소설리스트

3화 (18/20)

3.

한국은 새까만 새벽이었다. 노란 신호만 점멸하는 회색 도로를 달리며 승원은 고요함을 유지했다. 잔잔한 차 내부의 소리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들이 좋았다. 리조트에서의 좋은 침대와 좋은 음식, 눈부신 경치들보다도 익숙한 체취가 묻어나는 그의 시트에 등을 기댄 지금이 더 나았다.

공항 근처에서 담배를 피웠던 권 대표에게서는 찬바람과 적당히 섞인 씁쓸한 향이 났다. 더불어 승원이 골랐던 방향제 냄새도 함께 어우러졌다. 그의 차 안에는 온통 승원이 좋아하는 향들뿐이었다.

“윤승원 씨.”

“네?”

핸들을 돌리며 말없이 운전에 집중하던 그가 처음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질문 아니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니까 윤승원 씨도 잘 생각하고 대답해 줘요.”

“……네.”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조금 길었다. 한참 뜸을 들이는 권 대표를 승원은 얌전히 기다렸다. 다음의 말을 하면서도 권 대표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한 템포 뒤, 그가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이전에 물어본 이후로 시간은 충분히 흘렀다고 생각하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윤승원 씨 성격에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도 먼저 말을 할 거 같지도 않아서 내가 이렇게 물어보는 거고.”

“…….”

“아니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고, 좋다고 한다면 그거대로 좋은 거고.”

그가 승원에게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윤승원 씨 의견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승원은 말을 떼지 못했다. 사실상 반동거 상태인지라, 지금을 즐길 뿐, 그다음 단계의 것들은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전의 그에게서부터 비슷한 물음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거절한 승원이었다. 권 대표와 살고 싶었고, 살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질문에 대해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벨트를 갉작이던 승원이 입술을 뗐다.

“……대표님은 저랑 살고 싶으세요?”

진심 어린 물음이었다. 잠깐씩 집에 들러 함께 자고, 음식을 해 먹고, 출퇴근하는 것을 보고, 그 정도의 가벼운 즐김 말고. 정말로 365일, 24시간을 서로에게 간섭하며 생활하게 될 삶에 대해, 승원 역시 그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그의 생각이 더 중요했으므로.

어두운 내부 안에 비스듬히 비치는 바깥 등불에 그의 얼굴이 반쯤 붉게 물들었다. 그의 말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어떨 거 같습니까.”

“…….”

“아주 내 뇌를 뜯어서 보여 주고 싶네.”

“대표님은 제가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으세요?”

권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랑 같이 살게 된다면 저를 낮이든 밤이든 보고, 모든 순간들을 마주하게 될 텐데. 그것들을 다 견딜 수 있으신지 묻는 거예요.”

여전히 남아 있는 고민이었다. 그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그의 마음에 드는 것들만 드러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는 순간들이 왔을 때 그가 자신에게 내비칠 실망이나 후회 같은 것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주 작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도로 위를 달리던 차가 순간 끼익, 소리를 내며 인도 옆에 섰다. 점멸등을 켠 권 대표가 안전벨트를 풀고 승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두운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지 내부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낮은 조도의 하얀 빛이 둘의 머리 위로 비쳤다.

“윤승원 씨, 지금 질문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습니다.”

“…….”

“나는 윤승원 씨의 모든 순간들을 보려고 같이 살자고 권유하는 겁니다. 그걸 보고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충분히 있으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고. 윤승원 씨야말로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내 모든 모습을 마주하고도 날 질리지 않고 좋아할 자신이.”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그는 승원에게 몰아붙이듯 물었다. 마지막 물음 끝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좋아했고, 좋아함이라는 감정을 넘어서 사랑한다고 느낀 사람은 윤승원 씨가 처음입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온 나한테 처음으로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겁니다.”

“…….”

“……솔직히 말하면.”

그가 잠시 숨을 내쉬었다. 핸들을 붙잡고 뜸을 들이던 그가 머리를 숙였다 올렸다. 날카로우면서도 조금은 피로한 눈빛이 승원에게 그대로 향했다.

“내가 비웃었던 감정의 형태가 이 정도로 치명적일 줄 몰랐고, 고작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누군가를 미친 듯이 갈망하고 욕심내고 싶을 줄도 몰랐습니다.”

“…….”

“내가 하는 사랑이 남들보다 조금 비뚤어졌을 수도 있고, 과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윤승원 씨가 전부 처음이라 내가 바라는 대로 가는 이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음정 하나하나가 조금씩 떨렸다. 승원은 벨트를 가만히 매만지며 그의 말을 귀에 담았다.

“그래서 나는 윤승원 씨와 당장이라도 같이 살고 싶습니다. 윤승원 씨가 싫다고 하더라도 내 멋대로 내 집에 가둬 내 침실 침대에 재우고 싶을 정도로.”

“…….”

“그러니까 대답해 줘요. 윤승원 씨야말로 내가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윤승원 씨가 보게 될 내 모든 순간들을 견뎌 낼 수 있는지.”

승원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권 대표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만약 같이 살아 보고 별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원상태로 되돌리면 되는 일이고. 윤승원 씨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같이 살아요.”

반쯤 고개를 내린 채 중얼거리던 권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진심입니까?”

“……네. 저도 대표님이랑 살고 싶어요.”

이 정도의 진심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만큼, 딱 그만큼이라도 그가 자신을 좋아하면 괜찮지 않을까. 승원도 그가 얘기한 대로였다. 권 대표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넣고 싶었고, 그 안에서 욕심내고 싶고, 갈망하고 싶고, 그런 마음을 뛰어넘어 구속하고 싶었다.

그의 생각 역시 자신과 같다고 느꼈을 때, 승원은 비로소 안심했다. 자신을 침실에 가둬 제멋대로 재우고 싶다고 할 때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승원은 마침내 허락할 수 있었다.

“알았어요.”

그가 다시 핸들을 잡았다. 숨을 내쉬고 승원의 손을 잡았다.

“같이 사는 겁니다.”

“……네.”

그가 다시 핸들을 잡았다.

“일단 오늘은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캐리어 정리도 해야 할 거고.”

“좋아요.”

말 한 마디로 매듭지어진 지금까지의 고민이 허무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쉬운 일일 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의 말을 들어 보고 대답을 했을 텐데. 승원은 다시 무표정하게 운전에 집중하는 권 대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차가 빈 도로 위에서 유턴을 했다. 핸들을 돌리면서도 남은 손으로는 승원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커다란 손등을 내려다봤다. 둘은 승원의 집에 가기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올라가 주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돼요.”

“내가 올라가고 싶어서 그런 건데, 그것도 안 됩니까.”

“……집 더러운데.”

“그런 습관은 같이 산다고 고칠 수 있는 겁니까?”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는 권 대표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승원은 입만 꾹 다물었다. 어스름하게 비치는 가로등 빛이 두 사람만을 차갑게 비췄다. 아득한 새벽의 밤, 그 아무도 없는 주차장을 지나 아파트 안으로 올라갔다.

“……대표님.”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승원이 권 대표를 불렀다. 바뀌는 번호판을 지켜보던 그가 어깨를 돌렸다.

“만약에 같이 살면,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할까요.”

무감각했던 그의 얼굴이 잠시 부드럽게 미소를 띠었다.

“뭘로 하고 싶은데. 생각한 게 있습니까.”

“……그건 아닌데. 만약에 한다면 대표님 생일이랑 제 생일을 같이 넣어서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럼 너무 쉽지 않습니까. 윤승원 생일은 검색만 해도 나오는데. 나도 그렇고.”

“……그러면.”

승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권 대표가 먼저 발을 옮겼다. 승원의 집 번호를 제 것처럼 누른 그가 문을 열었다. 그가 캐리어를 현관 안쪽에 넣는 사이에도 승원은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문이 닫히고 머리 위로 하얀 불이 들어왔다.

그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다른 생각 좀 해 봤습니까.”

“네.”

“뭐.”

“그냥 생일로만 하면 너무 쉽잖아요. 그러니까, 대표님 생일이랑 제 생일을 교차로 섞어서. 그러니까 대표님 생일인 10월 12일이랑 제 생일인 11월 7일을 섞으면 11011027인데, 너무 1이 많은 거 같기도 하고…….”

말을 하면서도 번호의 나열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승원은 말꼬리를 늘였다. 그를 조용히 지켜보던 권 대표가 승원을 문으로 확 밀었다.

“……흐읏-.”

“1101인지 뭔지, 정 정하기 어려우면 그냥 지문 인식으로 해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시선이 가깝게 얽혔다. 팔목이 붙잡힌 탓에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승원이 토끼 같은 눈으로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길게 늘인 그의 눈이 승원을 핥듯이 훑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입술이 돌진했다.

“흐읍…… 응.”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입술 주위를 배회하며 분홍빛 살을 빨았다. 현관에 완전히 머리가 붙은 승원은 전부 삼킬 듯한 키스에 숨을 헐떡이며 손을 떨었다. 한참 동안 바깥쪽을 공략당하던 입술이 그의 혀끝에 힘없이 벌어졌다.

“예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흐, 으음…… 읏.”

“이렇게 헤퍼서야.”

그가 놓아준 덕에 스르륵 내려온 승원의 손이 그의 옷깃을 꾹 쥐었다. 툭 꺼졌던 현관 불이 그들의 움직임으로 다시 빛을 만들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난폭한 키스였다. 안쪽을 가득 찌르면서도 다정하게 혀를 감싸고 움직였다. 자꾸만 고이는 침에 승원은 목을 꿀렁였다. 입술이 번들거리도록 긴 시간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합시다.”

마침내 그가 물러났다. 권 대표는 제 입술을 살짝 닦아 내며 손등으로 승원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벌써 뺨 주변이 발갛게 달아오른 승원은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집으로 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는 가 보겠습니다.”

가려는 권 대표가 아쉬웠다. 승원은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쥔 채 대답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잘 자고. 내일 봅시다.”

“내일도 볼 수 있어요?”

“나랑 산다며.”

권 대표가 눈을 흘겼다. 승원이 머뭇거렸다.

“같이 살자는 말이 당장…….”

“급하게 준비한 건 하나도 없으니 안심하고.”

승원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멀어지려는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갈게요.’ 짧은 말을 덧붙이고 현관문을 열려던 권 대표의 등을 승원이 와락 껴안았다. 찰칵, 열리려던 문이 다시 잠겼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승원이 안고 있는 그를 더욱 힘주어 당겼다. 넓은 등에 뺨을 기대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그는 고장 난 사람처럼 잠시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야 숨을 내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꽉 붙잡혔다. 그의 손아귀에 승원의 손이 잡혀 올라갔다. 곧이어 손등에 도장을 찍듯 입술이 닿았다.

“나야말로.”

그가 조용히 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승원은 엘리베이터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캐리어를 내버려 두고 신발장으로 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끈거리는 귀와 눈 밑을 주먹 쥔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무리 조절하려 해도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잠 못 이룰 것이 예상되는 밤이었다.

* * * 

넓던 도로가 점점 좁아졌다. 평평한 길을 지나는 거 같았지만 바퀴가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승원은 건물이 점차 사라지고 나무들이 나오는 길가를 창 너머로 멀찍이 바라보았다.

“창문 열어도 돼요?”

“그럼.”

승원이 열기도 전에 권 대표가 대신 승원의 창을 열어 주었다. 지잉 하고 내려간 창문 사이로 활기를 띤 바람이 들어왔다. 휘날리는 머리를 만끽하며 승원은 바깥 풍경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가 가는 길이 곧 제가 가게 될 곳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가 코너가 나오는 길을 돌자 차 두 대는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커다란 문이 나왔다. 검은 저택의 대문은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미 활짝 열린 채였다. 권 대표는 느긋하게 그 사이로 지나 들어갔다. 핸들을 틀며 안쪽으로 이동하자 저 멀리 널따란 잔디밭이 펼쳐졌다. 바다의 지평선과 같이 초록빛 바닥과 하늘이 적당한 평행을 이루었다. 승원은 절로 터지는 감탄에 입을 벌렸다.

분수대가 있는 곳을 지나고, 작은 그네와 연못이 있는 곳도 지나자 모던한 스타일의 집이 한 채 나왔다. 하얗고 각져 있는 건물은 통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그 안이 훤히 보였다. 곧이어 차가 멈추고 그가 기어를 틀었다.

“내려요.”

무심하게 말한 그가 차에서 먼저 내렸다. 승원은 쭈뼛거리다 뒤늦게 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라도 펴고 싶은 공간이었다.

“여긴 아무도 없는데. 손 잡겠습니까?”

“그래도 돼요?”

“싫음 말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원은 보닛을 훌쩍 지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운 손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여기가 어딘데요?”

“우리가 살 집.”

“……여기가요?”

승원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널찍한 잔디밭과 물이 나오진 않지만 화려하게 자리 잡은 분수대, 작은 연못과 새하얀 집. 뒤를 돌아 아까 건너온 대문을 보려 했지만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다. 이질적인 공간에 혼자 자리한 듯 승원은 고개만 연신 움직였다.

“어때요.”

“이렇게 큰 곳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우리만 있을 수 있는 온전한 공간을 찾다 보니 여기가 딱인 거 같아서.”

“원래부터 알던 곳이에요?”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입니다.”

권 대표 역시 새삼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자 이 집이 다르게 보였다. 잔디밭 위에서 뛰어다녔을 그가, 그네를 타다가 연못의 물고기를 구경했을 그가, 통유리 안쪽에서 뛰어놀았을 어린 그가 홀로그램처럼 그려졌다.

“마음에 듭니까.”

“그냥 새로워서요. 대표님 어렸을 때 살던 곳에서 제가.”

“나름 개조도 많이 했고, 칠도 다시 한 겁니다. 안의 가구도 전부 바꿔 놓았고. 원래 소유만 하고 쓰지 않는 집이었는데, 윤승원 씨와 같이 있을 공간으로 딱이길래.”

“……그럼 대표님 어렸을 때 여기서 놀고 그랬겠네요.”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권 대표가 대답했다.

“그랬지. 거의 기억은 안 나지만.”

“기분이 이상해요.”

“일단 들어갑시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은 했지만 역시 깔끔하고 깨끗한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그곳을 지나자 중앙에 계단이 마련되어 있는 말도 안 되게 넓은 거실이 나타났고, 뒤쪽으로는 방이 있는 복도가, 옆으로는 방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다이닝 룸이 있었다.

새하얗게 칠해진 거실의 천장이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벽 한쪽엔 검은 피아노가 있었고, 곳곳에 이름을 모를, 그러나 고가의 액자들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거대한 소파를 매만지다 승원이 그곳에 살며시 앉았다. 푹신하게 내려왔다가 단단하게 받치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질 좋은 가죽을 만지작거리던 승원이 자신을 바라보는 권 대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에 들어요?”

“네. 저희 집에 있던 소파만큼 좋아요.”

“이것도 우리 거긴 한데. 제작을 따로 했습니다. 시중에서는 살 수 없고.”

“…….”

“우리가 쓰려고 단독으로 만든 겁니다.”

승원은 다시 소파를 살펴봤다. 어두운 가죽 소파는 180이 거의 다 되는 승원이 앉더라도 남은 자리가 굉장히 넓었다. 처음 보고 거대하다는 감상이 들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가 승원의 옆에 앉았다. 자신 역시 이곳이 새로운 듯 주위를 둘러보던 권 대표가 허공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권고은이랑 왜 만났는지 이제 좀 알겠습니까?”

“……설마 여기 가구 보신 거예요?”

“윤승원 씨는 모르게 하고 싶은데, 내 안목만을 믿고 골랐다가는 온전히 내 취향만 반영될까 싶어서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

“아직 가구가 다 오진 않았습니다. 지금보다 좀 더 사람 사는 집 같이 만들려면 여러 가지 것들이 있어야 할 거고, 윤승원 씨도 필요하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차근차근 보면서 나한테 알려 줘요. 뜻대로 맞춰 줄 테니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의문까지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들만의 사적인 만남도, 비즈니스적인 이유도 아닌, 나를 위한 만남이었음을 승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갑자기 얼굴이 후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발리 호텔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자신이 다시 생각난 탓이었다.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애 같은 행동이었음을 알기에 부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다른 궁금증이 생긴 승원은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

“만약에…… 제가 싫다고 하셨으면 어떡하셨을 거예요.”

승원의 질문에 권 대표가 등받이에 기대며 길게 숨을 쉬었다. 잠시 대답을 고르는 듯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승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좋다고 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렸겠지.”

“……그럼 준비해 둔 이 집은요?”

“무기한 방치 아니겠습니까.”

아무 대책도 없는 말이었다. 승원은 그의 말에 그만 웃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은 그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을 것이므로 그러한 가정은 굳이 떠올려 보지 않아도 될 문제이긴 했다. 지금 권 대표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윤승원 씨는 이제 드라마도 끝났고, 잠시 쉬기로 했으니까. 나랑 같이 여기서 지내는 걸로 합시다. 나도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여기서 업무를 볼 수도 있을 거 같고, 그게 아니더라도 출퇴근하는 데는 그리 문제없으니까.”

“……네.”

“활동 시기가 오면 어차피 이동하는 일이 잦아질 테니 그때는 각자의 집에서 움직이는 걸로 하고, 이렇게 간간이 이곳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 어떻습니까. 물론 지금은 너나 나나 그리 바쁘지 않으니까 여기서 지내면 되는 거고.”

“좋은 거 같아요.”

승원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를 사랑하는 평생의 시간 동안 똑같은 하루하루 서로를 마주해야 한다는 걱정이 덜어졌고, 이런 외딴곳에 그와 자신을 위한 온전한 공간이 생겼다는 만족감에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곳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피해야 할 눈 없이 오로지 그와 자신만 존재하는 돔 그 자체였다.

“위에도 올라가 보세요. 2층엔 침실도 있습니다. 발코니도 있고.”

“여기 조금 더 구경하고요.”

승원은 조금 더 옆으로 움직여 권 대표와 허벅지를 붙여 가까이 앉았다.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고요한 공기를 들이켰다. 사방으로 탁 트인 넓은 실내였음에도 이상하게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어렸을 때는.”

그가 입술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나한테 가족은 이방인 같은 존재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고, 그나마 좋았던 사람들마저 전부 내 곁을 떠나서.”

“…….”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이 집에서 자라고 크는 동안 생겼던 모든 것들로 인해 내가 인지하는 세상의 모습이 바뀌었고, 나는 그게 맞다고 믿었습니다.”

권 대표의 울대가 움직였다. 그는 한올 한올 내뱉듯 천천히 말했다.

“어찌 보면 혐오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집이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다시 살고 싶다는 마음이야 당연히 없었고.”

“……근데 왜 이 집으로 선택하셨어요.”

승원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차분한 음성이었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윤승원 씨밖에 없으니까. 윤승원 씨와 이곳에서 지내면, 여기서의 안 좋던 기억도 전부 상쇄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때문에.”

“…….”

“여기 말고도 함께 지낼 수 있는 고요하고 외딴 공간은 어디든지 많지만, 그래도 이 집 안에서의 윤승원 씨를, 내가 지냈던 공간에서의 윤승원 씨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전보다는 행복한 기억으로 다시 자리 잡을 테니까.”

어느 순간 권 대표는 승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히 미소 지은 그가 승원의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승원은 묵묵히 그를 들여다봤다. 자신을 비추는 검은 눈동자가, 반듯하게만 보였던 눈썹이 다른 때와 달라 보였다. 그를 보며 느낀 묘한 기분에 가슴이 아렸다. 승원은 대뜸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랑 살아요. 행복하게.”

긴 시선이 늘어지듯 이어졌다. 이어서 입술이 닿았다. 짧은 키스를 하듯 쪽, 입을 맞추던 그가 승원의 입술을 머금었다. 뺨을 붙잡은 손에서 적당한 힘이 느껴졌다. 승원을 향해 고개를 꺾은 그가 힘주어 들어왔다. 달콤하고 진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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