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푸르른 야자수 나무가 곳곳에 잔디처럼 깔려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의 행렬에 승원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도 벗어 내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사진을 찍었다. 하늘도 찍었고, 리조트의 전체적인 모습도 하나하나 공들여 예쁘게 찍었다. 사진만 보내기 뭐 해서 마지막에는 자신이 브이를 한 손가락을 함께 첨부해서 권 대표에게 문자로 보냈다.
비행기를 타고 4시간이나 걸렸다. 승원은 잠시 권 대표에 대한 그리움도 잊고 오로지 이 휴가를 만끽한다는 즐거움에 잔뜩 설레고 있었다. 비행기가 뜰 때까지만 해도 조금 초조하던 마음은 하늘 위에서 뭉게뭉게 피어난 구름을 보면서부터 점차 사그라들었다.
규모가 큰 포상 휴가인 만큼 인원도, 이벤트의 사이즈도 전부 컸다. 승원은 그 안에 함께 녹아들어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스쿠버 다이빙도 하고, 수영도 즐기고, 비행기에서 못다 잔 잠도 푹 잤다.
첫째 날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새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방안에서 눈을 뜬 승원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
당연히 와 있을 줄 알았는데. 핸드폰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분명 사진을 잔뜩 보냈던 것 같은데. 제가 헷갈린 건가 싶어 문자 창을 확인했고, 승원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 다시 누웠다.
바쁜 일이 있는 걸까. 아직까지 연락을 보지 않은 듯 문자 옆의 1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승원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비비적거렸다. 한 시간 있다가 축하 파티가 있다고 했는데, 갑자기 갈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먼 이곳까지 왔는데, 권 대표는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자를 확인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잘 갔냐는 안부 정도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번 서운하기 시작한 마음은 서운함을 더하고 더하며 약간의 미움까지 더해졌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허락해 주길 엄청 사리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건만. 막상 보이지 않으니 찾지 않는 것인지 승원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이불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이 빠져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승원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샤워를 시작했다. 물을 맞다가도 바깥에서 혹시 벨 소리라도 들릴까 신경을 바짝 세우기도 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준비를 마치는 동안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승원이 객실 밖을 나가기 위해 신발을 갈아 신던 참이었다. 홧김에 진동으로 바꿔 놓고 주머니 안쪽에 넣어 둔 핸드폰이 덜덜거리며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가득 써 있는 ‘대표님’이라는 글자가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서운함을 이길 만큼 기다렸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승원은 더 버티지도 못하고 전화를 받아 버렸다.
“여보세요.”
- 윤승원 씨 잘 갔습니까? 기사는 봤는데.
조금 다급해 보이는 음성이었다. 바깥 소음이 바람에 섞인 것인지 쉬이 쉬이 하고 들려왔다. 승원은 신발을 갈아 신다 말고 침대에 앉아 입술을 짓씹었다.
- 윤승원 씨? 듣고 있습니까. 대답이 없네.
“네. 저 잘 왔어요.”
- 목소리가 왜 그래요.
“제 목소리가 왜요.”
- 미안합니다. 내가 연락을 너무 늦게 했지.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묵혀 왔던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입술을 잔뜩 늘어뜨린 승원은 막상 사과를 들어 민망한 마음을 애써 지우려 이불을 긁적거렸다. 자신이 정말로 그의 사과를 받고 약간 누그러진 것도, 그것이 그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감정이라는 것도 조금 부끄러웠다.
“……조금.”
- 응?
“조금 그래서.”
- 내가 연락을 일찍 안 한 거 때문에?
“왜 이제야 전화하셨어요.”
권 대표는 자신도 제 잘못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연했고, 승원을 어루만지듯 부드러웠다. 아이를 달래듯이 천천히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승원은 아예 침대에 누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속 기다렸단 말이에요. 연락.”
-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어서. 미안합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바쁘셨어요.”
- 나야 항상 바쁘지.
웃음을 살짝 섞으며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승원은 하는 수 없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지면 안 되는데. 그에게 지는 건 매번 정해진 패턴이었다. 승원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너무 좋아하게 된 대가라고 승원은 마땅히 생각하고 말았다.
- 사진 봤습니다. 예쁘던데. 남들한테 윤승원 씨 사진 좀 찍어 달라고 하세요. 난 풍경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 애인이 궁금한 거라.
“아…… 진짜로 저 찍어서 보내 드려요?”
- 당장 그렇다는 건 아니고. 어디서 뭐 하고 노는지 나한테도 보여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윤승원 씨 얼굴 보니까 또 좋고.
승원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불 위가 갑자기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까는 이상한 저항심 때문에 밖에 나가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이 좋아서 나가기 싫어졌다.
“대표님은 뭐 하세요?”
- 지금 막 집에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거기나 여기나 한 시간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시차 걱정은 없겠네요.
“네. 근데도 비행기 탔더니 피곤해서 한숨 자고 일어났어요.”
- 잘했네.
불투명한 목소리에 틈틈이 섞여 있는 낮은 숨소리가 좋았다. 그 안에 폭 안겨 잠들고 싶었다. 승원은 이불보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핸드폰의 화면을 볼 가까이에 꼭 당기고는 말을 늘였다.
“대표님…….”
- 응.
“보고 싶어요.”
- 벌써?
벌써, 라고 얘기하는 말끝엔 웃음기가 옅게 번져 있었다.
“대표님은 아니세요?”
승원이 되묻자 잠시 숨소리가 길게 들렸다. 승원은 곧 알아차렸다. 탁탁거리는 소리는 불을 붙이는 소리고, 그는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나도 보고 싶습니다.
긴 숨소리가 들렸다. 찬바람과 섞여 탁했다.
- 보고 싶어 죽겠어.
그를 홀로 좋아하던 그때는, 죽기 전까지 그런 비슷한 말을 들어나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이렇게 쉽게 고백을 내어 주는 그의 음성이 승원의 몸에 천천히 젖어 들었다.
- 보고 있을 때도 보고 싶은데. 안 보이면 미칠 거 같지.
“…….”
- 그래서 보내기 싫었는데.
“그럼 보내지 마시지 그랬어요.”
승원의 작은 도발에 권 대표가 헛웃음 지었다.
- 돈 많은 백수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맞아요.”
- 그렇다고 애인 커리어까지 깨면서 내 옆에 끼워 둘 정도로 파렴치한 놈은 안 되고 싶어서.
“…….”
- 뭐 그렇게 하진 않을 거지만, 그만큼 보고 싶다고.
승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숨결에만 살며시 귀 기울이고 있을 뿐이었다. 승원이 대답이 없자 전화 안쪽에서 물음이 들려왔다.
- 왜 대답이 없습니까. 백수 시켜 줘?
“……아니요. 아니요.”
그가 웃었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물었다. 후우, 하고 내뱉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귓가를 타고 간지럽게 흘렀다. 눈앞에서 그의 입 밖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상을 했다. 승원은 괜히 그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이불에 코를 박았다.
“내일모레 갈게요.”
- 그러든지.
“사진도 보내 드릴게요.”
- 그래요.
“보고 싶어요.”
-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덧 약속한 시간까지 10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뛰어서 가도 지각일 게 분명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몸을 승원은 애써 일으켰다. 어기적거리며 신발을 신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는 언제나 눈치도 빨랐다.
“맞아요. 저녁에 파티 있대요.”
- 좋겠네. 재밌게 즐기다 오세요.
“네.”
- 자기 전에 연락하고.
“네. 대표님, 담배 잘 피우세요.”
- ……뭐?
마무리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 뱉은 거였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하는 권 대표의 목소리에 실소가 섞여 있었다. 승원은 비죽 웃었다. 전화를 끊고도 두근대는 가슴이 멈출 줄을 몰랐다.
서운함이고 미움이고 다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가벼운 마음이 금방이라도 통통 튈 듯이 부풀어 올랐다.
* * *
밤늦게까지 회식이 이어졌다. 커다란 레스토랑에서 시작했던 저녁 식사는 회식처럼 번져 2차로 넘어가 수영장이 딸린 밤 리조트에서 진행되었다. 처음엔 다 함께 건배사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교모임처럼 각자 그룹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승원도 제 또래 동료들의 무리 안에 끼어들어 가 그들이 하는 말을 얌전히 들었다. 손에 들린 술잔이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들었다. 취할수록 보고 싶은 건 권 대표의 얼굴 하나뿐이었다.
“오늘부터 이렇게 놀면 마지막 날은 어쩌려고 그런대.”
“오빠, 막날까지 있을 거야?”
“나는 있어야지. 에라이. 일찍 가는 것도 바빠야 가지, 나는 스케줄도 없어.”
“채영이 너 일부러 물어봤냐.”
“아, 아니거든요!”
동료 배우들은 전부 또래들이었고 또래들이어서 그런지 항상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했다. 누군가가 까라지는 것 같으면 으쌰으쌰 일으켜 주기도 했고, 가벼운 농담도 던지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승원은 대학을 가 본 적은 없지만 만약 대학에 들어가 동기들이 생긴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에휴, 노는 것도 적당히 놀아야지. 피곤하다.”
“뭘 했다고 피곤해요.”
“저는 그래서 좀 잤어요.”
“어쩐지 승원이 얼굴색이 좋아.”
“윤승원 얼굴색 안 좋은 때가 있었나.”
주고받고 오가는 대화 속에 승원도 술을 홀짝이며 웃었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머릿속에 동료들의 대화보다도 아까 권 대표와 나눴던 속삭임들이 자꾸만 귀에 맴돌았다. 그런 애틋함보다 달콤한 게 또 있을까. 술보다도 단 그의 목소리에 여전히 취한 채 승원은 내내 미소를 걸친 채였다.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먼저 들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은 많았고, 옆에서 셀카를 찍는 동료들을 따라 승원도 함께 브이를 했다. 발그레하게 색이 올라온 볼 옆이 붉었다.
“오 속보, 속보.”
적당한 소란 속에 누군가가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듯 목소리를 키웠다. 동료들과 동글게 모아 이야기를 나누던 승원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배우 박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수건이 옅게 흘러내렸다. 그것을 아예 떨쳐 내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두 다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권고은 열애설 떴다.”
‘권고은’이라는 말에 다들 놀라는 반응들을 보였다. 권고은은 요즘 새롭게 뜨고 있는 배우였다. 골프 선수 출신으로 집안이 빵빵하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부유하게 자란 티가 나는 만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근래 그녀가 입은 재킷이나 원피스는 값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전부 품절이었다.
“대박이네.”
“와, 봐 봐요.”
“나 고은이 아는데?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웬일이야.”
다들 박태경이 보여 주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승원은 모여드는 인간들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그 사이에 살짝 꼈다.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동떨어져 있어도 이상해 보일 테니 대충 보는 척만 했다. 승원의 머릿속엔 여전히 권차현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엥? 진짜로? 이거 그 대표 아니야?”
“S백화점에서 함께 걷고 있는…… K 양과 C 대표…….”
“그냥 권고은이라고 하면 되지 뭘 또 K 양이래. 하여튼 기자 새끼들.”
이야기가 퍽 흥미로워 보였다. 승원은 술잔을 내려놓고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눈들이 반짝거렸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승원이 여유롭게 물었다.
“누군지는 몰라요?”
“누구랑 사귀는지?”
“네.”
“이거 거기 대표 아냐? 그…… 제논 대표?”
“맞는 거 같아.”
“아! 맞아.”
무언가 검색하는 듯이 보이던 동료가 ‘맞네, 맞네.’ 하며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권차현.”
“그래! 권차현이다, 이름.”
“존나 잘생겼다고 소문났잖아.”
“왜 진짜 잘생겼어?”
“언니, 존나 잘생겼어요. 연예인 안 하고 뭐 하냐고 그러잖아.”
“아 진짜? 궁금하다.”
이야기가 한참 구름처럼 붕 떴다가 밑으로 가라앉았다. 승원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와 풍경 그대로였다. 제가 잠이 든 게 아니고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은 현실이었다. 갑작스레 정신이 든 승원이 다른 이들의 손을 제치고 태경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낚아챘다.
“어, 야.”
“…….”
몇 장의 사진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노란 조명 빛 밑에서 함께 걷고 있는 여자와 남자가 가지런히 보였다. 여자 옆에 있는 건 권 대표였다. 승원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척하면 알아볼 수 있는 게 그의 몸이었다. 찰나에 찍힌 걸음걸이마저 그임을 정확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살짝 내려 가구를 보고 있었다. 가전제품 따위를 보고 있는 두 남녀의 뒷모습이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을 만들어 냈다.
스크롤을 내리자마자 나오는 자동차 사진에 승원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빛을 가득 비춘 차 안에는 분명 권 대표와 권고은이 함께 타고 있었다. 실내등을 켜서 바깥이 보인다는 걸 모르는 것인지 둘은 천진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언제 올라온 거예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침착하게 나왔다. 승원은 가슴 깊숙이 번지는 무언의 감정을 꾹 내리눌렀다.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태경을 바라보자 주춤한 그가 어어, 하면서 기사 날짜를 확인했다.
“이거? 몇 시간 전에 올라온 거야. 특보라서 하나밖에 없네.”
“와 이 사람? 진짜 잘생겼네.”
그 사이 누군가가 권고은의 상대 남자 얼굴을 찾은 건지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승원은 따가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어려워서 가만히 서 있다가 바닥에 잔을 내려놓았다. 새빨갛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느껴졌다.
“승원, 뭐 해.”
어리둥절한 시선들이 승원에게 고정됐다.
“가려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던 지원이 승원의 어깨를 잡았다. 발끝에 툭 치인 유리잔이 넘어졌다. 안에 들어 있던 액체와 올리브가 함께 흘러나왔다. 지원이 으악, 소리 내며 발을 피하는 사이 승원은 지원의 손을 떼어 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 같아서.”
승원이 애써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태경이 나서서 물었다.
“쉬려고?”
“아까부터 속이 좀 안 좋아요. 저 먼저 들어갈게요.”
주위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승원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뒤를 돌아 반대편으로 가는 도중에 뒤쪽에서 작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속삭임은 되레 고요한 공간에서 커다랗게 공명하기 마련이었다. 승원은 뒤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하는 거 아냐? 대박이네.”
“가구 보면 말 다 했지.”
“근데 승원이 쟤 왜 저러지. 쟤 고은이랑 알아?”
“에이, 설마요. 권고은이랑 윤승원은 너무 안 어울린다.”
“근데 갑자기 왜 저래.”
“여기 보니까 이 사진에서…….”
걸음을 천천히 내디디며 목소리를 귀 기울이다가 승원은 빠르게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비상계단으로 달려갔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11층까지 계단을 오르며 승원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계단을 하나 오르면 머리가 다시 아팠고, 하나 오르면 볼이 흠칫 떨렸다. 아까 아무렇지 않게 통화하던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들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했건만, 저는 아직도 이런 쪽에 면역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권 대표에게 의문이 들었다. 저런 기사가 날 줄 몰랐던 것일까. 사람들이 또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왜 권 대표는 오늘 저녁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연락을 했는지마저 승원은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의문은 점차 분노로 바뀌었다.
11층에 다다르며 비상문을 여는 순간, 승원은 눈살을 콱 찌푸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연예계 안에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이라 불리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분리된 영역만 있을 뿐. 아무도 진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화제와 흥미, 논란과 문제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돌아갔다. 승원은 근거 없는 찌라시 따위 믿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대중들의 스낵과도 같은 놀이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말이 달랐다. 그때 똑똑히 본 건 제가 잘 아는 남자와 그 옆에 우아하게 서 있던 여자였다. 한 쌍의 남녀가 백화점 한편에서 가구를 보고 있었다. 승원은 핸드폰을 켰다가 다시 껐다. 다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을 정정당당히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미 반쪽짜리 기사를 접한 승원으로서, 그것도 사진까지 확인한 지금은 어떤 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이런 자신이 겁쟁이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서운 건 사실이었기에.
부르르, 전화가 울렸다. 승원은 수신인을 확인했다. 아직까지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가지런한 글씨로 ‘대표님’이라 적힌 글자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가 지금 이 기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뭐라고 이야기할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에게 걸려 온 전화가 조금은 괘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승원은 전화를 세 번이나 받지 않았다. 전화는 계속 울렸고, 승원은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고,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도 만무했으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을 수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막연한 두려움이 덮쳤다. 그게 어떤 것이든 승원은 그게 무엇인지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사실 관계 하나 파악하지 못해 안달이 나 도망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여전히 두렵기도 했다. 자신의 비겁함을 알면서도 승원은 도저히 지금 닥친 무언가를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승원은 핸드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면 또 다른 현실이 있을까 싶어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 * *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동이 터 버렸다. 승원은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감지도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대로 멍하니 이불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자꾸만 어제 봤던 사진이 아른거렸다. 자꾸만 나쁜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승원의 상대는 권 대표였고, 그의 집안이라면 지금 승원이 꾸리는 가설이 아예 없을 일만은 아니었다.
“아니야.”
승원이 문득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 9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이대로 있으면서 마냥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껏 그러한 행동으로 반성하고 뉘우쳤던 시간들을 되짚었다. 괜한 걱정을 만들어 내면서 리조트 안에서까지 수감자처럼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사실일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물론 그가 연락이 뜸하긴 했고, 그의 말대로라면 이런 사진이 멋대로 보도될 리도 없는데. 그렇지만 사실일 수가 없었다. 권 대표는 윤승원 저 하나만을 사랑한다고 했고, 승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잘못된 것이다. 그래. 그게 맞다.
승원은 핸드폰을 들었다. 전원을 켜자 전화가 두 통 정도 더 와 있었다. 모두 권 대표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승원이 잠을 뒤척이던 새벽에 남겨진 것들이었고 그 이후로 부재중에 찍힌 건 문자를 포함해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를 다시 확인하고픈 마음은 없었고, 그 사진을 재차 보고 싶지도 않았다. 기사 화면을 눌렀다간 지뢰처럼 그것들만 쏙쏙 피해 갈지도 몰랐다. 승원은 그 정도로 어제의 악몽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권 대표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다시 전화해 사실을 물으면 될 일이었다. 사실을 묻고 아니라는 대답을 받으면 될 거였다. 그러면 전부 끝날 문제였다. 허위 기사 따위 말도 안 되는 거짓이었고, 승원은 그에게 그냥 아니라는 말 한마디만 듣고 마음을 놓으면 되는 거였다.
발신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고, 승원은 두 손으로 귀에 붙은 핸드폰을 꾹 잡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은 세 번도 가지 않고 끝났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맑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승원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전화를 들 때, 승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게로 전화가 걸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우연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권 대표는 승원의 포상 휴가 일정을 알고 있었고, 때에 맞춰 승원이 한국을 떠나 있을 때 기사가 났다. 그는 빼도 박도 못하게 권차현이 맞았고, 그의 상대는 아름다운 젊은 여자였다. 승원에게 전화를 건 흔적이 있지만 많지 않았고, 승원이 다시 걸고 있는 지금, 그는 전화를 받고 있지 않았다.
“왜…….”
갑자기 가슴이 쓰리게 아팠다.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터질 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불쾌함을 내포한 그 빈약한 고통은 승원을 어지럽게 했다. 이윽고 가슴이 쿵쾅대며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어릴 적, 전쟁이 난다는 둥 나쁜 뉴스를 보면 정말로 그런 일이 터질까 봐 잠도 못 자고 밤을 지새우곤 했다.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속 뜨거운 순간을 보냈다.
승원은 지금 그때의 딱 열 배만큼 더 아팠다.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을 초조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을 먹어도 가시지 않을 통증이었다. 침대에 머리를 기대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무서웠다. 그냥 승원은 두려웠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데,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휩쓸고 돌았다.
* * *
“승원아. 윤승원!”
노크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객실 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남자 동료 두어 명이 승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승원은 마지못해 일어나 슬리퍼를 구겨 신었다. 비척비척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열심히 문을 때리던 손짓이 멈추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들이 승원을 바라봤다.
“어.”
“형들, 저 이상하게 몸이 좀 안 좋아서.”
“아 진짜?”
“……얼굴 안 좋아 보이긴 한다.”
우렁찼던 노크 소리와는 다르게 머뭇거리는 음성이 승원의 귀에 나긋하게 흘러들어 왔다. 둘 다 승원을 보고 짐짓 놀란 듯 보였다. 먹은 거 하나 없어 보이는 안색이 창백했다. 잘만 웃던 얼굴이 입술을 찌그러뜨리기만 할 뿐 꼬리를 올리지도 못했다. 한 명은 뒷목을 긁적이고 한 명은 제 목에 걸린 스노클을 만지작거렸다.
“많이 아파? 갑자기 그래? 어제는 안 그랬잖아.”
“모르겠어요. 몸살 같은 건지 뭔지, 힘이 좀 없어서.”
“왜 그러지.”
둘은 서로를 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승원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쉬고 있어. 먼저 귀국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럴까 생각도 하는데, 먼저 가기도 좀 그렇고.”
“에이.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놀지도 못하고. 집 가서 쉬는 게 낫지.”
“일단은 좀 쉬고 있을게요.”
“그래. 뭐라도 시켜 먹어. 죽 같은 거.”
승원의 어깨를 툭툭 쳐 준 둘은 뒤를 돌아 저 복도 먼 곳으로 사라졌다. 둘 다 키가 커서 그런지 보폭이 굉장히 넓었다. 반바지를 입은 긴 다리를 보고 있으니 권 대표의 걸음걸이가 생각났다. 쭉 빠진 늘씬하고 긴 다리로 저벅저벅 호텔 복도를 걷던 남자의 걸음걸이. 금방이라도 저를 향해 뒤를 돌아볼 것 같던 넓은 등과 검은 머릿결. 부질없는 생각임을 실감하고 나서야 승원은 스르륵 문을 닫았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였다. 권 대표가 아무리 과거에 신신당부하며 단언했어도, 지금에 와서는 말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였다. 사람의 사연이 뜻대로 되는 법이란 없었다. 승원은 그 모든 걸 이해하면서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언젠가 권 대표와 마주해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기라도 한다면 그땐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테두리로도, 법으로도 그의 곁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승원은 용기를 조금 보태서 핸드폰을 켰다. 아무 알림도 없는 핸드폰을 들어 포털 창을 켰다. 실시간 검색어에 ‘권고은’, ‘권차현’, ‘제논’ 등의 키워드가 줄을 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거기엔 ‘YS그룹’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그간 봤던 것들이 전부 진짜였다는 걸 다시금 실감하고 승원은 침대에 발라당 누워 버렸다.
포털 창에 걸려 있는 그의 이름이 낯설었다. 더 보기엔 겁이 났다. 실시간 검색어 창만 내내 들여다보며 승원은 무의미한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자신이 계속 권 대표의 곁에 붙어 있을 방법을 생각하다가, 권 대표가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방법들을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할 확률들을 생각했다. 사랑을 알아도 평생을 이성을 앞세워 살아간 남자였다. 이해타산적인 삶 안에서 승원 하나쯤 포기하는 거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의 끈이란 게 원래 길어질수록 구렁텅이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결말은 없었다. 생각을 더 해 가면 뭐가 됐든 종착지는 저의 불행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진리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을 늘어뜨리고 있는 승원은 좋은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체념에 이은 씁쓸함이 잔류처럼 남아 마음 안쪽에 고였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승원은 눈을 감았다.
그때, 다시 객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힘을 넣어 쿵쿵 치더니 초인종을 누르기도 했다. 승원은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시킨 게 없었고, 누군가 온 걸 보니 형들이 다시 온 건가 싶었다. 누추한 꼴 그대로 일어나 다시 문 쪽으로 향했다.
“형이에요?”
문을 열기 전에 확인차 물어봤다. 바깥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승원이 다시 불렀다.
“승준 형.”
- …….
“형 아니에요?”
답답함에 결국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검은 그림자가 문틈으로 서서히 등장했다.
“누구세…….”
“형?”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놀란 나머지 승원은 숨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가슴이 크게 팽창하는 것이 느껴졌다. 말을 잃은 그대로 눈앞에 상대를 바라보며 승원은 눈을 깜박거렸다.
어디선가 갑작스레 나타난 권 대표였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만 올 수 있는 이곳에 불현듯이 등장해 승원을 놀라게 했다. 그는 승원을 반기지 않은 낯으로 눈썹 한쪽을 비틀어 올린 채였다. 말릴 새도 없었다. 단추 몇 개를 풀어 놓은 셔츠 차림으로 그는 승원의 객실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서로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선 권 대표와 승원은 두 눈을 마주쳤다. 복도에 있던 더운 공기가 문틈을 타고 흘러들어 온 것인지, 약간의 더운 바람이 섞여 있었다.
“형은 어떤 형을 말하는 겁니까.”
“……대표님이 어떻게.”
놀라기 바빠 변명할 틈이 없었다.
“나한테는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면서.”
쯧, 혀를 차던 권 대표가 다시금 승원과 눈을 마주했다. 조금 건방진 얼굴로 말했다.
“뭐합니까?”
권 대표가 두 팔을 양쪽으로 짧게 벌렸다. 승원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
“계속 그렇게 바보 같이 서서 보기만 할 거예요?”
“……대표님.”
“이리 와.”
승원이 발을 떼기도 전에 권 대표가 승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팔이 붙잡히고 그다음에 몸이 이끌렸다. 숨이 막힐 듯이 갇혀 버린 품 속에는 약간의 더운 바람이 섞여 있었다. 뜨거운 체온에 몸을 기대면서도 승원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말을 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더운 공기가 안긴 몸 안쪽에 휩싸였다. 승원은 잠시 가슴팍에 코를 맞댔다.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향이었다. 자신이 찾던 권 대표 본연의 체취였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전화를 언제 하셨는데요.”
“내가 어제 새벽에 했을 때 안 받았잖아.”
“그때 이후로 다시 하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랬나.”
권 대표는 자신이 승원의 전화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와야겠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
“기사 봤습니까?”
대답 없는 승원의 반응을 기다리다 권 대표는 침대 맞은편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캐리어 안에 옷가지들이 마구잡이로 넣어져 있었다. 주변을 보니 제대로 정리된 옷들이 거의 없었다. 눈을 흘겨 안쪽을 살피던 권 대표가 승원의 머릿결에 손을 댔다.
“집에 가려고?”
“……가려고 했는데.”
“했는데.”
“대표님이 와서.”
“내가 망쳤습니까? 윤승원 씨 계획을.”
홧김에 옷과 물건들을 던져 넣은 승원이었다.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바로 캐리어를 들고 객실을 나설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그럴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럴 일이 안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마주한 기사와 사진이 있는 이상 돌아가야 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체념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권 대표가 나타났고, 자신을 안고 있었다.
승원은 권 대표의 몸을 밀어냈다. 아직 다 해결되지 않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조금이나마 안정을 취했던 것도 잠시,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상황을 승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지러웠다. 어쩐지 그에게서 낯선 기운이 스치는 것 같기도 했다. 타지에서 만난 권 대표가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옷은 다 풀어 헤치고.”
“어떻게 된 거예요.”
승원의 가슴에 향해 있던 권 대표의 시선이 올라왔다. 승원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까지는 왜 오신 거고. 기사랑 사진은 다 뭡니까.”
“봤습니까?”
“어떻게 안 봅니까. 인터넷만 켜도 나오는데.”
“윤승원 씨 평소에 인터넷 열심히 안 하는 걸로 아는데. 누가 보여 줬습니까.”
“…….”
정곡을 찌른 권 대표의 말에 승원이 입을 다물었다.
“윤승원 씨.”
승원이 대답하지 않자 그가 승원의 턱을 손등으로 톡 건드리며 들었다. 미지근한 웃음이 입가에 묻어 있었다.
“화났습니까.”
“화난 게 아니라.”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데.”
“…….”
“내가 어떻게 해 줘야 기분을 풀겠어요.”
답답해서 더 말하지 못하는 승원을 보며 권 대표는 여유롭게 웃음을 보이기까지 했다. 승원은 여전히 권 대표가 여기까지 온 일에 대해 안심할 수 없었다. 급박하게 수습하고 승원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척 굴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갑자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음이나 보이는 남자는 승원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권 대표의 물음에도 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을 금방 지울 수 있을 리 없었다.
“대표님.”
“왜.”
“여기까지 왜 오셨어요.”
“너 보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권 대표에 승원은 입술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기사 난 거 저한테 설명해 주세요.”
“…….”
“왜 그런 일이 있었던 거고, 대표님이랑 그 여자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고, 우리는 계속 이렇게 만나도 되는 게 맞는 건지, 제가 이렇게 대표님을 보고 있어도 되는 건지…….”
금방 사라진 잔열 같은 미소조차 지운 채 권 대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바지 내려 봐요.”
“…….”
“빨아 줄 테니까.”
“네? 잠깐……!”
승원이 채 말리기도 전에 권 대표는 벌써 승원의 바지춤을 잡아 내리고 있었다. 허벅지 밑단까지 내려간 바지가 스르륵 힘없이 풀어져 무릎 아래로 떨어졌다. 놀라 입을 막은 승원이 남은 손으로 권 대표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그를 일으킬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는 이미 무릎을 꿇고 앉아 승원의 마른 허벅지 위로 입술을 댄 채였다.
“대표님, 잠깐만…… 지금 여기서……!”
“왜. 그럼 복도 나가서 할까?”
“그 말이 아니…… 흣.”
승원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묵직함이 있었다. 그새 거칠어진 음성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와 승원의 살갗을 간지럽게 매만졌다. 혀를 세워 넓적하게 허벅지 안쪽을 핥고는 타액이 묻은 자리를 다시 혀로 쓸었다. 승원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권 대표의 목덜미를 잡았다.
“똑바로 서야지.”
“지금 그렇게 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이러다 뒤로 넘어가겠습니다.”
엉덩이를 받친 권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부풀어 오른 성기가 푸른색 드로어즈를 뚫을 듯이 밀고 나오고 있었다. 입가에 웃음을 살짝 걸친 그가 입술을 그대로 살이 닿은 면 위로 가져갔다. 말랑한 것이 입 안으로 훅 들어왔다. 과감하게 머금고 권 대표는 그것을 빨기 시작했다.
“하, 으응…… 읏.”
승원의 속옷에 입을 묻고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움직임에 있어서 막힘이 없었다. 물러서지 않고 승원의 성기를 입 안에 넣은 그가 오물거리듯이 그것을 적셨다. 푸른색이 남색이 될 때까지 잔뜩 넣고 빨던 그가 아예 속옷을 잡아당겨 내렸다. 팽 하고 튀어 오른 성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눈을 질끈 감은 승원이 체념의 자세로 입술을 씹었다. 다시금 부푼 성기가 살갗 그대로 권 대표의 입 안에 들어갔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어.”
권 대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파르게 올라간 좆이 그의 입김을 받을 때마다 습기에 움찔거렸다.
“좆이 빠지도록, 빨아 주겠습니다.”
“으으응, 하, 으으…….”
엉덩이를 힘껏 움켜쥔 손아귀가 불끈거리며 움직였다. 삼백안의 눈이 위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의 승원이 두 볼을 잔뜩 붉힌 채 힘겹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권 대표는 이미 전부터 팽창한 자신의 아랫도리를 꽉 잡아 눌렀다. 입은 쉬지 않고 승원의 성기를 입에 문 채 봉사했다. 입 안을 찌르는 늘씬한 기둥이 귀여웠다. 승원의 얼굴을 보며 빨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옷을 벗겨 뒷구멍에 제 것을 짓누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발가락이 오므라드는 기분에 승원은 머리에 힘이 들어갔는지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뒤로 넘어가려던 승원을 힘 있게 붙잡은 권 대표가 등허리를 감싸 안고 그대로 안아 들었다. 난폭한 키스를 이어 나가며 침대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캐리어를 발로 차 치워 버리고 침대 위에 승원을 눕혔다.
“씨발. 왜 이렇게 안 풀려.”
단추를 풀던 손을 두 번째 놓치자 욕을 짓씹은 그가 그것을 그대로 뜯어냈다. 아래로 밀어내듯 벗어 버린 권 대표가 다시 승원의 허벅지를 양옆으로 벌렸다. 잔뜩 벌어진 다리에 승원이 흐읍, 소리를 내며 눈을 가렸다. 이제는 말릴 힘도 없었다. 발기한 물건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제 것을 빨아 주는 권 대표가 싫지도 않았다. 더 힘껏 그를 안고 싶었다.
봉긋 선 기둥을 붙잡고 혀를 내밀어 곡진하게 쓸어 핥기 시작했다. 승원의 다리 사이에서 권 대표는 승원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물건을 핥았다. 타액이 묻은 자리를 다시 입에 넣고 목구멍까지 끌어 넣기도 하고, 다시 입술 밖으로 꺼내 귀두 위에 제 얇은 입술을 문지르기도 했다. 그의 분홍 입술에 제 젖은 귀두가 축축하게 비벼졌다.
“대표님, 대표, 님…….”
“좋아?”
입 안으로 넣고 점막에 가득 비볐다. 승원이 몸을 바르르 떨 때마다 권 대표는 기둥을 더욱 세게 물었다. 이를 감춰 아프지 않게 굴리면서도 가득 빨아올렸는데, 그때마다 승원은 누군가 제 좆을 손으로 콱 움켜쥐는 듯한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안에서 물기 젖은 타액이 혀와 섞여 오고 갈 때마다 물렁거리는 감촉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뜨거움이었다. 승원 역시 권 대표가 그리웠고, 그와 이러한 것들을 나누고 싶었고, 그럼에도 물리적인 거리로 머리로만 생각하던 것들이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차려 보면 다리 사이에서 가슴을 훤히 드러낸 권 대표가 제 물건을 입 안에 넣고 죽죽 빨아들이고 있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 사이로 제 좆이 안과 밖으로 드나들었다. 몸 안을 한참 돌고 돌던 피가 마침내 사타구니 안쪽으로 번져 가득 모이고 있었다.
“하, 하아…… 쌀 거 같…… 으으…….”
“아직 싸면 안 됩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저 자신이 싸는지도 모른 채 사정을 했을 승원이었지만, 지금은 상황도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의 입에 제 물건이 들어가 있으니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권 대표는 이내 입술에서 승원의 성기를 빼내었다. 사정을 시켜 주려는 듯 놔주는 것 같더니 그는 뜻밖에도 승원의 미끈거리는 귀두를 엄지로 가득 막았다.
“기다려.”
그가 명령을 내리듯 낮게 쏘아붙였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눈꼬리에 얕게 매단 승원이 당황스러운 낯으로 권 대표를 올려다봤다. 그는 셔츠를 펄럭거리는 자태로 어딘가를 두리번거리더니 무언가를 찾아 들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툭툭 만져지는 그것은 다름 아닌 승원의 핸드폰이었다.
“대표님…….”
툭. 승원의 마른 가슴 위로 딱딱한 게 닿았다.
“찍으세요.”
권 대표의 손안에 있던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다리 사이로 몰려들던 사정감이 다시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던 순간, 권 대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증거입니다. 내가 윤승원한테 눈이 돌아서 윤승원 좆까지 빨고 있는 호모 새끼라는 걸 증명하는.”
“…….”
“찍어, 빨리.”
권 대표는 승원에게 핸드폰을 들려 주었다. 화면이 켜져 있는 핸드폰은 동영상 모드였다. 액정 너머로 낯뜨거운 풍경이 액자에 담기듯 훤히 존재하고 있었다. 벌어진 제 다리와 그 사이 권 대표의 손에 꽉 묶여 있는 좆이 보였다. 그 뒤로 권 대표의 탄탄한 뱃가죽이 보였고 그 밑으로는 금방이라도 천을 찢을 듯이 부풀어 오른 그의 앞섶이 숨 쉬고 있었다.
화면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녹화는 이미 시작된 후였다. 승원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바로 잡았다.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 권 대표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을 비스듬히 흘겼다. 핸드폰을 내려놓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가 ‘똑바로’라고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승원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다리 사이를 향하여 핸드폰을 조준했고, 곧이어 화면 안으로 헝클어진 머리의 굵은 선을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그가 승원의 귀두를 다시금 입에 물었다. 핸드폰 렌즈를 꼿꼿이 바라보며 정성스레 승원의 좆을 다시 빨기 시작했다.
“이러면, 어떤 여자가 나한테…… 달라붙겠습니까.”
“흐, 흣.”
포커스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어? 윤승원 씨 뒷구멍에 자지 처박는 나랑 누가 스캔들이 나고 싶겠어요.”
그는 좆을 빨면서도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흣, 윽, 하, 으으.”
“내가 여자랑 그런 기사 난 게 그렇게 분했습니까.”
렌즈에서 눈을 절대 떼지 않는 권 대표의 눈빛이 선연하게 액정 너머로 들어와 승원의 시야에 잡혔다. 손이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눈에 불을 켠 짐승이 먹잇감을 잡아먹듯 무자비하고 게걸스러운 태도였다. 화면 안에 고스란히 담기는 상스러운 장면에 승원은 오히려 묘한 흥분감이 박차를 가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다리 안쪽이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제 눈 밑이 빨갛게 그을렸을 것이다. 제 좆을 빠는 권 대표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며 그 안에 자신의 들뜬 신음도 함께 녹음되고 있을 터였다. 지금 벌어지는 이 모든 광경이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백 마디 말로 해명하는 것보다 이렇게 몸으로 해결하는 게 훨씬 빠르잖아.”
권 대표가 렌즈를 바라보며 짐승처럼 지껄였다.
“하, 응, 으읏…….”
“윤승원 씨는 몸으로 설명하는 걸 더 좋아하니까.”
잠시 기둥을 혀로 쓸어 핥던 그가 다시 렌즈로 시선을 들었다. 까칠한 목소리가 닿았다.
“맞아, 아니야.”
“…….”
“윤승원. 대답해.”
그가 승원의 고환을 꾹 움켜쥐었다. 불시에 가해진 자극에 승원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흘렸다. 곧이어 고개를 제자리로 당기고 승원은 하아, 하아 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느릿한 목소리가 신음과 섞여 불분명하게 새어 나왔다. 승원의 귀두를 빨던 권 대표가 그대로 부위를 머금은 채 손을 뻗었다. 화면 안으로 권 대표의 팔이 가득 들어왔다가 나갔다. 그가 승원이 어설프게 붙잡은 핸드폰을 고쳐 쥐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남은 손으로는 기둥밑동을 어루만져 주는 정성을 보였다.
“저, 저 쌀 거 같…… 은데.”
“싸세요. 내 입에.”
가득. 그가 짧게 덧붙였다. 느슨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그가 지금 상당한 재미를 느끼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제 더 참을 수는 없었다. 승원은 권 대표의 허락에 참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분출했다. 긴장했던 몸에 힘이 스르륵 풀리며 사타구니 안쪽으로부터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가득 적셔진 점막에 기둥이 닿았다. 권 대표의 입 안에 사정한 승원이 손을 놓쳤다. 핸드폰이 배 위로 떨어지며 카메라 렌즈가 천장을 향했다.
입가에 묻은 정액을 권 대표가 무심하게 닦아 냈다. 안에 든 것을 쉽게 삼켜 낸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숨을 허덕이는 승원의 마른 가슴을 가볍게 토닥인 그가 입가를 혀로 쓸어 닦고는 옆에 놓인 물로 입을 헹궜다.
승원의 배 위에서 들숨 날숨과 함께 일렁이는 핸드폰을 그가 집어 들었다. 화면 아래 중앙에 보이는 정지 버튼과 녹화 중인 듯 초마다 바뀌는 숫자를 보며 그가 짧게 침음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그가 녹화를 중지했다. 핸드폰을 옆으로 던져 두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녹화 잘 됐는데. 보겠습니까.”
승원은 대답하지 않고 숨만 살살 내쉴 뿐이었다. 바지까지 벗어 내린 권 대표가 나신의 몸으로 승원의 위를 덮쳤다. 검게 그늘진 천장에 승원이 고개를 들자 잘난 콧대가 저를 향해 드리워져 있었다. 권 대표가 승원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만지며 말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화낼 겁니까?”
그가 조금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비죽였다. 승원은 숨을 한 번 내쉬고 대답했다.
“무슨…… 말이요.”
“아까 윤승원 씨를 보는데.”
“…….”
“윤승원 씨 앞에서 여자랑 섹스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네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서.”
승원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화를 내고 싶어도 못 내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이었다. 수분이 쫙 빠진 듯이 나른한 몸으로는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친다 한들 어떠한 타격도 없을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얕게 인상을 찌푸린 승원을 향해 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 비릿하고 씁쓸한 타액이 오가는 짧은 키스 이후 그가 웃으며 떨어졌다.
“미친 소리인 거 아는데.”
“…….”
“그 정도로 흥분됩니다. 윤승원 씨가 예민하게 나오는 거.”
승원은 그가 다시 입을 맞추지 못하게 입술을 질끈 씹었다.
“여기까지는. 왜 오셨습니까.”
“윤승원 씨 보러 왔다고 내가 아까 말했을 텐데.”
“그러니까 저를 보러 왜 여기까지 오셨냐는 말입니다.”
승원은 아직 그의 얘기를 들은 바가 없었다. 고작 펠라 한 번으로 풀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쥐여 주고 저 자신을 찍어 보라는 말까지 남긴 권 대표였지만, 어찌 됐든 정확한 해명이 필요했다. 아직 엊그제의 일에 관해서는 제대로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삐져 있습니까.”
“……삐진 게 아니라.”
승원은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이상한 겁니까? 갑자기 찾아와서는 말씀도 안 해 주시고 이런 식으로 풀려고만 하시고…… 제가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는데. 왜 불안하게 그거에 대해선 말 안 해 주시는 건데요.”
“별로 말할 가치가 없는 내용이긴 한데.”
“…….”
“그래도 내가 설명해 줘야겠습니까.”
승원은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살짝 치켜뜬 눈이 노려보는 듯이 보일 수도 있을 듯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권 대표가 나지막이 입을 뗐다.
“가족입니다.”
“……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사촌의 딸이니까. 육촌 정도 되겠네요.”
승원은 얼빠진 얼굴로 권 대표의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볼 뿐이었다.
“가족관계로 얽혀 있기보다는 사업적 협력 관계라 자주 만나긴 했습니다. 내가 개인적인 부탁을 좀 해서 만났던 건데, 그게 그런 식으로 찍혀서 일이 커질 줄은 나도 몰랐고.”
“…….”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 식의 보도는 정말 예상도 못 했고, 기가 차서 두 쪽 다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촌 관계라고 이미 새벽 동안 정정 기사까지 났을 텐데. 아까 봤던 윤승원 씨 얼굴을 보니 기사 확인은 안 한 듯싶기도 하고.”
“…….”
승원의 반응에 권 대표가 허, 하고 웃음을 지었다.
“진짜 처음 들었다는 얼굴이네.”
하릴없이 커지던 풍선 끝을 누가 바늘로 콕 찌른 것만 같았다. 갑자기 펑 터져 버린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도의 끈을 되감은 허무감이 멍멍하게 승원의 머릿속에 차올랐다. 갑자기 너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심장이 때아니게 빠르게 뛰기까지 했다. 하룻밤 동안 느꼈던 별의별 나쁜 상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표정 볼 만한데.”
“…….”
“내가 진짜 윤승원 씨 놔두고 바람이라도 필까 겁났습니까?”
승원은 대답 없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었다. 당장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 확인 못 한 기사들을 주르륵 살폈다. 실시간 검색어 확인에 그치고 말았던 과거의 저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권고은의 사진으로 뒤덮인 해명 기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승원이 머리를 싸매며 온갖 불행한 생각을 하던 늦은 새벽에 떠 있던 기사들이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올라왔던 이유 역시 다른 이유 없이 정정된 보도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지레 먹은 겁으로 안 해도 될 걱정이나 늘어놓으며 고통스러워하던 과거의 자신이 멍청했다. 승원은 핸드폰을 털썩 내려놓고 숨을 두 번 크게 쉬었다. 가슴을 움직이며 숨쉬기를 마친 승원이 권 대표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닿아 뜨거운 살갗이 서로에게 붙었다. 그의 목에 입술을 묻고 승원이 말했다.
“대표님이 저 버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참나. 권 대표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말이 심하네.”
“…….”
“나라고 괜찮았을 것 같습니까.”
그가 입술을 묻은 승원의 얼굴을 떼어 냈다. 시선이 가까이 얽혔다.
“내가 여기까지 왜 온 줄 압니까?”
“…….”
“오해한 윤승원 씨가 날 포기하기라도 할까 봐. 그거 막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이 성격에 꽁꽁 숨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패닉에나 빠져 있을 텐데. 내가 와서 설명하고 해명하지 않는 이상 해결되는 게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다짜고짜 왔습니다.”
“…….”
“근데 진짜 예상대로 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내가 생각보다 윤승원 씨를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승원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검은 눈동자에 오롯이 저의 얼굴만이 비쳤다. 일렁이는 눈동자와 함께 익숙한 숨을 느끼고 있으니 이제야 모든 것이 실감 났다.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든 오해할 일이 있었고, 윤승원 씨가 걱정을 많이 한 것 같긴 해서 사과는 해야겠네요. 걱정시켜서 미안합니다.”
그가 다정하게 이어붙였다.
“그래도 바로 온다고 달려온 게 지금인 겁니다. 바다 건너오느라 이만큼 늦은 건 어쩔 수 없었고.”
“…….”
“아직도 초조합니까.”
“……아니요.”
승원이 대답했다. 승원의 뺨을 어루만지던 권 대표가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어디다 내동댕이쳤는지도 잊었던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낯뜨거운 기억에 승원이 목을 훅 움츠렸다.
“지금 볼까.”
“안 돼요.”
잽싸게 움직인 손으로 승원이 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권 대표가 눈을 가늘게 흘겼다.
“왜. 열어 보세요. 잘 찍혔나.”
“……왜 그런 걸 찍으셔서.”
승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탓하는 듯 말했지만 승원은 내심 아까의 영상이 궁금했다. 손안에 쥔 핸드폰 속에 적나라하게 찍힌 권 대표의 낯이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라앉으려던 심장박동이 다시 뛰는 것만 같았다. 승원은 갤러리를 열어 보지도, 그렇다고 그것을 지울 생각도 없었기에 손아귀에 꾹 쥐고만 있었다.
“또 물어볼 게 있으면 말해 보세요. 다 말해 줄 테니까.”
“……대표님 그럼 그분이랑은…… 왜 만나신 거예요?”
“왜 만났냐고?”
“……두 분이 만나서 뭘 하신 건지…… 궁금해서. 사진 찍힌 곳이 백화점이었던 것 같은데.”
“사진은 열심히 봤나 봅니다. 그런 것까지 알고 있고.”
승원은 부정하지 않고 입만 다물었다. 권 대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손에 뺨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승원을 내려다봤다. 절로 내려온 검은 앞머리가 스르륵 눈썹을 가렸다. 나른한 눈이 긴 속눈썹과 함께 내려와 떨어졌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이어 나가는 듯 보였다.
“……그건 말해 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왜요?”
“윤승원 씨가 굳이 몰라도 되는 부분이라.”
방금 전엔 뭐든 대답할 것처럼 말해 놓고 그는 금방 말을 바꿨다. 승원의 두 뺨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이불 끝을 꾹 쥐고 입을 벌렸다. 할 말을 잃은 탓이었다.
“많이 궁금합니까? 우리가 만나서 뭘 한 건지.”
“……제가 왜 알면 안 되는데요.”
가족이라고 했으면서 알려 주지 않는 것은 반칙이었다. 아무리 피 섞인 집안 식구일지라도 기사가 날 정도로 충분히 의심을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상대가 잘나가는 배우인 것도 있었지만 백화점이라는 장소 역시 적당히 수상한 상황으로 의도되기에 충분했다. 간단한 선물을 산 거면 산 거라고 얘기하면 되고, 그냥 개인적인 만남으로 백화점에서 일을 본 거라면 그렇게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몰라도 될 것 같아서.”
그러나 권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승원은 애가 탔다. 뭐가 그렇게 비밀스러워서 저에게 말해 주지 않는 건지, 혹은 그 정도의 일은 자신에게 말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그가 생각하는 것인지. 그게 무엇이 됐든 승원은 찝찝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서운해지려는 얼굴을 티 내지 않으려 승원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입을 가만히 다물었다.
그런 승원을 오히려 놀리려는 듯이 권 대표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남겼다. 승원의 볼을 손등으로 살며시 건드렸다. 승원은 그런 권 대표의 손길을 피했다. 거센 저항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서운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피한 겁니까, 지금?”
그가 고저 없이 물었다. 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데라면 모를까, 침대 위에서 그러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그가 말하기 무섭게 승원의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슴이 꽉 맞닿도록 가까이 닿은 살결에 승원이 숨을 참았다. 엉덩이를 곡진한 손길로 매만진 권 대표가 골 사이로 손날을 넣었다. 부드럽게 위로 올리며 승원을 향해 눈을 흘겼다.
“흐, 읏…….”
“넣으려고 했는데.”
뺨 옆으로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볼과 볼을 맞댄 채 그가 속삭였다.
“내가 그리로 갈까. 아니면 윤승원 씨가 뒤로 돌겠습니까?”
“…….”
“있던 일정 다 빼고 비행기 타고 오느라 나도 수고 좀 했습니다. 보상이 없으면 섭섭하지.”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승원의 허리춤을 잡아 권 대표가 휙 돌리자 마른 몸이 속절없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놀라 긴장한 탓에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뽀얗게 살이 오른 사이로 굵은 기둥이 힘껏 비벼졌다. 살갗으로만 느끼는 감각임에도 도드라진 핏줄이 여실히 느껴졌다.
“전부 빨아 먹고 싶네.”
그가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손가락으로 골을 살며시 벌려 그 사이로 제 성기 선단을 비비기 시작했다. 하체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진득하게 움직이며 권 대표는 승원의 가슴을 꽉 눌러 잡았다. 처음엔 허리춤에 있던 손바닥이 점차 위로 올라와 어느새 도드라진 젖꼭지를 건드렸다.
“으, 읏. 하아. 대표님…….”
“아까처럼 피해 보지 그래요.”
“거기, 그렇게…… 흐응.”
“좋으니 저항 못 하겠지.”
권 대표가 제 손에 침을 뱉었다. 길게 늘어진 타액을 손끝에 비벼 선단을 비비던 골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이로 진입한 구멍 주변은 이미 그의 쿠퍼 액으로 적당히 끈적이고 있었다. 주름 하나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건들며 축축하게 적셨다. 승원이 숨을 쉴 때마다 뒤쪽의 입구도 함께 뻐끔거렸다. 손가락 두 개를 한꺼번에 넣자마자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읏! 흐으…….”
“힘 풀어요. 넣을 테니까.”
그가 승원의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입술이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긴 다리가 서로 얽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승원은 간지러운 감각에 시달리는 다리 사이를 매만졌다. 앞으로 딱딱하게 서 있는 제 성기를 손으로 쥐고 만지작거렸다.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에 손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 순간,
“윽. 아아……!”
승원이 이불을 꽉 쥐었다. 손가락과는 느낌부터 다른 굵은 덩어리가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제 등 뒤쪽에서 묵직한 신음이 들렸다. 승원의 판판한 몸을 매만지며 권 대표가 귓가에 뜨거운 숨을 뱉었다. 내벽 중앙까지 진입한 성기가 불끈대며 핏줄을 키웠다. 놀란 승원의 몸이 구멍에 바짝 힘을 줬다. 권 대표가 욕을 지껄였다.
“씹…… 적당히 힘 좀 빼지 그래요.”
“하…… 느낌이 이상해서……. 으응…….”
“우리 이것도 찍을까?”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싫, 으읏. 하아…….”
물렁물렁한 속을 딱딱하게 굳은 물건이 들쑤셨다. 마른 배를 찔러 앞으로 나올 정도로 그의 성기가 들어와 있었다. 엉덩이 뒤로 꽉 차는 느낌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눈을 꼭 감은 승원이 제 배를 끌어안은 권 대표의 손등을 부여잡았다.
곧이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거칠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릿하거나 여유롭지도 않았다. 주름이 모였다 풀리며 오물오물 그의 물건을 씹어 냈다. 바깥을 나갔다 다시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와 치골이 닿아 철퍽대는 소리를 냈다. 얽힌 다리 끝 승원의 발가락이 곱게 오므라들었다 펴지길 반복했다.
“하, 읏, 응! 하아, 그으, 응……!”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지긋하게 귓바퀴를 맴돌았다. 하체를 빠르게 움직이며 승원의 몸에 여지없이 박아 대는 그의 몸이 멈출 줄을 몰랐다. 박차를 가하듯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그는 승원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고 훑었다. 가슴 주위를 쓸던 손이 곧 아래로 내려와 허벅지 안쪽을 쓸고 승원의 물건을 쥐었다.
“나랑 섹스하, 는 게 그렇게 좋습, 니까?”
“읏, 응. 하아…… 아……!”
“몸만 섞, 으면 이렇게 체면 없이 달아, 올라서.”
잠시 서운했던 마음에 그가 뻗은 손을 피했던 아까의 제가 떠올랐다. 그가 얘기해 주기 전까지 말도 하지 않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승원은 지금 제 물건을 발딱 세운 채 그와의 섹스에 열렬히 응하고 있었다.
권 대표가 안쪽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미칠 듯이 좋았다. 살갗이 서로 붙어 있는 것도, 제 등과 그의 가슴 사이 틈 없이 맞물려 땀이 차오르는 것도, 옆으로 누운 자세 덕분에 가까이 붙은 채 이불에 밀리는 몸도 전부.
“하, 으, 읍.”
권 대표가 승원의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곧장 입술이 맞물리고 사이를 비집은 권 대표가 혀를 넣었다.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키스가 조금 난폭했다. 안을 다 뚫을 것처럼 점막을 찌르고 이 사이를 탐했다. 승원이 따라가기도 벅차도록 혀가 분란하게 섞였다.
“으, 대, 표님…… 하읍.”
잠시 얼굴을 떼어 내는가 싶더니 몇 초간 승원을 들여다본 권 대표가 다시 입을 맞췄다. 입술을 핥고 혀끝을 들어 볼을 핥아 올렸다. 입술과 입술이 맞물린 채로 안쪽을 쪽쪽 빨다가 승원의 입천장을 다시 핥았다. 섹스를 하고 있음에도 그것보다 더 야한 것을 입으로 하는 기분이었다.
문득 커튼을 다 치지 않은 창문이 마음에 걸렸다. 완전히 열려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커튼이 넓은 통유리창의 반만 덮고 있었다. 빈틈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대낮부터 벌어지고 있는 섹스의 적나라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뿐, 머릿속엔 온갖 그와 몸을 섞는 들뜬 감각이 전부였다. 승원은 권 대표와 키스를 하면서도 간간이 욕심을 내 뒤로 손을 뻗어 그의 탄탄한 몸을 매만졌다.
“안이 다 흘러내릴 거 같네.”
“아아!, 흐, 윽. 대표님, 그렇, 게 빠르, 면…….”
“지금은, 못 줄입니다.”
말랑하게 풀어진 통로를 커질 대로 커진 성기가 들락거렸다. 넣는 느낌도 물론이지만 빠질 때의 감각에 승원은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배 속에 피어오르는 열기를 입 밖으로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격렬히 움직임을 더해 오는 남자의 묵직한 살덩이가 안쪽에 갇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입구 주위에 기둥이 들어갔다 나가며 불이 날 듯한 마찰을 일으켰다.
승원의 다리 한쪽을 들고 안쪽으로 몇 번을 더 처박은 후에야 권 대표는 승원의 몸에서 제 성기를 빼냈다. 늘어질 듯한 살덩이를 엉덩이에 대고 사정한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후에 승원 역시 꿀렁이며 제 몸에 있던 것을 빼냈다. 시트가 다 젖어 묽게 물들었다.
“오자마자 이게 뭡니까.”
“……하아…….”
“안 그래도 피곤해 죽을 거 같았는데. 윤승원 씨 덕분에 남은 힘까지 다 쓰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넋이 다 나간 듯한 승원의 팔을 잡아당기자 흐물거리는 몸이 저항 없이 끌려왔다. 늘어진 승원의 몸을 위아래로 훑던 권 대표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아직도 가끔 어이가 없습니다.”
“……뭐가요.”
“내가 같은 물건 달린 남자를 보고 이렇게 꼴려 한다는 걸 생각하면.”
권 대표의 말에 승원은 몸과 함께 눅진해지려는 머리로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아니면요?”
“뭐?”
“……제가 아니어도. 대표님은 다른 사람이어도, 그게 여자가 아니라도 방금 같은 감정을 가지실 수 있다는 건가요.”
권 대표가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눈을 조금 키웠다가 눈썹을 비죽였다.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숨을 쉰 그가 승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
“아마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이마 밑으로 내려온 승원의 머리를 정갈하게 고쳐 준 그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코끝에 닿는 달콤한 체취가 몸을 간질이듯 깊이 퍼져 나갔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윤승원 씨가 처음입니다.”
“…….”
“그게 남자든 여자든. 난 윤승원 씨가 아닌 이상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
“단지 내가 사랑하게 된 윤승원 씨가 남자라는 점이 흥미로웠을 뿐이고. 그게 전부입니다.”
승원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만 말갛게 올려다보던 승원이 뒤늦게서야 그를 불렀다.
“대표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입을 맞췄다. 햇살이 동그랗게 비치는 침대 위에서 뜨거운 키스가 오갔다. 승원이 혀를 넣기 무섭게 그가 등을 꽉 끌어당겼다. 엉덩이를 힘껏 누르듯이 당기고 승원의 입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무섭게 키스했다. 엉킨 다리 사이에 성기가 다시 불끈거리며 힘을 받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입을 떼고 나서도 발갛게 오른 승원의 볼 주변은 되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아까의 서운함은 이미 다 잊은 뒤였다.
“……이제 어떻게 해요.”
뭐가.”
그가 다정하게 되물었다.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넌 언제 갈 건데.”
“대표님이…… 가실 때요.”
그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까지만 있다가 내일 나갑시다. 어때요.”
“전 좋아요.”
여기 계속 있자고 했어도 좋았을 거고, 일주일을 보내자고 했어도 좋다고 했을 거였다. 그러니 승원은 그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제 옆의 품을 꽉 끌어안았다. 하룻밤 동안의 걱정이 맑은 햇살에 섞인 그의 체취와 함께 잦아들었다. 어떻게든 제 옆을 지키는 남자가 너무 소중했다.
승원은 꿈을 꿨다. 갤러리에 담겨 있을 영상 그대로의 화면이 꿈속에서 그대로 재생되었다. 그가 승원의 성기를 입에 물고 정성스레 핥고 빨았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승원을 바라보며 하얀 정액이 묻은 입술로 미소지었다. 승원의 기둥과 치골에 각각 입을 맞추고 시야 가까이로 들어왔다.
그리고 데일 듯이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햇살 같은 것이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하고 뜨거웠다. 문득 느껴지는 단단한 팔을 잡고 승원은 자신을 껴안은 권 대표에게 키스했다. 뒤섞이는 타액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며 달콤한 꿀이 되었다. 배 속에 꽃이 가득 피었다. 떠오르는 황홀감에 몸을 움츠리던 승원이 문득 눈을 떴다.
오래도록 다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음성이 뺨을 건드렸다.
“왜 일어났어.”
권 대표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를 반쯤 기대고 승원을 잔잔히 바라봤다.
“……대표님 안 주무세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협탁 조명 하나에 의존한 공간이 모닥불을 피워 놓은 듯이 아늑했다.
“못 봤던 얼굴 좀 뜯어 보느라.”
“…….”
“꿈꿨습니까.”
“……꿨는데.”
“무슨 꿈이었는데.”
엉큼한 꿈을 꾸다가 깬 거라 아직도 머릿속에 불순한 장면들이 가득했다. 승원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불을 입술 위까지 덮었다.
“말 안 할래요.”
“왜.”
그가 되물었다.
“대표님도 그 분이랑 뭐 했는지 안 알려 주셨잖아요.”
그가 웃었다. 승원의 볼을 쓸어 만졌다.
“복수?”
“……비슷한 겁니다.”
“난 또. 윤승원 씨가 아까 녹화된 영상 보면서 자위라도 하는 꿈을 꿨나 싶었네.”
“……네?”
“다리를 배배 꼬길래.”
승원은 딱 붙어 있는 허벅지를 확인했다. 귓바퀴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분명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을 테지만, 자신에겐 농담이 아니었다.
“주무세요.”
툭 던지듯 말하며 눈을 감았다. 검은 시야 주변으로 그의 웃음이 번졌다.
“설마 진짭니까?”
“아닙니다.”
“진짜인가 보네.”
“아니라구요.”
승원이 눈을 번쩍 뜨고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시원스레 올라갔다. 적당히 웃음을 참는 듯 보이던 그가 고개를 끄덕여주며 이불을 끌어올려 줬다.
“알았습니다. 얼른 자요.”
“안녕히 주무세요, 대표님.”
“잘 자요.”
짙은 숨소리가 숨을 쉴 때마다 함께 섞여들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꿈에서만큼 따뜻한 포근함을 느끼며 승원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휴양지에서 빠져나오면서도 승원은 아쉽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지속된 촬영에 대한 보상으로 맛보는 꿀 같은 휴식이었지만 지금은 당장 날아서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권 대표가 잠시 샤워를 하는 사이, 승원은 객실 창 너머의 널따랗게 보이는 풀장과 럭셔리한 바들을 구경했다.
“배고프진 않습니까?”
별생각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가운이 발목을 다 덮지 못한 모습이었다. 권 대표는 물기가 다 덜어지지 않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승원에게 다가왔다. 승원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몸을 그대로 돌려 창에 등을 기댔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바깥 구경하고 있었어요.”
“나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여기 있을 거예요. 그냥 구경만 한 거고.”
“방금 씻고 나와서 몸이 좀 뜨거운데.”
권 대표가 승원을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던 승원이 잠시 뒤 입술을 벌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두 팔을 넓지 않게 벌렸다. 승원은 아이처럼 그의 품에 쏙 들어가 안겼다. 아예 가운 사이를 풀어 버린 그 덕분에 승원은 더운 기운이 남아 있는 권 대표의 맨 가슴에 뺨을 댈 수 있었다. 승원이 얼굴을 파묻듯이 고개를 살살 돌리며 향긋한 향과 물 냄새를 맡았다. 정수리 위에서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너무 쉬운 거 아닙니까. 팔만 뻗었는데 그냥 안겨 버리면.”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벌써 내가 다 용서됐냐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대표님이랑 저를 이런 식으로 갈라 놓은 매스컴 잘못인데.”
그렇다고 권고은이라는 여자가 아예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정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찝찝하고 조금은 불쾌한 심정이었지만, 이제 오해가 풀리니 다른 마음으로 그녀가 궁금했다. 비즈니스 관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권 대표가 함께 어울려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가족, 그것도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대표님.”
점점 식어 가는 몸에 여전히 딱 붙어 숨을 쉬던 승원이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여기까지 오신 거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그게 무슨 말인데.”
“바쁘셨다는 말도 있고, 그래도 시간까지 쪼개서 사실도 아닌 기사 하나 때문에 발걸음해 주신 거잖아요. 여기가 국내도 아니고.”
흐음. 권 대표가 잠시 침음했다. 눈을 살짝 내리뜬 채 승원을 바라보는 그의 긴 속눈썹이 유독 눈에 띄었다. 얼마간 그러고 있던 권 대표는 갑작스레 승원을 번쩍 안아 들었다. 목뒤와 무릎 뒤에 팔을 넣어 가로로 안은 채 침대로 승원을 옮겼다.
“룸서비스부터 시키고. 뭐 먹을 겁니까.”
“……대표님이 먹는 거 따라서요.”
“난 윤승원 씨가 먹는 걸 따라 주문할 생각이었는데.”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승원이 스르륵 웃으며 말했다.
“전 정말 아무것도 상관없어서 그래요. 대표님 드시고 싶은 거 시키세요.”
“그럼 내 마음대로 주문하겠습니다.”
“……네.”
승원은 반쯤 어리둥절한 채로 흰 이불을 끌어와 제 무릎에 덮었다. 협탁 옆 수화기를 드는 권 대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보는 게 불편해지자 아예 그쪽을 향해 풀썩 누워 버렸다. 푹신한 이불 위에 뺨을 붙이고 잘빠진 옆선을 구경했다.
능숙한 영어 실력으로 그가 이것저것 말했다. 보통 한국말을 쓰더라도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구사할 때는 톤이라든지 목소리의 무게라든지, 그런 것들의 차이가 보이곤 하던데, 그가 쓰고 있는 영어는 권 대표의 원래 목소리와 다를 바 하나 없었다. 묵직하고, 낮고 시크한 음성이 귀를 잔잔히 울렸다. 승원은 놀랄 거 없이 그를 바라봤다. 곧 수화기를 내린 권 대표가 다가왔다. 그가 앉자 침대 가장자리가 풀썩 내려갔다 올라왔다.
일어나려는 승원의 머리를 그가 다시 가볍게 눌러 내렸다.
“혹시 여기 있는 내가 불편해 보입니까?”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는 말은 결국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당히 내포했다는 뜻과도 같았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음에도 쉽사리 그의 마음이 읽히지 않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윤승원 씨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서 또 나를 걱정하는 겁니까.”
“…….”
“애초에 후회할 것 같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잠시 입을 다물던 그가 말을 이었다.
“윤승원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나는 평생 할 후회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윤승원 씨를 알게 된 게 후회되는 일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고.”
“…….”
“그만큼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뜻입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효율적일지 따지는 것보다 그냥 윤승원 씨 하나만 보고 달려드니 자꾸만 후회되는 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편안한 음성이 귀를 가득 채웠다. 권 대표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승원의 눈높이에 맞춰 편안히 누웠다. 두 눈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래서 이제 그런 후회마저 전부 지워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할 거고, 그건 대체로 윤승원 씨와 관련된 일일 테고. 충동적으로 뭘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 끝엔 전부 윤승원 씨 하나만 있을 겁니다.”
“…….”
“그러니까 나한테 후회되냐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네.”
승원은 스르륵 대답했다. 곧게 직조된 승원의 얼굴이 권 대표의 눈동자에 우물처럼 비쳤다.
“대표님.”
승원의 부름에 권 대표는 눈짓으로 대답했다.
“키스해도 돼요?”
“안 하고 뭐 했습니까.”
한순간에 입술이 덮쳐 왔다. 완벽하게 맞물린 두 입술이 서로를 더욱 삼키려 들었다. 승원의 허리를 끌어안은 권 대표가 제 쪽으로 가득 당겼다. 그의 손길에 휘말려 붙은 승원 역시 팔을 들어 그의 등을 휘어 감았다. 곧 승원의 뒤통수를 감싸는 뜨거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커다란 침대 중앙에 한 몸처럼 붙은 둘은 한참 동안 키스를 이어 나갔다.
머리에 있던 손이 목으로 내려가고, 등을 쓸어내리고, 곧이어 바지 틈 사이로 들어갔다. 몸을 바짝 움츠린 승원이 권 대표에게로 폭 안겼다. 입술을 머금은 채로 간지러운 몸을 비틀었다. 골 사이로 파고든 손날이 가볍게 엉덩이를 쥐었다. 점차 뜨거워지는 숨을 공유하고 있을 때였다.
쿵쿵. 객실을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들린 초인종 소리에 등을 잔뜩 휘고 있던 승원이 화들짝 움츠렸다.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권 대표의 미간은 이미 깊게 패어 있었다.
“뭐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승원의 바지 안에서 아직 손을 빼지 않은 그가 눈을 흘기며 숨을 죽였다. 승원은 그대로 굳어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 닿은 얼굴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그마했다.
“룸서비스 시키셨잖아요.”
“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옵니까, 그게.”
그러고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승원은 눈만 깜빡거리고 말았다. 툭 끊어져 버린 분위기에 권 대표는 반쯤 인상을 쓴 채 다시 승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승원아.
권 대표가 이상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시트를 짚고 있는 팔뚝에 선명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승원이 이불을 쥔 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객실 너머에서 들린 건 분명한 성인 남자 목소리였다.
- 윤승원. 자? 계속 안 보여서 와 봤는데.
권 대표가 망설임 없이 침대 밑으로 긴 다리를 내렸다.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은 그가 문이 있는 복도 쪽으로 발을 옮기려 하자 승원이 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시게요.”
“누굽니까.”
“저도 잘…… 그냥 동료 배우…… 같은데.”
“배우? 누구.”
“…….”
목소리만 듣고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소리를 치고 있지도 않았고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승원을 부르는 문 너머의 음성을 대번에 듣고 알아듣기란 어려웠다. 승원은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을 뿐이지만, 그런 승원을 내려다보는 권 대표는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표님!”
그가 승원의 손을 놓았다. 딱 잘라낸 고저 없는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를 말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어떤 해결책을 쓸지 몰라 걱정이 앞섰지만, 승원은 차마 그를 붙잡지 못했다. 급하게 침대 밑으로 내려가 맨발로 그에게 다가갔지만 이미 복도 끝으로 나간 권 대표는 문을 열기 일보 직전이었다. 승원은 코너 뒤로 바싹 숨었다.
권 대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객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반한 얼굴의 남성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뒤늦게 그를 올려다봤다. 180이 조금 넘을까 말까 한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톤과 날카로운 눈매가 선명했다. 남자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은 권 대표가 가운을 가볍게 여미며 문에 팔을 기대섰다. 아무리 180이 넘는다 하지만 권 대표의 몸집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뭡니까.”
살벌한 눈이 남자를 바라봤다.
“……저, 그게.”
남자는 확실히 당황한 듯 보였다. 권 대표의 얼굴을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객실 번호를 확인했다. 입이 마르는지 입술에 침을 바른 남자가 뒷목을 매만지며 시선을 올렸다. 권 대표는 대답할 시간은 주겠다는 듯 잔잔히 남자를 기다렸다.
“누굴 찾길래 남의 객실 문까지 두드리면서 난리인지 모르겠네.”
“……아. 여기 윤승원이라는 남자가 묵고 있었는데요. ……혹시 제가 잘못 안 건지.”
“전에 묵고 있던 사람은 이미 나갔습니다. 나도 들어온 지 별로 안 돼서 그쪽 사정은 잘 모르겠고, 그쪽이 찾는 남자는 없는 거 같은데.”
승원은 벽 뒤에 붙어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으려 노력했다.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면 제가 있을 것이 들킬 것 같았고, 그래서 숨을 죽여 대화를 확인하기엔 이곳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칼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얼굴을 뺐다.
승원의 눈에 보이는 건 문을 다 가린 권 대표의 거대한 몸통이었다. 길게 늘어진 샤워 가운과 함께 그의 몸이 맞은편의 남자를 가린 채였다. 승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얼른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제가 손쓸 방법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이곳에 오래 있지는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 끝났으면 가시죠.”
“네. 근데…….”
남자는 권 대표의 얼굴을 어디서 본 것만 같다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단순한 직감일 뿐, 확실하지 않았다. 꼬리를 늘리던 남자의 말을 자르고 권 대표가 따분하게 말했다.
“문 닫아도 됩니까?”
“……예, 예.”
확 당겨 닫은 문에서 쾅, 커다란 울림이 일었다. 권 대표는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다시 복도를 지나 들어왔다. 비어 있는 침대를 확인하고, 그 옆의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는 승원을 보며 눈썹을 들었다.
“거기 앉아서 뭐 해요.”
“……갔어요?”
“쫓아낸 쪽에 가깝긴 한데.”
“뭐라고 하셨어요?”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쳐든 승원을 권 대표가 멀찍이서 내려다봤다. 옆으로 몸을 기울여 고요한 객실 문을 확인한 그가 혀를 한 번 차고 승원을 바라봤다.
“입술 한 번에 하나씩.”
“……대표님.”
“싫으면 관두세요.”
“알려 주세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랑 키스하기 싫습니까?”
“그게 아니라…….”
이런 질문에 입맞춤을 거는 권 대표의 행동에 승원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대답 하나 얻어 내겠다고 입술을 비비고 있는 것도 쑥스러웠고, 갑자기 유치하게 행동하는 권 대표에 승원은 한참을 망설였다.
두 다리를 안은 채 입술에 침을 바르던 승원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쳐든 채 눈만 살며시 내리깐 권 대표의 입술이 위쪽에 있었다. 까치발을 살짝 들자 입술이 근처에 닿았다. 쪽, 입술을 맞대고 소리 내어 떨어졌다.
“……알려 주세요.”
그의 입술이 미약하게 올라갔다. 적당한 만족스러움을 안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윤승원이라는 사람은 모르겠고, 여기 있던 사람 나가고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알았다고 해요?”
“다시.”
그가 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승원이 입을 벌렸다. 황당하다는 듯 눈을 치켜올려 쳐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가늘게 눈을 뜬 권 대표의 시선이 승원을 가지런히 내려다봤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감질나는 키스에 귀 뒤가 붉어진 승원이 다시 답을 요구하는 얼굴로 권 대표를 올려다봤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마지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귀엽네.”
“뭐라고 했어요.”
“기억 안 납니다. 대충 말하고 문 닫아 버려서.”
승원의 눈썹이 늘어졌다. 권 대표에게 입을 맞춘 것이 처음으로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 중으로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을 겁니다. 매니저한테는 미리 말해 놓으세요.”
“……대표님-.”
승원이 그의 샤워 가운을 와락 잡았다. 권 대표가 나른한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짧게 물었다.
“왜.”
“대표님 기사까지 나셨는데, 혹시 얼굴 알아보거나 그러진…….”
“한국에서 유명 여배우랑 기사까지 난 인간이 생뚱맞게 발리에 와 있으면 그것도 그거대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
“그 인간 멍청하게 생겨서 뒤돌면 다 까먹을 거 같던데.”
승원이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권 대표가 자리에 앉았다. 입술을 몇 번 매만지던 그가 승원을 올려다봤다. 성의 없는 손짓으로 손가락 네 개를 까딱거렸다.
“무릎.”
“…….”
“빨리 오세요. 맛만 봤더니 아쉬워서 안 되겠으니까.”
“……대표님 아까부터.”
가만히 멈춰 있던 승원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촉하는 손길에 승원은 마지못한 듯이 그의 무릎 위를 타고 올라갔다. 벌어진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가까이 닿은 얼굴을 바라봤다. 코끝이 콕 닿았다.
“저 매니저 형한테 전화해야 돼요.”
“음식 오면 먹으면서 하세요.”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사이를 벌리고 들어온 혀끝이 입 안을 헤엄치듯 돌았다. 키스를 하는 중간중간 거친 호흡이 오가고, 승원이 말을 섞었다.
“흐읍, 대표님-.”
“왜요.”
“또 누가 노크하면 화내실…….”
“내가 화난 거처럼 보였습니까?”
승원의 입술을 가볍게 문 채 그가 웅얼거리듯 물었다. 승원은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권 대표의 손이 승원의 등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뼈가 드러난 맨몸을 쓸어 만지며 그가 목에 입술을 댔다.
“남자 목소리가 들리길래 짜증 나긴 했지.”
“……으, 흐으. 간지러워요.”
그가 승원의 목 주변을 간지럽게 씹었다. 타액이 섞이는 목덜미가 그의 숨으로 살랑였다. 승원이 그의 어깨를 꾹 잡고 힘을 줬다. 자꾸만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시간 없습니다. 음식 올 때까지만 이러고 있다가, 먹고 나갑시다.”
이마에, 눈에, 코에 닿은 입술의 잔류가 찌릿거리며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승원은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은 남자의 가슴을 크게 끌어안았다.
* * *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은 또 다른 새로운 낯섦이었다. 승원은 창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권 대표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무심하게 정면만 보고 있던 낯이 승원의 눈빛을 알아채고 돌아봤다.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습니까?”
승원은 고개를 저으려다 입을 뗐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담요가 필요해요.”
“담요는 왜. 춥습니까.”
“조금.”
권 대표는 곧장 승무원을 불렀다. 담요를 받은 그가 승원의 무릎 위에 덮어 주었다. 둥둥 떠 있는 구름만 바라보고 있는 승원의 귀 끝이 붉었다. 승원의 다리에 담요를 펴 준 그가 주름지지 않게 매만지고 있던 때였다. 승원이 권 대표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은 춥지 않으세요?”
이번에도 역시 목소리가 작았다.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그렇게 춥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덮어요, 그럼.”
승원은 제 무릎에만 덮어져 있던 담요를 권 대표의 다리에까지 끌어왔다. 다행히 너비가 큰 담요는 두 사람의 무릎을 다 덮기에 충분했다. 눈썹을 비죽이며 승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권 대표는 이내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코웃음 비슷한 것이 여리게 지나갔다.
“…….”
“이러려고?”
그의 나직한 물음에 승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요 안쪽에 닿은 권 대표의 손을 승원이 꽉 끌어 잡았다.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단단한 손가락을 매만지는 승원의 뺨을 빤히 바라보던 권 대표가 손을 고쳐 잡았다. 깍지를 끼운 그가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댔다.
“잡을 거면 제대로 잡든가.”
“……네.”
“머리 좀 썼네요.”
권 대표는 웃음기를 다 숨기지 못하고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다.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승원을 살짝 바라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뿌듯하고, 만족스러우면서도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은밀하게 애정행각을 벌이려던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창피했다. 깍지를 낀 손으로도 꾸물꾸물 손을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살갗이 다정하게 손등을 매만지며 더 깊이 손가락을 얽어 왔다.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집에 돌아가는 거보다는…… 대표님이랑 같이 돌아가는 게 좋아요. 함께 비행기도 타 보고.”
“비행기 탈 일은 앞으로도 많을 텐데. 이번엔 시험 삼은 거라고 치고, 다음엔 이거보다,”
말을 잠시 멈춘 그가 담요 속 승원의 손을 강조하듯 꾹 잡았다.
“더 확실한 걸로 준비해 오세요.”
“……예를 들면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승원이 어리숙하게 되물었다. 옆을 살짝 확인한 권 대표가 몸을 잠시 숙였다. 승원의 귓가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기내에서 하는 섹스도 스릴 있을 거 같긴 한데.”
승원은 아무 소리 못 하고 고개만 돌렸다. 반쯤 닫아 놓은 창 너머로도 여전히 흰 구름이 떠다녔다. 하늘 위에서 듣는 그의 낯간지러운 음성은 당장 실행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무심하고 태평했다. 승원은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나중에요…….”
“……나중에?”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르고 승원은 고개만 끄덕였다. 웃음을 터뜨린 권 대표가 잠시 입 주위를 가리고 웃었다.
“싫진 않은가 봅니다.”
“…….”
“질색할 줄 알았는데 새롭네. 그럼 다음에 한번 도전해 보는 걸로 합시다.”
승원이 뒤늦게 말을 고쳐 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느긋하게 기대어 눈을 감은 권 대표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그를 다시 붙잡고 그리 말하려던 게 아니라고 하려던 승원은 나름대로 그를 만족시켰다는 생각에 옷자락을 놓고 똑같이 머리를 기댔다.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비행이었다.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로 들뜨면서도 동시에 안온했다. 승원은 한국 땅에 들어갈 때까지 담요 속에서 잡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