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마지막 잔류
겨울이 완전한 모습을 감추고, 3월로 접어들었다. 드라마 촬영은 무탈하게 진행되었다. 시간은 승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듯이 매끄럽게 흘러갔고, 승원은 시간이 약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그가 없던 때의 제 모습을 찾아갔다. 물론 그 안에서 견디는 체감 속도는 몇만 분의 일처럼 더디고 느렸다.
“승원 씨 연기가 훨씬 안정적이다.”
“그런가요?”
“응. 사람이 엄청 차분해 보여. 좋은 뜻으로. 저번에 쉬고 나와서 그런가?”
“감사합니다.”
윤 작가의 기분 좋은 말을 들으며 승원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이럴 때면 자신이 왜 배우가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헛헛하게 빈 승원의 심정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몰랐다. 촬영장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동료들을 보면서도 어쩐지 한없이 외로웠다.
승원의 내적인 요소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순탄하게 흘러갔다. 어느 날은 연예 뉴스 메인으로 정신도 감독이 모든 영화 스케줄을 접고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는 기사가 떴다. 관련 기사 댓글엔 한국이 또 애먼 천재 감독을 잃었다며 한탄이 이어졌다.
전부 처음으로 돌아갔다. 비단 권차현이라는 남자뿐 아니라, 승원을 지독히 괴롭혔던 악인들에게마저 고통받지 않던 태초의 자리로. 진정 모든 게 제자리였다.
어느 날 스케줄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승원은 불이 다 꺼진 집 안 현관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 지금, 승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고 외로웠다. 죽기보다 싫었던 까마득한 시간을 견뎌 내는 동안 승원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어떤 식으로 보내야 하는지를 잊고 말았다. 비로소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났는데, 원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승원은 혼자 버티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지독한 악연의 끈을 잘라 준 남자가 승원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었다. 권차현이 너무 미웠는데, 그래서 용서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촬영장에 나가 아무렇지 않게 제 본업을 소화하고 집에 들어오면, 승원은 한없이 우울한 밤을 보냈다. 처방받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몇 시간을 버텨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건 약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 본질의 문제였다.
“승원 씨, 촬영 중에 김진헌이라는 분한테 연락이 왔었는데.”
“…김진헌이요?”
“네. 김 실장이라고 하면 잘 알 수도 있다고.”
“……아.”
승원은 곽영찬이 건넨 핸드폰의 발신 번호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개회식 날을 이후로 승원은 김 실장의 번호까지 차단했다. 김 실장에게 악감정이 있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혹시라도 권 대표가 김 실장의 번호를 빌려 승원에게 연락을 할까 무서웠다.
“잘 아는 분이에요?”
“…네.”
“연락 기다리겠다고 하던데. 전화번호 가져갈래요?”
“괜찮아요. …저 이분 연락처 알아요.”
돌아온 주말, 승원은 한참 동안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매무새를 점검했다. 조금이라도 흠이 보이거나 덜렁대는 부분이 없어야 했다. 권 대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 실장의 앞에서 승원은 그 어떤 때보다 괜찮은 척, 멀쩡한 척 보이고 싶었다.
시간에 늦지 않게 일찍 출발한 승원은 약속 장소에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김진헌’이라는 이름을 대자 프라이빗룸으로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매번 김 실장님이라는 호칭을 써서 그런지, 멀쩡한 이름 석 자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이네요.”
비어 있을 줄 알았던 작은 룸엔 김 실장이 이미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란 승원을 보고는 하하, 웃은 김 실장이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음에도 어쩐지 지각을 한 기분이었다.
코트를 벗으며 승원이 미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괜히 기다리시고…….”
“기다리는 일에 익숙한 직업이라, 괜찮습니다.”
오래간만에 보는 김 실장의 얼굴은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승원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동안, 김 실장은 승원의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물은 끓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손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커다란 접시에 한 줌 담긴 수프와 빵이 나왔다. 여전히 손에 물컵을 가득 쥐고 있던 승원이 김 실장 쪽을 바라보았다.
“얼른 드시죠.”
“실장님 먼저.”
“…그럼.”
김 실장이 숟가락을 드는 걸 보고 나서야 승원도 뒤늦게 따라 들었다. 연한 색을 띠고 있는 수프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새 굳은 겉면을 휘휘 젓던 승원이 입을 열었다.
“…저는 실장님 성함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권 대표를 통해서 마주했던 것만 족히 열 번 남짓은 되었을 것 같은데. 매번 그에게만 몰두해 있어서인지, 그의 옆을 꾸준히 지키던 김 실장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다못해 가장 기본적인 이름조차 오늘에서야 알았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던 승원이었다.
“제 이름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요. 승원 씨 같은 분이면 모를까.”
허허 웃는 김 실장을 보던 승원은 고개를 내려 수프를 뒤적거리고만 있었다.
“승원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숟가락을 움직이던 승원의 손이 뚝 멈췄다. 말없이 고개를 드니 김 실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스몰토크 정도의 일상적인 물음이었다. 그런데도 승원은 가볍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잘 지내 본 적이 없어서,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순간 막막했다.
“별 거 없어요. 그냥 촬영 갔다가 돌아와서 쉬고… 그런 반복이에요.”
“안 그래도 제가 매니저님께 연락하니, 그때도 촬영 중이라고 하시더군요. 바쁘게 살고 계시네요.”
김 실장의 말을 듣고 있던 승원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 입술을 깨물었다.
“…저한테도 전화를 몇 번 하신 거죠?”
“아, 네. 바쁘신 거 같아서 많이 해 본 건 아니고요.”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은 승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사실 제가… 실장님 전화번호를 차단해 놓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전화 연결이 안 되었을 거예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걸요.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 실장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놀라지도 않았고, 불쾌한 기색을 비치지도 않았다. 승원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과는 이제 더 연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 저와 연락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김 실장은 전부 다 아는 눈치였다. 구구절절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눈이었다.
“저야 승원 씨를 항상 대표님 덕분에 만나 뵈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으니 개인적으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염치 무릅쓰고 따로 연락을 드린 겁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종업원이 요리를 내놓았다. 고기가 얹어진 멜론과 넉넉히 익은 농어 요리, 마지막으로 각자의 자리에 핏기가 도는 스테이크가 놓였다. 깔끔한 테이블 세팅을 마친 종업원이 떠나고, 음식에 눈을 제대로 두지 못하는 승원을 향해 김 실장이 짧게 손짓했다.
“얼른 드시죠.”
“…네. 잘 먹겠습니다.”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사이, 김 실장이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예전에 대표님과 함께 승원 씨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어요.”
“…제 얘기를요?”
“네. 무거운 주제는 아니고요. 그냥 승원 씨가 찍는 드라마 이야기나, 이런저런 화젯거리 같은 것들. 보통은 제가 뉴스를 보다가 발견해서 대표님께 알려 드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도 연예 관련된 쪽엔 일절 관심이 없던 분인데, 승원 씨에 대한 것만 보면 싫은 티도 안 내고 얌전히 듣고 계시니…… 확실히 남다른 애정을 갖고 계시구나 싶었죠.”
승원은 어느새 칼질도 멈추고 김 실장의 말에 완전히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지난 몇 번은, 대표님이 먼저 승원 씨에 대해 묻거나 이야기하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꾸준히 꺼내던 승원 씨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비즈니스 일정을 제외하고 대표님이 시간을 내던 것도 승원 씨가 유일했는데. …그런 것들도 뚝 끊기고.”
김 실장도 눈치껏 알아차린 듯했다. 김 실장이 꺼내는 모든 문장들은 과거형이었다. 그래서 승원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던 그의 과거를 반쯤 더듬으며, 생각보다 잔잔한 기분을 느꼈다.
“저는 승원 씨가 너무 좋았거든요. 예전부터 대표님을 알았더라면, 승원 씨를 만난 이후의 대표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많이 달랐나요?”
“아마도요.”
인자하게 답한 김 실장이 빈 컵에 물을 따랐다. 찰랑대는 물잔을 가볍게 돌리던 그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승원 씨는 대표님 어릴 때 이야기에 대해 들은 게 있나요? 대표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실 분은 아닐 것 같긴 하지만.”
“네. …저는 전혀 몰라요.”
승원이 상체를 일으키며 홀린 듯이 대답했다.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는 접시 위에 놓인 채 관심 밖이 된 지 오래였다.
“제가 대표님을 처음 뵈었던 게 대표님이 고등학생 때였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이미 지금 같은 키에 얼굴도 훤칠했고… 어딜 가든 관심을 받았을 그런 잘난 학생이었죠. 또래 친구들과 신나게 어울려 놀 나이기도 한데, 그때도 대표님은 지금이랑 비슷했어요. 말수도 없으셨고, 혼자 있는 시간을 훨씬 즐겼던 것 같고. 아마 학교와 집이나 반복하면서 짜여진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게 다였을 겁니다.”
“…….”
“그때 대표님이 사시던 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대저택이었어요. 밖으로 나가면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잔디밭도 있었고, 대문 밖을 나가려면 차를 타고 움직여야 할 정도였으니까. 가족 모두가 거실에서 만나려면 미리 약속이라도 남겨야 했을 겁니다.”
김 실장은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건지, 이야기하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승원은 김 실장의 말을 들으며 권 대표의 어린 얼굴을 머릿속에 그렸다.
쉽게 상상이 가는 그림은 아니었지만, 승원은 영화에서나 보았던 그런 거대한 집 안에서 교복을 입은 채 돌아다니는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김 실장의 말처럼 그의 옆에 누군가가 있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승원의 상상 속에서도 권 대표는 다른 이와의 어울림 없이 혼자였다.
“당시의 저는 대표님 아버지인 부회장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래서 가끔이나마 마주쳤던 대표님은 매번 얼굴에 성한 곳이 없었어요. 멍이 들어 있거나, 반창고 같은 게 붙어 있거나. …얼굴이 멀쩡한 날이면 다른 곳이 성치 못하고. 표정도 항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님이 말없이 계실 때 보이는 그 무표정한 얼굴 하나. 승원 씨도 잘 아실 거 같은데.”
승원은 익숙한 얼굴을 상상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승원의 반응에 잠시 웃음을 보이며 김 실장이 물을 마셨다. 그 사이에 승원이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왜… 그렇게 항상 다치셨던 거예요?”
김 실장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가정의 영향이죠. 제가 완전한 속내까지 낱낱이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켜본 바로 말씀을 드리자면. …대표님이 갖고 계신 상처는 거의 부회장님의 체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래서 대표님은 아마 자기 아버지를 좋아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
“가끔가다 있는 가족 식사 자리는 살얼음판이라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어요. 가족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는 이가 없고,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서 각자 음식만 먹는데. …가족 구성원도 아닌 저마저 식사를 마치고 음식이 다 얹혀서 고생했을 정도이니. 그런 일을 매번 겪었을 대표님은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고.”
어느새 승원과 김 실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은 안중에도 없어진 상태였다. 승원은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김 실장의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었다. 권 대표가 드물게 질색하며 꺼내던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왜 항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는지, 승원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럼 어머니랑은. 대표님 어머니는 대표님을 엄청 아끼신다고 전 생각했는데.”
승원의 말에 김 실장이 눈썹을 내리며 미소지었다.
“제가 감히 이런 말을 입에 담아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두 분 다 대표님을 아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
“부회장님도, 여사님도 한참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식들에겐 관심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두 분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고. 매스컴에야 좋은 모습만 비쳐야 하니까 항상 완벽하고 화목한 집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으니.”
“…그래도 어머니는 대표님 결혼시키겠다고 그렇게 온 관심을 다 쏟으시던 분이었는데…….”
“대표님에게 진정 관심이 있으셨으면, 그런 식으로 강제적인 약혼 또한 맺지 않았겠죠. 유독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시고, 명예에 대한 집착도 심하신 분이라. 명성으로 따지면 제일가는 막내아들이 좋은 집안 다 거절하고 혼자를 고집하는 게, 아마 여사님 본인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승원 씨도 알겠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당사자에게 갑작스러운 선이나 상견례 자리가 발생하진 않을 테니까요.”
김 실장이 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표님도 참 꾸준하고 한결같으신 분이라.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의 대표님 역시 지금이랑 똑같았어요.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으셨고… 처음엔 자꾸 그런 자리를 강요하는 여사님에 대한 단순한 반발심이라고 생각했는데. 해가 거듭되어도 혼자 있는 걸 고집하는 걸 보고 알았죠. 대표님은 정말 혼자가 편하신 거구나. 정말 평생을 홀로 지내실 생각이겠구나.”
“…….”
“승원 씨가 처음이었습니다. 대표님이 이렇게 사적으로 누군가를 오래 옆에 두고 집착하는 게.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저조차도 놀라웠는데. 승원 씨를 몇 번 더 보고, 그런 승원 씨와 지내는 대표님을 보면서 알았죠. 대표님이 승원 씨를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대우하고, 느끼고 있다는 걸.”
말을 마친 김 실장이 다시 칼질을 시작했다. 여유롭게 움직이는 나이프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자라 온 환경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그래서 전 조금 이기적이고 무심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대표님의 성격이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알게 모르게 다정한 면모도 충분히 지니고 있지만, 그걸 타인에게 보여 줄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일종의 자기방어였을 겁니다.”
우울증 약을 달고 살았다던 과거 그의 말이 어렴풋이 지나갔다. 가족 이야기만 꺼내도 금세 차갑게 굳어 가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 실장의 말이 전부 맞는 것 같았다. 권 대표가 승원에게 진정으로 매몰차게 굴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미련을 남길 이유도 없을 터였다.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은 승원 씨 하나뿐일 것 같아서요. 처음엔 승원 씨 같은 성격이 대표님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었는데.”
“…….”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 승원 씨가 대표님과 너무 잘 지내 주셔서. …사실 대표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물론 대표님이 승원 씨를 달리 신경 쓰고 있는 것 역시 맞다고 생각하고요.”
승원은 그간 권 대표와 있었던 일들을 반추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승원이 손을 갉작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 김 실장이 문득 놀라웠다.
“실장님은 이상하지 않으세요? 저도 대표님도… 둘 다 남자인데…….”
머뭇거리는 승원의 표정을 보며 김 실장이 어렴풋이 미소지었다.
“대표님이 오래도록 혼자 지내는 걸 봐 와서 그런지… 저는 그냥 대표님과 잘 지내 주시는 승원 씨가 마냥 반갑기만 하던데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권 대표가 남들과 벽을 쌓고 지냈는지, 김 실장의 마냥 반가웠다는 그 한마디로 대번에 와닿았다. 벽을 허무는 이가 누구든 상관없을 정도로, 김 실장은 권 대표가 외로운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던 것 같았다.
“…순전한 제 욕심이지만, 사실 더 오래 함께 계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
“지금이니까 이런 말을 꺼낼 수 있는 거겠지만요.”
평소대로 돌아오려던 승원의 얼굴이 다시 그늘진 낯빛을 띠었다. 승원은 물잔을 끌어와 두 손으로 꼭 그러쥐었다. 김 실장은 그런 승원을 묵묵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더 보고 싶진 않으세요?”
권 대표의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다른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물음에 잠시 눈을 들었던 승원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아른거리는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가 이내 희미해졌다.
“저도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보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둘이 창을 들고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승원의 대답을 듣고 김 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김 실장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 우울한 낯빛의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승원은 마음이 복잡해져 맞은편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맛없어 보이는 음식만 멀거니 내려다보며 울렁이려던 속을 다듬었다.
“……사실 이 얘기를 승원 씨에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김 실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뜸을 들이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뗐다.
“대표님이 지금 병원에 계시거든요.”
“……예?”
크게 놀란 승원의 목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김 실장 역시 퍽 난처한 얼굴이었다.
“부쩍 식사도 거르시고 수척해 보인다고 느끼긴 했는데. 엊그제 밤에 갑자기 쓰러지시는 바람에 급하게 병동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건 절대 아니고요. 수액 맞으면서 안정 취하고 계십니다. 겉보기엔 완전 멀쩡한 상태이시고요.”
김 실장이 승원의 반응을 보더니 재빨리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승원은 이미 초점 잃은 얼굴로 김 실장의 말을 흘려듣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손이 떨리는 것 같아 불끈 주먹을 쥐었다.
“말씀 안 드리려 했는데. …아예 모르시게 두려니 그것도 마음이 편하지 못해서.”
어쩐지 곤란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지, 김 실장이 볼 한쪽을 긁적였다. 그런 김 실장을 바라보던 승원이 더듬더듬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네. 오늘까지만 계시고 내일 퇴원하실 겁니다.”
“…….”
“병동 주소… 알려드릴까요?”
김 실장의 질문에 승원의 눈동자가 떨렸다. 지금까지 힘겹게 참아왔던 인내가 잠시나마 덧없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테이블 끝을 갉작이던 승원이 끝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이제 갈 일이 없어서. 죄송해요.”
승원의 거절을 보며 이내 인자하게 웃은 김 실장이 분위기를 달래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부담을 드린 건 아닌가 싶네요.”
“……아니에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남자가 병실에 누워 있다는 말이 그리 현실감 있게 다가오진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몸을 방치했을까. 비를 맞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슬픈 눈이 동시에 떠올라 승원은 눈을 꾹 감았다.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더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전혀요. 괜찮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고요한 적막 속에 드디어 제대로 된 식사를 시작했다. 배가 부른 상태도 아닌데, 눈앞에 보이는 음식들이 전부 냄새 없는 모형 같기만 했다. 침도 고이지 않고, 입에 넣어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승원의 쪽으로 접시들을 조금 더 가까이 밀어 주던 김 실장이 대뜸 아, 하며 말을 꺼냈다.
“진작 말씀 못 전했는데, 이제 한참 전이긴 하지만… 전에 승원 씨도 입원했었잖아요. 고생 너무 많았네요. 이제 완전히 괜찮아지신 거죠?”
고무 같은 음식들을 무의미하게 씹어 넘기던 승원이 김 실장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네, 완전 멀쩡해요. 그러고 보니까 저 퇴원했을 때 꽃까지 보내 주셨는데……. 그때 감사 인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저 정말 너무 잘 받았습니다. 꽃들이 다 예뻐서 하나하나 다듬어서 물병에 꽂아 뒀어요.”
죄송스러운 마음에 승원은 말이 빨라졌다. 그런데 그런 승원의 말을 듣는 김 실장의 표정이 갸우뚱했다.
“…제가 꽃 선물을 드렸다고요?”
“네? …네. 그때 분명 대표님이 김 실장님이 퇴원 선물로 주시는 거라고…….”
김 실장도, 승원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먼저 웃어 버린 쪽은 김 실장이었다. 입술을 반쯤 벌리고 허허, 웃던 김 실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김 실장을 지켜보던 승원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굳어 갔다.
입꼬리를 올린 김 실장이 승원에게 집요하게 물었다.
“대표님이 그러셨나요? 제가 보내 드린 거라고?”
“…….”
“뭔가 이렇게 말하는 제 입장도 되게 우스워지긴 합니다만, 꽃집에 들른 적도 없는데요, 저는.”
김 실장이 끝까지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승원 씨 전혀 눈치 못 채셨던 건가요?”
“…….”
“제가 아니라, 대표님이 드린 선물이었던 것 같은데요.”
승원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포크로 찔러 놓은 스테이크를 차마 들지 못하고 승원은 홀짝거리며 물을 마셨다. 생각지도 못했었다. 권 대표는 애초에 그런 선물을 주는 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김 실장의 선물이라는 그의 말이 굉장히 설득력 있었기에 승원은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쭉 흘렀는데, 그걸 이제야 알았다.
마음 한구석이 자글거리며 작게 끓어올랐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권 대표가 준 선물이라고 말했더라면 그때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만 배는 더 기뻤을 텐데.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싶다가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를 잊으려고 노력해 본 적은 있었을까. 승원은 수분을 잃어 퍽퍽해진 스테이크를 포크로 툭툭 건들면서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며칠이 흘렀다. 깊은 밤 촬영을 마치고 승원은 밴에 올라탔다. 별 하나 볼 수 없는 검은 밤하늘은 반짝이는 비행기도 없이 바짝 메말라 있을 뿐이었다. 손난로 없이는 버티기도 힘들었던 밤은 이제 입김이 거의 희미해질 정도로 추위가 많이 달아나 있었다. 곽영찬은 이제 정말 겨울도 다 갔다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른한 몸을 시트에 기댄 채 승원은 새까만 하늘을 유난히 오래도록 지켜봤다. 보기 드문 별이 두어 개 마른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김 실장과의 만남 이후 승원은 어느 순간 인정하고 말았다. 자신은 권차현이라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었다. 머리를 아무리 비우고 그 자리에 다른 걸 집어넣으려 해도 매번 실패하기 일쑤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만 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지도 몰랐다.
승원은 아파트 정문 앞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오늘은 조금 걷고 싶었다. 이젠 날씨도 그리 매섭지 않았다. 겨울의 밤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 듯했다. 차에서 내린 승원은 아스팔트 위를 하얗게 메우고 있는 가로등을 응시하다 천천히 걸음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청량하면서도 상쾌한 밤바람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아파트들을 지나고, 무성하게 그림자 진 검은 나무들을 스쳐 승원은 저의 아파트 앞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뚝, 걸음을 멈췄다.
건물에 기대어 있는 새까만 그림자가 있었다. 실루엣만으로도 낯이 익는 인영은 꿈이 아니었다. 헛것 따위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봐도 알 수 있었다. 머리로만 몰래몰래 그리던 남자가 승원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승원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검은 영역 안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로등의 둥근 영역에 닿지 못한 구역은 온통 까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에게 승원이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입 안에서 말을 고르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실행에 옮겼다. 승원이 작게 숨을 쉬었다. 어깨를 미세하게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
권 대표가 눈앞에 있었다. 중력에 당겨지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늘어져 있었다. 잠시 눈을 커다랗게 키운 남자가 승원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마주했는데도 승원은 이상하리만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음이 들썩이지도, 커다랗게 요동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던 것을 마주하듯 평온하고 고요했다.
건물에 등을 기대고 있던 권 대표가 몸을 완전히 떼어 냈다. 그의 앞머리가 승원의 머리칼처럼 옆으로 휘날렸다. 남자는 승원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바닥 어딘가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희미하게 지껄이는 그에게서 아릿한 술 냄새가 났다. 주머니에 불량스레 꽂아 놓고 있던 손을 꺼낸 그가 승원을 바라보지도 않고 걸음을 뗐다. 찬 공기와 함께 풍겨오는 알코올 내음이 코를 싸하게 간질였다. 승원은 자신도 모르게 제 옆을 스치고 지나려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꽁꽁 언 얼음도 이거보다 차가울 순 없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붙잡은 뒤통수에 대고 승원이 물었다. 잠시 정적만 피어오르던 사이로 그가 대답했다.
“기억 안 납니다.”
“술 마셨어요?”
“…….”
“대표님.”
화도 나지 않았고, 난데없이 맞닥뜨리게 된 존재가 갑작스럽지도 않았다. 성마르게 날 서 있던 모든 감정들은 바닥 위로 잔류처럼 가라앉은 후였다. 이토록 몸이 차가운 걸 보면, 여기서 승원을 기다리던 시간도 그리 짧지 않았을 것 같았다. 승원은 직감적으로 오늘 그의 방문이 처음이 아님을 느꼈다.
적잖이 술에 취해 있는 남자의 앞에서까지 오기를 피우고 화를 끌어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제 손에 붙잡힌 하얗고 건조한 손이 초라해 보였다.
“대표님.”
승원이 그를 불렀다. 대답 없는 등에 대고 물었다.
“추워요. 들어가요.”
집안의 공기가 텁텁했다. 발을 들이자마자 어수선한 현관을 보며 승원은 말없이 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들을 주웠다. 하얗게 불이 들어온 센서 등 아래로 권 대표는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날 왜 데려왔습니까.”
팔이 꺾인 채 아무 방향으로 널브러져 있던 코트를 집어 들던 승원이 뒤를 돌았다. 크게 가슴을 울렁인 권 대표가 뒤늦게 승원을 응시했다. 승원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런 날도 없으면.”
“…….”
“대표님 계속 기다릴 거잖아요.”
빨리 들어오세요. 승원은 작게 덧붙이고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자 엉망인 거실 전경이 들어왔다. 이런 꼴이었음에도 그리 부끄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금 누구보다 민망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승원이 하나둘 물건들을 치우고 있는 사이, 현관 쪽에서 신발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안쪽으로 들어서는 흐릿한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승원은 애써 모른 척하고 하던 걸 마저 했다.
“…….”
어느샌가 몸이 덥석 붙잡혔다. 등 뒤로 차갑고도 뜨거운 이상한 체온이 닿았다. 승원을 뒤에서 힘껏 끌어안은 권 대표가 고개를 묻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은 팔에 그가 힘을 주었다. 옅은 술 냄새가 익히 아는 그의 체취와 적당히 어우러져 있었다. 승원은 꼿꼿하게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승원 씨…….”
“…….”
“…내가 미안합니다.”
어렴풋한 음성이 목에 닿아 피부로 전해졌다. 궤궤하게 젖어 있는 그의 말을 들으며 승원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뭐가 미안한데요.”
나무라는 뜻은 아니었다. 문장 그대로 뱉은 말이었다.
“상견례도 다 망치고 나왔다면서요.”
“…알고 있었습니까.”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되묻는 권 대표의 숨이 승원의 목선 위로 위태롭게 떨어졌다. 승원이 입 안쪽을 씹었다.
“왜 그러셨어요. 바보같이.”
“…….”
“대표님 혼자가 싫다고 하셨잖아요. 전 대표님을 다시 받아 줄 마음이 없는데, 그런 자리까지 뿌리치고 나오면 어떡해요.”
이젠 그의 첫인상이 가물가물했다. 어느 모로 봐도 완벽하다고만 느꼈던 남자는 사실 텅 빈 시체체였다. 그는 언제나 판단도 부족하고, 대책도 부족했다. 외로움을 타면서도 사람에게 벽을 쳤고, 승원을 좋아하면서도 그를 질리도록 밀어냈다. 모든 걸 깨닫고 다시 찾아온 지금도, 대책 없이 들이미는 고집불통 그 자체였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
“윤승원 씨가 아닌 사람은 싫어서.”
그가 가물가물하게 목을 울렸다. 술기운을 약간 빌려 얻은 용기가 껍질을 전부 벗긴 진심을 드러냈다. 승원은 제 몸을 가득 움켜쥔 권 대표의 손을 떼어 냈다. 등을 돌려 마주하기 무섭게 권 대표가 붙잡듯 다그쳤다.
“윤승원 씨, 나는…….”
“…….”
“내 말 좀… 들어줘요.”
행동 하나하나에 승원의 허락이 필요했다. 모든 게 조심스러운 남자는 눈앞의 승원이 툭 하고 깨져 버릴까 무서웠다. 그러나 다행히, 승원은 남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찬찬히 숨을 고르고 기다리듯이 그를 올려다봤다. 말을 이어가라는 듯이, 무언의 허락이 떨어졌다.
“난… 어렸을 때부터 내가 사랑받고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한테는 매일을 맞았고, 부모님의 숱한 외도를 목격하면서… 내가 얻고 배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금 진정되어 나직한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정을 붙이는 것도 싫었고, 사랑 같은 게 유효하다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하지만 그랬기에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습니다.”
“…….”
“내가 처음 윤승원 씨에게 손을 뻗은 이유는 동정과 비슷한 감정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좋아하는 감정으로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래된 것만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말을 이어 나가는 그의 음절이 점차 또렷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힘겹게, 천천히 내뱉던 그의 문장들이 점점 확신과 함께 완전하게 굳어 갔다.
“…나는 너무 불안정한 사람이라.”
“…….”
“윤승원 씨를 보며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낯설고 두려웠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감정을 애써 키워나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윤승원 씨를 볼수록 마음은 더 커져 가는데, 그걸 잘라낼 막연한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
“난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윤승원 씨는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윤승원 씨가 그렇게 나를 붙잡으며 건네던 용기도, 확신도 나는 없어서. …그런 확신도 주지 못하고 있는 내가 윤승원 씨를 더 붙들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냥 윤승원 씨를 보내 주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점차 격양되던 목소리는 이내 다시 고꾸라지듯 희미해졌다. 승원은 입을 다문 채 엉망으로 지껄이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애매하게 끝맺은 말끝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힘겹게 다시 고개를 든 그가 승원을 들여다봤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듯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서로에게 닿았다.
“이렇게 엉망이 될 줄 몰랐습니다.”
“…….”
“처음이라, 최선을 찾지 못한 내 잘못입니다.”
“…….”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윤승원 씨. 한숨 같은 음성이 낮게 새어 나왔다. 꼬리가 길게 늘어진 사과에는 미련이 잔뜩 걸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용서를 받기 위한 사과가 아니었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은 그가 건넨 최소한의 예의 같은 것이었다.
그의 사과를 끝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안하게 숨을 쉬는 서로의 호흡이 공기 중에 뒤엉켰다. 승원은 자꾸만 고이는 침을 삼켰다. 누구보다 간절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를 눈에 담았다. 뱃속이 뜨겁게 끓어올라 심장이 지끈거렸다.
“그럼….”
“…….”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승원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바라본 볼이 얄쌍하게 패여 거칠었다. 개회식 때보다도 훨씬 초췌했다. 회한이 곳곳에 묻어 있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승원은 다음으로 그의 손을 낚아챘다. 기다란 손가락이 군살 없이 얇게 도드라져 있었다. 핏줄이 선연한 손등에 굵은 바늘자국이 군데군데 달려 있었다. 입술을 짓씹던 승원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잔뜩 일그러진 눈가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왜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
“전 대표님을 잊어보려고 노력했는데. 대표님은 왜 노력조차 안 하고…….”
승원에게로 뻗은 손이 눈가의 물기를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길게 닿은 시선이 지그시 얽혔다. 그가 입술을 작게 벌려 숨을 쉬었다. 승원을 바라보던 시선을 그대로 고정한 채 느릿하게 말했다.
“윤승원 씨를 그렇게 보내고,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
“애초에 잊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도 나였고, 그랬기에 지금 다시 찾아와 용서를 비는 것 자체가 전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도, 염치를 다 버리고 욕심을 내서라도 난… 윤승원 씨를 다시 찾아오고 싶어서. 그게 다 변명처럼 들릴 걸 알면서도 무작정 붙잡고 싶었고…….”
그가 고개를 숙였다. 힘없이 지껄였다.
“진짜 최악이지 않습니까, 나….”
그가 다시 힘겹게 고개를 들었을 때, 승원은 볼 한쪽을 아프게 물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승원을 바라보며 조금 괴롭게 웃었다. 눈 주위의 근육이 작게 떨렸다.
“병신 같은 소리일 지도 모르겠지만.”
“…….”
“…사랑하는 거 같습니다. 윤승원 씨를.”
참고 참았던 울음이 툭, 샘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승원은 뺨 밑으로 하릴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눈 한쪽을 찌푸리던 그가 눈을 깜빡였다. 승원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 그대로 거칠게 숨을 쉬었다. 범람하던 호흡을 멈추려 애쓰고 그가 입을 열었다.
“윤승원 씨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윤승원 씨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깨를 들썩이던 승원이 놀란 듯이 눈을 떴다. 우는 건 승원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자존심과 오기를 갖다 던진 남자는 온전한 저의 본래 형태 그대로 승원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억눌렀던 결핍을 전부 벗겨내 승원에게 받쳤다. 그가 승원에게 애원했다.
“다시 찾아와 이런 말들을 쏟아 내는 게 염치없다는 거 압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우스운지도 전부… 윤승원 씨가 나를 보고 느끼고 있을 그 모든 원망들 나한테 전부 다 쏟아 내도 좋습니다. 그게 당장 지금이 아니라 앞으로가 되어도 좋으니까. …윤승원 씨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계속 기다릴 테니까…….”
“…….”
“…나 좀 사랑해 줘요.”
그가 위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덜덜 떨리는 그의 고백이 머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어렵게 귓바퀴를 타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킨 승원이 얼굴에 덮여 있던 그의 손을 떼어 냈다. 숨을 고르다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무작정 파고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닿는 안쪽까지 깊이 들어가 구부정한 등 뒤로 팔을 둘러 엮었다. 그는 여전히 승원을 안지 못하고 흐느꼈다.
“난 이제… 윤승원 씨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
“미안해요…….”
기약 없는 하루하루를 하릴없이 지새우던 그 허무맹랑한 시간 동안 남자가 느꼈을 비참함과 괴로움이 피부로, 목소리로, 체온으로, 울음으로 느껴졌다. 모든 감정을 앞에 두고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권차현은 비로소 사랑을 터득했다. 승원을 끌어안은 커다란 손이 승원의 옷자락을 짓이기듯 움켜잡았다.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요.”
흐느낌을 목 뒤로 삼키고 승원은 숨을 죽였다. 눈물에 젖어 흐르는 그의 진심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느꼈다. 승원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대로, 승원은 천성이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었다. 눈덩이 같던 마음은 눈 녹듯 녹아 이미 그를 용서해 버린 채였다.
가깝게 닿은 얼굴 사이로 서로의 숨이 엉켰다. 권 대표가 손을 들어 승원의 눈가를 느릿하게 닦아 냈다. 불안하게 떨리던 숨결이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두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승원을 정성스레 들여다보던 그가 뒤늦게 입술을 열었다.
“나 같은 걸…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의심이 아닌 부탁이었다. 승원이 눈을 찡그렸다. 더 나오려던 눈물을 참아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견뎠잖아요.”
“…….”
“어차피 저도… 대표님 아니면 안 돼요…….”
승원의 대답에 권 대표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잠시 숨을 크게 고르던 그가 다시 승원을 향해 지그시 눈을 마주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얼굴을 이제야 걱정 없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키스해 줘요.”
제 머릿결을 어루만지는 남자에게, 승원이 얌전히 속삭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얼굴이 점차 다가왔다. 얽히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권 대표의 손이 승원의 까만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뺨을 건드렸다. 울렁이는 목울대를 확인하고 승원이 눈을 감았다. 비스듬하게 콧대가 짓눌러지는 동시에 뜨거운 살갗이 입술 위로 번지듯 내려앉았다.
힘 있게 끌어안은 허리가 위로 힘껏 당겨졌다. 승원이 코트 안쪽으로 손을 뻗어 권 대표의 셔츠 자락을 잡았다. 뭉개진 입술이 벌어지고, 입 안 깊숙이 혀가 들어왔다. 서로의 혀끝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뒤섞이는 타액이 끓듯이 뜨거웠다.
오랜 시간 나눈 키스에서는 아릿한 짠맛이 났다.
***
옷장 가장 아래 칸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권 대표의 옷들을 챙겨 승원이 거실로 나왔다. 겉옷을 벗은 권 대표가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손을 씻고 나온 건지, 그의 손에 미세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승원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그에게 옷을 건넸다.
“…대표님은 저번에 쓰셨던 욕실 쓰시면 돼요. 저는 안쪽에 있는 거 쓸 테니까.”
“…….”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손짓을 써 가며 이야기하던 승원의 발이 앞으로 밀렸다. 권 대표가 예고도 없이 승원을 끌어안았다. 한 손에 감긴 승원의 몸이 권 대표의 가슴에 바짝 밀착되었다. 빠르게 느껴지는 그의 심장 소리가 승원의 귓가를 울렸다.
“…더 필요한 건 없고.”
“……대표님.”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깊게 잠긴 목소리가 승원의 어깨 위로 가라앉았다.
“옷은. 그때 그 옷입니까.”
“…네.”
더 묻지 않은 권 대표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묵직한 한숨 같은 것이 지나가고, 승원을 안은 채로 그가 중얼거렸다.
“…씻기가 싫어지는 건 또 처음입니다.”
귓바퀴에 닿는 선명한 심장 소리가 권 대표의 것인지, 저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권 대표에게 완전히 밀착한 채 승원도 몸에 힘을 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피부에 온전히 닿은 그의 체온이 뜨거웠다.
“윤승원 씨.”
“…네.”
“보고 싶었습니다. …엄청 많이.”
짧게 던진 말에 많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 승원은 그의 품에 코를 박고 대답했다.
“…저도요.”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권 대표의 말처럼 승원 역시 그냥 이대로 그에게 안겨 잠이 들고 싶었다. 그러나 슬금슬금 졸음이 찾아올 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그의 체향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지금은 두 눈이 또렷하기만 했다. 승원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립던 그의 온기를 느꼈다.
막상 씻고 나오니 뜨거운 물 냄새도, 향긋한 바디 워시 냄새도 괜스레 이상야릇하게 느껴졌다. 설레발 같은 긴장감이 불쑥 찾아들던 와중에 이미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있는 권 대표를 보자 전엔 느끼지 못했던 어색함이 깃들었다.
모든 걸 인정한 이후에 다시 마주 보려니, 이제껏 쌓아 왔던 감정과 유대조차 전부 낯설고 어설프게 느껴졌다. 과거 어느 날 엉엉 울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승원은 덜컥 얼굴이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권 대표도 그렇게 생각할까. 자신처럼 이 상황이 간지럽고 낯설게 느껴질까. 문턱에 기대 그에게 언제 말을 건네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불쑥 그가 승원을 불렀다.
“뭐 하는 겁니까, 거기서.”
“……아, 그게.”
얼떨결에 마주친 시선에 승원이 말을 어버버 더듬었다. 발이 제자리를 배회하다 천천히 거실로 나갔다. 그새 머리까지 다 말린 건지, 권 대표의 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밑으로 거칠게 내려와 있었다. 전에도 보았던 스포티한 잠옷 차림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둘 사이에 눈빛이 오고 갔다. 고요한 주변으로 정적이 돌았다.
“윤승…….”
“대표님-.”
동시에 뒤섞인 오디오에 승원이 얼른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옆구리에 착 붙인 두 팔도 함께였다. 권 대표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먼저 말해요.”
부드러운 말투에 승원이 조심스레 하려던 말을 꺼냈다.
“다른 건 아니고… 대표님 편하신 대로 제 침대를 쓰시던가… 혹시 소파가 더 편하신 거면, 제가 이불을 바로 갖다 드리겠다고 하려고 했어요. …대표님께서 하시려던 말은 뭐였어요?”
정말 별거 아닌 말이었기에 그의 말을 끊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승원은 빠르게 할 말을 끝내고 다시 그의 용건을 물었다. 어차피 잠자리를 고르는 일은 권 대표의 말을 들은 뒤에 정해도 되었다.
“…나는 윤승원 씨랑 같이 자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승원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머지않아 아, 하고 승원이 옅은 탄성을 내뱉었다. 잠시 딴 세상에 갔다 온 것처럼 기분이 붕 뜬 채 오락가락했다.
승원은 바보처럼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런 승원을 지켜보던 권 대표가 답답했는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훅 커진 키로 그가 승원을 내려다보았다.
“싫다면 나는 여기 있겠습니다.”
“…….”
“윤승원 씨 편한 대로 하세요.”
“……아니요.”
얼떨결에 거절처럼 뱉은 말 뒤로 승원이 다시 덧붙였다.
“같이 자요…. 저도 같이 자고 싶어요.”
입 밖으로 뱉고 있음에도 목소리가 다시 목구멍 안쪽으로 기어들어 갔다. 얄팍하고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승원을 바라보며 권 대표가 희미한 미소를 비쳤다.
그를 침대로 데려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승원 역시 누군가를 깊이 만나고, 교감을 나누는 관계 같은 걸 제대로 만들어 보지 않았으므로 침실 안으로 타인을 데려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승원이 먼저 오른 침대 위로 권 대표가 함께 누웠다. 혼자 쓰면 텅텅 남던 침대가, 오늘은 그의 존재로 꽉 채워졌다. 섹스나 알코올 따위를 빌리지 않고 오로지 맨정신으로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살짝 기댄 권 대표가 고개만 살짝 돌려 승원과 눈을 맞췄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있던 승원이 권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승원을 한참 들여다보던 권 대표가 여린 눈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피부로 느끼고 있는데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윤승원 씨.”
부드러운 속삭임에 뺨을 붉히던 승원이 다시 눈을 들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던가, 궁금한 건 없습니까.”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가 숨을 천천히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로 가까이 붙었다. 맞붙은 몸의 윤곽 사이로 뜨거운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스치듯 떠오른 물음에 승원이 머뭇거리며 권 대표를 힐끔거렸다. 내려다보던 시선으로 승원에게 집중하고 있던 권 대표는 금방 낌새를 알아채곤 ‘말해요.’라고 물었다.
“…자꾸 이런 질문을 하는 제가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는데.”
“…….”
“대표님, 결혼이요. 저는 아직도 대표님의 결혼이 걱정돼서…. 이미 다 정리를 하셨다는 말을 진작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고. …그래서, 또 언젠가 그런 문제가 닥칠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 문제에 대한 거라면 앞으로는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승원이 눈을 들었다. 기대고 있던 몸을 아래로 낮춘 권 대표가 옆으로 누워 머리를 기댔다. 반쯤 거꾸로 보이던 그가 시야에 반듯하게 들어왔다. 승원과 가까이 마주 본 채 그가 입을 뗐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낮게 목을 울리며 그가 승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애초에 난 지금까지 내 약혼이나 결혼 같은 것들을 제대로 거부하고 막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라 은연중에 단정 짓고 있었던 거겠지. …나는 이제껏 누군가를 만나면서 성가시다는 감정밖에 느끼지 못해서, 결혼과 만남에 대해 그렇게 고집을 피워 왔던 거고. 설령 내 고집이 막혀 내가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한들, 어차피 사랑은 없는 정략결혼이 될 테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더듬듯이 중얼거리는 권 대표의 목소리가 낮고 뜨거웠다. 승원은 천천히 움직이는 가는 입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권 대표가 승원의 얼굴 가까이 눈을 맞췄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대충 살아왔는데.”
“…….”
“어쩌면 윤승원 씨를 좋아한다고 깨닫기도 전부터, 나는 윤승원 씨 생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대응해 왔던 방식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느리게 뻗은 손이 승원의 뺨을 쓸어 만졌다. 부들부들한 살갗이 커다란 권 대표의 손안에 부드럽게 닿았다.
상냥한 손짓과는 다르게, 그는 반쯤 굳은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승원을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진작에 깨닫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윤승원 씨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내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겁니다.”
권 대표는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승원을 끌어당겼다. 승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불 안에 응고되어 있던 더운 열기가 몸을 더욱 다정하게 감쌌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쓰다듬는다는 느낌보다는, 미련이 담긴 더듬거림에 가까웠다.
“다시는 그런 일로 걱정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
“내가 지금 윤승원 씨를 안고 할 수 있는 말은 사과와 반성밖에 없습니다.”
그에게서 나는 향긋한 바디 워시 냄새가 승원의 것과 같았다. 밀착된 두 몸이 한 몸처럼 서로에게 녹아들었다. 승원은 팔을 뻗어 권 대표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그런 승원을 잠시 내버려 두다가, 그는 승원의 뒤통수를 찬찬히 쓸었다.
승원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뱉어 내는 숨이 서로의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난 지금도 윤승원 씨를 붙잡은 내 방식이 맞는 건지 계속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내 방식이 서투르다는 걸 알고… 그 정도로 나는 윤승원 씨가 너무 간절하다는 뜻이고.”
“…….”
승원은 제 볼을 살짝 꼬집어 보고 싶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이고 지독히도 이상적이었다.
“그러니까 혹여 내가 실수한 게 있거나, 윤승원 씨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지적하고 거절하세요.”
“…….”
“내 성질머리 고칠 수 있는 건 지금도, 앞으로도 윤승원 씨 하나뿐일 것 같으니까.”
목소리도, 말투도, 가까이 당도한 얼굴도 전부 그가 맞았다. 그래서 자꾸만 이질감이 느껴졌다. 가차 없이 지적하고 거절해도 좋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 하나만 간절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가 자신을 위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승원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머리칼을 만지는 권 대표의 손끝을 느끼며, 승원이 대답했다.
“당장은 없어요.”
바보처럼 중얼거리는 승원을 빤히 바라보다 그가 피식 웃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자고 일어난 내일 갑자기 내가 꼴도 보기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
“저도 대표님이 내일 자고 일어나서 오늘 하신 결정에 대해 후회를 하시면 어떡하나 걱정돼요.”
과거의 몇몇 기억은 여전히 승원에게 쓰라린 상처였다. 결실을 위한 고난이었다고 생각하면 쉽게 잊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당시의 승원은 너무 아프고 괴로웠기에, 그러한 감정들을 쉬이 지우는 것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장 닥친 내일도 또 과거와 같은 상처를 받을까 봐 무서웠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해서, 당장 이렇게 다정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도, 알 수 없는 내일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떠오른 불안은 여전히 작게 남은 불씨처럼 조그마한 크기로 타올랐다.
“나는 후회 못 합니다.”
“…….”
“그럴 만한 자격도 못 된다는 걸 알아서.”
탄력 어린 목소리가 늘어졌다. 마른 입술을 축인 그가 승원의 눈가를 쓸어 만졌다. 눈을 지그시 감은 승원의 얇은 눈꺼풀 위로 지긋한 엄지의 움직임이 머물렀다. 이게 꿈이라면, 꿈에서 깬 승원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박고 잠을 자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꿈이라도 과분할 현실이 승원의 침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승원은 갑자기 마음 안쪽이 넘치도록 벅차는 기분을 느꼈다. 당장 눈을 뜨고 맞이할 내일의 아침이 무섭다면,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폭포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승원은 다시 권 대표를 가득 끌어안았다. 본래에도 짙은 체취를 갖고 있던 그에게서는 승원이 쓰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샴푸 냄새가 동시에 났다. 조화롭게 섞여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승원을 가만히 내버려 두던 권 대표가 승원의 머리를 쓸어 넘기다 말고 턱을 붙잡았다. 위쪽으로 끌어 올리자 저항 없이 들린 고개 위쪽에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적당한 크기로 쌍꺼풀이 진 눈이 풍성한 속눈썹과 함께 깜박였다.
“키스하고 싶은데.”
직구로 들어온 권 대표의 목소리에 승원은 못 이긴 척 입술을 열었다. 망설임 없이 그가 고개를 가까이 붙였다. 뒤통수에 단단하게 손이 감기고 가슴이 한껏 앞으로 당겨졌다. 승원의 입 안으로 불쑥 들어온 혀가 거친 몸짓으로 부드러운 점막 안쪽을 헤집었다. 애틋한 입맞춤으로 시작하는 듯했던 키스는 점점 섹슈얼한 긴장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하, 흐으… 읍-.”
숨이 점차 가쁘게 달아올랐다. 두 다리가 하나처럼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 아랫도리가 바짝 닿는 느낌에 승원이 흠칫 몸을 떨었고, 권 대표는 굴하지 않고 불룩해진 다리 사이를 승원에게 맞붙였다. 바지 앞섶이 덜컥거리며 걸렸다. 딱딱하게 산을 만든 바지 안쪽이 승원의 허벅지를 문질렀다.
“…대, 흐으, 표님…….”
“…미안합니다, 오래 참아서.”
명료한 사과 사이에 거친 숨이 군데군데 끼어 있었다. 잠시 마주친 눈동자가 반쯤 풀려 있었다. 열띤 호흡을 내뱉는 승원의 두 뺨이 발그레했다. 잠깐이나마 승원의 얼굴을 확인한 권 대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작정 손을 들어 승원의 볼을 만지고 입술을 붙였다. 모든 숨을 다 빼앗을 것처럼 그가 승원의 혀를 빨아들였다.
“으, 흐읍…… 응, 읏!”
그의 두 팔에 묶여 있던 승원의 몸이 휘릭 돌더니, 눈 깜짝할 새에 권 대표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모로 누운 권 대표의 하체 위에 앉은 자세가 된 승원이 번들거리는 입술로 숨을 헐떡헐떡 내뱉었다. 입김이 나오는 것처럼 입 안에서 새어 나온 열기가 뜨거웠다.
다시 팔이 당겨졌다. 누워 있는 권 대표의 가슴 위에 제 가슴을 바짝 붙인 승원이 들이닥치는 입술을 또 한 번 가득 삼켰다. 인내의 끝에 도달한 건지, 잠깐이나마 배려를 보이는 듯했던 권 대표도 무작정 안쪽을 짓씹고 찌르기 바빴다. 진득하게 빨아들일 때마다 안쪽에 고여 있던 침이 난잡하게 섞이며 목구멍 안쪽을 타고 들어왔다.
뒤로 쭉 내뺀 엉덩이 사이로 굵직한 무언가 무겁게 스쳤다. 발가벗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바지 안쪽의 물건이 금방이라도 사이를 가르고 들어올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밭은 숨을 내뱉으며 입을 맞추는 동안, 승원의 앞섶도 점점 더 커다랗게 부풀었다.
승원의 등허리를 매끄럽게 쓸어내리던 권 대표의 손바닥이 어느새 위로 들린 엉덩이에 안착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안달 난 감각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승원은 볼기를 꽉 잡아 쥐는 커다란 손아귀에 그의 입 안으로 신음을 흘려보냈다. 드로어즈 안감에 묽은 액체가 점차 번져 갔다.
“……미치겠네.”
나지막하게 지껄인 목소리는 흥분감에 젖어 불선명했다.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권 대표가 타액이 가득한 승원의 입술과 턱을 엄지로 닦아 냈다. 곧 울기라도 할 것처럼 눈 주변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뒤로 밀어낸 승원의 몸이 다시 꼿꼿하게 세워졌다. 퍼즐이 맞춰지듯 골 사이로 험하게 선 물건이 들어찼다.
“움직여요.”
권 대표가 승원의 옆구리 밑을 꽉 붙들었다. 앞뒤로 살살 흔들자, 승원도 내려앉은 하체를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물린 신체가 점점 더 거대하게 불거졌다.
“흐, 으읏…… 하아…….”
그의 물건 끝이 닿은 안쪽부터 깊게 열이 새겨졌다. 엉덩이를 시작으로 몸 안쪽으로 퍼지는 열기에 갈수록 움직임이 빨라졌다. 권 대표의 하체 위에서 허리 짓을 하며 승원이 격하게 숨을 뱉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더한 자극이 고팠다. 끝도 없는 갈증에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그냥 섹스를 하는 게 낫겠는데.”
낮게 그을린 목소리로 권 대표가 숨을 털어 내듯 말했다. 그러다가도 아차, 싶은 느낌으로 권 대표는 다른 말을 뒤에 덧붙였다.
“이건 철저히 내 생각이고. 윤승원 씨 의견은-.”
“저도… 좋아요.”
“…….”
“하고 싶어요, 지금.”
승원의 허벅지를 곡진히 어루만지던 권 대표의 손이 뚝 멈췄다. 승원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잠시 한 자리에 머물렀다. 이윽고 한숨을 내뱉더니, 권 대표는 갑자기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얼굴을 가린 그대로 입을 열었다.
“지금 윤승원 씨를 보는 내 입장으로는… 사실 자제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단언할 수도 없고.”
그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건 승원에게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승원 역시 당장 앞이 부풀어서 곧 터질 것 같은데.
“뭐라도 좋으니까, 그냥 다…….”
승원이 판판한 배를 손으로 매만지며 작게 속삭였다. 권 대표는 그런 손을 떼어 내고 승원을 올려다봤다. 무감정한 듯하면서도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임을 지속했다.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승원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괜찮겠습니까.”
“…네. 당연히.”
“알았어요.”
그가 승원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이 밀렸다. 그가 승원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입 옆에 작게 속삭였다.
“그럼 옷부터 다 벗고.”
“…….”
“내 얼굴 위에 앉아 봐요.”
승원의 얼굴에 순식간에 열이 번졌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권 대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승원을 옆으로 내려 주었다. 잠시 몸을 일으킨 그가 훌러덩 웃옷을 벗었다. 바지와 속옷까지 한꺼번에 벗는 권 대표를 보고 있자, 승원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급해진 마음과는 달리 굼뜬 몸이 느리게 옷을 벗었다. 위에는 금방 벗었는데, 바지를 벗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재촉하지 않고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허물을 내리듯 주섬주섬 벗은 옷가지들이 침대 위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무릎을 꿇은 다리 사이로 단단해진 성기가 곧게 세워져 있었다. 뜨거워진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던 승원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다 마주한 핏줄 어린 살덩이에 숨을 헙 참았다.
“나는 참으려고 했는데.”
“…….”
“지금 윤승원 씨 때문에 좆이 터질 것 같습니다.”
적나라한 문장이 귀를 후볐다. 어색하게 다리 사이의 발기한 성기를 가리려는 승원의 손을 권 대표가 잡아서 끌어당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혀끝을 내밀어 승원의 입술을 핥은 권 대표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입술 가까이에 대고 말했다.
“내 입술도 빨아 봐요.”
그 말에 승원이 혀끝을 조심스레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았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갗에 축축한 혀가 배어 침을 적셨다. 밑에서 꺼떡거리는 성기 끝엔 프리컴이 우물처럼 고여 귀두를 적시고 있었다.
“……흐읍-.”
그가 느닷없이 거칠게 침입했다. 속절없이 벌어진 입술 안쪽으로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목젖까지 찌를 기세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볼 안쪽을 부드럽게 쓸고 고른 치열을 맛보듯이 물고 핥았다. 승원의 귀두 끝을 손바닥으로 살살 매만지는 손길에 승원이 찌르르, 몸을 떨었다. 이어서 그가 볼을 감싸 쥐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부드러운 키스를 이어 갔다.
“흐, 으응, 으음…….”
연한 살과 살이 끈끈이처럼 붙어 점막을 꾹꾹 밀었다. 타액과 섞인 뜨거운 열기가 입 안 가득 고였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손을 승원이 권 대표의 가슴 위에 어색하게 얹어 놓았다. 판판하고 넓은 가슴을 엉성하게 긁으며 버겁고 달콤한 키스를 받아 냈다.
서로 쫀쫀하게 붙어 있던 입술이 툭, 떨어져 나가며 권 대표가 헥헥 숨을 뱉는 승원의 볼에 입을 맞췄다.
“윤승원 씨 기분에 좋은 것만 해 주겠습니다.”
“하아…… 대표님…….”
“올라와요.”
몸이 침대 시트 위에 딱 붙은 것처럼 승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승원을 권 대표가 힘으로 당겨 일으켜 세웠다. 불쑥 힘을 준 승원이 등허리를 뒤로 바짝 물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안 돼……요…….”
“왜 안 돼.”
그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승원을 바라보았다. 아까 스치듯 했던 말이 정말 얼굴 위에 앉으라는 소리인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거기 앉아서…….”
“내 얼굴 보기가 어려운 거라면 반대쪽으로 앉으면 되니까.”
“…….”
“이리 오세요.”
마지못해 그의 말을 따라 승원이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그가 마음먹은 이상 승원이 달리 말을 붙여 봤자일 듯했다. 꽉 물고 있는 입술 양옆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웠다. 구멍 안쪽을 권 대표의 얼굴 위로 묻는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꼭 쥔 주먹으로 입술을 가린 승원이 조심스레 무릎을 굽혀 권 대표의 얼굴 위로 자세를 잡았다. 눈을 질끈 감고 엉덩이를 밑으로 내렸다. 골 사이로 높게 솟은 코끝이 닿았고, 승원이 감은 눈을 일그러뜨렸다.
“하아…….”
그의 짙은 숨결이 하체 뒤에 여실히 와 닿았다. 권 대표의 가슴 옆쪽 시트에 손을 기대고 눈을 뜬 승원이 입술을 크게 벌렸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그나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승원의 눈앞에 형형하게 몸집을 키우고 선 권 대표의 성기가 불끈거리며 앞뒤로 움직였다. 저 거대한 살덩이를 보고 있으니 가슴 안쪽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붉게 물들고 머리끝이 쭈뼛쭈뼛 섰다.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있는 승원의 허리를 권 대표가 꽉 끌어안아 제 얼굴 위로 눌렀다.
“흣, 대표, 님…… 자, 잠깐만…….”
“안 무거우니까 그냥 앉아요.”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깊게 파묻힌 것처럼 선명하지 못했다. 결국 다리에 힘을 푼 승원이 그의 얼굴 위에 그대로 앉았다. 죽을상으로 변하던 표정이 순간 팍 튀어 오르듯 눈을 치켜떴다. 고개를 뒤로 휙 젖힌 승원이 신음을 내질렀다.
“……하, 으읏! 하아……!”
회음 위를 뜨거운 혀끝이 지끈하게 눌렀다. 그대로 구멍 주변까지 빨아들이듯 핥아 올린 그가 손을 들어 승원의 엉덩이를 잡고 더욱 넓게 벌렸다. 쫀득하게 벌어진 안쪽으로 완전히 얼굴을 묻은 그가 무언가를 찾아내듯이 깊숙이 코와 입술을 찌르며 들어갔다. 곧이어 잔뜩 젖은 혀가 축축하게 닿았다. 권 대표의 가슴 위에 짓눌러진 승원의 성기가 묽은 물을 쉴 새 없이 쏟아 냈다.
“으, 으윽…… 하으……!”
“도망가지 말고.”
“흐, 으읏! 하아, 아아……!”
그가 승원의 마른 배를 감싸 잡고 확 당겼다. 슬금슬금 내빼려던 몸이 다시 권 대표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좁은 골 사이로 그의 얼굴이 있었다. 엽기적인 자세에 밀려오는 수치심과 더불어 도를 넘은 흥분감이 몸 안을 가득 채워 나갔다.
이미 그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회음과 구멍 주변이 축축했다. 진득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엉덩이를 조심스레 움직일 때마다 그 사이가 미끈거렸다. 눅눅하게까지 느껴지는 안쪽을 그는 피하지 않고 더욱 깊숙이 들어왔다. 등 뒤로 무언가를 먹어 치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혀끝이 침으로 젖은 살에 맞부딪쳐 이상한 질척임을 만들어 냈다.
그때, 승원의 볼기를 양옆으로 주욱 당긴 그가 쫀쫀하게 벌어진 구멍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하, 응…… 읏!”
양쪽으로 쭉 뻗고 있던 승원의 손바닥이 개구리처럼 파닥거렸다. 부릅뜨고 있던 눈꺼풀이 희미하게 경련하더니 이내 힘을 잃고 흐릿하게 무너졌다. 붉게 틈새를 벌린 안쪽으로 그가 쉴 새 없이 혀를 밀고 들어왔다. 거친 키스를 하듯, 승원의 내벽을 둥글게 핥고 찔렀다. 그의 숨이 닿는 부위가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절로 힘이 들어가는 뒤쪽 때문인지 구멍이 그의 혀를 머금고 뻐금대며 수축했다.
“흐으그…… 으응…….”
“힘 풀어요.”
안쪽에 혀를 넣은 채로 그가 중얼거렸다. 말랑한 승원의 엉덩이 한쪽을 살살 어루만지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빠듯하게 버티고 있는 상체가 금방이라도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비교적 태연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성기는 머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양옆으로 움찔거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커다란 모양의 살덩이가 살아있는 듯이 움직이니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뜨겁게 달궈지는 몸에 덧없이 뱉어 내고 있던 신음 소리도 종국엔 점차 가늘어져 희끗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흐, 으…… 대, 대표, 읏…… 저…… 하으…….”
곧 넘어지려는 듯한 승원의 상체를 권 대표가 다시 붙잡았다. 아예 승원의 두 팔을 뒤로 묶어 꽉 잡은 권 대표가 그대로 애무를 마저 이어 나갔다. 활처럼 당겨진 승원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렸다. 전방을 향해 곧게 뻗은 성기가 간헐적으로 진동했다. 불거진 귀두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혀로 내벽의 통로를 미끄러지듯 빨았다. 살살 간질이듯 안을 괴롭히다가 입구에 닿은 입술로 그 위에 한참이나 입을 맞췄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주름의 결을 문질렀다. 그 역시 숨이 차는 건지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 앞으로 바짝 서 있던 승원의 귀두 끝에서 파팟, 하얀 정액이 튀어 나갔다. 둥그런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묽은 액체가 권 대표의 발기한 성기 위로 하얗게 번졌다. 선듯한 여운에 승원이 허리를 파드득 떨었다. 기둥 위로 닿는 미온적인 감각에 승원의 엉덩이에 묻고 있던 얼굴을 권 대표가 옆으로 꺼냈다.
“흐, 흐읏…… 윽, 으으…….”
아랫배에 무언가 튀기는 것처럼 깊은 경련이 일어났다. 드디어 몸을 일으킨 권 대표가 물처럼 녹는 승원을 안았다. 승원의 안쪽을 빠느라 타액으로 젖은 자신의 얼굴을 닦아 내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가볍게 승원을 감싸 안은 권 대표가 고개를 내려 승원을 살폈다. 그의 가슴 위로 축 늘어진 승원은 여전히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게 흐느꼈다. 승원의 등을 쓸어 만지며 권 대표가 픽, 실소를 보였다. 주절거리듯이 그가 말했다.
“…내가 정말 미쳤나 봅니다.”
“…….”
“윤승원 씨 구멍이 달다고 느낀 걸 보면.”
기둥 위에 눅진하게 붙은 승원의 정액을 손가락 끝으로 푹 찍은 권 대표가 미끈거리는 지문을 매만졌다. 몸 안에 있던 뜨거운 기운이 죄다 빠져나가는 동시에 온몸에 찬기가 도는 것 같았다. 승원이 그의 몸에 더욱 바짝 기대고 목을 끌어안았다.
“기분 좋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흐으…….”
“벌써 이렇게 싼 걸 보니 어마어마하게 좋았나 본데.”
승원은 이제야 권 대표의 목소리가 차츰차츰 귓바퀴를 타고 들리는 것 같았다. 툭 끊겼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며 죄다 빠져나갔던 몸의 열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움푹 앉은 채로 사정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고개를 든 승원이 권 대표를 바라봤다.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승원이 푹, 고개를 내리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무작정 그의 입술을 닦기 시작했다. 권 대표는 황당하단 얼굴로 승원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입을 여는 도중에도 승원의 손이 무식하게 문질러졌다.
“…뭐 하는 겁니까.”
“더, 더러워서…….”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무슨.”
권 대표의 혼잣말에도 승원은 그의 입술과 턱을 구석구석 제 손목으로 닦았다. 유분이 도는 것 같은 그의 얼굴 위 물기가 결국 제 엉덩이 안쪽을 물고 빨다가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수치심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부끄러움에 저지하고 싶단 충동을 느끼면서도 결국 붕 뜨는 흥분감에 싸 버린 자신을 생각하니 이대로 발밑이 꺼지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치우세요.”
그가 명료하게 말했다.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승원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질긴 눈빛으로 승원을 샅샅이 훑어보던 권 대표가 승원의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손을 한꺼번에 잡아 허리 옆에 딱 붙여 놓은 그가 대뜸 승원에게 입술을 부딪쳤다.
“허, 으읍……. 으응…….”
성마른 움직임이 승원을 빽빽하게 밀어붙였다. 승원의 뒷구멍을 빨던 혀가 다시 승원의 입 안을 헤엄쳤다. 혀를 진득하게 놀리며 안쪽을 다 녹여 없앨 것처럼 느릿하게 짓누르고 움직였다. 허리 양옆에 포박된 손이 파들거렸다.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입 안의 타액을 삼키고 핥는 동안, 권 대표가 승원을 뒤로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커다란 그림자와도 같은 인영이 몸을 다 덮었다. 승원이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쌌고, 권 대표는 입술을 놓지 않은 그대로 승원의 무릎을 위로 들었다.
하체가 둥글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 다시금 주변의 공기가 선연히 구멍 앞쪽에 닿았다. 입술을 떼어 내고도 권 대표는 승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다란 중지가 주름을 타고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하, 으읏…….”
“나만 보고 있어요.”
“……으, 으그으…… 대표님…….”
구멍 깊이 느껴지는 이물감에 승원이 본능적인 도리질을 쳤다. 권 대표가 남은 손으로 승원의 볼을 꽉 그러쥐자 통통한 입술이 붕어같이 튀어나왔다. 그 위에 입을 맞춘 그가 손가락 하나를 추가했다. 뒤쪽으로 힘이 들어가자 구멍이 바짝 조였다.
“기분 좋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흐, 으응…….”
“윤승원 씨 안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승원이 숨을 힘겹게 쉬었다. 몸을 반쯤 일으킨 권 대표가 발기한 성기 뿌리를 들어 승원의 회음에 툭툭 가져다 댔다. 그대로 그 위를 문지르자 손가락을 물고 있던 아래쪽의 구멍이 작게 벌름댔다. 그의 성기를 보고만 있는데도 이미 제 배 안쪽을 푹 찌른 것처럼 구멍 안쪽으로 미약한 떨림이 전해졌다.
이미 한 번의 사정을 마친 자신과 다르게 권 대표는 곧 터질 것 같은 기둥으로 잘도 버티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와중에 승원은 누워 있던 상체를 살며시 일으켰다. 힘겹게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제가 느끼는 긴장감을 그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갑자기 왜.”
“저도 해 드리고 싶어서….”
“…뭐를 말입니까.”
“…대표님 거, 빨고 싶어요.”
입술을 뻐끔거리며 승원이 차분히 목을 울렸다. 잠시 눈썹을 찡그리던 권 대표가 승원의 몸 안에 있던 손가락을 스르륵, 꺼냈다. 꽉 물고 있던 이물감이 쑥 빠지자 허한 야릇함이 감돌았다. 가느다란 신음을 흘린 승원이 그의 다리 사이로 기어갔다. 권 대표가 반쯤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승원의 뺨을 들었다.
“진심입니까? 진짜로 하겠다고, 지금?”
“저도 사정했으니까, 대표님도…….”
그가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승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에 두 발로 선 권 대표를 승원이 멀거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형형하게 자리 잡은 기둥 끝이 이마 바로 위에 있었다. 요도에서 멀건 액체가 쉴 새 없이 늘어지는 중이었다.
“…그럼 거칠게는 안 하겠습니다.”
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밑동을 잡은 권 대표가 승원의 입술 위로 제 성기 끝을 비볐다. 매끈한 귀두가 닿는가 싶더니, 뜨거운 기둥이 툭툭, 승원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바로잡은 승원이 밑에 보이는 고환을 입에 넣었다. 볼 양옆으로 꽉 차게 들어오는 알맹이를 훅 빨아 젖히며 그를 올려다봤다.
“크흐…… 씨발…….”
인상을 콱 찌푸리는 남자가 섹시했다. 살갗에 닿는 음모를 손끝으로 쓸어 만지며 승원이 입 안에 있던 것을 꺼냈다. 혀끝으로 거칠게 일어선 피부 위를 핥자, 그가 길고 낮은 숨을 내뱉으며 승원의 머리칼을 빗듯이 만졌다.
“하아, 하…….”
직각으로 세워진 검붉은 기둥을 혀를 세워 핥았다. 길게 혀끝을 위로 올리던 승원이 요도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프리컴을 입 안에 넣고 머금었다. 항상 알던 비릿하고 짠 맛이었다. 좋은 맛도 아닌데, 분위기 때문인지 아랫도리가 다시금 묵직하게 아파 왔다.
아예 입 안에 넣고 열심히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손으로 고환을 어루만지며, 남은 손으로 뿌리를 잡아 받쳤다. 목젖 끝까지 열심히 넣으니 안으로 들어찰 때마다 캑캑, 헛구역질이 일었다. 승원의 머리칼을 만지고 있던 권 대표가 눈을 내리감은 채로 속삭였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에도 승원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할지라도 입 안에 들어온 거대한 살덩이는 점점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짐승 같은 숨소리도 좋았고, 자제하라는 말과는 다르게 입 안에서 끝없이 발기하는 모순도 좋았다.
계속되던 펠라 끝에, 승원이 목젖 안쪽까지 그의 성기를 다시 밀어 넣은 순간 무언가 울컥대며 식도 안쪽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가 욕을 씹었다. 승원은 얼굴을 빼지 않고 몇 초간 길게 이어지는 그의 사정을 입으로 모두 받아 삼켰다.
“크헤엑…… 하아…….”
숨통을 막듯이 입 안에 차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참고 있던 숨이 모조리 터져 나왔다. 입 안에 남은 정액까지 승원이 깨끗하게 삼켰다. 목울대가 분명한 움직임으로 꿀렁대며 움직였다. 분홍으로 물들인 눈가가 어릿어릿한 모습으로 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다.
“대표님, 저…….”
“…돌겠네.”
권 대표가 승원의 몸을 휙 뒤집었다. 순식간에 등을 보이고 눕는 자세가 된 승원이 시트에 뺨을 완전히 붙인 채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이미 등을 꽉 눌러 잡은 권 대표의 힘에 밀려 몸을 더 일으키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송연한 목소리가 그늘처럼 깔렸다.
“내 정액을 다 삼키니까 만족스럽습니까?”
“흐, 으으…… 으, 대, 표님, 잠깐…….”
금방 크기를 키워 발기한 성기가 승원의 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누가 양옆으로 벌리듯 속절없이 벌어진 안쪽으로 작게 벌름거리는 구멍이 드러났다. 주사를 놓듯 푹 찔러 넣자 승원이 자지러지듯 몸을 파드득 떨었다.
“아, 으읏……!”
“남의 정액 삼키는 놈이나, 뒷구멍 달다고 빨고 있는 놈이나.”
“아아, 으흐응…….”
“다시 보니 잘 만났네요.”
깊숙이 내벽을 타고 들어온 기둥이 무언가를 찾듯이 좁은 통로를 마구 헤집었다. 꽉 쥔 이불 사방으로 잘게 주름이 졌다. 종아리부터 가득 힘이 들어간 발목이 위로 빳빳하게 섰다. 곧이어 스팟을 찾은 듯, 권 대표가 힘 있게 허리를 퍽 찔러 넣었다.
“아, 하으……!”
“남들은, 윤승원 씨가, 이렇게까지, 목소리가 높다는 걸 모를, 텐데.”
“아아-! 으응, 흐으으! 대, 표니, 흐으아……!”
“내 앞에서만 이런다는, 걸 알면… 윤승원 씨 목소리까지, 전부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좋습니다, 나는.”
거침없는 추삽질이 이어졌다. 그러나 난폭하거나 배려 없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와 함께 찾아오는 미친 듯한 고양감에 승원은 괴로워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휘저었다. 제어되지 않는 흥분감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뻗어 나갔다. 너무 좋아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련하는 다리로 미친 듯이 침대를 내리치는 승원의 입술 밑으로 가느다란 침이 흘러나왔다.
“으으, 응, 흐…… 아…….”
“좋, 으면, 좋다고 말을 해 봐요, 그래야, 나도 조절을, 하니까.”
“조, 좋, 으응, 아요…… 흐아아…… 어떡, 해…… 좋, 아…….”
이불 위에 얼굴을 묻은 승원이 흐느꼈다. 비스듬한 각도로 하체를 든 권 대표가 거친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안쪽을 움푹 찌르고 밖으로 나가다가도, 성기가 다시 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권 대표가 움켜쥐고 어루만지던 탱탱한 볼기가 빨간 손자국으로 물들었다.
그가 승원의 목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가슴이 위로 바짝 치켜 올라갔다. 깊숙이 찔러 넣으며 승원의 뺨을 제 쪽으로 돌린 그가 입술을 빨 듯이 키스했다. 위아래로 빈틈없이 맞물린 접합부로 권 대표의 것이 승원의 안쪽으로 미친 듯이 돌진했다. 이불 끝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성기가 짙은 분홍빛이었다.
“하아…… 안에, 싸겠습니다.”
“흐, 으으…… 으응…….”
대답하기도 버거워 승원은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만 길게 내질렀다. 승원의 목선에 입술을 묻은 권 대표가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은 살갗에서 빠른 맥박이 느껴졌다.
승원 역시 잔뜩 부푼 귀두가 아릿하게 아파 왔다. 몰려드는 사정감에 아랫배가 불끈거렸다. 실같이 뜬 눈으로 울음을 삼켰다.
“하, 하아…….”
아주 깊은 안쪽에서 권 대표가 뚝 움직임을 멈췄다. 배꼽 아래쪽이 미지근하게 적셔졌다. 아까 승원의 입 안에 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긴 시간 사정했다. 사출되는 정액이 깊숙이 퍼지며 승원이 배를 움찔움찔 떨었다.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서로 엉겨 붙은 피부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상태였다. 여운에 늘어진 무거운 몸이 승원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승원 역시 스르륵 떨어지며 비교적 묽은 정액을 물처럼 뿜었다. 하얀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가 승원의 몸을 그대로 뒤집었다. 짚처럼 휘릭 뒤집힌 몸이 길게 늘어졌다. 사정을 마치고 무겁게 처진 살덩이가 서로 살갗을 맞댔다. 권 대표가 승원과 붙은 몸을 미끈하게 밀어 올리며 승원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곧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친 그가 눈썹 한쪽을 삐딱하게 올렸다.
“내가 못 참을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대표님…….”
“왜요.”
“힘들, 어요…….”
권 대표가 옅은 웃음을 내비쳤다. 손을 들어 승원의 동그란 이마를 드러낸 그가 땀을 닦아 냈다. 손가락 등을 세워 승원의 입술을 툭툭 건들며 그가 말했다.
“위나 아래나, 윤승원 씨를 내 걸로 가득 채웠습니다.”
“…….”
“이제 진짜 내 거 같네.”
그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나갔다. 승원이 가느다랗게 뜬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조그마한 입술로 밭은 숨을 내뱉으며 승원이 그의 손을 잡아 들어 제 뺨에 댔다. 쉬지 않고 이어진 섹스의 여파인지, 피부 위로 닿는 그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대표님 거… 할래요.”
“…….”
“권차현 거…….”
순간 권 대표의 눈이 미약하게 번뜩였다. 잠시 색을 바꾼 듯했던 눈동자가 이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연한 팔자가 지어진 눈썹으로 권 대표가 승원을 들여다봤다.
“…그럼 나는 윤승원 씨 겁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의 울림이 전해졌다. 심장이 또 한 번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권 대표가 다가와 승원의 손에 제 입술을 묻었다. 승원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가 쪽, 입을 맞췄다.
“제 거… 해 주실 거예요?”
순간 권 대표가 눈썹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맥 빠진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금까지 한 섹스는 다 뭡니까.”
허탈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승원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확실하게.”
“윤승원 씨 다 가지세요, 남김없이.”
“…….”
“다 줄 테니까.”
심장에서만 느껴지던 두근거림이 목젖으로, 배 속으로, 발끝으로 번져나갔다. 낮은 속삭임뿐인 권 대표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달게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해서 승원은 제 뺨에 대고 있던 그의 손에 얼굴을 더욱 세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더 참을 수 없어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목에 눈을 대고 비볐다. 부드러운 살의 감촉이 다정했다.
“고양이도 아니고. 애교라도 피우는 겁니까.”
“좋아서요…….”
“이번엔 다리 위에서 하려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승원이 파묻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이미 승원의 몸을 끌어안아 올린 권 대표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졸지에 엑스자를 만든 그의 허벅지 위에 눌러앉게 된 승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이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았다. 이미 두 번이나 싼 데다가, 체력이 거의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 표정은 왜 짓는데.”
“…….”
“이래서 내가 섹스는 안 하겠다고 버틴 건데.”
“…….”
“분명 윤승원 씨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미리 얘기했고.”
할 말이 없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앉은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성기가 이미 잔뜩 성이나 발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의 일이 두려웠다. 이제 더 사정하면 요도가 찌릿찌릿 아플 것도 같았다. 그러나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기에 지금 와서 후회를 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승원에게 입을 맞춘 그가 나긋하게 말했다.
“딱 세 번만 더 합시다.”
“…세 번이요?”
“한도를 정해 놓으면 그나마 할 만할 거 아닙니까.”
말을 잃은 승원의 목에 그가 입술을 붙였다. 쪽쪽 빨아 당기는 입술이 간지러워 승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권 대표는 무슨 발정 난 짐승 같았다. 이만큼 이성을 차리고 있는 것도 대견할 정도로 그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지금까지 승원 없이 참아왔던 게 신기했다.
“그럼 딱 세 번만이에요…….”
“입 벌려요.”
“아, 흐으음…….”
이미 녹아 없어진 듯한 입 안으로 그가 다시 혀를 넣었다. 뒤로 쓰러질 것만 같아 승원은 권 대표의 목을 바싹 끌어안았다. 속도 모르고 봉긋 선 젖꼭지가 그의 가슴에 닿았다. 더는 안 될 것 같다던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미친 듯이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시금 타오르는 몸의 열기를 느끼며 승원은 머리를 비우고 눈을 감았다.
긴 밤 동안, 둘은 서로를 끊임없이 탐하고 안았다. 하얀 미명이 비칠 때까지 권 대표와 섹스를 이어 나가던 승원은 때가 언젠지도 모르게 까무룩 기절했다.
***
이른 오후, 승원은 눈을 떴다. 어깨 끝까지 덮여 있던 이불을 얼른 끌어 내리고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 손을 대 보았다.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을 찾을 때까지 손바닥을 이리저리 문질러 보았는데도 전부 차가웠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재빨리 들어오는 이를 확인했다. 머리를 뒤로 자연스레 넘긴 권 대표가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깼네.”
“…….”
“일어나자마자 표정이 왜 그럽니까.”
“…가신 줄 알고.”
“…….”
그가 떼어 내려던 입술을 다시 붙였다. 숨을 크게 고르고 침대에 푹 눌러앉았다. 앞쪽으로 움푹 기울어진 매트리스가 스륵 제자리로 올라왔다. 그가 승원의 머리칼을 넘기고 이마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씻고 왔습니다.”
“…….”
“윤승원 씨 말을 듣는데, 내가 참 못 할 짓을 많이 했나 싶네.”
승원의 눈을 고요히 들여다보던 그가 다시 말했다.
“업보 다 갚으려면 시간 꽤 걸리겠습니다.”
다행이었다. 그가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승원은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어제 약속한 그의 말이 아직까지도 유효한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함께 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보란 듯이 제 옆을 지키고 있는 그를 보니 가슴 안쪽이 따뜻한 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권 대표는 승원을 바라보다 대뜸 입을 맞췄다. 불현듯 찾아온 키스에 승원이 눈을 동글게 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더니 권 대표는 다시 승원의 입술을 잔뜩 머금었다. 허리를 깊이 끌어안고 부드럽게 혀를 놀리며 안쪽을 달큰하게 빨았다. 키스를 마치고도 이마를 맞댄 채 승원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그가 어깨 위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승원의 몸 위로 무겁게 짓이겨지는 몸뚱어리에 승원이 어설프게 권 대표의 등을 끌어안았다.
“…대표님.”
“나를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
“인정한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은 몰랐는데.”
“…….”
“이젠 얼굴만 봐도 키스하고 싶네.”
묵직한 체온이 싫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의 어깨에 제 뺨을 묻고 겨드랑이 안쪽으로 손을 넣어 끌어안은 승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에게서 알 듯 말 듯 한 물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대표님, 이제 가시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승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이렇게 제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가 집을 나가는 모습을 기분 좋게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권 대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비틀어 승원의 목에 입술을 가득 붙였다. 그대로 입을 움직였다.
“왜. 내가 갔으면 좋겠습니까?”
간질거려 어깨를 꿈틀거렸다. 참으려던 웃음이 미약하게 새어 나왔다.
“아니요… 마음 같아선 안 가셨으면 좋겠는데.”
“씻고 준비하세요. 나가게.”
“…어디를요?”
“어디든. 어차피 여유도 없지 않습니까.”
“……네.”
내일모레면 또 촬영을 나가야 했다. 힘들게 손에 잡은 달콤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그와 더욱 붙어 있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오해와 부재로 인해 비어 있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보세요.”
“…그냥 데이트.”
“…….”
“그냥 남들 다 하는 데이트요.”
승원이 입술을 축이고 다시 설명했다.
“영화 보고, 저녁 먹고… 디저트 먹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그런 데이트 하고 싶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짤막한 연애도 진부한 데이트는 이루지 못했었다. 상대 역시 연예인이었고, 사실 사귀기도 너무 짧게 사귀었기에 이런 간단한 만남조차 해 볼 시간이 없었다. 드라마 속에서 폼으로나 해 봤던 평범한 연애를 그와 함께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승원은 궁금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권 대표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다가 승원에게 물었다.
“해 봤습니까? 그런 거.”
“…아니요. 안 해 봤어요.”
“나한테도 뭘 기대하지는 마세요. 나는 애초에 연애를 안 해 봐서.”
권 대표는 말을 하면서도 밍숭맹숭 이상한 표정이었다. 그냥 가볍게 어디를 나가자고 했으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데이트’라는 단어가 그를 자극한 듯싶었다.
승원은 문득 연애 경험이 전무한 그가 온몸으로 실감되어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저런 얼굴에, 저런 몸에, 저런 재력과 능력을 갖고. 서른두 살이나 먹은 남자가 승원이 처음이라니. 웃음을 실은 와중에도 작은 만족감이 서려 광대가 움찔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뜨겁던 어젯밤의 기억이 머릿속을 훅 찌르며 지나갔다. 승원은 웃음기를 싹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권 대표에게 시선을 걸었다. 어깨를 감싼 승원의 이불을 내려 주고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그를 올려다봤다.
“나갈 거면 얼른 내려와서 씻으세요.”
“대표님.”
“왜요.”
“…대표님은 제가 처음이 아니신 거죠.”
“연애는 처음이라고 내가 계속-.”
“연애 말고… 섹스.”
손가락에 머리 가닥을 걸어 두던 그가 손의 움직임을 뚝 멈췄다. 가만히 승원을, 승원의 입술을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아니지, 당연히.”
“…몇 번이요?”
권 대표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얼마나.”
“횟수로 따지면 적진 않습니다.”
무덤덤한 목소리에 승원은 기분이 찌르르 울리는 듯했다. 별다른 공격력을 띠고 있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타격감이 강했다. 연애와 섹스는 엄연히 다른 종목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던 그가 섹스 경험이 적지 않다고 하는 건 어딘가 말에 모순이 있었다.
더 캐묻기엔 자신이 그 정도의 자격까지 충분한지도 알 수 없었고, 얘기를 길게 이어 봤자 기분이 더 좋아질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승원은 묘하게 먹먹해지는 기분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맨몸의 다리를 내리고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저 씻고 나올게요.”
“윤승원 씨.”
승원의 얼굴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권 대표가 승원을 불러 세웠다. 뾰로통한 얼굴이 뒤를 돌았다.
“왜 물어봤습니까.”
침묵을 보이는가 하더니 서서히 뺨을 붉힌 승원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하셔서.”
“…….”
“그게 다예요.”
소심하게 지껄인 후 승원은 종종걸음으로 방 안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샤워기를 틀자 바깥에서 들리던 소리가 시끄럽게 떨어지는 물줄기에 전부 먹혀 버렸다. 옷가지를 벗을 것도 없어 승원은 그대로 뜨거운 물을 맞았다. 멀끔한 뒤쪽을 닦아 내면서도 찜찜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
영화관에 도착해서 관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데까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대신 승원은 집을 나오면서부터 부쩍 말수가 줄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침묵이 싫어서라도 권 대표에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아무렇게나 툭툭 던졌을 텐데, 승원은 그저 입을 다문 채 권 대표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멍하니 권 대표만 졸졸 쫓느라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승원은 광고가 다 끝난 스크린에서 비상구 안내 영상이 나오던 시점에서야 이 상황이 무언가 예사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표님.”
“왜요.”
대답하는 낯이 지독히도 태평했다. 팔짱을 꽉 낀 채로 승원을 들여다보는 옆얼굴에 하얀빛이 쏟아졌다. 승원은 고개를 앞뒤로 크게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화관 안엔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여기… 저희밖에 없어요.”
정말이었다. 남는 좌석이 이렇게도 많은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권 대표와 승원 딱 둘뿐이었다.
“별로입니까?”
“…그건 아닌데.”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거 불편할까 봐 그냥 빌렸습니다.”
“…빌렸다고요?”
승원은 입이 쩍 벌어지려는 걸 애써 힘을 주어 참았다. 정작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언뜻 둘러봐도 수용 인원이 족히 300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평범한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나온 건데, 첫 단추부터 평범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지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생각해서 관 하나를 통째를 빌렸다고 하니 평생 그 정도 배포는 가져 본 적 없는 승원으로선 기분이 이상하기만 했다.
그리고 사실, 아까 집에서 나눴던 대화를 이후로 승원은 마음 편히 데이트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스치듯 지나온 과거의 일이고, 당사자는 마음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에 와서 저 혼자 불편해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돌부리에 툭툭 걸리듯 씁쓸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곧 영화가 시작되려는지 공간 전체가 암흑으로 뒤덮였다. 귀를 에워쌀 듯한 커다란 스크린 소리가 둘뿐인 관 안에 가득 울렸다. 공간이 비어서 그런 걸까, 평소보다 소리가 몇 배는 더 큰 것 같았다. 권 대표는 승원의 손등 위로 제 손을 덮었다. 뜨거운 체온이 피부 위로 떨어졌다.
“싫으면 떼도 됩니다.”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어서인지 권 대표는 음성을 따로 낮추지도 않았다. 승원은 그의 손아귀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대표님.”
“왜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들여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다정했다. 대책 없이 불러 놓고 승원은 그대로 침묵했다. 이러고 있는데도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권 대표의 새까만 동공 안에 직조한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권 대표 같은 성격이라면, 설령 승원이 아닌 누군가를 뼈저리게 좋아하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왜 기분 나쁜 상상은 더 쉽게 머릿속을 채우는 걸까. 승원이 티 안 나게 한숨 쉬었다.
“왜 불렀는데.”
달리 말이 없는 승원을 참을성 있게 바라보던 권 대표가 다시 물었다.
승원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목젖만 댕댕 치는 목소리는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 맴돌았다.
권 대표는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며 포개어 잡고 있던 승원의 손을 뒤집어 가득 깍지 끼었다. 서로의 손가락 사이가 틈 없이 엮였다.
영화는 잔잔하게 흘러갔다. 색색의 빛이 중간중간 모습을 바꾸며 얼굴 위로 가득 떨어졌다 나가길 반복했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고급스러운 영국식 영어가 머나먼 외계의 언어처럼 승원의 귓전을 한참 동안 맴돌기만 했다. 미간을 좁히고 영화에 집중해 보려 해도 장면이 바뀌면 불과 몇 초 전의 스토리도 스르륵 휘발되었다. 승원은 오직 권 대표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한참 지나다 승원이 고개를 살짝 틀어 옆자리를 힐끔 확인했다. 권 대표는 좌석이 비좁은 사람처럼 불편하게 등을 기댄 채 영화를 감상 중이었다.
반쯤 풀린 눈이 어쩐지 영화를 보며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거 같진 않았다. 처음엔 그냥 그가 어떤 모습일지 살짝 구경만 하려던 거였는데, 한번 시선을 두자 좀처럼 떼기가 어려웠다. 그토록 보고 싶은 영화가 눈앞에 재생되고 있는데도, 결국 승원의 관심을 차지하는 건 옆자리의 남자였다.
그때, 줄곧 전방만 바라보던 그의 눈이 옆으로 휙 돌아왔다. 피할 새도 없이 두 눈동자가 맞물렸다. 아무 말 없이 지그시 승원을 바라보기만 하던 권 대표가 나직하게 목을 울렸다.
“나한테 할 말 있습니까.”
“…아니요.”
“근데 왜 아까부터 나만 보고 있어요.”
“…대표님만 본 건 아니고. 그냥 잠깐… 눈이 가서.”
적당히 좁혀져 있던 권 대표의 눈가가 사르르 풀어졌다. 승원의 두 눈을 올곧이 바라보던 그의 시야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왔다. 어느새 상영 중인 영화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가 승원의 도톰한 입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윤승원 씨, 나는 할 말 있는데.”
“…….”
“키스해도 됩니까?”
직진하며 들어오는 물음에 승원이 멈칫했다. 깍지를 끼고 있던 손안에 갑작스레 땀이 찼다. 권 대표는 이미 마음을 정하고 승원에게 마지막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승원은 그와 키스하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깨닫기도 전에 권 대표의 얼굴은 이미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말랑한 입술이 먼저 닿았고 그다음 눈을 감았다. 끈적하게 입술 사이를 파고든 혀가 농밀한 움직임으로 안쪽을 가득 빨았다. 적극적인 움직임에 순간 몸을 움츠린 승원의 팔이 끌어당겨졌다. 팔걸이 너머로 금방이라도 몸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영화는 관객을 잃고 혼자 외롭게 떠들었다. 등받이에 몸을 불량스레 기대고 있던 권 대표가 상체를 바로 들고 승원의 뒤통수를 가득 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혀와 혀가 사탕처럼 섞여 구슬 같은 소리를 냈다.
“으, 으흐, 응…….”
“이게 더 재밌네.”
잠시 입술을 뗀 권 대표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는 아무래도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게 맞는 듯싶었다. 스크린을 보는 내내 늘어졌던 그는 승원은 제 눈동자에 온전히 가두며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흐, 읏, ……으음.”
한번 시작된 키스는 좀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다 싶었는지, 아예 승원을 물고 놔주지 않던 권 대표는 이젠 입술 말고 다른 곳도 빨아들일 기세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미 목 쪽의 셔츠 단추 하나가 풀어진 승원이 지친 어깨를 헐떡거렸다.
“대, 대표님 그만…….”
결국 승원이 먼저 권 대표를 밀어냈다. 당장이라도 승원을 바닥에 눕힐 듯이 돌진하던 권 대표는 자신의 가슴을 밀어내는 승원의 손에 생각보다 쉽게 몸을 물려 주었다. 스크린의 환한 조명 때문인지, 맞물려 있던 입술 사이로 은색 실이 늘어졌다.
번들거리는 입술과 붉게 달아오른 승원의 두 뺨이 떨어지는 스크린 조명에 비쳐 반짝거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혹시라도 누가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보진 않을까 싶어 심장이 뒤늦게 조마조마해지기도 했다.
승원은 다시금 어스름하니 우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권 대표는 키스도 잘했다. 이젠 연애 경험이 없다고 했던 과거 권 대표의 말이 자신을 꿰어 내려고 꺼냈던 수작이었을까 의심까지 될 정도였다. 그와 입을 맞추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줄 알았는데, 개뿔. 더 울적해지기만 했다.
승원은 다시 손을 잡는 권 대표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미끄러뜨리듯 빼냈다. 승원의 머릿결을 쓸어 넘겨 주려던 그의 행동이 뚝 멈췄다. 권 대표는 거절당한 손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승원은 묻지도 않았는데 괜히 찔려 둘러대듯 웅얼거렸다.
“…저 이제 영화에 집중하고 싶어서.”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이미 바닥 친 집중력은 영화가 기승전결 중에 어느 부분을 달리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승원은 집중하는 척 제 두 다리 위에 손을 가지런히 얹고 입술만 축였다.
승원을 빤히 바라보던 권 대표가 승원의 턱 끝을 잡았다. 앞으로 시선을 고집하려던 승원의 고개가 그의 악력에 휘릭 돌아갔다. 꼼짝없이 그를 마주 보게 된 승원의 눈동자가 떨렸다. 다시 붙어오는 숨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한 권 대표가 속삭이듯 물었다.
“갑자기 내빼는 이유가 뭔데.”
“…….”
“그냥 더 하기 싫습니까?”
“……지금은. …네.”
승원이 고개를 피했다. 턱을 붙잡아 놓던 손이 스륵 떨어져 나갔다.
“영화 마저 봐요, 그럼.”
미련 없이 떨어진 말끝이 어딘가 건조했다. 권 대표는 더 이상 승원을 붙잡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영영 놓지 않을 줄 알았던 손이 떨어지고, 그는 등을 바로 세워 다시 지겨운 얼굴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리멍덩했다. 영점이 맞춰지지 않은 시야가 넓은 스크린을 버겁게 받아들였다. 즐거워 보이는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면서도 승원은 눈만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렇게 고대했던 영화건만, 근래 봤던 작품 중 가장 재미없었다.
***
“영화는 어땠습니까.”
차에 시동을 걸며 권 대표가 물었다. 차로 오는 내내 둘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차 안에도 어색한 공기만 감돌고 있기에, 권 대표가 답지 않게 말을 먼저 꺼낸 것이었다.
“재밌었어요.”
승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권 대표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아졌다. 어울리지 않게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누가 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자의 감상이었다. 너무 티가 났나 싶어서 승원은 재빨리 되물었다.
“대표님은요?”
대낮이었던 하늘은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조명과 가로등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도로를 달리며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권 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한 감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라 그럴지도 모르고.”
“…….”
“그래도 윤승원 씨라도 재밌게 봤으니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는 그의 말에 움찔했지만, 승원은 아닌 척 차창으로 돌린 시선을 그대로 굳히고만 있었다. 노란 조명들이 휙휙, 창을 스쳤고 그 위로 자신의 뚱한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지금 배가 고픈지 모르겠어요.”
“안 먹고 싶다는 겁니까?”
“…네. 별로…….”
“영화 보고 밥도 먹고 싶다고 했던 게 누구였지.”
“아까는 그랬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
이어서 불안한 정적이 차 안 공기를 가득 눌렀다.
그때,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기어를 당긴 권 대표가 조수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윤승원 씨, 나 좀 봐요.”
아까부터 대화의 핀트가 자꾸 엇나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승원 역시 그걸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문제라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럼에도 권 대표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마음 한구석에 싹 튼 고집 한 터럭이 꼿꼿하게 자리를 잡은 채였다.
주먹을 불끈 쥔 승원의 어깨를 그가 잡아 세웠다. 승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울상이 된 광대가 우울하게 내려간 채였다. 권 대표가 짧게 물었다. 자상한 목소리였다.
“왜 그러는데.”
“…….”
권 대표가 축 처진 승원의 입꼬리를 엄지로 당겨 끌어 올렸다. 어색하게 비틀어진 입꼬리는 그가 손을 놓자 다시 떨어졌다.
“밖에 나오자고 말 꺼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화 재밌게 본 거 맞긴 합니까?”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승원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신호가 바뀌는지 확인한 권 대표가 다시 승원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비스듬히 돌려 눈높이를 맞춘 그가 말했다.
“영화에도 집중 못 하는 것 같았고, 저녁 먹자고 먼저 말할 땐 언제고 이젠 배도 안 고프다고 하고.”
“…….”
“키스를 하다 말고 거절하지를 않나.”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승원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한 쪽에 더 가까웠다. 무관심해 보였던 권 대표는 승원의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신경 쓰고 있었다.
“윤승원 씨도 이제 나를 알지 않습니까.”
“…….”
“내가 이쪽으론 학습 능력이 떨어져서 말을 안 해 주면 모릅니다.”
“…….”
“분명 또 내 잘못일 텐데.”
권 대표가 길게 내려온 승원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걸어 주었다. 이렇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데도 그는 짜증 한 번을 내지 않았다. 본래의 권 대표였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목소리와 어투였다.
“밥도 안 먹고 싶고. 그럼 디저트도 물 건너간 거 같은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던 권 대표가 잠시 침음하다 말했다.
“바로 근처가 우리 회사 건물인데. 차라리 거기로 가겠습니까?”
“……네.”
아이를 달래듯이 나지막이 묻는 권 대표의 목소리에 승원은 홀린 듯이 대답해 버렸다. 어린 생각이지만, 이렇게까지 불퉁하게 구는 자신을 한없이 유하게 받아 주는 권 대표를 보고 있으니 승원은 그냥 밑도 끝도 없는 생떼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초록 불이 들어오자 미련 없이 승원에게서 손을 떨어뜨린 권 대표가 속도를 높였다. 권 대표의 회사가 금방 높다랗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능숙하게 핸들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차를 마친 권 대표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뒤늦게 빠져나온 승원에게로 다가온 권 대표는 승원의 코트 단추를 직접 잠가 주었다. 은은한 봄이었지만, 여전히 밤공기는 쌀쌀했다. 승원의 어깨를 감싸 잡은 그가 입술을 축이고는 물었다.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까?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싶어서.”
눈을 들어 권 대표와 시선을 교환하던 승원이 뒤늦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있다가 올라갈래요.”
“날도 추운데 괜히 감기 걸립니다.”
“저 혼자 들어가서 뭐 해요.”
“…그래, 그럼.”
그가 마지못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코트 안쪽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주변엔 잠들어 있는 몇 없는 차들이 전부였다. 야외로 바로 연결되는 주차장은 권 대표의 말대로 서늘한 바깥 공기와 다를 게 없었다. 그새 차 안 히터에 익숙해진 탓인지, 밖에 나오기 무섭게 두 뺨이 얼어붙을 듯 차갑게 식어 갔다.
불이 작게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입에 담배를 문 권 대표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은 승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빠진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담배 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승원은 머리를 비운 채 얇은 입술 사이에 물려 있는 담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권 대표는 갑자기 몇 되지 않는 걸음을 앞으로 당겨 승원을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는 표정 한 번 보이지 못하고 승원은 그에게 안겨 버렸다. 불시에 그의 코트 안쪽에 얼굴을 기댄 자세가 됐다. 뺨 안쪽으로 순식간에 더운 온기가 닿았다.
“…대표님-.”
“춥지 않습니까.”
승원의 부름을 끊고 권 대표가 말했다. 한 팔로 승원을 묶어 깊이 가둔 권 대표가 물고 있던 담배를 떼어 내 털었다. 승원이 몸을 꾸물꾸물 비틀어 보았지만,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 괜찮아요.”
“내가 추워서.”
“…….”
“그냥 이러고 있어요.”
권 대표의 가슴에 뺨을 기댄 그대로 승원이 눈만 들었다. 비스듬히 내려온 시선이 승원을 진득이 훑었다. 승원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누가 보면 큰일 나요.”
“이 주차장 내 겁니다.”
쉽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승원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난 여기 CCTV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
“정말로 우리 말고 아무도 없습니다. 차 뒤쪽에서 섹스해도 아무도 모를 텐데. 확인하고 싶어요?”
“…대표님…….”
새빨갛게 붉어진 귀 끝으로 승원이 말꼬리를 늘렸다.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승원을 확인한 권 대표가 자신의 코트를 승원의 등으로 끌어당겨 덮었다.
차츰 안정을 찾는 심장 박동이 적당한 속도로 두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추웠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폐부 깊은 곳을 덮는 짙은 그의 체향이 느껴졌다.
담배를 입에 물고 쭉 빨아들이다가 권 대표는 후우,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간헐적인 호흡으로 담배를 태우는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승원은 따뜻한 가슴 위쪽에 얼굴을 기댄 채로 있었다. 권 대표가 남은 손으로 승원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건 내가 그냥 생각해 본 건데.”
권 대표가 입을 뗐다.
“혹시 내가 윤승원 씨 말고도 섹스 경험이 많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런 겁니까?”
“…….”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하나씩 짐작을 해 보고 싶어서-.”
“네…….”
멍청한 대답에 그가 거의 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떨구다 말고 승원을 내려다봤다. 눈 한쪽을 찡그리고 있던 권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보이더니 남은 담배 입김을 전부 허공으로 뱉어 내다 실소를 터뜨렸다. 올라간 입꼬리는 좀체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말없이 웃기만 하던 권 대표가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고 승원의 눈덩이를 손등으로 쓸었다.
“웃어서 미안합니다.”
“…….”
“…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웃었습니다.”
맥박이 쿵쿵 뛰었다. 자신은 여태 데이트에 집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진심이었는데,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그저 귀여워하고 있었다.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더 나빠야 하는데, 승원은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도 윤승원 씨와 하듯이 잤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로 오산입니다.”
그가 승원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나는 말 그대로 ‘경험’만 있습니다. 윤승원 씨도 알다시피 난 매번 약혼자를 갈아 치우다시피 살아왔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서른 넘어서는 몰라도, 젊었을 땐 그래도 나 스스로 다른 누군가를 억지로라도 사랑해 보겠다고 노력 아닌 노력을 나름 하기도 했었습니다.”
“…….”
“그것도 결국 다 수포로 돌아갔지만.”
희미하게 웃음 짓는 권 대표를 승원이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권 대표는 승원을 유한 낯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려 승원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려 두었다.
“난 내가 이렇게까지 남에게 집착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줄도 몰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불끈거릴 정도로 성욕이 강한 줄도 몰랐습니다.”
“…….”
“솔직히 윤승원 씨만 괜찮다면 난 당장 차 안으로 윤승원 씨를 밀어 넣고 바지라도 벗고 싶은 심경입니다.”
나긋나긋하게 이어지는 말 사이에는 권 대표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감 없는 속삭임 역시 섞여 있었다.
“윤승원 씨한테는 굉장히 식상한 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
“나한테 있어서 이렇게까지 심장이 반응하는 사람은 아마 윤승원 씨가 처음일 겁니다. …내가 윤승원 씨를 만나고 느꼈던 모든 감정은 전부 윤승원 씨 한 사람을 보고 반응한 처음이자 유일한 감각이었으니까.”
순식간에 기분이 붕 떠올랐다.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귀를 기울이니, 귀에 딱 붙은 가슴 안쪽에서 빠르게 튀어 오르는 권 대표의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것도 같았다. 더불어 승원의 박동 역시 점점 가속이 붙어 더욱 빠르게 울림을 이어 나갔다.
권 대표를 꼭 끌어안고 있던 승원이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따뜻한 손길은 승원의 뒤통수를 쓸어 만지다가 목선을 부드럽게 덮어 다시 천천히 어루만졌다.
“여기 정말 아무도 없는 게 맞아요?”
“윤승원 씨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만 없다면.”
어깨 위에서 얼굴을 떼어 낸 권 대표가 승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입을 다물자, 고요한 바람 소리가 귀 끝을 살살 간질였다. 기척이라고는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승원의 작은 움직임과, 권 대표와 승원이 서로 뱉어 내는 숨소리가 전부였다.
“저는… 대표님이 너무 좋아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권 대표의 눈이 희미하게 휘었다. 더 해 보라는 것처럼 으쓱한 눈썹이 승원을 종용했다.
“얼마나.”
“…지금 여기서 키스할 수 있을 정도로.”
“해 보세요, 그럼.”
뱉기는 쉬웠는데 막상 실행으로 옮기려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에 침만 바르고 있는 사이, 그의 얼굴이 가깝게 떨어졌다. 서로의 이마가 맞붙었다. 코와 뺨에 입을 맞춘 권 대표가 승원의 가느다란 목선에 입술을 맞대고 물었다.
“왜 안 해.”
“…할 건데….”
숨을 크게 들이마신 승원이 입술을 살짝 열었다.
“저 봐 주세요.”
“자.”
다시 상체를 든 권 대표가 승원의 가까이로 얼굴을 숙였다. 시야에 가득 들어찬 그의 얼굴에 승원이 침을 삼켰다. 고개를 쭈뼛쭈뼛 세워 목을 쭉 뺐다. 바들거리는 입술을 그에게 맞붙였다.
그리고 권 대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승원의 뺨을 감싸 쥐고 그가 물었다.
“들어갈까.”
***
“흣……!”
문을 박차고 들어선 권 대표가 승원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불이 들어오지 않은 사무실 안쪽으로 밤하늘의 남색 빛이 가지런히 비쳤다. 가득 맞물린 입술 새로 묽은 타액이 끊임없이 섞였다. 뭉개진 입술로 승원이 여린 신음을 숨 가쁘게 뱉어 냈다.
입술을 바짝 붙여 오면서 권 대표는 승원의 코트를 벗겼다. 팔이 빠지자 밑으로 스르륵 떨어진 코트가 널브러졌다. 자신의 코트도 과격하게 벗어 밑으로 던진 그가 승원의 엉덩이를 꽉 붙잡아 들었다. 허공으로 붕 뜬 승원이 두 다리를 그의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읍, 으흣…… 떨어질, 것 같아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자신의 책상 위로 승원을 가볍게 올린 그가 옆에 보이는 명패를 뒤로 치웠다. 숨을 쉬어도 쉬어도 모자랐다. 승원이 걸터앉은 채로 다리를 살짝 벌리자, 권 대표가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승원의 등을 감싸 안고 그의 얼굴이 다시 가까이 덤볐다. 채 고르지도 못한 호흡이 재차 그의 입술 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드문드문 타고 들어오는 씁쓸한 담배 냄새가 다디달게만 느껴졌다. 잔뜩 상기된 귀 끝으로 붉은 혈관이 가득 비쳤다. 승원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던 권 대표가 아예 셔츠 사이를 힘주어 당겨 뜯어 버렸다. 우드득, 거친 소리가 들리고 단추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커다란 손이 안쪽을 파고들었다. 봉긋하게 선 가슴 주위를 손으로 빙글빙글 문지르며 그가 승원의 혀를 빨았다.
“하, 으읏… 으으…….”
“좋아요?”
“흐으…… 네……. 아읏….”
검지와 중지 사이를 벌리고 그가 곧게 선 유두를 살짝 비틀어 꼬집었다. 발밑에서 덜렁거리던 신발이 곧이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거의 다 벌어진 셔츠를 벌리고 권 대표가 가슴 중앙에 입술을 묻었다. 뾰족하게 세워진 혀끝이 예민한 살갗을 살살 간질였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승원은 발끝만 오므렸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흐으으, 대표님…….”
“윤승원 씨는 원래 이렇게 온몸이 다 예민한 겁니까, 아니면 나한테만 그런 겁니까.”
듣고 싶은 대답이 정해진 물음이었다. 가슴 한쪽을 잇새로 물어 잘근잘근 대던 권 대표가 삼백안을 치켜뜨고 승원을 올려다봤다. 밭은 숨을 내뱉던 승원이 간신히 고개를 바로잡고 권 대표의 뺨을 감싸 쥐었다. 자극 때문인지 손끝도 바들바들 떨렸다.
“대표님이… 흣, 대표님이 좋아서…….”
“…….”
“대표님한테만… 흡.”
그가 다시 승원의 입술로 돌진했다. 인정사정없는 키스가 이어졌다. 미끄러지며 들어온 혀가 승원의 가지런한 치열을 훑고 목젖 안쪽을 빨아당겼다. 공격적인 움직임에 입술이 다물어지지 못하고 그 밑으로 가는 침이 흘러내렸다. 권 대표가 제 뺨을 붙들고 있는 승원의 손을 떼어 내 밑으로 가져갔다.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있던 승원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딱하게 세워져 윤곽을 드러낸 아랫도리가 곧 바지 앞섶을 뚫을 기세였다. 승원의 손바닥으로 제 앞섶을 살살 문지르며 그가 신음을 토해 냈다. 더운 숨이 입술 안쪽으로 흘러들어 왔다. 온 혈관을 타고 번지는 열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승원은 권 대표가 더 잡아 주지 않아도 알아서 그의 앞섶을 양옆으로 쓸어 만졌다. 은근한 감촉에 배 아래가 뜨거웠다.
“다리 벌리세요.”
승원의 등을 뒤로 눕히고 그가 말했다. 허벅지 안쪽을 꾹 누르자 승원의 허벅지가 속절없이 벌어졌다. 팔꿈치로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헐떡이던 승원이 불룩 선 제 앞섶을 지켜보았다. 승원의 두 사이로 팔을 걸어 가까이 당긴 권 대표가 제 다리 사이를 그 위로 붙이고 뭉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으… 잠, 깐…… 대표님… 으으…….”
“이것도 나쁘지 않지 않습니까.”
“으응, 네… 좋아, 서…….”
“가끔은 이런 은근한 게 더 꼴리던데, 나는.”
속옷 앞쪽이 축축하게 젖는 게 벌써부터 느껴졌다. 권 대표가 질긴 신음을 뱉어 내며 승원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슴이 가까이 붙었다. 승원의 바지 윤곽 위를 권 대표의 앞섶이 뜨겁게 짓누르고 움직였다. 생경한 감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허공으로 든 승원의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난 이런 짓도 윤승원 씨랑 하는 게 처음인데.”
“하, 으읏…….”
“이 정도면 경험보단 재능이라고 쳐주는 게 낫지 않나.”
사포 같은 음성이 귓가를 긁듯이 들어왔다. 승원의 뺨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던 권 대표가 급기야 동그란 귓불을 와락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어 대며 반응을 살피니, 눈 한쪽을 질끈 감은 승원이 벌어진 입술로 아이처럼 흐느꼈다.
“대표님…….”
“…왜. 왜 불러요.”
짧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뭉근한 허리 짓을 이어 나가면서도, 상체는 온전히 승원에게만 집중한 채 권 대표는 승원의 얼굴과 쇄골 곳곳에 제 흔적을 새겼다.
“대표님은 제가 얼마나… 좋은지…….”
“말해 달라고?”
승원이 쳐든 고개로 얼른 끄덕였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권 대표가 헛웃음을 보였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평생 갈까 봐, 무서울 정도입니다.”
“…….”
“그러니까 나 같은 걸 받아들인 이상… 평생 위기감 느끼면서 살아야 할 겁니다, 윤승원 씨는.”
달빛에 비쳐 번지는 그의 얼굴이, 귀 안쪽에 하나하나 새기듯이 들어오는 묵직한 목소리가, 승원은 전부 버거웠다. 번복 따위 없을 것 같은 그 무시무시한 신뢰가 온몸을 잔뜩 돌다가 마침내 심장에 도달했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그가 말했다.
“평생 나만 사랑하고, 나만 좋아해야 돼요.”
“…그럴 거예요.”
“그 말, 지금이 아니고 나중이 되어서라도 지키세요. 장난으로 하는 소리 아니니까.”
“저도…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닙니다”
승원이 먼저 입술을 내밀었다. 잠시 굳어지던 권 대표의 뺨 위로 입술을 맞댔다. 바로 떨어지지 않고 물기에 젖은 입술을 살살 비비자, 그가 간지러운지 얕게 웃음을 지었다.
“이러다간 여기서 일 치르게 생겼네.”
“……대표님.”
그만 일어나려는 권 대표의 어깨를 승원이 덥석 붙잡았다. 다급하게 붙잡은 것 치고는 그 이상 더 끌어당기지도 못하고 승원은 그의 옷을 갉작이기만 했다. 승원의 벌어진 셔츠를 정리해 주며 권 대표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왜.’ 그가 짧게 물었다.
“…여기서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뭐?”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승원의 두 눈을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던 권 대표가 눈 한쪽을 찡그렸다.
“어제 나한테 그렇게 시달리고도 또 하고 싶습니까?”
“…그럼 대표님은 하고 싶지 않으세요?”
“말이 왜 그렇게 돼.”
억양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권 대표가 승원을 번쩍 안아 들었다. 내내 승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승원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물었다.
“나랑 섹스하는 게 그렇게 좋습니까.”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온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권 대표의 등허리를 두 다리로 힘껏 묶은 승원이 고개를 떨군 채 열심히 주억거렸다. 180이 다 되는 키의 승원을 들고도 힘에 부치는 티 한 번 내지 않은 권 대표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옆에 보이던 소파에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승원의 엉덩이 두 쪽을 콱 움켜쥐었다. 등줄기를 바짝 세운 승원이 권 대표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설핏 미소 지은 그가 승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를 용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렇게 쉽게 다 주려고 합니까.”
“…….”
“내가 밉지도 않아요?”
벌어져 있던 승원의 셔츠 단추를 그가 하나씩 채워 나갔다. 진심 어린 마음이 새겨진 그 평온한 질문을 승원은 한참 더듬고 곱씹었다. 점점 위쪽으로 올라오는 그의 커다란 손등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지며 승원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너무 좋아하면, 그게 잘 안 돼요.”
“…….”
“미워하려고 몇 번 노력은 했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그것마저 다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가 대표님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처음부터 관계를 먼저 시작한 쪽은 승원이었다. 그가 뒤늦게서야 제 마음을 깨닫고 승원에게 매달리기 한참 전부터 승원은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승원이 먼저 시작했던 만큼 그를 향해 착실하게 쌓아 온 감정 역시 더 깊고 짙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홀로 버텨 온 그 모든 시간이 다 무색해질 만큼, 승원은 여전히 그가 너무 좋은데. 그래서 또 이전처럼 그의 마음이 기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한 불안은 지금도 역시 승원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승원은 그를 마음 편히 미워할 수 없었다. 자신이 미워하는 순간, 상대가 미련 없이 자신을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겠다는 상대의 각오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승원의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었다.
어느 순간 승원은 권 대표의 손등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권 대표가 그런 승원의 손을 살며시 치워 내고 뺨을 붙잡았다. 짧지만 농밀한 입맞춤이 붙었다 떨어졌다.
“난 어차피 연애에 대한 요령이 없어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모든 건 전부 윤승원 씨가 처음일 겁니다.”
“…….”
“윤승원 씨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이상, 휘둘리는 것도 내 쪽일 거고, 서투른 쪽도 나일 겁니다. 그러니까 미워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마음 편히 날 미워해도 좋습니다.”
“…….”
“윤승원 씨가 언젠가 내게 질려 날 있는 힘껏 밀어내려고 한들, 어차피 난 윤승원 씨에게서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으니까. …붙잡고, 매달리고, 울부짖어서라도 윤승원 씨를 놓치지 않고 내 옆에 붙여 둘 겁니다.”
뚝, 뚝, 고여 있던 물이 낙하하듯 승원의 귀로 들어온 그의 목소리가 동그랗게 번졌다. 승원이 조심스레 팔을 뻗어 권 대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목에 얼굴을 묻자, 등허리를 감싸 안는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날 받아 주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윤승원 씨가 유일할 테니까…….”
“…….”
“그냥 날 사랑하기만 해요. 나는 그거면 됩니다.”
“벌써 사랑하고 있어요…….”
승원이 움켜쥐던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뜨겁게 닿은 가슴 안쪽이 후끈거렸다. 이상하게 눈가가 시렸다. 슬픈 말을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심장 한편이 달아오르더니 이내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간 열기는 종내에 눈물샘에 도달했다. 턱 끝까지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벅찬 와중에도, 그 물속으로 빠져 잠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윤승원.”
“…….”
“나 봐.”
살갗을 파고들 것처럼 얼굴을 붙이고 있던 승원의 뺨을 권 대표가 조심스레 들었다. 턱 끝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승원의 아랫입술을 그가 지그시 물었다. 알아서 벌어진 틈새로 혀가 들어왔다. 승원이 숨을 꾹 참고 그의 혀끝을 입 안에 머금었다. 부드럽게 뒤섞이는 서로의 숨을 느꼈다. 입술이 다 녹아내릴 듯이 달콤한 키스였다.
***
승원은 드라마 세트장과 권 대표의 집이 가깝다는 핑계로 그의 집에서 출퇴근했다. 처음엔 칫솔을, 그다음엔 잠옷을, 그리고 그 밖의 외출복과 이런저런 승원의 물건들이 깨닫지 못한 사이 그의 집에 셀 수 없이 쌓여 갔다.
깊이 잠겨 있던 꿈이 한 가닥, 한 가닥 벗겨지더니 얇은 눈꺼풀 위에 짧은 입맞춤이 닿았다. 이상한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치락거리던 승원이 간지러운 얼굴을 긁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슬슬 일어나지.”
권 대표가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며 가볍게 물었다. 승원의 등허리를 잡아 일으켜 준 그가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침실은 그의 냄새가 나서 그런 건지, 머리만 대도 잠이 솔솔 왔다. 승원은 권 대표가 건넨 물을 받아 마시고 하품과 함께 얇게 깔려 있던 졸음을 털어 냈다.
“얼른 아침 먹고.”
“…….”
“숍까지는 내가 데려다주겠습니다.”
“…매니저 있는데, 굳이…….”
“굳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로 번들거리는 승원의 입술을 그가 엄지로 꾹 눌러 닦아 냈다. 승원의 헝클어진 머리를 잘 정돈해 주는 권 대표를 향해 승원이 두 팔을 뻗었다. 그런 승원이 귀엽다는 듯이 웃은 권 대표가 상체를 살짝 굽혔다. 승원이 그의 허리를 꽉 안았다.
“아침 인사를 매번 이렇게 해야 합니까.”
“…이러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서요.”
“내가 평소엔 윤승원 씨 나이를 까먹고 지내다가도…….”
몸을 스르륵 떼어 낸 권 대표가 손을 들어 승원의 이마를 동그랗게 드러내고 그 위를 장난스럽게 쳤다.
“이럴 때 보면 엄청 애인 게 티가 나서.”
“…그래서 별로이십니까.”
승원이 짐짓 뾰로통한 얼굴로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승원은 언젠가부터 권 대표에게 부리는 어리광이 확 늘어 있었다. 티 나게 삐진 낯을 보이기도 했고, 기분이 좋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들어 껴안거나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전부 받아 주었다.
“그럴 리가.”
상체를 일으키려던 승원의 몸이 다시 뒤로 휙 밀렸다. 매트리스가 출렁, 기울었다. 긴 팔을 뻗어 협탁 위에 머그잔을 내려 둔 권 대표가 승원의 몸을 포박하고 위로 올라탔다. 티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 끝을 간지럽게 긁었다. 목을 움츠린 승원이 옅은 신음을 뱉었다.
“매번 아침에 눈 뜬 윤승원 씨 얼굴 보는 것도 새롭고 좋은데.”
“…….”
“그냥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살지 그래요.”
입을 맞추려는 그를 보고 승원이 얼른 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광대를 씰룩이자, 그가 다짜고짜 힘으로 밀어붙여 승원의 입술을 벌렸다. 틈 사이로 파고든 혀가 거칠게 안쪽을 비집고 핥았다. 아침부터 정도를 모르고 빨아 대는 남자에 두 눈을 콱 찡그린 승원이 힘겹게 가슴을 밀어냈다.
“누가 알기라도 하면… 저 큰일 납니다.”
“그럼 다른 층으로 오던가.”
“…….”
“이사는 그쪽으로 하고, 살기는 나랑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그가 짧게 덧붙였다.
권 대표는 며칠 전부터 계속 승원을 회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집에 빈방도 많다고, 아무 곳이든 내어 줄 테니 여기서 지내라며 끝도 없이 승원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너무 당연하지만, 승원은 당장이라도 집에 있는 짐을 다 싸서 오고 싶었다. 눈을 뜨는 매일 아침, 잠들어 있는 권 대표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잠에서 깨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계획을 미루게 되는 것은, 지금 가진 이 적당한 떨림이 언젠가 사그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은 지독히도 안락하고 달콤했지만, 그만큼 지금 충분히 만끽 중인 떨림과 설렘이 그로 인해 끊길까 봐 승원은 무서웠다.
“조금 더 생각해 볼래요.”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승원이 먼저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혹시 자신의 거절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권 대표는 승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만지고 침실 밖을 나갔다.
“이거 챙기세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권 대표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승원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 안엔 텀블러에 담긴 빨간 토마토 주스와 샐러드,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을 수 있는 즉석 밥 등이 들어 있었다. 승원이 의아한 얼굴로 핸들을 돌리는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제 거예요?”
“거기 있는 거 다 먹고 인증 사진 보내세요. 그것 말고도 오늘부터 매끼 뭐 먹는지 나한테 보고하는 것으로 합시다.”
“…….”
“옆에서 보면서 느끼는 건데, 윤승원 씨는 밥을 너무 안 먹습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승원의 쪽으로 눈을 힐끔 돌렸다.
“약속하세요, 빨리.”
“…그럼 토마토 주스는 숍 가서 먹고… 나머지는 점심이랑 저녁에…….”
“아니지.”
그가 한숨을 쉬었다.
“한 끼 식사로 다 먹으란 소리입니다. 토마토 주스 가지고 누가 한 끼를 버팁니까, 미련하게.”
권 대표가 손을 뻗어 승원의 손을 끌어왔다. 길고 마른 손가락을 느릿하게 쓰다듬더니 이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가득 깍지를 끼웠다.
“고기도 좀 더 먹고. 살 좀 찌우세요.”
“…그거는 나름 식단 관리를 한다고 하는 건데…….”
“어차피 윤승원 씨는 마른 체질이라 그거 좀 먹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그리곤 전방을 바라보고 핸들을 돌리던 그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살이 좀 붙어야 내가 만질 데도 생기지.”
멍하니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승원이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눈에 힘을 줬다. 이내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승원이 깍지 끼고 있던 손아귀에 꾸욱 힘을 주었다.
“…지금 그냥 대표님 사심 채우시려고…. 살 더 찌면… 다들 별로 안 좋아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
“…….”
“내 건데. 내 성에만 차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그가 승원의 손등에 꾹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은 손등 주위로 열기가 번져 나갔다. 붉어진 뺨을 들키지 않으려 시선을 살짝 피했지만, 그렇다고 쿵쿵 뛰는 심장을 잠재울 순 없었다.
어느덧 좁은 골목으로 진입한 차가 속도를 낮췄다.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길이라 권 대표는 승원의 손을 아쉽게 떼어 내고 핸들을 움직였다. 승원은 그가 안겨준 종이 가방만 만지작거리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건물 앞에 도착한 차가 깜빡이를 켜고 정차했다. 기어를 바꾼 권 대표가 승원의 쪽으로 몸을 틀었다.
“윤승원 씨, 가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네.”
“왜 당장 우리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건지 궁금한데.”
“…….”
“혹시나 해서 얘기하자면, 난 이제 가족들의 간섭을 더 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고, 다시 말하면 윤승원 씨가 내 가족들과 관련된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혹시 그게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그 점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권 대표의 말을 가볍게 막은 승원이 입술을 달싹였다. 승원의 말을 기다리던 권 대표는 벨트가 불편했는지 아예 풀러 버렸다. 핸들에 한쪽 손을 기댄 채 그가 묵묵히 승원을 바라보았다.
“저도 대표님이랑 살고 싶어요.”
“…근데 왜.”
“그렇게 되면 대표님이랑 매일 밥을 먹고, 생활하고, 잠자고… 그런 것들을 계속 반복할 텐데. 익숙하게 반복되는 것들이 언젠가는 지겨워질까 봐. …그러면 지금처럼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조금은 무관심하게 변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거지만, 어쨌든 지금 대표님을 만나면서 느끼고 있는 두근거림이 저는 좋아요. …그래서 대표님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매일같이 지겹게 보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말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승원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윤승원 씨.”
그의 부름에 떨어지려던 고개를 승원이 들었다. 승원을 부르고도 한참 침묵만을 유지하던 권 대표가 승원의 뺨을 자연스럽게 그러쥐었다. 가까워진 거리에 진정하려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윤승원 씨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확인하고 싶은데.”
“…….”
“지겨워지고, 무관심해진다는 게 내 쪽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언젠가 익숙해져서 윤승원 씨에게 지금 같지 않을까 봐,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
목소리가 순식간에 까칠하게 뒤바뀌어 있었다. 승원은 할 말을 잃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권 대표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내뱉었다. 말을 한참 고르는 것처럼 그는 입술을 축이고 승원을 찬찬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뭐라고 하려는 거 아니니까 고개 들어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권 대표는 유한 목소리로 승원을 불렀다. 승원이 떨구고 있던 눈을 들었다.
“나는 윤승원 씨와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이 무조건적으로 좋아서, 그래서 집으로 당장 들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윤승원 씨 말을 들으니… 지금 윤승원 씨가 하고 있는 고민도 어느 정도는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난 윤승원 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윤승원 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온몸으로 보여 주고, 깨닫게 하고 싶은데도 그게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나도 가끔 나한테 짜증이 나기도 하고.”
눈앞의 남자가 천천히, 온몸을 쓰다듬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승원이 크게 숨을 쉬었다. 맞물린 눈동자로 그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윤승원 씨가 나랑 같이 산다고 해도, 매일매일이 지금처럼 새롭기만 할 겁니다.”
“…….”
“그래도 윤승원 씨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나도 충분히 알았으니, 존중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라도 기다릴 테니, 그냥 마음 편할 때 나한테 얘기해요. 그럼 윤승원 씨가 우리 집 밑으로 이사를 오게 하든, 다른 집으로 같이 짐을 옮기든, 윤승원 씨 편한 대로 할 테니까.”
단단한 망치질이 이어지듯, 그가 깊숙이 못을 박았다. 단언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승원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각오가 그의 말 부분 부분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내 말 알아들었습니까.”
멍울진 눈동자만 잔잔하게 움직이는 승원에 권 대표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승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 안 할 거면 키스라도 하고 가지 그래요.”
“…해 주세요, 대표님이.”
입술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에서 승원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 대표가 승원의 양 볼을 꽉 붙잡아 끌어당겼다. 뺨을 옆으로 휙 틀어 버린 그가 진하게 입을 맞췄다.
“……흐, 으읏-.”
원래도 권 대표가 징그럽게 빨아 대 부풀어 있는 입술 아래쪽을 그가 잘근잘근 씹었다. 혀끝으로 입술 새를 부드럽게 애무하자 안쪽이 스르륵 틈을 벌렸다. 승원이 눈을 꾹 감고 점점 부드럽게 갈음되는 키스를 있는 힘껏 느꼈다. 달콤한 감각에 배 안이 온통 분홍 물결로 넘실거리는 것만 같았다.
승원은 온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이젠 마음 편히 인정해도 될 것 같았다. 사랑하는 만큼 불안할 것이고, 불안한 만큼 다시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된 거다. 그렇게 끝없는 사랑을 이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가 옆에 있는 이상 매 순간, 찰나마다 이 찬란한 확신을 반복해 나가면 될 테니까.
러브 인 도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