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감정의 모순
승원은 탈 없이 해외촬영을 마치고 들어왔다. 제 개인적인 일로 비즈니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승원은 이제 감히 프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었다.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최상은 아니어도 최선의 컨디션으로 촬영에 임했다.
낮과 밤은 생각보다 금방금방 뒤바뀌며 지나갔다. 승원은 멍한 오전을 보내다가 꾸역꾸역 회사로 나가 대본을 점검하고, 곧 다가올 촬영 재개를 준비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금방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주말이 찾아와 있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승원은 저 자신을 위로했다. 혼자 있으면 치명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승원은 조금이라도 마음이 땅을 파고 들어갈 것 같으면 곽영찬에게 전화를 걸거나, 무작정 밖을 나가 연습을 핑계로 회사에 나갔다.
그래도 자려고 눕는 순간엔 혼자만의 시간이 불가피했다.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며 승원은 권차현이라는 남자를 생각했다. 정말로 상견례를 치렀을까 궁금했다. 양가 부모들의 앞에서 그와 함께 자리를 지킬 여자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했다. 제 얼굴을 닮았다던 그 여자일지도 궁금했다. 그는 제가 좋다고 했는데, 그럼 제 얼굴을 닮은 여자도 금방 좋아지지 않을까 어림 짚었다. 그렇게 생각의 꼬리를 끝없이 물고 늘어지다 승원은 잠이 들었다.
존재를 잊어 가는 일이라는 건 지나치게 괴로운 건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 지났다고, 승원은 바닷가에서의 일이 가물가물했다. 어쩌면 이제 그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잘 잊어 가는 줄 알았다. 정말 정리라는 걸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를 이기고 마주한 존재는 최면도 통하지 않았다.
***
“어! 윤승원이다!”
“윤승원! 승원아! 여기 한 번만 봐 줘!”
“이 이상 접근하시면 위험합니다.”
스무 명 남짓 되어 보이는 무리가 우글우글 건물 주위를 감쌌다.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려 쓴 승원을 용케 알아본 팬들이 급히 카메라를 들어 플래시를 난사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연신 이어지고 경호원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아픈 데는 괜찮아요?!”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마스크를 잠시 턱 밑으로 내린 승원이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니 모두 입을 맞춘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예고되어 있던 스케줄도 아닌데, 용케 알아채고 찾아온 팬들이 새삼스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건물 입구부터 긴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건물 주위로 길게 늘어진 화환들은 금칠이라도 한 것처럼 호화스러웠다.
리뉴얼을 마치고 서울에 새롭게 자리 잡은 YS 면세점의 개회식이었다. 매장 입구 안쪽으로 검은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승원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그레이 색 정장을 갖춰 입은 승원이 어색하게 구두를 움직이며 이어지는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시야 주위로 잘빠진 정장들이 움직일 때마다 승원은 불편한 눈을 내려야 했다. 이곳에 권 대표가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없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 선언이 떨어지듯 승원은 이곳 면세점의 홍보 대사로 위촉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권 대표의 입김이 아니고서야 자신이 갑작스레 유성그룹 브랜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한참 전에 그의 집안 결혼식에 따라가 얼굴까지 드러내고 온 처지였기에, 집안에서 승원이 누군지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 자신이 아무런 저항 없이 이 자리에 승인되었다는 점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권 대표와 그렇게 이별을 고한 이후로 승원은 그의 연락을 전부 차단한 상태였다. 승원의 쪽에서 그를 먼저 차단했기에, 그날 이후로 권 대표가 자신에게 연락을 남겼을지는 알 수 없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승원이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사이, 누군가가 승원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정갈하게 안경을 치켜세운 남자가 승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남자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든 승원이 그 안에 적힌 이름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잠시 만나 뵙고 싶어 하시는데. 가능할까요?”
승원은 남자를 따라 복도 안쪽으로 이동했다. 인적이 잦아든 공간엔 두 사람의 교차하는 구두 소리가 전부였다. 남자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 들어간 승원이 그가 열어 주는 문밖으로 조심스레 나갔다. 찬바람이 훅 스치는 테라스 형식의 흡연 구역이 나타났다.
검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여자가 손가락에 끼운 담뱃재를 털어 내며 승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권 대표와 똑 닮은 날 선 눈매와 창백한 피부, 타고나게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여자는 과거 식장 객실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네요?”
높은 톤의 목소리와 함께 권희연이 눈썹을 비죽 들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에 승원의 앞머리가 휘날렸다. 승원의 안내를 마치고 돌아가는 남자의 자취를 따라 유리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입김인지 담배 연기인지 구분이 어려운 것이 권희연의 입 밖으로 흩날렸다.
“몸은 좀 괜찮아요?”
“…….”
“다쳤었잖아요. 드라마 촬영하다가. 맞죠?”
능청스레 물어 오는 그녀의 질문에 놀랐던 것도 잠시, 승원은 제 부상 기사가 온 포털 사이트에 떠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젠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승원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승원에게 대꾸하지 않은 권희연은 마지막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는 재떨이에 툭툭 털었다. 저번에 승원이 보았던 감상 그대로, 그녀는 성의 없는 손짓까지 제 동생 권차현과 꼭 닮아 있었다.
다만, 처음 마주쳤던 어느 날처럼 술에 절어 있지 않은 여자는 첫인상보다도 훨씬 깔끔하고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외향만으로 느껴지는 적당한 부내와 도회적인 이미지는 승원이 권 대표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인상과 거의 흡사했다.
짧게 목을 울린 권희연이 승원을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승원은 묵묵히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을 뿐이었다. 팔짱을 꼭 낀 권희연이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키가 큰 여자는 눈높이에 있어 승원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
“승원 씨, 혹시 내 동생이랑 헤어졌어요?”
“……예?”
돌발적인 질문에 승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되묻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그러나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 됐든 승원은 망설일 게 없었다. 승원이 그와 헤어졌다라는 질문은 성립 자체가 될 수 없었다. 자신은 권 대표와 헤어질 일이 없었다. 애초에 이루어지지도 않은 관계였으니까.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대표님과 만난 적 없습니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승원이 대답했다. 애초부터 인정하고 있던 사실임에도 새삼스레 가슴이 쓰렸다.
“으음. 그래요?”
심드렁하게 대꾸한 권희연이 심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티끌만큼도 믿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애인이라면서 손 붙잡고 결혼식까지 따라왔던 건 전부 짜고 친 거였어요?”
“…….”
“뭐야, 말이라도 맞추지. 이제 와서 김빠지게.”
승원이 권 대표에게 호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제멋대로에 효율도 따질 줄 모르는 바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승원의 손을 무작정 잡아끌고 다니고, 승원이 저의 가족에게 무슨 일을 당하든 신경 한 톨 쓰지 않는 배려 없고 무성의한 남자였다.
그 답 없고 막무가내인 식장에서의 남자와 얼마 전 승원을 끌어안고 세심하게 연고를 발라 주던 남자는 다른 차원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변화를 온몸으로 보여 줘 놓고, 이제 와 승원을 놓아준다던 그의 선택 역시 지독히도 그다운 모습이었다. 그때 그 얼굴이 다시 머릿속에 아른거려, 승원은 혼자 쓰게 웃음 지었다.
“왜 말이 없어요.”
“…….”
“정말 권차현이랑 만난 게 아니에요?”
승원의 얼굴을 갸웃거리며 떠보듯 중얼거린 권희연이 담배 하나를 다시 꺼내 입에 물었다. 탁탁, 불을 붙인 담배의 끝이 붉게 타들었다. 앞머리를 뒤로 넘긴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우리 동생 상견례 기똥차게 망치고 온 건 아시려나.”
순간 승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가 상견례를 망쳤다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고 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르는 얼굴이네요.”
“…….”
“그 미친 새끼 때문에 전부 망쳤어요. 양가 다 모인 자리에서 자기가 남자랑 씹질하는 건 아냐더니 분위기를 아주 지랄 박살을 내 버리고. 내가 살다 살다… 어른들 다 모신 자리에서 씹질이란 소리를 들어 볼 줄은 몰랐는데.”
말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그녀는 픽 웃음을 보였다.
“하여튼 도움 안 되는 새끼……. 그러고 나가 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고. …내가 뒷수습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
원망스럽다는 듯이 권희연은 한참을 투덜거렸다. 승원은 멍한 얼굴로 담배를 문 채 중얼거리는 권희연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모든 걸 다 체념한 듯이 승원에게 그만두자는 말을 내뱉던 그의 흐린 낯이 떠올랐다. 도대체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후의 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소리를 함부로 뱉고 나온 걸까.
“그쪽 데리고 결혼식장 왔을 때도 소꿉놀이 재밌게 한다 싶었는데. 약혼자 집안이라며 모시고 온 사람들 앞에서 씹질 소리까지 할 수 있는 패기가 어디서 나왔나 보니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윤승원 씨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
“그래도 만난 게 아니에요?”
결국 승원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알면 알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가 진정 얻으려고 했던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 식으로 상견례를 망치고 왔을 것이라고는 감히 예상해 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안정을 갈구하려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가 그렇게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것이.
승원의 눈앞에 뿌연 담배 연기가 흩날렸다. 맞은편 상대의 얼굴을 가리는 하얀 연기가 사라지고 나면, 언제나 냉연했던 그의 얼굴이 대신 자리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권희연이 잠시 몸을 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계를 확인한 그녀가 필터를 입에 문 채 잘근거리는 발음으로 ‘날씨가 왜 이래.’라며 중얼거렸다.
“그쪽을 우리 홍보 대사로 임명한 건 내 결정이었어요.”
“…왜 저를.”
여상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권희연을 바라보며 승원이 말꼬리를 늘렸다. 그런 승원을 보면서도 그녀는 태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쪽에서 오래 쓰던 모델이 이번에 약을 했더라고요. 당장 개회식이 코앞인데, 약쟁이를 모셔 올 수는 없으니까.”
“…….”
“급하게 나열한 후보 중에서 윤승원 씨가 능력도, 평판도 제일 괜찮더라고요. 요즘 안 보이는 데가 없던데. 어차피 우리도 이미지 장사인데, 그쪽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내 동생이랑 씹질을 하든, 연애를 하든. 그건 나랑도, 사업이랑도 관계없으니까.”
입에 문 지 얼마나 됐다고, 기다랗던 담배가 벌써 반이나 타서 없어진 채였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주변으로 하얀 연기가 자욱했다. 눈 한쪽을 가늘게 치켜뜬 권희연이 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아요. 나는 윤승원 씨를 능력만 보고 여기 초청한 거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승원이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한숨 같은 것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권 대표가 자신을 이곳에 꽂아 둔 건 아닐까 했던 멍청한 오해가 그대로 증발하는 순간이었다. 승원 때문에 그가 손을 쓴 부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젠 그게 당연했다. 당연한 걸 또 한 번 망각하고 있었다.
“도저히 알 수가 없네. 평생을 혼자가 낫다고 지랄할 땐 언제고.”
권희연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뇌까렸다.
뒤늦게 터져 나오려는 쓰린 웃음을 승원이 어렵게 삼켰다. 그거 조금 못 참고 자리까지 박차고 나온 남자가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을 그렇게 내쳐 버린 건지. 뭘 믿고 자신을 못 보겠다며 떳떳이 지껄일 수 있었던 건지.
“그리고 여기 권차현 안 오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말아요.”
난간 위에 놓인 재떨이에 거의 다 태운 담배를 지그시 눌러 꺼뜨린 권희연이 말했다.
“난 윤승원 씨한테 악감정 없어요. 이제 정말 그 애랑은 서로 볼일 없어 보이니 긴말은 안 하겠지만, 설령 걔랑 만난다고 해도 어차피 내 관심 밖이고.”
“……네.”
“나 먼저 들어갈게요. 안에서 봐요.”
승원에게 반듯한 웃음을 남긴 권희연이 승원의 어깨를 톡톡 쳐 주었다. 또각또각 울리며 멀어지던 구두 소리가 잠시 멎었다. 아,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외마디를 뱉은 그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승원에게 말했다.
“그 새끼 요즘 지좆대로 살던데.”
“…….”
“그것만 어떻게 좀 해 봐요. 하는 꼴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더라고.”
무표정하게 지껄이더니 다시 미소로 갈음한 여자가 문을 밀고 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승원은 무상히 응시했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승원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진한 먹구름뿐이었다.
애초에 뭘 기대한 걸까. 자신이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그의 꾀가 아니었음에 머리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편하지 못했다.
그를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안도보다는 허무함이 자꾸만 몸속을 휘돌고 비틀었다.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이젠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고 생각했건만, 그의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다시금 미친 듯이 그가 보고 싶었다.
***
개회 선언이 시작되고 마이크의 울림 소리가 커다랗게 공간을 메웠다. 좀처럼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에 승원은 가만히 앉아서 남들을 따라 박수만 쳤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들만 보이던 단상 위로 권희연이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의 인사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테라스에서 보았던 태평하고 지긋한 눈동자는 어디로 가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를 내비치며 정돈된 목소리로 목을 울렸다. 스치듯 시선이 부딪칠 때마다 권희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승원은 모르는 사람인 양 지나쳤다.
한참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지던 그때, 승원의 뒤쪽에서 무언가 어수선한 낌새가 느껴졌다. 귀 뒤쪽이 간지러운 걸 참고 전방만 주시하던 승원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른 이들의 수군거림에 멀찍이 시선을 옮긴 승원의 낯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
오래간만에 보는, 갑작스러운 얼굴이었다. 착각이라고 하기엔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역시 훤칠한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가슴 한쪽에 승원과 같은 꽃을 달고 이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원래도 날렵했던 턱선이 전보다도 훨씬 가늘게 변한 것 같았다. 길게 다물고 있는 얇은 입술이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힘껏 끌어안아 입을 맞추던 상대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앞의 남자는 초면처럼 낯설었다. 지금까지 그와 이어 나갔던 인연이 허황된 망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권차현이라는 남자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권희연은 분명 그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수습할 길도 없기에 얼른 고개를 돌리려 했건만, 그를 향해 꽁꽁 굳어 버린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쿵쿵 뛰는 맥박이 점점 더 빨라졌다.
“또한, 저희 YS 면세 서울점은 새로운 오픈을 발판 삼아…….”
단상 위에 있던 권희연의 시선 역시 난데없이 들이닥친 제 형제를 향해 있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권 대표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쫓던 권희연이 실소를 내뱉었다. 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커다랗게 울렸다.
다른 이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은 권 대표는 모든 자리를 스쳐 지나 가장 앞쪽에 있던 빈자리에 착석했다. 반달로 깎인 눈동자가 무감동한 얼굴로 단상을 향해 턱짓했다.
“자, 이어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끝 쪽에 서 있던 사회자가 기어이 마이크를 들었다. 줄곧 권 대표를 향하고 있던 권희연의 시선이 가까스로 떨어졌다. 어처구니를 상실한 미소를 남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목을 길게 뺀 승원이 저 멀리 앞자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기골을 뽐내는 어깨가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승원의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승원만큼이나 황당해 보이는 권희연의 표정을 보아 그녀가 승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예정되어 있지 않은 행사에 그가 갑자기 참석한 이유가 뭘까.
지루하게 이어지던 행사도 어느덧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권 대표는 원래도 없던 사람처럼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승원은 계속 시야에 걸리는 남자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신이 너무 싫었다.
준비된 커팅식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승원이 자리를 잡고, 그 옆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자리했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 한쪽이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향해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승원은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한 낯을 유지하려 애썼다.
“자자, 좋습니다. 자리에 잘 서 주시길 바랍니다!”
양옆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서 있던 승원은 순간 진한 현기증을 느꼈다. 손에 들린 끈을 움켜쥔 승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옆으로 밀려나며 누군가 승원의 옆으로 자리를 꿰고 들어왔다. 그림자 같은 인영이 느껴지고 어깨가 바짝 부딪히기 전까지도 승원은 뒤바뀐 옆 사람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반쯤 풀린 승원의 정신을 깨운 건 코끝에 스친 익숙한 향수 냄새였다.
설마.
천천히 고개를 들던 승원의 눈동자가 움찔 떨렸다. 거칠게 꿀렁인 목울대가 승원의 심리를 대변했다. 전방을 주시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퍽 태평한 낯으로 낮게 속삭였다.
“오랜만입니다.”
“…….”
잘 다듬어진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불안정했다. 멀쩡한 척 앞을 보는 권 대표의 잘빠진 목젖이 불안하게 동요했다.
“……잘 지냈습니까.”
산만한 주위에 입 밖으로 흘러나온 권 대표의 목소리가 그대로 휘발됐다. 잠시 지니고 있던 당혹스러움도 잠시, 입술을 짓씹은 승원이 그와 맞닿은 어깨 한쪽을 뒤로 치웠다. 옆으로 미세하게 몸을 움직이고는 시선을 내렸다. 두 눈이 일그러졌다.
잘 지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았을 리가 없었다. 잊은 줄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전부 착각이었다. 권 대표의 얼굴을 보지 못하던 지난 하루하루가 끔찍하게 불행했다. 그와 함께하면서 견뎌야 하는 서운함보다 그의 부재로 인한 고독이 더한 아픔을 남겼다.
입을 열면 거짓말하지 못하고 그에게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해 버릴 것만 같아서, 승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앞을 바라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 모두 앞에 봐 주시고! 그럼 YS 면세 서울점의 개회를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영광의 커팅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나에 엄청난 양의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폭죽 소리와 환호 소리가 함께 뒤섞여 튀어 올랐다. 웃어야 했는데, 그의 체향이 지독히도 선연했다.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가 바로 옆에 있었다. 몸을 살짝 틀어 기대면 금방이라도 안길 수 있을 정도로 권 대표가 너무도 가까웠다. 결국, 승원은 끝까지 배경 속에 섞이지 못했다.
커팅식이 끝나고도 행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승원은 자리를 돌며 샴페인을 건네는 직원을 피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석진 복도로 향한 승원이 비상계단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성급한 걸음으로 조심성 없이 달려 내려갔다. 더운 공기를 내뿜던 복도 밖을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뭉쳐 있던 숨이 입 밖으로 덜컥 새어 나왔다. 하얀 입김이 고이는 주변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때렸다. 흐릿하게 안개를 만들던 하늘이 기어이 세찬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주변을 울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여기서 울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고. 승원은 생각했다.
권 대표만 없었어도 문제없이 그곳에서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존재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갑작스레 심장이 부서질 듯 아프지 않았을 텐데. 그를 목격한 뒤로 행사장에서 있던 모든 순간들이 조각조각 찢겨 소실됐다. 방금까지 무얼 하다 나왔는지조차 승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음성과 그의 체취, 잠깐이나마 닿았던 팔뚝의 체온만이 생생할 뿐이었다.
승원은 새삼 권 대표의 앞에서 나약해지는 저 자신을 실감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아 잠시 무릎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멍멍한 귀 한쪽을 지그시 누르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윤승원 씨.”
가라앉은 목소리가 승원의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멎을 만큼 놀라 승원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상체를 일으킨 승원이 호흡을 가라앉히고 뒤를 돌았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유리문이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권 대표는 승원만큼 가빠 보였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은 얼굴로 그가 승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 밑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뭐 합니까. ……여기서.”
그가 없어 괴롭긴 했어도, 이제 조금이나마 차분함을 찾아 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이렇게 제 마음을 들쑤시는지 몰랐다. 승원은 권 대표가 원망스러웠다. 그에게 홧김에 물었다.
“여기 온다는 말 없었잖아요.”
“…….”
“분명 그 말만 믿고…….”
“윤승원 씨 때문에 왔습니다.”
강한 인상의 남자가 반쯤 일그러뜨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하듯 덧붙였다.
“너 때문에 왔다고.”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자신이 어떤 반응을 쏟아 내길 원하는 건지, 승원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새까만 물감 같은 남자는 언제나 승원에게 속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승원은 절대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그를 파악할 수 없기에,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승원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대표님이 뭐라고 저 때문에 여길 옵니까.”
“…….”
“무슨 말을 하시려고 여기까지 따라오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시끄럽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허공 위로 목소리가 먹혔다. 승원은 그토록 보고 싶던 남자의 얼굴을 낱낱이 제 눈에 담으며 아픈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은 것과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저 쫓아오지 마세요.”
“…….”
“할 말 없으니까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승원은 차마 떨어지지 않던 발을 애써 떼어 냈다. 무작정 가까이 보이는 주차장의 출구로 급하게 걸었다. 그와 점점 더 거리를 벌리며 주먹 쥔 손을 휘적여 앞으로 나아갔다.
“윤승원 씨!”
어느덧 주차장 출구를 빠져나온 승원의 머리 위로 거친 빗물이 흠씬 떨어져 내렸다. 여름의 장마와도 같은 거센 빗줄기가 하릴없이 이어졌다.
“어딜 가려고!”
그의 부름을 무시하고 가려던 승원의 어깨가 억세게 붙잡혔다. 잠깐이나마 거칠게 맞고 있던 비가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눈을 들자 다급해 보이는 권 대표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대체 어딜 가겠다는 겁니까?”
“…….”
“애초에 어디 갈지 정하고 나온 게 맞긴 합니까? 윤승원 씨 지금 무작정 발 딛는 대로 찾아온 게 여기 아니에요?”
그가 검은 우산을 펼쳐 승원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크지 않은 우산은 승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겨우 가릴 정도였다. 권 대표의 어깨가 점차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갔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권 대표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나랑……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승원을 바라보면서도 힘겨워하는 눈동자가 처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승원이 입을 열었다.
“…제가 대표님과 무슨 얘기를 합니까.”
“……전부. 아니, 윤승원 씨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원망하는 말이어도 좋습니다. 그게 뭐가 되든 당장 전부 들어 줄 테니까……. 제발 잠깐이라도.”
“저는 할 말 없습니다.”
터져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승원은 잠깐이나마 눈앞의 남자를 정성스레 들여다보았다. 개회식에서도 다른 세상의 존재 같던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르며 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끝을 다지고도 그는 아직 승원을 잊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을 보자 지금까지의 모든 걱정과 조바심이 거짓말처럼 비에 젖듯 씻겨 내려갔다. 승원이 보고 싶은 얼굴이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다. 인사불성이라던 그의 누나의 말과는 다르게, 지금 제 눈앞의 권차현은 첫인상보다 훨씬 유하고 고독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살짝 바랜 듯한 목소리와 변함없는 체취까지. 이 정도면 된 것 같았다.
승원이 매번 힘겹게 허물려던 둘 사이의 관계를, 그는 기어코 분리해 선을 그었다. 그런 남자에게 더 휘둘린다고 한들, 승원의 입에 떨어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걸 너무도 잘 알면서, 승원은 그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 여지껏 망설여 왔다.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조금 흔들리려던 마음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초췌하기 짝이 없는 권 대표의 얼굴을 보면서, 승원은 그를 만나며 겪어 왔던 자신의 수많은 수고와 불행을 기억해 냈다.
좋아하는 마음을 농락당하면서도 그가 좋아서 버텼고, 함께 보낸 밤을 뒤로하고 호텔 방을 나가던 그를 보면서도 승원은 제 어리석음을 자책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비겁하게 숨긴 채 자신을 제 손에 쥐고 놀리려던 남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승원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밤을 새며 그를 기다렸다. 모든 것을 감당하고 마침내 사랑해 마지않는다 생각하던 그때 역시, 먼저 끝을 부르짖은 건 제 앞의 권차현이었다.
승원은 여전히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에게 너무 불리한 일이었다.
“전부 대표님이 자처하신 일입니다.”
“…….”
“……왜 그러셨어요, 대체?”
매번 무릎을 꿇고 세상을 바라봐야 했다. 남들은 쉽게 갖는 작은 만족을 위한 대가마저 승원은 참혹했다. 그 모든 걸 견디고 이 자리에 오면서 승원은 매번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쏟아 내는 감정만큼은 가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요령 있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전부 다 퍼 주는 멍청하고 바보 같은 사랑 말고,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을 하고 싶었다. 사랑을 주기보다 받고 싶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었다.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에 대한 미련을 이제라도 씻어 내고 싶었다. 그를 알고 만나면서, 그를 사랑했기에 접어 둬야 했던 모든 자존심을 이제라도 돌려받고 싶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지금 저를 다시 붙잡는 겁니까?”
우산에 반만 걸쳐 있던 얼굴 위로 검은 파도 같은 것이 일렁였다. 권 대표가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승원은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윤승원 씨 성에 차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저한테 이러지 마시라는 겁니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간곡히 부탁하는 승원의 목소리가 침착했다. 거절과도 같은 승원의 대답에 권 대표가 망연히 입술을 다물었다. 허망함이 깃든 낯은 아무런 표정도 담지 못한 채 텅 비어 버렸다.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던 그의 머리가 엉망으로 젖어 들었다.
“……윤승원 씨, 제발-.”
권 대표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괴로울 사람은 따로 있는데, 도리어 그가 힘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원은 가슴 한쪽이 심히 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잠깐 미쳤었습니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내가…….”
퍼뜩 고개를 든 권 대표가 승원의 어깨를 붙잡으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승원이 뿌리치듯 그의 손을 떨쳐 냈다. 휙 내친 승원의 손에 권 대표의 손에 들려 있던 우산이 위로 날아올랐다.
비로부터 둘을 지키고 있던 작은 방패가 사라지고, 세찬 비를 쏟아 내는 구멍 뚫린 하늘이 펼쳐졌다. 모든 소리를 먹어 버릴 듯이 섬뜩한 자연의 울림이 일었다. 금방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얼굴로 떨어져 줄줄 흘러내렸다. 승원이 빗소리를 찢을 듯이 괴롭게 소리쳤다.
“이럴 거였으면… 저를 위해 물러나 주신다고 했던 말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때 그렇게 대표님 멋대로 결정하고, 지금은 다시 미련이 생겨서 저를 붙잡는 겁니까?”
“…….”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요? 대표님이 이런다고 제가 또 마음을 풀고 대표님을 용서해야 하는 겁니까? 이만하면 됐잖아요!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용인을 바라시는 겁니까?”
버럭 내지른 승원의 음성은 몇 센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물줄기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렵해진 줄만 알았던 권 대표의 얼굴은 비에 잔뜩 젖어 창백하고 초췌해 보였다.
“대표님이 저를 대표님 입맛대로 갖고 놀고 주무를 때도, 저는 잠자코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 대표님이 저를 싫어하면 어쩌나 매일 밤을 지새우고 전전긍긍하면서! 그런 불안을 계속 안고 살면서도… 대표님이 그냥 절 옆에 두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고 행복해서… 멋모르는 강아지 새끼처럼, 그렇게 제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매번……!”
“…윤승원 씨…….”
그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다. 승원은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대표님을 좋아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좋아하니까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왔던 거였습니다.”
분명 차디찬 빗물을 맞고 있는데, 뺨 밑으로 흐르는 물이 델 듯이 뜨거웠다. 승원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폭풍 같은 설움을 쏟아 냈다.
“지금까지 대표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는 선택권 하나 없이 무작정 기다리고 휘둘리기만 했습니다.”
“…….”
“그런데 이제는 대표님도 절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권 대표는 믿을 수 없는 걸 마주한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충격 같은 게 뒤섞인 눈동자가 점차 여린 빛으로 비어 갔다. 승원은 진정이 되지 않는 숨으로 그를 올려다본 채 가까스로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도 어디 불안하고 괴롭게 살아 보세요. 대표님 마음대로 시작하고 끝내는 그런 거 말고,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처지가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건지 몸소 느껴 보세요.”
“…….”
“전 대표님을 볼 때마다 그랬으니까.”
힘을 거의 잃은 목소리가 입술 새로 빠져나갔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고 나면, 이렇게 멋대로 찾아와서 절 붙잡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후회스러운 짓인지 깨달으실 겁니다.”
경사진 땅 위에 거꾸로 뒤집힌 우산이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처량하게 뒹굴었다. 승원의 말을 듣고 있던 찰나 권 대표의 낯 위로 쓴웃음이 지나갔다. 바들거리는 입술을 짓씹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승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뺨 밑으로 물기가 뚝뚝 흘렀다. 비를 맞아 엉망이 된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더는 대표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
“대표님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더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말을 내뱉는 승원의 눈가가 잔뜩 무너져 있었다. 울음에 먹혀 주체하지 못하는 입술을 팔뚝으로 가리며 애절하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제발 좀 가요.”
“…….”
“최악입니다, 진짜…….”
승원은 그 말을 끝으로 뒤를 돌았다. 팔뚝으로 입술을 눌렀지만, 둑 터진 눈물이 멈출 리 없었다. 등 뒤에 목석처럼 서 있는 남자를 내버려 둔 채 꿋꿋하게 위로 걸어 나갔다. 가파른 경사의 주차장 출구는 빗물에 젖어 미끄러웠다. 구둣발로 옮기는 걸음이 지나치게 위태로웠다.
승원은 애써 뛰지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권 대표가 자신을 붙잡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양심이 있다면 그래선 안 됐다. 지금 또 다시 승원을 붙잡는다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뺨을 때려 버릴 작정이었다.
그렇게 굳게 마음먹었는데, 출구를 오르면서도 빗줄기만 쏟아지는 허한 어깨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붙잡는 남자의 손은 이제 없었다.
승원은 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괴로웠다.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가 지상에 오르면, 그때부터는 정말로 권 대표를 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토록 냉정하게 그를 내쳐 놓고도, 초조함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는 하늘은 여전히 매섭고 추웠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 밑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승원은 악을 쓰고 입술을 깨문 채 위로 올라갔다. 거침없는 빗줄기가 세상 모든 소리를 앗아갔다. 승원은 목구멍 깊숙이 울음을 삼켰다. 너덜거리는 심장이 제 기능을 잃은 듯 죽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