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제자리 (12/20)

12. 제자리

나흘 정도가 지난 날이었다. 승원은 스케줄이 없는 날임에도 이른 아침 눈을 떴다. 6시에 맞춰 놓은 알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깨어나 바쁘게 이불을 정리하고 집을 치웠다. 청소를 하며 개운하게 깨운 정신으로 샤워를 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점검했다. 희미한 점처럼 남은 멍 자국은 이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승원은 이틀 전에 권 대표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비교적 가볍고 산뜻했다. 그는 승원이 전화를 받은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 윤승원 씨, 스케줄이 어떻게 됩니까?

‘…스케줄이요?’

- 엊그제 스케줄 조정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율한 결과가 어떤지 나한테 보고 좀 해 봐요.

그때 회사 골목 앞에서 헤어진 후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처음이었다. 승원은 대본을 정리하던 손도 다 멈추고 의자에 바르게 앉아 음량을 최대한으로 키웠다. 상사하게 보고하듯이 깍듯하게 제 스케줄을 이야기했다.

‘원래 당장 다음 주부터 드라마 촬영 시작하기로 했었는데, 제작 측에서 그냥 뒤로 밀렸던 분들 스케줄을 앞당겨서 전부 촬영을 끝내 놓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쩌다 보니 드라마 일정이 한 주 더 미뤄졌는데.’

- 그러면 다음 주는 쭉 쉬는 겁니까.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취소했던 해외 화보 촬영을 다음 주에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일단 알았다고 한 상태예요.’

- …비행기를 탄다고?

그가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일본으로 가는 거라 멀지도 않아요. 이틀만 있다가 올 예정이에요.’

권 대표는 승원의 대답에도 긴 시간 말이 없었다. 낮은 숨소리만 몇 초 동안 길게 이어졌고, 승원은 그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다시 말했다.

- 화보 촬영만 하고 오는 게 전부입니까?

‘…네. 벌써 컨셉 얘기도 다 끝났어요.’

- 다리는 이제 괜찮고? 얼굴은 어떻습니까.

‘다리는 진작부터 괜찮았어요. 지금은 완전 멀쩡하고, 얼굴도 한 사흘 지나면 멍은 흔적도 안 보일 거 같아요.’

한숨과 비슷한 묵직한 숨을 내뱉던 그가 물었다.

- 그럼 내일 모레는 아무런 일정 없는 거죠?

‘…네. 왜요?’

- 윤승원 씨, 가고 싶은 곳 있습니까?

‘…가고 싶은 곳이요?’

그때 승원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렇게 갑자기 화제가 바뀔 것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하기도 했고, 바뀐 화제의 질문이 그런 종류일 것이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냐는 그의 질문 하나로 승원은 순식간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질 게 뻔한데,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보세요.

‘…….’

- 윤승원 씨는 차가 없으니까, 차로 갈 수 있는 먼 곳이어도 상관없고. 평소에는 가고 싶어도 혼자 가기 힘들었던 곳으로 고르는 게 괜찮을 겁니다.

‘…대표님도 같이 가 주시는 건가요?’

- 그럼 나 말고 누구랑 갑니까.

툭 치듯 돌아온 대답에 승원이 손으로 귓불을 잘근잘근 만졌다. 갑작스러운 두뇌 회전에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혼자 가는 데에 무리가 있고 평소엔 가기 힘든 곳이 어디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승원이 천천히 입을 뗐다.

‘탁 트인 곳이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 탁 트인 곳? 바다 같은 곳을 말하는 겁니까?

‘…근데 바다는 서울에서 가기 힘들잖아요. 거기까지 가려면 네다섯 시간은 걸릴 텐데…….’

승원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 나가는 사이 전화 안쪽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그가 웃음 적신 목소리로 말했다.

- 왜 가기가 힘듭니까. 여기서 인천으로만 빠지면 두 시간 내로 널린 게 바다일 텐데.

‘……아.’

- 안 가 본 티 팍팍 내네, 아주.

승원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 그럼 바다 보러 가면 되는 겁니까?

‘…….’

- 윤승원 씨, 출국이 언제라고?

‘…저 월요일이요.’

- 당장이네. …나도 토요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요일에 당일치기로 갔다 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승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다가 뒤늦게 네, 라고 대답했다. 주고받는 말들이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가 먼저 이렇게 본격적인 계획을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가운 것보다도 낯선 기분이 머리를 심장을 앞섰다.

회사 골목에서 헤어지던 날부터 쭉 갖고 있던 근심들이 또 얼마나 의미 없고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를 승원은 새삼스레 체감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보냈을 시간 동안 승원은 또 헛된 수고를 덧대어 가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그가 먼저 전화를 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가 저런 제안을 건네는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몇이나 될까. 자신을 제외하고 더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단순한 심장은 다시금 설렘에 젖어 두근거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시계 바늘이 7에 가 있었다.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창밖을 확인하고 승원은 털이 복실거리는 야상을 껴입은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등을 완전히 기대지 않고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엉덩이를 반쯤 걸쳤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계를 멍하니 보고 있던 승원은 몇 분 뒤, 부르르 울리는 진동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7시를 맞이한 오전의 하늘은 수분을 잔뜩 머금은 회색이었다. 오늘 집 앞에 서 있는 차는 덩치가 커다란 SUV였다. 승원은 문득 그가 갖고 있는 차가 몇 개일까 궁금해지는 마음으로 조수석 문을 덜컥 열었다.

권 대표의 얼굴을 보자마자 금방 히터 바람을 맞은 사람처럼 뺨 두 쪽이 붉어졌다.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신체 반응이었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주섬주섬 자리에 앉아 벨트를 끌어오는 승원과 달리, 권 대표는 승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다렸습니까?”

“…엄청은 아니고. 준비 다 끝내니까 마침 딱 전화 오셔서.”

그가 약한 바람을 내뱉듯 웃었다. 권 대표는 승원과 비슷한 스타일의 야상 점퍼를 입고 있었다. 카키색인 승원과 다르게 권 대표의 것은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색만 다를 뿐, 옷 생김새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꼭 함께 맞춰 입고 온 것처럼 거의 똑같았다. 승원은 이번엔 귓불까지 붉어져 귀 뒤를 긁적였다.

“겨울이라 바다로 나가면 많이 추울 텐데. 그걸로 되겠습니까.”

“…이거 엄청 따뜻해요.”

그가 핸들을 돌렸다. 출발하는 차에 부드럽게 몸을 맡긴 채 승원은 제가 입은 옷차림을 다시 확인했다. 아파트 밖을 빠져나가면서도 권 대표는 힐끔힐끔 승원의 쪽으로 눈을 기울였다.

“목도리는 챙겼어요?”

“…아니요.”

“장갑은.”

“장갑 같은 거 껴 본 적이 없는데.”

추워 봤자 얼마나 추울까 싶었다. 목도리나 장갑 없다고 코 흘릴 나이는 한참 지났는데, 권 대표는 승원을 무슨 어린애 취급을 했다. 승원은 손을 뻗어 히터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따스한 바람이 손바닥을 에웠다.

“그럼 대표님은 챙기셨어요?”

“장갑은 몰라도 목도리는 챙겼습니다.”

“…….”

그 역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추위 하나 안 타게 생긴 남자는 승원보다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한 상태였다. 별생각 없던 승원도 그런 말을 들으니 약간 걱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겨울 바다는 한참 어릴 때 가족끼리 먼 곳으로 한두 번 갔던 게 전부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얼굴 좀 봅시다.”

불쑥, 패널 너머로 손이 넘어와 승원의 뺨을 가볍게 건드렸다. 앞을 보고 있던 승원의 고개가 운전석 쪽으로 자연스레 돌아갔다. 차에 올라타서 처음 제대로 맞이한 눈 맞춤이었다. 가느다란 흑색의 눈동자가 승원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었다. 마지막엔 손바닥이 잠시 승원의 뺨을 덮고 지나갔다.

“멀쩡하네, 이제.”

“…네. 완전 다 나았어요. 진짜로.”

“그래도 조심하세요. 낫고 있는데 덤벙거리다간 더 크게 다치는 수가 있습니다.”

간단한 충고를 곁들인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승원도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꾹 당겼다. 나흘 전과 공기가 달랐다. 그때는 안개가 가득 껴 있는 침침한 겨울 같았다면, 오늘은 흐린 아침이었음에도 차 안에 가벼운 공기가 둥둥 떠 있는 봄 같았다.

“대표님 아침은 드셨어요?”

“따로 먹진 않았는데, 당장 배가 고픈 상태는 아닙니다. 윤승원 씨는.”

“저도 지금 엄청 허기진 건 아니에요.”

엄청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을 뜬 순간부터 물 한 번 입에 안 댄 상태라 조금 허한 느낌은 있었다. 참을 만해서 내색하지 않고 차창 밖을 얌전히 바라보고 있는데, 잘 달리던 차가 길 옆에 멈춰 섰다. 승원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권 대표가 손등으로 히터 세기를 확인하고는 방향지시등을 눌렀다.

“편의점 갈 건데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승원은 그제야 길 위에 보이는 편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승원도 얼른 벨트를 풀고 차 문 손잡이를 잡았다.

“저도 같이 가요.”

“거창한 것도 아닌데 그냥 있으세요. 괜히 들어갔다가 눈치만 볼 거면서.”

“…….”

그 말도 맞아서 승원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권 대표는 나가기 전에 다시 눈썹 한쪽을 비틀고 물었다.

“진짜 없습니까? 먹고 싶은 거라든지. 마시고 싶은 거라든지.”

“막 생각나는 건 없는데…….”

“기다리세요.”

단호하게 문을 닫고 나간 남자가 보닛 너머로 보였다가 큰 키를 드러내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이 훤히 뚫려 있어서 승원은 차창에 바짝 붙어 그의 동선을 이리저리 눈으로 좇았다. 유리창에 잠시 비쳐 보이다가도 진열대 뒤로 숨으면 보이지 않았다.

체감상 1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권 대표는 곧장 편의점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조금 흥미로워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입김을 불며 다가오는 모습이 멋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그의 손에 들린 봉지가 생각보다 묵직한 것 같았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권 대표는 봉지를 대충 뒤적여 바나나 우유 하나를 꺼냈다. 무심하게 건네는 손길에 승원이 멍하니 받아들었다. 빨대까지 받고도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던 권 대표가 고저 없이 물었다.

“그거 아닙니까? 윤승원 씨가 좋아하는 거.”

“…맞습니다.”

“근데 표정이 왜.”

그가 승원의 얼굴 쪽을 가볍게 턱짓했다. 승원은 괜히 제 뺨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휘젓고 우유 위에 빨대를 꽂았다. 그는 승원의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권 대표는 함께 사 온 생수를 따서 들이켰다. 꿀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며 승원은 빨대 꽂은 우유를 마셨다. 차가 다시 출발했고, 그는 승원의 허벅지 위에 비닐봉지를 넘겨주었다. 우유랑 생수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봉지 안에는 지렁이 젤리와 에너지바도 함께 들어 있었다.

“같이 담을 게 없어서 대충 골랐습니다.”

“…….”

“그런 거 좋아할 거 같아서.”

핸들을 돌리며 말하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승원은 지렁이 젤리를 꺼냈다. 고속도로로 진입한 순간부터 권 대표는 승원에게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전히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하늘은 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흐릿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젤리를 입 안에 넣던 승원이 무심코 하나를 꺼내 운전석 쪽으로 기웃거렸다.

“뭐.”

운전에 집중하던 권 대표가 먼저 물었다. 아까부터 승원이 신경 쓰였던 건지, 눈길을 슥 주고 빠졌다.

“…하나 드실래요?”

“윤승원 씨 많이 드세요.”

“아니면 에너지바라도.”

“사양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끊어내는 바람에 더 붙잡을 수도 없었다. 승원은 그 자리에서 야금야금 젤리를 다 먹었다. 중앙 홀더에는 권 대표가 한 입 먹고 남은 생수와 승원이 깔끔하게 다 비워 놓은 바나나 우유가 함께 놓여 있었다.

정말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바다가 나오는 걸까. 반복되는 아스팔트 도로와 차들을 무료하게 바라보다가 승원은 문득 꿈에서 이 장면을 봤던 것을 기억했다. 한참 전에 꿨던 꿈속에서 승원은 권 대표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딘가를 끝없이 내달렸었다. 헛된 망상이라 생각했던 그 날의 꿈이 지금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가라앉히려 해도 자꾸만 기분이 들떴다.

“내일 몇 시 출국입니까?”

“아, 오후 비행기예요. 2시.”

“그럼 오늘 집에 돌아가서도 씻고 자리 누우면 넉넉하게 자다가 갈 수 있겠네.”

“…네. 근데 어차피 오전 비행기여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이어서 말을 하는가 싶던 권 대표가 승원의 목소리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자코 앞을 바라본 채 속도를 높였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오늘 밤 비행기였어도 왔을 거예요, 저는.”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절거린 진심이었다. 이젠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승원은 여전히 제게 붙잡힌 이 달콤한 현실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손에 꾹 힘을 주었다. 오늘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승원은 제 말을 끝으로 펼쳐진 정적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권 대표에게로 눈을 힐끔 보냈다. 핸들을 고쳐 잡은 권 대표가 마침 입을 열었다.

“그럼 최선을 다해서 즐기다 가세요.”

음률 없는 그의 말에 승원은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고, 흔쾌한 표정도 아니었지만 아무렴 괜찮았다. 그런 걸 하나하나 따져 오해를 만들며, 선물 같은 하루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덧 칙칙하던 새벽의 공기가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이른 오전의 탁한 구름들이 가시고 물을 머금은 푸른 수채화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승원은 깜빡 잠들어 버렸다. 귓가에 웅웅 울리는 엔진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바깥에서 들어온 바다 내음이 코를 슬며시 찌르고 있었다. 어쩐지 시야가 조금 낮은 것 같아서 몸을 뒤척여 보니 의자가 밑으로 반쯤 내려가 있었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옆자리를 보자, 권 대표가 자신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덜컥 달아난 졸음에 승원이 어버버 입을 오물거렸다.

“잘 잤습니까?”

“죄송해요. 깜빡 잠들어서…….”

그는 컵홀더에 있던 생수 뚜껑을 열어 승원에게 건넸다.

“도착… 한 거예요?”

승원의 물음에 그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모르겠습니까.”

“…….”

“얼른 잠 깨세요. 밖에 나가 보게.”

물을 마시다 말고 승원은 차창 밖 풍경에 입을 쩍 벌렸다. 드넓은 자연으로부터 떠밀려온 파도가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모랫바닥에 부딪히고 다시 떠밀려 나갔다. 거품을 문 바다는 회색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다. 눈이 감기던 순간까지도 앞뒤로 삭막하게 펼쳐진 아스팔트가 전부였는데, 어느새 짠 내음이 진동하는 진짜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모래 위를 걷고 파도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가족 단위도 보였고, 친구,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권 대표는 핸들에 손을 얹은 채 바깥을 크게 훑었다.

“사람이 좀 있긴 한데. 식당가랑 가까운 곳은 여기뿐이라.”

“…….”

“어차피 가서 물장구를 칠 것도 아니니. 일단 나갑시다.”

승원이 여전히 졸음기가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을 주무르고 있는 사이,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목도리를 챙겨 오던 권 대표가 갑자기 약한 웃음을 보였다. 승원의 뺨을 가볍게 건든 그가 승원 앞쪽의 선바이저를 내려 주었다.

“내 차 침대 삼아 아주 퍼질러 주무셨네.”

침착하게 거울로 제 뺨을 들여다보던 승원이 금세 귀를 붉혔다. 얼굴에 붉게 눌린 시트 자국이 만들어져 있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권 대표를 확인한 승원이 점퍼를 턱 끝까지 올린 채 밖으로 나왔다.

“윤승원 씨. 이리 와 보세요.”

보닛 앞에서 손짓하는 그에게 승원이 재빨리 다가갔다. 편안하게 자고 일어난 흔적을 보이기 싫어서 얼굴을 밑으로 숙이고 있었는데, 무언가 목 위로 칭칭 감겼다. 차에서 갖고 나온 목도리를 그가 승원에게 둘러주었다. 예쁘게 감싸기보다는 얼굴을 가리는 용도 같았다.

“누가 알아보면 골치 아픕니다.”

뒤로 조금 물러나 제 목도리에 감긴 승원을 바라본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꾹 깨문 승원이 보드라운 목도리의 감촉 위로 얼굴을 살살 움직였다. 턱부터 코끝까지, 그의 냄새가 얼굴 위로 가득 묻어났다.

겨울 바다의 추위는 감히 서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한 움큼 흔들었다. 자신보다 보폭이 넓은 남자를 뒤로 쫓아가며 승원은 가까이 보이는 바다를 두 눈에 담았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기 직전이었다. 경사진 길에 서 있는 작은 리어카에서 색색의 구름 같은 솜사탕을 팔고 있었다. 승원보다 한참 빠르게 내려가고 있던 권 대표가 금세 승원에게로 돌아와 솜사탕을 가리켰다.

“먹고 싶어요?”

먹고 싶다기보다는 어렸을 때 이후로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눈이 갔던 거였다. 그러나 승원은 사양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승원의 끄덕임에 그는 곧장 솜사탕 앞으로 다가갔다.

솜사탕은 승원의 얼굴보다도 한참 더 컸다. 바람이 휙 불 때마다 곧 주저앉을 것처럼 옆으로 들썩이는 게 재밌었다. 승원과 발을 맞추어 걷던 권 대표가 스치듯 물었다.

“좋습니까.”

“…네. 어린애 된 기분이에요.”

“지금도 어립니다.”

“…….”

“나도 좀 줘 봐요.”

입술이 닿지 않는 부분을 골라 승원이 크게 뜯었다. 손에 묻는 솜사탕 뭉치를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손을 들려는 권 대표에게 승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손에 묻어요. …진득거려서.”

자신은 이미 손을 대서 상관없었지만, 권 대표는 그렇지 않았다. 승원의 설명에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키를 조금 낮췄다. 승원이 벌어진 입 안으로 솜사탕을 밀어 넣어주었다. 잠깐 동등하게 맞춰졌던 눈높이가 다시 위로 훌쩍 올라갔다.

“엄청 다네.”

“…대표님 솜사탕 안 먹어 봤어요?”

“그런 것 같은데.”

“…어릴 때도요?”

데일 듯한 단맛에 인상을 찡그린 권 대표가 엄지로 입술을 쓸어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내가 가시지 않은 건지 탐탁지 않은 표정과 함께 손을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윤승원 씨나 많이 먹으세요. 나랑은 안 맞네.”

승원은 제 몫의 솜을 뜯으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솜사탕을 안 먹어 본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게 권 대표였다. 지금이야 그와 솜사탕은 평생 마주할 일이 없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년 시절엔 한 번쯤 먹어 봤을 만도 할 텐데. 솜사탕이 서민 음식이었음을 새삼스레 느껴 버리고 말았다.

“그럼 대표님은 어릴 때 뭐 좋아하셨어요?”

모래가 사각사각 밟혔다. 다행히 승원과 권 대표가 거니는 구역 주변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파도가 철푸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래 위를 적셨다.

“기억 안 납니다.”

그가 앞만 바라본 채 말했다.

“내가 뭘 좋아했고, 뭘 하고 싶어 했고, 어떤 걸 하면서 컸는지.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어릴 적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없어서.”

“…….”

“지금 걷고 있는 바다가 내가 추억이라고 여길 만한 최초의 기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승원이 손에 들고 있던 솜사탕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상태였다. 입술 근처에 묻은 설탕 자국들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닦아 낸 승원은 저보다 한 발 앞서나간 그를 지켜보다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뒤를 돈 권 대표가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핸드폰 줘 봐요.”

“…….”

“사진 찍어 주겠습니다. 앞에 서 보세요.”

그의 채근에 승원이 핸드폰을 넘겼다.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고 엉성한 걸음으로 파도 앞까지 다가가 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기 멀리 보이는 사람들도 마주 보고 서서 서로를 찍어 주고 있었다. 눈앞에 비스듬히 서 있는 남자는 핸드폰 렌즈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두 번 연속으로 들렸다. 발목을 다 가렸음에도 주변으로 서늘한 바다 기운이 휘돌았다. 가까이서 우글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발밑의 모래가 축축했다.

“…대표님은 안 찍으세요?”

찰칵 소리가 다시 이어져서 승원이 얼른 그를 불렀다.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의 말을 무시하고 핸드폰을 들고 다가왔다. 승원을 보지 않고 핸드폰을 내민 그가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응시했다. 갤러리에 들어가자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제 모습이 있었다. 매일 하는 게 촬영인데도, 그가 찍은 사진 속 승원은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마음에 좀 듭니까?”

승원에게 시선을 내린 그가 화면 속 사진을 함께 보았다. 쑥스러운 마음에 얼른 주머니로 핸드폰을 밀어 넣고 승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은 왜 안 찍으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합니다.”

“…그래도. 첫 추억이라면서요.”

“윤승원 씨가 찍었는데 나까지 찍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사진엔 저밖에 없는걸요.”

“그 사진 누가 찍어 줬는데.”

그가 희미한 미소를 내비치며 말했다. 권 대표의 말도 설득력 있었다. 혼자서는 여기까지 찾아와 사진을 남길 일이 없었을 테니까.

“…좀 추운 것 같아요.”

“목도리 없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러게요.”

겨울의 바다를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드러난 얼굴 전체가 곧 얼어붙을 것처럼 따가웠다. 거센 바람까지 더해진 탓도 있었다. 그런 승원과 다르게 권 대표는 얼굴을 다 내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겨울바람 따위로 약한 모습을 보일 사람도 아니었기에, 승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드넓은 물결을 바라봤다.

바다에 오자고 먼저 권유한 건 승원이었는데. 막상 목적지에 다다른 지금, 권 대표는 자신이 이곳을 더 원하던 것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지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승원은 그런 그의 얼굴을 몰래몰래 훔쳐봤다.

승원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왜 시간을 내서 자신과 함께 이곳에 와 있는 건지도 궁금했다. 승원이 바다에 가고 싶었던 것을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진정 오고 싶은 곳을, 승원의 바람을 핑계 삼아 함께 찾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게 뭐가 됐든, 승원은 지금 그와 함께 나란히 서서 바다를 보고 있는 지금이 좋았다. 코앞까지 찾아오는 차디찬 파도의 숨결도 좋았고, 영하의 날씨도, 푸른 하늘도, 그와 맞닿은 팔도 좋았다.

“솜사탕은 다 먹은 겁니까?”

“네. 아까 다 먹었어요.”

“슬슬 배고픈데, 점심 먹으러 갑시다.”

신발코로 단단한 모래를 툭툭 건들고 있던 승원은 얼른 그를 따라나섰다. 굳이 걸음을 빨리하지 않아도 그가 보폭을 낮춘 덕에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뭐 먹을 건데요?”

“뭐 먹고 싶은데.”

“초밥 같은 거 먹고 싶어요.”

“같은 거는 뭐야.”

“…초밥.”

축축한 모래를 지나고, 푹신하게 밟히는 모래들을 또 다시 지나, 딱딱한 경사를 타고 올라갔다. 주머니에 손을 불량하게 끼워 놓고 긴 다리를 휘적이는 권 대표 옆으로 승원은 딱 달라붙었다. 색만 다른 비슷한 디자인의 점퍼가 바다 위쪽으로 점차 멀어졌다.

***

차에 올라타자마자 권 대표는 이미 모든 동선을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바닷가 근처에는 즉석에서 떠 주는 횟집이나 매운탕 집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다 편견이었다. 승원은 그를 따라 들어간 가게의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에 감탄하고, 그곳에서 먹은 초밥 맛에 또 한 번 감탄했다.

한 사람 몫으로 정갈하게 차려져 나온 쟁반 위에는 색색의 초밥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 그릇이 있었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넣는 식감에 먹으면서도 침이 고였다. 서울 도심에서 먹는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이 훨씬 싱싱하고 부드러웠다.

작은 룸 안에서 음식을 즐기다가 옆을 보면, 동그랗게 뚫린 창 너머로 푸르른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승원은 오랜만에 눈앞의 음식에 열렬히 집중하며 그릇을 금방 비웠다. 권 대표는 답지 않게 열심히 배를 채우는 승원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커피까지 입에 문 채 느긋한 오후가 이어졌다. 추운 바깥을 다니는 대신 차에 올라타 드라이브를 다녔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이 순간을 그대로 박제시켜 놓고 싶을 만큼 승원은 만족스러웠다. 오늘따라 권 대표는 유난히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함께 커피를 사면서도, 운전하면서도 목소리도 표정도 전부 평온했다.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승원을 중간중간 확인하듯이 바라보던 게 전부였다.

도로 위를 쭉 달리다 낯선 비포장도로로 진입했다. 모래알이 씹히는 듯한 길을 쭉 들어가다 보니 또 다시 넓은 바다가 두 사람을 반겼다. 아까 있던 곳과 달리, 이곳은 사람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경사진 도로 밑으로 내려와 시동을 끄자 주위엔 푸르른 파도 소리뿐이었다.

“여기는 사람이 없어요.”

“많은 곳은 불편할 거 아닙니까.”

“…다 같은 바다인데, 왜 여기는 이렇게 고요할까요.”

“원래 뭐든 익숙한 곳을 찾기 마련이니.”

먼저 내리는 권 대표를 따라 승원도 목도리를 두르고 차를 빠져나왔다. 모래 밑으로 내려가기 직전 권 대표는 승원에게 다시 다가와 목도리를 제대로 감아 주었다. 이번엔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닌, 추위를 막아 주기 위한 것처럼 꼼꼼하고 섬세했다.

사장으로 진입하자, 파라솔이 꽁꽁 묶여 있는 평상 같은 게 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여름날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겨울이라 인적이 끊긴 것 같았다. 밀려드는 파도가 아우성치며 모래 위로 시원하게 부서졌다. 둘을 제외하고 남은 건 바다뿐인지라, 그 소리가 더욱 커다랗게 귓전을 울렸다.

사각사각 흔적을 남기는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승원은 한 걸음 앞서나가는 권 대표의 뒤를 따랐다. 이곳은 모래가 조금 더 거칠고 입자가 컸다. 발끝으로 살짝 치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늦게 권 대표의 옆에 붙자, 그는 승원에게 걸음을 맞춰 주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기를 반복하다가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윤승원 씨.”

“네?”

땅을 보고 걷던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옆선이 잠시 승원을 바라보다가 앞을 향했다.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권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원은 그에게 왜 다른 말을 하지 않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열 발자국을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 안에서 한참 고르고 고르다 나온 말인 양, 살짝 까슬한 목소리가 적당히 잠겨 있었다.

“윤승원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권 대표가 발을 멈췄다. 함께 걷던 승원이 그를 따라 정지했다. 바람이 거칠게 머릿결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마른 입술을 축이다가 바다를 한 번 내다보고 가슴을 들썩였다. 그가 고저 없이 말했다.

“앞으로 윤승원 씨를 더 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잠깐 새 목 밑으로 가득 고여 있던 음성이 낮게 잠겨 나왔다. 널따란 바다의 공기를 한참이나 떠돌던 그의 목소리가 어렵사리 승원의 귀에 닿아 파고들었다.

그 이상한 말을 단박에 받아들이는 데까지도 시간이 꽤 필요했다. 그의 말은 오늘 하루, 지금까지의 맥락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릴 때부터 승원은 무언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러나 직감과 이해는 또 다른 문제였다. 불안한 예상을 불행히도 꿰뚫고 들어온 그의 선언에 승원은 괴리를 느꼈다. 승원이 멍청하게 물었다.

“왜요?”

그게 지금 승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즐기다 갑자기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황당함에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

“대표님.”

승원이 그를 불렀다. 힘없이 물었다.

“왜요?”

“…….”

“…제가 뭐 잘못했어요?”

불안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권 대표가 승원에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인상을 반쯤 찡그리고 있던 남자의 낯 위로 찰나의 실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표정을 풀고 말했다.

“윤승원 씨 잘못 아닙니다.”

“…그럼 왜요.”

“다음 주에 상견례가 있습니다.”

“…대표님 상견례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힘없이 부서졌다. 권 대표가 덧붙였다.

“…물론 애초부터 내가 원한 자리는 아니지만.”

“…….”

“오래 생각한 끝에 결론적으로는 가려고 마음먹은 상태입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의 낯빛이었다. 여기까지 다다를 것을 전부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지나치게 초연한 태도였다. 권 대표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은 자리를 만들었을 제 어머니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데요.”

누가 속을 벌컥 뒤집는 것 같아 승원은 다급히 그를 마주 보고 섰다. 발밑으로 축축한 흙이 씹혔다. 태연한 눈빛이 승원에게로 떨어졌다.

“대표님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대표님이 원한 자리도 아닌데… 잘라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생겼다거나, 그런…….”

목이 턱 막혀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둘 사이의 대화를 방해하려는 것처럼 거칠었다. 승원은 최대한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축이며 그가 내뱉을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꺼낸 대답에 승원은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가기로 결정한 겁니다. 내 의지로.”

“…….”

“누굴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바다 근처를 떠돌고 있던 눈동자가 승원에게로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으면서 그는 승원을 아무렇지 않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승원 씨를 알게 된 이후로 깨달은 사실인데, 나는 의외로 외로움을 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

“압박은 이어지는데 언제까지 계속 이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울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입김이 승원의 얼굴에 닿지 못하고 안개처럼 흩어졌다. 별거 아닌 것을 설명하듯이 평소와 같은 목소리는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승원은 그래서 더 싫었다. 왜 이런 말을 다정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저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승원이 목도리를 끌어 내리며 토해 내듯 말했다. 승원에게는 너무도 쉬운 결론이었다. 알 듯 말 듯 무표정에 가깝던 권 대표의 얼굴이 작은 근육의 떨림을 보였다.

“저를 알게 된 이후부터 깨달으셨다면서요. 외로워질 순간들이 두려우신 거라면, 그냥 제가 계속 대표님 외롭지 않게 같이 있어 주면 되는 거잖아요. 어렵게 갈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머뭇대던 승원의 말을 잘라내고 그가 말했다.

“내가 윤승원 씨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

“마음은 이미 한참 전에 기울었는데, 미련하게 이제야 머리로 깨달았습니다.”

승원의 입술이 덧없이 벌어졌다. 태연하게 내뱉은 고백과 함께 그가 이어서 목을 울렸다.

“알고 있음에도 내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도 많은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이미 기운 마음을 피하려고 해도 피해지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부정한다고 한들 그게 정말 마음처럼 되는 것도 아니니까.”

“…….”

“…내가 윤승원 씨를 좋아하고 있다고 비로소 인정하고 나니, 지금까지 윤승원 씨와 함께 있던 순간 어느 하나도 후회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안쪽까지 치고 들어온 파도가 스르륵 모래를 덮으며 발 옆까지 다가왔다. 신발을 덮칠 것 같던 파도는 경계를 넘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물러났다. 승원은 다시 바다로 잠기는 파도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후회가 되는데 왜 물러나려고 하시는 건데요.”

“…….”

“대표님이 지금 후회하고 계신 거라면, 대표님은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실 게 아니라 후회되는 일을 갚을 다른 방법을 찾아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바람 새듯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목소리가 점점 거칠게 갈음됐다. 가득 힘을 준 승원의 눈자위가 어느덧 붉게 물들어 있었다. 권 대표의 짙은 눈동자 위로 승원의 목메는 얼굴이 직조됐다. 가슴을 크게 움직인 그가 체념하듯 말했다.

“윤승원 씨 나랑 같이 있는 거 버겁지 않습니까.”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무 빨리 그 말을 이해해 버린 자신이 승원은 너무 싫었다.

“내 기억 속에서 나랑 함께 있던 윤승원 씨는 다쳐 있거나 울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

“…나는 평생을 씨발스러운 가정환경에서 나고 자라면서 이따위 성격으로 살아왔고. 태곳적부터 이 모양인 거라, 노력해서 쉽게 바뀔 수 있을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

“윤승원 씨를 힘들게 했던 모든 원인이 나라는 걸 알고, 앞으로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상, 윤승원 씨를 내 옆에 두는 것보다 비겁한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좋아하는 걸 깨달은 다음에도 권차현의 방식은 전부 다 어려웠다. 진심을 내뱉고 괴로움에 젖은 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잠시 텅 비어 있던 눈이 승원을 바라보았다. 제 마음을 거칠게 눌러 담은 듯이 낮고 궤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랑 같이 있을 때 윤승원 씨는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와 달리 항상 긴장하고 있고, 경직되어 있고. 웃는 것도 보기 힘든 와중에 매번 울고, 다치고.”

“…….”

“내가 장윤철이나 정신도와 다른 게 뭐가 있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습니다. 내 말에 상처를 받고 울다가도 괜찮은 척 지우고 버텼던 모습도 전부… 이젠 그만 보고 싶습니다.”

그의 음성이 조금 불분명하게 들렸다. 시선이 가까이 얽혔고, 권 대표는 손을 뻗어 승원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듯 들췄다. 거의 다 나았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긴 이마 위로 그가 손가락을 대고 쓸었다. 추운 바람 때문인지, 정말 다 나아서인지, 이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승원 씨를 괴롭히던 그 미친 새끼들이 더 이상 해코지할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앞으로 나를 더 보지 않는다고 해도, 윤승원 씨가 그 새끼들 때문에 괴로워할 일은 이제 더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내가 윤승원 씨와 관계를 시작하면서 약속했던 도리는 다 지키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정말 모든 걸 정리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과 같았다. 승원이 인상을 잔뜩 구겼다. 떨리는 눈동자를 애써 그에게로 고정한 채, 이마 위에 닿아 있는 창백한 손을 치워냈다. 울대를 움직인 권 대표가 잠시 멈칫했다.

“대표님은….”

“…….”

“…설마 제가 그 사람들 때문에 대표님을 만난 줄 아시는 겁니까.”

흩날리듯 내뱉은 문장은 질문보다 책망에 가까웠다. 잠시 허공을 떠돌던 승원의 눈이 다시금 그에게 닿았다.

“그 새끼들한테 해코지 당할까 봐. 제가 지금 대표님 방패 삼아서… 여태껏 대표님 옆에 붙어 있으려고 한 줄 아셨던 거예요?”

“…….”

“그러니까 대표님도 더는 절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제가 지금까지 왜 온갖 고집 부려 가며 대표님 옆에 있으려고 한 줄 알면서… 제가 몇 번이고 대표님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 지금 다 안중에도 없고…….”

제 마음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고 승원은 그에게 이미 말했었다. 좋아하지 않아도 되니까, 제가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모른 척하지 말아 달라고. 소박하게나마 원했던 게 그런 바람이었다. 그래서 승원은 지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왜…….”

승원은 두어 발 뒷걸음질 쳤다. 깨닫지도 못한 사이, 반쯤 무너진 목소리가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퍽퍽하게 밟히는 젖은 모래가 발밑을 묶듯이 붙잡았다. 그가 승원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윤승원 씨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거 압니다.”

퍼뜩 고개를 든 승원이 털어내듯 쏟아 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저도 대표님을 좋아하고, 이제는 대표님도 절 좋아하는데 대체 뭐가…….”

“…….”

“좋아하면 된 거잖아요. 서로 좋아하면 그냥 계속 이렇게 지내면 되는 거잖아요.”

“윤승원 씨는 날 좋아하면서, 나 때문에 제대로 웃어 본 적이나 있습니까?”

그를 바라보던 승원의 눈동자가 떨렸다. 눈썹을 잔뜩 구긴 그가 힘겹게 밀어붙였다. 화를 내듯이 문장을 짓씹었다.

“내가 윤승원 씨를 기쁘게 해 준 적은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윤승원 씨 혼자 멀쩡한 척, 좋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거 말고. 객관적으로 내가 윤승원 씨한테 근심 걱정 한 번 덜어 준 적이 있기는 하냐는 말입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이 승원을 삼킬 듯이 바라보았다. 그가 눅눅한 발음으로 덧붙였다.

“…씨발, 왜 나 같은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윤승원 씨한테 잘해 준 기억이 쥐잡듯 뒤져 봐도 없습니다. 전부 온통 후회스러운 일투성이인데… 그걸 지금에서야 갚겠다고 어설프게 노력하고 있는 지금의 나도 너무 가증스럽고.”

승원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순전히 권 대표 저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분노이고, 회한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화가 곧 분출될 듯이 억눌린 목소리 사이에 찌꺼기처럼 끼어 있었다. 문장을 더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는 남자의 얼굴이 괴로움에 가득 젖어 있었다.

그런 권 대표를 바라보는 승원의 이마 위로 짙은 주름이 졌다.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승원은 도리어 비참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승원은 목에 둘린 목도리를 내려다보다가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를 한 번 내다봤다. 어느덧 해가 반쯤 떨어진 하늘이 노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붉은 하늘을 보며 가슴을 크게 들썩인 승원이 숨을 골랐다. 그와 마주한 발끝을 하릴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대표님은. …그 후회를 조금이나마 갚겠다고 지금 저를 데리고 여길 찾아오신 겁니까.”

“…….”

“대표님 마음 편하려고, 귀한 시간 내서 여기까지 저를.”

“…윤승원 씨.”

“그래놓고 이제 와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거고요.”

텅 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외면하고 승원이 시선을 내렸다. 웃을 상황이 전혀 아닌데, 자꾸만 바람 같은 웃음이 나왔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자 숨이 깊이 가라앉았다. 승원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대표님이랑 오늘 여기 오려고 밤까지 설치고, 일찌감치 눈 뜨고 대표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대표님이 저한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시는 것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

“……이런 소리 들으려고 오늘 하루를 그렇게.”

미친 듯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죽음을 앞두고 펼쳐진 만찬을 뭣도 모른 채 신나게 주워 삼킨 개새끼나 다름없었다. 그냥 바보 천치였다. 그런 자신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토록 훌륭한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순간에 취해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들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던 자신이 한심했다.

이런 말을 듣기 위해 계획된 만남이었다면, 승원은 곧 죽어도 여길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바쁜 시간 내어 이 먼 바다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멍청하게 여기까지 와서 이런 비참함을 느낄 바에야, 이따위 하루 행복할 거 다 집어치우고 말지.

“그래서… 여기까지 데려와서 그런 말을 꺼내면, 제가 알았다고 물러날 줄 아셨던 거예요?”

“…….”

“대표님은 왜 맨날 대표님 마음대로만 생각하시는 겁니까?”

칠흑 같은 눈동자가 서로 뒤엉켰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부딪칠 만큼 서로를 가까이 응시했다. 승원이 지지 않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꿋꿋하게 올려다보았다. 자꾸만 차오르는 울컥임에 금세 목 끝이 아려 왔다.

“…전부 다 대표님 마음대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결론짓고… 제가 대표님을 좋아한다는 걸 진짜 알고 계신 게 맞긴 합니까?”

울음 섞인 목소리가 혼잡하게 터져 나왔다.

“저를 좋아한다면서, 왜 제 생각은 안 해 주시는 건데요? 대표님은 어차피 제가 괜찮다고 해도, 실망도 후회도 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해도 대표님 마음대로 고집하고 믿으실 거잖아요.”

“…….”

“그게 저를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떳떳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승원은 요동치는 눈동자를 그를 향해 힘겹게 치켜뜬 채 버텼다. 말을 마치고도 울화가 가시지 않아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곧 무언가 터질 것처럼 위태로운 눈매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콧잔등이 움찔거렸다.

“…윤승원-.”

“뭐가 다 이래…….”

그리고 승원의 뺨 아래로 뜨거운 것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승원이 고개를 푹, 꺾듯이 숙였다. 물기 어린 모래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툭 비처럼 맺혔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대표님 입으로 직접 말씀하셔 놓고…….”

“…….”

“지금 또 후회할 일을 만들고 저를 괴롭게 하고 계시잖아요.”

권 대표의 눈빛이 파리하게 흔들렸다. 체념과 상실, 난처함과 허탈함. 명멸하는 눈동자 위로 편린 같은 감정들이 눈앞의 짙은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승원을 내려다보는 권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벌린 채 눈을 제대로 깜박이지도 못했다. 아차, 싶던 순간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제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 봐도 지금 대표님은….”

“…….”

“그냥 대표님 죄책감 덜겠다고 절 비겁하게 밀어내려는 걸로밖에 안 보입니다.”

승원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기억을 도난당한 기분이었다. 당장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생각이 아니었다. 하늘로 솟았던 기분이 지하 밑까지 고꾸라져 바닥 쳤다.

“대표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렇게 결론 내리셨다면… 제가 뭘 어떻게 하든 더는 마음이 바뀌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숨을 삼킨 승원은 비교적 평이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다 정리해요, 그럼. 저 다시는 대표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괜히 구질구질하게 돌아와서 붙잡지도 않겠습니다.”

커다란 파도 소리 때문일까, 주변을 휘감은 거센 바람 소리 때문일까. 생각보다 울음이 금방 잦아든 기분이었다. 승원이 눈을 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승원이 목을 울렸다. 머금고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대신, 대표님도 제 눈앞에 띄지 마세요.”

“…….”

“이건 윤승원을 좋아하는 권차현한테 부탁하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던 것 같은데, 시야가 워낙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승원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엄청 행복했는데.”

“…….”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승원이 일그러진 얼굴로 제 목에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잡아 뜯듯 마구잡이로 풀어헤친 목도리가 엉망이었다. 승원은 권 대표의 목도리를 그에게 강제로 들이밀었다. 가슴을 크게 들썩이는 남자는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듯 승원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벌어진 입술로 그는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갈게요. 따라오지 마세요.”

잠시 닿았던 그의 몸이 유난히 떨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승원이 들썩이던 어깨를 그대로 돌렸다. 완전히 뒤돌기 직전, 승원은 고개를 떨구고 제가 건넨 목도리를 쥔 채 부들거리는 그의 손을 보았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모래 바닥을 걸어 나갔다. 입술이 형편없이 떨려서 피 맛이 날 때까지 깨물었다. 위로 올라갈 때마다 푹신하게 쌓인 모래가 승원의 발목에 지저분하게 달라붙었다. 파도가 발목까지 덮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한기가 닥친 발이 시렸다.

인적없는 사장을 빠져나와 도로 위로 올라왔을 때, 승원은 뒤를 돌아 그의 자취를 좇았다. 그는 승원이 이별을 고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승원은 바로 다음 날 출국했다.

얼음 찜질을 하고, 찬물로 아무리 세수를 해도 퉁퉁 부은 눈은 좀처럼 나아지지를 않았다. 거실에는 어젯밤에 마구 벗어 던져 놓은 옷가지들과 택시 영수증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엉망이 된 집을 뒤로 하고 승원은 캐리어를 챙겨 집 밖을 나섰다.

날씨가 무척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꼭 새파란 가을 같았다. 이륙 준비를 마친 기내에서 안내 멘트가 들렸다. 파일럿의 안내까지 마친 비행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붕 떠오르는 몸을 시트에 깊숙이 기대며 승원은 눈을 감았다.

새까맣게 물든 눈꺼풀 위로 어제 보았던 권 대표의 이상한 얼굴이 둥둥 떠올랐다. 나약하게 승원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시트 손잡이를 힘주어 붙잡은 승원이 눈을 뜨고 동그랗게 뚫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하늘 위였다.

그와 멀어지고 있음을 몸으로 실감했다. 조금은 지독했던 짝사랑을 드디어 접겠다 다짐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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