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1. 감정의 사각지대 (2) (11/20)

11. 감정의 사각지대 (2)

승원은 한숨 자고 눈을 떴다. 나른한 햇살에 몸을 녹이며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어느덧 새까맣게 찾아온 밤에 거실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몸을 뒤척이자 옆구리에 덮여 있던 담요가 들썩였다.

머리에 단단하게 닿은 촉감의 주인은 베개가 아닌 권 대표의 허벅지였다. 승원이 눈을 들자 차분한 시선이 떨어졌다. 그의 손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액정 화면에 비치는 빛에 의지하며 승원은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먼저 말했다.

“깼습니까.”

“…죄송해요.”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네는 승원에 그가 눈 한쪽을 찌푸렸다.

“눈 뜨자마자 하는 게 사과입니까?”

“대표님 다리 저리실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나도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었더니.”

눈을 붙이고 있던 것과 자신이 짓누른 무게로 그의 다리가 저린 건 상관관계가 전혀 없었다.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몰랐지만, 승원은 토를 달지 않고 상체를 일으켰다. 하품이 나와 잠시 입을 가렸던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모르겠네. 한 30분 전쯤.”

“불편하셨을 텐데 깨우지 그러셨어요.”

“안 불편해서 안 깨웠습니다.”

고저 없이 답하는 권 대표는 제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였다. 커다란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슥슥 엄지로 화면을 넘기는 그의 손가락을 바보같이 바라보다가, 승원은 소파 밑을 뒤적여 제 핸드폰도 찾았다. 불이 밝게 들어온 화면에 기다렸다는 듯이 알림창들이 와다다 쏟아졌다.

[곽영찬 매니저 부재중 전화 2통]

[배 실장님 부재중 문자]

[곽영찬 매니저 부재중 문자]

[SNS 안 읽은 메시지 9개]

핸드폰 알림도 전부 무음으로 해 놓은 터라 듣지 못하고 말았다. 핸드폰을 든 그대로 승원은 신속히 머리를 굴렸다. 혹시 오늘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던가. 하지만 오늘 승원은 권 대표와 있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게 전부였다.

오늘 같은 날 기억 못 하는 스케줄이 있었을 리는 없을 텐데. 제 잘못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쌓여 있는 부재중 알림에 괜스레 맘을 졸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승원이 가장 상단에 떠 있던 곽영찬의 문자를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승원 씨]

[전화 안 받네]

[자고 있으려나?]

[저녁에 잠깐 회사 올 수 있어요?]

[다ㅏ은거아니고]

[다른 건 아니고]

[드라마 스케줄 밀린 김에 새로 조정을 급하게 해야할거같은데 해외스케줄이라]

[일단 나올수있으면 연락해요 못오면 어쩔 수 없지 쉬는데]

[되면 데리러갈게요]

“하아….”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단순한 스케줄 조정 문제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전화를 제대로 받기만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을 텐데. 몸을 늘어뜨린 승원이 소파에 길게 등을 기대었다.

“왜. 무슨 일입니까.”

승원을 지켜보고 있던 권 대표가 대뜸 물었다.

“…회사에서 저녁에 올 수 있냐고 물어봐서요. 무음으로 해 놔서 연락을 하나도 못 받는 바람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

“그럼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장 급하게 오라고 한 건 아니고… 그래도 가긴 가야 할 것 같아요.”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면 밝기를 낮춘 핸드폰을 승원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손전등처럼 얼굴을 비추어 보던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은 괜찮습니까.”

“…네. 자고 일어났더니 더 나아진 것 같아서.”

“자는 동안 내가 다시 발라서 그렇습니다. 얼굴 한 번 씻어내세요.”

승원이 머뭇거린 손으로 제 뺨을 쓸어 만졌다. 적당한 끈적임이 느껴지는 피부 위가 미끈거렸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승원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이 들어 있었다. 잠버릇이 고약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는 동안 그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을 거라 생각하니 절로 몸이 곱아드는 기분이었다.

“회사까지는 내가 태워다 주겠습니다.”

“…무리 안 하셔도 돼요. 매니저 형이 온다고 했어요.”

“가는 길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나도 이 시간까지 여기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켜 시계를 확인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볼 한쪽을 부풀리는 승원을 힐끔 바라보던 권 대표가 핸드폰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햄버거 좋아합니까?”

“…햄버거요?”

“인스턴트 안 먹나.”

뜬금없는 질문에 승원은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가리지는 않아요.”

“먹는다는 뜻입니까.”

“…있으면 먹긴 하는데.”

애매한 대답을 하는 동안 그는 자판을 눌러 무언가를 검색하는가 싶더니 이어서 승원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빨간색, 노란색 테마로 꾸며진 프랜차이즈 사이트였다. 끝없이 나열되어 있는 메뉴창이 다양했다.

“고르세요. 주문하게.”

“…햄버거를.”

“제일 빠르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끼니라서 선택한 겁니다.”

“대표님 이런 걸 드세요?”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늘어졌다. 승원의 얼굴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가 이어서 실소를 뱉듯 쓰게 웃음을 흘렸다.

“뭐가 문제인데.”

“저는 먹는데. …대표님은 왠지 안 드실 것 같아서.”

“편견 같은 겁니까?”

“…네?”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고르세요.”

팔 빠지겠네. 그가 뒷말을 흘리며 핸드폰을 살살 털었다. 승원은 권 대표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내리고 메뉴를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승원은 가끔가다 이런 걸 먹는 편이지, 즐겨 먹는 편도 아니고 직업도 직업인지라 햄버거를 먹을 일이 많지도 않았다. 안 본 사이에 이름 모를 메뉴들이 잔뜩 늘어나 있었다. 한참 스크롤을 내렸다 올렸다 하며 고민하던 승원은 결국 가장 익숙한 메뉴를 터치했다.

“콜라는 제로 콜라?”

“…네.”

“감자튀김에 소스 추가합니까.”

“아니요. 그냥 기본으로…….”

승원의 대답을 들으며 그가 핸드폰 액정을 툭툭 건드렸다. 어둠뿐인 공간 안에서 유일하게 하얀 빛에 반사되고 있는 잘생긴 얼굴을 승원은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잘빠진 옆선이 빛과 그림자의 조화 때문인지 유난히 날카롭고 선명해 보였다.

무대 위의 주인공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제쯤 그를 보며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을지도 의문이었다.

언제 그와 이렇게 가까워진 걸까. 어느 한 부분을 딱 짚어 이야기할 수도 없을 만큼 그는 알 수 없는 사이에 승원에게 성큼 다가와 있었다.

승원의 집에 당연한 듯이 찾아와 함께 온기를 나누고, 승원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항상 승원이 먼저 망설이며 요구했던 것들을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권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줄 알았던 관계는 줄을 덥석 잡아당기듯이 코앞까지 찾아와 있었다.

햄버거는 정말로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금방 배달되었다. 승원은 햄버거를 야금야금 먹다가도 맞은편에 앉아 감자튀김을 입에 넣는 권 대표를 힐끔대며 바라보았다. 그와 햄버거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그림이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햄버거를 먹다가도 승원을 바라보며 냅킨을 건넸다. 입술에 묻은 소스의 방향을 알려 주며 콜라를 마셨다.

신속하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원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욕실로 가 다 씻어내지 못한 연고들을 마저 닦아 내고 세수와 양치를 했다. 혹시 몸에 낮 동안 다 닦지 못한 그의 흔적이 있을까 싶어 승원은 자세히 전신을 훑었다.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끝마쳤다. 승원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의 동선을 눈동자로 나른히 훑으며 소파에 앉아 끈기 있게 그를 기다렸다.

평일 퇴근 시간이어서인지 차들이 가는 둥 마는 둥 도로 위를 지긋하게 지키고 섰다. 그의 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승원은 핸들 위에서 드르륵거리며 움직이며 권 대표의 하얀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 봐도 잘난 손끝은 오늘따라 빌딩의 조명들을 받아 더 우아해 보이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봅니까.”

전방만 주시하던 권 대표가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분명 앞만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챈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무것도 안 봤어요.”

“내 손 빤히 보고 있는 거 다 봤습니다.”

“…….”

“몰래 볼 거면 티를 내지 말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승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호까지 받아 앞뒤로 꽉꽉 막혀 있는 차는 정차 중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연락은 왜 온 겁니까.”

“…급하게 스케줄 조정할 게 있다고 해서요.”

“…스케줄 조정?”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미간을 꾹 찌푸린 그가 이내 승원에게로 손을 뻗었다. 흠칫 몸을 굳힌 승원의 얼굴로 그의 하얀 손가락이 닿았다.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넘긴 권 대표가 승원의 멍을 건드렸다. 살짝 스친 정도라 아프진 않았다.

“급하게 부르는 걸 보면 휴식 기간을 늘려 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

“지금 그 얼굴로 뭘 할 수나 있겠어요?”

“…거의 다 나았으니까요. 한 삼일이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희미하게 중얼거린 승원의 대답에도 권 대표는 대꾸하지 않았다. 승원의 멍 자국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점점 더 고요하게 잠겼다.

“…….”

“…….”

그는 잠시 알 수 없는 낯으로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침묵만을 유지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정적에 승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가슴 위의 벨트를 갉작였다.

그렇게 말없이 승원의 상처를 들여다보던 권 대표는 출발하는 앞쪽의 차량을 확인하고 도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체온이 닿았던 피부 위를 얌전히 매만지며 승원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부가 완전히 어두워서 표정이 제대로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어스름한 낯은 어쩐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생각이 많은 사람처럼,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사람처럼 그는 상대가 유추하기 힘든 표정을 갖고 있었다.

내내 알쏭달쏭해 보이던 그의 낯이 사납게 굳은 것 역시 한순간이었다.

체증이 지나간 도로를 한참 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제 것인가 싶어 핸드폰을 꺼낸 승원은 고요한 화면을 보고 권 대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진동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말없이 핸들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대표님-.”

“압니다.”

승원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아는 것처럼 그는 먼저 대답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흐릿한 짜증이 스며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확인한 그의 손등에 곧은 핏줄이 맺힌 채였다.

“…안 받으세요?”

“집안에서 온 전화입니다. 받는 게 손해라.”

“…….”

“어차피 금방 끊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증명하듯 웅웅대며 울리던 진동은 몇 초 지나지 못하고 끊겨 버렸다. 위로 지끈거리며 올라가 있던 그의 눈썹 한쪽이 아까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승원은 말을 고르고 고르다 조심스레 입을 뗐다.

“왜… 전화하신 건데요?”

“모르지.”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해요.”

앞을 향하던 눈동자가 돌아왔다.

“나한테 생긴 무슨 일은 집안보다는 이쪽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어렴풋한 시선이 승원의 얼굴 전체를 훑고 돌아왔다. 승원은 간신히 숨을 뱉는 사람처럼 입술을 벌렸다 다물었다. 무신경하게 던진 목소리가 심장을 양옆으로 뒤흔들었다.

비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위로 쭉 올라가던 차가 숨어 있던 빌딩 앞에 멈춰 섰다.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 서너 명이 보였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권 대표와 다르게 승원은 차창에 바짝 붙어 작게 웃음 지었다.

“회사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그의 날 선 눈빛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을 기세였다. 차를 세운 그가 핸들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바깥에 보이는 남자들을 사납게 바라보았다.

“그냥 깡패 같은데.”

승원은 애써 권 대표의 말을 무시하고 벨트를 풀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까만 차창 밖에 보이는 익숙한 회사 사람들이 골목길 양아치들 같아 보이는 묘한 착각이 일기도 했다. 그들은 건물 앞으로 진입한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관심을 끄고 다시 저희들의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저 사람들이랑 친합니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통수에 까슬한 목소리가 닿았다. 승원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대답했다.

“엄청 잘해 주세요. 다들 친절하시기도 하고.”

“…윤승원 씨랑 잘 맞나 봅니다.”

“대표님 덕분에… 소속사도 이렇게 옮겨서 다른 분들이랑 다 잘 지내고 있어요. …빈말 아니라 진짜로.”

말을 하다 보니 더 길게 꺼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권 대표가 없었다면 감히 이런 말을 꺼낼 수 있는 날이 왔을지도 확실치 않았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가벼운 일상의 사람들이 무엇보다 어렵게 찾아온 달콤한 해방이라는 것을 승원은 지금도 뼛속 깊이 인지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의 도움으로 오게 된 지금의 회사가 아니었다면 승원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찰나의 상상만으로도 눈을 질끈 감게 될 만큼 끔찍하고 괴로운 가정이었다.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을 정도로 너무 좋아요. 다들 저한테 엄청 신경 써 주시고, 저도 회사 사람들이랑 잘 맞는 것 같아서……. 일할 때 항상 즐거워요.”

재잘대며 이야기해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제 얘기를 낯간지럽게 떠벌리는 것 같아서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작게 줄어들었다. 쑥스러워지는 기분에 입맛을 다신 승원이 허벅지에서 놀고 있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어렵게 시선을 들었다.

권 대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생각이 많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마음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사람의 눈동자였다.

승원은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저 알쏭달쏭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자신까지 생각이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승원은 그저 지금 당장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이 단순히 좋기만 한데. 저런 표정을 보고 있으면 꼭 그는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시선을 거뒀다. 그는 아닐 수도 있다는 손톱만큼의 가능성조차 알아채고 싶지 않았다.

“…대표님 피곤하지 않으세요?”

승원은 먼저 물었다. 주절거렸던 제 말들을 다 지워 버리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승원에게 지그시 머물고 있던 권 대표의 눈동자가 떨어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안 피곤합니다.”

“…….”

“얼른 가세요. 윤승원 씨 사람들이 기다립니다.”

순간 승원은 그 말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별것도 아닌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서운했다. 왜인지도 모르게, 승원은 미련이 생겨 차 문손잡이를 열려던 손을 떼어 냈다. 자신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권 대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를 코앞에 두고 침을 삼켰다.

“…키스하고 가면 안 되나요?”

꽤나 저돌적인 문장과 달리 그 말을 내뱉는 승원의 목소리 끝이 덜덜 떨렸다. 승원은 권 대표의 눈동자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 밑의 잘 다듬어진 이목구비에 멀찌감치 눈을 뒀다. 몇 초간의 정적 끝에 가볍게 턱이 붙잡혔다.

“…흣.”

가까이 닿은 시선이 차 내부의 새까만 어둠과 뒤섞여 반짝이는 칠흑 같았다. 지금 심장박동을 재면 150은 그냥 웃돌 것 같았다. 조금 길었던 것 같은 눈맞춤이 끝나고, 높게 솟은 콧대가 짓눌러졌다. 승원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하던 그의 입술이 마침내 부드럽게 앉았다. 잠시 안쪽으로 들어온 혀가 가볍게 안을 헤집었다. 둥그렇게 훑고 지나간 혀끝이 미련 없이 입술 밖을 빠져나갔다.

“…이제 됐습니까.”

그가 낮게 물었다. 속눈썹이 서로 닿을 듯이 가까웠다. 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끄덕이고 보았다. 살짝 젖은 승원의 입술을 쓸어 만져 주고, 그는 얼굴을 떼어 냈다.

차 문을 열고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승원은 심장의 이상 반응과 뇌의 혼란 상태를 느꼈다. 키스하고 싶다던 승원의 요구대로 입술을 내어준 그에게 심장이 미친 듯이 콩닥거리는 동시에, 평소보다 훨씬 짧고 담백하게 이어진 입맞춤이 아쉬웠다.

서운함을 달래려 요구한 키스 때문에 승원은 조금 더 머리가 아파지려고 했다. 왜 볼을 감싸 잡지 않았을까. 왜 5초도 안 돼서 입술을 떼었을까. 왜 그렇게 마지못해 내밀어준 눈을 하고 있었을까.

“뭐야, 승원 씨네!”

“오! 승원이었어?”

저 앞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승원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싱숭생숭해지려던 마음을 얼른 접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비쳤던 근심을 정리하고 미소를 띄웠다. 잠깐 제 뒤의 차를 의식하다가 저에게 손을 흔드는 무리로 뛰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누구 차 타고 온 거예요?”

승원을 반긴 이들이 웅성거리며 입을 열었다. 추위에 곁들어진 짙은 담배 냄새가 지독했다.

“누군가 했더니 윤승원이었고만? 이거 매니저가 일을 안 하네.”

“아이, 승원 씨가 일 있어서 알아서 오겠다고 한 거예요.”

“맞아요, 그냥 친구랑 있다가 왔어요. …다들 추운데 안 들어가시고.”

웃으며 둘러대는 승원에게 함께 있던 직원이 담배를 내밀었다. 질색하며 손을 내젓자 장난이라며 웃었다. 다들 웃는 분위기에 맞춰 승원도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곽영찬의 빵이 잔뜩 담긴 종이가방을 열어 보였다. 오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거라며 얼른 가서 먹자고 이야기했다. 승원은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내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언제쯤 이런 불안함을 떨칠 수 있을까. 불안의 원인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저일지도 몰랐다. 꽃을 들고 초인종을 누르고, 나타나 하루 종일 자신의 베개가 되어 주고, 함께 햄버거를 나눠 먹은 남자를 고작 눈빛과 입맞춤 하나로 단정 지으려 했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언제쯤 그의 표정, 목소리, 행동을 가지고 계산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이대로 계속 지낼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을까. 문득 심장 뒤편의 희미한 의문이 승원을 깨우듯 한참을 두드렸다.

승원은 곧 자신의 지나친 의심을 완전히 접어두기로 했다. 관계에 대한 불안함은 오늘 이 순간이 아니더라도 매 시간, 매 순간 함께해 왔었다.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를 안고 그와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행동가지 몇 개로 제 마음이 이토록 상하는 게 이상했다. 결국 익숙함이 만들어낸 기대이고, 어리광일 것이라 결론지었다.

승원이 회사 사람들과 함께 찬바람을 실컷 맞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권 대표의 차는 골목 어귀를 지킨 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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