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침묵의 말로 (9/20)

9. 침묵의 말로

뻐끔거리며 눈을 떴다. 온몸이 무거워서 승원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천장만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분주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승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헐레벌떡 병실 문을 열고 나가는 곽영찬의 뒷모습이 보였다.

“승원 씨, 정신이 좀 들어요?”

점차 의식이 바로잡혔다. 배 실장이 얼굴에 그늘을 가득 만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웃음기 가득하던 입술이 한가득 벌어져 있었다. 승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올렸다. 뺨 위에 얹고 잠시 숨을 골랐다. 손등엔 굵은 바늘이 꽂혀 있었다.

곧 곽영찬이 데려온 의사가 찾아왔다. 승원을 보고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했다. 발목 인대에 조금 손상이 있긴 하지만, 2주 정도면 금방 회복될 정도의 부상이라고 했다. 피로도가 극심해서 잠시 기절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제 깨어났으니 전혀 문제될 게 없을 것이라 했다.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의사가 인사를 남기고 나갔다.

“괜찮죠? 물 좀 줄까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길래…. 사지가 이렇게 멀쩡한데 깨어나질 않으니…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아이고, 머리야. 배 실장이 그제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곽영찬이 생수를 까서 빨대를 꽂아 승원에게 건넸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은 창밖은 묘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촬영 땐 분명 낮이었는데, 벌써 이렇게 깊은 밤이 찾아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촬영은.”

“촬영이 문제예요, 지금?”

“…….”

“이거, 얼굴이고 몸이고 어쩔 거야. …괜찮은 거 맞아요?”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팔다리가 옥죄는 듯이 답답하고, 얼굴 언저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발에 뭘 잔뜩 두른 건지 움직이기에 편하지 못했다.

걱정을 얼마나 한 건지, 배 실장은 승원을 밉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배 실장이 난간에 기대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곽영찬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떨군 채였다. 승원은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옆에 놓여 있던 손거울을 들었다. 뺨 위엔 푸르른 멍이 잡혀 있었고, 턱엔 밴드가 붙어 있었다.

“일단 괜찮다니까 다행이고. …영찬 씨. 영찬 씨가 말해. 나는 나가 있을 테니까.”

“……네.”

허리춤에 손을 대고 있던 배 실장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병실 밖을 나갔다. 드르륵, 닫히는 문을 멀찍이 바라보며 승원은 그녀가 말하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기억 속의 안개가 걷히고, 서서히 당시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사진. 권 대표와 승원이 고스란히 담긴 수십 장의 사진들. 바닥에 난잡하게 흩어져 정 감독의 구둣발에 짓이겨지던. 툭툭 털어 내던 손끝에서 떨어져 재를 한 움큼 삼키던 그 사진들.

이불을 쥐고 있던 승원의 손이 차츰 진동을 시작했다. 꿈이라면 좋을 텐데, 기억은 이리도 생생하고 제 몸은 성치 못했다. 사진 속의 사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로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포털 사이트에 도배가 되었을까.

한 번 가속이 붙은 정보는 끝도 없이 퍼져 나갈 텐데. 그럼 권 대표가 알게 되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다.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자신이 다친 것은 알까.

“승원 씨.”

승원의 정신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귀를 후볐다.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망설이는 얼굴이 보였다. 승원은 숨을 죽였다. 혀끝으로 입 안을 훑던 곽영찬이 입을 열었다.

“사진은 내가 갖고 있어요.”

아. 순간 승원은 막연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곽영찬이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말도 안 되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고, 그래서 사진부터 전부 수거했어요.”

아무 말 없는 승원을 바라보며 곽영찬이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었다.

“…일단 나만 봤으니까 그건 다행이고.”

“…….”

“그냥 발 헛디뎌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 기사는 그렇게 내보냈어요. 지금 상황에 일을 더 키울 것도 없고, 까발려서 이야기해 봐야 우리한테 좋을 거 없다는 건 승원 씨가 더 잘 알 거고.”

“……형.”

곽영찬을 부른 승원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 침묵에 임했다. 말을 고르려고 입을 달싹여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사진들을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어떤 설명을 내놓아야 최선일 수 있을까.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곽영찬은 승원에게 왜 불렀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 대신 승원의 몸을 살폈다. 안 그래도 마른 편인 승원은 병상에 누워 있으니 정말 환자 같아 보였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얼굴에 멍 자국이 남았다.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있던 곽영찬이 괜히 이불 밖으로 나온 발끝을 덮어 주었다.

“피부가 많이 얇아서 그래요.”

“…네?”

곽영찬은 이제 아예 딴소리를 했다.

“멍 말이에요, 멍. 얼굴도 비싼데 멍이 그렇게 잘 들어서 어떡해요.”

“…….”

“그… 승원 씨.”

멋쩍게 뺨을 매만지고 있는 승원을 곽영찬이 다시 불렀다. 승원이 그를 바라보자 손을 둥글게 말아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곽영찬이 쩝, 소리를 내고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을 몇 번 달싹이던 곽영찬이 천천히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전엔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랄 맞은 사람이랑도 일해 봤다고.”

문득 처음 곽영찬과 스케줄을 향하는 차에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재잘거리는 입으로 진저리나던 이전 아티스트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던 곽영찬의 목소리가 여전히 귀에 선연했다.

“난 승원 씨가 처음도 아니고… 이 바닥에서 지낸 것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니까. 나도 별의별 일 다 겪어 봤어요. 더러운 일, 지저분한 일……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독특한 일도 많이 봤고요. 다른 곳에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이상하게 이 바닥에선 허다하더라고요.”

아무 대꾸 없이 듣고 있는 승원의 얼굴을 보며 곽영찬이 설핏 웃었다. 지금껏 겪어 왔던 수난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건지, 웃음의 끝이 썼다.

“그래서 사실 이젠 그냥 무뎌요. 이상한 소문이 돌아도 그런가 보다, 싶고. 옛날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 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는 편이고.”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곽영찬은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횡설수설한다고 느꼈는지 뒷덜미를 매만졌다. 입술을 축이던 곽영찬이 못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 숨기지 말고 말해요. 어차피 나는 승원 씨 매니저고, 승원 씨도 나밖에 말할 사람 없을 거 아니에요.”

“…….”

“그리고 정신도 감독은.”

곽영찬이 한마디를 더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곽영찬이 승원을 바라봤다.

“그 새끼 그거 완전 변태 또라이더라.”

…실장님 데려올게요. 뒷말을 덧붙인 곽영찬이 금방 문을 열고 나갔다.

승원이 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설픈 솜씨로 던진 위로가 가슴 위를 눅눅하게 적셨다.

묵묵히 이불을 덮고 있던 승원이 끝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입술을 짓뭉개자 광대가 동글게 솟았다. 지금 보니 손날에 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계단에서 구르느라 여기저기 긁히고 까지고 성한 데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냥 다행이다…….

승원은 그저 그렇게 혼자 되뇌었다.

***

어둠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승원은 잠이 오지 않는 몸을 새벽 내내 설쳤다. 아무도 없는 1인실이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밖을 나가자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던 승원은 미명의 끝 무렵, 어렵사리 눈을 감았다. 얕은 수면이 눈꺼풀 위를 덮었다. 가늘게 이어지는 불안한 잠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까맣게 물든 공간이 깊은 해면에 잠긴 것처럼 새까맣다. 그 위로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그림자가 덮쳤다. 눈꺼풀이 다 걷히지 않은 줄 알고 승원은 다시 눈을 깜박였다. 차츰 익숙해지는 어둠 아래, 낯익은 체향이 승원을 반겼다. 이내 향기의 근원이 어둠을 이기고 온전한 낯을 드러냈다.

“……대표님.”

상체를 일으키려는 승원의 어깨가 붙잡혔다. 그대로 떨어진 몸이 다시 푹신한 베개에 닿았다. 승원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가 머금고 온 찬바람이 걷히자 독한 술 냄새가 났다. 코가 찡할 정도의 매서운 냄새였다. 승원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단단한 손이 떨어졌다. 권 대표가 승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건조한 바람을 맞고 온 손바닥이 거칠었다. 차디찬 체온에 승원이 볼을 맞댔다. 낮은 음색이 떨어졌다.

“아픕니까.”

“…….”

“내가 이렇게 만지면 아파요?”

“……아니요. 안 아파요.”

승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었다. 말의 어투가 어딘가 불안정했다.

“대표님…….”

“…….”

“왜… 술 드셨어요?”

승원의 나지막한 물음에 권 대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술을 먹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걸까. 제정신이었으면 묻지 못할 것들을 물어도 될까. 권 대표는 술기운을 빌렸을 때 조금 더 솔직해지는 사람이니까.

승원은 누워 있는 자세 그대로 권 대표를 올려다봤다. 이젠 그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침침하거나 아득하게 보이는 부분 없이, 그의 얼굴 모든 부위 하나하나가 물에 푼 검은 물감처럼 선선하게 눈에 들어왔다.

“왜 말 안 했습니까.”

대뜸 물어 오는 질문에 어떤 것을 묻는 건지 승원으로선 짐작하기 어려웠다. 승원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턱 끝의 반창고를 지그시 문질렀다. 아릿거리는 아픔이 찾아왔다.

“그 새끼가 때려서 이렇게 된 거잖아.”

“…….”

“지금까지 그런 협박 들을 동안 나한테 말 안 하고 뭐 했습니까.”

권 대표의 말을 듣고도 승원은 한참 동안 눈을 깜박여야 했다. 짐작기 어려운 것들이 뒤엉켜 머릿속을 복잡하게 달궜다.

“그때 가게에서 마주친 이후로 그 인간과 대면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

“……그리고.”

서두를 떼고도 승원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 뺨에 닿아 있던 남자의 손을 떨어뜨렸다. 상체를 일으킨 승원이 바로 앉았다.

“제가 왜 대표님께 그런 걸 보고합니까. 무슨 자격으로…….”

“…….”

“전에 같았으면 말씀드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제가 권 대표님께 그런 걸 일일이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잖아요.”

“…….”

“대표님도 절 도울 필요가 없고.”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데, 입을 떼기까지의 망설임은 오래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구태여 인정하고 싶은 사실도 아니었기에.

권 대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리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떼지도 않았고, 승원의 말에 반박하려 들지도 않았다. 술기운에 젖은 거친 숨소리만이 병실 안을 가득 울렸다.

굳이 이 시간에,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채로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뭘까. 그를 보는 매 순간이 그러했듯이, 승원은 여전히 권 대표를 알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뭐가 됩니까.”

고개를 떨구고 있던 권 대표가 대뜸 중얼거렸다. 궤궤한 목소리가 불선명했다.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

“내가 저지르고 온 일에 대해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침대 난간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후들거렸다. 휘청이는 몸을 지지하려는 것처럼 꽉 붙든 어깨가 떨렸다.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엔 위태로운 숨소리가 함께 끼어 있었다.

그는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승원의 팔목을 잡았다. 휙, 이끌어진 몸이 여지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튀는 눈빛이 다른 날보다도 억세고 거칠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승원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순간 불안한 예감이 가슴을 덮쳤다. 승원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가까이 닿은 남자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손목에 달린 묵직한 메탈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둥근 베젤 안쪽이 검은 얼룩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져 본 손끝에 끈적하고 거친 얼룩 표면이 닿았다.

사람의 피였다.

“……대표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권 대표의 손목을 움켜쥔 승원이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두 눈에 제 모습이 직조했다. 미세하게 좁아진 미간이 영영 풀려나지 않을 것처럼 꽉 잠겨 있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

“윤승원 씨도 바라던 바 아니에요?”

그의 목울대가 무거운 것이 지나듯 꿀렁거렸다. 승원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면서 권 대표는 요요히 말했다.

“죽기 직전까지 패다가, 팔다리도 분질렀습니다.”

“…….”

“그냥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풀어진 눈가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음성이 지극히 낯설었다.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승원이 손을 놓았다.

승원은 권 대표를 처음 만났던 날을 다시 떠올렸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서늘한 낯빛을 가졌던 남자는 자신에게 주먹을 날린 장 사장에게 당한 대로 고스란히 되돌려 주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털어 버리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승원을 보며 내려가자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남자가 지금에 온들 달라질 리가 없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갑갑하게 막힌 숨통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다시 그를 바라봤다. 승원의 말에 권 대표가 눈썹을 찡그렸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목을 울린 건 권 대표 쪽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

“지금 이딴 꼴을 당하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기가 찬다는 물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승원의 뺨을 건드렸다. 씨발, 그가 욕을 읊조렸다. 승원은 권 대표의 손을 치웠다. 남을 바라보는 듯한 경계 어린 눈빛이 금세 눈동자 안에 들어섰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뭐?”

“다친 건 전데… 왜 대표님이 그 사람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죽을 때까지 팹니까….”

“…….”

“그런다고 대표님이 얻는 게 뭐가 있다고…….”

승원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짐이 되었다면 모를까, 자신이 권 대표에게 도움을 받거나 대가를 받을 일은 눈을 불을 켜고 찾는다 한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권 대표의 가짜 애인으로서의 자격은 이미 만료된 지 오래였고, 그런 주제에 그가 좋다고 매달린 것도 역시 승원이었다. 당장 내쳐도 아쉬울 거 없는 남자가 왜 이번에도 감당 불가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승원을 대신해 응징을 자처한 건지. 도저히 승원으로서는…….

“여기 괜히 왔지.”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자조적인 웃음을 내비친 그가 등을 돌렸다. 내내 그에게 향하고 있던 승원의 눈 밑이 붉었다.

승원은 급하게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다 아물지 못한 다리가 바닥에 닿았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하체 전체를 강타했다. 아, 신음을 흘린 승원의 쪽으로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힘들게 바로 선 승원이 곧장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제가 성가시지 않으십니까?”

목소리에 흠집이 난 것처럼 가냘프게 꺾였다. 아파하는 승원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그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꼿꼿하게 묻는 승원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맥을 못 가누던 눈가가 가늘게 뜨였다.

“제가 왜 그 사람이랑 몸싸움이 붙었는지는 아세요? 대표님이랑 저랑 같이 있는 사진들을 잔뜩 들고 와서는, 저한테 그 사진들을 뿌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고 목 끝이 벌게졌다. 그 역겨운 얼굴을 생각만 하면 지금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패 죽여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걸 내가 모를까 봐?”

불을 켠 듯한 목소리가 번쩍였다. 그가 걸음을 돌려 다시 승원에게 다가왔다. 이어서 터져 나온 음성이 금방이라도 승원을 잡아먹을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어깨가 강하게 붙들렸다.

“나도 압니다. 나도 알아서 이러고 있는 거잖아. 그 새끼 용서가 됩니까, 윤승원 씨는?”

권 대표를 바라보는 승원의 눈이 예상보다 잔잔했다. 질끈 문 입술로 찰랑대는 눈물을 참는 것을 대신하며 승원은 침착한 낯을 유지했다.

“용서 안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 씨발새끼가 그런 개 같은 짓을 저지르려는 걸 알았는데, 내가 가만히 있고 싶겠어요?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고, 좆같아서 열이 뻗치는데-.”

“그걸 아셨으면 그냥 기사를 막으면 됐잖아요.”

성을 내는 남자의 앞에서 승원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을 잘랐다.

“찌라시도 그렇게 막았잖아요. 대표님 그거 못 하시는 분 아니잖아요. 그런 거쯤 손 하나 까딱하면 다 막을 수 있는 분 아니었습니까?”

숨을 거칠게 쉬어 대는 남자의 얼굴이 역하게 일그러졌다.

“착해 빠진 겁니까, 아니면 좆같이 미련한 겁니까? 윤승원 씨는 본인 본분을 잊기라도 했어요? 지금 그 꼴을 당하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병신같이 당하고만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

“그러니까 하는 말입니다!”

짐승처럼 펄쩍이는 목소리를 잠재운 건 그보다 큰 승원의 목청이었다. 눈알 뒤로 힘이 바짝 쏠렸다. 한 번을 감지 않은 눈이 시렸다. 승원이 숨을 크게 쉴 때마다 숨통이 바르르 경련했다.

“대표님이 말하는 그 씨발새끼 때문에 저와 함께 있는 사진이 여기저기로 유출이 될 뻔한 거. 그래서 대표님 이미지가 망가질 뻔한 거.”

“…….”

“대표님이 입을 뻔한 피해는 딱 거기까지잖아요.”

승원이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올려다봤다. 한참은 더 큰 남자를 상대로 눈높이를 맞추려 애를 쓰며 고개를 들었다. 마구잡이로 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처음엔 그 사진들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면 어쩌나,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대표님 정도 되는 분이 그런 거 막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도 병실 앞에 득실거리는 기자 하나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진짜로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고….”

“…….”

“…그럼 된 거잖아요. 저는 몰라도, 적어도 대표님한테는 다행이라고 생각되고 말 일 아닙니까?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그딴 스캔들쯤 그냥 막으면 그만이라고.”

턱 끝까지 목이 메었다. 어느 순간 승원은 반쯤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왜… 대표님이 그렇게 악을 쓰고 그 사람을 죽도록 팹니까…? 맞은 제가 갚아 줘야 하는 걸, 왜 대표님이 나서서…….”

“…….”

“이렇게 당하고만 있던 저도 가만히 있는데, 왜 대표님이 피가 거꾸로 솟고, 기분이 좆같은 건데요…….”

가팔라지던 목소리는 종내엔 시들어가듯 얄팍해졌다. 움켜쥐던 봉우리를 터뜨리듯이 아무렇게나 튕겨 나온 음성이 축축했다. 목젖 끝이 파들거렸다.

“지금으로서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밖에 없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 밑으로 뜨거운 물이 흘렀다. 조여 오던 숨통을 힘겹게 풀어내고, 승원이 마지막 물음을 힘겹게 뱉어 냈다.

“…대표님 혹시 저 좋아하십니까?”

순간 핏발이 거세던 권 대표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번졌다. 승원의 어깨 위를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이윽고 그가 알 수 없는 낯으로 뇌까렸다.

“내가…….”

“…….”

“내가 윤승원 너를 좋아한다고?”

그는 제 마음 하나 헤아리지 못하는 남자였다. 남을 계산하고, 어림잡던 남자는 정작 제 심장이 어디를 향하는지조차 몰랐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런 그에게 승원의 마지막 물음은 당겨진 방아쇠로 날아간 총알과도 같았다. 뇌리에 단단히 박힌 물음이 어느새 가슴에 닿아 안쪽 깊이 파고들었다.

울음을 삼키는 승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남자를 노려보며 승원은 눈을 찡그렸다. 눈 밑으로 물기가 툭 떨어져 흘렀다.

맨발바닥 밑으로 차디찬 바닥의 서늘함이 맞닿았다. 마른 발이 권 대표에게 한 걸음 가까워졌다. 구둣발 사이로 가지런히 모은 다리를 세웠다. 입술을 뭉그러뜨린 승원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찬기가 전부 날아간 몸이 뜨거웠다.

긴 정적이 이어졌다. 시계 소리가 째깍째깍 귀를 울렸다. 가늘고 거칠게 뱉어 내는 숨의 끝으로 권 대표가 낮게 지껄였다.

“…그렇게.”

“…….”

“윤승원 씨 멋대로 판단하지 말아요.”

귓바퀴와 목선 사이, 여린 피부 위로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화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승원을 밀어내지 않았다. 승원보다 훨씬 커다란 몸이 승원에게 안기듯이 기댔다.

“…멋대로 판단한 적 없습니다.”

중얼거린 승원이 단단한 품 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떼를 쓰는 아이처럼 승원은 그의 몸에 딱 붙어 몸을 밀착했다. 가슴에 기댄 뺨을 있는 힘껏 비볐다. 승원의 숨이 그의 품 안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 가는 반면, 권 대표는 여전히 갈무리하지 못한 호흡을 거칠게 쏟아 내고 있었다.

그는 끝까지 승원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끝없는 침묵의 말로가 돌이킬 수 없는 긍정임을 깨닫지 못한 남자의 저항이었다.

***

아이는 악몽을 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불속지객은 그 형태와 형상이 매번 다양했다.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이기도 했고, 때로는 현실과 꿈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불분명했으며, 악귀와도 같은 꿈은 더 나아가 가위로까지 변질되곤 했다.

자려고 누운 베개 옆으로 누군가의 끊임없는 속삭임이 들렸다. 방 밖에서 유리 조각이 깨지고 언성이 오갔다. 누군가의 끊어질 듯한 울음소리.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두통. 침대에 붙들린 듯 꽉 죄어진 몸을 발버둥 치다 깨어나면, 사위는 죽은 듯 고요했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은 새파란 불안에 떨었다.

아이의 유년기는 혹독했다.

아이의 부친 권진혁은 골프에 환장했다. 그들이 사는 대저택 근처에 땅을 사서 그 위를 전부 잔디밭으로 메울 정도였으니까. 권진혁은 사람도 좋아하고, 여자는 더 좋아했다. 그때의 아이는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이의 기억 속 부친의 주위엔 젊은 여자들을 양옆에 길게 세워도 모자랄 정도였다. 골프라는 취미를 그림자 삼아 그늘 밑에서 오갔을 부친의 행실은 뻔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이지 않던 부친은 매번 문뱃내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덮고 누우면 바깥에선 난데없이 귀를 찢는 소리가 났다. 베개를 감싸 안은 채 발을 이끌고 나가면 부친은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독한 양주 냄새가 진동했고, 주위에 널린 고가의 물건들이 맥없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럴 때면 아이는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다시 가로질러 돌아갔다. 머리가 커다란 골프채를 보면 오금이 저렸다. 그것은 부친의 체벌 수단이었다.

아이의 가족은 항상 커다란 다이닝 룸의 끝과 끝에 닿을 정도로 기다란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자리에도 정겨운 분위기는 없었다. 정해진 대로, 일정한 만큼, 약속된 시간에 밥을 먹었다. 대화를 나누는 이도 없었다. 식사 직후 아이는 매번 복통을 호소했다.

열세 살의 아이는 이미 자신의 부친이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주 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선 매번 종류가 다른 여자 향수 냄새가 났고,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더 잦아졌다. 부친에 대한 애정이 없었기에,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자신의 모친 윤 여사는 남편이 밖으로 나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샐쭉 웃으며 고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지고 싶지 않아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진 적이 없던 사람처럼 여상한 느낌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모친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감히 제 모친을 보며 멋모르는 연민을 느꼈다.

‘엄마가 뭐가 불쌍해?’

‘왜? 누나는 불쌍하지 않아?’

‘엄마는 남자 안 만나는 줄 아니? 엄마나 아빠나 똑같아. 애초에 사랑해서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것도 몰랐어? 결혼은 그냥 한 거야.’

‘어떻게 결혼을 그냥 해?’

‘병신아, 사랑해서 했으면 우리가 이러고 살지도 않았겠지.’

누나는 아이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멍청한 제 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는 누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한다기보다, 부정하고 싶다는 쪽이 맞았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아닌 남자와 있는 걸 목격했다. 부정하던 꼬마를 비웃는 듯한 확인 사살이었다. 흐리멍덩해진 눈동자 안에 거짓말 같은 현실이 들어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난잡하게 뒹구는 모습이 빈틈을 보인 방문 안쪽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을 등진 아이는 품이 큰 교복을 걸친 채였다. 부친의 체벌로 남은 붉은 멍이 뺨 위에 적적히 묻어 있었다. 고작 아이가 열네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이에겐 부모보다 소중한 보모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아이에게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 형, 누나보다 어린 막내 아이를 유독 아껴주었다. 아이는 그런 보모를 ‘작은 엄마’라고 불렀다.

작은 엄마는 아이가 아주 어리던 시절부터 중학생이 되던 시기까지 매 순간 함께였다. 머리를 빗겨 주고, 교복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었다. 집 안에 발을 딛는 순간 쓸모없어지던 상장들을 가져다주면 그녀는 누구보다 좋아해 주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애정의 결핍을 그녀로부터 공급받았다. 반의 반쪽짜리 애정으로 아이는 꾸역꾸역 버텼다. 그렇게 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관뒀어요.’

‘……갑자기 왜 관둬요?’

‘잘렸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소년의 집에 출석하던 메이드가 가족사진 액자를 닦으며 무성의하게 말했다. 가방을 그대로 내던진 소년은 부친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난생처음 노크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이제 아버지보다도 훨씬 컸다. 부친과 모친을 반반씩 닮은 눈매가 날카로웠고, 우뚝 솟은 콧대와 입술이 반듯했다. 부친의 서늘한 눈매를 쏙 빼닮은 소년이 눈을 부릅뜬 채 부친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를 데려오라고 목에 핏대가 서도록 악을 썼다. 예의 따위 밥 말아 먹은 소년에게 부친은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작은 엄마가 왜 잘렸는지도 모르고 소년은 그날 골프채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세상 어딘가에서 버림받아도 이거보다는 덜 비참할 것 같았다. 소년은 처음으로 목이 메도록 엉엉 울었다. 교복 와이셔츠 소매가 비를 맞은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갔다. 소년이 흘린 눈물은 저택의 호수를 다 채울 정도였다.

소년은 작은 엄마가 있는 곳을 어렵게 알아냈다. 6인실 병원에서 오래간만에 마주한 얼굴은 홀쭉해져 있었다. 깊게 팬 볼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소년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가슴이 아프기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눈알이 뒤집히고 가슴이 불탈 정도의 울분이었다. 지갑을 꺼낸 열일곱의 소년은 그 안에 들어 있던 수표와 지폐, 카드를 탈탈 털어 그녀에게 건넸다. 싫다는 손에 꾸역꾸역 그것들을 쥐여 주었다. 형편없고 우스운 보탬이었지만, 당시의 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였다.

가족 중 누구도 작은 엄마를 다시 찾는 이가 없었다. 10년을 넘게 함께한 가족을 모두가 나 몰라라 했다. 악을 내고 반항을 보여도 알아 주는 이가 없었다. 소년 혼자 버티기에 저택은 너무 크고 추웠다.

그런 소년에게 작은 엄마는 사막 속 단비 같은 존재였다. 단비를 잃은 소년은 도로 모래 속에 파묻힌 채 메말라 갔다. 본디 그렇게 살아왔듯, 소년은 금세 사막에서 버티는 법을 배웠다.

열아홉이 되던 겨울, 작은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소년은 울지 않았다. 눈물을 짜내기엔 이미 늦은 뒤였다. 사막에 버려져 마를 대로 마른 심장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뒤늦게 찾아간 납골당에서 유골함을 골몰히 지켜보았다. 웃고 있는 사진 속 여인을 바라보며 소년은 건조한 눈을 깜박였다.

사랑이란 감정의 쓸모를 인생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관심과 애정의 소실 안에 살아오며 받은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것은 그를 놀리듯 소멸하였다. 이 세상에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게 꾸며진 각본이고 신기루였다. 부질없던 감정의 노동으로 돌아온 건 창백한 현실이었다.

“…….”

침상에 누워 있는 승원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던 기시감이 가슴을 깊게 후려쳤다. 초췌한 얼굴의 남자가 고운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치 떨리는 분노가 심장을 두드렸다. 목구멍 가까이 차오른 상실이 어느덧 입 안에 넘실댔다. 피로를 느끼는 눈이 가느다란 시선으로 잠들어 있는 승원을 훑었다.

멍투성이의 승원의 뺨을 매만지던 차현은 병원을 빠져나갔다. 차에 올라타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도로를 내달리는 차량의 엔진이 비명을 질렀다.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텅 빈 눈이 공허했다.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신도의 집 주소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일식집에서 승원을 마주했던 당시의 기억이 머리를 빙 돌고 지나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빌어먹을 씹새끼는 사람을 그 지경을 만들어 놓고는 속 편하게 집 안에 있었다. ‘박 기자 왔어?’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젖히며 정신도는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이상함을 감지한 두 눈이 정장태를 살피며 위로 올라왔다.

두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차현은 인사를 대신해 주먹을 휘갈겼다. 거친 파열음과 함께 놈이 소리를 질렀다. 현관문 안쪽으로 자지러진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놀란 개새끼처럼 숨을 헉헉 쉬어 대는 놈이 입술을 어버버 떨었다. 멱살을 잡은 그대로 놈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철커덕, 현관문이 잠겼다.

차현은 놈을 넓은 거실에 눕혀 놓고 죽도록 패기 시작했다. 죄송하다며 반항하는 몸을 비틀어 꺾었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남자의 눈앞이 명멸했다. 팔과 다리에서 우드득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묽게 물든 검은 눈동자가 발버둥 치는 놈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내가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는데.”

입술 밖으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정신도가 눈물을 짜내며 빌었다. 차현의 구두를 끌어안고 추하게 발버둥 쳤다. 제발 살려 달라고 빌어 대는 턱을 걷어찼다. 거실 테이블 위에 난잡하게 널린 사진이 보였다. 차게 식은 눈동자가 피떡을 흘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는 도를 지나쳤어.”

손목에 있던 시계를 끌어 내려 네 손가락에 단단히 감았다. 놈이 꺼떡거리며 아무 소리 내지 못할 때까지 주먹으로 얼굴을 내려쳤다. 피가 튀기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았다. 윤승원이 당한 것의 딱 열 배만. 그래야 제 속에 들끓는 열불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쩌면, 이제껏 갚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반란이자, 비로소 사수하고픈 사랑의 열망이었다.

***

엄청난 보일러 세기에 숨이 갑갑하다고 느꼈는데, 눈을 뜬 승원의 시야가 전부 권 대표의 가슴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무거운 팔이 제 허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막혀 몸을 뒤로 조금 밀어내고 어렵사리 고개를 들자 잠들어 있는 반듯한 얼굴이 보였다.

오롯이 잠에 푹 빠져 있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사진으로 찍어도 모자랄 그 생경하고 아까운 눈, 코, 입 구석구석을 승원은 낱낱이 들여다보았다. 안정적으로 울렁이는 가슴이 뜨거웠다.

이제 막 해가 뜨는 건지 창밖이 회색과 하얀색 사이의 그 어중간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 떨어지는 빛의 양이 적당했다. 좁은 침대 위를 남자 둘이 빈틈없이 채웠다. 어느 곳으로 움직여도 몸이 그와 딱 맞닿았다.

“……대표님.”

승원이 권 대표를 불렀다. 미동 없던 눈가가 살며시 찌푸려지긴 했지만, 그게 전부일 뿐 그는 계속 잠에 빠진 채였다. 그의 가슴팍에 코를 묻고 숨을 몇 번 들이쉬던 승원이 그의 이름을 주절거렸다.

“권차현.”

“…….”

“권차현. ……권차현.”

따뜻한 숨결을 널따란 몸 위에 꾸준하게 내뱉고 있던 승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

승원을 내려다보는 눈가가 가늘게 뜨여 있었다. 아직 잠에서 다 깨지 못한 몽롱한 시선이 승원에게로 흘러내렸다. 긴 눈 맞춤이 끝나고, 목울대가 크게 진동했다. 권 대표가 입을 열었다.

“왜 부릅니까.”

가슴 안쪽에 잠겨 있던 음성이 승원을 감싸듯 울렸다. 승원은 묵묵히 그의 옷자락을 손에 쥘 뿐이었다. 셔츠 위에 입술을 묻었다. 짙은 체향이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왜 아직 안 가셨어요.”

가라앉은 숨이 규칙적으로 들렸다. 승원의 몸 위에 엉성하게 걸쳐 있던 권 대표의 손이 곧 승원의 등을 움켜쥐었다. 몸이 더욱 가까이 밀착됐다. 애써 보지 않아도 그가 눈을 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곤해서.”

“…….”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승원은 따로 대답하지 않고 숨만 새근새근 쉬었다. 이대로 있으면 침대가 무너져 내려도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숨통이 조일 만큼 답답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승원이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 권 대표가 물었다.

“이제 괜찮습니까.”

“…….”

“더 아픈 데는 없냐고.”

“……네. 괜찮아요.”

맞붙은 가슴의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오가는 두근거림이 서로 맞물려 빠르게 뛰었다. 권 대표가 중얼거리듯 승원의 이름을 불렀다.

“윤승원 씨.”

“……네.”

“정신과 약은 아직도 먹는 겁니까?”

“…….”

“스트레스랑 불안증이 심했다고 들었는데.”

승원이 동공을 키운 채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향해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휘저었다.

“안 먹어요.”

“왜.”

“…….”

“불안하고 답답할 때 먹으라고 있는 약인데 그걸 왜 안 챙겨 먹습니까.”

승원을 나무라는 목소리였다. 잠자코 있던 승원이 뒤늦게 입을 뗐다. 대답 대신 뜬금없이 되물었다.

“대표님도 약 드신 적 있다고 했잖아요. 왜 드신 거예요?”

잠시 찌푸린 눈썹을 하고 승원을 내려다보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이 검게 일렁였다. 대답 없는 권 대표에 승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침묵을 오래 버티면 승원은 불안했다. 괜한 걸 물은 것 같아 정정하려던 무렵, 그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매일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

“매일같이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고. …어느 날은 반항심 같은 게 일어서 방 안에 있는 모든 빛을 차단하고 며칠을 버틴 적도 있었습니다.”

“…대표님 반항아였습니까?”

승원의 물음에 권 대표가 픽 웃었다.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왔다.

“반항아라고 하기엔 내가 좀 억울해서.”

“…….”

“내 딴에는 나름 정당한 반항이라고 생각했는데.”

승원은 말을 이어 나가는 권 대표의 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와 문장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잘 웃지도 않았고, 정 주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가기 싫다고 끌려간 정신병원에서 약을 처방 받은 다음부터는…… 내가 생각해도 예전보다 나아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쉽게 괜찮아지니까, 허무한 마음도 들고 무력해지기도 했고.”

“…….”

“그래도 우울이라는 게 늪에 빠진 것처럼 천천히 밀려 들어가는 거라, 자각하고 치료를 하기 전까진 나도 내가 어느 수준인지를 몰라서.”

“…지금은 괜찮아요?”

앞만 보던 고개가 승원에게로 떨어졌다.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그가 멍든 승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습니다.”

“…….”

“그러니까 약은 꼬박꼬박 먹으세요.”

“…….”

“우울은 감기 같은 겁니다. 약 먹으면 나아지는.”

자신과 숨을 교환하는 눈앞의 남자가 갑자기 낯설어 보였다. 지금까지 숱하게 봐 왔던 그와는 어딘가 조금 다른 듯했다. 내내 균열이 보이던 벽이 비로소 허물을 털어 내고 무너진 듯한 느낌이었다. 단단한 꺼풀을 벗겨 낸 남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대표님.”

대답 없는 남자에게 승원은 혼잣말처럼 목을 울렸다.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비밀스러웠다.

“그냥 맨날 이렇게 아팠으면 좋겠어요.”

어느새 어제의 악몽이 씻은 듯이 나았다. 어제보다 지금이 더 꿈같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하얀 셔츠엔 검은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 그곳을 쓸어 만졌다. 미동 없던 몸이 작게 뒤척였다. 정수리 위쪽으로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아픈 거 딱 질색입니다.”

“…….”

“아프지 마세요.”

그가 승원에게 남긴 꺼풀 벗긴 진심, 아프지 말라는 어조 없는 부탁, 떠나지 않고 곁에 남아 끌어안은 묵직한 온기까지. 그 모든 게 형태만 다를 뿐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랑 고백이라는 것을 그는 알긴 할까.

서로가 서로를 당길수록 더운 온기가 점차 더 높게 달아올랐다. 품에 넣어 두던 고개를 들고 시선을 주고받았다. 승원이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따뜻한 온기가 거친 입술 위로 전해졌다. 등허리를 잡은 팔뚝이 승원을 더욱 거세게 끌어당겼다. 이끌어진 고개가 위로 당겨졌다. 숨이 끊어지도록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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