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발악 (8/20)

8. 발악

광막히 뚫린 유리 밖 전경 안쪽으로, 높게 드리워진 천장엔 보석처럼 빛나는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로 천장에서부터 떨어진 조명이 환하게 주변으로 반사되었다. 값비싼 품위를 드러낸 호텔 로비 안은 검은 촬영 장비들과 수십 명의 사람들로 분주했다.

단정한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승원도 그 인파 사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세 명의 스타일리스트들이 동시의 승원의 차림새를 점검했다. 한 명은 빗을 들어 머리를 정돈했고, 한 명은 입술에 옅은 분홍 립스틱을 덧발랐다. 남은 한 명은 대본을 읽는 승원의 가슴 위로 여러 종류의 넥타이를 대 보기 바빴다.

“슬슬 준비해 주세요. 스탠바이 합니다.”

“…아이씨, 벌써?”

언질을 두고 간 스태프를 뒤로하고 넥타이를 만지던 스타일리스트가 다급함에 욕을 짓씹었다. 대본을 덮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급한 사람은 승원네 식구뿐만은 아닌 듯했다.

호텔 안에서 촬영해야 할 신들이 꽤 많았다. 장소 전환도 잦아서 아마 호텔 안에서의 모든 장면을 다 찍으면 못하면 사흘에서 나흘은 족히 걸릴 듯 보였다. 수위 높은 첫 키스와 19금으로 방영될 스킨십 장면 역시 이번 촬영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자, 갑시다!”

“저 갈게요.”

“어어, 잠깐잠깐! 승원 씨 머리핀 안 뺐어!”

확성기로 들리는 감독의 목소리에 얼른 움직이려던 승원을 스타일리스트가 붙잡았다. 하마터면 머리에 노란 머리핀을 달고 촬영에 임할 뻔했다. 신속히 뺄 수 있도록 머리를 숙여 준 승원이 얼른 백팩 정장 가방을 팔에 끼우며 들어갔다.

“컷! 오케이. 잠시 쉬다 갈게요!”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사위가 다시 제각각 소음을 만들어 내며 소란스러워졌다. 승원의 앞으로 작은 선풍기 한 대가 배달되었다. 한겨울인데도 건물 안은 수십 대의 촬영 장비들과 조명으로 땡볕 아래 서 있는 것과 같았다. 얼굴에 직접 대 주는 것을 사양하고 승원은 손 선풍기를 들어 더운 얼굴에 비췄다.

이번 장면은 딱히 어려울 건 없었다. 호텔 로비에서 마주친 두 남녀가 짧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기에, 몇 번의 테이크로 비교적 순조롭게 끝냈다.

깔끔한 베이지색의 정장을 차려입고 있던 차서희의 머리엔 어느새 여러 개의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메이크업을 다시 받는 건지, 아까 전 승원처럼 차서희의 얼굴 앞으로 붓 몇 개가 바쁘게 움직였다.

“대박, 승원 씨.”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는 대본을 돌돌 말아 방망이처럼 만든 차서희가 제 손바닥 위에 그것을 툭툭 두드렸다. 안 그래도 큰 그녀의 눈은 반짝이는 섀도우 펄에 음영이 더 짙어 보였다.

“우리 좀 있으면 키스 신 찍는다.”

“…아, 벌써요?”

“내 말이. 이거 봐 봐요?”

길게 만 대본으로 승원을 장난스럽게 톡톡 치던 차서희가 아예 대본을 넓게 펼쳐 승원을 향해 보여 주었다. 차서희와 나란히 붙은 승원이 그녀가 넘겨 주는 페이지를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랑, 이거. 이것만 하면.”

“…….”

“처음이죠?”

“아, 네. 처음이에요.”

키스 신은 처음이라는 승원의 말에 차서희가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듯 웃었다.

“괜찮아요. 난 처음 아니니까. 나만 따라와요.”

“그럼… 누나만 믿을게요.”

“으, 그런 말은 하지 마요. 부담 돼.”

바짝 펼친 손바닥을 들어 보인 차서희가 질색하는 표정을 보였다. 선풍기에 휘날리는 앞머리로 승원이 작게 미소 지었다.

승원은 이제 차서희와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멀리서만 보던 연예인의 연예인 같은 사람이라 처음 몇 번은 계속 눈치를 보기 바빴는데, 그럴수록 차서희는 승원이 편해질 수 있도록 더 부드럽게 다가왔다. 남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아해서 스태프들을 포함해 승원도 함께 받은 간식이나 물건들도 몇 개 있었다. 정이 많은 사람 같았다.

차서희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 근처에 알고 있는 맛집을 승원에게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워낙 활달하고 이곳저곳 촬영을 가 보지 않은 데가 없어서 그녀가 모르는 가게가 없는 수준이었다. 호텔 안은 가성비가 좋지 못하다며 주변에 작은 맛집들을 핸드폰 지도로 낱낱이 훑어 짚어 주는 차서희의 옆에서 승원은 입술을 벌리고 감탄을 하기 바빴다.

그렇게 계속되던 대화 중에 먼저 고개를 든 것은 차서희 쪽이었다.

감독이 있던 주변으로 누군가 온 것인지 약간의 웅성거림이 피어올랐다. 뒤늦게 알아챈 승원도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키가 큰 장비들이 워낙 많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승원의 옆으로 여자 몇 명이 무리 지어 지나갔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군대는 얼굴들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왜 저렇게 잘생겼어?”

“내 말이. 얼굴 보고 뽑았나 연예인 해도 되겠다…….”

“저런 게 귀티인가 봐요. 웬일이야.”

엄청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서로 눈을 휘어 접고 팔꿈치로 상대를 콕콕 쑤시기까지 했다. 멀어지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승원의 옆에서 차서희는 지나가는 스태프 한 명을 붙잡아 물었다.

“누구 왔어요?”

“호텔 오너인가? 모르겠다. 인사 겸 찾아왔다는데요?”

“오…… 그렇구나.”

“…….”

궁금증으로 가득했던 차서희의 얼굴이 금방 흥미를 잃은 듯 푹 꺼졌다. 볼을 빵빵하게 만들어 다시 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차서희는 다시 핸드폰을 보는 일에 집중했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승원이 입을 꼭 다문 채 허공을 응시했다.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렸다. 등을 스산하게 스친 소름에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이도 저도 아닌 자세로 그대로 굳은 승원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괜히 바람에 헝클어진 제 머리를 다듬었다.

‘조만간 봅시다.’

얼마 전 들었던 권 대표의 한마디가 제 옆에 속삭이듯이 생생하게 머리에 울렸다. 차서희와 함께 편안하게 웃기 바빴던 얼굴이 잔뜩 경직되었다. 실제로 벌어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펼친 상상만으로도 손에 땀이 찼다.

“승원 씨, 서희 씨!”

김 감독의 목소리가 돌처럼 날아와 멎어 있던 승원을 깨웠다. 저쪽에서부터 뭉게뭉게 피워져 있던 인파를 가르고 김 감독이 다가왔다. 그 사이를 확인한 승원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김 감독의 뒤로, 상상으로만 그리던 남자가 승원의 직감을 완전히 관통해 눈앞에 나타났다.

“자자, 인사해요. 권차현 대표님이십니다. 대표님, 여기는 우리 주연 배우분들입니다.”

오늘따라 더욱 화려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라 더 그런 걸까. 승원은 바로 앞에 등장한 완벽한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곧게 다물었다. 바짝 오른 어깨가 내려올 생각을 못 했다.

눈이 마주쳤지만 시선은 금방 분산됐다. 권 대표는 승원보다 차서희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승원에겐 거의 보여 주지 않는 산뜻하고 멀끔한 비즈니스 미소가 번져 있었다.

“권차현입니다. 배우님 이렇게 마주 뵙고 영광이네요.”

“아니에요! 그런 말씀을.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너무 멋있으시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지.”

연예인도 아닌 사람의 앞에서 저런 낯간지러운 칭찬을 하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닌데, 권차현이라는 남자는 홀린 듯이라도 그런 소리를 뱉게 하는 남자였다. 귀 뒤로 머리를 넘기며 광대를 올리는 차서희에게 권 대표가 느긋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짧은 악수를 마친 손을 자연스럽게 빼낸 권 대표가 이번엔 승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내 올라가 있던 양쪽 입꼬리 대신, 이번엔 한쪽만을 비스듬히 올린 채 권 대표가 승원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묘하게 가늘어진 눈매가 빠르게 승원의 차림새를 훑었다.

“윤승원 씨도.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여기저기 계속 악수를 하며 닳아 버린 손 때문인지 맞잡은 권 대표의 손바닥 안쪽에선 미온적인 열이 느껴졌다. 목울대를 꿀렁인 승원이 피하려던 눈을 살며시 들자, 길게 늘어뜨려 내리깐 눈매가 승원을 진득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영화에서 뵌 것만큼 훤칠하시네요. 실물이 훨씬 잘생겼습니다.”

끌어 올린 미소가 어딘가 불량스러웠다. ‘네.’라고 맥없이 대답하려 했던 승원은 점차 강하게 가해져 오는 손의 악력에 고개를 내렸다. 권 대표의 손아귀에 갈 데 없이 붙잡힌 승원의 손이 꽉 옥죄어져 불쌍하게 구겨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토할 것 같아서 승원은 좀처럼 권 대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승원의 손이 빨갛게 익어 비틀어질 때 즈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뒤로 물러나 주었다. 순조로이 촬영하라며 독려를 마친 권 대표는 초면의 타인처럼 금방 저 멀리로 없어졌다.

그에게 완전히 시선을 빼앗겨 뒤늦게 안 사실인데, 권 대표의 뒤엔 김 실장도 함께 하고 있었다. 권 대표가 자리를 벗어날 때 그의 옆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자신에게 가볍게 미소 지으며 눈짓하는 걸 보고 나서야 승원은 김 실장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가 물러난 자리를 지켜보던 차서희가 번뜩 뜬 눈으로 승원을 돌아봤다.

“승원 씨, 저 분 알아요?”

“…네? 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승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차서희가 입술을 오므렸다.

“승원 씨도 처음 보죠. 와, 깜짝 놀랐어요.”

“아… 네….”

도둑이 제 발 저릴 뻔했다는 것을 알곤 안도의 숨을 내쉰 승원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눈을 반짝이는 차서희가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와아, 무슨 키가…. 키도 크고 분위기 장난 아니던데. 나 아무 말도 못 했잖아요. 긴장해서.”

권 대표를 마주했던 아까의 상황을 반추하는 듯 차서희가 탄성과 함께 중얼거렸다.

승원은 연신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한번 들뜨듯이 차오른 심장이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이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멈춰 있던 자신이 한심했다. 보는 눈이 있으니 아는 척은 못 할망정, 대화라도 멀쩡한 듯 이어나갔어야 했는데.

물론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 해도, 촬영 현장에서 만난 권 대표를 보고 자신이 무슨 말을 똑바로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시 재개되는 촬영에 승원은 미련이 남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하루 익숙한 사람들만 한가득이었다. 반짝이며 빛나는 세련된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이번 장면은 객실이 늘어진 복도에서 진행되었다. 드넓은 로비보다도 훨씬 협소한 복도는 길게 깔린 카펫에 창문도 따로 없어서인지 사람들의 열기로 공기가 금세 눅눅해졌다.

로비에서 길게 진행되었던 촬영의 여파로 다들 적당히 피로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시끌벅적했던 1층에서와는 다르게 분위기도 적당히 도란도란한 느낌이었다.

복도에서부터 이어지는 키스 신이었다. 단추 두어 개를 풀어 둔 승원의 목덜미가 훤히 보였다. 생수를 들이켜며 다가오는 차서희는 구두 대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촬영을 해야 해서 구두가 삐끗할 위험이 있다며 갈아신은 것이었다.

벽에 등을 붙이고 뒤꿈치만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는 승원을 차서희가 다가와 가볍게 때렸다.

“벌써 넋을 놓으면 어떡해요.”

“아, 그건 아니고…….”

“긴장되죠.”

“……모르겠어요.”

넋을 놓은 건 맞았다. 그러나 차서희의 예상처럼 키스 신을 앞에 두고 긴장을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곧 닥칠 키스 신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도, 걱정도 들지 않았다.

승원의 머릿속엔 오직 ‘권차현’이라는 남자 하나뿐이었다. 과부하가 될 정도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며 아른거렸다. 잠시 맛본 입가심에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차오르는 것처럼, 승원은 아까 그를 만난 후부터 계속 동일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레디, 액션.”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검게 비치는 카메라 렌즈가 두 남녀를 주시했다. 카메라를 뒤로 공간이 두 영역으로 나누어졌다. 승원과 차서희의 움직임을 숨죽여 지켜보는 이들과,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해 역할의 임무를 다하는 배우 둘.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가 적막을 만들었다.

“흣. ……읍.”

승원의 손목을 붙들어 벽 앞으로 이끈 차서희가 그를 힘껏 밀쳐 눌렀다. 등이 쿵 부딪히고, 순식간에 입술이 먹혔다. 처음엔 차서희의 손에 잡힌 채 벽에 매달려 이도 저도 못 하던 승원의 손이 점차 풀어져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서로 바짝 붙었다. 얇은 허리가 품 안쪽으로 들어오고 허리가 뒤로 꺾였다. 한 손으론 허리를 감싸 잡고 남은 손으론 헤어라인을 쓸어 만졌다. 입술이 서로를 탐하고 머금었다. 눈을 살짝 뜬 승원이 그녀를 벽으로 밀었다. 둘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읏, 흐읍…….”

온전히 찰나에 집중을 다해야 하건만, 순간 자신의 혀를 뱀처럼 빨아 먹던 남자의 거친 혀끝이 떠올랐다. 눈을 뜨면 자신보다 한 뼘 작은 여자가 보여 승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한번 떠오른 그의 생각을 좀처럼 떨칠 수 없었다. 감은 눈앞이 흐려지고, 승원은 더욱 거칠게 그녀를 몰아세웠다.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컷!”

“……후으.”

뇌리로 치고 들어온 우렁찬 컷 소리에 승원이 입술을 떼어 냈다. 곧바로 대령된 생수를 까서 입에 콸콸 털어 넣었다. 무르익은 분위기에, 거친 입맞춤까지. 차서희도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바빴다.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배우들이 몇십 테이크에 걸쳐 진행하는 입맞춤은 거의 스포츠에 가까웠다. 처음에야 가슴이 조금 찌르르 울릴 수 있다지만, 키스 신 하나가 다 끝날 때 즈음엔 다들 지나친 체력 소모에 진이 빠져 있을 정도였다.

“둘 다 너무 좋다. 지금처럼만 해 주면 좋을 것 같네.”

감독 역시 만족한 얼굴이었다. 두 배우는 말을 아꼈다. 남은 테이크들을 위해선 에너지를 비축해놔야 했다. 금방 머리를 정리하고 벽에 등을 붙인 채 움직임과 구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차서희와 감독의 말을 들으며 승원은 어질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꿀떡꿀떡, 그 자리에서 차디찬 생수를 다 비워 냈다.

수없이 반복하던 키스의 마지막 테이크였다. 승원은 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입술을 빨아들이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부드러운 살결에 입을 맞추고 벌어진 셔츠 안쪽으로도 키스를 남겼다. 목을 빳빳하게 세운 차서희가 승원의 턱을 다시 치켜들고 입술을 붙였다. 싸한 박하 향이 나는 입 안을 핥고 빨았다. 숨이 과하게 차올랐다.

“컷, 오케이! 고생했어요. 이제 좀 쉽시다! 어휴, 둘 다 너무 잘했어요.”

감독이 수고했다며 손뼉을 쳤다. 복도에서 벌어진 에로틱한 두 남녀의 스킨십이 끝나고 이곳저곳 문을 열며 장비들을 옮기는 움직임들이 바빴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차서희가 물을 들이켜며 승원에게 격려의 토닥임을 건넸다.

“수고했다, 수고했다.”

“…등 아프진 않았어요?”

“네, 안 아팠어요. 완전 멀쩡.”

그러면서 차서희가 승원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빈 생수병으로 승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키스 신 처음 맞아요? 장난 아니네.”

가늘게 뜬 눈으로 입술을 오오, 오므린 차서희가 몸을 씰룩거렸다. 비아냥도 놀림도 아닌, 칭찬에 가까운 부추김이었다. 눈썹을 들썩이며 웃는 차서희를 보며 멋쩍게 웃음을 비췄다.

머리를 재차 손질받은 후, 구석에 서서 풀어져 있던 단추를 막 잠그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좁은 공간의 뭉쳐진 더운 열 때문에 볼 언저리가 적당한 분홍빛이었다. 물병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승원은 문득 주변 너머의 시야에 걸리는 검은 인영에 고개를 들었다.

감독과 대화를 하는 날렵한 옆선은 다름 아닌 권 대표였다. 로비에서 보았던 각진 매무새 그대로 반듯한 눈썹을 움직이며 말을 하고 있던 얼굴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의 존재를 알아채고 놀라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낸 권 대표가 먼 거리의 승원과 그대로 눈을 맞췄다. 부드럽게 웃음을 내비치던 눈이 무감동하게 변했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좁은 복도 안에서 다들 제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레일 좀 이쪽으로 이동시킬게요!’, ‘식사하고 오세요!’ 등 목소리가 마구 뒤섞여 혼잡했다.

저벅저벅,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그가 점점 더 승원에게 가까워졌다. 옷깃을 매만지던 손이 길을 잃은 것처럼 주위를 배회했다. 결국 마지막 단추 하나가 구멍 밖으로 엇나갔다.

마침내 그가 승원의 앞까지 당도했다. 테이크를 밟아 가던 내내 자신보다 작은 상대와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자신을 한 톨만 하게 만드는 장대한 기골의 남자가 이질적이었다.

커다랗고 하얀 손이 승원의 어깨를 꽉 내리눌렀다. 낮고 작은 목소리가 도착했다.

“잘하던데.”

승원의 입술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하얗게 질리던 얼굴을 푹 숙였다.

“1908호로 와요.”

눈을 보지 않고 중얼거린 남자가 승원의 목을 쓸어 만졌다. 살결을 스치고 지난 유려한 손끝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뒤를 돌았을 때, 권 대표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사라져 버린 남자의 행방을 찾던 승원은 쿵쾅대는 심장을 꾹 짓누르다 이내 입술을 물었다.

앞으로 남은 두 시간 남짓의 여유가 쉴 새 없이 닳아 가고 있었다.

***

아무도 없는 복도가 고요했다. 숨차게 다다른 승원이 객실 문의 벨을 눌렀다.

“금방 왔네.”

잠깐의 적막을 깨고 열린 문 안쪽으로 권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틈을 다 벌리지 않은 그가 몸을 벽에 붙인 채 측면으로 승원을 내려다보았다. 내리뜬 눈꺼풀이 촘촘했다.

“다들 밥 먹으러 간 것 같던데.”

“…맞아요.”

“윤 배우는 안 먹습니까.”

‘윤 배우’라는 말에 침을 삼켰다. 이런 호칭은 이상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기에 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프기보다는 오히려 탈이 난 것처럼 뜨겁게 끓어올랐다.

“오란다고 바로 찾아오고.”

“…….”

“말 잘 듣네요.”

그가 문틈으로 손을 뻗었다. 승원의 아랫입술을 꼬집듯이 잡았다. 통통한 입술 안쪽을 벌려 여린 살을 건드렸다. 한참 열띤 운동을 하느라 예민해져 있던 입술 안쪽이 권 대표의 뾰족한 손끝에 짓눌려 민감하게 반응했다.

“…읏. …대표님….”

입술을 놓아준 권 대표가 승원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촬영장에서 봤던 번듯한 호텔 오너, 대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하얀 와이셔츠뿐인 가슴 가운데로 적당히 풀어진 넥타이가 느슨했고, 걷어붙인 소매엔 도드라진 핏줄이 보였다.

“촬영은 잘 끝냈습니까.”

“네.”

“키스신도 잘 마무리했고?”

“…네.”

목소리가 무람없고 까칠했다. 귀찮음이 서린 말끝으로 그가 얕게 한숨을 뱉었다.

승원에게 몸을 기울인 남자에게서 아까는 맡아 보지 못했던 진한 담배 냄새가 났다. 사무적으로만 풍기던 짙은 향수 냄새와 어우러진, 승원만이 익히 아는 권 대표 본연의 냄새였다.

승원과 눈높이를 맞춘 남자의 시선이 지그시 맞닿았다. 적당히 고개를 내리고 있던 승원이 조심스레 눈을 들었다. 맞닿은 검은 눈동자가 공허했다. 승원의 콧대와 입술을 미끄러지듯 들여다보던 권 대표가 입을 열었다.

“난 지금 윤승원 씨와 섹스하고 싶은데.”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목을 울리며 전해졌다.

“들어오겠습니까.”

승원은 고여 있던 침을 삼켰다.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날것의 단어를 되새긴 목젖 안쪽이 쿵쿵, 진동했다.

망설임을 지속할수록 시간은 계속 흘러갈 뿐이었다. 승원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가 열어 둔 문 안쪽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고분고분한 승원의 움직임에 권 대표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지나갔다. 이윽고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앞으로 나아가던 승원은 붙잡힌 손목에 걸음을 멈췄다. 승원을 돌려 세운 권 대표가 그를 바짝 밀어붙였다. 뒷걸음질 치던 몸이 벽에 꽉 붙었다. 바짝 붙은 권 대표가 승원에게 속삭였다.

“다들 놀라던데.”

“…….”

“윤승원 씨 잘한다고.”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이 가까웠다.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권 대표가 지그시 승원과 눈을 맞춰 왔다. 나른하게 뜨인 눈동자가 먹잇감을 쫓는 뱀의 것처럼 가늘고 집요했다.

“누구한테 배워 먹은 겁니까.”

“그냥…….”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내며 승원이 중얼거렸다. 승원의 입술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잠시 얼굴을 떼어 냈다. 벽에 완전히 붙은 승원의 앞머리를 위로 쓸어 넘기자, 동그랗고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손바닥으로 이마 위를 지그시 누르던 권 대표가 내리깐 눈과 함께 지시했다.

“입 벌리고 혀 내밀어 봐요.”

보들보들한 두 뺨이 파르르 떨렸다. 방황하던 눈을 권 대표를 향해 치켜뜬 승원이 살며시 입을 벌렸다. 느린 몸짓에 벌어진 윗입술이 작게 경련했다. 잠깐의 망설임을 끝으로 붉은 혀가 입술 밖으로 드러났다.

“……흐읍!”

잠시 보고 있는가 싶던 권 대표가 순식간에 승원의 혀를 덥석 머금었다. 보기 좋게 벌어져 있던 입 안으로 배려 없이 침범한 혀끝이 안쪽을 마구 헤집었다. 금방 젖어 드는 안쪽이 축축했다. 더 갈 데도 없을 줄 알았던 등이 권 대표의 체구에 밀려 벽을 뚫을 기세로 바짝 붙었다. 허공으로 뻗던 승원의 손을 권 대표가 잡아 벽에 붙였다.

“으, 으응, 흣.”

꽉 붙은 입술 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승원을 놔줄 생각이 없는지, 권 대표는 온몸을 승원에게 더욱 바짝 밀착시켰다. 방금 전까지도 하던 게 키스였는데, 상대가 바뀌었다고 승원은 혀를 어떻게 쓰고,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조차 전부 잊고 말았다.

안쪽을 배려 없이 찔러 대는 통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그가 벽에 달아 놓고 있던 승원의 손을 제 어깨 위로 올렸다. 마구잡이로 섞이는 혀는 누가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입을 벌리고 있던 순간부터 고여 있던 안쪽의 타액이 서로의 것으로 마구 섞여 승원의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다리 사이의 묵직한 것들이 서로를 문질렀다.

입술을 떨어뜨리면서도 얽힌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바짝 상기된 승원의 두 뺨이 붉었다.

“키스하는 법을 오는 길에 다 까먹은 겁니까?”

적나라한 입맞춤 후에도 권 대표의 목소리는 지독히 건조했다.

입술을 다문 승원의 입 안쪽이 권 대표가 전한 열기로 가득했다. 앞섶이 찌릿하게 서는 듯해 승원은 두 다리를 오므렸다.

“대표님이랑 하는 건…… 느낌이 달라서…….”

머뭇거리며 이야기하는 승원은 권 대표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올린 손가락으로 승원의 고개를 위로 들었다.

“느낌이 어떻게.”

확인하려 드는 듯이 그가 되물었다.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진한 압박감에 승원의 눈이 갈 길을 잃은 듯이 흔들렸다. 위축되어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좋아하는 사람… 이니까…….”

순간 권 대표의 눈가가 희미하게 접혔다.

“변함없습니까.”

“……네.”

“윤승원 씨 벗어 보세요.”

물러난 권 대표가 자신의 바지 벨트를 풀었다. 찰랑거리는 벨트 소리와 함께 바지 버클을 푼 그가 굼뜬 승원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손수 재킷을 벗겨 주었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죄다 풀고, 입고 있던 상의를 전부 탈의시키자 적당히 마르고 하얀 몸이 드러났다.

“바지랑 속옷도 다 벗고.”

“지금 여기서…….”

“나랑 섹스하고 싶다며.”

부정할 수 없어 승원은 빠르게 바지와 속옷을 무릎 밑으로 내렸다. 허물이 벗겨지듯 떨어진 옷 밖으로 발을 꺼낸 승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신발 밑창으로 바닥을 툭툭 쓸었다. 잔디처럼 꺼끌꺼끌한 러그가 퍼석하게 발끝에 닿았다.

그가 성의 없는 발짓으로 툭툭, 승원이 벗어 둔 옷가지들을 승원의 발치 앞에 가지런히 모아 두었다. 승원이 그의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고 앉는 동안 권 대표는 헐렁거리던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당겨 목에서 꺼내 풀어 던졌다.

“무릎 꿇고, 일단 내 것 좀 빨아 봐요.”

목소리가 바닥에서 들끓는 심해와도 같았다.

승원의 눈앞으로 당도한 권 대표의 앞섶이 불룩하게 서 있었다. 높게 솟은 산처럼 드러난 안쪽의 둔기는 윤곽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그가 얼른 바지와 속옷을 내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알아서 합시다.”

그제야 승원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미 버클과 벨트가 모두 풀어져 있는 바지는 손으로 내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의 허리춤에 떨리는 손을 얹어 바지를 살며시 앞으로 내리자, 이미 반쯤 발기한 성기가 굵직한 무게감과 함께 튀어 올랐다.

핏줄이 반쯤 올라와 있는 성기 안쪽이 짙은 자주색이었다. 심호흡을 끝낸 승원이 조심스레 기둥 아래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밑으로 늘어져 손에 닿은 무게가 상당했다. 살짝 쓸어 만지는 것만으로 권 대표는 작게 신음을 내쉬었다.

“하아….”

아까 권 대표에게 보여 주었던 것처럼 승원이 혀를 내밀었다. 기둥밑동을 손으로 쥐고 귀두 끝을 천천히 핥았다. 매끈하게 닿는 피부의 겉면이 점점 뜨거운 열기로 차올랐다. 오늘은 옷도 전부 벗고 있는데, 그의 좆을 입에 물었다는 사실 하나로 승원의 물건 역시 부끄러움을 모르고 크기를 키워갔다.

“우, 으읍…….”

이내 입에 가득 권 대표의 것을 넣은 승원이 입술을 오므려 끝에서부터 귀두 끝까지 쭈욱 빨아들였다. 비린 맛이 가득한 살갗이 입 안 점막을 마구 찔렀다.

천천히 왕복 운동을 시작하는 승원을 내려다보며, 권 대표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갔다. 승원이 눈을 들어 확인했을 때, 권 대표는 가슴을 크게 일렁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묵직하게 달아오른 다리 사이의 좆이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꺼떡거리는 귀두 끝이 간지러웠다.

단추를 다 풀어 헤친 권 대표의 와이셔츠 사이로 탄탄한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승원의 머리를 어루만지듯 쓸어내리던 그가 뒤통수를 잡고는 부드럽게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찰랑대는 검은 머릿결이 스르륵, 잡혔다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섰네.”

권 대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승원이 얼른 제 허벅지를 바짝 붙였다.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를 향해 얼굴을 치켜든 채였다. 그가 구두 끝으로 승원의 성기를 툭 건드렸다. 스프링처럼 퐁 튕긴 승원의 성기가 덜덜거리며 진동했다.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권 대표가 두 손으로 승원의 뒤통수를 꽉 조였다.

“후, 으읍…….”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든 권 대표가 허리를 강하게 튕겼다. 그의 손에 완전히 고정된 입 안으로 기둥이 무자비하게 찔러 들어왔다. 목구멍 안쪽이 짓눌려 신음을 흘렸다. 귀두가 목젖 끝을 푹 찌르자 승원이 헛구역질을 했다. 얼얼한 입 안이 무감각해졌다.

“…케, 커헉….”

목구멍을 찔렀던 성기는 반쯤 입술 밖을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입술의 주름을 밀며 볼 안쪽을 강하게 짓눌렀다. 목젖을 치고 간 여운으로 식도 안쪽이 얼얼했다. 잔뜩 발기한 그의 성기를 받은 입꼬리 양쪽이 갈라져 찢어졌다.

그사이에 무지막지하게 크기를 키운 성기는 승원이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계속되는 추삽질을 이어나가며 입술 끝자락을 짓누르며 드나드는 뜨거운 살갗의 감각에 승원이 발끝을 오므라뜨렸다. 여린 신음을 이어 나가던 권 대표의 숨결이 점점 거칠게 변했다.

발기한 승원의 귀두 끝에서 투명한 쿠퍼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타오르는 흥분감에 젖꼭지가 바짝 섰다. 온몸을 권 대표의 다리 위로 바짝 붙인 승원은 자신의 입 안에 거침없이 제 좆을 박아 대는 권 대표를 끌어안았다.

“허, 헉… 하아…… 씹….”

권 대표가 간헐적으로 더운 숨을 뱉어냈다. 흐릿하게 올려다본 승원의 시야엔 가슴을 크게 울렁이며 인상을 찌푸리는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좆이 몇 번이나 칠흑 같은 움직임을 이어내며 입 안에서 팽창하더니, 이내 목구멍 안쪽으로 뜨거운 정액이 쏟아졌다. 여운을 맞이한 길고 깊은 호흡이 승원의 머리 위로 흩어졌다.

“……괜찮습니까.”

뭘 보고 괜찮냐고 묻는 것인지 몰랐다. 입술 밖으로 제 좆을 꺼낸 권 대표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붉게 번진 승원의 입술을 매만졌다.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여전히 발기한 승원의 성기를 무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목젖을 툭툭 건드렸다.

“안 삼킵니까.”

“…….”

“저번엔 잘 삼켰잖아.”

무작정 삼켜 버린 승원을 나무랄 때는 언제고, 권 대표는 승원이 제 정액을 삼키길 기다리고 있었다. 숨을 골라 쉬던 승원이 목울대를 크게 꿀렁였다. 입 안에 고여 있던 희멀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뒤로 꿀렁 넘어갔다. 꿀떡,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승원은 입술 주변까지 싹싹 핥아 다시 삼켰다.

“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시늉을 하는 권 대표를 따라 승원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를 향해 깨끗한 입 안을 보여주자, 만족스럽게 입가를 올린 권 대표가 승원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여전히 혼자 세우고 있는 승원의 좆을 그가 바짝 붙어 손으로 어루만졌다. 승원이 몸을 바짝 떨었다.

“이건 왜 아까부터 세우고 있습니까.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건들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불쑥 그가 승원의 기둥을 꽉 쥐었다. 쥐어짜는 듯한 강한 악력에 승원이 다리를 후들거리며 권 대표의 허리춤을 잡았다.

“그렇게 잡으시면….”

“손만 대도 쌀 거 같은 얼굴이네.”

“…으, 대표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짧게 지껄인 권 대표가 승원을 번쩍 안아 들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 침실 안쪽으로 들어선 그가 승원을 놓아준 곳은 침대가 아닌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 앞이었다. 무심결에 권 대표가 놓아준 그대로 손을 짚고 선 승원이 작게 경악했다. 전신을 다 덮을 만큼 거대한 거울이 적나라하게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승원의 등에 가까이 붙은 권 대표가 나긋하게 말했다.

“내가 윤승원 씨 흥분한 얼굴 꼴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표님…… 읏.”

턱주가리가 그대로 붙잡혔다. 권 대표의 손아귀 안에서 얼굴을 뻣뻣하게 치켜든 승원이 거울 속 자신과 제 뒤의 남자를 똑똑히 마주했다.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겨진 온몸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그 아래 발기한 좆이 덜렁거렸다.

“윤승원 씨도 보세요. 섹스할 때 윤승원 씨 얼굴이 얼마나 꼴리는지.”

수치스러움에 눈물이 흠뻑 차올랐다. 떨리는 손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힘겹게 쥐고 있는 동안 권 대표는 승원의 엉덩이를 양옆으로 벌렸다. 굵은 중지를 사용해 골 사이를 매끄럽게 쓸어 만지다가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로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유 부릴 시간 없으니 빨리합시다.”

“흐으, 으…… 대표님…….”

불러도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승원은 애처롭게 그를 부르짖었다. 뚜껑을 열어 하얀 로션을 듬뿍 짜낸 권 대표가 그대로 승원의 볼기 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미끄럽게 들어오는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구멍 안쪽으로 찔러 들어올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엉덩이를 뒤로 뺀 승원이 고개를 떨군 채 크게 숨을 쉬었다.

“벌써 싼 거 같네.”

권 대표가 작게 중얼거렸다. 중지와 검지로 미끄덩한 입구 주변을 부드럽게 짓누르던 그가 남은 손을 승원의 가슴으로 가져왔다. 가슴 위를 마사지하듯 둥글게 매만지던 그가 승원의 유륜을 꾹 누르고는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워 콱 비틀었다.

“흐, 으읏……!”

아찔한 감각에 튕기듯이 몸을 일으키자 거울 안에 흥분에 겨운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이미 잔뜩 열이 오른 볼이 취한 듯이 붉었고, 가슴 위엔 핏줄이 형형하게 선 남자의 손이 제 젖꼭지를 비틀어 꼬집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읏-.”

권 대표의 손가락 두 개가 동시에 주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로션이 윤활제 역할을 해서인지 전보다 미끄럽게 안을 침범한 손가락이 밑동 끝까지 내벽을 짓누르고 들어왔다. 뻐끔거리는 구멍이 점차 꾸물꾸물 안쪽의 크기를 키우며 그의 손가락을 따라 모양을 잡아 갔다. 승원의 가슴을 어루만지던 권 대표가 허벅지 바깥쪽을 착, 때렸다.

“다리를 더 벌려야 나도, 윤승원 씨도 수월하지.”

벌릴 수 있는 최대치로 벌리고 섰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제 몸에 들어선 권 대표의 손가락 역시 함께 꿀렁대는 것만 같았다. 고드름처럼 귀두 끝에 맺혀 있던 쿠퍼액이 끈적한 점성을 보이며 밑으로 떨어졌다. 안쪽의 주름을 다 펼 기세로 쭉쭉 밀고 들어오던 권 대표가 손가락을 꺼냈다.

“흣, 아아…….”

벌어진 다리만큼이나 벌어진 구멍은 곧장 다물어지지 못하고 작은 크기로 뻐끔대기 바빴다. 그 사이로 물기를 가득 머금은 로션이 묽게 번져 흘렀다. 다리 아래로 간지럽게 떨어지는 액체를 느끼며 승원이 허벅지를 떨었다.

“앞에 보세요. 그래야 나한테 윤승원 씨 얼굴이 보일 거 아닙니까.”

승원이 애써 부들거리는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일그러진 눈썹 밑으로 커다란 두 눈이 일렁거렸다. 승원의 가슴을 다시 크게 어루만진 손이 위로 올라왔다. 턱 끝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끝이 입술을 건드렸다. 통통한 입술 안쪽으로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검진이라도 하는 것처럼 승원의 혀를 꾹꾹 눌러 만졌다.

“넣을 테니까, 앞에 보고 빨아요.”

“하아…… 으흡…….”

쪽쪽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가락을 정성스레 빠는 승원을 권 대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양옆으로 벌어져 하늘거리는 권 대표의 와이셔츠가 간지럽게 승원의 등허리를 건드렸다. 그때마다 움찔거리는 엉덩이가 탐스러웠다.

권 대표가 자신의 좆을 들어 그 위로 로션을 듬뿍 뿌렸다. 치덕치덕 발린 하얀 크림이 야했다. 앞뒤로 몇 번 흔들어 곧추세운 뒤 뽀얀 엉덩이 사이를 벌려 밀어 넣었다.

“으윽, 대표님, 흐…… 아아…….”

“하아…….”

불거진 성기 끝이 딱딱하게 구멍 입구를 건드리다가 이내 사이를 벌리고 움푹 들어갔다. 형형하게 핏줄을 세운 기둥이 사나웠다. 승원의 허리춤을 뒤로 더욱 끌어당기곤 볼기짝을 잡아 넓게 벌렸다. 버거워할 것처럼 굴던 입구가 커다랗게 벌어지며 수월히 그의 물건을 삼켜 냈다. 오물거리며 받아먹는 구멍이 기둥을 힘껏 조였다. 안에 들어 있던 하얀 액체가 밖으로 밀려 나오며 그 밑을 가득 흘러내려 적셨다.

“…힘주지 말고.”

“하, 읏…… 으, 하응…….”

“뭐 합니까, 안 빨고.”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파고드는 좆기둥에 벅찬 숨을 이기지 못하고 승원이 신음을 쏟아 냈다. 손가락을 빨지 않는 승원에게 경고라도 하는 듯이 권 대표가 입 안쪽의 연한 살을 꾹꾹 찌르며 건드렸다. 찔꺽이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다 넣었는데. 아픕니까.”

거울을 통해 마주 본 권 권 대표가 승원에게 물었다. 짐승의 것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거울에 반사되어 승원에게 꽂혔다.

“으으, 응…….”

말을 할 수 없어 승원은 권 대표의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앞뒤가 전부 권 대표의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제 안에 가득 들어찼다고 생각하니 끓어오르는 배 속의 열기를 잠재울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숨이 차도록 선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흐, 윽!”

예고도 없이 그의 귀두 끝이 안쪽 깊숙한 공간을 푹 찔렀다. 후들거리던 허벅지 안쪽이 잘게 경련했다. 혹여 권 대표의 손가락을 물기라도 할까 엉성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승원의 입술 밑으로 고여 있던 묽은 침이 떨어졌다. 꽉 붙어 있던 몸이 뒤로 천천히 떨어져 나가자 목 위로 소름이 돋았다. 치골과 엉덩이가 그대로 맞붙어 그 사이로 열이 오른 끈적한 로션이 마시멜로처럼 늘어졌다.

권 대표가 승원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거칠어진 숨을 애써 차분하게 내쉬었다. 입구 끝에 걸려 있던 기둥이 다시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내벽을 다 뚫을 듯이 팽창한 좆이 팽팽하게 안쪽을 벌렸다. 끝 쪽에 다다른 귀두가 끈적이는 소리를 내며 붉은 전립선을 찔렀다.

“아, 읏……!”

승원의 등이 팔짝 뛰었다. 턱 밑으로 떨어진 타액을 손등으로 대신 닦아 낸 권 대표가 다시 그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고장 난 것처럼 혀조차 제대로 못 쓰는 승원을 대신해 직접 입 안 곳곳을 쑤시고 매만졌다.

쩍 벌린 다리 때문에 테이블 밑에 가려진 승원의 성기가 곧게 서서 꺼떡거렸다. 벌써부터 밀려오는 사정감에 손을 내리고 싶었지만, 테이블 밑으로 한 손이라도 뗐다간 그대로 중심을 잃고 몸이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앞에 똑, 바로 보세, 요.”

승원이 반응하는 지점을 찾은 그가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감싸 승원의 배를 꾹 움켜잡은 권 대표가 앞뒤로 빠르게 왕복했다. 안쪽에 뭉친 액체들이 불거진 성기와 함께 엉겨 붙어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배 안에 들어차는 듯한 좆의 모양을 그대로 느끼며 승원은 수치도 잊은 채 거울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하, 으으읏, 아, 윽, 흐응!”

배꼽 언저리를 꾹 누르던 그가 손을 위로 올려 승원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곳저곳 권 대표의 손자국이 남는 곳마다 피부가 삽시간에 붉어졌다. 뒤에서 밀려오는 힘에 못 이긴 승원의 몸이 쉴 새 없이 앞으로 밀렸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이 까마득했다. 거울 속엔 쾌락에 젖어 야해 빠진 남자가 저 자신을 그대로 응시하고 있었다. 알 수 없이 차오르는 눈물샘에 눈을 꾹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좆, 같… 이 야해서. …씨발.”

“읏, 윽, 흐으으, 아윽….”

권 대표의 목소리가 귀로 바로 닿지 않고 저 멀리 휘돌았다. 살이 쉴 새 없이 맞부딪쳤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지탱하고 있느라 가냘픈 팔이 테이블 위에서 부들부들 떨렸고, 아랫배를 묵직하게 채운 사정감에 승원의 시야 너머가 쉴 새 없이 점멸했다.

에너지를 다 털어 넣을 기세로 깊이 추삽질을 이어 나가던 권 대표가 밑으로 떨어지려는 승원의 몸을 손으로 꽉 안아 들었다. 승원은 저 자신도 모르게 잇새에 있는 기다란 손가락을 깨물었다. 쾌락에 젖어 그런 거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권 대표가 승원의 상체를 제 몸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완전히 일자로 선 자세가 된 와중에도 안을 파고든 성기는 단단하게 묶여 빠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승원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자 주륵, 남은 침이 권 대표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크게 허리 짓을 한 번 하자 승원이 목을 쭉 빼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권 대표가 승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입맞춤과 같은 것이 지나갔다.

“그 여자랑 있을 때보다 몇십 배는 더 붉은데.”

“…흣, 으으…….”

“이러고 조금 있다가 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갈 거 아닙니까.”

“…….”

“지금 윤승원 씨 얼굴이랑 내 얼굴, 잘 새겨 두고 나가세요. 그래야 안 잊어버리지.”

쭉 빠져나온 좆이 축축하게 젖은 회음을 짓눌렀다 다시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하는 승원의 입술을 권 대표가 다시 어루만졌다.

“아주 잘근잘근 다 씹어 삼키지 그래.”

그의 손가락 위로 승원의 이빨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짐승에게 물린 것처럼 붉게 자국을 맺은 손가락이 다시 한 움큼 승원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말랑거리는 혀를 지점토 만지듯 매만지던 권 대표가 마지막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승원의 눈자위가 온통 진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승원의 목에 입술을 가득 묻은 채 그가 사정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귓바퀴에 적나라하게 닿아 오는 남자의 거친 숨결이 뇌를 열기로 가득 채웠다. 승원은 반쯤 우는 듯이 그의 물건을 받았다. 안으로 꽉 채워 들어왔다가 재빨리 뒤로 빠질 때면, 허한 공백 사이로 구멍이 바짝 조였다. 안달 난 몸이 허벅지를 서로 비볐다.

“하, 으윽, 응…… 대, 읏, 표님, 응…….”

기어들어 갈 듯한 목소리로 승원이 힘겹게 울었다. 성기 끝이 팽팽하게 불어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 낼 기세였다.

“싸, 쌀 것 같아, 요…… 흐으, 으. 싸고, 싸고 싶, 읏…….”

“좀만 더 참으세요.”

테이블을 짚고 있던 손으로 승원이 제 기둥을 꽉 잡았다. 요도 끝을 엄지로 막고, 있는 힘껏 참았다. 광대가 부들부들 떨렸다. 쉼 없이 위태롭게 흔들리던 몸이 권 대표의 팔에 의해 지탱되었다.

“못 참겠으면 물어.”

그가 아예 손등을 승원의 입가에 물려 주었다. 혀와 타액이 마구잡이로 그의 손에 엉겨 붙었다. 휘몰아치듯 몰려오는 사정감을 참아내려 승원이 권 대표의 손을 와작 깨물었다. 흐느끼는 신음이 연방 터져 나왔다.

“하, 으윽, 흐….”

“……흐으, 으아….”

곧이어 권 대표가 질긴 신음을 뱉어 내며 승원의 안쪽에 사출했다. 승원이 녹아내리듯 몸을 맡기며 잡고 있던 자신의 성기 위에서 손을 떼어 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정액이 허공 위로 분출됐다.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승원이 허벅지를 간헐적으로 잘게 떨었다. 뿌옇게 찾아온 여운의 후유증이었다.

“윤승원 씨.”

“……하아…….”

“정신 차리세요.”

귓가에 파고드는 나긋한 음성에 승원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권 대표가 자신의 귓바퀴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댄 채였다. 가슴이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승원의 몸을 쓸어 만진 권 대표가 성기를 밖으로 꺼냈다. 미끈거리는 구멍 밖으로 흐물거리며 빠져나오니, 다물리지 않은 구멍이 검은 암흑을 만들었다. 그 사이를 손으로 누르니 담겨 있던 정액이 흘러내렸다.

“잠깐 기다리세요.”

잠시 뒤로 빠졌던 권 대표는 욕실에서 물에 젖은 수건을 챙겨 왔다. 상체를 테이블에 완전히 붙이고 힘겹게 숨을 쉬는 승원의 몸 이곳저곳을 그가 수건으로 닦아 냈다. 뜨거운 물에 적신 건지 몸에 수건이 달라붙을 때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안에 싼 거 빼야 됩니다. 힘줘 봐요.”

온 얼굴이 화끈거렸다. 승원이 배에 힘을 크게 주자 남아 있던 정액들이 찔끔찔끔 밖으로 새어 나왔다. 녹은 로션과 권 대표의 정액이 뒤섞인 묽은 액체가 골 사이로 흘러내렸다. 승원은 수치스럽다는 생각도 잊고 안에 있는 게 다 나올 때까지 그에게 엉덩이를 내보인 채 구멍을 뻐끔거렸다.

티슈로 받쳐 닦아 낸 그가 남은 것들도 손가락으로 긁어냈다. 수건을 한 번 더 물에 적셔 온 그가 몸에 남은 자국들을 모두 지워 주었다. 도저히 힘을 쓸 수 없어 승원은 그가 하는 대로 무작정 몸을 맡겼다.

정신을 차리니 흰 가운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기력을 모두 잃은 몸이 푹신한 이불 위로 완전히 잠겨 들었다. 셔츠 단추를 잠그며 멀쩡히 욕실 밖을 나온 권 대표가 냉장고에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승원은 눈만 뜬 상태로 멀거니 권 대표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며 제 차림새를 정돈한 권 대표가 승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 시간 조금 안 되게 남은 것 같은데.”

“…….”

“피곤하면 눈 좀 붙이세요. 깨워 줄 테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승원의 거절에 권 대표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일하는 사람 불러다가 노동을 시켰는데. 나도 그 정도 양심은 있습니다.”

승원은 몸을 작게 웅크리고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잘빠진 턱선은 아래에서 올려다보아도 여전히 날카로웠다.

“대표님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눈을 느리게 뜨고 감던 그가 침대맡에 앉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무게에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궁금해서 구경 좀 와 봤습니다.”

“…….”

“아까 연기하는 거 보아하니 나랑 이런 짓 하는 줄은 아무도 모르겠던데.”

짧은 비소가 권 대표의 낯을 스치고 지났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했습니다.”

승원은 누워 있던 몸을 차분히 일으켰다. 벌게진 귓바퀴를 들키지 않으려 괜히 머리를 매만졌다. 섹스에 취하느라 잊고 있던 질문들을 하나씩 하려던 셈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승원이 목을 울렸다.

“대표님, 저 언제부터… 보고 계셨어요?”

승원의 물음에 권 대표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답하던 시점엔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복도 촬영하던 내내 쭉.”

“…….”

“김 실장이 감탄하던데.”

팔을 뒤로 돌려 침대 위에 짚고 있던 권 대표가 승원에게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김 실장한테는 아직도 사인을 안 해 준 겁니까?”

“…아. 네, 아직…….”

“나한테 귀찮게 구는 것도 질립니다. 하나 해서 얼른 줘 버리세요.”

질색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문 권 대표를 응시하던 승원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대표님 제가 출연한 영화… 보신 적 있으세요?”

로비에서 만났을 때, 그가 승원에게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영화에서 봤던 것만큼 훤칠하다는 말. 남들이 다 보는 자리라서 그냥 겉치레로 한 소리인지, 아니면 진짜로….

“봤습니다. 몇 개.”

“…….”

승원의 눈이 커다랗게 확장됐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봤다는 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그의 대답을 듣기 무섭게 심장이 빠르게 반응했다. 그에게서 자신의 영화를 봤을 것이란 말이 돌아올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탓일까.

“질문에 답이 된 겁니까?”

“……네.”

멍청하게 대답하는 승원을 권 대표가 빤히 바라보았다. 몸을 가까이 당겨 승원에게 바짝 붙은 그가 승원을 불렀다.

“윤승원 씨.”

“네. 대표님.”

시선이 엉겨 붙었다. 다시금 숨통이 조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잠은 안 잘 생각입니까.”

“……네.”

“왜.”

“…아까워서.”

권 대표의 눈동자가 승원의 콧대를 훑고 내려왔다. 눈을 지그시 내리뜨던 그가 다시 승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금 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

“아까운 시간 만족스럽게 쓰고 나가고 싶은 거잖아.”

자비를 베푸는 사람처럼 씨익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권 대표가 승원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 거 해 보세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진짜로.”

“난 거짓말은 안 합니다.”

권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원의 시야에 곧바로 보인 것은 다름 아닌 곧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해 보라는 저 말은 꼭 승원이 하고 싶던 것을 미리 알아챈 사람이 지껄이는 듯이 여유가 느껴졌다.

승원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권 대표는 정말 가만히 있을 생각인지 어깨를 나른하게 내린 채 승원을 응시했다.

“대표님이랑 키스하고 싶습니다…….”

머뭇거리던 승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승원의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권 대표가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하세요, 그럼.”

고개를 살며시 들자, 권 대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자 곧바로 가슴이 닿을 것처럼 거리가 좁혀졌다. 승원이 권 대표의 어깨에 두 손을 짚었다. 세차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닿은 팔을 통해 그에게 전해지진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가까이 다가간 승원이 권 대표에게 살포시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머금는 것으로 시작한 키스는 그가 입술을 벌리며 조금 더 거칠게 바뀌었다. 승원이 직접 혀를 넣어 권 대표의 입에 들어섰다.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안을 열심히 헤엄치던 승원이 적셔진 혀끝으로 점막 군데군데를 찔렀다. 한동안 반복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살며시 눈을 떴을 무렵, 승원은 지그시 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마주쳐야 했다.

“복도에서 하던 대로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꽉 붙은 입술 사이로 그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삽시간에 붉어진 승원의 볼을 응시하던 권 대표가 턱을 바짝 잡고 혀를 확 밀어 넣었다. 금세 전세가 역전되었다.

질척이는 입맞춤이 한동안 길게 오고 갔다. 뒤로 밀릴 것 같은 몸을 간신히 힘을 주고 참아 낸 승원이 권 대표의 등을 끌어안았다. 먼저 한다고 해 놓고 너무 내빼고 있는 것도 민망하기에, 최대한으로 열정을 담아 상대의 움직임에 응했다. 사탕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서로에게 완전히 얽혀 입 안 곳곳을 탐했다.

뒷머리가 화끈하게 열이 오를 때 즈음,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몽롱했던 정신에 오히려 불이 들어오며 바짝 정신을 차리게 됐다. 키스가 끝난 이후에도 승원은 권 대표에게 매달린 채 떨어지지 않으려 힘을 주었다.

가까이 얼굴을 붙인 권 대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좋습니까?”

대답 없는 승원을 보며 그가 실소했다. 그러더니 승원을 떨어뜨리곤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권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등을 돌리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승원에게 옷걸이에 걸린 옷을 던져준 권 대표가 성의 없게 지껄였다.

“그거 그대로 입고 나가면 됩니다. 냄새 같은 건 안 뱄으니 걱정하지 말고.”

재킷을 챙겨 입은 권 대표가 거울로 가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다듬었다. 각진 정장을 입고 있는 태가 깔끔했다. 다시 승원에게 돌아온 권 대표가 승원의 정수리를 꾹 짓눌렀다.

“남은 촬영 잘하세요.”

“…지금 나가시게요?”

“나도 할 일이 많습니다. …둘이 같이 나가서 좋을 것도 없고.”

승원을 바라보던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협탁 위의 전화기를 가리켰다.

“배고프면 뭐라도 시켜 먹어요. 대신 음식 직접 받지만 말고.”

“네.”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머리 위를 누르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돌린 등으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권 대표가 차분히 걸음을 옮겨 객실을 빠져나갔다. 얌전히 열렸다가 철커덕, 하며 닫히는 문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다리던 승원은 그대로 대자로 뻗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승원이 제 볼을 꼬집어 당겼다. 따끔한 통증에 눈 한쪽을 찡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제자리걸음인 걸 아는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꾹 눌렀다. 이전과는 다른 공기가 여전히 그가 떠난 자리 위에 남아 있었다. 침침하게 내려앉아 모래 속에 갇혀 있던 가능성이 하나둘, 공기 방울을 맺으며 위로 떠 올랐다.

***

하얀 손가락이 담뱃갑의 뚜껑을 열었다. 길고 얇은 담배를 꺼내 문 차현이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돌렸다. 창가 너머의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이 탁한 회색빛이었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쏟아지는 빗물에 쓸려 내려갔다. 연기를 내뿜으며 허공을 바라보던 차현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세요.”

이어서 김 실장이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김 실장을 바라보며 차현이 미간을 좁혔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잘 빠진 검지를 들어 보인 그가 김 실장의 손에 들린 것을 가리켰다.

“뭡니까, 그건.”

“아, 대표님 앞으로 들어온 겁니다.”

“나한테?”

값비싼 브랜드의 이름을 단 종이가방 두 개였다. 김 실장이 묵직해 보이는 종이가방을 응접용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다 태우지 않은 장초를 그대로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끈 차현이 저에게 온 선물을 확인했다.

“누구한테 온 겁니까?”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묻는 차현에 김 실장이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대표님이 직접 확인을 해 보시는 게.”

눈빛을 보니 아는데 모른 척을 하는 듯 보였다. 김 실장의 낯을 금방 파악한 차현이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앉아 종이가방을 열어 보았다. 묵직했던 종이가방 안엔 모양이 잘 빠진 와인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은빛 끈으로 정교하게 묶인 네모반듯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자 얇은 포장지에 담긴 네이비색의 넥타이가 드러났다. 매끄러운 넥타이의 면을 매만지던 차현이 굳어 있던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설마.

승원과 호텔에서 만났던 그 날, 넥타이를 깜박했다는 것을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야 깨달았다. 어쩐지 허전했던 목을 매만지며 차현은 절로 터져 나오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거울을 보고 몇 번이나 확인했음에도 넥타이가 없단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어딜 가든 차림새와 매무새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던 자신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차현은 온몸이 젖어 거울에 비치던 안쓰러운 얼굴을 다시 반추했다. 온갖 분비물로 엉망이 된 채 자신의 손자국을 가득 매달고 손가락을 빨던 어린 얼굴. 재차 떠올리던 그 얼굴에 다시금 묵직해지는 아랫도리를 느낀 차현이 입술을 짓씹었었다.

그리고 차현은 그날 넥타이 없이 남은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때 그렇게 저버린 넥타이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것만 주고 간 겁니까?”

“아, 퀵으로 배달된 겁니다.”

“아쉽네.”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린 차현이 매끄러운 와인병을 매만졌다. 하긴, 그쪽 사정도 바쁠 테니 직접 오는 건 어려울 터였다. 아마 지금도 열심히 카메라 앞에서 애를 쓰고 있겠지.

금색 상표가 붙어 있는 와인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넥타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넥타이 꼬리 끝에 툭, 하고 작은 카드 하나가 떨어졌다.

“…뭐야, 이건.”

빳빳한 카드의 겉면이 거칠었다.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 보던 차현이 그것을 열었다. 몇 줄 적혀 있지 않은 문구는 차현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듯 보였다. 동글한 글씨체로 쓰여진 카드를 읽던 차현의 표정이 점차 차게 식어 갔다. 비틀게나마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삽시간에 밑으로 꺼졌다.

김 실장이 차현의 옆에서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어느덧 카드를 그대로 덮은 차현이 검지와 중지로 그것을 집은 채 고개를 들었다. 빛바랜 눈동자가 서늘했다.

“알고 있었습니까? 그 여자가 보낸 선물이라는 거.”

“…….”

“그쪽에서 오는 선물 받지 말라고 내가 분명 말했던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대표님.”

김 실장이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마에 주름을 잡은 차현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카드를 테이블에 내던졌다. 넥타이가 담겨져 있던 상자 뚜껑을 그대로 덮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도 씁쓸한 낯은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갑자기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잡쳤다.

“…씨발.”

창가로 등을 돌린 채 머리를 쓸어넘기던 차현이 나지막이 뇌까렸다. 훅, 입 밖으로 터뜨린 연기가 하얗고 길게 흩어졌다. 어느새 차현의 명패 앞까지 다다른 김 실장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안 받으면 제 쪽도 곤란해져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안 받는데 김 실장이 왜 곤란해집니까.”

“…그게 아니라 사모님께서.”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김 실장이 난감한 얼굴로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차현이 입술을 씹어내며 재를 털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후우, 한숨 같은 연기를 내뱉었다.

선물의 발신자는 승원이 아닌, 윤 여사가 새롭게 들이민 차현의 새 약혼자이자, 묘하게 승원과 닮아 불편한 기시감을 내내 일으켰던 장본인이었다. 깽판을 치르고 나온 이후로도 계속되는 성가신 조공에 자신에게 받은 선물을 따로 바치지 말라고 이야기해 둔 참이었는데. 그걸 그새 알아차린 건지 윤 여사가 대신 나서 김 실장에게까지 지랄한 모양이었다.

다가오는 여자마다 쉽게 끝나는 경우가 없었다. 다들 어떻게 해서든 차현의 발치에 붙어 뭐라도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아등바등 제 존재를 알리려 노력했다. 이딴 거지 같은 신경전은 대체 언제쯤 막을 내릴 수 있을까.

“김 실장님.”

“네, 대표님.”

“그 여자한테서 온 선물 하나 갖다 주겠다고 찾아온 건 아니죠?”

김 실장이 눈을 들어 차현의 얼굴을 살폈다.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여느 때보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엔 항상 짜증을 내던 차현이었지만, 처음 있는 일이 아님에도 오늘따라 더욱 저기압이었다. 김 실장이 조심스레 목을 울렸다.

“선물 전달해드리면서 다음 주에 어떻게 하실 건지 여쭤보려 했습니다.”

“뭘.”

“…곧 기일이지 않습니까.”

차현의 눈동자가 잠시 깊게 물들었다 돌아왔다. 눈을 힐끔 내려 무성의하게 달력을 확인한 차현이 씹고 있던 담배를 내려두고 입을 뗐다.

“그때 봐야 알 수 있을 텐데.”

“꽃만 준비해둘까요.”

“알아서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차현의 화법에 익숙한 김 실장이 짧게 응했다. 알아서 하라는 저 말은 긍정의 뜻임을 의미했다. 약간의 안심을 비치며 나가보겠다는 말을 남긴 김 실장이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힌 이후에도 차현은 김 실장이 떠난 문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담배 끝을 질기게 씹고 있던 차현이 창가의 레버를 돌려 열었다. 작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자, 손바닥 위로 금세 축축한 빗물이 젖어 들었다. 일기예보의 예측에 한 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 우중충한 날씨였다.

“…좆같은 날씨.”

이미 한 움큼 쌓인 재떨이 위로 반이 넘게 타들어 간 담배가 무덤에 코를 박듯 꽂혔다.

***

오랜만에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촬영이었다. 매번 야외에서 이루어지거나 거리가 먼 로케로 이동해야 해서 두꺼운 롱패딩을 어깨에 매단 짐짝처럼 껴입어야 했는데, 스튜디오 촬영은 그러지 않아도 되어서 그 점이 좋았다. 실내라서 옷 안쪽에 핫팩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을 필요도 없었고.

그래도 손 정도를 녹일 핫팩은 있으면 어디든 나쁘진 않았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새 핫팩을 꺼내 흔들던 승원은 남은 손으로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조명과 장비들이 즐비해 있는 근처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많았지만, 대본을 숙지하기에는 이런 구석진 공간이 더 편하고 좋았다.

켜켜이 쌓인 매트리스에 엉덩이를 조심스레 붙인 승원이 다리를 쭉 펴고 대본을 한 문장, 한 문장 훑어 내려갔다. 이미 달달 외울 정도로 보았던 것들이지만,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찾아드는 긴장감은 그간의 암기력마저 지울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났다. 그 위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버튼만 눌러도 나올 정도로 술술 외울 수 있어야 했다.

머리가 조금 지끈거릴 때 즈음, 승원은 대본을 옆에다 내려두고 샌드위치를 먹는 일에 집중했다. 대본만 보고 있느라 그새 흐물흐물해진 종이 포장지를 밑으로 벗겨낸 승원이 내용물들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꼭 잡아 입에 물었다. 빨대가 꽂힌 아메리카노를 먹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날씨에 괜히 아이스를 고집했나. 관자놀이가 싸해지는 차디찬 얼음물의 감각에 승원이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아까 챙겨두었던 외투를 꺼내 한 팔씩 끼워 입던 승원은 문득 주머니 안에 집히는 무언가를 꺼내 보았다.

“…아.”

호텔에서 권 대표와 시간을 보냈던 그날, 그가 객실에 두고 간 넥타이였다.

그에게 연락을 넣어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돌려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넥타이를 도로 돌려주고 남겨질 아쉬움이 더욱 컸다.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권 대표가 자신의 넥타이를 까마득히 잊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모른 척 그의 물건 하나쯤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연락을 넣는 대신, 손에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어 놓고 있던 것을 깜박 잊어버려 지금에서야 알아챈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승원은 넥타이를 들어 올려 코에 조심스레 가져다 댔다. 매끄러운 넥타이의 겉면에서 희미하면서도 익숙한, 달콤씁쓸한 그의 체취가 풍겼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권 대표와 호텔에서 헤어진 이후로 벌써 열흘 가까이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별다른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다면 용건도 없는 주제에 그의 부재가 낯설게만 느껴졌을 텐데, 이상하게 지금은 별다른 초조함이나 걱정이 들지 않았다. 일이 바빠서 그런 걸까 싶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넥타이에 대한 연락이 따로 없는 것을 보니, 승원은 권 대표가 정말 자신의 넥타이를 깜박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승원의 손에 들린 것도 그가 가진 지나가는 수많은 소모품 중 하나겠지.

그럼 정말 그의 넥타이 하나쯤은 이대로 제가 가져도 되는 게 아닐까.

“승원 씨! 승원 씨, 어딨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든 승원이 얼른 주머니 안에 넥타이를 구겨 넣었다.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중앙 쪽으로 매니저 곽영찬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머리를 빠르게 두리번거리면서 승원을 찾는 곽영찬을 향해 승원이 얼른 손을 들고 일어났다.

“형! 저 여깄… 어요.”

“아, 승원 씨!”

구석에 있던 승원을 알아챈 곽영찬이 산만한 덩치를 이끌며 뛰어왔다. 빠른 호흡을 고르는 것을 보니 바깥에서부터 계속 자신을 찾고 있던 것 같았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할래요?”

반가운 매니저의 부름에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던 승원의 낯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점차 굳어졌다. 항상 밝고 개구진 얼굴을 보이던 곽영찬의 낯빛이 좋지 못했다. 승원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낯선 것을 보듯 묘한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비어 있는 대기실의 공기가 서늘하게 뺨에 맞닿았다. 복도를 둘러보던 곽영찬이 뒤늦게 문을 닫고 들어왔다. 입술을 짓씹던 곽영찬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입을 달싹였다. 불안정한 마음을 계속 끌고 싶지도 않았기에 승원은 먼저 입을 뗐다.

“무슨 일인데요?”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냈지만, 손에 둥글게 말아 쥐고 있던 대본집이 맥없이 으스러졌다. 크흠, 목을 가다듬던 곽영찬이 곁눈질로 승원을 훑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슥슥 액정을 만지던 손가락이 멈추고 승원에게로 화면이 돌아왔다.

하얀색 화면 위의 로고가 한 커뮤니티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제목과 함께 길지 않은 본문의 내용이 띄어쓰기가 거의 되지 않은 채 채워진 채였다. 불편한 자세의 승원이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이자, 곽영찬은 아예 승원의 손에 제 핸드폰을 들려주었다.

“이것 좀 읽어 봐요.”

“…….”

승원이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그의 옆에서 곽영찬이 허공을 응시한 채 반쯤 체념한 얼굴을 했다.

제목: [찐] 배우 ㅇㅅㅇ ㅇㅅ그룹 ㄱㅊㅎ 스폰받는다는데

아는 선배가 업계에 존나오래 발담그고 있어서 모르는 거 업서

이번에 드라마 들어가고 소속사 옮기고 한것도 전부 ㄱㅊㅎ빽으로 들어간거라던데ㅋㅋ

이미 업계엔 소문 쫙 퍼졌고 다들 알음알음 모른척 하고 있었는데

한참 전에 호텔에서 둘이 엘베 탔다고 함 ㅇㅇ

뭐 얘기 들어보니까 촬영장에도 몇 번 왔다고 하는데?

니들이 생각하는 그 드라마 맞음 ㅊㅅㅎ랑 찍고 있는 그거ㅋㅋㅋ

아직도 스폰같은게 있나? 그것도 무슨 ㅅㅂ 남자배우를

그렇게 안봤는데 게이인것도 에바고ㅎ

어쩐지 요즘 존나 띄워주는 거 같아서 이상하다고 글 몇 번 올라왔었잖아

빼박인 듯?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제목부터 돌아가 다시 읽어내렸지만, 굳어진 활자가 갑자기 모양을 바꿀 리는 없었다. 본문 밑에는 댓글도 함께 있었다.

익명 : ㄱㅊㅎ?? ㅈㅔNON 권ㅊㅏㅎㅕㄴ 말하는거임?

└ ㅇㅇㅇ..그 YS 존나 잘생긴 손자

└ WOW..여자 안만나는 이유가 그래서??

익명 : 시발 대박이다ㅋㅋㅋ 근데 둘다 존나 잘생기지 않음? 난 찬성ㅎ

└ ㅇㅈ..잘생기면 다 게이라는게 학계의 정설ㅋㅋㅋ

└ 스폰일수도 있다는데 뭔 정신나간 소리여;

└ ㅅㅂ 극혐

익명 : 근데 너무 카더라 아님? 뭔 사진 한 장 없이..신빙성 다 뒤졌는데

└ 222...솔직히 그렇게 따지면 우리엄마도 방송국 국장임 ㅇㅈ?

스크롤을 내리려 액정을 밀었는데, 화면이 멈춘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승원이 검지를 들어 위로 세차게 밀어 버리는 것을 곽영찬이 핸드폰을 뺏어 막았다. 승원의 눈동자가 길을 완전히 잃고 허공을 한참 떠돌았다.

“캡쳐 화면이에요.”

“…….”

“좋을 거 없어서 회사에서 얼른 지웠어요. 다행히 추측성 찌라시라 크게 번지지도 않았고.”

전에도 이런 소문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자신이, 배우 윤승원이 이런저런 곳에 발을 걸치고 스폰 같은 것을 받아 가면서 작품을 건지고 광고를 따낸다는. 엄밀히 말해 허위적 유포는 아니었다. 그게 강제성을 띠고 있든 아니든, 승원은 누군가의 손에 건져져 잔뜩 주물러진 뒤, 작품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비단 익명에 가려진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를 악물고 버텼던 날들이 허다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고, 결국 사실이든 아니든 버티는 자가 이기는 게 이 바닥의 생리였다.

여차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이 생기는 날이 온다고 한들, 다 때려치우고 모든 걸 내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 악마 같은 인간들의 머리채만 함께 잡아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승원은 저 자신을 가다듬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세차게 겪었던 일임에도 처음 마주했던 충격보다도 더한 것들이 뭉텅이로 가슴을 짓눌렀다. 승원이 권 대표와 호텔에 간 적도 있었고, 그가 승원의 촬영장에 늦은 새벽 찾아왔던 적도 있었다. 남들이 아니라고 한들, 본인이 제일 잘 아는 일이었다. 부풀어 오른 양심이 커다란 바늘로 찔리는 듯이 금방이라도 터질 준비를 했다.

혀로 입술을 축이던 곽영찬이 캡쳐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며 씁쓸한 낯을 띄웠다. 그는 승원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아니죠?”

“네?”

순간 갈무리하지 못한 안색이 그대로 드러났을까 싶어 승원은 얼른 표정을 덮고 허파에 바람을 가득 넣었다.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그죠? 그럴 줄 알았어요. 아, 나 진짜 놀랬잖아. …무슨 이런 헛소리가 다 돌고.”

승원에게서 아니라는 말을 들은 후에야 곽영찬이 표정을 조금 풀었다. 힘을 주고 있던 어깨가 밑으로 푹 꺼지는 것이 보였다. 핸드폰 화면을 꺼 버린 그가 이마를 짚었다. 답지 않게 무거운 분위기로 그가 목을 울렸다.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맞아요.”

“…네.”

“승원 씨가 아니라고 하니까 나도 안심은 하는데. …솔직히 승원 씨 벤 없이 퇴근했던 거 한두 번 아니잖아요. 우리끼리야 서로 믿고 들어가라고 인사하고 끝내지만, 나도 승원 씨 관리하는 입장에서 저런 거 보면 난감해질 수밖에 없어요. 회사에서는 나한테 먼저 물어보기도 하니까.”

짐짓 걱정 서린 낯을 띄운 얼굴이 그늘을 만들며 일그러졌다. 팔짱을 끼운 곽영찬이 흐음, 숨을 내쉬었다. 승원은 대본을 옆구리에 끼우고 젖어 드는 손을 바지에 애써 닦았다. 떨리는 입술을 들킬까 싶어 힘껏 말아 물었다.

곽영찬의 말은 확실한 충고이자 경고였다. 이제껏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다. 아니라는 말뿐, 다른 말을 더 덧붙이지 못하는 승원을 보며 곽영찬이 눈썹을 팔자로 무너뜨렸다. 그가 승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미지가 전부인 거 알죠.”

“…알아요.”

“…승원 씨가 아니라는데 더 묻지는 않을게요.”

“…….”

“그래도 조심해 줘요. 우리는 가는 길이 같잖아요.”

쩝, 입소리를 낸 곽영찬이 승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괜찮다며 안심하라는 차원에서 두드린 손짓이었지만, 잿빛이 된 승원의 낯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모래주머니로 두 어깨가 짓눌린 것처럼 밑으로 꺼져 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복도로 나온 승원이 빠른 걸음으로 빈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 안에 있는 모든 칸을 전부 열어서 확인한 승원이 세면대에 손을 짚고 숨을 골라냈다. 찬물에 손을 닦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마주했다.

어깨를 힘껏 짓누르던 곽영찬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웅웅 맴돌았다. 날카롭게 날을 간 칼처럼 보이던 작고 검은 활자들이 거울에 비친 남자의 옆에 먼지처럼 떠돌았다. 머릿속에 가득 떠오른 오만 가지의 잡념들이 뇌를 타고 나와 온몸을 휘저었다.

발 빠르게 지웠다면 권 대표는 모르겠지? 권 대표만은 몰라야만 했다. 이 사실을 그가 알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삐뚜름히 미소짓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뺨을 잡고 키스해 주던 감각이 이토록 생생한데. 자신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에 파묻혀 사는데.

자신이 권 대표에게 있어 해가 되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부터, 그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데까지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그 암담한 여백을 헤아리며 승원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쏟아지는 찬물에 열심히 씻어내렸다.

***

당연하지만, 승원은 좀처럼 촬영에 몰두하기 어려웠다. 다른 이들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묘하게 갈라졌고, 자신이 느끼기에도 시선 처리가 곱지 못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어느덧 다섯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승원은 자꾸만 호흡이 더뎌 오는 것을 느꼈다.

근래에는 증상이 많이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승원은 확실히 전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음식을 도로 게워 내는 일도 거의 없었고, 종일 잠을 설치거나 악몽에 시달리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느껴지는 심리적 압박은 오히려 승원을 더욱 낯설고 두렵게 만들었다. 카메라가 제 주변을 감싸듯이 빙빙 돌았다. 목 끝까지 물이 찬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렌즈를 통틀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눈들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깜박깜박. 승원을 감시하는 것처럼 점멸했다.

감독의 컷 사인과 동시에 승원은 당장 조명이 훤히 비추는 카메라 밖을 벗어났다. 가려진 이마 안쪽에서 땀이 흘렀다. 헤어를 다듬어 주겠다며 다가오는 손들을 거절하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스튜디오 앞을 완벽하게 통제해 놓은 덕에 오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다란 복도를 한참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에서야 저 끝에 자판기 앞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이 승원을 보고 저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렸다. 승원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닫힘 버튼을 터질 듯이 눌렀다.

그나마 제 차례의 신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거기서 더 멈추지 않고 연기를 강행했다간 모두를 관중 삼아 토사물을 늘어놓았을지도 몰랐다. 아득해지는 상상을 관두었다.

옥상엔 예상외로 아무도 없었다. 바닥이 전부 젖은 것을 보니 지금까지 계속 비가 왔던 모양이었다. 냉기가 느껴지는 야외의 공기에 승원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뺨 위로 차가운 결정이 떨어져 녹았다. 손바닥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비가 그친 자리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들이 잔뜩 맺혀 있는 쇠 난간을 손가락으로 쓱 그었다. 여러 방울로 흩어져 있던 빗방울들이 승원의 손짓에 굵직한 덩어리로 뭉쳐 흘러내렸다. 하나둘 떨어지던 눈발은 점차 굵은 입자로 변해 포슬포슬 승원의 어깨와 머리 위에 안착했다.

옆엔 남들이 태우다 버린 담배들이 재떨이를 수북이 채우고 있었고, 난간 너머엔 여전히 불을 훤히 밝힌 빌딩들이 듬성듬성 등을 세운 채였다. 저 중에 불이 켜진 창문들을 세어 볼까 하다가 너무 많아서 관두었다.

이 시간까지도 퇴근도 못 하고 직장에 발 묶인 이들이 저렇게 많았다. 동질감에 혼자 웃음을 흘리느라 손이 젖는 줄도 몰랐다. 젖은 난간을 붙든 승원이 손등 위에 턱을 기댔다.

“하아…….”

건물 안에서 고르지 못했던 호흡을 찬찬히 내쉬었다. 담배를 태우는 것처럼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입김이 길게 새어 나올 때마다 코끝이 찡하게 아렸다.

“하아아…….”

마지막 숨을 길게 뱉어 내고, 승원이 눈을 떴다. 그리고 문득, 승원은 충동적인 움직임으로 외투 안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 위에 떨어진 눈이 녹아 물이 되었다. 화면을 닦고 잠금 화면을 풀었다. 눈이 붙은 속눈썹을 깜박거리던 승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가지 않던 연결음이 툭 끊기고, 전파 너머의 음성이 귀를 찌르르 울렸다.

- 이 시간에 뭡니까.

목소리를 들은 동시에 승원이 가장 크게 숨을 뱉었다. 묵을 갈증이 해소되듯 밑으로 푹 내려 꺼졌다. 물결을 가진 듯이 호흡이 길게 떨렸다. 입가 위로 산소마스크를 쓴 것처럼, 승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안정적인 숨을 내쉬었다.

- 윤승원 씨.

권 대표가 승원을 불렀다.

- 촬영 중이에요? 갑자기 전화는 왜 했습니까.

“그냥 하고 싶었습니다….”

아까는 권 대표에게 귀띔이라도 될까 두려워 안절부절못한 주제에. 염치는 진작 벗어던졌다. 권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건넬 말도, 따로 할 수 있는 말도 없으면서 승원은 무작정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숨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음성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멋대로 보금자리를 만들어 파고든 안락한 상대였다.

권 대표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입을 뗀 그가 물었다.

-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요.”

- 목소리가 아닌데.

중얼거린 목소리가 승원을 타진하려는 듯이 낮고 궤궤했다. 잠깐의 정적 옆으로 공기 주변의 먼 소리들이 백색소음처럼 귀를 울렸다. 먼저 전화를 건 승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쭉 입술만 달싹였다. 어떤 말을 해야 자연스러울까, 이 어색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였다.

- 설마 찌라시 봤습니까?

“……네?”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그대로 그에게로 닿았을 것이다. 승원이 핸드폰을 고쳐 잡고 머뭇거렸다.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 윤승원 씨가 아는데 내가 모를 수가 있나.

“…….”

- 잊었습니까? 윤승원 씨 소속사 내가 꽂아 준 겁니다. 근데 그까짓 루머를 내가 모를 줄 알고.

승원이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다. 한가득 젖은 물기가 손바닥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맺혀 뚝뚝 떨어졌다.

- 설마 그거 땜에 벌벌 떨기라도 했습니까? 윤승원 씨 커리어 망가질까 봐?

비소와도 같은 웃음엔 미온적인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렇게 순진해서 여태 연예인 하고 있는 것도 신기하네.

“…….”

- 스캔들 상대가 나인데. 그깟 인터넷에 나도는 루머 하나로 걱정을 다 했습니까.

승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자신의 대처 능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짜놓은 판에서 시험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촬영 내내 머리를 쪼개고 구역질을 삼키면서 초조해했던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파도에 밀리듯 떠내려갔다. 남은 자리엔 간지러운 허무함만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냈다.

- 또 무슨 걱정을 한 사발 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거짓말이었다. 무서워서 토기가 치밀었다.

- 그럼. 왜 그렇게 벌벌 떨었습니까.

“벌벌 떨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촬영 내내 오한이 찾아왔다.

- 목소리에서 티 납니다.

다그치는 음성에 승원이 다시 입술을 짓씹었다. 권 대표와 주고받는 대화는 결국 항상 승원이 백기를 들게 된다.

“익명이라 잡기는 어렵습니다. 그럴 정도의 가치도 없고.”

“…….”

“찌라시가 왜 찌라시겠습니까.”

권 대표의 말이 맞았다. 승원은 멍하니 까만 전경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내리고 입을 뗐다.

“대표님, 저는…….”

온난한 숨이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가며 하얀 입김을 자아냈다.

“…대표님께 피해 입히고 싶지 않아요.”

힘들게 건넨 말이었다. 겨우내 목 밖을 뚫고 나온 불안한 진심이었다. 승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멀쩡한 척 티를 내지 않으려 한들, 가능할 리 만무했다. 연기로 먹고살고 있건만, 그의 앞에선 이마저도 불능이었다.

승원과 전화 안쪽 상대가 번갈아 가며 숨을 교환했다. 마침내, 권 대표가 목을 울렸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

- 나도 내가 피해 입는 거 싫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

- 그래서 바로 처리했잖아.

어려움 하나 없이 내비친 문장이 깔끔한 해갈을 마쳤다. 자기 본위적이고, 지독히 이기적인 남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단단한 자신과 믿음, 그리고 느긋함. 그게 설령 뒷심 없는 막연한 확신이라고 한들, 그럼에도 닮고 싶었다. 승원은 초조함을 버틸 수 있는 그만한 자만조차 부족했기에.

승원이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권 대표만 한 재력도, 집안도 없었고, 어딘가에 으스댈 정도의 명성도 아니었다. 거기에 더불어 승원은 자신을 믿는 확신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지끈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우직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인간에게서 느긋함이 나올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승원은 그를 만난 이후부터 염치마저 잃어 갔다.

- 나랑 엮인 이상, 그런 지저분한 구설수에 오를 일은 없습니다. 지금 윤승원 씨의 문제는 곧 내 문제고. 윤승원 씨가 가진 스캔들이 내 스캔들이니까.

“…….”

-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적당히 하고 접어 두는 게 시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일 겁니다.

“…….”

승원은 문득 묻고 싶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날을 매번 치기와 고집으로 덧대어 왔는데. 쥐뿔도 보탬 되지 않는 처지는 생각도 못 하고 그가 좋다고 엉엉 울기나 했는데. 기회처럼 붙잡아 인연이 된 우리 사이에 자신은 더는 쓸모가 없는데.

당신은 왜, 어째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대표님.”

턱 끝까지 차올라 넘칠 듯한 음성을 짓눌렀다. 너무도 묻고 싶은 말은 가슴 깊숙이 꾹 삼켰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승원은 다른 말로 대신 덮었다.

“눈… 옵니다.”

침침하게 가라앉은 목울대가 젖은 목소리를 만들었다. 그가 미미하게 반응했다.

- 그래요?

“……네. 엄청 많이.”

- 아깐 거지같이 비만 내렸는데.

이어서 찾아온 침묵과 함께 그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인지 백색소음이 미세하게 모양을 바꿨다. 곧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의 두터운 거실화가 슥슥 바닥을 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더 기다려 그가 테라스로 통하는 유리문을 지나자, 승원과 같은 겨울의 한기가 그곳에도 찾아온 듯싶었다.

- 진짜 오네. 눈.

혼잣말로 중얼거린 권 대표의 음성이 승원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쌓이는 눈처럼 텁텁했다.

- 윤승원 씨.

“…네.”

- 혹시 내 넥타이 윤승원 씨가 갖고 있습니까?

“…아, 아니요.”

예상치 못한 흐름에 생각도 전에 말이 나왔다. 승원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말아 쥐던 주먹을 외투 안에 넣었다. 안쪽에서 구겨진 매끄러운 천 조각이 손안에 빙글빙글 돌았다. 자신은 이제 넥타이 도둑이나 다름없었다.

승원이 그의 넥타이를 손에 쥐고 있는 사이, 그가 중얼거렸다.

- 내가 넥타이를 잃어버렸는데.

“모르겠습니다, 저는.”

- 그래요, 그럼. 어차피 없어도 그만인 거.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권 대표는 깔끔하게 마무리한 말을 끝으로 더 묻지 않았다.

다시 내던진 거짓말에도 다행히 위기를 모면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그가 자신을 봐줬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 닦지 못한 초코를 입에 매단 채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다며 부모에게 생떼 쓰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감정이란 게 참 알 수가 없다. 승원은 생각했다. 분명 단어로 정의되지 않은, 아직까지도 이름이 붙지 못한 인간의 감정은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 보았을, 그러나 손쉽게 단어로 명명할 수 없는 그런 복잡하고 무지근한 감정들이. 마치 지금의 제 마음처럼.

추운 바람을 오래 맞고 있어서인지 자꾸만 눈가가 시린 탓에 승원은 눈을 깜박였다. 전화 속 상대는 뒤늦게야 눈이 내리는 겨울의 밤을 감상 중인 건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권 대표의 숨소리가 승원의 귀 위로 한참 동안 닿았다.

승원이 젖은 코를 한 번 훌쩍였을 때, 그가 중얼거렸다.

- 오늘 종일 기분이 좆같았는데.

“…….”

- 간만에 눈을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

절단된 말이 꼬리를 늘어뜨린 채 돌아왔다. 그가 뱉은 문장은 그게 전부인 건지, 아니면 뒷말이 완성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단면이 드러난 문장 뒤로 입김을 만들어 내는 듯한 긴 한숨이 딸려 왔다. 그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권 대표가 제 눈앞에 있었더라면, 벌어졌던 입술을 다시 다물었을까? 하려던 말을 삼키고 눈을 돌렸을까?

승원은 언젠가 권 대표가 말했던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의심해 왔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인 줄 알았지만, 기실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니. 온전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부족할 거 없이 자란 잘난 남자가 꺼낼 만한 말이 아니었다. 지겨운 사랑에 지친다는 말이라면 모를까, 누군가를 제대로 만나 본 적도, 좋아해 본 적도 없다는 그의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리 없었다.

그런데, 이젠 알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사랑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몰랐다.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낯섦과 무지. 사랑의 감정을 아는 승원의 눈엔 그게 훤히 보였다. 딱 하나, 승원이 그보다 월등히 지닌 경험이었다.

- 날 춥습니다. 적당히 있다가 들어가세요.

“…조금만 더 있다가요.”

눈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 난간 위에 금세 하얀 줄이 깔렸다. 그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승원은 규칙적인 호흡을 이어 나갔다. 완전한 안온을 되찾았다.

***

“피곤하지 않아?”

지그시 내려 감고 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거울 속에서 승원의 뺨에 파우더를 톡톡 쳐 주던 인영이 물었다. 인영은 승원의 메이크업 담당 실장이었다. 순간 핏발이 돈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누른 승원이 고개를 휘저었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돌돌 돌린 립스틱 끝에 붓을 문지른 인영이 승원의 입술에 다시 덧칠했다. 퍼렇게만 보이던 입술 위에 점차 그럴듯한 생기가 돋아났다. 거울에 비친 남자가 퀭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피곤하지 않냐고 묻는 게 당연했다. 고된 촬영이 지속되었다. 힘든 건 저뿐만이 아닐 터였다.

“그래도 어제는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사람처럼 그러더니.”

지금은 좀 낫네. 인영이 중얼거리며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자석이 부딪치며 딸각, 소리를 냈다. 거울 아래 잔뜩 늘어진 화장품들을 잘빠진 손가락이 이리저리 훑었다. 으음. 목을 울리며 고심하던 인영이 색조가 나열된 케이스 하나를 들었다. 거울을 두 눈 삼아 인영을 지켜보던 승원이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고 물었다.

“어제 제가 그랬어요? 그 정도였나…….”

“컨디션 엄청 안 좋아 보이던데. 잠 못 자서 저러나 싶었지. 밤 촬영 말구. 오후에 말이야.”

“…티가 났어요?”

“어머? 티 안 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인영은 승원보다 자그마치 15살은 더 먹었다. 누나라고 부르기야 하지만 그래도 한참 어른이었다. 승원이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면 인영은 툭툭 받아치며 제 아들 다루듯이 승원에게 반말을 했다. 나름 막냇동생 대하듯이 하는 것 같아서 승원은 그게 좋았다.

승원이 손을 올려 볼 언저리를 긁적이자 그녀가 승원의 손을 치웠다. 메이크업 다 안 끝났으니 건들지 말아라. 인영이 짤막한 핀잔을 뒀다.

“밤참 돌릴 때 즈음엔 또 멀쩡해져서 아무 말 안 했던 거지. 너 어제 촬영 땐 진짜 힘들어 보였어, 승원아.”

앞의 말을 곱씹느라 인영이 덧붙인 뒷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밤참을 돌릴 즈음이라면 어둠이 아주 깊어진 늦은 밤이었을 거다. 쌓여 있는 비닐 포장지 위에 서리서리 맺힌 눈이 가득해서 그제야 다들 밖에 눈이 오는구나, 어렴풋이 짐작하던 밤. 승원은 이미 눈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였던 밤.

권 대표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 내려왔을 때에서야 인영은 승원이 멀쩡해졌다고 느낀 것 같았다. 제가 느끼는 건 남들도 다 똑같이 느끼는구나, 승원은 하나 깨달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어제와 비교하면 카메라 앞에서 손가락 까딱하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오늘 촬영을 어제 하고, 어제 촬영을 오늘 했어야 하는데. 그러면 어제 촬영분이 조금이라도 더 괜찮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승원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카메라 뒤로 빠져 다른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커다란 연극 무대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독대한 두 배우가 북받치는 감정들을 쏟아 냈다. 상당한 몰입도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마침내 혼자 남겨진 차서희가 수십 명의 스태프의 앞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각각 다른 각도에서 그녀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줌이 당겨진 화면 안에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이 꽉 들어찼다.

텅 비어 버린 안쪽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 보였다. 맹하게 뻗은 시선 끝에 질긴 눈물이 툭 떨어져 흘렀다. 내로라하는 감독들이 왜 그녀의 앞에 줄을 서는 건지, 그 묵언의 표정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컷. 오케이.”

완벽에 가까운 마지막 테이크였지만, 감독은 구태여 목소리에 활기를 불어넣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르는 배우에 대한 예의였다. 엄숙한 분위기의 촬영장은 컷 사인 이후에도 진중하게 이어졌다. 부드러운 티슈를 서너 장씩 뽑아 눈가와 볼에 툭툭 두드리는 차서희의 얼굴이 슬펐다. 불이 꺼진 카메라 너머의 가면을 벗은 배우는 여전히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허덕이고 있었다.

격려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승원도 작은 손수건을 챙겨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가려고 하는데,

“어어, 왔어?”

“어머, 안녕하세요!”

뒤쪽에서 작은 소란이 펼쳐졌다. 승원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세트장에 발을 들이기 직전이었다. 김 감독과 얼싸안고 등을 토닥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일순 승원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설마, 또.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불행히도 정말이었다.

“남의 촬영장엔 왜 자꾸 오는 거람.”

승원의 옆, 멀지 않은 거리에서 팔짱을 낀 채 속닥거리고 있는 스태프 두 명이 있었다. 질린 표정을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지 눈썹이 못나게 비틀어져 있었다.

“둘이 친하다잖아요.”

“…저번에도 차서희 보러온 게 아니었어?”

“차서희가 정신도 감독 차기작 들어가는 건 맞는데, 그냥 김 감독님하고 친하대요.”

“친목은 즈그들 집에서 하지.”

머리를 넘기며 뇌까리던 스태프가 승원과 눈을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낯으로 얼른 입을 다물려 하길래 승원은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고개를 피하고 딴청 부리는 척을 했다.

놀라긴 했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엔 마음이 금방 잔잔해졌다. 저번에도 정 감독은 촬영장에 찾아와 승원을 찾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같지 않을까. 최대한 저쪽 눈에 띄지 않도록 다른 이들 사이에 끼어 묻혀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퍼뜩 고개를 들고 보니 안쪽에서 울고 있던 차서희는 어느덧 자리를 뜨고 없었다. 승원은 멀거니 쥐고 있던 손수건을 손아귀 안으로 말아 넣었다.

아무리 인원 많고 정신없는 촬영 현장이라지만, 밥때는 재깍재깍 지켜졌다. 고된 노동의 반복과 연속, 그 사이클 안에서 끼니라도 제대로 챙겨 줘야 말이 안 나왔다.

밥차가 왔다고 해서 다들 그곳으로 떼를 지어 움직였다. 학교 전교생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듯이, 촬영장 속 식사 현장은 항상 분주하고 치열했다. 여유를 부리고 있다간 금방 천막 아래 자리를 빼앗겼다. 차서희의 편으로 온 커피차가 밥차 옆에 세련된 현수막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

승원은 식사 대신 그곳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받았다. 함께 챙겨 주는 쿠키도 챙기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피해 피로하지 않은 건물 안쪽으로 이동했다.

몇 입 대지도 않고 내려 둔 커피에서 기다란 김이 새어 나왔다. 전에 아이스를 먹다가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을 겪었더니, 이번엔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더운 커피를 받아 온 것이었다.

그러나 입술이 뜨거워서 바로 먹지를 못했다. 승원은 커피가 식을 때까지 포장지에 쌓인 쿠키를 조각조각 부쉈다. 한입에 깔끔하게 넣기 위함이었다.

권 대표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오늘은 평일이니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을까. 그런데 그가 보는 업무는 뭘까.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을 정리하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펜을 돌릴까. 아니면 다 귀찮은 얼굴로 그냥 창가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도 섹시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또 귓바퀴가 물씬 달아올랐다.

이파리를 하나둘 뜯어 가며 오늘의 운세를 점치는 사람처럼, 승원은 권 대표를 생각하면서 커다란 쿠키를 엄지손톱만 하게 조각냈다. 잘 깨부순 것을 입에 넣고 씹으니 달곰한 땅콩버터 맛이 났다. 아메리카노를 손난로 삼아 손에 쥐고 있다가 다디단 입 안쪽을 텁텁한 커피로 갈음했다.

어제 잠깐 들었던 목소리의 효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음을 승원은 느꼈다. 불규칙하게 뛰어 대며 불안정했던 승원의 가슴을 한 번에 잠재운 권 대표의 낮은 음성은 어제까지만 그 효과를 발휘했다. 이젠 다시 전화를 걸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 얼굴을 봐야지만 괜찮아질 것 같았다.

“……아.”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 손에 끈적끈적한 캐러멜이 달라붙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에 닦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보았지만 마땅치 않았다. 일단 쿠키를 도로 포장지 안에 넣어 둔 승원은 끈적한 지문을 서로 비비다가 복도 화장실로 향했다. 가는 중에도 복도는 사람이 텅텅 비어 승원의 구두 소리가 우렁차게 울릴 정도였다.

비누칠을 한 손을 빡빡 씻었다. 끈적이는 걸 씻어 내는 김에 손등과 손날, 깍지를 끼워서 깨끗하게 비벼 닦았다. 그러다 승원은 물줄기에 대고 있던 손을 뒤로 빼내었다. 차츰 가라앉는 시끄러운 물소리 뒤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검은 몸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쏟아지던 물소리가 끊겼다. 모든 게 멈춰 버린 듯한 정지 화면 속, 널따란 거울 안으로 악귀와도 같은 존재가 유유히 베일을 드러냈다.

그간 잊고 있던 선득한 눈빛이 머릿속을 활개 쳤다. 권 대표를 만나기 전, 악몽 같은 기억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에 둥둥 떠올랐던 심장이 하수구 밑바닥까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예쁜이. 오랜만이네.”

정 감독이 입술을 찢을 듯이 들어 올려 웃었다. 드러낸 이가 섬뜩했다.

섣불리 안심하는 게 아니었는데. 금방 안정을 찾는다고 나아지는 게 없는데. 조바심을 내고 꼬리를 내빼 도망쳐도 모자랄 시간이었는데.

짧게나마 쥐고 있던 안온과 안락 위로 서서히 균열이 번져 갔다.

***

안정과 평화가 주는 방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승원은 다시금 뼈저리게 후회했다. 권 대표가 승원의 옆에 있다고 승원의 처지까지 달라지는 건 아닌데. 승원의 질긴 과거가 청산되는 건 아닌데.

그와 함께한 기억만 생생하게 머리에 담고 그 안에 함께 들어 있던 오물 같은 기억들은 죄다 버리고 싶었다. 깨끗하게 지운 줄 알았던 자신이 멍청했다.

“으, 흐으… 윽…….”

승원의 멱살을 움켜쥔 정 감독이 그를 그대로 끌고 복도를 걸었다. 다들 끼니 챙기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복도에 나다니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신발 두 개가 엇박으로 뚜벅이는 소리를 냈다. 정 감독은 승원을 데리고 아득한 복도 끝 비상구 문을 열었다. 무거운 철문이 끼익 벌어지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철커덕 잠겼다.

“씨발새끼야. 잘 만났다.”

정 감독이 승원을 내동댕이쳤다. 뒤로 밀린 몸이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윽, 소리를 낸 승원이 답답했던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뒤늦게 찾아온 숨이 쓰리게 밀려왔다.

바깥에서 보였던 신사적인 인상은 어디로 가고, 정 감독은 본래의 징그러운 낯을 띄우며 카악 가래를 모았다. 흙바닥도 아닌데 이곳에 침을 뱉었다.

정 감독이 승원에게 가까이 붙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시선이 엉겼고, 회색빛의 조명 아래 정 감독의 얼굴은 더욱 어두웠다. 차라리 그 점은 다행이었다. 역겨운 얼굴을 환한 빛에 비추어 들여다보는 것은 그거대로 고역일 터였다. 승원이 정신을 차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깜박조차 하지 않으려 눈알을 부라렸다.

“어쭈. 꼬나볼 줄도 알고.”

“…….”

“진짜 변했네, 이거.”

휙, 날아들 것 같았던 손은 예상외로 승원의 볼 언저리를 착 하고 감쌌다. 감싸기보다는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애무하듯이 주물럭거리는 그런 불쾌한 느낌. 볼기짝을 만지는 것처럼 승원의 볼을 꽉 쥐고 손장난을 치던 정 감독은 갑자기 비식 웃었다.

“야, 승원아.”

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 감독은 담배 한 개비를 챙겨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값비싼 권 대표의 것과는 다른 편의점에 파는 싸구려 라이터였다.

“너 장 사장이랑은 연락하냐?”

“…….”

“장 사장 병원살이하고 나오더니 네 이름 윤 자만 들어도 치를 떨더라.”

병원살이. 장윤철이 승원의 집에 찾아왔던 그날. 권 대표의 손에 장윤철이 죽어 버린 줄 알았던 그날. 그 이후로 승원은 장윤철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정말 살아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주먹으로 어찌나 갈겨 놓은 건지 상판대기를 다 뒤집어 놨던데. 나도 아픈 얼굴 직접 보진 못했고 대신 문자로 보내 주는 사진 보고 경악했지. 야, 그거 곰팡이 핀 거 같고 보기 싫드라.”

“…….”

“장 사장 패 주는 게 화대였나 보지?”

앞에 사람이 있는 건 고려도 않고 정 감독은 담배 연기를 후욱 뱉어 냈다. 하얀 연기가 승원의 앞으로 뭉게구름처럼 몰려와 흩어졌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 대는 승원을 힐끔 보던 정 감독이 변태같이 입꼬리를 올렸다.

“장 사장은 그렇다 쳐도. 너는 씨발, 나랑 그딴 식으로 그러면 안 됐지.”

“…….”

“다리 안 건너도 아는 우리 사이에. 어? 예쁜아.”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했다. 누구라도 와서 비상구 앞에서라도 기웃거려 주면 좋겠다. 복도에 다니는 사람들이 커다란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어 댔으면 좋겠다. 아니면 밖에 있던 소화기라도 뚝 하고 넘어졌으면 싶었다. 이 악마가 담배 뻑뻑 피우다 화들짝 놀라서 어깨라도 떨었으면 했다.

정 감독이 검지를 들어 승원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배우가 말이야. 떳떳하지 못하게. 연기로 승부를 해야지, 연기로.”

“…….”

“뒷구멍을 팔아먹고 살아도 되겠어? 그거는, 인마. 저기 어?”

승원에게 겁을 주려는 건지 정 감독이 목소리를 커다랗게 키웠다. 승원은 정 감독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비스듬히 내린 시선을 고정한 채로 숨만 아득바득 쉬어 댔다. 어차피 여긴 일터였다. 승원에게 해코지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그래서 승원은 시간에 매달려 입 다물고 버티기로 했다.

“우리야 동종 업계고 서로 그래그래, 하면서 넘어갈 수 있는 거지만. 너가 지금 붙어먹은 놈은 이야기가 좀 다르잖아.”

담배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 발로 으깨 버린 정 감독이 다시 가래침을 뱉었다. 입술을 뻐끔대더니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와 같이 다시금 거리가 좁혀졌다. 역겨운 얼굴에 이번엔 매캐한 담배 냄새까지 함께였다.

“나한테 창놈새끼라고 했던 놈이 권…… 뭐시기.”

뭐였냐? 그거 이름이. 승원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아! 맞다. 권차현. 권차현 대표인지, 병신인지.”

“…….”

“나한테 창놈이다 지랄을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거도 창놈이 맞지 않냐? 너랑 끼리끼리인데.”

정 감독이 권 대표의 존재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당연했다. 정 감독은 술에 절어 있긴 했지만, 권 대표를 직접 마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장 사장과 아는 사이였고, 승원의 눈앞에서 권 대표와 대면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입 밖으로 쏟아 내는 저 이름 석 자가 그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다.

“윤승원이도 봤을라나?”

“…….”

“찌라시.”

힘을 주고 있던 눈가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승원이 시선을 비틀어 들었다. 드디어 반응하는 듯한 승원의 모습에 희열을 느낀 건지 정 감독이 만족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반가움 같은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웃는 낯을 했다.

“봤는데. 어쩌라고요.”

처음으로 입을 뗀 승원이 한 말이었다. 정 감독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방금 뱉어 낸 말들에 온갖 감정들이 숨어 들끓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뱉어 낸 목소리가 꽉 잠긴 채였다.

정 감독은 승원과 호텔뿐만이 아니라 촬영장에서도 수개월을 보아야 했던 남자였다. 당연하지만, 감독은 배우의 성격이나 심성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

승원의 성질을 아는 정 감독이 부러 승원을 긁어 내려고 방울을 들고 딸랑거리는 거였다. 우리 승원이 이번에 또 얼마나 놀라서 걱정을 한 사발 들이켤까. 정 감독은 승원의 당황 서린 얼굴, 우는 얼굴, 놀란 얼굴 같은 것들을 좋아했다. 실제로 그의 영화엔 그런 승원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승원이 답지 않게 눈썹을 치켜뜨고 커다란 눈을 이글이글 태우고 있었다. 꾸물꾸물 떠는 게 아니라 이글이글 태웠다. 겁 모르는 개새끼가 금방이라도 짖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승원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정 감독이 헛웃음을 쳤다.

“찌라시가 왜 찌라신데요.”

승원은 권 대표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한 겁을 집어먹고 있는 승원을 간단명료하게 치료해 버린 그의 한 마디. 어제 권 대표와 통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승원은 대놓고 겁을 주는 정 감독의 수에 완전히 꿰어 진짜로 울음을 삼켰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권 대표와 엮여 있는 이상, 승원은 이딴 개수작에 겁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딴 개소리로 저 협박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까?”

“…….”

“제가 벌벌 떨기라도 할까 봐요?”

등을 기대느라 어정쩡하게 내려가 있던 어깨를 바로 세웠다. 말을 하고 보니 갑자기 용기 같은 게 샘솟았다. 두려워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권 대표가 있는데.

승원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늘은 정 감독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늘이 아니라 이 다음번에도, 다다음 번에도 무섭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고 싶은 얘기 더 없고, 할 말도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한들 그게 감독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점차 격양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승원은 여태껏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곤조곤 떨지 않고 쏟아 냈다.

“저라고 감독님에 대해 몰라서 이러고 있는 줄 아십니까?”

“씨발, 이거 입 싹 다물고 있다가 한다는 소리가 왜 다 이 모양이야.”

기가 찬다는 듯이 정 감독이 뇌까렸다. 아까는 빈정대는 듯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면, 이번엔 진짜 짜증 같은 것이 이마 위 주름에 함께 잡혀 있었다. 검지로 이마를 누르는 태도가 순간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제 좆돼도 뭐 씨팔, 좆되지 않을 거 같고 그러지, 네가.”

곱게 말해 줘도 처 듣지도 않는구나. 정 감독은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고개가 들렸다.

“찌라시가 찌라시가 아니면 어떡할래.”

승원은 정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잠시 눈을 깜박여야 했다. 정 감독은 외투 안쪽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손바닥 사이즈의 사진 뭉텅이였다. 배경이 넓게 그려진 안쪽에 사람 같은 것이 보였다. 사진의 실체를 깨달은 얼굴이 점차 파랗게 질렸다.

사진 속 남자는 명백히 승원과 권 대표였다. 호텔 앞에서 찍힌 이들도, 호텔 엘리베이터를 누르며 허리춤을 끌어안고 있는 이들도, 외딴 길목 밑 함께 마주 보고 있는 이들도. 사진을 보는 동시에 그와 함께 있던 사진 속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줄을 이었다. 승원의 기억과 달리 사진 속 인물들은 정말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퍽 다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색이 된 승원의 가슴 위로 정 감독은 사진 뭉텅이를 던져 버렸다. 착, 승원의 판판한 가슴에 부딪힌 겹겹의 사진들이 순식간에 낱장으로 흩어져 허공에 붕 떴다. 그러고는 바닥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족히 열 장은 넘어 보이는 것들이, 곳곳에 퍼졌다. 어떤 것은 계단 밑으로까지 도달했다.

“너 이거 어떡할 거냐.”

정 감독이 제 발치에 떨어져 있는 사진 한 장을 발로 씹었다. 승원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호텔 복도. 익숙한 문틈으로 고개를 뺀 채 남자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승원. 호텔에서 촬영하다 그에게 향했던 날, 달콤하다고만 느꼈던 그날의 순간이 사진으로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었다.

“……저게 어떻게…….”

바싹 굳어 버린 승원을 불량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엔 어떤 살기와 지저분한 복수심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사경을 헤매던 승원의 눈동자가 고개를 들었다. 정 감독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찌라시로 끝나면 찌라시가 맞는데.”

“…….”

“찌라시가 아닌 게 문제지. 우리 승원이 뒷구멍 창놈인 거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면.”

어떡하면 좋냐, 이거. 쪽팔려서 어디 나오기야 하겠어? 그러니까 내가 그냥 입 다물고 나랑 작품 하자고 그랬잖아. 그러면 이런 거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거 아니야. 정 감독이 이어서 하는 말들을 승원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눈이 빙글 돌 것 같았다.

증거가 있으면 안 되는데. 입으로 털고, 가려서 끝나는 찌라시는 덮을 수 있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남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 있는 사진들을 다 모아 불에 태워 버려도 포털 어딘가에 한 장이라도 박혔다간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닥칠 텐데.

자신은 그렇다 치고, 그때가 되면 권 대표는 어떡하냐는 말이다. 자신이 피해 입는 건 딱 질색이라던 남자인데. 말이야 거짓이라고 때우면 그만이라지만, 사진은? 사진은 어떻게 해야 하지?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건데.

정 감독은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옹졸하게 쥔 손가락이 보였다. 야비한 입술 사이에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정 감독이 그대로 승원의 턱주가리를 쥐었다. 힘을 주던 승원의 고개가 결국 위로 꺾였다.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흐으-.”

“그러니까, 왜 씨발. 말을 안 들어.”

“하, 윽.”

“이 사진들 기사랑 TV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꼬라지 보고 싶지?”

쓸려 들어오는 담배 연기에 승원의 눈가가 빨갛게 갈라졌다. 당장이라도 기침이 새어 나올 듯이 입 안에 먼지가 가득했지만, 콜록거리는 거조차 지는 기분이라 승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방법이 있지.”

“…….”

“나랑 다시 같이하자.”

승원이 눈에 한가득 힘을 주고 눈앞의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씨팔, 내가 지금 나 좋자고만 이러는 거 아니잖아. 너 좋은 자리 꽂아 주겠다잖아?”

승원의 살기 어린 낯을 본 정 감독이 악을 썼다.

사람들은 정신도 감독의 영화를 보며 저 감독은 변태가 분명하다고 했다.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붙는 ‘변태’라는 단어는 칭찬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 감독은 진짜 변태였다. 예술하는 변태가 아니라, 그냥 개 상놈 변태.

“그리고 나랑만 몇 번 자고 그러면, 이거는 내가 봐줄게.”

정 감독이 사진 속 승원과 권 대표를 발로 짓이겼다.

결국, 원하는 게 저거였다. 저급하고, 천박하고, 하잘것없는. 변태라는 이름 뒤에 보인 더러운 진짜 민낯.

승원이 숨을 가쁘게 쉬었다. 어깨가 위아래로 진동했다. 승원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 그대로 정 감독을 향해 치켜떴다.

“제가 왜.”

“…….”

“제가 왜 감독님이랑 자야 합니까?”

“이게 말을 해 줘도 못 알아 처먹네.”

“제가 대체 왜……! …윽!”

정 감독이 승원의 멱살을 잡았다. 벽에 잔뜩 물린 몸이 절벽 뒤로 떨어질 듯한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승원의 눈에 핑, 눈물이 고였다. 뭐가 다 이럴까. 대체 뭐 하나 이렇게 쉬운 게 없을까.

“여기 있는 거 다 뿌려도 좋다 이 말이지?”

“흐, 윽…….”

“정신 차려, 새끼야. 너 이미지로 먹고사는 놈이야. 지금 내가 너 도와주는 거잖아. 지금 나 아니면, 너 그냥 전국민이 다 아는 뒷구멍 창놈 되는 거야. 나락 가는 거라고!”

전 국민이 다 아는 뒷구멍 창놈이면 뭐 어떤가. 저 말은 승원에게 하나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미 장 사장과 정 감독 사이를 오가던 그 시절부터 승원은 익숙하게 그런 소리를 들어 왔다. 동료고, 스태프고, 이 바닥 좀 있었으면 한 번쯤 들어 봤을 그런 소문들. 그 소문이 그냥 대중 가십거리로 몇천만 명 더 알게 되는 거뿐이었다. 자신은 상관이 없었다.

권 대표. 이제 권 대표가 문제다. 승원은 권 대표가 너무 좋은데, 권 대표는 승원이 좋은지 아직 모르겠다. 사실, 조금 가능성이 보인 것 같기도 했는데. 일말의 가능성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위험했다. 권 대표는 꼭 새까만 물감으로 온통 범벅을 해 놓은 사람 같았다. 그 속을 당최 알 수가 없었고, 들여다볼 수도 없던. 그런 그가 이제야 좀 농도 묽게 바뀌는가 싶었는데.

기사와 뉴스에 온통 깔린, 저런 사진으로도 그는 태평하게 굴 수 있을까. 자신과 관련된 스캔들에 관해선 괜한 걱정을 집어먹지 말라던 권 대표였는데.

사실 승원은 애초부터 자신을 걱정하던 게 아니었다. 승원의 걱정거리는 오직 권 대표 하나였다. 그 역시 승원 못지않게 이미지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연예인 만큼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연예인보다 이미지와 명성이 더 중요할 사람이었다. 흠뻑 젖은 먹물을 뒤집어쓰고도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피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닥치지 않은 일에 관해선 누구든 요요히 굴 수 있다. 권 대표는 먹물을 뒤집어쓸 만큼의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어제도 승원에게 그런 우직한 확신을 줄 수 있었던 거겠지. 괜찮다고. 바보가 아니라고.

“……너무 싫어.”

승원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눈동자가 비어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이유가 대체 뭘까. 저 자신만 괴롭히면 됐지, 왜 권 대표에게까지 그 괴로움을 전이시키려 드는 걸까. 권 대표는 그냥 승원이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데. 그것도 혼자서, 외롭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불끈, 두 주먹이 쥐어졌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으윽!”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나가떨어졌다. 물고 있던 담배가 함께 나동그라졌다. 승원의 주먹에 날아간 고개가 돌아갔다. 아픔에 뒷걸음친 정 감독을 보면서도 승원은 주먹 쥔 손을 풀지 않았다. 바들거리는 입술 밑으로 호두가 깊게 팬 턱이 보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당신이 뭔데.”

“…….”

“당신이 뭔데, 씨발!”

“야…… 유, 윤승원……!”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삑- 귀 옆으로 이명이 났다. 비상계단의 조명이 뿌연 건지, 아니면 제 시야가 뿌연 건지 몰랐다. 승원은 남자를 향해 다시 주먹을 날렸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거센 파열음을 냈다. 정 감독이 다시 한번 나동그라졌다.

“씨팔, 근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소리치는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을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승원은 아무도 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바닥에 온통 그와 함께한 사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승원은 대표님께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휘청이던 정 감독은 금세 몸을 바로 잡고 승원을 향해 뺨을 날렸다. 짝!

“흐윽!”

손바닥은 주먹보다 피부에 닿는 면적이 넓었다. 얼굴의 반이 얼얼해졌다. 승원 역시 뺨을 날리려 다시 팔을 들어 올린 순간,

“이 개새끼가!”

상대편에서 날아온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승원이 다시 맞았다. 엄청난 타격이었다. 뺨이 더 아픈 줄 알았는데, 다시 정정해야 했다. 뺨보다 주먹이 몇십 배는 더 아팠다.

온 얼굴이 타격감에 불같이 타올랐다. 귀에선 섬뜩한 이명이 들리고, 눈앞은 뿌옇고, 얼굴은 너무 아팠다. 고개를 털고 꼬인 발을 제대로 디디려는데, 어딘가에 툭 걸리더니 순간 몸이 붕 떴다.

시야가 와글와글 뒤집히고 돌아갔다. 우당탕, 소리가 났다. 사람이 지르는 소리보다 훨씬 더 커다란 굉음이 비상계단 안을 가득 채웠다.

뻐끔거리며 뜬 눈으로 승원이 전방을 바라봤다. 층층이 쌓인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 비상계단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단의 높이도 높았다. 몸이 제멋대로 접힌 것 같았다. 단전까지 있던 힘을 몰아 쓴 탓에 더 남은 체력이 없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버거웠다.

시선을 살짝 위로 들자 쌓여 있는 계단 가장 위쪽에 정 감독이 보였다. 적당히 놀란 듯한 눈이 커다란 것 같기도 했다. 사진이 여전히 널브러져 있을 텐데. 큰일이었다. 저걸 다 수거해야 남들이 안 볼 텐데. 승원은 제 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로 숨을 하아, 하아 쉬었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툭, 절단된 기억을 끝으로 승원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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