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7. 고백 (7/20)

7. 고백

질질 기어가면 어쩌나 걱정했던 시간은 예상보다 바쁜 스케줄 때문인지 속절없이 흘러갔다. 승원은 그 사이에 끊임없이 반복된 촬영으로 현장에 출근을 하기 바빴고, 거기에 온전히 몰두한 덕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새도 없었다. 가끔가다 권 대표가 생각나면, 그와 주고받았던 통화 기록을 내내 바라보다가 주먹을 말아 쥐는 것으로 그리움을 인내했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 2주째가 되던 날이었다. 그에게선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고, 승원 역시 그의 연락을 목 빠지게 기다리진 않았다. 권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만날 수 있는 구실을 제 손에 쥐고 있었기에, 그거 하나로도 참을성 있게 버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케이! 자자,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감독의 한마디에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촬영 현장이 스위치가 켜지듯 한순간에 왁자지껄하게 바뀌었다. 밝은 조명을 쐬고 몇 번이나 반복한 대사 때문에 이마 밑으로 땀이 삐질 흘러나왔다. 그새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해 주고 땀을 닦아 주는 손길을 받으며 승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촬영장 밖을 빠져나가는 인파들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몇십 킬로짜리 장비들을 몸에 이고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었을 노고를 생각하니 점심이 땡 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심정이 절로 이해가 되었다.

뒤늦게 밖으로 나가자 주변이 시끄러웠다. 본래도 사람 수가 많아 왁자지껄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어수선한 분위기에 승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승원에게 누군가 재빠르게 튀어왔다. 동료 배우 최기환이었다.

“승원아, 왜 이제 와.”

“누구 오셨어요?”

“정 감독님 오셨어. 얼른 가서 인사 드려.”

익숙한 호칭에 승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승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굳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파헤쳐 본 인파 사이엔 정말로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악몽 같은 얼굴이 존재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승원은 눈썹을 매만졌다. 오늘따라 최기환은 승원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벌써 식사를 마친 건지 그의 손엔 커피 향이 솔솔 나는 하얀 컵이 들려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승원을 보던 최기환이 커피를 홀짝이며 어깨를 툭툭 쳤다. 흔히 남자 동료를 대하는 성의 없는 손길이었다.

“안 가?”

“…왜 오신 건데요.”

“너 정 감독 오는 거 몰랐어?”

“…네. 몰랐는데.”

“이번에 차서희가 정 감독 작품 들어가잖아. 벌써 자기 배우 챙기겠다고 여기저기 오지랖을…. 아, 그렇잖아.”

조심성이 없는 최기한이 이를 드러내 보이고 웃더니 혀를 쯧, 차며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겼다. 아닌 척하면서도 부러움이 가득한 눈이 검게 이글거렸다.

승원이 거절했던 영화의 다른 주연 배우가 차서희였던 걸까. 자신은 끼지 못하는 그룹 사이를 응시하던 최기환은 가만히 있는 승원을 바라보다 눈을 흘겼다.

“뭐 해. 안 가 보고.”

“제가 알아서 인사드릴게요.”

“근데 너 이번에 왜 정 감독 영화 안 들어갔어?”

아연함이 번진 눈동자가 순간 차갑게 일렁였다. 승원의 뒤로 보이는 인파를 슥 훑은 남자는 크흠, 목을 가다듬고 승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이 어딘가 껄끄러운 사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기민하게 알아차린 승원이 침착함을 유지하려 침을 삼켰다.

“…맡겨 놓은 건 아니니까요.”

“아, 그래?”

“저만 계속 나올 수도 없는 거고.”

“확실히 마음가짐이 달라. 아량이 넓네.”

평소에도 칭찬에 인색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건네는 칭찬이 아름다울 리 없었다. 답지 않은 말본새에 승원이 그를 찬찬히 들여다보자, 승원을 향하던 날선 눈매가 비틀어 올라갔다. 그가 승원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코를 찡긋거리며 불량스럽게 물었다.

“야, 승원아.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

“정 감독이랑 더 일 안 하는 거 말이야.”

차분히 최기환을 응시하던 승원이 대답했다.

“…형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다들 못 해서 안달인데. 좋은 기회를 싫다고 차 버리는 게 나 같은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니까.”

“…….”

“감독님이 친히 여기까지 발걸음 해 주셨는데, 바로 아는 척 안 하는 것도 그렇고.”

여우 같은 눈꼬리가 위로 더욱 치켜 올라갔다. 눈썹을 크게 들썩인 최기환이 괜히 딴청을 부리며 손톱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혼자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물론 노골적으로 승원을 저격한 말이었다.

“막 별 소문이 다 있더라고. 뭐… 너가 정 감독이랑 잤다는 둥. 그 백으로 들어갔다는 둥.”

“…….”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막 도니까 나도 마음이 안 좋드라.”

최기환이 눈을 들었다. 일그러뜨린 눈썹과는 다르게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승원을 주시했다.

“아니지? 그런 거는.”

승원에게 가까이 들이민 눈동자가 징그럽게 번뜩였다. 아니지? 라고 묻는 저 배배 꼬인 물음은 불순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뱀 같은 혀는 이어서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형.”

“난 내가 밑바닥이어도 그 정도 자존심은 지킬 것 같은데.”

“…….”

“됐다. 너도 고생이 많네. 내가 괜한 소리를 했지? 가서 밥 먹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꼬리가 느긋하게 올라갔다. 승원을 다 이해하는 척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최기환이 승원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승원과 눈높이가 같은 남자는 꼭 자신이 더 위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승원을 훑어 내렸다. 격려를 남기듯 툭툭 어깨를 치는 손짓을 승원이 털어 냈다. 밑으로 떨어진 손과 함께 누그러지려던 입꼬리가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가면 같은 미소를 덧대고 물러났다.

“새끼야. 너 표정이 왜 그래.”

“…….”

“어휴.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던 커다란 비닐봉지 안으로 종이컵을 가볍게 투하한 최기환이 승원을 스쳐 지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평하게 웃어넘긴 최기환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저 멀리로 작아져 갔다. 승원의 등 뒤에선 여전히 화기애애한 소음들이 섞여 들었다.

“승원 씨! 밥 안 먹어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스태프 한 명이 승원을 불러 세웠다. 발목까지 떨어지는 패딩을 꽁꽁 싸맨 채 뒤쪽을 가리키던 스태프가 승원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반대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선 승원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거절했다.

“지금은 생각이 없어서요.”

“에이, 좀 있다가 오면 없어요!”

“그래도 속이 좀 안 좋아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럼. 쉬어요!”

자신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스태프를 보고도 승원은 쉽사리 인사를 받기 어려웠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심을 외면하고 싶었다.

현장이 달라진다고 불거진 소문이 달리 잠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입을 통해 전달되는 싸고 무성한 말들은 지울 수 있는 흔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고 제 주변에 번져 있던 무뢰한들이 사라지는 것 역시 아니었다.

권 대표의 그림자 안에서 잠시 잊고 있었다. 홀연히 사라진 소문의 안개를 더듬으며, 승원은 홀로 남아 자리를 지켰다.

***

“영찬이 형. 저 차로 가고 싶어요.”

패딩을 목 위까지 끌어 올린 승원이 입술만 살짝 꺼내 말했다. 후미진 구석, 다른 몇몇과 담배를 태우고 있던 곽영찬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 쉬게요?”

“네. 눈 좀 붙이려고.”

“건물 대기실에 소파 있던데. 거기 누워 있지 그래요?”

“차가 조용해서……. 차에 있으려고요.”

“그럼 키 줄 테니까 가서 쉬고 있을래요?”

“네. 그렇게 할게요.”

“히터 틀고 있어요!”

뒤를 돌아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무렵, 곽영찬이 소리쳤다. 가던 발을 멈춘 승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난로가 거의 다 식어 있었다. 손이 델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손에 남은 것은 푸석한 자루의 감촉뿐이었다.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찬기가 가득했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가장 높은 세기로 틀어 놓은 승원은 잠시 차 내부가 녹을 때까지 기다리며 시트 포켓 안에 있던 새 손난로를 찾아 뜯었다.

창에 보이는 커튼을 모조리 쳐 두고 자리에 누웠다. 열심히 흔들어 대던 손난로가 점차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승원은 그것을 목 위에 얹어 두었다. 길게 누워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소음이 차단된 차 안은 홀로 남겨진 우주와도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 감독은 승원을 찾지 않았다. 물론 승원이 일부러 정 감독이 있는 주변을 피해 다녔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성격에 승원을 찾았다면 진작 화장실 칸을 다 뒤져서라도 발견을 했을 작자였다. 걱정과는 달리 현실화되지 않은 우려에 안도감과 의아함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한동안 꺼 놓았던 핸드폰의 전원을 꾹 누르자 얕은 진동과 함께 곧 화면 위로 불이 들어왔다. 금세 선명해지는 잠금 화면엔 이름이 가려져 있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쌓여 있었다. 느릿하게 손을 들어 잠금을 풀고 통화 목록을 확인하던 승원이 몸을 일으켰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벼 보기까지 했다.

“…….”

권 대표에게서 세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한 시간 전에 약 10분 간격을 둔 부재중 연락이 하나, 둘, 세 개나 쌓여 있었다. 얼른 위젯 달력을 확인했다.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려면 아직 한 주를 더 버텨야만 했다.

[연락 보는 대로 전화 하세요.]

문자 함에 떠 있는 메시지였다. 승원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8번째 통화음이 이어지던 때, 뚝- 하고 끊긴 연결음 사이로 전화 너머의 소음이 먼지처럼 부유했다.

- 윤승원 씨.

“…….”

오랜만에 듣는 권 대표의 음성이었다. 승원이 그와 연락을 한 게 벌써 이 주를 다 넘기고 있었으니, 자그마치 14일은 더 넘은 시간 동안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셈이었다. 그새 잊은 줄 알았던 낮고 궤궤한 음성은 다행히 여전했다.

“대표님, 문자 보고… 연락드렸어요.”

- 스케줄은 다 끝났습니까.

“…아니요. 한 씬 남아서. 그것만 하면 끝입니다.”

막 2시를 넘어간 시각이었다. 어제 이른 오전부터 시작되었던 촬영이 벌써 하루를 넘어 미명에 걸쳐 있었다. 뒤늦게서야 지금이 야심한 새벽이라는 것을 알아챈 승원이 얼른 덧붙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 줄 몰랐는데. …제가 너무 늦게 연락을-.”

- 그럼 한 시간 전에 전화했던 내 쪽도 할 말이 없어집니다.

툭 끊어 내는 목소리엔 악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승원은 작게 숨을 내뱉고 다음의 말을 혀끝에서 빙빙 돌렸다.

“…지금 한국이신 건가요?”

- 그러니까 연락을 했겠지.

“3주… 걸리신다고.”

- 예상보다 일찍 돌아오게 돼서. 아까 저녁에 왔습니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끝에 권 대표가 나지막이 목을 울렸다.

- 윤승원 씨.

“…네.”

- 몇 시에 끝날 예정입니까.

“그래도… 3시는 넘어야 될 것 같은데.”

앞 좌석 패널에 보이는 시계를 확인하던 승원이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밥 사 주시려고.”

- 약속했으니까.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제가 끝날 시간엔 열려 있는 가게가 거의 없을 텐데.”

- 그건 걱정할 필요 없고.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가게라면, 승원이 아는 건 한밤에 먹는 야식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승원이 퇴근을 하는 시간엔 영업을 마무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승원은 마땅한 해결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승원이 밥을 사 달라고 한 목적은 진짜 그와 ‘밥을 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두루뭉술하고 불투명한 이후의 만남을 다시 성사시킬 수 있는 아무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밥을 먹든, 먹지 않든, 그건 승원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시간에 만나서 어떤 가게를 가는지 역시 승원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대표님만 괜찮으시면… 저는 상관 없습니다.”

- 그럼 나한테 주소 찍어 두세요.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피곤하지 않으세요?”

- 윤승원 씨가 그런 걸 물을 처지는 못 될 텐데.

그가 승원에게 도리어 물었다.

- 피곤하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만나자고 하는데?

“…별로 안 피곤합니다.”

- 어려서 좋겠네요.

“…….”

- 주소 보내세요. 끊습니다.

꺼진 핸드폰에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고르던 승원은 잠을 청하려고 했던 것도 잊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잘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손 위로 뚝 떨어진 보상에 마냥 아연하기만 했다.

몇 날 며칠을 더 버텨야 찾아올 줄 알았던 만남이 갑작스레 코앞으로 당도했다. 이상한 에너지가 몸 안을 휩쓸었다. 거울을 보던 승원은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기나긴 촬영으로 수척해진 제 얼굴을 문질렀다.

뺨을 몇 번 치자 창백한 피부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물을 마시고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AM이라고 적혀 있는 알파벳의 앞 글자가 P로 바뀌는 기적을 실감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난로를 한참 주물거리던 승원은 다시 차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

3시 반이 넘어서야 촬영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긴 시간 지속되었던 촬영에 온몸이 뻐근했지만, 정신만큼은 당장 놀이동산에라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곽 매니저에게 다시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는 흔쾌히 알았다고 얘기하면서도 승원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비밀 연애라고 해도 매니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뒤로는 괜스레 혼자 뺨이 달아올라 삐그덕거려야 했다.

얼른 자리를 빠져나온 승원은 사람이 없는 깊은 골목으로 발을 옮겼다. 코트 안에 입고 있던 후드 집업 모자를 깊게 눌러쓴 승원은 옅은 가로등이 몇 개 없는 아스팔트 거리를 걷다가 저 멀리 서 있는 새까만 인영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차 안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던 권 대표는 차체에 기댄 채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밑엔 가로등도 없었기에 그저 어두컴컴한 그늘만이 전부였다. 반딧불이처럼 보이는 빨간 불씨가 선명했다.

승원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차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잡고 선 권 대표는 허벅지 밑까지 내려오는 까만 코트를 입고 있었다. 위로 넘기지 않은 머리가 차분히 내려와 있었고, 항상 구두를 신던 모습과는 다르게 편안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거기 서 봐요.”

“……네?”

권 대표는 인사도 없이 대뜸 승원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거의 다 와서는 걸음을 애매하게 멈춰 선 승원을 바라보며 그는 담배를 훅 빨았다. 매캐한 연기가 구름처럼 퍼져 나왔다.

“그러고 있으니 그냥 대학생 같습니다.”

“…….”

“다 피웠으니 좀 기다리세요.”

“…대표님도.”

입김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것을 입 밖으로 후우 내뿜고 있던 권 대표에게 승원이 입술을 열어 말했다.

“대표님도 그러고 있으니까… 엄청 젊어 보이십니다.”

좋은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권 대표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승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내비쳤다.

“지금 그거 칭찬이라고… 하는 말입니까?”

“…네. 칭찬입니다.”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은데.”

담배 끝이 다 타들어 갔다. 손가락으로 툭툭 털어내자 재가 바닥으로 휘날렸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 마신 권 대표의 얼굴을 승원이 얌전히 들여다봤다.

미리 약속을 하고 만난 것이었음에도 여전히 제 눈앞에 있는 남자가 실감 나지 않았다. 심장이 또 오지랖을 떨기 시작했다.

“타세요.”

“…네.”

아늑한 차 안에 몸을 싣자 그가 시동을 걸었다. 벨트를 끌어오던 승원은 대시 보드 위에 난잡하게 올라가 있는 서류들에 잠시 눈을 멈췄다. 패널에 불이 들어오고 부르르 옅게 몸을 떨던 차가 이내 따뜻한 바람을 날렸다. 권 대표는 서류를 끌어모아 대충 뒷좌석에 던졌다.

“대표님.”

“말해요.”

권 대표가 핸들을 돌렸다. 골목 밖으로 유연하게 차를 빼내고는 액셀을 밟았다.

“어떤 식당으로 가는 겁니까?”

“레스토랑.”

묵묵히 말하는 남자의 옆선을 훑던 승원이 시계를 확인했다. 3시 50분. 오후가 아닌 오전이었다.

“…지금 문을 여는 레스토랑이.”

“안 열었길래 열게 만들었습니다.”

“…….”

“달리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승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눈은 뻑뻑했고, 지금 안온한 온기를 맞으며 그의 차에 타고 있는 현실이 그저 꿈같기만 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주황 불빛들이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났다. 여기서 숨만 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다른 날도… 괜찮았을 텐데.”

“…….”

“왜 하필 지금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머뭇거리는 물음에 그가 승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차 안을 휘도는 낮은 소음이 공간을 기듯이 울렸다. 권 대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을 기다리던 승원이 기다림을 지속하다 포기하려던 때였다.

“솔직한 대답을 원합니까.”

차창으로 고개를 틀고 있던 승원이 다시 권 대표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의 목울대가 점잖게 파도쳤다. 창유리를 투과한 빛이 측면의 반쪽을 비췄다. 순간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승원이 대답하지 않아도 권 대표는 알아서 입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수도 있어서.”

“…….”

“…나도 나를 알 수가 없고.”

무심하게 지껄이는 남자의 옆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전방을 주시한 채 운전에 집중한 낯이 묘하게 흐릿했다. 잠시 머물렀던 침묵 끝에 권 대표가 다시 덧붙였다.

“내일이 되면, 나는 윤승원 씨가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내일의 나를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이 내킬 때 만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

“약속은 했으니 지키는 게 맞고. 그런 건 미룰수록 독이 된다는 것도 아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벨트 끝을 갉작이던 승원이 그의 얼굴에 대고 물었다. 그는 여전히 앞만 바라본 채, 승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느리게 축이던 권 대표가 목을 울렸다.

“그걸 알 길이 없으니 나도 나를 알 수 없다고 한 겁니다.”

“…….”

“…알았으면 이 시간에 부르질 않았겠지.”

승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앞을 주시했다. 뻥 뚫린 앞 차창 너머로 보이는 차량은 아무것도 없었다. 넓은 도로에 내달리는 차는 그와 함께 타고 있는 이 차 한 대뿐인 것 같았다.

차 안은 내내 정적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다르게 눈꺼풀은 무겁게 쳐져 갔다. 가게나 일반 건물 같은 곳으로 갈 줄 알았던 차는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마친 권 대표가 벨트를 풀었다.

시동이 꺼졌다. 차 안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자 바깥에 보이는 건물이 더욱 환하게 대비되었다. 눈앞에 드리워진 곳은 불이 모두 꺼진 다른 마천루와는 다르게 유일하게 고급스러운 조명을 내뿜고 있었다.

“호텔 레스토랑에….”

“싫습니까.”

“……대표님. 근데 사실 저.”

운전석 문을 열어 두었던 권 대표가 다시 발을 넣어 문을 닫았다. 빈틈으로 들어왔던 찬기가 내부에 갇혔다. 한참 말을 고르던 승원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은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뭘 맛있게 먹을 자신이 없어서.”

“이 시간에 맛있게 먹는 걸 바랄까 봐?”

“…….”

“안 먹는다고 쑤셔 넣지도 않을 텐데, 뭐가 문제입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텔 입구를 보고 있는데, 남녀로 보이는 커플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회전문을 밀며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밖에도 지나다니며 오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횟수로 끊임없이 있었다. 이 시간에도 호텔 문은 끊임없이 회전 중이었다.

호텔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호텔을 드나드는 자신을 알아보는 누군가가 있을까 그게 무서웠다. 낮에 최기환의 그 같잖은 소리를 듣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로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헛소리하는 상대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 되도 않는 입 밖으로 지껄여 나온 뿌리 없는 알맹이가 무서웠다.

오해는 오해를 부르기 마련이었고, 승원은 그것들을 일일이 붙들어 가며 해명을 할 기력도 못 되거니와 자격도 없었다. 바른말도 왜곡돼서 전해지는 게 이 바닥의 소문이라는데, 자신 때문에 애꿎은 제 옆의 남자까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건 더 최악이었다.

들어갈 때야 눈만 빼고 모조리 가린다며 상관없겠지만, 식당에 들어가서도 마스크를 벗고 편하게 밥을 퍼먹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윤승원 씨.”

상념에 휩싸여 있던 승원의 정신을 권 대표의 음성이 툭 깨뜨렸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눈 한쪽을 가늘게 뜬 남자가 승원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먹기 싫은 겁니까? 아니면 그놈의 밥을 또 먹기가 싫은 겁니까?”

“…….”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하세요.”

“…굳이 말하면 싫은 건 아니고…. 여기서 밥을 먹는 게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입 밖으로 뱉은 목소리가 어째 목구멍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권 대표는 말을 듣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승원이 보고 있던 호텔 입구를 흘겨보았다. 손목시계를 잠시 확인하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된 인내의 한계가 보이려는 것 같아 승원이 벨트를 풀려던 때였다.

“됐고. 그냥 여기서 기다리세요.”

“…….”

“뭐 먹겠습니까.”

“…….”

“수프? 아니면 샐러드 먹겠습니까? 어차피 무거운 음식 먹을 생각은 없을 테고.”

“…다 상관없습니다. 대표님이 먹는 걸로…….”

“갔다 오겠습니다.”

승원의 대답을 더 듣지 않고 권 대표는 문을 닫고 나갔다. 차창 밖으로 코트 차림의 남자가 앞으로 쭉 걸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승원은 저 옆에 함께 붙어서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큰 키의 남자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공간 속 불협화음 그 자체였다. 이 시간에 호텔을 드나드는 한 쌍의 남자들을 보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더 이상했다. 다시 생각해도 가지 않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느새 회전문 안쪽으로 들어간 남자는 더 보이지 않았다. 내내 그의 자취를 좇고 있던 승원은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에서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처럼 작은 숨을 내뱉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벨트의 까칠한 감촉을 손으로 매만지며 그를 기다렸다.

“……어.”

주변이 뿌예서 승원은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야 했다. 목을 움츠리며 깨고 보니 저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어 있었다. 잠시 까맣게 번지던 시야에 깔끔한 대시보드가 들어왔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차량이 고요하게 흔들렸다. 승원은 얼른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시트 머리가 아까보다 밑에 있었다.

“피곤하지 않다는 말은 허세였습니까.”

검게 그을린 운전석에서 평온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트를 조절한 승원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그사이에 픽업까지 마친 건지 차 안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났다. 밤 시간에 들었던 선잠인지라, 오히려 더 몽롱해진 정신이 눈앞을 흐렸다.

“잠든 줄 몰랐는데……. 죄송합니다.”

“어차피 다 왔습니다.”

금방 안쪽으로 들어선 차량이 가로등 불을 지나고 방지턱을 넘더니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드르륵거리며 내려간 내부는 저번에도 온 적 있었던 권 대표의 집 주차장이었다.

승원은 비몽사몽한 정신을 깨고 권 대표를 따라 주차장 밖으로 이동했다. 추운 복도를 지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권 대표가 자신을 힐금 보는 게 느껴졌다. 승원이 고개를 들자 그가 눈썹을 비죽였다.

“엘리베이터는 이제 잘 탑니까?”

“…그럭저럭이요.”

“으음.”

대답인지 아닌지 모를 반응이 끝나자 문이 열렸다. 권 대표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승원은 현관 앞에서 잠시 티 안 나는 머뭇거림을 가졌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 냄새라곤 전혀 풍기지 않는 그의 집은 이미 발을 들였던 곳인데도 까마득한 외지처럼 낯설었다.

코트를 가볍게 정리하고, 식탁 위에 포장한 음식을 내려놓은 권 대표가 손을 닦으며 승원에게 눈짓했다. 그가 말을 하기 전까지 승원은 코트 차림 그대로 거실 한가운데에 멀찍하게 서 있었다.

“손 닦고 와서 앉아요.”

“네.”

“졸립니까.”

“안 졸립니다.”

물기를 털어 낸 그가 포장지를 뜯다 말고 승원을 흘겨봤다. 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의아했는지 짧게 비소했다.

“안 졸린 사람이. ……가서 손이나 닦고 오세요. 세수라도 하든지.”

하던 말을 줄이고 명령조로 읊어내는 권 대표에 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안쪽으로 들어가자 나온 욕실에 불을 켠 승원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뺨을 가로지르는 빨갛고 긴 자국이 있었다. 손으로 더듬어 보자 그 부분만 움푹 파인 채였다. 피곤으로 수척해진 얼굴이 채찍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상하고 추레했다. 잠깐 머리를 꾸벅할 정도로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이렇게 눌린 건지 문질러도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화장실에 갇힌 채 얼굴에 생긴 이상한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승원은 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그의 차에서 정신 줄을 놓고 잠이 들었을 제 얼굴이 절로 상상되어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얼마나 추했을까. 코를 골았거나,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권 대표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스러운 얼굴로 비척이며 테이블로 돌아가는 사이, 삐빅- 하는 전자레인지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있는 곳에 도달했을 땐, 접시 위로 옮겨 놓은 음식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세팅되어 있었고, 와인 한 병과 와인 잔 두 개도 마련되어 있는 상태였다.

수건으로 손을 닦은 권 대표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앉으세요.’라고 말하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술 마실 줄 알죠?”

“…네. 그렇긴 한데.”

권 대표는 승원이 앉기도 전부터 와인 잔에 술을 채워 넣고 있었다. 구슬 같은 소리와 함께 새까만 포돗빛의 액체가 잔 안으로 넘실댔다. 승원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는 잔부터 들어 올렸다. 식탁 위에 올라간 음식들이 꼭 알코올을 위해 준비된 안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윤승원 씨 술 잘 먹지 않습니까.”

“……와인은 자주 마셔 보진 않았는데.”

“흔해 빠진 술보다는 훨씬 맛있을 겁니다.”

권 대표가 말하는 흔해 빠진 술은 보편적으로 먹는 맥주나 소주 따위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니, 고고한 자태를 비추는 그는 정말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 먹는 초록이나 갈색의 병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허벅지 밑으로 손등을 넣어 두고 있던 승원은 뺨을 만지다가 권 대표를 따라 잔을 들었다. 잔끼리 부딪히는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와인을 즐겨 마시지도 않고, 몇 번 먹어 보지도 않았던지라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머뭇거리다가 잔에 입을 대고 목 뒤로 넘기는 순간, 따가운 시선에 눈을 든 승원은 저를 지긋이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춰야 했다.

잘 뻗은 목 위로 툭 튀어나온 동그란 혹이 꿀렁거렸다. 와인을 넘기며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번 엉킨 시선은 풀어내기 힘들었다. 승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단맛이라고는 전혀 없이 쓰고 알싸한 액체가 목구멍에 들어왔다.

“맛은.”

“……맛있어요.”

“표정은 아닌데.”

“사실 조금… 씁니다.”

“그럼 쓰다고 하면 되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승원은 대답 없이 그릇에 담긴 수프를 떠먹었다. 불이 났던 목 안으로 따뜻한 음식물이 들어오자 오히려 홧홧한 기운이 더 크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잠을 못 잤습니까?”

질문을 듣고 승원은 눈을 들었다. 움푹 팬 수프용 숟가락은 승원의 입에 버거웠고, 결국 입술 밑으로 하얀 수프가 흘러내렸다. 권 대표가 눈을 흘겼다.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승원에게 건넸다. 감사하다는 인사말 없이 승원이 턱을 닦았다.

“촬영이 오전부터 있었습니다.”

“어제 오전?”

“……네.”

“그럼 잠은.”

“틈틈이. 조금씩… 잤습니다.”

“차에서부터 상당히 피곤해 보이던데.”

권 대표의 그릇에 담긴 수프는 아직 건들지 않아 처음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숟가락에 손을 가져가던 그는 대신 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남아 있는 와인을 모두 목 뒤로 넘겼다. 빈 잔에 액체가 다시 채워졌다.

“…그래도 그냥 잠깐 졸았던 것뿐-.”

“윤승원 씨가 자는 동안 집 주변을 다섯 바퀴쯤 돌았습니다.”

“…….”

“지금도 얼굴이 말이 아니네.”

승원은 문득 다시 손을 들어 제 뺨을 더듬었다. 팬 자국은 더 만져지지 않았으나 그에게 보일 얼굴이 어떤지는 거울이 없는 이상 확인해 볼 수 없었다. 후끈해지는 가슴을 문지르던 승원은 다시 코를 박고 수프를 퍼먹었다.

아직 와인이 남아 있는 잔에 권 대표가 새로이 와인을 더 채웠다. 그는 턱을 괸 채 무료한 얼굴로 승원에게 다시 잔을 내밀었다. 잔끼리 서로 부딪치자는 뜻이었다.

목은 하염없이 타들어 갔고, 계속되는 갈증에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벌써 뺨 언저리가 붉어진 승원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무거운 와인 잔을 들어 권 대표의 것과 부딪혔다.

꼴깍꼴깍 술을 넘기는 승원을 느릿한 몸짓의 남자가 유유히 지켜보았다. 승원은 그가 자신을 이 시간에 집까지 부른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함이었음을 차차 깨달아 갔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 새벽에 와인까지 꺼내 마시고 싶어진 걸까. 목 끝까지 차오르는 궁금증들을 마음껏 뱉어낼 수도 없었기에, 승원은 그것들을 그저 부드러운 액체와 함께 목 뒤로 삼켜 버리고 말았다. 피곤한 몸 상태가 한몫하는 것인지, 자신 역시 술이 쭉쭉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물론 꺼져 가던 몸은 술의 부추김에 더없이 빠르게 지쳐 갔다.

“윤승원 씨.”

딱딱. 권 대표가 승원의 시야 앞으로 검지와 중지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부름보다 확인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벌써 취했어요?”

“…아니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입술을 짓씹으며 승원은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꾹 쥐고 있던 쇠숟가락 손잡이 끝에서부터 묘한 열이 퍼져 흘렀다. 입술에 묻어 있던 수프를 혀로 쓸어 닦고, 승원은 눈앞에 있던 푸른 샐러드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맘처럼 되지 않는 젓가락 끝에 어설픈 풀 쪼가리가 덜렁덜렁 걸려 있어서 아쉬운 대로 그걸 그대로 가져와 입에 넣었다. 씁쓸한 풀 맛을 느끼자마자 승원의 표정이 불편하게 찌그러졌다.

“왜요. 맛이 없습니까.”

“…….”

“밥도 안 먹고 샐러드만 먹는 사람이 풀도 가립니까.”

“…샐러드는 닭고기랑 곁들어 먹는 건데.”

“윤승원 씨.”

이번엔 확인이 아닌 부름이었다. 낮게 떨어진 음성이 승원을 불러 잡았다. 후끈거리는 볼을 매만지던 승원은 어느새 텅 빈 와인 잔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손등으로 턱을 괸 채 무의미하게 응시하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뜬금없었다.

“웃어 봐요.”

“……네?”

승원이 눈을 깜박였다. 잘못 들었거나, 잘못 말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웃어 보라고.”

말에 높낮이가 없었을 뿐, 종용이라곤 볼 수 없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웃는다는 단어에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어떤 뜻이 또 있었던가. 승원이 그가 내뱉은 문장의 뜻을 궁리하고 있는 사이 권 대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 윤승원 씨 웃는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

“난 윤승원 씨가 웃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아무래도 나만 못 본 거 같아서.”

모든 게 황당하고 뜬금없었다. 갑자기 웃어 보라는 난데없는 요구를 들이미는 것도 이상했고, 권 대표는 꼭 자신이 승원의 웃음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것이 손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연한 권리를 추구하지 못한 자의 억울함인지, 자신을 보고 웃지 않는 승원에 대한 단순한 서운함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웃어 보세요.”

입술만 간단히 움직여 말을 하는 남자는 승원에게 손쉽게 부탁했다. 그가 손바닥 위에 얼굴을 얹고는 승원을 기다렸다. 유려한 속눈썹이 간헐적으로 깜박였고, 끝이 살짝 접힌 눈꼬리는 곧 맞이할 공연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적당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풀어져 있던 승원의 입꼬리 끝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갑자기 긴장이 치솟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광대가 꿈틀댔다. 입력을 잘못 받은 로봇처럼 승원은 뻑뻑한 안면 근육을 씰룩거렸다.

민망한 상황을 겪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허공을 떠돌던 승원은 마지못하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주먹을 꼭 쥐고 권 대표를 바라봤다. 끝나지 않을 듯한 기다림이 길게 늘어졌다.

꿈실거리던 입술을 올리는데 끝이 경련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뜨거웠던 눈자위가 더 세차게 이글거렸고, 주먹을 쥔 손안은 이미 잔뜩 젖어 흥건했다. 그러곤 비스듬히 시선을 맞대고 웃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던 사색 위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흐윽.”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승원을 지켜보던 권 대표가 손에 괴고 있던 얼굴을 떼어 냈다. 웃기 직전의 입꼬리가 턱 밑으로 추락하더니, 어느새 승원은 울고 있었다. 승원의 눈가 밑으로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곧이어 뺨을 타고 흘렀다. 반쯤 움츠러들어 있던 작은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대표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

“절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저한테…….”

권 대표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승원은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눈가를 쓸어 닦았다. 물과 술에 젖은 음성이 부정확하고 거칠었다.

차곡차곡 쌓여 가던 의아함과 서운함이 동시에 뚜껑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요구에 왜인지 모를 수치심도 느껴야만 했다. 취기 어린 몸은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기 어려웠고, 조절이 힘든 탓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하릴없는 눈물이 얼굴을 가득 적셨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앞의 남자를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종잡을 수도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말을 고르던 남자가 이마를 깊게 팼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갈무리하려 입술을 벌린 권 대표가 울음을 닦아 내는 승원을 바라보았다.

“…하기 싫으면 거절을 하면 되는 걸.”

“…….”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심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음성이었다. 권 대표의 목소리를 잠재운 흐느낌이 그대로 울렸고, 그는 굴하지 않고 승원에게 물었다.

“내가 윤승원 씨를 시험했다고?”

“…….”

“그럼 가뜩이나 피곤하고 시험에나 들려고 하는 남자가 불편해 죽겠는데, 밥 먹자는 말에는 왜 알았다며 따라온 겁니까?”

“…….”

“내가 윤승원 씨 입에 음식을 쑤셔 넣기를 했어요, 웃지 않는다고 입을 찢어 놓길 했어요.”

“…….”

“왜 갑자기 우는지 나 좀 납득시켜 봐요.”

정수리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승원은 내린 목을 고정시켰다. 고개를 들면 저 형형한 눈동자와 마주해야 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

“눈은 마주쳐야 예의지.”

고압적인 목소리가 전해졌다. 결국 고개를 들자 남자의 눈이 식탁을 넘어 가깝게 맞닿았다. 뺨에 떨어진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뜨끈한 온기가 물기와 함께 지나갔다. 승원이 바싹 마르는 입을 열었다. 말이 부분부분 떨렸다.

“대표님은 내일이 되면 제가 싫어질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와인의 도수가 높았다. 아까 전 식도를 타고 넘어간 술이 배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발그레해진 살갗이 분홍빛이었다. 그 위로 범벅이 된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 물끄러미 승원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지껄였다.

“내가 언제 싫어진다고 했습니까.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지.”

“…보고 싶지 않으면. 그게 제가 싫어지신다는 뜻… 아닙니까?”

“보고 싶지 않은 게 어떻게 싫어한다는 뜻이 됩니까? 그건 완전 다른 문제인데.”

유연하게 받아치는 남자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권 대표가 넓은 가슴을 크게 울렁였다. 그가 내뱉은 한숨이 들렸다. 승원이 찬찬히 숨을 고를 때마다 심장 중앙이 찌르르 떨렸다. 손등을 들어 눈을 벅벅 닦아 냈다. 축축한 손등 밑으로 묻어 나온 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럼-.”

누가 심장으로 북을 치는 듯이 쿵쿵쿵, 요동쳤다. 정돈되지 않은 음색이 파리했다. 승원이 숨을 크게 가다듬었다.

“…다른 문제면, 제가 대표님께 다른 대답을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승원의 서투른 물음을 끝으로 침묵이 떨어졌다. 승원은 권 대표를 바로 보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시야로 초점 잃은 눈동자가 식탁 언저리를 배회했다. 그 위로 어릿어릿하게 걸린 권 대표의 가슴이 차분하게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권 대표는 다시 입을 열기 전 한숨을 뱉었다.

“취한 사람끼리 무슨 말을 더 해.”

“…….”

“그만 일어나세요.”

그가 의자를 밀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을 옆으로 치워 두고 대충 식기들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고집스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승원의 곁으로 권 대표가 다가왔다.

그가 승원의 턱을 잡아 들었다.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혀를 차는가 싶더니 승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잡힌 손목에서 약한 둔통이 느껴졌다. 승원은 반쯤 끌려가다시피 권 대표의 손에 이끌렸다.

그가 데려간 곳은 권 대표의 집에 처음 오던 날, 승원이 잠시 머리를 기대고 머물렀던 그의 응접실이었다. 호텔 객실처럼 꾸며진 그곳은 오늘도 어김없이 붉은 러그가 깔려 있었고, 하얗고 거대한 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권 대표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안온감이 펼쳐진 이곳은 철저하게 외부의 공간처럼 이질적이었다.

방으로 들어와 손목을 놓아준 권 대표가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가 다시 승원에게 다가오는 동안에도 승원은 무겁게 떨어진 고개를 들 생각이 없었다.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주책맞게 다시 떨어졌다. 툭, 툭 방울로 낙하한 눈물이 발등 위로 맺혔다.

“이렇게 골치 아프게 굴 줄 알았다면 술 먹자고 안 했습니다.”

승원의 머리 위로 권 대표의 음성이 잔잔히 떨어졌다. 톤이 한층 누그러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에 승원은 그의 감정을 선뜻 예상할 수 없었다. 승원이 물기 젖은 눈가를 손을 들어 닦았다.

“왜 제가 골치 아프게 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승원이 내린 시야엔 발등을 마주 보고 있는 권 대표의 발끝이 보였다. 심연에서 끄집어낸 목소리가 위태로웠다.

“대표님은 매번… 제가 대표님 뜻대로만 움직이고, 행동하고, 말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

“제가 거절하지 못할 걸 아시면서, 왜 자꾸… 제가 잘못한 것처럼…….”

“윤승원 씨.”

더 털어 낼 말이 없어 늘리고 있던 사이를 그가 끊어 냈다. 짧게 내뱉은 한숨이 비수처럼 승원의 가슴을 찔렀다. 어딘가 지친 듯한 목소리는 마지막 기회처럼 인내를 누르고 있었다.

“왜 거절을 못 합니까?”

“…….”

“하세요. 내가 언제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난 윤승원 씨한테 강요한 적 없습니다. 혹시 내 말투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겁니까? 이제 와서 그런 핑계로 꼬투리를 잡는 건 어림도 없다는 거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날카롭게 벼린 목소리가 승원에게 쏟아졌다. 어른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반문조차 하지 못하고 꼭 다물린 입술이 부들거렸다. 권 대표는 말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호흡을 골랐다. 그럴 때마다 보지 않았는데도 그가 눈을 감고 화를 가다듬는 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승원은 위로 솟은 어깨에 힘을 가득 줬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가냘픈 충동을 조절하려 애썼다.

“윤승원 씨 내 말 무시하고 자리 박찬 적도 있고, 거절한 적도 있습니다. 꼭 한 번도 그런 적 없이 꼭 참아 왔던 사람처럼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이 말하는데. 설령 여태까지 하던 그대로 군다고 해도 나는 뭐라고 할 생각 없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는데-.”

“제가 대표님을 좋아하니까.”

양어깨를 뒤흔들며 삐뚤어진 목소리가 갈리듯이 나왔다. 야심차게 뱉어낸 언성 뒤로 터져 나온 것은 크기를 키운 울음이었다. 아까 흘렸던 눈물이 이 순간을 위한 전조 증상이라도 됐던 것인 양, 승원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물이 온 얼굴을 적셨다.

“제가 대표님을 좋아해서.”

“…….”

“…그래서…….”

뒤엉킨 말이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뱉어 낸다 한들 울음에 묻혀 똑바로 전달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두 팔을 다 들어 얼굴을 닦는데도 한참 모자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변명처럼 덧댄 고백이 너무도 형편없었다. 이런 식으로 들통나듯이 마음을 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이 밖이었다면, 권 대표의 집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발이 닿는 대로 도망이라도 갔었을 터였다. 그러나 고요하게 틀어막힌 집안엔 빼도 박도 못하게 권 대표와 승원 둘뿐이었다. 시끄러운 주변 소음을 탓하고, 우르르 쏟아지는 비를 탓할 수도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두 사람의 발을 흥건하게 적셨다.

대답 대신 들린 것은 권 대표의 발소리였다. 승원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땐, 권 대표가 방을 나선 후였다. 텅 빈 공간에 고개를 들자 남은 건 저 하나였다.

눈이 크게 뜨였다.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이 굵직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창을 뚫고 뛰어내리고 싶었다. 점차 커다랗게 벌어진 입술로 좌절을 쏟으려던 때였다.

다시 돌아온 권 대표의 손에 물컵이 들려 있었다. 미간에 옅은 주름이 져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피곤함이 가득한 낯으로 승원에게 다가온 권 대표는 조금 질린 사람 같았다.

그가 억지로 승원의 손에 물컵을 쥐여 주었다. 마시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손에 들린 유리잔의 표면엔 미지근한 온기가 전달됐다.

말없이 승원을 지나쳐 커다란 침대에 다다른 그가 이불을 휙 걷었다. 두꺼운 침구가 뒤집히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그가 다시 승원에게 다가오더니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리고는 승원을 강제로 침대 위에 앉혔다.

“지금 윤승원 씨는 술도 마셨고, 피곤도 상당할 겁니다.”

“…….”

“나는 지금 자고 일어나서 다시 눈을 떴을 윤승원 씨를 위해 배려해 주는 겁니다.”

단말마적 외침을 이후로 가래가 들끓는 듯이 목구멍이 콱 막혀 버린 상태였다. 다리 위까지 이불을 올려 준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승원을 보고 숨을 내쉰 남자가 잠시 승원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짧다면 짧았을 그 마주침을 끝으로, 권 대표가 등을 보였다.

“대표님……. 가지… 마세요.”

승원이 그의 옷을 잡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목소리에 걸음을 더 떼려던 발이 멈췄다. 권 대표가 승원의 손을 떼어 냈다.

“내가 간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

“왜 갑자기 애처럼….”

훌쩍임이 들렸다. 봉숭아 물처럼 벌겋게 물든 눈가가 아련했다. 승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목울대를 움직였다.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던 그가 숨을 내쉬었다. 다시 돌아온 눈이 떨어졌다. 그가 체념했다.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지친 목소리였다. 그가 승원의 손에 들려 있던 물컵을 뺏어 협탁 위에 올려 두었다. 헝클어진 앞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젖은 입술을 뻐끔거리는 승원을 바라보더니, 권 대표가 그의 턱을 잡아 들었다. 승원의 고개가 치켜 올라갔다.

“내가 뭘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형형한 눈에 불꽃이 튀었다. 턱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아 승원은 코를 찡그렸다. 마른 눈물에서 짠 내가 나는 것 같았다.

“…대표님.”

“…….”

“저랑 했던 섹스는 기억하세요…?”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승원이 그에게 물었다. 힘이 들어가 있던 아귀가 스르륵 풀렸다. 긴 눈맞춤이 이어졌고, 마침내 그가 입을 뗐다.

“그걸 왜 묻는 건데.”

“…기억하실 것 같아서요.”

혼란이 담긴 두 눈이 거칠게 방황했다. 검은 눈동자 안에 그대로 직조한 제 몰골을 승원은 지지 않고 바라보았다.

“없던 일로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철저히 벽을 두는 남자로부터 또 한 번 패배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속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아무리 조절하려고 해도, 이미 고장 난 수도처럼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답답함에 팽창한 가슴이 곧 터져 버릴 것 같아 승원이 울먹였다. 입을 떼는 순간 아랫입술이 무너졌다.

“어떻게 없던 일이 됩니까, 그게…….”

“…….”

“머리로든, 몸으로든 전부 무엇 하나 잊은 게 없는데. 고작 말 한마디로 어떻게 없던 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습니까, 대표님은…….”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가 잔잔히 떨렸다. 눈가를 찌푸리는 남자를 보고도 승원은 참지 않았다.

“대표님이 저를 닮은 여자분과 만났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술 먹다가 제가 생각나서 저를 찾아왔다는 것도 전부… 하나같이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다 없던 일처럼 굴라고 하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윤승원 씨-.”

“이기적이십니다. 자기 마음 편하겠다고, 왜 제 기억까지 없는 취급을 하십니까?”

“…….”

“뭐든 그렇게 쉽게 잊고 없애 버릴 수 있는 거였으면, 애초에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말조심하세요.”

짓이긴 단어가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빠르고 단단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승원에겐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하릴없이 뱉어 내고 있던 말들이 그의 목소리로 전부 흩어졌다.

“그럼 나는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잖아.”

하나하나 밟아내듯이 씹어 낸 그가 승원과 가까이 눈을 마주쳤다. 머릿속을 정리하려 시도하는 듯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목울대가 떨렸고, 이마에 주름이 파여 있었다. 이윽고 그가 분노에 찬 음성을 뇌까렸다.

“내가 이기적으로 굴었다고? 그럼 이 새벽에 윤승원 씨를 집까지 불러서 밥을 먹이고 여기서 재우려고 들었겠습니까?”

“…….”

“오늘 저녁에 입국해서 들어왔습니다. 잠은 내 쪽도 충분치 못하고, 피곤한 건 윤승원 씨뿐만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지금 여기까지 데려와서 윤승원 씨 투정을 다 받아 주고 있는데. …그런데도 내가 이기적입니까?”

내뱉는 말 사이에 숨이 없었다. 쏘아붙이는 말들이 뾰족하게 깎여 찔러 들어왔다. 아무 말 못 하는 승원에게 시선을 걸어 두던 권 대표가 숨을 골랐다.

“나도 돌아 버리겠습니다.”

“…….”

“후회할 짓은 이미 벌어졌는데, 후회할 선택을 한 과거의 나를 부정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던 그 좆같은 심정을 압니까? 그게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고 거지같이 만드는지…….”

가까이 닿은 눈동자가 질리게 엉켰다가 풀려났다. 단전에서부터 단단하게 뭉쳐 굴러 나온 감정들은, 결국 승원이 아닌 권 대표 본인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말을 고르는 옆선이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

“난 여태껏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까지 내가 믿어 왔던 그러한 확신에서 나는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내가 그렇게 자신 있게 윤승원 씨한테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내 확신을 떠벌릴 수 있었던 거고.”

“…….”

“허세라면 허세고, 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뭐든 감정적으로 이해하던 윤승원 씨가 한심하다고 생각했고…….”

“…….”

“그런데 그런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윤승원 씨와 만난 근래에 계속 통감하고 있었으니.”

승원과 지낸 이후, 남자는 때를 알 수 없게 바뀌어 버린 심장의 반응이 어색했고, 낯설었다.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막연한 자신을 저도 모르는 새에 점차 잃어 가고 있었다.

승원에게 휘둘리는 순간, 자신이 확신해 왔던 그간의 순간들조차 전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제가 그려 왔던 논리와 순리가 보잘것없다 생각했던 스물여섯 남자의 손에 들어가 냉정하게 빨간 줄이 그어지고 있었다.

그가 자조적인 미소를 걸쳤다. 여태껏 지키고 있던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순간에 꺾여 버린 자존심이 허무했다.

“윤승원 씨를 만나기 전으로 되돌아가면, 좀 나아질까 생각도 했습니다. 착오 없는 계획을 만들어 가려 데려온 그쪽 때문에… 내가 지금 그 전보다 못한 꼬라지로 살고 있으니까.”

“…….”

“그런데 더 씨발스러운 건.”

자신을 바보같이 올려다보는 어린 얼굴 위로, 저 때문에 생겨난 눈물 자국이 선했다. 그가 조금 힘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몇 번을 다시 돌아가도 과거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윤승원 씨와 관련된 모든 것은 전부. 내가 이걸 인정하기까지…. 아니, 인정하고도 너한텐 들키고 싶지 않았어.”

사방이 막힌 공간인데도, 어디선가 바람이 선선하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승원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멀거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을 해도, 지금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없을 것 같았다.

권 대표가 가슴을 크게 울리고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 속에서 승원은 침묵을 지켰다. 배꼽 위까지 덮인 이불 위를 손으로 가득 그러쥐었다. 혼란스러웠던 그의 얼굴이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덧 평상시의 사색을 되찾은 권 대표가 다시 승원을 마주했다. 그가 손등을 들어 승원의 뺨을 닦아 냈다. 어느새 다 마른 눈물은 얼룩덜룩한 자국이 전부였다. 건조하게 묻어난 손등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윤승원 씨를 만나기 전에도, 윤승원 씨를 만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와 미래를 기약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

“그건 내 안에서 어떤 신념과도 같은 것이고, 이건 감정이 아닌 의지의 문제이니 앞으로도 변치 않을 생각입니다.”

“…….”

“그래서 윤승원 씨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있더라도 그냥 접고-.”

“그게 됐으면-.”

“…….”

“여기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어요.”

바람이 빠지듯 승원은 얄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몇 번의 설명에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에게 또 한 번 깊게 새겼다.

“누굴 좋아하는 데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표님 말처럼 오늘은 좋다가도 내일은 싫어질 수도 있는 게 사람 마음인데…. 그걸 제가 어떻게 마음대로…….”

권 대표를 향해 뜨고 있던 눈을 내렸다. 다음의 말을 꺼내기까지의 결심이 늦었다. 이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승원은 악물고 있던 잇새를 풀어냈다.

“대표님이 좋아하지 말라고 해도… 전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없을 것 같아요…….”

“…….”

“그러니까 그냥… 좋아하게만 해 주셨으면, 대표님이 제 마음을 모른 척하지만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정말 마음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서…….”

모든 말이 진심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서서히 불어나고 있던 마음은 주춤하기는커녕, 인정하던 그 순간부터 한계가 없는 양 끝도 없이 커졌다.

누군가를 이토록 좋아해 본 게 처음이라, 그 간절한 마음을 부정당하면 그건 거절보다 힘들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앞에서 투명 인간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블라인드 사이로 어스름한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둠을 이긴 새벽은 짙푸른 하늘색이었다. 팽팽하게 오가던 대화의 끝에 찾아온 건 골을 짓이기는 듯한 졸음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승원은 눈을 비볐다. 긴장에 가득 차 있던 이불 안쪽의 몸이 응고된 온기로 답답했다.

권 대표가 물잔을 다시 들었다. 승원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마셔요. 나중에 목쉬었다고 내 탓하지 말고.”

“…….”

“윤승원 씨 의견은 존중해 주겠습니다.”

음률 없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원은 잔에 든 물을 꼴깍꼴깍 목 뒤로 넘겼다. 미지근하던 물맛은 어느새 식도를 차게 식혔다. 일렁이던 뱃속이 찰랑거리는 물에 잠겨 안정을 찾았다.

“웃는 거 보겠다고 이 지경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인터넷에 검색하면, 웃고 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을 텐데…….”

승원의 해결책에 권 대표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상을 찡그리는 듯했지만, 그는 어처구니가 빠진 사람처럼 얕게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살살 젓던 권 대표가 승원의 손에서 빈 물컵을 수거했다. 그러더니 뒤에 보이는 베개를 툭툭 쳤고, 승원은 그제서야 천천히 머리를 기댔다. 푹신한 베개가 머리를 안정감 있게 받쳤다.

“좀 있으면 해도 뜨겠네.”

“그럼 이제 대표님은… 대표님 방에서….”

“당연한 소리를 합니까.”

“…….”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눈 감으세요.”

승원이 그의 말대로 눈을 감자, 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침대맡에서 시작됐던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게 감각으로나마 느껴졌다. 그가 문고리를 잡기 전, 승원은 다시 눈을 떴다. 넓은 등을 향해 반쯤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세요. 대표님.”

문을 열던 그가 뒤를 돌아봤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부터 잔잔한 인사가 되돌아왔다.

“윤승원 씨도.”

이윽고 불이 꺼지며 문이 철컥 닫혔다. 그의 응접실, 넓은 호텔 방 안에 승원 홀로 남겨졌다. 이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지도록 승원은 몸을 뒤척였다. 간지러운 뺨을 긁다가 눈을 감았다. 술기운에 잔뜩 열이 올라 있던 얼굴은 어느새 적당한 온도로 식어 있었다. 방 안을 오묘한 색으로 비추는 창밖 새벽빛을 느끼며, 승원은 수마에 빨려들었다.

***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아챘을 무렵, 검게 내려앉은 승원의 눈꺼풀 너머로 무언가 어지러이 움직였다. 이불 소리인지, 옷에서 나는 소리인지 모를 부스럭대는 소리가 한참 들렸고, 졸음에 취해 끙끙거리던 승원은 어느 순간 제 몸이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놀라 뜬 눈으로 상황을 파악한 승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무슨-.”

“왜 깼습니까.”

승원을 번쩍 들어 올린 권 대표의 두 팔에 제 무릎과 등이 받쳐져 있었다. 이불째로 번데기처럼 꽁꽁 싸맨 몸이 속절없이 그에게 안겨있음을 깨닫고 승원은 이도 저도 못 한 상태로 입을 벌려야 했다. 자다가 맞은 봉변이 따로 없었다.

권 대표는 승원을 신경도 쓰지 않고 넓은 거실을 지났다. 언제 대낮이 된 건지, 창으로 비치는 새하얀 햇살이 환하게 거실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복도 안쪽으로 쭉 이동하던 무렵, 어디선가 인터폰 소리가 울렸다. 떨어질까 무서워 권 대표의 팔뚝을 잡고 있던 승원이 목을 쭉 뺐다.

“누구…….”

“조용히.”

“…….”

승원이 입을 다물었다. 이쪽 복도까진 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생경함을 느끼고 있는데, 그가 문을 열었다.

회색빛으로 도배된 침실이었다. 무엇을 그린 건지 모를 심플한 그림 액자 등이 큼지막하게 침대 뒤쪽을 장식하고 있었고, 커튼을 쳐 놓은 탓에 넓은 창으로부터 빛이 들어오지 못한 채였다. 모든 게 깔끔하게 제 자리를 이루고 있는, 군더더기 없는 권 대표의 침실이었다.

“여기 있어요.”

그가 승원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불 안에 둘둘 싸여 있던 몸이 답답했다. 잠시 승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승원의 이마를 한 번 넘겨 주었다. 잠에 빠져 있느라 헝클어져 있던 앞머리가 넘어가고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가만히 있으세요. 밖으로 나오지도 말고.”

“…왜-.”

“불청객.”

간단하게 답을 한 권 대표는 방을 나가기 전, 승원을 다시 돌아봤다. 그리고 그의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눈을 깜박이는 승원을 들여다봤다. 짧은 눈 맞춤이 이어지고, ‘얌전히 있어요.’라고 권 대표가 재차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던 승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반쯤 내려와 있는 졸음을 떨치려 눈을 비비던 승원이 검은 침구를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새것처럼 정돈되어 있는 이불은 과연 사람의 흔적이 있긴 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멀끔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권 대표의 침실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공간 가득 느껴지는 그의 냄새 때문이었다. 자신의 영역을 증명하듯, 그에게서만 나던 짙은 향이 느껴졌다.

승원은 조심스레 침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코로 깊게 숨을 쉬다가 검은 이불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폭 안겨지는 몸이 아늑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순간에 그의 침실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감히 발을 들일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싶던 성역과도 같은 공간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포근했다. 남들이 다 갖고 있는 그 흔한 침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

바깥에서 나는 희미한 소리에 반응한 승원은 상체를 번쩍 세웠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거실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면 음량이 상당한 듯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문 앞에 귀를 대고 있자,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있었고, 그 사이에 궤궤하고 낮은 음성도 함께였다. 권 대표의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승원은 불청객의 정체가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권 대표의 모친이었음을 승원은 서서히 깨달았다. 그래서 이곳을 비상 방공호로 쓴 거구나. 승원은 목소리 이외에 달리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자 흥미를 잃고 제자리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그의 어머니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뭘까. 갑작스레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을 보니 미리 계획되어 있던 약속도 아닌 것 같았다.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일까. 무릎 위에 뺨을 기댄 채 숨을 쉬었다.

전처럼 조바심이 나거나 걱정이 되진 않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권 대표는 다른 누구와도 만남을 추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절을 위한 거절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

“…뭐야.”

둥글게 말고 있던 몸이 갑작스레 앞으로 스윽 밀려났다. 멍을 때리고 있던 참에 화들짝 놀란 승원이 고개를 위로 들자 문틈으로 발을 내민 권 대표가 승원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 안쪽으로 들어온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여기 앉아 있습니까?”

“…어머니는 가신 건가요?”

‘어머니’라는 말에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문을 닫은 권 대표가 그 문에 그대로 등을 기대고 섰다.

“엿들었습니까?”

“…어차피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일어나세요.”

내밀어 주는 권 대표의 손을 잡고 승원이 몸을 일으켰다. V자로 떨어진 그의 새하얀 목덜미가 보여 승원은 고개를 피했다. 그는 다시 나가지도 않았고, 바깥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진 알 수 없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권 대표는 승원을 침대 위로 다시 앉혔다. 그 옆에 앉은 그는 잠시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쓸었다.

“피곤해 죽겠네.”

“왜 오신… 거예요?”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권 대표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승원을 바라보았다.

“알아서 뭐 하게.”

“…….”

“원래 사람이 제멋대로입니다. 감당이 안 돼서 거절보다 수긍이 나을 정도로.”

“…….”

“되도 않는 결혼 타령을 계속 해 대는 통에 내가 연락을 씹고 있었더니. 보란 듯이 찾아와서.”

얼마나 질려 있는지는, 권 대표의 표정만으로도 쉽게 드러났다. 허공을 가로지르던 그의 시선이 곧이어 승원에게 가닿았다. 눈을 깜박이며 승원을 바라보던 남자가 문득 물었다.

“윤승원 씨는 내가 어떻게 보입니까.”

고고하게 울린 음성이 귀에 닿았다. 승원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시선이 짙었다. 물음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승원은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단순하게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말을 골라야 할 것 같았다. 승원은 잠시 생각하다 목을 울렸다.

“그냥… 철저하고. 어른 같고…….”

“…진심입니까?”

권 대표가 쓰게 웃었다. 승원을 비웃는 건지, 자신을 비웃는 건지, 애매한 미소가 헛웃음과 함께 걸려 있었다.

“철저하면, 결혼식장까지 데려가서 윤승원 씨 뺨은 왜 맞게 했겠습니까.”

“…….”

“다 큰 아들을 구속하고 갈구겠다고 부모라는 작자가 이렇게 허구한 날 집에 쳐들어오는데. 윤승원 씨가 보기엔 그래도 내가 철저하고 어른스러운 사람 같습니까?”

그가 팔을 뒤로 뻗어 등을 뒤로 기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허공에 건 시선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애새끼처럼 보이니까, 나를 이렇게 구속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건 대표님이 애 같은 게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관심이 지나치신 겁니다.”

“…….”

“대표님이 잘못한 건 없는데요.”

그가 잠시 승원을 바라보았다. 두 쌍의 눈이 오래도록 서로를 응시했다. 묘한 분위기를 먼저 깨부수고 일어난 건, 권 대표 쪽이었다.

“촬영은 어디까지 했습니까? 잘하고 있어요?”

“…네. 그럭저럭.”

순간 최기환과 있었던 촬영장에서의 일이 떠올라서 승원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있었던 잠깐의 해프닝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나쁠 것 없는 일반적인 촬영장이었다.

“키스 신은 찍었습니까.”

무심하게 묻는 권 대표를 바라보다가 승원은 뒤늦게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 곧 들어갈 것 같습니다.”

“여배우랑 합은 어떻고? 친하게 지냅니까?”

“…네. 친절하고.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이런 장르는 처음이라 걱정 많이 했는데, 괜찮을 것 같습니다.”

권 대표는 승원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아무런 호응도, 대답도 없이 듣기만 하는 권 대표에 조금 민망해진 승원은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입을 달싹거렸다.

“잘 어울리던데.”

뒤로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 권 대표가 무심히 뇌까렸다. 승원은 앉은 자리에서 잠시 머리를 굴렸다. 권 대표가 뭘 보고 저런 말을 하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홀로 승원에 대한 정보 등을 찾아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더욱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침대가 기우뚱 기울었다. 푹신한 매트리스는 권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푹 꺼졌다가 제자리로 올라왔다. 침대 라운드를 빙 돌아 창가 쪽으로 이동한 권 대표가 커튼을 양옆으로 걷었다. 깊게 가라앉아 있던 어둠이 가시고, 눈이 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불을 켠 것처럼 밝아진 공간 안에서, 그의 머리가 빛에 부서져 하얗게 반짝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일반적인 담배 같진 않았다. 하얗고 얇은 막대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는 원래의 형태와는 다르게 검은 기둥 같은 것을 그가 입에 물고 있었다. 안개 같은 연기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승원을 권 대표가 나직이 불렀다.

“윤승원 씨.”

“……네.”

“내 좆 빨겠습니까.”

허리춤에 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귀로 들어온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떼어 낸 권 대표가 이어서 덧붙였다. 향긋한 냄새가 났다.

“키스는 그 여자랑 할 테니. 지금은 내 좆이라도 빨아 봐요.”

뭐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느 때에 어떤 식으로 패를 내밀지 모르는 남자였기에, 미리 대비할 수도 없는 제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반사 기능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런 대응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승원에게 권 대표가 눈썹을 비틀며 물었다.

“왜. 싫습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면.”

“…….”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낸 낯이 어둡게 갈음됐다. 엄지와 검지로 담배 스틱을 떼어 낸 권 대표가 후우, 숨을 내뱉었다. 뿌연 연기가 그의 얼굴을 희끄무레하게 가렸다. 이불을 하릴없이 쥐고 있던 승원이 어렵사리 손을 떼었다.

“싫으면 말고.”

“아니요. …빨고 싶습니다.”

다급히 덧붙인 승원의 말에 권 대표가 눈썹을 비죽였다.

“그럼 내려오세요.”

승원은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두 발을 딛고 침대를 빙 둘러 권 대표에게 다가갔다. 그는 입에 물고 있는 검은 스틱을 떼어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떨이가 떨어지거나, 불 끝이 타오를 일도 없었기에, 그가 멈추지 않는 이상 흡연은 계속될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승원에게 다가온 권 대표가 한 모금 더 빨고는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는 승원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승원에게서 시작한 시선이 그의 두 다리 사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릎을 꿇으라는 암묵적인 명령이었다.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았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장 사장의 것도 물어 봤고, 정 감독의 가랑이 사이도 핥아 봤다. 그때와 같은 막연한 혐오의 감정보다는, 두려움과 긴장으로부터 비롯된 두근거림이 주를 이루었다.

“고개 들어 봐요.”

권 대표의 앞섶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던 승원이 눈을 들었다. 가슴팍을 지나 시선을 위로 올리자, 입에 스틱을 물고 있는 권 대표가 자신을 나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초간의 긴 눈 맞춤이 이어졌다. 잇새로 물고 있던 스틱을 떼어 내고, 그가 말했다.

“시선 떼지 말고.”

“…….”

“나만 보세요.”

가벼운 단추를 풀고 그가 지퍼를 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승원은 권 대표를 질기게 응시했다. 그의 말대로 눈을 떼지 않았다. 승원을 바라보던 권 대표의 가느다란 눈이 순간 부드럽게 휘었다. 심장이 자유자재로 날뛰고 움직였다.

벌어진 사이에서 굵고 묵직한 선단이 드러났다. 발기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날것의 살덩이가 늘어진 채였다. 시선을 굳이 내리지 않아도, 존재감이 상당한 그의 물건이 시야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쳐들고 있던 승원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가 제 기둥을 몇 번 어루만졌다. 손에 축 늘어져 있던 굵은 성기가 점차 팽팽하게 모습을 갖췄다.

“자.”

선물이라도 하는 것처럼 특별한 행위라도 되는 양, 그가 승원에게 제 물건을 내밀었다. 뒤늦게 고개를 내린 승원이 숨을 참았다. 반쯤 세워진 성기가 꺼떡대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더 가까이 오세요.”

“……네.”

승원이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성큼 더 다가갔고, 그는 승원이 편하도록 몸을 뒤로 비스듬히 누이고는 허벅지를 더 넓게 벌렸다. 더 지체할 수 없어 얼른 기둥을 잡아 귀두 끝을 입에 물었다.

“……하흐읍.”

지금 벌린 크기로는 한참 모자랐다. 단단한 기둥을 고쳐 잡은 승원이 입술을 더 벌렸다. 이를 감추고 안쪽으로 성기를 밀어 넣자 넓게 벌어진 입 안이 힘겹게 그의 것을 삼켰다. 미지근하게 느껴지던 살갗으로부터 열이 느껴졌다.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는 사실만으로 벌써 제 밑의 물건이 움찔대는 것만 같았다.

“하…… 아.”

“흣, 읍. 하윽.”

“후, 으…….”

입에만 넣고 있기 버거워 반쯤 빼서 귀두 끝부터 혀를 살살 돌렸다. 축축하게 젖은 혀끝의 돌기가 부드럽게 기둥을 쓸어 만졌다. 오가는 혀가 기둥 위를 둥글게 돌아 미끄러졌다. 입에 물고 있던 스틱을 떼어 내고, 권 대표가 작게 신음했다. 낮은 숨이 무겁게 내려앉아 승원의 머리 위로 닿았다.

권 대표의 성기를 입에 문 그대로 눈을 들었다. 반쯤 찡그린 두 눈이 승원을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높게 솟은 콧대가 뒤로 뉘어진 채 놓은 산을 만들었다. 거대해 보이는 남자의 어깨와 가슴팍을 차례로 내려온 승원이 막대 사탕을 핥듯이 혀를 들어 기둥을 주욱, 빨아 올렸다. 마지막에 닿은 요도는 젖은 것처럼 미끈했다.

“……온갖 내숭은 다 떨더니.”

권 대표가 스틱의 전원을 껐다. 옆으로 던져 둔 그가 늘어뜨렸던 상체를 앞으로 세웠다. 승원의 머릿결을 쓸어 만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손가락을 끼워 넣어 머리통을 꾹 눌러 잡았다.

“……하, 씨발.”

반사적으로 목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았던 승원이 귀두 머리를 혀로 눌렀다. 홈이 파여 있는 사이를 혀로 굴렸다. 비리고 오묘한 맛이 입 안을 적셨다.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권 대표가 승원의 뒤통수를 둥글게 내려 붙잡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간지럽게 두피를 매만졌다. 그가 승원을 끌어당겼다. 준비되지 않은 입술이 좆 기둥에 거침없이 짓눌러졌다. 목구멍 안쪽으로 미끈한 끝이 거칠게 가닿았다.

“켁, 크흐-.”

“아프면…… 말하세요.”

“크흑, 윽. 하아…… 악.”

승원은 반사적으로 권 대표의 허벅지 안쪽을 두 손으로 짚었다. 목이 앞으로 쏠렸다. 입 안을 꽉 채운 기둥이 오갈 데 없이 좁은 안쪽에 갇혔다. 팽팽하게 불어 오른 기둥은 버겁게 커진 덕에 곧 살가죽이 뜯어질 것만 같았다.

뾰족한 칼끝처럼 아슬아슬하게 목젖 부근에 닿은 귀두는 금방이라도 식도를 타고 들어올 기세였다. 그의 성기를 입에 문 채 힘겹게 숨을 쉬던 승원이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허벅지를 잡고 있는 것도 힘이 들어서 바닥에 두 손을 모아 짚었다.

앞으로만 들어오던 기둥이 수직으로 치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뜨겁게 눈시울을 붉혔다. 승원이 눈을 치켜올려 제 입 안 생식기의 주인을 살폈다. 감고 있는 눈꺼풀 위로 미세한 찡그림이 보였다. 그가 짙은 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지도 않은데 꼭 뜨거운 연기가 흩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원의 입에서 제 좆을 뿌리 뽑듯 꺼냈다.

“푸하, 흐으…….”

입가에서 침이 줄줄 새어 나왔다. 안쪽에 고여 있던 묽고 투명한 물이 입술 밑에 고여 바닥으로 낙하했다. 머리를 쓸어 넘긴 권 대표가 허리를 숙여 승원을 들여다보았다. 벌게진 눈가 밑으로 더 붉은 뺨이 있었다. 엄지를 들어 눈가를 쓸어 냈다.

“영 기분이 안 나서.”

“…….”

“옷 좀 벗어 봅시다.”

그가 손등으로 승원의 입가를 닦아 냈다. 더러울까 봐 고개를 뒤로 젖혔지만, 그는 거침없었다. 승원에게 팔을 들라는 듯이 손바닥을 위로 해서 꺼떡거린 권 대표를 확인하고 승원은 두 팔을 올렸다. 훌러덩 벗겨진 옷 안에 얇은 티셔츠가 또 있었다. 권 대표는 그것마저 전부 벗겨 버렸다.

공기가 서늘하게 피부 위로 맞닿았다. 어깨를 가로지르는 얇은 추위에 잠시 몸을 떨었다. 솜털이 곤두섰고, 가슴 양쪽의 돌기가 바짝 머리를 들었다.

권 대표가 다시 가까이 걸음을 붙였다. 형형한 형태로 굵은 가시처럼 세워진 성기가 승원의 배꼽 가까이에 있었다. 다리를 조금 내려 높이를 적당히 맞춰 준 그가 다시 좆을 잡아 승원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타액에 번들거리는 귀두 끝이 승원의 입술에 살살 짓눌려 비벼졌다.

“전부터 말했지만.”

“……하, 읏.”

“윤승원 씨 벗은 몸. 상당히 야합니다.”

“……으, 허업.”

강하게 밀려오는 압박에 잇새가 벌어졌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귀두를 또 한 번 머금었다. 아까는 그게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들어온 물건은 아까보다 크기가 더 부풀어 있었다. 승원의 볼 한쪽이 짓눌린 귀두 끝으로 부풀었다.

“그 입술로 잘 빨아 봐요.”

벌어진 턱이 아팠다. 권 대표의 발등 위로 각각 손을 얹은 승원이 얼굴을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피스톤질 되는 기둥이 승원의 입술 끝에서 드러났다 감춰지기를 반복했다. 턱 밑으로 흐르는 침이 은빛을 띤 채 길게 늘어졌다.

펠라를 받고 있던 그가 갑자기 두 손을 올려 제 웃옷을 벗어 던졌다. 들뜬 숨과 함께 아까 전엔 감춰져 있던 그의 널따란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주먹으로 내리꽂아도 미동 하나 없을 듯한 근육이 자리 잡은 그의 배가 코앞에 있었다. 입 안에서 허리를 치켜올린 권 대표가 승원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윽, 응- 흐, 아흡.”

“느, 립니다. 이렇, 게 빨아서, 어느, 세월에.”

“허, 으윽. 흐으. 아…….”

구역질이 날 것처럼 비릿한 살갗이 끊임없이 안쪽을 치고 들어왔다. 부피를 키운 표면이 입술을 다 까고 벗길 듯이 비벼졌으며, 안을 찌르는 요도가 붉은 살을 북북 쑤셨다. 승원의 하얀 가슴팍이 금세 벌겋게 물들었다. 요동치는 심장의 여파가 제 다리 사이의 기둥으로도 묵직이 와 닿았다.

“하, 윽. 씨, 발…….”

“으, 대표, 흐, 님… 하아, 읍!”

그를 불렀지만 소용없는 짓거리였다. 아예 깍지를 끼운 손으로 승원의 뒤통수를 단단하게 받친 권 대표가 쉴 새 없이 추삽질을 퍼부었다. 꺽꺽거리는 소리가 목구멍 안쪽에 여실히 울렸다. 자신에게 좆을 퍼부어 대는 남자의 두 다리를 끌어안고 승원은 울음을 삼켰다. 좆이 터질 것 같았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입술이 다 부르틀 지경이었고, 어느새 눈꼬리에 맺혔던 눈물이 뺨을 타고 뜨겁게 떨어졌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지금 제 꼴이 얼마나 엉망일지 눈에 훤했다. 생각이란 걸 관둔 머리는 눈앞의 물건만을 맹목적으로 먹고 삼켰다. 벌써 프리컴을 질질 쏟은 제 속옷 앞이 축축해진 게 느껴졌다.

“하, 하아…….”

점점 더 부풀던 그의 성기가 울컥, 무언가를 쏟아냈다. 안쪽 점막에 눌려 있던 귀두 밖으로 나온 정액이 볼을 뚫을 듯이 터져 나왔다. 움직임을 멈춘 권 대표는 여전히 승원의 머리통을 제 가까이로 끌어당긴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여운을 느끼려는 듯이 고개를 쳐들고 가슴을 부풀렸다. 어느새 배꼽 아래로 은은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입 안에 쏟아진 비리고 쓴 단백질이 혀를 어지러이 휘감았다. 헐어 버린 입속을 빠져나온 기둥을 그대로 놔둔 채 권 대표가 협탁에 있던 티슈를 가져왔다. 휙휙 잡초 뽑듯 티슈를 뽑아내고는 제 기둥을 닦았다. 몇 장을 더 뽑아 이번엔 승원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대로 있으세요.”

승원이 입을 벌린 채 그를 기다렸다. 눈가가 따가웠다. 생리적인 눈물이 마른 자국을 그대로 남긴 채였다. 입술 근처를 닦아 낸 그가 턱밑에 늘어진 침을 티슈로 받쳤다. 가볍게 쓸어 내 닦고는 승원의 턱 밑으로 티슈를 얹은 손을 내밀었다.

“뱉으세요.”

무심한 눈동자가 승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을 깜박이는 동작이 느렸다. 잠시 동안 만끽했던 행위의 여운을 잊기라도 한 듯이, 무감동한 낯이었다. 차디찬 상대를 마주한 순간, 마음속에 무언가 번쩍거리며 일어났다.

승원은 눈을 꼭 감고 입 안에 가득 담겨 있는 것들을 목 뒤로 넘겼다. 당장 입을 헹구고 싶을 정도로 비리고 역한 맛이었지만, 숨을 꾹 참고 목울대를 움직였다. 꿀렁, 목젖이 솟아나며 미지근한 정액을 삼켜 냈다. 그리고 그것을 본 감흥 없던 얼굴이 미세하게 번뜩였다.

승원은 그의 시선에도 멈추지 않고 혀로 입술을 훑고 빨았다. 그가 목구멍으로 손을 쑤셔 넣어 구토를 유발시키지 않는 이상, 승원의 입에 그의 정액이 남아 있지 않도록 전부 빨고 삼켰다. 마지막으로 손등으로 입술을 쓸어 닦은 승원은 저릿한 다리를 옆으로 늘어뜨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피가 통하지 않던 두 다리가 미칠 듯이 저렸다.

“……지금 뭐한 겁니까.”

“삼… 켰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뱉으란 소리 못 들었습니까?”

“…….”

“…대체.”

후끈했던 열기가 가신 몸은 급격하게 낮아진 체온 때문인지 약하게 오들거렸다.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 몸이 가늘게 떨리는 와중에, 권 대표가 짧게 알 수 없는 욕을 지껄였다. 그가 쓸모를 잃은 티슈를 손아귀로 구겨 버렸다. 둥글게 뭉친 것을 바닥으로 성의 없이 내던졌다.

“별종입니까?”

“…….”

“이해 가능한 범위에서 놀면 안 돼요?”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 그가 지껄였다. 속눈썹이 서로 엉킬 듯이 시선이 가까이 닿았다. 승원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는 그냥-.”

“내 걸 빨아서 좋았습니까?”

화가 난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헷갈렸다.

“말해 봐요. 어땠는지.”

“……좋았습니다.”

승원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권 대표가 곧장 다시 물었다.

“그래서 삼켰어요? 내가 윤승원 씨 입에 싼 그 더러운 찌꺼기를.”

“…….”

“그걸 삼킬 만큼이나 좋았냐고. 나는 그걸 묻는 겁니다.”

눈동자가 너무 가까워서, 자신의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날카로운 콧대 주변을 혼란스레 바라보던 승원이 다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네. 삼킬 만큼…….”

“…….”

“…좋았습니다.”

“…….”

“그리고 대표님이… 함께 나눈 흔적을 앗아가는 게… 저는 싫었습니다.”

없어지면 그만이고, 입만 닫으면 곧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어떻게든 그와 있었던 편린들을 전부 남기고 몸에 지지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껏 권 대표를 경험한 승원이 대비한 하잘것없는 보루였다.

“…사람이 좀 적당할 줄도 알아야지.”

승원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내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어딘가 지친 파리한 음색이 낮게 울렸다.

그때였다. 입술 위로 뜨거운 무언가 닿았다. 권 대표의 입술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승원은 배려 없는 그의 혀끝에 잇새를 벌려야 했다. 몸이 뒤로 밀렸고, 귀신같이 알아챈 그가 승원의 등을 받쳤다. 몸을 아예 낮춘 그가 막무가내로 입술을 들이밀었다.

“……흐으, 읍-, 으.”

고개가 젖혀졌다. 기어코 안으로 들어온 혀가 치아 배열을 전부 망쳐 놓을 듯이 휘젓기 시작했다. 바짝 세운 혀끝이 안쪽을 찌르고 핥았다. 사탕 알맹이가 어지러이 부딪히듯 두 혀가 격렬하게 섞였다. 기껏 닦아 놨던 침이 다시 안쪽에 고이기 시작했다.

다 삼킨 줄 알았던 비릿한 정액의 맛이 그의 키스로 다시 입안에 감돌았다. 인상을 찌푸리던 승원은 어느새 타액으로 축축해져 달게만 느껴지는 입 안을 더 크게 벌렸다. 좆이 이곳저곳 구멍을 뚫었던 자리 위로 권 대표가 눅눅하고 불친절한 키스를 이어갔다. 기력을 잃은 몸이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아 승원은 팔을 들었다. 권 대표의 어깨를 더듬거려 잡았다. 근육이 사납게 솟아난 두꺼운 뼈가 손가락에 그대로 닿았다.

척추에 미세한 소름이 돋아났다. 다 드러난 자신의 등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이 느른하게 피아노를 치듯 가느다란 손짓을 뻗었다. 물컹하게 쏟아지는 혀를 받아 내자 머릿속에 새하얗게 번져 나갔다. 침이 섞이는 소리가 질척였다.

“하으, 응, 흣…….”

아쉽지 않으려 권 대표의 팔 언저리를 끊임없이 만지고 쓸었다. 입술이 터질 것 같았다. 맞닿은 열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갈 새 없이 서로에게 미친 듯이 공급되었다. 더운 숨으로 가득 찬 입 안에 안개가 맺히는 것 같았다. 갈수록 벅차는 숨에 더딘 호흡을 내뱉었다. 곧 죽을 것 같은 와중에도 그와의 입맞춤을 끊어 내고 싶진 않았다. 승원은 그만큼 이 순간이 간절했다.

“하아…… 아…….”

거칠게 이어지던 키스가 가까스로 끝이 났다. 끈적하게 붙었다 떨어지는 두 입술 사이에서 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 멀어지는 입술을 다시 붙잡고 싶었다. 볼 주변이 화끈거렸다. 누가 심장으로 공을 튀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박동이 엄청났다. 기나긴 입맞춤의 여운을 남기듯, 둘 사이에 이어진 눈 맞춤 또한 쉽게 끝나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이 서로를 향해 있었다.

권 대표가 지은 표정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승원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간의 그를 마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 그의 표정을 알아내려 노력했다.

“…….”

그러나 아무리 헤집고 뒤져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맞이하는 그의 새로운 낯이었다. 가슴이 이상했다. 승원이 입술을 짓씹었다.

“…저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 승원이 몸을 일으켰다. 불거진 앞이 여전히 단단했다.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다리를 최대한 넓게 폈다. 널브러진 옷가지에 팔을 꿰어 옷을 입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지 뭉치들을 주웠다.

처음 보는 표정은 곧 읽을 수 없음을 의미했고, 읽을 수가 없다는 뜻은, 곧 돌아올 반응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뜻과도 같았다. 의미를 모르는 낯으로부터 터져 나올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승원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권 대표는 벌어진 입술을 갈무리할 뿐, 별다른 말도,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혼잡스럽게 오가는 승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입을 다문 그가 낯설었다. 갑작스레 당도한 분위기에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름 모를 저 표정을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표님, 저… 가겠습니다.”

날 선 옆면이 승원을 향해 돌아왔다. 대답 없이 눈빛을 보내던 그가 시선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들어가면 연락하세요.”

승원에게 어떤 다른 말도 덧붙이지 않은 그가 표정을 지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대에 놓여 있던 스틱을 다시 들었다. 너른 등이 보였다. 완전히 등을 돌린 권 대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원이 팔을 들어 입술을 닦았다. 그의 침실 밖으로 나왔다.

무식하게 넓은 집은 사람이 있는 구역을 제외하곤 전부 휑하게 비어 있어 공터 같았다. 조그마한 소리도 커다랗게 공명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을 둘러보던 승원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았다. 침실에서부터 시작해 제가 지나왔던 통로는 그늘진 어둠만 있을 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코트를 바짝 끌어와 여몄다. 내내 고개를 숙인 채였다. 불끈 달아올랐던 다리 사이가 다시 축 늘어지고 있었다. 간지러운 기분에 바지를 매만지던 승원이 현관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위잉. 상승하는 엘리베이터가 금방 층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굳게 닫고 나왔던 현관문이 박차듯이 열렸다. 승원이 고개를 돌려 확인한 눈앞엔 차 키를 손에 쥔 권 대표가 있었다.

“데려다주겠습니다.”

*** 

차로 오는 내내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권 대표는 승원보다 앞에 서 있었고, 그랬기에 등을 지고 있는 그의 얼굴을 승원은 파악할 수 없었다.

“…대표님, 벨트 안 매셨어요.”

“……아.”

시동이 걸리기 무섭게 액셀을 밟던 권 대표가 행동을 멈추고 벨트를 끌어왔다. 휙, 서늘한 소리와 함께 감긴 벨트가 단단하게 잠겼다. 핸들을 돌리는 그의 옆선이 만들어진 모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슴을 가로지른 벨트를 매만지던 승원이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권 대표의 집에서 보던 것보다도 훨씬 밝고 쾌청한 하늘이었다. 창으로 보고만 있으면, 외부의 매서운 추위도 잊고 상쾌할 듯한 바람을 맞고 싶을 정도였다. 말없이 속도를 높여 달리던 차량이 어느새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다.

바깥에 보이는 전광판 위로 승원이 한참 전에 찍어 두었던 생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저 브랜드의 모델은 바뀐 지도 좀 되었는데, 전광판 속 광고는 아직 교체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여름 반팔 옷을 입고는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꿀꺽꿀꺽 물을 들이켜는 승원의 얼굴이 도로 전체에 중계되고 있었다.

뒤늦게 알아보곤 흠칫 놀란 승원이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권 대표가 유리 너머로 전광판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승원의 광고가 두어 번 더 반복될 때까지 전광판을 보고 있던 그는 초록불이 밝기 무섭게 다시 차를 움직였다.

“……대표님.”

한참 더 달리던 시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승원이 그를 불렀다. 한 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는 권 대표는 여전히 정면만을 바라본 채였다. 승원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표지판을 확인했다. 집으로 가는 길과 반대 방향이었다.

“집에 데려다주신다고….”

“그랬지.”

“저희 집으로 가려면 여기서 유턴해야,”

“생각해 보니 이 시간까지 먹인 게 없는 것 같아서.”

승원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보니 도로가 좁은 번화가였다. 주말이 아닌 평일이라 사람이 비교적 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널널한 정도도 아니었다. 앞뒤로 막힌 도로 위에서 지루하게 눈을 뜨고 있던 권 대표가 입만 움직여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럼 가서 고르세요.”

백화점 길목 안쪽으로 들어선 차량이 한참 줄을 잇다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흰 장갑을 낀 손을 둥글게 휘두르는 안내원을 따라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금방 자리가 나왔다. 손쉽게 주차를 마친 권 대표가 시동을 끄곤 승원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얼굴을 훑은 그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잠깐 여기 있으세요.”

“…네? 그냥 같이…….”

“금방 오겠습니다.”

승원을 남겨 두고 나간 권 대표는 정작 코트 하나 입지 않은 차림새였다. 집에서 봤던 옷임에도 불구하고 잘 정돈된 핏이 외출복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벨트를 잠시 풀어 놓은 승원이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겉옷을 챙겨 입을 새도 없이 현관을 열어젖히던 그의 얼굴을 다시 기억해 냈다. 다급해 보이는 얼굴, 손에 쥐고 있던 차 키, 외투조차 입지 못한 조급함. 무엇 때문에,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차창 위로 습기가 새하얀 도화지처럼 칠해져 있었다. 승원이 검지를 든 손을 뻗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주변에 반복된 호선을 두르니 작은 꽃이 되었다. 줄기를 그리기 위해 손가락을 밑으로 긋는 순간 무언가 머릿속을 때리고 지나갔다.

‘윤승원 씨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옆으로 빗나간 줄기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승원은 펴고 있던 손가락을 그대로 감싸 주먹을 만들었다. 만들어 놓았던 차창 속 작은 그림을 손등으로 벅벅 지웠다.

괜찮다고 태연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전부 척이었다. 괜찮을 자신도 없었고, 태연해질 자신도 없었다. 혼자 하는 사랑이 만족스러울 리도 없었다. 조금 더 빨리 털어놓고 마음을 접었더라면, 해결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변색되지 않았을까.

그 말을 듣던 순간,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좋아한다는 말도 아니었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었다. 냉정한 거절이 아닌, 간곡한 부탁이었다. 진심이 통째로 느껴지던, 그래서 더욱 심장을 후벼 파던 뾰족한 고백이었다.

반쯤 잠든 사람처럼 고개를 비틀어 눈을 내리깔고 있던 승원은 앞 유리로 드리워지는 커다란 장신에 절로 얼굴을 들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돌아온 권 대표는 종이 가방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먹을 건 줄 알았는데, 그가 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쓰세요. 내려가려면.”

생각지도 못한 것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벗겨진 비닐에서 드러난 검은색 볼 캡은 어느 브랜드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패턴 자수가 들어가 있었다. 새삼 그의 재력을 깨달은 승원이 얼떨떨하게 그가 내민 모자를 받아 들었다.

“얼굴 다 내놓고 다니진 못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 정도만 쓰면 번거로울 일은 없을 겁니다.”

시큼한 새 제품 냄새가 났다. 모자를 둥글게 펴서 머리에 쓴 승원이 가장 안쪽으로 모자 크기를 줄였다. 선바이저가 있었지만, 대놓고 얼굴을 확인하기도 뭐해서 승원은 그냥 모자를 쓴 채 옆으로 내려온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렸다.

“봐 봐요.”

그가 승원의 캡을 잡고 그대로 제 쪽으로 돌렸다. 맥없이 돌아간 고개로, 승원은 권 대표와 눈을 마주쳤다. 모자에서 시작되어 찬찬히 훑어보는 시선이 집요한 듯 아닌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 냉큼 가까워진 얼굴에 속절없이 뺨이 달아올랐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승원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따뜻한 체온이 속눈썹 위로 내려앉았다.

“…뭘 묻히고 다닙니까.”

잠시 닿았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갔다. 참았던 숨을 뱉은 승원이 머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세수를… 못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눈을 뜨니 이불에 꽁꽁 싸여 있었고, 번데기 상태 그대로 권 대표의 품에 안겨 그의 침실에 갇혀 버렸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새끼처럼 문 앞에 앉아 그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권 대표의 다리 사이를 핥고 나온 게 오늘 눈을 뜨고 보낸 일의 전부였다.

갑자기 얼굴 한 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지금에서야 모자라도 얹어 두어서 다행이지, 여태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을 상대를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메이크업을 받고 스타일링을 받는 그 많고 많은 하루들 중에 왜 이런 날만 골라서 그와 함께 보내고 있는지 한스러웠다.

“한 거나, 안 한 거나.”

툭 내뱉은 그가 ‘나갑시다.’ 이어서 짧게 덧붙이고는 문을 열었다. 보닛 앞에 서서 보이지도 않을 저를 유심히 기다리고 있는 반듯하고 서늘한 얼굴이 보였다. 승원은 모자를 벗고 눈을 비볐다. 손등으로 뺨을 문질러 닦고 모자를 고쳐 쓰곤 밖으로 나섰다.

주변의 공기가 사뭇 더웠다. 권 대표와 나란히 걷지 않고 서너 걸음 정도 뒤에 떨어져 따라가던 승원을 그가 뒤를 돌아 바라보았다. 가벼운 외출복 차림새로 바지 안에 손을 끼워 넣은 모습이 제법 불량스러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도 승원은 권 대표보다 세 계단 뒤떨어진 곳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싶더니, 문득 그가 뒤를 돌았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계단까지 더해져 안 그래도 커다란 남자의 기골이 그늘진 느티나무처럼 거대했다.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끼운 권 대표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승원을 빤히 내려다봤다. 주변을 살피던 승원이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자 권 대표는 눈썹을 찡긋 올렸다.

“뭐 하는 겁니까.”

“…네?”

“무슨 거리두기라도 합니까?”

“…….”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그렇게 어중간하게 따라다니니까 스토킹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진 않은데.”

캡을 내내 손으로 매만지던 승원이 고개를 틀었다. 손잡이만 붙잡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승원이 그에게 말했다.

“같이 다니다가 폐라도 끼치면 어쩌나 싶어서…….”

“…참나.”

그는 승원에게 손을 뻗으려는 듯하더니 이내 거두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승원의 바로 앞에 당도한 권 대표가 승원의 캡을 잡아 아래로 꾹 눌렀다. 힘에 밀려 픽 내려간 고개에 마주 본 두 발이 보였다.

“그것도 자의식 과잉입니다.”

“…….”

“그런 건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쯤 될 때나 걱정하세요. 아무도 못 알아보니까.”

모자를 써서 다행이었다. 또 자두처럼 한가득 붉어진 얼굴을 보면 권 대표가 뭐라고 한소리를 할지 몰랐다. 승원은 자신의 캡에 얹고 있던 남자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 내고 헛기침을 했다. 딱 붙은 거리에 그의 체취가 훅 풍겨 왔다.

에스컬레이터 끝에 발을 디딘 곳은 거대한 푸드 코너였다. 저 멀리까지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식당가는 온갖 잡다한 소음과 붐비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조그마한 카트를 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교복을 입고 무리 지어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훑어보던 권 대표가 인상을 썼다. 이 정도로 인산인해일 것이라는 것은 그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 승원은 두 뺨을 가늘게 매만지며 걸음을 떼는 그와 발을 맞추려 노력했다.

“뭐 먹을 겁니까.”

“…….”

“어차피 포장하려고 온 거니까, 아무거나 말해 봐요.”

“저는, 엇-.”

순간 하얀 조리복을 입은 남자가 승원의 어깨를 힘껏 쳤다. 어깨에 느껴진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손목에 완강하게 닿은 악력이 느껴져 눈을 들자, 권 대표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제야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붙잡혀 있던 손목이 놓였다. 미련 없이 승원을 놔준 그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손은 여전히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이번엔 승원이 아닌 권 대표의 팔이 타인에 의해 덥석 붙잡혔다.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권 대표를 향해 전해졌다.

“잘생긴 총각.”

“……됐습니다.”

“어휴, 총각 키가 엄청 크네. 이거 한 잔만 먹고 가요.”

“…….”

“무알콜 와인이라 운전해도 돼.”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실없이 웃으며 권 대표의 팔을 두드렸다. 무시하고 가려던 그의 팔뚝을 아예 잡고 놔주지 않은 직원분은 여전히 만반의 미소를 장착한 채 어떻게 해서든 종이컵에 담긴 와인을 건네려 애썼다.

“……흡.”

승원이 숨을 훅 참았다. 조금 떨어진 뒤에 서서 실랑이를 벌이는 둘을 지켜보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난데없이 웃음이 나오려 한 탓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본 건지 등을 대고 서 있던 권 대표가 고개를 돌려 승원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 얼른. 사라고 안 할게요. 총각이 너무 잘생겨서 꼭 주고 싶어서 그래.”

“…괜찮-.”

“여기. 지금은 말고, 나중에 애인이랑 분위기 잡을 때 하나 사 줘요.”

알코올도 없는 술을 가지고 무슨 분위기를 잡으라는 건지. 자신을 올려다보는 부담스러운 얼굴에 눈을 흘기던 권 대표가 마지못해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소주잔 크기의 컵은 권 대표의 손안에 들어서인지 그 크기가 더 작아 보였다.

애써 외면 중이던 승원의 곁으로 그가 다가왔다. 성의 없는 손이 툭 무언가를 건네 왔다. 붉은 와인이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주위로 눈을 돌린 권 대표가 짜증 섞인 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괜히 왔네. …이렇게 붐빌 줄 알았으면.”

주말에 비하면 봐줄 만한 수준인데도 그는 처음 겪는 사람처럼 불편해했다. 투덜거리는 말투가 보기 드물게 아이 같아서 승원은 입술에 꾹 힘을 주고 말았다.

“저 주시는… 겁니까?”

“윤승원 씨나 많이 마셔요.”

“…드시기 싫으셔서 저 주시는.”

“안 마실 거면 내놓든가.”

도로 가져가려는 손짓에 승원이 얼른 손을 뺐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권 대표의 시선을 모른 척하고 승원은 잔에 든 와인을 마셨다. 어제 마셨던 쓰고 알싸한 맛과는 다르게 일반 음료수처럼 달달한 맛이 강했다.

“하아… 그래서, 뭘 먹는 게 좋겠습니까.”

“…저는 그냥, 저거.”

어차피 많이 둘러보지 않아도 주변엔 맛있는 음식이 천지였다. 승원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한식 간판을 가리켰다. ‘저거?’ 재차 확인한 권 대표가 먼저 길을 텄고, 승원이 그의 옆에 붙어 바짝 따라나섰다.

새하얀 쇼케이스에 정돈되어 있는 음식들은 전부 밥 종류였다. 깔끔하게 통 안에 담겨 진열된 덮밥 이외에 칸칸이 쌓여 있는 롤초밥도 있었고, 두부로 속이 꽉 채워진 유부초밥도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간 권 대표가 팔짱은 단단히 끼운 채 승원의 지시를 기다렸다.

승원이 고른 것은 풀 종류의 채소가 잔뜩 들어가 있는 회덮밥이었다. 푸르른 풀들만 무성하게 보이는 것이 다른 음식에 비해 입맛을 돋우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커다랗게 채워져 있는 초밥 종류들은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다.

권 대표는 승원이 고른 것 이외에도 여러 음식들을 더해서 챙겼다. 가슴께까지 쌓아 올린 팩들을 보고 당황한 승원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저 이거 다 못 먹어요.”

“왜. 누가 그쪽 준답니까?”

잽싸게 입을 다문 승원을 무시한 채 그가 계산을 마쳤다. 두 개로 나뉜 종이 가방을 한꺼번에 들고 돌아왔던 길로 턱짓했다. 이곳에서 사람 구경만 하고 있는 게 영 귀찮고 거슬렸는지 돌아가는 걸음이 아까보다도 빨랐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는데 아까는 배를 채울 요깃거리를 찾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디저트 코너가 눈에 하나둘 들어왔다. 하얀 크림이 속을 가득 채운 롤케이크도 있었고, 슈가 파우더가 한가득 묻혀진 슈들,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빵들과 화과자도 보였다. 브랜드명만 봐도 값비싸 보이는 음식들은 명성 그대로 먹음직스러운 향을 내뿜고 있었다.

빵이라도 간신히 참고 지나가는데, 그다음에 보이는 버블티 가게에 승원은 애써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늦춰야 했다. 곽 매니저가 엄청 달고 맛있다며 그렇게 칭찬을 해 대던 그 버블티 가게였다. 영어 상표를 보고도 긴가민가했었는데, 함께 달린 로고를 보니 확실해졌다.

“……대표님.”

승원이 앞장서던 권 대표를 불러 세웠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까지도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그가 ‘왜.’ 입 모양으로 물었다.

“버블티 좋아하세요?”

다짜고짜 전해진 물음에 권 대표는 잠시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승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했다.

“여기 버블티 집이 엄청 맛있다던데. 이 백화점에만 파는 건데 제가 여기 올 일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오늘 아니면 먹기 힘들 것 같아서….”

“…….”

“제가… 사 드릴게요.”

아예 정면으로 서서 승원을 느긋이 바라보던 권 대표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로 승원을 지나치는가 싶더니 가게 앞에 서서 메뉴판을 확인했다. 승원을 향해 눈짓을 하곤 어서 이리 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뭐 먹을 겁니까?”

“대표님 뭐 드실 건데요? 대표님이 고르면, 제가 계산할게요.”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던 권 대표가 눈을 찌푸렸다. 승원을 휙 바라보고는 뇌까렸다.

“코 묻은 돈 사양합니다.”

“…….”

“빨리 고르세요. 난 같은 걸로 시킬 테니.”

메뉴를 선택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승원은 권 대표가 계산을 마친 후에도 아무런 말 없이 옆에 있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열대 안쪽에서 무언가 칙칙거리며 조리되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을 캐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렸고, 잠시 시계를 확인한 권 대표가 승원의 가까이로 왔다. 승원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 타일만 보고 있던 승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무료하게 뜨고 있던 권 대표의 눈이 승원과 마주하자 가늘게 늘어졌다. 한참 입술을 꿈실거리더니 승원이 입을 뗐다.

“…저 돈 많이 법니다.”

승원의 말에 잠시 그를 응시하던 권 대표가 픽 미소를 보였다. 약간의 웃음기를 섞은 물음이 되돌아왔다.

“설마 코 묻은 돈이라고 해서 그러는 겁니까?”

“…제가 무슨 한 푼 두 푼 버는 알바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누가 그걸 모릅니까.”

뒷짐을 진 권 대표가 상체를 승원의 가까이로 숙였다. 목소리를 낮춘 권 대표가 바짝 닿은 얼굴 앞에서 목을 울렸다.

“윤승원 씨한테 대표님 소리 듣는 내가 받아먹는 것도 모양 빠집니다.”

“…….”

“그렇지 않겠어요?”

마침 준비가 완료됐다는 우렁찬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원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이 권 대표는 태평한 얼굴로 캐리어에 담긴 음료를 들고 왔다. 승원이 들겠다며 가져가자 그는 다른 말 없이 음료를 넘겨 주었다.

갓 익혀서 말랑말랑한 버블이 컵 안쪽에서 마구 섞였다. 진한 시럽을 흔들고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빨아 마시자 미지근하게 올라오는 달콤함 뒤에 식도를 싸하게 만드는 시원함이 전해졌다. 버블을 잘근잘근 씹어 먹던 승원은 버블티를 무사히 샀다는 개운함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물었다.

권 대표는 지금 먹어야 맛있다는 말과 함께 승원이 건넨 버블티를 거절했고, 승원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제 몫을 쪽쪽 빨았다. 곽 매니저의 말대로 괜히 인기가 많은 게 아닌 것 같았다.

“맛있습니까?”

“네.”

“그냥 봐도 달아 보이네.”

“…그 맛에 먹는 겁니다.”

썩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승원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마저 걸어 나갔다. 그렇게 승원이 권 대표와 함께 아까 왔던 길을 쭉 되돌아가던 참이었다.

“…어.”

갑작스레 어깨에 닿는 손길에 빨대에 입을 가져다 대던 승원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앞서나가던 권 대표도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게 손을 뻗은 자들을 향해 고개를 튼 승원이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같은 교복을 쪼르르 입은 서너 명의 여학생들이 승원을 향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반짝이고 있었다.

“미친. 윤승원 오빠 아니에요…?”

승원을 단단히 붙잡은 학생들이 확신에 찬 듯이 물었다. 여태 버블티를 정신없이 마시느라 뒤에서 누가 덤비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제일 뒤에 있던 여학생 하나는 승원이 아닌 권 대표를 보며 입을 허, 벌렸다.

난감해진 승원이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답답하게 보고 있던 권 대표도 승원의 곁으로 자연스레 다가왔다.

“혹시나 하고 따라왔는데… 진짜 승원 오빠다. 대박.”

“사인해 주시면 안 돼요?”

“……아, 그게.”

“아니면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헐. 사진 찍어 주세요.”

“미친 거 아니야? 진짜 개쩐다……. 실물 완전 잘생겼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한 뼘보다도 작은 여학생들에게 둥글게 포위되어서인지, 비교적 큰 승원의 키만 가운데에 훌쩍 튀어나와 있었다.

승원을 옆에 두고 지내면서 그의 ‘팬’이라는 존재들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던 권 대표였던지라, 그에겐 이런 모습이 꽤나 새로웠다. 제 옆에서는 항상 어물쩍하게 서 있거나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웬일로 작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림이 퍽 어울렸다.

“미친, 나 손 떨려.”

“존나 잘생겼다… 진심.”

“아… 하하, 고마워요.”

“저희 사진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음, 사진은 조금 힘들 것 같고…….”

다행인지 아닌지,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이라 그런지 이 길목엔 승원과 권 대표, 여자아이들이 전부였다. 간혹 소수의 사람들이 지나가긴 했지만, 여자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무리라 그런지, 그리 주의 깊게 바라보진 않았다.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승원을 권 대표가 물끄러미 보고 있던 때였다.

“저분도 연예인인가…?”

“아, 뭐래.”

아까부터 권 대표를 드문드문 훔쳐보던 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고, 옆 친구가 아이의 등짝을 차지게 때렸다. 다 들은 권 대표가 눈썹을 비스듬히 씰룩였다.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경호원인가 봐. 몸도 좋고 키 엄청 크잖아.”

“…….”

멀지 않은 거리였고, 음량을 낮췄다 한들 까랑까랑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작아지지도 않았다. 자신을 경호원 취급하는 아이들을 향해 권 대표가 눈을 들어 바라보자 헉, 소리를 낸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제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저들끼리 뭐라고 속닥속닥거리기도 했다. 권 대표는 어이가 빠져 허, 짧게 숨을 뱉었다.

어느새 승원은 아이들이 꺼내 놓은 공책에 돌아가며 사인을 남겨 주고 있었다. 손바닥에 펼친 스프링 노트에 검은 펜을 휘갈기며 한 명 한 명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모이를 쪼듯이 승원을 빙 두른 아이들이 ‘미친’, ‘대박’ 등의 탄성을 내질렀다.

“길바닥 팬 미팅이 따로 없네.”

손목시계를 확인한 권 대표가 그들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밥을 챙겨 먹이겠다고 백화점으로 데려온 것이 여러모로 후회가 되었다. 발에 본드라도 붙인 듯이 미동도 없는 아이들은 승원에게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고, 사인을 하느라 바쁜 승원은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집중할 때의 버릇인 건지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통통했다.

승원의 곁에 있던 아이 하나가 작게 속살거렸다.

“오빠, 저분 경호원이에요?”

“네? 아… 그냥……. 경호원은 아니에요.”

입술이 말랐다. 승원은 고개를 저으며 난처하게 얼버무렸다.

“저분도 연예인 같다.”

“오빠, 제 이름은 예진이요.”

“예진이? 이름 예쁘다. 예진이라고 써 주면 돼요?”

어느새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고 그들만의 분위기를 가꿔 나가는 통에 권 대표는 완전히 소외되어 버렸다.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둥글게 원을 만든 머리들이 깔깔대며 웃기 바빴다. 승원 역시 아이들에게 맞춰 주며 해사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또래 학생들 같았다.

자연스레 웃고 있던 시선을 처리하려던 승원이 문득 고개를 들었고, 둘러싼 아이들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짙고 검은 눈동자의 주인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싱글거리며 반으로 접혀 있던 두 눈이, 살며시 벌려 시원스레 웃고 있던 입꼬리가 권 대표의 앞에 뚝 멎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서로가 서로의 시선에 엉켰다. 잠시 스쳤던 눈 맞춤을 먼저 피한 건 승원 쪽이었다. 웃고 있던 얼굴이 한순간에 누그러지던 순간, 권 대표는 눈에 힘을 풀었다. 머리를 넘기고, 아이들에게 마저 사인을 해 주는 잘난 배우를 위해 등을 돌리고 섰다.

마지막까지 아무 곳에도 올리지 않을 테니 제발 사진 한 장만 찍어 주면 안 되겠냐고 간곡히 부탁하는 아이들에게 승원은 꽤 단호하게 거절을 표했다.

아쉬운 마음을 그득그득 담은 채 왔던 길을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승원은, 다시 권 대표와 둘만 남았다는 사실에 간지러운 목덜미를 긁었다.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그냥 보낼 순 없으니까…….”

“유명 인사네요.”

빠르게 자신에게 붙어 오는 승원을 가볍게 무시한 권 대표가 주차장으로 빠져나가는 자동문을 휘휘 저어 통과했다.

“내가 윤승원 씨를 너무 무시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옆에 있다가 경호원 소리 들어 보니 반성이 되네.”

그러고 보니 권 대표의 손에 승원의 버블티가 들려 있었다. 언제 그의 손에 들어간 지도 모른 채, 승원은 쭉쭉 빨아 마시던 음료도 잊고 아이들에게 몰두해 버렸다. 건조한 손길로 음료를 건네는 권 대표에게 머리를 꾸벅 숙인 승원이 버블티를 받아 들었다.

“잘 웃던데.”

주차장을 지나던 권 대표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내뱉었다. 말에 고저가 없었고, 웃음기도 없었다. 버블티 빨대를 만지작거리던 승원이 말했다.

“무표정으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생각보다 웃음이 헤픈 것 같아서 의외였습니다.”

“…직업이니까.”

“좀 일관된 직업 정신을 보여 줘도 좋을 것 같은데.”

대놓고 비꼬는 말투였다. 근처로 다가가자,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소리를 냈다. 금방 보닛을 지나친 남자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멍하니 서 있던 승원이 모자를 푹 누르고 뒤늦게 조수석에 올랐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바깥이 아까보다도 더 복작거리는 건 기분 탓일까, 번잡한 도로를 빠져나오고 부드럽게 핸들을 움직이는 권 대표를 바라보다가 승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집에 데려다주시는 건가요?”

“경호원 노릇에 이어서 기사 노릇까지 하고. 윤승원 씨는 매니저 없어도 편해서 좋겠습니다.”

자처해서 하는 운전이면서도 그는 생색을 냈다. 굳이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은 승원이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윙윙거리며 울리는 차 내부의 소리가 귓가를 내내 맴돌았다.

“윤승원 씨.”

“…네?”

잠시 가라앉았던 공기를 터뜨린 건 권 대표 쪽이었다. 그의 부름에 허벅지 위에 벗어 둔 모자를 조물거리던 승원이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

“6월 17일은 무슨 날입니까.”

순간 놀란 승원이 눈을 크게 키웠다. 그런 승원을 힐끔 바라본 권 대표가 덧붙였다.

“집 도어 록 번호. 0617.”

“…아.”

자신의 아버지 생일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물으려던 참이었다. 정 감독과 술을 먹던 날, 권 대표에게 때아니게 도움과 신세를 졌던 밤의 일이었다. 이젠 너무 멀고 흐릿해서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기억이었다.

승원에게 잠시 눈길을 주던 그가 줄줄 말을 뱉었다.

“일반인도 아닌 사람이 현관 번호를 그렇게 허술하게 해 놔서야. 집 털려서 억울해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이사 올 때 급하게 바꿨던 걸… 여태 잊고 못 바꿨습니다.”

권 대표가 다시 물었다.

“기념하는 날짜 같은 겁니까?”

“저희 아버지 생신입니다.”

으음, 목을 울리던 권 대표가 응수했다.

“아버지랑 친한가 봅니다.”

“…돌아가셨습니다.”

차 안에 무딘 정적이 감돌았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를 노린 게 절대 아니었기에, 승원은 얼른 뒷말을 붙여 추스르려 애썼다.

“…달리 기억할 방법이 없어서 비밀번호로 대신해 두었던 겁니다. 큰 뜻이 있고 그런 건 아니고요.”

말을 마치고 나니, 떠나기 전까지 한참을 병상에서 지내던 수척한 남자의 얼굴이 스쳤다. 자신과 많이 닮은, 그래서 더욱 눈물이 나던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떠오른 친부의 생각에 승원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던 승원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좋은 분이셨는데…….”

입이 아닌 목으로 뱉은 목소리가 꽉 잠긴 채였다. 운전에만 집중하는 줄 알았던 권 대표는 신호가 바뀌고 나서 나지막이 말했다.

“윤승원 씨가 좋았다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

“난 내 부모가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부럽습니다.”

승원이 고개를 틀어 평온한 낯의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안정적이었다. 알 듯 말 듯 한 그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이 잠시 귓전에서 회오리쳤다.

“집안이 좀 엄한 편이셨나 봐요.”

저도 모르는 새 승원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희미한 어색함이 차의 공기를 냉랭하게 뒤바꿨다. 드러난 옆선의 눈썹이 날을 세웠다. 침묵으로 임하고 있던 권 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한 것보단. 그냥 개판입니다.”

“…….”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순간 뒤바뀐 낯은 금세 질려 있었다. 성가신 것을 생각해 낸 듯 미세하게 짜증이 번져 있던 그의 얼굴은 입술을 축이더니 금방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과 권 대표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승원은 더 묻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숨을 죽이고 달리던 무렵, 어느덧 승원이 사는 동네로 차가 들어섰다. 몇 개의 신호등을 지나고, 회색 도로를 달리던 차가 방지턱을 넘어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느새 반쯤 모습을 감춰 흐릿한 하늘을 만들었다.

집 앞에 멈춰 서 깜빡이를 켜 놓은 권 대표가 뒷좌석에 있던 종이 가방을 챙기곤 승원을 돌아보았다. 품에 꽉 찬 종이 가방이 안겨 들었다.

“수고했습니다. 들어가세요.”

백화점에서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도착이었다. 냉큼 발이 떨어지지 않아 승원은 괜히 종이 가방 안쪽을 살펴보고 종이 겉면을 매만졌다. 승원의 벨트를 대신 풀어낸 권 대표는 아프지 않게 벨트 끈을 창 쪽으로 놓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안에 들어 있는 음식들이 종이 가방 위쪽까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승원이 얼른 그를 붙잡았다.

“이거… 다 가져갈 뻔했어요. 하나만 제 거고, 나머지는 전부 대표님 겁니다.”

“다 가져가세요.”

포장된 용기들을 꺼내려던 승원의 손이 그에 의해 저지되었다. 권 대표의 말에 승원이 얼른 손사래 쳤다.

“…저 이렇게 많이 필요 없습니다.”

“난 그거 말고도 집에 먹을 게 많은데, 윤승원 씨 집 냉장고는 장식 아닙니까. 그거라도 채워서 사람 사는 흉내라도 내세요.”

“…….”

“유통 기한 확인하고 적당히 먹다 남은 건 버리던가.”

항상 느끼지만, 권 대표는 무언가를 남기고 버리는 데에 큰 죄책감 따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다 먹지 못할 음식들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돌려준다면 다음 주까지는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음식들이 오늘 당장 길바닥에 나뒹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젠 정말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야 하건만, 쉬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그대로 굳어 머뭇거렸다. 그와의 만남은 매번 다음 기약이 없었다. 몇 번의 우연으로 이만큼의 만남을 지속해 온 게 기적 같을 정도로, 남은 미래가 불분명했다.

종이 가방을 품에 안고 입술을 들썩이던 승원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행동을 낱낱이 훑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대표님.”

“윤승원 씨-.”

동시에 나온 목소리가 서로 맞물렸다. 잠시 생긴 소리의 공간 사이로 승원이 얼른 고개를 내렸다.

“먼저 말씀하세요.”

“윤승원 씨 먼저 말하세요.”

“…아닙니다. 대표님 말씀하세요. 저는 용건 없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할 말도 없으면서 승원은 그냥 이 순간이 아쉬워 그를 부른 것이었다. 승원은 권 대표가 자신에게 건넬 말이 더 궁금했다.

“으음.”

시트에 등을 깊게 기댄 권 대표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용건이 있어서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침묵을 지키는 남자는 말이 없었다. 차 안에선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방향 지시 등 소리만 반복적으로 울렸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

“내가 좋다고 했죠. 윤승원 씨는.”

“……네.”

“내 어디가 좋은 겁니까.”

“…….”

“언제부터 좋아했습니까, 나를.”

고개가 돌아왔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질문의 의미가 정확했음에도 그 안에 품고 있는 본질이 모호했다. 숨차는 침묵 끝에 승원이 어렵사리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정확히는.”

“당사자가 모르면 누가 압니까.”

“좋아하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그걸 제가 알 리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횡설수설 주절거리던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여러 막으로 덧댄 듯이 불투명했다. 그 역시 승원만큼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표정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느낌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심경적인 변화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승원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혀를 돌돌 묶은 말이 정리되지 않고 입 안을 헤맸다. 하얗게 질린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 확신하지는 못할지언정, 제 마음은 전부 베풀고 싶었다. 알아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권 대표가 무심하게 뻗은 손으로 방향 지시 등을 껐다. 한순간에 조용해진 차 안은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기어를 바꾸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승원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냥.”

괜찮던 목소리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떨렸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생각났어요.”

“…….”

“자기 전에 생각나는 얼굴이 처음엔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승원의 목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 공명했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차오른 목 끝이 칼칼했다. 진심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일은, 언제나 처음처럼 어렵고 망막했다.

“자고 일어나서도 생각나고, 대표님을 안 보고 있으면 대표님을 볼 때까지 대표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대표님이랑 같이 있으면….”

두서없는 말들이 어지러이 얽혔다. 뱉으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저는 대표님이 다른 세상 사람 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연예인을 보며 느끼는 호기심과 생경함 같은 것을 제가 대표님을 보면서 느끼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물에 반쯤 들어온 듯이 숨이 찼다. 그럼에도 승원은 말을 멈추기 힘들었다.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이제야 숨통 트인다는 듯 위로 넘쳐흘렀다.

“대표님이랑 같이 있으면 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머리도 복잡해져서…. 촬영장에서도 안 하는 실수를 할까 봐 계속 긴장되고, 불안했습니다.”

“…….”

“그런데,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대표님이 계속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건… 그건 답이 하나밖에 없잖아요.”

“…….”

“제가… 대표님을….”

남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용기 내어 다시 바라보았다. 승원이 마주한 눈동자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눈썹을 비틀고,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찡그리고 있을 줄 알았던 권 대표는 차분하게 승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귓전이 간지럽게 달아올랐다. 숨을 쉬는 1분 1초가 뜀박질을 마친 이후처럼 가빠 왔다. 속에서 들끓던 감정의 덩어리가 다시금 부풀었다.

“윤승원 씨.”

그가 승원을 불렀다. 비교적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가 윤승원 씨를 받아 줄 마음이 없다고 했던 건 기억할 겁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팽창하던 심장에 김이 새듯 바람이 빠졌다. 하루도 지나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너무 또렷해서 적당히 지워 내고 싶을 정도로 승원은 새벽의 있었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권 대표가 핸들을 잡았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도어 포켓에 있던 담뱃갑의 뚜껑을 그가 엄지로 들었다 내렸다 반복했다.

팽팽한 적막 안에서, 승원은 종이가방을 제 품 안으로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은 울음소리처럼 꺼끌꺼끌하게 울렸다.

마침내 그가 나지막이 목을 울렸다.

“윤승원 씨는 내가 지금 당장 꺼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승원의 몸이 움찔, 떨렸다. 돌연히 맞닥뜨린 질문이 벼락처럼 머리를 강타했다. 모든 신경이 그의 말 한마디에 발작하듯 번뜩거렸다.

승원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리는 동안, 유리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권 대표가 승원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래도 나한테 매달릴 겁니까?”

“…….”

“아니면 쿨하게 뒤돌 수 있습니까? 마음 정리할 수 있어요?”

비교적 무감한 얼굴이었다. 감정이 실려있지 않은 얼굴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를 혼자서라도 좋아할 생각이면, 언제라도 털어 버리고 포기할 준비 역시 되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윤승원 씨가 좋아하는 상대가 나라는 이유로, 내가 윤승원 씨의 감정까지 헤아려 줘야 하는 건 아니니까.”

승원이 크게 숨을 골랐다. 그다운 말이었고, 틀린 말 역시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떨리던 마음도 잦아들었다. 하얗게 지워 낸 머릿속이 생각을 마치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차피 그런 날이 오면 저 혼자 정리할 생각이었습니다.”

승원은 보지 못한 권 대표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다.

“솔직히. …진짜로 그런 말씀을 저한테 하신다면…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저는… 대표님이 꺼지라고 하신다면 꺼질 생각입니다.”

“그 말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한다고 해도. 그래도 바로 꺼질 수 있단 소립니까?”

승원이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로 끄덕였다. 대답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하.”

권 대표는 다른 말 대신 실소를 터뜨렸다. 한숨을 크게 내쉰 그의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순하네.”

“…….”

“좋아한다면서 꺼지는 건 또 쉽습니까.”

남자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문장을 씹어 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승원의 눈썹도 비죽 일그러졌다. 눅눅한 목소리로 승원이 입을 열었다.

“좋아하니까 꺼질 수 있는 겁니다.”

“…….”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는 걸 고집하는 것보다 멍청한 게 어딨어요.”

“…….”

“대표님이 싫으시면, 저는… 꺼질 수 있습니다.”

당당히 마주하려던 눈이 금세 자신감을 잃고 떨어졌다. 씩씩하게 뱉은 말 치고는 목소리가 반쯤 꺾여 있었다. 목 끝에 차오르는 물기를 꾹 눌러 삼켰다.

그때, 떨구려던 고개가 다시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권 대표가 손등으로 승원의 턱을 받쳐 위로 올렸다. 권 대표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들려진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원이 시선을 피하려 하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피하지 마세요.”

직선으로 뻗은 명령에 승원이 다시 그와 시선을 얽었다. 당장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품에 들어 있던 종이 가방이 격하게 구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긴 눈 맞춤을 지속할수록, 승원의 얼굴이 점점 무너져갔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권 대표는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고 픽, 웃음소리를 냈다. 승원을 향한 짧은 비소였다.

“나랑 이렇게 눈만 마주치고 있어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인데.”

“…….”

“진짜 내가 꺼지라고 해도 꺼질 수 있는 게 맞습니까?”

손등에 날 선 뼈대만 느껴졌었는데, 어느새 손바닥을 둥글게 감싼 권 대표가 승원의 뺨을 잡았다.

“신뢰도가 영 부족하네.”

승리를 직감한 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지나갔다.

“왜 울려고 합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침을 삼키자 꽁꽁 뭉쳐진 물기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금세 흐려진 눈가를 부정할 순 없었다.

“내가 지금 꺼지라고 할까 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권 대표의 눈꼬리가 옅게 휘어졌다.

“아닙니까?”

“…….”

기분 탓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승원을 놀리려 들려는 남자의 수작이었다.

그 잠깐 동안 승원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계산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소리치는 경우, 오늘을 끝으로 너를 보고 싶지 않다고 나긋하게 통보하는 경우, 그것도 아니면 이곳에 자신을 세워 두고 떠난 이후 영영 보지 않는 경우.

어떤 말을 들어도 각오가 되어 있을 사람처럼 이야기했지만, 그건 엄연히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막연한 고집이고 방패였다.

붉게 그을린 눈매를 샅샅이 훑어보던 시선이 뒤로 떨어졌다.

“더 뜸 들이다간 진짜 울겠네.”

“…….”

“꺼지라고 안 할 테니 울지 마세요.”

권 대표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승원이 뻑뻑한 눈을 문지르는 사이 그가 말했다.

“난 윤승원 씨가 싫지 않습니다. 내 좆을 빨아 주는 것도 좋고.”

“…….”

“당장 보기 싫을 정도로 성가신 것도 아닌데.”

그가 손을 뻗어 승원의 눈가를 쓸어 만졌다. 뜨거운 체온이 눈두덩이를 지나 뺨을 타고 내렸다.

“내 쪽에서 벌써 꺼지라고 할 이유는 없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던 승원의 귓바퀴가 새빨갰다.

권 대표가 담배를 챙겨 들었다. 차 시동을 꺼 버리곤 문밖으로 내렸다. 보닛을 지나친 남자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앉아 있는 승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재촉했다.

“나오세요. 집에 가야지.”

“대표님은 왜….”

“담배.”

그러면서 권 대표는 기다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승원은 마지못해 끌려 나오는 사람처럼 느릿하게 밖으로 발을 빼냈다. 컵홀더에는 승원이 사준 버블티가 새것 그대로 겉면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 남아 있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큰 키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차 문을 닫고 고개를 들자 몇 발치 뒤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뿌연 연기를 뿜어 댔다.

“들어가세요.”

“대표님 가시는 거 보고 가도 괜찮습니다.”

“됐습니다. 나도 한 대로 끝날 거 같진 않아서.”

입술에 다시 묻힌 담배 끝이 붉게 타들었다. 차디찬 바람에 날 것 그대로의 머리가 휘릭, 흩날렸다. 한 손엔 권 대표가 안겨 준 종이 가방이, 한 손엔 권 대표가 사다 준 모자가 들려 있었다. 승원은 잠시 홀린 듯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만간 봅시다.”

걸음을 떼려던 승원이 다시 멈춰 섰다. 승원의 커다란 눈망울이 잔잔히 요동쳤다.

“…조만간이면, 언제.”

“그때 가면 알게 될 겁니다.”

차에 기대고 선 그가 집요하게 승원을 응시했다. 승원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돌아 낮은 계단에 올라서던 승원은 자동으로 열린 유리문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를 돌았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 승원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뭐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버블티 진짜 맛있으니까….”

“…….”

“버리지 말고… 꼭 드세요.”

승원은 권 대표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다시 열린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가 나타날 때까지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러는 동안 심장이 멈추지 않고 쿵쾅댔다. 힘이 풀리는 손아귀에 갖고 있던 물건들을 놓칠까 굳세게 말아 쥐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승원은 덜렁거리는 신발을 던져 두고 주차장이 보일 창 쪽으로 향했다.

멀리 떨어진 바닥에 여전히 등을 비추고 있는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얀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정차되어 있던 차량이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고개를 쳐들어 저 멀리 차가 사라질 때까지도 승원은 내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매달려 있던 난간에서 내려왔을 무렵, 추위에 이기지 못한 발목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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