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깨닫지도 못한 사이 (6/20)

6. 깨닫지도 못한 사이

첫 촬영을 앞둔 시점이었다. 승원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고, 차에 기대서 쪽잠을 자며 대본을 넘겨보기 바빴다. 그의 독촉이 아니면 식사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었기에 운동에만 몰두하는 몸은 더없이 빳빳해져 갔다. 포털 사이트에선 승원의 몸을 보며 환호하는 이들이 넘쳤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살집도 점점 줄어드는 제 하찮은 몸을 바라보며 승원은 너무 말랐다고 책망하던 권 대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 건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고사를 지내고 이어진 뒤풀이 현장은 더운 공기와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이 내뿜는 에너지로 후덥지근했다. 지글거리는 고기 냄새와 누렇게 떠오른 열기, 남들이 내는 목소리가 서로 뒤섞여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통에 승원은 최대한 말을 줄이고 먹는 일에만 집중했다.

“승원이랑 서희도 한 잔씩 해야지.”

동료 배우 중 가장 연차도 높고 나이도 많은 김성태가 둘에게 다가왔다. 이미 목까지 새빨개진 김성태는 다른 테이블을 싹 거치고 마지막 종착지로 온 듯했다.

손에 든 소주를 달랑거리면서 킬킬대던 김성태가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잔을 싹 돌렸다. 잠시 난감해하던 얼굴을 거두고 사람 좋게 웃으며 잔을 내미는 차서희를 보고 승원도 하는 수 없이 물이 담겨져 있던 잔을 비우고 그에게 팔을 내밀었다.

“우리 주연 배우들이 받았는데, 러브 샷 한 번 갈까요?”

“좋다, 좋다!”

“화끈하게 함 갑시다!”

그냥 마시려고 들었는데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며 환호며 난리도 아니었다. 왁자지껄했던 소음이 전부 멎고 모두가 차서희와 승원을 주목했다. 김성태는 자신이 제일 좋다며 노래까지 부르면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에 동한 다른 사람들도 다 함께 손뼉을 치며 둘을 부추겼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승원을 보고 있던 차서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내지르던 환호가 더욱 커졌다. 옆 테이블에 있던 팀들은 아예 팔을 걷고 나서서 핸드폰으로 동영상까지 촬영하기 시작했다. 쓰게 웃고 있던 차서희가 승원을 보고 짧게 일렀다.

“얼른 하고 끝내요.”

난감하긴 차서희 쪽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승원이 주위를 둘러보자 온통 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들밖에 없었다. 술은 이제 석 잔 정도 마신 게 다였는데, 몰려 있는 수십 개의 눈을 보자 없던 취기까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러브 샷! 러브 샷!”

일동 외치는 부추김에 승원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가 다 뒤집힐 정도로 소리를 질러 대는 사람들에 순간 가게 종업원들의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차서희에게 다가가자 입꼬리만 매끄럽게 올린 그녀가 승원에게 손을 뻗었다.

“실례할게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짧게 속삭인 승원이 차서희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 팔을 둥글게 말자 몸이 자연스레 가까이 붙었다. 난데없이 사람들 앞에서 여자와 포옹을 하고 있으려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던 터라, 승원은 얼른 끝내기 위해 그녀를 안은 채 입에 닿은 술잔을 휙 넘겼다. 승원의 어깨 위로 가느다란 손끝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환성과 탄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잘 어울린다!”

“한 번 더! 한 번 더!”

“자자. 우리 했으니까, 성태 선배랑 감독님도 한 번 갑시다!”

금방 승원의 곁에서 떨어지곤 머리 위로 소주잔을 탈탈 털어 낸 차서희가 타겟을 돌려세웠다. 달콤함 뒤에 남은 쓴 알코올 내음에 승원이 입술을 문지르고 있는 사이, 동영상을 찍은 몇몇은 재밌다며 그것을 돌려 보고 있었다.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던 김성태와 김 감독은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냐며 손사래를 쳤고, 분위기를 그대로 탄 사람들은 그들을 놔주지 않았다.

“성태 형 빨리해요! 감독님이랑 러브 샷 할 기회가 그냥 오는 게 아니라니까?”

“야! 그럼 네가 하지 그러냐?”

“어우, 좋은 건 선배한테 양보해야죠.”

“야, 김성태 빨리 이리 와. 우리 해야 끝난다.”

“와아! 감독님 최고다!”

결국 김 감독과 김성태 역시 서로를 얼싸안고 술을 들이켜야 했다. 승원과 차서희가 했을 때보다도 더 뜨거운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승원 역시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그들을 보며 하하, 웃기 바빴다. 살갑게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 어느덧 시간은 늦은 밤까지 흘러 있었다.

한창 무르익던 자리가 한풀 꺾였을 즈음, 승원은 시끌시끌한 테이블 사이를 지나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더운 열기를 내뿜던 볼이 날카로운 바람에 차게 식었다. 입김을 후 불어 내며 외투에 손을 끼워 넣은 승원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골목 쪽으로 피신해 검은 하늘로 눈을 올렸다.

별인 줄 알고 보고 있던 반짝이는 점은 움직이는 비행기였다. 어렵사리 찾은 별이었는데, 어쩐지 크기도 크고 눈에 띄게 반짝거린다 싶었다. 서울 도심에서 별을 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참 위만 바라보던 눈동자가 시려서 승원은 나른한 몸을 벽돌에 기댄 채 한참을 쪼그려 앉아 눈만 깜박였다.

승원은 핸드폰을 꺼냈다. 비교적 따뜻한 핸드폰을 손난로 삼아 들고 있던 승원은 잠금 화면을 풀고 통화 기록을 무의미하게 넘겨보았다. 한참을 내려도 권 대표가 보이지 않았다. 최근 통화 목록엔 다른 이들의 이름만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꿇은 무릎 위에 무거운 머리를 기댄 승원이 비스듬한 시야로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하나 검색했다. 툭 떠오른 전화번호와 이름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초록색 전화 버튼을 충동적으로 눌렀다.

“……미쳤나.”

눕혀 놓았던 고개를 번쩍 든 승원이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막 가려던 참에 전화를 끊어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괜히 위험하다는 게 아닌데. 깨기 위해 나와서는 헛짓거리나 하고 있던 자신이 한심해 승원은 두 뺨을 때렸다.

“…….”

그런데 핸드폰을 밀어 넣은 외투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꺼낸 핸드폰에 환한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잉, 소리를 내며 울리는 액정 위로 다급히 끊었던 전화 상대의 이름이 떠 있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던 승원은 금방 끊어질까 두려워 얼른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왜 전화했습니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적당히 잠겨 있는 까칠한 목소리가 귓속을 후볐다. 잠시 일으켰던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승원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입 안쪽을 짓씹으며 한참 침묵만을 유지하는 승원을 기다려 주던 권 대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왜.

“…….”

- 무슨 일입니까.

“그냥…….”

찬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흘리듯 대답한 말을 끝으로 다시금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 못 듣던 목소리였다. 부재의 빈자리를 다시 느끼며, 승원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선명한 숨소리를 귀에 담았다.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같은 게 잠시 들렸고, 이어서 권 대표가 몸을 움직이는 건지 목을 울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 용건도 없이 전화를 했어요?

“……네.”

자신이 대답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목소리를 들을 용기로 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지금 이렇게 권 대표와 통화를 하고 있는 현실도 꿈만 같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는 승원을 나무라거나 전화를 끊는 행위 등은 하지 않았다. 잠자코 숨을 죽인 채 지나는 바람을 맞고 있는 사이, 권 대표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 곧 촬영이라는 얘기 들었습니다.

“……아, 네. 맞습니다.”

- 잘하고.

“감사… 합니다.”

- 밖입니까?

핸드폰 하단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있었음에도 바깥 소음을 전부 차단할 순 없었나 보았다. 승원은 골목 초입 주변에 보이는 작은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네. …오늘 드라마 고사 치러서. 뒤풀이 왔습니다.”

- 술 마셨습니까.

“…조금 마셨습니다. 많이는 아니고…….”

비교적 부드럽게 닿았던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았다. 뒷말을 어물쩍하던 승원은 달싹이던 입술을 황급히 떼어 냈다.

“대표님은-.”

- 집입니다.

승원이 하려고 했던 질문을 정확히 간파한 그가 먼저 대답했다. 차분한 전화 음성은 꼭 그가 귀에 붙어 속삭이는 것 같았다.

- 나도 할 일이 많아서. 내일은 출국 예정이라 짐도 싸야 하고.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승원이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 잘만 이해되던 권 대표의 말이 단박에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멍하니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리며 승원이 굳은 몸을 일으켰다.

“…출국이라니.”

- 해외 출장입니다. 3주 정도 있다가 올 생각이라 챙겨야 할 짐이 꽤 됩니다.

“언제… 가시는데요?”

- 내일이라고 금방 얘기한 것 같은데.

승원은 더 묻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리 옆에 내려놓았던 손을 뻣뻣하게 쥐었다. 얘기를 듣는 족족 귀로 들어오지 못한 문장들이 허공으로 증발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서두를 떼야 할지 머릿속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아서 승원은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진정 궁금한 말, 그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것들이 입속에서 거미줄을 친 듯이 어지럽게 엉켜 버렸다. 그리고 그런 복잡함을 다 제치고 나선 서운함은 불어나는 물처럼 뱃속에 가득 차올랐다.

“저는… 몰랐는데.”

- 알고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얘기한 적이 없으니.

권 대표가 당연한 걸 이야기하듯 말했다. 종내엔 어이가 없는 건지 웃음기도 서려 있었다.

- 나라고 윤승원 씨 스케줄을 다 아는 게 아닌데. 서로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새삼스럽다고.

권 대표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승원이라고 그에게 자신의 스케줄을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하는 게 아닌데. 승원이 그의 일정을 모르는 건 당연한 거고, 나서서 알 필요도 없는데. 그의 말 그대로 정말 새삼스러운 물음이었고,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갈되지 않은 서러움은 여전히 뱃속을 넘실거렸다.

“그래도 해외까지 나가서 3주 이상 계시는 건데…. 저한테 말해 주셨으면…….”

- …그게 윤승원 씨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순간 키를 훌쩍 넘는 단단한 돌벽이 눈앞을 지나갔다. 발로 차고, 몸으로 밀고, 도끼로 내리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그런 견고하고 딱딱한 벽. 권 대표의 차가운 되물음이 그랬다.

얼얼한 통증을 그대로 느끼며 승원은 부들거리는 잇새를 물었다. 아쉬움이라곤 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감한 음성이 날것으로 되돌아왔다. 그 괘씸한 말에도 승원은 아무런 반론도 낼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어디에도 없었다.

“…잘 다녀오세요.”

- 전화는 정말 그냥 한 겁니까?

“아니요. …잘못 걸었습니다.”

- 잘못?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예쁘게 말을 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음, 권 대표는 낮게 목을 울렸고 잠깐 멈칫하던 그가 말했다.

- 잘못이라도 안 했으면, 내가 출국한 것도 모를 뻔했겠습니다.

“…어차피 저랑 상관없으니까요.”

승원의 말에 권 대표는 도리어 웃었다. 전화 너머에선 무언가 드르륵, 열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렸고 이어서 지퍼가 직 하며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승원은 그것들을 배경 삼아 발치에 걸리는 돌만 툭툭 건드렸다. 발에 걸리는 작은 알맹이들이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 적당히 마시세요.

권 대표다운 짧고 적당한 충고가 들려왔다.

- 술 먹고 벌인 짓은 죽을 때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 그러던지.

“이제 끊겠습니다-.”

“승원 씨!”

권 대표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지려던 찰나, 저 옆에서 승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큼지막하게 들렸다. 고개를 든 승원이 눈을 가늘게 떠 확인하자, 코트를 꽁꽁 두른 차서희가 제 몸을 감싸 안은 채 승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얼른 목을 가다듬은 승원이 입술을 축였다.

“통화 중이에요?”

“아, 이제 끊으려고요.”

웃음을 섞어 자연스럽게 화답하자 차서희가 방긋 웃었다. 전화 안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승원은 황급히 권 대표에게 전했다. 서러움이 묻어 나오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 목소리가 딱딱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고, 주무세요.”

한참 들리지 않던 전화 끝에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 윤승원 씨도.

뚝. 음성이 멎었다. 하얗게 돌아온 배경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원은 가려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미끄러지듯 추락한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바깥 공기 마시니까 좀 살 것 같네. 누구랑 통화했어요? 부모님?”

후우, 커다란 돌 위에 발꿈치를 올린 채 달랑거리던 차서희가 물었다. 부담 따위는 싣지 않은 가벼운 질문이었다. 승원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꺼진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발끝이 시렸다.

“…그냥. 아는 사람이요.”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렇게 보였나요? 날이 추워서 그런가 봐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누나는 왜 나왔어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어후, 몇 시간을 내리 술 냄새 고기 냄새만 맡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더라고요. 아까 보니까…….”

이후로 차서희가 내뱉은 문장 중 온전히 승원의 귀에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줄줄 새어 나가는 옆 사람의 음성을 멍하니 들으며, 승원은 반대쪽에 보이는 새까만 벽에 초점 잃은 시선을 걸어 두었다. 멍울진 시야가 점점 더 넓게 번져 나갔다.

의지를 기반해 벌려 놓은 거리는 극복이 가능하다고 느꼈는데, 다시 보니 그마저도 복에 겨운 생각이었다. 권 대표를 보지 않으려 애썼던 것도 결국엔 언제라도 그를 다시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거리의 격차는 제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인데.

상호 간의 그리움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데, 짝사랑하는 주제에 겁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

술을 마신 평소였다면 늦은 오전까진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을 승원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뒤척이며 선잠을 자던 몸을 일으켜 시계를 확인하니 고작 6시 반이었다. 창을 확인해 보니 긴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락 하나 없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까만 액정에 불이 들어오자 눈이 시릴 듯 부셨다. 뻑뻑한 눈을 닦아 낸 승원은 손이 이끄는 대로 최근 전화 목록을 살폈다. 권 대표에게 잘못 걸었던 부재중 전화 한 통과 그와 짧게 나누었던 통화 기록이 차례로 찍혀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밝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던 눈이 감겼다. 푹 꺼지는 한숨을 뱉은 승원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한참 이불 안쪽에서 뒤척이던 몸이 커다란 산을 만들며 다시 일으켜졌다.

손안에 핸드폰을 쥔 채 묵묵히 버티고 있던 승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몇 번 가지 않은 통화 연결음이 뚝 끊기고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실장님. 저 윤승원입니다.”

- 아, 안녕하세요. 승원 씨가 이 시간엔 어쩐 일로.

김 실장의 목소리는 까칠하지도 않았고, 졸음에 잠겨 있지도 않았다. 이 시간에 감히 실례라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인데, 그는 오히려 승원을 반가워했다. 침침한 목을 가다듬은 승원이 잠시 침음했다. 이불자락을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 대표님이 출장 가신다고 들었어요.”

-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점잖게 답할 줄 알았던 김 실장은 조금 놀라는 투로 물었다.

“대표님이… 말해 주셨어요. 3주 정도 지내고 오신다고…….”

-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오전 8시 비행기예요.

오전에 떠날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오전이어도 꽤나 이른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떠나는 것이라면 지금 전화를 거는 것도 그들에겐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닐 듯했다.

- 놀라운데요.

“…네?”

- 비즈니스 제외하고 대표님의 스케줄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대표님 일정은 가족들도 모르거든요.

가벼운 어투로 전하는 김 실장의 목소리에 짐짓 웃음이 서려 있었다. 서로 관심은커녕 애정도 없어 보였으니 일정 따위 모르는 게 당연해 보이는 집안이었다.

- 대표님은 지나가는 소리로도 자기 스케줄을 발설하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

- 볼수록 승원 씨가 제게도 귀한 분이라는 게 느껴지네요.

승원은 쭈글쭈글해지도록 붙들고 있던 이불자락에서 손을 떼었다. 김 실장의 말은 곧 권 대표가 남에겐 하지 않을 소리를 승원에게만 하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귀찮은 불청객 취급이나 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승원에겐 너무도 생경한 말이었다.

- 그나저나 어떤 일로 전화하신 건가요?

허공 위로 멍청하게 뜨고 있던 눈을 깜박인 승원이 얼른 마무리하려 입을 열었다.

“그냥 대표님 스케줄 다시 확인해 보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 아, 두 분이 계획 중인 일정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 그렇군요. 대표님께 바로 연락드려도 좋았을 텐데요. 이 시간이면 진작 일어나셨을 거예요.

“…네.”

어차피 권 대표가 깨어 있다고 한들 그에게 전화해서 물을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대화마다 끼어있을 잠잠한 침묵도 견디기 힘들었을 테고.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전부 열고는 어스름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화 너머에선 가느다란 물소리가 났다.

“이른 아침부터 놀래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 아니에요. 더 전하실 말은 없는 건가요?

“…네. 없어요.”

괜찮다는 김 실장의 말에도 승원은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했다. 전화를 마친 후에 핸드폰을 그대로 침대 위로 처박아 둔 승원은 거실로 나왔다. 한가운데를 턱 하니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소파가 그를 반겼다. 색 때문인지, 선물한 사람을 떠올려서인지, 아늑해야 할 가구는 더없이 차가워 보이기만 했다.

***

이미 눈을 뜬 다음 다시 잠을 청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소파 위에 일자로 누워 천장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원은 침실에서 가져온 핸드폰을 꺼내 포털 사이트에 ‘권차현’ 세 글자를 검색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스크롤을 쭉 내리던 승원은 이미지로 들어가 군더더기 없는 외모의 남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이마와 강한 선이 돋보이는 티존, 그 아래 드러난 날카롭고 검은 눈매. 뚝 떨어지는 높은 콧날을 따라 내려오면 차갑게 다물린 곧은 입매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액정 너머의 상대가 제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머나먼 꿈처럼 느껴졌다.

어느덧 어둡기만 하던 하늘이 점차 걷히고, 탁한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해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유 없이 틀어 놓았던 티비 소리가 맹맹하게 귀를 감쌌다.

뒤늦게야 다시 찾아온 수마에 소파 팔걸이에 목을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승원이었다.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려는데, 배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긴 진동이 느껴졌다. 알아채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던 승원은 핸드폰이 소파 밑으로 떨어졌을 때에서야 진동이 울리고 있음을 직감하고 허겁지겁 뒤집어진 핸드폰을 들었다.

[권 대표]

“……아, 윽-.”

손을 뻗어 놓은 탓에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건지 그만 소파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찧은 무릎이 빨간 멍울을 만들었다. 부딪힌 부위를 손으로 급히 문지르며 승원은 발신자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지이잉, 지잉-. 끊기지 않고 계속 울리는 진동이 끈질겼다. 하나의 자아가 반으로 쪼개졌다. 받고 싶은 마음 반, 받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머리는 받지 말라고 재촉하는데,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 받아야 될 것 같았다. 승원이 10초 남짓 망설임을 지속하고 있는데,

“어어…….”

요란하게 울리던 전화가 맥 끊기듯 뚝 끊어졌다. …이게 아닌데. 어둠에 잠긴 화면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승원이 늘어지는 몸을 소파에 기대었다. 이럴 거면 멍청하게 기다리지 말고 받는 거였는데.

“멍청아…….”

그런데 안타까운 승원의 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찾아온 진동이 바닥 위를 들썩이며 울려 댔다. 자동반사적으로 튀어 오른 몸이 핸드폰을 번쩍 집었다.

승원이 화면 속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오고 있었다. 두 번째 기회까지 놓칠 수는 없었다. 승원은 곧장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윤승원 씨.

전화 너머가 제법 시끄러웠다. 바로 닿는 듯 작게 울린 권 대표의 목소리가 어딘가를 크게 한 번 돌았다가 귀에 안착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리지 않아, 승원은 귓가에 핸드폰을 더 가까이 붙였다. 절로 겸손해진 다리가 꿇은 무릎을 만들었다.

- 새벽에 김 실장한테 전화했다고 들었습니다.

예상을 아예 접어 뒀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그의 귀로 들어가 직접 확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종일을 권 대표의 옆에 붙어 함께하는 김 실장에게 무엇을 바란 건지 몰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권 대표가 승원에게 전화를 걸 일은 그 이유가 다였다.

- 김 실장에게 물어보니 달리 전한 말은 없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 술 마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일찍도 일어났네.

권 대표가 갑자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승원이 입을 벌려 놓고 있는 사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 동료 배우들이랑 분위기도 좋아 보이던데.

이어서 들려온 말은 고저가 없어서 의미를 파악하기에 쉽지 않았다. 물론 승원은 그의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일터를 엿본 것도 아니면서 그가 저런 말을 어떻게 하는 건지 막연하다는 생각밖에 더 들지 않았다.

- 그래서 왜 전화한 겁니까.

목소리만 듣고 있음에도 그가 낯 위로 드러냈을 귀찮음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순간 새하얗게 질린 승원의 머릿속이 아무 말이나 끄집어내기 위해 제멋대로 회전했다. 사이의 공백이 싫어서 승원은 아무렇게나 덧붙였다.

“잘 갔다 오시라고…….”

- …잘 갔다 오라고?

“……출장.”

- 나 참….

잠깐 머물렀던 침묵 뒤로 남자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이었지만, 귀한 그의 웃음을 듣고 있으니 승원은 느리게 감겼던 눈꺼풀이 위로 시원스레 걷히는 기분이었다.

-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네. …이런 인사는 처음 들어 봐서.

“…….”

- 안 그래도 곧 있으면 탑니다.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네.”

- 정말 그거 말고는 할 말 없습니까?

여전히 주변이 시끄러웠다. 오전이어도 공항 안은 대낮처럼 분주할 터였다. 주변 분위기의 영향일까, 권 대표도 평소와 달리 조금 격양된 톤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설마 그거 때문에 지금 일어나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닌….”

- 할 짓도 더럽게 없네요.

비아냥거리는 투였지만 힐난하고 있진 않았다. 그저 승원을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끊어 낸 말을 뒤로 몇 번 더 옅은 웃음을 내비쳤다.

- 전화로 이렇게 영양가 없는 소리만 해 대고 있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저 할 말 더 있습니다.”

- 뭔데.

승원이 무릎을 끌어모았다. 조절 불가능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무릎에 맞닿은 가슴 위로 느껴졌다. 이대로 그가 바다를 건너 떠나면 3주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맡겨 놓은 인연도 아닌데, 기약 없는 시간을 버텨야 하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대표님.”

- 듣고 있습니다.

“출장 갔다 오시면, 밥 사 주세요.”

숨소리가 들렸다. 권 대표가 되물었다.

- 빚 갚으라는 소리입니까?

“네. …오면 갚으세요.”

- 진짜 용건이 거기 있었네.

“…….”

- 그 소리 하려고 어제부터 전화 건 겁니까.

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 윤승원 씨가 굳이 보채지 않아도 갚을 생각이었습니다.

“…….”

- 잘 다녀오겠습니다.

“…네.”

- 촬영 잘하세요. 다시 오면 연락하겠습니다.

“…네.”

- 그럼 끊겠습니다.

대답도 하기 전에 툭 끊긴 핸드폰 화면이 검은색이었다. 그 위로 제 말간 얼굴이 비쳤다. 어느새 열이 오른 핸드폰이 난로처럼 따뜻했다. 승원은 핸드폰을 가만히 쥐고 있다가 뺨 위로 따뜻한 액정을 가져다 댔다.

이젠 그의 성격을 좀 알 것 같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승원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차분한 음성과 나지막한 어투. 매번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의 딱딱한 말씨도 어느새 적응은 물론이고 제 안에서 매력으로 자리 잡힌 건지 그저 좋기만 했다.

답이 없는 인력이 승원을 무한히 그에게로 이끌었다. 앞으로 그를 기다릴 3주가 얼마나 길게 흘러갈지 감도 오지 않았다.

조각 담요를 끌어당긴 승원이 바닥에 그대로 누워 몸 위에 덮었다. 비축해 뒀던 졸음이 그제야 물을 끼얹듯 쏟아져 내렸다. 새벽 내내 뒤척이느라 쌓인 피곤을 비로소 온몸으로 무겁게 느끼며, 승원은 눈꺼풀을 덮었다. 칠흑 같은 꿈속으로 빨려 들었다.

***

타지의 공항이 분주했다. 갖가지 언어가 어지럽게 혼동된 넓은 공간엔 사람들의 목소리와 캐리어의 바퀴가 바쁘게 굴러가는 소리가 함께 섞였고, 제각각의 신발 밑창들이 분주하게 바닥을 울리며 지나쳤다.

피곤함을 담은 낯 위로 신경질적인 주름이 잡혀 있었다. 긴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쓸어 만지던 남자가 시계를 확인했다. 남자가 긴 다리를 움직여 걸을 때마다 잘빠진 구두가 또각, 또각 울림을 만들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어 놓던 참이었다. 한동안 축적되어 있던 피로가 좀체 가시질 않았다. 이동할 생각에 벌써부터 짜증이 밀려오는지 차현은 미간을 좁혔다. 제 앞으로 시끄러운 아이들이 수다를 떨며 한가득 지나갔다. 오며 가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새까만 눈동자가 무감동하게 지켜보았다.

“대표님.”

“왜요.”

김 실장의 목소리에 차현은 고개만 들어 대답했다.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은 자신이 보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다른 건 아니고….”

“…….”

“재밌는 걸 좀 봐서요.”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로 핸드폰이 고이 올라왔다. 건네받은 그가 화면을 확인했다. 무료하게 뜨인 눈가가 느릿하게 화면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내려다보았다. 뒤죽박죽 귀를 쨍하게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귓구멍을 냅다 찔러 대는 것이 성가셔 아예 음소거를 해 버렸다. 소리 없이 재생되는 영상 속엔 승원이 있었다. 주변에 둘러싸인 낮은 테이블 위로 어지러이 쌓여 있는 초록 병들도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 같은 것을 하는 게 보였고 하나같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이걸 지금-.”

김 실장에게 한 소리를 하려고 입을 떼던 그가 멈췄다. 승원이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여자에게 가까이 붙더니, 이내 키를 맞추고 여자의 목 뒤로 술잔을 돌려 포옹했다. 능숙하게 팔을 감아 여자를 안자, 상대는 승원의 품에 안겨 잘 보이지 않았다. 잔을 꺾어 술을 들이킨 승원이 천천히 여자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화면으로만 봐도 주변이 갑작스레 어수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뼉을 치며 상황을 부추기는 자들을 바라보는 승원의 붉은 광대는 적당히 올라가 있었고, 헤실거리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 꽤나 낯설었다. 다시 재생되는 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미온적인 눈이 묘하게 영상을 훑었다.

김 실장이 차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은 차가운 인상이 사납게 위를 응시했다. 얼굴을 들고 있었음에도 이마 밑으로 그늘이 진 것 같은 낯은 동요 따윈 없었다. 가져가라는 듯 핸드폰을 흔들던 차현이 무감하게 일갈했다.

“이걸 지금 나한테 보여 주는 저의가 뭡니까.”

핸드폰을 받아 든 김 실장이 퍽 난감한 표정을 했다. 그저 유쾌한 영상이니 웃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냉혈한 남자는 태도를 그대로 유지할 뿐이었다.

“딱히… 그냥 연예부 뉴스를 보다가 윤승원 씨 얼굴이 보이길래 반가워서 보여 드렸습니다.”

“…그게 거기 떠 있었습니까.”

“스타는 스타인가 봐요. 술자리 영상도 기사로 다 뜨네요.”

“기자 새끼들은 할 짓거리가 어지간히도 없나 보죠.”

“대표님도 참.”

딱딱한 대답에 애써 웃는 낯으로 응한 김 실장이 얼른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괜히 보여 준 사람만 더 민망해진 꼴이었다. 이런 일이야 워낙 잦았기에 김 실장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러면서 김 실장은 또 승원의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도 반응이 상당하던데요.”

“…….”

“여배우랑 케미도 좋고. 드라마 플롯도 좋다고 벌써 기대하는 사람들 한둘이 아니랍-.”

“김 실장님.”

“예, 대표님.”

고고한 목소리엔 낮은 울림이 있었다. 다리를 늘어뜨려 놓던 차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쩍 커진 키로 가볍게 목을 돌리더니, 이내 서늘한 눈동자가 돌아왔다.

“팬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호감이 있으면 그게 다 팬이죠.”

“김 실장님도 윤승원과 꽤 가까워진 것 같던데. 개인적인 통화도 나눌 정도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좋은 소식은 당사자에게 알리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나한테 할 게 아니라.”

김 실장은 차현이 보지 않는 사이 어깨를 작게 들썩였다. 때아니게 과한 귀찮음이 묻은 얼굴이 제 핸드폰을 확인했다.

“더 지체할 시간도 없는데 얼른 이동하죠.”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승원이었다면 오늘 차현의 얼굴을 보며 겁을 잔뜩 먹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먼저 앞장서는 차현을 바라보던 김 실장이 다시금 그를 불러세웠다.

“대표님.”

“왜요.”

그 사이에 조금 누그러진 얼굴엔 여전히 피곤이 가득했다.

“진작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만. …여사님께서 자리 다시 마련하시겠다는데.”

“…….”

“뭐라고 말씀 전달 할까요.”

진저리 나는 그 이름에 차현이 다시 표정을 굳혔다. 참으로 지독하고 끈질긴 여자였다. 이쯤되면 어련히 물러나 줄 때도 되지 않았는가. 괜히 권차현의 모가 아니라고, 그냥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서유정을 그렇게 오래 붙잡아 놓더니, 이번엔 승원을 닮은 그때 그 여자에게 완전히 꽂혀서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결국 인내의 싸움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던 곱상한 얼굴. 완연하게 떠오르던 하얀 얼굴이 점차 흐려지더니, 그 위로 자연스레 덧칠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지워지고, 눈, 코, 입이 조금 변화했다. 그리고 잔상 끝에 남은 인물은, 결국 또 승원이었다.

“한국 돌아가면 얘기하겠습니다.”

간결한 대답 후 다시 돌아서려던 그의 고개가 돌아왔다.

“김 실장님.”

“네.”

“여기 있는 동안엔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는 안 했으면 합니다.”

“…….”

“타국 와서까지 골 썩히고 싶진 않아서.”

“돌아가면 다시 얘기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생략한 차현이 등을 돌렸다. 유려하게 뻗은 긴 다리를 이끌고 그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지나다니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월등한 신체를 자랑하는 그가 유유히 인파를 헤쳐 걸음을 옮겼다. 커다랗게 드러난 창밖엔 눈부신 햇살이 가득했다. 넓은 활주로 위로 속속들이 들어서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한국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가 맞이한 뒤늦은 오전이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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