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돌이표
“어머, 미쳤나 봐. 이게 뭐야!”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커질 줄 모르고…….”
하늘색 시폰 재킷의 소매를 걷은 배 실장이 내내 탄식을 내지르다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승원에게 얼굴을 가까이 내민 배 실장이 사슴 같은 눈을 번뜩 키웠다가 눈썹을 팔 자로 흐트러뜨리며 승원의 뺨 가까이에 허공 손짓을 했다.
“진짜 넘어진 게 맞다고?”
“네, 술 먹고 자빠졌어요.”
승원은 신뢰를 더해 주기 위해 입술을 강단 있게 다물고 한탄스러움을 인정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 대체 어쩌다가 얼굴을 박았어요? 세상에, 이 비싼 얼굴을.”
어우, 어우. 배 실장은 승원의 얼굴이 곧 제 얼굴 내지는 제 자식 얼굴이라도 되는 양, 이마를 짚더니 이내 주먹을 꼭 쥐었다.
배 실장의 눈에 이토록 완벽한 승원이 술을 먹고 자빠졌다니. 그녀의 눈엔 아무리 봐도 영 구린 구석이 있었다. 어디선가 봤던 인터뷰에서 주량은 소주 석 잔도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진짜? 진짜 술 먹고 그런 거 맞아요?”
배 실장이 통 믿지 못하는 듯하기에, 승원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넘어졌던 머릿속 가상의 상황을 설명했다.
“술을 한 서너 병을 혼자 마셔 가지고…. 몸을 못 가누겠는데, 갑자기 머리가 휙 돌더니 어디에 꽝 부딪힌 거예요. 진짜 이렇게, 팍!”
승원이 손바닥을 펴서 제 이마를 있는 힘껏 강타했다. 배 실장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식탁 모서리에 뺨을 맞고 벌러덩 넘어져 있더라구요. 이렇게 벌레처럼.”
“……풉.”
승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배 실장은 비웃음 소리에 눈을 새파랗게 뜬 채 고개를 휙 돌렸다. 크흠, 목을 가다듬은 곽 매니저가 웃음을 터뜨렸던 입술을 정리하고 헛기침을 연발했다.
승원의 설명과 몸동작을 잠자코 보고 있더니 혼자 재밌는 상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배 실장이 소리쳤다.
“웃음이 나와?”
“웃은 게 아니라.”
“이거, 이거 이 얼굴을 보고도 정녕 웃음이 나와?”
삿대질할 수는 없고, 예의를 차린 손을 내밀어 승원의 얼굴을 여럿 강조하며 가리킨 배 실장이 천장을 향해 눈을 올리곤 한숨을 쉬었다.
“매니저라는 게 관심도 없고.”
“관심이 없다뇨? 말이 심하시네요. 내가 오면서 승원 씨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요.”
승원이 둘을 바라보다 배 실장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곽영찬의 말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오늘 오전, 마스크를 벗은 승원의 얼굴을 보고 경악으로 인사를 시작한 곽영찬은 오는 내내 승원을 심문하고 들었다.
정말 있는 오바 없는 오바는 다 떨며 왔으니 말 다 했지. 웬만하면 들어 주려고 하는데도, 말이 어찌나 많은지 승원은 조금 지친 거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패딩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낸 곽 매니저는 영 억울했는지 결국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실장님도 그만 좀 쪼아요. 승원 씨가 어디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졌겠어요? 이미 생긴 멍을 어쩌겠어요. 당사자가 제일 괴롭지. 그냥 얼른 낫길 바라야지 뭐.”
“승원 씨, 내가 지금 승원 씨를 쪼았어요?”
“아니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배 실장의 가는 눈초리가 다시 곽 매니저에게 쏠렸다. 씁쓸하게 미소를 올린 곽 매니저는 모른 척 테이블에 있던 캔 커피를 따서 목을 축였다.
“승원 씨가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좋아하는 건 아니고.”
“혼자 그랬어요?”
“네. 뭐… 혼자…….”
없는 일을 만들어서 그렇다고 하려니 그것도 참 난감했다. 승원은 대충 빠져나가기 위해 팔을 만지작대며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 실장은 스케줄 조정을 좀 해야 할 거 같다면서, 승원의 얼굴에 붙은 멍을 빼는 게 우선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이만큼 푸르게 질린 이상, 금방 나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 승원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작은 남자주인공 자리만 비어 있었기에, 승원이 승인을 한 이후부터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당장 다음 주에 배우 미팅을 진행하고, 이번 달 내로 대본 리딩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배 실장이 왜 이렇게까지 승원의 얼굴을 보며 안달이 난 건지 알 것도 같았다.
“승원 씨, 차서희 알죠?”
“차서희 배우님이요?”
“우리 승원 씨 상대 배우로 당첨.”
현 기준 브랜드 평판 1위에 빛나는 가장 잘 나가는 배우라 할 수 있는 차서희는 남녀불문 불호가 없었다. 도도한 외모와는 달리 예능에서 보여 준 수수한 이미지와 더불어, 남다른 연기력과 학벌로 이미 많은 화제가 되어 있던 그녀는 작년에 작품을 잘 만나 해외 영화제로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온 뒤로 완전한 탑으로 거듭나 있었다.
시상식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승원이 일방적으로 선망하고 동경하는 존재였기에 멀리서 그녀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고개만 꾸벅 숙이고 말았었다.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승원은 저게 바로 스타구나, 라는 걸 비로소 느끼곤 했었다.
근데 그런 분과 함께 작업한다니. 심장 주위가 콩콩, 설렘과 함께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감히 그런 멋진 배우와 호흡을 맞춰도 되는 걸까. 팬도 엄청 많을 텐데. 괜히 실수라도 해 실례나 끼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승원은 입가에 걸친 옅은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배우 ‘윤승원’을 둘러싼 모든 게 순조롭게 이어져 가고 있었다. 이만하면 더 바랄 것도 없을 정도로 무난, 아니 꽤 괜찮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본래의 ‘윤승원’만 잘 다룬다면 더 흠이 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승원은 제 마음을 다잡았다.
***
목도리를 둘둘 두른 채 마스크와 모자를 함께 쓴 승원이 커다란 병원 입구로 들어섰다. 커다란 로비 안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급한 발소리로 귀를 꽉 차게 울렸다.
잠시 중앙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던 승원은 주머니 안에서 꼬깃꼬깃한 쪽지를 꺼내 들었다. 잔뜩 구겨진 쪽지 가운데엔 권 대표의 글씨로 적힌 번호가 있었다. 그의 흔적이 닿은 글씨를 매만지던 승원이 결심에 찬 발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적요함이 흐르는 복도는 승원이 익히 아는 6인실 복도와는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방에 침을 꿀꺽 삼킨 승원은 2인실로 이루어진 방들을 찬찬히 살펴보다 번호에 적힌 대로 걸음을 옮겼다.
곧 코너를 꺾고 들어가 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승원이 찾던 병실 앞에 벽처럼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한참 다른 느낌에 승원은 잠시 걸음을 물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다시 돌아가는 게 더욱 큰 후회로 남을 터였다. 그늘진 벽만 바라본 채 정승처럼 서 있는 남자들에게로 승원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윤철…… 이라는 사람을 보려고 왔는데요.”
문에 딱 붙어 서 있던 남자 둘은 키가 190은 족히 넘어 보였다. 승원을 내려다보던 시선이 한참을 고민하는 듯 보여, 승원은 조심스레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제 얼굴에 둘려 있던 목도리까지 내렸다. 승원은 권 대표에게서 받은 쪽지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권차현 대표님께 직접 병동 호수 받고 찾아온 겁니다.”
얼굴에 감싸져 있던 것들을 벗은 이유는,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승원의 쪽지를 가져간 남자 하나가 꼬깃한 쪽지를 잠시 살피더니 문에 걸려 있는 방 호수를 확인했다. 문 안쪽에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윤승원 씨 본인 되십니까?”
“……네, 맞아요.”
승원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목도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러나 당장 알았다며 문을 열길 기대했던 승원은 제 어깨 위의 올라오는 가드의 묵직한 손짓에 몸을 움찔 떨어야 했다. 승원의 몸을 그가 찾아왔던 길목으로 돌려 세운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승원은 몸에 힘을 바짝 주고 밀리지 않으려 버텼다. 문의 번호가 아예 보이지 않도록 남자들은 단단하게 문짝을 가리고 섰다.
“여기 직접 가 보라고 대표님이 병실 알려 주신 건데요…?
“권차현 대표님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네, 맞아요.”
“대표님이 윤승원 씨는 병실 출입 금지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승원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철옹성 같던 가드들은 자기들도 유감이라는 듯 인상을 찡그린 채 짧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가 보라고-.”
“저희가 내막까진 알 수 없지만, 일단 지시 내리신 이상 저희는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이 다시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위협적인 몸과 권 대표 못지않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자들이라, 이렇게 공손한 태도로 나오는 이상 더 밀어붙일 도리가 없었다. 승원은 돌려받은 쪽지를 손에 꾹 쥔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동시에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저기, 안에 사람이 있긴 한 겁니까…?”
“네. 있습니다.”
곧장 들려오는 대답은 미련 하나 없었다. 승원은 찝찝한 입술을 머금은 채 그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마음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설움과 상처를 전부 털어 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힘겹게 붙잡아 온 용기가 허무하게 흘러내렸다. 제 계획이 그의 지시 하나로 전부 무로 돌아가 버렸다.
***
권 대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렵사리 도착한 집 현관에서부터 그의 번호를 눌러 전화 연결을 요청했지만, 들려오는 건 수신 거부 또는 길게 이어진 공허한 연결음뿐이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윤승원입니다. 전화 부탁드립니다.]
늘어난 가죽을 만져 보며 멍하니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승원은 그가 정리해 두고 간 이후 미처 정돈하지 못한 맨투맨과 트레이닝 바지를 다시 펼쳐 확인했다.
눅진하고 하얀 얼룩이 검은 맨투맨 위에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화끈거리는 낯을 가린 채, 승원은 그것들을 통째로 가져가 세탁기 안에 던져 넣었다.
기다림을 반복하며 맞이한 하늘은 어느덧 검은 유채에 달을 띄운 채였다. 불을 켜지 않아 자연스레 집 안까지 연장된 기다란 어둠 속에 승원은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포기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정적을 깨부수고 울리는 벨소리에 승원은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무슨 일입니까.
단정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귓가에 울렸다. 승원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4시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가 승원에게 응했다.
- 아까 일이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빨리 말해요. 무슨 일인지.
퇴근 중인 건지, 권 대표의 목소리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불선명했다. 직접 귀에 대고 받는 전화가 아니라, 차의 패널과 연결된 통화음이었다.
“대표님. 여쭐 게 있습니다.”
- 오늘 스케줄은 끝난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제 물음을 가로채고 묻는 여상한 질문에 승원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침실 안에 있는 게 답답해서, 승원은 거실로 빠져나왔다. 먼저 물어봐 놓고는 아무런 응수도 하지 않아 승원은 다시 목을 울렸다.
“대표님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뭔데요.
“아까 낮에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대표님이 저한테 남겨 주신 병원 호수를 찾아갔는데. 거기 경호원 두 명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저한테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
- 기어이 거길 다녀왔습니까?
까칠한 음성이 되돌아왔다. 승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대표님이 저한테 직접 쪽지까지 남겨 주셨는데, 갑자기 그분들이 절 가로막아서… 왜 제가 못 들어가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혹시 잘못 전달한 게….”
- 왜 가로막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승원이 알 수 없어 침묵하자, 전화 안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이동하며 나는 자동차 엔진 소리도 함께였다.
- 내가 출입 금지시킨 거 맞습니다.
“…왜.”
- 왜냐니. 들어가서 보복이라도 하고 올 셈이었습니까?
보이지 않는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뻔하게 예상 가는 권 대표의 짜증 어린 낯을 떠올리며, 승원은 심호흡했다.
“다시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됩니까? …한 대만 때리고 오겠습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그냥… 그냥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올게요.”
- 안 됩니다.
한 치 망설임도 없는 거절에 승원은 혀끝을 풀어냈다. 단칼에 꺾인 전투력이 허무했다. 권 대표의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가 정돈된 톤으로 적나라한 단어를 내뱉었다.
- 난 윤승원 씨와 그 빌어먹을 씹새끼를 철저하게 분리할 생각입니다.
“…….”
- 난 그 새끼한테 분명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신 못 차리고 윤승원 씨 집까지 찾아가 돼지 발정제나 처먹이고 강간까지 하려 들었던 정신병자입니다. 윤승원 씨 지금 엘리베이터 똑바로 탈 수는 있어요? 고작 그 20초 남짓한 시간도 못 버티겠다고 내 손 잡아다 집까지 끌고 간 거 아니었습니까?
승원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가감 없이 들려오는 말들이 전부 사실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참혹함을 이로 말할 수 없었다.
- 그 분한 마음은 알겠는데, 지금 병실에 묶여 있다고 그 새끼가 나중에 윤승원 씨한테 손을 안 댈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
- 지금이야 내가 이렇게 관리해 주고 있지만, 나중에 우리가 서로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혼자 감당해야 할 텐데. 그거 다 지고 갈 수 있습니까?
“…….”
- 다시 말하지만 난 지금 내가 약속한 일을 이행하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어차피 끝이 정해진 관계 아닙니까. 언젠간 윤승원 씨의 몫이 될 짐입니다. 지금 속이 후련해 봤자, 나중에 전부 빚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소리입니다.
사실을 열거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지독히 평면적이고 일상적이었다. 물고 늘어질 부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승원 역시 덧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말들이었다.
- 철저하게 윤승원 씨를 위해서 해 주고 있는 말입니다.
한껏 차분해진 목소리가 울렸다. 거칠게 날 서 있던 승원의 마음은 이미 거대한 눈에 파묻혀 소리와 존재를 잃은 후였다.
- 그래도 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승원은 그가 눈앞에 있는 양, 고개를 푹 숙였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깽깽대며 짖는 것뿐인 작은 개새끼가 주인 품에 안겨 으르렁대고 있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주인이 떠나면 할 수 있는 건 끝도 없는 줄행랑뿐임을 망각한 채, 그렇게 설쳐 대고 있었다.
- 됐어요. 그럼.
소파를 등받이로 삼아 거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승원은 무릎 위에 뺨을 기댄 채 숨을 쉬었다. 더 덧붙일 말은 없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전화를 끊는 것 역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런 승원을 그가 다시 불렀다.
- 윤승원 씨,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전화 안쪽의 배경음은 아까보다 한결 정리되어 있었다. 주행 중인 듯한 산만한 소음이 완전히 잦아든 적막이 승원에게까지 전해졌다. 승원은 얄팍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뭡니까.”
- 난 오늘도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데.
“…….”
- 윤승원 씨도 달리 없지 않습니까?
“…….”
- 맞아요?
무엇을 위해 이런 걸 묻는지 승원은 빠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아연함에 눈을 떴다 감았다 하던 승원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 그럼 나오세요.
“…네?”
- 이미 예약해 둬서 지체할 시간도 없습니다.
고개를 쳐든 승원이 눈을 깜박였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려던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창을 열고, 난간에 매달려 고개를 떨구자 바닥에 닿는 시야 저 끝에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헤드라이트로부터 나온 노란빛이 앞쪽에 주차된 차를 간헐적으로 비췄다.
전화 안쪽에서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내가 나오라고 하니까 또 고민됩니까.
고민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권 대표의 차량을 멍하니 바라보느라 미처 대답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신이 팔려 있었음을 인지한 승원이 얼른 난간에서 내려와 문을 닫았다. 훅 떨어진 저녁 기온에 닿았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요, 지금 나가겠습니다.”
- 서두르세요.
“네.”
승원은 당장 어둠을 헤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층 현관의 유리문을 밀고 나오기 무섭게 승원의 입술에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뜨면 보이는 미세한 먼지 입자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었다. 희끗하게 떨어져 손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눈은 금방 빗줄기로 변할 것만 같았다.
창을 통해 보았듯이 여전히 헤드라이트를 반짝이고 있는 차량은 승원이 항상 보던 권 대표의 차와 모델이 달랐다. 검은색인 것은 동일했지만, 차의 브랜드도 달랐고 세단이었던 원래의 차와 다르게 날 선 옆태를 드러내는 눈앞의 차량은 해치백 형태였다.
어둡게 선팅이 되어 있는 것은 본래 그의 차와 다를 게 없었기에, 승원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어두운 창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뭐 합니까, 안 타고.”
직, 내려온 차창 안쪽에서 단조로운 목소리와 함께 권 대표의 얼굴이 드러났다. 삐뚜름한 그의 얼굴을 확인한 승원은 안심하고 조수석 위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벨트부터 매세요.”
이미 기어를 틀어 놓은 권 대표는 당장 출발이라도 할 셈이었는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승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 하나 받아 주지도 못할망정 재촉이나 하는 남자에게 아무런 말도 얹지 못한 승원은 얌전히 벨트를 당겨 단단히 채웠다. 찰칵, 하는 소리와 동시에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오랜만이네요.”
권 대표다운 인사가 드디어 찾아왔다. 승원은 거의 희미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한 거 외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타고 있는 차도 처음 보는 모델이었지만, 그런 걸 묻는 것 자체가 제 옆의 남자에겐 전부 대수라고 느껴질 것 같아 승원은 말을 아꼈다.
“저녁은 또 굶을 생각이었습니까.”
“샐러드가 있어서, 그거 먹으려고 했습니다.”
안 먹는다고 하면 또 뭐라고 한소리할까 싶어 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사실 오늘 권 대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승원은 내내 그의 연락만 기다리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식사할 때 보면 먹는 걸 그리 꺼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
“혼자 있으면 밥이 목 뒤로 안 넘어갑니까?”
무심한 듯 지껄였지만 동시에 정확히 승원의 허를 찌른 물음이기도 했다.
우울증약을 먹으면 몸이 나른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한참 몸에 있던 음식물들을 전부 토해 내던 시절부터 승원은 자연스레 굶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이젠 누군가와 굳이 식사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이상 음식에 먼저 손을 뻗는 일이 없었다.
승원은 운전대를 잡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승원에게 일말의 시선도 보내지 않는 권 대표는 전방만을 주시한 채 차분히 운전에 임하고 있었다. 마천루와 도로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주황빛들이 어두운 음영 위를 수채화처럼 물들였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이 남자는 뭐가 아쉬워서 저에게 밥을 먹자고 하는 것일까.
“…대표님은요.”
승원이 물었다. 무심히 앞만 바라보던 고개가 돌아왔다.
“대표님은 왜 여태 식사 안 하셨습니까.”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눈썹을 가늘게 비튼 채 승원에게 툭 내뱉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퇴근했다고.”
승원이 정녕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챈 승원은 얼른 제 물음을 바꾸어 그에게 다시 전했다.
“그럼 왜… 저를 부르신 겁니까?”
“…….”
“다른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왜 많고 많은 식사 파트너 중에 굳이 저를.”
“…식사 파트너.”
승원의 말을 차분히 곱씹던 권 대표는 짧게 비소했다.
“식사 파트너라니. 그런 것도 나쁘진 않겠네.”
“…….”
“내가 아까 전화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없습니다. 같이 밥 먹을 사람.”
그런 말을 했던가. 승원은 잠시 생각했지만 떠올리진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 대표가 자신에게 이런 시시한 농담을 던졌을 리도 없었다.
“비즈니스 외엔 함께할 상대도 없습니다. 내가 만들지도 않고.”
“…….”
“말 꺼낸 김에, 식사 파트너. 그거 윤승원 씨가 하세요.”
“…네?”
“싫습니까.”
권 대표는 흑백 논리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좋다, 아니면 싫다. 두 가지뿐인 선택지에서 승원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엔 강요 같다고만 느껴졌던 그 무언의 압박이 이젠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승원은 답을 정해놓고도 선뜻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권 대표답지 않은 말은 승원을 충분히 당황스럽게 만들 만했다. 언뜻언뜻 피곤에 전 듯한 느른한 눈동자와 평소보다 조금 더 낮게 울리는 목소리, 고압적인 어투가 전부 빠진 물음 그대로의 말.
망설임을 반복하는 입술이 작게 뻐끔거렸다. 그와 동시에 가슴 언저리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권 대표를 만나고 승원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 심장이 제어되지 않을 정도로 제멋대로 뛴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정맥이라도 찾아온 듯, 불순 들이닥치는 쿵쾅거림은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았다. 단, ‘권 대표와 함께 있음’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싫든 좋든 대답은 하는 게-.”
“…좋습니다….”
승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승원은 두 손을 깍지를 만들었다가, 풀었다가, 다시 엉켜 놓다 서로 매만졌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권 대표에게 들켰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승원은 지금 기분이 붕 떠올라 있었다.
권 대표가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거의 들리지 않아서 처음엔 그가 웃는 건지 알지 못하던 승원은 옅은 콧바람을 듣고서야 권 대표가 어둠에 가려진 채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림자에 거의 가려져 희미하게 비치는 낯이 아쉬웠다. 저 얼굴을 밝은 곳에서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차 안에서의 대화는 식사 파트너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승원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그는 계속 권 대표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더 해 주길 내심 기다렸지만, 권 대표는 운전에 집중할 뿐 승원에게 다른 화젯거리를 더 꺼내지 않았다.
처음엔 마냥 그를 기다리던 승원의 얼굴이 점차 흥미를 잃고 아쉬움을 삼켰다. 승원은 창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차는 음식점이 아닌 호텔 로비 앞에 멈췄다. 벨트를 푸른 권 대표가 먼저 차에서 내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레드카펫에서도 낯부끄럽게 느껴졌던 에스코트를 받는 게 괜히 이상했던 승원은 재빨리 차 밖으로 내려와 자신을 기다리는 권 대표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호텔 직원들처럼 머리를 단정하게 올린 종업원이 차분한 묵례를 건네며 두 사람을 안쪽으로 모셨다.
역시나 안쪽은 전부 테이블마다 구분이 되어 있는 룸 형식이었다. 저번에 들렀던 일식당처럼 큰 방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넉넉한 공간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정장 재킷을 벗은 권 대표가 손목을 들어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권 대표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승원도 뒤늦게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멍은 하루 사이에 많이 좋아졌네.”
하도 달고 다녔더니, 이젠 제 뺨 위에 멍이 있는 것도 잊고 있던 승원이었다. 그의 말에 비로소 제 뺨에 달린 멍을 떠올린 승원은 창피함에 고개를 숙인 채 손등으로 부위를 가렸다. 권 대표는 그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물컵을 채웠다.
“솔직히 좀 의외였습니다.”
궤궤한 음성이 승원의 고개를 다시 일으켰다. 물잔을 입술에 갖다 댄 권 대표는 목을 축이는 잠깐 사이에도 승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길 진짜 갈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장윤철을 제 발로 찾아간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입을 다 헹궈낸 남자는 승원의 용기를 다시 봤다는 듯이 흥미 어린 눈동자를 반짝였다.
“진짜로 가서 주먹이라도 갈기고 올 생각이었습니까?”
여전히 믿지 못한다는 듯한 가벼운 물음에 승원은 괜한 오기가 치솟음을 느꼈다.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었습니다.”
“…으음.”
무겁게 침음하는 낮은 음성과 달리, 권 대표는 입가에 느린 미소를 띄워 둔 채였다.
“대표님은 어차피 절 출입시키지 않을 생각이었으면서, 왜 병실 주소를 알려 주신 겁니까?”
승원은 기죽지 않고 곧장 권 대표에게 제가 묻고팠던 물음을 건넸다. 느긋하게 반찬들을 살피던 권 대표가 젓가락을 들어 계란말이 하나를 집었다. 제 입으로 가져갈 줄 알았던 것을 승원의 접시에 놓아준 그가 남은 하나도 자신의 접시 위에 가져다 놓았다.
“윤승원 씨가 그걸 받고 병실에 찾아갈지 아닐지, 궁금하긴 했습니다.”
“…….”
“물론 나는 가지 않는다는 쪽에 배팅했고. 실제로 내가 맞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음식물을 입에 넣고 조용히 씹는 권 대표의 턱관절이 절제된 모양새로 움직였다. 얌전히 씹는 행위를 끝낸 권 대표가 목을 꿀렁이고는 깔끔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약해 빠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갈 생각을 다 했다니 의외네.”
“…그럼 지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면 되잖아요.”
너무 간단하고 쉬운 문제였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승원에게 방문을 허락하면 되는데.
“싫습니다.”
다시 돌아온 거절이 따끔했다.
“윤승원 씨가 거길 들어간다고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
“내가 장담하는데, 윤승원 씨는 그 새끼 털끝 하나 못 건들 겁니다.”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압니다. 내가 봤으니까.”
승원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편린이었다. 얼굴을 눈물로 가득 적신 채로 처절하게 흐느끼던 승원의 어린 얼굴이 다시 떠올라, 권 대표는 홀로 버석한 미소를 지었다. 나사가 반쯤 빠진 정신으로도, 자신이 전부 손봐 주겠다는 말에도 승원은 몇 차례에 걸쳐 보복을 거절했다.
승원이 그토록 거절했던 것은 권 대표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승원이 가진 분노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윤승원 씨는 내가 옆에 있어도 그 새끼 못 건드려요.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천성의 문제입니다.”
“…….”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거라고.”
승원이 입을 떼려던 순간, 룸 도어가 열리고 테이블 위로 갖가지 음식들이 세팅되었다. 색색의 음식들을 정결하게 차리는 종업원의 손만 가만히 따르며 승원은 문이 다시 닫히길 기다렸다.
“대표-.”
“그리고…….”
종업원의 걸음 소리가 희미해질 무렵 둘의 오디오가 동시에 맞물렸다. 권 대표가 먼저 승원에 가볍게 턱짓했다.
“먼저 말하세요.”
“…아닙니다. 대표님 말씀하세요.”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것이라 말하던 의도를 묻고 싶었다. 칭찬인지 책망인지, 권 대표의 표현 방식으로는 쉽게 유추해 볼 수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승원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저 입으로 좋게 이야기해 줄 리가 없는데. 이미 정해진 것을 묻는 듯이 뻔한 행위밖에 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죠.”
그의 말에 승원은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접시에 비하면 한 줌 될 것 같지도 않은 작은 음식들이 눈앞에 어지럽게 차려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을 가진 새우전을 들어 입에 넣은 승원은 권 대표가 제 접시에 올려 두었던 계란말이도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식감 사이에 돋보이는 달콤함이 식도 뒤로 넘어왔다.
앉아서도 높은 키를 자랑하는 권 대표는 눈을 지그시 내린 채 자신의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승원은 간간이 그를 바라보며, 남은 반찬들을 열심히 제 그릇에 옮겨 입에 넣었다. 그와 함께 섞여 나오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승원은 권 대표가 하려던 말이 몹시 궁금했다. 얼른 그가 적당히 목 넘김을 마치고 하려던 말을 했으면 좋겠는 마음이었다.
“먹을 만합니까.”
한참 동안 잠잠히 이루어지던 식사 사이에 권 대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넘어 왔다. 승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에 얘기했던 3개월이라는 시간 말입니다.”
그는 갑자기 본론으로 예상되는 화젯거리를 끌어 가져왔다. 젓가락으로 의미 없이 음식들을 조각조각 자르고 있던 승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넉넉잡아 소요될 거라고 예상했던 시간이 3개월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약혼 상대와 관련된 일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사이에 무언가 방패 삼아야 할 일이 있다면, 그럴 때 윤승원 씨와 함께할 생각이었고.”
조곤조곤 내뱉는 음성엔 음률이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기에, 승원은 묵묵히 권 대표가 꺼낼 다음의 말들을 기다렸다.
“그런데 내 예상보다 훨씬 금방 약혼 상대가 물러나 줬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빨리 포기할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호모 스캔들을 가진 상대를 약혼자로 두려고 하니 그게 그렇게 좆같은 모양이었는지.”
말을 중얼거리던 권 대표가 잠시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풀었다.
“날 개 잡듯이 잡진 않을까 걱정했던 집안도 생각보다는 조용하고.”
“…….”
“허무하기 짝이 없는 소리 같긴 하지만.”
승원이 숨을 죽였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덧붙였다.
“윤승원 씨가 더 수고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한 달이나 됐을까 한 시간이었다. 권 대표를 알고 지낸 초반에는 완전한 상식을 부숴 버린 채, 누구보다 상식적인 척하는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런 그에게 휘둘리며 제 안위를 스스로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딱하다고 생각했다. 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상대에게 맞추며 함께 있던 묵직한 침묵의 순간을 견디기 어려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엇나감을 발판 삼아 승원이 그에게 점차 스며들었다는 점에 있었다.
입맛이 싹 가신 입술이 빳빳하게 굳어 갔다. 승원은 물잔을 들려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제 약혼 상대 같은 건 없다는 말씀… 이신가요.”
“당장은 없지만, 잠재적으론 있다고 봐야지.”
“그게 무슨.”
“선 자리는 계속 있을 겁니다. 내가 그 이상으로 끌고 나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권 대표는 승원을 보지 않고 양념장에 고기를 한 점 찍어 입에 넣었다.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씹고 삼키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승원은 뱃속이 마구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윤승원 씨한테 말했던 3개월은 당장 목전에 두고 있던 내 결혼을 파혼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고정적인 약혼 상대가 자리를 떴으니, 내 쪽에서도 한시름 덜게 되는 거고, 윤승원 씨도 더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하지만 계속 선은 보신다고.”
충분하게 설명을 해 줬다고 생각했는데도 승원은 다시 질문을 내뱉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권 대표가 물로 입을 축였다. 잔을 내려놓은 그의 시선이 삐딱하게 승원을 향했다.
“선을 보는 게 왜.”
“…선을 보신다는 말은, 언젠가 다시 약혼자를 두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럴 일 없습니다.”
깔끔하게 절단한 말끝으로 그가 이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시늉이라도 해야 집안이고 언론이고 덜 귀찮게 할 테니까. 그 정도만 내가 감내하고 가겠다는 거지. 어차피 결혼은 추호도 생각이 없는데, 선을 보는 거 자체에 문제가 될 만한 게 있어요? 내 의지가 없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승원은 여전히 허공 어딘가를 멀찍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귀를 타고 들어온 권 대표의 목소리가 체내의 구멍들로 다시 하릴없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는데 갑자기 맞선 절벽처럼 더는 디딜 땅이 보이지 않았다.
승원은 선을 보게 될 권 대표의 얼굴을 상상했다. 미세한 감각마저 전부 새겨 두었던 그의 수십 가지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자연히 그려지는 드라마 속 주인공과 같은 권 대표는 어김없이 쫙 빼입은 정장 차림으로 값비싼 레스토랑이나 호텔 따위에서 식사나 차를 마시며 맞은편의 여자와 대화를 나눌 것이었다. 그 여자 역시 권 대표와 마찬가지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집안, 스펙,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자일 테고.
알 수 없는 사이에 스며드는 감정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마음은 자기가 조절한다고 마음대로 뒤집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에 선본 상대가 훗날 대표님의 약혼 상대가 되어서, 다시 파혼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그때는 다시 자신이 필요해지지 않겠냐는 말이 하고 싶었다. 목 끝에서 출렁댈 뿐, 그 이상 터져 나오지 못하는 말머리를 꾹 삼킨 승원은 여전히 제 말을 알 수 없단 듯이 바라보는 권 대표를 마주해야 했다.
“선을 본 상대가 내 약혼 상대가 될 일이 없다니까.”
“…….”
“그 이상의 진도를 나갈 생각이 없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야기는 맥을 잃고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순간 승원은 목젖 너머로 올라온 해일과도 같은 말을 토해 냈다.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뭐?”
권 대표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자신에게 캐묻는 듯한 승원의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승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잖습니까. 싫다가도 좋고, 좋다가도 싫은 게 사람 마음인데…. 대표님이 아무리 밀어 내려고 한들, 상대 쪽에서 좋다고 밀어붙이면 약혼이야 금방 성사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분명 권 대표의 본래 약혼자 역시 권 대표보다 상대 쪽이 더욱 원한 결혼이었을 거라고 승원은 짐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승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분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또 한 번 권 대표의 상대가 된다 한들, 그의 말처럼 쉽게 끝낼 수 있을 리 없을 것이 분명했다. 상대 쪽에서 싹을 틔운 호감과 감정까지 권 대표의 의지로 꺾을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그리고… 대표님이 그분을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윤승원 씨.”
가만히 듣고 있던 권 대표가 승원의 이름을 불렀다. 승원은 어깨를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서운한 마음이 들 필요가 전혀 없는데, 자꾸만 속이 뒤집히듯 울렁거렸다. 방금까지 먹었던 음식들이 다시 게워져 나올 것만 같았다.
권 대표는 어두운 낯을 한 채였다. 불쾌감을 잔뜩 스민 얼굴이 사나웠다.
“윤승원 씨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입니까.”
고고한 음색이 바닥을 기듯이 낮고 서늘했다. 힘겹게 떨고 있던 심장이 그 차가운 말 한마디에 울컥, 눈물샘을 쥐어짰다. 승원의 눈가 위로 축축한 물이 차올랐다.
“나랑 뭐 얼마나 같이 지냈다고 나에 대해 파악이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는데. 듣기에 굉장히 거북하고 불쾌하네요.”
“…….”
“내가 초반에도 얘기하지 않았나? 나는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좋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들 다 하는 감정 소모에 나까지 빼앗겨 아까운 시간 할애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이걸 왜 일일이 윤승원 씨한테 설명하고 있어야 되는지도 모르겠는데.”
권 대표가 했던 말은 모조리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던 승원이었으므로, 초반에 얘기했던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원은 여전히 피어나는 불안과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걸…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통제합니까-.”
“왜 못합니까, 그걸?”
승원은 순간 말을 잃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은 말이 그대로 승원에게 눈덩이처럼 되돌아왔다.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좋아하고 싶지도 않다는 저 말은 말로만 던진 방패가 아니었다. 심지가 굵은, 날카로운 칼이 박힌 껍질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감정 하나 조절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는 듯이 구는 저 자세는 정말 그딴 것 따위로 단 한 번도 감정 소모를 해 본 적이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대표님은 그럼, 지금 아까운 시간 할애해서 저랑 왜 밥을 먹고 계신 겁니까?”
날카롭게 좁아진 권 대표의 인상이 정면으로 마주한 승원을 보고 더욱 험상궂게 바뀌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던 남자는 곧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려 상대를 비웃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테이블을 넘어왔다. 눈물을 간신히 삼켰지만, 함께 적셔진 목소리까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뜨거운 무언가 흐르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물이 잔뜩 차오른 눈동자 너머로 시야가 아득했다. 승원은 바들바들 떨며 눈을 감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힘을 주고 입술을 씹었다.
왜 이렇게 배신감이 밀려드는지, 입술을 씹어 내는 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아 승원은 발가락을 잔뜩 오므리고 손을 터질 듯이 쥐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권 대표가 승원을 바라봤다. 지독히 차분한 음성이 건너왔다.
“난 윤승원 씨와 함께 있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가늘어진 눈초리가 승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윤승원 씨와 하는 것들은 감정 소모가 전혀 들지 않는데, 내가 불편함을 느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
“애초에 이게 아까운지 아닌지 따위를 저울질할 만한 거리도 아니고.”
잠시 뒤집히는 듯했던 판도는 다시 심해를 향해 엎어졌다. 기어코 승원의 눈 밑으로 굵은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눈을 감지 않아도 한도를 넘긴 물들이 뺨을 타고 넘쳐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것을 흘리듯이 말하던 권 대표가 승원의 얼굴을 보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미세한 짜증이 스민 음성이 묻어 나왔다.
“…웁니까, 지금?”
승원의 눈물이 가진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권 대표는 이해 불가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발가벗겨진 채 전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옷을 올리라는 그의 말을 듣고, 다리를 벌려 나신을 내놓은 채로 손가락이 쑤셔지는 행위를 당하는 것보다도 훨씬 수치스러웠다.
혼자서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호감이나 기대 따위는 떨어진 눈물에 젖어 전부 흘러내렸다.
“윤승원 씨.”
“……대표님은.”
승원이 티슈를 뽑아 얼굴을 묻었다. 얇고 하얀 종이가 물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하게 흐물거렸다. 긴 침묵을 묶은 채, 한동안 눈물을 닦아 내던 승원은 마지막으로 코를 닦고 쿵쾅대는 심장을 잠재웠다. 숨을 길게 쉬고 권 대표를 마주했다. 눈 주변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대표님은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는데. …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계속 승원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반복된 우연의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내밀던 선의나 연민 따위의 손길 때문이었을 것이다. 승원을 귀찮게 하는 것들을 치워 주겠다고 약속했으므로, 그는 정말 철저하게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던 것뿐이다.
머리로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재단할 줄 알았다면, 세상에 상처를 받을 사람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보 같은 선택지를 고르고 후회할 사람이 생겨날 일이 없었다.
승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저는 계속 대표님이랑 같이 지낸 시간에 의미를 담아 두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무슨 의미를 말입니까.”
“…제가 설명해 드린다 한들, 이해하실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 대표가 침묵했다. 승원의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질 줄 알았던 그는 생각보다 잠잠한 표정이었다. 느릿하게 뜨고 감는 눈이 승원을 응시했다.
“그래서 저는 대표님이랑 같이 있던 시간들이… 너무 아깝게 느껴집니다.”
외줄 타듯 중심을 간신히 유지하던 목소리로 승원은 힘겹게 내뱉었다. 말을 하면서도 비참했다. 일말의 기대라도 하고 있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동요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권 대표가 원망스러웠다.
권 대표의 어깨에 시선을 걸치고 있던 승원은 뻑뻑한 눈을 매만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코트에 팔을 다시 넣었다. 권 대표의 시선이 저를 따라 길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승원은 그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식사 파트너는 다른 분 알아보세요. 저 말고도 말동무 되어 드릴 분은 많다고 생각합니다.”
“윤승원 씨-.”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험악하게 날을 세운 부름을 무시한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승원은 입술을 꼭 말아 물고 복도를 지났다. 갖가지 음식들과 탕 요리를 실어 트레이를 밀고 들어오던 종업원은 식사 도중에 자리를 뜨는 손님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카운터로 향한 승원이 계산을 요구했다. 아직 식사 도중인데 괜찮겠냐는 말에 괜찮다며 작게 대답한 승원이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긁고, ‘감사합니다.’라는 목소리를 그대로 무시한 채 밖으로 나온 승원은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물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하게 내리던 눈발은 어느덧 비가 되어 바닥과 건물을 적시고 있었다. 내리는 비로부터 번지는 산만한 소음을 빌려 승원은 내내 삼키던 울음을 끄집어냈다. 터져 나온 눈물이 멈출 줄을 모르고 쏟아졌다. 고개를 내린 채 입을 벌리고 서러움을 모두 토해 냈다.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뜬 승원은 검은 화면으로 가득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도로 이불 속으로 파묻혔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에 거슬렸음에도, 그것들을 치울 기력도 들지 않아서 묵묵히 안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한참 동안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승원은 푸석하게 느껴지는 얼굴과 뺨 언저리를 손으로 만져 보다가, 이불을 걷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에 있던 거울에 모습을 비추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공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볼 주위에 들어 있던 멍은 다 사라지진 않았지만, 저번과 같은 통증은 없었다.
대신 눈자위와 코 옆까지 내려와 있는 붉은 홍조가 거슬렸다. 창백한 얼굴에 띄워진 붉은기는 꼭 굉장한 설렘을 느끼곤 부끄러움에 못 이겨 볼을 한껏 달군 어린아이 같았다.
새벽 내내 잠이 들면서도 좀처럼 서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어 승원은 한참 동안 베갯잇을 적셨다. 그 바람에 퉁퉁 부어오른 눈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라면 이 몰골 그대로 방송국에 나가도 저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감히 저를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기대는 하지도 않았고, 설레발을 친 적도 없다.
다만, 적어도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무감동한 그의 말 몇 마디로 승원은 지금껏 제가 조심스레 가꿔 왔던 마음을 전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문을 두드려 보지도 못했는데 쫓겨났다.
승원은 거실로 나왔다. 햇살을 전부 막고 있는 커튼을 내버려 둔 채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를 열어 먹을 걸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권 대표가 줬던 조각 케이크만이 눈에 들어와, 승원은 그걸 꺼냈다. 상자 껍질을 벗겨 내고 그대로 포크를 들어 한 부분을 잘라서 입에 넣었다. 허한 빈속을 적시는 달콤함이 불쾌했다.
전부 끝난 기분이었다. 이제 더 만날 이유가 없을 거 같다고 말하는 권 대표를 다른 구실을 끌고 와서라도 붙잡았어야 하는데. 처절하게 보일 제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승원은 그에게 마음을 내보이기 전에 제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자신이 인정했듯이, 권 대표와 자신은 어차피 갑을이 정해진 관계였다. 그게 신체적이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승원이 을인 결말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그에게 마음을 내놓을 준비를 하던 자신이 온당히 받을 수밖에 없던 대가였다.
씹고 있던 케이크가 퍽퍽하게 느껴졌다. 자잘한 먼지처럼 조각을 내 아이가 밥투정을 하듯 부스러기를 의미 없이 입에 집어넣던 승원은 순간 어깨를 흠칫 떨었다.
띵동-.
문밖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였다.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던 승원은 띵동, 띵동 재촉하는 벨소리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선명하지 못한 픽셀 화면 안을 가득 채운 넓은 몸이 보였다. 어깨가 꽉 차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승원은 갑자기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은 조바심을 느꼈다. 옷차림을 확인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을 마른 손바닥으로 한참 동안 감싸고 문질렀다. 그래 봤자 바뀌는 건 없지만 조금이라도 멀쩡해 보이고 싶었다.
인터폰에 비치는 사람은 분명 남자였고, 자신의 집을 찾아올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배신감이나 비참함 따위가 엉켜 울렁거리던 속이 긴장감에 잔뜩 수축되었다. 간사한 마음은 혹시 그일까 하는 터럭만 한 기대로 세차게 뛰었다.
맨발로 현관 복도를 뛰어나간 승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어 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연 틈으로 인터폰으로 마주했던 널따란 몸이 나타났다.
“…….”
“윤승원 씨 댁 맞죠?”
벌어진 틈으로 나타난 남자가 승원을 기웃거리며 바라보았다. 손에 단말기 같은 것을 들고 있던 남자의 등 뒤엔 복도 천장이 닿을 정도로 커다란 무언가가 세워져 있었다. 힘이 빠진 손이 스르륵, 문고리를 놓쳤다. 승원은 쿵 내려앉은 심장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잘못 찾아오신 거… 같은데요.”
“윤승원 씨 아니에요?”
“……맞아요.”
“그럼 맞습니다. 옆으로 나와 주실래요? 소파가 커서 들어갈까 모르겠네.”
승원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남자의 이마 주변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얼른 들어갑시다.’ 우뚝 서 있던 소파 뒤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두 명이 함께 온 듯 보였다.
입을 꼭 다 물고 바보같이 서 있기만 하는 승원이 답답했는지, 기사는 승원을 옆으로 슬쩍 밀어 두고는 현관문을 끝까지 열어젖혔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기사 둘은 사람 키가 훌쩍 넘는 소파를 들어 올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뭐라고 중얼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맞죠? 진짜 무겁네. 등의 시답잖은 대화들이었다. 승원이 뒤늦게 거실로 들어섰을 땐 이미 원래 있던 소파가 치워지고 새로운 소파가 비닐이 벗겨진 채 마련되어 있었다.
“이건 저희가 수거할게요.”
“……네.”
땀을 잠시 닦던 남자들은 가죽 끝이 너덜너덜한 승원의 소파를 다시 들었다. 비닐을 싹 뜯어낸 소파가 덩그러니 거실 한가운데에 남았다. 제 할 일을 마치고 남자들이 떠난 자리에 디리링, 짧은 도어 록 잠금 소리가 들렸다.
원래 놓여 있던 소파는 어두운 고동색에 그마저도 색이 바래 밝게 물들어 있었다. 그에 비해 매끈한 표면을 자랑하는 새 소파는 옅은 회색이었다. 올드하기만 하던 본래 소파보다 집안 분위기와 훨씬 잘 어울리는 디자인과 색상이었다.
승원은 소파에 다가가 가죽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자리에 앉자 시트가 푹 꺼지는 듯하더니 이내 적당한 높이로 매끄럽게 엉덩이를 감쌌다. 소파 끝 손잡이에는 제논의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새 가구에서 나는 특유의 매운 냄새에 코끝이 시렸다.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댔다. 푹 감기는 몸이 편안하게 가구에 닿았다. 눈을 감은 승원이 몸을 뒤척였다.
승원의 집을 다녀간 권 대표의 흔적이 거실 한쪽을 꽉 채웠다. 이러면 잊어 보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제 인간관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결국 바닥에 드러누워 고집을 피우던 애새끼는 저 자신이었다는 사실만 더욱 체감할 뿐이었다.
***
세상을 빨리 감기 한 것처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승원은 그동안 얼굴에 생긴 멍을 지우는 데에 힘썼고, 다행히 나흘 정도가 지나자 멍은 흔적을 거의 찾을 수도 없었다.
미리 받은 대본 등을 확인하며 연습에 돌입하다가도 간간이 잡혀 있는 화보 촬영 등을 소화했다. 머리는 텅 비운 채 몸만 바쁘게 움직이니 승원은 집으로 돌아오면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소파에 그대로 누워 기절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배우 미팅이 있는 오늘은 이른 오후부터 폭설이 쏟아졌다. 항상 제시간에 맞춰서 오던 곽 매니저가 웬일로 지각을 했다. 승원은 그의 사정들을 들으며 멍하니 서리 낀 창을 바라봤다. 서 있기만 해도 귓불이 붉게 물드는 추운 날씨여서인지, 자동차 엔진도 통 말을 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간신히 지각을 면한 승원이 제일 마지막 주자로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남은 인원은 이미 저마다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오늘 모인 사람은 김 감독과 윤 작가, 차서희 배우가 전부였다. 승원은 바짝 긴장한 채로 그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그 자리에 있는 생수 한 통을 다 비웠다.
“승원 씨랑 서희 씨 처음 보는 사이인가?”
“아-.”
“아니요, 몇 번 봤어요. 이번에 시상식에서도 봤고.”
입을 떼려던 승원이 차서희를 바라보자, 그녀가 눈가를 살짝 접은 채 생긋 웃어 보였다. 승원은 처음 가까이서 보는 티비 속 미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많이 뵈었어요.”
“어머, 근데 왜 인사 안 했어요?”
“아, 그게.”
“서희 씨 짓궂네. 승원 씨 이제 더 마실 물도 없다. 하하.”
둘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김 감독이 넌지시 농담을 내뱉었다. 승원을 제외한 모두가 어깨를 가볍게 털며 웃었다. 차서희는 승원을 보며 ‘그러려고 한 말은 아니에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차서희는 그 사이에 머리를 자른 건지 팔뚝까지 내려와 있던 긴 생머리가 어깨선에 닿아 있었다. 안 그래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한껏 더 차분하고 진중해 보였다. 속눈썹이 둥글게 올라간 눈과 오똑하게 솟은 동그란 코끝, 여유롭게 끌어 올린 입꼬리가 자신감 넘쳐 보였다. 승원은 순간, 저 위풍당당한 얼굴에 위축이 될 뻔한 자신을 자책했다.
한참 작품과 대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조연 배우는 누구누구를 생각하고 있으며 그중에 너희들은 친한 배우가 있냐,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앞으로 캐릭터가 소화해야 할 이미지는 어떤 식인데 잘할 수 있겠냐는 요구사항들이 오갔다. 승원은 열심히 경청하고 메모하며 펜대를 돌렸다.
“근데 우리가 제일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게 있는데.”
김 감독이 화제를 바꿔 한 마디를 툭 내뱉자, 옆에 앉아 있던 윤 작가가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거는 애들이 보는 드라마가 아니야. 15세라고는 하는데 완전 어른들용이라고. 편성도 11시에 되어 있고.”
승원은 김 감독이 무슨 말을 할지 얼추 알 것 같기도 했다.
“뭐 정말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할 건 아니지만, 키스신이나 스킨십이 들어간 장면들은 화끈하게 해 줬으면 좋겠는 마음이 크지. 이건 자기들이 우리랑 함께하기로 한 이상 잘 따라와 줘야 해.”
당연한 걸 묻는 듯해서 승원은 얼른 알았다며 대답했다. 차서희 역시 ‘당연하죠.’라며 대꾸했다. 새삼스러운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저 정도는 감안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정 감독의 밑에서 일하며 수도 없는 성적 수치심을 느꼈던 승원이었다. 그런 장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었는데도, 승원은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 김 감독의 자세는 승원이 절을 하며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어느덧 블라인드 너머로 보이는 창밖은 깊은 밤하늘로 물들어 있었다. 이대로 보내기 아쉽다던 김 감독은 서로 더 친해질 기회가 언제 있겠냐며, 뒤로 시간이 비냐고 물었다. 모두 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냉큼 와인과 맥주 등을 차려 온 그가 대본이 있던 테이블을 치우고 갖가지 안줏거리들로 공간을 채웠다.
“승원 씨는 술 잘 먹어요? 서희는 잘 먹는 거 이미 알고.”
숏컷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윤 작가가 잔을 채워 주며 승원에게 물었다.
“많이는 못 먹는데, 그래도 분위기 같이 띄울 정도는 돼요.”
“잘됐네. 편하게 마시다가 가요. 언제 이렇게 여유 내서 보겠어.”
“네. 감사합니다.”
“승원 씨가 스물여섯이죠? 제가 스물여덟이에요.”
“오, 그러네. 서희가 두 살 더 많구나? 누나네, 누나.”
어느새 비즈니스 껍질을 벗겨 낸 자리엔 가벼운 반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지금 보니 승원을 뺀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 듯 보였다.
“에이, 처음 본 사이에 뭘 누나예요. 감독님도 참.”
그렇게 말하면서도 차서희는 내심 승원의 호칭이 무엇일지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차서희가 보기에 승원은 다른 남자 배우들과는 다르게 다소곳하고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외모와는 다르게 겸손해 보이는 승원은 여전히 이 자리가 적응되지 않는지 뻣뻣하게 굴었다. 이 자리까지 치고 올라온 신인치고는 굉장히 조심성 있고 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차서희의 눈에도 승원은 순딩이 그 자체였다.
“뭐라고 부를 거예요?”
“……편하신 대로.”
“저는 진짜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럼… 그냥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정중한 물음에 모두 웃음을 빵 터뜨렸다.
“아하하, 누나래. 너무 귀엽다.”
“키도 크고 얼굴도 훤칠해서 그렇게 안 봤는데. 승원 씨 완전 애네.”
“어우, 그럼 얘가 애기지. 스물여섯이면… 와, 나 대학 다닐 때가 대체 몇 년 전이냐, 그게.”
“감독님 그런 거 세어 봤자 감독님만 손해인 거 아시죠.”
“그런가?”
끊이질 않는 웃음에 그 사이에 있던 승원은 멋쩍은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승원 혼자서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경직됐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진 듯 보였다. 바짝 세워 놓았던 어깨에 힘을 푼 승원은 다 함께 드는 잔을 함께 따라 들며 그들과 함께 건배를 외쳤다.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차서희는 먼저 자리를 떠서 없었고, 윤 작가와 김 감독과 함께 남은 승원은 팔을 걷어 작업실 테이블에 남은 술병들과 음식들을 치우는 것을 도왔다.
뒤늦게 곽 매니저에게서 15분 뒤에 도착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승원은 취기가 올라온 볼을 꾹꾹 누르며 테이블에 앉아 대본을 다시 훑었다. 물론 따로 노는 활자들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한바탕 에너지를 소진하고 난 뒤라 다들 텐션이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나긋하게 귓가로 들려오는 티비소리가 잔잔한 라디오 같았다. 뭉툭한 대본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승원은 술이라도 깨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나간다고 하면 더 있으라고 붙잡을 거 같아, 차가 와 있다고 둘러댄 승원은 90도로 인사를 하고 작업실 밖을 빠져나왔다.
작업실은 독립 주택 단지 안에 있었다. 승원은 현관밖을 나와 하얗게 뒤덮인 땅을 밟았다. 꽝꽝 얼어붙은 작은 연못 옆 돌다리를 지나서 아치형으로 둘러져 있는 마당 대문 밖을 빠져나오자 메마른 아스팔트 위로 하얀 가로등 조명이 둥글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코트 깃 안쪽으로 입술을 파묻은 승원은 소복소복한 눈 위를 무의미하게 밟았다. 미끈거리는 바닥은 조금만 발을 헛디뎠다가는 자빠지기 딱 좋을 듯했다.
“…….”
수십 분쯤 더 기다렸을까. 시린 볼을 손등으로 만지면서 발끝으로 눈 위를 살살 건들고 있던 승원은 옆얼굴에 비치는 환한 헤드라이트에 고개를 들었다. 승원이 기다리는 건 검은 밴인데, 길목으로 들어서는 차량은 은색 외제 차였다.
좁은 도로를 지나는 데에 자신이 방해될까 싶어 대문 턱으로 발걸음을 옮긴 승원이 벽에 붙어 섰다. 오지 않는 곽영찬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되어 핸드폰을 막 들었을 때, 지나치려는 듯 보였던 차량이 스르륵, 승원의 앞에 멈췄다.
앞을 훤히 비추던 헤드라이트가 브레이크등으로 바뀌며 양옆을 빨갛게 비췄다. 대문 앞을 가로막고 선 차량을 유심히 바라봤지만, 선팅된 차창엔 뺨이 붉은 제 얼굴만 비칠 뿐이었다.
“윤승원 씨.”
앞 좌석을 둘러보고 있던 승원은 부름에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권 대표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처럼 완벽한 자태를 지닌 남자의 이마 밑으로 머리칼 한 올이 느슨하게 내려와 있었다. 늘 백 퍼센트를 추구하던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어딘가 한 끗 비틀어진 모습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조그마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삼백안의 눈을 치켜뜬 그의 눈꺼풀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에게선 차가운 겨울 냄새를 이길 정도로 코끝이 찡한 위스키 냄새가 났다.
“타요.”
승원이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달칵, 소리와 함께 그가 육중한 차 문을 밀어 열었다. 어두운 차 안에 커다란 몸을 비스듬하게 시트에 걸친 채 긴 다리를 꼬고 있는 권 대표가 보였다. 머리가 아픈 건지 잠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던 권 대표가 승원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빨리.”
낮은 음성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며 목을 울리는 것 같았다.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듯 화를 억누르는 그의 태도에 승원은 천천히 차에 올라탔다. 권 대표가 옆자리로 비켜섰지만, 그는 불건전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원이 쓸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널널하지 못했다.
“출발하세요.”
권 대표의 말 한마디에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원은 급한 대로 운전 중인 김 실장에게 시선을 틀었다. 승원의 인기척을 알아챈 것인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김 실장이 그에게로 시선을 살짝 틀어 눈인사를 건넸다. 물어 봤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윤승원 씨.”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짙은 음색이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뜬 권 대표가 무거운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채 승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온통 새까만 와중에 그의 눈동자만 형형하게 빛났다.
“술 마셨습니까.”
권 대표가 승원의 어깨 한쪽을 콱 붙잡아 당겼다. 시트에 아프지 않게 쏠린 몸이 권 대표와 가깝게 좁혀졌다. 어깨가 맞닿은 거리에서 그가 공기 중의 냄새를 맡는 건지 고개를 살짝 틀어 승원의 몸을 살폈다. 승원은 그런 권 대표를 옆으로 밀어내고 최대한 멀리 자리를 고쳐 앉았다.
“마셨습니다.”
“…나도 마셨는데.”
말하지 않아도 권 대표는 이미 온몸으로 자신이 만취 상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속이 쓰릴 정도로 역한 양주 냄새와 풀어진 동공, 비뚤어진 자세까지. 그나마 멀쩡한 발음과 목소리였기에 그와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직 찬기가 다 빠지지 않은 코트를 급하게 더듬어 핸드폰을 꺼낸 승원은 곽영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기고, 우렁찬 곽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원은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어디까지 오셨어요? …그게, 안 와 주셔도 될 거 같아서요. 네. 갑자기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그냥 바로 돌아가시면 될 거 같아요. 네.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귀 한쪽에 붙은 핸드폰을 두 손으로 잡은 승원이 소곤거리며 그에게 연거푸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도로를 달리는 차체의 적당한 움직임과 차 밖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음들, 그 안에 곁들어진 승원의 고요하고 맑은 목소리. 그림자처럼 보이는 소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 대표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먹잇감을 눈에 앞둔 짐승처럼, 그는 승원의 전화가 끊어지기만을 숨을 죽여 기다렸다.
“남자?”
어렵사리 통화를 마친 승원이 핸드폰을 내리자마자 권 대표가 건넨 물음이었다. 승원은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어 두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매니저입니다.”
아, 매니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쁜 새끼는 아니고?”
“…아닙니다, 나쁜 새끼.”
“그거 아쉽네.”
섭섭해하는 말투에 승원이 눈을 들어 권 대표를 바라봤다. 다른 곳을 보고 있으리라 짐작했던 그는 승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위로 치켜뜬 눈동자는 어딘가 초점이 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정확히 승원을 저격하고 있는 새까만 동공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음률 없는 톤으로 갑작스레 물었다.
“나한테 아직도 화났습니까.”
“…제가 왜 대표님한테-.”
“그래서 연락 한 번 없었던 거 아닙니까.”
가만히 있던 권 대표가 승원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베일 듯 날카로워 승원은 눈을 피했다. 뱉은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색 짙은 알코올 향이 났다. 그의 눈이 승원을 샅샅이 핥아 내렸다.
“밥 먹다가 갑자기 울지를 않나, 혼자 얼굴 붉히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를 않나.”
“…….”
“계산은 왜 윤승원 씨가 합니까? 대접은 내가 다 했는데, 기분은 윤승원 씨가 내요?”
승원은 작게 입을 벌린 채 눈을 내리깔았다. 팔뚝을 잡고 있던 권 대표의 손이 위로 올라와 어깻죽지를 잡더니, 엄지손가락을 벌려 승원의 목선을 쓸어내렸다.
“소파까지 받아 놓고 입을 싹 다물고. 어떻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합니까.”
“…저는 소파 선물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승원의 입술 언저리로 떨어졌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가볍게 헛웃음을 내뱉던 권 대표가 머리를 잠시 내리고 있다가 제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윤승원 씨 얼굴이 빨갛네.”
“……저도 술을 마셔서.”
“멍은 이제 감쪽같습니다. …어두워서 그런가.”
권 대표는 갑자기 다른 소리를 해 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진득하게 훑어 내렸던 자신의 시선과 태도 등을 전부 잊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했다.
승원도 골이 아프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깨우려던 정신은 갑자기 맞닥뜨린 권 대표의 등장으로 전부 도루묵이 된 참이었다. 권 대표가 한참은 더 취해 있어서 비교적 멀쩡해 보일 뿐, 승원 역시 취하긴 마찬가지였다.
차는 계속 달렸고 머릿속의 스위치가 켜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고작 몇 분의 시간이 엿가락을 늘어뜨린 것처럼 길게 지속되는 기분이었다.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호텔.”
단답으로 대답한 권 대표가 차창으로 시선을 넘겼다.
“기분이 좆같을 때가 있는데.”
“…….”
“그럴 땐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이편이 낫습니다.”
“…….”
“지금 내 기분이 그래서.”
침착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음성엔 깊은 인내가 담겨 있는 듯했다. 들고 있던 머리를 아예 차창에 기대어 버린 권 대표가 시선만 틀어 승원에게 고정시켰다. 물이 엎질러지듯, 승원의 앞까지 미끄러진 시선이 축축했다.
차가 곧 호텔 로비 앞에 멈춰 섰다. 주황빛으로 수놓아진 조명이 부드럽게 회전문 앞을 감싸고 있었다. 차가 호텔 입구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미동 하나 보이지 않아 잠이 든 줄 알았던 권 대표는 센서가 작동하기라도 한 것처럼 잠들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몸이 차 안을 꽉 채울 듯이 들썩였다.
승원은 가만히 권 대표를 지켜보기만 했다. 감당이 되지 않는지 눈을 감은 채 옅은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고 있던 그가 차 문을 열었다.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가 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바깥으로 발을 내딛던 권 대표가 승원을 바라봤다.
“뭐 합니까, 안 내리고.”
“…제가 왜.”
다리 한쪽만 바깥으로 내놓은 권 대표가 상체를 승원의 가까이로 기울였다. 머리를 시트에 기댄 그의 이마 밑으로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길게 흐트러졌다.
“몸 하나 못 가누는데, 같이 올라갈 사람 한 명 정도는 필요할 거 아닙니까.”
떳떳한 그의 요구에 당황 어린 눈을 한 승원이 앞자리의 김 실장에게 시선을 틀려던 때였다.
“엘리베이터도 혼자 못 타서 내가 집까지 따라갔던 건 그새 잊었습니까?”
승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음성으로 속살거린 권 대표는 승원의 허벅지를 꽉 쥐고 있었다. 얇은 허벅지가 그의 손아귀에 다 들어왔다. 힘을 가득 실어 쥔 악력을 못 버틴 승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권 대표가 먼저 내렸고, 승원은 그가 빠져나왔던 문 쪽으로 이동해 나갔다. 문밖으로 몸을 다 빼기 직전, 김 실장은 승원에게 ‘부탁드립니다.’라며 짧게 인사를 남겼다. 정작 승원은 권 대표를 부축할 정신머리도 못 되는데.
승원은 목에 무겁게 떨어지는 권 대표의 팔을 걸고 호텔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의 머리가 힘을 잃고 승원의 어깨에 뜨겁게 닿았다. 목선에 닿는 권 대표의 입김에 솜털이 곤두섰다.
넓게 펼쳐진 벽 한쪽에 커다란 그림이 마구 휘갈긴 패턴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승원은 인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호텔 주위를 둘러보며 대리석 바닥으로 이루어진 로비 중앙의 러그를 한 발씩 밟아 갔다.
카운터로 가서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승원의 옆구리를 감싸고 있던 권 대표가 손가락에 힘을 줬다. 판판한 배에 실려 오는 악력에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나직이 읊었다.
“엘리베이터로 가세요.”
지친 목소리가 귓속으로 한가득 파고들었다. 앞으로 옮기던 걸음을 틀어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그를 이끌던 승원은 무게의 한계로 느끼는 피로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입은 옷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권 대표와 바짝 맞붙은 상태였다.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자 권 대표가 다시 목을 울렸다.
“48층.”
고개를 떨군 권 대표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승원은 얼른 그가 말한 층의 버튼을 눌렀다. 쿠웅,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승원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묵직한 무게로 그를 내리누른 권 대표가 바닥에 떨구었던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전방을 바라보던 승원의 시야 안으로 권 대표의 얼굴이 그늘처럼 들어섰다. 흐릿하게 비친 권 대표의 얼굴이 물에 닿은 물감처럼 사방으로 번져 보였다.
지그시 닿은 시선을 둘 중 누구도 먼저 피하지 않았다. 눈을 먼저 감는 사람이 지기라도 하는 게임인 듯 둘은 서로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
“…….”
권 대표의 눈이 승원의 긴 속눈썹을 관찰하다 곧 아래로 떨어졌다. 긴 콧대를 타고 내려온 눈동자가 승원의 인중을 지나 통통하게 살 오른 입술을 응시했다. 갑작스레 차오른 긴장감을 애써 넘기려는 찰나,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이 곧 승원의 시야를 덮었다. 뜨거운 입김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으, 읍-.”
그대로 들이받힌 입술이 권 대표에게 완전히 먹혀들었다. 승원은 반항 한 번 못하고 벌어진 입술 새로 침범하는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거침없이 헤엄치며 안쪽으로 파고든 혀끝과 함께 권 대표의 얼굴이 승원에게 더욱 가까이 밀착되었다. 엘리베이터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던 몸이 힘에 밀려 구석 벽 쪽에 쾅, 찧었다.
“흣, 읍…… 응.”
숨 쉴 틈을 아예 내주지 않으려는 건지 하나의 통로가 만들어진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들이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안쪽을 다 엉망으로 만들어 뚫을 듯한 기세로 들이받은 권 대표의 혀가 승원의 입 안 점막을 전부 빨고 핥았다. 축축한 것들이 서로 맞물려 내는 끈적한 소음이 엉겨 붙은 그들의 얼굴 새로 흘러나왔다.
승원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안 그래도 신체적 차이가 상당한 데다, 취기까지 올라 있는 권 대표를 제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음과 달리 바짝 달아오르는 몸이 뱃속을 서서히 덮쳤다. 딱딱한 벽에 닿은 뒤통수가 평평하게 갈리는 기분이었다. 전기가 어려 오는 듯한 손끝의 감각에 승원이 권 대표의 몸으로 바스락거리며 손을 올렸다.
“……그, 흐읏. 만……. 흐으.”
승원의 말을 들을 리 없는, 아니 들리는지도 확실치 않은 권 대표는 빠져나오긴커녕 오히려 승원의 혀를 옭아매 혀뿌리를 뽑아 버릴 듯 집어삼켰다. 붉은 살을 잔뜩 누르고 씹은 권 대표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승원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숨결이 목젖을 덮치고 부유했다.
주먹을 쥔 손으로 권 대표의 가슴을 밀었다. 물러날 생각이 없던 남자는 승원의 지속적인 거부에 겨우 입술을 놓아주었다. 한껏 달궈진 승원의 두 볼은 술기운에 젖어 들던 아까보다도 훨씬 더 야했다.
순간 넋을 놓고 그에게 입술을 내어 주던 어린 얼굴이 광대를 동글게 붉혔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옅은 숨을 토해 내는 승원의 눈 주변이 빨갰다. 곧 울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 마세요…….”
승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까이 밀착됐던 숨이 떨어져 나갔다. 얼굴을 들어 올린 권 대표가 피곤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멀쩡한 척하는 게 괘씸해서.”
제 눈을 꾹꾹 만지며 졸음을 이겨 내려는 남자가 다시 무겁게 기대 왔다. 승원은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며 잇새를 물었다. 충동처럼 빨려 들었던 황홀감은 어느덧 아랫배를 묵직하게 키워 배꼽 밑 다리 사이로 흔적을 남겼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서며 승원이 다시 그의 팔을 들어 몸에 둘렀다. 뺨 옆으로 붙는 어깨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복도 바깥은 사람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눅눅하고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조도가 낮아 어둑하게 이어진 복도로 승원이 발을 옮겼다. 승원의 어깨를 감싸 안은 권 대표가 느릿한 걸음을 따르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호텔 문에 다다르자 권 대표가 주머니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문에 가져다 댔다. 철컥, 소리를 내며 풀린 문을 승원이 열었다. 짧은 통로를 지나자 드넓은 거실과 침실이 한눈에 보였다. 승원은 작게 숨을 고르며 권 대표를 침실까지 데려갔다. 무겁게 걸쳐 있던 몸이 떨어져 나가고 승원은 탈력감에 침대 끝자락에 자신도 엉덩이를 붙였다.
승원은 고개를 돌려 누워 있는 권 대표를 내려다봤다. 팔을 얼굴 위에 걸치고 있는 권 대표가 잇새 사이로 색색 숨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옆에 누워 이대로 잠을 자고 싶다는 충동이 몸 안을 휩쓸었다.
일주일을 버텼던 것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미칠듯한 만족감과 안정감이 차올랐다. 그의 살결을 만질 수 없어 승원은 아쉬운 대로 그를 받치고 있는 이불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마음은 이미 저 널따란 품에 제 맘대로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승원은 애써 그를 외면하고 시선을 돌렸다. 한참 동안 침대 난간에 발을 올리고 있다가 아쉬움을 털어 내고 땅에 발을 디디려던 때였다.
턱, 손목이 강한 힘에 붙잡혔다. 여전히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쉬고 있는 권 대표가 승원을 가지 못하도록 억세게 끌어 잡았다. 풀어 보려 했지만, 수갑 같은 그의 압박에 꽁꽁 묶여 벗어날 수 없었다.
“…대표님-.”
“윤승원 씨 말이 맞았습니다.”
권 대표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무거운 잔류가 바닥에 남듯 느릿하게 가라앉는 음성이었다. 승원은 팔목이 붙잡힌 채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집에서 날 놔주질 않고, 내가 질릴 때까지 물어뜯을 생각이더라고.”
“…….”
“오늘 가족들이 다 모인 식사 자리에 나갔는데…….”
말이 빨리빨리 나오지 않는 듯 고뇌를 반복하던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권 대표가 차에서 이야기한 ‘좆같은 일’이라는 게 오늘 있었던 가족 식사였다는 것을 승원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여자랑 상견례라도 치르게 할 생각이었는지…… 번듯하고 단정한 여자 한 명을 같이 불렀습니다.”
“…….”
“웃긴 게 뭔지 압니까.”
반듯하기만 했던 권 대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내 원래의 낯으로 돌아온 그가 중얼거렸다.
“그 여자가 묘하게 윤승원 씨를 닮았습니다.”
“…….”
“…어디서 그렇게 닮은 여자를 데려와서. …아마 식장에 데려갔던 윤승원 씨 얼굴을 보고 어머니가 머리 좀 굴린 게 아닌가 싶던데.”
“…….”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실 내가 데려간 윤승원 씨도 다 가짜일 뿐인데. 그런 아들을 결혼시키겠다고… 윤승원 씨와 닮은 외모의 여자를 선별해 왔다는 게.”
승원은 그저 혼잣말처럼 내뱉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불이 들어와 있지 않은 호텔 방안은 넓은 창에 의지한 푸르른 야경의 불빛이 전부였다. 이런 말을 꺼낸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없던 승원은 찬찬히 방금의 말들을 더듬는 게 다였다.
“근데 더 미친 건.”
“…….”
“처음으로… 어머니의 그 같잖은 궁리에 넘어갈 뻔했다는 겁니다.”
느리게 번진 목소리가 승원의 귀로, 혈관으로,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권 대표가 금방 꺼냈던 말들을 더듬던 승원이 입술을 벌린 채 그를 내려다봤다. 까칠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권 대표는 어느덧 승원의 팔을 놓은 채였다. 그에게서 풀려났지만 승원은 자리를 박차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
“나는… 내가 지껄이고도 모르겠는데.”
“…….”
“윤승원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팔에 가려져 있던 권 대표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다시 승원의 팔을 당겨 이끌었다. 속절없이 밀린 몸이 권 대표에게 기대어졌다. 검은 배경에 유일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맞물렸다. 서늘한 표정을 그대로 둔 채 입술만을 움직이며 말을 꺼낸 권 대표가 무표정한 얼굴로 승원을 바라봤다. 어둠에 익은 두 눈이 그의 이목구비를 가득 담았다.
끈적일 정도로 낮게 깔린 권 대표의 음성은 그가 취기에 가득 젖은 자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에게 휘말려 나른하게 까라지는 몸을 애써 유지한 채 승원이 얌전히 그에게 물었다.
“얼만큼… 닮았습니까. 그 여자분이랑, 저랑…….”
미세하게 뜨인 권 대표의 눈동자가 승원을 잔잔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뗐다.
“……적당히.”
“…….”
“이목구비 자체는 이쪽이 훨씬 나은 수준이고.”
나긋하게 말을 마친 권 대표가 승원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또렷한 승원의 눈코입을 차례로 응시했다. 잔잔히 피어오르던 파도 위로 거센 빗줄기가 내렸다. 승원은 적당히 취해 있었다. 발끝까지 퍼진 취기가 다 날아가지 않은 채였다.
승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근한 목소리가 권 대표에게 닿았다.
“그러면….”
“…….”
“그 여자분이랑 결혼하실 건가요….”
침묵이 늘어졌다. 그 끝으로 권 대표가 담담히 대답했다.
“모르지.”
낮게 그을린 목소리였다.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마음에 드신 게… 아닌가요?”
“…마음에 들었으면 진작 결혼 약속이라도 하고 나왔겠지.”
“…….”
“박차고 나왔는데도… 기분이 더러워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듯했다. 승원은 그가 이 지경이 되도록 술에 취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러면 꼭….”
“…….”
“내가 윤승원 씨를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 같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아요?”
자신이 판단해야 할 몫임을 알면서도 권 대표는 승원에게 물음을 넘겼다. 작고 어린 얼굴 속 까만 눈동자가 작게 파도쳤다. 지그시 다문 승원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뺨 위로 어릿거리는 붉은 홍조가 조금 더 채도를 높였다.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던 승원이 마침내 입을 뗐다.
“대표님 취하셨어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승원은 곧 권 대표의 몸 위로 쓰러질 수 있을 정도로 제 상체가 그에게로 쏠려 있음을 깨달았다. 머리로는 뒤로 물러나는 제 모습을 상상했지만, 늘어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구 가위질을 당한 것처럼 차곡차곡 쌓인 기억들이 잘게 흩어졌다.
“멀쩡한 정신으론 못 할 소리니까.”
승원은 갑자기 확 당겨진 얼굴에 신음을 흘렸다. 권 대표가 그의 턱을 부술 듯이 붙잡았다.
“윤승원 씨나 나나. 취한 건 매한가지인데.”
“…….”
“내일 되면 다 잊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권 대표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그의 몸에 쌓여 있던 잔열이 저에게로 옮겨붙는 기분이었다. 깊게 깔린 목소리로 묻는 권 대표의 물음에 승원은 시린 눈을 감았다 떴다. 이미 그의 가슴 위에 올라간 손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 위에 어색하게 정체 중이었다.
권 대표에게서 취기를 옮은 듯이 승원의 몸이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이미 한참 전에 떠난 이성은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였다.
주변이 어두웠고, 여긴 그가 승원을 데려온 호텔이었으며, 둘은 모두 술에 젖어 정신이 아득했다. 승원에게 말을 건네는 권 대표는 지독한 위스키의 내음을 풍기며 앞뒤가 맞지도 않는 소리를 주절거리고 있었으며, 승원은 그런 그의 말을 멍하니 들으며 한 발짝 느린 대답을 지속했다.
그의 말대로 눈을 뜬 아침이면 전부 다 잊혀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내일이면 없어질 신기루이자, 다시는 잡기 힘든 동아줄 같은 바람이었다.
“…….”
승원의 뺨으로 이유 모를 눈물이 떨어졌다. 아까부터 서서히 차오르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던 탓이다. 술기운을 빌렸기에 그다지 민망하거나 수치스럽진 않았다.
승원은 충동 아닌 결심으로 제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애새끼 같던 투정의 끝은 손으로 헤쳐 다시 건져 올린 진심이었다. 그에게 기대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으며, 입을 맞추고 싶었다.
고개를 들던 권 대표가 이내 상체를 들썩였다. 거침없이 쳐들어온 혀가 승원의 입술 사이를 벌렸다. 벌써 그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이 미끄러지듯 안쪽을 개방했다. 안으로 파고든 혀가 사이사이를 찌르고 넘실댔다. 승원의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권 대표의 손이 그의 목선을 타고 떨어져 등허리를 단단하게 잡았다.
“으, 흣, 으응…….”
번듯하게 세워진 날 선 콧날이 서로 비스듬히 맞닿으며 부딪혔다. 코끝이 짓눌러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승원은 그의 옷깃을 잡고 놓지 않았다. 혀와 혀가 서로 얽히는 소리가 야릇했다. 권 대표가 점막의 껍질을 벗겨 낼 듯이 두꺼운 혀의 날을 세워 꾹꾹 눌렀다. 달뜬 숨결 사이로 오고 가는 적당한 알코올의 잔향이 승원의 광대를 더욱 뜨겁게 태웠다.
“……흣.”
순간 승원의 몸이 번쩍 들렸다. 감고 있던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검은 배경이 허공으로 붕 띄워졌다가 다시 밑으로 떨어졌다. 권 대표가 승원의 몸을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몸을 크게 움직인 와중에도 입술을 놔주지 않은 그가 얼굴을 더 가까이 밀어붙였다.
“……씹.”
“……하, 으, 읍…….”
틈 사이로 씹어 낸 욕을 삼킨 승원이 다시 그의 혀를 머금었다. 뒤통수로 넓고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머리칼을 단단히 받아 낸 손이 둥근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완전히 기댄 승원이 팔을 뻗어 권 대표의 목을 감쌌다.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손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빈틈없이 붙은 두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갑갑한 숨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흐느낌을 반복하는 승원의 혀를 삼키고 빨던 권 대표가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승원을 안은 채로 이동한 그가 승원의 어깨를 밀었다. 구름이 잔뜩 낀 듯 흐릿하던 시야가 휙 돌았다. 곧이어 푹신한 게 머리에 닿았다. 승원의 입술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흘러내렸다.
권 대표가 승원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딱 달라붙어 있는 팔 부분이 잘 벗겨지지 않자 그대로 가죽을 벗겨내듯 뒤집어 벗은 그가 셔츠를 뜯었다. 승원은 힘겹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뺨 밑으로 마른 눈물에 살갗이 간지러웠다. 공기 중에 뭉게뭉게 뜨거운 입김이 떠올라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왜 이렇게.”
권 대표는 한 손으론 셔츠 단추와 바지 버클을 풀어내고, 남은 손으론 승원의 두 다리를 잡아 양옆으로 벌렸다. 단추 몇 개가 후두둑,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마무리할 정신도 없이, 권 대표는 승원의 옷을 벗겨 냈다. 감싸고 있던 옷은 허물처럼 벗겨져 승원의 마른 몸을 드러냈다.
“하, 읍-.”
옷을 벗기 무섭게 그가 승원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권 대표의 팔에서 빠져나온 셔츠가 그대로 뒤집혀 침대 밑으로 축 처져 낙하했다. 단단하게 제 뺨 옆을 지탱하는 남자의 팔을 붙잡은 채, 승원은 혀를 빼고 턱을 치켜들었다. 다시 서로의 혀가 한 몸처럼 섞였다.
몽롱했다. 달콤하게 젖어 드는 타액에 완전히 빠진 몸이 어쩔 줄을 모르고 바들댔다. 목에 핏대를 가득 세운 승원이 그에게 숨을 빼앗긴 채 발가락을 오므렸다. 온몸이 마비될 듯이 뜨겁게 타올랐다. 생각이 많아질까 무서워, 승원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말의 것들을 순간순간 지워 버렸다.
“키스 잘해서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떼어 낸 입술이 점성을 드러내며 떨어졌다. 그가 맞닿은 거리에서 속삭였다. 안달이 난 몸은 반응이 빨랐다.
“…좋아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끝맺음이 덤덤해서 승원은 말의 의도를 한참 생각해야 했다.
“그냥… 아무렇게… 아무렇게나…….”
“아무렇게,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귓가에 파고드는 묵직한 음성이 승원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간지러운 감각과 그 상대가 권차현이라는 당혹과 놀라움. 권 대표가 내뱉는 톤만큼이나 무겁게 달아오른 다리 사이까지.
승원은 보채는 사람처럼 권 대표의 어깨를 쓸어 만졌다. 미끄러져 떨어진 손은 곧 그의 쇄골에 닿았다. 그 밑으로 판판한 근육이 만져졌다. 흠칫 몸을 떠는 승원을 보며 그가 입술 옆에 입을 맞췄다.
“…내가 미쳤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권 대표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속옷까지 잡아 한 번에 바지를 벗겨 내자 단단해져 있던 성기가 통 튀어 올랐다. 승원의 좆을 손으로 그러쥐고 만지작거리던 권 대표가 자신의 바지도 내려 벗었다. 드로어즈를 허벅지 밑으로 비스듬히 내렸고, 승원은 헐떡이던 숨을 잠시 멈춰야 했다.
저렇게 큰 건 난생처음이었다.
“남의 자지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멍한 얼굴의 승원을 마주하고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은 권 대표가 이마 밑으로 떨어지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승원은 순간 벌어져 있던 다리를 모으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몸에 가로막혀 안쪽으로 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귓바퀴가 새빨개진 승원이 어느새 목까지 색을 붉히고 눈을 피했다.
그래 봤자 승원이 봐 왔던 좆은 다 볼품없는 수준의 내외를 겉돌았지만, 제 눈앞에 보이는 거대하고 반듯한 성기는 태어나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아직 모르는 것일 텐데도, 승원은 지레 겁이 들어 긴장을 삼키고 이불을 그러쥐었다.
“……읏.”
“이제 와서 내외합니까?”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야를 꽉 채워 들어왔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권 대표가 승원의 두 뺨을 잡았다. 승원의 허벅지로 권 대표의 귀두 끝이 맞닿았다. 기둥이 비벼지고, 비교적 축축한 요도가 부드럽게 치대며 붙어 왔다. 승원의 살갗에 닿을 때마다 닿은 물건이 점점 더 크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꽤 흥분되는데.”
서늘하게 피어오른 낯이 승원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머리가 완전히 앞으로 쏠려 자주 볼 수 없던 그의 앞머리가 생겼다. 가슴을 크게 울렁이며 숨을 쉬는 권 대표를 바라보며 승원은 침을 삼켰다.
승원을 가만히 보고 있던 권 대표는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드로어즈를 다리 밑으로 전부 내린 그가 흉흉하게 선 성기를 손으로 받쳤다. 그가 승원의 다리를 넘어 허리를 타고 가슴 위까지 올라왔다.
잠깐 눈을 깜박한 사이에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제 눈앞에 당도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물건은 보기보다 한참은 더 컸다. 형형한 모습을 드러낸 핏줄은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승원이 숨을 흡, 참았다.
권 대표가 숨을 들이쉬었다. 단전에서 끌어온 숨을 다시 바닥까지 누르듯이 숨을 쉬던 그가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제 기둥 끝을 잡아 승원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압도적인 크기에 겁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승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꾸만 눈물이 고이는 탓에 시야가 빛 번지듯 옆으로 퍼졌다. 흐린 눈으로 권 대표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승원이 제 앞에 세워진 발기한 성기를 바라보았다. 이불을 꾹 움켜잡던 손이 서서히 떨어지고, 고민이 어려 있던 어린 눈이 남자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그대로 느끼며, 승원은 말아 쥔 성기를 천천히 쓸어 만졌다. 단단한 물건을 쥐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승원이 조금 겁에 질린 눈을 위로 들었다. 나른한 눈동자가 승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손은 침대 헤드를 붙잡고, 남은 손은 제 우뚝 선 성기를 승원의 입가에 조준한 채로 있는 권 대표가 보였다.
그의 성기로 눈을 돌린 승원이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드러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곱게 세운 혀끝으로 기둥 입구를 핥았다. 진득한 쿠퍼액에서는 비릿하고 야릇한 맛이 느껴졌다. 입술을 조금 더 크게 벌려 귀두를 완전히 물었다. 턱을 벌려도 좀처럼 들어차지 않는 느낌에 인상을 쓴 승원이 안쪽으로 그것을 밀어 넣었다.
“흐, 읍-.”
“……씨발.”
거의 흩날리는 듯한 발음으로 권 대표가 지껄였다. 그의 가슴이 점점 더 빠르고 크게 들썩였다. 입술에 침을 바르며 승원을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손을 내려 승원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살갗에 닿는 감각에 비스듬히 눈을 뜨던 승원이 버거운 물건을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입을 오므려 넣은 안쪽으로 계속해서 넣었지만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 …모너어- 요…….”
“할 수 있습니다.”
낮은 포효와도 같은 울림이 닿았다. 성기 뿌리 끝을 잡은 권 대표가 기둥을 세워 승원의 입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턱, 걸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아……. 씹…….”
“으, 흡- 으읍…….”
급히 지지대를 찾는 것인지 손을 허우적거리던 승원이 날카롭게 세워진 그의 허벅지에 손을 기댔다. 뼈를 꽉 움켜잡은 승원이 제 입 안쪽으로 더욱 밀고 들어오는 그를 받아 냈다. 쓰고 시린 맛이 느껴졌다. 목젖에 닿는 생경한 감각에 구역질이 일었지만 승원은 참고 버텼다.
결국 다 받아 내지 못했음에도 권 대표는 얕은 구멍과도 같은 승원의 입 안으로 느릿하게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하아…… 흐으.”
“으, 읍. 음…….”
제 다리 사이의 성기가 홀로 팔딱대며 발기하는 게 느껴졌다. 아래로 찾아드는 간지러운 기분에 귓바퀴까지 그 전율이 닿은 승원이 손을 오므라뜨렸다. 더듬대며 찾은 그의 탄탄한 배를 쓸어 만지던 승원이 다시 잘빠진 장골에 제 손을 올렸다.
천장을 보며 허리를 계속해서 움직이던 권 대표가 고개를 내려 승원의 얼굴을 샅샅이 관찰했다. 엉망이 된 머리와 더 엉망이 된 얼굴. 침이 줄줄 흘러 목 끝까지 타고 내려온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제 물건이 들락거리는 붉은 입술이 미치도록 야했다.
볼만한 얼굴로 이만한 성기를 저렇게 열렬히 빠는데도, 처음 같은 어리숙함이나 거부 반응 따위를 보이지 않았다. 읍, 읍, 소리를 내며 제 것을 물고 빠는 동안 다른 고통스런 기색 역시 내비치지 않았다. 전부 안쪽으로 참아 내는 듯이 쓰디쓴 신음을 목 뒤로 넘겼다. 흐릿한 정신에 길게 눈을 세워 뜬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보며 또 다른 충동을 느꼈다.
“흐, 읏-!”
그가 칼을 뽑듯 승원의 입술에 박혀 있던 제 검붉은 성기를 빼냈다. 뽁, 소리와 함께 빠져나온 기둥과 귀두 위로 축축하게 늘어진 타액이 흘러내렸다. 사정은 하지 않아 부풀어 오른 그의 성기는 원래보다 두 배는 더 커져 있는 상태였다.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승원의 눈이 번뜩거리며 빛났다. 그가 승원의 턱을 치켜세웠다.
“읍, 흐음-.”
제 물건으로 들쑤셨던 입 안으로 권 대표가 입을 맞추고는 혀를 쑤셔 넣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승원이 컥컥 소리를 냈다. 권 대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찌르고 빨았다. 젖은 부위를 더 눅진하게 적시고, 입술까지 남김없이 빨아 삼켰다. 얼굴을 젖히고 있던 승원의 턱 밑으로 또 한 번 수도가 고장 난 듯 물이 새고 있었다.
은빛 실을 늘리며 끝난 난폭한 입맞춤에 승원의 눈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처럼 초점을 잃은 채였다. 지칠 대로 지쳐 나른하게 숨을 토해 내는 얼굴이 분홍빛이었다. 중간중간 캑캑이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이내 뺨을 붉힌 채 앵두 빛의 입술을 벌려 지그시 권 대표를 올려다봤다.
“미련해 빠져서는…….”
또 한 번의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아 낸 권 대표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무언가를 해도 해도 갈증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또 다른 조갈을 일으킬 뿐이었다.
검게 그늘져 어릿거리던 얼굴이 승원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숨을 몰아쉬던 승원은 제 다리가 양쪽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몸을 놓았다. 늘어진 두 허벅지를 주물럭대는 권 대표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승원은 순간 휙, 하고 들리는 허리에 반사적으로 목을 세워 앞을 바라보았다.
“다리 더 벌려.”
안개 같은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권 대표의 굵은 허벅지 위로 제 엉덩이와 허리가 기대어진 채 치켜세워져 있었다. 사타구니부터 배꼽 부근까지 비스듬하게 쏠린 몸에 쳐든 엉덩이 골 사이로 희미한 바람이 들어왔다. 아직도 살살 떨리는 제 성기가 권 대표의 시야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승원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 손으로 두 얼굴을 다 감쌌다.
“으, 읏!”
권 대표에게 여실히 드러난 볼기가 옆으로 갈라졌다. 살이 오른 중앙을 벌려 파고든 그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는 듯 엉덩이 살을 더듬으며 들어왔다. 길고 뭉툭한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가르며 들어왔다. 권 대표가 잘빠진 눈썹을 비죽, 올렸다. 마침내 입구에 닿자, 그가 지문 끝으로 구멍을 꾹 눌렀다.
“……하으, 응-.”
“뭐가 이렇게 뻑뻑해.”
술에 취한 권 대표는 혼잣말이 잦았다. 그는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지만, 두 사람의 숨소리뿐인 침대 안에서 그의 나직한 음성은 승원의 귀를 끊임없이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귀두에 묻어 있던 미끈한 점액이 묻은 손가락을 들었다. 길게 늘어진 투명한 액체는 쿠퍼액과 승원의 타액이 적절히 섞여 미끈거렸다. 적셔진 손가락이 다시 안쪽을 헤집었다. 구멍 위로 살살 바르던 그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흐윽-. 대, 표님…….”
푹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쭉쭉 밀며 들어왔다. 이 짓도 벌써 세 번째였다. 망설임 없이 안을 파고들더니 그는 여지없이 뻑뻑한 벽면을 누르고 찔렀다. 찔꺽거리는 소리에 이마까지 새빨개진 승원이 숨을 들이마시고 잇새를 물었다. 한 손으로 버겁게 얼굴을 가린 채 남은 손으로 베개를 움켜쥐었다.
검지로 쑤시던 그가 중지를 더해 다시 푹, 푹 쑤셔 댔다. 중심부 사이로 굵고 커다란 살결이 자꾸 맞붙었다. 하아, 숨을 털어 내던 권 대표가 충분하다고 느꼈는지 꽉 물고 있던 구멍 밖으로 제 손가락을 꺼냈다. 예고 없이 빠져나간 탓에 승원이 허벅지를 잘게 떨었다.
“손 치우세요.”
“…….”
“좋은 말로 할 때 치워.”
승원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거뒀다. 턱을 내리고 눈을 뜨니 벌어진 다리 사이에 권 대표가 자리를 잡은 채였다. 승원 못지않게 엉망이 된 머리에 풀어진 눈을 지그시 뜬 남자가 혀로 제 입술을 빨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불거진 기둥을 잡아 몇 번 앞뒤로 뒤흔들던 권 대표는 상체를 뒤로 물려 승원의 몸을 더욱 치켜올렸다. 하체가 위로 올라갈수록 볼기 사이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날뛰고 쑤셨던 구멍 사이가 벌름대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뜨거운 살덩이가 닿았다. 승원이 숨을 멈춘 순간, 푹- 귀두 끝이 입구를 벌리고 들어섰다.
“아흣-.”
“……하아, 이걸.”
“……으, 흐응, 읏…….”
한 번에 넣으려던 걸 실패한 건지 권 대표가 기둥 끝을 다시 꺼냈다. 잠시 깔짝대며 들어섰던 귀두가 다시 빠져나가자, 온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미끈거리는 요도 끝이 승원의 벌어진 구멍 주변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간지럽게 와 닿는 감촉에 승원이 연신 신음을 흘려 댔다.
“흐아-!”
잠시 바깥을 배회하던 성기가 다시금 입구 안쪽으로 밀고 들어섰다. 굵다란 성기는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고 끊임없이 내벽을 벌려 파고들었다. 쫀쫀하게 붙은 내막이 권 대표의 물건 그대로를 본뜨듯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승원은 간헐적으로 목을 울렸다. 끙끙, 목이 제 마음대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아, 흐윽. 읏, 대- 대표니임…….”
“뭐가 이렇게…… 씹, 좁아…….”
기둥 반을 머금은 입구가 미친 듯이 조였다 풀어졌다. 그 사이를 권 대표 역시 버티기 힘들었는지 낮은 신음을 흘리던 그가 승원에게 더욱 가까이 붙어 왔다. 어느덧 침대 양옆으로 내팽개쳐진 두 손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일그러진 얼굴 밑의 입술이 크게 벌어져 밭은 숨을 내뱉었다. 가까이 다가온 권 대표의 숨이 닿았다. 뜨거운 열기에 승원은 그의 물건을 받으며 허우적댔다.
무언가 계속 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마취와도 같은 몽롱한 기억에 한참 동안 수를 세고 있던 사이, 목 위로 닿는 뜨거운 살결에 승원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승원의 목 안으로 파고들어 입을 맞춘 권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턱 밑으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승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을 찡그렸던 승원이 다시 제 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맞췄다.
“……할 만합니까?”
권 대표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승원의 눈꼬리 끝에 달려 있던 작은 눈물방울을 손가락을 들어 닦아 낸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승원이 대답하지 않을 것을 이미 예상한 건지, 권 대표는 더 묻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린 승원이 알아챈 건, 권 대표의 성기가 제 몸에 다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엄살은 엄살대로 부리더니.”
“……흐으…….”
“먹기는 다 먹고.”
권 대표가 승원의 양 무릎을 접어 눌렀다. 다리를 구부린 채로 그에게 활짝 벌린 승원의 얼굴이 잘 익은 자두 같았다. 배 안을 꽉 채운 것이 권 대표의 성기라는 것을, 자신이 지금 그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승원은 부끄러움에 온몸을 털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남자랑 하는 건 처음인데.”
“…….”
“이러면 윤승원 씨가 내 아다를 따는 건가.”
“흣!”
그 말을 끝으로 권 대표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을 깊이 채우고 있던 물건이 뒤로 슬그머니 빠졌다. 그러다가 다시 강도를 더해 푹! 찔렀다. 차분히 시작하던 그의 허리 짓이 점점 속도를 높여 나갔다.
“하, 읏, 응- 흐으!”
“하아…… 흐으, 읏…….”
거칠게 이어지는 피스톤질에 고장난 것처럼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 나갔다. 엉덩이 볼기 위로 권 대표의 딱딱한 두 허벅지가 아프게 비벼졌다. 승원을 배려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권 대표는 잠시 귀두를 밖으로 빼내고는 벌어져 있던 승원의 다리를 한쪽으로 포갰다. 왼쪽으로 가지런히 놓아둔 허벅지 사이를 벌리고 그 안으로 핏줄을 곤두세운 성기를 다시 밀어 넣었다.
“흐, 으극. 윽…… 하, 읏!”
포개진 다리는 한쪽으로 살이 몰려 벌리고 있을 때보다 충격이 더했다. 앞뒤로 오가며 찧어 대는 통에 철퍽거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울려 퍼졌다. 승원은 가누지 못하는 머리를 시트에 처박았다. 점멸하는 머리가 비상벨을 울렸다. 배를 가르는 듯한 통증 사이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농염한 관능이 몸을 휩쓸었다.
“……자, 잠까, 흐읏……. 아프, 아파…….”
“못, 멈춥, 니다.”
“대, 으응, 대표, 니임, 자, 윽…….”
말이 미처 완성되지 못하고 옹알이처럼 터져 나왔다. 승원의 가느다란 외침에도 고조에 다다른 남자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승원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쥐고 앞뒤로 흔들던 권 대표가 발딱 선 채 보기 좋은 색으로 물든 성기를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아, 흣- 으!”
승원의 하체가 팔딱, 뛰었다. 프리컴을 줄줄 쏟아 내던 귀두 끝에서 꿀렁대며 터져 나온 액체가 용암이 흐르듯 기둥 끝으로 흘렀다. 주르륵 타고 흐르던 것은 곧 그의 성기를 쥐고 있던 권 대표의 손 위로도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아득한 정신에 헤매고 있는 사이, 머리 위로 권 대표가 헛웃음 쳤다.
“예의가 아닌데.”
사정감에 잠식되어 있는 승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 대표는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이며 안쪽을 찔렀다.
“하, 으아, 읏, 흥, 아, 아니으, 아니, 흣!”
그를 제지하려 들었던 손이 허공에서 경련하다 이내 시트 위로 추락했다. 승원이 핏대를 세우며 고개를 쳐들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덜덜 떨리는 기둥에선 남은 정액이 꿀렁거렸고, 눈 밑으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러움을 잠재운 쾌락에 승원은 어느덧 이성을 잃고 잔뜩 벌어진 입으로 헥헥대기 바빴다.
안쪽을 다 긁어낼 것처럼 박고 문지르던 좆기둥은 좀 있으면 그 안에서 터질 기세로 부풀어 있었다. 권 대표 역시 정화되지 않은 숨을 크게 벌렁이며 쉬고 있었지만, 이미 반쯤 넋을 놓은 승원이 그의 조급함을 알 리 없었다. 배를 다 뚫을 정도로 깊게 제 사타구니를 밀어 넣던 권 대표가 욕을 짓이겼다.
“……하, 하아…….”
잠시 멈칫하던 권 대표는 몸 이곳저곳에 잡혀 있는 근육을 들썩이며 승원의 안에 깊이 사출했다. 뜨겁게 안을 적시고는 절정의 여운을 맛보기 위해 그가 앞뒤로 살짝 움직이자 몸 안의 액체가 함께 넘실대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땀이 맺혀 있는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승원의 치골 위로 충동적인 입맞춤을 남겼다. 다리가 움찔 경련하고, 권 대표는 사정을 마친 성기를 꺼냈다.
“으, 흐응…….”
찬찬히 빠져나오다가 입구에 걸치고 툭 떨어지는 성기의 감각에 승원이 다시 몸을 떨었다. 여물어지지 않은 구멍을 숨기지도 못한 채 승원은 숨을 얕게 헐떡거렸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은 눈꼬리 끝에 매달려 있다가 콧대를 타고 떨어졌다.
모든 게 끝난 것처럼 암흑이 찾아왔다. 불에 덴 듯이 뜨거운 볼기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닿았다. 승원은 눈을 꼭 감고 뜨지 않았다. 주변이 새까매서 눈꺼풀 너머로도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찬 공기에 닿아 시린 몸에 누군가의 뜨거운 살결이 느껴졌다.
“……대표, 님…….”
마지막 밧줄이 끊어지기 직전, 승원이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이름이었다.
***
천천히 뜨이던 눈이 이내 상황을 파악하려 급히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 소리, 높이 떠 있는 낯선 천장, 익숙하게 코를 간질이는 누군가의 깊은 체취까지. 승원이 모든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움푹 파여 싸늘한 빈자리뿐이었다.
“…….”
손으로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었다. 아직 온기가 다 빠지지 않은 자리가 따뜻하게 손바닥을 감쌌다. 졸음이 묻은 눈을 비빈 승원이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의식의 끝자락에 희미한 물소리가 이어졌다. 불투명한 실루엣이 비치는 곳으로 눈을 돌리자, 물을 맞고 있는 훤칠한 남자의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그가 떠나지 않았다.
승원은 샤워 부스 너머의 남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다 제 가슴을 움켜잡고 숨을 쉬었다. 눈을 뜨면 없으리라 생각했던 권 대표는 아직 제 곁에 남아 있었다. 매운 코끝을 만지던 승원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전기가 달아오르는 통증이 엉덩이를 타고 허리까지 느껴졌다.
푹신하고 아늑한 침대에서 더 있어도 좋겠지만, 승원은 애써 아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계속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가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나와 옷을 꿰어 입고 자신을 두고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조각조각 찢긴 기억 사이로 그와 몸을 섞고 입을 맞췄던 것만이 생생히 떠올랐다. 마지막 부분은 거의 희미해 흐릿하게 번진 기억이 전부지만, 섹스의 끝에 몸 안으로 들어와 뜨겁게 번졌던 무언가는 아직도 제 엉덩이 사이로 흘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걸 떠올리자 승원은 충동적으로 옆에 보이는 창을 뚫어 몸을 던지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
속옷을 입기 전 확인을 하려 얼굴을 뒤로 돌렸는데, 매끈한 엉덩이엔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정액이 말라비틀어져 나는 비릿한 향기나 눅눅한 이물감도 없었다. 승원이 골 사이로 손을 넣어 확인했다. 축축하리라 생각했던 곳은 오히려 호텔 안을 덥힌 약한 히터 바람에 건조하게 메말라 있었다.
그때, 샤워가운을 걸친 남자가 부스에서 나왔다. 수건 한 장을 들어 비스듬히 든 머리를 털어 내던 권 대표가 무감동한 얼굴로 침대 가까이 다가오며 승원을 바라보았다.
“……깼네.”
아직 속옷은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승원은 얼른 제 셔츠를 잡아 끌어내렸다. 단이 짧은 셔츠 끝은 허벅지만 간신히 가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승원에게 찰나의 시선을 던진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욕실을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씻으세요.”
침대에 걸터앉은 권 대표의 커다란 등이 나타났다. 흰 가운이 팽팽하게 선 어깨 위로 곧게 뻗은 목선이 흰 피부와 함께 드러났다. 승원은 그런 권 대표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속옷을 꿰입었다. 머리를 털던 그가 뒤쪽으로 손을 짚어 승원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가느다란 눈이 승원의 행위를 확인하고는 그의 눈을 올려다봤다.
“뭐 합니까?”
“옷… 입습니다.”
“…씻으라는 말 못 들었어요?”
귀찮음을 잔뜩 드러낸 얼굴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권 대표는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쭉 뻗은 검지를 들어 승원의 자리부터 욕실까지를 허공으로 슥 그렸다.
“지금 여기서 저기까지 가겠다고 옷을 입는 겁니까?”
“…….”
“누가 보면 얌전히 자는 윤승원 씨 옷을 내가 다 벗겨 놓은 줄 알겠네.”
무감한 목소리가 승원을 쿡 찔렀다. 날카롭게 몸 안을 관통한 그의 지적에 승원은 입던 속옷을 도로 내려놓고 남은 옷가지들을 손으로 챙겼다.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들어서는 승원에게 권 대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가운 한 장만 걸친 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꼬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워 부스 안은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이 각이 진 넓은 부스 벽 표면엔 권 대표가 남기고 나간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힌 채였다. 승원은 샤워기를 틀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건지 다시 부스 문을 열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조각상 같은 남자가 젖은 머리를 넘기며 핸드폰 액정을 넘기고 있는 게 보였다.
“……대표님.”
승원의 부름에 권 대표는 고개는 가만히 둔 채로 시선만 슥 올렸다. 긴 거리임에도 가까이에 닿는 것처럼 질겼다. 부스 손잡이를 잡은 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잘생긴 미간이 지그시 좁아졌다.
“왜요.”
권 대표가 물었다. 신경질적이었지만, 통상 그의 원래 목소리 그대로였다. 승원은 푹 잠긴 제 음색을 위로 끌어올리려 목을 큼큼 다듬었다. 머뭇거림 속에 걱정 서린 말투가 그대로 배어 나왔다.
“…가실… 건가요?”
“…….”
“그러니까, 제가 씻고 있는 동안 혹시 나가시는 거라면…….”
“안 갑니다.”
한숨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말을 이어 나가던 승원의 입술이 맥없이 벌어졌다. 짧게 응수한 권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탁에 놓여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그 자리에서 불을 붙였다. 후, 긴 연기를 뿜어내며 창가 쪽으로 이동하는 장대한 기골을 지켜보던 승원이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승원은 권 대표의 대답을 듣고도 그를 믿을 수 없어 간간이 물을 켰다 껐다 하면서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멎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한창 머리 위로 물을 맞고 있는데, 달팽이관을 댕 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하는 소리는 다름 아닌 객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대로 빳빳하게 굳어 버린 승원이 수도를 잠그고 불투명한 부스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마 그가 나간 걸까.
쿵쿵대는 심장으로 저 너머를 지켜보던 승원은 다리가 풀릴 것만 같아 수도꼭지를 손으로 꼭 잡았다. 바깥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커다랗게 존재감을 드러내던 권 대표의 인영도 없었다. 정말 자신을 놓고 간 것이라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다른 때라면 괜찮을지도 몰랐지만 이젠 얘기가 달랐다. 권 대표가 남긴 흔적들이 여전히 승원의 머릿속에 생생했다. 기억을 품고 있는 이상 자신을 떠나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덜커덕.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숨을 죽이고 있던 사이, 바퀴 같은 게 구르는 소리가 났다. 부스 너머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턱을 꾹 짓누른 승원이 입술을 물었다.
다시 돌아온 상대를 마주하고도 좀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선명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 비로소 안심될 것 같았다.
힘겹게 샤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승원을 기다리고 있는 건 코끝을 찌르는 맛있는 밥 냄새였다. 아예 침대 헤드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던 권 대표가 승원을 힐끔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미 셔츠와 바지를 다 입고 있는 상태였다.
“다 씻었습니까?”
“네.”
대답하며 침대맡을 둘러보던 승원은 은색 카트 하나를 발견했다. 승원이 묻기도 전에 권 대표는 카트를 밀어 탁자 쪽으로 가져갔다. 자리에 먼저 앉은 그가 작은 창문을 열고 은빛 푸드 커버를 열었다. 냄새의 근원지가 저기 있었다. 승원은 허기진 배를 쥔 채로 홀린 듯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앉아요.”
허연 국물에 파채가 송송 썰어 올려진 갈비탕이었고, 그 옆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함께 정갈한 반찬들이 적당한 양으로 담겨 있었다. 푸르른 양상추와 슬라이스 햄이 엿보이는 크루아상도 보였다. 폭신해 보이는 에그 스크램블이 크루아상 옆에 구름처럼 놓여 있었다.
승원이 마른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승원의 자리 앞에 갈비탕 대접을 놓아준 권 대표가 숟가락 손잡이를 승원 쪽으로 돌려 주었다.
“갈비탕 싫어합니까.”
“…아니요. 좋아합니다.”
“먹어요, 그럼.”
승원은 제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국물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가 상대편에 놓인 브런치와도 같은 구성의 조식을 바라보았다. 배를 채우는 건 똑같겠지만, 빵과 달걀은 제대로 된 식사라고는 볼 수 없었다.
“대표님은… 왜 밥을 안 드시고….”
“아침부터 무거운 거 먹으면 속이 별로라.”
와인 잔에 물을 따른 그가 잔 끝을 입에 댔다. 목을 축인 권 대표는 포크로 토마토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거 싫어요?”
“…네?”
“싫으면 바꾸세요. 다시 주문하면 되니까.”
“그럼 이거는….”
“버리면 되고.”
뭐가 문제냐는 듯이 지껄인 권 대표는 제 몫의 음식을 씹고 있었다. 완벽하게 차려진 음식은 한눈에 봐도 정성을 쏟아부은 느낌이 가득했다.
모형처럼 이루어진 한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승원은 숟가락을 들었다. 국을 한 입 떠먹자 뜨끈한 김이 입 안에 피어올랐다. 짭조름한 국물을 넘김과 동시에 뱃속이 온기로 차올랐다.
“…맛있습니다.”
“그럼 남기지 말고 먹어요.”
“…….”
“윤승원 씨는 너무 말랐습니다.”
순간 승원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뜨끈해진 제 귀를 매만지던 승원이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움푹 팬 그릇 안에 보이는 흰 국물 위로 제 얼굴이 잔잔하게 비치는 것만 같았다.
말랐다는 말을 이 시점에서 들으니 목이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생생하게 떠오른 기억이 전두엽을 훅, 치고 들어왔다. 숟가락을 묵묵히 움직이던 승원은 문득 궁금해졌다. 어젯밤에 보았던 권 대표가 멀쩡하게 지니고 있던 것은 그의 똑똑한 발음 하나가 전부였다. 숟가락에 딸려 오는 당면을 휘휘 젓던 승원은 충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대표님.”
음식을 씹던 턱이 멈췄다. 고요한 눈이 승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가 쳐다만 봐도 승원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왜 자꾸 불러 놓고 말을 안 합니까.”
그에게 용건을 말하기 위해선 항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탓이었다. 승원은 물을 한 잔 마시고 입 안에 맴돌던 물음을 끄집어냈다.
“기억… 전부 나시나요?”
“어떤 기억.”
되려 돌아온 질문에 승원의 눈이 정처 없이 표류했다.
“…어제 이곳에 와서 있었던… 일 전부…….”
“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
“윤승원 씨랑 섹스한 기억은 있습니다.”
필터 없이 도착한 대답에 승원이 볼을 붉혔다. 잊은 척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는 오히려 깔끔하게 인정했다. 빵을 베어 문 가지런한 이가 보였다. 음식물을 씹으면서도 권 대표는 담배가 당기는지 연신 테이블 위에 있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술은 좀 깼습니까?”
참기 힘들었는지 라이터와 담뱃갑을 한꺼번에 들어 창틀로 옮겨 놓은 권 대표가 물었다. 화제가 갑자기 전환되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제의 일은 취기가 8할을 다 했으므로 승원은 숟가락을 휘휘 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네. 멀쩡합니다. …대표님은.”
“나도 멀쩡합니다.”
“…원래 술을 잘 드시는 편이세요?”
권 대표의 대답이 끝난 후 이어질 정적이 두려워 던진 질문이었다. 권 대표는 아예 포크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잔에 담긴 물로 입을 헹구더니 식사를 마친 사람처럼 상체를 등받이에 길게 기댔다.
“윤승원 씨보단 잘 마시겠지.”
“…….”
“어제 내 주량을 넘긴 건 맞습니다. 윤승원 씨가 수고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네.”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들이쉰 권 대표는 손톱 밑을 툭툭 튕겨 댔다. 얇은 반달이 가볍게 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승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수고 보답에 대한 식사 대접은 이 정도로 하면 될 것 같은데.”
권 대표가 눈을 슬며시 내렸다가 다시 승원에게 올렸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잠시 눈꺼풀을 깜박이던 승원이 목을 꿀렁였다. 지금까지 제가 입에 넣고 있던 음식이, 그저 그와 함께 숟가락을 들고 먹는 가벼운 식사가 아니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답 같은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런 거… 하지 않으셔도 돼요.”
승원의 말에 권 대표가 안 그래도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더욱 날카롭게 치켜떴다.
“어제 있었던 일을… 저는 수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요?”
“…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윤승원 씨를 붙잡아 주정을 부린 것도 모자라, 여기까지 불러들여서 오늘 아침까지 시간을 빼앗았는데.”
여상한 목소리와 함께 떨어진 문장 끝엔 희미한 물음표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몸을 길게 기댄 채로 팔짱을 낀 권 대표가 승원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저 표정이 너무 새삼스러워서, 승원은 어제 자신이 그와 했던 일이 무엇인지 다시 되새겨야 했다.
상호 간에 이루어졌던 달큰한 접촉이 눈을 뜬 하루아침 만에 저 혼자 짊어졌던 수고가 되어 있었다.
“…그냥…….”
입속에 차오른 말들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대가 같은 걸 바라거나, 생색 따위를 내려고 권 대표와 하룻밤을 보낸 게 아니었다.
“그냥 저한테는 그런 마음 갖지 않으셔도….”
폐부가 먼지로 가득 쌓인 것처럼 꽉 끼고 답답했다. 입에 들어와 있는 음식이 없는데도 사레가 들릴 것 같아 승원은 혀끝을 둥글게 말았다. 안쪽을 씹다가 고인 침을 넘겼다. 테이블 위에 흐르던 공기가 한순간에 기세를 바꾸고 뒤집히는 듯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어 번 돌았을 때, 권 대표가 입을 뗐다. 냉랭한 목소리였다.
“미안한 사람이 대접하는 건데, 부담가질 필요 없습니다.”
손수건을 들어 입을 가볍게 닦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정리하지 못한 승원이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그의 동태를 살폈다. 소매를 잠시 정리하던 권 대표가 제 몫의 그릇들을 치웠다.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 음식이 그대로였다. 혀로 입술을 축인 권 대표가 승원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때 윤승원 씨가 나 대신 기분 낸 건 그냥 넘어가기 싫습니다.”
“…….”
“그건 차차 갚도록 하고.”
이젠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일주일 전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권 대표를 홀로 두고 나와 승원이 계산을 하고 나온 일을, 권 대표는 단순히 ‘기분을 냈다.’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계산 이후 호텔을 나온 승원이 비를 맞으며 목 놓아 울었던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을 남자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하고 쉬운 단어 선택이었다.
“다 먹었으면 트레이에 옮겨 놓으세요.”
자리를 떠나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꺼내 입는 권 대표를 바라보던 승원이 냉큼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바로 묶지 못한 리본이 흘러내리려 해서, 다시 꽉 조여 당긴 승원이 맨발바닥으로 권 대표에게 다가갔다. 척을 실패한 사색이 푸르게 변했다. 조바심을 가득 담은 눈썹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대표님.”
승원이 그를 부르자 손목에 시계까지 채운 권 대표는 침대맡에 있던 슬리퍼를 꺼내 가까이 다가왔다. 승원의 발밑에 가지런히 놓아 준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윤승원 씨.”
“…네.”
“잊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승원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윤승원 씨도 깔끔하게 어젯밤 일을 잊는 거고.”
“…….”
“상호 간에 확인이 되어야 나중이 되어서라도 문제 삼을 일이 없을 거 아닙니까.”
무감한 목소리는 귀로 들어와 칼이 되었다. 날카로운 칼날의 끝이 몸 안을 긁었다. 몸 안을 휘젓고 다니던 권 대표의 무심하고 신랄한 음성들은 난도질을 마치고는 아무렇지 않게 승원의 반대쪽 귀로 의미 없이 빠져나갔다.
“먹던 식사 마저 하세요.”
“…대표님은-.”
“나는 회사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럼 저는.”
등을 보이고 발을 떼려는 권 대표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승원이 물었다. 잠시 놓쳤던 의식이 뒤늦게 돌아왔다. 가운을 걸친 몸이 초라하게 권 대표를 향하고 있었다. 권 대표는 한숨이라도 쉬는 건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곧 표정을 지운 옆선이 드러났다.
“김 실장 불렀습니다. 천천히 준비하고 쉬다가 내려가세요. 원하는 목적지까지 알아서 데려다줄 테니.”
권 대표가 멀어지고 있었다. 권 대표가 놓아 준 슬리퍼를 그대로 밟고 지나친 승원이 그가 있는 쪽으로 두어 걸음을 더 움직이다가 다시 멈췄다. 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승원이 촉촉하게 벌어진 입술을 열었다.
“…정말로 기억하시는 게… 맞습니까?”
가던 등이 잠시 멈췄다. 곧이어 입이 열렸다.
“아까 대답한 질문 아닙니까?”
“…….”
“알면서 왜 굳이 다시 묻는 건데.”
차갑게 끝을 맺은 남자가 끝인사를 남겼다.
“나중에 연락하겠습니다. 먼저 갈게요.”
권 대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저벅저벅, 러그 위를 걷던 발소리가 멎고 철커덕 열린 문이 스르륵 닫혔다. 승원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잘게 떨었다. 한참 동안 숙이고 있던 얼굴을 겨우 들었을 땐, 눈가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병신.”
승원은 입 모양으로 그렇게 중얼댔다. 그러면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내리쳤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몇 번 그렇게 거세게 내리치자 금세 이마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 전체가 쓰라렸다.
어지러운 머리 대신 눈두덩이를 손으로 감싼 승원은 문득 발에 닿는 슬리퍼를 내려다보다가 휙, 차 버렸다. 그래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자 한 짝씩 집어 내동댕이쳤다.
힘없이 던진 얇은 슬리퍼는 고작 발치를 조금 더 벗어나서 나뒹굴었다. 침대 옆에 주저앉아서 머리를 기댔다. 무릎을 끌어안았다. 입술 밑이 부들거렸다.
다 먹지 못한 갈비탕 국물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나던 연기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
승원이 호텔 문밖으로 나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가 더 지난 후였다.
한참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승원은 침대에 반쯤 걸터누워 시간을 견뎠다. 눈을 감고 몇 번이고 숫자를 셌다. 1부터 300까지의 수를 세면서 차츰 가라앉는 듯싶던 감정은 구멍 난 곳에서 물이 빠지듯 자꾸만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호텔 이불에서 그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승원은 눈을 뜬 채 그렇게 두 시간을 내리 버텼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차디찬 공기가 승원을 반겼다. 당연히 자신을 기다리는 이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거늘, 익숙한 은색 외제 차가 호텔 문 앞에 정차 중이었다. 이미 떠난 권 대표를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었으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확실했지만, 딱 붙은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을 맞아도 좋으니 혼자 가고 싶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기에 말이라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헤드라이트를 깜박이던 차량이 승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운전석에서 나온 이는 김 실장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승원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넸다. 승원도 그를 따라 인사했다.
“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직접 다가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준 김 실장이 안쪽으로 손을 내밀어 안내했다. 각이 잡힌 정장을 소화해낸 김 실장은 온몸에 배려가 장착되어 있는 사람 같았다.
선뜻 나서지 못하던 승원이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 권 대표에게서 풍겨 나와 차 안을 가득 메웠던 거친 위스키 향은 어느덧 코끝을 가볍게 간질이는 차량 방향제 냄새로 갈음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김 실장을 보자 승원은 순간 낯이 다 화끈거려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술에 잔뜩 취해 함께 호텔에 올라가서는, 다음 날 이 시간이 되어서야 비척이며 나온 제 행색을 보며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안 봐도 뻔했다. 비슷하게나마 이런 시선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나름 익숙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오산이었다.
“좀 쉬셨나요?”
그런 승원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김 실장이 가볍게 물었다. 룸 미러로 보이는 반쪽짜리 얼굴이 인자하게 풀어진 채였다. 권 대표와 모든 일을 함께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김 실장은 그와는 정반대의 인상을 갖고 있었다. 푸근하게 떨어지는 눈꼬리가 온화했고, 깊은 눈동자는 진갈색이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실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나오는 건데…….”
“아닙니다. 저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기어를 바꾼 김 실장이 핸들을 돌렸다. 천천히 출발한 차가 안정감 있게 속도를 올렸다. 허벅지 위에서 손을 만지작거리던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따로 연락을 남긴 적도 없고, 이 시간까지 있을 거라고 언질을 준 적도 없는데. 의아함에 승원이 김 실장의 얼굴을 살폈지만, 전방을 주시하는 푸근한 미소의 남자는 오히려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자. 어디로 모셔다드릴까요?”
호텔을 빠져나와 차들이 쌩쌩 내달리는 도로로 끼어들었다. 양옆의 길 위로 가로수가 잔뜩 늘어져 있었지만 추운 겨울에 살아남은 이파리는 없었다. 건조한 날씨에 메마른 하늘이 물에 탄 회색빛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으나 영하의 날씨는 꽁꽁 얼어붙은 채였다.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주소 알려 주시면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 네.”
운전석 등받이를 손으로 짚은 채 몸을 가까이 끌어당긴 승원이 집 주소를 하나씩 불렀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실장은 내내 짓던 평온한 표정을 잠시 거두곤 입을 작게 벌렸다. 곧이어 김 실장의 입꼬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알아차리지 못한 승원은 다시 제자리에 몸을 기댔다.
“데려다드릴게요.”
“서울 지리에 빠삭하신가 봐요.”
“그건 아닙니다만, 익숙하면 못 찾아갈 일도 없으니까요.”
창밖의 나무들이 쉼 없이 스쳐 지났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던 참에 승원은 차가운 창가에 머리를 뉘었다. 신호등에 멈췄다 달리기를 반복하던 차량이 다시 스르륵, 정지했다. 어느덧 큰길로 들어선 도로 주변엔 빌딩이 가득했다.
김 실장의 고개가 뒤로 살짝 돌아왔다.
“적적하면 노래라도 틀까요?”
“…저는 상관없어요.”
그렇게 말을 마친 승원은 잠시 기대고 있던 머리를 떨어뜨리고 앞을 향했다.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한 가지를 물었다.
“대표님은… 들으시는 음악이 따로 있나요?”
권 대표에겐 직접 물을 일이 평생 없어 보였다. 그깟 음악 취향이 뭐라고, 사소한 물음 하나를 던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잠시 으음, 하면서 생각 따위를 하는 듯 보이던 김 실장이 입을 열었다.
“거의 듣는 일이 없으시긴 한데, 아주 가끔 잔잔한 클래식 음악 정도는 들으십니다.”
“아….”
“틀어 드릴까요?”
“…네.”
곧이어 잔잔한 클래식이 차체 안을 부드럽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솜털로 누르는 듯한 산뜻한 피아노 소리가 이어지며 잔잔한 물결 같은 선율이 공간 안을 유연하게 헤엄쳤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에게서 1밀리미터도 벗어나지 않은 취향이었다. 예상대로였던 권 대표의 음악 취향에 승원은 그만 작게 웃어 버렸다. 물론 그 웃음은 몇 초도 머물지 못하고 지워졌다.
“대표님 때문에 윤승원 씨도 자주 뵙네요.”
“…네.”
“다음엔 꼭 사인도 해 주세요. 정말 팬입니다.”
“아… 정말요? 꼭 해 드릴게요.”
“대표님이 엄청 아끼는 분 같은데.”
“…제가요?”
승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룸 미러를 통해 비쳐 보였다.
“그냥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
“대표님이 아닌 대표님의 지인분을 이렇게 자주 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
“앞으로도 쭉 뵐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그건 모르겠어요.”
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털어놓았지만, 좁은 차 안이라 김 실장의 귀에 승원의 말이 들리지 않을 리도 없었다. 다행히 김 실장은 묵묵히 운전에 집중할 뿐, 승원에게 달리 반문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승원의 말에도 김 실장은 알아서 동까지 찾아내 아파트 건물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간 승원은 옷도 벗지 않은 상태로 침대 위로 낙하했다. 겹겹이 쌓여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그가 저에게 다시 연락할지조차 이젠 의문이었다. 서늘했던 그의 옆얼굴이 다시 떠올라 승원은 눈을 질근 감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 식당에서 마주 앉아 밥을 먹던 그때처럼 다시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매몰차게 그에게 등을 보일 자신도 더는 없었다. 단전에서 끌어 올려 내세우던 가짜 자존심은 결국 도로 벗겨져 제가 쏟은 울음에 씻겨 내려가 버렸다.
멍청하게도 당시의 회한은커녕, 어제의 일로 승원은 권 대표가 더 좋아진 후였다. 뜨겁게 맞붙던 살결과 온기, 입술 새로 나누던 정염이 이렇게 온몸에, 손끝에, 심장에 남아 있는데. 불어난 마음은 눈치 없이 커져만 갔다. 제 손에 들린 바늘로 직접 찌르지 않는 이상 부풀어 오르는 이 붉은 덩어리를 잠재울 방법은 없었다.
결국, 돌고 돌아 찾아낸 건 우스운 제 처지를 인정하는 답이 없는 도돌이표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