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4. 불완전 인력 (4/20)

4. 불완전 인력

거머리 새끼가 따로 없다.

거머리도 제 배를 두둑이 채우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건만, 지금은 거머리만도 못한 사람 새끼가 제 차 뒷좌석에 처박혀 있었다. 목에 선명한 울혈 자국을 떠올려 내던 차현이 잘근잘근 씹고 있던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휙 타오르는 연기가 거센 바람에 날렸다.

저번에 봤을 땐 그래도 제 체면을 세우겠다고 온갖 명품으로 처바른 채 나오더니, 아까 본 꼬라지는 동네 노숙자라고 해도 될 만큼 그 몰골이 형편없었다.

금액을 제시하자 제 몸에 처바른 명품의 가치가 무색하게 눈을 뒤집어 까던 장 사장은 군말 없이 그에게 승원을 넘기기로 했었다.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윤승원을 가운데 두고 호가를 내놓는 상황에 웃음이 나왔었다.

윤승원을 팔아넘긴 대신 다신 얼씬도 하지 않겠다던 게 장 사장의 주장이었고, 차현은 이후로 그 일에 관련해서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내지 않았다. 애당초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일도 아니었고, 그 금액을 보고 감히 다시 돌아온다면 그건 양심을 팔아 젖힌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승원은 차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러운 판에 몸을 꿰고 있던 아이였다. 장 사장에 대한 정보를 심심찮게 접해 보던 그는 장 사장이 운영하는 기획사가 애초부터 엔터 목적이 아닌 유흥을 위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간 그곳을 오간 자가 많았고, 당연하지만 엔터테이너를 키우는 목적엔 전혀 관심이 없던 그 병신같은 작자들은 어린 애들을 꼬셔 뒤쪽으로 팔아넘기는 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간판만 멀쩡할 뿐, 속은 말 그대로 진창 무너진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집에 찾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발을 들여 일을 키웠다. 근래 들어 치우기 난감한 일만 수두룩하게 늘어 가고 있었다. 전부 윤승원을 만나고 난 후부터였다.

차현은 김 비서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들었었다. 서유정이 윤승원을 알고 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 비서는 그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가볍게 덧붙인 말이었지만, 그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묵직한 침묵만을 유지했다. 김 비서는 그제야 제가 실수를 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서유정은 말 그대로 성격이 더러웠다. 곱게 자란 숙녀답게, 제 손에 물을 묻히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고, 그런 습관은 역시나 날 때부터 붙어 온 성정에서 뻗어 나온 고질병이었다. 그녀는 눈치도 빨랐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역시 그냥 두는 일이 없었다.

차현이 그녀의 유일한 예외 대상이었다.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그녀는 실제로도 차현을 흠모하고 있었으며, 그랬기에 그의 모든 것을 그 천성을 참고 이해해 왔던 것이었다.

제 약혼자와 입술을 물고 빤 그 미친 호모 새끼가 누군지 당연히 궁금할 터였다. 윤승원을 알고 있단 것은, 곧 차현이 친형 결혼식에 윤승원을 데려갔단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결론적으로 서유정이 그 호모 새끼가 윤승원이란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이었다.

서유정은 오늘 오전부터 대표실로 찾아와 한껏 분탕을 치르고 간 후였고, 승원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가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은 손에 꼽는데, 그랬기에 기다림에 지쳐 있던 차현은 결국 밤늦은 시간 집으로 향하던 차를 돌리고 승원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승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몇 번 데려다준 기억이 있기에 아파트 동은 기억했지만, 상세한 주소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미 서유정이 있는 지랄 없는 지랄을 다 떨다 갔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징글맞도록 받지 않는 전화에 슬슬 지치려던 참이었다. 별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찾아온 자신에게 질리려던 그는 개방된 엘리베이터 문 안의 남자를 보고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승원의 존재보다 먼저 보인 것은 그의 뺨을 갈고 지나간 붉은 흔적이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좆같이 싫던 차현에겐 제 계획에 빨간 줄이 하나 그어진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저 병신 같은 새끼가 그만큼의 돈을 처받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찾아와서는 껄떡대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승원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남의 일이 될 수 없었다. 승원에게 벌어진 일이 곧 제 일과도 직결된 것이었고, 그것은 즉 차현에게 역시 침범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도무지 씨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귀찮음을 참아 내고 승원의 집 앞까지 찾아온 수고를 더해, 그거보다 더한 상황이 자신을 맞닥뜨리고 있다는 성가심에 얼굴 위로 지끈거리는 주름이 피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엘리베이터 안에다 꼴사나운 머리통을 내리꽂아 버리고 싶었지만, 빨간 불을 번뜩대는 CCTV가 있어 그건 무리였다. 여긴 저희 호텔이 아니었고, 권 대표가 이 구역의 CCTV까지 왈가왈부할 권한은 없었다. 물론 권한이야 만들면 생기는 거지만, 그건 영 귀찮은 일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승원이 청승맞게 울기까지 하는 걸 보니 그냥 보내서는 정신을 못 차릴 새끼 같았다.

위협을 주려 목이라도 조이자 같잖은 얼굴이 콜록대며 침을 튀겼다. 더럽게 튄 침 자국을 참아 내고 있는데, 켁! 갑자기 마지막 숨을 토해 낸 이가 목을 푹 꺾어 버렸다. 그리 힘을 주지 않았는데 엄살도 심한 모양이었다. 옅은 숨이 느껴지는 몸이 무겁게 떨어졌다.

‘대표님… 대표니임….’

겁에 질려 아련히 부르짖는 승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기절한 장 사장을 몸에 이고 승원을 다시 올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제 눈앞의 어린 몸이 어깨를 연신 떨어 가며 말을 더듬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겁이라도 먹고 이 지경이 된 건가.

제집 주소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승원은 홀딱 젖은 강아지 새끼처럼 몸을 계속 떨어 댔다. 아까보다 뺨도 한층 더 붉어져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술은 부들부들 경련했다. 정상 같진 않았다.

그래서 차현은 그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이 개새끼를 엘리베이터 안에다가 던져 줄 테니, 마음껏 패겠습니까?’

승원은 가엾게 몸을 덜덜 떨 뿐,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칼을 꽂든, 주먹으로 내리치든, 마음대로 하게 해 주겠습니다.’

승원의 표정이 초 단위로 그 양상을 바꿔 나갔다. 잠시 고민하는 듯 방황하던 눈동자가 이내 아래로 깊이 내려앉더니, 다시 권 대표를 향했다.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다시 앞니로 입술을 콱 물었다.

‘저는 그런 거 못 합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멍청한 소릴 하기 시작했다.

‘주, 죽었으면 어떡합니까? 대표님, 저 사람이 죽었으면….’

기가 찼다. 설마 이 자가 죽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몸을 저렇게 덜덜거리며 떨고 있는 건가. 저를 무슨 괴물 취급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영 잘못 짚었는데.

자신을 살인자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 불쌍한 얼굴이 차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냘픈 얼굴을 어딘가 더 비틀어 조여 보고 싶었다. 난데없는 이상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저 얼굴이 어디까지 일그러질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지금 묻는 거 아닙니까. 내가 이미 죽여 버렸으니까, 윤승원 씨가 이 새끼한테 칼빵을 놓든 난도질을 하든 상관없다고.’

벌써부터 어릿어릿한 보랏빛의 기운이 감돌던 승원의 뺨이 작게 떨렸다. 그는 아까 이 개새끼를 패고 싶다고 했다. 당연한 심리였다. 저 지경이 되도록 맞고, 이제까지 제가 당한 욕을 생각하면 패는 게 아니라 죽여 버린다고 해도 차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승원이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 담배 한 번 입에 물지 않아 봤을 저 순진하고 깨끗한 얼굴 위로 피어오른 새까만 역정과 함께 죽여 버리고 싶다고 뱉어낼 입술을.

한참 말이 없던 승원이 답답해 그는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가 이미 죽였으니, 윤승원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습니까.’

역시나 아무 말이 없었다.

‘죄는 죽인 내가 뒤집어쓰면 되는데.’

개소리를 지껄이고도 제 말이 다시 생각해도 우스워 그는 풋, 웃어 버릴 뻔했다. 그러나 승원은 그 말에 이제껏 보이던 표정과는 또 다른 형식의 충격을 드러냈다.

살살 떨리던 눈동자가 장 사장을 보더니 권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깊은 웅덩이처럼 까맣게 울렁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얼굴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것만 못해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먹을 날려 버리고 싶다 정도의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겁이 많은 아이였다. 겁이 많고, 순진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였다. 거기다 착해 빠지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고통을 당해 놓고는, 픽 죽어 버려 감정도 없다는 자한테 티끌 하나 손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윤승원이라는 남자는.

“…씨발.”

차현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까 봤던 그 말간 얼굴이 다시 머릿속을 휘감았다. 다 타지 않은 장초 끝이 깊게 타올랐다. 구둣발로 그대로 짓이겨 버린 차현이 후우, 입김을 내뱉었다. 담배의 허연 연기와 섞인 짙은 입바람이 공기 중에 길게 흐르다 곧 흩어졌다.

사람을 불렀는데, 어지간히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벌써 10분은 더 기다린 것 같은데, 이 야심한 시각에 차가 막힐 일도 없는데. 좆같이 되는 일이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 그는 새까만 제 차로 시선을 돌렸다. 뒷좌석을 벌컥 열고 안으로 몸을 넣었다. 가죽 시트에 몸을 기울이고 있는 더러운 면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차현이 대뜸 주먹을 날렸다. 퍼억, 서슬 푸른 파열음 소리와 함께 장 사장의 고개가 휘릭, 돌아갔다. 곧이어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권 대표는 그대로 한 대, 두 대, 세 대를 이어서 주먹을 내리꽂았다.

이렇게 갈겼는데도 영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제 씹스러운 기분은 이래도 나아지지 않는데. 윤승원은 도대체 무슨 성정으로 이딴 걸 견디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현이 부른 자들이 차를 끌고 왔다. 거기엔 김 실장도 함께 있었다. 그의 차에 있던 몸뚱이를 그들이 가져온 차에 옮겨 실었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뚱이가 축축 액체처럼 늘어졌다. 입김을 뿜고 있는 그에게 김 실장이 다가왔다.

“대표님.”

“병원 가서 치료 맡기세요. 흠집 하나 없게 원상 복구 해 놓으라고 하세요.”

권 대표가 ‘원상 복구’라는 말에 힘을 실어 발음했다.

“네, 알겠습니다.”

“눈뜰 때까지 자리 지키고, 내가 가기 전까진 거기서 못 나오게 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김 실장이 찝찝한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까지 사납게 나온 적은 없었는데. 근래 있던 일들이 그를 더욱 삐뚤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김 실장은 잠잠히 생각했다. 장 사장을 실은 차 한 대가 이미 출발을 마치고, 김 실장 역시 뒤따라온 차를 타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다 그에게 돌아왔다.

“대표님, 안 가십니까?”

“어딜.”

“대표님, 댁으로… 모셔다드릴까요?”

“됐습니다.”

차현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을 뒤졌다. 몇 개비 남지 않았던 것까지 모조리 피워 버린 탓에 빈 통뿐이었다. 입맛을 다시는 권 대표에 김 실장이 얼른 제 몸을 더듬었다. 그러자 차현이 손을 들었다.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들어가 보세요. 그 면상만 제대로 복구시켜 놓고.”

그가 다시 강조했다. 김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차현은 원래도 어딘가 고압적이고 낮은 음률의 목소리를 가진 남자였기에 무슨 말을 한들 분위기를 휘어잡는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목소리와 그가 겉면으로 가진 특성일 뿐, 김 실장이 봐 온 차현은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작은 말이라도 실수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손목을 돌리는 권 대표의 뺨 언저리에 방울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

권 대표가 발을 뗐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주차장을 지나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가 버튼을 눌렀다. 22층에 다다라 있던 숫자가 반짝이며 번호를 바꿔 나갔다. 승원이 올라간 이후로도 아무도 오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바닥 끝과 끝에 병과 병뚜껑이 버려져 있었다. 22층 버튼을 누른 그가 쓰레기를 수거했다.

맨질거리는 병을 슥 훑어보던 그가 그것을 코에 가져다 댔다. 쓰디쓴 알코올 냄새와 더해진 시큼한 향에 인상을 찌푸린 권 대표가 그대로 뚜껑을 닫아 버렸다. 승원의 옷이 다 젖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입에 전부 털어 넣은 듯싶은데.

“…….”

별다른 생각 없이 병을 위로 던졌다가 잡으며 엘리베이터가 멈추길 기다리던 권 대표는 ‘22층입니다.’라는 여자 목소리와 함께 개방되는 문 사이로 시선을 들었다.

“…으, 으흐, 응… 흐윽.”

희미한 울음소리가 뚝 멈췄다. 이미 잘 아는 목소리에 권 대표의 이마 위로 주름이 잡혔다. 멀지 않은 비상구 너머로, 권 대표가 걸음을 옮겼다.

층계참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눕다시피 한 등을 어렵사리 벽에 기댄 작은 몸이 보였다. 울음을 삼키던 얼굴이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대, 대표님….”

권 대표를 보자마자 번쩍 몸을 일으키려던 승원이 발을 헛디디며 도로 주저앉았다. 그런 승원을 재빨리 잡은 권 대표가 그의 몸을 대신 일으켰다. 쭈욱, 따라오는 몸은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겁지도 않았다.

여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청승맞게 가슴을 떨고 있던 승원의 뺨 한쪽이 보라색으로 부풀어 있었다. 맞아 멍이 든 부위를 제외하고는 전부 새빨갰다.

“하아.”

승원이 들뜬 숨을 토해 냈다. 눈꺼풀이 반쯤 풀려 눈이 가느다란 채였다. 권 대표의 팔목을 잡은 손에 악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취한 나머지 집을 잘못 찾기라도 한 건가 싶던 그때, 승원이 희미하게 목을 울렸다. 물기에 젖은 음성이 덜덜 떨렸다.

“문이, 문이 안 열립니다…….”

“…….”

“그리고…. 흐읏.”

승원이 다시 훌쩍댔다. 톤이 마구 날뛰었다. 이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행색을 한 채, 승원은 권 대표의 몸에 바짝 붙었다.

밀어낼 새도 없이 그의 품에 얼굴을 파고든 승원이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장 사장의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만, 다가오는 직감은 완전히 달랐다.

“열이 나는 거 같습… 니다…….”

“…….”

“저 좀 집에 데려, 데려다주십, 주, 세요…. 저, 좀…….”

현관문을 앞에 두고 집에 데려다 달라니. 염치 빠진 소리를 흘려 대는 얼굴 전체가 오만상이었다. 이미 한차례 울음을 쏟아내 눈물범벅이 된 승원은 나무에 붙은 매미인 양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하아….”

승원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숨을 뱉었다. 지금 욕지거리를 내뱉는다고 승원이 떨어져 나갈 리도 없었고, 그래봤자 제 성질만 더 버릴 것 같았다. 속으로 나지막이 된 발음을 씹어 낸 그가 승원의 허리를 감쌌다.

번쩍 안아 올리자 인형처럼 들린 승원이 그의 가슴을 꽉 안고 매달렸다. 현관까진 몇 걸음 되지도 않았고, 승원은 정말 인형이라도 되는 듯 가벼웠다.

“불러요.”

“…으.”

“부르라고. 번호.”

벽에 뉘어놓다시피 승원을 내려놓은 권 대표가 그의 이마를 꽉 잡아 눌렀다. 덜덜거리는 눈동자가 곧 권 대표를 응시하더니 그 밑의 통통한 입술이 벌름대며 그의 귀 가까이 다가왔다. 눈을 지그시 감은 권 대표가 그가 부르는 번호를 들었다.

“고, 공… 육, 일 칠…….”

“…그게 답니까.”

“두, 두 번입니다.”

집을 털리고 싶어 작정한 모양이었다. 지문 패드가 이미 하얀 지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6월 17일. 끽해 봐야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특별히 챙기는 기념일 정도일 텐데, 단순한 번호 패턴을 두 번 반복하자 도어락 테두리가 하얗게 한 바퀴를 돌며 잠금을 풀어 냈다.

문짝을 뜯어내듯 현관을 열어젖힌 그가 승원을 번쩍 안아 들었다. 마네킹처럼 딸려 오는 몸이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 채 길게 늘어졌다.

어둠뿐인 집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권 대표가 눈에 보이는 스위치를 전부 켜 버렸다. 빛이 훤히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더 움직이지 않고 거실에 마련된 소파로 승원을 던지듯 놓아 버렸다. 승원이 내동댕이쳐진 소파 안쪽이 깊이 잠겼다 떠올랐다.

“하아, 하아… 하으윽…….”

승원은 눈도 뜨지 못하고 제 옷을 막 파헤쳤다.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소파 시트에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다 누운 몸이 다리만 덜렁이며 밖으로 떨어졌다. 제 옷을 마구 긁는 손길이 다급했다.

순간, 권 대표가 비틀어진 눈으로 제 주머니 안에 있던 유리병을 도로 꺼냈다. 검은 갈빛으로 물들어 있는 불투명의 유리가 안의 남은 액체를 싹 비운 채 반짝였다. 모조리 비워 낸 병 안을 훑어보던 권 대표가 승원을 다시 확인했다.

그 미친 병신 새끼 짓이었다.

“윤승원 씨. 윤승원 씨, 내 말 들립니까?”

유리병을 거실 러그 위에 내동댕이친 권 대표가 승원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주욱 반죽 늘어나듯 가까이 다가온 승원에게서 아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지독하고 이상한 내음이 풍겨왔다. 승원이 살며시 든 눈꺼풀로 권 대표를 훑었다. 진득하게 한 바퀴를 돌린 눈동자가 권 대표의 입술로 향했다.

“뭘 쳐 먹인 거야.”

지금 승원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몸속에서부터 시작돼 오감을 꿰뚫는 형형한 감각이 머리부터 발끝을 전부 뱅뱅 돌며 차올랐다. 이미 아까부터 안달 나 있던 묵직한 고통이 다리 사이를 채워 나갔고, 그로 인해 발끝이 어김없이 위로 들려 올라갔다.

눈을 뜨면 권 대표가 보이고, 다시 감으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뻗으니 찬 기운을 내뿜는 남자의 살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승원은 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옷에 있던 단추를 풀어냈다. 손이 제대로 일을 못 하자 그는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가장 위의 단추를 뜯어 버리고 말았다.

“…….”

“…….”

툭, 하고 터져 나온 단추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쪽 눈만 길게 뜨고 있던 승원이 눈동자를 키워 코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숨을 길게 쉬었다. 권 대표에게서만 나는 진한 어른의 향이었다. 앞쪽이 무겁게 달아올랐다가 회음을 지나 뒤쪽까지 간지럽게 이어졌다. 목에 소름이 돋은 승원이 엉덩이를 고쳐 앉던 순간, 무언가 팟- 소리를 내며 켜졌다.

- 제 말이 틀립니까? 원하는 게 뭔지 말을 해 보라고요.

공교로운 찰나였다. 승원이 출연했던 드라마가 재방송 되고 있었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냉철하고 젊은 검사가 딱 잘린 발음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정확한 발음으로 단단하게 읊어 내는 목소리가 까랑까랑했다.

지금 온몸이 붉어져 숨을 헐떡이며 형언할 수 없는 그 어떤 무엇을 갈망하는 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TV 속 승원과 지금의 승원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벽을 다 에울 만큼 커다란 TV였음에도 권 대표의 널찍한 등에 가려져 귀로 들리는 음성만 남은 채였다. 검은 그림자가 승원을 더 가까이 덮었다.

꼭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승원의 대사와 꼭 맞는, 아니 어쩌면 너무도 모순적인.

TV 속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얼굴의 승원이 질질거리는 발음으로 울먹였다. 아무렇게나 붙잡힌 권 대표의 팔목을 꼭 쥔 채, 다 풀어내지 못한 제 단추로 그의 손을 가져다 댔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따위 들켜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늘이 깊게 져 까맣게 물든 권 대표는 말이 없었다. 승원이 위태롭게 속삭였다.

“저 좀, 도와… 주세요…….”

우드득, 소리를 내며 뜯긴 단추가 대차게 안을 벌렸다. 안쪽에 입고 있던 티마저 답답했는지 자신이 코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조차 잊은 승원이 옷을 말아 올렸다. 코트 바람으로 젖꼭지 위까지 전부 드러낸 살결이 부르르 닭살을 돋구었다.

눈을 위로 치켜뜬 승원이 하아, 하아, 밭은 숨을 내쉬었다.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내버려 둔 채, 한 걸음 뒤로 몸을 물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주름을 잡은 미간 사이로 승원을 지켜보았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정신이 승원에겐 없었다. 거하게 달아올라 있던 몸으로 뭔들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최후의 조각 같은 정신머리로 현관 앞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몸을 권 대표가 데리고 들어온 뒤부터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승원이 다시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눈물이 나왔다. 울음이 섞여 나온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대, 대표님…….”

실 같은 눈동자 새로 권 대표의 얼굴이 어릿어릿하게 비쳤다. 눈물이 고인 탓에 승원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몸의 이상 신호에 수치심은 진작 벗어던진 후였다. 지금 제 앞에 나타난 사람이 권 대표라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불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던 미동 없는 눈동자가 잠시 눈꺼풀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목울대를 꿀렁인 남자는 승원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다급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미치도록 따분한 음성이었다.

“내가 윤승원 씨를 도와줘야 합니까?”

“하, 하으… 으….”

승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 대표가 도와줘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잠시 착각했다. 그 없이도 충분히 홀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급한 마음에 그에게 정신없이 손을 뻗은 것이었다. 승원이 눈을 질끈 감자, 굵직한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TV에서 번듯한 정장을 입은 자신이 계속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권 대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티 하나 없이 맑은 목소리로 제 주장을 마음껏 펼치는 TV 속 윤승원과, 소파에 쏟아져 나신을 다 내놓고 뺨을 붉히며 울부짖는 윤승원이 있었다.

“그러게 누가 그딴 걸 받아 처 먹습니까.”

“…하, 하아….”

“알아서 처신해야지.”

제가 뭘 먹었길래. 뭘 먹었지? 뭘 먹은 적이 있던가? 그럼 지금 몸이 이렇게 들뜨는 건 제 잘못인 걸까? 혼란스러운 머리 위로 물음표가 가득했다. 몇 바퀴를 돌아 생각해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초조함이 기억마저 잠재운 게 분명했다.

커다란 그늘이 자리를 옮겼다. 눈을 느릿하게 뜨고 감으며 옆으로 이동한 권 대표에 승원의 시야 너머로 커다란 티비 화면이 들어왔다. 네모난 박스 안을 전부 채워 낸 모범생 같은 제 얼굴이 비쳤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잊은 줄 알았던 수치심이 혈관을 타고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권 대표 역시 고개를 틀어 티비 속 윤승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의 시선이 소파 위 승원에게 돌아왔다.

울음이 나와도 어쩔 수 없었다. 승원은 손을 내려 제 바지 단추를 풀었다. 똑, 기다렸다는 듯이 풀려난 사이가 벌어지고 지퍼를 내리자 톱니 갈리는 소리가 귓가를 가로질렀다.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꿈인지 아닌지도 승원에겐 명확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현실과 그렇지 않은 것의 간극 위에서 승원은 지속적인 혼란을 겪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 계속 그를 떠올리고 있던 탓에, 헛것이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마음이 편안해졌다. 승원은 티비 속 배우 ‘윤승원’을 바라보다가 저와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권 대표를 올려다봤다. 모든 배경과 인물, 배치가 무엇 하나 어울리는 게 없었다. 모순을 현실화시킨다면 딱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하, 하으, 으으…….”

답답한 드로어즈를 허벅지 밑으로 내렸다. 참고 참아 퐁, 튀어 오른 성기가 잔뜩 부풀어 허공 위로 목을 세웠다.

“…씨발.”

낮은 음성이 귓가에 스쳤다. 목 끝까지 올려놨던 티셔츠가 거슬려서 승원은 어깨 위까지 말아 올린 채 공기 위로 드러난 제 살갗을 손바닥을 문질렀다. 엉겨 붙는 흥분감이 전신을 눌렀다.

승원은 아예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 번에 잡아 다 벗어 버렸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공간이 누렇게, 빨갛게, 파랗게, 그리고 다시 누렇게 변했다.

승원이 제 성기를 잡고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만지던 순간 말캉하던 감각이 딱딱한 돌처럼 굳어 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승원은 고개를 추켜세웠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힘겹게 들여다보며 다리를 양옆으로 널찍이 벌렸다.

“흐으, 으읏.”

벌써부터 기둥을 가득 조여 오는 사정감에 몸이 부풀어 올랐다. 다리를 아예 M자로 넓게 뻗어 벌린 승원이 성기를 만지고 있지 않은 남은 손으로 제 손가락을 들어 입에 넣었다. 쪽쪽, 손가락을 빨아 당기는 입술 밑으로 번들거리는 침이 가득했다. 권 대표의 네모 반듯한 정장 태가 불선명하게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그 멋들어진 몸을 한껏 바라보며 승원이 제 손가락을 고환 밑으로 가져갔다.

“하, 하아… 흣, 아….”

권 대표는 아까부터 자신을 방관만 할 뿐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진짜인지 허구인지도 판별되지 않으니 그저 꿈이라고 단정 짓기로 한 승원이었다.

회음을 타고 이어지던 손가락이 꼭 조여든 구멍 근처에서 움직임을 멎었다. 살살 건들자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끼쳤다.

“아, 으윽… 아, 안 돼…….”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해도 좀처럼 열리질 않았다. 몸에 남아 있던 힘이 거의 다 소진된 상태였다. 꽉 닫혀 조인 입구는 입을 벌릴 생각이 없었고, 미끄덩한 손가락은 그 근처만 어슬렁댈 뿐 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했다. 급한 마음과 달리 영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자, 다시 눈물이 벌컥벌컥 튀어나왔다. 울음 범벅이 된 승원이 흐느꼈다.

“윤승원 씨.”

귓속을 후빈 나지막한 한 마디에 승원이 바짝 서 있던 제 성기에서부터 눈을 들었다. 권 대표가 가까이 다가왔다. 훤했던 시야가 다시 그로부터 생겨난 그늘로 어둡게 내려앉았다. 장대한 기골로 뒤덮인 영역 안, 승원이 입술을 질끈 물고 그를 올려다봤다.

“도와줘요?”

“흐, 흐으… 으응….”

승원이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바닥에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승원의 손을 치워 버린 권 대표가 고개를 살짝 내려 넓게 벌어진 승원의 다리 사이를 유심히 훑었다. 프리컴이 질질 흘러나오는 성기 밑으로, 뽀얀 볼기가 반쯤 보였다. 그 사이로 벌어진 구멍 주변이 승원이 바른 침으로 반들거렸다.

그가 승원의 입술 가까이로 중지를 내밀었다. 남은 손으로 승원의 눈가를 슥 눌러 닦은 권 대표가 낮게 목을 울렸다.

“빨아요.”

이해가 쉽지 않아 승원이 가만히 그의 눈을, 다시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낮게 으르렁대는 음성이 돌아왔다.

“도와 달란 뜻 아닙니까?”

“…….”

“내가 지금 병신같이 이해를 못한 겁니까?”

승원이 고개를 휘저었다. 잠시 물러났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 승원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빨아, 그럼.”

승원이 입술을 벌렸다.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그의 손가락을 입에 담은 승원이 목젖 가까이로 치고 들어오는 기다랗고 유려한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점막을 누르는 손끝을 혀로 뭉근하게 핥았다가 둥글게 휘감았다.

누군가 반나체의 몸으로 권 대표의 손가락을 빨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로 그는 무감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찬찬히 부유하는 눈동자만 승원의 가슴 언저리를 느릿하게 훑었다. 내리깐 눈이 천한 것을 보는 듯했다.

“흐읍-!”

갑자기 권 대표가 제 손가락을 승원의 입에서 푹, 꺼냈다. 입술 새를 벗어나는 쪽 소리가 울렸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 위로 승원의 침이 늘어 붙어 있었다. 승원의 턱을 붙잡아 추켜든 권 대표가 눈을 부릅뜬 채 얼굴을 가까이 밀어붙였다.

날카로운 눈매 사이로 드러난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승원의 속눈썹과 함께 엉겨 붙었다. 승원이 체념하듯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나 그랬듯 짙은 그의 냄새가 났다.

“내 이해 가능 범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피식, 입술을 당긴 권 대표가 비웃듯 덧붙였다.

“거머리 새끼들이 이래서 환장하나 봅니다.”

“…….”

“재주도 적당히 부려야지. 이딴 식으로 굴어서야 안 굴리고 배기겠습니까?”

하는 말이 족족 새로 간 칼처럼 서늘했다. 권 대표는 밑을 보지도 않고 제 손가락을 승원의 벌어진 뒷구멍으로 가져다 박았다. 입구를 금방 찾아낸 손가락 끝이 푹 찔러 들어왔다.

“하, 하으읏….”

눈을 질끈 감았다. 권 대표가 승원의 멍든 뺨을 꾹 잡아 눌렀다. 광대가 무너져내리는 듯한 통증에 승원이 눈을 부릅뜬 채 신음을 흘렸다. 아래쪽에선 쾌감에 젖어 든 감각이, 위쪽으로는 그가 내리누른 상처로부터 터져 나온 아픔이 분출됐다. 승원이 권 대표의 어깨를 잡고 도리질을 쳤다.

“아, 아픕니다… 아파요….”

“어디가 아픕니까.”

그가 승원의 뺨을 짓눌렀다.

“여기?”

“아악!”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는 승원에도 권 대표는 굴하지 않고 압력을 가한 엄지로 뺨을 지그시 쓸어 만졌다. 생채기가 올라온 광대 위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니면, 여기?”

“하, 으윽…!”

내벽을 둘러싸고 가만히 멈춰 있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안쪽을 푹, 찍고 나갔다. 그새 눈가에 다시 맺혔던 눈물이 퐁, 튀어 올랐다. 승원의 눈물에도 그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한번 입구를 침범한 중지는 거침없이 안을 밀고 들어왔다. 긴장감에 그의 중지를 삼킨 구멍이 조여들고 팽창했다. 승원의 뺨을 타고 지나 통통하게 부어오른 입술까지 쓸어 누르던 권 대표가 인상을 썼다. 희미한 욕지거리도 함께였다.

“자주 쓰던 통로 아닙니까?”

“…그, 그마, 흐읏.”

“근데 왜 이렇게 못 삼켜. 내 손가락 끊어 먹으려고?”

그의 너른 어깨를 꼭 붙잡은 승원이 눈을 살며시 내려 제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숨을 꾹 참고 다시 권 대표에게 시선을 향한 승원이 하아, 날숨을 내뱉었다. 경직된 근육에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권 대표의 손가락은 잘도 안쪽을 파헤치고 들어왔다. 어깨를 잡는 것으로도 역부족이었던 승원이 부치는 힘에 그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예상외로 순순히 끌려오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승원이 헐떡이는 숨을 다그쳤다.

“싸게 해 주면 되는 겁니까.”

“…네, 네… 흐읏….”

“앞은 안 만질 거고?”

“읏!”

입구 밖으로 수욱, 나가려던 손가락이 다시 푹! 주름 사이를 비집고 찔러 들어왔다. 승원의 발끝이 오들오들 떨렸다. 아까부터 나오던 그의 등 너머 티비 소리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여기저기 구른 탓일까. 승원은 좌절스럽게도 앞보다 뒤로 느끼는 쾌감에 훨씬 약했다. 평소 자위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있다고 한들 승원은 제 성기를 만지기보다는 뒤로 손가락을 넣어서 해결하는 경우가 잦았다.

권 대표가 길고 잘빠진 눈을 승원 가까이 맞닥뜨렸다. 그는 계속 제 손가락을 움직였다. 찔꺽이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점차 건조하게 메말라 퍽퍽해지는 바깥과는 다르게 안쪽은 축축하게 젖어 들어 질척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가 나른한 입꼬리를 비틀었다.

“원래도 이렇게 남들이 찔러 줬습니까.”

“…으, 하아… 모, 모릅니, 흐으, 다…….”

“손가락 하나만 넣어도 그딴 몹쓸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원래 윤승원 씨 버릇이냔 말입니다.”

내벽에 맞이한 점막을 지문으로 꾹, 누르더니 이내 파고들 듯이 문질렀다. 말 그대로 지문이 다 닳아 버릴 정도로 박박 비벼 대는 권 대표에 승원이 배를 흠칫 떨었다. 짙게 몰려오는 사정감과 함께 속절없이 풀려 버린 눈꺼풀이 내리 감겼다. 악을 쓰는 거 같던 신음소리는 어느덧 묘한 흐느낌으로 갈음된 상태였다.

“좆, 같네. 진짜.”

매몰차게 다그친 권 대표가 넣고 있던 손가락을 그대로 승원의 사타구니를 엄지로 붙들었다. 그러더니 사정없이 승원의 볼기를 붙잡고 털어 대기 시작했다. 최후의 보루로 잡고 있던 이성이 툭, 끊겼다.

“하, 으… 아악! 하흐, 응!”

허공으로 뜬 다리가 진동했다. 승원의 목소리가 날뛸수록, 권 대표는 털던 손에 더욱 힘을 주고 흔들었다. 발끝부터 오므라드는 감각이 온몸을 타고 전이됐다. 어깨를 잡고 있던 승원의 손이 흘러내렸다.

넘실대던 사정감이 귀두 끝으로 미친 듯이 넘쳐흘렀다. 파들거리던 승원의 성기 끝이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프리컴을 줄줄 흘려 대던 끝에, 하얀 점액질이 푹푹, 터져 나왔다. 승원의 몸에서 나온 물이 권 대표의 셔츠 위로 흩뿌려졌다.

“하… 아, 아…….”

뿌연 여운이 눈앞을 가렸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것처럼 눈앞이 까맸다가 점차 밝게 돌아왔다. 그 끝엔 자신을 들여다보는 권 대표의 얼굴이 있었다. 무감동한 눈동자가 한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승원의 몸 안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이 입구 밖으로 빠져나왔다. 깊은 탈력감과 함께 승원의 엉덩이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착지도 하지 못한 채 위에 떠 있는 승원의 두 다리를 잡은 권 대표가 그를 소파에 길게 내동댕이질 쳤다. 허벅지를 붙인 자세로 옆으로 뉘어진 승원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슴을 헐떡댔다. 길게 드러난 옆선에 봉긋 솟은 엉덩이 사이로 축축한 물기가 선연했다.

승원의 구멍 사이를 들이닥쳤다 빠져나온 제 잘빠진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불투명한 빛으로 젖어 든 수트를 확인했다. 손가락 끝으로 셔츠를 집어 들더니, 손가락에 묻어나온 정액을 보며 하, 헛웃음을 뱉었다.

“쌀 거면 싼다고 말을 하던가.”

“…….”

“옷 다 버렸네.”

지친 승원은 말이 없었다. 푸르른 뺨이 승원이 숨을 쉴 때마다 함께 차분히 떨렸다.

“윤승원 씨 여자 경험이 있긴 합니까?”

그의 목소리가 허공 위만 떠돌았다.

가까이 다가온 권 대표가 승원의 턱을 손끝으로 세웠다. 승원은 반쯤 죽은 자처럼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정신이 반은 나가 있는 승원은 이토록 생생한 권 대표의 목소리조차 환청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할 뿐이었다.

축축한 손가락을 승원의 너른 가슴에 대충 닦아낸 그가 걸음을 물렸다.

가늘게 뜨인 시야로 승원은 움직이는 검은 인영을 지켜보았다. 현실과, 꿈, 망상이 온통 뒤섞여 사리 분별이 되지 않았다. 흥분에 젖어 물들었던 조바심은 꺼져 버린 긴장과 함께 수그러들었다. 그 사이로 어스름한 어둠이 내렸다.

덧없이 빨려드는 졸음과 함께, 승원은 완전한 꿈속으로 파고들었다. 단념을 종국으로 툭, 스위치가 꺼졌다.

***

번쩍 뜨인 눈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제 집 거실 천장이었다. 탄식을 내지르며 상체를 벌렁 일으킨 승원의 어깨 밑으로 작은 담요가 흘러내렸다.

셔츠는 보기 좋게 벌어져 있었고, 안쪽에 있던 티셔츠가 돌돌 말려 있었다. 그 안으로 차디찬 공기가 눅눅히 들어왔다. 담요라도 덮지 않았으면 배탈이라도 났을지 몰랐다.

완전한 나신이 된 채 널브러져 있던 하체를 확인하고야 만 승원이 귓전을 새빨갛게 붉혔다. 머리 위로 종이 댕, 울렸다.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듯 골이 울리고 말았다.

“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쳐 버린 사이에 쨍하게 귀를 울리던 티비 소리가 지금은 잠잠했다. 보이지 않던 담요가 제 몸을 덮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기억의 편린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꿈도, 망상도 아닌 권 대표가 저의 집에 들이닥쳤다 나갔다.

“흣-.”

놀라 움찔한 광대 위로 어마어마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승원이 안방 문을 열어 거울을 확인했다. 뺨 한쪽이 부풀어 있었다. 살짝 건들자 전기가 찌르르 울리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 아래의 깡마른 몸이 누군가에게 겁탈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 된 채 드러났다.

장 사장은 어떻게 된 거지?

문득 후두엽을 치고 든 생각이었다. 권 대표가 정말 장 사장의 목을 졸라 죽인 것일까. 그래놓고 태평하게 저의 집을 찾아 들고, 자신은 그에게 옷을 내던지고, 그리고….

‘도와 달란 뜻 아닙니까?’

‘빨아요, 그럼.’

어제 들었던 그의 낮은 음성이 선명히 달팽이관을 관통했다. 수면 위로 드러나듯, 꿈과 맞닿아 있던 현실들이 둥둥 떠올랐다.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울부짖던 제 처량한 목소리와, 성가신 것을 해결하듯 무감한 얼굴로 제 몸을 쓸어 훑던 정 없는 검은 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망연히 들여다보던 승원이 그대로 몸을 낮췄다. 두 다리를 부여잡은 채 무릎을 굽히고 웅크렸다. 벽에 기댄 몸으로 허망하게 표류하는 두 눈동자를 깜박였다.

***

승원은 밥도 먹지 않고 그대로 욕실에 들어가 구석구석 몸을 씻었다. 기둥을 타고 흐른 채 그대로 굳어 버린 굳은 정액들을 닦아내고, 공기만 닿아도 뻐끔대며 입을 벌리는 골 사이도 싹싹 닦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10여 분간을 뜨거운 물만 맞으며, 눈을 감았다.

아무 옷이나 챙겨 입고 승원은 곧장 집을 나섰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떠오르는 생생한 감각에 사타구니가 부들거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하게 작동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밖으로 나선 승원은 고민 않고 택시를 잡았다.

그에게 받았던 단정하고 깔끔한 명함이 반듯한 날을 세운 채 승원의 손안에 들렸다. 차 안을 이동하며 마천루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도착한 주소지에는 높은 빌딩이 서 있었다. 승원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게이트 앞에서 경호 중인 가드 한 명을 붙잡았다. 권차현 대표를 찾는다고 말했고, 당연하지만 가드는 그런 승원을 곤란해했다. 마음 같아선 마스크를 몽땅 내려 신원을 인증하고 싶었지만, 얻어터진 뺨 한쪽이 제구실을 못해 그건 어려웠다.

승원은 대신 그의 명함을 들이밀었다. 무광의 명함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가드가 곧 어딘가로 전화 연결을 했다. 가만히 ‘네, 네, 알겠습니다.’ 등을 반복하던 가드가 개방된 게이트로 승원을 안내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가장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넓은 복도 사이드엔 그림 몇 첩이 걸려 있었다. 군데군데 놓여 있는 식물은 자세히 보니 전부 진짜와 거의 구분 불가능한 조화였다.

길을 안내하는 가드를 따라 한참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각진 문이 하나 보였다. ‘대표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노크하고 가드가 자리를 비켜섰다.

매끄럽게 열린 문 안으로 승원이 발을 들였다. 거실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커다란 사무실 벽 한쪽은 전부 넓게 뚫린 창이었다. 그의 이름처럼 딱딱한 명패를 앞에 둔 채, 창을 보고 있던 익숙한 등이 보였다. 후우, 소리와 함께 얼굴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왔습니까.”

승원은 순간 머리를 회전시켰다. 가드는 자신에 대해 권 대표에게 설명한 바가 없었는데, 그는 이미 이 자리에 찾아온 자가 누군지 안다는 듯이 굴었다. 승원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오른쪽 벽면에 퍼즐처럼 짜여 있는 CCTV가 눈에 들어왔다. 아. 승원이 짧게 탄성을 뱉었다. 굳게 닫힌 문을 등 뒤에 두고 승원이 그의 가까이로 걸음을 뗐다. 잘 다듬어진 옆선이 드러나고 검은 눈동자가 승원에게 도달했다.

“앉아요.”

그는 담배를 다 피워 가던 참이었다. 한 모금을 더 머금은 채 저 옆에 보이는 응접용 소파로 턱짓을 한 그에 승원이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자리에 앉아 주먹을 꼭 말아쥐고 그를 기다렸다.

“차 마시겠습니까.”

담배를 무느라 뭉개진 발음이 전해져 왔다. 평소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승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따뜻한 녹차라도 줘요?”

“…….”

“내가 안 먹어서 남겨 놓은 조각 케이크도 있는데.”

“…….”

“그것도 먹겠습니까?”

묻는 이유를 모르겠다. 여기서 거절을 한들, 정해진 답을 두고 이리저리 도망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승원이 잠자코 있자, 짧은 구두 소리 후에 무언가 달그락거렸다. 권 대표가 승원의 곁으로 와 차와 케이크를 내놓았다. 디저트가 담긴 그릇의 무늬가 화려했다. 그저 접시인데도 불구하고 턱 보기에 몇백은 할 듯싶은 명품이었다.

“들어요.”

“…감사합니다.”

승원이 마스크를 벗지 않고 말했다. 음식과 차를 거절하려고 했던 이유는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도 물론 있었지만, 지금 제 형편없는 꼴 때문인 게 우선이었다. 그가 가만히 버티고 있자,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권 대표가 고고하게 목을 울렸다.

“왜 안 먹습니까. 기껏 내왔는데.”

“…….”

“내온 사람 성의를 몰라 주고.”

승원이 눈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동시에 어딘가 누그러진 채였다. 승원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남자가 자신의 얼굴 앞으로 손을 들어 아래를 향하게 손짓했다. 휙휙, 치우라는 듯한 명령이 그의 제스처에 담겼다.

“벗지, 그거.”

“…….”

결국 승원은 귀 끝에 걸려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벌에 쏘인 것처럼 부풀어 오른 뺨이 얼마나 보기 싫을까. 입술을 뭉갠 승원은 길어지려는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꺾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다시 귀 끝에 닿았다.

“얼굴 들어요.”

차분한 음성은 강요였다. 승원이 다시 턱을 들었다. 으음, 그가 한가로이 승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몸을 곳곳이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부터 가슴, 배꼽을 지나 허벅지와 발끝까지 그의 눈이 떨어졌다.

“고개는 왜 내렸습니까.”

“…….”

“쪽팔리긴 한가 보지?”

서슬 푸른 물음이 비웃음과 함께 전해졌다. 승원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가 지금 묻는 ‘쪽팔림’의 근원은 무엇일까. 보잘것없이 부어올라 보기 싫은 몰골이 된 승원의 얼굴인지. 그게 아니라면, 어제 제 집에서 일어났던 그와의 작은 소동을….

절망스러운 확신이 들어서려고 하던 찰나, 그가 선고를 내리듯 똑똑히 단정 지었다.

“윤승원 씨 어제 내 얼굴 반찬 삼아 싼 거 아니었어요?”

원색적인 문장이 귀를 후볐다. 승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제의 일이 뭉텅이 채로 승원의 머리를 덮었다. 눈더미 같은 기억 사이를 헤집는 손이 분주했다.

“여기 찾아온 이유도 그거 때문 아닙니까.”

“…….”

“얘기해 봐요, 어디.”

눈더미 밖으로 간신히 드러낸 손바닥이 파들거렸다. 어렵사리 입술을 벌리자, 부어오른 광대가 아팠다. 승원이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을 낱낱이 핥고 있었다.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뭐를.”

숨 쉴 틈 없이 다시 돌아온 대답에 입이 바싹 말랐다. 승원은 그를 보지 않고 그가 내놓은 탁자 위의 조각 케이크를 빤히 들여다보며 어제의 일을 반추했다.

“어제 그렇게… 그런 식으로… 물의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서.”

“어떤 물의? 구체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게임판을 벌인 사람처럼 흥미진진한 눈으로 승원을 관전 중인 남자의 얼굴에 그윽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승원의 수치를 들쑤시려는 저 본격적인 표정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넌지시 한마디를 더 던졌다.

“기억은 나나 싶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

“나한테 일으킨 물의가 한두 개도 아니고, 사과하는 사람이 뭐 때문에 반성하고 있는지 정도는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가 케이크를 자신의 쪽으로 잠시 가져가더니 얄쌍한 포크를 들어 한 조각을 잘라냈다. 그걸 제 입에 넣는 대신 다시 가지런히 놓은 접시와 함께 승원의 쪽으로 밀었다. 물론 승원은 먹지 않았다.

“기억이 납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납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눈썹을 들썩인 얼굴 위로 무언가 반짝 지나갔다.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는가 싶던 권 대표가 다시 몸을 들어 웃었다.

“말해 봐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나는지. 나는 윤승원 씨를 엘리베이터에서 본 순간부터 이미 윤승원 씨가 반쯤 맛이 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는데.”

“…….”

“얼른.”

그의 재촉에 승원이 마지못해 목을 울렸다.

“장 사장에게 뺨을 맞고, 그리고 대표님을 뵈었던 게 기억납니다.”

“또?”

승원은 기억 하나하나를 모두 되새기며 그간의 상황들을 곱씹었다. 제 기억이 올바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에게 확인을 받는 이 기분. 듬성듬성 자라 있는 잡초 같은 기억을 한 올씩 뜯어냈다.

“그리고… 제가 대표님한테 도움을 요청했고, 대표님이 장윤철 사장의 목을 졸라 버리셨던 것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저를 엘리베이터에 태운 뒤 올라가라고 하셔서, 대표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제가 겁도 없이 대표님의 몸에 손을 대고 있었고, 그렇게 해서 그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모두, 전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지대로 나오지 않는 말들이 더듬더듬 입술 밖을 기어 나왔다.

“내가 윤승원 씨 몸에 손을 넣고 물을 빼 줬던 건에 대해서는.”

승원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희끗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까만 얼굴. 울며불며 권 대표의 온몸을 붙잡고 허리를 털던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아쥐고 있던 주먹 안쪽으로 뭉근한 손톱이 파고들었다. 감히 눈을 마주치고 말할 수 없어 승원은 호흡을 꾹 참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무래도 좋으니 꿈이었으면 좋겠다. 어제 일이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순간이라도. 발밑으로 땅이 푹 꺼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 짧은 순간 수십 번을 반복하며 승원은 입술을 축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과를 왜 받아야 하냐는 둥, 고개라도 들고 지껄이라는 둥, 그런 그 다운 대답을 내뱉을 줄 알았는데, 권 대표는 한참 지내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기억이 몇 개 빠졌습니다.”

승원이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깜박였다. 그가 이어서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윤승원 씨가 모를 수도 있는 사실이 있는데, 윤승원 씨 그 사장 새끼한테 맞기 전에 뭘 잘못 먹었습니다. 돼지 발정제 같은데. 돼지 새끼한테 먹이는 걸 사람이 처먹으니 그 지경이 된 겁니다.”

“…….”

“갑자기 내가 윤승원 씨 집에 들이닥친 건 아니고, 윤승원 씨가 올라간 층으로 가 보니 현관문 하나 따지도 못하고 잔뜩 흥분해서는 나한테 몸을 비비고 허리를 붙이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궁금하지도 않던 윤승원 씨 현관 비밀번호도 알았고.”

“…….”

“물이라도 안 빼면 사람이 곧 죽을 거 같길래 좀 도와준 겁니다.”

돼지 발정제…. 어제 입에 들어왔던 쾨쾨한 술의 내음이 다시 혀끝 감각을 일으켜 세웠다. 결국 또 장 사장의 소행이었다. 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잠시 잊고 있던 그 역겨운 얼굴을 떠올리니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장 사장이 죽었는지 진짜 궁금합니까.”

승원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윤승원 씨 원하는 대로 말해 줄 수 있는데.”

“…….”

“죽었다고 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살아 있다고 말해 줄까.”

여과 없이 드러난 승원의 당황을 마주 보던 그가 비소했다. 잠시 그 흥미로운 얼굴을 관찰하더니, 그가 옆에 있던 메모지를 뜯고 꽂혀 있던 펜을 들었다. 사인을 남기듯 귀찮고 재빠른 손길이 무언갈 휘갈겨 적었다. 승원의 앞에 놓인 것은, 알파벳 하나와 세 자릿수의 숫자였다.

“병동이랑 호수입니다. 유성병원에 입원 중이고. 사지 전부 멀쩡합니다.”

“…….”

“설마 내가 윤승원 씨 때문에 사람을 죽일까.”

당연한 말이었다. 그가 설마 자신 때문에 그딴 무모한 짓을 저지를 리가 없는데.

“필요 없으면 찢으세요. 병문안이라도 가고 싶으면 챙겨 두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가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리를 꼰 채 승원을 지켜보는 그의 눈이 집요했다. 승원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하는 듯, 곧은 입술을 다문 권 대표가 침묵했다.

선택지는 두 개였다. 찢거나, 챙기거나. 승원은 찢는 것 대신 그걸 손아귀에 넣어 구겨 버렸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 모양으로 뭉쳐진 메모지를 승원이 제 주머니에 넣었다. 찢는 것은 섣불렀고, 그대로 챙기기엔 제 속이 분했다.

메모지가 들어가 있을 승원의 바지 주머니를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아까 내버려 두었던 케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몇 분간 입을 대지 않아 크림 표면이 거칠었다. 푹 찍은 그가 승원의 입에 가져다 댔다.

“왜 안 먹습니까.”

그가 승원의 다물린 입 앞에 그것을 흔들었다.

“케이크 싫어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태평하게 케이크를 씹어 삼킬 수 있는 멘탈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승원은 그런 기백이 없었다. 마지못해 입을 달싹이며 승원은 권 대표가 쥐고 있던 포크를 잡았다.

“제가 먹겠습니다.”

그가 순순히 포크를 내주었다. 승원이 입에 케이크를 넣었다. 달달한 크림치즈와 블루베리 맛이 났다. 그렇게 버텨 놓은 고집이 무색하게, 허기에 몸부림쳤던 배 속은 입에 들어온 음식물을 열렬히도 반겼다.

승원이 달콤한 케이크를 입안에서 질리게 오물거리는 동안, 권 대표가 입을 뗐다.

“내가 고민을 좀 해 봤는데.”

“…….”

“어쩌면 내가 남색에 흥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레가 들릴 뻔했고, 승원은 얼른 차를 마셨다. ‘뜨겁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하고 컵을 들었던 승원은 혀끝에 닿은 열기에 인상을 썼다. 그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승원에게 건넸다.

“뭘 그렇게 놀래.”

“…….”

“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까 염치없는 십새끼 같습니까?”

그런 게 아니었다. 승원은 대뜸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드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과를 하러 이 자리까지 찾아온 이유가 없어졌다. 그 말을 정말 입증하기라도 하듯, 권 대표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지껄였다.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단 얘깁니다.”

“…….”

“물론 방금 한 말은 내가 윤승원 씨한테 관심이 있단 소리는 아니니, 부담스럽게 들을 필요 없고. 어찌 됐든, 윤승원 씨는 어제의 일 때문에 불쾌해하고 있을 나를 걱정해서 날 찾아온 거 아닙니까.”

승원의 행동거지를, 그가 하는 모든 생각들을 전부 꿰뚫고 있는 것처럼 권 대표는 깔끔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승원이 아무 말 없이 침묵으로 임하자, 권 대표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이어서 중얼거렸다.

“어제 있었던 소란 속 ‘행위’ 자체에 대해선 나는 불쾌하지 않았습니다.”

“…….”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수치스러웠다. 변태 새끼들이 저를 향해 반찬 집어 먹듯 던지는 성희롱과 몹쓸 손짓들을 그렇게 수십 번 겪어 왔음에도, 승원은 지금 권 대표에게서 흘러나오는 저 정갈한 문장과 음성들에 몸을 가만둘 수 없었다. 노골적인 의미를 내포하였을 속셈과는 전혀 다른 차이에서 오는 간극이 무한한 모순을 만들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을 그 지속된 구원 아닌 구원으로, 승원은 그를 남들과 다를 것이라 어림잡고 있었다. 어제의 행위에 대해 그가 불쾌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길 바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틀렸다. 승원이 완전한 백기를 들었다. 그의 속은 읽을 수 없는 암흑이었다.

“그러니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네.”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꾹 눌러 참아 낸 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승원의 시선은 권 대표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그저 그만 아니면 두 눈을 어느 곳에 두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권 대표가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소리를 해댔다.

“그 케이크는 어때요. 맛은 괜찮습니까?”

“…네.”

“새 거 그대로 있는데, 더 먹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가 강제로 먹인 한 입을 제외하곤 케이크가 모형처럼 남아 있는 상태였다. 딱 보기에도 먹는 걸 꺼려 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권 대표는 여상스레 지껄였다.

“내가 있으면 음식이 안 넘어가나 봅니다.”

“…….”

“매번 그러더니. 이번에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원의 눈이 움직이는 그를 쫓았다. 잠시 자신의 자리로 향한 권 대표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저녁 먹고 가세요.”

“…저 스케줄 있습니다.”

“그 상판대기로 스케줄 소화할 생각입니까?”

당연하지만 스케줄은 없는 소리였다. 거절할 건덕지나 찾느라 얻어터진 뺨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권 대표의 언급에 갑자기 광대 부근이 따끔하게 아려왔다.

“못할 거짓말 살살 치다간 윤승원 씨만 손해 봅니다.”

제 자리 서랍 가장 위쪽을 열어 손으로 뒤적이던 권 대표가 네모난 각 하나를 꺼내 승원에게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둥글게 날아오는 물건에 승원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손 위에 안정적으로 착지를 마친 것은 다름 아닌, 결혼식 날 권 대표가 승원의 뺨에 발라 줬던 연고였다.

“바르세요.”

‘안 버리길 잘했네.’라며 그가 혼잣말했다. 승원이 손등으로 제 아픈 뺨을 쓸어내렸다. 좁은 차 안에서, 가까이 닿은 그의 손길이 눈앞을 스쳤다. 승원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였다.

“감사… 합니다.”

“이번엔 놓고 가지 말고 챙기세요. 나는 있어도 쓸 일이 없습니다.”

권 대표가 옷을 챙겨 입었다. 코트를 걸친 잘 빠진 선의 남자를 얌전히 지켜보던 승원이 손에 들린 연고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저녁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냔 얼굴로 시계를 확인했다. 무감한 눈동자가 승원을 향했다.

“3시밖에 안 됐는데. 이 시간에 누가 저녁을 먹습니까.”

그럼 지금 그가 자리를 뜨려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승원은 앉지도, 그렇다고 서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연고를 꼭 쥐었다. 갑자기 그와 정면으로 마주친 얼굴 위의 멍이 신경 쓰여 승원은 고개를 내렸다.

“회의가 있어서 다녀와야 합니다. 갔다 와서 먹으면 딱 맞으니까,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럼 저도 나가겠습니다.”

승원이 제 옷을 챙겼다. 마스크 한쪽을 귀에 걸며 자리를 뜨려는 모습에 권 대표가 가볍게 한숨 쉬었다.

“끽해야 두 시간 안쪽입니다.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든지, 저기 꽂혀 있는 책을 꺼내서 읽든지.”

“…….”

“그 정도도 못 기다리진 않을 거 아닙니까.”

기다리는 입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 기다리는 일 따위 해 본 적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승원은 모든 걸 속으로 삼켜 낼 뿐, 달리 덧붙이지 않았다. 승원이 다시 푹신한 소파 위에 앉았다.

“…다녀오세요.”

고분고분 말을 듣는 승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입꼬리를 휙 올려 웃었다. 머리를 넘기며 걸음을 옮기는 권 대표의 옆선이 조각처럼 고왔다. 언제 남을 쥐잡듯 털어 냈냐는 듯 잘빠진 입을 곧게 다문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승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나간 자리지만, 그의 공간이었기에 마냥 편하지는 못했다. 승원은 바쁘게 돌아가는 벽 한쪽의 CCTV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고요한 눈으로 권 대표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승원의 시선이 패널 화면을 바꿔 가며 움직였다.

이곳은 권 대표의 공간이기에 CCTV가 없겠지. 승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 모서리 어디에서도 빨간 불이 들어오는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온전한 권차현의 영역이었다.

찻잔을 살피니 거의 입을 대지 않아 웅덩이처럼 뜨인 물 위로 제 못난 얼굴이 비쳤다. 이래서야 스케줄을 고집해 잡아도 펑크가 날 터였다.

텁텁한 목을 미지근한 물로 축인 승원이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를 한 입 넣었다. 아까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한번 입에 넣기 시작한 승원이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금방 케이크를 다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찾았다. 어두운 바닥 타일을 들여다보며 둘러본 공간은 그의 집 구조와 거의 흡사했다. 그의 자리와 응접용 소파, 탁자, 한쪽에 마련된 우드 소재의 책꽂이.

벽면에 마련된 크지 않은 거울을 찾은 승원이 맞은편의 못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틀자 멍든 뺨이 더 잘 보였다. 그가 던져 준 연고를 손에 가득 짜서 얼굴에 발랐다. 손이 닿는 곳마다 따끔했다. 한쪽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처치를 마친 승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숨만 쉬었다. 그가 함께 있을 때까지만 해도 차가운 기운이 방 안을 맴돌았는데, 갑자기 후끈거리며 열이 올랐다. 더운 열기에 나른해진 승원이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어제 불편한 잠에 빠져서였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사무실에 들여다 놓은 소파임에도, 제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가 운영하는 브랜드 상품이겠지. 앉은 채로 고개만 비스듬히 꺾은 승원은 찬찬히 감기는 눈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따뜻한 공기에 몸을 맡긴 채 잠에 빠졌다.

***

“……으으.”

얇게 펼쳐진 꿈결 위에서 한참을 허우적대던 정신이 점차 돌아왔다.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뜬 승원이 졸음에 자꾸만 감기는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낮은 테이블 위에 보이는 케이크 박스에 허, 하고 쓰러져 가던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모니터 두 대 사이로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승원을 대충 훑어보던 눈동자가 다시 사라졌다. 승원은 고여 있던 침을 닦아내고 몸을 들었다. 잘 땐 없던 작은 담요가 몸에 덮여 있었다.

“깼습니까.”

“…….”

승원은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뻑뻑한 눈을 비볐다. 몸 아래로 흘러내리는 담요를 끌어당긴 후, 소파 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있는 두 다리를 내렸다. 앉아서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었는데, 어느새 맨발인 채로 길게 누워 있었다. 승원의 운동화가 가지런히 소파 밑에 놓여 있었다.

권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했던 유리 너머가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수채화 같은 밤하늘 위로 높게 솟아 불을 밝힌 빌딩들이 배경처럼 그려졌다.

재빨리 시계를 확인하곤 탄식을 내뱉는 승원의 곁으로 어느새 코트를 차려입은 권 대표가 가까이 다가왔다.

“회의 끝내자마자 왔는데, 잠이 들어 있길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여기 나간 시간이 3시였고, 지금은 7시입니다.”

승원이 얼른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 보았다. 그의 말은 즉 자신이 적어도 3시간은 넘게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 됐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소파 팔걸이에 가볍게 걸터앉은 남자가 승원을 들여다봤다.

“죄송합니다….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잘 자는데 뭐하러 깨웁니까.”

“…….”

“벌써 윤승원 씨 자는 얼굴만 몇 번을 본 건지 모르겠네요.”

졸음이 다 털어지지 못했을 얼굴을 괜히 문지르려 손을 올리려던 때였다.

“얼굴 건들지 마세요. 연고 발라 놔서 끈적할 겁니다.”

“…이미 다 말랐을 거-.”

“내가 다시 발랐습니다.”

고저 없이 답하는 권 대표에 승원이 어정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봤다.

“바를 거면 좀 꼼꼼히 바르지 그랬습니까. 안 바른 것만 못하길래.”

깊이 들었던 잠도 아니었을 텐데, 자는 동안 제 뺨 위에 지나갔을 권 대표의 손결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까 그런 상스럽고도 노골적인 말들을 속 시원히도 내뱉고는, 권 대표는 자는 승원을 기다려 준 것도 모자라 연고까지 발라 놓았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내가 꽂아 준 소속사인데. 나랑 각별한 관계라는 걸 아는 몇몇도 있을 거고. 그 사람들한테 내가 윤승원 씨 그 꼬라지 만들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것도 곤란할 겁니다.”

“아… 맞습니다.”

승원이 바보같이 대답하자, 권 대표가 지나가는 소리로 ‘뭘 또 맞아.’하고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각별한 관계’라는 단어가 뇌리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이상하게 맴도는 그 다섯 글자를 둥둥 떠올리며 승원이 입술을 벌리고 있는 사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권 대표가 제 구둣발로 승원의 신발을 슥, 밀었다.

“농땡이 그만 피우고. 갑시다, 저녁 먹으러.”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그가 발을 떼려고 하길래, 순간 마음이 급해진 승원이 얼른 신을 꿰신었다. 기다려주지도 않고 나갈 듯이 굴던 권 대표는 바쁘게 코트를 입고 마스크를 챙기는 승원을 기다리려는 건지 문고리를 잡은 채 다가오는 승원을 바라보았다.

“거기 케이크 챙겨 오세요.”

“…이거요?”

“그럼 거기 케이크가 그거 말고 뭐가 있습니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케이크 박스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 두 개만 한 사이즈의 하얀 케이크 박스는 아까 승원이 해치웠던 그 조각 케이크였다.

“나는 둬도 안 먹으니까.”

“…괜찮습니다.”

“아까 다 먹은 거 아니었어요? 싹싹 비웠던데, 남김없이.”

그러고 보니 흔적이 남았을 접시와 찻잔도 다 없어진 상태였다.

“윤승원 씨밖에 손 안 댄 새 케이크입니다. 나도 입 한 번 안 댔으니까, 윤승원 씨가 입 댄 김에 가져가세요.”

하얀 박스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손잡이에 작게 달린 태그에는 누군가가 글귀를 남겨놓은 건지 ‘Dear Cha Hyun.’이라고 적혀 있었다. 승원은 마지못해 그가 말한 케이크 박스를 챙겨 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대표님 거….”

“여기 내 거 아닌 게 어딨습니까?”

답답하게 구는 승원에 짜증스러운 기색을 피운 권 대표가 음률 없이 일갈했다. 반강제적인 선물이었다. 남의 걸 빼앗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를 생각해서 누군가가 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이상했다.

“마스크 낄 필요는 없습니다.”

“…왜-.”

“왜긴, 다 퇴근했지. 지금 시간을 봐요. 윤승원 씨 때문에 지금 나도 퇴근 못 하고 있던 거 아닙니까.”

그럼 깨우면 됐을 텐데. 승원은 혀끝에서 맴돌던 말을 없던 듯이 삼켰다. 비꼬듯이 지껄인 권 대표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인 승원이 그를 따라 복도 밖으로 나갔다.

손에 들린 케이크 박스가 제법 묵직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내려가는 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권 대표는 지하 주차장에 다다르고, 차에 올라타서야 시동을 걸며 물었다.

“뭐 먹을 겁니까.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는 없습니다.”

“내가 데려가는 데로 가요, 그럼.”

승원이 벨트 매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차가 움직였다. 어스름한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새까만 도시가 나왔다. 승원은 침묵을 유지한 채 바깥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대표님.”

“왜요.”

“…왜 저랑 저녁 드시려고 하는… 겁니까.”

“뭐?”

줄곧 전방만 향하던 시선이 툭, 하고 승원에게 넘어왔다. 질문에 고스란히 그 뜻이 담겨 있었음에도 권 대표는 그걸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정적이 감도는가 싶던 찰나, 그가 삐딱하게 물었다.

“내가 윤승원 씨랑 밥 먹는데 굳이 이유를 대야 합니까?”

언제나 그랬듯, 뾰족한 말이 튀어나왔다. 고압적인 톤은 아니었다. 단지 항상 그의 말투에 묻어 나오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을 뿐.

“윤승원 씨는 누군가랑 밥 먹을 때 다른 목적이라도 둡니까?”

“…아니요.”

“근데 나한테는 그걸 왜 묻습니까.”

“…….”

“그냥 먹고 싶으니까 먹는 거지.”

내내 혼나는 기분이었는데, 마지막 말에 승원은 권 대표의 옆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패널을 사이에 두고 앉은 게 고작인데도 저 아득한 너머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말은 알 듯하면서도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어차피 나도 같이 먹을 사람 없습니다.”

“…….”

“마주 보고 먹을 사람 없었는데, 잘됐지.”

승원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앞을 봤다. 차가 탈 없이 안정감 있게 달렸다. 승원은 자꾸 밟히는 그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옆 유리창에 비친 무감한 얼굴은 전방을 바라본 채 기계처럼 핸들을 돌렸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일식집이었다. 다행히 불미스러운 일로 그를 만나야 했던 가게와는 다른 곳이었다. 일어로 적혀 있는 커다란 간판 주변에 호롱불 모양의 조명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돌로 된 작은 다리를 지나, 문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가장 끝 쪽의 방으로 둘을 데려갔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던 상 위에는 온갖 생선회와 스키들이 널려 있었다. 한 입씩만 주워 먹어도 배가 더부룩하게 차오를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진 상 위는 승원과 권 대표 몫의 수저뿐이었다. 승원을 안쪽으로 안내한 그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정 감독과 식사를 했을 때도 이런 비슷한 코스의 음식들을 먹었었는데, 당시에 그를 만났던 승원으로서는 권 대표가 일식 요리를 좋아하나, 싶던 때였다.

“그때 보니 상 상태가 말이 아니던데. 음식 제대로 집어 먹긴 했습니까?”

입을 축이려 물잔을 들던 승원이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승원은 그가 말하는 상의 상태가 뭔지 알고 있었다.

당시 룸 안에서 온갖 난동을 부리던 정 감독과, 덕분에 엉망이 되었던 음식과 접시들. 어차피 불편한 자리였기에 음식이 넘어가지도 않던 승원이었지만, 그 지경의 정신머리로도 혼자선 잘 찾지도 않았을 값비싼 음식들이 아깝다고 느끼긴 했었다.

“배려… 아니, 센스 감사합니다.”

순간 컵을 들어 물을 마시려던 권 대표가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승원의 말이 재밌었는지, 그는 물을 넘기고 나서도 다 가시지 않은 미소를 남긴 채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내가 한 말은 다 기억을 하나 봅니다.”

“어떻게… 안 합니까. …기억을.”

정말이었다. 승원은 권 대표와 있었던 모든 것을 다 기억해 낼 자신이 있었다. 어제 이상한 걸 목 뒤로 흘린 직후 소실된 조각 같은 몇 개의 기억 빼고는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위를 둥둥 지나갔다.

젓가락을 들고 먼저 회를 집어 먹는 권 대표를 보고 승원도 그제야 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 입 떠 마셨다. 속을 따뜻하게 채우고 나서야 음식을 하나씩 조심스레 입에 넣고 씹었다. 권 대표는 그에게 음식이 입에 잘 맞느냐고 물었다. 승원은 오물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옮긴 소속사 사람들과는 잘 맞습니까?”

“네. 다들 잘해 주십니다. 빈말 아니라, 정말로.”

배 실장님도, 곽 매니저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일하며 가장 곁에 두고 오래 봐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혹여나 처음부터 좋지 않은 이미지가 낙인찍히면 불편할까 걱정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승원을 응원하고 좋아했다. 기나긴 옥살이 끝에 찾아온 해방 같은 자들이었다.

“다행입니다.”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권 대표는 음식을 씹고 삼키는 모든 몸짓이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정갈한 젓가락질은 그가 어릴 적부터 올바른 환경에서 엄숙하게 식사 예절을 배운 사람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드라마 들어간다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승원은 이미 알고 있는 권 대표에 놀라 초밥을 집어 먹으려던 손을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레 연어 초밥을 들어 제 접시로 가져왔다.

“장르가 뭡니까.”

“멜로인 것 같습니다.”

“으음.”

입에 있던 것을 삼킨 권 대표가 제 앞에 놓인 국에 숟가락을 넣고 휘휘 저었다. 그 손짓이 너무 여유롭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승원은 잠시 넋을 빼고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멜로 해 봤어요?”

“…제대로 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씬도 많겠네요.”

“…아직 대본을 다 받아보진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연애 경험이 있으니 그런 부분에 대해 감정 잡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다.”

꼭 부러워하는 자의 말투 같았다. 그런 일 따위 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떠올려 본 적도 없었을 것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무신경하면서도 아릿한.

“저도 경험이 많은 건 아니라서.”

국을 젓기만 하던 권 대표가 숟가락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가 턱을 괴고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긴장이 들어, 승원은 시선을 내린 채 입을 다물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못하는 건 없던데.”

“…….”

“잘할 겁니다, 윤승원 씨는.”

승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희롱 따위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해서인지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찌르르, 전기가 울렸다. 자신을 올곧이 바라보며 확신하는 듯 말하는 저 단단한 음성이, 바르게 올라가 있는 잘생긴 입꼬리가 가슴 한쪽을 쿡 찌르듯이 강타했다.

“감사합니다….”

“그 얼굴만 어떻게 좀 하고.”

승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접시에 놓여 있던 초밥을 입에 넣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니 비리지 않고 부드러운 연어살이 혀끝을 맴돌다 솜사탕처럼 녹았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 거였을까.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바짝 굳어 있던 몸이 입 안 속 연어처럼 연하게 가라앉았다.

“아직도 정신과 약 먹습니까?”

“네. 근래에는 좀 빼먹긴 했습니다.”

“정신과 약 거르는 거 아닙니다. 약을 줄이면 줄였지, 그렇게 먹었다 안 먹었다 하면 부작용만 심해져요.”

잠시 승원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권 대표가 아닌 음식만 훌훌 바라보던 두 눈이 방황하다가 조심스레 떼어 낸 입술과 함께 멈췄다.

“…대표님도 저에 대해서 다 기억을 하시나 봅니다.”

웅얼거리듯이 말한 승원이 얼른 눈에 보이는 아무 음식이나 젓가락으로 집어 가져왔다. 접시에 가져오고 나서야 비로소 튀김이라는 것을 깨달은 승원이 그것을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뇌보다 혀가 먼저 움직였다. 뱉고 보니 이게 무슨 주제넘은 소리인가 싶었다.

아무 말도 없는 그를 앞에 두고 승원은 머쓱한 마음을 숨기려 시선을 꿋꿋하게 내렸다.

“요즘 내가 기억하고 신경 쓸 만한 사람은 윤승원 씨밖에 없는 거 같은데.”

“…….”

“그래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귀찮은 일 좀 그만 만듭시다.”

그 말을 끝으로 권 대표도 다시 입을 다문 채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제 몫의 밥을 찬찬히 넘기고 물을 마셨다. 권 대표가 식사하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승원의 귀를 쑤시고 들어왔다.

양반다리 위에 올려놓았던 승원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기분이 오락가락, 청룡 열차에 오른 것처럼 거침없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갑자기 제 멍든 뺨이 다시 생각나 승원은 바닥에 길 듯이 얼굴을 내리깔고 음식을 삼켰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승원은 그에게 한탄할 처지가 못 됐다. 그만큼 제 속을 제가 알 길이 없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떨리는 숨을 골라 가며 승원은 음식을 씹고 삼켰다.

저녁 식사는 일방적인 권 대표의 질문과 승원의 대답으로 한참 동안 잠잠히 이루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듯하면, 권 대표가 물음이나 시답잖은 말 따위를 던져 왔고, 승원은 거기에 응하며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하나둘, 입 안에 음식을 넣다 보니 어느새 넉넉히 채워져 있던 접시가 다 비어 있었다.

깨끗하게 상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배가 더부룩할 정도로 불러 왔다. 물로 입 안을 깨끗이 헹군 승원은 아까 그대로 코트를 입고 나가는 권 대표를 따라나섰다.

“담배 한 대만 피웁시다.”

“…아. 네.”

“차에 먼저 타고 있던지.”

“기다리겠습니다.”

담배를 꺼내던 눈이 승원을 훑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낯을 잠시 보였지만, 그는 이내 신경을 끄고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타오른 담배 끝이 기다란 연기를 내뿜었다.

“식사는 잘했습니까? 입에는 잘 맞았고?”

발에 채는 자갈들을 툭툭, 발끝으로 건들고 있을 때였다. 권 대표의 물음에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그는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 같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승원이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네. 대표님 덕분에….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대답 없이 입바람만 불고 있는 권 대표를 응시하던 승원의 뺨이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세찬 추위에 도드라진 홍조가 푸르른 멍마저 지워 버렸다.

“대표님. 다음엔 제가 사겠습니다.”

무료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권 대표가 담배를 입에서 떼어 내고 후우, 입김을 냈다. 그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나랑 밥 먹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네?”

“오늘도 억지로 먹은 거 아닌가 했는데, 나는.”

“아닙니다. 억지로 먹은 거. 진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승원은 담배가 떨어지는 그의 입술을 지그시 응시했다. 곧은 입술 새로 퍼져 나오는 연기로 자꾸만 눈이 갔다. 손에 들려 있던 것을 툭툭 털어 낸 권 대표가 떨군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아직 길게 남아 있던데. 저만큼만 피우고 버리는 걸까. 승원은 담배를 피운 적이 없으니 그걸 알 도리가 없었다.

이젠 그의 차가 제법 익숙해지는 듯했다. 권 대표는 운전 솜씨가 좋았다. 택시를 탔을 때의 불안정함도 없었고, 밴에 오를 때마다 느끼는 주변에 남는 공허함도 없었다.

그리고 권 대표의 차에선, 그의 냄새가 났다. 그의 체취가 잊힐 때 즈음, 권 대표의 차에 오르면 다시금 그 잔향이 코를 건드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모는 차는 알아서 승원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익히 아는 다리를 건너고, 항상 보던 빌딩들을 바라보고, 비로소 아파트 정문을 들어설 때야 안도감이나 반가움 따위가 들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그때 얌전히 굴러가던 차가 갑작스레 방지턱을 지나며 덜컥, 움직였다. 순간 유리창을 보고 있던 승원의 동공이 커졌다. 심장이 쿵쿵쿵- 급작스러운 반응을 시작했다.

저의 아파트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안쪽으로 들어간 차량이 곧 그가 항상 머무르던 승원의 아파트 앞에 정차했다. 깜빡이를 누른 권 대표가 승원을 응시했다. 승원은 뒤통수만 보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였다.

“뭐 합니까. 다 왔는데.”

“…대표… 님….”

승원이 색색 숨을 내쉬었다. 제집에 왔는데 내리고 싶지가 않았다. 엊그제 있었던 현관에서의 일이 통째로 승원의 머리를 조였다.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섬뜩하고 아뜩했던 당시의 떨림이 다시 손끝으로 전이되는 듯했다.

분명 낮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새까만 어둠 아래 보이는 차창 밖의 아파트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올라가면 또 그 괴기스러운 얼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장윤철에 대해선 이미 권 대표를 통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지만, 그건 승원의 두려움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덮친 당시의 기억은 어느덧 트라우마로 변질되어 움을 틔웠다.

“윤승원 씨.”

“…….”

“말을 해요. 왜 불렀는지.”

답답했는지, 권 대표가 승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신의 쪽으로 돌린 그가 불안정한 승원의 눈을 응시했다. 어둠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자, 그가 실내 라이트를 켰다. 팟, 명도 낮은 하얀빛이 둘을 비추었고, 그의 얼굴이 승원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는데.”

“…태워 주신 거 감사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 거 같은데.”

눈을 삐딱하게 뜨고 있던 그가 승원의 두 뺨을 잡았다. 갑작스레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가에 어릿한 울음이 맺혀 있었다.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하려던 말도 멎었다. 권 대표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뿐이었다. 잘 먹고, 잘 조잘대고, 얌전히 차에 타 무사히 도착해서는, 갑자기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승원이 그의 입장에서 이해가 될 리 없었다.

그가 잠시 인상을 썼다. 그게 꼭 종용 같이 느껴져 승원은 얼른 입을 뗐다. 툭 터져 나온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한데요.”

“…….”

“대표님 댁, 아니 그게 아니라… 호텔 같은 곳…….”

“…….”

“그런 데로 다시 가 주시면 안 될… 까요….”

감히 이런 부탁을 해서 송구하다는 얼굴이었다. 두 뺨을 권 대표에게 붙잡힌 채로도 승원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울음을 최대한으로 참아 보려는 게 표정에서 전부 드러났다.

혼자 올라가기에 너무 벅찰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현관만 열고 들어가면 그만인 것을, 그 짧은 순간에 승원의 머릿속을 어지럽힐 온갖 두려운 상념들이 벌써부터 그를 겁주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권 대표의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이런 말은 염치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승원은 지금 그 염치를 무릅쓸 만큼 간절했다.

승원의 간절한 눈빛이 그에게 닿았을까. 언제나 한 치 앞도 읽을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승원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권 대표가 미간을 좁혔다. 천장을 밝히고 있는 가까운 등 때문인지, 얼굴이 낱낱이 보였다. 선명한 티존과 높게 솟은 콧대, 그 옆으로 자신을 살피는 검은 눈까지.

코앞까지 닿은 상대가 자신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아는데도, 권 대표는 솔직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채 낮게 지껄였다.

“자는 사람 기다려 주고, 밥 먹이고, 기껏 집 앞까지 모셨더니.”

“…….”

“진짜 나를 무슨 기사 취급하는 겁니까.”

피곤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은 짜증을 잔뜩 묻힌 채였다. 승원은 벌렁거리려는 가슴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송곳 같은 문장들은 전부 맞는 말투성이였다. 달리 덧붙일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고 손을 오므라뜨리는 승원의 얼굴을 놓아준 권 대표가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하아, 짧은 한숨이 들렸다.

“귀찮게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어요?”

“…….”

“윤승원 씨 집에 남는 칫솔 있습니까.”

여상하게 물으며 그가 이어서 덧붙였다.

“주차할 테니 내리세요. 나도 피곤한 상태라 운전대 더 잡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서.”

“…정말로.”

“내려요, 빨리.”

그가 귀찮은 걸 털어내듯 턱짓했다. 자신이 먼저 부탁해 놓고도 그걸 수락한 권 대표의 행동이 믿기지 않아 승원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권 대표가 ‘내리라고 했습니다.’라고 다시 강조할 때에서야 승원은 멀건 얼굴로 숨을 삼켰다. 벨트를 풀고 차에서 빠져나왔다.

차는 정말로 근처에 보이는 빈 주차 공간으로 들어섰다. 번쩍이는 헤드라이트를 따라다니며 승원은 그의 차에 바싹 붙어 있었다. 최대한 권 대표와 가까이 있기 위함이었다.

차가 무사히 주차를 마치곤 모든 등을 잠재웠다. 잠잠해진 차 밖으로 권 대표가 빠져나왔다. 잊고 있던 케이크 박스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정신 좀 차리지.”

“…감사합니다.”

권 대표에게서 그의 몫의 케이크를 받아든 승원은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듯이 권 대표가 앞장섰고, 승원이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쯧,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주차하는데 왜 이렇게 옆에 붙어 있습니까. 다치려고.”

“…가시면 어떡하나 하고.”

“…….”

승원은 말을 뱉자마자 두 입술을 꼭 말아 물었다. 버튼을 누르자 7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정수리 위로 장대한 남자의 지긋한 눈빛이 전해져 왔다.

“어지간히도 못 믿네.”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엘리베이터가 양쪽으로 열렸다. 권 대표가 먼저 들어선 후, 승원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22층 버튼은 권 대표가 눌렀다. 문이 닫히고 안정감 있게 올라가는 박스 안에서도 승원은 좀처럼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어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머리로는 자제하라고 연신 소리를 쳤지만, 몸은 이미 권 대표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행히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나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승원이 그를 부른 이유 역시 아는 눈치였다.

[22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공간을 가득 울리는 기계 목소리가 그렇게 섬찟할 수 없었다. 승원은 고개를 푹 숙였고, 열린 문밖으로 권 대표가 먼저 빠져나갔다. 빠른 발로 현관 앞에 다다른 그가 센서 등을 먼지 털어내듯 켜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승원을 향해 이리 오라며 턱짓했다.

“아무도 없으니까 나와요.”

그의 곁으로 빠져나가자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혔다. 도어락 앞에 다다른 권 대표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올리려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제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문은 집주인이 따세요.”

그가 걸음을 뒤로 물렸다. 승원이 불이 들어온 번호들을 하나씩 눌렀다. 그러자 뒤에서 한마디가 들려왔다.

“오늘은 안 까먹었나 봅니다.”

“…네. 오늘은… 안 틀립니다.”

혹시 실수할까 싶어 번호를 조심스레 눌러 가던 승원은 몸을 더 웅크렸다. 몸을 살며시 웅크려 도어락 버튼을 가리는 건 승원의 평소 습관이었다. 아무도 없는 현관에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얌전히 버튼을 누르고 지문까지 지워야 안으로 편히 들어갈 수 있었다.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의 행동을 바라보더니 다시 덧붙였다.

“내가 볼까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네?”

지체하던 손놀림을 빨리 놀려 비밀번호를 풀어내자 잠겨 있던 문이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열렸다. 문고리를 당기며 승원이 말했다.

“그냥… 습관입니다.”

승원의 등 뒤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철저한 습관 들여서 참 좋겠습니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아마 비꼬는 것에 더 가까울 텐데, 웃음소리가 함께 들리니 승원은 잠시 헷갈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선 승원은 이제야 진정 놓이는 마음에 참았던 숨을 후, 털어 냈다.

불을 켰음에도 잠시 불안이 새어 들어 승원은 방을 살폈다. 안방까지 들여다보고 나오니 거실 중앙에 권 대표가 멀대같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집 안에 들어선 또렷한 그의 인영이 조금 낯설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안 따라오면 울 기세던데, 그냥 가면 나만 나쁜 놈 될 것 같아서.”

이제 저 화법도 계속 들으니 단련이 되는 것 같았다. 승원은 잠시 머뭇거리며 방황하다가,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든 게 없었다. 그가 줬던 케이크를 포함해 오렌지와 탄산수, 지금 당장 내놓기 어려운 반찬이나 샐러드가 전부였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

뒤통수 바로 가까이에서 들린 목소리에 승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의 뺨 옆으로 권 대표의 뺨이 맞붙어 왔다. 거의 닿을 듯이 밀착된 거리에서 들린 그의 음성이 곧장 귓속을 파고들었다.

“호텔 냉장고도 이거보단 낫습니다.”

“…거긴 호텔이잖아요.”

호텔이니까 제집보다 품질 좋고 다양한 구성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승원의 집은 그저 남자 한 명 건사하기 빠듯한 거처밖에 더 되지 않았다. 호텔과 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호텔이 더 좋을 정도로. 호텔은 새롭기라도 하지, 제집은 그냥 잠만 자는 곳이었다.

오렌지라도 깎을까 했는데, 칼질은 썩 형편없는 승원이 오렌지를 깎았다간 괜한 핀잔이나 더 들을 것 같았다.

그때, 냉장고 벽 쪽에 있는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 우유 두 개를 발견했다. 언제 산 건지도 모르는 게 마침 딱 두 개였다. 승원은 일단 그거라도 꺼냈다. 권 대표가 그런 승원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술을 벌렸다.

“지금 이걸 나한테 대접하는 겁니까?”

“…싫으시면 사양하셔도 됩니다.”

“줘 봐요.”

권 대표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몇 번의 만남에도 전부 무감한 얼굴로 일관하던 남자는 생각보다 표정이 많았다. 그래 봤자 서너 개 정도 더 본 게 다였지만.

승원은 얇은 빨대를 꽂은 우유를 권 대표에게 건넸다. 자신도 빨대를 꽂아 하나를 입에 물었다.

“몇 년 만에 먹어 보는 건지 모르겠네.”

권 대표가 바나나 우유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중얼댔다. 그가 거실로 향해야 자신도 자연스레 여길 빠져나갈 텐데, 권 대표는 냉장고에 기댄 채 움직이질 않았다. 거실로 나가시죠, 라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승원은 잠자코 빨대만 빨았다.

“맛있습니다, 이거….”

할 말도 없고, 집에 부른 사람에게 기껏 바나나 우유 하나 내놓는 제 꼴이 우스워서 승원은 아무 말이나 붙였다. 권 대표도 승원처럼 빨대 꽂은 바나나 우유를 쪽 빨았다. 승원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는 정말… 바나나 우유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 집도 못 올라오고, 기껏 따라왔더니 우유나 대접받고. 애도 아니고 이게 뭔지.”

“…애 맞습니다.”

바나나 우유를 위스키 잔 들듯 살살 돌리던 권 대표가 눈썹을 휙 들었다. 승원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나 참,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대각선으로 올라간 입꼬리 끝이 볼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본인 입으로 그런 말을 해요?”

“…대표님에 비하면.”

“윤승원 씨 대학은 나왔습니까?”

그의 어투가 다소 알맹이 그대로 드러났을 뿐, 승원을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승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졸입니다.”

“으음.”

권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얘기라도 한다면 말이나 좀 통할까 싶었는데, 그럴 여지마저 금세 차단된 셈이었다. 빨대만 잘근잘근 물고 있는 승원에게 권 대표가 다른 걸 물었다.

“바나나 우유를 좋아합니까?”

권 대표의 얇은 입술에서 빠져나온 건 담배가 아닌 빨대였다. 부조화 그 자체였다. 그 아이러니에 눈을 껌벅이던 승원은 뒤늦게 그가 자신에게 한 질문을 곱씹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런 편입니다.”

“이 회사 제품을?”

“보통 바나나 우유는 다 이렇지 않나요?”

마땅히 비교해 볼 만한 다른 제품의 우유를 먹어 보지도 않았기에 판단이 어려웠다. 뭔들 바나나 맛이 난다면 그러려니 하고 먹겠지만, 승원은 항상 이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 우유를 즐겨 마시곤 했다. 가끔 묶어서 파는 경우도 많아서 쟁여 놓고 먹기도 했는데, 이번엔 어느새 다 비우고 운이 좋게 딱 두 개가 남아 있던 거였다.

둘은 서로 마주 본 채 우유를 마셨다. 영양가 있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니, 가만히 서로의 얼굴만 들여다본 채 빨대를 빠는 것이 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을 긁는 소리가 끅끅, 들렸다. 먼저 비운 권 대표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뱉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맛있네.”

승원은 그 말에 무어라 덧붙일 말이 없어서 간질거리는 손을 들어 그의 빈 우유병을 가져왔다. 자신도 얼른 남은 것을 빨아 마시고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쓰레기를 버리고 나오니 권 대표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느새 코트까지 벗어 그 옆에 놓은 채였다.

승원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댄 남자의 기럭지가 새삼 실감 났다. 승원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다란 눈매를 바라보다가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저 괜찮아서… 가셔도 될 거 같아요.”

“…뭐?”

권 대표가 고개를 틀며 입을 벌렸다. 한숨 소리가 쑥, 흘러들어 왔다.

“부를 땐 언제고, 갑자기 쫓아냅니까?”

“그게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었다. 승원은 착잡함에 혀로 입술을 축이곤 끌끌거리던 손을 들어 팔목을 쓸어 만졌다.

“괜히 저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걸음해 주신 거 같아서… 대표님 괜찮으시면 그냥 대표님 댁으로 돌아가셔도 괜찮다는 말이었어요.”

“…….”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됐어요.”

승원이 고개를 숙이며 묵례를 건네려는데,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걱정이 깃든 낯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승원 역시 예의상 건넨 말이었다.

“칫솔 좀 줘 봐요.”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피곤해 죽겠는데, 하룻밤만 묵겠습니다.”

승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한참 동안 답을 고르고 골랐음에도, 승원은 결국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까 오기 전에도 말했던 거 같은데. 칫솔 있냐고.”

“…….”

“정신 좀 제대로 차려요.”

“…….”

“이 소리도 몇 번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권 대표가 투덜거리는 어투로 혼잣말을 씹었다.

“그럼 대표님 출근은-.”

“뭐가 문제입니까? 여기서 하면 되지.”

권 대표는 삐딱하게 내뱉고는 나른한 기지개를 켰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훌쩍 높아진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던 승원이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며 몸을 재빨리 움직였다.

부엌으로 가서 서랍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휴대용 칫솔을 발견했다. 일이 있을 때 요긴하게 쓰기 위해 놔둔 것이었다.

승원이 건넨 칫솔을 들여다보던 권 대표가 ‘욕실 좀 빌리겠습니다.’라고 통보하고는 알아서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꽉 닫힌 욕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승원은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권 대표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 두고 나니 힘이 쫙 풀려 소파에 등을 기댔다.

“…….”

순간 어제의 기억이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튀어나왔다. 끅끅, 울음을 삼키며 먹었던 눈물의 짠맛과 거대한 그늘 같던 권 대표의 그림자, 제 몸에 들어왔던 그의 손가락과 사정없이 그와 몸을 맞붙여가며 깊고 긴 쾌락에 빠졌던 자신까지.

금세 귀 끝이 타올랐다. 손끝이 저리는 듯해 승원은 두 손을 꽉 붙잡고 있다가 붉은 얼굴을 손아귀 안에 묻어 버렸다.

“하아…….”

흐릿한 기억이라고 애써 모른 체하고 있었는데, 권 대표와 당시의 순간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어지럽혀진 머리가 정리되질 못했다. 갑자기 제 머리 안에 있던 도미노가 전부 무너진 기분이었다. 구슬 같은 기억으로도 이렇게 민망한 자신인데, 그 꼴을 다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권 대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뺨을 착착, 내리친 승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머리를 털어내고 다시 욕실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불이 켜져 있는 욕실 안에서는 작은 물소리가 났다. 혼자 지내는 승원의 집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승원은 대본을 꺼내 읽었다. 활자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보고 있자니 더 심란할 것 같았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간단하게만 씻고 나온 건지, 권 대표는 물기에 젖은 멀끔한 얼굴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승원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부엌 식탁에서 늘어뜨렸던 몸을 다시 번쩍 일으켰다.

미리 양치를 마친 입을 괜히 두어 번 확인한 승원이 거실로 나왔다. 어정쩡한 승원의 움직임에 나른한 얼굴의 권 대표가 무심히 물었다.

“뭐 하고 있었습니까.”

“…대본, 대본 보고 있었습니다.”

“아.”

원래도 희고 창백한 권 대표의 피부는 물이 닿아 더 뽀얗게 보였다. 살짝 젖어 있는 앞머리를 바라보던 승원은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대본집이 괜히 민망해 손으로 가렸다. 당연하게도 권 대표는 그런 승원을 놓치지 않았다. 승원의 손을 슥 치워 버린 그가 제멋대로 대본을 확인했다.

“이게 그 멜로물입니까?”

“…네.”

“윤승원 씨, 내가 입을 옷이 있나.”

그는 예상 외로 대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즉각적인 반응을 한 승원이 얼른 발걸음을 뗐다.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으니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승원의 사이즈에 맞는 옷이라면 권 대표에게 맞을 리 만무했겠지만, 다행히 협찬으로 들어온 옷들 중에 승원에게 맞지 않는 옷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무난한 걸 한참 동안 뒤적이던 승원은 검은색 맨투맨과 회색 칠부 트레이닝 바지를 찾았다.

칠부라고 나온 제품이었지만 승원에겐 허리도 컸고, 발목까지 다 내려와 제대로 된 핏이 나오질 않았다.

“이거 입으시면… 될 거 같아요.”

한참 안 쓰던 서랍을 뒤졌더니 안 보이던 먼지가 얼굴에 훌훌 붙은 기분이었다. 승원이 후, 소리를 내며 권 대표에게 옷을 건넸다. 그가 의아하다는 듯이 받은 옷 사이즈를 확인했다.

“내 건데, 완전.”

“…그거 협찬받은 건데, 저랑 사이즈 안 맞아서.”

다물려던 입술을 승원이 다시 뻐끔댔다.

“잘 맞으시면, 그냥 대표님이 입으셔도 돼요.”

“…….”

“아, 막… 버리는 옷 그런 거 아닙니다. 나름 비싼 브랜드 제품이에요, 그래도….”

권 대표의 드레스룸이 생각난 탓이었다. 그 어떤 비싼 제품을 들이민다 해도, 그의 옷장 앞에선 다들 기가 죽을 터였다. 고급 입맛을 가진 사람한테 괜히 싸구려 음식을 건네는 건 아닌가 싶어서 민망해진 승원이 목덜미를 긁었다.

“가져가서까지 입을 필요는 없고.”

“…….”

“부득이하게 여기 올 때마다 입으면 되겠네.”

그가 걸음을 돌려 욕실 쪽으로 다시 향했다. 승원이 큰 키의 남자를 멀거니 바라봤다.

“여길 또 오신다고….”

“윤승원 씨 하는 짓을 보세요. 내가 여기 찾아올 일이 앞으로 얼마나 많을지 벌써 눈에 훤하네.”

쾅, 문이 닫혔다. 정적만 남은 거실이 어쩐지 휑하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승원이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와 다시 대본을 막 펴고 있는데, 금세 옷을 갈아입은 권 대표가 승원에게 다가왔다.

“그 대본 나도 좀 같이 봅시다.”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는 권 대표의 모든 모션들이 눈으로 입력돼 머리에 새겨졌다. 커다란 키에 늘씬한 몸은 항상 정장을 차려입고 있어서 도회적이고 사무적인 이미지만 풍겨 왔는데, 맨투맨에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꼭 잘 나가는 국가대표 선수 같았다. 제 나이대로 생긴 줄 알았던 인상이 제 또래라도 된 것처럼 다섯 살은 더 어려 보였다.

“그거… 잘 어울리세요.”

“고맙네요.”

자기도 잘 안다는 듯 승원의 눈동자를 바라본 권 대표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군더더기 없는 감사 인사에 승원은 멋쩍은 듯 눈을 대본으로 돌렸다.

권 대표가 승원이 보고 있던 대본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 속절없이 그에게 대본을 넘기게 된 승원이 분홍 대본을 쥐고 있는 섬섬옥수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본을 고요히 넘겨보던 권 대표의 시선은 글자 하나하나를 파헤칠 듯이 집요했다.

“하고 많은 작품 중에 왜 이걸 들어간 겁니까?”

고요했던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갑작스런 질문은 부엌을 오디션장으로 만들었다. 마치 감독 앞에라도 선 것처럼 침을 삼킨 승원이 눈을 깜박거리다 입을 뗐다.

“추천도 해 주셨고. …저도 제대로 된 멜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색다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말은 즉 이 작품은 본격적인 멜로라는 소리겠네요.”

“비슷합니다.”

승원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 놀이를 더 하는 줄 알았더니, 권 대표는 그걸 얼마나 읽었다고 금세 지루해진 눈으로 대본을 아까보다 빠르게 휙휙, 넘겼다. 손길이 거침없었음에도 짜여진 손가락이 유려해서인지 종이의 구김은 보이지 않았다.

“윤승원 씨가 맡은 캐릭터가 뭡니까. 설명해 봐요. 눈이 아파서 읽기가 귀찮네.”

당당하게 요구하는 권 대표에 허벅지 사이에 손을 짚고 있던 승원이 등을 꼿꼿하게 폈다. 뭐라고 할 수도 없던 것이, 뺨에 손을 괸 채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권 대표의 낯엔 정말 유약한 피곤이 찌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 공기를 싹 뺀 민낯을 봐서인지 평소와 느낌이 다른 것 같았다.

승원도 아직 캐릭터에 대한 파악이 완료된 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망설이던 승원이 목을 울렸다.

“이름은 유정원이고, 대기업에 막 입사한 멋모르는 신입인데… 팀에 있던 부장과 안 좋게 얽혀서 부장이 주인공한테 막 갑질을 합니다. 그런데 구세주가 등장해요. 그 사람이 여자 주인공이에요. 잘난 대기업 CEO인. 그렇게 멋모르는 신입은 그 여자한테 완전 반해 버리고, 여자도 주인공한테 점점 스며든대요. 그러면서 서로한테 깊이 빠져들고… 결국 사랑하는. 그런 로맨틱 코미디….”

승원의 목소리는 희고 고왔다. 희다, 라는 표현이 목소리를 꾸며 내기에 적합한 표현은 아니지만, 승원의 목소리는 정말 하얗고 맑았다. 너무 낮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의 톤은 가락가락이 단정하고 모난 데 없었다. 깔끔한 발음 역시 한몫했다.

훑어봤던 드라마의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쭉 브리핑하던 승원은 문득 자신이 너무 재잘거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나긋나긋한 승원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권 대표는 승원의 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승원의 설명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침묵으로 임하던 그가 질문을 하나 했다.

“구세주가 뭘 했다고 그 남자가 갑자기 사랑에 빠집니까.”

“구해줬잖아요.”

“고작 그런 일 하나로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집니까? 동화도 아니고.”

“동화 같은 일도… 얼마든지 많은데요.”

방금 한 말은 작은 반박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도움이나 구원을 받는 경험을 쉽사리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주 작은 거라도, 정말 별거 아닌 일이라도, 제 앞을 막고 나서서 변호하고 편들어주고,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그는 지금도, 시간이 훌쩍 지난 나중에라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승원은 막연히 예상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

역시나 권 대표는 이번에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다못해 동화에서 말하는 구세주는 최소한 목숨은 구해 준 은인일 텐데.”

“…….”

“사랑에 빠지기도 쉽네요.”

“대표님은 을이 되어 보신 적이 없어서 그래요.”

허공을 내다보던 권 대표의 시선이 올라왔다. 승원은 이전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대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한쪽 눈을 느슨하게 뜬 채 ‘어디 더 해 봐.’라고 말하듯이 눈짓했다. 뱉은 말 자체에 후회는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내가 왜 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모 아니면 도일 거고, 그럼 나는 갑입니까?”

“경제적으로 보나, 신체적으로 보나… 집안이나, 현 위치를 봐도… 대표님은 을보단 갑 쪽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대한민국에서 감히 가장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상류 계층 중에서도 탑을 지키고 있는 집안이었다. 날 때부터 타고났을 듯한 내력과 재력, 혼자 기업을 차릴 정도의 위치와 지성,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잡아 놓은 권위와 직책까지. 거기다 그는 없어도 충분할 빼놓을 데 없는 신체와 비주얼까지 갖춘 자였다.

권차현은, 먹이사슬 가장 꼭대기에 있다고 한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런 남자였다.

잠시 침음하던 권 대표가 나지막하게 목을 울렸다.

“갑을 관계는 상대적인 건데.”

“…….”

“윤승원 씨는 그럼 을입니까.”

권 대표가 지그시 승원을 응시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답이 뻔했지만 입을 열어 소리를 내면, 제 비루한 처지를 인정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닥 존재감도 없었던 자존심이 갑자기 기를 세우며 꿈틀댔다.

“저는 당연히… 을입니다.”

그러나 세운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빠르게 수긍하는 게 자신에게, 그리고 갑의 상대에게 더 어울렸다. 승원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권 대표는 아예 식탁 위에 두 팔을 올려 팔짱을 끼웠다. 본격적인 심문이라도 할 기세였다.

“누구한테.”

“…….”

“나한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대표님한테.”

권 대표가 희미하게 웃었다. 비웃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가 만족스러운 낯을 띄웠다.

그때, 센서로 되어 있는 거실 불이 툭 소리와 함께 꺼졌다. 승원과 권 대표가 앉아 있는 식탁 위를 제외하고 남아 있던 불들이 전부 깊이 잠들었다. 스포트라이트처럼 좁은 빛이 둘을 감쌌다.

“윤승원 씨, 나 아까부터 이 얘기 좀 하고 싶었는데.”

“네.”

앞에서 다가오던 넓은 빛이 사라지니, 권 대표의 얼굴이 그림자에 물들어 더욱 날카롭게 완성됐다. 승원이 대본집을 손으로 꼭 말아 쥐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내 언어능력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네.”

“어제 발가벗고 질질 싸던 윤승원 씨 몸 보고 솔직히 좀 꼴렸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던 승원의 어깨가 위로 들썩인 그대로 빳빳하게 굳었다. 방금까지 이어졌던 일상적이고 부드러웠던 대화를 깡그리 짓밟는 모난 형태의 단어들이 그대로 승원의 머리를 치고받았다. 순간 하얘진 머리에 어지러울 뻔한 정신을 꽉 붙잡은 승원이 목울대를 꿀렁였다.

권 대표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내 앞에서 어제 했던 거 다시 해 볼 생각 없습니까.”

승원의 눈이 두어 번 끔벅였다. 눈을 감았다 뜰 때면 풍성하게 매달린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권 대표는 그 어린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남자는 바나나 우유나, 승원의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와 비슷한 목소리로 방금의 말을 지껄였다.

정령 마음이 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소리였다. 일말의 감정도 없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저딴 소리를 갑자기 난데없이 뱉어 낼 리가 없으니.

“오늘 사무실에서도 이 얘기 하지 않았나.”

“…….”

“묻는 겁니다, 그냥. 윤승원 씨의 의사를.”

이 무감한 어투와 목소리로부터 휘몰아치는 기시감이 무엇인지 승원은 한참 동안 덤불 같은 과거를 헤집었다. 그리고 뽑혀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결혼식에 가던 날 그가 차 안에서 했던 말과 단어들이었다.

‘섹스는 했습니까.’

‘원하는 대답 없습니다. 그냥 네, 아니요. 정도면 끝날 물음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표정 하나,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섹스를 해 봤냐고 묻던 그 무신경한 얼굴. 당황한 승원의 낯을 보고도 미안함을 보이긴커녕, 그저 궁금한 게 다였다며 말을 줄이던 목소리.

지금도 똑같았다. 저 검고 깊은 눈동자에선 역시나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승원은 주름 하나 잡혀 있지 않은 단단한 권 대표의 이마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려 그의 눈썹과 눈동자를 응시했다. 잘생긴 코와 단정한 입술, 맨투맨 때문인지 더욱 넓어 보이는 그의 어깨가 제 시야를 꽉 채웠다. 멍청한 심장은 정신을 못 차린 건지 다시 두근거렸다.

아무 말 없는 승원에게 싫증이 난 건지 권 대표가 입술을 축였다. 표류하는 승원의 눈을 그는 기다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싫으면 관두세요. 강요할 생각 없습니-.”

“그럼 대표님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승원이 입을 열었다. 뒤돌려는 상대를 다시 붙잡으려는 듯한 손짓 같은 음성이 권 대표에게 닿았다.

미동 없는 두 눈이 승원을 바라보았다. 승원의 다물린 입술은 일자로 쭉 그어진 채였다. 떨림을 잠재우려는 노력이 울렁이는 울대로 여지없이 드러났다.

“제가 어제 했던 것들을 다시 하게 된다면… 대표님은 저한테 뭘 해 주실 건가요.”

권 대표가 눈을 흘겼다. 잠깐이나마 미세한 당황이 비쳤던 얼굴은 곧 본래의 흔들림 없고 강단 넘쳐 보이는 권 대표의 얼굴로 돌아왔다. 눈을 살짝 내리깐 권 대표가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별게 있나 싶은 듯,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뭔데.”

“…….”

“말해 봐요. 서로 윈윈하는 건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정말 들어주실 겁니까?”

몸 안에서 똘똘 뭉친 무언가가 뜨겁게 작열했다. 어젯밤 이루어졌던 허상 같은 현실이 승원의 가슴 언저리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승원의 물음에 권 대표는 한 걸음을 물렸다.

“들어 보고.”

확신을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승원이 불편한 사람처럼 입을 오물거렸다. 권 대표의 검은 눈동자에 직조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저의 말을 얌전히 기다리는 남자에게, 승원은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느릿한 호흡과 뭉친 목소리를 토해 냈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

“대표님이랑.”

“…….”

크게 놀라거나 적어도 인상을 찌푸릴 줄 알았던 권 대표는 미동 없는 표정으로 승원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나불댄 입과는 다르게 눈은 차마 자신을 가질 수 없어 승원은 의자 시트에 보이는 제 허벅지 사이의 두 손만 바라보았다. 허공 위로 붕 뜬 공백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윤승원 씨, 취했습니까?”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무감한 목소리가 고저 없이 묻고 있었다. 자신을 찬찬히 타진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승원이 대답했다.

“아닙… 니다.”

저런 말이 돌아오는 게 당연했다. 승원은 마땅한 물음에 눈을 내리깔았다.

권 대표가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울였다. ‘담배가 당기는데.’라고 그가 주절거렸다. 손끝이 온통 붉게 물든 승원이 잇새로 연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런 소리를 지껄였는지 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미 물이 엎질러진 이상, 승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저 이 공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었다.

그때, 입술을 축인 권 대표가 목을 울렸다.

“하세요, 그럼.”

세 글자가 묵직하게 승원의 귓전을 울렸다.

“가까이 오라고.”

그가 승원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덧없이 이끌린 승원의 몸이 권 대표와 가까이 닿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박을 뻔했던 승원이 간신히 고개를 들자, 권 대표의 턱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내리깐 눈이 승원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윤승원 씨 키스 잘하지 않습니까.”

“…….”

“해 보세요, 어디.”

자기가 뱉고도 미친 소리라는 걸 알았기에, 이런 답변은 전혀 예상에도 없던 일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머리가 일분일초마다 뒤집어지고 뒤엉키길 반복했으므로, 승원은 자신이 토해 내고도 무슨 소릴 지껄였는지 구분이 안 가는 순간순간이 잦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울대를 크게 꿀렁이며 울렸다. 맞닿은 가슴에 세차게 뛰는 심장은 제 것 하나뿐이었다.

“…….”

번듯한 입술에 시선을 걸어 놓던 승원은 눈을 질끈 감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말랑한 두 살결이 서로 맞물렸고,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숨을 쉬던 승원이 코로 호흡을 바꿨다. 더운 숨결이 붙었다. 말 그대로 뜨거운 입술이 맞붙어 온기를 나누었다.

“…흐으…….”

입술이 서로 붙었는데, 그 이상 진도를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장을 남기듯 입술만 꾹 맞대고 있던 몸에 밧줄로 죄는 듯한 긴장이 몰려왔다.

권 대표의 허리 언저리를 잡고 있던 승원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 그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다 감지 않은 눈꺼풀 너머로 똑똑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매서운 남자의 눈빛이 느껴졌다.

“…갑자기 어리숙한 척입니까.”

승원과 입술을 맞댄 그대로 그가 말했다. 권 대표의 나직한 음성이 숨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뜨거운 숨결 끝엔 상쾌한 치약 내음이 퍼졌다. 심장이 불안정한 진동을 이어 나갔다.

처음 입을 맞췄던 그때와 뜀박질의 반응이 또 달랐다. 누군가가 저희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도, 술에 의탁한 취기도 없었음에도 승원은 그저 권 대표와 입술을 맞대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몸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권 대표가 승원의 작은 턱을 밀어냈다. 애매하게 닿아 있던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무람없고 고압적인 음성으로 그가 승원을 옥죄어 지껄였다.

“할 거면 똑바로 해야지.”

“…….”

“이러면 부탁하는 내 쪽도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가 승원의 턱을 도로 잡아 끌어당겼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지체 없이 곧장 틈새를 벌려 밀고 들어오는 혀가 승원의 입 안을 꿰뚫었다. 권 대표의 허벅지를 잡고 있던 승원의 손에 땀이 차올랐다. 부들부들 지탱하는 팔이 버겁게 떨렸다. 두 혀가 뒤엉키며 나는 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으, 으흣… 으음…….”

머리가 한참 동안 어두운 궤도 안을 돌고 돌았다. 온갖 상념들이 다 지워진 자리엔 오로지 상대의 혀끝에서 오는 물컹한 감촉과 상큼한 잔향만이 머물렀다. 감고 있는 눈 위로 잘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파드득, 떨렸다. 권 대표는 승원의 혀를 씹어 삼킬 기세로 물고 빨았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승원에게 달려드는 이유를 승원은 알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거침없이 다가오는 것은, 입을 맞춘 수위의 값만큼 승원이 어제 했던 ‘짓’을 정당하게 치러야 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혀끝이 점막에 붙었다 떨어지며 질척이는 타액 소리가 가득 울렸다. 숨을 빠듯하게 쉬고 있었음에도 승원은 권 대표를 밀어내지 않았다. 단단하고 거친 손이 동그란 뒤통수를 받들었다. 승원은 완전히 권 대표에게 몸을 맡긴 채 달랑이는 고개를 들었다.

“으, 하아, 응…….”

달고 긴 키스를 열심히 받아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달큰한 기회였다. 후회를 반복해 돌파하라던 곽 매니저의 말이 승원의 뇌리를 스쳤다. 승원은 권 대표의 허벅지 위에서 꾸물거리던 손을 그의 허리 위로 올리려 끙끙댔다. 그리고 그 순간,

“흐응, 으, …아악-.”

농밀하게 섞여드는 혀를 움직이면서도 적당한 발판을 찾으려 더듬거리던 손이 미끄러지며 어딘가에 불시착했고, 승원은 손바닥에 느껴지는 크고 긴 윤곽에 퍼뜩 손을 떼었다. 적당히 녹아들던 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읏…….”

“…….”

당황스러움에 두 손을 다 떼어 버린 승원은 권 대표의 입술을 놓치고 말았다. 그대로 미끄러지며 떨어진 얼굴이 권 대표의 너른 가슴에 꽝 부딪혔다. 긴 콧대 안쪽으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니.”

동시에 멍들어 있던 뺨도 그의 품에 눌려 함께 아려 왔다. 승원이 작게 신음하며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해서 숨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아파서 손이 가는 마음도 있었다. 승원은 혀로 입술을 슥 핥았다. 쿵쿵쿵, 심장이 멈출 줄을 모르고 뛰었다. 제 손에 닿았던 건, 다름 아닌 권 대표의…….

“뭐 합니까, 지금.”

그의 목소리가 승원의 뇌를 쪼개고 지나갔다. 아픈 코를 매만지다가 입술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숨겨 둔 바람 섞인 음성이 떨어졌다.

난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되며 불쑥, 묵히고 있던 궁금증이 승원의 혀끝에 맴돌았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타액을 삼키며 승원은 동시에 작은 아연함을 품었었다.

“…대표님….”

“왜요.”

다시 시선이 가깝게 얽혔다. 살짝 번들거리는 권 대표의 가지런한 입술이 보였다. 그가 어처구니가 없단 듯이 승원을 내려다보았다. 웃는 얼굴도, 그렇다고 화난 얼굴도 아닌 야릇한 무표정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승원이 숨을 쉬었다.

“대표님, 왜…….”

권 대표는 연애 따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과거의 제가 잘못 들은 것일까.

“분명 연애 같은 거 안 해 보셨다고…….”

저번에는 분위기상 그랬다고 치지만, 지금은 말이 달랐다. 승원을 잔뜩 빨아 집어삼킨 남자는 혀를 능숙하게 다뤘다. 자신이 권 대표보다 경험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틀린 가설이었다.

마무리가 되지 않은 승원의 문장을 단박에 이해한 남자의 낯 위로 미약한 비소가 찾아들었다.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린 권 대표가 무심히 지껄였다.

“연애 안 해 본 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상대가 신기해 승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는 어째서 자신의 속을 이리도 잘 꿰뚫는지 몰랐다. 승원은 벌게진 제 얼굴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몽롱한 눈을 깜박였다.

“윤승원 씨, 생각보다 순진하네요.”

권 대표가 승원의 몸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승원의 뺨 위에 붙은 푸르른 멍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에서부터 더운 온기가 느껴졌다. 고고한 눈이 제 밑의 어린 눈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승원의 귀 끝에 닿았다.

“내가 내는 대가는 이쯤으로 하고.”

“…….”

“이제 윤승원 씨 차례인데.”

승원의 눈이 흐릿하게 그를 살폈다. 냉연한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짧디짧은 반짝임과도 같던 입맞춤을 끝으로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지시에, 승원이 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손을 잘못 짚어서 몸을 못 가누지만 않았어도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었을 텐데.

“빨리하죠. 피곤합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자신이 먼저 제안해 놓고는 이제 와서 피곤하다는 소리를 지껄이며 짜증을 내는 권 대표를 보자, 승원은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 승원은 더 지체할 수 없어 제 바지 위로 손을 올렸다.

“…여기서-.”

“그럼 어디서.”

단호한 대답은 끄떡없는 벽과 같았다. 마지 못해 고갤 숙인 승원이 조심스레 엉덩이를 들썩이며 바지를 허벅지 밑으로 내렸다. 드로어즈만 내놓은 채, 아예 무릎 밑까지 내리자 힘을 잃은 바지가 허물처럼 쑥, 발밑으로 떨어졌다. 승원의 얼굴만 유심히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다리 선을 훑었다.

이미 단단해진 성기가 드로어즈 위로 윤곽을 드러냈다.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제 속옷이 부끄러워 승원은 귀를 붉히며 윗옷을 끌어 내렸다. 그런 승원의 손목을 권 대표가 잡아 저지했다.

“윤승원 씨 어제, 윗옷은 가슴 위까지 올리고 있었습니다.”

“…….”

그가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내가 설마 거짓말을 할까.”

알고 있었다. 권 대표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 승원도 어제의 기억을 찾아냈기에 더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달아오른 수치심에 온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가 떨리는 손으로 윗옷 끝을 잡아 위로 올렸다. 바짝 세운 젖꼭지가 훤히 드러났고, 그 밑으로 힘을 준 배가 작은 복근을 만들었다. 마른 몸에 어울리는 슬림한 근육을 관찰하던 권 대표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 여유로운 감상을 이어 나갔다.

“…제가, 어디까지…….”

“어디까지 재연해야 합당할 것 같습니까.”

“…….”

“나는 방금 우리가 충분할 만큼의 키스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권 대표는 승원의 몸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동안 느릿하게 가슴과 배, 그 밑의 남은 드로어즈 위의 윤곽을 살피던 권 대표가 시선을 들었다.

“부족합니까.”

“…….”

“부족했으면 말하세요.”

“…아닙니다.”

승원의 대답에 권 대표가 도로 눈을 내렸다. 다음 행위를 종용하는 듯, 집요한 눈동자가 길게 승원의 몸을 핥았다.

승원은 잠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드로어즈를 벗어 냈다. 뽀얀 허벅지 사이로 중간쯤 세워져 있는 승원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식탁에 몸을 기댄 채 흥미로운 것을 보는 듯이 눈썹을 들어 올린 권 대표가 다시 자리에 앉은 승원에게 명령했다.

“다리도 벌려야지.”

승원은 그의 말대로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소파에서처럼 길게 뻗어 시트에 걸칠 수는 없었기에, 승원은 몸을 느슨하게 기댄 채 두 다리를 최대한 옆으로 당겼다. 숨을 차분하게 쉬려는데도 한 번 가빠지기 시작한 호흡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을 텐데. 동작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표정 하나하나가 전부 그대로 재생되듯 눈앞에 선연했다. 승원은 거짓말도 못 하는 숙맥이었다.

“…하아.”

단단한 성기를 쥐자 야릇한 감각에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면, 권 대표가 제 뺨 옆에서 자신의 행위를 관망하고 있었다.

술에도, 약에도 취하지 않은 맨정신 그대로의 나신으로 승원은 권 대표의 앞에서 자위를 하기 시작했다. 꽉 잡은 기둥을 주무르듯 위아래로 천천히 쓰다듬고 매만졌다. 앞서 권 대표와 했던 입맞춤 때문인지, 딴딴하게 굳어 가던 성기 위로 투명한 물이 맺혔다.

“……흐, 으…….”

손에 악력을 쥔 채 위아래로 움직이자 기둥 위의 뽀얀 살이 함께 딸려 왔다. 그 마찰로부터 느껴지는 느른하고 연약한 쾌감이 온몸의 말초신경을 간지럽게 건드렸다.

권 대표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남의 흥분을 관전하는 두 눈은 정말 다른 세상의 것을 접하는 사람처럼 감동도,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점차 달아오르는 붉은 뺨에 승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정적을 타고 흐르는 야릇한 음성이 제 것 하나뿐이라는 것에 대한 묘한 불합리성을 느꼈다.

“대표님…….”

“왜.”

집중을 방해한 건지, 권 대표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응시한 채 승원이 깨물었던 입술을 놓고 말했다.

“부… 족한 거 같습니다…….”

“다시 해 달라고?”

승원은 대답 대신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눈자위가 뜨겁게 달궈졌다. 서러워지려는 이 감정을 저 자신조차 납득하지 못한 채, 승원은 발가락을 작게 오므라뜨렸다.

“……읏.”

순간 권 대표의 손끝이 승원의 가슴 사이를 갈랐다. 판판하고 마른 가슴을 쭉 내려와 배꼽까지 손가락을 타고 내려온 남자는 여전히 승원의 눈에 시선을 걸어 둔 채였다. 진득하게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권 대표에 좆을 주무르던 승원의 손이 바빠졌다. 고환을 매만지던 승원이 위태로이 턱 끝을 들며 제 앞에 맴도는 권 대표의 얼굴을 탐했다. 입술을 벌리고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코끝이 닿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승원은 그의 입 안으로 침입했다.

“하, 읏… 으읍…….”

혀가 미친 듯이 섞였다. 안을 찌를 듯이 들어온 권 대표의 혀가 난잡하게 안쪽을 뒹굴고 쑤셨다. 금방의 키스가 아이들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의 키스는 그 수위와 강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승원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른 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승원의 젖꼭지 위를 쓸어 만졌다. 가슴이 앞으로 봉긋하게 솟았다. 흥분감에 툭 튀어나와 있던 돌기가 손끝에 닿기 무섭게 파득 파득, 몸을 떨었다.

아예 몸을 틀어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운 권 대표가 흘러내리려는 승원의 윗옷을 위로 끌어당겼다. 직각 위로 떨어진 얼굴이 축축하게 젖은 혀와 함께 목젖을 꿰뚫었다. 버거운 숨을 헐떡이며 승원은 권 대표와 혀를 섞었다. 사정감이 몰려오는 성기 끝에 방울처럼 맺혀 있던 것이 기둥을 타고 흘렀다.

“하, 으, 읍. 으, 하아…….”

“하, 아…….”

뺨이 아닌 귓가를 감싼 채 각도를 틀며 섞이던 혀가 점막 여기저기를 짓누르고 삼켰다. 침이 고일 때마다 울대를 꿀렁이던 승원은 요도 주위로 몰린 묵직하고 조급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권 대표가 승원의 얼굴을 뜯어내듯 떼어 냈다. 휙, 뒤로 젖혀진 고개 밑으로 자제하지 못한 침이 흘러나왔다.

“후우… 흐.”

“하아… 하아…….”

권 대표가 시선을 떨궜다. 배꼽에 닿을 만큼 솟아 있는 승원의 성기를 확인하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승원의 얼굴이 반쯤 흘러 일그러져 있었다. 두 눈이 무거운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흐릿하게 뜨였다. 막혔던 숨을 내쉬느라 작게 벌린 입술 틈새에서 적당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읏, 으읍-.”

권 대표가 승원의 입 안으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채 중지만 길게 뻗은 그의 손가락이 침이 가득 고인 안쪽으로 푹 찔러 들어갔다. 불쑥 찾아온 야릇한 불청객에 놀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어제도,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으, 우으… 흡.”

“잘 적셔야, 넣는 나도, 받는 윤승원 씨도 편할 겁니다.”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은 승원이 입술을 붕어처럼 오므려 권 대표의 손가락을 안쪽으로 흡입했다. 중지 끝까지 다 삼킨 승원이 목젖에 걸렸는지 캑캑거렸다. 갈고리처럼 둥글게 말아쥔 손가락으로 볼 안쪽을 쓸자, 승원의 눈이 다시 스르륵 풀렸다. 혀로 싹싹 핥는 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항문에 빨려 들어간 손가락을 보듯이, 말캉한 입술이 한참 동안 그의 손을 빨고 핥았다.

비좁은 틈새로 권 대표가 검지까지 욱여넣었다. 식도까지 파고들 듯이 밀어 넣은 권 대표가 고요한 낯을 띄운 채 뺨을 붉힌 승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질척이는 혀를 이리저리 누르고 바르던 권 대표는 승원이 입에 넣고 있는 게 무엇인지 잊을 정도로 혀의 감각이 무뎌지던 때에서야 손가락을 꺼냈다. 구출된 손가락과 승원의 입술 새로 가느다란 은빛 실이 늘어졌다.

“젖내 나는 얼굴로 그러고 있으니.”

“…….”

“어울립니다. 상당히.”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긴 권 대표가 제 젖은 손을 승원의 몸 아래로 내렸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승원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숨을 말아 쉬었다. 망설임 없이 구멍 근처로 손을 댄 권 대표가 그 주변을 살살 문질렀다.

“으, 흣…….”

승원의 반응을 집요히 살피는 시선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승원의 표정과 반사적인 작용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어떻게 튀어 오르고 소리를 지를지 기대하는 눈빛이, 검은 파동처럼 움직였다.

“하으, ……으읏!”

한참 기웃거리던 중지가 예고도 없이 푹 찔러 들어왔다. 주름 사이사이를 긁어낸 권 대표의 뭉근한 손끝이 그 안의 자극을 일깨웠다. 승원이 벌려 놓은 다리를 불편하게 떨고 있자, 권 대표가 그의 두 종아리를 한꺼번에 들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팔로 대본을 밀어 버리고 일어선 채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남자 뒤를 쑤셔 본 적은, 없어서 몰랐는데.”

“하, 으…… 흐읏…….”

“윤승원 씨는, 좀 해 볼, 맛이 나네.”

“읏, 대표님, 아, 아파요……. 흣.”

뒤늦게 알아차렸는데, 승원이 유난스레 아픔을 호소한 이유는 권 대표가 예고도 없이 검지를 이어서 삽입했기 때문이었다. 제법 단단하고 길이도 있는 커다란 손가락이 갑작스럽게 두 개나 들어오니, 정말 웬만한 좆을 받는 것만큼의 자극이 들어왔다.

“으, 읏… 하으… 응….”

발끝이 저리고 찌릿한 아픔이 반복됐다. 승원이 제 좆을 다시 세차게 문질렀다. 손에 쥐고 흔들 때마다 딸려 오는 분홍빛의 살이 위아래로 탄력 있게 움직였다. 여태 사정하지 못한 요도 끝이 붉었다.

그런 승원의 손이 갑자기 붙들렸다. 등받이 뒤로 목을 꺾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승원이 고개를 쳐들었다. 권 대표가 승원의 손을 치워 옆으로 떨어뜨렸다. 허공에 떨어진 팔이 힘없이 대롱거렸다.

“뒤로만 가지 않았습니까. 그대로 해야지.”

승원의 어깨와 등을 등받이를 통해 휘어잡은 권 대표가 넣고 있던 손가락을 그대로 붙들고 승원의 허벅지 안쪽을 잡았다. 손이 커서 그런지, 고환부터 회음까지 한 번에 붙들린 기분이 미칠 듯이 야했다. 승원이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커다랗게 오르고 꺼졌다.

검지와 중지가 들어간 손으로 안정감 있게 안쪽을 밀어내니, 내벽이 울렁이며 경련하는 주름이 느껴졌다. 승원의 허벅지 밑에 있는 손이 한참을 왔다 갔다 움직이며 급박하게 움직일 채비를 했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모아 놓은 허벅지 위로 통통하게 부어오른 성기가 덜덜 떨며 프리컴을 뿜어냈다.

“……하, 윽. 읏, 대표, 니임. 흐윽.”

“털어 줄 테니까, 참으세요.”

뭘 참으라는 거지? 승원이 생각을 마친 순간, 항문 안쪽부터 미칠 듯한 전율이 몰려왔다. 그가 어제와 같이 승원의 몸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읏, 응, 하아, 앗, 으!”

뻑뻑하기만 하던 입구가 살살 벌어지며, 권 대표의 손이 닿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상스럽기 그지없는 행위에 승원의 얼굴이 이마까지 다 새빨개졌다. 빨라지는 손의 움직임에 중간까지 걷어 놓은 권 대표의 팔목 위로 진한 근육이 올라섰다.

“……하, 씨발.”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보였던 시야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뿌예졌다. 승원은 필사적으로 권 대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빗장뼈 위로 입술을 파묻자, 가까이 맞닿은 남자는 안쪽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질끈 감은 눈에 힘이 들어가 눈알이 다 빠질 것 같았다. 미칠듯한 쾌감에 승원이 저도 모르게 권 대표의 어깨를 다급하게 쳐 댔다. 분출할 준비를 마친 기둥 끝이 색을 짙게 물들였다.

“하, 윽! …으읏…… 하아…….”

툭, 투욱. 귀두 밖으로 하얀 점액이 튀겼다. 물총 쏘듯 위로 튀어 오른 승원의 정액이 얇은 포물선을 그리며 젖꼭지를 다 드러낸 가슴 위로 떨어졌다. 여운을 못 이긴 좆이 여전히 파들거렸다.

허벅지를 잘게 떠는 승원을 지켜보던 권 대표가 빼지 않은 손을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아, 응, 그마, 그마안…….”

사정 직후 승원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한 상태였다. 승원을 고려하지 않은 손이 다시 안쪽을 파고들었다. 뭉툭한 손톱으로 내벽을 주욱, 긁어내는 손길에 승원이 소스라치며 비명을 질렀다.

“하윽! …아악!”

“무슨 남자가 뒤가 이렇게 예민해서.”

“하, 으, 하지 마세요……. 흐으, 으.”

그렇게 껴안고 있을 땐 언제고, 승원은 권 대표의 품에서 벗어나려 늘어진 몸을 버둥거렸다. 안쪽을 파고들었던 두 손가락이 내벽을 길게 긁으며 떨어졌고, 뻐끔거리는 입구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벌름거리기 바쁜 구멍을 손가락으로 살짝 벌린 그가 무심한 눈동자로 그곳을 살폈다.

“그만, 그만…….”

승원은 필사적으로 권 대표를 밀어냈다. 여운이 가신 자리엔 뜨끈한 잔열만이 남았다. 몸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팔뚝이 떨어져 나간 후, 옆으로 비켜선 권 대표가 승원을 내려다보았다. 미끈거리는 손을 지문에 비비던 그가 승원의 배에 뭉쳐져 있는 정액을 살살 흩어냈다. 긴장감에 뼈에 붙어 있던 뱃가죽이 부르르 진동했다.

“끝났으니 일어나세요.”

“…….”

“못 일어납니까.”

개수대로 향한 그가 물을 틀어 손에 남은 점액들을 흘려보냈다. 간단하게 손을 씻은 그는 머리를 넘기며 승원에게 다가왔다. 올려 뒀던 다리를 직접 바닥에 내려 주더니 다시 뒤로 물러섰다. 승원에게 일어나 보라며 턱짓했다.

방금까지 뜨겁게 이글거리던 눈빛은 다른 이의 것이었을까. 다시 본래의 냉혈인으로 돌아온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일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하지도 못하고, 시큰거리는 눈가를 비빈 승원이 조심스레 바닥에 발을 짚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그나마 남아 있던 힘마저 모조리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식탁에 손을 짚은 채 승원을 지켜보던 권 대표가 한마디 했다.

“침실이 어딥니까.”

“제가… 갈 수 있습니다….”

그래? 권 대표의 사사로운 낯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는 선심 쓰며 기회를 나눠 준 사람인 양 천천히 발을 떼는 승원의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티셔츠를 엉덩이 밑까지 끌어당긴 승원의 뒤에 선 권 대표가 그의 옷과 속옷을 챙겨 들었다.

“…답답하네.”

기어가는 수준으로 움직이고 있던 승원의 뒤통수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닿았다. 결코 힘에 부치거나 신체적으로 아프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아직도 긴 쾌락에 깨어났던 몸이 흥분을 재우지 못하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탓이었다.

승원이 고개를 돌렸다. 큰 키의 권 대표는 얼굴을 들어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제 것이었던 맨투맨에 불투명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귀를 붉히며 다시 앞을 바라본 승원이 조금 서두른 걸음으로 힘겹게 발을 뗐다.

“…갑자기 왜 이런 걸 요구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잘해놓고 갑자기 딴소리입니까.”

분위기에 휘둘려 아무 말도 못 했던 건 사실이지만, 권 대표가 자신에게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고, 실행에 옮긴 이유가 막연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유가 그게 다일까.

‘어제 발가벗고 질질 싸던 윤승원 씨 몸 보고 솔직히 좀 꼴렸습니다.’

정말 그 이유 하나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긴 걸까.

“누가 보면 내가 막무가내로 들이민 줄 알겠습니다.”

“…….”

“키스는 누가 하자고 했는데.”

승원의 뺨이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몰려오는 수치에 고개를 푹 숙이자 티셔츠 끝머리에서 고개를 떨군 제 물건이 보였다. 부끄러움에 얼른 등을 돌리려던 승원의 시야에 제 속옷과 바지를 들고 있는 권 대표의 손이 들어왔다. 승원이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권 대표가 더 빨랐다.

가슴 옆으로 들어 올린 권 대표의 손끝에 승원의 속옷이 매달려 있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

“왜 나랑 키스가 하고 싶었습니까?”

승원은 질문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벙찐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눈 주위 밑으로 어른거리며 올라온 붉은 기가 색을 더욱 진하게 물들였다.

서로를 놓지 않은 끈질긴 시선 사이로 자그마한 정적이 대롱거렸다. 참을성 있게 승원의 대답을 기다리던 권 대표가 눈썹을 휙 올렸다 내렸다. 인형처럼 굳어 있던 승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키스를 잘하셔서.”

“…….”

“……다시 해 보고… 싶었습니다.”

권 대표가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 눈살을 좁힌 그가 짤막하게 던졌다.

“비교 상대라도 있나 봅니다.”

“…….”

권 대표의 말에 승원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시 정처 없던 시선이 푹 떨어지는 것을 그는 남김없이 캐치했다. 반쯤 떨군 고개 사이로 보이는 승원의 턱이 작은 호두를 만들곤 부들댔다.

순간 권 대표의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다. 비교 상대가 누군지 알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몇 안 되던 좆같은 얼굴들이 훅 스쳐 지났다.

“…방까지 들어가면 해 뜨겠네.”

한심하다는 듯 나무라는 권 대표를 무시한 채 묵묵히 지나가려던 승원의 발이 갑자기 붕 떴다. 승원을 휙 들쳐 멘 권 대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가슴에 닿는 중심부에 승원이 얼른 손을 내려 가렸다. 시선이 잠시 얽히고, 가늘게 뜬 눈으로 승원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혀를 쯧, 찼다.

“…놔주세요.”

“성질머리 더 버리기 전에 이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

“달팽이도 아니고, 아예 네발로 기지 그래요?”

승원을 짐처럼 이고 아무 문이나 벌컥 열어 버린 권 대표가 안쪽에 보이는 침대를 확인하곤 승원을 그곳에 휙 던졌다. 탄력 있게 승원을 받아 낸 매트리스가 붕 잠겼다 떠올랐다. 깔린 이불을 승원의 다리 위로 휙 덮어 버린 권 대표가 제 손에 들려 있던 옷가지도 함께 던져 놓았다.

“내일은 스케줄 있습니까?”

“…회사에 가긴 하는데, 딱히 있는 건… 아닙니다.”

승원의 몸에 들어갔던 손가락을 그대로 들어 제 눈썹을 긁던 권 대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한 손은 삐딱하게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로 회색 트레이닝복을 기가 막히게 소화해 낸 기럭지를 움직이며 그가 장롱 앞으로 갔다. 승원이 얼른 상체를 바짝 일으켰다.

“이불.”

자기 마음대로 슬라이딩 도어를 밀어 버린 그가 눈을 휙 돌렸다. 승원은 급한 대로 얼른 제 옆에 놓인 바지를 입었다. 권 대표가 여기서 자고 간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속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바지를 어설프게 걸친 채 무릎걸음으로 일어나 침대 밑으로 내려오려는데, 권 대표가 먼저 극세사로 된 담요와 베개 하나를 챙겨 들었다.

“이것 좀 빌리겠습니다.”

“…대표님 어디서 주무시려고…….”

“거실.”

“…여기서, 주무세요.”

얼굴을 휙 구긴 권 대표가 간단히 일축했다.

“남이랑 침대 쓰는 건 질색이라.”

“…그럼 제가 밖에서 잘게요. 대표님이 여기서 주무세요.”

권 대표가 통 알 수 없단 표정으로 얼굴에 지었던 주름을 폈다. 한 손에 이불과 베개를 한꺼번에 든 채, 커다란 기골이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한테까지 이미지 관리하는 겁니까?”

숨결이 맞닿는 거리에 목을 뒤로 움츠리면서도 승원은 고개를 저으며 꿋꿋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진짜 괜찮으니까 여기서 주무세요. 피곤하다고 하시기도 했고…….”

“남이랑 침대 쓰는 건 싫은데, 남 침대 쓰는 건 더 싫습니다.”

“…….”

“각자 편한 길 갑시다.”

“…네.”

“잘 자요.”

다정한 문장은 권 대표의 음성과 섞여 차갑게 승화됐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열린 문틈을 벌려 나갔다.

고요히 닫힌 문을 다시 한참 바라보던 승원이 조금 진정된 두 다리를 침대 밑으로 내렸다. 바지를 다시 벗고, 비척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몸에 남은 잔해들을 물에 씻어 냈다.

***

꿈을 휘젓던 승원이 졸음에 취해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밤이 긴 하늘은 온통 보랏빛이었다. 밖에서 들린 인기척에 제 몸이 반응했음을 알아차린 승원은 몸에 이불을 돌돌 말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무겁게 내린 눈꺼풀에 시야가 아득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보인 것은 까만 배경보다 더 새까만 남자였다. 익히 아는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의 커다란 등이 시원스레 어깨를 폈다. 옷을 전부 꿰입은 권 대표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승원은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어렴풋한 그를 향해 물었다.

“…어디 가세요.”

“집.”

“…….”

승원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몇 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상이 이렇게 어둠뿐인 것을 보니, 지금은 출근하기 적합한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더 주무셔도 되는데…….”

“이 집 소파는 영 쿠션감이 별로라서.”

승원이 그의 말을 듣고 소파를 보자, 정갈하게 개켜져 있는 그의 맨투맨과 바지가 까만 그림자에 물들어 있었다.

“이 소파 어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권 대표는 가장자리가 살짝 벌어진 가죽 소파를 손으로 슥 매만졌다. 멀쩡한 듯한 소파는 벌어진 표면이 다 일어나 그의 손이 닿자마자 그으윽, 하는 흉흉한 소리를 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본가에 계신 어머니께 새 소파를 사 드리고 승원 자신은 그곳에 있던 소파를 가져다 놓았다. 나름 본가에 있던 물건 중엔 가장 비싼 것이기도 했고, 그냥 버리기엔 아직 쓸 만하다고 느껴서 이곳에 놔두고 계속 사용하던 것이었다.

한 번도 별로라고 느낀 적이 없는데, 대놓고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권 대표의 말을 듣고 가죽이 벌어진 부분에 꺼끌꺼끌한 소음을 귀로 느끼니 새삼 저 소파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승원 역시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가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대표가 얹는 말이니 틀린 말도 아닐 것이었다.

“윤승원 씨는 왜 일어났습니까.”

“…….”

멍하니 시선을 멈춰 두던 승원이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다시 권 대표에게 눈을 들었다. 승원이 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는 것처럼, 권 대표 역시 승원을 향해 한 걸음도 떼지 않았다. 벌어진 거리는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간격처럼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었다.

“…대표님이 가시니까.”

“…….”

“인사드리려고… 나왔습니다.”

“그래요.”

무신경하게 중얼거린 권 대표의 말을 들으며, 승원은 땅으로 고개를 닭처럼 쪼아 댔다. 승원을 보고 콧바람을 뱉은 권 대표가 미련 없는 걸음을 뗐다.

“가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멀었던 거리가 더욱 벌어졌다. 내린 어둠에도 오목조목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드러낸 옆선으로도 입체감을 내뿜는 실루엣, 단단한 등이 보이고 그가 거실을 빠져나간다. 승원은 눈을 살살 끔벅이며 그를 응시했다.

“……윤승원 씨.”

권 대표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멀어지려던 몸이 우뚝 서서 승원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합니까?”

음률이 전혀 없는 낮은 음성이 바닥을 기어 승원에게 도착했다. 어깨 밑으로 스르륵 떨어지는 이불을 승원은 다시 끌어올렸다. 눈을 한 번 깜박이고 승원이 대답했다.

“어떻게…… 안 합니까, 기억을.”

확인을 마친 남자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지만, 짙은 새벽이 가린 그의 낯을 승원은 볼 수 없었다.

“갈게요.”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하는 권 대표의 얼굴 위로 밝은 광이 비췄다. 승원에게 눈짓을 잠시 남겼던 고개가 전방으로 돌아갔다. 권 대표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현관 복도로 사라졌다.

한 겹 덮인 꿈 위를 거닐며 서 있던 승원은 권 대표가 빠져나가는 도어 록 소리가 들리고, 집 안이 진공 상태의 우주처럼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때에서야 비로소 느린 몸을 움직였다.

남은 건 오직 잠에 취한 승원의 발걸음 소리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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