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비의도적 구원자 (3/20)

3. 비의도적 구원자

주말 내내 권 대표의 친형, 권주현의 결혼식과 관련된 기사와 뉴스가 떠 있었고, 윤성희 여사의 응급 이송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권 대표의 말로는 잠깐의 기절 직후 바로 깨어났다고 하였지만, 기사 내용엔 그녀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는 둥, 여전히 악화 중인 상태라는 둥 허위로 가득 찬 자극적인 글들이 난무했다.

주중이 되어 소속사로 향한 승원은 새 매니저를 소개받았다. 승원보다 네 살이 더 많은 덩치 큰 남자는 자신을 곽영찬이라고 소개했다. 짧은 머리에 조금 험악해 보이는 인상을 가졌는데, 웃을 때는 눈이 반으로 접혀 선한 얼굴로 바뀌었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곧장 잡힌 스케줄에 둘은 통성명만 간신히 주고받은 후 바로 촬영 현장으로 나가야 했다. 혼자였으면 추스르기 힘들었을 일정들을 새 소속사는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하고 이해해 주었다. 덕분에 승원은 어려움 없이 일정을 따를 수 있었다.

오늘 잡힌 스케줄은 화보 촬영이었다. 촬영장까지 거리가 먼 것은 아니었지만, 도로 어디든 복잡하지 않고 차가 없는 곳이 없었기에 내내 밀리는 차량이 기어가듯 움직였다. 그 김에 곽영찬 매니저는 승원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는 아까부터 승원에게 말을 걸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고 있던 참이었다.

“차가 많이 밀리네요.”

“아, 네. 안전하게만 가 주세요.”

쓰게 미소 지으며 화답한 승원에게 곽 매니저가 허허, 하고 웃음을 보였다.

“좀 과묵한 편이에요?”

“아, 그건 아니고…….”

“그… 시비 거는 거 아니고, 그냥 성향 같은 거 물어보는 거예요. 계속 봐야 하니까. 나는 좀 말이 많은 편이라. 얼굴은 이렇게 생기긴 했는데, 말하는 건 엄청 좋아하거든요.”

“말 많이 해 주세요. 수다 좋아해요, 저도.”

‘과묵하다’라는 표현이 워낙 묵직한 느낌을 주는 편이라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대답한 승원이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과묵한 편이 맞았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승원은 성격 자체도 얌전하고 차분한 스타일이라 남들은 그를 보고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승원도 그 점은 인정하는 바였다. 자신은 정말 따분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건 있어요? 아니면 제가 알아야 할 것들이라든가.”

“아, 음…….”

룸 미러를 통해 승원을 바라보는 곽 매니저의 시선에 승원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가리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고… 딱히 얘기할 만한 게…… 아.

“약을 복용하는 중인데, 그거 때문에 속이 좀 메스꺼워서… 끼니 거르는 경우가 좀 있을 수도 있는데 이해해 주시면 좋겠어요.”

“아아, 그럼요. 그런 거는 얼마든지요.”

“그거 말고는 부탁할 거 없는 거 같아요.”

“나는 너무 좋은데! 어휴, 저번에 맡았던 인간은 성격이 얼마나 드러운지, 살살 웃으면서 재수는 드럽게 없고. 매니저가 무슨 자기 시종인 줄 알아요. 그 성격 다 참아 주다가 내가 골병 나서 관뒀잖아요. 그런데 승원 씨는 안 그럴 것 같아서 벌써 걱정 덜었어요. 하하하.”

다다다, 쏟아지는 말들에 승원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조금 틈이 나기만 하면 액셀을 세게 밟으면서도 입에 단 모터는 끊이지 않고 돌아갔다.

곽 매니저의 말이 어쩐지 승원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리 눈치를 주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인간 밑에서 일하는 게 어떤지 옆에서 봐 왔고 저 자신도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받은 승원은 빠르게 촬영을 시작했다. 보기 드문 미인의 남자를 피사체로 둔 카메라 감독은 흥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플래시를 터뜨려 댔다. 그러나 확인해 본 사진은 전부 딱딱하기 그지없는 로봇 같았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스태프들이 흐음, 소리를 냈다.

“승원이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인가?”

“얼굴이 좀 굳었다. 여기서 약간 더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네. 그렇게 해 볼게요.”

주말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리에서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관여도, 신경도 쓰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저절로 떠오르는 사념들은 차마 지울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렌즈를 향해 옆선을 드러낼 때마다 거세게 날아왔던 손바닥이 떠올랐고, 연고를 발라 주던 권 대표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A컷과 달리 무수히 많은 B컷을 남기고, 아쉬움이 가득 남은 촬영장에 승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죄송하다고 이야기했다. 다른 이들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승원을 뭐라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승원은 이 자리에 모시는 것조차 쉬운 인물이 아니었기에.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던 참이었다.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드려 가며 승원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최 실장은 순간 촬영장을 가득 울리는 커다란 목청에 ‘꼴통 왔네.’라며 한숨 쉬었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린 승원에게 누가 왔나 보라고 가볍게 이야기했다.

“정신도 감독이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윤승원이 왔다고 해서 들렀지!”

그러나 승원이 저 목소리를 헷갈릴 일은 없었다.

껄껄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등장한 남자의 얼굴에 승원의 얼굴이 일순 파랗게 질렸다. 아무도 그의 표정을 인지하지 못했지만, 승원은 정 감독을 보자마자 테이블 밑에 있던 손을 달달 떨었다. 장 사장과 각별한 사이이자, 그와 함께 승원을 장난감 다루듯 공유했던 파렴치한이었다.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최 실장이 호호 웃으며 부럽다는 듯 승원을 바라보았다.

“역시 뮤즈는 다른가 봐, 승원 씨.”

“…아. 네.”

“윤승원이! 이야, 진짜 오랜만이네. 요즘 얼굴을 못 봤잖아.”

정신도 감독이 승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반반한 얼굴과는 다르게 누추한 야상 차림의 남자가 승원의 뒤에 붙어 그의 어깨를 꾹 눌러 잡았다. 볼 옆으로 까칠한 얼굴을 기댄 남자에게서 커피와 담배가 뒤섞인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간 있었던 순간순간의 충격들이 떠올라 승원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그걸 알고 승원에게 더욱 빈정대고 있었다. 권 대표에게 장 사장에 관해선 이야기했지만,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정신도 감독에 대해선 말한 바가 없었다. 장 사장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변수가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승원이가 요즘 연락이 너무 뜸하던데.”

스멀대는 말투로 승원에게 말을 건네는 남자의 얼굴에서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무언가 다 알고 왔다는 듯이, 남들은 느낄 수 없는 무언의 압박을 승원에게 쏟아 넣고 있었다. 장 사장과 어쩌다 그렇게 끝난 거야? 한참 재미 보고 있었는데 어딜 기어 도망간 거야. 날것의 위압이 칠흑 같은 눈동자 위에 읽혔다.

“아이고, 윤승원 씨 지금 인터뷰 중인데. 나중에 얘기해요. 방해하지 말고.”

“아 그래? 몰랐네. 나는.”

최 실장이 피식 웃으며 정 감독을 흘겨보았다. 둘은 친한 사이 같았다. 그러니 미리 승원이 있다는 소식을 받고 그가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 승원은 무릎 위에 주먹을 꼭 쥐었다. 그의 어깨 위에 묵직하게 올라가 있던 정 감독의 손이 떨어졌다.

“오늘 스케줄 이게 끝이지? 저녁이나 먹자.”

“승원 씨랑 친한 거 이렇게 티 내기 있어요? 어후, 정말. 좀 이따 얘기하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윤승원! 가자? 응? 나랑.”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남들이 보고 있는 자리였다. 감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정 감독은 그걸 알고 승원에게 노골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좌절 어린 한숨이 가슴 한쪽을 짓눌렀다.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린 승원이 그를 보며 쓰게 웃었다.

“네. 알겠어요.”

***

정갈한 음식들이 상 위로 가득 차려졌다. 긴 도마 위에 올라간 비싼 초밥과 회들을 보고도 입맛이 전혀 돋지 않은 승원은 그것들을 미미한 눈동자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도쿠리를 들어 승원에게 손목을 달랑달랑 흔들던 정 감독이 뱀 같은 눈으로 그를 훑었다.

“뭐 해. 안 받고.”

마지못해 잔을 든 승원의 손이 힘없이 떨렸다. 쪼르르, 잔에 채워진 액체가 넘실댔다.

“우리 승원이, 요즘 장 사장한테 소식 듣기도 어렵고.”

“…….”

“소속사도 옮겼던데? 언제 옮겼어?”

“…일주일 안 됐습니다.”

“으응? 진짜? 이야, 그랬단 말이야? 어쩐지, 장 사장이 입을 싹 다물었길래. 무슨 일인가 싶더라고!”

푸하하! 느닷없이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승원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승원을 지긋하게 바라보며 술잔을 입에 대려던 정 감독이 다시 잔을 떼었다.

“우리 오랜만에 러브 샷이나 할까?”

“……네?”

“아, 왜 못 알아먹는 척을 해? 얼른, 가까이 와 봐.”

빨리. 재촉하며 아예 상체를 들고 일어난 정 감독이 제 바지춤을 크게 푹, 들어 올렸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승원이 잔을 들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놀라운 상황도 아니었다.

가까이 들이댄 얼굴이 팔을 휘감았다. 가슴이 닿는 게 싫어 부들거리며 지탱하던 승원은 정 감독의 뒤통수 뒤로 입술만 축였다. 정 감독이 승원을 끌어안은 채 꿀떡, 술을 음식 먹듯이 넘겼다.

“이거 봐. 술맛이 더 좋네.”

승원의 뺨을 착착, 두드리던 손이 아쉽다는 듯 떨어져 나갔다. 속이 안 좋았다.

저런 심성의 작자라는 것을 알면, 나락으로 떨어질 게 분명한데. 이 세계라는 게 참 이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 감독의 평판과 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암암리에 그의 성적 취향과 더러운 속내가 알려져 있었음에도 성공을 위해 그에게 붙어 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어떻게 보면 승원은 그런 경쟁 속에서 거뜬히 자리를 차지한, 불행히도 운이 좋은 자라 할 수 있었다.

“그래 가지고. 어쩌다 거기를 나온 거야? 나한테 말 좀 해 줘 봐.”

두 사람을 제외하고 사방이 막혀 있는 방 위로 정 감독의 거대한 울림통을 가진 목소리가 커다랗게 공명했다. 회를 입에 싸악 넣은 그가 그것을 씹으며 말했다.

“장 사장이 말을 안 해 주더라고? …아아. 아니지, 네 얘기를 하긴 했다.”

“…….”

“아주 그냥 씹스러운 새끼라고.”

크크. 웃기지 않어? 그 자식 욕도 못 하는데 말이야. 정 감독이 컬컬대면서 승원에게 주절거렸지만, 승원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작게 벌린 채 숨을 쉬던 승원은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마셨다가 목구멍을 쓰리게 데우는 술맛에 인상을 썼다.

잔이 똑같아서 물과 술을 헷갈린 것이었다. 캑캑대는 승원을 보고 음흉하게 웃는 정 감독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승원은 붉어진 이마를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말해 보라고, 어쩌다 씹스러운 새끼가 됐어, 우리 승원이.”

“…….”

“어디서 엉덩이를 어떻게 놀렸길래, 그리 붙어먹던 장 사장을 뻥 차 버렸대.”

“……감독님.”

“우리 승원이 뒷맛이 죽이긴 하지. 그치?”

초밥 한 점을 집은 정 감독이 제 팔을 식탁 위로 넘겼다. 승원의 입 앞에 도달한 초밥이 덜렁거렸다. 승원의 미간이 작게 패였다. 승원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정 감독은 팔이 아프다는 시늉을 보이며 짙게 인상을 썼다.

“팔 아퍼. 빨리 먹어. 얼른, 예쁜아.”

“…제가 먹겠습니다.”

“아우, 그니까. 한 번만 받아먹으라고. 식사 예절 몰라?”

남의 입술 앞에 음식을 흔들어 가며 희롱을 하는 것이 대체 어느 나라 식사 예절이라는 것인지. 개새끼를 유인하듯 눈썹을 들썩이는 얼굴이 역겨웠다. 눈을 감았다 뜬 승원이 침을 꾹 삼켰다. 한 번만이다. 마지못해 벌어진 입술이 그의 음식을 받아먹었다.

“잘 먹네.”

거북하게 웃으며 음식을 오물거리는 승원을 지켜보던 정 감독은 기다란 젓가락을 떼는가 싶더니 이내 젓가락 끝으로 승원의 볼 언저리를 슥 긁어냈다. 반질거리고 뾰족한 나무 질감이 승원의 뺨에 쭉 떨어져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씨익 올라간 입술이 술에 젖어 번들거렸다.

“기깔나는 시나리오를 하나 완성했는데. 거기 쓸 사람이 아직 없네.”

“…….”

“이번에 나랑 하겠다고 줄을 선 애들이 우후죽순 널리고 널렸어. 젊고 어린 애들 있잖아. 내 작품엔 그런 애들만 나오니까.”

“……네.”

정 감독의 영화는 트렌디하고 세련된 편이었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영상미가 돋보이는 그의 영화는 시나리오 면에서도 특출 나게 뛰어난 편이었음에 외국 영화제에도 왕왕 노미 될 만큼 예술성으로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그는 젊은 피의 배우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여태 그의 ‘뮤즈’ 윤승원이 차지해 왔고.

“근데 나는 또 우리 예쁜이가 쓰고 싶어서.”

정 감독의 얼굴이 십분 붉어져 있었다. 어느새 취기에 달아오른 눈이 아까보다 더욱 그윽하게 승원을 핥아 냈다. 젓가락으로 승원의 목을 탁탁 쳐 낸 그가 그것을 위로 올려 승원의 통통한 입술을 콕 찍었다. 살에 짓눌려 콕 들어가는 젓가락을 보며 정 감독이 만족스레 웃었다.

“너만 한 애가 또 어디 있겠냐.”

“…….”

“이번에도 나랑 작품 해야지. 더 올라가야지? 승원아.”

“……시-.”

싫어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 얼굴만 봐도 토기가 치밀어요. 몸 안에서 몇 번이나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싫습니다, 라는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들 것일까.

입술을 뻐끔댈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며 정 감독이 나긋하게 물었다. 본론과도 같은 물음이었다.

“오늘 저녁 먹고 뭐 해? 밤에.”

고약한 의도는 다분했으며,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정 감독의 루트는 항상 일관되었다. 승원을 잘 구슬려 앞에 앉히고는, 제 작품의 위엄을 떠벌린다.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도 주지 않는다는 역할을 승원의 손에 단단히 쥐여 주고는, 그것을 대가로 그의 바지를 벗겨 냈다. 개만도 못한 수작이었다.

장 사장의 밑에 있었을 땐, 그의 손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들어가야 했지만, 지금의 승원은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 이상의 성공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이 자리를 빌려 더 성공할 수 있다고 쳐도 승원은 이딴 방법으로 더는 저 자신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신 승원이 쿵쾅대는 심장 언저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머뭇대는 승원에 기다리다 지친 정 감독이 갑자기 눈을 부라렸다. 쾅!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고는 짜증을 냈다.

“아, 밤에 뭐 하냐니까?”

“서, 선약이 있습니다.”

“선약?”

둘러댄 말이었다. 피할 길이 필요했기에 승원은 일단 거짓으로 응수했다. 눈썹을 비틀어 올린 정 감독이 흐으음, 하고 짜증 서린 표정을 지었다. 코를 훌쩍이고는 다시 승원을 노려보았다.

“왜. 오늘은 누구한테 가랑이를 벌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누구한테. 누구야? 누구야, 그 새끼는!”

갑자기 화가 났는지, 정 감독이 젓가락을 집어 던졌다. 말 그대로 취객의 난동이었다. 정 감독은 술에 강한 편이 아니었다. 테이블을 요란하게 내리치며 주절주절 소리를 치는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며 승원은 몸을 뒤로 물렸다. 보고만 있어도 피로가 몰려오고 구역질이 났다.

꿈틀대던 손이 더듬대며 바닥을 짚다가 핸드폰을 꼭 붙잡았다. 하나, 둘…… 타이밍을 재던 승원이 불쑥 핸드폰을 귀에다 대고 없는 소릴 해 댔다.

“…여, 여보세요. 네, 네.”

진짜 전화를 받은 줄 착각한 정 감독은 자리를 망치는 통화 상대가 아니꼬웠는지 에이, 시팔. 욕을 하며 술을 벌컥 마셨다. 승원은 핸드폰 아랫부분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감독님 저,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왜? 도망가려고?”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순간 들킨 줄 알고 심장이 쿵 내려앉을 뻔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승원을 질긴 시선이 따라붙었다. 마른 다리부터 치골, 다리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가 그의 상체를 훑으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새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남자가 술을 젖혔다.

“얼른 갔다 와라.”

“…네.”

“코트 놓고 가.”

아무래도 영 못 믿는 눈치였다. 어차피 코트를 입고 나갈 생각도 아니었지만, 적당한 취기에 달아올라 있었음에도 엿보이는 그의 치밀함에 승원은 작게 좌절했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온 승원은 신발을 신으며 순간 가빠진 숨을 하아하아, 내쉬었다. 바지춤에 땀에 젖은 손을 벅벅 닦아 낸 그는 지나가던 종업원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고는 얼른 자리를 떴다.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 화장실에 5분가량을 앉아 있던 승원은 우욱, 하며 올라오는 속 쓰림에 가슴을 쓸어내리다 더 버틸 수 없어 칸 밖으로 나왔다. 손을 씻어 내고 퀭해 보이는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꽉 묶여 느릿하게 움직이는 걸음을 옮기던 승원은 제가 나왔던 룸 안으로 들어가기 싫어 한참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저 끝 쪽 맞은편 룸의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 걸음 정도 되는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신의 남자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눈이 크게 뜨였다.

“…….”

“…뭡니까.”

검은 구두를 꿰신은 훤칠한 남자가 저벅저벅 승원의 앞으로 걸어왔다. 좁은 복도를 다 메울 정도로 큰 남자는 미세하게 찡그린 얼굴로 승원을 내려다보았다. 승원 역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꺼려지던 남자가, 난데없이 마주한 지금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로…….”

“내가 할 소린데 그건. 윤승원 씨가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아.”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둘러댈 말도, 둘러대고 싶은 말도 없었다. 입을 다문 대신 승원의 시선은 자신이 빠져나왔던 룸으로 향했다. 승원의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권 대표는 고개를 휙 돌려 굳게 닫힌 문을 확인했다. 마루 아래 놓인 커다란 신발을 확인한 그가 승원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저 사람은.”

“…….”

“남자 같은데.”

“……사적인 영역은 터치 안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아닌데. 이러면 그가 절 두고 갈 텐데. 왜 이렇게 말했지? 승원은 뱉자마자 후회했다.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위로 불쾌한 의심이 띄워진 것 같아 반발심이 솟은 탓이었다. 그래도 가릴 거 없는 처지에 말은 똑바로 했어야 했는데. 또 멍청하게 실수를 했다.

승원의 말을 들은 권 대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것도 맞네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럼 하던 식사 마저 하세요.”

“…대표님은-.”

승원을 지나치려던 권 대표의 팔을 승원이 휙 잡았다. 꽉 쥔 팔을 내려다보는 권 대표에 승원은 얼른 그의 슈트 소매를 작게 꼬집어 고쳐 잡았다.

“뭐요.”

“대표님은… 혼자 오신 겁니까?”

“이런 자리에 혼자 왔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에 승원은 혼자 혀를 내둘렀다. 필사적으로 그를 잡고 싶었다. 이런 멍청한 대화라도 하면서 시간을 끌고 싶었다. 저 안에 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 하고 입술을 벌린 채 좀처럼 저를 놔주지 않는 승원에 권 대표는 작게 일축했다.

“놓죠, 이거.”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까진 없고요.”

권 대표에게서 손을 떼었음에도 미련이 가득 남은 승원의 눈동자는 좀체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가시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권 대표의 미간이 다시 한번 좁아졌다. 그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가던 길로 등을 돌리려던 권 대표는 다시 걸음을 세웠다.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원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권 대표가 그에게 다시 다가왔다.

“안 들어가요?”

“들어갈… 겁니다.”

“윤승원 씨,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네.”

이때다 싶어 대답하는 듯한 승원의 얼굴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걸 읽어 버린 자신이 싫었다. 일이 귀찮아질 것을 예감한 권 대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윤철뿐이 아닙니까? 그쪽 귀찮게 구는 작자가.”

승원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작아졌다. 고개를 내린 어린 얼굴이 입술을 뭉갰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라. 부정하지 않으니 긍정이 맞았다. 볼수록 물러 터진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야, 초면이니 그렇다 치지만, 과연 대중 앞에서 보여지는 직업이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이것도 타고난 연기자라면 연기자라 할 수 있을까.

권 대표는 한 걸음 물러났다. 안 그래도 작은 입술이 꼭 물려 더 조그마했다. 나약해 빠진 얼굴이 제법 가여웠다.

“윤승원 씨.”

“……네.”

고개를 살며시 내린 남자가 저를 올려다보는 불쌍한 눈을 바라봤다.

“윤승원 씨는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그렇고. 휘둘리기 딱 좋아 보이는데. 알아서 적당히 끊어 낼 줄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그 정도 컸으면 그런 거쯤은 알아서 판단할 수 있지 않아요? 그리고…….”

술술 뱉어 내던 그의 얼굴이 순간 바짝 일그러졌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축인 권 대표가 기다랗게 뜬 눈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회는 써먹으라고 있는 겁니다.”

“…….”

“갈게요.”

권 대표가 발을 돌렸다. 넓고 검은 등이 승원의 눈앞에 있었다. 높은 벽과 같아 보이는 그 널따란 몸이 점차 멀어졌다.

그런 그를 보며 승원은 주먹을 꼭 쥐었다. 제가 빠져나왔던 룸을 한 번 바라보다가, 좁은 복도 뒤로 작아지는 남자의 등을 진득이 주시했다. 권 대표가 방금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기회. 기회를 써먹으라고. 기회를…… 아.

“대표님-.”

승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곧장 가려는 듯싶던 몸이 승원의 쪽으로 돌아갔다. 잘생긴 옆선이 드러나고, 곧 그의 얼굴이 보였다.

“또 왜.”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술을 퍼마시고 있던 정 감독은 드르륵, 열리는 문소리에 벌떡 고개를 들었다. 만취 상태의 얼굴이 홍시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질긴 눈이 문틈을 주시하고는 버럭 짜증을 냈다.

“아이씨! 전화 받고 온다며 왜 이제……!”

처진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룸 안으로 들어오는 건 승원 혼자가 아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문짝만 한 남자의 얼굴을 고개를 치켜든 채로 멍하니 바라보던 정 감독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머뭇거린 승원이 차분히 목을 울렸다.

“어, 감독님 이분은…….”

“안녕하세요. 정신도 감독님 맞으시죠? 작품 많이 챙겨 봤는데. 이렇게 뵙네요.”

말을 다 잇지도 못한 승원을 옆으로 밀어내고 정 감독의 맞은편에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춘 권 대표가 능숙하게 말을 이어 냈다. 사교적이고 정갈한 말투와 취한 눈으로도 어렴풋하게 보이는 깔끔하고 잘생긴 인상에, 옷을 입은 태마저 예사롭지 않았다. 당황한 정 감독은 맞은편 남자의 분위기에 압도돼 허리를 펴고 뒷덜미를 긁적였다.

“어, 예. 저 맞습니다. 예예. …근데, 누구.”

“오늘 윤승원 씨와 선약 잡은 사람입니다.”

승원이 잠깐 나간 사이에 무슨 난리를 피웠길래 상 위가 온갖 잡다한 음식들로 엉망이었다. 그게 승원이 함께 있을 때인지, 그가 나간 후의 일인지 권 대표는 알 리가 없었기에, 뒤집힌 음식을 훑은 눈이 차게 식었다.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듯한 정 감독이 지키던 방 안은 술 냄새로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였다. 이런 산만한 분위기가 권 대표의 등장만으로 공기부터 정숙한 태세로 바뀌었다. 괜히 긴장한 승원이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호텔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그때의 기시감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고 회전이 늦어진 건지 멍하니 뜨여 있던 얼굴로 제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정 감독이 곧이어 어어, 하고 추임새를 붙였다.

“윤승원? 아아. 저 윤승원이랑 선약 잡으셨다고요? 오늘요?”

“네, 맞습니다.”

악수를 청한 권 대표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그렇게 말한 정 감독이 곁눈질로 승원을 힐끔 바라보았다. 술에 찌든 눈가가 징그럽게 승원을 훑었다. 들린 건 아니지만, ‘저 망할 씹새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코를 훌쩍인 정 감독이 지껄였다.

“아하하하. 그렇구나, 오늘 선약 잡으신 분이 진짜 있었구나. 아이고, 윤승원이 구멍 담당이 또 있었어요? 이렇게 멋진 분이 또 계신 줄 몰랐네!?”

“…….”

“아이코, 내가 지금 뭐라고 했지? 하하하.”

주정을 부리는 듯한 그는 자신이 뭐라고 주절대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취한 와중에도 승원을 향해 부라린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구멍 담당.”

권 대표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혼잣말로 뇌까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정 감독의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비슷합니다. 워낙 능력 있는 친구라.”

“어어, 그래요? 진짜구나! 윤승원이 진짜 능력 좋네, 아주?”

같은 지위를 가진 이를 만나자 갑자기 반가웠던 건지 정 감독이 화색 돋은 얼굴로 소리쳤다.

“어떤 거 같아요? 거기서도 실력 발휘 좀 하나? 어이고, 나는 낚시를 하는 줄 알았어요. 아주 콱 물면 놔주지를 않아! 이게 뻐끔뻐끔하다가 아주 그냥 입질하듯이 더듬대는데, 그게 그렇게 죽여준다니까요. 소리도 기가 막히잖아. 야, 예쁜아. 너 아플 때 내는 소리 그거 한번 해 드려 봐!”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건지, 묘하게 제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건지 구분이 거의 불가능했다. 손을 휙휙 대며 아예 승원을 노려보듯 바라본 정 감독이 더럽게 웃었다. 해 봐, 빨리. 창피해하지 말고. 승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뻣뻣이 굳었다.

무감동한 얼굴이 역겨운 소리를 지껄이는 입술을 응시했다. 권 대표가 테이블 위에서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놓았다. 정 감독은 풀려난 손을 제 코에 박고 킁킁거리더니 허벅지에 쓱쓱 닦았다. 추하기 그지없었다. 구멍 담당으로 시작해 터질 듯 튀어나온 그 무람없는 표현에 잠시 방 안에는 침묵이 돌았다.

다시 목을 울린 건 권 대표였다.

“애호랑 타인의 흔적 잘 봤습니다.”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술에 취한 자는 방금의 기억을 싹 지우고 제 칭찬에 반응했다.

“정말요? 아이고, 이렇게 뵈어서 그런 소리까지 듣고. 누추한데 참… 감사합니다, 허허.”

“유명하신 감독님인데, 제가 감히 몰라뵐 리가 없죠. 꼭 뵙고 싶어서 실례 무릅쓰고 부탁해서 찾아왔습니다.”

“예예, 어우. 제가 그 정도인지, 참.”

쏟아지는 기탄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지 정 감독은 금세 배시시 웃으며 껄껄댔다.

선한 듯 자비롭게 접혀 있던 눈매가 갑작스레 날카로운 기세로 바뀌었다. 취객은 그 정도 눈썰미까지 갖추지 못했다. 으음, 잠시 침음하던 권 대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뼈가 박힌 말을 시작했다.

“뭐, 그만큼 이름 날린 분인데, 반가운 거랑은 또 별개로 이런 곳에서 그런 행색으로 구멍이니, 죽여주니 뭐니 하시는 걸 듣고 있으니 새롭긴 합니다.”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정 감독이 고개를 들고 물음표를 띄운 채 그를 바라보았다. 권 대표는 굴하지 않았다. 승원을 잠시 훑어보고는 다시 취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기 윤승원 씨도 이제 톱스타 아닙니까.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야, 정신도 감독님이 제일 잘 아실 것 같고. 뭐… 소문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렇게 감독님이 나서서 입을 놀리실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우리 윤승원 씨가 특별히 정 감독님 영화에 얼굴을 비춘 이유가 다 있었나 봅니다.”

“……아니 그게.”

냉철하게 굳어 있던 눈빛은 잠시 허를 찌르며 날카롭게 바뀌었다가, 어느새 가소롭다는 듯이 가늘게 길어져 있었다.

“능력 좋은 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남색까지 밝히는 분인 줄은 또 몰랐고. 그것도 스무 살은 어린 애를.”

승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말을 듣고 마땅히 부끄러워야 하는 것은 정신도라는 인간이건만, 왜 자신의 낯에 어둠이 찾아드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없는 제 얼굴에 신랄한 말들을 해 대는 남자를 보며 정 감독은 벌린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스무 살. 자기가 말해 놓고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단어였다. 멍청하게 눈만 껌벅거리는 얼굴에 권 대표가 마지막 한 발을 당겼다.

“거장 감독이니 뭐니 하더니,”

“…….”

“이건 그냥 순 남창 아닙니까.”

정 감독은 잠시 반응 없이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권 대표의 뒤에 서 있는 승원을 슥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취한 데에다 머리까지 나빠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한 듯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와 권 대표는 씩 미소 지었다. 영 말이 안 통했다.

살짝 접힌 눈매로, 그의 동요 없는 목소리가 친절히 일러 주었다.

“윤승원 말고 당신 말하는 거야. 이 남창 새끼야.”

“씨발. 뭐야?!”

쾅! 음식이고 접시고 그딴 건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정 감독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씨발.”

권 대표의 욕설에 승원이 몸을 흠칫 떨었다. 음식물이 튄 것인지 권 대표가 제 재킷 끝을 툭툭 털어 냈다. 핏줄을 세워 권 대표를 노려보던 정 감독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당탕탕, 요란스레 움직이는 몸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정 감독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권 대표를 향해 삿대질했다.

“야, 이 새끼야. 너 근데, 누구야? 씨팔,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개지랄이야!”

그가 누군지 이제야 궁금했던 모양이다. 널뛰는 발음이 부정확했다. 승원은 걸음을 뒤로 물려 미닫이문의 입구를 꽉 막고 섰다. 혹시 누군가 소란을 눈치채고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 꼬락서니를 보게 될 것인데, 그것만은 절대 막고 싶었다. 혹렬한 상황에 겁이 나면서도,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믿음이 권 대표를 향해 솟아 있었다.

한숨을 쉰 권 대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지 마시죠.”

“이러지 마시죠? 나이도 몇 개 아, 안 먹은 거 같은데 어디서 감히!”

“나이 어지간히 드시고 애새끼한테 뒷구멍이니 뭐니 하는 것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리고 여기 공공장소입니다. 아무리 술 있는 자리라지만 지금 이게 무슨 패악질입니까.”

“야, 윤승원이! 끄윽, 너 씨발, 어디서 이딴 창놈 새끼 데려와서 갑자기 행패야?”

승원에게 넘어간 손가락에 승원은 어깨를 바싹 움츠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권 대표에게로 시선을 돌린 승원의 눈이 파들거렸다. 저 커다란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땅 밑으로 툭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정 감독은 갑자기 소리를 질러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잠시 비틀거리다가 제 이마를 꾹 눌렀다.

“아오, 씨발! 저거 왜 씹스러운 새끼라고 하는지 알겠, 네.”

씨발이고 시팔이고. 욕을 어지간히 입에 달았다.

“야, 너 이리 와 봐. 이 창부 새끼가 오냐오냐했더니-!”

주먹을 말아 쥔 정 감독이 갑자기 테이블 옆으로 나와 승원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텅 빈 눈이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본능만을 갖고 움직이는 듯했다. 저벅저벅, 빠르게 다가오는 정 감독에 승원이 목에 힘을 주고 숨을 헙 참았다.

그때였다.

“으어으악, 아아악-!”

정 감독의 처참한 비명과 함께 무언가 잔뜩 깨지고 엎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승원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권 대표가 정 감독의 팔목을 잡아 뜯듯 쥐어 꺾어 버렸다. 나불대는 몸뚱이를 뒤로 밀어내자 궤짝 처박히듯 굴러 넘어졌다.

“좆같네.”

까만 벽과도 같은 남자가 제 앞을 막아서자 정 감독이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에 몸을 부딪쳐 다리를 부여잡고 절절대는 모양새를 무표정한 안광이 벌레 보듯 바라봤다. 욕을 뇌까리는 정 감독은 머리가 아픈지 제 이마를 붙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아, 신음을 내며 엄살을 피웠다.

권 대표는 거기에 더해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했다. 안 그래도 쑤시는 부위를 잡고 울어 대는 감독의 다리를 발로 지끈대며 밟았다. 악쓰는 비명이 또 한 번 쏟아졌다.

“나 이런 건 물어보고 싶지 않은데.”

등을 보이던 권 대표가 나직이 읊조렸다. 승원에게 고개를 돌린 그의 날카로운 옆선이 드러났다.

“윤승원 씨 이 새끼 집 주소 압니까.”

승원은 머뭇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압니다.”

당장 필요한 대답은 맞았지만, 역시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뭡니까. 말해 봐요.”

그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님, 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승원은 그가 다른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작게 안심했다. 승원을 바라보며 눈짓하는 권 대표에 승원은 차분히 정 감독의 집 주소를 읊었다.

“나가요.”

승원의 코트를 대신 챙겨 들곤 룸의 문을 연 권 대표가 승원을 밀어냈다. 밖으로 밀려나면서도 승원은 기절하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정 감독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눈치챈 권 대표가 싱겁게 덧붙였다.

“그냥 취해서 저러는 겁니다.”

“…저렇게 내버려 둬도…….”

“기사 불렀습니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아요.”

그래도 발을 떼지 못하는 승원에게 권 대표가 기어이 짜증스레 덧붙였다.

“윤승원 씨가 저 꼴이 나도 저 새끼가 책임져 줄 거 같습니까?”

“…….”

“좀 가요. 신경 끄고.”

그가 승원의 등을 밀어냈다. 신발을 신는 승원을 바라보다가 코트를 건넨 권 대표는 그걸 입는 그를 내내 감시하듯이 지켜봤다. 그 덕에 빠르게 팔을 꿰어 넣은 승원은 바로 걸음을 떼는 권 대표의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넓은 주차장엔 주차된 차량 몇몇 대뿐,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주위를 둘러본 권 대표가 여느 때처럼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가 나는 방향 쪽에 서 있던 승원에게 그가 ‘나오세요.’라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뇌까렸다.

“…대표님,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나도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차 있어요?”

후우, 내뿜는 연기가 옅은 승원의 입김보다 몇 배는 짙고 길었다. 매캐한 냄새에 코를 살짝 찡그린 승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택시 타고 갈 생각입니다.”

승원의 말에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권 대표가 담배 필터를 빨아올리는 소리만 허공 위를 돌았다. 언제 자리를 벗어나야 할지 고민하던 승원이 일단 감사 인사를 표하려던 때였다.

“여자한테 빌붙는 놈들은 심심찮게 봤는데, 이런 케이스는 또 처음 보네.”

“…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해 승원이 그를 바라본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질기게 뜬 눈이 승원을 훑었다.

“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저기 걸친 발이 많네요.”

“…….”

여상하게 뱉어 내는 권 대표의 말 사이사이엔 의미심장한 가시가 콕콕 박혀 있었다. 승원을 힐난하려는 의도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그 무감정한 문장들이 더욱 날카롭게 승원을 찔렀다. 장초를 빨아들인 그가 숨을 뱉었다. 다리부터 길게 훑어 올린 시선이 승원의 눈동자에 도달했다.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인가 봅니다, 윤승원 씨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고 했던 게 바로 몇 초 전이건만, 승원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다문 채 걸음을 뒤로 물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주름진 승원의 얼굴을 무심히 들여다보던 권 대표가 툭 떨군 담배를 구둣발로 비볐다.

“태워다 주겠습니다. 타고 가세요.”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요. 내 배려가 부담스럽습니까.”

“…….”

“여기 택시 안 잡힙니다. 잔말 말고 타요.”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승원은 갑작스레 치솟는 울컥거림에 침을 꾹 삼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을 돌려 차도를 확인했지만, 깜깜한 어둠과 함께 비추는 가로등뿐, 10시가 넘은 밤에 지나다니는 차는 몇 대 없었다. 코를 훌쩍인 승원은 어쩔 수 없이 권 대표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가 도로를 매끄럽게 내달렸다. 침묵을 유지하며 운전하는 권 대표의 옆에서 차창만 내내 주시하고 있는 승원은 10분이 다 지나도록 고개 한 번을 까딱하지 않았다.

처음엔 운전에만 집중하던 권 대표도 차에 올라탄 이후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 승원이 내심 신경 쓰였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했다. 어두운 차창에 비치는 어렴풋한 얼굴이 미세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거기 뭐 붙어 있기라도 해요? 멀쩡한 앞을 놔두고 왜 거길 그렇게 봅니까.”

사방이 도로와 마천루뿐이라 더 볼 것도 없었다. 화려한 조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강이 드러나는 다리 위도 아닌데 승원은 제 쪽의 차창만 꿋꿋하게 바라보았다. 저번엔 문을 세게 고쳐 닫는다든지, 향수 냄새 좀 지적한 것으로 창을 열고 간다든지, 이상한 고집을 피우더니 이번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때, 목소리 대신 흘러나온 훌쩍임에 시선을 거두려던 권 대표가 다시 그를 확인했다.

희미하게 공간을 채운 건 명백한 울음소리였다.

“…뭡니까.”

창을 보고 있던 얼굴이 이내 고개를 떨구더니 손으로 얼굴을 닦아 냈다. 권 대표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윤승원 씨.”

“…아닙니다.”

“아니긴.”

“…….”

“왜 울어요?”

권 대표가 중앙을 침범해 손을 뻗었다. 승원의 어깨를 꾹 잡은 그가 억척스레 그를 돌려세웠다. 고집스레 버티고 있던 몸이 그의 쪽으로 돌아가고, 눈물에 적셔진 눈이 보였다. 권 대표를 보자마자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뺨을 타지도 못하고 허벅지로 낙하했다.

“…….”

“놔주세요.”

불분명한 목소리로 부탁한 그가 권 대표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창가로 고개를 고정했다. 눈을 벅벅 닦아 대던 승원이 침을 삼켰다. 물기가 어른거리는 소리가 차 안 가득 울렸다.

권 대표의 신경이 곤두섰다. 주름 없이 매끈하던 이맛살이 구겨졌다.

“왜 웁니까? 갑자기?”

“…….”

“내가 태워 주는 게 그렇게 싫어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면, 왜 그러는데.”

크게 날숨을 내뱉는 권 대표의 숨소리가 들렸다. 타라는 대로 탈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훌쩍대는 게 그의 눈에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

승원은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했다. 꾹 물고 있는 아랫입술에 피가 날 듯했다. 벨트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쥔 승원은 추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제 허벅지로 시선을 내렸다.

뭐 하나 제대로 거절하고 도려낼 줄 아는 일이 없었다. 권 대표를 만나기 이전부터, 그를 만난 지금까지 바뀐 자신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장 사장의 탓이라고만 생각했던 원망이 저 자신에게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권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의 도움을 받아 장 사장에게서 벗어났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의 힘을 빌려 자리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 놓고 저에게 같잖은 소리를 퍼붓는 권 대표에게 역시 간단한 거절 하나 하지 못하고 그의 차에 올라타 버렸다.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천성이 그런 걸까. 휘둘리고만 사는 게 저의 최선인 걸까.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도 빠져나온 게 아니었다. 어차피 또 헛걸음질하다가 자빠질 자신이 눈에 훤해서. 그런 본인에게서 염증을 느꼈다. 그래서 자꾸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다.

그걸 알 리 없는 남자는 속도를 높이며 승원을 재촉했다.

“대답 안 할 겁니까?”

“…….”

“벙어리 새끼도 아니고,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싫어서.”

마침내 승원이 운을 뗐다.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가 작게 부들거렸다.

“권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는데…….”

“…….”

“줏대도 없고 판단도 못 해서 그런 거 하나 거절 못 하고 또 휘둘릴 뻔한 저한테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대표님을 만나기 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자꾸 아무 상관 없는 대표님께 손을 벌리는 것도 너무 죄송스럽고…….”

침묵이 한 바퀴 돌고, 권 대표가 목을 울렸다.

“그래서 울었습니까?”

“…네. 죄송합니다. 이제 안 웁니다.”

승원이 얼른 소매를 들어 붉어진 제 눈가를 벅벅 닦았다. 뻥뻥 뚫린 도로 위엔 권 대표의 차만 내달렸다.

눈물을 애써 삼켰더니 이번엔 콧물이 눈치 없이 비집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권 대표는 승원 자리의 포켓을 열어 티슈를 꺼내곤 그의 허벅지에 가볍게 던졌다. 입을 다문 승원이 티슈를 뽑아 물기를 닦아 냈다. 그는 승원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윤승원 씨, 지금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

“내가 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까?”

승원이 창가가 아닌 왼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앞만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나한테 감사하거나 죄송해할 필요 없습니다. 난 어차피 우리 약속에 포함되어 있던 걸 이행한 거뿐입니다. 내가 윤승원 씨 귀찮게 구는 인간을 치워 주는 대가로 윤승원 씨가 내 애인 행세를 하고 있던 거였고. 그딴 새끼가 장윤철 말고 더 있었다면 진작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녹색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권 대표가 깔끔하게 다그쳤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한 거뿐이니, 그냥 우리 약속을 지킨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괜히 머리만 아픕니다.”

덧없는 얼굴을 한 승원이 무심한 남자의 옆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항상 일정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승원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그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되새겼다. 군더더기 없는 소리는 다행히 금방 머릿속에 새겨졌다.

“알아들었습니까?”

“…….”

“대답을 해야 알지.”

“…네.”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목을 울렸다. 방금까지 끓어오르던 속이 잔잔한 물결처럼 원상 복귀되었다. 조금 들쑤시던 숨소리가 잠잠해지고 저도 모르는 새 안정을 찾은 승원이 권 대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앞 유리를 바라보았다. 깜깜한 밤하늘이 도로보다 넓게 유리를 비췄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승원은 새삼 가게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을 체감했다. 낮부터 지속됐던 촬영과 정 감독과의 실랑이, 이 시간까지 버텼던 체력들을 돌이켜 보니 갑자기 느른한 피곤이 몰려왔다. 울기까지 했던 얼굴이 무겁게 흘러내리는 듯했다. 승원이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동안, 권 대표는 단조롭게 울리는 벨 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네, 김 실장님. 그 인간은 어떻게 됐습니까.”

얌전히 그의 목소리를 라디오 삼아서 듣던 승원이 멍한 눈을 깜박였다. 잠시 김 실장의 말을 듣는 듯 침묵하던 권 대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곧바로 전화를 끊는 줄 알았는데, 그는 갑자기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가라고 하세요. …말귀 못 알아먹는답니까?”

권 대표는 승원이 옆에 있는 걸 알면서도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듯이 제 할 말을 쭉 이어 나갔다. 정 감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승원은 걱정이 차오르는 몸을 편히 놓지 못하고 그를 지켜봤다.

“정신을 못 차렸네.”

나지막한 음성이 귓전에 닿았다. 승원은 얌전히 숨을 쉬며 그의 통화가 다 끝나길 기다렸다.

뚝, 전화를 끝마친 권 대표가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순간적인 가속력에 벨트를 꽉 잡아 쥔 승원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머뭇거리며 물음을 던졌다.

“…대표님, 정 감독은…….”

그는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잘 들어갔습니다. 개처럼 술에 절어서는 내일 되면 기억도 못 할 거 같다는데.”

“아….”

그렇다면 방금 그가 짜증을 비췄던 상대는 정 감독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거까진 상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던 참이었다.

“윤승원 씨.”

“…네. 대표님.”

그의 부름에 승원은 얼른 대답했다.

“혹시 나랑 지금 우리 집으로 좀 가 줄 수 있겠습니까?”

“…네?”

익숙한 도로와 건물들이 나오던 참이었다. 곧 있으면 도착인데,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권 대표의 말에 승원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허리를 세웠다. 권 대표도 그런 말을 하는 거 자체가 귀찮고 성가셔 보였다.

“빨리 말해요. 갈 수 있어요?”

승원이 어찌 거절한단 말인가. 그는 거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권차현이라는 남자에게는 더더욱.

불가항력과도 같은 대답이 새어 나왔다.

“…네. 갈 수 있어요.”

“부탁 좀 합시다.”

승원의 말에 짧게 응수한 권 대표가 그대로 핸들을 돌려 유턴했다. 반대 차선으로 차량을 돌린 그가 빠르게 속력을 냈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지만, 운전에 집중한 남자의 얼굴이 너무 예민해 보여서, 승원은 차마 묻지 못했다.

***

어스름한 오피스텔 입구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날이라도 따뜻했다면 이 시간에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항상 지하 주차장으로 가던 차량이 어째서인지 오늘은 지상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금방 손쉽게 주차를 마친 권 대표가 시동을 끄자 푹, 죽어 버린 차량이 모든 소음을 잡아먹어 버렸다. 어둠이 내린 차 안에서 가만히 그의 눈치를 살피던 승원은 내리라는 그의 말에 묵묵히 벨트를 풀었다.

원래도 다리가 길어 보폭이 크던 권 대표가 오늘따라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아스팔트 위에 밟히는 구두 소리가 불규칙적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던 승원이 힘겹게 그의 옆으로 다가서자 승원을 힐끔 바라본 남자가 입술에 침을 바르곤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에 승원은 입김을 내뿜으며 그를 뒤따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함을 계속 품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표님-.”

승원이 걸음을 맞춰 보려 했지만, 그는 승원과 발을 맞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표님,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어떤 걸.”

“제가 여기 왜 따라온 건지, 말씀 안 해 주셨잖아요.”

“알잖아요, 윤승원 씨도.”

그는 승원을 보지 않고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그의 등에 바짝 붙어 따라가던 승원이 침을 삼켰다. 구체적이진 않아도 감은 잡을 필요가 있었다.

“또 애인 같은… 대표님의 애인 행세, 그런 걸 하면 되는 겁니까?”

“……봐서.”

지상 주차장에서 오피스텔 건물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다. 추위에 볼이 발그스레해진 승원의 귀가 홧홧했다. 그들이 걸음을 옮기는 길엔 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모자도, 마스크도 없는 상태인데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을 때 즈음, 갑자기 권 대표가 걸음을 뚝 멈췄다.

그의 뒤만 꾸준히 따라가던 승원에겐 갑작스레 시야가 차단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검고 널찍한 그의 정장이 눈앞에 보였고, 걸음을 멈춘 승원은 제 앞의 남자가 내뱉는 긴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의 머리 옆으로 담배 연기와 같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때 그가 휙, 뒤로 돌았다. 가슴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탓에 승원이 걸음을 뒤로 물리려는데, 그걸 막으려는 듯 승원의 양어깨를 꽉 그러쥔 권 대표가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윤승원 씨.”

“……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도 빛이 나는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이 자신을 또렷하게 들여다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승원을 응시했다.

“지금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주위에.”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권 대표가 그렇게 말하며 승원의 어깨를 꽉 잡은 채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가던 방향이 아닌, 둥글게 회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에게 억지로 몸이 이끌린 승원은 어느새 자신이 그와 서 있던 위치를 바꿨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검은 물결 같은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 좀체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정 감독 치워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까는 미안하단 마음도, 고맙다는 마음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으면서 왜 갑자기.

그것보다 그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주변을 휘감는 차가운 기운을 물리치고 그의 체향이 끼쳐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눈을 깜박거리던 승원은 느리게 운을 뗐다.

“아깐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고맙다는… 생각.”

“그래서, 안 고마워요?”

승원의 눈이 알 수 없게 흔들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왜 자꾸 이러는 걸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도저히 속셈을 알 수 없는 남자를 하릴없이 보고 있다 한들, 꿰뚫어 볼 수도 없는 제 속이 답답했다.

잠시 고민하던 입술이 오물거리며 달싹이길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이 열렸다.

“당연히,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맞는 걸까, 확신하지 못한 채 승원은 제 진심을 말했다. 그에게 고마웠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역겨운 접대나 더러운 행위들을 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더군다나 오늘도 역시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그 식당에서 나올 기회조차 놓칠 수 있었을 테니. 그 자체만을 따졌을 땐, 그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고개를 살며시 떨구는 승원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그의 뒤쪽 너머 어딘가를 메마른 눈빛으로 응시했다. 당연히 고갤 내리고 있던 승원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읏.”

불쑥, 턱이 잡혔다. 살짝 경직된 듯한 얼굴 위로 날카로운 눈매가 승원을 훑었다. 제가 이번에도 말실수를 한 걸까. 그가 원한 대답이 아닌 걸까? 순간적인 사색에 빠진 승원에게 권 대표가 입술을 벌렸다.

“고마우면, 입술 좀 빌립시다.”

헤아릴 새도 그의 얼굴이 가까이 내려왔다.

“네? …으읍-.”

차가운 듯 끝이 거친 입술이 승원의 입술에 맞붙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머리가 생각이란 것을 멈추고 가슴이 쿵쿵, 미친 듯이 요동쳤다. 가슴께에서 떨고 있던 손이 권 대표의 허리 위로 속절없이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비튼 남자의 입술이 더욱 가까이 맞붙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곧 입술이 뚫려 축축한 혀가 붙을 듯했다.

“흐, 으읍…….”

그러나 입술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승원의 입술이 더 벌어질 일도, 그와 혀가 맞붙을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숨만 막힐 듯한 기분에 살며시 눈을 뜬 승원은 형형히 번쩍이는 그의 두 눈이 승원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읏, 으음…….”

난리라도 난 듯 요동치는 심장과 다르게 빠른 머리는 금세 판단을 마쳤다.

……누굴까. 어떤 이를 쳐 낼 생각으로 저에게 갑자기 무식한 입맞춤을 퍼부은 것일까. 미친 듯이 궁금했지만, 그와 입술을 맞대고 있는 지금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승원이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든, 그에게 도움이 되어야 했다. 이대로 있는 건 숨이 막혔고, 그를 밀어내는 건 그의 계획에 차질을 빚는 일이었다.

승원이 권 대표에게 몸을 맞붙였다. 추운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까치발을 조금 들어 팔을 올린 승원이 권 대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눈을 한 번도 감은 적 없던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승원에게로 옮겨졌다.

야속하게도 이건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어 틈을 벌렸다. 건조한 바람에 메말라지려 했던 거친 입술 사이로 승원이 깊이 혀를 넣었다. 습기를 머금은 혀가 축축하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쾅댔다.

“……흡.”

“흐, 으, 하아…….”

기분이 이상했다.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고개를 비틀고 있던 그에게 적극적으로 응수하는 듯 보였을까. 승원의 귀 끝은 아까보다 배로 붉어졌다. 까치발 때문에 중심을 잡기 힘들었던 승원의 허리를 권 대표가 뒤늦게 감싸 안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 아, 으읍…….”

서로 뒤엉킨 혀가 한동안 그의 입 안에서 섞이고 돌기를 반복했다. 날이 추워서인지, 입술을 섞고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감도는 열기에 몸이 녹는 것 같았다. 승원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할 수 있는 대로 그의 혀를 빨았다. 권 대표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승원을 제 쪽으로 더욱 바짝 끌어 올렸다. 누구 하나 내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대를 탐했다.

아까 먹은 술이 이제야 기운을 발휘하는 걸지도 몰랐다. 배 속이 들끓었다. 자신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손가락을 세워 저와 키스를 하는 남자의 뺨 언저리를 선을 따라 쓰다듬었다.

한참을 입 안에 나돌던 축축함이 갑자기 끝을 맺었다. 씁쓸하고 단 입 안을 부유하던 혀끝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툭, 떨어져 나갔다.

서로 떨어진 입술이 쪽, 소리를 냈다. 입 안에 단내가 남은 것처럼 달콤하게 적셔졌다.

“……하아.”

“…….”

가빠진 숨을 삼키며 제 입술을 닦아 낸 승원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침침해진 눈을 부릅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제 침으로 번들거리는 권 대표의 입술이 보였다. 제가 생각해도 갑작스레 반응한 자신의 몸은 제어 불가였다.

멀쩡하게 키스를 마친 권 대표의 미간이 사정없이 조여졌다. 승원을 바라보는 두 눈이 매서웠다. 그는 차가운 바람에도 눈 한 번 꿈쩍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상승했던 열기와 대비되는 차가운 말투로 그가 목을 울렸다.

“…미친 겁니까?”

자신이 먼저 할 땐 언제고. 그는 이제 와서 저런 말을 지껄였다.

“…취한… 겁니다…….”

승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답했다.

그가 뒤로 물러났다. 잠시 헛돌았던 정신이 되돌아왔다.

“지금 그쪽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습니까?”

화라도 낼 줄 알았던 권 대표는 오히려 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순간을 비웃는 실소에 가까웠다.

승원이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지러이 뒤섞였던 머릿속이 갑자기 휘릭, 하고 정돈되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질기게 저를 추궁하고 있는 게 보였다. 온기가 달아나지 않아 따스하게 느껴지는 코트 안쪽의 감촉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젖어 있는 권 대표의 입술 역시…….

“……흐어.”

손이 불쑥 올라갔다. 승원이 입을 틀어막았다. 서너 걸음은 뒤로 물려 그와 사이를 벌린 승원의 커다란 눈동자가 곧 튀어나올 듯이 키워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 솟구쳐 오를 것 같았다. 허겁지겁 내쉰 숨으로 물었다.

“…제, 제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취했다고 했습니다.”

“…….”

접신이라도 당한 듯 잠시 가출했던 제정신이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한 손으로 가리고 있던 입술을 양손으로 다 잡았다가, 고개를 내렸다가 올리고, 떨어뜨린 손을 코트 자락에 마구 문질렀다. 하릴없이 벌어져 있는 입술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진짜로 잠깐 미쳤던 게 분명하다. 술은 넉 잔도 안 마셨는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죄송할 거까지야.”

“…….”

“우릴 보고 있던 관객은 깔끔하게 물러났습니다. 덕분에.”

눈을 초승달처럼 가지런히 접은 남자가 승원에게 만족스레 턱짓했다.

사실 권 대표에겐 승원과 혀를 섞었다는 사실보다는 저희가 벌인 꼴을 보고 점차 일그러지던 서유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그는 밍크코트를 걸친 채 자신의 집 앞에서 죽치고 있던 서유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내보낼까 고민 중이었고, 마침 눈에 들어온 게 제 옆의 승원이었다.

물론 입맞춤은 보여 주기식으로만 할 생각이었고, 실제로 처음엔 살짝 입술만 닿아 있던 정도였는데, 갑자기 들이미는 승원에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성가실 정도는 아니었다. 덕분인지 아닌지, 결과적으로 엿은 충분히 먹였으니.

“어떡합니까…….”

당돌하게 먼저 치고 들어올 때는 언제고 승원은 자신이 그런 짓을 당한 사람인 양 주먹을 꼭 쥐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그의 양 볼과 귀 끝이 빨갰다. 그만큼 붉은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깨물고 있던 승원은 이번엔 한숨을 내쉬며 제 이마를 퍽퍽 쳤다.

“죄송합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합니까.”

“입만 맞추셨는데, 제가 갑자기 너무 오버를 한 거 같아서…….”

경직되어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이 정도로 주절대는 걸 보니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오버한 줄은 아나 봅니다.”

“저, 제가 생각했을 때도 분명 대표님이 저에게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대표님 뜻에 따르려고 함께 맞춰 드린 거뿐입니다. 절대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진짜로…….”

자기변호를 하면서도 승원은 권 대표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중간중간 힐끔거리며 권 대표를 올려다보다가도 이내 차마 마주할 수 없었는지 다시 시선을 거두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 나갔다.

권 대표는 그의 말을 들으며 흐음, 목만 울렸다. 날도 추운데 계속 여기 서서 이러고 있는 것도 질렸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진짜로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만.”

2절로 이어지려는 승원의 말을 권 대표가 손을 가로질러 멈추게 했다. 마구 뱉어 내던 말들을 정리한 승원이 그의 손짓에 하던 변명을 마치고 입술을 축였다. 그러자 또 그와 했던 입맞춤이 떠올라 뱃속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오해하기 좋습니다.”

“…….”

“다른 마음 아닌 거 잘 압니다. 애초에 다른 마음먹은 거였다면 진작 나랑은 여기까지일 텐데.”

“……네.”

“그런 것도 아닐 거고, 그냥 나 도와준다고 그런 건데. 그렇게까지 주절거릴 필요 없습니다.”

“……네.”

깔끔하게 잘라 되돌아온 답변이 명쾌한 듯 씁쓸했다. 승원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로 강한 바람이 휘익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흩날리는 머릿결 사이로 오한이 드는 추위가 들이닥쳤다. 목에 소름이 돋은 승원에게 권 대표가 다가왔다.

“됐고, 집에 데려다주겠습니다.”

“아닙니다.”

평온했던 권 대표의 얼굴 위로 잠시 찌푸림이 지나갔다. 딱 잘라 거절하는 승원의 말에 눈썹을 살며시 올린 그가 짧게 뱉었다.

“왜.”

“…제가 혼자 갈 수 있어요.”

“진짜로 내 ‘차’가 타기 싫습니까? 다른 차 있는데 그걸로 태워 줘요?”

차를 탈 때마다 꼭 이렇게 한 번씩 튕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두 번이면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슬슬 거슬렸다.

승원은 여전히 고개를 휘저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내고는 작게 숨을 골랐다.

“그게 아니라……. 그냥 저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굳이 그렇게 어렵게 가려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승원의 얼굴 가까이로 권 대표가 제 얼굴을 들이댔다. 팔짱을 낀 몸이 순식간에 승원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까와 같은 두근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시선이 닿으면 입술까지 닿을 것 같아서 승원은 고개를 튼 채로 버텼다. 권 대표는 영 모르겠단 얼굴로 그를 관찰했다.

“이유가 뭐냐니까.”

“싫은 데 이유가 어딨… 습니까…….”

“……싫다고 했습니까, 지금?”

“…….”

또 말실수였다. 승원은 제 입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끈덕지게 붙어 오는 시선이 승원을 심문했다.

“방금은 그게 아니라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

“진심이라도 나왔나 봅니다.”

“…….”

“사춘기가 이제 온 겁니까? 변덕이 그렇게 심해서야.”

마지막 질문은 한 번 비틀어져 덧붙인 말과 함께 돌아왔다. 무심하게 마무리를 지은 권 대표는 바로 허리를 들어 일어났다. 잠시 맞았던 눈높이가 다시 위로 훌쩍 올라갔다.

“택시 잡는 데까지만 태워다 주겠습니다, 그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들어가세요, 대표님.”

권 대표가 이상하게 뜬 눈으로 승원을 내려다봤다. 구겨진 이마가 펴질 줄 몰랐다. 실랑이를 하는 것도 지치는데. 어련히 알았다고 하면 될 것을, 그의 입장에선 승원이 갑자기 삐딱선을 타는 이유가 뭔가 싶었다.

하지만 승원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가야 할 것 같았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저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혼자 허리를 숙여 잠자리 인사까지 마친 승원이 제 뺨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리고는 뒤로 돌았다. 콜록, 배 속에 꽉 묵혀 있던 숨을 토해 낸 후 앞을 보고 걸었다.

권 대표는 멀어지는 승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집에 들어가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갑작스레 여기까지 데려온 입장에서는 저렇게 보내는 게 속 시원한 결말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빚지는 건 죽어도 싫은 성격이었고, 뭐든 딱 잘라 끊어 내야 편한 성정이었기에, 이렇게 제 말을 거절 아닌 거절로 막아서고 돌아가는 승원이 싫은 것도 아니게 참 묘했다.

한참 가던 승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한 3초 정도 서 있는가 싶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는데, 대뜸 뒤를 돌았다.

“……!”

“…….”

자기가 뒤를 돌아 확인해 놓고는 아직 가지 않고 서 있는 권 대표에 놀랐는지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권 대표가 콧바람을 냈다. 저렇게 보니 진짜 애는 애인가 싶어서. 안 그래도 저보다 10센티도 더 작은 키라 아담해 보였는데,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 인영이 더 조그마했다.

쯧, 소리를 낸 권 대표가 이만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았다.

키스도 오랜만이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인간이었기에 먼저 직진하는 경우도, 흥미를 갖고 하는 경우도 없었지만, 안 그럴 것 같던 인물이 제 흥에 맞춰 준답시고 먼저 밀고 들어오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볼수록 다채로운 인간이었다.

***

길도 모르면서 마구 나아가다 보니 가로등뿐인 큰 도로가 나왔다.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커플을 보고 마음이 초조해진 승원은 훤히 드러난 제 얼굴을 가리려 고개를 숙였다. 속에서 부글대며 끓어오르는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뱃속에서 피어오르는 초면인 감정이 낯설었다. 동동 구른 발로 얼른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느라 피곤에 찌든 운전기사는 승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적지로 천천히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승원은 화끈거림에 좀처럼 잠재워지지 않는 볼을 감싼 채 눈을 감았다.

미친 게 분명했다.

그 남자에게 잠시 닿았던 그 입술의 감촉이, 입 안을 헤집던 감각이 여실히 떠올랐다. 귀 끝부터 시작된 간지럼이 목을 타고 내려와 겨드랑이, 허리춤을 타고 허벅지 밑으로 내려갔다. 지워 보려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찰나 동안 섞었던 그 달콤한 입맞춤에 저도 모르게 넋을 빼놓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순간적인 연기에 파드득, 스파크를 튀기며 몰입하듯이, 승원은 입술이 닿았던 남자에게 완전히 빨려 들었다. 관객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슨 대단한 걸 선사하듯이 권 대표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분명 말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했어도 신경 쓰고 있을 터였다. 아니라고 선을 그었던 그였지만, 속내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 걸어가다 뒤를 돌았을 때도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던 그 커다란 기골에 놀라 승원은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판도라의 뚜껑이라도 연 것같이, 그 안으로 휩쓸려 가지 않으려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자신을 그 남자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감정적?

“흐으…….”

쿵. 차창에 머리를 찧은 승원을 택시 기사가 슥 바라보았다. 승원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까만 시야에 영화가 재생되듯 아까 있던 일이 무한 반복되었다. 오늘 저녁에 있던 식당에서의 무시무시한 일은 이미 다 까먹어 버린 지 오래였다.

***

연락이 따로 오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오후가 된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건 차현의 예견에 없던 일이었다. 물론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제 그렇게 들어가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놓고 여태 잠수 중인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잠잠한 핸드폰이 미동 없이 검은 화면만을 유지했다. 의자에 깊게 기대어 있던 그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툭 던졌다. 무료한 몸을 일으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열어 둔 작은 창밖으로 흰 연기가 물 빠지듯 흘러 나갔다. 몇 번을 빨아도 좀처럼 머리가 맑아지지 않는 듯해 기분이 잡치던 참에 창가 끝 쪽에 놓여 있던 식물 하나가 기어이 죽어 버린 것을 발견했다. 윤 여사가 억지로 가져오는 바람에 둘 곳 없이 버려진 불쌍한 아이였다.

크리스털 소재의 재떨이 위로 담뱃재를 툭툭 털어 낸 그가 식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건조한 날씨에 간접흡연까지 당한 식물은 본래의 푸른색을 잃고 바짝 말라 시들어 버렸다. 금방 시선을 거둔 그가 창 밑으로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차가 보였다. 익숙한 듯한 차 모델에 그의 인상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인 그가 ‘들어오세요.’ 말하며 재를 털어 냈다.

틈만 살짝 벌린 문 사이로 김 실장의 얼굴이 드러났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청객을 직감한 그는 느긋이 눈을 깜박였다. 알면서 물었다.

“뭡니까.”

“……대표님, 그게. …지금 갑자기 찾아오셔서… 아, 잠시만… 읏!”

“좀 나오라고!”

덧없이 뒤로 밀린 김 실장이 꼭 잡고 있던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며 문을 활짝 벌렸다. 차현의 눈은 움직임 하나 없이 고고했다. 미세하게 미간을 무너뜨린 그가 방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여자를 응시했다. 예상대로였다.

어젯밤 승원과 자신의 무대를 관람했던 1등 관객이자 그의 약혼녀, 서유정이었다.

“김 실장님, 나가 보세요.”

“……네. 대표님.”

문이 닫히든 말든 앞만 보고 그에게 다가온 서유정은 명패가 붙어 있는 책상을 넘어와 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권차현의 앞에 섰다. 살기 어린 눈빛이 그를 노려보더니 이내 손바닥이 날아왔다.

짜악, 찰지게 뺨을 날린 손바닥이 주먹을 꼭 쥔 채 부들거렸다.

“개새끼야.”

“…….”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손바닥이 쫀득하게 부딪혔다 떨어진 그의 창백한 뺨 위가 불그스름하게 열을 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평하게 목을 뺀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화를 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이별 고지에 도달한 이상 더 힘을 뺄 필요가 없었기에.

“더 때릴 겁니까.”

“뭐?”

“때릴 거면 더 때리라고. 그래도 속은 풀고 끝내는 게 마음 편하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맞을 생각인 양 차현은 서유정의 눈앞에 제대로 서서 얼굴을 내려 보였다. 기가 찬다는 듯 서유정이 하, 어처구니없는 숨을 내뱉었다.

이제껏 차현이 어떤 태도를 보여도 금방 수용 가능했던 것은, 자신이 이 남자의 유일하게 오래된 약혼녀로서 정말 결혼이 코앞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덤으로 어떤 재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도 용서 가능한 용안 역시 한몫했다.

하지만 이번 건은 말이 달랐다. 수용해 줄 수 있는 수위가 아니었다. 어떤 꼴을 보여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노선은 절대 용서 불가였다.

“어제 우리 집 앞에 왔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못 본 척이야? 서로 다 봐 놓고? …왜? 쪽팔린 건 아니?”

그는 벌써 이 대화가 지루했다. 차현은 서유정 뒤쪽에 놓인 아까 그 시든 식물에게로 시선을 넘겨 버렸다. 서유정은 그것도 모르고 목을 써 가며 열불을 냈다.

“아니지. 아주 창피한 줄 모르고 붙어먹더라. 혀까지 섞고 지랄 발광을 하던데.”

“봤을 줄은 몰랐는데.”

이 소리도 지랄이었다. 그녀가 없었으면 애초에 승원과 입술을 붙일 일도 없었기에.

“좆같이 구는 건 알았어도, 좆이랑 붙어먹는 새끼일 줄은 몰랐지.”

격양된 목소리가 흥분에 가득 차 적나라한 발음으로 쏟아졌다. 화가 단단히 난 여자는 다행인지 아닌지, 차현에게 완전히 정을 뗀 것처럼 보였다. 원하던 바였음에 차현은 속으로 만족했다.

“이 정도까진 아니지 않았어?”

어딘가 지친 목소리가 차현을 향해 질린 듯이 물었다.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동자에 잠시 빛이 돌았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키의 여자와 친절히 눈을 맞춰 준 그가 다그쳤다.

“이 정도라는 걸 왜 이제야 알았겠습니까.”

“…….”

“우리가 딱 거기까지라는 거지.”

하아. 서유정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 같아선 저 개새끼의 얼굴을 갈겨 버리고 싶은데. 자신의 품격 있는 체면 역시 유지해야 했다. 전부 다 무로 돌아간 이상, 여기서 머리채를 풀어 봤자 손해를 보는 건 제 쪽이라는 걸 똑똑한 여자는 알았다.

“뺨 때리려고 온 겁니까?”

“그딴 걸 보고도 뺨 한 대로 끝내면,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너도 잘 알 텐데?”

“그래서 말했잖아요. 속이라도 풀고 끝내라고.”

“엿이나 먹어, 이 좆같은 새끼야.”

반듯하게 세워 올린 가운뎃손가락이 차현을 향해 꼿꼿이 드러났다. 여자는 일부러 뒤를 돌며 제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을 투포환 던지듯 그를 향해 돌려 쳤다. 웃음도 나오지 않는 차현이 점차 멀어지는 여자를 보며 다시 담뱃갑을 열었다.

“좆이나 물다 지옥에 떨어져라.”

가다 말고 멈춰 서 차현을 향해 격분한 그녀가 침을 퉤, 뱉었다. 상대 남자의 얼굴이 어떻든 말든, 이제 제 알 바가 아니었다. 더러운 얼굴 보기도 역겨웠으니.

부서져라 소리를 낸 문이 거세게 닫혔다. 거친 회오리가 지난 자리에 갑작스러운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좆이나 물다 지옥에 떨어지라니. 퍽 섬뜩한 저주에 차현이 피식 웃었다.

차현은 모니터 옆에 있던 수화기를 들었다. 곧이어 김 실장이 부랴부랴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그가 불확실한 발음으로 씹었다.

“김 실장님, 이 식물 치우세요.”

“어휴, 이게 왜 이렇게……. 회생 불가하겠는데요.”

“네. 쓸모없습니다. 버리세요, 그냥.”

죽은 식물이 가여운 건지 쓸어 만지던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식물을 번쩍 들어 치웠다.

삭막하고 메말라 보이는 ‘권차현’이란 남자의 공간 안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생명이었다.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린 식물에게도 차현은 마지막까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푸르름을 유지하던 화분마저 떠난 자리는 다 털어 내지 못한 검은 흙만 자잘하게 남아 있었다.

보기보다 고집이 상당해 보이던 승원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차현은 떠나가는 검은 세단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입술을 축였다.

***

“진짜 아무것도 안 먹어요? 진짜로?”

“네. 속이 더부룩해서.”

“허…… 나 참, 어떻게 그러지? 마른 사람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봐요.”

곽영찬 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끙, 하고 다물었다. 뒤에 타고 있던 승원이 룸 미러를 통해 보이는 덩치 큰 남자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미리 사 온 샌드위치를 승원이 먹지 않겠다고 하니 자기도 먹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승원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 말이다.

“드세요. 저 신경 쓰지 말고.”

“에이, 어떻게 그래요. 차 안에 냄새가 이렇게 다 나는데…. 포장 뜯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면, 먹으면 어떻겠어요.”

“괜찮아요. 창문 열고 가면 되니까…….”

순간 알 듯 말 듯 한 기억이 번쩍 뜨였다 사라졌다.

“차가 좀 막히긴 하는데, 20분 안쪽으로 도착할 거 같으니까 가서 먹을게요. 운전하는데 뭐 먹으면 그것도 그거대로 위험하더라고요.”

허허, 웃으면서 핸들을 돌리던 곽영찬은 조수석에 놓인 샌드위치를 한 번 바라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승원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정말 정말 괜찮다고, 제발 먹으면서 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는 굳건히 제 뜻을 지키며 운전에 임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에 맡았던 연예인 놈은 음식 냄새에 치를 떨었다며 그 시절의 트라우마를 떠들어 댔다.

승원은 그의 말을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른 아침의 한강 옆 도로는 앞뒤로 수놓아진 차량으로 오갈 데 없이 막혀 있었다.

승원은 불쑥 붉어지려는 얼굴에 평정심을 유지하려 코로 깊이 숨을 쉬었다.

방금의 상황이 꼭 자신이 권 대표의 차 안에서 김밥을 먹던 일과 겹쳐 보였다. 상대방이야 먹지 말라고 한다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생각해서도, 차 안에 남는 냄새를 생각했어도 음식을 참았어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자신은 운전하는 권 대표를 옆에 두고 김밥을 다 비웠었다. 그것도 그가 결제하고 결국 그는 입에 댔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김밥을.

“…….”

입술로 손이 올라갔다. 자고 일어난 다음 날임에도 기억은 야속하게도 생생히 남아 머릿속에 그대로 재생까지 되는 수준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 맞았다. 그때도 미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신은 정말 미친 새끼가 틀림없었다.

승원은 지금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적인 동요가 당시의 자신을 불도저로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저 자신도 당시의 자신을 읽을 수가 없는데, 그런 쪽에 승원보다도 한참 무감해 보이는 권 대표는 어땠을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승원은 잠깐 맛보았던 그 거센 입맞춤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라 뻑뻑한 눈을 비비고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아…….”

“왜요? 왜 그래요?”

속으로만 한다는 게 기어이 창에 대고 한숨을 뱉어 버린 승원이었다. 뿌예진 창이 바깥을 가렸다. 땅이 꺼지듯 하아아, 소리를 낸 승원에 목을 쭉 뺀 곽 매니저가 고개를 뒤로 돌려 승원을 확인했다. 덩치에 맞지 않는 줄 알았는데, 걱정 어린 표정을 단 얼굴의 조화가 제법 괜찮은 남자였다.

승원이 얼른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차 바닥으로 꺼지는 줄 알았어요.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 안 풀리는 일 있어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운전에 임하던 곽 매니저가 중얼거렸다. 곽영찬은 첫인상보다도 더 정이 많고 괜찮은 사람 같았다. 일도 꼼꼼하게 하는 편이고, 지각도 하지 않으며, 오버도 잘하고 말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귀찮게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괜찮은 인간미도 있었다.

“……저기.”

“응. 말해 봐요.”

승원이 입술에 침을 바르고 묵혀 둔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자꾸 후회스러운…… 일이 떠오르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너무 답답하고 화끈거렸기에 홧김에 한 말이긴 했지만 이렇게 묻는 게 맞나 싶었다. 제가 한 질문이 자신의 상황과 적절히 들어맞는지, 그리고 이 질문을 받아들인 곽 매니저가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인지, 승원은 입술을 달싹이며 재차 곱씹었다.

곽영찬은 어… 하고 잠시 침묵을 하더니 이내 하하, 크게 웃었다.

“어떤 후회스러운 일이요?”

“…어, 그게…….”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가 어제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애매한 상태에서 저에게 어쩔 수 없이 입을 맞춰야 했던 남자에게 혀를 집어넣고 헤집었습니다. 잠시 머리가 이글거릴 정도로 기분이 아찔했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너무 무례한 행동이었고, 저는 머리를 빡빡 밀고 엎드려 절을 해도 용서가 되지 않을 변태 새끼였을 게 분명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죠……?

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승원의 눈썹이 바짝 솟았다가, 밑으로 쭉 꺼졌다. 앞쪽에서 으음, 목을 울리는 곽영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회되는 일이 뭔진 모르겠는데, 승원 씨보다 고작 5년 더 산 내가 한마디 하자면…….”

부우웅, 앞으로 쭉 나아가는 차량의 핸들을 여유롭게 돌리며 곽영찬이 말을 이었다.

“어느 부분이 후회가 됐는지 계속 되새겨 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렇구나.”

“물론 거기서 끝내면 안 되죠. 후회되는 일을 회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다시 한번 되풀이해서 그 후회를 걸러 내는 거예요.”

“…….”

“그러니까, 절대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꼭 다시 그 상황을 맞서서 정면 돌파를 하는 게! ……어!”

신나게 내달리던 곽영찬이 갑작스레 맞닥뜨린 빨간불에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다. 커다란 차가 갑자기 멈추니 온 시트가 휘청였다. 벨트를 차고 있었음에도 무방비 상태였던 승원의 몸이 종잇장처럼 앞뒤로 펄럭였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아, 이거 내가 또 말하다가 흥분하는 바람에…….”

“허어…… 네. 괜찮아요.”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한 손으로는 제 심장을 꼭 쥐고 있던 승원이 어정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심장이 쿵쿵쿵쿵, 거세게 뛰어 댔다.

“…괜찮은 거 맞죠?”

“네. 괜찮… 아요.”

“…저 자를 건 아니죠?”

“…안 잘라요.”

“진짜요? 표정이 영 아닌-.”

“어, 파란불!”

어? 어어! 미안, 미안해요! 곽영찬이 다시 허겁지겁 액셀을 밟았다. 멈춘 지 얼마나 됐다고, 차가 다시 반동을 일으키며 앞으로 매끄럽게 나아갔다. 그럼에도 쿵쾅대기 시작한 승원의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자신의 고민을 곽영찬의 조언에 하나하나 끼워 넣던 승원의 머릿속에 남은 건 이제 고작 몇 안 되는 단어들뿐이었다. 회피. 다시. 정면 돌파. 세 가지 단어가 머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단어들을 조합해 문장을 만들었다.

회피하지 말고 다시 돌아가 정면으로 돌파해라.

“……으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곽영찬은 승원의 고민에서 한참 잘못 짚어 이야기해 준 듯했다. 곽영찬 탓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는 승원이 커리어나 앞으로의 평판 따위를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러니 저런 결론이 나왔을 터였다.

“왜, 왜 그래요? 머리 아파요?”

크지 않은 눈을 최대한으로 키워 뜬 곽영찬이 룸 미러를 통해 승원을 걱정했다. 방금 전의 귀 떨어질 것 같던 조언자는 어디로 가고, 다시 걱정 많은 로드 매니저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요. 안 아파요.”

거짓말이었다. 승원은 지금 머리가 아팠다. 머리만 아프면 다행이지, 가슴도 답답했다. 소화제를 먹어서 해결될 답답함이 아니었다. 숨통을 꼭 조일 듯이, 입을 테이프로 틀어막은 듯이, 무언가 뚫고 지나갈 자리에 거대한 돌덩이가 끼워져 있는 기분이었다.

전혀 해결되지 못한 갑갑함이 승원의 몸속을 털고 뒤흔들었다.

***

유리 테이블에는 각종 다과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코스 요리처럼 펼쳐져 있는 시나리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들어온 것들이란 걸 알았지만 이런 환경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지라, 승원은 제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이 남의 것처럼만 느껴졌다.

곽 매니저는 착석한 승원에게 샌드위치를 또다시 권했지만, 승원은 역시나 먹지 않겠다며 고개를 휘저었다. 곽 매니저는 하는 수 없이 승원의 몫까지 샌드위치를 다 해치우기로 했다.

“자! 우리 승원 씨 이제 다시 시동 걸어야지.”

배 실장이 넉넉하게 웃으며 박수를 짝! 쳤다. 곽영찬도 옆에서 샌드위치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 실장이 눈치를 살짝 주자 곽영찬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 끝에 붙어 있는 작은 창의 레버를 열었다. 그래 봤자 저 작은 창으로 냄새를 빼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샌드위치를 먹고 말이야. 승원 씨 놔두고.”

그녀가 곽영찬에게 야무지게 타박했다. 그래서 승원은 대신 그를 변호했다.

“제가 안 먹는다고 한 거예요.”

“맞아요! 그리고 저 배고파서 실려 갈 뻔했다니까요.”

오물거리던 곽영찬이 억울하단 듯이 중얼거렸다. 샌드위치와 함께 뭉개진 발음이 부정확했다.

“하여간, 이럴 때만 아주 억울해 죽겠지?”

질린 눈으로 손을 휘휘 저은 배 실장에게 눈 하나 깜박 안 한 곽영찬이 어느새 마지막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그녀는 곽영찬을 아예 없는 취급 하며 승원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자 그래서, 본론을 얘기해야죠. 승원 씨한테 러브 콜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어우, 우리 승원 씨 덕분에 우리 회사 주가도 올라갔잖아요?”

“에이, 제가 그 정도는 아닌데…….”

“어머, 진짜 이렇게 겸손하다니까?”

승원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지만, 타인에겐 그의 겸손이 그 어떤 연예인을 통틀어서도 제일가는 심성이라며 효과 만점으로 먹혔다.

손바닥을 맞대고 준비를 취하듯 싹싹 비비던 그녀가 쫘악, 카드를 놓듯이 시나리오를 펼쳤다.

“자. 골라 먹는 서비스니까, 승원 씨가 잘 보고 선택해 봐요. 다들 승원 씨만 오케이 하면 어떻게든 해 주겠다는 식이었어요. 역시 셀럽답다니까.”

방 안에 놓여 있던 TV에서는 마침 승원이 저번 화보 촬영을 하던 모습을 찍은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승원이 이곳에 들어오고 첫 스케줄을 소화하기 무섭게 이곳 기획사 신 대표가 얼른 걸어 놓으라 해서 걸게 된 영상이었다. 메이킹에 가까울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영상이었지만, 아무렴 윤승원의 미모만으로도 충분히 커버가 된다는 게 배 실장의 주장이었다.

승원은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 마시고 낯설어 보이는 시나리오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딱히 제목이 끌리는 건 없었다. 대신 낯익은 이름은 하나 있었다. 감독, 정신도. 승원은 그 이름 석 자를 보고 순간 날뛸 뻔한 몸을 힘주어 참았다.

사실 이전 소속사에선 그냥 장 사장이 하라는 걸 기계처럼 받들곤 했었다. 원래 다 그런 건 줄 알았고, 그래서 승원은 대본 같은 걸 볼 줄 몰랐다. 그건 승원의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볼 일조차 없이, 통보를 받은 작품에 들어가곤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직접 훑어보고 골라 보라는 게 처음인 승원에겐 쉽지 않았다. 해 본 적이 없으니 그는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라고 생각하며 대충 대본을 보는 시늉만 했다.

“참 예쁘다.”

배 실장은 그런 승원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성심성의껏 시나리오를 들여다보는 프로페셔널한 배우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지나가는 소리로 물었다.

“근데 승원 씨, 왜 우리 회사로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

악의 없는 질문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푸른빛의 시나리오 집을 만지작거리던 승원이 입술을 축이다가 어렴풋하게 대답했다. 사념에 쌓인 눈이 빙빙 돌았다.

“그냥… 기분 전환 같은 거…….”

“크으, 기분 전환!”

곽영찬이 크게 거들었다. 배 실장도 중지와 엄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기분 전환 좋다. 확실히 계속 같은 곳에만 있는 것도 좋다고는 못 하죠. 아무래도 환기를 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네. 맞아요.”

“승원 씨 이전 소속사에서 데뷔한 거 맞죠?”

“맞, 아요.”

“그럼 바꿀 때도 됐네. 잘 왔어요.”

다행히 큰 추궁은 하지 않았다. 소속사에 대해서 더 묻기라도 했다간 제가 몸담았던 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금방 들키고 말 것이다. 기본적인 대본 보기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으니, 다른 건 안 봐도 뻔했다.

“그냥 이 회사 와 줘서 고맙다고요, 그 말 하려고 물어봤어요. 오래오래 같이해요, 우리?”

“네네. 좋아요.”

“승원 씨, 실장님이 승원 씨 어지간히 좋아하는 거예요. 나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하는 거 못 봤어.”

“정말요?”

승원이 살며시 웃자 그녀가 무슨 그런 소릴 하냐며 곽 매니저를 나무랐다. 그러면서도 호탕한 웃음은 좀체 꺼질 줄을 몰랐다. 입바른 소리겠거니 싶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곽영찬은 그냥 일 열심히 하는 사옥 직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배지현 실장과도 꽤 가까운 사이 같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곽영찬은 승원의 샌드위치까지 전부 제 배 안으로 꿀꺽한 뒤였다. 다 먹은 샌드위치 껍질만 테이블 위에서 나뒹굴었다.

“승원 씨 이번엔 이거 안 들어가나?”

승원이 한참 들여다보고만 있는 거 같으니 앞에서 기다리던 배 실장이 넌지시 한마디를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저 끝 쪽에 있던 시나리오를 하나 잡아서 승원의 앞으로 쓱 끌어왔다.

“…….”

정 감독의 작품이었다. 보기 싫어서 저쪽으로 밀어 뒀는데 기어이 다시 제 앞으로 찾아왔다.

“항상 정신도 감독님이랑 같이했었잖아요. 그렇지 않나?”

“…네. 그렇긴 한데…….”

머리 아픈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 승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그냥 이번엔 장르를 좀 더 다양하게 해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불러 주시면 좋지만, 너무 저만 출연하면 그것도 그거대로 반감 들지 않을까요.”

“일리가 있네. 승원 씨 말을 너무 잘한다.”

조카 재롱 보듯 반응하는 배 실장에 승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전부 받아 줄 셈으로 보였다. 꼬집어 물어뜯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이 정도면 무난한 듯했다.

“그러면!”

어디 보자……. 배 실장은 흥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시나리오들을 손으로 하나씩 걸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가 ‘여깄다!’ 반가워하며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는 시나리오 하나를 냉큼 들어 올렸다.

“우리 로맨스를 해 보자.”

‘러브 스펠’이라고 쓰여 있는 제목 아래 익숙한 이름이 눈에 보였다. 윤채은 작가. 로맨스 드라마 흥행작을 줄줄이 쏟아 낸 그녀가 이번에도 신작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현재 각종 CF와 드라마, 영화 자리를 빈틈없이 꿰차고 있는 배우들의 인기는 그녀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 승원은 로맨스 쪽은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다고 해도 정치물이나, 아까 힐끔 봤던 로펌물 정도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다짐한 이유도 사실 그런 작품에는 으레 제게 주어진 역할 외에도 원탑 주연을 맡는 배우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주목을 받는 건 딱히 끌리지 않았기에 그냥 옆에서 쏠쏠한 감초 역을 하는 새끼 주연 정도가 저와 딱 맞다고 생각했다.

“어때요? 승원 씨 로맨스 해 본 적 없잖아요.”

“…안 해 본 건 아닌데.”

“으잉? 해 봤다고?”

옆에서 음료수까지 야무지게 빨아 마시던 곽영찬이 ‘학교 시리즈 말하는 거 같은데.’하고 말을 얹었다. 배 실장의 얼굴이 종이 구겨지듯 찌그러졌다.

“설마… 진짜 학교 시리즈 말하는 거예요? 그 교복 입고 나왔던?”

“…네, 그거. 거기서 그래도 키스 신도 있었는데…….”

비중이 큰 역은 아니었지만, 반 안에서 모범생 역할을 맡았었다. 주인공 여자와 잠깐의 일탈을 즐기는 짧은 에피소드에서 키스 신까지 찍었던 승원이었다. 물론 시청자들이 그건 키스가 아니라 뽀뽀라며 정정하라고 난리였지만, 승원은 대중 여론을 주의 깊게 보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런 건 몰랐다.

“그게 무슨 로맨스야. 애들 소꿉장난이지.”

말을 하면서도 가당치도 않다는 듯 배 실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쓰읍, 소리를 낸 그녀가 승원의 손을 꼭 잡아 쥐고 비장한 말투로 일렀다.

“승원 씨 수요가 얼마나 괜찮은데 어떻게 여태 로맨스 하나 안 찍었어요. 이번에 하나 가자. 진한 멜로 하나 해야지. 윤성희 작가잖아. 이건 무조건이야.”

“잘 어울릴까요, 제가.”

“완전 괜찮을 것 같은데?”

옆에 있던 곽영찬이 거들었다. 승원을 향해 엄지를 떡하니 치켜드는 그를 보자 난데없는 용기가 조금 샘솟는 거 같기도 했다. 배 실장의 말처럼 가벼운 하이틴 물에 그쳤지, 이런 본격적인 멜로물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새로운 의미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으음…….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라는 그의 말에 ‘나쁘지 않을 거 같은 게 아니라 다들 좋아 죽을걸요?’ 신나게 떠들어 대는 배 실장과 ‘고럼, 고럼.’ 인정해 주는 곽 매니저 사이에서 승원은 히히, 살며시 웃기만 했다.

“그럼 우리 긍정 검토로 가 봅시다.”

“좋아요.”

흡족하게 웃던 배 실장이 조금 아쉬운 톤으로 정 감독의 시나리오를 다시 집어 왔다.

“이건 정말 안 할 거고요? 정신도 감독님 건데.”

“……네. 안 해요.”

어느 모로 보아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일단 권 대표가 제 옆에 있는 이상은 더더욱.

“그래요, 그럼. 승원 씨 편한 대로 하는 게 제일 좋지.”

시나리오를 모아서 탁탁 정리하는 그녀에게 승원은 제가 선택한 시나리오를 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건네주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승원은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꼈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 거 같다. 꼬르륵 소리가 날 듯해서 승원은 얼른 테이블에 있던 과자 하나를 까먹었다.

“자, 그럼 점심시간 마감하기 전에 식당 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포장지로 배를 접던 곽영찬이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실장과 승원은 동시에 믿을 수 없단 눈으로 그를 한 번, 그의 배를 한 번 바라보았다. 왜요? 태연하게 되묻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배 실장이 승원에게 눈빛을 토스했다.

“가서 식사할래요?”

“저는 좋아요. 슬슬 배고프네요.”

“자자, 갑시다. 승원 씨 우리 회사 구내식당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죠? 얼른 가서 먹어 봐요. 깜짝 놀란다.”

“그런 거치고는 곽영찬이 더 신난 거 같은데.”

“배 안 부르세요?”

“애피타이저라고 치죠, 뭐.”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제 배를 통통 내리치던 그가 목청을 크게 울렸다. 승원은 못 말린다는 듯 웃다가 그들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남은 자리, 커다란 모니터에 여전히 반짝이는 승원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

“수고하셨어요. 들어가세요.”

“예예, 가 볼게요. 승원 씨 파이팅!”

오늘 종일 파이팅 소리를 입에 달고 지내던 곽영찬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승원에게 힘찬 응원을 외치고는 조수석 창문을 닫았다. 검은 밴이 쭉 나아가며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승원은 여태 풀어져 있던 얼굴을 다시 굳혔다. 하아, 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권 대표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없는 게 당연했다. 그 남자는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찾을 꼭두각시 인형이 필요했던 거지, 그 밖의 영역으로는 승원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검은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무슨 용건을 대며 그를 불러내야 할지 머리가 돌지 않아 입술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쉬던 승원은 문득 자신이 이유도 없이 그를 찾고 있단 것을 깨닫고 가늘어지는 눈을 감았다 떴다. 미친 척 입술 한 번 부빈 게 뭐 대수라고, 왜 자꾸 이런 낯선 마음이 심장 한편에 싹트는지 알 수 없었다.

금방 차가워진 뺨을 손으로 짚어 내던 승원은 얼른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음에도 헬스와 연습, 회사에서 있던 회의로 어느덧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이 자신의 집인 22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고도 승원은 딱히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금방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승원은 집에 가까워지는 만큼 피곤이 들뜨는 몸을 주무르며 얼른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알림음을 울리며 22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문 너머 검은 공간에 센서 등이 툭, 켜졌다.

그림자처럼 어두운 인영이 등을 진 채 서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람이었다. 이어서 집주인의 등장을 감지한 검은 등이 서서히 돌아섰다.

“윤승원…….”

키가 큰 승원과는 다르게 170 중반도 넘기지 못한, 그에 비해 옆으로 넓어 단단한 체격을 가진, 뒷모습만으로도 적당한 연륜이 느껴지던. 다시는 보기 싫어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오던.

장 사장이었다.

사고가 한 발짝 늦었다. 서서히 벌어지던 입과 눈동자가 이내 덜덜 떨렸다. 승원은 엘리베이터 끝의 버튼으로 몸을 움직여 다짜고짜 닫힘 버튼을 마구 눌렀다. 탁탁탁탁, 고장 날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며 닫히려는 문틈 사이로 두꺼운 손이 불쑥 침입해 들어왔다.

“…어, 어떻게…….”

목이 콱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 안에 종이 뭉텅이가 잔뜩 들어가기라도 한 듯 승원은 아무런 소리도 뱉지 못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저 악의 어린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려 벽에 손을 짚었다.

칼이라도 꺼낼 줄 알았던 남자는 실연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미련 어린 얼굴로 승원에게 손을 훅 뻗었다.

“이 십새…! 아니지, 아니지……. 승원아… 왜 그랬어. 네가 나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어? 정말?”

장 사장은 미친 사람처럼 도리질을 치다가 승원을 노려봤다. 술 냄새가 훅 끼쳤다. 도수 높은 알코올 냄새는 병원 수술실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로 그 내음이 끔찍이도 고약했다. 눈까지 시린 악취 같은 냄새에 승원의 얼굴이 푸르게 물들었다.

눈썹을 팔자로 흐트러뜨린 장 사장은 쉰 것 같은 목소리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승원을 대뜸 와락 껴안았다.

숨통을 조이듯 승원을 있는 힘껏 껴안은 장 사장이 제 가슴을 들이밀며 승원에게 바싹 밀착했다. 목에 질질 흐르는듯한 번들거리는 입술이 닿았다. 묵직한 다리 사이가 동물 흘레를 붙는 듯이 승원에게 닿아 왔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승원을 샅샅이 훑어내는 모양새가 발정 난 짐승이 따로 없었다.

“이 냄새…… 이 냄새인데…. 윤승원이. 내 윤승원인-.”

“왜 이러세요…!”

“으읏-!”

그를 밀쳐 버린 승원에도 장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코 문이 닫혀 움직임을 멈춘 엘리베이터가 덫처럼 둘을 가뒀다. 쿠당탕, 굉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부서져라 바닥에 구른 장 사장이 다시 승원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치를 떨던 얼굴은 어느새 사지가 마비된 듯 잔뜩 경직된 채였다.

“놔, 놔주세요… 제발 놔주세요…….”

“왜 그랬어, 나한테. 승원아… 나 한 번만 봐줘….”

“이것 좀 놓고…!”

허벅지와 정강이에 더러운 뺨을 치대는 이의 머리를 걷어차고 싶었다. 이 좆같고 구질구질한 인연은 대체 어떻게 끊어낼 수 있는 걸까. 눈물이 핑 돌아, 승원은 눈을 치켜떴다.

“일어나세요. …제발, 일어나시라고요, 사장님!”

“이, 이거 봐. 아직 나 사장님이라고 부르잖아! 그렇지? 그런데 왜 그래…….”

장 사장이 벌떡 일어나 승원의 팔목을 억세게 잡았다.

“나한테 아직 미련 있는 거지? 그 썅놈의 새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지? 너도 원한 거 아니잖아, 그치?”

장 사장은 승원의 팔목을 미친 듯이 쓰다듬더니 이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웠다. 썅놈의 새끼는 권 대표를 말하는 것일까? 그의 생각이 머릿속에 들자 정말로 속에 물이 꽉 차 넘칠 것만 같았다.

구석으로 몰린 승원은 거대하게 느껴지는 거지꼴의 남자를 향해 눈망울을 떨었다. 장 사장은 몇 날 며칠은 굶은 사람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한 소속사의 사장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게, 그리 명품으로 처바른 몸으로 젠체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거무튀튀한 얼굴 밑으로 잡초처럼 난 수염이 보였다.

설마 이게 전부 자신 때문은 아니겠지. 부정하며 고개를 저어도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바깥에서도 들지 않았던 한기와 오한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장 사장은 정신을 못 차리고 나사 빠진 사람처럼 중얼댔다. 흥분 어린 얼굴 밑으로 침이 줄줄 흘렀다. 그는 이윽고 승원의 손을 번쩍 잡아 마구 파헤쳤다. 승원의 살갗을 희롱하는 건조하고 텁텁한 살결이 끊임없이 닥쳤다.

“난 너랑 이렇게 못 헤어지겠다. 너너, 너, 반지는 어디 갔어? 항상 여기 예쁘게 끼고 있었잖아. 반지 어디 갔어, 나랑 씨발, 같이 맞춘 반지는 어디에다가 좆같이 처박아두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승원이 결국 소리쳤다.

믿고 싶지 않았는데, 부정하고 싶었는데. 현실이고, 사실이었다.

버럭 내지른 승원의 목소리에 충격받은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승원은 도리어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장 사장의 눈동자가 맥없이 흔들렸다. 그는 승원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고분고분하고 예쁘기만 하던 장난감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상실감에 빠진 남자의 얼굴에 승원이 입술 끝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루하루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옥 같았던 순간순간을 이 늙은 남자는 그 무엇보다 진심 어린 행복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토악질이 나왔다.

“이거… 놓으세요, 좀……!”

승원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소름이 끼쳤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뱃속에서부터 이름 모를 신뢰가, 알 수 없는 믿음이 발동했다. 누구로부터 파생된 용기일까. 어릿하게나마 떠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승원은 정신을 차리려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는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자신을 쥐어 잡고 흔들던 무서운 남자였고, 승원은 지금 다른 누구도 없이 오직 홀로 이 미치기까지 한 남자를 견뎌야 했다.

“너 씨발 왜 이러는 건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구석으로 몰린 승원의 모서리 양옆으로 어두운 그늘이 졌다. 희번덕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에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진동했다. 순간, 머릿속의 무언가 툭, 끊겼다. 울음이 받쳐 잔뜩 충혈된 눈가가 뻑뻑했다.

“제가 어떤 애인 줄 아셨는데요, 그럼…. 설마… 진짜 사장님 애인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신 겁니까?”

그때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승원의 눈동자가 계기판을 확인한 후 버튼을 보았다. 아무 버튼에도 불이 들어와 있지 않은데 엘리베이터가 혼자 내려갔다.

누군가 밑에서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툭 끊긴 이성을 다시 이어붙여야 했다. 상대를 격하게 자극해서도 안 된다. 숨을 천천히 고르는 승원에게 악독 같은 얼굴이 가까이 덤벼왔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장윤철은 지금 눈이 헤까닥 돌아 엘리베이터가 운행하는지조차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 남자는 승원을 눈앞에 두고 그딴 걸 가늠할 상태가 아니었다.

“윤승원이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너 그 새끼한테 뒤 대 줬어?”

이건 누굴 말하는 걸까. 헷갈리려던 참에 확신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돌아왔다.

“그 썅놈 새끼랑 잤냐고. 그 개씨발 새끼랑 잤냐고!!”

아악!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으로 벽을 쿵쿵 쳐 대는 장윤철은 말 그대로 미친 사람 같았다. 그것도 정신이 단단히 돌아 이대로는 가라앉히기 힘든 수준의 중증으로 보이는.

장윤철은 한참 악을 쓰며 벽을 쳐 대더니 돌연 승원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상당한 무게를 실어 어깨로 떨어진 손이 승원의 몸을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말해. 잤어, 안 잤어?”

몸이 앞뒤로 대책 없이 흔들렸다. 골이 지끈거리고 속이 욱신거렸다. 17층을 지난 엘리베이터가 16을 지나고 곧이어 15층을 지났다.

“왜, 그 새끼가 네 기둥서방이라도 돼? 어!?”

“네.”

순간 노래가 끊기듯 몸이 뚝 멈췄다. 장 사장이 잘못 들었다는 얼굴로 눈을 크게 키웠다. 승원은 침착을 유지하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벌렁이는 기도 사이로 물이 차올랐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맞으면 어떻고, 아니면 어쩌시게요? …맞든 아니든 그게 대체 사장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씨발… 너, 너….”

장윤철의 눈동자가 시시각각 움직임을 바꿨다. 초점이 흐트러져 있던 눈이 새까맣게 물들더니, 이내 검은자가 크기를 키웠다. 눈가에 잡혔던 주름이 사라지고 정처 없이 흔들렸던 동공이 번뜩댔다. 그리고,

“으윽-!”

승원은 장 사장이 날린 주먹을 그대로 얻어맞았다. 혹시 손이 날아올까 싶었는데, 진짜로 뺨을 타고 지나갈 줄은 몰랐다. 호텔에서 맞았던 것의 몇 배에 달하는 충격이었다. 휘청인 몸을 벽을 짚고 가누자 엘리베이터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설움보다도 아가리를 크게 벌린 분노였다.

“아악!”

승원이 번쩍 일어나려 하는 순간, 장 사장이 기를 쓰며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이 떨어져 나갈 듯이 큰 소리를 냈다. 폭발할 듯한 붉은 얼굴이 바짝 붙은 그림자에 가려져 보랏빛처럼 보였다.

“야, 이 씹창아.”

“윽!”

장 사장이 승원의 양 볼을 틀어잡았다. 계기판에선 미친 듯한 시한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힘에 밀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몸이 힘겹게 버둥댔다.

“으, 으윽- 놔….”

장 사장이 눈을 부라리며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딸깍거리는 병뚜껑 소리가 들렸다. 번쩍 뜨인 눈이 상황을 인지하려 쉴 새 없이 이동하는 사이, 붕어처럼 벌어진 입술로 알 수 없는 액체가 새어 들어왔다.

“시, 싫, 흐, 어… 으읍… 으윽…!”

몸을 마구 흔들어 봐야 소용없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덩치인데, 약이라도 한 듯한 미친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이었다. 혓바닥을 넘어온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렀다. 점막을 태울 듯한 도수의 알코올이 하릴없이 넘어갔다. 다 들어가지 못한 남은 액체는 입술 새로 빠져나와 목과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켁-, 켁!”

장 사장이 휘두르듯 내동댕이친 병이 바닥에 닿아 굉음을 내며 굴렀다. 순식간에 어지러워지려는 눈을 부릅떠 확인했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비타 음료였다. 그 안에 술을 담아 가져온 것이었다.

승원이 술을 먹지 못하는 것을 잘 아는 장 사장은 그가 양주 하나 비우지 못해 콜록대는 것을 보며 항상 그 광경을 즐거워하던 사람이었다.

“야! 이제야 좀 볼만하다.”

이번에도 역시였다. 벽을 짚고 우웩, 우웩, 소리를 내는 승원을 보며 장 사장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몸을 비척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식도에 속을 게워내면서도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하아, 승원이 숨을 골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달린 CCTV고 뭐고,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계기판은 멈추지 않고 깜빡이며 아래로 떨어졌다. 승원이 정신없이 몸을 가누는 동안 어느새 4층을 지나 3층, 2층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손톱이 꾹 말려 들어간 주먹 안쪽으로 살이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진동이 팔을 지나 어깨까지 경련시켰다. 맞은 부위에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근래 하도 맞았더니, 이 정도는 버틸 만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목을 타고 넘어온 술 역시 이 정도 기운이면 정말 미친 척 저 괴물을 물리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층에 도달해 있었다.

장윤철은 제 팔을 걷어붙이며 갑자기 벨트를 끌러냈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남자는 당연하지만, 1층에 도착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장윤철의 흥미는 오직 승원 하나였다.

[1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눈을 감았다. 밖에라도 데리고 나가서 억울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머리라도 내려치고 싶은 마음인데. 지금은 그 방법이 아니면 한을 풀 방도가 없을 것 같은데.

승원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스르륵, 부드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검고 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남자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승원은 제 눈을 의심했다.

“…대표님……?”

꿈과 현실이 한참을 뒤섞였다 돌아왔다. 꿈이 아닐까 했지만, 식도 밑으로 떨어져 배를 태우는 화끈거림이 여실했고, 얻어맞은 볼이 얼얼했다.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고 마주한 이는, 놀랍게도 승원이 그토록 눈앞에 그리던 권 대표였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무표정하게 서 있던 권 대표의 얼굴 위로 어두운 빛이 드리워졌다. 그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상황을 스캔하는 눈이 빠르게 엘리베이터 안을 훑었다. 핸드폰을 내린 권 대표가 다시 닫히려는 문을 버튼을 눌러 잡았다.

“전화를 왜 안 받나 했더니.”

마네킹처럼 서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냉랭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남자는 진짜 권 대표였다. 꿈도 아니고, 헛된 망상도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한 승원이 얼어붙어 있던 몸을 냉큼 더듬었다.

코트 주머니 깊숙이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보자, 부재중 전화가 네 통 정도 와 있었다. 알림이 쌓인 것은 불과 10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승원보다 더 놀란 자가 그의 옆에서 입을 쩍 벌린 채 권 대표를 응시하고 있었다. 치밀하게 뜨여 있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장 사장은 권 대표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했다. 술을 먹었음에도 저 조각 같은 얼굴과 서늘한 목소리를 잊을 리 만무했다. 제가 감히 명함도 못 들이밀 자라는 것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들이닥칠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승원에게 신나게 제 열을 퍼붓던 중이었는데. 갑작스런 천적을 맞이해 겁을 먹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이건 또 뭐야.”

반쯤 가늘게 뜬 눈으로 장 사장을 슥 훑은 그가 뇌까렸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낸 그가 제 눈앞의 꼬락서니를 비웃었다.

승원의 붉은 뺨을 캐치한 눈썹이 비틀어 올라갔다. 퉁퉁 불어 내일 즈음이면 파란 멍이 들 수준의 큰 상해였다. 번들거리는 입술 밑으로 침도 뭣도 아닌 무언가가 옷을 다 적실 정도로 흐르고 있었으며, 바닥엔 액체를 쿨럭이며 나뒹구는 병이 하나 보였다.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행동이 멎어 버린 승원을 보며 그가 말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인가.”

계속 눌려 있던 열림 버튼에 지쳐 버린 엘리베이터가 다시 닫히려던 순간, 쿵- 발을 밀어 넣어 문을 다시 개방시킨 권 대표가 음산하게 목을 울렸다.

“나와.”

등골이 오싹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본래 목소리보다 더한 공포를 전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승원은 제 눈앞에 떨어진 동아줄이 대롱대롱 흔들리는 듯한 착각을 보았다.

잡아도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잡자마자 끊어질 썩은 동아줄일 수도 있고, 생각 외로 튼튼한 버팀목일지도 몰랐다. 잡기 전까진 알 수 없었지만, 썩은 줄을 잡고 뚝 떨어질망정, 이 지옥불에 버려지는 것보다야 뭐든 나았다.

불안함에 몸서리치며, 처량하게 떨리는 두 눈이 엘리베이터 밖의 남자를 향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동아줄 가려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막연한 구원을 기다렸던 승원에겐 눈앞의 권 대표가 그저 빛과 같았다.

울컥, 차오른 물기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승원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사각형 밖을 벗어났다. 팔을 허우적대며 권 대표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맞은 얼굴이 너무 아팠고, 입 안으로 들어온 액체가 미친 듯이 쓰렸다. 위로받고 싶었고, 보호받고 싶었다.

“사, 살려 주세요…. 대표님, 저 좀, 흐윽….”

막힌 식도 위로 울렁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물꼬를 튼 울음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내렸다. 승원이 그의 널따란 가슴을 껴안았다. 정교하게 짜인 근육이 느껴지는 판판한 몸 위로 축축하게 젖어 오른 눈과 뺨을 마구 비볐다.

‘그딴 새끼가 장윤철 말고 더 있었다면 진작 나한테 미리 말을 했어야지.’

순간 과거 어느 날 그가 뱉었던 목소리가 승원의 귓전을 날카롭게 때리고 지나갔다. 날 선 옆선으로 무심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전달하던 그의 목소리가 선연히 머리를 울렸다. 지금 그가 나타났으니, 그에게 도움을 바라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 같았다.

그는 승원을 안고도 가만히 있었다. 승원을 밀어내지도, 나무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승원의 등을 한 팔로 감싸기까지 했다.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쿵쿵대는 저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승원이 숨을 죽였다.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승원을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그대로 시선을 들어 장윤철을 쳐다보았다. 장윤철은 그를 보자마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몸을 움찔, 떨었다.

씨팔, 왜 하필 엘리베이터란 말인가. 장윤철은 권 대표에게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거하게 얻어맞은 기억이 있다. 이후로 장윤철은 해당 호텔의 블랙리스트로 이름 박혀 그곳에 더는 출입할 수도 없었다. 첫인상의 트라우마가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

“죄, 죄송합니다…!”

보기 싫게 찌그러져 있던 권 대표의 얼굴이 흥미롭게 뒤바뀐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올리는 작태가 꽤 볼만했다. 승원 역시 권 대표의 품에 묻고 있던 얼굴을 돌려 좆같은 새끼를 지켜보았다.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조금 전까지 저에게 손을 올리고 협박을 지껄이며 악을 쓰던 자가 맞나 싶었다. 아직도 입 안에 알코올의 내음이 이리도 씁쓸한데, 머리가 이렇게 어지럽고 지끈거리는데. 권력의 차이가 이렇게 드러났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쓰게 떠오르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와.”

그가 아까와 같이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훨씬 더 낮고 고압적인 톤이었다. 장윤철은 그 말에도 표류하는 눈동자를 덜덜 떨 뿐, 다른 행동을 더 하지 못했다.

그때 권 대표가 엘리베이터 문을 펑, 걷어찼다. 쿠궁! 크게 흔들린 엘리베이터가 굉음을 냈다.

“엘리베이터 고장 낼 셈입니까.”

“…….”

“나오라고.”

그가 다시 말했다. 승원이 온몸이 경직된 채로 그의 품에 안긴 채 숨을 참았다. 승원을 완벽히 감싸 안은 남자가 삼백안을 번뜩였다.

승원은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건 꿈이 아니다.

“네, 네!”

당장 파리처럼 손을 싹싹 비빌 준비를 하던 장윤철이 몸을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눈높이가 맞는 키도 아니었지만, 장윤철은 어떻게 해서든 권 대표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눈을 여기저기 바쁘게 이동시켰다.

장윤철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발을 뺀 그가 승원을 놓았다.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승원을 권 대표가 자신의 등 뒤로 밀어냈다. 순간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승원이 권 대표의 옷을 당기듯이 붙잡았다.

아까부터 계속 이랬다. 잠깐 공황증세와 같은 어지러움인가 싶었는데, 그게 끝날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었다.

이마를 찡그린 채 권 대표가 음울한 눈빛으로 승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옷깃을 잡은 승원의 손을 보고 있었다. 민망스러움에 시선을 피한 승원이 얼른 저 뒤로 벽을 짚고 섰다.

구두 소리가 이토록 섬뜩할 수 없었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 주위의 소음이 잦아들었고, 아파트 건물 안을 가득 울리는 구두 소리가 공간 속 음파의 전부였다. 승원은 정말 쥐 죽은 듯이 숨을 삼켰다. 순간순간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뚝 멎은 걸음이 장윤철의 코앞에서 끝났다. 장윤철은 승원보다도 작은 키였으니, 권 대표에겐 땅딸보 수준의 높이였다.

장윤철은 승원을 원망할 새도 없이 권 대표의 걸음에 밀려 슬슬 뒤로 뒷걸음질쳤다. 이내 차가운 시멘트가 맞닿은 장윤철의 목에 소름이 돋았다. 권 대표는 다른 이들보다도 월등히 압도적인 체구에 더해, 송연한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를 가진 자였다. 서늘한 낯짝이 비스듬히 틀어졌다.

“돈으로 해결이 안 된 겁니까.”

나지막한 물음이 전해졌다. 맞다. 승원은 다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떻게 하면 저를 괴롭히는 자를 그렇게 단박에 떼어낼 수 있었나, 에 대한 그의 대답은 ‘돈.’

과연 그답게 단순하고 명료한 답이었다.

권 대표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가 느긋하게 이를 갈듯이, 그의 느릿한 행동은 상대에게 미칠 듯한 압박을 더욱 자극했다.

승원은 차마 시야에 눈앞의 두 인물을 함께 담을 용기가 없어, 방황하던 고개를 조아렸다. 연신 콩닥대는 심장이 진정할 줄을 몰랐다. 두려움인지, 적당한 긴장감인지, 그도 아니면 그리 기다리던 그를 향했던 기대감인지, 아니면 모두가 전부 뒤섞여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일지.

두근거리는 몸의 떨림과 동시에 훅 끼쳐오는 어지러움에 땅을 보고 있던 승원이 또다시 몸을 휘청였다. 혹시 아까 입 안을 타고 들어왔던 술기운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몸이 슬그머니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뒷구멍이 살살 아려 오는 게 처음 느껴보는 미약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쓸어내리고 온몸으로 떨어졌다.

승원이 울리는 골을 붙잡고 눈을 깜박이는 동안, 권 대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공간을 울렸다.

“뭘 바라고 찾아온 건데.”

“…그, 그게.”

병신 같은 새끼는 주정 하나 부리지 않고 말만 덜덜 더듬었다.

“돈을 더 바라고 찾아온 겁니까?”

“…….”

“아니면, 저 남자를 바라고 찾아온 건가.”

권 대표가 제 뒤의 승원을 엄지를 들어 가리켰다. 다시 손이 내려오고, 무심한 말이 덧붙었다.

“나는 둘 다 합의 못 보겠는데.”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승원의 눈꺼풀이 부릅떠지던 그때였다.

“윽…! …크, 켁…….”

귀로만 듣고 있던 승원이 이상한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권 대표가 기다란 팔을 들어 장윤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승원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입술을 파묻었다. 눈물이 차오르는 시야에 안 그래도 흐릿한 광경이 뿌옇게 번졌다. 손등으로 눈물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안 돼…….”

목이 졸린 채 눈을 질끈 감은 장윤철의 피부가 거무튀튀했다. 금방이라도 혀를 내놓고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와 다르게 장윤철의 목을 쥐고 있는 권 대표의 손은 한가한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떨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입술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승원은 신속히 주위를 살폈다. 주변엔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CCTV도 저 끝, 사각지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표님, 그만 하세요.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떨어진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제 볼 한쪽을 날려 버린 남자에 대한 속 시원한 응징을 하는 권 대표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 보는 이가 없다면, 이대로 제 부어오른 뺨 한쪽처럼, 제가 날리지 못한 주먹을 그가 대신 갈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방 놓아줄 줄 알았던 권 대표는 좀처럼 장윤철을 놔주지 않았다. 그가 저지르는 응징의 수위는 승원이 생각한 것 상상 이상이었다.

“…케, 케윽, 크, 흐… 으…….”

피죽 한 접시 못 먹은 듯한 거죽으로 캑캑, 창백한 권 대표의 손을 마구 쳐 대던 몸뚱이가 갑작스레 축 처졌다. 동시에 승원의 심장도 차게 식었다. 커튼이 무너지듯 눈을 회까닥 감아 버린 장윤철에 승원은 헙 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 대표님-. 대표님…….”

저도 모르는 사이 주저앉았던 몸을 승원이 벌떡 일으켰다. 승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 이내 새하얗게 들떴다. 눈물에 젖어 붉어져 있던 눈가마저 금방의 상황을 목격한 후엔 하얀 페인트를 뒤집어쓴 듯 시허옇게 갈음됐다. 다급한 부름이 부들대며 부유했다.

“대표님, 지금… 대, 대표님…….”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음성으로 목을 울리던 승원은 어느덧 그를 부르짖었다. 곡소리와도 같은 목소리가 건물 안을 가득 울렸다.

허공으로 뻗은 손 너머로 권 대표의 검은 인영이 흐릿하게 번졌다. 쉬이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파악이 안 됐다. 아까부터 어지럽던 머리는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한 바퀴를 휙 돌고 지나가는 시야에 승원이 고개를 휘저었다. 이쯤 되면 정말 꿈이 아닐까? 한동안 악몽과 가위를 반복하던 머리가 이젠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마저 불가능한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승원이 한참 정신을 차리고 있을 사이, 그의 부름에 기척 한 번 내지 않던 권 대표는 장윤철의 목에서 손을 떼고는 무겁게 처지는 몸을 한 팔로 들었다. 거적때기 들듯이 팔에 기대어 놓은 그가 송연한 옆선을 드러냈다.

“얼굴은.”

“…네?”

한동안 벽 너머의 가상처럼만 보이던 그가 말했다. 승원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여태 봐 왔던 권 대표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윤승원 씨 얼굴 지금 볼만한데.”

“…….”

“괜찮습니까?”

“…….”

“안 괜찮아 보이네.”

대답 없는 승원에 권 대표는 혼자 결론지었다. 멍이 질 뺨을 대놓고 보이면 어쩐지 더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승원은 뒤늦게 맞은 부위 언저리를 꼭 쥐었다.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괜찮습, 니다….”

아픈 뺨을 붙잡고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는 승원을 바라보던 그가 짐을 이듯이 장윤철을 고쳐잡았다. 서늘하게 바닥을 짓이긴 걸음이 가까워졌다. 승원은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뒷짐을 지었다. 권 대표가 두 개가 되었다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두 개가 되었다가 하나로 돌아왔다.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했다. 잘난 턱선이 뿌옇게 지워졌다가 나타났다.

“몇 층입니까.”

“…네…?”

승원의 대답이 계속 한 발짝씩 느렸다. 승원은 얼른 정신을 챙기고 말했다.

“22… 22층, 입니다….”

장윤철을 들쳐메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권 대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였다. 대답 없이 승원을 바라보던, 아니 정확히는 부어오른 그의 뺨을 들여다보던 권 대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승원과 함께 방금의 미친 광경을 목격했던 엘리베이터가 고요히 문을 열었다. 권 대표가 승원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흣!”

그가 승원의 턱주가리를 잡았다. 턱을 중심축 삼아 휙휙 성의 없이 돌려대더니, 강요에 가까운 물음을 뱉었다.

“몇 호.”

“…….”

“22층 몇 호냐고 물었습니다.”

“…1호….”

“올라가 있으세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승원은 눈썹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왜 이렇게 어지러운지 몰랐다. 진짜 꿈일까. 꿈이라면 언제 깨는 걸까. 아니면 정말 아까 먹었던 술에 이상한 것이라도 들어 있던 걸까. 너무 썼기에 무슨 맛인지조차 기억에서 휘발되었다.

뭐가 됐든 승원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의 머리로는 제 앞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승원은 팔을 뻗었다. 잠시 허공 위에서 떨리던 손을 허우적대던 승원이 손바닥을 펼쳐 권 대표의 뺨에 맞대었다. 차가운 뺨이 손에 닿았다. 불에 덴 듯 놀란 승원이 홀로 팔을 팔딱였다.

“윤승원 씨 지금, 반쯤 미친 사람 같은데.”

권 대표가 공중에서 허둥대는 손을 내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냥 떠나려는 듯 보이던 그는 짧은 한숨과 함께 승원에게 다시 물었다.

“윤승원 씨.”

“…….”

“이 새끼 패고 싶습니까?”

그의 눈동자가 잠시 제 어깨에 이고 있는 장 사장을 가리켰다가 다시 승원을 향했다. 승원은 작게 끄덕이기 시작한 고개를 세차게 움직였다.

“…패, 패고 싶습니다.”

방금까지 말을 더듬던 승원이 이번에는 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승원의 풀어진 눈이 잠시 권 대표의 어깨 위 늘어진 인간을 바라보았다. 감정이 날뛰었다.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시체 같은 몸뚱어리를 보고 있으니 눈물샘이 울컥, 터졌다.

“내가 지금 이 개새끼를 엘리베이터 안에다가 던져 줄 테니, 마음껏 패겠습니까?”

속살거리듯이, 그가 승원에게 물었다. 승원은 입술을 벌린 채 그의 어깨 위 장윤철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권 대표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윙윙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가 다시 강조했다.

“칼을 꽂든, 주먹으로 내리치든, 마음대로 하게 해 주겠습니다.”

유혹과도 같은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몇 번이고 흔들렸지만, 결과적으로 결론이 바뀌진 못했다.

패고 싶을 만큼 저 인간이 죽도록 싫고 역겨웠던 거지, 승원은 그것을 직접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위인이 못 되었다. 답답하고 버거워도 어쩔 수 없었다. 제 그릇의 크기가 딱 이 정도였다.

승원은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거 못 합니다…….”

그러면서 승원은 추하게 울기 시작했다.

“주, 죽었으면 어떡합니까? 대표님, 저 사람이 죽었으면….”

얼굴이 검게 변하다가 이내 숨이 멎어 버린 몰골을 목격한 승원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죽음이었다. 내뺄 수 있는 구석이 아무 데도 없었다. 권 대표가 정확히 장 사장의 목을 손으로 잡아 비틀어 조여 죽여 버렸다. 희뿌옇던 정신으로도 승원은 그것을 또렷이 목격했다.

이렇게 마음이 조급해지는데, 권 대표는 인상 하나 바꾸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지루하게 뜨인 눈이 멍하니 울기 바쁜 승원을 바라보았다. 태평하게 사람 하나를 업은 그였지만, 그래도 상당한 체중에 달하는 성인 남자를 이고 있던 권 대표도 슬슬 지치는 듯 보였다.

“뚝.”

그가 한마디 했다. 승원은 흐느끼던 울음을 뚝 멈추고 참아 냈다. 그래봤자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뺨 밑으로 줄줄 흘렀다.

“그래서 내가 지금 묻는 거 아닙니까.”

“…….”

“내가 이미 죽여 버렸으니까, 윤승원 씨가 이 새끼한테 칼빵을 놓든 난도질을 하든 상관없다고.”

“…네?”

승원의 입술이 스르륵 벌어져 뻐끔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짓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원색적이고 노골적으로 쏟아내는 권 대표의 필터 없는 유혹에 승원은 이미 제가 난도질을 당한 사람처럼 입술을 부들거렸다.

“내가 이미 죽였으니, 윤승원 씨가 손해 볼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

“죄는 죽인 내가 뒤집어쓰면 되는데.”

잠시 뜨여 있던 적막 가운데 승원이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었다. 권 대표가 꺼낸 말은 이해 가능한 구역이 한 부분도 없었다. 그가 어째서 저의 죄를 몽땅 뒤집어쓴단 말인가. 손해를 만들어 덮어도 모자랄 판에, 그가 왜 저를 위해. 자신을 두고 장난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짐짝처럼 들려 있는 장 사장은 미동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만져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냥 보아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섬뜩한 현실을 맞닥뜨린 승원이 다시 이를 딱딱 부딪쳤다.

승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권 대표가 이내 질린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곤 뒤로 물러났다. ‘재미도 없고.’ 정확하진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올라가 있으세요.”

“…….”

“두 번 말하기 싫습니다. 대답하세요.”

“…….”

“대답.”

“네….”

그가 발을 빼자 문이 덜커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양쪽에서 사이를 서서히 좁히는 알루미늄 문이 권 대표를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곧이어 계기판이 빨갛게 숫자를 드러내며 위로 상승했다. 우우웅, 아까는 들리지 않았던 기계음이 선명하게 귀에 와닿았다.

승원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벽을 짚은 손이 주욱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기로 흥건한 손을 바지춤에 벅벅 비비던 승원이 끙 소리를 내며 앓았다. 뻐끔대며 깜박이던 눈으로 주위를 살피자 아까는 오른편에 있던 병이 이번엔 왼편에 보였다. 그 사이에 저쪽으로 굴러간 걸까. 진하고 고약한 냄새에 승원은 우욱, 헛구역질했다.

살기 어리던 눈빛이 전두엽을 스쳤다. 그가 장윤철을 짐짝처럼 이고 있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길고 유려한 손끝으로 힘쓰는 기색 한 번 내지 않고 장윤철을 짐짝으로 만들어 버리던 그 모습이.

그가 장 사장을 죽였다.

[22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칸 안을 휘도는 딱딱하고 불투명한 여자 음성에 승원이 헥, 숨을 들이켰다.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이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슴 언저리를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비틀대는 몸을 일으킨 승원이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떼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현관 앞이 고요했다. 센서 등이 움직임을 알아채고 툭 하얀 불을 켰다.

몸 안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이상 반응의 신호를 느낀 승원이 급한 손으로 현관 도어락을 눌렀다. 장 사장의 지문으로 뒤덮인 흔적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한 번, 두 번, 아무리 눌러도 도어락이 풀리지 않았다. 2201호. 정확히 쓰여 있는 저의 집 현관 호수이건만, 왜 자꾸 틀렸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흐으, 으으윽…….”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줄줄 물이 새는 눈 때문에 시야가 불선명했다. 머리는 난해할 정도로 정돈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몸은 점차 뜨겁게 달아올라 어느새 홧홧하게 뱃속을 꿈틀댔다.

하아, 하아, 숨이 벅찼다. 가슴이 델 듯 뜨거웠다. 피가 솟구치는 듯한 화끈거림이 온몸을 감싸 마침내 아랫부위를 묵직하게 을러 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승원은 생각했다. 얼른 이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며 눈을 감고 최면을 걸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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