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완벽의 불확실성
다시 눈을 뜨고 나니 주말이었다. 승원은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병원 문을 열기 무섭게 예약을 마치고 가장 처음으로 진료를 받았다. 의사에게 전부 이야기했다. 속이 메스껍고, 계속 구토 증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심하면 두통과 어지럼증까지 호소한다고.
스트레스가 상당한 상태 아니냐는 의사의 물음에 승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권 대표의 말대로 약의 문제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약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바꾸는 게 좋지 않겠냐고 먼저 제안했다. 의사는 손으로 휙휙 돌리던 펜을 잡고 메모를 했다.
처방전을 받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던 승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간호사의 눈에 띄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미 이름도, 얼굴도 다 알아 버린 이상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를 피할 수도 없었다.
“저기.”
“…네. 처방전 나왔나요?”
처방전이 나왔다면 진작 데스크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맞을 텐데.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애써 무시한 채 승원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른 아침에 들른 병원 안엔 승원을 제외하고 다른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승원을 보고 손을 한 번 말았다가 폈다. 어깨를 들썩이는 여자의 광대가 서서히 치켜 올라갔다.
“저 엄청 팬이거든요.”
여자가 기어이 승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한참 다닌 병원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도 별로 되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드러냈음에도 여자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라마도 너무 잘 봤고… 지, 진짜 팬이라서 영상 같은 것들도 자주 챙겨 봐요. 이번에 상 타신 것도 정말 축하드려요.”
생각보다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여자는 더듬더듬 대며 이야기했다. 승원은 잠시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발그레하게 올라온 뺨을 한 채 눈을 반짝이며 승원을 바라보는 얼굴이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울대를 꿀렁인 여자가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저, 저 어디 가서 말은 절대 안 할게요. 그냥 너무 팬이고 반가운데, 그래서 말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집에 승원 님이 찍은 화보도 붙어 있고. 팬 카페도 가입되어 있어요. 저 진짜 팬이거든요.”
팬이라는 말을 벌써 두 번이나 한 여자는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지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혼자 와다다 뱉어 내는 여자의 얼굴을 승원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는 정말 승원의 팬인 것 같았다. 다른 의도를 전부 다 빼고 온전히 승원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은 진정한 팬 그 자체.
“혹시 악수라도 할 수 있으면…….”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아.”
“아니, 부담되시면 안 해 주셔도 돼요.”
혼자 설레발을 쳤다고 생각했는지 여자가 다시 손을 뒤로 빼 버리려던 참이었다.
“김 간호사! 뭐 해요!”
방 한편에서 나온 여자는 승원이 자주 보던 익숙한 얼굴, 이곳에 항상 있던 윤 간호사였다. 승원은 버럭 소리를 지른 윤 간호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다가 다시 눈앞에 여자를 보았다. 가슴 한쪽에 붙어 있는 사원증엔 ‘김지은’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공사 구분 똑바로 못하고! 환자분 죄송합니다. 뭐 해요? 빨리 환자분께 사과해요.”
짓이기듯이 말한 여자가 승원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일반 환자도 아니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사람이 없는 이른 아침에 들른 승원에게 무례를 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옆에 서 있던 김지은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아까보다 훨씬 붉어진 얼굴로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 싫지도 않았고 거절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승원은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돌려 보고자 자리를 고쳐 앉고 손을 저었다.
“방해 안 됐어요. 괜찮습니다. 지은 씨, 저랑 악수 한 번 해요.”
승원의 말에 둘은 함께 눈을 키웠다.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승원이 제가 건넨 손을 가볍게 흔들자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승원의 손을 맞잡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나머지 손으로 입술 위를 묻었다.
“하이고, 참…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윤 간호사에 승원은 입술을 끌어 올려 웃으며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봐 주시고. 제가 더 감사해서 그래요. 아, 사인해 드릴게요.”
“어, 정말요?!”
“펜이…….”
“페, 펜 저기 있어요. 저기!”
“김 선생!”
“…어어,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
순간 방방 뛰던 몸을 추스르고 멋쩍어하며 웃는 그녀에게 승원도 미소를 보였다. 데스크에서 펜을 빌려 A4용지에 사인을 해 주었다. 따로 묻지 않고 ‘김지은 님께’라고 써 주자 가라앉아 가던 뺨 위가 다시 붉게 번졌다.
“진짜 감사해요. 진짜로… 진짜 어떡해. 대박이야…….”
“지은 씨도 참…….”
주절거리는 김 간호사를 보던 윤 간호사도 결국 너털웃음을 보였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살살 젓고는 승원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저 진짜, 여기서 뵐 줄 몰랐어서.”
“아니에요. 대신 다음엔 모른 척해 주세요.”
승원이 다시 손을 건네자 덥석 잡은 여자가 알았다며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어쩐지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돈을 보고 뛰어든 일에 운이 좋게 얻어걸린 케이스여서 그런 걸까. 말솜씨가 화려한 것도 아니고, 예능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저를 보며 팬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아도 승원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원해 보고 좋아해 본 것도 이젠 너무 오래되어 바랜 감정들이어서일까,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무조건적으로만 보이는 그 막연한 호감과 열정이 분명한 힘이 된다는 것이다. 저 자신을 가치 있게 생각해 본 적도, 진심으로 인정해 본 적도 없는 승원에겐 대신 저를 사랑하고 응원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그들을 볼 때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눈을 반짝이고 주먹을 꼭 쥘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는 감정의 변화가 부러웠다. 느껴 본 지도 너무 오래되어서, 아니 어쩌면 아예 경험이 없을지도 모르는 승원에게는 마냥 애틋하고 소중해 보이는 현상이었다.
승원의 약이 금방 나왔다. 저번과 다른 구성으로 되어 있는 약들은 처음 보는 것도 있었고, 이미 복용했던 것들도 있었다. 약 봉투를 받아 든 채 설명을 들은 후 승원은 카운터에 인사를 남기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병원과 다르게 춥디추운 바깥은 바람이 서늘하게 머리 위를 스쳤다. 어느덧 권 대표와 함께 식장에 가기까지 6시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
“잘 잤습니까.”
차에 올라탄 승원에게 권 대표가 가장 먼저 물은 말이었다. 벨트를 끌어오던 승원은 ‘네’라고 작게 대답했다. 옆얼굴로 쏟아지는 질긴 시선이 느껴졌다.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권 대표가 승원을 위아래로 스캔하고 있었다.
“옷은 잘 맞아요?”
“네. 다 잘 맞습니다.”
“다행입니다.”
그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배우라 그런지 옷발은 잘 받나 봅니다.”
운전대를 잡은 권 대표의 콧날이 오늘따라 더 돋보이는 느낌이었다. 위로 가지런히 넘겨 고정한 머리가 깔끔했고, 짙은 눈썹은 표정이 없는 얼굴 위에서도 단단한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아까 제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보니 안쪽에 남색 슈트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승원은 시선을 떨궈 제 차림새를 다시 확인했다. 옷이 값비싸고 좋은 것이라 그런지, 처음 꿰어 입고 나오는 것임에도 편하고 제 것 같았다. 따뜻하게 감싸는 안감 소재 역시 보드라운 것이 화보 촬영 따위를 하며 휙휙 입었다 벗은 옷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뭐라도 먹었어요?”
“아, 그게.”
“그렇게 굶으면 활동은 어떻게 한답니까.”
끼니를 걸렀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머뭇거리는 승원의 의도를 단박에 캐치한 것인지 그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권 대표는 생긴 것답지 않게 끼니에 대해서 오지랖을 넓히곤 했다. 전에 만날 때도 몇 번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왜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는지 생각하기 전에 끼니를 좀 챙기세요.”
“…….”
“그렇게 비실거려서야 여자들이 퍽이나 좋아하겠습니다.”
“…좋아합니다. 다들.”
여기 오기 전에도 자신의 팬이라던 여자에게 사인을 하고 왔는데.
“그리고 그렇게 부실하지 않아요.”
전방을 보고 있던 승원은 말을 뱉자마자 창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의 말에 권 대표가 입술을 비틀며 비소했다.
“어련하시겠습니다.”
그는 항상 말을 할 때면, 직설적인 듯싶으면서도 한 번 돌아 남을 비꼬는 어투를 갖고 있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권 대표도 그런 부류인 듯싶었다.
“내가 누굴 데려갈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입니다.”
갑작스레 본론으로 넘어온 대화 주제에 승원은 틀고 있던 고개를 권 대표에게로 돌렸다. 무심하게 지껄인 남자가 승원의 쪽을 살며시 바라보았다.
“긴장하지 말고 내 옆에만 붙어 있어요.”
“…네.”
“누가 뭘 물어도 그냥 가만히 있어요. 적당히 웃는 것 정도만 하면 됩니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승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린 권 대표가 무심히 물었다.
“윤승원 씨는 남자 좋아합니까?”
잠시 침묵이 도는 듯하더니 단도직입적인 물음이 직진해 왔다. 잠깐 서린 당황을 지운 승원이 눈을 깜박였다.
“…모르겠습니다. 경험이 많지 않아서.”
“아니라고는 안 하네요.”
승원이 잠자코 있자, 그가 질문을 다시 던졌다.
“여자는 사귀어 봤습니까?”
“네. 한 번…….”
“그 여자랑은 어디까지 해 봤습니까.”
“…네?”
평온하게 물어 오는 상대에 승원은 먹고 싶은 점심이라도 이야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뻔했다. 잘못 들었냐는 눈으로 권 대표를 바라본 승원이었지만, 그는 제가 던진 질문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눈빛으로 대답을 종용할 뿐이었다. 왜 말하지 않느냐는 듯 선을 타고 올라간 눈썹이 보였다.
“말하기 싫어요?”
“…그런 걸 왜 얘기해야 합니까, 제가.”
“궁금해서요.”
이번에도 역시 방금과 똑같은 화법이었다. 태평하기 그지없는 말투와 목소리. 미동 없는 눈동자로 승원을 훑은 권 대표가 커다란 차를 피해 핸들을 돌리곤 뻥 뚫린 다리 위를 빠르게 주행했다.
“…오래 사귀지 않아서. 그냥 몇 번 만나다가 헤어졌습니다.”
승원의 말에 앞을 보고 있던 권 대표가 눈길을 힐끗 넘겼다.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고, 그가 다시 앞을 보았다.
“몇 번이라면, 열 번도 안 만났다는 소리입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럼 손은 잡았습니까?”
승원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 왜 이런 질문을.
“……네.”
“키스는?”
“…….”
“그 정도 만난 사이여도 키스는 하는지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보통 이런 질문이 오가는 게 일반적인 건가. 다른 누군가와 연애와 만남에 대해서 깊게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게 보편적인 물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을 환기한 승원이 허벅지에 있던 주먹을 불끈 쥐었다.
“했습니다.”
권 대표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음에 터져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럼 섹스는.”
“…….”
“섹스는 했습니까.”
“…대표님.”
“왜요.”
여상스러운 대답에 승원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불편한 목적으로, 불편한 상대와 불편한 동행을 하는 지금, 가는 길 만큼은 조금 편하게 가고 싶었다.
일부러 저러는 걸까. 자신을 떠보기라도 하는 걸까. 성 접대니, 이상한 요구니 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 저를 꾀기 위한 속셈이었나 싶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답 없습니다. 그냥 네, 아니요. 정도면 끝날 물음 아닙니까?”
“…….”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어려운 게 아니라.”
차가 신호 앞에 멈췄다. 부드럽게 정차한 차량은 미동이 없었다.
“…무례합니다.”
권 대표가 승원을 주시했다. 혹여 화를 낼지라도 할 말은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싶어 넌지시 건넨 말이었다. 무례를 범하는 상대를 꼬집는 승원은 정작 자신이 그 말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차 안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흐르는 공기에 맺혀 있던 정적을 권 대표가 깨뜨렸다.
“내가 실수했습니까?”
고저 없는 물음이었다.
“다른 뜻 없고, 진짜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이런 걸 물어볼 만한 상대가 마땅치 않아서.”
“…….”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깔끔한 사과에 승원은 도리어 입술을 벌렸다. 사과를 할 만한 일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진작에 묻지 않는 게 올바른 도리이지 않은가. 누가 봐도 무례한 질문을 던져 놓고는.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진 사람치고 금방 물러나는 것 역시 승원으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표님은요.”
이번엔 승원이 먼저 물었다.
“대표님은 몇 번 만나 보셨습니까.”
불똥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저를 희롱하려는 듯한 남자가 괘씸해 승원은 홧김에 던졌다. 마음과는 다르게 비교적 침착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를 움직이는 권 대표에게 승원은 질문을 추가했다.
“여자였습니까, …남자였습니까.”
“없습니다.”
툭 잘려 떨어진 대답이 돌아왔다. 멀거니 권 대표를 바라보는 승원에게 그가 덧붙였다.
“없다고. 한 번도.”
한 번도 없다고? 승원이 눈을 깜박였다. 그런 승원을 휙 바라본 권 대표가 무료한 어투로 목을 울렸다.
“못 믿겠다는 눈으로 봐 주는 건 윤승원 씨가 보기에 내가 퍽 괜찮은 사람 같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됩니까?”
“…어떻게.”
개나 소나 하는 게 연애라고 들었다. 실패와 우여곡절이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만 먹으면 해 볼 수 있는 게 연애였다. 그냥 길을 둘러보아 평범하고 시원찮아 보이는 인간들도 다 연애를 하고 있었더랬다. 하다못해 승원과 같이 문외한인 인간도 해 본 게 연애인데.
빼놓을 데가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집안 좋고 능력 좋다면 비주얼쯤은 못 해도 그만이라지만, 권 대표는 그것도 아니었다.
연예인 뺨치게 뛰어난 외모와 훤칠한 키에, 배우인 승원조차 저런 얼굴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지나가듯 생각했었다. 보통 관심이 없더라도 저 정도면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게 불가능과도 마찬가지일 듯한데.
“뭘 그렇게 봅니까.”
권 대표가 한마디 했다. 승원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자신이 권 대표의 옆선을 지나치게 들여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자라도 찾을 셈인가.”
승원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인간에겐 하자가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완벽히 빚어져 태어난 인간 같았다. 얼굴도, 배경도, 능력도, 하다못해 목소리까지도.
“뭘 좋아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귓전에 닿은 평온한 목소리에 승원은 무심결에 그를 보고 있던 눈에 힘을 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한 번씩은 다 해 본다는 그 흔한 짝사랑도 안 해 봤고. 남들이 느끼는 성적 흥분과 로맨틱한 사랑을 나는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전부 마찬가지고.”
순간 방지턱을 넘은 차량이 약하게 덜컹댔다. 승원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무성애자 같은 겁니까?”
어렵사리 던진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남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모르겠습니다, 그거까진.”
“…….”
“이 나이 먹도록 무언가에 마음이 동한 적 없는 것도 하자라면 하자겠지.”
대수롭지 않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건 그가 이미 그러한 무감각에 익숙해졌기 때문인 듯싶었다. 실제로 사랑에 대한 감각이 둔한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머나먼 이야기고 희박한 확률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승원 역시 여태껏 누군가를 성심성의 다해 사랑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느껴 본 적은 있었다.
아주아주 어렸을 때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키우다 죽었을 때도 승원은 엉엉 울며 슬퍼했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좋아하던 선배에게 작은 쪽지를 써서 사물함에 남기고 간 적도 있었다.
모두가 그렇듯, 사춘기에 접어들어 성에 눈을 뜨며 처음으로 아랫도리가 불끈거리는 경험을 해 본 적도 있었고, 이후로 감흥이 돌지 않아 쭉 공백이었던 시절에도 잠시 만났던 여자가 있었다.
동료 배우였고, 그녀 역시 무명이었다. 승원이 자신에게 무심하게 군다는 이유로 그녀는 승원을 먼저 찼지만, 승원이 빵 뜨고 난 이후로는 몇 번 연락을 건네며 질척이기도 했었다.
과정이 어땠고, 이루어 낸 결과와 파생된 감정이 어찌 됐든 그게 전부 다 사랑이고 성애였을 것이다. 보통은 사랑에 실패하거나 제가 마음을 크게 쓰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성과 사랑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제 짝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할 테니.
“…그럼 왜 저를.”
“…….”
“왜 저에게 이런 관계를 하자고 제안하신 건가요.”
사랑을 느껴 본 적도 없다는 이가 승원에게 애인 행세를 해 달라고 한 것은 조금 모순적이었다.
그는 잠시 음, 하고 목을 작게 울렸다.
“혼자 있고 싶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
“윤승원 씨가 내 옆을 차지하고 있는 척해 준다면 적어도 누군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진 않을 거 아닙니까.”
“…….”
“결혼하자며 덤벼드는 상대는 차고 넘치는데, 내 옆에 남자라도 끼워 둔다면. 그땐 다들 겁먹고 도망갈 일밖에 없겠지.”
그 말을 뱉으면서 권 대표는 굉장히 성가신 것을 이야기하듯 미간에 살며시 주름을 만들었다. 말만으로도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가계도를 보면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자는 삼 남매 중에 권 대표가 유일했다. 저런 집안에서 여태 가만히 있던 권 대표를 그냥 놔둘 리도 없었다.
“나 때문에 윤승원 씨가 사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필요할 때만 같이 있으면 되는 관계이고, 나도 그 이상으로는 윤승원 씨에게 관심을 둘 생각이 없으니.”
권 대표가 곧장 되물었다.
“윤승원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대화를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권 대표는 다시 고개를 틀고 앞을 바라보았다. 승원은 그대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쌩쌩 지나치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
그리스식 건물을 연상케 하는 으리으리한 호텔 입구 앞에는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채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두운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언론사 마크가 붙어 있는 승합차들이 한쪽에 즐비해 있었고, 그 앞으로 패딩을 마구 껴입은 기자들이 바글바글한 머릿수로 누구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카메라를 든 채 대기 중이었다.
그들을 지나쳐 건물 옆쪽을 빙 돈 차량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본래 꽉 차 있어야 할 주차장은 거의 텅텅 비어 차가 많지 않았다. 고가의 외제 차와 벤만 띄엄띄엄 스무 대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수로 주차되어 있었다.
“내려요.”
그의 말에 승원은 숨을 후 쉬었다. 벨트를 푸는 승원에게 차에서 내리려던 권 대표가 툭 말을 뱉었다.
“떨리긴 하나 봅니다.”
“…….”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철석같이 믿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권 대표의 목소리가 너무 단단하고 확신에 차 있었기에 승원은 알 수 없는 안심을 느끼며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침묵이 유지되었다. 한참을 올라가던 때, 권 대표는 잠시 승원 쪽으로 시선을 틀어 그의 겉치레를 확인했다. 승원은 얌전히 그에게 제 차림새를 확인받았다. 그리고 불쑥 손이 넘어왔다.
“…….”
머리 한 올이 보기 싫게 이마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검지 끝을 뾰족하게 들어, 거슬리는 것을 치워 내듯 권 대표가 승원의 머리칼을 넘겼다. 간지러운 것이 지나가듯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지나간 자리가 묘했다.
승원을 다시 확인한 권 대표가 아예 몸을 틀어 승원의 어깨를 잡고는 제 쪽으로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한 채 승원의 옷깃을 정리했다.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이 목과 어깨, 코트 위의 깃을 매만졌다. 승원은 번호가 올라가는 계기판만 바라보며 그와 시선이 닿지 않도록 주의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밖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넓은 로비가 펼쳐져 있을 줄 알았는데, 대리석 바닥으로 이루어진 크지 않은 공간이 있었고, 복도로 이어진 방들이 보였다.
카운터가 있는 곳에는 인이어를 귀에 꽂은 직원이 권 대표를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머리를 들던 직원이 승원을 보고 잠시 머뭇거린 것 같기도 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친절하게 안내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권 대표가 먼저 앞장섰다. 보폭이 넓은 권 대표의 뒤를 따르던 승원은 서둘러 그와 발을 맞췄다.
“식은 한 시간 후에 시작할 거고.”
“네.”
“안에 들어가면 가족이 있을 겁니다. 입 다물고 있어요.”
“……네?”
승원이 가던 걸음을 멈췄다. 조금 앞서던 권 대표가 뒤를 돌았다. 비틀어진 표정을 한 채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왜. 그가 물었다.
“지금 갑자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권 대표는 승원에게 입을 뻥긋하지 않으면 된다고 일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매뉴얼일 뿐이었다. 정신없는 결혼식에 참가하는 줄 알았지, 이렇게 사적인 공간에 함께 들어설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승원은 당황이 서린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머뭇댔다.
“지금까지 말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타령입니까.”
“……그게 아니라. 가서 무슨 말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팔목이 잡혔다. 꼼질대는 승원이 답답했는지, 권 대표는 승원의 팔목을 그러쥔 채 앞으로 나아갔다. 저벅저벅, 구둣발이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려 댔다. 스텝이 맞지 않아 권 대표의 걸음에 비해 승원의 발소리는 분주했다.
금방 문 앞에 도달했다. 어두운 목재 소재의 문 위로는 ‘VIP’라고 완연하게 박힌 문구가 있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린 권 대표가 기다리지 않고 곧장 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손 좀 빌리겠습니다.”
그가 승원의 손목을 놓고 대신 손을 덥석 잡았다. 꽉 잡혀 있었던 탓에 피가 통하지 않는 손목 밑으로는 붉은 열이 올라와 있었다. 뜨거운 승원의 손만큼 홧홧한 온기가 느껴지는 단단한 살결이 맞부딪혔다. 승원의 손가락 사이로 권 대표의 손가락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깍지를 끼운 채 그가 먼저 방 안에 몸을 들였다.
갑자기 심장이 파도치듯 쿵쾅댔다. 승원은 발을 옮기면서 틈 하나 없이 꽉 쥔 깍지를 내려다보았다. 굳게 잠기기라도 한 듯 조여진 두 손 사이에 열기가 가득했다.
안쪽은 호텔 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러그가 깔린 바닥이 눅눅했고, 짧은 복도를 지나자마자 드넓게 내비친 방 안이 훤했다. 벽걸이 TV와 기다란 소파 뒤쪽으로 아치형으로 오픈되어 있는 침실이 보였다. 비스듬히 비친 안쪽은 하얀 시트가 덮인 침대와 곳곳에 고가의 장식품들이 걸려 있는 형태였다.
“뭐 하다 이제야 와?”
예상과 달리,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승원은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최대한 권 대표와 몸을 겹쳐 붙었다. 그의 뒤쪽에 꼭 숨은 채 고개를 살짝 내밀어 확인해 보니 넓은 테이블 한편에 앉아 비스킷을 씹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긴 웨이브 머리에 깔끔한 남색의 원피스를 갖춰 입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반 토막을 낸 비스킷을 내려놓았다.
여자가 대뜸 물었다.
“누구야?”
권 대표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공간을 가득 덮은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입술을 씹어 낸 그가 짜증이 피어오른 얼굴로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어머니는.”
“글쎄, 옆에 누구냐니까.”
팔짱을 낀 여자는 둘에게 다가오다 이내 경악을 하고 말았다. 여자의 시선이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에 향해 있었다. 권 대표의 악력에 더 버티지 못하고 숨던 몸을 옆으로 내놓은 승원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야, 권차현.”
승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여자는 그의 성별만으로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설마.’라고 중얼거린 그녀가 입을 쩌억 벌렸다. 곧이어 미친 사람처럼 하하, 웃기 시작했다.
“기어이 미쳤구나, 네가?”
여자가 크게 비소했다. 팔짱을 끼운 손을 풀고 허리춤에 올렸다. 와, 골 때리네, 이거. 머리를 뒤로 넘기곤 권 대표와 승원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힐끔 확인한 여자의 눈이 조금 풀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지금 결혼하기 싫다고 시위 부리니?”
눈을 크게 부라린 여자가 권 대표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키가 큰 여자였지만, 월등히 큰 권 대표의 신체 사이즈는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여자를 향해 눈을 그대로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시위 뿐일까.”
“미친 새끼.”
상종도 하기 싫단 눈으로 욕을 씹어 낸 여자는 권차현의 친누나, 권희연이었다.
가계도 정도는 미리 파악하고 왔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둘은 생김새가 정말 비슷해 완전한 초면이었어도 그녀가 권 대표의 누나라는 것쯤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을 듯했다. 살짝 찢어진 눈매와 날카로운 인상, 전체적인 분위기가 꼭 닮아 있었다.
권희연은 비스킷이 있던 자리 위 와인을 들어 잔에 담았다. 그러면서도 제 동생과 그 옆의 승원의 꼴이 웃기지도 않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권 대표가 나지막이 쏘아붙였다.
“여기까지 와서 술을 마시고. 최악이네.”
“사내새끼 데려온 너보다 더할까.”
반을 넘게 채운 잔을 그대로 원 샷 한 권희연이 권 대표를 보며 뇌까렸다.
“형제 결혼식에 지 애인이랍시고 외간 남자 데려온 남동생을 보고 술이 안 넘어가면 그게 비정상이지.”
“어머니 어딨어.”
“그 꼴로 갈 거면 엄마고 아빠고 상종할 생각도 하지 마.”
와인은 이미 반이 넘게 비워진 상태였다. 테이블에 두 손을 짚은 채로 권 대표를 유심히 바라보던 권희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곤 다시 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승원은 어찌할 줄을 몰라 시선만 회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입을 다물라는 명령만 있었기에, 다른 대처 방법을 알지 못한 탓이었다.
“얼굴이나 좀 보자.”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자리한 권희연이 승원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약한 알코올 향이 전해졌다. 권희연이 고개를 숙인 승원의 얼굴 밑으로 제 얼굴을 들이댔다. 나른한 듯 치밀하게 뜨여져 있던 눈이 승원과 눈을 맞추기 무섭게 커다랗게 크기를 키웠다. 그녀가 입을 벌렸다.
“윤승원……?”
“나와.”
“…윤승원 아냐? 잠깐만. 하이씨, 이거 좀 놔!”
서로 꽉 끼워져 있던 손이 드디어 떨어졌다. 권 대표의 손이 나간 손바닥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찼다. 헛헛해진 공간이 흠뻑 젖어 있었다. 승원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권희연에게 인사했다. 잘못이라도 뉘우치는 사람처럼 ‘안녕하세요.’ 말끝을 흐리곤 뒤로 물러났다.
권희연은 흐으음, 소리를 내더니 검지를 치켜들고 승원을 가리켰다.
“나 하나도 안 취했는데. 그쪽 배우 아니에요?”
“…권희연.”
승원에게 가까이 붙으려는 권희연을 권 대표가 힘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여자는 만취 상태였다.
“너 돌았구나, 진짜.”
“식 한 시간도 안 남았어. 맨정신으로 가고 싶으면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지 그래.”
“밖에 기자들 수두룩한 거 못 봤니? 아아, 왜? 가서 말해 줄까? 권차현 대표가 친형 결혼식에 데려온 애인이, 남자라고. 그것도 윤승원이라고?”
권 대표의 체구가 워낙 커서 그의 등에 가려져 있는 권희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피치 높은 목소리가 쨍하게 승원의 귓가를 때렸다.
승원은 더 갈 데도 없는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버티고 있어도 되는 걸까. 저 말을 들으니 갑자기 두려움이 닥쳤다. 정말 저 여자가 그런 소리를 퍼뜨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결혼하기 싫다는 남동생이 동성애자라 그런 줄도 모르고. 누나가 속도 몰랐네!”
권 대표의 팔을 뿌리친 권희연은 제 머리를 정돈하며 침대 옆 창가 쪽으로 향했다. 승원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권희연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조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제 입술을 가리고 푸하핫,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TV에서 보던 얼굴이잖아.”
“…….”
“저 새끼랑 진짜 만나요?”
갑자기 자신에게 넘어온 질문에 승원은 당황한 눈으로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객실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있던 권 대표가 권희연의 목소리에 미간을 좁히며 승원을 응시했다. 경고 어린 시선만 내비칠 뿐, 다른 말은 없기에 승원은 침착하게 목을 울렸다.
“…네. 만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프런트와 연락이 통한 권 대표가 수화기에 대고 무어라 이야기했다. 얼핏 들어 보니 룸에 있는 와인을 전부 치우라는 말인 듯싶었다.
“쟤가 어디가 좋아서?”
“…….”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얼굴? 돈? 돈은 그쪽도 많지 않아요? 아니면, 우리 동생이 밤일을 잘하나?”
눈을 실처럼 뜬 권희연이 동글게 말아쥔 손가락 사이로 맞은편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배시시 웃으며 승원을 느른하게 바라보았다.
승원은 순간 할 말을 잃고 허공에 버려 놓던 시선에 힘을 주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아는 게 없으니 둘러댈 말도 없었다. 목석 같은 승원을 보고 금세 흥미를 잃은 권희연은 이기죽거리던 태도를 버리고 귀를 후볐다.
“그나저나 은퇴 각오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여상하기 짝이 없는 물음에 승원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권희연은 고개를 휙 돌려 창 아래의 풍경을 확인하곤 혀를 쯧, 찼다. 찾아 꺼낸 담배를 하나 물고 탁탁, 불을 붙였다. 후 하고 뱉어 낸 열기와 함께 연기가 퍼져 나왔다.
“아니, 커밍아웃 그런 거 당하는 거 무섭지 않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얼굴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이.”
“…네?”
그런 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아니,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 왔다. 권 대표는 승원에게 그런 문제에 대해선 관여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는 듯이 굴었으니까. 그 설득 아닌 설득에 승원은 어느새 그를 믿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승원의 고개가 권 대표에게로 돌아갔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뭘 믿고 저 남자를. 설령 폭로 등의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될 쪽은 저 남자가 아니라 승원 본인인데.
엎지른 물처럼 다시 담을 수 없는 게 말이고 소문인 것을, 왜 그런 것은 진작 걱정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차피 자신의 이미지가 망가진다고 해도 그게 권 대표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왜 인제야 비로소 인지한 것일까.
승원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권 대표가 승원의 손을 잡았다. 권희연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승원이 멀찍한 시선으로 제 옆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헛소리 적당히 하고 그 꼴 좀 다시 점검하지.”
“남이사. 네 걱정이나 해.”
“나갑시다.”
“잘해 봐. 네 마음대로 되겠어, 그게?”
그녀의 말을 무시한 권 대표가 잡고 있던 승원의 손을 당겨 룸 밖을 빠져나왔다. 권희연이 피우는 짙은 담배 냄새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뒤통수를 찔렀다.
복도로 나오자 짜증이 깊게 서린 얼굴이 승원을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나도 저런 꼴은 예상 못 한 일이라.”
승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권 대표의 손을 먼저 풀어낸 그는 다른 걸 물었다.
“저분은 누나 되는 분이신가요.”
권 대표의 눈썹이 바스러졌다.
“맞아요. 저 인간을 먼저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 대표님.”
침을 삼킨 승원이 침착하게 목을 울렸다.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거 맞는 건가요? …이렇게만 하면 대표님께도, 저한테도 다 괜찮은 게 맞는 건지-.”
“네. 잘하고 있습니다.”
“…….”
“계속 그렇게 하세요. 내가 미리 말을 하지 못했는데.”
입술을 축인 권 대표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
“방금 룸에서 봤던 것보다 더한 꼴을 마주할 수도 있고, 윤승원 씨 보여 주기 민망할 상황들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감안하세요. 집안 가족들이 벌이는 추태는 나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까.”
복도 맞은편에서 직원 하나가 트레이를 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권 대표는 승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벽에 붙었다. 어느새 승원의 시선은 권 대표의 가슴 위에 올라가 있었다. 가까이 붙은 거리가 부담스러웠지만 돌돌 거리는 바퀴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어쩔 수 없었다.
“안에 있는 술 싹 다 수거하세요.”
권 대표에게서 은은한 향수 냄새가 감돌았다. 가슴이 조금 닿은 상태일 뿐인데도 뜨거운 체온이 여실히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친절한 미소로 응수한 직원이 룸의 벨을 눌렀다. 직원이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동안, 권 대표는 승원의 어깨를 감싸 쥐고 복도를 걸었다.
그가 이끈 곳은 방금 들어갔던 룸과 같은 크기와 배치로 이루어진 또 다른 객실이었다. 권 대표는 답답했는지 코트와 정장 재킷을 벗어 두고는 창가로 향했다. 창의 레버를 돌려 연 권 대표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잠자코 있던 승원의 눈이 미세하게 뜨였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 그가 담배 필터를 쭉 빨자 붉게 번지던 기둥 끝의 불이 작게 타들어 갔다. 긴 숨을 내뱉은 권 대표는 창 밑의 기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승원 쪽을 돌아보았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옮긴 모습이 방금 봤던 누나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날렵한 삼백안의 눈이 승원을 응시했다.
“담배 피웁니까.”
승원은 고개를 저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 것을 훔쳐 몇 개비를 피웠다가 그마저도 너무 써 도로 돌려놓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하긴 그런 이미지에 담배가 어울리진 않습니다.”
“…….”
“그 얼굴로 피운다면 그건 그거대로 재밌었겠네요.”
창가에 등을 기대고 선 권 대표가 요요히 미소 지었다. 거의 웃지 않는 인상은 아주 약간의 입꼬리만 움직여도 그가 웃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재떨이에 담뱃재를 가볍게 털어 낸 권 대표가 부유하는 연기를 유유히 지켜보았다. 승원은 앉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서서 그런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여유로워 보이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승원에겐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대표님.”
권 대표가 눈썹을 들썩이며 승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남들을 속이다가 잘못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고저 없이 되묻는 권 대표에 승원이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가족분들 앞에서만 행세하면 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선 다른 이들 눈에 익기도 쉽고, 특히 대표님 집안도 집안인 만큼… 몰려든 기자들이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그땐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건데.”
권 대표는 뚝뚝 끊기는 승원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태평하게 태우던 담배를 마저 빨았다. 연기를 뿜으며 그는 승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윤승원 씨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내가 얘기했을 텐데.”
“하지만,”
“날 못 믿어요?”
승원은 침묵했다.
못 믿는 게 당연했다. 그를 믿을 만큼 승원과 권 대표의 관계가 긴밀한 것도 아니었고, 그가 승원에게 신뢰를 줄 만한 무언가를 딱히 행한 적도 없었으니.
또한 이런 스캔들은 한 번 놓치면 종잡을 수 없이 새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설령 쏟아진다 하더라도 금방 주워 담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치부하는 권 대표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한 모금을 머금은 권 대표가 반으로 줄어든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눌러 비볐다. 유려한 손가락이 먼지처럼 남은 재를 털어 냈다. 매무새를 가볍게 정돈한 남자가 저벅저벅, 러그 위를 지나 승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권 대표의 얼굴이 눈앞에 가까이 있었다.
“그래도 믿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
“구두 계약도 계약은 계약입니다. 윤승원 씨는 내 말 믿고 소속사 옮긴 거 아니었어요?”
내리깐 눈으로 승원을 진득이 훑어 낸 남자가 건조하게 지껄였다. 보기 드문 미소를 걸친 채였다.
“혹시 잘못돼서 추한 꼴이라도 날까 봐 무서워요?”
“대표님-.”
“지금이라도 무르세요, 그럼. 회사는 원래 윤승원 씨가 지내던 그곳으로 다시 바꾸고, 우리가 만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것만은 절대 싫었다. 다시 돌아가서 어떤 꼴을 당할 줄 알고.
제 앞의 남자는 정말 마법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은 꼭 이런 데서 묵직한 신뢰를 가져왔다. 승원은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마주한 깊은 눈동자 안에 겁에 질려 있는 제 얼굴이 보였다.
권 대표가 손목에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흠, 소리를 낸 그가 숙였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불평은 나중에 다시 하고. 일단 나갑시다.”
그가 승원의 팔목을 억세게 잡았다. 승원은 마음을 갈무리할 정신도 없이, 권 대표의 강한 힘에 휘둘려 끌려 나갔다.
***
호화스러운 전경이 펼쳐졌다. 중앙엔 미끈한 선을 뽐내는 조각상이 돋보이는 분수가 자리 잡고 있었고, 곳곳에 넝쿨처럼 늘어진 액자들이 보였다. 검은색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트레이나 하얀 꽃 등을 들고 분주하게 지나쳤다. 식장 입구에서 가드를 친 채 무전을 주고받는 경호원들을 보며 승원은 다시 한번 결혼식의 규모를 실감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권 대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창 복작이는 인파 사이를 확인하던 그가 승원에게 가까이 붙었다.
“방 안으로 들어갈 겁니다. 어머니 있을 거고, 일단 인사만 하고 나올 생각입니다.”
맞붙은 어깨가 불편해 조금 떨어지려는데, 그가 승원의 바깥 어깨를 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금세 그의 옆구리에 끼인 자세가 된 승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승원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결혼식이 아닌 파티에라도 참석한 사람들처럼 저들끼리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안쪽으로 들어서 대기실로 향한 권 대표가 승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으라는 뜻이었다. 승원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다시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인사할 거니까, 옆에 잘 붙어 있어요.”
“……네.”
그는 손을 잡고선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깍지를 끼우고 있는 이상 승원이 더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때, 그의 손이 올라왔다. 승원의 눈가를 엄지로 가득 쓸어 만진 권 대표가 그의 눈꼬리를 위로 쭉 끌어당겼다. 그를 힘껏 올려다보는 얼굴이 된 승원이 쿵쿵대는 심장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읊조렸다.
“웃어요. 예쁘게.”
문 안으로 들어서자 역시나 아까와 같은 짧은 복도가 나왔다. 그 후 드러난 공간은 객실이 아닌 VIP 대기실이었다. 숍처럼 꾸며진 방 안은 새하얗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 중앙에 한 여자를 감싸고 직원 서너 명이 동시에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보고 있었다. 권 대표와 승원이 몇 걸음 더 다가가자, 거울에 비친 얼굴이 드러났다.
하얀 얼굴에 새까만 마스카라와 아이라인이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레드 와인 빛이 도는 윤기 나는 머리를 위로 올려 꽁지처럼 묶은 여자는 단아한 차림새와는 다르게 강한 인상에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권 대표의 어머니, 윤성희였다.
“저 왔어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동자가 거울 속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윤 여사는 치켜올린 눈썹과 함께 그의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승원은 애써 끌어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조금 더 위로 당겼다.
순간 불똥 같은 안광이 튀었다.
윤 여사는 갑자기 제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깜짝 놀란 직원들이 옆으로 비켜섰고, 윤 여사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슴을 크게 부풀린 윤성희 여사가 거침없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승원의 얼굴이 슬로 모션처럼 굳어 갔다. 찰나의 포착처럼 등장한 인영이 손을 올렸다. 새된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짜악. 순식간이었다.
뺨 위로 커다랗게 마찰을 일으킨 손바닥이 지나갔다. 승원의 뺨을 세차게 날린 여자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 가슴을 크게 울렁였다. 작지만 단단한 손이 어찌나 매운지, 승원의 뺨 전체가 불덩이처럼 화끈거렸다. 승원이 떨리는 손으로 제 뺨을 더듬었다. 나려던 생각마저 부어오르는 뺨과 함께 전부 소멸됐다.
“……어머니-.”
놀란 건 승원뿐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권 대표가 이 말도 안 되게 우스워진 상황을 파악하려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애써 갈무리했다. 미리 언질을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곧장 알고.
“희연이한테 다 들었다. 기어이 정신이 나갔구나, 네가?”
“……하.”
그사이를 못 참고 가벼운 입을 나불댄 모양이었다. 이딴 식으로 먼저 선수를 칠 줄은 몰랐는데. 입술을 벌린 그가 실소를 뱉었다.
“정신 병원에 처넣어 봐야 정신을 차리겠니? 어?!”
그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아졌다. 윤 여사가 정신 병원에 처넣겠다는 자는 권 대표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승원이었다.
“무슨 낯짝이 이렇게 두꺼워서. 창피한 줄 모르고!”
그녀가 다시 손을 올리자, 옆에 있던 직원들이 반사적으로 윤 여사의 팔을 잡았다. 몸을 움찔거린 승원의 얼굴을 권 대표가 신속히 살폈다. 뽀얗기만 하던 피부에 생채기가 올라와 있었다.
“이거 놔!”
그녀가 팔을 뿌리쳤다. 살얼음 같은 상황에 주위에 있던 직원들이 저들끼리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떨리는 눈동자로 제 파렴치한 아들을 올려다보던 윤 여사의 나이 든 이마에 짙은 주름이 패었다. 분을 칠해 하얀 얼굴이 더없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윤 여사가 승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어디서 데려와도 이딴 상스러운…….”
승원은 고개를 숙였다. 몸이 사정없이 경련했다. 뾰족한 목소리가 귓가에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그때, 퍽. 아까 제 뺨을 갈겼던 손바닥이 이번엔 승원의 어깨와 가슴을 사정없이 밀어 내기 시작했다.
“뭐 하는 새끼길래. 년도 아니고, 어디 계집만도 못한 게-.”
퍽, 퍼억. 그녀가 승원을 밀어 낼 때마다 그는 저항 없이 뒤로 밀려 나갔다. 권 대표가 새로 맞춰 준 구두가 바닥에 밀려 딱딱한 소리를 냈다. 승원은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서는, 겁도 없-.”
“손대지 마세요.”
가슴과 어깨로 밀려오던 손바닥이 커다란 손아귀에 잡혔다. 서너 걸음은 뒤로 더 쫓겨났을 무렵, 승원을 막아선 권 대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씹어 냈다. 승원은 아직도 얼얼한 뺨을 감싼 채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필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제 사람입니다. 제가 못 데려올 곳 데려왔습니까?”
목에 핏대를 가득 세운 남자가 화를 내고 있었다. 초점이 완전히 나간 윤 여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아들을 보며 주절댔다.
“내, 내가 지금… 이딴 꼴을 보겠다고 지금까지 너를…….”
“누구라도 좋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데려왔잖아요. 뭐가 문제입니까?”
“차현이 너…….”
그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한 권 대표가 승원을 바라보았다. 제 가까이로 끌어와 뺨을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
승원은 순간, 와락 울어 버릴 뻔했다. 제법 다정한 눈길이 승원에게 떨어졌다. 울음을 참아 낸 코가 지끈거리도록 매웠다. 지금 하고 있는 게 역할극이라는 걸 알면서도, 승원은 부풀어 오른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안을 뻔했다. 끄덕일 수도, 도리질을 칠 수도 없어 그를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권차현!”
차갑게 식어 버린 시선이 제 어머니를 쏘아보았다.
“어머니가 생각한 상대가 아닙니까?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
“그냥 마땅한 결혼 상대를 찾고 있던 거잖아요.”
윤 여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렇게 매일 같이 공을 써 가며 상대를 붙여 줬건만, 개밥 무시하듯 쳐 낼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이런 자리에 데리고 온다는 파트너가 남자라니. 자식 둔, 그것도 곧 결혼이라도 치를 작정이었던 부모 입장에선 기가 막혀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결혼을 정 시키고 싶으시면 이 사람이랑 시켜 주세요. 남자 며느리도 색다르고 좋을 텐데.”
“이게 근데……!”
그때였다. 쿵, 하고 열린 대기실 문 바깥에서 가드 열댓을 포함해 날 선 정장을 입은 풍채 좋은 남자가 나타났다.
“…뭐예요? 권차현. 뭐야, 너.”
권차현의 형인 권주현이었다. 셔츠 중앙에 달린 검은 나비넥타이가 돋보였다.
승원의 온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사시나무 털어 내듯 경련하는 몸을 권 대표가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팔뚝을 꾹 잡았다가 놓은 부근에 홧홧한 기운이 돌았다. 기댈 곳이 없었기에 승원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수밖에 없었다. 빙 둘러싼 시선이 끔찍이 두려웠다.
다른 이들이 오든 말든, 완전한 대치가 이루어진 그들 사이에선 그저 구경꾼을 더 보태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더 보고 있기 두려워 눈이라도 감으려던 승원을 권 대표가 제품에 끌어당겼다. 그의 가슴팍에 완전히 안긴 승원이 그대로 경직됐다.
“지금, 대체 뭐 하는…….”
제 아들을 보며 숨을 헐떡거린 윤 여사가 다시 꽥, 소리쳤다.
“형 결혼식 망치고 싶어서 단단히 벼른 거니? 어!?”
“어머니야말로 제가 멀쩡한 결혼식 하나쯤 망쳐야 제 진심을 알아 주실 겁니까?”
가관이었다. 경호원들이 저희를 빙 둘러싸고 있고,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남자들 사이에 구경거리가 된 듯했다. 승원은 그의 품 안에서 눈을 꼭 감고 초를 셌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머리가 아팠다.
권 대표는 승원을 놓지 않았다. 어깨 위에 얹고 있던 손이 스르륵 내려와 승원의 허리춤을 끌어당겼다. 더욱 밀착되는 몸에 감고 있던 눈을 뜬 승원이 날뛰는 심장을 잠재우려 숨을 크게 쉬었다.
“제가 싫다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그때 진작 끊어 냈으면 이렇게 추한 꼴 만들지 않아도 됐잖아요.”
추한 꼴. 승원의 머릿속에 단어 세 글자가 새겨 들어왔다.
“언제까지 어머니 입맛대로 재단하고 속단하실 겁니까?”
“…….”
“어떻게 증명하든 믿지 않으실 거 같아서 이 자리에 데려온 겁니다. 여기서 더 물러날 생각 없으니까, 형 결혼식 더 망치고 싶지 않으시면 여기서 말 줄이시는 게 좋을 거예요.”
“……권, 차현 너…….”
“결혼 절대 안 합니다.”
그가 명확한 발음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짓씹었다. 곧 뒤로 넘어갈 듯한 제 어머니를 뒤로하고 권 대표가 승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반사적으로 품 안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팔목이 붙잡혔다.
“가요.”
승원을 이끌고 가드들에게 비키라고 뇌까린 그가 갈라진 틈새로 무리를 빠져나갔다. 입술을 다문 채 권 대표에게 끌려가던 승원은 어수선한 로비 구석, 대리석 벽에 기대어 둘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권 대표가 입 모양으로 제 누나를 보며 무어라 지껄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뜻은 아니었으리라. 승원은 예감했다.
권 대표는 이미 알고 있는 길을 찾아가는 양 거침없이 나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승원을 데리고 빠져나가는 그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식을 앞둔 결혼식 현장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곤 아무렇지 않게 앞서 나가는 권 대표의 등을 승원은 눈물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넘치는 파도보다 잠재우기 어려웠다. 단련되지 않은 속이 울렁거렸다.
길고 좁은 복도를 쭉 나아가 인적이 드문 작은 테라스로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갔다. 야외 흡연실처럼 되어 있는 테라스는 검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권 대표가 뿌리치듯 놓은 팔뚝은 울혈이 잡힐 정도로 얼얼했다.
“……씨발.”
난간 쪽을 바라보던 권 대표가 가장 먼저 되뇐 말이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쉬어 있었다. 승원은 숨을 몰아쉬었다. 걱정이 끼쳐 들어왔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분간할 순 없었지만, 저희를 보고 있던 시선들이 굉장히 많았던 것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탁탁, 소리가 났다. 지포 라이터를 열어 담배에 불을 붙인 권 대표가 필터 끝을 입에 물고 한숨을 쉬었다. 문득 돌아본 시선으로 승원을 응시하던 그가 손으로 담배를 옮기고 가까이 다가왔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손에 승원이 몸을 주춤거렸다.
권 대표가 손등을 들어 승원의 뺨을 건드렸다. 견고한 살결이 붉은 기가 다 가시지 않은 뺨 위로 떨어졌다. 그가 담배를 문 채 물었다.
“괜찮습니까?”
대충 씹어 낸 발음에서 성의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동안 저에게 다정했던, 자신을 감싸고돌던 애인 같은 남자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탁. 승원이 그의 손을 쳐 냈다. 콧잔등을 찌푸린 남자의 얼굴이 이내 평온하게 되돌아왔다. 고개를 틀고 담배를 빨아 물었다.
“괜찮지 않습니다.”
꽤 단호한 말에 권 대표는 웃지 않고 지그시 승원을 바라보았다. 뿜어져 나온 연기가 길고 짙었다. 겨울바람에 흩어지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아픈 것보다도 더한 걱정이 앞섰다. 자신을 바라보던 수십 개의 눈. 살벌하게 치켜뜬 눈으로 저를 때리고 밀어 내던 그의 어머니. 이 모든 것을 재밌는 것을 보듯 방관하던 그의 형제까지. 승원의 편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자신의 편이라 할 수 있었던 남자조차 실상은 아니었기에.
권 대표조차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얌전히 담배를 빨았다. 잠깐의 침묵이 돌고, 그가 말했다.
“나도… 이렇게 개판이 될 거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물론 욕먹을 준비는 하고 있었다지만, 그렇게 손까지 올릴 줄은 몰랐고. …그 점에 대해선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해요. 얼굴을 그렇게 만든 건 내가 대신 사과-.”
“무섭습니다.”
말허리를 자른 승원이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목울대를 꿀렁인 권 대표가 저를 바라보는 승원의 눈을 응시했다. 울다 만 얼굴엔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그걸 보고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양, 그는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저는 여기 왜 온 겁니까?”
더 참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여태껏 참아 온 말들이, 생각들이 한데 뭉쳐 화수분처럼 터져 나왔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절 데려와서 어떤 기대를 바라고 어머니께 가신 겁니까? 총알받이 역할이라도 시키려고 그러신 건가요? 결혼하기 싫다고 시위하는 건 대표님인데, 왜 뺨은 애먼 제가 맞아야 합니까? …그러려고 사람 찾으신 겁니까?”
말을 하다 보니 목소리가 점차 격양됐다. 물기에 젖어 가빠지는 음성에 힘겹게 가슴을 억누르며 말을 끝마친 승원이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뺨 위의 붉게 앉은 부위가 차가운 바람에 밀려 더욱 쓰라렸다.
“…….”
담배를 더 물지 않고 들고 있던 권 대표가 난간 위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김이 새는 듯한 연기와 함께 허리가 푹 끊긴 꽁초를 놓은 그가 승원을 응시했다. 둘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건물 안쪽에서는 무언가 왁자지껄한 기척이 들렸다.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떠들썩한 음악 소리였다.
“그래서 방금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무표정한 얼굴이 짜증스레 일갈했다.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어요? 각오하라고. 내 가족이 부리는 추태에 대해선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그 점에 대해선 윤승원 씨가 알아서 갈무리하라고. 나는 그 뜻이었는데.”
“…….”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갑자기 왜 우는 겁니까? 맞은 게 아파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여기 온 게 후회돼서 그런 겁니까?”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서 승원은 고개를 틀었다. 권 대표의 시야로 승원의 붉은 뺨이 여실히 드러났다. 제 어머니에게 세차게 맞은 볼 언저리를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총알받이라고 했죠.”
“…….”
“맞습니다, 총알받이. 나 지금 결혼하기 싫어서 윤승원 씨 이용하는 거예요.”
“…….”
“그래서 당신 원하는 거 이뤄 줬잖아요. 근데 왜 엄살입니까.”
승원이 숨을 몰아쉬었다. 승원의 관심은 오로지 한 곳에 쏠려 있었다. 그 많던 눈동자 중 승원을 알아보고 바깥으로 새어 보낼 가능성을 가진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식장 건물을 가득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
너무 가혹한 수치와 모욕을 지속적으로 받아 온 몸이었던지라, 그 정도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감을 잃은 게 분명했다. 화대 따위를 바라고 다리를 벌리고 바지를 내렸던 일만이 수치가 아니었다. 말을 잃은 벙어리처럼 조종을 당하듯이 서서 입도 뻥긋 못 하고 뺨을 맞았던 순간이 머릿속을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무슨 벌레만도 못 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서서히 차오르는 울화에 승원이 입 안을 꽉 깨물었다.
그는 여지없이 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서 충분히 좆같은데.”
“…….”
“윤승원 씨까지 보태지 마세요.”
배려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 떠밀려 왔다. 눈동자를 가득 덮은 물기가 축축하게 쌓여 툭툭, 떨어졌다. 주차장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갑자기 권 대표가 승원의 턱뼈를 부술 듯 잡아 쳐들었다. 입 안을 물고 있던 승원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리저리 확인하는 짙은 눈동자에 감흥이 없었다. 가까이 들이미는 얼굴에 담배에서 배어난 매캐함과 농도 짙은 향긋함이 동시에 섞인 그의 체취가 훅 끼쳐 들어왔다.
“약 발라야겠네.”
“…….”
“아파서 울었습니까?”
그가 재차 물었다. 승원은 반항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무서워서 울었어요?”
“……모릅니다, 저도.”
“아는 게 없네요.”
권 대표가 승원의 턱을 툭 떼어 놓았다. 문 안쪽에서 아까보다 더욱 소란스러운 소리가 넘어왔다. 이미 식이 시작된 것 같은데. 자신은 몰라도 권 대표는 참석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의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사람처럼 표정이 멎었다.
그때였다. 테라스 밑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귓등을 찌르고 들어왔다. 눈물에 멍울져 있던 승원의 눈이 불시에 커졌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은 권 대표의 입술이 벌어졌다. 비소를 내던지는 남자의 표정에 짜증과 당황이 서려 있었다. 그는 승원을 힐끔 보고는 전화 상대에게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지금 간다고 전해요.”
말끝마다 옅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명료한 통화를 마친 권 대표가 승원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고 해서 병원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귀가 먹먹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니. 아까 저를 야단치고 불같이 성을 내던 분인데. 갑자기 쓰러지다니. 승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푸르게 질렸다.
“심각한 거 아닙니다. …진짜 별꼴을 다 보이네.”
충격을 안은 상대를 두고 정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다시 어딘가에 전화를 건 권 대표의 입 모양을 보고 있었음에도 승원은 그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주위가 음소거 된 듯 소리의 공백이 차올랐다.
권 대표가 승원을 데리고 다시 실내로 들어갔을 땐, 분주하고 시끄러웠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든 후였다.
식이 진행되고 있는 예식장은 문이 굳게 닫혀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무언가를 축하하는 파티 자리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곳을 그냥 지나친 권 대표가 승원을 데리고 구석진 복도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쪽문으로 빠져나가니 호텔에서 권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검은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뒷좌석을 연 권 대표가 승원을 그곳에 태웠다. 밀리듯이 안으로 들어가 자리한 승원이 순간 그의 팔을 잡았다.
“왜요.”
“오늘 제가 할 일은.”
“다 한 겁니다. 수고했고, 집으로 가 있어요. 김 실장님, 부탁합니다.”
“네, 대표님.”
문이 가차 없이 닫혔다. 권 대표의 팔을 놓은 손이 차창을 매만진 채로 머물렀다. 검은 창엔 커다란 키 때문에 그의 차가운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정 없어 보이는 각진 슈트 차림의 몸이 등을 돌려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승원은 눈을 깜박였다. 숨을 쉬었다.
“집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대답하지 않아도 차는 출발했다. 권 대표가 이끄는 것만큼이나 부드러운 운전 실력을 가진 김 실장이 핸들을 잡은 채 룸 미러로 승원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진득한 시선이 느껴져 승원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반응해야 했다.
거울을 통해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김 실장이 흐릿하게 눈을 접어 웃으며 딱딱하게 말했다.
“팬입니다.”
“……아.”
“이렇게 뵈다니 영광이네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저, 기사님.”
“김 실장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 김 실장님. …괜찮은 건가요?”
지금 이게 괜찮은 게 맞나요? 그분의 어머니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가요? 이 상황에 내가 집으로 가도 되는 건가요? 물음표가 달린 문장이 입 안을 휘돌았다.
온통 엉망이었다. 체계적으로, 계획적으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던 기대를 애초에 버렸어야 했던 걸까. 이지적이고, 도회적으로 보이는 남자였기에, 로열패밀리라 감히 칭할 수 있는 집안이었기에, 그의 옆에 있으면 최소한 그가 정의한 순리대로라도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밑 빠진 독이었다.
승원은 몇 번이나 권 대표의 당황 섞인 표정을 보았고, 그러면서도 제 체면을 놓치지 않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체면을 챙긴 그이 대신 엉망이 된 건 승원 본인이었으니.
거울로 승원을 다시 들여다본 김 실장은 우려가 가득한 승원의 얼굴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으음. 소리를 내며 전방을 주시한 김 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지 않을까요? …뉴스야 좀 떠들썩하겠군요. 하하.”
심각한 승원을 두고 아리송한 미소를 띤 채 어깨를 들썩거린 김 실장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럴수록 승원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단단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승원이 콩콩 뛰는 심장을 꾹 잡아 눌렀다.
혹시라도 무언가 어긋나 자신이 권 대표와 이 자리에 왔다는 게 들통나는 것보다 더한 우려가 끼쳐 들어왔다. 이 아름답고 성대한 결혼식을 제가 다 망쳐 버린 기분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와 물 전체를 다 흐려 버린 불순물. 그게 딱 저였다.
어떤 가능성을 다 대어 보아도 윤 여사가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건 저 때문이었다. 승원과 권 대표에겐 그저 역할극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 눈에까지 그게 연극으로 보일 리는 없었다. 큰일이라도 난다면 어떡하지.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어쩌지. 불안을 이기지 못한 승원의 손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을 숨기려 주먹을 쥐니, 둥그레진 손이 그대로 경련했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승원을 지켜보면서도 김 실장은 차분히 운전을 이어 나갔다. 꽉 막힌 대로변에 신호를 기다리는 차가 가득했다. 입술을 질끈 물고 숨을 크게 들썩이는 승원을 룸 미러로 지켜보던 김 실장이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물었다.
“혹시 차멀미 하십니까?”
“…아, 아니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얼굴색이 조금 안 좋아 보이셔서.”
“괜찮습니다. 정말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양하듯 말하는 승원에 김 실장이 이내 다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십자로 커다랗게 뚫린 차로 주변 빌딩의 반을 다 덮은 전광판에선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핸들에 기대어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김 실장이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빠르기도 하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렇게 대문짝만하게 보도를. 윤 여사가 저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다.
이번에야 제 아들의 식장에서 쓰러진 것이니 크게 말이 나올 만도 하지만, 그녀가 뒤로 넘어간 게 처음도 아니었다. 권 대표의 옆에 항상 붙어 있던 김 실장도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던 광경이니.
“저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아… 결혼식 다녀오신 거 아닌가요? 윤 여사님 쓰러지신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닌가 하고…….”
“……아.”
잠시 움직이는가 싶던 차가 다시 정지선에 멈췄다. 추운 날씨에 비해 햇살이 뜨겁게 쏟아지는 횡단 보도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걸음을 옮겼다. 불편하게 몸을 기대고 있던 승원이 김 실장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자주 그러십니다. 몸이 좀 약하시기도 하고. 아마 별거 아닐 거예요. 걱정 덜어 드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러신 분입니다. …원래 엄살도 심하시고.”
“……네?”
“하하, 그냥 진짜 별거 아닐 테니까 맘 놓고 계세요.”
작게 중얼거린 김 실장의 뒷말을 들었지만 승원은 모른 척 넘어갔다.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어쨌든 권 대표의 옆을 보좌하는 자라면 집안 사정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저렇게 말을 전하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싹 틔운 죄책감이 다 무뎌진 건 아니었다.
“그나저나 대표님이 윤승원 씨와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아. 네. 어쩌다 보니까…….”
“대표님 차에 타는 분이 흔치 않은데. 각별한 사이신가 봐요.”
순간 승원은 말을 내뱉는 김 실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승원에게 가볍게 이야기하는 김 실장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각별한 사이라.
“저도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창을 바라보던 승원이 혼잣말로 화답했다. 김 실장은 다시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분명 꿈은 아닌데, 하루가 진득하니 길게 느껴질 정도로 무언가 많이 치고 닥쳤다. 갑작스레 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승원은 느긋하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
갑갑한 숨통이 느껴져 숨을 몰아쉬던 승원이 문득 정신이 깨어나 눈을 떴다. 조수석 시트의 헤드가 보였고, 진한 가죽 냄새가 났다. 아까 타고 있던 차 안 그대로였다. 다 깨지 못한 정신으로 움츠러들려던 몸이 순간 옆쪽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휙 돌렸다. 헙, 놀란 승원이 입술을 벌렸다.
“깨우려고 했는데. 알아서 일어났네요.”
“…대표님이 왜.”
“내 차인데, 내가 타 있는 게 이상합니까?”
승원이 눈을 비비고 얼른 등을 세웠다. 창 쪽으로 바짝 붙은 몸이 권 대표와의 거리를 벌렸다. 저와 같은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권 대표가 느른한 시선으로 승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슈트 차림도, 위로 깔끔하게 넘긴 헤어도 그대로였다. 분명 운전 중이었던 김 실장은 온데간데없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권 대표가 고개를 힐끗 돌리더니 승원을 들여다보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옆얼굴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기울이기에 승원은 오히려 목을 넣고 눈을 내리깔았다.
“약이라도 발라야 할 것 같아서 병원으로 데려온 건데. 아주 넋을 빼고 자고 있길래 깨우기가 뭐 해서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창가 쪽에 등을 기댄 권 대표가 조금 불량스러운 자세로 바깥을 확인했다.
“김 실장이 약 사 온다고 했으니 그거라도 바르세요. 얼굴 파는 직업인데 흉지면 문제 되지 않겠습니까.”
“…네.”
잠시 주춤거리던 승원은 제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승원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 않은 남자는 창가 밖만 멀찍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표님.”
“왜요.”
“…어머니는 괜찮으신 건가요?”
“네. 너무 멀쩡해서 민망할 정도로.”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은 그가 말을 이었다.
“제 고집대로 키운 아들 제 뜻대로 결혼시킬 수 있겠다 했는데, 갑자기 멀대 같은 남자를, 그것도 제 친형 결혼식에 데려온 걸 보고 쓰러지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 아니겠습니까.”
“…….”
“안 그래요?”
권차현의 어머니는 식이 시작되기 직전 갑자기 목을 붙잡고 쓰러지셨다. 어마어마하게 큰일로 번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외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대기실에서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급하게 부른 119에 이송되었다.
빠르게 새어 나가는 소식까지는 막을 수 없어도 결혼식은 윤 여사 없이 여차여차 무사히 진행되었다.
차창에 추적추적 내린 빗물이 길게 서려 있었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쨍쨍하던 하늘은 어디로 사라지고 승원이 자는 사이에 옅은 비가 쏟아진 모양이었다. 승원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확인했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작은 빗소리가 전부일 뿐, 차 안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직도 후회 중입니까.”
침묵을 깨고 다시 전해진 음성에 승원이 권 대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차창에 승원과 권 대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자리에 따라온 거.”
그의 고개가 다시 승원을 향해 돌아왔다. 두 시선이 부딪혔다. 무감한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
“윤승원 씨가 그렇게나 유명하고, 그렇기에 이런 자리 오는 게 한시라도 불안할 정도라면 사실, 애초부터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게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됐든 그쪽은 내 제안을 수락해서 지금 나와 이 자리에 와 있고.”
“…….”
“가족들 분위기도 그리 화목하지 못할 거라고 미리 언질까지 주었던 것 같은데. 윤승원 씨가 아무리 연예인이고 얼굴 다 팔린 인간이라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지속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평온하게 뱉어 내는 말들이 어딘가 날이 서 비틀려 있었다. 승원을 비꼬려는 것처럼 특정 단어 몇 마디에 힘이 실려 있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고 있지 않은 승원에게 권 대표가 눈썹을 틀어 올리며 물었다.
“여전히 나를 못 믿어요?”
설마, 아직도?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건가? 승원의 입장에선 그렇게밖에 더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차 안에 히터가 넉넉하게 나오고 있었음에도 목 위로 옅은 소름이 올라왔다. 승원은 등허리를 펴고 입술을 한 번 말아 물었다. 그러고는 저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남자에게 말을 얹었다.
“저는 대표님을 못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럼.”
“대표님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만약의 상황들을 걱정하던 거뿐입니다.”
“예를 들면요.”
브리핑을 받듯 그가 승원의 입장을 기다렸다.
“…애초에 저랑 대표님이 어떤 매뉴얼을 두고 같이 움직였던 것도 아니고, 저는 그저 대표님 옆에서 입만 다물고 움직여야 했고, 대표님의 형제분을 만나는 것 역시 계획에 없었고…… 어머님이 쓰러지는 일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지 않습니까.”
곧장 꼬집으려는 듯 보이던 남자는 생각보다 참을성 있게 승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권 대표는 숭원에게 더 말을 이어 보라는 식으로 작게 턱짓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결혼식이라지만, 식장 앞에 기자들도 많았고, 대표님의 말씀처럼 저는 얼굴이 다 팔린 인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자칫 말이 새어 나가거나 일이 커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
“……그런 것들을 걱정한 거였습니다. 저는.”
조금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승원은 눈을 들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나 새까만 눈동자는 무엇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권 대표가 번듯한 입술을 열었다.
“윤승원 씨 인지도로 그 정도 걱정하는 거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길고 묵직한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명 인사가 윤승원 씨 하나뿐이었습니까? 내가 그 정도도 감당 못 하면서 무턱대고 그쪽을 데려왔을 것 같아요? 비공개로 이루어진 결혼식이지만, 식장 앞에 서 있던 기자들 전부 봤잖아요. 그게 다 누구 기다리던 기자들 같습니까, 윤승원 씨 본인이라고 생각해요? 설마?”
할 말을 잃은 승원이 입술을 벌렸다. 권 대표는 끊지 않고 말했다.
“일이 틀어져서 잘못된다면 문제가 발생하는 건 윤승원 씨뿐만이 아닙니다. 윤승원 씨는 윤승원 씨 본인 일만 추스르면 되는 거겠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일개 남자 배우랑 게이 스캔들이라도 났다간 나 하나는 물론이고 집안 전체가 휘청할 수도 있는 문제예요. 내가 그 정도 파악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대표님, 저는.”
“그럼에도 윤승원 씨는 계속 날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겁니다. 아깐 경황도 정신도 없어서 제대로 말 못 했는데.”
“…….”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그만하세요. 데리고 다닐 때마다 징징거리는 것도 난감합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윤승원 씨 말고도 내 옆에서 그럴듯한 흉내를 낼 만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
“애인이야 바꾸면 그만이고.”
승원에게 겁을 주거나 위압을 주려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승원이 아니어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보탬 하나 없는 진실 그대로였다.
승원은 느닷없이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공격을 퍼붓듯이 쏟아진 말들에 무엇 하나 제대로 받아칠 구석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생쥐라도 된 듯이, 그렇게 답을 잃어버린 승원은 입술만 뻐끔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요. 내 말이 틀립니까?”
승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주먹을 꼭 쥔 채로 붉어지려는 콧잔등에 힘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앞서 나간 거 같습니다.”
“…….”
“토 달지 않을게요. …계속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스물여섯의 승원은 어리고 순진했다. 이 자리까지 오르는 순간마다 제가 제대로 해내서 이룬 게 없었다. 적어도 저 자신이 평가한 저는 그랬다.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악마 같은 눈들에게 휩쓸려 어영부영 올라온 승원은 이번에도 역시 힘없이 꺾인 제 주장을 받아들였다.
눈살을 찌푸리던 권 대표가 승원을 바라보곤 흠, 소리를 냈다. 주머니에 있던 라이터를 꺼낸 그는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면서 ‘어지간히도 쏟아지네.’라고 뇌까렸다.
칠흑같이 느껴지던 침묵을 깨고 마침 저 멀리 검은 우산이 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구원처럼 다가온 김 실장에 승원의 얼굴이 잠시 펴지는 듯하다 이내 푹 꺼져 버렸다. 그는 차에 타지 않은 채 창을 내린 권 대표에게 연고를 건넸다.
“이거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들어가 계세요.”
“네. 연락 오면 문자 드리겠습니다.”
다시 가려던 김 실장이 권 대표의 옆에 앉아 있던 승원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승원에겐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 없던지라, 꼿꼿이 편 등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었다.
“깨셨네요!”
“실장님 다시 가시는… 건가요?”
소심한 승원의 물음에 창을 바라보고 있던 권 대표가 승원에게로 휙 시선을 던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 실장은 그저 웃기만 했다.
“연락할 곳이 있어서…… 금방 돌아올 겁니다. 히터 세기라도 더 높일까요?”
아무래도 피죽도 못 먹은 얼굴이 된 승원을 보고 하는 말인 듯싶었다. 권 대표는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탁탁 열고 닫던 라이터를 완전히 닫아 버리고 손을 대충 휘적였다.
“얼른 가세요.”
“네. 대표님. …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승원에게 간단한 묵례를 마친 김 실장이 다시 뒤를 돌았다. 스르륵 위로 닫히는 창 너머로 활짝 펼쳐진 검은 우산이 점차 멀어졌다. 승원은 김 실장을 다시 붙잡아 차에 태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랑 같이 있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네요.”
중얼거린 그를 바라보자, 권 대표가 나직하게 말했다.
“김 실장 태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눈인데.”
콕 찔린 양심에 입술을 짓무른 승원을 뒤로한 채 그는 연고에 새겨진 문구를 유심히 확인했다. 그러곤 다시 승원을 바라보았다. 무심하게 얼굴을 쓸어 보던 눈동자가 승원의 뺨에 안착했다. 으음.
“아픈 곳이 어딥니까.”
“이제 아프진 않습니다.”
“그럼 맞은 곳이 어딥니까.”
곧바로 바뀐 질문에 승원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여기인 것 같습니다.”
눈을 내리깐 채로 손가락을 들어 제 뺨을 가리켰다. 확인을 마친 권 대표가 연고 상자를 무식하게 벗겨 냈다. 툭툭 벗겨진 상자가 껍질을 드러내고, 연고를 꺼내는 손이 거침없었다.
“대 봐요.”
“아니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이건 내가 미안해서 안 됩니다.”
직조한 두 눈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승원은 하는 수 없이 제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댔다. 하얀 연고를 올린 손가락이 승원의 얼굴에 닿았다. 둥글게 펴 바르는 손이 생각보다 섬세했다. 숨을 참고 있는 승원을 힐끔 바라본 권 대표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
“…….”
시간이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했다. 내부 등을 켜고도 영 얼굴 보기가 시원찮자, 그가 눈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검지로 바르던 손가락을 바꿔 엄지로 뺨을 쓸어 눌렀다. 괜찮은 줄 알았던 살결이 그의 손가락에 짓눌리자 아릿거렸다.
“윤승원 씨가 몇 살이었지.”
그가 대뜸 물었다. 방금까지의 상황과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왜 고이는지 모를 침을 꾹 삼킨 승원이 목을 울렸다.
“스물여섯입니다.”
“…어리네.”
승원이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잠시 엉킨 시선이 꽤 오래 부딪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다른 말로 얼른 이 상황을 갈무리하고 싶었다.
“발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입니다.”
승원의 인사를 무시한 남자가 연고를 조금 더 도포하는 듯싶더니, 몇 번 문지른 끝에 마무리했다. 승원의 뺨 언저리를 확인하는 시선이 다시 진득하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시선만은 올곧게 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시 미지근한 기운뿐이었다.
권 대표가 상자 안에 연고를 다시 구겨 넣었다.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입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배우 하기에 썩 좋진 않네요. 낯짝 두꺼워야 버티기도 쉬울 텐데.”
다리를 꼬고 앉은 권 대표가 차창을 들여다보았다. 저 멀리서 우산을 쓴 김 실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사이 부재했다 나타나는 김 실장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승원은 저도 모르게 조수석 시트를 꽉 잡았다.
“평소 걱정 반만 덜고 살아도 지금보단 편할 겁니다.”
권차현이라는 남자는 본래 타인에게 비추어지기에 재수가 없는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남자였다. 어떤 말을 해도 남을 쉽게 설득하고 회유하는, 그런 운명을 타고난 남자. 듣기 싫은 말들은 전부 팩트뿐이었다. 그렇기에 승원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