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벼랑 끝자락
“자기, 진짜 안 먹어?”
긴 웨이브 머리를 귀 뒤로 찔러 넣은 서유정이 조리용 숟가락을 든 채 살랑대며 물었다.
어둠이 깊이 가라앉은 늦은 밤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휘황찬란한 빛깔의 조명들이 거리를 가득 밝힌 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창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짧게 숨을 뱉었다.
“안 먹냐구.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차현은 바지춤에 꽂아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넓은 유리창 안쪽에 비치는 서유정의 얼굴이 기대에 가득 차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 조명을 다 켜 놓은 집이 대낮같이 훤했다. 벽을 다 채울 듯한 커다란 TV에선 올해의 연기 대상을 발표 중이었다.
- 저도 떨리네요. 그럼 올해의 연기 대상, 발표하겠습니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카드를 열어 본 시상자가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들썩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이크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시상자는 곧 숨을 들이쉬고는 영광의 주인공을 호명했다.
- 축하합니다! 윤승원 씨!
“어머. 윤승원? 윤승원이 받았대?”
아일랜드 식탁에 기대어 붉은 스파게티 소스를 붓고 있던 서유정이 쪼르르 드넓은 거실로 뛰쳐나왔다. 요란하게 움직인 덕에 서유정의 숟가락에 묻어 있던 소스가 바닥에 파밧, 튀었다. 무신경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차현의 미간이 바스러지듯 구겨졌다.
“쟤가 받을 줄 알았다니까? 얼굴 봐, 어쩜 저렇게 고와. 어머, 너무 잘생겼어.”
TV 화면엔 배우 윤승원의 얼굴이 가득 띄워져 있었다. 침착한 모습으로 트로피를 받아 드는 얼굴이 티끌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단정한 얼굴은 서유정의 말대로 곱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입고 있는 남색 슈트 역시 예쁘게 자리 잡은 몸에 완벽히 어울렸다.
서유정은 유쾌하지 못한 차현의 표정을 슬그머니 지켜봤다. 본래도 감흥이 없던 얼굴엔 미세한 짜증이 묻어 있었다. 입술에 침을 가득 묻힌 서유정이 그에게 가까이 붙어 단단한 팔뚝을 와락, 껴안았다. 힐을 신고 있으면 얼추 키가 맞는 듯한데, 맨발로 있으니 차현이 어마어마하게 높아 보였다.
“그래도 우리 권 대표가 더 잘생겼지. 남자답고, 섹시하고.”
서유정은 차현에게 작게 속살거렸다. 팔뚝을 마음껏 매만지다가 손바닥을 펼쳐 제 애인 같은 남자의 어깨와 가슴 부근을 가득 쓸어 만졌다. 목석 같은 남자는 언제나 그랬듯, 반응이 없었다.
- 제가 여기 올라오기까지 정말 많은 스태프분들과 우리 배우분들, 그리고 팬 여러분들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과연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국내에 내로라하는 정신도 감독의 픽을 받아 혜성처럼 등장한 괴물 신인이었다. 생소한 등장으로 시작했음에도 미친 연기력과 꽃 같은 외모로 금방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은 탑 티어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에 꿋꿋이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대한민국에 더 이상 그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오목조목한 얼굴로 무대 너머를 바라보며 수상 소감을 이어 나가던 윤승원은 이따금 차오르는 울컥거림을 삼키려는 듯 울대를 꿀렁이며 입술을 짓씹기도 했다. 눈가가 참을성 없이 붉어졌다.
차현은 화면 속 남자를 덤덤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트로피를 손에 쥔 채 희열과 감격을 오가는 그 다양한 표정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못하는 듯 무감각했다.
마지막 다짐을 끝으로 인사를 남기는 윤승원에게로 화려한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사이, 화면은 금세 사회자들에게로 넘어갔다. 턱시도 차림의 남자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 네! 윤승원 배우 다시 한번 축하 말씀드리겠고요. 자, 시청자 여러분. 시간이 이렇게 빠르네요. 어느덧 올해도 3분가량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 3분! 사랑하는 사람과 갖는 행복한 시간 누리시길 바라겠고요…….
차현의 어깨에 서유정이 슬그머니 머리를 기댔다. 팔짱을 낀 팔이 더욱 가까이 조여 붙어 왔다. 차현이 제 왼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너무 좋다, 그렇지 않… 응?”
삼백안의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던 차현이 갑자기 서유정에게로 몸을 돌렸다. 덕분에 나긋하게 중얼거리고 있던 서유정의 팔이 차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차현은 서유정의 손에 들린 채로 소스를 질질 흘리던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부엌을 향해 성큼성큼 이동하는 남자의 걸음이 사나웠다. 당황한 서유정이 눈을 잽싸게 키운 채 다급하게 차현을 쫓아갔다.
“뭐, 뭐 하는 거야!”
대리석 식탁이 엉망이었다. 갖가지 재료와 물건들이 질서 없이 쏟아져 나와 있고, 음식이라고는 봐줄 수도 없는 모양새를 한 것들이 접시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현은 개수대에 숟가락을 던져 놓고 손등에 묻은 소스를 물로 흘려보냈다. 손을 간단히 털어 낸 그가 소파로 향했다. 그녀가 입고 왔던 고가의 코트와 가방을 들었다.
“입어요.”
“뭐 하자는 건데?”
“귀가 시간 챙겨 주는 겁니다.”
황당하다는 얼굴로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던 서유정이 이내 실소를 터뜨렸다.
“너 지금 나 쫓아내는 거니?”
“오늘 하루만 있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서늘한 낯짝을 가진 남자는 농담 따윈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준비해서 나가면 딱 맞겠네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약속 어기는 거 굉장히 불쾌합니다.”
차갑게 절단해 내는 차현에 서유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색을 바꿨다. 입술을 씹어 낸 그녀가 차현의 손에 들려 있던 코트를 뺏듯이 낚아챘다. 대단한 망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새빨갰다.
“정 실장님한테는 모시러 오라고 미리 연락 넣어 놨어요. 1층으로 내려가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읊어 내는 목소리에 고저가 없었다. 여상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남자를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올려다보던 서유정이 코트를 제멋대로 껴입고 뒤를 돌았다. 얼굴은 좆같이 잘생겨서 더 짜증이 치밀었다. 권차현의 껍데기는 서유정이 바라는 이상형과 완벽하게 부합했다.
들어올 땐 그렇게 길던 복도가 신발장으로 향하는 데까지 너무도 짧았다. 마음 같아선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눌러앉아 아침을 보고 싶었지만, 이 싸가지 앞에서 자존심을 챙겨 봤자 제 체면만 더 구겨질 뿐이었다.
씩씩대며 구두를 구겨 신는 서유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차현이 한마디 했다.
“서유정 씨.”
“…….”
“다른 남자 알아보세요.”
“…….”
“서로 귀찮아질 일에 용쓰지 말고.”
구겨진 구두 뒤꿈치를 손으로 잡아떼던 서유정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차현에겐 눈도 맞추지 않은 채 현관문을 밀었다.
“씨발 새끼.”
쾅. 잠시 찬바람이 새어 들던 문이 굳게 닫히고, 향수 냄새가 가득했던 현관이 휑하게 남았다. 차현은 다시 발을 돌려 거실로 돌아왔다. 남겨진 거실과 부엌이 심란했다. TV에선 새해 공연을 즐기는 윤승원의 얼굴이 잡히고 있었다. TV를 바라보던 지친 눈동자가 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피곤하네.”
퍼엉, 펑. 불꽃이 터져 나왔다. 물감이 터지듯 검은 하늘에 눈부신 파편들이 펼쳐졌다. 성가신 새해의 시작이었다.
***
은은한 주황빛의 조명이 수놓아진 호텔 건물은 공허한 적막이 흘렀다. 항상 그랬듯, 승원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직원을 지나쳐 조금 성급한 걸음으로 회전문을 밀고 들어갔다.
채도가 낮은 붉은 카펫은 아무런 발소리도 만들지 않았다. 눅눅한 걸음을 이어 가며 룸 앞에 도착한 승원이 노크를 했다. 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복도에 긴 정적이 이어졌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야 들어와?”
“뒤풀이가 길어져서 끊고 왔어요.”
마흔 중반은 훌쩍 넘어 보이는 액면가의 남자는 나이가 들어 깊게 들어간 눈과 짙은 눈썹을 갖고 있었다. 키가 크진 않았지만, 체격이 좋은 남자는 그냥 보기에 댄디하고 신사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하얀 가운 사이로 잘 관리한 까무잡잡한 피부가 드러났다.
남자가 앞장서 안쪽으로 들어갔고, 승원은 더블 침대와 커다란 욕조가 함께 들어찬 드넓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익히 아는 방이라 더 구경할 거리도 없었지만. 찬찬히 눈을 돌리던 승원은 손등을 매만지며 자리 한쪽에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먹다 만 와인이 빈 잔과 함께 놓여 있었다.
“떨던데. 소감 발표할 때 긴장했어?”
“……그런가 봐요.”
남자가 와인 잔을 채웠다. 승원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인상을 잔뜩 쓴 주름진 얼굴이 이내 손을 들어 제 코를 틀어막았다.
“어우, 고기 냄새가 진동을 하네. 너 가서 몸부터 씻고 와라.”
“…….”
“작품 대상 탈 때는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어?”
“아.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누가 그런 곳에서 자리를 비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리고 아무리 늦었어도, 얼른 올라가서 옆에서 꼬리도 치고, 웃어 주고 했어야지. 너 안 올라왔다고 벌써 기사 났잖아.”
연말의 파티가 벌어지고 있던 화려한 저녁 시상식,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눈앞에 보이던 것들이 뿌옇게 흐려지던 참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구역질이 나 더한 꼴을 보일까 걱정됐던 승원은 실례를 무릅쓰고 식장 밖을 나갔다. 얼굴을 다 가린 채 화장실에 들어가 칸 안에 처박혀 있었다.
팡파르처럼 터져 나온 함성과 박수 소리에 뒤늦게 식장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드라마 팀들이 다 함께 무대에 올라가 소감을 발표 중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살살 돌린 잔을 입에 댔다. 머리를 매만지며 와인을 넘기는 눈길이 진득하게 승원을 훑어 내렸다. 살이라도 발라먹을 듯한 기세의 눈빛은 버터를 잔뜩 바른 칼과도 같았다. 침이 번들거리는 입술이 말했다.
“예뻐.”
승원은 고요히 다물고 있던 입을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던 차 안에서 한참 동안 붉어진 눈가를 그에게 들키진 않을까 걱정했던 승원은 눈을 깜박였다.
“수고했어.”
두툼한 손바닥이 승원의 머리칼을 쓸어 만졌다. 승원은 얌전한 인형처럼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았다. 곧 내려온 손이 볼을 느릿하게 어루만지다 목선으로 매끈하게 떨어졌고, 남자는 와인을 더 넘기며 승원의 손을 매만졌다.
남자의 손에 이끌려 허공으로 올라간 팔이 아팠다. 승원과 남자의 손엔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오는 길에 가방을 뒤져 급하게 끼운 것이었다. 남자는 승원의 왼쪽 약지를 보더니 흡족한 듯 입꼬리를 질기게 올렸다. 남자의 숨결이 점차 거칠게 달아올랐다.
“안 되겠다. 일어나 봐.”
승원이 움직이기도 전에, 와인 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남자가 승원의 팔을 끌어당겼다. 도수가 진한 알코올 향이 얼굴 근처에 허, 하고 머물다 사라졌다. 막무가내로 입을 맞추려던 남자를 힘겹게 밀어내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친 얼굴이 간신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표정을 구긴 상대를 본 승원은 재빨리 덧붙였다.
“사장님. …일단, 일단 씻고 올게요.”
“…에이. 냄새 안 나. 그냥 한 소리야. 이리 와. 한 발만 빼자.”
뜨거운 숨결이 불쾌했다. 다시 붙어 오려는 제멋대로인 손길에 승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건조한 탓에 살이 일어난 입술이 승원의 입술 위로 푹 맞닿았다. 도장을 찍듯이 꾹 누르고는 그 위를 혀로 핥았다. 두 손을 꼭 말아 쥔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곧이어 승원의 재킷을 벗기고 매끈한 재질의 셔츠를 손바닥으로 곡진히 쓸어내리던 두꺼운 손이 엉덩이를 콱 물듯이 쥐었다. 볼기를 둥글게 쓸어 만지더니 이내 바지춤 안으로 손이 들어섰다. 동시에 승원의 손을 가져다가 단단하게 달아오른 앞섶에 올렸다.
“흐, 읍…….”
“하아… 씨발. 좆 터지겠다. 승원아.”
저급하게 지껄이고는 승원의 맨살을 주물럭거렸다. 혀가 이 사이를 비집으려 안간힘을 썼다. 어느새 가운 앞섶까지 풀어낸 것인지 다리 사이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꺼떡대는 한 뼘의 성기가 승원을 향해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밀어낼 때마다 울긋불긋 떨리는 듯한 근육의 움직임이 징그러웠다. 뜨거운 체온이 닿는 순간순간, 온몸은 더없이 차게 식어 갔다.
“얘가 너만 기다렸다잖아. 어?”
“……으, 읏.”
“너만 보면 이게 주체를 못 하고…… 허윽!”
기운이 빠져 체념 상태인 줄 알았던 승원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결국 힘에 밀려 거세게 벌린 이 사이로 알싸함을 품은 혀끝이 침범하는 순간, 승원은 상대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지친 몸이 잘게 떨렸다. 두려움보단 피로에 가까웠다.
남자의 눈썹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하, 이 씨발.’ 욕을 씹었다.
“왜 이래? 미쳤어?”
“…저 냄새나는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씻고 올게요.”
그러면서 승원은 제 셔츠의 깃을 잡아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힘에 겨운 서투른 손이 다급하게 남자의 가슴을 쓸어 만지고 떨어졌다. 그 단순한 터치에 화가 난 듯한 얼굴이 금세 누그러졌다. 남자는 다시 웃음을 띤 채 승원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볼기짝을 꾹 잡아 꼬집듯 떨어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계집애들보다 더해.”
“…….”
“얼른 가서 씻고 와.”
담배에 불을 올리며 자리에 앉은 장 사장의 다리 사이로 김빠진 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여미지 않은 가운 안쪽의 것을 마주하자 갑자기 토기가 올라왔다.
급하게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어 놓고 옷가지를 다 벗어 놓은 승원은 변기에 앉은 채 먼 허공을 응시했다.
문득 손바닥을 펴서 뒤집어 보았다. 길게 뻗은 손가락은 살이 다 빠져 마디마다 뼈가 보일 정도였다. 앙상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쥔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운물이 오래도록 나오던 욕실은 뿌연 연기가 자욱했다. 승원은 느릿하게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
시상식이 끝난 직후 뒤풀이에서 있었던 일이 끈질기게 승원을 잡고 흔들어 댔다.
촬영 내내 자신을 기피하는 눈초리를 적지 않게 마주해 왔었다. 스태프일 때도 있었고, 동료 배우일 때도 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발버둥 쳤을 뿐, 저조차도 떳떳하지 못했으므로 홀로 느끼는 위기의식 같은 것이라 여겨 왔다.
습하고 쾨쾨한 고깃덩이 냄새들이 진동하는 뒤풀이 현장 속,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술들이 배 속에 한데 엉켜 회오리치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두통과 메스꺼움에 침을 삼키며 참고 있던 승원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가게 밖 골목에 있던 화장실로 급하게 들어갔다.
먹은 것도 없이 비어 있던 속을 억지로 게워 내고 창백한 얼굴에 물을 묻힌 승원이 다시 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방음이 되지 않는 화장실 문틈으로 비교적 분명하게 새어 들어왔다.
“씨발, 존나 코미디야. 진짜.”
“윤승원 그 새끼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들 걔한테 상을 못 바쳐서 안달이야?”
“대단한 과부라도 만나셨나 보지.”
승원은 순간 숨을 죽였다.
“와, 이 형이 뭘 잘못 알고 있네! 과부가 아니라 좆을 물었다니까요.”
“소속사 사장한테는 반지 받고, 정 감독한테는 뒤 대 주고.”
“뭐? 씨발, 진짜?”
이방인들의 음성이 필터 없이 모조리 넘어오고 있었다. 승원은 아예 몇 걸음 물러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닫힌 틈새로 퍼져 들어온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간혹 익숙한 음성도 사이사이에 끼어 있었다.
“야, 그런 소리도 농담일 때나 웃긴 거야.”
“농담 아닌데? 뒤 대 주는 거 누가 모른다고. 엉덩이 존나 가볍다잖아.”
“걔 팬들은 걔 그러고 사는 거 안대요?”
“알겠냐, 씨발. 알고도 빨아 주면 그것도 용하다.”
“어우. 같이 일 못 하겠어. 드러 죽겠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허공 위를 한참 맴돌았다. 간혹 더해지는 구역질 시늉을 하는 소리가 귀를 후벼팠다. 조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좁은 공공 화장실에서 나는 지린내보다 더한 악취가 풍겼다. 어디서부터 비롯된 악취인지 알 수 없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사위가 죽은 듯 고요해질 때까지 승원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고 눈을 떠도 햇살이 커튼에 가려진 방 안은 어둑하기만 했다. 비척비척 움직여 맨몸으로 속옷을 챙겨 입는 승원의 허리를 누군가 꽉 끌어안았다. 등허리 위로 냅다 퍼붓는 거친 입맞춤에서 질척이는 침 소리가 났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승원은 정신이 번쩍 들어 서둘러 손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식 먹어.”
“괜찮습니다.”
“사양은. 시켜 줄게, 기다려 봐.”
“……속이 좀 안 좋아요.”
그래? 프런트에 전화를 걸던 장 사장이 그의 말에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았다. 아무리 동안의 얼굴이라지만, 주름이 남은 이마와 깊게 팬 눈가는 나이를 속일 수 없었다. 탁탁, 불을 붙인 담배 끝을 문 장 사장이 희멀건 연기를 내뿜었다.
“사장님. 저 할 말이 있습니다.”
“뭔데.”
가시지 않은 졸음에 취한 중년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꺼져 있었다. 벌써부터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와 있는 얼굴은 지저분했다. 승원을 보며 볼을 홀쭉하게 만든 중년의 남자는 눈을 흘겨 뜨며 와이셔츠를 걸친 승원의 몸을 관조했다. 그러면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가운 사이로 손을 올려 주물럭거렸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승원은 커튼이 반쯤 막고 있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숨을 가다듬고 질끈 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승원의 말에 의외로 장 사장은 크게 놀라지 않은 듯했다. 가볍게 혀로 입 안을 굴리던 장 사장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검게 염색을 한 머리 사이로 하얀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자리 잡혀 있었다. 턱을 긁적거린 그가 다시 승원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가늘어진 눈을 한 채였다.
“왜?”
너무 단순한 물음에 승원은 순간 하얗게 질릴 뻔한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이어서 나온 말은 두서가 없었다.
“홧김에 하는 말은 절대 아니고. …이런 만남이 부적절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 이런 일을 반복하는 것도…….”
“반복하는 것도.”
“…….”
“반복하는 것도, 뭐.”
“…….”
“이 새끼야 말을 해.”
마지막 입김을 내뱉은 장 사장이 재떨이에 담배를 찍찍 밀어 껐다. 반도 타지 않은 꽁초가 재떨이에 밀려 구겨졌다. 이미 잔뜩 태웠던 재들이 까만 모래처럼 대리석 위에 쌓여 있었다.
장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가운을 입었다. 승원은 다음 말도 잇지 못하고 굳어 있을 뿐이었다. 벌을 받듯 경직된 어깨가 잘게 떨렸다.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지?”
“……아니요.”
“새해라고 새롭게 다짐이라도 했어? 상까지 받았겠다, 이제 뭐라도 된 것 같고 그러지.”
가까이 다가온 상대의 눈을 승원은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휙 잡힌 턱이 위로 한껏 치켜 올라갔다. 턱뼈를 부숴 버릴 듯한 악력이 입술까지 이어졌다. 장 사장이 입을 열 때마다 매캐하고 텁텁한 담배 냄새가 났다.
“너 이만큼 올라오게 해 준 데에 누구 공이 컸어.”
“…….”
“말해 봐.”
“…….”
“얼른.”
타이르듯 차분한 음성이 곧 터질 용암처럼 부글댔다.
“…모르겠습니다. ……윽!”
피할 수 없는 찰나였다. 눈앞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퍽 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였다.
장 사장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주먹을 털어 내며 승원을 내려다보던 눈이 더한 짓을 할 것처럼 형형하게 번뜩였다.
순간 어제 화장실에서 들었던 익숙한 음성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방의 일처럼 생생한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승원은 입 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쇠 맛을 삼켰다.
장 사장은 매번 참지 못하고 욱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제 성에 차지 않으면 미친 듯이 괴로워하며 분노했다. 지금도 역시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창가 앞으로 가서 숨을 쌕쌕거리고 있었다.
승원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지금이 후회하기 전 마지막 기회였다. 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만하고 싶습니다.”
“하.”
장 사장이 가쁜 숨을 삼켜 냈다. 마지막 경고를 하듯이 질기고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너무 억울하고 분한 것 같아?”
“…저는.”
“갑자기 자기 연민이 생기고 그러지? 내가 씨발, 배우까지 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것도 명색이 이제 남들이 다 알아주는 유명 인사인데. 남한테 몸이나 대 주고, 스폰이나 받고. 이딴 짓 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 자신이 막 불쌍하고 그러지?”
“…….”
“야, 근데 다 이렇게 해. 너 이 바닥에서 진짜 자기 노력 갈아서 뜬 애들이 몇이나 될 거 같냐? 노력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잖아. 지금 네 자리는 뭐 떳떳해서 지키고 있어? 이제 막 위로 올라가서 아직 감이 안 잡히나 본데. 지금 내로라하는 애들 죄다 TV 나와서 이런저런 고생 다 겪었다 하는 거, 그거 진짜 고생이 뭐였는지 제대로 얘기해 줘? 어?!”
목소리가 점점 가파르게 올라갔다. 커다랗게 울리는 목청이 침대 너머에 있는 승원을 칠 것처럼 웅웅 댔다.
“그리고 씨발, 네가 지금 떳떳해? 갑자기 이딴 식으로 굴어서 사람을 무슨 개잡놈 변태를 만드는데. 그래, 네가 여기서 관둘 거면 은퇴를 해야지. 윤승원 네가 지금 들고 있는 왕관 누가 만들어 준 거야?”
“…….”
“네 과거를 생각해. 네가 나 없었으면 이렇게 클 수 있었을 것 같아? 아니지. 크는 게 뭐야. 네 애비 빚 다 갚아 주고, 길바닥에 나뒹굴 뻔한 거 병원 침상에 간신히 회복시켜 준 게 누구 덕일 것 같냐?”
“…….”
“누가 여기까지 끌어다 준 건데 이제 와서 피해자 흉내를 내,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눈을 감았다 떴다. 하얀 바닥이 보였다.
승원은 차마 입 밖으로 터뜨리지 못한 말을 입 안 가득 삼켰다. 울컥거림이 차오르는 대로 말라서 비틀어졌다.
“그래서 못 하겠다고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멍울진 눈 밑으로 무언가 후드득 떨어졌다.
“돈 때문에 시작한 거 맞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뭐?”
“사장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단지 빚 갚으려고 이 짓 계속해 온 겁니다.”
눈빛이 흔들린 장 사장을 보고도 승원은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맞아요. 운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이제 갚을 빚도 없고, 아버지도 더 부양하지 않아도 되고. 근데 제가 왜…….”
끝말이 떨렸다.
“왜, 계속 사장님한테 다리를 벌리고 애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
“어느 배우가 소속사 사장한테 뒤를 대 주고 돈을 받느냐고요. 어느 누가…….”
어깨가 비참하게 떨렸다. 경련하는 입술 끝을 질끈 문 채 승원은 손에 잡히는 와이셔츠를 무작정 밑으로 눌러 내렸다. 아무리 생각을 정리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못 하겠습니다.”
“…씨발!”
둔탁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처럼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소리, 아마 재떨이일 것이다.
승원은 의자에 포개져 있던 나머지 옷을 대충 챙겨 입었다. 무언가 소용돌이를 치듯 가슴 가운데를 세차게 치고 돌았지만, 갈무리할 정신도, 체력도 없던 승원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못한 채 남은 겉옷을 집어 들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여 봐 아주.”
승원은 장 사장의 말을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뒤통수 가까이로 다가온 묵직한 걸음 소리가 이내 멈추더니, 승원의 팔이 퍽, 소리를 내며 잡혔다.
“…윽!”
어깨가 짓눌렸다. 문으로 향하는 복도의 바닥은 거친 카펫 소재로 되어 있었다. 바닥에 닿은 두 무릎이 까끌거렸고, 어지러운 눈을 뜨니 눈앞에 흰 가운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눈앞의 허벅지를 잡았던 승원이 소스라치게 놀라자, 장 사장이 역한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그러고는 승원의 머리를 자신의 다리 사이로 꺼질 듯이 눌렀다.
“정신 차려 봐, 어디.”
벌어져 있던 틈이 열렸고, 역한 살덩이를 보는 순간, 승원은 눈앞의 허벅지를 거칠게 밀었다. 콰당탕 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원이 거센 비명을 뒤로 한 채, 입술을 질끈 물고 도망쳤다.
객실 문을 열자 쾌청한 공기가 느껴졌다. 방 안에 비하면 좁은 복도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고요했다. 방금의 일이 끔찍한 악몽이었나 느껴질 정도로 상이한 공간이었다.
수치와 치욕이라면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 높은 자리는 원한 적도, 바란 적도 없었다. 협박과 위협을 받으며 강제적으로 시작한 일에 어처구니없게 얻어걸린 처지나 다름없었다. 꼭대기에 있어도 만족감은커녕 손에 잡히는 행복이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위만 바라보며 노력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로 현재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부터 떨리던 손이 멈출 줄을 몰랐다. 승원은 손톱을 딱딱 깨물며 불이 들어온 계기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숫자를 바꾸며 하강하던 엘리베이터는 다행히 금방 18층에 도달했다. 이내 버튼을 격렬하게 누르던 승원의 손이 멎었다.
아무도 타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승원은 예상치 못한 낯선 이에 잠시 주춤했다. 버튼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 승원을 무심히 바라보던 남자는 제 옆의 버튼을 눌렀다. 스르륵, 닫히려던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안 탑니까.”
남자는 승원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굴었다. 알아보지 못한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이내 정신을 차린 승원은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몸을 실었다.
요란스레 카펫을 밟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 것도 동시였다. 순간 옅게 갈무리하려던 승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퍼렇게 변했다.
닫히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사이를 벌렸다. 추한 꼴로 등장한 장 사장이 괴물 같아 보였다. 눈 위로 가느다란 실핏줄이 형형하게 드러나 있었다. 장 사장이 입고 있는 하얀 가운은 재떨이의 검은 재로 얼룩덜룩했다.
“나와.”
“…….”
“나오라고 개새끼야!”
빽 지른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울렸다.
“사장님. 제발…….”
무서웠다. 저렇게까지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적은 없었다. 승원은 처음 보는 낯이었다. 탈을 벗은 악마와도 같은 모습에 손이 제 맘 같지 않게 달달 떨렸다. 여기서 끌려 나간다면 그 뒤는 감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문밖에 있는 남자가 두려웠다.
“너 진짜 좆되고 싶지?”
이 밑으로 발이라도 꺼졌으면. 흉악하게 몸을 드러낸 장 사장이 거추장스러운 가운과 징그러운 몸을 여실히 드러내며 살기를 품은 채 일갈하고 있었다. 닫힘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서 있는 위치에서 손이 닿지 않았다.
그때, 승원의 어깨 위로 묵직한 온기가 느껴졌다.
안에 있던 그 남자였다.
“내릴 겁니까, 내려갈 겁니까.”
간단한 물음에도 승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봤다. 몸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내려가고 싶어 하는 거 같네.”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콧대가 승원을 향하다, 곧 앞을 응시했다. 차분한 톤에는 떨림 하나 없었다.
“여기 CCTV가 많습니다. 엘리베이터에도 있고, 복도도 마찬가지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듯했던 분위기가 남자의 차분한 말 한마디에 물을 끼얹듯 고요해졌다.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장 사장이 이건 뭐냐는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당황스러운 것은 승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면 호텔 내에서 조치가 이루어질 겁니다.”
“넌 씨발, 뭔데-.”
멀쩡한 겉껍질을 벗고 완전한 본색을 드러내던 장 사장은 색색거리는 숨으로 다음 말을 잇지도 못한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남자에게 주먹을 내지를 것 같은 저 미친 얼굴에 승원은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도, 목소리도, 처음 지켜보던 순간부터 쭉 느껴지던 품위도 그대로였다.
“보아하니 여길 자주 이용하는 것 같은데, 다른 호텔로 옮기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장 사장이 더한 소리를 하기 전에 남자는 이어서 말했다. 묘한 귀찮음이 서려 있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적인 얘기를 이런 데서 듣고 있자니 조금 거북하네요. 더 할 얘기가 있으면 일단 그 엉망인 차림새부터 정돈하고 오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어느새 장 사장은 승원이 아닌 남자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화를 분출하지 못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화했다. 다리 사이가 다 드러난 제 같잖은 차림새를 그제야 인지한 건지 장 사장은 괜히 추릴 것도 없는 가운을 매만졌다. 부르르 떨리는 얼굴에 분노가 그득했다.
버튼 쪽으로 손을 올리던 남자가 바깥쪽 버튼을 터질 듯 누르고 있는 장 사장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정말 내려갈 겁니까? 그 꼴로?”
“…….”
“경찰서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평이하게 내뱉은 말들은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어느덧 승원의 앞을 가리고 선 남자가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 개새끼가!”
남자를 향해 주먹이 날아들었다. 질겁한 승원이 몸을 던져 막으려 했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고, 장 사장에게 얼굴을 가격당한 남자는 상황 파악이라도 하는 듯 돌아간 고개로 침묵을 유지했다. 장 사장은 치를 떨며 더 때릴 기세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승원은 눈물이 핑 돌았다. 돌처럼 굳어 버린 머리는 아무런 대책도 펼치지 못한 채 에러가 뜬 상태였고, 몸은 머리보다 더한 상태로 바싹 얼어 버린 채였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기척 하나 내지 못하고 그들을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금방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듯 비어 있었다.
175가 될까 말까 한 장 사장과 다르게 남자는 거의 190은 되어 보이는 대단한 장신이었다. 애초에 장 사장이 주먹을 날린 것 역시 팔을 힘껏 벗어 던지듯이 휘둘러 성공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런 남자가 잠시 기울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니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까지 침범한 탓에 남자와 가까이 맞닿게 된 장 사장에겐 더없이 거대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입술엔 피가 고여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걸음을 뗐다. 평온해 보이는 눈에 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뭐야. 뭐… 뭐 하는…….”
남자가 걸음을 앞으로 옮길수록 장 사장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몇 걸음 만에 엘리베이터 밖까지 벗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으윽!”
남자가 장 사장을 힘껏 내리쳤다. 장 사장과 똑같이 주먹을 들어 장 사장의 얼굴을 가격했다. 덩치에서 나오는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퍽 소리와 함께 맥없이 쓰러진 장 사장의 가운이 보기 싫게 벌어졌다.
“왜 치고 지랄이야.”
남자가 짓씹듯 뇌까렸다. 상대의 악력을 맛본 장 사장이 몸을 잔뜩 움츠리고 떨기 시작했다.
“옷 여미세요. 추합니다.”
금방 제 품위를 찾은 남자는 구둣발로 장 사장의 가운 사이를 발로 건드려 추한 부위를 가려 주었다. 찍소리도 못하는 장 사장을 서늘하고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눈이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남자와 눈을 마주친 승원은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가 다시 올라탔다. 아까와 같은 얼굴로 혀를 찼다.
“재수가 없네.”
“…….”
“내려갑시다.”
장 사장을 남겨둔 채 부드럽게 닫힌 문이 다시 열리지 않고 밑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의 기계음이 한참 들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히, 계기판의 숫자가 빠르게 자리를 바꾸며 떨어졌다.
후유증이 길게 남은 심장 박동이 쿵쿵대며 가슴을 짓눌렀다. 승원은 여전히 믿기지 않아 제 눈앞에 보이는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판판한 슈트는 남자에게서 느꼈던 인상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승원은 목을 가다듬었다. 입술을 한참 달싹이다 말했다. 물에 젖은 듯한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로 갈음했다.
“셔츠 버튼이 제멋대로이던데. 다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승원은 허겁지겁 제 셔츠를 살폈다. 남자의 말대로 중간에 있던 단추 하나가 엇나가 있었고, 그 밑으로는 몇 개 잠기지 않은 탓에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멀쩡한 척 방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제 모습을 상상하니 저 바닥에 잠겨 잊은 줄만 알았던 수치가 불쑥 치밀었다.
빠르게 단추를 다시 정리하려 했지만, 아까부터 떨리던 손이 진정할 줄을 몰랐다. 단추가 구멍에 제대로 끼워지지 않았다.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카운트다운과도 같은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확인하며 갈라진 앞을 신경 쓰던 승원은 결국 그 위에 점퍼를 입고 지퍼를 위로 쑥 올려 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헐렁이는 모자를 애써 눌러썼다.
“치한입니까?”
“…네?”
“신고해 줘요?”
스산한 시선이 뒤로 넘어왔다. 일상적인 물음을 묻듯 차분한 음성에 승원은 잠시 당황해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닙니다…….”
남자는 음, 하고 목을 울렸다. 승원을 위아래로 훑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남자는 미련 없이 걸음을 뗐다. 몇 초 전까지 장 사장에게 주먹을 날리고 차갑게 일갈하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여상스러운 태도였다.
길게 뻗은 다리가 유유히 걸음을 내디뎠다. 보지 않으려 해도 시선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작게 멀어지는 남자를 내내 응시하던 승원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더 늦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호텔 밖을 빠져나갔다.
칼바람이 찾아드는 바깥으로 나오기 무섭게 앞에 보이는 택시에 올라탔다.
“…….”
차가 출발할 무렵, 승원은 뒷 유리에 보이는 인영을 지켜보았다. 세단 운전석 바깥에서 기다리던 이가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일상적인 듯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어 타자, 비서로 보이는 이가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 모습이 작아져 점처럼 보일 때까지 승원은 창에 매달려 그를 지켜보았다.
기사의 배려 없는 운전을 느끼면서도 승원은 지그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이 내린다며 혼잣말로 불평을 해 대는 기사의 말을 들었음에도 승원은 어둠만을 응시한 채였다.
집 앞에 도착해 눈을 떴을 땐, 차창 위로 얇게 쌓인 눈이 하얗게 날리고 있었다.
뭉쳐 왔던 설움이 눈발보다 강하게 승원을 덮쳤다.
***
어질러진 집을 정돈하고 나서도 좀처럼 집 안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던 차현은 호텔로 들어가 잠을 청했지만,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일찍이 방을 나오던 참이었다.
집으로 가지 않고 회사로 바로 나갈 채비 후 복도를 빠져나온 차현의 걸음은 평소보다 신경질적이었다. 신년이고 뭐고 피곤하게 굴어 대는 주변인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참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하던 차현에게 갑작스레 목도한 엘리베이터 안의 작은 소란은 그의 신경을 더욱 곤두세우기에 충분했다.
몇 년 전, 복도에서 여자를 끌고 가려다 붙잡힌 변태 새끼를 봤을 때도 이런 비슷한 불쾌감을 느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우습게도 남자였다. 그것도 꽤나 낯이 익은.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방해받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소란을 잠재웠다.
차현은 제 데스크톱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정지된 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유정이 멋대로 틀어 놓아 시청해야 했던 연말 시상식 속 배우 윤승원의 소감 영상이었다.
말간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예사롭지 않고 어딘가 익숙했던 분위기까지. 붉은 기를 지우지 못하고 울 것 같은 얼굴을 아득바득 참아 내던, 엘리베이터에서의 그 남자와 동일했다.
“김 실장님. 스토리온 아십니까?”
그의 책상 앞에 반듯하게 서 있던 김 실장이 조금은 아연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일 외의 어떤 분야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기에 그는 머뭇거리며 차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드라마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아, 그럼 알죠. 윤승원 배우가 출연하기도 했고. 드라마 자체가 워낙 흥행을 해서…… 이번에 상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줄줄이 읊어대는 김 실장의 얼굴을 차현이 빤히 바라보았다.
“많이 아나 봅니다.”
옅은 웃음기와 함께 대답하는 그의 말에 김 실장이 잠시 주저하며 말을 더듬었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사인을 마친 서류를 전달하며 차현은 다시 물었다.
“윤승원 배우가 유명합니까?”
그의 말에 김 실장은 잘못 듣기라도 했다는 듯 눈을 크게 키웠다.
“엄청 유명하죠.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올해 광고 자리도 꽉 찼다는 이야기도 있고.”
“음.”
“지금처럼만 가면 올해 안에는 탑 찍을 듯합니다.”
“구설수 같은 건 없고?”
질문이었음에도 음률 없는 어투였다. 김 실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살살 저었다.
“저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만…….”
“스캔들도? 소문도 없습니까.”
“그렇게까진 모르겠습니다.”
“윤승원 게이입니까?”
“예?”
헛소리라도 들은 양 김 실장이 황당 어린 표정을 지었다. 권차현 대표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기에 김 실장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작 질문을 던진 당사자는 남의 일인 듯 김 실장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찌 됐든 김 실장이 큰 목소리로 되묻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소리인 듯했다.
“…그런 얘기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렇군요.”
“항상 행동거지 좋다고 소문난 배우라고 알고 있습니다. 스캔들도 없고 미담은 많고.”
“김 실장님.”
“예, 대표님.”
“윤승원 팬입니까?”
“…예? 아니…….”
김 실장이 급하게 등을 세우며 말을 더듬었다.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려 내는 차현에 김 실장은 대충 뱉었던 말을 주워 얼버무렸다.
근래 워낙 유명한 배우이기도 하고, 안목과 실력도 좋아 그가 찍는 드라마는 전부 재밌게 봤던 김 실장이었다. 팬까지는 아니어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재능과 화제성을 갖고 있었다. 김 실장이 아는 이야기도 TV만 틀면 나오는 윤승원 관련 연예 뉴스 등에서 나온 이야기들이었다.
“됐습니다. 내가 사람을 착각했나 보네요. 들어가 보세요.”
“네. …아, 저기 대표님.”
주춤거리며 걸음을 떼려던 김 실장은 몸을 다시 멈춰 세웠다. 시선을 거두려던 차현의 눈길이 다시 김 실장을 향해 올라갔다. 무슨 용건이냐는 듯, 그는 질문 대신 표정으로 물었다.
“입술에 상처는… 다치시기라도 하셨나요?”
“아, 이거.”
차현이 제 입술을 만졌다. 약을 바르긴 했는데, 덧난 부분이 아직 아물지 않은 듯했다.
“별거 아니에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 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 보세요.”
차현은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터졌던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영상을 재생하자 물기에 축축해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는 윤승원의 얼굴이 움직였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트로피와 관객석을 향해 소감을 발표하는 그에게로 ‘울지 마!’, ‘오빠!’, ‘윤승원 사랑해!’ 등의 부름과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지루한 것을 보듯 텅 빈 눈으로 영상을 지켜보던 차현이 포털 사이트에 ‘윤승원’ 이름을 검색했다. 담배 한 대도 꺼내 물었다. 후, 하고 태워 날린 연기 사이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름 석 자와 함께 떠오른 프로필 사진 속 인물은 이름만큼이나 맑고 깔끔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커다란 눈과 오뚝하게 솟은 코, 조금 도톰하게 나온 입술이 프로필 사진을 꽉 채웠다. 티 없는 단정함이 느껴지는 사진을 물끄러미 보던 차현이 잠시 당시의 상황을 반추해 보았다.
손에 닿았던 어깨의 떨림, 그만큼 겁에 질려 있던 얼굴. 사장님이라고 부르던 목소리.
“흐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앉아 필터를 쪽 물었다가 연기를 뿜었다. 팔걸이에 대고 있던 손가락이 다닥다닥, 리듬감 있는 소리를 만들었다. 커다란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그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냉연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곧 혀를 내밀어 입을 축였다.
곧 고민이 끝난 듯 깊게 들어가 있던 등이 세워졌다.
***
올 일이 없을 거라 다짐했던 호텔로 승원이 다시 발을 들인 것은 일을 벌이고 나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대충 껴입은 코트 위에 캡 모자와 마스크를 올려 쓴 승원은 달갑지 않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에서 내리고 있는 눈 때문인지, 회전문을 지나 들어가기 무섭게 두꺼운 카펫 같은 것들이 깔려 있었다. 승원은 대충 젖은 발을 카펫 위에 털어 내며 공간을 둘러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반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있을 리도 만무한 집 이곳저곳을 뒤지던 승원은 제 점퍼와 옷들의 버킷 확인을 마쳤을 때 즈음, 제가 호텔 방에서 반지를 잠시 빼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 사장이 커플링이라며 막무가내로 맞췄던 반지였다. 왜 끼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매일같이 삼킨 채, 승원은 항상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그가 강제로 선물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 족쇄 같은 고리가 꼴도 보기 싫어 잠자리가 끝난 후 해가 뜨기 무섭게 구석 테이블에 벗어 둔 것이다. 장 사장 쪽에서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아직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안전하게 이별하기 위해선 반지를 찾아내야 했다.
승원은 걸음을 서둘렀다. 카펫에 발바닥을 닦았음에도 매끈한 대리석 바닥은 다 털어 내지 못한 눈이 녹아 생긴 물기로 미끈거렸다.
위쪽으로 뻥 뚫려 있는 높은 천장엔 은빛으로 별처럼 빛나는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커다란 공간에 잔잔한 피아노와 첼로 연주가 흘러나왔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정장을 쫙 빼입고 주위를 돌아다니는 직원들, 저 멀리 붉은 카펫이 넓게 깔린 곳에 차를 즐기는 이들이 보였다.
자주 드나들던 공간임에도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질감처럼 느껴지는 몸을 꿋꿋하게 이끌었다. 프런트에 다다르자 목을 반듯하게 세운 직원이 승원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승원이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엊그제… 새해로 넘어가는 날 하룻밤을 묵었었는데요. 그 방에 반지를 놓고 온 것 같아서요. 확인해 주실 수 있나요.”
“아, 몇 호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1807호요.”
직원은 그의 말에 모니터를 확인해 보고는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승원은 괜스레 치미는 초조함에 손을 프런트 위에 탁탁 부딪혔다. 옆쪽에선 젊은 여자가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스크로 가려져 있는 얼굴로 손을 올려 괜히 한 번 더 가렸다.
전화를 걸며 이것저것 확인을 하는 직원의 곧은 눈썹이 시시각각 구겨졌다 반듯해지기를 반복했다. 난감한 눈치로 승원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고, 승원은 미리 직감해 버렸다.
그때 살짝 웅크리고 있던 직원의 등이 곧게 세워졌다. 승원을 보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시선이 승원보다 뒤쪽에 있었다. 예의를 차리듯이 눈인사를 건네는 직원을 보고 승원도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냉기가 느껴지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점차 가까워지는 구두 소리와 함께 상대가 승원을 향해 다가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했던 남자의 얼굴은 잠깐 보았던 인상치고는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승원의 앞에 멈춰 선 남자는 인사도 없이 입을 뗐다.
“반지 찾습니까?”
“……어, 대표님이 어떻게-.”
프런트 직원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표님? 승원이 멍한 얼굴로 다가온 남자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상대를 두고 남자는 여상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찾을 필요 없습니다. 나한테 있어요.”
“…그게 무슨.”
머뭇거리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원을 확인하고 승원이 급하게 입을 뗐다. 당황이 서린 목소리가 가팔랐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
“그쪽은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말 허리를 절단한 남자가 날카로운 턱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다짜고짜 자신을 데려가려는 남자에 승원은 잔뜩 경계를 한 채 자리에 발을 묶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거 아닙니까? 그쪽 반지.”
조그마한 비닐 팩에 싸인 반지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금색의 링 위로 작은 보석 장식이 달린 반지는 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반지를 확인하고 미세하게 떨리던 눈동자가 다시 남자를 향했다. 자초지종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며 남자가 간단히 말했다.
“일단 따라와요. 얘기해 줄 테니까.”
***
방문을 열어 룸 안쪽으로 안내하는 남자에 승원은 다시 가던 걸음을 멈췄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남자가 질린다는 얼굴로 승원을 바라보았다.
“나 의심합니까?”
“안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나온 복도로 승원을 데려온 남자였다. 다 같은 객실임을 알았지만, 굳이 그 많은 공간을 두고 이곳까지 찾아온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승원은 그가 장 사장을 때리는 광경까지 목격했으니.
“내가 그쪽을 해칠 사람으로 보여요?”
장 사장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던 남자가 말했다.
“보는 눈이 많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윤승원 씨 쪽을 배려해 준 건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감이네요.”
승원의 눈이 다시 한번 크기를 키웠다. 자신을 모를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직접 이름을 불리는 건 느낌이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저를 알아보면 가만히 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기에, 얌전하기만 했던 남자가 자신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런 꼴을 보이고도 입 다물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고.
문에 기댄 채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적당한 귀찮음과 묘한 피로가 드러났다. 침을 삼켰다. 묶였던 발을 풀고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를 따라 향한 룸은 장 사장을 따라 드나들었던 방보다도 훨씬 넓은 방이었다. 가구와 가구 사이마다 공간이 널찍한 객실의 창은 벽을 전부 창으로 뚫어 놓은 것처럼 드넓었다.
곧장 테이블이 있는 자리에 앉은 남자가 승원에게 턱짓했다.
“앉으세요.”
승원은 느릿한 걸음을 떼고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이서 정면으로 마주한 얼굴은 엘리베이터에서 스치듯 봤을 때보다 더욱 또렷하고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다. 표정이 거의 없는 얼굴이 지루한 눈동자로 승원을 훑었다.
“마스크는 계속 쓰고 있을 셈인가.”
얼굴이 궁금하다기보다는 대화 중에 쓰고 있는 마스크가 거슬린다는 뜻이었다. 승원은 마스크를 내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조금 낫다는 듯 시선을 떼어 낸 남자가 손에 있던 것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이거 맞아요?”
건조한 손이 떨어져 나가고 나타난 반지를 승원은 얼른 주워 들었다.
“이게… 왜 그 쪽한테 있는 겁니까?”
“찾아 준 사람한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의심부터 하는 겁니까.”
뱉어 내는 말엔 고저도 온기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승원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물건을 찾은 건 다행인 일이었지만, 괜히 저를 들쑤시는 상대와 실랑이를 하고 싶진 않았다. 묘하게 가시가 돋친 채로 자신을 떠보려는 남자에 승원은 침착하게 침을 삼켰다.
반지만 전해 주고 모른 척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그가 어디서 어떻게 승원의 반지를 찾았든, 남자는 그 이상으로 승원에게 관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자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굳이 승원을 직접 찾아오는 수고를 더해 불필요한 자리를 만들어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용건을 늘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승원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못 볼 꼴까지 함께 관망했던 자였기에.
결론적으로 반지의 주인을 찾아 주겠다고 나타난 사람의 태도로는 볼 수 없었다.
“저한테 하고 싶으신 말이 따로 있는 겁니까?”
승원의 물음에 남자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깔끔하면서도 심히 차가운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는 그냥 보아도 평범한 인물 같아 보이진 않았다. 입고 있는 정장 속 셔츠나 재킷 등의 브랜드를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가 소화해 낸 맵시와 태만 보아도 고가의 명품임을 대번에 드러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 위로 빼곡한 속눈썹이 보였다.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다시 올린 남자의 눈동자는 불투명한 남색이었다. 지그시 다물려 있던 매끈한 입술이 열렸다.
“반지, 급한 겁니까?”
“…급한 거면 어쩔 셈입니까.”
승원은 긴장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깜박이던 눈도 그대로 정지한 채 올곧게 남자를 응시하기만 했다.
“일단 통성명부터 하죠. 나는 윤승원 씨를 알고 있으니 소개는 내 쪽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가 베이지색의 멀끔한 각을 가진 명함을 건넸다. 승원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한편, 얼떨결에 그가 건넨 명함을 받아 들었다.
“권차현입니다.”
승원은 명함에 단조롭게 새겨진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빳빳한 종이 질감은 손으로 휘어도 구겨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ZENON
권차현 대표.
익숙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승원이 자주 봐 왔던 로고였다. TV에서도, 지나다니며 흔히 봤던 광고판에서도, 하물며 드라마 현장에서까지. 그간 봐 왔던 질 좋은 가구들 위에 박혀 있던 단정한 로고였다.
승원은 마른침을 삼키고 그의 이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글자를 다시 새겨보았다. 로고를 확인하고,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이름 옆에 있는 ‘대표’라는 단어를 다시 보면 볼수록 승원은 지금 제 앞에 돌아가고 있는 이 상황이 더더욱 납득되지 않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서두를 떼야 할지 승원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손에 들린 명함만 끈기 있게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 이렇게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승원은 마침내 운을 뗐다.
“그래서… 지금 어쩌자는 건가요.”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어져 나온 말엔 망설임이 없었다.
“내 애인 행세 좀 해 줍시다.”
“네……?”
방금 들은 말이 머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귓전을 때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말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등을 느른하게 기댄 몸이 비스듬한 시선으로 승원을 응시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내 애인인 척해 달라고요.”
승원은 순간 탁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반지를 보았다. 그간 겪었던 일들이 머리를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 늙은이와 같은 반지를 나누어 끼고, 다리를 벌리고, 입을 맞추고. 장 사장과 지금까지 했던 놀이를 정확히 명명할 순 없겠지만, 애인 행세라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설명일 것이다.
꼿꼿하게 굳어 버린 승원이 혼란에 잠겨 있는 사이, 권 대표는 이어서 덧붙였다.
“나한테 고맙지 않아요? 귀찮은 인간 치워 주고, 반지까지 찾아 줬는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나는 윤승원 씨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습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남자가 잠시 미간을 구겼다.
“설마 나를 그 변태 새끼랑 같은 부류로 보는 건 아니죠?”
장 사장을 ‘변태 새끼’라고 일컫는 남자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했다.
떡 벌어진 남자의 몸은 작게 움직이기만 해도 그 몸짓이 커서 위협적이었다. 그가 느른하게 널고 있던 몸을 반듯하게 세워 내자 그림자가 덮칠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승원은 작게 몸을 움츠렸다. 비주얼만으로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남자는 장 사장보다도 훨씬 무섭고 싸늘해 보였다.
“내가 지금 그쪽한테 하는 제안은 저급한 기대나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내 옆에서 아양을 떨라는 것 역시 아니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내 애인인 척, 남들 앞에서만 행세하면 된다는 거예요. 쇼윈도 부부 같은 거라고 말하면 이해가 됩니까?”
“…그걸 왜 저한테.”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진 않았다. 수많은 사람 중, 다른 사람도 아닌, 그것도 남자인 승원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윤승원 씨 연예인인 거 압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알고요.”
“…….”
“당연히 윤승원 씨 이미지엔 타격 갈 일이 없도록 할 거고.”
“……아니.”
“역할극 하듯이 하면 됩니다. 내가 미리 얘기해 주는 자리에서만 그렇게 해 주면 되고, 영역 밖에서는 손도 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머릿속의 실들이 잔뜩 엉겨 붙어 꼬인 기분이었다. 간단히 설명하는 그의 말 때문일까, 말만 들었을 땐 그리 어려운 일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선뜻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는 건, 지금 제가 제정신으로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어서였다. 모든 게 갑작스레 들이닥쳤기에 승원은 찬찬히 무언가를 헤아려 볼 시간이 부족했다.
본래 오늘의 목적이었던 반지가 눈앞에 있음에도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승원의 시선은 곧 그 옆에 있던 그의 명함으로 다시 돌아갔다.
“기한은 3개월 정도로 하고 싶은데. 부탁 들어줄 수 있겠어요?”
마치 저녁 약속이라도 잡는 사람처럼, 그는 쉬운 일을 하듯 승원에게 물었다. 곧게 비친 눈동자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잠깐의 해방을 비웃듯 거짓말 같은 물음이었다.
제안보단 강요에 가까운 말투였다. 거절할 수 있는 상대인지 역시 분명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때렸다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보복하는 이는 드물다. 남자는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어딘가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남자의 인상은 명함을 받고 몇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은 지금도 역시 똑같았다.
잇새로 초조한 숨이 새어 나왔다. 승원이 혼란과 고민을 겪고 있는 사이, 권 대표는 기다리기 어려웠는지 손톱을 매만지던 행위를 멈추고 간단히 물었다.
“윤승원 씨 지금 제일 해결하고 싶은 게 뭡니까?”
“…네?”
“골치 아픈 일 없어요? 아니면 원하는 거라든지.”
“…….”
“그 정도 명성에 돈은 필요 없을 테고. 돈을 빼면.”
그 말이 꼭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다는 유혹처럼 들렸다. 승원은 내렸던 고개를 들고 저를 곧게 바라보고 있는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독히도 일관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윤철 대표, 맞습니까?”
“……예?”
잘못 들었나 싶어 승원이 떨어지려던 고개를 다시 퍼뜩 들었다. 똑바로 들은 게 맞다면,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장 사장의 본명이었다.
“…그걸 어떻게.”
“그 변태 새끼 그쪽 소속사 사장 아니에요?”
“…맞, 맞는… 맞습니다.”
말을 흐리면 안 될 것 같아 승원은 얼른 끝을 맺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주먹을 꽉 쥔 손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권 대표는 이미 모든 걸 아는 얼굴이었다. 부정해 봤자 소용이 없을 듯했다.
“윤승원 씨, 그 남자랑 잡니까?”
원색적인 표현에 승원은 입을 다물었다.
“반지도 그 남자 거고.”
“…그걸.”
“그 남자 반지만 아니었어도 내 입술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승원은 문득 남자의 입꼬리 끝을 바라보았다. 눈에 띄지 않아 여태껏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티끌 같은 상처가 여태 아물지 못한 채였다.
“그 남자한테서 벗어나게 해 주겠습니다.”
“…….”
“그럼 내 부탁 고민할 필요도 없잖아요?”
승원의 아랫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맞은편의 상대가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알고 자신에게 이런 협박과도 같은 부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의 제안은 승원의 마음을 분명히 흔들었다.
“번복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고민해 보고 연락하세요.”
권 대표의 손끝이 승원의 앞에 있는 명함에 향해 있었다. 승원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누군가에겐 제안할 일이었습니다. 공교롭게 윤승원 씨가 그 첫 번째 누군가가 된 것뿐이고. 윤승원 씨가 거절한다 해도 어차피 대안도, 사람도 많지 않겠습니까.”
“…….”
“나에겐 지금 내 상황이 급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윤승원 씨가 아니어도 전혀 손해 볼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윤승원 씨는 어때요.”
그는 이미 승원의 머릿속을 다 꿰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팔짱을 끼운 상체를 테이블 위로 기댄 남자가 승원과 가까이 눈을 마주쳐 왔다. 이마부터 시작해 시선을 빙 돌려 승원의 얼굴을 핥아 냈다. 더없이 건조한 눈으로 그가 목을 울렸다.
“그 남자한테 다시 가고 싶어요?”
“…….”
“나 아니고서야 다시 그 반지 들고 돌아가야 하는 신세 아닙니까.”
반듯한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승원을 놀리듯 지껄이는 말투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승원은 지금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도 밑으로 떨어질, 가망 없는 벼락에. 찰나의 일탈처럼 맛보았던 자유도 잠깐뿐이었다. 이별을 고하면 제 처지가 어떻게 될지 머리를 쥐어 예견하지 않아도 뻔했다.
손에 땀이 서렸다. 권 대표의 말을 올곧이 믿는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승원은 지금 당장 어떤 도움이라도 필요했다. 그게 썩은 동아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기회일지 아닐지도 판단이 서지 않는 제 손의 선택권을 승원은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쭉 말이 없는 승원에도 권 대표는 계속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거절하든, 수락하든 연락은 주면 좋겠습니다. 그게 예의니까.”
“…그게 다인가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몸이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승원이 무미건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만 하면 되는 건가요, 정말?”
권 대표가 미소를 보였다. 날렵한 턱 위로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것만 하면 됩니다.”
자신에게 물은 승원의 의도를 파악했다는 듯 미묘한 웃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승원은 곧이어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숨을 한 번 들이켠 후 나지막이 말했다.
“…할게요.”
승원의 손엔 권차현 이름의 명함이 꾹 들려 있었다.
***
어떤 사람들은 승원이 정상의 고지에 다다랐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들은 승원이 이미 정상에 올라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저 정도 위치와 명성으로는 더 얻고 싶은 것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이루지 않았냐고 할 만큼, 대중들은 승원이 완벽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남들의 부러움으로 제 가치를 평가하고 만족한다고도 하던데, 대중의 눈과 관심으로 먹고사는 직업임에도 승원은 좀처럼 그게 되지 않았다. 그들의 환호만으로 자신에게 만족하기엔, 승원은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제가 아는 윤승원이라는 남자는 누구보다 형편없고 불행했다.
아무것도 몰라 방황하던 시절, 길거리 캐스팅으로 소속사에 들어가 마주한 이가 장윤철이었다. 인상부터 껄끄러웠던 장윤철은 번지르르한 말로 승원을 구슬리며 그를 회유했다. 좋은 자리에 꽂아 준다며 승원에겐 가히 과분한 제안을 내놓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돈이 급한 승원을 달콤한 말로 꼬드겼다. 아픈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 주겠다고 했고,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던 승원에게 용돈을 지급해 주겠다고 했다.
승원은 그게 어떤 대가로 떨어지는 돈인지 몰랐다. 그저 돈이 급했다. 아등바등 살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꿈을 이루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려운 집안을 도와준다는 말에 바보같이 속아 버렸다. 당장 억척스럽고 가난한 형편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그렇게 교묘하고 지독한 장 사장의 간섭이 시작됐다. 승원은 장 사장과 데이트를 하고, 섹스를 하며 돈을 받았다. 장윤철은 그걸 용돈이라고 했다. 그러곤 아픈 아버지의 병원비를 대 주었다.
취미로 엔터 일을 하는 듯한 장 사장은 돈이 많았다. 그 덕에 승원은 찍소리도 못 한 채 그에게 붙어 있어야 했다. 선의이고 챙김인 줄 알았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빚과 인질처럼 매여 버렸다.
돈이라는 악마에 묶여 고분고분해진 승원을 장 사장은 역겹게도 진심으로 아꼈다. 조카뻘 되는 승원을 정말 제 애인이라도 되는 양 끼워 두고 예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장 사장은 승원을 그럴듯한 배우로 키우고 싶어 했다.
장 사장이 소개해 준 정신도 감독은 명성이 자자했다. 그가 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나오는 족족 성공했으며, 정 감독의 어깨에 올라 꿈을 이룬 자들도 많았다. 부푼 기대를 안고 그를 찾아간 승원은 며칠 뒤, 호텔 호수가 적힌 쪽지를 들고 침대 위에서 정 감독을 다시 만나야 했다. 잠깐의 치욕으로 무한한 성공을 가질 수 있다는 그 같잖은 설득이, 승원을 또 한 번 옥죄었다.
정 감독과 장 사장은 승원을 돌아가면서 공유했다. 장 사장은 승원의 성공이 곧 자신의 덕이라고 이야기했고, 정 감독은 온갖 TV와 인터뷰에서 승원을 들먹이며 그가 자신의 뮤즈라고 이야기했다.
남들이 인정한 성공을 쥐고도 정작 승원의 손에 든 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맥없는 모래뿐이었다.
얼떨결에, 운이 좋아서, 편법으로, 저급하게.
승원이 정상 가까이에 올라오며 들어 왔던 모진 말들은 어느덧 승원이 자신을 객관화하는 말로 가꾸어져 있었다.
***
어둠이 가득한 거실의 커튼을 치자 말도 안 되게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과한 빛을 쐰 탓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승원은 비척대는 몸을 이끌고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벽시계의 시침이 벌써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약속은 바로 다음 날 이루어졌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계획에 승원은 더 덧붙일 새도 없이 그의 말에 전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음 날 계약 이행과 관련하여 만남을 갖는 게 어떻겠냐는 권 대표의 말에 알았다고 얼버무려 대답한 승원은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말엔 거절 의사를 표했다.
예의상 건넨 말인지 더 묻지 않은 그는 멀끔한 몸을 일으키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각이 진 듯 딱 떨어진 걸음의 남자가 멀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내 침대에 처박혀 잠만 자던 승원은 뒤늦게 일어나서야 시간을 확인하고 약속 시각까지 불과 3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비하고 나가는 데까지, 그리고 상대가 승원에게 어려운 상대라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이렇게 여유를 피우고 있을 시간은 없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멍하니 TV에 시선을 둔 채 리모컨 버튼 누르기만 지겹게 반복하던 승원의 손이 뚝 멈췄다.
연예 뉴스에서 인터뷰하는 제 모습이었다.
드라마를 끝마치고 광고 촬영을 하던 3주 전 즈음 받았던 인터뷰였다. 화면에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푹 패여 수척했다. 남들은 그저 체중 감량을 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테지만, 당시 승원은 입맛도 없었고, 억지로 먹은 것도 전부 토해 낼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었다.
승원을 지칭하는 온갖 멋스러운 수식어가 화면 가득 자막으로 띄워 올라가고,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리포터가 그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 다가오는 시상식 노미로 지목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 저를 택해 주셨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쁘죠. 작품을 잘 만난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한 것 같-.
팟. 승원은 도저히 더 보고 싶지 않아 TV를 꺼 버렸다. 가식에 젖어 있는 얼굴.
리모컨을 바닥에 던진 승원이 소파 등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집 안 가득 떨어지는 햇빛이 성가셨다. 커튼을 괜히 쳤나 싶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끈끈이에 잡힌 듯 꽉 붙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누워 있던 몸을 간신히 일으킨 것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진작 충전을 하지 않아 방전되기 직전인 핸드폰 화면 상단엔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조금 늘어지는 듯한 신호음이 딸깍, 끊겼다. 상대편의 공기가 귓속을 타고 넘어왔다. 승원은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 윤승원입니다.”
- 무슨 일입니까. 6시 약속인데.
전파를 타고 전달되는 목소리는 원래의 음성보다도 낮고 건조했다. 승원은 상체를 완전히 들고 머리를 넘겼다.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 약속을 미룰 수 있을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게 뭐라고, 승원은 조퇴증이라도 끊으려는 학생처럼 긴장이 되었다.
- 그쪽 직종들은 약속 미루기가 종특입니까?
비틀어 쪼는 어투였다. 나긋하게 내던진 말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틈에 권 대표가 물었다.
- 이유가 있어요? 나와 한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겁니까? 선약은 내 쪽일 텐데.
“…아니요. 그게 아니라,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오늘은 식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저 컨디션의 난조였다. 매번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우울이라는 이름의 불청객도 한몫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다시 고쳐 잡은 승원이 몸을 바짝 웅크렸다. 불편한 침묵을 끝으로 전해 들어올 대답을 초조히 기다렸다.
- 저녁을 먹기 어렵다는 겁니까?
“…네.”
- 다른 약속은 없는 거고요.
“네. 맞습니다.”
- 그럼 약이라도 챙겨 먹고 좀 자지 그래요.
“…네.”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여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승원은 멀거니 대답했다. 나무라면 나무랐지, 저런 말을 꺼낼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저를 걱정해 주는 듯 부드러운 말로 내뱉은 남자의 목소리에 승원은 늘어지는 몸을 다시 등받이에 깊이 기댔다. 잠시 긴장으로 움츠렸던 몸이 뜨거운 물을 맞은 듯 삭 녹아내리는 듯했다.
- 지금이 3시니까. 음… 오늘 밤에 데리러 가도 되겠습니까?
“…네?”
- 저녁은 못 먹을 거 같다니, 식사는 건너뛰는 걸로 하고 9시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른 안심은 안 되는 거였는데. 승원은 소파 쿠션을 가져와 얼굴에 묻어 버렸다. 꼬투리를 잡을 구간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니 9시까지는 시간이 충분했고, 그의 말대로 약을 먹고 자고 일어나도 남을 듯한 여유였다.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좋습니다.”
- 그럼 그때 다시 봅시다. 집으로 데리러 갈 테니 주소는 문자로 찍어 두고, 그때까지 준비하고 있어요.
“…데리러 오시는 겁니까?”
- 싫어요?”
“…아닙니다.”
- 그럼 그때 봐요.
미련 없이 뚝 끊긴 전화를 승원은 한참 들여다봤다. 1분씩 흘러가는, 느리다면 느린 시간이 갑자기 급박하게 느껴진 그는 늘어져 있던 몸을 어영부영 일으키고 부엌으로 향했다. 처방받은 약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영양 보조제만 챙겨 먹은 승원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독이 밀려왔다. 침대에 누운 채 허공 위로 손바닥을 들어 보이던 승원이 두 손을 강하게 깍지 끼웠다.
몸속에 까만 불순물이 낀 것처럼 답답하고 쓰라렸다. 원인이라도 알면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깍지를 끼운 두 손을 그대로 눈 위에 덮었다. 차가운 손이 뜨거운 눈시울 위로 가득 내려앉았다.
***
니트 한 장을 챙겨 입고 위에 두꺼운 패딩을 걸쳤다. 대충 다듬은 머리를 거울로 확인하던 승원은 살이 쪽 빠져 핼쑥해 보이는 뺨을 만지작거리다 모자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새해를 맞이한 겨울의 밤은 추웠다. 집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얼굴 위를 가르는 냉기 어린 바람에 승원은 목을 바짝 움츠리고 계단 밑으로 내려왔다.
검은 외제 차 한 대가 깜빡이를 켠 채 승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게 윈도 틴팅이 칠해진 차의 내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의 문을 열기 무섭게 운전석에 타고 있던 권 대표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승원에게 말했다.
“앞에 타세요.”
혼자 왔을 줄은 몰랐는데. 승원은 힘없이 닫아 제대로 잠기지 않은 문을 다시 고쳐 닫고 앞자리로 올라탔다.
“문 하나 제대로 못 닫아서 어떡합니까.”
인사보다 먼저 나온 비아냥이었다. 괜히 입을 축인 승원이 이번엔 힘껏 문을 끌어당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닫히는 차 문을 권 대표가 무신경하게 바라보았다.
“혼자 오셨네요.”
“그럼 나 말고 누가 옵니까.”
승원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차는 망설임 없이 출발했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차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세련된 내부 디자인을 곁눈질로 훑어보던 승원은 괜히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창에 비치는 날렵한 옆얼굴에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좀 쉬었습니까.”
승원의 오피스텔 단지를 빠져나갈 때 즈음 그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승원은 그가 운전하느라 제 얼굴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요.”
9시가 되도록 내내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아 커튼을 닫고, 이불을 이마 끝까지 덮고, 노래도 들어 보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영양가도 없는 주제에 한 번 가지를 치기 시작한 생각들은 끊임없이 승원의 머릿속을 파고들었고, 가위 비슷한 것을 계속 경험하다가 얕은 수면만 반복했다. 이 짓도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으니 대수롭진 않았다.
“저녁 안 먹었겠네요.”
“네. …대표님은 드셨나요?”
“진작에 먹었습니다.”
핸들을 돌린 권 대표가 이어서 물었다.
“늦긴 했는데 뭐라도 먹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그냥 가죠.”
“근데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문득 궁금해졌다. 목적지도 모른 채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인지한 탓이었다. 핸들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던 권 대표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되게 일찍도 물어보네.”
“…….”
“우리 집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벨트를 매만지던 승원이 고개를 휙 돌렸다.
“대표님… 집이요?”
“제일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어딜 가든 다른 사람들 눈은 피하지 못할 텐데. 윤승원 씨는 계속 눈치 보며 다녀야 할 테고. 그건 같이 다니는 나도 불편하고.”
납득이 되어 승원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람이 많은 곳은 질색이었다. 항상 머리가 바글바글한 곳에서만 일을 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럿이 모여 있는 사람들의 숨 막히는 목소리만 들어도 숨이 막히고 현기증이 일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고 한참 도로 위를 달리던 차량이 신호에 막혀 멈췄다. 정적이 감도는 공간 속에서 나름 안정을 찾아가던 승원은 문득 고개를 틀었다가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는 권 대표를 보았다.
“……음.”
전방이 아닌 대각선 방향 쪽을 바라보고 있는 권 대표의 시선을 쭉 따라가던 승원은 마침내 창밖에 붙어 있는 제 커다란 화보를 마주하고 말았다.
백화점 건물에 붙어 있는 사진이 벽을 다 가릴 만큼 거대했다. 드라이로 빠짝 올린 머리에 가슴 쪽이 다 벌어진 셔츠 차림을 한 승원이 눈을 내리깐 채로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습니다.”
“…….”
귓가에 들린 나지막한 목소리에 승원이 흠칫 놀랐다. 사진 속 남자와 제 옆의 남자를 비교하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 뒤쪽이 뜨거웠다.
백화점 벽에 붙어 있던 승원을 바라보던 눈이 옆자리 승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괜히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쓴 승원이 헛기침을 하며 옆 창가로 얼굴을 돌렸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어디든 뒷좌석만 주로 이용하던지라, 앞자리에서 보는 넓은 차창 너머의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도로를 비추는 수많은 조명과 불빛들이 도시의 생기를 유지시켜 주었다.
층 높은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차량을 반기는 센서 등이 줄줄이 불을 켜며 길을 밝혔다. 널찍한 주차장은 지나는 곳곳마다 고급스러운 차들이 반짝이는 광택을 드러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의 뒤를 조용히 뒤따르며 승원은 고요한 주변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고급 주택이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빌딩 같은 집일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38층에 도달했고, 승원은 낯설기만 한 복도를 권 대표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현관문을 열고도 이어진 긴 복도를 지나 신발을 벗고 들어간 공간은 드라마 세트장에서나 볼 법한 멋과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거실엔 띄엄띄엄 몇 없는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멀끔한 공간은 심플함을 넘어 휑해 보이기까지 했다.
“손 씻고 잠깐 앉아 있어요.”
승원을 식탁 쪽으로 안내한 그가 의자를 꺼내 자리를 내주었다. 권 대표는 코트를 벗으며 또 다른 긴 복도로 들어섰다. 딱딱한 아일랜드 식탁 위엔 영양제와 차 종류의 분말 가루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매끈한 식탁을 매만지던 승원은 참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손을 씻고 나온 승원은 무언가에 홀린 듯 넓은 창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렇게 높은 층에서 전망을 내려다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둡게 내린 밤하늘 아래 검게 물든 땅과 강의 경계가 모호했다. 아까 지나온 다리가 저렇게 반짝이는 줄 몰랐는데.
“뭐 합니까.”
“…아. 야경이 예뻐서요.”
“앉아 있으라고 한 말은 어디로 흘려듣고.”
치켜 올라간 눈썹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승원은 괜스레 민망해지는 마음에 바지춤에 손을 쓱쓱 닦으며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권 대표는 승원을 등지고 무언가를 접시에 담아냈다. 탁탁, 소리가 났다. 입술을 달싹이던 승원이 얌전히 기다리고 있자 비싸 보이는 접시 위에 그만큼 먹기 아까워 보이는 과자 종류들이 놓여 있었다. 대충 식탁 위에 얹어 놓은 그가 자리에 앉았다.
“먹어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손님 대접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그래도 승원이 선뜻 손을 들지 못하자 그는 빨리 먹어요, 라고 무감동하게 덧붙이며 그릇을 승원의 쪽으로 밀어 주었다.
안 먹으면 그것도 그거대로 신경이 쓰일 것 같아, 승원은 그냥 손에 집히는 쿠키를 아무거나 입에 넣고 씹었다. 달콤 쌉싸름한 시나몬 맛이었다.
“입에 좀 맞습니까?”
뜨거운 차까지 내온 권 대표가 빈 컵에 열이 폴폴 나는 액체를 담아 주었다. 꾸벅 인사한 승원이 입술에 차를 대는 순간, 권 대표의 이마에 흠칫 주름이 잡혔다.
“……아뜨-.”
커졌던 눈을 가늘게 뜬 권 대표가 승원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뜨겁습니다. 입술 거덜 낼 일 있어요?”
열이 붙은 혀가 얼얼했다. 혀를 찬 그가 티슈 몇 장을 뜯어 승원에게 건넸다. 오돌토돌 살이 일어난 듯한 혀끝을 살짝 내두르던 승원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권 대표가 본론을 꺼내 왔다.
“변태 새끼랑 이후로 연락했습니까?”
“…아니요. 안 했습니다.”
하지 않은 것은 맞았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연락 때문에 배터리가 방전될 정도였다. 고작 하루 이틀이었지만, 승원은 그사이에 장 사장이 자신의 집에 쳐들어오기라도 할까 싶어 문까지 걸어 잠그고 잠도 설쳤다.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험한 꼴로 끌려 나가는 상상까지 했었다.
“차단하세요.”
“…네?”
“앞으로 볼 일 없을 텐데, 괜히 신경 쓰는 것보다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
권 대표가 과자를 들어 제 입에 넣었다. 음식을 깔끔하게 넘긴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회사 옮기고, 수습은 내 쪽에서 알아서 해 주겠습니다.”
“…어떻게.”
“돈.”
명료한 대답에 승원은 순간 숨을 합 참았다. 그 구질구질하고 추잡했던 관계를 단박에 끊어 버릴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 다른 어떤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확실한 설득이었다.
식탁 위로 서류 하나가 올라왔다. 권 대표가 꺼낸 흰 종이엔 무언가 가득 적혀 있었다. 종이 뭉치를 그대로 승원의 쪽에 밀어 둔 그가 턱짓했다.
“윤승원 씨가 새로 들어갈 회사 계약서입니다.”
“…….”
“찬찬히 살펴보고, 당일에 가서 계약하면 됩니다.”
도깨비방망이라도 휘두르듯이 뚝딱하면 해결되는 것 같았다. 승원은 잘 읽히지도 않는 검은 활자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얇은 A4용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승원을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겨우 부탁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권 대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표님.”
“질문하세요.”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느릿하게 고개를 든 승원이 권 대표와 눈을 마주쳤다. 매끄럽던 눈썹이 잠시 찌푸려졌다.
“그때도 말하지 않았어요? 내 부탁 들어 달라고.”
제 말을 여태 이해 못 했냐는 투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부탁 하나 때문에 지금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건지 이유를…….”
말을 끝맺지 못하는 승원에 음, 작게 침음하던 권 대표가 차를 마셨다. 잠시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겨 있던 얼굴이 승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윤승원 씨한테는 이게 ‘이렇게까지’라고 이야기할 정도의 엄청난 일입니까?”
“…….”
“내가 부탁을 조건으로 윤승원 씨를 신경 써 주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게 나한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해 주고 있는 겁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거뿐이에요.”
다물어지려던 입술이 한마디를 더 남겼다.
“내가 윤승원 씨를 특별히 생각해서 위해 주고 있다는 그런 착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그 정도 파악은 할 줄 알잖아요.”
단호하게 선을 그은 남자는 멍한 얼굴의 승원을 미동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대답을 바라는 듯한 남자의 시선을 느끼며 승원이 침을 삼켰다.
“맞습니다.”
“이해가 됐으면 다행입니다.”
권 대표는 금방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윤승원 씨가 옮기게 될 회사는 아티스트도 꽤 많고 안정적인 곳이니 탈 없이 잘 케어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그 정도인 것 같고…….”
요기를 할수록 허기진 공간이 더욱 덩그러니 남는 느낌이었는데, 갑작스레 차오르는 거짓말 같은 포만감에 승원은 손을 내렸다. 권 대표의 말이 어느새 블러칠을 한 듯이 불투명하게 귀에 맴돌았다. 손을 내려 식탁 밑의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따끔한 통증과 함께 아프기만 했다.
다리를 벌리고, 반지를 받고, 원치 않은 관계를 지속하며 겪은 수모를 단칼에 끝내 준, 그걸로도 모자라 승원은 상상도 못 했던 것들을 대번에 이루어 주려는 눈앞의 남자에게, 겨우 이 정도로 보답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이제껏 제가 바쳐 온 모욕과 수치는 다 무엇을 위한 것들이었을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이상한 허망함이 자꾸 마음속을 짓눌렀다.
“윤승원 씨, 듣고 있습니까?”
단단한 식탁을 똑똑 두드리는 손짓에 승원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권 대표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반듯하게 승원을 응시한 채 묻고 있었다. 승원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얼른 과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중요한 얘기인데 넋을 놓고 있는 것 같아서.”
“…아닙니다. 듣고 있었습니다.”
“입에 묻은 거나 닦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권 대표가 검지로 자신의 왼쪽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를 거울삼아 그대로 제 입술 언저리를 매만지던 승원은 붙어 있는 부스러기를 얼른 떼어 내고 새빨개진 귀를 감쌌다. 미지근해진 차를 마시고 있자, 그가 물었다.
“돌아오는 주말에 바쁜 일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회사를 나오게 되니 없을 터였다. 권 대표는 그걸 뻔히 알면서 물었다.
“어차피 일이 있어도 빼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네.”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요.”
“…….”
“내 애인 행세는 그때 해 주면 좋을 것 같고.”
다과를 앞에 두고 오고 가는 이야기는 여상한 듯 흘러갔지만 일반적이진 못했다. 승원은 이해하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어떤 자리입니까?”
“친형 결혼식입니다.”
“……대표님 친형이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까지는 이해가 되는 척이라도 했다지만, 이번에는 좀처럼 그냥 넘어갈 순 없을 듯해 승원은 재차 물었다. 머그잔 위의 손톱이 초조하게 컵 위를 긁었다.
“사람 많이 부르지도 않고 작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자리니 보는 눈도 거의 없을 테고.”
“…….”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그냥 내 옆에 붙어서 흉내만 좀 내다 오면 그만이에요. 윤승원 씨 연기자잖아요. 연극 하나 한다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겠어요?”
“…왜 그렇게 하시려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승원의 물음에 권 대표는 눈썹을 크게 들썩였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런 질문쯤은 충분히 예상해 두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물 잔을 잡은 손을 둥글게 돌리던 손이 멈췄다. 입을 열기도 전부터 이미 귀찮음이 잔뜩 서려 있었다. 낮게 내리뜨던 눈을 든 그가 말했다.
“충격을 줄 생각입니다.”
“…….”
“결혼이 하기 싫어서. 어떻게 하면 내 결혼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거창한 듯 거창하지 않은 이유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님과 그에 대응하는 부잣집 도련님. 딱 그 정도의 투정처럼 보이는 이유.
“남자 애인을 하나 만들면 괜찮겠다 싶었고.”
느리게 말을 이어 나가던 권 대표가 승원과 눈을 마주쳤다.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윤승원 씨면 효과가 꽤 크지 않겠습니까.”
승원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를 망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잠시 찌그러졌다 되돌아왔다. 생각하기도 싫은 것을 질리도록 경험한 표정을 금세 지워 낸 그가 승원을 지그시 응시했다. 잘생긴 눈이 또렷했다.
“그래도 서로 간의 계약은 계약이니까. 서로 해 줄 일만 딱딱 지켜서 한다면 문제 될 것도 없을 겁니다.”
“…네.”
권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원은 남겨진 음식을 바라보다 키가 높아진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승원도 180에 가까운 키였지만, 권 대표는 누구와 견주어도 월등히 큰 키를 갖고 있었다. 앉아서 보고 있으니 그의 체격이 더욱 실감 났다.
“얘기는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치울까요.”
“…네. 도와 드릴게요.”
“됐습니다. 거실에 가서 앉아 있어요.”
단호한 거절이라 더 묻기도 민망했다. 크게 치울 것도 없던지라, 권 대표는 그릇과 컵들만 하나씩 정리하고 있었다. 승원은 어정쩡하게 일으켰던 몸을 다 세우고 조심스레 식탁을 빠져나와 거실로 향했다.
텅 빈 것 같은 거실은 이곳에 살고 있는 권 대표의 모습을 보아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여백을 남기고 놓인 가구들을 살피던 승원은 푹신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TV와 커다란 스피커, 턴테이블 같은 것만 놓인 공간은 희고 검은 것들의 연속이었다. 아마 권 대표는 깔끔함을 중시하고 지저분한 걸 딱 질색으로 여기는 사람인 듯했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권 대표는 아까와 다른 재질의 코트를 입고 나왔다. 차 키를 손에 든 그를 보자마자 승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용건이 끝나기 무섭게 나갈 채비를 할 줄은 몰랐다.
“데려다주겠습니다.”
“네.”
사양하진 않았다. 점퍼를 챙겨 입고 지퍼를 목 끝까지 잠근 승원은 앞장서는 권 대표를 따라나섰다. 길게 늘어진 복도마다 크고 작은 그림들이 틈틈이 걸려 있었다. 아깐 미처 보지 못했던 인테리어였다.
현관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권 대표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차례대로 길을 트며 비추던 센서 등이 승원과 권 대표의 머리 위를 환하게 비췄다. 갑자기 뒤를 돌아 저를 바라보는 그에 적잖이 당황한 승원이 입술을 우물쭈물거렸다.
“근데 얼굴은 언제 보여 줍니까.”
“…네?”
“그 모자 좀 벗어 보지 그래요. 볼 때마다 쓰고 있네.”
뒷말을 혼잣말처럼 짓씹으며 권 대표가 중얼거렸다. 흰 양말을 신고 있던 발이 작게 꿈틀댔다. 아랫입술을 짓 물던 승원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지금 핸드폰만 켜도 당장 볼 수 있는 게 제 얼굴일 텐데 굳이 모자를 벗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그 얘길 꺼낼 생각은 없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싶던 승원이 모자를 조심스레 들었다. 부스스한 머리가 함께 딸려 나와 얼른 손으로 매만졌다. 옷을 벗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요구를 부탁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모자 하나 벗는 건데. 뭐가 이렇게 창피하고 어색한지 몰랐다.
“…됐나요.”
모자를 잡고 있는 손이 쭈뼛거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채 승원이 재차 머리를 흔들었다. 마주 본 남자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렇다고 걸음을 뒤로 물리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 승원은 내린 시선만 유지한 채 다시 쓰라는 권 대표의 말을 기다렸다.
“윤승원 씨.”
그의 부름에 그는 자동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승원의 얼굴을 완전히 마주한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내린 눈을 깜박였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오목조목한 승원의 이목구비를 들여다봤다. 지긋한 시선을 피하기도 전에 권 대표가 먼저 뒤를 돌아 신발을 신었다.
“윤승원 씨는 실물이 더 낫네요.”
“감사… 합니다.”
권 대표가 현관문을 밀어 여는 사이, 승원은 잠시 넋을 빼고 있던 몸을 빠르게 움직여 허겁지겁 신발을 신었다. 발꿈치가 다 들어가지 않은 운동화를 바닥에 탁탁 부딪혀 구겨 넣은 승원이 그를 따라나섰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도로에 남아 있는 차들이 몇 없었다. 가슴을 가로지른 벨트를 꼭 쥐고 있던 승원은 앞만 바라본 채, 권 대표가 이끄는 차량에 부드럽게 몸을 기대었다. 그는 운전에만 집중하는 듯하다가도 승원에게 계획을 재차 설명하며 일러두었다.
“계약은 내일모레 연락이 닿을 때 하러 가면 됩니다. 이전 소속사 일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 약속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몸이 편치 않다고 했는데, 나도 급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래 잡아 두지 않으려 했으니까 내 쪽도 이해 좀 해 주고.”
권 대표의 말은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경계를 오가며 족족 그 양상을 바꿔 나갔다. 유하게 끝맺은 그의 어투에 고개를 찬찬히 끄덕인 승원이 모자의 챙을 어루만지다 벨트를 풀었다.
권 대표가 자신을 진득히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느릿하게 뜨고 감으며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 승원은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직접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대표님도 들어가세요.”
쾅 닫힌 차창엔 방금까지 보였던 남자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를 켜며 출발한 차가 점점 멀어졌다. 찬바람이 들이치는 겨울의 공기가 날카로웠다. 금방 귀 끝이 얼어붙는 듯한 추위에 승원은 얼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누른 손바닥을 쫙 펼쳐 보았다. 이 시간엔 항상 자리 잡고 있던 약지 위 반지가 이젠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승원은 한 것도 없이 늘어진 몸을 침대 위에 간신히 눕혀 놓고 있다가, 갑작스레 치미는 토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다. 권 대표의 집에서 먹었던 몇 안 되는 음식물들이 전부 쏟아져 나왔다.
쿨럭거리는 숨을 삼키고 메스꺼운 입 주변을 쓸어만지던 승원이 변기 안에 얼굴을 틀어박은 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의 집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끓어오르던 속을 용케 참아 낸 저 자신이 기특했다.
언제쯤 이 불규칙한 악화를 끝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현실감이 없던 권 대표의 말이 진정 사실이었는지 장 사장에게선 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비싼 반지를 내놓으라는 문자 한 통도 없었다. 조바심에 갖고 있던 반지를 승원은 참지 않고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 버렸다. 쾌청한 소리와 함께 작은 족쇄가 빨려 들어갔다.
새로 연락이 닿아서 찾아간 회사는 전에 있던 곳보다 훨씬 크고 높았다. 기획사의 정석 같아 보이는 건물 안은 여러 모니터가 이곳저곳에 깔려 있었고, 승원 말고도 소속된 아티스트들이 많은지 익숙한 얼굴의 액자들이 자주 보였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승원이 처음 발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승원을 맞이하던 배지현 실장은 이미 승원에 대해 전해 듣고 파악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승원은 괜한 의구심에 계약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지만, 그런 승원을 보고 배 실장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냐며 털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 대표님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승원 씨라서 특별히 눈여겨서 케어하라고 전하셨어요.”
신 대표는 이곳 SJ소속사 대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도 아마 권 대표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겠지. 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배 실장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세로로 널찍한 회의실 같은 방을 빠져나와 그녀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뗐다.
“이 층은 다 이런 식이에요. 회의나 일반 업무를 주로 보는. 위층엔 연습실이랑 개별 관리실이 있고.”
그녀의 말대로 다니는 복도마다 보이는 넓은 방들은 블라인드가 내려와 있는 창이 붙어 있었다. 깔끔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 서 실장이 쭉 말을 이어 나갔다.
“구내식당은 지하에 있고… 식사 안 하셨으면 들러 보실래요?”
“아, 괜찮습니다. 나중에 찬찬히 둘러볼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미소를 보이며 정중히 거절하는 승원에 배 실장이 방긋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전해 듣기도 들었지만, 승원 씨는 성격도 너무 좋으시다.”
“…에이, 아니에요. 제가 뭘….”
“개인적으로 엄청 팬이에요. 사인이라도 해 줄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승원이 결국 얕은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뱉은 말임을 알았기에 승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 드릴 수야 있는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어머, 왜 없어요. 너무 있지. 너무 있어서 문제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차오르던 긴장이 차츰 풀어졌다. 경계와 의심을 품고 찾아온 곳이었지만 금방 적당한 여유와 안정이 들어섰다. 회사 안을 하나하나 훑을수록 자신이 여태 대체 어떤 곳에서 버티고 지냈던 건지 더욱 믿기 힘들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매니저에 대한 건은 주말 내로 연락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승원 씨 같은 사람이 매니저 없이 다니는 것도 쉬운 일 아닐 텐데. 미안해요.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다 보니 일정이 늦어지네요.”
“저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이번 주엔 스케줄도 없어서.”
웃으며 말하는 승원에 배 실장이 다행이라는 듯이 눈을 가득 접어 웃었다.
사람을 불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실장의 말을 정중히 거절한 승원은 회사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 이틀 치도 채 남지 않은 약 때문에 새로 처방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번 승원을 진료하던 의사가 오늘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모니터 화면에 승원이 자주 들르던 3 진료실의 창이 꺼져 있는 것을 바라보던 승원은 아쉬움을 삼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
[나비위키_NABIWIKI]
이름 : 권차현
나이 : 32세 (현년도 기준)
국적 : 대한민국
직업 : 기업인
학력 : S대학 경영학 졸업
신체 : 189cm
-현 제논(ZENON) 대표이자 유성그룹 권유형 회장 막내 손자
-할아버지 권유형 | 아버지 권진혁 어머니 윤성희 | 형제 권주현 권희연
【유성그룹(YS) 권유형 회장의 손자이자, 권진혁 부회장의 막내아들. 집안의 기업 운영을 물려받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독립적인 사업을 진행해(ZENON), 현재 가구 업체 브랜드 1위를 달성. 제논 CEO로 자신의 사업을 운영 중이다.】
【189cm라는 장대한 키와 잘생긴 외모 덕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소문에 따르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도 하는데, 확인된 바는 아니다.】
권차현 이름을 사이트에 검색해 나온 내용을 줄줄이 읽어 나가던 승원은 궁금하지 않은 가십거리를 보고 내리던 스크롤을 멈췄다. 굴지의 재벌 집안이자, 대표 자리까지 맡은 자에게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 사사로운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말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그 밖에도 권 대표에 대한 이미지와 영상이 상당했다. 굴욕 하나 없는 사진들 속 권 대표는 전부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표정이 없었다. 반듯하고 진한 눈썹은 거의 같은 위치와 각도였고, 날카롭고 서늘함을 주는 눈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으로 곧게 다물린 입술은 꼬리를 올리는 사진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고, 장대한 기골임에도 슈트를 날렵하게 소화해 낸 몸이 유려했다.
본문 내용이 없는 기사 사진임에도 코멘트 창엔 베스트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xeo12*** : 연예인을 했어야 됨]
[minke*** : 주총 때 갔다가 봤는데 걍 탈인간임 ㄹㅇ 신이 몰빵한 듯ㅋㅋㅋㅋㅋ]
[1429kk*** : 제발 데뷔해 주세요 오빠ㅠㅠㅠㅠㅠ]
[que*** : 근데 누구랑 결혼할지 존나 궁금하다 이미 약혼은 했을려나? 둘째 아들 결혼한다는 얘기 있던데ㅋㅋ]
└ [yunj** : 응 벌써 나랑 함ㅋ]
└ [ioni** : 네? 뭔 소리시져; 이번 주에 저랑 결혼식 잡았는데;;;]
똑같은 패턴의 댓글들을 확인하던 승원은 핸드폰을 그대로 꺼 버렸다. 이렇게까지 주목을 많이 받는데 자신은 권 대표를 이제야 알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한 번 보면 쉽사리 잊기 힘든 외모이기도 했다.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신장과 체격을 가진 터라 어딜 가나 눈에 띌 것 같은 사람이었다.
겉보기로도, 실제 스펙으로도, 어떤 일에서든 아쉬움이 없어 보였는데.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한 이유는 뭘까. 묻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질문하기에는 승원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고작 몇 번의 만남으로 갑자기 애인 흉내를 내어 집안 행사에 불려 간다는 게, 여전히 승원에겐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기에 떨리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지금 드는 이 평온한 감정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이렇게 안일하게 있어도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이 되었다.
씻지 않은 몸이 노곤했다. 촬영장에서 몇 시간 버티던 몸이 그새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인지 오랜만에 밖에 나가 좀 움직였다고 체력이 바닥이었다. 침대에 머리를 붙이고 천장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하기 싫은 것들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을수록 피곤만 더욱 깊게 몰려왔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념들을 떨쳐 내고 승원은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을 덮었다. 까만 어둠이 찾아왔고, 아무도 저를 찾지 않는 듯 주위가 잠잠했다. 이대로 영원히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간헐적인 점멸이 감은 눈앞으로 찾아왔고, 곧 꿈속으로 잠식됐다.
***
권 대표는 주말이 다가오기 전, 승원에게 다시 연락했다. 그는 승원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장 사장이 지금도 연락을 하냐고 물어 왔고, 승원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저녁에 시간을 비울 수 있냐는 말에 고민 없이 알았다고 이야기한 승원은 권 대표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기까지 기다렸다.
7시에 찾아오겠다고 한 권 대표는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이 더 늦은 8시가 넘어서야 승원에게 연락을 남겼다. 약속 시각에 맞춰 내내 그를 기다리다 잠시 잠들었던 승원은 몸을 일으키고는 마스크를 끌어 올린 채 집 밖으로 나갔다. 어김없이 차가운 바람 아래, 권 대표의 차가 승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향수 냄새가 과하네요.”
늦게 온 점에 대한 말이라도 얹을 줄 알았던 권 대표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안전띠를 하기 무섭게 액셀을 밟는 남자를 바라보며 승원은 주먹을 꼭 쥐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일 텐데도 비꼬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밥은 먹었습니까?”
“안 먹었어요.”
잠시 정적이 있는 듯하더니 권 대표가 뒷말을 붙였다.
“평소에 누가 챙겨 주지 않으면 밥을 잘 안 먹습니까?”
성가신 듯 들렸지만 별다른 공격성은 띠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싱겁게 대답한 승원이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로 밖엔 차도, 사람도 많았다. 날이 추워서인지 다들 입고 있는 외투를 제 가슴 쪽으로 꽉 끌어안은 채 동글게 말아 낸 몸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승원은 창을 내렸다.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차디찬 겨울바람에 전방만 주시하던 권 대표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바깥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승원은 창에 비치는 권 대표의 시선을 뒤늦게 알아챈 사람처럼 느릿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히터까지 틀었는데. 뭐 합니까.”
“…향수 냄새가 너무 짙다고 하셔서.”
건조한 승원의 대답에 권 대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실소를 뱉은 그가 다시 앞을 보며 속도를 높였다. 삭막하게만 느껴지는 차 안이었기에 승원에겐 날카로운 바람도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듯했다.
“이제 됐으니까 닫죠.”
“…조금만 더요.”
“춥습니다. 감기 걸려요.”
“향수 냄새는…….”
“안 나니까 좀 닫아요.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권 대표는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이 적셔진 말투로 일축했다. 승원이 못 이긴 척 창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창을 올려 버렸다. 서늘하게 맞닿은 바람과 바깥에서부터 넘어오는 시끄러운 외부 소리가 전부 뚝 멎었다. 다시 둘만 남겨진 좁은 공간에 승원은 불편해지는 몸을 뒤척였다.
“컨디션이 별로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배가 고파서 그래요?”
“아닙니다…….”
일부러 저를 비꼬려는 듯이 구는 남자에게 승원은 구태여 반응하지 않았다.
“저 음악… 틀어도 되나요?”
“상관없어요.”
“그냥 라디오 같은 것도 좋을 것 같고…….”
“나랑 있는 게 불편한가 봅니다.”
승원이 눈을 들어 권 대표의 날 선 옆선을 보았다. 흘리듯이 중얼거린 권 대표가 패널을 몇 번 건드리니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사가 불분명한 외국 노래였다. 승원은 그제야 조금 숨이 트이는 것 같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도 저녁 안 먹었는데 먹고 들어가는 거 어때요.”
“대표님 안 드셨으면 그렇게 하는 것도.”
“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
“아니요. 전 없어요.”
정말로 입맛이 돋는 음식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서 대답한 말이었다. 하지만 권 대표는 승원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제가 가려던 목적지로 액셀을 밟았다.
“다이어트 해요?”
“아니요.”
“밥이 부담스러우면 샐러드라도 먹겠습니까.”
“…아니요.”
잠시 침묵하던 권 대표가 신경질을 냈다.
“아니요, 아닙니다. 이런 거밖에 못 합니까?”
“…….”
“TV에선 잘만 재잘대던데.”
그것도 다 만들어진 모습, 가꾸어진 모습이었다.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대본대로, 정석대로 움직이고 행동해서 가꿔 낸 결과였다. 처음엔 이 정도로 괴리가 크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승원은 TV에 나오는 자신과 그렇지 않은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본래 제 모습을 지우고 행동하는 게 익숙해진 탓이었다.
“원래 성격은 조용한 편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나랑 지내기엔 그편이 나을 겁니다.”
큰길에서 코너를 돈 차량이 한참 골목으로 들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김밥집이었다. 상표가 달린 간판이 밝게 빛나는 가게의 외관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깔끔해 보였다.
“내릴 겁니까? 아니면 기다릴래요?”
“내릴게요.”
“모자 없어요? 마스크 더 올려요. 귀찮아지는 거 질색이니까.”
짧게 경고한 권 대표가 먼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승원은 선바이저를 내려 잠시 제 모습을 확인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인데다가 마스크까지 위로 덮어서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승원을 권 대표가 몇 걸음 앞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는 외관만큼이나 깔끔했다. 다른 곳에 있는 체인점을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보다도 훨씬 편리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벽에는 일반 김밥집과는 다르게 유기농 채소와 고기 없는 건강식으로 마련된다는 문구가 크게 걸려 있었다.
아이보리와 하얀색의 패턴으로 칠해져 있는 벽을 바라보던 승원은 카운터 앞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는 권 대표의 뒤에 얌전히 섰다.
“사양할 생각하지 말고 골라요. 일부러 여기로 온 겁니다.”
“그냥 대표님이 드시는 걸로 먹겠습니다.”
“그러든지.”
권 대표는 곧장 주문을 기다리던 직원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선 딱히 집중하고 있지 않던 승원은 멀찍이 걸음을 물리고 눈에 보이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권 대표가 금방 그의 앞에 앉았다. 승원은 말없이 테이블을 바라본 채로 있었다. 다 가려지지 않은 시야 너머로 직원 몇몇이 이쪽을 보며 숙덕거리는 것이 들렸다. ‘윤승원 아냐?’ ‘윤승원…….’ 등 불분명하지만 제 이름이 명확히 귀에 흘러 들어왔다. 그들이 보이는 쪽에 앉아 있던 승원은 방법이 없어 그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게 다였다.
그때,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는 권 대표에 승원은 눈만 덩그러니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나오진 않을 것 같은데. 자리 바꾸겠습니까?”
“아… 네.”
신경을 써 주려는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권 대표에 승원은 얼른 그와 자리를 맞바꿨다. 팔짱을 낀 채로 승원의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권 대표의 시선에 뒤쪽에서 들리는 수군거림이 금세 잦아들었다. 승원이 잠시 머리를 긁었다.
“감사합니다.”
“서로 귀찮아서 뭐 합니까.”
“네. 맞습니다.”
5분 정도가 더 됐을 무렵, 메뉴가 나왔다는 직원의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요.’라고 말하는 권 대표에 승원은 먼저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늘하지만 날카로운 바람은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마스크를 내린 승원이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터져 나온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권 대표는 시동을 걸기도 전에 손에 있던 종이 가방을 열어 팩을 꺼냈다. 벨트를 매던 승원이 얼른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굳이 지금 안 먹어도.”
“집에 가자마자 할 게 많습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더 늦기 전에 챙기세요.”
“냄새나잖아요.”
“그거야 창 열면 되지 않겠어요?”
툭 터져 나온 그의 말을 듣자마자 아까 향수 냄새를 빼겠다며 창을 열었던 자신의 행동이 생각나 승원은 잠시 귀 끝을 붉혔다. 손에 쥐여 주는 것을 반강제적으로 받아 든 승원은 하는 수 없이 팩 뚜껑을 열었다. 역시나 김밥 특유의 누리고 고소한 향이 퍼져 나왔다. 차 문을 열어도 냄새가 금방 빠질지도 의문이었다.
“대표님은.”
“알아서 먹겠습니다.”
“…네. 잘 먹겠습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고, 승원은 반으로 가른 나무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하나씩 입에 넣었다. 씹을 때마다 아삭아삭한 야채가 가득 들어 있고, 그 사이에 깻잎 향이 나는 건강한 맛이었다.
“입에 맞아요?”
“네. 맛있어요.”
“향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던데.”
“깻잎 좋아해요.”
“다행입니다.”
검은 물결 위를 건너는 차가 한산한 도로를 빠르고 안정감 있게 달렸다. 별다른 흔들림이 없어 어려움 없이 김밥들을 차곡차곡 입에 넣고 삼키던 승원은 앞 유리 너머의 풍경들을 보다가, 다시 창 쪽으로 고개 돌리기를 반복하다가 아까부터 씹어 내던 말을 입 밖으로 조심스레 꺼냈다.
“대표님. …계속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
권 대표는 승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되물었다.
“집에도 데리러 와 주시고, 아까 가게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저녁 챙겨 주시니까.”
“아.”
짧게 떨어진 목소리에 승원은 갑작스레 긴장감이 들었다. 평온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권 대표의 이어진 대답이 승원을 비웃듯 떨어졌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센스입니다.”
“……아.”
“칭찬은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내가 윤승원 씨 쪽을 생각해서 배려하는 거라고 멋대로 어림잡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승원은 침범한 적도, 침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선을 권 대표는 계속 그어 나가고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묘한 벽이 느껴졌다. 두드릴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등을 돌릴 생각까진 아니었는데.
창을 멀리 바라보며 승원은 김밥을 계속 입 안에 집어넣었다. 냄새를 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창을 내리니 권 대표는 묵묵히 운전에 집중할 뿐이었다.
***
문을 여는 권 대표를 따라 집 안으로 몸을 들였다. 한 번 와 본 것으로 그새 익숙해져 승원은 두리번거리지 않고 곧장 그를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며칠 지났다고 공허해 보이던 집 안이 바뀌어 있을 리는 없었다.
“대표님 식사는.”
“나는 천천히 먹어도 됩니다. 잠깐 여기 있어요.”
그가 방으로 들어간 사이, 승원은 잠시 부엌 쪽을 어슬렁거렸다. 식탁 위엔 김밥집 상표가 붙어 있는 종이 상자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제가 먹던 쓰레기만 조심스레 꺼내 한쪽에 치워 둔 승원은 주머니에 있던 약봉지를 손에 만지작거리며 물을 찾았다.
정수기가 있는 걸 확인하고 새것처럼 보관되어 있는 머그잔을 꺼내 물을 따랐다. 그 많던 약들을 다 언제 해치운 것인지 지금 먹으면 고작 하나 남는 상태였다. 초콜릿 같은 색색의 알들을 손에 담아 입에 넣은 승원이 물과 함께 약을 들이켰다. 언제 먹어도 적응되지 않는 양이었다.
“뭐 해요?”
복도에서 막 나온 권 대표가 승원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다가왔다. 머그잔을 입술에 붙이고 있던 승원이 얼른 컵을 내려 두었다.
“약… 약 먹었습니다.”
“약?”
권 대표의 이마에 옅은 주름이 졌다.
“그냥 감기약이요.”
“감기약 먹는 사람이 오는 길에 그렇게 창을 내리고 버텼습니까?”
비꼬는 듯한 말투에 승원은 잠자코 입술을 다물었다. 권 대표는 두 팔을 걷은 채였다.
“…대표님 식사하세요.”
“음. 그것보다.”
의자까지 꺼내 준 승원을 무시한 채 권 대표는 검지를 들어 까딱거렸다.
“나 따라와요.”
의아한 얼굴로 권 대표를 바라보던 승원은 의자를 도로 넣어 놓고 조심스레 그를 따라갔다. 저번에는 거실과 부엌 사이만 오갔었기에 이쪽으로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리마다 작은 장식품과 액자들이 심심치 않게 길을 반겼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코너로 들어서자 문이 나왔고, 그가 그곳을 열었다.
“……와.”
승원의 입에서 반사적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걸 알아챈 권 대표가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려 승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난생처음 본 광경에 승원의 눈이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권 대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떼었다.
방 안에는 하얀 조명이 공간을 가득 밝히고 있었으며 벽을 모조리 둘러싼 하얗고 까만 장들이 사방을 꽉 메우고 있었다. 중심에 놓여 있는 커다란 진열장들은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그대로 들여온 것인 양 깔끔하고 멋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가장 끝 쪽에 있는 장을 옆으로 밀어내자 그 안에는 수십 장의 셔츠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거의 다 같아 보이는 재질과 색의 옷들이 잔뜩 걸려 있는 것을 보며 승원은 진열장에 멍하니 손을 올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작게 침음하던 권 대표가 옷걸이 몇 개를 꺼내 들었다. 키가 워낙 커서 그런지, 손을 뻗으면 안 닿는 거리가 없었다. 순간 설마, 하고 입술을 뻐끔대던 승원에게 옷을 전부 가져온 권 대표가 옷걸이째로 하나하나 승원의 몸에 대보기 시작했다.
“이것도 크려나.”
“뭐 하시려는…….”
“결혼식 안 갑니까?”
“…네?”
“그날 가서 입을 옷 정도는 미리 생각해 둬야 할 거 아니에요.”
승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려 제 차림새를 확인했다. 당장 목전에 앞둔 주말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승원이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멀거니 있는데, 옷걸이를 들고 있던 손등이 승원의 턱을 가볍게 톡 쳤다.
“나 봐요.”
“…….”
차분하게 펄럭이는 와이셔츠를 승원의 몸 위에 대보던 권 대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윤승원 씨는 배우라는 사람이 뭐가 이렇게 말랐습니까. 근육도 없고.”
“…관리한 겁니다.”
승원이 짧게 반박했음에도 권 대표는 감흥이 없는 듯 중얼거렸다.
“뼈밖에 없네.”
“뼈밖에 없진 않습니다.”
“삼시 세끼만 다 챙겨 먹어도 지금보다 나을 겁니다.”
“…….”
“그거 말고 차라리 이건 어떻습니까.”
어느새 다시 농 앞으로 가 다른 옷을 꺼내 보이며 권 대표가 물었다.
승원은 그저 그가 하라는 대로 움직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권 대표는 가만히 앉은 자세로 승원의 맵시를 훑으며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바로바로 판단했다. 표정이 거의 없는 남자는 손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대신 표현했다.
끊임없는 탈의를 끝으로 권 대표는 승원이 흰색의 목티를 받쳐 입고 나오자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승원에게 그가 가까이 다가와 턱 끝까지 길게 말린 목티를 정리해 주었다. 옷 갈아입기 놀이를 당하는 인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윤승원 씨는 얼굴도 작고 목이 길어서 그런지, 이런 옷이 잘 어울리네요.”
승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개는 꼿꼿이 든 채로 시선을 내린 승원은 잠시 제 목과 쇄골 위에서 움직이는 얇고 기다란 손가락에 시선을 빼앗겼다. 반지 하나 끼우지 않은 맨 손가락은 일반 사람보다 하얀 편이었다.
“…….”
“…….”
눈을 살짝 들자 빼곡한 속눈썹이 가득 내려앉아 있는 권 대표의 눈이 보였다. 곧게 다물린 입술로 손을 움직이는 얼굴이 무감각해 보였다. 승원이 잠시 그를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휙 하고 권 대표의 시선이 올라왔다. 승원과 눈을 마주친 날카로운 눈매는 미동이 없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닙니다.”
승원의 눈빛을 착각한 것인지, 권 대표는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뒤로 물러났다. 음률이 없었지만, 고압적인 목소리로 그가 목을 울렸다.
“윤승원 씨는 내 애인 자격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취향대로, 내 입맛대로 맞출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승원은 작게 네, 라고 대답했다.
“아까 입었던 재킷 위에 걸치면 괜찮겠네요. 그렇게 입으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지금 입은 건 내 옷이라 윤승원 씨한텐 좀 크긴 한데. 집에 가기 전에 사이즈 좀 말해 둬요.”
“아, 이걸 입는 게 아닙니까?”
“내 옷을 왜 윤승원 씨가 입습니까. 새로 맞춰야지.”
승원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중얼거린 권 대표는 액세서리를 하나하나 고르며 진열대와 승원을 번갈아 보았다. 어깨 쪽으로 얼굴을 살짝 기대니 권 대표에게서 나던 향이 옅게 올라왔다.
웬만한 백화점이나 화보 촬영 현장에서 봤던 옷보다 브랜드도, 종류도 많고 다양했다. 새 옷 같은 권 대표의 옷을 입은 채 소매 이곳저곳을 어색하게 만져 보던 승원은 곧 그가 보여 주는 시계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을 건넸다.
***
벌써 옷을 입고 벗고 반복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승원은 조금 피로하게 느껴지는 몸을 진열대에 느슨하게 기댄 채 권 대표를 멍하니 구경하기만 했다.
“……하아.”
아까 먹은 김밥이 소화되지 않는지 자꾸 신물이 오르는 듯해 승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참을 만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더니 갑작스레 토기가 밀려왔다. 목젖을 치고 혀끝으로 무언가 치미는 듯한 기분에 승원은 눈을 감은 채 침을 넘겼다.
승원이 입고 벗었던 옷들과 액세서리들을 정돈하고 있던 권 대표는 옆얼굴에 느껴지는 수상쩍은 느낌에 잠시 고개를 틀었다.
“왜 그럽니까.”
“아…… 닙니다.”
꼿꼿하게 서 있던 승원의 상체가 구부정하게 뉘어져 있었다. 수상쩍어 보이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 듯해 다시 시선을 거두려던 그때였다.
“우욱……!”
“……윤승원 씨-.”
그대로 쓰러지려던 승원을 권 대표가 빠르게 잡아 세웠다. 축 늘어진 몸은 다행히 정상 체온이었다. 기울어진 머리가 무겁게 밑으로 쏠려 있었다.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판에 승원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갑자기 왜 이래요. 윤승원 씨!”
“……흐, 저, 저 화장실… 화자, 으윽, 화장실 좀…….”
액체를 입에 물고 있는 듯이 발음이 불분명했다. 입술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희멀건 액체가 흘러나왔다. 떨군 고개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본 권 대표는 그대로 승원을 둘러맸다. 혼자만 몇 배의 중력에 이끌리는 듯이 승원의 몸이 무겁게 처졌다.
“으, 으윽…… 웩…….”
긴 복도를 지나던 찰나를 견디지 못하고 승원이 입을 벌렸다. 후두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권 대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시큼해지다 못해 붉게 달아오른 눈가로 그의 어깨에 매달린 승원이 숨을 색색거렸다.
욕실 문을 발로 차 버린 권 대표가 변기 앞에 승원을 내려 두었다. 무릎이 땅에 닿기 무섭게 없던 힘을 전부 끌어모아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승원이 손을 더듬거려 변기 커버를 잡았다. 번들거리는 입술 밑으로 희고 투명한 액체가 줄줄 흘러나와 있었다.
“윤승원 씨, 괜찮습니까? 갑자기 왜-.”
“……가, ……요.”
“뭐?”
변기를 끌어안은 듯한 자세의 승원이 커다란 구덩이와 같은 구멍 안쪽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침을 질질 흘리는 채로 승원이 권 대표를 밀어냈다. 울먹임이 터져 나왔다.
“……나, 나가 주세요…….”
“…….”
“나가요…… 빨리…….”
어림도 없는 힘으로 밀어내 봤자 쓸어 만지는 정도밖에 더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권 대표는 쉽게 뒤로 물러나 주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토기를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 승원은 곧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권 대표가 불편한 몸짓으로 욕실 밖으로 나갔다. 쿵, 소리를 내며 욕실 문이 닫혔다.
“웩, 하, 으엑, 웩……!”
오늘은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승원은 구토를 시작했다. 머리가 미친 듯이 어지러웠다. 잔잔한 물결 위로 얼굴이 비치는가 싶더니 그 위로 자신이 뱉어 낸 토사물들이 흩어졌다. 내장까지 비워 낼 듯이 차오르는 것들을 쏟아 내도 좀처럼 개운함이 찾아오지 않았다.
답답함과 절망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미친 듯이 구토를 하면서도 드는 생각은 이곳이 제집이 아닌 권 대표의 집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좌절감이었다.
속이 뒤집히고 먹은 것을 토해 내는 일은 근래 승원에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일상과도 같았기에 상관이 없었지만, 그 추잡한 모습을 다른 이의 앞에서 보였다면 말이 달라졌다. 저번처럼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갑작스레 식도를 조여 대며 찾아온 불청객은 승원을 배려해 줄 생각이 없었다.
모든 감각 기관의 뚜껑이 열린 것만 같았다. 씁쓸한 입을 다시는데 정신이 빙글, 돌았다. 아까 먹은 김밥과 그 뒤에 먹었던 약들이 화근이 된 거겠지.
이성적이고 침착하게 생각하는 머리와 다르게 몸은 통제 불가였다. 눈물과 콧물, 침이 한데 버무려진 얼굴이 헐떡이는 숨을 토해 내며 고개를 들었다.
“……아.”
이마를 내리치는 듯한 두통과 함께 승원은 그 자리에 까무룩 기절했다.
***
뻐끔대며 벌린 눈에 높은 천장이 보였다가 어둠과 함께 점멸했다.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몇 번 더 눈을 깜박이던 승원은 다시금 눈꺼풀을 덮었다.
길고 얕게 이어지는 듯한 몽롱한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 대표였다.
“하루만 있겠다고 해서 데리고 있던 거고, 그 이상 더 같이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보내 준 겁니다.”
승원을 대하던 말투보다는 순화되어 있었지만, 음률과 톤만큼은 평소보다 훨씬 사나웠다.
“제가 그 여자 인생을 왜 책임져야 합니까? 어머니 취향 저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
“다시는 그 인간 제 앞으로 데려오지도, 부르지도 마세요. 갔던 자리도 되돌아올 거니까.”
상대가 어머니인 걸까. 아득한 어둠 사이로 들리는 권 대표의 음성은 승원의 귀에 낱낱이 새겨 들어왔다. 그는 잠시 반대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지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방금까지 나지 않던 시큰한 담배 냄새가 승원의 코끝을 찔렀다.
조금 더 길게 숨을 뱉은 권 대표가 말을 이었다.
“이번 주에 데려갈 사람 있어요.”
“…….”
“그러니까 징글징글한 소리 그만 좀 하세요.”
그 순간 통화 필터가 불투명하게 들어간 목소리가 승원에게까지 전해졌다. 권 대표와 통화 중인 여자의 음성은 잔뜩 흥분한 것처럼 무어라 열띠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쪽, 소리를 내며 권 대표가 담배 필터를 빨아들였다.
“그날 가서 보면 알겠죠. 저랑 함께 갈 사람이 식구들 마음에 들지 안 들지.”
권 대표와 함께 갈 사람. 제 얘기를 엿듣는 것 같은 기분에 승원은 뒤척이고 싶은 몸을 새우처럼 꾹 웅크린 채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움직이지 않으려 했건만, 조금의 움직임에도 금방 이불이 스치며 주름이 졌다.
몇 번의 공백과 함께 통화를 나누던 권 대표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그 사이를 짙은 담배 내음이 메꾼다. 필터를 물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 다시 그가 숨을 내뱉는 깊은 숨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찬바람이 밀려 들어오는 것인지 내놓고 있는 얼굴로 느껴지는 공기가 싸늘했다.
“깼습니까?”
승원이 어설프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스르륵 떠지는 눈 위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통화 들었어요?”
“…아, 안 들었습니다.”
창문을 닫은 권 대표가 승원에게 다가왔다. 거짓말을 한 게 들통날까 싶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데, 다행히 그는 더 캐묻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커다랗게 그늘진 그림자가 승원을 다 덮었다. 멀찍한 시선으로 승원을 살피듯 권 대표가 기웃거렸다.
“아까보다 혈색은 나아진 것 같은데.”
“…저 얼마나 잤습니까?”
목소리가 꽉 잠겨 나오는 것을 느끼고 승원은 뒤늦게 기침을 뱉었다.
“얼마 안 잤습니다. 3시간 정도.”
승원은 상대를 올려다보며 계속 누워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권 대표는 앓는 신음을 흘리는 승원을 보고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볼 뿐이었다.
“윤승원 씨 우울증 있습니까?”
“…네?”
“약 먹어요?”
다짜고짜 닥친 질문에 승원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짐작 가는 게 없는…….
“식탁 위에 있던 약, 그거 그쪽 거 아닙니까.”
“…아.”
약 봉투를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게 인제야 생각났다.
“종류도 많던데. 양도 많고.”
“…….”
“나도 한때 달고 살던 것들이라 알았습니다. 약이 윤승원 씨 몸에 안 맞는 것 같은데. 한동안 계속 이러지 않았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까처럼 토하고, 쓰러지고, 기절도 하고.”
날렵한 눈매가 위로 힐끗 올라갔다 내려왔다. 승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업히듯이 안겨 침을 질질 흘리며 화장실로 부축 당했던 일이 생각나 순간 귀 끝이 화르르 타오르는 듯했다.
“…맞는 거 같습니다.”
팔짱을 낀 채 승원을 주시하던 남자의 시선이 허공 위를 돌았다. 권 대표는 약에 대해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승원은 배 밑으로 흘러내렸던 이불을 가슴 위까지 끌어당겼다.
“의사한테 부작용 얘기하고 다시 처방받는 게 좋을 겁니다. 한동안 계속 그랬다면 윤승원 씨 문제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약 문제니까 당장 바꿔요.”
“…….”
“오갈 데도 많은 사람이 그런 몸으로 대체 어떻게 다닌 겁니까?”
볼수록 알 수가 없네. 권 대표가 성가심이 서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승원을 바라보는 시선에 꼭 ‘한심하기 짝이 없군.’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약을 먹고 어지러움과 구토를 몇 번이고 반복해 왔던 승원이었다. 우울과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인 줄만 알았는데, 약의 문제라고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이르는 권 대표에 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도 복용하신 적이 있나 봅니다.”
말을 뱉고 나서야 주제넘은 소리라는 걸 깨닫고 승원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번져 나온 말은 그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권 대표는 생각보다 평온한 얼굴로 승원을 응시했다.
“오래 먹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간단하게 대답한 그가 승원에게 턱짓했다.
“상태도 시원찮아 보이는데, 그냥 여기서 쉬세요. 괜찮으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고.”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말을 잇는 중에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승원에게 하나하나 대 주며 권 대표가 직접 고르고 입혔던 옷. 얼른 손을 뻗어 목을 만져 보니 텁텁한 재질의 섬유가 느껴졌다.
토를 하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승원은 권 대표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당황이 번진 채 방황하던 눈동자가 권 대표를 향하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옷도… 죄송합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담뱃갑의 입구를 손으로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죄송한 건 알아서 다행입니다.”
“…….”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약 바꾸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겁니다. 이런 일로 애꿎은 시간 잡아먹는 거 윤승원 씨도 싫지 않습니까.”
“……네.”
“먼저 나갈 테니 알아서 하세요.”
“대표님-.”
문 앞에 다다른 권 대표를 승원이 불러 세웠다. 미미하고 짙은 눈동자가 승원을 바라보았다.
“침대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나가겠습니다.”
권 대표는 알았다는 말 대신 짧게 혀를 찼다.
“여기 내 침실 아니고 응접실이니 감사해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누가 내 침대에 눕는 거 싫어해서.”
쾅, 문이 닫혔다. 권 대표가 사라진 자취를 눈으로 좇던 승원은 그대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운데 놓인 침대와 협탁, 중앙 벽에 마련된 TV, 카펫과 조명. 창 옆에 놓여 있는 테이블과 의자까지. 흡사 호텔 룸을 연상시키는 방 안은 편안하지만, 온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침대를 들여놓은 응접실이라니.
잠시 사색에 잠겨 있던 승원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마른세수를 했다. 기절해 누워 있던 침대는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을 만큼 푹신하고 편안했지만, 어설픈 안정과 지속된 불편함 때문인지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타겠다고 이야기한 승원에 권 대표는 더 묻지도 않고 알았다며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