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Part. Cantĭúncŭla
“와……. 사람들 좀 봐.”
“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처음 봐.”
“예상은 했지만…….”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압도적일 수가 있다니.
영애들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훗, 당연하지요.”
그때 그들 사이에 도도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영애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몽에르트 소후작님!”
영애들이 반색한 얼굴로 외쳤다.
몽에르트 소후작, 베로니카 몽에르트. 몽에르트 후작가의 후계로서 자리를 공고히 한 그녀는 사교계의 뭇 영애들, 특히 이곳에 온 영애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에 리페님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면서요!”
“혹시 그때 찍은 사진은 통신방에 안 올려주시나요?”
“리페님은 요즘 어떠세요?”
영애들이 몽에르트 소후작을 향해 질문을 쏟아냈다.
신문과 잡지에서는 이 나라의 황후이자 만인의 우상인 칼리오페에 대해 매일같이…… 아니, 말 그대로 매일매일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덕후들이 지면 위의 글자로 만족하겠는가. 그들은 생생한 정보를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몽에르트 소후작이 이런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생생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흐음, 리페님이야 여전하시죠.”
“여전하시다고요?”
“여전히 귀여우시고, 여전히 사랑스러우시고, 여전히 나를 베로니카 언니라고 다정히 부르시죠.”
성덕—성공한 덕후—이었으니까.
칼리오페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뽐낸 몽에르트 소후작이 훗, 하고 미소 지었다.
“언니라니……. 나도 언니 소리 듣고 싶어…….”
“나는 리페님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난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아. 연회장의 기다란 테이블이어도 좋으니 한 테이블에서 식사해봤으면……!”
“이룰 수 없는 꿈은 아니야! 황궁에서 일하게 되면 기회가 올지 몰라. 특히 황후궁에 소속된 행정부처로 발령 난다면……!”
“하지만 거긴 너무 경쟁률이 세서…….”
칼리오페가 황후가 된 후로 황후궁 행정부의 경쟁률이 어마무시하게 높아졌다.
심지어 제국 주요 정책 전략을 결정하는 아프락스 궁보다도 더 경쟁률이 높았다. 행정에 뜻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황후 폐하를 보좌하겠다고 시험에 응시했기 때문이다.
“포기하긴 일러!”
“오늘 리페님 공연 보고 힘내서 시험 통과해야지!”
영애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행정 관료 시험을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그 사이에도 공연장 안으로 사람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와, 정말 인파가 장난 아니네요.”
“많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직접 보게 되니…….”
“당연한 소리를.”
영애들의 감탄에 몽에르트 소후작이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여유롭게 말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리페님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기회라고요. 공연장 크기만 아니었어도 더 몰렸을걸요?”
“그건 그래요!”
“우리 리페님께 이곳도 협소하죠!”
“그냥 다락방 크기랄까요.”
제국을 넘어 대륙 최대 크기를 자랑하는 테르난 홀이 한순간에 협소한 다락방 취급을 당했다.
“표를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제 친구는 못 구해서 며칠째 울고 있더라고요.”
“저런……. 표를 되파는 사람조차 없어서 처음에 실패하면 영영 못 구하는 거나 다름없죠.”
“그래도 중계되긴 하니까요.”
도시 곳곳의 광장에 설치된 전광판에서 오늘 공연이 동시에 생중계될 것이다.
전 제국, 아니 전 대륙에서 오늘을 기대하고 있었다.
단 하루.
에테르를 다루고 대정령을 불러내는 유일무이한 자.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날이었으니까.
* * *
“리페.”
칼리오페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저 뒤를 돌아보는 것뿐인데 대기실에 있던 모두가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다. 평소 황후로서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을 때도 빛나는 미모였지만, 공연을 앞두고 화려하게 꾸민 지금은…….
“진짜 사람이 이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유리안의 말에 칼리오페가 머쓱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하는 공연이라 자신을 띄워주기 위해 이렇게 칭찬하는 것을 알지만, 민망했다.
“너무 띄워주지 않아도 자신감을 갖고 공연할 테니 걱정 마세요.”
“아니, 나는 진심인데…….”
칼리오페가 빙긋 웃고 그에게 다가갔다.
“유리 오라버니께서도 잘 생기셨어요.”
그 말에 유리안의 흰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칼리오페는 그저 칭찬을 되돌려주는 것일 뿐이라는 걸 알아도 기뻤다.
에피니는 그런 유리안을 눈꼴사납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냥 인사치레 가지고 뭘 그렇게 반응한담.”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에피니 언니도 멋져요. 항상 고마워요, 내 기사님.”
그 말에 에피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으나 살짝 부푼 뺨을 감출 순 없었다.
유리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툭 쳤다.
“그냥 인사치레라며.”
“리페가 그러는 거 봤어? 쟤는 항상 진심이야.”
“그건 그래.”
티격태격하던 둘은 서로를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가 나한테 진심으로 잘생겼대!’
‘리페가 나한테 진심으로 멋지댔어!’
만족하던 그들의 입꼬리가 싸악 올라갔다.
“나중에 힐데 녀석한테 말하자.”
“후후, 부러워 죽으려고 할걸?”
에피니는 칼리오페의 직속 호위 기사로, 유리안은 매니저로 일하며 항상 함께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게 생활하고 있었다.
반면 제국의 브레인이자 아프락스 궁의 젊은 실세인 힐데르트 소후작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일에 치여 칼리오페의 얼굴 보기도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소꿉친구를 놀려먹을 생각에 두 사람의 얼굴이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유리안은 본분을 잃지 않았다.
“이제 대기해야 해. 시간 다 됐어.”
그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공연은 특별했다.
황후가 되고 난 뒤, 가끔 사교 파티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지만 이런 규모 있는 공연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황후로서의 집무가 바쁜데 이런 식의 대규모 공연을 준비할 시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공연은 자선 후원금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로 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꽉 쥐며 결심을 다졌다.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소식이 있으니까.’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쥔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몸에 힘을 주었다.
“리페, 나가야 해.”
그 말에 칼리오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채 걸음을 옮겼다.
쇼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 * *
환하던 테르난 홀의 불이 일시에 훅 꺼졌다.
웅성거리며 오늘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내뱉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대화를 멈췄다. 많은 인파만큼 시끄러웠던 홀이 한순간에 조용해진다.
새까만 암흑과 고요한 정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황.
그렇기에 사람들의 기대감은 더더욱 고조되며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부풀어 오른 기대감이 두근두근 심장을 울리고 가슴을 터트려버릴 것처럼 팽창한 순간.
파아아앗—!
무대 위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는 것과 동시에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아—!”
“리페니이이이임!!”
“사랑해요!!”
여기저기서 흥분을 이기지 못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부응하듯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시원하게 뻗어져 나오며 더 높게 울렸다.
풍부한 에테르가 그녀의 노랫소리에 춤을 추며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칼리오페에게서부터 나온 아름다운 빛무리가 어둑한 관객석을 향해 유영했다. 마치 그게 칼리오페의 선물 같아서,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답 같아서 사람들은 손을 뻗으며 열광했다.
피아노 선율이 물을 차는 제비처럼 빠르게 흐르고 가슴을 쿵쿵 울릴 정도로 커다란 드럼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두드렸다. 브라스 밴드의 화려한 기교, 무대 위에서 칼리오페의 손짓을 따라 퍼져나가는 황홀한 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칼리오페의 목소리.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칼리오페가 이제껏 공연하지 않았던 만큼 오늘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기다림이 너무 커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기대가 치솟았다. 하지만 지금 웃으며 손을 흔들고 노래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만족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또다시 관객과 가수로 만나는 것을 반가워하듯 신나는 노래였다.
쿵쿵 울리는 빠른 박자에 맞춰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손을 저었다.
칼리오페가 뿜어내는 생생한 에테르를 느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마치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근사하고 신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저 반가움이라고 할 수 없는 감정이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그러는 사이 곡이 끝났다.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앞으로 진행될 공연에 설레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칼리오페가 마이크를 든 채 정면을 보자 테르난 홀을 뒤흔들 듯 커다랗던 함성이 멎었다.
칼리오페가 빙긋 웃으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오랜만이에요!”
그러자 곳곳에서 화답이 돌아왔다.
서로의 목소리가 엉겨 붙어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감정만큼은 더 확실하고 묵직하게 전달되었다.
“저도 여러분이 보고 싶었어요!”
칼리오페의 답에 사람들이 오열했다.
“으허어어엉, 리페님이 나 보고 싶으셨대…….”
“으흡, 저도 보고 싶었어요. 진짜 보고 싶었어요…….”
“끄으으흡!”
귀하게 자란 영애들이 예법도 잊고 코를 팽 풀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기 때문이다.
덕후는 하나다!
제 손수건을 내주었으면 내주었지, 혀를 찰 일은 없었다.
마치 결속력 있는 덕후의 마음을 알려두듯 이들이 들고 있는 손수건은 모두 하나같이 흰 바탕에 푸른 빛으로 엠브로이더리가 놓여져 있었다.
비록 손수건의 재질이나 엠브로이더리의 섬세함 정도는 달랐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했다. 모두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를 이어주었다는 전설의 손수건을 본 따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아스타레아스의 모친인 태후께서—아스타레아스의 숙부였던 선 황제는 사후 황제 위를 박탈당했기에 선 황후 또한 봉작을 잃었다— 손수 엠브로이더리를 놓은 그 손수건.
“테르난 홀에 저를 만나러 찾아와주신 분들, 그리고 멀리서도 중계를 통해 저를 보고 계신 분들.”
칼리오페의 또렷한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오늘 공연은 참 뜻깊은 공연입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참으로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또다시 오열했다.
“우리 리페님께서는 마음씨도 좋으시지.”
“우리 리페님께서는 인간이 아니라 천사가 틀림없어.”
“여신님……!”
울면서 웅얼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흥, 짜증 나는 손수건을 들고 있긴 하지만 맞는 소리를 하는군.”
“우리 리페는 천사이자 여신이니까.”
“요정에 정령, 얼굴 천재, 노래 천재라는 말도 부족하지.”
두 형제가 쿵짝이 맞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를 바라보던 호르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시집까지 보내 놓고서 팔불출인 건 여전하구나…….”
그 말에 루시우스가 냉정하고 싸늘한 눈으로 호르세안을 바라보았다.
“팔불출이라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다.”
“와, 그런 냉철하고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재주야.”
“흥,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본데, 네가 보는 리페는 어떻지?”
그 말에 호르세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무대 위에 있는 칼리오페에게로 향했다.
“리페는—.”
보는 사람 가슴이 따뜻해질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는 얼굴. 가늘어지는 산호빛 눈동자와 웃느라 포동해진 뺨. 성인인데도 어렸을 적의 모습이 보인다.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호르세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꿀처럼 달콤하게 흐무러졌다.
“—귀엽지. 사랑스럽고. 내 꼬마 아가씨.”
호르세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퍽!
“아야!”
갑자기 왼팔에 가해지는 충격에 호르세안이 기겁해서 루시우스를 노려봤다.
“왜 때려!”
루시우스는 당황한 얼굴로 호르세안을 때린 제 손을 바라보았다.
“아니, 뭔가…….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기분 나빠서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에? 나도 한 번 나도 모르게 널 때려볼까?!”
“뭐, 일단은 미안.”
듣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을 사과를 들은 호르세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진짜. 이런 놈을 친구라고.”
그가 왼팔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루스티첼 가 사람들이 막둥이와 관련될 때 멀쩡한 경우가 없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인인 데다가 결혼까지 했으면 팔불출도 좀 잦아들 법하지 않은가.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뭐, 리페를 보고 있으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호르세안의 시선이 다시 칼리오페를 향했다. 관객들을 향해 종알종알 말하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으음……. 팔불출이라면서 이놈들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닐지도…….’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또 혼날지 모르니 마음속으로 생각하자.
호르세안이 슬쩍 루시우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 너머로 루스티첼 백작 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아들 녀석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무섭도록 셔터를 눌러대는 루스티첼 백작 부인.
호르세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정도의 연사 능력이라면 귀부인께서도 무인으로서의 재능이…….’
어쩌면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재능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인 옆에 앉은 루스티첼 백작은…….
‘우, 울고 계셔?!’
백룡의 빙벽, 철혈의 기사, 열두 개의 검의 일 좌. 듣기만 해도 엄청난 이명을 가진 위대한 기사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백룡 기사단의 일원으로 단장님에게 항시 굴려지는 호르세안으로서는 참으로 보고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호르세안의 눈매가 살짝 경련했으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백룡 기사단의 기사로서 지낸 세월보다 루시우스의 불알친구로서 팔불출 넘치는 딸바보 아빠를 봐온 세월이 더 길었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이 정도쯤이야 아무렇지 않다.
“우리 리페……. 내 딸……. 내 귀염둥이 천사, 내 막둥이……. 너무 예뻐……. 예뻐서 심장이 아파……. 왜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거야…….”
……분명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건만.
기감이 뛰어난 만큼 예민한 청력이 문제였다.
이 엄청난 환호성 가운데에서도 힝, 우는 단장님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어제도 단장님에게 검 앞에서 깨졌던 걸 생각하니 왜인지 자신까지 울고 싶어졌다.
‘……나는 못 들은 거야.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
호르세안은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며 무대만 바라보았다.
마침 전주가 흐르며 새로운 노래가 시작되었다.
* * *
툭, 툭—.
느릿하게 팔걸이를 두드리는 상사를 보며 힐데르트는 식은땀을 흘렸다. 오랜만에 보는 칼리오페의 공연에 처음에는 넋을 놓고 감탄했다.
역시 칼리오페였다.
순식간에 그의 눈과 귀를 앗아갔다.
하지만 힐데르트는 곧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태고 이래 단 한 번도 녹지 않았다는 만년설보다도 더 차디찬 기운을 내뿜는 제 상사 때문에.
‘으, 박스석이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테르난 홀의 뜨거운 분위기마저 얼려버렸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이번 공연에서는 박스석을 마련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툭.
까닥거리는 손가락을 멈춘 그 예외의 주인공이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내 황후님은 내가 독점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눈부신 은발이 사라락 흩어져 내렸다.
“매년 천사 시리즈라면서 화보집을 내는 것도 거슬리는데.”
힐데르트는 제 상사가 비밀 조직까지 동원해 그 화보집을 다 사들였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러다 칼리오페에게 들켜서 혼이 나고서는 참고 있다.
칼리오페는 인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는 그를 유일하게 인내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역시 말렸어야 했어. 너무 예쁘잖아.”
황제의 눈매가 후회로 일그러졌다.
그의 머릿속에 칼리오페의 공연을 반대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 * *
칼리오페는 싫다고, 공연하지 말라고 하는 아스타레아스를 책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보통이라면 그 눈빛에 물러났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결국 칼리오페가 그를 설득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부금을 위한 공연이잖아요. 황후로서 진행해야 할 집무에는 지장이 없도록—.]
[집무에 지장이 생길까 봐 반대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스타레아스가 왜 모르냐는 듯 칼리오페의 손을 붙잡고 그 손끝에 키스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게 싫어. 당신 예쁜 모습은 나만 보고 싶어. 독점하게 해줘요, 응?]
국정에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를 듣는 황제이건만 사랑하는 황후 앞에서는 달랐다. 눈꼬리를 내리며 애원하듯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에 칼리오페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건 사람들을 돕는 중요한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아스타레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때요.]
보드라운 숨결이 그의 귓가에 닿았다.
[레아스만 아는 내 모습이 있잖아요.]
오싹, 아스타레아스는 소름이 돋았다.
[지금 보여줄게요.]
[지, 지금?!]
아스타레아스는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 칼리오페가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칼리오페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호선을 그리는 불디 붉은 입술에 아스타레아스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특별히 유혹적인 표정도 아닌데 제 아내 앞에서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다.
[자, 레아스, 눈을 감아요.]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생각하기도 전에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기대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서 칼리오페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눈을 감으라고 해놓고선 칼리오페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뭔가 사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스타레아스는 그 어느 때보다 감각을 곤두세웠다. 사락거리는 소리는 꼭 천이 스치는 소리가 닮아 있었다.
‘설마…….’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에 아스타레아스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와…….’
정말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아니, 바라긴 했는데 차마 그런 걸 칼리오페 앞에서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꿈에선 봤지만, 그게 실제로…….’
아스타레아스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제 떠도 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아직이요.]
돌아오는 수줍은 대답에 너무 보챘나 싶어서 아스타레아스는 반성했다.
하지만 어떻게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아스타레아스는 항상 그의 황후에게 목말라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지금은?]
[으음, 조금만 더.]
그 말과 함께 보드랍고 말캉한 게 뺨에 닿았다. 예고도 없이 기습처럼 찾아온 감각에 아스타레아스의 호흡이 멎었다.
그는 이 감촉을 알고 있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아, 정말…….]
이제 그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마저 나왔다. 평소 감정 한 자락 밖으로 내비치지 않는 무정한 황제 폐하를 이렇게 애 닳도록 만드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칼리오페가 유일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아내의 유혹에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황후는 다른 일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대담한 행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런 면에선 수줍음이 많았다. 평소엔 그게 참 사랑스러웠으나 이토록 색다른 모습을 보이니 혼이 쏙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 떠도 돼요.]
고작 오 분도 안 되게 흘렀을 상황이 그에게는 오 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아스타레아스는 각오를 다지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칼리오페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너무 놀라진 않을—.
[……응?]
아스타레아스의 반응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옆으로 갸웃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결 좋은 남보랏빛 머리카락이 밤하늘의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의아함을 담고 동그랗게 뜬 커다란 산호빛 눈.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귀엽고 아름다운 건 혼자 다 하나 싶었다.
그렇긴 한데…….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상태인 칼리오페를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락, 사라락거리던 소리는?! 그건 대체 뭐였는데……!
약간의 억울함마저 그의 청안에 비쳤다.
[왜 그래요?]
칼리오페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차마 그 얼굴에 대고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기대했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아스타레아스는 시선을 피했다.
[흐응—.]
묘한 비음을 흘린 칼리오페가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건 동의한 걸로 알게요.]
칼리오페가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어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기부금 모금을 위한 자선 공연에 대한 서류였다.
그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나는 싫은—.]
—까지 말하던 아스타레아스의 말이 뚝 끊겼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류 맨 앞 장에 황제의 인장이 쾅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인장을 찍은 기억은 없는데.]
느릿하게 중얼거린 그가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스타레아스가 꺼내지도 않은 황제의 인장이 위풍당당하게 놓여 있었다.
범인은 누군지 확실했다.
[황후님.]
[네, 폐하.]
칼리오페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게 무슨…….]
[그러게 집무실에서 한눈팔면 안 되지요.]
칼리오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입매에 애써 힘을 줬다. 저렇게 웃으니 어이없고 황당했던 마음이 벌써부터 말랑하게 풀어지려고 했다.
황제의 인장에 손댄 죄인은 아예 저는 잘못 없다는 듯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있건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 다 좋은데…….]
아스타레아스가 미간을 문질렀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온갖 상상을 다 하며 기대했던 만큼 실망감이 어마어마했다. 실망하다 못해 억울하고 속이 상했다.
[이왕 이런 식의 비리를 저지를 거면 좀 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지 않나요?]
[다르게요?]
[좀 더 내 시선을 빼앗을 만한 일을 벌일 수 있잖아요.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낮게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쿡쿡 웃으며 아스타레아스가 이끄는 대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런 것도 레아스만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하긴, 그렇죠.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우신 황후 폐하께서 이런 사기를 칠 거라고 누가 알겠습니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콧잔등에 가볍게 촉,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이왕 칠 사기 좀 더 화려하게 쳐주세요.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내가 눈을 뗄 수 없게.]
콧잔등에서 옆으로 미끄러져 내린 그의 입술이 칼리오페의 귓불을 베어 물었다. 젖은 듯한, 습한 목소리가 칼리오페의 귀를 뜨겁게 적셨다.
[설령 내 황후님이 이 나라 국고를 다 털어먹어도 내가 황후님 치마폭에 감싸여 알 수 없도록.]
그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틀어 아스타레아스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뭐하러요?]
재밌다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눈만 감으라고 해도 이렇게 내 말을 잘 듣는데.]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푹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녀가 또다시 눈 감으라고 하면 냉큼 눈을 감을 것이다. 혹시라도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기대하며.
그 사이 인장을 마음대로 써도 조금만 더 유혹해달라고 조르겠지. 지금처럼.
[당신은 너무 나를 잘 알아.]
칼리오페와 관련해서는 학습 능력 따위 없다.
아스타레아스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그 눈빛이 귀여워서 칼리오페는 그의 눈가에 키스했다.
[……그런다고 해서 내 기분이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이런, 어쩌죠.]
[다른 쪽 눈가에도 해줘요.]
쪽.
[그보다 좀 더 아래에도.]
쪽.
[좀 더 아래.]
쪽.
[조금만 더 옆.]
쪽.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아스타레아스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입술을 빗겨서 뽀뽀하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 맞잖아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에 아스타레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이 타고난 팜므파탈이었다.
[됐어요, 내가 뭘—.]
흥,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돌리던 아리스티레아스의 말이 일순 멎었다.
쪽.
칼리오페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기에.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멍했다가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명백하게 칼리오페를 원하는 진득한 욕망이 드러나는 눈이었다.
[사람이 참으려고 해도.]
[응? 왜 참아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보여 준댔잖아요. 당신만 아는 모습.]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게서 그 모습을 이끌어 내 봐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칼리오페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당신만이 할 수 있잖…… 흐읍!]
칼리오페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그녀의 말과 그녀의 숨결과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그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탐욕스러운 키스였다.
아스타레아스의 뜨거운 손이 칼리오페의 허리를 붙잡았다. 순식간에 칼리오페의 발이 허공으로 떴다.
풀썩—.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칼리오페는 집무실 테이블 위로 눕혀졌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흐드러진 꽃과 같았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와중에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끝없이 칼리오페를 갈구하며 그녀의 손목을 테이블 위로 꾹 눌렀다. 칼리오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숨을 몰아쉬며 그의 탐욕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가뿐 숨결에 따라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발끝이 몇 번 긴장했다 풀리기를 반복하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구두가 툭,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흐…….]
생리적인 눈물이 칼리오페의 눈꼬리에 맺힐 즈음에야 아스타레아스가 입술을 뗐다. 그는 붉게 젖은 칼리오페의 입술을 엄지로 스윽 쓸었다.
눈빛에 초점이 나가 있었다.
칼리오페는 위기감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자신은 자극하지 말아야 할 걸 자극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저, 저기, 레아스?]
칼리오페가 뒤늦게 아스타레아스의 이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집무실인데…….]
이런 일에 있어서 칼리오페는 얌전하고 보수적인 성격이었다. 그녀에게 황제의 집무실, 그것도 테이블 위에서 이런 자세로 있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지금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도발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스러운 농담이었을 뿐. 해봐야 키스 정도일 줄 알았다.
집무실에서 키스라니, 칼리오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자극적이고 짜릿하다 못해 배덕감마저 드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칼리오페가 생각했던 키스란 이렇게 짙고 농염한 키스가 아니었다.
[지금 보여주겠다면서요.]
아스타레아스가 드레스의 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비딱한 웃음이 걸려있는 것이 이미 사로잡힌 사냥감을 보는 듯했다.
[이런 걸 말한 건 아니었는데…….]
칼리오페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아스타레아스가 재밌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짧게 웃었다.
어딘지 사나운 웃음이었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레, 레아스!]
칼리오페는 하려던 말을 멈춘 채 황급히 아스타레아스를 불렀다. 재빨리 상체를 일으킨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칼리오페와 달리 아스타레아스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 사이에서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왜요?]
모르는 척 묻는 게 그렇게나 얄미울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차마 지금 상황을 입에 담을 수 없어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저런.]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입술을 살살 매만져 깨문 것을 풀어냈다.
[함부로 깨물지 말아요. 상처 나면 어쩌려고.]
[깨물 수밖에 없는 일을 하잖아요.]
칼리오페의 항변에 아스타레아스가 웃었다.
[어쩌죠?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는데.]
그가 칼리오페의 입술을 쓸었다.
[대신 내 손가락을 깨물어요.]
그 말과 동시에 칼리오페의 입안으로 단단한 손가락이 들어왔다. 아주 자연스럽게 제 집인 양 안에서 농탕질을 친다.
칼리오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자극에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아스타레아스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가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자, 이제 깨물지 않을 거죠?]
[못됐어.]
[응, 나 못됐어요.]
아스타레아스가 긴 눈매를 사르르 휘며 웃었다.
[근데 내가 못되게 굴어도 내 황후님께서 자꾸 봐주잖아.]
[아, 그만…….]
[못된 폭군 황제는 황후님 치마폭에 감싸여 헤어나오지 못해야지.]
그 말을 끝으로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가 입고 있는 풍성한 드레스 자락뿐이었다.
그걸 끝으로 칼리오페는 곧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기에.
* * *
아스타레아스는 이마를 감쌌다.
‘예뻤지, 정말…….’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끈불끈했다.
하긴, 황후님에 관한 그 어떤 걸 떠올려도 그렇긴 했다.
“충분히 독점하고 있건만 뭘 그렇게까지…….”
힐데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덜거렸다. 평소에는 아스타레아스를 황제로서 극진히 모시지만 사석에서만큼은 옛날처럼 편하게 대하는 중이었다.
“충분하다고? 대체 어디가?”
아스타레아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황당한 눈으로 힐데르트를 바라보았다.
“와, 진짜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오랜 친우의 조언에 아스타레아스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점은커녕 둘만의 시간도 제대로 못 보내는 것 같은데. 내 황후님은 너무 만인의 연인이야.”
그 말에 힐데르트는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저번 주에 나한테 농지 개발 계획안 떠넘기고 넌 어디로 갔지?”
황후님께 갔다.
“지지난 주에는 세법 개정과 관련해 나한테 귀족들을 설득시키라고 하고 어디 갔더라?”
당연히 황후님께 갔다.
“세법 개정을 나 혼자 설득하라니, 네가 생각해도 너무 했지?”
“……너 혼자는 아니었잖아.”
“지금 그 말이 나와? 지금 말한 것 외에 다 읊어줘?”
힐데르트가 눈을 부릅떴다. 아스타레아스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억울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힐데르트가 아스타레아스를 노려보다가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말 시키지 마. 리페 봐야 해.”
“야.”
아스타레아스가 불만스럽게 힐데르트를 불렀지만 더 뭐라 하진 못했다.
내 황후님 아까우니까 보지 말라고 하기엔 양심이 쿡쿡 찔렸다.
아스타레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칼리오페는 그의 속도 모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못생겨도 좋을 텐데 왜 저렇게 완벽하게 이쁜 거야.’
아스타레아스는 속으로 불만을 삼켰다.
풀리지 않은 억울함은 아직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힐데르트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주 사적인 불만이었다.
‘하지만…… 최근 리페가 묘하게 잠자리를 피한단 말이야.’
공연 준비 때문에 피곤하다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이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진심을 담은 거절이 떠오른 것은.
처음 그 얼굴을 봤을 때는 충격이 너무 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말 피곤한가 보다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런 나날이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이제 아스타레아스는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서 칼리오페에게 깊은 스킨십을 시도조차 못 하고 있었다. 두려울 것 하나 없는 황제 폐하께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것이 황후님의 거절이었다.
‘그러게 왜 이런 공연을 해서는…….’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공연 끝나고 보자.’
아주 뼈와 살이 불타다 못해 황궁마저 홀랑 타버리는 밤을 보낼 테다.
물론 그 결심이 지켜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 *
환호 소리가 귀와 가슴을 먹먹하게 울렸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 처 현실감마저 사라질 지경이었다.
마지막 곡이 끝났다.
칼리오페는 전광판에 뜬 숫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상상치도 못할 정도의 액수가 떠 있었다. 오늘 칼리오페가 공연하는 와중에 기부된 금액의 총액이었다.
“여러분, 희귀병을 앓는 아이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칼리오페가 인사하자 더 큰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숫자가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억 단위가 바뀌는데?’
억 단위가 마치 백 단위처럼 매 초마다 휙휙 바뀌었다.
“리페님이 응원하시는데 이 정도야!”
“덕후의 저력을 보여주자!”
“이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되지!”
“앞으로 공연 클로징할 때까지 100억은 더 간다!”
“계속 기부금 쏴서 공연을 못 끝내게 하자!”
“그래! 노래가 끝났다고 해서 공연이 끝나는 건 아니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후, 오늘을 위해서 일했다.”
공연장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생중계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미친 듯이 통신석을 눌렀다.
“아, 리페님 얼굴 보느라 넋을 놓다가 실수로 공 하나 더 눌렀네요.”
“저도 실수로 한 번 더 기부해버렸네요.”
“우리 애가 미소 지으면 또 실수할 것 같은데.”
귀부인들이 한숨을 내쉬며 속닥거렸다.
칼리오페가 황후가 된 후로는 황후 폐하 혹은 리페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공연에 흥분한 탓에 옛날처럼 우리 애, 우리 애 소리가 나왔다.
계속해서 오르는 숫자에 칼리오페의 동공이 흔들렸다.
‘고, 공연 끝났는데……. 어쩌지?’
보답하고자 더 노래를 부르고 싶긴 했지만, 그럴 상태가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으, 모르겠다.’
예정대로 지금 말하는 수밖에 없다.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떨리는 칼리오페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통신석을 누르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릴 적 노래할 때도 목소리 하나 떨지 않았던 칼리오페가 아니던가.
‘대체 무슨 일이지?’
‘우리 애가 저러는 거 처음 보는데…….’
소란스러웠던 테르난 홀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을 느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곧…….”
‘곧?’
‘대체 뭐지?’
사람들은 궁금하다 못해 답답함을 느꼈지만, 소리 내서 칼리오페를 재촉하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려 주었다.
온기를 담고 있는 시선들에 칼리오페는 후, 숨을 내뱉어냈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곧 엄마가 됩니다.”
정적이 찾아왔다.
아까 전의 잠잠했던 분위기와 차원이 다른 적요였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칼리오페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별로였나…….’
결혼식 때부터 아기는 언제 볼 수 있나, 남녀 쌍둥이였으면 좋겠다, 하는 말이 나왔던지라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좋아해 주었으면 했는데.’
불안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기대했다.
‘그냥 홍보부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발표할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뭐? 진짜로?”
“내가 들은 게 사실이야?”
“리페님이 엄마? 그럼―.”
“드디어 황손을 볼 수 있는 거야?!”
“리페님 2세?”
“리페님 미니미!”
“무조건 황녀님이셔야 해!”
“아니야, 황자님이신 것도 꽤…….”
“역시 쌍둥이로 하자.”
“두 분 폐하의 성혼식 때 여자아이랑 남자아이 신발을 광장에 진상했는데. 그때의 기원이 드디어……!”
“아, 근데 황제 폐하의 미모도 장난 아니시니 두 분 폐하의 아이는…….”
“상상만으로 행복하다.”
“솔직히 우리 황녀님과 황자님의 미모만 생각해도 두 분 성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역사서에 역대 최고의 결합이라고 쾅쾅 박혀야지.”
벌써 우리 황녀님, 우리 황자님 소리가 나왔다.
폐위된 선대 때와 달리 지금 황실에 대한 제국민의 호감도는 매일 최고치를 경신 중이었다.
국민적 지지를 받는 칼리오페가 황후인 데다가 아스타레아스는 소공자 시절부터 사람들의 애정을 받았던 인물이다. 사람들은 당시 황자였던 아스타레아스의 사촌보다 소공자인 그를 더 아끼고 사랑했다.
황제가 된 아스타레아스의 아래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항상 죽어 나가지만, 사람들의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윤택해졌다.
황실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곧 태어나실 황녀님, 황자님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 때부터 2세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았던가.
흥분한 말과 말이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고요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폭포처럼 테르난 홀을 울렸다.
사람들이 제각기 말을 내뱉고 있어 칼리오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기된 얼굴을 보니 싫어하진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다.
‘으, 다행이야…….’
처음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서 그런지 힘이 쭉 빠졌다.
‘그나저나 레아스랑 가족들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깜짝 선물이었다.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은 항상 손주와 조카를 보고 싶어 하셨으니까.
‘좋아하시겠지? 하지만 역시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았을지도 몰라. 서운해하실 것 같은데…….’
칼리오페가 가족들과 아스타레아스에게 먼저 말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말하면 공연이 취소되었을 테니까.’
칼리오페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창 공연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때였다. 공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이미 극대화된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너무 설레했으니까.’
칼리오페가 이번 공연을 기획하게 된 건 자선 활동 중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을 직접 만나면서였다.
제도적인 지원을 마련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이 모이면 관련 의료 연구도 탄력을 받게 되고 법제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니까.
‘부모님이나 레아스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면 무리하면 안 된다며 공연을 취소했을 거야.’
특히 아스타레아스는 처음부터 이 공연을 탐탁지 않아 했다.
칼리오페도 무리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 역시 배 속의 아이가 소중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엄마가 되었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배 속에 있는지도 잘 모를 생명체가 사랑스러웠다.
‘나와 레아스의 아이.’
그냥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숨이 꽉 막히도록 벅차올랐다. 그리고 그건 그 아이들의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들.
아스타레아스와의 아이가 애틋한 만큼 더더욱 그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
대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연 일정을 조율했다. 노래 수도 처음 계획보다는 적었고, 움직임도 슬쩍 박자를 타는 정도였다. 벌써부터 엄마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인지 아이는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덕분에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아이들도 도울 수 있었어.’
배 속에서부터 남을 돕는 아이이니 밖에 나와서는 더더욱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다.
그렇다.
루스티첼 가의 팔불출은 핏줄에 각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칼리오페는 벌써부터 팔불출 끼를 내비쳤다.
* * *
“어, 어, 엄마……? 우리 리페가 지금 엄마라고 한 거 맞아?”
로베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조카 생기는 거야?”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그 질문에 대답해줄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 리페의 아이라니…….”
“어서 안아보고 싶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걸까……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게 아닐까…….”
감개무량했다.
기쁘고 행복하고 대견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막둥이랑 똑 닮은 손주, 조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이제나저제나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지만 막상 생기니…….
“좋긴 좋은데 왠지 화가 나는데…….”
“사위 놈…… 아니, 님은 지금 뭘 하고 있지?”
루스티첼 백작의 근육이 꿈틀했다.
“우리 리페가 지금 자기 발로 서 있잖아.”
루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냉기를 내뿜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항상 안고 다녀야 하는 거 아냐?”
그 말에 호르세안이 짜게 식은 눈으로 자신의 친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베르트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 리페가 자기 코로 숨을 쉬고 있잖아! 다 알아서 대신 해줘야지!”
‘아니, 숨을 대신 쉬어주면 죽어…….’
호르세안은 대체 이 가족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칼리오페의 임신 소식에 놀랐지만, 옆에서 이렇게 오버를 하니 오히려 진정이 됐다.
‘그렇구나, 이제 리페가 엄마가 됐구나.’
그가 턱을 괴며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어렸을 때의 얼굴 그대로다.
‘그래, 축하할 일이네.’
천천히, 호르세안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 * *
“레아스…….”
힐데르트가 눈치를 슬슬 보다가 결국 아스타레아스를 불렀다.
박스석 안의 분위기는 뭐라 형용할 수가 없었다. 힐데르트는 아스타레아스가 기뻐하는 건지 분노하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뭐야, 뭐라도 반응을 해.’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석상처럼 굳어진 채였다.
힐데르트가 힐끗 뒤에 있는 러그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아스타레아스를 모셔온 러그윈도 도저히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상치 않은 애 아빠의 분위기에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의 임신 소식에 제대로 놀라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아스타레아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레아스!”
“폐, 폐하 갑자기 어딜 가십니까!”
힐데르트도 러그윈도 당황해서 아스타레아스를 불렀다. 하지만 그 누가 황제 페하의 발걸음을 가로막겠는가.
아스타레아스는 거침없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박스석 밖으로 나갔다.
혹시 아스타레아스가 어떻게 반응할까 두근두근하며 박스석을 바라보고 있던 칼리오페는 굳은 표정으로 사라지는 남편의 모습에 바짝 얼어붙었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레아스……?’
칼리오페는 차가운 손을 꽉 맞잡았다.
역시 이렇게 알리는 건 아니었나. 먼저 말을 해야 했나. 그랬으면 좋아해 주었을까.
가슴이 복잡했다.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을 돕고 싶었지만, 아스타레아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돕는 거야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고, 무엇보다—.
칼리오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스타레아스였으니까.
‘……내가 너무 경솔했나 봐.’
칼리오페가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아—!”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객석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칼리오페는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레,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허공에 떠 있었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벌어졌다. 박스석을 나간 아스타레아스가 텔레포트를 사용해 칼리오페의 앞으로 온 것이다.
한쪽 어깨에 걸친 그의 망토가 공중에서 무겁게 펄럭였다.
아스타레아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칼리오페는 옛 기억에 눈을 깜빡였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예전에도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내민 적이 있었다. 쫓기는 와중, 들키면 안 되는 위기의 순간에.
기억 속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쳤다.
앳되었던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은 턱선이 단단히 여물며 완연히 남자답게 변했다. 내미는 손 역시 모양이 보기 좋다는 건 변함 없지만 크기부터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같았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추억이 지금 이 순간 다시 살아 숨 쉰다.
칼리오페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손이 단단한 손바닥에 닿는 순간,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마치 발아래 구름이라도 밟은 것처럼 칼리오페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물결쳤다.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꺅!”
갑자기 확 끌어당겨져 칼리오페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아스타레아스의 품에 그녀가 쏙 들어갔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댄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품에서 나는 향기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임신한 탓에 스킨십을 피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렇게 꽉 끌어안기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칼리오페는 조금 주저하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칼리오페만을 담고 있었다. 그는 칼리오페가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깊어서…….
“레아—”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이름을 채 부르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아무것도 새어 나오지 못했다. 목소리도, 숨결도, 흐느낌도.
그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입술을 입술로 막아버렸기에.
칼리오페가 눈을 홉 떴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환호성은 더 커졌으나, 칼리오페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이 세상에 아스타레아스와 자신만 있는 것 같았다.
발밑은 구름을 밟은 듯 가벼웠고, 그녀는 사랑하는 이의 품에 감싸여 있었다. 뜨겁고 단단한 품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다는 게 이렇게나 설레고 안심될 수가 없었다.
사실은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다.
알자마자 이야기하고 싶었다.
결혼도 했으니 아이가 생기길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생기니 조금 두렵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쩌면 좋을지, 잘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하고 싶었다.
‘아…….’
이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있으니 여태까지 혼자 끙끙 앓아 왔던 게 사르르 다 풀렸다.
‘마법 같아.’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아스타레아스뿐일 거다. 칼리오페 스스로조차 못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스타레아스의 목을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틀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등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다가 멈칫했다.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갑작스럽게 키스를 멈추자 칼리오페가 몽롱한 얼굴로 눈을 떴다. 그 얼굴을 본 아스타레아스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들어 모든 것을 가지고 싶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내쉬는 숨결 하나조차도 그에게 자극적이라는 것을 칼리오페는 알긴 알까.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초유의 인내심으로 솟아오른 욕망을 내리눌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의 아이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너무 꽉 끌어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조심스러운 말에 칼리오페가 작게 웃었다.
“아직 배도 나오지 않았는걸요.”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배를 바라보았다.
사실 허리에서 풍성한 치맛자락이 시작되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체형에 딱히 변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최근 깊은 스킨십을 하지 않았지만, 남편으로서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칼리오페 본인보다 그녀의 몸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그게 확실했다.
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아니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만져봐도 돼?”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칼리오페는 조심스럽게 묻는 그의 모습이 조금 재밌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이런 식으로 떨려 하며 만져도 되냐고 묻는 날이 올 줄이야.
첫날밤조차 이러진 않았는데.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천천히 칼리오페의 배에 손을 뻗었다. 겹겹이 쌓인 드레스 자락 아래로 납작한 배가 만져졌다.
그뿐이었다.
태동도, 이렇다 할 부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경이로웠다.
신비하고, 놀랍고, 이상하고, 그리고.
그리고.
“레아스?!”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아스타레아스를 불렀다.
푸른 눈에 투명한 눈물이 맺히더니 툭, 하고 떨어졌다.
아스타레아스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누가 보면 눈물을 흘렸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얼굴.
하지만 칼리오페는 분명히 봤다.
설마 아스타레아스가 울 줄은 몰랐다.
‘나도 울지 않았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더 컸었다.
여하튼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싫지 않다는 뜻이리라.
칼리오페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싫어하는 줄 알고.”
그 중얼거림에 아스타레아스가 세상에서 가장 황당하고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그녀를 보았다.
“당신과 내 아이를?”
“그게…… 갑자기 나가고.”
“마법 쓰는 것조차 잊어버렸어.”
발로 뛰는 것보다 비행 마법을 쓰는 게 더 쉬울 대마법사가 마법 쓰는 걸 잊어버릴 정도라니.
칼리오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웃는 칼리오페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아!”
몸이 붕 뜨는 감각에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조금 전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잡아 몸이 뜰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공주님처럼 그녀를 안아 들었으니까.
“내, 내려줘요.”
“싫어요.”
칼리오페를 안아 든 아스타레아스가 더 높이 떠올랐다. 칼리오페는 저 밑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보잖아요.”
“내가 내 황후님 안고 있는 게 뭐 어때서요. 많이들 보라고 하지.”
“부끄러워요.”
빨개진 채 웅얼거리는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아스타레아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귀엽게 굴어도 안 돼.”
“내가 언제 귀엽게 굴었다고…….”
지금 이렇게 꿍얼거리는 게 작정하고 귀엽게 구는 게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더 귀엽게 굴어도 안 돼. 이건 벌이니까.”
“벌이라니.”
칼리오페가 불만스레 그를 올려다 봤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이마에 쪽, 키스했다.
“나한테 가장 먼저 말하지 않은 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얌전히 벌을 받는 수밖에.
칼리오페는 부끄러워서 아스타레아스의 가슴에 얼굴을 숨긴 채 그에게 폭 안겼다.
‘진짜 이렇게 귀여워서.’
아스타레아스는 사람이 이렇게 귀여운 것도 큰 문제라고 생각하며 공중을 거닐었다.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잊지 못할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그때, 걸음을 옮기던 아스타레아스가 갑작스레 멈칫했다. 그리고 저 밑에 어이없다는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는 힐데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힐데르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입을 벌렸다. 그는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결국 힐데르트는 이마를 감쌌다.
“아니, 뭔…….”
그의 뒤에 있던 러그윈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뭐,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국고에서 쓰는 것도 아니고 황제의 사재에서 쓰는 건데. 심지어 좋은 곳에 쓰이는 돈 아닙니까.”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불순하니까 문제인 거지.”
힐데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도 황제의 명에 따라 착실하게 통신석을 조작했다.
그가 통신석 화면을 끄는 것과 동시에 무대 옆에 있던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기부액의 총금액이 나와 있는 글자였다.
그리고 총액 밑에 표기되었던 기부금 순위에 1위가 새롭게 갱신되었다.
1위. 애 아빠.
기부금: 10,000,000,000 운드
칼리오페가 터트린 소식에 기부 경쟁이 멈춰있던 상태라 그 변화는 더욱 도드라졌다. 사람들이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100억……?”
“애 아빠?”
지금 이 순간 애 아빠라면서 기부하는 사람이 누구일진 확실했다.
전광판에 표기되는 기부자는 총 10위까지였다. 10위를 사수하고 있던 기부자가 울상을 지었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애 아빠’ 때문에 순위권에서 밀려나 이름을 박는 걸 실패했다.
1위를 목표로 달리고 있었던 최상위 기부자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더 하면 안 되겠지?”
“제치고 1위 했다가 무슨 난리가 나려고…….”
“어휴, 진짜 너무하네. 결혼했으면 됐지 여기서도 일 위하려고 해.”
“왜 목록에 폐하께서 안 계시나 했다, 진짜.”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은 결국 미소를 지었다.
기실 이들은 소위 레리커플의 극성 추종자였다. 아스타레아스가 이 사소한 것에서조차 1위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기꺼웠다.
무엇보다 오늘은 참 기쁜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1위에 당당히 자리한 ‘애 아빠’란 이름이 그 소식의 증거였다.
* * *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아니, 제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까지도 난리가 났다.
“뭐? 기부 총액이 1000억을 넘었다고? 공연 30분짜리 아니었어?”
“세상에, 병원 하나 새로 짓고 의료진 다 고용해도 되겠네.”
“근데 기부금 1위가 ‘애 아빠’라며.”
“응, ‘애 아빠’말이지…….”
“근데 그 1위가 안 나왔으면 2000억까지 갔을 수도.”
“‘애 아빠’를 제칠 수 없어서 큰 손들이 마지막 스퍼트를 안 올렸잖아.”
사상 초유의 기부금이 나온 것도 나온 것도 엄청난 이슈였다. 원래라면 이것만으로도 헤드라인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일.
하지만.
“지금 기부금이 문제야? 황손이 태어난다는데!”
“그것도 첫 아이라고!”
대륙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제국의 황제.
그가 처음으로 얻은 자식이다. 당연히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이 사건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관심의 방향이 어딘지 조금 이상했다.
단순히 황손의 탄생에 기뻐하는 거라고 하기에 제국민의 반응은 과했고, 주변국들 역시 국제 정세보다는 다른 것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아이가 부모 중 누굴 더 닮았을지, 성별은 무엇일지부터 시작해서 오늘을 기념해서 국가 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기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바쁘게 타자기를 두드렸고, 마도 인쇄 공방은 미친 듯이 돌아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것은 통신석을 통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퍼 나르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의 입도, 손가락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야말로 전 세계가 단숨에 끓어올랐다.
그러나 정작 그 소식을 세상에 던진 당사자는 아주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을 만끽 중이었다. 공연의 막이 내리지도 않은 상황에서 황후를 납치한 황제가 품에서 안 내려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품에 안긴 채 꿈지럭거렸다.
“저기, 레아스. 이제 내려줘도…….”
“안 돼요.”
“이제 다 왔고, 또 무거울 텐데…….”
“무거워지고 난 후에야 그런 말 하세요.”
그렇게 말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긴, 내 황후님과 내 아이를 드는 게 무거울 일은 없겠네요.”
“정말…….”
칼리오페가 입술을 비죽였다.
“벌이라고 했잖아요. 안 내려줄 거야. 평생 내 품에 품고 있어야지.”
최근 칼리오페가 공연의 막바지 준비로 바빴던지라 아스티레아스는 그녀를 마음껏 끌어안고 있지 못했다. 칼리오페를 찾아가더라도 공연을 기획하거나 노래를 연습하는 모습만 바라보다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라만 봐도 행복하지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이렇게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는 때가 가장 좋았다.
아스타레아스는 볕이 포근하게 들어오는 창가에 앉았다.
여전히 칼리오페를 품에 안고 있는 채였다.
칼리오페가 꿈지럭거리며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한 팔로 아주 손쉽게 다시 그녀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흐뭇한 눈으로 보고 있던 시녀에게 명했다.
“당장 악단을 불러.”
“예, 폐하.”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칼리오페가 의아한 눈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악단이요?”
“태교에 음악을 듣는 게 좋대요.”
“아, 그렇죠. 저도 그간 틈틈이 레코딩한 걸 많이 들었어요. 하르첸 경이 특별히 녹음해…… 줘서…….”
웃으며 말하던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하르첸 경이 특별히 녹음을요.”
아스타레아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 하르첸 경도 임신 사실은 몰라요. 그냥 제가 곡 몇 개를 따로 뽑아서 레코딩을 부탁한 거예요.”
아스타레아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공연 때문에 그러지 못하게 됐지만, 적어도 아스타레아스보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알리긴 싫었다.
회임을 진단한 궁의 외에는 그 누구도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공연 연습을 한다고 그놈…… 아니, 하르첸 경과 딱 붙어 있었지요.”
“딱 붙어 있긴요. 하르첸 경은 피아노를 치고 있고 저는 서서 노래하는데.”
“그래도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잖아.”
아스타레아스가 투덜거렸다.
칼리오페는 질투하는 남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해. 웃기까지 하고. 나 삐졌는데.”
“미안해요.”
사과하는 칼리오페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말로만?”
그렇게 말하며 아스타레아스가 눈을 감았다. 남자다우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얼굴에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앉는다.
칼리오페는 새삼 감탄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를 닮은 아이가 내 배에 있다는 거지.’
느낌이 이상했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느낌. 동시에 배 속에서 북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나 기다리고 있는데.”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그의 입술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쪽, 하는 귀여운 마찰음과 함께 다가왔던 칼리오페의 입술이 다시 멀어졌다.
아스타레아스는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깊게 입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그녀의 숨결을 맛보았다.
달다.
그가 각도를 틀며 조금 더 깊게 그녀의 입안을 헤집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 쪽으로 무게를 싣자 자연스럽게 칼리오페의 상체가 기울었다.
포옥, 푹신한 소파가 칼리오페의 등에 닫는 순간.
팍!
아스타레아스는 갑작스럽게 밀려나 눈을 깜빡였다. 천국에 있다 갑자기 현실로 끌려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지?’
다른 부분에서는 냉철하고 비상할 정도로 두뇌 회전이 빠른 그였지만, 지금은 상황 파악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아래에 있는 칼리오페를 향했다.
두 손을 뻗고 있는 모습.
안아달라고 손을 뻗은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자세는…….
‘설마.’
아스타레아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 내 황후님이 나를 밀어낸 건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사실이었다.
충격받은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보고 칼리오페는 아차, 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순 없는 법이다.
“저기, 레아스…….”
조심스러운 칼리오페의 부름에도 아스타레아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칼리오페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스타레아스가 흠칫, 하더니 초점 없던 시선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끌어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납작한 배였다. 당연히 태동이 느껴지지도 않고, 특별한 부피감도 없었다. 말하지 않으면 임신했는지도 모를 정도.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무언가를 느꼈다.
누군가는 착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단언할 수 있었다.
여기, 이곳에 자신과 칼리오페의 아이가 살아 있다고. 그게 느껴진다고.
“시,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이가 있으니까…….”
칼리오페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작게 변명했다.
아스타레아스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온 얼굴에 키스하고 싶었다. 그러면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이 더 탐스럽게 붉어지겠지.
하지만 그는 그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그렇게 욕망에 하나씩 굴복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다. 아스타레아스는 인내심과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황후와 관련되기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참을성 없는 남자가 되었으니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내를 두고 수절해야 한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제 무릎 위에 앉힌 채 배를 쓸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아빠를 고생시키는구나.”
“레아스도 참…….”
“아빠는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는데.”
“내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아빠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공연 준비 때문에 지쳐서 그러는 줄 알고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레아스!”
칼리오페가 얼굴을 붉힌 채 그를 흘겼다.
아스타레아스는 터질 것 같은 그녀의 뺨에 촉, 하고 키스했다.
“너무 자극하지 말아요. 지금도 겨우 참고 있는걸.”
“아니, 내가 언제 자극했다고…….”
방금은 탓하며 째려본 것 같은데. 거기에 자극을 느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당신의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 자극적인걸요.”
아스타레아스가 그렇게 속삭이며 칼리오페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미끄러트려 내려 뺨과 턱에 이어서 키스하려던 그가 윽, 신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오페의 얼굴에서 입술을 뗀 아스타레아스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진짜 아빠가 엄청 양보하는 거야.”
진지한 얼굴로 배에 대고 말하는 모습에 칼리오페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엄마 너무 괴롭히면 안 돼. 엄마 힘들게 하는 건 용서 못 해.”
심각하게 타이르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했다.
환하게 웃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스타레아스가 살살 그녀의 배를 매만졌다.
“분명 싫은 건 아니라고 했어요.”
“네?”
엉뚱한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요.”
“아…….”
아스타레아스가 무얼 말하는지 깨달은 칼리오페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좋다는 뜻이지요?”
“그, 그게…….”
칼리오페가 시선을 떨궜다. 새하얀 목이 발갛게 물든 채였다.
뭘 또 그런 말을 귀담아듣는단 말인가.
칼리오페가 어물어물하며 대답을 피하자 아스타레아스가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좋진 않아요? 나만 좋은가.”
그 반응에 화들짝 놀란 칼리오페가 손을 내저었다.
“나, 나도 좋아요! 레아스랑…….”
칼리오페가 말을 멈추고 휙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한 건지.
아스타레아스가 쿡쿡 웃으며 그녀를 깊게 끌어안았다. 저번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대범하게 굴더니 다시 수줍음이 가득해졌다. 아스타레아스는 어느 쪽이든 좋았다.
“그러면 엄마도 엄청 양보하고 있는 거네.”
“레아스으…….”
칼리오페가 앓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엄마, 아빠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건강하게 나와야 해.”
“정말…….”
한숨을 내쉬는 칼리오페의 입매는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봄볕 아래 몸을 누인 것처럼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한때였다.
결혼하고 4년 차에 선물처럼 찾아온 아이.
여전히 신혼처럼 사는 황제 부부였지만, 아이에 대한 준비를 안 해놓은 건 아니었다.
함께이기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봄.
그래서 칼리오페도, 아스타레아스도 설마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각.
드넓은 방을 밝힌 불빛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방만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 앉은 남자가 트럼프 카드를 넘겼다. 파라라락, 남자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십 장의 카드가 물결치며 뒤섞였다. 느긋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남자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파라락, 탁!
이윽고 남자가 카드를 섞던 손을 멈췄다.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으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되묻지 않았다. 아니, 되묻지 못했다. 그저 마른침을 꿀꺽 삼킬 뿐.
남자는 테이블 위에 있는 통신석을 툭, 두드렸다.
“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2’라는 숫자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냐고.”
도열해 있던 사람 중 가장 키가 작은 사내가 힐끗 통신석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2위. 네 운명.
기부금: 9,999,999,999 운드
오늘 있었던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자선 공연의 기부 순위가 떠 있었다.
“내가 분명 1위를 만들라고 했을 텐데?”
“하, 하지만…….”
사내는 저도 모르게 항변했다가 흠칫,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남자는 감히 제 말에 토를 단 사내에게 역정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말해보라는 듯이 느긋한 시선을 주었다.
“제국의 황제가 1위를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넘보지 말라는 선언을 하듯 했지요.”
“그래서?”
“만약 더 기부해 1위를 만들었으면 황제가 누구인지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가명으로 댄 ‘네 운명’이라는 이름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
챙그랑—!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술잔이 깨졌다. 동시에 말하던 사내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남자가 던진 술잔에 머리를 다친 사내가 비틀거렸다.
“그깟 놈이 대체 무슨 상관인데?”
“저, 전하…….”
“이 내가 그놈의 심기를 건드릴까 걱정하며 벌벌 떨어야 해?”
“무슨 말씀을……!”
“당연히 아닙니다!”
주인의 분노에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하지만 남자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1위를 해야 의미가 있어. 운명은 특별한 거라고.”
남자의 말에 조아리고 있던 여자 한 명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전하.”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이제 놓아주시지요.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결혼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심지어 이번에 아이까지…… 아악!”
비명 소리와 동시에 여자가 눈을 감쌌다. 트럼프 카드 한 장이 그녀의 손에서 우그러졌다.
“내, 내 눈……!”
“시끄러워.”
남자의 말에 부복하고 있던 사내 한 명이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패닉에 빠졌던 여자는 흠칫하더니 비명을 멈췄다.
눈 하나로 끝나고 싶으면 조용히 해야 했다.
“결혼한 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그깟 맹세보다 더 중요한 게 운명이야.”
남자가 트럼프 카드를 손끝으로 드르륵 넘기며 말했다.
“임신?”
그가 픽, 웃었다.
“임신 좋지. 그녀를 닮은 아이는 참 귀여울 거야.”
남자의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다른 놈의 씨는 안 되지.”
와그작!
거친 소리와 함께 트럼프 카드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유산이라는 게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잖아?”
남자가 활짝 웃었다.
“저, 전하 제발…….”
사람들은 거의 빌 듯이 남자에게 애원했다. 제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괜찮아. 아이는 또 낳게 될 테니까.”
그가 다 구겨진 트럼프 한 장을 집어 올렸다.
“내 아이를.”
조커였다.
* * *
“조심해. 돌부리야.”
에피니의 말에 칼리오페가 후후, 웃었다.
황궁의 정원은 잘 가꿔져 있다. 걸려도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돌부리를 조심하라니.
심지어 에피니는 칼리오페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넋을 놓고 걸어도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 웃어?”
“아니, 내 기사님이 날 너무 잘 지켜주시니까.”
“뭐야, 그게.”
에피니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조금 보이는 그녀의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꿉친구의 귀여운 모습에 칼리오페는 싱긋 웃고는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배가 부풀어 오른지라 옆에서 잡아주니 한결 편했다.
“리페!”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었다.
로베르트가 손을 크게 흔들더니 이쪽으로 뛰어왔다. 호수 옆에 있는 가제보(gazebo) 안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리페! 보고 싶었어!”
로베르트가 와락 여동생을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혹시라도 끌어안다가 배를 누를까 봐 걱정된 모양이었다.
‘로벨 오라버니께서는 만날 때마다 이러신다니까.’
칼리오페는 웃으며 먼저 로베르트를 끌어안았다. 로베르트는 동생의 포옹이 좋은지 웃으면서도 팔을 어정쩡하게 왔다갔다 거렸다.
“끌어안아도 괜찮아요.”
“으, 응……!”
로베르트가 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로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살포시 등에 손만 얹는 게 조금이라도 힘주면 깨지는 것을 다루는 듯했다.
칼리오페는 쿡쿡 웃으며 몸을 뗐다.
그때, 뱃속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어머?”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배 눌렀어?”
로베르트가 울상이 되어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칼리오페는 어쩔 줄 모르는 로베르트의 손을 잡고 살며시 자신의 배 위에 얹었다. 그때까지도 로베르트는 진짜 만져도 되나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
로베르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 움직였어!”
“네, 움직였죠. 삼촌을 만나서 반갑나 봐요.”
삼촌.
칼리오페의 임신 후로 자주 들은 소리였지만, 언제 들어도 참으로 감미로운 말이었다.
“흐어어엉, 내 조카가 나한테 반갑대!”
로베르트가 눈시울을 붉혔다.
“어휴, 정말 이런 사람이 소드 마스터라니.”
“어디 가서 이런 모습은 안 보이는 게 좋겠어.”
칼리오페의 곁에 있던 에피니와 유리안이 로베르트를 향해 한마디 했다. 그러나 타격이 있을 리 없었다.
“흥, 내가 부러워서 그런 거지?”
로베르트는 콧대를 세운 채 착, 팔짱을 꼈다.
에피니와 유리안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하지만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부러운 게 맞았다.
투닥투닥거리는 세 사람을 지켜보던 칼리오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멈춰서 안 오나, 이쪽에서 가볼까 기웃기웃거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버지, 루스 오라버니.”
가제보에 도착한 칼리오페가 가족들을 보고 인사하려는 순간이었다.
“어어, 고개 숙이지 말렴!”
“자, 어서 여기 앉으렴. 그늘이라 시원해.”
수선을 떠는 세 사람을 보며 칼리오페가 웃음을 삼켰다.
“그다지 더운 날씨도 아닌걸요. 인사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되는데.”
배가 엄청 나온 것도 아니고 이제 25주 정도 됐다. 살짝 고개 숙이는 정도는 아무 무리도 아니었다.
“무슨 소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모자란단다.”
“정원에서 만날 게 아니라 우리가 방으로 갔어야 했는데.”
“걸어오느라 고생했다. 빨리 앉으렴.”
“그래, 이쪽으로 오거라.”
“힘들지? 여기 앉아.”
가족들이 서로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칼리오페 옆에 서 있던 로베르트도 “어어?” 하더니 제 자리로 가서 옆자리를 손짓했다.
“리페, 이리 와!”
‘아니 저놈이?’
‘내 동생인데!’
‘내 딸은 내 옆에 앉아야 해!’
가족들 사이에서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스치는 눈빛 속에서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승자는 역시 가족 내 서열 부동의 1위인 사람이었다.
“리페, 어서 엄마한테 오렴.”
루스티첼 부인이 활짝 웃으며 딸아이에게 손짓했다.
칼리오페는 에효, 하고 한숨을 쉰 후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별거 아닌 것 가지고 만날 때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루스티첼 백작이 냉큼 반대편 옆자리에 앉았고,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마주보는 곳에 앉았다.
“힘들지 않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가족들은 사석에선 칼리오페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칼리오페가 원했기 때문이다. 가족들 역시 황후로 칼리오페를 대하는 것보다 여전히 막둥이로 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힘들긴요. 레아스가 잘해주는걸요.”
칼리오페의 대답에 가족들은 탐탁잖은 얼굴이 되었다.
“당연히 잘해줘야지!”
“내 딸 성인이 되자마자 데리고 갔는데!”
“흐음, 아무리 잘해준들 과연 나보다 잘해줄까.”
“내 동생 홀대하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로베르트의 말에 가족들은 물론이고 함께 앉은 에피니와 유리안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가만두지 않는다니. 무서워라.”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자 황제 폐하께서 서늘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 웃고 있는 얼굴로 저렇게 벼린 날처럼 새파란 예기를 내뿜을 수 있는 것도 재주였다.
‘우와…….’
‘저거 질투해서 저러는 거지.’
유리안과 에피니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또 어디에 꽂혔는지 몰라도 질투하는 얼굴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저렇게 고요하게 분노하는 것은 오직 칼리오페가 관련된 일뿐이니까.
“이거 정말 슬프네요. 내 편은 하나도 없구나.”
아스타레아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긴 속눈썹이 그의 뺨에 처연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또다.’
‘진짜 이 모습을 다른 사람들도 봐야 하는데.’
국무를 볼 때, 관료들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불쌍한 척을 하니 가증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레아스…….”
칼리오페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스타레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가증스러워하든 말든 상관없다. 단 한 사람만 자신을 불쌍히 여기면 됐으니까. 아니, 칼리오페 외에 다른 사람이 감히 자신을 불쌍히 여기면 당장 후회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내가 레아스 편이니까 걱정 말아요.”
“정말이요?”
처량하게 바라보는 미남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굳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요.”
“내 황후님만 믿을게요.”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 봤다. 마치 ‘보셨습니까.’ 하고 자랑하듯이.
루스티첼 일가가 부들부들 떨며 그를 노려봤다.
“아, 그러고 보니 리페.”
루스티첼 백작이 탁, 하고 손짓했다.
그러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공손하게 무언가를 가져왔다.
“이건…….”
“요정의 꿀이란다.”
“요정의 꿀이요?!”
칼리오페가 당황해서는 루스티첼 백작과 꿀을 번갈아 보았다.
요정의 꿀.
그건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물건이었다.
얼음가시나무 산맥의 가장 깊숙하고 가장 추운 곳. 극한의 환경에 아무 생명도 살지 않지만, 단 하나 요정의 꽃이라고 불리는 식물이 살고 있다.
요정의 꿀이란 그 꽃의 꿀이었다. 그야말로 첩첩이 쌓인 산맥이 감추고 있는 보물이었다.
심지어 얼음가시나무 산맥은 몬스터의 주서식지였다. 그야말로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곳에서 구해온 것이다.
“이 귀한 걸…….”
“우리 막둥이를 위해서 못할 게 뭐가 있겠니.”
“그래, 이 오빠는 널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
“나도 같이 갔어!”
“아버지, 오라버니들…….”
칼리오페가 감격한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게 입맛을 돌게 하잖니. 잘 먹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네 아빠와 오빠들이 직접 가서 꿀을 따왔단다.”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감격한 칼리오페를 보고 미소 지은 루스티첼 부인의 시선이 아스타레아스를 향했다.
장모님의 시선에 아스타레아스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아주 선량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왔던 힐데르트는 불안함을 느꼈다.
힐데르트는 머릿속으로 황가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도 같은 영약들을 떠올렸다. 그중 태반이 임신한 칼리오페의 입으로 들어갔다.
물론 칼리오페는 알지 못했다. 만약 안다면 어떻게 황가의 보물을 그렇게 막 쓸 수 있냐며 안 먹으려 들었을 테니까.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귀한 것들이었지만, 힐데르트 역시 마땅히 칼리오페의 입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궁내부 장관한테는 또 뭐라고 말하지.’
귀족들 몰래 빼돌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루스티첼 가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더 좋은 것을 리페한테 줄 수 있다며 대놓고 자랑할 생각일 텐데…….’
다른 귀족들이 모를 수가 없으리라.
‘어휴, 공식 서류로 남겨놔야겠네. 진짜 나만 귀찮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힐데르트는 미소 지었다.
‘뭐, 레아스 녀석이 그렇게 황가의 보물을 털어온 덕에 리페가 건강하니까.’
현재까지 산모도, 아이도 아무 탈 없이 건강하기만 했다. 그러니 추가 업무에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칼리오페가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좋았다.
‘네가 좋으면 난 다 좋아.’
그리고 그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동이 느껴져요.”
칼리오페가 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머, 정말?”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반짝 빛내며 딸의 배에 손을 얹었다. 살짝 두드리자, 그에 반응하듯 안쪽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정말이네! 세상에, 벌써 힘도 좋지.”
루스티첼 부인의 반응에 루스티첼 백작 역시 서둘러 솥뚜껑만 한 손을 얹었다. 꿈틀거리는, 작은 움직임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루스티첼 백작은 한동안 아무 반응도 없었다. 말이라도 한 마디 할 법한데, 꾹 다물린 입술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흡.”
작은 흐느낌이 루스티첼 백작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투명한 눈물이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 위로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아, 아버지?!”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루스티첼 백작을 불렀다.
손주의 움직임을 느끼며 주르륵 눈물만 쏟아내던 루스티첼 백작이 주먹으로 거칠게 눈가를 문질렀다.
“눈에,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변명이었다. 칼리오페가 미소 지으며 아빠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후후, 우리 리페 임신했을 때 생각나네.”
루스티첼 부인이 그 모습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그때 어땠는데요?”
“그때도 네 아빠가 이렇게 엉엉 울었—.”
“부인!”
루스티첼 백작이 다급하게 아내를 불렀다. 근엄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어머?”
루스티첼 부인이 남편을 바라보자 아내에게 약한 루스티첼 백작은 곧바로 꼬리를 깨갱 내렸다.
“어, 엉엉 울진 않았소…….”
소심한 변명이 뒤따르긴 했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그런 남편이 귀엽다는 듯이 후후, 웃었다.
“리페는 은근히 개구져서 심심하면 엄마 배를 뻥뻥 찼는데.”
“제, 제가요?!”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럼. 근데 세상 얌전한 아이가 나왔지 뭐니. 뭐, 크고 나니까 고집쟁이 아가씨라는 걸 알았지만.”
“어머니도 참 제 고집이 뭐 그리 세…….”
순간적으로 꽂히는 시선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 모두들 왜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는 거지…….’
억울했다.
“루스랑 로벨이 매일매일 엄마 배에 손이랑 귀를 대고 동생 언제 나오냐고 물었었는데.”
아직 나오려면 한참 남은 시점부터 어서 동생을 보고 싶다며 로베르트가 졸랐다. 루시우스는 그 옆에 아닌 척하고 서 있었지만, 누구보다 열렬한 눈으로 루스티첼 부인의 배를 쳐다봤다.
“매일매일까지는…….”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변명한 루시우스가 은근슬쩍 칼리오페의 배에 손을 얹었다.
몰랐는데 기척 없이 일어나 어느새 칼리오페에게 다가와 있었다.
“그래, 매일매일이 아니라 매시간 그랬지.”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본전도 못 찾은 루시우스가 끄응,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그의 신경은 꼼질꼼질거리는 조카의 움직임에 쏠렸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제게 쏠린 관심을 아는 것인지 배 속 아이는 쉴새 없이 꼼지락거렸다.
움찔거리는 움직임을 느낀 루시우스의 뺨이 상기되었다. 물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오랜 기억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듯 그를 물 들였다.
“뭐야, 나도! 나도 만질래!”
로베르트가 호다닥 뛰어와 칼리오페 곁에 섰다. 재빨리 손을 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으아, 너무 떨려!”
와 놓고서는 정작 만지지도 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살살 쓰다듬어주면 좋아하니까.”
그 말에 로베르트가 용기를 내서 칼리오페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 안 움직이는데?”
뭔가 잘못됐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불안한 어조로 묻는 로베르트를 보고 칼리오페가 웃음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어! 움직였어!”
로베르트가 깜짝 놀라 말했다.
“로벨,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째 똑같냐.”
루시우스가 한숨 쉬며 핀잔을 주었다.
평소라면 대번에 뭐라 화를 냈을 로베르트가 조용했다. 부풀어 오른 배에 시선을 고정한 모습을 보니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두 남자는 나란히 선 채 조카의 움직임을 느꼈다.
“……이렇게 있으니까—.”
“응.”
로베르트의 말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를 품은 엄마의 배에 나란히 귀와 손을 대고 태동을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배에다 대고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곤 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어느덧 배 속에 있었던 막둥이가 자라서 어머니가 그랬듯 새 생명을 품고 있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어느새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콧잔등이 붉어졌다.
“내 동생이 벌써 이렇게 커서…….”
“엄마가 다 되고.”
“우리한테는 아직도 막둥이인데.”
“앞으로도 계속 막둥이지.”
만감에 젖은 가족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을 들으며 칼리오페는 괜히 부끄러웠다.
임신하고 난 뒤로 어째 가족들이 감상적으로 된 것 같다. 원래 산모가 감상적으로 변한다고 하던데.
“흐음…….”
묘한 비음을 흘리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부러워서.”
“아…….”
칼리오페의 눈매가 쳐졌다.
아스타레아스의 부모인 선황제 부부는 그가 아기일 때 이미 승하하셨다.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그가 이 순간 얼마나 부모님을 그리워할지.
“이제는 내가 레아스의 가족이니까……. 물론, 감히 대신할 순 없겠지만—.”
살며시 손을 잡아오며 하는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뭘 대신해요?”
“아니, 그게…….”
우물쭈물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곧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당신이 내 가족이 된 지는 이미 몇 년이나 됐는걸요. 누굴 대신할 필요도 없이 확실한 내 가족이야.”
“레아스.”
칼리오페가 감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내의 손바닥 위에 쪽, 하고 키스한 아스타레아스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눈매를 휘었다.
“오해한 것 같은데.”
남편의 요염한 모습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내가 부러워한 건 다른 거예요.”
“다른 거라니요?”
“당신이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애정을 쏟을 수 있었던 게 부러워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칼리오페가 숨을 들이켰다.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말에 칼리오페가 그의 뺨을 쓸었다.
“우리 아이에게는 그렇게 해줄 수 있잖아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스타레아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그렇지요.”
황제 부부 사이로 살랑살랑 봄바람이 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소꿉친구들은 또 시작이다, 라는 얼굴이었고 루스티첼 일가는…….
‘용서 못 해!’
단숨에 칼리오페의 관심을 가져간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이글이글 분노에 찬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 * *
그 후로 티타임은 느긋하게 흘렀다.
익숙한 사람들이 주는 평온한 온기 속에서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머나?”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받쳐주기 전에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쉬어야겠군요.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말이 참으로 의외였다.
루스티첼 백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혹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말만 남기고 아스타레아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남은 사람들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설마 리페가 입덧 때문에 밥을 잘 못 먹나?”
다시 잘 먹게 됐다고는 들었는데 임신 중에 상태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리페는 잘 먹고 있어요.”
‘황가의 보물을 다 턴 덕분에요.’
에피니가 대답하며 뒷말을 삼켰다.
“그럼 잠을 못 자나?”
“근육통도 있고 피부도 건조해져서 힘들다던데.”
“아뇨, 괜찮아요.”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리안과 힐데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칼리오페의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피부는 반질반질 윤이 나고,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빛났으며, 얼굴의 혈색은 발그레했다.
근육이 뭉칠 일도 없었다.
수백 년 동안 황실에서 모아온 온갖 영약을 섭취한 데다가 황제 폐하께서 밤낮으로 손수 마사지한 결과였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지…….”
“힐데, 아는 거 없어?”
“에피니랑 유리, 너희는 항상 리페 곁에 있잖아.”
두 형제의 채근에 힐데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건 폐하께 직접 듣는 게 좋겠어.”
굳은 얼굴을 보아하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컨디션도 괜찮으면 대체 뭐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게 막둥이의 건강 외엔 없는 루스티첼 일가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인 칼리오페를 해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돌아온 아스타레아스가 전하는 말에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 * *
“지금 뭐라고 하셨죠, 폐하?”
“감히 누가 내 딸을……!”
“……죽인다.”
“그냥 죽이는 걸로는 안돼!”
“그래, 맞아.”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어줘야지.”
격한 반응에 아스타레아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그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문제는 놈의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스타레아스가 가져온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칼리오페에게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말.
그것도 벌써 세 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세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아직 배후도 못 밝혀냈단 말입니까!”
평소 냉정하고 침착했던 루시우스가 흥분해서는 다그치듯 물었다.
“황궁에 있는 것보다 우리 집에 데려가는 게 좋겠어!”
이런 위험한 곳에 내 동생 못 둬!
로베르트가 당장이라도 칼리오페를 데려갈 기세로 말했다.
루스티첼 백작의 주변으로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딸 앞에서는 한없이 말랑해지지만, 루스티첼 백작은 감히 제국 최고의 무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존재.
그의 고요한 분노에 공기가 일렁였다.
“내 딸과 손주를 세 번이나…….”
에피니는 물론, 화를 내던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까지 숨을 죽였다.
만약 오러가 폭주하면 황궁 정원 하나가 날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감을 끌어올렸다. 혹시라도 있을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스타레아스 역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여보.”
루스티첼 부인이 남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분노에 찬 루스티첼 백작의 눈이 반사적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향했다.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핫, 하고 정신을 차린 루스티첼 백작이 살기와 오러를 거뒀다.
“부인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였소.”
시무룩하게 사과하는 남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의 미소가 깊어졌다.
“괜찮아요. 그런 모습도 멋있으니까.”
“부인…….”
‘물론 그런 모습보다 시무룩해서 사과하시는 모습이 더 좋지만요.’
루스티첼 부인은 후후, 웃으며 축 처진 남편의 손등을 쓸었다.
아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루스티첼 백작은 그저 관대한 아내의 말에 감동할 뿐이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두 아들을 돌아봤다.
“너희가 폐하께 화내는 이유는 나도 충분히 공감한단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루스티첼 부인의 정리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이나 시도하고서도 꼬리를 밟히지 않은 놈입니다. 과연 네 번째 시도는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심각한 눈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세 번의 시도 모두 꼬리는 잡혔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스타레아스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황후의 안전이다.
세 차례 전부 시도 단계에서 범인이 잡혔다.
“하지만 미련 없이 끊어내더군요.”
직접 칼리오페의 차에 약을 섞던 범인은 들키자마자 자결했다.
출신과 독약의 구매처부터 시작해 샅샅이 추적했지만 나오는 것이 없었다.
다른 두 번의 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시도가 있고 나서는 슬럼가와 뒷골목, 검은 거래 등 가리지 않고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혹시라도 밀거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 말은 설마…….”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외국에서 사 온 것이겠죠.”
“어쩌면 범인이 타국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겠네요.”
“혹은 타국에서 벌인 짓일지도 모르죠.”
그 말을 끝으로 잠시 가제보 안이 조용해졌다.
“곧 있으면 사절단이 도착하지 않나요?”
무거운 침묵 끝에 루스티첼 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외국 세력이든 외국과 결탁한 세력이든 그때 몸체를 드러내게 되겠지요.”
“그래서 저희에게 말씀하신 거고요.”
“일손이 필요한데 아시다시피 나는 의심이 많아서.”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미소 지었다.
수많은 인재가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아스타레아스는 그들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혈육인 숙부가 양친을 살해한 데다가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전부 믿는 사람이 칼리오페였다.
아스타레아스는 루스티첼 가를 믿지 않았다.
그럴 일은 절대 없지만, 만약 자신이 칼리오페를 울리면 바로 뒤돌아설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에 퍽 만족했다.
칼리오페의 가족들이 제 목숨보다 칼리오페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기꺼웠다.
어쨌거나 그런 만큼, 칼리오페에 관한 일에서는 루스티첼 가를 전적으로 믿었다.
“제대로 고르셨네요.”
루스티첼 부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루스티첼 백작과 두 아들 역시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귀를 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 * *
“어때?”
“완벽하다는 말도 전하께는 부족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뿜어내시는 휘광에 눈이 멀 지경입니다.”
원하던 대답이었는지 남자가 훗, 하고 미소 지었다.
“제국의 황제가 꽤나 잘생겼다던데.”
“전하에 비할 바 하겠습니까.”
“원래 권력자에겐 과한 찬사가 붙기 마련이지요.”
“분명 허명일 것이 뻔합니다.”
시녀들의 말에 남자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닌 척 한마디 더 했다.
“전에 사진 보니까 꽤 잘생겼던데? 라이브 때도 그렇고.”
“사진이나 영상 같은 거야 각도나 조명에 따라 얼굴이 달리 나오지 않습니까.”
“명색이 황제인데 얼마나 신경 써서 찍었겠습니까.”
“잘 안 나오면 목이 달아날 텐데요.”
“이번에 전하께서 제국에 가시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옆에 서 계시면 다들 전하만 바라보겠지요.”
드디어 만족했는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래.”
거울 앞에 서 있던 그가 몸을 휙 돌렸다.
“아아, 리페가 날 보고 얼마나 당혹스러워할까.”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칼리오페의 사진이 벽이 안 보일 정도로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남자는 창문보다도 더 커다란 사진에 다가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늦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고, 놀라겠지.”
그가 사진 속 칼리오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괜찮아. 비록 늦게 만났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거니까.”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칼리오페의 입술을 쓸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 따위 내가 다 해결해줄게.”
* * *
아스타레아스가 먹여주는 밥을 냠, 받아먹으며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응? 어떤 게 이상해요?”
“으음…….”
칼리오페는 신음을 흘렸다. 어떤 거라고 딱히 콕 집어 말할 순 없었다.
“그냥, 뭔가…….”
아스타레아스는 꼭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고, 에피니는 누가 다가오기만 해도 경계하며 칼리오페를 호위했다.
유리안은 칼리오페가 먹는 모든 것을 직접 확인했고, 힐데르트는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짬을 내 찾아와 얼굴을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그냥 기분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머, 우리 리페 밥 먹고 있었구나.”
“그래, 잘 먹어야지. 우리 딸 밥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네.”
“골고루 먹어야 한다.”
“내가 형 몰래 피망 먹어줄까?”
소란스레 들어오는 가족들을 보며 칼리오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제도, 어제도 오셨는데 오늘도 또 오다니.
일단 접시에 손을 뻗을 기세인 로베르트에게 답을 해주었다.
“로벨 오라버니도 참……. 전 피망 잘 먹어요. 피망 못 먹는 건 로벨 오라버니죠.”
“내, 내가 언제! 난 항상 잘 먹었어!”
로베르트의 외침에 칼리오페가 웃었다.
도대체 로베르트 오라버니는 자신을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가족들에게 자신은 항상 어린 막둥이인가 보다.
“어서 오세요.”
매일매일 가족들을 보니 좋긴 좋았지만—.
‘확실히 이상해.’
요즘 가족들은 하루가 멀다고 칼리오페를 찾아왔다. 지금처럼 네 명이 다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한두 명씩은 꼭 자리를 지켰다.
‘그냥 나랑 시간을 보내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은데.’
수다를 떨면서도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임신했으니 그런가, 하고 넘기기도 애매했다.
‘레아스의 반응이 이상해.’
만인의 어버이여야 하실 황제 폐하께서는 루스티첼 일가를 품긴커녕 질투하셨다.
원래 가족들이 찾아와서 버티고 있으면 단둘이 있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는데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는 칼리오페를 빼놓고 루스티첼 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지금도 루스티첼 일가와 아스타레아스는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수상해.’
칼리오페가 가족들과 아스타레아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하지만 사이좋은 게 이상하다고 할 순 없잖아.’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칼리오페가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곧 외국에서 사절단이 도착하겠네요. 우리 리페의 회임을 축하하러.”
“그렇습니다. 얼마 안 남았죠.”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우스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걱정입니다. 홑몸도 아닌데 그런 대외적인 활동을 하다 무리가 생기는 건 아닌지.”
“아무래도 외교 행사다 보니 신경 쓸 게 많긴 하겠죠.”
“아무래도 나가지 않고 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짠 것처럼 매끄럽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칼리오페가 ‘으응?’ 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절 축하해주러 멀리서 온 사절단인데 제가 안 나가면 어떻게 해요?”
이건 주인 없는 생일 파티를 열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손님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다들 이해해줄 거야. 우리 리페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로베르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를 축하해주러 멀리서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 정도는 이해하겠지.”
“그래, 괜히 무리하게 행사에 참석했다가 쓰러지는 걸 원치 않을 거야.”
칼리오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가족들과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제가 왜 쓰러져요? 전 건강해요.”
그렇다.
칼리오페는 임신 중에 특별히 아프지도 않았고, 입덧도 심하지 않았다. 임신 초기에 공연 준비와 공연까지 했는데도 건강 그 자체였다.
물론 여기에는 칼리오페의 입속으로 들어간 수많은 영약의 기여가 대단했다.
매일매일 황궁의가 칼리오페와 태아의 건강을 확인했지만, 이상이 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 지금은 쉬고 있으니 그런 거지.”
“그래, 이 엄마가 임신 중에 티파티 열었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니?”
“사절단이 온다고 해도 제가 행사를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리에 있는 것뿐인데요.”
칼리오페의 말에 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이기지 못한 칼리오페가 끄응, 하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얼굴만 비추고 혹시 몸이 안 좋다 싶으면 바로 들어올게요. 어쨌든 불참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요.”
칼리오페의 양보에 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리 기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완전히 안심하지 않은 모습.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을 것을 염려한다기엔 좀 과했다.
‘정말 왜 그러지?’
칼리오페는 의문을 느끼면서도 아스티레아스가 내민 스푼을 향해 입을 짹, 열었다.
* * *
밥을 다 먹고 볕을 쐬며 잠깐 걸은 칼리오페는 단잠에 빠졌다.
루스티첼 가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 옆을 지키거나 아스타레아스와 회동을 가졌다.
“유산이 목적입니다.”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루스티첼 가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 보는 독약이라 성분 분석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분석 결과 유산을 유도하는 약이라고 하더군요.”
“황손이 목적인 걸까요?”
그 말에 루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리페가 표적이 되는 것은 폐하 때문이 아닙니까.”
“루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루시우스가 칫, 하고 고개를 돌렸다.
“유산이 목적이라면 꽤 범위가 좁혀지네요.”
“하지만 황위 계승서열을 생각하면 이렇다 할 후보가 없습니다.”
힐데르트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중 태아를 노리는 것은 황실에서 꽤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스타레아스나 그의 자식을 노릴 경쟁자가 없었다.
폐위된 숙부는 이미 죽었고, 그 숙부의 자식인 사촌은 황실의 성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즉, 황족으로서 모든 것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심지어 지금 그는 노역 중이었다.
사실 사촌을 살려준 것만으로도 선처였다. 숙부는 아스타레아스의 아버지인 선황제 부부를 시해했다. 반역을 저질렀으니 삼족까지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숙부가 반역을 저질렀을 당시, 사촌은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평생 노역으로 죄를 갚는 것으로 판결했었다.
“처음 음해 시도를 발견했을 때 사촌부터 확인했지만, 이상 없었습니다.”
그에게 접근한 세력도 없었고, 특별한 징후도 없었다.
“대체 배후가 누구일지…….”
“이런 큰일은 강력한 가능성과 동기가 있어야 저지르는 법인데.”
“동기와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없군요.”
그때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리안이 입을 열었다.
“있어요.”
“응? 있다고?”
반문에 유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게 생각해보세요. 정치나 권력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정치나 권력과 상관없는 일?”
“그럼…… 황제의 핏줄과 상관없이 리페의 아이를 노린 일이라는 뜻이야?”
“네, 그렇게 생각하면 답은 뻔하죠.”
뻔하다고 하는데 도무지 답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 꽂히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이 간단한 걸 모르는 걸까?
“그야 당연히 폐하와의 아이를 질투해서 죽이고 싶은 거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무슨 그딴 말도 안 되는……!”
“누가 질투해서 애를 죽여!”
“그러다 다치는 건 리페야. 거기다 애는 무슨 죄가 있다고…….”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딴 생각은 하지도 않겠지.”
마지막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멈칫했다.
잠깐.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칼리오페는 이 대륙을 아우르는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계층도,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이 칼리오페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 그중에 정신 나간 또라이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젓는 사람들을 보며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힐데르트, 분명 독약이 유산 유도제 중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다고 했지?”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에 힐데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응, 보통 이렇게 개월 수가 많은 아이를 약으로 유산시킬 땐 아무래도 산모의 몸이 상하게 하는데…….”
계속해보라는 아스타레아스의 눈짓에 힐데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 약은 그렇지 않아. 유산한 후에도 다음 임신을 하는 데 지장이 없지.”
그 말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아이는 죽이면서 산모의 건강, 특히 아이를 임신할 가능성을 그렇게나 신경 쓴다는 것은—.
“확실히 황자나 황녀가 태어날 것을 경계해서 벌인 짓은 아니겠군요.”
루시우스의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어둠에 잠긴 것처럼 가라앉았다. 모두 범인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예상은 하지만, 결코 입에 담지 못했다.
아스타레아스는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조차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절대적인 무(無). 그러나 아스타레아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공기를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위대한 대마법사의 살기에 반응한 마나가 거칠게 요동쳤다. 숨소리라도 잘못 내쉬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불길함. 마나의 흐름이 사람들의 목을 조를 듯 사나웠다.
“폐하.”
루스티첼 백작의 부름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무기질적이었다. 도무지 인간의 눈 같지 않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당황하지 않고 제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아스타레아스는 루스티첼 부인의 상태를 인지했다.
“실례했습니다.”
그가 재빨리 살기와 마나를 갈무리했다.
루스티첼 백작이 오러로 기운을 막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루스티첼 부인 같은 귀부인은 실신했을지도 모른다. 칼리오페의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할 순 없었다.
“부족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재차 사과하는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같은 마음인걸요.”
그 의연한 모습에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의 그 강인한 면모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감히 내 딸은 물론이고 내 손주를 노린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 어머, 실례.”
흥분해서 말하던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흠흠, 그 극악무도한 자는 죗값을 치러야지요.”
말을 마치고 생긋 웃는 루스티첼 부인의 자태는 그야말로 모든 귀부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아했다.
“부인의 말대로 반드시 찢어 죽이겠소.”
“과연 죗값을 치르고도 숨이 붙어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음, 굳이 법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까?”
“와, 로벨 형의 의견에 나는 찬성.”
“법적으로도 조지…… 아니, 형벌을 내리고 그 후에도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 자리의 유일한 비폭력 성향인 힐데르트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우선 명복부터 빌어야 할 것 같은데.’
범인의 안녕을 위해선 차라리 지금 당장 죽는 게 행복할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완전 찬성이지만.’
이 자리에 범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사람 따윈 한 명도 없었다.
* * *
“굳이 나갈 필요 없지 않겠어요? 그냥 나 혼자—.”
“레아스.”
거울 앞에 서 있는 칼리오페가 미간을 찌푸리며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 소리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요?”
“윽.”
아스타레아스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오페는 밉지 않게 그를 흘기며 들으라는 듯 꿍얼거렸다.
“사절단에 대해 보고 받느라 바쁘실 황제 폐하께옵서 대체 왜 여기 계신 건지.”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시녀들에게서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사르락, 아스타레스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목덜미에 스쳤다. 시녀들과 확연히 다른 손길에 고개 숙인 채 배를 바라보고 있던 칼리오페가 얼굴을 들었다.
거울을 통해서 제 뒤에 서 있는 아스타레아스가 보였다.
“레아스?”
아스타레아스는 대답 없이 다시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의 손길에 길고 풍성한,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 앞으로 모였다.
아스타레아스의 속눈썹이 우아하게 내리 깔렸다.
목덜미에 닿는 시선을 느낀 칼리오페가 뺨을 붉혔다.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티 하나 없이 새하얀 칼리오페의 뒷목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는 목걸이를 칼리오페에게 걸어주었다.
가느다란 목을 타고 흐르는 빛나는 화이트골드 체인, 그리고 다이아몬드 헤일로를 두른 커다란 사파이어 펜던트. 깊은 광채를 뽐내고 있는 로열 블루빛이 칼리오페의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바빠서 보고 들을 시간이 있어야지요.”
그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게 바쁜 사람의 태도란 말인가.
“바쁘다고요?”
“네, 내 황후님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주느라 굉장히 바빠요.”
낮은 속삭임과 동시에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칼리오페가 숨을 삼킨 순간,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말캉하면서도 단단한 감촉. 그리고 그 직후 예민하고 얇은 피부를 빨아들이는 느낌.
살짝 따끔한 통증에 칼리오페가 눈가를 움찔했다.
거울을 통해 목에 키스하고 있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이 보여 얼굴이 더 붉어졌다.
촉, 아쉽다는 듯이 젖은 소리를 내며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목덜미에 그의 머리카락이 스친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붙잡았다.
눈을 감자 입술에 입술이 내려앉는다.
곧장 입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혀가 뜨거웠다. 한없이 그녀를 갈구하고 원하는 키스였다.
거친 숨과 함께 옅은 비음이 흘러나왔다. 칼리오페의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입술을 떼고 두 사람은 호흡을 고르며 잠시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바쁘시군요.”
“응, 바빠요.”
속삭이는 질문에 속삭이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죠. 바쁜 일부터 빨리하는 수밖에.”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시녀가 반지를 내주었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손을 맡긴 채 거울을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곳이 있나 확인하는데…….
“이, 이건…….”
흰 목에 붉게 남은 자국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을 들어 닦아내듯 문질렀지만, 그런다고 해서 사라질 자국이 아니었다.
아스타레아스가 당황한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더니 미소 지었다.
“아, 예쁘네요.”
“예쁘다고요?!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그냥 느낀 점을 말한 것뿐인데.”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사절단을 만나러 가요!”
“음…….”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아스타레아스가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안 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레아스!”
아까부터 참석하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럴 속셈이었나.
칼리오페가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까지 못 가게 말리니 가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칼리오페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축하연에 참석하기로 다짐했다.
‘아, 그전에.’
칼리오페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중한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줘요, 레아스.”
칼리오페가 거울에서 몸을 돌려 아스타레아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불참했으면 하는 거, 다른 이유가 있나요?”
“다른 이유요?”
“무리해서 건강이 상할까 걱정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언제나처럼 매끄러운 미소였다.
“다른 이유라니,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다고……. 아.”
깨달은 듯 탄성을 내뱉은 그가 씨익 웃었다.
“내 황후님이 너무 예뻐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게 질투 나긴 하죠.”
그가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나만 보고 싶은데.”
쪽, 하고 뺨에 입을 맞춰와 칼리오페가 볼을 부풀리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뭐예요, 그게. 난 진지하게 물었는데.”
투덜투덜거리는 한편으로 칼리오페는 안심했다.
‘다른 이유가 없단 말이지.’
그렇다면 말리는 대로 가만있을 이유가 없다.
칼리오페는 시녀에게 명했다.
“다른 목걸이를 가져와. ……그, 이 자국……을 가릴 수 있게 초커로.”
4년째 신혼 생활 중인 황후를 모시며 시녀는 참으로 많은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아직도 부끄러운 것인지 칼리오페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시녀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칼리오페의 명에 아스타레아스가 입술을 내밀었다.
“너무해. 가린다니.”
“안 가리면 어떡해요.”
“내 사랑의 증거인데.”
“그래도 가릴 거예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씩 웃었다. 맹수처럼 위험한 웃음이었다.
“그럼 가릴 수 없는 곳에 남겨 볼까요?”
“그럼 가릴 수 없는 곳에 남겨볼까요?”
아스티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입을 벌렸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눈매를 나른하게 휘었다. 긴 속눈썹이 깊은 음영을 만들어낸다.
결국 숨을 삼킨 칼리오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킥킥 웃으며 칼리오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못 써요. 그런 장난하면.”
“장난이 아니라 진담이었는데.”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관자놀이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정말…….”
칼리오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살짝 두드리자 그에 반응하듯 안에서 통통 힘찬 움직임이 느껴진다.
아이는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범인이 잡히기만 하면…….’
아스타레아스는 아무런 살기도, 분노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한 상태인데 어찌 그 앞에서 분노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렇게 꾹꾹 눌러 담고 숨겼기에, 아스타레아스의 진노는 안에서 폭발할 듯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럼 가실까요, 황후님.”
칼리오페가 치, 하고 입술을 비죽이더니 아스타레아스가 내민 손에 손을 얹었다.
축하연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가고자 하는 길을 그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전부터 때부터 그랬다.
그녀가 가시밭길을 걷겠다고 결정했으면 자신이 그 가시를 치워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 * *
“아, 너무 기대돼요.”
“건강하시겠죠? 아이도, 황후 폐하도.”
“신문에서는 다 건강하다고 하지만 직접 뵈어야 안심하죠.”
“빨리 아기가 태어났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귀여울까!”
회장 안에는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오늘은 공연 와중에 임신 소식을 알린 초유의 사태 이래로, 두문불출하던 황후가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다. 기대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우리라.
“그나저나 다른 나라의 사신들이 이렇게 일찍 축하하러 오는 것은 처음이지요?”
“보통 공식 서한을 보내 축하를 전하지만 이렇게 사절단을 꾸려 오는 것은 황손이 태어난 다음에야 하지요.”
“이렇게 신경을 기울이다니……. 하긴, 그럴 만하지요.”
대륙에 단 하나뿐인 제국.
그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처음으로 자식을 얻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신경 쓰일 법한데 하물며 황후가 칼리오페였다.
칼리오페는 그야말로 대륙의 문화를 선도하는 자였고,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무엇보다 에테르를 생성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타국에서도 너도나도 잘 보이기 위해 줄을 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발루에린의 사절단에 왕세자가 껴있대요.”
“세상에, 왕세자가 직접 오다니! 아직 아기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심지어 보안을 위해 사절단에게 황궁에 거처를 내어줄 수 없다고 했잖아요.”
“네, 그래서 사절단이 모두 호텔에서 묵고 있다고 들었어요.”
“왕세자 급에 맞는 국빈 취급도 안 해준다는데 온 걸 보면 발루에린에서 제국과의 외교에 사활을 걸었나 보네요.”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와 관계를 좋게 맺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한다는 소식은 들으면 들을수록 신나는 일이다.
귀부인들이 호호,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 발루에린의 왕세자가 황후 폐하의 팬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어머나?”
“아, 저도 들었어요. 뒤늦게 천사 시리즈를 구하려고 백지 수표를 냈던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이 발루에린의 왕세자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후후, 우리 황후 폐하의 인기란……!”
“어쩌면 왕세자가 오는 것도 황후 폐하를 뵙기 위해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소문에 따르면 발루에린의 왕세자가 참으로 잘생긴 미남이라던데……. 우리 황제 폐하께서 긴장 좀 하셔야겠어요.”
“에이, 아무리 잘생겼다고 해도 우리 황제 폐하에 비할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죠.”
귀부인들이 농담하며 꺄르륵 웃었다.
웃을 수 있는 것은 발루에린의 왕세자가 어떤 인물이든 황제와 황후의 끈끈한 관계를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커튼 뒤에 서서 회장 분위기를 살피던 남자가 테라스 밖으로 나와 중얼거렸다.
“흐음……. 가십지에서 떠들어 대는 것과 달리 내 리페와 황제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은가 본데?”
“전하,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누가 들을까 걱정됩니다.”
“누가 듣는다고 그래? 주변에 아무도 없건만.”
발루에린의 왕세자, 미하일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찬란히 빛나는 금발과 잿빛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타국의 왕세자가 잘생겼다는 사실만으로 긴장해야 하는 관계야.”
“전하…….”
“아주 작은 계기만으로 삐걱거릴 수 있는 관계란 뜻이지.”
훗, 하고 웃은 미하일이 샴페인을 마셨다.
제국의 황제와 일국의 왕세자. 이 둘을 놓고 보면 당연히 제국의 황제가 압도적인 권력을 지녔다.
왕세자라고 하나 실제로 왕이 될지는 또 모르는 문제이고, 왕이 되더라도 발루에린은 완벽한 독립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귀부인들이 저렇게 떠드는 것을 보면 황제와 황후의 관계에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야 그렇겠지. 4년 만에 겨우겨우 임신했어.”
후계는 중요하다.
“4년이나 회임 못했다며 눈치 줬을 텐데, 나의 리페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었겠어.”
아무리 애타는 사랑이라도 4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겨우 임신했더니, 계속해서 유산될 위기에 처하고. 남편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안 그래도 임신 중이라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텐데.”
진짜 유산이 되지 않은 건 아쉬웠지만, 어차피 쉽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쨌든 제국의 황궁이 아닌가. 성공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래도 칼리오페가 불안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했다. 불안은 곧 불만이 될 테니까.
“나는 리페를 보듬어줄 수 있어.”
피식 웃은 미하일에 테라스 문을 잡았다.
“그럼 진짜 공식적으로 입장해 보자고.”
* * *
‘나오길 잘했어.’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도 맞이하는 것이지만, 귀족들의 반응이 참으로 열렬했다.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귀족들이 이렇게 황가에 충성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칼리오페는 관계가 좋은 귀부인들에게 직접 배를 만져보는 걸 허락해주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주를 얻게 된 양 좋아하는 귀부인들을 보니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온 사절단이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에게 인사하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분명 아비의 뒤를 잇는 성군이 나실 거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자신들이 가져온 선물을 은근슬쩍 어필하기도 했다. 주로 칼리오페의 건강을 위한 것들이었다.
각 나라의 사절단이 경쟁적으로 가져온 선물은 보관소가 가득 찰 정도로 많았다.
리스트를 미리 받아보았던 칼리오페는 조금 부담을 느꼈지만, 내 아이를 위해준다고 생각하니 또 고마웠다.
“황후 폐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렸다. 남성적이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곳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견장을 보고, 칼리오페는 그가 발루에린의 왕세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에 온 사절단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자였다.
“아, 발루에린의 왕세자 전하시군요.”
그 말에 상대의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시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예?”
묘한 반응에 칼리오페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당연히 타국 왕족의 사진 정도는 다 숙지하고 있는 게 기본 소양이었다.
축하연에 참석하기 전에 발루에린의 왕세자인 미하일의 사진을 확인하려 했지만, 아스타레아스가 이제 다른 남자한테 한눈파는 거냐 훌쩍거려서 보지 못하고 왔다. 정말 날이 갈수록 장난기가 심해지는 황제 폐하셨다.
아스타레아스와 장단을 맞추고 나중에 확인하려 했지만, 그와 산책을 나서며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은 뒤였다.
‘견장을 달고 와서 다행이야. 바로 알아볼 수 있어서.’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알아 봐주길 원하는 부류는 못 알아볼 때 참 귀찮아진다.
“발루에린의 왕세자께서 이렇게 먼 길을 발걸음해주시다니 참 고맙네요.”
“왕세자라니, 그런 딱딱한 호칭은 접어두고 미하일이라 부르십시오.”
“네?”
당황한 칼리오페에게 미하일이 손을 내밀었다.
“아…….”
칼리오페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내주고 손등 키스를 받는 것이야 흔한 일이다. 흔한 일이긴 한데…….
이렇게 거리를 훅 좁히는 것을 보니 머릿속에 비상등이 깜빡였다.
그때였다.
“내 황후님의 손등에 키스하는 영광은 나밖에 누릴 수 없는 것이라서.”
아스타레아스가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푸른 눈동자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아쉽다면 내 손등을 내어줄 수는 있는데?”
예기 어린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하일은 턱, 하고 숨이 막혔다.
“어머…….”
“세상에…….”
두근두근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입술을 가린 채 감탄했다.
“지금 폐하께서 질투하시는 거야?”
“폐하께서도 차암. 그냥 인사하는 것뿐인데 말이야.”
“어휴, 정말 무서워서 외교 사절단이 황후 폐하께 인사도 못 하겠다니까안.”
그렇게 말하면서 잇몸을 내보이며 웃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미하일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에게서 칼리오페를 빼앗아간 원수 같은 아스타레아스에게 기백에서부터 밀렸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그건 곧 분노가 되어 미하일의 머릿속을 뜨겁게 달궜다.
그는 자신이 아스타레아스에게 순간 압도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그건 황제 폐하만의 생각이 아닙니까. 손등의 키스를 허락하실 분은 황후 폐하십니다.”
미하일이 아스타레아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존대를 쓰고 있긴 했지만 어조부터 시작해서 표정까지 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 * *
미하일의 한마디에 회장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발루에린은 제후국이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독립국은 아니었다.불과 50여 년 전에 조건부 독립을 했기 때문이다.
독립국의 왕세자가 아닌 국왕이 이렇게 굴어도 외교 관계에 영향이 미칠 정도의 무례이건만.
“어머, 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귀부인들이 속닥거렸다. 하물며 완전한 독립국도 아닌 나라의 왕세자가 감히 황제 폐하께 불손하게 구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국의 귀족들은 자존심이 높았다. 그럴 만한 위치였으니까.
“보니까 별생각 없이 구는 것 같은데 흥분할 것도 없죠. 재밌네요.”
“제국을 깔보는 것은 아니고…….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우리 황후 폐하께 남다른 연정을 품고 있나 본데요?”
“아아, 그렇다면야.”
귀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투에 눈이 먼, 젊고 패기로운 타국의 왕세자. 발루에린에서는 그를 막을 자가 국왕 빼곤 없었으니 얼마나 천둥벌거숭이같이 굴었겠는가.
기분 나빴던 표정이 풀어지고 곧 흥미진진한 눈빛이 되었다.
사실 이토록 재밌는 구경이 또 어딨겠는가.
칼리오페를 팬으로서 좋아하는 사람도 물론 많았지만, 연정을 품은 사람들 역시 많았다. 오죽하면 제국민의 첫사랑이라는 소리를 들었겠는가.
하지만 감히 그 수줍은 연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가 터트린 세기의 스캔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문지기가 있다고 해서 성에 못 들어가냐고 하던 사람들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아스타레아스였다.
신분도, 지위도, 권력도, 명예도, 재력도, 능력도 그 누구보다 출중한 남자. 소공작 시절에도 그랬지만 황제까지 되었으니 더더욱 마음을 고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또, 두 사람의 연애는 보는 사람들의 몸이 비비 꼬이고 어휴, 어휴하며 광대를 승천시킬 정도로 다디달았다.
아스타레아스라는 남자의 엄청난 배경은 제외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군가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세상을 따돌렸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칼리오페에 대한 연심을 드러내며 황제에게 날을 세우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도 우리 황제 폐하께 댈 것도 없는 존재였다.
물론 발루에린의 왕세자 미하일은 소문대로 잘생긴 남자였다. 태양의 축복을 받은 것 같은 화려한 금발, 우수에 잠긴 듯 보이는 잿빛 눈동자. 큰 키, 남자답게 다부진 체격.
아까 미하일이 나왔을 때 몇몇 영애들이 힐끔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스타레아스가 등장하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태양 앞에서 촛불이 빛을 잃듯 아스타레아스 앞의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평범한 남자 1’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불안해할 것 하나 없이 어머 어머, 하며 재밌게 구경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사실 너무 불안해할 게 없어서 아쉽기까지 했다.
“잘생기긴 했지만 조금만 더 잘생겼으면 더 재밌었을 거 같은데요. 우리 폐하께 너무 안 되네요.”
“생길 만큼은 생겼어요. 그것보단 우리 폐하께서 너무 잘생긴 게 문제인 거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싸움 거는 멍…… 아니, 흠흠, 패기 넘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어딘가요.”
재밌는 구경이라도 난 듯 신이 난 주변 분위기와 달리, 칼리오페를 둘러싼 남자들은 심각했다.
* * *
“아아, 그렇지. 내 황후님 생각이 가장 중요하지.”
아스타레아스가 미하일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남편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삐지면 귀찮은데…….’
축하해주는 게 고마워서 나왔다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발루에린의 왕세자는 축하하러 왔다면서 왜 싸움을 거는지 도통 모르겠다.
칼리오페가 어떻게 생각하든 미하일의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그걸 이제라도 아셔서 다행입니다.”
아스타레아스가 자신과의 말싸움에서 졌다고 착각한 그가 자랑스럽게 콧대를 세웠다. 칼리오페 앞에서 황제를 눌렀으니 그녀가 자신을 더 대단하게 볼 게 분명했다.
“제국의 황제 폐하씩이나 되는 분께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도움, 이라고 말은 했지만 ‘가르침’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제가 아스타레아스를 가르쳤다고 큰소리치는 것이다.
아스타레아스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반면 칼리오페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 황후 폐하.”
미하일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칼리오페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물끄러미 그 손을 내려다 봤다. 자신이 임신한 것을 축하해 주러 온 타국의 왕세자에게 손등을 내어주는 것은 예의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거리를 좁혀 오는 것 하며, 덧붙이는 말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니 왜 우리 애 아빠한테 그렇게 불손하게 굴어!’
아스타레아스가 끼어들어 손등 키스를 거절한 것 역시 외교적으로 좋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제국의 황제인데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것 아닌가.
또, 크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그 순간 느낀 것은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이었으니까.
칼리오페는 생긋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황제 폐하께서 질투가 많아서.”
완곡한 거절이었다.
다들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하일의 생각은 달랐다.
‘역시, 나의 리페는 내 키스를 받고 싶은데 황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사려 물 때였다.
“그리고 저도 딱히 왕세자께 손등을 내어드리고 싶지 않군요.”
미하일이라고 불러 달라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칼리오페가 보드라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미하일은 설마 칼리오페가 자신을 거절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서 할 말을 잃었다.
“구태여 지적하는 결례를 범하고 싶지 않으니 조언이라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칼리오페가 미하일과 눈을 맞췄다.
“발루에린 왕세자.”
그전까진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던 칼리오페의 전신에서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정령을 다루며 세계를 구원한 자에 걸맞은 위엄이었다.
“발루에린의 청결 상태에 정책적으로 신경 쓰시는 것이 좋겠어요. 무슨 병이든 발병률을 떨어트리는 것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갑자기 청결 상태를 말하자 미하일은 어리둥절해졌다.
“……현재 발루에린에는 딱히 전염병이 돌고 있지 않습니다만. 앞으로도 돌지 않을 정도로 위생 상태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 그런가요?”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다소 염려가 되는데…….”
그렇게 말하는 칼리오페의 시선이 미하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특히 구강 청결이요.”
특히 구강 청결이요.
특히 구강 청결…….
구강 청결…….
구강 청결.
미하일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머릿속에 칼리오페가 한 말이 메아리쳤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비록 그가 멍청한 데다가 눈치가 없긴 했지만, 이 말마저 못 알아들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전신이 삶은 문어처럼 새빨개졌다.
“구, 구강 처…….”
말하던 미하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도 제 입에서 냄새가 나는 걸까 두려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우아하게 말하고 있지만, 칼리오페의 뜻은 아주 확실했으니까.
‘너 입 냄새 나서 손등에 키스 받기 싫어.’
그런 말이라는 게.
키득키득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주변에서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황망함과 창피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미하일의 가슴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네? 저는 그냥 발루에린의 위생을 염려한 것뿐인데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미하일이 이를 악물었다.
칼리오페가 이렇게 영악하게 굴다니 말도 안 된다.
‘물들었어!’
이건 진정한 칼리오페가 아니었다. 아스타레아스의 곁에 오래 있는 바람에 나쁜 영향을 받아 순수하고 티 없던 칼리오페에게 때가 탄 것이다.
‘내가 가르쳐줘야 해.’
그건 칼리오페의 운명인 자신의 역할이었다. 자신이 바로 잡아서 교정시켜줘야 한다.
‘다시는 내게 이런 수치심을 줄 수 없도록!’
마히일의 어깨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전하!”
커다란 외침이 미하일을 불렀다.
미하일은 멈칫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시종이 애끓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황족과 왕족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고 있다가 나선 것이다.
나설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은 감히 제국의 황후인 칼리오페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으니까.
손을 들어 올린 것도 아니니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미하일을 오랜 기간 옆에서 모셔온 시종은 잘 알았다.
황후에게 손을 대면 바로 전쟁이다.
뿐만 아니라 발루에린 내부의 여론 역시 극도로 나빠질 것이다.
미하일은 평소의 행실 탓에 원래도 국민들의 원성을 사는 왕세자였다. 장자상속이라는 발루에린의 법만 아니었으면 왕녀가 후계로 지목되었을 터.
그런 상태에서 발루에린의 국민들이 동경하는 칼리오페에게 손찌검을 한다? 제국에서도, 발루에린에서도 미하일은 발을 붙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종의 모습에 미하일은 정신을 차렸다.
너무 흥분해서 이성이 날아갔었다. 왕국에선 멋대로 방만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여긴 제국이었다.
“하, 하하…….”
그가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며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우리 발루에린을 이렇게 걱정해주시다니, 역시 황후 폐하께서는 절 신경 쓰고 계셨군요.”
“네?”
칼리오페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해석하면 저런 결론이 나는 건지 신기했다.
“다음에도 또 발루에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미하일은 고개를 숙인 뒤 칼리오페의 앞에서 물러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나라의 사절단과 제국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조소 어린 시선.
짜증이 나 턱에 힘이 들어갔지만 괜찮다. 어차피 칼리오페는 자신의 손에 떨어지게 되어 있다.
‘칼리오페를 교육하는 건 발루에린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다시는 제게 그런 소리 못하도록 꽁꽁 가둬두고 그녀를 가질 수 있는 게 누군지 똑똑히 알려주리라.
미하일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났다.
* * *
“뭐야, 진짜…….”
칼리오페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고마운 마음으로 나왔다가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
“신경 쓸 게 뭐 있어요. 더 생각하지 말아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도닥이며 달랬다.
“하지만 저 왕세자가 레아스한테…….”
“내 황후님께서 멋지게 물리쳐 주셨잖아요.”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휘며 속삭였다. 칼리오페가 치, 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발긋해졌다.
아스타레아스가 웃으며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예쁜 거, 좋은 거만 봐도 부족한데 썩은 입 냄새 맡게 해서 미안해요.”
“레아스도 참…….”
입 냄새가 진짜 나진 않았다. 감히 애 아빠를 무시한 그 더러운 입이라는 의미였지.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절단이 쭈뼛거리며 다가와서 칼리오페의 관심은 곧 그쪽에 쏠렸다.
집중하고 있는 칼리오페를 확인하고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돌렸다. 회장에서 나가고 있는 미하일의 모습이 보였다.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분명 아까 손을 올리려고 했어.’
칼리오페는 바라보는 것조차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감히 손을 올리려 하다니.
아스타레아스는 애써 살기를 가라앉혔다. 칼리오페의 옆이었다.
“그쵸, 레아스?”
“응, 맞아요.”
칼리오페가 사절단과 이야기하다가 돌아보며 물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다정한 황제 부부의 모습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러그윈의 눈에는 달랐다.
러그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지켜보는 심정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칼리오페라는 안전핀이 옆에 있었지만,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발루에린 왕세자의 뒤를 밟아.>
머릿속에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파시였다.
이미 미행은 진행 중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루시우스가 직접 나섰으니 놓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사절단의 선물을 보관한 고방의 경비에 틈을 만들어.>
경비를 강화해도 모자랄 판국에 틈을 만들라니.
‘그러다가 황후 폐하의 유산을 원하는 무리들이 장난이라도 치면…….’
거기까지 생각한 러그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반응에 아스타레아스는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안쪽 감시는 내가 친히 할 테니.>
친히 하겠다는 말이 이토록 두렵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적에게 동정마저 들 정도였다.
러그윈은 알았다는 뜻으로 눈을 한 번 깜빡이곤 회장을 벗어났다.
이제 덫을 칠 때였다.
* * *
“발루에린의 왕세자가 축하연에서 큰 소리 쳤던 것을 사과하고 싶다고 만남을 청하는데.”
유리안의 말에 책을 읽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큰 소리?”
“너한테 소리 쳤잖아.”
그 말에 칼리오페가 피식 웃었다.
“입 냄새 난다고 했는데 화내는 건 당연하지.”
“그래도 임산부한테는 사납게 구는 거 아냐. 놀라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데.”
검을 손질하던 에피니가 짜증 난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흠, 하고 칼리오페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왕세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네. 사과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레아스인데.”
자기 남편에게 무례했다고 뒤끝 있게 구는 모습에 유리안과 에피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도 참…….”
에피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을 들어 살폈다.
“어쨌든 안 만나겠다는 뜻이지?”
“당연하지.”
국빈을 맞이하는 예는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는 칼리오페를 보며 유리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딴 놈은 안 만나는 게 좋았다.
“그럼 코테린 공국은? 그쪽에서도 괜찮으면 다과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코테린 공국에서?”
칼리오페는 미하일이 물러간 뒤 쭈뼛쭈뼛하며 다가왔던 사신을 떠올렸다. 무례하긴커녕 진심으로 아이를 가진 것을 축하해주던 모습.
“먼 곳에서부터 축하해주러 왔는데 당연히 만나야지.”
“응, 알았어. 그렇게 답신할게.”
체크하는 유리안의 모습을 보며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황후가 되어서도 이렇게 편하고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또, 전생에서는 연쇄살인마였던 유리안이 이렇게 밝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뿌듯했다.
친정으로 돌아가 병을 치료받던 사르니오 부인은 꽤 상태가 좋아졌다. 슬픔에 빠진 자신이 유리안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은 뒤로 내내 후회하며 살았다.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도 유리안은 몇 년째 무시했다.
사르니오 부인 역시 억지로 유리안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의 행복을 바라며 기다릴 뿐.
처음에는 사르니오 부인의 편지를 보지도 않고 찢어버렸던 유리안이 최근엔 읽어본다는 사실을 칼리오페는 알았다.
칼리오페는 그 변화가 기꺼웠다. 유리안에게 어릴 적의 상처를 돌아볼 정도로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딱히 유리안이 사르니오 부인을 만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선택은 오롯이 유리안의 몫이었다.
다만, 어떤 선택이든 유리안이 편하고 행복한 방향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열렬한 눈으로 다른 남자를 보고 있으면 질투 나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스타레아스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으며 칼리오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배를 쓸며 말했다.
“엄마 안 힘들게 하고 잘 있었니?”
“그럼요. 얼마나 착한데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손등 위에 손을 얹으며 대신 답했다.
“아참, 코테린 공국의 사신과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는데 함께 할래요?”
“코테린 공국이요.”
아스타레아스가 느긋하게 읊조리며 눈매를 휘었다.
코테린 공국.
‘흠,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 황후님과 무슨 일이든 함께 하고 싶지만.”
아스타레아스가 아쉽다는 얼굴로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
“안타깝게도 미룰 수 없는 정무가 있어서.”
“아, 당연히 정무부터 봐야죠. 그러고 보니 여러 곳에서 사절단이 왔으니 더 바쁘겠네요. 이김에 국제 관계를 조율해야죠.”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일하러 가라고 재촉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아스타레아스는 기분이 묘해졌다. 붙잡아주길 바라며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냥 가지 말까요.”
투정 부리듯 속삭이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칼리오페가 대체 무슨 소리 나며 눈썹을 세웠다.
“일을 해야죠!”
단호한 황후 폐하의 말에 황제 폐하께옵서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이라도 정무 취소되었다고 하고 붙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었으나…….
“티타임을 갖자는 건 사석에서 보고 싶다는 말인데 내가 있으면 사절단이 긴장해서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스타레아스의 중얼거림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걸까요. 레아스처럼 선정을 베푸는 황제가 또 어디 있다고.”
아스타레아스가 속상하다는 듯 말하는 칼리오페의 품에 얼굴을 부볐다.
“내 황후님만 알아주면 돼요.”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에피니와 유리안의 입매가 씰룩였다.
‘……댁의 황후님한테만 친절한 것이겠지.’
‘어휴, 리페가 실체를 알아야 할 텐데.’
그러나 칼리오페의 눈에 끼인 남편 콩깍지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둘이서 한참을 꽁냥거릴 게 분명해서 유리안은 지금 당장이라도 티타임을 갖자고 답신을 보냈다.
* * *
“황후 폐하, 이렇게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다니 광영입니다.”
코테린 공국 사절단의 대표, 라인텔 백작이 칼리오페의 앞에 깊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세요, 백작.”
라인텔 백작은 황공하다는 듯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후,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에 앉을 때조차 조심스러웠다. 어째 지난번 공식 석상에서 봤을 때보다도 더 긴장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맞았다.
‘황후 폐하를 이렇게 사석에서 뵙다니……!’
라인텔 백작은 감격으로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그는 칼리오페의 오랜 팬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여론이 신전에게 기울었을 때조차 오로지 칼리오페만을 부르짖었던 골수 팬이었다.
칼리오페는 지나치게 삼가는 라인텔 백작을 바라보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차를 마시는 걸 참 좋아해요.”
“예, 예. 알고 있습니다. 딸기 타르트를 좋아하신다는 것도.”
갑작스럽게 나온 딸기 타르트 이야기에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던 칼리오페의 손이 삐끗했다.
‘으으, 이제 그건 잊어주면 안 될까.’
하지만 그녀는 황후였다.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군신보다 뜻이 맞는 벗일 때 더 차향이 향그러운 법이지요.”
그 말에 라인텔 백작의 눈매가 떨렸다.
‘어쩌면 이렇게 다정하고 우아하신 분이실까.’
통신석 너머로 칼리오페를 지켜본 지 오래. 그녀를 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본 칼리오페는 또 달랐다.
지금 칼리오페는 긴장해서 떠는 백작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은 채, 저를 벗으로 생각하고 편히 대하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라인텔 백작이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차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 배 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차향이 정말 좋습니다.”
웃는 그의 모습엔 아까와 같은 극도의 긴장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라인텔 백작은 유쾌하고 화젯거리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사실 칼리오페는 공국 측에서 제게 무언가 부탁할 게 있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인텔 백작에겐 그런 기색이 없었다.
연배도 비슷하고 말도 잘 맞고 정치 이야기도 하지 않으니, 칼리오페는 모처럼 새로운 친구를 사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차, 라인텔 백작이 주저주저하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 그리고……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개인적인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을지요.”
칼리오페는 조금 실망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각자 맡은 책임이 있는데 정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실망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말해보세요, 백작.”
칼리오페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인텔 백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이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가져왔다.
벨벳 천으로 감싸여 있는 자그마한 물건에 칼리오페의 안색이 굳었다.
‘설마 청탁인가.’
그렇게 안 봤는데 뇌물이라니.
각 나라의 사절단은 이미 제국에 공식적으로 선물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 은밀하게 준다는 것은 칼리오페 개인에게 대가성 청탁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칼리오페의 눈빛에 엄정함이 깃들었다.
시종이 칼리오페에게 공손히 물건을 바쳤다.
“이런 부탁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여기 싸인을 좀…….”
동시에 나온 말에 서로 말을 멈췄다.
싸인?
칼리오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벨벳 천을 젖혔다. 곱게 포장된 자신의 레코드가 보였다.
뜯지도 않은 한정판이었다.
“…….”
“아, 역시……. 어렵군요. 그렇죠. 귀한 싸인인데 제가 무리한 부탁을…….”
시무룩하게 말하는 라인텔 백작의 말에 칼리오페의 귓등이 홧홧해졌다.
“내, 내가 오해를 했군요. 싸인이야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제 싸인이 뭐가 그렇게 귀하다고…….”
그런데 그때까지 조곤조곤하게 말하던 라인텔 백작이 큰 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뭐가 그렇게 귀하냐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게 리페님의 싸인인데!”
흥분해서 외치던 라인텔 백작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칼리오페를 보고 머쓱해져 고개를 수그렸다.
“아니, 황후 폐하의 싸인이요…….”
소심하게 정정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소리로 웃는 얼굴을 보고 라인텔 백작이 얼굴을 붉혔다.
감히. 주제 모르고 연심을 품진 않는다. 그저 저 웃음을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뿐.
그때였다.
‘뭐지?’
갑자기 뼛속까지 얼릴 정도로 시린 한기가 엄습했다.
마치 맹수의 이빨이 자신의 목에 닿은 것 같은 느낌.
라인텔 백작은 그 살기의 근원지로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자, 여기 있어요, 백작.”
싸인을 마친 칼리오페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그 살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인텔 백작은 칼리오페가 건네는 레코드를 받으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찝찝한 마음은 싸인과 함께 적혀져 있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날아갔다.
내 티타임의 벗, 라인텔 백작께.
다음에도 또 함께 차를 마시길.
‘아아…….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아…….’
라인텔 백작이 내적 눈물을 흘리다 정신을 차렸다.
“황후 폐하, 사실은 제가 폐하께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가요?”
“해서, 공국에서 들고 온 차를 대접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중하게 물은 라인텔 백작이 황급히 덧붙였다.
“아, 물론 이건 정식으로 저희 측에서 드리는 선물이었습니다. 보관소에 들어갔던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귀한 차는 같은 무게의 금과 같은 값어치를 지닌다. 라인텔 백작은 이것이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물건이며 칼리오페에게 은밀히 몰래 비싼 선물하는 게 아님을 어필한 것이다.
한 마디로 청탁하려 밑밥을 까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안전하다는 뜻이지.’
보관소에 들어간 선물은 모두 혹시 모를 위험 요소가 없는지 엄격한 검사를 받는다. 따라서 라인텔 백작이 대접하고 싶다는 차 역시 제국의 검증을 받는 차일 터.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어떤 차일지 기대가 되네요.”
라인텔 백작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시종에게 입차를 건네받아 손수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 정갈한 손놀림을 보며 칼리오페가 감탄했다.
“우아한 마술을 보는 것 같군요.”
그 말에 라인텔 백작이 수줍게 웃었다.
“황후 폐하께서 어려서부터 차를 즐기셨다는 말을 듣고 저 역시 즐기게 되었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또 따끔한 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기분 탓인가 싶을 정도로 아주 짧았다.
쪼르륵, 담홍색 차가 찻잔에 뒹굴며 수증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황홀한 향기가 비강을 자극한다.
“향이 정말 좋네요.”
향부터 음미한 칼리오페가 미소 짓고 찻잔에 입술을 댔다.
그 순간이었다.
‘응?’
손안의 찻잔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에 칼리오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하얀 도자기에 금박을 물린 찻잔이 허공을 두둥실 날았다.
담홍빛 찻물이 허공에서 흩어지며 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그대로 쏟아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쏙 빨려 들어가듯 찻잔 안에 담겼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는 한정되어 있다.
정령, 그리고.
“레아스?”
칼리오페가 정령을 소환해내지 않았으니 범인이 누군지 확실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놀라 입을 벌린 가운데 칼리오페만이 주변을 둘러보며 남편을 찾았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칼리오페와 라인텔 백작이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
새파란 예기가 어린 검날이 라인텔 백작의 목을 겨눴다.
라인텔 백작은 고개조차 다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극도의 긴장으로 마른침이 고였지만 검날에 목젖이 닿을까 침도 삼키지 못했다.
칼리오페는 갑자기 침입한 괴한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각각 라인텔 백작에게 겸을 겨누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에피니가 칼리오페의 안전을 살폈다.
급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칼리오페는 이해했다. 라인텔 백작이 무언가 제게 술수를 부리려다 들킨 듯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 건 아니다.
입안이 썼다.
“라인텔 백작.”
루시우스가 차가운 눈으로 라인텔 백작을 불렀다.
“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는 결백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시린 빛을 내뿜었다.
“감히 제국의 황손을 해하려 한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서 모르는 척이냐.”
루시우스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소름 끼쳤다.
라인텔 백작의 무릎에서 덜컥, 힘이 빠졌다. 풀썩 무릎 꿇은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화, 황손을 해하려 했다니 저는, 저는 절대……. 제가 어찌 감히 황후 폐하께 어떻게…….”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리는 그는 누가 봐도 그 끔찍한 음모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발뺌할 셈이냐! 여기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
로베르트가 아직도 허공에 떠다니는 찻잔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라인텔 백작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찻잔에 담긴 차를 바라보았다.
“즈, 증거라니요. 저건 공국에서 가져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상된 물건인데…….”
말하던 그의 시선이 칼리오페에게 닿았다.
“화, 황후 폐하,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검 끝이 제게 향하고 있어 차마 칼리오페에게 다가가 애원하진 못했다. 에피니 역시 라인텔 백작이 칼리오페에게 접근할 때를 대비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친교를 나누던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거리감이었다.
라인텔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는 결백합니다. 제가 어찌 감히 황후 폐하께 해가 되는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읍소하는 라인텔 백작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이미 보관소에서 확인을 거친 물건입니다. 안전성을 검수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차를 들고 온 사람은 너와 네 시종이지.”
루시우스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라인텔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무언가 안 좋은 것을 넣은 게 아니냐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는 정말로, 정말로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 마음 하나로……. 그것만은 진짜입니다.”
가만히 라인텔 백작을 내려다보던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레아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견고한 팔이 뻗어져 나와 칼리오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 불렀어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나른하다. 칼리오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설명을 요구하는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오페가 불의에 맞서 싸우고 위험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강인한 사람.
하지만 임신한 상태라 감정이 불안정한 데다가 스트레스받는 것으로 건강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게다가 산모의 정신 상태는 배 속의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함구했었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려 했죠. 우리 아이에게.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꼬리를 잡았으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는 커다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뜰 뿐. 그것만으로 모든 충격을 갈무리한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려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나쁜 사람이 라인텔 백작이라고요.”
“저, 저는 진짜로……!”
“결백하죠.”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항변하던 라인텔 백작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아스타레아스가 한 말이 맞는지, 제가 정확하게 들은 것인지 의심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당황한 사람은 라인텔 백작만이 아니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결백?”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에피니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꼭 끌어안으며 눈매를 휘었다.
“사냥감을 잡으려면 미끼를 쳐야죠. 하지만 그게 미끼인 줄 알면 사냥감이 도망가겠죠?”
칼리오페가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무도 미끼인 줄 모르게 속였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웃는 아스타레아스를 보며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에피니는 같은 생각을 했다.
‘진짜 딱 한 대만…… 아니 두 대만 때리고 싶다.’
황제만 아니었어도, 하다못해 칼리오페가 옆에 없기만 했어도 시도라도 해봤을 텐데. 물론 아스타레아스가 가만히 맞고 있을 위인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뺨을 꼬집었다.
“진짜 못 됐어요. 혼나야 해요. 반성해야 해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칼리오페가 혼을 내자 황제 폐하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반면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에피니의 얼굴은 확 살아났다.
‘역시 우리 리페!’
‘날 위해서 화를 내주고 있구나!’
‘흥, 당연하지.’
처진 눈으로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던 아스타레아스가 조용히 물었다.
“나 미워요?”
“미워요.”
칼리오페가 팩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미, 밉진…… 않지만!”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던 아스타레아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라인텔 백작은 새로 사귄 내 벗이에요. 갑작스레 황족 시해미수범으로 몰려서 얼마나 놀랐겠어요. 거기다가 검까지 들이대고. 오라버니들은 몰랐으니 죄가 없죠. 이번 일은 무조건 레아스가 잘못했어요.”
쏟아지는 칼리오페의 말에 다른 세 사람 역시 큰 충격에 빠졌다.
‘나를 위해서 화낸 게 아니었단 말이야?!’
‘저놈이 나보다 소중해?!’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아스타레아스와 루시우스, 로베르트와 에피니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이글이글거리는 네 쌍의 시선이 라인텔 백작을 향했다.
라인텔 백작은 아까 검날이 자신의 목을 향했을 때보다도 더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미안해요, 라인텔 백작. 불명예스러운 오해를 받게 만들어서.”
“아, 아닙니다.”
칼리오페가 손수 일으켜 세워주어서 라인텔 백작은 황공해 하며 일어났다.
“자, 그래서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린 이유가 있겠지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차에 독이 들어간 건 사실이에요.”
“네?!”
라인텔 백작이 깜짝 놀라 눈을 홉떴다.
그렇다면 마냥 억울한 상황은 아니었다. 비록 라인텔 백작이 독을 넣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가 칼리오페에게 직접 우려 진상한 차에 문제가 있다는 거니까.
본래라면 이대로 끌려가 강도 높은 조사가 이뤄졌을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아무도 이 흉계를 눈치채지 못해서 칼리오페가 복용했을 경우를 생각하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라인텔 백작뿐만 아니라 공국 전체가 곤욕을 치러야 했을 터. 진범이 밝혀지더라도 피를 볼 만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아스타레아스가 먼저 알아챈 게 라인텔 백작과 공국에게는 천운이었다.
자칫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걸 생각하니, 아스타레아스가 진범의 술수를 역이용하기 위해 라인텔 백작을 미끼 삼은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지.
“그대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아니 안심해도 좋다.”
황제의 말에 라인텔 백작은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백작이 결백하다는 걸 알면서 왜 이런 소란을 부렸나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지금쯤 공국에서 황후를 시해하려 해서 루스티첼 가가 검을 들고 뛰어들어왔다는 소문이 다 퍼졌겠죠.”
칼리오페는 라인텔 백작을 향해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백작. 하지만 이 모함은 내가 책임지고 풀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지금 당장은 안 돼요. 진짜 범인을 잡아야 하니까.”
아스타레아스의 제지에 칼리오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전 괜찮습니다. 감히 황후 폐하와 황손을 시해하려 한 죄인을 잡는 게 우선이지요. 저는 공국의 귀족. 즉, 넓게는 제국의 황가를 모시는 가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큰일에 제게 역할이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정말 충신의 귀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답에 칼리오페는 감탄하는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백작…….”
“황후 폐하…….”
우정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머지 네 사람의 눈매가 사나워졌음은 당연했다.
아스타레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하게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을 보고 질투가 나서 괜히 더 일을 크게 벌이는 바람에 아내에게 혼나고, 라인텔 백작의 호감만 높여주었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그놈을 죽일걸.’
갈 곳 잃은 아스타레아스의 분노는 진범에게 향했다.
* * *
감히 회임한 황후를 복속국인 공국의 사절단이 해하려 한 초유의 사태였다.
그 즉시 공판 일자가 잡혔다.
타국의 사절단은 물론, 제국의 귀족들까지 공판에 참여하겠다며 분노를 불태웠다. 그 분위기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제국민뿐만 아니라, 타국의 국민들까지 분개하며 공판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사상 최초로 공판을 생중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전 세계로.
‘범인에게는 최악의 데뷔탕트지.’
아스타레아스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저기, 저 죄인 놈이다!”
라인텔 백작이 공판장에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감히 우리 황후 폐하를 해하려 하다니!”
“우리 쌍둥이 황자님과 황녀님을……!”
칼리오페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여아인지 남아인지 쌍둥이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쌍둥이라고 결론 내린 후였다. 수많은 통신 전쟁을 치른 후 극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라인텔 백작은 묵묵히 그 시선과 비난을 감내했다.
‘황후 폐하와 아기님들을 위해서 이 정도쯤이야.’
그렇다. 그 역시 쌍둥이 파였던 것이다.
물론 그도 일단은 코테린 공국의 귀족이었다. 심지어 공국의 대표로서 사절로 제국에 왔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한 염려가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공국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야.’
진범이 밝혀졌을 때, 지금 이렇게 그를 비난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당연히 머쓱해 하며 라인텍 백작에게 미안함을 표할 것이다. 외교 협상에서도 누그러진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또 진범에 대한 분노도 더 거세지겠지.’
소란이 크면 클수록, 라인텔 백작이 죄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수록 이후 반전이 더 놀라운 법. 이로써 국제 관계에서 꽤 좋은 카드를 쥘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황손을 시해하려 한 진범을 잡는 데에 공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
황제가 친히 그와 코테린 공국에 상을 내릴 것이다. 코테린 공국에도, 칼리오페에게도 도움이 되니 어찌 기쁜 마음으로 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를 벗이라 불러주셨어.’
라인텔 백작이 고개를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지금 감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우리 황후 폐하를 바라보는 거예요?!”
“당장 무릎 꿇고 빌지는 못할망정!”
귀부인들이 흥분해서는 부채를 팔락팔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칼리오페는 가슴이 아파 두 손을 움켜잡았다. 정작 라인텔 백작은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다며 속으로 미소 지었지만.
그때 칼리오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입을 다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라인텔 백작의 무고를 믿습니다. 비록 피고인으로서 이 자리에 왔지만, 오늘 공판은 그를 치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무고함을 푸는 것이길 바랍니다.”
피해자가 피고인을 두둔하고 나선 사태에 사람들은 놀랐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역시 우리 황후 폐하께서는 관대하기도 하시지.”
“아직 판결이 나온 것도 아니니 무죄 추정의 권리를 지켜주시려고 하는 거야.”
“인권 향상에 앞장서는 분다우셔.”
제국의 귀족들뿐만 아니라 타국의 사절들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오페의 인품에 탄복했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라인텔 백작에 대한 분노는 더 거세졌다.
“저런 분을 해하려 하다니…….”
“인두겁을 쓰고서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재판장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공판을 생중계로 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다다다닥 통신석을 누르며 제 의견을 남겼다.
‘으음, 이게 아닌데…….’
라인텔 백작에 대한 비난을 멈추길 바라서 나섰던 칼리오페는 사람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아스타레아스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라인텔 백작을 바라보는 칼리오페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스윽, 그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손바닥에 닿았다. 손바닥 안쪽의 보드랍고 오목한 부분을 스치듯 문지른다. 천천히, 느릿하게.
명백히 의도가 묻어나오는 손길이었다.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스타레아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나도 예뻐해 줘요.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서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으, 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시도 때도 없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아스타레아스가 사근사근 웃으며 칼리오페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칼리오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손을 내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잘들 논다.’
칼리오페의 호위를 위해 뒤에 서 있던 에피니는 짜하게 식은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정숙하라는 목소리와 함께 공판이 시작되었다.
무려 황제가 친람하는 공판이었다.
특별한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의문을 느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황제가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는 황후의 신변을 위협하고 황손을 해하려 한 죄인의 공판이다. 친람이 아니라 친국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판관의 뒤에 마련된 좌장석에 칼리오페와 함께 앉아 있을 뿐이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황후의 손을 조물조물하면서 유혹하듯 미소 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얼굴을 굳히고 있는 지금도 황후를 희롱하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공판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코테린 공국에서 바치고 공국의 사절인 라인텔 백작이 직접 우린 차에서 유산약이 검출되었다. 이보다 명명백백한 증거는 없었다.
당장 범인으로 몰릴 게 분명한데, 그렇게 빤히 보이는 짓을 하겠냐는 말도 쑥 들어갔다.
선물한 차를 주인이 우리는 일은 있어도, 선물한 차를 선물한 사람이 우리는 일은 없다. 과연 아무 목적도 없는 사람이 그런 예외적인 일을 저지를까?
모두가 라인텔 백작을 죄인이라고 생각했고, 생중계를 보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제 생각을 쏟아냈다.
쌍둥이를지키자: 저 XXX한 XX가! 목을 잘라야 해!
응애예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불에 태우자! 시원하게 화형 가즈아!
와아아압볼살한입: 감히 우리 리페님과 리페님의 아들딸을 노린 죄는 지옥에 떨어져도 부족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자.
내가바로이모다: 너무 쉽게 죽일 순 없지. 일단 살려두고 계속 고문해서 고통받게 해야 해!
우릉릉까꿍: 이모님 말씀이 맞음. 제발 죽여달라고 빌빌거릴 정도로 만들어야 함.
귀엽고 깜찍한 별칭을 단 사람들이 험악한 말을 쏟아냈다.
그 뜨거운 열기는 공판장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당장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은 만장일치였고, 어떻게 사형을 시킬지 논의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는 자가 있었다.
“감히 황후 폐하와 황손을 해하려 한 죄는 그냥 죽는 것으로 모자랍니다!”
발루에린의 왕세자, 미하일이었다.
“산 채로 저 극악무도한 죄인의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어야 합니다!”
그는 핏대를 높여 외쳤다. 모두 라인텔 백작에게 분노하고 있었고, 어쨌거나 미남의 말은 설득력을 가지기 마련이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방에는 그에 관한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리페님바라기: 오, 미하일 왕세자가 꽤 하네?
쌍둥이바라기: 백 번 천 번 동의!
리페님닮은아들기원: 축하연에서 우리 황후 폐하께 집적거렸다는 말은 들어서 별로였는데.
황제님닮은딸기원: 하긴, 우리 황후 폐하를 처음 보면 정신이 나갈 수도 있지.
반반닮은쌍둥이기원: 그때는 실수한 걸로 생각하고 넘어가 줄 수 있음! 더 말해라!
공판장의 분위기가 제 편인 것을 느낀 미하일이 미소 지었다.
“물론 그 전에 간악한 혀를 뽑아야지요. 감언이설로 황후 폐하께 접근해 극죄의 기회를 만든 혀 말입니다.”
혀를 뽑으면 더 이상 결백을 주장할 수 없다. 코테린 공국에서도 그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꼬리를 자르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혀를 자를 것을 말했지만, 사실 질투도 있었다.
‘감히 이 나조차도 리페와 함께 차를 마시지 못했는데, 버러지 주제에!’
자신과 대화했을 때는 차가웠던 칼리오페가 라인텔 백작의 인사는 웃는 낯으로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저놈이 더러운 혓바닥으로 나의 리페를 꾀어낸 게 분명해!’
자신은 허락받지 못했던 손등 키스도 했다고 들었다.
‘나의 리페의 손을 만진 손가락과 입술도 썰어버리겠어.’
미하일의 잿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때였다.
“흐음, 참으로 흥미로운 제안이야. 우선 혀를 뽑고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어야 한다라…….”
아스타레아스가 턱을 괴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황제의 발언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황제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곧 그대로 형이 집행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흥, 저 새끼도 쓸 만한 데가 있군.’
미하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지를 찢기 전에 황후 폐하께 닿았던 더러운 입술과 손도 얇게, 여러 번에 걸쳐 썰어내야 합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미개한 형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미소는 더 깊어졌다.
“정말 흥미로워.”
툭, 툭.
아스라테아스가 황금으로 된 좌장석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모두가, 심지어 재판장까지도 황제의 판결을 기다렸다.
그러나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내 황후님께서는 백작의 결백을 믿는다 하셨지. 나는 다른 누구보다 황후 폐하의 말을 신뢰한다.”
황제 폐하의 공언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타오른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라인텔 백작이 진상했던 찻잎을 일부러 사석에 가져가 직접 우린 행위는 충분히 의심을 살만하다.”
아스타레아스는 극형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라인텔 백작의 주장대로 정말 몰랐을 수도 있지.”
몰랐다면 왜 칼리오페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차를 우렸겠는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과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라인텔 백작은 의사봉이 나무판을 내려치기도 전에 죄인이 된 차다.
결국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이 재판의 도돌이표를 찍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모두가 그에게 의문을 품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라인텔 백작이 결백하다면 보관소에 누군가가 침입해 유산약을 넣은 것이겠지.”
감히 누가 제국의 황궁에 있는 보관소에 침입해 그런 범죄를 저지를까. 제국 황궁의 보안을 뚫을 수 있는 자가 과연 존재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황후가 음독할 뻔한,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뒤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말에 다들 ‘설마?’ 하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미하일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라인텔 백작의 혀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른히 미소 지었다.
“입술과 손을 얇게 포를 뜨듯 여러 번 썰어내고.”
노래하듯 느긋한 중얼거림이었다.
“혀를 뽑아낸 뒤,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는다.”
미하일의 몸이 경련했다.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전신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참 흥미로워.”
가장 맑은 수원의 한가운데처럼 청명한 푸른 눈동자가 미하일을 똑바로 직시했다.
* * *
“폐하께서 저리 말씀하시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건가?”
“하지만 황궁 보관소에 누가 침입했을 리가…….”
“다른 분도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 답이 안 나오는 일에 대해 말씀하실 리 없지요.”
“그렇다면 설마?”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다.
통신방의 체팅창 역시 불타올랐다.
아스타레아스가 나서자마자 단번에 변화는 분위기에 라인텔 백작은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어차피 벗겨질 누명이니 간단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결백이 밝혀지면 자신과 코테린 공국에도 도움이 되고, 종주국인 제국과의 관계도 돈독해지니 썩 나쁘지 않은, 아니,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개인적인 사심까지 들어가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이 일에 관여되어서 운이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막상 공판장에 나와 온갖 비난을 들으니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라인텔 백작은 어쨌거나 귀족으로 태어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산 사람인지라 이런 일에 면역이 없었다. 물론 비난을 듣긴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코테린 공국은 국력이 강하지 않아 외교관인 라인텔 백작은 타국에서 푸대접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와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탓에 미하일 왕세자의 말을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가 온갖 말이 오가는 통신방의 채팅을 보지 못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위축되었던 라인텔 백작에게 분위기의 반전은 커다란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어쨌거나 그의 뒤에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대륙을 한 손에 움켜쥔 제국의 황제였다.
‘그래, 이미 일어난 일이야.’
길이 거칠다고 달리는 마차 안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는 법.
‘그래도 미하일 왕세자에게는 꼭 사과를 들어야겠어.’
약소국인 코테린 공국의 백작이 발루에린의 왕세자에게 사과를 듣는 건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인텔 백작은 일전에 발루에린에 사절로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 거만하고 오만한 왕세자가 제게 고개 숙일 것을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콧대 높은 강대국 귀족들의 태도 역시 달라지리라.
아스타레아스의 발언으로 숨통이 트인 라인텔 백작과 달리 미하일의 얼굴은 시시각각 꺼멓게 죽어갔다.
‘설마, 증거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증거가 있다면 왜 이런 공판을 열었겠는가. 처음부터 라인텔 백작이 아니라 미하일을 피고인으로 공판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래, 증거는 없어.’
“폐하의 말씀대로 누군가 보관소에 침입해 유산약을 넣었다면 라인텔 백작은 결백하겠지요. 그러나 그걸 밝힐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의 말씀이 합당하오.”
그 말에 미하일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증거는 없으니 이대로 라인텔 백작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 판결을 내리기 전에 증거를 기다려 보지.”
이어지는 아스타레아스의 말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증거가…… 진짜 증거가 있다고?!’
미하일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공판장의 문이 열렸다.
“폐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교하신 바 진실을 보고 왔습니다.”
힐데르트였다.
“진실이라고?”
“그럼 진범은 따로 있다는 건가?”
“대체 폐하께서 하교하셨던 게 뭐지? 증거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다가 이윽고 조용해졌다. 모두 힐데르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라인텔 백작은 황후 폐하와 복중 황손을 해하려 한 범인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양상을 보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직접 말로 확인받으니 느낌이 달랐다.
사람들은 숨을 들이켜며 라인텔 백작을 바라보았다. 곧 자신들이 그를 향해 쏟아냈던 말이 생각나 얼굴을 붉혔다.
공판장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지만, 이 사건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던 통신방은 난리가 났다.
—헉, 범인도 아닌데 그렇게 욕먹은 건가.
—괜히 애먼 사람 잡았네…….
—여기 말 보진 않았겠지?
—그러게 왜 판결 나기도 전에 욕을 했어. 아까 분위기 솔직히 너무 과열되었음.
—그 말 아까 하지 왜 지금 와서 함?
—여기서 싸우지 마세요. 우리 모두 잘못했죠.
—백작님 죄송해요…….
—백작님 장수와 번영을…….
—백작님 무병장수하세요…….
—진범은 유병단수…….
—그러고 보니 진범은 누구지?
대체 진범은 누구냐.
중계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물론, 공판장에 있는 귀족과 사절단들 역시 의문을 품고 힐데르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힐데르트의 입술이 열렸다.
“진범은—.”
진범은?
말을 끄는 모습에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거기에 눈 하나 깜짝할 힐데르트가 아니었다. 그는 공판장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에는 힐데르트의 얼굴이 커다랗게 비치고 있었다. 밖에서 생중계로 공판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는 모습이었다.
“직접 확인하시죠.”
그 말과 동시에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뭐지? 보관소인가?”
바뀐 화면 속에는 이번에 칼리오페의 회임을 축하하며 진상된 여러 가지 공물과 선물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때, 보관소의 구석 바닥에 푸른 빛이 맺히며 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진이 완성되고 빛이 잦아들자 아무도 없던 공간에 검은 인영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침입자? 복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를 모르겠군.”
“저놈이 유산약을 섞은 건가?”
복면인은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테린 공국의 문장이 찍혀져 있는 진상품에 다가가 조용히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그의 손에 금박과 은박을 잔뜩 입힌 화려한 티 캐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인은 티 캐디를 열고 그 안에 품 안에서 꺼낸 가루를 쏟아부었다.
“세상에!”
“미친…….”
체면상 공식적인 자리에선 욕을 하지 않던 귀족들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아니, 그런데 왜 아무도 안 오지? 근위병은?”
“인기척이 안 느껴졌나? 그런데 워프 마법으로 침입한 것 자체가 이상한데.”
황족이 거하는 곳도 아니고, 황궁 외곽에 있는 창고일 뿐이다. 보안이 철저하진 않을 순 있다.
그러나 창고라고 해도 어쨌든 황궁 안에 있는 건물이었다. 워프 마법을 방해하는 마법 결계 정도는 처져 있는 게 정상이었다.
“이것과 같은 시각의 영상입니다.”
힐데르트의 말과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보관소 앞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이 절절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상대하기에 한없이 신분이 높은 존재가 난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져온 선물이 선물 목록에 들어있지 않았다! 있던 물건이 대체 왜 없어진 것이냐! 너희가 몰래 내 선물을 가로채서 그런 것 아니냐!]
호통을 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타국의 사절단이 선물로 가져온 물건이 없어졌다는 말에 근위병은 어쩔 줄 모르고 납작 엎드렸다.
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난리를 치는 사람이 근위병의 눈을 제게 잡아두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이라고. 저 사람이 바로 이 일을 주모한 진범이라고.
하지만 스크린에는 진범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로 젊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대체 누구야?!’
사람들이 답답하다 못해 초조함을 느낄 때, 화면 안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과 잿빛 눈동자. 호감을 사는 얼굴.
“미하일 왕세자?”
그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젠장, 젠장!’
미하일은 욕지기를 삼키며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에 눈을 꾹 감았다. 공판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게 뭡니까, 미하일 왕세자!”
“왕세자가 이런 일을 벌이다니! 발루에린은 제국과 전쟁을 원하는 것입니까!”
“황손을 해하는 것은 곧 제국을 해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이런 치졸하고 더러운 수를 써 제국을 위협하려 하다니!”
“제국에서 발루에린을 격상시켜준 게 얼마나 지났다고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겁니까!”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화살촉처럼 미하일을 헤집었다. 미하일은 거기에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때였다.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한 공판장 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아스타레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온 것이다.
“네가 네 입으로 말했지. 그런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에게 어떤 형벌을 내리면 좋을지.”
아스타레아스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판결이나 다름없었다. 얼음 같은 눈동자가 미하일을 내려다보았다.
“저, 저, 저는…….”
미하일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졌다.
“뿐만 아니라 억울한 자에게 누명을 씌우고 혀를 자르라고 주장했지. 이는 진실을 밝히는 신성한 재판정을 모욕하고 사람들의 눈을 가려 악행을 은폐하려는 중죄.”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공판장 안에 울려 퍼졌다.
“새롭게 추가된 죄에는 어떤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나.”
황제의 물음은 차라리 조롱에 가까웠다. 미하일이 그 말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 이번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네요.”
“선처를 베풀어야 한다고 싹싹 비는 건 아닌지.”
“한 나라의 왕세자라는 이가 그렇게 치졸하겠소.”
킥킥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져 나갔다.
미하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일부러, 증거가 있으면서 일부러 밝히지 않고 공판을 연 것 아니오!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이건 함정이야!”
흥분으로 시야와 판단력이 좁아진 미하일이 소리를 꽥꽥 질렀다.
억울했다.
저런 증거를 제시하며 처음부터 자신을 기소했다면 이렇게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다. 치졸한 건 자신이 아니라 함정을 판 아스타레아스 아닌가!
“그래서?”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부정 한 번 하지 않고 예의 그 깔끔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일 뿐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네놈이 황후를 해하고 황손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기저에는 분노가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황제의 진노에 공판장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수그렸다. 하지만 분노와 수치, 공포로 제정신이 아닌 미하일이 상황을 파악하고 언행을 바로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긴, 그가 정신을 차린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호, 일부러 그랬다는 걸 인정하는구나! 내가 리페와 운명이라는 것에 질투해서! 그래, 분명 그래서 나를 시궁창에 처넣으려고 이런 판을 짠 거지?!”
번들거리는 눈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하는 말에 싸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웅성거림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뭐야? 운명?”
“지금 자기가 황후 폐하와 운명이라고 한 거야?”
“황제 폐하께서 자길 질투한 거라고……?”
공판장이 이럴진대 채팅방은 더 난리가 났다.
—저게 진짜 미쳤나!
—미쳤다는 말도 아까워!
—운명? 대체 뭐가 운명임? 아, 리페님께 주제넘게 집적대다가 죽을 운명?
—우리 폐하 얼굴을 땅에 갈아버린 것보다 못생긴 주제에 질투라니!
—안 되겠다. 쟨 진짜로 그냥 죽이면 안 됨.
읽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채팅이 쏟아져 내렸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미하일은 당당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아드레날린이 전신을 휘돌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무엇보다 그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경계하고 질투해서 이런 함정을 파지 않았는가! 그건 곧 자신이 아스타레아스에게 위협적이라는 소리였다.
‘왜냐하면 리페가 내 운명이니까.’
벌겋게 물든 미하일의 눈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리페, 네가 지금 저놈 옆에 계속 있다 보니 누가 네 운명인지 안 보이나 본데, 내가 제대로 교육해줄 테니까—.”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아악!”
미하일이 제 얼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흐으윽, 하, 내, 내 눈……!”
눈을 감싼 그의 손 틈 사이로 벌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 이런. 실례.”
아스타레아스가 느긋한 어조로 말하며 사르르 웃었다.
“재판 절차를 준수해야 했는데 저 더러운 눈이 내 황후님을 향하니까 나도 모르게.”
미하일은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그는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더듬었다.
“아, 안 보여……. 아무것도, 아무것도……! 내, 나는……! 아아아악!”
울부짖는 그를 향해 동정을 보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몸을 돌려 칼리오페의 눈을 다정하게 가렸다.
“쉬이, 저런 흉한 거 보면 안 돼요. 좋은 것만 봐야죠.”
“레아스.”
순식간에 마법으로 다른 사람을 실명시킨 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상냥한 어조였다.
힐데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 수습은 자신의 몫이었다.
“너무 황당한 주장이라 폐하께서 굳이 부정할 가치를 못 느껴서 답하지 않으셨지만, 당연히 증거를 숨긴 채 함정을 판 게 아닙니다.”
물론 재판 전에 가지고 있는 증거를 다 밝히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증거가 뭔지 알면 상대가 반박할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피고인이 다른 사람인 걸 알면서 라인텔 백작을 공판에 세운 걸 인정하게 되는 거니까.
도의적인 문제가 있었다.
“워낙 해괴한 사건이다 보니 공판 날짜가 급작스럽게 잡히지 않았습니까.”
칼리오페의 찻잔에서 유산약이 나온 뒤 이제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각국의 사절단이 황궁에 당도해 보관소 문을 열었던 순간부터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보름에 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축하연에 맞춰 도착한 사절단도 있지만, 그보다 더 전에 도착한 사절단이 훨씬 많았다.
“보름 동안 녹화된 영상을 다 돌려 보기엔 촉박한 일정이었지요.”
아무리 빨리빨리 넘겨본다고 해도 무리였다.
“그래서 공판 도중에 증거를 발견하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힐데르트의 정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판 도중에 발견해낸 것도 대단하네. 진짜 이틀 만에 찾아낸 거잖아.”
“그나저나 보관소에 카메라를 설치해 녹화하고 있었다니……. 서너 시간밖에 저장 못 하는 게 아니었나?”
“그 이상 긴 영상을 녹화하는 기술은 아직 나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역시 제국의 기술력은 대단하군.”
“발표하지 않은 기술이 많겠지.”
각 나라의 사절들은 다시 한번 제국의 국력에 감탄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콧대가 으쓱했고, 동시에 황가에 대한 두려움과 충성심도 높아졌다.
“판결은 따로 내릴 것도 없겠지. 발루에린의 왕세자가 스스로 형벌을 정해주었으니.”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죄인의 말대로 혀를 뽑고, 산 채로 가죽을 벗긴 후 사지를 뽑도록 해라.”
황제의 선언에 재판장이 의사봉을 들어 올렸다.
“입술과 손을 얇게 포 뜨는 것은 봐주도록 하지. 황후에게 거절당해 손등에 키스를 하지 못했으니까.”
아스타레아스가 덧붙이며 차갑게 웃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하교대로 죄인을 벌한다.”
재판관이 그렇게 말하며 의사봉을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칼리오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를 저지했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눈을 가린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스타레아스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녀를 막진 않았다. 대신 로베르트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 미하일을 얼굴을 덮었다.
칼리오페는 미하일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다들 칼리오페가 어떤 발언을 할지 궁금해했다.
운명이니, 뭐니 했던 망상에 일침을 놓을까? 아니면 현실을 알라며 황제와 하나하나 비교를 해줄까.
어떤 일이든 기대됐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라인텔 백작에게 사과하세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다른 누구보다 라인텔 백작이 눈을 홉떴다.
“라인텔 백작은 당신의 죄를 뒤집어쓰고 온갖 모욕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 모욕과 수모에 일조한 사람들이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죄를 밝히지 않은 것은 정의롭지 못하고 비겁하지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서서 무고한 자를 비난하며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뽑으라니.”
칼리오페의 고운 미간에 금이 생겼다.
“이 일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그녀가 재차 명령했다.
“죄인은 라인텔 백작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도록.”
그 말에 부들부들 떨던 미하일이 멈칫했다.
“사과하라고? 나보고 허억, 저 약소국의…… 시골이나 다름없는 공국의 백작에게?”
고통으로 헐떡이면서도 미하일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감히 황후의 명을 비웃은 그에게 사람들이 발끈했다.
루스티첼 일가의 남자들은 검을 움켜쥐었고 아스타레아스 역시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면 당장 그를 짓눌러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마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칼리오페가 숨을 들이 삼켰다.
그녀가 다시 숨을 내뱉었을 때, 고요한 목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 그리고 사방이 닫혀 있는 공판장 안에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땅을 구성하는 대정령, 바람새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의 등장이었다.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엄청난 존재감에 사람들은 숨을 삼켰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으로 느껴졌다.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대정령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은 미하일은 거의 혼절할 듯했다. 그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벌 떨리는 다리 아래로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실금한 것이다.
[주제도 모르는 것이 겁도 없이 설치는구나!]
위대한 대정령의 목소리가 공판장을 뒤흔들 듯 울려 퍼졌다.
미하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끊길 듯 이어지는 숨이 불안정했다.
칼리오페는 손을 높게 들어올렸다. 바람새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안으로 날아들었다. 대정령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칼리오페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바람결이 달라지며 사위가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발루에린의 왕세자, 미하일 에미렌트.”
낭랑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고요한 공판장에 또박또박 울렸다.
몸을 수그린 채 떨고 있던 미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 두 눈이 멀었는데, 칼리오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산호빛 눈동자가 엄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며 긴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휘날렸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흔들림이 없었다.
‘아…….’
저건 자신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존재다.
미하일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느꼈다.
칼리오페에게서 뻗어져 나오는 기운이 피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이건 오러와도, 마나와도 다른 기운이었다.
저절로 신경 하나, 하나가 곤두서며 위협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게 만드는 감각.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힘, 에테르가 품고 있는 절대적인 위압감이었다.
그는 칼리오페를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상상 속에 있었던,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고, 노래를 부르며 제 기분을 맞춰주는 여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높은 정점에 서 있는 자만이 있을 뿐.
“자, 잘못…… 죄송, 흐,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굳어버린 혀를 애써 움직여 사죄했다.
“본 황후에게 자비를 구하지 마라. 나는 내 아이를 해하려 한 너를 용서하지 않아.”
엄격한 목소리에 미하일은 더 빌지도 못했다.
“분명히 아까 말했을 텐데. 라인텔 백작에게 사죄하라고.”
그 말에 미하일은 고개를 들어 라인텔 백작을 바라보았다.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자신보다 훨씬 못한 존재였다. 라인텔 백작이 제게 고개를 숙이는 건 당연해도, 제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휘이이이잉—
그때,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미하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미하일은 납작 엎드렸다.
차라리 칼날이었으면 이렇게까지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대정령의 힘이 깃든 바람은 스치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뇌리에 심어주었다.
“라, 라인텔 백작…….”
라인텔 백작은 제 앞에 발루에린의 왕세자인 미하일이 엎드려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 내가 미안하오. 내가 시, 실수를…….”
발루에린에 사절로 가면 미하일이 대담장 문을 잠그고 들여 보내주지 않아서 라인텔 백작은 몇 시간이고 대담장 문 앞에서 서 있어야 했다.
두어 시간 그렇게 서 있으면 온 줄 몰랐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물론 사과는 없었다.
그래도 약소국인 코테린 공국에서는 제대로 항의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미하일 왕세자가 제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양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하나둘 이전의 일이 떠오르며 마음이 달라졌다.
라인텔 백작은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칼리오페는 그가 무슨 일을 하든 지켜보겠다는 자세로 서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켜 결심한 라인텔 백작이 입을 열었다.
“실수라고 하셨는데 그럼 왕세자께선 본인이 지은 죄를 제가 뒤집어쓴 상황에서 제 혀를 자르라고 말한 게 어떤 의도도 없었다는 뜻입니까.”
“그건, 내가 생각을 잘못해서…….”
“왕세자답게 분명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실수다, 미안하다. 이런 형식적인 사과가 아니라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짚어서요.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합니다.”
미하일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감히 한낱 공국의 백작 따위가 발루에린의 왕이 될 자신에게 하나하나 다 따져가며 제대로 사과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미하일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공포로 얼룩진 목소리였다.
다른 것보다 어서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부터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내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를 백작에게…… 계획적으로 전가하고, 으, 그것으로 모자라 잔혹하고 끔찍한 형벌을 내리라며 다, 다른 누구보다도 거세게 주장했네. ……내 죄를 용서해주시게.”
수치심이 전신의 혈관을 타고 돌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흐음,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요.”
삐딱한 말이 되돌아왔다.
“사과하는 사람이 그렇게 고개를 들고 두 눈 똑바로 바라보던가요?”
미하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이 불거지는 게 참지 못하고 라인텔 백작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축축하게 젖은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미하일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젖은 바닥에 그의 이마가 닿았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결국 그렇게나 우습게 보고 하찮게 여겼던 상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침묵이 공판장을 휩쓴 가운데 ‘탕, 탕, 탕—’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재판관에서 의사봉을 넘겨받은 아스타레아스가 공판의 끝을 알린 것이다.
“죄인을 끌고 가도록.”
* * *
“그거 봤어?”
“아, 그 주제도 모르는 싸가지 왕세자 굴욕 사진?”
공판장에서 생중계되었던 미하일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진짜 오줌 쌀 줄 누가 알았겠어.”
“황후 폐하를 유산시키려던 것도 지 애를 임신하게 하려고 그런 거였다며?”
취조실에서 아스타레아스와 독대한 미하일은 모든 것을 술술 다 불었다. 대체 무슨 방법을 썼는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눈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황제 폐하께서 마법으로 멀게 하지 않았나?”
“아, 그거 환상 마법이었대. 아무래도 타국의 왕세자니까.”
“크으, 그 상황에서도 그런 판단을 잃지 않는 우리 유능하신 황제 폐하 너무 멋지시다.”
“뭐, 그것보단…….”
“진짜로 눈멀게 만들었으면 황후 폐하한테 혼났을 테니까…….”
“응, 그런 거지.”
영애들이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루에린에서는 아직 소식 안 왔나? 어쨌거나 처벌을 면할 수는 없는 사안이지만, 그래도 자기네 나라로 데려가서 자국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말이 올 법한데.”
“아, 너 아직 신문 못 봤구나?”
영애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신문을 내밀었다.
“자, 여기 봐봐.”
[발루에린 왕궁 앞을 밝힌 촛불, “왕세자를 폐위하라.”]
그런 헤드라인과 함께 시작된 기사에는 발루에린의 백성들이 어떤 특혜도 없이 왕세자를 벌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 적혀져 있었다. 또한, 제국의 판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까지.
“하긴, 나도 우리나라 황태자가 저러면 좀…….”
“진짜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지.”
“오줌 왕세자라고 불리잖아.”
“그대로 왕이 되면 오줌왕이야.”
“으, 싫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심지어 왕가에서도 난색이라네.”
“하긴, 제국과 관계가 틀어지는 걸 막고 싶겠지. 그게 최악이니까.”
이쯤 되니 발루에린의 국왕 폐하가 좀 불쌍했다.
“그나저나 공판 때 황후 폐하 너무 멋지시지 않았니?”
“하아…….”
“거친 바람을 등지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 엄정한 눈으로 내려다보시는데!”
“절경이고요, 장관이고요, 신이 내린 축복이었지.”
“나 진짜 설렜다니까!”
영애들이 서로의 어깨를 치며 꺄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복중 황손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유산약을 복용하신 것도 아니니 괜찮으실 거야.”
“응, 건강히 태어나시길 빌자.”
커피 하우스에서 영애들이 정신없이 수다 떠는 것을 듣고 있던 라인텔 백작은 조용히 일어나 마차를 잡아탔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 나와 황궁에 가기 전에 들렀던 커피 하우스였다.
마차 안에서 라인텔 백작은 심호흡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 대체 무슨 일로 나를 부르시는 걸까.’
오늘 황궁에 가는 용건은 다른 것도 아닌 황제 폐하의 알현. 그것도 독대다. 라인텔 백작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는 바짓단에 땀에 젖은 손을 문질렀다.
이번 일이 있었으니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날 바라보시는 눈빛이 정말 무서워서…….’
그 오싹한 눈을 떠올린 라인텔 백작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막상 황궁에 도착했을 때 라인텔 백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포상이었다.
라인텔 백작은 눈앞에 펼쳐진 온갖 사치의 향연에 체통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공국의 일 년 치 국가 예산을 합쳐도 이보다 적을 것이다.
‘이, 이건 라이난테 실크?!’
원래도 수량이 한정된 데다가 값비싸서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만남에 라이난테 실크로 만든 손수건이 오작교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나서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라인텔 백작은 두려워서 차마 만져보지도 않았다.
그 외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미와 보석이 아낌없이 박힌 사치품. 도자기와 그림, 조각상을 비롯한 각종 예술품. 심지어는 짙은 빛을 발하는 고순도의 마력석까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그 정도였다.
라인텔 백작은 끝없이 이어지는 하사품이 다 얼마나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질렸다. 공국의 일 년 치 국가 예산이 아니라 삼 년 치 예산에 달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코테린 공국에서도 섭섭하지 않겠지.”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라인텔 백작이 정신을 차렸다.
“서, 섭섭하지 않다니요. 오히려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진범은 밝혀졌지만, 어쨌든 코테린 공국의 사절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공판까지 갔다. 코테린 공국에서는 충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보통은 그렇겠지만, 오히려 실리는 챙겼어. 공왕 전하께서도 만족 중이시고. 물론 사절이 공판장에 섰다는 것 자체는 탐탁지 않아 하시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보상이 있으니 불만은커녕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가지고 돌아가는 순간 입 찢어져라 웃으며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일장연설하시겠군.’
코테린의 공왕은 물질적인 것만 추구하고 제 사리사욕만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마다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고, 주변국에 치이는 작은 나라인 만큼 라인텔 백작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다.
“과하다라…….”
아스타레아스가 중얼거렸다.
혹시 황제의 기분이 상했나 싶어서 아차, 한 라인텔 백작이 서둘러 말했다.
“그, 안 좋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폐하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이번 일로 코테린 공국은 실리를 얻었습니다.”
아스타레아스가 어떤 황제인가.
현재 라인텔 백작과 코테린 공국을 둘러싼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여기서 우린 손해만 보고 얻은 게 없다며 수지타산 이야기를 해봤자 본전도 못 찾는다.
“각 나라의 사절이 다 모이는 것은 또 다른 외교의 장이 되지요. 이번 공판 덕에 다들 제게 한 수 양보해주고 있습니다.”
공판장에서 욕하던 게 있으니 염치가 있는 자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특히 황후인 칼리오페가 라인텔 백작과의 친분을 보였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항상 무시당하던 약소국인 코테린 공국으로서는 처음으로 점하는 외교적 우위였다.
“이미 얻게 된 게 있는데, 또 이렇게 크나큰 하사품을 내리시니 황은이 깊다는 뜻이었습니다.”
고개 숙인 라인텔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스타레아스가 툭, 내뱉었다.
“하나도 과하지 않은데.”
중얼거리는 듯한 말에 라인텔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황후님을 노린 자다. 그런 자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비용인데.”
오히려 너무 싼 것 아닌가.
그렇게 읊조리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라인텔 백작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돌아가는 길에 원인 모를 습격을 받아 끔찍하게 죽는 건 너무 쉽잖아?”
아스타레아스가 라인텔 백작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어린 영애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까지 얼굴을 붉힐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라인텔 백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하일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조차 사치였다.
단순히 폐위되고 왕가의 성을 박탈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미하일의 발치에 엎드리지조차 못하던 비렁뱅이마저 그에게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고 있으니까.
차기 왕이라는 높디높은 자리에 있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 일은 역사서에 남아 후대 사람들도 그를 멸시할 것이다.
‘폐하의 말씀대로 돌아가는 길에 의문사하면 비운의 왕세자로 이름이 남았겠지.’
그냥 죽이지 않고, 미하일의 모든 것을 빼앗아 영원히 오물에 넣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는 그 어느 것도 아깝지 않다니…….’
칼리오페를 향한 아스타레아스의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걸 그냥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라인텔 백작은 두렵기까지 했다.
“그래도 백작이 과하다고 생각하는 건 좋군.”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라인텔 백작은 정신을 차렸다.
“그건 어떤 말씀이신지…….”
“받을 것 이상의 대가를 받았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지.”
“요, 요구라니요. 감히 폐하께……. 당치도 않습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대답 대신 라인텔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라인텔 백작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어, 저어……. 황후 폐하께 보상을 요구할 생각은 당연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
그 매끄러운 단언에 라인텔 백작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칼리오페는 그를 친우라고 칭했고, 언제든 티타임에 환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우로서 만날 일이 있다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제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예…….”
라인텔 백작으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지만, 목숨은 하나뿐이었고 소중했다.
“그나저나 이런 짐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일이겠어.”
“아, 아닙니다. 폐하의 하사품을 받아 금의환향하는 것인데 어찌 짐으로 생각하겠습니까.”
“아니야. 정말 힘들 거야. 가지고 갈 인력도 뽑아야 하고 바쁘겠군.”
“예? 예.”
황제 폐하께서 참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으나 외교관다운 눈치로 라인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동 속도까지 느려질 테니 서둘러 떠나야겠군. 코테린에서 공왕이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기다리겠는가. 좋은 마음으로 사절을 보냈는데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었으니.”
공왕은 요 며칠간 라인텔 백작이 다른 나라를 상대로 쌓은 실적에 매우 만족하며 거기서 뽑아 먹을 때까지 뽑아먹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까.
그러나 라인텔 백작은 알겠다며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떠나자. 그래도 떠나기 전에 황후 폐하는 한번 더 뵙고 싶은데.’
난공불락의 황제가 가로막고 있으니 요원했다.
그때였다.
“레아스!”
순식간에 주변을 환기하는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가 에피니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법 부른 배에 한 손을 얹고 조심조심 갸웃거리며 한 발을 내딛는 모습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바로 앞에서 아스타레아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목격한 라인텔 백작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뭔가 보면 안 될 것을 본 느낌이었다.
“리페.”
아스타레아스가 뒤뚱거리는 칼리오페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쉬고 있지 왜 나왔어요.”
“너무 안 움직이면 또 안 좋으니까. 근데 누구랑 같이 있었어요?”
칼리오페가 기웃거리며 아스타레아스의 등 너머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아스타레아스가 뒤를 돌아봤다.
푸른 눈동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친 라인텔 백작은 비명이 터질 뻔한 것을 겨우 참고 하사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주, 죽을 뻔했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같이 있긴요. 나 혼자지.”
아스타레아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와, 이것들은 다 뭐예요? 왜 이런 곳에 있나 했더니.”
“코테린에 내릴 하사품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라인텔 백작은 잘 지낼까요? 괜히 안 받아도 될 비난을 받게 해서 마음이 쓰이네요.”
“마음이 쓰인다고요.”
아스타레아스는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대화를 듣고 있는 라인텔 백작은 수명이 깎이는 것만 같았다.
“이런 물질적인 것으로 과연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듣자 하니 이 일의 덕을 봐 외교도 잘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 그래요? 그럼 언제 티타임에 초대를 해서—.”
“그건 안 되겠는데.”
툭 끊는 말에 칼리오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 황후님께선 부인과 아이를 잃을 뻔한 공포로 상처받은 남편을 달래줄 예정이라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뺨을 움켜쥐었다.
* * *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흘렀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나날이었다.
물론 발루에린의 왕이 찾아와 직접 사죄하며 배상을 하고, 왕가의 성을 박탈당한 미하일에게 공식형이 집행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황궁의 평화를 깰 만 한 일이 아니었다.
황궁의 평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오로지 회임한 황후의 용태였다.
이 대륙의 유일한 제국에 대를 이어 쌓인 전설이라고 불리는 각종 영약들. 그 영약을 아낌없이 먹은 칼리오페는 아주 건강했고, 배 속의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배 속 아이가 너무 잘 자라 출산 때 힘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약이 왜 영약이겠는가. 문제가 될 정도의 기운은 아이에게 가지 않고 칼리오페에게 흡수되었다.
그 결과 격무에 시달리던 회임 전보다도 오히려 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임신한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마음이 어디 멀쩡하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칼리오페가 살짝 기우뚱거리면 기우뚱거린다고,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에 재채기라도 하면 또 재채기한다고 아주 난리였다. 아내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황제 폐하를 보고 있으면 참으로 유난이라는 생각이 들 법했으나…….
안타깝게도 칼리오페 주변에는 그걸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가 임신시켰으면 그 책임을 다해야지.”
“손발 쓸 일 없도록 수발드는 게 당연해.”
“어휴, 고생해서 우리 리페 볼살이 쏙 빠진 것 좀 봐.”
루스티첼 일가는 물론이고, 칼리오페의 소꿉친구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말과 달리 칼리오페의 볼살은 말랑말랑 포동포동했다. 성인이 되며 빠졌던 볼살이 고영양 보양식을 먹으며 다시 붙었던 것이다.
그렇게 칼리오페가 한 번 기우뚱할 때마다 황궁이 기우뚱하고, 한 번 재채기할 때마다 황궁이 들썩이길 몇 달째.
오늘 황궁은 답지 않게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살얼음처럼 아주 조금의 충격에도 파사삭 깨질 것 같은 고요.
하지만 그건 초겨울에 막 얼기 시작한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고요가 아니었다. 겨울 내도록 두꺼웠던 얼음판이 다가오는 따스한 봄에 점점 녹아내렸을 때와 같은 고요였다.
살얼음이 녹아내리다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파삭 깨지면, 흐르는 생명이 땅에 스며들어 싹이 움틀 것이다.
언제야 진정 봄이 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지만, 그보다는 기대와 설렘을 담고 숨죽여 기다리는 고요가 황궁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그리고 곧 그 고요를 깨치는 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아!”
울음 소리는 두 명 분이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황후궁 앞에서 사람들이 달려나가며 외쳤다. 언제 고요했냐는 듯 황궁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아기씨가 두 분이시랍니다!”
“두!”
“분!”
뛰어가던 사람 중 둘이 서로 팔을 교차하며 크로스를 만들었다.
그 둘은 라이벌 신문사 소속의 기자로 특종을 두고 다투는 앙숙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 라이벌이고 앙숙이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 역시 실성한 듯 깔깔깔 웃으며 그들 옆을 뛰어갔다.
“두 분이라니!”
“최고다!”
“성별은?”
그 말에 아차, 한 사람들이 달려나가는 것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확실히 정상이라고 볼 순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이내 답을 듣고는 만면에 화색이 된 얼굴로 아까보다 더 빨리 뛰쳐나갔다. 갑자기 이단 점프를 하며 “이얏호!” 하고 환호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뭐,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러그윈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품에서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멀쩡한 문명의 이기를 놔두고 왜 발로 뛴담?’
통신석의 화면이 켜지고, 러그윈의 엄지가 그 어떤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 * *
칼리오페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애써 다듬었다.
눈물로 눈앞이 뿌옇게 물들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길고 곧은 손가락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칼리오페는 그 손가락의 주인을 확인도 하지 않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가들은?”
“모두 건강하십니다.”
유모가 훌쩍이며 답했다.
“제가 이 손으로 우리 아가씨의 아이를 받다니…….”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 그녀가 칼리오페의 품에 두 아이를 안겨주었다. 칼리오페는 제 가슴팍에서 꼬물꼬물거리는 작은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진짜 죽을 것 같이 힘들었는데, 아프고 무서웠는데 그게 다 괜찮아졌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제대로 달려 있다는 게 신기한 손발을 꼼질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냥.
그냥…….
“리페.”
아스타레아스가 땀에 젖은 칼리오페의 이마를 훔쳐주었다.
칼리오페는 그 손길을 받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쓸었다. 두 아이의 무게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코끝이 시큰했다.
아스타레아스도—남편도 이런 기분일까.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어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칼리오페는 감상에 젖었던 것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스타레아스는 평소의 말끔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헝클어졌고 옷에는 주름이 잔뜩 가 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웃음을 터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남편의 완벽한 얼굴이…….
“레아스, 울어요?”
눈물을 뚝, 뚝 흘리는 남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스타레아스는 웃는 칼리오페를 조금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당당히 얼굴을 내밀었다.
과연 당당히 내밀 만큼 지금 이 꼴을 하고서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응, 울어요. 당신이 날 울게 하잖아.”
“내가요?”
“날 너무 행복하게 해.”
아스타레아스가 아주 어렸을 적, 제대로 말도 못했을 적.
그를 낳아준 태후—어머니는 죽음을 예감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 어린 자식이 쓸 손수건에 수를 놓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손수건은 몇 년이나 지나야 쓸 수 있을 텐데.
그보다도 더 긴 시간이 지나 장성한 자식이 결혼할 아내에게 줄 손수건에 수를 놓는 건? 아스타레아스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보지도 못할 미래였다.
그 사실에 좌절했을까, 절망했을까, 아니면 삶을 원망했을까.
이제야 답을 알았다.
어머니는 그때, 행복하셨을 것이다.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나도, 행복해요.”
행복함이 지나쳐서 가슴이 알싸하게 아려온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알게 되었다.
칼리오페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그녀가 겪었던 끔찍한 미래. 그때 겪었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다 사라지는 듯했다.
악몽 같았던, 사라진 미래 혹은 과거.
이제 그건 정말로 현실이 아니라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그녀는 분명한 행복의 결실과 미래를 손에 넣었으니까.
“둘이나 되어서 엄마는 죽는 줄 알았어, 정말.”
칼리오페는 웃으며 아이들의 정수리에 입술을 비볐다.
아이들의 얼굴을 더 자세히 확인하고 아스타레아스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레아스, 나 너무 졸려요.”
“안심하고 푹 쉬어요. 고생 많았어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토닥였다.
칼리오페는 그의 손길을 받으며 눈을 깜빡였다.
아스타레아스가 품에 있던 아이들을 안아 드는 모습이 보였다. 출산 전에 아이 안는 법부터 시작해 육아의 모든 것을 배운 만큼, 처음 안는 것치고 퍽 안정적인 자세였다.
칼리오페는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꽃물이 드는 것만 같았다.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손을 뻗는데 자신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분만하면서 쥐었던 주먹을 아직도 풀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행복에 가득해 고통을 어느 정도 잊은 그녀는 그렇게 힘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폈다.
그런데.
‘……뭐지, 이 은빛 실은?’
손바닥 안에 은빛 실이 여러 가닥 놓여 있었다. 빛깔부터 평범한 실이 아닌 듯한 게 푸른 기가 도는 은빛은 보석보다도 더 환히 반짝였다.
감촉도 매끄럽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칼리오페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면서도 칼리오페는 힐끔 남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절로 눈이 그쪽으로 갔다.
머리카락 몇 가닥 뽑혔다고 땜방이 생길 리는 없었지만,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부인이 해산할 동안 남편은 밖에서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 혼자 고통을 겪게 할 수 없다며 해산을 도왔다.
그리고 정말로 고통을 함께했다.
* * *
온 나라에 축제가 열렸다.
일곱 날과 일곱 밤 동안 광장 정중앙의 불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으며 소리 높여 황자와 황녀의 탄생을 축하했다.
각 도시의 광장에 있는 중앙 제단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신발부터 시작해서 배냇가운, 딸랑이, 모자 인형 등등 아기자기한 것들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었다.
모두 이제 막 태어나신 황자님, 황녀님께서 쓰셨으면 하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져다 놓은 것들이었다.
“진짜로 남녀 쌍둥이라니…….”
광장의 전광판 위에 커다랗게 내걸린 아기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한 소녀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사진 속 쌍둥이 황자와 황녀는 곰과 토끼 모자를 쓴 채 서로 이마를 붙이곤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감탄을 흘리는 소녀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은 행복했다.”
“저 빵빵한 볼살 좀 봐. 미칠 거 같아.”
“으으, 발목이, 발목이 통통해! 무발목이야!”
“하아, 사랑한다는 말은 아껴둘 걸 그랬어……. 이제 무슨 말로 내 마음을 표현할까…….”
온갖 주접을 다 떨고 있는 이들은 사실 모두 다 초면이었다. 그러나 어색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축제의 열기도 한몫했지만 우리 황자님, 황녀님을 찬양하는데 초면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황자님과 황녀님이 귀염뽀짝하시니 그 아래에서 우리들은 모두 하나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이쪽 감상했으면 저쪽 감상할 차례지.”
곤히 잠든 쌍둥이 사진의 건너편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꺄르르 웃는 쌍둥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너무 완벽하다. 어떻게 저렇게 반반 딱 나뉘었지.”
“이건 진짜 비스 신이 개입한 거다. 아님 이렇게 최적의 결과를 낼 리가 없어.”
“남보랏빛 머리칼과 파라이바 블루빛 눈을 가진 황자님이라니……. 진짜 장래가 기대된다. 아니, 장래까지 갈 거 없이 지금도 너무 좋아.”
“은발과 산호빛 눈을 가진 황녀님은 또 어떻고……. 내 장래희망은 우리 황녀님 턱받이다.”
“하, 보모로 취직시켜주세요. 제발…….”
한참 꿈을 꾸는 표정으로 중얼중얼거리던 사람들이 다시 반 바퀴를 돌았다.
“그럼 다시 주무시는 모습을 감상하자.”
끝나지 않는 굴레였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 통신석 확인해! 영상 올라왔다!”
정보 빠른 동지들의 외침에 모두가 빛의 속도로 품에서 통신석을 꺼냈다.
그곳엔 천국이 있었다.
* * *
“응애!”
“응아!”
포대기에 온몸이 감싸인 채 커다란 눈을 깜빡깜빡하는 아기들을 보고 루스티첼 일가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내, 내, 내 손주들…….”
루스티첼 백작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어휴, 리페 태어날 때도 울더니 또 그러네.”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남편을 토닥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가 역시 발갛게 물들어 눈물이 고여 있었다.
“리페, 네 아빠가 네가 태어났을 때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던 거 혹시 기억나니?”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그녀는 농담을 한 것이겠지만, 칼리오페는 정말로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눈이 안 보일 때라서 우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이런 표정이셨구나.’
왠지 아스타레아스가 아기들을 보고 지었던 표정과 닮았다.
“레아스도 울었어요.”
“어머나?”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아스타레아스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행복해서요.”
“어휴, 재미없게.”
고개를 돌리는 루스티첼 부인을 보며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제 앞에선 부끄러워할 때 많으니까.”
그 말에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루스티첼 부인이 휙 얼굴을 들고 칼리오페를 바라보았다.
‘방금 말에 담긴 뜻이 엄청났던 거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 사람이 그러는 동안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아무 말 없이 요람에 딱 달라붙어 조카들을 내려다보았다.
“형…….”
“응.”
로베르트의 부름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발목을 적시는 한낮의 파도처럼 아스라이 밀려왔다. 두 사람은 이렇게 나란히 요람을 내려본 적이 있었다.
스무 해가 훌쩍 넘은 지난날의 일이었지만 평생 잊혀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장면.
손때가 묻을 정도로 읽고 또 읽어 완전히 외워버린 책처럼 소중한 기억이었다.
칼리오페와의 첫 만남.
그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소원하던 형제는 가까워졌고, 자식들에게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다정한 속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후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이 있기에 그 모든 일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로베르트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와, 작아. 진짜 작다. 이 손 좀 봐.”
“……작네.”
“그치? 손톱까지 있는 게 신기해.”
형제의 대화는 오래전에 나누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달랐다.
잠들어 있다가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깨려던 칼리오페와 달리 조카들은 이미 깨어 있었다. 형제들은 입을 합, 막고 다시 잠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며 신기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조카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볼 뿐.
예전에 칼리오페에게 그랬던 것처럼 루시우스가 조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로베르트 역시 조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통통한 배를 토닥토닥하자, 끔뻑이던 커다란 눈이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한다.
“어머? 오라버니들이 좋은가 봐요. 편안해 하네.”
칼리오페가 그렇게 말하자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야 네가 내 손길을 좋아했으니까.”
“내가 우르르 까꿍해주면 어찌나 그렇게 잘 웃던지.”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으쓱으쓱거리며 자랑했다.
“흥, 네 얼굴이 웃기니까 웃었던 거지. 내 손길은 좋으니까 편히 받았던 거고.”
“무슨 말이야! 나랑 있으면 행복하니까 웃은 거지!”
‘오라버니가 귀여워서 웃었던 건데요…….’
칼리오페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하하, 웃었다.
루스티첼 부부는 다 큰 자식들을 미소 지은 채 바라보았다. 이렇게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 어렸을 때와 다를 바 없게 느껴지지만, 이제는 각자 한 사람의 몫을 할 만큼 다 자랐다.
그 사실이 물씬 다가왔다.
“안아봐도 돼?”
로베르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조심하세요.”
아스타레아스가 불만스레 덧붙였지만.
로베르트가 한 명을 안아 들자, 루시우스가 나머지 한 명을 안아 들었다.
“우에…….”
“흥에에에!”
낯선 품이 불편한지 조카들이 칭얼거렸지만 곧 토닥이며 어르자 입을 오물거리며 잠잠해졌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볼살이 같이 탱글탱글 흔들려서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귀엽다!’
‘엄청 귀여워!’
역시 내 동생의 아이들이었다.
칼리오페를 처음 안아 들었을 때가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해다.
“이제는 하단 베기 만 번도 넘게 할 수 있는데…….”
“백만 번도 할 수 있지.”
따끈따끈한 아기들을 안고 있자 행복한 동시에 어쩐지 아련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어린 여동생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들 역시 칼리오페만큼이나 자라서 제 자식을 낳겠지.
“아덴하르트.”
“아르셀리나.”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이 두 아들의 품에 안긴 손주들의 볼을 콕, 찌르며 이름을 불렀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아기를 안은 채 행복하게 웃는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건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정도로 따스한 광경이었다.
그녀는 이런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다. 항상 안겨서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네 사람을 올려다보았으니까.
자신이 안겨 있었을 때, 가족들이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공유하며 얼마나 이어진 느낌을 받았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은 언젠가 아이를 낳고, 같은 광경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
“반복되네요.”
“하지만 똑같진 않아요.”
뜬금없는 말인데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남편이 칼리오페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의 말대로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하지만 결코 똑같지는 않다.
자신과 레아스의 아이들 역시 스스로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미래에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까 불안해하기도 하고, 비극을 뛰어넘는 행복을 꿈꾸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결코 멈추는 일 없이.
‘나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칼리오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아스타레아스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칼리오페는 입술에 검지를 붙이며 생긋 웃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에도 미소가 옮겨 붙었다.
아덴하르트와 아르셀리나를 바라보고 있던 가족들이 킥킥 웃는 황제 부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미소 지을 것이다.
아이들이 나아가는 모습을 믿고 지켜보며.
—<레이디 베이비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