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세기의 신부님
지금 제국은 때 아닌 정보의 편중 현상을 겪고 있었다.
모든 신문사, 잡지사 그리고 통신석을 매개로한 방송 중계사가 단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만 집중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수개월째 이어오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 주제란 바로 곧 있을 황제의 결혼이었다.
[황제, “약혼식은 생략, 바로 본식 준비 예정”]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 뱃속의 2세 때문?]
[막내의 결혼에 대한 루스티첼 가의 입장을 말하다]
[레리 커플의 연애사, 처음부터 끝까지.]
[세기의 프러포즈, 낭만적인 공개구혼]
[세기의 커플, 제국을 넘어 전 대륙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다]
[황제의 공개구혼이 불러온 파장—깨지는 커플 전년대비 수직 상승]
[공개구혼 유행에 대한 분석과 실태조사]
[황후궁의 개축공사. 과도한 인력 투입인가, 적절한 인사배치인가.]
[황후궁의 인테리어, 누가 총괄할까?]
[황후궁 인테리어 따라잡기—올해의 추천 실내장식]
[예비 황후의 드레스는 아직 미정—드레스 트렌드 살펴보기]
[리페님이 결혼식 때 입어줬으면 하는 드레스 투표해봅시다!]
[레이디 칼리오페의 취향]
[카스틸로 공작가, 예비 신부에게 막대한 재산 상속]
[다정한 시할머니와 예비 며느리의 한순간 포착]
[카스틸로 공작가의 예물—공작가의 보물전—]
[우리 결혼식에 메인으로 장식할 꽃 투표해 봐요! 재미로~]
[드레스 결정 났대요. 총 세 벌인 듯.]
[완성된 황후궁, 왜 황제의 침실이 존재하는가]
[황제궁, 침실을 아예 폐쇄]
[결혼 축하 선물 조공 리스트입니다]
[결혼식 구경하기 좋은 자리 찾아요~ 중계 스팟 리스트 공유]
수없이 쏟아지는 모든 것이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딱히 황궁에서 발표한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도 길거리를 지나가거나, 통신석만 켜도 결혼식 준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 황후궁 공사를 시작했는지, 언제 완료됐는지, 예물로는 무엇을 주었는지, 드레스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뿐만이 아니다.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도 화제가 되어 수백 가지의 이야기를 꽃피우는 소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만나 차를 마셨을 때 무슨 찻잎을 어떻게 블렌딩한 걸 마셨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런 차를 직접 음미해보고 싶어 하기까지 했다.
귀족들의 사교계부터 부르주아의 파티, 일반 시민들의 모임까지 이 세기의 커플이 먹거나 마셨던 것을 따라하는 게 유행이 되었다.
원래 황제의 결혼식은 자국 내에서는 물론 타국에서까지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이 관심은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과했다. 모두 칼리오페 때문이었다.
원래도 칼리오페는 대륙단위의 인기를 보유한 유명인이었다. 그런데 지난 공개 프러포즈가 세계각지에서 화제가 되며 칼리오페의 지난 행적이 새로 재조명됐다.
유서 깊은 덕후들 덕에 칼리오페에 관한 자료들은 꽤 잘 보존되고 정리된 편이라 재조명하기도 쉬웠다. 이로 인해 신규 팬들이 많이 유입되며 결혼 전에 자기네 나라에도 와서 공연해달라는 러브콜이 있었다. 이 탓에 칼리오페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투어 공연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노래나 일화뿐만 아니라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오랜 연애를 다룬 이야기도 단연 화제가 되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이 소설, 시, 그림, 오페라 그리고 연극 등으로 자신의 창작 세계를 펼쳤다.
그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칼리오페 덕분이었다. 신에 관한 예술 외에 인간을 주제로 한 예술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배경이 칼리오페였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속가를 부르며 노력한 것이 제국의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삶의 양식에 긍정적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칼리오페는…….
“얼굴 보기 너무 힘든 거 아냐?”
바빴다.
그것도 너무너무너무 바빴다.
결혼식 날짜가 너무 빠르게 잡혀 준비만도 빠듯한데, 황후의 업무에 대해서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죄송해요. 저도 시간을 내보려고는 했는데.”
칼리오페의 사과에 에피니가 눈을 흘기다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뭐, 그래. 바쁠 때니까.”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에피니는 슬쩍 운을 떼었다.
“황실을 호위하는 거 있잖아. 그거 원래 청룡기사단의 역할이잖아.”
“그렇죠?”
“딱히 백룡기사단에서 차출되어도 나쁠 건 없잖아?”
뜬금 없는 소리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청룡기사단 분들이 반발하시지 않겠어요? 원래 그쪽 영역인데…….”
청룡, 백룡, 적룡, 흑룡. 이 네 개의 용기사단은 모두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적룡기사단은 마법사들로 이루어져 있고, 흑룡기사단은 베일 속에 가린 황제의 직속 친위 기사단이라 분명한 특성이 있다. 하지만 청룡과 백룡은 기사단은 구성원의 특성이 비슷했다.
그러나 청룡기사단은 황실의 호위를 맡아 권력과 가까웠고, 백룡기사단은 변경의 몬스터를 처리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백성들 사이에서 명예가 드높았다.
구성원은 비슷하지만 전혀 상반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지라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백룡 기사단원이 황족을 호위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불만이 나오겠지. 자신의 몫을 침해받은 거니까.’
에피니가 그걸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그야 그렇지만……. 호위대상이랑 특별한 관계에 있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않아?”
그 말에 칼리오페는 에피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 저희 오라버니들이요?”
백룡 기사단원인 루시우스나 로베르트가 황후가 될 자신의 호위를 맡는 건 어떠냐는 제안이 분명했다.
하지만 에피니는 가차없이 콧방귀를 끼었다.
“흥, 그 둘은 신뢰할 수 없어. 호위는 언제 어느 때라도 냉정해야 하잖아.”
칼리오페는 두 오라버니들을 변호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침착하다는 평을 받는 첫째 오라버니도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약간…… 아주 약간이지만 성급해지기 때문이다.
“오라버니들이 아니라면 왜……. 아, 언니가…….”
“딱히 내가 하고 싶다는 건 아니야. 그냥 뭐, 그렇다는 거지.”
에피니가 빨대로 아이스티를 빠르게 휘저으며 말했다. 딸그락딸그락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친다.
“저야 언니가 제 호위를 해주시면 감사하지요. 하지만 백룡 기시단 측에서도 전력 손실일 텐데.”
“딱히. 별로 그런 거 없어. 근데 뭐, 네가 황궁에 들어가면 이것저것 심력을 써야할 테니까. 주변에 갑자기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도 신경 쓰일 테고. 친구로서 이 정도 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딸그락딸그락딸그락딸그락.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치는 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에피니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에피니 언니는 정말 다정하세요.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칼리오페가 감동 받은 얼굴로 에피니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치사해!’
지켜보고 있던 힐데르트와 유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에피니를 쳐다봤다. 에피니는 그들의 시선에 승리자의 미소로 화답했다.
‘억울하면 너네도 기사하든가.’
딱 그 표정이었다.
힐데르트가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나는 아프락서스 궁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황후가 되면 업무적으로 많이 만나겠네.”
“아, 그렇겠네요. 그때 잘 부탁드려요.”
“나는 이미 몇 년 동안 하던 일이라 익숙하니까 잘 모르는 일 있으면 물어봐.”
“힐데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엄청 든든하네요.”
힐데르트는 최연소로 아프락서스 궁에 배정받을 정도의 재원이자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천재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만큼 업무를 볼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떨어져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쓸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레아스도 있고.’
힐데르트와 칼리오페가 훈훈한 미소를 주고 받는데 큰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유리안이 빽 소리를 지르며 안달난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나는.”
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유리안은 에피니 같은 기사도 아니었고, 힐데르트 같은 행정관도 아니었다.
“나는…… 많이 놀러가도 돼?”
결국 나온 질문은 그거였다. 속상함에 얼굴이 빨개지는데 칼리오페가 그 어느때보다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럼요.”
“……일이 없어도?”
“유리 오라버니는 언제든 환영이에요.”
칼리오페의 대답에 유리안의 입매가 일렁였다.
‘역시 나는.’
가슴에 봄비가 내린다.
칼리오페가 그를 구해주었던 순간부터 그녀를 볼 때면 항상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비가 내렸다. 그래서 유리안은 메마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통신석이 울리는 소리에 화면을 확인한 칼리오페가 난처한 얼굴로 일어났다.
“아, 이런. 가봐야겠어요. 죄송해요.”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간단 말인가. 테이블 위에는 칼리오페가 좋아하는 티푸드가 아직 손도 못 댄 채 가득했다.
에피니와 힐데르트, 유리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정말 죄송해요. 모처럼 만난 건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칼리오페를 보니 더 화낼 수도 없었다. 애초에 여러 일로 바쁠 칼리오페에게 계속 만나자고 조른 것은 이쪽이었다.
“서운하지만 참을게.”
에피니가 일부러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난다.
“맞아. 다시 보면 되니까. 그때까지 서운한 거 참으면 되지, 뭐.”
“그땐 우리 서운함 들어줘야 해!”
힐데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하자 유리안이 눈썹을 세우며 흥! 하고 당부했다.
친구들의 모습에 칼리오페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부터 연을 이어온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이것도 전생과 달라진 점.’
어렸을 때 루스티첼 부인을 따라 티파티나 피크닉에 나갔지만, 칼리오페는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이야기를 나누는 또래야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또래와 이야기를 나누고 놀이를 하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책 읽는 건 좋아하지만.’
15살 때까지는 독서 클럽을 나가는 등 최소한의 친목 활동만 했고, 그 후는 가세가 기울어 아예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들까지 그렇게 되니 그럴 정신 자체가 없었지만—
‘사실 상 다른 가문에서 먼저 연을 끊은 경우가 많았지.’
엘피너스 가 같은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랬다.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칼리오페는 가문과 연이 있는 다른 가문에 찾아가곤 했다. 어떻게든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에피니와 힐데르트, 유리안이 웃는 그녀를 보며 으름장 놓았던 것을 풀고 픽 웃었다. 두 눈 가득 호의와 친애를 품고 있다.
소꿉친구.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삶을 함께 한 소중하고 소중한 친구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평생 함 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들.
어떤 상황이 와도, 설령 전생과 같이 모든 것이 틀어져도 이들은 자신과 함께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들 고마워요.”
칼리오페의 말에 세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미간을 찌푸린다.
“용서해준 거 아닌데?”
“다음에 만날 때 각오하라고.”
“완전 서운한 거 잔뜩잔뜩 풀 거니까.”
칼리오페는 푸스스 웃었다.
“각오하고 올게요.”
세 소꿉친구들 외에도 베로니카 언니, 하르첸 경, 메일린 영애.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모두와 만날 수 있어서,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될 수 있어서 다행이야.’
* * *
칼리오페가 나가고 나서 프라이빗룸에는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유리.”
힐데르트의 부름에 시무룩한 얼굴로 유리잔을 매만지던 유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너 괜찮냐?”
뜬금 없는 질문이었지만 유리안은 뭘 묻는지 바로 알았다. 오랜 시간 유지되어온 관계는 그 시간만큼 서로를 잘 알게 한다.
“뭐가아?”
유리안은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새순 같이 연한 빛의 눈을 순진하게 깜빡인다. 힐데르트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중얼거리듯 나직하게 말했다.
“……유리, 넌 내게 소중한 친구다.”
“뭐야, 힐데. 징그러워.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리페라면 모를까.
뒷말을 웅얼거린 유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름 끼친다는 듯 바르르 떨며 팔을 쓸었다. 평소라면 그 수선에 와락 성을 낼 힐데르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어라?’
유리안이 의문을 느낀 순간, 힐데르트가 고개를 다시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벨벳 같은 자색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다.
“하지만 전에 말했듯 레아스에게 손 대면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그 말에 유리안이 픽 웃었다.
“네가 용서 안하면 뭐 어쩔 건데?”
농담인 척 꾸며낸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날이 서 있다. 마냥 유순하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예기를 띠었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긴장감이 팽팽해진 순간, 유리안이 하하, 웃었다.
“농담이야.”
방긋 웃는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날카로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리안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낸 탓인지 그 얼굴이 가라앉아 보였다.
“네가 날 용서하지 않으면…… 그건 좀 싫을 거 같아. 에피니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유리잔을 매만지던 유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사라락, 벚꽃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얼굴을 반쯤 가렸다.
“리페 빼고는 다 아무래도 좋다고, 나랑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
활기찬, 살짝 애교가 묻어나오는 평소 유리안의 목소리와 달리 작고 연약한 음성이었다. 겁먹은 어린 짐승 같은 목소리.
“너희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뱃속이 더부룩해.”
유리안이 인상을 찡그리며 배를 쓸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그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나 있잖아. 하나도 좋지 않았어.”
고개를 든 유리안이 힐데르트에게 말했다.
“그때, 샘에서.”
그렇게 덧붙인 순간, 힐데르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깨달았다.
“아스타레아스가 죽으면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유리안이 정말 이해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지, 내일 소란 틈에 아스타레아스가 죽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샘에 가기 바로 전날 밤, 유리안은 힐데르테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힐데르트가 아스타레아스에게 손 대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경고했던 것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에피니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유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 때문에 리페가 우리랑 함께 있는 시간이 적어졌잖아. 그러니까 걔만 사라지면.”
유리안의 말에 에피니가 눈매를 찡그렸다. 하지만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불같은 에피니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당장 따져 물을 줄 알았는데.
아니, 따져 묻기만 하면 다행이다. 아예 바로 주먹이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보고 뭔 짓한 거냐고 안 물어? 그때 그놈 완전 위험했는데.”
아스타레아스의 위기에 자신이 일조했다고 생각하진 않는 건가.
“응, 하지만 넌 아무 짓도 안 했잖아.”
에피니의 호박색 눈동자는 분명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굳건하고 절대적인 믿음.
유리안은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리페가 싫어할 테니까.”
“그래, 그걸 아니까.”
유리안은 왠지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근데 진짜 내 생각이 말이 씨가 된 것처럼 정말로 아스타레아스가 위험해졌는데.”
“그건 너랑 전혀 상관 없이 일어난 일이었잖아.”
“…….”
조개처럼 입을 다문 유리안을 보고 에피니가 물었다.
“유리, 누가 널 혼내줬으면 좋겠어?”
“어?”
그럴 리가. 유리안은 혼나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런 생각을 한 걸 후회하는구나.”
“후회……?”
힐데르트의 말에 유리안은 바보처럼 되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후회라니. 자신은 정말 그런 적 없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난.”
유리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싫었던 거뿐이야. 그놈이 쓰러지는데 하나도 기분 좋지 않더라고. 하나도 재미없었어.”
그래, 그저 생각과 달리 재미가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 끔찍하게 싫었어. 리페가 너무 슬퍼해서.”
그때 칼리오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에 구멍이 생기는 것 같았다.
검은 구멍이 눈, 가슴, 손, 배, 다리 가리지 않고 생겨나 그만큼의 상실감을 채웠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감각.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나는 내가 리페랑 있는 게 좋으니까. 그게 가장 행복한 일인 줄 알았는데.”
유리안이 웃었다. 칼리오페가 어떻든 상관없이 그녀가 자신의 곁에만 있어준다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아니었어.”
전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데우소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 처박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칼리오페가 덜 슬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칼리오페가 웃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녀석이 무사해서,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유리안은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며 그가 처음으로 지은 온전한 미소였다.
“……그래.”
에피니와 힐데르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슴 속에 뭉글뭉글한 무언가가 부드럽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뭐어, 그렇다고 해도 우리 리페 눈에 조금이라도 물기가 비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지만!”
유리안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에피니의 눈에 날카로운 예기가 어렸다.
“황제라고 해도 대련을 명목으로 팰 순 있지.”
낮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옆에서 힐데르트가 입매를 비틀었다.
“나는 서류 지옥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시켜줄 거야. 일주일째 잠 한 번 못 자고 일만 하면 아무리 그 녀석이라도…….”
세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킥킥 웃었다.
자신의 소꿉친구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행복하길.
동화 속과도 같은 결과를 맞이하길 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곧 칼리오페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 * *
“리, 리이페에에에…….”
로베르트가 코를 훌쩍거렸다. 잘생긴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라 본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로베르트는 웨딩 드레스를 입은 칼리오페를 끌어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칼리오페는 하하, 웃으며 그를 토닥였다. 처음에는 그녀 역시 마음이 찡해 눈물이 났지만 이제는 눈물도 쏙 들어가고 찡했던 가슴도 담담해졌다. 벌써 세 시간째 이러고 있기 때문이다.
칼리오페는 그냥 기계적으로 로베르트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우으으윽, 리이페……. 내 동생, 내 동생이, 흑…….”
“네네, 오라버니 동생 리페예요.”
“히이이이잉, 우리 막내 나랑 결혼해야 하는데…….”
“자자, 코 푸세요.”
“크흥!”
로베르트는 칼리오페가 대어준 손수건에 코를 팽팽 풀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목나무에 딱 붙은 매미처럼 칼리오페에게 매달렸다.
“리이페에에에…….”
“하하하.”
칼리오페는 영혼 없이 웃으며 그를 토닥여주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다른 가족들이 비쳤다.
루스티첼 백작은 평소처럼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콧잔등이 빨개진 채 가라앉을 줄 몰랐다. 칼리오페와 눈을 마주치자 안 운 척 뒤돌아 눈물을 닦아낸다.
그래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다시 뒤돌아 칼리오페를 보자마자 또 눈물이 맺혔으니까.
루시우스 역시 얼음기사라는 별칭은 어디에 두고 온 건지 콧잔등을 붉힌 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주먹으로 쓱쓱 닦아내지만 손을 내린 순간 다시 눈물이 맺힌다.
이렇게 보니 정말 누가 봐도 부자지간이었다.
왠지 웃음이 나와서 칼리오페는 뺨이 힘을 주었다.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행복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루스티첼 부인의 눈시울이 붉었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에 칼리오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칼리오페는 손을 뻗어 어머니의 손을 꽉 쥐었다.
“네, 꼭 행복할게요.”
칼리오페가 답하자 결국 감정을 못 이긴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를 폭 끌어안았다.
“흐으으윽, 내 딸인데! 내 딸인데! 웬 놈팡이가 엄마 딸을 채갔어!”
어느 모임에서나 우아하고 기품 있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듣는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를 끌어안은 채 끼잉끼잉 울었다.
로베르트 역시 루스티첼 부인의 낑낑거림에 힘입어 합창하듯 더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음…….’
울멍울멍해져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모자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순간적으로 외출하지 말라고 조르는 강아지 두 마리를 떠올렸다. 축 처진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건 루스티첼 부인과 로베르트만이 아니었다. 눈물을 슥슥 털어내고 있는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 역시 꼬리가 말려있긴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정말 좋은 사람인 거 알고 있어.”
다소 마음을 가라앉힌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특히 우리 딸의 상대로는 더더욱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 말에 나머지 가족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레아스를 보면 항상 으르렁거리기 급급했던 가족들이었던지라 동의하는 게 의외였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레아스와 이어져서 다행이라고.”
“아니.”
루시우스가 단호하게 칼리오페의 말을 부정했다. 단호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황제 폐하시다.”
“우리 리페가 간택해줬는데 당연히 감사해야지.”
“하늘을 향해 절해야 해.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힘든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가족들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정색하고 말하는 내용이 참 황당하기 그지 없어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팔불출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리페, 폐하만큼 더 좋은 상대가 없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요?”
“만인지상의 위치에 계신 황제 폐하셔서 가장 좋은 상대인 게 아니란 뜻이란다.”
루스티첼 부인이 이제 결혼하는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폐하께서 널 평생 호강시켜줄 만큼 대단한 부호셔서, 더 강한 사람을 찾기 힘든 위대한 대마법사라서, 네 목숨을 구해주셔서.”
아스타레아스가 좋은 상대인 이유들이 루스티첼 부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서 좋은 결혼 상대라는 게 아니야.”
칼리오페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루스티첼 부인이 열거한 사항이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좋은 신랑감의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칼리오페와 달리 가족들은 모두 루스티첼 부인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아는 듯했다.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루스티첼 백작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딸아이에게 다가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리페, 네가 선택해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루스티첼 일가는 모두 막내의 안목을 믿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칼리오페 루스티첼이었으므로.
“모두들…….”
내뱉는 호흡이 떨렸다. 칼리오페는 뜨거운 숨결을 애써 갈무리했다. 눈물은 이미 쏙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시야가 흐릿해졌다.
가족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때론 말보다 맞닿은 시선이, 이어진 체온이 더 많은 것을 말하곤 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님, 이제 슬슬 손님을 맞이하셔야죠.”
조심스럽게 유모가 말을 건넸다. 유모의 눈도 퉁퉁 부어있었다.
자신의 눈에는 항상 어린아이 같은 아가씨가 어느새 장성해 시집을 간다니.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차마 말로는 이루 다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루스티첼 부인이 아쉬운 듯 칼리오페의 손을 꼭 붙잡았다가 뗐다. 칼리오페와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고받은 가족들이 문으로 향했다.
“유모는 좋겠다.”
“제가요?”
“나도 리페 따라가고 싶은데.”
문을 나서기 직전, 로베르트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칼리오페가 황궁에 들어가도 유모는 따라가기로 했다.
가족들이 이글이글 질투 어린 시선으로 유모를 바라봤다.
솔직하게 말해서, 유모는 자신이 막내 아가씨와 계속 함께라는 사실이 몹시 흡족했다. 하지만 그걸 저렇게 아쉬워하는 가족들 앞에서 티 낼 순 없었다.
최대한 웃지 않으려 조심하며 유모는 은근슬쩍 도미닉 경을 끌어들였다.
“도미닉 경도 함께 가시는걸요, 뭘.”
“도미닉 경…….”
가족들의 이글이글한 시선이 도미닉경에게로 분산되었다. 이런 걸 능숙하게 받아넘길 주변머리 없는 고지식한 기사는 그대로 담담하게 시선을 받아낼 뿐이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소란을 피운 가족들이 나가고, 칼리오페는 유모와 도미닉 경과 함께 신부 대기실에 남게 되었다.
칼리오페는 힐끔 도미닉 경의 눈치를 보았다. 제 뜻을 충분히 펼칠 수 있을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호위로 들어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도미닉 경.”
“예, 아가씨.”
언제나처럼 진중한 목소리.
“저어,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그 말에 도미닉 경이 시선을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도미닉 경도 기사로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 테니까. 경이라면 나중에 기사단장도 충분히 가능하실 텐데, 제 호위가 되면…….”
“아가씨.”
“전 정말로 괜찮으니까, 지금이라도……. 황족 호위 임무를 일임하고 있는 청룡 기사단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제 개인 호위로 궁에 들어오는 건데…….”
청룡 기사단과 달리 황제의 명에도 따르지 않고, 황제를 더 우선시하지도 않고 오로지 칼리오페만을 위하는 개인 호위 기사. 만약 황제가 칼리오페의 목숨을 노리면 황제의 목에 주저 없이 칼을 들이댈 것이다.
당연하지만 보통 황후는 개인 호위를 대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예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 폐하께옵서 나서서 이 일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반대할 귀족들도 어째서인지 ‘뭐어, 폐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야.’라며 어물쩍 동의했다.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 끝에 도미닉 경이 선발되었지만, 칼리오페는 그에게 미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이끌 능력이 충분한 사람을 일개 개인에 머무르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제가 불편하십니—”
“아니요!”
도미닉 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깜짝 놀란 칼리오페가 빽 부정했다.
무뚝뚝한 도미닉의 눈매에 설핏 웃음이 깃든다.
“그렇다면 끝까지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한없이 진중했다.
“기사로서 제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을 거라 말씀하셨죠. 아가씨를 모시는 게 기사로서 제가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도미닉 경…….”
도미닉이 칼리오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새하얀 웨딩 드레스 자락이 넓게 퍼진 바로 앞에 그의 무릎이 닿았다.
평생의 레이디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처럼 자세를 낮춘 도미닉 경이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게 닿지 않고 정중히 손바닥을 올린다. 기사라는 말에 표본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도미닉 경일 것이다.
“저의 레이디는 단 한 분, 칼리오페 루스티첼 당신입니다.”
도미닉 경의 밤색 눈동자가 꼭 땅속에 잠든 씨앗 같았다.
“만약 당신의 검으로 삼겠다던 그 말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싱그러운 꽃을 피워낼 그런 씨앗.
“당신을 지키고 싶다는 제 고집을 들어주십시오.”
담담하게, 그러나 막힘 없이 흘러나온 말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아가씨를 지키는 건 제 고집입니다.]
언젠가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그리운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흰 나비가 내려앉는 것처럼 새하얀 장갑에 감싸인 칼리오페의 손이 도미닉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다.
단단하고 딱딱하고 커다란 손.
따뜻한 손이다.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도미닉이 새하얀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그녀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기사가 제 유일한 레이디에게 평생토록 지키겠다 다짐하는 맹세의 키스였다.
“도미닉 경.”
나의 기사, 나의 검.
“경이 결혼할 땐 꼭 제가 신부에게 화관을 내릴게요.”
황후가 직접 화관을 내린다는 것은 엄청난 총애의 의미였다.
“영광입니다.”
도미닉 경은 그렇게 답하며 미소 지었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미소라 칼리오페는 얼른 그를 위로했다.
“곧 여자친구 생길 거예요.”
“……예.”
“……소개 시켜드릴까요? 어차피 따로 호위가 붙을 테니 자유 시간을 늘려 드려도.”
“괜찮습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참견하는 것도 실례다.
“그럼 필요하실 때 말씀하세요.”
“예.”
슬슬 잡힌 손을 빼려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뭐야. 분위기 좋은데?”
옆을 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호세 오라버니!”
살짝 쳐진 눈매가 휘며 유혹적인 눈웃음을 만들어낸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내 꼬마 아가씨!”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호르세안이 칼리오페를 번쩍 들어올렸다.
“꺅!”
깜짝 놀란 칼리오페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르세안은 아예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꽃잎처럼 겹겹이 쌓인 새하얀 드레스가 허공에서 만개했다.
웨딩 드레스 무게까지 합쳐 무거울 게 분명한데 호르세안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 바퀴 돌고 나서도 호르세안은 칼리오페를 바로 내려주지 않았다.
허공에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칼리오페가 쓰고 있는 베일이 그에게로 쏟아져 내리며 그의 얼굴에 레이스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정말 예쁘다.”
달콤한 꿀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녹아내린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응, 정말 예뻐.”
호르세안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땅에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칼리오페가 제대로 땅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선 다음에 허리를 잡았던 손이 떨어진다. 하지만 손가락이 다 떨어지기 직전, 호르세안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반할 정도로.”
파고든 낮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을 때 호르세안은 이미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휴, 호세 오라버니는 정말 여전하다니까.’
칼리오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나보다 더 일찍 결혼할 줄이야.”
“그러게요.”
칼리오페의 얼굴에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라버니도 어서 한 사람한테 정착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루스 녀석도 아니고 너도 그 소리냐.”
호르세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 교제한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대도. 그냥 말 거는 여성에게 대답만 한 건데도 소문이 나는 거라고. 나는 정말—”
“네에, 그렇죠. 물론이에요.”
호르세안이 키득키득거리며 웃는 칼리오페의 코끝을 살짝 꼬집었다.
“아주 날 놀려먹지.”
“오라버니가 먼저 저를 놀렸잖아요.”
그 말에 호르세안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난 그런 적 없는데?”
진심인 것 같아 칼리오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때, 호르세안이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의 손가락이 뺨과 목덜미에 닿았다.
“여기 흐트러졌어.”
“아, 고마워요.”
반사적으로 인사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을 들어 올린 채 빙글빙글 돌린 호르세안이 원인이었다.
잠시 정리해주길 기다리는데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호르세안의 손길이 멈춘 채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됐나?’
그렇게 생각하며 눈만 살짝 들어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그의 눈까진 보이지 않았다.
“……호세 오라버니?”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그가 움찔하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다.
“행복해, 내 꼬마 아가씨.”
언제나 반쯤 베여있던 장난기가 사라진, 낮은 속삭임이었다.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환하게. 더 없이 행복한 얼굴로.
“응, 행복할게요.”
잔잔한 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퍼져나간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호르세안이 한숨처럼 웃었다.
‘행복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나.’
그의 꼬마 아가씨는 이미 행복해 보였다.
* * *
황제와 황후의 성혼식에 걸맞게 홀 안은 사치스러우면서도 품위 있고, 고상하면서도 호화로웠다.
귀족들은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고, 중계되는 화면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들 역시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았다.
누구나 꿈꾸는 결혼식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야말로 로망의 집결체였다. 아스타레아스가 결혼업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을 직접 황궁에 불러 몇 달 드륵드륵 갈아댄 결과였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이 소리 높여 황제의 입장을 알렸다.
그 존재만으로 눈부신 황제가 등장하자 안 그래도 완벽했던 홀은 이제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황공할 정도가 됐다.
“와…….”
“역시 모든 것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패션만 완성시키는 줄 알았는데 인테리어 완성 효과까지 있을 줄이야.
하객들이 옆자리 사람과 속닥속닥 말을 주고 받았다.
“아니,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 완벽하셔서 더 그래.”
길쭉하니 시원한 팔다리와 적당히 근육이 붙어 넓은 어깨, 탄탄한 허리.
“이보다 성장(盛裝)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니, 정말로 솔직해지자면 이렇게 차려 입는 것보단 아예 아무것도 안 입는 편이…….’
저도 모르게 황제 폐하를 두고 불경한 생각을 떠올린 영애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방금 그 생각은 입 밖에 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모든 것은 황제 폐하가 너무 잘생긴 탓이다. 자신같이 순진한 레이디마저도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물이었다.
‘피지컬 완벽한 미남의 위력이란 참 무섭군.’
그리고 그때.
“레이디 칼리오페 루스티첼께서 드십니다.”
하객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문을 바라봤다. 오늘 성혼식에서 가장 궁금한 게 바로 칼리오페의 모습이었다.
본식에 입을 드레스부터 장신구까지 공개되지 않고 비밀에 부쳐졌기에 안 그래도 이 결혼식에 관심 많던 사람들의 몸이 달은 것은 당연했다.
다들 할 말을 가득 품고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러나 막상 신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하객석은 오히려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정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선도, 의식도 오로지 칼리오페에게 집중됐다.
수줍은 듯 살짝 붉어진 탐스러운 장밋빛 뺨, 설렘에 반짝이는 눈동자, 살짝 긴장한 꽃잎 같은 입술.
얇디 얇은 베일은 그녀의 매력을 채 가리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결혼하는 것 같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결혼식을 지켜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에 상관 없이 모두 칼리오페의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어른들은 자신의 딸이나 손녀, 조카가 결혼하는 듯 감개무량했고, 또래들은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하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다양한 감정에 사람들의 코끝이 붉게 물들고 눈매가 일렁였다.
‘우리 애가…….’
‘어느새 다 컸네, 다 컸어.’
‘애기가 결혼한다고 생각했는데 웨딩 드레스 입은 모습 보니 시집 갈 때가 다 됐어.’
‘아, 왜 내가 다 두근거리지?’
‘리페, 잘 살아야 해…….’
‘황제 놈, 아니 황제 폐하가 조금이라도 못 살게 굴면 바로 나와! 우리는 네 편이야!’
왠지 모르겠지만 칼리오페도 모르는 가상 혈연이 잔뜩 생긴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차례 감상이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하객들 눈에 칼리오페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어머…….”
방울방울 흐르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딸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있는 루스티첼 백작의 얼굴이…….
“괘, 괜찮으신 건가…….”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하긴 저렇게 아끼는 딸이 시집 가게 되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 당사자가 루스티첼 백작이라는 점이었다.
루스티첼 백작이 과연 누구인가.
네 개의 용기사단 중 백룡 기사단의 단장이자 열두 개의 검 중 하나였다. 또 철혈의 기사, 백룡의 빙벽, 레드불 등 수많은 이명을 지닌 존재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얼마 전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고 들었다.
사위놈……아니, 사위를 상상의 적으로 두고 열심히 검을 수련한 결과라는 소문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비록 막내딸 앞에선 배를 쓸어달라는 멍뭉이처럼 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막내딸 앞에서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깎아지른 태산과도 같은 루스티첼 백작의 일면만 봐왔다.
하객들은 모두 당황해서 눈만 도로록 도로록 굴렸다.
하지만, 또 계속 보다 보니 느낌이 또 묘한 게…….
‘우시는 모습이 조금…….’
‘뭔가 방금 가슴이 쿠웅, 했는데……?’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면 가히 현 인류 최강의 무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루스티첼 백작은 철혈이나 빙벽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엄격하고 딱딱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성년이 된 아이 셋의 아버지답지 않게 완벽히 관리된 몸과 중후한 멋까지 겸비한 잘생긴 얼굴. 원래부터 그를 동경하는 귀부인과 영애들이 참 많았다.
그런 남자가 굳은 얼굴로 콧잔등을 붉힌 채 뚝뚝 눈물을 흘리며 딸아이의 손을 꼬오옥 잡고 있는 게 참…….
“흠흠.”
헛기침을 한 사람들이 어렵사리 루스티첼 백작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칼리오페의 얼굴로 이 번민을 정화할 때였다.
물론 칼리오페는 자신을 둘러싼 기류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제 옆에서 걷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해서 구경하고 있는 하객들의 모습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야가 좁았다.
눈앞에 드리운 베일 때문은 아니었다.
낮은음과 높은음 사이의 수많은 음표처럼, 긴장과 설렘 사이의 수많은 감정들이 심장을 둥둥 두드렸다. 심장소리에서 비롯된 와글와글한 음표들이 폭풍처럼 칼리오페를 휘감았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질어질한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단정한, 모양 좋게 잘 빠진 구두.
‘아.’
그것만으로 칼리오페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레아스.’
그가 있었다.
길의 끝에.
순식간에 좁아졌던 시야가 돌아온다.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이 보인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
꽃길을 걸어 제게 오라고 아스타레아스가 꽃잎을 깔아놓은 길이었다.
심지어 혹시라도 미끄러질까 직접 안정화 마법까지 걸었다. 대마법사의 마법이 걸린 꽃길이라니.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꽃길의 끝에서 아스타레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할 필요도, 떨 필요도 전혀 없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위해 마련한 길이니까.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만나고 싶어. 어서.’
이 짧지만 긴 꽃길을 칼리오페는 차분하게 똑바로 걸었다. 곁에 있는 아버지의 몸이 단단하게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왠지 떨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꽃길의 끝에 도착했을 때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감정을 내리누르느라 조금 찡그린 미간, 수만 가지 감정을 담고 빛나는 눈동자.
이런 얼굴은 그가 황제의 관을 쓰던 순간에도 하지 않았는데.
천천히 다가온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뜨겁고 단단하다.
그 순간 깨달음이 전신을 강타했다.
‘나, 이 사람이랑 결혼하는구나.’
그렇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야.’
베일이 벗겨지고 그의 얼굴이 보다 선명해졌다.
‘나는 이 사람의 아내.’
푸른 눈동자가 가슴을 물들일 것처럼 아름다웠다.
‘평생,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입술에 입술이 닿았다.
‘아…….’
그저 닿기만 하는 키스였다.
그간 아스타레아스와 여러 번 입술을 맞대었고, 그 순간들이 모두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무언가 달랐다.
한없이 정중하고 차라리 기원에 가까운, 맹세의 키스.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칼리오페는 그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는, 그런 키스였다.
* * *
……(전략)……
말하자면, 레이디 칼리오페 루스티첼, 아니, 우리 황후 폐하께서는 그야말로 완벽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우셨다. 사람이 너무 예쁘면 개인의 취향이라는 게 상관 없어진다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 머리채잡고 알려주는 기분이었다.
작은 다이아몬드를 수없이 매달아 만든 베일은 찬연하게 빛났고, 새하얀 순백의 드레스 치마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튤(tulle)을 겹겹이 덧대 풍성했다.
우리 황후 폐하께서 옮기시는 걸음걸음 풍만한 드레스자락이 흐드러지며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튤도 보통 튤이 아니었다. 빛에 따라 오묘한 빛을 냈으며, 겹겹이 쌓인 튤이 각기 다른 톤으로 빛나 정말이지 보는 내내 내 눈이 호강하는 느낌이었다.
드레스 윗부분을 장식한 자수와 레이스, 보석은 어떤가. 지금 내 눈앞에 드레스 디자이너가 있다면 세 번 입 맞춘 후 끌어안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삼천 번할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드레스는 완벽했다.
왜 완벽한가.
그야 물론 우리 황후 폐하와 찰떡같이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뭐, 우리 황후 폐하께야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드레스에 대한 건 특집 칼럼이 있으니 이 이상은 거기서 보시고.
(물론 결혼식을 위해 천재 음악가 하르첸 경이 작곡한 음악, 쓰인 실내 장식과 사용된 꽃, 와인을 비롯한 각종 베버리지와 디저트, 식기, 음식 등에 대해서도 각기 특집 칼럼이 있다. 자세한 건 목차 참조. 참고로 결혼식 사진집은 별매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시길.)
여하간 필자의 곁에 있던 외국 기자들은 감탄하는 와중에도 시무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것이다. 그들의 나라에는 이런 황후 폐하가 없으니.
통치자 미모 순위로도 우리 황제 폐하께서 전 대륙을 압살하셨는데 이제 황후 폐하까지 가세하시니…….
제국에 영광이 있으라!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반 정부 칼럼을 주로 집필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건대, 역시 모국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충의를 바치는 것이 내가 제국민으로서 할 일이다.)
오늘 성혼식을 이 두 눈에 직접 담은 바, 나는 앞으로 세수할 때 눈과 눈 주변을 씻지 않기로 다짐했다.
두 분 폐하께서 이러신데 과연 언젠가 세상에 나실 황손은 어떠실까?
여기서 안타까운 소식 하나.
소문과 달리 성혼식을 서두른 이유는 뱃속의 2세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성혼식에서 그 사실이 밝혀져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모두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
언제 황궁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냐고, 구체적인 자녀 계획을 알려달라고 인터뷰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직은 둘이 달콤한 신혼을 즐기며 커플 화보집이나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의견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낳는다면 역시 딸과 아들 쌍둥이여야 한다는 점에선 한 목소리를 냈다.
제도를 비롯한 각 도시의 중앙 광장 제단에는 두 분 폐하의 결합을 축하하며 시민들이 선물을 올렸다. 여러 가지가 많았지만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아기 신발과 아기 모자, 아기 옷, 턱받침, 아기 장난감 같은 것들이었다.
……(후략)……
“…….”
칼리오페는 읽던 잡지를 퍽, 소리 나게 덮었다.
[아가씨! 따끈따끈한 호외예요! 이번 성혼식을 다룬 호외! 백성들의 반응이 궁금하시지 않나요? 꼭 읽어보세요!]
피로연이 끝나갈 무렵 카이논이 니카이논 사(社)가 만든 호외—몇 년 전부터 <천사의 탄생> 포토북 인쇄를 맡겼던 곳과 결합해 아예 신문과 잡지 사업에 뛰어들었다—를 주고 돌아갔다.
[저희 회사가 가장 빠르면서 가장 퀄리티 높은 호외를 냈어요! 다 자금력과 기술력의 승리죠. 저희는 기자가 성혼식에서 쓴 칼럼을 인쇄소에서 바로 인쇄할 수 있거든요. 사진이나 원고를 들고 와서 인쇄소에서 따로 조판할 필요 없이!]
과연 통신석을 보급화해낸 회사다웠다.
칼리오페는 순수하게 니카이논의 기술력에 감탄했다. 이건 사람들의 삶에 꽤 도움이 될 소식이었다. 심지어 호외라곤 하지만 실제론 거의 소책자나 다름없는 볼륨이었다. 잡지에 가까운 구성인지라 깜짝 놀랐다.
‘그래서 흥미를 가졌던 건데…….’
“왜 그래요?”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왼손이 테이블을 짚고 오른손이 칼리오페가 앉은 의자를 짚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이 그녀에게로 살짝 기울었다.
‘가까워.’
이 정도로 가까웠던 건 여태까지 충분히 있어왔는데, 어째서인지 의식됐다.
칼리오페는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호외인지 잡지인지 알 수 없는 것을 팔랑팔랑 넘긴다.
“그게, 2세 이야기가 나와서. 왜 그런 걸까, 하고.”
“2세 이야기?”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는 걸—”
—까지 말하던 칼리오페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방금 말 뭔가.’
이상했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아스타레아스가 허리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칼리오페의 귓가에 맴돈다.
“무언가 하는 게 나았어요?”
“아, 아뇨!”
화들짝 놀란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강력히 부정했다.
그리고 그 즉시 바로 깨달았다.
실수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탓에 얼굴이 너무나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입술과 뺨 사이에 느껴졌다. 평소보다 한층 어두워진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듯 응시했다.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
“아니야?”
나직한 속삭임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그가 묻는 것과 동시에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데웠다.
칼리오페는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횡설수설했다.
“아, 그, 꼭 그런 건 아닌 건 아니리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는 생각이…….”
아니냐는 물음에 ‘응’이라고 답하기엔 오늘은…… 신혼 첫날밤이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입술이 시원스레 호선을 그리고 어깨가 떨린다.
그제야 놀림당한 것을 깨달은 칼리오페가 눈썹을 세웠다.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하하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2세 이야기 같은 거야, 황제가 황후를 들일 때 항상 나오는 이야기고. 무엇보다—”
물론 이렇게 기대에 차있진 않다. 보통은 정치 이권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상관 없지 않아요?”
“네?”
대체 뭐가 상관 없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칼리오페가 그를 바라보자 아스타레아스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이제 앞으로 그게 사실이 될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발이 허공에 떴다. 칼리오페를 공주님처럼 안아든 아스타레아스가 걸음을 옮겼다. 긴 웨딩드레스 자락이 춤추듯 공중에서 흔들린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사실이 된다니.
그건…….
그녀가 미처 머릿속에서 그 문장의 뜻을 받아들이기 전에,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였다.
“가득가득 채워줄게요.”
“무, 뭐를요?!”
칼리오페가 펄쩍 뛰었다.
그 과격한 움직임에도 그녀를 받치고 있는 아스타레아스는 안정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놀란 칼리오페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추슬렀다.
“사랑을.”
“사랑을?!”
칼리오페의 눈이 토끼처럼 댕그랗게 커졌다.
‘아니지, 아니야.’
이렇게 계속 동요하는 건 자신답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침착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고, 실제로도 거의 그랬다.
‘침착하자. 진정해.’
그런데 도저히 침착할 수 없었다.
심장이 아까부터 두근두근을 너머 쿵쾅쿵쾅 뛰었다. 빠르기는 프레티시모. 세기는 포테시모. 온몸이 악기가 된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진 칼리오페를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당신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도록 채워주겠다는 거였는데요. 우리 결혼 생활은 사랑이 가득했으면 좋겠으니까.”
“어…….”
그게 그 뜻이었구나.
아스타레아스가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폭신해서 편하고 닿는 감촉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어디에 내려놓았는지 깨달았다.
‘침대?!’
동요하느라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무슨 상상을 하셨을까, 내 황후님께서는.”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침대 위로 올라온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가 만들어낸 검은 그림자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칼리오페의 몸을 뒤덮었다.
스윽—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길쭉하고 단단한, 남자다운 손이었다.
드레스자락이 침대 위에서 흩어진 바람에 드러난 발목을 어루만진다. 동그랗게 불거진 핑크빛 복사뼈와 새하얀 발목을 스친 손가락이 살갗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린다.
“야하셔라.”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짙은 음영에 잠긴 그의 눈동자가 지독히도 섹시했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신만을 원하는 눈동자.
아스타레아스가 무게 중심을 바꾸며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칼리오페는 누운 채 자신의 위에 올라온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가 점점 더 몸을 숙인다.
점점 더, 점점 더—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칼리오페의 가슴과 그의 가슴이 거의 맞닿으려는 순간.
“자, 잠깐만요!”
칼리오페가 그를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열 오른 뺨을 식혔다.
‘와 누구 남편인지 진짜 위험한 사람이네, 이거!’
하마터면 여기서 이대로 일을 치를 뻔했다.
아무리 결혼했다고 해도 지금은 이르다.
물론 본식도 치렀고, 피로연도 끝났고, 돌아갈 사람들은 다 돌아갔다. 황궁에서 묵을 생각으로 남은 사람들이 밤을 지새울 연회를 벌이고 있을 뿐.
‘그래도 아직…….’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지금은 하루 종일 정신 없었을 황제와 황후를 위해 잠시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궁인들이 자리를 비워준 상황이었다. 곧 있으면 궁인들이 들어와 두 사람의 시중을 들 것이다.
깨끗이 목욕을 하고 침의로 갈아입고, 그러고 난 후에야.
“이, 일단 준비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 건 생략해도 돼요.”
“오, 옷도 갈아입고!”
“어차피 벗을 건데.”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곱게 접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긴 눈매가 그런 식으로 접히니 칼리오페의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은 정말…….
“시, 시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칼리오페는 항변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목소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좋아하겠지.”
아스타레아스가 피식 웃으며 마주 앉아 있는 칼리오페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투둑—
호크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젊은 황제가 황후를 너무나 아껴 가만히 두질 않는다고.”
귓가에 속삭인다.
투둑, 툭.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유혹적인 눈매가 나붓이 휘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부끄러운데…….”
이제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더 이상은 안 돼.”
아스타레아스가 못 박았다. 유혹하듯 달래던 것과 달리 이번엔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마지막 호크를 풀었다.
투둑.
칼리오페는 그의 웃음이 어딘지 사납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못 참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풀썩—
이날을 위해 준비된 침대는 가뿐하게 두 사람 몫의 무게를 받아냈다.
“아…….”
짧고도 긴긴 밤의 시작이었다.
앞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될 두 사람의 밤.
—<레이디 베이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