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대관식은 커플 이벤트가 아니야
대전 안에는 심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벌써 황제가 실종된 지도 한참이다.
민간에서 황제의 실종에 관해 떠돌던 루머는 이제 아예 확신이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황제의 모습이 언론에도 비치지 않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황궁에서는 계속 문제 없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정말로 문제가 없다면 모습을 드러내 증명하지 않겠는가.
제국의 기반이 된 꼼꼼한 행정 제도와 명문가의 힘으로 국가 기능은 커다란 구멍 없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이도 한계였다. 중요한 결정은 미뤄지고 외교 문제 쪽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정말 황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려 숨어든 주변국의 움직임이 몇 번이나 포착되었다.
황제는 무치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태업은 죄였다.
사회는 예전과 달랐다. 이름과 핏줄보다 금권을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설령 폐하께서 돌아오신다고 하셔도 더는 간과할 수 없소.”
그 말은 신황을 세워 황제가 돌아오더라도 더 이상 황제로서 예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다들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심지어 황제파마저도 침묵했다.
이제는 정말로 차기 황위에 대해 결정할 수밖에 없다.
“폐하의 적장자는 황자님이니 역시 황자님께서 황위를 이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침묵을 깨트리고 엄중하게 입을 연 건 황제파였다. 최근 황제파의 움직임을 볼 때 예상했던 발언이지만 그래도 직접 들으니 우스웠다.
“계승서열을 무시하는 거요? 이는 폐하께서 즉위하실 때부터 정한 서열이요.”
“그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데. 당연히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소.”
그러나 황제파는 대놓고 뻔뻔하게 나왔다.
“뭐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가야지요. 십수 년 전의 이야기보다는 누가 황위에 오르는 것이 이 나라에 도움이 될지 지금 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소공작보다 황자 전하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끄실 거란 말이오?”
“카스틸로 소공작은 제왕학을 배우지도 않았잖습니까.”
“단순히 허수아비로 만들어 조종하기 쉬워서가 아니라?”
“허어!”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황제파 귀족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게 반발했다.
“제왕학을 배우지 않은 것은 황자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런 날을 대비해 황후 폐하께서 따로 가르치셨답니다.”
“황후 폐하의 혜안이시지요.”
냉큼 답하는 꼴이 이보다 더 뻔뻔스러울 수 없었다.
본디 황제의 명 없이 제왕학을 가르치는 것은 역심이다. 하지만 궁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역모라 결정 내릴 황제가 없으니 반역이라 못 박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역심이라 의심 받을 일을 황후의 혜안이라며 되레 큰소리치는 것이다.
‘아주 작정을 했군.’
본인들도 스스로가 지금 얼마나 몰염치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황후의 친정과 황제파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목소리를 크게 냈다.
그간 황후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에 책봉하지 않는 황제에 딱히 정치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황제파와 손을 잡은 모양이다.
‘여기서 폐하의 허락 없이 제왕학을 배우는 것은 역심이라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야.’
반역이라 판단할 황제가 없으니 결론 짓지 못하고 시간만 흐를 것이다. 또, 저쪽의 뻔뻔함을 보니 황제가 뒤에서 허락했다고 할 수도 있다.
“글쎄, 폐하께서 모습을 감추신 후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이끈 게 누구였는지 생각하면 그런 말을 안 나올 듯합니다만.”
“황자님께서는 아직 기회가 없으셨을 뿐이오. 부황의 부재를 틈 타 통치에 깊이 관여하면 황위를 탐낸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바꿔 말하면 통치에 깊이 관여한 아스타레아스는 그런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까부터…….’
제왕학을 배우지 못해 자질이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도 넘어갔는데 계속해서 소공작을 은근히 욕하니 짜증 났다.
“폐하께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모습을 감추셨습니다. 혹시라도 신변에 이상이 생긴 건가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지요.”
상업지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황제는 칼리오페를 공격하려다가 실패하자 그 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일로 황제가 무탈하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
사실 이미 죽었으나 데우손의 손에 다시 살아난 것이지만 결사대에 소속된 자들을 제외하고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없었다.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이 지지하던 황제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확실한 약점이었다.
기실 황제에게 가장 분노한 사람들은 그를 따르던 황제파였다. 대체 어떻게 자신들에게까지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신변에 아무 이상도 없는데도 태업하며 책임감 없이 자리를 비운 황제의 적장자라는 게 신황으로 추대하는 중요한 사유가 됩니까?”
“옳은 말씀이오. 황제의 자격을 박탈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을 저질렀는데, 그 아들이라고 추켜세우는 꼴이라니.”
“지금껏 비어 있는 황좌 때문에 제국의 위명조차 빛이 바래려 하고 있소!”
“그러지 않게끔 애쓴 분이 바로 소공작이십니다!”
정론이었다. 하지만 황제파의 수장인 디알츠 백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점을 알면 더더욱 황자 전하를 황위에 올려야 하오.”
“디알츠 백작!”
“황제 폐하께서는 제왕학을 익히지 못하고 황위에 오르셨소. 지금 이 사태에 그 탓이 없다고 할 순 없소.”
현 황제는 갑작스러운 선황 부부로 인해 궁에서 나가서 살다가 황제가 되었다.
“합당한 지적이십니다. 제왕학은 황제로서 기본을 수양하는 학문이 아닙니까. 기본을 단단히 다져야 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거지요.”
“맞는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도 즉위 초기에는 얼마나 열의가 깊으셨습니까.”
“그런 마음이 꾸준히 가려면 역시 기본을 갖춰줘야지요.”
한마디로 기본을 못 갖춘 아스타레아스는 자격이 없는 데다가, 만약 황제가 되어도 현 황제처럼 태업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자 전하께서는 어려서부터 황제가 될 기본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수양하셨지요.”
황후의 아비인 케릴 후작 제 손자에 대해 자랑했다.
‘……역시.’
서모나 후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아무리 황자를 지지해도 그 전까진 아스타레아스를 깎아내리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지.’
이러다가 아스타레아스가 황위를 물려받으면 본인이 끝장날 것이라는 절박함. 그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서모나 후작을 비롯한 결사대원들은 조용했다. 몇 번 입을 열고 발언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말을 보태는 수준이었다.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저쪽은 물론이고 지금 아스타레아스를 지지하는 일반 귀족들조차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그런 것이다.
황제는 어차피 죽었다.
늦든 빠르든 황제가 죽었다는 건 어차피 밝혀질 거다.
먼저 운을 떼 책 잡힐 일이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에 결사대에 소속된 귀족들은 황제의 신변에 대해 모르는 척하고 있다.
그들은 여유로웠다. 이전에는 죽인 줄 알았던 황제가 살아남아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조급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는 사실상 아스타레아스의 즉위에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황제파와 케릴 후작 일파가 아무리 캉캉 짖어봤자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개의 입에는 재갈을 씌우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서모나 후작의 속을 까맣게 모르는 디알츠 백작은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벌면 돼.’
디알츠 백작을 비롯한 황제파도, 케릴 후작 일파도 바보는 아니었다.
아스타레아스와 황자. 떡잎부터 차이나니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것도 없었다.
황제라는 커다란 지지대가 사라진 이상 자신들이 지는 싸움이라는 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부재한 이상 누가 후계가 될지 확실하게 정할 사람은 없다.
그게 황제파와 케일 후작 일파에게는 비극이었지만 오히려 그 점을 활용하면 어떨까.
관례적으로 계승 서열 1위가 황위에 오르지만 그런 관례는 어디까지나 관례일 뿐, 국법은 아니었다. 그들은 끝까지 아스타레아스의 즉위를 반대할 것을 결심했다.
‘결국 우리들을 몰아내려면 숙청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황제가 부재한 틈을 타 난을 일으켜 황위에 올랐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레 황제의 부재에도 아스타레아스의 음모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따라올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그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조성되는 순간, 아스타레아스를 비롯한 그의 지지자들이 운신하는 폭이 좁아진다.
‘그런 계산이 빠르게 설 자들이니 함부로 우리를 처리할 리 없어.’
정 안되면 숙청하겠지만, 그전에 다른 방법을 모색하긴 할 거다. 자신들을 회유하고 협박하고 민심을 근거로 세우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쪽과 달리 저쪽은 쓸 수 있는 패가 많다.
‘그 패들을 다 써보기만 하면 돼.’
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간 벌이였다.
‘아모스와 탕페르칸, 카플라의 공동 전선이 구축될 동안만.’
그렇다. 황제파와 케릴 후작 일파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외국과 접선 중이었다.
천년이나 명맥을 유지한 제국의 땅을 탐내는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제국의 위세가 너무나 막강해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제후국이나 우호 관계국인 채로 지낼 뿐이었다.
어찌 욕심내지 않을 수 있을까. 기회만 주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침략하고 싶었다.
극비 중의 극비이니 아모스와 탕페르칸, 카플라 같은 강대국과만 접선하고 중이지만, 일을 벌이고 난 후에는 군소 소국도 이 싸움에 끼어들겠다며 먼저 손을 내밀어 올 것이다.
‘설마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하겠지.’
디알츠 백작이 히죽 비웃음을 지었다.
외국의 병력을 빌려와 자국을 쓸어버린다는 선택지는 어지간하면 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부끄러운 선택이었지만 디알츠 백작은 똑똑하다며 스스로를 추켜 올렸다.
‘황자가 황위에 오르고 나면 외국에서 도와줬다는 것을 빌미로 이것저것 참견해오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야.’
설마하니 다른 나라도 아니고 천년을 유지해온 대 제국인데 그 정도 수습도 못 하겠는가.
‘설령 참견받더라도 이대로 카스틸로 소공작이 황위에 오르는 것보단 나아.’
그렇게 되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되니까.
나라의 안위보다 본인의 일신이 중요한 자였다. 그와 뜻을 함께한 자들 역시.
‘역시 나는 현명해!’
그가 그렇게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대전 문이 열렸다.
정사를 논하는 대전에 이렇게 무뢰배처럼 쳐들어오다니.
‘대체 누가…….’
디알츠 백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문을 바라봤다.
“서모나 경?”
“몽에르트 경도…….”
당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두 사람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며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디알츠 백작의 미간이 더 깊게 패였다. 가뜩이나 거슬리는 두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이름을 알린 힐데르트는 물론이고, 몽에르트 가의 후계로 자리 잡은 후 무서울 정도로 성장한 베로니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두 가문의 위세가 대단해서 가만히 있어도 앞날이 탄탄대로인데 본인들의 능력마저 출중하니 범에 날개를 단 격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건방지게 내게 대들기까지 하고.’
디알츠 백작의 입매가 뒤틀렸다.
“대명문이라는 서모나와 몽에르트의 이름이 아깝군. 시정잡배도 삼갈 줄 아는 곳에서 행패라니.”
힐데르트와 몽에르트 영애의 시선이 디알츠 백작을 향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디알츠 백작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만만한 눈빛에는 경멸과 혐오감이 베여있었다. 그간 이들이 썩 호의적인 눈으로 자신을 보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디알츠 백작의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 전에 몽에르트 영애가 입을 열었다. 강단 있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죄인을 포박하라!”
그 말과 동시에 그들의 뒤에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빛나는 은빛 갑주. 황궁을 수호하는 청룡 기사단이었다.
“이, 이게 무슨……!”
“죄인이라니?!”
대전에 있던 귀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렸다. 그 사이 청룡 기사단은 빠르게 황제파와 칼렌 후작 일파를 제압했다.
“이것 놔라!”
“내가 누군 줄 알고!”
디알츠 백작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말도 안 돼…….’
영상 속의 일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급작스럽게 팔이 뒤로 꺾이는 아픔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거린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식은땀이 치솟는다.
들켰다.
‘안 돼!’
“몽에르트 경! 경이 대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감히 이러는 건가!”
디알츠 백작은 몽에르트 영애를 향해 핏대를 세우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일단 이게 부당하다는 것부터 알려 분위기를 조성해야 했다.
아스타레아스를 지지하던 일반 귀족들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갑자기 기사들이 난입한 것에 그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계속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야 했다. 그래야 이들이 가지고 온 증거를 위증으로 몰아붙이기 수월해진다.
“그대는 행정관이 아닌가! 군권을 행사하다니! 아무리 황좌가 탐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부당하—”
“닥치세요.”
몽에르트 영애의 차분한 목소리에 디알츠 백작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뭐, 뭐라고?!”
“전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몽에르트 영애가 명령서를 내밀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인장이 찍혀져 있었다.
“카스틸로 공작가는 황실 기사단을 부릴 수 없어! 이건 월권일세!”
“공작가는 그렇지만 이 문장의 주인께서는 다르시지요.”
황제가 부재한 상황에서 황위 계승 서열 1위가 명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황좌를 노리고 반대하는 우리를 숙청하겠다는 건가!”
칼렌 후작이 날카롭게 외쳤다.
“누가 보면 정말 죄 없는 사람을 정적이라 제거하는 줄 알겠군.”
힐데르트가 혀를 찼다. 그 말에 황제파와 칼렌 후작 일파가 흠칫했다.
역시 들킨 것이다.
“황좌가 탐나 부정을 저지른 죄인들이 되레 우리를 비난하다니.”
몽에르트 영애의 눈동자에 경멸이 가득 차올랐다.
“황자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타국의 병력까지 끌어들이다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제국을 팔아먹을 셈인가!”
그녀의 일갈에 대전이 술렁였다.
“무슨…….”
“그게 정말인가!”
“맙소사.”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귀족들은 기겁해서 황제파와 칼렌 후작 일파를 바라봤다.
“모함도 정도껏 해야지!”
디알츠 백작이 지지 않고 호통쳤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야 해.’
워낙 은밀히 진행했으니 증거로 남을 것이라곤 타국과의 협약서다. 정교하게 위조된 문서라고 잡아뗀다면 아주 못 빠져나갈 것도 없다.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지 아나! 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한 내게 치욕스러운 모함을 씌우고! 이렇게 무도하게 난입해—”
[황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기만 하면 뭐든 내어주겠소.]
갑자기 흘러나온 목소리에 디알츠 백작의 말이 끊겼다.
[비옥하다는 카스틸로 공작령도, 금맥이 흐르는 서모나 후작령도. 아니, 아예 남부 전체는 어떻소.]
굳이 영상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디알츠 백작의 목소리였다.
“치욕스럽다는 건 아니 다행이군요. 나는 그런 것도 모르는 자인 줄 알았지.”
몽에르트 영애가 차갑게 조소했다. 디알츠 백작의 입술이 뻐끔뻐끔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제가 타국과 접선하는 영상이 찍힌 거지? 이 일은 워낙 은밀히 진행돼서 황제파와 칼렌 후작 일파에서도 수뇌부만 알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자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예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까지 하다니.”
“하! 자질 없는 황자를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 사리사욕을 채울 줄로만 알았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군.”
“잠깐, 그렇다는 건 이 일에 황후 폐하도 연관 있다는 건가.”
그 말에 힐데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황후라는 자리는 그 죄인에게 과분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가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먹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했다. 하지만 힐데르트의 어조는 그 이상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의아한 눈빛을 받은 힐데르트가 손짓했다.
“이, 이것 놔! 감히 이 나라의 국모인 내게 무엄하도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앙칼진 목소리였다. 이윽고 청룡 기사단원에게 붙잡힌 채 끌려오는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 황후 폐하!”
칼렌 후작은 황후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를 단단히 제압하고 있는 기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후라는 고귀한 신분에 대한 예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칼렌 후작이 눈을 치뜨며 날카롭게 외쳤다.
“정말로 예우해달라고 요구하는 건가? 그게 저 죄인이 가진 마땅한 권리라고?”
힐데르트의 오만한 얼굴에 얼음처럼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흠칫, 그 시선을 받은 칼렌 후작과 황후가 몸을 굳혔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지금 타국과 교섭했다는 게 들통나서 저러는 것뿐이야.’
‘마, 맞아.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생각한 황후는 적반하장으로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과 황자만이라도 빠져 나와야 했다.
“타국과 결탁한 것에 대해서라면 나와 황자는 모르는 일일세.”
그 말에 힐데르트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지.
“그렇다면 선황 폐하를 시해한 것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
황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무, 뭐…… 지금 무슨…….”
“선황 폐하를 시해했다니…….”
“선황 폐하께선 분명 사고로…….”
황후 일파와 황제파가 앞장 서서 매국 행위를 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이건 그보다 더했다.
그런가 하면, ‘역시나’ 하는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들기도 했다.
선황의 죽음 당시에도 사고사라 판명났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자리를 탐낸 아우가 일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황제는 아스타레아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노라 공표했던 것이고.
“그 모합은 이미 예전에 거짓이라 밝혀진 일이야!”
“폐하께서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직접 카스틸로 소공작을 후계로 삼으시겠다 말씀하시지 않았나!”
다급히 외치는 황후와 칼렌 후작을 본 힐데르트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 일이 아니었어도 후작께서는 일선에서 물러나실 때였나 봅니다. 십수 년 전의 일은 상관 없다고 주장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하고서 황태자 책봉을 미룬 황제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더 이상 그건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증거가 분명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힐데르트의 손짓에 문관들이 증거 자료를 귀족들에게 건넸다.
“이럴 수가……!”
“선 황후 폐하마저!”
분노에 찬 음성이 흩어지는 종이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황후와 칼렌 후작은 그 종이에 상세하게 적힌 자료를 보고 눈을 꾹 감았다. 그들이 십수 년간 숨긴 비밀이 세상에 드러났다.
끝났다. 모든 것이.
“이건 재판을 거칠 필요도 없소!”
“즉결 처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중죄요!”
“이러면서 정당한 황위의 계승자인 체 행세하다니!”
사람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대전 안을 메웠다.
힐데르트는 그 소란을 들으며 은근슬쩍 문간을 곁눈질했다.
‘근데 이 녀석은 왜 안 오는 거야.’
현 황제의 즉위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 중대한 사건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늦다니.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 * *
러그윈은 심각한 얼굴로 깊은 사색에 빠진 제 주인을 바라봤다. 워낙 진지한 분위기라 방해하는 게 저어되지만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도련님.”
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긴 아스타레아스에겐 들리지 않았는지 반응이 없다.
러그윈은 흘낏 시간을 확인했다. 몽에르트 영애와 힐데르트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황궁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도련님, 이제 슬슬 나가셔야 할 때입니다.”
그래도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지 않아 러그윈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몸에 손을 댔다.
“도련님.”
조심스레 어깨에 손을 얹자 사색을 방해받은 아스타레아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그를 돌아봤다.
이런 식의 날카로운 반응은 흔치 않은 터라 러그윈은 다소 놀라 주인을 바라봤다.
“……나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날 선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봤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러그윈은 하인에게서 재킷을 받아들곤 아스타레아스가 입는 것을 도왔다.
정당한 황위 계승자다운 위엄을 드러내게끔 의관을 정제했다.
빠릿하게 손을 움직이면서도 러그윈의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고민에 잠겨 계셨을까.’
현 황제가 즉위한 것 자체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날이다. 이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는데 방금 주인의 반응은 어땠는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냐니. 이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당연히 어떻게 결론 내릴지 고민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릴 때까지 최대한 방해하지 말자고 숨소리도 죽였었는데.
허리띠를 점검한 러그윈이 몸을 일으키며 은근슬쩍 책상 위를 바라봤다.
고민에 잠겨 있던 아스타레아스가 뭐라 뭐라 끄적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반지, 꽃—어떤 종류?
‘응?’
생각지도 못한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반지와 꽃은…… 보통 여성에게 하는 선물 아닌가.’
안 좋은 예감이 스쳤다.
케이크—딸기랑 초코 생크림? 커스터드 크림도 좋아하는데.
파뤼르—이건 여러 세트 사주고 싶은데. 어떤 보석이든 다 잘 어울려.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주인님이 여성에게 줄 선물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구를 위한 것인지 빤한 일이었다. 저 케이크 취향이 거기에 아주 확인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러그윈은 이미 예전에 칼리오페의 입맛에 딱 맞는 디저트를 찾겠다는 아스타레아스의 명에 따라, 제도의 모든 디저트 가게를 섭렵하며 팔 빠지도록 디저트를 사나른 전적이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가 노래를 연습하는 곳으로 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만나는 것 자체를 숨겼던 만큼, 아무리 사소한 심부름이라도 관련자가 적을수록 좋았다.
‘강아지 아가씨는 꿈에도 모르시겠지…….’
러그윈은 아련하게 생각했다. 설마 디저트 뒤에 러그윈의 고혈이 쥐여 짜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래도 준비된 디저트를 얌냠 야무지게 먹는 모습은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테다.
‘나는 보지도 못 했지만.’
그 모습을 귀엽게 생각하며 봤을 때 돌아올 아스타레아스의 날 선 반응을 생각하면 차라리 못 본 게 다행이긴 했다.
어쨌거나 그런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역사가 있는지라 러그윈은 본의 아니게 칼리오페의 입맛을 너무 자세하게 알아버렸다.
‘그렇게까지 상세하고 집요하게 입맛을 알고 싶진 않았는데…….’
파이 크러스트의 바삭함은 어느 정도로 좋아하는지부터 커스터드 크림의 달달함 정도, 바닐라 크림은 풍미가 진할수록 좋아한다는 것까지.
여하간 다년 간의 임상 실험 데이터가 축적된 러그윈이 보기에 저 케이크 취향은 딱 칼리오페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
정말 상사만 아니었어도 뭐라 한마디 했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를 걸고 온갖 사람들이 긴장한 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때, 그 장본인이라는 사람이 하는 짓이란.
‘자기 여자 친구한테 줄 선물이나 고민하고 있다니!’
생각하니까 더 빡쳤다.
러그윈은 태어나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
딱히 이것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다른 사람은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본인은 다른 것—애인 생각에 정신 팔려 있는 게 어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자긴 여친 있다고 자랑하는 건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 때문에 더 화내는 건 절대, 절대로 아니다.
중요한 거사를 코앞에 두고 너무 긴장 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라기엔 너무나 분노에 가득 찬 감정이었지만 아무튼—이 되는 것뿐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애인이 없는 건데!’
여기에는 분명 그의 주인 탓도 있었다. 아니, 탓‘도’ 있는 게 아니라 백 퍼센트 도련님 탓이다!
여성분과 뭔가 좋은 분위기로 진전될 거 같으면—어디까지나 러그윈의 주관적인 느낌 상의 진전 가능성이다— 도련님에게서 호출이 왔다.
뭐 어쩌겠는가.
당장 달려가야지.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남은 그렇게 모태 독거총각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는 희희낙락 애인 선물이나 고르고 있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장이 터지고 가슴이 턱턱 막혔다.
‘나도 여친 사귀고 싶다고!’
분노에 씩씩거리면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자 그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지?”
“……아닙니다.”
러그윈은 바로 깨갱 꼬리를 내렸다.
방을 나서는 주인의 뒤를 졸졸 쫓아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종이를 슬쩍 바라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주인의 고민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의도치 않게 반쯤은 강제적으로 칼리오페의 취향을 섭렵했으니 결정에 보탬이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파뤼르 밑에는 단 한 단어가 적혀져 있었다.
이벤트
이벤트에 고민이 많았는지, 밑줄까지 쳐져 있고 줄의 끝에는 잉크가 동그랗게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아, 설마.’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러그윈은 멈칫했다.
반지, 꽃, 케이크, 파뤼르 그리고 이벤트.
이 다섯 개의 조합이 어딘가 꽤 정석적이지 않은가.
‘도련님이 프러포즈를?!’
저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러그윈은 앞서가는 도련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가 책상 위를 바라보길 반복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얼굴이 홧홧해지고 꺄아아, 하는 내적 비명이 터져 나왔다.
“러그윈님 왜 저러셔?”
“몰라, 원래 종종 저러시잖아.”
“하긴 그건 그래.”
복도를 지나가던 하녀들이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자신을 보고 얼굴을 붉힌 채—어디까지나 러그윈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속닥거리는 하녀들을 본 러그윈은 빠르게 진정했다.
‘훗, 이 몸의 인기란.’
역시 여태껏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없는 건 모두 다 도련님 탓이다. 그는 최대한 멋있는 표정을 지으며 멋있게 걸었다.
‘후, 나도 참 죄 많은 남자군.’
자신의 멋진 뒷모습이 하녀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활활활!
‘시선이 느껴지는군.’
러그윗은 훗, 하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소녀들이여, 그 불을 꺼트려 주고 싶지만 내 주인께서 허락하질 않으시니.’
멋지면서 바쁜 남자란 이다지도 소녀들에게 해롭다.
러그윈의 생각이 아주 착각인 것은 아니었다. 하녀들의 시선이 러그윈 쪽을 향해 있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에게 러그윈의 뒷모습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하아, 도련님 미모는 오늘도 열일하신다.”
“정말 월급 받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니까.”
“여기에 리페 아가씨까지 오신다고 생각해봐.”
“복지 500% 향상 아니냐구!”
“아가씨께서 오시면 나 치장 시중을 들고 싶은데 될까?”
“경쟁률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난 두 분이서 함께 차마실 때 차 시중!”
“하아, 그거 정말 양손에 꽃이네.”
몽롱한 얼굴로 환상에 잠긴 하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하, 하녀장님!”
하녀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상사에게 직무 태만을 걸리다니 운도 없었다.
하지만 하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도련님께서 황위에 오르시면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실 거다.”
“그, 그 말씀은…….”
“이 저택을 떠나실 거라는 소리지.”
콰과광!
청천벽력이었다.
“그, 그럼 리페 아가씨께서도…….”
“황후궁에서 기거하시겠지.”
콰과광!
천지가 무너져 내렸다.
“아악!”
“안돼!”
“이럴 순 없어!”
하녀들이 절규했다. 어디선가 사내 복지가 하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선황을 시해하고 제국을 기만한 지크베르트의 황제 직위를 박탈한다.
제국 전체에 공문이 떴다.
이 일에 가담했던 황후와 황자, 그리고 칼렌 후작 일파는 당연히 지하 감옥으로 끌려 들어갔다. 타국의 병력을 끌어들여 황위를 차지하려 했던 디알츠 백작을 위시한 황제파의 죄 역시 낱낱이 드러났다.
이들의 죄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뇌물 수수와 부정축재, 불법 투기 등등 끝이 없는 죄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내가 힘 좀 썼지.”
힐데르트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귀족적인 얼굴 덕에 그 모습이 한없이 오만해 보였다.
칼리오페는 웃으며 오구오구 칭찬해주었다.
“역시 힐데 오라버니는 대단하세요.”
그 말에 옆에 있던 몽에르트 영애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우아하게 부채를 촤르륵, 펴며 힐데르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어머, 누가 보면 경 혼자 다 한 줄 알겠어요.”
“에이, 몽에르트 영애의 공을 잊을 사람이 어딨겠어요. 영애가 함께 해주셔서 무척 든든해요.”
칼리오페가 살갑게 웃으며 몽에르트 영애의 팔 위에 손을 살짝 얹었다. 둘 다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지만, 칼리오페 눈에는 왠지 서로 칭찬해달라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루스 오라버니와 로벨 오라버니 탓인가.’
사실 칼리오페가 본 게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둘 다 능력 좋고 우수한 인재들이라 무난히 칼렌 후작 일파와 황제파를 축출할 꼬리를 잡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예정과 달리 피 터지게 경쟁한 건 모두 칼리오페 때문이었다.
그래, 그건 협력이라기보단 경쟁이었다.
‘저 놈이 선황 시해 증거를 찾아냈다고?! 그럼 나는 황제파를 한 번에 골로 보낸 치명적인 건수를 잡는다! 반드시!’
‘뭐? 저 여자가 타국과의 결탁을 잡아냈다고?! 쳇, 쓸데없이 능력만 좋아서는. 뭔가 더 있을 거야. 그거라도…….’
‘저 자식, 시해 증거를 찾았으니 하하호호 놀고 있을 줄 알았는데 황제파의 불법 투기를 잡아내다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은 없어. 더 털어봐야지.’
그렇게 황제파와 칼렌 후작 일파는 탈탈탈 털렸다. 보통은 걸리지 않을 것까지 집요하리만치 털려서 은근슬쩍 부정을 저지르던 사람들에게 경종까지 울리게 되었다.
모두 이 엄청난 수사력을 보인 두 사람에게 혀를 내둘렀지만 정작 장본인들은 칫, 하고 혀를 찼다.
‘무승부…….’
‘흥, 건수가 하나만 더 있었어도…….’
결과적으로 오늘 칼리오페에게 자기가 이거저거 했다고 자랑할 때 더 돋보이지 못했다. 그래도 칼리오페가 웃으며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내니 그간 고생했던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나 혼자 이 시선을 독차지할 수 있었는데……!’
물론 그런 생각에 서로를 파지직 소리 나도록 노려보긴 했지만.
몽에르트 영애는 자신의 팔에 친근하게 닿은 온기와, 자신을 바라보는 산호빛 눈동자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만끽했다. 그러고 있자니 왠지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리페.”
“네.”
칼리오페가 부름에 답해도 몽에르트 영애는 아무 말이 없었다.
팔랑팔랑 부채질을 몇 번 하다가 다른 곳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러도.”
“네?”
잘 들리지 않아 되묻자 몽에르트 영애가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부채를 착, 접더니 칼리오페를 마주 보곤 말했다.
“슬슬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다고요.”
“아.”
칼리오페는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거리감을 느껴서 경칭으로 부른 건 아니고 습관이었을 뿐인데 듣는 쪽에서는 또 다르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함께 있는 힐데 오라버니와 레아스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니까 비교됐을지도.’
“네, 베로니카 언니.”
그 순간, 부채를 잡은 몽에르트 영애의 손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베로니카 언니, 베로니카 언니, 베로니카 언니.
칼리오페의 부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나보고 베로니카 언니래……!’
잠시 바르르 떤 몽에르트 영애가 턱을 살짝 들고는 우아하게 답했다.
“그래요.”
기품 있는 자태로 차를 마시는 몽에르트 영애를 바라보는 칼리오페의 눈에 창밖 너머의 풍경이 비쳤다. 포르르, 작은 새가 나뭇가지를 헤치며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정확히는 나뭇가지가 스스로 몸을 누이며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두 분 덕분에 불필요한 소모전을 막을 수 있었어요. 특히 타국의 병력이 제국에 들어왔으면 어찌 되었을지…….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이 나라에 봉사하는 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두 사람은 의젓하게 답했지만 칭찬받아 기쁘고 들뜬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가느다란 눈으로 지켜보던 아스타레아스가 옅게 미소 지으며 한마디 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들이 있다니 제국의 미래가 밝군요.”
푸른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자 힐데르트와 몽에르트 영애는 몸을 움찔 떨었다.
분명히 칭찬인데 왜 열심히 굴려서 쥐어 짜내주겠다는 말처럼 들릴까. 머릿속에 야근하며 갈려 나가는 미래가 그려졌다.
“그럼 다음에 또 함께 차를 마셔요.”
칼리오페의 말에 애써 정신을 수습한 몽에르트 영애가 생긋 웃었다. 힐데르트보다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다음에는 몽에르트 저로 초대하지요.”
“기쁜 마음으로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몽에르트 영애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혹시?’
“……베로니카 언니.”
뒤늦게 덧붙이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함께 갈게.”
힐데르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후후,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몽에르트 영애 역시 웃으며 말했다. 힐데르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몽에르트 저에는 간만에 가게 되겠군.”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몽에르트 영애는 지지 않고 어깃장을 놓았다.
“호호, 소공작을 초대하겠다고 말씀드리진 않았는데요.”
하지만 힐데르트도 들은 척 안했던 말을 아스타레아스가 귀 담아 들을 리 없다. 세 사람은 웃으며 신경전을 펼쳤다. 파지직 전기가 튀었다.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다니. 세 사람은 역시 친하구나.’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인사(?)를 마친 몽에르트 영애와 힐데르트가 다실에서 나가고, 칼리오페는 창문을 열었다. 자그마한 오목눈이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으로 날아든다.
“제피루스님.”
오목눈이가 당연하다는 듯 손 안에 자리 잡는다.
“어때요?”
[안정되었어.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칼리오페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젊음의 샘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 혹시라도 안 좋은 영향이 있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에테르로 가득 찬 샘은 이 세계의 중요한 에테르 공급원이기도 했다. 그게 잘못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다시 은잔을 불러내서 샘물을 마셔도 돼. 샘은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은잔은 그때 칼리오페가 정신을 잃으며 사라졌다. 한 번 벽을 넘고 회복했으니 이제는 은잔을 소환할 때 전처럼 신체적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샘물을 마실 거야?]
“아니요.”
칼리오페의 대답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오목눈이는 몸체를 갸웃거렸다.
[불로불사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도?]
그건 모든 인간들이 원하는 힘 아니었던가.
“그래도요.”
[왜?]
검은 깨 같은 눈동자에는 순수한 의문이 가득했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해가 지남에 따라 나이를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지금이.
내일이, 내일모레가 기다려졌다.
열아홉 살, 스무 살, 마흔 살…… 전생에서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이 기대됐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접는 바람새는 어쩐지 아쉬워 보였다. 영생을 사는 그로서는 칼리오페가 불로불사의 존재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칼리오페는 손가락으로 오목눈이의 목깃을 긁어주었다.
잠시 그 손길을 받으며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가 중얼거렸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손으로……인가.]
“네?”
[아니, 그렇게 말했던 녀석이 있어서.]
결국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멸망의 길을 걸었다가도 결국 스스로 일어나 정상 궤도에 오른다.
불멸자나 초월적인 존재가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비스 신이 했던 말인가요?’
칼리오페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오목눈이의 부리를 매만지고 미간을 간질였다. 기분이 좋은지 바람새가 눈을 감고 머리를 더 들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칼리오페의 부탁 덕에 아스타레아스 또한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아무리 봐도 애완동물로 보이는데.’
[슬슬 돌아갈 때야.]
바람새가 아쉽다는 듯이 부리를 딱딱거렸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피워낸 에테르로 현신하는 것이니 시간에 한계가 있다. 노래를 한 곡 불러서 소환했으니 이제 곧 에테르가 다할 때였다.
손바닥에서 날아오른 오목눈이가 칼리오페의 주변을 한 바퀴 휘돌더니 사라졌다.
아스타레아스가 비어있는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레아스?”
“질투 나.”
“네?”
심통이 난 채 말하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질투가 난다니.’
대체 어디에?
칼리오페의 손을 들어 올린 아스타레아스가 손바닥에 턱, 하고 자기 얼굴을 올렸다. 꼭 자기도 예뻐해달라는 듯이.
‘우와아.’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잘생긴 남자가 이렇게 하니까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
칼리오페는 머뭇머뭇하다가 아스타레아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이 사르륵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감촉이 놀랄 만큼 좋았다.
고롱고롱.
마치 포만감에 물든 고양이처럼 아스타레아스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음, 고양이보다는 맹수인가.’
지금은 얌전하게 머리를 맡기고 있지만 사실 아스타레아스는 맹수에 가까운 남자였다.
‘보이는 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긴 속눈썹이 눈가에 꽃잎 같은 그늘을 만들고, 흰 뺨은 도자기보다도 더 매끄러웠다.
쭉 뻗은 콧마루, 담홍색 입술, 도드라진 턱선. 입에 넣으면 그대로 사르르 녹을 것처럼 달콤하고 유혹적인 얼굴이었다.
너무 달콤해 위험한 줄도 모르고 자꾸자꾸 입에 넣다가 혀가 저릿해지는 얼굴. 그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천사처럼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고 있다.
‘레아스랑 결혼하면 이런 모습을 매일매일 보게 되는 걸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어 뺨에 열이 올랐다.
결혼.
그야 언젠가는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상대가 아스타레아스일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다는 감각이었을 뿐이다.
[설마 지금 그걸 프로포즈라고 한 거야?]
에피니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프로포즈도 받았는데.’
아스타레아스가 말했을 때는 설마 그게 프로포즈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에피니가 말하고 나서야 아, 하고 깨달았다.
유리안과 힐데르트가 끼어들고, 거기다 가족들까지 와서 그 날은 흐지부지됐다.
‘딱히 싫다는 말은 안 했으니 대답이 된 걸까?’
조금 불안해졌다. 타이밍을 놓친 게 아닐까. 아스타레아스가 답을 미룬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카스틸로 부인께서 날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는데.’
좋아하는 사람의 유일한 직계 혈육이다. 당연히 잘 보이고 싶었다.
카스틸로 부인과는 열다섯 살 때 처음 만났다. 그때 약간의 인정을 받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거리감은 여전했다. 그 인정이라는 것도 아스타레아스와의 관계를 인정받은 게 아니라, 노래를 인정받은 거였다.
‘음, 한 번 따로 찾아뵈어야 할까.’
그간 카스틸로 부인과 마주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아스타레아스와 함께였다. 혼자 만나 뵙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레아스가 입궁하고 나면 적적하시기도 할 테고.’
노부인이 그 넓은 백악의 저택에 홀로 계실 것을 생각하니 제 가슴마저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쪽.
손바닥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아스타레아스가 눈만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집중 안 하냐는 듯.
초옥.
손바닥의 여린 살을 가볍게 흡입한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손바닥 한 가운데 오목하고 보드라운 살이 가볍게 빨리는 감촉에 일어난 일을 자각하기도 전에 소름이 돋았다. 오싹, 손바닥부터 시작해 등골이 간지러웠다.
“레아스……!”
칼리오페가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불렀다. 뒤늦게 손을 거두려는데 아스타레아스가 더 빨랐다.
손목을 그러쥔 그가 칼리오페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틈 없이 맞물린다.
“앗! 응…….”
고개를 든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연분홍빛 입술에 닿았다.
살짝 닿는가 싶더니 이내 깊게 이어지며 갈구한다.
밀어붙이듯 파고드는 아스타레아스의 움직임에 그가 움켜쥔 칼리오페의 손목이 벽에 닿아 고정되었다. 파르르 칼리오페의 속눈썹이 떨렸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를 녹일 듯 적셨다.
어느새 숙였던 몸을 바로 편 아스타레아스 때문에 그녀의 허리가 꺾이고 고개가 들렸다.
바뀐 자세 때문인지 그가 더 깊게, 깊게 밀려온다.
뜨겁다.
벽과 아스타레아스 사이에 갇혀 칼리오페는 그저 입을 벌린 채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 *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숨죽여 방안을 지켜보던 하녀들이 서로를 툭 쳤다.
“뭘 니가 침을 삼키고 있어.”
“너도 침 고인 거 다 보이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다시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를 향했다.
사실 이쪽에서 보이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벽에 고정된 채 바르작거리는 칼리오페의 손과 아스타레아스의 등정도였다.
칼리오페를 온통 뒤덮을 정도로 넓은 등. 그 등을 감싼 셔츠 너머로 견갑골이 두드러졌다가 느슨해지는 모습이 언뜻언뜻 비쳤다.
이제 여름에 가까운 날씨가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저 견갑골에 낑겨 죽을 수만 있다면…….’
‘행복한 삶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흐뭇해지는 등빨이었다.
그러면서도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소중한 우리 아가씨에겐 아직 일러!’
‘더해라! 더해라!’
그런 마음이 오른쪽과 왼쪽에서 싸웠다.
우리 아가씨께 무슨 야한 짓거리냐고 쏘아붙이고 싶다가도, 어이구 감사합니다 하고 절하고 싶은 마음.
‘아가씨도 성인이시고…… 연인 간의 키스 정도는…….’
‘그치만 우리 아가씨는, 우리 아가씨는……!’
키스가 길어질수록 하녀들의 마음에 번민이 깊어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녀들의 번민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어가고 뭐해?”
“그러게, 거기 서서.”
하녀들은 화들짝 놀라, 안 된다는 생각 중에도 절대 눈 돌리지 않았던 광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마, 마, 마, 마, 마님……!”
하녀들이 허둥지둥 예를 갖춰 인사했다.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 루시우스 그리고 로베르트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수상한 반응에 뭐하냐고 물었던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무언가 눈치 챘는지 루시우스의 눈빛은 벼린 날처럼 서늘해졌고, 루스티첼 백작의 눈에는 불길이 타올랐다.
탁, 탁, 탁.
루스티첼 부인이 쥐고 있는 부채로 천천히 손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마님이 제일 무서웠다.
‘히이이익!’
임기응변에 능한 하녀가 서둘러 살짝 열려있던 문을 쾅 닫았다.
지금 이 광경을 루스티첼 일가가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쩌면 세계 멸망이 더 평화로운 결말이 될지도 모른다.
어쩐지 사명감까지 생겨 꾹 버티고 서는데 지척까지 다가온 루시우스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열어.”
“네!”
하녀는 냉큼 문을 열었다.
사명감 따위 단번에 날아갔다. 버티고 있기엔 큰 도련님의 서늘한 분노가 너무너무 무서웠다.
‘아, 박력 있으셔…….’
……무서운 것만은 아닌 듯했다.
세계가 멸망하면 좀 어떤가. 우리 큰 도련님이 이렇게 잘 생겼는데.
가족들은 문지기가 훤히 뚫어준 길을 통해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놀란 얼굴로 루시우스를 불렀다.
“……들이랑 어머니, 아버지.”
줄줄이 들어오는 가족들의 모습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하녀의 손에서 디저트를 빼앗아든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웃었다.
“아니, 목마를까 싶어서.”
“아, 감사해요.”
“다과를 드는 김에 다 같이 함께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고.”
루스티첼 부인이 자연스럽게 변명하는 사이, 세 남자들은 칼리오페의 상태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왠지 얼굴이 발갛고 입술이 촉촉했다.
그들은 소드 마스터의 예민한 기감을 열었다.
‘맥박이 빨라!’
‘동공이 확장되어 있군.’
‘체열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세 남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누가 보면 적을 앞두고 실력을 가늠한다고 착각할 기세였다. 현실은 막둥이가 남자친구와 둘만 있었을 때 뭘 했는지 추측하는 것뿐이었지만.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이딴 데에 사용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안다면 재능 낭비라고 통탄할 것이다.
칼리오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 같은 척하고 있지만 소드 마스터의 오감을 속일 순 없었다.
“네 녀석……!”
누구보다 냉정해보이던 루시우스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눈 깜짝 하는 순간에 달려들어 아스타레아스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아스타레아스는 반항하지 않고 멱살을 잡힌 채 축 늘어졌다.
루시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하다.
아스타레아스의 실력이면 충분히 반격할 수 있을 터다. 적어도 제압당한 걸 풀 수는 있을 텐데. 그가 의문을 느낀 것과 동시에 아스타레아스가 콜록콜록 기침했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깨끗한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다. 흰 피부가 살짝 붉어지며 목줄기에 핏대가 섰다. 가련하면서도 왠지 가혹적인 기분이 드는 모습이었다.
루시우스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무슨 멱살을 잡혀 있으면서 기침을 해?’
기침이 나와도 멱살이 풀릴 때 나오지 지금 나오는 건 말이 안 된다. 루시우스가 어이없어하는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루스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은 루시우스는 순간적으로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칼리오페는 가까이 다가와 루시우스의 손에서 아스타레아스를 빼냈다. 소드 마스터가 단단히 틀어쥔 멱살이 말랑말랑한 손에 힘없이 풀어졌다.
“괜찮아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난…… 콜록, 괜찮아요.”
아스타레아스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촉촉한 푸른 눈동자와 아련한 미소, 붉어진 얼굴과 살짝 갈라진 목소리.
누가 봐도 안 괜찮은데 괜찮다고 애써 안심시키는 모습이었다.
칼리오페의 눈매가 단단히 굳었다. 그녀는 루시우스에게서 아스타레아스를 보호하듯 앞에 섰다.
“왜 그러셨어요?”
칼리오페의 비난 어린 말에 루시우스는 입술만 달싹였다.
저 놈이 엄살 부리며 연기하는 게 분명하다. 그 짧은 순간 멱살 한 번 쥐었다고 저렇게 된단 말인가. 그것도 아스타레아스처럼 강한 남자가!
억울했지만 엄살이라고 말해봤자 저 요망한 놈의 손아귀에 더 놀아날 게 분명하다.
“오라버니께서는 강자에게서 약자를 지키는 긍지 높은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약자?
루시우스는 기가 막혔다. 그 말만큼 아스타레아스와 안 어울리는 말이 어디 있을까. 저 놈이 약자면 이 세상에 강자는 없다.
“갑자기 달려들어 가만히 있는 사람의 멱살을 잡다니.”
칼리오페가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실망이에요.”
콰과광!
갑자기 세계가 멸망했다. 적어도 루시우스에게는 그랬다.
실망이라니, 실망이라니, 실망이라니……!
“리, 리페.”
새하얗게 질린 루시우스가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홱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루시우스는 팔을 뻗은 그대로 굳어 석상이 되었다.
‘리페가 나를 외면했어…….’
멸망한 세계가 다시 멸망했다.
엄청난 초유의 사태에 가족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막둥이에게 실망이라는 소리를 듣고 외면 당하다니……. 세상에 이보다 더 끔찍하고 가혹하고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와중에도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별것 당하지 않았는데 온갖 연약한 척하며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미청년의 병약한 모습은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루스티첼 일가에게는 가증스러운 거머리가 칼리오페에게 찰싹 붙어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거머리는 칼리오페의 심금을 울렸다.
“레아스…….”
칼리오페가 안쓰럽다는 듯 그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어지러운 척 그녀에게 제 몸을 기댔다.
“저……!”
가족들은 튀어나오는 욕을 삼켰다. 칼리오페의 품에 포옥 안긴 아스타레아스를 당장 떼어놓고 싶었지만 여기서 달려들면 사랑스러운 막둥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
“리, 리페! 나도 여기 팔 다쳤는데…….”
로베르트가 왼팔을 내밀며 울망울망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팔에는 상처도, 붓기도 없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팔을 만졌다.
“겉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다쳤어!”
빽 소리 지른 로베르트가 눈을 굴리며 우물쭈물 덧붙였다.
“시, 십 년 전이었나…….”
“로벨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그럼 못 쓴다는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봤다. 평소 로베르트가 이런 장난을 치면 받아줬겠지만 지금은 정말 환자—어디까지나 칼리오페의 생각이다—가 있는 상황이다.
로베르트는 단숨에 깨갱 꼬리를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아스타레아스가 훗, 하고 웃었다. 물론 로베르트를 바라보고 있던 칼리오페에게는 그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은 똑똑히 봤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2차로 뒷목을 잡았다.
칼리오페는 몰랐다. 그녀가 가장 걱정해야하는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가족의 혈압이었다.
부채를 꽉 틀어쥔 루스티첼 부인이 더없이 상냥하고 온화하고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아스타레아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어머나. 소공작, 괜찮으신가요?”
꽈아아악.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찌나 강하게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꿈쩍도 안 하고 마주 미소 지었다. 멱살잡이 한 번에 곧 쓰러질 병약한 미청년처럼 굴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말씀 편하게 하시죠, 장모님.”
“호호, 장모님이라니 소공작께선 농담도 잘 하시네요. 자, 제게 기대세요. 힘들어보이시는데.”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아스타레아스를 잡아 당겼다. 온후한 얼굴과 달리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꿈쩍할 아스타레아스가 아니었다. 그는 칼리오페가 눈치 채지 않도록 조심하며 버텼다.
그러자 루스티첼 백작이 가세했다. 힘줄 돋은 그의 팔이 아스타레아스를 잡고 그대로 제게 기대게 했다. 졸지에 루스티첼 백작의 단단한 품에 기대게 된 아스탈레아스의 입매가 움찔했다.
“이렇게 약해서야……. 내가 몸을 단련시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군.”
“아! 내가 대련 상대해줄까?”
로베르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장 검을 가져오라고 할 기세였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을 보다가 미소 지었다. 화목(?)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전생에서 이런 모습은 꿈도 못 꿨는데…….’
살아서, 새로운 형태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현재의 자신은 이전의 자신이 살지 못했던 나날까지 살아갈 테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눈에 루시우스가 들어왔다. 그는 아직도 시무룩해서 저 틈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심했나.’
여태껏 침울한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스 오라버니.”
다가가자 루시우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돌아봤다.
“리페.”
답하고선 또 추욱 처져있는 게 안쓰러웠다. 칼리오페가 웃으며 팔을 살짝 벌리자 곧장 끌어안는다.
꼬옥.
‘에구구.’
꼭 끌어안는 팔에 칼리오페는 손을 들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전생의 삶까지 살아서 그런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오라버니인데도 애기처럼 보였다.
한창 신경전을 벌이던 아스타레아스와 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대치를 멈췄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오늘 진정한 승리자는 루시우스였다.
* * *
[죄송합니다, 아가씨.]
떠오른 영상에서 러그윈이 사과했다.
칼리오페는 실망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아스타레아스에게 통신했는데 러그윈이 나왔다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지금 도련님께서 바쁘셔서요.]
아니나 다를까 나온 말에 칼리오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최근 자주 이러네…….’
자주 못 만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통신 연결까지 러그윈이 대신 받으니 아무래도 힘이 빠졌다.
“바쁜 건 어쩔 수 없죠. 아무래도 대관식 준비가 있으니.”
[음,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네?”
러그윈의 중얼거림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게……. 음, 대관식뿐만 아니라 정무 문제도 있으니까요. 즉위하시기 전에 정리할 계파 문제도 있고. 요즘 도련님을 만나는 손님이 끊이질 않고 있어요.]
러그윈은 서둘러 변명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손님들 중엔 귀족보다 상인이 훨씬 더 많지만.’
칼리오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즉위 전부터, 아니, 즉위 전이기에 정리할 것들이 많을 터다.
“레아스도 레아스지만 옆에서 고생이 많겠어요.”
[역시 제 생각해주시는 건 아가씨밖에 없으십니다. 도련님이 반만 닮았어도…….]
‘제가 솔로가 아닐 텐데.’
러그윈이 눈물을 찍 흘렸다.
“레아스도 당연히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 다정한 사람이잖아요.”
[아, 예.]
러그윈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다정이라니. 그 말만큼 아스타레아스와 안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뭐, 아가씨 탓이 아니지.’
제 주인이 강아지 아가씨한테 하는 짓을 보면 이중인격이 의심됐다.
“그럼 힘내세요!”
통신을 종료한 칼리오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날며칠 째 아스타레아스와 연락이 안 되니 조금 쓸쓸했다. 통신할 틈도 안 나는 걸까.
‘아니야, 아니야. 바쁘게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서운함을 훅 날려 보내고 으쌰,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스틸로 저에 가볼까.’
아스타레아스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카스틸로 부인을 만나러.’
* * *
“마님.”
“들어오게.”
문 너머로 들려오는 허락에 카스틸로 저의 총괄 집사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부인이 보인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린 머리카락,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 흘러가는 세월조차 이 백악 저택의 귀부인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루스티첼 저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카스틸로 부인의 한쪽 눈썹이 슥 치켜 올라갔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영애로부터입니다.”
“……테이블 위에 두도록.”
나직한 대답과 이쪽에서 시선을 떼는 모습에 집사는 속으로 다소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다지 리페 아가씨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가.’
바로 읽어보실 관심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집사의 생각과 달리 차를 한 모금 마신 카스틸로 부인은 바로 편지를 읽어보았다. 비록 엄격하고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답장을 쓴 카스틸로 부인은 집사에게 편지를 건네고 저택 하녀인 마리나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루스티첼 영애가 카스틸로 저에 오겠다고 하는구나.”
그 말에 마리나가 눈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 건에 관해 널 믿고 위임해도 되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귀부인!”
척, 한쪽 무릎을 꿇어가면서까지 하는 대답에 집사는 당황했다.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세였다.
“카스틸로 가의 위엄과 권위를 톡톡히 보여줄 때다.”
카스틸로 부인의 목소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엄격했다.
“철저히 준비하도록.”
“예!”
마리나가 고개를 숙였다. 적군 수장의 목을 베어오라는 사명을 받은 장군과 같은 기세였다.
‘괜찮은 건가…….’
집사는 편지를 꼬옥 움켜쥔 채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도 성격이 드센 마리나는 도련님을 지극히 아껴 하녀 모임에 나가면 꼭 적을 만들어왔다. 배틀 주제는 항상 모시는 아가씨, 도련님 자랑이었다.
성년이 된 후에는 덜하지만 도련님의 유년기 땐 주제도 모르고 잘난 척하는 다른 가문의 하녀들을 눌러줬다며 하하핫! 호탕하게 웃곤 했다. 그런 그녀이니 도련님과 교제하는 칼리오페가 얼마나 눈에 차지 않을까…….
‘나는 리페 아가씨면 무조건 찬성이지만…….’
도련님 콩깍지가 너무 강한 마리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터.
카스틸로 부인의 방에서 나온 집사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께서도 그걸 아시고 마리나에게 맡기신 거겠지…….’
이런 것을 다른 사람과 상담할 순 없었다. 말하는 순간 카스틸로 부인이 벌써부터 시집살이 시킬 생각 만만이라는 소문만 돌게 될 거다.
‘이럴 땐…….’
집사 역시 마리나 못지않게 비장한 태도로 통신석을 켰다.
‘익명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삼촌입니다: 저기 레리커플 말인데요.
삼촌입니다: 카스틸로 부인께서 리페님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결혼해: 쓸데없는 걱정이죠.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어떻게 리페님을 맘에 안 들어 해요.
언제결혼해: 그러니까요. 아주 시댁에서 예쁨 받을 상인데.
아가씨초코따개: 루스티첼 가에서 맘에 안 차 했으면 안 차 했지. 어떻게 카스틸로 가에서 리페님을 싫어해요.
언니케이크잘자른다: 뭐요? 소공작님이 어디가 어때서 마음에 안 차 해요!
노래천사: 레리커플은 진리입니당
이 통신방에서 사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상주민들이 와글와글 답했다.
‘이 사람들 실생활은 어떻게 하는 거지…….’
통신방에 접속할 때마다 보이는 이름들이었다. 이 고인물에 비하면 집사는 윗물에 스쳐 지나가는 맑은 물 수준이었다.
문제는 이 고인물들의 대답이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삼촌입니다: 아니,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삼촌입니다: 만약에라도 미움 받으면 해결책이라던가.
언제결혼해: 그런 가정 자체가 울 리페에겐 불필요해요.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제가 관상을 볼 줄 아는데
언니케이크잘자른다: 리페님은 시댁에서 이쁨 받다 못해 우쭈쭈 어화둥둥 둥개둥개 받을 상임.
언니케이크잘자른다: 그리고 소공작님과 결혼할 상.
우쭈쭈: 나도 우쭈쭈 잘해줄 수 있는데…….
언제결혼해: 케이크님 진짜 영험하신 듯;;
언제결혼해: 너무 다 사실밖에 없어서 저 소름 돋았잖아요.
다다닥 올라오는 답변에 집사는 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들은 틀렸어.’
명문가 대저택의 집사는 외로운 법이다.
‘나라도 아가씨를 챙겨드려야지.’
그렇게라도 다짐하는 수밖에.
* * *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여 거울 같은 대리석, 사치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절제미를 보이는 장식품들. 열과 각도를 맞춰 인사하는 고용인들에게서는 품격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틈 하나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 완벽이라는 말이 감히 부족하지 않은 대저택.
“카스틸로 부인.”
로비를 지나 다실로 안내된 칼리오페는 이 백악 저택의 주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집사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눈물을 찍 흘렸다.
‘우리 리페 아가씨……. 잘 버티셔야 해요.’
다행히 마리나는 칼리오페를 홀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진 않았다. 하긴, 그건 너무나 유치하고 천박한 방식이었다.
대신 그녀는 카스틸로 저의 위엄을 보여 칼리오페를 압도하려고 마음 먹은 듯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못해 위압적이었다.
일명 ‘네까짓 게 우리 도련님과 어울리기나 해?’작전.
작전명은 집사가 혼자 속으로 붙인 것이었지만, 스스로도 꽤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일 없어 아쉬울 뿐. 역시 명문가 대저택의 집사는 외로운 법이다.
‘마리나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마리나, 이건 너무 과하지 않나?]
며칠 전, 집사는 거대한 라피스라줄리를 통으로 깎아 백금으로 마감한 테이블을 사들이는 마리나를 보고 기겁해서 말려보았다.
[과하다니, 어디가 과해요? 다른 곳도 아니고 대명문이자 곧 황제 되실 도련님께서 거하시는 카스틸로 공작저에서 칼리오페 루스티첼 영애를 맞이하는 거라구요! 이보다 더 해도 과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건…….]
테이블뿐이라면 말을 않겠다.
[마님께서도 카스틸로 가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줘야 한다고 명하셨어요. 철저하게 준비하라고.]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진—]
[집사님.]
마리나가 정색하고 집사를 바라봤다.
[이 일은 마님께서 직접 제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셨으니 집사님은 빠지시죠?]
그때 마리나의 눈은 기묘하리만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박력에 밀린 집사는 그대로 깨갱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리나가 성격이 좀 강하긴 해도 일 처리가 빠릿하고 윗사람에게 깍듯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 결과 오늘 칼리오페와 자그마한 티타임을 갖는데 일반 백작 가의 3년 치 예산을 썼다. 이 다실의 인테리어를 아예 새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는데 도련님 옆방의 인테리어도 다시 했고.’
“만나 뵙고 싶다는 제 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부인.”
감사를 표하는 칼리오페의 말에도 카스틸로 부인은 별 반응 없이 눈썹만 까닥였다. 한술 더 떠 말을 오래 섞기 싫다는 듯 선언했다.
“일단 다과부터 들도록 하지.”
집사는 속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이러면 칼리오페 아가씨는 다과를 다 먹을 때까지 말을 못하시잖아…….’
카스틸로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아에 보석을 박아 넣은 다실의 문—물론 이번에 마리나가 새로 사들인 것이다—이 열리고 십수 명의 하녀들이 이 열로 들어왔다. 손에는 모두 은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엄청난 디저트의 향연.
거대한 라피스라줄리 원석을 통째로 가공해 이음 하나 없는 테이블에 한 입 크기의 쁘띠 디저트를 담은 은식기가 놓였다. 놓는 위치까지 계산해 미리 연습한 것인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반짝이는 금빛 파티클을 담고 있는 우아한 남청색의 원석은 마치 밤하늘처럼 아름다웠고, 그 위에 놓인 은식기는 은하수처럼 보였다.
디저트는 어떤가.
마리나가 이날을 위해 섭외한 파티시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술 정신을 펼친 결과물은 기하학적인 가치마저 있어 보였다. 테이블에 디저트를 세팅한 것뿐인데 이미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칼리오페는 말을 잊은 듯 테이블을 내려다 봤다.
‘그야 그렇겠지…….’
집사는 대저택의 총괄 집사답게 정자세로 있었지만, 속으로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디저트를 접대하는 게 아니었다.
디저트를 이용한 시위였다.
게다가 카스틸로 부인이 다과부터 들자고 했으니 이 수많은 디저트를 끝내기 전엔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환대에 감사드려요. 잘 먹겠습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꿋꿋하게도 웃어 보이며 포크를 들었다.
‘너무 착하셔…….’
그 모습에 집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카스틸로 부인은 눈을 번뜩이며 칼리오페가 포크로 디저트를 집는 것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책잡을 기세였다.
보는 사람도 체할 것 같은데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게 디저트를 뇸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한 파이지를 겹겹이 쌓아 캐러멜 소스와 피스타치오 크림을 번갈아 넣고 위에는 베리류와 초콜릿으로 장식한 미니 밀푀유였다.
‘맛있어!’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훅 커졌다.
달콤한 캐러멜과 고소하면서 짭조름한 피스타치오의 조화가 환상이었다. 거기에 바삭바삭한 파이지에서는 기분 좋은 버터 향이 났다. 저절로 뺨이 말랑하게 풀렸다.
‘그러고 보니 이 집 파티시에가 수준급이었지.’
칼리오페는 새삼 생각했다. 옛날에 처음 이 저택에서 카스틸로 부인과 대면했을 때, 티푸드로 딸기 타르트가 나왔다. 긴장한 와중에도 맛있게 느껴질 정도로 멋진 디저트였다.
오늘 나온 디저트는 모두 한 입 크기라 밀푀유는 아쉬움을 남기고 단번에 사라졌다.
칼리오페의 포크가 다른 접시를 향했다. 이번에는 새콤한 라즈베리와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이 어우러진 제폴라.
“……!”
칼리오페의 포크질이 빨라졌다. 디저트가 하나, 둘 입속으로 사라지는 게 꼭 마법 같았다.
아직 젖살이 남은 소녀의 뺨이 다람쥐처럼 부풀어 올랐다. 입술을 꼭 다문 채 오물거린다.
쁘띠 디저트는 모두 섬세한 맛을 담고 있었고, 순식간에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향긋한 차와 함께 먹으니 그 많다 싶었던 디저트가 순식간에 절반 이상 사라졌다.
‘핫!’
정말로 절반 넘게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오페가 힐끔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디저트를 야무지게 입에 넣었던 칼리오페와 달리 카스틸로 부인은 차만 홀짝이며 뚫어져라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눈치 보인다.
“저…….”
“그만 먹는 건가?”
“네? 아, 아뇨.”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만든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야 하는 법.”
“그렇지요.”
아무 문제도 없었구나 싶어서 칼리오페는 안심하고 생긋 웃었다. 그녀는 새로운 디저트를 집었다.
‘역시 리페 아가씨께선 대범하셔.’
집사는 의연한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먹는 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눈치 주고, 그 때문에 그만 먹으려고 하자 다 먹으라고 으름장 놓는데도 굴하지 않는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 편입니다!’
차마 겉으로 표현하진 못해도 속으로는 그렇게 응원하는 순간이었다.
집사는 눈을 홉떴다.
칼리오페가 포크로 집은 디저트를 카스틸로 부인에게 권하는 게 아닌가! 의외의 반격에 천하의 카스틸로 부인도 놀란 것인지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가 내밀어진 디저트를 바라만 보고 있자 칼리오페가 생글생글 웃으며 권했다.
“진짜 맛있어요.”
집사는 몸을 긴장시켰다. 카스틸로 부인이 분노에 차 일갈하면 그 뒷수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쁘지 않군.”
디저트를 삼킨 카스틸로 부인이 짧게 평했다.
집사도,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도 입을 벌렸다. 일류 고용인답게 업무 중에는 사감을 내보이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이건 정말 초유의 사태였다.
내민 디저트를 받아 드시다니. 그 카스틸로 부인께서.
“그렇죠?”
칼리오페는 활짝 웃으며 눈을 빛냈다.
“모두 다 맛있어서 놀랐어요. 역시 카스틸로 저의 파티시에는 격이 높네요. 일류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예요.”
“흠.”
카스틸로 부인은 별 반응 없었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차만 한 모금 마셨다.
그러나 집사와 하녀들의 동공은 아직까지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까다로운 카스틸로 부인의 입맛을 잘 알고 있었다.
‘단 건 정말 싫어하시는데……!’
밤처럼 은은한 단맛이 나는 것만 어쩌다 한 번 드실 정도다. 이런 류의 디저트는 애초에 드시지도 않을 뿐더러, 우연히 드셔도 눈살을 찌푸리시곤 곧바로 입을 싹 닦으셨다.
집사는 멍하니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했나?’
고용인들의 혼란을 전혀 모르는 칼리오페는 뇸뇸뇸 디저트를 먹으며 카스틸로 부인에게도 권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남은 디저트를 거의 비웠다.
어째서인지 카스틸로 부인은 스스로 디저트를 먹지 않아서 칼리오페가 계속해서 입에 쏙쏙 넣어드렸다. 사실 처음에도 그냥 포크를 가져가실 줄 알았는데 그대로 받아 드셔서 조금 놀랐다.
‘부인께서도 나처럼 익숙하신가.’
아스타레아스도 그렇고, 가족들도 모두 칼리오페에게 뭘 먹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느새 받아먹는 게 습관이 됐다.
‘후후, 레아스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카스틸로 부인께선 워낙 엄격하셔서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역시 가족끼리는 또 다른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입에 먹을 것을 쏙쏙 넣어주는 오순도순한 조손지간이라.
‘귀여워.’
다정한 손자와 알콩달콩 사셨으니 아스타레아스가 황궁으로 들어가면 상심이 크실 터다.
칼리오페는 하나 남은 디저트를 콕 집어 카스틸로 부인에게 양보했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나도 살갑게 대해 드려야지.’
아스타레아스는 제 외조모에게 먹을 것을 이렇게 내민 적도 없고, 카스틸로 부인 역시 손자가 내미는 것을 받아먹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 먹는 디저트 역시 입맛에 맞냐고 물으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수많은 디저트를 깨끗이 비우고, 새로 우린 따뜻한 차로 입가심까지 했다.
이제 대화할 시간이었다.
“명망 높으신 귀부인과 이렇게 티타임을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나랑 티타임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레아스님 때문에 찾아온 것이겠지.”
예의 바르게 운을 떼는 칼리오페에게 카스틸로 부인이 냉정하게 답했다.
“레아스와의 관계가 계기였지만, 저는 예전부터 귀부인을 흠모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카스틸로 부인은 대답 없이 차만 홀짝였다. 항상 굳어있는 표정이라 잘 알 수 없긴 하지만 딱히 싫어 보이진 않았다.
“정치 사교계에서는 물러나신 지 오래되셨지만, 여전히 예술계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계시지요.”
아부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오늘 카스틸로 저를 둘러보고 과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어요. 작은 것 하나에서도 격조가 느껴졌으니까요.”
그 말대로 카스틸로 저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하나하나가 엄청난 값어치를 가진 예술품이었다. 모두 카스틸로 부인의 깊은 심미안을 충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 집이 영애의 마음에 든다는 뜻인가?”
“이 곳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사람도 있나요?”
“즉, 영애의 마음에도 든다는 소리군.”
재차 확인하는 카스틸로 부인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칼리오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카스틸로 부인은 잠시 침묵했다. 생각에 잠겨 검지로 팔걸이를 톡, 톡 두드린다. 그럴 리 없겠지만 조금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카스틸로 부인이 입을 열었다.
“레아스님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겠지.”
“아…….”
“사양할 필요 없어. 난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카스틸로 부인의 엄격한 시선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저, 그게…….”
칼리오페는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저 아스타레아스의 유일한 가족인 외조모와 가깝게 지내고 싶었을 뿐, 딱히 아스타레아스와의 관계에 관한 말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왠지 부끄러웠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그, 그래도 기회가 왔을 때 말씀드리는 게 좋겠지?’
아스타레아스를 키워주신 분께 그와의 교제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샘솟았다. 특히, 프러포즈를 받았으니 더더욱 그러고 싶었다.
‘프러포즈!’
갑자기 생각난 단어에 발갛게 열 오른 뺨이 더 붉게 물들었다. 톡, 건드리면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프러포즈, 결혼, 신혼 여행, 밀월……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응? 영애?”
어지러운 가운데 카스틸로 부인이 재촉하자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이 열렸다. 물론 생각하고 나온 말이 아니었다.
“할머님, 손자분을 제게 주십시오!”
“…….”
“…….”
“…….”
엄청난 정적이 찾아왔다.
카스틸로 부인도, 칼리오페도, 집사를 비롯한 하녀들도 모두 말을 잃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칼리오페의 몸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새빨갰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것도 잠시, 다시 목 아래부터 천천히 빨개져 종래에는 머리꼭지까지 사과처럼 붉어졌다. 머리 위에서 김이 나올 것만 같다.
칼리오페와 달리 뜨거운 차를 마시고 평정을 되찾은 카스틸로 부인이 먼저 싸늘하게 말했다.
“달라니. 레아스님을 루스티첼 가에 데릴사위로 들이겠다는 건가?”
“아, 아니요. 어찌 감히…….”
아스타레아스는 대명문 카스틸로 공작 가의 장손일 뿐만 아니라 선황의 적장자로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데릴사위로 들인다니. 심지어 루스티첼 가는 이미 후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루스티첼 가에서 따로 나와 살겠군.”
“네, 아무래도.”
황궁에 입궁할 테니까.
“식은 언제 올릴 생각이지?”
“네, 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칼리오페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 말씀은…… 허락하신다는 걸까? 방금까지는 별로 안 내켜하시는 것 같았는데?’
두근두근, 당황이 가시고 설렘이 찾아왔다.
칼리오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답했다.
“지금은 대관식만으로도 바쁘니 나중에 올려야지요. 대관식이 끝나도 내사가 안정되고 난 뒤에 준비해서…….”
아스타레아스를 방해할 생각은 절대 절대 없다는 점을 어필했다. 하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에 선을 그었다.
“글쎄……. 이미 결정 난 일, 굳이 미룰 이유를 모르겠구나.”
“네?”
“황궁에 들어가기 전에 식을 올리는 게 좋지 않겠니.”
콜록, 이번에는 정말 사레가 들렸다. 입에 넣은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들릴 수 있다니.
“귀, 귀부인…….”
대관식이 코앞이다. 그런데 언제 식을 올린다는 말인가.
“아, 식 준비가 너무 빠듯하겠구나. 어떤 결혼인데 대강 올릴 수는 없지.”
“그럼요. 너무 이르죠.”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렬한 동의를 표했다.
어쨌거나 카스틸로 부인이 식을 올리라는 말을 철회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흠, 하고 비음을 흘린 카스틸로 부인이 칼리오페를 향해 말했다.
“식은 나중으로 미루고 먼저 카스틸로 저에 들어와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푸흡……!”
정말 상상치도 못한 말에 칼리오페가 먹던 차를 뿜었다. 생전 안 하던 실수를 하필이면 예비 시할머님 앞에서 했지만 이건 정말 불가항력이었다.
“내 말이 그렇게 의외였나?”
카스틸로 부인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그런 문제는 조금 더 신중히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의외가 아닐 수 있나 싶었지만, 일단은 예의를 차려 답했다.
“내 충분히 숙고해 내린 결론이네.”
‘방금 그게요?’
칼리오페는 되묻고 싶은 충동을 애써 삼켰다.
빨리 식을 올리자. 아, 식 준비가 힘들겠네. 흠, 그럼 동거부터하자. 이런 흐름이었던 것 같은데 대체 여기에 숙고의 ‘ㅅ’이라도 있단 말인가.
“결혼하자마자 제국의 황후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는 것보다 사가에서 신혼의 단맛을 보는 게 낫지 않겠나.”
‘신혼의 단맛’이라고 말하는 카스틸로 부인의 눈은 날카롭게 번뜩였고 표정에는 힘이 들어갔다.
집사는 아연했다.
‘그 말은 눈을 번뜩이는 게 아니라 초롱초롱 빛내면서 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칼리오페가 자신처럼 주인 마님의 생각을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이 일었다.
“또 결혼 생활에도 적응이 필요한 법이네. 나중에 식을 올리고 그때 거처를 합치면 황궁과 황후라는 직책에 적응하기에도 벅찰 것이야.”
“네에…….”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집을 합쳐서 미리 결혼 생활에 적응하며 신혼의 단맛을 맛보는 게 좋을 게다.”
“그렇군요…….”
칼리오페는 초점 없이 답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할지 알 수 없으니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어차피 네가 필요한 모든 게 갖춰져 있으니 몸만 오면 된다.”
“하하하.”
“뭐 하면 오늘부터라도 지내도 괜찮아. 방은 준비되어 있으니. 레아스님의 옆방으로.”
카스틸로 부인이 슬그머니 칼리오페의 손등을 매만졌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증손을 보고 싶구나.”
“하하하…… 네에?!”
영혼 없이 웃던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토끼눈이 된 채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분명 지금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바로 옆방이고, 얼마 전 리모델링을 해서 방끼리 연결된 문이 있단다.”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은근했다.
칼리오페는 입을 헤 벌렸다.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지금 자신이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건가?!
“하루라도 빨리.”
대체 뭘 하루라도 빨리, 라는 걸까.
‘저는 정말 모르겠는데요, 할머님!’
“오늘 굳이 루스티첼 저에 돌아갈 필요가 뭐 있니? 어차피 여기서 살게 될 것.”
카스틸로 부인의 눈빛이 맹수처럼 희번덕였다.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깨달아버렸다.
‘진심이셔!’
한 치의 농담도, 과장도, 장난도 없는 순도 백퍼센트의 진심.
‘여, 옆방까지 준비하시고!’
거기다가 방끼리 구멍도 뚫어놨다.
‘이건, 이건……!’
확실히 그것을 위한 그것 아닌가!
화르르륵.
칼리오페의 얼굴이 불에 활활 타올랐다. 분명 장미꽃잎이 있겠지! 그것도 하트 모양으로 하트하트하게 있겠지!
이대로는 안 된다.
정말로 안 된다.
왜 안 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 된다.
‘음, 정말 안 되나?’
머리 한구석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눈앞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살짝 내리뜬 눈, 어둑하게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 속삭이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 그가 속살거릴 때마다 그의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이 자신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얼굴에 몰렸던 열이 코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코피가 날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주문을 외웠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다행히 그녀에게는 한 줌의 이성이 남아있었다.
후하후하, 숨을 가다듬은 칼리오페가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눈빛으로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다행히 칼리오페는 꽤 설득에 자신이 있었다. 진지하게 말하면 카스틸로 부인도 이해할 것이다. 아니, 카스틸로 부인이 아니라 자신부터 이해해야 했지만.
‘이성을 챙기렴, 나야.’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칼리오페는 몸을 바로하고 최대한 예의를 차려 입을 열었다.
“……귀부인께서 지금 제게 하시는 말씀은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고, 물론 저 역시 새겨듣고 싶습니다. 환경이 바뀌는 동시에 황후라는 무거운 관을 쓰게 되는 저를 신경 써주신 점,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혼전동거는—”
“지금 카스틸로 저의 준비가 부족하다는 거니?”
“아, 아뇨! 절대요.”
칼리오페는 펄쩍 뛰었다.
“그럼 문제 없겠구나.”
“저, 카스틸로 저에는 문제는 없지만—”
“역시 문제가 있다는 거군.”
“아니예요!”
뭔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이게 아닌데.’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증손주를 어서 빨리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긴 하셨지만 그것과 별개로 다른 것도 원하시는 듯 했다.
‘왜 레아스와 결혼하는 것보다 이 집에 들이는 것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이시지?’
자신을 바라보는 노부인의 눈에는 어떤 열의와 열망마저 보였다.
* * *
카스틸로 공작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원래도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공작 부인의 취향에 따라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용하다 못해 쥐죽은 듯 고요했다.
모두 이 고택의 주인인 카스틸로 부인의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신 카스틸로 부인의 입에서 나직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거절하고 돌아갔어.”
긴 침묵 끝에 갑작스럽게 나온 말이었지만 대기하고 있던 집사도, 마리나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리나가 앞으로 나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모두 제가 미흡한 탓입니다!”
비통하게 외치는 마리나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있었다. 카스틸로 부인은 그녀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잠시 후 술에 젖은 한숨과 함께 옅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다 내가…….”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님께서는 저를 믿고 모든 준비를 일임하셨는데, 제가 부족해서…….”
기어코 마리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저에 들어올 날만 기다리면서 지난 3년 간 케이크를 자르는 것만 밤낮으로 연마했다.
그런데.
‘내가 망쳐버렸어.’
칼리오페에게 홀 케이크를 잘라주긴커녕 마님까지 실망시켜버렸다.
카스틸로 부인은 달빛을 벗 삼아 황금빛 술이 담긴 술잔을 한 바퀴 돌렸다. 향긋한 향이 공기를 타고 올라오건만 하나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피곤하군. 이만 물러가게.”
마리나는 뭐라 더 말할 듯 입을 열었으나 결국 큭,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곤 일어섰다.
비통해보이는 그녀의 뒤를 집사가 졸졸 따라갔다.
그는 여전히 이 사태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루스티첼 영애에 대한 마님의 마음을 오해했다는 건 알겠다.
도련님의 짝으로 칼리오페 아가씨를 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겠다.
‘알겠는데…….’
두 사람이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황이 정리된 후—도련님이 대관식을 올린 후—에 식을 올리겠다는 건데. 그게 왜 이렇게까지 애통할 일이지?
그걸 정말로 모르겠다.
카스틸로 부인은 정정했고 증손주가 태어나고도 한참을 정정하게 지내실 거다. 집사의 업무 중에는 주인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도 있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마리나는 마님의 생각을 아는 것 같은데…….’
이 저택을 관리하고 마님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총괄 집사로서 하녀보다 마님의 의중을 못 읽는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제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의 심기를 읽는 것이다.
집사는 프로였다.
“마리나, 마님께서 왜 저렇게까지 속상해하시는 줄 알아?”
“네?”
“어차피 빠르든 늦든 도련님과 리페 아가씨께선 결혼하시는 건 똑같잖아. 해봐야 시간의 차이뿐인데.”
“시간의 차이뿐……이라고요.”
“내 생각에도 결혼식은 공들여 준비하는 게 맞아.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드려야지. 그러려면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리고. 혼전에 동거는 구설수에 오르기 쉬워.”
“누가 감히 세상을 구한 리페 아가씨와 황제 폐하가 되시는 도련님을 욕해요.”
“그, 그건 그렇지만 그만큼 귀감이 되셔야…….”
“게다가 두 분은 원래 공인 커플이라 하루라도 빨리 결혼이든 동거든 했으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걸요. 응원했으면 응원했지 욕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다 쳐도, 왜 마님이 기분 나빠하시지?”
“여기까지 말씀드렸는데도 모르시겠어요?”
미라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봐 집사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마리나는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집사님은 비덕이셨죠.”
“비덕?”
“덕후 아닌 사람들이요.”
“나도 리페 아가씨 좋아해. 귀엽고 예쁘시다고 생각해. 가끔 사진 보기도 하고.”
“네, 그게 비덕이라는 거예요.”
마리나가 검지 손가락을 세워 옆으로 살살 흔들었다.
“도련님께서 즉위하신 뒤에 결혼하면 리페 아가씨께서 어디서 지내실까요?”
“그야 황궁에서…….”
“그럼 지금 동거하시면요?”
“여기에…… 설마?!”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친 깨달음에 집사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데릴사위니 뭐니 하며 날카롭게 반응하신 것도 당연히 아스타레아스를 남의 집에 들인다고 생각해서 화내신 줄 알았다.
그런데 애초에 신경 쓰셨던 게…….
‘리페 아가씨의 거처였던 거야?!’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결론에 입이 헤, 벌어졌다. 명문 귀족가의 집사답지 못한 태도였지만 그렇다는 자각도 할 수 없었다.
“제 탓이에요.”
마리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티푸드도 무조건 리페 아가씨 입맛에 맞는 것으로, 한두 개면 다양하지 않으니 여러 가지 종류로 준비했는데 부족했나 봐요.”
그 다채롭다 못해 전투적이기까지 했던 디저트의 향연이 모두 칼리오페를 낚으려는 당근이었다.
“인테리어도 황궁 부럽지 않게,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로 꾸민다고 꾸몄는데…….”
“…….”
집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게 카스틸로 가의 위엄을 바로 보이려는 게 아니라…….’
머리가 아팠다.
“정말 리페 아가씨를 꾀어내려고 그렇게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했어요. 전 안 되나 봐요.”
마리나가 입술을 꾸욱 깨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유혹일 거라고는 생각도 몰랐을걸.’
집사는 마리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네 탓이 아니라……. 마님이 불편하셨던 것일 수도 있어. 나도 마님께서 그렇게 리페 아가씨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티를 내시는데 어떻게 몰라요?”
마리나가 집사의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집사는 억울했다.
“티를 내신다니……. 평소에도 별로 웃지 않으시지만 리페 아가씨 앞에선 더 하신데. 무표정에 눈빛도…….”
“무슨 소리예요! 너무 팬이라서 힘이 들어가 얼굴이 굳어버리는 것뿐이잖아요!”
‘그게 그거였냐!’
집사는 기함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 자신보다 마리나가 마님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막…… 카스틸로 저의 준비가 부족하냐고 화내셨잖아.”
“그건 부족한 게 있으면 말만 하라는 거죠!”
‘그게 어디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납득하지 않는 집사의 얼굴을 보고 마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비덕은 안 돼.”
중얼거리는 혼잣말에 집사가 인상을 썼다. 듣자듣자 하니 너무한 것 아닌가.
“너무 억지 아닌가. 마님께서 얼마나 조리 있게 잘 말씀하시는 분인데. 그걸 그런 식으로 상대가 오해할 수 있게 말씀하실 리 없어.”
“평소에는 그렇죠.”
마리나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집사를 쳐다봤다.
“근데 최애 앞에서는 저절로 굳어버리고 이상한 말만 나온다고요. 이래서 역시…….”
마리나는 아예 혀를 차고 있었다.
“…….”
집사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뭔가 자존심에 가득가득 상처만 났다.
‘나도 리페 아가씨 좋아하는데. 통신석에 사진도 저장해놓은 게 있는데.’
왜 비덕이라면서 벽을 치느냔 말이다.
‘마님을 가장 잘 모신다고 생각했는데…….’
집사실에 도착한 그는 통신석을 꺼내 칼리오페를 검색했다.
수많은 통신방이 뜬다. 신문 기사에 실릴 정도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그 중 가장 사람 수가 많은 방에 들어갔다.
언제결혼해: 왜 리페는 카스틸로 저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언제결혼해: 역시 공작 부인이 어려운 걸까요?
언제결혼해: 세대 차이도 있고.
언제결혼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겠죠.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아니에요, 님.
언니케이크잘자른다: 리페님이 세대 차이 난다고 사람 가리시는 분인가요.
언니케이크잘자른다: 공작 부인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이겠죠.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카스틸로 저에 가셨을 때 리페님의 시중을 든 하녀가 마음에 안 드셨을 확률이 커요.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제대로 시중을 못 들었다거나, 마음에 안 차는 다과를 내놓았거나.
“…….”
잠시 통신방에 올라오는 말을 읽어내린 집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왠지…….’
익숙한 대화 아닌가? 주인마님의 방에 있었을 때 나눴던 대화랑 비슷했다.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그거랑 똑같은데?!’
“설마 마님과 마리나가…….”
집사는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일단 이 통신방을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스스로 잘 표현하지 않는 카스틸로 부인도 여기서는 조금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니.
‘모든 것은 주인마님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모시기 위해서다.’
직업 정신과 충성심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결심이었다.
‘절대 마리나 고게 나보다 마님의 총애를 더 받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야.’
아름다운 결심…….
‘난 안된다던 마리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정말이었다.
투쟁심에 활활 불타오르던 집사는 몰랐다.
교통사고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입덕 계기 역시 예고도 없이 일어나는 사고와 같다는 것을.
설마 이게 입덕의 계기가 될 줄은, 그래서 ‘역시 비덕은 안 돼.’라는 대사를 미래의 본인이 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 *
수많은 인파가 황궁 앞에 몰려들었다.
성벽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공중에는 기구가 둥둥 떠다니며 꽃을 뿌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기구에는 ‘신 황제 폐하 만만세!’라고 써져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드디어 아스타레아스가 신황으로 즉위하는 날이었다.
칼리오페는 가족들과 함께 귀빈석에 앉아있었다. 가족들 옆이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카스틸로 부인이 오른편에 앉아있었다.
‘자리 배치 누가 짠 거지.’
의전 서열로 따졌을 때 루스티첼 가는 이 자리가 아니라 좀 더 뒤에 있어야 했다. 아무리 교제 중이라고 해도 아스타레아스와 약혼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맨 앞줄 정 중앙…….’
조금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아까부터 기자들이 칼리오페를 찰칵찰칵찰칵 찍고 있었다. 누가 보면 칼리오페가 즉위한다고 착각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중된 촬영이었다.
그때, 가자기 저 밑 쪽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
“꺄아아아악!”
“폐하!”
아스타레아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성벽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생기셨어!”
“아아아아악!”
“여기 좀 봐주세요!”
새 황제의 얼굴이 크게 비치자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황제의 관을 쓴 아스타레아스는 원래도 눈부신 미모를 더더욱 빛내고 있었다. 저절로 애국심이 생기는 모습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좌중을 둘러보며 미소 짓자 소란은 더 커졌다. 저러다 실신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도저히 진정될 것 같이 않은 분위기.
하지만 단상에 도착한 아스타레아스가 손을 들자 거짓말처럼 침묵이 찾아왔다. 엄청난 카리스마였다.
모두가 숨을 죽여 새 황제의 말을 기다리고, 이윽고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열렸다.
“오늘 황제로 즉위해, 황제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때 전광판에 아스타레아스를 생중계하고 있던 카메라가 갑자기 방향을 전환했다.
그리고.
“꺄아아아아아!”
갑자기 전광판에 떠오른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칼리오페는 커다란 전광판에 비친 제 얼굴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도 밖에서도 보일 것처럼 거대한 전광판을 가득 메운 것은 칼리오페 자신의 얼굴이었다.
당황한 모습이 그대로 비친다.
‘왜……?’
대관식에 어째서 자신이 중계되고 있단 말인가.
“리페.”
어느새 귀빈석에 다가온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싱긋 웃더니 그대로 칼리오페를 단상으로 데리고 나갔다.
“뭐, 뭐야?”
“리페!”
당황한 가족들이 칼리오페를 불렀지만, 이미 단상 위에 오르고 난 후였다.
“레아스.”
궁벽 아래로 수많은 인파가 내려다보였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꺄아아아아!”
“리페니이이이임!”
“사랑해요—!!”
이게 대관식인지 아니면 칼리오페의 공연인지 헷갈릴 정도로 열렬한 반응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화답은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새 황제가 즉위하는 중요한 대관식 와중 아닌가.
어쩌지, 싶어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자 그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사람을 홀리고 이 상황조차 잊게 만드는 달콤한 미소였다.
천천히, 아스타레아스가 자세를 낮추었다.
그게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칼리오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황제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아스타레아스는 관을 받은 황제였다. 그것도 정통성에 흠결 하나 없는, 고귀하디 고귀한 피의 소유자. 신혈을 짙게 타고나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의 위에 가장 가까운 자였다.
그런데 황제로서 가장 처음한 일이 칼리오페 앞에 무릎 꿇는 일이라니.
대관식에서 관을 받은 황제가 가장 먼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는 엄청나게 중요했다. 그의 처세 전반에 관련된 상징적인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그 중요한 것을 연인의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끝냈다. 주저함이나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히려 기껍게, 너무나 쉽게.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두 연인을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가 벨벳에 감싸인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었다.
뒷켠에서 아스타레아스를 보좌하고 있던 러그윈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결국 하시는 구나…….’
자신은 최선을 다해 말렸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부추긴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인의 앞에서 프러포즈하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거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런 게 로맨틱한가?]
[하아, 그럼요.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사랑을 인정받는 건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에요.]
마리나는 아스타레아스가 어렸을 적부터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로 당연히 하녀들 중에서도 관계가 좋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근거리에서 도련님을 모시는 러그윈보다야 훨씬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칼리오페 이야기를 하며 부쩍 더 친해지더니 급기야…….
‘내 말보다 마리나의 말을 더 들으시다니!’
[네 의견보단 여성의 의견이 더 신빙성이 있지.]
그렇게 말하며 대관식에서 공개 프러포즈를 준비하는 도련님의 모습에 상처 받았다. 그리고 모태솔로로서 커플이 공개적으로 꽁냥대는 것에 또 한 번 상처 받았다.
아스타레아스의 프러포즈는 수많은 모태솔로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도열해있던 의전 기사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아니, 내가 왜 남의 연애를 강제로 시청해야하지? 난 여친도 없는데.’
‘지금 무려 대관식 중이라고.’
‘한 대에 한 번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국가 행사에 대체 무슨…….’
‘대관식은 커플 이벤트가 아니야…….’
아연한 한 편으로 질투심이 퐁퐁 샘솟았다.
‘젠장, 부럽다!’
‘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친 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이미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는 이미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올려다 보았다.
“레이디 칼리오페 루스티첼.”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조금 떨렸다.
상기된 뺨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약간의 긴장.
평소와 달리 넘긴 머리칼 덕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칼리오페는 가슴이 꾸욱 조여들어왔다.
그의 표정,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과 사랑에 빠졌을 때의 모습. 자신을 평생토록 원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의 모습이다.
지금 이 순간 아스타레아스의 모든 것을 죽을 때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리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주변으로 꽃비가 흩날렸다. 향그러운 꽃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아주 오랜 시간, 최악의 비극과 두 번의 삶을 거쳐 비로소.
미래로 나간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칼리오페의 입매가 무너져내렸다. 환히 웃으며 좋다고 말해야 하는데 숨결이 자꾸만 떨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가 입을 열려는 때,
“멋있다!”
저 아래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시발점이 되어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고 싶은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남자다!”
“받아줘!”
“키스! 키스해!”
안 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렸던 신 황제의 즉위다. 원래도 가벼운 흥분 상태였는데 거기에 이런 일까지 벌어지자 들썩거리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칼리오페는 휘둥그레져 사람들을 바라봤다.
와글와글 저마다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전생에서 이맘 때였으면 이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거리는 모두 불타 사라지고,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조차 잦아들었을 터였다.
“네, 좋아요.”
칼리오페가 환하게 웃으며 아스타레아스에게 답했다.
그녀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조금은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서서히 온전한 행복이 퍼져나간다.
그가 칼리오페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그 결정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할게.”
그건 칼리오페에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단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 같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지체하지 않고 칼리오페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새하얀 손등에 붉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각인처럼 자리 잡았다. 칼리오페의 눈동자 색과 꼭 닮은 산호빛 다이아몬드였다.
전광판에 프러포즈링의 모습이 비치자 사람들이 탄성을 흘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너무나 대단한 값어치를 가진, 호화로운 반지였다.
보석을 다루는 세공사부터 사치스러운 취향의 귀족까지 합쳐 그 누구도 산호빛 다이아몬드 중 이 정도로 색이 선명하고 균일한 것을 본 적 없었다. 애초에 이런 빛깔의 다이아몬드 자체가 굉장한 희귀품이었다.
구혼을 받아들인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 칼리오페가 프러포즈링을 낀 왼손을 들어올렸다.
“와아아아아아!”
“잘 어울린다!”
“행복하세요!”
“저는 황녀님이 좋아요!”
“저는 황자님!”
“저는 둘 다!”
“그래, 둘 다로 갑시다!”
왁자지껄한 소리 사이로 2세에 대한 취향을 어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키스으으으!!”
그 아우성을 뚫고 커다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키스를 안 하면 한이라도 맺힐 것 같은 목소리였다.
“키스해! 키스해!”
다른 사람들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키스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키스 스캔들을 불러 일으킨 전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려니 창피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어쨌든 칼리오페 역시 들뜬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기대에 찬 관중들의 함성 역시 하늘을 찌를 듯 커졌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에 칼리오페는 눈을 꾹 감았다.
쪽.
하지만 그의 입술이 닿은 것은 칼리오페의 입술이 아니라 뺨이었다.
“에에에이—”
“우우우우우!”
기대하다가 푸시식 식은 사람들이 야유하며 발을 굴렸다. 본인들이 키스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 보면 전혀 상관 없는 일인데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가 제대로 키스하지 않으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칼리오페는 애써 미소 지었다. 키스를 생중계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조금 그랬다.
‘딱히 아쉬운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타레아스에게서 슬쩍 몸을 떼는데, 강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힘에 칼리오페의 몸이 아스타레아스에게 틈 없이 밀착하는 순간,
“읍……!”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먼저 얽히고 그보다 더 뜨거운 것이 뒤섞였다.
아스타레아스는 끊임없이 칼리오페를 요구하고 원했다. 그녀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때까지.
머릿속이 진탕이 되어 환호성이 멀리서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호흡이 계속 밭아진다. 사람들이 발산하는 흥분과 열기 속에서 키스는 점점 더 짙어지고 농밀해졌다.
길고도 짧은 순간이 지나고 두 입술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살며시 눈을 뜨자 곧장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보였다.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
칼리오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시선을 맞췄다. 이 세상에 꼭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실제로도 두 사람에게는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으니까.
“하아아아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입안에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달달하고 설렜다. 만약 연인이 공개적으로 프러포즈를 한다면 질색할 게 분명한데, 그래도 부러웠다.
권력과 지위, 부와 명예, 얼굴과 몸이 다 되는 남자가 공개 프러포즈를 하니 이렇게나 멋지고 설렐 수가 없었다.
그것도 보통 공개 프러포즈가 아니었다.
무려 대관식에서 프러포즈를 해서 전 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까지 생중계하고 있다.
또 황제로 즉위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연인에게 프러포즈라니. 이건 곧 황제인 그가 가장 소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칼리오페란 뜻이었다. 그걸 말보다도 행동으로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황제의 스케일이었다.
커플짓도 이 정도 스케일이 되니 그냥 멋있다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보긴 매한가지였다. 왠지 저러면 제 연인도 좋아할 거 같고, 자신도 아스타레아스처럼 멋져 보일 것만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굉장한 비극을 몰고 올 착각이었지만…….
황제 커플의 프러포즈 때문에 한동안 제국은 물론 외국에까지 공개 프러포즈가 유행하게 된다. 그 결과 잘 사귀던 커플이 깨지고 솔로 비율이 늘어나는 슬픈 사태가 발생하지만, 아직은 다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모두가 이 세기의 커플이 하는 공개구혼과 승낙에 로맨틱한 기분에 빠져 흥분하고 환호했다.
하지만 이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저 놈이……!”
“감히 우리 사랑스러운 막둥이에게 더러운 주둥이를…….”
“……황가의 성씨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 역사가 뒤바뀔 때가 왔어.”
루스티첼 일가가 각자 살기를 발산하며 낮게 짓씹었다. 눈빛만으로 아스타레아스를 아흔아홉 번 찢어죽이고 육십육 번 불에 태울 기세였다.
“자자, 참으세요, 참으세요.”
“나도 같은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 리페가 싫어할 거야.”
“맞아, 리페가 이상하게 쳐다볼 거라고.”
힐데르트와 유리안이 루스티첼 부부를, 호르세안이 루시우스를, 에피니가 로베르트를 전담마크하며 필사적으로 말렸다.
“리페도 언젠간 결혼해야하고 그 상대로 폐하만 한 분이 없잖아.”
호르세안의 말에 루시우스가 멈칫했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긴 게 그것만큼은 인정하나 싶었다. 하지만 짧은 침묵 끝에 루시우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아니었다.
“리페가 왜 결혼해야하지?”
진심으로 진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게?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우리 가족끼리 살면 돼.”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 우리 모두 리페의 이상형에 부합해. 리페도 한 명보다는 네 명의 이상형과 같이 살고 싶을 거야.”
루시우스의 말에 가족들이 모두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피니는 살짝 차갑게 식은 눈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부인의 공명정대하고 논리적인 부분을 참 존경했는데……. 지금 이상형 운운한 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소리라고 말씀하신건가.’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진지하게 동의하고 있는 루스티첼 일가를 보니 다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고회로에 막둥이밖에 없는 사람들.
“내가 평생 먹여 살릴 거다.”
“나도나도!”
“결혼이라니, 그런 거 할 필요 전혀 없는걸.”
“원래 딸은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했지. 실제 아빠가 있는데 굳이 결혼할 필요가 있나?”
루스티첼 일가는 서로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선을 교환한 그들이 벌떡 일어났다.
결혼할 필요가 하나도 없으니 ‘이 결혼은 무효야!’라고 외칠 순간이었다.
하지만.
“물론 루스티첼 영애가 꼭 결혼할 필요는 없지.”
나직한 카스틸로 부인의 말이 그들의 발걸음을 막았다. 설마 이쪽에서 동의를 해올 줄은 몰랐기에 가족들은 우뚝 멈춰서 뒤돌아봤다.
‘지금 우리 리페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가?’
‘물론 나도 반대하지만!’
‘저쪽에서 거부하니 기분이 이상한데?’
‘우리 리페가 부족하다는 거야? 결혼을 거부할 만큼?’
‘저쪽은 안달내면서 제발 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와달라고 고사를 지내야하는 것 아닌가?’
루스티첼 가족들의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 찾아왔다. 이 결혼을 결사반대하고 있고, 자신들처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데, 저쪽 집안에서 반대하니 그것도 자존심 상했다.
‘우리 리페가 아까운 거지, 황제폐하가 아까운 게 아니거든?!’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카스틸로 부인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하고 있긴 하지만 오래 살아보니 결혼이란 게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루스티첼 일가를 한 명씩 찬찬히 둘러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지만 리페가 하고 싶다고 하지 않나. 우리 레아스님과.”
완전히 승리자의 미소였다.
“꼭 결혼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우리 며늘아기가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이건 분명 자랑이다. 카스틸로 부인은 루스티첼 일가에게 대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며, 며늘…….”
순식간에 혈압을 상승시키는 마법의 단어였다.
“이제 청혼도 했고 우리 며늘아기가 받아들이기까지 했으니 카스틸로 저에서 머물면 되겠군.”
카스틸로 부인의 표정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지만, 뽐내고 있다는 게 전신에서 느껴졌다.
“황후궁은 새로 꾸며야 하니까. 굳이 그 기간 동안 황궁에 있는 다른 별궁을 준비해 들어갈 필요는 없겠지.”
훗, 미소 짓는 카스틸로 부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촤라락 부채를 펼쳐들고 생긋 웃었다.
“어머어머, 귀부인도 차암. 식을 올리기도 전에 무슨 들어가고 말고를 말씀하세요.”
사교계에서 그 누구도 카스틸로 부인의 말에 전면으로 반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루스티첼 일가는 눈에 막둥이 외엔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부인 말이 옳소. 고작해야 프러포즈 아니오.”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죠.”
“약혼도 하다보면 깨지기 마련인데 무슨 프러포즈했다고 집을 옮겨요. 이런 건 그냥 통신석으로 ‘헤어져’ 한 줄 보내고 끝내도 되는 수준인데.”
진짜 통신석으로 ‘헤어져’ 한 줄 보내고 프러포즈를 없던 일로 만들면 욕먹을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네 명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그 대단한 카스틸로 부인이 상대였지만, 루스티첼 가는 절대 밀리지 않았다. 밀리긴커녕 틈만 보이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칼리오페를 카스틸로 저에 들이겠다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은 카스틸로 부인 역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대치하는 그들 사이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듯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뭐 양쪽 다 진심으로 심각하게 다투는 건 알겠는데 주변 사람 좀 생각해줄래요.’
귀빈석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냥 자신들은 새 황제를 즉위를 보러왔을 뿐인데 왜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있게 되는지 모르겠다.
무려 대관식을 커플 이벤트로 쓰는 황제는 차라리 나았다. 솔직히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청혼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 역시 환호하고 소리 지르고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있어야지.’
맨 앞 한 가운데서 살기를 뿜어내는 루스티첼 일가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러고 있어도 분위기가 가라앉을 텐데 무려 소드 마스터 3명이서 사방으로 살기를 흩뿌리고 있다.
귀족이라는 죄로 귀빈석에 앉은 사람들은 하얗게 굳은 채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루스티첼 일가가 프러포즈를 파투내러 갈 때는 차라리 응원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래, 뭘 하든 좋으니 제발 여기서 멀어지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그런데 이제는 카스틸로 부인까지 가세해 분위기를 더 초토화시키고 있다. 차라리 저 밑 인파에 파묻혀 있는 게 훨씬 행복하고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처음엔 분명 프러포즈를 응원하고 싶었고, 군중들과 함께 키스를 연호하고 싶기도 했는데 이젠 다 필요 없다.
오직 한 가지.
‘……집에 가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