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샘과 은잔
“이런 데 샘이 있었다니…….”
누군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동감했다.
제도 근교의 자그마한 숲속. 결사대는 그 안에 자리 잡은 샘 앞에 서 있었다.
찰랑찰랑 맑은 물이 고여 흔들린다. 정겹고 목가적인 광경이었지만 신화 속 비밀이 담겨져 있는 위대한 유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루시우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샘으로 손을 뻗었다.
“에테르가 느껴지진 않는데.”
보이는 것만큼이나 알맹이 역시 평범한 샘이었다.
“잘못 찾아온 건가?”
“허탕 치게 하려고 그쪽에서 일부러 거짓된 정보를 남겼다든가…….”
그때 칼리오페가 앞으로 나왔다.
샘에서는 분명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익숙한 기운이 주변에서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공기에 녹아든 에테르 파동이 미묘하게 다른 것을 느꼈다. 불 근처에서 공기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통 대기 중에 안정되어있는 에테르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분명 뭔가가 있어.’
하지만 무언가가 막혀 있는 것처럼 튕겨져 나와 그 힘의 근원을 정확하게 알 순 없었다.
칼리오페는 루시우스 옆에 앉아 샘으로 손을 뻗었다.
“……?!”
그녀의 손이 샘에 닿기 직전, 샘물이 작게 소용돌이치며 표면이 움푹해졌다. 칼리오페가 손을 다른 쪽으로 움직이자 소용돌이 역시 따라왔다.
“이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침음을 삼켰다.
칼리오페가 소용돌이 안쪽을 향해 손을 넣자 소용돌이가 점점 더 커지며 깊어졌다.
손을 거둔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맞게 찾아온 것 같네요.”
칼리오페는 이 친숙한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정령.”
분명 정령의 기척이었다.
그와 동시에 물보라가 일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수정처럼 물방울이 허공에서 반짝였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꼭 꺄르르, 웃는 목소리 같았다.
[만나서 기뻐, 칼리오페 루스티첼.]
샘물에서 물빛 정령이 솟아 올랐다. 여태 봐왔던 정령들과 달리 그녀는 인간형이었다. 다만 크기가 보통 사람의 반 정도로 작긴 했다. 칼리오페는 언뜻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워요.”
물의 정령은 신이 난 듯 칼리오페 주변을 빠르게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물이 꼬리처럼 궤적을 남기며 반짝반짝 빛났다.
“에테르가 고인 샘으로 가고 싶은데 방법을 아시나요?”
[응, 알아.]
칼리오페의 얼굴 앞에서 멈춘 물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가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비스 신의 증표가 있으면 돼. 작은 돌이야.]
당연하지만 그런 증표는 칼리오페에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대신관은 가지고 있겠지.’
“그 증표가 없으면요?”
[못 들어가.]
정령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이거든.]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잠시 풀어졌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날카롭게 긴장했다. 어느 급 정도의 정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령과 싸우는 것은 분명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할 터였다.
“증표가 없으면 죽인다고요?”
[응, 비스 신과의 계약으로 나는 지난 수천 년간 샘을 지켜왔어.]
그 말에 하일레나는 문득 신화 속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났다.
“샘물 안에 웅크린 물뱀…….”
[맞아. 그게 나야.]
정령이 웃었다. 참방참방 물장구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사람들의 안색이 굳었다. 무려 신이 자신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안배한 문지기였다. 대정령은 아니더라도 얼마나 강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뱀이실 줄 알았는데.”
칼리오페는 신기하다는 듯 물의 정령을 보며 말했다.
[응, 뱀이야. 이건…… 너무 오랫동안 계약에 얽매여 있다 보니 계약자의 영향을 받아 모습이 점점 변했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비스 신의 형상과 비슷해졌다는 말인 것 같았다.
[좀 실망했어? 별로야?]
정령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요. 예뻐요.”
[다행이다!]
칼리오페는 그런 정령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정령이 빙글빙글 돌았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제가 샘에 가겠다고 해도 절 죽이실 거예요?”
[어?]
정령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설마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물이 훅 튀어 올랐다.
칼리오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설마 미인계를 쓰게 될 줄이야.’
상대가 사람이었다면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정령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정령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정령이 아니니 정확하게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령은 에테르를 주관하며 에테르는 정령의 권한이다. 정령들이 에테르를 다루는 칼리오페를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피가 아니라 에테르로 이어진 관계였다. 자신의 핏줄이면서 자신들과 달리 유한한 생을 사는, 유일무이한 존재.
정령들이 칼리오페를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들에게 본능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나를 죽일 건가요?”
칼리오페가 재차 물었다.
당황한 정령이 빠르게 칼리오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너무해. 너무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널 해칠 리가 없잖아! 나를 그렇게 나쁜 존재로 본 거야? 인간들은 뱀을 싫어한다고 들었어! 내가 뱀이라서 그런 거야?]
“저는 뱀 좋아해요.”
그 말에 샘에서 물덩이가 팔짝 뛰어올랐다. 쏴아아아, 분수처럼 물이 흩어져 내렸다.
[정말?]
“네.”
사실 딱히 싫어하는 게 없었다. 뱀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긴 하지만, 눈앞의 정령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조, 좋아. 들여 보내줄게.]
그 말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 쉽게?’
다행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쉬웠다.
하지만 루스티첼 일가는 당연하다는 듯 자랑스레 콧김을 뿜었다.
‘과연 내 딸!’
‘내 동생이 좀 사랑스러워야지.’
‘저 정령보다 내가 더 리페 좋아하는데! 나도 리페한테 좋다는 말 듣고 싶어!’
로베르트에게는 매일 들어도 부족한 말이었다.
어쨌거나 가족들은 막둥이가 대정령조차 함락(?)시켰으니 그보다 지위가 낮은 정령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아스타레아스는 어쩐지 차가운 눈으로 정령을 응시했다.
[비스 신의 증표는 없지만 네 영혼은 이미 한 번 비스 신의 세례를 받은 적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정령이 계약을 어기는 건 아니라며 핑계를 댔다.
칼리오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전생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칼리오페는 회귀한 후로 단 한 번도 좋은 마음으로 신전에 간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경연 때문에 간 게 처음 간 거였다. 당연히 신앙심은 없는 것을 넘어 마이너스였다.
그런데.
“제가 비스의 세례를 받았다고요?”
[응, 그것도 영혼에 완전히 각인될 정도로 특별하게.]
“착각을—”
[그 축복을 증표 대신 삼을 거야.]
정령의 말에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착각을 바로 잡으면 샘에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내게도 들려줘.]
솟구쳐 오른 정령이 칼리오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노래.]
칼리오페는 무심코 생각했다.
‘정령들의 취향은 참 하나같구나.’
정령이 몹시 기대하는 얼굴이었기에 칼리오페의 입술에도 미소가 우러나왔다.
“그럼 짧게…….”
안 그래도 샘에 가기 전 에테르를 생성해 사람들의 힘을 가득 채워주고 싶었다.
칼리오페의 노랫가락이 바람을 울려 퍼진다.
숲이 기분 좋게 사르락 웃음소리를 내고 햇빛이 화답하듯 칼리오페를 비췄다. 사람들은 순간 상황도 잊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따뜻한 에테르야.]
노래가 끝난 후, 정령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주변에 가득 찬 에테르에 사람들이 각자 오러와 마나, 신성력을 축적했다.
“엄청난걸…….”
공기 중에 흐르는 에테르를 정제할 필요 없어서 그런지 한순간에 힘이 축적됐다. 이를 위해 항상 몇 시간 동안 명상이나 기도를 하던 사람들로서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에테르의 질 때문인지 축적된 힘은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결전을 앞두고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니 당연히 사기가 올라갔다.
에테르 사이를 헤엄치듯 가르던 정령이 샘 위에 자리 잡았다. 그와 동시에 샘물에 파동이 일며 번쩍이는 빛이 났다. 작게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기묘한 형태를 이루는데, 그 중앙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거울처럼 잠잠한 샘 중앙은 하늘 대신 다른 것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돼.]
정령이 물속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가운 물방울이 조심스레 칼리오페의 뺨을 스쳤다.
[만나서 기뻤어. 물의 인내가 함께하길.]
* * *
갑자기 느껴지는 위화감에 비스 대신관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이 열렸어.’
증표는 분명 자신에게 있는데 어째서 문이 열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해봐야 무의미하다. 이미 침입자가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이 안에 병력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다른 누군가가 샘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황제의 강박증 덕분이었다.
황제는 지난 몇 년간 수차례에 걸쳐 상당수의 군사력을 샘으로 이동시켰다.
‘어디서 온 것들인지 몰라도 단번에— 응?’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침입자를 본 대신관이 눈을 홉떴다.
‘대체 어떻게 이 정도의 병력이…….’
예상을 훨씬 웃도는 침입자의 수에 당황했다.
‘이래서야 황제를 제도에 내보낸 이유가…….’
아스타레아스를 신황으로 추대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고 황제를 밖에 내보냈다. 그가 황위에 오르면 군부를 통솔할 전권을 가지게 되니 그걸 막기 위해서였다.
귀족들의 사병에는 제한이 있으니 아예 여러 귀족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대놓고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상대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내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삶을 생각하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터. 하물며 영지도 아니고 제도에 주둔할 수 있는 귀족의 병력이란 빤하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파도가 끊임없이 물결쳤다.
대체 이게 어찌 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크리스탈을 보던 대신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루스티첼 가에서 샘 수색을 나갔다가 전사했다는 자의 얼굴이 보였다.
‘저놈들이 다 살아 있었구나!’
전사했다고 처리하면 자연스럽게 종적을 감출 수 있다. 그런 자들을 몰래 사병으로 키운 것이다. 황제도, 대신관도 거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제 살을 깎아 먹는다고 비웃었다.
그러니 얼마나 손쉬웠을까!
그런 줄도 모르고 루스티첼 가를 멍청하다 바보 취급했는데 정작 놀아난 사람은 자신들이었다.
이를 가는 대신관의 눈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선명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밤하늘을 그대로 잘라 붙인 것 같은 남보랏빛이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거의 직감적으로 느꼈다. 자신과 황제를 완전히 속인 계획이 저 영악한 계집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아니면 그런 계획을 세울 사람이 없다.
‘아직 이쪽이 수적으로는 우세해!’
저쪽의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쪽이 많았다. 애초에 황제가 운용할 수 있는 병력과 귀족이 운용할 수 있는 병력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감히 이 나를 능멸해?”
칼리오페를 노려보는 대신관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다 죽여라! 저 계집 눈에서 피눈물이 나도록 모두 죽여!”
“우아아아아아아!”
황제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침입자를 향해 돌격했다.
그간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갇혀있다시피 지냈는데 드디어 그 이유를 찾았다. 심지어 이길 승산이 분명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간 좀이 쑤셨던 만큼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그때.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정확히 황제군 바로 앞에 번쩍이는 섬광이 내리꽂히고 자욱한 안개와 함께 땅이 진동했다.
먼지가 가라앉자 붉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채 늠름하게 백마 위에 올라탄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저, 적룡기사단장?!”
칸테나 부인이 고삐를 당기자 화답하듯 말이 울었다. 그녀는 몇 년 전 부단장에서 단장으로 승진했다.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방금 전 폭발에 휘말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으리라.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들던 자들은 예상과 다른 전개에 움츠러들었다.
칸테나 부인이 만든 틈을 타 결사대가 황제군에게 돌진했다. 양측 모두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압도적인 힘을 보여 빠르게 상대를 꺾는 게 최선이었다.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마라!”
루스티첼 백작의 호령이 날붙이가 부딪치며 자아내는 곡 사이로 울려 퍼졌다.
루시우스와 호르세안의 검 끝에서 오러가 피어올랐다. 얼음처럼 고요하고 냉철한 루시우스의 검이 잔혹하리만치 정확하게 움직였고, 자유자재로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호르세안의 검이 능란하게 상대를 유린했다.
로베르트는 아예 말에서 뛰어내려 적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스스로 이점을 버렸으나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피니가 붉은 오러와 함께 군마를 몰고 질주한 자리에는 사람이 남지 않았다. 그녀는 멀리 가지 않고 일정 반경 안에서만 움직였다. 칼리오페는 에피니가 유리안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항상 틱틱거리지만 에피니만큼 정이 많은 사람이 없다.
유리안은 걱정과 달리 침착하게 한 명, 한 명 차근히 적의 수를 줄여갔다. 손속에 사정이 없고 속도가 빨라 모르는 사람이 그를 보면 사람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일에 숙련되었다고 느낄 정도였다.
“리페.”
칼리오페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이 난전 가운데에서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적 주세요.”
그가 속삭였다. 주변이 시끄러워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아스타레아스가 하는 말이라면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렸다.
“이 상황에요?”
칼리오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지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말 위에 앉아있던 그가 둥실 떠올라 칼리오페의 앞에 다가왔다.
“주세요, 내 부적.”
그가 그렇게 조르자 칼리오페는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잠시 주변을 슬쩍 살핀 그녀는 그가 “응?” 하고 재촉하자 에잇, 하고 눈을 꾹 감았다.
쪽.
“무, 무운을 빌게요.”
발개진 칼리오페가 작게 행운을 빌었다.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환한 웃음이 그의 얼굴을 물들인다.
“나 지금이라면 상대가 신이어도 자신 있어요.”
그 말을 남기고 아스타레아스가 적군 쪽으로 사라졌다. 칼리오페는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방어막을 보다가 픽 웃었다.
뽀뽀 한 번에 신에게 맞설 수 있다니.
‘너무 값이 싼 것 아닌가요.’
* * *
우지끈-
황제군 병사들은 갑자기 들린 둔탁한 소리에 멈칫했다. 이내 왜 그런 소리가 난 건지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지, 지, 지금 검날을 빠갠 거야? 손으로?!’
믿기지 않는 눈으로 오들오들 떨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물소처럼 커다란 루스티첼 백작이 지옥에서 막 올라온 악마처럼 흉흉한 기세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러가 깃든 그의 손에서 조각난 검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히이이익!’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루스티첼 백작과 눈이 마주친 병사가 오들오들 떨었다.
루스티첼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로베르트와 루시우스, 에피니와 유리안을 비롯해 칸테나 부인과 호르세안까지 어쩐지 기세가 맹렬해졌다.
‘가, 갑자기 왜?!’
안 그래도 버거운 상대였다.
그런데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건지 갑자기 광폭화라도 한 것처럼 험악하고 흉흉해졌다. 그들의 공격은 적을 향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살기는 아군인 아스타레아스를 향하는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이겠지만…….’
정작 그 살기를 받는 아스타레아스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유자적한 미소를 매끄러운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천천히 그의 손이 움직인다. 허공에 빛이 글자를 수놓고,
콰아아아아앙!
그 여유로운 움직임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허공을 찢고 땅을 갈랐다. 아군마저도 두려움을 느껴 한순간 동요할 정도였다.
그 두려움은 적군의 싸울 의지를 빼앗고, 아군에게는 경외심이 되어 투지에 기름을 부었다.
“와아아아아!”
결사대가 움츠러든 적군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비록 황제군보다 수는 적었지만 결사대는 한 명 한 명이 정예였다. 그들은 대다수가 칼리오페가 소유한 살롱 스티그마에서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은 사람들이었다. 그 뒤로 오렌과 로한의 신관까지 협력해 계속해 자그마한 부상도 신성력으로 치유하니 막을 자가 없었다.
오러도, 마나도, 신성력도 칼리오페의 에테르로 가득 채웠기에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황제군은 적이 침입했기에 의무적으로 방어할 뿐, 왜 싸우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몰랐다. 자신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무엇을 지키는지, 왜 적이 침입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에 반해 결사대는 폭군을 물리치고 제국을, 사람들을 구명한다는 사명을 띠고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의지가 달랐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흘러도 그들의 눈은 순수한 투지와 열망으로 뜨겁게 빛났다.
그들의 시선은 적 너머,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아…….’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귀를 먹먹히 채우는 함성 속에서 칼리오페는 가슴이 벅찬 것을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생에서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스티그마를 손에 넣고 재능 있는 자들에게 개방했고, 그 결과는 전생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 모두 최고의 기사와 마법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한 몸을 희생하고 있다.
황제가 영생을 얻어 신처럼 이 나라에 군림해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더 나은 미래를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두들……!’
칼리오페는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할 수 있어!’
사람들의 염원과 노력이 만들어낸 승기가 확실하게 비쳐들었다.
이미 황제군의 중앙은 훤하게 뚫렸다.
“황제를 찾아라!”
어느 정도 전투가 정리되자 무의미한 희생을 내지 않기 위해 결사대는 황제를 최우선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군의 저 뒤쪽, 마치 자신을 불렀냐는 듯이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
루스티첼 백작이 황제를 향해 몸을 날리고, 아스타레아스가 마나로 만든 창이 엄호하듯 그 뒤를 따랐다.
황제의 몸은 당장이라도 루스티첼 백작의 검과 마나의 창에 찢길 것 같았다.
하지만.
채앵-! 콰앙!
루스티첼 백작이 황제에게 도달하기 전, 그의 검이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아스타레아스의 마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가 얼마나 많이 담겼는지 가로막힌 것만으로도 폭발이 일었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흔들렸다. 두 명이었다.
지척 거리에서 상대를 확인한 루스티첼 백작의 동공이 훅 좁아졌다.
“비오렌…….”
루스티첼 백작의 검을 막은 자는 일전 루스티첼 백작을 급습한 소드 마스터, 비오렌이었다.
연기가 가라앉고 아스타레아스의 마법을 막은 자 역시 얼굴이 드러났다.
“스벤.”
그 역시 비오렌과 함께 루스티첼 백작을 공격했던 소드 마스터였다.
루스티첼 백작의 미간이 패였다.
“분명 죽었을 텐데.”
두 사람 모두 그날 죽었을 터였다. 루스티첼 백작은 둘의 심장이 멈춘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아니, 사실 심장이 멈춘 것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루스티첼 백작의 마지막 일격은 그들의 육신을 성히 남겨두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그 마지막 일격이 아니었더라도, 스벤은 분명 왼팔을 잃었었다. 하지만 스벤의 왼팔은 지금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루스티첼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황제도 그렇고.’
“망자를 살려낸 건가.”
루스티첼 백작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천둥처럼 사람들의 머리를 강타했다.
“망자를 살려내……?”
“그럼…….”
아무리 황제를 죽여도 다시 살아난다면 황제의 음모를 막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미 불로불사가 진행된 것인가?
전투에 임한 후 처음으로, 결사대의 의지가 꺾였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죽음이 무의미한 것은 두려웠다.
죽음을 불사르고 황제를 저지해도 다시 살아나 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황제 앞에 자신들의 시체가 쌓이고 쌓일 뿐이다.
“괜찮아요.”
그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처럼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미소였다.
“껍데기만 살려냈을 뿐이에요.”
칼리오페는 유심히 황제를 바라봤다.
저번에 황제가 자신을 공격했을 때,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때 황제는 전혀 평소 같지 않았다.
황제가 엄청나게 뛰어난 지략가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멍청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에서 황제가 자신을 공격했던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황궁에 입궁하는 게 우선이고, 못해도 대중 앞에서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가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게 나았다. 하지만 황제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칼리오페의 이름만 부르짖으며 공격했다.
그 결과 황제에 대한 여론은 더 악화됐고, 칼리오페를 향한 여론은 더 좋아지기만 했다.
호르세안의 배신과 기습에 아무리 분노했어도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그 정도 기간이 지나면 화가 가라앉고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기 마련이다.
‘이성을 잃은 게 아니라, 없었다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칼리오페는 옷에 감싸인 황제의 팔 안쪽이 기묘하게 변한 것을 소매 사이로 발견했다.
아스타레아스가 만든 화상 자국과 달랐다. 오히려-
‘부패한 자국과 비슷했어.’
하지만 찰나의 순간 스치듯 본 것뿐이라 확신할 수 없어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점점 더 아귀가 맞는 것 같았다. 황제가 진짜 살아난 것이라면 전투하는 내내 이렇게 조용했을 리가 없다.
‘아니, 그전에 이미 예전에 황궁으로 귀환해 반란자를 토벌했겠지.’
이쪽이 움직이길 기다려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더라도 결사대가 습격한 순간 추가적으로 군대가 움직였을 것이다.
‘뒤를 치는 게 효과적이니까.’
하지만 황제군이 이렇게 열세에 몰려도 원래부터 샘에 있던 병력 외에 증원은 없었다.
칼리오페는 거의 확신했다.
아니, 설령 사실과 다르더라도 그렇게 말해야 했다. 사람들의 동요를 가라앉혀야 하니까.
‘반박당해도, 눈앞에서 황제가 몇 번이고 살아나더라도 그렇게 믿고 생각해야 해!’
그래서 칼리오페는 더더욱 당당하게 미소를 지었다.
“젠장, 또 어떻게 안 거야!”
대신관은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상황을 보며 이를 갈았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저 계집은 사사건건 방해였다.
‘역시 저번에 불완전한 상태에서 황제를 내보낸 게 원인인가…….’
황제와 접촉했으니 그때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시체를 움직이는 사술…….”
“그런 건 오래된 고서에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디바인 크리스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대신관은 초조함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이 사술의 시전자가 있을 것이다.”
아스타레아스가 단언했다.
투명한 크리스탈 안에 푸른 눈동자가 비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대신관은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것 같다고 느꼈다.
“시전자를 죽이면 시체는 다시 재로 돌아갈 터.”
그 말이 대신관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시전자, 라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전 대신관인 마르멜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꿰찬 후 이 모든 일은 주도한 사람. 대신관 타라손.
“그러니까 타라손을 죽이면 된다는 말이군.”
루스티첼 백작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버려진 눈동자가 짙은 살기를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그의 검이 자신을 가로막은 비오렌의 몸을 갈랐다.
되살아난 시체에서 검붉은 피가 꼭 허공에 잎을 틔운 난초처럼 긴 궤적을 그렸다.
덜커덩!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뒤로 디바인 크리스탈로부터 물러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쓰러지는 비오렌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샘에 주둔하고 있던 그 많은 병력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던가.
압도적이었던 적의 공세.
대신관은 그들이 자신을 찾아내 자신의 가슴을 가르고 아직 펄떡이는 심장을 꺼내는 것을 손쉽게 그릴 수 있었다.
처음 황제의 몸을 회수했을 때가 생각났다.
황제의 몸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리고 꺾여있었다. 말 그대로 성한 부분은 없었다.
극심한 화상에 껍질이 벗겨진 채 진물과 핏물이 엉켜 굳은 부분도 있었고, 아예 새까만 고깃덩어리처럼 탄 부분도 있었다. 반쯤 녹아내렸던 얼굴은 황제의 생전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대신관은 제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자신의 얼굴이 그렇게 녹아내리는 장면이 뇌리를 채웠다.
“아,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주저앉은 채 고개를 실성한 사람처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전 대신관 마르멜의 주도하에 타라손은 아무런 감흥 없이 소녀들을 고문했다. 그저 위에서 시키니 따랐다고 하기엔 그는 분명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즐겼다.
불에 달군 인두를 어린 몸에 가져다 댈 때는 비열하게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냥 살을 지지는 게 아니라 그림 그리듯 손을 움직였다.
웃는 얼굴, 타라손의 이름자 같은 것들이 소녀들의 몸에 낙인처럼 흉측하게 남았다.
울부짖을 힘도 없어 하얗게 메말라 바스러져 가는 타인의 얼굴. 그런 것은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대신관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턱 끝으로 손쉽게 살인을 계획했다. 서슴없이 죽이라 명했고, 제 아랫사람이 죽더라도 안타까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임무를 실패했다며 멍청하다 화를 냈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단 한 번도 자신의 목숨을 걸어본 적 없다.
지금 이 순간, 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하니 벌레처럼 동요하며 몸을 떨었다. 이 엄청난 짓을 벌인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 그랬다.
마지막 경연에서 칼리오페가 대정령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를 소환해내고 성녀에 대한 것이 까발려졌을 때.
아스타레아스의 마법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순간에도 지금처럼 굴었다. 주저앉은 채 죽고 싶지 않다며 미친 사람처럼 중얼중얼거리다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그를 놀리듯 아스타레아스의 마법이 코앞에서 멈췄고, 그때 이미 대신관의 바지춤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눈앞에서 멈춘 마법에 그는 땅을 짚은 손바닥으로 제가 싼 소변을 첨벙대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그날도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땐 칼리오페를 ‘순교’시키겠다며 비웃음 흘렸더랬다. 타인의 목숨은 파리 취급하며 자신을 향한 위협 앞에서는 한없이 추잡해지는, 졸렬한 사람.
기질로 따지자면 전 대신관이었던 마르멜보다도 훨씬 못한 자였다.
“어, 어떻게……. 무, 뭘 해야…….”
비오렌에 이어 스벤까지 무너져내렸다. 그래도 생전에 소드 마스터였던 만큼 더 벼텼어야 했지만, 시전자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동요하는 바람에 움직임이 둔해졌다.
흉흉한 기세로 대신관을 찾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 주변을 둘러보던 대신관의 눈에 긴 로브를 입은 신관이 보였다.
“데, 데우소!”
대신관이 허겁지겁 데우소의 긴 로브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떻게든 해 봐! 자넨 똑똑하잖나! 이 상황을 어서 해결해!”
“그렇게 말씀하셔도…….”
데우소는 난감한 얼굴로 대신관을 내려다봤다.
“내, 내가 몸을 숨길 때까지만이라도— 아니, 네가 내 행세를 하도록 해!”
“제가 어떻게 감히 대신관님의 행세를 합니까. 게다가 저들도 대신관님의 얼굴을 아는데…….”
속을 리가 없었다.
대신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데우소의 멱살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무슨 수라도 쓰란 말이야! 어떤 희생을 치러도 상관 없다! 살아남은 황제군을 다 죽이는 거라도 상관 없어!”
“다 죽여도 상관 없다니…….”
데우소가 아연하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대신관은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어서 말해!”
말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그런 방법은 없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데우소는 재차 확인했다.
“정말 어떤 희생을 치러도 상관 없습니까?”
역시 방법이 있다.
벌게진 대신관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비죽 입꼬리가 올라간다.
“상관 없다.”
천천히, 주저하는 데우소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면—”
* * *
오싹.
칼리오페는 등 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불길한 느낌이 온몸을 진득하게 휘감았다.
‘에테르가…….’
그녀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른 사람들 역시 무언가를 감지했다. 에테르의 영향을 받는 오러와 마나, 신성력이 태풍을 만난 파도처럼 거칠게 일렁였다.
“조심하세요!”
칼리오페의 외침과 동시에 죽었던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나 비오렌처럼 겉모습이 치유되지 않고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팔이 잘린 사람은 팔이 잘린 채로, 배가 꿰뚫린 사람은 꿰뚫린 대로 비척비척 일어난다.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무릎관절부터 뚜둑 움직여 땅에 발을 디디더니, 그다음엔 골반이 수직으로 서고, 그 후에 어깨가 서고 마지막에야 젖혀져 있던 머리가 똑바로 자리 잡았다.
끔찍하다는 말라도 부족한 광경에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자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다니…….”
비록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을 맞대고 싸웠지만 고인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였다.
“이런 게…… 정말로 대신관이 하는 짓이라고?”
예전부터 신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간악무도하다곤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아예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것 아닌가.
똑바로 선 시체들이 하얗게 빈 눈으로 결사대를 바라봤다.
그 순간,
“으악!”
최전선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시체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시체라고 해도 인간이 인간의 육체를 물어뜯는 모습은 지독했다.
몸에서 끼리릭 소리가 날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던 것과 달리 시체들은 맹수처럼 날렵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재빠르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게걸스러웠다.
“신관분들!”
칼리오페가 저도 모르게 넋 놓고 있던 신관들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오렌과 로한의 신관들이 빠르게 신성력을 피워올렸다.
부상 당한 사람들이 빠르게 치유되기 시작했다. 시체들이 움직이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하나하나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루스티첼 백작과 칸테나 부인의 지휘 아래 기사와 마법사들은 빠르게 대열을 정비하고 공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시체의 공격은 야생동물처럼 빠르긴 했지만, 이성이 없는 만큼 단조로웠다.
이내 사람들은 역공하며 형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으아아악!”
“크흑…….”
신관들이 치유를 해줘도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체력을 잃는 사람들과 달리 시체들은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지칠 줄도 몰랐다.
팔을 잘라내도, 심지어 가슴을 꿰뚫어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순간이나마 주춤거리지도 않는다.
“끝이 없어!”
“이대로 가다간 우리가 당한다……!”
“어서 시전자를 찾아내 죽여야 해!”
시전자가 사라지면 이들 역시 평온히 눈 감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신관은 대체 어디에 숨은 것인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장 최악인 건 시간이 지날수록 시체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살아있던 황제군은 이 초유의 사태에 질려 혼비백산하다가 빠르게 사냥당했다.
결사대 중에서도 전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명감을 품고 명예롭게 전사한 동료들이 죽어서 눈도 감지 못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제게 달려든다. 정의로울수록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거기에 되살아난 시체를 쓰러트려도 다시 일어났다. 다리를 베어내도 다리가 없는 채로, 머리를 잘라내도 머리가 없는 채로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지쳐갔다.
결전에 나서기 직전, 오러와 마나와 신성력을 가득 채우긴 했지만 계속되는 전투에 이마저도 고갈되기 시작했다.
시체가 된 동료의 몸에 몇 번이고 치명상을 입히며 몸이 지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마저 꺾였다.
점점 정신이 어둠에 좀먹힌다.
말 그대로 지옥이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이 패색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두운 밤의 장막을 뚫고 빛나는 새벽별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썩은 곰팡이처럼 검은 얼룩에 잠식되어가던 영혼이 따스한 빛에 물든다.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칼리오페의 노래가 정신에 스며들었다.
희망의 노래였다.
‘얼마나.’
얼마나 강한 것일까.
이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란.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그것을 제 손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빛나던 미래마저 보이지 않았다. 온 몸에 기름칠을 하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기분이다.
가만히 있으면 추락하고, 힘겹게 발버둥 쳐봐야 제자리.
어떻게든 버텨 한 발자국 올라가면 까마득한 위에서부터 다시 기름 덩어리가 흘러내린다.
밀려오는 시신들을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는다. 저쪽은 계속해서 수가 늘어날 것이고, 그건 곧 이쪽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죽어서도 저렇게 농락당하며 동료들을 공격하겠지.
끝이 없는 악의 순환이었다.
이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시전자를 잃으면 시체들은 다시 먼지로 돌아갈 테지만, 대신관은 보이지도 않았다. 지치지도 않고 들이닥치는 시신을 상대하느라 대신관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결국엔—
머릿속에 빛나는 미래 대신 최악의 결말이 그려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이 노랫소리는…….
이 끔찍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노랫소리였다.
눈 속에 피는 꽃처럼, 마른 우물에 차오르는 물처럼, 어둠을 물리치는 여명처럼 아름다웠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막을 벗겨낸 것처럼 시야가 선명했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미래가 아니라 눈앞이 보였다.
시체가 정신 없이 달려드는 모습. 그걸 베어 넘기는 자신의 검, 적을 꿰뚫는 자신의 마법. 동료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신의 신성력.
아까와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저 자신과 동료들이 하고 있는 일이 명확히 보이는 것뿐인데 뭔가 달랐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거나, 끝이 없거나, 저 역시 조금 있으면 저렇게 될 거라는 잡생각이 사라졌다.
그저 모든 것이 뚜렷하고 확실하고 명확했다.
[와우, 대단한데.]
칼리오페의 노래에 소환된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가 포르르 날며 감탄을 흘렸다.
[시체가 살아 움직이다니. 결국엔…….]
한 바퀴 빙글 돌더니 그대로 칼리오페의 손에 내려앉았다.
“부탁드려요.”
칼리오페의 말에 검은 깨 같은 오목눈이의 눈이 찌그러졌다.
[그건 아무래도……. 무, 물론 내 본신의 힘이라면 이 정도야 거뜬하지만!]
시무룩하게 말하던 오목눈이가 가슴을 탁 내밀며 휙휙 날개를 휘둘며 자신의 강함을 어필했다.
“알아요. 이 상황을 해결해달라는 말이 아니었어요.”
이것은 인간의 역사다.
신화의 시대는 끝났다. 대정령이나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그들은 세계를 유지하고 조율할 뿐, 운명을 결정짓지 않는다.
종의 역사는 온전히 해당 종의 것이다.
번영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멸절하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몫.
“…….”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잠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해서 나머지 인간들이 어떻게 되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이 아이가 아픈 일을 겪는 건 싫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찢어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개입할 수 없었다. 소환된 처지에서는 정령의 기본인 에테르조차 생성할 수 없어 칼리오페가 만들어 낸 에테르만 운용 가능했다.
그걸 알고 있는 아이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려 하고 있다. 배의 키를 잡은 것은 칼리오페고, 자신은 그저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일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가 저를 의지하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원래 내 힘이라면 네가 타고 있는 배가 하늘을 날 수 있게도 해줄 수 있는데.’
“도와주세요.”
그러나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변덕 심한 바람새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오목눈이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날개깃이 칼리오페가 만들어 낸 에테르 사이를 가른다.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르는 바람새를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눈을 감았다.
다시 노래할 순간이었다.
그녀가 겨루어야 할 것은 고작 대신관의 힘이 아니었다.
비스 신의 유산이자 불로불사의 기적을 일으키는, 순수한 에테르 그 자체인 샘이었다.
* * *
“커흡……!”
대신관은 왈칵 피를 토해냈다.
가슴 앞을 적신 시꺼먼 피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이 덜덜 떨린다.
“왜…….”
자신은 공격당하지 않았다. 상처 입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데우소!”
대신관이 날카롭게 긴 로브를 입은 신관을 불렀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왜 내가……!”
“그, 그게……. 아무래도 샘의 에테르를 사용하는 일이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습니다.”
데우소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애초에 시체를 일시에 대량으로 살려내 부리는 건 대신관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부리는 시체가 늘어날수록, 시간이 오래될수록 강생술은 더 많은 힘을 요구했다.
마나가 끊기면 전구가 나가는 것처럼, 에너지가 끊기면 강생술 역시 멈추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강생술이 괜히 금지된 사술인 게 아니었다. 시전자에게 힘이 없으면 생명력을 빨아먹어 술법을 유지한다.
지금 대신관은 샘의 에테르를 기반으로 강생술은 펼치고 있었다. 이미 강생술에 주도권을 빼앗긴 상황이라 시전자라기보단 강생술에 에테르를 공급하는 통로가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강생술이 그가 신성력으로 바꿔 감당할 수 있는 에테르 이상을 요구하자 몸에 부하가 걸린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강생술을 멈추세요!”
대신관은 강생술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주도권이 빼앗긴 상황에서 가능할 리 없다.
“아, 안 돼…….”
대신관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한 번 토혈한 뒤에 다른 이상 조짐은 없지만 그게 더 불안했다. 어디까지가 이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인지 알 수 없었다.
공포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는 데우소에게 달려들었다.
“네 녀석이 감히 나를……!”
“저, 저는 대신관님이라면 이 정도는 감당하실 수 있을 줄 알고…….”
“네 주제에 나를 속여?!”
시뻘게진 눈으로 대신관이 품 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데우소를 향해 내려찍는 순간이었다.
탁, 강한 힘에 팔목이 붙잡혔다.
“속이다니. 말은 제대로 하셔야죠.”
데우소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신관은 눈이 찢어질 것처럼 크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제가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어떤 희생도 달게 치르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 네 놈이……!”
데우소는 소리 지르는 대신관을 무시한 채 그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으윽…….”
“통로 역할이나 제대로 하도록 하세요. 당신을 살려주는 것은 그 때문이니까.”
이미 시전자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은 상태니 대신관을 어찌 다뤄도 상관없다. 지금 술법을 유지하는 것은 강생술 그 자체였고 대신관은 에너지 공급 통로일 뿐이다.
“지금 네가 나를 이렇게 능멸하고 무사할 것 같아?! 난 대신관이야!”
“그 대신관 자리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데우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신관이 죽지도 못한 채 강생술을 시전하는 통로로 존재하는 동안 자신은 즐겁게 구경하면 된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비롯한 침입자들은 자연히 죽을 것이다.
‘그럼 나는 은잔을 손에 넣고 영생을 얻으면 돼.’
멍청한 황제와 멍청한 대신관, 그리고 멍청한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 모두 자기 손에서 놀아났다.
대신관이야 지금 알았지만 황제는 끝까지 제 계획을 몰랐다.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 역시 죽는 순간에도 그 사실을 모를 것을 생각하니 그렇게 우스울 수 없었다.
‘오랜 기다림이었어.’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힘이 저 너머에서 느껴졌다.
‘에테르?!’
데우소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럴 리가 없다. 에테르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생겨난단 말인가.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에테르를 다룬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있는 에테르를 다루는 것도 인간에겐 불가능한데 어떻게 만들어 내기까지 한단 말인가.
예전에 경연에서 에테르가 나왔던 것은 어디까지나 대정령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칼리오페는 대정령을 부를 수 없다. 황제가 칼리오페를 황궁에 초대한 후 목숨을 위협했을 때 이미 알아낸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힘은 분명 에테르였다.
그것도 샘의 에테르에 비견할 정도로 강력한 에테르였다.
* * *
칼리오페의 노래로 인해 생성된 에테르에 사람들은 다시 고갈되었던 오러와 마나, 신성력을 채웠다.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힘까지 다시 채워지니 거리낄 게 없었다. 절망을 극복해낸 만큼, 공세는 한 번 꺾이기 전보다 더욱더 맹렬해졌다.
‘아직이야. 부족해.’
그럼에도 칼리오페는 결핍을 느꼈다.
강생술이 시전되는 순간 이것이 샘의 에테르를 이용한 사술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에테르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샘의 에테르에 비하면 방금 노래로 생성된 에테르는 어른과 어린아이처럼 차이 났다.
‘제피루스님!’
노래를 이어나가며 칼리오페는 허공을 가르는 바람새를 응시했다. 그녀의 염원을 읽은 바람새가 더 높이, 더 높이 솟구쳐 올랐다.
끝없는 비상 직후, 그대로 강하하며 나선으로 휘돈다. 오목눈이의 작은 날개로는 불러일으킬 수 없는 강풍이 공간을 채웠다.
칼리오페의 노래에서 태어난 에테르가 바람새의 날갯짓에 따라 퍼지고 확산되었다.
에테르의 길이다.
무작정 에테르를 쏟아붓는 것과 대정령이 만든 길을 통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땅고래가 숨구멍을 뚫어 에테르의 길을 냈던 것처럼, 바람새가 칼리오페를 위해 길을 형성했다.
‘굉장하군.’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혀를 내둘렀다.
길을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칼리오페의 에테르는 기하급수적으로 효율이 올라갔다.
의지를 가진 에테르가 공명한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 의지력을 지닌 존재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그리고 의지가 담긴 에테르는 길을 통해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다. 망설임이 사라진 채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캐스팅한다. 새로 부여된 에테르로 인해 그들의 오러와 마나는 더 강력해졌다.
시체가 쓰러지는 속도가 되살아나는 속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잘 싸워주고 있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되살아나는 속도도 느려졌어.’
이 정도 규모의 술법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시전자에게도 힘든 일일 터.
샘의 에테르를 사용하는 만큼, 샘이 고갈될 때까지 술법을 끊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전자가 지치면 효율이 떨어진다.
‘내게는 기회야.’
사실상 샘의 에테르와 칼리오페의 에테르 간의 체급 싸움이었다. 샘과 달리 칼리오페는 인간이다. 몇 시간 동안이나 에테르를 만들어내는 건 힘들다.
그래서 서둘러 이 싸움을 끝내야만 했다.
‘도박이지만…….’
어쩌면 겨우 잡은 좋은 흐름을 다시 저쪽에 넘겨줄 수도 있다. 자신이 에테르 생성을 멈추면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테니까.
‘해볼 만해. 아니, 해내야 해!’
칼리오페는 에테르를 피워내는 것을 그만두고 주변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칼리오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에테르를 예민하게 느꼈다. 노력한다면 지금 이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에테르의 근원을 파헤쳐 샘의 에테르를 세세하게 구분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에테르가 어떻게 사술에 공급되는지, 그 진원지를 찾아내면 대신관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집중하는 칼리오페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감각이 확장되면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이상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에테르를 만들어내지 않는 시간 만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부담이 늘어난다. 아무리 시체가 되살아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해도 지금 전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시간을 번 만큼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쉽게 답은 보이지 않았다.
뒤섞은 바닷물 속에서 뭐가 어느 바다의 물인지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리는 망치로 내리치는 것같이 아파왔고, 미세한 바늘 수천 개로 찌르는 것처럼 전신이 따끔거렸다.
더 이상은 감각의 한계였다.
“아가씨?”
칼리오페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도미닉이 그녀의 상태가 심상찮은 것을 보고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드는 순간, 칼리오페가 눈을 반짝 떴다.
하얗게 질린 채 땀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생기 가득하게 빛났다.
“찾았다.”
새파란 입술이 달싹였다. 스러질 것처럼 작으면서도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도미닉의 팔을 붙잡았다.
“대신관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어요!”
“예?”
“저쪽이에요.”
칼리오페가 가리킨 곳은 공방에서 조금 빗겨나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저긴…….”
도미닉이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건 칼리오페의 말을 의심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멀어.’
“어서요.”
칼리오페의 재촉에도 도미닉은 망설였다. 그의 역할은 칼리오페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여기 혼자 그녀를 두고 가도 될까?
“도미닉 경!”
계속되는 재촉에 도미닉은 칼리오페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이 싸움을 빠르게 종결시키는 게 곧 칼리오페를 지키는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전이 일어나는 전선은 저 앞이고 칼리오페는 훨씬 떨어진 후방에 위치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 뒤에는 신관들이 포진해 있었다. 가장 안전한 후방 중심에 있으니 아무 일 없을 터였다.
도미닉은 빠르게 내달렸다. 그의 오러가 검을 완전히 감쌌다.
극도로 예민해진 기감에 무언가 일렁이는 힘의 흐름이 잡혔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그냥 스쳐 지나갈 만큼 옅은 일렁임이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발견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이걸로……!’
그렇게나 보이지 않던 끝. 그게 드디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검 끝이 정확히 그 힘의 균열을 꿰뚫었다.
파사삭—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분명 아무 것도 없던 허공이었건만 유리 조각이 날리듯 깨진 공간의 파편이 비산했다. 그리고 그곳에 드러난 것은 겁에 잔뜩 질린 채 개구리처럼 몸을 웅크린 대신관이었다.
도미닉의 그림자가 대신관의 발치까지 닿았다.
대신관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이곳을…….”
그의 중얼거림은 곧 소란에 묻혔다.
“대신관!”
“저기 대신관이 있다!”
공간이 깨지는 것에 놀라 돌아본 사람들이 대신관을 발견한 것이다.
흉흉한 기세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대신관은 주저앉은 그대로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그동안 몇 번이나 토혈했다. 시야가 가물가물하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 폐가 찢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신관님!]
[그만, 뭐든 할 테니 저 물에는……!]
계속 고문받아왔던 소녀들은 아무리 가혹하게 굴어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샘에 들어가게 할 때만은 달랐다. 이빨이 다 빠져 잇몸만 남은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용서해 달라며 애원하고 빌었다. 대신관은 지금에서야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샘물에 접촉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에테르를 이동하는 통로가 된 것인데도 이렇게, 이렇게나…….
그의 눈에 저 멀리 서 있는 성녀의 얼굴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고 있고, 성녀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있다. 그런데도 그 얼굴만 선명히 박혀 들었다.
“성녀.”
저도 모르게 입술이 달싹였다.
“내가, 내가 잘못했— 커헉!”
가슴을 꿰뚫는 격통에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검은 기운이 날름거리는 창이 가슴에 박혔다.
“네 놈은 사죄할 자격도 없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
아스타레아스의 머리 위로 햇빛이 찬란했다. 마치 황제의 관처럼.
그 모습을 보니 맥이 풀린 것처럼 탁, 깨달음이 왔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던 거였다.
황제도, 전 대신관인 마르멜도 그리고 자신도 본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탐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고, 그러다 보니 항상 결핍을 느꼈다. 아무리 뺏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항상 불안했고, 항상 분노했다.
이게 나라며 누구보다 거들먹거렸지만, 사실 그건 불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어.’
그간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게 다 허상이고, 사실은 처음부터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을 안 후에야 겨우 깨달았다.
대신관은 눈이 부셔 자꾸만 찌푸려지는 것을 애써 힘겹게 떴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아스타레아스가 미간을 좁혔다. 대신관의 눈에 참회의 빛이 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칼리오페를 상처입힌 이상 그에게 속죄할 자격 따윈 없었다. 그러나 칼리오페라면 분명히 한 번 기회를 주었을 것이기에, 아스타레아스는 물었다.
“타라손, 성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나?”
“성녀의, 허억, 이름?”
대신관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되물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얼굴이다.
“서, 성녀를 괴롭힌 건, 으윽, 마르멜의 며, 명령 때문…… 나, 나는 시키는 대로…….”
더는 두고 볼 것도 없다. 결국 그의 참회란 기만이고 위선이며 자기연민일 뿐이었다.
영원한 고통 속에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숨만 붙이고 있게 하고 싶었지만, 사술을 멈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금 당장 죽여야 했다.
아스타레아스의 손짓에 그의 가슴에 꽂힌 창에서 일렁거리던 검은 기운이 스르륵 움직여 몸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대신관의 몸이 덜컥덜컥 떨렸다.
창이 머금고 있는 것은 극독이었다.
“사, 사, 살려……. 살려, 주, 어…….”
눈과 귀, 입과 코. 온몸의 구멍에서 검은 피를 흘리면서도 대신관은 아스타레아스의 발치에 매달렸다.
살고 싶다.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 이제야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데. 이제야 제대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서걱.
쌓인 눈을 삽으로 가르는 것처럼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그래서 대신관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투욱, 아스타레아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이 땅으로 추락했다.
멍청히 그 모습을 바라본 대신관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잘린 팔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는 그를 루시우스가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네게 조의 있는 죽음은 과분하다.”
하지만 대신관은 루시우스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했다. 빠르게 퍼진 독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모세혈관까지 스며든 독 때문에 대신관의 피부 곳곳에 얇은 실핏줄이 거미줄처럼 불거졌다.
조금씩 조금씩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살아있는 채로 느낀다. 몸 안의 장기가, 손끝과 발끝이 하나씩 기능을 멈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신관에게는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사, 살고 싶어, 죽기 싫어, 살고 싶어, 살고, 싶…… 죽기, 사, 사, 살려…….”
잦아지면서도 끊길 듯 말 듯 끈질기게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가 결국 완전히 멈췄다. 거멓게 죽은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끝났다.
이 긴 싸움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끝없이 달려들던 시체가 고장 난 인형처럼 픽픽 쓰러진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내 함성을 내질렀다.
“이겼다!”
“끝났어!!”
“와아아아아!”
“해냈어, 우리가!”
힘든 싸움이었던 만큼, 승전의 기쁨이 더 컸다. 환호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칼리오페 역시 미소 지었다.
드디어 전생부터 이어져 온 비극이 완전히 끝을 맺은 것이다. 이제 가족들이 죽을 일도, 이 땅이 전쟁으로 불탈 일도, 사람들의 삶이 망가질 일도 없다.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과 같은 내일을.
일상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일상으로 돌아갈 터.
‘일상.’
그 말에 왠지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하는 일상이 그려졌다.
어젯밤 아스타레아스가 같이 있자고 말했던 것처럼. 아침에 함께 일어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잠에 드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리페!”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아스타레아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와 오빠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오러로 각력을 강화하면서까지 뛰어오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자 검보랏빛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흉포하고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찰나의 순간, 칼리오페는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바람새는 이미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가 가장 먼저 칼리오페에게 도달할 터였다.
하지만 오목눈이의 신형이 점차 흐려졌다. 칼리오페가 노래를 멈춘 데다가 피워냈던 에테르가 점점 소진되면서 대정령이 현신할 수 있을 정도의 양보다 적어진 것이다.
인간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 대정령은 깨달았다. 자신은 칼리오페에게 가지 못할 것이다.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대정령이었던 그로서는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제 아픔을 돌아볼 시간에 칼리오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점점 흐릿해지던 신형은 종래에 완전히 사라졌다. 신형을 유지할 에테르가 부족해져 자연히 역소환된 것이다.
그 사이에 칼리오페는 몸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보다 그녀를 향한 공격이 더 빨랐다.
칼리오페는 그게 섬뜩하리 만치 날카로운 창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날의 뒤편에서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보였다. 절박한 얼굴이었다. 그가 뭐라고 외치자 칼리오페를 감싸고 있던 마법 결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검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결계를 통과했다. 날카로운 창날 끝이 정확히 칼리오페의 심장을 겨눴다.
여린 육체가 찢겨 붉은 선혈을 내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순간,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이 훅 사라졌다.
다시 그가 나타났을 때, 그는 이미 칼리오페를 온몸으로 뒤덮듯 끌어안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칼리오페는 가슴 속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동공이 확장되고 온몸이 떨렸다. 폐에 공기가 부족할 정도로 크게 외치고 있는데,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진정하라는 듯, 혼란에 빠진 그녀의 뺨을 감쌌다.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따뜻하고, 상냥한 미소였다.
“괜찮아요.”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괜찮은가 보구나.
그래, 괜찮을 것이다. 창에 찔렸으면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았어야 하는데 그런 조짐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아스타레아스의 입매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겨우 미소를 띄워내던 칼리오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럴 리 없어.’
칼리오페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애써 꺾어서 그의 등 뒤를 보았다.
‘레아스는 괜찮다고 했는걸.’
검보랏빛 창이 그의 등에 솟은 날개처럼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아스타레아스의 몸에 가린 탓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칼리오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아스타레아스의 등을 감쌌다. 뜨겁고 축축하다. 손을 다시 제 앞으로 가져와 보니 검붉은 핏물로 물들어 있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에서 표정과 생기가 사라졌다.
“괜찮…….”
아스타레아스는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속에서 역류하는 핏덩이를 억지로 삼켰다. 피를 토해 칼리오페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안 괜찮아요!”
소리친 그녀가 제 자신이 더 놀라 입을 가렸다. 화내려던 게 아니다. 화내고 싶지 않았다.
루스티첼 백작이 무거운 얼굴로 아스타레아스의 등을 살폈다.
‘이건…….’
환부를 본 그의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떠올랐다.
창은 마치 아스타레아스의 몸과 융합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예 혈관이 도드라져 비수와 이어져 있고 환부를 둘러싸고 검보랏빛 글씨가 떠올랐다.
평범한 창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갈래 갈래로 찢긴 비수가 혈관을 파고 들었으니 그 고통은 말로 하기도 힘들 것이다.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으며 칼리오페를 안심시키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소는커녕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분명한데.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 루스티첼 백작 역시 상태의 심각함을 내색하지 않았다.
“아빠…….”
하지만 눈물 가득한 얼굴로 딸아이가 자신을 올려다 봤을 때, 루스티첼 백작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칼리오페가 펑펑 울며 아빠에게 애원했다. 어린아이였을 때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제발, 사, 살려주세요. 네? 차, 창을 뽀, 뽑아야 하잖아요.”
창백하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며 말한 그녀가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움켜쥐었다.
“괘, 괜찮아요. 창을 뽑고, 치유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을 수 있어요.”
상처 입어 피 흘리는 아스타레아스보다 그녀의 손이 더 차가웠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제 온기를 나눠주려는 건지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입을 열면 진탕된 속 때문에 새어 나올 것 같아 그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창조차 뽑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건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제 손을 토닥이는 손길에 칼리오페가 이를 악물었다.
“아빠!”
루스티첼 백작이 어서 창을 빼주길 바라며 다시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안타까운 눈빛뿐이었다.
칼리오페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째서인지 모두 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애처롭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들 왜 그러는 거야?’
칼리오페는 사람들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서 치료를 해야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아?
꼭 이미 늦은 것처럼.
‘안 늦었잖아. 하나도 안 늦었어. 창만 뽑으면…….’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문외한인 자신이 괜히 창을 건드렸다가 상처가 덧날까 두려워 그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바짝 굳어있는 칼리오페의 어깨에 따뜻한 손이 내려앉았다.
“리페.”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목소리에도 칼리오페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혹시라도 제 어깨를 잡은 손이 아스타레아스에게서 저를 떼 놓을까 봐 몸에 힘을 잔뜩 준다.
아스타레아스의 옷깃을 붙잡은 그녀의 손등 위로 새파란 핏줄이 돋았다.
그 모습을 보자 도저히 창을 빼낼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일단 레아스를 편하게 해주자.”
루시우스의 말에 그제야 칼리오페는 몸에서 힘을 풀었다.
맞다. 이렇게 서 있는 게 좋을 리 없다.
칼리오페는 조심스럽게 아스타레아스를 부축했다. 하지만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몸에 부담이 됐는지 아스타레아스가 움찔했다.
기침을 참고 그대로 삼키는 것이 보인다. 칼리오페는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바보.’
눈이 시큰거렸다.
저렇게 참을 필요 없는데. 아프다고, 너무 괴롭다고 가감 없이 드러내고 기대고 의지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을 감싸느라 그렇게 됐다고 칼리오페가 스스로를 자책할까 봐 저러는 것이다.
이제는 제가 아스타레아스의 곁에 있는 게 좋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선 자신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심장을 얇게 저며내는 것 같았다. 한 꺼풀, 한 꺼풀 심장이 떨어져 나간다.
‘……나는.’
“하나도 안 좋아.”
그때 침잠한 공기를 뚫고 툴툴대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그래서 잡아 왔어.”
유리안이 손에 붙잡고 있던 것을 휙 앞으로 던지다시피 끌어냈다.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긴 신관복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
“당신은…….”
칼리오페는 그가 고위 신관 무리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다지 눈에 띄는 짓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신관들에 비하면 칼리오페를 대하는 태도도 온건했다.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랬다는 것이지만.
유리안이 신관의 머리카락을 바투 잡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자, 말해.”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태도에서 깨달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하지만 차마 아스타레아스를 붙잡고 있는 손을 놓지 못하는 채로 신관에게 외쳤다.
“당신이야?!”
분노와 물기가 함께 어린 목소리에 데우소가 킬킬 웃음을 흘렸다. 잡힌 머리카락에 거죽이 당기고 꺾인 목이 빠질 것처럼 아파도 웃음이 났다.
퍼억—!
그 웃음에 인상을 찌푸린 유리안이 그의 머리를 거세게 발로 찼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 일격에 나가떨어진 데우소가 끄윽대며 바닥에서 바르작댔다.
핏물과 함께 빠진 이빨을 툭 내뱉으면서도 데우소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 웃음이 멈출까. 저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주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는데.
“결국 네 년도 날 이기지 못했어.”
그가 칼리오페를 향해 말했다.
그래, 데우소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것을 인정했다. 설마하니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정말로 에테르를 생성하고, 대정령마저 불러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자신의 패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칼리오페 루스티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관과 황제를 뒤에서 움직인 존재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이런 일을 겪는 것이다.
자신은 칼리오페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도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 비록 자신은 여기에서 죽고 칼리오페는 계속 살아갈지라도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게 될 테니까.
“끄윽…….”
유리안이 데우소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쓸 데 없는 말하지 말고 어떻게 저 녀석을 살릴 수 있는지나 말해.”
창을 뽑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뒤, 신관들은 모든 신성력을 아스타레아스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아문 살에서 창을 빼내는 게 고통스러울지라도 일단 살리고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데우소가 큭큭 웃었다.
“다들 괜한 힘을 빼고 있어.”
자신의 계획을 망친 이들이 이렇게 절망하는 게 보기 좋았다. 이들은 모두 아스타레아스를 차기 황제로 올릴 생각이었겠지만, 이제 그건 영원히 불가능해졌다.
“살릴 수 있는 방법 따윈 없다.”
그가 단언했다.
“오렌의 대신관이여, 그리 오랜 시간 동안 대신관 자리에 있었으면서 저 창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너무 늙은 것 아닌가.”
그 말에 오렌의 대신관이 고목처럼 마른 얼굴을 떨었다.
“설마.”
떨리는 그녀의 얼굴을 본 데우소가 통증에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바싹 끌어올렸다.
“그래, 그 설마다.”
“하스타 디레…….”
오렌의 대신관의 입술에서 신음처럼 창의 이름이 나왔다.
하스타 디레, 저주 받은 창. 감히 신을 찔렀기에 저주 받았다.
오렌의 대신관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신화 속 샘을 둘러싸고 일이 벌어진 상황에서 신화 속 창이 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다.
“대신관님…….”
칼리오페가 절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하스타 디레라면 방도가 없었다. 여기 있는 신관들이 사흘 밤낮으로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치유할 수 없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숨이 끊어지겠지. 하지만 그게 시작이야.”
데우소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가에 피거품이 끓었지만, 그는 희열에 차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시체가 살아나는 술법은 그 창을 연구해서 만든 거거든.”
그 말이 담고 있는 악의가 너무나도 선명해 소름이 돋았다.
“정의로운 칼리오페, 인류를 구한 칼리오페. 너는 선택해야 할 거야.”
광기로 번들거리는 데우소의 눈이 정확하게 칼리오페의 눈을 직시했다.
“나머지를 살리기 위해 네 사랑을 끊임없이 죽이든가. 아니면 네 사랑이 소중해 그 나머지 모두를 죽이든가.”
칼리오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크헉!”
이번에는 에피니가 데우소를 찼다. 명치를 채여 숨도 못 쉰 채 몸을 새우처럼 말면서도, 데우소는 호흡이 돌아오는 대로 입을 놀렸다.
“네가 무엇을, 선택할지 못 보는 것만은 아쉽군.”
데우소는 자신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아스타레아스보다도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할 터.
칼리오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스타레아스가 죽는다고?
그가 사라져?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절대적인 무(無).
자신의 존재마저 지울 정도의 공백이 찾아왔다.
그때, 차가운 손이 자신을 붙드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렸다.
“리페.”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다. 칼리오페는 순식간에 현실로 불려 나왔다.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아…….’
텅 빈 껍데기처럼 굳어있던 칼리오페의 눈동자에 생기가 깃들기 시작한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녀를 향해 미소짓다가 밭게 터지려는 기침을 삼켰다. 핏덩이가 다시 목구멍 아래로 내려간다. 애써 속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노래 불러줘요. 당신 노래가 듣고 싶어.”
작게 말한 게 아닌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허공에서 바스라질 듯 희미한 목소리에 혹시라도 칼리오페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곤 힘차게 답했다.
“응.”
제대로 웃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자꾸만 눈매가 일그러지려 했다. 시야가 흐릿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손끝이 계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미끄러져 내린다.
칼리오페가 그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눈에 대 주었다. 축축한 물기가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손끝으로 옮겨가고, 옮겨가고, 옮겨가길 반복했다.
당신의 슬픔도 이렇게 내가 다 가져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일렁이는 산호빛 눈동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름다워서 눈을 감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점점 몸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진다. 두 다리에 제대로 힘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지 잘 모르겠다.
풀썩, 그의 무릎이 꺾였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그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서둘러 땅에 무릎 꿇고 그의 몸을 제게 기대도록 했다.
그 와중에도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뺨을 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제는 사람의 체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차가웠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온통 새하얘서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그 손을 꼬옥 잡은 채 제 뺨을 붙였다. 그러지 않으면 그 손이 아래로 툭 떨어져내릴 것 같았다.
“어서요.”
아스타레아스의 재촉에 칼리오페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불안정한 호흡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라기보다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였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노래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눈매가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노래를 듣는 것이 기꺼운 모양이다.
기시감이 들었다.
볕 좋은 오후, 둘만의 연습 장소에서 칼리오페가 노래하고 있노라면 아스타레아스가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이런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노래가 좋다던가, 듣기 즐거웠다거나, 잘 부른다거나 하는 간단한 말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라보는 눈동자가 수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그럴 때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게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에 간 것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백사장에는 아무도 없고, 파도가 자신의 발목을 적신다. 그곳에 갈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녀뿐이다.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으면 그 빛나는 푸른 바다가 손안에 가득 떠밀려 온다. 하얀 물거품과 반짝이는 윤슬, 그리고 새파란 바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밀려와 손가락 사이로 감겼다.
그녀의 손으로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몇 번이고 가득 차오른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을 봐도 질릴 것 같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바다는 절대로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한없이 밀려올 뿐, 밀려 나가는 법이 없다.
칼리오페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바다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끝없이 밀려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시시각각 죽음의 기운이 푸른 눈동자를 덧칠한다.
‘제발.’
칼리오페는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한 음절, 한 음절 노래를 내뱉을 때마다 가슴을 파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부탁이야.’
담아두고 싶다.
자꾸만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다를 붙들고 영원히 제 손바닥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 바다가 메마른 순간, 그녀 자신 역시 부서질 것 같았다.
‘내게서 그를 빼앗지 마!’
그 어느 때보다 짙고 뻑뻑하게 생성된 에테르가 그녀의 감정에 반응해 격렬하게 휘몰아쳤다. 공간을 가득 메운 에테르의 폭풍이 폭발할 것 같이 엉키고 설켰다.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옷자락이 부풀어 오른다. 노랫가락이 더 높이, 높이 한없이 밀려 올라간다.
칼리오페의 노래가 귓가를 멍멍하게 채워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소리가 숨죽이고 그녀의 노래만이 세상을 가득 채운 순간, 서광이 비쳐 들었다.
그 빛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반짝이는…….’
고개를 든 채 그것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의 눈이 훅 커졌다.
“은잔?!”
“으, 은잔이야……!”
사람들이 감탄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내뱉을 때, 데우소 역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은잔을 올려다 보는 그의 눈은 믿기지 않는지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은잔이……. 아니야, 그럼…….”
그는 고개를 잘게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은잔이 분명했다.
이 일을 처음부터 꾸민 그가 이 자리의 누구보다 은잔에 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은잔이 확실했다.
“그게 왜, 왜 여기에…….”
그는 엉금엉금 은잔을 향해 기어갔다. 사람들이 은잔을 보고 놀란 덕에 그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진 참이었다.
“너……!”
하지만 유리안이 금방 그를 발견하고 잡으려 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데우소는 유리안의 손을 뿌리치고 은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내 것이야. 내 거, 내 것!”
“저, 저놈이……!”
미친 사람처럼 외치는 데우소를 사람들이 막는 것보다 그의 손이 은잔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그때였다.
콰앙!
굉음이 들렸다.
데우소는 손을 뻗었음에도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은잔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왜 손에 잡히지 않지?
의아한 마음에 자신의 손을 내려보는 순간,
“으아아아아악!”
깔끔하게 절단된 자신의 팔을 보고 그가 비명을 질렀다.
떨어진 팔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대로 폭발했던 것이다.
뒤늦게 몰려온 통증에 벌레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그 와중에 손에 넣지 못한 은잔이 눈에 들어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위치였다. 영원한 젊음이 그에게 잡힐 듯했다.
탐욕에 물든 인간은 어리석다.
데우소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하나 남은 팔을 뻗었다.
콰앙!
“끄아아아!”
결과는 처참했다. 데우소는 피와 눈물과 침으로 범벅된 얼굴로 은잔을 노려봤다. 저것 때문에 양 팔을 잃었음에도 어떻게 해서라도 가지고 싶어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은잔은 에테르를 휘감고 천천히 내려와 칼리오페의 앞에서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본 데우소의 눈이 분노와 절망으로 타올랐다.
“왜!”
저 년은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신화를 연구하고, 샘물을 찾고, 은잔을 찾아 헤맨 것은 그였다. 진정한 은잔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은잔은 저딴 계집을 택했단 말인가!
두둥실 떠 있는 은잔을 본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노래를 멈췄다.
손을 뻗자 차갑고 단단한 금속이 만져졌다.
데우소에게는 가까이 다가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잔이 너무나도 쉽게 제 몸을 허락해주었다. 그걸 본 데우소가 분노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절규했다.
“왜, 왜, 왜!”
문득 그는 은잔을 이끌고 감싸는 에테르가 샘이 아니라 칼리오페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흐르는 생명의 수호자, 흰 날개를 펼쳐 잔을 비호하라.]
신화 속 구절이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하, 하하…….”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을 흘리며, 그는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처음부터 저 잔은 칼리오페의 것이었다.
그녀에게만 허락된 신의 안배였다.
칼리오페가 은잔의 수호자였으니까.
* * *
‘이건…….’
칼리오페는 손에 쥔 은잔을 바라봤다. 무게와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게 정말 현실이고, 제 손에 들린 게 은잔이라는 자각이 들자 정신이 확 들었다.
“레, 레아스, 이거 봐요.”
그녀가 은잔을 쥔 채 아스타레아스에게 말했다. 명확한 생각보다도 더 먼저 기대감이 찾아왔다.
어쩌면, 어쩌면 아스타레아스를 살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어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가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굳게 감긴 눈은 더 이상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그 상태로도 그의 손은 칼리오페의 손을 쥐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숨도 못 쉰 채 그를 바라봤다. 냉정하게 그의 용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몸이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루시우스가 대신 그의 체온과 숨소리를 확인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어.”
그 말을 듣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몸뿐만이 아니라 얼까지 빠져버린 것 같았다.
“서둘러!”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은잔을 바투 쥔 채 칼리오페는 일어나 샘으로 달려갔다. 태어나 이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본 적이 있을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런 것보다 생각이 차올랐다.
정말 살릴 수 있을까?
불로불사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샘물이 정말로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늙지 않고, 더 나아가 젊게 만들어줄 뿐.
이 샘은 전설 속에서 젊음의 샘이라 불렸다.
영원한 젊음이란 영생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생은 아니었다.
칼에 찔리거나 병에 걸려 목숨이 위험할 때, 젊음이 사람을 구해주진 않는다.
모두가 바라는 젊음.
청춘의 신 비스다운 권능이었으나 칼리오페에게 영원한 젊음 따위는 필요 없었다. 시간과 함께 늙어가고 싶었다.
스무 살이 채 되지 못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번에는 스무 살이, 스물한 살이, 서른 살이, 마흔 살이 되어보고 싶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세월이 조각한 흔적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샘에 도착하자 기묘할 정도로 맑은 물이 보였다. 찰랑이는 물이 꼭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젊음을 선사하는 샘이니 아스타레아스를 되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은잔을 꽉 쥐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기댈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은잔에 샘물을 담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칼리오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은잔 가득 차오르는 샘물을 바라봤다.
뒤따라온 루시우스가 안고 있던 아스타레아스를 땅에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두 남매의 시선이 얽혔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스타레아스 곁에 앉았다.
은잔을 조심스레 그의 입가에 대었다.
“레아스, 이거 마셔봐요.”
하지만 이미 아스타레아스는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칼리오페는 침착하려 애쓰며 신중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을 살짝 벌리고 은잔을 다시 가져다 댔다. 잔을 기울여 샘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게 했다.
하지만 샘물의 태반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과연 입속에 들어간 게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주 조금 마셨다고 해도, 그 정도로 얼만큼의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금 아스타레아스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입안에 확 쏟아붓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기도로 들어가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칼리오페는 은잔과 그 안에 고인 샘물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소용돌이치는 에테르의 힘이 느껴졌다.
‘……은잔에 담아 마셔야 한다고 했지.’
은잔이 샘물의 저 강력한 힘에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라면, 한 번 담은 것으로 괜찮지 않을까?
모험이었다.
어쩌면 은잔에 담아 마시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매 초, 매 순간 아스타레아스는 죽음에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는 생각할 게 없었다.
“리페?”
칼리오페가 샘물을 들이켜는 모습에 로베르트가 기겁해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입안에 샘물을 머금은 채 지체 없이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빈틈 없이 맞대고 입술을 열어 벌어진 그의 입안으로 샘물이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제발.’
차갑게 식은 입술에 키스하며 칼리오페는 바라고 또 바랐다.
‘내게 레아스를 돌려줘요.’
그 순간이었다.
아스타레아스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를 중심으로 바닥에 빛이 맺히며 선을 만들어냈다. 꺾이고 이어진 빛이 하나의 거대한 문양을 이뤘다.
‘이건…….’
형성된 문양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커다란 원을 가로지르는 선과 직선으로 형상화된 별. 열두 방향의 황도 12궁.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몰라볼 수 있겠는가.
‘그때 그 문양이야……!’
그녀를 과거로 되돌려준 바로 그 문양이었다.
빛은 점점 강해졌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빛이 공간을 살라 먹고 광풍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눈 뜨고 있기도 힘들 정도였지만 칼리오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끝까지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양의 빛이 아스타레아스에게 빨려가는 게 보였다. 언제 그런 광풍이 불었냐는 듯 세계가 잠잠해진다.
그리고.
움찔,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서둘러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바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뜨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지 몇 번 더 깜빡인 후에야 청명한 푸른빛 눈동자가 온전히 드러난다.
칼리오페는 주저 앉은 자세 그대로, 숨죽인 채 아스타레아스가 살아나는 광경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이 순간이 깨질까 호흡마저 마음대로 내쉴 수 없었다.
눈을 뜬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기도 전에 주변을 둘러봤다. 푸른 눈동자에 칼리오페가 온전하게 담긴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강한 힘이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얼음장보다도 더 차갑다고 생각했던 게 바로 몇 분 전이었는데,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뻣뻣하게 굳어가던 몸에 생기가 돌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끌어안긴 채 숨만 내쉬고 있었다.
“리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괜찮아요.”
따뜻한 손이 칼리오페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제 뺨에 그녀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제대로 살아있으니까.”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읏…….”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의 의지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럼에도 아스타레아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레아스.”
“네, 리페.”
부르면 대답이 돌아온다. 그 사실이 이렇게나 벅찰 수 없다.
“레아스.”
“응, 나 여기 있어요.”
눈물이 글썽거려 얼굴이 엉망일 게 분명한데도 웃음이 샘솟았다.
마냥 좋았다. 칼리오페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아스타레아스를 불렀다.
“레아……커헉!”
“리페?!”
후두둑, 핏방울이 그녀의 입에서 떨어져 내렸다. 방금 전까지 행복에 겨워 미소 짓고 있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아스타레아스는 깜짝 놀라 무너지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뜨겁고 붉은 것이 그의 손을 물들였다.
“리페!”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 로베르트 역시 당황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사람들 역시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황위에 올리려던 사람은 아스타레아스였다.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스타레아스가 다쳤을 때보다도 더 동요했다.
저마다 이곳에 온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사명감과 정의감, 보은하겠다는 마음. 그런 것들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모은 것은 칼리오페였다.
“어서 치유를……!”
그 말에 신관들이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왜 치유하지 않는 거야!”
에피니가 신관의 멱살을 잡으며 닦달했다. 소드 마스터의 살기에 허약한 신관은 히익, 하고 패닉에 빠졌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쓸모 없는 건 죽는 게 나아. 공기가 아까우니까.”
유리안이 검을 빼 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두 분 다 진정하시오.”
오렌 대신관의 말에 에피니가 인상을 구기며 그녀를 노려봤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치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치유할 수 없는 거다. 모두들 자신의 손으로 루스티첼 영애를 치유하고 싶을 거야.”
로한 대신관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의 얼굴이 침통함에 물들어 있었다.
에피니는 그제야 신관들의 얼굴을 살폈다. 괴로운 표정이었다.
‘아, 신성력이…….’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아스타레아스가 창에 맞고 나서 모든 신관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신성력을 다 쏟아부어 치유술을 펼쳤다. 지금 그들은 가뭄에 든 논밭처럼 바짝 마른 상태일 터.
신성력이 고갈되었으니 치유하고 싶어도 치유할 수 없다.
“조금만 있으면 신성력을 회복할 테니 시간을…….”
“흐윽…….”
그때 신음과 함께 칼리오페가 몸을 웅크렸다. 새빨간 핏덩이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너무 많아…….’
피가 너무 많이 나왔다. 지금도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다.
“조금이 언제인데! 저러다가 리페가…….”
차마 뒷말을 이을 순 없어 입을 다물었다.
신관들은 서둘러 기도하며 신성력을 되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비관적인 마음이 들었다. 저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면 신성력이 많이 필요했다. 과연 그 시간 동안 칼리오페가 버틸 수 있을까.
그때였다.
조용히 칼리오페의 곁에 앉는 사람이 있었다.
“하일레나?”
“제가 해볼게요.”
하일레나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아스타레아스가 다쳤을 때도 치유술을 펼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신성력은 가득 찬 상태였다. 심지어 성녀였던 만큼, 보유할 수 있는 신성력의 양 또한 누구보다 많다.
이보다 더 좋은 상태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너는…….”
그녀는 치유의 권능을 펼칠 수 없다. 애초에 아스타레아스가 다쳤을 때 가만히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 곁을 지키고 있던 가족들도, 아스타레아스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실낱같은 희망마저 꺼져버릴까 봐.
그들은 하일레나가 칼리오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니, 그녀가 치유할 것이라 믿었다. 믿어야 했다.
“부탁하마.”
루스티첼 백작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굳은살이 잔뜩 배긴 단단한 손이었다. 하일레나는 루스티첼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로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셋 모두 똑같은 표정이었다. 자신을 온전히 믿는 얼굴.
그들에게 칼리오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한때 그녀를 해치려 했던 자신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루스티첼 저에서 이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들은 꿈만 같았다.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들은 하일레나를 적대시하고 경계했다. 그야 당연했다. 그녀 때문에 칼리오페는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태도가 변했다.
그들은 하일레나를 알아가려 했고, 알아갔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모두 칼리오페가 제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이 겪어야 할 일이에요.]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도 칼리오페는 움츠러드는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었다.
창백한 겨울 햇빛이 칼리오페를 향해 내리쬐고 산호빛 눈동자가 놀랄 만큼 투명하게 빛났다.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던 실내, 성에가 끼었던 창문, 칼리오페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포근포근한 모피.
[하일레나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면서요. 그게 평생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 안에 숨어 산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칼리오페가 자신을 방 밖으로 꺼내주었다. 그녀 덕분에 두 발로 단단하게 땅을 딛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신이 움츠러들 때마다, 항상.
하일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너머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그녀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의심……하지 않아요? 함정이라고.]
[눈과 귀와 머리가 장식으로 있는 건 아니라서.]
[그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왔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해냈다. 그녀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인정 받았다.
신뢰.
그건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녀라고 마냥 추앙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를 수 없는 산을 오르고 볼 수 없는 풍경을 본 것처럼.
‘네 덕분이야.’
하일레나는 고개를 숙여 누워있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가 없었다면 그녀 자신으로 삶을 살 기회도, 그럴 용기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에 좌절할 때마다 칼리오페는 당연한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덕분에 하일레나는 다시 힘내서 노력할 수 있었다.
‘나는…….’
[뭘 하고 싶어요?]
하일레나로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칼리오페는 그렇게 물었다.
[복수하고 싶어.]
염치없지만 복수하고 싶었다. 그것 외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리고 오늘, 복수는 완전히 이루어졌다.
대신관은 고통스럽게 죽었고, 자신을 괴롭혔던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다. 데우소가 남긴 했지만, 양팔을 잃은 그의 끝이야 뻔했다.
그런데 뭔가가 개운하지 않았다. 복수하는 과정 내내 여과되지 않은 무언가가 가슴 속에 남아 계속해서 부유하고 있다.
‘이젠 알 것 같아.’
무엇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알 것 같았다.
하일레나는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식은땀이 가득한 작은 얼굴, 두 눈은 이미 굳게 감겨 있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빛무리가 하일레나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어떤 어둠도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순백의 빛.
‘그러니까 일어나!’
빛이 칼리오페의 몸에 스며든다.
하일레나는 신중하게 집중했다. 이 손으로 칼리오페를 치유할 것이다. 한 번쯤은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강대한 신성력만큼이나 강렬한 빛이 끊임없이 칼리오페에게 퍼부어졌다.
하일레나의 이마에도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더 악화됐다. 하얗게 질린 입술은 점점 파래져 보랏빛이 돌 것 같았다. 그걸 보는 하일레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한 술렁임이 소름처럼 돋아난다.
그녀는 애써 그 불안을 털어냈다.
‘할 수 있어.’
하일레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읊조렸다.
‘내가 너를 깨울 거야!’
그녀의 손에서 아까보다 더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흡…….”
한계를 뛰어넘는 일에 신경과 혈관이 가닥가닥 끊어질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익숙하다 생각했는데도 괴로웠다.
아프다.
‘아파. 괴로워. 숨을 못 쉬겠어. 온몸이 터질 것 같아. 괴로워. 아파. 아파. 아파.’
그만하고 편해지고 싶었다. 이런 고통을 참아낸다고 해서 정말 칼리오페가 깨어날까? 루스티첼 백작이 다쳤을 때도 온힘을 다했다. 하지만 결과는…….
으득, 하일레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극한으로 신성력을 쏟아붓는 바람에 색이 바랬던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내가 널 치유……할 거야.’
고통에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새하얗게 끊어지길 반복하는 의식 속에서 하일레나는 치유할 거라는 말만 되뇌었다.
‘예전에는 나도 치유할 수 있었어.’
신성력이란 본디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큭큭…….”
모두가 하일레나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숨을 죽이는 가운데, 손톱으로 바닥을 긁는 것 같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소용없어. 네 신성력의 근원에 주박을 걸어놨으니까.”
데우소가 말을 할 때마다 입가에서 피거품이 끓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은 희열로 번들거렸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가 단언했다.
“곧 있으면— 크헉!”
가슴을 거세게 짓밟힌 데우소가 비명을 토해냈다. 왈칵, 핏덩이가 쏟아져 나온다. 퉤, 하고 피를 뱉어낸 그가 미친 것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시체가 된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와 너희가 싸우는 걸 기대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증오스러운 칼리오페 루스티첼. 사사건건 그의 앞길을 훼방 놓다 못해 결국에는 그가 평생을 염원했던, 그러나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보란 듯이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게 끝.
은잔을 손에 넣자마자 죽다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 정도쯤은 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은잔은 칼리오페가 정신을 잃자마자 사라졌다. 그러니 저들 중에서도 은잔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못 가진다면 그 누구도 가져선 안 된다.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야. 넌 주박을 풀 수 없어.”
데우소는 제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하일레나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애쓰는지 모르겠군. 오히려 나는 네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저주 받은 창, 하스타 디레를 연구해 시체를 조종하는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하는 법을 찾아냈다. 비록 저주에서 파생한 힘이지만, 데우소가 보기엔 축복이었다. 아무에게나 그 능력을 줄 순 없었다. 성녀는 그에게 선택받은 자였다.
“치유밖에 못 하는 신성력보다는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게 더 이득 아닌가? 넌 나에게 감사를…… 커헉!”
“리페를 치유하는 데 부정 탈까 봐 지금 당장 널 죽이지 않는 것에 감사해라.”
호르세안이 대신관의 머리를 짓밟으며 속삭였다. 항상 다정한 빛을 띠었던 호박색 눈동자가 한없이 차갑고 싸늘했다.
살기와 기백에 눌려 저절로 입이 닫혔다. 데우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호르세안은 한숨을 내쉬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 로베르트 그리고 아스타레아스가 꼭 붙어있어 거의 가렸지만, 틈 사이로 생기가 다 빠져나가 핼쑥한 얼굴이 보였다.
‘어서 일어나. 내 꼬마 아가씨.’
* * *
‘내게…… 주박을 걸었다고.’
하일레나는 어쩔 수 없이 동요했다.
‘성녀’로 만들어지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치유력을 행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들이 그녀에게서 신의 은총마저 빼앗아간 것이었다.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과 같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어린 꿈을 짓밟았다.
하일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넌 주박을 풀 수 없어.]
그 말이 정말로 주박이 되어 그녀를 옭아맸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아무런 변화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소용없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끔찍했던 고문, 도망과 반항. 각다귀 같은 신관들의 손. 포기하고 순응하면 편했다.
지금도 포기하면 편해질 수 있다. 하일레나는 그 달콤함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해봤자…….
[넌 주박을 풀 수 없어.]
맞아, 나는—
[나는 의미 없는 발버둥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때, 가슴 속에서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약 내 발버둥에 의미가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 역시.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은빛 눈동자에 오기가 어렸다.
신성력이 빠르게 고갈되어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일레나는 더 많은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흐윽…….”
잇새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까의 통증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아아악!”
그러나 하일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될 때까지 발버둥 칠 것이다. 그녀 혼자서, 스스로 데우소의 저주를 넘어설 것이다. 이겨내리라.
무언가 투툭 끊기는 느낌과 함께 모든 감각을 압살하는 고통이 찾아왔다. 아니, 이걸 과연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산 채로 갉아 먹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일레나는 버텼다. 신성력의 고갈로 흐려져 가던 빛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제발, 난 너에게 할 말이 있어.’
하일레나는 고통에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떠 여전히 누워있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어서 일어나!’
화아아악—
시야를 표백시킬 정도로 강한 빛이 하일레나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 빛이 잦아들었을 때, 하일레나는 더 이상 몸을 가눌 힘도 없어 그대로 쓰러졌다.
‘안되는 걸까?’
죽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그 생각부터 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결국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걸까?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하일레나는 후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천근 같았다.
‘아직, 아직이야…….’
고장 난 등불처럼 그녀의 손에서 빛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그때, 따뜻한 무언가가 그녀의 손을 쥐었다.
“하일레나.”
십수 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처음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목소리였다. 자신조차 잊었던 이름을 다시 되살려준 목소리.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눈을 뜨니 산호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칼리오페였다. 맞닿은 손이 따스했다.
“내가, 내가…….”
고쳤어?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턱이 덜덜 떨리고 눈가가 시큰했다.
“응, 당신이 나를 치유해주었어요.”
칼리오페가 흐리게 보였다 선명해진다. 은빛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가득 차올랐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칼리오페가 다정하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축해주었다. 앉을 수 있게 상체만 잡아주었는데 하일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완전히 일어났다.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고 싶었다.
“리페…….”
하일레나는 말없이 무사히 회복한 칼리오페를 눈에 담았다. 아직 조금 창백하긴 하지만 그래도 입술색이 분홍빛이고, 피부도 따뜻했다. 숨소리도 고르고 안정되었다.
‘정말로 내가 치유했어.’
신성력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신전에서 훈련 삼아 치유했던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실질적으로 누군가를 치유한 것은 처음이라 봐도 무방했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기묘한 감각이 포말처럼 차올랐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이 감정을. 그저 성취감이나 보람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해방감과도 비슷한 감각.
하일레나는 칼리오페의 손을 꽉 맞잡았다.
“저, 영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말해보라는 듯 마주 보는 칼리오페의 눈을 응시하면서, 하일레나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전에 제가 복—”
“으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들려온 괴성이 하일레나의 말을 뒤덮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에 핏발이 선 채 달려오는 데우소가 보였다.
방심했다.
칼리오페가 깨어나고, 하일레나가 그토록 염원하던 치유를 해냈다는 사실에 다들 기뻐하느라 경계심을 푼 것이다. 설마 양팔을 잃은 데우소가 사고를 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퍼억, 데우소가 하일레나를 들이받았다.
“꺄악?!”
강한 충격에 하일레나는 중심을 잃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굉장히 느릿하게 보였다. 자신을 향해 뻗어지는 손, 뭐라 외치는 입술, 칼리오페의 당혹스러운 얼굴.
왜.
이제 살아났잖아. 내가 치유해주었잖아.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풍덩—!
물소리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넘어지면서 샘에 빠져버린 것이다.
잘못 들이켠 물 때문에 코가 맵고 물보라로 인해 시야가 어지럽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강대한 에테르가 강제로 몸 속에 주입되며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것같은 통증이 일었다.
하일레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녀는 참아내고 이겨냈다. 하지만 지금과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 샘에 완전히 몸을 담근 것도 아니고 샘물을 담은 수조에 머리를 담갔을 뿐이었다.
고통에 절로 입이 크게 벌어졌다. 숨 방울이 빠져나가고 샘물이 기도로 파고 들었다.
“하일레나!”
다급한 외침이 고통과 물에 멍멍이는 귓가에 울렸다.
“어서 끌어 올려!”
“빨리!”
사람들은 샘 주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어서 하일레나를 구출해야 했지만, 무턱대고 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일레나와 함께 빠진 데우소는 눈과 배를 까뒤집은 채 경련하며 샘물에 떠 있었다. 쇼크로 혈관이 잔뜩 불거진 데다 양팔까지 잘려있어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이었다. 아직 죽은 거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터였다.
에테르로 가득 채워진 샘에 섣불리 들어가면 데우소처럼 될 게 뻔했다.
다행히 샘은 그리 크지 않았고 고요해서 하일레나는 물살에 떠밀려가지 않고 물가에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하일레나의 팔이 수면 위로 나왔을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샘에서 끌어냈다.
“커헉! 콜록, 콜록!”
물 밖으로 나온 하일레나는 기침하며 물을 토해냈다. 금방 건져 올린 덕에 의식을 잃지도, 물을 많이 먹지도 않았다. 등을 두들기고 신선한 공기를 가득 마시면 괜찮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샘에 빠졌을 때의 이야기다. 젊음의 샘은 평범한 샘이 아니었다.
“하일레나!”
갑자기 픽 쓰러지는 하일레나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비명처럼 그녀를 불렀다.
하일레나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확장된 게 육안으로까지 보였다. 안압에 혈관이 터진 건지, 은빛 눈동자를 담고 있던 흰자위가 피로 얼룩져있었다.
그 상태로도 하일레나는 눈을 돌려 칼리오페의 얼굴을 담았다.
“리, 리페.”
“네.”
칼리오페가 하일레나의 손을 꼭 잡으며 답했다. 하일레나의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붙잡은 칼리오페의 손마저 떨릴 지경이었다.
“나 너, 너를 치유했어. 그렇지?”
칼리오페는 눈물을 참아내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일레나가 저를 살려주었어요. 조금만 참아요. 곧—”
그렇게 말하며 칼리오페가 하일레나의 손을 놓고 신관에게 가려던 순간이었다.
턱, 손목이 잡혔다. 아픈 사람이 잡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하고, 하고 싶은 말이…… 허억, 나, 하고 싶은 말…….”
“응, 듣고 있어요.”
칼리오페는 일어서던 몸을 다시 앉히고 제 손목을 쥔 하일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하일레나가 자신을 잘 볼 수 있도록 얼굴에 더 가까이했다.
슬몃, 그녀가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나온 목소리는 침중했다.
“미안해.”
칼리오페는 하일레나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보, 복수하고 싶다고 했잖, 아. 그거 아, 아니야…….”
하일레나로서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건, 가장 처음으로 이루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뒤늦게야 깨달았, 흐윽…….”
하일레나는 헐떡이면서도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읏, 너에게 사과…… 사과하고 싶었어.”
그래, 그녀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거였다. 잘못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고, 사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속죄하고 싶었다.
하일레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누워서 말도 잘 못하는 게 답답했다. 좋은 모습까진 아니어도 괜찮게 보이고 싶었다. 너무 꼴사납지 않았으면 했다.
“다른 사, 사람들에게도…… 사과하고 싶, 었어.”
왜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사과하면서 우는 건 너무 제멋대로인데.
하일레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계속해서 당겨 올렸다.
“나, 용서받고 싶었어.”
용서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감히 용서받고 싶었다.
“미안해.”
곧 꺼질 것 같이 볼품없는 목소리였다.
그게 분했다. 너무. 이제야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건데.
“미안해.”
자신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지지도 못하고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일레나.”
칼리오페가 웃으며 하일레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투둑, 그녀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하일레나의 뺨으로 떨어져 내렸다. 뺨의 곡선을 따라 옆으로 흐르다가, 하일레나의 눈물과 만나 방울진 채 버티다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또르륵 흘러내린다.
“나는 당신을 용서했어요. 아주 오래 전에.”
그 말에 하일레나가 하하, 하고 웃었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랬어? 그랬구나.”
칼리오페는 흔들리는 호흡을 억누르며 하일레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 이제 살아야지요.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 다른 것들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요.”
그 말에 하일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눈물 방울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나 치, 치유했어.”
“네, 이제 사람들을 고칠 수 있어요.”
“맞아. 나는…….”
하일레나의 은빛 눈동자에 저를 살펴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모두 걱정스럽고 슬프고 간절한 얼굴이었다.
“다들 나를—”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다들 저렇게 걱정하는데, 안타까워하는데, 내가 웃으면 안 되는데.
불현듯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부모님의 얼굴이었다. 웃으며 저를 하늘 높이 안아 들던 모습, 무등을 탈 때는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큰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짧고 흐릿했다.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했고, 부모님은 저를 남겨두고 떠나셨다. 보육원 생활이 시작됐다. 그와 함께 긴 머리카락이 목덜미에서 잘렸다. 신성력에 재능을 보여 신전에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끔찍한 나날이 찾아왔다.
아무리 애원하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참혹한 날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함께 있던 소녀들은 어느새 하나 둘 죽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성녀가 되었다.
성녀가 된 그녀는 신전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세뇌했다. 단 한 순간도 즐긴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저를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 미소가 나왔다. 추앙받을 때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 같았다. 그야 자신은 신의 은총을 받는 성녀이니 당연히 특별한 존재였다.
세뇌에 대한 거부감도 조금씩 무뎌졌다. 신전은 모든 것은 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대의를 위해서라고 했고, 그녀도 그 말에 점점 고개를 끄덕였다. 손톱에 난 거스러미처럼 가끔씩 무언가 거슬리긴 했지만 대체로 편안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만나기 전까진.
결국엔 질 게 뻔한 싸움인데도 계속해서 대항하는 칼리오페를 보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좋은 쪽이냐 싫은 쪽이냐 고르자면, 더러울 정도로 싫었다.
신관들의 말이 거슬리는 빈도도 늘어났다. 조금 거슬린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더 참을 수 없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칼리오페 루스티첼 때문이었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녀였다.
결국 칼리오페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거꾸러트렸다.
하지만.
[하일레나.]
고아도, 성녀도 아닌, 오롯한 그녀 자신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준 사람 역시 칼리오페였다.
‘아.’
하일레나는 문득 깨달았다.
‘주마등이구나.’
칼리오페가 머리칼을 잘라주었다. 목덜미 위에서 잘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하일레나는 새 삶을 시작했다. 똑같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지만 보육원에 들어갔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 그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칼리오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먼저 그녀를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언젠가, 언젠가는 ‘하일레나’로서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을까. 그게 너무 먼 미래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힘든 일이었을 텐데 고생했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
당연히 자신을 경계하고 의심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그녀를 대하는 것조차 꺼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넘어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뛰어난 신성력을 가져서도 아니고, 성녀여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녀가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했기에 인정한 것이다.
[하일레나.]
그 목소리가 들렸을 때, 주마등을 보고 있던 하일레나는 미소 지었다. 이 앞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마등 속 자신이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뻗었지만,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서둘러 손을 거두려 한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더 빨랐다.
손을 감싸 쥐는 온기. 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하일레나는 칼리오페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며 하일레나는 마주 미소 지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이 틀렸다.
성녀로서 살았을 때도 그렇지만,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계속 자신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게 복수라는 것도 틀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내가 옳았어.’
눈앞에 보이는 이 순간을 주마등에서 가장 커다랗게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자신이 지나온 생을 바라보면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일 거라고 여겼다. 그녀의 예감처럼 흘러가는 순간들 속에서 유일하게 사진처럼 남아 있는 순간이었다.
눈앞 한가득 웃고 있던 칼리오페의 모습이 어느새 울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리페.”
자신이 부르자 애써 웃으려고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못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애써 미소 지었던 칼리오페의 표정이 무너져 내린다.
‘울리려던 건 아닌데.’
하일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정말 쓴웃음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점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애써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다들 우스운 표정이었다. 코끝이 벌게진 채 입매를 우그러트리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칼리오페 몰래 홀로 샘을 찾아 나서면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 하나 없을 거라고…….’
그래서 위험한 일을 혼자 도맡았다.
‘틀려서 잘됐다.’
슬퍼하는 사람들한테 미안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퍼해 줘서 기쁘다.
“있잖아, 리페.”
비밀이지만, 칼리오페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나 행복해.”
이래도 되는 걸까?
칼리오페가 뭐라 말하는 게 보였다. 움직이는 입술과 웅웅거리는 소리. 잘 안 들린다. 뭐라고? 되묻고 싶은데 입술이 너무 무거웠다. 웅웅거리던 소리는 아예 사라지고, 흐렸던 칼리오페의 모습도 어둠에 잠긴다.
하지만 하일레나는 칼리오페가 뭐라고 답했을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된다고 했겠지.’
행복해도 된다고, 앞으로 더 행복하자고.
그래, 꼭 그러자.
하일레나는 속으로 답했다.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하일레나?”
칼리오페는 미소 지은 채 눈을 감은 하일레나를 보고 믿기지 않아 그녀를 불렀다.
하일레나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니야. 이건 제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어서 잘 못 들은 것뿐이다.
“하일레나…….”
다시 한 번 불러보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하일레나!”
칼리오페는 하일레나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아무 힘도 없는 몸은 품에서 축 처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각자 조의를 표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일레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존중받고 사랑받을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리페.”
하일레나를 끌어안은 채 미동도 없는 칼리오페의 등을 아스타레아스가 감쌌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에 무너져선 안 된다. 언제나 중심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그건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겪어왔으니까.
모두가 사라져도 칼리오페는 언제나 칼리오페 루스티첼로 살아왔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건 절대 무뎌지지도,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무너지고 싶다.
‘응, 행복하자.’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하일레나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한 말을 들었으니까.
칼리오페는 조심스럽게 하일레나를 내려놓고 반듯이 섰다.
“하일레나는 우리들의 친구이자 영웅이자 위대한 신관이었습니다.”
칼리오페가 엄숙히 선언했다.
비스 신전과 얽혔던 일을 생각하면 과연 하일레나에게 신관이라고 하는 게 좋은 일인가, 하는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하일레나가 얼마나 사람을 치유하고 싶어 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그녀는 끝의 끝까지 그 바람을 위해 노력했고, 결국 이뤄냈다. 그러니 하일레나는 한 사람의 신관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성녀가 아닌, 위대한 신관.
그리고 이미 위대한 신관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며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숭고한 정신이 위대하지 않을 리 없다.
루시우스가 샘가에 핀 흰 들꽃을 꺾어 하일레나에게 바쳤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 역시 한 송이씩 저마다 꽃을 꺾어 하일레나에게 헌화했다. 하일레나는 금방 수많은 꽃송이에 파묻히게 되었다.
잘 관리해 주먹만 하게 핀 백합 송이는 아니었다. 흔하디 흔한 들꽃. 하지만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골라낸 것이었다.
방금 있었던 전쟁의 화마에 닿지 않은, 가장 예쁜 꽃송이를 찾아 하일레네에게 바쳤다. 소박하고 소담한 꽃이지만 그 속에서도 하일레나는 빛이 났다.
미소 짓고 있는 입가에 칼리오페는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미련이 없구나.’
눈을 감겨주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감고, 거기다 미소까지 짓고 있다니. 행복하자고 했으면서 정작 그녀 자신은 그렇게 훌훌 털고 가버리다니, 야속했다.
오렌과 로한의 대신관이 하일레나를 축복했다.
묵념이 끝나고 칼리오페는 하일레나의 곁에 무릎 꿇고 앉았다. 고개를 숙여 매끄러운 이마에 입을 맞춘다.
야속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마지막이 미련과 후회로 가득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행복하길, 내 소중한 친구.’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샘물이 흐른다.
서편 하늘은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해 구름에 다채로운 색을 덧칠한다.
꽃을 한가득 품은 하일레나는 향그러웠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이 향기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 * *
하일레나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사람들을 속이고, 세뇌하고, 기만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게 된 것이 뭉클했다.
‘그만큼 네가 치열하게 살았다는 게 보여서.’
‘하일레나’로서 살아간 시간은 짧았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이뤄냈다.
그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하일레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겪어본 사람들은 오늘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조의를 표했다.
‘언젠가는 꼭.’
칼리오페는 하일레나와 비스 신전에 관한 진실을 대중에 밝힐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에 관해서도.
하일레나가 저질렀던 잘못이 없던 것이 되진 않더라도 불필요한 오명은 씻겨주고 싶었다.
칼리오페는 하일레나를 위한 헌정곡을 만들어 바쳤다. 하르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가사와 주제부 멜로디는 칼리오페 혼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엄숙한 장송곡은 하일레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일레나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칼리오페가 밝은 노래를 부를 때 좋아했다. 집에서 칼리오페가 노래하고 있으면 조금 거리를 두고 슬그머니 앉아 듣다 가기도 했다.
[같이 부를래요?]
그렇게 말하면 깜짝 놀라 사양했다. 하지만 살짝 붉어진 얼굴과 눈빛에 아쉬움이 보였다. 노래에 얽혀 칼리오페와 일이 있었으니 염치 때문에 사양하는 듯했다.
칼리오페는 그런 그녀를 붙들고 나란히 악보를 보며 제가 부르던 속가를 가르쳐주었다.
‘들었을까?’
칼리오페는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살아있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하일레나가 슬그머니 앉아 듣다 갔으면 좋겠다. 칼리오페는 그럴 때 하일레나가 짓던 자그마한 미소를 좋아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침중한 얼굴로 칼리오페 앞에 부복했다.
“모든 것이 제 탓입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칼리오페는 놀라지 않았다. 도미닉 경다운 행동이었다.
“제가 아가씨를 지켰더라면 이런 일은—”
“도미닉 경이 저를 지켰다면 레아스가 창에 맞지 않았을 거고, 그러면 제가 쓰러질 일도 없었고. 저를 치유할 일도 없었을 테니 하일레나도 힘 빠지지 않았을 테고. 그러니 그렇게 쉽게 샘물에 빠지지 않았을 거라구요?”
칼리오페가 그의 말을 자르며 조곤조곤 말했다. 도미닉 경은 입을 다물고 칼리오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하일레나를 샘에 데려간 일 자체가 잘못이에요. 결국 결사대에 하일레나를 받아달라고 했던 제 탓이지요.”
“아닙니다!”
도미닉 경이 깜짝 놀라 강하게 부정했다. 개암나무 열매 같은 눈동자에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자신이 처단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네, 그러니 경의 탓도 아니에요.”
“하지만 제 임무는—”
“하일레나를 그렇게 만든 건 데우소예요.”
칼리오페가 단언했다.
죗값을 치렀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데우소는 절망 끝에 고통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경은 시체를 되살리던 타라손을 찾아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잖아요. 오히려 공을 세우셨지요.”
“그건 아가씨께서 타라손이 어딨는지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하지만 저는 알고서도 경에게 부탁했죠. 제가 아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까.”
그 자리를 이탈하는 것부터가 무리였을 테지만, 갔더라도 타라손이 몸을 숨긴 결계를 파훼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경이 제 곁을 떠났던 이유도 제가 부탁해서였구요.”
그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숙였다. 보지 않아도 그가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게 선했다.
이런 사람이었다. 그는.
“도미닉 경.”
칼리오페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건 비밀인데, 경은 이미 여러 번 저를 구했어요.”
도미닉은 잠자코 칼리오페를 내려다 봤다. 자신의 레이디가 이런 뉘앙스를 풍긴 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떤 것을 말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건만, 칼리오페가 사하르네 부인이나 몬스터 건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칼리오페는 의아한 기색이 가득한 도미닉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죽을 뻔한 위기에서 지켜내는 것만이 사람을 구하는 건 아니다. 살아있다고 해서, 숨을 쉰다고 해서 삶을 사는 건 아니다.
도미닉은 그녀가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
“있죠.”
칼리오페가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손을 입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속닥거렸다.
“샘에서 돌아와서도 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요. 단 한 번도 일어나기 싫다고 늦잠 잔 적이 없어요.”
잠이 오지 않지만, 그래도 같은 시간에 침대 위에 눕는다.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아침은 가족들과 함께 꼬박꼬박 먹고 점심도, 저녁도 제시간에 먹어요. 티 타임도 빼먹지 않구요.”
입맛이 없어도 절대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 조금씩이라도 먹으려 노력한다.
일상을 지키는 것.
굉장히 쉽게 보이지만 사실 그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은 없다. 매 순간 노력이 필요하다.
조그마한 불행이나 우울 앞에서도 일상은 촛불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력해서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다. 매번 새롭게 고비가 찾아와도 새롭게 지켜낼 가치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간다.
“잘하셨습니다.”
도미닉의 칭찬에 칼리오페가 웃었다.
“네, 저 잘했죠.”
칼리오페의 시선이 주위를 향했다.
“다들 잘하고 있어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도, 이루고 싶었던 것을 오늘은 이루지 못한 사람도, 운이 안 좋은 하루를 보낸 사람도.
모두 다 일상을 잘 지켜내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도저히 혼자서는 지키기 힘들 때가 온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밝혀낼게. 너는 밥 먹고 자도록 해. 매일매일 해 질 무렵이면 침대에 눕고 새가 울면 일어나. 일어나면 밥을 먹고. 하루 세 번 먹어야 해. 너는 그것만 해줘. 부탁한다.]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을 때, 칼리오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쉽게 중심을 잃고 무너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그대로 가다간 어쩌면 술독에 빠져 살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탱해 주는 가족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순식간에 무너져 자신의 삶을 망가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게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는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가족들조차 모두 사라졌을 때.
‘나를 지탱해 준 사람은 당신이었어.’
고집스럽고 우직한, 나의 기사님.
삶이 아무리 잔인할지라도 도미닉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끝까지 주군의 딸을 지키겠다고 말하는 그가 있었기에—
참극 속에서도 신의를 지키고 신념을 관철하는 자가 있었기에.
‘나 역시 그럴 수 있었어.’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렇게 시간을 되돌아올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리라.
도미닉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말을 뱉어내지 않고 다시 다물린다.
“……아가씨.”
침묵 끝에 그가 칼리오페를 불렀다.
산호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해온다. 검은 망사가 얼굴의 반절을 가렸지만 그녀의 눈은 선명하게만 보였다.
도미닉은 그 투명하면서도 깊은 눈동자를 보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뭘까, 대체.
항상 신중하고 진중한 그답지 않게 생각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칼리오페를 향해 움직였을 때였다.
“리페.”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도미닉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하려던 행동을 깨닫고 머릿속이 서늘해진다.
“레아스.”
칼리오페가 부르자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짓는다. 방금 전까지 무표정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가운 미소였다.
그가 칼리오페와 도미닉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칼리오페의 손을 잡는다.
도미닉은 그 모습을 말 없이 지켜봤다.
칼리오페의 호위기사가 되며 몇 번이나 보았던 장면이다. 아마 카스틸로 공자의 시종인 러그윈을 제외하면 그보다 이런 장면을 더 많이 본 사람은 없을 터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눈에 박혀 들었다.
따끔. 명치를 찌르는 것처럼 따가운 감각이 느껴진다.
자신이 하지 못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아스타레아스가—
‘부러워……?’
도미닉은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흠칫했다.
아니, 그냥 부럽기만 하면 다행이다. 자신의 내부에 떠오른 감정에 도미닉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도미닉 경?”
칼리오페가 그의 이변을 깨닫고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걱정스러운 눈동자.
‘다정하신 분.’
하지만 자신을 보는 눈동자와 아스타레아스를 보는 눈동자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녀가 말하는, 자신이 그녀를 구해준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그녀를 구해주어도, 몇 번이나 그녀를 지켜도.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진 않겠지.’
씁쓸했다.
“저는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몸이 안 좋은 건가요?”
“아니요.”
도미닉이 칼리오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두 분이서 시간을 보내시도록 잠시 비켜 있겠습니다.”
그 직접적인 말에 칼리오페가 당황해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였다.
“아, 그…… 고마워요, 도미닉 경.”
결국 두 뺨을 따끈따끈하게 붉히고선 인사한다.
도미닉은 옅게 미소 지었다.
따끔따끔. 명치를 찌르는 통증은 더 심해지건만 미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사랑을 하고 있는 칼리오페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묵례하고 물러나는데 아스타레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는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칼리오페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다. 도미닉의 불온한 마음을 알고 끼어든 것이다.
그가 부러웠다. 질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그가.
‘……호위기사 실격이군.’
도미닉은 쓰게 생각했다.
* * *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한참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말이 만들어낸 침묵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칼리오페였다.
“……고마워요.”
하일레나가 숨을 거두었을 때, 아스타레아스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자신을 놓아버렸을 것이다.
‘회복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
그리고 그 긴 회복 기간 동안 그녀의 주변 역시 힘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준 아스타레아스가 있기에, 그녀는 똑바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일레나의 죽음을 선언하고 경건한 조의를 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었다.
칼리오페의 선언 덕에 사람들은 불쌍한 소녀의 죽음을 가련하게 여기기보단 위대한 영웅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때 당신이 내게 기대주길 바랐는데.”
오열하는 칼리오페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아스타레아스는 그녀가 혼자 고개 숙이고 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차피 흘릴 눈물이라면 그의 가슴에 기댄 채 흘렸으면 했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그녀를 품어 조금이라도 온기를 나눠줄 수 있도록.
하지만 칼리오페는 무엇이라도 깨달은 것처럼 꿋꿋이 일어나 똑바로 섰다. 자신의 감정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갈무리한 후 상황을 정리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아.”
칼리오페가 그런 의연함을 얻게 된 경위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스타레아스는 손을 들어 칼리오페의 눈가를 매만졌다. 마치 눈물이라도 닦아주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레아스.”
칼리오페는 어쩐지 분해 보이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보며 기시감에 빠졌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
회귀한 후 처음 아스타레아스와 얽히게 되었을 때.
눈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두고 갔다는 그에게 칼리오페는 울지 않았다고 답했다. 정말이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어린 소년의 것이지만 단단히 여문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눈가를 매만졌다. 지금처럼, 눈물을 닦아주듯이.
[울었잖아.]
그의 입술이 열리고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칼리오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그때에도, 지금도.
아스타레아스의 손끝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그것을 시작으로 칼리오페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손가락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이.
아스타레아스는 양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따스한 손이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낸다.
“흐어어엉!”
칼리오페의 몸이 그의 품에 잠겨들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하일레나가, 하일레나가—”
“응.”
“흐으윽, 이제 읏— 모든 일이 다 끝나서, 흑, 행복해질 수 있는데, 자기 삶을…….”
아스타레아스는 아무 말 없이 칼리오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칼리오페의 고개가 그의 가슴에 파고든다. 그녀가 웅얼웅얼 쏟아내는 슬픔이 그 가슴에 묻힌다.
한참 동안 눈물을 쏟던 칼리오페가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등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머뭇머뭇 아스타레아스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뗀다. 하지만 고개를 들진 않았다.
“리페?”
불러도 마찬가지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휙, 그의 손이 칼리오페의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칼리오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시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있는 손이 허락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우느라 달아올랐던 칼리오페의 얼굴이 더더욱 달아올랐다.
보지 않아도 눈이 퉁퉁 부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눈만 부었으면 다행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칼리오페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점점 더 다가왔다.
설마, 하고 눈을 꽉 감았다.
눈가에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이 닿는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었다. 우느라 눈에 열이 잔뜩 올라 평소와 달리 그의 입술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을 촉, 하고 빨아먹은 그가 이마를 맞댔다.
“나 피하지 말아요.”
“……응.”
칼리오페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그가 미소 지었다.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눈물 범벅인 얼굴을 닦아준다.
한참 손을 움직이던 그가 말했다.
“하일레나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걸 바꿔 말하면 하일레나가 죽을 때까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게 된다. 그건 틀렸다.
“그녀는 이미 행복했으니까.”
칼리오페도 안다. 스스로 눈까지 감고, 가장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는 하일레나의 모습이 야속하리만치 행복하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더…….”
다른 누구도 아닌 하일레나 본인이 만족한 삶이다. 타인이 멋대로 더 좋았을 수 있다고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페.”
그때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불렀다.
“저길 봐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렸다.
“아…….”
은빛 물결이 하일레나의 무덤을 휘감고 있었다.
화려하기 보단 온유한 빛의 파도. 꼭 하일레나가 가는 길을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진혼의 빛…….”
칼리오페가 중얼거렸다.
위대한 성직자가 땅에 묻힐 때 이런 광휘가 무덤을 감싼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저 신관을 우상화하기 위한 선전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에요.”
“나도 그래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런 빛을 발하는 신관은 없었다.
무덤 주위를 휘돌던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도 쳐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에게까지 밀려온다. 따스한 빛이 아직 젖어있는 눈가를 스쳤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더니 이내 하늘로 사라진다.
빛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하늘을 올려보던 칼리오페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오른다.
‘하일레나…….’
다쳤을 때 하일레나의 신성력이 온몸에 스며들던 게 떠올랐다. 따스하고 말랑말랑했다. 고통도 잊게 만들 정도로.
방금 그 빛도 그랬다. 꼭 하일레나의 신성력처럼 다사롭고 온화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쌌다. 그녀는 그에게 기댔다.
모두 힘들지만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지탱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다. 두 다리를 땅에 붙이고 발끝이 아니라 앞을 볼 수 있도록.
‘행복하자고 약속했지.’
칼리오페는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기로 다짐했다.
가끔은 이렇게 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도록 노력하리라. 그렇게 살아나갈 것이다.
“리페.”
“네.”
“나는 절대로 당신보다 일찍 죽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나는 당신을 이 세상에 혼자 남겨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내 죽음을 겪게 하지 않을 거야.”
푸른 눈동자가 한없이 진지했다. 칼리오페는 그를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그건 나도 그런데.”
농담인 듯 웃음기가 섞인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그럼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는 수밖에 없겠네요.”
속삭이는 말에 칼리오페가 웃었다.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누가 일 초라도 먼저 죽으면 어떡해요?”
“안 그러도록 노력해야죠.”
두 사람은 몸을 나란히 맞댄 채 키득키득 웃었다.
이상하게도 노력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행복하고 평화롭게 둘이서 동시에 긴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끝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거나 숙연해지긴커녕 웃음이 나다니.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어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칼리오페가 시선을 들어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곧장 눈이 마주친다.
“그때까지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런 말을 하는 남자는 모두 약속을 못 지킨다고 하던데.”
괜히 툴툴거리자 아스타레아스가 어깨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럼 그때까지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행복하게 해드리죠.”
그럼 괜찮은 거 아니냐며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치,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런 뻔하고 유치한 말도 아스타레아스가 하니까 다르게 들렸다.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나도 중증인가 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내리는데—
‘으응?’
이글이글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의 시선이 따갑다. 정확히는 아스타레아스에게 꼭 붙어있는 있는 어깨 쪽이 따가웠다.
왠지 모르게 아스타레아스의 목숨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전생의 비극을 일으킨 원인을 모두 없앴는데도.
칼리오페가 본능적으로 아스타레아스에게 완전히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려던 차였다.
턱, 어깨가 잡혔다.
“아스타레아스…….”
음산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림자가 어둡게 깃든 얼굴이 나타났다.
‘히이이익!’
심장이 철렁해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무덤가라지만, 무덤가라지만!
그때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있던 귀신(?)의 얼굴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유, 유리안?!’
눈이 마주치자 천사처럼 방긋 웃는다. 도무지 아까의 귀신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었다.
“설마 지금 그걸 프로포즈라고 한 거야? 유치하긴.”
에피니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칼리오페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것도 모자라 칼리오페를 등 뒤로 숨기고 아스타레아스의 시야를 제 몸으로 막았다.
칼리오페의 눈에는 이런 신경전이 들어오지 않았다.
‘프, 프로포즈?!’
생각도 못한 단어에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
그리고 당연히 가족들도 갑자기 변한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았다.
조문객들의 애도를 방해하지 않으려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가족들의 얼굴이 확 굳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왠지 모르게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와 꼭 붙어있던 아까보다 지금이 더 열 받았다.
척척척, 가족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디 전투에라도 임하는 것 같은 기세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은 아스타레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로포즈라…….’
물론 칼리오페와는 다른 방향으로 당황한 것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진지해졌다.
“그딴 싸구려 멘트나 날리면서 프로포즈라니!”
“내가 생각해도 그건 좀 성의가 부족했어.”
에피니에 이어 유리안과 힐데르트까지 아스타레아스를 비난했다.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미간이 살짝 금이 간다.
그 모든 게 칼리오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나, 레아스에게 프로포즈 받은 거야?’
평생 아스타레아스와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런 건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떡해! 어떡해!’
얼굴을 푹푹 붉히며 귀머거리가 된 칼리오페 대신 가족들이 유리안과 힐데르트의 말을 들었다.
“프로포즈…….”
루스티첼 백작은 충격에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우리 리페는 절대 못 내주니까!”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꼬옥 끌어안으며 “바보, 바보!” 하며 외쳤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날이 나오는 소리가 서늘했다. 조용히 검부터 뽑은 루시우스가 중얼거렸다.
“……벤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나마 루스티첼 부인은 고상한 품위를 지닌 귀부인답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이들의 연애를 지켜보며 흐뭇해하고 귀여워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후후, 프로포즈라니. 옛날 생각이 나네.”
청춘이라면서 웃는 그녀의 웃음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그런데.”
그녀가 팔랑팔랑 부치던 부채를 탁, 접었다.
“싸구려 멘트에 성의가 없었다고? 내 딸한테 프로포즈하면서?”
우지끈, 루스티첼 부인이 쥐고 있던 부채가 무지막지한 소리와 함께 반 토막이 났다.
열두 개의 검 중 하나인 루스티첼 백작의 눈빛에도, 소드 마스터인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아스타레아스가 무력 하나 없는(?) 루스티첼 부인의 기세에 움찔했다.
에피니와 유리안, 힐데르트 역시 순간적으로 루스티첼 부인의 기세에 몸을 움츠렸다.
‘과연 루스티첼 저의 최강자…….’
에피니가 존경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