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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은잔 (37/41)

Chapter 4. 은잔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귓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레아스.”

칼리오페는 제 허리를 끌어안은 아스타레아스의 팔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서로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푸른 눈동자가 길게 드리운 속눈썹에 어둑하게 그늘진 채 칼리오페를 응시했다.

칼리오페는 조금 난처한 기분으로 그 눈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말이 난처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시선이 너무…….

칼리오페는 제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눈빛에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쳐다보는데요?”

그 말에 내리깔았던 그녀의 시선이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향했다.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화들짝 놀라 서둘러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요.”

칼리오페의 뺨에 홍조가 더 짙어졌다.

탐스러운 장밋빛 뺨을 바라보는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점점 깊어졌다.

“그렇게가 어떤 건데요.”

귓가에 속삭이는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는 낮고 살짝 잠겼다.

칼리오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아예 앞으로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등에 맞닿은 그의 가슴이 유난히 뜨거웠고,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이 유독 단단했다. 그렇게 느끼는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절로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긴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리며 희고 긴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 순간,

“……!”

뒷덜미에 닿는 따끔한 감촉에 칼리오페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깜짝 놀라 뒷목을 감싸며 뒤를 돌아보니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산뜻해서 칼리오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을 뻔했다.

“지, 지, 지금…….”

너무 당황해서 버벅거리는 칼리오페를 보고 아스타레아스의 입매가 가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칼리오페의 몸이 빙글 돌아갔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앉고, 바로 앞에 보이는 푸른 눈동자에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몸을 그와 마주 보도록 돌린 것이다.

어느새 그의 손이 등허리를 받치고 있었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맞닿을 듯했다. 칼리오페는 혹여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어쩔 줄 몰랐다.

“응? 말해줘요.”

시선을 돌리는 족족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따라왔다. 그의 입술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다.

“내가 당신을 어떤 식으로 쳐다봤는데.”

칼리오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키스하고 싶은 것처럼?”

속삭임 끝에 촉, 하고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끌어안고 싶은 것처럼?”

등허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조금 더 그녀를 바짝 끌어당겼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몸이 밀착한다.

“아니면—”

아스타레아스의 속삭임이 더 낮고 짙어진다. 목소리에 습기가 느껴졌다. 그의 입매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그시 응시하는 시선에 밀도라도 있는 것처럼 칼리오페는 숨이 막혔다.

“레아스…….”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아스타레아스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크게 불렀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온 것은 흐느낌 같이 가냘픈 목소리였다.

“정답은 모두 다예요.”

아스타레아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지금 당신을 끌어안고 키스하다 못해 집어삼키고 싶거든.”

그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입술이 삼켜졌다.

잠시 맞닿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겁고 진한 키스였다.

혀가 입술을 가르고 입안으로 들어와 마치 제 것인 양 구석구석 맛보고 핥았다. 폭군처럼 제멋대로 유린하는가 하면 초콜릿보다도 더 부드럽고 달콤하게 녹인다.

“응…….”

칼리오페의 숨결에 비음이 섞였다. 뒷목이 오싹하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가녀린 허리를 감싼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쭉 뻗은 등마루를 따라 손이 위로 올라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다.

“하아…….”

마침내 두 입술이 떨어졌을 땐 칼리오페는 거의 아스타레아스에게 매달리다시피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그녀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아스타레아스가 가뿐히 받혔다. 온통 붉어진 얼굴로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는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호흡을 고르던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흐무러졌던 산호빛 눈동자가 다시 총기로 또렷해진다.

아스타레아스가 아까부터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내일 일에 관한 것이다.

내일, 황제를 시해하는 일.

하일레나가 샘의 위치를 알아낸 후로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황제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먼저 쳐야 하는 시간 싸움이니 당연했다. 그리하여 내일, 결사단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샘으로 향한다.

아스타레아스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를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칼리오페가 가족의 죽음을 겪고 가족의 안전에 관련된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아스타레아스도 마찬가지다.

전생에서 아스타레아스는 강렬한 빛이 일고 커다란 힘이 폭발하는 것을 느끼곤 서둘러 그곳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땅 위에 누워있는 칼리오페의 시신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여 칼리오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이후 시간대의 꿈은 꾸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칼리오페의 영혼이 몸을 떠나 과거에 안착하는 순간 시간이 되돌아간 듯했다.

“레아스, 나도 내일 함께 갈 거예요.”

칼리오페는 가만가만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감싸며 속삭였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가야 했다.

칼리오페는 검도, 마법도, 신성력도 다룰 줄 모른다. 무력도 치유력도 없다는 뜻이다.

보통이라면 짐만 될 게 뻔하니 당연히 함께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힘을 쓸 수 있었다.

“내가 필요할 테니까.”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의 뺨을 감싼 칼리오페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래도 날 생각해서 가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다.

살아 돌아온 황제는 이상하게 칼리오페에게 집착했다. 다른 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만 부르며 달려들었다.

‘만약 루스티첼 일가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떨렸다. 칼리오페의 손을 붙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황제에게 화가 났다. 저번에 그렇게나 큰 고통을 주었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했다. 칼리오페의 이름을 부른 입을 찢고 그녀에게 뻗은 팔을 뽑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화가 나는 건, 칼리오페가 위험한 순간 곁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바닥에 깊게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입술이 손바닥의 가장 오목하고 여린 부분에 닿는다.

내리떴던 눈꺼풀이 열리고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꿰뚫듯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가지 말아요.”

“레아스.”

“오늘.”

아스타레아스를 설득하려던 칼리오페가 그 말에 멈칫했다.

“오늘, 가지 말아요.”

아스타레아스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나랑 있자, 칼리오페.”

* * *

루스티첼 저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바로 내일 황제의 목을 칠 생각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루스티첼 가는 황제의 목에 검을 들이댄 전적이 있는 만큼, 내일 황제와 결판을 내지 못 하면 가문 전체가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 칼리오페를 공격한 황제에게 검을 들이댄 날, 루스티첼 부인은 고용인들에게 바로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고용인들까지 엮여서 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퇴직금으로 일년 치 봉급을 챙겨줄 것이고, 원한다면 다른 가문에 추천장도 써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좋은 조건에도 그만둔 사람은 손에 꼽았다.

대부분의 고용인들은 오히려 섭섭하다는 티를 냈다. 아이들을 함께 키운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단순히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내일 일은 워낙 큰일이다 보니 고용인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분위기만으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루스티첼 일가는 응접실에 모여 앉아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벌써 한 시간째다. 테이블에 놓인 차는 이미 차갑게 식었다.

그때, 루스티첼 백작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아무래도 내일 있을 일의 총 사령관으로서 가족들에게 할 말이 있을 터였다.

“아직도 안 돌아왔나.”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일 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그런데 가족들 중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아직……. 기별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분명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 말이죠.”

“안 되겠어! 나, 카스틸로 저에 가볼게요!”

로베르트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다른 가족들 역시 그에 동조해 주먹을 꽉 쥔 채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 이들은 내일 세상을 뒤집는 일로 이렇게 심각한 게 아니었다. 남자친구 집에 갔다가 연락 없는 딸내미—여동생—이 신경 쓰여서 그런 것이었다.

“이렇게 늦었는데 안 돌아오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 없어요.”

참고로 지금 시간은 일곱 시가 조금 지났고, 칼리오페는 저녁을 먹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위험하니 마중 나가는 게 좋겠소.”

위험하다는 건 분명 길거리일 텐데 루스티첼 백작이 이 순간 떠올리는 건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었다.

“도미닉 경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심할 순 없죠.”

루시우스가 검을 챙길 생각을 하며 말했다.

“일단 우리 리페는 나랑 결혼할 거니까 말이야.”

로베르트는 평소처럼 아무 말이나 했다. 단결하던 가족들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리페는 나를 더 의지한다.”

“내 딸은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말했는데?”

“원래 딸들은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최고라더군.”

파지직. 가족들이 사이에 찌릿한 전기가 튀었다.

부모 자식 형제간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다. 지켜보던 고용인들은 각자 미는 사람을 속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공방이 끝난 것은 유모의 개입 덕분이었다.

“저, 일단 지금은 카스틸로 저로 가시는 게 우선 아닐까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루스티첼 일가가 나갈 채비를 꾸렸다. 언제 경쟁했냐는 듯 마음이 착착 맞았다. 원래 공동의 적을 두면 사람은 단결하기 마련이었다.

* * *

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가만히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붉은 하늘의 반대쪽은 보랏빛에서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별이 빛나기 시작한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나뭇가지가 흔들려 쏴아아, 이파리가 서로 부딪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이렇게 느긋해 본 적이 언제였었지.’

칼리오페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이야말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결정 나는 날.

내일이 지나면 모든 것을 가지거나,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이 한없이 고요하고 편안했다.

옷자락에 풀물이 드는 것도 상관 하지 않고 풀밭에 아무 것도 깔지 않고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풀 냄새 솔솔 풍기고,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그리고, 옆에는 아스타레아스가 있다.

“어두워져요.”

“응.”

별 것 아닌 말에도 꼬박꼬박 대답이 돌아온다.

산호빛과 오렌지빛, 보랏빛이 뒤섞인 구름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 달 보인다.”

“응.”

“별도 떴어요.”

“응.”

꼬박꼬박 돌아오는 대답이 좋았지만, 또 그게 건성으로 느껴져서 조금 심통이 났다. 칼리오페가 입술을 비죽이며 아스타레아스를 돌아봤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쭈욱 그래왔던 것처럼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 보지 말고 하늘을 봐야지요. 엄청 예뻐요.”

“보고 있어요.”

아스타레아스의 대답에 칼리오페가 미간을 모았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아스타레아스가 덧붙였다.

“예쁜 거.”

아스타레아스가 미소했다. 나른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고 입술이 살짝 올라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산호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읏, 하고 신음을 흘린 칼리오페가 휙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귀 끝이 홧홧했다.

“좋다.”

만족스러운 한숨이 섞인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어.”

깍지 낀 채 잡은 손이 풀밭 위를 스쳤다.

손 외에는 어느 부분 하나 닿지 않았는데, 바로 옆에 누운 그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

얼굴을 붉힌 채 그를 외면하던 칼리오페가 결국 몸을 옆으로 돌려 그를 마주 봤다.

“하늘 안 봐도 돼요? 예쁘댔잖아.”

“지금 보고 있잖아요.”

칼리오페가 장난스레 입술을 종알거렸다.

“예쁜 거.”

아스타레아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덧붙이곤 히, 웃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문득 신기했다.

분명 자신은 타인에 대해서 어떠한 감흥도 못 느꼈는데, 어느 순간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기분이 든다.

어떤 때는 따뜻하고, 어떤 때는 초조하고, 어떤 때는 절박하다. 분명 제 감정인데 모든 것이 전적으로 칼리오페에게 달려 있다. 그 스스로는 조절할 수 없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오로지 칼리오페뿐이었다.

산호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황제의 자리도 이 눈동자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열렸다.

칼리오페는 그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을 본능적으로 예감했다.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시선이 얽혀든다.

“내일 샘에서 돌아오—”

“리페!”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 위로 들린 커다란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원 멀리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오페가 풀밭 위에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누워있는 모습을 본 그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휘익—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 로베르트는 아예 오러까지 써서 바람처럼 정원을 가로질렀다.

칼리오페가 겨우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세 사람은 이미 눈앞에 서 있었다.

루스티첼 백작이 딸아이를 당겨 제 뒤에 숨기고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위협하듯 아스타레아스 앞에 섰다. 칼리오페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면 바로 응징할 태세였다.

아스타레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장인어른, 형님들.”

언제 들어도 기가 막힌 호칭이었다.

뒷목을 잡는 세 남자의 반응은 보이지도 않는지 뒤늦게 온 루스티첼 부인을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아, 장모님도 오셨군요.”

루스티첼 일가는 동시에 고혈압 증세를 느꼈다. 저 호칭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 탓에 예전보다 더 거슬렸다.

“어머나, 소공작께서 마음에 병이 있으신가. 나를 보고 장모님이라고 부르시다니.”

루스티첼 부인이 달빛도 질 만큼 환하게 웃으며 고상한 어투로 ‘너 미쳤니’라고 말했다. 그에 아스타레아스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병이 없는 건 아니죠. 따님이 없으면 죽을 것 같거든요.”

그 말에 가족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심지어 그 와중에도 잘 생겨 보인다는 게 참 대단했다.

“내일 일이 있으니 소공작도 어서 쉬시게. 결전을 앞두고 몸 관리만큼 중요한 건 없지 않나.”

더 이상 상대해봤자 혈압만 상승할 거라는 판단에 루스티첼 백작이 대강 상황을 정리했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의 양손을 하나씩 잡았다. 가족들의 얼굴에 걱정과 서운함이 반씩 배여 있어 칼리오페는 묵묵히 그들을 따랐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 결전을 앞둔 것은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붓하게 가족들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으셨을 텐데.’

저녁만 먹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아스타레아스가 붙잡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가족들 역시 함께 식사하고 싶었을 것이다.

카스틸로 저에 가는 것을 허락해 준 것만으로도 양보해준 건데 시간을 지체하다니.

칼리오페가 오빠들을 잡은 손에 힘을 꼬옥 주었다. 그걸 느낀 루스우스와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내려다보곤 손을 마주 꽉 잡았다.

그대로 정원을 나서 가족들부터 차례로 마차에 올랐다.

“그럼 좋은 꿈 꿔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속삭였다. 멈칫하는 그녀를 향해 루시우스가 손을 뻗었다. 칼리오페는 뭐라 말할 듯 입술을 뻐끔하다가 “레아스도요.” 하고 작게 속삭이곤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타는 와중에 칼리오페와 눈이 마주친 도미닉이 고개를 숙였다. 정원에 있다는 걸 그가 알려준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은 칼리오페는 배웅하는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밤바람이 달빛이 깃든 은빛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천천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이 조금씩 뒤편으로 사라진다.

‘아…….’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몸을 반쯤 창밖으로 뺐다.

가족들이 기겁해서 붙잡는 게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소리 질렀다.

“돌아오면!”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든다.

“매일 그렇게 해요!”

그의 눈이 살짝 커진 게 보였다.

“꼭!”

칼리오페가 환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세워 내밀었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흰 팔은 진주처럼 빛났고 휘날리는 남보랏빛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반짝였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모습을 망막에 새길 듯 깊게 바라봤다. 비로소 온전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피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본 칼리오페가 팔을 크게 흔들다가 위험하다는 가족들의 만류에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사이 맞바람은 맞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피어난 사랑에 뺨은 상기됐고,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명백히 사랑에 빠져 행복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가족들은 그 모습을 속 쓰리게 바라보다가 울망울망 눈가를 적셨다.

‘우리 막둥이가…….’

‘내 딸이…….’

‘내 동생이…….’

‘내 천사가…….’

루스티첼 일가는 하아아아 길게 한숨을 푹 쉬었다.

‘내 품을 떠나려나 봐!’

눈물이 앞을 가렸다.

* * *

“에피니.”

지붕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있던 에피니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세.”

호르세안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제 봐도 짜증 날 정도로 낙천적인 얼굴이었다.

‘가장 위험한 짓을 했던 주제에.’

마음에 안 들었다.

“잠이 안 와?”

“……별로.”

에피니는 고개를 휙 돌리며 답했다.

이곳에선 아래에 펼쳐진 풍경이 잘 보였다. 봄꽃이 피어난 엘피너스 저의 정원도, 담장 너머의 가도도, 그리고 그 가도 몇 개를 지나 있는…….

‘칼리오페의 집.’

에피니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묵묵히 시선을 유지했다. 그녀의 다리 위에는 검이, 손에는 검의 폼멜에 달린 크리스탈이 쥐어져 있었다. 손에 힘을 꽉 주자 크리스탈 모서리가 하나하나 다 느껴졌다.

호르세안은 에피니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잠시 두 남매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호르세안이 에피니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밤에도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에피니가 그를 바라보았다.

“멍청이.”

내뱉는 말에 호르세안이 웃었다.

‘내일—’

남매는 같은 것을 생각했지만 둘 다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달이 밝았다.

* * *

힐데르트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힐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힐데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에 들어올 땐 노크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도무지 듣질 않는다.

신경질적으로 뒤돌던 힐데르트는 상대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너…….”

유리안이 특별한 차림새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괜히 오랜 기간 친구였던 게 아니었는지 힐데르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가려고.”

산책이라도 나간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그에 반해 힐데르트의 얼굴은 진지해졌다. 그는 친우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반대해도 듣지 않겠지.”

유리안이 히히 웃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천진한 얼굴이었다.

힐데르트는 새삼스레 그 얼굴을 바라봤다.

다시 제도로 돌아온 후, 루스티첼 저에 머물던 유리안은 서모나 저로 거처를 옮겼다.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의 관계를 알게 된 그가 에피니와 힐데르트의 앞에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거의 에피니의 강요였다.)

유리안이 제도에 올라온 지도 한참 되었지만 정작 그의 집인 사르니오 저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힐데르트는 복잡한 마음으로 유리안을 바라봤다. 봄의 새순 같은 연녹색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있지, 내일 소란 틈에 아스타레아스가 죽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뭐?”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너 이 자식……!”

다음 순간, 유리안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힐데르트가 거칠게 그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만약 레아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 안 둔다.”

이를 갈며 뱉는 말에 유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놈 때문에 리페가 우리랑 함께 있는 시간이 적어졌잖아. 너도 그게 아쉽지 않아?”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힐데르트는 인상을 쓴 채 유리안을 노려봤다.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유리안이 흐응, 하고 비음을 흘렸다.

“니가 안 말려도 나는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냥 그러면 좋겠다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유리안이 눈매를 찡그렸다.

“리페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해.”

딱 한 번 칼리오페 몰래 크레티안느 피엔테를 혼내준 적이 있었지만, 그건 예외다.

‘이번 일은 들키면 리페가 정말로 날 원망할 테니까.’

힐데르트는 찝찝한 표정으로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유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 정신 나간 놈이 칼리오페 덕에 그나마 사람답게 사는 게 다행인지, 칼리오페가 이런 놈이랑 엮인 게 불행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어쩌다 이런 놈이랑 친구가 되었는지…….’

“왜, 너도 가고 싶어?”

유리안이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그렇다고 하면 말릴 기세였다. 진심으로 힐데르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힐데르트 역시 친우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가면 짐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겐 입궁해서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며 틀어쥔 멱살을 풀었다. 정신 나간 놈이라고 속으로 욕하지만 힐데르트 역시 유리안이 염려됐다.

“……무사해라.”

“응.”

유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에 힐데르트의 상념이 더 깊어졌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자긴 그른 듯했다.

* * *

루스티첼 저에도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

하일레나는 무릎 꿇고 앉은 채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대지 않고 기도한 덕에 몸 안에 신성력이 가득 차올랐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면 또 기도하는 일 없이 백 명도 넘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할 수 있다면 말이지.’

성녀가 되라며 고문받는 와중 그녀의 신성력은 사람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세뇌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아무래도 그때 대신관이었던 마르멜의 수작이었겠지.’

사특한 짓을 벌여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 바라보며 신께 기도하며 희구했다. 비스 신이 원망스럽고 증오스럽다가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의지하게 됐다.

루스티첼 백작에게 가지고 있던 모든 신성력을 쏟아붓고 텅 비었을 때, 하일레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증오스러운 신전의 흔적이 제게 단 한 톨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해방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일레나는 결핍을 느꼈다.

‘제발.’

하일레나는 다시 두 손을 모았다.

‘제가 다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비스 신이시여…….’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돌아오는 응답은 없었다.

하일레나는 신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이전에도, 지금도.

진정한 신의 뜻은 아무도 모른다.

* * *

칼리오페는 집에 돌아와 자신을 놔주지 않는 가족들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가족이 최고지?”

“집 떠나지 않을 거지?”

“우리 리페는 엄마 딸이지?”

“리페, 남편은 남의 편이라고 해서 남편이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항상 우리 리페 편이야!”

“리페, 아빠는 굳이 남들 다 한다는 이유로 일찍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아예 안 해도 돼!”

“우리끼리 살면 된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결국 웃음이 나왔다.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매 순간 순간이 기적과도 같았다.

‘이렇게 다 같이 살아서 행복한 것 자체가 내겐 너무…….’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남았다. 가장 험하고 높은 산이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무사히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전생에는 인연이 없던 사람들이 이렇게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게 고맙고 신기했다.

‘당신이 누군지 아직도 모르지만 시간을 되돌려줘서 고마워요.’

칼리오페는 가끔씩 전생에서 만났던 여자를 떠올리며 속으로 속삭였다.

밤이 깊어 가족들과 헤어져 방에 도착했다. 뒤따라오던 도미닉과 인사하려는데 그가 말했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진중한 갈색 눈동자가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들어와 마주 앉고 나서도 도미닉은 한참 말이 없었다. 칼리오페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직 커튼을 치지 않아 창밖의 풍경이 잘 보였다. 커다란 달과 소금을 뿌린 듯 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 다른 사람들도 이 밤하늘을 보고 있을까, 싶었다.

“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칼리오페의 말에 도미닉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가 아니라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도미닉은 조금 더 편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번 날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한동안 뜸 들이다 나온 소리에 칼리오페가 피식 웃었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그땐 도미닉 경이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나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구요.”

황제가 칼리오페를 급습했던 날, 도미닉은 그 자리에 없었다. 가족들이 함께 외출하는 것이니 딱히 호의가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자리에 없던 사람이 어떻게 칼리오페를 지키겠는가.

그런데도 도미닉은 호위인 그가 없었던 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지 몇 번이나 사죄를 청했다.

“정말로 괜찮아요. 도미닉 경은 몇 번이나 제 목숨을 구했고. 사죄를 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 감사를 받아야 하는걸요.”

칼리오페의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의문에 칼리오페가 쓴웃음을 지었다.

회귀 후 사하르네 부인 외에는 딱히 일이 없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도미닉이 없었다면, 칼리오페는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 이미 전쟁통에 죽었을 것이다.

“그냥 그런 느낌이에요. 경이 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구해준 느낌.”

도미닉은 말없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직시한다. 살짝 휘는 눈매에 달빛이 맺힌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제가 아가씨를 지키겠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을 돕는 게 아가씨의 고집이라면, 아가씨를 지키는 건 제 고집입니다.]

“그게 경의 고집인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미닉의 눈매가 살짝 커졌다. 곧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무뚝뚝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그걸 칼리오페에게 지적받으니 민망했다.

“나도 고집이 세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하죠. 닮았네요, 우리.”

칼리오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도미닉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저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네?”

뜬금없는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미닉은 설명하지 않고 일어나 자신의 레이디에게 정중히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방을 나오자 달빛이 내리쬐는 커다란 창이 보였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반역자로 몰려도, 불명예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똑같이.’

황제의 목에 검을 겨눴을 것이다.

커다란 창에 한가득 하늘이 담겼다.

그녀가 말한 대로 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는 소리.

그렇게 각자의 밤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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