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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황제의 귀환 (36/41)

Chapter 3. 황제의 귀환

황궁 외정의 정무궁 그란디나스는 짙은 침묵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군가 숨소리만 잘못 내쉬어도 와장창 깨질 것 같은 첨예한 침묵이었다.

“폐하께서도 너무 하시는군!”

그 침묵을 깨트린 것은 서모나 후작이었다. 과연 그가 성토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이제는 아예 조회에 참석하시지도 않다니!”

“허! 가뜩이나 폐하께서 태업하시는 바람에 쌓인 일이 한둘이 아닌 데 말이오!”

황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회장을 울려도 아무도 주의시키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일하러 나온 고관대작들을 벌이라도 세우듯 황제가 아무런 언급도 없이 조회에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가 생겨 못 나오더라도, 아니, 그냥 안 나오는 것일지라도 해도 일단 사람을 시켜 일단 핑계를 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대신들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도가 지나친 행위였다.

황제파에 속한 귀족들은 불편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힐끔거렸다.

위세가 예전만 하지 않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입도 못 열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이 사태에 대해 하나도 몰라 면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굳이 황제를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 2년 간 황제가 그들에게 주는 콩고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말리는 사람 한 명 없이 회장 안은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터질 듯 가득 찼다.

“디알츠 백작, 폐하께 뭐 들은 건 없습니까?”

그런 마당에 힐데르트가 황제파를 향해 묻자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디알츠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처지에 체면이 상했다.

후계인 크레티안느의 일로 인해 피엔테 후작은 결국 정치계에서 떠나 영지로 내려갔다. 그 후로 황제파 내부는 쪼개지고 합쳐지길 반복하다가 안정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탈자도 많았고 황제의 권세도 약해져 황제가 힘을 실어주는 정도도 예전만 하지 않았다.

약해진 황제파가 황제의 의견을 두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두둔 받지 못한 황제의 권력은 더욱 약해지고, 황제파는 더 약해져 황제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그런 악순환이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황제파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나 다름없는 형편이다.

때문에 황제가 수장인 자신을 깊이 신임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회장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황제를 대변하는 수족인 그에게 언질 한 번 없는 것은 노골적으로 그를 무시하는 행위였다.

그것만으로도 불쾌한데 심지어 이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사실을 제 입으로 고하게 생겼다.

“……내 짐작으론 폐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을 정도로 병환이 깊으신 모양이오. 최근 옥체가 미령하신 것 같았으니…….”

디알츠 백작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으나 그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엔 비웃음이 떠올랐다.

“결국 아무런 말도 못 들었다는 소리군.”

“어제도 역정을 내고 회장을 박차고 나가신 걸 보면 옥체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오.”

“정말 병환으로 자리 보전하고 계신 거라면 시종이 나와서 알렸겠지요.”

“디알츠 백작도 참 얄팍한 핑계를…….”

“하긴 뭐 어쩌겠소. 본인도 모르는 것을.”

사람들이 속닥거렸다. 소리를 낮췄으나 디알츠 백작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

디알츠 백작을 비롯해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검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힐데르트의 입매가 길게 늘어났다. 아무리 소꿉친구들 앞에서 격의 없이 굴어도 오만한 그의 성정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민중을 돌보지 않는 황제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며 제 잇속만 챙기는 것들을 밟아줄 때 희열을 느꼈다. 찍소리도 못한 채 속으로 황제를 씹어 먹고 있는 것을 보니 앞으로 황제파가 단단히 규합하기는 글렀다.

힐데르트의 의도대로였다.

물론 황제라는 끈을 놓는 순간 패가망신 당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기에 그들은 끝까지 황제라는 패를 놓지 않을 것이다. 힐데르트 역시 그들이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 끝까지 짓밟아주지.’

보랏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회장 안이 과열될수록 시종들이 바쁘게 황궁을 가로질렀다. 사라진 황제를 찾기 위해서였다.

궁내부장은 머리를 싸맸다.

황제의 실종을 알리는 게 황제의 정치적 약점이 될까, 만약 그렇다면 귀환한 황제에게 끌려가는 건 아닐까 고민하느라 시간만 축냈다. 그냥 실종이어도 머리가 아플 텐데 어제 내정 안에 있는 수호 석상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던지라 침입자가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황제가 최근 묘하게 군권에 집착하는 것은 그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다 알았다.

아무래도 반대에 부딪힌 군비 확장 건을 수호 석상을 통해 대체하려 시험한 게 아닐까 싶었다. 신의 축복이나 다름없는 수호 석상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다분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황후궁 쪽에서 단단히 입조심을 시키고 있었다.

만약,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침입자가 있어 황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극비였다.

“하아…….”

궁내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 황제가 돌아오거나 궁인들이 찾아내길 바랐지만 끝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뒤늦게나마 황제의 옥체에 문제가 있어 오늘 정무를 볼 수 없다고 고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런 말은 노기를 띤 귀족들의 헛웃음만 살 뿐이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정말 병환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면 진작에 고했을 것이다.

“최근 가장 느긋하셨을 분께서 병환이 나셨다니 걱정이로군!”

“정무를 보신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침상에 누워계실 만큼 크게 앓으시다니 폐하의 신하로서 가슴이 무겁소.”

“이렇게 건강이 안 좋으시다면 오늘 하루가 아니라 길게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즉위 때 약조하신 대로 양위하셨다면 편히 쉬실 수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로아힌 백작, 도를 지나친 소리 아닙니까!”

황제파가 곧바로 반발했다. 탐탁지 않아도 황제가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되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로아힌 백작은 코웃음 치며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하냐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황제 폐하께서 약조하신 일을 말한 것뿐이오.”

그렇게 말하자 황제파도 할 말이 없었다. 뭐라 할 순 있겠지만 더 물고 늘어질 의욕도 없었다.

대노한 귀족들이 싸늘하게 황궁을 나섰다. 기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붙었다.

* * *

칼리오페는 제 어깨를 감싸는 따스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얇게 있고 밖에 있으면 감기 들어요.”

아스타레아스가 그의 겉옷을 그녀에게 걸쳐주며 말했다. 칼리오페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녀는 겉옷을 더 바짝 여몄다. 아스타레아스의 품에 안겨있을 때처럼 청량한 향기가 났다.

“나한테 주면 당신이 추울 텐데.”

초봄이지만 아직 쌀쌀했다.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나붓이 휘었다. 그가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휙 좁혀진 거리에 칼리오페가 긴장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럼 당신이 데워줄래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아스타레아스에게서 한 발짝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단단한 팔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휘감고 있었다.

“레아스…….”

칼리오페의 얼굴은 거의 울 것 같았다.

“따뜻하게 해줘요.”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봤다. 부탁하듯 애절한가 하면 명령하듯 오만하기도 했다.

칼리오페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겉옷 하나 걸친 것뿐인데 식었던 몸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어서.”

아스타레아스의 재촉에 그의 가슴팍에 놓였던 칼리오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티 없이 새하얀 셔츠가 소리 없이 구겨지고 칼리오페의 뒤꿈치가 살짝 들렸다.

치맛단에 감춰져 있던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난다.

서로의 숨결이 섞여들었다.

칼리오페는 차마 아스타레아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시꺼멓게 머리를 물들이는 욕망에 그의 시선이 깊고 어둑하게 그늘졌다. 칼리오페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힘줄이 불거졌다.

막 입술이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테라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러그윈은 딱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망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말은 꼭 해야 했다.

“황제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 * *

익명734822: 그 소식 들었어? 황제가 실종됐다던데.

익명862155: 그런 소문 계속 도는데 진짜임?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실종되나.

익명122564: 실종이겠어? 태업 중이었잖아. 그냥 일하기 싫어서 나른 거지.

익명556878: 내정에 수호 석상이 움직였다고 하더라.

익명289209: 워낙 일 안 해서 황제가 있든 없든 차이도 없음.

익명846588: 맞아맞아. 솔직히 황제가 뭘 하는지도 모르겠음.

익명592398: 내 세금…….

익명084499: 차라리 진짜 실종이면 좋겠다.

익명475467: 사라지는 게 제국에 좋은 일.

익명552176: 황제가 성군이 되는 법: 사라진다.

익명256887: 자살한다도 있음.

익명363218: 자살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신데……는 그래서 장례식 언제 치르죠?

익명454471: 아니, 황제 이미 고인 취급하냐고.

익명512057: 이 방 진짜 웃겨!

익명735485: 이러다 다 잡혀가는 거 아님?

익명102114: 걱정 마요. 우리 잡아갈 사람들도 황제 때문에 실시간으로 갈리는 중이라 이 갈고 있을걸.

익명652221: 여기서 함께 욕하고 있다에 건다.

익명142573: 아, 진짜 이참에 황제 갈아치웠으면.

익명325574: 애초에 소공작님이 즉위해야 했던 거 아님? 이제라도 잘못된 거 바로잡아야지.

익명866544: 소공작님이 황제 되면 국가 복지 올라간다. 일단 공식 석상에서 황제 황후 얼굴 보는 것만으로 기본은 먹고 들어감.

익명348494: 갑자기 애국심이 샘솟는군요.

익명554926: 완전 주입식 국뽕 수준 아닌가요. 괜찮은 건가.

익명686533: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황제와 황후의 얼굴.

익명154686: 말리지 마. 나 24시간 황궁 자경단 할 거다.

익명685337: 자경단이 아니라 스토커겠지.

익명255447: 세금 안 걷고 사진첩 같은 거 내서 국가 운영해도 될 수준.

익명926873: 달력집 내주세요. 황가의 일상 이런 주제로.

익명301589: 외국에서도 사갈 듯.

익명742668: 하긴 리페님은 세계구급이시지!

익명153354: 그냥 방송해주면 안 됨? 아무 말 안 해도 돼요. 그냥 숨 쉬고 있기만 해도 재밌으니까.

익명120038: 근데 황제 옹호하는 사람 한 명이라도 나올 법한데 그런 거 전혀 없다니. 익명방이 이렇게 대동단결해서 평화로운 거 처음 봄.

익명698633: 평화의 수호자 황제.

익명256370: 다른 거 다 그렇다 해도 일단 일을 못 해서……. 최근 이 년간 집행된 정책 있긴 함? 제대로 된 건 거진 다 공작가 주머니에서 나왔지.

익명258337: 이렇게 태업해서 욕이란 욕 다 먹고 사라지는 거 알고 보면 조카에게 황위 넘겨주려는 황제의 큰 그림 아니냐.

익명631873: 하긴 전국민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지지하는 건 역대급일 듯.

익명394830: 우리가 황제 폐하의 큰 그림을 몰라봤네. 그럼 어쨌거나 이제 안 나타나는 거지?

익명535699: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 * *

“황제가 실종했단 소식이 벌써 사람들 사이에 다 퍼져나갔나 봐.”

“벌써 3주째인데 그럴 때가 되긴 했지.”

에피니의 말에 힐데르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금 와서는 실종 사건이 터지는 게 좋아.”

지금 황제가 사라졌다는 게 밝혀지면 여론이 누구를 지지할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후와 황제파는 어떻게 해서든 실종 사실을 숨기려 혈안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황제의 권위가 바닥을 치고 있는 판국에 수많은 입을 틀어막을 순 없었다.

“그쪽은 그렇다 쳐도 황제의 시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계속해서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설마 황제의 숨이 끊어지지 않은 건 아니겠지.”

“석상이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며. 그럼 죽은 거지.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지 않지만, 또 생각보다 잘 죽기도 해.”

유리안의 말에 에피니가 눈매를 찡그렸다.

“그럼 제3의 인물이 개입했다는 건데.”

“비스 대신관 쪽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꼬리가 잡히질 않으니…….”

“꼬리가 잡히면 그쪽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을 텐데.”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드러나겠죠. 그것보다 가장 중요한 건 호세 오라버니예요.”

호르세안은 비밀 통로를 통해 침궁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가 황궁에 출입하는 걸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기록도 남지 않았다.

시그니페르 홀로 이동하면서 황제의 시종장이 유일하게 호르세안을 목격했지만, 그쪽은 이미 처리했다. 황제의 곁에 붙어 더러운 짓을 수없이 저질렀으니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외에도 목격자가 있다면.

황제의 실종 사실이 공개되고 본격적으로 수사에 들어가면 증언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일단 시그니페르 홀에 있었을 때 주변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어. 그리고 호세가 멍청하긴 하지만 완전히 바보는 아니니까 황제랑 이동하면서 자기 모습을 들키진 않았을 거야.”

에피니의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호르세안에게 확인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사고사를 위장해서 이 일과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가 발견할 때까지 놔두었을 텐데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때,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럽게 칼리오페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만약 증언자가 나오면 정당한 황위 계승자가 자신을 권리를 되찾은 것이라고 말하면 되니까.”

“레아스…….”

칼리오페가 염려스러우면서도 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황제를 칠 때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함정을 팠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였다.

그 다음 이유는 새 황제가 즉위할 때 정치적 약점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정통한 계승자라지만 제 손으로 숙부의 목을 자르고 황위에 올랐다는 건 커다란 스캔들이니까.

황태자가 부황의 목을 가르고 올라도 그 잔혹함에 대해 죽어서도 말이 따라다닐 텐데 하물며 아스타레아스는 황태자에 봉해지지도 않았다. 아무리 정당한 계승권이 있다고 해도 법도 상 황태자와 비교할 순 없었다.

피로 역사를 새로 쓴다는 것은 그만한 책임이 뒤따랐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괜찮겠어요?”

쨍한 빛이 나는 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휘었다.

“약점 잡히는 게 당신이 다른 남자를 걱정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치, 하면서 그를 흘겨봤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

“…….”

“…….”

힐데르트, 유리안 그리고 에피니는 흐린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뭐, 어쨌든 황제를 유해를 계속 찾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해야지.”

힐데르트가 고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나도 함께 입궁하도록 하지.”

* * *

“언제까지 황좌가 공석이어야 합니까!”

“안 그래도 처리할 일이 밀려 있는데 이러다가 기약 없이 기다리게 생겼습니다!”

“이러다가 내실이 무너져내려 제국이 자멸하면 어쩔 거요!”

“제국의 역사가 우리 시대에서 저물게 놔둘 겁니까!”

“시급히 황좌를 채워야 하오!”

귀족들이 앞다투어 소리를 질렀다. 항상 의견이 갈리던 계파들이 다 같은 의견이었다.

단 하나, 황제파만 제외하고.

황제파 귀족들은 난감한 얼굴로 진땀을 뺐다. 지금 이들에게 밀려선 안 된다. 적어도 황후의 섭정으로 가야 했다. 황위를 넘기는 방향으로 가면 황자는 아스타레아스의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 폐하의 신변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황위를 교체하다니요.”

“모두 부끄러운 줄 아시오! 폐하께서 무탈하시길 바라진 못할망정 황위 교체부터 운운하다니!”

디알츠 백작이 강경한 어조로 역정을 냈다. 힐데르트가 피식 웃으며 왼쪽 눈썹을 까닥했다.

“부끄러운 줄 알라니. 그 말을 백작께서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매끈한 얼굴이 지독하게 오만해 보였다.

“폐하께서 실종되신 상황을 숨기고 병상에 누워계신다며 거짓을 입에 담은 사람이 누굽니까. 그 탓에 본격적인 수색이 늦어지지 않았습니까.”

“맞는 말이오. 곧장 수색에 들어갔다면 이렇게까지 폐하의 행방이 오리무중이진 않았을 것이오!”

실종이 직후에 곧장 수색에 나서는 것이 발견 확률을 더 높여준다는 건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그건…… 폐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게 밝혀지면 국정에 혼란이 올까 봐…….”

디알츠 백작이 더듬더듬 변명했다.

“결과적으로 정확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시간만 버렸지 않습니까. 덕분에 국정은 아예 마비되었습니다.”

힐데르트가 현실을 주지시키자 백작의 입이 다물렸다.

“백작께선 국정을 염려하면서 이런 결과도 예상하지 못했단 말씀입니까.”

“그, 그게…….”

디알츠 백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부정하자니 자신의 무능함을 긍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수긍하자니 국정이 마비될 걸 알면서 제 이득을 위해 거짓말했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어린놈이 입만 살아선……!’

결국 속으로만 역정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자자, 지금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무엇 하겠습니까. 일단 이 상황을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리는 일이 중요하지요.”

보다 못한 다른 황제파 귀족이 화제를 돌렸다. 몽에르트 영애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그 말을 받았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선 공석을 채워야 하는 법이지요.”

결국 다시 원점이다.

‘아예 날을 잡았군.’

최근 이 문제에 대한 공방이 몇날 며칠 이어졌지만 쉽게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서로 견제만 하다가 수확 없이 끝나곤 했다. 하지만 저들의 기세를 보니 기필코 오늘 끝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황제파 귀족들은 심기를 다잡았다. 지금 자신들은 후퇴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새 황제 즉위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래, 황위를 교체한다고 칩시다.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그땐 대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그러면 기약 없이 황위를 비워두잔 소리요? 지금 산적해 있는 일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내사도 그렇지만 외교 문제는 어떻게 할 거요. 통치자 없는 나라와 협약하겠다는 나라가 있겠소?”

하지만 작정하고 날 잡은 귀족들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회장 안을 꽉 조이는 가운데, 디알츠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꼭 황위를 교체할 필요 없지 않소. 황후께서 섭정하셔도 충분히—”

“이 나라를 대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요!”

“황후의 섭정이라니…….”

“신혈도 흐르지 않는 자의 섭정?”

디알츠 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눈앞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제국의 긍지도 잊은 거요, 디알츠 백작!”

서모나 후작이 낮게 일갈했다.

“제국이 종주국으로서 입지가 굳건한 건 단순히 국력이 강해서가 아니오. 신에게 선택받은 황가가 통치하기 때문이오.”

신혈이 흐르는 황가, 신석이 깃든 황궁. 이 두 가지는 다른 어떤 국가에도 없는 제국만의 유산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전설이었다.

길고 긴 제국의 역사 중 섭정의 통치 기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 황태자가 섭정을 했고, 황태자가 없거나 어릴 경우엔 다른 황족이 섭정했다. 제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 신혈은 단순한 상징성 이상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황후의 섭정은 타국에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백작께서는 제국이 가진 우위를 스스로 내려놓자는 겁니까.”

“이쯤 되니 백작의 의도가 의심스럽군. 혹시 다른 나라의 사주라도 받은 것 아닌가?”

“그 무슨 말씀이오! 내가 나라라도 팔아먹었다는 뜻이오!”

“지금 백작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그런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텐데요.”

“거참,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까. 그저 섭정할 경우 황태자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다음 순위로 황후 폐하가 어떤가, 생각하신 걸 텐데.”

“그러면 당연히 다른 황족 이야기가 나와야지, 왜 황후가 나옵니까? 제국에서 섭정을 논할 때 황후나 태후가 언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황제파 귀족들은 뭐라 반박하려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더 이상 황후의 섭정을 주장하다간 제 잇속을 챙긴다는 비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국한다는 소리를 들을 지경이다.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니 순간적으로 내 잘못 생각한 것 같소. 그럼 섭정은 폐하의 적장자인 황자님으로—”

“허!”

황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황자에겐 통치자로서 자질이 하나도 없다. 아비인 황제조차 포기했는지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현재 황위 계승서열 1위는 아스타레아스다. 그런데 1위를 제쳐두고 모자란 2위부터 언급하는 건 얄팍한 속이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대놓고 비웃는 귀족들의 모습에 디알츠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걸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순 없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섭정을 막아야 하니까.

“디알츠 백작,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으면 그다음부턴 입을 여시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해보시지요.”

힐데르트가 디알츠 백작을 내려다보며 신랄하게 말했다.

“잘못을 한 번 하는 건 실수지만, 같은 잘못을 연달아 하는 것은 본인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멍청함을 만천하에 알렸다는 뜻이다.

“무, 뭐, 무슨……!”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디알츠 백작은 버벅거리며 힐데르트를 삿대질했다.

“황제 폐하의 태업부터 시작해 실종까지. 그 탓에 현재 국정은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힐데르트는 그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시작했다.

“황제의 부재에는 섭정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시국이 이러니 황위를 교체하는 게 혼란스러운 국정을 빠르게 정상화할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제국 법상 섭정은 모든 권한을 위임받지 못하잖소. 그렇게 제한적인 통치로 현 상황을 타개하긴 힘들잖소.”

힐데르트의 의견이 지지받을수록 황제파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썩어들어갔다.

겨우 섭정 쪽으로 물꼬를 돌렸는데 단 몇 마디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가다간 즉위식 날짜는 언제로 할지 논의하기 시작할 것 같았다.

강수를 둬야 한다. 황제파 귀족들은 서로 바라보며 시선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듣고 있으니 다들 너무하시군.”

“모두 자중하시오! 나라를 위한다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황위 교체를 바라는 것은 곧 역심이오!”

역심.

과격한 단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회장 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역심이라고?”

“황제께서 버젓이 살아계실 텐데 황위를 교체하자는 게 반역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지금 당장 역모죄로 감옥에 들어가도 할 말 없소!”

그 일갈에 공백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빽빽한 침묵이었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않는 그 순간,

“그렇다면 그대들은 내가 역심을 품고 있다고 하는 건가.”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개입에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은사철나무가 양각된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한 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여유롭고 방만한 태도에도 숨길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묻어나왔다.

디알츠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

마치 마음 속의 외침을 들은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아스타.레아스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디알츠 백작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그, 그건…… 아닙니다.”

아스타레아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구두 굽이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반역죄를 운운하며 다른 귀족들은 협박하던 기세가 어디로 간 건지, 황제파 귀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스타레아스를 맞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자리에 앉은 후 회장 안을 쭉 둘러봤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던데. 계속하시게.”

황제파 귀족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 역시 황제의 생사에 대해서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고, 살아있다고 해도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무지는 곧 불안으로 이어졌다.

제 밥줄을 위해 아스타레아스가 즉위하는 걸 반대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기는 게 불가능한 싸움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일을 조금 늦출 수 있긴 하지만, 결국 아스타레아스가 즉위하게 될 거라고.

벌어놓은 시간 안에 황제가 귀환하는 게 그들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희망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지금이라도 아스타레아스 쪽으로 돌아서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닌지 스스로 반문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입이 딱 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와서 아스타레아스에게 붙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대놓고 그에게 반역자라고 손가락질할 자신은 없었다.

말이 없는 황제파를 보고 귀족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아스타레아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그렇게 핏대를 세우고 반역을 운운한 게 우스웠다.

그 표정을 본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이 수치심에 물들었다.

조용한 가운데 몽에르트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황좌가 비어 시국이 불안정합니다. 이에 선황의 적장자이자 짙은 신혈을 타고나신 소공작님께 감히 빈 자리를 채워주십사 청하는 바입니다.”

“몽에르트 후작!”

디알츠 백작이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바로 치고 들어올지 몰랐다.

“저 역시 감히 청을 올립니다. 비록 황태자 위에 책봉되진 않았지만 소공작께선 계승서열 1위.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모나 후작 역시 앞으로 나와 몽에르트 후작 곁에서 손을 모았다.

그 모습을 본 디알츠 백작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소공작께서는 진중히 생각해주십시오. 숙부께서 돌아오셨을 때를 생각하셔야지요. 황제 폐하께서 부재하신 틈을 타 황위를 교체하는 건—”

“반역이다?”

아스타레아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까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디알츠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지만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스타레아스가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와 보랏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친다.

절대적인 신뢰를 담고 있는 푸른 눈. 힐데르트는 순간 숨이 막혔다. 아스타레아스가 이렇게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칼리오페를 포기했다. 하지만 포기되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도 가끔씩 열대야마냥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분명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는 칼리오페와 관련해서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를 신뢰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칼리오페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을지라도.

하하, 마른 웃음이 나왔다.

힐데르트는 앞으로 나섰다.

“아까부터 황제 폐하께 불충을 저지른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디알렌 백작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파 귀족들 역시 드디어 건수를 잡았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황제 폐하를 놔두고 황위를 교체하는 게 충의를 보이는 거란 뜻인가?”

“어린 나이에 중용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자네가 이유를 모르겠다니. 이건 곧 기만 아닌가!”

그 기세를 몰아 아예 아스타레아스에게 화살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

“폐하의 신변을 모르는 상황에서 신황을 추대하는 건 곧 폐하께서 승하하시길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소공작께서 진정으로 폐하께 충의를 보인다면 이점을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미소가 더 깊어졌다. 그의 시선이 힐데르트를 향한다. 꼭 ‘그렇다는데?’ 하고 묻듯이.

힐데르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폐하에 대한 충의를 부르짖는 분들께서는 정작 폐하의 뜻을 잊으셨나 봅니다.”

“뭐라?”

“폐하께서 즉위할 때 밝히신 뜻을 잊은 겁니까?”

“……!”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번져나갔다.

아스타레아스가 황제의 자식보다도 더 계승 서열이 높은 이유.

“소공작께서 성년이 되면 양위하실 거라고 하셨지요.”

“그, 그건…….”

황제가 즉위할 때는 잡음이 많았다.

정통성 문제는 물론이고 숙부가 조카의 자리를 노리고 탐욕을 부린다는 치명적인 여론도 있었다. 그 여론은 소문을 부풀렸고, 선황제의 죽음이 사고사라 판명 났음에도 형의 자리를 노린 동생이 꾸민 계략이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선황제를 시해했다는 말은 비록 낭설이라 하더라도 치명적이었다.

황제는 어디까지나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제위를 잠시 맡아놓는 거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아예 대관식에서 맹세했다. 아스타레아스가 성인이 되는 즉시 양위하겠노라고.

하지만 그 맹세는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답하지 못하는 황제파 귀족들을 보고 힐데르트의 얼굴에 비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그때 상황을 넘기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맹세를 한 것이라곤 말할 수 없을 터다. 설령 모두가 그게 거짓 맹세라는 걸 알지라도.

“무, 물론 그랬습니다만, 아직 소공작께서는 제위에 오를 준비가……. 제왕학을 배우지도 않으셨고…….”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계승 서열 1위임에도 불구하고 제왕학에 손도 대지 못했다.

“황제 폐하 역시 제왕학을 배우지 않고 보위에 오르셨습니다. 지금 자작께서는 폐하께서 준비 없이 황위에 오르셨다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폐하께서 태업하신 후로 나라가 돌아가는 데 카스틸로 공작가가 크게 기여했다는 걸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생각하오. 지금 자작의 발언은 트집이라고밖에 안 느껴지는군.”

자작은 낭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밀렸다가는 정말 아스타레아스가 즉위할 것만 같아 디알츠 백작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자작의 말은 경솔했지만 어쨌거나 신황 추대는-”

“폐하께 불충이 아니지요. 조카의 즉위는 폐하의 오랜 염원이셨으니까요.”

힐데르트가 깔끔하게 일축했다.

“폐하께서는 진작 성인이 된 소공작에게 양위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있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셨겠지요.”

이 말에 반박할 순 없었다. 반박하는 순간, 황제가 조카에게 양위할 생각이 없다는 게 되니까.

“그러니 황좌가 비워진 지금, 미력하나마 우리가 폐하의 뜻을 대신 이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소공작의 즉위는 폐하의 뜻을 따르는 길이기도 하오.”

디알츠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치는 곧 명분 싸움이다. 저쪽에서는 이길 수밖에 없는 명분을 들고 왔다.

심지어 황제파 귀족들의 과반이 논쟁에 소극적인 상태였다. 아스타레아스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 소모적인 언쟁이 끝났군요. 그럼 다시 청을 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이 앞으로 나서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예를 표했다.

“감히 청컨대 소공작께서-”

그때였다.

“그, 급보입니다!”

거친 발소리와 함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없이 회장의 문이 열려 있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리 소란인가!”

낮은 질책도 들리지 않는 것인지 시종이 손에 들린 호외를 흔들며 황급히 외쳤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회장 안이 소리 없이 술렁거렸다.

황제파조차 너무 놀라 이 여세를 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종이 움켜쥔 호외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전달되었다.

호외의 전면을 장식한 사진을 본 순간, 이 소란에도 흔들림 없던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가 훅 커졌다.

‘리페……!’

사진에는 칼리오페와 황제가 함께 찍혀 있었다.

* * *

“칼리오페 루스티첼.”

칼리오페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흉흉한 검은 눈이 꿰뚫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로 황제……?’

살아있었던 건가? 시체가 사라졌던 이유는 숨이 끊기지 않은 황제가 탈출해서?

당황스러운 그녀의 시선이 면밀하게 황제를 훑다가 멈칫했다. 주변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지금 칼리오페는 가족들과 함께 자선 파티에 필요한 물품을 직접 사러 번화가에 나와 있었다. 보는 시선이 많았다.

칼리오페는 천천히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녀의 인사에 가족들 역시 예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 로베르트는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몸을 긴장시켰다. 루스티첼 부인 역시 여차하면 칼리오페를 끌어안아 감쌀 생각을 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황제는 고장 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여기서 황제가 자신을 공격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 걷잡을 수 없게 돈다. 칼리오페는 조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어찌 이런 곳에 혼자 계십니까. 황궁이 비어 소란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두 애탄 마음으로 폐하를 기다릴 테니 어서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제가 황궁까지 모시겠습니다.”

루스티첼 백작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쪽으로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오로지 칼리오페만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그렇게 중얼거린 황제의 몸이 별안간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채앵!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황제의 움직임이 멈췄다.

칼리오페의 눈에 자신을 가로막듯 서 있는 루시우스의 뒷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검이 새파란 예기로 반짝이고 있는 것 역시.

“루스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비명처럼 루시우스를 불렀다.

“안돼요!”

황제의 앞에서 검을 뽑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검을 든 상태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이 엄청난 일에 한 점의 후회도, 동요도 없는 모습.

칼리오페의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루시우스를 말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 역시 황제를 응시하며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리페, 이리 오렴.”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의 손목을 잡아끌어 품에 안으려 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황제의 목소리는 차라리 포효에 가까웠다. 바닥을 긁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또다시 칼리오페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시우스는 주저 없이 황제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루스티첼 백작과 로베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살의를 담은 검날이 그의 목과 가슴, 다리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황제를 베진 않았지만 아주 조금만 움직이면 검날이 서슴없이 살갗을 파고들 것이다.

황제는 검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세 부자는 그런 황제에게 따라붙진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굳건히 서서 이 이상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황제는 그런 셋을 노려보다가 별안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루스티첼 백작이 눈매를 찌푸린 찰나, 황제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황제가 모습을 감춘 후로 한동안 기척을 가늠해본 루스티첼 백작이 검을 집어넣었다.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리페, 괜찮니?”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제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대체 이게…….”

이렇게 목격자가 많은 상황에서 황제를 향해 검을 들이댔다.

루스티첼 가는 반역죄를 피할 수 없으리라.

* * *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은 커다란 충격을 낳았다.

신문과 통신석을 통한 매체에서 연일 황제의 등장에 대해 보도했고 사람들 역시 입과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아스타레아스를 신황으로 추대하려던 계획은 아예 물거품이 되었다. 황제께서 돌아오셨으니 이 논의는 아예 없던 것으로 하자는 황제파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러다 결사대 중 누구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가 어떻게 살아있는가.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살아 돌아온 황제가 그날 일에 대해 입을 여는 순간 모두 반역죄로 처형당할 것이다.

심지어 루스티첼 가는 아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돌아온 황제에게 검을 들이댔다. 사진이 찍힌 것은 물론이고, 영상까지 찍혔다. 도저히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딱 하나 다행인 점은 칼리오페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고, 황제는 그 반대라 루스티첼 가를 옹호하는 반응이 많다는 것이다.

황제가 먼저 칼리오페를 공격했기에 루스티첼 가는 방어했을 뿐이다. 방어만 했을 뿐 물러나는 황제에게 추가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칼리오페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대정령의 총애까지 받는 중요한 인물이다. 요인을 경호할 때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때 황제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칼리오페를 공격한 것 역시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이 주로 정보를 나누는 통신방도, 전문 기자들이 정보를 싣는 신문도 대부분 그런 논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스티첼 가에 대한 유예를 벌어줄 뿐, 황제에게 검을 들이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황제가 황궁에 귀환하는 순간 루스티첼 가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행히도 모습을 감춘 황제는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황제가 돌아오면 모든 것은 끝납니다.”

“대체 어떻게 황제가 살아있는 건지!”

“분명 그때 석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황제가 살아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회장 안이 소란스러웠다. 이 예상치 못한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다들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황제와 비슷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림자나 대역.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 말에 루스티첼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 신혈이 느껴졌었네.”

“진짜 황제라니…….”

대역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도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늪처럼 사람들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가 돌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눈발 속에서도 꿋꿋이 꽃 피우는 동백과도 같은 눈동자가 차근히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작은 몸은 두려움이나 염려 하나 없이 꼿꼿했다.

칼리오페의 몸은 가녀리고 연약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 그녀보다 훨씬 커다랗고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가냘픈 소녀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의지 됐다.

칼리오페가 또다시 세상을 구원할 거라는 희망이 사람들의 눈에 싹 텄다.

무력함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씻겨 나간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를 먼저 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황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황제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수색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 말에 칼리오페가 하일레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를 따라 사람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모이자 하일레나는 조금 당황했다.

칼리오페의 설득에 따라 함께 행동하고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야 제게 한 번 세뇌당했으니 당연하다.

그간 하일레나는 최대한 아무 말도 없이, 거슬리지 않도록 쥐죽은 듯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목을 받다니.

잠시 움찔했던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샘의 위치를 알아냈어요.”

“샘의 위치를?!”

하일레나의 한마디가 불러온 파급력은 어마했다.

경계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불로불사를 꿈꿔 에테르가 가득한 샘을 독점하고 있고, 그 샘물을 떠 마실 은잔을 노린다는 건 결사대 전원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거사를 추진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황제는 아마 샘에 숨어있겠죠.”

칼리오페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세 오라버니께서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주셨어요. 황제에게 저희가 샘을 찾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할 때 들었다더군요.”

위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호르세안은 샘과 동떨어진 곳에서 루스티첼 가가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계속 꾸며낼 수 있었다.

“하지만 범위가 워낙 넓어 찾을 수 없었어요.”

기회를 봐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려 했지만, 의심 많은 황제는 실수로라도 샘에 대한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그 대략적인 위치를 들은 하일레나가 알아낸 거예요. 직접 비스 본 신전에 가서.”

하일레나가 직접 비스 본 신전에 갔다는 말에 사람들이 동요했다.

비스 신전은 지금 엉망인 상태였다.

대신관의 범죄가 드러난 후, 비스 신전에 대한 힐난이 쏟아졌다. 비스 신전에 소속된 신관들도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했다. 사실 대신관의 음모와 관계 없는 선량한 신관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신도가 사라지고 수뇌부 역시 사라졌다. 신전이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평생 신관으로 살아온 사람들 중 대다수는 이대로 신전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길 주저했다.

한순간에 평생 몸담던 곳이 무너져 내린 고통을 감당할 수 없던 사람들은 책임을 떠넘길 대상을 찾았다. 하일레나는 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 위험한 곳에…….”

평범한 사람도 비스 본 신전에 가길 꺼렸다. 체념과 절망이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상식을 무너트렸다.

황제가 신전에 대한 판결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며 그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신전 밖으로 나올 용기가 없는 선인과 악인이 뒤섞여 폐가에 숨어 사는 들쥐처럼 몸을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일레나는 대신관의 계획에 깊이 가담했던 자로서 신전에 숨겨진 방과 통로를 알고 있었다.

대신관은 보름마다 샘에 갔다. 하지만 하일레나는 단 한 번도 보름밤 그가 신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몸을 잘 숨겼기 때문일까?

하지만 호르세안이 말한 대략적인 샘의 위치가 비스 본 신전과 아주 가깝다는 걸 알게 되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칼리오페에게 말하면 위험하다고 말리거나 함께 갈 것이 분명했다. 칼리오페마저 그 위험한 곳에 가게 할 순 없었다.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 하나 없지만……. 너는 다르니까.’

그래서 하일레나는 몰래 혼자 비스 본 신전에 숨어들었다.

샘과 연결된 것으로 추정된 통로는 이미 훼손되어 가로막혀 있었다. 하지만 대신관이 사용하던 수많은 비밀의 방 중 하나에서 샘의 위치를 찾아냈다.

“정말 샘의 위치를 찾아낸 게 맞나?”

의심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일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손이 꽉 잡혔다.

“잘했다!”

하일레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루시우스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의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뒤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미로 속에서 빛을 본 것처럼, 밝아지고 흥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하일레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성녀로서 사람들을 세뇌하지 않고 이런 시선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힘든 일이었을 텐데 고생했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

“……신세졌군.”

하일레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의심……하지 않아요? 함정이라고.”

그 말에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말을 뚝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잠깐의 침묵 후, 푸하하 웃음소리가 와르르 회장 안을 울린다.

“그야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맨 처음 리페가 너를 용서했다고 했을 때도 황당했지만, 결사대에 일원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했을 때는 더더욱 어이없었어.”

“그래, 너를 일원으로 받아들여서 일을 망치는 게 아닌가 했었지.”

반역을 꾀하고 있는 만큼 일을 망치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녀를 일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칼리오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칼리오페가 하일레나에 관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런데 왜…….”

“눈과 귀와 머리가 장식으로 있는 건 아니라서.”

“그간 우리와 함께하면서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봐왔으니까.”

그 말에 하일레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것. 그건 그녀의 인생에 없던 것이었다.

울컥,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른다.

“하일레나.”

그 부름에 돌아보니 칼리오페가 그녀를 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아…….’

은반 같은 하일레나의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거렸다. 저도 모르게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직후 그런 스스로를 깨닫고 흠칫했다.

서둘러 손을 거두려는데 칼리오페가 더 빨랐다.

손에 닿는 보드라운 온기에 하일레나의 어깨가 떨렸다. 칼리오페는 여전히 아무 거리낌 없는 태도로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가 왔어요.]

하일레나는 칼리오페가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창살을 움켜쥐고 절규하는 제 손을 잡고 칼리오페가 말했다. 괜찮다고, 내가 여기 왔다고.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그땐 이 손을 맞잡지 않았다. 오히려 뿌리치고 상처 주었다.

하일레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칼리오페의 손을 맞잡았다. 힘을 주어 강하게. 그녀의 손길을 느낀 칼리오페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두 여자의 손이 단단하게 맞물린다.

‘……주마등.’

하일레나는 불현듯 생각했다.

죽기 직전엔 살아온 지난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고 들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내 주마등에서 가장 커다랗게 남는 장면일 거야.’

그녀가 지나온 생을 바라보며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

다른 순간들은 그저 스쳐 지나갈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사진처럼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그건 예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렬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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