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겨울 (2)[8권] (35/41)

Chapter 2. 겨울 (2)

시그니페르 홀은 오래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장엄하게 우뚝 서 있었다.

일곱 개의 돌계단 앞에 서서 호르세안은 잠시 주변의 기척을 가늠해 봤다.

‘숨어 있는 황제의 호위가 다섯. 나를 미행하는 그림자가 둘.’

그 외에 다른 건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꽤 운치가 있는 곳이군.”

황제가 시그니페르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양식의 석조 건물은 화려하기보단 우아했다. 대리석은 세월의 흔적에 상처는 났을지언정 하얗고 깨끗했다.

‘영원토록 희고 빛나라……라고 했던가.’

문헌에 따르면 헌공 받은 신이 기뻐하며 시그니페르 홀에 ‘너는 영원토록 희고 빛나라’ 하고 축복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곳에도 신화 속 무언가가 잠들어 있을지도.’

신화에 나온 샘의 영험함을 알고 있는 황제의 검은 눈이 탐욕으로 일렁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자신이 손에 넣어야 했다.

“어서 가자.”

황제는 호르세안을 재촉하며 서둘러 돌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탁 트인 넓은 홀이 나왔다.

천장은 고개를 치켜 올려도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높았고 사람 서넛만 한 거대한 석상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커다란 원을 가로지르는 선과 직선으로 형상화된 별, 열두 방향의 별 자취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한 가운데, 일곱 가지 빛으로 빛나는 크리스탈이 허공에 떠 있었다.

“오…….”

황제는 저도 모르게 크리스탈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오래된 유적 사이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찬란히 빛나며 떠 있는 크리스탈은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홀 중앙으로 나아가 크리스탈을 향해 손을 뻗던 황제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호세.”

“예, 폐하.”

호르세안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분명 내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선물이다. 보는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폐하의 마음에 드신다니 제 기쁨입니다.”

호르세안의 대답에 황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묵직한 음성이 홀 안을 울렸다.

호르세안은 바짝 마른 입안을 억지로 축였다. 극도의 긴장으로 온 신경이 곤두섰다.

황제가 천천히 그를 돌아봤다.

“대체 이런 걸 신관도, 문관도 아닌 네가 어찌 알았지?”

카앙—!!

황제가 말을 마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호르세안이 자신을 공격한 검을 쳐낸 것이다.

그를 기습한 사내가 훌쩍 물러서며 자세를 낮췄다.

“호오.”

황제가 천천히 감탄을 내뱉었다.

“호세, 내 생각보다 꽤 검을 잘 다루는구나.”

호르세안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어렸다.

“실력이 그리 좋다면 내게 말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더 좋게 대우해주었을 텐데.”

황제의 손짓에 기척을 감추고 있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르세안이 가늠했던 대로 총 일곱 명이었다.

“왜 내게 실력을 숨겼을까. 그저 겸손했던 걸까?”

황제의 목소리에는 노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분노에 찬 일갈이 터졌다.

“아니지. 감히 내 등 뒤에 칼을 꽂으려고!”

호르세안을 포위한 다섯 명의 그림자가 일시에 달려들었다.

호르세안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충격을 완화해 검을 받아내곤 반격하지 않은 채 몸을 굴려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을 미행했던 두 명은 몰라도 황제를 호위하는 다섯의 검은 꽤 묵직했다.

호르세안의 시선이 홀 구석을 향했다.

‘아직인가?’

기척을 가늠해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지원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최악을 가정하는 것이 낫다.

호르세안의 몸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간격 안으로 파고 들어서 검을 휘두른다. 왼쪽 어깨로 쇄도하는 검에 상대 역시 검을 들어 방어한다.

검날과 검날이 맞닿기 바로 직전, 호르세안의 어깨가 기묘하게 움직였다.

“커헉!”

내장을 꿰뚫는 비수에 상대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호르세안의 검로가 한순간에 뒤틀리며 어깨를 방어하느라 텅 빈 배에 검을 꽂아 넣은 것이다.

호르세안은 바로 검을 회수해 간격을 벌렸다. 너무 깊게 파고들면 다시 포위될 위험이 있다.

‘과연 스승이 루스티첼 백작이랬나.’

호르세안의 움직임을 본 그림자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정확하고 간결한 동작으로 몸에 무리를 최소화하고 있다. 검로를 뒤틀 때 손목이 아니라 어깨를 회전한 것만 봐도 실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저것을 죽여!”

순식간에 한 명이 무력화되자 황제가 왈칵 소리를 질렀다.

그림자들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신중한 듯 보였지만 굳이 힘을 뺄 필요 없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한 명이 당했는데도 상대는 전혀 심리적으로 압박되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당한 이는 호르세안을 미행하던 둘 중 하나였다. 황제를 호위하는 다섯에 비해 실력이 한참 뒤떨어지니 위축될 이유가 없다.

호르세안은 혀를 찼다. 자신이 만들어낸 패착이었다.

처음 그를 공격하라 명했을 때, 황제는 딱히 호르세안을 배신자라고 확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정체도 모르는 신비한 기물을 손에 넣게 된 게 이상해 떠본 것이었겠지.

의심이 병증 상태에 있는 황제가 항상 하던 시험이었다.

아마 그림자의 검은 호르세안을 상처 입히기 직전에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극도의 긴장으로 예민해져 있던 상태라 반사적으로 검을 쳐냈다.

황제가 아는 그의 검술 실력으로는 그런 갑작스러운 기습에 능숙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황제에게 본 실력을 숨기고 있었노라고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늘 하는 습관적인 가벼운 의심에 확신이라는 불을 붙여준 것이다.

‘침착하자.’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저쪽’에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위축되지 않았고 여유를 부리고 있다. 여유는 다시 말해 방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호르세안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검에 황금빛 오러가 감돌기 시작했다.

* * *

허억, 허억. 호르세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상대의 몸이 허물어지며 둔탁한 충돌음이 들렸다. 바닥에 완전히 쓰러진 것이다.

숨을 고른 호르세안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호르세안을 응시했다. 단련된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지만 치명적인 건 없었다.

‘이렇게 우수한 놈이었다니.’

아까웠다. 하지만 이렇게 우수하기에 욕심을 부린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항상 생각했지.”

황제의 입술이 움직였다.

“샘에 대한 것을 알게 된 수하가 과연 나를 성심껏 모실까?”

느긋하게 묻는다.

호르세안을 막아서던 수하들이 다 죽었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날 죽이고 샘을 가로채 불로불사의 기적을 얻어 이 세계에 신으로 군림할 생각을 하는 놈이 정말로 없을까?”

그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계속해 던진다.

“없을 리가 없지.”

황제의 입술이 뒤틀리며 비릿한 비웃음을 만들어냈다.

그는 충성심이나 명예같이 허황된 가치를 믿지 않았다. 그가 믿는 건 인간의 탐욕이었다.

그래서 제 편을 포섭할 때도 달콤한 대가로 꾀어냈다. 포섭하고서도 항상 의심하고 시험했다.

“유감이야. 너는 그 모든 시험을 항상 기대 이상으로 통과해왔는데. 결국 이렇게 걸리다니.”

황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구르릉, 하고 마치 옅은 땅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황궁이 황제의 적을 말살하고 황제를 수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본능이 더 먼저 경고했다.

호르세안이 몸을 굴린 것과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가 무너져 내렸다. 날카로운 빛이 채찍처럼 호르세안의 발목을 잡아채려 하는가 하면, 홀 벽면에 서 있던 거대한 석상이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황제는 재미난 묘기를 보는 것처럼 그 모습을 감상했다.

호르세안은 석상 몇 개를 쓰러트렸지만 결국 거대한 손아귀에 붙들렸다.

양손으로 호르세안을 움켜쥔 석상이 머리 위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바닥에 내려치려 하는 것이다.

아무리 오러를 몸에 둘러 보호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죽지 않더라도 이어지는 공격을 피할 수 있을까?

선명한 죽음이 눈앞에 드리웠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호르세안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버니의 안위를 우선으로 사세요.]

불현듯 추운 겨울날 제게 그리 말했던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겨울바람에 코끝이 붉어져 있었다.

[……부탁이에요.]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

차마 따스한 곳으로 들어가지 못해 겨울밤 밖에 나와 꽁꽁 얼어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상하게도 칼리오페가 제 옷깃을 붙들자 다리가 녹아내렸다. 실내에서 막 나온 아이의 손이 따뜻해서 그랬을까?

칼리오페가 오라고 손짓하자 몸이 움직였다.

제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자책한 게 거짓말처럼, 훈기가 도는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이제야 깨닫는다.

그 애는 항상, 제게 봄볕처럼 따스했다.

칼리오페가 곁에 다가온 순간부터 추운 밖이든 따스한 안이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 애가 있는 곳이 따스했으니까.

“하하.”

호르세안이 마른 웃음을 삼켰다.

그때 대답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애에게 약속을 못 지킨 건 아닐 테니까.’

강한 압력과 함께 몸이 훅 꺼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움켜쥔 석상이 팔을 내리친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호르세안을 붙잡고 있던 석상의 손이 부서져 내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호르세안은 순발력을 발휘해 재빨리 낙법을 취했다.

“멍청이.”

바닥에 착지한 그의 머리 위로 새침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익숙한 붉은 오러 사이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에피니.”

에피니가 호르세안의 앞을 막아선 채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리페.’

칼리오페가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 가득 들어찬 걱정과 염려, 그리고 자책감에 호르세안이 쓴웃음을 흘렸다.

슬쩍 손을 흔들자 자그마한 얼굴이 더 일그러진다.

‘이런.’

더 속상하게 만들려던 건 아닌데.

“칼리오페 루스티첼?!”

황제가 칼리오페를 보고 비명처럼 외쳤다. 설마 이곳에 칼리오페가 나타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호르세안은 자신이 심은 첩자로 루스티첼 가에서 보자면 배신자일 텐데—

“오랜만입니다, 폐하.”

황제를 향해 사뿐히 인사하는 칼리오페에겐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기품과 우아함이 베여 있었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고 시체가 누워 있는 곳이 아니라 고상한 연회장에 있는 것만 같았다.

“네가 어째서…….”

황제의 말에 칼리오페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재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녀가 에피니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거래가 있었거든요.”

“거래?”

칼리오페는 더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거래라고.’

황제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호르세안이 불로불사의 기적이 탐나 자신을 배신한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루스티첼 가가 개입해서 그를 구하러 온 상황에 당황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바로 이중 스파이임을 알 수 있었겠지만, 선입견이 강했기에 판단이 늦어졌다.

칼리오페는 황제의 반응을 보고 그가 호르세안이 이중 스파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판단이 늦어졌을 뿐, 곧 무슨 상황인지 알아챌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생각하게끔 미끼를 던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호르세안이 이중 스파이라는 것을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가 알아서 착각하고 있는데 그 오해를 풀어줄 이유는 없다. 이렇게 순간적인 판단이 중요한 때에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전황을 좌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으니까.

‘호르세안의 동생이 제 오라비를 구하려고 루스티첼 가와 거래를 한 모양이군.’

그리고 당연하게도 황제는 제가 앞서 확신했던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대신, 칼리오페가 푼 미끼를 냉큼 물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던 것들이 제 발로 찾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군.”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칼리오페는 사로잡고 다른 적은 모두 죽이라 의지를 실어 명한다.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일가에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 막내 사랑이 지극한 가족이니 누구 하나는 칼리오페와 은잔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교섭에 응하리라.

저 꼴 보기 싫은 년을 바로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또 달리 생각하면 괴롭힐 거리가 늘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죽으면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살아 있으면 계속해서 고통받을 수 있으니.

황제의 명을 받은 석상이 에피니와 호르세안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두 사람은 양측으로 피해 석상을 휘돌아 검을 내리그었다.

쿠웅, 커다란 울림과 먼지가 솟는다.

두 사람의 연계기는 호흡처럼 착착 맞았다. 하지만 석상은 많았고 팔이나 머리가 부러진 것으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또 석상을 상대하고 있다 보면 직선으로 뻗어 나온 빛이 뒤를 노리고 공격해왔다.

지치는 인간과 지치지 않는 석상.

거기에 수적 우위도 있으니 시간이 흐르면 다 정리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지?’

이곳은 황궁의 외정이 아니라 내정이었다. 정무를 보는 외정과 달리 내정은 황제의 직계가 기거하는 사적인 공간이다. 내정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따로 허가가 필요했다. 황족인 아스타레아스조차도.

‘헌데 칼리오페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황제의 시선이 칼리오페와 에피니가 처음 나왔던 쪽을 향했다.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는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와아아아아—!”

그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황궁의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온 것이다.

‘말도 안 돼!’

황제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했다.

‘어떻게 비밀 통로를…….’

황궁 비밀 통로는 거미줄처럼 짜여있어 길도, 출구도 여러 개다. 하지만 거미줄과 달리 규칙이 없어 미로 같은 데다가 통로 안에는 여러 가지 기관 장치를 비롯해 마법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다.

비밀 통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발을 들이는 경우, 가장 운 좋은 최후가 아사였다. 굶어 죽기 전에 기관 장치나 마법 장치에 당해 죽을 테니까.

그런데 이들은 비밀 통로를 통해 이곳에 들어왔다고?

‘나도 모르는 것을……!’

황제가 비밀 통로를 통하지 않고 마차를 통해 시그니페르 홀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길을 모르니까.

황제가 알고 있는 비밀 통로는 고작해야 몇 개뿐이었다.

선황이 붕어하고 아스타레아스에게 갈 황위를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제가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비밀 통로에 대한 정보를 승계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이 비밀 통로를 이용했다니.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는 자명했다.

“아스타레아스!”

황제가 이를 갈며 조카의 이름을 일갈했다.

“숙부님.”

칼리오페의 곁에 선 아스타레아스가 황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싸늘하고 오만한 미소가 황제의 신경을 긁었다.

“네가 어떻게……!”

비밀 통로의 길을 모르는 것은 아스타레아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선황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당시 나이가 어렸던 아스타레아스는 비밀 통로 전체가 어떤 식으로 이뤄져 있는지, 어떻게 장치를 파훼하는지 전수받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비밀 통로에 관해서 꼭 입으로 들어야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스타레아스의 대답에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제국에선 대대로 황제는 후계에게 비밀 통로에 관해서 알려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즉위하면 자연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황궁은 황족이 지닌 신혈에 반응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즉위식에서 황제는 황궁 중앙에 안치되어있는 신석에 피를 떨어트리는데, 그 피가 황궁에 각인되어 황제를 이번 대의 주인으로 인식한다.

주인의 명을 받아 적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밀 통로 역시 황제에게 길을 ‘보여’ 준다.

하지만 현 황제는 길을 보지 못했다. 그의 신혈이 너무 옅었기 때문에.

지금 황제가 알고 있는 통로는 모두 그의 아버지가 제위에 있던 시절에 어린 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네가 설마 신석에…….”

말을 하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황제의 즉위식 이후 신석이 있는 곳은 굳게 닫혀 한 번도 열린 적 없다. 게다가 지금 석상이 황제의 명을 따라 침입자들을 공격하고 있는 걸 보면 신석은 여전히 황제를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글쎄요.”

애매모호한 아스타레아스의 대답에 황제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전생에 있었던 전쟁에서 아스타레아스는 황궁을 점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신석에 피를 떨어트려 비밀 통로가 어찌 이뤄져 있는지 알게 됐다.

꿈을 통해 그때의 기억을 되찾은 것이지만 황제가 이를 알 리 없었다.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에게 황제는 비밀 통로를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것도 사실 아스타레아스가 전생의 상황을 꿈으로 보고 말해준 것이었다. 황궁을 점거할 때 황제는 비밀 통로로 도망치지 못했으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황제는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루스티첼 가를 비웃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불로불사를 원해 자신을 배신한 호르세안을 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루스티첼 가와 결탁해 그를 구하러 오고,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연인인 아스타레아스가 그 상황을 도왔다.

이렇게 사실을 나열해도 혼란만 더 커졌다. 퍼즐 조각이 빠진 것처럼 아귀가 정확하게 맞물리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그의 눈에 석상과 사람들이 얽혀 싸우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까와 달리 석상이 수적으로 열세에 몰려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있었다고?’

루스티첼 가는 지난 이 년간 엉뚱한 곳에서 샘을 찾느라 병력을 소진하지 않았나?

귀족 가문이 보유할 수 있는 병력에는 제한이 있다. 루스티첼 가는 샘 수색 과정에서 매번 병력을 잃었기에 계속해서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분명 그 정도로 병력이 모자랐는데 지금 이 상황은…….

‘아니, 루스티첼 가는 샘 수색을 위해 엘르인으로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시그니페르 홀에 오기 전, 호르세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제야 황제는 깨달았다.

“호르세안, 네놈이……!”

황제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감히 이 나를 기만하다니!’

처음부터 루스티첼 가와 손을 잡고 자신을 속였던 것이다. 감쪽같이 놀아났다.

“너희는 황궁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황제의 명에 석상 하나가 아예 비밀 통로를 막아버렸다. 퇴로가 막힌 것이다. 비록 지금 석상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전체 황궁으로 따지면 어떻게 될까?

황제의 입술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퇴로가 차단되자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동요를 내비쳤다. 퇴로가 막혔다는 건 곧 증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궁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 것이다.

아스타레아스가 다른 비밀 통로를 열어 탈출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우선 시그니페르 홀 밖으로 나가야 했다. 황궁 전체가 적인 상황에서 탁 트인 장소로 나가면 바로 포위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안 좋아진다.

이 상태를 벗어날 방법은 하나였다.

황제를 죽이는 것.

황제가 죽으면 더 이상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어지니 자연스레 황궁도 움직임을 멈출 것이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강력한 보호막에 둘러싸여 있다. 오러나 마나, 신성력 따위가 아니라 황궁에 신석을 내어준 신의 힘이 깃든 보호막이다.

‘과연 깰 수 있을까?’

약한 마음을 먹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 저절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때,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레아스, 저기에 크리스탈이 있어요!”

빠르고 낮은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애써 흥분감을 내리누르며 소리를 낮췄지만 충분히 황제에게 들릴 만한 크기였다.

황제는 칼리오페가 눈짓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시그니페르 홀에 들어온 순간 보았던 그 신비로운 보석이 둥둥 떠 있었다.

“어서……!”

칼리오페가 작게 외치며 크리스탈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아스타레아스가 마법을 캐스팅했다. 크리스탈을 제 쪽으로 불러오기 위한 주문일 터였다.

황제의 검은 눈동자에 절박한 얼굴로 달려오는 칼리오페와 아닌 척하지만 초조한 기색이 배인 아스타레아스가 비쳤다. 두 사람 다 어떻게든 크리스탈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마침 크리스탈은 황제의 바로 옆에 떠 있었다. 황제가 그걸 잡으려다가 멈췄었으니 당연했다.

제대로 생각하기 전에 황제는 크리스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만약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늘 일어난 사건의 인과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기만 했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중첩되어 쌓인 오해와 그로 인해 생긴 균열이 황제의 판단력을 흐렸다.

아까부터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호르세안에 대한 제 확신은 완전히 틀렸었다. 여전히 아스타레아스가 어떻게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지 감도 안 잡힌다.

이 사실은 자신에게 정보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자신은 모르는 걸 저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역시 자신은 왜인지도 모르지만, 저들은 이 크리스탈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의식보다 더 빨리 뻗은 손이 크리스탈을 잡아챘다.

손바닥에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저들보다 먼저 이것을 손에 넣었다는 승리감과 안도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 직후, 불안감이 스멀스멀 가슴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보석을 맨 처음 보게 된 건 분명—

‘호르세안.’

저 기만자가 선물이랍시고 들이밀어서였다. 이게 진정 좋은 것이라면 저 배신자가 자신에게 주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독이나 저주는 아닌 것 같았다.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크리스탈을 자세히 보기 위해 쥐었던 손을 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사방이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석상과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천천히, 황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사자 석상이었다. 금방이라도 눈앞의 적을 도륙한 것 같이 흉포한 기세로 거대한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다는 것이다.

그 주변으로 보이는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역자들을 처단하던 석상은 모두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멈춰 있었다.

‘움직여!’

황제가 명했지만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석상은 하나도 없었다.

‘네 주인이 명한다! 움직여!’

심기를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해 다시 한 번 명해도 요지부동이긴 마찬가지였다.

“뭐 하는 거야! 난 제국의 황제다! 어서 움직여! 공격해! 저 놈들을 모두 죽이란 말이다!!”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일갈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황제는 손안의 크리스탈을 내려다보았다.

‘이것 때문에……?’

이렇게 간단히 신이 선물한 권능을 파훼한다고?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석상이 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건—

‘안 돼……!’

그를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방어막 역시 사라졌다는 뜻이니까.

황제는 곧바로 크리스탈을 내팽개쳤다.

그와 동시에 아스타레아스가 캐스팅을 끝냈다. 그의 주변에 떠오른 문자와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거센 바람이 휘돈다.

황제의 뇌리에 깨달음이 스쳤다. 아스타레아스는 신혈을 짙게 타고나 벌써 대마법사에 반열에 올랐다. 그건 다시 말해 물건을 옮기는 정도의 간단한 마법은 캐스팅 없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그는 크리스탈을 제 쪽으로 가져오기 위해 주문을 외운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를…….’

황제의 생각은 내장을 파고드는 격통에 끊겼다.

“커헉!”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신음과 함께 시뻘건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겁화로 이루어진 창이 몸을 꿰뚫고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검은 글자들이 황제의 사지를 죄었다.

검붉게 일렁이는 화염은 황제의 배를 관통한 채 사라지지 않았다. 직접 닿은 부분은 꺼멓게 타들어 가 건드리면 재가 날릴 것 같았고, 닿지 않은 부분은 그 열기만으로 심한 화상을 입어 물집이 차올랐다.

“끄아아아아! 끄흐, 으으윽……!”

황제가 결박된 몸을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인간의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입을 뻐끔거릴 때마다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이런.”

아스타레아스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괴로우시긴 하겠지만 당장 죽는 건 아니니 황제로서 체통을 지키시지요.”

아스타레아스가 하고 마는 마법 중에 지옥의 겁화를 불러온 이유는 하나였다. 최대한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상처 부위가 지져져 추가적인 출혈이 생기지 않아 그만큼 생존시간이 길어진다.

황제는 푸들푸들 경련하는 얼굴을 들어 제 앞에선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물집으로 뒤덮여 추악했다. 눈동자가 좁혀들어 흰자위가 비현실적으로 커 보였다.

“네, 네 노……! 끄읍, 흐으…….”

말하는 것도 엄청난 고통이 따라왔다. 성대까지 화상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성대가 화상을 입었다는 건 폐 역시 그렇다는 뜻.

숨을 내쉬고 마시는 단순한 행위조차 황제에게는 폐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리페를 황궁으로 불러 목을 다치게 하셨지요.”

아스타레아스는 황제의 상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를 언급할 때 그의 푸른 눈은 그 어떤 때보다 잔혹하게 빛났다.

칼리오페가 무리하게 대정령을 부르려다가 목을 살짝 다쳤던 일은 아직도 그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겨우 한 음을 내뱉었을 뿐인데도 그렇게 됐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늦었다면 칼리오페는 평생 목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체통을 지키지 못하겠다면 제가 대신해 지켜드리지요. 아무리 모자라도 제 숙부님 아니십니까.”

아스타레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의 목 피부색이 썩은 것처럼 물들었다.

격통에 황제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겁화가 그의 성대를 태웠기 때문이다. 배를 꿰뚫은 것처럼 목을 관통하면 바로 죽어 고통에서 해방될 테니 이런 수를 쓴 것이다.

“이제 체통을 지키시게 됐군요. 제게 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스타레아스의 발 아래에서 황제가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이제 오기도, 증오도, 분노도 다 사라졌다.

그저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어서 편해졌으면.

“소리 문제를 해결해드렸더니 다른 문제가 남아 있네요.”

아스타레아스가 옅은 한숨과 함께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손이 많이 가시는 분이로군요.”

푸른 눈동자가 황제의 양팔을 훑었다. 검은 글자들이 파고들어 꽉 옥죄고 있어 푸르딩딩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그날 칼리오페의 팔에는 멍이 들었었다. 제압당하는 바람에 생긴 상처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그와 동시에 황제의 사지에 화염이 꽂혔다.

황제의 목구멍에서 쉭쉭거리는 바람 소리가 나왔다. 그의 눈이 까뒤집어지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새하얗게 표백된 머리에는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추해라.”

조용한 가운데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도와드려도 처음부터 황제의 관에 어울리지 않았던 분은 어쩔 수 없군요.”

* * *

‘음…….’

칼리오페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에게 아스타레아스의 마법이 강타하는 것과 동시에 눈과 귀가 막혔다. 에피니가 그녀의 눈을 가리고 호르세안이 그녀의 귀를 막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이 상태로 시간이 꽤 오래 지나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칼리오페가 손을 들어 에페니의 손에 제 손을 겹치려는데, 그보다 더 빨리 눈과 귀가 트였다.

몇 번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추자 시야 한가득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리페.”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움켜쥐었다.

“돌아가요.”

칼리오페의 시선이 아스타레아스의 등 너머를 향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가 거의 가린 데다가 사람들이 많아 잘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이 이렇게 보여주기 싫어하는데 뭐하러 노력해서 보나 싶어서 칼리오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는 딱히 복수하며 상대의 비참한 최후에 희열을 느끼는 성격이 아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서도 복수를 꿈꾼다기보다는 가족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황제는 확실히 죽었는지 움직임을 멈췄던 석상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밀 통로를 막고 있던 석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수월하게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궁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 *

“엘피너스 경.”

회장에 모인 결사대 사람들이 너도나도 호르세안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가 경을 오해했군. 미안하오.”

“그간 홀로 그 중요한 일을 도맡느라 힘들었겠소. 우린 그것도 모르고…….”

“아닙니다. 여러분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못 미더우셨을 만합니다.”

호르세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호르세안의 행태를 보고 믿지 못해 결사대에서 제명한 것은 오히려 현명한 처사다. 이런 일에 사람 머릿수가 많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썩은 가지는 서둘러 잘라내야 한다.

호르세안은 분명 썩은 가지처럼 행동했다.

“또 그렇게 절 못 믿으셨던 건 다시 말해 제가 이 일을 잘했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정말이네. 어찌 그리 잘 속였나.”

“정말 감쪽같이 속았어요.”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호르세안이 설마 흑룡 기사단에 들어갔고,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는 중일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호르세안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했다.

에피니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호르세안을 찍어 죽이고도 남을 기세였다. 지은 죄가 있는 호르세안으로서는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러고 보니 이쪽 일은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습격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긴 했습니다만.”

호르세안이 황제와 대치할 때 지원이 늦게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황제는 루스티첼 백작이 엘르인으로 떠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루스티첼 가는 샘 수색을 위해 계속 위험 지역을 탐사하다가 병력을 연거푸 깎아 먹었다. 잇달아 모집한 기사의 전력이 이전만 하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심지어 그 병력을 이끌고 엘르인으로 갔으니 루스티첼 저는 빈집이나 다름없을 터. 이제나저제나 루스티첼 가를 멸문시킬 생각만 가득하던 황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샘을 지키고 있던 병력을 이동해 루스티첼 가를 비밀리에 습격하라 한 것이다.

루스티첼 부인과 칼리오페만 잡으면 은잔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잘 해결됐네. 애초에 이목을 끌지 않고 치러 온 거라 많은 병력이 온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정예였다. 불시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 초반에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난전이었다.

다행히도 황제를 칠 생각에 결사대 병력이 대부분 집결해 있어서 신속하게 피해를 수습하고 반격할 수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황제의 곁에 있었는데……. 그런 낌새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황제가 언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짐작 가는 때가 있었다.

시그니페르 홀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르기 전, 황제는 시종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때 루스티첼 가에 자객을 보내라 명했던 것이다.

황제는 호르세안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춰 말했지만, 기감이 발달한 호르세안의 귀에는 잘 들렸다. 그러나 별것 아닌 내용이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암호명이었겠지.’

떠나기 전 시종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긴 했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황제의 성격상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묻는 것만으로도 의혹을 살 수 있었다.

“아닐세. 그게 어찌 경의 잘못이겠는가.”

“그래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간 경의 도움을 받아 움직였으면서 그것도 몰랐던 게 죄스러운걸요.”

“어쨌거나 다 해결됐으니 다행입니다. 이제…… 정말 끝이군요.”

그 말에 회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감회에 잠겼다.

예기치 못한 습격에 루스티첼 저를 방어했던 사람들도, 전력이 쪼개진 채 황제를 공격하러 갔던 사람들도 모두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건만, 어째서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오랜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마음을 다진 것에 비하면 상황이 빠르게 해결돼서 그런 것일까?

길고 길었던 준비에 비해 한순간에 모든 것이 결판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최소한의 피해로 결판을 내기 위해 지난 몇 년간을 힘겹게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노력의 결실을 맺었다.

마음껏 기뻐해도 되리라. 이제 곧 진정한 자격을 지닌 황제가 황위를 이을 것이니.

“그러고 보니 그 보석은 뭐였습니까? 그때 갑자기 영애가 저기에 크리스탈이 있다면서 달려나가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에피니를 진정시키고 있던 칼리오페는 저를 향한 기사의 물음에 뒤를 돌아봤다.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황제가 크리스탈을 잡자 석상이 움직임을 멈췄다는 건 이미 그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퍼져 있었다.

“음, 그게……. 신석의 기운을 담은 크리스탈이예요.”

“신석의 기운을……?”

“그런 게 가능합니까? 마나나 오러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에테르랑 가장 가까운 기운일 텐데 그런 걸 담을 수 있다니.”

상식적으로 에테르를 담을 수 있는 물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에 테라님께서 주신 거예요.”

감출 것이 없었기에 칼리오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알아서 납득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지만 대정령이 준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칼리오페는 땅고래 프네우마케투스테라에게서 받은 일곱 개의 크리스탈 중 다섯 개에 자신의 에테르를 채워 가족들과 유모에게 주었다. 나머지 두 개 중 하나는 당연히 호르세안에게 줄 생각이었다.

성녀와 겨뤘던 경연장에서 가족들의 크리스탈을 본 아스타레아스가 탐을 내긴 했었다.

[가족들은 모두 가지고 있던데.]

칼리오페가 가족에게 준 선물이 그들을 구했다는 말을 하면서, 아스타레아스는 빤히 칼리오페를 쳐다봤었다.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칼리오페도 그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는 호르세안이 마음에 걸렸다.

칼리오페의 속마음을 모르는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에게 졸랐다.

[내게도 당신의 숨결을 담아주세요. 절대 떼어 놓지 말라고 말해주세요. 그럼 나는 매일 밤 거기에 키스하고 사랑을 속삭일 테니까.]

그의 손끝이 그녀의 목덜미와 입술을 건드렸다. 나붓이 휘는 눈매가 아찔했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그렇게 가지고 싶어요?]

[당신이 소중한 사람한테 주는 거잖아.]

순도 높은 에테르가 깃든 보석.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정도의 기물이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그런 건 하나도 상관없고 그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표식이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 외에는 그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당신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나 함께하는 기분이 들 것 같으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럴 듯했다. 그녀 역시 언제나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있고 싶었으니 더더욱 크리스탈을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르세안은 전생에서도 죽었고, 지금은 전생보다도 더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에게 줄 것이라고 말했고, 대신 아스타레아스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호르세안에게 크리스탈을 주었을 땐…….

[뭐야, 뭐야. 우리 꼬마 아가씨께서 내게 선물 주는 거야? 이것 참, 나 설레도 되는 거야?]

처진 눈매를 도톰하게 휘며 호르세안이 빙글거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짝였다. 하지만 크리스탈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그는 드물게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그가 크리스탈을 다시 칼리오페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에피니에게 줘.]

그의 어린 동생도 이 싸움에 가담했다. 에피니가 맡은 임무 중 위험한 것은 없었지만, 본디 위험한 순간이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가 에피니를 언급하자 칼리오페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호르세안이라면 제 목숨이 위험한 순간마저도 에피니에게 크리스탈을 주길 잘했다고 생각할 것을 알기에.

[오라버니는 항상 남만 생각하시네요.]

[하하, 아닌데.]

칼리오페는 심통 난 얼굴로 웃는 호르세안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아?]

그렇게 묻는 호르세안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작았다.

칼리오페는 가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너무한걸.]

상처 받았다며 우는 시늉을 하는 호르세안을 보고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좋아해요, 그런 점.]

호르세안은 우는 시늉도 멈춘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옅은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달조각처럼 걸려 있었다. 깊고 깊은 산호빛 눈동자.

한순간 숨을 들이켠 호르세안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능글맞게 웃으며 칼리오페를 놀렸다.

[우리 꼬마 아가씨가 그렇게나 이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줄 몰랐는걸. 루스 녀석이 알면 나를—]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황당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호르세안은 킬킬 웃으며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마구마구 쓰다듬었다.

‘이 대단하신 레이디의 머리칼을 마음대로 쓰다듬을 수 있는 것도 어린 시절부터 봐온 오라버니의 특권이지.’

엉망으로 헝클어진 칼리오페가 그에게 화를 내기 전에, 호르세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리페.]

호박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말로 할 수 없는 수많은 고마운 이유가 칼리오페의 가슴 가득 전해졌다.

이내 호르세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더더욱 헤집었다.

덕분에 칼리오페의 머리칼은 완전히 부풀어 올랐다. 황망함이 가득한 커다란 눈동자를 보며 호르세안이 킥킥 웃었다. 결국 칼리오페마저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미소였다.

그렇게 크리스탈 중 하나는 에페니에게 갔다.

호르세안이 주라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 받을 게 뻔했기에 칼리오페는 크리스탈에 대해 말하지 않고 참을 만들어 그냥 선물이라고만 했다.

에피니는 폼멜 끝에 참을 달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보란 듯이 유리안과 힐데르트도 앞에서 검을 흔들곤 했다. 두 사람의 울망한 시선을 받게 된 칼리오페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 맨 마지막 일곱 번째 크리스탈은 특별한 임무를 맡아줘야 했으니까.

에테르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에테르와 가장 가까운 기운을 지닌 신석의 힘 또한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문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황제의 피가 각인된 신석은 황제의 명을 들어 황제를 수호한다. 황제를 죽이기 위해선 그걸 멈춰야 했다. 수호 석상이나 덫, 기관 장치는 그렇다 쳐도 황제를 감싼 보호막을 해제해야 하니까.

황제가 직접 의지로 명령을 내려야 하는 석상과 달리, 보호막은 황제의 신변에 위험을 감지하면 자동적으로 생성된다.

즉, 황제가 보호막을 해제하고 싶어도 그에게 위험이 있는 이상 해제하지 못한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 강제로 해제하기란 불가능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신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기능을 이용해야지요.]

아스타레아스가 그렇게 말했을 때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영리한 그녀답게 곧 그 말에 함유된 인과관계를 유추해냈다.

[그 말은…… 신석에 보호막을 해제하는 기능이 있다는 뜻인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해제는 아니에요. 범위를 넓히는 거죠.]

보호막의 강도가 낮아지는 대신 범위가 더 넓어져 황궁 전체를 감싸게 된다. 이 역시 비밀 통로처럼 아스타레아스가 전생에서 황궁을 차지했을 때 신석에 피를 떨어트려 알게 된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건 황제가 신석에 접촉해서 명을 내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의 명령 문제는 건 차치하고서도 전제조건인 신석에 접촉하는 것 역시 요원했다.

해서 고안해낸 방법이 크리스탈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탈에 신석의 힘을 담아서 황제가 크리스탈과 접촉하는 순간 마치 신석에 직접 접촉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신석이 접촉 여부를 판단하는 원리가 그 돌에 깃든 기운에 달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접촉 문제를 해결해도 여전히 다른 문제가 있었다.

신석이 주인인 황제와 접촉했다고 착각하더라도 황제가 보호막을 넓히라는 명을 내릴 리 없다.

[전생에서 레아스가 궁을 점거했을 때 황제가 죽진 않았었죠?]

[맞아요.]

[하지만 신석에 피를 흘렸을 때 비밀 통로를 알려주었구요.]

[응.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기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죠.]

대답하던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뭘 말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본디 신석은 각인된 주인이 죽어야만 새로운 주인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원래라면 아스타레아스가 아무리 신석에 피를 흘려도 주인인 황제가 살아 있는 한 비밀 통로를 알려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이나마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스타레아스의 신혈이 초대 황제만큼이나 짙기 때문인지, 현 황제의 신혈이 옅기 때문인지, 그 둘 다 때문인지, 아니면 짐작도 할 수 없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신석은 아스타레아스의 피에 의해 한순간이나마 교란당했다. 전생에서 한 번 일어났던 일이니 두 사람은 거기에 걸어보기로 했다.

하여 아스타레아스의 명령을 새긴 피를 크리스탈에 넣었다. 황제와 접촉했다고 인식한 신석이 짙은 신혈에 새겨진 명령을 듣고 주인이 내린 명령이라 착각하도록.

‘테라님이 주신 크리스탈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받지 못했다면 일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그 크리스탈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은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런 방법이…….”

“정말 놀랍습니다.”

“헌데 어째서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황제는 호르세안을 의심해 크리스탈을 바로 붙잡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순발력을 발휘해 연기하지 않았다면 계속 만지지 않았을 테다.

만약 사람들이 이 계획을 알았다면 황제가 크리스탈을 만지지 않은 시점부터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계획이 틀어져 순식간에 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변한 것이니까.

하지만 애초에 이런 계획을 모른다면 그렇게 당황할 일도 없다. 황제가 크리스탈을 잡을지 잡지 않을지 변수가 있는 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그것을 고정값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았다.

“역시 영애의 혜안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략이 뛰어난 건 알았지만…….”

칼리오페는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을 멋쩍게 듣다가 호르세안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 말에 사람들이 호르세안더러 일등공신이라며 추켜세웠다.

칼리오페는 슬그머니 멀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로베르트가 호르세안을 툭툭 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회귀 전, 칼리오페가 열여덟이었을 땐 두 사람이 저렇게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둘 다 죽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정말로 가족들이 죽은 원흉을 없앤 것이다.

“리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가족들이 다가와 있었다.

칼리오페가 황궁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루스티첼 저는 자객들이 침입해 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어느 쪽이 더 안전한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칼리오페가 황궁으로 가겠다고 하니 말리기도 모호했다.

적어도 비밀 통로 안에 있으면 안전하겠지, 하고 위안 삼았다. 물론 그들의 사고뭉치 막둥이가 비밀 통로 안쪽에 얌전히 있을 리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 루스 오라버니, 로벨 오라버니.”

칼리오페는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며 눈을 맞췄다.

겨울을 몰아내는 봄바람은 따스하면서도 강인하다. 이렇게 가족들과 눈을 맞추고 있으면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서로가 있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말없이 가족끼리 끈끈한 정을 다지며 이대로 함께하자는 느낌을 물씬 풍길 때였다.

“약속을 지켰지요, 장인어른.”

느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가 장인어른입니까.”

루스티첼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위압감이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리페의 솜털 하나 다치지 않게 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를 믿고 인정해서 그런 것 아닌가요?”

“정확히는 제 딸아이의 솜털 하나라도 다치면 다시는 제 딸을 못 보실 줄 아시라 말씀드렸지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그렇다면 솜털 하나 다치지 않도록 내가 항시 옆에 붙어서 지켜야겠군요.”

“무슨……!”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며 말하자 루스티첼 백작이 뒷목을 잡았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눈이 휘 번뜩 빛났다. 형제가 쌍으로 황제가 될 이에게 대놓고 살기를 내뿜었으나 가족 중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난감한 듯 어머나, 하며 웃었지만 부채를 쥔 고운 손에 어울리지 않게 혈관이 불거져 있었다.

칼리오페는 아웅다웅하는 가족들과 아스타레아스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많은 일이 있었건만 어째 이들의 사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제가 나서봐야 일이 더 복잡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칼리오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변은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숙원을 이룬, 승리의 날이었다.

지난날 동안 모두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숨죽여 조심히 지냈다. 뱃속에 칼을 감추고 있었으니 편할 리가 없다. 제가 쥔 칼이더라도 날카로운 것은 매한가지이니.

가까운 이를 속이고, 다가오는 이를 의심하고, 지켜보는 자들을 경계했다.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반역죄로 멸문지화 당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어 고독한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부당하게 황위를 이어 폭정을 일삼는 황제를 몰아내고 이 나라에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자신의 손으로 이뤄냈다.

춥디추운 겨울도 이제 끝이다.

토독토독,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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