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겨울 (1) (34/41)

Chapter 2. 겨울 (1)

“왜 반대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대보시오!”

황제가 쾅, 소리를 내며 팔걸이를 내리쳤다.

제왕의 분노에 대신들은 의례적으로 고개를 숙일 뿐, 진정으로 언행을 삼가진 않았다.

“황공하오나 이미 이유에 대해 말씀을 올렸던 것 같습니다만…….”

“이전까지 소신들이 말씀드렸던 것은 타당한 이유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듣지 않으신 듯하니 다시 한 번 말씀 올리겠습니다.”

황제는 건방진 면면들을 보고 이를 빠드득 갈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귀족들의 행태가 되바라졌다. 황제가 추진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제국민을 위한 것이라면서 시답잖은 것만 요구했다.

‘젠장.’

안 그래도 피엔테 후작가가 흔들린 바람에 황제파의 결속력이 확연히 떨어졌다. 다른 수장을 내세워 구심점을 만들려 했지만, 그 탐욕스러운 작자들은 화합하지 않고 서로 수장이 되겠다며 다퉜다.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지금에야 수장이 정해졌긴 하다. 하지만 긴 시간 제 살을 갉아먹는 싸움을 한 황제파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예전과 같은 힘은 찾아볼 수 없고, 다른 계파로 이탈한 자들도 많았다.

억지로 황제파를 키우기 위해서 이권을 그쪽에 몰아주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 커 굵직한 권한은 뭐 하나 제대로 위임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황제는 제가 원하는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만 내게 있었어도…….’

강력한 황권은 기본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과의 싸움으로 소드 마스터를 둘이나 잃었고, 남아있는 병력도 대부분 ‘샘’에 배치하고 있어서 빠듯했다.

그래서 군사력을 강화하겠다고 하는 건데.

“이미 말씀드렸지만, 제국에 전쟁이 일어날 일은 요원합니다.”

“주변국들과 친교가 깊은데 갑작스럽게 군비를 확장하면 오히려 경계를 살 것입니다.”

“과거 제국은 정복 전쟁을 잦게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쪽에서도 군사력을 강화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안 일어나도 됐을 전쟁이 일어나고, 제국민이 고통받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타당하지 않다 여기시면 다른 이유도—”

“되었다!”

황제가 짜증스레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뒤에서 귀족들 몰래 흑룡 기사단원을 포섭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게다가 황제파가 힘을 못 쓰다 보니 흑룡 기사단이 되어봤자 별 이득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입단을 거절하는 자들이 많았다.

황권이 약해지고 있는 게 두 눈으로 보였다. 분명 손에 꽉 틀어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권력이 모래알처럼 손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황제는 벌떡 일어나 대전을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귀족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찬다고 바로 박차고 나가다니.”

“이렇게 처리 못 한 안건이 더 늘어가는군요.”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처리되지 못한 안건이 많으니 후속 대처가 필요하고, 후속 대처를 짜 올리면 그것마저 또 밀린다.

“적어도 이번 눈사태로 인한 피해 대책안은 가결 받았어야 하는데.”

“이재민들은 지금 어떻게 살지 막막한데 거기에 대해선 일언반구 안 하시고 군비 확장 이야기만 하시니.”

“이래서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군사력을 확장하겠답시고 벌써 몇 번째 그러는 겁니까. 지난 일 년간 폐하께선 그 얘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현시점에서 제국에 국방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거기에 예산을 쏟아부어봤자 낭비 아닙니까.”

“낭비뿐이면 다행이게요. 정말 주변국들의 경계를 사 정세가 어지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역 마찰이 빚어질 수 도 있고…….”

“무역이 힘들어지면 그 피해는 또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가겠지요.”

“하아—”

귀족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엄청난 명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행정에 차질이 없을 정도로 정무를 보았다. 그런데 이 년 전부터 무언가 경계만 잔뜩 하며 날 선 반응을 보이더니, 최근 일 년은 아예 이런 식이었다.

“그나마 카스틸로 가에서 지원을 해주어 다행입니다.”

“황가에서 해야 할 것을 왜 공작 가에서 하고 있는지.”

“공작 가의 가신도 아닌데 이번에도 영지에 지원을 받아 면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현 황제가 아니라 카스틸로 소공작이 황위를 물려받았다면—’ 하고 생각했다.

“내 이럴 것 같아서…….”

중얼거리던 노귀족이 입을 다물었다.

이럴 것 같아서 현 황제가 황위를 이어받겠다고 했을 때부터 반대했었다.

그가 황자였던 시절부터 봐온 이들은 그다지 재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탐욕스럽고 자기중심적이었다. 군주는 모두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지만, 정무를 볼 때는 그래선 안 된다.

선황의 적장자인 아스타레아스를 황위에 올리고 황숙께서는 대리청정하시라 주장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기어코 황위에 올라 황제의 관을 썼다.

그나마 워낙 반대가 심해 한 마디 양보하긴 했다.

[조카님께서 성년이 되시면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돌려드릴 것이오. 나는 조카님께서 성장하시는 동안 황관을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떤가. 아스타레아스가 성년이 된 지 삼 년째인데도 그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황제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귀족들은 아스타레아스가 황위에 추대되길 원했다.

“그런데 이번 눈사태 이재민은……. 영주 혼자 감당하기에는 피해 정도가 너무 큰데요.”

시일을 다투는 문제인데 오늘도 처리 못 했다.

“아, 그건 루스티첼 가에서 자선 사업을 추진할 거라 하더군요.”

“루스티첼 가 말이죠.”

“그럼 걱정을 덜어도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는 귀족들의 얼굴에는 안심한 기색을 넘어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들 똑같은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럼 자선 파티도 열려나요?”

“칼리오페 영애도 나올 테지요?”

“초대장은 돌았나요? 저는 못 받았는데…….”

“아직 초대장 발송 전일 겁니다. 자선이라는 취지인 만큼 웬만한 곳에는 다 연락이 가겠지요.”

그 말에 귀족들의 얼굴에 화색이 피었다.

“간만에 영애의 노래를 듣겠네요.”

“소규모 파티 정도는 주최할 때가 됐는데. 자선 파티 규모가 클 것 같으니 무리일까요.”

다들 성장한 칼리오페가 파티를 주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자선 연설은 아마 영애가 하실 거예요. 그편이 더 선전되니까.”

신문에서 황자나 황녀의 일보다 칼리오페의 행보를 더 집중 조명해서 싣고 있다.

제국민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신문의 판매량부터가 달라지니 확실하고 분명한 지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만큼 칼리오페의 연설은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다.

“아무래도 루스티첼 가의 자선 파티가 끝나면 사람들 틈에서도 이재민을 위한 모금이 시작될 듯하군요.”

“정말 곳곳에서 행정이 구멍 나고 있는데도 그나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건 루스티첼 영애와 카스틸로 소공작 덕이에요.”

“그런 두 분의 사이가 남다르니 그것 또한 복이지요.”

“조금 아깝지만.”

“조금 질투 나지만.”

복이라는 말에 다들 하하 웃으면서도 농담인 척 한마디 덧붙였다.

칼리오페가 다섯 살이었을 무렵부터 눈독 들였던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들이 있고 나이가 어느 정도 맞는 가문이라면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막강하고, 공개 연애도 그런 공개 연애가 없었던지라—무려 경연 무대에서 전국에 생중계되었으니— 깔끔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백작이 박수를 짝 쳤다.

“아, 그럼 이번 자선 파티에서 성년이 된 칼리오페 영애의 모습을 처음 보겠군요!”

* * *

“앗, 거기 아가씨 위험해요!”

커다란 소리에 로브를 쓴 여인이 움찔 뒤를 돌아봤다.

“위! 위예요! 어서 피하세……!”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고층에서 떨어진 화병이 소녀의 머리 위에서 무자비하게 깨질 것이다.

크게 외치던 사내는 차마 그 참상을 보지 못 하겠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불러 세우지 말걸.’

자신의 부름에 멈춰서 뒤돌아보느라 여인은 정확히 화병이 떨어지는 자리에 서 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제 탓인 것 같아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화병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살며시 한쪽 눈을 떴던 사내는 생각 외의 장면에 두 눈을 홉떴다.

화병이 여인의 머리 근처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더니 휙 솟구쳐올라 사내의 앞까지 당도했다. 그는 얼떨결에 허공에 뜬 화병을 품에 안으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때마침 여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머리를 덮은 로브 후드가 아래로 떨어지며 긴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미풍에 남보라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흔들렸다.

“어!”

사내는 저도 모르게 그 여인을 향해 삿대질했다. 그리고 믿기질 않아 건너편에 걸려 있는 전광판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여인을 바라봤다.

전광판 속 사진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사내는 똑같은 감탄사를 남발하며 이번에는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게 구는지 자각할 수도 없었다. 너무 당황하고 놀라면 어, 어 하는 말밖에 안 나온다.

여인이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하얀 뺨이 도톰해진다.

깨끗한 미소였다.

사내의 얼굴이 목 아래에서부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저, 저, 그…….”

그가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내뱉고 있을 때 여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는 이가 있었다.

그 역시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칼리오페의 어깨를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칼리오페를 감싼 이가 고개를 들며 후드를 슬쩍 올렸다.

햇빛에 새하얗게 부서지는 은빛 머리칼과 어떤 보석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드러난다. 그 눈동자가 사내를 지긋이 응시했다. 마치 내 것이니 눈독 들이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사내는 화병을 끌어안은 채 저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저 쳐다본 것뿐인데도 엄청난 박력감이었다.

“레아스.”

칼리오페가 창문에서 사라진 사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옆에 있는 남자를 불렀다.

“왜 그래요?”

창가를 보던 눈빛이 순식간에 달콤하게 풀어진다.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고 멈춰 선 사람들이 보란 듯이 그가 그녀의 옆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남자의 질투는 추하대요.”

칼리오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움찔했다.

“질투 아닌데요.”

“흠, 그래요?”

“정말 아닌데.”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그냥 당신은 내 사람인데 다른 남자가 쳐다보는 게 싫어서.”

“그랬군요.”

“그것도 얼굴을 붉힌 채 ‘예쁘다, 예쁘다, 진짜 예쁘다. 이거 꿈 아니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잖아요.”

“그랬나요……?”

사내의 시선이 그랬던가. 잘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 없어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뺨을 감싸쥐었다.

“내가 당신 것이든, 당신의 마음은 내 것이니까.”

“음, 글쎄요. 그건 어떨까.”

칼리오페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농담에도 아스타레아스는 초조해졌다. 그의 눈에는 칼리오페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렇게 보이는 게 저뿐일 리 없어서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도록 나로 가득 채워줄게요.”

그 말과 동시에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칼리오페의 입술에 닿았다. 칼리오페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스르르 감겼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얼마 전 해가 바뀌어 막 열여덟 살이 됐다.

‘성년이 되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키스 스캔들 생성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아스타레아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 * *

“세상에!”

통신석을 확인한 소녀가 옆에 있는 친구의 어깨를 퍽퍽 두들겼다.

“아파!”

“이거 봐봐!”

그 말에 친구는 아픈 어깨를 문지르며 통신석을 들여다 봤다. 그리고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박!”

들어가 있는 통신방에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키스신이 올라와 있었다.

그 밑으로 계속해서 메시지가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사진을 찍은 행인들을 통해 신문보다도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쭈쭈: 미쳤어, 미쳤어!

언제결혼해: 하아……. 역시 레리 커플은 진리야!

언니보석다니꺼야: 진리는 무슨! 하…… 우리 애가 길거리에서…….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아 진짜 둘이 넘 잘 어울려요.

리페의뭉뭉이: 어울리긴 뭐가 어울려!

빙결검: 하나도 안 어울린다.

언제결혼해: 이분들이 참. 솔직히 소공작님 빼면 리페한테 어울리는 사람 있나요?

노래천사: 맞아. 소공작님 정도 되니까 겨우 균형이 맞춰지는 거예요.

리페의뭉뭉이: 어울리는 사람이 왜 없어?

빙결검: 오빠가 있음.

리페의뭉뭉이: 맞아맞아. 리페는 자기 오빠들이랑 있을 때 더 낫더라. 더 행복해 보여.

리페의뭉뭉이: 특히 그 둘째 오빠던가?

빙결검: 둘째는 무슨. 둘째보단 첫째랑 있을 때가 표정이 더 잘 사는데.

리페겅듀: 그로치 않아염! 파파랑 있을 때가 젤루 좋아 보였어염!

“뭐가 ‘그로치 않아염!’이야!”

로베르트가 부들부들 떨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로치 않아염’이라 말할 때는 주먹 쥔 손을 뺨에 앙증맞게 붙이고 최대한 혀짧은 소리로 재현하는 걸 잊지 않았다.

“하, 진짜 보는 눈도 없으면서 귀척은.”

투덜거린 로베르트가 전투적으로 통신석을 쥐었다. 그리고 와다다닥 타자를 누르기 시작했다.

리페의뭉뭉이: 아닌데 아닌데? 둘째 오빠랑 잘 어울리는데?

빙결: 무조건 첫째 오빠다.

리페겅듀: 아니얌! 리페는 파파랑 있을 때가 최고얌!

“뭐야, 이놈들은.”

루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호르세안이 고개를 들었다.

“뭐하냐?”

“……별로.”

루시우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통신석을 내렸다.

호르세안은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단장님께 다녀올게.”

“그러든가.”

루시우스는 호르세안이 나갈 때까지 그가 나가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 관심 없는 척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달칵.

하지만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통신석을 들었다. 그리고 심각한 눈으로 통신방을 들여다보았다.

친우가 방안에서 뭘 하고 있든 호르세안은 착실히 걸음을 옮겨 단장실 문을 열었다.

물소처럼 거대한 루스티첼 백작이 조그마한 통신석을 붙잡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통신석만 붙잡고 있네.’

호르세안은 흠, 하고 고개를 갸웃한 다음 이미 닫힌 문을 똑똑 두드렸다.

“단장님, 뭐 하십니까.”

그 물음에도 루스티첼 백작은 통신석을 움켜쥔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좀 바쁜데. 급한 일인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조금 있다 이야기하지.”

건성으로 그렇게 대답한 후, 큼지막한 손가락을 움직여 통신석을 꾹꾹 눌렀다.

‘파, 파랑 리페, 가 젤, 루…….’

리페겅듀: 파파랑 리페가 젤루 잘어울려염!

됨됨이된권력자: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죠.

됨됨이된권력자: 리페랑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요?

됨됨이된권력자: 바로 엄마입니다, 엄마.

됨됨이된권력자: 당연히 리페가 가장 많이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은 엄마.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엄마.

됨됨이된권력자: 자, 이제 명확해졌지요?

아가씨초코따개: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아가씨초코따개: 리페님과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사람은 유모 아닌가요?

“유모?! 유모라고?”

갑작스러운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들었다.

“예? 마님, 유모님을 불러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손을 내저은 루스티첼 부인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됨됨이된권력자: 뭘 모르는군요.

됨됨이된권력자: 엄마는 리페가 태어나기 전 열 달 동안 한몸에 함께 있었어요. 이제 이해되셨나요?

조용해진 ‘아가씨초코따개’를 보며 루스티첼 부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갑자기 통신방에 사진이 연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레리커플겨론난퇴직’이라는 사람이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가 함께 있는 투샷을 잔뜩 전송한 것이다.

파르페 하나를 놓고 앉아있는 모습, 선디스푼으로 칼리오페에게 크림을 떠먹여 주는 아스타레아스,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모습, 웃는 얼굴.

언니보석다니꺼야: 헐 이거 실시간?

우쭈쭈: 대박대박!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오늘 옷이랑 달라요. 다른 날 사진임.

눈귀정화: 아 이날 사진 저도 있음.

언제결혼해: 오, 올려주세요.

‘눈귀정화’가 올린 사진은 딱 한 장이었다. 같은 장면이었지만 이전에 올라왔던 사진과는 확연히 다른 각도였다.

눈귀정화: 저 날 커피 하우스에서 마주쳐서 계 탔다고 생각했는데. 기념으로 한 장만 찍었는데 저분은 여러 장 찍었나 봄. 소공작이 무섭지 않으셨나.

노래천사: 그러게요. 소공작님 질투 장난 아닌데.

우쭈쭈: 퇴직님 답 없다. 소공작님 손에 끌려간 거 아님?

너의목소리: 사진은 영혼 상태에서 올린 건가?

농담에 통신방에 한바탕 웃음이 지나갔다.

언제결혼해: 아 근데 진짜 눈이 정화되는 선남선녀네요. 잘 어울려! 귀여워!

언니보석다니꺼야: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보이는 것만큼은 인정.

언니케이크잘자른다: 솔직히 외모 말고도 잘 맞죠. 둘이 데이트하는 거 귀여워어!

‘데이트…….’

그때까지만 해도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루스티첼 일가는 그 순간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카스틸로 소공작…… 용서 못 해……!’

* * *

“그럼 그렇게 전달해 놓을게요.”

정보 길드장 웬디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웬디가 자꾸만 히죽히죽 웃으며 묘한 눈으로 쳐다봐서 부담스러웠다.

왜 그런지 알 것 같아서 더더욱.

‘여기 오기 전에 길에서 키스한 것 때문이겠지.’

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웬디를 만나기 고작 몇 분 전의 일이었지만 정보 길드인 만큼 빨리 안 것 같다.

어쨌거나 볼일을 마쳤으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더 있다가는 웬디가 무슨 짓궂은 말을 던질지 모른다.

“그럼 다음에 봬요.”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웬디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통신방이 볼 만 하겠네.”

“네?”

“아, 아니에요. 최근 관심 있는 통신방이 있어서요.”

“그래요?”

통신방에 대한 건 칼리오페도 안다. 통신석이 보급되면서 생긴 문화였다.

소수의 귀족들이 통신석을 사용할 땐 화상 연락이 주였는데, 보급되고 나니 의외로 화상 연락보다는 메시지가 더 선호되었다. 그중에는 정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관심사를 통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도 있다고 들었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쏟아질 텐데, 정보 길드장인 웬디가 이렇게 관심 있어 하는 게 의외였다.

“나름 정보의 보물창고랍니다.”

웬디가 통신석을 톡 건드리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하지 않는 게 좋을 지도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끄덕였다. 어차피 정보는 웬디를 통해 얻는 것으로 충분하니 그런 곳까지 신경을 기울일 필요는 없을 터였다.

정보 길드에서 나온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마차에 올라 회합 장소로 향했다.

정보 길드에서 생각보다 오래 있었는지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겨울 해는 빨리 진다.

칼리오페는 이 긴 겨울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겨울이 끝나기 위해선 변화가 찾아와야 하니까.

봄을 부를 변화지만 어떤 변화든 진통을 낳기 마련이다.

이제 준비도 막바지였다.

‘……황제.’

칼리오페는 차게 식은 손을 꽉 쥐었다.

그 위로 따스한 것이 닿았다.

돌아보니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따스함이 전이되듯 칼리오페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옮아붙었다.

전생과 달리 그녀의 곁에는 아스타레아스가 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그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다.

‘무엇보다 가족들도, 호세 오라버니도, 유모도…… 모두 다 살아계셔.’

미래는 바뀌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

더 나아지게 만들 것이다.

회합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먼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는지 분위기는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거사를 목전에 앞두고 있는지라 가벼울 수가 없었다.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가 착석하자 몽에르트 후작이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제 다 모인 건가?”

“그런 듯하오.”

“엘피너스 경은?”

그 물음에는 침묵이 돌아왔다.

사람들의 이목이 호르세안의 동생인 에피니에게 집중되었다. 에피니는 별말 없이 여전히 새침한 얼굴 그대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됐소. 엘피너스 경이 이런 자리에 제대로 나온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레. 이만하도록 합시다.”

로아힌 백작의 중재에 칸테나 부인이 마음에 안 찬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오늘 백룡 기사단에선 엘피너스 경이 멀쩡히 근무한 걸로 아는데.”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에피니를 비롯해 이곳에 백룡 기사단에 적을 둔 이들이 많았다. 그들더러 데려오지 않고 뭐했냐고 책하는 것이다.

“일정이 있다 했습니다.”

루시우스의 대답에 몽에르트 후작이 미간을 찡그렸다.

“결사대 회합에 참석할 시간은 없으면서 백룡 기사단에는 잘 다니나 보군.”

“백룡 기사단은 직장 아닙니까.”

“자자자, 오지 않은 사람 얘기를 해서 뭣합니까. 거사를 앞두고 중요한 논의가 산적해 있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확실히 하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중요한 결전을 앞둔 상태 아니오? 내실이 단단해야 하잖소.”

“확실히 하다니요.”

“엘피너스 경을 결사대에서 제명하는 것 말이오.”

“예?!”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일리가 있는 말씀인 것이, 엘피너스 경이 결사대에 제대로 나온 지가 언제입니까.”

“일 년 전부터는 눈에 보일 만큼 소홀해졌지요.”

“엘피너스 경이 맡기로 한 일을 제대로 안 해서 다른 쪽에서 손을 쓴 게 몇 번째입니까.”

“도움이 되긴커녕 오히려 해가 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예정에도 없던 몫까지 대신하게 되니 부담이 되지요.”

“다른 일도 아니고 나라를 뒤집는 일에 이런 허점이 있어서야…….”

“그 허점을 없애고 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만약 거사 일에 엘피너스 경이 구멍을 낸다면 막아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엘피너스 경은 초창기부터—”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여태 방만하게 군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소!”

“다른 누구도 아닌 엘피너스 경이 이렇게 될 줄이야……. 루스티첼 가와도 인연이 깊지 않았나요.”

“우리가 하는 일은 장애가 많지 않소. 그러다 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

“……이제는 놓을 때가 된 것 같군요.”

회장의 분위기는 이미 호르세안을 제명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중립을 지키고 있던 자들도 그간 있었던 일을 돌아보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이다.

호르세안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쪽도 더 이상 그를 변호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동안 호르세안의 행적은 좋지 않았다.

껄끄러운 침묵 속에서 에피니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담담하다 못해 찬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르세안의 동생인 에피니가 그렇게 말하니 다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는 곧장 다음으로 넘어갔다.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칼리오페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녀의 얼굴에 수심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살짝 쳐진 눈가에 달콤한 호박색 눈동자. 능글맞은 듯하지만 얼굴이 다정하다.

‘호세 오라버니…….’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쥐었다.

* * *

“젠장!”

챙그랑—

욕설과 함께 방안을 장식하고 있던 화병이 깨졌다.

꽃은 이 계절에 피지 않는 리시안서스였고, 화병은 크리스탈에 색은 입힌 극상품이었다. 깨진 화병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닥에 깔린 카펫을 적셨다.

한순간에 서민 일 년 치 생활비를 날려 먹었지만 성에 차지 않는지 황제는 여전히 씩씩거렸다.

이러다가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뒤엎을 것 같아 시종장은 전전긍긍했다. 하루가 멀게 기물을 깨트리니 남아나는 게 없었다. 또 새 화병과 새 카펫을 공수해올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폐하.”

다행히 황제의 패악을 멈출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손님이건만 황제보다 시종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목소리의 근원지엔 호르세안이 빙긋 웃음을 머금은 채 서 있었다. 비밀 통로를 통해 황제의 방에 들어온 것이다.

침전에 아무런 장애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비밀 통로 중 하나를 알려줄 정도로 황제는 그를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르세안은 그런 황제의 기대에 부응해왔다.

황제의 손짓에 시종장이 깊게 읍하고 방을 나섰다. 동시에 호르세안이 술을 잔에 따라 황제에게 건넸다.

술을 한 모금 삼킨 황제가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이라는 것들이 황제의 말은 따르지 않고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 원하는 것만 졸라대니.”

오늘도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귀족들에게 진노해 편전을 박차고 나왔다.

초조함과 탐욕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불로불사의 권능이 한 걸음만 내디디면 닿을 곳에 있다. 그 힘만 손에 넣으면 귀족들과 입씨름할 일도 없다.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그 한 걸음을 못 떼고 있다.

루스티첼 가에 은잔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 레아스 놈까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조용히 지냈던 게 거짓말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다. 지금 황제가 수락하지 않은 정책은 카스틸로 가의 막강한 영향력 하에 우회해서 추진되고 있다.

‘이래서야 귀족들이 들고 오는 안건을 거부해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

원래 황제는 귀족들의 숨통을 막아 어쩔 수 없이 군비 확장에 동의하도록 하려 했다. 군비 확장에 동의해주는 조건으로 그들이 들고 오는 안건도 수락해주는 거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매번 군비 이야기만 하고 딴 이야기를 꺼내는 즉시 편전을 박차고 나왔으니 귀족들도 황제의 의중이 뭔지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카스틸로 가의 개입으로 인해 그들이 올린 안건이 이뤄지고 있으니 거래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공작 가의 월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귀족들이 들고 오는 안건은 주로 예산 문제였다.

당연히 공금으로 처리되어야 할 비용이었지만 황제가 단단히 틀어쥐고 있으니 도리가 없다. 그에 공작 가에서 사업을 지원해주거나 자금을 빌려준다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재산을 자기가 쓰는 데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탓에 공작 가문의 위세만 드높아졌다.

신문에서도 황제와 카스틸로 공작가를 비교하는 기사를 연일 보도했다.

[카스틸로 가, 공공교육 사업에 70억 지원.]

[세금을 걷는 건 황가, 쓰는 건 공작가]

[오늘도 박차고 나간 황제…… 귀족들 지체 없이 공작 가로]

[극명한 대비, 누가 이 나라의 군주인가]

쾅!

오늘 아침 읽었던 기사를 떠올리며 황제는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황제는 약속대로 성년이 된 적법한 황위 계승자에게 황위를 승계하라는 칼럼까지 등장했다. 상황이 이러니 황제의 신경이 들끓지 않는 게 이상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폐하.”

호르세안이 그런 황제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제의 눈에 잠시 이채가 서렸다.

그래, 제게는 호르세안이 있다.

신관들부터 시작해 뭐 하나 마뜩잖은 아랫것들과 달리 지난 2년간 호르세안은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호르세안은 빈말하지 않는다. 이리 말을 꺼낸 것을 보면 분명 뭐라도 들고 온 것일 터.

아니나 다를까, 황제의 시선을 받은 호르세안의 입술이 열렸다.

“폐하께서 기뻐하실 만한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흐음?”

“루스티첼 가가 이번에는 엘르인 지역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황제가 크핫, 하고 광소를 터트렸다.

“멍청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 이 년이나 수색 중인데 여전히 헛다리만 집고 있으니.”

은잔을 가지고 있는 루스티첼 가는 샘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지난 이 년간 쉴 틈 없이 샘이 있을 법한 곳을 여기저기기 수색했다.

“운이 지지리도 없는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한결같이 샘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곳만 뒤지다니.”

특히 이번에 수색 중이라는 엘르인 지역은 산새가 험하고 고위험 몬스터가 다수 서식해 인간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다.

“제 살을 깎아 먹고 있군. 엘르인을 수색하다가 몇이나 살아 돌아올까.”

이쪽에서 군비 확장을 못 하고 있는 만큼, 저쪽에서 제 병력을 깎아 먹고 있다. 조금만 더 이런 식의 수색이 계속되면 루스티첼 가의 무력은 하잘 것 없어질 것이다.

“네 공이 크다, 호세.”

이렇게까지 위험한 지역을 연달아 조사하게 된 이유야 자명하다. 호르세안이 루스티첼 백작과 친우인 루시우스의 귓가에 거짓 정보를 불어넣은 것이다.

권력을 위해 어릴 적부터 친 혈육처럼 지낸 친우를 사지로 몰아넣다니.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마음에 들어.’

그 야심만만한 면이 저와 닮아 흡족했다.

“폐하.”

호르세안은 황제의 입매에 웃음기가 어린 것을 확인하며 제 얼굴에도 웃음을 드리웠다.

“제가 폐하께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황제의 입매에 어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네 선물이라니 기대되는구나. 그간 너는 날 실망시킨 적이 없었지.”

“과찬이십니다.”

“시킨 일도 항상 그 이상을 해왔는데 그런 네가 날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니. 어떤 것일지 짐작도 안 가는구나.”

“감히 자신하건대 폐하께서 깜짝 놀랄 만한 것입니다.”

“호오?”

황제의 검은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값비싼 사치품을 두고 이리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보인가?’

호르세안이 첩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게 가장 타당한 추측이었다.

무엇에 대한 정보일까.

‘설마 루스티첼 가가 은잔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알아낸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많이 기대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선물이며 이렇게 자신할 정도라면…….’

적어도 은잔과 관련된 정보이리라.

황제는 루스티첼 가와 어려서부터 관계 깊은 그를 포섭해 세작으로 심어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루스티첼 가에 은잔이 있는지 몰랐으니 그보단 루스티첼 백작이 단장으로 있는 백룡 기사단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그를 골랐던 것이지만.

“뜸 들일 필요 없겠지. 말해 보거라.”

황제의 말에 호르세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로 할 게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폐하의 눈과 귀 노릇을 하고 있다지만 너무 그쪽으로만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정보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건 의외로군.”

“제가 깜짝 놀라실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황제가 턱을 괴었다. 그는 호르세안의 일거수일투족을 대부분 꿰고 있었다. 하지만 선물이 무엇일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엇일까 잠시 유추해보다가 생각을 접었다.

선물을 풀어보면 자연히 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어서 꺼내보거라.”

호르세안이 침전에 들어올 때부터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으니 품에 갈무리할 수 있는 작은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르세안은 품에서 선물을 꺼내는 대신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 친히 보러 가셔야 할 듯싶습니다.”

“내가 직접?”

황제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가져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인가?

점점 선물의 정체가 오리무중이었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면 지금 가보도록 하지.”

“지금 말씀입니까?”

다소 놀라는 호르세안을 향해 황제가 삐딱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선물을 못 기다리는 성미라서 말이야.”

그래서 항상 선물이 제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빼앗아 탐했다. 본디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마저도.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호르세안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지?”

황제가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어서 선물을 받고 싶다는 듯, 떠날 생각만 가득한 태도였다. 탐욕스러운 황제의 성정 상 선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 저를 따라나설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가겠다는 건…….’

“황궁 안에 있습니다.”

“황궁?”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듯 황제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예, 설마 제가 폐하를 아무 준비 없이 갑작스레 궁 밖으로 모시겠습니까.”

황제는 탐욕이 많은 만큼 의심도 많다.

현재 황제가 가장 중용하고 총애하는 그림자는 바로 호르세안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호르세안은 제 뒤에 몰래 따라붙는 다른 그림자를 느꼈다. 황제의 명에 따라 그를 미행하는 자들이었다. 가장 가까이 두면서도 완전히 믿진 않는 것이다.

“과연.”

황제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이번 시험도 통과인가요?”

호르세안이 눈매를 접으며 물었다.

“그래.”

황제는 방금 호르세안을 시험했다. 선물을 이유로 누군가 황제인 자신을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한다?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얼간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설령 그게 진실이라고 해도 황제는 믿을 수 없었다. 해서 호르세안을 떠본 것이다.

만약 그가 오답을 내놓는다면—

‘죽여야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도, 변명을 들을 이유도 없다. 아끼는 수족이라 조금 아깝긴 하겠지만 그뿐, 즉결처분이다.

“본디 내가 생각한 정답은 그게 아니었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는 황제를 말리는 게 정답이었다. 모시는 주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기사 아닌가. 응당 호위를 대동해야 한다고 간언해야 한다.

‘감히 나를— 황제를 시해할 생각이 있는 역도라면 다르겠지만 말이야.’

물론 따로 호위를 꾸리지 않아도 황제가 어딜 가든 항상 따라붙는 그림자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호르세안에게 밝힌 적 없으니 그들의 존재를 모를 것이다.

‘상식선에서 짐작 정도야 했겠지만 그 규모와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

호르세안의 실력으로는 알아채기 힘들 것이다.

호르세안에 대해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무력적 성취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다.

동생 중 하나가 뛰어난 기사인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엘피너스 가는 본디 무가가 아니었으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애당초 그를 흑룡 기사단으로 영입한 것도 전력으로 기대해서가 아니라 밀정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호르세안이 흑심을 품지 않았다면 황제가 행적을 알리지도, 호위도 대동하지 않은 채 황궁에서 벗어나는 일은 말려야 할 터였다.

“하지만 너는 내가 생각한 정답 이상을 내놓았지. 이래서 내가 널 아낄 수밖에 없어.”

“제 대답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걸로 제 목도 안전하겠군요.”

그 능청스러운 답에 황제가 실소를 흘렸다. 이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멍청한 놈들은 황제가 자신을 시험하는 줄도 모르고, 똑똑한 놈들은 시험하는 것을 알고 바짝 긴장한다.

하지만 호르세안은 다르다.

“황궁 어디냐.”

“시그니페르 홀입니다.”

황제가 멈칫했다.

황궁에 속해있는 곳이었으나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잊혀진 곳.

황궁은 넓다. 어려서부터 후계로 책봉돼 평생을 황궁에서 산 선황도 황궁의 모든 곳을 가보지 않았다. 하물며 현 황제는 성인이 된 후 궁을 나갔다가, 황제로 즉위하며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이름마저 생소한 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황제가 거기가 어디냐고 묻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시그니페르 홀은 꽤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홀이었다. 신혈을 받은 초대 황제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지은 곳이니까.

하지만 그곳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초대 황제의 명으로 개축도 못 하는 실정이라 낡다 못해 안전이 염려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최소한의 보수만이 이뤄져 왔다. 긴 세월 동안 황궁은 계속해서 확장되었고 새로운 건물이 새로운 양식과 기술로 지어졌다.

먼 옛날 황궁의 중심에 있었던 홀이지만 지금은 서편 구석에 있는 작은 유적지나 다름없었다.

“이목을 끌 일은 없겠군. 조용히 다녀오지.”

황제의 말에 호르세안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탐욕스럽고 의심 많은 황제는 호르세안이 어떤 것을 선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목격자를 늘리는 게 내키지 않을 것이다.

‘황궁 안에선 안전하니 굳이 따로 호위를 대동할 필요도 없고.’

황궁은 제 주인을 수호한다.

이건 단순히 근위대가 황제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황궁 자체가 황제를 지킨다.

황제는 비밀 통로 밖으로 나와 입구를 조작했다. 통로 입구가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사라진다.

“조용히 다녀오시려면 비밀 통로가 낫지 않습니까?”

호르세안이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황궁에 살면서도 그쪽으로 향하는 것은 처음이다. 가는 김에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예, 그 또한 선물을 기다리는 흥을 더할 겁니다.”

호르세안이 빙긋 웃었다.

‘리페, 네 추측이 옳았어.’

칼리오페는 황제가 비밀 통로를 이용하지 ‘못할’ 것이라 추측했다. 지금 황제의 언행을 볼 때 그게 사실로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목을 끌지 않겠다면서 왜 마차를 타고 간단 말인가. 황제의 행차가 궁인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옮겨질 텐데.

칼리오페의 추측이 맞아떨어졌으니 이제 다른 변수는 없을 것이다. 없어야 했다.

호르세안은 황제와 함께 침전을 나섰다.

세상이 뒤집힐 때가 왔다.

<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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