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I. Pégăsis
Chapter 1. 전조
“이제 곧입니다.”
대신관 타라손의 말에 황제가 한쪽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 곧이라는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었어.”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은잔은 폐하의—”
“당연히 내 손에 들어와야지.”
황제가 탕, 소리 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루스티첼 백작도 어리석군. 죽음을 택하다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검은 눈은 기분 좋은 포만감에 물들어 있었다.
안 그래도 칼리오페 때문에 루스티첼 가가 눈엣가시였다. 처리해버리고 싶은데 그저 분풀이하겠다고 일을 벌일 순 없었다.
그런데 마침이라고 해야 할지, 건수가 잡힌 것이다.
황제는 스무날 전쯤에 있었던 루스티첼 백작과의 일을 떠올렸다.
* * *
[루스티첼은 ‘제국의 흰 날개’라 불리며 오랜 세월 굳건히 수호자 역할을 해냈지.]
가문에 ‘제국의’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가는 몇 없다. 해당 오브제를 유일하게 사용하는 가문만이 그렇게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국의 방패’라 불리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장에 방패가 들어간 가문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오랜 신화와 연관 있는 가문만이 오브제를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황제의 치하에 루스티첼 백작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루스티첼 백작의 태도에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불온한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틀 전에 칼리오페가 황궁에 온 일로 인해 그러는 것 같았다.
‘감히…….’
황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어제 루스티첼 백작은 등정하자마자 황제를 찾아와 제 딸을 궁에 불러들인 것, 위험에 처하게 한 것에 대해 강력한 반발심을 표했다. 여론 역시 그랬기 때문에 황제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제 내 직접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까지 했거늘……. 오늘도 이딴 태도라니.’
자신은 이 나라의 황제다. 루스티첼 백작은 신하로서 황제를 보필해야 하는 입장이고.
막말로 제 딸과 황제가 동시에 위기에 처하면 당연히 더 중요한 존재인 황제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고작 딸아이 때문에 이런 식으로 불온한 기색을 풀풀 풍기다니.
하지만 오늘 루스티첼 백작과 독대하는 것에는 긴한 목적이 따로 있기에 지적하지 않았다.
[루스티첼 가의 오랜 충의에 나 역시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예.]
루스티첼 백작의 단답에 황제는 다시 혈압이 올랐지만 어쨌거나 넘어갔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더 묻겠네, 백작.]
루스티첼 백작의 눈이 황제를 향했다.
[황가에 충성하는가?]
이 질문은 대관식에서 들었던 것이다. 루스티첼 백작만이 아니라 모든 귀족이 함께 들었고, 함께 답했다.
그저 절차였다.
그러나 그때 루스티첼 백작은 진심으로 답했다.
[황가를 위해 그대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나?]
허나 지금은 전과 같은 마음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예.]
그 외에 다른 대답은 있을 수 없었다. 이미 황제의 대관식 때 했던 맹세이고, 그 맹세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역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의 모든 귀족들이 황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만, 어쨌거나 말로는 자신의 모든 것은 황가를 위한 것이라 한다.
황제는 루스티첼 백작이 진심을 하나도 담지 않아 답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의 혀가 루스티첼 백작의 대답을 빌미로 간교하게 움직였다.
[그렇다면 루스티첼의 보물을 내게 바칠 수 있을 터.]
루스티첼 백작의 푸른 눈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살기.
그러나 황제가 인식하기도 전에 완벽히 갈무리되어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다.
긴장한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만약 신혈이 흐르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식은땀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자신의 동요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루스티첼 백작의 반응이 만족스럽기도 했다.
살기를 완벽히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루스티첼 백작은 명백히 경계하고 있다. 단번에 황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은 것이다.
그건 곧 루스티첼 가에는 보물이—은잔이 있다는 뜻이다.
조급한 탐욕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왜 답이 없지? 분명 아까 전엔 그대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하지 않았나.]
루스티첼 백작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살기를 내비치진 않았다. 하지만 황제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엔 선명한 적의가 담겨 있었다.
그야 은잔을 내놓기 싫을 것이다. 루스티첼 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이니 어떻게 쓰이는지도 잘 알 터.
‘샘이 있는 위치를 몰라 못 쓰고 있는 것뿐이고.’
황제의 입매가 뒤틀렸다.
루스티첼 가는 대대로 충성스럽고 청렴결백한 것으로 명예가 드높았다. 예상했지만 역시 그런 건 다 위장이었다. 은잔에 대해 들키니 이렇게 바로 적대감을 내비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언젠가 샘을 찾아내 불로불사가 되어 황가의 성씨를 바꾸려고 했겠지.’
그것이 루스티첼 가의 오랜 숙원이라 지금까지 충신인 척 굴었던 거다.
[뭐, 됐어. 잔을 가져와. 황명이다.]
황제의 말에 루스티첼 백작의 한 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잔, 말씀입니까?]
꽤 그럴싸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 얼굴만 보면 루스티첼 백작은 은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날 속일 생각이면 처음 보물을 언급했을 때부터 연기했어야지.’
자신을 너무 바보로 아는 것 아닌가.
황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잡아뗄 생각하지 마. 샘의 물을 마시게 해주는 은잔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은잔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고 그걸로 샘물을 떠 마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영악하게 연기를 잘하는지 알겠다.
‘이제 보니 제 아비를 쏙 빼닮은 거였군.’
[그럼 가지고 있는 은잔을 다 가져와. 특히 가보로 내려오는, 미스릴로 만든 것을 포함해서.]
[루스티첼 가의 가보에는 미스릴로 만든 무기들이 많습니다만 은잔은 없습니다.]
루스티첼 백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 그러시겠지. 어쨌든 가져와.]
[없는 것을 어찌 가져온단 말입니까.]
[분명 황명이라고 말했을 텐데. 반드시 가져와.]
마지막 경고였다.
황명을 어기는 것은 곧 역심이다.
과연 경고가 먹혔는지 루스티첼 백작은 다음날 황제에게 은잔을 진상했다.
은으로 만든, 평범한 은잔을 말이다.
* * *
챙그랑—!!
그때의 분노가 생생히 떠올라 황제는 루스티첼 백작이 가져온 은잔을 내팽개쳤던 것처럼 지금 들고 있던 술잔을 내던졌다.
“폐하……?”
대신관은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는 황제의 모습에 당황했다.
방금만 해도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 있지 않았던가.
“감히 나를 조롱하다니…….”
황제가 이를 으득 갈았다. 평범한 은잔을 가져온 게 조롱이 아니면 뭔가. 게다가 역정을 내며 은잔을 내던지자 루스티첼 백작은 이상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꼭…… 실성한 사람을 보듯이.
한순간에 미친놈 취급당했던 기억에 황제가 눈을 번뜩였다.
그때, 대신관이 이상하단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너도 내가 미친 것 같나?”
황제의 이죽거림에 대신관이 몸을 낮췄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무엇 때문에 폐하의 심기가 불편해지셨는지 의아했을 뿐입니다.”
대신관에게 화풀이하던 황제는 곧 생각에 잠겼다.
“……루스티첼 가가 은잔을 가지고 있지 않을 확률은 없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미친놈 보듯 했던 루스티첼 백작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은잔에 대해 알면 그렇게 바라볼 리가 없다.
보물이라는 말에 루스티첼 백작이 동요하긴 했지만, 만약 다른 것으로 착각했다면……?
보물을 내놓으라고 하기 바로 이틀 전, 칼리오페를 황궁에 불러 칼을 들이댔다. 만약 보물이 칼리오페를 뜻한다고 생각했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확신하나?”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신화에 나오는 모든 구절이 다 루스티첼 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모든 구절에 다 해당하는 신화 가문은 오로지 루스티첼뿐입니다. 특히.”
대신관은 은잔이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쐐기를 박았던 구절을 다시 읊었다.
“흐르는 생명의 수호자, 흰 날개를 펼쳐 잔을 비호하라.”
가장 마지막에 발견한, 아주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구절은 누가 봐도, 신화 해석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 봐도 루스티첼이 아닙니까.”
흐르는 생명은 샘을 뜻하고 수호자는 신화 가문 중 무가를 뜻한다.
신화에서 천칭이 나오면 무조건 카스틸로 가를 뜻하는 것처럼, 흰 날개는 무조건 루스티첼 가를 뜻했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문장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그 놈이 날 농락한 거군.”
루스티첼 백작의 연기에 놀아났다.
“뭐, 됐어.”
어쨌든 오늘 루스티첼 백작은 죽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지.’
은잔을 숨기고 황가의 성씨를 바꿀 역심을 품고 있는 루스티첼 가를 살려둘 생각은 없다.
[죽기 직전까지 고문해서 은잔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
황제는 흑룡기사단에게 그렇게 명했다.
[끝까지 반항하면 그냥 죽이고. 루스티첼 백작이 입을 다물면 그 후계에게, 후계가 입을 다물면 그 다음 놈에게 물으면 되니까.]
은잔을 빨리 찾고 싶긴 하지만, 이왕이면 일가가 전부 반항하다가 마지막에야 실토하면 좋겠다. 주제넘은 루스티첼 일가를 줄줄이 죽이는 것도 묘미일 테니까.
뭐, 은잔을 찾고 나서 불로불사의 존재로 군림하게 되면 더 이상 귀족이나 백성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그때 싹 다 죽여도 좋을 듯했다.
어느 쪽이든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반드시 맨 마지막에 죽일 것이다.
[괴롭고 괴롭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할 정도로 데리고 놀다가 죽여. 루스티첼 백작이 죽은 것으로 나머지 가족들에게 경고가 되겠지.]
겁을 집어먹고 먼저 은잔을 가져올 수도 있다.
[루스티첼 백작이 은잔을 내놓으면 어떻게 할까요.]
심복의 물음에 황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렇게 어심(御心)을 읽지 못해서야.
[당연히 죽여야지.]
그리고 충실한 흑룡 기사단원들은 주인의 명을 착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루스티첼 백작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소드 마스터 둘을 포함해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을 보냈다.
그 중에는 루스티첼 백작의 등을 찌를 배신자들까지 껴있다.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배제하고자 일부러 과한 전력을 보낸 것이다. 아무리 열두 개의 검 중 하나라고 해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건방진 년이 지 아비가 죽은 것을 알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칼리오페가 처절하게 절규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심신의 안정을 넘어 평화가 찾아왔다.
* * *
“단장님!”
날카로운 외침이 높게 솟은 침엽수 사이로 울려 퍼졌다.
루스티첼 백작은 제 심장을 노리는 칼끝을 피해 몸을 뒤로 물리며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은빛 검날이 커다란 반월을 그린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반격이었으나 검을 쥔 이가 루스티첼 백작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강한 힘으로 휘둘러진 검에는 견고하고 강대한 오러가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침착하고 묵묵한 루스티첼 백작과는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오러였다.
‘단 한 번의 반격으로 세 명이…….’
루스티첼 백작의 뒤에 서 있던 발렌 경이 살짝 질린 얼굴로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 명이 동시에 진을 짠 공격이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프란 경에게 집중된 공격을 거둬주느라 자신의 가슴은 무방하게 내놓은 상황이었다.
‘그 상태에서 저런 반응을…….’
정말 루스티첼 백작을 죽일 수 있을까.
발렌 경은 프란 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긴장으로 굳어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작전 인원이 서른 명을 넘는 데다가 소드 마스터까지 둘 동원된단 소리에 굳이 자신들까지 정체를 드러낼 위험을 감수하고 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누가 봐도 루스티첼 백작이 질 수밖에 없는 전력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루스티첼 백작이 죽은 후 백룡 기사단을 장악하는 게 나아 보였다.
‘……내가 완전히 잘못 판단했군.’
루스티첼 백작이 강한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도.’
소드 마스터 둘이 개입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아직 두 소드 마스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발렌 경과 프렌 경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릴 버리진 않을 거야.’
자신들이 위험에 처하면 루스티첼 백작은 분명 도와주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럼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방금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비록 압도적인 무력 차이로 루스티첼 백작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오히려 공격자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하지만 그 허점을 소드 마스터가 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까지 공격한다면—’
푹, 날카로운 비수가 루스티첼 백작의 몸을 꿰뚫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실패할 리가 없는 확고한 심상이었다.
“발렌, 프란.”
루스티첼 백작의 부름에 발렌 경과 프란 경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예, 단장님.”
“너희도 돌아가도록.”
“아닙니다, 단장님. 저희는 드높은 백룡 기사단의 일원, 위험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예, 혼자 남겠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끝까지 단장님을 보필할 겁니다.”
듬직한 기사들의 모습에 흡족한 걸까? 루스티첼 백작의 무뚝뚝한 입매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멍청하긴.’
프란이 그런 루스티첼 백작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고지식할 정도로 기사도를 따르는 모습이 평소에도 짜증 났다. 임무만 아니었으면 백룡 기사단에 적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야.’
두 배신자가 등 뒤에서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든 루스티첼 백작은 오러를 끌어올리며 상대의 전력을 파악했다.
방금 부상을 입힌 세 명 중 한 명은 배를 깊게 베였고, 다른 둘은 상처가 얕았다.
‘훈련이 잘 되어 있군.’
배를 뚫린 놈이 주저앉긴 했으나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다른 둘도 상처가 얕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치명상이 아니란 뜻일 뿐, 통증이 꽤 강할 것이다.
하지만 기세가 꺾이진 않았다.
거리를 벌리긴 했으나 신중을 기한다는 느낌이지 주춤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예상은 했지만 길목에서 산적질 하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습격자 한 명, 한 명이 모두 오러를 사용하는 정예였다. 이만한 전력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몇 없다.
그 중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이라면—
‘황제.’
존재하지도 않는 은잔을 내놓으라고 할 때부터 미쳤나 싶었는데, 정말 실성이라도 한 모양이다. 내놓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더니 결국 이런 미친 짓을 벌였다.
‘……단원들은 다 피한 것 같군.’
기척을 가늠해보던 루스티첼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도를 코앞에 둔 거리였다. 설마 여기서 발이 묶이다니.
그 순간, 루스티첼 백작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챙— 루스티첼 백작의 목을 겨냥해 날아오던 작은 비도(飛刀)가 튕겨 나갔다.
그게 신호였다.
카앙, 캉!
날카롭게 벼린 검과 검이 맞붙어 불꽃을 피워내고 오러가 일렁거리며 닿는 모든 것을 갈랐다.
오른쪽을 막아내면 왼쪽에서, 왼쪽을 막아내면 아래에서, 아래를 막아내면 위에서. 그야말로 공격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루스티첼 백작은 강했으나, 스무 명이 동시에 하는 공격에 점점 상처가 늘어났다.
찢어진 피부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때.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단단한 거죽을 꿰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잔혹하게 울렸다.
루스티첼 백작은 반사적으로 각력을 강화해 몸을 뒤로 물렸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진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왼쪽 허벅지가 점점 붉게 물드는 게 보였다.
‘난감한데…….’
아무리 오러로 각력을 강화한다고 해도 기동성이 낮아질 것이다. 거기다 흘린 피만큼 체력도 급속도로 낮아질 터.
“큭큭, 같은 소드 마스터를 베는 일은 흔치 않은데, 과연 베는 맛이 남다르군.”
그 말에 루스티첼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착착 감기는 게 더 베고 싶은 맛이야.”
히죽 웃는 두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루스티첼 백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드디어 등장했군.’
아까부터 소드 마스터 둘의 기척이 느껴졌는데 공격하지 않아 의아하던 참이었다.
원래는 소드 마스터 급의 검사가 공격할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몰아 치는 공격에 신경을 집중하는 찰나에 당했다. 그 짧은 틈을 알아채고 바로 공격하다니.
‘몬스터보다는 인간을 죽이는 데 특화된 놈이야.’
오러를 끌어올리는 속도도 수준급이었다. 속도가 느렸으면 소드 마스터의 오러가 집약되는 것을 느낀 루스티첼 백작이 바로 회피했을 테니까.
‘……너무 불리해.’
아직 끼어들지 않은 소드 마스터가 한 명 더. 아마 기습이나 커다란 한 방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습격자들은 아까부터 결정적인 공격을 한다기보다 얕은 공격을 빠르게 날리고 있다. 당장 죽이는 것보다 체력을 깎는 게 목적인 것처럼.
숫자의 우위를 이용해 계속해서 힘을 빼고 서서히 목을 조르는 것.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결정적인 공격을 해봤자 결과는 썩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여럿이서 얕은 공격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이미 서넛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방금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음으로써 승기는 저쪽으로 기울었다.
‘게다가 이쪽은 혹까지 둘 달고 있다.’
이건 정말 좋지 않았다.
“왜, 네놈의 죽음이 눈 앞에 그려지는 가 보지?”
소드 마스터가 표정이 굳은 루스티첼 백작을 보고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도.”
고개 숙인 루스티첼 백작이 어두운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뭐라고? 안 들리는 데. 겁에 질려서 목소리 낼 힘도 없나? 이거 완전히 지리는 건 아닌지 몰라.”
킥킥 웃은 소드 마스터가 오러를 확 끌어올려 검에 두르며 이죽거렸다.
“열두 개의 검 중 일좌(一座)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이런 겁쟁이라니.”
그가 성대하게 비웃음을 터트리려 할 때였다.
고개를 번쩍 든 루스티첼 백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네 놈들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집에 도착했을 텐데!”
목소리에 담긴 기백이 침엽수의 나뭇가지를 뒤흔들었다.
“……뭐?”
소드 마스터는 얼빠진 얼굴로 루스티첼 백작을 바라봤다.
죽을 위기에 처한 놈이 지금 뭐라고……?
그가 어떻게 보든 루스티첼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사랑스러운 막내의 열다섯 살 생일이다. 꼭 돌아와 같이 축하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이렇게 성가신 상황이라니, 이건 정말 좋지 않다.
절대, 절대 이런 데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구르릉, 땅 울음 비슷한 소리가 루스티첼 백작의 발 아래에서 울렸다.
“뭐, 뭐야…….”
옆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도 단 한 번도 주춤하지 않던 습격자들이 주춤거렸다.
아주 불길하고 흉포한 기운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피부가 찌릿찌릿하게 아렸다. 생각하기도 전에 본능이 말했다.
피해야 한—
그러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서걱,
곱게 쌓인 눈을 검으로 베는 것처럼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으아아아아!”
“내, 내 다리가……!”
“크흑, 사, 살려 줘…….”
웬만한 자상을 입었을 때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란 사이로 절단된 나무가 뒤늦게 쓰러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 집채만 한 나무에 깔려 버둥거렸다.
“으흑, 으으…….”
잘린 팔로 애써 나무통을 밀어내지만 피만 울컥울컥 솟아 나올 뿐, 단단한 침엽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단 일격에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무력화됐다. 루스티첼 백작의 오러에 닿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주 깨끗하게 절단되었다.
황량하고 메말랐던 겨울 대지가 붉은 피로 질척질척하게 물들었고, 상쾌했던 겨울 공기 대신 비릿한 혈향이 점막에 달라붙었다. 붉은 웅덩이 속에서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뇌를 끓이는 것 같은 격통에 오열하며 절규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어떤 상황이 와도 동요하지 않도록 훈련받아왔지만,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평정을 잃고 공포심과 잔혹한 통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거의 이지를 잃었다.
“칫.”
저 멀리 나무 위로 물러난 소드 마스터가 혀를 차며 검을 빼 들었다.
잘린 왼팔을 잃은 게 뼈 아팠다. 하지만 이미 잃은 것에 미련을 두는 것도 어리석다.
그는 오러를 검에 둘러 잘린 왼팔의 바로 윗 부분을 베었다. 그리고 오러를 뭉쳐 더 이상 피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지혈했다.
루스티첼 백작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자마자 피했다. 그런데도 팔 하나를 잃었다.
“괴물 같은 놈…….”
대체 오러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루스티첼 백작의 일격으로 침엽수로 가득했던 숲에 웬 공터가 생겼다. 같은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격이 다르다.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계획대로 가자니까. 상대는 열두 개의 검이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얼굴을 구겼다.
“흥, 그래서 너는 구경만 하고 있었나?”
“구경이 아니라 염탐이지. 그런데…… 애들이 너무 아파하는데?”
지옥 같은 장면이 펼쳐지긴 했지만 이들은 모두 훈련 받은 정예였다. 엽기적인 고문을 받은 것도 아닌데 반응이 심했다.
“그냥 잘린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 루스티첼 백작이 지닌 오러의 특성이겠지.”
“아, 그래서.”
잘린 팔을 다시 자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진짜 괴물 같은 놈이야. 오러에 특성을 부여했으니 범위가 줄어들었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라니.”
“……십 년 전 루스티첼 백작을 직접 봤을 때 강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강해질 줄은 몰랐는데. 백룡 기사단은 심한 전투를 치를 일도 없을 텐데 그간 뭘 했길래.”
딸아이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수련했다.
“그래도 방금 일격으로 오러가 꽤 고갈됐을 거야.”
“체력이 고갈되도록 질질 시간을 끌려 했는데 이러다간 이쪽이 전멸하겠어. 전력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말고 빠르게 가자.”
“그래.”
“스벤, 정말 할 수 있겠어? 못하겠으면 방해되니까 빠져.”
잘린 왼팔을 눈짓하며 묻는 말에 스벤이 인상을 찌푸렸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그 말을 끝으로 스벤은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루스티첼 백작의 범위에서 벗어난 곳에 있었던 덕분에 공격당하지 않은 수하들에게 신호했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 모습을 보고 자세를 낮추고 검을 들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오러가 꽤 많이 소모됐다. 잔챙이는 중요하지 않지만 소드 마스터 둘을 상대하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왼팔이 아니라 몸을 반으로 가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상대가 잽쌌다.
악에 받친 사람들이 루스티첼 백작에게 공격했다. 아까와 달리 몸을 사리지 않은 공격이었다.
세련되지 않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만큼 격렬했다. 팔이 베이거나 말거나 피하지 않고 간격 안에 들어와 어떻게든 루스티첼 백작을 찌르려 했다.
그리고 얕게나마 성공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게 아니라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작전이었다.
강한 공격으로 주변을 쓸어버리려고 해도 스벤이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만한 오러를 집약시킬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직 끼어들지 않은 소드 마스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저 멀리서, 소드 마스터의 오러가 집약되는 것이 느껴졌다.
콰앙! 루스티첼 백작이 오러를 실은 발로 깊게 땅을 내리눌렀다. 이때를 위해 일부러 흙이 아닌 바위 위로 조금씩 이동했었다.
바위가 부서지며 루스티첼 백작을 공격하던 습격자들이 균형을 잃고 자세를 무너트렸다.
그 틈을 타 소드 마스터의 일격에 대비하는데—
‘이런……!’
소드 마스터의 오러가 향한 곳은 루스티첼 백작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뒤, 부하가 있는 곳이다.
루스티첼 백작이 급히 몸을 날렸다.
“크윽…….”
“다, 단장님!”
프란 경이 사색이 된 채 자신을 감싼 루스티첼 백작을 불렀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발렌 경 역시 희게 질린 얼굴로 루스티첼 백작에게 달려왔다.
울컥, 진탕이 된 안에서부터 피가 역류했다. 루스티첼 백작의 입가에 붉은 선혈이 흘러 내렸다.
“단장님……!”
“저, 저 때문에…….”
프란 경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을 구하려다가 루스티첼 백작이 다친 것을 자책하듯이.
두 사람이 피를 토해내는 루스티첼 백작을 보호하듯 감쌌다.
“프란, 발렌.”
“단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어떻게든 단장님을 집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예, 기필코…….”
“비록 시체인 상태이겠지만요.”
마지막 말과 동시에 발렌 경과 프란 경의 검이 예기를 띠었다.
감싸듯 바짝 붙은 거리, 심지어 루스티첼 백작은 내상으로 주저앉은 상황. 심지어 수하들이라 경계도 하지 않고 있다.
오러를 쓸 필요도 없었다.
푸욱, 배신이라는 극독(劇毒)을 품은 검이 루스티첼 백작의 몸을 꿰뚫는다.
꿰뚫었어야 한다.
‘어라?’
분명 그랬어야 하는데…….
“역시 너희였구나.”
오러를 두른 손이 두 검을 잡았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가르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루스티첼 백작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적을 상대할 때, 이긴 것 같아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했지. 날 상대로 오러도 두르지 않다니.”
검을 쳐낸 루스티첼 백작이 빠르게 움직여 발렌 경과 프란 경의 검으로 배에 구멍을 뚫었다.
“으윽…….”
“물어볼 게 많으니 잠시 누워 있거라.”
루스티첼 백작이 귀찮다는 듯 각혈한 흔적을 문질러 닦았다.
“오, 배신을 예상하고 있었나 보네?”
루스티첼 백작은 휘파람을 불며 감탄하는 상대를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비오렌.”
“뭐,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아. 방금 내가 먹인 일격으로 속이 완전 진탕이 됐을 텐데. 오러도 꽤 소진한 모양이고.”
사실이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대꾸하지 않은 채 자세를 잡았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명예롭지 않겠어? 결과가 뻔한 상황에서 살겠다고 너무 발악하는 것도 추해. 백룡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끝은 깔끔하게 내야지.”
“말이 많아졌군. 십 년간 검이 아니라 주둥이를 수련했나 보지?”
루스티첼 백작이 여유롭게 받아쳤다.
하지만 비오렌의 말이 맞았다. 혹시라도 프란이 배신자가 아닐까 봐 구하느라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오러로 보호했는데도 이 정도였다.
게다가 대규모 공격에 이어 다수를 상대하느라 오러를 많이 소진했다. 심지어 비오렌 말고도 소드 마스터가 한 명 더 있다.
‘이길 수 있을까?’
저절로 약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딸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꼭, 꼭 돌아오셔야 해요.]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올려다보며 했던 말. 기묘한— 아니, 절박한 열망이 담겼던 눈.
루스티첼 백작은 검을 강하게 쥐었다.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딸의 얼굴을 봐야만 한다.
“어리석군.”
비오렌이 검을 위로 들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스벤 또한 가세해 오러를 집약했다.
두 사람의 중심으로 날카로운 광풍이 주변을 집어삼킬 듯 회오리쳤다. 엄청난 오러에 검은 검이 아니라 빛으로만 보였다.
세상엔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지금 상태의 루스티첼 백작은 물리적으로 이 공격을 당해낼 수 없다.
파사삭, 남은 오러를 끌어모아 방어막을 형성했으나 빛에 닿는 순간 파훼되었다.
죽음의 예기를 띤 검이 루스티첼 백작의 가슴에 닿았다.
그 순간.
루스티첼 백작의 검 폼멜에 달린 참 장식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어둠을 사르고 세상을 일깨우는 새벽과도 같은 빛이었다.
고도로 압축된 오러로 인해 빛으로 보였던 검마저 퇴색할 만큼 강렬한 빛.
비오렌과 스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미처 알아챌 틈도 없이 실패한 공격의 반동이 전신의 오장육부를 강타했다.
“커헉……!”
“큭…….”
두 사람이 동시에 울컥 치솟은 시꺼먼 피를 뱉어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이었던 만큼 그 역풍도 대단했다. 오러가 꼬이며 몸 안의 중심, 오러 코어마저 타격을 받았다. 이건 소드 마스터를 비롯한 오러 사용자에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아까 있었던 루스티첼 백작과의 교전으로 오러를 상당히 소모했던 스벤은 견디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비오렌은 여전히 두 다리에 힘을 준 채 버티고 있었지만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격통을 참으며 어떻게든 몸 안의 오러를 돌려 코어를 보호하고 뒤틀린 기운을 진정시켰다.
“무슨……. 아직도 오러가 이렇게, 허억, 많이 남아있었다니…….”
계속해서 역류하는 피를 내뱉으며 스벤이 중얼거렸다.
“아니, 이건 오러가 아니야.”
그 말에 스벤이 흐릿한 눈을 들어 루스티첼 백작을 바라봤다. 눈이 아니라 정신을 집중해 힘의 본질을 꿰뚫는다.
“……에테르? 마, 말도 안 돼.”
“저 집 딸이 에테르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그냥 그때 나온 대정령이 에테르를 발산한 게 아니었다고?”
사람이 어떻게 에테르를 만들겠는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돌고 있긴 하지만 와전된 것일 뿐, 마침 나왔던 바람의 대정령이 에테르를 생성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아주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평범한—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특별한 인간의 존재를, 인간의 가능성을 무작정 믿고 싶겠지만, 소드 마스터쯤 되면 다르다. 오러에 대한 이해력이 월등히 높고 오러의 기반이 되는 에테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우침을 얻게 된다.
“에테르는 결코 사람이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야.”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은 힘이다.
“하지만 이곳에 정령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말대로였다. 정령도 없는데 에테르가 갑자기 확 퍼져 나왔다. 맑고 온유하고, 그러면서도 폭풍처럼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힘.
비오렌은 정신을 집중했다.
어쨌든 스티그마에 있는 것처럼 순도 높은 에테르가 터져 나오고 있다.
루스티첼 백작에게도 기회였지만,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걸 놓칠 순 없다. 그는 에테르를 흡수해 오러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에테르의 양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순도를 봤을 때 고갈된 오러를 채우고 남을 것이다. 그럼 손상된 오러 코어를 강화하고 들쑤셔진 오러의 혈도를 정비할 수 있다.
그런데.
‘……응?’
비오렌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다시 한 번 정신을 모아 집중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에테르가…… 내게 흡수되지 않아?’
에테르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루스티첼 백작을 보호하듯 그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에테르에 의지가 있다니. 환원하는 생명의 근원이 아닌가. 이건 흐르는 물에 의지가 있다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소리였다.
하지만 에테르를 생성해내는 인간도 등장한 와중에 안 될 게 뭐 있나 싶었다.
“스벤.”
“왜.”
“오러를 쌓을 수 있겠어?”
그 말에 스벤이 인상을 찌푸리며 퉤, 하고 핏덩이를 뱉어냈다.
이렇게 기혈이 뒤틀린 데다가 오러 코어마저 손상된 상황에서 무리하게 오러를 쌓으려 하면 되레 독이 될 수 있다. 오러 코어가 파괴되는 것은 운이 좋은 편이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날 뭐로 보는 거야.”
하지만 스벤은 그렇게 말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공격에 당한 것도 아니고 고작 반동 때문에 이렇게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 말고 있을 순 없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근히, 그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오러의 길을 열고 에테르를 불러들인다.
비오렌은 그가 집중하는 동안 루스티첼 백작의 동태를 살피며 경계했다. 그리고 스벤이 눈을 뜨자마자 물었다.
“어때?”
결과적으로 그는 죽지도, 오러 코어가 파괴되지도 않았다. 에테르를 흡수하는 것 자체에 실패했기 때문에.
“……방금 반동 때문에 코어가 많이 손상되어서 그런가. 에테르를 흡수하지 못하겠어.”
스벤의 얼굴은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이 정도로 코어가 파괴됐다면 다시는 오러를 쓸 수 없다.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나도다. 하지만 내 코어는 그 정도로 손상되지 않았어.”
“그럼……?”
“저 에테르의 특성이다.”
* * *
루스티첼 백작은 따스하고 부드럽고 안온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근 것 같은데 물에 압력이 있는 것처럼 마음대로 휘저을 수 없다.
에테르가 단단하게 응집해 그의 주변에 방벽을 세운다. 이 사람은 반드시 내가 지킨다, 꼭 그렇게 고집 부리는 것처럼.
‘리페.’
부드럽고, 따스하고, 말랑말랑하면서도 묘하게 고집 부리는 게 마치 딸아이 같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이전에도 이런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경연에서 성녀의 노래를 들었을 때였다.
루스티첼 백작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자동반사적으로 오러를 끌어올렸다. 자각하자마자 황급히 가족들을 살펴보니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이미 오러를 끌어올린 뒤였다.
마스터의 벽을 넘어선 루시우스는 그걸로 어느 정도 정신을 보호한 것 같았지만, 로베르트는 아직 힘겨워 보였다. 그때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칼리오페의 선물이 빛을 발했다.
몬스터에게 습격 당했을 때 칼리오페가 준 목걸이가 유모를 보호했던 일이 있었기에 가족들은 모두 크리스탈이 에테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참 장식에서 뻗어 나온 에테르가 주인을 보호했다.
아내와 아들들은 괜찮았지만 유모는 달랐다. 이미 한 번 에테르를 썼기 때문에 목걸이에 에테르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을 인지한 루스티첼 백작이 자신의 크리스탈은 유모에게 넘겼다.
성녀의 노래가 끝나고, 에테르가 소모된 크리스탈은 칼리오페의 눈과 꼭 닮은 산호빛이 아니라 투명하게 변했다. 잘 썼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웠다. 검을 손질할 때 폼멜에 달린 참 장식을 보며 딸아이의 눈을 생각하는 게 습관이었기에.
하지만 그 아쉬움은 곧 사라졌다. 칼리오페가 노래를 시작하며 생성된 에테르가 크리스탈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크리스탈에서 다시 에테르가 흘러나와 가족을 보호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안전하도록, 웃음을 잃지 않도록.
태어나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보고 평생토록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네가 나를 지키는구나.’
뿌듯함, 안타까움, 벅참, 기쁨, 서운함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먹먹하게 가슴을 적셨다.
루스티첼 백작이 호흡하는 것과 동시에 에테르가 그의 안에 오러로 고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의식해서 집중할 필요도 없이, 잘 길들인 군마(軍馬)처럼 손쉽게. 마치 도움이 되고 싶다는 양.
전신에 오러가 샘솟았다. 루스티첼 백작의 검에 강력한 오러가 맺혔다. 조금 전, 비오렌과 스벤의 합동 공격보다도 더 거칠고 거센 힘이었다.
단단한 침엽수가 여린 나무처럼 몸을 휘며 비명을 지른다. 숲 전체가 긴장한 채 전신을 바르르 떤다.
“젠장…….”
저 무식하게 큰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뤄내는 것을 눈앞에서 보니 기가 질렸다. 최상의 컨디션이어도 이 공격을 막아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비오렌은 패배를 예감했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황제의 명을 받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누르고 더럽고 치사한 수를 썼다. 그런데도 결과가 이렇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정당당하게 검을 맞대고 싶었다.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라고 해도, 이 위대한 기사와 성심성의껏 실력을 겨뤄보고 싶었다.
‘이젠 늦었지만…….’
그 생각과 동시에 영혼마저 압살한 것 같은 묵직한 일격이 그를 덮쳤다.
* * *
“허억…….”
루스티첼 백작은 검을 땅에 박은 채 그에 의지해 섰다. 가슴 한복판을 가른 상처와 허벅지를 꿰뚫은 상처에서 피가 푸슉푸슉 새어 나왔다. 거센 움직임을 이기지 못하고 상처가 벌어지며 상태가 악화되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맹렬한 공격을 하고서도 아직도 오러가 남았다. 하지만 오러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가야 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딸아이의 얼굴만은 선명했다.
환하게 웃는 얼굴. 기다리겠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생일에 와야 한다고 속삭이던 얼굴.
‘그 애가 그렇게 조른 건 처음인데…….’
약속했다.
돌아가야 한다.
힘겹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상처에서 왈칵 피가 쏟아져 내렸다.
루스티첼 백작은 마른 기침을 터트렸다. 피가 입가를 물들인다. 그는 뒤늦게 오러로 상처를 막았다.
이제는 오러를 아끼느라 지혈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지혈해야 했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판단이 늦었다.
머릿속은 온통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사랑하는 아내.
성인이 돼 듬직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직 의지할 부모가 필요한 아들들.
검에 의지한 채 그는 힘겹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뎠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가 한없이 멀다. 더 이상 피가 새지 않을 뿐, 상처는 여전하다. 피가 부족한 상태 역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은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돌아가야 해.
이 상태로 제도까지 가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루스티첼 백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리페…….”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그의 입술에서 딸아이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 * *
“리페, 들어가서 쉬도록 해.”
로베르트의 말에도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저 정문 앞에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한겨울에 벌써 몇 시간 째 바깥에서 서 있느라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꽁꽁 얼었다. 여린 피부는 발갛게 트고 추위에 굳은 얼굴에선 생기가 사라졌다.
미동도 안 한 채 정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칼리오페를 보고 가족들은 물론 하인과 하녀들까지 발을 동동 굴렀다. 두꺼운 모피를 둘러주고 주변에 화로를 피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위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터.
저러다가 백작님이 오시기 전에 아가씨가 쓰러지는 게 아니냐며 노심초사였다.
평소라면 주변을 생각해 집 안으로 들어가거나 적어도 괜찮다며 웃었을 칼리오페는 오로지 굳게 닫힌 철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주변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주변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게 문제였다.
“형이 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로베르트가 모피 속에서 칼리오페의 손을 찾아내 장갑을 끼워주며 말했다.
“그리고…… 카스틸로 공자도 함께 갔잖아. 뭐, 일단 대마법사니 수색 마법도 잘 하겠지.”
로베르트는 아스타레아스를 칭찬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능력 덕에 한결 안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루시우스와 아스타레아스를 필두로 한 기사들은 보르세이 경이 보고한 습격 지점으로 떠났다.
‘칫.’
로베르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역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주의 신변이 불분명한 가운데 후계자인 루시우스가 그쪽으로 떠났으니 로베르트는 집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칼리오페가 이렇게 불안정한 모습을 보니 자신이라도 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어라 말해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오도카니 서서 문만 바라보는 칼리오페를 향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을 때 속상해 하실 거야.”
움찔.
그 말에 칼리오페가 미약하게 반응했다.
손을 붙잡고 있는 덕에 느낄 수 있는 작은 움찔거림이었지만 로베르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어가자.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아버지께서 많이 추우실 텐데 따뜻하게 맞아드려야지.”
로베르트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귓가에 울렸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래, 들어가자. 밖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아버지가 더 빨리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을 너무 많이 걱정시켰다. 이렇게 서 있으면 저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어진다.
저만 아버지를 아끼는 게 아니다. 다른 가족들도 애간장이 녹고 있을 텐데, 가솔들도 걱정 중이고. 자신은 지금 그들의 걱정에 짐만 더 얹고 있다.
‘……그러고 보니 생일 파티는.’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없다.
가주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극비였다. 파티에 온 사람들에게 밝힐 순 없다. 어머니께서 별 문제 없도록 중재하셨겠지만 주인공이 중간에 빠졌으니 아무래도 흐지부지 끝났을 것이다.
발렌 경과 프란 경과 함께 아버지가 습격자들을 유인해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자신을 부축하던 가족들의 손길이 떠올랐다. 뭐라 뭐라 말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보르세이 경이 보고를 끝마치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무장한 기사들과 함께 루시우스 오라버니가 뒷문을 통해 떠나려는 모습을 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때까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주저 앉아 있던 칼리오페가 벌떡 일어나 아스타레아스가 있는 파티 홀로 뛰어갔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그에게 가는지 몰랐다. 그저 생각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아스타레아스는 파티장 안에 들어온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서둘러 다가와 끌어안고 홀 밖으로 나갔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매달렸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습격을…….]
더듬더듬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을 용케 알아들은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품에서 놓았다.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옷깃을 꽉 틀어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차가운 손끝에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커다랗게 뜨인 칼리오페의 두 눈에 거울처럼 비쳤다.
어? 왜 레아스가 가는 거지?
레아스에게 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
‘정말?’
머릿속에서 차가운 음성이 울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를 찾아온 이유가 단순히 동요한 마음을 의지하고 싶어서였나? 아스타레아스는 신혈을 타고 짙게 타고 난 위대한 마법사다. 그런 그가 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단 한 톨도 하지 않았나?
[읏…….]
그제야 두려움이 물밀 듯 몰려왔다.
혹시 자신이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건 아닐까?
아스타레아스마저 사지로 밀어 넣은 건—
‘아니야.’
칼리오페는 애써 퍼져나가는 생각을 부정했다. 최악의 일은 가정하기도 싫었다. 혹시라도 제 생각이 씨앗이 되어 현실이 될까 봐.
모두 다 안전할 거다. 괜찮을 거다. 돌아올 거야.
‘그야,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셨는걸.’
그렇게 스스로에게 쉼 없이 속삭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차갑게 언 채 굳게 닫힌 철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쩜 이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이지.’
똑같이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께 생일 파티의 마무리를 떠넘기고, 아스타레아스에게 아버지를 도와달라 조르고…….
그런 주제에 이렇게 걱정과 위로나 받고 있다니.
자격이 없다.
‘들어가자.’
그렇게 생각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움직이려 하면 할수록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무서워서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여!’
칼리오페는 꽁꽁 얼어 감각이 없는 다리를 어떻게든 가누려 노력했다.
‘움직이란 말이야! 뭐가 잘 났다고!’
이렇게 시위하듯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내려치고 싶었지만 팔조차 꿈쩍하지 않았다. 눈물만 방울방울 터져 나왔다.
울고 싶지 않은데. 하고 싶지 않은 것만 하는, 말 안 듣는 몸뚱이가 미웠다. 내가 가족을 지킬 거라고 호언했으면서 이렇게 무력하게 떠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와락—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푹 끌어 안았다.
그를 감히 마주 껴안지도 못한 채 칼리오페는 눈물만 아룽아룽 흘렸다.
“리페, 아직도…….”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신들과의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나온 것이다. 칼리오페가 아직도 밖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칼리오페는 겨우겨우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무언가 기묘한 감각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선득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칼리오페는 이 감각을 알았다. 자신이 피워낸 에테르가 주인의 감정에 반응해 손짓하고 있다.
루시우스가 돌아오고 있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철문으로 향했다. 거대하고 웅장한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먼저 기척을 느낀 것은 로베르트였다. 기감이 발달한 그에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 전까지 아버지의 생사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버지는 태산과도 같이 단단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이 되니 덜컥 불안해졌다.
만약, 정말 만에 하나라도 돌아온 형제의 곁에 아버지가 안 계시다면—
품 안에 있는 작은 동생의 몸이 오늘따라 더 가녀리게 느껴졌다.
그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꽉 붙드는 것과 동시에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 공기에 하얀 콧김을 내뿜는 군마가 보였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제 키보다 더 큰 군마를 따라 위로 향한다.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리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아빠……!”
칼리오페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그렇게 루스티첼 백작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아빠’라는 호칭으로 루스티첼 백작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 부름이 칼리오페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알려주었다.
서둘러 말에서 내린 루스티첼 백작이 품에 안겨드는 딸아이의 몸을 감쌌다.
“리페.”
묵직한 딸아이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지니 가슴 속에서부터 안도감이 끓어올랐다. 머리카락과 이마, 콧잔등, 뺨할 것 없이 키스를 퍼부으며 어린 것의 몸을 꽉 끌어안는다.
“아빠…….”
잔뜩 배어 나온 물기로 흐물텅한 산호빛 눈동자가 루스티첼 백작의 얼굴을 향한다.
코끝을 벌겋게 물들인 칼리오페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이 얼굴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다녀왔다.”
“응, 어서 와요.”
칼리오페가 두터운 루스티첼 백작의 목을 꼭 끌어 안는다. 그녀의 귓가로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생일 축하한다, 우리 딸.”
목이 먹먹해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배신자들 틈에 홀로 남아 싸우며 가슴 속에 이 말을 간직하고 계셨던 걸까. 차갑게 식은 몸 가장 따뜻한 곳에 그 말을 소중히 품고 오신 걸까.
따스한 말이 언 땅을 녹이는 봄비처럼 마음에 스며든다.
차마 답할 수 없어 칼리오페는 말없이 아버지의 목을 힘 주어 끌어안았다. 절대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루스티첼 백작은 옅게 미소 지으며 그런 딸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흐렸던 시야가 점점 까맣게 물든다. 딸아이를 도닥이는 손이 천금처럼 무겁다.
‘안 되는데, 조금 더 리페를 보듬어줘야 하는데…….’
이 추운 날 밖에서 얼마나 기다린 건지 딸아이의 몸이 얼음장 같았다.
품어서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아빠!”
딸아이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의식이 끊겼다.
* * *
칼리오페는 자리에 누운 아버지의 손을 꽉 붙들었다.
“이렇게 다치시고…….”
다시금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전혀 몰랐다. 그저 돌아오셨다는 것에 기뻐서 상태가 어떤지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루시우스가 자책하는 칼리오페를 도닥였다.
아버지의 상태를 아는 루시우스는 설마 아버지가 직접 홀로 말에서 내려 칼리오페를 끌어안을 줄은 몰랐다.
‘분명 말에서 홀로 내리기도 버거우셨을 텐데.’
바보 아버지.
그런 불경한 생각이 절로 들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루스우스를 바라봤다.
“오라버니, 고생 많으셨어요.”
“뭐…….”
루시우스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사실 아스타레아스가 합류한 덕에 일이 수월했다.
루시우스는 집안일에 끼어든 외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끼어들었으니 마음에 들 리가. 하지만 뛰어난 마법사인 아스타레아스가 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루시우스 본인도 오러를 감지해서 오러 보유자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기감이 예민해져서 얻게 된 부가적인 요소라 수색 마법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오러가 감지되지 않는 상황도 생각해야 했다.
사망, 혹은 오러가 모두 고갈된 상태.
어느 쪽이든 생각하기 싫었지만 그가 지휘관인 이상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했다. 마뜩잖지만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감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아스타레아스와 협력했다.
과연 아스타레아스는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습격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펼친 광범위 수색 마법 덕에 바로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전투는 이미 다 끝난 상태라 추가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아스타레아스의 덕이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게 아스타레아스를 칭찬하긴 싫었다.
뭔가 찜찜한 얼굴로 우물거리는 루시우스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칼리오페의 눈에 아스타레아스가 들어왔다.
“레아스도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어 절로 시선이 내리깔렸다. 속삭이듯 나온 사과에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미안하다니.”
아래를 향한 시야에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길고 곧으면서도 남성적인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어져 들어온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을 틀어쥐곤 제 입술로 가져갔다. 부드럽고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입술이 손끝에 닿는다.
손을 따라 시야를 올린 칼리오페의 두 눈에 섬세하게 내리깔린 아스타레아스의 속눈썹이 들어온다.
입술을 손 끝에 댄 채 아스타레아스가 느릿하게 눈을 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새파란 눈동자가 정확히 칼리오페를 응시한다.
“그런 말씀 마시길.”
그가 속삭일 때마다 입술의 움직임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당신이 나를 의지해줘서 기쁜데.”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아악 붉어졌다.
“카스틸로 공자!”
빚을 진 게 있으니 손을 붙잡는 것까진 참았다. 하지만 보자 보자 하니 도를 지나친다. 루시우스는 당장 검을 빼 들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아스타레아스를 노려봤다.
아스타레아스는 산뜻한 얼굴로 웃으며 칼리오페에게서 손을 뗐다. 주변을 둘러보니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루스티첼 부인뿐만 아니라 하인과 하녀까지 다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순진한 막둥이—아가씨—한테 저 놈팡이가!’
그 대치상태를 깬 것은 칼리오페의 물음이었다.
“신관은 아직인가요?”
“아직입니다.”
“…….”
집사의 대답에 칼리오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를 치유하기 위해 오렌과 로한 쪽에 신관을 요청했다. 그들은 당연히 오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줄다리기.’
세뇌 사건으로 비스 신전은 망조의 길을 걷고 있다.
신전과 신관, 심지어 신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급격히 추락했고 오렌 신전과 로한 신전 역시 그 여파를 피해갈 순 없었다.
무료 치유 등 전에 없이 대규모로 봉사를 행하고 있지만 싸늘해진 여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아쉬워지니까 태세 전환하는 거 아니냐며 더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황제, 귀족, 신전.
이 세 가지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제국이 유지되었는데, 지금 한 축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치유력이 있는 이상 신전이 아예 망하긴 힘들지만, 재기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이 상황에서 루스티첼 가의 신관 요청은 갑자기 나타난 황금 동아줄 같을 것이다.
신전이 우위를 점할 기회.
게다가 칼리오페가 오렌과 비스 신전 쪽에 힘을 실어주면 여론 역시 변할 것이다.
루스티첼 백작을 죽게 내버려 두면 두 신전을 향한 여론이 악화될 건 자명하다. 그러니 치유하긴 할 것이다.
다만 애간장을 태울 대로 태워 어떤 조건이든 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생각이겠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사질한다는 생각에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예전에 만났던 오렌 대신관과 로한 대신관은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 거대 단체의 수장이다. 어느 정도 거래를 할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저어—”
그때 한구석에 쥐죽은 듯 가만히 서 있던 하일레나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다지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하일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결심이 흐려지려 해서 두 발에 힘을 꽉 주었다.
“제가…… 해볼게요.”
“너의 뭘 믿고?”
하일레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베르트가 싸늘하게 물었다. 칼리오페 앞에선 항상 밝고 명랑하게 굴던 것과 전혀 딴판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해서 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그간 저질렀던 일이 하일레나의 의지라기보단 신전의 명령을 따른 거였다는 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하일레나는 칼리오페를 죽일 뻔했다. 로베르트는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칼리오페가 부탁했기 때문에 내버려 두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당장 이 집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확실히…… 저를 믿긴 힘드시겠죠. 하지만 저는, 이제 제 자신으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사람을 치유하고 싶어요. 오래 전부터…… 사람을 살리고 싶었어요.”
“그럼 부탁하마.”
“어머니!”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루시우스가 기겁했다.
“치유하고 싶다잖니.”
“하지만 저 애의 뭘 믿고…….”
“나는 리페를 믿어.”
루스티첼 부인이 하일레나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리페가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리페의 판단을 믿어.”
그 말에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도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길을 터준다.
하일레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루스티첼 백작의 앞에 섰다. 긴장감에 목이 말랐다.
‘할 수 있을까…….’
비스 신관들에게 성녀로 ‘교정’받는 와중 어느 순간 제 신성력은 치유보단 정신을 지배하는 성격을 띠게 됐다. 정신 지배력이 강해질수록 치유력은 약해졌다. 나중에는 하일레나가 치유하는 척 다른 신관이 옆에서 몰래 치유해야 할 정도였다.
‘해보자.’
안 될 이유가 없다. 신성력의 가장 큰 특징은 치유다.
이건 하일레나의 신성력이었고, 그 신성력이 그녀의 의지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정신 지배를 할 때조차 어떻게 세뇌하겠다는 의지를 담았고 신성력은 그 의지대로 사람들을 세뇌했으니까.
하일레나가 루스티첼 백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스러운 기운을 담은 새하얀 빛이 그녀의 손 끝에 어린다.
‘절대, 절대 세뇌는 안 돼. 다른 안 좋은 것도 안 돼. 치유해야 해. 고쳐야 해. ……나는 이 사람을 살리고 싶어.’
간절한 마음을 담는다. 새하얀 빛은 루스티첼 백작의 몸에 깃든다. 어느 때보다 정교하게 신성력을 컨트롤한다. 하일레나의 은빛 눈동자가 전에 없이 심각했다. 하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일레나는 포기하지 않고 신성력을 더 부여했다. 그러나 가슴에 난 상처는 나아지지 않는다. 벌건 속살은 여전히 보는 것만으로도 아플 정도로 잔혹하게 벌어져 있다.
‘치유해. 제발, 치유하란 말이야.’
지극한 염원을 담는다.
길게 이어지는 고도의 집중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다른 신관이라면 이렇게까지 집중할 필요가 없을 텐데, 성녀라 불린 자가 사람을 치유하는 걸 더 힘들어하다니.
불쑥 든 생각을 지워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신성력을 쏟아붓는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루스티첼 백작의 위로 전염병 때문에 누워있던 부모님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기억하는 모습은 몇 없다. 온몸에서 역한 내가 나는 진물이 쏟아졌다는 것밖엔.
하일레나는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 누구보다 많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
‘고칠 수 있어. 내가 고칠 거야.’
파앗— 하일레나의 손에서 나온 빛이 더더욱 짙어졌다. 시야가 표백될 정도로 엄청난 빛.
“허억, 허억.”
빛이 잦아들고 완전히 땀에 절은 하일레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주저 앉는다.
그러나 루스티첼 백작에게는 어떤 차도도 없었다.
그 많은 신성력이 고갈돼 바닥이 보일 정도로 힘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왜!”
하일레나가 비명처럼 절규했다.
“고쳐지란 말이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르작거리며 루스티첼 백작을 향해 겨우겨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아주 미약한 빛이 꺼져가는 여광처럼 깜빡깜빡인다.
“커헉.”
한계까지 신성력을 끌어다 쓴 하일레나가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시뻘건 핏물이 입가에 흘렀다. 그러면서도 루스티첼 백작을 향한 손을 거두지 않는다.
칼리오페가 경련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녀를 탐탁지 않게 지켜봤던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조차 숙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일레나의 몸이 무너져 내려 칼리오페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끄윽, 끅 하일레나가 오열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 * *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오렌과 로한의 신관은 동시에 도착했다.
여론이 신경 쓰였는지, 아니면 일말의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몰라도 무려 대신관이 직접 당도했다. 특별대우이긴 했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싸늘한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늦으셨군요.”
오자마자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는지 두 대신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본디 병자의 가족들이란 신관에게 한없이 약해지는 법이다.
칼리오페는 그들의 반응을 개의치 않았다. 신관들이 아버지의 병세를 개의치 않았는데 저라고 신경 써야 하겠는가.
“……오랜만이구려, 루스티첼 영애. 춥고도 먼 길을 달려온 노구의 몸을 녹일 따스한 차라도 내주시지 않겠는가.”
치료 전에 다과를 들며 거래하자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줄을 쥐고.
“레아스.”
칼리오페의 부름에 아스타레아스의 손에서 마나가 피어올랐다. 부드럽고 온유한 마나가 훈훈하게 두 대신관의 몸을 감쌌다. 온열 마법이었다.
두 대신관은 눈을 홉떴다. 칼리오페에 대한 아스타레아스의 정성이 지극하다는 것은 경연 사태와 황궁 사태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니…….’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워낙 저렴하게 군 지 오래된 데다가 막내가 세계 최고인 루스티첼 일가에게는 딱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인에게는 놀람을 넘어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감히 그 아스타레아스를 난방기 취급하다니.
심지어 난방기 취급 당한 본인은 강하게 나오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성직에 적을 두고 혼인하지 않은 두 대신관의 기분이 어쩐지 참 묘해졌다.
“차를 마시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몸이 녹으셨으니 다과는 따로 필요 없으시겠지요.”
“그래도 숨 돌릴 시간은—”
“아버지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에요.”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처음부터 성심껏 아버지를 치유해주었다면 칼리오페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었을 것이다. 상대가 바라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제 목숨마저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는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아버지 목숨줄을 쥐고 겁박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두 대신관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하려는 짓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지적받으니 새삼 수치를 느낀 것이다.
그들도 딱히 내키지 않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 신전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말이 심하군, 영애.”
“정곡을 찔린 자들이 보통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기 마련이죠. 그저 오해라면 성을 내실 필요 없습니다. 또, 오해는 행동으로 풀 수 있지요.”
어릴 적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했다.
“설마 피로 때문에 신성력이 잘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뭐라 입을 열려는 신관보다 빠르게 칼리오페가 선수 쳤다.
“이 정도 피로에 흐트러지는 신성력이라니요. 그러시다면 지친 대신관 자리를 내려놓고 후임에게 물려주시는 게 적을 두신 신전을 위해서도 옳습니다.”
맞는 말뿐이라 두 신관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칼리오페가 이리 예민하고 날카롭게 굴 줄은 몰랐다. 기억하는 모습은 보드랍고 말랑하게 구는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세월이 흘렀어도 그 성정이 완전히 변하진 않았을 거다. 일례로 그 요망한 성녀를 용서하고 품었단 소식을 들었다.
한데 이렇게 나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겠지.’
“그래, 영애의 말대로 오해는 행동으로 푸는 법이지. 백작은 어디 있나.”
로한 대신관의 말에 오렌 대신관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작은 아이. 그러나 그 여린 몸으로 세상을 구한 아이.
신성력을 지니고 있어 성녀의 세뇌에 당하지 않은지라 아래 신관들에게는 딱히 크게 와닿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 소녀에게 빚이 있다.
그런 소녀의 아비가 사경을 헤매는 틈을 타 목숨줄을 쥐고 줄다리기하려 했단 것은 오해인 것으로 하는 게 마땅했다. 신전 입장에서 얻은 것은 무엇 하나 없으나 루스티첼 백작을 치료할 결심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돌아가면 한 소리 듣겠구먼.’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오렌 대신관이 칼리오페를 따라 발걸음을 뗐다.
* * *
과연 대신관의 신성력은 대단했다.
은빛 글자와 함께 환하게 터져 나온 빛이 루스티첼에게 스며들자마자 가슴의 상처가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아예 처음부터 상처 따윈 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허벅지의 부상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허벅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혈하기 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문제였다.
루스티첼 백작이 잘못되면 두 신전은 제국민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협상을 시도했던 것은 통신석을 통해 루스티첼 백작의 상태를 봤을 때 목숨이 당장 끊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치유할 것을 대체 왜 부끄러움을 샀나 싶어 후회됐다.
“워낙 강건하신 분이니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것이네. 성력의 도움으로 원기를 회복했지만 그래도 얼마간은 격한 움직임을 삼가시는 게 좋을 거구려. 빈혈이 일어 어지러울 수 있으니.”
루스티첼 백작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며 오렌 대신관은 힐끔 벽 가까이 서 있는 하일레나를 바라봤다.
하일레나는 왠지 모르게 다 마모된 것 같은 얼굴로 치유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렌 대신관은 딱히 내색하지 않았지만 로한 대신관은 하일레나를 향해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표했다. 비스 신전의 성녀 때문에 오렌과 로한에까지 엄청난 피해가 왔다.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하일레나는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든 루스티첼 백작의 기혈을 타고 도는 신성력을 응시했다.
핏기없이 새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 얼굴을 보듬던 칼리오페가 두 대신관을 향해 깊게 절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 간결한 말이지만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진심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루스티첼 부인과 루시우스, 로베르트 그리고 가솔들까지 두 대신관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관의 입술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신전의 이익을 위한 실질적인 대가 말고 이런 진심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된다. 먼 옛날 처음 신관이 되었을 때, 분명 그리 생각했던 때가 있다
“내 살아온 시간의 반의 반도 안 산 어린 영애에게 못 볼 꼴을 보였구려.”
“오해인 것으로 생각해주었으면 좋겠군.”
“당연히 오해지요. 두 분 대신관께서는 제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아버지부터 치유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신의 자취를 따르는 두 분의 위대한 헌신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칼리오페가 살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 대신관의 뜻대로 앞서 있었던 일을 모르는 척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오렌 대신관의 시선이 아스타레아스를 향했다.
황제의 관에 가장 가까운 자.
그런 자에게 이만큼 총명하고 영리한 짝이 있을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오렌 대신관님, 로한 대신관님.”
더 있어 봐야 무언가를 요구하는 꼴이 될 것 같아 지체 없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대신관을 칼리오페가 불렀다.
칼리오페는 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뗐다.
‘사실은 아버지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곁을 지키고 싶지만.’
칼리오페 루스티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야 가족들을 지킬 수 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마냥 기다릴 때처럼 무력감에 떨고 싶지 않았다.
“그럼 아까 들지 못했던 다과를 들까요.”
칼리오페가 생긋 웃으며 오렌과 로한의 대신관에게 말했다.
* * *
“루스.”
“호세.”
두 친우는 말없이 서로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한 번 어깨를 부딪치고 떨어진다. 말 그대로 평생을 함께해온 친우 사이에서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관의 치유로 루스티첼 백작의 상태가 확연히 호전돼 둘은 잠시 숨 돌리려 발코니로 나왔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정원과 발코니를 밝힌 불빛이 어둠을 잡아채 흔들었다. 숨결이 하얗게 망울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두 남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루시우스는 호르세안이 스스로를 책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르세안 역시 루시우스가 자책하는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혼자만의 사색에 잠긴 채 서로의 곁을 지킬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추위로 언 뺨이 아릿하고 귀에선 감각이 사라졌다.
등 뒤에서 자그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 조곤조곤한 기척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윽고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전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으면서 두 사람은 상대가 당황하지 않게끔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저택 안의 따스한 훈기가 추위를 밀어냈다.
그 따스함 속에 칼리오페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들.”
한겨울밤의 날카로운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사람을 단번에 녹이는 봄볕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리페.”
칼리오페가 타박타박 나와 그들 곁에 섰다.
“추운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그렇게 말하며 옷자락을 붙든다. 칼리오페가 붙든 부분부터 온기가 퍼져나가는 것 같다.
호르세안은 제 옷자락을 붙든 자그마한 손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리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호르세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얗고 말간 얼굴을 눈앞에 두니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이 울컥 치솟았다.
“내 탓이야.”
칼리오페는 대답 없이 가만히 호르세안을 올려다봤다.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 턱선이 도드라졌다.
‘이가 상할 텐데.’
칼리오페가 손을 들어 호르세안의 아래턱을 살며시 매만졌다. 차갑고 단단하다.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찔렀나요?”
아래를 향했던 호박색 눈이 칼리오페를 응시한다.
“오라버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가슴을 베었나요?”
“……내가 단장님께 좀 더 잘 말씀드렸어야 했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황제의 그림자가 된 것인데. 너무 안일했어.”
긴 시간 밖에 있으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게 거짓말처럼 속에 있는 말이 술술 나왔다.
“백룡 기사단 내에 나 말고 다른 황제의 그림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알아내려 했으면 알아낼 수 있었어. 그랬다면—”
“아니, 위험할 수 있으니 더 캐지 말자고 한 건 나야. 아버지께 배신자가 있다는 귀띔만 해드리자고 했지. 안일한 건 나야.”
루시우스가 호르세안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설마하니 아버지를 노리고 공격하는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칼리오페는 자책하는 호르세안과 루시우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탁한 목소리와 가라앉은 시선이 평소 장난기 많은 호르세안 같지 않았다. 루시우스는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칼리오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꼭 죄지은 사람처럼.
기시감이 들었다.
‘나와 같아.’
칼리오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내내 자신을 책하고 비난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발코니의 난간을 잡았다.
밤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저는 대정령의 가호를 받고, 에테르를 만들어내는 큰 힘을 가졌죠. 거기에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요.”
새삼 깨닫는다. 지난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결코 작지 않은 힘이죠. 하지만 그런 힘을 지녔으면서도 아버지가 저리 다치시는 걸 막지 못했어요.”
“리페, 네 탓이 아니야. 왜 그런 식으로—”
“그러면 호세 오라버니 탓일까요?”
호르세안은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호르세안을 지나 그 너머 루시우스에게 향했다. 루시우스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가슴 아팠다.
고개를 들면 항상 눈이 마주칠 정도로 루시우스는 칼리오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다정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죄인처럼 두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칼리오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버석 말라 있던 속에 따스한 물이 스미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과연 스스로를 탓하지 않아도 될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었다.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 자신을 탓하는 것은 결국 호르세안과 루시우스를 탓하는 것과 같다.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스스로를 갉아먹는 생각은 할 필요 없다.
그들을 탓하지 않듯이 자기 자신에게도 유예를 줘야 한다.
아버지는 살아 계신다.
‘더 잘하자.’
칼리오페는 반짝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응시했다. 산호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깨끗했다.
호르세안이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다물었다.
자신의 팔 안에 달랑 들어왔던 작은 아이. 그 아이가 어느새 허리춤까지 올 정도로 쑥쑥 자라더니 이제는 가슴팍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호르세안의 눈에는 여전히 팔 안에 달랑 안기는 작은 아이로 보였다. 위대한 존재로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에테르라는 강대한 힘을 부려도, 여전히 그가 지켜주어야 하는 아이였다.
‘그랬는데.’
바람을 등지고 서 있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고고했다.
칼날 같은 겨울바람도 소녀를 마모시키지 못하리라.
‘다정하고, 상냥하고, 강한 아이.’
어둠 속에 반쯤 묻혀 있는데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평생 검을 쥔 저보다도, 제 친우보다도 단단하고 강하다.
“두 분 모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하신 거예요. 백룡 기사단 내에 있는 흑룡 기사가 누구인지 파헤치다가 호세 오라버니가 위험하셨을 수도 있어요.”
호르세안은 이중 스파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부족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버니의 안위를 우선으로 사세요. ……부탁이에요.”
칼리오페의 얼굴에 얼핏 절박함이 서렸다 사라진다.
“들어가요.”
칼리오페가 방긋 웃으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추운 데 있지 말고 돌아가요, 우리.”
맞잡은 손이 따스했다. 온기가 번져 나간다.
발코니 문을 열자 훈기가 담뿍 몰려온다. 칼리오페가 봄비처럼 웃었다.
작은 손이 안락하고 다사로운 곳으로 이끈다. 봄비가 언 땅을 녹이는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들었다.
* * *
루스티첼 백작이 깨어난 것은 다음날이었다.
눈을 뜬 그는 자신을 빙 둘러싼 가족들과 고용인들을 바라보았다. 걱정 가득했던 면면에 안도감이 퍼지기 시작한다.
“아버지!”
안겨드는 막내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니 가슴 속에서부터 충만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다.
“어제는 분명 아빠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게, 너무 당황해서.”
칼리오페가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보니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듣기 좋았는데.”
“놀리지 마세요.”
칼리오페가 입술을 비죽이며 루스티첼 백작을 흘겼다.
안 그래도 어제오늘 내내 저를 오빠라고 부르라는 로베르트에게 시달렸다. 나중에는 루스티첼 부인까지 가세해 엄마라고 한 번만 불러달라며 안달을 냈다.
조용히 있는 루시우스에게로 피신했더니 제 등 뒤에 감춰주었다. 역시 루시우스 오라버니밖에 없다고 고맙다며 안도하는 찰나.
[고마우면…… 오빠라고 불러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한 채 중얼거린 말에 결국 칼리오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정말이지, 가족들은 자신을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내가 다시는 아빠라고 부르나 보자.’
칼리오페가 속으로 씩씩거렸다. 루스티첼 백작에게는 비보였다.
“이제 정말 괜찮으신 거죠?”
“리페, 아빠는 강하다.”
루스티첼 백작이 진지하게 딸내미한테 자신의 강함을 어필했다.
“부인.”
“여보.”
루스티첼 백작이 루스티첼 부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아내의 어깨를 감싸 쥔다.
“걱정시켜서 미안하오.”
“무사하시리라 믿었어요.”
얼굴을 맞댄 채 서로의 눈을 응시하는 주인 내외를 바라보는 고용인들의 등에서 땀이 났다. 왠지 아가씨와 도련님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고용인들이 우려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스티첼 백작이 아내의 뺨에 키스하고는 두 아들을 바라봤다.
“루스, 로벨.”
“예, 아버지.”
“고생했다.”
대견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모습에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입매가 울렁거렸다.
루스티첼 백작이 웃으며 훌쩍 큰 두 아들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고용인들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루스티첼 백작은 잊지 않고 그들의 노고도 치하했다. 그 후, 정양을 핑계로 고용인들을 내보냈다.
“발렌과 프란은?”
“지하에 가둬뒀습니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루스티첼 백작의 물음에 루시우스가 답했다.
어제 루스티첼 백작과 귀환하며 쓰러져 있던 발렌과 프란 역시 수습해 데려왔다.
습격했던 무리를 지휘하던 두 소드 마스터는 루스티첼 백작과의 전투로 유명을 달리했다. 죽지 않게끔 손속을 봐주며 상대할 이들이 아니었다.
“보는 건 나중으로 미루지.”
루스티첼 백작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막내딸을 향한다. 칼리오페는 절대 이 방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딸아이의 고집을 아는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칼리오페를 위해서라도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정확히 아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후는 황제다.”
무겁게 떨어진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방안에 침묵이 내리깔렸다.
다들 서로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예상하고 있었다.
황제가 칼리오페를 황궁으로 불렀던 건도 있었고,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백룡 기사단 내에 흑룡 기사단이 잠입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게 루스티첼 가에 가보로 내려오는 은잔을 달라고 했지.”
루스티첼 백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말이었다. 은잔이라니. 그런건 어느 집에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딸아이의 반응이 이상했다.
“은잔……이라고요?”
“뭐 아는 게 있니?”
“그게…….”
칼리오페는 가족들을 둘러봤다.
눈이 마주치자 괜찮다는 듯 눈가를 부드럽게 풀며 고개를 끄덕인다.
“에테르로 가득한 샘과 그 샘물을 떠 마실 수 있는 은잔이 있어요.”
칼리오페는 샘과 은잔, 불로불사를 원하는 황제의 속셈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들을 전부 설명했다.
“어쩐지……. 카스틸로 공자에게 양위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황자에게 관심이 없다 싶었지.”
황자의 열두 살 생일 축하연을 황태자 예우로 열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혼약을 통해 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정치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 모든 것을 혼자 알고 있었다니.”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혼자 위험한 짓 했다고 혼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간 혼자 속 끓였겠구나.”
루스티첼 백작이 다정하게 딸아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
“무섭진 않았니?”
걱정스러운 눈을 한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푹 끌어 안았다.
“리페.”
“그딴 놈한테 혼자 불려가기까지 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칼리오페를 응시하는 루시우스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댕댕거리는 로베르트까지.
칼리오페의 입매가 떨렸다.
“우리 막내가 조금만 더 의지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한 칼리오페가 고개를 주억이다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재차 답했다.
“네!”
가족들은 그런 칼리오페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다시 논의로 돌아오자면—”
“황제를 막아야 해.”
황제는 탐욕스러운 자였다 그런 자가 불로불사의 생을 얻어 군림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빤했다.
“그러기 위해선 리페 말대로 은잔을 먼저 선점하는 게 가장 최선이지.”
“황제는 루스티첼 가에 그런 은잔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우리 가문에 그런 가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가 하도 성화를 부리길래 혹시나 해서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 저택뿐만 아니라 영지의 성까지 다 수색해도 전해져 내려오는 은잔은 없었다.
그 은이 미스릴을 뜻하는 거였다면야 더더욱 없다는 게 확실하다.
“……리페, 네가 생각한 방법은 분명 최선이다. 원천을 차단하니 사람도 다치지 않겠지.”
은잔을 쓸 수 없는 황제는 아무리 발악해도 불로불사의 몸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혼란도, 무력 충돌도 없이 자연히 황제의 음모는 저지된다.
“하지만 세상은 최선의 방향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단다.”
때로는 피가 흘러야만 해결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때가 있다.
칼리오페는 아버지가 조심스레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다정하고 상냥한 칼리오페가 충격 받을까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런 것에 충격받을 정도로 쉬운 삶을 살지 않았다. 검을 들고 남의 살을 베는 루스티첼 백작이 보고 겪은 것보다 더 지독한 참상을 감내해왔다.
칼리오페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황제가 은잔 때문에 아버지를 공격했을 줄은 몰랐어요.”
황제의 음모를 알게 되어 입막음하기 위해 공격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황제 몰래 은잔을 먼저 손에 넣고 모르는 척 입을 씻기는 이미 틀렸다. 은잔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나타나지 않는 이상, 황제는 계속해서 루스티첼 가가 은잔을 지니고 있다고 의심하고 공격할 것이다.
‘전생에 그랬듯이.’
전생에서도 은잔 때문에 차례로 가족들을 추궁하다가 죽인 것이다.
‘어머니와 내가 황제의 손에 죽지 않았던 건 전쟁이 일어난 바람에 이쪽에 손을 쓸 여력이 안 됐던 거고.’
칼리오페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은잔을 누가 먼저 얻느냐.
그건 정보전이었다.
비스 대신관과 결탁해 샘과 은잔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황제 쪽보다 칼리오페가 불리했다.
그걸 알면서도 불리한 싸움을 택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그저 언제나 최선을 추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 결코 다른 선택을 할 때 누군가가 흘릴 피가 두려워서 회피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선전포고했는데 피 흘리는 게 두려워 꼬리 마는 게 루스티첼이었나요?”
칼리오페의 얼굴에 대범한 미소가 걸쳐졌다.
“감히 다시는 넘볼 수 없도록 철저하게 응징해야죠.”
루스티첼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칼리오페는 루스티첼이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전쟁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절규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온 제국을 불태우는 전쟁의 화마를 막기 위해서라도 흘릴 피가 필요한 법이다.
아버지가 황제에게 공격 당했던 순간, 칼리오페는 이미 결심을 마쳤다. 그래서 오렌과 로한의 대신관과도 결탁한 것이다.
아버지를 치료한 그들과 차를 마시며 칼리오페는 그들이 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분명하고 견고한 동맹을 요구했다.
최선의 방법은 이미 무용지물이 됐고, 무력 충돌을 각오했다. 이 싸움엔 신전의 치유력이 필요했다.
“……그래.”
루스티첼 백작이 작게 미소 지었다.
딸아이가 이런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자신들 손에서 해결하고 칼리오페에게는 어떤 불행도 닿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버렸고 그의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자라났다.
“리페에게 말해도 될 것 같구나.”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루시우스는 살짝 눈매를 찡그렸지만, 곧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결사대가 있다.”
“결사대요?”
“……이 나라의 정통한 계승자에게 황제의 관을 돌려드리기 위한 결사대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칼리오페가 입을 벌렸다. 이 나라의 정통한 계승자라니, 그러면.
“레아스를 황제로 추대하려고요?”
루시우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그래.”
왜 하필이면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와 연…… 아니, 연인 관계는 아니고, 걸쩍지근한 모종의 관계에 있는 것인가.
루시우스는 이 사실이 마음에 안들었다.
칼리오페의 짝으로 아스타레아스를 인정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이번에 아버지 일로 조금, 아주 조금 도움을 받긴 했지만 어쨌거나 아직 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도 보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상대가 아닌, 황제로 생각을 하면 또 달랐다.
아스타레아스가 제왕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것에는 도저히 이견을 낼 수 없었다. 적법한 계승자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짙은 신혈과 강대한 마법 능력, 우수한 두뇌와 뛰어난 정치 감각 등 부족한 것이 없었다.
거기에 인생을 처음 사는 게 아니라 두 번 사는 것만 같은 여유로움과 혜안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스타레아스는 조용히 살았다. 자신을 견제하는 황제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딱히 황제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황제의 자리 자체에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를 흠모하는 기사와 문관이 많았다.
젊고 파릇해 제 잇속을 챙기는 이권 다툼보다는 세상의 풍파에 마모되지 않은 정의감과 기대에 가득 찬 사람들. 그들은 탐욕스러운 황제보다 아스타레아스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
그들과 달리 정치 다툼에 이골이 난 귀족들은 황제를 견제할 수단으로 아스타레아스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견제용으로 들고 있는 카드일 뿐, 실질적인 행동으로 아스타레아스를 황위에 올릴 생각을 하는 자는 없었다.
아스타레아스가 황위에 욕심을 보였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본인과 카스틸로 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으니 일을 추진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용했던 아스타레아스가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냈다.
‘모두 리페 때문이었군.’
칼리오페와의 관계를 알고 나니 아스타레아스가 왜 그렇게 돌변했는지 알겠다. 아마 그 즈음해서 칼리오페와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미 아스타레아스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결사대가 조직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현 황제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은 많았다. 분위기를 읽은 그들이 알음알음 아스타레아스와 접선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래서 호세 오라버니가…….”
자신이 흑룡 기사단에 소속된 걸 밝힌 호르세안은 사실 이중 스파이가 될 생각이라고 말했다. 황제의 움직임이 이상해서라고 말은 했지만,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단순히 황제가 이상하다고 이중 스파이를 하나? 그 위험한 짓을?
이쪽에서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지 감수할 만한 행동이었다.
‘그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황위를 찬탈하고 레아스를 황제로 추대할 생각이었어.’
그랬기에 황제 쪽에 심어둘 세작이 필요했던 것이다.
‘꽤 오래 전부터 결사대가 만들어졌어. 그럼 꽤 많은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반가운 소식이었다.
“리페.”
그때 루스우스가 탐탁잖은 얼굴로 칼리오페를 불렀다.
“네?”
“호세가 흑룡 기사단에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었어?”
“아, 네.”
“언제?”
“꽤 예전에…….”
그 말에 루시우스가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녀석……!”
“어차피 오늘 알게 될 거였잖아요. 먼저 알게 된 것뿐인데요.”
칼리오페가 하하 웃으며 호르세안을 변호했다.
저 몰래 내 동생에게 그딴 위험한 정보를 알려줬다면서 호르세안을 향해 투지를 불태우던 루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호르세안이 리페에게 말한 것도 짜증 나지만 그걸 입 싹 씻고 제게 꼭꼭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이다.
‘혼날까 봐 말 안 했다는 걸 알겠는데 말이지. 나중에 들키면 더 혼날 거는 생각 안 했냐.’
나중에 만나면 뺀질뺀질한 악우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기로 다짐했다.
결사대 이야기를 들은 칼리오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수를 치겠다는 뜻이군요.”
칼리오페의 말에 루스티첼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한 딸은 무슨 생각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벌써 인과를 도출해냈다.
“그래, 무려 소드 마스터 둘을 잃었으니 황제 쪽의 전력도 꽤 타격이 컸을 거다.”
차라리 소드 마스터 둘을 희생해서라도 루스티첼 백작을 죽였으면 나았을 거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을 죽이지 못했다. 또 재기 불가한 타격을 입힌 것도 아니라 얼마간 정양하면 예전의 컨디션을 회복할 것이다. 전력이 감소한 것도 감소한 것이지만, 이건 황제 측에 굉장한 심리적 압박을 줄 터.
‘한동안 황제도 몸을 사리겠지.’
전력을 가다듬고 내사를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가 은잔을 갖고 있어도 그쪽에서 샘을 지키고 있으면 불로불사의 기적을 못 이룰 거라고 생각할 테니.’
루스티첼 가를 공격해서 실패하고 전력을 또 잃는 모험을 하느니 샘의 경비를 강화할 것이다.
“황제가 조용한 틈을 타 우리도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해.”
루시우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숙였다.
정통한 황위 계승자는 아스타레아스다. 하지만 이 일은 현 황제를 황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이기도 했다.
모반이며 역심이다.
당연히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더 큰 화마를 막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무거웠다.
다행히도 칼리오페는 그 희생을 더 줄일 방법을 알았다.
“그 전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가족들을 둘러봤다.
“은잔이 어딨는지 알아내야죠.”
바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
* * *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군.]
거친 바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바람의 대정령,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가 무거운 시선으로 칼리오페를 내려다 보았다.
[네 힘으로 감히 이 위대하신 몸을 불러내다니. 터무니없이 무모한 짓을 저질렀어.]
대정령의 분노에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휘몰아쳤다. 칼리오페의 긴 머리칼이 허공에 휘날렸다.
[아직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큰 힘을 사용하다니!]
포르르 날아온 오목눈이가 씩씩거리며 칼리오페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그러다 목소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정말 너란 아이는 항상 본인 몸은 생각하지 않고!]
화를 내며 작은 부리로 칼리오페의 손바닥을 콕콕 쫀다.
“아야야. 아파요, 제피루스님.”
칼리오페가 엄살을 떨자 흠칫해서는 쪼는 걸 그만둔다.
그래도 분위 풀리지 않는지 콧김을 씩씩 뿜으며 작은 발을 쾅쾅 굴렀다. 칼리오페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그런 바람새의 깃을 쓸어주었다.
‘옆에서 엄청난 시선이 느껴지는데…….’
부러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콕콕 찌르는 시선에 뒤통수와 뺨이 얼얼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단 말이야?!’ 하는 가족들의 생각이 읽혔다.
칼리오페는 모르는 척 외면했다.
“죄송해요, 제피루스님. 하지만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전에 황제에게 불려가 위기에 처해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를 부르려 했던 적이 있다. 다행히 아스타레아스가 와줘서 부르지 않아도 됐지만, 집에 돌아오고 나니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자유자재로 바람새를 소환해낼 힘을 가져야 한다.
모든 것은 다룰수록 숙련도가 오르는 법이다. 칼리오페가 에테르를 테르로 바꾸는 능력을 얻게 되고, 종래에는 에테르를 완전히 다룰 수 있게 각성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땅고래가 말했던 것처럼 각성하게 되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전까진 자신을 회귀시킨 여자가 이런 능력을 준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회귀 전부터 이미 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
누군가의 눈에 띄어 능력을 부여받은 게 아니라, 칼리오페는 태생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만약 그녀가 전생에서 어렸을 때부터 노래했다면 진작에 각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가문이 기울고 나서야 노래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노래하며 자신조차 몰랐던 어떤 자질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회귀하기 직전, 칼리오페는 그 능력을 완전히 개화했다. 그래서 회귀 후, 노래할 때 자연스레 테르를 에테르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가 내 노래가 듣기 좋다고 했던 건 아마 이중적인 의미였겠지.’
액면 그대로 노래가 듣기 좋다는 뜻도 있지만, 능력을 개화해 테르를 에테르로 바꾸고 있는 것을 뜻하기도 했을 것이다.
대정령 같은 상위 존재들은 에테르를 기꺼워하니까.
완전히 에테르를 다룰 수 있기 까지 두 가지의 벽이 존재한다. 그렇게 개화한 채로 노래를 통해 테르를 에테르로 바꾸는 것이 능숙해지자 숙련도가 쌓이고 쌓여 두 번째 벽을 통과했다.
그게 바로 각성이었다.
능력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떠올랐다.
‘아직 막 각성한 내 힘으로 마음대로 제피루스님을 소환할 수 없어. 그렇다면.’
이 능력이 수천 번의 연마를 통해 발전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터.
위기 상황에서 주저 없이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를 부르기 위해 칼리오페는 고통을 각오했다. 지금 같아선 목소리를 잃을 걸 각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야 소환하게 되니까.
칼리오페가 저를 불러내고서도 왜 다치지 않았는지 깨달은 바람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통스러웠을 텐데.]
각성한 후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해질 능력을 억지로 앞당겼으니 분명 피를 토하며 노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제피루스님을 무사히 소환해냈잖아요.”
칼리오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 고통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직 이 능력이 완성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제피루스님을 불러내고도 목소리를 잃지 않은 걸 보니 괜찮은가 보네요.”
[완성된 줄도 모르고 무턱대고 소환했단 말이냐!]
제피루스가 다시 한 번 칼리오페의 손바닥을 꽉꽉 쪼았다.
[아이야, 네 능력은 양날의 검이다.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알고 있는 애가 이렇게 무모하게 군단 말이냐!]
칼리오페의 말이 되려 화를 불러일으켰다.
[제발 부탁하마.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몸을 사려. 나를 소환해내더라도 나는 전능을 발휘하지 못해. 네가 다룰 수 있는 에테르 양 만큼만 운신할 수 있다.]
위대한 대정령이 일개 인간에게 제발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부탁을 하다니.
하지만 이렇게 부탁해서 칼리오페가 조금이라도 조심한다면 얼마든지 애원할 수 있었다.
‘소중한 인간이 생기면 짝사랑을 하게 될 거라고 하다니.’
비스가 깔깔 웃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들은 부모가 자식을 영원히 짝사랑하게 된다고 말하던데. 이게 그 기분인가 싶었다.
[그래,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날 불러낸 이유가 뭐냐.]
바람새가 지친 음성으로 물었다. 왠지 뽀얗고 작달막한 오목눈이가 순식간에 늙은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은잔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 싶어서요. 에테르로 된 샘물을 떠 마실 수 있는 잔인데.”
[그에 대해선 내가 알려줄 수 없다.]
바람새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히 그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칼리오페가 어깨를 축 늘여트렸다.
“아, 제피루스님도 모르시는군요.”
[모르지 않아! 이 몸은 당연히 알고 있어!]
오목눈이가 버럭 성을 냈다. 딱히 도발할 생각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구나, 생각했던 칼리오페는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바람새가 포르르 날아올라 칼리오페의 눈앞에서 파닥거렸다.
[그 은잔은 비스의 보물. 내가 인간에게 알려주면 금기를 범하게 된다.]
비스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가침 조약 때문에 나도 제약을 받게 되겠지만 그보다 네가 더 문제야.]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절대적인 존재다. 금제를 견뎌낼 힘이 있어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감히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는 거대한 능력을 지녔지만, 어찌 됐든 인간이었다. 금제를 견뎌낼 힘도 없거니와 대정령들이 정성을 쏟아 소멸하지 않게끔 돌본다 해도 소멸하지 않을 뿐,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살지도 소멸하지도 못한 채 억겁의 시간을 견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까지 제약을 받게 된다는 말에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저만 고통받는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저 때문에 바람새까지 고통받게 된다니 더 물을 수 없었다.
침울해하는 칼리오페를 본 오목눈이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가 조금 의기소침해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약해지다니.
이 정도는 알려줘도 문제없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아이야, 너는 흰 날개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화 속에서 흰 날개는 루스티첼을 뜻한다.
칼리오페의 의아한 얼굴을 본 바람새가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잊었느냐? 흰 날개는 수호자다.]
“수호자…….”
칼리오페가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더 있다간 네게 부담이 될 거야.]
날아오른 오목눈이가 칼리오페의 머리 주변을 한 바퀴 휘돌더니 광풍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칼리오페는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리이페에.”
꽉꽉 억누른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칼리오페는 핫, 하고 뒤를 돌아봤다. 가족들과 눈이 마주치자 식은땀이 절로 났다.
“그래서, 자칫하면 목소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일까.”
루스티첼 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정하고 상냥한 어조로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그, 그게…….”
칼리오페는 몸을 움츠린 채 은근슬쩍 문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앗!”
그러다 콩, 하고 무언가 단단하고 부드러운 것과 몸이 부딪쳤다. 올려다보니 루스티첼 백작이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 아버지…….”
루스티첼 백작이 딸아이를 향해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 물음에 대답해야지.”
그 자상한 얼굴이 어찌나 무섭게 느껴지는지 칼리오페가 히익 숨을 들이켰다.
“나도 궁금한데에.”
로베르트가 천진하게 웃으며 칼리오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위험한 거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에 관해서도 듣고 싶은데.”
루시우스마저 옆에서 끼어들었다.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결과적으론 괜찮았다고 해도 가족들을 걱정시킨 건 확실히 잘못이다. 만약 반대 입장이었으면 칼리오페 역시 화가 났을 것이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
“네, 잘못했어요.”
시무룩해져서는 사과하는 칼리오페를 보던 가족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엄마라고 불러보렴.”
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칼리오페가 멍하니 루스티첼 부인을 올려다 봤다.
“아빠 뺨에는 뽀뽀해줘.”
루스티첼 백작이 은근슬쩍 뺨을 들이밀며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기대로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빠는 둘 다 해줘!”
로베르트가 환히 웃으며 자신의 볼을 콕콕 찔렀다. 크흠, 루시우스가 헛기침하더니 은근슬쩍 몸을 낮췄다. 칼리오페가 발돋움하면 볼에 뽀뽀할 수 있도록.
“뭐, 리페 네가 둘 다 해주고 싶다면 딱히 말리진 않으마.”
“…….”
칼리오페는 흐린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화도 못 내겠다.
칼리오페는 울상을 지은 채 가족들을 올려다봤다.
네 사람 모두 눈을 빛내고 있긴 하지만 어딘지 경직되어 있다.
칼리오페가 목소리를 잃을 뻔한 짓을 저질렀다는 게 가슴을 까맣게 태운 것이다. 더 책하지 않는 것은 칼리오페가 진심으로 사과했기 때문에.
칼리오페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쪽.
울리는 소리에 루시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리오페는 로베르트와 루스티첼 백작 그리고 백작 부인의 뺨에도 쪽쪽 뽀뽀했다.
그러곤 붉어진 얼굴로 최대한 담담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엄마, 아빠, 오빠들.”
“……!”
가족들은 말없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너무 강한 자극에 심부전이 올 것 같았다.
“그, 그럼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요.”
칼리오페는 부끄러움에 차마 가족들을 바라보지 못한 채 호다닥 방을 나섰다.
긴 회랑을 걷고 계단을 올라가자 부끄러움이 가시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소복이 눈 내린 정원의 풍광이 들어왔다.
‘수호자라.’
신화 속에서는 수호자는 보통 무가를 칭했다.
흰 날개는 루스티첼. 수호자는 무가.
루스티첼이 긴 시간 동안 명맥을 유지해온 유서 깊은 무가라는 것은 칼리오페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그 사실을 일깨워준 걸까.
그것도 은잔에 대해 물었을 때.
‘수호자의 원래 뜻은—’
지키고 보호하는 자.
그렇다면.
‘은잔을 지키고 수호하는 게 흰 날개—루스티첼이라는 뜻인가?’
꽤 타당한 추측이었다.
그렇게 가정하면 왜 황제가 루스티첼 가에 은잔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말이 된다.
‘아마 그에 관한 신화 구절을 발굴해낸 것이겠지.’
황제가 은잔을 내놓으라며 부린 행패가 오히려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하지만 가보 중에는 은잔이 없는데.’
가보까진 아니어도 오래된 은잔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느 가문에나 있는 은식기로 평범한 은으로 만들어진 잔이었다.
‘가문의 기록을 한 번 찾아보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찬 바람이 날카롭게 집안으로 파고 들었다. 실내복은 찬기를 막아주지 못했다. 살갗이 아리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다시 창문을 닫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이제 칼리오페도 열여섯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열다섯부터 칼리오페의 인생은 내리막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모든 비극의 시작인 아버지의 죽음은 반복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제대로 살아계신다.
“읏…….”
갑자기 울컥 치솟는 감정에 칼리오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돌아온 루스티첼 백작은 칼리오페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네가 날 살렸다고. 덕분에 이리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스스로를 탓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사실 속으론 자책하고 있었던 걸까. 그 말에 가슴 속에 딱딱하게 뭉쳐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위험한 순간에 칼리오페가 선물했던 크리스탈 참이 에테르를 내뿜어 고갈된 오러를 채울 수 있었다고 했다. 덕분에 상대의 공격이 완전히 가슴을 꿰뚫기 전에 막아낼 수 있었다고.
혈전을 끝내고 난 뒤 곧바로 쓰러질 것 같았는데, 칼리오페의 생일을 축하해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신을 잃지 않았다며 웃었다.
추운 겨울 숲에서 피를 많이 흘린 채 의식까지 잃었으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루시우스가 발견하기 전에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나를 지킨 거란다, 리페.]
숨결이 떨렸다.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자신이 그의 생환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간 했던 수많은 노력이 완전히 헛된 게 아니었다는 것이 기쁘고, 기뻐서…….
‘열심히 하자.’
칼리오페가 찬바람에 꽁꽁 언 뺨을 찰싹 두드렸다.
반란.
무거운 단어에 저절로 몸이 긴장했다.
황제가 잃은 전력을 보강하느라 숨 고르기에 들어갔듯이, 이쪽은 반란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계절이 끝나도 겨울은 한동안 계속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