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기적을 부르는 노래 (2)
하르첸은 거리를 내다보는 칼리오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온 거리를 물들인 성녀에 대한 찬양이 칼리오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칼리오페의 시선은 항상 더 높고 숭고한 것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런 것 따위 신경 쓰시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하르첸은 신경 쓰였다.
마음을 번뇌 없이 다잡으려 해도 도저히 신경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레이디께선 이런 취급 받으실 분이 아닌데!’
진짜 태양이 떠오르기 전의 여명에 불과했다는 취급.
성녀의 등장을 더 화려하게 장식할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태도.
하르첸이 빈손을 콱 움켜쥐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야.’
하르첸의 눈에 칼리오페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에 잘못이 있다면 그녀의 파트너인 하르첸, 본인에게 있었다.
칼리오페는 성녀와의 대결을 위한 연습보다는 마치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임하는 것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전까지의 경연은 모두 전략이 있었다.
처음 선전에서 경연할 땐 장소에 어울리고 거부감 없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곡을 선곡했다. 그 다음 보육원에서 경연할 땐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댄서와 브라스 밴드를 불러 춤을 가미하기로 했다. 비록 신전의 방해로 항상 돌발 상황이 생기긴 했으나 철저한 전략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전략도 없다니.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 전보다도 훨씬 더 고심해서 필승 전략을 짜야 하는 게 아닌가.
당연히 그런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들을 수록 우려는 희미해졌다.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온 마음을 다해 노래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있으면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노래가 아니라 수행에 가까웠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 했고, 원래의 자기 자신을 탈피하기 위한 싸움 같았다. 그래서 더 높은, 더 고매한 경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속가를 노래하는 사람에게서 구도자의 기운을 느끼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하르첸은 그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칼리오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성녀 따위보다 훨씬 더.’
그렇게 노래 자체에만 파고들어 집중한 결과, 칼리오페의 노래는 나날이 풍성하고 다채로워졌다.
어느 소절은 이렇게까지 세심할까 싶을 정도로 정교하다가도, 또 어떤 소절은 바람과 파도보다도 더 자유롭고 거침 없었다.
하지만 한결같이 따스하게 마음을 울렸다. 아니, 그저 마음이 울리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하르첸은 그게 무엇인지 말로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음악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칼리오페에게밖에 없는 무언가였다.
‘그런데 이런 취급을 받으시는 건 역시 내가 부족해서—’
“하르첸 경?”
하르첸에게서 이상함을 느낀 칼리오페가 그를 돌아봤다.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던 칼리오페가 하르첸의 손을 맞잡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손과 달리 칼리오페의 손은 따스했다.
“긴장되죠?”
“아…….”
“당연하지요. 하지만 괜찮아요.”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르첸은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봤다.
성녀라는 거대한 적과의 싸움 때문에 긴장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단지 너무 대단한 당신에게 내가 너무 부족한 파트너인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미안하다고.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손이 차갑네요. 연주자가 손이 차가우면 안 되죠.”
칼리오페가 탁자 위에 놓아둔 토끼털 머프를 들어 올려 그의 손에 끼워주었다. 그녀가 끼고 온 것이었다.
머프 안에서 칼리오페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도착한 뒤로 벗어놓고 한참 동안 연습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하르첸의 흰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제 생각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칼리오페의 시선을 피했다.
“으음, 조금 어색한가요.”
하르첸의 반응에 칼리오페가 미간에 선을 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단정하게 수트 차림을 한 하르첸과 여성용 머프는 확실히 안 어울렸다. 마음이 앞서서 조금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나 싶어진 칼리오페가 다시 머프를 빼주려고 하는데—
휙, 하르첸이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물렸다.
덕분에 칼리오페의 손은 허공만 스쳤다.
“아……. 그게, 저, 따뜻해서— 레이디께서 말씀하신 대로 손이 얼면 연주에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요.”
제 행동을 깨달은 하르첸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모피니까 꽤 따뜻하죠?”
다행히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그렇게 물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르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따뜻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모피여서가 아니라—
‘레이디의 머프니까.’
머프 안의 보드라운 감촉을 손끝으로 느꼈다. 꼭 칼리오페와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것처럼 따스해서 이대로 영원히 빼고 싶지 않았다.
“하르첸 경.”
그 부름에 뜨끔한 하르첸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머프 안에서 꼼질거리던 손가락도 아닌 척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이 추운 계절에도 피어나는 꽃송이 같은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하르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파트너가 되어줘서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경연에서 이기고 할 거니까.”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과연 추위와 모진 세파를 이겨내고 움트는 꽃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일주일 뒤에 꼭 말할게요.”
하르첸은 칼리오페에게 압도되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속에서 끓어 넘치는 것을 그저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버려 두는 것 외에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용암처럼 뜨겁게 흐르는 그것은 제 감정이지만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다.
이윽고 하르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짓는 그의 은회색 눈동자 역시 칼리오페만큼이나 굳건하게 빛났다.
“네, 꼭 들려주세요.”
나와 파트너가 되길 잘했다고, 후회하지 않았다고.
무대 위에서나마 감히 당신에게 어울리는 파트너였다고.
‘꼭 들려주십시오, 레이디.’
* * *
“이것뿐인가요.”
몽에르트 영애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영민한 초록빛 눈동자가 응접실을 훑었다.
몽에르트 가의 대응접실.
몽에르트 영애가 주로 대규모 살롱을 주최할 때 사용하는 곳이다. 하지만 최근 반년간은 다른 이유로 더 많이 사용했다. 바로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팬클럽 모임 장소로.
엄선된 인원을 들이는 것인데도 대응접실을 써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었다. 정기 모임 땐 와글와글 넘치는 활기에 몽에르트 저 전체가 떠들썩했다.
그런데 성녀가 나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두 명씩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초록색 눈이 채운 자리가 얼마 없는 응접실을 살피고 눈꺼풀에 가렸다.
“하아…….”
클럽의 회장으로서 한숨을 내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게 기폭제가 되었는지 분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영애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다.
“흐읍…….”
“영애.”
“죄, 죄송합니다. 끕, 하지만 너무, 읏, 너무 속상해서—”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몽에르트 영애는 예법을 지적하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단단하게 버텨야 합니다. 리페에게 힘을 주고 리페를 지킬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그 말이 맞아요. 속상하고 힘들지만 견뎌내야죠.”
“차라리 잘됐어요. 그렇게 쉽게 변절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리페님을 좋아했던 게 아니었던 거죠. 위기가 기회라고, 이번 기회에 잘 골라낸 거예요.”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며 힘을 짜내는 모습을 보니 몽에르트 영애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내일이 바로 성녀와의 결전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돌아서서야…….”
조심스레 말을 꺼낸 영애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경연은 투표로 진행된다.
지금 대세 여론은 칼리오페에게 불리해도 너무 불리했다.
성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그 반대급부로 칼리오페의 인기는 땅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니 어느 정도의 호감과 안쓰러움을 가질 만한데…….’
‘하나 같이 성녀에게 상대도 안 될 게 설친다고 욕을 하니……. 괘씸한 것들!’
차마 생각을 말로 꺼내지 못한 사람들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던 몽에르트 영애가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어요.”
“이상한 점이요?”
사람들이 의아한, 혹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몽에르트 영애를 바라봤다.
“음…….”
몽에르트 영애는 잠시 망설였다.
성녀의 등장은 전 제국의, 아니, 제국을 넘어 전 대륙의 축복이었다.
인류를 이끄는 구원자.
그런데 그 대단하신 구원자님에 대해 정도 이상의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심지어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야.’
적어도 몽에르트 영애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납법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사실에 가까운 추측이라고 해도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말씀해주세요, 영애.”
“그래요, 리페님 일인데 저희도 알아야지요.”
몽에르트 영애는 채근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눈물을 겨우 그친 채 딸꾹질하면서도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애의 모습에 몽에르트 영애의 입매가 올라갔다.
그래, 이 사람들 역시 저와 같은 마음인 것이다.
그 대단하신 성녀보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더 마음이 쓰이는 사람들.
“성녀의 능력은 치유라고 알려져 있죠. 하지만 사실은 다른 듯합니다.”
“네?!”
“뭐라구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니에르 영애가 사교계에서 멀쩡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봤기에 더 그랬다.
“하, 하지만 성녀는 분명 사람들을 고쳤어요. 타니에르 영애도 그렇구요.”
다들 같은 생각을 했는지라 너도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몽에르트 영애, 저도 신전과 성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가끔씩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라요. 그깟 능력이 뭐라고 사람들이 이러나 싶어서.”
한 영애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적은 기적이잖아요.”
그래, 그 때문에 억울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성녀에게 매료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곳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으니 모든 것을 내던질 정도로 성녀에게 감화되는 것도 이해됐다. 어쨌거나 성녀는 신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자 인류를 살릴 성스러운 구원자였다.
처음에는 이들 역시 순수하게 성녀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던가.
다만 조용히 탈덕해도 모자랄 판에 성녀를 찬양하며 칼리오페를 욕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 앙심이 치밀어오른 것이다.
그러니 몽에르트 영애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깎아내린 것처럼 성녀를 깎아내리고 싶겠지.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법이에요.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승리할 길도 보이는 법이잖아요. 마음을 알지만 외면하면—”
“옛날에 타니에르 영애의 다리를 고치지 못했을 때 신전이 했던 말을 기억하세요?”
몽에르트 영애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극히 이성적이라는 설득을 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애초에 곧바로 수긍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나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칼리오페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성녀는 막강한 존재였다.
“신전에선 제대로 치유했다고, 뼈와 근육과 피부 모두 원래대로 재생되었다고 했지요. 겉보기에도 그랬고요.”
“네, 하지만 타니에르 영애는 걷지 못했죠. 그 일로 비난이 심했는데……. 겉만 치료하고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냐구요.”
거세지는 비난 여론에 결국 신전은 치료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런데 사실 신전의 말이 옳았다면요?”
몽에르트 영애의 말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 삼켰다.
“가끔 신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어도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실어증이 대표적이죠.”
“정신적인 이유…….”
몽에르트 영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때 타니에르 영애는 아주 어린 나이였어요. 마차에 깔린 두 다리를 본인 눈으로 목격했죠. 치료 전, 완전히 납작해진 모습까지도.”
“그럼—”
“무의식 중에 본인이 다시는 걷지 못할 거라고 깊게 낙인되어도 이상할 것 없죠.”
사람들은 몽에르트 영애가 성녀의 능력이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하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진실이 너무 거대해서,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이해를 멈출 정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성녀의 노래를 듣고 온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뀌었을까요?”
모두 한 번쯤 했던 생각이다.
“성녀에게 감화되더라도 리페를 그렇게 증오할 이유는 없을 텐데 치를 떨며 욕했죠.”
충격에 물들었던 사람들의 고개가 미약하게나마 위아래로 끄덕였다.
“경연 때문에 성녀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해서 적대적이게 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몽에르트 영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이 안 되죠.”
모두 찜찜해 하면서도 성녀라는 위명 하에 의문을 억눌러왔었다.
“과거에도 성녀는 존재했고, 사람들은 항상 성녀에게 열광해왔죠.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에요. 이렇게 획일적으로, 똑같이는.”
숭배의 방법은 여러 가지다. 대적자에 대한 반응 역시.
조용히 있던 사람들이 슬슬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오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 정도는 태도가 달라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칼리오페를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모인 사람들이라 성격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런데 모두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똑같은 태도로 적대시했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에르트 영애가 한쪽 다리를 꼬며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았다.
“그래서 실험해봤죠.”
“그 말은—”
“네, 모두 성녀에게 미친 광신도가 되었어요.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세뇌.
직접적으로 나온 단어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떨렸다.
사람들이 충격을 이겨내는 사이 몽에르트 영애는 짧게 실험에 관해 설명했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 다행인 점은 레코딩엔 성녀의 힘이 깃들지 않는다는 걸까요. 소리만 담아내는 마법이라 신성력을 담아내지 못하니까요.”
만약 녹음한 노래로도 세뇌할 수 있었다면 이미 전 대륙이 광신도 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계는 달라요. 소리뿐만 아니라 그곳의 모든 것을 그대로 눈앞에 불러오는 거니까.”
디바인 크리스탈이든, 통신석이든 이용하는 에너지—신성력과 마나—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그럼 어쩌죠? 당장 내일이 경연인데…….”
“성녀의 노래를 들으면—”
성녀와 칼리오페의 대결은 성녀가 처음 등장했을 무렵부터 초유의 관심사였다.
현장에 오는 사람들만 해도 수십만 명이고, 중계는 전국을 넘어 대륙 곳곳에 퍼질 것이다. 예전에는 따로 디바인 크리스탈을 설치한 곳에만 중계됐지만, 지금은 값싼 가격으로 통신석이 보급되었기 때문에 제약이 사라졌다.
그렇게 성녀의 노래가 온 대륙에 울려 퍼진다면.
“……모두가 광신도가 된다는 말 아닙니까.”
우리마저도.
응접실 안에 살얼음보다 더 차갑고 위태로운 침묵이 깔렸다.
* * *
다음 날 아침, 비스 신전 안.
“이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간 궂은일이 많았지만 다 오늘을 위한 액땜 아니었겠습니까.”
본디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신의 전당은 껄껄거리는 경박한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 아직 경연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다 이겨서 축배를 드는 분위기였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전에 항상 고난을 먼저 주시지.”
대신관의 말에 성녀의 입매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녀는 떠들썩한 고위 신관들과 달리 홀로 고요하게 앉아있던 중이었다.
“고난 도중엔 힘들고 절망스럽지만, 다 지나고 보면 그 또한 축복인 것을 깨닫기 마련이지요.”
대신관 옆에 있던 긴 로브를 입은 사내가 말을 받았다.
“그 말이 옳아. 실제로 우리에게 축복 아닌가. 칼리오페 루스티첼 덕분에 일이 잘 풀렸으니……!”
신이 난 대신관이 책상을 탕탕 치며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녀의 노래를 전파시키기 위해 발품 팔아 곳곳을 돌아다녀며 노래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사람들을 디바인 크리스탈이 있는 각 지역의 신전 안으로 끌어들일 계책을 세워 성공시키거나. 그래야만 신성력이 담긴 성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이 정신을 지배당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경연을 핑계로 주요 시설이나 거점에 디바인 크리스탈을 설치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습니다.”
“그게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고 자기 영지에도 설치해달라는 귀족도 있었죠.”
“어떻게 쓰인다니. 우매한 인간들을 신께 인도해주는 용도 아닌가. 신의 사자이신 우리 성녀님의 개가 되니까 말이야.”
대신관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다른 신관들도 똑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설치했다 뿐입니까. 굳이 오라고 할 필요도 없이 경연을 보겠다고 사람들이 알아서 오지 않았습니까.”
딱히 유도할 수고 없이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디바인 크리스탈을 설치한 곳이나 신전으로 발걸음했다.
오늘 제도에 있는 비스 본 신전에는 사상 최대규모의 인원이 몰릴 것이다.
비스 본 신전뿐만이 아니다. 비스 신전의 지부에도, 또 곳곳에 디바인 크리스탈 앞에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인원이 밀려들 것이다.
성녀와 칼리오페의 경연을 보기 위해.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아니었다면 경연은 열리지도 않았을 테지.”
“그 계집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신전이 욕먹을 땐 어찌하나 싶었는데, 이게 바로 전화위복이군요.”
“그 계집에게 모아진 관심이 고스란히 성녀님께로 향하지 않았습니까.”
아예 없던 것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있는 것을 빼앗아 오는 게 훨씬 더 쉬운 법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칼리오페 루스티첼이야말로 우리 신전의 최대 공로자인 듯합니다.”
“보급형 통신석도 그 계집 덕에 개발된 것 아닙니까.”
“그래, 신전이나 디바인 크리스탈 쪽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도 제 손바닥 안에 있는 통신석으로 오늘 중계를 보겠지.”
졸렬한 눈빛을 주고 받은 신관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오늘 바로 역사가 바뀌는 것 아닙니까.”
“모두 칼리오페 루스티첼 덕이지요.”
킬킬킬 징그러운 웃음이 먼지처럼 회의실 안에 떠다녔다.
“안 그래도 오늘 루스티첼 일가를 신전에 초대했다. 아주 정중하게 모시라고 했어.”
대신관이 한쪽 입매를 비죽 올리며 말했다.
그간 신전 측에서 루스티첼 가에게 초대장을 보낸 적은 없었다. 칼리오페가 경연자임에도 불구하고 루스티첼 일가는 항상 입장권을 따로 구매해야 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렇게 우리에게 도움을 줬으니 우리도 그 아이에게 선물해줘야지.”
대신관이 미천한 것에게 하사품을 내려준다는 양 거만한 태도로 팔걸이에 턱을 괴었다.
“루스티첼 일가는 가족 간의 사랑이 깊다던데—”
피식, 대신관의 입매가 비틀리며 야비한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그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들이 본인을 향해 야유하며 쓰레기를 던지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지 않나?”
* * *
“리페.”
마차에서 내리던 칼리오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레아스.”
“오늘은 루스티첼 저로 마중 나가고 싶었는데.”
다가온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 탓에 칼리오페를 에스코트하던 도미닉은 자연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눈으로 칼리오페만을 바라보는 아스타레아스에게서는 고의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미닉은 아스타레아스가 고의로 그런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간 자신의 아가씨를 호위하며 수십 번은 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나 교묘해서 우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매번 밀려나다 보면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 남자, 자기 외에 다른 모든 사람이 칼리오페 아가씨께 닿는 것 자체가 싫은 거구나.’
“루스티첼 저로 오셨으면 오늘 성녀와 제가 겨루는 게 아니라 레아스와 제 가족들이 겨루게 되었을걸요.”
물밑에서 일어나는 견제질을 하나도 모르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말갛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무뚝뚝한 성정의 도미닉으로서도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기사답게 꾹 참고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밀려난 도미닉 대신 아스타레아스가 자연스럽게 칼리오페를 에스코트했다.
경연장인 신전 별관은 오늘 경연을 위해서 새로 짓다시피 증축해 보수했다.
과연 별관 내부는 황궁의 대연회장보다도 화려할 정도였다.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도 끝이 안 보일 만큼 높이 솟은 회랑, 청금석과 녹주석을 통으로 가공해 만든 부조물. 폭포수처럼 푸른빛과 은빛 톤이 어우러져 정갈한 맛을 더해 우아하고 신비로웠다.
‘딱 성녀의 이미지네.’
칼리오페는 그렇게 평했다. 예상한 일이었다.
“……그냥 오지 마시지.”
칼리오페의 중얼거림에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고, 정중하게 대기실 문을 열어주었다.
철컥—
그리고 문을 잠갔다.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스타레아스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아가씨?”
탕탕, 들어오지 못한 도미닉이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칼리오페 역시 당황했지만 우선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잠시 레아스랑— 아.”
갑자기 푹 끌어안기는 바람에 칼리오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두근두근두근—
맞닿은 몸으로 심장 소리가 들린다. 아스타레아스 특유의 체향이 공기를 타고 몸 안으로 스미는 듯했다.
살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곧장 깊고 푸른 눈과 눈이 마주친다.
초옥,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칼리오페의 눈가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아…….”
눈가에서 뺨으로, 뺨에서 턱으로 키스가 이어진다.
그리고 종래에는 도톰하고 말랑한 입술로.
잠시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온기를 느꼈다.
“무서워요?”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성녀의 진짜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이후, 아스타레아스가 따로 성녀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은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정신 지배.’
그런 흉악한 게 신의 사자인 성녀의 능력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긍됐다.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생에서 사회 분위기가 왜 그렇게 급변했는지 이해됐다. 역사가 항상 옳은 쪽으로 발전하는 건 아니지만, 의식 수준이 급격하게 퇴보했던 것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세뇌라면 가능하다.
‘전생에서는 그나마 더디게 진행된 거야.’
성녀의 노래를 직접 듣거나 신전에서 들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이단 심문관이 생기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세뇌한 것이다. 세뇌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끝까지 반항하고 투쟁해서 내전이 일어난 거고.
‘하지만 지금이라면…….’
오늘 대부분의 제국민이 동시에 세뇌당할 것이다.
아스타레아스를 붙잡은 칼리오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약 레아스가 성녀에게 세뇌당한다면—’
다른 것보다 그게 무서웠다.
지난 반년 동안 칼리오페는 수도 없이 제게서 돌아서고 멀어지는 사람들을 봐왔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의 얼굴에 경멸이 떠오르고, 호의를 담고 반짝이던 눈이 얼음보다 더 차게 식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가족들과 친구들, 아스타레아스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정신을 지배당한다면 변하지 않으려고 해도 변하는 것 아닌가.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가 햇볕보다 더 따스하고 포근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감정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상 어느 것보다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
‘이 눈이 변한다면.’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차게 식어 경멸과 혐오로 얼어붙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꽉 막혀왔다.
“리페.”
칼리오페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걱정 말아요.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성녀의 신성력 따위에 지지 않으니까.”
언제나처럼 웃는 그의 모습에 칼리오페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성녀는 단순히 최면을 거는 게 아니다. 신성력을 통해 이적을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강하더라도 소용없다.
그걸 알면서도.
“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그리고 그 예외라는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믿고 싶었으니까.
* * *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연장을 가득 메웠다.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VIP를 위해 마련된 자리는 숨통이 트였다.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실크와 꽃으로 장식한 곳이었다. 맨 중앙에는 미니 바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루스티첼 일가는 그곳에 앉아있었다. 신전에서 마련해준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지만, 막둥이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한 것이다.
“어머, 카스틸로 공자님?”
루스티첼 부인이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알은 체를 했다. 못 본 척을 할 순 없었으니까.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내 딸 뺏어간 놈팡이’라는 글자가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아스타레아스 역시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장모님, 장인어른, 형님들.”
순식간에 혈압을 상승시키는 호칭을 입에 담으며.
“여전히 일방적인 호칭을 사용하시는군요, 공자님.”
“언젠가 부르게 될 호칭이니 미리 부르는 거지요.”
루스티첼 부인과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웃음꽃을 가득 피우는 두 사람을 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생각했다.
‘루스티첼 가와 카스틸로 공자님의 사이가 참 화기애애하구나.’
화려한 꽃을 피워낸 만큼 가시를 잔뜩 두른 루스티첼 부인과 아스타레아스의 대치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다.
“꺄아아아아아—!”
“성녀님, 성녀니임!!”
거의 울부짖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아니, 정말로 울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등장한 성녀가 사람들을 향해 고아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아아악!”
“성녀님!!!!”
사람들이 자지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성녀가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거짓말처럼 멎었다.
웅장한 오르간 반주가 신전 전체를 휘감은 파이프를 통해 울려 퍼졌다.
드디어 경연이 시작된 것이다.
* * *
성녀의 인기에 대해서 말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다. 광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에 루스티첼 부인의 안색이 흐릿해졌다.
‘리페…….’
딸아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괜찮소, 부인.”
루스티첼 백작이 그녀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아 왔다. 미소 짓는 남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 또한 살풋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 애는 우리 중 루스티첼의 피를 가장 강하게 타고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리페 노래는 세계 최강이라구요.”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후,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래, 리페는 리페니까.”
경연 결과가 안 좋게 나와도 상처 받아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을 것이다.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겠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세다.
“괜찮으니 편안하게 즐기세요, 장모님.”
그러나 그녀의 진지한 생각을 옆에서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미소 짓는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에 혈관이 불룩 솟았다.
“공자님, 그 장모님이라는 호칭은 이제 그만 두실 수 없나요?”
아스타레아스는 그 말에는 대답 없이 말을 이었다.
“칼리오페는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루스티첼 부인은 한참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공자님께선 안목이 뛰어나신 만큼 우리 리페에 대한 판단도 정확하신 것 같네요.”
조금 못마땅한 어조였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리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두 눈이 먼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다들 진짜가 나타나면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성녀를 바라봤다.
분명히 그 말대로 될 것이다. 다짐하듯 그렇게 생각했다.
성녀의 능력이 정신 지배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는 많은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경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성녀가 사람들을 세뇌한다고 말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세뇌당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들까지 흰 눈을 뜨고 바라볼 것이다.
아직 신전은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지 않았다. 성녀 역시 겉보기엔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다. 인류를 구원하는 성녀를 깎아내리는 거라고밖에 안 보일 것이다.
만약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몇이나 될까?
오히려 칼리오페가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더러운 루머를 퍼트리고 다닌다고 욕하겠지.
다른 핑계를 대고 경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신전은 성녀가 무서워서 비겁하게 경연을 피하는 것이라고 칼리오페를 매도할 것이다. 또, 경연의 주최자가 신전인 만큼 취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속가를 부르는 다른 가수를 데려다가 쓰거나— 이건 화제성이 줄어들어서 선택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아예 성녀의 단독 공연으로 진행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카피 문구에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알아서 피해갔다는 식으로 쓰며 홍보했겠지.
이 상황을 타계할 다른 계책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의견을 나누던 도중 혼자 생각을 정리하듯 말이 없던 칼리오페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냥 노래할게요.]
산호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전쟁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대로.
[제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요.]
아스타레아스는 차마 안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다만 아스타레아스는 믿었다. 예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혹독하고 맹렬한 추위와 살을 얼리는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칼리오페는 무언가를 피워낼 것이라고.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성녀의 목소리가 높게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은빛으로 성스럽게 빛나는 휘광이 부드럽게 온 신전을 물들였다.
아스타레아스는 물론이고 루스티첼 일가, 힐데르트와 유리안, 에피니와 호르세안, 몽에르트 영애와 메일린 영애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은빛 물결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의식이 잠에 빠질 정도로 아주 따뜻하고 안온하고 평온한 감각이었다.
사람을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천국으로 이끄는, 성녀의 축복이었다.
* * *
“하르첸 경.”
칼리오페가 긴장된 얼굴로 하르첸의 두 손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우리 많은 일들을 겪었지요.”
처음 속가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배척받았던가.
천재 소리를 듣던 하르첸의 위명 역시 한순간에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전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성녀가 나타나기 전까진.
“오늘 경연이 끝나면 하르첸 경에게—”
“제게 감사 인사를 하실거라고요.”
하르첸이 부드럽게 칼리오페의 말을 받았다.
칼리오페는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네, 맞아요. 감사 인사를 해야지요.”
“이길 거니까.”
“네, 저는 이길 거니까.”
다짐하듯 칼리오페가 말했다.
자칫 약한 소리를 할 뻔했다. 오늘 경연이 만약 실패로 돌아가면 하르첸에게 가해질 압박이 걱정되어서.
‘그래, 내가 잘 하면 걱정할 필요 없어.’
칼리오페가 하르첸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믿겠어. 내 노래에 확신이 없으면 아무도 내 노래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설령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생각해주세요.”
하르첸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제가 아가씨를 믿으니까.”
산호빛 눈동자가 빤히 그를 바라봤다.
하르첸의 섬세한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제 말은— 주제 넘은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게……. 나, 나름 천재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니까요.”
으아아, 하르첸은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을 느꼈다.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한다는 게 오히려 역효과 날 소리만 하고 있다. 제 혀를 어디다 묶어놓고 싶었다.
“풋……!”
하지만 들려오는 웃음 소리에 하르첸의 생각이 끊겼다.
아하하, 맑은 웃음 소리가 하프의 음률처럼 하르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하르첸은 멍하니 칼리오페가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까칠하고 신경질적이라고, 천재 예술가다운 기질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칼리오페 앞에서만 서면 그런 평가가 무색하게 멍청한 바보가 되어버린다.
“그럼 나갈까요.”
웃음기가 진하게 남은 얼굴로 칼리오페가 말했다.
“네, 레이디.”
하르첸은 어쩐지 자신이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는 수줍은 레이디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 * *
대신관은 탐욕과 기대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빈 무대를 바라보았다. 사회자가 내려갔으니 이제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등장할 때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보고 싶어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어서 그녀가 보고 싶어 몸이 달 정도였다.
이윽고 무대 상수에서 칼리오페가 등장했다.
“우우우—!”
“물러가, 돌아가!!”
“어딜 감히 성녀님께 도전하겠다고!!!”
사람들의 야유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가 모이는 구조로 지은 신전 특성상 아주 크게 잘 들렸다.
대신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 자 어때? 응? 지금 기분이 어때?’
대신관은 칼리오페를 향해 들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항상 사람들의 환호만 받던 애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푸하하하하!”
“저 꼴을 보십시오! 그러게 왜 우리에게 개겨선—”
“이런 큰 웃음을 주려고 그랬나 봅니다.”
다른 신관들이 대신관의 마음을 대변하듯 낄낄 웃어재꼈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나무라는 목소리에 신관들이 정색하며 말한 사람을 바라봤다.
“우리 일의 큰 공로자가 칼리오페 루스티첼 아닙니까. 존중해줘야지요.”
크하하하하, 정색했던 사람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 말이 맞지요 칼리오페 루스티첼 덕분에 거의 모든 제국민을 동시에 세뇌할 수 있었으니.”
신관이 크큭, 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 말대로였다.
방금 성녀의 공연으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디바인 크리스탈이나 통신석을 통해 노래를 들은 사람 모두 정신을 지배당했다.
“당황한 꼴을 보니 제 가족들이 세뇌라도 당했나 봅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향해 쓰레기라도 던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아야 하는데 아쉽게도 VIP석에는 천막이 쳐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우리 신전 최대의 공로자지.”
대신관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러니 이제— 순교할 때가 되었어.”
* * *
칼리오페는 가만히 제게 야유하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저절로 손이 차게 식고 몸이 뒤로 주춤거릴 정도로 거센 거부였다.
“감히 천박한 속가나 부르는 것이 주제도 모르고……!”
퍼억! 큰 소리와 함께 물병이 나뒹굴었다. 누군가가 들고 있던 물병을 칼리오페 쪽을 향해 던진 것이다.
다행히 맞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안전에 신경 써야 할 신전 측은 물병을 던지는 걸 보고서도 방관 중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던지니 관객들은 너도 나도 손에 잡히는 것을 쥐었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어?’
물건을 던지려는 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가장 잘 보이는 관객석 중앙부에 눈에 띄게 꾸며놓은 자리가 있었다. 그곳에 가족들이 있었다.
당연히 세뇌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족들은 이글이글거리는 눈으로 다른 관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이대로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뒤에서 세 사람을 말리고 있는 유모와 노심초사하며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레아스.’
가장 맑은 수원의 한 가운데처럼 깨끗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칼리오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여리고 보드라운 것이 결국 차게 굳은 땅을 뚫고 피어오르는 것처럼.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을 비롯해 아스타레아스 역시 성녀에게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검대를 붙잡고 있던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 역시 칼리오페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루시우스 오라버니, 로베르트 오라버니, 유모. 그리고 아스타레아스.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웃는 모습에 칼리오페의 입매가 올라갔다.
모두가 그녀를 비난하고 야유하고 경멸하는 상황에서도.
칼리오페는 환히 웃었다.
태양이 녹아든 것 같은 미소였다.
밝게 빛나는 그 미소에 칼리오페를 손가락질하고 물건을 던지려던 사람들조차 멈칫했다.
칼리오페는 후, 하고 숨을 털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곧게 폈다. 자신을 욕하고 야유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경연장.
‘상관없어.’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이보다 더한 것을 겪었다.
포탄이 바로 옆에 떨어진 적도 있고, 날카롭게 벼린 검 끝이 목줄기를 향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따로 있다.
아무도 구하지 못해 무력감에 몸을 떨 때. 숨 막히도록 몸을 짓눌러오는 무게를 그저 견뎌내는 것밖에 하지 못했을 때.
그때가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붙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게 신호가 되어 하르첸이 연주를 시작했다.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 들은 멜로디를 들으며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만약, 만약—’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돌아온 데에 이유가 있다면.’
[네가 바꿔봐.]
‘내게 바꿀 수 있는 힘을—’
이들을 구할 힘을.
반짝, 칼리오페가 눈을 떴다.
동시에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 * *
성녀님을 따라야 해. 성녀님이 나를 구원하실 거야. 성녀님을 찬양해. 성녀님을 칭송해. 성녀님이 가장 중요한 존재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부모도, 자식도, 연인도 성녀님께 방해되면,
죽여.
안개 속에서 끝도 없이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출구도, 입구도, 길도 찾을 수 없는 희뿌연 연기 속.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연기가 몸 안으로 들어와 아무리 호흡해도 숨이 막혔다.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저 멀리 보이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
그나마 모든 것이 모호한 세상에서 은빛 빛무리가 자신을 인도해주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빛은 가까워지지 않았고, 안개는 계속해서 몸 안에 가득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다.
저 은빛 빛에 닿았던 순간이 얼마나 안온하고 달콤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해야 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단 하나다.
저 빛에 닿는 것.
어라, 내가 저 빛에 닿았던 적이 있었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숨을 막는 연기에 사그라들었다.
저 빛에 어째서 닿았고, 바로 저 빛이 이런 안개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는 기억은 이미 몸 안에 차오른 안개에 가렸다. 다만 어서 저 빛에 닿고 싶다는 마음만이 간절하게 떠올랐다.
그 마음이 통한 건지 한없이 멀어질 것만 같았던 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빛을 향해 손을 뻗는데—
“————.”
아무 소리도 없던 공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고, 어렴풋한 노랫소리. 귀 기울이는 것을 멈추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어서 빛에 닿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나 원했던 빛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째서인지 숨마저 죽인 채 노래를 듣고 있었다. 혹시라도 움직이면 노랫소리가 사라질까 걱정되어 빛을 향해 손을 뻗을 수도 없었다.
짙고 뻑뻑한 안개에 휩싸여 있던 머릿속이 조금씩, 조금씩 개이기 시작한다.
‘괴로워.’
‘힘들어. 그만하고 싶어.’
‘제발, 벗어나고 싶어.’
안개에 가려서 있는지도 몰랐던 자신의 생각들이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누가 나를…….’
그 중 가장 커다랗게, 몇 번이나 덧칠에 쓴 것처럼 짙은 글자가 있었다. 깨닫는 순간 저절로 입술이 열렸다.
이곳에 와 단 한 번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해 버쩍 말랐던 입술이 아릿하게 벌어지고 숨을 크게 들이킨다.
“나를 좀 구해줘—!!”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파사삭, 세상이 깨어져 나갔다. 물속에 있다가 빠져나온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것이 생생하고 명징하게 느껴졌다.
살갗에 닿는 공기, 새 건물 특유의 냄새, 눈꺼풀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에 비치는 빛과 온갖 색채, 그리고—
귓가에 파고드는 노랫소리.
웅웅거리며 희미하게 울렸던 노랫소리가 선명하고 분명하게 들렸다.
“아…….”
툭, 투둑. 손등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마등처럼 그간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 말도 안 돼.”
자신이 칼리오페를 향해 쓰레기를 던지고 욕을 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갑자기 든 생각에 핫, 하고 숨을 들이킨 영애가 옆을 바라봤다. 발작이라도 난 것처럼 몸을 덜덜 떠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
어머니는 몸을 떨며 헐떡이는 와중에도 뭐라 뭐라 띄엄띄엄 말하고 있었다.
“성, 녀님……. 구, 원…….”
“어머니,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크게 뜨인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영애가 자신의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칼……페, 죽, 여.”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어머니. 제발, 제발…….”
부들부들 떨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눈물을 흘리며 성녀를 찬양하고 칼리오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내뱉는 어머니가 그렇게 괴로워 보일 수 없었다.
끔찍하다.
“제발, 리페님. 제발…….”
이대로 어머니가 잘못될 거라는 불안감에 미칠 것 같았다. 영애는 어머니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칼리오페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녀를 현혹하는 빛에서 구해내고 수렁에서 현실로 이끈 노래였다.
“제발, 도와줘요…….”
나를 구해내 준 것처럼 제발, 우리 엄마도 구해줘요.
그 순간이었다.
* * *
“이, 이건……!”
“마,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무슨……!”
상황실에 있던 신관들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섰다.
칼리오페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히죽히죽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향해 쓰레기를 던질 때는 아예 박수마저 칠 정도였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노래를 시작하고 한 두 소절, 그녀가 만들어낸 멜로디가 쌓이기 시작하자—
“이런 바보 같은……!”
콰앙! 대신관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째서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노래에서 에테르가 나오는 것이야!”
대신관의 말대로였다.
오러, 마나, 신성력의 모체이자 원류인 에테르. 모든 생명의 근원인 에테르가 칼리오페의 노래를 타고 흘러나왔다.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파동이 사람들을 감쌌다.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상처 잎은 사람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 오러를 다루는 기사, 신성력을 다루는 신관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마저 느낄 수밖에 없는 거대한 힘. 그 힘을 담은 노래가 확실한 질량감을 가지고 성녀의 노래에 붙들린 사람들을 일깨웠다.
길고 높게 음을 뽑아내 한 소절을 마친 칼리오페가 앞을 바라봤다.
무대 아래는 혼돈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칼리오페가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불쑥, 그녀 앞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언제 나를 불러내나 했더니 이제야 불러주는구나.]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전에 웅장한 목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너무 늦어.]
결코 인간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위엄이 담긴 소리.
칼리오페는 이것과 비슷한 종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촉촉한 흙더미를 스치는 바람 같기도 하고, 깊게 뿌리 내린 나무의 울림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들린 소리는 또 달랐다.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 같은가 하면, 온 세상을 얼리고 뒤흔드는 북풍 같기도 했다.
“아…….”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누군지 알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해후한 가족을 알아보는 것처럼, 칼리오페는 그 존재를 알아보았다.
위대한 바람의 대정령.
먼 태곳적부터 이 세상을 유지해온 존재의 모습이 칼리오페의 두 눈에 온전히 담겼다.
그 웅대한 모습은—
“……뱁새?”
[누가 뱁새라는 거냐!]
뱁…… 아니, 오목눈이가 역정을 내며 포르르 칼리오페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이 몸은 오목눈이라고!]
흥분했는지 자그마한 날개가 세차게 파닥파닥거렸다.
“……죄송합니다.”
칼리오페는 바로 사과했다.
작은 발로 손바닥을 탁탁 치는 오목눈이가 너무 귀여워서 아무리 예법에 바른 그녀라도 한순간 입술이 움찔거린 건 비밀이다.
확실히 지적받은 대로다. 오목눈이를 뱁새라고 오해한 건 대단한 실례다.
뱁새는 붉은빛을 띠는 오목눈이고 눈앞의 오목눈이는 소담한 눈송이처럼 흰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둘 다 오목눈이는 오목눈이였지만 어쨌든 다르다.
표정 관리가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칼리오페는 처음으로 난감함을 느꼈다.
[흥, 어서 계속 노래하기나 해.]
그 말에 칼리오페는 정신을 차렸다.
처음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얼떨떨했지만, 대정령이 나타나는 순간 깨달았다.
‘각성한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진다. 스티그마에 있다고 착각할 만큼 강한 에테르가 칼리오페를 감싸고 있었다.
“네, 정화해야죠.”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오목눈이가 부리를 탁탁 부딪쳤다.
[……뭐 그것도 있지만 듣기 좋으니까. 테라 녀석이 얼마나—]
“네?”
[크흠! 어서 안 불러? 저놈들이 디바인 크리스탈 작동을 멈추면 어쩌려구!]
그 말대로다.
아직 에테르가 퍼져나가는 중인 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정신 지배와 싸우고 있었다. 신전이 디바인 크리스탈 가동을 멈추면 그쪽에 에테르를 전달할 수 없다.
즉,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보고 있는 사람들은 구할 수 없다.
‘나중에—라는 건 없어. 세뇌를 하고 있는 이상 신전이 어떻게 나올지 뻔하니까.’
죽음도 불사르는 수족을 손에 넣은 것이다.
칼리오페는 이미 한 번 전쟁을 겪었다. 그 끔찍한 비극 역시 신전이 사람들을 세뇌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막을 거야.’
산호빛 눈동자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칼리오페는 정신을 집중했다.
땅의 대정령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말한 대로였다. 마치 처음부터 숨을 쉬는 법을 아는 것처럼, 소리를 내는 법을 아는 것처럼, 보는 법을 아는 것처럼. 어떻게 에테르를 다루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진리에 다가간 기분.
칼리오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윽고 인류를 구원할 노래가 퍼져나갔다.
경연장을 넘어 각지에 설치된 크리스탈을 통해, 혹은 사람들의 손안에서.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눈이 멀어 방황하는 영혼들을 인도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빛의 물결이 터져 나왔다. 성녀가 흩뿌렸던 은빛 빛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롱하고 찬연했다.
[……아름답군.]
포르르 날아 칼리오페의 어깨에 안착한 바람의 대정령이 작게 중얼거렸다.
길고 긴 생을 살면서도 이런 광경을 정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작디 작은 소녀가 만들어내는 진실한 기적을, 오랜 약속의 이행을, 그리고.
[고작해야 인간 아이 하나를 이리 애틋하고 특별하게 여기게 될 줄은.]
하지만 칼리오페는 특별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특별했다.
숨구멍을 뚫고 있는 땅고래가 무리해가며 사념을 먼저 보내 맞이할 정도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 이 아이가 소중하다고 말할 정도로. 어떻게든 더 보고 싶어 곧바로 잠들지 않고 마지막 인사를 남길 정도로.
그리고 그건 바람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한한 삶을 사는 대정령에게는 시간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이 작은 여자아이를 보고 싶어서, 보듬어주고 싶어서 하루하루 가는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만나자마자 왜 이제서야 나를 불러냈냐고, 너무 늦었다고 타박할 정도로 애달파 이 순간을 기다렸다.
[이제는 테라 녀석이 날 부러워할 차례군.]
오목눈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몸체를 기웃기웃거렸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네 노래는 네 숨결, 너의 바람에서 나오는 것.’
바람새는 존재할 때부터 바람의 대정령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은 적도, 특별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다. 바람새는 바람새이고, 이 세상을 유지하는 위대한 사명을 지닌 존재일 뿐.
하지만 영원과도 같은 삶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바람의 대정령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유일하고 소중한 아이가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 * *
“대신관님!”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패닉 상태에 빠진 대신관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흠칫, 대신관이 그를 바라봤다.
“결정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정신 지배가 모두 풀릴 겁니다.”
“……결정?”
“예.”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대신관이 남자의 팔을 거세게 뿌리쳤다.
“대체 뭘 결정한단 말인가! 이제 와서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무릎 꿇고 빌라고?”
짓씹듯 말한 대신관이 명했다.
“마이크를 꺼.”
“예? 예.”
컨트롤러 앞에 있던 신관이 서둘러 마이크에 공급되는 마력을 차단했다.
칼리오페의 성량이 아무리 좋아도 새로 증축한 이 거대한 별관을 가득 채울 순 없을 것이다. 노래가 디바인 크리스탈이나 통신기로도 흘러가지도 못할 터.
갑자기 마이크가 꺼졌지만 칼리오페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 노래했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노래였으니까.
[흥, 하찮은 수를.]
콧방귀를 뀐 바람새가 파닥파닥 날개짓을 했다.
그 바람을 타고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더 크고 더 깊게 울려 퍼졌다. 오히려 마이크를 통했을 때보다 더 멀리 뻗어 나갔다.
“……설마 대정령?!”
그제야 대신관은 칼리오페의 곁에 있는 존재를 눈치 챘다. 칼리오페의 주변에 에테르가 너무 짙어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었다.
“대, 대정령이 왜 여기에?!”
“여긴 스티그마도 아닌데……!”
“땅고래일까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땅고래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게 진짜였나?”
“젠장! 그냥 스티그마의 주인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고?!”
신관들은 아까보다 더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에테르를 만들어 내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대정령인 땅고래라니.
대정령.
그 이름의 위압감은 이들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등이 나간 것처럼 눈앞에 컴컴해지고 땀이 비식비식 솟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몇 초도 안 되는 순간에 땀방울이 맺혀 뚝뚝 흘렀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악취가 상황실 안에서 진동했다.
“대신관님!”
신관들이 쥐어 짜내듯 대신관을 불렀다.
대정령이라는 이름 앞에선 한없이 보잘 것 없지만 그들이 기댈 곳이라곤 이제 대신관뿐이었다.
대신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좋으니까 뭐라도.
그때 그의 눈에 칼리오페의 노래를 다른 곳으로 전송하고 있는 디바인 크리스탈이 들어왔다.
“디바인 크리스탈 연결을 끊으라고 해! 어서!”
지금 연결을 끊으면 그래도 각 신전 지부 쪽에서 경연을 본 사람들은 여전히 지배할 수 있다. 전 제국을 손아귀에 넣을 계획이었던지라 아쉽게 느껴지지만 그나마도 큰 수확이다. 경연이 아니었으면 그 정도 인원을 세뇌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을 터.
하지만.
“대, 대신관님…….”
디바인 크리스탈을 맡고 있던 신관이 곤죽이 된 얼굴로 신음처럼 대신관을 불렀다.
“뭐냐!”
“시, 실은 아까부터 신성력을 주입하고 있지 않았는데…….”
대정령이 나타났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손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뭐라고?! 그럼 왜 작동되고 있는 거야!”
대신관이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신관의 말대로 정말로 신성력이 끊겨 있었다.
디바인 크리스탈은 송신하는 쪽과 수신하는 쪽 모두가 신성력을 주입해야 했다. 저쪽에서 신성력을 넣고 있어도 이쪽에서 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설마, 에테르가 저절로…….”
불현듯 든 생각에 대신관이 중얼거렸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에테르가 의지 있는 생명체도 아닌데 어떻게 저절로 움직여 디바인 크리스탈을 조작한단 말인가.
칼리오페가 에테르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은 더 말이 안 된다. 에테르는 인간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마나나 오러, 신성력으로 가공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노래를 타고 흐른 에테르가 디바인 크리스탈을 조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말도 안 돼…….”
대신관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마치 온 우주가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비호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끊어!”
“예?”
“끊으라고! 어떻게든 끊어야 한다! 이대로,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명을 받은 신관이 디바인 크리스탈에 주입되는 에테르를 강제로 끊어내려고 했다.
그가 크리스탈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크아아악!”
불꽃이 번쩍 튀기며 지옥의 겁화와 같은 화염이 그 손을 불태웠다.
“내, 내, 내 손……! 내 손이…….”
신관이 망연자실한 눈으로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이었던 무언가가 검은 숱처럼 매달려 있었다. 감히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강대한 에너지를 섣불리 통제하려 다가 대가를 치른 것이다.
“아, 아, 으아아아아악—!”
그가 오열하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게 탄 자신의 손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 작은 움직임에 검게 탄 손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았다.
“아, 안 돼……. 아니야, 안 돼, 안 돼, 안 돼, 아니야, 안 돼, 내, 내 손, 내 손…….”
신관이 고개를 저으며 하나 남은 손으로 미친 듯이 재가 된 손을 그러모으려고 했다.
“고쳐져! 고쳐지라고!”
몇 번이고 신성력을 들이부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신성력을 완전히 쥐어짜내 탈진할 때까지 그 발악은 계속되었다. 신관들은 그 끔찍한 모습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라봤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형체도 온전하지 않은 숱 검댕이가 되어 재로 폭삭 내려앉은 모습이 마치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져서.
그렇다고 에테르가 가동하고 있는 디바인 크리스탈을 어떻게 해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럴 순 없어…….”
버석 메마른 목소리로 대신관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칼리오페의 노래로 정신 지배를 풀 수 있으니 앞으로 아무리 사람들을 세뇌해도 소용 없다.
“바로 눈앞에 있었다고……. 이 세계가 내 발 앞에 무릎 꿇는 순간이 바로 내 눈앞에…….”
그간 어떻게 준비를 해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절벽으로 떠밀린 것처럼 발밑이 무너져 내린다.
이 순간에도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더 청아하게, 더 고아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신관이 발작하듯 귀를 꽉 틀어막았다.
듣기 싫다.
저 노래가 그의 살을 갉아먹고 심장을 파내고 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그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 * *
“내가 무슨 짓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성녀가…….”
숨 막히는 짙은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곧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겪었으니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니 칼리오페가 보였다.
괜찮다는 듯이, 이제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 짓는 얼굴.
“리페님…….”
어둠 속에서도 그들을 이끈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온전한 안도감이 샘솟아 올랐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봄비에 젖은 땅처럼 마음이 기쁘고 감동이 밀려왔다.
어느새 사람들은 혼란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칼리오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온 세상에 울려 퍼지던 칼리오페의 노래가 끝이 날 때까지.
* * *
노래를 끝낸 칼리오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정신 지배가 대부분 풀린 것 같아요.”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다 풀렸어.]
“다행이네요.”
그렇게 안도하고 있는데—
“우와아아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기쁨과 흥분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흥, 그래도 이 몸을 알아보는군. 인간이 다시 태어나도 보지 못할 대정령의 자취를 느꼈으니 감격할 만도 하지.]
오목눈이가 고개를 쫑긋쫑긋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곤 포르르 날아 칼리오페의 손등에 내려앉아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어때, 전에 테라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는데 그때도 이랬나?]
내가 더 대단하지? 어서 그렇다고 말해.
까만 깨 같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 기대는 깨졌다.
“성녀님!”
“진짜 성녀님이시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만세!!”
“진정한 성녀님!!!”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부르짖으며 목 놓아 외쳤다.
[뭐, 뭐야? 내가 아니라 너야?]
오목눈이가 당황해서 파닥파닥거렸다. 괜히 칼리오페 앞에서 폼 잡았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오목눈이의 색이 붉어졌다.
“새 깃털이 붉어지기도 하나요?”
신기한 기분에 칼리오페가 속닥속닥 물었다.
[이 몸은 단순한 새가 아니니……가 아니라! 붉어지지 않았어! 나는 뱁새가 아니야!]
‘아무도 뱁새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칼리오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목눈이의 깃털을 쓸어주었다.
“그럼요. 오목눈이시죠.”
[흥!]
바람새는 콧방귀를 끼면서도 칼리오페의 손가락에 몸을 기댔다.
아이에게서 나는 산다화 향기와 따뜻한 손길이 기분 좋아 고롱고롱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 * *
무대 뒤쪽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성녀가 커튼을 꽉 틀어쥐었다. 진짜 성녀님이라며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가시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진짜 성녀라니……. 그럼 나는.”
성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피가 터져 흘렀다. 그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그녀는 상처 난 입술을 계속해서 질근질근 씹었다.
이럴 순 없다.
“내가 성녀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을 겪었는데…….”
하지만 사람들이 부르짖는 성녀는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
“성녀님! 부디 저희를 용서해주세요.”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세요!”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향해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를 욕하고 쓰레기를 던졌던 게 그렇게 후회되고 죄스러울 수 없었다.
“가짜 성녀가 저희를 세뇌했기 때문입니다!”
“맞아! 신전 놈들이 우리를 속였어!”
“더러운 신전 놈들!”
용서를 빌던 사람들이 신전과 성녀를 향해 치를 떨었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신전과 성녀였다.
“가짜 성녀를 끌어내!”
“신관놈들을 잡아 들여!”
“진짜 성녀님께 무릎 꿇리자!”
“감히 리페님을 능멸한 죄를 목숨으로 갚으라고 합시다!”
“그럽시다!”
마치 봉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며 세차게 일어났다.
그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진짜 성녀를 봤다는 감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정신을 지배당해 소중한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신전의 개가 되었었다. 칼리오페를 좋아한다는 어린 자식들에게 손찌검은 물론, 집밖으로 내쫓았던 적도 있다. 아내나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폭언하며 이혼을 요구한 적도 있고, 다 늙으신 부모님을 굶긴 적도 있다.
가짜 성녀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정신 지배는 더 강해졌다.
종래에는 성녀에게 방해되면 누구든 죽여버릴 것이라는 생각마저 품을 정도로.
모두 세뇌당한 이후에는 온 가족이 성녀만 바라봤기에 평화로워졌다.
하지만 과연 그게 진짜 평화였을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도 못 알아보고 잊어버린 채 기계처럼 성녀만 찬양했다. 가장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이 성녀를 위해 죽었다면 잘 죽었다면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 끔찍한 기억은 세뇌가 풀린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정신 지배에서 풀려나 혼란과 충격에 정신을 놓을 뻔했던 것을 칼리오페의 노래 덕분에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이 안정되었다고 해서 들끓어오르던 감정이 푹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맑고 깨끗해진 정신으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되돌아보니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됐다.
정신을 지배당해 저지른 일이었다.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서 상처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준 사람도, 상처 받은 사람도 가슴이 뜯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상처 받은 마음은 원망과 분노가 되었다. 가장 원망스럽고 화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왜 세뇌 당해서 그런 짓들을 저질렀단 말인가.
하지만 스스로를 아무리 탓해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기에 분노는 곧 그 원인을 제공한 자들에게 쏠렸다.
신전과 가짜 성녀에게.
소중한 이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은 채 소리를 질렀다.
민중의 외침이 불씨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달궜다.
가짜 성녀를 찬양하며 하나가 되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음이 온전히 하나로 모인 느낌이었다.
* * *
“아악!”
“안 돼! 다가오지 마!”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품계를 받은 고위 신관이…… 커헉!”
“성기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나를 보호해!”
“감히 내게 손을 대? 내 신성력이 없으면 너희는 모두 병 들어 죽는다는 것을 모르나!”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물러가면 용서해주마!”
사람들이 상황실에 처들어온 바람에 신관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평소 거드름 피우던 모습과 달리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까지 했다.
“성기사! 성기사!!”
“신관들은 다 어디 있느냐! 저들을 막아!”
하지만 그 명을 듣고 달려오는 자들은 몇 없었다. 모두 먼저 잡혔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스 신전의 신관과 성기사라고 해서 모두 다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진 않았다. 기밀에 속하는 일이었기에 고위 신관들과 고위 성기사들, 그리고 그들의 수족이 되어줄 몇몇만 진상을 알고 있었다.
또 진상을 아는 정도도 다 달랐다.
전부 다 알고 있는 것은 고위 신관과 성기사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평범한 신관과 성기사들은 이번 사건으로 큰 패닉에 빠졌다.
진짜인줄 알고 따르던 성녀가 사실은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었고, 가짜라니! 심지어 진짜 성녀는 그렇게나 깔보고 욕했던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아닌가!
천박한 속가를 유행시킨 칼리오페 루스티첼 때문에 신전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어왔고 그게 진실이었다.
그런데.
“진짜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성녀라고?”
“대, 대체 뭐가 맞는 거야…….”
신전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외침이 땅을 울렸다.
신관들은 벌벌 떨며 웅크렸다.
평생 믿고 따르던 것이 무너져내렸다.
이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 * *
‘……병사?’
칼리오페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고위 신관들을 줄줄이 끌고 오는 사람들의 행색은 평범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눈에는 전혀 평범하지 않게 비쳤다.
비록 기사는 아니지만 무가인 루스티첼 가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훈련 받은 사람들을 보고 자랐다. 신관들을 끌고 무대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평복차림을 한 병사가 분명했다.
‘레아스구나.’
짧은 순간 왜 병사들이 여기 있는지 판단을 마친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소 지었다.
“여기 우리를 속인 신관들을 잡아왔다!”
병사가 외치자 사람들이 발을 굴리며 소리를 질렀다.
“더러운 신관놈들!”
“신의 뜻을 따른다면서 사람들을 세뇌해?!”
“너네 때문에 나는 우리 애를 영영 못 볼 뻔 했어! 생이별할 뻔했다고!”
사람들의 외침에 신관들이 희게 질린 얼굴로 주춤거렸다. 살면서 존경만 받아왔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나 멍청하다고 비웃고 우습게 본 민중들이 처음으로 두려웠다.
“아악! 이거 놔라!”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높다랗게 울렸다.
“나는 성녀다! 이 세상을 구원하고 너희를 평안으로 이끌 신의 사자이니라!”
팔목을 틀어 잡힌 가짜 성녀가 무대로 끌려 나오며 외쳤다. 항상 고요하고 신비롭던 은빛 눈동자를 표독스럽게 치켜뜬 채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칼리오페를 발견한 가짜 성녀가 자유로운 팔로 손가락질하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넌 성녀가 아니야! 아니라고!”
발악하듯 외치는 모습은 도저히 한 때나마 성녀라 추앙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너 따위가— 꺄아악!”
가짜 성녀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강제로 무릎 꿇리며 호통을 쳤다.
“감히 성녀님께 뭐라고 하는 건가!”
가짜 성녀와 신전이 사람들에게 끔찍한 가해자라면 칼리오페는 고마운 은인이었다.
잊었던 소중한 마음을 되찾게 해주고 하마터면 영영 놓칠 뻔했던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게 해주었다. 하물며 자신들은 칼리오페를 핍박하고 괴롭혔다.
그런데도 칼리오페는 자신들 앞에 서서 몰매 맞을 각오를 하고 구원해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마녀 때문입니다!”
그때 대신관이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희도 이 마녀에게 정신을 지배 당했습니다.”
“뭐라고?”
성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대신관을 바라봤다.
“마, 맞습니다! 여러분 역시 이 마녀에게 정신이 붙들리지 않았습니까!”
“신관의 본분을 잊고 세뇌된 것도 저희 잘못이지요. 하지만 마녀의 마성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신관들이 대신관의 말에 동조하며 너도나도 외쳤다.
성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관들을 바라봤다.
“지금 어떻게, 내게…….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당신들이 내게 사람들을 세뇌하라고—”
“마녀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또 사람을 미혹시키려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감히 진짜 성녀님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대신관이 사죄하며 칼리오페를 향해 엎드려 절했다.
땅바닥에 이마를 박으면서 그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대신관이 된 이후로 황제에게도 절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제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조그마한 여자애 따위에게 절하다니.
‘이 치욕은 절대 잊지 않겠다.’
지금은 우선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성녀님!”
“진정한 성녀님!”
“마녀에게서 저희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관들이 대신관을 따라 너도 나도 칼리오페에게 절했다.
칼리오페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주 유치한 촌극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렁찬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 아주 우습구나!]
신관들이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몰아치며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각성하며 힘을 받아들여 머리카락이 칼리오페의 키보다도 더 길게 자라 있었다.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이 파도치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신성하게까지 느껴졌다.
[너희는 틀렸다. 저 여자의 말이 옳다.]
차갑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위압감이 드는 음성이었다.
[이 아이는 성녀 따위가 아니야.]
성녀가 아니라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관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칼리오페가 세뇌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을 직접 보고 겪지 않았던가.
[오랜 세월을 살며 너희가 성녀라 이름 붙인 인간들을 더러 보았다. 신성력이 눈에 띠게 강대한 인간들이었지.]
대정령의 말에 신관들이 움찔했다.
[자, 네가 말해보아라. 이 아이가 다루는 것이 고작 신성력이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엎드려 있던 대신관의 고개가 위로 휙 들렸다. 대신관을 지목한 것이다.
“그, 그게…….”
대신관은 시선을 앞으로 향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대정령이 바람으로 강제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다시 고개를 조아렸을 기세였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대신관님, 이제 그만 포기 하시지요.”
옆에 있던 긴 로브를 입은 사내가 보다 못하겠다 듯 끼어들었다.
“감히 대신 고합니다. 그 분이 다루시는 건 모든 생명의 근원인 에테르입니다.”
긴 로브가 예를 갖춰 절하며 말했다.
“에테르?”
“에테르라고?”
관객석에 있던 평범한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괜히 손을 허공에 휘저어보기도 했다.
칼리오페가 엄청난 힘을 내보내 세뇌를 풀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힘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대기에 머물러 있었다. 새벽 공기처럼 청량하기도 하고 부드럽고 다사로운 춘풍 같기도 한 힘.
고요하고 편안하지만 견고하며 단단하기까지 했다. 워낙 강한 힘이라 느끼긴 했지만 오러, 마나, 신성력을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게 뭔지 구별해낼 능력은 없었다.
그저 기적을 행했으니 성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아생전 에테르를 직접 느끼게 되다니…….”
사람들은 감격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살아생전 스티그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살롱 스티그마가 아무 대가도 없이 개방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에테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 한해서다. 안 그러면 아비규환이 될 테니까.
“그런데 에테르라는 게 사람이 다룰 수 있는 거였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기본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다.
에테르는 사람이 감히 다룰 수 없는 강대한 힘이다.
[그래, 에테르지. 성녀 같은 게 다룰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나?]
역사에 위대한 성녀가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성녀도 에테르를 다룬 적은 없었다.
[애초에 성녀라는 이름 자체가 너희 인간들이 붙인 것이다. 신성력이 다른 신관들보다 강하다고 하나 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나 마찬가지.]
그 말에 대신관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 성녀가 저희가 붙인 거라니요. 대정령께서 인간의 일을 잘 모르시니 오해한 듯합니다. 성녀는 신의 사자이자 인류의 구원자입니다. 뭔가—”
[그럼 내 물어보마. 신화나 성서에 성녀가 등장하던가?]
“신화에는 없지만 성서에는 등장합니다. 그러니…….”
[아아, 후대에서 신전의 위대함을 알리겠답시고 집필한 것 말하는가?]
목소리에서 노기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한층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게 신의 행적을 기록한 성서인지 그저 인간의 역사서인지 잘 생각해보고 말해야 할 것이야. 네가 신관이라면 더더욱.]
대신관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관님, 그만하십시오.”
긴 로브가 대신관의 옷자락을 잡고 말렸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대정령이시여.”
[흥, 내게 행한 무례는 별것 아니다.]
사죄하는 긴 로브를 향해 대정령이 코웃음을 쳤다.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였지만 별것 아니라는 말에 그가 안도하려는 찰나였다.
대정령이 이어 말했다.
[너희가 내 소중한 아이에게 행한 짓거리에 비하면 말이지.]
늪지에 고인 바람처럼 어둡고 습습한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광풍이 몰아쳤다.
“꺄아아악!”
허공을 찢어발기는 바람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대정령님.”
그러나 칼리오페의 나직한 부름 한마디에 천지를 뒤흔들 것 같았던 풍랑이 일시에 멎었다.
[……내 이름은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다. 특별히 제피루스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지.]
왠지 볼멘 목소리였다. 칼리오페가 손바닥 위에 있는 바람새를 바라보니 확실히 심통이 난 얼굴이었다.
“아,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
“바람의 대정령?”
그녀가 정령이 왜 심통이 난 건지 고민하는 사이 사람들이 깜짝 놀라 수군거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긴 로브가 대정령이라고 언급할 때까지 이 신령한 목소리의 주인이 대정령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에테르와 신성력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대정령의 기운을 구별해낼 능력 따위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평범한 사람도 바람의 대정령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성격이…… 까놓고 말해 지랄 맞기로 유명했으니까.
땅의 대정령 프네우마케투스테라는 온화하고 상냥한 성정이라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들에게 호의적이다. 자신이 뚫은 숨구멍을 놓고 인간들이 무슨 짓을 벌여도 딱히 참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다르다.
그의 변덕에 인류가 겪은 재앙만 몇 번이던가.
신화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의 이름만큼은 외우고 있었다. 인간의 역사서에 가장 많이 언급된 대정령이니까.
바람새는 인간을 싫어하고 인간을 돕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칼리오페를 놓고 하는 말들은 대체 뭔가.
“제피루스님.”
칼리오페의 부름에 오목눈이가 팩 토라졌던 얼굴을 바로 했다.
칼리오페는 새가 이렇게 표정이 풍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바람의 대정령의 악명은 칼리오페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항상 과장되거나 축소되기 마련이다.
직접 만난 바람새는 솔직하지 못한 면이 있지만 다정했다. 각성했기 때문에 대정령을 가족처럼 가깝게 느끼게 됐긴 했지만 그걸 빼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렇게나 귀여운 오목눈이가 아닌가.
자고로 귀여운 털짐승이 못됐을 리 없다.
[내 소중한 아이가 말리니 그만하도록 하지. 하지만 너희는 너희의 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람새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천공을 가르는 바람. 높은 곳에서 보면 세세한 것은 보이지 않고 큰 것만 눈에 띠기 마련이지.]
그가 하는 말은 명확했다.
[인간 하나하나의 사정은 내게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유라도 칼리오페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
바짝 얼어붙은 사람들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그간 칼리오페를 핍박하고 괴롭혔던 신관들은 완전히 시체마냥 시퍼렇게 질렸다.
드넓은 경연장 안에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포악하기로 유명한 바람의 대정령이 대놓고 하는 말에 다들 겁을 집어 먹었다.
칼리오페가 대단한 존재인 건 오늘 수 없이 깨달았다. 직접 사람들을 구원해주고, 에테르를 다루고, 거기다 폭군이라 불리는 바람의 대정령을 길들이다니.
하나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존경심을 넘어 두려움마저 들기 시작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는 위대한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정령의 경고와 세뇌 당했던 자신이 칼리오페를 향해 쓰레기를 던졌던 게 자꾸만 생각났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공포심을 읽은 칼리오페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로서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칼리오페는 사람들이 전생과 달리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지, 공포에 질린 채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 데, 그때 무대 위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밟지 않은 눈처럼 순결한 은빛 머리칼, 푸른 눈동자.
“화, 황자님?”
“황자님이시다…….”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들에게도 반편이 같은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아스타레아스가 더 황자로 느껴졌다.
비단 그가 직계적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민심을 잡고 사람들이 의지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칼리오페는 자신 앞으로 다가온 아스타레아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아스타레아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스타레아스는 현 황제의 대관식에서조차 무릎을 꿇은 적 없는 사람이었다.
칼리오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주저했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에게 무릎을 꿇은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했다. 심지어 칼리오페의 흙발을 자신의 발등 위에 얹고 춤추었던 적도 있다.
칼리오페 앞에서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이 존귀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는 오로지 칼리오페뿐인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전 제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중하고도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리페.”
“레아스.”
칼리오페가 그의 손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온기에 칼리오페는 그제야 자신이 꽤 긴장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들을 겪고 있으니 그럴 법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안심하라는 듯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켰다. 사라락, 결 좋은 그의 머리카락이 그가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흐트러졌다.
그가 눈을 감는 장면이 천천히, 느릿하게 보였다. 긴 속눈썹이 내려앉고 우미한 얼굴에 깊은 음영이 물든다.
이윽고 손등에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촉, 젖은 마찰음과 함께 화인처럼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칼리오페의 살갗을 눌렀다.
칼리오페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아스타레아스에게서 키스를 받는 게 처음도 아닌데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아까와 분명하게 다른 이유로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스타레아스가 살며시 눈을 뜨고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레이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입술이 차근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시각보다 촉각으로 더 먼저 느껴졌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붉은 입술이 흰 손등을 간질였다.
화르륵,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레이디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예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아스타레아스의 행동은 도무지 단순히 예를 차리는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뭐가 문제냐고 물으면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하여간 그랬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이, 표정이, 목소리가— 모든 것이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창 때의 아가씨들은 물론, 나이 지긋한 노부인도, 심지어 남자까지 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았다. 예라기 보단 마치 구애하는 것 같은 느낌이고, 그보다는 연인의 밀회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답다는 게 노래가 아니라 칼리오페를 보고 하는 말 같았다. 노래를 칭찬하는 게 저렇게 사심을 넘어 흑심 가득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지금도 그렇다.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는 눈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진대 칼리오페는 어떻겠는가.
“레, 레아스…….”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소녀의 얼굴은 수줍음과 설렘, 그리고 새싹처럼 자라나는 연정으로 발그스름히 물들어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이 경연장에 마련된 커다란 전광판과 각지에서 중계 중인 디바인 크리스탈, 통신석에 비치는 순간,
“안 돼!”
커다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 한 명이 외친 것도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부르짖은 것이다.
“우, 우리가 리페를 어떻게 키웠는데……!”
“고이고이 키운 우리 애를……!”
갑자기 칼리오페에 대한 양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자그마치 십 년 동안이나 칼리오페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다. 중앙 광장에 칼리오페의 생일 사진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일 년이 가는 것을 느끼며 살아왔다. 우리 조카, 우리 아가씨하며 모두 마음으로 키워왔다.
그런데.
“이렇게 홀라당…….”
“아직 우리 애한테는 일러!”
“하지만 상대는 황, 아니, 공자님이잖아요. 잘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찬성인데.”
“맞아. 솔직히 공자님만큼 우리 리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어딨다구요.”
“둘이 너무 잘 어울려. 지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이 되는데.”
“저는 리페에게 연애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이지만, 눈이 호강을 넘어 정화되고 있다는 생각은 드네요.”
“니카이논에서 중계 영상을 저장해서 판다고 했는데 이것까지 다 저장되려나.”
“아, 팔아줬으면 좋겠다. 엄청 설레지 않나요?”
“설레는 건 둘째 치고 곱게 키운 우리 애를 이렇게 쉽게 넘길 순 없죠!”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구름처럼 경연장을 가득 메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칼리오페를 올려다 보던 사람들이 우리 애한테 연애는 이르니, 아니니 하고 있다. 폭군이라 불리는 바람의 대정령의 협박과 세뇌 당했던 시절 저질렀던 잘못에 한순간 위축되긴 했다.
그러나 수년 간 쌓아온 정이 단숨에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로서 우뚝 서 있는 칼리오페가 아니라 그들이 봐왔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인 칼리오페.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본래의 마음이 되살아났다.
칼리오페는 제 연애에 대해 자기 일처럼 심각하게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후, 하고 웃었다. 위축된 게 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사람들은 전처럼 편히 자신을 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 덕분에 풀릴 계기가 마련됐다.
“고마워요, 레아스. 이걸 위해서 그러신 거죠?”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잡아 일으켜 세우며 속삭였다.
아스타레아스의 고개가 나른히 기울어졌다.
“그것만 이라고 생각해요?”
귓가에 닿는 속삭임에 칼리오페가 그를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가 가느스름하게 휜다.
“전국에 중계되고 있으니 이참에 내가 당신 거라고 말한 건데.”
그의 입술이 귓가에 스쳤다. 뜨거운 숨결에 솜털이 쭈뼛 선다.
“나는 당신 거예요.”
* * *
“리페…….”
“네, 저 정말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진짜예요.”
칼리오페는 세 시간동안 계속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그 말에 가족들은 칼리오페를 더 꽉 끌어안았다.
처음에 가족들이 달려와서 괜찮은지 확인하고 끌어안으며 걱정했을 땐 가슴이 뭉클했었는데, 이제 세 시간이 넘어가니 슬슬 어깨가 결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저 이제 그만…….”
하지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울망울망한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방에 들어가겠다는 말이 쏙 사라졌다.
“그만? 방에 들어가려고?”
“어디 아픈 거 맞지?”
“혼자 끙끙 앓을 필요 없다, 리페.”
“리페, 네게는 가족들이 있어. 의지해도 된단다.”
‘아니……. 제 몸은 진짜로 괜찮았는데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때문에 결려오기 시작하는데요…….’
소중한 가족들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칼리오페는 하하,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오목눈이가 불만스레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칼리오페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가족들이 방해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인간들을 바람으로 휙 날려 버리고 싶지만…….’
칼리오페를 눈치를 보니 그랬다가는 자신을 싫어할 것 같아서 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였다.
대정령에게 시간은 무의미했지만, 칼리오페와 함께 하는 시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희보다 강한 아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그만 내버려둬.]
“제피루스님.”
[난 너희에게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어!]
바람이 휙 불었다. 가볍게 분 바람이라 그저 칼리오페의 머리만 살짝 나폴거렸을 뿐이다.
칼리오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바람새는 포르르 그 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칼리오페는 심통 부리는 오목눈이가 귀엽다는 듯이 목 깃털을 쓸어주었다.
아무리 봐도 귀여운 애완동물을 다루는 품새라 위대한 바람의 대정령께오선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화를 내기엔 아이의 손길은 정말…… 기분 좋았다. 저도 모르게 눈까지 감고 아예 손가락에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리페, 손을 꼼지락거리는 게 설마 대정령님을 만지고 있는 거니? 네 손에서 대정령님의 기운이 느껴지긴 한다만…….”
칼리오페의 손짓이 너무 털짐승을 쓰다듬는 그것이라 루스티첼 백작이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설마하니 자신의 딸이 신화의 존재를 애완동물 다루듯 다루겠는가.
“아, 네. 보이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 설마가 사실이었다.
[인간들에겐 위대한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 그림자만 겨우 볼뿐.]
위대한 모습을 한 오목눈이가 말했다.
“그래, 엄마에게는 일렁이는 기운만 느껴진단다.”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볼 수 없어. 값싼 테라 녀석과는 다르단 말이다.]
바람새는 은근슬쩍 칼리오페에게 넌 특별 취급 받고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테라님은 값싸지 않으신데.”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나무라는 듯한 시선뿐이었다. 그것도 슬리퍼를 물어뜯은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흠흠, 테라 놈이 값싸다는 건 아니고……. 내가 비싸다는 뜻이지.]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변명을 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지고의 존재인 자신이 왜 혼나는 강아지처럼 아이의 눈치를 보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칼리오페가 착하다는 듯 부리를 매만져주자 당황스러우면서도 왠지 뿌듯했다.
“다른 사람은 못 본다니 조금 아쉽네요. 굉장히 사랑스러운데…….”
사랑스럽다고? 오목눈이가 자랑스레 깃털을 부풀렸다.
[……네 가족이라니 보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마.]
그 말이 끝나자마자 로베르트가 깜짝 놀란 얼굴로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를 가리켰다.
“어어? 뱁—”
[누가 뱁새라는 거냐!]
“와아, 진짜 귀엽다!”
위대한 대정령님의 호통은 들리지도 않는 건지 로베르트가 활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만지는 건 허락하지 않았어!]
바람새가 포다닥 손길을 피했다.
“어머, 정말 귀엽네.”
루스티첼 부인이 당황했던 얼굴에 생긋 미소를 띠웠다.
설마하니 바람의 대정령의 모습이 조그마한 오목눈이일 줄은 몰랐다. 깜짝 놀랐던 게 가시니 그 귀여운 외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감히 누구더러 귀엽다는 거냐! 무엄하다!]
폭군 중의 폭군, 무자비하고 냉혹한 바람의 대정령이 버럭 성을 냈지만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날개를 파닥파닥거리며 성을 내는 눈송이가 귀여웠으면 귀여웠지, 무서울 리 없었다.
원래 사람은 시각 정보에 가장 많이 의지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루스티첼 일가에게 두려운 것이라고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막내가 화를 내는 것.
그들에겐 신화 속 위대한 존재의 분노보다 막둥이 화가 더 무서웠다.
‘이젠 못 참아……! 이 몸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이의 가족이니 죽이진 않더라도 혼쭐은 내줘야겠다.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가 막 깃털을 부풀렸을 때였다.
“그러게요. 귀여워서 리페랑 잘 어울립니다.”
그간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오목눈이를 손에 든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던 루시우스가 툭 내뱉었다.
휘몰아치려던 바람이 일순 훅 가라앉고 부풀렸던 깃털이 절로 내려앉았다.
‘잘 어울린다고……?’
그때 찰칵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루스티첼 백작이 묵묵히 딸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뭘 또 사진을 찍고 있어.]
오목눈이는 타박하듯 말하면서도 은근슬쩍 가슴 깃을 부풀렸다.
아이와 함께하는 늠름한 자신의 모습이 잘 나오길 바라며.
* * *
칼리오페는 겨우겨우 가족들을 떼어내고 방안에 돌아와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끝나고 바람새를 돌려보낸 뒤 잠시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던 때였다.
“유모 아까부터 왜 그래?”
칼리오페는 아까부터 서성이는 유모를 보고 물었다.
“네?”
유모는 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계속 안절부절 못 하고 있잖아.”
“아휴, 아니에요.”
유모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칼리오페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어디 불편한 데 있어?”
조심스레 자신을 올려보며 묻는 아가씨의 모습에 유모는 마른침을 삼켰다. 칼리오페의 커다란 눈망울이 유모의 양심을 따끔따끔 찔렀다.
“혹시 세뇌 때문에 힘들다거나…….”
칼리오페의 눈매가 심각해졌다.
바람의 대정령이 나타난 바람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가족들과 유모는 성녀의 정신 지배에 걸리지 않았지만, 뭔가 후유증이 있다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유모는 절대 아니라며 손을 내젓다가 칼리오페와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더는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실은—”
* * *
똑똑똑.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족들이 휙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눈빛이 분주하게 오갔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그와 동시에 칼리오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 눈치를 보았다.
“어어, 우리 리페 왔어?”
“방에서 더 쉬지 그랬니.”
부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에 칼리오페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제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방안에만 있겠어요.”
그 말대로 응접실에는 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이 또 있었다.
“레아스.”
“리페.”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으며 칼리오페를 맞았다.
찻잔이 빈 것을 확인한 칼리오페가 책망하는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레아스가 왔는데 제게 알리지도 않으시고…….”
“리, 리페…….”
“온 가족이 다 둘러앉아서 괴롭힌 건 아니겠죠?”
“그, 그럴 리가 있겠니!”
“그, 그래. 손님을 냉대하는 건 루스티첼 가의 가풍에 맞지도 않아.”
누가 봐도 나 뜨끔했어요, 하는 말투라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왜 찻잔이 다 빌 때까지 제게 알리지도 않았어요?”
그 말에 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칼리오페는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아스타레아스에게 착착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흡사 악당의 무리에서 레이디를 구해주는 기사님 같은 기백이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기꺼이 그의 기사님의 손을 잡았다.
“안 돼! 리페는 오빠랑 결혼할 거라고 했어!”
그간 울망울망한 눈으로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던 로베르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형님.”
아스타레아스가 로베르트를 향해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리페는 저랑 혼인할 거라서요.”
그 말에 놀란 건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네에……?”
크게 뜨인 산호빛 눈동자를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가죠, 내 미래의 부인님.”
“네?”
휙,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칼리오페는 무슨 상황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안아 든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달칵. 부드럽게 응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저, 저 놈이……!”
“감히 우리 막내를…….”
“누가 허락할 줄 알고?!”
방음을 뚫고서 가족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로베르트만 잠잠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방금 아스타레아스의 공격으로 입은 내상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듯 했다.
칼리오페는 안긴 그대로 굳어 있다가 아스타레아스를 올려다 봤다. 푸른 눈동자가 곧장 그녀를 내려다보며 사르르 아찔하게 미소 짓는다.
“아…….”
칼리오페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울렸다.
그게 자신의 심장인지, 얼굴 가까이 있는 아스타레아스의 심장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슬쩍 그의 품에 기대니 그의 고동 소리가 들렸다. 제 심장과 하나가 되어 같은 박자로 울리고 있다.
따스하고 단단한 품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칼리오페는 안온하면서도 설레고, 긴장되면서도 포근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온 집안을 안긴 채 돌아다닌 바람에 고용인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도 모른 채.
뒷목을 잡으며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이를 갈았다는 것 역시 꿈에도 모른 채.
* * *
“죄송해요, 우리 가족들인 좀 유난이죠.”
“당신 같은 딸과 동생이 있는데 이 정도면 유난이 아니라 양호한 거죠.”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는 칼리오페의 방 안에 도착해서도 그녀를 놔주지 않고 안은 상태 그대로 소파 위에 앉았다.
“나였다면 절대 이렇게 웬 놈팡이와 단 둘이 있게 하지 않았을걸요.”
“레아스가 웬 놈팡이는 아니잖아요.”
칼리오페가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아스타레아스가 꿍꿍이를 감춘 미소를 지었다. 칼리오페에게 수작질하려는 걸로 따지자면 이 세상에서 자신만큼 놈팡이란 말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칼리오페에게 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신사다운 미소를 유지한 채 칼리오페에게 졸랐다.
“웬 놈팡이가 아닌 사람이 나뿐이었으면 좋겠는데—”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가 애원하듯 응시해오자 칼리오페의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응? 다른 남자랑 이렇게 단 둘이 있으면 안돼요.”
“레, 레아스도 차암…….”
촉,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칼리오페의 볼에 닿았다.
“사랑스러운 볼에 키스해도 안 되고.”
촉.
“예쁜 이마에 키스해도 안 되고.”
촉.
“귀여운 콧잔등에 키스해도 안 돼요.”
뺨과 이마, 콧잔등에 차례로 아스타레아스의 키스를 받은 칼리오페가 부끄러운 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힐끔 고개를 들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입술은요?”
아스타레아스는 순간적으로 심장에 가해지는 무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뚝 끊긴 이성 때문에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커다란 손이 칼리오페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고요하게 끓는 푸른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잡아먹힐 것 같은 강렬한 눈빛에 칼리오페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파르르, 연약한 그녀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천천히,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쿵쾅대는 심장이 귓가를 울렸다. 칼리오페는 차마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서로의 콧대가 살짝 닿고 스치듯 미끄러졌다.
뺨을 감싼 손가락이 스르륵 움직여 칼리오페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한 호흡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 시선에 가득 담긴 열망을 이기지 못하고 칼리오페는 눈을 꼬옥 감았다. 곧 다가올 무언가에 절로 몸이 긴장했다.
그러나 이윽고 입술에 닿은 온기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얕았다.
‘아?’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떨어지는 느낌에 칼리오페가 눈을 떴다. 아스타레아스는 호흡을 고르며 그녀의 이마에 툭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나를 너무 시험하지 말아요.”
조금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그를 바라봤다.
이마를 뗀 아스타레아스는 그림처럼 입매를 올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미소가 평소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무언가를 감추는 것 같은 미소였다.
미소로는 숨기지 못한 진득한 시선이 칼리오페의 입술을 훑었다. 그저 시선일 뿐인데도 마치 입술을 직접 어루만지는 것처럼 뜨겁고 아찔했다.
“당신과 관련되면 나는 너무 쉽게 이성과 자제력을 잃으니까.”
속삭이는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칼리오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말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어리지 않았다. 입을 맞추는 게 그와 그녀가 항상 하듯 입술만 닿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역시.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 둘 다 각자의 방법으로 전생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품에서 호다닥 몸을 일으켰다.
부끄러움과 난처함에 귀까지 발갛게 익었다.
“아, 그, 으음, 차를 내오라고 할게요.”
차마 아스타레아스를 보지 못하고 변명하듯 말한 그녀가 설렁줄을 당긴다는 핑계로 멀어졌다. 아스타레아스에게서 등을 돌렸건만 아까보다 배는 그가 신경 쓰였다.
칼리오페는 괜히 하녀가 들어올 때까지 문가를 서성였다.
사실 가장 부끄럽고 난처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스치는 정도로 아주 얕게 입을 맞췄을 때—
칼리오페는 제 양 손바닥에 조그마한 얼굴을 폭 감췄다.
—그녀가 느낀 것은 분명 아쉬움이었다.
그걸 깨닫자 도저히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하녀에게 다과를 명하고 나자—하녀가 아스타레아스를 불손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정신 없는 칼리오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핑계가 없었다.
칼리오페는 답지 않게 우물쭈물 걸어 아스타레아스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바로 옆에 앉진 않고 긴 소파의 끝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아스타레아스는 눈매를 휜 채 잠자코 칼리오페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리오페가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게 다분히 느껴져 만족스러웠다.
그는 굳이 이 어색함을 깨지 않았다. 충분히 칼리오페가 어색해 하고 의식하도록 둘 생각이었다.
테이블에 다과가 세팅되고 차 한 잔을 빠른 속도로 쭉 넘기고서야 칼리오페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경연 때는 어떻게 된 거예요?”
아스타레아스가 빈 잔에 차를 따라주는 것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물었다.
“저는 성녀의 노래를 듣고 당연히 정신 지배에 걸릴 줄 알았는데…….”
아스타레아스는 멀쩡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요. 성녀의 세뇌 따위에 당할 정도로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약하지는 않다고.”
그 말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스타레아스는 어쩜 이런 말을 부끄럼 없이 하는 걸까.
어쨌든 그의 말이 옳았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성녀의 신성력 따위에 지지 않으니까.]
경연 전, 아스타레아스는 불안해하는 그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었다.
“날 믿지 않은 거예요?”
“미, 믿었어요.”
“흐음.”
“……믿고 싶었죠.”
“그때는 고개를 끄덕였으면서. 혼나야겠는데.”
아스타레아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혼이요?”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부모님께도 혼나본 적이 없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슬쩍 웃더니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꺅!”
작은 비명과 함께 소파 끝에 있던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품으로 쓰러졌다.
“이렇게 내 품에 끌어안고 온종일 벗어나지 못하게 할 거예요. 나만 바라보고 내 말은 뭐든 믿도록.”
아스타레아스가 흐트러진 칼리오페의 머리칼은 차분차분 넘겨주며 말했다. 그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칼리오페의 긴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건 벌이 아닌걸요.”
“정말?”
“…….”
칼리오페는 붉어진 얼굴을 휙 돌렸다.
“안 되죠. 나만 바라봐야 하잖아.”
벌 받는 중이니까.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이며 부드럽게 칼리오페의 얼굴을 돌렸다. 칼리오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비꼈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포기한 듯 아스타레아스를 마주 보았다.
“레아스.”
“네.”
“고마워요.”
올곧은 산호빛 눈동자가 진지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정말로 믿고 싶었어요. 내 믿음에 보답해줘서 고마워요.”
아스타레아스가 성녀에게 정신 지배 당해 자신을 싸늘한 눈으로 본다는 상상만으로도 칼리오페는 가슴이 시려왔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녀는 단순히 최면을 거는 게 아니라 신성력을 통해 이적을 행하는 것이니까.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의 사랑이 약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마음이 강하더라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건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소용 없는 저항이 만약 현실이 된다면, 그건 분명히 기적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게 당신은 기적이에요.”
꾸밈도, 과장도, 숨김도 없이 말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과연 그녀는 알까.
그녀야 말로 기적이라는 것을. 불행과 의무만 가득했던 아스타레아스의 인생에 단 하나의 빛이 바로 칼리오페란 것을.
그녀는 그를 기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녀가 없으면 그는 암흑 속에 처박힌 채 살았을 것이다.
“리페…….”
“자, 그럼 이야기해줘요. 당신이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사랑만 믿고 관람석에 있진 않았을 거잖아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피식 웃었다. 그가 그녀를 아는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칼리오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다. 확신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성녀의 노래 따윈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녀는 노래를 통해 나오는 신성력으로 정신을 지배하죠. 신성력은 에테르에서 나오고.”
“네, 그래서 상위 에너지인 에테르를 사용하는 제가 세뇌를 풀 수 있었던 거고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와 오러 역시 신성력처럼 에테르를 가공해서 사용하는 힘이죠.”
“그 말은…….”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마법사와 기사가 싸울 때 마나와 오러를 이용해 상대의 기술을 상쇄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성력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상쇄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신관들이 신성력을 통해 치유 하다 보니 상쇄할 이유가 없어서 여태까지 안 했을 뿐.
“네, 마나를 통해 상쇄했죠. 내 마나는 성녀의 신성력보다 강하니까.”
아스타레아스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성녀의 신성력은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보다도 강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전국 단위의 광범위한 마법을 펼칠 순 없으니까.
신혈이 흐르는 만큼 아스타레아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스타레아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이 불러온 기적으로 알아줬으면 했는데.”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기적 맞아요.”
경연 전부터 아스타레아스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피곤해 보였다. 칼리오페는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성녀의 정신 지배를 파훼할 마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마법사는 아니지만, 칸테나 부인과의 친분이 깊기에 칼리오페는 새로운 마법을 창조해내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당신이 나를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서 기적을 만들어 낸 거잖아요. 당신 손으로.”
그저 하늘이 행운을 내려주길, 사랑에 감동하길 기다린 게 아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상처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제 손으로 기적을 움켜쥐었다.
“고마워요, 레아스.”
나를 위해서 기적을 만들어내 주어서.
툭, 아스타레아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길어서 다행이에요.”
아스타레아스가 손가락 사이에 감기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며 속삭였다.
짧은 머리카락이든 긴 머리카락이든 칼리오페에게 잘 어울리지만 남이 억지로 잘라낸 만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한순간에 길게 자랄 줄은 몰랐어요.”
칼리오페가 제 머리카락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너무 길게 자라서 어느 정도는 잘라내야 할 것 같았다.
아스타레아스의 품에서 몸을 바로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관들은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글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뭐든 말해보라는 듯,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눈으로 아스타레아스가 되물었다.
칼리오페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경연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성녀가 가짜일 줄은 미처 몰랐고 당신들 역시 세뇌를 당한 거라고요.”
칼리오페는 자신들 역시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비는 신관들을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루스티첼 영애.”
“절대 저희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신관들의 얼굴에는 절절함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진실을 말하는 듯 했다.
성녀는 분개한 얼굴로 그들을 삿대질했다.
“거짓말! 다 당신들이 꾸민—”
“사람들을 세뇌해 속인 악독한 작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세뇌 당하기 전에 끝까지 반항했던 저희를 길동무로 삼으려고 저러는 겁니다!”
신관들이 목청을 높여 자신들의 결백을 부르짖었다.
칼리오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볼 때, 이들이 성녀에게 정신을 지배당해 그런 짓을 저지른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관들이 주도하고 성녀가 이들의 뜻을 따른 것 같은데.’
하지만 신관들이 세뇌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
[웃기는 놈들이군.]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가 낮게 읊조리는 말에 칼리오페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아는 걸까?’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스타레아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대신관을 비롯해 신관들은 모두 무고하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공자님.”
대신관은 아스타레아스에게 굽신거리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신분상 대신관은 공작의 손자인 아스타레아스에게 존대를 받을 위치였다. 아스타레아스가 아무리 선황제의 아들이라고 해도 지금 지위는 공작의 손자였다.
황자의 신분이더라도 대신관과 서로 공대해야 하는데 이런 하대라니…….
하지만 지금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이런 수모를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거짓이라면?”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공자님!”
신관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너도 나도 아스타레아스의 앞에 엎드렸다.
“나는 만약 거짓인 경우 어떻게 할지 물었는데.”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거짓이라면 그 즉시 신의 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죽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신관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무고한 이가 자신의 결백함을 알리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청렴해보였다.
아스타레아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역시 신의 뜻을 따르는 사제라 그런지 기개가 대단하군.”
“저희의 결백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나는 황제 폐하께 즉결처분권을 받지 못 해서.”
그 말에 대신관이 움찔했다.
황제와 자신이 한패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의 위기만 넘기면 잡혀 들어가더라도 무사할 거라 생각했다. 그걸 알기에 목숨을 내놓겠다고 주저 없이 말한 것이다.
‘헌데 즉결처분권을 운운하다니…….’
즉결처분은 말 그대로 죄가 밝혀지는 순간 목을 치는 것을 뜻한다. 지금 아스타레아스는 선택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자신의 목을 칠 권리를 넘겨주는 대신 계속 결백을 주장할지, 말지.
하지만 여기서 망설이면 세뇌 당한 게 거짓임을 시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퇴로는 없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어린 새끼가 수완이 대단하군.’
감탄이 아니라 분노에 가득 찬 생각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청렴결백한 태도로 소신 있는 척 말했다.
“거짓인 게 밝혀지는 순간 공자님께서 제 목을 치셔도 상관 없습니다.”
“그래?”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대신관은 왜인지 불안함을 느꼈다.
‘설마……. 증거는 하나도 없어.’
있다면 성녀의 말뿐이다. 하지만 성녀는 증인인 동시에 가해자다.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이 없다.
‘그래, 오히려 잘 됐어. 지금 이렇게 결백을 주장해 넘어가면 되니까.’
대신관의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는데……. 나는 성녀에게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았어.”
느긋한 아스타레아스의 어조가 신관들에게 불러온 파문은 엄청 났다.
대신관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부릅 뜨였다. 숨길 수 없는 동요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대신관이 그럴 진대 다른 신관들은 어떻겠는가.
“말도 안 돼…….”
“불가능한 일이야…….”
신관들이 알기로 성녀의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는 조건은 단 하나였다. 그 조건에 아스타레아스가 해당된다고?
“그럴 리가…….”
신관들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숨김 없이 동요를 내보였다.
그래, 거짓말이 분명하다.
다시 살펴봐도 아스타레아스는 그 조건에 해당하지 않았다. 지금은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사실은 세뇌 당한 주제에 안 당했다고 거짓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려고.
‘그게 분명해.’
아스타레아스는 일부러 뭐가 말도 안 되는지 캐묻지 않았다. 지금 지적해서 입 조심시킬 이유가 없다.
“내가 왜 세뇌 당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너희가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맹수의 목울음처럼 느릿하면서도 위험한 기색이 잔뜩 베인 어조였다.
움츠러드는 순간 바로 목줄기를 물어뜯길 것 같은 위기감.
아스타레아스는 일부러 가장 크게 동요를 내보인 신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파란 눈이 자신을 꿰뚫듯 직시 하는 순간,
“거, 거, 거짓말!!!”
그 신관이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소리 쳤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헐떡이며 일어선 그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삿대질했다.
“거짓말이야! 모함하려 해도 소용없어!!”
여기서 밀리면 정말 목을 물어 뜯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신관이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아스타레아스가 유도 심문하고 있다는 생각도 못한 채, 무조건 그의 말을 부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신성력도 없는 주제에 무슨 세뇌에 안 걸렸—”
“자크란 신관!”
대신관이 뒤늦게 그를 만류했지만 이미 늦었다.
“신성력이라니.”
아스타레아스가 나긋하게 웃었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말은 꼭 신성력이 있으면 정신을 지배당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는데.”
무거운 침묵이 별관 내에 자욱하게 깔렸다.
“오, 오해입니다……!”
“자크란 신관이 실성했나 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다니!”
“자크란 신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신관들이 너도 나도 자크란을 윽박지르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 놈도 참 난 놈이군.]
바람새가 칼리오페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렇게 수완 좋게 유도해낼 줄이야.]
“지금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신관들이 끌려 나와 있으니까요. 다양한 사람이 있지요.”
신전의 음모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는 자도 있고, 다른 신관의 수족에 불과한 자도 있을 것이다. 무지는 쉽게 불안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들은 모두 일정 이상의 지위를 가진 신관들이다.
평신관들조차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지낸다. 하물며 이들은 어떻겠는가.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것을 생전 처음 겪어봤을 터.
압박감과 불안, 초조함과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온몸을 옭아매 시야가 좁아지고 상황 판단이 흐려졌을 것이다.
“레아스는 기민하게 기척을 읽은 거죠.”
칼리오페는 조금 뿌듯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뭐, 인간치고는 무게감도 나쁘지 않았어. 상대가 바로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버리던걸.]
“대정령님의 인정을 받다니 대단하네요.”
[어디까지나 인간치고 나쁘지 않았단 거야!]
바람새가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신관들은 아예 자크란이 가짜 성녀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웃기고 있네! 그런 변명이 통할 거 같냐!”
“뭐든 다 남 탓만 하고!”
“한순간 세뇌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지!”
신관들의 주장과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별관이 쿵쿵 울렸다.
[시끄럽군. 이만 정리해야겠어.]
오목눈이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그 모습이 온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떠오르는 휘광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허공을 배회하다 아스타레아스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바람의 대정령이 명했다.
[네가 말해 보거라.]
“성녀가 사용하는 힘은 신성력인 만큼 신성력을 지닌 신관이나 성기사들은 모두 내성을 가지고 있죠. 그러니 처음부터 세뇌에 걸릴 리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신관들부터 모두 정신을 지배 당했을 것이다.
“아, 아니야!”
“지금 우리를 모함하는 거요, 카스틸로 공자!”
“자크란 신관과 짜고서 우리를 모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창백하게 질린 신관들이 팔을 휘저으며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추하다, 추해.”
“정말……. 저딴 놈들을 신관님이라고 떠받들었던 내 과거가 수치스럽다.”
계속해서 말을 바꿔가며 되는 대로 변명만 일삼았으니 믿는 자가 나오는 게 이상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거기다 바람새가 몸체를 끄덕거리며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긍정하니 신관들은 더 이상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거짓을 일삼는 그들이라고 해도 대정령의 앞에서 대정령의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뭐야, 그럼 진짜 신성력이었어?”
“신성력이 세뇌를 한다고……?”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가짜 성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신성력이 아니라 뭔가 다른 사특한 힘을 사용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스타레아스는 분명 ‘신성력’이라고 말했고, 대정령 역시 그 말이 옳다고 하지 않았는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를 향해 물었다.
바람새가 성녀에 대해 말했을 때부터 그녀는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하나의 가설이 되었고, 방금 아스타레아스가 ‘신성력’이라고 못 박는 순간 구체화되었다.
“아까 제피루스님께선 ‘인간들이 성녀라 이름 붙인 이’라고 말씀하셨죠.”
[내 귀애하는 아이는 총명하기도 하지. 잘 기억하고 있구나.]
바람새가 짹짹 답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긍정할 때와 온도 차이가 너무나 극명했다.
“그 말은 역대 성녀들이 전부 신께서 직접 내리신 신의 사자가 아니라 인간— 그러니까 신전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뿐이라는 뜻인가요?”
[총명하구나. 비스도, 로한도, 오렌도 딱히 인간 아이 하나에게 계속 사명을 부여하며 특별 취급하지 않았지.]
그래서 네가 특별한 거란다.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는 뒷말을 가슴에 묻으며 칼리오페를 향해 말했다.
“뭐, 뭐라고?!”
“말도 안 돼……. 그럼 성녀가—”
“처음부터 신전에서 지어낸 거라고?!”
사람들은 아까보다도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여태까지 단단한 땅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한 걸음에 파사삭 깨질 살얼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어쩔 줄 모르고 황망하게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딛는 순간 저 깊은 물 속으로 추락할 것 같아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에게 여전히 신전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비스 신전에서 저지른 잘못으로 신전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다고 해도, 신전은 신전이었다. 올바른 가치에 대해 설파하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약한 자를 돕는 신의 전당.
부패한 신관들을 내쫓아내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다시 재건될 줄 알았다. 아니, 비스 신전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렌이나 로한 신전은 믿었다.
그런데.
성녀에 대한 것부터가 신전이 지어낸 거짓말이었다고?
성녀는 성서에도 나와 있는 존재였다. 제국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천 년 전부터, 천 년의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을 속여 왔던 것이다.
그럼 대체 어느 것이 진실이지?
무엇을 믿어야 하지?
사람들은 더 이상 신전에서 하는 어떤 말도 믿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우리를 속여 온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새어나온 의문에 누군가가 답했다.
“뻔하지. 성녀가 나와야 신도들이 신전에 오니까. 기부금도 확 늘고 권력도 잡고.”
“성녀가 고작해야 신전의 권력을 위한 선전 도구였다니…….”
“천 년 동안 사람들을 등쳐 먹었으니 쏠쏠했겠지.”
“하, 그딴 놈들에게 속아서 여태 까지…….”
아이가 태어나면 신관의 축복을 받았다. 성가대의 축가를 들으며 결혼했고, 죽어 묻힐 땐 신전에서 장송했다.
신전은 분명 사람들의 삶의 한 축이었다. 아무리 요 몇 년 비스 신관들의 행적이 수상했다고 해도 신전 자체에 대한 신뢰는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반 자체가 거짓이었다.
깨달은 진실에 사람들은 슬퍼했고, 분노했다.
믿음에 배신당한 사람들의 눈이 흉흉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리 지르지도, 저들을 벌해야 한다 목청을 높이지도 않았다.
고요한 분노가 얼음창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아까 내게 목을 칠 권리를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스타레아스의 나른한 목소리에 신관들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느라 순간적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아스타레아스의 미소에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그 미소는 일견 친절했지만, 얼음창 같은 사람들의 분노보다 더 시리고 잔인했다.
“아, 아, 안 돼…….”
신관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잘게 저으며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차마 아스타레아스의 발치에 매달려 빌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저벅.
아스타레아스는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신관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오른손에 찬란한 빛이 떠올랐다.
아름답고 영롱한 빛이었으나 신관들은 그게 얼마나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알았다.
마나가 압축되고 압축되다 못해 저런 빛을 띠는 것이다. 빛이 모이고 모여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그리고 저런 고농축 에너지원은 인간 하나 정도는 뼛가루하나 남기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
“아, 으으…….”
“오, 오지 마!”
공포에 질린 신관들은 일어서 도망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아스타레아스를 피해 엉금엉금 몸을 뒤로 물렸다.
아스타레아스의 관심은 잔챙이가 아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대신관을 향했다.
대신관의 얼굴은 그 사이 폭삭 늙은 것처럼 생기가 빠져나가 있었다.
“안 돼, 살려, 나, 나는— 주,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나는 이렇게 주, 죽을 사람이 아니야…….”
희게 질리다 못해 보랏빛이 된 얼굴로 정신이 나간 것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이 추잡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매를 뒤틀며 칼리오페를 향해 순교하라는 둥 저주의 말을 내뱉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천천히, 응축된 마나가 대신관을 향해 날아갔다. 곧 다가올 결과에 비해 너무나도 아름다운 비상이었다.
“아, 아, 아, 안 돼, 안 돼애애애애—!!!!!”
폐를 찢는 것 같은 대신관의 비명이 길게 울렸다. 그는 빛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고요한 공간에 아스타레아스가 혀를 차는 소리가 느긋하게 울렸다.
대신관이 꽉 감은 눈 한쪽을 살며시 떴다.
빛이 그의 코앞에 멈춰 있었다.
화들짝 놀라 땅을 짚으며 빛에게서 물러섰다. 땅을 짚은 손이 왠지 축축하게 느껴졌지만, 공포심에 짓눌린 그의 정신에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레이디 앞에서 이런 결례를 저지르다니.”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대신관은 그제야 자신이 추잡하게 실금했고, 소변을 손으로 첨벙대며 물러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알까지 뜨거워지는 수치심에 대신관은 서둘러 로브로 짙어진 바지춤을 가렸다. 하지만 그 더러운 모습이 이미 전국에 생중계된 후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는 거대한 종교의 정점에 서 있던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부정하고 버러지처럼 목숨을 구걸하며 바지에 오줌을 싸는 추한 짐승에 불과했다.
* * *
아스타레아스는 그 자리에서 대신관을 비롯한 신관들을 죽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칼리오페가 보는 앞에서 피를 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신관들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카스틸로 가의 감옥에 갇혔다. 국가적인 범죄를 저질렀는데 일반 감옥이 아니라 개인 귀족의 감옥에 갇히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게 너희의 목을 칠 권리가 있으니까.]
아스타레아스는 당연하다는 듯 명분을 대며 자연스럽게 카스틸로 저에 가두라 명했다.
사람들은 아스타레아스의 결정에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안심하고 환호했다.
그들은 아스타레아스를 개인 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스타레아스는 이 일의 고발자가 아니던가. 신전과 어떤 식의 연줄이 닿아있을지 모르는 치안대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러웠다.
“하! 아주 그냥 기다렸다는 듯이 일사천리로 진행시켜버리는군.”
챙그랑— 황제가 던진 유리잔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황제는 제 조카의 치밀함과 영악함에 이를 까드득 갈았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어차피 카스틸로 공자가 사설 감옥으로 끌고 간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제국을 어지럽혔으니 황제께서 친히 벌하시겠다며 신관들의 신병을 인수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멍청한 놈! 그러니 저 어린 놈에게 이렇게 뒤통수나 맞는 것이다!”
“예?”
황제의 일갈에 해결책을 제시했던 부관이 몸을 움츠렸다.
“녀석이 신관들을 데려가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나? 지금은 민심을 무시할 수 없어.”
신전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불신이 가득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면 바로 어수선해질 것이다.
“또 내게 인수된 신관들이 바로 치죄당하지 않거나— 탈옥한다면?”
황제로서는 신관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물론 화풀이로 잔챙이들은 죽여버릴 생각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신관과 그 측근은 살려두고 싶었다. 아니, 살려둬야 했다.
그러니 바로 치죄할 수 없다.
“……카스틸로 공자에게 그대로 맡기지 왜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냐는 식의 여론이 나오겠군요.”
황제가 무능하다고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아스타레아스와 비교까지 당할 것이다.
“하지만 신관들의 죽음을 위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적당히 시신을 구해서 태운다거나.”
“아스타레아스가 잘도 ‘아, 이 타서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대신관이군요’라고 말하겠군.”
황제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부관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렸다.
“내게 신병이 인수되는 순간 그 놈은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할 거야.”
아스타레아스를 따르는 귀족이나 이 기회에 황제의 기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도 귀족들까지 합세할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순간 물어뜯으려하겠지.”
신전이 일으킨 스캔들은 정말 치명적이었다. 이 일에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것만은 들키면 안 된다.
쾅! 황제가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쳤다.
아스타레아스가 대신관을 제 손아귀에 넣는 걸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이 영악한 놈!”
이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아스타레아스의 신문에 대신관이 입을 열면 어찌합니까. 차라리 그 전에 죽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황제와 비스 신전의 관계 중 드러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부관의 말대로 이대로 버림패로 처리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샘만 아니었어도.’
부관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황제가 비스 신전과 손을 잡은 진정한 이유. 그리고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
“……사람을 그렇게 써놓고 한 번 실수했다고 바로 죽여버릴 순 없지.”
황제의 말에 부관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지금 이 일이 ‘실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안이던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런 관대한 말은 절대 자신의 상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그간 황제의 더러운 성정을 옆에서 지켜본 세월이 얼마던가. 대신관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면 날뛰었지 이렇게 감쌀 줄은 몰랐다.
하지만 황제가 죽일 수 없다고 하는데 자신이 죽여 버리는 게 맞다고 할 순 없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총애하시는데 대신관이 폐하에 대한 걸 쉽게 털어놓진 않을 겁니다.”
“오줌이나 질질 싸는 놈이?”
황제가 픽 비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관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대신관을 향한 총애가 커서 살려주는 줄 알았는데 지금 반응을 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그럼 대체 뭐지?’
부관은 황제의 생각이 뭔지 가늠하듯 바라보았다가 짙게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 얼른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 그럼 남은 방법은 대신관이 불어버리기 전에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황제가 뭐라 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방법이 가장 좋겠지.”
아스타레아스가 가둔 신관들이 탈출하면 그를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신뢰가 꺾일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예?”
“그 놈은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아마 직접 결계도 쳐놨을 거다.”
아스타레아스가 직접 친 결계라는 말에 부관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괜히 탈출을 돕다가 실패하고 역으로 이쪽의 꼬리도 밟힐 수 있어.”
황제는 미간을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정말 성가신 상대였다.
“흑룡을 보내면 그 걱정은 더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잡히면 알아서 자결할 테니까요. 그리고 결계는—”
부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껏 황제의 성에 차지 않는 말만 했지만, 그는 확신했다. 황제가 자신의 다음 말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는 것을.
“카스틸로 공자의 약점을 건드려 신경을 그쪽에 쏠리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황제의 눈이 어둡게 빛나며 그를 향했다.
“놈의 약점이라…….”
턱을 쓸며 낮게 읊조리는 황제의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을 향해 노래하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던 것 역시.
“아주 소중해 보였지.”
태어났을 무렵부터 아스타레아스를 지켜봤지만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 봤다.
“그래, 정말 소중한 거야.”
몽에르트 가와 친밀하게 지낸 것도 다 위장이었다.
그간 정치 사교 활동을 일절하지 않던 카스틸로 가가 움직여서 황제는 무슨 일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후계 문제로 한동안 주춤거렸지만 다시 상승세를 타는 몽에르트 가가 아스타레아스의 편에 서면 일이 귀찮아진다.
거기에 신경 쓰느라 황제는 아스타레아스에 관한 다른 소문은 무시했다. 그 중 여자에 관련된 소문은 더더욱 휴지조각 취급했다. 아스타레아스가 몽에르트 가와 정략혼을 맺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 정말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놈이야.”
아주 훌륭하게 자신의 눈을 가렸다.
고작 18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해서 보호한 존재.
“칼리오페 루스티첼.”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그 소녀 때문에 틀어졌다. 안 그래도 거슬리던 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정령의 가호를 받고 성녀의 세뇌마저 풀어버리는 존재를 어떻게 건드린단 말인가.”
부관이 씨익 웃었다.
“건드리다니, 무슨 말씀을. 무려 대정령의 가호를 받는 소녀 아닙니까.”
황제의 시선이 부관을 향했다.
“정중히 궁에 초대하셔야지요.”
* * *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흘렀다.
칼리오페는 느긋하게 책을 읽거나 노래를 불렀다.
경연을 준비하는 동안이나 경연 당일에는 이렇게 느긋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사치였다. 그래서 이런 휴식이 달가웠다.
“아가씨,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는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루스티첼 저를 찾아왔다.
“지금은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고 하고 돌려보내 줄래?”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들을 전부 돌려보냈다.
칼리오페에 대한 미안함, 호의를 가진,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새로운 권력자와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꼭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는 돌려보내고 누구와는 이야기하면 소문이 날 것이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어느 가문을 싫어한다, 어느 가문은 마음에 들어 한다더라, 운운. 지금은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저어…….”
하녀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며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녀들은 상대가 후작과 같이 권세 높은 사람이더라도 당당히 돌려보냈다.
‘우리 아가씨 쉬시는 데 방해하는 사람 가만히 안 둬!’ 하며.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게…….”
말을 아끼는 하녀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대강 무슨 일인지 눈치를 챘다.
“어머니는?”
“응대하고 계세요.”
루스티첼 부인은 여태까지 칼리오페의 손님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응대하고 있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뜻했다.
“가자.”
칼리오페가 앞장서자 하녀가 뒤를 따랐다.
“아, 아가씨, 여기 새로운 선물인데 선물방이 다 차서요.”
복도를 지나는 중 마주친 하녀가 새로 받은 선물을 어찌할 지 물었다.
“방이 벌써 다 찼다고? 음, 그럼 그 옆방에 놔두자. 고마워.”
“별말씀을요.”
칼리오페의 인사에 선물을 운반하던 하녀와 하인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별처럼 빛났다.
칼리오페는 선물을 운반하는 긴 행렬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매일 같이 여기저기서 선물이 들어오고 있지만 설마 그 넓은 방 하나가 며칠 새 가득 찰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소녀가 거리에서 정성스레 딴 들꽃부터 희귀하고 진귀한 보석과 비단까지. 칼리오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계층과 나이, 성별이 다양한 만큼 선물의 종류 역시 다양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보니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가 운반되고 있었다. 상아에 산호와 진주를 상감해 장식한 피아노는 악기라기 보단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아가씨가 옆에 서 계시면 그림처럼 잘 어울리겠어요.”
칼리오페와 함께 응접실로 향하던 하녀가 속삭였다.
“너무 비싼 거 아닐까?”
“아가씨도 참. 아가씨한테 드리는 건데 가격이 무슨 문제인가요.”
칼리오페는 하녀를 잠시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팔불출기가 더 심해진 거 같은데…….’
아이가 자라나면 팔불출기가 수그러든다는데 어째서 해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걸까.
‘뭐, 회귀 전과 다르게 루스티첼 가가 파산할 일은 없겠네.’
칼리오페는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황궁에 진상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들이 루스티첼 저에 향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 정도니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했다.
* * *
“어머니.”
응접실에 도착한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을 불렀다.
“어머, 리페. 아픈 데 왜 나왔니. 그냥 쉬고 있지.”
루스티첼 부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약간 책망하는 눈빛이 하녀를 스쳤다. 칼리오페는 어머니의 시선으로부터 하녀를 가려주었다.
아프지 않은데 아프다고 말하는 걸 보니 병환을 핑계로 손님을 거절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황궁에서 손님이 오셨는데 가만히 쉬고 있을 수는 없지요.”
칼리오페가 옅게 미소 지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확실히 황가의 문양을 가슴에 단 시종(chamberlain)과 기사들이 칼리오페를 보고 일어섰다.
“휴식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영애. 몸이 편찮으신 걸 미리 알았다면 폐하께서도 저를 오늘 보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게 관대하신 폐하시라면 백작이 빈 손으로 돌아갔어도 별 말씀 안 하실 텐데요.”
루스티첼 부인이 웃는 얼굴로 쌀쌀 맞게 말했다. 아픈 걸 안 순간 돌아가지 왜 버티고 있냐는 말이었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시종은 사과하면서도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황제의 시종 위치까지 오른 백작이 황제의 칙령으로 귀족의 집에 와 이런 식의 냉대를 받은 건 처음일 테다. 그런데도 이렇게 굽신거리는 걸 보니 황제가 신신당부한 모양이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예, 황제 폐하께서는 이번에 제국을 위협한 마녀의 손아귀에서 백성들을 구한 레이디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공로를 치하하시며 친히 그란디타스 궁에 초대하셨습니다.”
칼리오페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루스티첼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최근 딸아이의 몸이 좋지 않아 모든 방문도 거절하고 있는 차입니다.”
“부인, 이건 정말 드문 기회입니다. 다른 방문과 폐하의 초대가 어디 같습니까? 무려 그란디타스 궁으로 초대하셨단 말입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초대지만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지요. 딸아이가 궁에 가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심각하고 단단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는 황제와 신전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황제의 음모 역시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도 반대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시종의 말대로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아이가 황제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니고 황제가 집무를 보는 그란디타스 궁에 초대받는 것은 유례 없는 일이다. 그란디타스 궁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볼 때, 황제는 앞으로 칼리오페를 중용하고 신임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니까.
가문 대대로 영광으로 여겨도 될 정도의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황제의 중용과 신임을 받는 건 바꿔 말해 황제의 편이라는 뜻이지.’
대정령의 가호를 지닌 데다가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칼리오페가 황제의 편에 선다는 것은 정치사교계에 많은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폐하께선 지금 황제파 내부의 분란 때문에 리페를 이용하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확실히 칼리오페가 황제의 편을 드는 순간, 갈라지고 찢어지던 황제파는 다시 단결할 것이다.
루스티첼은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항상 황제께 충성하는 명예로운 가문이었지만 막둥이에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칼리오페가 황제를 주군으로 모시며 뜻을 펼친다면 모를까, 허나 루스티첼 부인이 느끼기로 딸아이는 황제에게 아무런 호의도 없었다.
사랑하는 딸이 정치적인 도구로 쓰이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레이디를 모시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페하께서 딸아이를 진정으로 공로자라고 생각하시면 몸이 안 좋아 초대에 응하지 못해도 이해하실 겁니다.”
“예, 이해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걸 우선시해야 합니다.”
“명을 듣는 것도 융통성이 있어야지요. 오히려 데려가면 몸이 안 좋은 아이를 왜 데려왔냐고 책하실 겁니다.”
“그 책망은 제가 달게 듣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부인.”
시종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카스틸로 공자가 손을 쓰기 전에 기습적으로 데려와야 해.’
몸이 낫고 나서 초대하겠다고 하면 그 사이 아스타레아스가 무슨 수를 쓸지 몰랐다.
가만히 두 사람의 공방을 지켜보던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머니.”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아이를 돌아봤다.
“백작님, 제 몸이 좋지 않아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듯합니다. 그래도 괜찮은가요?”
그 말에 시종이 반색했다. 의관을 정제한다고 시간을 끄는 것보다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떠나는 게 그가 바라는 일이었다.
“아픈 사람을 데려가는데 그런 것을 따지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자, 그럼 어서 가시지요.”
기사가 칼리오페의 곁에 다가가와 에스코트를 청했다.
‘너무 서두르는데?’
칼리오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늘 내로 데려가려고 하는 이유야 아스타레아스 때문일 거라고 짐작이 가긴 했다.
하지만 가기로 한 상황에서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모르겠다.
“그럼 저도 함께—”
“죄송하지만 부인께서는 초대받지 못하셨습니다.”
기사가 칼리오페를 따라 일어서는 루스티첼 부인의 앞을 막아섰다.
“어머니께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영애.”
“사과는 어머니께 하셔야지요.”
“죄송합니다, 부인.”
“어머니, 전 괜찮아요. 혼자 다녀올게요.”
칼리오페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사가 가로막는 것을 보니 이건 초대가 아니라 연행에 가까웠다.
“리페, 역시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괜찮아요.”
칼리오페는 미소로 루스티첼 부인을 안심시키고 화려한 황궁 마차에 올랐다.
뭐가 그리 급한지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마차가 출발했다.
정원을 지나 정문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칼리오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 * *
“도련님.”
대신관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지?”
차가운 눈동자는 별 것 아닌 일이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루스티첼 저에 황제의 시종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털썩. 아스타레아스가 손을 놓자 대신관이 돌바닥에 쓰러져 내렸다. 그는 덜덜 떨면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바르작거리며 ‘제발, 제발’하며 빌었다.
그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스타레아스는 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대신 얆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맹수의 목울음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리페를 데려갔군.”
푸른 눈동자가 불꽃처럼 번뜩였다.
아스타레아스는 신문 중이던 신관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도련님!”
러그윈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도련님!”
러그윈의 만류에도 아스타레아스의 걸음은 거침 없었다.
“가셔선 안 됩니다.”
러그윈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아스타레아스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뒤돌아보는 것이 러그윈의 눈에는 느릿하게 보였다. 새파랗게 날이 선 푸른 눈동자가 마주 치는 순간, 러그윈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도, 도련님…….”
희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러그윈을 바라보는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는 살기로 물들어 있었다.
가면 안 된다고?
리페가 황제의 손에 떨어졌는데?
아스타레아스가 생각하기에 그가 가지 않아야할 이유는 무엇 하나 없었다.
오로지 가야 할 이유만 가득했다.
러그윈은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며 아스타레아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절대로, 가셔선 안 됩니다.”
* * *
“잠시만요.”
루스티첼 저의 정문이 열리자마자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함께 마차를 타고 있던 황제의 시종이 미간을 설핏 찌푸린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잠시만 멈춰 주세요.”
“영애, 이제 와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잠시만 세워주세요.”
하지만 시종은 칼리오페를 바라볼 뿐,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며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저를 연행해가듯 데려가는 건 공을 치하하는 것은 핑계일 뿐, 분명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이겠죠.”
“연행이라뇨, 영애. 분명 영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습니까.”
시종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수락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황명을 들먹인 게 존중인가요?”
칼리오페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종은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괜히 시선을 돌렸다.
“제가 먼저 한 발 양보해 백작님의 뜻대로 황궁에 가는 것이니 백작님께서도 제게 한 번 양보해 주시지요.”
백작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려하는 것을 애써 수습했다.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어린 영애가 맹랑하다고 할지, 배짱이 두둑하다고 할지.’
칼리오페의 어조는 노랫소리같이 듣기 좋았지만 그 안의 내용은 물렁한 구석이 하나 없었다.
황제의 측근인 그에게 누가 이렇게 또박또박 대꾸를 하겠는가. 심지어 무려 자신이 ‘먼저 양보해주었다’며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설령 자신에게는 맹랑히 굴더라도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황제에게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그런 것도 없었다.
황제의 용안을 가까이서 볼 기회조차 없었던 주제에 감읍하긴커녕 건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황제의 초대를 성가셔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충분히 불쾌해할 일이지만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묘한 태도가 한몫했다. 그녀는 따지는 것처럼 느끼지 않는 어조와 자세로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영리하군. ……그래, 영애가 내게 양보해준 것이 맞긴 하지.’
어쨌거나 이 소녀는 대정령의 총아(寵兒)가 아닌가.
이 일을 맡으면서도 시종은 어딘지 께름칙했다. 혹시라도 강제로 칼리오페를 데려올 상황이 와 대정령의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내색했다가는 바로 파면될 것 같아 감히 내색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영애. 하지만 아주 잠깐만입니다.”
“네, 저택 안으로 돌아갈 필요 없고 잠시 세워주시기만 하면 돼요.”
시종은 칼리오페의 요구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앞창을 열어 마부에게 명했다.
마차는 곧바로 멈춰 섰다.
칼리오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 뒤에 서 있던 황가의 풋맨도,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도 깜짝 놀라 칼리오페가 나오는 것을 바라봤다.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찰칵찰칵찰칵찰칵—
“여러분.”
칼리오페는 셔터 소리와 반짝이는 플래시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이 추운 데 계속 밖에 계셨군요. 며칠 간 나오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나올 생각 없었는데…….”
칼리오페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기자들에게 다가갔다.
‘아차!’
마차 안에 있던 시종은 그제야 왜 칼리오페가 마차를 멈춰 세워달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기자들을 이용할 셈이야……!’
루스티첼 저 앞에는 저명한 일간지부터 삼류 가십지까지 거의 모든 언론사가 모여 있었다.
정문이 열리자마자 칼리오페가 움찔하길래 막상 황궁에 가려니 후회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자들을 발견하고 반응했던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칼리오페에게 말려든 자신의 결정이 후회됐다. 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기자들이 칼리오페 주변에 쫙 깔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기서 막으려고 끼어 들었다간 칼리오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자신이 기자들을 막으며 칼리오페를 강제로 마차에 태우고, 칼리오페가 ‘폐하께서 저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세요. 도와주세요.’ 라고 말을 흘린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기자들에게 ‘강제성’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게끔 차라리 두 손 놓고 지켜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게 칼리오페의 의도였으리라.
‘젠장! 영리한 것을 넘어서 영악하군.’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 가련하고 연약한 소녀라서 쉽게 봤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기책을 생각해 내다니.’
저 예쁘장한 겉껍데기 안에 있는 것은 자신보다도 더 노련한 수완가였다.
칼리오페는 서둘러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던 기사들이 무슨 명을 받았는지 물러서는 것을 보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생각대로였다.
“루스티첼 저 사람들에게 레이디의 외출 계획이 없다고 듣긴 했습니다.”
“하지만 예정이라는 게 변할 수도 있다 보니 계속 기다렸지요.”
“오늘 그 보람을 느끼네요.”
기자들이 발갛게 언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추운데 기약도 없이…….”
“전 국민이 레이디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정도 고생이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저희가 귀찮지 않으실까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신경도 써주시고.”
“그런데…… 아프시다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외출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도 황궁 마차로…….”
질문한 기자가 말끝을 흐렸다.
“아……. 그게요.”
칼리오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황명을 받드는 것은 제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방긋 웃는 칼리오페의 얼굴은 어딘지 파리해 보였다.
기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다만 걱정인 게……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다는데 성장(盛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어요. 무례한 일이 아닐까 걱정이네요.”
칼리오페가 실내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실내복으로…….”
“춥지 않으십니까? 마차 안은 난방이 된다고 해도 밖은 추운데 몸도 안 좋으신 분이…….”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시선이 기사들에게 향했다. 이런 식으로 레이디를 데려가는 게 과연 기사도냐는 비난 섞인 시선이었다.
칼리오페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변호했다.
“아니에요. 모두 절 배려해주신 거예요. 몸이 아파 성장을 갖추기 힘들 것 같다고 하니 시간도 부족한데 잘됐다고 그냥 가자 하셨거든요.”
“뭐, 무슨…….”
취재하며 여러 가지 일을 겪어본 기자들조차 순간적인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욕을 읊조릴 뻔했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일반적인 레이디에게도 무례한 일인데 하물며 칼리오페는 구국의 영웅이었다.
“아차, 백작님께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예?”
“바쁜 와중에 이렇게 멈춰 서는 것도 허락해주시고 정말 좋은 분이세요.”
방긋 웃음을 지은 칼리오페가 풋맨이 미처 다가오기 전에 마차에 혼자 올라서서 손수 문을 닫았다.
자리에 앉은 칼리오페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종의 시선을 느꼈다.
“왜 그러세요?”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시종의 어조가 아까 전에 비해 한층 날카로워졌다.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느긋하면서도 어딘지 위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
왠지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겹쳐 보여 시종은 눈을 부릅 떴다.
“제가 한 발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칼리오페가 물었다.
시종은 입매를 굳혔다.
문제?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정확히 지적할 말이 없었다. 칼리오페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심지어 ‘황명을 받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발언은 모두 황가와 수행원을 옹호하는 것뿐이었다.
“……없습니다.”
결국 시종은 주먹을 꽉 쥔 채 수모 당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도착했습니다, 루스티첼 영애. 내리시지요.”
시종이 안도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칼리오페를 무사히 황궁에 데려왔다.
사실 이렇게 기사들을 잔뜩 대동한 것은 혹시 모를 전투를 대비한 것이었다. 구국의 영웅에 대한 예우라는 것은 핑계일 뿐, 아스타레아스가 방해한다면 무력으로 돌파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풋맨이 마차 문을 열고 기사가 칼리오페를 에스코트했다.
칼리오페는 마차에서 내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이 넓디넓은 제국의 중대사가 모두 결정되는 곳, 그란디타스 궁이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며 우뚝 솟아 있었다.
단 한 점의 얼룩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새하얀 계단을 밟으며 칼리오페는 조소했다. 이미 황제부터 썩어 있는데 이렇게 겉을 희고 고결하게 꾸며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부드러운 융단이 깔린 긴 회랑을 걸으면 황제에게 도달하게 된다.
칼리오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칼리오페는 그저 거절할 수 없어서 황제의 초대에 응한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분명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다.
가족들의 죽음에 얽힌 배후.
‘그 배후에는 황제가 있어.’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내 그 기색은 속으로 갈무리 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칼리오페는 이 뜻밖의 기회를 어떻게든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어느 때보다 더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갔다.
“폐하께서는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궁인들이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폐하께서 좀 더 가볍고 친밀한 만남을 가지실 때 특별히 이용하는 곳이랍니다.”
황제의 호의와 배려에 칼리오페가 어떤 감명이라도 받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넓은 채광창을 타고 한낮의 햇빛이 찬연하게 들어오는 가운데 서 있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칼리오페는 미소를 그려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천천히 무릎을 굽혀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춘다.
순종하듯 머리를 숙이면서도 칼리오페의 가슴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 보여줘.
네가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있는지, 왜 우리 가족을 죽였는지.
* * *
“루스티첼 영애의 예법이 참 바르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왜 그런 말이 도는지 알겠군. 황궁 예법서에 싣고 싶을 정도야.”
“과찬이십니다, 폐하.”
칼리오페가 살며시 고개를 들며 단정하게 답했다.
나붓이 내리깔린 속눈썹이 소녀의 얼굴에 꽃잎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황제는 가늠하듯 잠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의외였다.
아스타레아스와 관계가 있는 만큼 제게 적대적으로 굴 줄 알았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황제를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눈빛에나 언행에도 적대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거나 이쪽도 태도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선 칼리오페의 기를 죽여 놓을 계획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황제는 손수 칼리오페를 일으켜주며 말했다.
“자, 영애가 좋아한다고 해서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과자를 준비했네.”
“폐하께서도 저를 아이 취급하시는 건가요?”
칼리오페가 장난스레 황제를 흘겨보다가 웃었다. 삼가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허물 없이 군다.
황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초콜릿을 싫어하는가?”
“……싫어하진 않지만요.”
“그럼 영애를 위해 준비했으니 맛이라도 봐 주게.”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칼리오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누가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운 태도였다.
그러나 황제는 웃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순식간에 이 자리의 분위기를 풀어버렸다. 그 바람에 다시 황제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긴 애매해졌다.
계산일까?
아니면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 귀여운 아가씨다운 태도일까.
아이 취급하지 말라고 했으면서도 초콜릿 타르트를 야무지게도 냠냠 먹는 칼리오페를 보며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저 모습을 보니 후자 같았다.
‘……보고를 받지 않았으면 바로 후자라고 믿었을 정도야.’
루스티첼 저를 나서며 칼리오페가 모여 있는 기자들을 상대로 수작을 벌였다는 걸 이미 들은 차였다.
표면적으로 황제에게 적대적인 발언은 하지 않았다. 아예 시종까지 칭찬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례하게 강제로 데려간다고 생각하도록 교묘하게 말했지.’
과연 그게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결과일까?
“그래, 오는 길에 별일은 없었고?”
‘이미 보고 받았구나.’
칼리오페는 기자들과 있었던 일을 황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떠보는 질문인 게 명백해 칼리오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일이요?”
동요 하나 없이 순진하게 갸웃거리는 모습에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칼리오페는 황제의 저울추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저울추가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 여유로운 미소가 칼리오페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 기자들 말씀하시는구나.”
순연하게 반짝반짝 빛나던 산호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깊어졌다. 분위기가 변했다. 누가 봐도 어리숙한 여자애가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칼리오페의 반응에 황제는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계산이었다고 해도, 지금 이렇게 속내를 드러낼 필요가 있는가? 드러내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맹랑한 여자애의 연기에 깜빡 속았을 것이다.
“폐하, 말씀해보세요.”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낮아졌다.
“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있지 않으신가요?”
여유로운 태도였다.
누가 감히 황제에게 진짜 속내를 말하라면서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주도권은 완전히 칼리오페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그걸 깨달은 황제는 하, 하고 기막힌 숨을 내뱉었다.
방금 칼리오페의 한수는 흔들기였다. 그리고 자신은 고작 열다섯짜리 여자애의 수에 보기 좋게 당해 흔들렸고, 페이스를 잃었다.
하지만 이대로 쉽게 넘어가줄 순 없는 법이다. 그는 제국의 황제였다.
“지금 감히 내게 다른 뜻이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아무리 영애의 공이 크다고 하나 시건방지군!”
일갈하는 낮은 호통 소리에는 황제다운 위엄이 배여 있었다. 빛 하나 들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노기를 띠고 칼리오페를 응시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는 자신에게 어떤 짓도 할 수 없다.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전 국민이 들고 일어설 테니까.’
지금도 여러 신문사에서 호외를 만들어 뿌리고 있으리라.
기자들에게 말을 흘린 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인질로 잡힌 게 민심이니 황제에게 효과가 좋을 수밖에 없다.
“공치사라니, 좋은 핑계였어요.”
칼리오페는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가슴께에서 손을 깍지 꼈다. 황제 앞에서 취하기엔 꽤 방만하고 권위적인 제스쳐였다.
“하지만 정말이라면 저를 알현 받으시는 홀로 부르셨어야죠. 이런 내실이 아니라.”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그래야 제가 폐하께 다른 뜻이 전혀 없다고 속기라도 할 거 아닌가요?”
칼리오페는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급할 건 없다. 지금 이 테이블의 주재자는 자신이었다.
‘원래는 황제를 방심시켜서 이것저것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황제가 기자와의 일을 아는 이상 그럴 순 없다. 칼리오페가 뭐 모르는 어린 여자애라고 결론을 내려도 머릿속 한구석에는 의심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그런 상대에게 경계를 풀고 방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탁 까놓고 이야기하는 게 낫지.’
“하! 아주 맹랑하군. 루스티첼 백작이 자식을 아주 잘 키웠어.”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오페는 동의한다는 듯 생긋 미소 지었다.
‘자신만만하다는 거군.’
황제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정중히 예를 갖췄지만 절대 굽실거리지 않았다.
처음 황제와 독대하는 귀족 중에는 성인이라도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인사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허물없이 구는 걸 보고 지나치게 순진하기 때문인가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딱히 황제를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딸조차 나를 어려워해 조심하거늘.’
신선했다.
칼리오페가 황제라고 해서 딱히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확실했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군.’
영리한 아이다.
‘아깝군.’
이런 아이가 아스타레아스의 곁에 서 있다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현재 황제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신전도, 성녀도 제 역할을 다하긴커녕 발목을 잡고 있고, 황제파인 귀족들은 서로 밥그릇 싸움 때문에 정신이 없다. 황제파에서 이탈하는 귀족들마저 생기고 있는 판.
지금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도 엄청난데 심지어 본인이 이렇게 똑똑하기까지 하다.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현 상황을 단번에 타개할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황제 역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을 보았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아스타레아스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황제와 눈이 마주친 칼리오페가 빙긋 웃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
“마치 절 죽일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는 사람처럼.”
황제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영애는 농담도 잘하는군. 백성을 구한 공로자이자 대정령의 가호를 받는 귀중한 인재를 내 어찌 해칠 생각을 한단 말인가.”
칼리오페는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서에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폐하의 목적이 무엇인지 감히 제가 알 수 없지만, 그게 뭐든 저와 함께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황제는 칼리오페가 말하는 ‘목적’이 단순이 이 자리에 그녀를 초대한 이유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녀는 황제가 벌이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을 묻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칼리오페는 황제가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전과 내 관계도 알고 있는 건가.’
모른다면 황제가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정말 탐이 난다.
‘그래, 이 아이의 말대로야.’
그 무엇이든 칼리오페와 함께하면 더 쉽게 풀릴 것이다. 민심을 사로잡는 건 둘째 치고 대정령의 가호를 받고, 무려 에테르를 직접 만들어내지 않는가.
심지어 칼리오페는 스티그마의 주인이기까지 했다. 스티그마를 손에 넣지 못해서 계획을 전면 수정했던 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썼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는 단 한 사람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많은 것이 함께 따라온다.
“영애가 솔직히 말하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지.”
됐다.
황제의 마음이 어느 정도 기운 것을 깨닫고 칼리오페는 속으로 환호했다.
“내 조카님께서는 이 나라의 적통 핏줄이시지. 나는 황제위에 오를 때 조카님이 성년이 되면 양위하겠다 맹세했고.”
무슨 뜻인지는 더 듣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 황제는 성년이 된 아스타레아스에게 양위하지 않고 있다. 대신들 사이에서 말이 나와도 어물쩍 넘기고 있다.
그 이유야 뻔하다.
‘아직 황제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고, 자기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황제의 관을 쓰고 계신 분은 폐하십니다. 그 관을 물려줄 이를 택하는 것도 폐하이신 게 당연하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매끄럽게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안달 나는 마음을 애써 내리 눌렀다. 이 상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가족의 죽음에 얽힌 사정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윽고 황제의 입술이 열렸다.
“아니, 물려줄 생각은 없다.”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칼리오페의 눈이 커졌다.
‘물려줄 생각이 없다니……? 지금 당장을 말하는 걸까?’
“내가 계속 쓰고 있을 생각이야.”
“계속……이요?”
황제는 칼리오페의 되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응시해올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언젠가는 황위를 물려줘야 한다. 양위가 아니더라도 끝은 온다. 사람은 모두 죽으니까.
“그런데 영애는 내 조카님과 친밀한 관계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 나와 손을 잡을 순 없지.”
황제의 말에 칼리오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은 그런 것을 깊게 생각할 때가 아니다.
“어머나, 폐하.”
칼리오페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폐하께서 참 귀엽고 순진하기도 하시지.’ 딱 그렇게 읽히는 표정이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황제는 정략혼을 했고, 그 덕을 많이 본 인사였다. 선황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황제 위에 누가 올라야 하는가를 놓고 언쟁이 있을 때, 그의 처가가 꽤 힘을 썼다.
“저는 가족들과 집에서 카드게임을 즐겨 해요.”
칼리오페가 카드 패를 쥐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새로운 패를 얻으려면 가지고 있던 패는 내려놓아야 하기 마련이죠.”
툭, 소리와 함께 칼리오페의 왼손이 패를 버리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눌렀다.
황제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거짓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를 버림패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따끔거렸다.
‘버텨야 해.
조금만 방심하면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부러 방긋방긋 웃었다.
“크하하하하!”
이윽고 황제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정말 걸작이군. 그 천하의 조카님께서—”
황제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손등에 애달프게 키스하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은 절대 위장이 아니었다. 오로지 진심만이 가득했다. 제 잘난 조카가 그렇게 마음을 내보이는 상대는 칼리오페가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진심을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휴지조각 취급이라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나 그는 황제였다. 후계가 아니었으면서도 결국에는 황위에 오른 존재.
“하지만 영애, 내가 영애의 말을 어떻게 믿지?”
웃음을 뚝 그친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칼리오페는 등 뒤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쪽에도 문이?’
뒤돌아본 칼리오페의 눈에 벽이 갈라진 틈이 보였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칼리오페의 몸을 붙들었다.
“무슨……!”
손쉽게 칼리오페의 양팔을 제압한 사내가 칼리오페의 드레스를 매만졌다. 그의 손이 치맛주름 사이의 주머니를 향하는 것을 보고 칼리오페는 눈을 꾹 감았다.
“깜빡 속을 뻔했지 뭐야.”
느긋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특히 방금 내 조카님을 버림패 취급할 때는 속아 넘어가는 것을 넘어 희열마저 느꼈어.”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칼리오페의 뺨을 스르륵 매만지다 턱을 들어올렸다. 수렁처럼 검은 눈동자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널 나와 동류라고 생각했거든.”
‘동류라고?’
이미 들킨 것, 칼리오페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봤다.
황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표정도 잘 어울리는데. 그 고귀하신 내 조카님이 왜 홀랑 넘어갔는지 알겠어.”
칼리오페를 붙들고 있던 사내가 주머니에서 통신기를 꺼냈다.
‘녹음 중’이라는 글자가 통신기 위로 떠있었다. 그 글자를 확인한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아까워. 이렇게 배짱 좋고 똑똑하다니. 흔치 않은 인재인데 말이야.”
통신석을 건네받은 황제가 장난감을 다루듯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뭐, 그렇게 분하게 생각하지 마. 알면서 널 가지고 논 게 아니라 정말로 속아 넘어가던 중이었거든.”
황제는 붙잡힌 칼리오페를 감상이라도 하듯 뒤로 물러나 팔짱을 꼈다.
“널 초대하기 전에 나도 생각이란 걸 했지. 그간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는 일이 많았는데, 그게 참 묘하게도 다 네 이름과 연결되더란 말이지.”
황제가 마음대로 떠들든 말든 칼리오페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팔에 힘을 주어봤지만, 자신을 붙잡고 있는 성인 남성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신경 쓰기엔 너무 어린 아이여서 우연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어.”
궁지에 몰린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 다 잡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런데 그 애가 에테르를 만들어내고 대정령을 부리기까지 하네? 이제 이쯤 되면 나도 의심을 해봐야하지 않겠어?”
탁, 탁. 황제가 자그마한 통신석을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하며 속삭였다.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마나를 체크하도록 준비시켰지.”
그 말에 칼리오페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내가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궁엔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있어서 원래도 마나가 많이 흐르고 있어. 그래서 특정해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콰지직, 황제의 손아귀에서 통신석이 부서졌다.
“마침 딱 좋은 순간에 밝혀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내가 비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황제는 칼리오페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이다.
‘시간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었어도……!’
아쉬움에 칼리오페는 속이 타들어갔다.
“자, 그럼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소름끼치는 황제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흰 목줄기를 훑어 올라갔다.
* * *
“함정이라는 걸 도련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러그윈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도련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순간 결계에 구멍이 뚫립니다. 다른 마법사가 결계를 유지하더라도 몇 명이 달려들어서 파훼 마법을 걸면 당해낼 수 없어요.”
러그윈은 아예 무릎까지 꿇고 호소하는 눈으로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그 틈을 타서 신관들을 사살하면 모든 것이 틀어집니다. 결국 아직 중요한 것은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잖습니까.”
“그런 것들보다 리페가 더 중요해.”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는 단단한 껍질처럼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도련님께서 자리를 뜨는 게 황제의 목적이라고요! 리페 아가씨를 어찌하려는 게 아니니 아가씨는 무사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어찌 아가씨를 건들겠어요.”
“그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 약점을 정확하게 짚어냈으니 움직일 수밖에.”
다 알면서도 가겠다는 태도에 러그윈은 기함했다. 그는 방법을 바꿨다.
“아가씨께서는 대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안전할 겁니다.”
“대정령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알고?”
그 말에 러그윈은 입을 다물었다. 대정령이 그런 식으로 한 인간에게 총애를 보인 게 처음이라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더 이상 대정령이 오지 않는다면? 대정령이 나오는 데 특별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면? 아니, 설령 대정령이 나온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나?”
아스타레아스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그의 어조는 지극히 차갑고 단조로웠다. 하지만 푸른 눈동자는 화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도, 알리스아우카제피루스도 힘을 행사하지 않고 돌아갔어. 숨고래는 그렇다 쳐도 그 바람새의 성격을 봤을 때 거기 있는 인간들을 다 쓸어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야.”
“그건…….”
러그윈은 부정할 수 없었다. 바람새는 자기가 심심하단 이유로 산 하나를 날려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 그는 애써 말을 쥐어짜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성격이 변했을 수도 있고……. 워낙 바람처럼 변덕이 심한 정령이니 변덕을……. 아, 리페 아가씨 앞에서 사람을 쓸어버리기는 좀 그래서 자중한 것일 수도 있지요!”
아스타레아스가 대신관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아스타레아스의 동의에 러그윈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만약 힘을 쓰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
“예? 하하, 도련님도 참! 상대는 대정령……이라고요…….”
러그윈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인가?
바람새가 변덕—이라는 이름의 재앙—을 부리지 않은 것도 벌써 800년이다.
“대정령이 어디까지, 얼마나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시 나타날 수나 있는지조차 모르지.”
맞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것만 믿고 기다리자고?”
아스타레아스가 그대로 걸음을 옮길 기세였기에 러그윈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비스 신전과 황제의 관계에 대한 증거를 이렇게 사라지게 둘 순 없었다.
“황제도 얼간이는 아닙니다. 대정령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건드리진 않겠죠. 도련님 말씀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더더욱.”
아스타레아스는 모르기에 걱정하지만, 황제는 모르기에 두려워할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걱정은 더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영리한 아가씨더군요. 황궁으로 향하는 도중에 기자들을 만났어요.”
그림자 속에서 스르륵 나온 여자가 손에 들린 신문을 아스타레아스에게 내밀었다.
“거리에 돌고 있는 호외예요. 온갖 신문사에서 경쟁적으로 뿌리고 있죠. 그리고 통신석을 통해 상황을 보도하고 있는 기자들도 있고요.”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신문을 향했다. 이때다 싶었던 러그윈이 말을 보탰다.
“리페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을 때 도련님이 침입을 허용해서 신관들이 다 죽었다고 하면 아가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움찔, 칼리오페를 들먹이자 처음으로 아스타레아스에게서 반응이 되돌아왔다.
“리페 아가씨를 위해서라도 신전과 황제의 관계를 밝혀내야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러그윈은 이유를 몰랐지만, 칼리오페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황제가 루스티첼 일가를 몰살한 주범인 만큼 그의 움직임을 제한할 필요가 있으니까.
“제 생각도 같습니다, 주인님. 아가씨께서 이런 준비까지 해서 갔는데 믿고 기다려주시지요. 황제도 언론을 무시하진 못할 겁니다.”
* * *
“울지 않아?”
황제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물었다.
“내가 왜 울어야 하지?”
되돌아오는 싸늘한 대답에 황제가 킬킬 웃음을 흘렸다.
“건방지구나.”
큿, 칼리오페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녀의 목을 황제가 거칠게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기도에 가해지는 압박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띵, 하고 울릴 무렵,
“하지만 마음에 들어.”
황제가 손을 느슨히 했다.
칼리오페는 밭은 기침을 하며 황제를 노려봤다.
황제는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산호빛 눈동자를 음미했다.
살아있었던 동물의 뼈로 만든 보석. 그 보석의 색을 지닌 눈동자답게 꺼내서 박제해두면 정말 예쁠 것 같았다.
황제의 손이 눈가를 어루만졌다. 징그러운 감촉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이렇게나 날 혐오하면서 아까는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다니. 정말 대단한 연기력이야. 내가 박수라도 쳐야 하나?”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통은 살려달라고 빌며 두려움에 떠는데 그렇지 않은 건 가상하게 봐주지.”
황제의 손짓에 마법사가 얼음으로 된 칼날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위기 아니야? 하는 짓을 보니 어려서 뭘 모르는 것도 아닌데. 슬슬 비장의 수를 꺼낼 때라고.”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칼리오페는 말없이 황제를 노려봤다.
황제는 잠시 무언가를 기다리듯 칼리오페를 마주 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정령이 나타나지도 않는 걸 보면 역시 그 제약 때문인가.”
칼리오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네? 황궁에는 꽤 다양한 문헌이 있거든.”
정답을 찾은 것이 기쁜지 황제는 입매를 들어올렸다.
“이제 비장의 수가 허세라는 것도 들통 났으니 애써 당당한 척하는 건 슬슬 그만 둘 때야.”
황제는 반응 없는 칼리오페를 보고 재미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매끈한 얼굴이 절망과 공포, 수치심으로 일그러지면 꽤 그럴싸할 것 같았다.
“재미난 연기를 보여줬으니 네 발로 기어와서 내 구두 밑창을 핥으면 살려주지.”
그 모욕적인 말에도 칼리오페의 얼굴은 변화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황제를 비껴 그 뒤를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산호빛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착각하고 있는데.”
시간 끌기는 끝났다.
“내 비장의 수는 허세가 아니야.”
* * *
“세상에, 말이 돼요?!”
“이 추운 겨울에 실내복차림으로 데려가다니…….”
“안 그래도 세뇌를 풀어주신 것 때문에 무리해서 정양하고 계시지 않았어요?”
“몸도 안 좋은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로…….”
거리에 뿌려진 호외를 본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이마를 맞대고 한 마디씩했다. 누군가가 킨 통신석에서 당시 칼리오페와 기자들이 주고 받은 영상이 흘러나왔다.
“와, 내리는 데 에스코트 하나 안 해주는 거 봐. 황실에서 우리 애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겠네.”
사람들이 매의 눈을 하고 풋맨의 움직임, 기사의 눈빛을 하나하나 분석해 가며 깠다,
[그런데…… 아프시다 들었는데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외출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도 황궁 마차로…….]
[아……. 그게요. 황명을 받드는 것은 제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파리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짓는 칼리오페의 얼굴이 나오자 사람들의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억지로 가는 거였다.
“우리 애가 너무 착해서 저렇게나마 황실을 포장해주네!”
“아니, 제국을 구한 영웅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사람들이 분개해 떠들었다.
[아니에요. 모두 절 배려해주신 거예요. 몸이 아파 성장을 갖추기 힘들 것 같다고 하니 시간도 부족한데 잘됐다고 그냥 가자 하셨거든요.]
대답하듯 때 맞춰 나온 칼리오페의 변호는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아니, 그럼 코트 하나 못 입고 나온 게 시간 부족하다고 빨리 가자고 한 거란 말이야?!”
“성장을 갖추는 게 힘들다고 했지 누가 코트 입는 게 힘들다고 했나!”
“진짜 수행원들 제정신이야? 저 마차 안에 보이는 얼굴 빅타렐 백작 같은데?!”
“와, 진짜 자기 혼자 따뜻하게 코트까지 입고 있고.”
[아차, 백작님께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 말이 더해지자 빅타렐 백작을 향한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하, 참나. 끝까지 마차 문도 안 열어주고 부축도 안 해주는 것 좀 봐.”
“아픈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면서…….”
“황실 인사들이 모두 제정신이 아니구만.”
“근데 이거 정말 그냥 데려가는 거야? 연행되는 거 아냐? 기사들이 많기에 처음엔 영웅에 대한 예우를 해주는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그런 게 아니잖아.”
“뭐야, 그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 * *
민심이 수런거리며 동요했다.
원래도 그다지 신임을 못 산 황제였다.
황제의 친정(親政) 13년. 긴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무심코 황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자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무궁인 그란디나티스는 당연히 기자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어 있다. 이미 오래 전 제정된 언론법 상 황궁 기사들은 기자들을 제압할 권한이 없었다. 보안 때문에 내실까지 출입하려면 사전협의가 이뤄져야 했다.
그래서 칼리오페와 황제가 있는 방까지 들어가진 못했지만 충분했다.
칼리오페는 이미 창밖의 기자들을 확인했다.
그 말은 기자들이 창을 통해 이 방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시간문제란 뜻이다.
지금 칼리오페는 누가 봐도 위협당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에게 등 뒤로 팔을 제압당하고 목엔 칼날이 들어온 채 황제와 대치하고 있으니까.
“이 요망한…….”
궁 밖의 소란을 들은 황제가 칼리오페를 노려보며 읊조렸다. 그의 눈에도 창밖에 몰린 기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영리하다 못해 영악한 계집이다. 도저히 열다섯 살짜리 소녀라고 볼 수 없는 수완이었다.
갑작스럽게 황궁에 불렀으니 모든 것이 임기응변일 터. 하지만 마치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물 흐르듯 진행되고 있다. 자신이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누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리 없다고 안심이라도 할 법한데.
마법사를 대기 시키면서도 과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녹음하고 있지 않나, 심지어 들킬 때를 대비한 다음 수까지 두고 있었다.
어린 여자애의 잔꾀에나 당하다니. 검은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였다.
“자, 폐하께서 결정하실 차례예요.”
칼리오페는 생긋 미소 지으며 황제를 바라봤다. 얼음칼날이 새하얀 목덜미 바로 근처에 있었지만 그녀는 여유로웠다.
그 모습이 황제의 심기를 들끓게 만들었다.
“네년이 감히—”
“어! 저기 저쪽 방에 있어!”
기자들의 외침이 창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저, 저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경악한 목소리와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끊임 없이 울렸다.
“시간 초과네요”
칼리오페가 황제를 향해 조용히 선고했다.
자존심 때문에 살 길을 스스로 막은 게 참 기가 막혔다. 녹음했던 증거가 사라졌으니 칼리오페를 풀어줬다면 이 일은 묻힌 채 끝났을 거다.
황제는 칼리오페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경멸을 읽었다.
‘감히……!’
그는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며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절대 저 건방진 계집의 뜻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내 기필코 저 년의 목을 딸 것이야.’
그리고 감히 지고의 존재인 제국 황제를 무시한 저 붉은 눈깔을 침전에 장식해 놓을 것이다.
황제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리고 소리높여 외쳤다.
“루스티첼 영애를 구해라!”
“……?!”
황제의 말에 칼리오페는 눈을 부릅떴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황제의 계획을 간파해냈다. 황제는 마법사와 자신의 관계를 숨기고, 괴한에게 습격당한 칼리오페를 마치 구해내는 척하는 것이다.
‘황제는 황제라는 건가.’
어쨌거나 그는 후계자가 아니었으면서 보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너무 쉽게 봤음을 쓰리게 인정했다.
“영애께서 습격 당하신 거야?”
“대체 황궁 보안이 얼마나 허술하면…….”
“세상에, 우리 아가씨 어떻게 해!”
창밖의 기자들이 소란을 떨었다. 통신석을 통해 이 상황을 중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가오지 마!”
칼리오페를 붙든 마법사가 칼날을 더 가까이 들이대며 내실에 들어온 황궁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물러서!”
기사들은 인질의 안전을 위해 뒤로 물러섰다. 겉으로 보기엔 칼리오페를 최우선시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필코 인질을 구해내야겠다는 강한 열망이 있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이런 쇼를 통해 나와 불화가 없다는 식으로 상황을 넘기는 것뿐이라면 괜찮은데…….’
칼리오페를 구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될 것이니까.
칼리오페는 시선을 내려 목에 겨누어진 칼을 바라보았다. 아주 살짝만 스쳐도 피부가 쉽게 찢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날이 번뜩였다.
그녀는 시선을 올려 황제를 바라보았다.
‘조금 위험하겠는데.’
검게 일렁이는 황제의 눈동자는 살기에 물들어 있었다. 이 기회를 통해 황제는 칼리오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어쩌면 죽일지도.’
칼리오페는 이제 정치적인 상징성마저 갖춘 존재가 되었다. 황제라면 그녀가 아스타레아스의 편에 들어가느니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할 법했다.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범인은 따로 있고, 황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범인을 처단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의 자작극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반드시 루스티첼 영애를 안전하게 구해내야 한다! 영애는 나의 백성이자 이 제국의 희망이야!”
황제가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기사들에게 명했다.
“영애,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약속하지. 반드시 그대를 구해내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당당히 선 황제의 뒷모습은 기자들을 통해 생생히 중계되고 있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를 향한 입술은 비죽비죽 솟아나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징그럽게 휘어져 있었다.
‘침착해.’
칼리오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전쟁으로 나라가 불탔을 때, 이보다 더 끔찍하고 참혹한 일을 보고 겪었다.
그녀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마법사의 상태를 살폈다. 기사들과의 거리를 가늠하는데…….
‘호세 오라버니?’
낯익은 얼굴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호르세안이 흑룡 기사단 소속이라는 건 기밀이다. 일단 그는 여전히 백룡기사단 소속이었다.
‘왜 여기에……?’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살짝 쳐진 호박색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제나처럼 칼리오페를 향해 다정히 빛났다. 마치 안심하라는 것처럼.
‘내가 널 구해줄 테니까. 우리 꼬마 아가씨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작은 헐떡임이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여태까지 침착했던 칼리오페가 처음으로 내보인 동요였다.
‘절대 안 돼.’
호르세안이라면 반응 속도가 느린 마법사의 신경을 돌리고 빠르게 칼리오페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러를 통해 마법에도 대응할 수 있고.
‘하지만 죽을 거야.’
호르세안은 황제에게 복종하는 척 흑룡 기사단에 들어가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칼리오페를 구해버리면…….
‘분명 이중 스파이라는 것을 들키고 소리 소문 없이 처분 당하겠지.’
칼리오페는 눈에 힘을 줘 안 된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소용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싫다고, 안 된다고 해봤자 호르세안은 그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니까.
가벼워 보이는 태도에 가려질 때가 있지만 그는 한없이 정의롭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먼 과거에 봤던 호르세안의 시체가 다시 눈 앞에 떠오르는 듯 했다.
‘또다시 그럴 바엔…….’
시간을 되돌아온 순간부터 이번엔 칼리오페가 그를 지켜주자고 마음 먹었다.
‘내가!’
결심을 마친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단호했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위험 부담이 있지만 호세 오라버니를 잃는 것보단 훨씬 나아.’
하지만 성공할까.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니 누군가의 얼굴이 강하게 떠올랐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 투명한 푸른 눈동자. 리페, 하고 부르는 목소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용기가 샘솟는 사람.
‘그래,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열렸다.
성대가 진동하고 그녀 안에 고였던 숨이 밖으로 흩어지는 순간, 격통이 밀려왔다.
‘큭…….’
겨우 한 음절 내뱉었는데 폐가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기침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아내며 칼리오페는 어떻게든 노래를 이어나가려 했다. 거칠게 요동치는 에테르가 성대를 날카롭게 할퀴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목소리를 못 내게 되더라도—’
고작 목소리 하나로 호르세안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다.
그때였다.
콰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의 잔해와 먼지가 만들어내는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칼리오페를 붙들고 있던 마법사의 비명이었다.
칼리오페는 흐린 시야 속에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었던 손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칼날은 아예 형체도 없이 기화되었다.
마법사는 칼리오페를 거의 내팽겨치다시피 하며 화상 입은 자신의 손을 감쌌다. 흉측하게 타들어간 손은 표피가 타 붉은 속살이 드러난 것을 넘어 군데군데 검게 패여 있었다.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무너져 내린 벽 앞에 서 있는 인영이 드러났다.
“……!”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떠올렸던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레아스?”
칼리오페는 소리 없이 그를 불렀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오열하는 마법사를 보고 있던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돌렸다. 얼음처럼 시렸던 푸른 눈동자에 온기가 깃들었다.
그는 한달음에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여기에…….”
속삭이는 칼리오페를 향해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당신이 여기 있잖아요.”
그가 차갑게 굳은 칼리오페의 손을 감싸쥐었다.
따뜻했다.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안심됐다.
칼리오페는 그제야 자신의 초연함 뒤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감정들을 깨달았다.
“내 조카님께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그때, 황제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깊은 공동처럼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만족감에 슬쩍 올라간 입매가 탐욕스러웠다.
그런 황제의 얼굴을 본 순간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황제가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낸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레아스를 이곳에 불러내기 위해서였어.’
정확히는 아스타레아스가 신관들을 가두기 위해 치고 있는 결계를 거두기 위해서.
“황제의 정무궁을 습격하다니, 이건 또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황제는 일부러 습격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했다.
황제가 정무를 보는 곳을 습격한 것은 반역으로도 간주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아스타레아스에겐 황위계승권마저 있었으니 반역의 주체가 되에 충분했다.
황제의 말에도 아스타레아스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칼리오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괜찮은지, 무사한지 확인하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본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목이 아파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습격이라니요. 레아스는 위기에 빠진 저를 구해준 거지요.”
겨우 한 음절 노래한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목이 쉬었다. 그래도 목소리를 완전히 잃지 않은 게 어디냐 싶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입매가 굳었다.
칼리오페는 뭐라 말하려고 하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저지하곤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나요? 저를 반드시 구해내야 한다고.”
그냥 해본 말이었나요? 산호빛 눈동자가 그렇게 묻고 있었다.
기자들을 의식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는 건 그녀도 알고 황제도 알았다. 그러나 사실대로 답할 순 없는 법이다.
“그래, 그리 말했지. 그리고 내 명을 받은 황궁 기사들이 곧 영애를 구해낼 셈이었네.”
칼리오페는 ‘시체가 된 후에요?’라고 되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를 구한 사람은 레아스예요, 폐하.”
그 말에 황제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저를 인질로 잡고 있었으니 허점을 찌르기 위해 다소 과격한 충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칼리오페의 물음은 황제가 아니라 기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기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큰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이 정도로 끝나길 천만 다행이죠. 다친 사람도 없고.”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아스타레아스를 칭송하는 목소리에 황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폐하께서 정무를 보시는 그란디타스 궁은 정말 중요한 곳이지요. 저도 알아요.”
칼리오페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폐하의 말씀은 궁을 훼손하는 게 저를 빠르게 구출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려서…….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셨겠지만요.”
일개 귀족 영애가 황제에게 하기에는 무례한 말이다.
그러나 황제도, 황제의 기사도 지금 상황에서 그 점을 지적할 수 없었다.
기자들의 눈에는 조금 전 목숨을 위협당한 소녀가 한없이 가련하고 애처롭게만 보일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모습까지 생중계하는 기자가 있었다.
무례를 꾸짖으면 칼리오페에 대한 호의로 가득 찬 제국민들이 어떻게 볼까?
‘이 영악한 년…….’
황제는 이제 칼리오페의 머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알았다. 분명 무례를 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부러 순진함을 가장해 선을 넘고 있는 것이다.
그래, 겉보기에 만큼은 떼 묻지 않은 순진한 소녀가 놀라고 서운하고 당황했던 마음에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제가 그렇게 느끼는 건 이해해주셔요. 레아스는 저를 구해냈는데 이에 대해 치하는 안 하시고 그란디타스 궁을 훼손한 책임만 묻고 계시잖아요.”
기자들이 어떻게 기사를 쓸지 뻔히 보였다. 황제는 당장이라도 저 간사한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애써 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해하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 방금 전 상황에서 영애의 목숨보다 더 중한 게 어디 있겠나.”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여요. 하지만 왜 레아스를 꾸짖기만 하셨는지…….”
황제가 피해간 대답을 기어코 다시 묻는다.
황제는 다시 한 번 칼리오페를 향한 살의가 치솟는 것을 느겼다. 아스타레아스와는 또 다른 의미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건 황가의 사정이니 영애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이 상황에선 최선의 대답이었지만 결코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당장 내일 정무회의부터 시끄러워질 것이다.
“리페.”
아스타레아스의 부름에 칼리오페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도록 해요. 아프잖아.”
칼리오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기자들이 포진해 있을 때 황제에게 알아낼 게 있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가 고통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작 아픈 당사자인 칼리오페는 이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스타레아스가 더 고통 받고 있다.
칼리오페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안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도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찰칵찰칵찰칵— 잦아들었던 셔터 소리가 날아오르는 새의 날개 소리처럼 힘차게 울려 퍼졌다.
당황한 칼리오페와 달리 칼리오페를 안은 아스타레아스는 당당히 걸어 뚫린 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안아든 상태 그대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아스타레아스는 마차를 타지 않고 황궁까지 날아왔는데 기어코 도련님이 황궁에 가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른 러그윈이 마차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상황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와 함께 나올 건 알았으니까.
마차 문이 멈추자 기자들은 서둘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에 관한 기사를 쓸 생각만 가득했다.
* * *
“목 안 다쳤는데 목소리는 왜 그래요.”
아스타레아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마차 안에서도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안은 채 내려놓지 않았다. 그의 무릎 위에 안긴 채 칼리오페는 얼굴을 붉혔다.
“레아스, 일단 내려놓고…….”
“싫어요.”
아스타레아스는 되레 칼리오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온과 무게와 향기를 온전히 느끼겠다는 듯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어쩐지 기운이 없었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가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대고 있어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쩐지 축 쳐진 어깨와 숙인 고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오려던 생각을 접고 아스타레아스를 마주 끌어안았다.
‘불안했구나.’
“괜찮아요. 레아스가 날 구해줬잖아요.”
“목소리는 엉망이면서.”
“그렇게 엉망은 아닌데.”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들어 칼리오페를 마주 봤다.
아까는 정말로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그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제압 당한채 목숨을 위협 당하는 칼리오페였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 바로 옆에서 번득이는 칼날을 보자마자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들끓는 그의 분노에 감응한 마나가 그가 명하기도 전에 겁화를 불러냈다.
‘아, 끔찍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칼리오페의 상태를 살피느라 그 버러지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의 실수에 혀를 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칼리오페의 앞에서 죽이지 않길 잘했다.
‘그래도 처분할 권리를 주장해서 내가 데려왔어야 했는데.’
아스타레아스는 마법사가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잔혹해질 자신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칼리오페의 팔목으로 향했다. 붉은 손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지금은 그저 붉을 뿐이지만 분명 멍이 들 것이다.
“올 줄 몰랐어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잔혹한 생각을 거뒀다.
“왜 몰랐어요. 당신이 있는 곳인데.”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한가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결계를 치고 있었다. 그가 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칼리오페는 기자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나한테 왜 없었냐고 그랬잖아요.”
툭,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정말 무서웠는데 왜 없었냐고. 보고 싶었다고, 기다렸다고 했잖아요.”
그가 속살거릴 때마다 숨결이 칼리오페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날, 칼리오페는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원망했다.
“그러니 내가 와야죠. 당신이 나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찡하게 조여와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네, 기다렸어요.”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그가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대조차 없었고 서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레아스가 무서울 땐 내가 함께 있어줄게요.”
“그럼 나는 매일매일 무서울 텐데.”
“레아스도 참…….”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흘겨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그녀를 마주 하는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 역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 * *
“응,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 카스틸로 공자가 왔거든.”
[봤어. 중계하는 기자가 있더군. ……역시 내가 진작에 따라갔어야 했어.]
통신석을 통해 들리는 루시우스의 나직한 목소리에 호르세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호르세안은 황제의 밀명을 받기 위해 황궁에 들린 참이었다. 황제와 독대하고 궁을 나서려는데 루시우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리페가 황제에게 불려갔나 봐. 나도 곧 갈 테니 그때까지만 살펴봐줘.]
통신석 화면에 뜬 메시지에 호르세안은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너는 그냥 기다리고 있어. 차라리 포섭했으면 포섭했지 지금 상황에서 황제는 리페를 어떻게 할 생각 없을 거야.]
[그래도 내가 가야지.]
[네가 오면 오히려 루스티첼 가를 이상하게 볼 거야. 황제가 얼마나 반란에 예민한지 알잖아.]
답장이 없는 게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 호르세안은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칼리오페와 카스틸로 공자와의 관계는 둘 사이의 관계로 끝나야해. 네가 오면 루스티첼 가가 카스틸로 공자를 지지한다고 볼걸. 그게 리페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칼리오페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고 했으니 오지 않을 것이다.
‘이 녀석 다른 때엔 침착하고 냉정한데 막냇동생에 관련되기만 하면 성급해진다니까.’
호르세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문장을 보냈다.
[리페는 내가 지킬게.]
그리고 친우와의 약속대로 호르세안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서 칼리오페를 지키려고 했다.
[아, 호세. 널 탓하는 건 아니다.]
루시우스의 말에 호르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거 알아. 하지만…….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는 네 동생이 도착하면 꼭 묻도록 해.”
[지금 그게 문제야? 리페의 목덜미에 칼이 들이밀어졌다고. 애가 얼마나 놀랐을 텐데.]
“네 동생은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 안 해. 너도 알잖아?”
루시우스는 침묵했다. 칼리오페가 얼마나 대범한지는 가족인 루시우스가 더 잘 알았다.
“황제는 분명히 리페를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어. 경계는 했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 리페는 막대한 정치적 영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리페는 권력에 관심 없어.]
“그래, 하지만 황제는 그걸 모르잖아. 그리고 권력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고작 열다섯 짜리 소녀야. 오히려 이용하기 쉽다고 노리는 사람이 있겠지.”
[황제도 그 중 하나고.]
호르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틸로 공자와 연인이라는 것 때문에 칼리오페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도 황제는 멍청하지 않아.”
[회유했으면 회유했지 오늘 해를 입힐 이유는 없었다는 거군.]
“응. 그러니까 황제가 태도를 바꾼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 리페가 무슨 짓을 했겠지. 네가 알아야 다음에 대비하지 않겠어?”
루시우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호르세안의 말은 옳다. 하지만 큰일을 겪고 온 동생을 다그치긴 싫었다.
[알았어. 물어 볼게.]
“루스.”
호르세안이 통신을 종료하려는 루시우스를 불러 세웠다. 호르세안이 루시우스를 봐온 시간은 그가 살아온 시간과 똑같았다.
“상대는 황제야.”
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막둥이가 말하기 힘든 기색을 내비치면 모르는 척 쉬라고 할 것을 잘 알았다.
“리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오가고 있는지 알아야 해.”
[……꼭 답을 들을 테니 걱정하지 마.]
확답을 받고서야 호르세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조만간 사고뭉치 꼬마 아가씨한테 초콜릿 잔뜩 들고 찾아가겠다고 전해 줘.”
[오지 마.]
“너무하네. 내가 오늘 얼마나 난감했는데.”
호르세안이 상처 입은 양 가슴을 움켜쥐며 울상을 지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렸을 땐 에피니가 말괄량이고 리페는 차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리페만 한 말괄량이가 없어.”
[리페가 나쁜 게 아니야. 주변이 나쁜 거지. 그 정도로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니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뿐이다.]
루시우스의 단호한 얼굴에 호르세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러시겠지. 여하간 나는 황제한테 가서 상황을 봐볼게.”
[조심해, 호세.]
나는 동생을 지키고 싶은 거지 너를 잃고 싶은 게 아니니까.
진중한 하늘색 눈동자를 보며 호르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루스티첼 저에 도착한 칼리오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한바탕 걱정과 포옹과 훈계와 키스를 받았다.
가족들은 아스타레아스를 인정하긴 죽어도 싫다는 태도로 막둥이를 구해줘서 고맙다며 인사했다. 그리고 쫓아내고 싶지만 차마 쫓아내진 못하고 손님으로 들였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되돌아갔다.
어서 가서 결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보고가 없는 걸 보니 신관들이 황제에게 사살 당하지 않은 듯 했다.
“그래서, 왜 갑자기 인질로 잡힌 거야? 아니, 그전에 인질이 맞긴 해?”
아스타레아스가 돌아가고 어느 정도 어수선함이 가라앉자 루시우스가 물었다.
“당연히 아니죠. 그 마법사는 황제의 수하였어요. 기자들이 몰려오니 황제가 기지를 발휘한 거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칼리오페의 입에서 사실로 확인되니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가 치솟았다.
천사 같은 막둥이를 이 추운 겨울에 외투 없이 실내복 차림으로 강제 연행해 갔다. 그것도 부족해서 황제라는 작자가 어린 소녀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고 겁박하다니.
기자의 중계를 통해 그 모습을 봤을 땐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거기다 칼리오페의 팔에는 멍 자국이 잡혀 있었다.
“당장 가서 황제의 목에 검을 꽂아놔야겠어.”
“나는 배때지에 꽂을래!”
“로벨, 루시우스.”
황제를 향한 불경한 말에 뼛속까지 기사인 루스티첼 백작이 엄하게 두 아들을 불렀다. 그는 발칙한 자식들을 꾸짖—
“단 번에 꽂아선 안 된다. 즉사하게 두면 안 돼.”
……진 않고 적절한 조언을 해주었다.
“어머, 그러기 전에 우선 만천하에 황제의 본성을 드러내야죠. 지금 가진 걸 다 빼앗고 재기 불가능하게 만든 뒤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는 게 좋겠어요.”
루스티첼 부인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얼굴만 보면 피크닉 가자는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으응? 아니, 지금 너무 자연스럽게 반란 모의를 하고 있지 않나요?!’
칼리오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미 결심이 굳은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예전부터 이런 날을 준비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칼리오페의 가족이었다.
칼리오페는 가족들과 의논하지 않고 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지려고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눈치 챘을 것이다. 언제나 관심과 애정을 가진 눈이 칼리오페를 향했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상황이 됐던 거야? 황제는 널 해칠 생각이 없었을 텐데.”
“황제와의 대화를 녹음 중이었는데 들켰거든요.”
아무렇지 않은 칼리오페의 말에 가족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담력이 커도 그렇지 설마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말괄량이 사고뭉치.
호르세안이 칼리오페더러 했던 말이 루시우스의 머릿속에서 다시 울려퍼졌다.
‘……이제는 그 말에 부정할 수도 없게 됐군.’
“다시는 그러지 말거라, 리페. 독대하면서 황제 몰래 녹음하다니 자칫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 즉결 처분될 수 있어.”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의 양 어깨를 짚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한 번 들킨 수를 다시 쓰진 않을 테니까요.”
안심하라는 듯 밝은 미소를 짓는 딸아이를 보니 머리가 아팠다. 그럼 다른 위험한 짓은 하겠다는 소리인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황제가 제게 위해를 가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벌였던 일이구요.”
칼리오페가 당당히 말했다.
“위험한 행동인 걸 알긴 알았구나. 난 또 모르는 줄 알았지.”
“그럼요.”
씨익 웃는 막둥이를 당해낼 사람은 가족 중에 아무도 없었다.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한 순간엔 대정령을 불러내면 돼요.”
지금 바람새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칼리오페는 그 점을 밝히지 않았다.
“위험한 짓을 아예 안 할 생각은 없는 거니?”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엄하게 혼내서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칼리오페가 어디 말린다고 들을 아이던가.
차분하고 예의가 바른 데다 얌전해서 다들 착각하지만 가족들은 알았다. 칼리오페가 얼마나 고집쟁이인지.
“하아, 말리진 않을 테니 말이라도 해주렴.”
“리페, 네게는 이 오라버니가 있다. 네가 불구덩이에 뛰어든다고 해도 함께 갈 거야.”
“나는 물구덩이도 갈 거야!”
“응, 고마워요.”
칼리오페는 두 오라버니를 푹 끌어안았다.
“이만 방으로 가볼게요. 쉬고 싶어요.”
“그래, 어서 쉬는 게 좋겠구나.”
칼리오페에게 안겼던 두 아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던 루스티첼 부인이 때를 놓치지 않고 팔을 벌렸다. 칼리오페가 어머니를 꼭 끌어안자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남은 루스티첼 백작만 시무룩한 얼굴로 딸아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좋아, 성과가 아주 없진 않았어.’
방으로 돌아온 칼리오페는 천천히 황제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가족들은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았을지 염려했지만 칼리오페는 정말로 괜찮았다. 위험한 건 상관 없다. 그 위험을 감수해서 가족들을 살릴 수 있다면.
목에 칼이 들어오거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가족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싼 거지.’
오늘 알게 된 것 역시 황궁에 가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정보다.
그것도 큰 의문을 불러오는 퍼즐 조각.
‘황제는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 없어.’
칼리오페가 황제를 회유하듯 말한 것에는 그걸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사실 칼리오페는 황제를 떠보면서 당연히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루스티첼 백작을 죽이는 순간 칼리오페와 적이 될 게 뻔한데 왜 한 편이 되겠는가.
쓰고 버리는 패 정도로 고려하면 모를까 진심으로 곁에 두려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솔깃해했어.’
칼리오페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황제가 갈등한 이유는 오로지 아스타레아스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마법사가 나타났을 때 황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한참 어린 소녀에게 농락당했다는 분노였다. 느긋한 척 제 페이스를 찾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진심으로 내가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 루스티첼 가를 공격할 계획 자체가 황제의 머릿속에 없었다는 뜻이다.
‘왜?’
전생에서 아버지는 올해 가을에 이미 살해당했다.
범인은 황제의 그림자인 흑룡 기사단이었다.
‘그런데 정작 황제는 겨울이 된 지금까지 아버지를 해할 생각이 없다라…….’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 살해 시기가 늦춰진 줄로만 알았는데 황제의 계획이 바뀐 걸까? 황제가 루스티첼 가를 몰살할 이유가 사라진 건가? 아니면 루스티첼 가의 위상이 커져 몰살할 경우 얻을 이득보다 후폭풍이 더 클 거라고 생각해 포기한 걸까.
대체 황제가 루스티첼 가를 몰살한 이유가 뭐지.
뭘 얻을 수 있었을까.
아무런 사적인 원한이 없는 경우,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혹은 죽여 입막음하기 위해.
루스티첼 가는 청렴했던 만큼 황제가 탐을 낼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혹시 범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가문의 재산이 어떻게 되었나 조사해봤다. 하지만 몰락 과정에서 생긴 부채에 휩쓸려 재산은 조각조각 나 여러 사람에게 돌아갔다. 정체를 숨긴 흑룡 기사단원이었을 수도 있지만 재산의 쓰임을 생각할 때 황제와 관련됐다고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입막음을 위해?’
어머니는 병환으로 돌아가셨으니 전생에서 살해 당한 건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들이었다.
그들이 황제가 숨기는 무언가를 알아낸 거였을까?
‘그리고 이번엔 그 비밀을 몰라서 죽일 필요가 없다거나…….’
꽤 그럴싸했다.
회귀 후 루스티첼 가를 둘러싼 상황이 변한 만큼 아버지와 오라버니들 역시 전생과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전생에 알게 된 비밀을 이번엔 모르는 채 넘어가도 말이 된다.
‘이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가족들이 황제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만 경계하면 된다.
‘그나저나 황제의 비밀이 뭘까.’
목숨이 위험하니 가족들은 몰랐으면 했지만, 칼리오페 본인은 알고 싶었다.
죽여서라도 감춰야 했던 황제의 비밀. 그것만 알면 약점을 잡는 것이나 다른 없으니까.
‘……혹시.’
번뜩 든 생각에 칼리오페는 자세를 바로했다.
[황제의 관을 쓰고 계신 분은 폐하십니다. 그 관을 물려줄 이를 택하는 것도 폐하이신 게 당연하지요.]
[아니, 물려줄 생각은 없다.]
칼리오페의 말에 황제는 분명 그렇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물려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인 걸까, 의아했다.
제국에서 황제가 죽기 전에 먼저 선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병환으로 황제가 정사를 못 보는 경우마저 완전히 죽은 다음에야 후계인 황태자가 황위를 승계했다.
다시 말해, 선위한 몇몇 황제를 제외한 모든 황제가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단 뜻이다.
‘아주 일반적인 생각인데 그걸 굳이 저렇게 말하나?’ 하고 의문을 가졌다.
어쨌거나 사람은 죽는다.
현 황제도 언젠가는 죽어서 누군가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할 것이다. 차라리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더 상황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진 황제의 말은 확실히 더 이상했다.
[내가 계속 쓰고 있을 생각이야.]
마치 자신은 누구에게도 물려줄 필요 없다는 것처럼.
그건 다시 말해서—
‘죽지 않는다……?’
칼리오페는 황망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고를 멈출 수 없었다.
불로불사.
이건 모든 권력자의 영원한 염원이었다.
하지만 왜 영원한 염원이겠는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성력으로 병을 고치고 건강을 유지해도 노화는 차근히 진행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신성력으로 손도 쓸 수 없는 상태가 찾아온다.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가난한 평민부터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황제까지. 모두 죽음 앞에서 평등했다. 신의 섭리에 따라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황제가 그렇게 말한 건 분명 무언가 있기 때문이겠지.’
어쩌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알아낸 황제의 비밀이 이것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황제가 레이디 칼리오페를 구한 조카를 꾸짖은 이유, “황가의 사정이야”]
[공훈은 없애고 과실만 강조한다? 황제는 조카에게 왜 그러는가]
[조카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던 황제, 약속 불이행을 넘어 조카에게 누명까지?!]
기사가 쏟아져 내렸다.
괴한의 손에서 칼리오페를 구해낸 아스타레아스를 황제가 박대했다. 칼리오페가 사건 현장에서 그 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던 만큼, 그에 초점을 맞춘 기사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칼리오페를 거의 강제로 초청해 사고를 일으킨 황제를 비난하는 사설도 상당했다.
[완전히 뚫린 황실 보안, 귀빈을 인질로 잡혀.]
[국민의 혈세는 어디에 쓰이는가.]
[구국의 영웅, 왜 한겨울 얇은 실내복차림으로 집을 나섰나.]
[레이디 칼리오페의 황실 행, 초대인가 연행인가]
사람들은 모두 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칼리오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자세한 정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기사를 다 읽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황제를 향해 분통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공자님께서 성년이 되셨는데 황태자위를 내리지 않아서 이상했는데.”
“솔직히 속이 너무 빤히 보이는 거 아냐? 칭찬할 일을 했는데도 칭찬하긴커녕 타박하다니.”
“황제가 되어서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할 거 아니야.”
“별 능력도 없는 지 아들한테 물려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 너무 티 나. 진정한 통치자라면 자질 있는 사람한테 물려줄 생각을 해야지.”
“야, 말은 가려서 해.”
“뭐 어때. 원래 안 듣는 데선 신도 욕한다는데.”
그말에 사람들이 픽픽 웃었다. 말린 사람도 정말 말렸다기 보다는 밀리는 시늉 한 번 해본 것이다.
그만큼 황제를 향한 민심은 바닥이 났다. 원래도 그다지 인기 없는 황제였지만 이번 일이 결정타였다.
파리하게 질린 칼리오페가 실내복 차림으로 오들오들 떨며 황제에게 불려간 사건. 그 모습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사람을 그렇게 데려가 놓고 목숨까지 위협 당하게 둬?”
“황실 보안은 왜 이래? 이럴 거면 그 돈으로 우리 애한테 개인 경호원이나 붙여줘라.”
사람들은 씨익씨익거리며 세금을 아까워했다.
“그때 공자님이 오시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맞아. 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이라니까! 이번에 나 그 장면 중계영상으로 봤는데……. 다 부시고 들어가서 리페님 구해내는 거 보고 무릎 꿇었잖아.”
“진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는데 완전 멋졌지. 내가 다 설렜다니까!”
여자들이 꺄아꺄아 외치며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뭘 또 천생연분이야. 우리 애한테는 그 누구도 아까워!”
“그러엄! 무려 대정령의 가호를 받고 에테르를 다루는 요정천사천재라고.”
양쪽으로 패가 갈린 사람들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아무리 안 어울린다고 떠들어 봤자야. 두 사람은 이미 공인 커플이라구! 경연장에서 못 봤어?”
“아 그때 정말 깜짝 놀랐어. 갑자기 공자님이 무대로 올라오더니 리페님한테 아름답다고 고백하고…….”
말하는 눈동자가 그때를 떠올리듯 몽롱했다.
“뭐, 우리 애가 좀 예쁘긴 했지. 보는 눈은 있으시다니까.”
두 무리가 극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사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때 칼리오페에게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래를 칭찬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심지어 영상을 수십 번 돌려봤음에도—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고백했다고 믿었다.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다 그렇게 보였으니까.
* * *
“죄송합니다, 주군.”
아스타레아스는 자신 앞에 부복한 여자를 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텅 빈 옥사가 보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황제는 결계를 치고 있는 아스타레아스를 끌어내기 위해 칼리오페를 부른 거니까.
아스타레아스가 카스틸로 저를 나서는 순간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춰 옥사를 습격했을 게 뻔했다. 그걸 각오하고서 칼리오페에게로 갔던 것이다.
‘설마 리페가 정말 위험에 처해 있었을 줄은 몰랐지만.’
논리적인 이유를 대며 칼리오페는 괜찮을 거라고 설득했던 수하들의 말처럼 그녀의 신변에 이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갔던 것은—
‘네가 나를 기다릴까 봐.’
몬스터에게 습격 당했던 날 그를 원망하는 칼리오페를 보고서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안할 상황이라면 자신이 곁에 있겠다고.
‘가길 천만 다행이었지.’
설마 칼리오페의 목에 칼이 들어왔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빈 옥사에는 사람 대신 피가 가득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광경을 보고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습격한 자들의 피입니다. 신문을 위해 몇몇은 살려두려고 했지만 자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보고하는 여자의 팔에도 자상이 심했다. 배에 입은 화상은 아직 치료 전이라 진물이 가득 배어나오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였을 것이다.
“습격자들이 흑룡 기사단원이라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문신을 새겼던 자들의 경우 그 위를 불로 지진 자국은 있었습니다만…….”
화상 자국으로 엉망이 된 문신을 흑룡 기사단의 증거라고 해봤자 역공만 당할 것이다.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다. 자결을 각오하고 온 이상 증거를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
“신관들은?”
“몇몇은 죽었지만 대신관은 도망쳤습니다. 예상과 달리 살인멸구시키는 게 아니라 신관들을 도주시키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도주가 목적이었다고?”
그 전까지 담담하던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에 처음으로 이채가 돌았다.
비스 신전은 지금 제국을 넘어 전 세계의 지탄을 받고 있다. 황제의 목적은 당연히 비스 신전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은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둘의 연결점이 밝혀질 시 지금 비스 신전을 향한 비난은 황제에게로 향할 테니까.
그런데 죽여서 증거를 지우는 대신 탈출을 도왔다라…….
황제는 사람을 체스 말처럼 취급한다. 그간 자신을 도운 대신관이 고마워서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다.
‘분명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어. 대신관이 아직 필요한 거야.’
오늘 습격했던 이들은 황제로서도 잃기에 뼈 아픈 전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을 전부 잃고서라도 대신관을 탈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뭔가 목적이 있어.’
“예, 다른 것보다 대신관을 탈출시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더군요.”
“대신관을? 성녀는?”
“성녀는 여전히 북쪽 탑에 갇혀 있습니다. 북쪽 탑의 경비를 강화해 놨지만 그쪽으로는 습격조차 없었습니다.”
지하 감옥에 가둔 신관 무리와 달리 성녀는 북쪽 탑에 갇혀 있었다. 습격을 대비해 일부러 분리해서 가뒀던 것이다.
‘오히려 이쪽의 전력이 분산되기만 했군.’
아스타레아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성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줄은 몰랐다. 성녀의 능력이 세뇌라는 것이 다 들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용 가치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황제와 신관들은 아스타레아스가 세뇌 파훼 마법을 창조해냈다는 것을 모른다. 오로지 칼리오페의 힘만이 세뇌를 풀 수 있는 줄 안다.
즉, 칼리오페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세뇌가 통한다는 뜻이다.
물밑에서 움직일 때 세뇌만큼 손 쉬운 수단이 어딨을까?
‘루스티첼 가의 마부에게 세뇌를 걸었던 것처럼.’
경연을 위해 보육원으로 향하던 칼리오페의 마차가 엉뚱한 길로 빠져 몬스터와 조우했다. 이 사건의 뒤에는 성녀가 있었다.
몬스터와 마부에게 세뇌를 걸어 마부는 잘못된 길이 맞다고 생각하게 됐고, 몬스터는 칼리오페를 주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성녀가 있으면 얼마든지 이런 짓을 꾸밀 수 있어.’
간단하게는 대신들을 세뇌해 황제가 원하는 대로 의견을 주무를 수 있다.
‘그런데 성녀는 두고 대신관을 데려갔다고?’
그 말은 황제에게 대신관의 이용 가치가 성녀보다 더 높다는 뜻이다.
‘대신관이 대체 뭘 할 수 있기에…….’
“벌레처럼 성가시군. 추격은?”
“은밀히 붙여놨습니다. 잡아들일까요?”
여자는 부디 맡겨달라는 눈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이만큼 부상을 입었지만 아스타레아스가 명만 내리면 당장 선봉에 나서 도주 중인 대신관 무리를 잡아들이리란 결의가 보였다. 어떻게든 오늘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놔둬.”
“하지만…….”
“딜런, 바퀴벌레를 잡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딜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특기는 인간을 죽이는 거지, 벌레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단순하게 그냥 보이는 걸 잡아 죽이면 안 돼. 그럼 절대 박멸하지 못하거든.”
보이는 걸 잡아봤자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벌레가 나와 성가시게 한다.
“먹이에 독을 섞는 거야. 독이 든지도 모르게.”
독을 먹은 지도 모르고 소굴로 돌아간다.
알아서 소굴까지 안내해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소굴로 돌아간 벌레는 다른 벌레에게도 먹이에 대한 사실을 공유한다.
지금 신관들이 품은 독은 꼬리에 붙은 미행자였다.
“안전하다, 아무 문제 없다. 이런 착각을 하게 한 채 내버려둬. 자신이 독을 품은 지도 모르고 소굴로 들어갈 때까지.”
대신관이 알아서 안내해줄 것이다. 그의 이용가치가 뭔지, 황제가 왜 그를 필요로 하는지, 황제가 그를 이용해 무엇을 꾸미는지.
“우리가 할 일은 눈과 귀를 열어두는 거야.”
딜런이 고개를 숙였다. 과연 자신의 주인이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군.”
* * *
아스타레아스와의 통신으로 신관들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칼리오페는 서둘러 기자들을 만날 일정을 짰다.
그녀는 그란디나스 궁에서 있었던 일을 보도한 기사를 빠짐없이 읽었다. 어떤 논조로 작성했는지, 기자의 이름을 유심히 살피며.
그리고 그 중 상당수를 루스티첼 저로 초대했다.
“레이디.”
루스티첼 저 응접실에 들어선 칼리오페를 보고 기자들이 예를 표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호감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모두 성녀에게 세뇌당해 칼리오페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기사를 썼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 기사를 다시 읽어보니 자신의 손으로 썼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칼리오페가 무슨 대량학살을 주도한 희대의 마녀인양 언어로 난도질했었다.
“급하게 만남을 요청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해요.”
칼리오페의 인사에 그들은 더더욱 면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야 루스티첼 저 앞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이렇게 불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 안 그래도 불편하시다 들었는데 그런 일까지 겪으셔서 악화되진 않으셨을까 걱정이었습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러분의 염려덕분에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다정한 칼리오페의 말에 기자들은 더더욱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들이 루스티첼 저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이유.
그건 칼리오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제국민들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칼리오페는 지금 제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최고의 화제였으니까.
칼리오페의 소식 한 줄, 사진 한 장이 신문의 판매부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대기했던 것은 꼭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실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칼리오페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그들은 직업 윤리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세뇌에 걸렸었다고 하나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쏟아내고 진실을 왜곡했다는 게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펜을 꺾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칼리오페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저어, 레이디. 저희는 레이디께서 이렇게 대접할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자 한 명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말문이 트인 것처럼 다른 기자들도 너도 나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레이디께서 저희의 기사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정말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습니다.”
“계속해서 레이디께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신전 사건만 마무리되면 저희는 모두 펜을 꺾을 생각입니다.”
“저희는 진실을 전파하는 소임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긴커녕 사실을 왜곡했죠.”
“지금 당장 펜을 꺾는 게 맞습니다만, 그래도 이번 사건에 대해 오보했던 것만은 바로 잡고 싶어서…….”
“비스 신전 일이 마무리 될 때까지만 기사를 쓸 생각입니다.”
“물론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기자를 그만둘 겁니다.”
칼리오페는 면목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여러 활동을 하며 기자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당연히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칼리오페가 익숙하게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이들의 모습에서 조금 더 나이 들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거친 모습. 전쟁터에서 만났던 기자들의 모습이 칼리오페의 기억 속에 그대로 박제되어있으니까.
이들 중 상당수가 종군 기자로서 칼리오페와 전쟁터에서 마주친 사람들이었다.
마주친 적 없어 얼굴을 모르는 기자들도 이름은 익숙했다.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지면에서 읽었던 이름이니까.
가혹한 전쟁 와중에도 본인의 살길을 도모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던 사람들이다.
끝까지 반항했던 짓밟힌 생명들.
고생으로 나이보다 훨씬 늙어버린 데다가 피골이 상접했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지금 이렇게 말쑥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칼리오페는 입을 열었다.
“저는 기자님들이 평생토록 얼마나 떳떳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요.”
질타를 각오하고 있었던 기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협박도 많이 받아봤고 회유도 많이 받아왔죠.”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차분한 울림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소신을 지켜왔어요.”
기자들을 바라보는 칼리오페의 시선은 한없이 맑았다.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
“제가 어떻게 기자를 그만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칼리오페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신다고 해도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은데.”
얼어있는 분위기를 깨는 시도였지만 기자들은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메마른 입술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목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칼리오페가 말한 대로였다.
힘겹게, 힘겹게 파헤친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려 했을 때 따라오는 것은 절망이었다.
권력을 쥔 귀족의 협박을 받은 적은 수 없이 많았다. 제 목숨이 위험했을 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가족의 미래가 저울대에 놓이는 것보단 나으니까.
이들 중엔 이혼한 사람도, 차마 결혼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고발 기사를 태우는 대가로 수억의 현금을 제안 받은 적도 있었다. 꿀 같이 달콤하고 끈적여 한 번 빠지면 절대 헤어날 수 없는 제안들.
자신이 아무리 진실을 지켜도 써놓은 기사를 지면에 못 실은 적도 많았다.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냐고, 어렵게 살 거면 혼자만 어렵게 살라고 동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땐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이때까지 그만두지 못했다.
“저는, 아니, 이 사회는 여러분 같은 분들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정의롭고 소신 있고 꺾이지 않는 사람들.”
이렇게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봐.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조금씩 밝혀내 아주 약간이나마 세상이 환해졌으면 해서.
“레이디, 저희는…….”
하지만 이 손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구렁텅이에 몰았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기자들은 기사가 당사자에게 미치는 파급력을 잘 알았다.
“왜 그런 기사를 썼느냐고 따지려고 여러분을 부른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의지도 아니었고요.”
칼리오페의 말은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 썼던 기사를 다시 보며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아무리 세뇌 당했다고 해도 그 일이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이제 조금쯤은 짐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레이디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저희가 레이디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 말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여태 그래 오셨던 것처럼 진실을 밝혀주시는 걸로 족합니다.”
칼리오페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신관들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급하게 이들을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솔직히 도움을 받고자 부른 게 맞았다. 하지만 진실을 왜곡하거나 거짓을 진실인 양 포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요. 여태 여러분께 그런 제안을 한 사람들이 많았겠죠.”
기자들과 권력자의 유착은 꽤 오랜 전통이다. 이들은 거절했기에 진실만을 보도했던 것이고.
“그란디나스 궁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관해 쓰인 기사를 읽고, 제게 유리한 기사를 쓴 것을 감사하려고 여러분을 부른 게 아니에요.”
“물론 기사 내용이 레이디께 호의적이었으나 그게 진실이기 때문이지 부러 그렇게 쓴 건 아니었습니다.”
“예, 레이디는 피해자셨으니 그렇게 보도된 것이지요.”
“네, 알아요. 하지만 그런 기사를 쓴 후 제가 여러분을 부르고 또 호의를 비추니 오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 기사를 더 써달라고.
“제가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은 여러분께서 세뇌 당했을 적 쓴 기사로 자책하고 있지 않을까 염려되어서예요.”
“레이디…….”
기자들은 하나같이 칼리오페의 인품에 탄복했다. 아직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어쩜 이렇게 배려심이 넘쳐날까.
“그에 덧붙여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진실을 명확히 확인하지 않고 보이는 겉면만 보고 판단하면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죠.”
진실에서 빗겨나간 오류가 마치 분명한 사실인 양 퍼진다.
“어떤 사실을 알게 되면 성급히 판단하지 마시고 꼭 그 일의 진상을 파헤친 후에 보도하셨으면 좋겠어요.”
칼리오페에 관해 비난 조의 기사를 낼 때 미처 그러지 못했으니 이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앞으로는 반쪽짜리 진실로만 보도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자들의 말에 칼리오페는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진 말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이렇게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레이디께서는 저희에게 더한 말씀을 하셔도 되는걸요.”
‘좋아, 그럼 신관들이 탈옥했다는 걸 알아도 바로 보도하진 않겠군.’
적어도 어떻게 탈옥했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조사한 후에 보도할 것이다.
지금 비스 신관들은 전 국민적인 대역적이었다. 이들의 처분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어있다.
그런데 신관들이 탈옥했다. 당연히 이들의 신병을 관리하던 아스타레아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릴 것이다. 아스타레아스에 대한 제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어쩌면 반대급부로 황제에 대한 신뢰가 올라갈 수도 있다.
‘저럴 거면 공권력에 맡기지 그랬냐면서 물타기 할 테니까.’
기자들은 칼리오페에게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자 일을 그만둘 정도로 심한데 거기다 당사자인 칼리오페가 따지긴커녕 칭찬했으니 부채감이 더 심해졌을 터.
‘레아스와 내 사이를 모를 사람은 이제 없어. 기자들도 탈옥 소식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떠오르겠지.’
그럼 칼리오페의 당부도 함께 생각날 것이다.
죄책감 때문에 안 그래도 칼리오페의 연인에게 불리한 기사를 쓰게 되는 것에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을 텐데 이런 당부까지 들었다.
기자들은 전후 관계를 면밀히 조사한 후에 기사를 쓸 것이다.
‘이 건은 이제 되었으니…….’
다음 건으로 넘어갈 때다.
“이번 사건들을 겪으며 이 사회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어요. 아직 모르는 것도, 부족한 것도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레이디의 연치가 몇인데……. 성취가 훌륭하십니다.”
칼리오페가 칭찬에 부끄럽다는 듯 뺨을 살짝 붉히며 인사했다.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도 제가 보지 못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죠? 그리고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보도되지 못하는 것도 많을 테고요.”
칼리오페가 호기심이 넘치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말하자 다들 손녀나 어린 딸을 보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것들을 알고 싶어요. 세상에 대해서 알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칼리오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생각지 못하게 큰 힘을 갖게 되었어요. 이 힘을 이용하려고 제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겠죠.”
그 말에 다들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가 원하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마수를 뻗을 것이다.
“그걸 가려내기 위해서라도 많은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생각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지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기자들을 한차례 둘러봤다.
“아까 도울 게 있으면 말씀드리라고 하셨죠.”
칼리오페에게 유리한 기사를 쓰고, 불리한 기사를 지우고 편중된 보도를 하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이 칼리오페에게 좋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 권리가 있으니까.
대신.
“저는 여러분께서 그걸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많은 것을 알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내게 정보를 주세요.
기자들은 놀란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정보는 기자들에게 목숨과 같이 소중했다. 기사로 내보내기 전에 유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좋습니다. 제가 레이디께 동전의 뒷면을 알려드리죠.”
“레이디께서는 이미 한 번 저를, 이 나라를 구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여러 사람을 손에 휘둘리게 둘 순 없지요. 최대한 협력하겠습니다.”
기자들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칼리오페에게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칼리오페는 만족스럽게 감사를 전했다.
기자들은 직업 특성상 다양한 곳에 인맥을 두고 있다.
인맥과 정보.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손에 넣었다.
‘이제 의병이었던 사람들을 모으고…….’
칼리오페는 머릿속으로 차근히 계획을 되짚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반복되지 않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무력이 필요했다.
‘우선 성녀부터 만나자.’
황제는 성녀를 버리고 대신관을 택했다.
어쩌면 이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리페.”
카스틸로 저에 도착하자마자 아스타레아스가 맞았다.
칼리오페는 그를 향해 눈인사를 하고는 정중하게 무릎을 살짝 굽혔다 폈다.
“카스틸로 부인.”
“루스티첼 영애, 갑작스러운 방문은 달갑지 않아.”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칼리오페를 향했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 어느 누가 감히 이 백악의 대저택에 이렇게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방문할까.
“죄송합니다, 부인.”
변명하지 않는 칼리오페의 태도에 카스틸로 부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몸을 틀었다.
“이왕 왔으니 편히 있다 가시게.”
“귀부인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묘한 눈으로 자신의 조모를 바라봤다.
“레아스?”
“아, 아니. 할머님께서 당신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아서.”
“저를요?”
칼리오페는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보다가 카스틸로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꼿꼿한 뒷모습 어디에서도 칼리오페를 향한 호감을 느낄 순 없었다.
“하긴 당신을 탐탁지 않아할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그 말에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곱게 흘겼다. 갈수록 아부만 는다.
“성녀는 어디에요?”
“북쪽 탑에 있어요.”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에스코트하며 길을 안내했다. 그러면서도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이 왜 그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머, 정말 모르세요?”
당신 같이 똑똑한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아스타레아스가 신음을 흘렸다.
“내 말은 꼭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는 거죠.”
성녀는 칼리오페를 해칠 뻔했다. 그때 유모가 지니고 있던 목걸이에서 에테르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아스타레아스는 성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칼리오페가 걸음을 멈추곤 아스타레아스를 마주 보았다.
“레아스, 나는 뭐든 할 거예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산호빛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결연하게 반짝였다.
그럼에도 아스타레아스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 칼리오페가 죽는 미래였다.
칼리오페가 그의 팔을 가볍게 토닥이며 생긋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당신이 나를 지켜줄 거잖아요. 나는 당신을 지키고. 우리는 서로가 있으니까.”
괜찮다는 듯이 긴 눈매가 예쁘게 휜다.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가 수면처럼 일렁였다. 그렇게 말하니 더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잠자코 그들의 뒤를 따르던 러그윈은 새삼스레 서러워졌다. 자신은 저번에 황궁에 가겠다는 도련님의 뜻 한 번 반대했다가 목이 잘릴 뻔했는데…….
강아지 아가씨의 미소와 말 한마디에 순한 양처럼 구는 도련님이 낯설고, 낯선 것을 넘어 야속했다.
‘나 원, 나도 애인을 만들든가 해야지.’
하지만 그는 몰랐다. 여자 친구는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 * *
끼이이이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이중 철문이 열렸다. 낡아보여도 복잡한 마법 수식이 새겨져 있는 철문이었다.
성녀는 그 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디찬 돌바닥 구석에 몸을 옹송그린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폭포처럼 아름답게 흘러내리던 푸른 머리칼은 산발이 된 채 아무렇게나 엉켜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제국민의 선망을 받는 성녀였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비루한 모습이었다.
“너무 가까이 가진 마세요.”
“철창도 있으니 괜찮아요.”
아스타레아스 말에 칼리오페가 염려 말라는 듯 답했다.
귓가에 파고 든 목소리에 성녀가 움찔했다.
‘이 목소리…….’
자각하는 순간 성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은빛 눈동자에 거울처럼 칼리오페의 모습이 비쳤다.
콰앙, 캉!
마른 몸에 철창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그간 미동도 없었다는 게 거짓인양 성녀가 칼리오페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바닥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성녀는 핏발 선 눈으로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이 세상에 오로지 칼리오페 루스티첼 밖에 없는 것처럼, 한껏 벌어진 눈이 단 한 번 깜빡이지도 않은 채 칼리오페의 얼굴을 담았다.
철커덩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분노를 못 이긴 성녀가 계속해서 칼리오페를 향해 달려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철창으로 가로막혀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하는데, 그런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차갑고 단단한 철창에 부딪친 그녀의 몸만 벌겋게 상처 났다.
“성녀.”
칼리오페의 부름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성녀가 입을 열었다.
“성녀?!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
신비롭던 은빛 눈동자가 악의와 증오로 타올랐다.
“왜! 대체 네가 뭔데!”
추위로 곱아든 손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았는지 성녀는 갈퀴처럼 강하게 쇠창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네가 다 빼앗아갔어! 네가! 이 나를……!”
굳이 누가 누구의 것을 빼앗아갔다고 따지자면 성녀가 칼리오페의 것들을 앗아갔다. 온 거리가 성녀로 물들고 칼리오페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세뇌 당해 성녀를 따랐다.
하지만 성녀는 진심으로 칼리오페를 원망하고 있었다.
“넌 다 가졌잖아!”
말이 계속될수록 그녀의 눈에는 악의외 증오 외에 다른 것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원망, 절망, 절박함.
칼리오페는 묵묵히 그 안에 깃든 감정을 바라봤다.
“왜! 왜 내 것까지 빼앗아 가는 거야?!”
성녀는 이제 거의 감각이 없는 손을 들어 철창을 강하게 내리 찍었다.
추한 발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신께서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전에 항상 고난을 먼저 주시지요.]
경연 당일, 신관들이 잘난 척 떠들어댔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울렸다.
[고난 도중엔 힘들고 절망스럽지만 다 지나고 보면 그 또한 축복인 것을 깨닫게 되지요.]
축복.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대체 뭐가 축복이란 말인가.
대체 뭐가 선물이란 말인가.
대체 뭐가, 대체 뭐가!
“내가, 내가, 내가 얼마나……!”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성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내가 왜…….”
성녀의 무릎이 푹 꺾이며 마른 몸이 휘청였다. 그러나 그녀는 철창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듯이.
“나는 성녀야.”
뭐가 성녀란 말인가.
“나는 인류의 구원자야.”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사람을 세뇌시키는 것에 재능이 넘치는 주제에.
“나는 신의 사자야!”
신의 사자라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신전에서 그녀를 일컬어 하는 말들. 그냥 듣기 좋은 말을 가져다 붙인 것뿐이다.
성녀는 단 한 번도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들릴 리가 없다. 신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삶을 살았으니까. 신관들 역시 마찬가지다.
신을 원망한다.
신전을 원망한다.
신관을 원망한다.
“너 때문이야!”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하일레나.”
부드러운 속삭임과 함께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얼어붙은 손에 닿았다. 칼리오페가 철창을 움켜쥔 성녀의 손을 붙잡은 것이다.
“뭐…….”
“하일레나.”
기억 속 어두운 곳에 묻어두었던 이름이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 앉아 이제는 성녀 자신조차 잊었던 이름.
“난…….”
“하일레나죠.”
그래, 그렇게 불렸었다. 성녀라고 불려지기 전에, 7호라고 불려지기도 더 전에. 한없이 아득한 옛날.
“괜찮아요. 내가 왔어요.”
칼리오페가 성녀의 손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어 꽉 붙잡았다.
“니가?”
성녀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니가 뭔데……? 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어. 네가 온 게 뭐?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성녀의 눈에 독기가 가득 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용서 못해!”
파악, 성녀의 손톱이 칼리오페의 손등에 붉은 생채기를 냈다. 어찌나 강하게 휘둘렀는지 살갗이 찢어져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걸 보고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이 어둡게 빛났다. 살기가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다. 그러나 칼리오페가 다른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여전히 성녀를 바라본 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는다.
“당신이 도와주었으면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잖아요.”
은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아니야, 나는…….”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가냘팠다.
칼리오페는 말없이 성녀의 손을 쥔 채 혼란에 빠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 * *
하일레나는 고아였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신전의 보육원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사하지도, 아사하지도, 살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길었던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지만 때가 되면 밥이 나왔고 밤에는 죽을 걱정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하일레나처럼 운이 좋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하일레나는 그들보다 더 운이 좋았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육원 원장이 인명 사전을 보고 대충 찍어 고르는 이름이 아니라, 부모님이 제대로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하일레나는 가끔씩 상상하곤 했다.
내 이름을 지으실 때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뜻을 담았을까. 다른 후보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내 이름은 엄마의 뜻이 더 들어간 걸까, 아니면 아빠의 뜻이 더 담긴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자신이 소중한 존재 같았다. 사랑 받을 만한 존재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일레나는 자신의 운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게 신성력이 발현되었던 것이다.
신전 소속의 보육원은 당연히 신앙 생활을 중요시한다. 신성력에 대한 감응력 훈련도 매일하는데, 보통 아이들에게는 다리에 쥐나도록 기도하는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하일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감응력을 가지고 있었다.
비스 본 신전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하일레나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아이인지 신께 감사드렸다.
그녀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신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병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전염병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비스 신전에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린 소녀들의 비명은 성대가 다 찢겨나가 사람 목소리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익숙하다 못해 일상 소음 정도로 느껴지는 소리였으니까.
신은 고행을 쌓을수록 그 대가로 더 큰 능력을 부여했다. 때문에 신관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잠을 자지 않은 채 기도를 올렸다.
소녀들에게 상황은 더 가혹했다.
[너희는 성녀가 될 존재들이야.]
성녀가 되어야 했으니까.
[모두 신께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다. 기쁜 마음으로 임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다 부스러져 가는 마른 몸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며 신관들이 속삭였다.
비스 신전에 들어간 하루 사이 하일레나의 손톱과 발톱이 다 빠졌다. 보름이 지나자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신관들이 뽑은 게 아니었다. 고문을 견디던 몸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다시 자라지 않았다.
한 달이 되었을 즈음 이빨이 다 빠졌다.
어쩌다 먹을 것이 주어지면 달려들어 무조건 삼켰다. 이빨이 없어도 상관 없었다. 이가 다 빠진 채로도 경전을 외는데 먹는 게 어려울까.
신관들은 그녀에게 신의 축복을 강하게 받은 몸이라며 감탄했다. 운이 좋다고 했다. 하일레나에게 다른 소녀들보다 강도 높은 고문이 행해졌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호오? 이 과정에는 다 미치거나 죽어나가기 마련인데. 대단하구나. 그럼 이건 버틸 수 있나 볼까?]
그리고 찾아온 것은 거대한 암흑이었다.
짙은 물 내음, 숨을 갉아먹으며 폐에 가득 차오르는 샘물.
얼음과 불로 된 창이 소녀의 몸을 아흔아홉 차례 꿰뚫었다. 하일레나는 눈 아래 점막이 손톱 밑보다도 섬세하고 예민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운이 좋구나, 너는.]
그래도 하일레나는 살아남았다. 미치지도 않았다.
[앞으로 널 7호라고 부르마. 행운의 숫자야.]
그렇게 하일레나는 7호가 되었다. 처음 그들이 하일레나를 부르는 숫자는 세 자리 수였다.
그때 깨달았다. 어느새 수많은 소녀들은 다 사라지고 열다섯 명의 소녀만 남았다. 원래 7호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7호는 직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들의 수는 한자리로 줄어들 것이고, 종래에는 그마저도 다 없어져 단 한 명만이 홀로 남을 거라고.
역시 7호는 운이 좋았다.
그녀는 최후의 생존자였다.
그리고 성녀가 되었다.
* * *
“성녀가 되는 게 나의 목표였어. 내 삶의 이유가 되었지.”
하일레나라는 이름은 그녀 자신에게조차 잊힌 지 오래였다.
부모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름을 지어주셨는지,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랑받을 존재라는 생각도 모두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가혹했다.
몇 번이나 도망치려 했고, 다른 소녀들과 힘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더한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7호에게 신전은 감히 반항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신과 같은, 아니, 신보다도 더 강한 절대 권력자였다.
발버둥 쳐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너만 힘들어질 뿐이다.
그녀가 칼리오페에게 해준 말은 진심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7호는 어느 순간 순응했다.
몸은 갈수록 힘들어졌지만 마음은 굉장히 편안해졌다. 신전에서는 네가 바로 다음 대 성녀라고 말했다.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성녀.
그러기 위해선 견뎌야 한다. 이 고통과 고난은 신이 축복을 내리시기 전의 시련일 뿐이다.
그런 거룩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자신의 능력이 치유가 아닌 세뇌라는 것, 고문을 당하는 어느 순간 그렇게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잊었다. 고통으로 생각을 깊게 할 수 없었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나는 성녀야. 인류를 구원할 성녀.
그게 7호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이 고통을 견디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걸 이뤄냈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더 이상 7호라고 불리지 않았다. 성녀라고 일컬어졌다.
성녀를 향한 사람들의 숭배와 공경. 그런 것들을 보며 그녀는 신전이 옳다고 생각했다. 역시 그녀가 겪었던 모든 것은 신의 안배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칼리오페를 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왜 신전에 반항하는 것이지?
왜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웃고 있는 거야?
그것 봐, 신전에 대항하니까 그 꼴이 된 거잖아. 내 말을 들었어야지.
그런데…….
왜 아직도 행복해 보여?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도저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고문 당해서 고통으로 생각을 지워내고 싶었다.
저를 보며 성녀님, 성녀님 하며 웃는 신관들을 견딜 수 없어졌다. 제대로 된 고난을 겪어본 적 없는 주제에 고난이 축복이네, 신의 선물이네 운운 하는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널 보면 토할 것 같았어.”
가슴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었다. 꾹꾹 눌러 담아 그녀 자신조차도 있는 줄 몰랐던 감정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밀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녀였고, 그걸로 족했다. 결국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신전에 대항해서 살아남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신전을 넘어섰다.
스러진 건 칼리오페가 아니라 신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미 없는 발버둥은 없다고 생각해요.]
칼리오페가 하일레나의 가슴에 던졌던 작은 파문.
그 파문이 결국 모든 것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너를 원망했어. 내 평생을 오로지 성녀가 되기 위해 살아왔는데 그걸 없애버렸으니까.”
하일레나가 미소 지었다. 버석하게 메마른 미소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해?”
나침반을 잃었다. 무엇을 위해 그 고통을 감내해 왔는데, 인류를 위한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는데 이제 진실을 마주 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세뇌하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었건만 어느새 신전에 그녀 자신이 세뇌당했던 것이다.
세뇌가 풀리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일레나.”
칼리오페의 부름에 하일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녀는 성녀가 아니라 하일레나였다.
오랫동안 잊었던 이름.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잊고 있었던 것이 수면으로 떠오르자 그제야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보였다.
“나, 하일레나로서 살고 싶어. 나도 내 인생을…….”
네가 칼리오페 루스티첼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도 될까?”
그렇게 묻는 말과 달리 일그러진 얼굴이 자신이 감히 바라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뭘 하고 싶어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하일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만약…….”
이윽고 새어나온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신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신전은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신보다도 더 강대한 존재였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패망했다.
비루하게 빌면서 거짓으로 진실을 왜곡해 자비를 구걸했다. 절대 권력자였던 고위 신관들이 오줌을 질질 싸며 무릎 꿇고 애원했던 모습은 하일레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칼리오페의 발버둥이 신관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의미 없는 발버둥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때 들었던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만약 내 발버둥에 의미가 있다면…….”
하일레나의 눈이 스르륵 칼리오페를 향했다. 피골이 상접한 데다가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눈빛만은 선명했다.
“복수하고 싶어.”
칼리오페는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하일레나를 바라봤다. 그 맑은 시선에 하일레나는 마른 웃음을 삼켰다.
“나 같은 사람을 더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창한 생각 따위 없어.”
은빛 눈동자는 자조적인 기색을 띠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녀라고 불리고 칭송 받았다. 그러나 지금 가장 먼저 입에 담은 것은 복수였다.
“나는…… 너와 달라.”
그래도 하일레나는 복수를 원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신전에 대한 복수.
신전이 죗값을 피해가는 걸 더 이상 보지 못하겠다.
그들이 자신에게 고난을 겪게 한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그들에게 신의 축복을 내리리라. 기필코 신관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하리라.
“너는 이런 날 경멸하겠지.”
하일레나는 칼리오페의 시선에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돌렸다.
“그걸로 충분해요.”
하지만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의 내용은 예상과 달랐다.
“뭐?”
“당신의 삶을 시작하는 것. 거기엔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어요.”
칼리오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삶을 살게 할 사소한 동기 하나로 충분해요.”
하일레나는 그냥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했다. 칼리오페에게 그래도 되냐고 물었지만, 사실 그건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좋은 삶일 수도 있고 나쁜 삶일 수도 있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그에 따른 대가 역시 자신의 몫.
“그러니 내가 당신을 경멸할 이유도, 경멸하지 않을 이유도 없죠.”
“너는…….”
하일레나는 기묘한 것을 바라보듯 칼리오페를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일어날 수 있으세요? 새로운 삶의 첫 시작으로 우선 씻고 따뜻한 밥을 먹어요.”
하일레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칼리오페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 *
기자들과 대면하며 성녀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후, 칼리오페는 곧바로 정보를 모았다.
기자들은 칼리오페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해주었다. 성녀가 보육원에 있던 고아였다는 것, 하일레나라는 이름까지 모두 기자들이 알려준 것이었다.
신관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성녀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던 것이나 절박한 그녀의 눈을 보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설마 성녀가 되기 위해 고문을 당했을지는 몰랐다.
“끔찍하군.”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성녀를 만들기 위해 신전에서 자행했던 일에 충격 받은 듯 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칼리오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하일레나가 당신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엔 변함 없어.”
“힘든 게 전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죠.”
다른 것보다 몬스터를 세뇌 시켜 공격하게 한 일은 정말 위험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신관들이 시켜서 한 일이었다.
“그래도 저는 괜찮아요.”
사주 받은 것뿐이라고 해서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일레나의 상황을 봤을 때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아스, 당신이 있었으니까.”
그날은 몬스터에게 습격당했던 두려운 날이 아니라, 설레는 날로 기억에 남아있다. 차가운 유리창에서 느낀 그의 온기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때를 떠올린 칼리오페의 뺨이 발갛게 익었다.
그 얼굴에 아스타레아스는 소리 없는 신음을 흘리며 칼리오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 동그란 정수리 위에 턱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오페가 그렇게 말하니 아스타레아스로서는 더 이상 하일레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낼 수 없었다.
아무리 신전의 피해자라고 하나 칼리오페에게 있어서 하일레나는 명백히 가해자였다.
“그 여자가 다시 당신을 괴롭히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칼리오페가 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하얀 이마에 아스타레아스가 입술을 꾹 눌렀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스르륵, 칼리오페의 눈이 감겼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그의 입술이 말랑하고 보들한 그녀의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루스티첼 영애.”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화들짝 놀라 아스타레아스를 밀어냈다.
“네, 네?”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돌아보자 하일레나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더 민망해져서 칼리오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고문 당했던 시절에 비하면 한겨울 탑에 갇혀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하일레나는 얼굴이 좀 상했긴 했지만 건강에 이상은 없어보였다.
“저…… 부탁이 있는데.”
“말씀하세요.”
칼리오페의 허락에도 하일레나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칼리오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아스타레아스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결심이 선 듯 하일레나가 물었다.
“제 머리를…… 잘라주시겠어요?”
* * *
머리카락은 하일레나에게 있어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어렸을 적 허리까지 왔던 머리칼은 부모님을 잃고 보육원에 들어간 동시에 짧게 잘렸다. 그 후 성녀 후보로 비스 본 신전에 들어가고 나서는 아예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 몸이 되었다.
수년이 지나 성녀가 되고 나서야 머리카락이 자랐다. 신성력으로 온 몸을 치유한 덕분이었다.
하일레나는 그 후 머리카락을 단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사각사각, 귓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폭포수가 흐르는 것처럼 길고 매끄러운 푸른 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하일레나는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을 꽉 맞잡았다. 멀미가 나는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에게는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칼리오페가 가위질을 멈췄다.
“음, 잘 잘랐는지 모르겠네요. 역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영애가 잘라주는 게 좋아요.”
하일레나가 빠르게 읊조렸다.
칼리오페의 눈짓에 곁에 서 있던 하녀가 거울을 대 주었지만 성녀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피하듯이 시선을 아래로 돌리며 속삭이듯 물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그럼 됐어요.”
하일레나는 끝끝내 거울을 보지 않았다.
머리가 가벼운 게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만 고문 당했던 시절의 일이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일레나는 심호흡하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영애.”
“별말씀을.”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하일레나가 어떤 심정일지 그녀로서는 완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하일레나가 투쟁 중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칼리오페는 조금 더 휴식이 필요하지 않나 싶었지만, 결심을 굳힌 하일레나의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샘이 있어요. 에테르로 가득 찬 샘이죠.”
에테르로 가득 찬 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찻잔을 쥐던 칼리오페의 손이 멈칫했다.
새로 얻게 된 정보에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르멜이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전 대신관의 이름에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르멜이 비스 대신관이 된 시기는 칼리오페가 태어날 무렵과 비슷했다.
‘이때부터 비스 신전의 위세가 높아졌지.’
그 전에는 오렌과 로한에 비해 비스 신전의 위용은 강하지 않은 편이었다. 비스 신전의 성장은 황제가 그들의 편을 들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르멜이 샘을 발견했고 샘에 대한 정보로 황제의 마음에 든 것인가…….’
“에테르는 생명의 근원이에요. 그 샘물을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일레나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황제를 만난 뒤부터 계속 맴돌던 단어. 그 단어가 입술을 타고 나왔다.
“불로불사.”
칼리오페의 중얼거림에 하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에테르는 사람이 조절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이야. 그대로 마신다면.”
“네, 보통은 그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죽겠죠.”
하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받았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하일레나가 잘 알았다. 그 샘에서 고문을 당했으니까.
신성력에 대한 감응력이 뛰어나 선별된 소녀들도 이 과정에서 에테르의 에너지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 죽는다. 하지만 하일레나는 살아남았다. 계속해서 혈관을 터트릴 듯 역류하는 에테르를 신성력으로 바꿔 살아남은 것이다.
그때의 기억에 하일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주 잠깐 얼굴을 샘에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혈관이 다 터져나갈 것 같았다.
“보통은……? 그러고 보니 샘에서 고문당했다고 했죠.”
“제 경우는 달라요. 저는 강대한 에테르를 빠르게 신성력으로 가공한 거였어요.”
에테르 주입 속도에 가공 속도가 따라오지 못한 다른 소녀들은 죽었다.
“불로불사가 되려면 신성력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에테르 자체를 몸에 축적해야 하죠.”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테르는 감히 인간이 다루지 못하는 힘이라 마나, 오러, 신성력으로 가공해 사용한다. 그걸 유일하게 다룬 사람이 칼리오페였다.
“리페 외에 에테르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럼…….”
“하지만 저항 없이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 방법이 있다고?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눈 속에 번진 의문을 보고 하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특별한 은잔을 사용하면 된다고 해요.”
“은잔……이요?”
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칼리오페가 되물었다.
“그냥 은으로 만든 잔이 아니라 신화 속에 나오는 은잔이에요. 그 은잔으로 샘물을 마시면 영원한 젊음을 손에 넣게 된다고 하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스타레아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황제는 그 샘물을 통해 불로불사를 원했던 거군.”
칼리오페는 속으로 아스타레아스의 도출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신전 쪽에서 벌인 일이니 대신관이 불로불사를 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정확히 황제를 집어냈다. 황제와 칼리오페가 주고 받은 대화를 모르면서도 황제가 보인 행동의 모순 속 빈 퍼즐 조각을 찾아낸 것이다.
“그럼 황제가 대신관을 탈옥시킨 이유는 대신관이 그 은잔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요.”
칼리오페의 말에 하일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은잔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그 단서를 가장 많이 쥐고 있는 게 대신관이에요.”
“은잔을 찾기 위해 대신관을 탈옥시킨 거군요.”
세뇌라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성녀를 내버려두고 대신관을 탈출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인 이유를 알겠다.
“막아야 해.”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황제는 이상하리만치 비이성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이대로 집행되면 반란으로 번질 게 불 보듯 뻔한 과도한 정책. 아무리 탐욕이 넘쳐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볼 때 손해인 짓을 왜하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현 황제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집권 초창기부터 후대의 평가를 굉장히 의식했다. 그런데 폭군이라는 평을 들을 만한 일을 계속해서 벌이니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황제가 멍청한 통치자였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탐욕스러웠을 뿐, 멍청하진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새로운 황제를 원했다.
전란이 제국을 휩쓸었다.
왜 그런 일을 야기했는지 황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알겠다.
‘불로불사의 육체를 손에 넣고 성녀를 통해 백성들을 세뇌시킨다.’
아주 끔찍한 계획이었다. 그게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더더욱 참혹하다.
‘만약 내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점점 세뇌당하는 사람들은 늘어났을 테고,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전쟁의 승기는 황제에게 기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황제는 세뇌당한 백성들을 착취하며 신으로서 군림했겠지.’
가슴이 답답했다. 불타는 대지, 귀를 할퀴던 비명, 눈앞에서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데…….’
황제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조차 세뇌 당해 황제를 칭송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자유의지와 마음을 빼앗고 신으로 군림한다니 이 얼마나—
“리페.”
문득 들린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안다고, 하지만 괜찮다고. 그 역시 잔혹한 참상을 겪은 이였다. 그리고 태생부터 이 나라의 백성에 대한 책임이 있는 황태손이었다.
“레아스…….”
소파 위에 놓인 칼리오페의 손 위로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겹쳐졌다.
따스했다.
이 남자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함께 전생을 기억하는 이가 그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일레나는 그 모습을 묘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게 바로 연애질이라는 거구나.’
그녀가 경험하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냥 신기한 걸로 끝날 법한데 왠지 모르겠지만 눈꼴시었다.
“대신관이 가지고 있다는 단서는 어느 정도에요? 곧장 찾을 수 있을까요?”
칼리오페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하일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어디 있는지 바로 알진 못할 거예요. 사실 원래 마르멜이 모든 것을 주관했었거든요. 샘에 대한 것도 마르멜이 대신관이었던 시절엔 아무도 알지 못했죠.”
마르멜 혼자만 알았다. 전 대신관인 마르멜과 현 대신관타라손의 교분은 깊지 않았다. 마르멜은 타라손에게 샘이나 은잔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일레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말했다.
“루스티첼 영애와의 일로 마르멜이 실각될 위기에 처하자 타라손이 뒷조사를 한 것 같아요. 대신관이 되기 위해.”
마르멜이 황제와 어떻게 연을 맺고 권력을 손에 넣었는지 궁금해 하는 신관들이 많았다.
“타라손이 샘에 대해 알게 되고 황제와 협상을 해 마르멜을 몰아내고 대신관이 되었다?”
“네, 신전 내부적으로 대신관의 파면을 주도한 것도 타라손이었어요.”
“성직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권력을 얻으려 서로 잡아먹는군.”
그 말에 하일레나가 피식 웃으며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럼 설마 그딴 곳이 제대로 돌아갔었겠어요.”
“마르멜이 독점하던 정보를 타라손이 모두 다 알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군요.”
즉, 마르멜이 쭉 대신관이었던 전생에 비해 은잔에 대한 조사가 지체되었으리라.
“맞아요. 신전에선 신경 쓸 일도 따로 있었고요.”
하일레나의 시선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최근 비스 신전은 경연을 최우선으로 준비하느라 다른 것은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다. 마르멜이 실각된 것, 경연을 추진한 것 모두 다 칼리오페로 인한 것이었다.
하일레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단 한 명의 소녀로 인해 이 거대한 음모가 몇 번이나 견제 당하다니.’
마르멜도, 타라손도, 황제도 모두 칼리오페를 무시했다. 우연이라고, 고작해봐야 어린 소녀 하나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모든 것은 칼리오페 때문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급히 진압하려 했지만 칼리오페가 피운 불은 이미 환하게 번진 후였다.
“그런데 황제가 샘이나 은잔에 대해 그대로 믿었나요?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칼리오페는 그 의심에 한 번 당한 적이 있으니 황제가 어떻게 대신관을 믿게 됐는지 의아했다.
“모조품을 만들었거든요.”
“모조품?”
하일레나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엄숙한 음성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샘에 비친 은잔의 그림자, 신의 숨결을 덧입혀 만월을 담아 물에서 솟아날지니—”
마르멜이 발굴해낸 신화의 한 구절이었다.
천천히 눈을 뜬 성녀가 그 구절에 관해 설명했다.
“축성 받은 은으로 만든 잔에 보름달을 비쳐 마시면 저항 없이 샘물을 마실 수 있어요.”
아스타레아스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냥 은이 아닐 텐데.”
성녀가 깜짝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맞아요. 미스릴이에요. 어떻게 아셨어요?”
“균형이 안 맞으니까.”
미스릴은 진은(眞銀), 트루실버(true silver)라고 불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미스릴이 아니라 그냥 은을 사용해 잔을 만들었어요. 결과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겠죠.”
에테르 덩어리를 섭취한 것이다. 그냥 죽진 않았을 것이다.
“그땐 몰랐지만 성녀 후보들이 실험군이었어요. 다른 소녀들이 은잔에 담긴 샘물을 먹고 죽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 실험의 결과로 미스릴을 사용했고.”
“네.”
축성을 받아 신성력을 담고 만월로 마나를 담고 미스릴로 오러의 길을 만든다.
“샘물을 오러와 마나와 신성력으로 중화시키는 거야.”
“그걸 그렇게 해석해다니 대단하네요. 아무도 그 원리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저 신화의 구절을 어떻게든 해석해 실현할 뿐이었어요.”
만약 마르멜이 아스타레아스처럼 에테르를 중화시킬 원리를 알고 있었다면 소녀들이 그렇게 잔혹한 실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황제를 설득했다고? 중화된 만큼 효과도 약해질 텐데……. 그 잔에 담긴 샘물을 순수한 에테르라고 할 순 없어.”
하일레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받았다.
“네, 하지만 잠시나마 젊음의 축복을 받기엔 충분하죠.”
“과연.”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은잔을 써서 샘물을 마시면 영원한 젊음을 손에 넣게 되겠지만, 모조품에 담긴 샘물은 더 이상 순수한 에테르가 아니다. 하지만 일시적이나마 황제의 육체에 활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어쩐지 숙부께서 최근 노화가 더디다고 생각했지.”
그저 신경 써서 관리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황제는 젊어지지도 노화가 멈추지도 않았다. 평균보다 더디지만 해마다 꾸준히 나이 드는 게 표 났다. 그러니 얼마나 애가 탔겠는가.
“원래 아예 모르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해본 게 더 안달 나는 법이죠. 심지어 보름달을 비춰 마시려면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마시는데.”
칼리오페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조품으로 샘물을 마실 때마다 불로불사에 대한 황제의 열망은 갈수록 커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젊어지면 좋긴 하겠다는 정도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샘물을 마셔 주름이 옅어지고,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을 경험한 후에는 다르다.
펴졌던 주름이 다시 돌아오고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점점 더 젊음을 갈망하게 되었으리라.
“모조품은 어차피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어요.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효과가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미치게 할 뿐.”
그 말에 칼리오페가 시선을 들어 두 사람을 둘러봤다.
“우리가 할 일이 정해졌네요. 그 은잔을 황제보다 먼저 찾는 것.”
* * *
“리페, 생일 축하해!”
“감사합니다.”
생긋 웃으며 답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힐데르트와 유리안, 에피니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았다.
그때 하녀가 다가와 칼리오페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3번방도 다 찼어요.”
“그 큰 방이?”
설마 세 번째 방까지 다 찰 줄은 몰랐다.
칼리오페의 생일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보냈다.
쏟아질 듯 많은 양을 감당하지 못해 칼리오페의 방 근처에 있는 방을 비우고 임시 선물 보관실로 쓰고 있다. 방 세 개를 비우면서도 너무 많이 비우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설마하니 모자랄 줄이야.
“아가씨, 새로운 말과 마차도 선물로 왔는데 보시겠어요? 정말 장난 아니에요! 마차가 아가씨스러워요!”
다른 하녀가 후다닥 달려와 말했다.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음, 마차가 나스럽다는 건 무슨 말이지……?’
칼리오페가 하녀를 쳐다보자 하녀가 앗, 하고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흥분해서…….”
고귀한 레이디께 적합하지 않은 언사를 사용했다.
딱히 책하는 게 아니었던지라 칼리오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근데 나……스러운 마차가 왔다고?”
“네, 몽에르트 영애의 팬클럽에서 보낸 조공이예요.”
“조공…….”
몽에르트 영애가 주축인 팬클럽은 물론 다른 팬클럽도 조공이라며 회원들끼리 합심해 선물을 보냈다. 팬클럽끼리 경쟁이라도 붙은 건지 아주 공격적이었다. 특히 가격대가.
“지금 보시겠어요?”
“아니, 손님을 맞아야지. 나중에 볼게.”
그렇게 하녀를 돌려보내니 나머지 문제가 남았다. 3번방까지 다 찼는데 계속 들어오는 선물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자자,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아가씨는 생일을 즐기세요. 오늘은 행복하게 노는 게 아가씨의 역할이니까요.”
유모가 칼리오페의 등을 밀며 말했다.
“그럼 맡길게. 고마워.”
다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틈으로 가려던 칼리오페가 멈칫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쯤 도착하신대?”
루스티첼 백작은 황명을 받아 백룡기사단을 이끌고 얼음가시나무 산맥을 정찰하러 떠났다. 그리 긴 여정은 아니고 특별히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
황명이라는 말에 칼리오페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괜찮겠지. 전생에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살해당한 건 황제의 비밀—불로불사를 알고 있어서니까…….’
전생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또, 칼리오페가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을 한 뒤로 루스티첼 백작은 전처럼 황가에 무조건 충성하며 무골호인처럼 굴지 않았다. 때문에 전생처럼 황제가 그를 중용하지 않아 비밀에 다가갈 가능성은 더 희박해졌다.
‘그래, 괜찮을 거야. 전생에서 돌아가실 땐 백룡 기사단과 움직이지도 않았는걸.’
단원 둘 정도와 함께 제도 근교에서 직무 수행을 하던 중 변을 당했다. 칼리오페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떠나기 전 루스티첼 백작은 웃으며 막내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어느 정도 크고 나서 이렇게 안아 올린 적은 없었기에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우리 리페, 생일에 아빠가 없을까봐 서운하구나.]
보름 정도 일정이면 칼리오페의 생일까지 돌아오기 힘들었다.
[우리 리페의 생일인데 아빠가 빠질 수 없지. 좋아, 우리 리페 생일에는 무조건 돌아오마.]
[저는 괜찮아요. 서두르시느라 무리하지 마세요. 제 생일은 내년에도 있잖아요.]
살아서 내년에도 꼭 함께 생일을 맞기를.
그거면 충분하다.
[내년에도 있다니. 우리 리페의 열다섯 살 생일은 단 한 번뿐이야.]
루스티첼 백작이 뭘 모른다는 얼굴로 칼리오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 약속하마. 반드시 우리 리페 생일에는 돌아오겠다고.]
루스티첼 백작이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결국 칼리오페는 피식 웃었다. 이만큼이나 컸는데 아버지께 자신은 아직도 어린 아이인가 보다.
새끼손가락을 걸어 흔드는 동안 칼리오페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생일에 못 올 줄 알았던 아빠가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니 기분이 좋았다.
‘열다섯 생일은……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으니까.’
이미 돌아가셨기에 함께 축하할 수 없었다.
“글쎄요. 아직 연락이 없으시네요…….”
유모의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유모는 생긋 웃었다.
“곧 오실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 생일에는 맞춰서 오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응, 그러셨지.”
“백작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잖아요. 특히 아가씨와의 약속은 무조건.”
“응!”
밝아지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유모가 후후 웃었다. 칼리오페가 아무리 어른스럽게 굴어도 아빠가 생일날 온다는 것에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면 아직도 마냥 어리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면 좋겠네.’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보는 올리브빛 눈동자가 햇볕처럼 따스하고 포근했다.
* * *
“제정신이야?”
에피니의 날카로운 물음에 칼리오페가 하하 웃었다.
“야, 에피니. 말 좀 가려서 해.”
“너 지금 날 말릴 생각이 들어? 쟤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날 말리지 말고 쟤를 말려야지.”
에피니가 힐데르트를 노려보며 톡 쏘았다.
힐데르트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칼리오페에게 한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피니가 먼저 제정신이냐고 따지니 반사적으로 칼리오페를 감싸게 됐다.
“말리는 건 말리는 거고, 말은 가려서 해야지.”
“네가 그렇게 무르게 구니까 리페가 제멋대로인 거야.”
“그게 나 때문이라고?”
힐데가 황당하다는 듯 에피니를 바라봤다.
“리페가 제멋대로면 좀 뭐 어때! 리페는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돼!”
유리안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외쳤다.
‘……그럼 다들 제가 제멋대로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건가요.’
칼리오페는 소꿉친구들의 공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쩐지 서글퍼졌다.
“아무튼 저는 하일레나를 데리고 나올 거예요.”
“안 돼! 미쳤어?”
“미쳤냐니. 말 가려서 하라니까. 상스럽게.”
“왜 안 돼? 리페가 그러고 싶다잖아!”
한 마디 할 때마다 뒤따르는 잡음이 많았다.
“안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제멋대로니까.”
칼리오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팽 돌아서는 몸짓에서 흥, 하는 콧방귀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타박타박 멀어지는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힐데르트가 팔꿈치로 에피니를 툭툭 쳤다.
“야, 삐졌잖아. 어쩔 거야?”
“…….”
에피니는 팔짱을 낀 채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지금 고집 부릴 때야? 나 리페 삐진 거 첨 봐.”
“…….”
“에피니, 지금 화 낼 때가 아니라니까.”
“흥, 화내게 놔둬. 그러다 리페한테 미움 받으라지. 나는 리페한테 갈 거야.”
유리안이 얄밉게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에피니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유리안을 노려봤다.
‘짜증 나!’
칼리오페도, 순진한 얼굴로 실실 웃는 유리안도 짜증 났다.
하지만 더 짜증 나는 건.
‘……설마 리페가 이거 가지고 날 미워하진 않겠지.’
유리안의 말에 살짝 불안해졌다는 거다.
* * *
“역시 그냥 저는 방으로 돌아가는 게…….”
칼리오페의 손에 이끌려 응접실로 향하던 하일레나가 멈춰 서며 말했다.
하일레나는 루스티첼 저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가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칼리오페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들은 칼리오페를 괴롭힌 하일레나를 탐탁지 않아하면서도 그녀가 겪었던 과거를 듣고 꽤 신경이 쓰이는지 은근하게 신경을 써주곤 했다.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거면 억지로 나오라는 말 안 해요. 하지만 참석하고 싶잖아요.”
그 말에 하일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누군가가 곤란할까 봐. 그런 생각 때문에 사양하지 마세요.”
“하지만 영애의 생일인데…….”
자신이 참석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을 것이다. 그러면 생일 당사자인 칼리오페도 난처할 테고.
“하일레나, 당신은 이미 몇 번이나 사람을 난처하고 곤란하게 만들었어요. 몇 번 더 그러는 것쯤은 어쩔 수 없지요.”
빙긋 웃으면서 말하는 칼리오페를 보며 하일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난처하고 곤란할 사람이 칼리오페 본인이 될 텐데, 어떻게 저렇게 밝은 얼굴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이 겪어야할 일이예요.”
지금도 자신의 생일이 망할 것보다도 하일레나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주고 있다.
“하일레나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면서요. 그게 평생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 안에 숨어 산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 말대로다. 이런 파티가 아니라 길거리에 나가도 하일레나는 눈총을 받을 것이다. 이미 얼굴은 팔릴 대로 팔렸고, 제국에서 하일레나와 하일레나가 한 짓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왕 비난 받을 거 자잘하게 받지 말고 화려하게 한 번 받고 끝내자구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일레나의 가장 큰 피해자인 칼리오페의 생일이다.
아직도 망설이는 하일레나의 모습을 보고 칼리오페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냥 다른 거 다 생각하지 말고 본인 마음만 생각해서 답해 봐요. 내 생일 파티에 오고 싶어요?”
하일레나는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산호빛 눈동자를 바라봤다.
저절로 입이 열렸다.
“……생일, 축하해주고 싶어요. 나도.”
칼리오페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감히 친구라고 불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생일을 축하해주고 함께 기뻐하고 싶었다.
“뭐해? 거기 서서. 안 와?”
멈춰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계단 밑에서 유리안이 물었다. 어느새 쫓아왔나 보다.
“곧 가요.”
칼리오페가 그렇게 답하며 하일레나를 바라봤다.
하일레나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을 내려갔다.
* * *
“저 사람, 설마…….”
“성녀?”
“세상에, 어떻게 여기에…….”
“감옥에 있는 거 아니었어?”
“뻔뻔하기도 하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데 루스티첼 영애와 함께 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칼날처럼 하일레나를 찔렀다.
그 누구도 그녀를 향해 호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선명하고 분명한 적대감. 그것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뒷걸음 치게 만들었다.
파티장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보다 더 강한 시선으로 하일레나를 응시할 뿐.
벌컥!
그때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큰일 났습니다!”
파티장에 이런 식으로 난입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과연 큰 소리를 내며 들어온 집사—이전 집사와의 일 이후 새로 온 집사다—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목된 시선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새 집사는 조용하고 침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동요해 손님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운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고 강하게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는 소리가 칼리오페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긴장감과 불안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집사는 더 이상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루스티첼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가 속닥거리며 전하는 말에 루스티첼 부인의 표정이 한 순간 흐려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나, 오늘 파티의 주인공도 아닌데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네요.”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는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으로 답했다.
“조금 더 이 시선을 즐기고 싶지만, 딸아이의 생일이니 그럴 수 없지요. 자,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향해 손짓했다.
칼리오페가 다가가자 어깨를 손으로 짚곤 빙긋 웃었다. 칼리오페는 제 어깨에 닿은 어머니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생각했다.
“올해 리페에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하지만 오늘 이렇게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여러분이 계시니 행복하게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가볍게 잔을 들며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호응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여러분들 모두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루스티첼 부인의 시선이 잠시 하일레나를 향했다.
“하지만 그 손님을 초대한 것도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리페의 뜻이니 함께 생일을 축하해주세요.”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도 하일레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때 호르세안이 샴페인 잔을 위로 들어 올리며 외쳤다.
“칼리오페를 위해.”
자신을 향한 시선에 그가 미소로 답했다. 살짝 쳐진 눈매가 시원하게 휜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잔을 위로 들어올렸다.
“칼리오페를 위해.”
“칼리오페를 위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하일레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여전히 그녀가 탐탁지 않았지만 더 이상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루스티첼 부인이 말했듯 그들은 모두 칼리오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기 위해 모인 것이니까.
‘아까 큰일 났다고 했던 건 성녀 때문이었나.’
성녀에 대해 뒤늦게 보고 받은 집사가 달려온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귓속말로 칼리오페가 초대했다는 말을 들은 루스티첼 부인이 상황을 수습한 것이고.
뭔가 다른 게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게 무슨 일인지 밝힐 생각은 없어보였다. 호기심 때문에 캐묻는 것은 예의와 상식을 아는 사람들에겐 저속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하일레나가 파티장에 나오기 전처럼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관심이 식자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려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어머니.”
“리페.”
왜 부르는 것인지 알 텐데 루스티첼 부인은 곧 바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게 칼리오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불안은 거의 공포로 바뀌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덜덜 떨리는 양손을 꽉 맞잡고 심호흡했다.
“……아버지는요? 제 생일에는 무조건 돌아오신다고 하셨는데.”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이 한순간 흔들렸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아픈 얼굴.’
어머니께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물러서지 않고 시선으로 답을 재촉했다.
“……일단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구나.”
“그럼 자리를 옮기지요.”
반드시 지금 들어야겠다는 칼리오페의 태도에 루스티첼 부인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들도 함께 가자꾸나.”
칼리오페에게 알릴 거라면 당연히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도 알아야 했다.
* * *
자리를 옮긴 곳에는 백룡 기사단 단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우스가 그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단장님과 함께 임무를 나갔던 걸로 아는데……. 임무지에 문제가 생겼나?”
“귀환 중에 일이 생겼습니다.”
빠르게 답한 그녀가 루스티첼 부인을 향해 예를 갖췄다.
“귀부인.”
“안녕하세요, 경.”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루스티첼 부인. 저는 백룡 기사단 소속 기사 클레어 보르세이라 합니다. 이번에 황명을 받아 단장님과 함께 얼음가시나무 산맥으로 임무를 나갔습니다.”
“보르세이 경, 제 마음이 급하니 아는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죠. 제 남편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들었습니다.”
그 말에 루시우스, 로베르트의 시선이 루스티첼 부인을 향했다.
칼리오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전생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아버지의 시신과 장례식이 마치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게 감각을 좀먹었다.
악몽은 그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루스 오라버니가 실종되고, 로벨 오라버니의 시신이…….’
시야가 붉게 변했다. 칼리오페는 숨을 몰아쉬었다.
‘침착해. 침착해야 해.’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항상 경계했다. 그러니까 전생보다는 나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니 도저히 냉정할 수 없었다. 그것도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던 와중에 일어난 일 아닌가.
그때,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고개를 드니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각각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
그 딱딱하고 차가운 손이 그렇게 안심될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두 오라버니의 손을 마주 꽉 잡았다.
“임무는 무사히 마쳤으나 귀환 도중 습격을 받았습니다.”
“습격?”
“예, 습격 당한 직후, 단장님께서는 기사단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유인책을 펼치셨습니다.”
“잠깐, 그 말은 백룡 기사단이 상대하기 버거웠다는 건가?”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이번 임무의 구성원은 총 열 명으로, 루스티첼 백작과 아홉 명의 단원이 맡았다.
얼음가시나무 산맥 정찰은 그다지 어려운 임무가 아니다. 산맥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초입의 결계를 살피며 혹시 누수 되는 곳이 없나 살피는 일이기 때문이다.
간혹 몬스터들과 전투가 있을 수 있지만, 산맥 초입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백룡 기사단원의 실력으로 무리 없이 처치할 수 있는 정도다. 정찰하는 김에 신입 단원들의 경험치를 쌓았으면 좋겠다는 황제의 말에 열 명 중 일곱 명의 단원이 이제 막 종기사에서 기사 서임을 받은 신입으로 구성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대하기 버거웠다고?’
백룡 기사단원들은 모두 오러를 사용할 줄 안다. 신입이라고 해도 상당한 수준의 실력자란 뜻이다.
“다 저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단장님께선 저희를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서…….”
보르세이 경이 입술을 꽉 깨물며 비통하게 말했다.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짐이 됐다. 루스티첼 백작 혼자였다면 차라리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혼자 가셨어?”
“발렌 경, 프란 경이 함께 했습니다.”
신참이 아닌 단원들이었다. 그들이 함께라면 상황이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안심하던 찰나였다.
“발렌 경과 프란 경이라고요……?”
칼리오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예, 두 분은 실력자이니 레이디께선 걱정을 더셔도 됩니다. 곧 연락이 닿으실 거예요.”
칼리오페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서 안심시키려고 한 말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딱딱해졌다.
‘전생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함께 있었던 기사들이야…….’
전생에서 루스티첼 백작은 발렌 경, 프란 경과 함께 제도 근교에서 직무를 수행하던 와중 변을 당했다.
발렌 경과 프란 경이 무릎을 꿇고 단장님이 돌아가신 건 자기네 탓이라며 사죄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두 사람 역시 심한 부상을 당한 채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지금 역시 발렌 경과 프란 경이 위기에 빠진 아버지와 함께 있다.
이것이 과연 공교로운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두 사람은 흑룡 기사단원이었어.’
전생에서 그들이 싸운 상대는 루스티첼 백작을 죽인 자가 아니었다.
바로 루스티첼 백작이었다.
적과의 접전 와중에 아버지를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반복된다.
“안 돼…….”
보잘 것 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새어 나왔다.
“리페?”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깜짝 놀라 칼리오페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행복하게 열다섯 살 생일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 어머니, 아버지, 루시우스 오라버니, 로베르트 오라버니, 그리고 유모. 아스타레아스와 에피니, 힐데르트, 유리안처럼 새로운 연으로 닿게 된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웃으면서 케이크의 불을 끌 수 있을 거라고, 분명…….
하지만.
한 번 보았던 아버지의 시신, 가슴을 찢는 그 끔찍한 기억이 망막을 가득 채운다.
“안 돼!”
피를 토하는 비통한 절규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