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6. 기적을 부르는 노래 (1) (31/41)

Chapter 16. 기적을 부르는 노래 (1)

‘그랬구나. 레아스는 회귀한 게 아니라 꿈을 꿨구나.’

순서도 상관없이 뒤죽박죽. 그래서 시구를 몰랐던 것이었다.

어젯밤 그 시에 관한 꿈을 꾸고 곧바로 자신에게 달려온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고, 네 곁엔 내가 있다고, 앞으로 함께 걸어가자고 말해주기 위해.

‘그리고 그 은패는.’

아스타레아스는 더 이상 칼리오페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면서 은패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칼리오페가 알고 있던 대로 루스티첼 가를 몰락시킨 주범과 관련된 표식이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흑룡기사단의 문장이에요.]

흑룡기사단.

베일에 싸인 황제의 그림자.

그 구성원이 누구인지, 그 문장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비밀친위대. 흑룡기사단의 문장은 황제마다 다를 정도로 은밀히 관리되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을 죽이고 루스티첼 가를 파멸시킨 배후다.

칼리오페는 잠시 비틀거렸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일찍이 거대한 적이라는 것을 예감했고, 황제 역시 그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실로 확인 받으니 느낌이 달랐다.

이 나라의, 이 거대한 제국의 정점.

그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적이라니.

‘하지만.’

자신을 굳건히 붙드는 온기가 있었다. 고개를 들자 곧장 푸른 눈과 마주쳤다. 아스타레아스와 함께라서 칼리오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레아스와 관련이 없진 않다고 말했군요.]

흑룡기사단은 황실과 관련이 있으니까.

아스타레아스 역시 현 황제의 흑룡기사단 문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조사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정확한 정체를 알게 된 것도, 은패를 손에 넣게 된 것도 얼마 전이라고.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요?]

칼리오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흑룡기사단이, 황제가 루스티첼 가를 노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면 제게 말해주는 편이 좋았을 텐데.

[당신이 알면 가족들을 지키겠다고 나설 게 분명하니까.]

겁먹지도, 숨지도 않고 분연히 일어날 것이 눈에 선하니까.

아스타레아스의 대답에 칼리오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당신의 반격은 꽤 효과가 있겠죠.]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미간을 살살 펴주며 말했다.

[우리의 적에게 거슬릴 정도로.]

우리의 적.

자신의 적은 곧 아스타레아스의 적이라는 뜻이다. 그 울림이 달콤했지만 칼리오페는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았다.

정말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나를 배제하려 하는가. 왜 아무것도 모르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는가.

‘이유는 알고 있어.’

황제에게 거슬리면 표적이 된다.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저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은데요.]

불만스레 나온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옅게 웃었다.

[알아요. 여리게 보이지만 당신은 그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해.]

‘그렇다면 왜—’

칼리오페의 불평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얼어붙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아프고 애처로운 눈이었다.

‘왜…….’

어째서 그런 눈을 하는 걸까.

[당신이…… 죽은 걸 봤어.]

아스타레아스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강한 힘이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정말 존재하는지, 정말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절박한 몸짓이었다.

그 손짓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 칼리오페는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나 안 죽어요. 절대로. 그러니까—]

칼리오페는 그의 뺨을 잡고 시선을 맞췄다.

[함께 싸워요.]

* * *

기억을 되새긴 칼리오페는 굳게 결심했다.

‘상대가 황제라도— 설령 신이라고 해도 나는 지지 않아.’

가족들을 지키고 살아남아서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도 설마 레아스가 내 시체를 봤을 줄은 몰랐어…….’

거대한 힘의 파동을 느끼고 그쪽으로 이동했는데 자신의 시체가 있었다고 했다. 그게 그가 꾼 꿈의 시간대 중 가장 마지막이라고 했다.

아마 그 이후는 없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렸으니까.

‘좋아. 적이 명확해진 거니까 차라리 잘 됐어.’

이전에 에피니가 신관의 몸에서 흑룡기사단의 문장을 봤던 건 그 신관이 흑룡기사단의 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은패를 가지고 있었던 사하르네 부인 역시 마찬가지고.

흑룡기사단원들은 가족들에게도 정체를 숨기니 남편이 보지 못하게 은패를 관리하던 것도 이해가 됐다.

올해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해. 분명 황제 쪽에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가을이었지.’

이제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주먹을 꾹 쥐었다.

‘황제의 움직임을 주시하자.’

정보길드장인 웬디와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화가들은 아직인가?’

칼리오페는 시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화가들과 만나는 날이었다. 초상화를 그리는 목적은 아니고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칼리오페는 문화계를 선도하는 인물인 동시에 수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만남을 갖는 일이 꽤 있었다. 가장 열성적인 사람들은 음악가이긴 했지만 화가와 배우, 시인과 소설가를 비롯해 철학자까지도 칼리오페와 만나고 싶어 했다.

“아직 도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그런가 보네요.”

유모 역시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모두 일찍 왔으면 일찍 왔지, 이렇게 늦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 아가씨!”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하녀가 들어왔다.

어딘지 분개한 표정이었던 하녀는 칼리오페와 눈이 마주치자 자세를 수습했다.

“왜 그래?”

“아, 그게— 화가들한테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취소했어요.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달라네요.”

‘……화가들?’

칼리오페는 위화감을 느꼈다.

루스티첼 저의 고용인답게 하녀는 손님을 존칭 없이 부른 적이 없었다. 웃는 얼굴도 어딘지 어색했다.

“오히려 잘됐지 않아요? 요즘 혼자 여유롭게 보낼 시간이 없으셨잖아요. 바쁘셨던 데다가 그나마 남는 시간엔 유리 도련님과 계셨고.”

유리안과 칼리오페가 사이 좋은 건 알고 있지만, 칼리오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마침 칼리오페에게 일정이 있다는 말을 들은 유리안이 외출한 상황이었다.

“쌀쌀해졌으니 허니레몬티를 내올게요. 느긋하게 계세요.”

다시 나가려는 하녀를 칼리오페가 붙잡았다.

“안나.”

“네, 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그, 그게…….”

충실한 하녀인 안나는 감히 칼리오페가 직접 묻는 말에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그럼 내가 맞춰볼까?”

칼리오페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말했다.

“화가들한테서 먼저 연락 온 거 아니지?”

칼리오페의 눈이 시계를 스쳤다. 이미 약속 시각에서 꽤 시간이 지났다.

“소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사람을 보낸 것일 테고.”

“아, 아가씨…….”

“그러다가 들은 거야.”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그녀의 입술이 확신을 담아 움직였다.

“화가들이 성녀와 만나고 있다고.”

* * *

“역시! 평범한 귀족 나부랭이 따위 우리 성녀님과 비교도 되지 않죠!”

“예쁘장하고 노래 좀 잘 부르는 게 끝인 애를 어떻게 신의 대리자이자 기적을 행하시는 성녀님과 비교할 수 있겠어!”

“그러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성녀님에 대한 모독이지!”

껄껄껄, 깔깔깔 경박한 웃음 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화가들이 칼리오페를 바람 맞히고 성녀와 만나고 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일파만파 퍼졌다.

신전이 일부러 발 빠르게 소문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근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조심스레 눈치 보던 한 영애가 물었다.

“뭐가요?”

“아니, 화가들이 성녀님을 배알하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나라도 루스티첼 영애는 내팽개치고 성녀님께 달려갈 텐데.”

“조금 신기한 물건을 파는 상인과 약속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부르시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폐하를 뵈러 가야지요.”

너도 나도 전투적으로 말을 보탰다. 그 탓에 괜찮겠냐고 물었던 메일린 영애는 다소 위축되었다.

하지만 다시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귀족 나부랭이라기엔 루스티첼 영애도 대정령을—”

“그거야 루스티첼 영애가 가진 베이비 살롱의 땅이 스티그마였기 때문에 그렇죠!”

“루스티첼 영애가 아니었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그게 어떻게 우리 성녀님과 같을 수 있어요!”

흥분한 사람들이 따졌다.

“으음, 그렇지만……. 화가들은 모두 루스티첼 영애한테 빚이 있잖아요. 아무래도 도의적으로 조금.”

“메일린 영애.”

차가운 목소리에 메일린 영애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한가득 그녀에게 꽂혔다. 호의적인 시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

“다시 한 번, 말씀해보시겠어요?”

생긋, 질문한 영애가 웃었다. 친절하게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독화처럼 독을 품고 있었다.

“그— 저, 역시 성녀님과 루스티첼 영애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메일린 영애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동조했다.

“그렇죠?”

“역시,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껄껄껄, 깔깔깔 다시 높은 웃음 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메일린 영애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며 사람들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다른 핑계를 대고 이만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이렇게 튀는 행동을 한 후 나가면 말이 돌 것이다.

메일린 영애는 그저 조용히, 눈에 띄는 일 없이 평안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인 칼리오페를 생각하니 정말 이대로 가만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칼리오페가 다섯 살 때 맨 처음 참석한 티파티. 그 티파티가 메일린 영애의 어머니인 메일린 부인이 주최한 티파티였다. 그날의 인연으로 메일린 영애와 칼리오페는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사춘기 시절, 쟁쟁한 가문 사람들과 어울리는 칼리오페를 보면서 메일린 영애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꼈던 적도 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칼리오페가 어쩌면 그토록 멀게 느껴졌는지. 나 따위는 차마 닿을 수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한결같았다.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인 자신에게 항상 먼저 다가와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칼리오페가 먼저 반겨주지 않았다면 나는 말도 걸지 못했을 텐데.’

부끄러운 데다가 용기가 없어서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면서 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잠 못 들었겠지.’

아침에 일어나 퉁퉁 부은 눈을 보며 역시 못났다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은—

칼리오페와 만난 날이면 설레는 가슴을 안고 침대에 누워 눈을 말똥말똥 떴던 것은—

다음 날 아침 세안하고 거울을 보며 유독 자신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거울을 향해 괜히 히, 하고 웃어 보였던 것은.

‘모두 칼리오페가 나를 알아봐 주었기 때문이야.’

자신을 반가워하고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즐거워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있으면 스스로가 정말 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칼리오페와 친구여서 기쁘다. 하지만 이 관계는 칼리오페의 호의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노력한 게 없어.’

칼리오페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대로 멀어졌을 관계.

‘……이런 나라도.’

메일린 영애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약을 무시하는 처사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네?”

웃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웃음을 뚝 멈추고 메일린 영애를 바라봤다. 메일린 영애는 땀이 비어져 나오는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문지르며 최대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 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순 있어요. 하지만 루스티첼 영애와의 선약을 무시하는 걸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어요.”

“지금 저희가 몰상식하다는 말씀인가요?”

“예와 의를 아는 귀족이라면 선약을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면 연락이라도—”

“하!”

대놓고 콧방귀 뀌는 소리에 메일린 영애는 움찔했다.

“메일린 영애, 영애가 루스티첼 영애와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건 알아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묻는 영애를 비롯해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 얼굴에 같잖다는 비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이것 참,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시네.”

“이렇게 말하면 또 괜히 나쁜 사람 되는 건 아닌지 몰라.”

“영애도 적지 않은 나이니까 현실을 알아야지요.”

저희끼리 피식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던 사람들이 메일린 영애를 바라봤다.

“마음은 알겠는데…… 루스티첼 영애는 과연 메일린 영애를 친구라고 생각할까요?”

“무슨…….”

“솔직히— 루스티첼 영애와 친한 사람들은 서모나 영식, 엘피너스 경, 엘피너스 영애, 몽에르트 영애와 같은 분들이잖아요. 아, 최근엔 카스틸로 공자님하고도 꽤…… 그렇죠?”

“그렇죠.”

서로 동조하며 주고 받는 눈짓에 담긴 뜻이 기분 나빴다.

“나쁘게만 듣지 마세요. 하지만, 다섯 살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젠 아시잖아요?”

“저 이름들 옆에 메일린 자작가가 나오면 조금.”

“아니, 뭐어— 메일린 자작가도 유서 깊은 가문이지요.”

적선이라도 베풀어주겠다는 듯한 칭찬이었다.

“지, 지금 무슨 말씀을…….”

메일린 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메일린 자작가가 이런 무시를 당할 만큼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다.

물론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서모나, 몽에르트와 같은 대명문가와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중앙 제도 귀족으로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은 가문이었다.

적어도 오늘 모인 독서 클럽에서 고개에 빳빳이 힘줄 수 있는 위치였다.

“줄을 잘 서셔야죠.”

한 영애가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메일린 영애의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고요.”

그러나 소심하고 조용했던 메일린 영애는 고개에 힘을 줘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모멸감에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감히 자신의 가문을 무시하는 거냐고, 너처럼 저급하게 급을 나누자면 네 가문이 우리 가문보다 더 아래 아니냐고.

그렇게 따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영애의 가문 하나가 아니라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치면 메일린 가가 당해낼 수 없기도 했다.

“메일린 영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생각하세요. 오늘 실수는 눈감아 드릴게요.”

“그래요. 메일린 가문이면 저희도 좋게 보고 있고.”

“영애를 친구로도 보지 않는 루스티첼 영애보다야 우리가 더 서로에게 도움 되지 않겠어요?”

“……니야.”

“네?”

움찔거리던 메일린 영애의 입술에서 가냘픈 말이 새어 나왔다.

“루, 루스티첼 영애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급을 나눠서, 권력이나 가세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리니까—

자신을 보며 웃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나도— 루스티첼 영애의 친구야.’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들이 준 불안감이 아니다. 자신의 안에 있던 불안감이다. 외면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주제를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메일린 영애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안 좋아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푹 쉬시며 생각해보세요.”

“마음이 여려서 그런 거 우리가 아니까.”

그렇게 모욕을 준 게 본인들이면서 챙겨주는 척하는 이라니 어이없었다.

‘……루스티첼 영애라면 뭐라고 했을까?’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은 조용하고 소심한 메일린이었다.

* * *

“어머, 메일린 영애.”

“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연락도 없이. 이거 실례인데— 여, 역시 돌아갈게요.”

횡설수설 중얼거린 메일린 영애가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녀 자신도 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루스티첼 저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칼리오페가 메일린 영애의 팔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돌아가지 마시고 부디 제 초대에 응해주세요, 메일린 영애.”

상냥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메일린 영애는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청객에게 초대에 응해달라는 말을 하다니.

그냥 배려로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어쩜 이런 사람이 다 있을까.

메일린 영애는 칼리오페의 손에 이끌려 응접실에 들어갔다.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풍광 좋은 자리였다.

어떤 응접실로 안내해주느냐에 따라서 손님에 대한 대접이 보이기 마련이다. 칼리오페는 충분히 자신을 존중해주고 있었다.

“옮겨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꽃이 피지 않았어요.”

메일린 영애의 눈길이 정원에 머무른 것을 보고 칼리오페가 말했다.

“그래도 일주일 정도면 코스모스가 만개하겠죠. 괜찮으시면 그때 또 보러오세요. 분명 예쁠 테니까.”

메일린 영애의 시선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목을 간지럽혔다. 하지만 묻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요. 요즘 제가 많이 바빠서 티파티, 클럽이나 살롱 같은 곳에 나가지 못하고 있거든요.”

“아, 그렇죠. 제가 바쁜 사람을 괜히…….”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영애 생각이 났는데 이렇게 찾아오셔서 기뻐요.”

불청객은 자신인데 칼리오페가 자신을 배려해 부드럽게 대화를 트고 있었다. 다정한 산호빛 눈동자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보고 지루해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칼리오페만은 그러지 않았다.

작아졌던 메일린 영애가 조금씩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때 하녀가 다과를 내왔다. 상큼하면서 달달한 향기가 났다.

“허니 레몬티예요. 요즘 같은 환절기에 마시기 좋더라고요. 몸도 마음도 따뜻해져요.”

‘마음도…….’

메일린 영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칼리오페가 부러 캐묻지 않았지만 자신의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던 것이다.

허니 레몬티는 칼리오페의 염려였다.

“아, 그러고 보니 메일린 영애는 조금 스파이스가 있는 차를 좋아했지요. 진저도 같이 넣어 담근 게 있을 거예요.”

칼리오페가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가 소녀들을 향해 미소 짓곤 진저 허니 레몬티를 내오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러는 동안 메일린 영애는 눈만 깜빡이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뭔가가 목구멍에 턱, 걸렸다.

“내, 내가 스파이시한 차를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칼리오페가 의아한 시선으로 메일린 영애를 바라봤다.

“영애와 친구가 된 지가 몇 년인데. 이 정도 취향은 당연히 알지요.”

칼리오페가 환히 웃었다.

어쩐지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메일린 영애는 생각했다.

정원에 봉오리가 맺힌 꽃이 일시에 만개해도, 칼리오페보다 화사하지 않을 거라고. 칼리오페보다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할 거라고.

메일린 영애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툭, 내뱉었다.

“리페.”

그렇게 본인이 불러놓고서 메일린 영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리페라니, 그건 마음 속으로도 불러보지 못한 애칭이었다.

“—그, 그렇게 불러도 돼요?”

끙끙거리며 물어보는 메일린 영애의 얼굴엔 부끄러움과 초조함과 기대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칼리오페는 방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샬럿. 저도 그렇게 불러도 괜찮지요?”

칼리오페의 입에서 나온 애칭에 메일린 영애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네, 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고 바람은 산들거렸다.

창가에 앉은 두 소녀의 머리 위에 다사로운 햇빛이 내려앉았다.

* * *

“리페!”

큰 소리와 함께 평화로웠던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유리안을 필두로 에피니와 힐데르트가 쪼르르 서 있었다.

메일린 영애는 깜짝 놀랐지만 칼리오페는 놀란 기색도 없이 생긋 웃었다.

익숙했다.

“어머, 오늘 유리 오라버니가 모처럼 혼자 외출한다고 생각했는데 세 분이서 만나시는 거였어요? 저만 빼고.”

“리, 리페는 약속이 있다고 들었으니까…….”

타도 아스타레아스를 외치며 두 사람에게 달려갔던 거라 유리안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근데 그 화가 놈들이 성녀에게 갔다며!”

“연락도 없이 말이지.”

에피니가 벌컥 역정을 내고 힐데르트가 서늘하게 분노했다.

“음……. 일단은 소개부터 할까요? 이쪽은—”

“알아. 샤를로테 메일린 영애잖아.”

힐데르트가 메일린 영애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메일린 부인과 친분이 있으셔서.”

“아, 그랬죠.”

그러고 보니 칼리오페가 처음 참석했던 티파티에 서모나 부인이 있었던 것도 메일린 부인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여, 영광입니다.”

메일린 영애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곤 얼굴을 붉혔다. ‘영광입니다’가 대체 뭔지 머리를 콩콩 때리고 싶었다.

힐데르트와는 몇 번 스친 적 있지만 그가 자신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힐데르트는 오만했고,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면 상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알아. 네 친구니까.”

에피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메일린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식 습관이 몸에 베여 나온 거라 메일린 영애는 어색해하면서도 그 손을 잡았다.

모든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기사님과 악수라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에피니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네 친구니까’라는 말이 가슴을 간질거렸다. 칼리오페와 절친한 사람이 보기에도 자신이 친구처럼 보이는 걸까?

하지만 눈치 없게 이들 사이에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어, 저는 이만 일어나볼게요.”

“네? 벌써요?”

진저 허니 레몬티가 새로 나오고 이제 막 한 모금 맛보았을 뿐이다. 메일린 영애는 어색하게 웃었다.

“충분히 있었고, 갑자기 실례한 거였으니까요.”

“사실 갑자기 실례한 분들은 따로 있지요. 노크도 없이.”

칼리오페가 자신의 소꿉친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에도 세 사람은 당당했다. 칼리오페가 익숙한 것처럼 그들 역시 익숙했다.

칼리오페는 한숨을 폭 쉬었다. 가겠다는 사람을 딱히 붙잡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알기로 메일린 영애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십 년 간 알고 지냈지만 그녀가 사적으로 루스티첼 저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횡설수설하지 않나, 여러모로 불안정해보였다.

‘걱정 돼.’

적어도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돌려보낼 순 없었다.

“그럼 같이 놀면 되지!”

칼리오페의 표정을 본 유리안이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메일린 영애의 팔을 잡아 다시 소파에 앉혔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미소년이 이렇게 가까이 붙자 메일린 영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칼리오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같이 있어도 괜찮아요, 샬럿? 불편하면—”

“아니, 아니에요.”

누가 누굴 불편하다고 하겠는가.

“너 좋은 애구나!”

유리안이 방긋 웃었다.

힐데르트와 에피니 역시 아무렇지 않게 옆에 앉았다. 자신을 꺼리거나 낮잡아 보는 기색은 없었다.

[저 이름들 옆에 메일린 자작가가 나오면 조금.]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 들렸다.

사실은 그녀 자신조차 동조했던 말이다. 그랬기에 더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말을 주고 받고 있다.

머그컵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뜨거운 차 때문일까, 따뜻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뭐어? 독서 클럽에서 그랬다고?!”

탕! 분개한 에피니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진짜 웃기는 것들이네.”

힐데르트, 에피니, 유리안은 메일린 영애가 있던 독서 클럽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듣고 분개해서 콧김을 뿜었다.

“저도 정말 당황했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사실 좋은 말도 아니고 칼리오페 앞에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루스티첼 저에 온 것도 일러바치려 온 게 아니라 정말 친구가 맞는지 확인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꾸 캐묻는 세 사람에게 조금씩 말하다 보니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무시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괜찮은 걸까.’

이미 말한 뒤지만 후회됐다. 힐끗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니 눈이 마주친 그녀가 생긋 웃었다.

“그래서 제가 받은 모욕이 속상하셔서 이렇게 찾아오신 거군요. 고마워요, 샬롯.”

“아, 아니에요. 다, 당연한 일인데.”

그래, 당연한 일.

친구를 위해 화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일이 자신에게는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해냈다.

‘정말로, 내가 해냈어!’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하던 메일린 영애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칼리오페도 고맙다고 말하고, 이렇게 얘기를 털어놓으니 같이 화내주고 동조해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거였구나.’

메일린 영애는 따뜻한 차를 목으로 넘겼다. 향긋하고 달콤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의문이었던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오늘 이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경우 없진 않았거든요.”

“그래? 오늘 있었던 이야기만 들으면 경우 없다는 말로도 부족한데.”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었으면 오랫동안 독서 클럽도 같이 하지 않았을 거예요.”

메일린 영애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그 중에서는 리페의 팬도 있었고, 딱히 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호의적이었던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리페 팬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딴 식으로 말해?”

메일린 영애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성녀가 막 등장했을 때도 당연히 모두들 기뻐했죠. 하지만 그렇게 열성적으로…… 뭐라고 해야 하지.”

“광신도.”

“네! 광신도처럼 맹목적으로 찬양하진 않았어요.”

힐데르트와 에피니, 유리안이 시선을 교환했다.

딱히 칼리오페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성녀가 점점 인기를 얻는 걸 보면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다. 인기가 많아지는 거야 당연하지만, 어쩜 하나 같이 광신도처럼 돌변하는지.

“뭐, 처음에 등장했을 때는 이렇다 할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고. 지금은 그야말로 기적을 행하니까.”

“확실히 눈에 보이는 기적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니까. 광신도가 되도 이상할 거 없긴 해.”

“그거야 그렇다고 쳐도 화가일은 어이가 없잖아.”

유리안이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화가들이 지금 길거리에 나앉지 않은 게 누구 덕분인데! 우리 리페 덕분이잖아!”

“그건 그래.”

“맞는 말이지.”

에피니와 힐데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가 발명되고 난 뒤, 화가들은 대거 파산할 뻔했었다.

화가들의 가장 큰 수입원은 귀족과 황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이 유행하며 초상화의 입지는 확 좁아졌다.

귀족들의 관심이 적어진 만큼 후원도, 일감도 줄었다.

화가들은 종교화를 그리거나 몸이 고된 벽화나 천장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나마 성전의 내용을 그린 종교화는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일감이 꾸준했다.

하지만 베이비 살롱을 시작으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종교화에 대한 수요 자체가 적어졌다. 칼리오페로 인해 속가가 유행하고 나서는 그 하락세에 박차를 가했다.

당연히 화가들은 자금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화가들은 칼리오페라고 하면 학을 떼며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타개한 것 역시 칼리오페 덕분이었다.

“리페를 그렸던 게 모든 시작이었죠.”

메일린 영애가 담담하게, 하지만 상기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녀가 독서 클럽에서 했던 말대로 화가들은 모두 칼리오페에게 빚이 있다. 칼리오페를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침체되었던 미술계에 새 부흥기를 열었기 때문이다.

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칼리오페를 욕하고 신전 측에 표를 주기 위해 경연에 참관하러 갔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하지만 오히려 칼리오페의 노래에 크게 감동하고 매료되어 이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노래를 통해 본 환상, 그가 받은 영감 그리고 칼리오페라는 현실을 접목시킨 그림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이는 현실에만 기반을 둔 기존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이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칼리오페에게서 영감을 받은 화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걸작을 남겼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아스라하고 오묘한 느낌이 순식간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사람들 역시 칼리오페의 노래를 통해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공감하기도 좋았다.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가시화해 화폭에 담는다는 것은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이는 미술계를 비롯한 예술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이 흐름은 칼리오페가 회귀하기 전의 역사와 사뭇 달랐다. 그때 카메라가 발명되고 난 뒤, 화가들은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종교화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는 비스 신전의 세력 확장과도 맞물려—당시에는 칼리오페가 베이비 살롱을 열지도, 속가를 부르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상승세에 걸림돌은 없었다— 사람들을 더더욱 종교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예술은 사람을 감동시키기 마련이다. 사진에 지지 않기 위해 화가들이 혼을 갈아 넣은 작품은 좋은 선전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어릴 적부터 차츰차츰 만들어 놓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종래에는 칼리오페의 노래로 인해, 화가들이 칼리오페의 노래에 영감을 받고 감동함으로써 그런 역사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리페를 자기들의 뮤즈니 뭐니 떠들며 찬양할 땐 언제고…….”

“어떻게 이렇게 입 싹 씻을 수 있는지.”

“이건 그냥 약속을 어긴 게 아니잖아. 성녀에게 쪼르르 달려가고.”

“리페,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메일린 영애의 위로에 조용히 차를 마시던 칼리오페가 작게 미소 지었다.

사실 화가들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은 칼리오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화가들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있기에는 다가올 성녀와의 대결이 훨씬 무겁고 힘든 문제였으니까.

괜찮으니 그만하라고 나서서 말려봤자 넌 화 나지도 않냐면서 더 화낼 게 뻔해 가만히 있었던 것뿐이다.

“저는 괜찮아요. 약속을 안 지키는 건 물론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보다 성녀를 더 선호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지요. 그건 그 사람들의 자유니까.”

“아니, 문제라고!”

에피니가 대번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칼리오페로 인해서 재기에 성공했으면서 이렇게 모욕을 주는 건 인간적으로 말이 안 된다.

칼리오페가 그런 에피니를 향해 생긋 웃었다.

“무엇보다 덕분에 오늘 느긋하게 친구들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게 됐는걸요. 저는 화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보다 이 시간이 훨씬 더 값지고 행복해요.”

“리페……!”

“응! 나도 리페랑 있는 게 제일 좋아.”

“사리 분별도 못 하는 화가들과의 시간이 유익할 리 없긴 하지.”

“뭐, 네가 그렇다니.”

네 사람 모두 칼리오페의 말에 뺨을 은은히 붉혔다.

왠지 그 모습이 사람이라기보단—

‘토끼와 강아지, 고양이 두 마리?’

칼리오페는 무심코 든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하지만.

‘음, 네 마리…….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공교롭게도 그녀의 말에 꼬리를 홰홰 젓는 가족들 역시 네 마…… 아니, 네 명이었다.

* * *

“이건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우리 리페님한테 감히……!”

“안 그래도 거슬리는 성녀한테!”

아비규환이었다. 흥분한 사람들이 핏대를 세우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몽에르트 영애는 이 소란이 닿지도 않는 것처럼 눈을 내리깐 채 우아하게 차를 홀짝이다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짓에 응접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흥분한 영애와 영식들은 쉬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몽에르트 영애! 화가 나지도 않으세요?”

결국 따지듯 말이 나왔다. 몽에르트 영애는 그저 웃었다.

“당연히, 화가 나지요.”

챙강—!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테이블과 부딪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흠 하나 없던 값비싼 도기가 파편이 되어 튀고, 뜨거운 찻물이 흘러내려 서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융단을 적셨다.

하지만 몽에르트 영애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호호, 웃을 뿐이다.

주변을 지키고 있던 하녀들 역시 익숙하다는 듯 재빨리 새로운 찻잔을 내왔다. 식사할 때조차 식기 부딪치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몽에르트 영애가 최근 자주 찻잔을 깼던 탓이다.

모두 칼리오페와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성녀가 더 뛰어나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망언까지 함께 돈다지요.”

몽에르트 영애의 눈이 날카로운 예기를 발했다.

“그간 심기를 거스르는 소문이 많이 돌았고, 실제로 우리 쪽에서도 이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지요.”

몽에르트 영애가 응접실을 둘러봤다.

자주 보던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정신이상자같이—몽에르트 영애의 기준이다— 성녀를 찬양하며 칼리오페를 무시한 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왔어도 받아주지 않았을 거지만.

“리페의 평판이 고작 이딴 걸로 흔들릴 리 없으니 저 역시도 개인의 일탈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려 했어요. 하지만.”

몽에르트 영애가 허리를 쭉 폈다.

“이건 확실히 도를 지나쳤어요.”

그 말에 사람들 역시 시원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와 선약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성녀가 화가들을 부른 것은 의도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부러 소문까지 냈으니 고의성은 명확하다.

“저는, 아니, 몽에르트 가는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스마 가도 함께 합니다. 화가들에게 하던 후원을 모조리 끊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잡아놨던 일정도 취소할 거고요.”

모두들 동조의 뜻을 밝혔다. 칼리오페에게 이런 모욕을 준 화가들의 배를 불려주는 일을 해줄 순 없었다.

“자, 그러면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려 하는데요.”

몽에르트 영애가 운을 뗐다.

“조금 색다른 선물을 하려 해요.”

팬클럽에서 칼리오페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선물을 주는 것은 항상 있어 왔던 일이다.

“네, 이번 일로 리페님도 우울하실 테니 작게나마 마음에 위안이 될 선물을…….”

“아니, 그것도 좋지만.”

몽에르트 영애가 고개를 저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이름으로 기부하고 봉사하고 후원하는 거예요. 아예 자선 파티를 여는 것도 좋겠네요. 아주 크게.”

몽에르트 영애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던 사람들 역시 서서히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다.

“과연.”

신전은 가난한 자를 살피고 사회에 봉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과 대척하는 칼리오페가 그 기능을 수행한다면?

당연히 신전의 영향력이, 권력이 줄어들 것이다.

하물며 이번 소문은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칼리오페와 선약이 있는 것을 무시하고 성녀가 그날 같은 시간에 화가들을 부른 것이니까.

칼리오페의 이름으로 행한 봉사나 후원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접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확실히 저 오만방자한 신전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네요.”

“좋아요. 우리 리페님의 이름 아래 선행을 베풀며 힘을 합치지요.”

이러저러한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몽에르트 영애는 생각에 잠겼다.

세속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바뀌며 하락세로 접어들었던 신전의 교세가 이상하게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광신에 가까운 맹목적인 믿음은 괴이할 정도였다.

‘단순히 성녀가 나타났기 때문일까.’

몽에르트 영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번 알아봐야겠어.’

* * *

“확실히 분위기가 심상치 않긴 하군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흐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걱정 말아요. 감히 당신을 무시한 화가들은 이제 다시 예술 활동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레아스.”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에 아스타레아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뺨에 키스했다.

“딱히 내가 어떻게 한 건 아니에요.”

“정말인가요?”

“그럼요.”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들의 손가락을 꺾어 붓을 못 쥐게 만든 건 아니었으니까.

화가들은 사지 멀쩡한 데다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자본주의란 냉혹한 법 아니던가.

예술품을 살 때 누구나 그럴 가치가 있는지 면밀히 따져보며 구매한다.

여기서 ‘그럴 가치’란—

‘돈이지.’

그리고 아스타레아스는 작품에 가치를— 구체적인 액수를 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백악의 귀부인인 카스틸로 부인을 비롯해 아스타레아스 역시 안목가로 정평이 나 있다. 칼리오페 역시 속가를 부르기 전에 먼저 카스틸로 부인 앞에서 선보였었다.

어느 누가 두 사람이 혹평한 화가의 작품을 사고 싶어 할까?

게다가 그가 알기로 몽에르트 영애 쪽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살롱을 선도하는 사교계의 중심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작품이 차갑게 외면 받을 때, 빵 한 조각의 가치도 되지 않을 때 화가들이 어떤 좌절에 빠지는지 아스타레아스는 잘 알았다. 그건 그들의 손가락을 꺾는 것보다 더한 절망을 안겨주곤 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속생각을 숨기고 칼리오페를 향해 상냥하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는 그가 키스한 뺨을 살짝 매만지다가 물었다.

“레아스, 성녀가 행한 기적이 정확히 뭔지 생각나세요?”

“제가 알기로는 치유력이에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한 대로였다.

“하지만 조금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네?”

“치유력이라고 말한 건 신전이니까.”

“신전의 말을 다 믿을 수 없긴 하죠. 하지만 성녀가 사람들을 치유한 것도 사실이에요.”

“타니에르 영애 건도 그렇고요.”

아스타레아스가 덧붙였다.

신관들의 치유력으로는 고치지 못했던 타니에르 영애의 다리를 치료한 것을 시작으로 성녀는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행한 기적에 벅찬 감동을 받았다. 단순히 감동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탄복이었다.

“……화가들이 절 모욕주면서까지 성녀에게 갔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리페.”

아스타레아스의 부름에 칼리오페가 살짝 웃었다.

약한 소리를 한 게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성녀와 곧 경연을 치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어수선했다.

자신은 사람을 치료하지도, 맹수를 한순간에 길들이지도,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안정시키기도 못 한다.

“레아스.”

“네.”

아스타레아스가 다정하게 칼리오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레아스는 다 알고 있잖아요.”

루스티첼 가가 망할 것도, 칼리오페 자신이 아무 것도 없는 혈혈단신이 될 것도, 신전이 득세할 것도, 성녀가 나타날 것도 그는 다 알고 있었다. 성녀가 모든 것을 손에 넣는다는 것까지.

“그런데 왜 나를 선택했어요?”

성녀를 선택했으면 훨씬 더 편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아스타레아스가 성년이 됐는데도 황위를 돌려주지 않는 현 황제.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면류관을 빼앗고 정통성 있는 황제로서 보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스타레아스가 웃었다.

마치 칼리오페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공기가 있냐고 물어본 것처럼, 아주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가진 사람을 보듯이.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게 아니에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귓가에서 미끄러진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턱선을 스쳐 내려왔다.

“당신이 나를 선택한 거예요.”

엄지로 칼리오페의 턱을 꾹 누르자 보드라운 입술이 벌어지며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새하얀 치아 밑으로 살짝 보이는 분홍빛 혀.

칼리오페는 무구한 의문을 담은 채 아스타레아스를 올려다볼 뿐이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신뢰와 애정을 담고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속으로 감추며 칼리오페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녀 역시 시간을 되돌아왔으니 조금 더 닿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긴 했지만—

“제가 레아스를 선택했다고요?”

“응, 맞아요.”

아스타레아스는 무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비린내로 가득한 전쟁터에서 그는 항상 기다렸다. 그녀가 오기를, 그녀가 자신을 봐주기를, 그래서 두 눈이 마주치기만을.

칼리오페에게선 항상 청량한 향기가 났다. 피비린내를 몰아내는 청아함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알아봤다.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절규하는 사람들, 타들어 가는 땅, 무자비와 아비규환 속에서도 칼리오페에게선 빛이 났다.

그러니 그가 그녀를 선택한 게 아니다. 그녀가 그를 알아봐 준 것이다.

“당신이 나를 선택했으니까 마음이 바뀌면 안 돼요. 겪어보니 생각과 다르다고, 이런 줄 몰랐다고 해도 이미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어.”

“레아스도 참.”

재미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칼리오페가 웃었다.

아스타레아스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진심인데.’

그 말을 속으로 감추며.

칼리오페는 심란해하는 자신을 위로해주기 위한 말로만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다.

“나는 황제의 자리엔 관심 없어요.”

“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현 황제는 아스타레아스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다. 심지어 그 권력을 이용해 폭정을 일삼는다.

지금이야 아직 때가 오지 않아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있지만, 전쟁이 일어날 무렵은 어땠는가. 신전의 이단 심문, 황제의 폭정으로 제국은 공포와 혼돈에 휩싸였다.

국민의 염원에 아스타레아스가 검을 들고 일어날 때까지 황제의 악행에 걸림돌은 없었다.

아무리 제국민이 그를 원했고 그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하나, 아스타레아스가 황제에게 칼날을 겨눈 것은 반란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니?

“내가 관심 있는 자리는 당신 옆자리여서.”

속삭이는 말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담인지 그저 위로로 하는 달콤한 말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어느새 성녀에 대한 불안감은 다 사라져 버렸다.

“이것까지 농담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나른하게 휘었다. 햇빛을 받은 샘물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칼리오페가 붉게 달아오른 제 뺨을 감싼 채 아스타레아스에게 경고했다.

아스타레아스가 무슨 뜻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자꾸 그러면 제가 레아스한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산호빛 눈동자가 그렇게 진지하고 심각할 수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할 말을 잊었다.

“자꾸만 그렇게 사랑스럽게 굴지 말란 말이에요.”

나 아주 위험한 여자예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칼리오페가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흥, 하고 콧김을 뿜었다.

“아—”

아스타레아스가 신음을 흘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뒷목이 저릿저릿했다.

‘정말 위험한 여자야.’

언제 그의 이성을 시험할지 모르는 위험한 여자.

“여하간 저는 무려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대단한 사람이니까—”

칼리오페가 읏샤, 기합을 넣으며 말했다.

“성녀한테 기죽을 필요 없죠. 성녀가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당신을 선택할 권한은 없을 테니까.”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가 ‘그렇죠?’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 계…… 성녀에게 감히 나를 선택할 권한이 있을 리 없지요. 나를 선택지 위에 올려놓고 저울질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뿐이니까.”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그를 마주 보고 헤헤 웃었다.

성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칼리오페는 기억한다.

스티그마를 손에 넣고 승승장구하던 비스 신전. 거기까지는 세 신전 중에서 걸출한 정도였다. 조금씩 비스 신전에게 유리하도록 사회 분위기가 변화해갔지만 가시적이진 않았다.

거기에 눈에 보이는 뚜렷한 날개를 달아준 사람이 바로 성녀다. 만약 성녀가 없었다면 오렌과 로한이 비스 신전에 통합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비스 신전이 전통적인 교리를 뜯어 고쳐 유일신교로 거듭나지도 않았을 터다.

‘이 시대에 이단 심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용납됐다. 성녀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성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가히 광적이었다.

직접 두 눈으로 기적을 목도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성녀는 이를 현실에서 실현시켰다.

자신에게, 자신의 주변에 실제로 일어나는 기적. 이건 사람들을 한순간에 미치게 만들었다. 이를 부정하거나 신전의 뜻에 거스르는 짓을 두려워하는 걸 넘어 증오하게 될 정도로.

감히 어떻게 성녀님을 따르지 않을 수 있냐며, 신관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날을 세웠다.

다가올 미래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은 명확해요.”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왔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겁먹고 도망치거나 물러서지 않고 평소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것.”

칼리오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매 경연에 최선을 다해 노래했어요.”

상대를 얕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상대가 쉽다고 생각한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다.

예상치 못한 방해로 준비했던 일이 틀어지고, 도저히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매 경연을, 아니, 경연뿐만이 아니라 노래하는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상대가 기적을 노래하는 성녀라고 해도 내가 할 일은 똑같아요.”

질 거라는 생각에 빠져 온갖 핑계를 대며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신전과 똑같은 수준이 되어 뒷공작을 펼쳐 성녀를 방해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모두들 성녀가 칼리오페의 자리를, 인기를 빼앗아 갔다며 안타까워 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걸려 있던 전광판, 칼리오페의 기사로 채워져 있던 신문, 칼리오페의 이야기로 가득했던 사교계. 하지만 지금은 모두 성녀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었어.’

뜻밖의 굉장한 인기를 누리면서도 칼리오페는 언젠가 시들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정확히는 성녀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한순간에 뒤집힐 거라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뿐이다.

인기나 명성은 처음부터 칼리오페의 목표도 아니었다.

‘내 목표는 가족들을 살리고, 가족들과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칼리오페의 시선을 받은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레아스도 함께.’

이전의 삶과 달리 새로운 바람이 추가되었다. 그건 칼리오페가 새로운 삶을 살며 받은 선물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있기에 칼리오페는 이 상황 속에서도 온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이죠.”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곧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으로 모두가 절망했던 때에도 흔들림 없던 사람이다. 그러니 고작 이 정도에 스러질 리가 없다. 그렇기에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그에게 약한 소리를 한 게 좋았다.

앞으로도 그런 투정은 자신에게만 부렸으면 했다.

만약 칼리오페가 그 외에 다른 이에게 약한 소리를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잔혹한 기분이 든다.

“자, 그럼 성녀와의 경연이 곧 다가올 테니 열심히 연습해볼까요!”

그런 아스타레아스의 생각은 까맣게 모르는 칼리오페가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성녀와의 경합이 있는 마지막 경연은 겨울이다.

드디어, 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녀가 등장했을 때부터 모두가 이 경연을 기다려왔지만 신전에서는 그간 성녀를 경연에 내보내지 않고 있었으니.

적절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신전에서 다음 경연 상대가 성녀임을 통보해왔다. 계절 하나가 남았지만 연습으로 칼리오페의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성녀와 신전 역시 만전을 기하고 있는 중일 테다.

성녀가 칼리오페를 완전히 누르는 모습을 전 제국에 화려하게 중계하기 위해 신전은 훨씬 전부터 별관 하나를 공사 중이었다.

지더라도, 볼품 없게 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이길 거야.’

상대가 설령 기적을 일으키는 성녀라고 할지라도, ‘지더라도 멋지게 지자!’ 하고 다짐하기 싫었다. 그런 패배 의식 따위는 루스티첼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도 칼리오페는 이기기 위해 노래하고 싶었다. 신을 찬양하라고, 신을 위해 인간의 목숨을 바치라고 종용하던 신전의 성가에 지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노래로 이기고 싶었다.

사람의 감정, 사람의 삶, 사람의 기쁨, 사람의 고통.

그런 것들이 하찮고 무의미한 것이 되질 않길 바랐다.

전생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야.’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사람들이 죽지 않게 할 거예요.”

이단 심문과 전쟁. 이 두 가지를 겪으며 많은 피가 흘렀다.

칼리오페는 사람들에게 생존이 목표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행복이 목표이기를, 행복을 바라는 일이 사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대의 뜻대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에 키스하며 사뭇 경건하게 말했다.

* * *

기합을 잔뜩 줘서 연습한 탓인지 목이 조금 아릿했다.

내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스타레아스는 귀신 같이 칼리오페의 상태를 알아채고 연습을 중단했다.

도미닉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던 칼리오페는 잠시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칼리오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녀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도미닉 역시 주변을 한 번 살펴보곤 마차에 탔다. 별말이 없는 것을 보니 아무 이상도 없다는 뜻이다.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았는데.’

칼리오페는 커튼을 살짝 열고 창밖의 거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녀의 얼굴로 가득한 거리는 평소와 같았다.

* * *

루스티첼 가의 마차가 매끄럽게 움직여 멀어진다.

마차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자 지켜보던 여인이 살며시 들었던 커튼을 닫았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사람이 마차에 오르는 것은 흔한 풍경인데도 빛이라도 뿌린 것처럼 칼리오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분명 악보 철이었다.

‘왜 그만두지 않는 거야?’

커튼 자락을 쥔 여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기적을 행하고 다닌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미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다. 이전과 같은 인기도, 명성도, 선망도 없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네게도 좋은데.’

다음 경연에서 칼리오페가 자신에게 지면 모든 것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설마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스스로가 말해놓고서도 어이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똑똑한 사람이다. 그런 허황된 꿈에 기대 희희낙락할 사람이 아니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 치지 말라고 친히 충고해줬거늘.’

여인은 부채 끝으로 입가를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의미 없는 발버둥은 없다고 하던 칼리오페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녀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여인, 성녀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도착했습니다.”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기사의 에스코트를 받기 위해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와아아아—!”

“성녀님이시다!”

“성녀님! 여기를 봐주세요!”

“성녀님, 제발……!”

손 하나가 나왔을 뿐인데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했다.

아까 성녀가 탄 마차 모습이 보였을 때부터 이미 소란이 일었었다. 모두 성녀를 보려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자리를 잡겠다고 하루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성녀와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손 한 번, 눈길 한 번이라도 닿기 위해.

성녀는 서늘한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디딤판에 발을 디디고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성녀의 얼굴엔 신비롭고 자애로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꺄아아아아—!”

“성녀님! 성녀님!!”

‘칼리오페 루스티첼, 네가 질 게 뻔하잖아.’

손을 들어 대중에게 화답하며 성녀는 생각했다.

더더욱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해되지 않았다.

희망에 찬 밝은 발걸음, 내일을 기대하는 눈으로 앞을 응시하던 모습.

‘거슬려.’

* * *

칼리오페는 티 하우스에 앉아 녹음했던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길거리에 낙엽이 가득했다. 완연한 가을이 된 것이다.

바람에 소용돌이치는 낙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이어폰—연습하며 노래를 녹음해 확인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니카이논에서 개발해주었다— 한쪽이 빠졌다.

뭐지, 하고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눈앞이 검게 변했다.

“누구게.”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짙게 배여 있었다. 칼리오페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글쎄, 누굴까요.”

“맞춰 봐.”

“으음, 잘 모르겠는데.”

“뭐야, 나인 거 알고 있잖아. 그치?”

“음, 글쎄요…….”

칼리오페가 말꼬리를 끌었다. 등 뒤의 상대가 아닌 척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알겠다. 루스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활짝 웃으며 답을 외쳤다.

“맞죠?”

“너무해. 정말로 날 몰라보는 거야?”

등 뒤의 상대가 칼리오페의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무룩한 호박색 눈동자가 원망을 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알지요.”

칼리오페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호세 오라버니.”

호르세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루스 오라버니라며.”

불만스레 꿍얼거리면서도 호르세안은 칼리오페를 마주 껴안았다.

가벼운 포옹이 오간 후, 호르세안은 건너편에 자리를 잡는 대신 칼리오페의 손을 자신의 팔에 얹었다. 에스코트 자세다.

“안 앉아요?”

호르세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칼리오페가 물었다.

“프라이빗 룸으로 가자.”

호르세안은 프라이빗 룸보다는 오픈 스페이스를 선호하는 편이라 칼리오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하지만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

프라이빗 룸에 도착한 호르세안은 종업원이 움직이기도 전에 칼리오페의 의자를 쨘, 하고 빼주었다.

으쓱이는 미소에 칼리오페가 마주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다. 요즘 나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냐?”

“저번에 뵈었잖아요. 베이비 살롱 메뉴도 논의할 겸.”

“그건 여름이었지. 게다가 일 이야기가 목적이었고. 심지어 가을 한정 메뉴 때는 시간 안 된다며 만나지도 않고 서면으로만 이야기 나눴잖아.”

“정말 바빴어요.”

“나한테 너무 소홀해. 오늘 그간 소홀했던 거 다 받아낼 테니까.”

호르세안이 장난스레 으름장 놓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살짝 쳐진 호박색 눈동자가 꿀처럼 반짝거렸다.

저렇게 대놓고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듣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지는 게 호르세안의 매력이었다.

“호세 오라버니도 바쁘지 않아요? 요즘 기사단도 일이 많고 후계로서도—”

다정하게 주고 받는 담소가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근황에 대한 것뿐이다.

주문한 차가 나오고 테이블 위에 마카다미아가 콕콕 박힌 휘낭시에가 소담하게 놓여도 호르세안은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호세 오라버니.”

결국 칼리오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왜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왔어요?”

“그야 우리 리페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지.”

호르세안이 한쪽 눈을 감아 윙크하며 말했다.

“혹시라도 같이 있는 모습을 루스 녀석에게 보이면 골치 아파지기도 하고.”

“농담하지 마시구요.”

“난 농담 아닌데. 이런 미인과 둘이 있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손을 잡으며 씨익 웃었다.

“정말 오라버니도…….”

그 능글맞은 모습에 칼리오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별일이 있는 건 아닌가.’

평소와 같은 호르세안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호르세안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칼리오페로서도 즐거운 일이었다. 전생부터 시작해서 한결같이 이어진 인연. 친 오라버니처럼 편안하고 든든했다.

“그나저나— 우리 리페는 어려서부터 의젓한 줄 알았더니, 아직도 애기구나.”

“네?”

“여기, 묻었어.”

긴 손가락이 보드라운 칼리오페의 뺨을 스쳤다.

홍차 위에 얹은 크림이 묻었나, 싶어 칼리오페의 뺨이 은은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워.’

하지만 뺨을 훔치고 나서도 호르세안의 손가락은 멀어지지 않았다.

의아해진 칼리오페가 고개를 드는데—

‘오러?’

에테르를 느끼고서 예민해진 칼리오페의 기감에 아주 옅은, 존재조차 희미한 오러가 느껴졌다.

호르세안에게서부터 부드럽게 퍼져나간 파동이 프라이빗 룸 벽면을 타고 머물렀다. 칼리오페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호르세안이 움직였다.

일어난 그의 허리가 숙여지며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칼리오페의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흑룡 기사단.”

“……?!”

칼리오페가 고개를 휙 들었다.

호르세안의 얼굴이 가까웠다. 호박색 눈동자가 전에 없이 심각한 빛을 띠고 칼리오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사하는 것 그만둬.”

“무슨…….”

칼리오페의 의문이 끝맺어지기 전에 호르세안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고 호르세안은 다시 원래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왔다.

팟, 프라이빗 룸을 감싸고 있던 오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놀랐어? 그렇다고 갑자기 일어나면 위험하잖아.”

칼리오페는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 굳어있었다.

“이 오라버니의 손길이 부끄러웠던 거야? 그냥 묻은 거 닦아준 건데.”

다시 보니 호르세안의 손가락은 깨끗했다. 크림이 묻은 자국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칼리오페의 뺨에는 크림이 묻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

방을 차단하듯 감쌌던 오러.

앞뒤 맞지 않는 행동과 말.

갑자기 일어나면 ‘위험’하잖아.

칼리오페는 생각을 마쳤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잖아요.”

물론 호르세안이 뺨을 만져서 놀랐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잖아.”

호르세안 역시 크림이 묻은 채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는 말은 아닐 테다. 처음부터 크림 따윈 묻어있지 않았으니까.

“그냥 설명해주셨을 수도 있는데.”

“그치만 이게 빠른걸.”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간이 없다—라는 건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했던 사이인 만큼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하긴, 오러를 둘러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고 해도, 오러를 두른 것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호르세안은 아주 미량의 오러를 사용했다.

오러의 근원인 에테르를 숨 쉬듯 느끼는 칼리오페이기에 바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온유하고 연약한 오러였다. 그런 섬세하고 세심한 오러 컨트롤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또,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의 오러를 잘 알았다. 유들유들한 모습과 달리 그의 검술과 오러는 야생마처럼 난폭했다. 호르세안은 일부러 자신의 오러 성질을 바꿔 세심하게 컨트롤하며 타인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 동안만 방출한 것이다.

명백히 타인을 의식한 작업이었다.

“그러고 보니 호세 오라버니 요즘 기사단에서 농땡이 부리신다면서요.”

“어?”

“루스 오라버니랑 에피니 언니한테 다 들었어요. 조만간 에피니 언니가 오라버니보다 더 실력자가 될 거라던데요?”

칼리오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짐짓 나무라듯 말했다.

“억울한데. 이래 봬도 이 오라버니는 우리 리페한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리페한테 멋지다는 말 들으려고 검술에서도 몇 가지 성취를 이뤄냈는걸.”

“흐음, 못 믿겠는데.”

“너무하네. 상처 받았어.”

호르세안이 과장스레 가슴에 손을 얹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럼 한 번 보여주세요.”

칼리오페가 입술 끝을 올려 미소 지었다. 산호빛 눈동자가 비밀을 담고 반짝였다.

“마침 이 거리에 좋은 곳이 있잖아요?”

그들이 있는 티 하우스는 파트리유 거리에 자리했다. 즉, 살롱 스티그마가 바로 근처라는 뜻이다.

그곳이라면 누가 엿들을 걱정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에테르로 가득 찬 곳인 데다가 안에서 마법사와 검사들이 마나와 오러를 그 어느 곳보다 격하게 사용하고 있으니까.

‘숲에 나무를 숨기는 것과 같은 이치지.’

호르세안의 입술 역시 칼리오페와 똑같이 호선을 그렸다.

“이 오라버니의 검술에 반해도 책임 못 지는데.”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칼리오페가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새침하게 말했다.

“저는 루스티첼이니까요.”

“으음, 단장님은 몰라도 루스 녀석보다는 리페에게 더 멋져 보이고 싶은데.”

“그럼 분발하셔야 해요.”

“아, 분발해야 하는 거야? 차가워.”

“그냥 분발로는 안 돼요. 완전 분발하셔야 해요.”

“정말 너무하네.”

호르세안이 씩 웃었다. 쳐진 눈매가 휘며 능청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칼리오페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칼리오페도, 호르세안도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식은 채였다.

* * *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이에요?”

살롱 스티그마에 도착해, 주변과 단절되자마자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을 붙잡고 물었다.

“말 그대로야. 위험하니까 더는 조사하지 마.”

칼리오페가 눈매를 찡그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물었다.

“오라버니, 혹시 미래를 아세요?”

호르세안에게는 대놓고 물을 수 있다. 전생부터 쭉 믿었으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생뚱맞은 소리를 들었다는 반응에 칼리오페가 초조한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 몰라요?”

“음…….”

호르세안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내 결혼식 때 에피니가 펑펑 울 거라는 건 알지.”

그 말에 칼리오페는 몸 안에서 긴장감이 훅 빠져 나갔다.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농담에 칼리오페의 입가에도 옅은 웃음이 걸렸다.

“뭘 그렇게 심각한 어조로 미래를 아냐고 물어? 우리 리페는 미래를 아는 거야?”

호르세안이 키득거리며 물었다. 칼리오페는 당황하지 않고 볼을 부풀렸다.

“자꾸 위험하다, 네가 잘 모르는 거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미래라도 아시나 싶었죠.”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볼을 톡 찌르며 웃었다.

“꼭 미래를 알아야 위험한 걸 아는 건 아니잖아.”

“저도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칼리오페의 항변에 호르세안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해. 흑룡 기사단은 황제의 그림자야.”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는 거 같은데. 다른 황실 기사단이랑 달라. 그림자는 온갖 더러운 일을 다 도맡아서 한다고. 흥미 위주로 접근할 상대가—”

“흥미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에요.”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그 말을 끊었다.

“……그런데 오라버니께서 제가 흑룡 기사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칼리오페는 심혈을 기울여 은밀하게 움직였다. 아스타레아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가족들조차 모르게.

그런데 호르세안이 알다니,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안돼.’

칼리오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호르세안의 말대로 황제의 그림자를 캐는 건 위험한 일이었고, 가족들을 위기에 빠트릴 수도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반란.’

역심을 품고 있다고 확대해석해도 할 말이 없다. 반란은 증좌만 있으면 즉결처분이다.

“리페,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나 말곤 아무도 몰라.”

호르세안이 창백해진 칼리오페를 보고 깜짝 놀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몇 번이고 괜찮다고 속삭이며 다정히 토닥여주었다.

‘이런 반응을 보면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분명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차가워진 칼리오페의 몸은 호르세안의 품 안에서도 도무지 쉬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새하얀 손가락이 호르세안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말해주세요, 오라버니. 어떻게 아셨어요?”

절박한 칼리오페의 눈동자를 보며 호르세안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불거졌다. 제 품 안에 있는 작은 몸은 아기 새처럼 연약하고 애처로웠다.

“리페.”

말하면 안 된다고, 알려선 안 된다고, 보여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칼리오페 루스티첼, 내가 어떻게 너를 외면하겠니.’

차마 거짓으로 변명해 안심시켜줄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호르세안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패를 꺼냈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그의 손을 향했다.

“그건…….”

익숙한 문장이 새겨진 패였다.

“흑룡 기사단의 패……?”

호르세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께서 왜…….”

아스타레아스와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칼리오페는 그가 흑룡 기사단일 거라는 속단을 내리지 않았다.

사실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 시기에 호르세안이 흑룡 기사단의 일원이었다면, 이후에 아버지를 노리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이번에 흑룡 기사단이 되었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호르세안의 말은 칼리오페의 바람과 달랐다.

“호세 오라버니가 흑룡 기사단에 입단하셨다고요.”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폭풍 앞의 촛불처럼 희미했다.

“응.”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렇다면 호르세안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면서도 방조했던 걸까? 아니면 아예 일조했나? 나중에 친한 친우를 잃고 후회해 내부고발자가 된 것인가.

‘그래서 쫓겼고, 죽…… 그래, 어쨌거나 우리 가족을 위해서, 남은 가족을 지켜주려고 호세 오라버니는 죽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칼리오페는 땅에 파묻힌 호르세안의 편지를 기억했다. 그 진심이 가득했던 글귀를.

“……그런 거 저한테 말해도 돼요? 보통 가족한테도 말하지 않던데.”

“하하, 그러게.”

호르세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역시 나는 호세 오라버니를 믿어.’

과정이 어떻든 자신의 가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이다.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지금도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이야기해주세요, 호세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항상 제게 숨김없이 말씀해주셨잖아요.”

다섯 살 때도 그랬다. 그 나잇대 애가 하기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도 호르세안은 성실히 답해주었다.

능글맞은 겉과 달리 언제나 성실하게.

“—최근 흑룡 기사단에선 인원 충원이 필요해졌던 모양이야.”

호르세안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 * *

흑룡 기사단의 특성상, 새로운 단원을 들일 계획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연이어진 임무 실패와 단원의 죽음—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이 포함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등으로 황제는 기존 흑룡 기사단에 대한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신규 단원을 들이는 것이었다.

“—해서 오라버니께 제안이 들어온 것이군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가지가 확실해졌다.

‘전생의 호세 오라버니는 흑룡 기사단이 아니었어.’

전생에서 흑룡 기사단이 실패한 적은 없다. 있었다 하더라도 사람을 충원할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모든 것은 아주 잘 짜인 연극처럼 착착 진행되었으니까.

‘이맘때 아버지께 변고가 생기는 데 그럴 기미가 없어서 의아했는데……. 내부적인 문제가 있어서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거구나.’

평소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 역시 해소되었다.

“내게 백룡 기사단 쪽의 밀정 역할을 해주길 원하는 것 같았어.”

“오라버니가 루스티첼 가와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래서, 였겠지.”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엄청난 제안을 하더라고. 나뿐만 아니라 엘피너스 가 전체에 대한. 알다시피 나는 동생도 많잖아.”

칼리오페가 피식 웃었다.

“그 사람들 호세 오라버니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요.”

그 말에 멈칫한 것은 호르세안이었다. 칼리오페의 말에는 호르세안이 밀정 짓을 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어?”

“네?”

“나를 그냥 믿는 거야? 엄청난 제안을 했다니까? 심지어 나는 거절한 게 아니라 흑룡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호르세안이 기사단 패를 흔들었다.

“네, 그치만 밀정 짓을 해서 백룡 기사단을 곤경에 빠트리거나—”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단장님인 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을 거잖아요?”

“당연하지!”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하냐며 호르세안이 펄쩍 뛰었다.

칼리오페가 그것 보라며 웃었다.

“저는 호세 오라버니를 믿으니까요.”

호르세안은 말갛게 웃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호세 오라버니를 믿으니까여.]

언젠가 칼리오페가 했던 말이 겹쳐 들렸다. 그때도 이랬다.

대수롭지 않게,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지게.

내가 널 믿으니까 배신하지 말라거나 내 호의를 알아달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다.

‘당연해서 그냥 무심코 흘러나오는 말.’

그 말에 기뻤으면서도, 호르세안은 고개를 저었었다.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돼.]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쉽게 믿지 않아여.]

커다란 아이의 눈이 유독 순수하고 맑았다.

[호세 오라버니니까 믿는 거예여.]

제대로 발음도 못 하는 주제에 칼리오페는 사람의 마음에 쿵 박히는 말을 했다.

짧은 과거의 기억에 호르세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아직 열다섯 살, 성년도 되지 않은 여자애에게 흑룡 기사단 패를 보여준 순간부터 이미 미친 짓을 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자신을 믿듯, 그 역시 그녀를 믿었다. 그녀의 지성과 분별력과 판단력을.

그건 그간 칼리오페가 걸어온 길만 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리페, 사실 내가 흑룡 기사단에 들어간 건…….”

이어지는 호르세안의 말에 칼리오페의 눈이 커다래졌다.

* * *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칼리오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하는 나날이었다.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노래에만 전념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어느새 하아— 숨을 불면 꼭 눈송이 같은 입김이 공기 중에 나타났다가 흩어졌다.

쌀쌀한 공기에 양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제 일주일.’

칼리오페가 입술을 꼬옥 다물었다.

<7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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