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낙하한 동백꽃 다시 가지 끝에서 피어날 때
“성녀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거야.”
“뭐?”
“모두 성녀님의 노래를 듣자.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건 그분의 노래밖에 없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영애는 황당한 눈으로 자신의 친구를 바라봤다.
“성녀가 우리를 구원한다니! 걘 리페님 따라쟁이일 뿐이잖아……!”
그 말에 친구가 얼굴을 굳혔다.
“감히 우리 성녀님을 모욕하는 거야?”
“지금 장난 치는 거지?”
하지만 친구의 눈빛은 도저히 장난이라고 볼 수 없었다.
“너 왜 그래…….”
영애는 친구의 팔을 붙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화장품 가게에 가 칼리오페 트레이딩 카드를 모았고, 어제도 즐거운 덕톡을 나눴는데. 하루 만에 바뀐 친구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니. 그냥 진실을 깨달았을 뿐이야.”
친구가 영애가 붙잡은 팔을 팍 뿌리쳤다.
“성녀님을 두고 칼리오페 따위를 좋아라 한 내가 어리석었어.”
“……뭐라고?”
“너도 나랑 같이 성녀님의 은총을 받으러 가자.”
친구가 영애의 손목을 휙 잡아 끌었다.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손길에 영애는 학을 뗐다.
“싫어! 너 진짜 왜 이래!”
거칠게 쳐내고 나자 친구가 영애를 보고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성녀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좀 봐! 칼리오페는 우리를 미혹시킬 뿐이야.”
“미혹?”
기가 찬 되물음에 친구는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좋아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걔가 대체 뭘 할 수 있어? 성녀님처럼 사람들을 치유하길 해, 아니면 다른 기적을 일으켜?”
“너 진짜—”
“그냥 예쁘장한 외모로 노래하는 게 전부잖아!”
친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생각해보니까 화 나네.”
그 전까진 갑자기 변한 친구의 태도 때문에 당황스러움이 더 컸지만 이젠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영애의 가슴을 달궜다.
“변심한 덕후가 가장 유해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제 알겠으니 그쯤 해.”
“뭘 그쯤 해? 내가 틀린 말 했어?”
“어, 틀린 말 했어.”
“그럼 말해 봐. 걔가 뭘 할 수 있는지. 노래도 논란이 되는 속가나 불러서 관심 끄는 거잖아.”
“너 리페님이 왜 속가를 부르는지 진짜 몰라?”
모름지기 칼리오페 덕후라면 칼리오페의 모든 행동에 대해 논문 급으로 생각하는 법이다. 칼리오페가 그냥 짓는 웃음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분석하는 게 칼리오페의 덕후들이었다.
이 정도니 당연히 칼리오페가 속가를 고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100가지 이유—칼리오페 본인도 이렇게 많은 줄 모를 것이다—를 들 수 있었다.
“그냥 관심 끌기 위해서라니. 아무리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도 네가 성녀 끄나풀들처럼 리페님의 행적을 비하할 줄은 몰랐다.”
“끄나풀이라고?”
“지금이랑 3년 전은 달라. 리페님이 그때 처음 속가를 부르기 위해서 어떤 용기가 필요했을지 그렇게 숱하게 얘기해왔는데.”
친구랑 둘이서 밤에 잠도 안 자고 알콩달콩 2박 3일 동안 이야기했던 때가 그리웠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이 사회를 바꾸신 거잖아.”
팬들끼리 흥분해서 얘기하다 보면 과열될 때도 있긴 하다.
칼리오페가 불러온 사회 현상은 그저 팬들의 망상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진짜로,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영애는 몇 명이나 되는 평민 친구가 생겼다. 비슷한 헤어 스타일을 하고,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었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평민과 차별적인 귀족 고유의 문화를 고수하려고 했는데, 이젠 저와 비슷한 스타일인 사람을 보면 자동적으로 반가웠다. 저 사람도 리페님 팬이구나, 하고.
“하, 걔가 뭔 사회를 바꿔.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어. 결국 성녀님이 옳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차갑게 비웃은 친구가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친구를 보며 처음에는 분노했다가, 그다음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지배했다. 친구가 했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 푹푹 가슴을 찔렀다.
변심한 팬이 가장 무섭다는 말은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친구일 줄은 몰랐다.
“나쁜 기지배.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리페님 응원했으면서.”
화나고, 당혹스럽고, 슬프고, 짜증 나고, 안타깝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길거리에 우뚝 서 있다가 고개를 드니 성녀로 가득한 거리가 보였다. 화려한 전광판과 포스터. 모두 성녀로 채워져 있다.
이전에는 다 칼리오페였다는 걸 생각하면 속상했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다들 변해가는 걸까.’
처음 성녀의 얼굴이 전광판에 걸리기 시작했을 땐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무려 13년 동안이나 칼리오페의 얼굴이 걸려 있었던 페릴턴 광장 중앙 전광판이 성녀로 교체되었을 땐, 그 분분했던 의견도 하나로 모였다.
성녀의 탄생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전광판이 성녀로 가득해지는 것에 대해서도 별생각 없어하던 사람들조차 화를 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칼리오페를 밀어내고 성녀로 가득해진 거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녀의 사진에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성녀가 행한 기적은 분명 대단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개를 돌리던 영애는 그 와중에 보이는 반가운 사람의 얼굴에 옅게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의 초상화를 많이 그리는 화가였다. 매 공연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영감을 얻어 화폭에 담아내는 열혈 팬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이쿠, 아가씨. 오랜만이군요.”
화가가 영애를 보고 반가운 듯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리고 있나요?”
영애의 시선이 캔버스를 향했다. 분명 칼리오페를 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녀님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제 마음을 울려서요.”
화가는 성녀의 사진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다.
“……전 리페님을 그리실 줄 알았는데요.”
“에헤이.”
화가가 손사래를 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성녀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신화이자 살아있는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런 영감의 원천이 계신데 다른 사람을 그릴 리가요.”
“…….”
“뭐, 루스티첼 영애는 대단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뭐 하나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 * *
“피엔테 가는 잘 처리했어.”
“힐데.”
아스타레아스가 방안에 들어오는 힐데르트를 돌아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예의 그 포커페이스 같은 미소였다.
‘뭐지?’
하지만 힐데르트는 미심쩍음을 느꼈다.
아스타레아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반기고 있지만 무언가가 부자연스러웠다.
힐데르트의 시선이 방금 닫힌 함을 향했다.
‘분명 저 함 안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들어오자마자 뚜껑을 닫았다. 그저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 걸까, 아니면—
‘감춘 건가?’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지 찝찝했다.
힐데르트는 아스타레아스가 제게 뭔가를 숨길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 보통 친구인가. 서로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만났던 사이다. 아스타레아스에겐 아마 자신이 유일한 친구이리라.
워낙 속 생각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녀석이니 말하지 않는 것쯤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비밀을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 아닌가.
“피엔테 가를 잘 처리했다고?”
아스타레아스의 질문에 힐데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응, 제대로 흔들었지.”
지금 피엔테가는 안팎으로 굉장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스타레아스의 명령대로 서모나 가는 은연중에 황제파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었다. 이는 서모나 가의 독특한 입지 덕에 가능했다.
카스틸로 가와 친밀하니 당연히 반황제파일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서모나가 귀족파나 다른 반황제파와 뜻을 함께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서모나 후작가가 카스틸로 공작가의 정치계 진출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틸로 가에 접근하려는 귀족들은 모두 서모나 가의 소개를 거쳐야 했다. 그 때문에 징검다리라고도 불리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징검다리가 없으면 아무도 건널 수 없다.
서모나 후작은 이미 몇 번이나 정치적 거물과 카스틸로 가의 회동을 저지시킨 전적이 있다.
해서, 사람들은 서모나 가에 대해 친 카스틸로파인 듯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 실상은 전혀 다른데 말이지.’
힐데르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지’시킨 게 아니라 아스타레아스가 그들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다. 어쨌든 이 전략은 꽤 유효해서 황제마저 깜빡 속아 넘어갔다.
칼리오페가 회귀하기 전, 힐데르트가 어린 나이에 중앙 핵심 행정기구인 아프락스 궁에 발령받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의 능력이 뛰어나고 양친이 모두 아프락스 궁 출신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것은 황제가 서모나 가를 제 쪽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둔 수였다.
지금도 아무런 의심 없이 황제파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 정도로 서모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좋은 카드였다.
“계속 시선을 붙잡아 두도록 해. 그 김에 황제파가 전처럼 결속을 다지지 못하도록 해도 좋겠지.”
“응, 마침 좋은 기회야. 권력이라는 떡밥이 있으니까.”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힐데르트는 잠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함에 대한 질문이 입술을 툭툭 두드렸지만 결국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그런데 크레티안느 피엔테 말이야.”
아스타레아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네가 한 거 아니야?”
“말했을 텐데. 내가 아니라고.”
약간의 틈도 없이 나온 단언이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옅은 이런 일로 거짓말하지 않는다.
알고 있지만.
“정말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고?”
아스타레아스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여유로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쳐진다.
그 무언의 대답에 힐데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역시 유리안인가.’
에피니와 칼리오페는 모르는 것 같지만 자신은 유리안의 묘한 성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과거 할라피뇨 사건으로 두 사람은 남다른 우정을 나누고 있으니까.
아마 유리안이 계속 제도에서 컸다면 에피니와 칼리오페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네가 하진 않았지만, 일이 일어나는 걸 알면서도 막지 않았지.”
막지 않은 걸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도왔을 것이다.
‘유리안이 안전한 걸 보면.’
힐데르트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글쎄.”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대답은 여전히 모호했다. 그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나른하게 턱을 괸 아스타레아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내가 직접 움직였다면 그 주제도 모르는 계집은 머리카락 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권태롭게 중얼거리는 말에 힐데르트는 조금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러시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리오페를 건드렸으니 어련하시겠냐 싶었다.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관계를 알게 된 후, 힐데르트는 그녀를 대하는 아스타레아스의 태도를 싫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나 봐?”
“이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칠 정도의 지능이 있다면 내가 손댈 필요 없겠지.”
힐데르트는 태어나 처음으로 크레티안느를 위해 기도했다. 아스타레아스가 나서면 유리안에게 당한 일 정도는 장난처럼 느껴질 것이다.
부디 그녀가 멀리멀리 떠나 칼리오페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인생에서도 꺼져주길 바랐다.
‘그나저나 유리안 녀석도 참 난 놈이야.’
무턱대고 크레티안느를 잡아다가 고문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렇게 대책 없이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한단 말인가.
만약 아스타레아스가 그를 비호하지 않고, 서모나 가가 피엔테를 흔들지 않았다면 당장 잡혀갔을 것이다.
‘진짜……. 생각 없이 행동부터 하는 놈이 가장 무섭다니까.’
이성의 소유자인 힐데르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만약 유리안 녀석이 리페와 레아스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끔찍한 상상에 저절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회까닥 돈 유리안이 너 죽고 나 죽자는 기세로 아스타레아스를 푹푹 찌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현실처럼 너무나 선명해서 과장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없었다.
‘뭐, 레아스 네 업보라고 생각해라.’
칼리오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그 정도는 감내해야 했다.
솔직히 조금 고소하기도 했다.
‘꽤 고생하겠지.’
아스타레아스라면 손쉽게 유리안을 제압할 수 있지만, 칼리오페가 연관되어 있으니 골치 아플 것이다. 칼리오페가 소꿉친구들을 유독 아끼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유리안 사르니오가 제도에 올라왔다면서.”
“이미 알고 있잖아. 저번에 내가 리페에게 통신했을 때 같이 있었으면서.”
그리고 리페가 널 버리고 우리에게 왔지. 힐데르트가 뒷말을 삼켰다.
그날 일이 생각난 건 마찬가지였는지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 속 시원해.’
아스타레아스는 유리안이 제도에 온 첫날부터 그 소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크레티안느 피엔테를 습격한 유리안을 비호할 수 있으니까.
“……리페가 유리안 사르니오를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
툭, 툭. 아스타레아스의 검지가 천천히 상아로 만든 책상 위를 두드렸다.
힐데르트는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고쳤다. 유리안이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관계를 알게 되는 것따윈 아무 것도 아니다.
큰일은 따로 있다.
‘아스타레아스가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찰싹 붙어 다닌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재앙도 그런 재앙이 없다.
아까처럼 업보니, 뭐니 하면서 속으로 농담조차 할 수 없었다.
힐데르트의 반응에 아스타레아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석처럼 선명한 푸른 눈동자에 비친 것은 질투였다. 질투, 불안감, 초조함. 항상 여유로운 아스타레아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평생을 함께한 친구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힐데르트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아, 그래. 엄청 사이좋지. 알잖아, 리페가 얼마나 정이 많은 애인지.”
“…….”
“유리안하고는 아예 같이 산 적도 있으니까. 더 애틋하지.”
“……같이 살았……애틋…….”
아스타레아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얼굴이 꼭 국정을 논하는 제왕처럼 심각했다.
힐데르트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아스타레아스를 놀릴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누군가를 놀리며 재밌어할 줄도 몰랐다.
하지만…… 재밌으면서 어딘지 가슴 한 편이 씁쓸한 것은.
‘나는 지금 유리안을 빗대서 나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
칼리오페에게 유리안도, 힐데르트 자신도 분명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칼리오페의 마음이 향한 곳은 아스타레아스였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도 ‘친구’일 뿐.
“좀 봐주지 그래. 애가 어려서부터 힘들었잖아. 리페도 걔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고. 그건 유리안이 가장 잘 알걸.”
그래, 리페가 자신을 친구로만 생각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이라고 해도—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단 하루라도 좋으니까.’
칼리오페를 좋아할 수 있게 용서해주길.
아스타레아스가 하, 하고 웃었다.
“미안한데 봐줄 여유 따위 없거든.”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푸른 눈동자가 어둑하게 빛났다.
아스타레아스에게 칼리오페는 항상 벅찬 상대였다. 단 한 번 방심할 수도,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다. 칼리오페 앞에서 아스타레아스는 언제나 절박했다.
아무 일 없어도 칼리오페의 주변에 남자가 있다면 거슬릴 텐데 심지어 지금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첫 키스를 한 날, 칼리오페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 후로 몇 번 연락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거절뿐이었다.
항상 핑계가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유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일 수도 있다.
[—그냥, 갑작스러워서.]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또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요즘 이것 때문에 아스타레아스는 사춘기 열병에 걸린 소년처럼 밤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그저 입술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달콤하고 달콤해서, 심장이 다 녹아내릴 것 같았던 건 자신뿐이었나. 좋았지만…… 좋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좋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녀에게 입 맞추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키스를 한 게 잘못인가.”
“뭐?!”
아스타레아스가 불쑥 중얼거린 말에 힐데르트가 경악해서 그를 쳐다봤다.
“지, 지, 지, 지금…… 무, 뭐라고…….”
잘못 들었을 것이다.
아니, 잘못 들었다. 잘못 들은 게 확실하다.
“하하하, 나 요즘 귀가 이상한가 봐. 별 황당한 소리로 잘못 들었다니까.”
“그래?”
“응, 글쎄 니가 키스한 게 잘못이니 뭐 그딴 망언을 한 줄 알았어. 나 참, 니가 리페한테 키스했다고 착각할뻔했네.”
“응, 착각 아니야. 제대로 들었어.”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힐데르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확히 3초 후, 그가 아스타레아스의 멱살을 잡았다.
대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 그 서슬에 아스타레아스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끼이익,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척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했다.
“너, 너 이 자식……!”
감히 우리 리페에게 뭘 해? 그 청초하고 순진하고 해맑은 아이에게 뭘……?!
입에서 여러 가지 비난이 튀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힐데르트는 이를 악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연인이다. 자신은 그녀의 친구이지만,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뭐라 말할까.
칼리오페가 응했다면 자신은 뭐라 할 수 없다.
힐데르트의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여전히 멱살이 잡힌 채, 아스타레아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오랜 친우를 바라보았다.
“—힐데.”
푸른 눈동자에 힐데르트의 얼굴이 담긴다.
화가 나고, 황망하고, 비참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얼굴.
“나를 한 대 쳐도 좋아.”
“뭐?”
“너라면 맞을 수 있어.”
그 말에 힐데르트는 벙쩌 있다가 성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바보 자식.”
한참 킬킬거리다가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창백한 금발이 그 손길에 스르륵 요동쳤다. 아스타레아스에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서 더 참담했다.
차라리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내가 더 편했을 텐데.’
“내가 못 때릴 줄 알고?”
“역사서에 이름이 남을 기회야.”
“그것 참 영광이네. 다시 없을 기회니 그 잘난 면상을 요리해주지.”
“그런 말 어디에서 배웠어? 네가 쓰던 말은 아닌데. 조금 촌스러우니까 쓰지 마.”
“충고 참 고맙다.”
힐데르트는 주먹을 꾹 쥐었다.
문관답지 않게 핏줄이 돋아난, 강인한 주먹이었다. 무가에서 자란 칼리오페가 강한 사람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힐데르트의 턱이 힘이 들어갔다.
퍼억—!!
거칠고 둔탁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아스타레아스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그대로 친구를 올려다 봤다. 그의 얼굴 바로 옆의 의자 등받이가 부서져 떨어져 나간 채였다.
아스타레아스에겐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다.
“레아스!”
그의 뺨에 생긴 얕게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전까진.
의자가 부서지면서 파편이 튄 것 같았다. 힐데르트가 황망해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넌 바보야.”
아스타레아스가 힐데르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속삭였다.
푸른 눈동자가 호수 같았다.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이 비치는 호수의 수면. 힐데르트가 움찔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바보한테서 그런 말 듣기 싫거든. 대체 너라면 맞을 수 있다는 게 뭐냐.”
고개 숙인 힐데르트의 입술에서 픽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억지로 쥐어 짜낸 것처럼.
까진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진심이었는데.”
한숨처럼 말한 아스타레아스가 힐데르트의 손목을 잡았다. 서랍에서 붕대를 꺼내 능숙하게 상처를 치료했다.
힐데르트는 자신의 손을 치료하는 아스타레아스를 내버려 둔 채 바라봤다. 이대로 편하게 손을 맡기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힐데.”
아스타레아스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내가 너였다면 봐주지 않았을 거야.”
“…….”
“나는 리페가 다른 누군가를 눈에 담는 걸 용납할 수 없거든.”
붕대를 다 감은 아스타레아스가 이어 말했다.
“그게 너여도.”
힐데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감은 붕대 위로 붉은 피가 베어 나왔다.
“리페를 존중하지 않는 거야?”
“존중해.”
아스타레아스가 엷게 미소 지으며 단언했다. 힐데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리페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한 주제에.”
“응, 그러니까 리페가 날 선택하게 할 거야.”
“뭐?”
“제발 날 봐 달라고 빌든,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온갖 것을 안겨주든, 본래의 나를 숨기고 평생 리페가 좋아하는 모습을 연기하든.”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다.
아스타레아스가 눈꼬리를 나른하게 휘며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이 달콤해 음험한 속내를 말하는 중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리페를 꼬실 거야.”
그게 너한테서 칼리오페를 빼앗는 결과여도 말이지.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내 인생이자 내 우주야. 없으면 안 돼. 없이 살아봤자 아무 의미도 없거든.”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 네 본분을—”
“내 본분을 잊은 적 없어. 하지만 그 본분이란 건 내가 존재해야지 있는 거잖아.”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힐데르트는 숨이 턱 막혔다. 그 뜻은 칼리오페가 그를 원하지 않으면 아스타레아스가 존재할 이유 자체가 없다는 거다.
“어느새 그렇게 돼버렸어.”
힐데르트의 눈빛에 아스타레아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정말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자각도 못 하는 사이, 그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하루하루 들이마시는 모든 공기가 그녀로 차올라서, 이제 그의 삶에 그녀가 없다는 건 산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
힐데르트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아스타레아스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그게…….’
아스타레아스와 자신의 격차가 너무나 선명해 힐데르트는 분했다.
너무 분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어땠지.’
칼리오페와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워 고백조차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게 도둑처럼 했다.
‘도저히—’
이미 모든 게 다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야 할 때가 왔다고 실감하면서도.
“뒤늦었긴 하지만……. 한 대만 때려도 될까?”
힐데르트가 피식 웃으며 주먹을 치켜 올렸다.
* * *
“유리 도련님, 이것도 봐 보세요!”
“여기 이게 제가 말씀드렸던 사진이에요.”
하녀들이 유리안을 옹기종기 둘러싸고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정원에 있던 로베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마음에 안 들어.’
제도에 올라온 유리안은 아예 루스티첼 가에 터를 잡았다.
하룻밤 묵고 간다는 게 이틀 밤이 되고, 이틀 밤이 사흘이 되고, 그렇게 어느새 열흘이 넘었다.
처음 유리안이 왔을 때는 그 조그맣던 꼬맹이가 어느새 컸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 반가웠다.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이 지나가니 뭔가 기분이 찜찜했다. 무엇보다—
“저놈 아무래도 우리 리페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래, 맞아. 그거다.
‘응?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나?’
“워씨, 깜짝아.”
로베르트는 어느새 바로 옆에 서 있는 루시우스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시우스는 한심하단 눈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봤다가 다시 유리안을 봤다.
“헉! 리페 너무너무 귀엽잖아!”
유리안이 꺄, 소리를 질렀다. 그가 감탄할 때마다 꽃잎 같은 머리카락이 들썩였다.
“그쵸? 진짜 귀여우시죠? 완전 사랑스럽죠?”
“우리 아가씨는 우리 아가씨이시니까요!”
하녀들이 엣헴, 하고 가슴을 당당히 폈다.
“하, 참나…….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리 도련님?”
갑자기 정색하는 유리안의 모습에 하녀들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이제 리페한테 귀엽다는 말은 쓰지 마.”
“네?”
“앞으론 ‘리페하다’라고 해. 귀엽다는 말로는 우리 리페의 귀여움을 다 표현할 수 없으니까.”
“뭐예요, 그게.”
하녀들은 깔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애, 내 말 맞잖아.”
“으음, 확실히 귀엽다는 평범한 말로는 우리 아가씨의 귀여움을 전부 나타내기 힘들죠.”
“어머, 여기 아가씨께서 정말 아가씨하시네요.”
“이 사진도 아가씨하세요.”
하녀들이 농담을 주고 받으며 꺄르륵 웃었다.
루스티첼 저에서 유리안은 하인과 하녀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다들 막내 아가씨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이었고, 유리안은 칼리오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이었다. 안 맞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작고 귀여운 토끼를 경계하지 않는 것처럼, 유리안은 아주 손쉽게 사람의 마음에 걸린 빗장을 풀곤 했다. 그가 순진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무해하게 미소 지을 때면 고용인들의 ‘감히 막내 아가씨를 노리는 놈팡이 경계 레이더’가 작동을 멈췄다.
그렇게 고용인들을 회유한 유리안은 루스티첼 저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구체적으론 이렇게.
“리이페.”
유리안이 마침 방안에서 테라스로 나온 칼리오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겁했을 하녀들도 유리안이 작은 토끼로만 보여서 아무 생각 없이 웃었다.
“저, 저, 저게!”
대신 로베르트가 뒷목을 잡았다.
“야! 너 안 떨어져? 틈만 나면 리페한테 붙는다?”
로베르트가 성큼성큼 정원에서 테라스 안으로 들어가며 성을 냈다. 하지만 유리안은 오히려 칼리오페에게 더 찰싹 붙었다.
“으응, 그치만……. 그간 나 혼자만 떨어져 있어서 너무 외로웠는걸. 거기 가니까 친구 한 명 없었구…….”
유리안을 보는 칼리오페의 시선에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그걸 본 루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자신의 둘째 동생은 저 영악한 것에게 말려들었다.
“로벨 오라버니…….”
칼리오페의 슬픈 눈빛에 로베르트의 전투력이 대폭 하락했다.
“으, 으으! 그래도 일단 좀 떨어져!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라구!”
하지만 그럴수록 유리안은 칼리오페에게 더 찰싹 붙었다.
“리페 옆자리는 내 꺼란 말이야! 내 동생이야!”
결국 로베르트가 으앙앙아 외치며 칼리오페를 푹 끌어안았다. 칼리오페가 슬픈 눈으로 저를 쳐다본 게 너무 억울하고 가슴 아팠다.
하지만 로베르트가 떼쓰는 것에 물러나면 유리안이 아니다. 로베르트의 단단한 몸에서 칼리오페의 팔 한 짝을 빼내 야무지게 끌어안았다.
‘이 사람들 대체 지금 뭘 하는 거죠…….’
칼리오페는 흐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왠지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의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리안이 로베르트에게 또박또박 따졌다.
“왜 떨어져야 해? 어렸을 때도 이렇게 붙어 있었잖아. 왜 지금은 안돼?”
“그땐 네가 여자애인 줄 알았을 때고!”
그 말에 유리안의 연록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역시 내가 안젤리나인 게 좋은 거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로베르트도, 칼리오페도 숨을 삼켰다.
‘유리안이 이겼군.’
루시우스만이 느긋하게 한발 물러서 판정을 내렸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절대 아냐!”
로베르트가 손사래를 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그때 이 집 와서 정말 좋았는데……. 로벨 형은 아니었나 보네.”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 익숙하니까.”
시무룩한 얼굴로 아프게 미소 짓는 유리안의 모습에 로베르트는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어졌으니.
“유리안 사르니오.”
루시우스가 테라스 안으로 들어오며 유리안을 바라봤다.
얼굴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덕지덕지 붙은 로베르트나 칼리오페와 달리, 그의 얼굴은 한 점 동요도 없이 침착하기만 했다.
‘이크.’
루시우스의 등장에 유리안은 혀를 쏙 내밀었다. 그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유리안은 곧장 칼리오페의 팔을 잡아끌었다.
“리페, 나 밖에 나가고 싶어. 제도에 올라온 후 바깥 구경 딱 하루만 했잖아. 리페하구 다시 만난 날.”
“아, 그랬었죠.”
다시 밝아지는 유리안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안에서만 지내서 답답했죠.”
유리안이 손님으로 와 있는 건데 진작 자신이 좀 더 신경 써야 했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은패를 가지고 있었던 것에 온 마음이 쏠려 잘 챙겨주지 못 했다.
“으응, 아니야. 나는 리페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았는걸.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자.”
그 말에 칼리오페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에 올라오기도 힘든 시골로 내려가 많이 심심하고 외로웠나 보다.
“말 나온 김에 바로 준비해서 나갈까요?”
“그럼 나도 같이 갈—”
“로벨.”
루시우스가 같이 가겠다고 하는 로베르트의 목깃을 잡았다.
“그냥 또래 친구들끼리 다녀오게 두자.”
“뭐?”
“이렇게 느긋하게 만난 건 십 년 만이니 밖에 나가서 추억할 것도 많겠지.”
‘아니, 그때 얘네가 다섯 살이었는데 뭘 밖에서 추억할 게 있다 그래?’
로베르트는 황당한 눈으로 루시우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루시우스의 표정을 보고 따지지도 못한 채 입술만 쭉 내밀었다.
루시우스는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유리안만 바라봤다.
‘적으로 적을 몰아낸다는 말이 있지.’
유리안이 계속 칼리오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카스틸로 공자.’
무려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가 칼리오페와 연인 사이다.
‘지금 리페가 열다섯. 몇 개월만 지나면 열여섯이야.’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되면 칼리오페가 열여덟이 되자마자 청혼서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우리 리페같이 완벽한 애를 놓치기 싫을 테니 어떻게든 빨리 낚아채려고 하겠지.’
바깥에는 소중한 막냇동생을 노리는 하이에나뿐이다. 가장 불안한 점은 아스타레아스가 하이에나들 중에서 가장 그럴싸하다는 거다.
가족들이 제시한 ‘우리 막둥이 신랑 조건’에 부합하는 남자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스틸로 공자는—
‘어쨌든 열여덟이 되는 순간 청혼서가 오는 것만큼은 막아야 해!’
어차피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친구 외에 다른 존재로 보일 일은 요원했다. 그러니 잠시 짜증 나는 것쯤은 참고 대의를 도모해야 한다.
‘유리 녀석은 밖에서도 리페에게 찰싹 붙어 다닐 테니 소문이 나겠지.’
분명 아스타레아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고소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저희 둘이서 다녀올게요. 고마워요, 루스 오라버니.”
루시우스의 속을 까맣게 모르는 칼리오페는 유리안을 챙겨주는 첫째 오라버니의 배려라고 생각해 감동했다.
“뭘.”
루시우스는 시침 뚝 떼고 칼리오페의 뺨에 살풋 키스했다.
“그럼 조심히 다녀와.”
“다녀와, 리페.”
로베르트가 미련이 뚝뚝 흐르는 목소리로 말하며 칼리오페의 뺨에 키스했다.
유리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루스 형은 대체 무슨 속셈이지.’
둘만 보낸다니 평소 그의 성정으로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상해.’
하지만 어쨌거나 칼리오페와 단둘이 데이트다.
“그럼 어서 가자!”
유리안은 방긋 웃으며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 외출에서 어떤 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 * *
“리페, 이거 봐.”
유리안이 가판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강아지 인형을 가리켰다.
“와, 귀엽네요.”
“이거 리페랑 닮았다.”
“이건 유리 오라버니랑 닮았어요.”
칼리오페가 인형을 들어 올려 유리안 가까이 대며 말했다. 유순한 눈매와 커다란 눈망울이 유리안과 똑 닮았다.
“내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워?”
유리안의 농담에 칼리오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인형보다 더요.”
“나 이거 살래.”
유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칼리오페와 닮은 인형과 자신을 닮은 인형을 샀다.
“둘 다 너무 귀엽고 잘 어울리지?”
“정말 그러네요.”
가판대를 떠나 몇 걸음 더 걷는데 유리안이 멈춰 섰다.
“……리페.”
“네?”
칼리오페는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둘 사이에는 세 발자국만큼의 거리가 생겨 있었다.
“뭐 신경 쓰이는 일 있어?”
“네?”
칼리오페는 뜨끔한 마음을 숨기며 반문했다.
집에서 유리안에게 신경 못 써준 게 미안해서 집중한다고 집중한 건데 뭔가 티가 났던 걸까. 유리안은 눈치가 빠르니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리 유리안에게 집중하려고 해도 가슴 한구석에선 아스타레아스와의 일이 도무지 사라지질 않았다.
“있지, 전에 무슨 일 있냐고 물었을 때 크레티안느 피엔테 때문이 아니라고 했잖아.”
유리안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그럼 뭐 때문이야?”
내가 리페를 괴롭히는 거 없애주면 되잖아.
유리안은 순수하게 생각했다.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안을 보고 칼리오페는 가슴이 술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다. 이런 마음의 부침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간절히 믿고 싶고, 누군가가 간절히 보고 싶고, 누군가의 체온이 간절히 그립고.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만든 그가 원망스럽고, 그런 마음을 품은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 없다.
이 마음을 입 밖에 내면 조금이라도 편해질까.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요.”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으래?”
“네.”
“뭐, 좋아.”
유리안은 어깨를 으쓱이곤 친밀하게 칼리오페의 팔짱을 꼈다.
“자, 그럼 우리 애들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우리 애들은 방금 산 강아지 인형이었다.
“좋아요.”
모르는 척해주며 먹을 것으로 기분을 전환시켜주려는 유리안이 고마웠다.
칼리오페가 그를 보고 환히 웃는데—
‘아.’
시야 끄트머리에 누군가가 잡혔다.
지난 며칠간 칼리오페를 잠 못 이루게 만들었던 그 누군가가.
순식간에 주변이 흐릿해진다.
마치 처음부터 그를 향해 시선을 준 것처럼, 시계(視界) 속에 그만 있는 것 같다.
‘레아스.’
속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며 여러 가지 감정이 물살처럼 뒤섞였다.
얼어붙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꿰뚫듯 유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맹세코 칼리오페는 떳떳했다. 유리안은 친구일 뿐이고, 그도 자신도 서로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품은 적이 없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아스타레아스에게 어떻게 비칠진 뻔했다. 심지어 아스타레아스 역시 자신이 그를 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이것 참, 우연이네요.”
천천히, 아스타레아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당신 보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이런 우연이 다 생기나 봐.”
나른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눈빛은 처음이라, 칼리오페는 도저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요 며칠 몸이 안 좋아 집에만 있을 생각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레아스.”
“나은 것 같아 다행이에요.”
싱긋, 아스타레아스가 웃었다. 눈꼬리가 길게 휘는 예쁜 미소였다. 그 미소가 그렇게 위험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유리안은 털을 잔뜩 부풀린 새끼 고양이처럼 칼리오페에게 착 달라붙은 채 아스타레아스를 노려봤다.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칼리오페와 맞닿은 유리안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미소가 더 깊어진다.
“유리안 사르니오.”
혀에서 진주처럼 구르는 우아하고 미려하고 차가운 발음.
유리안의 얼굴에 긴장이 잔뜩 어렸다.
‘뭐야, 쟨?’
유리안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포식자를 앞에 둔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기분 나빠 유리안은 한층 더 반항적으로 아스타레아스를 쳐다봤다.
“왜 불러?”
유리안으로서는 크레티안느에 관한 문제로 자신이 아스타레아스의 비호를 받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더더욱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당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둥 하는 건 뻔한 수작 아냐? 그런 작업은 리페도 귀찮아할 거라구.’
어려서부터 칼리오페를 혼자 짝사랑하는 또래는 많았고, 그 작업을 쳐내는 게 에피니와 힐데르트의 주요 임무였다.
‘지금은 내가 나설 때야.’
안 그래도 요즘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공자와 몇 번 둘이 외출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혹시 특별한 관계가 아니냐는 추측도 덧붙여서.
그럴 리가 없다.
하르첸도, 호르세안도 꾸준히 칼리오페와 단둘이서 만나지 않는가.
‘우리 리페가 상냥해서 잘 거절을 못 한 거겠지. 상대가 권력가이기도 하고. 내가 지켜줄 거야!’
유리안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끝 아냐? 이제 서로 갈 길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스타레아스가 가늠하듯 유리안을 바라봤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게 무서운 줄 모르고 캉캉 짖고 있다.
다시는 짖지 못하게 목덜미를 물어뜯는 건 쉽지만 어떨까.
새파란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향했다.
이 하룻강아지의 주인이 진심으로 화를 낼지 모른다는 게 그의 이성을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니 시도는 좋았는데 보다시피 리페는 나랑 데이트 중이라서 말이야.”
“데이트라…….”
“그래, 여기 우리 애들도 있고. 그러니까 이만—”
“유리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팔을 꽉 끌어안으려는 유리안의 손길을 피하며 그를 불렀다. 유리안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리페가 날 피한 거야?’
“모처럼 나왔는데 정말 미안해요. 아무래도 오늘 오라버니한테 미안한 일들만 많네요.”
“리, 리페…….”
유리안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단호히 말했다.
“죄송한데 먼저 돌아가 주실래요? 레아스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레아스?’
유리안은 뒤늦게 아까부터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공자를 어떻게 부르는지 깨달았다.
‘카스틸로 공자…… 하다못해 레아스 오라버니가 아니라 레아스라고?’
“나, 나는…….”
유리안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칼리오페의 옷자락을 꼬옥 붙들었다.
칼리오페는 너무 미안해서 재차 사과하면서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마차까지 데려다준 후 집에서 얘기하자면서 손을 흔들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칼리오페의 행동에 당황했던 유리안은 마차가 움직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루스티첼 저에 갈 순 없다.
그는 마차를 서모나 저로 돌렸다.
* * *
‘휴, 다행이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세 사람을 지켜보던 러그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땀 흘려 겨우 물가에서 건져낸 사람을 내 손으로 다시 절벽에 밀어트릴 뻔했네.’
크레티안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범인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만, 피엔테 가에선 그 일에 관해 조사 중이었다.
피엔테 가의 수사로부터 유리안을 보호하기 위해 그간 흘렸던 땀이 얼마인가. 자칫했다간 그 땀이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
칼리오페가 유리안의 손길을 피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려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유리안을 혼자 돌려보내 다니.
‘나이스, 강아지 아가씨!’
지금 심정 같아서는 칼리오페를 향해 몇 번이나 키스를 날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스타레아스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겠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저 멀리서 혼자 난리를 피우는 러그윈을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신 착란 상태에 빠진 것 같은 게 요즘 스트레스가 심했나 싶었다.
상사로서 걱정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리페.”
“오해예요.”
바로 나온 대답에 아스타레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엇이?”
“레아스가 지금 생각하는 거요.”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한쪽으로 느긋하게 기울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뭘까.”
“…….”
“아니, 정말로. 당신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까.”
칼리오페의 여린 팔에 닿은 손을 꺾고 싶다거나.
칼리오페의 다정한 미소가 향한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다거나.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애들이랍시고 들고 있는 인형을 불에 태워버리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과연 칼리오페가 알까?
‘난 당신이 몰랐으면 좋겠는데.’
도망갈 테니까.
아스타레아스는 포악한 생각 따위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것처럼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반응에 칼리오페는 빈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리가 없잖아.’
정말, 정말로 알고 싶었다. 요 며칠간 하는 생각은 온통 그거였다. 아스타레아스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왜 은패를 가지고 있는지, 루스티첼 가와 관련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자신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지.’
칼리오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어디 가서 이야기해요.”
“내 레이디의 뜻대로.”
아스타레아스는 바로 옆에 있는 커피 하우스로 그녀를 이끌었다. 쾌적하고 깔끔하긴 했지만 특급 하우스가 아니어서 프라이빗룸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가 들어가서 지배인에게 미소를 짓자마자 권력이라는 이름의 마법이 일어났다. 종업원들이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숙이고 계산도 안 받은 채 사람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 역시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자발적으로 커피 하우스에서 나갔다. 바깥에서 러그윈이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상하겠다고 돈을 나눠주는 게 보였다.
거의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공짜 음료와 돈을 얻은 사람들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자님께 받은 돈이라며 가보로 간직하겠다는 쑥덕거림도 들려왔다.
아스타레아스가 권력을 활용하는 건 처음 봤다.
‘화 많이 났구나.’
칼리오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할까요, 얘기.”
아스타레아스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긴 다리가 소파 밖으로 비죽 튀어나왔다.
어느새 드넓은 커피 하우스에는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 둘뿐이었다.
지배인이 감읍한 얼굴로 시중을 들기 위해 다가왔지만 아스타레아스의 손짓 한 번에 물러났다.
“……유리 오라버니는 그냥 남매 같은 사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였는걸요. 잠시나마 같이 지내기도 했고.”
“하지만 떨어져 있었죠.”
“가족이 떨어져 있다고 해도 남이 되진 않잖아요.”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는 고요한 호수처럼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자연의 이치를 말하듯 동요 없는 얼굴이 유리안은 결코 연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걸로 기분이 좋다니 나도 참 중증이군.’
“아까 데이트 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스타레아스는 팔걸이에 턱을 괴며 낮게 중얼거렸다.
계속 듣고 싶었다. 칼리오페의 변명을, 오해라는 말을.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이라는 말을.
그 말 한마디면 첫 키스 후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잠 못 이루며 괴롭게 번민하던 모든 밤조차 달게 느껴질 것 같다.
“그건 농담이에요.”
“글쎄, 유리안 사르니오도 그렇게 생각할까?”
“당연하지요.”
“물어봤어요?”
“물어본 건…… 아니지만.”
“그럼 모르는 거죠. 유리안 사르니오가 당신한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칼리오페는 자신이 남자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좀 자각할 필요가 있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힐데르트와 유리안에게 얼마나 무방비하게 구는가.
“그걸 꼭 말해야 아나요? 유리 오라버니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니까요.”
“그건 당신 생각이지요. 유리안 사르나오는 어떨지 모르는 거니까.”
도돌이표다. 칼리오페가 입술을 다물었다.
“내게 아파서 집에만 있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유리안 사르니오와 데이트라…….”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압박했다.
단 한마디, 당신이 좋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키스 직후 칼리오페가 자신을 피하는 건 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으니까.
아무리 칼리오페가 아무리 자신을 피해도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럭저럭 세계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라고, 나라고 그렇게……. 내가 얼마나— 얼마나, 읏…….”
희미하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아스타레아스는 깜짝 놀라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인 채라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손안에서 파르르 떠는 작은 새의 숨결처럼 가냘파서 아스타레아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혹시 자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나는, 나야말로 묻고 싶어요. 나도 화내고 싶단 말이에요!”
감정이 북받친 칼리오페가 고개를 휙 들며 소리쳤다. 커다란 눈동자 속에 눈물이 가득 고여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울먹이는 얼굴을 보자마자 아스타레아스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유리안에 대한 질투, 칼리오페가 자신을 피하는 것에 대한 초조함,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답답함과 짜증. 그간 그를 괴롭혔던 수많은 감정들이 모두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진다.
아스타레아스는 지금 상황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칼리오페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연스레 자세를 낮춰 그녀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올려다보았다.
“리페.”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깨질 것처럼 연약해 보여서, 그게 아스타레아스의 평소 모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그가 이런 눈빛을 하는 건 자신 앞에서뿐이라서.
칼리오페는 차마 견디지 못하고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날 봐요, 제발.”
아스타레아스가 애원했다.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자마자 아스타레아스는 극독을 마신 것처럼 장기가 다 녹아 끊기는 것 같았다. 그 눈물이 자신을 향한 원망을 담고 있어서 더더욱.
“내가 잘못했어요, 응? 제발, 제발 울지 말아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톱 아래에 자신의 손등을 대었다.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내가 당신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안타까움을 넘어 스스로에 대한 책망과 분노마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칼리오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회귀 후,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마저도 그는 이미 그녀의 곁에 있었다.
울지도 않았는데 울지 말라며 손수건을 남겨두고 간 남자.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울고 있다는 걸 알아 봐준 남자.
아주 오래 전부터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아프게 만들까?
“나는 당신이 우는 게 세계가 멸망하는 것보다 더 두려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내 가족들을 죽일까?
‘……안돼.’
칼리오페는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췄다.
그녀는 이미 배신을 겪어봤다. 가족이라 여기고 믿고 의지하고 아끼던 사람이 얼마나 잔혹하게 돌아섰는지 기억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순 없다.
“뭐든 할게요. 다시는 키스 같은 거,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울지 말아요.”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애원에 칼리오페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해도 아스타레아스는 너무나 간단히 가슴에 파고 든다.
‘키스 때문이 아닌 거 알면서.’
눈치 빠른 남자이니 키스가 싫어서 자신의 행동이 변한 게 아니라는 걸 알 거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도 흘려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뭐든 다 할 수 있다구요.”
나를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내 가족들을 해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 물음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 빼곤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날 봐요. 적어도 내가 당신 눈물이라도 닦아줄 수 있게.”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정말 상처 받은 것처럼 느껴져서 내가 더 미안하다고 달래주고 싶었다.
의심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내겐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다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눈앞에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끌어안는 따스한 품. 익숙한 포근한 향기. 리페, 하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한순간에 자신에게서 사라져 버렸던 것들.
어느 날 갑자기 시신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시체조차 없는 루시우스의 무덤. 시꺼멓게 엉망으로 뒤틀려 있던 로베르트의 모습.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나날이 쇠약해져 가시던 어머니.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핏기없이 입술까지 하얗게 질린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어.’
이대로 아스타레아스와의 모든 관계를 끝내는 게 가장 나은 결정이다. 그러기 싫어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며 외면했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도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것을.
아스타레아스를 믿으면 그에게 가족들을 해할 기회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그 기회를 차단할 수 있다.
설령 아스타레아스가 결백하더라도 가족들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
‘그냥 내 마음이 아플 뿐이지.’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끊어내야 해.’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이고 진작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제발……. 할 수 있지, 칼리오페 루스티첼. 하지 못해도 꼭 해야만 해.’
스스로를 다독인 칼리오페가 막 입을 열어 아스타레아스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넣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의 손과 겹쳐진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보였다.
‘아…….’
그제야 칼리오페는 아까 왜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 아래에 제 손을 가져다 대었는지 깨달았다.
아스타레아스의 손등 위로 붉은 생채기가 잔뜩 나 있었다. 칼리오페가 주먹을 꽉 쥐느라 손바닥에 생채기가 생길까 봐 미리 자신의 손을 대었던 것이다.
지난번 은패를 발견한 날, 주먹을 움켜쥐느라 칼리오페의 손바닥에 옅은 손톱자국이 남았었다.
그나마 그 정도로 그친 것은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주먹을 펴곤 자신의 손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칼리오페의 손바닥에 남은 그 작은 손톱자국이, 진작 사라져서 없어진 옅은 자국이 그에게 얼마나 아프고 신경 쓰이는 상처였으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 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더 흔들릴 뿐이니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아스타레아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칼리오페의 가슴 한구석이 훅 꺼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의 손등 위에 짙게 생긴 상처 따위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듯, 오직 칼리오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가 났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그의 상처보다는 칼리오페의 눈물이 더 아프고 괴롭다는 눈으로.
그 눈을 보고서 어떻게 그를 의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가족들을 지키려면 모질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전처럼 칼리오페를 강하게 붙들진 못했다.
“레아스…….”
칼리오페가 허물어져 내리듯 아스타레아스를 끌어안았다. 그가 그녀를 품에 받아들며 꽉 끌어안았다. 더 이상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미안해요, 미안해.”
칼리오페는 계속 울면서 미안하다고만 중얼거렸다.
아스타레아스는 캐묻지도,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녀가 진정할 수 있게 계속 등을 토닥여주었다.
겨우겨우 진정한 칼리오페가 새빨개진 얼굴로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젖은 눈가에 상냥하게 키스하며 물었다.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입맞춤 때문이었다고 말하면 정말로 다시는 입 맞추지 않을 거예요?”
칼리오페가 운 흔적이 온통 남은 얼굴로 그를 보며 살짝 웃었다.
“이런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런 질문은 잔혹한 것 아닌가요.”
“치, 엉망인 게 뻔한데.”
칼리오페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스타레아스를 믿기로 결정하자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를 보며 웃을 수 있었고, 그 모든 웃음이 전부 진심이었다.
행복이 햇볕처럼 따스하게 칼리오페의 가슴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어떻게 이걸 포기할 생각을 했는지.
“당신과의 입맞춤이 내 영혼을 구원할 정도로 좋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칼리오페의 입술을 훑었다. 그 눈빛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슬쩍 달아올랐다.
“당신이 싫다면 하지 않을 거예요.”
“레아스…….”
칼리오페는 아쉬움을 느껴야 하는지, 감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조금 솔직해지자면, 아쉬웠다.
저도 모르게 그런 눈빛을 한 걸까?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대신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입 맞추게 해줘요.”
앗, 할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하지만 부드럽게 그의 입술이 닿았다.
눈물에 젖은 입맞춤이 이렇게나 달콤할 수 있을까.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한참동안이나 서로의 눈을 응시하다가 툭, 이마를 맞대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행복하고 따뜻하고 안온하고, 마치 햇볕에 잠겨 있는 것 같은 기분.
“이제 말해줘요. 왜 그랬어요? 당신이 날 보지 않는 이 며칠이 내겐 지옥이었어.”
투정 섞인 속삭임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제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설마 정말로 키스 때문은 아니겠지요.”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칼리오페의 귓가로 미끄러졌다.
“사실 그건 아직 시작도 안 한 건데.”
그가 덧붙인 속삭임에 칼리오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칼리오페가 그를 가볍게 흘겨 보고는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사실 그날…… 당신 책상 위에서 본 게 있어요. 멋대로 봐서 죄송해요. 그냥 악보를 다시 돌려놓고 정리하려고 했을 뿐인데…….”
“괜찮아요. 당신이 봐선 안 되는 것 따위 없으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는 잠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도 멋대로 집무실을 보지 않는데……. 정말 제가 봐도 상관 없어요? 전부 다?”
나한테 비밀은 없나요? 그 은패조차도?
칼리오페의 눈빛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무리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돼요, 당신은.”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당신은 내게 그래도 돼.”
아스타레아스는 뭘 그렇게 힘겹게 묻느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손이 칼리오페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그래서, 무엇을 보았나요?”
그 말에 칼리오페의 눈빛이 떨렸다.
어쩔 수 없는 순간적인 망설임.
하지만.
‘믿어.’
그리고 그 믿음을 준 건 아스타레아스다.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신뢰를 주었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배신 당하고, 한순간에 뒤바뀌어버린 사람들의 태도 사이에서 절망하던 칼리오페조차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신뢰.
이제 자신이 그 신뢰에 보답할 때다.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곧게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책상 위, 작은 함에서 기묘한 문장이 새겨진 은패를 봤어요.”
움찔.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문장이 새겨진 은패말이군요.”
“그게 용이었나요?”
칼리오페의 되물음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옅은 낭패감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바로 알아보기 힘들지만 모티브가 용이 맞습니다. 용을 형상화한 거예요.”
칼리오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은패’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스타레아스가 보인 동요, 용 문장에 대해 자신이 몰랐다는 걸 안 후의 낭패감.
이 두 가지 반응을 놓고 보면 확실히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내게 다 설명해주고 있잖아.’
숨기는 것도, 말 돌리는 것도 없이 전부 말해주고 있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가슴 위에서 꼬옥 맞잡았다.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은 후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레아스, 당신과 연관된 문장인가요?”
“…….”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그대로 반사된다.
그 몇 초 안 되는 짧은 순간이 칼리오페에게는 무엇보다 길게 느껴졌다.
“관련……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겠군요.”
덜컹.
씁쓸한 미소와 함께 나온 대답에 칼리오페는 심장이 그대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관련이 있다고요.”
목에 녹이 슨 것처럼 목소리가 이상했다.
“리페.”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나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요.”
눈앞에는 푸른 눈동자가 가득했다. 절박하고 진지한 표정.
“믿어요.”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각이나 계산은 전부 제쳐두고 그냥 고개가 끄덕여졌다.
“믿어도 되죠?”
“나는 당신의 개가 될 수도 있는걸요.”
“개는 필요 없대두요.”
아스타레아스가 눈꼬리를 접으며 선량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든 말만 하면 당신의 사랑스럽고 충실한 개가 될 수 있다는 듯이.
“리페, 그 문장에 대해서 어떤 걸 알고 있어요?”
“어떤 거라니…….”
“내 책상 위에서 은패를 보고 태도를 바꾼 거라면 그게 무엇인지 당신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표정을 살핀 후 결론을 내렸다.
“그 문장이 용이라는 것도 몰랐던 걸 보니 아닌 듯하군요.”
“……맞아요. 그 문장에 대해 아는 건 몇 가지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찾았지만 아직도 잘 모른다.
확실히 아는 것은 그게 가족들을 죽인 범인에 대한 단서라는 것. 그리고 에피니가 비스 신관의 몸에 문신 되어 있는 걸 봤다고 했으니 신전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 것 정도.
가족의 죽음, 비스 신전, 아스타레아스.
이 세 가지가 모두 관련되어 있다니.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아스타레아스가 적이라고 생각하면 명확해지는데.
‘나는 레아스를 믿어.’
만약 아스타레아스가 가족들을 해친 배후라면 이렇게까지 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몇 가지?”
“……비스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요.”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을 피했다.
회귀에 관해서는 그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다.
칼리오페는 설마 오늘, 아스타레아스와 우연히 마주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엇보다 아스타레아스를 믿더라도 가족을 위해 숨구멍을 남겨두어야 했다.
‘레아스도 자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지금 명확하게 대답해주는 건 아니니까.’
변명하듯 스스로에게 속삭인 뒤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저랑 신전은 적대 관계잖아요. 그리고 레아스는 제가 처음으로 속가를 부를 때부터 저를 도왔구요.”
신전에서 칼리오페를 적대시한 계기가 속가였다.
“그런데 신전의 비밀결사대로 보이는 곳의 패를 가지고 있으니 당황스러웠어요.”
“내가 당신을 불안하게 했군요.”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칼리오페를 도닥였다.
“하지만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그쪽과 같은 입장인 건 아니에요.”
“대체 어떤 관계인데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아스타레아스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정도로만 알고 있다면 그게 좋아요. 무언가에 대해 모를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니까.”
“아니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손길을 뿌리치며 단언했다.
“모르는 건 축복이 아니에요.”
회귀 전부터 칼리오페는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과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몰랐기에 사람의 선의와 예의, 지성과 인성을 믿었다.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게 축복인가?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었던 나날이 행운인가?
‘아니.’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삶이 괴롭고 힘들어서 하루하루 숨이 가빠오더라도 알았어야 한다.
알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설령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알아서 괴롭더라도 나는 알고 싶어요. 알아야 해요.”
아스타레아스를 응시하는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칼리오페가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서, 선의와 정의로 가득한 사람이라서, 눈 돌리거나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가시밭길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자신이 마모되어 닳아 없어지고 그 형체마저 사라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갈 사람이라서.
“몰랐으면 좋겠어요.”
아스타레아스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긴 속눈썹 아래 그늘진 눈동자가 반짝였다.
칼리오페가 숨을 들이켰다.
“그냥 걸어가요.”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였다. 갈라진, 젖은 음성이었다. 그가 칼리오페의 발을 잡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당신의 발을 찌르는 가시덤불은 내가 다 치울 테니까.
계속 희고 깨끗하게, 상처 하나 없이.
그러니까 보지 못한 건 보지 말고,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살을 에는 북풍과 몸을 찌르는 가시는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채로 살아가요.
천천히, 입술이 칼리오페의 구두 위에 닿았다.
* * *
아스타레아스는 어스름하게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석양이 그의 은빛 머리칼을 붉게 물들였다.
잘한 걸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에 확신을 가지고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지만, 칼리오페와 관련된 일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붉게 일렁이는 석양이 원망으로 가득 차올랐던 산호빛 눈동자 같았다. 알고 싶다고, 피하기 싫다고 맑게 반짝이던 눈동자.
‘하지만 진상을 알게 되면 분명 자기 자신을 희생할 테니까.’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활활 불태울 것이다.
‘당신이 조금만 더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빛에 이끌리듯이, 칼리오페가 올곧기 때문에 더더욱 끌리면서도 가끔은 안타까웠다.
‘원망을 듣더라도 어쩔 수 없어.’
다시는 칼리오페를 잃을 수 없다. 세계가 소실되는 것 같은 상실은 악몽으로 끝나야 한다. 악몽으로 끝낼 것이다.
‘내 손으로.’
아스타레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칼리오페를 황제의 관심 밖으로 밀어놓기 위해 부단히 뒷공작을 하고 있었다. 크레티안느의 일을 계기로 피엔테 후작가가 흔들리며 황제파 내부에 균열이 생겨 황제는 모든 심력을 그쪽에 쏟아 붓는 중이었다.
현 황제에게는 견고한 지지기반이 그 어떤 황제보다 절실했다. 아스타레아스가 성년이 되면 양위할 거라는 맹세를 하고 즉위한 데다가 정통성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황제는 어떻게든 황제파 내부를 정리해 안정시키려고 하고, 아스타레아스는 서모나 가를 통해 혼란이 계속되게끔 수를 쓰고 있다. 한동안 황제는 조카의 소꿉장난 같은 연애 따위에 신경 쓸 필요도, 여력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하지.’
칼리오페의 안전이 걸린 일이다. 몇 중으로 안전 장치를 해도 부족했다.
황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카스틸로 가에서 몽에르트 가에 몇 번 사람을 보냈다.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선물을 보냈을 뿐이지만.’
황제의 눈에는 다르게 비칠 것이다.
‘카스틸로 가와 몽에르트 가가 혼인 동맹을 맺기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겠지.’
유명인인 칼리오페와 몇 번 사적으로 만난 것과 중도파의 중심인 몽에르트 후작가와 가문 간의 교류. 황제에게 어느 쪽이 더 심각하게 다가올 것인가.
뻔한 답이었다.
거기에 몽에르트 영애는 차기 몽에르트 후작으로 벌써 정치계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미성년 시절부터 명망 높은 살롱을 주관했던 만큼 수완이 대단했다.
‘실제로도 보통내기가 아니었지.’
[아버님과 이야기가 끝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제 허락도 받으셔야지요.]
어느 누가 감히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에게 눈 똑바로 뜨고 허락이라는 소리를 운운할 수 있을까.
[저를 방패막이로 세울 거면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순서입니다. 제가 당사자니까요.]
그 건방지고 대담한 태도에 아스타레아스는 그저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도 몽에르트 영애는 긴장해 찻잔을 힘주어 붙잡았다.
움찔하면서도 용케 물러서지 않아 아스타레아스는 그 점을 높게 평가했다. 칼리오페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려면 이 정도 담력은 있어야 한다.
[가문의 명에 따르는 것은 차기 후작으로서 지켜야 할 소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 속엔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면, 가문 내부의 의견 충돌을 내게 전시하는 겁니까.]
몽에르트 영애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스타레아스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인데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턱 밑에 칼날이 파고 들 것 같았다.
‘그래, 이게 내가 아는 카스틸로 공자야.’
일전에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 있다.
그때 아스타레아스의 태도를 잊지 못한다. 그가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때 본 게 착각인 듯 싶었다.
[정말 리페와 특별한 관계인가요?]
묻고서 아차 했다. 너무 사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차라리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아버님께는 황제를 혼란시킬 눈속임이라고 말씀하셨죠.]
그저 정치 싸움이라고. 거기에 몽에르트 가를 이용하는 대가로 아스타레아스는 막대한 이익을 약속했다.
[아버님은 이 기회를 통해 저를 공자님의 아내— 황실의 일원으로 만들 욕심도 있으신 것 같지만…….]
몽에르트 영애는 탁, 소리 나게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스타레아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사실은 리페를 황제의 시선으로부터 가릴 방패막이 필요했던 것뿐이죠.]
아스타레아스의 입매가 올라갔다.
[현명하고 주제 파악도 잘하는군요.]
[저도 그 아이를 보호하고 싶어요.]
[그럼 이야기가 끝났군요.]
몽에르트 영애는 고개를 저었다. 아스타레아스에게 압도당할 정도의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아이에게 당신은 너무 위험한 상대예요. 안 그래도 속가를 불러 보수 세력에게는 눈 밖에 나 있을 텐데.]
아스타레아스의 미소가 깊어졌다.
몽에르트 영애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그에게서 느꼈던 압박감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전까지 아스타레아스는 그녀를 압박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그녀 혼자서 압도된 것일 뿐.
‘이것이 제왕. 신혈의 정통 계승자.’
현 황제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것이다. 찌릿찌릿한 흥분감이 손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그 아이를 지킬 힘을 갖고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죠.]
아스타레아스는 흠칫 거리면서 할 말을 다 하는 몽에트르 영애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여간 그의 연인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을 홀려서 탈이다.
[그 아이를 울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신혈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렇게 거래는 성사되었다.
황제는 칼리오페에 관해 정략혼의 눈속임이나 결혼 전의 놀이 상대 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황제파에 대한 정리가 끝나면 몽에르트 가에 신경을 쓰겠지.’
몇 겹의 블러핑을 하고 일부러 칼리오페와 함께 있는 상황을 언론에 노출시켰다. 혹시 칼리오페에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선황의 장자에 대한 황제의 보복이라고 몰아갈 수 있도록.
정통성 때문에 황제를 향한 국민의 지지가 약했다. 황제로서는 여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으리라.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뒷공작을 했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순 없어.’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가를 보호하기 위해 정면에 나서기 시작하면 황제의 우선순위가 바뀔 것이다. 지금처럼 그저 ‘속가를 부르고 다니는 거슬리는 여자애’ 혹은 ‘건방진 조카의 놀잇감’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
‘일단 황제파가 결집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더 흔들어야겠어.’
그녀가 안전하도록 계획을 점검했지만 가슴의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리페, 많이 화났겠지.’
가끔 생각한다.
그녀가 모르는 게, 자신 혼자만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게 그 무엇보다 쓸쓸하다고. 하지만 역시 그녀가 모를 수 있다면 모르는 게 낫다.
아무리 뼈에 사무치더라도 고독은 그의 오랜 동반자였다. 이제는 익숙하다.
하지만.
[낙하한 동백꽃 다시 가지 끝에서 피어날 때—]
가끔씩 칼리오페가 그에게 속삭인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낭랑한 목소리, 간절했던 눈빛.
그저 시구를 읊는다고 하기엔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 거대해서.
다섯 살의 칼리오페의 슬픈 눈빛이, 그 실망이 가득 번지던 얼굴이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망막을 채운다.
대체 뭐였을까.
의문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답답함으로 남아있다.
‘그 시구에 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런 시는 나오지 않았다.
* * *
유리안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몇 번이나 사과하는 칼리오페에게 괜찮다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칼리오페는 왠지 더 미안해져서 최근 며칠 유리안과 부쩍 어울렸다.
‘피곤해.’
유리안과 함께 노는 것은 즐겁고 재밌다. 하지만 피곤한 이유는 계속 다른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이리라.
밤이 되어 제 방에 혼자 남은 칼리오페는 습관적으로 통신석을 바라봤다.
오늘도 아스타레아스가 보낸 메시지가 찍혀 있다.
“흥.”
칼리오페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나 이번엔 정말로 화가 났다구요.’
그렇게 입술을 비죽이며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통신석을 살폈다.
[제법 선선해졌어요. 따뜻하게 입어요.]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속상해도 밥은 챙겨 먹어요.]
무수히 떠 있는 메시지를 읽다 보면 아스타레아스가 그리워진다.
‘만나주진 않을 거지만.’
정말 만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똑똑, 창가에서 낯익은 소리가 났다.
벌떡.
칼리오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몸을 휙 일으켰다가 다시 푹 누웠다.
‘아니지, 아니야.’
만나주지 않을 거다. 안 만날 거다. 절대로.
똑똑똑.
일정한 간격을 두고 노크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무시하자고 생각하면서 칼리오페는 이불 위에서 괜히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시간은 자꾸만 길게 흐르고, 그럼에도 두드리는 소리에는 신경질 하나 없이 여전히 정중해서.
바스락— 칼리오페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칼리오페의 귀가 쫑긋 섰다.
‘……갔나?’
대답 안 한다고 정말로 가버리다니. 자신이 대답하지 않은 것인데도 야속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칼리오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들춰 보았다.
창백한 달과 정원 곳곳의 등불이 밤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만개했던 수국은 이제 다 사라지고 정원사가 옮겨 심은 국화와 코스모스 봉오리가 꽃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자신의 마음이 그래서일까.
칼리오페는 손안에 매끄럽게 감기는 커튼을 움켜잡았다.
실망을 감추고 창가에서 몸을 돌리려는데—
“……!”
이미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창틀에 기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에 새하얗게 부서지는 은빛 머리칼과 희게 빛나는 피부,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비현실적이었다.
어둠에 반쯤 녹아든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은 어딘지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고, 그래서 더 매력적인. 뒷걸음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다가가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하지만 칼리오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숙녀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것은 신사답지 않은 행동인데요.”
“오늘 밤은 신사가 아니라고 하죠.”
“위험한 말로 들리는데요.”
“맞아요. 나는 지금 그대에게 위험해.”
아스타레아스가 훅 칼리오페에게 다가왔다. 찬 기운과 함께 쌉싸름하면서 달콤한 밤의 향기가 칼리오페를 덮쳤다.
하지만 정작 아스타레아스의 몸은 손끝 하나 칼리오페에게 직접 닿지 않았다.
지척에서 달빛과 어둠에 물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느릿하게 그를 비껴 열린 창가를 훑었다. 분명히 유모가 창문을 잠가 놨었다.
“고작 레이디에 침소에 숨어드는 데 권능을 사용하시다니.”
힐난하는 목소리가 조곤조곤 노랫소리 같았다.
“그대의 침실에 숨어드는 것이 열두 바다를 가르고 황좌에 오르는 것보다 내겐 더 중한 일이라.”
“정말 위험하신 분이네.”
아스타레아스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가 칼리오페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도망쳐요, 나의 소중한 아가씨.”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위험하다는 말과 어둡게 깔린 눈빛과 달리 그 손길은 여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정중했다.
도망치라 말하면서 손을 잡고 입술을 묻는다. 뿌리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절실하게.
‘……차가워.’
아스타레아스의 손가락과 입술이 차가웠다.
이제 초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라 밤공기가 차다. 오랜 시간 밖에 있었으니 몸이 차게 식는 건 당연했다.
손과 뺨이 얼어 있는 게 안타까워 칼리오페는 자유로운 손을 그에게 뻗다가 멈칫했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너무 커 휩쓸릴 뻔했다.
겨우 얼굴을 비춘 것 가지고 아스타레아스를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왜 왔어요?”
차가운 목소리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안 해줄 거면서.”
삐죽삐죽한 말이 튀어나간다. 평소의 칼리오페라면, 다른 사람에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어투와 행동.
자신의 언동이 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아스타레아스에게는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화를 내고 싶었다. 원망하고 싶었다.
나 이렇게 기분이 안 좋으니 알아줘요.
그렇게 틱틱거리고 싶은 상대는 아스타레아스뿐.
칼리오페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 팔짱을 끼곤 고개를 돌렸다.
“리페.”
아스타레아스가 애원하듯 그녀를 불렀다.
칼리오페는 여전히 창밖의 정원을 바라볼 뿐, 그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밤의 어둠보다 더 짙은 목소리였다.
칼리오페는 움찔했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이런 식으로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그녀를 이런 식으로, 이런 목소리로 부른 사람이 있었다.
‘설마.’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어느새 그는 일어나 있었다. 그가 등지고 선 달이 환했다. 그 주변으로 하얗게 흩뿌려진 별이 설원처럼 빛났다.
설원 속에 피었던 붉은 꽃.
남자의 손에 만개한 붉은 꽃이 들려 있었다.
“—동백…….”
칼리오페는 신음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언젠가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세상엔 둘뿐이었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세상에는 사람들의 절규도, 시체도, 전쟁의 포화도 없었다.
공백처럼 깨끗한 순백 속에 칼리오페는 서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건 오로지 눈앞의 남자뿐.
지금 그녀의 눈에 비치는 아스타레아스보다 더 성숙하고, 더 위험했다.
전쟁을 겪은 남자는 날카롭고 거칠었다. 유리알같이 무기질적인 푸른 눈이 깜빡이지도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이 차가운 눈으로 덮여 있어서였을까, 칼리오페는 자신에게 닿은 그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수천 명을 도륙한 전쟁의 악귀라고 해도,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닮아 있었기에.
온통 흰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붉은 것이 있었다.
혹독한 전쟁과 잔인한 겨울에도 죽지 않은 동백나무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피로 물든 땅에서 붉은색은 칼리오페에게 고통으로밖에 다가오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가 건네준 동백꽃은.
그가 차가운 손으로 건넨 붉은 꽃만큼은—
“……카스틸로 소공작.”
버석하게 메마른 칼리오페의 입술이 움직였다.
나약하고 연약한 음성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드랍고 연한 꽃잎이 칼리오페의 손가락에 닿았다.
‘—항상.’
항상, 언제나 꿈꿨었다.
혼자만의 기억과 추억은 너무 쓸쓸하고 외롭다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고,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만약, 만약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이 택할 수 있다면 그건 가족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레아스.’
당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칼리오페의 손을 꽉 붙들었다. 전생에서는 차마 맞닿지 못했던 두 손이 뿌리내리듯 단단히 얽혀 들었다.
“낙하한 동백꽃.”
그가 속삭였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시구에 두근, 심장이 먼저 울렸다.
칼리오페는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한 번 그에게 확인한 적이 있었다.
계속 전생과 같은 말을 하는 그가 꼭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떨리는 마음으로 시구를 읊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뼛속까지 시린 실망뿐이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아야지.’
동백꽃을 주는 건 회귀 후 그와의 첫 만남에 동백나무가 있었으니까. 다정한 사람이니 다섯 살 생일 때 그녀가 읊었던 시구를 기억해 다시 읊어주는 것뿐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동이 온몸을 쿵쿵 울렸다.
온몸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다고.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고.
자꾸만 마음에 고삐를 쥐려고 하는데도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이 벅참과 떨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어쩌지?
너무 바라고 바라서, 혼자 감당하는 게 힘들어서 꾸는 꿈이라면—
차라리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러면 그가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이 세상에서 나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라도 꿈꿀 수 있으니까.
그때,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어느새 그녀의 온기가 그에게 옮겨간 건지 손이 따스했다. 그 온기에 칼리오페의 입술이 열렸다.
“—가지 끝에서 다시 피어날 때.”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스타레아스를 살피는 그녀의 시선은 더 불안했다.
제발, 제발.
그냥 다섯 살 우리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읊은 거라고 말하지 말아요.
제발, 그 뒤의 구절을 기억해줘요.
당신이 과거에서— 미래에서 내게 속삭였던 말들을, 전부 다.
다시 내게 줘요.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으며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칼리오페에게는 무엇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해묵은 기다림, 향기 되어—”
나직한, 그러나 힘 있는 어조가 칼리오페의 귓가에, 가슴에 파고 들었다.
한 번의 죽음 이전에 있었던 먼 옛날처럼 물빛 눈동자와 산호빛 눈동자가 서로를 담았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화답하듯 열렸다.
“향기 되어, 코끝을 스치네.”
완성된 시구가 공기 중에— 현실에 울려 퍼지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 파도처럼 온몸을 적셨다.
이 짧은 시를 완성하고 싶어서, 그의 입술로 듣고 싶어서 그 긴 나날 동안 얼마나 밤잠을 설쳤던가.
품 안의 동백꽃에서 정말로 향그러운 내음이 뭉클 피어올라 코끝을 스쳤다.
그가 웃는다.
“어떻게, 어떻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코끝이 찡하니 아리고 가슴이 안타깝도록 조여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품에 안았다.
따스하고 단단한 품이 몸을 감싸자 뒷목이 쭈뼛 설 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온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울지 말아요.”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닦아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가에 보드랍게 키스하곤 닿았던 얼굴을 떼어내자, 달빛 아래 고요히 시선이 마주쳤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동백꽃이 두 사람의 품속에서 뭉그러지며 더욱 짙고 달콤한 향기를 흩트렸다. 그 겨울, 설원에서 낙하한 동백꽃은 긴 시간을 지나 지금 가지 끝에서 다시 피었다.
그때는 차마 닿지 못했던 손끝, 그저 애타게 스치는 것으로 끝났던 마음이,
전생과 회귀, 다시 현생을 지나 그 모든 시간을 넘어서—
드디어 닿았다.
행복처럼 안온한 그의 품 속에서 칼리오페는 감은 눈 안쪽으로 다섯 살의 언젠가 보았던 환상을 다시 보았다.
그녀만이 아는 붉은 꽃가지.
가족들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나 혼자서만 짊어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쓸쓸했어.’
진흙 속의 진주처럼, 눈 속에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비탄 속에서도 소중하고 기적 같은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중한 꽃가지를 아는 사람은 이제 그녀 혼자뿐이라서.
모두가 사라진 설원에 칼리오페는 홀로 서서 피어나는 붉은 꽃이 잊히지 않기를, 퇴색되어 시들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몰아쳤다.
희고 검은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붉은 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칼리오페는 혼자 아는 소중한 기억이 시들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눈보라가 그치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새하얀 눈밭에는 못 보던 발자국이 있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에 누군가가 꽃나무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느리게 비쳤다.
그 가지를—
산호빛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잘게 떨렸다.
—꺾지 마.
애탄 외침에도 우둑, 거친 소리가 나며 가느다란 가지가 단번에 꺾였다. 나뭇가지 틈으로 보인 사람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된 눈처럼 희게 빛났다.
다섯 살의 그 날, 그 환상 속에서 칼리오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로 꺾인 기억에 안타까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아스.’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소중한 기억을 소중히 품에 안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닿은 손이 따스했다.
이제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이다.
* * *
“너무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요.”
속삭이는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닿아서 다행이다.
두 사람은 지붕 위에 올라와 나란히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새하얀 눈송이처럼 빛나며 쏟아 내리는 것 같은 별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칼리오페는 품 안의 동백꽃을 바라봤다.
“이 계절에 만개한 동백꽃이라니.”
“당신과 약속했으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아스타레아스는 흡족했다.
이 계절에 갑작스럽게 활짝 핀 동백꽃을 구한다고 러그윈을 비롯해 수하들이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았지만, 그건 칼리오페가 몰라도 되는 일이었다.
“정말로 다 기억해요?”
칼리오페가 물었다. 전과 같은 불안은 그녀의 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행복한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받으려는 태도였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다고?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장 중요한 기억은 거의 되찾았어요. 당신과 만나고,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당신의 눈을 바라봤던 일들.”
아스타레아스에게는 그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이었다.
다른 건 모두 잊어버려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순간들.
“……시간을 되돌아오신 게 아니에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묘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당신은 시간을 되돌아왔나요?”
“네, 어떤 여자가— 사람은 아닌 듯했지만……. 시간을 되돌려줬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로.”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겠군요.”
푸른 눈동자가 아픔과 안타까움에 젖어 들었다.
“이 긴 시간 동안 혼자.”
그의 손이 칼리오페의 뺨을 매만졌다.
“나는 당신이 몰랐으면 했는데.”
그런 비극이 칼리오페의 기억 속에 없길 바랐다. 전쟁 따위, 일가가 다 죽는 비극 따위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먼일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모두 알고 있고, 심지어 그걸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니.
‘이 여린 어깨로.’
칼리오페가 홀로 겪었을 슬픔과 고독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이제 레아스가 있잖아요.”
칼리오페가 그의 손에 뺨을 묻으며 제 손을 겹쳤다.
웃는 얼굴이 그 모든 일을 겪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 아스타레아스는 눈매를 좁혔다. 눈앞의 이 소녀가 그렇게 눈부실 수 없었다.
“레아스는 달라요?”
“……나는 오랫동안 악몽을 꿨어요.”
처음엔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 다음은 아버지의 죽음.
그저 악몽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 역시. 지독하리 만치 꿈과 똑같은 이유와 방식으로, 하다 못 해 코끝을 스치는 냄새와 바람과 별의 이동마저 소름 끼치도록 같았다.
그때 아스타레아스는 깨달았다.
그가 꾸는 꿈들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꿈은 순서대로 찾아오지 않았다. 다가오는 미래인지 한 번 겪은 과거인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잔혹한 저주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진창 같은 저주 사이에서 유일하게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어떤 여자의 얼굴이었다.
밤하늘 같은 남보랏빛 머리카락. 메마른, 어딘지 결핍된 산호빛 눈동자.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눈을 들여다보면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불씨 같은 희망이 보였다. 미등처럼 희미하지만, 심연처럼 시꺼먼 저주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왜 폐허가 된 곳에서 서 있을까.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을까.
이름이 뭘까. 목소리는 어떨까.
나와 아는 사이일까?
그 여자는,
왜.
뒤죽박죽 섞인 시간 속에서 저도 모르게 여자가 나오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조금씩 의문이 풀렸다.
전쟁이 났고, 사람들이 죽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여자에 대해 점점 많은 것을 알아갔다. 그리고 악몽 속에서 그녀가 그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을 때—
아스타레아스는 처음으로 이 악몽이 어쩌면 저주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덟 살, 서모나 가의 숲속에서 앳된 산호빛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메마르지 않은, 여문 과일처럼 생기 있는 눈동자가 댕그라니 그를 직시했을 때.
아스타레아스는 그가 그토록 악몽을 꾸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아마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그의 생을 그녀에게 바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