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입술과 입술, 그리고 그림자
“어? 너도 머리 잘랐어?”
“너도?”
영애들은 단발로 자른 서로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푸하하 웃었다.
“왜 잘랐는지 말 안 해도 알겠다.”
“응, 나도.”
피실피실 웃으며 팔짱을 끼고 쇼핑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단발 너무 귀여우셨지.”
“응, 엄청 귀엽더라! 단발로 자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나도 따라서 잘라버렸어.”
그도 그럴 것이, 단발로 자르는 귀족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단발은 평민이나 고아들의 스타일이었다. 그런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관습으로 굳어져 애초에 선택 대상이 되지 않았었다.
“근데 리페님이 왜 단발로 자른 건지 들었어?”
“하! 당연히 들었지.”
영애가 콧김을 훅 내뿜었다.
“그 피엔테 가의 모지리 때문이지?”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칼리오페의 공연을 망치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와인을 끼얹었다는 사건은 이미 유명했다. 그 탓에 크레티안느는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집 안에 숨어 두문불출했다.
피엔테 후작이 아예 금족령을 내렸다고 했다. 그가 크레티안느의 사고에 직접 대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걔는 진짜 좀 혼나봐야 해. 여태까지 여기저기 사고 엄청 치면서도 가문 덕에 다 흐지부지 넘어갔잖아.”
“그 영상 봤어? 리페님한테 막 자기 잘못 아니라면서 하는 거.”
“아, 진짜 화딱지 나서 중간에 꺼버릴 뻔했잖아. 진짜 말하는 것하고는…….”
보육원에서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자르고 와인을 쏟았다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제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했던 영상은 이미 사교계에 일파만파 퍼졌다.
“그런데 거기서 신전 이야기가 나왔잖아…….”
영애가 목소리를 죽여 친구에게 속삭였다.
“응, 신전하니까 생각났는데 너 성녀 공연 봤어?”
“아니, 그냥 이야기만 들었지. 꼴도 보기 싫어.”
진성 칼리오페 덕후인 그들은 성녀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 길거리에 가득했던 칼리오페 사진이 하나둘 성녀 사진으로 바뀌더니 이제 전광판에는 온통 성녀 사진뿐이었기 때문이다.
칼리오페의 자리를 뺏어간 느낌이라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근데 성녀가 기적을 일으켰다잖아.”
성녀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만성두통이 나았다. 이런 이야기가 돌았을 땐 콧방귀를 꼈다. ‘우리 리페님 노래를 들어도 그렇다고!’ 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사나운 맹수도 성녀의 앞에선 온순해져서 노래를 듣는 건 조금 신기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무려 대정령 프네우마케투스테라의 사랑을 받는 소녀가 아니던가. 성녀 따위 별 거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니에르 영애가 성녀의 노래를 듣고 일어섰다고 했지.”
타니에르 영애.
유서 깊은 타니에르 백작 가의 금지옥엽이자 어렸을 때 불운한 사고로 두 다리를 못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밝고 명랑했던 그녀는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아예 두문불출하며 바깥 외출을 하지 않았다. 타니에르 백작은 신전 세 곳 모두에 막대한 기부를 하며 어떻게든 손녀의 다리를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세상에는 고칠 수 없는 것이 있다. 타니에르 영애의 다리가 그중 하나였다.
사실, 신전에서는 타니에르 영애의 다리를 보고 분명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차 바퀴에 다리가 깔린 정도의 외상은 예전부터 치료해 왔기 때문이다.
타니에르 영애의 상태가 심하긴 했지만 딱히 어려운 치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신성력으로 조각난 뼈가 붙고, 상처가 다 아물어도 타니에르 영애는 두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모두가 그녀의 사정을 안타까워했다. 신전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 사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타니에르 영애가 두 다리로 일어나다니……!
“진짜 성녀이긴 한가 봐.”
고위 성직자도 치유하지 못한 걸 해내는 걸 보면 확실히 성녀는 성녀였다.
“……성녀는 짜증 나긴 하지만 타니에르 영애에겐 잘된 일이지.”
“응, 앞으로 얼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보니까 많이 수척하던데.”
타니에르 영애가 일어난 채 웃고 있는 모습은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사건은 노래 경연에 관심 없던 사람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어쨌거나 눈에 보이는 기적만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건 없으니까.
덩달아 경연에 대한 관심까지 높아져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흥미롭게 신전과 칼리오페의 경연을 지켜보았다.
원래 응원하는 존재가 있을 때 훨씬 더 몰입해서 관람하는 법이다. 이전에는 사실상 성가대를 응원하던 사람은 없었다. 성가가 이겼으면 했던 거지, 굳이 성가대가 아니어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성녀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칼리오페의 팬들이 무조건 칼리오페가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성녀가 이기길 바랐다. 그래서 아직 성녀는 경연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성녀가 부르는 성가를 응원했다.
당연히 경연에 대한 열기는 더 뜨거워졌고, 투표 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보육원 경연은 이전까지 관심 없었던 사람들까지 눈과 귀를 기울였다.
중계를 놓친 사람도 있으나 니카이논에서 촬영했던 칼리오페의 공연이 무료로 배포되었다. 평민 중에서는 통신석은커녕 영상구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영상구를 가지고 있는 집에 다 같이 모여 함께 보기도 했다.
게다가 좋은 소식도 있었다.
니카이논에서 곧 기존의 반의반도 안 되는 가격에 통신석을 판매할 거라고 발표했다. 그렇게 판매한 통신석을 통해 경연을 중계할 예정이라고 했다.
즉, 앞으로 경연을 보려고 일부러 신전이 만든 중계 장소까지 갈 필요 없게 된다. 심지어 이렇게 촬영한 영상을 아무 때나 다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통신석에 쓰이는 마력 양도 확연히 줄여 유지비가 이전의 1/10 수준일 거라고 했다.
귀족들은 지금도 집에 통신석이 있어서 칼리오페의 공연을 몇 번이나 복습했지만, 그러다 보면 마력석 소모가 재정적으로 부담됐던 게 사실이다.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의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이 모든 발전이 전부 칼리오페의 공연 때문에 아이디어를 얻어 이루어진 거라는 게 사람들의 웃음 포인트였다. 우스갯소리로 니카이논을 카메라 회사가 아니라 칼리오페 덕질 회사라고 부를 정도였다.
여하간 성녀가 일으킨 기적과 니카이논의 촬영으로 인해 경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전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칼리오페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그 중 상당수 호감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래 칼리오페가 착용한 것들은 완판되기로 유명했다. 기업들은 너도 나도 칼리오페를 기용해 마케팅하려고 했다. 심지어 한 화장품 회사는 니카이논 사와 협업해 칼리오페 트레이딩 카드를 만들기까지 했다.
“아, 도착했다.”
“허억……! 설마 이게 다 줄이야?!”
영애들은 바로 그 화장품 가게에 트레이딩 카드를 얻기 위해 외출했다. 10,000운드 이상 구매 시 칼리오페 트레이딩 카드를 랜덤으로 지급하는 이벤트였다.
영애들은 가게 바깥까지 늘어선 줄을 보고 기겁했다. 아예 매장 직원이 나와 줄을 관리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30분]
[여기서부터 60분]
이런 팻말마저 꽂혀 있었다.
“……두 시간은 기다려야겠네.”
영애들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마차 관리소로 가서 풋맨을 불러도 되지만 그러긴 싫었다.
이왕이면 직접 사고 싶은 느낌. 그리고 길게 줄 선 사람들과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간만에 리페님 사진 크게 걸려 있는 것 보니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와…….”
화장품 매장은 칼리오페를 모델로 기용한 만큼 칼리오페의 사진을 건물 외벽에 커다랗게 걸어놓고 있었다.
“맞아, 요즘 거의 다 성녀 사진으로 채워져서…….”
“성녀보다 우리 리페님 사진 보는 게 훨씬 정신 건강에 좋은데.”
둘이서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는데 앞에 있던 사람이 슬쩍 끼어들었다.
“정신 건강뿐이겠어요? 눈 건강에도 좋아요.”
두 영애는 다소 놀랐지만 격하게 공감하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마구마구 끄덕였다.
“아침마다 리페님 사진을 보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기분이에요.”
“응, 알아요. 이번에 트레이딩 카드 전체 다 모아서 방에 장식해둘 거예요.”
“그런데 두 분 다 단발로 자르셨네요? 저도 자를까…….”
“자, 망설여지실 땐 저 사진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영애가 화장품 매장 외벽에 걸린 칼리오페의 사진을 가리켰다.
소악마처럼 조그마한 뿔과 악마 날개를 단 칼리오페가 앙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하아……. 근데 저 분은 리페님이시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 하지만 리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요!”
“근데 그거 아시죠? 저 사진도 트레이딩 카드로 나온 거. 유일하게 새로운 사진이에요.”
“정말요?!”
시간이 촉박하기에 트레이딩 카드는 모두 니카이논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진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포토북이나 니카이논의 광고를 통해 이미 공개되었던 사진이었다.
하지만 저 소악마 사진은 유일하게 새로 찍은 사진이었다.
‘즉, 유일한 단발 사진!’
“근데 그냥 나오는 게 아니래요. 트레이딩 카드를 전부 다 모은 사람한테 주는 거래요.”
“원래도 다 모을 생각이었지만 꼭 모아야겠네요.”
영애가 사뭇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트레이딩 카드가 총 열 종류였으니 지르다 보면 언젠가는 나오겠지.
전부 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이야기하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수다에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두 시간도 금방이었다. 원래 덕질 할 땐 시간도 잘 가는 법.
“아악! 똑같은 거 나왔어!!”
“이거 있는 건데……!”
매장 안에 들어서자 때 아닌 절규가 들려왔다.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삼십 장만 더 사보자.”
“아니, 카드를 사는 게 아니라 일단은 화장품을 사는 거잖아.”
“아니야. 카드 사는 데 화장품이 딸려 오는 거라구!”
“앗, 고객님! 그건 테스터예요, 테스터! 이걸로 가져가세요!”
“아, 마음이 급해서…….”
“고, 고객님! 카드만 가져가지 마시고 물건도 가져가셔야죠!”
드넓은 매장이 아비규환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예 카드 교환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사 날개 카드 있으신 분! 달콤달콤회오리 카드랑 교환해요!!”
“수국 카드랑 우비 카드 교환하실 분!”
“저요!”
“아니, 저랑!! 저 수국 카드만 일곱 장이란 말이에요, 제발!!”
고상하게 말을 주고 받던 귀족 영애들이 여기에선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눈알이 벌겠다.
그때 꺄아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처음으로 전 종 모으신 분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3번 모으셨어요!”
한 영애가 위풍당당하게 악마 카드 세 장을 손에 넣고 훗, 웃음을 지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다 박수를 쳐주었다. 짝짝짝짝짝.
“모, 몽에르트 후작 영애 아니셔……?”
“몽에르트 영애께서 여길 왜…….”
그 드높은 권위를 가진 몽에르트 영애가 직접 화장품 가게에 와 트레이딩 카드를 사고 있다니……. 심지어 교환 한 번 안 하고 수백 장을 질러서 손에 넣었다.
몽에르트 영애가 손을 들자 박수 소리가 멎었다. 그녀는 좌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지금 상황에서 발휘될 것인가 싶긴 했지만.
“모두 감사해요. 다 같이 우리 리페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니 호의를 베풀고 싶네요.”
몽에르트 영애는 자신이 모은 30장을 제외하고 교환 테이블 위에 남은 카드를 올려놓았다.
“두고 갈 테니 마음대로 교환하세요. 단, 트레이딩 카드인 만큼 교환만 가능해요.”
“헉……!”
사람들의 눈에 존경심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절대 그냥 가져가시면 안 돼요. 이런 이벤트를 기획해주신 회사에 감사하고 있으니까요.”
생긋 웃은 몽에르트 영애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우리 리페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암묵적으로 칼리오페 팬클럽 회장이 당선된 순간이었다.
* * *
몽에르트 영애의 베풂이 시발점이 되어 화장품 가게에 있던 소녀들은 모두 의기투합했다.
트레이딩 카드 전 종을 모아 소악마 카드를 획득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로 옆에 있는 커피 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큰 프라이빗 룸에서 소녀들은 우아하고 고상한 다과회를 가졌다.
“니카이논에서 신개념 통신석을 출사한다는 말은 들으셨겠지요.”
“네, 리페님 영상을 무한 반복 재생하기엔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 반드시 사려구요.”
그 말에 몽에르트 영애가 훗, 하고 미소 지었다.
“아직 그 얘긴 못 들으셨나 보군요.”
“어떤……?”
몽에르트 영애는 좌중을 둘러보고 비장하게 말했다.
“한정판이 나옵니다.”
“설마……!”
“그, 그럼!”
영애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데도 아니고 칼리오페 덕후 회사인 니카이논의 한정판이다. 그럼 무엇이 나오겠는가.
“후후, 맞아요. 칼리오페 에디션이 나와요. 디자인부터 리페를 모티브로 했고 통신석 안에 기본으로 리페의 영상이 내장되어 있대요.”
“……!”
“어떡해어떡해어떡해!!”
영애들이 흥분을 못 이기고 소리 지르고 퍽퍽 옆 사람을 때렸다.
품위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괜찮다. 모두 같은 마음을 지닌 동지들이었으니까.
살면서 이처럼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을까. 이렇게 허례허식을 깨게 된 건 칼리오페 덕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된 것이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0대 영애들에게 칼리오페는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그저 멋지고 예뻐 보여서 따라 했다. 그러다 깊게 덕질하며 차츰차츰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왜 칼리오페가 평소에는 보석이 들어간 장신구를 안 쓰는지, 화려한 드레스보단 깔끔한 원피스를 입는지.
고급 상점은 절대 할인행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이비 살롱은 분기별로 엄청난 할인 행사를 한다. 왜 그럴까?
칼리오페가 처음부터 성가를 불렀다면 지금보다 훨씬 쉽게 추앙받았을 것이다. 아무런 잡음도 없었을 테지. 그런데 왜 속가를 고집할까?
“리페님이 너무 상냥해서지요.”
“똑똑하고 총명하셔서예요.”
“시류를 읽을 줄 아시는 분이기에.”
소녀들은 너도 옳고, 너도 옳다 했던 명 재판관 호앙히의 마음이 되어 모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를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귀족 영애만이 아니었다. 평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석 장신구는 아무리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리본이나 폼폼은 얼마든지 따라 할 수 있다.
사실 옷감만 봐도 서로 평민인지 아니면 귀족이나 부르주아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옷을 입으며 이전엔 분명했던 계층 간의 경계선이 조금씩 흐려졌다.
경연장에서 잘 차려입은 귀족 영애보다 칼리오페 팬이 확실해 보이는 평민이랑 옆자리인 게 더 좋았다. 태생적으로 특권의식이 있는 귀족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칼리오페로 인해서.
이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변화는 막을 수 없다. 그건 누가 억지로 가르치고 일깨워 비롯된 변화가 아니라, 조금씩 마음이 움직여 어느 순간 자각하니 달라진 걸 깨닫는 변화였으니까.
“사실…… 저는 이번 보육원 공연을 보고 정말 충격받았어요. 와인 얼룩이라니…….”
타인의 실수여도 옷에 얼룩이 묻으면 비밀로 하는 게 당연하다. 부끄러운 일이니까.
설령 피해자이더라도, 얼룩을 묻힌 사람보다 얼룩을 묻히고 있는 사람이 더 회자되고 눈총을 받는 게 사회였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당당했다.
그 상황에서 얼룩을 활용하는 기지를 발휘했다는 것도 대단한데 그걸 아예 공개해버렸다. 보통이라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잘 무마했다고, 들키기 전에 빠져나왔을 텐데.
“단발을 하고서도, 얼룩을 묻히고서도 하나도 움츠러들지 않았지요.”
어째서인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칼리오페의 노래가 좋아서, 그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칼리오페를 좋아하는 데에는 분명 그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어느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귀족들에겐 제약이 많았다.
걸음마를 떼고 말을 시작할 무렵부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칼리오페를 따라 조금씩 조금씩 선을 넘고 자유로워진다. 자유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열망하게 된다.
그건 자각도 못 하는 사이 이루어졌다.
부유함과 여유, 즉 품위를 나타내는 보석 헤드 드레스 대신 리본 핀을 달았던 그 날부터, 조금씩.
이는 평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넘지 못했던 선을, 스스로 귀족들과 저는 다르다고 세웠던 벽을 칼리오페를 따라 하며 어느새 훌쩍 넘게 만들었으니까.
“……분명히 보수적인 사람들은 리페님을 싫어할 거예요.”
“성녀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성녀 정말 짜증 나지 않아요? 물론 성녀가 나타난 건 축복이고 기쁜 일이지만…….”
그 성녀의 행보가 너무 칼리오페와 비슷하지 않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고, 공연을 하고, 사방에 광고를 걸고. 대체 어느 성녀가 ‘공연’을 한단 말인가.
“우리가 리페를 지켜줘야 해요.”
몽에르트 영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신전이 수상해요.”
[시, 신관들이 그렇게 말했어!]
[네가 나쁘다고, 내 걸 다 뺏어간 게 너라고 그랬어! 너한테 본때를 보여주면 이제 더 이상 안 그럴 거라고…….]
크레티안느는 신전의 사주를 받아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크레티안느는 뭐든 자기 잘못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이에 대해선 쉽게 나불거렸다.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정도로 똑똑하진 않죠.”
“있는 이야기를 자기 편의대로 왜곡하면 모를까.”
“그런 의미에서 신전 쪽에서 크레티안느에게 작게든 크게든 뭐라 바람을 넣은 건 사실일 거예요.”
“그 무렵 피엔테 영애가 신전에 자주 갔던 것도 그렇고요.”
“무엇보다 리페님이 오지 않으면 주최 측인 신전에서 당황하거나 뭐라고 공지를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죠. 심지어 사회자까지 다음 무대는 리페님이라 하고 바로 내려갔고.”
“그 때문에 분위기가 얼마나 안 좋았는데요.”
“하, 마르멜을 쫓아내고 겉으론 리페님께 미안하다, 앞으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하더니.”
“그것 때문에 비스 신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호감 갖지 않았나요? 스스로 자정하는 게 확실히 다르다고.”
“사실 저도 비스 신전을 좋게 봤어요. 우리 리페님한테 사과하고 이런 경연을 주최해 공연을 볼 수 있게 해주니까.”
“저도요. 그런데 그게 거짓이었다니.”
잠자코 영애들의 말을 듣고 있던 몽에르트 영애가 탁, 소리 나도록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더는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리페를 괴롭히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도록 하죠.”
* * *
“너, 너 이 새끼.”
큭큭 고위 신관 중 하나가 웃으며 벽에 딱 붙어 서 있는 신관의 뺨을 툭툭 때렸다.
“아, 진짜 골 때리는 새끼네.”
픽 웃다가 거칠게 상대를 걷어찬다.
빡! 뼈 맞는 소리와 함께 맞은 신관이 쓰러졌다.
“으윽…….”
그는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했지만 아무도 그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흉흉한 눈길만 되돌아올 뿐.
크레티안느 피엔테를 충동질해 칼리오페를 괴롭히고, 몬스터를 길가에 푼 범인을 찾는 건 쉬웠다.
외부 인력인 사회자는 당연히 신전의 음모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는 아주 공정하게 경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보육원 경연에서 다음 차례를 소개하고 내려간 뒤, 칼리오페가 등장하지 않아서 가장 당황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자칫하면 자신의 잘못이 될 수 있기에 사회자는 신전에 어떻게 된 일이냐, 자신은 분명히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누구한테 사인을 받았냐고 묻자 아주 쉽게 답이 나왔다. 이는 보육원 원장에게 칼리오페가 늦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던 자와 똑같았다.
고위 신관 엔드릴과 그의 종신관.
신관들은 그들이 이 흉계를 꾸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어쩔 거야!”
퍽! 분을 못 이긴 신관이 쓰러진 신관을 걷어찼다.
“겨우겨우 신전의 이미지를 회복해서 다시 성장세에 접어들었는데, 너네가 다 망쳤어! 벌써부터 신전에 항의서가 들어오고 있어!”
“발걸음하던 신도 수도 확 줄고, 예배당을 찾은 신도들도 무슨 일이냐며 진상을 묻는다고!”
신관들은 그 일에 대해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심지어 기부금마저 다시 줄기 시작했다. 성녀를 배출한 덕에 다시 늘어났는데 말짱 도루묵이 된 것이다.
“루스티첼 그 계집이 이기고 있는데도 이 경연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신전에서는 경연을 주최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호의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뭔가.
신전에서는 이 일에 대해 모른다고 발뺌해도 주최 측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커져가는 경연 규모를 신전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이전이라면 어차피 중계권을 가진 건 디바인 크리스탈을 사용하는 신전뿐이니, 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경연이 계속되는 걸 원하고, 그럼 어쩔 수 없이 신전의 중계를 볼 테니까.
하지만 니카이논에서 곧 통신석을 판매하고 이를 통해 중계할 것이라 예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전의 여론이 나빠지면 누가 일부러 신전의 중계를 보러 올까?
공연이야 직접 보러 오더라도 중계는 다르다. 결국 이는 신전 영향력이 약해지는 걸 뜻했다.
‘대체 왜 니카이논은 이때 통신석을 만들어서……!’
신관들은 설마 칼리오페가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옆에서 자신의 종신관이 맞는 걸 지켜보던 엔드릴이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 그래도 역시 신전이 계속 지는 것보단—”
“졌잖아!”
그렇다.
그런 더러운 수를 쓰고서도 신전은 이번 경연에서 패배했다.
솔직히 다른 것보다—
‘쪽팔려!’
그러고서도 진 게 쪽팔린다.
신관은 애써 쪽팔림을 털어내며 부러 근엄하게 말했다.
“애초에 이길 필요도 없었어. 어차피 성녀가 이길 거다. 그럼 모든 게 정리돼!”
오히려 불패의 신화를 가진 칼리오페에게 성녀가 승리하면 더더욱 그 가치는 올라간다.
“쓸 데 없는 짓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상황을 악화시켰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저리 나불댈 걸 예상하지도 못했어?!”
“나불대봤자지! 걘 신뢰가 없어! 그 계집이 멍청한 거 모르는 귀족들도 있나?”
“그래, 그리고 얼마나 팔랑귀인지도 잘 알지.”
신관이 낮게 읊조리며 엔드릴을 향해 이를 갈았다.
“하다 못 해 보육원 원장이나 사회자에게 입이나 털지 말든가……! 꼬리 잡히면 어쩌려고!”
다른 건 몰라도 공연자가 안 나타났을 때 신전의 대응이 이상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게 됐다.
“해봤자 의혹일 뿐이지.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습격한 건 암살자나 산적이 아니야. 몬스터라고.”
엔드릴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꼬리 잡힐 리 없어.”
몬스터는 인간이 조종할 수 없다. 시킨다고 말을 듣지도 못하고, 시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하다. 인간을 보면 무조건 공격하고, 질 것 같으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포획해서 거리에 풀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몬스터가 어디로 가서 누굴 공격할지 어떻게 알고. 자칫하면 우리 산하에 있는 보육원 후원자를 공격할 수도 있는데.”
엔드릴은 아까와 달리 여유를 되찾았다.
“또, 포획에는 반드시 반항한 흔적이 남아. 그런데 아무 흔적도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꼬리 밟힐 일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원래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은 논리적이지 않은 법. 하지만 루스티첼 가가 정식적으로 몬스터와 우리가 관련됐다고 하면—”
엔드릴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억지라는 비난만 들을 거야. 그럼 루스티첼 가를 향한 여론도 바뀌겠지.”
엔드릴은 이제 당당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너네가 져도 된다는 둥, 안일한 계획을 세울 때 나야말로 실질적으로 신전을 도울 계획을 세웠어.”
“뭐?!”
“실패한 주제에—”
“루스티첼 고 계집도 지금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엉엉 울고 있을걸? 울기만 하겠어?”
엔드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엔드릴.”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대신관의 부름에 엔드릴은 반색했다. 대신관도 자신의 공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 치 혓바닥을 놀려봤자 네가 신전에 끼친 피해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대신관의 말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대신관의 앞에는 신전을 향한 비난이 담긴 가십지와 하락세인 기부금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대신관은 고개를 들고 엔드릴을 향해 딱 한 마디 했다.
“옷 벗어야지.”
그 말에 여유만만했던 엔드릴의 얼굴은 단번에 사색이 되었다.
“시, 신전에서 나가라고요?”
대신관은 대답 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아, 안됩니다!”
엔드릴은 당장 대신관에게 달려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제발…… 대신관님…….”
그저 신관복을 벗고 신전을 나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엔드릴은 신전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주, 죽일 거야…….’
죽어서 입막음 당할 것이다.
손발이 덜덜 떨려왔다. 전 대신관 마르멜이 지하감옥에서 고문 당하다가 죽었다는 게 생각났다. 시체는 신전을 나가 들개의 밥으로 줬다고 했지.
절대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 아니, 어떻게든 죽는 건 싫다. 살고 싶다.
“저, 저는 신전을 위해 그런 겁니다! 계획은 제가 아니라 종신관이 짠 겁니다! 저는 관계 없어요!”
엔드릴이 걷어차여 쓰러져 있던 제 종신관을 삿대질하며 호소했다. 종신관의 눈이 배신감으로 크게 떨렸다.
“아, 아닙니다! 대신관님! 이건 모두 엔드릴 신관님께서…….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 후로는 서로를 탓하기 바빴다. 침을 튀겨가며 서로를 비난하고 밀어내고 대신관의 옷자락을 잡았다. 대신관은 피로감을 느꼈다.
“끌어내.”
그 한마디에 엔드릴과 종신관은 성기사에게 끌려갔다. 목적지는 뻔했다.
죽음.
“대, 대신관님, 대신관님!”
문이 닫힐 때까지 그들은 애타게 대신관을 불렀다. 하지만 대신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성녀.”
소란이 가라앉자 대신관은 그때까지 그림처럼 조용하게 앉아있던 성녀를 불렀다.
“네가 좀 나서줘야겠다.”
그는 앞에 있는 기부금 하락 보고서와 신전을 비난한 여론 자료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 일에는 너도 관련 있으니까.”
대신관의 눈초리가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되돌아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책망의 의미는 분명했다.
“엔드릴이 대신관의 명이라고 말해서 협력했을 뿐이에요.”
성녀는 조용히 답하며 일어섰다. 폭포 같은 머리카락이 촤르륵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어쨌든 제가 관여하긴 했으니.”
은빛 눈동자가 대신관을 응시한다.
“원하시는 대로 그 아이의 것을 빼앗아 오지요.”
* * *
보름달이 환히 뜬 밤.
한 소년, 혹은 청년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작약처럼 탐스럽고 보드라운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었다.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도의 달은 오랜만이야. 우리 리페도 이 달을 보고 있을까?”
혼잣말은 아니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새순처럼 연한 빛깔을 띤 연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지만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저기, 있잖아. 내가 정말 오랜만에 제도에 올라왔거든.”
“흐흡……. 흡!”
“마지막으로 올라왔을 때가 황자의 열두 살 생일연회 때였으니까 말이야. 3년만인가? 그때 너도 있었지?”
그는 기쁜 듯 재잘거렸다.
“그때는 생일 연회에 참석하는 게 목적이라서 며칠 못 있다 다시 돌아갔거든.”
회상하는 그의 눈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다들 황태자도 아닌 황자의 열두 살 생일에 모든 귀족을 참석시킨다고 투덜거렸지만 난 좋았어.”
“으흐으으읍!!!”
“제도에 오면 나의 리페가 있으니까.”
생긋 웃는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웠다.
“어쨌든, 이렇게 여유롭게 제도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십 년 만이지.”
길었다. 그에게는 정말 기나긴 시간이었다.
“아니, 제도에 ‘왔다’가 아니라 ‘돌아왔다’라고 해야 하나? 이젠 다시 제도에서 살 거거든.”
기분이 좋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는 항상 칼리오페가 있는 제도를 그리워했다. 그의 외조부모는 성인이 되면 다시 제도에 있는 사르니오 저에 가도 되니, 그때까지만 참으라고 타일렀다.
아직 성인이 되진 않았지만 그의 조름에 외조부님은 결국 조금 더 빨리 허락했다.
몇 달 후면 열여덟 살로 성인이 되니 마찬가지라는 말에 설득된 것이다.
“그래, 무려 십 년. 십 년만에 이곳에 왔는데 내가 처음 들은 소식이 뭔지 알아?”
“읍! 흐으……!”
“안 그래도 우리 리페 공연 못 봐서 화가 났었거든.”
그가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상대에게 다가갔다.
“근데 있잖아.”
상대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오렌지빛 머리카락을 쥐었다. 한참 동안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상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우리 리페 머리칼을 막 잘랐다구 하네?”
“……!”
그와 눈이 마주친 상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도, 도망쳐야 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덜컥, 덜컥, 쿵!
묶인 몸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우리 리페에게 와인도 끼얹고 말이야.”
오히려 그는 방긋방긋 웃으며 오렌지빛 머리채를 잡고 휙 들어 올렸다.
“흐윽……!”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웃는 얼굴과 달리 우악스럽고 거친 손길이었다.
“있잖아, 크레틴.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무구하고 천진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네 마음 다 알아.”
크레티안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머리칼을 자른 건 네 머리를 잘라달라는 거지?”
“흐끄으응, 으읍!”
“그리고 와인을 쏟은 건 네 몸을 피로 물들여 달라는 거잖아.”
그가 해맑게 웃었다. 봄꽃 같은 그의 외모에 어울리는 상큼한 미소였다.
“난 알 수 있어.”
“흐흡, 읍, 응으읍!”
“전부터 자꾸만, 자꾸만 그랬잖아.”
묶인 채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는 크레티안느에게 그가 소곤소곤 속삭였다.
“죽여달라고. 죽고 싶다고.”
“으흐으으으으!”
크레티안느의 발버둥이 더 거세졌다.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이 잡고 있던 크레티안느의 머리채를 놓았다.
“읍!”
그 바람에 크레티안느가 푹 고꾸라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닥에 부딪혀 찢어진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그는 기어가는 개미 떼를 보는 어린아이처럼 신기하다는 눈으로 빤히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바라봤다.
손을 뻗어 피를 검지에 찍어본다.
“네가 아무리 졸라도 리페가 싫어하니까 무시하려고 했는데.”
검지와 엄지를 비벼본다. 붉은 피가 그의 손가락에 번졌다.
“역시 안 되겠어.”
턱, 그가 크레티안느의 턱을 붙잡았다.
검지와 엄지에 묻어있던 피가 크레티안느의 턱과 뺨에 자국을 남겼다.
와인 얼룩처럼.
“리페가 모르면 되잖아?”
그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렴.”
칼리오페는 배웅하는 루스티첼 부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듀레밀 사건 이후로 가족들은 칼리오페가 외출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하물며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이후는 어떻겠는가.
칼리오페가 조금만 안 보여도 불안해하고 걱정했다.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칼리오페는 그 후 보름간 외출을 일절 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냈다.
집에서 지낸다고 해서 아스타레아스와 만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는 만나지 못했지만, 칼리오페에겐 가족들이 준 통신석이 있었다.
연애하라고 사준 건 절대 아니었건만 통신석은 오로지 연애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아침점심저녁으로 틈만 나면 아스타레아스와 꽁냥꽁냥 꿀 떨어지는 영상 통신을 주고 받았다. 누가 보면 같이 산다고 착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사귄 지 얼마 안 돼 불붙은 커플이 언제까지고 영상 통신만으로 만족할 리 없다.
이쯤이면 충분히 됐다 싶어서 칼리오페는 외출을 결심했다. 그런데 가족들이 의외로 흔쾌히 보내주는 게 아닌가.
‘그간 내가 너무 집에만 있었나 보다.’
칼리오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도미닉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 * *
마차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고 루스티첼 부인이 뒤를 돌았다.
“자, 갔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고용인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던 로비에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 로베르트가 주섬주섬 나왔다. 괘종시계와 콘솔, 커튼 뒤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무력을 지닌 제국의 기사들이라기엔 참 없어 보이는 모양새지만 다들 한없이 진지했다.
짝, 루스티첼 부인이 손뼉을 쳤다.
“이번 작전은 중요합니다, 제군들. 적의 정체를 파헤칠 기회입니다! 모두 심기일전해 완벽하게 수행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예스, 맴! 루스티첼 부인의 지휘 아래 가족들이 뭉쳤다.
지켜보던 하녀가 눈물을 흩뿌리며 루스티첼 부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님,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비록 재주는 일천하나 아가씨를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 견주어도 지지 않습니다.”
“제게도……!”
“저도 함께하게 해주십시오!”
하인과 하녀들이 너도, 나도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그 기세가 마치 전장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용맹한 장수 같았다.
“내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안다. 하지만 나간다고 한들 너희가 적과 어찌 싸운단 말이냐.”
“마님, 제게는 아직 일곱 개의 마대자루가 남아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통촉하여 주시옵소어어, 하는 말이 들린 듯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통탄스러운 얼굴로 고용인들을 둘러봤다.
“너희의 충정을 봐 데려가고 싶지만 이번 작전은 처음으로 적과 조우하는 중요한 작전이다. 예정대로 소수정예만 함께 하겠다.”
총사령관의 묵직한 말에 하인, 하녀들은 크윽, 하는 신음만 내며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마님…….”
고용인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부디 승리해주십시오.”
“적을 말살해주세요.”
고용인들의 응원을 들으며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루스티첼 백작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이를 알기 위해선 닷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닷새 전, 칼리오페가 한창 방안에서 아스타레아스와 꽁냥꽁냥 영상 통신을 주고 받고 있을 때였다.
루스티첼 저에 특이한 손님이 찾아왔다.
“어머, 마담 웬디.”
바로 정보 길드장 웬디였다.
루스티첼 가도 정보 길드를 이용했기에 안면이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칼리오페 때문에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다. 웬디가 바로 칼리오페의 골수팬이었기에.
“말씀도 없이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루스티첼 부인.”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 말에 웬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이 정보를 얻자마자 루스티첼 저로 직접 발걸음할 수밖에 없었다.
웬디는 차가 나오기도 전에 거두절미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디께서…….”
하지만 급하게 말을 꺼낸 것과 달리 웬디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리페가?”
답답해진 건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되물음에도 웬디는 후우, 하고 심호흡한 뒤 경고했다.
“듣고 너무 충격받지 마십시오. 심기를 굳건히 하시고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괜찮으니 말해보세요. 마담이 이렇게 찾아왔을 때부터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습니다.”
“……레이디께서 얼마 전 어떤 남성과 단 둘이 데이트를 했다고 합니다.”
“……!”
“……!”
“……!”
루스티첼 부인도, 차를 내오던 하녀도, 하녀에게 문을 열어주던 하인도 모두 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 이건…… 아니, 아닐 거예요. 무슨 일 때문에 만난 거겠죠. 우리 리페가 그런 중요한 일을 엄마한테 숨겼을 리 없어요.”
내 딸은 나한테 비밀 따위 없어!
딸바보 엄마가 현실을 부정했다.
“무엇보다 리페가 남자랑 돌아다니고 있으면 가십지에 기사가 쫙 났을 거예요. 맞아, 그러니까 사실일 리…….”
“VIP 통로를 통하고 프라이빗룸에서 만나서 목격자가 없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티하우스 내부에 심어져 있는 저희 길드의 눈과 귀를 피할 순 없지요.”
어느 티하우스였는지,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부연하는 말에 루스티첼 부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가족들은 칼리오페 미행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기회가 찾아왔다.
한데 유모의 표정이 이상했다.
“유모?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마님.”
유모는 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고민했지만 어쨌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주제 넘은 소리지만 어쨌든 우리 아가씨도 한창 사춘기입니다. 이성에 관심을 가질 나이지요.”
다들 유모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모는 강경파 중에서도 강경파였다.
그런데.
“이럴 때 연애 한 번 해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유모가 변절했다.
가족들을 비롯해 고용인들까지 모두 충격에 빠졌다.
이 배신자!
말은 하지 않았지만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가씨도 언젠간 결혼하실 테니까 이제—”
“안돼!”
“안돼!”
“싫어!”
“절대 안 돼!”
가족들이 동시에 빽 소리를 질렀다.
결혼 이야기만 나와도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 것을 보니 칼리오페의 미래 남편이 걱정되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냐는 듯 루스티첼 일가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고용인들 역시 비난이 가득 어린 눈으로 유모를 쳐다봤다.
루스티첼 저에서 일한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런 시선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유모는 당당했다.
‘이럴 건 예상했지.’
오히려 그녀는 훗, 하고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녀에겐 회심의 일격이 있었다.
“마님, 주인님. 리페 아가씨를 쏙 빼닮은 손주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움찔.
손주 소리에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이 주춤했다.
칼리오페를 쏙 빼닮은 손주…… 그게 딸이든 아들이든, 솔직히.
‘보고 싶어! 엄청 보고 싶어! 완전 귀엽고 사랑스러울 거 같아!’
“으윽…….”
루스티첼 부부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유모가 두 오빠들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아가씨를 쏙 닮은 조카는요?”
유모가 조카, 하고 말하는 울림조차 신성하고 아름답게 들렸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순식간에 천국으로 인도되었다.
‘삼쬰! 삼쬰!!!’
어릴 적 칼리오페를 빼다 박은 아이가 꺄르륵 웃으며 자신에게 안겨들었다. 고소한 우유 냄새와 따끈한 작은 몸. 말랑말랑한 복숭앗빛 뺨.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행복해…….’
‘여기가 바로 천국이야…….’
그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유모, 무서운 사람……!’
가족들의 약점을 너무 잘 꿰고 있었다.
단 한마디로 철벽 같은 가족들을 한순간에 무장해제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넘어갈 순 없다. 아직 작전을 수행하기도 전인 데다가 적의 정체조차 모른다.
“리, 리페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루스티첼 부인이 더듬더듬 변명했다.
손주의 파괴력이 워낙 강해 예전처럼 결혼시키지 않을 거란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 그래! 때가 되면 결혼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상대여야겠지.”
“맞아, 맞아!”
가족들의 말에 유모가 눈을 가늘게 떴다.
“좋은 상대요?”
“그래, 좋은 상대!”
“좋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죠?”
“일단 나보다 강해야 한다.”
루스티첼 백작이 즉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백룡 기사단의 단장이자 열두 개의 검 중 하나인 루스티첼 백작보다 강해야 한다니. 칼리오페의 또래인 남자 중에 그런 사람이 제국에, 아니, 세상에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우리 리페 이상형이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랬어. 하지만 그건 기본 요건이라 커트라인일 뿐이야. 그것도 아주 간당간당하다구!”
로베르트의 말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고, 잘생기고, 키 크고, 리페한테 잘하고, 리페밖에 모르고, 어떤 상황에서든 리페를 지켜주고, 리페가 최우선이고, 리페 외엔 다른 건 다 상관없고. 이 정도는 돼야 그나마 교제를 허락해줄까 말까야. 결혼은 턱도 없지.”
“리페의, 리페에 의한, 리페를 위한! 그런 남자여야 해.”
그럼, 그럼. 루스티첼 일가는 물론 고용인들까지 동의하며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이분들 설마 칼리오페 아가씨의 노예를 구하는 걸까.’
외부인이 봤으면 분명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그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루스티첼 부인이 유모를 향해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아무래도 수상해. 전에는 분명 리페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는 걸 경계했었는데…….”
태도가 너무 바뀌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깨달음이 스쳤다.
“리페가 결혼하면 따라가려고 하지!”
움찔.
루스티첼 부인의 추궁에 유모는 뜨끔했다.
사실 그렇다.
칼리오페가 결혼하면 떨어져 사는 가족들과 달리 유모는 소중한 아가씨를 따라갈 수 있다. 언제까지고 칼리오페와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보름 전, 칼리오페의 방에서 속닥속닥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유모의 마음은 복잡했다.
칼리오페가 마법사님이 마법을 걸어줘서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두 사람 사이에 어깃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루스티첼 백작 부부의 침실 앞에서 서성이길 몇 번. 번뇌는 깊어져 갔다. 하물며 요즘 칼리오페가 얼마나 영상 통신을 자주 하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유모가 모를 리 없다.
그러다 깨달은 것이다.
칼리오페가 결혼할 때 따라가면 된다는 걸.
그걸 깨닫자마자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
‘이, 이 배신자!’
‘치사해!’
아까보다 훨씬 짙은 비난의 눈길이 유모에게 쏟아졌다. 거기다가 질투까지 더해져 이글이글했다.
“유모는 집에 있어!”
하마터면 간신배의 알량한 말 한마디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루스티첼 일가는 씩씩 투지 불태우며 집을 나섰다.
* * *
마부는 이미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티첼 일가를 태운 마차는 쉽게 칼리오페의 마차를 따라잡았다.
마차관리소에 내려 총총 걸음을 옮기는 칼리오페의 뒤를 그들은 은밀하게 따라붙었다.
광장에 도착한 칼리오페는 곧바로 약속 상대를 발견했는지 포르르 다가갔다. 그 뒷모습이 그렇게 깜찍하고 사랑스러울 수 없어서 가족들은 찡하면서도 화가 났다.
‘저렇게 귀여운 우리 리페를 대체 언 놈이……!’
하지만 몸을 바짝 숨기고 있느라 상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긴 하군.”
루스티첼 백작이 아쉽다는 듯 쳇, 하고 중얼거렸다. 트집 잡을 생각 만만이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상대에게 살금살금 다가간 칼리오페가 폴짝 뛰어 남자의 눈을 가렸다.
‘저, 저건 나한테만 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 놈팡이에게도 해주는 거였다.
영락없이 사랑스러운 어린 연인의 모습이라 가족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남자가 칼리오페의 손을 떼 내며 뒤를 돌아봤다. 부드러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려 있다.
루스티첼 일가의 눈에 그 얼굴이 들어오는 순간.
“……?!”
“카, 카스틸로 공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등장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 * *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가 누군가.
선황의 적장자.
신혈을 타고난 황가의 적통 중의 적통.
하물며 외가인 카스틸로 가는 재계 서열 1위였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다.
올해로 성년이 된 아스타레아스는 모든 가십지 앙케이트에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 연애하고 싶은 남자, 잘생긴 남자 1위를 당당히 차지했다.
그야말로 올 챔피언.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돌풍을 일으키는 그에게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꼬였다. 모든 귀족이 연을 맺으려 안달했지만 철옹성 같은 관문을 뚫은 자는 극소수였다.
사교계에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귀하디 귀한 남자.
그 비싼 남자가 칼리오페에게는 무척 저렴하게 굴고 있었다.
가족들이 아는 아스타레아스는 항상 가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 것은 처음 본다.
오로지 칼리오페에게만 보여주는 얼굴. 칼리오페가 그에게 얼마나 특별한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돈 많고, 잘생기고, 키 크고, 리페한테 잘하고, 리페밖에 모르고, 어떤 상황에서든 리페를 지켜주고, 리페가 최우선이고, 리페 외엔 다른 건 다 상관없고. 이 정도는 돼야 그나마 교제를 허락해줄까 말까야. 결혼은 턱도 없지.]
[리페의, 리페에 의한, 리페를 위한! 그런 남자여야 해.]
어쩐지 구구절절 나열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나보다 강해야 한다.]
루스티첼 백작보다 강한 칼리오페 또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신혈이 개입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루스티첼 백작이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아무리 아스타레아스의 몸에 황가의 적자다운 강한 신혈이 흐른다고 해도 저렇게 새파란 애송이한테 밀리진 않을 것이다.
충심 높은 루스티첼 백작님께서 자각도 없이 황가에 불충한 생각을 해버렸다. 막내딸 앞에선 황가고 뭐고 보이는 게 없었다.
[우리 리페 이상형이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랬어. 하지만 그건 기본 요건이라 커트라인일 뿐이야. 그것도 아주 간당간당하다구!]
“사, 사람 됨됨이가 됐는지 어땠는진 봐야 알지! 아니, 볼 필요도 없어! 성격 별로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아!”
로베르트가 주먹을 꽉 쥐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 얼마나 리페를 위하는지, 리페 외엔 다 상관 없는지 봐야 아는 거지!”
정말 칼리오페의 노예인지 칼리오페를 사랑하는지 두고 봐야 아는 법이다. 가족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맞아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
손깍지 낀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 네 쌍의 눈동자에 포착되었다.
루스티첼 일가의 동공에 규모 9의 강진이 일었다. 충격으로 호흡이 빨라지고 체온이 상승했다.
“저, 저 새끼가! 감히 리페 손을 잡아?!”
로베르트가 당장 튀어나갈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턱, 하고 강하게 팔이 잡혔다. 루시우스였다.
“아, 왜!”
“리페한테 혼나고 싶어?”
루시우스의 서늘한 한 마디에 로베르트가 깨갱, 꼬리를 내렸다. 칼리오페가 무슨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지 눈에 선했다. 로베르트는 다시 몸을 숨기고 입을 비죽였다.
그렇게 상황이 진정된 순간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저 놈이…….”
낮게 읊조린 루시우스가 스윽 일어났다. 안광이 벼린 날처럼 날카로웠다.
“형.”
이번에는 로베르트가 루시우스의 팔을 잡았다.
“참아, 참아. 리페가 화낼 거야.”
“…….”
어쩔 수 없이 루시우스는 다시 몸을 숙였다. 칼리오페에게 미움 받기 싫다는 이유로 참긴 하지만 마음에 들 리 없다.
가족들은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꽁알꽁알거렸다.
“저 놈이 우리 리페 걷게 만드네요? 다리 아프게.”
“저 놈이 우리 리페 말하게 만드는군? 입 아프게.”
“저 놈이 우리 리페 웃게 만듭니다? 안면근육 아프게.”
“저 놈이 리페를 숨 쉬게…….”
아, 숨은 쉬어야지.
로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 * *
“왜 그래요, 레아스?”
칼리오페는 어딘가 신경이 분산된 듯한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물었다.
“아니—”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흘낏 가로수 사이를 스쳤다가 다시 칼리오페를 향했다.
“오늘은 더 예뻐요.”
예고도 없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칼리오페의 뺨이 화르륵 달아 올랐다. 내리뜬 눈매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칼리오페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리고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장이 쾅쾅 뛰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저, 저 새끼가……!”
우지끈.
루스티첼 백작이 부여잡은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아름드리 나무가 뚝 부러지며 일대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응?”
칼리오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아스타레아스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나는 어때요?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가까이에서 속삭여 칼리오페는 다른 데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커다란 손이 칼리오페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이번에는 남편의 팔을 잡고 말리던 루스티첼 부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루스티첼 백작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미간에 깊은 줄이 하나 생겼다. 루스티첼 부인이 꼬집은 팔뚝은 아마 내일이면 시꺼먼 멍이 들 것이다.
명망 있는 가족들이 숨겨왔던 폭력성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는 중이라는 걸 칼리오페는 까마득히 몰랐다.
그녀는 수줍게 두 뺨을 붉힌 채 연인에게 속삭일 뿐이다.
“……요.”
“응?”
“멋있다구요.”
“다행이다.”
칼리오페 눈에만 잘 생기고 멋있으면 된다.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휘며 물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때 아닌 미인 공격에 칼리오페의 심박 수는 더 올라갔다. 주변의 소란에 신경 쓸 정신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갔다.
그대로 허리를 감싼 채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칼리오페는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걷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설렜다. 바짝 붙어서 걷다 보니 아스타레아스의 탄력 있고 단단한 가슴팍이 살짝살짝 닿았다.
‘……좋은 향기가 나.’
무심코 든 생각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나 좀 이상한가. ……하지만 정말 좋은 향기가 나는걸.’
이렇게 함께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전에는 마차를 타고 건물 지하로 들어가 VIP 통로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햇살 아래서 당당히 걷는 건 처음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린 영락없는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 부끄럽고 설렜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통신석으로 연락했을 때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 말자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함께 걸어도 괜찮을까요?”
그냥 함께 걷는 것도 아니고 무려 허리를 안은 채 걷고 있다.
“싫어요?”
“싫은 건 아니지만—”
싫긴커녕 너무 설레서 문제다.
꿀 떨어지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아스타레아스가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정보를 차단해도 모든 틈을 다 막을 순 없다. 물은 새기 마련이고, 소문은 나기 마련이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와 사귀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각오했다. 다만 황제의 눈에 띄는 시기를 늦출 수 있으면 늦추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뿐.
아스타레아스는 한 걸음 떨어져서 칼리오페를 지키는 게 아니라,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고 지키는 걸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미 물밑에서 여러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래도 물밑 준비를 다 마치고 전면에 나설 생각이었지만…….’
얼마 전 크레티안느의 일이 있고 나서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와의 관계를 밝힐 필요성을 느꼈다.
칼리오페가 사교계를 비롯해 제국민들에게 워낙 인상이 좋아서 전반적인 여론이 좋긴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뿌리 깊은 거대 권력 집단과의 마찰이 공개된 것이다.
칼리오페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 역시 존재했다. 신전을 탓하는 크레티안느의 말을 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성녀의 추종자들이 그랬다.
그런 사람들이 칼리오페 앞에서 섣부른 언행을 하지 않게 하려면 기를 눌러줄 필요가 있다.
이제 칼리오페에게 아스타레아스의 비호가 있다는 걸 아니 조무래기들이 그녀에게 시비 거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다곤 해도 탐탁지 않았다. 어차피 드러날 관계이긴 했지만 크레티안느와 신전 때문에 물밑 작업을 마치기 전에 공개한 거니까.
‘하지만 잘된 것도 있지.’
아무 계산 없이 황제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크레티안느의 삽질 덕분에 현재 황제파는 꽤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크레티안느는 아직 아무런 봉작도 받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황제파의 당수인 피엔테 후작의 후계자였다.
원래도 불안한 후계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아예 전 제국민의 앞에서 비논리와 무능함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황제파 내부에서 피엔테 후작의 입지는 좁아졌고, 서로 당수가 되려는 정치 싸움이 일어났다.
아예 계파의 미래가 불안정하다고 탈주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는 이전처럼 아스타레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크레티안느가 쏘아 올린 커다란 멍청함이 정권을 흔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연습실 가까이 있는 커피 하우스에 들어갔다.
아스타레아스가 프라이빗룸이 아니라 1층 창가 자리를 택해 칼리오페는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가 맞은 편에 앉지 않고 그녀와 같은 소파에 나란히 앉자 의문은 저 멀리 날아갔다.
아스타레아스는 달콤하게 웃으며 칼리오페가 좋아하는 진득한 초콜릿 퍼지를 떠서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맛있어요?”
끄덕끄덕.
아스타레아스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오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것도 마셔요. 좋아하잖아.”
그가 칼리오페의 입에 스트로를 물려주었다. 누가 봐도 하트가 뿅뿅 솟아나는 깨 떨어지는 커플이었다.
그 모습은 전면 창을 통해 루스티첼 일가에게도 잘 보였다. 가족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또 다시 가로수를 뽑을 뻔했다.
“지, 지, 지금 저 놈팡이가 우리 리페 옆에 착 달라붙어서 뭐 하는 거죠?!”
“우리 리페에게는 손이 있다구!”
“저렇게 다 먹여주는 건 우리 리페의 손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칼리오페 먹여주기 경력 십오 년차인 사람들이 말은 잘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떨어져라, 떨어져라.”
살기 등등한 기세로 저주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흠칫하며 피해갔다.
“엄마, 저 사람들—”
“쉿, 쳐다보는 거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가족들에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지, 지금 리페 이, 이, 입술을 만진 거야?!”
“안 되겠어. 저는 저놈을 죽여야겠습니다.”
“하지만 리페한테 들키면…….”
가족이 사람을 죽인다는데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칼리오페에게 들킬 걱정만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루시우스가 비장하게 말했다. 흡사 자신 한 몸 희생해서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투사 같았다.
“루스…….”
“진정한 기사는 중요한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대체 막내딸이 데이트하는 게 목숨을 걸 중요한 상황인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루스티첼 일가는 모두 다 비장했다.
“……그래.”
루스티첼 백작은 뿌듯하고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운 눈으로 장남을 바라봤다.
“형……. 형의 숭고한 희생,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로베르트의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였다.
“자, 잠깐! 지금 저 놈이 우리 리페를 놔두고 나오는데요?”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가족들의 시선이 커피 하우스를 향했다.
과연 그 말대로 아스타레아스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 * *
아스타레아스는 밖으로 나와 커피 하우스 소유의 정원에서 멈춰 섰다.
“나오시죠.”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곧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덤불이 흔들리더니 서로를 꼭 닮은 네 명의 가족이 걸어 나왔다.
드높은 명성의 영예로운 기사, 사교계가 선망하는 귀부인, 한없이 차가운 얼음 기사와 최연소 오러 유저. 쟁쟁한 사람들이 한없이 비장하고 심각한 얼굴로 걸어오니 그 기백이 대단했다.
……머리카락에 붙은 풀떼기만 아니었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휘이이잉, 마주 선 그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한없이 굳은 얼굴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리페를 혼자 두고 나온 겁니까?”
인사도 없이 질책부터 나왔다.
감히 아스타레아스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황제마저도.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당황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싱긋 웃었다. 결연한 루스티첼 일가와 달리 애교스러운 미소였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계속 밖에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언제나 그렇게 불러왔던 것처럼, 단 한 번의 걸림도 없이 매끄러운 호칭이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자, 장인어른…….”
쿨럭, 피를 토하듯 그 악랄한 호칭을 내뱉은 루스티첼 백작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갑작스러운 필살기에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역시 카스틸로 공자. 어중이 떠중이와 달라. 만만찮은 상대군.’
루스티첼 백작은 심호흡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가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장인어른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카스틸로 공자님.”
카스틸로 공자님. 거리감을 꾹꾹 눌러 담은 호칭이었다.
“그러게요. 다른 건 몰라도 저희를 부른 것만은 절대 아닌 것 같은데.”
루스티첼 부인이 철벽같은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팔을 잡았다.
절대 인정 못 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답했다.
“이곳에 장인어른이신 루스티첼 백작과 장모님이신 부인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여상한 말에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의 이마에 혈관이 불뚝 솟았다.
‘누가 장인어른, 장모라는 거야?!’
당장이라도 아스타레아스를 잘잘 흔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애써 품위를 지키며 호호 웃었다.
“공자님의 일방적인 호칭에 대해선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일방적인, 이라고 발음할 때 방점이 찍힌 듯한 어조였다.
아스타레아스는 루스티첼 부인만큼이나 해사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글쎄요, 따님과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만.”
우지끈.
루스티첼 백작이 딛고 있던 멀쩡한 바닥이 한순간에 푹 파이며 비명을 질렀다. 보통이라면 히익, 비명을 지르며 꽁무니를 뺄 일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칼리오페를 얻기 위해서라면 저 바닥처럼 몸이 조각나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
“호칭은 상대와 대화하려고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인데 일방적이면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루시우스가 스윽 참전하며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차갑다 못해 서리가 맺힐 것 같은 눈빛이었다.
“공자님께서 이리 무례하실 줄 몰랐습니다.”
“지금은 어색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어차피 부르게 될 것, 지금부터 불러 익숙해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형님.”
형님? 형니임?! 어차피 부르게 된다고?!
자연스럽게 나온 말에 루시우스는 혈압 상승과 뒷골 당김이라는 병증을 동시에 맛보았다.
“공자님을 동생으로 둔 기억은 없습니다만. 제게 남동생은 한 명입니다.”
루시우스가 로베르트를 끌어당기며 차갑게 말했다. 로베르트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나는 남동생이 아니라 매부지요, 형님.”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으며 사람의 복장을 긁었다.
“우리 리페는 공자님과 결혼할 생각 없을 텐데요?”
하지만 로베르트의 말에는 아스타레아스 역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우리 리페는 나랑 결혼한다고 했거든요.”
“형님과 말씀입니까.”
“누가 당신 형님입니까?! 어쨌든 나랑 하기로 약속했어요.”
로베르트가 뻐기듯 말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슥 가늘어졌다.
칼리오페가 어렸을 때 농담 삼아 한 말일 게 분명했지만—사실은 그런 적조차 없다. 로베르트의 행복한 기억 왜곡이었다— 알면서도 심사가 뒤틀렸다.
‘나도 참 중증이군.’
아스타레아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유치한 도발에 진심으로 기분이 나쁘다니.
“뭐, 이렇게 이야기 나누게 됐으니 확실히 말씀드리죠.”
루스티첼 부인이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말했다.
“오늘 하루 쭉 지켜봤는데, 제 딸아이는 공자님께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네가 부족해서다. 분명 말은 정중했지만 속뜻은 그런 느낌이었다.
“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공자님께서 우리 리페의 결혼 상대라니, 가당키나 합니까. 장인이란 호칭도 거둬주시죠.”
안 거두면 큰일 날 것 같은 위압감이 루스티첼 백작에게서 풀풀 풍겼다.
아스타레아스는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말이 맞습니다.”
정작 그가 동의하자 루스티첼 일가는 기분이 이상했다.
속뜻은 전혀 아니지만,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상대로 부족하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헤어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우리 리페가 어디가 부족하냐고 화내야 할지 잠시 헷갈렸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저는 리페에게 부족한 남자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여도 리페가 아깝지요.”
“그건…….”
설마 아스타레아스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기에 가족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혈통으로도, 재력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이름 앞에선 스스로를 낮추다니.
가족들이 보기엔 맞는 말이다 못해 당연한 소리였지만 그래도 가슴에 훅 파고 들었다. 유모 앞에서 이야기했던 ‘우리 막둥이 남편 조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뭔가, 조금 그 조건에…… 적합한 것 같은—’
아니지, 아니야!
가족들은 정신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대로라면 인정해 버릴 것 같다는 위기감에 로베르트가 으아아아, 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저, 정말 리페를 좋아한다면 세 바퀴 돌고 멍,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돼요!”
내뱉고 나니 정말 아무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이어도 괜찮다. 아니, 아무 말일수록 좋다.
못하겠지? 그러니까 포기해!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놀란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세 바퀴 돌았다.
“멍.”
로베르트의 말대로 짖은 그가 눈매를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그리고 당황하다 못해 영혼이 출타한 것 같은 루스티첼 일가에게 물었다.
“꼬리도 흔들어 볼까요?”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새하얗게 사고가 정지했다.
아스타레아스는 하나도 굴욕적이거나 수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겨우 이 정도로 칼리오페의 가족들에게 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니 남는 장사라는 얼굴이었다.
‘대체—’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뚫고 낮고 차분하게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 * *
“리, 리페?!”
칼리오페가 굳은 얼굴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그녀가 부를 때마다 주인 몰래 신발을 물어뜯은 강아지처럼 가족들이 흠칫 떨었다.
“레아스한테 개처럼 짖으라고…….”
차마 말을 못 잇겠는지 칼리오페가 짧게 헐떡였다.
“지금 레아스를 괴롭히는 거예요?”
“그, 그게…….”
가족들은 쩔쩔맸다. 방금 일어난 일에 그들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걸 칼리오페가 봐버리다니.
염치가 없어 변명조차 못 하겠다.
“괴롭힌 것 아니에요, 리페.”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굳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레아스.”
괜히 편들어 줄 것 없다는 뜻을 담은 부름에 아스타레아스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을 쓸었다.
“당신 눈에는 내가 괴롭힘 당할 사람으로 보여요?”
“그건— 아니죠.”
“그렇죠?”
싱긋 웃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에 칼리오페의 굳은 얼굴도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다. 칼리오페는 짐짓 인상을 쓰며 물었다.
“괴롭히는 게 아니면 대체 어떻게 멍멍 짖는 상황이 온 거예요?”
“내 사랑을 증명해 보라고 해서요.”
그 말에 칼리오페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개처럼 짖었다고요?”
아스타레아스는 대답 없이 입술 끝을 올렸다.
“멍.”
그가 애교 있게 짖으며 칼리오페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마치 손 달라는 주인에게 강아지가 손을 내미는 것처럼.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개가 될 수도 있어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속삭였다.
“주인님.”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칼리오페는 흠칫 떨었다.
“나는— 개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칼리오페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아스타레아스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그럼 뭘 원해요?”
뭐든 말해보라는 듯,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다 이뤄주겠다는 듯 그가 유혹적으로 속삭였다.
“나는 레아스를 원해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신으로 충분해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기껍게 웃었다. 가슴 저 아래가 스멀거린다.
이대로 칼리오페에게—
촉촉한 분홍빛 입술이 깊어진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일렁이는 충동을 이겨내며 산뜻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군요. 장모님, 장인어른, 형님들.”
루스티첼 일가는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서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히 칼리오페의 뺨을 만지고,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고, 심지어 원한다면 개가 될 수 있다는 아스타레아스를 코앞에서 봐버린 것도 너무너무 충격적이지만.
‘우, 우리 리페가…….’
‘카스틸로 공자를 원한다고…….’
‘정말로 조, 좋아하나 봐.’
‘아, 아니야……. 이건 꿈이야…….’
미행하면서 훔쳐본 게 아니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말을 가감 없이 보니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다.
뇌가 파업했다.
루스티첼 일가는 뭐라고 대답도 못 한 채 그대로 파스스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어, 어머니, 아버지.”
그제야 칼리오페는 가족들 앞에서 아스타레아스와 너무 붙어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창피하고 민망했다. 정숙한 레이디의 몸가짐이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슬쩍 아스타레아스와 거리를 벌리자 풍화되던 가족들이 다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리 리페, 아직도 엄마가 좋아?”
루스티첼 부인이 울먹이며 물었다.
칼리오페는 왜 이런 질문을 하나 순간 당황했지만, 루스티첼 부인이 너무 절박해 보여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전 항상 어머니를 사랑할 거예요.”
“아빠는?”
“아버지도요.”
“리페, 나는…….”
“루스 오라버니는 제가 언제나 사랑하는 첫째 오라버니지요.”
“나는, 나는? 나도 좋아?”
로베르트가 댕댕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장난기가 돌아 칼리오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음…….”
“왜, 왜!”
칼리오페와 똑같은 로베르트의 산호빛 눈동자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줬다.
“자, 장난이에요. 제가 우리 로벨 오라버니를 사랑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요.”
“정말?”
로베르트가 훌쩍이면서 칼리오페를 힐끔 바라봤다.
“정말이지요.”
눈물을 다 닦아준 칼리오페가 로베르트를 껴안았다. 사랑하는 여동생의 포옹에 로베르트는 언제 울었냐는 듯 헤헤 웃었다.
로베르트를 부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지켜보던 나머지 가족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칼리오페를 푹 끌어 안았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칼리오페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뺨이 행복으로 말랑하게 젖어 든 것을 보며 가족들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 이렇게 애기인데…….’
그러다가 아스타레아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아까와 달랐다. 조금 전 같은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왠지 이긴 느낌에 가족들은 제 품에 있는 칼리오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흥, 리페는 우리랑 있다!’
‘우리에게 안겨 있지롱!’
‘리페는 우리가 좋다 그랬다!’
‘너한텐 리페 없지?’
과연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아까 그가 칼리오페의 뺨을 매만졌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한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가족들은 무서워서 차마 칼리오페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좋냐고 묻지 못했다.
‘두 번째로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해…….’
가족들에게 막둥이의 퍼스트 자리에서 밀려나는 것은 세상이 멸망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아스타레아스가 더 좋다고 하면…….
상상만으로도 오싹 두려웠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께서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어?”
“여기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으응, 그, 그렇지?”
가족들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설마……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요?”
막둥이의 심문에 가족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냥, 그냥 나들이라도 할까 해서.”
“여기서요?”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상업지구였다.
“쇼, 쇼핑도 겸해서 겸사겸사.”
“흐음—”
어색하게 하하, 웃는 가족들을 새치름하게 흘겨보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면서도 넘어 가준다는 느낌이었다.
“그럼 마저 쇼핑하세요.”
“뭐?!”
가족들이 깜짝 놀라 동시에 되물었다.
“쇼핑하는 중이셨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반가운데 같이 쇼핑할까?”
‘우연히’에서 유독 목소리가 커진 것 같은데 착각일까.
“그래, 이제 곧 가을인데 우리 리페 옷도 새로 사야지.”
‘이제 곧’이라고 하기엔 아직 열대야가 끝나지도 않았다.
“아니면 우리 리페가 좋아하는 초콜릿 가게에 갈까?”
“오빠가 우리 리페 갖고 싶은 거 다 사줄게, 응?”
칼리오페는 흐린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봤다.
속이 빤히 보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냥 모르는 척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오늘은 레아스랑 선약이 있으니까요. 중간에 그러는 건 실례되는 일이지요.”
“아니야! 공자님도 이제 돌아가고 싶으실걸? 바쁘신 분이잖아.”
“아니면 아예 우리랑 같이 가셔도 돼.”
“레아스와 저도 이후 일정이 있어서요.”
칼리오페는 가족들의 말을 가뿐히 쳐내고 생긋 웃었다.
“그럼, 쇼핑 즐겁게 하세요. 레아스랑 저는 쇼핑하지 않을 테니 또 마주칠 일은 없겠네요.”
상냥하지만 단호한 축객령이었다.
가족들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왠지 아스타레아스가 소중한 막둥이를 품속에 넣고 멀리멀리 떠나가는 환상이 보였다. 하하하! 승자의 웃음 소리마저 들린다.
‘안돼!!’
절대로 이렇게 헤어지기 싫다.
하지만 지은 잘못이 있으니 가족들은 결국 끙끙거리며 꼬리를 말았다.
“집에 일찍 들어올 거지?”
“저녁은 당연히 가족들이랑 먹을 거지?”
“리페, 잠들 때까지 책 읽어줄 테니까 일찍 돌아와. 좋아하잖아.”
‘대체 제가 몇 살 때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시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난……. 난 리페랑 같이 있고 싶어!”
로베르트가 외쳤다. 루시우스처럼 칼리오페에게 뭔가 해준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결국엔 목에 걸려있던 진심만 나왔다.
조금 속상했지만 자신의 말에 웃는 칼리오페를 보니 그 마음도 날아갔다.
“응, 집에서 봬요.”
* * *
가족들을 배웅한 후,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뭐가요?”
“가족들이…….”
아스타레아스가 픽 웃었다.
“나였어도 그랬을걸요.”
“네?”
“가족들이 당신을 감싸고 도는 건 당연해요.”
칼리오페 같은 딸이나 여동생이 있다면 품 안에서 결코 떼놓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랑 있을 땐 나한테만 집중해줘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이마에 이마를 툭 대며 말했다. 애원하듯 살짝 애처로운 눈빛.
칼리오페는 읏, 하고 신음을 흘렸다. 집중하고 싶지 않아도 그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리며 푹 익은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자 아스타레아스가 웃었다.
“그런데 왜 나왔어요? 그냥 기다리지 않고.”
“커피 하우스에서 어떤 분이 제게 말을 걸었어요. 가족들이랑 같이 왔냐고.”
밖에 가족들이 있는 걸 봤다면서 말을 붙였다. 그 말에 설마, 하고 나와본 것이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가족들과 아스타레아스가 대치 중이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아스타레아스가 세 바퀴 돈 후 멍, 하고 짖어서 어찌나 놀랐는지.
‘처음부터 날 미행했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외출한다는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인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팔불출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한숨이 푹 나왔다.
두 사람은 커피 하우스 근처에 있는 연습실로 이동했다. 걸음을 옮기며 든 생각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까 왜 갑자기 저 보고 아직 당신들을 사랑하냐고 물으신 걸까요?”
그것도 진심으로 물어서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제가 레아스를 괴롭혔냐고 뭐라 한 것 때문에 그러신 걸까요.”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말해주지 않았다.
솔직히 그도 무서웠다. 칼리오페에게 가족이 더 소중할까 봐.
‘아니, 가족이 더 소중하겠지.’
그녀가 얼마나 가족을 아끼는지 아는 만큼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저 예쁜 입에서 가족이 더 소중하다고 말하면 상처 받을 것 같다.
‘나한테는 그 어떤 것보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소중하고, 중요하고, 특별하니까.’
다른 것은 감히 그녀와 비교 대상에조차 오를 수 없다.
‘당신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어.’
욕심은 자꾸자꾸 커져만 간다.
칼리오페를 삼켜버리고 물들여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다.
‘조급해해선 안 돼.’
그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길 포기할 생각은 없다.
천천히, 천천히 한입씩.
야금야금 칼리오페에게 스며들 것이다. 종래에는 그녀가 온통 그로 물들도록.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더없이 상냥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 * *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곧 비밀 연습실에 도착했다.
칼리오페는 소파에 풀썩 앉으며 헤헤, 웃었다.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이곳이 편하고 안심돼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이 칼리오페의 허벅지 옆을 짚었다.
“정말 편하고 안심돼요?”
그녀를 가둘 듯 훅 다가온 아스타레아스와 그의 낮은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그…….”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길이가 짧은 탓에 손가락이 목덜미에 스친다.
흠칫.
칼리오페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나는 지금이 가장 긴장되고 떨리는데.”
짙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꿰뚫듯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걸쳐진 나른한 웃음에 칼리오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시야 가득 찬 그의 얼굴만큼이나 마음까지 그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다.
“으, 아…… 그, 그러고 보니!”
입술을 어물어물하던 칼리오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누가 봐도 말 돌리기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색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손쉽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싱긋 웃음 짓는 여유로운 물음에 칼리오페는 왠지 얼굴이 더 뜨거웠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하르첸 경이 새로운 곡을 편곡했다면서요.”
어느새 아스타레아스는 비밀 연습실 건물을 집무실처럼 쓰고 있었다. 그 탓에 책상 위에는 서류가 많았다.
하지만 워낙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칼리오페는 어렵지 않게 악보를 찾아냈다. 연습했던 모양인지 악보 여기저기에 체크가 되어있었다.
팔랑팔랑, 악보를 넘겨본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피아노 쳐주세요.”
아예 악보까지 악보대 위에 세팅하고 눈을 반짝인다.
아스타레아스는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피아노로 다가갔다.
“노래는 안 불러줄 거예요?”
“오늘은 데이트니까. 레아스 연주 감상할래요.”
그 깜찍한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피식 웃었다.
첫 데이트 중에 연습 안 하러 가냐고 물었던 그녀가 생각났다.
안 할 거라고, 그냥 만난 거라고, 단순히 보고 싶어서. 그래도 되는 사이 아니냐고.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칼리오페의 표정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랬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칼리오페를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웃으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감히 누구 부탁인데 거절할까요.”
그 말과 함께 부드럽게 시작되는 연주에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까맣게 반질거리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그 앞에 앉은 아스타레아스의 등이 넓었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다시 주름지길 반복했다.
건반 위에서 움직이는 그의 길고 우아한 손가락. 빠른 템포로 강하게 내려칠 땐 팔근육이 살짝 갈라졌다.
칼리오페는 괜히 제 손가락을 서로 얽었다.
연주는 순식간에 끝났다. 적어도 칼리오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어땠어요?”
“좋았어요…….”
무심코 멍하게 대답하던 칼리오페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스타레아스는 그저 곡이 좋다는 말로 들었는지 다행이라며 산뜻하게 웃고 있다.
칼리오페는 부끄러움에 홧홧하게 얼굴을 붉힌 채 괜히 변명처럼 곡에 대한 감상을 늘여 놓았다. 마음이 반쯤 다른 곳에 가 있긴 했지만 연주를 제대로 들을 정도의 지성은 남아 있었다.
“레아스의 연주는 참 신기하게 저랑 잘 맞아요.”
잘 치고 못 치고, 곡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항상 드는 생각이다. 마치 칼리오페의 습관을 아는 것처럼, 칼리오페가 좋아하는 주법을 아는 것처럼. 수십 번이고 맞춰본 곡처럼 꼭 맞게.
“처음부터 그랬죠.”
칼리오페는 처음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에게 반주해주었던 때를 떠올렸다.
카스틸로 저에서 갑작스럽게 주어진 노래할 기회.
공작 부인의 평을 듣기 위해선 당장 노래해야 했다. 아스타레아스는 반주해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었고 칼리오페는 그에게 코드를 알려주었다.
즉석에서 이뤄지다 보니 곡을 완주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겠다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완벽하게 습득해서 연주하셨지.’
분명 아스타레아스는 속가를 몰랐을 테니 처음 연주하는 곡이었을 텐데. 그것도 그냥 완벽하게 연주했던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칼리오페의 노래에 맞췄다.
폭신폭신한 구름 위에서 노래하는 것 같은 기분에 칼리오페는 그날 처음 반주와 함께 노래하는 기쁨을 알았다.
“그랬나요?”
“네, 그랬어요. 마치 예전부터 맞춰왔던 것처럼.”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당신과 내가 잘 맞아서 그런가 봐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는 왠지 멋쩍어져 괜히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딩, 맑은 소리가 난다. 악보에 적혀진 첫 음이었다.
“쳐볼래요?”
아스타레아스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조금 부끄러운데……. 이 편곡 악보 처음 보는 거라서.”
아스타레아스 앞에서 엉성한 연주를 선보이기 싫었다.
노래를 부르는 만큼 칼리오페 역시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치긴 하지만 아스타레아스에 비할 순 없었다. 음계나 화음을 맞추고 악보대로 치는 건 무리 없지만 섬세한 표현력은 아스타레아스가 훨씬 나았다.
“가르쳐 줄 테니까.”
아스타레아스가 웃으며 말했다. 눈매가 살랑 접혔다.
‘으, 치사해.’
그렇게 눈웃음 지으며 말하면 절대로 고개를 저을 수 없다.
칼리오페는 좁은 피아노 의자 위에 아스타레아스와 나란히 앉았다.
‘……예전에도 이렇게 나란히 앉은 적이 있었는데.’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칼리오페는 생생히 기억했다.
열세 살 때였다.
사하르네 부인이 자신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자살한 뒤 아스타레아스를 처음 만났던 날.
단둘만 있는 연습실에서 칼리오페는 묘하게 긴장했다. 아스타레아스와 그녀 둘만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의식되어서, 어떻게든 어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하다 못 해 에피니 언니네 암말이 새끼를 낳았다는 소리까지 했지.’
그러다 말을 멈추게 되었던 건—
‘레아스가 나를 껴안아서.’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던 순간 가득 차던 그의 얼굴. 너무나 가까운 거리와 눈 맞춤. 그리고 서로의 입술을 달구는 서로의 뜨거운 숨결에 어찔했다.
주춤거리던 칼리오페의 손이 피아노 건반을 짚지만 않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진 아무도 모른다.
쾅쾅거리는 피아노 소리에 마법의 순간은 깨졌고, 두 사람은 피아노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았다.
그때 칼리오페는 그 싱숭생숭한 마음이, 그 떨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안도 되는 만큼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안타까워서.
‘어깨가…… 닿아.’
열세 살 때는 어깨가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닿는다.
둘 다 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가까워진 관계를 보여주는 걸까.’
틈 없이 맞닿은 어깨 너머로 온기가 느껴졌다.
‘뜨거워.’
칼리오페의 흰 손이 건반 위로 미끄러졌다. 가볍게 건반을 누르고 손가락이 움직인다.
“좋은데요?”
비로 옆, 귓가에서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아.”
손가락이 삐끗했다.
칼리오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붉어진 얼굴이 실수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거기는 이렇게.”
아스타레아스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힘줄 돋은 커다란 손이 칼리오페의 작은 손을 덮을 듯했다.
‘……확실히 남자구나.’
알고 있었고, 항상 의식했지만 이렇게 선명히 대조되니 느낌이 달랐다.
칼리오페는 집중하지 못했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머뭇거리자 아스타레아스가 아예 양손을 모두 그녀의 손에 겹쳤다. 자연스럽게 칼리오페의 몸은 그의 단단한 가슴팍 위로 기울고, 그의 품이 그녀를 감싸는 모양이 되었다.
‘너무 가까워…….’
거의 끌어안긴 채 피아노를 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등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고 옆 이마에 그의 턱이 비벼졌다. 어쩌면 입술이 닿을 것 같다.
하필 여름이라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 둘 다 팔을 드러내고 있었다. 건반을 누르느라 팔이 스칠 때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여긴 좀 더 작게 쳐야 해요.”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였다. 자세 탓에 그의 숨결이 그녀의 얼굴을 달궜다. 칼리오페는 움찔거리려는 몸을 애써 눌렀다.
‘레아스는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 이렇게 딴 생각하면 안 된다.
안 되는데.
“당신은 이런 부분에서 속삭이듯 작게 노래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스르륵.
아스타레아스의 긴 손가락이 움직이며 칼리오페의 손가락 사이 연한 살을 건드렸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겹치며 파고든다.
“여, 역시 안 되겠—”
칼리오페가 손을 떼며 아스타레아스를 돌아봤다.
그리고.
“……!”
너무 가까운 거리에 흠칫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이고, 그의 숨결이 그녀의 콧잔등을 간질였다.
이랬던 적이 있었다.
몇 번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열세 살의 안타까움과 열다섯 살의 아쉬움을 기억했다.
더 이상 안타까워하기도, 아쉬워하기도 싫었다.
청명하면서도 열기를 띤 여름 바다 같은 눈동자가 한 점도 깜빡이지 않고 칼리오페를 바라본다.
가까이, 더 가까이.
코끝이 살짝 닿았다.
오똑한 코끝이 칼리오페의 부드러운 콧대를 타고 스르륵 미끄러진다.
‘읏—’
손발이 저릿했다. 그의 숨결이 칼리오페의 입술을 간질였다.
칼리오페는 속이 바짝바짝 타는 듯했다.
뭘 바란다고 정확히 인지하기도 전에 뜨겁고, 뜨겁고, 뜨거운 열기를 견디다 못해 눈이 감겼다.
그리고—
입술이,
‘아…….’
닿았다.
* * *
“느낌이 안 좋아.”
로베르트가 뚱, 하니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진짜로 말이 씨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타박하는 루시우스 역시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치마안— 그 놈팡이가 우리 리페한테 막……. 단둘이 있음 어떻게 해!! 아까 보니 우리 리페 허리에 손도—”
우드드득—
로베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파가 양쪽에서 비명을 질렀다.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가 팔을 걸치고 있던 팔걸이가 말랑한 점토처럼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비싸고 단단하기로 유명한 얼음가시나무 산맥 흑단목으로 만든 소파가 망가졌다.
멀쩡한 소파가 동강 나는 상황에서도 동요 없이 우아하게 차를 홀짝인 루스티첼 부인이 한마디 했다.
“우리 리페가 어디 그럴 애니? 똑 부러진 아이니 손잡는 것도 쳐낼 거야. 걱정하지 말렴.”
그 말에 가족들은 조금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사실 허리를 감쌌던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쳐내지 않은 걸 생각하면 조금 불안했지만…….
그런 유해한 광경은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그래, 손잡는 건 파티에서 춤출 때나 가능한 거지.”
“네, 사실 파티에서 춤추는 것도 아직 가족들이랑 추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요.”
“맞아! 리페는 내 파트너니까!”
로베르트의 외침에 가족들이 시선이 모였다.
“내 파트너다.”
“원래 딸들은 다 아빠를 좋아한다더군.”
“어머, 엄마 딸은 당연히 엄마 파트너지.”
파지직, 한 차례 전기와 같은 시선이 오갔다.
막둥이 파트너 자리, 절대 물러설 수 없다!
각자 각오가 대단했다.
고용인들은 한때 소파였던 쪼가리를 정리하며 허허 웃었다.
어쨌거나 루스티첼 일가에게 막둥이가 남자친구와 뽀뽀하는 것은 물론, 포옹마저 너무 먼 미래의 일이었다.
* * *
같은 시간, 엄마의 의견으로는 똑 부러져서 손잡는 것도 쳐낼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남자와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불에 덴 것 같은 감촉에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뒤로 물렸다. 살짝 닿은 것뿐인데도 온몸에 전기가 찌릿 도는 것 같았다. 몸 전체가 심장이 된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쿵쿵거리며 맥박이 뛴다.
칼리오페의 깜짝 놀란 얼굴과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비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궁금해서 칼리오페는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레아스는 이런 일로 별로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만큼이나 떨리고 두근거리는 것이다.
그걸 깨닫자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기뻐.’
자신만 이렇게 부끄러우면서 설레고, 간질간질 짜릿한 게 아니라서.
아스타레아스도 같다는 게.
칼리오페는 아직까지도 뜨거운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이 아릿했다. 마치 화인을 찍은 것처럼 그 감촉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손가락에 분홍빛 입술이 눌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소리 없이 신음했다.
아까 살짝 닿았던 칼리오페의 입술 감촉이 다시 생각 났다.
보드랍고, 폭신하고, 말랑하고, 따뜻하고.
마치 솜사탕처럼 금세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달콤한 감각.
겨우 입술을 살짝 겹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좋다니.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칼리오페가 정녕 그와 같은 인간인지 의심되었다.
꿀과 설탕으로 만든 인형이 아닌가.
확인해봐야 했다.
그가 칼리오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움찔 놀랐다.
아스타레아스의 탄탄한 팔이 칼리오페의 허벅지 옆, 피아노 의자 끝을 짚었다. 자연스레 그의 몸이 기울고, 좁은 피아노 의자 위에서 칼리오페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느라 그의 얼굴이 그녀의 시선보다 아래에 있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싫어요?”
올려다보는 각도 때문일까, 빤히 바라보며 묻는 눈빛이 이상하게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그녀에 비해 한없이 커다랗고 강인한 남자가 허락을 구하며 조르고 있다.
마치 맹수가 애교를 부리는 느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싫냐니.’
차마 말로 대답하지 못하고 칼리오페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추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스타레아스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 냈다. 다시 눈이 마주치고, 그가 칼리오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촉, 입술과 입술이 마찰하며 작은 소리를 냈다.
입술이 떨어지고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마가 살짝 닿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한 번 더.”
촉.
“한 번만 더.”
촉.
“마지막으로…….”
내리쬐는 황금빛 여름 햇살 아래, 좁은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입술을 맞대었다.
* * *
칼리오페는 몽롱한 감각으로 아이스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마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들고만 있다.
의식하지 못한 채 자꾸만 손이 입술로 향했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닿았을 때의 느낌, 좋은 향기, 자신의 뺨을 감싸던 단단한 손, 지그시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
머릿속에 한꺼번에 봄이 온 것 같았다. 폭죽처럼 만발하는 꽃망울 사이로 내던져진 느낌. 전생까지 통틀어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이런 게, 이런 느낌이 있는 줄은 몰랐다.
칼리오페는 또다시 입술을 만지작만지작거리다가 핫,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 아이스티를 엎지를 것 같아서 한 입 쭉 빨아당기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얼음을 동동 띄운 아이스티가 뱃속에 들어갔는데도 열기는 도통 식을 줄을 몰랐다.
‘레아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침착해져야 해.’
결코 끊이지 않을 것 같았던 입맞춤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연 러그윈은 칼리오페와 레아스를 보고 제대로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례했습니다.]
재빠르게 사과하고 바로 돌아나가려는 그를 아스타레아스가 제지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잠시 드릴 말씀이…….]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전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아스타레아스를 보내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러그윈이 와서 참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내가 레아스를 덮쳐 버렸을지도 몰라.’
칼리오페는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아스타레아스가 돌아올 때 너무 의식하지 않기 위해선 좀 진정해야 했다.
칼리오페는 벌떡 일어나 서성이다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악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계속 생각날 것 같다.
악보대 위에 있는 악보를 가지고 책상으로 가 원래 놓여있던 자리에 다시 놓았다.
괜히 책상 위 서류를 탁탁, 오와 열을 맞춰 정리하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그 짜릿한 감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멍하니 떠올리기만 하는 것보단 나았다.
칼리오페는 거의 무아지경으로 서류의 각을 맞췄다.
그러다 실수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작은 함을 쳤다.
달칵, 뚜껑이 떨어지며 보인 함 안에 있는 것은—
“어?”
설렘으로 가득 찬 칼리오페의 가슴을 순식간에 차갑고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물건이었다.
“이건—”
창백해진 안색으로 칼리오페는 함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은패?”
확실했다.
호르세안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찾아준 단서.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범인의 유일한 단서.
사하르네 부인의 집무실 서랍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기묘한 문장이 새겨진 은패였다.
저절로 손이 떨렸다.
“이게 왜 여기에……?”
어째서 아스타레아스의 책상 위 함 안에 고이 놓여 있는 걸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순식간에 너무 많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피어올랐다. 온갖 색을 다 섞으면 결국 새까맣게 되는 것처럼, 머릿속이 컴컴했다. 빛 하나 들지 않는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진 함 뚜껑을 주웠다.
은패를 함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류도 다시 놓았다.
그리고 책상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초조하게 서성일 것 같아 아예 소파에 앉았다.
무릎에 손을 가지런히 얹고서야 생각이라는 게 의식 위로 떠올랐다.
‘왜 숨겼지?’
숨겨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머릿속을 시꺼멓게 덧칠한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뿐이다. 의식 위로 제대로 떠오르지도 못한, 수 갈래의 생각 중 하나.
그런데 나는 왜 다시 은패를 되돌려 놓았을까. 봤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책상을 정리했을까.
칼리오페 스스로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아스타레아스가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요?”
그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삐걱삐걱 움직이는 고개와 하얗게 질린 안색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염려로 굳어졌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 다정한 모습에 칼리오페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숨길 필요 없어. 물어보면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리페.”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온 아스타레아스가 곁에 앉아 얼굴을 감쌌다. 다정한 온기와 상냥한 눈빛에 목에 걸려있던 말이 나오려 했다. 그에게 다 털어놓고 싶다.
‘하지만.’
덜컥 든 생각에 혀가 굳었다.
바늘구멍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작은 가능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닐 걸 알지만, 만약.’
만약.
아스타레아스가 가족들을—
그 다음 말은 차마 머릿속에서도 완성되지 못했다. 심장이 그대로 깨지는 것 같은 통증에 칼리오페는 숨을 헐떡였다.
‘정신 차려, 칼리오페 루스티첼.’
입안 쪽 연한 살을 꽉 깨물었다.
‘가족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스스로를 꾸짖고 타일렀다.
머리와 심장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오로지 사명감 하나로 생각이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스타레아스에게 저 은패가 뭔지 묻고서 명확하게 상황을 정리해야 할까?
그러고 싶었다.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아스가 우리 가족을 공격할 이유 따위 없으니까.’
은패에 대해 조사를 한다거나, 관련자의 물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그 외에도 다른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면.
‘여기서 내가 은패를 본 걸 밝히는 게 과연 좋을까?’
아스타레아스는 여전히 염려 섞인 상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 무슨 일 있었던 거죠.”
차갑게 식은 칼리오페의 손을 쥐며 온기를 나눠주는 것처럼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그 모습에 숨이 막혔다.
‘아스타레아스가 그럴 리 없어.’
심장이 아우성쳤다.
조금 전, 그와 입술을 맞대었을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뜨겁고, 설레고,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했던 감각이.
‘내게 그럴 리가 없어.’
울지 말라며 손수건을 주던 모습도.
생일에 찾아와 발이 식은 자신을 위해 그의 발등 위에 발을 얹게 했던 것도.
위기의 순간에 마법처럼 나타나 손을 내밀던 순간도.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함께 연회에서 춤을 추던 모습도.
사라진 자신을 찾느라 사색이 되어 떨리는 손길로 끌어안았던 때도.
깊은 밤에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던 순간도.
아스타레아스는 항상, 언제나—
일렁이는 산호빛 눈동자에 아스타레아스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비쳤다.
언제나 내게—
칼리오페는 이대로 목놓아 울어버리고 싶었다. 이 뜨겁게 치미는 것을 토해내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아스타레아스는 토닥이며 다 들어주고 난 뒤, 약간 곤란한 얼굴로 웃으며 분명하게 말해줄 것이다.
모두 다 오해라고.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칼리오페는 그를 믿었다.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감정을 앞세우지 마.
주먹에 힘이 들어가 손톱 끝이 손바닥을 파고 들려는 것을 아스타레아스가 굳은 얼굴로 애써 펴준다.
‘제발.’
차라리 자신의 손을 할퀴라는 듯 손톱 밑에 손바닥을 대준다.
‘울지마.’
칼리오페는 수없이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가족들을 생각해.’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번엔 실패해선 안 된다.
정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능성이라도, 보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라도.
‘다 생각해야 해.’
칼리오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을 때는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했던 비탄, 슬픔, 절망과 혼란, 원망, 믿음, 희망 그 무엇도—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무슨 일은요.”
생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하지만 이내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더 다정하고, 더 상냥하게 풀어지며 칼리오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니잖아요. 무슨 일 있었던 거잖아.”
아스타레아스가 사분사분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속삭였다.
“내게 말해줘요.”
칼리오페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털어놓고 싶었다.
칼리오페는 웃었다.
“아무래도…… 조금 창피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래서 그랬나 봐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의 감은 사실이 아니라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 없어지는 것이다. 칼리오페는 그에게 이런 기분을 들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무시하고 자신의 감을 믿었겠지만, 칼리오페의 말은 지나가며 가볍게 흘린 말이라도 그럴 수 없었다.
“싫었어요?”
그럴 리가.
아스타레아스와 맞닿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칼리오페는 차마 아스타레아스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갑작스러워서.”
싫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답이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순식간에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리페.”
주저하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띠리링, 맑은 음과 함께 밝은 빛이 칼리오페의 품속에서 터져나왔다. 통신석 신호였다. 칼리오페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얼른 통신석을 꺼내보니 힐데르트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힐데?’
마찬가지로 이름을 읽은 아스타레아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받아도 될까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아스타레아스는 뒤틀리는 심사를 속으로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통신하게 될 거 자신의 앞에서 하는 게 나았다.
칼리오페가 통신석을 조작하자 영상이 허공에 떠올랐다.
“리페.”
인사하던 힐데르트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칼리오페가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지금 연락하기 곤란한 거 아냐? 나중에 다시 할까?”
“괜찮아요. 무슨 일이세요?”
“혹시 소식 들었어?”
소식?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얼굴을 보고 답을 알아낸 힐데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건 정말 칼리오페가 예상하지 못했던 소식이었다.
“유리안이 제도에 올라왔어.”
* * *
“리페가 모르면 되잖아?”
유리안은 크레티안느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으흐으흐흡……!”
크레티안느의 대답에 유리안을 밝게 웃으며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눈길로 크레티안느의 뺨에 와인 얼룩처럼 남은 핏자국을 바라봤다.
“네가 원했던 거야.”
좋지 않냐는 듯 유리안이 순수하게 웃었다.
“더 물들여줄게. 네가 리페 옷에 그랬던 것처럼.”
유리안은 손에 묻은 피를 크리티안느에게 문질렀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리페 머리카락부터 자른 거야, 와인부터 쏟은 거야?”
“흐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면 순서를 알아야 하잖아?”
머리카락을 먼저 잘랐으면 머리부터 자르고, 와인부터 쏟았으면 우선 붉게 물들여 주고.
“왜 대답 안 해?”
유리안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네가 원하는 거 나는 다 안다구 했지만, 이건 내가 직접 보지 못한 거니까 어쩔 수 없잖아.”
변명하듯 말하며 투덜거리는 귀여운 모습이 크레티안느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본 건 영상에서 리페 모습뿐이니까. 이 정도쯤은 직접 말해줘도 좋잖아.”
어디를 자르면 좋을지 가늠하듯 목 언저리를 손톱으로 긁으며 하는 말에 크레티안느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힉, 힉 거리는 숨소리만이 그녀가 낼 수 있는 소리의 전부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안은 아무 말 없이 그런 크레티안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렸을 적, 꽃 위에 내려앉은 나비를 잡아채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묘한 열기를 띈 눈동자로 빤히.
크레티안느에게는 억겁과 같은 찰나였다. 곧 유리안은 흥, 하며 크레티안느에게서 시선을 뗐다.
“뭐, 됐어.”
흥미를 잃은 것 같은 태도에 크레티안느가 조금이나마 안도하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어깨를 으쓱인 유리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낸 크레티안느의 시야에 그것은 선명하게 빛났다.
차갑고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나이프. 반짝이는 은빛 날에 크레티안느는 움직임을 멈췄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그 다음 순간, 크레티안느는 미친 듯이 발광하며 몸을 뒤틀었다.
“흐끄읍, 흡! 으흐으으읍!!!”
발버둥 칠 때마다 쿵쿵, 벽에 머리를 찧었다. 찢어졌던 이마의 상처에서 다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크레티안느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으흐으읍!! 끄으으!!!!”
그저 어떻게든 유리안과 멀어지기 위해 몸을 비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유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귀엽고 말랑말랑하게 생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이 숨겨져 있는지, 조금이라도 밀려날 법한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퍼덕이는 크레티안느가 귀찮아진 유리안은 그녀의 목을 갉작갉작 긁던 손을 움직여 아예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커헉……!”
목이 졸린 크레티안느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대체 왜 그래?”
유리안은 성가시게 투정 부리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크레티안느를 바라봤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잖아.”
“크헉, 소, 커걱…….”
크레티안느는 어떻게든 유리안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묶인 상태로는 그의 손을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안은 순순히 손을 풀었다.
딱히 목을 조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쿵쿵대는 것이 귀찮아서 붙든다는 게 목을 잡았을 뿐. 그는 볼을 부풀린 채 크레티안느가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것을 바라봤다.
눈물과 침, 콧물과 피로 엉망진창인 얼굴도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시끄럽고, 떼나 쓰고. ……이제 끝내자.”
유리안이 크레티안느에게 바짝 다가갔다.
휘리릭, 나이프를 돌리고 날을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귀찮게 크레티안느가 다시 꿈지럭거려서 한 손으로 목을 틀어쥐었다.
예리한 날이 피부를 가르려는 순간,
[그러지 마세요.]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비가 아파할 거예요.]
볕 좋은 오후, 루스티첼 저의 정원에서 어린 유리안은 나비를 움켜쥐고 있었다.
날개를 찢기 위해.
아파한다고?
유리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손안의 나비를 들여다보았다. 나비는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손바닥을 간질일 뿐이다. 움직이는 날개가 어서 자신을 잡아 뜯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프다니.
[아파요.]
칼리오페가 말했다. 유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리페가 아프다고 말했으니까 아픈 거겠지.
‘하지만, 그게 뭐?’
유리안은 나비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지금, 크레티안느의 목을 움켜쥔 손에도.
파닥이는 나비의 날개처럼 손바닥 아래에서 팔딱팔딱 맥박이 울린다. 어렸던 어느 봄날처럼, 손안에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촉이 유리안을 충동질했다.
어서 나를 죽여줘.
유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프를 역수로 강하게 쥐었다.
분명 자신은 무시하려고 했다. 칼리오페가 싫어하니까. 하지만 크레티안느가 계속 조르니까, 선을 넘으니까, 어서 해달라고 칼리오페를 괴롭히니까.
‘—그러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
“리페가 싫어해도,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
그래, 그러면 된다. 칼리오페에게 미움 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위로 휙 들어 올린 유리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사실은 나도 리페가 싫어하는 짓은 하기 싫어.
가슴 밑바닥에서 염원 한줄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을 흩어버리기엔 희미하고 연약했다.
“이건 크레틴이 원한 거인걸.”
유리안이 나이프를 쥔 손을 다시 높게 들어 올렸다.
“내가 해줘야 해.”
푹, 유리안은 나비의 날개를 찢었다.
아니, 찢으려고 했다.
바로 직전,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그의 손을 감쌌다.
칼리오페의 손이었다.
[유리 오라버니는 사실 상냥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유리안은 스스로를 죽였다.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여기 있어요, 나를 봐 주세요.
차마 밖으로 소리 내어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처절하게 외치다 곪아 들어갔다.
[그러니까 남을 아프게 하면서 가장 상처 받는 건 오라버니잖아요.]
상처 같은 거, 받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거울을 보는 것처럼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맑았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했더라?
나비의 날개를 찢었나, 아니면—
[예쁘죠?]
손에서 풀려 훨훨 날아가는 나비를 본 칼리오페가 유리안을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예뻤다. 정말로.
* * *
“유리 오라버니!”
“리페!”
유리안이 활짝 웃으며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포옹을 푼 후에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 칼리오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저 놈이.’
에피니는 도끼눈을 떴고, 힐데르트는 미간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면 유리안이 아니었다. 그는 생긋 웃으며 칼리오페에게 마구마구 어리광을 피웠다.
“리페, 나 칭찬해줘.”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뜬금없이 나온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무엇을 칭찬해달라는 건지 묻진 않았다. 그저 차분차분하게 유리안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유리안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유리 오라버니, 잘하셨어요.”
“응.”
“정말 대단해요. 외조부님들 밑에서 열심히 사시고, 잘 크시고. 이렇게 먼 길도 혼자 무사히 잘 올라오시고.”
“응응.”
“그러다 이제 숨 쉬는 것도 잘한다고 칭찬하지 그래?”
못마땅한 얼굴로 그 꼴을 바라보던 에피니가 결국 한마디 했다.
“에피니 언니도 대단해요.”
“흥.”
에피니가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뺨은 붉어져 있었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서버가 티 세트 트레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칼리오페는 유리안과 힐데르트, 그리고 에피니를 차례로 바라봤다. 이렇게 사총사가 만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힐데르트로부터 유리안이 제도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몇 년 만에 유리안이 왔으니 이만 가봐도 되겠냐고.
실례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솔직히 아스타레아스와 아무렇지 않게 함께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핑계 삼아 버리다니.’
칼리오페는 스스로의 행동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정말로 절실하게 시간이 필요했다.
세팅을 끝마친 서버가 나갈 때까지 유리안은 생글생글 웃으며 오직 칼리오페만 바라보고 있었다.
“좋다.”
그 말에 칼리오페 역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직접 보니 저도 좋아요. 사진으로만 보는 것하고는 또 다르네요.”
영상 통신을 한 적도 있긴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고 그마저도 손에 꼽을 정도다. 제프라덴 영지와 제도는 워낙 떨어져 있어 마나 소모가 심하기 때문이다.
제프라덴 자작 내외는 손자를 위해 얼마든지 통신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영지 사정을 생각해 칼리오페 쪽에서 자제했다.
사진으로 봤을 땐 잘 몰랐는데 유리안은 키도, 골격도 전과 달라졌다.
꽃잎처럼 탐스러운 분홍빛 머리칼, 새순 같은 연둣빛 눈동자.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 누가 봐도 미소년이긴 했지만 이제 여장하더라도 여자로 착각할 순 없으리라.
“그런데 원래 내년에 올라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올라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해주시지.”
“깜짝 놀래키고 싶어서. 놀랐어?”
“정말 놀랐어요.”
생긋 웃는 칼리오페를 빤히 바라보던 유리안이 불쑥 물었다.
“리페, 무슨 일 있어?”
“네?”
유리안의 물음에 에피니와 힐데르트는 속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아까부터 묻고 싶었어.”
다만 모처럼의 재회를 망칠까 봐 묻지 못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그래요? 어디 아프진 않은데…….”
칼리오페가 되물으며 뺨을 더듬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전혀 모르는 이야기 같았다. 그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에피니와 힐데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억지로 캐묻는 대신 속아 넘어가는 척해주었다.
그러나 유리안은 달랐다.
유리안이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며 칼리오페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크레틴 때문에 그래?”
그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짧은 머리카락을 사락 스쳤다.
“피엔테 영애와의 일은 확실히 조금 충격적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질질 끌고 우울해할 정도의 일은 아니에요.”
칼리오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드레스야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고, 머리카락은 언젠가 자라기 마련이니까요. 무엇보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피엔테 영애는 제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니까.”
부드러운 어조지만 꽤 냉정한 말이었다.
에피니는 말없이 샐러드에서 고기를 골라 찍어 먹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은 크레티안느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원망하는 말보다 더 잔인하다.
칼리오페를 향한 선망과 열등감. 그게 크레티안느의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크레티안느는 어떻게든 칼리오페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발악했다. 그게 긍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런데 그 결과가 ‘아무 의미도 없다’라니.
‘걔도 참 안 됐다니까.’
냠, 터키 햄을 입안에 넣으며 에피니는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했다. 오늘따라 햄이 참 고소했다.
“그 크레티안느 피엔테 말인데.”
힐데르트가 운을 뗐다.
“어젯밤에 변고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으래?”
유리안이 전혀 모르는 소리라는 듯 되물으며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피엔테 후작이 금족령을 명했잖아.”
“그랬지.”
에피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엔테 후작가는 요즘 어수선했다.
황제파 내부에서 후작가를 밀어내려 하는 데다가, 사업도 전처럼 잘 풀리지 않았다. 모든 게 외동딸이자 후계인 크레티안느 피엔테 때문이었다. 그녀는 피엔테 후작가의 명성을 깎아 먹고, 아첨꾼들에게 계약을 남발했다.
후계에 대한 불안감에 멀쩡한 거래처들도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터질 일이었지만 크레티안느가 보육원에서 칼리오페에게 행패를 부린 게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답답해서인지, 뭐 때문인지 어젯밤 몰래 바깥에 외출했던 모양이야.”
“간도 크지. 들키면 피엔테 후작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크레티안느가 가문을 말아먹으면서 후작은 전처럼 무작정 그녀의 역성을 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무리 사고를 치고 다녀도 직접 대응한 적조차 없었는데 금족령을 내렸다는 건 아주 큰 의미였다. 아주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다면 한동안은 자숙하는 척했을 것이다.
그런데 밤에 외출이라니.
“변고라고 하는 걸 보니 이미 후작에게 들켰나 보네요. 꽤 혼났을 것 같은데.”
“걘 좀 혼나야 해.”
“그치?”
에피니의 말에 유리안이 싱글벙글 웃으며 되물었다. 에피니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니가 뿌듯하게 웃냐. 대강 그런 뜻을 담은 눈빛이었다.
“그게 아니라…….”
힐데르트는 잠시 말을 망설이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제도, 그것도 귀족들이 사는 구역은 치안이 좋은 편이다.
귀족들이 자주 이용하는 파트리유 거리 같은 상업지구 역시 질서가 잘 잡혀 있다. 그래서 별다른 호위나 시종 없이 외출하는 귀족들도 꽤 많았다.
하지만 한밤중이라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건 리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괜히 마음 쓰지 마.”
“네? 무슨 일이길래…….”
칼리오페는 혹시 밤중에 자신의 팬들과 크레티안느가 마주쳐 시비가 붙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솔직히 말해 크레티안느에 대해선 그다지 염려되지 않았다. 크레티안느는 누가 자신에게 언성을 살짝 높이는 것조차 크나큰 변고라고 생각할 테니까.
걱정되는 쪽은 자신의 팬들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하나 대귀족에게 대거리한 일로 보복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보복은 불법이다. 하지만 그런 괴롭힘은 항상 교묘하게 일어나는 법.
팬들은 사진 한 장, 싸인 한 장에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밝고 순진하고 여린 아기 사슴들인데……. 상처 받을 만한 일이 생기면 어쩌지.’
칼리오페는 자신의 팬들의 전투력을 조금, 아니,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다.
“대체 뭔데 리페랑 상관 없다고 미리 못을 박아?”
에피니의 채근에 잠시 말을 고르던 힐데르트가 입을 열었다.
“—크레티안느가 후작에게 수도원에 보내달라고 빌었대.”
“수도원에요? ……그런 말을 하게 된 이유가 있겠지요.”
칼리오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크레티안느가 수도원을 운운하며 떼를 썼으니 아무리 피엔테 후작의 마음이 전과 같지 않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보복을 할 법했다.
‘우리 아기 사슴들을 보호해야 해!’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의 다음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힐데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걔 머리카락이 다 잘려나갔다고 하더라.”
“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
이건 그녀의 아기 사슴들이 저지를 수 없는 폭력적인 일이었다.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에피니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머리카락이 잘렸다고?”
“응, 두피가 다 드러날 정도로 바짝. 가위로 잘랐는지 상처도 좀 남았나 봐.”
힐데르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시 유리안을 향했다. 하지만 유리안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아.” 하고 말하며 생글생글 천진하게 웃을 뿐이다.
“무슨…….”
“새벽에 피엔테 저 정문 앞에서 발견됐는데…….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야.”
“다른 데도 다친 거예요?”
“몸에 밧줄에 묶인 자국이랑 타박상이 있대. 어디 강하게 부딪친 거 같다던데. 머리에 찢어진 상처도 있고.”
“대체 어쩌다…….”
“울며불며 횡설수설해서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나 봐.”
“범인은 잡았대요?”
“그게, 크레티안느가 거기에 관해선 입을 다무는 모양이야. 충격이 커서 그런지.”
“그렇군요…….”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에 칼리오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 신경 쓰는 거 아니지?”
귓가에 또박또박 파고드는 물음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었다. 에피니가 또렷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
“언니.”
“걔가 너한테 한 짓이랑 뭐가 달라?”
에피니는 속상해 죽겠다는 듯이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쳤다.
하여간 크레티안느는 도움이 안 된다. 변고를 당할 거면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당할 것이지. 왜 머리칼을 잘려선.
칼리오페의 마음이 무거울 게 불 보듯 뻔해 신경질이 났다.
“솔직히 난 인과응보라고 생각해. 쌤통이지, 뭐.”
칼리오페는 뭐라 대답할 수 없어 애매하게 웃었다.
“그래도 죽지 않았잖아.”
칼리오페를 빤히 바라보던 유리안이 불쑥 말했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곧장 연둣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해왔다. 어쩐지 기묘한 열기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죽은 거보다 낫지? 그렇지?”
“그야 그렇죠.”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는 유리안의 농담이라고 생각한 칼리오페가 설핏 웃었다.
“역시! 리페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유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칼리오페에게 기댔다.
부비작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칼리오페는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돌아보았다. 둘 다 이 일로 자신이 스트레스 받지 않을지 걱정으로 가득해서 화까지 난 얼굴이다.
칼리오페는 전생과 달리 사람을 차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중한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이성적인 생각보다 그게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언니 말이 맞아요. 제가 신경 쓸 필요 없겠죠. 제가 그 사람의 머리칼을 자른 것도 아니고, 시킨 것도 아니니까.”
말로 그렇게 내뱉자 정말로 가슴 한구석이 가벼워졌다.
에피니와 힐데르트는 대놓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들의 걱정시키고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크레티안느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가벼워졌다고 해도 여전히 커다란 돌을 삼킨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크레티안느의 무게를 들어내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갑갑함이었다.
‘레아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의 책상 위에서 본 은패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은 다정하게 달래주던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