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3. 날 따라 해봐요(6권) (28/41)

Chapter 13. 날 따라 해봐요

[신의 사자, 이곳에 임하셨도다]

[푸른 순백의 성녀]

[세상 만물이 따르는 신의 자녀]

[신의 노래, 세상에 울리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가십지를 포함한 신문 전체가 성녀에 관한 기사로 뒤덮였다.

“성녀가 노래하자 새가 날아들고 토끼와 다람쥐, 사슴이 주변을 맴돌았다. 심지어 사나운 맹수가 온순하게 성녀의 앞에 무릎 꿇고 노래를 경청했다.”

소리 내어 신문의 한 구절을 읽은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엄청나네요.”

“슬슬 기사를 내보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네요.”

칼리오페는 말하며 아스타레아스가 보고 있던 신문으로 눈길을 향했다. 신문에는 과연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성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성녀의 노래를 들었던 사람들 인터뷰도 있어요.”

“듣는 순간 기분이 고양되며 심신에 평안이 찾아왔다. 내 친구는 노래를 듣는 동안에는 만성 두통이 나은 것 같다고 했다.”

“신전에서 사람을 풀었나 보네요.”

그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정말일 거예요.”

칼리오페는 성녀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의 신성력이 엄청났다는 건 안다.

그건 가히 기적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아마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거예요.”

전생에서 신관의 신성력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병자를 치료했으니 성녀의 능력은 치유일 가능성이 높았다.

“두통을 완전히 해결한 것도 아니고 노래를 듣는 동안 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는 건…… 예상대로 아직 성녀의 신성력이 약하다는 뜻이에요.”

“노래를 통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성녀라……. 확실히 신전에서 엄청난 패를 손에 쥐고 있었네요.”

“계속 지는 상황에서 이런 경연을 벌이는 이유는 성녀의 데뷔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서죠.”

지금 칼리오페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상황이다. 여태까지 제국에서 칼리오페 같은 존재는 없었다.

이런 대단한 존재를 한순간에 꺾고 등장한 성녀.

이보다 더 획기적이고 주목받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신전에서는 칼리오페를 뼛속까지 이용해 먹을 심산이었다.

“일단 당장 저와 경연하게 하진 않을 거예요. 다른 이벤트에 성녀를 계속 내보내 인기를 키우겠죠.”

“성녀의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은 성녀에게 열광하게 될 테니까.”

좋은 노래와 기적을 일으키는 노래. 사람들이 어느 것에 열광할진 뻔하다.

“그렇게 저를 향한 지지를 갉아먹고, 성녀의 인기가 높아질 때— 성녀의 능력이 완전히 꽃 피우는 순간.”

“당신과 겨루게 하겠죠.”

“그리고 저는 패배하고, 성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는 것으로 역할을 끝내는 거죠.”

성녀는 칼리오페의 인기를 모두 흡수하고, 패배자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지워진다.

그것이 바로 신전의 최종 계획이다.

“글쎼, 나는 성녀가 아무리 대단한 기적을 불러일으켜도 당신만 못할 것 같은데.”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른하게 말했다.

“당신의 마법을 생각하면.”

“제가 언제 마법을 썼다고 그래요.”

“걸었잖아. 나한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뺨을 살살 매만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치, 하고 입술을 비죽였다. 별말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아스타레아스의 손길을 털어내지 않았다.

신전의 짜놓은 음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 설렐 수 있다니.

‘진짜 이 남자 요물이야…….’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신전의 음모는 계속해서 잡아먹을 듯이 아가리를 벌린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불안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스타레아스와 둘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길을 찾아낼 것 같은 느낌.

어쩜 이렇게 신뢰를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신뢰를 의심 없이 그대로 받을 수 있을까.

“다음 공연은 보육원에서 하는 거라 고민되네요.”

“보육원은 신전에서 관리하는 만큼 아이들의 모든 생활 기반이 신전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침 기도나 식전 기도와 같은 소소한 생활 습관부터 시작해서 책과 장난감, 교육까지 모두 신전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당연히 성가밖에 들어본 적 없고 성가에 익숙할 테죠.”

익숙함은 때로 강력한 무기가 된다.

물론 익숙하니까 지겹게 느끼고 새로운 것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든 성가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잘 모르는 성가도 충분히 많다.

요는 신전은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을 적절히 골라 결정할 수 있다는 거다.

‘속가는 낯설기만 한 상황인데.’

“무엇보다 아이들은 자이언트 스피릿를 좋아하죠. 이건 신전의 문화구요.”

칼리오페는 어렸을 적 인기였던 자이언트 스피릿이 아직까지도 대유행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해서 후속 시리즈가 나오는 것도 참 대단하다.

“신전에서 자이언트 스피릿을 이용하면 아이들은 당장 흥분해서 환호할 거예요.”

투표는 보육원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그랬듯 전국적으로 이뤄지긴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육원에서 공연하는 취지가 있는 만큼 보육원 내의 투표에 가중치를 주기로 했다.

“신전에서 아이들과 취지를 들먹이며 아이들의 표에 점수를 더 주자고 한 이유야 뻔하죠.”

하지만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라는 명분이 너무 확실해 반대할 수 없었다.

“이미 정해진 사항에 대해 불만을 토로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요.”

칼리오페가 옅은 한숨을 내쉬곤 이어 말했다.

“전국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연도 중요하지만 현장 분위기까지 중계되니 결국 아이들을 어떻게 사로잡느냐가 관건이에요.”

불리한 상황에서도 투덜거리기보단 앞을 똑바로 직시하며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는 칼리오페다.

“아이들은 산만하고 집중력이 약해요.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지요. 주목하게 하고 그 주목을 계속 유지하는 게 관건이에요.”

과연 옳은 말이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신전은 자이언트 스피릿을 이용해 그게 가능하다. 속가에선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법이 있긴 한데…….”

아스타레아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끌었다.

칼리오페의 눈에 기대가 어린 것을 확인하며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당신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 제가 내키고 안 내키고가 문제인가요? 자이언트 스피릿이 상대인데.”

그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씩 미소 지었다. 산뜻한 미소였다.

“아이들은 동적인 것에 쉽게 흥미를 느끼고 집중하지요.”

칼리오페는 왠지 불안해졌다.

아스타레아스의 미소를 보니 그 불안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 말은—”

“네, 춤추세요.”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칼리오페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네?”

작게 열린 입술 사이로 얼떨떨한 반문이 새어 나왔다.

그 후에야 칼리오페는 상황을 온전히 이해했다.

“네에에?! 아, 안돼요.”

칼리오페가 두 손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부, 부끄럽단 말이에요…….”

손가락 사이로 아스타레아스를 힐끔거리며 하는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충동이 그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뒷목이 긴장하는 느낌에 그는 웃었다. 선하게, 더 없이 친절하게. 그렇지 않으면 진득한 본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게 좋다는 건 알잖아요? 화려하면 더더욱 좋고.”

“그건 그렇지만……. 창피한걸요.”

“자이언트 스피릿이 상대인 이상 내키고 안 내키고가 문제가 아니라면서요?”

자신이 했던 말인지라 칼리오페는 뭐라 대답 못 하고 끄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수줍게 숨은 채 힐끗거리는 산호빛 눈동자가 아스타레아스에게 왠지 모를 가학적인 욕구를 자극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채.

아스타레아스는 이렇게 수줍어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보는 무대 앞에서 어쩜 그렇게 당당히 노래하는지 신기했다.

“저번 신전 무대에서도 춤췄잖아요.”

“그건…… 춤췄다기보단—”

그냥 자연스레 리듬에 맞춰 조금 움직인 것뿐이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가 말하는 춤이 그 수준이 아닐 거라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은근히 비슷하다는 식으로 몰아가려는 꿍꿍이가 보여 칼리오페는 그를 흘겨봤다.

“레아스—”

뒤를 끌며 원망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스타레아스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모습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결정이 어렵다면 우선.”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늘 밤엔 나랑 춤춰요.”

푸른 눈이 조금 어둑했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월광이 그의 피부를 희게 물들였다.

칼리오페는 홀린 듯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잡았다.

몸이 휙 끌어 당겨졌다. 보통 사교계에서 추는 왈츠나 스로 폭스 트롯(slow fox trot)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몸이 밀착했다. 마주한 얼굴 사이로 긴장된 숨결이 부딪쳤다가 흩어졌다.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칼리오페의 어깨와 허리를 감쌌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목과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단단하고 팽팽한 감촉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뜨거운 체열이 본인의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은 서로를 향한 채 떨어질 줄 몰랐다.

둘만 있는 밀실에서 그들의 몸이 움직였다.

이르게 뜬 달이 눈을 반쯤 감은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 * *

“크레티안느 영애.”

크레티안느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비스 신전의 신관 하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레티안느가 기억하기로 꽤 직급이 높은 신관이었다.

“안녕하세요, 신관님.”

“최근 신전에서 영애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귀한 분께서 발걸음해주시니 신전 전체가 환해지는 느낌이군요.”

크레티안느는 자신이 비스 신전에 그렇게 자주 방문했나 조금 의아했다.

최근 어울리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비스 신전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길래 두세 번 방문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신관의 말이 듣기 좋았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예 오지도 않았던 예전보다야 자주 들린 거긴 했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기쁘군요.”

“항상 영애같이 고귀하신 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었답니다. 평소 품행도 그렇고 타고나신 혈통도 지체 높으시니 다른 귀족들의 귀감이자 선망의 대상 아니십니까.”

“어머나……! 비스 신전의 고명함은 익히 들었는데 과연, 이라는 말이 나오네요. 신관님의 생각을 알았다면 진작 이야기 나눌 것을 그랬어요. 저도 전부터 비스 신전의 고견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비스 신관은 기쁜 듯 입술을 늘여 웃었다.

‘별생각 없었을 거면서 입질을 드리우자마자 바로 물다니.’

이쪽이야말로 ‘과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레티안느 주변에 득실거리는 소인배들에게 비스 신전에 관해 흘리게 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되어 다행이지요.”

“아, 그러게요. 사실…… 비스 신전에는 리페 일이 있다 보니…….”

크레티안느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이전에 마르멜 대신관이 리페를 핍박했기에 조금 오해를 했어요. 물론 지금은 비스 신전에서 리페에게 잘 대해준다는 건 알지만요. 공연도 열어주고.”

“그랬군요. 오해가 풀려 다행입니다.”

크레티안느는 제게 호의적인 신관을 바라보다가 지나가듯 이야기를 꺼냈다.

“리페에게 잘해주시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음, 이런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리페가 다소 욕심이 많잖아요.”

“그런가요?”

신관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모르시고 계셨군요. 그 때문에 저한테도……. 절 질투해서 그런지 제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더라구요.”

신관은 저도 모르게 나오려 하는 실소를 애써 안으로 갈무리했다.

칼리오페는 신관에게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크레티안느의 말은 어이없었다. 크레티안느와 칼리오페의 사이가 왜 틀어졌는지 제도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신관은 능숙하게 거짓 표정을 꾸며냈다.

“세상에……. 루스티첼 영애가 영애에게 그런다고요? 그간 영애께서 얼마나 호의를 베푸셨는데…….”

신관의 반응에 크레티안느는 신이 났다.

“예전엔 정말 친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사이가 멀어졌어요.”

그녀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물론 저는 그래도 리페를 좋아하고,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요.”

처연하게 웃는 크레티안느는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자신은 칼리오페에게 아무런 악감정 없다고, 자긴 이렇게나 착하다고.

먼저 칼리오페를 헐뜯고, 상대가 그 말에 반응하자 더없이 즐거워하는 주제에.

신관은 피해자 행세를 하는 크레티안느를 위로하듯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이 기막힐 정도로 멍청하고 모자란 데다 자기중심적인 아가씨의 귓가에 어떤 말을 흘려 넣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열등감이 무섭긴 하지요.”

신관의 은근한 말에 크레티안느가 그를 바라봤다. 달콤한 케이크를 앞에 둔 것처럼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상처받은 가련한 표정인 게 우스웠다.

“열등감이요?”

그건 사실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에게 품은 감정이었다.

신관은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영애께서는 워낙 상냥하시고 다정하신 분이니 루스티첼 영애에 대해 좋게만 생각하시지만…….”

그는 크레티안느가 심취해 있는 그녀 자신의 설정에 맞춰 말을 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크레티안느의 눈에 희열이 차오른다.

“사실 저희가 루스티첼 영애와 함께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면……?”

“루스티첼 영애가 크레티안느 영애에 대한 말을 많이 하더군요.”

“저에 대해서요?”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영애의 귀를 더럽히고 싶진 않군요.”

그 말에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리페가…… 어떻게 리페가 저를…….”

크레티안느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저는, 저는 그래도 리페를 믿었는데.”

안색이 창백한 게 크레티안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에 가득한 건 만족감이었다.

칼리오페가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고고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이제 자신과 상관 없는 삶을 사는 듯 보였던 칼리오페가 사실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 자신에게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

그게 어떤 것보다 크레티안느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그야 칼리오페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응당 크레티안느 피엔테를 신경 써야 한다. 선망하든 질투하든.

별 근거도 없는데 크레티안느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녀가 믿고 싶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크레티안느에게 중요한 건 칼리오페가 자신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느냐가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질투해야 하고,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선량하고 여린 자신은 피해자여야 한다.

칼리오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칼리오페를 칭찬하는 사람들, 칼리오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속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선량한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

“노래하는 내내 영애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길래 뭔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노래하는 내내요?”

“지금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크레티안느 영애를 발판으로 삼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신관은 아무 논리도 없는 말을 계속해서 속삭였다.

“루스티첼 영애가 영애의 자리를 빼앗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말에 크레티안느의 반응이 격해졌다.

“저는 리페가 의도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부러는 아닐 거라고……. 그런데 정말 작정하고 제 것을 빼앗은 거였다니…….”

“영애, 이대로 루스티첼 영애가 승승장구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실 겁니까?”

“하, 하지만 저는…….”

“본인의 자리를 찾으셔야죠.”

흔들리는 크레티안느의 눈을 보며 신관은 속으로 픽 비웃었다.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칼리오페가 그녀에게서 빼앗은 건 하나도 없으니 되찾을 것도 없다.

‘되찾을 게 없으니 어떻게 되찾아야 하는지 모르고, 그러니 망설이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자신이 방법을 가르쳐줄 생각이다. 괜히 없는 것을 되찾는 데 힘쓰지 말고, 칼리오페를 방해하는 데 집중하도록.

“다음에 열리는 보육원 공연에서 루스티첼 영애가 또 승리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영원히 영애의 자리를 뺏기게 돼요.”

아무런 인과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관의 얼굴은 엄숙한 진실을 선언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가짜가 진짜인 줄 알 겁니다.”

그리고 크레티안느 역시 그 말을 진실로 믿었다.

“제, 제가 어떻게 해야…….”

“걱정 마세요, 크리티안느 영애.”

신관이 자애롭게 웃으며 크레티안느의 두 손을 붙잡았다.

“신께서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 * *

“와, 정말 멍청하네요.”

창문에 기대 신전 밖으로 나가는 크레티안느의 모습을 바라보며 젊은 신관 하나가 감탄했다.

“신관님이 크레티안느한테 말씀하시는 걸 듣고서 ‘저게 통한다고?!’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고개를 돌려 크레티안느를 배웅하고 돌아온 신관을 향해 씨익 웃었다.

“정말 통했네요. 신기하기도 하지.”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크레티안느가 노래하는 걸 들어본 적도 없을 텐데요. 우리도 들어본 적 없고. 그 사실을 본인이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쟤한테 그런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니, 본인의 노래 실력은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아요? 난 저 아가씨가 노래 잘 부른다는 말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데.”

“그러니까 사실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보통이라면 아무리 멍청해도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노래로 인기를 얻은 것과 자기 자신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 테지.”

신관이 어깨를 으쓱하며 창밖을 고갯짓했다.

“하지만 크레티안느 피엔테라고. 보통 사람이 아니야.”

그 말에 젊은 신관이 휘익, 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멍청해서 잘 이용당하는 권력자만큼이나 소중한 건 없네요.”

“맞는 말이야. 우리한텐 고마운 일이지.”

신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무 멍청해서 그 쉬운 일조차 잘 해낼지 믿을 수 없으니 우리도 손을 써놓을까.”

“뭐, 확실히. 멍청하게 굴 가능성이 크죠.”

“위에선 성녀와 싸우기 전에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계속 이겨도 상관 없고, 오히려 계속 이기는 게 낫다곤 하지만…….”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최초로 이기는 게 성녀여야 더 좋다고 했지요.”

“하지만 슬슬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럼 우린 우리 대로 준비하도록 하죠.”

두 신관이 마주 보며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칼리오페는 마차 창밖으로 거리를 내다 보았다.

번화가 거리를 보는 건 오랜만이다.

요즘 외출할 때마다 가족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길래 밖으로 나오는 걸 자제 중이었다.

어디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동선이 어떻게 되는지, 아예 같이 가자는 말까지. 한 번 외출하려면 무슨 면접보듯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러시지?’

가족들이 자신을 과보호하고 아끼는 경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행동에 제한을 두진 않았다. 아끼는 것과 통제하는 건 다르니까.

‘뭐, 지금도 내 생활 반경을 통제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어쨌거나 칼리오페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노래 연습 말고는 외출을 자제하게 됐다.

노래 연습에도 같이 가겠다는 것을 방해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상처받은 듯이 보였지만…….’

솔직히 방해는 방해였다. 칼리오페가 노래 한 소절만 불러도 가족들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으니까.

‘그리고…….’

칼리오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레아스와 데이트도 하고 싶으니까.’

노래 연습하러 갈 때도 미행이 따라붙는 느낌이라 이 점을 아스타레아스에게 말하니 그가 방법을 강구해냈다.

먼저 하르첸과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건물 내의 비밀 통로를 통해 아스타레아스와 만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방안에서 하는 데이트밖에 할 수 없었다.

밀실에서 단 둘이 데이트.

루스티첼 일가가 자신들의 감시가 불러온 결과를 안다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가족들이 왜 날카로울까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회귀 전, 아버지가 올해에 돌아가셨다.

가족들의 신경이 날카로운 게 혹시 루스티첼 가를 덮친 음모 때문이라면……?

칼리오페는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그녀가 이 경합을 받아들인 또 다른 이유가 가족이었다. 열다섯 살,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를 기점으로 여론이 얼마나 루스티첼 가에 안 좋게 돌변했는지 기억했다.

성가와 속가 경연에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면서 언론은 이 이벤트를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이 기회를 살려 기자들을 비롯해 신문사와도 꽤 관계를 쌓아놓았다. 대중 역시 그녀에게 우호적이었다.

‘이제 회귀 전처럼 여론몰이에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만큼 완전히 안심되진 않았다.

‘심지어 유모마저도 아는 것 같은데.’

칼리오페는 힐끔 곁에 앉은 유모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니 유모가 생긋 웃는다.

‘물어볼까?’

하지만 대답 안 해줄 게 뻔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작전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 여러 번 물어봤지만 가족 중 누구 하나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만 아련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페,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지?]

[리페, 아빠랑 같이 쇼핑하러 갈까?]

[리페, 넌 내가 책임지마. 난 독신으로 살겠다.]

[리페! 어릴 때 나랑 결혼하기로 한 거 기억하지?!]

정확히는 칼리오페가 약속한 게 아니라 로베르트가 막내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마냥 아련하기만 했던 건 아닌 것 같아.’

아련하기보단 왠지 모를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두 오라버니 모두 독신을 추구하는 것 같아서 가문이 걱정됐다.

‘내 질문에 왜 갑자기 독신 선언을 했을까?’

칼리오페는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설마…… 내가 선물 받은 것 때문에 그런가?’

사실 전부터 약간 눈치채고 있긴 했다. 가족들이 예민해진 게 집에 아스타레아스와 힐데르트의 선물이 도착하고 나서부터였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을 비롯해 고용인들까지 하도 심각하고 비장하기에 설마, 설마 했다.

아버지가 쇼핑 운운해도 뭐랄까, 어려운 상황에서 애써 딸한테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추억을 만든다거나.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한바탕 난리 난 걸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듀레밀에서 데이트를 한 날, 칼리오페가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모두 로비에 나와 있었다.

루스티첼 백작이 인사하는 칼리오페에게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리페, 듀레밀에서 선물이 왔던데……. 그쪽 말로는 네가 받겠다고 했다꾸나.]

가족들을 비롯해 유모, 하인과 하녀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무수하게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건 하나였다.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하면 당장 모든 사람들이 합심해서 아스타레아스의 선물을 불에 태운 다음 소금을 뿌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긍정을 뜻하는 칼리오페의 작은 고갯짓 한 번에 백룡 기사단의 기사단장 루스티첼 백작은 심한 내상을 입고 쓰러졌다.

하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아직 링 위에 남아있었다.

[우리 리페가 쇼핑 많이 했구나? 하긴, 그간 별로 사지 않았으니까.]

루스티첼 부인이 다정하게 웃으며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다음엔 ‘혼자’ 쇼핑하지 말고 엄마랑 같이 가도록 하자.]

[…….]

왠지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집에 운석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적어도 가족들과 고용인들은 운석이 떨어진 것만큼 충격을 받을 것 이다.

[……네, 다음에 같이 가요.]

[응, 그래. 역시 오늘은 혼자였던 거지? 그렇지? 선물이라는 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던 거지? 엄마 말이 맞지?]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에 우아하고 고상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 미소가 그렇게 압박적으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차마 가족들에게 거짓말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사재 사용 내역을 보면 다 알게 될 거였다.

[……혼자는 아니었는데…….]

[그럼 에피니랑 간 거지?]

루시우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안색이 창백했다.

[에피니는 그때 나랑 살롱 스티그마에서 수련 중이었어.]

로베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답지 않게 음울한 표정이었다.

[누구야?]

루시우스의 딱딱한 물음에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괜찮으니 누군지 말해보렴. 엄마는 그냥 우리 리페의 교우관계가 궁금할 뿐이야.]

[그래, 그냥 이름 첫 글자만 말해 봐.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대체 그 알아서 한다는 게 뭐지요?!’

[가문 문장에 뭐가 들어가는데? 사자? 용? 백합?]

내상을 입었던 루스티첼 백작까지 추궁에 합류했다.

[그냥 이렇게 좋은 선물을 준 친구가 누군지 궁금해서 그런단다. 이쪽에서도 보답을 해야 하니까.]

‘왠지 그 ‘보답’이라는 게 절대 좋은 의미일 것 같지 않은데요…….’

마치 자신은 선량하고 무해하다는 듯 어필하는 가족들의 미소가 그렇게나 어색할 수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선한 얼굴이 악당보다도 더 악당 같았다.

‘……운석이 떨어지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어.’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와 힐데르트의 목숨을 비롯해 제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들은 끈질기게 물었다.

하지만.

[너무 그렇게 캐물으면 싫어요. 미워요.]

그 말 한마디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머어머, 엄마는 절대! 캐물은 게 아니란다! 대답 안 해도 돼!]

[그래, 아빠도 그냥 보답하려고 했던 것뿐이야. 리페가 싫은데 알려고 하는 거 아니야.]

[리페, 누구랑 쇼핑했는지 내게는 평생 비밀로 하도록 해.]

[다들 왜 리페한테 캐묻고 그래! 리페가 싫어하는 짓 하지 마!]

다들 칼리오페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닌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 선물을 준 놈팡이에 대한 투지와 분노는 급속 상승 중이었다. 대기권을 뚫을 기세로.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해봐라……!’

어쨌거나 그 뒤로 칼리오페 앞에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정말 이것 때문에 예민한 거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마음이 심란했다.

연애가 이렇게 어려울 일이었던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들에게 극비일 정도로.

이 세상에서 저와 아스타레아스에게 가장 위험한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가족들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최근 칼리오페는 외출을 자제했다. 연습실 외에 다른 곳을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뭐, 이번 외출도 결국 노래와 관련된 거지만.’

오늘 드디어 보육원에 공연하러 간다. 교외로 빠져나가기 위해선 중심 시가지 중 하나인 페릴턴 광장을 지나야 했다.

창밖으로 바깥 구경을 하던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성녀…….’

광장 중앙 전광판에 성녀의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칼리오페가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유모가 고개를 쭉 뺐다.

“저긴 원래 우리 아가씨 사진이 붙어 있던 곳인데…….”

유모가 속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기도, 저기도, 저기도. 모두 아가씨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다 성녀 사진으로 바뀌었네요.”

‘……내 사진이 그렇게 많이 붙어 있었나?’

칼리오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유모가 가리키는 곳은 거리 전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찍으신 광고 사진이 많이 붙어 있기도 했지만, 아가씨께서 처음 신전에서 공연하신 후부터 계속 늘어나서— 거리에 온통 아가씨 사진이 가득해서 참 좋았는데…….”

전혀 좋지 않다. 칼리오페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이제는 다 성녀뿐이네요.”

유모가 푹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바라봤다.

이미 마차는 광장을 빠져 나왔건만 유모의 아쉬운 시선은 여전히 뒤를 향했다.

“다른 덴 몰라도 페릴턴 광장 중앙 전광판은 아가씨께서 다섯 살 때부터 걸려있던 곳인데…….”

니카이논이 카메라를 처음 출시할 때부터 상시 광고했던 전광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가씨 말고 다른 얼굴이 걸려 있으니……. 기분이 참 그러네요. 우리 아가씨 자리인데.”

유모가 너무 속상해하는 얼굴이라 칼리오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냥 광고 자리일 뿐이잖아. 얼마 만에 나온 성녀인데 신전 쪽에서도 광고하고 싶겠지.”

“신전은 신전답게 있어야지 무슨 광고를 내요! 아니, 광고뿐이 아니에요. 요즘 신문에서도—”

“성녀가 나왔는데 기사가 나는 건 당연하잖아? 속상해할 이유 없어.”

칼리오페의 말에 유모는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가 말하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안다. 그래도 속상했다.

성녀가 여기저기서 노래하며 칭송받는 게 꼭—

‘아가씨를 따라 하는 것 같으니까.’

옛날 성녀들은 신전 안에만 있었지 이렇게 여기저기 나돌아다니지도, 노래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성녀는 어떤가.

“그래도 광고 자리도 그렇고, 외부에서 공연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노래를 통해 신성력을 발휘하는 타입이라도 해도 그렇지, 너무 아가씨랑—”

유모가 말을 잇는 순간이었다.

쿵—!!

굉음이 들리며 마차가 기울었다.

히이이잉!

말 울음소리가 높게 고막을 긁고 비명 소리가 부서져 내렸다.

동시에 칼리오페의 몸이 붕 떴다.

“아가씨!”

유모의 외침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뜨겁고 단단한 것이 칼리오페를 감쌌다.

곧 옅은 충격과 함께 몸이 착지했다. 도미닉이 칼리오페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바닥에 내려선 것이다.

마차가 옆으로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유모 역시 앉아있던 자리에서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칼리오페가 걱정돼 불렀던 거였다.

“유, 유모…….”

칼리오페는 떨리는 목소리로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유모를 불렀다.

유모의 눈매가 움찔 떨리더니 칼리오페를 향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유모, 피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는지 유모의 이마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아가씨가 무사하셔서.”

안도하며 미소 짓는 유모를 보고 칼리오페는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이렇게 다쳤으면서……. 어떡해, 우선 의사를 부르고, 또, 또— 뭘 해야 하지?”

평소 침착했던 모습은 사라졌다.

침착할 수 없었다. 자꾸만 자신을 대신해 죽었던 유모의 모습이 겹쳐졌다. 칼리오페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르기 시작했다.

‘안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알잖아.’

전쟁을 겪으며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느라 어느 정도의 응급처치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심각한 거면— 심각한 두부 손상은…….’

응급처치를 해봤자 소용없다.

“괜찮습니다. 가벼운 타박상 정도입니다. 하지만 머리를 부딪쳤으니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도미닉이 유모의 상태를 살펴보고 지혈해주며 말했다.

그제야 칼리오페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다행이다…….”

“후후, 제 걱정하신 거예요?”

“당연하잖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유모가 미소 지었다. 온화한 얼굴 위에 붉게 물든 손수건이 너무 마음 아파서 칼리오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례지만, 아가씨 무릎을 한 번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가씨 무릎이 왜요?”

유모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걸 칼리오페가 내리 눌렀다.

“나 안 다쳤으니까 가만히 누워 있어.”

허락을 받은 도미닉이 칼리오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를 살폈다. 칼리오페는 오늘 공연을 위해 무릎 위까지 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치맛자락을 걷을 필요는 없었다.

도미닉은 속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귀한 주인의 치마를 걷어 올린다니, 그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칼리오페의 무릎은 살짝 쓸려 붉게 달아오른 정도였다. 아무래도 멍이 들 거 같았다.

어느 정도인지 집중해서 보느라 도미닉은 무심코 칼리오페의 종아리를 쥐었다. 얄쌍하고 보드라운 종아리가 손바닥에 착 감기는 느낌에 흠칫 놀라 손을 뗐다.

손바닥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도미닉은 동요를 감추며 빈 손을 꾹 말아쥐었다.

고결한 레이디께서 혹 불쾌하진 않으셨을지 걱정이 됐다.

주저하다 힐끔 안색을 살피는데 칼리오페의 시선이 그의 주먹에 못 박혀 있었다. 칼리오페의 매끈한 종아리를 쥐었던 바로 그 주먹에.

고귀하신 분께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피가 식었다.

“이 무례는 제—”

“도미닉 경! 팔에 피가 나잖아요!”

칼리오페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제야 도미닉은 그녀가 왜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는지 깨달았다. 팔꿈치에서 시작된 핏줄기가 어느새 손등까지 내려왔다.

“별 것 아닙니다.”

도미닉은 묵묵한 어조로 답하며 등 뒤로 팔을 감췄다.

“별 것 아니긴요! 둘 다 다쳤다구요!”

칼리오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무릎 좀 쓸린 게 뭐가 대수라고…….”

그 순간,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도미닉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제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아가씨.”

칼리오페는 긴장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마차가 옆으로 쓰러졌지만 마부석 쪽으로 난 창으로 바깥 모습이 보였다. 길이 아무리 이상해도 거대한 사륜 마차가 단번에 옆으로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습격?’

하지만 제국은 치안이 훌륭한 나라다. 거리에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혼자가 아니라 고용인을 데리고 다닌다고 해도 호위보단 시중을 드는 풋맨을 대동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실제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위기 의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치안이 좋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외로 나가는 길에 도적에게 습격을 당한다고?’

말도 안 된다.

‘진짜 도적이 아니라 도적으로 위장한 용병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창밖 멀리 검붉은 생명체가 언뜻 보였다.

“몬스터입니다.”

“몬스터?!”

도미닉의 나지막한 말에 칼리오페와 유모는 깜짝 놀랐다.

“몬스터가 왜…….”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칼리오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심지어 회귀 전 전쟁 중일 때조차도 몬스터를 본 적이 없다. 몬스터는 남부 밀림이나 북부 얼음가시나무 산맥에나 나타나는 것 아니었던가.

그 외의 지역에도 사람 눈을 피해 서식한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이 닦아놓은 길에 나타나는 건 말도 안 돼.’

“으아아! 몬스터다!!”

몬스터가 다가오는 것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혼비백산한 사람들 사이로 몬스터의 모습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다 뭣 때문인지 광폭화까지 되었나 봅니다.”

“도미닉 경이 나가보는 게 좋겠어요.”

칼리오페는 검 자루를 꽉 쥐면서도 제 곁을 떠날 생각 없는 도미닉을 보고 말했다. 설마 무력이 필요한 상황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이 중에 기사는 그 한 명이었다.

이대로라면 바깥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학살 당할 것이다.

“하지만—”

“합심해서 싸우는 게 나아요.”

잠시 고민하던 도미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절대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마차가 쓰러진 바람에 문이 위로 나 있었지만 도미닉은 별 어려움 없이 단번에 도약해서 훌쩍 나갔다.

마차 안에는 유모와 칼리오페 둘만 남았다. 칼리오페는 유모의 이마에 감긴 손수건을 단단히 묶어주며 말했다.

“걱정 마. 우리가 도착하지 않으면 보육원 쪽에서도 뭔가 이상이 생겼나 하고 마중 나올 거야.”

‘……보육원은 신전 소속이고, 과연 신전에서 이 일을 알게 되더라도 지원해줄진 미지수지만.’

칼리오페는 속생각을 감춘 채 미소 지었다.

“만약 그쪽에서 눈치 못 채도 공연 시간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보육원에서 열리는 행사인 만큼 후원자나 사회 명사를 초대했다. 그들이 제도에서 보육원으로 가려면 이 길을 지나는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칼리오페는 리허설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생각으로 이르게 집을 나섰다.

아직 공연 시간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쿠웅, 쿵!

“으아아, 살려줘!”

“누, 누가……. 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창문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유모와 마부, 도미닉이 전부였겠지만 오늘은 일행이 많았다.

희망적이진 않았다. 무장 세력이 아니라 칼리오페의 공연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로, 무용수들이었으니까.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소리치며 도망가는 모습이 먼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아주 오래전, 전쟁으로 불타던 거리가. 한순간에 먼지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던 사람들이—

칼리오페는 숨을 삼켰다.

그 순간,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차가 흔들렸다.

콰쾅! 쾅!

마차에 달라붙은 몬스터가 마차를 내려쳤다. 주먹이 마차에 박힐 때마다 철문이 우그러졌다.

도미닉이 몬스터의 등에 검을 찔러 넣었지만 광폭화한 몬스터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쾅쾅! 콰앙!!

아무 타격도 없다는 듯 여전히 마차를 부술 기세로 주먹을 내질렀다. 결국 우그러진 문짝과 마차 상단이 종잇장처럼 떨어져 나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칼리오페를 완전히 뒤덮었다.

2층 건물만 한 몬스터의 몸채엔 수많은 눈알이 달라붙어 있었다. 수십 개의 눈알이 일시에 칼리오페를 향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

수십 개의 눈동자가 속삭이는 소리가 칼리오페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몬스터가 땅에 질질 끌리는 팔을 번쩍 들었다. 도미닉이 이를 악물고 몬스터에게 박힌 검을 빼냈다.

눈 부신 빛이 그의 검신을 감싸고,

“으아아아아!”

기합 소리와 함께 그가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이 마치 빛무리가 사방에 뿌려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공격에도 오직 마차를 부수는 데에만 집중하던 몬스터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후.

푸슉, 하며 몬스터의 몸에서 피가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몬스터의 몸이 여러 갈래로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하아, 하아, 하아— 그제야 참았던 숨이 갈급하게 새어 나왔다. 몬스터의 체액을 온통 뒤집어 썼지만 불쾌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로지 깊은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

모두가 안심하는 찰나였다.

도미닉의 뒤에서 섬광처럼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몬스터였다.

“아가씨!”

어디서 그런 순발력이 생겼는지 유모가 칼리오페를 밀쳤다. 그리고 쓰러진 칼리오페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뒤덮었다.

크게 뜨인 칼리오페의 눈에 몬스터의 긴 손톱이 유모를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칼리오페의 동공이 훅 좁아 들었다.

“안돼—!!”

* * *

“루스티첼 영애는 아직인가요?”

보육원 원장이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관이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오겠다고 말한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이러다 리허설도 못하는 건 아닌지.”

답답함에 원장은 가만있지 못하고 계속 왔다 갔다 서성였다.

이번 공연은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는 데다가 전국에 방영된다. 보육원이 이렇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공연 분위기가 좋다면 당연히 낙수 효과로 보육원에도 후원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원장의 물음에 신관이 회의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사실…… 늦을 건 어쩌나 걱정하긴 했는데…….”

묘한 어조였다. 예상했다는 듯한 말투.

“걱정하셨다고요?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쉽게 미끼를 무는 보육원 원장을 보고 신관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론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뭐, 사람이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으면 좀 달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

“루스티첼 영애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습니까. 아직 어린 나이고 어쩔 수 없는 거죠.”

신관이 애써 웃으며 칼리오페를 두둔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보육원장의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비스 신전 소속의 보육원 원장으로서 당연히 이번 대결에서 신전이 이기길 바랐다. 성가의 첫 승리가 보육원인 것도 꽤 의미 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공연하기로 결정되고 나서부터 아이들에게 자이언트 스피릿을 부쩍 더 보여줬다. 공연에 대해 통지하러 왔던 신관이 성가대가 자이언트 스피릿에 관련된 노래를 부를 거라고 은근슬쩍 힌트를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개인적으로 유명인사인 루스티첼 영애가 궁금하기도 했다.

‘소문은 괜찮던데……. 하긴 뭐, 소문은 소문이고, 자리가 사람을 바꾸는 경우는 많으니까.’

“어휴, 고생해서 오늘 공연을 준비했는데 이렇게 돼서 속상하시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원장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공연을 준비하느라 들였던 노력이 컸던 만큼, 원망은 칼리오페를 향했다.

* * *

결국 칼리오페는 리허설 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공연 시각이 가까워짐에 따라 하나, 둘 모인 사람들 사이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 말 들으셨어요? 루스티첼 영애가 아직 오지도 않았다는 거.”

“네? 좀 있으면 공연 시작인데……. 무슨 일이 있나 봐요.”

“그게 아니라,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네에?!”

“루스티첼 영애가요? 그럴 리가…….”

“아무튼 안 왔대요.”

“아무리 그래도 리허설은 해야지. 그냥 공연이어도 그런데 심지어 경연 아닙니까.”

“저번에 이겼다고 그런가 봐요.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한 번 이긴 거 가지고…….”

“성가대는 일찍부터 나와서 연습에 연습 중인데.”

“아, 좀 그러네요.”

그때, 또렷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수런거림을 갈랐다.

“그 말 확실합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서, 서모나 영식……!”

그곳엔 비딱하게 선 채 신경질적이고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는 힐데르트가 있었다. 대명문 서모나 가의 후계이자 행정 관료 시험에 수석으로 단번에 합격한 힐데르트 서모나의 눈 밖에 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은 제도 귀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다들 자긴 아닌 척 입을 꾹 다물고 처음 말 꺼낸 사람을 쳐다봤다. 시선이 몰리자 그녀는 당황하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사, 사실이에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대요.”

“그거 말고.”

힐데르트가 경멸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깔아보며 나직히 내뱉었다.

“그, 그건 그냥, 저는…….”

“그러니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확실하지 않으면서도 마음대로 입을 놀렸단 말이지.”

느릿하게 말하던 힐데르트가 피식 웃었다.

“수준 알만하네.”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말에 여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힐데르트의 눈총을 피해간 사람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힐데르트의 눈매가 슥 날카로워졌다.

“그 말에 그대로 놀아난 사람들도.”

그 말을 끝으로 더 볼 일 없다는 듯 힐데르트는 뒤돌아섰다.

남은 사람들은 수치심과 모욕감에 열을 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힐데르트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칼리오페는 준비성이 좋은 아이이니 분명 리허설 시간보다 빨리 도착하도록 출발했을 거다.

‘그런데 도착하지 않았다라…….’

무슨 일이 생겨 출발 못 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했을 텐데.’

칼리오페의 성격상 아무리 급한 일이어도 연락했을 게 분명하다.

‘신전 쪽에서 칼리오페가 연락한 사실을 숨겼을 수도 있어.’

하지만 전보도, 통신석도 흔적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멍청하게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설마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이 가장 그럴듯했다.

‘하지만 보육원에 오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신관들 쪽으로 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했다고!”

흥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힐데르트는 일단 말을 걸지 않고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동향을 살폈다.

“분명, 분명히 에테르 반응이 저쪽에서 느껴졌어! 스티그마야!”

“착각 아닙니까? 제도에 이미 스티그마가 있으니 제도 근교에 스티그마가 생길 리 없습니다.”

“그래, 잘못 느낀 거겠지.”

“……저도 느끼긴 했습니다만, 스티그마라고 하기엔 너무 미약했습니다.”

“그럼 정말 에테르 반응이 있었다고 치자. 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약한 에테르가 한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나? 그런 경우가 역사상 있긴 해?”

그 말에 에테르 반응을 느꼈다고 주장하던 신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생각하던 신관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착각이었나 봐. 괜한 소란을 피웠군.”

그렇게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힐데르트의 눈에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뒤로 빠지는 신관 두 명이 보였다. 힐데르트는 그들에게 따라붙었다.

“에테르 반응이 느껴졌다고 한쪽…… 그쪽 아닙니까?”

“맞아. 그리고 사실 나도 느꼈어.”

“하지만 갑자기 에테르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건—”

“여태 없었지. 하지만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스티그마의 주인이야. 게다가 대정령의 가호도 받았지. 만약 루스티첼에게 뭔가 방법이 있다면?”

“……어쩌죠? 그리 멀지 않으니 한 번 가볼까요?”

“무슨 일이 일어났어도 어차피 우리와 상관없는 거야. 괜히 살펴보러 갔다가 들키면 귀찮아져.”

* * *

“이, 이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

광휘가 찬란하게 주변을 물들였다.

‘에테르?!’

도미닉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머리로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충만하게 온몸에 스며드는 힘. 모든 생명의 근원.

‘정말 에테르야.’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몬스터가 손톱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유모의 몸은 두 조각으로 찢길 상황이었다.

도미닉은 알면서도 바로 전 오러를 한계까지 짜냈던 여파로 막을 수 없었다. 무력함에 악문 잇새에서 피가 들끓었다.

그때였다.

유모에게서 빛이 터져 나왔다.

몬스터는 갑자기 폭발하듯 나타난 빛에 주춤했다.

도미닉은 지금 한가하게 의문이나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몸이 에테르에 흠뻑 적셔지자 고갈됐던 오러가 차오르며 전신에 활력이 돋았다. 그 어떤 때보다 심신이 명료했다.

그의 검이 섬광처럼 몬스터를 갈랐다.

기척을 곤두세워 주변을 감지했지만 이게 정말 마지막인 듯했다. 그제야 도미닉은 칼리오페와 유모의 상태를 살폈다.

“유모, 괜찮아?!”

“아, 아가씨…….”

“응, 나 여기 있어. 이제 괜찮아.”

칼리오페가 유모를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아가씨, 아가씨, 우리 아가씨.”

“응, 응.”

“무사하신 거죠? 무사, 무사하셔야—”

“응, 나 안 다쳤어. 유모 덕분이야. 이제 괜찮아.”

유모는 칼리오페가 정말 무사한지 확인하듯이 계속 쓰다듬었다가 껴안기를 반복했다. 전쟁을 겪었던 칼리오페도 몬스터의 공격에 큰 충격을 받았으니 유모는 더 했을 것이다.

유모를 안심시키던 칼리오페와 도미닉의 눈이 마주쳤다.

“감사해요, 도미닉 경. 또 도미닉 경이 저를 구했네요.”

정말 두렵고 끔찍했을 텐데 애써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도미닉의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게 울컥 치밀어올랐다.

전처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는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네?”

“마지막 몬스터를 막지 못했습니다. 만약 에테르가 아니었다면 유모님은…….”

“유모는 살았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도미닉 경 덕분에요.”

“……아닙니다, 저는—”

“도미닉 경 혼자서 싸우신 거잖아요.”

전투 인원은 도미닉뿐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죽지 않은 것은 도미닉이 애써줬기 때문이다.

도미닉은 한동안 알 수 없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다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도— 아니, 감히 평생 아가씨의 기사로 살아도 되겠습니까?”

“경께서 원하시는 한 영원히.”

해사하게 웃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도미닉의 굳은 얼굴에도 옅게 미소가 생겼다.

아까 보았던 에테르보다도 더 찬란하다고, 도미닉은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그 빛은…….”

칼리오페도, 유모도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아까부터 느꼈던 의문이 먼저 나왔다.

“아, 그거요.”

“뭔가 아시는 것 있으십니까?”

방금 유모에게서 뿜어져 나온 에테르는 뭔가 이상했다.

에테르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만 더 특이한 건 에테르의 반응이었다. 도미닉은 오러를 사용하는 만큼 조금 전 에테르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에테르는 만물이 살아가는 근원이 되는 에너지다. 즉, 몬스터에게도 에테르가 필요하며 도움이 된다.

원래라면 도미닉이 힘을 얻었듯 몬스터 역시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은 아니었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에테르가 몬스터에게 흡수되지 않았다.

‘그런 게 가능한가.’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퍼져나간 에테르는 몬스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잘 흡수되었다.

지금도 주변을 둘러보면 패닉에 빠졌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안정하고 있는 게 분명 에테르의 효과였다.

다친 사람들이 있지만 몬스터에게 직접 공격당해서 다친 건 아니었다. 마차가 뒤집힐 때나 혼란 속에서 도망치다가 다친 것이라 생명에 지장이 있는 큰 상처는 없었다.

에테르 덕분에 자연치유력이 향상되었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걸 보면 정상적인 에테르인데 왜 몬스터에게는…….’

혹시나 싶어 유모를 살펴봐도 딱히 이렇다 할 뭔가가 보이진 않았다. 아직도 에테르가 유모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유모에게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거지.’

도미닉이 본 건 엎드려 있는 유모의 뒷모습뿐이었다. 그 마저도 몬스터에게 가려져 있었다.

그러니 유모에게서 나온 건지, 유모 밑에 있는 칼리오페에게서 나온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게서 나온 건지 알 수 명확하게 알지 못했다.

도미닉은 답이 없는 칼리오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빛은 분명 에테르였습니다.”

보통 에테르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에테르였다.

“그 빛이 에테르였다고요?”

많이 진정한 유모가 고개를 들고 도미닉에게 물었다.

“예, 유모님. 아시는 게 있습니까?”

“그건 아가씨께서 주신 목걸이에서 나온 건데…….”

“아가씨께서 주신 목걸이요?”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고 있던 목걸이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

“그 목걸이에서 에테르가 나온 것입니까?”

흥분했는지 도미닉의 말이 평소보다 빨랐다.

유모는 대답하지 않고 목걸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오페가 그녀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크리스탈에 에테르가 담겨 있었거든요.”

“에테르가…… 담겨 있었다고요?”

도미닉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마나, 오러, 신성력과 달리 에테르는 어디에 담을 수도, 인위적으로 이동시킬 수도 없다. 이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스티그마에 그렇게 목메는 것이다.

“사실 이 크리스탈은 프네우마케투스테라님이 주신 거라서요.”

옛날에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노래를 불러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다며 선물해준 거였다.

에테르를 담을 수 있는 크리스탈.

칼리오페는 땅고래의 도움으로 자신이 생성한 에테르를 크리스탈에 담았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유모에게 선물했다.

“땅고래라고 불리는 대정령 프네우마케투스테라님 말씀이십니까?”

되묻는 도미닉의 얼굴이 이상했다.

칼리오페는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자 여기저기서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땅고래님께서 직접 주신 거래.”

“오, 대정령이시여…….”

“그래서 아까 그 빛이 진짜로 에테르였다는 거야?”

“어쩐지 통증도 덜해지더라.”

“나 에테르 처음 봤어.”

에테르는 공기 중 어디에나 있지만 농도가 약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까처럼 눈에 빛으로 보일 정도라면 스티그마에서나 볼법한 집약된 에테르였다.

“역시 땅고래의 가호를 받는 레이디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기적의 증거를 목도한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아, 아가씨…….”

목걸이를 바라보던 유모가 고개를 들며 칼리오페를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는 데다가 눈가에는 눈물이 어룽져 있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유모?”

“페, 펜던트에 색이 사라졌어요. 아가씨께서 주신 건데……!”

에테르가 터져 나왔으니 색이 변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투명한 크리스탈에 칼리오페가 에테르를 채워 산호빛으로 물든 거였으니까.

“아가씨가 일부러 절 위해 보석까지 다 세팅해서 목걸이로 만들어주신 선물인데……. 저는 간수도 제대로 못 하고…….”

우울해하는 유모를 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받은 물건이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저런 대단한 거였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게 정상 아닌가. 심지어 이런 위급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하는 물건이다.

“하고 다니는 것도 아까워서 원래는 그냥 방에 두려 했는데……. 그래도 아가씨께서 평소에 지니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일부러 목걸이로 만드셨다고 하셔서…….”

“응, 잘 하고 다녔어.”

“그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유모가 너무 자책하면서 아쉬워 해서 칼리오페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화도 낼 수 없었다.

“아가씨의 눈 색과 제 눈 색이 어우러진 펜던트여서 좋았는데. 이제는 그냥—”

“괜찮아. 에테르를 또 채우면 되니까.”

그땐 프네우마케투스테라의 도움을 받아서 채웠는데 이제는 잘 될까. 조금 불안했지만 방법이 없진 않을 것이다.

“정말요?”

“응, 정말.”

칼리오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칼리오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에테르 덕분에 말도 어느 정도 심리적 안정을 되찾긴 했지만 당장 마차를 끄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다 내가 탔던 마차는 아예 반파됐고 무용수들이 탔던 마차도 뒤집혔으니까…….’

“공연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지?”

“……이미 시작할 시간입니다.”

도미닉의 답에 칼리오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아가씨, 공연하실 생각인 건 아니죠?”

이 상황에서.

유모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노래할 거야. 하기로 한 건 해야지.”

“아가씨!”

“너무 위험합니다.”

“절대 안 돼요.”

“또 몬스터가 습격할지도 모릅니다.”

유모와 도미닉이 돌아가면서 반대했다.

“누가 도우러 올 때까지 여기에 그대로 있는 거랑 신성 결계가 쳐진 보육원에 가는 것. 어느 게 더 안전할까?”

“차라리 제도로 돌아가시죠.”

“아니, 난 노래할 거야.”

칼리오페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유모가 무용수들을 눈짓했다.

“이런 일을 겪어서 무용수 분들도 많이 지쳤을 거예요. 다친 분들도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공연하는 건 불가능해요.”

칼리오페가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라는 걸 잘 아는 만큼 우회해서 설득하는 것이다.

과연 공연한다는 소리에 무용수들 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다친 사람은 빠진다고 쳐도 이런 일을 겪었는데 춤출 수 있을 리가 없다. 몬스터가 아니라 도적을 만났어도 춤추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무리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럼—”

“그러니까 나 혼자 부를 거야.”

“아가씨!”

유모가 소리를 빽 질렀다. 걱정으로 애간장이 타 얼굴이 붉어진 데다가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미안.”

칼리오페는 사과하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유모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가 옵니다.”

도미닉이 정적을 깨고 말했다.

“설마…….”

“사람입니다. 말발굽 소리예요.”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지나니 다그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보였다.

“……힐데 오라버니?”

“리페!”

힐데르트가 빠르게 다가와 말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야?”

무너지고 뜯긴 마차를 보고 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칼리오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말을 듣고 힐데르트가 칼리오페를 꽉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네, 정말요.”

힐데르트는 품 안에 가득한 온기와 무게가 너무 소중하고 안타까워 그대로 팔을 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팔을 풀고 칼리오페와 마주봤다.

“그런데 왜 이 길로 왔어? 보육원으로 가려면 더 가서 옆으로 빠졌어야 했는데…….”

“네?”

“한 번 더 가서 꺾었어야 보육원이 나오는데 잘못 꺾었어. 교차로에 표지판이 있잖아?”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마부에게로 향했다.

“저, 저는 분명히 보육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 저도 뒤따라가면서 이상한 점은 못 느꼈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마부들이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런데 왜 길을 잘못 들었어?”

“그건…….”

“이놈들이 우릴 죽이려고!”

“몬스터가 있는 줄 알고 있었던 거지?!”

흥분한 사람들이 마부에게 달려들었다.

“아니에요! 저, 저도 몬스터를 만나면 죽긴 마찬가진데 미쳤다고 그러겠습니까!”

“정말 제대로 가고 있었다고요! 믿어주세요!”

“표지판도 잘못 볼 정도로 어리숙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도미닉의 나직한 목소리에 마부들이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몬스터를 조각내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 압박감이 남달랐다.

“표, 표지판은 분명히—”

“내가 보육원에 갈 땐 표지판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힐데르트의 말에 마부들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눈알을 굴렸다.

“부, 분명 중간에 누군가가 바꿔치기 한 게 확실해요!”

“마, 맞아요! 제가 봤을 땐 확실히 이쪽을 가리켰다고요!”

“글쎄. 그건 추적해보면 알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도미닉이 마부들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아무도 안 오더라니.”

공연 시간이 다 됐으니 분명 보육원으로 가는 사람들이 길을 지나갔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도 못 만났던 건 아예 엉뚱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교차로 하나 차이라 풍경도 비슷하고 도로정비도 똑같이 되어 있어서 눈치 채지 못했다. 몬스터를 상대하고 수습하는 것뿐만 아니라 길까지 잘못 들어 생각보다 더 시간이 지난 듯했다.

“어쨌든 그 추궁은 나중에 천천히 하시고.”

칼리오페가 짝, 손뼉을 치며 상황을 정리했다.

“저는 노래하러 가야겠어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요.”

“아가씨, 아직도……!”

뭐라 한소리 하려던 유모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서 들을 거였으면 아까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가지 희망이 있었다.

‘힐데 도련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힐데르트 역시 반대할 건 자명했다.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의 오랜 친구이며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의 판단을 굉장히 신뢰했다.

어쩌면 그의 말은 들을지도 모른다.

유모의 시선이 힐데르트에게 향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그 눈빛을 느낀 칼리오페가 힐데르트에게 분명하게 말했다.

“나, 노래할 거예요.”

힐데르트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산호빛 눈동자.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

힐데르트는 입매가 풀렸다.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에 봄볕처럼 연하고 강인한 미소가 스민다.

“그래, 노래하러 가자.”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었다.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자신의 말에 태운다.

“힐데르트 도련님!”

유모가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괜찮아.”

힐데르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며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럼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제대로 달릴 말이나 있고?”

힐데르트가 도미닉을 내려다보며 코웃음 쳤다.

“걱정 마, 리페.”

힐데르트가 고개를 숙여 칼리오페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안 해요.”

칼리오페가 그를 돌아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저도 모르게 힐데르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한 손으로 가느다란 칼리오페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손엔 고삐를 쥔 채 힐데르트는 말을 달렸다.

부는 바람에 칼리오페의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향기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품에 느껴지는 온기.

따끈하고 보드라운 감촉.

리페.

칼리오페.

칼리오페 루스티첼, 내 천사. 내 영혼, 내 전부.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가슴이 터져라 부른다.

“……제가 쓸 데 없는 짓을 하는 걸까요?”

칼리오페가 웅얼거리듯 물었다. 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다. 바람에 반절이 먹혔는데도 힐데르트는 그녀의 목소리를 제대로 다 들었다.

“아니.”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짧지만 단호한 말이었다.

‘힐데 오라버니는 이렇게 날 믿어주는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칼리오페는 두고 온 무용수들을 떠올렸다.

이번 보육원 공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용수가 필요했다. 신전 측에선 분명 자이언트 스피릿과 관련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아이들은 당연히 열광하겠지.’

그걸 뒤엎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집중하고 환호할 만한 요소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무용수들을 고용해 무대를 화려하게 메울 생각이었다.

무용수들을 숲속 친구들처럼 꾸미고 노래 중반에는 아예 무대 밑으로 내려가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질 예정이었다.

새로운 시도인 만큼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 다 틀어지다니…….’

참으려 해도 한숨이 나왔다.

물론 이기고 지는 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지면 안 돼.’

이건 그냥 단순히 노래를 누가 더 잘 부르냐 못 부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전이 무슨 생각으로 이 경연을 계속 주최하는지 알면서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며 응낙했다.

‘지는 순간 끝이야.’

위기는 위기로 끝날뿐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내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괜찮아.”

힐데르트의 나직한 목소리가 혼란과 불안을 가로막듯 귓가에 파고 들었다.

“넌 네가 원하는 걸 하면 돼.”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려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새벽 하늘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 보며 미소 지었다.

힐데르트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재차 속삭였다.

다짐하듯이.

“내가 너 데려다줄게.”

어디든지.

네가 원하는 곳이라면 내가 데려다 줄게.

네가 가는 길 끝에 내가 없더라도. 내가 아니더라도.

데려다줄게, 꼭.

* * *

보육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성가대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역시 자이언트 스피릿을…….’

칼리오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지금은 그런 데 하나하나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고마워요, 힐데 오라버니! 덕분에 늦지 않았어요.”

“응.”

힐데르트는 칼리오페를 부축해 말 위에서 내려주면서 미소 지었다.

“네 노래 잘 들을게.”

그 말이 어떤 말보다 힘이 됐다. 칼리오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대기실 방향을 향해 뛰었다.

“루스티첼 영애?!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떻게 해요!”

신관이 칼리오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얘기해요!”

칼리오페는 그렇게 외치며 그를 지나쳤다.

대기실 문을 쿵, 닫고 숨을 몰아 쉬었다.

이렇게 달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밖에서 박수 소리와 환호하며 열광하는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성가대 공연이 끝난 모양이다.

아이들의 새된 목소리만으로도 열기가 전해져 왔다.

보지 않아도 성공한 공연이었다.

칼리오페는 주먹을 꾹 쥐었다.

‘힘내자!’

하르첸은 대기 사인을 받고 무대 쪽으로 먼저 간 건지 방 안에 없었다.

숨도 돌리고 각오를 다진 후에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칼리오페가 망토를 벗고 대기실을 나서려던 때였다.

“뭐야, 왔네.”

킥킥거리는 웃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무서워서 안 오는 줄 알았는데.”

돌아본 곳엔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있었다.

그녀는 칼리오페를 향해 중얼거리며 비죽 웃었다.

“피엔테 영애? 여긴 왜…….”

“그냥 오지 말지 그랬어? 너 내가 무섭잖아. 나한테 열등감 느끼니까. 내가 너보다 뛰어나고 내가 너보다 잘났으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녀가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네가 가짜고 내가 진짜인데. 그게 들킬까 봐.”

크리티안느가 한 발짝, 한 발짝 비틀거리며 천천히 칼리오페에게 다가왔다.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게 괴기스러웠다.

“일단 지금 제가 바빠서요.”

상대하고 있을 시간도, 정신도, 여력도 없다.

칼리오페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대기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서걱.

귓가에서 서늘한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머리칼이 평소와 다르다.

시야에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는 크레티안느가 담겼다. 그녀의 손에 한 움큼 잡힌 머리카락도.

시선을 느낀 크레티안느가 보란 듯이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길고 매끄러운 남보랏빛 머리칼이 허공에 흩어진다.

어쩐지 그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칼리오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네가 나쁜 거야.”

크레티안느가 중얼거렸다.

칼리오페는 바닥에 흩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목덜미를 손으로 매만졌다.

‘아.’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이 느껴진다.

“왜— 왜 나 무시해?”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를 바라봤다.

너무 당황하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감정도,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새하얀 공백.

물밀 듯이 들려오던 함성 소리도 잦아들었다.

침묵 속에서 크레티안느는 가위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저질러버렸다.

이번에는 리페도 나를 무시할 수 없을 거야.

고소하다. 시원해.

큰일 났다고 생각했지만 기묘한 쾌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어쩌지?’

두려움에 손이 떨려왔다.

“대체 무슨—”

“리페가 나쁜 거야!”

크레티안느가 버럭 소리치며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테이블에 몸이 닿자 크레티안느는 던지듯이 가위를 내려놓았다. 마치 자신은 이 일에 관여되지 않았다는 듯. 가위를 만진 적도 없다는 듯.

“피엔테 영애.”

“나, 나는 틀리지 않았어. 내 걸 뺏어 간 건 리페야. 난 피해자야. 나,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나쁜 건 전부 리, 리페라구…….”

크레티안느는 중얼중얼거리며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어떡하면 좋지? 어떡해야 해?

엉망이 된 칼리오페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오자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칼리오페 탓이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너무 큰 일을 저질러버렸다.

‘이제 다들 날 욕할 거야. 날 미워할 거라고.’

미움 받는다.

덜컥.

심장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크레티안느는 고개를 마구마구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원래 착한걸. 리페가 착한 나를 이용했던 거잖아.

그래, 맞아. 신관도 그랬어.

웅웅거리는 귓전에 자신을 이해하고 편들어주며 속살거리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리페가 무대에 못 나가면 돼.’

신관은 그렇게 말했다.

‘그럼 사람들도 더 이상 리페 편이 아니게 된다고 했어.’

원래도 시야가 좁았지만, 구석에 몰린 크레티안느는 이지를 완전히 잃었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녹색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상식적으로 이런 일을 겪고 저런 상태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크레티안느의 불안감은 그녀를 부추겼다.

‘이걸로는 부족해!’

크레티안느의 손이 테이블 위를 더듬는 것을 보고 칼리오페는 재빨리 가위를 집어 들었다. 홱 돌아간 눈을 보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날붙이를 회수하고서 칼리오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촤—악!

붉은 와인이 칼리오페에게 끼얹어졌다.

“무슨…….”

칼리오페는 서둘러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흰 드레스에 붉은 와인 얼룩이 점박이처럼 흉측하게 물들어 있었다.

“이, 이제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크레티안느가 중얼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칼리오페는 진심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리, 리페가 잘못했어.”

아까부터 같은 말 반복이다.

칼리오페는 화내봤자 소용없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다.

손수건으로 드레스에 스민 와인을 어떻게든 닦아내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얼룩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왜 또 나 무시해?”

“…….”

“그러게, 나한테 잘 했으면 좋았잖아. 나한테 착하게 대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리페가 조금만 나한테—”

“나가세요.”

크레티안느가 뭐라고 하든 드레스를 벅벅 닦던 칼리오페가 결국 못 참고 폭발했다. 이대로 듣고 있다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버티는 크레티안느를 대기실 밖으로 몰아내고 칼리오페는 문에 등을 툭 기댔다.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칼리오페는 천장에서 빛나는 광원을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밖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성가대가 공연을 마쳤는데도 칼리오페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리오페는 이를 꽉 물고 눈을 떴다.

거울을 바라보니 엉망진창인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 한쪽은 이상하게 잘리고, 흰 옷에는 더럽게 와인 얼룩이 묻어있다.

“…….”

이 상태로 나가면 노래는커녕 비웃음만 당할 게 뻔했다.

* * *

“뭐야, 왜 안 나와?”

“설마 루스티첼 영애 아직도 안 온 거야?”

초대받은 사회 명사들은 모두 얼떨떨한 기분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무슨 문제가 있다면 사회자가 어떻게든 진행을 이끌어나갈 텐데, 사회자는 칼리오페의 차례라고 소개하고 무대를 벗어났다.

“아직 안 왔는데 사회자가 내려갈 리 없잖아요?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 하지.”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귀족들이 수군거릴 때 보육원 아이들은 이미 집중력을 잃었다.

“푸슝푸슝! 피싱!”

“가라! 자이언트 스피릿~!”

방금 성가대가 환영으로 만들어낸 자이언트 스피릿을 흉내 내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선생님, 이거 봐요!”

“쉿! 조용히 있어야지?”

보육원 교사가 아무리 아이들을 달래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 소동 속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사람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르첸은 피아노 앞에 앉은 채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놨다.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막았다. 소음 덩어리에 몸이 짓눌리는 느낌.

리허설 시간이 다 돼도 칼리오페가 도착하지 않아서 당황했다. 연락도 없는 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공연이 시작하고도 칼리오페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칼리오페의 차례가 되어 하르첸은 무대에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다만 무대는 취소되지 않았고 하르첸은 음악가였다. 칼리오페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무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소란은 점점 커지기만 할 뿐 가라앉지 않았다.

무대를 망칠 수 없다는 책임감보다 칼리오페가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온갖 나쁜 상상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나까지 이러면 안 돼.’

자신은 칼리오페의 파트너다.

평소에 그녀의 파트너는 따로 있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녀의 유일한 파트너야.’

그 생각에 굳어있던 손가락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그녀를 믿자.’

칼리오페를 믿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녀에게 부끄러운 파트너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르첸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딩—

첫 음이 묵직하게 울리며 소음을 몰아냈다.

곧이어 유려하고 매끄러운 음이 물보라처럼 빠르게 몰아쳤다.

엄청난 초절기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넋을 잃고 하르첸을 바라봤다.

화려한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순간적으로 하르첸에게 시선을 뺏겼다. 집중을 잃은 아이들을 사로잡기 위해 하르첸이 즉석에서 오늘 노래를 편곡한 것이다.

신동이라 불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천재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은 하르첸의 연주다. 속가를 연주해 난리가 났을 때도 차마 하르첸의 실력을 까 내리진 못했다.

한순간 귀를 붙들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 * *

‘설마……? 안돼!’

갑자기 들린 피아노 소리에 크레티안느는 빠르게 관람석으로 돌아왔다.

‘뭐야, 역시 없잖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리기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긴, 그 꼴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오겠어.’

수치를 안다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절대로.

크레티안느는 엉망이었던 칼리오페의 모습을 떠올렸다. 멋대로 잘린 채 산발이 된 머리칼. 흰 옷 여기저기 튄 붉은 얼룩.

‘만약 그 꼴로 나온다면—’

제국 최고의 레이디. 모두의 귀감.

칼리오페를 수식하는 그런 말들은 당장 사라질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무대에 나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면 그 말은 모두 날 수식하겠지.’

원래 칼리오페가 제게서 뺏었던 거니까.

‘리페도 날 인정할 거야. 나한테 잘할 수밖에 없겠지.’

크레티안느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자 크레티안느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는 이미 지워졌다.

‘어쨌든 이걸로 리페는 끝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하르첸의 연주가 갑자기 뚝 끊겼다.

일순 커다란 공백이 공간을 메웠다.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낸 것같이 빽빽한 정적이었다.

그리고.

밤의 어둠을 불살라 먹으며 태양이 떠오르듯.

그 짙은 정적을 꿰뚫는 청아한 목소리가 창공에 울려 퍼졌다.

* * *

길고 높게 뻗어 나가는 시원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받쳐주듯이 하르첸의 피아노 소리가 깔렸다.

경쾌한 피아노 음이 주렴처럼 무대를 메우고, 그 차르륵거리는 음표 사이로 칼리오페가 등장했다.

“……!”

사람들은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허리까지 왔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깡총하니 짧게 잘려 있었다.

“세상에…….”

“단발이라니…….”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머리 길이에 대해서 이렇다 할 격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귀족은 모두 긴 머리를 선호했다.

긴 머리카락을 윤이 차르르 돌도록 관리하는 데에는 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빛이 나는 긴 머리칼은 곧 부유와 풍족, 여유를 뜻했고 이는 기품과 동일시되었다. 오랫동안 굳어진 통념이라 명료하게 의식적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원래 은연중에 드는 생각이 가장 사람을 사로잡는 법이다.

어쨌거나 단발은 평민이나 고아가 많이 하는 머리였고, 머리칼을 따로 관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는 빈곤함을 상기시키곤 했다.

하지만 지금 칼리오페의 모습은 어떤가.

칼리오페가 웃으며 멜로디에 맞춰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귀밑에서 단발이 발랄하게 흔들렸다. 동그스름한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사랑스러웠다.

빈곤해 보이지도,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귀여워……!’

칼리오페가 핑그르르 돌자 풍성한 치맛자락이 들썩였다가 가라앉았다.

무릎 위까지 오는 미니 드레스에는 붉은 꽃이 염색되어 있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꽃이 더 많이 피어있었다. 치마 끝은 아예 붉게 물들어 있어서 옷자락이 들썩이거나 부풀어 올라 빙글거릴 때마다 그 자체로 만발한 한 송이 꽃 같았다.

앙증맞은 손짓과 사랑스러운 표정,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런 공연도, 이런 춤도.

* * *

‘좋아, 일단 시선은 끈 것 같은데.’

칼리오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르첸 덕분이기도 하다. 엉성하게 등장하는 것보다 확실히 나았다.

시간을 끌기 위해 즉흥곡을 연주하던 하르첸과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맞춘 지 삼 년이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할지 알았다. 하르첸은 마치 등장을 위한 연출이었던 것처럼 곡을 멈췄다가 다시 연주해나갔다.

‘그럼 앞으로 어쩐다……?’

칼리오페는 간주에 맞춰 춤을 추면서 머리를 팽팽 돌렸다.

원래는 무용수들이 무대를 가득 메우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다 아이들 틈으로 내려가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함께 즐겁게 어우러질 생각이었다.

그저 감상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공연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축제. 그게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가 생각한 활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

지금은 아이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지만 언제 흥미를 잃을지 모른다.

아니, 끝까지 잘 지켜보더라도 자이언트 스피릿보다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수없이 연습해 아예 몸에 베어버린 동작을 반복하며 칼리오페는 고민을 거듭했다.

아이들을 참여시키고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다.

‘그렇다면…….’

사전에 어떤 협의도 없었지만, 칼리오페는 하르첸의 능력을 믿었다. 즉석에서도 놀랍도록 빠르고 아름답게 편곡하는 그라면 어떻게든 어울리는 코드를 찾아내 노래를 메워줄 것이다.

노래하던 칼리오페가 소절을 마치고 마이크를 내리자 하르첸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바로 이어지는 소절이 나와야 하는데 칼리오페는 아예 두 손을 내린 채 눈을 감고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피아노 음을 감상하듯이, 거기에 귀 기울이라는 듯이.

하르첸은 그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후렴구의 반복되는 멜로디를 연주하며 공백을 메웠다.

칼리오페를 따라 사람들이 그 멜로디에 귀를 기울였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멜로디였다.

사람들이 의아해하는데 칼리오페가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하르첸이 연주한 후렴구 멜로디를 그대로 허밍했다.

그리고 마이크를 관객들에게로 향했다.

“……?!”

이런 건 처음 본다.

귀족들이 당황하는 사이, 아이들은 피아노 멜로디에 맞춰 똑같이 허밍했다.

칼리오페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홀린 듯 아이들이 더 크게 허밍했다.

칼리오페는 아예 손을 귓가에 대며 더 크게 불러 달라는 듯이 손짓했다.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신나 하는 모습과 칼리오페의 종용에 귀족들 역시 조그맣게 따라 허밍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르첸은 연주를 멈췄다.

야외 무대에는 오로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고아와 귀족, 어른과 아이, 여자와 남자.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목소리가 하나의 멜로디로 이어졌다.

칼리오페가 씩 웃으며 마이크를 다시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멜로디 위에 칼리오페의 노래가 얹어졌다.

구름처럼 폭신하게 깔리는 허밍과 그 위에서 춤추는 칼리오페의 노래.

‘아, 뭐지.’

부끄럽고 수줍어서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허밍하던 귀족들도 어느 순간부터 크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기분은.’

어쩐지 가슴이 뭉클했다.

칼리오페가 풀썩 앉았다가 일어서는 것을 신호로 하르첸의 연주가 다시 시작됐다.

그간 조용했던 만큼 거대하게 휘몰아치는 음의 폭포에 압도당할 것 같은 연주였다. 그 위로 쏟아지는 칼리오페의 고음.

사람의 마음을 벅차게 고양시키는 노래였다.

풀밭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이미 흥분해 있었다. 칼리오페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며 방방거렸다. 박수를 치기도 하고 칼리오페를 따라 폴짝폴짝 뛰기도 한다.

칼리오페가 너무 기분 좋은 듯 웃어서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하르첸이 즉석에서 브릿지를 만들어내 칼리오페는 아예 아이들에게 맞춰 춤을 췄다.

꼭 따라 해보라는 것처럼 쉽고 깜찍한 안무였다.

아이들이 꺄르륵 거리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부모와 함께 온 귀족 영애들이 슬금슬금 소심하게 손동작을 따라 하다가 서로 마주 보고 킥킥 웃었다.

부모님이 그런 제 모습을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

딱 그 말에 맞는 공연이었다.

* * *

“언니!”

보육원 아이들이 칼리오페에게 뛰어왔다.

노래가 끝날 땐 아이들이 거의 무대 쪽으로 몰려 있었기 때문에 칼리오페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아이들이게 둘러싸였다.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이들이 원래 안 이러는데…….”

보육원 교사가 당황해서 아이들을 말렸다.

“괜찮아.”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교사에게 답하곤 아이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언니도 높으신 분이야……요?”

슬그머니 말투를 바꾸는 아이를 보곤 칼리오페는 눈높이를 맞췄다.

“그냥 너한테 노래를 불러준 사람이야.”

“노래 재밌었어! 신났어!”

아이들이 폴짝폴짝 뛰었다. 아까 춤동작을 엉성하게 따라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아이들이 입을 헤 벌렸다. 원래 아이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에 약하다. 그들에게는 칼리오페가 꼭 그렇게 보였다.

괜히 몸을 비비 꼬던 아이들이 칼리오페에게 치댔다.

“언니, 언니도 단발이네?”

“응, 단발이야.”

칼리오페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며 답했다. 그 모습 어디에도 단발에 얽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랑 같네…….”

“응, 우리 똑같아.”

여자아이들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동화 속 공주님이나 가끔 보육원에 찾아오는 귀부인이나 아가씨 모두 긴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저도 그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긴 머리칼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보육원에선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짧게 유지시켰다. 긴 머리칼은 관리하기도 힘들고 이가 잘 생기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머리 자르기 싫다고 울며 도망가는 게 계절마다 있는 행사일 정도다.

“나…… 머리 짧아서 안 예쁜데.”

“응? 무슨 소리야. 굉장히 귀엽고 예뻐.”

칼리오페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 나는?”

“너도.”

“나도?”

“응, 예뻐.”

칼리오페는 아이들을 돌아보다가 왜 그러는지 깨달았다.

“머리 짧은 것도 예쁘지 않아? 언니는 머리 자르고서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응, 언니 예뻐.”

“고, 고마워…….”

아이들의 눈동자가 순수하고 진지해서 칼리오페는 좀 부끄러웠다.

보육원 아이들은 칼리오페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들에게 칼리오페는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은 칼리오페가 유일했다.

“자자, 더 이상 영애를 귀찮게 하면 안 돼. 죄송해요, 레이디.”

“아니에요. 아이들이 귀여운걸요.”

“하하, 귀여운 악마들이죠.”

보육원 교사가 아이들을 인솔해 가는 것을 보며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노래 재밌었어! 신났어!]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듣기 좋았다거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는 감상이 아니라, 오늘 공연에서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결과가 나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페.”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뒤를 돌아봤다. 힐데르트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힐데 오라버니,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힐데르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칼리오페의 어깨쯤을 향했다.

“머리카락,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함께 보육원에 올 때까지만 해도 길었는데 갑자기 짧아졌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하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힐데르트 뒤로 보육원에 온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 있는 크레티안느 역시도.

“무슨 일 있었어?”

힐데르트의 물음에도 칼리오페는 여전히 크레티안느를 바라봤다.

짧은 침묵.

크레티안느의 입매가 일렁인다.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의 시선에 의아함을 느끼고 뒤돌아보려는 순간,

“네.”

칼리오페가 시선을 거두고 힐데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그럼 머리칼을 자른 게 그냥 공연을 위해 그런 게 아닌 건가?”

“거봐요, 내가 리페가 늦었다는 소문부터 이상하다고 했잖아.”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크레티안느는 차갑게 식은 양손을 꽉 맞잡았다.

‘나, 난 잘못한 게 없어.’

“뭔데?”

힐데르트의 물음에 칼리오페의 눈이 정확히 크레티안느를 향했다. 덩달아 사람들의 시선도.

크레티안느는 제게 꽂히는 무수한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불안한 눈을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도움을 청하듯, 호소하는 눈.

크레티안느의 녹색 눈동자와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열렸다.

“대기실에 들어갔더니 피엔테 영애가 있었어요. 이미 제 차례가 된 상황이라 시간이 촉박했죠. 그래서 빨리 나오려는데.”

칼리오페가 뒤늦게 등장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는 연출이었나, 싶은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확실히 너무 긴 공백이라 이상했다.

그런데 대기실에 크레티안느가 있었다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피엔테 영애가 갑자기 제 머리칼을 잘랐어요.”

“뭐?”

“뭐라고?!”

하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머리카락을 자르다니?!”

이건 정말 상식적으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까보다 배는 날카로워진 시선이 크레티안느에게 꽂혔다. 그 시선이 너무 따갑고 아프고 무서워서 크레티안느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에게 호의적인 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옷의 꽃무늬도 사실 와인 얼룩이에요.”

칼리오페가 한 걸음씩 천천히 크레티안느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뭐라고?”

힐데르트가 그녀와 걸음을 맞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얼룩 위에 다시 와인으로 덧그렸어요. 부끄럽지만…… 무대 위에 있으니까 자세히는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귀족들이 너도나도 칼리오페의 드레스를 쳐다봤다. 꽃비같이 잔잔한 꽃이 염색된 예쁜 드레스라고만 생각했는데, 와인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힐데르트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그는 칼리오페가 왜 와인으로 꽃을 그렸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얼음장 같은 시선이 크레티안느를 향했다. 그가 짓씹듯 말했다.

“멀쩡했던 드레스에 그런 얼룩이 묻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피엔테 영애가 제게 와인을 쏟았거든요.”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칼리오페의 말 한마디가 불러온 파문은 엄청났다.

머리칼을 잘랐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워낙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보니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와인을 쏟았다는 말과 합쳐지니 무슨 상황이었는지 그려지는 듯했다.

“실수로 와인을 쏟은 건 절대 아니겠군.”

“그럼 머리카락도 막 강제로 움켜쥐고 자른 거 아니야?”

“설마 싶은데……. 그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리가—”

“근데 일어난 것 같네.”

“하긴, 피엔테 영애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크레티안느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손발이 저릿저릿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라구! 이런 거 말이 안 되잖아.’

사람들이 저를 둘러싸고 수군거리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칼리오페.’

크레티안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어떻게…….”

다 말해버릴 수가 있지?

지금 이 순간 가장 믿기지 않는 게 그거였다.

칼리오페가 제게 못 해준다고, 전과 다르다고, 싸늘하다고, 저를 무시한다고 말해도—

‘아무리 그래도.’

사실 안심하고 있었다.

다 말해버리면 내가 엄청 곤란해지는데 리페가 말할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했다.

칼리오페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착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크레티안느는 본능적으로 그 선의를 이용했다.

오늘 자신이 저지른 짓에 스스로 겁먹긴 했지만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건 그 때문이다. 칼리오페의 선의 덕에 자신은 안전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확실하게 자각해서 계산한 건 아니지만, 크레티안느 본인도 모르는 그녀의 밑바닥에는 그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멍청하고 순진하게 굴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영악했다.

“나, 나는…….”

크레티안느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떨리는 것을 칼리오페는 무감각하게 바라봤다.

크레티안느가 무슨 생각인지 손에 잡힐 듯했다.

그래, 칼리오페는 자신이 어느 정도 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무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칼리오페는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업신여기는 걸 봐주지 말라는 것 역시 배웠지.’

[리페,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란다. 리페는 가장 귀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누가 우리 리페한테 집적거리면.]

[그 새끼를 확 조—]

[로벨, 따라 나와.]

가족들의 말이 생각나 칼리오페는 이 순간에도 힘이 났다.

크레티안느는 선을 넘었다. 루스티첼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대체 저한테 왜 그런 거예요? 갑자기 사람 머리카락을 자르고, 일부러 와인을 끼얹고.”

칼리오페 입에서 또박또박 정리된 말이 나오자 사람들은 침음을 흘렸다. 사교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 기가 막힐 텐데 칼리오페는 공연을 앞두고 겪은 거였다.

“이건 공연 망치려고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잖아요. 아예 작정한 거죠.”

“음습해…….”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아까 들었던 이유는 제대로 된 답이 아닌 것 같아서. 왜 그랬는지 듣고 싶어요.”

칼리오페의 말에 크레티안느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나, 나는……. 아니야. 나는 그냥…….”

크레티안느가 울먹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보통 이러면 누군가 그녀를 도와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평소 그녀를 도와주던 사람들도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왜……?’

역시 리페가 자기 것을 다 뺏어가서?

그래서 제 편이었던 사람들도 이제 칼리오페의 편으로 돌아서는 건가?

신관이 말했던 것처럼?

신관.

크레티안느는 멈칫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신관이었다. 자긴 그냥 신관의 말을 듣고 움직인 거다. 이전까진 칼리오페도 이렇게까지 화내지 않았다.

‘전부 신관 탓이야.’

신관이 머리를 자르라고도, 와인을 끼얹으라고도 말하지 않았지만 크레티안느는 모든 잘못을 그에게 떠넘겼다.

“나,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하나도 잘못 안 했어…….”

와인을 쏟고 머리를 잘랐으면서 잘못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기가 차서 크레티안느를 노려봤다.

“대기실에서 제게 올 줄 몰랐다고 그랬죠. 제 공연이고, 제 대기실인데 거기에 제가 나타난 게 영애는 이상했나 봐요.”

어쩔 줄 몰라 하는 크레티안느와 달리 칼리오페는 차분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느릿하게 끄는 말에 크레티안느가 움찔했다.

“오는 길에 몬스터 습격을 받았어요.”

“뭐?!”

“몬스터?!”

칼리오페의 말 한마디가 불러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몬스터라니, 세상에…….”

“몬스터가 제도 근처에 나온다고요?”

“말도 안 돼.”

“하지만 이런 문제는…….”

사람들은 희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속닥거렸다. 불안한 눈빛이 서성이다가 칼리오페를 향했다.

“그것도 피엔테 영애가 한 짓인가요?”

“아냐!”

크레티안느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건, 그건 내가 아냐! 몬스터가 나타났다니…….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그녀는 고개를 마구마구 저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자신이 다른 혐의를 인정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을 거다. 칼리오페의 질문의 전제에 깔린 것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크레티안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전부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크레티안느에겐 그런 사실을 자각할 능력이 없었다.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래!”

“그런데 왜 제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문이 턱 막혔다. 대답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크레티안느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들에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여기서 대답하지 못하면.

“시, 신관들이 그렇게 말했어!”

빽 터져 나온 대답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크레티안느는 조용해진 주변을 불안한 듯 둘러보다가 재차 말했다.

“지, 진짜야……. 신관들이 나한테, 전부 신관들 잘못이야!”

신관들이 칼리오페에 대해 말하지만 않았다면 자신은 그냥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신관들이 제가 못 올 거라고 그랬나요?”

“그, 그건 아니지만…….”

우물쭈물 대답하면서 크레티안느는 자신의 말을 믿는 거 같지 않아서 애가 탔다.

“정말이야! 네가 나쁘다고, 내 걸 다 뺏어간 게 너라고 그랬어! 너한테 본때를 보여주면 이제 더 이상 안 그럴 거라고…….”

칼리오페는 대체 내가 뭘 뺏어갔냐고 묻지 않았다. 정말 황당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신관을 잡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신관이 그렇게 말해서 제 머리칼을 자르고 와인을 끼얹은 거라고요……?”

“맞아!”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세상에, 루스티첼 영애는 충격받아서 말하는데 그런 건 하나도 안 보이나 봐요.”

“목소리 떨리는 것 좀 봐요.”

“아, 진짜 마음 아파서 못 보겠어요.”

사람들은 비스 신전 측에서 칼리오페에게 사과하고 관계 개선에 힘쓰는 중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경연도 기획한 거고, 칼리오페도 신전의 사과를 받아들여 참여한 거라고.

그런데 뒤에서는 저런 말을 하고 다녔다니……!

“이건 사람을 두 번 배신한 거잖아요…….”

“정말, 리페가 착하고 사람 잘 믿는 거 이용해서.”

칼리오페의 커다란 눈망울이 충격으로 일렁이는 게 보는 사람이 다 속상했다. 그런데 크레티안느는 그런 건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나 있다.

“대체 루스티첼 영애가 자기한테서 뭘 뺏어갔다고.”

“솔직히 퍼준 거 아니야? 그렇잖아, 어렸을 때부터 피엔테 영애를 챙겨준 게…….”

또래라 누구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아는 영애들이 속닥거렸다. 칼리오페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크레티안느는 피엔테 가의 권력과 돈을 보고 모여든 하이에나들에게 진작 둘러싸였을 것이다.

실제로 칼리오페와 사이가 틀어진 기점부터는 정말로 하이에나들에게 둘러싸였다. 피엔테 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후계인 크레티안느일 것이다.

“그랬군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칼리오페가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그 가련한 모습에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피엔테 영애는 어째서 제가 못 올 거라고 생각한 거죠?”

“어?”

“제게 그런 짓을 한 게 신관들 때문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제가 못 오는 건 상관없잖아요?”

“아니야, 다 신관들이—”

“신관들이 제가 못 올 거라고 말하진 않았다면서요.”

칼리오페의 말에 크레티안느는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역시 제가 못 올 거라고 생각한 건 몬스터—”

“아니야!”

다급해진 크레티안느가 소리를 질렀다.

“시, 신관들이 네가 날 피할 거라고……. 나한테 잘못한 게 있으니까, 내가 무서워서— 내가 도착해서 널 찾았을 때도 그렇게 말했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피엔테 영애는 전부 신관 말만 듣고 제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하고, 저를 괴롭혔다는 거네요.”

“그거야! 전부 신관 잘못이야!”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요. 저는 영애가 오늘 온다는 사실도 몰랐는데요. 초청 리스트는 신전에서만 가지고 있거든요.”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영애를 피할 생각을 하죠?”

“진짜야! 신관이 나한테—”

“네, 믿어요. 그런데 신관은 왜 영애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요?”

칼리오페의 혓바닥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제가 안 오면 주최 측인 비스 신전에서 가장 당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조금 묘했어. 안 오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해야 하는데 이상한 소문부터 돌았잖아.”

“아, 그…… 리페가 일부러 늦고 그런다는 거?”

“난 처음부터 안 믿었지만 확실히 이상했어. 왜 그런 말이 나왔지?”

사람들이 쑥덕거렸다.

“마치 제가 안 나타날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잖아요.”

칼리오페의 말에 사람들이 헉, 숨을 들이 삼켰다.

“지금 영애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스 신전 쪽에선 제가…… 탐탁지 않았나 봐요.”

칼리오페가 아픈 미소를 지으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연락 없이 늦는데도 제 걱정을 하지 않았던 건…… 그래서겠지요.”

소문에 휩쓸려 칼리오페를 흉봤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모진 괴롭힘 끝에서도 웃는 칼리오페의 처연한 모습이 그들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죄책감은 그들의 마음에 커다란 짐을 지웠다.

누구라도 공연을 앞두고 수난을 겪은 칼리오페의 처지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것이다. 거기에 죄책감까지 더해지니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제 행방을 묻는 피엔테 영애에게도 왜 늦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곤란하고 난처하다면서 자기 입장을 토로할 법한데.”

칼리오페가 슬쩍 크레티안느를 바라봤다.

“그, 그런 말은 없었어!”

혹여 자신을 의심하는가 싶어서 크레티안느는 냉큼 말했다.

칼리오페는 어쩜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해주나 싶어서 좋아해야 하는지, 그 얄팍함에 질려야 하는지 마음이 복잡했다.

“그럼 경연의 주최자인 비스 신전에서는 제 부재에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피엔테 영애가 무서워서 안 오는 거라는 식의 말을 했다는 거죠?”

정리하니 이보다 이상한 말도 없을 것 같았다.

“뭐야……. 저게 말이 돼?”

“피엔테 영애는 저 말을 또 냉큼 믿고 루스티첼 영애한테 그런 거야?”

“좀 멍…… 흠흠,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물며 신전에서는 리페가 누가 참석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그럼 저 핑계가 말도 안 된다는 걸 비스 신전에서도 알았을 텐데.”

“확실히 이상하네요.”

“신전에서 루스티첼 영애가 못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도 아무런 공지도 안 해주고……. 아까 리페 차례 때 안 나타나서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는데.”

“그 때문에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이건 일부러라고밖에 볼 수 없네요.”

“그럼…… 루스티첼 영애가 못 오는 거— 늦었던 것도 신전이랑 관계 있는 거 아니야?”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이 확 조용해졌다.

소란스러운 침묵이었다.

이 엄청난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오히려 입을 다물게 되는.

그 짧은 침묵 후, 사람들의 입이 열렸다.

“허면 몬스터를…….”

* * *

“미스터 카이논.”

칼리오페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니카이논의 사장, 카이논에게 다가갔다.

“리페 아가씨! 정말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그의 말에 칼리오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요. 도미닉 경 덕분에.”

“정말……. 오늘 몇 번이나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시는지. 아가씨께서 늦으셨을 때부터 불길했어요.”

“진짜로요!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우린 아가씨 없음 살 수 없단 말이에요!”

카이논을 비롯해 니카이논 직원들이 칼리오페를 빙글빙글 둘러싸며 우는 시늉을 했다.

칼리오페는 하하, 웃으며 그들을 토닥였다. 니카이논 직원들은 그걸 기회 삼아 마음껏 칼리오페를 껴안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말랑말랑해!’

‘보들보들해!’

하지만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짧게 끝나는 걸 보니 다시 울적해졌다.

“아가씨 머리칼…….”

“별로예요?”

“아니요! 예뻐요! 무척!”

“아가씨는 삭발해도 이쁠 거예요!”

“맞아요! 두상도 예쁘고!”

‘삭발은 아무래도 좀…….’

눈이 반짝반짝한 게 진심이 가득해 보여서 칼리오페는 머쓱해졌다. 부끄러움에 시선을 돌리다가 원래 목적이었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칼리오페가 카메라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카이논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녹화기능을 추가한 카메라예요!”

레코딩 사업을 성황리에 시작한 뒤, 니카이논은 바로 녹화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통신석에 이미 있는 기술인 데다가 니카이논의 노하우도 쌓인 만큼, 작업 속도는 빨랐다.

“말씀드렸다시피 일반 카메라만큼 상용화하기엔 비용적인 문제가 있지만요.”

그래도 부유한 부르주아나 귀족은 손쉽게 살 정도다.

“그럼 이제 신전 측에서 경연 중계를 독점할 수 없겠네요.”

비스 신전이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경연 중계를 독점하면서 대중에게 신전의 이미지가 굉장히 좋아졌다. 이걸 저지하기 위해 칼리오페는 니카이논과 상의했었다.

녹화기는 그 결과였다.

“네, 그리고…….”

카이논이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방금 피엔테 그 녀…… 흠흠, 그 아가씨와 대화하는 것도 찍었습니다.”

칼리오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이 제 주변에 모였을 때 카이논과 니카이논의 직원들을 봤기 때문이다.

그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도.

아마 찍는 중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패는 가지고 있을수록 좋지요.”

카이논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를 안 써도 되는 평화로운 방향으로 상황이 흐르면 더 좋지만요.”

딱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칼리오페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며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이로써 경연에 대한 모든 것을 신전이 쥐고 있지 않게 되었군요.”

“네, 비스 신전에서도 꽤 속탈 겁니다.”

주최부터 시작해서 중계까지 모두 비스 신전에서 하다 보니, 경연을 재밌게 본 사람들이 비스 신전에 대해 점점 더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일이 알려지면 또 달라지겠지만.’

“아직 녹화만 가능할 뿐, 바로바로 생중계하는 건 불가능하지만요. 그래도 진척 상황을 봤을 때 곧 가능하게 될 겁니다.”

“잘됐네요. 비스 신전에서는 설마 다른 곳에서 중계가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할 테니까요.”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생중계하는 것은 모두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이뤄졌었다.

하지만 기술이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이때까지 문화 사업을 중계한다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궁과 신전에서만 사용하는 기능이라 딱히 수요가 없어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 기본적으로 통신석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상 통신석의 주요 기능을 거의 다 비용 절감해서 재개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중계는 결국 통신이다.

“이 기술을 썩히긴 아까우니 아예 통신석 시장에 뛰어들려고 합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통신석은 고위 귀족들이나 쓰는 최고가품이었다. 그마저도 회당 마력 소모가 극심해서 잘 사용하지 않고, 쓰더라도 항시 가지고 다니는 물건은 아니었다.

사실상 전보에 가까웠다. 다만 글자가 아니라 영상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점이 달랐다. 통신석은 주로 고위 귀족들끼리 사업 회의를 하거나 친교를 다지는 데 사용되었다.

“아마 상용화되면 획기적으로 사회가 다라질 것입니다.”

“네, 접근성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니카이논이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칼리오페는 불안감을 느꼈다.

“처음 통신석을 출시할 때—”

“안돼요.”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답했다.

“드, 들어보시지도 않고서요?!”

“들어보지 않았지만 안돼요.”

“그치만 이게 상용화되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문화 격차도 줄어들고, 정보의 접근성도—”

“물론 출시를 응원해요. 하지만 제가 홍보하지 않아도 잘 출시될 거잖아요?”

“윽…….”

맞는 말이었다.

“하, 하지만 화제성이…….”

“통신석이 반의 반값으로 나왔다고만 해도 충분히 화제성 있을걸요.”

“아, 아가씨께선 저희 전속 모델이신데…….”

“전속 모델은 카메라 사업이었구요. 레코딩까지 했으면 의리는 다 지켰지요.”

“아가씨, 팬분들을 생각하세요. 아가씨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구요.”

“맞아요. 요즘 거리에도 성녀 광고로 다 밀어붙여서 안 그래도 사람들이 속상해하고 있는데…….”

“뒤늦게 입덕해서 포토북 매물 구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하세요.”

“맨날맨날 신문 한 귀퉁이에 상시광고처럼 포토북 구한다고, 가격 상관 없다고 걸려있는 거 볼 때마다 제 눈에서 눈물이 다 난다니까요?”

“그럼 가지고 계신 거 팔아주시든가요.”

“그건 절대 안 되죠.”

헤헤, 니카이논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직원 복지 덕에 비매품으로 소장한 건데 그럴 순 없다.

니카이논은 워낙 혁신적인 사업체로 유명해 입사 지원자가 매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오페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데다가 관련 물품을 먼저 받아볼 수 있어서 취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가씨이…….”

“리페 아가씨…….”

“저희 진짜 빨리 개발하려고 밤잠도 안 자고 일했는데…….”

“개발부서 아니시잖아요.”

“그래도오…….”

“저희 진짜! 진짜로! 촬영 한 번이면 돼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악! 한 번!”

사실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준비한 콘셉트가 있다.

천사가 나왔으니 악마도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소악마처럼 까만 뿔을 단 칼리오페의 사진…… 아니, 이젠 영상이다!

이번 년도 포토북을 위해 찍고 있는 것까지 합쳐서 천사와 악마 컨셉트로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눈빛이 반짝이다 못해 광기마저 어렸다.

“리페 아가씨이, 제발…….”

니카이논 사람들이 꼬리를 파닥파닥 흔들며 졸랐다. 익숙한 투자회사 직원들에게서 더 익숙한 가족들의 향기가 난다.

“으으, 정말……. 진짜 딱 한 번이에요.”

“아가씨, 사랑해요!”

“우리 아가씨가 최고야!”

칼리오페는 방방 뛰는 니카이논 사람들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사실 머리카락이 이렇게 잘려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네?”

“회사에서 밀고 있는 이미지라는 게 있으니까요.”

칼리오페의 이미지는 누가 봐도 차분하고 고아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개구지기보단 차분해서 레이디 베이비라는 별명까지 붙었었다.

“그 이미지는 니카이논의 이미지니 난처해 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단발 머리는 사회에서 생각하는 레이디란 이미지에 맞지 않았다. 관리하는 데 품이 많이 드는 긴 머리는 부유함과 우아함을 상징하니까.

칼리오페 스스로는 자신이 단발이든 장발이든 별 상관 없었지만, 사업이 걸린 문제다 보니 걱정됐다.

“무슨 소리세요, 아가씨.”

“저희는 귀족들의 귀감이라는 이미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선망하는 이미지인 사람을 찾아서 아가씨를 모델로 쓰는 게 아니에요.”

“맞아요! 리페 아가씨이시니까 모델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라구요.”

“저희는 애초에 사랑스러운 순간을 저장하는 것을 모티브로 삼았고, 리페 아가씨는 항상 사랑스러우신걸요.”

조금 부끄러운 말이었다. 부정하고 싶은데 여기서 뭐라고 하면 더 부끄러운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얼굴을 붉히고만 있는데, 누군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리페는 니카이논의 모델로 딱이지.”

올려다보니 힐데르트가 그녀를 내려다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힐데 오라버니.”

“니카이논 쪽과 얘긴 끝난 거야?”

“아, 네.”

“그래, 그럼.”

힐데르트가 칼리오페를 에스코트하며 걷기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칼리오페를 빼가서 니카이논 직원들은 한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르고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칼리오페를 뺏겼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해!”

“적어도 양해는 구할 수 있잖아!”

“양해를 구할 필요도 없다는 거겠지. 과연 서모나 가의 도련님.”

아마 힐데르트가 양해를 구하는 사람은 칼리오페 정도일 뿐이리라.

* * *

“보육원 전보를 빌려서 루스티첼 부인께 대강 이야기해뒀어.”

“난리 나셨을 거 같은데…….”

“답장도 안 하시고 바로 오실 것 같아서 길이 엇갈릴 수 있으니 내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걱정하실 테니 빨리 돌아가 봐야겠어요.”

“응, 바로 출발하자. 너도 지쳤을 테고.”

원래 경연이 다 끝난 후 보육원 후원을 위한 피로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피로연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아직 투표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걱정하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고, 다그닥거리는 소리 외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페.”

힐데르트가 조용히 칼리오페를 불렀다.

산호빛 눈동자가 그를 담는다. 그 깨끗한 눈동자를 보면서 힐데르트는 입을 열었다.

“오늘 공연 좋았어.”

“여러모로 불안했는데 다행이네요. 힐데 오라버니가 좋았다고 하니까 안심돼요.”

“응, 좋더라.”

힐데르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 좋아.”

네가.

칼리오페, 네가 정말 좋다.

힐데르트는 고맙다며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옅게 미소 지었다.

“사진 찍고 싶었어.”

“춤추는 거 놀리려고요?”

칼리오페가 하하, 웃으며 “곤란한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춤추지 않더라도.”

힐데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연한 얼굴로 저를 보는 칼리오페에게 속삭였다.

“춤추지 않더라도, 그냥 가만 있더라도. 찍고 싶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와인 얼룩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지금도.”

“네? 지금요?”

“응.”

[당신의 사랑스러운 순간을 저장하세요.]

10년 전, 칼리오페의 얼굴과 함께 실렸던 문구가 여전히 가슴 속에서 팔랑거렸다.

내 사랑스러운 순간.

그게 너니까. 항상 너니까.

내게 사랑스러운 순간은, 그 매 순간이 너였어.

* * *

“리페!”

가족들은 저택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모나 가의 마차가 보이자마자 마차 쪽으로 달려왔다. 가족들 얼굴이 걱정과 초조로 뒤범벅되어 있어서 칼리오페는 가슴이 시큰거렸다.

칼리오페는 서둘러 창문을 열고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칼리오페가 무사하다는 소리는 힐데르트에게도, 유모와 도미닉에게도 들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고개를 내민 칼리오페의 모습은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리페 머리카락이…….”

단발로 잘랐단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듣지 못했다. 답을 듣기 위해 유모를 바라보자 유모 역시 깜짝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 사이 칼리오페가 마차에서 내렸다.

“리페!”

가족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으으, 수, 숨 막혀…….’

어머니의 부드러운 품은 그렇다 치고 근육으로 탄탄하고 단단한 오라버니들과 아버지가 꽉 껴안으니 정말로 숨이 막혔다. 하지만 자신을 꼭 끌어안은 채 안심하는 얼굴을 보니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속상해하실 거 없어요.”

가족들은 칼리오페의 말에 그저 응, 응하고 대답하며 온기를 확인했다.

뺨을 부비고 몇 번이고 얼굴에 키스를 한다.

힐데르트는 가족들 품에 안겨있는 칼리오페를 보며 미소 지었다.

행복한 광경.

절로 가슴이 따스하게 울리건만 왜 코끝이 아릿할까.

[정말 좋아.]

말했으나 칼리오페에게 전혀 닿지 못한 고백.

차마 소리 내어 ‘네가’라고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속삭인 고백을 생각한다. 칼리오페에게는 그 고백이 그저 공연이 좋다는 말이었다. 힐데르트의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예뻤어.’

그 말에 칼리오페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는데, 정말 예뻤다. 딱 눈부실 정도로.

‘그리고 그게 끝.’

자신의 ‘좋아’는 칼리오페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한 번도 흔들지 못했다.

칼리오페를 흔들 수 있는 건—

눈앞에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있던 칼리오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듀레밀에서 쇼핑을 마치고 셋이서 함께 간 티하우스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모습.

알 수밖에 없었다.

칼리오페의 수줍은 마음이 힐데르트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차라리 안 보였으면 좋겠는데, 칼리오페만을 바라본 지가 벌써 십 년이라.

힐데르트에게는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칼리오페에 대한 마음을 단번에 잘라낼 수 없었다.

전하고 싶었다.

결과가 뻔해도, 거절당할 걸 알아도.

그 상상만으로 괴로우면서도 전하고 싶었다.

이 마음을, 도무지 억눌러지지 않는 마음을, 아무리 단속해도 어느 순간 칼리오페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닿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에.

내가 너를 이렇게나 좋아한다고, 제발 알아달라고 빌고 싶었다.

‘하지만—’

힐데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말하지 못했다.

제 고백에 칼리오페가 곤란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이로 남고 싶다는 욕심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든 전하고는 싶어서, 그래서 공연이 좋았다는 말에 빗대어 마음을 전했다.

비겁하다면 비겁하고, 용기 없는 짓이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칼리오페가 저를 보고 웃는 걸 포기할 순 없었다. 다른 것은 다 내려놔도 그것만은 내려놓지 못해서.

힐데르트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마음을 결국 속으로 삭였다.

“힐데.”

루스티첼 부인이 그를 불렀다.

한참 동안 막내를 물고 빨던 루스티첼 일가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그녀였다. 루스티첼 부인은 한걸음 물러나 서 있는 힐데르트를 보고 아차, 하고 미소 지었다.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맙구나.”

“아닙니다.”

힐데르트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오늘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네.’

뭔가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몬스터 습격 건도 그렇고 힐데르트도 생각이 복잡할 거다. 그리고 이제 힐데르트는 성인인데 이것저것 참견하는 것도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그래. 공무로 바쁘겠지만 다음에 에피니와 함께 놀러 오렴. 오늘은 정신이 없구나.”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힐데르트가 짧게 미소 짓곤 묵례했다. 그대로 마차에 올라타자 옅은 진동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왠지 엄청나게 지친 기분이라 힐데르트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쪽으로 칼리오페의 얼굴이 아룽아룽한다.

“힐데 오라버니!”

그를 부르는 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다 하다 못해 이젠 환청이라니. 기가 막힌다.

“힐데르트 오라버니!”

다시 한 번 그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힐데르트는 설마 싶어서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봤다.

“리페?”

마차를 따라 달려온 건지 칼리오페가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힐데르트는 홀린 듯 창문을 열었다.

고운 비단을 깐 것 같은 노을 아래 정원에서 칼리오페가 그를 보고 웃었다.

덜컹, 심장이 멈추는 소리가 난다.

“오늘 감사했어요.”

칼리오페가 마차에 가까이 붙어서며 말했다. 몇 번이나 받았던 인사에 힐데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죄송해요.”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힐데르트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 하는 생각이 가슴에 훅 피어올랐다.

칼리오페에게 자신의 마음이 닿은 거라면, 그 비겁한 고백이 전해진 것이라면—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제가, 그…….”

칼리오페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짧은 머리카락이 흰 뺨과 가느다란 목덜미에 스친다. 산호빛 눈동자는 힐데르트를 보지 못하고 아래로 향했다. 수줍음이 눈 밑에서 발갛게 빛나고 있다.

힐데르트는 깨달았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놀라셨죠.”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힐끗 힐데르트를 올려다 봤다가 빠르게 아래를 향했다.

“저 레아스랑…… 카스틸로 공자님이랑 교제하고 있어요. 미,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처음으로 말했다.

칼리오페는 부끄러움에 숨이 다 막혔다.

누군가에게 아스타레아스와의 관계를 소리 내어 말한 건—

‘교, 교제하고 있다고 말한 건 처음이야.’

귓가가 뜨끈해진다. 힐데르트는 이미 다 눈치 채서 알고 있는 일일 텐데도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고, 간지러워서—

칼리오페는 입술에 꾹 줬다.

“…….”

힐데르트는 말없이 칼리오페를 내려다보았다.

괜히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는 칼리오페가 귀여웠다.

마주치지 못한 채 슬쩍 내리깐 눈매도 예쁘고, 발그레한 두 뺨도 고왔다. 마차 위에서 보니 칼리오페의 정수리가 잘 보였다. 동그란 가마가 그렇게 깜찍할 수가 없다.

칼리오페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사랑처럼 달콤한 향기가 그녀에게서 퐁퐁 풍겨오는 것 같다.

‘설레 보여.’

행복해 보였다.

그럼에도 힐데르트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행복해?”

그런 질문이 날아올 줄 몰랐는지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깜짝 놀란 눈이 크게 뜨여 커다란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다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초승달처럼 예쁜 모양으로 가느스름하게 휜다.

“네! 무척!”

도톰하게 솟은 뺨에 가득가득 행복이 묻어나와 힐데르트는 따라 미소 지었다.

그래, 그럼 됐어.

네가 행복하다면, 나도.

“바람이 차갑다. 얇게 입고선……. 들어가.”

“여름밤인데…….”

칼리오페는 슬쩍 꿍얼거리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게 칼리오페다워서 힐데르트는 먼저 창을 닫고 마부석 쪽을 툭툭 두드렸다.

마차가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힐데르트는 커튼을 치고 몰래 칼리오페를 훔쳐봤다.

칼리오페는 여전히 노을 진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힐데르트가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차가 정문을 통과해 사라질 때까지.

여름밤의 바람에 짧은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정문이 닫혀 이제 칼리오페도, 루스티첼 저도 보이지 않는데 힐데르트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열대야의 시작이었다.

* * *

힐데르트를 배웅하고 돌아온 칼리오페는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푹 담가 피로를 풀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뽀송뽀송해져서 방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옹기종기 기다리고 있었다.

“리페, 피곤할 테지만 잠깐 이야기해도 괜찮겠니?”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곤 소파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마시자 온몸이 따뜻해졌다.

“우리 리페, 짧은 머리카락도 예쁘네.”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미소 지었다.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야! 천사야!”

“우리 리페한테 안 어울리는 건 없어.”

“누구 딸인데 당연하지.”

루스티첼 백작의 말은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에게 묘한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제 동생입니다.”

“맞아 맞아! 내 동생이야!”

두 아들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머, 내 딸이란다.”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푹 끌어안으며 말했다. 질세라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다시 칼리오페 끌어안기 2차전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막혀오는 숨에 칼리오페는 “그, 그만…….” 하고 구조 신호를 보내야 했다.

겨우 상황이 진정됐다.

가족들은 핫 초콜릿을 마시는 칼리오페의 짧은 머리카락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떤 헤어 스타일을 하든 막내는 예쁘다. 단발이 잘 어울리는 것도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칼리오페가 원해서 자른 게 아니라 누군가 강제로 잘라버린 거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칼리오페가 씻는 동안 가족들은 보육원 경연에 참석한 다른 가문에 통신을 걸어 대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크레티안느 피엔테.’

가족들은 모두 한 사람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생긋 웃는 루스티첼 부인에게서는 한기가 느껴졌고, 칼리오페 앞에서만은 항상 다정했던 루스티첼 백작과 오라버니들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머그잔에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 때는 다들 온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주변 온도가 잠깐 내려갔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하고 넘겼다.

가족들은 칼리오페에게 크레티안느와의 일을 꼬치꼬치 캐물어 안 좋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강제로 자르고 와인을 끼얹었다는 거다.

‘감히 내 딸에게…….’

‘감히 내 동생에게…….’

칼리오페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아깝거늘.

이 값은 톡톡히 치를 것이다.

가족들의 시선을 느낀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 순간에는 경연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됐고.”

칼리오페가 웃으며 짧은 머리칼을 쓸었다.

“단발도 꽤 마음에 들어요. 물론 좀 더 다듬어야겠지만요.”

“우리 막둥이 이렇게 착해서 어떡하지?”

“평생 저랑 살면 됩니다.”

“아니야! 나랑 살 거예요!”

“우리 딸은 엄마, 아빠랑 살 건데?”

가족들이 자꾸 이런 농담을 하는 게 혹시 우울해하거나 무서워할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아서 칼리오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확실히 가족들 덕분에 가라앉았던 기분이 나아졌다.

“리페, 앞으로는 이걸 가지고 다니렴.”

루스티첼 부인이 작은 파우치를 내밀었다. 받아서 열어보니 안에 통신석이 들어있었다.

“언제 어느 때나 위험하면 연락해.”

칼리오페는 통신석을 손에 꾹 쥐었다. 묵직한 감촉이 손바닥에 감겼다.

“……리페를 혼자 보내고서 무척 후회했단다.”

“같이 갔다면, 하다못해 경연을 보러 가기만 했어도…….”

그랬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가족들이 경연을 보러 갔어도 칼리오페와는 따로 이동했을 것이다. 리허설 때문에 칼리오페는 더 일찍 출발하니까.

하지만 가족들이 보육원에 도착한 후, 칼리오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장 수색에 나섰을 터. 시간상 그때 바로 움직였다면 칼리오페가 몬스터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지켰을 수도 있다.

괴로운 듯 미간을 일그러트리는 가족들을 보고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거였잖아요.”

춤추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가족들에겐 오지 말라고 했다.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로베르트에게는 차라리 중계되는 걸 보라고 했다.

가족들은 끝까지 가고 싶다고 난리였지만, 이 집안의 실질적 서열 1위 막둥이를 당해낼 순 없었다.

[정말……. 오면 미워할 거예요!]

그 말에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수밖에.

카이논에게 연락해서 다각도 녹화본을 찍어달라고 한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 덕분에 이렇게 무사한걸요.”

칼리오페는 유모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유모도 너무 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유모 자신도 소중히 해. 나도 유모가 다치는 거 참을 수 없으니까.”

그 말에 유모의 눈가가 젖었다.

“그럼요, 아가씨.”

하지만 다음에 같은 순간이 온다면 자신은 또다시 온몸으로 칼리오페를 보호할 것이다.

“그런데 몬스터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나타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봐도 제도 근교에 몬스터가 나타나서 소동이 일었던 적은 없다.

칼리오페의 말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쪽이 수상하긴 하지. 크레티안느의 말도 그렇고.”

“걔는 없는 사실을 그럴싸하게 지어내진 못하고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기억들을 자기 위주로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애니까.”

로베르트의 평은 꽤 신랄했다. 항상 웃으며 장난치고 떼써서 저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역시 신관들이 몬스터를 풀었을까?”

로베르트의 말에 루시우스가 도드라진 턱선을 쓸며 중얼거렸다.

“경연으로 이미지를 회복하고 있는데 스스로 찬물을 끼얹는다고?”

이내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몬스터 때문에 리페가 다치거나 참석 못 하게 되면 여론이 리페 쪽으로 확 쏠릴 텐데.”

“그렇지. 신전에선 요즘 성녀와 관련해서 여론을 모으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수를 쓸 것 같진 않아.”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몬스터의 습성을 생각해도 이상해. 몬스터를 잡아다 풀었다고 치자. 하지만 과연 그 몬스터들이 정확히 리페를 노린다는 보장이 있나?”

몬스터는 특정인을 추격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되는대로 공격하거나 아예 숨는다.

루스티첼 백작은 몇 번이나 몬스터 위험 지역으로 토벌을 나갔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보육원으로 가는 길과 고작 갈림길 하나 차이야. 만약 몬스터가 그쪽으로 이동했으면 초청받은 후원 귀족들이나 사회 명사를 공격했을 거다.”

그런 사고가 생기면 아무래도 경연에 대한 열기까지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또, 신전 역시 비난을 피하지 못할 터.

“그러고 보니 마부들은…….”

칼리오페의 말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계속 억울하다는 소리만 해.”

그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생명을 노린 마부들을 직접 신문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는 거다.

“…….”

칼리오페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몬스터가 인간의 명령을 받는 건 불가능하지만…… 저만 노릴 순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니?”

깜짝 놀란 가족들을 보고 칼리오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죽여.]

수십 개의 눈동자가 속삭이는 소리.

그건 입 밖으로 나온 소리가 아니었지만, 칼리오페는 분명히 들었다. 아직까지도 귓가에 그 말이 생생해 소름이 쫙 돋았다.

“몬스터와 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때 몬스터가 찾았다고, 죽이라고 말했어요.”

새파랗게 질린 칼리오페를 보고 가족들의 심장은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유모의 말에 루스티첼 백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론을 내렸다.

“몬스터의 사념을 들은 거야.”

“몬스터의 사념이요?”

“그래, 보통은 들을 수 없지만, 리페는 워낙 특별한 아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대정령의 총애를 받는 만큼 그런 쪽의 감각이 예민할 수도 있다.

가족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더 이상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어떻게든 칼리오페의 곁에 머물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우리 리페 오늘은 엄마랑 같이 잘까?”

루스티첼 부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가족들 모두 부러움과 질투에 안달복달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거절했다.

가족들이 모두 다 돌아가고 나서 칼리오페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침대에서 꼼지락하다가 협탁에 있는 램프를 켜고 통신석을 꺼내보았다. 톡톡, 두드리고 만지작거리며 몇 번을 망설인다.

‘연락……해도 될까.’

가족들이 떠나질 않아서 시간이 많이 늦었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에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칼리오페는 통신석을 내려놓았다.

“…….”

하지만 역시 아쉽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해, 해보자!’

칼리오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니까. 레아스는 내 남자친구니까.

결심이 섰을 때 해야 한다. 칼리오페는 잽싸게 통신석을 조작하다가 깨달았다.

‘아, 맞다.’

아스타레아스의 통신 코드를 모른다.

연락할까, 말까 그렇게나 망설였으면서 막상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엄청난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똑똑, 자그마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설마!’

칼리오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금 창문을 두드리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칼리오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똑똑, 그 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촤르륵—

커튼을 걷자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과,

“레아스!”

마치 거짓말처럼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짓는다. 달빛에 희게 빛나는 은빛 머리칼이 밤바람에 물결치고, 속이 비칠 것처럼 파아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휜다.

왠지 가슴이 울컥해서 읏, 하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칼리오페는 서둘러 잠금쇠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촉촉하고 달콤한 밤공기가 훅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분명하고 강렬한 체온과 체향과 무게감도.

“……!”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꽉 끌어안은 채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칼리오페의 향기가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제야 뒷목이 쭈뼛하며 진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품 안에 가둔 작은 몸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스타레아스는 비로소 칼리오페가 안전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이 조금 떨려와 칼리오페는 놀랐다. 갑자기 끌어안기는 바람에 굳었던 팔을 움직여 아스타레아스를 마주 끌어안았다.

넓은 등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고 그의 체온과 무게를 느꼈다.

밤바람이 두 사람 주변을 헤엄치듯 불었다. 커튼이 살랑거리며 그들을 감싼다. 연약한 달빛과 별빛이 그들 위로 내려앉고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끌어안고 있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많이 무서웠죠.”

방안으로 들어온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이듯 물었다.

무서웠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수십 개의 눈알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정말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부터 칼리오페는 계속, 계속 괜찮다는 말만 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무사한걸요.”

생긋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안 괜찮잖아요.”

“…….”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정곡을 찔려서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요. 무섭고 두렵고 힘들었잖아.”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쥐고 손가락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 보드랍고 섬세한 감촉에 칼리오페는 손끝이 떨렸다.

“그런 데다가—”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칼리오페의 깨끗한 목덜미에 닿았다. 정확히는 그 언저리에서 잘린 머리카락에.

그는 치밀어 오르는 욕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칼리오페를 향해 무해한 듯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이상한 것까지 얽히고.”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잠시나마 짧은 머리카락에 머물렀다는 걸 깨닫고 칼리오페는 얼굴을 붉혔다. 괜히 어색한 손길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한 번도 단발로 자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칼리오페는 갑자기 단발이 된 것에 별 감상이 없었다. 어떤 모습이든 그다지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에 살짝 걸렸던 건 그녀를 모델로 기용한 니카이논이 생각했던 홍보 이미지와 간극이 생긴다는 거였다. 그마저도 비즈니스이니 신경 쓰이는 거지, 마음이 동요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만약 아스타레아스에게는 단발이 어색하고 안 어울려 보이면 어쩌지. 그를 좋아하는 만큼, 그에게 설레는 만큼, 아스타레아스에게는 좋게 보이고 싶었다.

“나, 이상하지 않아요?”

조그마한 질문에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한순간 훅 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다. 칼리오페가 그런 걱정을 할 거라는 건.

칼리오페의 성격상 단발이 된 것에 그렇게 스트레스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저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내게 좋게 보이고 싶어서.’

그리고.

‘내 생각이 그녀에게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자 아스타레아스는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이상하지 않냐니. 아스타레아스에게 칼리오페는 언제나 한결같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이상하다는 건 아예 선택지에도 없었다.

“예뻐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무척.”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아스타레아스는 그 말과 흉포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고 겉으로는 연한 꽃잎처럼 보드랍게 웃었다.

매끄러운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아쉽고 애타는 마음에 결국 머리카락 끝에 키스했다. 정말 키스하고 싶은 곳은 다른 곳이었지만 차마 닿지 못하고.

코 끝에 닿는 칼리오페의 향기에 그는 어찔한 정신을 바로잡았다.

‘읏…….’

칼리오페는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그런가, 키스를 하는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가까워서 기분이 이상했다.

숨결과 체온이 너무 가까이에서 느껴져서—

‘아, 안돼. 레아스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칼리오페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당신은 대단해요.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노래하고……. 가끔 눈이 부셔서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

아스타레아스가 눈부신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 그래도.”

아스타레아스의 이마가 칼리오페의 이마에 톡, 닿았다. 숨결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나한테는 다 말했으면 좋겠어요.”

“…….”

“무섭고 힘들었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왜 그 자리에 없었냐고.”

“레아스…….”

“불평이든 원망이든 뭐라도 좋으니까.”

칼리오페는 그가 자신의 심장을 쥐고 있는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나한테 화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이렇게 조이고, 뜨겁고, 아릿하고, 그러면서도—

“내가 당신을 구하고, 내가 당신을 지키는 게 당연한 거였으면 좋겠어.”

이렇게나 기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부디 내게 화를 내세요.”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는 마치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절박해 보였다.

“나를 원망하고, 나를 비난해.”

“나는…….”

“왜 그 순간에 없었냐고, 무서웠다고, 정말 보고 싶었다고, 기다렸다고.”

어서 내게 화를 내요.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커다란 그의 손이 칼리오페의 뺨을 감쌌다.

“나를 기다렸다고.”

도미닉이 몬스터로부터 칼리오페를 지켜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했다.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질투가 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칼리오페를 지켜주고 싶었다.

왜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소중한 이에게 함부로 굴 때 그 자리에 없었는지. 왜 칼리오페가 불안해할 때 안심시켜주지 못했는지.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다.

“저, 정말…… 정말로 무서웠어요.”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울먹임이 가득한 목소리. 귀족들 앞에서도, 오랜 시간 함께한 힐데르트 앞에서도, 심지어 가족들 앞에서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사실은— 사실은 하나도 안 괜찮아요.”

“응, 미안해요.”

“진짜 무서웠는데, 정말 힘들었는데— 너무 지쳐서 아무 힘도 낼 수 없었는데.”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꽉 끌어안았다.

“왜 없었어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원망의 말이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나왔다.

“기다렸는데, 보고 싶었는데— 왜 없었어.”

“미안.”

칼리오페의 흐느낌에 아스타레아스는 심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흐르는 칼리오페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물길을 그대로 더듬어 올라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칼리오페에게서 흐르는 슬픔과 원망을 닦아낸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젖어 들고 칼리오페의 눈에서 눈물이 사라져 갈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웠던 거리가 조금씩, 조금씩 느릿하게 가까워졌다.

심장뿐만 아니라 온몸이 두근두근 울리는 것 같았다. 긴장으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맞닿고 싶었다.

그리고 두 입술이 맞닿으려는 찰나,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천둥과도 같이 들렸다.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 휙 몸을 세웠다.

“아가씨? 아직 깨 계세요?”

유모의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어쩔 줄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어, 어떡해요. 들키면 안 돼요. 큰일 나요.”

칼리오페는 소리를 죽인 채 속삭이며 아스타레아스를 창문 쪽으로 밀었다. 이 밤중에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의 침실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족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졸지에 아스타레아스는 그대로 쫓겨나 창문 밖으로 밀려났다.

“아가씨?”

“응, 이제 자려구.”

칼리오페가 재빨리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며 답했다. 칼리오페의 답에 유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기척이 계속 들려서……. 역시 잠이 안 오시는 거죠? 따뜻한 우유를 가져 올까요? 꿀 넣고.”

“괜찮아. 졸려서 자려고 했어.”

“그럼 다행이지만……. 잠 못 주무시겠으면 곁에 있을게요.”

“아니야! 정말로 자려고 했어.”

그렇게 말해도 유모는 안심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칼리오페는 한마디 더 보탰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계속 생각나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것 때문에 잠 못 자진 않아.”

차라리 아스타레아스 생각에 잠 못 이루면 모를까.

조금 전 아스타레아스와의 있었던 일이 안 좋은 기억을 몰아냈다. 온통 아스타레아스로 가득해서 지금은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던 입술, 아찔했던 향기, 자신의 뺨을 감쌌던 그의 커다란 손.

다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유모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확실히 혈색이 창백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아가씨, 더우세요?”

“어? 아니?”

“얼굴이 붉으셔서…….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 그냥 이불 속에 있어서 그랬나 봐. 아픈 덴 없어.”

아기 때부터 자신을 키워온 사람이다. 더 이야기해봤자 덜미만 잡힐 거란 생각에 칼리오페는 서둘러 침대에 누웠다.

“이야기 계속하니까 잠 깰 것 같아. 어서 잘래.”

“아, 그래요. 어서 주무세요.”

유모가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칼리오페를 토닥였다.

아직까지도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 같아 칼리오페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회귀 전, 열여덟 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유모에게 자신은 항상 소중한 어린 아가씨였다.

“유모, 나 정말 괜찮아. 잠 안 오고 무섭고 그런 거 아니야.”

유모는 빙그레 웃으며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올리브빛 눈동자에는 애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칼리오페는 그 눈을 바라보다 말했다.

“사실은…… 사실은 조금 무서웠는데— 잠을 못 잤을지도 모르는데.”

“네.”

“마법사님이 마법을 걸어주고 가셨어.”

비밀 얘기처럼 속닥속닥하고 헤헤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유모는 미소 지었다. 아직 한없이 어리게 보이는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좋은 마법사님이네요.”

“유모?”

“어서 주무세요.”

유모가 칼리오페의 뺨에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은 꿈도 꾸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달칵, 문이 닫혔다.

칼리오페는 그대로 누운 채 숨을 죽였다. 속으로 천천히 삼십까지만 세려고 하는데 급한 마음에 계속 속도가 빨라진다.

‘……28, 29, 30!’

칼리오페는 벌떡 일어나 살금살금 창가로 다가갔다.

‘가셨을까? 가셨겠지…….’

제대로 된 배웅도 하지 않고 쫓아내듯 내보냈다.

‘적어도 눈이라도 마주칠걸.’

급한 마음에 그와 눈인사도 하지 못했다.

칼리오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미련이 남아 조심스레 커튼을 열었다.

‘……역시.’

예상했지만 실망감은 어쩔 수 없다.

광활한 하늘과 커다란 보름달, 쏟아지는 별빛이 빈 자리를 대신했다. 아쉬움에 칼리오페의 눈이 정원 구석구석을 바라보는데,

똑똑.

작게 두들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짓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가 이내 푸스스 웃으며 창에 바짝 붙어섰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는다.

칼리오페가 툭 이마를 기대자 아스타레아스 역시 이마를 유리창에 대었다. 차갑고 단단한 유리창에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눈을 마주치다가, 칼리오페가 하아, 하고 입김을 불었다.

[떠나신 줄 알았어요.]

슥삭슥삭 손가락으로 성에 위에 글씨를 쓴다. 아스타레아스가 재밌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사라져가는 글자와 성에 위로 아스타레아스 역시 입김을 불고는 글씨를 썼다.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가 글자 모양으로 선명해진다.

[아직 볼일이 남아서.]

볼일?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싱긋 미소만 지을 뿐 알려주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숨결을 하아, 불었다.

[통신 코드 알려주세요.]

아스타레아스가 적어준 통신 코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암기하고 있는데,

쪽.

아스타레아스가 유리창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숙여 칼리오페의 입술 바로 앞의 유리창에.

섬세하게 내리깔린 그의 속눈썹과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여 칼리오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말 닿은 곳은 입술이 아닌데, 마치 입술에 닿은 것처럼 입술이 화끈거렸다.

“굿나잇 키스.”

눈을 뜬 아스타레아스가 놀란 칼리오페를 보고 웃으며 입만 벙긋해서 소리 없이 말했다. 그의 긴 눈매가 휘는 모습과 등 뒤로 쏟아지는 별빛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잘 자요, 내 아가씨.”

소리 없이 속삭인 아스타레아스가 멀어졌다.

칼리오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화르륵, 얼굴이 불에 타는 것처럼 새빨개졌다.

“……!”

소리 없는 신음이 칼리오페의 입에서 나왔다.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누르는 데 아스타레아스가 창에 키스하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으아아아!’

칼리오페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콩콩 뛰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한참 어쩔 줄을 모르고 방방 뛰다가 창가에 남은 입술 자국이 보였다.

칼리오페는 한걸음, 창가로 다가섰다. 손자국이 남을까 봐 직접 만져보지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쓸어본다.

뺨에 깃든 홍조가 더 짙어진다.

스르륵, 칼리오페의 눈이 감겼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 자국이 남은 곳에 칼리오페의 입술이 닿는다.

단단하고 차가운 감촉.

이제 그가 남긴 온기는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칼리오페는 그의 따스함을 느꼈다.

조용히 심장이 울렸다.

칼리오페에게 오늘은— 이 밤은 몬스터에게 습격 당한 날이나, 한 때 가까웠던 이에게 모욕을 당한 날이 아니라.

설레는 아름다운 밤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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