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그래도 되는 사이
[파격과 파격과 파격! 파격 그 자체!]
[컴컴한 밤하늘을 비추는 별의 탄생!]
[제국을 휩쓴 노랫소리!]
신문에서는 연일 칼리오페에 관해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그런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건 역시 마음에 둔 남자가 있기 때문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과연 칼리오페의 남자는?]
[칼리오페 주변 남자들을 파헤친다!]
이런 가십류는 굉장히 잘 팔리기 때문에 너도나도 이러저러한 추측 기사를 내기 시작했다.
때를 맞춰 니카이논 사에서 레코드 사업을 정식 론칭했다.
첫 판매는 당연히 칼리오페의 레코드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노래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기회!]
칼리오페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구매 문의가 쇄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거 알아? 초회 한정판에 ‘성가 대 속가 경연’에서 부른 노래 영상이 들어있대!”
“뭐라고?!”
“어머, 이건 사야 해!”
정식 출시 상품 외에도 물밑에서 거래가 활발했다.
[비스 본신전 공연 가신 분들 중 리페 사진 직접 찍으신 분 없나요?]
[포토북 10년 치 모두 구해봅니다. 가격 선제시 하세요. 얼마든 삽니다.]
[이번 공연 말고 예전 공연도 영상 있다던데 혹시 가지고 계신 분?]
칼리오페가 입거나 착용한 것들은 당연히 연일 완판되었다.
저번에 한차례 ‘칼리오페의 난’을 겪은 상인들은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성난 소비자들에게 당해 ‘완판, 완판’ 하고 울 수밖에 없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러나 빛에는 그림자도 있는 법. 칼리오페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전에서 남녀 간의 사랑 노래라니……. 그런 엽색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전당에서 어떻게 그런……. 도가 지나치네요.”
육신의 본능과 욕망을 경계하고 영혼과 정신의 이상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게 보수적인 신자들의 생각이었다.
“신께서는 그 오만방자함을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과 궤가 달라요. 감히 그런 천박한 사랑에 대해 신전에서 노래하다니요.”
“그런 게 사교계에 유행한다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무려 신전에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사랑만 듬뿍 받고 자라서 분별이 안 서나 봅니다. 제가 하는 건 모두 박수칠 줄 아는 건지.”
“제가 투자하는 신문사에게 연락 좀 해봐야겠어요.”
“저도요.”
[천재 음악가 하르첸의 변절]
그런 제목으로 쓰인 사설은 현 상황에 대해 통탄할 일이라며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특히 하르첸 경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제도에서 열린 리사이틀을 강조해서 언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르첸은 정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제도에서 열린 그의 리사이틀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던가. 예술계의 빛이자 희망이며, 이 사회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 직후, 칼리오페 루스티첼과 만나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상과 진리 추구를 등지고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그는 더 이상 빛이 아니다. 오직 그의 제도 리사이틀만이 꺼지지 않는 잔열로 남아 안타까움을 더할 뿐.
그는 너무나 빨리 전설이 되어버렸다. 어서 빨리 그가 예전의 빛을 회복하길 바란다.
또,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 사회로부터 빼앗아간 빛을 어서 제자리로 돌려놓길 바란다.
“—라는 사설을 본 게 바로 어제였던 것 같은데요.”
칼리오페가 묘한 눈빛을 하며 아스타레아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는 오늘 자 신문이 들려 있었다.
열린 페이지는 기사 헤드라인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하르첸, “제도 리사이틀 곡은 모두 속가”]
칼리오페는 가늘게 눈을 뜨며 시침 뚝 떼고 있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이거 공자님의 작품이죠.”
확신이 담긴 질문이었다.
하르첸이 인터뷰를 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런 기사가 날 리 없다. 바로 어제 칼리오페를 비난하며 하르첸의 제도 리사이틀을 그리워하던 신문이 단 하루 만에 논조를 바꾸는 데에는—
‘외부 알력이 있어야지.’
아스타레아스는 답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아, 하고 깨달았다.
“레아스.”
“네.”
아스타레아스가 살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그 태도가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는 듯해서 칼리오페의 볼이 붉어졌다.
“이거 레아스의 작품이죠.”
“그저 사실을 흘렸을 뿐이에요.”
“흐음, 그저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요즘 신문사는 바로 논조를 바꾸나 보군요.”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니까요. 좋은 신문사죠.”
“그래요.”
칼리오페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픽 웃었다.
뭐, 오늘 아침 이 기사를 보고 혼비백산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어딜 가나 시선과 질문이 쏟아져서 힘들어요. 예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런 대단하신 스타의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다들 사랑 노래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난리인데.”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그를 슬쩍 흘겨 보았다.
“나도 궁금한걸.”
아스타레아스가 답을 재촉했다.
“치, 알고 있잖아요.”
“모르겠는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마주하는 시선에서 달큼한 냄새가 났다.
말을 주고 받으며 어느 순간 마주 잡은 손이 뜨거웠다.
아스타레아스 덕분에, 칼리오페는 노래에 배어있던 어두운 감정을 극복해냈다. 깊게 배인 슬픔과 비탄, 절망과 상실을 걷어낼 수 있었다.
사랑과 희망과 설렘을 노래하는 것은 칼리오페가 잘 모르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를 알게 되고 모든 것이 변했다.
그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며. 애타고 설레고, 좋았다가 밉고, 밉다가도 다시 좋고 그런 수많은 감정을 맛보며.
“당신이요.”
칼리오페는 변했다.
“당신한테 부른 노래예요.”
“…….”
아스타레아스는 답이 없었다.
그는 칼리오페와 마주하던 시선을 살짝 빗기고 입매를 가렸다. 조금 곤란하고 난처한 표정.
‘왜 그러지?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덜컥 겁이 나는 순간 아스타레아스의 뺨이 붉어진 게 보였다.
‘으응?! 설마 지금 레아스 얼굴…… 붉어진 거야?’
확실히 붉어졌다. 그걸 깨닫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자, 그럼 어서 연습해볼까요!”
칼리오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아노 쪽으로 다가가려는데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칼리오페는 다시 아스타레아스의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레아스?”
“연습 꼭 해야 하나.”
“그럼 안 해요? 우리 연습하려고 만난 거잖아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닌데.”
“네……?”
“그냥 만난 건데. 만나고 싶어서.”
속삭이는 듯한 말에 칼리오페의 뺨에 노을 같이 은은한 물이 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우리 이제 아무 이유 없이, 아무 핑계도 없이 만날 수 있는 사이 아닌가. 난 그러고 싶은데.”
“아…….”
칼리오페는 차마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내렸다. 귓가가 뜨거웠다.
“그래도…… 되는 사이지요.”
내뱉고 나니 왠지 벅차올라 칼리오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 사람이랑 정말로 특별한 사이가 됐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러면 나갈까요?”
“네?”
“데이트하러.”
* * *
칼리오페는 화려하게 빛나는 의상실 내부를 보고 기가 질리는 느낌을 받았다.
호화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호화의 극치였다. 천장에서부터 물방울 형식으로 내려오는 장식물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크리스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였다.
다이아몬드가 반사한 무지개빛 빛무리가 고인 바닥은 마법처리를 마친 대리석이었다. 마법처리한 대리석은 워낙 비싸 황궁에서도 본궁 정도에만 쓰고 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화려한 장식이 가득했는데 이 모든 게 조화롭고 세련되게 배치된 게 놀라웠다.
물품을 판매하기 위한 의상실이 아니라 내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
‘과연 듀레밀.’
칼리오페도 이 의상실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듀레밀은 아무나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 오죽하면 ‘중앙에 진출한 후 할 일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이고 그 후에 할 일이 듀레밀의 손님이 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을까.
황제와 독대하는 영광을 얻는 것보다 듀레밀의 손님이 되는 게 어렵다는 우스갯소리였다.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이야…….’
루스티첼 가의 위상이 높아졌고 칼리오페 본인의 가치도 대단하니 원한다면 들어올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칼리오페도, 루스티첼 부인도 사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와볼 생각도 못 했다.
“여기 오는 게 레아스가 하고 싶은 일이예요?”
듀레밀은 원체 손님을 가려 받는지라 보통 때도 손님이 거의 없다. 그런데 지금은 문밖에 서 있는 가드가 아예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오늘 영업은 종료한다는 안내판—안내판 주제에 엄청나게 화려했다—까지 세워놨고.
변장 안 하고 밖에서 데이트하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긴 했다.
“정확히는 당신에게 돈 쓰는 일이죠.”
“네?!”
생각지도 못하는 말에 칼리오페가 황당하단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알다시피 나 돈이 좀 많거든요. 한 번 날 파산시켜봐요.”
파산시켜달라는 게 첫 데이트의 요구라니.
아스타레아스의 여자친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 걸 왜 하고 싶은데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대답 없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참 이상한 바람이었다.
칼리오페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원래 취향은 이해하는 게 아니다. 존중하는 것이지.
‘뭐, 특이한 취향은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거니까.’
칼리오페는 애써 연인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쨌든 첫 데이트인 상황에서 연인의 첫 리퀘스트다.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주는 게 도리였다.
* * *
“괜찮네요. 다음 건?”
커튼이 열리고 칼리오페의 모습이 드러나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갈아입어요?”
“날 파산시켜보라고 했잖아요.”
칼리오페가 새처럼 입을 작게 비죽였다.
아스타레아스의 리퀘스트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칼리오페는 각오한 것보다 더 큰 노력을 해야 했다.
수없이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는 것은 예사고 옷뿐만 아니라 구두, 헤드 드레스,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등등 옷과 어울리는 수많은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도와주는 직원들의 손길이 워낙 능숙하고 정중해 갈아입기 수월했지만 그래도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레아스도 반응 없고.’
아까부터 괜찮다는 말과 그 다음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별로인 걸까…….’
남자친구와 같이 의상실에 왔다.
‘잘 어울린다는 말 정도는 듣고 싶었는데…….’
시무룩해진 칼리오페가 슬쩍 아스타레아스를 살폈다. 소파에 기대앉아 긴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이 화보 같았다.
칼리오페는 포르르 그에게 다가갔다.
직원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나 별로예요?”
“응?”
“잘 안 어울려요? 파산은커녕 한 벌도 못 살 정도예요?”
아스타레아스는 “아까부터 다음 거 입으라는 말만 하고—” 하고 꿍얼거리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숨결이 그의 귓가에 닿았다. 시무룩하기도 하고 심통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에게 팔을 뻗었다.
“꺅!”
갑자기 아스타레아스가 끌어당기는 바람에 칼리오페는 그대로 소파 위로 쓰러졌다.
정확히는 소파 위인지, 아스타레아스 위인지 모를 곳으로.
“너무 자극하지 말아요. 아까부터 계속해서 참고 있으니까. 물론 지금도.”
“네?”
“예뻐요, 당신.”
코앞에 있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에 칼리오페는 숨을 삼켰다.
“이대로 납치해버리고 싶을 만큼.”
아스타레아스의 목소리에는 마력이 있어서 그 마력으로 살갗을 간질이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오싹할 리 없으니까.
칼리오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아스타레아스는 열이 올라 더 붉어진 도톰한 입술을 바라봤다. 살짝 벌어져서는 색색이는 따뜻한 숨을 내뱉는 입술이 그의 입술 근처에 있었다.
“리페.”
그가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칼리오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왜인지 아스타레에스에게 사로잡힌 것처럼 그의 두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직원들이 몇 명이나 대기하고 있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잊혔다. 내리깔린 아스타레아스의 긴 속눈썹이 치명적이었다.
그가 칼리오페 가까이로 얼굴을 조금 더 내렸다. 코끝이 스쳤다.
그 순간,
“오늘 영업은 끝났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입구 쪽에서 소란이 들렸다. 칼리오페는 재빨리 팔을 짚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서모나님……!”
“끝나긴 무슨. 안에 내 친구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말소리와 함께 힐데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삐딱한 웃음을 머금었다.
“거봐.”
힐데르트의 눈길에 그를 말리던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칼리오페 앞에서는 조금 달랐지만, 힐데르트는 힐데르트였다.
대명문 서모나 가의 외아들이자 후계, 열여덟이 된 올해 단번에 관료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천재, 오만하고 귀족적이기로는 둘째가라 하면 서러운 존재.
그가 바로 힐데르트였다.
* * *
“열어.”
듀레밀 앞을 지키고 있던 가드는 영업 종료라는 팻말에도 거침없이 명령하는 힐데르트의 모습에 당황했다.
영업이 종료됐음을 정중하게 알리는데도 힐데르트는 눈썹만 까딱하고는 제 손으로 직접 문을 열었다. 가드는 힐데르트의 몸에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그저 따라가면서 말리는 수밖에.
또 아스타레아스와 힐데르트가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오늘 듀레밀에 손님은 우리 둘뿐인 줄 알았는데.”
아스타레아스의 나긋한 목소리에 듀레밀 직원들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우리 둘?”
힐데르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리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삐딱하게 물었다.
“응, 우리 둘.”
아스타레아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는 힐데르트의 섬세한 눈매가 움찔 떨렸다.
“언제 그렇게 리페랑 친해졌어?”
“글쎄.”
힐데르트는 아스타레아스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았다.
힐데르트가 본 것은 아주 단편적인 몇몇 상황뿐임에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와 이야기할 때는…… 사람 같으니까.
살아있고, 숨을 쉬고, 좋고 싫은 게 있고, 의지가 있는—
‘그냥 사람.’
힐데르트는 아스타레아스를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 셋뿐인 친구 중 하나니까. 에피니, 유리안 그리고 아스타레아스.
그러니 아스타레아스를 사람으로 만드는 존재가 칼리오페라면 두 사람의 관계를 응원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힐데르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 칼리오페가 친구가 아닌 이유 때문에.
단 한 번도 얘기해본 적 없지만 아스타레아스 역시 그 이유를 알 거다.
힐데르트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칼리오페를 눈에 남았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지금 이 순간에 조차 가슴이 지끈거렸다.
역시 칼리오페를 포기할 순 없다.
아직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면—
“이 쇼핑에 내가 껴도 괜찮겠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힐데르트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에피니와 힐데르트 그리고 유리안과는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넷만의 추억과 기억, 넷만의 비밀도 많았다. 많은 것을 공유했다.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칼리오페는 힐데르트가 언제 처음으로 젖니가 빠졌는지도 안다.
‘만약 힐데르트에게 연인이 생겼는데 그걸 비밀로 한다면…….’
섭섭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하물며 힐데르트는 아스타레아스와도 절친한 친구였다.
“힐데 오라버니.”
“지금 입고 있는 옷 예쁘네. 무척 잘 어울려.”
“아, 감사해요.”
자동반사적으로 예의 바르게 답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힐데르트가 가늘게 웃었다.
“내가 사줄게.”
“네?”
“선물하고 싶어서.”
“아니요, 괜찮—”
“이 옷은 내가 사주기로 한 거여서 말이야.”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곱게 접으며 끼어들었다. 그러며 은근슬쩍 칼리오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칼리오페가 그의 손에 이끌려 가는데 탁, 하고 다른 쪽 손목이 잡혔다.
‘……?’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의 손목을 쥔 채 특유의 오만한 눈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는 청량한 미소로 그 눈빛에 답했다. 어찌나 청량한지 상냥해 보이는 미소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먼저 사준다고 했다니 어쩔 수 없지.”
힐데르트가 아스타레아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대충 벽면을 가리켰다.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포장해.”
“예, 서모나님.”
직원들은 이 초유의 사태에 당황했으나 프로답게 내색하지 않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선 아무 장식도 달리지 않은, 집에서 편하게 입는 원피스가 천만 운드가 넘었다. 그리고 그런 건 벽면에 내놓지 않는다.
마치 예술처럼 인테리어의 일부가 되어 의상실을 장식하고 있는 드레스들은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토파즈와 루비 등 온갖 진귀한 보석들이 섬세하게 자수처럼 놓여 있었다.
한 벌에 집 한 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드레스 몇 벌이 힐데르트의 손짓 한 번에 포장되기 시작했다.
물론 벽면에 전시되어 있는 건 드레스만이 아니었다. 드레스와 걸맞는 장신구와 양산 등등이 함께였다.
아스타레아스가 후, 하고 작게 웃었다. 미려한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며 보는 사람이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달콤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푸른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느긋하게 보고 싶었는데. 친애하는 친구가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아스타레아스가 딱, 소리 나도록 손가락을 튕겼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들고 있던 마도구를 조작했다.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드레스를 비롯한 듀레밀의 판매 품목이 비쳤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빼고 다 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카스틸로님.”
직원들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힐데르트와 아스타레아스가 산 것만으로 매출이 천 억대가 나왔다.
양손을 각각 잡힌 채 칼리오페는 조금 냉정한 눈으로 두 남자를 바라봤다.
‘대체 이 두 사람 뭐 하자는 거지……?’
칼리오페는 차마 상스러워서 입에 담지 않았지만, 민가에서 이걸 어떻게 부르는지는 알았다.
돈지랄이라고.
* * *
“힐데 오라버니.”
“응?”
“포장한 것들 전부 다 여자 건데 설마 오라버니께서 사용하실 거예요?”
아스타레아스가 의상실을 통째로 빌리며 했던 말 때문에 오늘 듀레밀에선 오직 칼리오페에게 맞는 것만 전시해놓고 있었다.
여자 옷을 입을 거냐는 말이라 힐데르트는 피가 식었다.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그런 오해를 살 순 없다.
“아니! 내가 드레스를 가져서 뭐 해.”
“그럼 왜 사신 거예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힐데르트는 잠시 침묵했다.
평소라면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대강 말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가 버티고 있는데 그럴 순 없었다. 칼리오페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힐데르트는 산호빛 눈동자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너 주려고.”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말인데도 진심을 가감 없이 칼리오페 앞에 드러낸 게 처음이라 입안이 바싹 말랐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전 이만큼 많은 드레스는 필요 없어요. 장신구도 마찬가지구요.”
칼리오페는 허리에 손을 얹고 힐데르트를 책했다. 힐데르트는 얌전히 혼났다.
듀레밀 직원들은 대명문 서모나 가의 오만한 도련님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혼나는 모습에 내심 놀랐다.
“레아스.”
마치 다음 차례는 당신이라는 듯, 아스타레아스를 부르는 칼리오페의 목소리엔 책망이 담겨 있었다.
“난 아직 파산 안 했는데요.”
아스타레아스가 사르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애교라도 부리듯 눈매가 달콤하게 휘며 붉은 입술이 길게 늘어난다.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은 꿀이 떨어질 것 같았다.
지켜보던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왠지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뺨이 붉어졌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겐 해당 사항 없는지 여전히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할 말을 이어나갔다.
“파산하지 않았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죠. 전부 다 사는 건 과소비예요.”
“그래서 몇 개 뺏잖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레아스가 산 걸 보세…….”
홀로그램을 눈짓하던 칼리오페는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아스타레아스가 제외했던 품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옷깃 장식으로 모양이 예쁘게 잡힌 빳빳한 레이스를 사용한 드레스, 진주 브로치와 진주 허리띠. 아스타레아스가 왜 제외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가 붉은데.]
[옷깃이 이렇게 빳빳한 레이스로 되어 있으면 피부에 쓸려서 아프더라고요. 까슬까슬하고.]
일이 년 전, 어느 때인지도 생각 안 나는 때 주고 받았던 대화다. 칼리오페가 예전에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제외한 것이다.
진주는 물거품에서 태어난 님프가 다섯 명의 연인을 동시에 사귀었다는 전설 때문에 연인에게 선물하면 바람을 핀다는 속설이 있었다.
‘레아스는 그런 속설 따위 믿을 것 같지 않은데.’
기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속설이었다. 연인이 바람을 피고 난 후에야 ‘그때 진주를 선물해서 그런가.’ 하고 한탄하는 정도일 뿐.
왠지 굉장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자 그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칼리오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칼리오페는 큼큼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여하튼, 과소비는 좋지 않아요.”
“과소비 아닌데.”
“지금…… 단번에 천억을 쓰고 과소비가 아니라고요?”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매끄럽게 대답했다.
“당신에게 돈 쓰는 게 왜 과소비죠? 다른 데도 아니고 당신에게 쓰는 거라면 아무리 써도 써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고작 물질적인 것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아스타레아스는 이 땅의 모든 금과 다이아몬드를 칼리오페 앞에 바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입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을 자신으로 채우고 싶었다. 옷 몇 벌 산 것 가지고는 하나도 만족스럽지 않다.
‘정말로…… 이대로 납치하고 싶네.’
그는 나른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까 납치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칼리오페는 그저 농담으로 생각한 듯 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자신이 칼리오페를 위해 사들이고 꾸민 저택에서 오직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옷을 입히고 그녀의 입맛에 맞춘 요리를 먹여주고 싶다.
그녀의 생활과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제 손길이 닿았으면 좋겠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런 집착적인 마음을 깊숙이 감춘 채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도 생각해야죠.”
뜬금없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이 옷도 결국 누군가에게 입혀지기 위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당신이 입어주면 옷에게도, 디자이너에게도, 파는 사람들에게도 영광이지.”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듀레밀 직원들은 티 내지 않았지만 공감의 눈빛을 보냈다. 만약 그들이 다른 의상실의 직원이었다면 이 대화에 끼어들며 격하게 동의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칼리오페에게 옷을 갈아입힐 때마다 정말 행복했다. 뭐든지 다 소화를 잘 해내니 꾸미는 기쁨이 있었다.
‘이 두 개는 절대로 같이 착용 못해!’ 하는 것조차 칼리오페는 기가 막힐 정도로 조화롭게 소화해냈다. 그러다 보니 패션업계 종사자로서의 영혼이 불타올라 판매를 위해 입히는 건지,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입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5분도 안 돼서 기록적인 매출을 올리긴 했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갈아입혀 드리지 못하잖아…….’
이왕 살 거 좀 다 입어보지.
듀레밀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매일 칼리오페의 옷 입는 걸 도와줄 루스티첼 저의 고용인들이 부러울 정도였다.
“정말 말은 잘 하시네요.”
칼리오페가 한숨을 훅 쉬며 말했다.
솔직히 남자친구에게 듣는 칭찬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부끄러웠다.
아스타레아스가 너무 진심처럼 말해서 칼리오페는 차마 직원들 쪽으로 시선을 줄 수 없었다.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왠지 울적해졌다.
힐데르트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스타레아스는 아주 대놓고 칼리오페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끊기 위해 그는 다급히 칼리오페를 불렀다.
“리페.”
“네?”
의아한 산호빛 눈동자를 보며 힐데르트는 결심을 마쳤다.
“과소비는 잘못했어. 하지만 나 너한테 옷 사주고 싶은데.”
당당히 던진 돌직구에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아스타레아스는 둘째치고 대체 힐데르트까지 왜 이러는 걸까.
‘설마 지금 열여덟 살 명문가 자제들 사이에서 파산 놀이가 유행인가.’
누가 더 많이 쓰나 이런 걸로 자존심 대결하나. 하지만 힐데르트도, 아스타레아스도 그런 겉멋 든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안돼?”
항상 오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던 힐데르트의 눈동자가 유순하게 둥글어졌다. 자색 눈동자에 간절함이 사뭇 담겨 반짝이는 게 멍뭉이 같았다.
칼리오페에겐 익숙한 눈망울이었다. 갑자기 겹쳐 보이는 가족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답했다.
“안 될 건 없지만…….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싫어?”
반짝반짝. 울망울망.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의 눈망울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에 움찔했다.
‘이건 과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반짝반짝.
‘그, 그래야 하는데…….’
울망울망.
십 년 넘게 힐데르트를 봐왔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싫다고 말하면 상처받을 게 뻔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찔리는 게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랑 사귀는 걸 아직 말하지 못 했다는 게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말했다.
알게 되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얼마나 서운해할까.
‘그렇다고 힐데 오라버니에게만 받을 수도 없고, 레아스에게만 받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이번만이에요.”
결국 두 남자의 미인계와 반짝울망 공격에 칼리오페는 굴복했다.
그리하여 칼리오페의 집에는 천억 운드어치의 드레스와 장신구가 배달되었다.
루스티첼 저가 뒤집어진 건 당연한 결과였다.
* * *
쇼핑인지 돈지랄인지를 마친 그들은 티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에게 지금 아스타레아스와 자신의 관계를 밝혀야 하는지, 아니면 에피니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밝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말하면 에피니가 서운해할 것 같고, 나중에 말하면 힐데르트가 그때 모른 척한 거냐며 섭섭해할 것 같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는데.
“……이게 다 뭐예요?”
테이블 한가득 온갖 디저트가 펼쳐져 있었다.
진한 초콜릿 크림에 각각 아몬드, 헤이즐넛, 산딸기, 호두, 마카다미아를 넣어 만든 가나슈. 향긋한 얼그레이 크림과 피스타치오 크럼블이 어우러진 시폰 케이크. 봄에 어울리는 과일들로 장식된 크루아상은 버터를 가득 넣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각종 디저트가 섬세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모를 정도였다.
“여기 맛있어.”
“너무 말랐으니까 많이 먹어야 해요. 난 당신이 맛있게 먹을 때 보기 좋더라.”
“…….”
이건 다 못 먹는다.
칼리오페는 차가운 눈으로 두 남자를 바라봤다.
왠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두 사람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오늘 참 여러 번 냉정해지는 것 같다.
“분명히 조금 전에 의상실에서 과소비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칼리오페는 다시 한 번 남자들 사이에서 파산 놀이가 유행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을 느꼈다. 하지만 일전에 주변 영애들이 이야기했던 말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어떤 영식이 한 영애에게 ‘내가 투자한 게 얼만데 당연히 나와 만나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화를 냈다고 했다.
또 유행이 지나서 이제 염가로 팔리는 액세서리를 이 비싼 걸 널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며 내민 적도 있다고 한다. 도저히 신사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근데 파산 놀이가 유행이 아니면 대체 이 두 사람은 왜 이러는 거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이런 소비 행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해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아시는 분들이니까.”
칼리오페의 서늘한 말에 아스타레아스와 힐데르트가 움찔했다.
“후……, 두 분이 어떤 식으로 본인의 돈을 쓰시든 저와 상관없지만.”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리며 한숨처럼 하는 말에 두 사람 모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상관 없다는 말이 그 무엇보다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그냥 당신에겐 뭐든 다 해주고 싶었어.”
아스타레아스가 서둘러 사과하며 “옷 입은 모습이 예뻐서 안 사고 배길 수 있어야지.” 하고 덧붙였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진지했다.
그는 뭐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칼리오페가 싫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렁이 담 넘듯 슬쩍 지나가지 않고 진지해지는 게 좋았다.
칼리오페는 용서를 구하는 푸른 눈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
힐데르트는 그런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 먼저 가볼게.”
“네?”
갑작스러운 말에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일이 있는 걸 잊고 있었어.”
“저기, 힐데 오라버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힐데르트를 보고 칼리오페가 서둘러 그를 불렀다.
“저어—”
하지만 막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아직 힐데르트에게 아스타레아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말해야 하나? 아니면 역시 에피니 언니와 다 같이 있을 때……?’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알 수 없었다.
힐데르트는 망설임이 가득한 칼리오페를 보고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었다.
그리고 마구마구 흐트러트렸다.
“……?”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루시우스나 로베르트, 호르세안이면 몰라도 힐데르트가 이런 식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진 적은 없었다.
깜짝 놀라 크게 뜨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산호빛 눈동자를 보고 힐데르트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제길. 왜 이런 때까지 예쁜 거야.’
차였는데.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 번 전해보지 못하고 차였다.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의 머리를 꾹 눌렀다. 도저히 저 눈을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푹 숙인 칼리오페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힐데르트는 충동적으로 입술을 내렸다.
차마 칼리오페에게 직접 키스하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누른 제 손등에.
입술에 닿은 것은 자신의 손등일 뿐이다. 그런데 손바닥 아래로 칼리오페의 동그란 정수리가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술렁거렸다.
깊이 입술을 묻었다가 손과 함께 휙 떼어냈다.
사실은 절대 떼고 싶지 않았다.
“나 급해서 가볼게.”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대로 프라이빗룸을 나갔다.
칼리오페가 따라서 일어나려는데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이었다.
“가지 마.”
왜일까.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애절해 보였다.
“여기 있어요.”
“…….”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닫힌 문에 한 번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힐데르트가 떠난 건 아무래도 잊었던 일이 생각나서 나간 느낌이 아니었다.
“혹시 힐데 오라버니가 우리 사이를 눈치챈 걸까요?”
아스타레아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른다.
“그게 중요해요?”
청명한 눈동자가 깨끗하고 푸르게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당신에게 중요하냐고.”
칼리오페는 대체 아스타레아스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하죠?”
칼리오페의 말에 그녀의 손을 쥔 아스타레아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힐데 오라버니는 제게 무척 소중한 사람이에요.”
말을 하며 힐데르트를 떠올린 칼리오페는 미안함에 눈썹을 늘어트렸다.
“입장을 바꿔서 힐데 오라버니가 제게 비밀로 하고 연인을 사귀었다면 서운할걸요. 전 지금 힐데 오라버니에게 그런 상처를 준 거잖아요.”
말을 하면 할수록 칼리오페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심지어 마주쳤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상대마저 자기와 친한 친구고.”
아스타레아스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알고 있다.
칼리오페는 한 번 마음 안에 들인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결코 배신하지 않고 올곧은 마음으로 상대에게 진심을 다한다.
‘소중한 ‘친구’인 힐데르트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칼리오페의 그 상냥함과 성실함, 신의와 진정이 힐데르트에게 가장 잔혹하다.
아스타레아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힐데는 지금은 우리 둘 다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
칼리오페는 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다. 힐데르트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갔는데 그걸 억지로 붙잡는 건 실례다.
하지만 힐데의 상처를 모르는 척할 순 없었다.
“나중에 저 제대로 사과할 거예요.”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결심으로 단단한 칼리오페의 눈을 보며 아스타레아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래서 힐데르트도 칼리오페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질투가 나.’
아스타레아스는 시꺼먼 마음을 옅은 웃음 아래 감췄다.
‘나 정말 못된 사람이네.’
그걸 깨닫는 동시에 칼리오페가 자신에게 얼마나 깊게 박혀 들었는지 깨달았다.
칼리오페의 시선과 마음 한 자락도 아까워 뱃속에 흑심을 품는 게 과연 정상일지. 다른 사람이 칼리오페의 매력을 아는 것조차 이다지 마음에 걸리다니.
‘이런데 어떻게 거리를 둘 생각을 했을까.’
오만했다.
만약 정말로 칼리오페가 멀어졌다면 자신은 미쳐버렸을 것이다.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다.
칼리오페가 알면 도망갈까 두려워 아스타레아스는 꽃잎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미소로 본심을 감췄다.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며 춘풍처럼 나긋하게 속살거렸다.
“그래요 나중에. 지금은 나랑 있으니까 날 봐요.”
긴 손가락이 흐트러진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우리 첫 데이트잖아.”
칼리오페는 잠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르트에게 미안하다고 아스타레아스와의 데이트를 망칠 순 없었다. 힐데르트가 데이트에 끼어든 순간부터 아스타레아스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런데 힐데 오라버니는 우리가 듀레밀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듀레밀 같은 고급 의상실은 손님의 개인정보를 절대 풀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관계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가 듀레밀에 있다는 걸 알 리 없다.
“아마도 러그윈을 봤겠지.”
듀레밀 근처에 있는 러그윈을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인사를 겸해 들리려 하는 걸 러그윈이 제지했을 것이고.
‘들어가는 걸 말리는 이유를 추측했겠지. 힐데르트는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까.’
그 말을 듣곤 칼리오페는 조금 걱정이 됐다. 아스타레아스와 연인 관계라는 게 알려지면 어쩌지.
‘분명 공자님한테 피해가 갈 텐데.’
“걱정하지 마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달콤한 케이크를 먹여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칼리오페가 안전하게끔 지킬 것이다.
자신을 노리는 황제의 마수가 칼리오페에게 닿지 않도록, 자신의 반역에 칼리오페가 연루되지 않도록.
“아니, 제가 문제가 아니라 공자님이 곤란해지시잖아요.”
칼리오페의 다정한 염려에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그럼 당신이 날 지켜줘요.”
“네, 꼭 지켜드릴게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아스타레아스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내리눌렀다.
아스타레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칼리오페는 그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지킬 수 있을지.
황제가 선황제의 독생자인 아스타레아스를 견제하는 건 칼리오페도 잘 아는 일이었다.
‘에피니 언니는 은패의 문양을 비스 신관에게서 봤다고 했어.’
자신 때문에 아스타레아스에게 비스 신전의 화살이 향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비스 신전은 계속해서 이 대결 구도를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에요.”
“유월이 되면 또 경연을 한다고 했죠.”
지금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열기를 이어나가겠다는 생각이 엿보였다.
“네, 고아원에서요.”
“신전에서 했던 첫 공연은 경연이 아니었지만 따지자면 신전이 진 것과 다름없죠.”
아스타레아스는 가나슈를 떠 칼리오페의 입에 넣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상 두 번 공연해서 두 번 연달아 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계속하려고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선전을 위해서겠죠.”
칼리오페가 오물오물 케이크를 삼키곤 답했다. 혓바닥에 감기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비스 신전을 향한 여론이 바뀌고 있는 게 그 증거죠.”
신전의 경연이 주목받으면서 덩달아 신전 역시 각광 받기 시작했다.
신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비스 성가대의 신성한 일루젼은 본신전에 있던 사람들을 비롯해 중계를 보던 사람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예전에 비스 신전이 일으켰던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꺼렸던 사람들도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문제가 됐던 대신관은 비스 신전 쪽에서 먼저 파면을 요구했고, 바뀐 신전이 이렇게 좋은 경연을 주관하는 것이다. 비스 신전이 전처럼 어린 소녀를 핍박한다면 이런 공연을 열 리 없다는 게 대중의 생각이었다.
또, 다른 신전 행사와 달리 신관이 사회를 맡지 않고 전문 사회자가 진행을 맡은 것 또한 좋은 수였다. 엄숙하거나 딱딱하지 않고 위트 있고 발랄한 진행이 축제에 온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네, 전과 달리 대중에 친화적이고 친숙한 느낌으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어요.”
“이미지 쇄신…… 아니 세탁이 더 옳은 말이려나요.”
아스타레아스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도 이미지가 중요하다. 하물며 신전은 오죽하겠는가. 벌써 사람들은 비스 신전에 우호적으로 변했다.
그중에는 ‘칼리오페의 공연을 보게 해준 비스 신전에게 감사하다.’ 라는 사람도 있었다.
실상을 알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실상과 다르다.
“계속해서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개최하면 더더욱 열기가 과열되겠죠.”
“비스 신전은 그 열기를 고스란히 가져가려 할 거구요.”
즉, 칼리오페가 경연을 하면 할수록 비스 신전은 이득을 얻는다.
그렇다면 경연을 그만둬야 하는가?
“난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이건 둘도 없는 기회니까.”
열두 살부터 지금까지 칼리오페는 3년 간 사람들 앞에서 속가를 노래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신전에서 공연한 것이 그녀의 3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효과적이었다.
상류 사회에 속가를 유행시키기 위해선 신전 공연보다 더 완벽한 기회는 없다. 이 기회를 잘 살린다면 신전 쪽에서 문화와 시류를 선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신전의 세를 낮추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위험은 감수해야 해.’
아스타레아스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각오를 단단히 마친 산호빛 눈동자가 그에겐 너무나도 눈부셨다.
결코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정면으로 부딪친다. 말은 쉽지만 인생을 살면서 그러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응, 내가 당신을 응원할게요.”
칼리오페는 두 손을 마주 잡으며 웃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순간 숨을 삼켰다.
햇살이 스미는 것같이 따스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갑자기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 위해선—”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의 시선이 마주쳤다.
“계속 이겨야 해요.”
“계속 이겨야 하죠.”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그게 바로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전제 조건이다.
단 한 번도 지면 안 된다.
신전은 져도 얻는 게 있다.
지금도 이미지를 세탁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계속 하향세를 타던 기부금이 처음으로 상향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이겨야만 원하는 것을 얻어갈 수 있다.
지면 아무것도 없다.
지는 순간, 경연을 통해 쌓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투표를 마법사들이 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전에서는 대규모 단위의 투표를 일시에 취합할 기술이 없다. 그래서 마법사들에게 의뢰했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칼리오페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무 대가도 없이 능력 있는 자들에게 스티그마를 개방한 것. 그것만으로도 칼리오페는 마법사와 기사에게 엄청난 존경과 경외를 받았다.
칼리오페가 스티그마를 개방하고 난 후 마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이길 거예요. 당신의 노래는 내 마음을 움직이니까.”
칼리오페는 확신을 담은 아스타레아스의 어조에 설핏 웃었다.
“하지만…… 조금 힘들지도 몰라요.”
칼리오페가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다. 아스타레아스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곧 성녀가 나타날 거거든요.”
“성녀 말이죠.”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에 심어둔 눈과 귀를 통해 그 역시 성녀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 여자는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데.”
“없을 것 같다고요?”
“아니, 움직일 수 없어요. 내 마음을 움직이는 건 당신뿐이니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뺨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치, 하고 아스타레아스를 흘기면서도 얼굴을 붉히곤 사르르 웃었다.
“계속 이기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하고 운을 뗀 그녀가 말했다.
“저쪽은 져도 얻어가는 게 있는데 단순히 신전이 사회를 주도하는 걸 막는 것만으로 끝내면 아쉽죠.”
이기는 것에만 집중해서 다른 곳엔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신전의 계획을 역이용할 거예요.”
칼리오페가 말하는 순간. 아스타레아스는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챘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생각이에요. 정말이지 당신의 지략과 대담함에는 매번 놀라네요.”
칼리오페는 헤헤 웃었다. 아스타레아스가 동의하자 기분이 좋았다. 그와 이야기할 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해서 좋다.
“역공을 해도 어쨌든 대전제 조건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단 한 차례도 지면 안 돼요. 그러기 위해선 일단—”
“그것도 중요하지만.”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칼리오페의 입에 과일을 넣어주었다.
“지금은 나랑 하는 데이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줘요.”
아스타레아스가 애원하듯 말했다.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터졌다.
마치 아스타레아스와 함께하는 시간처럼.
* * *
“뭐야, 진짜.”
에피니는 수건으로 대강 땀을 닦으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살롱 스티그마에서 수련 중이었는데 힐데르트가 찾아온 것이다. 배리어를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집중이 다 깨져 엄청 짜증 났다.
오러를 모을 땐 고도의 집중 상태에 빠져드는데 이때 방해당하면 정말 열 받는다. 그 집중을 깨도 되는 사람은 칼리오페뿐이다.
‘리페도 아니고 힐데 따위가 날 방해하다니.’
같이 수련하던 로베르트 역시 짜증 난다는 얼굴로 힐데르트와 에피니를 바라봤다.
에피니는 ‘왜, 뭐, 왜’ 하는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쏘아보곤 배리어 밖으로 나갔다. 로베르트도 따라 나와 샤워실로 향하는 걸 보니 집에 돌아갈 생각인가 보다.
‘하긴, 오늘은 공쳤지.’
누구 씨 때문에.
배리어 안에 로베르트와 자신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힐데르트를 보는 에피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야, 내가 한두 번 말해? 좌선하고 있을 땐 절대 방해하지 말랬지! 한 번 깨지면 다시 집중할 오러가 없어서 오늘은 나가리라고! 조금만 더 하면 벽을 깰 수도 있었는데…….”
다다다 쏘아붙이던 에피니의 입이 다물렸다.
힐데르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라면 이때쯤 ‘아, 됐고.’ 하면서 지 할 말만 했을 오만한 놈인데.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부답인 모습이 그답지 않았다.
“너…… 왜 그래?”
고개를 든 힐데르트의 얼굴을 본 순간, 에피니는 답을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알았다.
“어휴, 이리 와.”
에피니는 힐데르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휴게실로 갈까 하다가 아예 살롱 스티그마 밖으로 나왔다.
파트리유 거리에는 오늘도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활기차고 쨍한 소음 사이를 두 사람은 말없이 묵묵히 걸었다.
앞선 에피니가 힐데르트의 손목을 잡아끈 채로.
* * *
파트리유 거리를 벗어난 에피니는 좁은 골목길로 빠졌다.
힐데르트는 이런 곳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안은 칼리오페로 가득 차서 그녀밖에 안 보였다.
에피니가 멈춰 서고 나서야 힐데르트는 그들이 우거진 나무 사이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
힐데르트의 손목을 놓은 에피니가 나무에 걸린 포댓자루를 눈짓했다.
무력과는 거리가 먼 힐데르트도 그게 무슨 용도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그는 에피니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봤다.
‘나보고 저걸 치라고?’
눈에 빤히 보이는 의문인지 경악인지에 에피니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는 에피니의 비밀 기지였다.
아무도 모른다. 형제들도, 심지어 칼리오페마저도.
칼리오페가 궁금하다고 하면 당연히 데려올 거지만 먼저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리페에게 이런 폭력적인 곳을 나서서 보여줄 순 없으니까.’
칼리오페는 예쁘고 좋은 것만 봐야 한다는 게 에피니의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원래 에피니는 힐데르트를 이곳에 데려올 생각 따윈 없었다. 순간의 충동이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벌써 후회 중이었다.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샌드백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힐데르트를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뭐해? 때려.”
본래 맨주먹을 쓰는 건 기사인 에피니는 하지 않는 짓이었다. 하지만 스트레스 풀이엔 이만한 게 없다.
힐데르트는 갑자기 저를 이런 곳에 데려와 폭력을 조장하는 에피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에피니의 종용에 힐데르트는 어색하게 툭, 하고 포댓자루를 때렸다. 말이 때렸다는 거지, 엉성하게 쥔 주먹을 갖다 댄 꼴이었다.
에피니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지켜볼 뿐이다.
툭, 힐데르트의 주먹이 한 번 더 포댓자루를 때린다.
대체 왜 에피니는 이런 걸 시키는가.
대체 왜 나는 시키는 대로 여기서 포댓자루를 때리고 있는가.
툭, 툭.
어째선지 힘없이 내리치던 손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툭— 툭, 툭…… 퍽!
대체 왜 포댓자루는 무거운 것인가.
대체 왜 손가락은 아픈 것인가!
대체 왜 칼리오페는 나를…….
퍽!
대체 왜 나는—
나는.
퍽!
대체 왜.
힐데르트는 흔들리는 포댓자루를 움켜쥐었다. 펜만 잡아본 그의 연약한 손등과 손가락은 거친 면에 쓸려 잔뜩 붉게 물들었다.
“흡…….”
옅은 흐느낌이 힐데르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에피니는 노을 속에 잠긴 힐데르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칼리오페가 보지 못한 힐데르트의 모습을 많이 봐왔다.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어렸을 땐 힐데르트가 에피니를 많이 무시했다. 에피니 역시 참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힐데르트를 재수 없어 했다.
기실, 칼리오페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평생 어울릴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칼리오페의 곁에 있고 싶어했기에 마주치고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을 뿐, 서로가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연스럽게 친구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오만한 놈이 이러는 걸 보니까 참…….’
입안이 씁쓸했다.
에피니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힐데르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쩌겠냐. 넌 원래 리페랑 안 될 거였어. 리페가 너한테 그런 관심 하나도 없더만.”
“야!”
힐데르트가 고개를 들고 에피니를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눈과 코가 빨갰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인 얼굴. 이런 힐데르트의 모습은 처음 본다.
에피니는 어깨를 으쓱하고 답했다.
“내가 다정하게 위로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온 것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힐데르트는 자신을 다정하게 위로하는 에피니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냥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필요했다.
혼자 있기 싫었다.
에피니는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곤 손수건을 꺼내 힐데르트의 얼굴을 벅벅 닦아주었다. 평소라면 질색팔색을 하며 얼굴을 뺐을 텐데 힐데르트는 가만히 있었다.
에피니는 묵묵히 얼굴을 닦아주다가 은근슬쩍 물었다.
“그런데 리페의 상대가 누구일까.”
힐데르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에피니는 손수건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잠시 떨리는 걸 느끼곤 눈매를 가늘게 떴다.
칼리오페가 친구 이야기라면서 연애 상담을 할 때부터 에피니는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덜미를 잡은 것이다!
“너 누군지 알아?”
힐데르트는 에피니의 시선을 피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사실대로 다 말해버리고 싶다.
에피니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 없고 당장 아스타레아스를 찾아가 멱살을 움켜쥘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포댓자루가 아주 믿음직스러웠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친구를 어찌하지도 못하고 난감해하겠지.
‘꼴좋다.’
아스타레아스의 반듯한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드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조금 시원해졌다.
아스타레아스가 원망스럽고 밉다.
아니, 원망스럽고 밉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칼리오페와 둘이서 말을 주고 받던 모습, 둘 사이에 흐르던 그 달콤한 공기. 그걸 상기하니 심장을 그대로 도려내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는 첫사랑도 되지 못한 풋사랑이었다.
그 풋사랑은 어느새 첫사랑이 되고,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힐데르트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아 도저히 빠지질 않았다. 이제는 칼리오페를 향한 사랑이 그의 일부가 되었다. 그 사랑이 끝나는 것과 생살을 도려내는 게 뭐가 다르단 말인가.
아스타레아스가 밉다.
하지만…….
힐데르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웃고 있는 얼굴.
‘행복해 보였어.’
에피니의 말대로 자신에겐 원래부터 가망이 없었다.
전부터 알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하나도 헷갈리게 굴지 않았다. 그녀가 친절하고 상냥하기에 뭘 모르는 남자들은 자주 오해를 하곤 했지만, 칼리오페를 잘 아는 힐데르트는 오해할 수 없었다.
‘오해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칼리오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었고, 힐데르트는 그녀에게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가.
남자로 보일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해야 하는가.
그래, 칼리오페가 저를 어떻게 보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호흡기를 씌우듯 사랑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켰다.
“……몰라.”
나지막한 대답에 에피니는 손을 거뒀다.
“흠, 모른다고.”
그녀는 캐묻지 않았다.
어떻게 캐물을 수 있을까.
다만 푹 젖은 손수건을 보며 삐딱한 미소를 걸쳤다.
힐데르트 역시 그녀에게 소중한 친구였다. 어느새 이 오만방자하고 싹수없는 도련님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칼리오페를 채가고 힐데르트를 울린 놈.
‘어떤 놈인지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라.’
* * *
그 시간, 정확히 에피니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루스티첼 가의 서편 날개 1층.
물건을 배달받는 곳으로 원래라면 루스티첼 일가가 직접 그쪽으로 발걸음할 일이 없다. 하지만 지금 저택에 있는 모든 주인 일가가 서편 날개 1층에 모였다.
“세, 세, 세상에 마님……! 이게 다 얼마랍니까.”
하녀 하나가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가 잔뜩 걸린 행거를 가리켰다.
화려한 행거에 드레스가 상하지 않도록 각각 포장되어 있는데 금분을 칠해 반짝이는 로고가 선명했다.
듀레밀.
단 한 번도 듀레밀 근처에 가 본 적 없는 하녀와 하인조차 이 드레스 한 벌의 값어치를 알았다. 지금 루스티첼 가에 배달된 드레스와 장신구, 잡화를 합치면 수백…… 아니 천억도 나올 것이다.
“세상에, 이 다이아몬드를 봐요!”
“이렇게 많은 걸 보내다니……!”
“그것도 이렇게 비싼 물건들을요!”
“이건, 이건 필시……!”
고용인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청혼하려고 밑밥을 까는 겁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주인 내외 앞에선 쓰지 않는 고용인들끼리의 말투까지 튀어나왔다.
“안돼요!”
“안돼애……!”
고용인들 틈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우리 막내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다구요!”
“적어도 3년…… 아니, 5년은 이 집에서 저희랑……!”
“거절, 거절하실 거죠? 돌려보내실 거죠? 그럴 거죠? 아니죠?”
하녀들이 루스티첼 부인의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흡사 나흘 굶은 사람이 물을 구걸하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루스티첼 부인은 침착하게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방안을 가득 채운 드레스와 장신구, 잡화를 쭉 둘러봤다.
“그래서,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구라고?”
상냥한 웃음을 머금은 침착한 물음에 고용인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루스티첼 가 고용인들의 절규를 이상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듀레밀 직원들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먼저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루스티첼 부인. 듀레밀에서 나왔습니다.”
절도 있고 완벽한 인사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듀레밀에서 나왔다는 건 보면 알아. 어머니께서 묻고 계신 건 누가 보냈냐는 거야.”
서늘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듀레밀 직원들은 루시우스를 보고 저도 모르게 동요했다.
깊은 눈매, 우아하게 뻗은 콧대, 얇은 입술. 전신에서 풍기는 푸른 예기. 과연 얼음 기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조금 전, 루스티첼 부인을 봤을 때도 순간적으로 숨을 삼켰는데 이 집안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미모가 대단했다.
루스티첼 가 사람들의 미모야 워낙 유명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상상보다 더 놀라웠다. 핏줄은 속일 수 없다고 칼리오페의 미색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프로였다.
“죄송합니다. 고객에 관한 정보는 밝힐 수 없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듀레밀 직원의 모습에 루시우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짐작했지만 리페가 산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군.”
“아가씨께서 얼마나 검소한 성정이신데 이걸 전부 사셨을 리가 없지요.”
유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칼리오페는 가족들이 끌고 가서 쇼핑해도 별 관심 없는 아이다. 물욕이 없어서 항상 가족들이 뭐라도 더 사주고 싶어서 안달했다.
“이게 다 우리 리페에게 선물로 왔다는 거네.”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웃었다.
듀레밀 직원들은 그 아름다운 미소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수 있는지
‘……이런 반응은 생전 처음 보는데.’
오늘 참 초유의 사태를 많이 본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주세요.’ 도 기절할 것 같았는데 ‘이거, 이거 빼고 다 주세요.’ 까지 겪었다. 더 이상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루스티첼 가 반응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이제야 왜 루스티첼 영애께서 그런 요청을 했는지 알겠어.’
일단 받기로 했으니 받겠다고 말하며 칼리오페는 집에 반드시 누가 샀는지 비밀에 부쳐 달라고 했다.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왜 그런 요청을 하는지 의아했었다. 보통 듀레밀에서 선물을 구매했다는 것만으로도 선물 받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에게까지 큰 어필을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고객들은 로고가 큼지막하게 보이는 걸 선호했다.
그래서 그들은 루스티첼 가가 듀레밀의 로고와 물량, 제품의 퀄리티와 가격에 기쁨과 놀람이 반반 섞인 비명을 지르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루스티첼 일가에게 중요한 건 듀레밀이라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가진 명품도, 천억 운드나 하는 가격도, 아름답고 영롱한 드레스와 보석도 아니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유모와 고용인들까지 모두 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자(추정)가 칼리오페에게 선물을 했다. 그것도 엄청난 물량 공세로.
이것 외에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그래서 지금 누가 보낸 건지도 모르는 선물을 받으라고?”
“죄송합니다.”
루시우스의 날카로운 물음에 듀레밀 직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천억짜리 선물을 가져왔다가 이런 반응을 겪는 건 역사를 통틀어 자신들이 유일할 거다.
“다시 도로 가져가도록.”
루스티첼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을 딱 그었다.
루스티첼 가 고용인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가고, 듀레밀 직원들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지나갔다.
“하지만 부인, 선물 받는 당사자인 루스티첼 아가씨께서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리페가?”
루스티첼 부인과 루시우스를 비롯해 루스티첼 가 고용인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
심지어 루스티첼 부인은 얼굴이 희게 질린 채 비틀거려 루시우스가 부축해야 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왜 다들 여기에 몰려 있어?”
로베르트가 방안에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이게 다 뭐야?”
그는 아무리 봐도 칼리오페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막내가 이런 충동구매를 할 리가 없고, 답은 하나였다.
“……어떤 놈이야?”
항상 유유자적하니 장난기 많던 로베르트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그답지 않았다.
오늘 칼리오페가 외출해서 늦게 돌아올 거라고 하기에 로베르트 역시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수련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힐데르트의 방해를 받아 수련을 공 쳐 안 그래도 기분이 저조했던 차였다.
‘거기에 예정보다 빨리 집에 돌아와 보니 웬 놈팡이가…….’
로베르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맹수처럼 위험한 기색을 잔뜩 풍기며 으르렁거리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듀레밀 직원들은 울고 싶어졌다.
‘천 억짜리 선물을 들고 왔다가 이게 웬 사달이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어쨌거나 선물을 전달했으니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일 듯했다.
“루스티첼 영애께서 구매자 분과 함께 오셨고, 선물을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재빨리 인사하고 사라지는 듀레밀 직원들을 잡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던진 폭탄 때문이었다.
“아, 아가씨께서…….”
“남자랑 같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는 고용인들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두 오빠들의 얼굴은 나라를 잃은 것처럼 텅 비었다.
이럴 때 강한 것은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해라.
루스티첼 부인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진했다. 그녀는 품 안에서 통신석을 꺼냈다.
수신자는 루스티첼 백작이었다.
[부인?]
“여보, 작전 25843이에요.”
[……알겠소.]
루스티첼 백작의 목소리가 단번에 낮아졌다.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통신을 끊었다.
지금쯤 기사단장실을 빠져나와 저택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루스티첼 부인은 깊게 심호흡했다.
한 번 통신하는 데 막대한 마나석을 소비하는 통신석이 오직 딸아이가 남자와 데이트한 것을 알리는 데 사용됐다.
하지만 루스티첼 일가를 비롯한 사용인 모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