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평범한 사랑 노래
“왜 아직도 ‘그들’의 배후를 못 찾은 거지?”
나직한 주인의 말에 보고하던 그림자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인은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얼음 조각을 베어 문 것처럼 날카로웠다.
“분명 ‘그들’이 루스티첼 가를 노리는 이유가 있을 거야. 이것도 알아내.”
그림자들이 파악한 바로는 ‘그들’ 은 딱히 루스티첼 가를 노리지 않고 있다.
한때 스티그마를 얻기 위해 뒤에서 공작한 정황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스티그마 외의 루스티첼 가에는 관심 없었고,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 꼬리를 잘라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이 루스티첼 가를 노린다는 걸 전제로 깔고 명을 내렸다.
의문을 품을 만하건만 그림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주인께서 노린다고 하면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주인에 대한 신뢰와 충성은 주인의 유년 시절부터 견고하게 굳어져 감히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비스 신전에 꼬리를 더 붙여.”
“존명.”
짧게 답하고 사라지는 그림자들을 보며 아스타레아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도련님, 많이 피곤하십니까.”
시종, 러그윈이 살갑게 웃으며 아스타레아스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
“잠시 휴식하시는 것도 어떤지.”
요 며칠간 벼린 날처럼 날카로운 아스타레아스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러그윈 특유의 느물느물하고 가벼운 태도 역시 한풀 꺾였다.
솔직히 무섭다.
차가운 시선만 던지고 서류만 팔락팔락 넘기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러그윈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러다 서류에서 마음에 안 차거나 잘못된 부분이 나오면 작성자가 죽어날 것 같았다.
러그윈은 가내 및 직장 내 평안을 위해 한 번 더 나섰다.
다행히도 그는 이럴 때 특효약을 알고 있었다.
‘강아지 아가씨!’
무서워도 믿는 구석이 있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칼리오페 아가씨와 함께 어디 다녀오셨잖아요. 저까지 빼놓고 단둘이.”
둘이서 어땠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러그윈의 입꼬리가 방정맞게 올라갔다.
“단둘이라니……! 둘이서만 있으면서 대체 뭘—”
청산유수처럼 나불거리던 러그윈의 입술이 얼어붙었다.
절로 힉, 소리가 났다.
아스타레아스가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화를 내지도, 얼굴을 일그러트리지도 않았다. 한없이 무표정했지만 어두운 얼굴에 차갑게 불타오르는 눈동자가 마치 야차의 그것과 같았다.
“도, 도, 도련님…….”
“러그윈.”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사,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오들오들 떨면서 비는 러그윈을 보며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왜 갑자기 살려달라고 비는 걸까.”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흐음,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잘못을 했으니 비는 거겠지?”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러그윈은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잠시 시린 눈으로 러그윈을 내려다보던 아스타레아스가 한숨을 내쉬곤 시선을 뗐다.
“됐으니까 자료 수집한 거 정리해.”
아스타레아스가 턱 끝으로 집무실에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저, 저걸 다요……?”
서류로 산을 만들다 못해 섬 하나를 만든 것 같은 양이었다.
말없이 재차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러그윈은 찔끔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서류 정리는 제 특기입죠! 천직이라고 할 정도라니까요? 제가 아주 확실하게 정리해놓겠습니다!”
러그윈이 서류의 섬으로 가는 것을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하아, 절로 깊은 숨이 새어 나왔다.
‘리페.’
[누구한테요?]
그렇게 물던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에 알알이 박혀 있던 수많은 감정들.
무심코 보드라운 볼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질투에 조금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아스타레아스는 그게 자신에게 온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는 감정에 이끌려 이성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군 것을 전부 되돌릴 기회.
단 한 마디면 칼리오페는 그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칼리오페가 멀어진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시렸다.
말하기 싫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그게 왜 궁금해요?]
웃고 있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심장을 갈라 후벼 파는 심정이었다. 시뻘건 피가 가슴을 물들인다.
하지만 그에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상처 받고 충격 받은 칼리오페의 눈동자였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숨길 수 없이 드러난 감정에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칼리오페는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멀어졌다.
‘잘된 거지.’
황제는 아스타레아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조금만 어긋나면 바로 쳐버릴 생각 만만이다. 그런 상황에서 칼리오페와 연인 이 되면 황제의 마수는 루스티첼 가에까지 뻗어질 것이다.
‘머지않아 루스티첼 가는 위험에 빠지는데 내 몫까지 더해지면 안 돼.’
지금까지 몰래 만났던 것처럼 비밀리에 사귀며 밀회를 즐기는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 아스타레아스 자신이 칼리오페와 이어지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리페를 위험에 빠트릴 순 없어.’
악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스타레아스는 먼저 황제를 칠 생각이었다.
반역.
성공으로 돌아가든 실패로 돌아가든 칼리오페를 끌어들일 순 없다.
칼리오페 성격상 마음을 내준 사람이 반역을 일으키는 걸 알게 되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맹렬하게 왜 반역을 하는지 고민하고 그게 옳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차라리 리페가 신의나 의리 하나 없이 제 몸만 생각하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반역 계획을 알게 되더라도 “아, 당신이 그럴 줄 몰랐네요. 그럼 전 이만. 목숨이 소중해서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그럼 나도 그때까지 단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하며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사람이기에 반한 것이다.
그러니 칼리오페가 안전하길, 무사하길 바란다면 선은 자신이 그어야 했다.
“하…….”
신음처럼 고통스러운 숨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얼마든지 예상했는데 상실감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저 칼리오페가 보고 싶었다. 미칠 듯이.
* * *
칼리오페는 정보 길드장 웬디가 전해준 비스 신전에 관한 서류를 슥슥 넘겼다.
에페니에게서 비스 신관의 몸에 은패의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 문신 되어 있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웬디에게 의뢰를 넣었다.
핑곗거리는 딱히 필요 없었다. 신전에서는 속가를 소개한다는 식으로 포장했지만 무려 정보 길드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포장지에 속을 리가 없으니까.
웬디는 신전이 사실 어떻게든 속가와 칼리오페의 위상을 시궁창에 팽개치고 싶어서 난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죠! 이건 사담이지만 저는 레이디께서 승리하길 바라요.]
웬디는 그렇게 말하며 칼리오페에게 비스 신전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대한 자료였다.
‘물론 대가는 치러야 했지만…….’
차라리 돈으로 받았으면 하는 게 칼리오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칼리오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쨌든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자료인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칼리오페는 서류를 들여다 봤다가 창밖을 쳐다봤다가 괜히 유리컵을 만지작거렸다가 고개를 홰홰 젓곤 다시 서류를 들여다 봤다.
‘아, 그러고 보니 노래에 뭐가 부족한지도 찾아내야 하는데.’
가슴이 답답해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간은 꼬박꼬박 흘렀다.
보름 후면 속가 대 성가 공연을 하는 날이다.
하아, 다시 한숨이 나왔다.
노래를 생각하니 자연스레 아스타레아스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일도 함께.
‘그 손수건…….’
정성 들여 수놓아진 엠브로이더리(embroidery). 섬세하고 아름다운 레이스. 손에 감기던 실크의 감촉.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대체 누가 준 거지…….”
중얼거림과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신경 쓰이세요?”
곁에서 지켜보던 유모가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유모.”
자신을 내려다보는 올리브빛 눈동자가 다정했다. 칼리오페는 왠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우리 아가씨.”
유모가 칼리오페를 폭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푸근한 품이 칼리오페를 감쌌다.
“우리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
너무 조그매서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품 안 가득 들어올 정도로 자랐다. 섭섭하면서도 뿌듯하고, 벅차면서도 쓸쓸한 기묘한 감각.
자라난 아이는 어느 틈에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물론 감히 우리 아가씨께 상처 준 놈은 괘씸하지만……!’
되도록 칼리오페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은 채 온실 속 꽃밭에서 마냥 웃고만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오래 산 유모는 이 또한 성장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세계가 더 넓어지고 다채로워지는 과정.
‘우리 아가씨는 평생 가족만 바라보며 살 것 같았는데.’
어렸을 땐 보통 남을 돌아볼 여유 없이 자기 자신만 신경 쓰기도 힘들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아기 때부터 가족만 신경 썼다. 자기 일은 뒷전이고 항상 양보만 했다.
가족들은 그게 더 안타깝고 속상해서 칼리오페에게 뭐든 해주려고 했다.
칼리오페가 어쩌다 강하게 나설 때는 항상 가족과 연관되어 있었다.
‘속가를 부르고 싶다고 하실 때는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걸 찾았구나 싶었는데.’
다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이 원해서 밀고 나가는 게 생겼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태도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게 아니었다. 노래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나서서 부르는 건 일종의 사명감이 합쳐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칼리오페는 그 어떤 것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 몰두해 있다.
그게 슬픔이든 번민이든 미련이든.
지금 칼리오페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가씨가 자기 일이 이렇게 신경 쓰는 거 처음 봐요.”
“응?”
“항상 자기 일은 뒷전이고 남 일에만 심력을 쏟으셨잖아요.”
“……내가?”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칼리오페를 향해 유모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다른 곳만 보고 계셨어요. 그런데 요 며칠은 달라요.”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사람을 신경 쓰고 생각했다. 슬퍼하다가 화냈다가 애써 이해해보려 하다가 또 다시 분노했다. 칼리오페의 인생에서 이만큼이나 자기 감정만을 신경 쓰며 솔직하고 선명하게 티 낸 적이 있을까?
“아가씨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아가씨예요.”
유모가 칼리오페를 껴안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아가씨 마음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고 소중해요.”
칼리오페가 앉은 의자 앞에 수그려 앉은 유모가 자애로운 시선으로 칼리오페를 올려다 봤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지 옳다, 이래야 더 나은 미래가 온다.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나는…….”
유모가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 가슴께에 얹었다.
“여기. 아가씨 마음 가는 대로 사세요.”
유모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볼을 부드럽게 스쳤다.
“아가씨의 삶은 아가씨 거예요. 아가씨는 웃고 행복하고 즐거울 권리도, 자격도 충분한 분이세요.”
“……!”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훅 커졌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스쳤다.
“나는…….”
기묘한 해방감이 칼리오페를 감쌌다.
지금까지 칼리오페는 이상한 부채감에 휩싸여 있었다.
가족들이 곧 위험에 빠질 것이고, 그 배후의 꼬리를 잡았다. 그런 상태에서 아스타레아스가 신경 쓰여서,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아서 뭐 하나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스타레아스와 잘 지낼 때도 죄책감이 들었던 건 마찬가지다. 또다시 가족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내가 현실을 즐겨도 되는 걸까. 이렇게 웃고 설렐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슴 한켠으로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두 살 생일 때,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에 난감해하는 가족들을 보고 현재를 살자고 다짐했다. 과거 때문에 가족들과 보내는 현재의 시간이 불행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칼리오페가 생각한 ‘현재의 삶’이란 그녀의 삶이 아니라 가족과의 삶이었다. 칼리오페의 모든 초점은 가족이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할 때—아스타레아스와 시간을 보낼 땐 행복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늘 불편했다.
“내 삶…….”
나 행복해도 되는구나.
죄책감도, 부채감도 없이. 그냥 행복해도 되는 거였어.
어쩌면 유모가 해준 말은 칼리오페가 계속 듣고 싶어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칼리오페는 유모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원하는 삶.’
그렇게 생각하자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나는 과거와 다른 삶을, 비극 때문에 사라졌던 내 삶을 찾고 싶어.’
그러려면 가족도 지키고, 현재의 크고 작은 행복도 차곡차곡 쌓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음 가는 대로.
“유모, 나 외출할래.”
칼리오페의 말에 유모가 빙그레 웃었다.
“네, 준비하죠.”
벌떡 일어서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칼리오페를 보고 유모는 몰래 눈물 지었다.
‘우리 아가씨께서 또 훌쩍 커버리시겠네.’
* * *
“리페.”
“안녕하세요, 공자님.”
칼리오페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멈칫 했다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째서 너는 이 순간마저 아름다워서 내 결심을 흐트러트릴까.’
아스타레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아무렇지 않게 마주 웃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습니다.”
“평소 신중하다는 말을 많이 듣긴 하는데 저 알고 보면 행동파여서요.”
알고 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렇게 답하는 대신 칼리오페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말해 자신이 상처 준 게 있으니 다시는 칼리오페가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차게 식은 눈동자로 바라볼 거라고.
그 생각만으로도 손발이 차가워지며 숨이 막혔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도 리페가 죽는 것보단 나아.’
“무슨 일이신지.”
아스타레아스의 여상한 물음에 칼리오페가 그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요.”
이전과 전혀 달라진 칼리오페의 태도에 아스타레아스는 당황했다.
“무엇이—”
“공자님의 태도요.”
칼리오페가 한 발짝 아스타레아스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 기백이 대단해 아스타레아스가 밀릴 정도였다.
“공자님은 저를 끌어안기도 하고— 제가 사라진 걸 걱정하시다 그런 거긴 하지만 여튼 끌어안으셨잖아요. 거기다 머리칼도 쓰다듬고, 뺨도 막 만지고 그러셨잖아요.”
“…….”
아스타레아스는 할 말을 잃었다. 자기가 했던 행동을 귀로 들으니 그런 파렴치한이 있을 수가 없었다.
“뭐, 좋아요. 호의와 선의로 그렇게 할 수도 있지요. 그래, 생각해보면 오라버니 친구분들이나 기사분들도 계속 제 뺨이나 머리칼을 만지고 싶어 하셨어요.”
아스타레아스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샘솟는 질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으니 자신이 뭐라 할 처지가 못 된다는 걸 알아 티도 못 내고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공자님은 그 사람들이랑 다르잖아요.”
“레이디.”
“내가 특별하다면서요……!”
날 섰던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울먹울먹하게 녹아들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눈을 보고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위험에 빠질 수도 없는데 아무 대가 없이 날 도와주고, 위험할 때 나타나고, 왠지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한테는 세우는 벽을 나한테는 허물고. 그러면 나는, 나는—”
칼리오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칼리오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고 생각하자 제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른 어깨를 다독이려 손을 들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그녀에게 상처를 줬는데.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다.
우는 그녀를 위로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 끔찍하고, 이런 상황을 초래한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쾅!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제 얼굴 옆에 있는 벽을 쾅, 하고 짚은 칼리오페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산호빛 눈동자는 물기 하나 없이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그냥 단순히 호의를 베푸는 거예요?”
아스타레아스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이렇게 당황하게 하는 사람은 칼리오페뿐이다.
칼리오페는 예고도 없이 그에게 성큼 다가온다. 애써 세운 벽이 없는 것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아스타레아스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벌려놓은 거리가 칼리오페의 한걸음에 모두 사라진다. 칼리오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스타레아스를 쥐고 흔들었다.
보고 싶었다.
가까이서 보이는 칼리오페의 얼굴이, 그 빛나는 눈동자가 심장을 조이는 듯했다.
눈앞에 있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숨길 수 없이 가슴이 터지도록 차올랐다.
지난 며칠이 아스타레아스에게는 형벌과도 같았다.
목마른 자에게 주어진 단 한 모금의 물이 잔혹하리만치 기껍고 안타까워 더더욱 물을 갈구하게 되듯, 칼리오페를 본 아스타레아스의 심정이 그랬다.
칼리오페는 아무 말 없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하, 하고 날카로운 숨을 내쉬었다.
아스타레아스와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인 관계라고 들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특별하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여 생긴 오해라고 해도.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한 거라고 해도.
‘—분명히 무언가 특별한 게 우리 사이에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스타레아스는 울지 말라며 어머니의 유품을 그녀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동정일 뿐이고, 그에게는 그의 눈물을 닦아줄 다른 여자가 있는 걸까?
‘나는…… 그게 나이고 싶었는데. 나였으면 했는데.’
“나는.”
당신이—
칼리오페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가뒀던 팔을 풀려던 순간이었다.
“네가 좋아.”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말에 칼리오페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당신이 좋아요.”
간절한, 떨림을 담은 고백이 재차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린다.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눈송이가 자꾸만 칼리오페의 머리에, 어깨에 발치에 쌓인다. 추웠던 마음이 포근해지도록.
아스타레아스는 아무 반응도 없이 고개를 들지 않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초조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칼리오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산호빛 눈동자와 물빛 눈동자가 한 호흡 거리에서 마주쳤다.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두 사람이 어떤 계산이나 염려도 없이, 처음으로 서로만을 바라보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나 사실 공자님을 다시 보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가뒀던 팔을 스르륵 내리며 말했다.
아스타레아스의 몸이 경직했다.
우연이 아니라면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손톱으로 심장을 파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가올 미래가 두렵다고 현재를 포기할 순 없잖아요.”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나는 행복하고 싶은걸요.”
햇살이 깃드는 것처럼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숨을 삼켰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까.
아스타레아스는 몇 번이나 반복되는 악몽에 지쳐 현실을 포기하려 했다.
미래인지 그저 꿈인지 알 수 없는 미몽 사이에서 아스타레아스는 몇 번이나 칼리오페의 죽음을 목도했다.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니다.
설령 미래이더라도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아스타레아스 역시 현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칼리오페의 용기에 아스타레아스 또한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디딜 수 있었다.
어떤 비극이 닥쳐오더라도 칼리오페를 지켜내리라.
“……나도 행복하고 싶어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당신과.”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자그마한 손이 아스타레아스를 등을 꼬옥 끌어안았다.
두근두근두근—
마주 안은 가슴에 서로의 심장 소리가 울렸다.
“내게 당신의 노래를 들려줘요.”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돌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평생토록.”
칼리오페의 몸이 떨렸다. 그 어떤 말보다 지금 아스타레아스가 한 말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스타레아스는 알고 있는 것이다.
칼리오페는 항상 우울할 때나 절망할 때, 감정적으로 구석에 몰렸을 때 노래를 불렀다. 본격적으로 속가를 부르겠다고 마음 먹고 노래 ‘연습’을 하면서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칼리오페는 자기 자신조차 감내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서 노래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칼리오페가 자신을 놓아버리는 때가 바로 노래하는 순간이었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사람들의 무덤가에서도, 돌아와 비극이 가슴에 사무칠 때도 노래했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노래에 담았다.
그런 그녀에게 아스타레아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 감정, 네 모든 것 하나도 놓치지 않을게.
네 마음이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게 두지 않을게.
너 혼자 감내하게 하지 않을게.
“레아스…….”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아스타레아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혼자 속으로 그를 생각할 때조차 부끄럽고 안타까워 감히 부르지 못하고 꼭꼭 숨겨놓았던 애칭이었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가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그의 얼굴에 꽃망울이 움트는 것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극적인 변화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잘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홀려버릴 미소였다.
“리페.”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더 꽉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자그마한 몸이 얼마나 그에게 안정감을 주는지 모른다.
꿈에서만 보던 칼리오페를 처음으로 직접 본 순간, 아스타레아스는 예감했다.
나는 앞으로 너로 인해 살겠구나.
내 삶의 웃음도, 울음도, 분노도, 즐거움도 모두 너로 인해서겠구나.
내 삶은 너로 인해 가치가 생기겠구나.
눈물 대신 노래로 우는 작은 아이의 모습에 불현듯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흐르지도 않는 눈물이 안타깝고 마음 아파 미칠 것 같았다.
그건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칼리오페를 만나기 전까지 그에게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칼리오페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당신은 내가 지킬게.”
아스타레아스의 속삭임에 칼리오페가 몸을 살짝 떼고 그를 올려다 봤다.
“그럼 저는 공자님을 지켜드릴게요.”
칼리오페의 미소에 아스타레아스가 마주 웃었다.
“당신은 항상 나를 지켜줬어.”
아리송한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아스타레아스를 지켜준 기억은 없었다.
의문을 가득 품은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피식 웃었다.
‘귀여워.’
그러다가 곧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왜 다시 공자님이죠?”
“네?”
“아까는 나를 이름으로 불렀잖아요. 레아스, 라고.”
“그, 그건…….”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불러 봐요, 레아스라고.”
“그치만…….”
우물쭈물하는 칼리오페에게 아스타레아스가 집요하게 눈을 맞췄다.
‘으…….’
칼리오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너, 너무해. 미인계라니…….’
결국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을 견디다 못한 칼리오페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레아스.”
“네, 리페.”
“…….”
칼리오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앙, 하고 깨물면 달콤한 과즙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스타레아스를 힐끔힐끔 바라보던 칼리오페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우리 이제 특별한…… 아니, 사귀는 사이 맞지요?”
“아니라고 하면 날 죽이는 겁니다.”
아스타레아스의 답에 칼리오페가 치, 하고 그를 흘겨봤다.
“그럼 그 손수건은…….”
칼리오페의 질투가 그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 없어서 아스타레아스는 현기증마저 일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사랑스러움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할 수 있다니.
누가 들었으면 닭살이라면서 짜게 식을 생각을 아스타레아스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했다.
조금 더 칼리오페가 질투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스타레아스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칼리오페에게 내밀었다.
자진 납세하는 품새라 칼리오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따, 딱히 나한테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레아스가 가지고 있는 건 싫고, 그렇다고 버리라고 하기엔…….’
솔직히 이렇게 순순히 내밀어서 좀 좋았다. 어쨌든 그 여자보다 자신이 훨씬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이어진 아스타레아스의 말은 칼리오페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당신을 위해 만들어 주셨던 겁니다.”
“어머니……?”
멍하니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따라 하던 칼리오페는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누가 준 건지도 모른 채 질투하고 따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심지어 이제는 안 계신데…….’
아스타레아스의 모친인 선 황후 에리시네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었다.
“죄, 죄송해요.”
어머니의 유품을 가지고 왈가왈부한 게 너무 미안했다.
칼리오페가 다시 손수건을 돌려주려고 하자 아스타레아스가 그녀의 손을 손수건 채 힘주어 쥐었다.
“당신을 위해 만드신 거라니까요.”
“……저를 위해서요?”
아스타레아스는 말없이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주인은 당신이야.”
칼리오페는 손안에서 매끄럽게 감기는 손수건을 바라봤다. 자신을 위해서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죄송한 건 나지요.”
“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는 현 황제보다도 더 고귀한 혈통이라고 불리는 황금 피를 타고 났다. 혈통으로 따질 때, 제국에서 그보다 더 고귀한 자는 없다. 현 황제가 즉위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아닌, 아스타레아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에 아스타레아스는 황제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칼리오페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굴욕감도 없이. 마치 칼리오페를 숭배하는 게 그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옛날에 구두 리본을 묶어줄 때도 그랬지.’
어렸을 적 햇살이 가득 고인 나무 밑에서 그가 이렇게 무릎을 꿇고 구두 리본을 묶어주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칼리오페도, 아스타레아스도 아직 어렸다.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엮이지 않도록 피해 다닐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마음은 속절없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내 각오가 부족해, 내 나약함이 당신을 힘들게 했습니다.”
항상 오만했던 새파란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순종적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스타레아스가 살며시 칼리오페의 손을 쥐었다.
“부디 절 용서하시길.”
하얀 손등에 붉은 입술이 지그시 닿았다.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한 입술이 뜨겁게 손등을 스치는 기분이 이상했다.
위에서 봐서 그런지 아스타레아스의 섬세한 속눈썹이 유독 길어 보였다.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칼리오페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게 왜 궁금해요?]
그 말을 사과하는 걸까.
손수건이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걸 알고 난 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의 소중한 물건에까지 질투하는 내게 질려서 날카롭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자신의 짐작이 틀린 것 같았다.
‘사과하는 건 그게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럼 그때 일부러 날 밀어냈다는 건가.’
그럴 것도 같았다. 카스틸로는 정치적으로 묘한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
황제와의 정치 관계에 칼리오페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해서 밀어낸 것일 테다.
‘내가 안전하길 바라서.’
칼리오페의 입술을 꾸욱 다물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로 기쁘지 않아.’
“하는 거 봐서요.”
칼리오페는 새침하게 손을 빼며 말했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잖아요.”
앞으로 황제는 더더욱 아스타레아스를 압박할 것이다.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때 가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황제로부터 보호하겠답시고 또 밀어내면 진짜로 화가 날 것 같다.
“이런. 용서받기 위해 앞으로 잘해야겠군요.”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하셔야죠.”
칼리오페가 새초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레이디, 부디 귀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 가요? 지난번 제 무례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손을 살짝 쥐며 하는 데이트 신청에 칼리오페는 “흐음…….” 하고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제발.”
애원하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명랑하게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 한 번 어떻게 만회하실지 볼까요.”
* * *
‘음…….’
러그윈은 난감함에 턱을 쓸었다.
도련님께 급히 보고할 말이 있어서 그는 한참 전에 노크 없이 문을 연 상태였다. 실수였다는 건 방안에 칼리오페가 있는 걸 보고 깨달았다.
딱히 칼리오페를 만나러 가는 거라는 말도 없었던 데다가, 아스타레아스가 가끔 혼자 이 연습실에 와 사색에 잠기곤 했기에 칼리오페가 있을 줄은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사람은 러그윈이 문을 살짝 연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마 강아지 아가씨 덕분이겠지.’
귀신같은 도련님이 주변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칼리오페에게 온 정신이 쏠려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러그윈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칼리오페가 벽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오!’ 하면서 신선하게 봤다. 솔직히 도련님을 저렇게 대하는,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강아지 아가씨가 유일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흐르는 분위기가 묘했다.
둘만의 세계 속에서 사랑 싸움인지 사랑 확인인지 뭔지 모를 것을 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왜 이걸 계속 보고 있는 거지?’
그야 문 닫는 소리에 들킬까 봐 계속 서 있다. 들키는 즉시 도련님이 이 세상과 하직할 기회를 줄 것 같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이 초래한 상황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문 한 번 잘못 열었다가 이게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나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애인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는데……. 나보다 어린 애들이…….’
더 서러운 거는 아직도 두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는 거다. 자신의 목숨 보전을 위해서는 들키지 않는 게 좋긴 하지만, 막상 진짜로 무시 당하니 마음에 깊은 상처였다.
살아있는 병풍이 된 기분……. 이건 경험해본 자만이 알 것이다.
‘크흡…….’
눈앞에서 알콩달콩 눈꼴 시린 행각을 펼치는 두 사람을 보며 러그윈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러그윈은 들장미같이 굳세고 강해지자고 다짐했다. 지금 두 사람의 행각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병풍 예약이었다.
‘그런데 도련님이 무릎을 꿇으시다니…….’
솔직히 지켜보던 러그윈의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다.
‘강아지 아가씨는 그간 도련님의 유하고 부드러운 면만 봐서 그런지 조금 놀라고만 것 같은데…….’
도련님의 진면목을 아는 러그윈으로서는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후 칼리오페의 반응이나 아스타레아스의 태도를 봤을 때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도련님이 참 많이 구르시겠구나.’
러그윈의 머릿속에서 권력 구도가 개편되었다.
태양보다 더 위에 있는 도련님. 그리고 그 도련님의 위에 있는 강아지 아가씨.
‘이쯤 되면 강아지 아가씨가 존경스러울 정도야…….’
데이트하러 나갈 것 같으니 러그윈도 재빨리 사라져야 했다.
문을 닫으면 소리 때문에 들킬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러그윈은 문을 살짝 열어둔 그대로 호흡을 멈췄다.
‘나는 건물이다. 나는 문이고, 나는 벽이며 병풍이다…….’
강제로 병풍이 돼서 서러워한 게 조금 전인데 자발적으로 병풍일치를 추구하는 상황이 서글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목숨은 하나고 소중하다.
‘내 오랜 숙원인 무병장수를 위해……!’
러그윈은 그렇게 병풍이 되어 복도를 빠져 나왔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어느새 신전에서 공연하는 날이 되었다.
칼리오페는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둔 손수건 두 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푸른 자수가 놓인 손수건은 다섯 살 무렵 아스타레아스가 동백꽃 가지에 묶어 놓았던 것이다.
돌려주려던 칼리오페에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나면 닦으세요.]
[저, 울지 않았는데여.]
[울었잖아.]
칼리오페는 울지 않았다. 다만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울음으로도 나오지 않는 칼리오페의 깊고 어두운 감정이라는 것을.
그 옆에 놓인 레이스 손수건은 연인이 된 날 아스타레아스가 주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칼리오페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면서.
‘그런데 왜 나를 위해서 만든 거라고 하셨지?’
아스타레아스의 어머니는 칼리오페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칼리오페는 곧 생각을 멈추고 레이스 손수건을 챙겼다.
오늘 눈물을 닦을 일은 없다. 그래서 행복한 앞날을 약속한 손수건을 택했다.
부적처럼 가슴 앞에 꼬옥 쥔 채 기도했다.
‘오늘 내 마음을 담아 잘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기도를 마친 칼리오페가 손수건에 살짝 키스했다. 그러고 나서 괜히 얼굴이 빨개져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다행이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몰랐다.
그녀가 제대로 보지 않은 곁방으로 통하는 문에서 하녀들이 옹기종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 * *
비스 중앙 신전에 도착한 칼리오페는 도미닉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성가 vs. 속가
당신의 선택은?
디바인 크리스탈이 화려하게 빛나며 오늘의 공연을 홍보하고 있었다.
“뭐야, 이 저렴한 문구는.”
힐데르트가 칼리오페 곁으로 다가오며 디바인 크리스탈을 보고 중얼거렸다.
과연 첫 번째 승자는 누구인가.
당신의 손에서 결정됩니다.
“명색이 신전이라면서 경건함이라곤 전혀 없이 흥미만 끌려고 하고 있잖아.”
어느새 다가온 에피니 역시 말을 보탰다.
“이런 이벤트를 열면 돈벌이가 되니까요. 홍보도 되고. 두 분 다 일찍 오셨네요.”
칼리오페가 생긋 웃으며 힐데르트와 에피니에게 인사했다.
“난 원래 시간 잘 지켜. 공연에 늦는 건 실례지. 딱히 리페가 신경 써서 일찍 온 거 아니야.”
“난 그냥 산책 중인데? 산책하다 보니 신전이 나타나고 이런 광고가 보이고 너네가 있던 건데?”
‘음……. 시간을 잘 지킨다고 하기엔 공연 시작 네 시간 전인데요. 그리고 언니 집이 어디인데 산책하다 보니 신전이 나오는 거지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칼리오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렇군요.”
에피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쁜 남자와 얽히는 바람에 시무룩했던 얼굴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더 부담되면 어쩌지 싶으면서도 못 참고 일찍 와버렸다.
‘그런데 리페 얼굴이…….’
환하다.
그것도 까만 밤 홀로 빛나는 보름달처럼 환하다.
에피니는 칼리오페를 휙 끌어당겨 소곤거렸다.
“설마 너…… 아니, 네 친구 그 남자 다시 만나?”
“아, 그거요.”
칼리오페가 웃었다. 수줍은 미소였다. 에피니는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손수건, 어머니께 받은 거라고 하더라구요.”
“뭐?!”
아니나 다를까 뒷목 잡는 대답이 나왔다.
“너 바보…… 아니, 네 친구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엄마가 왜 아들한테 여성용 손수건을 줘?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잖아!”
에피니는 소리를 잔뜩 낮춘 채 따졌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다시 침울해지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 놈팡이한테 속는 것보단 나았다.
“……유품이에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칼리오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에피니는 멈칫했다. 유품이라고 하니 그 점에 대해 더 말하는 건 실례였다.
‘하지만!’
“……그래도 너……의! 친구한테 그게 왜 궁금하냐고 물었다며.”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지만……. 그 점은 확실히 만회 중이에요. 친구도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대요.”
똑 부러지는 대답에 에피니의 입술이 다물렸다.
칼리오페는 애정 관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그쪽에는 눈치가 영 별로였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런 칼리오페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이 여자 저 여자 가지고 노는 놈팡이가 아닐 확률이 더 높았다.
‘다행인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피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안돼!”
“네?”
버럭 외치는 말에 칼리오페가 당황해서 에피니를 바라봤다.
“안돼! 안돼!”
에피니는 고개를 마구마구 휘저으며 칼리오페를 꼬옥 끌어안았다.
“리페는 내 친구란 말이야! 내 껀데……!”
“너 뭐하냐.”
힐데르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 사이에 끼어들어 에피니를 떼어냈다. 에피니가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이 한심한 놈! 바보! 멍청이!”
갑자기 욕을 얻어먹은 힐데르트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에피니를 바라봤다.
“에피니 엘피너스.”
“왜! 이 멍청아!”
두 사람이 갑자기 싸우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칼리오페는 하하 웃으면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벌써?”
“준비해야 하니까요. 이따 봐요.”
칼리오페는 두 사람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곤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리페!”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힐데르트와 에피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의 선택은 너야!”
“항상 너였어!”
봄 햇살이 반짝이며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 위로 부서져 내렸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임을 예감했다.
“응! 고마워요!”
칼리오페 역시 커다랗게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답했다.
다사로운 춘풍이 세 사람의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풋풋한 봄꽃 향기를 가득 실어 보냈다.
* * *
“좋은 분들이시군요.”
대기실로 향하는 도중 도미닉이 불쑥 말했다.
칼리오페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올려다 봤다.
“그렇지요? 저렇게 좋은 친구들과 오랜 시간 함께해서 너무 좋아요. 가끔씩 제가 굉장히 행복하고 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해요.”
도미닉은 칼리오페의 말간 얼굴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운이 좋은 게 아닙니다.”
“네?”
“아가씨께서 좋은 사람이기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겁니다. 아가씨가 사랑 받을 만한 분이기에 사랑 받으시는 거고, 응원하고 싶은 분이기에 응원하는 겁니다.”
칼리오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도미닉은 그녀가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몇 번이고 자신의 노래를 돌려보고 문제점을 찾고, 자신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도 않은 가수인데도 찾아가 노래를 듣고 좋은 점을 배우려 하고. 목에서 색색거리는 바람 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하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도미닉은 그런 칼리오페를 보면서 괜찮으니까, 아가씨는 그런 거 안 해도 충분하니까 고생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결코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가 없었다. 노력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지키는 것뿐이라서.
도미닉은 새벽 별이 떠오를 때까지 검을 휘둘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칼리오페가 자신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아차 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냥……. 음, 기쁜데요? 도미닉 경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줄 몰랐어요.”
고맙다면서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의 무구한 얼굴을 보며 도미닉은 잠시 침묵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가슴이 아릿해져 왔다.
‘좋아! 그럼 응원도 받았겠다. 기합을 넣고 잘해볼까.’
칼리오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모퉁이를 도는 순간,
“아.”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살짝 부딪쳤다.
“아가씨.”
도미닉이 괜찮냐는 뜻을 담아 불렀지만 딱히 세게 부딪친 건 아니었다.
칼리오페도, 상대도 넘어지지 않았다. 로브를 입은 상대의 치렁치렁한 소매가 흔들릴 정도였을 뿐.
하지만 칼리오페는 괜찮지 않았다.
커다랗게 뜨인 산호빛 눈동자가 상대를 응시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무미건조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칼리오페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발치까지 오는 긴 푸른 머리칼, 신비로운 은빛 눈동자.
분명 처음 만나는 거지만 칼리오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성녀.’
칼리오페에게 익숙한 모습은 이보다 더 나이가 든 모습이었으나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은 똑같았다. 전생에서 그림이나 사진으로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성녀는 자애롭기보단 싸늘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싸우지 말아요.”
“네?”
칼리오페는 성녀가 갑작스레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싸우지 말라니?
‘혹시 지금 신전과의 알력 다툼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오늘 노래 경연?’
“의미 없으니까요.”
“무슨…….”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래해봤자 칼리오페 루스티첼, 그대가 지는 게 당연합니다.”
성녀는 예언이라도 하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그냥 포기하세요.”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성녀가 왜 자신이 지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각오도, 노력도, 바람도…… 무엇 하나 알지 못하면서— 완전한 타인이 그렇게 쉽게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순 없었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의미 없는 발버둥은 그대를 힘들게 할 뿐.”
성녀가 무심히 칼리오페를 스쳐 지나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고 난 후엔 지금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명성도 빛이 바랠 것입니다. 이건 그대를 위한 충고입니다.”
칼리오페는 그대로 자신을 지나쳐 가는 성녀를 돌아봤다.
“충고 감사해요.”
또렷한 칼리오페의 목소리에 성녀가 멈춰 서 뒤돌아봤다.
칼리오페의 눈과 성녀의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나는 의미 없는 발버둥은 없다고 생각해요.”
칼리오페가 생긋 미소 지었다. 아무런 사감 없는 깨끗한 미소였다.
“성녀님도 발버둥 치셨잖아요?”
움찔.
칼리오페의 말에 성녀의 얼굴에 약하지만 분명한 동요가 드러났다.
“그럼 전 이만.”
칼리오페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완벽한 자세로 다소곳이 인사한 후 돌아섰다.
뒤에 홀로 남은 성녀가 우두커니 서서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 *
“성녀님이라니요?”
도미닉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흠, 하고 생각했다.
‘아직 오러 사용자에게 신성력이 겉으로 느껴지기 전인가.’
오러 사용자는 상대의 오러를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법사는 상대의 마나를 느낄 수 있고, 신관은 상대의 신성력을 느낄 수 있다.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쉽게 느껴지고, 약할수록 미약하게 느껴진다.
이는 서로 다른 계열끼리도 마찬가지다. 오러, 마나, 신성력은 모두 에테르에서 나온 것으로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단, 같은 계열의 경우 10의 힘을 그대로 10으로 느끼지만, 다른 계열의 경우 5나 3과 같이 훨씬 약하게 느낀다.
‘그렇다는 말은 아직 성녀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는 뜻인데.’
회귀 전, 성녀가 처음 등장했을 때 곧바로 기적을 행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그럴 만했다.
“비스 신전에서 성녀님을 찾아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들었던 외모와 똑같아서요.”
그 말에 도미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가 정보 길드에 비스 신전에 관한 정보를 의뢰했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성녀라……. 놀랍군요. 백 년도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는데.”
“성녀가 행하는 기적은 대단하니 환영할 만한 일이죠.”
‘원래라면.’
칼리오페는 뒷말을 삼킨 채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디.”
“하르첸 경. 일찍 오셨네요.”
칼리오페의 얼굴에 서린 걱정을 보고 하르첸이 미소 지었다.
“레이디께서 보내주신 기사분들 덕분에 잘 왔습니다.”
“오늘은 절대 혼자 있지 마세요.”
그 말에 하르첸의 섬세한 얼굴이 일순 흔들렸다.
“그럼…… 레이디께서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하르첸이 조심스레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내 곁에 있어요.”
부슬부슬한 보랏빛 머리칼이 흔들리고 옅은 잿빛 눈동자에 간절함이 담겼다.
“그럼요. 파트너를 지키는 건 당연하니까요! 절대 하르첸 경이 그런 일을 다시 겪게 하지 않을 거예요.”
활짝 웃으며 나를 믿으라는 듯 당차게 말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하르첸은 씁쓸하게 웃었다. 티 없이 맑은 칼리오페의 미소를 좋아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심이 섞여도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 * *
‘성녀는 나오지 않았어.’
칼리오페는 성가대의 화려한 무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성녀를 내보내서 나를 누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기상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직 성녀의 힘이 약해서 효과가 부족할까 봐 내보내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신전은 왜 이런 무대를 마련했는가.
지난번 신전 공연에서 칼리오페는 성가대보다 압도적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성녀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고서 성가와 속가를 전면에 경쟁시킬 경우, 성가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다.
‘신전이 이런 전면적인 경쟁을 붙인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거대한 함성이 관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오색 찬연한 빛이 성가대로부터 피어오르며 눈부신 광경을 만들어냈다.
여덟 장의 날개를 가진 거대한 새가 그 사이를 비상해 관객들의 머리 위를 맴돌다 위로 솟구쳤다. 비스 신전의 성서에 있는 내용이다.
새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흥분이 가득했다.
‘지금은 신전이 무슨 생각인지 고민할 때가 아니야.’
칼리오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엄청난 무대 다음이 바로 자신의 차례다. 신성력 덕에 특수효과를 보는 것과 달리 칼리오페는 아무 무대 장치도 없이 홀로 노래해야 했다.
‘아니지.’
칼리오페는 옆에 선 하르첸을 바라봤다.
‘하르첸 경이 있지.’
시선을 느낀 하르첸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정말 대단한 공연이었습니다! 성서를 그대로 재현해 내다니…….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요!”
흥분한 사회자가 성가대의 무대를 칭찬했다.
“성가대가 성가를 부를 때 아름다운 오로라가 그 주변을 감싸곤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관객 여러분도 처음이시겠죠?”
“네에!”
관객들의 대답이 우렁차게 신전 안을 울렸다.
“이런 엄청난 환상을 보여주는 게 바로 성가의 힘이겠지요! 이런 무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마저 드네요.”
그 말에 관객들이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지르며 호응했다.
“자, 그럼 다음은! 모두가 다 아시는 그분! 여러분이 기다리신 바로 그 레이디,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무대입니다!”
박수 소리가 울렸다.
칼리오페는 하르첸과 눈빛을 주고 받은 후 무대를 향해 걸어나갔다.
중앙에 서서 관객석을 바라보자 별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칼리오페는 단번에 아스타레아스를 찾아냈다.
‘아…….’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꽉 움켜쥐고는 아스타레아스를 응시했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들려주고 싶은 노래.
‘평생 내 노래를 듣겠다는 레아스에게 나는 영원토록 평범한 사랑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두 사람은 그대로 쭉 행복하게 살았다는, 유행하는 연애 소설 어디에나 나오는 평범한 결말을 맺고 싶다.
하르첸의 손에서 반주가 시작되었다.
통통 튀는 물방울 같기도 하고, 와르르 맑은 웃음소리 같기도 한 전주.
빠른 템포의 경쾌한 연주에 관객들의 손가락이 절로 들썩였다. 저도 모르게 박자를 맞추는 사람들을 보며 칼리오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하르첸 경.’
100년 만의 천재라는 명성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리오페 역시 음악에 몸을 맡겼다. 그녀가 리듬을 탈 때마다 무릎까지 오는 드레스 자락이 함께 춤추듯 살랑였다.
칼리오페의 노래에는 기본적으로 슬픔과 좌절, 비탄과 상실, 공포와 절망이 배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칼리오페가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노래에 쓸쓸하고 처연하고 애처로운 기운이 맴돌았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싸하게 사로잡기도 했지만 곡의 분위기와 맞아야만 가능했다.
‘여태 내가 부른 노래는 모두 그런 노래였지.’
눈을 감고 관객과 감정을 나누지 않고, 오롯이 제 안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칼리오페의 스타일과 그 노래들은 잘 맞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노래만 부를 순 없어.’
하물며 신전에선 신성력을 사용해 적극적으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칼리오페가 계속 똑같이 홀로 침잠해가는 노래를 부르면 결국 관객들은 깨달을 것이다. 이 현장에 칼리오페와 함께 있음에도 그들 사이는 단절되어 있다고.
‘단절된 상태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어.’
카스틸로 부인이 말했던 부족한 것.
칼리오페는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당신 덕분이에요.’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스치고, 빗기고, 다시 마주쳤다.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퍼블릭 하우스에 갔을 때, 칼리오페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꼭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 마법에 걸린 건 가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였다.
마치 나에게 불러주는 것 같은, 나에게 하는 말 같은 노래.
그곳에 같은 현장에 있기에 주고 받을 수 있는 것.
노래는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게 아니다. 서로 소통하고 나누고 주고 받는 것이다.
특히 공연은.
‘할 수 있어.’
칼리오페의 입술이 열렸다.
설렘을 가득 담은 사랑 노래, 칼리오페가 그날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들은 노래였다.
‘레아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을 꿈꾸는 사람에게.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설렜으면 좋겠어. 나 같은 행복을 맛보았으면 좋겠어.’
들뜨고 조금은 수줍은 미소가 사랑스러운 얼굴에 가득 피어올랐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음성이 촉촉한 봄비처럼 귓가에 내렸다.
‘아…….’
노래를 듣던 관객들이 침음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칼리오페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산호빛 눈동자와 마주칠 때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두근거리는 설렘을 노래하는 칼리오페는 정말 설레 보였고,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질투를 노래할 땐 조금 심통 난 얼굴이 귀여웠다.
처음 느껴보는 사랑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들뜨고, 기대했다가도 혼자 실망하고.
그런 모습이 노래와 어우러져 다채로웠다.
그저 가사에 음을 붙인 게 아니라 감정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
듣고 있으면 두근거린다.
마치 칼리오페와 막 사랑에 빠진 것처럼.
* * *
짝짝!
노래하던 칼리오페는 갑자기 들린 박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그녀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번져나갔다. 사람들이 마디와 마디 사이 공백에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친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타악기처럼 노래의 빈 공간을 메꾸었다. 경쾌하고 발랄한 노래와 잘 어우러지는 소리였다.
박수 친 쪽을 바라보니 칼리오페를 향해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분명한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칼리오페 역시 보답하듯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 하는 작은 함성이 번져나갔다.
짝짝!
소절 사이의 공백에 또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번 건 아까보다 더 컸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칼리오페의 환히 웃는 모습이, 즐겁게 호응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까지 박수를 치게 만들었다.
다음 마디 끝에서는 칼리오페 역시 관객들과 함께 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즐거운 웃음이 관객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장엄하고 경건한 성가와는 전혀 달랐다.
또한, 사람들이 예상했던 칼리오페의 노래와도 달랐다.
지난번 신전 공연에서 칼리오페가 불렀던 속가는 정적인 노래인지라 사람들은 분위기 측면에서 성가와 큰 차이점을 못 느꼈다. 그래서 처음 속가를 듣는 사람들까지 편견 없이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 노래는 성가와 완전히 달랐다.
거부감이 생길 법도 하건만 관객석의 분위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성가가 엄청난 환상을 보여줘 사람들을 들뜨게 만든 것과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운 점이 오히려 칼리오페에게 좋게 작용했다. 이런 신나는 노래는 시큰둥한 상태보다 흥분한 상태에서 들을 때 훨씬 마음에 잘 와닿는다.
곡이 고조되고 하르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가볍게 날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나중에 몇몇은 아예 일어나 발까지 구르며 박자를 맞췄다. 몇 명이 그렇게 하자 전염되듯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치는 박수가 노래의 일부가 되는 기분, 전혀 모르는 옆 사람과 같은 것을 공유하는 기분. 마치 하나가 되는 기분에 사람들의 가슴이 뜨겁게 타올랐다.
어느새 사람들은 입안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같은 음이 반복되며 고조되는 노래라 속으로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기도 쉬웠다.
칼리오페가 시원하게 뻗은 청량한 고음으로 대미를 장식하자 땅을 진동시킬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휘이이이익—!
일어나 있던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열광했다.
칼리오페는 벅찬 숨을 몰아쉬며 호응하는 관객들을 바라봤다.
기뻤다.
사람들과 이렇게 상호 작용하는 게.
자신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객들이 제 마음을 움직인다.
혼자 연습할 때보다 훨씬 더 즐겁고 기쁘게 노래했다.
‘행복해.’
이 순간만큼은 결과야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사람들의 선택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함께 즐겨주는 것만으로.
‘나 노래하는 게 좋아.’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꼬옥 쥐었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 크게 노래하고 싶다.
그간 칼리오페는 어딘지 사명감을 느끼며 노래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롯이 노래 그 자체를 즐기며 푹 빠져 관객들과 소통했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도, 신전의 음모도 뒤로 미룬 채.
‘조금 더 이곳에 있고 싶어.’
내려가고 싶지 않다.
좀 더 노래하고 싶다.
조금 더 이곳에서 사람들과—
하지만 칼리오페는 차오르는 감정을 꾹 누른 채 무대에서 내려왔다.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러니 이제 결과를 기다릴 때다.
* * *
“너무 즐거웠어! 나 노래 공연에서 이렇게 소리 지르고 뛰어본 거 처음이야.”
“역시 리페님이셔!”
“몇몇 퍼블릭 하우스에선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나중에 한 번 가볼까?”
흥분한 소녀들이 재잘거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좀 카바레에서 하는 거 아니야? 관객들이 이렇게 소리 지르고 뛰는 거.”
“무슨 소리야 그냥 평범한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도 엄청난 솔로 파트가 나오면 소리 지르잖아.”
“너 예전에 펠릭스 경의 바이올린 솔로 파트에서 꺄악, 하고 소리 지르지 않았어?”
“그거랑 지금은 좀 다르잖아……!”
“뭐가 달라? 난 모르겠어. 서서 보는 공연도 꽤 많은 편이고…….”
“나는 카바레 가본 적 없으니까 거기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르겠어서.”
“나도 그건 마찬가지야!”
카바레 운운했던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내밀었다.
“자자, 각자 자기가 더 좋았던 것에 투표하면 돼.”
그 말에 소녀들의 대화가 멈췄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슴 속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컴컴한 감정이 씨앗처럼 박혔다.
자고로 최애를 까는 순간 십 년 우정도 쉽게 무너진다고 했다. 이미 입덕한 소녀와 이제 막 입덕한 소녀는 뾰족한 눈초리로 친구를 바라봤다.
‘니가 우리 리페님에 대해 뭘 알아……!’
소녀들 말고도 관객석 곳곳에서 어느 쪽을 찍을 것인지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난 무조건 리페님이야. 오늘 리페님 때문에 왔는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짜로 신전에서 사랑 노래를 부를 줄이야…….”
“왜?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히려 괜찮던데? 속가에 끈적하거나 질척한 사랑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맞아. 지난번 칼리오페 공연 후에 관심이 생겨서 속가 좀 찾아봤는데, 좋은 노래도 있지만 좀 그런 노래도 많더라. 그런 걸 들어서 그런지 오히려 선곡 잘한 느낌? 애초에 오늘 사랑 노래 부를 거라고 기사까지 났었잖아. 새삼스레.”
“뭐, 나는 칼리오페에 대해 별생각 없었는데 풋풋한 사랑 노래랑 좀 잘 어울리긴 하더라. 귀여웠어.”
“맞아. 나까지 풋풋해지더라. 첫사랑 때 설렜던 생각도 많이 나고……. 칼리오페랑 사랑에 빠진 느낌이었어. 포토북 중고 매물 구하면 나올까?”
“거기서 ‘랑’은 빼라. 너 혼자 빠진 거야.”
“뭐, 근데 불편해하는 사람도 이해 가긴 해. 다른 데서 들었다면 이런 생각도 안 들 텐데.”
“확실히 성가대 공연은 그런 잡음이 없지.”
“와, 나는 무지개 사이로 새가 날아오를 때 깜짝 놀랐어!”
“날개 여덟 장 달린 거 그림으로 봤을 때는 그다지 안 와닿았는데 생생히 움직이는 거 보니까 진짜…….”
“그치! 나도 모르게 막 신앙심이 생기는 거 있지?”
“비스 신전이 했던 일도 있고 그래서 다른 신전만 갔는데 다시 비스 신전에 와 볼까 싶기도 하고.”
“나도 그런 생각 들더라. 사실 저번 공연도 좀 관심 있었는데 비스 신전에서 한다고 해서 안 갔거든. 근데 공연 후에 난리 난 거 보고 아쉬워서 오늘은 왔는데……. 막상 와보니 비스 신전도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어차피 문제가 됐던 전 대신관은 파면 당했으니까.”
“신관들이 나서서 폐하께 파면시켜 달라고 했던 걸 보면 남아 있는 신관들은 확실히 괜찮은 듯.”
“속가 알리겠다고 이런 무대 마련하는 걸 보면 과거 잘못 청산하려고 애쓰는 거 같아.”
“그래서 너넨 누구 뽑을 거야?”
“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리페님.”
“난 성가대.”
“나도 성가대. 솔직히 노래 잘 부르는 거랑 신성력은 차원이 다르지.”
“난 칼리오페. 이런 공연은 처음이었어.”
“나도. 신성력 보는 거야 다른 곳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렇게…… 뭐라고 해야 하지 일체감? 그런 걸 느낀 건 이번이 유일할 거 같아.”
“응, 진짜 다른 관객들하고도 하나 되는 느낌이더라. 되게 행복했어.”
“아, 난 누구 뽑지. 고민 된다. 둘 다 너무 특색이 달라서. 가슴이 뛰었던 건 칼리오페 공연인데. 깜짝 놀랐던 건 성가대 공연이라서.”
“나도 결정 못 내리겠어.”
서로 의견이 분분하고 각자 고민이 깊은 와중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 이제 투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 투표하지 않으신 분들은 서둘러 투표해주세요! 1분 후에 마감합니다!”
“으아아아! 어떡해!”
“고민하지 말고 1초 남았을 때 찍는 게 진심이래.”
“자! 30초!”
사회자가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아직 고민하던 사람들이 망설이다가 서둘러 버튼을 눌렀다.
“자, 10초! 모두 같이 세 주실까요? 9!”
“8!”
투표를 마친 사람들이 사회자의 유도에 맞춰 함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이 또한 사람들에겐 즐거운 경험이었다.
관객들의 면면에 흥분과 기대가 가득 비쳤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심리라는 게 미묘해서 숫자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자신이 뽑은 사람이 되길, 하고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그 마음을 담아 숫자를 세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3!”
“2!”
“1!”
“자, 투표 마감합니다!”
사회자가 손을 들며 관객석을 향해 외쳤다.
“성가 대 속가! 이건 성가의 대표로 나온 비스 신전 성가대와 속가의 대표인 레이디 칼리오페의 대결이라 할 수도 있는데요!”
사회자가 애타는 좌중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이곳 비스 본신전에 참석해주신 관객분들 외에도 전국 신전에서 디바인 크리스탈로 시청 중인 수많은 분들, 그리고 제도 중앙 광장과 중앙 공원에서 보시는 분들의 투표까지 반영됩니다.”
저번 공연이 흥행하자 비스 신전에서는 이번 공연을 위해 제도 중앙 광장과 중앙 공원에도 디바인 크리스탈은 설치했다.
“그야말로 전국적인! 제국, 아니 세계최초! 유일무이한 대규모 단위의 투표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길어질수록 관객들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 하지 말고 어서 결과나 공개해!’
‘그래서 누가 됐다는 거야?!’
“이렇게 많은 분들이 선택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알고 싶으신가요?”
“네에!!!”
“그건 바로오!”
사회자가 아우성치는 관객들을 보며 웃었다.
애가 탈수록 그는 더 신났다. 더 애태우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우우우!”
사회자의 말에 발을 구르며 관객들이 야유했다.
“하하, 여러분들 많이 궁금하신가 보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전국 단위인 만큼 집계에 시간이 소요되니까요.”
경합 투표 결과를 바로 내기 위해 신전은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마법사들에게도 이런 의뢰는 처음인 데다가 시간도 충분하지 않아 투표 마감 즉시 결과가 나오는 마도구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우선 오늘 성가와 속가의 대표로 나와 훌륭한 경연을 펼쳐주신 분들을 다시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사회자가 말을 마치자 성가대와 칼리오페가 무대로 나왔다.
사람들은 각자 응원하는 쪽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칼리오페!”
“비스 성가대!!”
그러다 은근히 경쟁심이 붙어 서로를 견제하듯 더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했다. 신전 안은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아주 반응이 열렬한데요! 그만큼 오늘 공연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뜻이겠지요!”
사회자가 분위기를 진정시키며 진행을 이어 나갔다.
“모셔 놓고 그냥 지나갈 순 없지요. 오늘 경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마디씩 들어볼까요? 먼저 성가대부터.”
사회자가 성가대 쪽에 다가가 마이크를 건넸다.
“결과는 저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비스 신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걸으며 그를 찬양하며 노래할 따름입니다.”
“과연 신을 모시는 성가대다운 말이네요. 레이디께선 어떠신지? 역시 결과는 상관 없나요?”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칼리오페가 좌중들을 둘러봤다.
“저는…… 이기고 싶어요.”
말하고서 쑥스러운 듯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웃는다.
“오오—!!”
생각지 못한 당돌한 답변에 관객석에서 호응했다.
칼리오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똑바로 정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날 선택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노래 부르면서 느꼈던 게…… 나 혼자 느낀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한순간 드넓은 신전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정적을 몰아내는 엄청난 함성이 가득 메웠다.
“꺄아아아아!”
“칼리오페!”
“나도 느꼈어어어!!”
“하하, 이것 참 반응이 뜨겁네요. 대답이 성가와 속가만큼이나 달라서 더 재밌는 것 같습니다.”
진행하던 사회자는 무대 상수에 있는 마법사가 사인을 보내는 걸 확인했다.
“이런……! 말을 나누는 사이 벌써 60초가 지나갔군요. 드디어 결과 발표입니다. 사실 저도 결과를 모르는지라 긴장되네요.”
너스레를 떠는 사회자에게 관객들이 시선을 보냈다. 왠지 그 시선이 협박처럼 느껴져 사회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더 이상 뜸 들이는 것 없이 바로 발표합니다! 성가 대 속가, 비스 성가대 대 칼리오페! 그 승자는……!”
두구두구두구둥!
북 치는 소리가 지나가고 커튼 뒤에 있던 마법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파아앗!
맑은 빛무리가 퍼져나가면서 칼리오페를 감쌌다. 바람에 칼리오페의 긴 머리카락과 드레스 자락이 느리게 흔들리고, 빛의 꽃잎이 휘날린다.
“와아아아아!”
흥분한 관객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벌떡 일어난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축하드립니다, 레이디.”
칼리오페는 조금 얼떨떨한 상태로 사회자의 축하를 받았다.
관객석 쪽에서 모자가 몇 번이나 위로 솟아오르고 휘파람 소리가 높다랗게 울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승리를 기뻐하고 응원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기뻐한다는 건 내 노래가…… 좋았다는 거겠지?’
그건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아니, 엄청 기쁘다.
“여러분, 정말 감사해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기쁘고, 행복하고, 조금 부끄럽고 그러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보는 사람까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어라?’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커튼 뒤에 있던 마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마법이 잘 나갔네?’
예상보다 훨씬 디테일하게 마법이 구현됐다. 빛무리가 꽃잎처럼 휘날리는 걸 보면서 깜짝 놀랐다.
‘마력 소모도 덜 됐고…….’
잠시 자신의 상태를 살피며 얼떨떨해하던 그는 곧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성장했나 보다! 난 천재야!’
저절로 콧노래가 흐흥, 하고 나왔다. 야근하며 투표 마도구를 만든 보람이 있었다.
때론 착각 덕분에 행복할 수 있기도 하다.
* * *
“젠장……!”
무대를 지켜보던 신관 하나가 책상을 치며 낮게 읊조렸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관제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 원래 계획대로라면 우리가 문화를 선도했어야 했던 건데 말입니다.”
문화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며 이는 사고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다. 비스 신전의 고위 신관들이 세운 청사진에는 문화 지배가 거의 필수적이었다.
노래의 파급력은 엄청나다. 잘 외우기 힘든 것이나 중요한 것을 노래로 만들어 전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 명맥도 끈질겨서 딱히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닌데 민가에 나가보면 백 년 전 흙장난 노래를 아직도 부르고 있다. 그래서 비스 신전이 수많은 문화 요소 중 속가 탄압에 큰 공을 들였던 것이다.
“하르첸도 눈여겨보던 패인데 아차 하는 순간 루스티첼에게 뺏겨버리고.”
하여간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사사건건 방해다.
“요즘 파트라유 거리나 유리돔 플라자에서도 속가 악보가 팔린다고 합니다.”
둘 다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대표적인 쇼핑지였다. 제도 사교계 살롱에서 조금씩 유행했던 속가 발표가 저번 칼리오페의 신전 공연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단 한 명의 소녀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니……!”
대신관이 이를 아드득 깨물며 무대 위의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나비의 연약한 날개짓이 태풍을 부르듯, 칼리오페의 노래가 거대한 사회 흐름을 몰고 와 신전의 앞길을 막았다.
“어찌 됐든 오늘의 패배는 예상범위 안 아니었습니까.”
한 신관의 말에 대신관은 진정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성가가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저번 공연에서 무너진 차였다.
“우리는 새로 짠 계획대로 다음 단계를 밟으면 됩니다.”
“그렇지.”
그렇게 답하며 대신관은 제 옆을 돌아봤다.
그곳엔 푸른 머리카락을 폭포처럼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우리 계획이 사람들 틈에 무해하게 스미듯 접근하는 거였지.”
대신관의 중얼거림에 신관이 말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이 깊게 빠진 존재가 있어서 접근 자체가 힘들어졌지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까.”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면 돼.”
그게 그들의 새로운 계획이었다.
“어때,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직접 본 소감이? 이길 수 있겠나?”
그 말에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성녀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대신관을 바라봤다.
“당연한 말씀을.”
느릿하게 성녀의 입술이 열렸다.
서늘하니 감정의 온기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신의 축복도 받지 못한 가련한 자에게 내가 질 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