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꼬리 잡기
“칼리오페 아가씨 아니십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정보 길드 사람이 굽신거리며 칼리오페를 안내했다.
듣던 것과 꽤 다른 상황에 칼리오페는 얼떨떨해하면서도 따라갔다.
지금 칼리오페는 회귀 전 호르세안이 증거로 남겨준 문양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정보 길드에 왔다.
‘정보 길드 사람들은 꽤 기 싸움이 심하다고 했는데 아닌가…….’
정보를 쥔 쪽이라 그런지 웬만한 최고위 귀족이 아닌 이상에야 아주 기본적인 예절만 지킨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칼리오페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여기 앉으시지요. 죄송합니다. 저희 길드장님께서 외부에 계신 중이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방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더 따뜻하게 할까요? 아니면 뭐 마실 거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칼리오페가 거절하니 상대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그러나 그 한 마디에 다시 밝아졌다. 그는 쑥스럽게 웃더니 머뭇머뭇거리다 방을 나갔다.
‘그런데 길드장이라니…….’
용건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길드장에게 안내될 줄은 몰랐다. 길드장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SSS급 정보를 거래할 때라고 들었다.
‘음, 내 의뢰는 표면적으론 간단한데……. 그래도 길드장이 의뢰를 받으면 신경 써서 정보를 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 아가씨!”
머리를 짧게 친 늘씬한 미인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칼리오페를 향해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칼리오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여자를 맞았다.
여자는 무언가 잔뜩 끓어오르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뭔지 몰라도 많이 진정돼 보였다.
“반갑습니다. 제가 이곳의 길드장, 웬디입니다.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마자 문이 열리며 다과가 들어왔다.
뜨거운 초콜릿 음료에 차가운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핫초코. 폭신폭신한 얼그레이 시폰 케이크는 담백해 보였다.
“좋아하시죠?”
웬디가 칼리오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과연. 이게 기 싸움인가.’
칼리오페는 납득했다. 자신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듣던 것과 달리 좀 친절하게 기선제압을 하려나 보다.
정보 길드는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칼리오페의 취향으로 딱 맞춰 다과를 내놨다.
딸기 타르트를 좋아하는 건 유명하지만 얼그레이 시폰 케이크는 다르다. 핫초코처럼 단맛이 강한 음료와 함께 먹는 것만 좋아하기 때문에 웬만큼 칼리오페를 자주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었다.
“네, 좋아하는 거예요.”
칼리오페는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핫초코를 마셨다. 입안에 뜨겁고 쌉쌀한 초콜릿과 차갑고 달콤한 생크림이 동시에 들어오며 완벽한 하모니를 자아냈다.
‘……정말 맛있네. 어디 초코를 쓰는 거지.’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었다.
웬디는 핫초코를 맛있게 마시는 칼리오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구오구 잘 먹네. 좋아하는 걸 준비하길 잘했어.’
그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아, 별것 아닌데……. 문장을 모으고 싶어서요.”
“문장이요?”
“네, 희귀한 문장을 수집하고 싶어요.”
웬디는 잠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순진하게 깜빡였다.
“이런 말씀은 원래 드리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운을 뗀 웬디가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희귀한 문장을 수집하고 다니신다는 정보를 저희 쪽에서 팔 수도 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래서 은패의 문장을 보여주며 알아봐달라고 하지 않는 거고.’
칼리오페가 은패의 문장을 알아보고 다닌다는 정보가 정보 길드에 들어가는 거니까. 하지만 칼리오페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그래요?”
“새어나가길 원하지 않으시면 독점 조건으로 정보를 사시면 됩니다. 단, 독점이 붙는 만큼 가격이 더 추가됩니다.”
독점으로 정보를 사더라도 ‘칼리오페가 뭘 알아보고 다니는지’를 정보 길드가 알게 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무엇보다 정보 길드를 다 믿을 수 없어.’
정보 길드 내부에 은패의 문장과 관련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쓸 데 없는 의심을 사게 되겠지.’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를 냠 먹었다.
‘그리고 이건 확실히 날 떠보는 거야.’
정보 길드 측에서는 손님에게 왜 그런 정보가 필요한지 질문하지 않는다. 질문 자체가 의뢰자의 정보를 캐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런 식으로 떠보는 거지.’
칼리오페가 여기서 난감해하며 정보를 독점하겠다고 하면, ‘비밀리에’라는 정보가 추가된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비밀리에 희귀한 문장을 수집하고 다닌다고.
독점했으니 그 정보를 다른 곳에 팔진 않겠지만 어쨌든 정보 길드 측에서는 알게 되는 것이다.
칼리오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문장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요.”
그 말에 웬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가 있나 싶었는데 그냥 취미인가?’
당신에 관한 정보를 팔 수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가도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모습이 딱 그래 보였다. 문장의 씰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꽤 많다.
‘루스티첼 가의 씰도 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지.’
전적으로 칼리오페 때문이었다.
“스크랩 북에 웬만한 문장은 다 모았어요. 귀족 문장원에 등록된 문장은 전부 다.”
“대단한 콜렉션이네요.”
“그래서 제가 못 모은 특이한 문양을 수집하고 싶어요. 몇백 년 전에 멸망한 어느 왕국의 문양같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문장의 대표적인 건 비밀 결사대죠.”
빙고.
웬디가 웃으며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머, 말만 들어도 멋있네요. 베일에 둘러싸인 문장이라…….”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꿈꾸는 소녀처럼 반짝 빛났다.
“존재 자체가 비밀이니 그런 곳의 문장을 구한 사람은 거의 없겠죠? 어쩌면 제가 처음이 될 수도 있겠네요?”
칼리오페는 비밀 결사대의 문장을 강조하면서도 오로지 수집에 대한 열의만 보였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희소성은 디자인 자체보다도 더 굉장한 가치이기 때문에 칼리오페의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웬디는 눈을 빛내는 칼리오페를 보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희귀한 문장을 찾아주면 칼리오페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안 되지. 일은 일이니까.’
“하지만 그런 건 비쌉니다. 특히 비밀 결사대의 정보는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가격을 흥정하겠다는 소리에 칼리오페는 잔을 소서에 내려놓았다.
“아가씨께서 치른 값에 따라 저희가 드릴 문장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희귀한 문장만 찾아주신다면 얼마든지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칼리오페는 부자였다. 얼마나 부자인지는 웬디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웬디는 고개를 저었다.
“가장 값이 나가는 건 돈이 아니라 정보지요.”
정보? 칼리오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려 정보 길드에 팔만 한 정보가 제게 있을 리가 없다. 아니, 회귀 덕에 아는 정보가 있지만 과연 팔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제게는 그만한 정보가 없는데요. 차라리 돈으로 내는 게 더 비싸게 쳐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니요.”
웬디는 딱 잘라 부정했다. 그리고는 눈을 갸름하게 뜨며 은근한 어조로 칼리오페를 향해 말했다.
“왜 그래요. 가지고 계시잖아요. 비싼 정보.”
“…….”
입안이 바싹 말랐다.
칼리오페는 동요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웬디를 바라봤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내가 회귀한 걸 알고 있나?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온갖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웬디의 긴 눈매가 요염하게 휘었다.
“아가씨와 관련된 정보요.”
“……네?”
순간적으로 웬디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한 박자 늦게 무슨 말인지 깨닫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웬디를 바라봤다.
‘나와 관련된 정보라니……?’
“웬만한 정보는 다 알아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부터…….”
웬디의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를 흘끗 스쳤다.
“어떤 음식을 싫어하는지. 좋아하는 색깔과 교우 관계. 유치가 언제 처음 빠졌는지도!”
칼리오페는 할 말을 잃었다. 머리가 멍했다.
“가장 인기 많은 건 글씨 변천 과정이에요. 길드 내에 사본을 보관 중이지요.”
그 말에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럴 수가…….’
칼리오페는 실의에 빠졌다. 자신의 검은 역사를 박물관의 전시품마냥 박제해서 보관 중이라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웬디는 사실 원본 중 몇 개는 개인적으로 보관 중이라는 말을 아꼈다. 칼리오페의 글씨, 특히 어렸을 적 글씨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제국의 정보를 쥐고 있는 웬디도 손에 넣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절대 모르는, 새로운 정보였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런데 그런 정보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지—”
“가치는 아가씨가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수요가 결정하는 거지요.”
그 말은 그런 정보를 돈을 주고서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
칼리오페는 경악했다.
“그래서 아가씨, 좋아하는 남자 타입은 어떻게 됩니까?”
“네……?”
“그런 데 관심 가지실 나이 아닙니까.”
“아, 저…….”
칼리오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생각도 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아스타레아스.
칼리오페의 눈 밑이 발그스름해졌다.
‘그래도 밝히면 안 돼. 안 그래도 공자님은 황제의 견제를 받는데 나처럼 논란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황제에게 빌미를 줄 수 있어.’
“별로……. 아직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요.”
“그래요? 또래 영애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네?”
“두 오라버니 분들이야 가족이니 열외로 치고. 힐데르트 영식도 인기 많고, 호르세안 기사님도 그렇고요. 둘 중에서 누가 좋아요?”
“네에?”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웬디는 깨달았다.
‘정말 순도 백 퍼센트의 친구구나.’
그걸 깨달을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웬디는 의문의 1패를 당했을 두 남자를 향해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그래도 왜, 이상형 같은 거는 생각해봤을 거 아니에요.”
웬디의 말에 칼리오페는 우물쭈물했다.
솔직히.
‘하고 싶어, 남친 자랑!’
“일단…… 키 크고 어깨도 넓어서 제가 품에 쏙 들어갔으면 좋겠구요. 청량하고 상쾌한 향기가 나는 사람이요.”
결국 욕망이 이겼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혔다.
“말투는 기본적으로 정중한 존대를 쓰는데 가끔씩 툭 반말을 던지고. 아, 그게 무례하거나 그렇지 않게요. 무례하다기보단 오히려…….”
‘섹시하달까.’
칼리오페는 꺄, 하며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렸다.
“긴 속눈썹을 보고 있을 땐 제가 다 아찔해지고, 서늘한 눈매에 진심 어린 웃음이 맺힐 때는 심장이 콩콩 뛰고…….”
한마디로 잘생겼다.
칼리오페는 좀 더 상세히 아스타레아스의 매력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지만 웬디가 눈치챌까 봐 자제했다.
솔직히 지금 말한 것만 들어도 누가 봐도 아스타레아스였다. 저렇게 잘생기고 매력적인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말은 끝까지 맺어야 하니까.
“상냥한 듯 보이지만 차갑고, 차갑다고 생각하면 따뜻한…….”
칼리오페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런 사람이 좋아요.”
“…….”
웬디는 할 말을 잊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흐릿했다.
* * *
정보 길드를 나온 칼리오페는 마차를 타고 파트리유 거리로 향했다.
얼마 전 어머니의 브로치 중 하나가 고장 난 걸 봐서 새로운 것을 선물해드릴 생각이었다.
파트리유 거리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칼리오페를 보고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도 눈길을 많이 받긴 했지만 신전 공연 이후로는 한층 더 심해졌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소녀들이 말을 걸어왔다.
“저어…….”
“네?”
“패, 팬이에요! 실례지만 같이 사진 찍어도 될까요?”
칼리오페는 당황했지만 소녀들의 간절한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들은 꺅꺅하며 카메라를 꺼내 칼리오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확실히 카메라 보급이 잘 되고 있네.’
니카이논에서는 고급형과 보급형 라인을 번갈아 가면서 출시해 이제는 평민들도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추세가 되었다.
좋은 일이었다. 귀족들에게만 허락되던 것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는 거니까.
“와, 얼굴 진짜 작다. 주먹만 해.”
“나 너무 못 생기게 나왔어.”
“원래대로 나온 거야.”
소녀들은 찍힌 사진을 확인하며 한 마디씩 주고 받았다.
“그럼 전 이만…….”
“아! 저,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인사하고 떠나려는 칼리오페를 소녀들이 잡았다.
“정말로 신전에서 또 공연하세요? 그런 소문이 있던데.”
칼리오페는 멈칫했다. 소문 한 번 참 빠르다. 오늘 아침에 신전 측에 알겠다고 답변을 보냈는데.
“네, 맞아요.”
“어머, 정말이었구나……!”
소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 받은 후 칼리오페를 향해 말했다.
“저희는 무조건 리페님 편이에요!”
“맞아요. 저희 표는 이미 가져가신 거나 마찬가지예요.”
“공연 기대하고 있을게요!”
칼리오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소녀들을 향해 고맙다고 웃어 보였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뒤돌아서서 아틀리에로 가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전에서 칼리오페에게 다시 공연하자며 연락이 왔다. 속가가 매우 흥미로웠다는 믿기도 않는 말을 하면서.
그러면서 제안한 게 있었다.
성가 vs. 속가.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음악을 비교해보는 차원에서 이벤트를 하는 게 어떠냐는 거였다.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 수 있지 않겠냐면서.
‘성가의 장점과 속가의 단점을 말하고 싶은 거겠지.’
청자들이 더 좋았던 노래에 투표하고 이로 우승 여부를 가린다고 했다. 지난번 공연 때 칼리오페가 압도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걸 생각하면 신전의 이런 제안은 이상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이유를 알았다.
‘이맘때였지.’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성녀가 세상에 나왔던 게.’
올해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해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던 해다.
아버지를 살리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칼리오페는 한동안 노래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노래는 가족들을 모두 살리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런데 신전 공연 이후, 자신을 둘러싸고 조성된 여론을 보고 다른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 루스티첼 가와 관련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었지.’
[이 일은 끝난 일이오! 루스티첼 백작은 본인의 실수로 인한 사고로 죽었소! 자꾸 들쑤시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소!]
[루스티첼 일가가 보상금을 노리고 백작의 죽음을 조작하려 한다더군.]
[깨끗한 척은 다 하더니 본색을 드러내네요.]
아직도 생생한 과거의 기억에 칼리오페는 잠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전까지만 해도 루스티첼 가는 명예롭고 청렴결백하기로 이름 높았다.
하지만 한순간에 바뀐 것이다.
‘상대는 그만큼 여론을 움직이는 데 능하다는 뜻이지.’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얼마든지 여론을 움직여 루스티첼 가에 부정적인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내게도 여론을 움직일 힘이 필요해.’
이번 신전 공연을 통해 칼리오페는 그런 힘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엿봤다.
지금 칼리오페는 그야말로 제국 전역을 휩쓸고 있는 돌풍이나 다름 없다. 어딜 가나 칼리오페에 관한 이야기가 꼭 나왔고, 칼리오페를 섭외하고 싶어 하는 곳에서 연락이 쏟아졌다.
원래 저택으로 선물이 자주 도착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까지 조공이라면서 선물을 보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 매체에서 칼리오페의 소식이 빠지는 날이 없었다. 그게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그야말로 칼리오페를 중심으로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내가 노래를 그만두면 이런 관심은 점점 꺼질 거야.’
계속 장작을 넣어야 불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것과 같다. 이왕이면 신전 공연과 같이 대규모 공연일수록 좋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신전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래도 거절하려고 했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으면서 거절하려 한 이유는 하나다.
‘하르첸 경.’
칼리오페가 공연하는 동안 하르첸은 납치 당했다. 걸어가던 그를 누군가가 기절시켰고, 깨어나 보니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곧 발견됐지만…….’
범인은 하르첸에게 계속 속가를 연주하고 다니면 이 다음은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는 뻔했다.
‘비스 신전.’
하지만 하르첸 실종 당시, 미처 의혹을 내뱉기 전에 비스 신전에서 선수를 쳤다.
[신전 내부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다니……. 다 저희가 부덕한 탓입니다.]
[오, 비스 신이시여. 부디 어린 양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보살펴주소서.]
[신전의 책임이 큰 만큼 하르첸 경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찾아내겠습니다.]
그렇게 비스 신전은 하르첸을 수색하는 일에 앞장섰고, 결국 하르첸을 찾아냈다.
‘그야 당연히 잘 찾았겠지. 어디 있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하르첸은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대신 단서로 협박에 대해 말했다.
[속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짓이군요.]
[비스 신전은 속가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칼리오페의 날카로운 물음에 대신관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건 마르멜이 대신관으로 있었던 때의 일이지. 그 후, 비스 신전은 딱히 속가에 부정적이지 않았는데.]
[속가를 혐오한다면 왜 영애를 신전 공연에 초청했겠습니까. 영애는 그간 속가를 불렀는데.]
[전 대신관의 일에 관해 사과했는데 아직 영애의 마음이 풀리지 않았나 봅니다.]
아예 계획하고 작정해서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칼리오페가 입을 다물자 신관들이 신나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런 짓을 저지를 만큼 속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보군요.]
[다른 곳도 아니고 신전에서 속가를 부른다니 가만있을 수 없었던 거겠죠.]
비스 신관들은 은근히 속가가 불러온 범죄라면서 속가 자체에 유해성이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칼리오페는 바로 반박했다.
[제가 속가를 부를지 성가를 부를지 범인이 어떻게 아는 거죠? 저는 무슨 노래를 부른다고 밝힌 적이 없는데요.]
[그거야 저희도 모르죠. 그냥 범인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하니 속가를 부른다고 생각했을 거라 짐작할 뿐.]
[영애가 어떤 노래를 부를 계획이었지는 우리도 모르니까요. 영애가 우리에게도 안 밝혔으니.]
대기실에 들어간 신관이 있었지 않냐고 반박해봤자 아니라고 잡아뗄 것이라는 걸 깨닫고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따지고 보면 영애 때문이 아닌가.]
대신관이 그런 칼리오페를 보며 입매를 늘였다.
[영애의 반주자가 되기 전에 하르첸 경은 속가를 연주한 적 없지 않나.]
[…….]
[고집스레 속가를 부르고 다니니까 주변 사람이 이런 수모를 당하는 거야.]
대신관이 일부러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리오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니까.
신전이 저지른 범죄다.
하지만 하르첸이 속가를 연주하지 않았다면.
‘내 반주자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칼리오페는 하르첸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반주해달라 할 수도 없었다.
하르첸은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칼리오페를 한참 바라봤다.
[레이디께는 제가 겨우 그 정도인가요.]
조용히, 그러나 들끓는 감정을 눌러 담아 내뱉은 말에 칼리오페는 놀랐다.
[다른 파트너가 있으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저 역시 레이디의 파트너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은 제 파트너예요. 함께해서 너무 영광이었고 즐거웠어요. 진심이에요.]
[이렇게 쉽게 손을 놓는 파트너요?]
[쉽게라뇨! 경은 죽을 수도 있었어요. 아무 일 없이 끝났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에요!]
신전에서 하르첸에게 더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첫 번째는 범죄가 클수록 덮기 어렵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협박이 레이디께 먹힐 것이기 때문이지.’
하르첸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칫 잘못하면 하르첸 경의 손을 못 쓰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구요!]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가느다란 비명 같았다. 희게 질린 채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칼리오페를 하르첸은 보고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래도 괜찮아요.]
납치 당했을 때,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괴한이 다가올 때도 하르첸은 두렵지 않았다.
걱정되는 건 단 하나였다.
‘내가 사라져서 공연은 어떻게 되는 거지.’
[괜찮다니……. 속가를 부르겠다는 제 고집 때문에 하르첸 경이 그런 일을 겪은 건데. 게다가 또 겪을 수도 있다구요! 다음번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손을 못 쓰게 되는 건 제게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이죠.]
하르첸은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거예요.]
[전혀 괜찮지 않아요! 제 고집 때문에—]
[고집이 아니죠. 레이디가 속가를 부르는 게 단순히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노래 하나 부른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속가를 부르면서, 지난 3년간 알게 모르게 사회는 변했다.
평민들이 즐기는 것은 무조건 천박하다고 생각하던 귀족들이 평민들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계층 간의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졌다.
칼리오페는 신전의 문화 지배를 막기 위해 시작한 것이지만, 다른 곳에도 속속히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었다.
[나도 그 일에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르첸 경…….]
[파트너로서, 팀으로서 우리는 함께한다고 생각했어요.]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보랏빛 눈동자를 보자 하르첸이 어떤 마음인지 절절히 전해져 왔다. 그가 이제 와 선을 긋는 칼리오페의 태도에 얼마나 실망하고 가슴 아픈지.
‘속가를 반주하는 순간부터 그는 각오를 마친 상태였는데.’
하지만 망설여졌다.
어쨌거나 하르첸이 다칠 수도 있는 문제니까.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어요.]
하르첸은 담담하게 말했으나 그 눈동자는 애달팠다.
칼리오페를 만난 순간부터 운명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칼리오페와 갈라서면 몸은 무사할지언정 영혼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칼리오페는 그의 뮤즈이자 음악의 원천이었다. 그녀 없이 영감이 솟을 리도, 연주하거나 작곡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이대로 끝낸다면 저는 손이 멀쩡해도 더는 연주할 수 없어요. 그게 손이 다친 것보다 더 잔인한 일 아닌가요.]
[……제가 경솔했어요.]
결국 칼리오페가 물러섰다.
[저 때문이 아니라 하르첸 경도 이유가 있어서, 분명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속가를 연주한 건데. 그 마음을 간과했어요.]
칼리오페가 그만두라고 하는 건 그 신념을 꺾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념이 꺾인 사람이 어떻게 더 이상 연주하겠는가.
고개 숙인 칼리오페를 보고 하르첸은 작게 미소 지었다.
‘아니요. 내 모든 것은 다 당신 때문이랍니다.’
내뱉지 못한 말을 꼭꼭 숨긴 채.
* * *
“칼리오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칼리오페는 아틀리에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엔—
“오랜만이에요, 카스틸로 부인.”
칼리오페가 반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예의 바르게 카스틸로 부인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남자친구의 할머니!’
예전에 노래 때문에 백악 저택에 찾아가 만나 뵈었을 때도 두근거리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전혀 달라……!’
두근거리는 의미 자체가 달랐다.
칼리오페는 어쩔 줄 모르고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쳐 생긋 미소 지었다.
“쇼핑 중인가? 하지만 여긴 네 나이대가 쓰기엔 다소 취향이 다를 텐데.”
“아, 제가 아니라 어머니께 선물 드릴 걸 보려구요.”
카스틸로 부인은 얌전히 미소 지으며 답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컸군.’
2년…… 아니, 3년 전인가. 그때 홀로 저택에 찾아와 또박또박 말하던 작은 아이를 기억했다. 그간 신문이나 광고에서 칼리오페의 모습을 봤지만 직접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조금 더 또래처럼 보이는데.’
지금 칼리오페는 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현재를 보지 못하고 뭔가를 대비하듯 딱딱하게 굳어있었던 게 거짓말처럼.
칼리오페는 현재를 살아가며 현재를 즐기는 듯 보였다.
‘우리 레아스님도 조금이지만 이렇게 변하셨지. 역시 이 아이 덕일까.’
“카스틸로 부인께서 직접 쇼핑을 나오기도 하시는군요.”
“너무 집에만 있다 보면 답답해지니까.”
무슨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동의하며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의 눈길을 느낀 직원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진열장에서 브로치를 꺼내 벨벳 위에 올려놨다.
‘앗, 딱히 보고 있었던 건 아닌데.’
비록 시선을 어떻게 둘지 몰라 진열장을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지금 칼리오페의 신경은 온통 남자친구의 할머니에게로 향한 상태였다.
“루스티첼 부인에겐 이게 더 어울릴 거야.”
카스틸로 부인이 눈짓하자 직원이 그 브로치를 꺼내 벨벳 위에 올려놨다. 우아한 진주와 연꽃과 석양을 닮은 파파라차 사파이어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브로치였다.
과연 한눈에 봐도 루스티첼 부인과 잘 어울렸다.
“역시 대단하신 안목이십니다, 공작 부인.”
직원이 이번 신작 중 가장 자신 있는 물건이라면서 브로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브로치는 한눈에 칼리오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벌써부터 어머니께서 착용하신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좋았다.
“이걸로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레이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포장을 준비하는 사이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부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카스틸로 부인. 덕분에 좋은 선물을 골랐어요.”
카스틸로 부인은 그저 고개만 까딱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카스틸로 부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 소개받기도 힘들지만, 어렵게 소개받더라도 문전박대당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런 카스틸로 부인이 무려 선물을 직접 골라줬다. 아무도 믿지 않을 일이다.
“부인께는 이 브로치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카스틸로 부인에게 권했다.
카스틸로 부인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시선만 돌려 브로치를 바라봤다. 별다른 변화가 없기에 칼리오페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하고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때, 직원이 돌아와 칼리오페에게 포장된 브로치를 건넸다.
“이것도 주게.”
카스틸로 부인이 가리킨 것은 칼리오페가 권했던 브로치였다.
내색은 안 했지만 칼리오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카스틸로 부인은 말랑하게 풀어진 칼리오페의 뺨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웃은 것을 깨닫고 바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타인으로 인해 웃게 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레아스님도 그러셨던 걸까.’
하지만 칼리오페는 너무 유명해지고 있다. 바꿔 말하면 논란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점은 영 탐탁잖다.
‘이 아이 자체는 괜찮은데. 물건을 보는 눈도 있고.’
카스틸로 부인의 예리한 눈이 칼리오페를 훑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아틀리에를 나섰다.
“간만에 뵈어서 더 반가웠습니다, 카스틸로 부인.”
“칼리오페.”
카스틸로 부인이 인사하는 칼리오페를 멈춰 세웠다.
“노래가 많이 늘었더군.”
그 단순한 칭찬에도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목이 높다는 말로도 부족한 카스틸로 부인의 칭찬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곧 놀람이 사라지고 칼리오페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다. 카스틸로 부인은 한순간에 만개하는 꽃 같은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미숙하다고 했던 부분은 나아지지 않았어.”
“……네?”
예상치 못한 말에 칼리오페는 멍하니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신전에서 또 너를 초청했다고 했지?”
“네.”
“이번에는 그 점을 깨닫고 고쳐야만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카스틸로 부인의 황록색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네 패배가 될 거야.”
* * *
“제 노래에 부족한 점이 뭘까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괴었다.
오늘 뭔가 묘하게 처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거웠다.
“갑자기 왜?”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거짓말.’
아스타레아스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가 말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냥 제가 2년 전에서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부분이 뭘까, 하고.”
우물우물 말하던 칼리오페가 결국 아스타레아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어지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칼리오페의 신뢰가 느껴져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배부른 포식자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이 된다.
“카스틸로 부인 앞에서 노래했던 때보다 실력은 확실히 좋아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날 긴장한 칼리오페는 엉망으로 노래했다. 첫 음은 떨렸고, 호흡 조절도 이상했다. 이제는 아무리 긴장해도 그런 실수를 하진 않는다.
‘그런데 나아지지 않았다고?’
대체 어떤 점을 말하는 걸까.
초조했다.
[네 패배가 될 거야.]
그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걱정 말아요. 당신은 답을 찾아낼 거야.”
얼음으로 만든 토파즈같이 영롱한 눈이 바로 앞에서 새파랗게 빛났다. 그 시린 색이 어찌나 이렇게 다정하고 달콤할 수 있는지.
“나는 당신을 믿어.”
칼리오페는 숨을 삼켰다.
멍하니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어둡고 진득하게 자리 잡고 있던 불안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비쳐드는 햇빛에 사라지는 그늘처럼, 흔적도 없이—
‘신기해.’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와 눈을 맞추며 생각했다.
‘공자님은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움직일까?’
요 며칠을 잠도 못 자고 전전긍긍했는데 아스타레아스의 말 한 마디로 스르륵 풀린다.
카스틸로 부인은 칼리오페에게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스스로 깨닫지 않는다면 의미 없다는 뜻일 터다.
“고마워요, 공자님. 나는 공자님을 믿으니까, 공자님이 믿는 걸 믿어요. 나를 믿고 열심히 해볼게요.”
칼리오페는 두 주먹을 앙당그레 쥐었다.
‘힘내야지!’
아스타레아스는 제 손에서 벗어난 칼리오페를 다소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부를 노래는 정했어요? 신전 쪽에서 요청한 게 있잖아요.”
“사랑 노래를 부르라고 했죠.”
[수많은 속가 중 가장 대표적이고 인기 많은 장르가 사랑 노래 아닙니까. 성가와 속가를 비교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만큼, 대표적인 곡을 다루고 싶습니다.]
칼리오페는 신전이 보냈던 편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전에서 남녀 간의 사랑 노래를 부르라니.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이별 노래만큼이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당연히 거절했어요.”
“신전 쪽에선 다른 생각인 것 같은데.”
“다른 생각이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전단지 같이 자그마한 타블로이드 신문을 건넸다.
기사에는 칼리오페와 신전의 경합에 대한 소식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문구가 다다닥 박혀 있었다.
빠르게 기사를 훑던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멈췄다.
[제국민의 사랑을 받는 칼리오페가 이번엔 사랑을 노래한다.]
“오늘 신문에서 이런 건 못 봤는데요?”
“레드톱(red tops)이에요.”
쉽게 말해서 황색 언론이라는 뜻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아니면 말고’ 식의 흥미와 낚시성 기사.
“아, 어쩐지. 사람들이 다음 공연에서 속가와 성가를 경합시킬 거라는 것까지 잘 알더라니.”
거리에 이런 레드톱이 돌아다녀서였다.
기사는 분명하게 남녀 간의 사랑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번 신전 공연에서 칼리오페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러나 사실 속가의 가장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장르는 남녀의 사랑이다.]
그렇게 시작해서는 남녀 사이의 사랑 노래에 대한 것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기사만 읽으면 속가는 모두 남녀 간의 사랑 노래라고 착각할 정도네요.”
“어차피 이런 레드톱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다른 노래를 불러도 상관없어요. 정정 기사를 낼 필요도 없고. 문제는—”
“사람들이 남녀의 사랑 노래를 기대하고 있다는 거죠.”
“맞아요. 다른 노래를 부르면 속가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속가의 대표 격인 이성 간의 사랑 노래를 두고 다른 노래를 불렀다고 말이 나올 거야.”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확실히 온건하겠지만……. 신전에서 경합 때문에 꼼수를 쓰며 피해간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장하겠죠.”
“그런 분위기는 득표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거고.”
“그렇다고 사랑 노래를 부르면…… 뭐, 부를 걸 예상하고 듣는 거니 충격이 덜 하긴 하겠지만 부르기도 전에 흰 눈 뜨는 사람들이 있겠죠.”
“흰 눈만 뜨면 다행인데.”
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혼자서 끙끙 고민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아스타레아스와는 제 생각을 이해시킬 필요도 없이 대화가 매끄럽게 흘러가서 좋다.
“결정해야 해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둘 다 장단점은 확실하다. 좀 더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이냐, 상대의 전략에 휘말려 들어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것이냐.
칼리오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곧 결정을 내렸다.
루스티첼은 물러서지 않는다. 오랜 가르침은 빛을 잃는 일 없이 여전히 칼리오페의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랑 노래를 부르겠어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어떤 반론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이나 우려는 그의 눈에 한 조각도 비치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정말요?”
“응.”
아스타레아스의 대답에 칼리오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내가 어떻게 결정할지 알았구나. 알고 있었구나.’
괜히 입가가 말랑말랑하게 풀어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연습에 연습뿐이네요!”
칼리오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활기차게 말했다.
‘뼈를 취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렸어.’
자칫 잘못하면 살만 내주고 끝날 수도 있다.
‘내 노래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그게 관건이었다.
“카스틸로 부인의 말씀을 듣고 제 노래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들리는지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객관적으로?”
“이걸 통해서요.”
칼리오페는 미니 백에서 자그마한 하트 모양의 콤팩트를 쨘! 하고 꺼냈다.
아직 시장에 나오지 않은 니카이논 사의 녹음기였다. 레코딩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내놓을 녹음기 모델—칼리오페 리미티드 에디션— 중 하나였다.
“그건…….”
“녹음기예요. 통신석에 있는 녹음 기능만 따로 뗀 거죠. 물론 마나 소모는 더 효율적이게 개발해서.”
아스타레아스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해하거나 놀라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처음 보는 거일 텐데……. 설마 알고 있었나?’
그럴 리가 없다.
아직 뭘 개발하고 있다는 기사조차 내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워낙 감정 표현이 극적이지 않은 사람이니 그런 거라고 납득했다.
* * *
“이게 아니야.”
칼리오페는 한숨을 탁 내쉬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녹음했던 다섯 개의 후보곡을 돌아가면서 재생했지만 뭔가 확 오는 게 없었다.
발성과 성량, 멜로디의 완급 조절, 호흡과 애드리브. 이 모든 걸 다 다르게 해서 같은 곡을 다양하게 불러봤지만, 아니라는 느낌만 올 뿐 뭔지 모르겠다.
‘다 똑같이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 건 테크닉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뜻인데…….’
칼리오페는 한숨을 내쉬며 신전 노래 영상을 재생했다.
[사실은 이미 레코드 해둔 게 있어요.]
카이논이 자진 신고했던 바로 그 영상이었다. 테스트용이라더니 음성뿐만 아니라 아예 영상으로 녹화했던 거였다. 니카이논은 영상 녹화까지 상용화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개발 중이다.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칼리오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부르는 노래랑 딱히 다른 건 없는데.’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괜찮았었다.
‘하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이대로라면 안 될 거라고 했어.’
뭔가 부족하다면 왜 이때는 사람들의 반응이 괜찮았던 걸까.
반응이 좋았는데도 왜 앞으론 안 될 거라고 말한 걸까.
‘모르겠어.’
답답한 속에서 계속 무거운 한숨이 올라왔다.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간다.
[네 패배가 될 거야.]
초조한 마음에 울고 싶다가도—
[나는 당신을 믿어.]
다시 노력하자고 힘을 끌어모은다.
한동안 녹음 곡을 들으며 끙끙거리던 칼리오페는 벌떡 일어났다.
자꾸만 자기 노래만 듣다 보면 거기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시야를 넓혀보자!’
칼리오페는 타자기 앞에 앉아 전보를 치기 시작했다.
* * *
“이건 또 새로운 모습이네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보고 빙긋 미소 지었다.
지금 칼리오페는 앞머리가 있는 갈색 가발을 쓴 채 눈가에 점을 그려 넣은 상태였다.
나름의 변장이었다.
칼리오페는 괜히 얼굴을 한 번 쓸어보며 물었다.
“이상해요?”
“아니요.”
가까이 다가선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예뻐.”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의 두 볼에 홍조가 올라왔다.
‘나보고 예쁘대.’
아스타레아스가 팔을 내밀에 칼리오페는 수줍게 그에게 팔짱을 꼈다. 이렇게 에스코트 받는 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손 아래 감기는 단단한 근육의 감촉에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열여덟 살이 된 아스타레아스는 이제 소년이라기보단 청년에 어울리는 몸을 하고 있었다.
부유한 평민처럼 차려입은 두 사람은 퍼블릭 하우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테이블이 거의 차 있었다.
‘모두 공연을 보러 온 건가.’
최근 평민들 사이에서 꽤 인기 많은 가수가 여기서 금요일마다 공연을 한다고 했다.
아직 공연 시작 전이라 내부 한편에 마련된 작은 무대 위에는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다른 남자가 아닌 나를 선택해줘서 기쁜데.”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곱게 휘며 장난스레 말했다.
‘꼭 데이트 같아.’
마주 본 채 앉아 있으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첫 데이트.’
칼리오페는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 재빨리 메뉴판을 바라보는 척했다.
어쩐지 부끄럽고, 간지럽고,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이따 노래에 집중해야 하는데.’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데도 오감이 그를 향해 활짝 열린 기분이었다.
“이제 시작하나 보네요.”
과연 아스타레아스의 말대로 가수가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확실히 자유로운 분위기네.’
가수가 마이크를 툭툭 건드리며 소리를 체크하기도 하고, 반주자가 건반을 아무렇게나 누르며 손을 풀기도 했다. 원래 그런 건지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여전히 일행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시작은 급작스러웠다.
아무 언질도 없이 피아노 반주가 리드미컬하게 깔리자 사람들은 수다를 멈추고 무대를 바라봤다.
가수의 달콤한 목소리가 설탕 위를 구르는 것처럼 가볍게 울렸다.
“나 오늘 사랑을 시작했어요. 그대를 기다리는 가슴이 떨려요.”
요즘 유행하는 사랑 노래였다.
적당히 가벼우면서 말랑말랑한 게 듣기 좋았다.
펍 내부를 둘러보던 가수와 칼리오페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가수가 생긋 웃으며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를 번갈아 보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려 노래했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 역시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칼리오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무릎과 무릎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설탕 과자처럼 달콤한 노랫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사랑을 시작하는 설렘을 가득 담은 목소리였다.
콩닥콩닥.
칼리오페의 가슴이 노래처럼 뛰었다.
그 순간,
“어이쿠, 미안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며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가 앉은 테이블을 쳤다. 레모네이드 잔이 휘청거리며 칼리오페 쪽으로 쓰러졌다.
“아…….”
“정말 미안해요, 아가씨. 일단 내가 지금 급해서!”
다급하게 사과한 사내가 뒤뚱거리며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칼리오페는 젖어 든 드레스 자락을 보고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닦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무심코 받아들려던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여자 손수건?!’
손은 자연스레 드레스 자락을 닦으면서도 칼리오페의 정신은 온통 손수건에 쏠려 있었다.
‘왜? 받은 건가? 아니, 남자한텐 남자 손수건을 주잖아? 그럼 다른 사람 거? 누구 거지?’
손에 감기는 손수건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좋은 향기까지 나는 것 같다.
칼리오페는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검은색 펜으로 마음에 시꺼멓게 낙서를 한 것 같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 걸까.
“리페?”
“……공자님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칼리오페는 손수건을 돌려주며 고저 없이 말했다.
“아, 받은 거예요.”
받은 거라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거 같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스타레아스가 다른 사람에게 손수건을 선물 받을 수도 있다.
‘응?’
왠지 이것도 상상하니 조금 기분이 이상해서 칼리오페는 의아했다. 하지만 의아한 건 둘째치고 어쨌거나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남성용 손수건이라면 말이지.’
여성이 남성에게 여성용 손수건—자신의 손수건—을 주는 건 의미가 다르다.
과거 전쟁에 출정하는 기사에게 연인이 자신의 손수건을 주었던 전통이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은 거의 연인 사이에 주고 받는 선물이나 마찬가지다.
‘꼭 그렇다고 법으로 정한 건 아니지만…….’
친구들이 좋아하는 상대의 이름 점을 치는 걸 보고 혼자 몰래 쳐보는 사춘기 소녀로서는 선물의 의미까지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손수건을 주는 의미가 무려…….
‘어디서나 날 생각해주세요.’
칼리오페가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첫 데이트에 다른 여자가 저런 의미를 담아 선물한 손수건을 들고 오다니. 마음 속 낙서가 점점 더 시커멓고 커다래진다.
“누구한테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멈칫해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투명한 물빛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바라본다. 눈동자는 유리 거울처럼 제 모습만 비출 뿐, 칼리오페는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해요?”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상냥하고 예의 있고 차가운 미소.
‘아.’
벽이다.
차갑고 견고하고 거대해 결코 넘을 엄두도 나지 않는 벽.
아스타레아스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세우는 벽이다.
칼리오페는 짧은 호흡을 내뱉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시린 날로 후벼판 것처럼 선득하다.
‘……궁금하면 안 돼?’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반발심이 들었다.
‘안 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는 되잖아?’
이어지는 생각에 칼리오페는 흠칫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사이가 아니야……?’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칼리오페 앞에 펼쳐진 거대한 벽 때문에 속으로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달콤했던 노랫소리가 멀어지고 귓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아까와 같은 장소에 같은 사람과 함께 마주 보고 있는데 전혀 다르다.
꼭 세상이 색을 잃은 것처럼.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나직한 말이 새어 나왔다.
“노래도 들었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더 있다간 변장을 들킬 수도 있고 이만 일어나죠. 옷도 갈아입고 싶고.”
칼리오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퍼블릭 하우스 밖으로 나온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에게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절도 있는 예의가 오히려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가는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차마 붙잡지 못하고 그대로 손을 내렸다.
얼음 같은 눈동자가 조각조각 깨져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 * *
“무슨 얘긴데?”
에피니가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에피니는 기분이 좋았다. 칼리오페가 힐데르트는 쏙 빼놓고 자신만 불렀기 때문이다. 거기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니.
‘힐데 놈보다 내가 더 믿음직스럽다는 뜻 아니겠어?’
에피니가 빨대를 휘저을 때마다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며 딸그락딸그락 청량한 소리를 냈다.
“저어, 이건 제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에요.”
“흐음, 친구 이야기?”
“네에. 친구가 음, 사귀는…… 아니, 사귀는 것 같은 남자가 있었는데—”
칼리오페는 대강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생각해보니까 사귄다는 말도 없었고, 좋아한다는 말도 없었고……. 특별하다고는 했지만.”
“그으래?”
이를 악무느라 에피니의 발음이 이상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 다른 여자가 있는 거라면 대체 왜 그렇게 말한 거지요?”
에피니는 대답 없이 콧김을 훅 뿜었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 김이 날 것 같았다.
“친구 사이여도 걱정되거나 그러면 껴안고 그럴 수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니 칼리오페도 유리안을 다시 만나면 반가움에 껴안을 것 같기도 했다.
“껴안……. 껴안기까지 했어?!”
에피니가 버럭 성을 냈다. 김이 날 것 같은 게 아니라 이제는 아예 김이 나고 있었다.
“막…… 얼굴 이렇게 가까이하고, 머리칼이랑 볼도 쓰다듬고. 그럴 수도 있어요?”
칼리오페가 에피니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에피니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 새끼가 너한테 이랬다고?!”
“네, 아니, 제 친구한테…….”
“그래, 네 친구한테.”
“네.”
“그런데 딴 여자가 준 그 여자 손수건을 가지고 있고?!”
“네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에피니는 복장이 다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키운 내 새끼인데……!’
“뭐 그딴 놈이 다 있어!”
쾅!
에피니는 소리를 내지르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우리 리페가……. 내 리페가……!’
칼리오페가 자기 몰래 연애 비슷한 걸 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다. 그런데 그 상대라는 놈이 이 여자, 저 여자 가지고 노는 바람둥이였다니!
‘이게 다 우리 리페가 너무 순진해서 그래.’
워낙 착하고 순진무구하니 그런 놈팡이한테 깜빡 속아 넘어가 버린 것이다.
“역시 그런 말이나 행동은 사귀는 사이에서 하는 거 맞지요?”
주저하며 묻는 칼리오페를 보고 에피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조금 후에 에피니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오리발이었다. 에피니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친구 사이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나도 대련하다 보면 얼굴 좀 가까워지고 상대 머리 좀 만지고 그래.”
검으로 만진다는 게 좀 다르지만.
“……정말요?”
“어. 전혀 아무 사이도 아닌 지나가는 행인하고도 할 수 있는데?”
칼리오페의 눈초리가 이상해졌다.
에피니는 그걸 깨닫고 크흠, 하고 헛기침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 나갔다.
“아니, 아무튼 내 말은 그 정도로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에피니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칼리오페가 그 바람둥이에게 놀아나 배신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 놈이 칼리오페의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될 수는 없다! 거기다 첫 연애라니!
에피니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활기차게 말했다.
“애초에 별 사이도 아니었네! 상처 받을 것도 없어!”
푸욱.
그 말이 칼리오페의 심장을 갈랐다.
‘처음부터 별 사이가 아니었다……고.’
“난 또……. 나 혼자 착각했네.”
에피니의 품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인 칼리오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구나. 전부 내 착각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속에 바람이 불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잃은 것은 하나도 없건만, 대체 어디에 구멍이 뚫린 것인지 바람이 분다.
사막에 이는 바람처럼 메마른 공기에 목 안이 따끔따끔했다. 마음에 생긴 균열 사이를 바람이 시익,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칼리오페는 웃었다.
“별일 아니라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렇게 친구한테 말해줘야겠어요.”
에피니는 몰랐다.
칼리오페에게 이미 그 남자가 특별한 의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 특별하고 특별해서, 특별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멍하니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에피니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래, 이건 여름 감기도 되지 못 하는 일이야. 아무 의미도 없고, 그냥 지나가면 끝이라고.”
칼리오페의 마른 등을 쓰다듬으며 에피니는 이를 악물었다.
‘죽일 거야.’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어떤 놈팡이인지 몰라도 우리 리페를 건들다니 넌 내가 죽인다……!’
이를 득득 갈던 에피니가 칼리오페를 일으켜 세웠다.
“나가자! 햇빛도 쐬고 단 것도 먹고 싶어. 이제 봄이라구!”
칼리오페는 에피니의 손에 이끌려서 일어났다.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유모가 재빨리 먼저 나가 하녀들에게 테라스에 티테이블을 차리라고 명했다.
에피니는 칼리오페의 손을 꼬옥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막 책상을 지나치는데 책상 위에 놓인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
“왜 그러세요?”
칼리오페는 에피니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에피니의 시선이 향한 곳을 깨닫고 움찔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건 칼리오페가 그린 은패의 문장이었다.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평소라면 에피니를 만나기 전에 싹 다 치워놓았을 거다. 에피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위험한 일에 연루되게 하기 싫어서.
‘그런데 지금 에피니 언니의 반응은…….’
가슴이 떨렸다. 칼리오페는 자꾸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에피니에게 물었다.
“혹시— 혹시, 이런 문양 본 적 있어요……?”
“응.”
에피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봤을 뿐이라 완전 똑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이런 문양은 잘 없으니까.”
가슴이 꽉 조여들며 명치께가 아릿해졌다. 칼리오페는 마른 입안을 한 번 적시고 물었다.
“어디서요?”
에피니가 고개를 돌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비스 신관의 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