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개벽의 노래
칼리오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손이 차가웠다.
거대한 예배당 안에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해 있었다. 아직 반 정도 찼는데도 바글와글했다. 소리가 안에 고이는 예배당 구조 특성상 사람들의 소리가 웅웅 울리며 커다란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잘 할 수 있을까.’
칼리오페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축축한 손에 마른 천이 닿았다. 칼리오페는 그제야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이곳 비스 신전에서 속가를 노래한다.
신전에서는 칼리오페에게 리허설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되묻는 신관의 얼굴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한껏 차올라 있었다. 칼리오페가 필요 없다고 답했던 것은 신전이 편지로 노래 선곡과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던 때뿐이었다.
어차피 정확한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성가대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가대가—]
[우리 도움은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성가대가 나오는 것도 알려드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관들이 킥킥거리며 칼리오페를 비웃었다. 아마 예정과 달리 성가대가 나오는 상황에 당황해서 물어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언질 덕에 성가대가 공연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신관들은 칼리오페가 도착한 때에 맞춰 일부러 보란 듯이 성가대를 연습시켰다. 마치 기선 제압하듯이.
‘아니, 성가대가 먼저 공연하냐 내가 먼저 하냐 물어보려고 했을 뿐인데.’
물어봤자 정상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그냥 리플렛을 확인하기로 했다. 확인 결과 성가대가 자신보다 먼저 공연하는 순서였다.
‘순서는 아무래도 좋아.’
성가대는 사람들의 입장 직전까지 무대를 차지하고 연습했다.
칼리오페는 좁은 대기실에 갇히다시피 있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어서 거기서 연습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오르간 소리가 어떤지 맞춰는 봐야 했는데.’
오르간으로 연습해보긴 했지만 신전에서 연습한 적은 없다. 공간에 따라 소리의 울림이 바뀌기 마련이다. 특히 신전처럼 특수하게 건축된 곳은 더더욱.
‘괜찮아.’
칼리오페는 후하 심호흡을 했다.
‘긴장해서는 될 것도 안 돼.’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고 사람들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계속 사람들이 차는 것을 보다 보면 멀미가 날 것 같다.
‘돌아가자.’
칼리오페는 대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칼리오페는 신관 하나가 대기실 쪽에서 걸어오는 걸 봤다. 그는 칼리오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곧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저쪽에는 내 대기실밖에 없을 텐데?’
신전에서 칼리오페에게 가장 구석진 대기실을 줬기 때문이다.
칼리오페는 미심쩍음을 느끼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시원한 음료수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마시지 않는 게 좋겠지.’
칼리오페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지쳤다.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 * *
“큰일 났어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성가를 부르지 않을 생각인가 봐요!”
관제실 안으로 들어온 신관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뭐라고?”
“성가를 부르지 않는다니?!”
안에 있던 신관들은 모두 경악한 목소리를 냈다. 신전에서 성가 외에 다른 노래를 부른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주자의 악보를 봤는데 성가가 아니었어요!”
“무슨 곡이었어?”
“제목도 안 적혀 있어서 그건 저도 잘…….”
“하! 속가 따위에 제목이 붙어 있을 리가 없지. 가사는?”
“가사도 안 적혀 있었습니다.”
“흥, 엉성한 가사에 엉성한 음만 붙이면 노래인 줄 아는 멍청이가 있지.”
“그리고……. 아무래도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음료를 마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관이 고개를 숙여 대신관에게 사과했다.
“그건 됐어. 어차피 꼭 마실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까. 마시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다행히 대신관은 유하게 반응했다. 신관이 가져온 새로운 정보가 꽤 쓸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군요. 무대에서 추태를 부리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모습은 꽤 볼만 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신관은 대신관이 다른 사람과 주고 받는 말을 듣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무대에 나가지 못하게 할까요?”
신관의 물음에 대신관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러자 다른 신관들이 너도 나도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속가를 부르면 관객들이 야유를 보낼 텐데요. 아무리 그래도 신전에서 속가를 부르는 게 말이 됩니까. 다들 기막혀할 겁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속가가 통하면 그땐 돌이킬 수 없어집니다. 신중해야 해요.”
“그런데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사랑 노래나 부를 텐데.”
신관 하나가 관제실에 놓여 있던 종이를 툭 가리켰다.
“우리 모두 그간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사교계에서 부른 노래 목록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반응이 특히 좋았던 곡들도 분석해두었지요.”
“다 사랑 노래였지.”
대신관의 말에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반응이 좋았던 곡은 모두 다 사랑 노래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큰 무대에서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부를 노래란 뻔하지요.”
“지금 남녀 간의 통속적인 사랑 노래를 불러봤자 역효과만 날 겁니다.”
“오히려 우리에겐 잘 됐지요. 그 건방진 년에게 현실을 알려줄 수 있으니.”
“흐음…….”
신관들의 말에 대신관은 턱을 괸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럼, 예정대로 무대에 내보낼까요?”
질문에 결단을 내린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갑자기 무대가 취소되면 사람들도 당황하겠지. 그대로 내보내.”
“알겠습니다.”
대답한 신관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대신관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잡아챘다.
“그 대신.”
뒤돌아보니 대신관이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다른 걸 선물해줘야겠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가라고 했듯 만에 하나의 상황을 위해 안전핀을 꼽아둬야겠거든.
대신관의 눈동자가 음습하게 빛났다.
* * *
“어머니?”
칼리오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들어온 사람을 바라봤다.
“어머, 있었구나.”
칼리오페를 보고 살짝 놀랐던 루스티첼 부인이 후후, 웃으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루시우스 오라버니 그리고 로베르트 오라버니.
좁은 대기실이 한가득 찼다.
칼리오페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돌아오시기 전에 몰래 준비해서 놀래켜 드릴 생각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하르첸이 들어오며 말했다. 문을 닫은 그가 칼리오페를 향해 옅게 웃었다.
“조금 긴장한 듯 보이셔서.”
칼리오페는 아무 말 없이 하르첸을 바라봤다. 긴장한 자신을 위해 하르첸이 일부러 대기실에 가족들을 불러온 것이다.
뭐라고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리페!”
하르첸과 칼리오페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것을 보고 눈을 샐쭉하게 뜬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로베르트의 품 안에서 그를 올려다봤다.
“뭐 하는 거야. 떨어져.”
루시우스가 눈매를 서늘하게 굳힌 채 로베르트를 칼리오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
갑자기 보드랍고 따뜻한 게 그런 세 사람을 폭 껴안았다.
“어머니?”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아들딸을 품에 한가득 끌어안고 후후 웃었다. 이제는 다 커서 그녀의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게 가슴 벅차게 기쁘기도 하고,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가족들을 지켜보던 루스티첼 백작도 다가와 네 사람을 담뿍 끌어안았다.
“수, 숨 막혀…….”
커다랗고 단단한 품에 몸이 꾹 눌린 로베르트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과장되게 말했다.
“풋……!”
칼리오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꺄르륵 하는 목소리에 가족들 모두 칼리오페를 바라봤다가 입가를 부드럽게 풀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끌어안은 채 미소 짓는 가족들을 찬찬히 올려다봤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불안과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가족들의 품에서 빠져나온 칼리오페가 결심하듯 그들을 직시하며 말했다.
“저 오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을 위해 노래할 거예요.”
그 말에 가족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막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대하고 있을게.”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모습에 칼리오페의 뺨 역시 푹신하게 부풀며 얼굴 가득 웃음이 깃들었다.
그때였다.
쪽, 두 오리버니들이 칼리오페의 양 뺨에 기습적으로 뽀뽀했다.
“어?”
“아니, 나도 모르게.”
루시우스가 난감한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럼 지켜볼 테니까!”
로베르트가 히히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응, 그래. 지켜보고 있을게. 엄마를 위해 노래한다니 감동이야.”
“아빠를 위해서 노래한댔지.”
“절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아니, 날 위해서랬어!”
가족들 사이에 파지직 하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칼리오페는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불안함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여하간 조금 이따 봐!”
소란스러웠던 가족들이 나가자마자 대기실엔 정적이 찾아왔다.
칼리오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다.’
하르첸은 칼리오페의 혈색이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르첸 경.”
“네?”
“고맙습니다.”
칼리오페는 하르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제가 뭘…….”
정중한 인사에 하르첸이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하르첸이 자신의 반주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첫 만남이 어긋났었으니까.
‘만약 그 어긋났던 것을 하르첸 경이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들은 계속 어긋난 채 있었을 것이다.
‘모두 하르첸 경 덕분이야.’
“아니요. 덕분에 무척 도움이 됐는걸요. 이번뿐만이 아니라 항상.”
칼리오페는 하르첸을 향해 진심을 담아 웃었다. 좁은 대기실 안에 태양이 내리쬐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하르첸 경이 제 반주자라서 다행이에요.”
그 말에 하르첸의 눈동자가 훅 커졌다가 가라앉았다. 하르첸은 차마 칼리오페를 더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귀 끝이 발개져 있을 게 분명하다.
입매가 울렁이며 절로 읏, 하고 눌러 죽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도…… 레이디의 반주자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점점 작아지는 말에 칼리오페가 하르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힘없이 내려가 있는 하르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힘주어 강하게.
이제는 하르첸이 긴장한 차례인가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용기를 준 것처럼 칼리오페 역시 그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저는 하르첸 경을 믿어요.”
그 말에 하르첸이 고개를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투명하리 만치 맑은 산호빛 눈동자가 분명하게 그를 담고 있었다.
“제가 하르첸 경을 믿는 것처럼 하르첸 경도 저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하르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무대에서 혼자가 아니잖아요.”
칼리오페가 생긋 웃고는 하르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꼬옥 주었다.
“……네.”
하르첸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 그런데 저 음료는 마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대답을 들은 칼리오페가 맞잡았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하르첸은 사라지는 온기에 짙은 아쉬움을 느꼈지만 그녀를 붙잡을 용기가 없었다.
“신관이 몰래 놓고 갔더라고요. 감이 좋지 않아요.”
“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걸 그랬어요.”
“아니요. 하르첸 경의 탓이 아닌걸요. 무엇보다 절 위해 가족들을 불러오느라고 그러셨던 거고.”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리고 신관들이 염탐할 때를 대비해놨잖아요?”
음료를 놓고 가면서 악보를 안 봤을 리가 없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하르첸에게도 올라붙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렇죠. 무슨 곡인지 들키지 않으려고 제목도 가사도 다 지웠으니까요.”
편곡도 강하게 들어간 데다가 신관들은 속가를 잘 모르니 악보만 봐선 알 수 없다.
“속가라는 걸 들킨 건 아쉽지만요. 깜짝 선물처럼 속가를 불러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무슨 노래인지 들키지 않는 거니까요.”
그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곡인지 알면 대신관이 공연 자체를 막을 수도 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다음 곡이 영애의 차례입니다. 따라오시죠.”
신관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을 나섰다.
긴 복도를 따라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자 신관이 걸음을 멈췄다.
“반주자는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무대에 입장하는 위치가 달라서요.”
그 말에 하르첸이 고개를 끄덕이고 신관이 가리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칼리오페와 하르첸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부딪쳤다가 비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서로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무대 상수에 도착하자 신관이 멈춰섰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곤 커튼 사이로 성가대를 바라봤다.
새로운 곡이 시작하기 직전이라 예민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트리며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울렸다.
“……!”
전주 없이 시작된 노래가 여러 갈래의 화음으로 나뉘며 기 막히는 하모니를 자아냈다. 다른 것은 하나 섞여들지 않고 순수한 인간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찬미가였다.
한 소절이 끝나자 오르간이 이어받듯이 연주를 시작했다.
신전 전체가 소리에 공명하듯 떨리고 그 위에 노래가 얹어지기 시작한다. 오르간은 구름처럼 노래를 떠받들었고 노래는 더 위로, 위로 향하며 찬란하게 부서졌다.
이 웅장하고 장엄한 소리의 홍수에 정신이 멀 것 같았다.
압도적인 성량. 풍부한 화성. 그리고.
“와아아아아—”
“세상에……!”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신을 찬미하는 노래가 짙어질수록 성가대를 중심으로 빛무리가 퍼져 나왔다.
오색찬란한 빛의 향연.
이것이 바로 성가대가 발휘하는 신성력이었다.
‘아무 효과가 없지만.’
기적을 발현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신성력이기에 어떤 효과도 없지만 예쁘긴 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옆에서 칼리오페를 보고 있던 신관이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아, 이제 영애 차례군요. 뭐, 열심히 해보십시오.”
신관이 칼리오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건 응원이 아니라 조롱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신경 쓰지 않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조금 전까지 무대를 가득 메웠던 성가대와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한없이 대비되었다.
‘……많아.’
칼리오페는 눈앞에 한가득 펼쳐진 사람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로 끝이 아니다. 디바인 크리스탈로 생중계되고 있으니까.
당연히 떨릴 수밖에 없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탑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봤을 때처럼 명치 부근이 간질거리며 조여들었다.
‘괜찮아. 혼자가 아니니까.’
칼리오페는 마이크를 꽉 붙잡았다.
하르첸이 함께 한다. 칼리오페는 하르첸을 믿었다.
‘좋아.’
호흡이 가라앉고 심장도 진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지?’
아무리 기다려도 반주가 나오지 않았다.
칼리오페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던 관중들의 얼굴에 점차 짜증이 베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당황해서 오르간 쪽을 바라봤다.
‘없어?!’
오르간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왜 시작 안 해?”
“반주자가 안 온 거 같은데.”
“그럼 어떻게? 노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웅성거림이 점차 심해졌다.
공연을 주관하는 신전 측에서도 당황할 법한데 그들은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칼리오페의 어깨를 툭툭 쳤던 신관은 아예 그녀를 보며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너희 짓이구나.’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당장 이 무대를 어떻게 하는가다.
선택지는 두 가지. 그대로 못 부르겠다고 내려오거나.
‘무반주로 부르거나.’
현장에서 반주가 있고 없고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 거기다 그냥 무반주도 아니고 땅 울림이 느껴질 정도로 웅장했던 성가대의 노래 뒤다.
이 상태로 노래를 불렀다가는 성가와 비교 당해 속가는 역시 촌스럽고 아마추어적이고 빈약한 것이라고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게 저들이 원하는 거겠지.’
칼리오페는 정면에 보이는 관제실을 향해 미소 지었다.
‘한 번 시험해볼까? 너희 뜻대로 될지, 내 바람대로 될지.’
여태까지 쌓아온 게 다 무너질 수 있다.
각오했던 일이다. 쉬울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칼리오페의 눈이 관중석에서 가족들을 찾아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니 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응, 난 괜찮아요.’
가족들이 있으니까.
이 노래는 그들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사라졌다.
비웃음을 짓고 있는 신관들, 호기심 어린 눈을 한 사람들, 짜증 나 있는 사람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기자들.
모두가 사라지고 검게 물든 시야에 빛이 깃들었다.
칼리오페가 시간을 되돌아오며 다시 생을 얻었을 때 보았던 빛이다.
태초의 순간이 찾아온다.
칼리오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 * *
“아, 진짜 짜증 나게.”
제국 남부에 있는 비스 신전의 신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신성력을 사용하느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왜 이딴 일을 생중계한다는 거야.”
교대는 아직 한참 남았다. 그는 노래하지 않는 칼리오페를 원망스레 노려봤다. 칼리오페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의 일이 더 길어진다.
“별것도 아니구만 뭘 저렇게 뜸 들여.”
막 말을 마친 순간, 신관은 이상한 힘을 느꼈다.
“무슨……?”
이변은 칼리오페가 노래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일어났다.
귀를 잡아끄는 목소리였다. 맑은 물처럼 청아하기도 하고 깊은 늪처럼 습하기도 했다. 목소리에 마력이 깃든 것처럼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신관은 이상을 느꼈던 것도 잊은 채 디바인 크리스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서 여신이 노래하고 있었다.
‘어?’
신관은 눈을 깜빡였다. 여신이라니. 앵글을 너무 멀리 잡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잘못 봤나 보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까 느꼈던 게 착각이 아니야. 신성력이 별로 안 빠져나가는데?’
몸에서 빠져나가는 신성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디바인 크리스탈 발동기를 확인해봐도 이상이 없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갑자기 신성력 소모가 줄어든 것이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 * *
“왜 저래?”
“긴장해서 언 거 아니야?”
“안 부르는 것 같은데 그냥 갈까?”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노래한다길래 와봤는데.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고.”
비스 본 신전 안.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으나 이제 사람들은 대놓고 떠들고 있었다.
예배당 안이 시장통처럼 와글와글 시끄러웠다.
그때였다.
“지금—”
“쉿!”
소란을 뚫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하던 말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커다란 무대 위에서 자그마한 소녀가 홀로 서서 노래하고 있었다. 성가대의 폭발적인 무대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왜소해 보였다. 그게 보통일 터였다.
하지만.
“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광활하리만치 넓은 무대 위에서 칼리오페는 밤하늘의 별처럼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 * *
콰앙!
테이블이 부서질 것 같았다.
“대, 대신관님 일단 고정하시고…….”
“그러다가 기판을 다 부수겠어요.”
신관들이 대신관의 허리춤에 달라붙어 말리기 시작했다. 관제실 안에는 디바인 크리스탈 송출 컨트롤러를 비롯해 여러 기판이 있는데 대신관이 난동을 부리다 다 부술 기세였다.
“저 꼴을 보고도 진정하라는 소리가 나와? 저 요망하고 약삭빠른 년이! 잔재주만 가득해서는……!”
그때 시린 목소리가 난장판 사이로 파고들었다.
“설마 지금 그 요망하고 약삭빠른 년이 내가 아는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신관들이 말려도 행패를 멈추지 않던 대신관이 우뚝 멈췄다.
“……카스틸로 공자.”
관제실 문가에 선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열린 문을 똑똑 두드린다.
“일단 노크는 해두지.”
“여긴 어떻게…….”
대신관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열려있던걸. 그것보다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스타레아스가 거침없이 관제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분명 전 대신관인 마르멜과 문제가 있고 나서 비스 신전은 피해자인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호의를 품었다고 하지 않았나?”
대신관은 당황했다.
설마 아스타레아스가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대신관이 알기로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는 아무 관계도, 사적인 접점도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다.
‘이걸 빌미로 신전을 압박할 셈이야……!’
그런데 아스타레아스가 신전을 압박할 이유 따윈 없었다.
아니, 하나 있다.
‘우리가 황제와 결탁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황제가 대외 정책 중 비스 신전의 편의를 다소 봐주긴 했지만 그것만 봐선 황제와 신전의 깊은 관계를 알아채긴 힘들다. 역대 황제들은 모두 선호하는 신전이 있었고 다들 이번 대도 그럴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원래 사람은 찔리는 것이나 들키면 안 되는 것이 있을 때 그 부분에만 신경이 몰리기 마련이다.
아스타레아스는 정확히 그 점을 꿰뚫어 봤다.
‘혹시 나와 리페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면 다른 쪽으로 몰아가려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겠군.’
아스타레아스는 대신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며 느긋하게 생각했다.
“공자가 오해한 거요. 우리가 왜 루스티첼 영애를 두고 그런 말을 하겠소? 영애에게 신전에서 공연해달라 초청한 게 우리인데.”
“흐음, 그래? 그럼 반주자는 어디 있지?”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까딱하며 물었다. 눈매가 나긋이 휘었지만 어쩐지 싸늘한 느낌이었다.
“우리도 모르는 일이오. 안 그래도 나타나지 않아서 우리도 곤란해하던 참이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신전 공연에 불참이라니!”
대신관은 시침을 떼다 못해 아예 제 쪽에서 역정을 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럼 일단 비스 신전에서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없고, 오히려 신전에 초대할 정도로 호의적이라는 거지?”
“그, 그렇소!”
“그럼 그 호의에 걸맞게 좀 더 잘 비춰주는 게 좋지 않아?”
“뭐요?”
아스타레아스는 의아해하는 대신관을 무시하고 디바인 크리스탈 송출 컨트롤러와 기판으로 손을 뻗었다.
“무슨 짓을……!”
신관들이 기겁해서 다가갔다.
아스타레아스가 말없이 눈동자만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흠칫! 신관들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졸아든 자신들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더 이상 다가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새파란 눈동자에 베인 살기와…….
‘마력.’
신관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분명한 경고였다.
신관들이 조용한 사이 아스타레아스는 여유롭게 기판을 조작했다.
신전에서는 일부러 디바인 크리스탈에 칼리오페의 모습이 손톱만 하게 나오도록 잡고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크리스탈에 칼리오페가 잘 나오도록 손을 움직였다.
* * *
다시 시간을 돌아왔을 때, 눈도 못 뜨던 그때.
눈을 감고 있으나 컴컴하던 시야에 빛이 비춰들었다.
칼리오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소중히 하며 기억했다.
단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꿈에서도, 죽음의 순간에도 그리워했던 가족들의 모습이다.
처음 눈을 떴을 때를 기억한다.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보았던 날.
눈물 어린 부모님의 환한 미소, 뛰어오던 오라버니들.
‘내 사랑하는 가족들.’
칼리오페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칼리오페의 청아한 목소리가 마치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부르는 태양처럼 소란을 밀어냈다.
웅성대며 떠들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신전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하던 생각도 멎은 채 멍하게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광활한 무대 한가운데 작은 소녀가 오도카니 서 있다.
소녀를 감싼 건 아무 것도 없다.
노래할 때마다 화려한 빛무리를 뿜어내는 신성력도, 웅장하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도, 뻗어 나가는 완벽한 화음도. 신전의 노래처럼 경외심을 들게 하지도, 성스러워 범접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감정을 자극했다.
맑고 청아한, 그러나 어딘지 슬픔과 쓸쓸함이 깃든 목소리가 울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뭔가 찡하게 울렸다.
가슴이 절로 촉촉하고 말랑말랑해졌다. 그 상태라면 무엇이라도 사람의 연약한 곳 깊숙이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칼리오페가 부른 노래는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애정.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마음.
그 깊은 그리움.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관객들은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함께 온 딸과 어머니는 서로의 손을 꼬옥 붙잡았고,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은 집에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괜히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건 신의,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였다.
칼리오페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꼭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아니, 내 마음을 노래하는 이가 있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칼리오페의 노래에 공감했다. 목소리가 아름답다거나 멜로디가 좋다거나 이런 객관적인 판단을 할 새도 없었다.
그냥 좋았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칼리오페의 노래에 감화되었다.
* * *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아!!”
“칼리오페! 칼리오페!”
흥분의 도가니였다.
여태까지 숨죽였던 게 거짓말처럼 예배당 안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천둥처럼 울리는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칼리오페를 향해 경의와 감동을 표하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밭은 호흡을 내뱉었다.
열광하는 사람들의 흥분이 그녀에게 찌릿찌릿하게 전해져 왔다.
눈앞의 광경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성가가 아닌 속가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는 것. 그게 칼리오페가 생각한 최고의 결말이었다. 이런 열광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칼리오페! 칼리오페! 칼리오페!”
“칼리오페 루스티첼—!!”
계속해서 사람들이 칼리오페의 이름을 연호했다.
칼리오페는 이대로 무대 위에서 내려와도 되는지, 아니면 뭔가 더 해야 하는지 얼떨떨했다.
잠시 허둥지둥하던 그녀가 관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관중석에서 한 차례 웃음 소리가 나오고 박수가 더 커졌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왜 웃지?’
칼리오페는 갸웃갸웃하면서 관중을 힐끔 보며 무대를 종종종 빠져나왔다.
칼리오페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 사이에서 다시 웃음이 흘렀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사람들은 상기된 얼굴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여운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지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생각이 스쳤다.
‘칼리오페의 노래를 듣고 싶어.’
* * *
대신관은 망연자실해서 관객석을 바라봤다.
칼리오페가 노래를 마치자마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성가대가 노래를 부를 때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원래 계획대로라면 칼리오페가 홀로 노래를 부르는 게 볼품 없고 비루했어야 한다. 커다란 오르간 소리와 수십 명이 만들어낸 화음과 대비시켜 성가의 위대함과 속가의 천박함을 아로새겨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대비는 칼리오페의 노래에 진정성을 더해주었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무대.
고요한 가운데 울리던 소녀의 맑은 목소리.
보여주기 위해 노래하는 게 아니라, 홀로 푹 빠져 부모님을 생각하며 노래하는 것 같았다. 관객들에겐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쳤을 것이다.
게다가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워낙 풍부하고 성량이 좋아서 성가대보다 노래가 못하다는 인상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대신관은 송출 화면을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가 기판을 조작해 텅 빈 무대 대신 관객석을 찍고 있었기에 화면 속에는 흥분한 사람들이 그대로 잡히고 있었다.
대신관은 눈물을 흘리며 상기된 얼굴로 미소 짓는 사람들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설마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가는 길에 비단을 깔아준 것인가?’
믿을 수가 없다.
‘이 내가 이용당한 것이라고……?!’
* * *
“이거! 이것대로 만들어주세요!”
“앗, 저도요! 리페님께서 하셨던 그대로!”
영애들이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모두 신문에 실린 칼리오페의 공연 사진을 자라낸 것이었다.
‘또인가…….’
장신구 아틀리에 장인은 몇 번째인지 모를 똑같은 주문을 받았다. 사교 시즌도 아닌데 갑자기 주문이 폭발적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 주문은 모두 한 가지를 원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비스 신전 공연에서 칼리오페가 착용하고 나온 장신구.
이제는 사진을 보지도 않고서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다.
바쁜 것은 장신구 아틀리에만이 아니었다. 드레스샵을 비롯해 패션계 모두가 급작스러운 성수기를 맞았다.
가장 붐비는 곳은 칼리오페가 직접 드레스와 장신구를 샀던 가게들이었다.
처음에는 영애들이 알음알음 찾아온 게 전부였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가 칼리오페 영애가 드레스 맞춘 곳이죠?” 하고 물으며.
그 다음날엔 아예 신문에 실렸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드레스를 만든 곳은?]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목걸이를 만든 이터널 아틀리에]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헤어드레스를 만든 장인을 만나다]
주요 일간지가 그런 기사를 낼 정도이니 가십지는 더 했다. 칼리오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낱낱이 분석해 가격대와 판매처, 얼마나 예약이 밀렸는지까지 적어놓았다.
이제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한 번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가게들이 너도나도 ‘칼리오페가 우리 가게 들렸다.’ 하고 기자들에게 연락했다.
사교 시즌도 아닌 추운 겨울에 때아닌 성황을 맞아 상업 지구에 활기가 넘쳤다.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층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오더메이드를 할 수 없었기에 기성품을 구매하고자 했다.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이것과 비슷한 것 없나요?” 하고 묻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에 가게들은 앞다투어 쇼윈도에 칼리오페가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장신구를 내놓았다. 아예 신문에 나온 칼리오페의 사진을 유리에 붙여놓은 곳까지 있었다.
옷가게들도 전부 칼리오페가 입었던 풍과 비슷한 디자인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색깔이나 디테일을 어레인지해도 기본형은 칼리오페가 무대에 입고 나온 드레스였다.
기성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들은 재빠르게 디자인을 참고해 공장을 돌렸다.
원래 이 시기는 겨울이라 날도 추운 데다가 이미 신년 행사도 다 끝나서 소비가 주춤하는 때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소비 시장이 활발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 내수 시장이 활발히 돌아가게 된 이유는 부정할 수 없이 단 하나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칼리오페 효과’라고 칭하기까지 하며 신문에 사설을 냈다.
원래도 칼리오페는 인기 모델로서 제도의 유행을 선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케일이 남달랐다.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그녀의 무대가 전국 곳곳의 비스 신전에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칼리오페의 패션은 제국 전역에 유행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주문 안 받습니다.”
“네에?!”
“재료 수급도 어려워요, 아가씨들. 지금 갑자기 주문이 급등해서 다들 난리예요. 정확히 같은 색의 같은 보석으로 원하시는데 그런 핑크 사파이어는 잘 나오지도 않아요.”
“그래도…….”
“재료가 있다고 해도 주문이 워낙 밀린 상황이라……. 지금 주문해도 반년 후에야 받게 되실 겁니다.”
장인의 말에 영애들의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해졌다. 그래도 칼리오페와 꼭 같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리페님이 여기서 사셨다고 들었는데……. 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칼리오페가 입고 착용했던 것들의 인기도 이런데 칼리오페의 노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신이 내린 목소리]
[신마저 감동했던 3분]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부른 노래는?]
[음악계에 거대한 해일이 몰려온다]
[성가인가, 속가인가]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차지하고 있는 건 단연 칼리오페 사진이었다. 그 밑으로는 그녀가 부른 노래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져 있었다.
제국의 모든 문화와 예술은 신전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돌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자 센세이션이었다.
이렇게까지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니 비딱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나도 가볼 걸 그랬나. 어땠는지 궁금하네.”
“근데 그렇게까지 난리 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이래 놓고서 막상 까보면 별 거 아닌 경우 많잖아.”
“나름 화제성 있는 애잖아. 그런 애가 노래했으니 여러모로 띄워주는 거겠지.”
“무슨 사업도 하지 않나? 자기 이름 걸고서. 실질적인 건 부모가 다하겠지만. 그런 사업 홍보용 아니야? 새 사업 여나?”
“신전에 기부 많이 했나 보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속가를 신전에서 부르다니……. 나는 좀 그래. 홍보용으로 신전 빌려 썼으면 좀 맞춰야 할 거 아냐.”
“어떤 장소인지 아무 고민도 없었나? 그냥 생각이 없는 건가?”
마차 대기소 안에서 떠들썩하게 말을 주고 받는 걸 듣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안 들으려고 해도 목소리가 커서 들을 수밖에 없다.
결국 듣다 못한 사람이 한 마디 했다.
“저기요. 공공장소인데 조금만 목소리 좀 낮춰주세요.”
“아, 예에.”
누가 봐도 비꼬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들으라는 듯 쑥덕댄다.
“뭐야, 여기 전세 냈나 봐.”
“우리가 칼리오페 안 좋게 말하니까 저러는 거야? 하여간 무서워서 말을 못 해요.”
“사실을 말하는 건데 말이야. 입 틀어막는 거지, 지금?”
이쯤 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참기 힘들어졌다.
“그쪽 분들이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서 목소리 낮춰달라고 한 거고요. 전세 냈냐는 말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네요.”
“꼬여서 온갖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알겠는데. 그쪽이 생각하는 거 다 틀렸거든요?”
“그렇게 떠들 거면 제대로 알고 말하든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 크고.”
“맞아. 누가 비스 신전에 기부를 많이 해요. 루스티첼 영애는 오히려 비스 신전의 피해자인데.”
“기사 하나만 읽어도 알 텐데 그런 유언비어 퍼트리지 좀 마세요. 욕하고 싶으면 제대로 알고 욕하고.”
“실제로 노래가 어땠는지 들어보지도 않고 너무 막말하는 거 아니에요?”
대기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자 그들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씩씩거리며 비꼬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아예 꼬리를 말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 * *
“……레코드요?”
칼리오페는 당황한 얼굴로 카이논을 바라봤다.
“예, 리페 아가씨. 레코딩 쪽으로 사업을 확장할까 해서요.”
“네에…… 그건 축하드리는데. 제 노래를 처음으로 레코드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당연하지요. 저희가 사업하는 데 리페 아가씨가 빠질 수 없지 않습니까.”
카이논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과장스레 손을 슥슥삭삭 비볐다. 그 장난기 넘치는 태도에 칼리오페는 그를 흘겨보며 픽 웃었다.
“아가씨,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음, 나쁠 건 없지만요.”
아니, 칼리오페의 목표를 생각하면 오히려 대단히 좋은 제안이었다. 노래를 녹음하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퍼질 테니까.
그간 칼리오페의 노래를 직접 들은 사람은 기껏해야 같은 살롱에 참석한 이들뿐이었다.
이번 신전 공연으로 전국 곳곳에 퍼졌지만, 이제 그럴 기회는 없을 터였다. 칼리오페의 코를 납작 눌러주겠다는 계획을 완전히 실패한 신전이 다시 칼리오페를 초대할 리 없으니까.
“저희가 처음 카메라 사업을 시작할 때도 리페 아가씨께서 모델이 돼주셔서 큰 성공을 거뒀지요.”
칼리오페는 처음 신문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을 때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벌써 십 년! 십 년이나 아가씨께서는 저희 회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월이 참 빠르죠.”
카이논이 씨익 웃었다. 그는 새삼스레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짤뚱하고 통통하던 팔다리는 늘씬하니 길어졌고 얼굴선도 훨씬 가늘어졌다. 아직 젖살이 남긴 했지만 십 년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성장했다.
곁에서 성장을 지켜봐서 그런지 이렇게 훌쩍 컸다는 걸 새삼 깨달을 때 기분이 묘했다.
“정말 그러네요. 올해로 제가 열다섯 살이니까.”
해가 지났으니 칼리오페는 열다섯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해.’
가슴이 답답해졌만 곧 털어내고 카이논을 향해 웃었다.
“네, 그래서 이번 년도 천사의 탄생은 10주년 기념으로 초호화롭게 기획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에…….”
칼리오페는 조금 무서운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어떻게 더 호화롭게 한다는 거지.’
어쩐지 1월 1일이 되자마자 주변을 에워싸며 사진을 찍어대더라니.
스튜디오에서 본격적으로 촬영한 게 아니어서 설마 천사의 탄생을 위한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여간 리페 아가씨께서는 그야말로 니카이논의 얼굴이십니다. 그러니 새로 시작하는 레코드 사업에 꼭 아가씨의 노래를 쓰고 싶습니다.”
유쾌하게 말했지만 카이논의 얼굴은 사뭇 간절했다.
‘괜찮겠지.’
칼리오페는 결심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논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좋아요. 저도 앞으로도 계속 노래할 생각이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얼굴이 확 밝아진 카이논이 싱글싱글 웃으며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슬쩍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은 이미 레코드 해둔 게 있어요.”
“네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카이논을 바라봤다.
“하하……. 죄송합니다. 실전에서 얼마나 감도 좋은지 테스트해보려고 했던 건데……. 정말 테스트용이었습니다. 다른 마음은 없었어요.”
바로 사과하는 카이논을 잠시 흘겨보던 칼리오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 전 일이지만 제 사진을 일언반구도 없이—부모님과 협의했지만— 신문에 실었던 게 생각났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내게 말했으니까.’
“알겠어요. 이미 하신 건데 어쩔 수 없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했다고 생각해요. 기록으로 남겨둘 만한 노래였으니까요.”
잔잔하게 미소 짓는 카이논의 얼굴엔 진심이 가득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노래를 이렇게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다.
“그리고 저희가 레코드 쪽을 개발한 건 리페 아가씨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네?”
카이논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칼리오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니카이논은 통신석에 있는 기능 중 하나인 카메라 기능을 따와 독자적인 개발로 마력 소모를 절감시켜 성공했다. 그렇기에 원래도 통신석의 다른 기능에 관심이 있긴 했다. 하지만 딱히 개발해서 모험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니카이논은 카메라 시장에 처음으로 진입한 데다가 칼리오페라는 얼굴 덕에 10년간 업계 1위 자리를 압도적인 차이로 지켜내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 필요가 있을까?
신사업은 항상 그만한 리스크를 동반하기 마련이고, 카메라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했다.
‘하지만.’
3년 전, 칼리오페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저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다. 저 모습을 보다 생생히 담고 싶다.
그런 욕망이 가슴 속에 싹 틔웠다.
‘그리고 우리 최대 투자자께서도 같은 생각이시고.’
루스티첼 백작 부부가 카이논과 식사 도중 푸념한 적이 있었다.
[카메라가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조금 아쉬워. 우리 막내의 목소리까지 담아내면 좋을 텐데.]
이에 카이논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신사업 계획을 브리핑하듯 줄줄 읊었다. 친목을 위한 식사 자리가 한순간에 프레젠테이션 현장이 되었다.
“정말로 아가씨가 결정적인 계기였어요.”
“항상 저를 띄워주시네요.”
칼리오페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논은 진심이라고 재차 강조하는 대신 그저 웃기만 했다.
‘이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벌써부터 기대돼.’
사업가로서 새로 도전하는 사업의 결과에 대해 기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칼리오페의 펜으로서도 기대됐다.
그녀가 얼마나 재능을 꽃피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