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8. 함정 혹은 기회 (23/41)

Chapter 8. 함정 혹은 기회

“야, 야. 저기 봐.”

소리를 낮춘 채 자신을 툭툭 치는 친구의 행동에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 아!”

친구의 고갯짓을 따라가자 ‘나는 귀족이오’하고 써 붙인 것처럼 잘생긴 소년이 인형같이 예쁘장한 소녀를 에스코트하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여자는 탄성을 질렀다.

“진짜 맞지?”

곁에서 친구가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와 걸어오는 소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포스터 속 소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애가 걸어오는 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런 거 같으니까 조용히 해.”

여자는 자꾸 툭툭 건드리는 친구에게 방해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낮게 읊조렸다. 친구가 입을 비죽이는 게 보였지만 소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친구 역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조용히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그때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놀란 듯 살짝 크게 뜨이더니 이내 웃음기를 머금고 가늘어진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는 몸짓에 따라 긴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여자는 그대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소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으, 우와…….”

옆에서 친구가 신음처럼 감탄을 흘리는 게 들렸다.

“봐, 봤어?”

“우리한테 인사해준 거 맞지?!”

“세상에, 실물이 더 예쁘다.”

소녀 일행이 저만치 멀어지고 나서야 두 사람은 팔짝팔짝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멀어진 소녀 일행에게도 들렸다.

“너 그거 하지 마.”

“네?”

칼리오페는 뜬금없는 힐데르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막 아무한테나 인사하는 거.”

“음, 그렇지만 눈까지 마주쳤고 저쪽에서 호의를 보이는데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칼리오페의 정론에 힐데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여자들한테만 해.”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할 순 없어서 결국 툭 덧붙였다. 그 말에 칼리오페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힐데 오라버니, 점점 루스 오라버니랑 로벨 오라버니를 닮아가네요.”

“내가 그 자…… 흠흠, 두 사람과 어디가 닮았다고.”

칼리오페는 힐데르트가 중간에 말을 바꾼 것을 못 들은 척해줬다.

“아, 에피니 언니 마침 대련 중인가 봐요.”

두 사람이 살롱 스티그마—베이비 살롱에서 발현된 스티그마를 사람들이 그렇게 줄여 부르다가 아예 정식 명칭으로 자리 잡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에피니가 보였다.

대련장 결계 너머로 사람들이 구경하며 뭐라 뭐라 떠들고 있었다.

칼리오페와 힐데르트 역시 결계에 붙어 에피니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에피니는 날카롭게 쇄도해 오는 얼음창을 피해 몸을 굴렸다. 하지만 얼음창은 너무나 많았고 그냥 날아오는 게 아니라 에피니의 움직임을 뒤쫓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에피니는 피하는 것을 멈추고 그대로 두 발로 땅을 깊게 누른 채 섰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얼음창을 바라본 채 한 호흡.

콰콰콰쾅!

굉음이 울렸다. 마법으로 보호받는 건물은 안전했지만 결계 안의 대련장은 갈아엎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 자욱한 연기로 안 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연기가 가라앉고 나타난 것은 마법사의 목덜미에 칼을 겨누고 있는 에피니였다.

“와.”

“저기서 저걸 저렇게 빼네.”

“진짜 열여섯 살 맞아?”

구경하던 사람들이 수런거렸다.

대련 모드가 끝나자 반파된 대련장이 저절로 수복되기 시작했다. 이곳이 스티그마인 것을 이용한 마법장치였다.

칼리오페는 타월을 챙겨 들고 결계에서 빠져나오는 에피니에게 다가갔다.

“에피니 언니.”

“리페.”

에피니는 씩 웃으며 타월을 받아들고 땀을 닦았다.

“조금만 기다려. 씻고 나올 테니까.”

“네.”

그제야 칼리오페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들이 하나둘 곁으로 몰려들었다.

“리페,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좀 더 자주 와, 응?”

“에피니 기다리면서 뭐 마실래?”

마침 오늘은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칼리오페에게 말을 붙였다. 중간중간 힐데르트가 틱틱거렸지만 이들은 와하하 웃으며 그런 힐데르트에게까지 치댔다.

이들 모두 처음에는 스티그마의 주인인 칼리오페를 어려워했지만 지금은 자기 동생 삼지 못해 안달 난 상태였다.

“리페!”

한창 이야기를 주고 받는 와중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호세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을 발견하고 빙긋 웃었다.

“여긴 웬일이야? 설마, 설마!”

가까이 다가온 그가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더니 한쪽 눈을 슬쩍 감으며 윙크했다.

“나 보러온 거야?”

꿀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흐무러지며 살짝 쳐진 눈이 매력적으로 휘었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미소였지만 갑자기 날아온 주먹에 바로 사라졌다.

“악!”

호르세안의 이마에 꿀밤을 먹인 에피니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착각하지 마. 리페는 날 보러 온 거니까.”

그리곤 뽐내듯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너무해, 리페. 이제 이 오라버니는 안중에도 없는 거니?”

호르세안이 울먹이면서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호세 오라버니하고는 얼마 전에도 만났잖아요.”

베이비 살롱 건으로 만났다. 교외로 이전한 베이비 살롱은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었다.

“뭐라고?!”

“정말이냐, 호세!”

“이 부러운 자식!”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호르세안의 머리를 마구마구 문지르며 달려들었다.

“가자.”

한심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피니가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좀 더 있다 가지!”

“또 와야 해!”

호르세안을 올라타 괴롭히는 자세 그대로 사람들이 칼리오페에게 인사했다.

“하여간.”

힐데르트가 문을 나서며 혀를 찼다. 깔끔하고 귀족적인 그로서는 영 적응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힐데르트가 은근 저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세 사람은 근처 티 하우스로 들어가 프라이빗룸에 자리 잡았다.

“힐데, 공부하지 않고 이렇게 나와도 돼? 곧 시험인데 떨어져서 엉엉 울면 어쩌려구. 나랑 리페 둘이서 오붓하게 노는 데 방해돼.”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하시지.”

“난 너무 잘해서 이미 기사 서임까지 받았는걸?”

에피니가 씨익 웃으며 종알거렸다.

기사 자격은 열다섯 살에 주어진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열여덟 살에 서임 받는 게 보통이다. 열다섯 살 때 에피니는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열여섯 살인 올해 통과해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았다.

“흥, 나는 너처럼 떨어지는 일 없이 단번에 붙을 거니 걱정 마시지.”

힐데르트는 열여덟 살이 되는 내년에 처음으로 관료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는다. 지금이 칼리오페의 생일마저 지난 12월 말이니 관료 시험 날짜는 금방이었다.

‘매년 초에 치르니까.’

칼리오페는 티격태격하는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힐데르트가 무려 수석으로 관료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부족해 내후년인 열아홉 살에 아프락스 궁에 발령받는 것을 알고 있다.

‘둘 다 정말 잘 컸어…….’

본인이 키운 것도 아닌데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화롭다.

겨울 햇볕이 느긋하게 쬐는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음미한다. 티푸드는 달콤한 초코 코엔도르.

“왜 그래, 리페?”

에피니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그녀를 바라봤다. 에피니도, 힐데르트도 아까 티격태격할 때와 전혀 다른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아차,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연말이라서 좀 싱숭생숭한가 봐요.”

“리페.”

엄한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며칠만 지나면 칼리오페는 열다섯 살이 된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해.’

모든 비극의 첫 시작이 되었던 해.

지금 루스티첼 가는 회귀 전처럼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왜 살해한 걸까.

우리 가문을 노린 이유가 뭘까.

가문은 강해졌지만 아직 비극의 배후는 단 하나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분명히 은패에 새겨진 문장과 관련되어 있을 텐데.’

회귀 전 호르세안이 목숨과 맞바꿔 구해준 단서. 그것과 똑같은 것을 사하르네 부인의 집무실에서 봤다.

대외적으로 사하르네 부인은 전 비스 대신관인 마르멜의 사주를 받아 칼리오페에게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마르멜이 루스티첼 가를 노렸던 배후인 셈이니 그가 실각한 지금 실질적인 위협 역시 사라진 것으로 끝난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더라도 말이지.’

실제로 지난 2년 가까이 칼리오페의 주변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간의 평화가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의 고요함이라는 것을, 불길한 전조를 품고 있는 비릿한 평화라는 것을 직감했다.

삐이이익—

어디선가 화살이 우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아슬했던 평화가 끝나고 전쟁이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효시였다.

칼리오페는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사실 비스 신전으로부터 초대장이 왔어요.”

* * *

“마르멜은 멍청했어.”

대신관의 말에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그를 바라봤다.

“좋은 것을 지닌 사람이 있으면 응당 끌어안을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든 등쳐먹으려고 했으니, 쯧.”

긴 로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위를 맞췄다.

“그러니까 생전에 대신관님 같은 인재도 못 알아본 것 아닙니까.”

대신관은 그 말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는 그 여자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야. 가장 좋은 건 그 애를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잖아?”

“우리 편……말입니까?”

“그래. 마르멜은 우습게 보고 간과했지만 그 여자애한테는 힘이 있어. 스티그마와는 별개의 힘.”

그 말에 회의실에 모여 있던 신관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스티그마의 소유자라는 걸 빼면 아직 성년도 안된 여자애한테 뭐가 남는단 말인가.

“그 여자애가 나타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속가는 천대받았어. 그런데 그 애가 속가를 부르고 난 뒤 무슨 일이 생겼지?”

“속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죠. 중간에 잡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수월했어요.”

말을 하면서 신관들은 아, 하고 깨달았다.

“시대의 흐름은 그렇지 않았어. 황금의 시대에 환멸을 느낀 귀족들은 다시 예전처럼 고고한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었지.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런데 그 흐름이 바뀌었지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속가를 부르기 전부터 점진적으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차근차근.”

“그 계기 역시 칼리오페 루스티첼이야. 어쨌거나 그 여자애는 처음 바깥에 나왔을 때부터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어. 그런 애가 직접 상업 시설을 운영하며 눈길을 끈 거야.”

다들 칼리오페 루스티첼처럼 되고 싶어 했다. 제 아이가 그렇게 자라났으면 했다.

“베이비 살롱은 어린아이를 둔 귀족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 역시…….”

베이비 살롱뿐만이 아니다. 사업가들은 베이비 살롱을 벤치마킹했고 수많은 유아용 상업 시설이 생겨났다.

“그래, 그래서 다시 실리를 추구하는 쪽으로 사람들의 사고가 변했어. 물론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 모든 걸 계획했다고 보진 않아. 말도 안 되지. 베이비 살롱을 세웠을 때가 몇 살이랬더라? 다섯 살? 여섯 살?”

대신관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고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우연도 이렇게나 겹치면 필연이야.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만들어낸 필연.”

대신관은 마르멜처럼 어리다고 칼리오페를 얕보고 그녀가 가진 파급력을 간과하지 않았다.

“여기서 문제. 이런 필연을 만들어낸, 아직 가치관 형성도 덜 되었을 어린 여자애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희가 끌어들여야겠군요.”

긴 로브의 말에 대신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하나의 시대 아이콘이다. 잘만 이용하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래, 그리고 그 여자애의 능력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해.”

“노래 좀 유행시킨 게요?”

한 신관의 말에 대신관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인식의 문제야. 예술은,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아침에 눈을 떠서 보는 것, 듣는 것, 입는 것, 먹는 것 모두 다 문화다. 사람들의 사고는 본인이 사는 대로 흐를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점은 본인이 딱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야. 알지도 못하는 사이 생활 전반을 지배당하는 거지.”

“……너무 비약한 것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귀족들 사이에서 세속적인 것, 현재 삶에 치중한 것이 다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신성한 것, 형이상적인 것, 신에 대한 것이 뒷전으로 물러났다.

“아직까지는 표면적으로 확실하게 보이지 않겠지. 사람들이 여전히 신전에 기부금을 내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기부금은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마르멜 일로 우리 신전은 기부금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었지만 파면 이후부터 점점 회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아. 회복하려고 신성력 할인 행사도 꽤 했지. 뭐, 할인 행사라고 절대 부르진 않지만.”

대신관이 히죽 웃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부하는 이유가 뭐지? 신앙심이 넘쳐나서?”

신관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 전부 느끼고 있었다.

“아니. 인간이 신성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야. 예전하고 확실히 다르다고.”

“대신관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습니다. 확실히 엄숙하게 통제 잘 되던 것이 점점 자유분방하고 개인적으로 바뀌고 있죠. 예배에 오는 신도들의 분위기조차도.”

가만히 있던 긴 로브가 대신관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다른 신관 몇몇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과장한 것 같은데요.”

“지금 드러나기 시작한 징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것밖에 못 보니까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거야.”

그 말에 이견을 내놓으려던 신관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우리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양식이 변할 거야.”

“그럼 어떻게…….”

“이 흐름을 다시 바꿔야지.”

대신관이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로.”

수신인은 칼리오페 루스티첼이었다.

* * *

“이게 그 초대장인가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서 넘겨받은 초대장을 들고 물었다.

팔랑팔랑, 긴 손가락 사이에서 초대장이 흔들리는 모습을 가만히 쫓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레아스의 손가락은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다.

“네. 읽어보셔도 괜찮아요.”

“그럼 사양 않고.”

초대장을 열어 안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어내린 아스타레아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교외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 초대장이었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문제는 발신인이 발신인인 만큼, 비스 신전에서 주관한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갈 거예요.”

칼리오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아스타레아스는 후, 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초대장을 보여줄 때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칼리오페의 단호한 결심을 보니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 수백 가지 이유가 저절로 스르륵 흩어졌다.

‘당신이 그 길을 가고 싶다면야.’

반대하려는 이유는 모두 칼리오페가 안전하고 평화로운 장소에만 있길 바라서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해맑게 웃고만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칼리오페는 결코 자기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협을 피하지 않는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샘솟는지 항상 정면으로 위협에 맞섰다.

“그럼 나도 갈까.”

중얼거리듯 새어 나온 말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말인데 바쁘지 않으세요?”

“연말은 보통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죠.”

“그렇죠.”

아스타레아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오페를 보고 입 끝을 올렸다.

“그러니까 가야지.”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긴 눈매가 가늘어지며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가 겨울 햇살에 투명하게 빛났다.

칼리오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파도처럼 울렁거린다. 새하얀 레이스 같은 포말이 부서지며 마음을 적셨다.

물어보고 싶다.

무슨 의미냐고.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냐고.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왜 그런 얼굴이냐고.

왜.

“…….”

내가 생각하는 게 맞냐고.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나란히 앉아있는 아스타레아스에게 들릴 것 같았다.

‘내가 착각하는 거면 어쩌지.’

묻고 싶으면서도 묻기 싫었다. 그냥, 그냥 이렇게 나란히 옆에 앉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럴 때가 아닌데.’

침묵하던 비스 신전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전생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비스 신전이 뭘 꾸미는진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초대장이 아니라 전쟁을 선포하는 전서(戰書)라는 것.

정신 바짝 차리고 다가올 일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때, 소파 위에 놓여있던 칼리오페의 손과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살짝 닿았다.

“……!”

새끼손가락 끝이 살짝 닿은 것뿐이다.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잘 모를 정도로 살짝.

그런데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바르르 떨린다. 온 신경이 새끼손가락 끝으로 몰린 것 같다.

왠지, 왠지 몸이 풍선 위에 앉아있는 것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청명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곁엔 아스타레아스가 있었다.

꼭 앞으로 일어날 일을 혼자서만 겪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계속 곁에 있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냥 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 * *

겨울인데도 야외 회장은 따뜻한 훈기가 돌았다. 마법으로 결계를 친 덕분이다.

칼리오페는 털이 복슬복슬한 망토를 메이드에게 넘기고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그녀는 비스 신전에서 초대장을 보낸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 정면에 마련된 단상 쪽에 비스 신전의 신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는 오랜만에 보는 크레티안느도 있었다.

“…….”

칼리오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못 본 척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리페.”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크레티안느가 그녀를 불렀다. 칼리오페는 어쩔 수 없이 멈춰서 그녀를 돌아봤다.

크레티안느가 신관들 틈에서 벗어나 칼리오페 쪽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오, 오랜만이야…….”

“그러네요, 크레티안느 영애.”

칼리오페의 응대에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크레티안느 영애라니.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고 차갑게 자신을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오랜만이라며 애처롭게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지도 않은 건지!

실상 칼리오페는 인상을 찌푸리지도, 이상한 어조로 말하지도 않았다. 그다지 친분 없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적당한 예의를 갖춰서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크레티안느는 멸시를 받은 것처럼 모욕감에 파르르 떨었다.

‘역시 다른 사람들 말이 전부 다 맞았어!’

칼리오페는 그 똑똑한 머리로 자신처럼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서툰, 때 묻지 않은 사람을 이용해 먹는 나쁜 년이다.

‘다들 네가 못돼먹어서 순진한 날 배신하고 이용한 거라고 말해도, 나는 널 믿었는데……!’

[아니야. 난 리페를 믿어. 우리가 얼마나 사이 좋았는데.]

그렇게 말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안쓰럽게 여겼던가.

[아, 크레틴 영애는 너무 마음씨가 고와요.]

[그러게요. 이렇게 착해서 어찌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실지.]

[안 되겠어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들의 말이 옳았다.

크레티안느는 배신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에 심취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리페…….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칼리오페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 없이 크레티안느를 바라봤다.

칼리오페와 크레티안느는 대놓고 척을 졌다. 그것도 크레티안느의 잘못 때문에.

[내 시녀하면 되잖아!]

환한 얼굴로 웃으며 대단한 수혜라도 베푸는 듯이 루스티첼 가를, 가족들을 모욕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워낙 파격적인 발언이었기 때문에 칼리오페를 초대하는 영애들은 아직까지도 같은 모임에 크레티안느를 부르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크레티안느와 친한 무리는 칼리오페를 싫어했으니 더더욱 이간질하려고 안달이었다.

그전에는 칼리오페가 크레티안느의 돈과 권력을 탐하려 접근하는 사람들을 은연중 막아줬지만, 이젠 그러지 않으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쳤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어느 쪽이든 칼리오페와 크레티안느의 사이가 틀어진 원인을 알고 납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크레티안느 혼자만 억울해하고 있다.

“내가 그간 보냈던 편지도 다 무시하고…….”

그 사건 이후, 크레티안느는 상냥한 자신이 먼저 져준다 생각하고 칼리오페에게 편지와 파티 초대장을 보냈다.

‘셋이서 단체로 편 먹고 날 매도하고 모욕했는데도, 나는 착하니까 먼저 화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칼리오페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그래서 그들이 얼굴을 마주하는 건 굉장히 오래간만이었다.

어쩌다 얼굴을 보는 경우는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처럼, 객들의 관계를 일일이 고려하지 않는 대규모 파티뿐이었다. 아직 성년도 안 된 그들이 그런 파티에 초대받는 일은 드물었으니 사실상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화해하려고 보낸 편지까지 무시당했는데 또다시 먼저 말 걸어주는 마음씨 고운 자신에게 어쩜 이렇게 싸늘하게 군단 말인가.

“바빠서 영애가 초대한 파티에 참석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칼리오페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고 크레티안느를 지나쳤다.

크레티안느는 자신에게서 등 돌리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진짜로 나를 완전히 거절하는 거야?

이만큼 내가 손 내밀었으면 웃으면서 미안했다고 말해야 하잖아.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래?

넌 나한테 잘해줘야 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그랬잖아.

그게 맞는 거잖아.

“리페.”

탁.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의 팔목을 붙잡았다. 항상 여린 척하던 것과 다르게 거센 손길이었다.

붙잡힌 팔목에 아릿해 칼리오페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

크레티안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나직한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채도 낮은 녹색 눈동자가 기묘할 정도로 어둡게 물들었다.

칼리오페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크레티안느가 속삭였다.

“살인자라며?”

키득.

말을 끝낸 입술 꼬리가 위로 바짝 올라갔다.

* * *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하지만 동요는 한순간이었고 그녀는 곧 폭풍처럼 치미는 감정을 속으로 갈무리했다.

긴 속눈썹이 산호빛 눈동자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느릿하게 움직인 시선이 크레티안느에게 향했다.

“……!”

칼리오페의 붉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크레티안느는 이유도 모른 채 몸을 흠칫 떨었다. 오싹함이 밀려왔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칼리오페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저런.”

살며시 움직인 입술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떨고 있어요?”

너무 부드러워서 상냥하기보다 연약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난방은 잘되고 있는데.”

중얼거린 칼리오페가 크레티안느를 보고 짙게 미소 지었다.

“조심해야겠어요.”

칼리오페의 손이 덜덜 떨리는 크레티안느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었다. 검지 끝이 소름이 돋은 목덜미에 살짝 스쳤다.

크레티안느는 자신의 목덜미에 닿은 게 손가락이 아니라 칼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달싹이는 입술에서 소리가 되지 못한 호흡이 흐느낌처럼 들썩이며 새어 나왔다.

‘뭘 조심하라는 거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녹색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향했다.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의 시선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긋 미소 지었다. 아까까지 칼리오페를 둘러싸고 있던 질척한 기운이 한순간에 말끔히 휘발된 것처럼 청명한 미소였다.

목덜미에 닿았던 손이 거둬졌다.

“감기 안 걸리게요.”

아무렇지 않은 칼리오페의 말에 크레티안느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전 이만.”

칼리오페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피고 몸을 돌렸다.

또다시 칼리오페의 등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크레티안느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읏.”

칼리오페가 멀어지고 나서 한참 후에야 짓눌려 있던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손끝이 차가웠다.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쓰러질 것 같다.

크레티안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한동안 그곳에서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 * *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신관들 틈에서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저쪽에서 뭔가 느껴지지 않았나.

아주 미약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느껴지지도 않을 무언가가.

신성력과 같으면서도 다른 응집된 기운.

너무 미약했던 데다가 이미 사라져버려서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에테르 같았어.’

긴 로브는 기운이 느껴졌던 곳을 바라봤다.

‘크레티안느 피엔테?’

크레티안느가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방금 그 기운은 피엔테 영애에게서 나온 건가?’

자연스럽게 든 생각에 긴 로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친황제파인 피엔테 가문과 비스 신전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긴 로브는 크레티안느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조금 전에도 함께 있지 않았던가. 크레티안느 피엔테에겐 어떠한 자질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느꼈나 보군. 요즘 피곤했으니.’

주변에 있는 신관들을 둘러봤지만 뭔가를 느낀 건 오로지 자신뿐인 듯했다.

결론을 내린 긴 로브는 크레티안느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미심쩍은 것을 그냥 넘어갈 순 없다.

‘오늘 자선 파티에서 뭔가 느껴지는 기운이 있는지 유심히 봐야겠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파티를 시작해도 되겠지.”

그 말에 신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를 맡은 신관이 단상 위에 올라가 시작을 알렸다. 그가 대신관을 소개하고 대신관이 짧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사회자가 물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판매된 물품의 수입은 신전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기부될 것이다.

“그럼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가볼까.”

단상에서 내려온 대신관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칼리오페에게 다가갔다.

칼리오페는 그녀에게 접근한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물품 판매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스티첼 영애.”

칼리오페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돌아보고 미소 지었다. 부러 초대장을 보냈으니 신관이 말을 걸 거라고는 예상했다.

“대신관님.”

‘그런데 대신관이 직접 움직일 줄이야.’

“처음 만나는데도 알아 봐주다니 기쁜데.”

“신문에서 봤으니까요. 방금 연설하시기도 했고.”

“나도 영애를 신문에서 봤어.”

칼리오페의 건조한 대꾸에도 대신관은 공통점이라도 찾았다는 듯 반갑게 웃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고 찬사가 굉장하더군.”

칼리오페는 멈칫하고 대신관을 바라봤다. 분명 스티그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그런데 노래라니?’

그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무슨 꿍꿍이일까.’

이제 와 속가를 걸고넘어져 봤자 겨우 회복했던 비스 신전의 여론만 다시 나빠질 뿐이다.

“어머, 대신관님도 리페의 노래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주변에 있던 귀부인이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그런가 하면 영 탐탁지 않은 얼굴로 대신관을 바라보는 귀부인도 있었다.

“비스 신전에서는 리페가 노래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건 파면된 전 대신관 때의 일이죠.”

대신관이 마르멜 때와 지금은 다르다며 선을 딱 그었다.

“그때 신전 내부에서는 전 대신관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부에서부터 먼저 마르멜 대신관을 파면해달라 청원한 것이고요.”

“그건 그랬죠.”

귀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으니 그녀의 태도도 누그러졌다.

“사실 저는 그때부터 루스티첼 영애의 노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전을 찾는 분들의 입에서 들었던 찬사도 있고요.”

“저도 리페가 노래하는 걸 들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맞아요. 가슴이 울린다고 해야 하나요?”

칼리오페는 감사의 인사로 자신을 칭찬하는 귀부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팽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뭔가 감이 안 좋아.’

비스의 대신관이 제게 찾아와 갑자기 노래를 칭찬한다라…….

대신관의 말처럼 지금 비스 신전이 마르멜 때와 다르다고 해도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속가만 부르잖아.’

오렌과 로한에서도 속가를 인정하긴 했지만 좋아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모든 예술과 시류가 신성을 추구하던 상황이 달라질 거란 뜻이니까.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라면 신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귀부인들과 몇 번 말을 주고받던 대신관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루스티첼 영애, 신전에서 노래해보는 건 어떤가.”

대신관의 권유에 놀란 것은 칼리오페가 아니라 주변의 귀부인들이었다.

“어머, 신전에서 노래를요?”

어쨌거나 아직까지도 신전에서 노래를 하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다.

오페라 내용이 모두 다 신에 관한 것인 만큼, 가장 성공하고 유명한 오페라만이 이벤트로 신전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오페라 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프리마돈나만이 신전에서 독무대를 가졌다.

신전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상징성이 있었다.

물론 칼리오페의 인기는 프리마돈나에 댈 것도 아니었다. 최초의 사진 모델로서, 베이비 살롱의 운영자로서, 스티그마의 주인으로서, 대정령의 사랑을 받는 소녀로서.

칼리오페는 수많은 제국민들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노래에 관한 것만 놓고 따지면 이야기가 다르다.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 대부분은 그녀의 노래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은 사람 자체가 몇이나 될까?

많아야 삼백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칼리오페는 여태까지 제도 내에서 열리는 살롱에서만 노래했으니까.

물론 제국의 문화를 선도하는 제도 사교계에서 속가를 유행시킨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노래’를 실제로 듣고 감탄한 사람은 절대적으로 소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신관의 제안은 가히 파격적이라고 할 만했다.

“와, 정말……. 리페가 신전에서 노래하는 모습 꼭 보고 싶네요.”

“저도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으면 하고 생각했거든요.”

들떠서 말을 주고받던 귀부인들이 아차, 하고 칼리오페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예전의 비스 신전과 지금의 비스 신전이 다르다고 해도 당사자인 칼리오페는 불편할 수 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

전 비스 대신관의 음모로 스티그마를 뺏길 뻔하고, 목숨을 위협을 받은 것으로 모자라 눈앞에서 사람이 자살하는 것까지 봤다. 비스 신전과 얽히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옆에서 너무 들뜬 것 같아 미안했다.

칼리오페는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는 귀부인들을 보고 애써 미소 지었다. 보통 이런 과분하다 못해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하면 주제를 모른다며 비난받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절해도 괜찮아.’

비스 신전과의 일이 있었으니 다들 불편할 만하다고 납득할 것이다.

칼리오페는 전생에서 유일신교로 거듭난 비스 신전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 심판이라는 이름 하에 사냥당했다.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쌓은 금자탑.

눈을 감으면 아직까지도 공포에 질린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 곳에서 노래하고 싶지 않아.’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대신관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꾸며낸 듯 친절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저야 영광이죠.”

그렇게 말하자 대신관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읽혔다.

‘지금은 네 뜻대로 이뤄졌다고 생각하겠지.’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 * *

‘피곤해.’

칼리오페는 문에 몸을 툭 기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바깥에서 사회자가 물품을 소개하는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잠시 그렇게 기대 있던 칼리오페는 눈을 뜨고 걸음을 옮겼다. 마침 파우더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거울에 지친 얼굴을 한 소녀가 비쳤다.

칼리오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갔다.

‘뺨에…….’

자그마한 점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야외에서 열리는 파티이다 보니 뭔가가 튀었나 보다.

칼리오페는 손가락 끝으로 그 점을 문질렀다.

‘안 지워지는데.’

이게 뭐지? 하며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아…….’

커다랗게 뜨인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피…….’

얼굴 여기저기에 피가 튀어 있었다.

호흡이 일순 멈췄다가 가팔라졌다.

[너, 살인자라며? 너, 살인자라며? 살인자라며? 살인자라며? 살인자라며? 살인자라며?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머릿속에서 크레티안느가 했던 말이 웅웅 울리며 메아리쳤다.

칼리오페는 강박적으로 뺨에서부터 입가까지 점점이 튄 검붉은 피를 문질렀다.

하지만 핏자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진해지는 것 같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문지르다가 문득 깨달았다. 산호빛 눈동자가 억지로 손바닥을 향해 움직였다.

“……!”

손바닥이 온통 붉은 피로 흥건했다.

“흐…….”

칼리오페의 잇새에서 흐느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새어 나왔다. 덜덜 떨리는 양 손바닥 모두 피로 목욕한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살인자의 손.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려 어지러웠다.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작은 몸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붉은 피로 가득한 시야에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혈향, 들리는 건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 기도가 좁아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 칼리오페는 눈을 꾹 감았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쉴 새 없이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이게 환각이라는 것 따위 잘 알고 있다.

그냥 트라우마일 뿐이다.

얼굴에도, 손에도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질척하게 후신경을 마비시키는 피 냄새 역시 다 거짓이다.

“나는 괜찮아.”

홀로 중얼거린 말에 거짓말처럼 응답이 있었다.

“응, 맞아요. 당신은 괜찮아.”

부드러운 목소리.

칼리오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감은 눈 속에서도 선명히 그려지는 얼굴.

그녀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뜨면 이 다정한 환청 역시 사라질 게 분명하니까. 거울에는 온통 피범벅이 된 그녀 자신만 비칠 것이다.

그때,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조심스레 쥔다. 마치 온기를 나눠주는 것처럼.

“리페.”

부름에 이끌리듯 칼리오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빨갛게 피투성이가 된 자기 자신도, 목덜미에 칼을 꼽은 사하르네 부인도 아니었다.

“……레아스.”

신음처럼 그 이름이 나왔다.

시뻘건 시야 속에 그가 있었다.

빛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은발이 사라락 흔들리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어딘지 놀란 것처럼 보였다.

청명한 푸른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흠칫 몸을 굳혔다. 희고 길쭉한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피로 물든 제 손을 붙잡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창백한 얼굴로 서둘러 손을 거두려고 했다. 그에게까지 피가 묻을 것 같아 두려웠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안돼…….”

꺼질 것처럼 희미하게 흘러나온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힘주어 단단히 붙잡았다.

“뭐가 안돼?”

“피가 묻을 거야…….”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이었고 그는 곧 칼리오페를 향해 다정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달래는 말에도 칼리오페는 손이 뻣뻣해질 정도로 잔뜩 준 힘을 풀지 않았다. 계속 꿈지럭거리면서 어떻게든 아스타레아스의 깨끗한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다.

“피 같은 거 없어.”

“아니야. 나는…….”

살인자.

칼리오페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네 손은 깨끗해.”

아스타레아스의 말에도 칼리오페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진 칼리오페를 본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숙였다.

“……!”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이 피로 얼룩진 손바닥에 닿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작은 손바닥 한가운데 오목한 곳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내리깐 긴 속눈썹이 그의 얼굴에 깊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그 상태로 느릿하게 눈을 뜬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와 시선을 맞췄다.

“깨끗해.”

입술의 움직임이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간지러운 감촉에 칼리오페가 어깨를 움츠렸다. 손가락이 절로 꼼지락 움직였다.

어느새 손바닥에 흥건했던 피가 사라져 있었다.

칼리오페는 제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깜빡, 깜빡, 깜빡.

몇 번 눈을 깜빡인 칼리오페가 비명처럼 외쳤다.

“고, 공자님?!”

“레아스라고 불러준 게 더 좋았데.”

손바닥에 키스하는 자세 그대로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나른하게 휘며 답했다.

칼리오페는 후다닥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아쉬운 눈으로 칼리오페의 손을 바라봤다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진짜 공자님이세요?”

“진짜 레아스이죠.”

칼리오페는 그 말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오감을 지배하던 환각은 다 사라지고 평범한 파우더룸의 정경이 보였다.

아니, 꼭 평범한 건 아니었다.

“여자들의 파우더룸에 신사분이 들어오시다니.”

“그럼 나는 신사가 아닌가 보죠.”

아스타레아스가 웃으며 답했다.

“힘들어하는 당신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신사가 아니어도 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인다.

“내가 너무 늦게 왔죠? 미안.”

칼리오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말은 보통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죠.]

[그러니까 가야지.]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칼리오페는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다. 온기 없는 천의 감촉만이 느껴져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손바닥 한가운데가 뜨끈했다.

“공자님께…… 제가 특별한 사람인가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부정해야 해.’

고개를 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이미 수많은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저질렀다.

조금 더 칼리오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조금만 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으면 해서.

그녀의 눈에 점점 특별함이 깃드는 게 좋아서.

안 된다고, 더 가까워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완전히 다가가지 않는 주제에 계속 손을 뻗는 건 기만이라는 걸 아는데도.

‘너와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칼리오페에게 닿고 싶어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생각한 그대로 움직였는데 칼리오페와 함께 있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수많은 감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너는 항상 내게 특별했어.’

그렇게 말하고 싶다.

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올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속 새어나가고 마는 감정. 이 감정이 그녀에게 닿고 싶다 아우성쳤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정말 선을 넘어도 되는가?

“…….”

칼리오페는 갑자기 미소를 지운 채 말이 없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드레스 자락이 손안에서 구겨진다.

그의 태도가 대답을 대신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숙였다.

‘왜 사람 헷갈리게…….’

아스타레아스에게 그런 원망마저 들었다.

칼리오페는 눈가가 시큰거리는 걸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안 돼.’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흉한 모습을 보인 데다가 도움까지 받았는데 인사를 못 드렸네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공자님.”

아까의 질문이 없었던 양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탁.

손목이 잡혔다.

아스타레아스가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놀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특별해.”

‘이런.’

아스타레아스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저질러버렸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말이 이어 나갔다.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다. 아니, 사실 주워 담고 싶지도 않았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데 말하고 나니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 그의 눈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들어왔다.

화아아악 꽃물이 물든 것처럼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칼리오페의 얼굴이.

그 상태에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새삼 붙잡고 있는 손이 뜨거웠다.

아스타레아스의 얼굴도 슬쩍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칼리오페에게서 시선을 빗기며 난감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가 이러는 걸 처음 봤다. 어쩌면 그녀가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구나.’

저절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특별하구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이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일 정도로.’

자각하는 순간 진정되어가던 얼굴이 다시 새빨개졌다.

귓등까지 붉게 물들인 채 칼리오페는 안절부절못했다. 부끄러우면서 설레고, 좋으면서도 수줍어서 차마 아스타레아스를 더 못 보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소년은 소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 소녀는 소년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어…….”

“아, 그…….”

두 사람은 두근두근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언젠가 이랬던 적이 또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웃음을 터트리며 긴장이 풀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말을 꺼내며 서로 상대를 바라본 탓에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더 커졌다.

어렸을 때와 달리 두 사람은 사춘기 소년, 소녀였다.

각자의 이유로 정신연령이 또래보다 더 높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생활에, 주변 사람들의 대우에 맞춰 태도와 생각이 변하기 마련이다.

다른 때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첫사랑의 마법에 빠진 사춘기 소년, 소녀였다.

가슴이 한계까지 부푼 풍선처럼 팡 터질 것 같다. 그냥 이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어서 빨리 지나가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이 다음에는.

‘이 다음은.’

칼리오페는 너무 열이 올라 시야가 가물거릴 정도였다.

“저, 저기, 그러면—”

칼리오페가 조심스레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철컥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문을 바라봤다.

“응? 이거 왜 안 열리지?”

파우더룸 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문틈 너머로 들렸다.

말하는 와중에도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철컥철컥 불안하게 들렸다.

“잠금장치도 없는데.”

야외 회장에 간이로 설치된 파우더룸이기 때문에 문에 딱히 잠금장치를 달지 않았다.

“내가 해볼게.”

몇 번 더 문고리를 돌려보던 사람들은 곧 포기했다.

“고장 났나 봐. 사람 불러와야겠다.”

“응, 갔다 오자.”

대화를 봐선 일단 파우더룸을 떠나는 것 같았다.

작은 손으로 입까지 틀어막은 채 숨죽이며 긴장했던 칼리오페가 어깨에서 힘을 뺐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모습을 보며 습관적으로 생각했다.

‘귀여워.’

아직 미성년이라곤 해도 남성인 아스타레아스가 레이디들의 파우더룸에 들어온 것은 큰일이다. 그것도 칼리오페와 단 둘이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순식간에 추문에 휩싸일 수 있다.

밀실에 남녀가 둘이 있는 걸 무조건 안 좋게 볼 정도로 제국이 보수적인 건 아니었다.

물론 권장하거나 좋게 보진 않았다. 특히 전통을 중요시하는 귀족 중에서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은 밀실에 남녀가 단둘이 있는 것은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금남 구역이나 다름없는 레이디들의 파우더룸에서 남녀가 단 둘이 있었다는 것이다.

‘알려지면 다른 건 둘째치고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가족들은 금남 구역이 아니라 그냥 방안에서 단둘이 있었다고 해도 난동을 부릴 것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이라 칼리오페는 설마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보며 귀여워 따위의 나사 빠진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지요?”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또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명하게도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먼저 나가세요.”

그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문 고장 났다고 하던데요?”

간이로 설치한 파우더룸이다 보니 창문도 없어서 그쪽으로 나갈 수도 없다.

아스타레아스는 말없이 입 끝을 살짝 올렸다. 나른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오른다.

‘아하.’

칼리오페는 그 미소를 보고 깨달았다. 무슨 수를 썼는진 몰라도 아스타레아스가 문을 잠갔나 보다.

사람을 부르러 갔던 일행이 돌아오기 전에 파우더룸에서 나가야 한다.

칼리오페는 서둘러 문 쪽으로 다가가다가 문득 깨달았다. 자신보다 아스타레아스가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가 나가고 난 뒤, 아스타레아스가 빠져나가기 전에 아까 일행이 파우더룸에 도착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렇다고 바깥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데 공자님이 먼저 나가기엔 위험 부담이 있어.’

파우더룸 입구는 회장 쪽이 아니라 숲 쪽으로 나 있어서 사람들 눈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가다 정면으로 마주칠 것이다.

“괜찮으시겠어요?”

걱정스러운 칼리오페의 물음에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매를 나긋하게 휘며 속삭이듯 덧붙였다.

“내가 신사가 아니게 되는 건 그대 앞인 걸로 족해서.”

그 농담에 걱정으로 굳었던 칼리오페의 얼굴이 말랑하게 풀렸다.

아스타레아스는 작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파우더룸 문을 열어주었다.

“레이디 먼저.”

“그럼 다음에 뵐 땐 신사분이시길.”

농담 섞인 칼리오페의 인사에 아스타레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모르죠. 또 누군가를 보러 파우더룸에 숨어들지.”

칼리오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아스타레아스를 슬쩍 흘겨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파우더룸을 반 바퀴 빙 두르자 야외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물품 경매가 끝나 단상 위에는 현악 콰르텟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드러운 선율을 들으며 칼리오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작은 새.’

작은 새는 곡이름으로, 이 곡은 비스의 성서에 나오는 작은 새 일화를 모티브로 한 성가였다.

비스의 신관들이 여기저기서 귀족들과 웃으며 말을 주고 받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서는 사람들이 즐겁게 춤추고 있었다.

‘더 있을 필요는 없겠지.’

칼리오페는 파우더룸 벽에 몸을 툭 기댔다.

‘공자님이 잘 빠져나오는지만 보고 가자.’

망을 보고 있다가 사람이 오면 벽을 두드려 아스타레아스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때, 레이디 둘이 메이드를 데리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루스티첼 영애. 반가워요.”

“반가워요, 영애. 영애도 문이 안 열려서 서 있었어요?”

“맞아요. 그런데 두 분 오늘 물품은 많이 사셨나요?”

칼리오페는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며 이야기를 돌렸다.

아직 아스타레아스는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두 사람이 파우더룸 문을 여는 것을 막아야 한다. 최소한 시간이라도 끌어야 했다. 하지만 두 귀부인은 칼리오페의 말에 답을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파우더룸을 반 바퀴 둘러 문 앞에 도착했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겨울 숲은 운치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야외 파티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네요.”

이젠 하다 하다 못해 비스 신전이 주최한 파티를 칭찬하고 있다.

“어머, 영애가 그렇다니 저도 한 번 야외 파티를 열어봐야겠어요. 와주실 거죠?”

귀부인들은 스티그마의 주인인 칼리오페가 자신들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에 들떠 답했다. 그러면서도 손짓으로 메이드에게 어서 문을 열라고 종용했다.

‘아…….’

메이드가 문고리를 잡는 모습을 보고 칼리오페는 탄식했다.

‘그래도 문을 다시 잠그셨을 테니까 괜찮겠지?’

적어도 문이 열려서 아스타레아스가 금남 구역인 레이디들의 프라이빗룸에 혼자 있는 모습을 들키진 않을 것이다.

‘최소한 변태로 오인당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칼리오페의 희망이 무색하게 문고리는 매끈하게 돌아갔다.

“잘 열리는데요?”

메이드가 의아하게 묻는 말을 들으며 칼리오페는 두 손을 맞잡았다.

내 남자친구(?)가 변태로 낙인찍히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깐 분명히 안 열렸는데.”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귀부인들이 파우더룸으로 들어서며 메이드에게 인사했다.

“어쨌든 고마워.”

“네, 또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메이드는 공손히 인사한 후 물러갔다.

‘응?’

칼리오페는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귀부인들은 파우더룸 안에 마련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아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변태를 만난 표정이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없었다.

변태가.

‘그사이 빠져 나오셨나.’

칼리오페는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스티첼 영애, 여기 앉아요.”

귀부인들이 눈을 빛내며 칼리오페에게 말을 걸었다.

“아, 괜찮아요. 전 이만 돌아가려고요.”

“파우더룸이 안 열려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귀부인이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칼리오페는 차마 변태를 구하러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조금 지쳐서 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냥 돌아가려구요.”

“저런…….”

“부축해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루스티첼 영애, 다음에 꼭 또 봬요.”

“야외 파티를 열 테니까.”

두 귀부인들은 아쉬운 듯 칼리오페를 향해 인사했다. 더 붙잡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데 몸이 안 좋다고 하니 차마 좀 더 있다 가라고 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칼리오페는 미소로 그들에게 답하고 서둘러 파우더룸을 빠져 나왔다.

달칵.

문을 닫고 나니 저절로 숨이 훅 빠져나가며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눈 앞에 앙상한 겨울 숲이 보였다.

‘숲 쪽으로 가셨나.’

어쨌든 다행이었다.

칼리오페는 땅바닥을 한 번 툭 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짜로 집에 돌아갈 때였다.

* * *

“역시 예상대로 됐군요. 마르멜이 왜 애를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신관 하나가 말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아무리 대단해봤자 고작 열네 살짜리 애라는 뜻이지.”

대신관이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의 입매엔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 있었다. 그 기색을 읽은 신관이 재빨리 아부하듯 말했다.

“대신관님께서 직접 나서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서면으로 전했어도 신전에서 노래하는 건 영광이라면서 감격했을 겁니다.”

“아니.”

탁, 술잔을 내려 놓으며 대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직접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 갔다고 생각하나.”

“그, 그거야……. 루스티첼이 주제를 모르고 거절할지도 모르니까…….”

“단순히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건가?”

되물은 대신관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단호한 부정에 오늘의 성과를 자축하기 위해 모여 있던 신관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잘 들어. 앞으로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만나면 무조건 특별 대우를 해주도록 해.”

“예?”

“그게 무슨…….”

“그 계집애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 줄 착각하도록 만들란 말이야. 속된 말로 뽕을 채워주는 거지.”

대신관의 말에 신관들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그게 우리에게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목줄을 쥐게 해줄 거거든.”

“제가 어리석어 대신관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말에 대신관이 술잔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신관이 황급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사람들이 속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간 보는 수준이야.”

“그렇지요. 수백 년의 전통이 있는 성가에 비할 바가 아니죠.”

“그것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건 따로 있어.”

이에 관해선 신관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번에 대신관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게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는 뜻이죠.”

“그래. 속가가 아니라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부른 노래라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그래서 신전에서 노래하라고 제안한 것 아닙니까. 그땐 성가를 부를 테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어쩌다 한두 번 성가를 불러선 안 돼.”

대신관이 손목을 빙글 돌리자 술잔 안의 술이 가볍게 소용돌이쳤다. 그는 그대로 술을 쭉 들이켜고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앞으로 평생 성가만 불러야 해.”

거의 선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처럼.

신관들은 잠시 대신관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칼리오페는 스티그마의 소유자인 데다가 사교계의 입지마저 남다르다. 협박과 회유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왜 불가능해?”

하지만 대신관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그렇게 되물었다.

“신전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영광이야. 칼리오페 루스티첼 본인도 그러지 않았나. 영광이라고.”

생각보다 엉성한 이유에 신관들은 실망했다. 신전에서 노래하는 게 영광이니 계속 성가만 노래할 거라니.

“하지만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신실한 신도였으면 애초에 성가만 불렀을 겁니다.”

“누가 신께 영광이래?”

대신관 입매를 늘이며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날카로운 예기를 띄고 있었다. 신을 따르고 신의 뜻을 전파하는 신관의 수장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신관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사람이 오로지 자신만 우러러보고 있어.”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고작해야 몇십 명 앞에서 노래해 봤을 뿐이다.

“거기에 신전의 음향은 어떻지? 음이 만들어낸 진동으로 온몸을 울릴 정도라고.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그런 경험을 해봤을까?”

신전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기처럼 이뤄져 있다. 거대한 파이프가 울타리처럼 내부를 감싸고 모든 소리가 안에 고이도록 구조 자체도 돔형으로 설계되었다.

처음 신전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광경과 소리에 압도되어 경외심을 갖는다.

“그 모든 게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봐.”

신전이 자신의 노래에 맞춰, 자신을 위해서 함께 노래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다.

“제도 사교계에서 인기 좀 끌었다고 해도 신전 공연에 비하면 촌놈 수준이겠죠.”

이제야 대신관의 뜻을 눈치챈 신관이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한번 공연하고 나면 뽕 맞은 것처럼 흠뻑 취하겠지.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그 계집이 먼저 신전에서 다시 노래하고 싶다고 안달할 거야.”

제국에서는 예술가나 인기인 뒤에 ‘병’자를 붙이기도 한다. 그들 대다수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병증과도 같은 정신 상태 때문이다.

예술가병, 인기인병이라고 하는 건 항상 사람을 희한하게 몰고 간다.

“그러니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특별 취급해주도록 해. 그 특별함에, 인기에 취하도록. 나중에는 그게 사라질까 두려워할 정도로.”

신관들 역시 한물가기 시작한 프리마돈나가 얼마나 병적인 행동을 보이는지 잘 알았다. 한창 인기 절정이라고 해도 그다지 정신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대신관님의 혜안은 정말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 신관이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치켜들자 다른 사람들 역시 술잔을 치켜들었다.

대신관은 별 걸 다 한다는 듯 픽 웃었지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모두 함께 술을 들이켜고 난 후, 대신관이 말했다.

“뭐, 사람들 반응을 봐서 선전용으로 쓸만하다 싶으면 여기저기 돌리면서 신도들을 선동하는 데 쓰면 돼.”

“벌써부터 교세가 확장되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그래, 만약 선전용으로 별로면 그때 가서 성가대 구석에 처넣으면 되니까.”

“역시 영민하십니다.”

“처음부터 마르멜이 아니라 대신관님께서 저희를 이끄셔야 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식당 안에는 웃음 소리와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신전은 제가 성가를 부를 거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저는 그럴 생각 없어요.”

칼리오페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하르첸은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칼리오페는 자신이 어떤 파격 선언을 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속가 중에 뭘 부를지가 고민인데. 아시다시피 선곡이—”

“잠깐, 잠깐!”

하르첸은 손을 휘저으며 칼리오페의 말을 막았다.

“신전에서 속가를 부르겠다고요?!”

잘못 들었길 바라며 물었지만 칼리오페의 대답은 간결했다.

“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하르첸은 두통을 느꼈다.

“레이디, 저는 레이디께 제 삶을 다 바쳤습니다.”

“또 그러신다.”

칼리오페가 미간을 찡긋하며 웃었다.

“진짜로요.”

하르첸은 인생은 음악이었고 그는 자신의 음악을 모두 칼리오페에게 바쳤다. 오로지 칼리오페만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것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끝이 안 보이는 영감을.

그가 연주하고 작곡하는 모든 음악의 원천이 칼리오페였으니 그녀에게 인생을 바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여태까지 하르첸은 칼리오페의 행보에 반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성가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르면 레이디께서 위험할 겁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는 생긋 웃었다.

“알아요. 파장이 엄청나겠죠. 사석에서 속가를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니까.”

하르첸은 다 안다면서 미소 짓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고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명랑하게 말했다. 하르첸의 시야에 별 같이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담겼다.

“제가 속가를 불렀을 때 신관들 표정이 볼 만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하르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제 불안대로 눈앞의 소녀에게 또다시 매료된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언제나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칼리오페가 이렇게 노래에 관해서 호전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곤 했다.

가슴 속에서 찌릿찌릿한 것이 터진다. 마치 몸 안에 불꽃을 품고 있는 것처럼.

이 불꽃은 새로운 악상이 되어 하르첸의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이 불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칼리오페뿐이었다.

결국, 하르첸은 이성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정말로 반대할 수 없었다. 칼리오페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하르첸 자신이 가장 기대됐기 때문에.

“그럼 선곡이 중요하겠군요.”

하르첸의 말은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밝아졌다.

“네, 그래서 하르첸 경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그런 중요한 문제를 저와 의논해도 괜찮겠습니까?”

“왜 안 돼요?”

칼리오페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당연히 하르첸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반응에 하르첸은 가슴이 꾹 조여왔다.

기쁘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그게…….”

막상 설명하려니 말문이 턱 막혔다.

칼리오페에게는 노래를 함께 연습하는 파트너가 있다.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칼리오페의 반주를 도맡지만, 실상 진짜 파트너는 따로 있는 것이다.

“…….”

자신이 믿음직했다면, 중요했다면 하다못해 칼리오페의 파트너가 누구인지라도 밝혔을 텐데.

얼마 전에 새해가 되었으니 칼리오페와 함께 한지도 어언 3년째다. 그런데도 파트너가 누구인지 귀띔도 안 해준 걸 보면 그간 신뢰를 전혀 못 쌓았다는 뜻이겠지.

‘레이디에게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야.’

알고 있었던 일이다.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칼리오페의 노래에 반해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여 곤란하게 만들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다 잘됐다고 해도 그때 칼리오페가 느꼈을 난감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때 사과하고 물러나는 게 가장 신사답고 깔끔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르첸은 도저히 칼리오페를 잊을 수도, 놓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편지를 보내고, 리사이틀까지 열어 칼리오페의 마음을 바꾸려고 했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애원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칼리오페의 반주자가 되었다.

‘아니, 반쪽짜리 반주자지.’

차마 나 말고 다른 파트너의 의견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설마 파트너를 질투한다고 생각할까 봐.

‘사실 질투가 맞나.’

하르첸의 섬세한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뮤즈, 모든 영감의 원천, 영혼의 불꽃.

칼리오페 루스티첼.

그녀가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그녀에게도 자신이 유의미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감히 전부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으음, 왜 괜찮을까 고민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망설이다 입을 다문 하르첸을 보고 칼리오페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저는 여태까지 수많은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를 만나왔어요.”

제도 사교계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며 칼리오페는 저명한 예술계 인사를 많이 만나봤다.

속가에 관심 있는 사람도 있었고, 속가에 적대적인 사람도 있었으며, 스티그마에 관심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개중엔 하르첸보다 유명한 사람, 나이가 많아 경험이 더 풍부한 사람, 경력이 훨씬 오래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하르첸 경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어요.”

하르첸의 빛나는 독창성과 잠재성을 따라올 자는 없었다. 적어도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저는 하르첸 경의 음악이 좋아요.”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하르첸을 분명하게 담았다.

하르첸은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라고, 당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의견이 궁금하다고.

꼭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칼리오페는 또렷한 시선으로 하르첸을 직시했다.

“……제 음악이 좋다고요?”

왜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 항상 편곡하신 걸 들을 때마다 설레는 걸요.”

기쁘다.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조여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어느 순간, 그들이 보내는 찬사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것이 되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당신의 음악이 좋다고 말하는 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처음 음악으로 인정받았을 때보다 지금 칼리오페의 진실된 말이 훨씬 가슴 깊이 와닿았다.

“편곡을 부탁드릴 때는 기대되고, 어떻게 편곡할지 이야기 나눌 때도 좋아요. 뭐랄까, 저를 염두에 두고 편곡하시는 느낌이라고 하면 건방진 소리일까요?”

칼리오페가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며 머리카락을 꼬았다.

“하지만 이렇게 편곡하면 좋겠다, 라든가.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든가. 서로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땐 뭔가……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음악을 통한 교감.

하르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는 칼리오페를 위해 편곡하고 있었다. 그가 작곡하는 모든 곡은 칼리오페가 부르는 것을 상상하며 만들어졌다.

편곡 역시 어떻게 하면 칼리오페가 더 곡에 몰입할 수 있을지, 어떤 게 그녀의 음색에 잘 어울릴지를 생각하며 작업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칼리오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칼리오페는 성실하게 답하며 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초점이 같아서인지 서로 비슷한 의견을 냈고, 그러면서 곡에 대한 생각은 더더욱 깊고 풍부하게 발전했다.

하르첸은 그 시간을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 칼리오페 역시 그 시간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르첸은 가슴 속에서 응어리져 있던 것이 스르륵 풀리는 것을 느꼈다.

“건방진 소리가 아닙니다. 저는 항상 레이디를 생각하며 곡을 쓰니까요.”

“하르첸 경.”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둥그레졌다.

곧 그녀의 뺨이 기쁨으로 상기되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작곡가에게 영감을 준다는 건 지극히 기쁜 일이었다.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선곡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경께서는 저를 항상 도와주시고 계신걸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말했다.

하르첸은 시선을 내린 채 애꿎은 찻잔을 매만졌다.

내가 당신의 첫 번째 반주자보다 더 도움이 되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더 욕심내면 안 돼.’

칼리오페와 함께 지내며 하르첸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자 천재로 이름 날리며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았다.

[예술가들은 원래 좀 신경질적이잖아.]

[천재들은 원래 평범한 사람들이랑 다르니까.]

[그런 부분도 멋져.]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의 능력은 존중하면서도 그를 평범한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그런 질문은 레이디를 곤란하게 할 뿐이야.’

그 덕에 하르첸은 배려하는 법을, 물러날 때를 알게 되었다.

똑똑, 침묵을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칼리오페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도미닉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유모였다. 유모는 눈짓으로 도미닉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비스 신전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비스 신전으로부터?”

칼리오페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유모가 가져온 레터 나이프로 편지를 뜯고 빠르게 읽어내렸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비스 신전에서 칼리오페가 할 신전 공연의 연습을 도와주겠다는 말이 적혀져 있었다.

맨 마지막 장에는 신전에서 고른 선곡 목록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져 있고 필치도 우아했지만 결국 본론은 하나다.

‘말로는 특별한 분에 맞는 특별한 대우를 위해 저희 쪽에서 응당 모든 편의를 제공해드리고자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칼리오페가 부를 노래에 관한 모든 것을 비스 신전이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전보를 보내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신전에서 꽤 신경을 쓴다는 뜻이다. 비스 신전에서는 자신들이 이렇게 챙겨주고 특별 대우하는데 설마 거절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런 달콤한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가 콧대를 세우며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비스 신전은 칼리오페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몰랐다.

“종이와 펜을.”

유모에게서 편지지와 만년필을 건네받은 칼리오페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써 내려갔다. 이제 칼리오페는 악필에서 벗어나 회귀 전과 같이 유려하게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화려하고 우아한 글씨가 예술처럼 편지지를 수놓았다.

[필요 없습니다.]

칼리오페가 적은 말을 보고 깜짝 놀란 하르첸이 눈매를 살짝 움찔거렸다. 신전의 제의를 거절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답을 보내는 건 괜찮을지 걱정됐다.

“비스 신전에서는 당연히 받아드릴 줄 알 텐데요.”

“원래 세상일은 뜻대로 안 되는 법이죠.”

칼리오페가 생긋 웃으며 만년필 캡을 닫았다.

그녀에게 정정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하르첸은 반짝반짝 생기를 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리려던 생각을 접었다. 여전히 말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말리고 싶지 않아졌다.

대신 머릿속에서 멜로디가 떠올랐다. 둥둥, 박자감이 치고 올라오는 호전적인 멜로디가.

“부탁해, 유모.”

“네, 아가씨.”

유모 역시 온유한 얼굴을 전투적으로 반짝이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도미닉이 다시 한 번 유모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칼리오페는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으며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 꼈다.

“자, 그럼 이제 신전에서 골라주는 곡도 깔끔히 거절했으니 진지하게 선곡을 고민해볼까요.”

칼리오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도미닉은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 칼리오페가 위험에 처해있던 인상이 강해서인지, 그는 자신의 아가씨를 그저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곁에 있어서 지켜보니 전혀 달랐다.

칼리오페는 분명 여리고 연약하다. 가느다란 목선과 가냘픈 손목. 설탕으로 빚은 것 같은 가볍고 섬세한 몸.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건 절대 약하지 않다. 칼리오페는 마냥 얌전한 듯 보였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았다.

‘피하긴커녕 상대방을 납작 눌러주고서야 만족하시지.’

한 번 뒤돌아서고 나서는 영원히 되돌아보지 않는다. 선을 긋는 게 단호하다.

도미닉은 칼리오페야말로 무가인 루스티첼의 피를 가장 강하게 타고 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기사인 그로서는 칼리오페의 그런 모습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음……. 사교계에서 속가를 연주하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요. 사람들이 사랑에 관한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잠시 고민하던 하르첸이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짝사랑이나 이별, 혹은 막 사랑에 빠진 마음을 노래할 때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데다가 여태까지 그들이 접했던 신성한 성가에서는 절대 다루지 않는 주제니까.

“하지만 신전에서 그런 노래를 불렀다간 반발을 사기 쉬워요.”

신전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말 신실한 신자다. 이런 이벤트성 공연에는 평범한 사람들도 많이 참석하긴 하지만 그래도 장소가 주는 경건함이라는 게 있다.

신이 인류에게 베푸는 아가페적인 사랑에 비해 남녀 간의 사랑은 세속적인 것으로 비쳤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어긋나면 이상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음, 확실히. 자칫 잘못하다간 결혼식에서 이별 노래를 부르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어요.”

“특히 신전에서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을 대거로 초청할 테니까요.”

그 정도 수작을 부릴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속가에 안 익숙하겠죠. 아니, 속가를 부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려면 최대한 그들의 취향에 맞춘 곡을 택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신전이란 장소와 어울리는 내용을 담은 곡이어야 하겠군요.”

“하지만 저는 종교적인 메시지가 있는 곡은 절대 부르지 않을 거예요.”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전에 어울리되 종교적 메시지는 없는 곡이라……. 그것도 사람들이 최대한 공감해야 하고.”

요건을 정리하던 하르첸이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그런 곡이 있을까요?”

* * *

“대신관님! 칼리오페 루스티첼에게서 답신이 왔습니다.”

신관 하나가 회의실을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와 외쳤다.

“그래?”

대신관은 턱을 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뭘 그리 호들갑을 떠냐는 반응이었다.

“적혀 있을 말이야 뻔하지.”

대신관은 거드름을 피우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회의실에 있던 신관들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얼마나 감격했는지 구구절절 적었을 것 아닙니까. 그걸 보는 게 묘미지요.”

“우리가 진심으로 자길 특별하다고 떠받들어주는 줄 알고 구름 위를 걷고 있을 겁니다.”

“원래 상대가 멍청하게 속아 넘어갈수록 재밌지요!”

껄껄껄, 신관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웃었다.

“그래서 대신관님, 뭐라 적혀져 있습니까?”

신관 하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필요 없습니다.”

“예?”

“뭐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신지…….”

아리송한 대신관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파사삭!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회의실을 울렸다. 꽃향기가 나는 값비싼 고급 편지지가 대신관의 손안에서 무참하게 구겨졌다.

“대신관님……?”

갑작스러운 대신관의 반응에 신관들은 모두 얼떨떨해서 그를 불렀다. 묘한 긴장감이 회의실에 돌았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적혀져 있다.”

대신관이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가 꾸깃꾸깃 구긴 편지를 테이블에 내던졌다.

“필요 없다고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대신관의 말을 그대로 되물었다. 그들은 서둘러 편지지를 펴봤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유려한 필체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필요 없다는 말이 적혀져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편지지가 다 펴지고 보인 문장은 달랑 한 줄.

[필요 없습니다.]

“…….”

신관들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황망해서 편지지를 보았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딱히 다시 읽을 것도 없었지만—적혀져 있는 말은 똑같았다.

“허…….”

막혔던 숨이 턱 새어나 왔다.

글씨가 이렇게 화려하다는 게 오히려 더 어이없고 화가 났다. 어슴푸레 코끝에 닿는 꽃향기도,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비단 같은 편지지도 모두 자신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뭐, 이런…….”

“대체 이게…….”

신관들의 잇새에서 분노와 황당함이 비어져 나왔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대신관이 늪처럼 낮고 질척한 목소리로 칼리오페의 이름을 읊조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고개를 숙인 채 허공을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음산하고 흉흉했다.

“이런 건방진……! 대신관님, 이 년을 가만둬선 안 됩니다!”

“당장 가서 이 오만방자한 년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요!”

“하! 우리가 기껏 호의를 베풀어줬는데 주제를 모르고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배려받을 가치도 없는 년이었습니다!”

흥분한 신관들이 너도나도 가만둘 수 없다며 칼리오페를 욕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음모에 칼리오페가 걸려 넘어갔을 거라면서 비웃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자신들의 호의와 배려가 진심인 것마냥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 그 점에 대해 꼬집는 사람은 없었다.

흥분한 신관들이 꽥꽥거리며 분노하는 모습에 대신관은 뜨거웠던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뭐, 이것도 좋지.”

대신관의 입매에 비틀린 미소가 걸쳐졌다.

“이번 기회에 제 주제를 깨닫게 해주는 것도 좋겠어.”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허리를 쭉 폈다.

“성가대를 준비시켜.”

“……성가대를요?”

“그래,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위해 화려한 무대를 마련해줘야겠으니.”

대신관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관들이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대신관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에 히죽거리는 웃음이 피어났다.

* * *

“그래서, 필요 없다고 답장을 보냈어요.”

“그래요.”

“그 후로 비스 신전 쪽에선 아무 연락도 없지만.”

“응.”

“분명 뭔가를 꾸미고—”

말을 하던 칼리오페가 입을 꾹 다물고 아스타레아스를 쳐다봤다.

눈매가 새침한 게 딱 사랑스러울 정도로 매섭다.

‘딱 뽀뽀해주고 싶게.’

저 뾰족한 눈가에 입을 맞추면 움찔움찔 떨리다가 사르륵 풀어지겠지. 눈가는 물론 얼굴까지 온통 붉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생각은 단 한 톨도 하지 않았다는 듯 멀끔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

아스타레아스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눈매를 좁혔다.

“지금 제 말 제대로 듣고 계신 거 맞아요?”

“누구 말씀이신데 당연히 귀담아들어야지.”

물빛 눈매를 나른하게 휘며 그가 속삭였다.

“장난치지 마시구요.”

“아니, 정말로. 안 듣고 싶어도 그대 목소리는 내 귀에 속속 들려서.”

아스타레아스가 후, 하고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그의 숨결이 칼리오페의 뺨을 간질였다.

칼리오페의 입매가 울렁였다.

“그, 그럼 그만 좀 만지세요.”

“아프다면서요.”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달콤하게 휘며 나긋하게 답했다.

“배 아플 땐 이렇게 손 주무르는 게 효과 있어요.”

그의 엄지가 칼리오페의 손바닥 위를 스윽 미끄러졌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감촉에 칼리오페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 이제 괜찮아요.”

“정말?”

푸른 눈동자가 물끄러미 칼리오페를 응시했다.

“……네.”

칼리오페는 입술을 살짝 떨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직 아픈 거 같은데.”

그러면서 그의 손가락 끝이 칼리오페의 손가락을 느릿하게 스치며 떨어져 나갔다.

칼리오페는 빈손을 꼼질꼼질거리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쉽지 않다.

……조금 아쉽긴 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너무 부끄러웠는걸.’

그대로 가다간 얼굴이 펑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중요한 얘기 중이었는데.’

칼리오페의 눈매가 다시 뾰족해져서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제 말 다 들으신 거 맞죠?”

“비스 신전에서 연습 제안했던 걸 거절했다고 했죠. 필요 없다고.”

정말로 제대로 듣고 있었다. 심통이 조금 누그러들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비스 신전 쪽에서 많이 화가 났다던데.”

아스타레아스가 소파 팔걸이에 팔을 얹고 턱을 괴며 말했다.

“그래요?”

“어떤 아가씨 때문에요.”

“흠, 그렇군요.”

칼리오페는 시침을 뚝 떼고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레아스의 입가가 슬며시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서 이번 공연을 크게 할 거라고 하더라고.”

“공연을 크게요?”

처음 듣는 소식이었다.

만약 비스 신전에서 공연 규모를 바꾼다면 당사자인 칼리오페에게 연락하는 게 옳았다. 왜 안 알렸는지는 뻔하다.

“모든 비스 신전에 공연을 송신할 예정이라고 말하더군요.”

“모든 신전에 공연을 송신한다고요?!”

생각도 못 한 규모에 칼리오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전에는 디바인 크리스탈(divine crystal)이 있으니까요.”

디바인 크리스탈, 성스러운 수정.

예로부터 각 신전의 신성력을 동기화해 본 신전의 예배를 다른 신전에도 비추는 데 쓰였다.

각 신전에서 동시에 신성력을 발휘하면 투명한 판 모양의 디바인 크리스탈에 본 신전의 영상이 뜨는 형식이었다. 신성력이 굉장히 많이 소모되기에 일반적으로 쓰이진 않았다. 칼리오페가 듣기로 신관들이 30분마다 교대로 투입된다고 했다.

“제국 전역에서 제 공연을 볼 수 있겠네요.”

“기를 꺾겠다는 의도겠죠. 성가대까지 준비시킨다고 하던데.”

“흠…….”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칼리오페가 공연할 일정에는 성가대가 없었다. 칼리오페를 회유할 생각이었던 대신관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그녀에게 집중시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리오페를 띄워주겠다고 성가대를 들러리로 세우는 건 주객전도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회유당한 칼리오페가 신전의 얼굴이 되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 공연에는 성가를 부르겠지만 칼리오페가 속가를 부르는 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다. 제도에 속가를 유행시킨 대표주자인 칼리오페를 성가대를 이용해 올려주는 건 피해야 했다. 그래서 성가대를 아예 출연시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칼리오페가 ‘필요 없다’는 답장을 보내기 전의 일이다.

대신관은 이 주제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의 코를 납작 눌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개 공연에 디바인 크리스탈을 사용한다고요?”

비스 신전이 디바인 크리스탈을 사용하는 건 송구영신 예배나 비스신이 처음 인류에게 복음을 전해줬다는 ‘시작의 날’뿐이다. 모두 공연이 있긴 하지만 주요한 건 예배다. 그것도 특별한 예배.

“나도 소식을 듣고 놀랐어요. 꽤나 약올랐나 봐.”

“이번 기회에 제 기를 확실히 꺾어놓겠다는 거겠죠. 성가대를 어떻게 준비시킬진 몰라도 대단한 걸 들고 올 거예요.”

칼리오페와 성가대를 비교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큰 무대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기도 하고요.”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신전 공연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올 것이다. 칼리오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해 본 적이 없다.

가장 규모가 컸던 때가 크레티안느가 주최했던 대규모 살롱에서의 공연이었다. 칼리오페는 그날 자신이 얼마나 떨려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게다가 눈앞의 수천 명으로 끝이 아니야.’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디바인 크리스탈을 통해 칼리오페의 노래를 지켜본다. 상상만으로도 명치가 조여들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신전에서는 어떻게든 저를 깎아내리려고 다양한 준비를 하겠죠.”

디바인 크리스탈까지 쓰는 마당에 뭘 못하겠는가.

칼리오페의 노래 따위 별 거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야유하게 만들려고 갖은 수를 다 쓸 것이다. 그리고 실의에 빠진 칼리오페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것이다.

고삐를 채우려고.

“거기다가 성가대에는 ‘그게’ 있어요.”

“……그렇죠.”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머리가 툭 아래로 향했다.

아스타레아스가 안쓰러움에 손을 뻗어 그녀를 위로하려는 순간,

“하지만 이건 어쩌면 가장 큰 기회예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휙 들며 말했다.

아스타레아스와 마주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단단했고,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패배의 퇴색감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칼리오페에게 향했던 그의 손이 다시 얌전히 내려갔다. 아스타레아스는 엷게 미소 지으며 고개 끄덕였다.

“당신에겐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이 있으니까.”

“열심히 노력해야죠.”

“함께 노력할게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볼을 옅게 붉혔다.

함께.

그 말이 어찌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신전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르는데도 다 잘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라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