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생일 선물 고마워요 (2)
부드럽고 따스하면서도 시원한 감각.
촉촉한 풀밭 위에 누워 봄날 햇볕을 쬐고 있으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 좋다…….’
칼리오페는 미소 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파티장으로 단장했던 베이비 살롱 내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울창한 숲이 그녀를 맞아주고 있었다.
짙푸르게 우거진 녹음 사이로 희고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고래가 유유히 헤엄쳤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다. 노래를 불러달라는 땅고래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던 날, 고래와 그녀가 만들어낸 숲에서.
‘그때 우리가 만든 숲인 걸까.’
칼리오페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우곤 프네우마케투스테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테라님.”
그녀의 부름이 기껍다는 듯 고래가 다가왔다. 뻗은 손에 고래의 몸체가 닿았다. 매끈하면서도 어딘지 촉촉한 흙을 만지는 것 같은 감촉이었다.
“이제 만질 수 있네요.”
칼리오페가 작게 미소 지었다.
7년 전 그녀가 처음 땅고래를 만났을 때,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만질 순 없었다.
그때 프네우마케투스테라는 자신이 사념체라서 그렇다고 했다. 몇 년 후에는 직접 만날 수 있다고, 그때가 되면 자신을 만질 수 있다고.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덧붙이던 땅고래는 수줍어 보였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는 7년이나 걸려 직접 닿은 칼리오페의 손길이 기쁜 듯이 커다란 얼굴을 그녀의 손바닥이 비볐다. 그 감촉이 간지러워 칼리오페가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오페가 웃는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고래가 얼굴을 마주한 채 속삭였다.
[생일 축하한단다, 내 소중한 아이야. 네 탄생은 나의 기쁨이자 온 우주의 기쁨이란다.]
칼리오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하니 정령에게서 생일 축하를 받을 줄은 몰랐다. 거창한 인사가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기뻤다.
“감사합니다. 축하해주셔서 정말 기뻐요.”
생긋 웃는 칼리오페를 본 땅고래가 머뭇거리며 커다란 몸체를 갸웃했다.
칼리오페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 생일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네?”
[네 생일에 맞춰보려고 힘을 내봤는데…….]
칼리오페의 몸보다도 더 큰, 하지만 땅고래의 몸체에 비하면 자그마한 지느러미가 수줍게 파닥였다.
[물론 내가 어서 너를 직접 보고 싶어서 서두른 것도 있지만.]
우물쭈물하는 위대한 대정령의 모습에 칼리오페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짜 맞춰졌다.
확실히 저번에 스티그마를 살펴보러 와 아스타레아스와 마주쳤던 날 느낀 바로는 이렇게 빨리 숨구멍이 뚫릴 줄 몰랐다.
“……네.”
칼리오페는 어쩐지 먹먹해서 작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들어맞는 타이밍에 기뻤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스티그마가 발현된 건 엄청난 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그저 운이 아니라, 그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프네우마케투스테라 덕이었다니.
그녀가 정령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십수 년 혹은 그 이상을 걸쳐 뚫는 숨구멍을 더 빨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땅고래 역시 안심한 듯 밝게 미소 지었다.
“저도 테라님이 보고 싶었어요. 스티그마가 더 빨리 발현된 것보다 테라님을 직접 뵌 것이 더 큰 선물이에요.”
진심이었다. 설마 테라를 생일날 볼 수 있을 줄은 몰라서 더더욱 기뻤다.
‘정말 상상도 못 한 깜짝 선물이야.’
땅고래는 아이의 말이 기뻐서 거대한 꼬리를 휙휙 돌리며 주변을 빙글빙글 유영했다.
[많이 성장했구나.]
헤엄을 멈춘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칼리오페를 마주 보고 말했다. 고래가 말하는 성장은 단순히 육체의 성장만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각성은 전이야.]
아니나 다를까, 프네우마케투스테라는 각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각성하면 테라님처럼 안정화를…… 테르를 에테르로 바꿀 수 있다고 했지.’
물론 지금도 할 수 있으나 그 양이 미미하다고 했다.
‘현재로선 에테르에 민감한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극소량이야.’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각성하면 가족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될 거야.’
언제쯤 할 수 있을까.
노래를 통해 안정화를 하는 거니 좀 더 노래를 많이 불러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요즘 이러저러한 문제로 바빠서 노래 연습을 하지 못했네.’
자연스럽게 아스타레아스와도 만나지 못했다. 저번에 그가 베이비 살롱으로 찾아와 창고 안에서 만난 게 전부였다.
그때를 생각하자 괜히 뺨에 열이 올랐다.
‘으아…….’
칼리오페가 화끈거리는 양 뺨을 감싸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본 고래가 몸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곳이 네게 도움이 될 거란다.]
땅이 숨을 쉬어 안정화가 일어나는 곳인 만큼, 칼리오페가 안정화를 몸으로 체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언제 각성할 수 있을까, 초조해하는 기색이 느껴졌기에 땅고래가 설명해줬다. 왜 갑자기 체온이 상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기에 칼리오페는 더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서둘러 아무렇지 않은 척 부끄러움을 털어냈다.
“앞으로 이곳에 오면 테라님을 볼 수 있나요?”
칼리오페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땅고래가 웃었다. 땅이 진동하는 낮은 웃음이었다.
[그건 안타깝지만 안 되겠구나. 나는 잠시 잠들 거야.]
숨길을 뚫느라 고생한 만큼 회복하느라 동면에 들어간다. 땅고래는 아쉬워하는 칼리오페에게 얼굴을 부빗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렴. 네가 나를 부를 수 있게 되면 다시 만날 수 있단다.]
“제가 테라님을 불러요?”
[그래. 내가 잠자고 있으면 사념체로 만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좋아요.”
칼리오페의 말에 땅고래가 미소 지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너를 애타게 찾는 사람들이 있구나.]
어찌나 절박한지 정령과는 무관한 존재들인데도 그 바람이 자신에게 닿을 정도였다. 소중한 아이가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칼리오페는 그럴 가치가 있는 아이였다.
[가보렴.]
작별의 말에 칼리오페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그녀는 감정을 못 이기고 땅고래를 와락 껴안았다. 소녀의 작은 품에는 고래의 얼굴도 다 들어오지 않았다.
“꼭…… 꼭 또 만나요. 테라님.”
[그래, 네가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으마.]
아이의 사랑스러운 뺨에 키스한 고래가 수줍게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짧은 자장가라도 불러주지 않겠니? 네 노래를 들으며 잠들고 싶구나.]
* * *
루스티첼 백작은 흠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곁에 있던 두 아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심각한 얼굴을 한 그들은 귀엽고 섬세한 레이스와 프릴이 잔뜩 달린 핑크빛 물건들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
루시우스의 부름에 백작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은—”
“베이비 살롱 아니야?”
로베르트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갑작스럽게 폭발하듯이 강력한 에테르 반응이 일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베이비 살롱의 땅이 스티그마가 되고 나서 그곳엔 항상 충만한 에테르가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여보?”
심상치 않은 반응에 루스티첼 부인이 남편을 불렀다.
그들은 칼리오페의 부탁으로 잠시 쇼핑하러 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했었다. 생일 파티를 시작할 때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게 가족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이상하게 떼를 썼다. 생전 억지를 부리지 않는 아이였는데.
루스티첼 부인은 대강 사하르네 부인과 무슨 일이 있을 것을 짐작했다. 집사와의 일을 전부 다 아는 데다가 사하르네 부인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도 알고 있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항시 품에 가둔 채 지켜주고 싶은 게 자식이지만, 때론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의 부탁을 들어주자고 했다. 집사 건부터 시작해서 가족들에게 자세히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있는 듯 보였으니까.
홀로서기라고 생각하면 쓸쓸했지만 호소하는 딸의 눈동자를 보고 외면할 순 없었다. 이상하게도 딸의 눈에는 공포심과 닮은 절박함이 있었다.
그리고 루스티첼 부인이 본 것은 정확했다.
‘가족들은 타깃이 된 적 있어. 눈에 띄거나 눈 밖에 나면 안 돼.’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움직이면 눈에 띈다.
‘그러니까 그 역할은 나만 할 거야.’
표적이 되더라도 자신만이 되도록.
의미 없는 짓일진 모르나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가 있는 칼리오페에겐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안심되니까.
결국 루스티첼 부인의 중재로 가족들 모두 파티장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쇼핑을 시작하니 사랑스러운 막둥이한테 어울릴 게 너무 많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칼리오페가 입으면 예쁠 드레스, 칼리오페가 착용하면 귀여울 헤어비즈와 목걸이, 팔찌부터 시작해서 칼리오페 방에 두면 귀여울 미니어처, 칼리오페가 껴안고 있으면 귀여울 곰 인형, 칼리오페가…….
하여간 칼리오페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마구마구 지르다 보니 끝이 없었다.
“서둘러 가봐야 할 것 같소, 부인. 막내가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리페가 있는 곳에요……?”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에테르 반응을 느낀 다른 가족들과 달리 그녀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무지는 그 어떤 것보다 맹렬한 공포로 다가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온갖 재앙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런 아내의 손을 꽉 붙잡았다.
“별일 아닐 겁니다. 걱정하지 마요.”
“그래요, 어머니. 좋은 일일 가능성이 커요.”
“응, 그냥 에테르가 강해진 것뿐인걸? 거긴 스티그마니까.”
루스티첼 부인은 자신을 안심시켜주려는 남편과 아들들을 한차례 둘러봤다.
지금은 혼란에 빠져 정신을 놓을 때가 아니다.
루스티첼 부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다시 드러난 그녀의 산호빛 눈동자는 침착하고 결연했다.
“그래, 어서 가보자.”
* * *
“도련님.”
러그윈의 부름에 아스타레아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부터 움직였다.
“알고 있어.”
짧게 짓씹듯 답하는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엔 그답지 않은 초조함이 배어있었다.
칼리오페의 생일 파티. 이번에는 정말로 찾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어차피 나중에 따로 둘만 시간을 보내면 된다. 핑계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니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베이비 살롱 앞에 와 있었다. 찾아오지 않겠다고 해마다 다짐하지만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그나마 올해는 루스티첼 저에서 열리지 않아서 지나가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 마차를 곁길에 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그렇게 칼리오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살피는 와중에 비스의 대신관이 베이비 살롱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저 자가 왜……?’
하지만 곧 칼리오페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사하르네 부인의 손에서 집사를 보호한 사람이 바로 아스타레아스니까.
대신관이 칼리오페와 독대했다는 소문이야 그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계획을 성공시키는 칼리오페의 멋진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분명 예쁠 테지.’
총명한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
하지만 들어갈 순 없었다.
‘대신관의 눈에 띄는 건 피해야 해.’
사하르네 부인이 황제와 신전 중 어느 쪽 끄나풀인지 모르겠지만 그쪽 눈에 띄는 것도 좋지 않다.
아스타레아스는 베이비 살롱과 한 블록 떨어진 골목에 마차를 세우라고 명했다. 그렇게 대기하던 중 강력한 에테르 반응이 베이비 살롱에서 느껴진 것이다.
아무리 스티그마라고 해도 비정상적으로 강력했다.
마치 폭발처럼.
그 순간, 아스타레아스는 남들 눈에 보이면 안 된다는 것도 잊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마차에서 구르듯 나와 베이비 살롱으로 향했다. 뒷문으로 들어간 것은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골목에서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른 쪽으로 움직였던 러그윈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러그윈은 자신의 주인이 무엇 때문에, 아니, 누구 때문에 움직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파티장에는 없습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증발한 것처럼.”
“뭐……?”
사라졌다.
칼리오페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정신없이 건물 안을 뒤졌다.
단정했던 얼굴이 일그러지고 항상 여유 있던 호흡이 밭아졌다.
‘어디야.’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도 날아갔다.
‘리페, 어딨는 거야.’
진정하라고 스스로에게 명령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도련님……!”
자신을 부르는 러그윈의 목소리도, 붙드는 손길도 인식할 수 없었다.
‘리페.’
초조함과 절박함이 아스타레아스를 지배했다.
계속 칼리오페를 찾아 헤맸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아찔한 절망감이 아스타레아스를 짓눌렀다. 도무지 평정을 되찾을 수 없었다. 얼음같이 단단하고 유리알처럼 매끄러웠던 눈동자가 고통으로 녹아내렸다.
자신을 보고 상냥하게 휘는 칼리오페의 눈매.
의지로 반짝이는 산호빛 눈동자.
언제나 또박또박 말하는 입술.
어른스럽게 굴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모습들.
보드라운 머리칼에 손가락을 얽고 싶었다.
자그마한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대고 싶었다.
품 안 가득 끌어안고 숨을 들이키고 싶었다.
아직 그 무엇 하나 해보지 못했는데.
‘리페……!’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심장을 산 채로 가르는 것 같다.
그때.
“어? 공자님……?”
거짓말처럼 칼리오페가 나타났다.
동그랗게 뜨인 산호빛 눈동자를 본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확 끌어안았다.
“……!”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갑자기 뜨겁고 단단한 품 안에 갇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숨이 막혔다. 일단 벗어나려고 하는데—
‘……공자님?’
자신을 붙든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몸을 비틀려던 것을 그만뒀다. 그 대신 고개를 들어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아…….’
숨결이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아스타레아스의 이마 위에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칼이 칼리오페의 짙은 머리칼과 섞여들었다.
‘공자님의 이런 얼굴……. 처음 봐.’
도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드는 얼굴을.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마주 끌어 안았다.
토닥토닥.
칼리오페의 작은 손이 그의 등을 차분차분 두드렸다.
“괜찮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위로부터 나왔다.
괜찮지 않은 일도 괜찮아질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기만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반드시 괜찮아질 거라고.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얼굴이었다.
눈을 감고 미소 지은 채 토닥토닥 위로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은 어린 소녀답지 않게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리페.”
아스타레아스의 부름에 칼리오페의 손길이 일순 멎었다.
‘……리페라니.’
그가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페라고 불린 경우는 굉장히 많았다. 칼리오페와 친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다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새롭게 들리는 걸까.
어쩐지 그의 입에서 나온 ‘리페’라는 울림은 다른 사람보다 더 따스하고, 달콤하고, 촉촉해서—
“……네.”
칼리오페는 그의 얼굴을 더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봐야 아스타레아스의 품 안이라 이마를 그의 가슴에 기댄 꼴이 되었지만.
칼리오페의 등과 허리를 꽉 붙들었던 손이 스르륵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의 턱과 뺨에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꽉 쥐면 깨질까, 만지는 것조차 아까운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이.
칼리오페는 차마 그 덜덜 떨리는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다시금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치고 숨결이 얽혀들었다.
“리페.”
“……네.”
“리페.”
“네.”
떨리는 호흡조차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눈동자를 파고들 듯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품 안의 온기. 이름을 부르면 돌아오는 답.
여기 있구나.
내 곁에. 내 품에.
살아서 숨 쉬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에테르 반응은 무엇이었는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안전하게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몸에서 힘이 다 빠질 정도로 엄청난 안도감이 들었다.
어디까지가 악몽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는 꿈을 꾸며 아스타레아스는 몇 번이나 칼리오페의 죽음을 목도했다.
과연 이건 현실일까?
‘좀 더.’
좀 더 칼리오페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다. 그녀가 차갑지 않다는 걸,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있다는 걸, 그 숨결이 따뜻하다는 걸 느끼고 싶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다.
네가 살아있다는 걸 확실하게 느끼고 싶어.
스르륵— 아스타레아스의 고개가 움직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짙은 남보랏빛 머리카락과 더 섞여들며 얽혔다.
산호빛 눈동자 속에 오롯이 담긴 자신의 모습.
곧 그마저도 사라지고 시야 가득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가득 찼다.
호흡이 멈췄다.
그 순간,
“리페……!”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화들짝 놀라 아스타레아스를 밀어냈다.
“네, 네!”
칼리오페는 서둘러 대답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얼결에 완전히 밀려난 아스타레아스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곤란해.’
그는 한 손으로 입매를 꾹 눌렀다.
‘정말로.’
* * *
‘우와…….’
러그윈은 망을 보는 것도 잊고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도련님이 저렇게나…….’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그의 주인은 모든 것에 냉정하고 무감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어느 것에도 애착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항상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미소에 담긴 것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무관심이었다.
단 하나 예외가 칼리오페였다.
‘도련님께 강아지 아가씨가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지근거리에서 모시며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의외인 면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련님인걸.’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겨도 다른 사람들보다 서늘하고 침착한 감정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서늘? 침착?’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다.
그냥 껴안고 있기만 한데도 보는 사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감정이 느껴졌다. 땅과 바위를 녹이는 용암처럼 애끓는, 자기 자신마저 삼켜버리는 감정.
‘아직 꼬맹이면서……!’
러그윈이 입술을 비죽였다.
단 한 번도 여성과 엮인 적 없는 그로서는 그렇게 배가 아플 수 없었다.
저보다 한참 어린 소년, 소녀가 서로를 보듬는 모습이 애절하고 안타까워 러그윈의 심장을 촉촉하게 물들이면서도 아프게 찔렀다.
‘내가 애인이 없는 건 도련님이 날 너무 부려먹기 때문이야.’
러그윈은 내년엔 반드시 여자친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가 결심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긴 하다.
그때 두 소년, 소녀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서, 설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진짜 뽀뽀?’
왠지 전혀 상관없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요즘 애들이 조숙해도 그렇지. 어린 것들이 못하는 짓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코너 벽을 붙잡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리페……!”
러그윈은 칼리오페를 부르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어떻게…….’
타박타박 급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른다.
기척이 들릴 정도의 거리에 누군가가 접근했는데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것에 러그윈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있던 모퉁이에서 나와 주인에게 다가갔다.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주인을 보니 왠지 안쓰러웠다.
‘하필이면 타이밍이……. 왜 내가 다 아쉽지.’
뽀뽀한 다음에 부를 것이지 하기 직전에 부르는 건 뭐란 말인가. 그래도 한편으로는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친 생기면 꼭 뽀뽀부터 해야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도련님에게 선수를 빼앗길 순 없다.
어쨌거나 이곳에 자신의 주인이 있다는 걸 들켜서 좋을 일은 없다.
‘루스티첼 일가의 그 엄청난 팔불출을 생각하면 더더욱.’
러그윈은 칼리오페가 떠난 자리를 힐끗 보고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베이비 살롱을 빠져 나왔다.
* * *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들!”
“리페!”
칼리오페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가족들을 향해 달려갔다.
와락—!
곧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 그녀를 감쌌다.
“하아, 리페.”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며 꼬옥 끌어안는 가족들을 마주 끌어안았다.
안락하고 따스하고 평온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느낌. 그런데.
‘뭔가.’
다르다.
‘공자님께 안겼을 때랑.’
무심코 든 생각에 칼리오페의 양 뺨이 화르륵 붉어졌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을……!’
당황한 그녀의 머리 위로 두서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몸은?”
“다친 덴 없어?”
“안 좋은 곳이라든가.”
“기분은 괜찮아? 무섭거나 그러지 않았니?”
걱정이 한가득한 가족들의 울망울망한 얼굴을 보며 칼리오페는 하하 웃었다.
‘낑낑거리는 강아지들 같아…….’
“괜찮아요. 멀쩡해요.”
그 말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가족들은 한참 칼리오페를 이리저리 살피고서야 안심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나머지 가족들도 궁금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게…….”
칼리오페는 대강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땅이 숨을 쉬도록 숨구멍을 뚫은 정령이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는 말에 가족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오페는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서 재차 땅고래에 관해 좋은 말을 했다.
하지만 ‘테라님은 좋은 분이세요.’ 라고 할 때마다 가족들의 얼굴은 더더욱 떨떠름해졌다.
“어쨌든 돌아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야.”
그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가족들이 손을 꼬옥 잡아 왔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많이 놀라셨구나.’
왠지 가슴이 찡해져 칼리오페는 가족들을 향해 밝게 미소 지었다.
* * *
파티장은 어수선했다.
모두 방금 보았던 비현실적인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신화 속에나 나오는 초월적인 존재. 그런 존재를 직접 목격했다는 벅참과 경외심이 한 데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사랑받는 칼리오페.
과연 그녀는 어떤 존재일까.
사람들이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있을 때 칼리오페가 파티장에 들어섰다.
“리페……!”
갑자기 사라졌던 아이가 돌아온 것에 사람들은 우선 반색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칼리오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칼리오페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제 조카처럼 친근하고 가깝게 느꼈다.
‘그런데…….’
대정령이 사랑하는 신성한 소녀.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도 될까?’
‘특별한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뭔가 실례를 하는 건 아닌지.’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거리감을 느꼈다.
칼리오페가 그 어색한 공기를 읽고 멈칫한 순간이었다.
“리페!”
“뭐야, 깜짝 놀랐잖아.”
힐데르트와 에피니가 타다닷 뛰어왔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칼리오페를 대했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그야 놀라지. 갑자기 커다란 고래가 나타나질 않나, 너는 고래랑 함께 사라지질 않나.”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거기다 그 고래가 대정령 프…… 푸푸라고 하고.”
에피니의 말에 힐데르트가 한심하다는 듯 정정했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
“그게 그거지!”
“푸푸랑 푸네우마케투스테라랑 뭐가 같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칼리오페가 작게 웃었다.
그런 그들에게 호르세안이 다가왔다.
“그래도 우리가 놀란 건 새 발의 피였어.”
“네?”
칼리오페가 되묻자 호르세안이 씨익 웃었다. 쳐진 눈매가 가늘어지고 입매가 슬쩍 올라가자 놀랄 정도로 짓궂은 얼굴이 되었다.
거기에 불안감을 느낀 사람은 루시우스였다.
“너—”
“네 오라버니들이 말이지.”
루시우스가 저지하려고 했으나 호르세안이 더 빨랐다.
“갑자기 베이비 살롱에 쳐들어와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듣더니—”
“호르세안.”
루시우스가 경고를 담아 불렀지만 거기에 굴복할 호르세안이 아니었다. 괜히 배냇저고리 시절부터의 악우가 아니다.
호르세안은 얼음 같은 친구가 이러는 게 재밌어죽겠다는 눈으로 말을 마저 이었다.
“아주 대단했어. 로벨은…….”
“형!”
“감히 우리 리페를 데려가다니! 내가 그 고래 새끼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호르세안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로베르트 흉내를 냈다.
“루스 녀석은 한술 더 떠서—”
“야.”
북극 빙하처럼 시린 루시우스의 목소리에도 호르세안은 멈추지 않았다.
“정령이든 뭐든 죽인다.”
아예 목소리를 쫙 깔고 눈빛까지 날카롭게 빛내며 루시우스에 빙의했다.
“……내가 정령은 안 죽여도 너는 죽인다.”
루시우스의 협박에 호르세안은 칼리오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의 곁에 있으면 루시우스가 아무 짓도 못 한다는 것 정도야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루스 녀석 피하는 건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루시우스의 반응에 오히려 더 신난 호르세안은 다음 타자를 혀끝에 세웠다.
“거기에 단장님은—”
힐끗 루스티첼 백작 쪽을 본 호르세안의 입술이 딱 다물렸다.
‘주, 죽고 싶지 않아…….’
찔끔한 호르세안이 식은땀을 흘리며 루스티첼 백작의 시선을 피했다.
단장님이 가타부타 말도 안 하고 검부터 뽑아 드는 바람에 파티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소드 마스터의 살기에 놀란 심약한 귀부인들이 휴게실로 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찌르는 듯한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왜……. 저 입 다물었잖아요, 단장님. ……아!’
루시우스를 피하려고 칼리오페에게 너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여간 이 집안의 팔불출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호르세안은 슬금슬금 칼리오페에게서 멀어졌다. 아직 죽기엔 너무나 창창한 나이였다.
갑자기 자신을 피하는 호르세안을 칼리오페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 봤다. 그 순연한 눈동자가 당장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호르세안은 눈물을 머금고 멀어졌다.
“미안하다, 리페. 오빠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칼리오페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버지가 날 죽일 거야…….”
“네에? 무슨 말씀이세요, 호세 오라버니. 아버지께서 그럴 리가.”
그저 농담이라고만 생각했는지 칼리오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맑고 티 없는 웃음이었다.
‘너는 속고 있어! 속고 있다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목숨은 하나였고 소중했다.
“자자, 장난들은 여기까지만 해요.”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언뜻 보면 가족들로부터 뾰족한 시선을 받는 호르세안을 구해준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분명 내 입을 막으시는 거야.’
호르세안은 힐끔 루스티첼 부인을 쳐다봤다. 곧장 눈이 마주친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여신 같았다.
‘윽…….’
하지만 그 속에서 호르세안이 읽은 것은 경고였다.
‘절대 말 못하겠군.’
날뛰는 아들과 남편을 말려야 할 루스티첼 부인이 가장 선봉에 나섰다고는. 그 가느다랗고 여린 몸으로 무슨 힘이 그렇게 샘솟는지 천하를 호령할 기세였다.
이렇게 소중한 막둥이를 데려간 정령을 죽이네, 마네 했던 가족들로서는 아까 칼리오페가 납치범(?)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자 떨떠름해졌던 것이다.
팔불출 가족들은 당연히 리페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정령까지 탐내 납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령이 남긴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라는 말이 증거였다.
‘리페라면 정령도 탐낼 만해!’
‘정령도 눈이 있으니까!’
‘오죽 사랑스러워야지!’
‘눈이 높아도 용서할 순 없어!’
그리고 그 생각은 자초지종을 들은 지금도 딱히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를 갑자기 데려가면 어떡해?”
“납치인 줄 착각해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인사하러 왔다면서 예의도 못 차리잖아.”
“의도가 어쨌든 행동으로 판단하는 법이다.”
칼리오페는 투덜투덜거리는 거리는 가족들을 보고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테라님은 정말 좋으신 분인데…….’
하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역효과가 날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사라진 바람에 놀라셔서 그러는 거니 테라님도 이해해주시겠지.’
그래도 대신 사과는 해두자 싶어서 칼리오페는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테라님.’
그러자 땅이 진동하는 것 같은 낮은 웃음이 들리는 듯도 했다.
칼리오페를 평소처럼 대하는 에피니와 힐데르트 그리고 호르세안 덕에 분위기가 밝아졌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칼리오페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리페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다정하고 예의 바른 모습. 속 깊게 생각하는 말. 모두 다 그대로였다. 칼리오페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거만하게 굴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은연중에 그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 보다.
‘하지만 전혀 아니야.’
칼리오페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녀였다.
땅고래 프네우마케투스테라를 둘러싸고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오늘은 칼리오페의 생일이었다.
모두 다 이 날을 축하하는 마음을 가득 안고 참석했다. 곧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축하를 받으며 즐거워하던 칼리오페가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저, 그런데 대신관님과 사하르네 부인은요?”
그 질문에 사람들의 표정이 확 굳었다. 차가운 경멸과 멸시가 그들의 눈동자에 스쳤다.
“그런 사람들한테 리페가 신경 쓸 건 없단다.”
“기가 막혀서. 무슨 생각으로 생일 파티에 참석한 건지.”
“뻔뻔한 것도 도를 지나쳤어요. 자기 이득을 생각하는 게 사람이라지만 속이 그렇게 시꺼멀 줄이야.”
“사하르네 가와의 거래를 중단하려고요. 그런 사람의 뭘 믿고 같이 사업하나요?”
“잘 살펴보세요. 협업하는 척하며 뒤로 더러운 수를 썼을지도 모르니까.”
“이제 비스 신전에 기부를 끊고 오렌과 로한 쪽에만 하려고요.”
사람들이 속닥이는 소리를 들으며 칼리오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생일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정령의 숨결이 배어있어서 그런가. 몸 안 가득 들어오는 공기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받은 생일 선물은 전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사하르네 부인과 대신관님이 주신 선물일까요.’
칼리오페의 입매가 조용히 올라갔다.
‘이제 받은 선물의 보답을 해볼까.’
* * *
“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음엔 분명—”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통신이 끊겼다.
상대에게 정신없이 자비를 빌던 사하르네 부인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 안돼! 이럴 순 없어!”
주군한테까지 버림받으면 정말로 끝이다.
이미 사하르네 가의 사업은 패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하고 거래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거래를 끊고 싶다고 했다. 새로 추진하고 있던 계약 역시 상대방의 일방적 통보로 불발되었다.
그 탓에 현금이 필요한데 가문에서 쥐고 있는 현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칼리오페에게 새로운 베이비 살롱을 지어준다고 당장 유통할 수 있는 현금은 그쪽에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은광이나 토지 같은 부동산은 보유하고 있지만 당장 현금화하기엔 시일이 걸린다.
날짜를 맞추지 못하니 파산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야.’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팔려고 해도 묘하게 잘 팔리지 않았다. 분명 거래하고 싶어하던 자도 소유주가 사하르네 가라는 걸 알자마자 태도를 바꿨다.
어쩔 수 없이 시세보다 낮은 가격을 계속해서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반응이 좋지 않아 판매가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상환해야 할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제국의 명문가, 제도 중앙 사교계의 중심 중 하나인 사하르네 백작가. 그 위세가 명문 후작가에 견준다는 가문이 이렇게나 쉽게 허물어지고 있다.
모든 것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아니, 갑자기가 아니지.’
사하르네 부인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스티그마를 노리고 칼리오페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은 제국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희대의 사기꾼.
순진한 아이를 꼬드겨 등쳐먹는 모리배.
상환을 요구하는 투자자들에게 부동산으로 상환하겠다고도 말해봤다. 돌아오는 건 비웃음이었다.
[그 땅엔 또 무슨 장난을 쳐놨을지 알고. 내가 어떻게 믿소?]
[현금 대신 은광이라니……. 그 은광 이제 은맥이 끊긴 게 아니오? 믿을 수가 있어야지.]
시세보다 낮게 땅을 내놔도 안 팔리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그 사기꾼이 이렇게 급매하려는 건 하자가 있기 때문이 분명하다는 거다.
어떻게든 파산을 막으려고 해도 사하르네 가의 이름으로 뭔가를 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사하르네 가는 비옥한 토지와 광산을 가지고도 이대로 파산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기댈 곳이 주군이었는데…….’
쉽게 용서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티그마를 놓친 것도 부족해서 계책까지 다 까발려졌다. 그 탓에 사하르네 부인이 어떻게 그 땅이 스티그마를 알게 되었는지 추측하는 말들이 무성하다.
이건 주군에게까지 해를 입힐 수 있다. 진실에 도달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거기다 사하르네 가는 신뢰와 명예를 잃고 파산 직전이다. 사하르네 부인이 대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그 말은 자신이 필요 없는 말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희망을 놓을 순 없었다. 주군이 자신을 버리면 정말로 끝이니까.
사하르네 부인은 허겁지겁 통신석을 조작했다.
그간 그녀는 유능한 수하였다. 이번 실수가 크긴 하지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제발…….’
하지만 연결 신호만 계속될 뿐, 주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주군에게 통신을 연결하던 사하르네 부인은 깨달았다.
자신이 비참하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어찌나 세게 갈았는지 입술이 찢어져 붉은 선혈이 흘렀다.
긴 머리칼이 온통 산발이 된 채 으드득 으드득 이를 갈며 입가에 피를 흘리는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도저히 명문가의 안주인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그녀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줬다. 목전에 칼이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제 그녀가 살기 위해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줄은 딱 하나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쇠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음성이 사하르네 부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 * *
“그 소식 들었어요? 땅의 대정령이 베이비 살롱에서 나왔다면서요?”
“스티그마에서 정령이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처음이라던데.”
“그뿐만 아니에요. 칼리오페 영애에게 ‘사랑하는 아이야.’ 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나……! 그럼 대정령이 스티그마라서 나타난 게 아니라 칼리오페 영애 때문에 나타난 거 아닌가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른다.
대체 왜?
어째서 칼리오페 때문에 대정령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왜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는가.
이런 의문은 결코 풀리지 않기에 더 많은 소문과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 확실하지 않은 점마저도 사람들에겐 미스테리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대정령의 사랑을 받는 소녀.
그 특별함. 그 고귀함. 그 거룩함.
칼리오페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붙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옛 전설 속에나 나오는, 화석처럼 굳어진 해묵은 신화가 지금 자신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느낌. 무언가 대단한 것의 산증인이 된 느낌.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이면 무조건 칼리오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여기엔 대정령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따랐다.
“그런데 칼리오페 영애는 천박한 속가를 불렀다고 하지 않았나요? 물론 속가에 대해서 학술적 논의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신전에서는 속가가 신의 뜻에 반하는 거라고 했죠.”
“형이상적인 진실을 외면하고 형이하적인 인간이나 물질에 집착하게 된다고.”
“그런데 신의 뜻에 반한다는 속가를 불렀는데 왜 대정령이 사랑하는 아이라면서 칼리오페 영애를 보러오죠? 말이 안 되잖아요.”
“사실은 속가가 신의 뜻에 반하지 않는 게 아닌가요?”
“그럼 대체 신전의 가르침은 뭐죠?!”
“칼리오페 영애는 아직 어린데 그릇된 가르침 탓에 듣지 않아도 될 말까지 듣고…….”
“요즘 신전 좀 이상하지 않아요?”
“조금이 아니죠. 속가에 대해 왈가왈부한 것도 웃기지만, 스티그마가 될 거라는 걸 속이고 칼리오페 영애에게 베이비 살롱을 기부하라고 했다면서요.”
“그것도 기부하라는 말도 없이 당당하게 여기 신전을 짓겠다고 했다던데요?”
“어머, 정말요? 세상에…….”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기부해달라는 대로 기부했더니 귀족을 자기 지갑이라고 생각하나 보네요.”
“오죽했으면 아직 어린애한테까지 그랬겠어요.”
같은 돈이라도 성인에게 달라고 하는 것과 어린아이에게 달라고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칼리오페에 대한 이야기가 성행할수록 신전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다.
사람들은 칼리오페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스티그마의 주인인 데다가 정령의 사랑을 받는 칼리오페에게 호감을 사고 싶어했다.
꽃다발을 비롯해 온갖 선물과 초대장과 편지가 루스티첼 저로 날아들었다.
‘칼리오페는 그냥 평범한 소녀가 아닌, 어떤 신화적 존재가 아닐까.’
이를테면 성녀 같은.
하지만 칼리오페는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귀족 사회부터 시민 사회까지 온 제국이 흥분해서 떠들썩했다.
모두가 소란스러운 가운데 칼리오페는 간만의 평화를 맛보며 집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폭신폭신한 수플레 팬케이크에 달콤한 메이플 시럽을 뿌리고 버터와 크림을 가득 얹어 한입에 냠.
‘흐아아아—’
칼리오페의 얼굴이 수플레 팬케이크만큼이나 폭신폭신해졌다. 잔뜩 부푼 뺨이 발갛게 물들고 작은 입술이 다람쥐처럼 오물오물 움직인다.
찰칵찰칵찰칵—
이제는 배경음이 된 것 같은 카메라 소리에 칼리오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해진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하아, 내 딸이지만 너무 귀여워.”
루스티첼 부인은 잠깐 호흡 곤란이 온 바람에 가슴에 손을 얹고 후후하하 심호흡했다.
‘……사진 찍을 땐 멀쩡하셨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칼리오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전에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가족들에게 상식도 모른다는 듯한 눈빛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지금 이 순간을 남기기 위해선 호흡 곤란 따위 이겨낼 수 있어!]
[맞아 맞아! 호흡 곤란보다 우리가 더 강해!]
[아픈 건 나중에 아파도 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호흡 곤란을 지배할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기사지.]
아직도 그때 가족들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다시 생각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요.’
“그런데 리페, 베이비 살롱은 어떻게 할 거니?”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스티그마를 사고 싶어 했다. 그들이 제시한 대가는 칼리오페의 상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다이아몬드 광산, 동부 곡창 지대, 마이라닌 군도, 몇몇 물자의 유통거래 독점권, 자그마한 영지와 작위 등등. 하나만 있어도 몇 대가 사치하며 놀고먹을 수 있는 것들을 동시에 제시했다.
‘하지만 당장 거액의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스티그마를 사놓은 이유는 전생처럼 가세가 기울어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그때 가문의 재산은 모두 가치가 일시에 하락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스티그마의 가치는 절대 하락하지 않으니 긴하게 쓰일 수 있다.
‘음, 전생과 다르게 우리 집안이 쉽게 쓰러질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으면 가세가 기울기도 힘들어.’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하나다.
스티그마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흠…….’
입안을 빵빵하게 채운 팬케이크를 야무지게 삼킨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개방하겠어요.”
“개방?”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스티그마를 개방한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다. 스티그마 보유자들은 절대 스티그마를 개방하지 않는다. 스티그마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데에 얻는 이득이 막대하니까.
보통 신전에서 스티그마를 보유하는 경우 개방하긴 하지만 그것도 완전한 개방이 아니다. 막대한 기부금을 낸 자들에 한해 한정적으로, 시간 제한을 두면서 개방한다.
‘실상은 개방이 아닌데 개방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듯이 으스대는 것도 웃긴 일이지.’
루스티첼 부인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어쨌거나 스티그마에 가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대가를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그냥 개방할 거니?”
“모든 사람들한테 개방하는 건 안 되겠죠. 엄청난 인파가 몰릴 텐데 그걸 관리하는 것도 일이고.”
“그건 그렇지.”
“그래서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개방할 거예요.”
칼리오페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은 제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에테르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힘. 밀집된 에너지 그 자체다.
이 세계에는 크게 세 가지 힘이 있다.
에테르를 마나로 환원해 사용하는 마법사.
에테르를 오러로 환원해 사용하는 검사.
에테르를 신성력으로 환원해 사용하는 성직자.
모두가 스티그마를 탐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방대한 마나와 오러 그리고 신성력을 속성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흐음,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
“검사나 마법사 같은 분들이요. 성직자는 안 돼요. 절 속이려고 했잖아요? 믿을 수 없어요.”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말했다.
‘비스의 대신관이 아주 큰 역할을 해줬어.’
칼리오페가 스티그마를 개방하겠다고 하면서 성직자들을 제외시킨다면?
당연히 모든 신전에서 일시에 반발할 것이다. 신을 멀리하는 마녀 등등 온갖 핑계를 대며 칼리오페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비스의 대신관에게 스티그마를 놓고 큰 배신을 당했고, 이 탓에 성직자의 출입을 금한다고 하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잘못은 신전 쪽에서 먼저 저질렀으니까.
‘오렌과 로한에서는 죄없이 스티그마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니 당연히 비스에 불만을 품겠지.’
이것 역시 칼리오페에게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재능 있는 사람을 다 받을 순 없는 게…… 에테르를 악용할 수 있잖아요?”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스티그마를 이용해 방대한 힘을 손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식칼을 들고 테러하려는 사람에게 폭탄을 쥐여주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 틈에 루스티첼 가를 노리는 사람이 섞여 들어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다.
“아무한테나 개방할 수 없으니 추천을 받겠어요.”
“과연.”
루스티첼 부인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는 정말 시야가 넓다. 제 딸이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생각지 못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걸로 제국…… 아니, 제국을 넘어 대륙에서 손꼽히는 무력이 리페의 손안에 모이게 될 거야.’
은거하는 마법사나 검사들이 스티그마를 사용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제도에서 기재라고 기대를 받으며 수련 중인 기사나 마법사는?
모두 당장 짐을 싸서 칼리오페를 찾아올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칼리오페는 이러한 인물들을 ‘추천’ 받겠다고 했다. 그 말은 마법사나 검사가 아닌, 에테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솔깃한 이야기다.
칼리오페에게 직접 연이 없는 마법사나 기사들이 스티그마 개방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할까?
한마디라도 괜찮으니 이야기를 전해달라며 칼리오페 주변 사람들에게 안달복달할 것이다.
즉, 칼리오페와 연이 닿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힘이 된다. 칼리오페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힘은 커진다.
모두가 칼리오페의 인맥에 들려고 할 것이다. 칼리오페가 먼저 찾아갈 필요도 없이, 유수의 정치가와 재력가들이 먼저 칼리오페를 찾아올 것이다.
‘한 가지 걱정인 건…….’
이 일은 칼리오페를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 구도가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기존의 권력자가 그것을 좋아할까?
보통은 칼리오페를 자기 쪽으로 포섭하거나 호의를 보여 이 새로운 권력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새로운 상황에서 한 발 앞설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게 돈이든 정치력이든 무력이든. 아니면 모두 다이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황제는.’
안 그래도 황권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만약 유약한 성정의 황제라면 이 상황에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하지만 현 황제는 달라.’
그는 황권이 약한 것에 큰 불만을 품고 계속해서 황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황권을 약화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먼 옛날과 달리 황금의 시대가 되며 수많은 게 변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명예만으로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서서히 계층이 넓어지고 그 격차는 얕아졌다. 그러나 혁명적인 변화는 없었다.
황제는 절대군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국의 가장 위에서 군림하는 자였다. 황금의 시대의 율법에 걸맞게 황가에서는 가장 많은 황금을 보유했으므로.
역대 황제는 수많은 권리증서와 재물로 새로운 충성을 얻어냈다. 하지만 현 황제가 즉위하면서 황권은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선황이 승하하고 원래대로라면 장자인 아스타레아스가 황위를 물려받았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묘하게 돌아가 결국 선황의 동생인 현 황제가 즉위한다.
한동안 국정은 아수라장이었다.
황제는 끊임없이 선황을 암살하지 않았냐는 의혹에 시달렸고, 그 의혹에 종지부를 찍고자 선언했다. 자신의 조카가 성년이 되는 순간 황제의 관을 양위하겠다고.
그렇게 반쪽짜리 정통성을 손에 넣었으니 당연히 황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 현 황제는 큰 불만을 품었다.
‘야욕이 넘치는 자야.’
그런 자가 칼리오페가 새로운 권력의 구심점이 되면 어떻게 나올까?
‘포섭해서 자기 아래에 두려고 하거나, 아니면…….’
루스티첼 부인은 다시 팬케이크에 집중한 딸아이를 바라봤다.
‘정치 사교활동을 열심히 해야겠어.’
다행인 점은 그 반쪽짜리 정통성 덕에 황제에게 제약이 많다는 것이었다.
* * *
“아가씨, 사하르네 부인이 방문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칼리오페는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돌려보낼까요?”
하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돌려보낼까요?’ 가 아니라 ‘내쫓을까요?’ 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이번 주 즈음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쩜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지.
[그럼 베이비 살롱은? 닫는 거야?]
에피니의 물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스티그마씩이나 된 땅을 아깝게 평범한 가게로 쓸 순 없다. 훈련장 비슷한 용도로 개방할 거라고 했더니 에피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언니도 스티그마에서 검술 연습해 보고 싶죠?]
[……뭐어.]
에피니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중얼거렸다. 좋으면서 안 좋은 척하는 게 빤히 보여 귀여웠다.
칼리오페는 빙긋 웃으며 잘한다, 잘한다 격려해주었다.
[지금도 강하지만 스티그마에서 단련하면 더 강해질 거예요.]
[당연하지. 나는 계속 강해질 거야. 널 지키기 위—]
[네?]
갑자기 말을 하다 말아서 고개를 갸웃하자 에피니가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고개를 팩 돌렸다.
[여튼. 강해질 거라고.]
[응, 언니는 더 강해질 거예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니 에피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베이비 살롱에 대해서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장소만 바꿔서 다시 열 거니까요.]
[정말? 어디에?]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는데……. 아마 곧 그 장소가 절 찾아올 거예요.]
그리고 오늘, 그 장소가 칼리오페에게 찾아왔다. 그러니 어찌 내쫓겠는가.
“아니. 내 방 옆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를…….”
칼리오페는 말을 하다 멈췄다. 하녀의 뒤에서 사하르네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사하르네 부인.”
하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부인! 로비에서 기다려주십사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무례하게—”
“리, 리페…….”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에게는 하녀의 질책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감히 자신에게 뭐라 한 거냐며 하녀의 뺨을 올려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비척거리며 하녀를 지나쳐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머, 저런.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부인.”
칼리오페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이런 상태인 사하르네 부인을 데리고 삼 층에 있는 자신의 방 옆으로 가는 것은 힘들 듯했다.
“응접실 말고 가제보(gazebo)에 티테이블을 세팅해줘. 화로도 같이.”
“예, 아가씨.”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사하르네 부인을 쳐다보던 하녀가 칼리오페를 향해 공손하게 답했다.
“리페…….”
“가제보는 이쪽이랍니다, 부인.”
칼리오페는 앞장서서 걸으며 말을 이었다.
“춥긴 하지만 화로를 놓으면 제법 따뜻하더라고요. 오늘은 햇빛도 좋고……. 겨울 정원도 나름대로 운치가—”
“리페!”
칼리오페가 여상하게 말을 건네자 안달 나고 초조해진 사하르네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칼리오페를 불렀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에 놀라 입을 가렸다.
“아, 그러니까, 나는…….”
“부인.”
칼리오페가 안타까운 얼굴로 사하르네 부인에게 다가갔다. 작은 손이 건조한 사하르네 부인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많이 힘드신가 봐요.”
그렇지 않으면 부인께서 감히 제게 소리를 지르실 리 없잖아요?
칼리오페의 말은 꼭 그렇게 들렸다.
명백한 우위.
칼리오페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 고지를 이용할 줄도 알았다.
언제나와 같은 태도로 사하르네 부인을 맞은 것, 지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잡는 것. 열두 살…… 아니, 해가 바뀐 지금 열세 살이 된 소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사교술에 능했다.
이렇게 심약해진 꼴을 보이면 칼리오페의 마음이 좀 약해질 줄 알았다. 아니면 화를 내거나, 뭐든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애써 화내고 모욕주고 까 내릴 필요도 없다.
‘그럴 가치도 없는, 저 진창 밑바닥에서 기는 벌레 같은 존재니까. —라는 건가.’
사하르네 부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가 좁아지길 반복했다. 그녀는 칼리오페의 손을 뿌리치지도, 그렇다고 맞잡지 못한 채 숨을 멈췄다.
굴욕적이다.
칼리오페의 손바닥 위에서 어릿광대짓을 하는 기분.
‘그럼 힘들지 안 힘들겠어? 지금 누굴 놀려?!’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을 입을 딱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 자체가 너무나 모멸스러웠다.
* * *
“내가 잘못했다, 리페.”
가제보에 도착하자마자 사하르네 부인이 사과했다.
“널 속이고 스티그마를 빼앗으려고 술수를 쓰고……. 네 믿음에 마지막까지 배신했어.”
한참 어린애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여전히 짜증 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회생할 수 있다면.
“미안하구나.”
절절한 음성이었다.
칼리오페는 피식 웃었다. 정말 미안했다면 그날 사과했겠지.
그런데 지금 와서 뒤늦게 한다는 건—
‘바라는 게 있어서지.’
“제발 날 도와주면 안 되겠니? 부탁하마, 응?”
역시나.
항상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빌게.”
사하르네 부인이 비는 시늉을 했지만 칼리오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겨울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 마셨다.
‘오늘 차향이 유독 좋네.’
사하르네 부인이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굴욕적이지만, 칼리오페의 시선을 끌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털썩.
사하르네 부인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칼리오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사하르네 부인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빌겠습니다, 루스티첼 영애.”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사하르네 부인.]
칼리오페의 머릿속에서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이 재생되었다.
그때 자신 역시 저렇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가문은 사라지고 길거리에 내앉게 생겼습니다. 이대로는 죽을 수밖에 없어요.”
칼리오페는 아무 말 없이 그날 사하르네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영애밖에 없어요. 제발……. 큰돈을 융통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제게 베이비 살롱에 기부한 땅 가치를 현금으로만, 제발…….”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어머니 약값만큼은……! 이대로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칼리오페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열리는 입술을 보며 사하르네 부인의 눈동자에 기대가 찼다.
[루스티첼 영애.]
“사하르네 부인.”
[추해요, 지금.]
“추해요, 지금.”
* * *
밀랍을 바른 것처럼 사하르네 부인의 얼굴이 하얗고 창백하게 굳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끼기긱.
칼리오페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사하르네 부인의 목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칼리오페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겨울에 즐기는 홍차라 클로브를 블렌딩했는지 독특하고 스파이시한 향이 났다.
‘넛맥도 넣은 거 같은데…….’
사하르네 부인의 눈동자에 느긋하게 찻물을 음미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담겼다.
서서히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너, 너……. 네 년이!!”
칼리오페는 무감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말에 발작하던 사하르네 부인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런데 제가 말 한마디 했다고 바로 네 년이, 하고 운운하시는 걸 보면 이번에도 또 뒤통수 칠 생각이었나 봐요?”
사하르네 부인은 이대로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숙이고 들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약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누군가에게 모욕당하며 부탁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무게추는 현실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네가 일부러 날 모욕주니까……. 내가 잘못한 건 아는데—”
“어머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추해 보여서 추하다고 했을 뿐이에요.”
“뭐……?”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 입가에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칼리오페는 정말 악의가 없어 보였다. 다른 뜻 없이 느낀 바 사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모욕적이었다.
“그런데 부인, 고작 추하다는 말 하나 가지고 성을 내실 정도로 마음이 상하신 거예요?”
“고작……?”
사하르네 부인의 손톱이 바닥을 까드득 긁었다.
듣는 순간, 그리고 이어지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느끼는 모멸감을, 고작?!
한 번도 절박해 본 적도, 그 절박함을 비웃음 당해 본 적 따위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어렸을 때부터 뭘 하든 잘한다, 예쁘다, 착하다 하고 칭찬받으며 온실 속에서 아이가 어떻게 반응할진 뻔했다.
“그럼 너는, 누가 절박하게 애원하는 네게 추하다고 하면…….”
“글쎄요.”
달칵, 칼리오페는 소서에 찻잔을 내려놨다. 묘한 웃음이 소녀의 입가에 걸쳐져 있었다.
‘정확하게 있었던 일이라서요.’
산호빛 눈동자가 무릎 꿇고 앉은 사하르네 부인을 내려다 봤다.
‘그것도 당신이 내게 그랬죠.’
칼리오페는 그때 추하다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낼 수 없었다.
단 한줄기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광대 노릇을 한 이를 비웃으며 조롱하는 의미로 주는 돈도 괜찮았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도 다 내다 버렸나요?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어도, 천박하게.]
자신이 모욕 당해도, 천박해 보여도, 진창을 굴러도.
‘그래서 어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렇게 구걸할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그러나 돌아오는 건 몸이나 팔라는 말이었다.
칼리오페가 그렇게 절박해진 원인이 바로 사하르네 부인이었다.
가세가 기울긴 했지만 남은 재산이 있으니 어머니 약값 정도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집사와 손을 잡고 가문의 재산을 빼돌린 사람이—
칼리오페의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작 추하다는 말 한 마디로 세상에 다시 없을 모욕을 당했다고?
‘당신은 내 어머니를 죽였어!’
말라비틀어지는 꽃처럼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잃어가는 어머니의 모습. 스스로 숟가락질도 힘들 정도로 앙상해진 팔목.
힘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살아만 있어 주길 바랐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호흡을 골랐다.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사하르네 부인의 멱살을 틀어쥘 것만 같았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은 제가 아닌걸요.”
당신이지.
산호빛 눈동자가 그렇게 단언했다.
과거는 지워졌고 새로운 현재가 만들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그런 거라면 전 이만 일어날게요. 낭비할 시간 따윈 없어서요.”
칼리오페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흠칫 놀라 사하르네 부인을 바라봤다.
땅바닥에 머리를 찧은 사하르네 부인이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루스티첼 영애.”
그녀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요 며칠 살 길이 보이지 않고 궁지에 몰리다 보니 감정 기복이 심해졌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지금 이 순간, 사하르네 부인은 칼리오페가 발을 담갔던 그 진창에 머리를 처박은 채 빌고 있는 것이다.
“영애께 화를 낸 건 결코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제발, 부디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애원을 마친 그녀가 조심스럽게 칼리오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찧은 이마에서 붉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도 칼리오페의 얼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 보통 사람이 이런다면 안타까워서 뭐든 용서해주고 싶을 텐데.’
칼리오페의 두 눈동자에는 사하르네 부인의 모습만이 비친 게 아니었다.
사하르네 부인의 입가에 묻은 피가 어머니가 흘린 피를 비추었다. 고통스럽고 절박한 눈동자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눈동자를 비추고, 회한이 가득한 눈물 역시 어머니의 눈물을 비췄다.
“……재밌네.”
나직한 속삭임이 작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이번 생에서 상대의 목줄을 쥔 사람은 칼리오페였다. 정반대가 된 상황이 어찌 재밌지 않을 수 있을까.
칼리오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 자국을 냈지만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뭐……?’
사하르네 부인은 칼리오페가 중얼거린 말이 믿기지 않았다. 혼잣말이었지만 가까이 있는 사하르네 부인에게만큼은 잘 들렸다.
‘내 꼴이, 내 모습이 재밌다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가슴 속에서 휘몰아쳤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들어갔는지 시야가 붉었다.
“아…… 아, 아아!”
나락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것같은 목소리가 사하르네 부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 악마 같은 계집애는 처음부터, 애초에, 자신이 뭘 하든 도와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진창에 처박히는 자신을 보고 유흥거리로 삼을 뿐!
덜덜 떨리는 사하르네 부인의 손이 품을 뒤적였다. 곧 손에 꼭 들어오는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하, 하하…… 킥.”
실성한 사람처럼 웃던 사하르네 부인이 그대로 칼리오페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아가씨!”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소리를 지르며 가제보 안으로 달려왔다.
칼리오페는 제게 다가오는 사하르네 부인을 보았다.
반짝.
사하르네 부인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반짝였다.
창백한 겨울 햇살에 시리게 빛나는 날붙이.
그 하얀 빛이 자신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보였다.
* * *
“대신관.”
황제의 부름에 대신관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폈다.
“폐하, 왜 그렇게 무섭게 부르시고 그럽니까.”
빙긋 웃으며 능청스레 말하는 대신관을 보고 황제는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난 네 놈의 그런 면을 좋아했지.”
진지하지 않고 유들유들한 태도가 여유로워 보였다. 그 여유로움은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고. 그래서 황제인 자신에게 무례한 언행이어도 딱히 뭐라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데 지금 상황이 여유나 부릴 때인가?”
황제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시꺼먼 눈동자에서 노기가 넘실거린다.
“단 하나, 스티그마만 손에 넣으라고 했어.”
“폐하.”
“네 놈 계획이 다 틀어지고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어도 그거 하나면 된다고 했어!”
쾅!
황제가 팔걸이를 거칠게 내려쳤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뭐지?”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대신관은 고개를 숙였다. 그 꼴도 황제에게 좋게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화를 내더라도 뭔가 대책이 있을 때 대신관은 항상 유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지금 아무 말도 못하는 걸 보면 대책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스티그마를 손에 넣지 못한 것도 모자라서 계획까지 다 까발려? 기껏 신전을 키워줬더니……!”
이 말은 상당히 많이 억울했다.
대신관은 숙인 고개 아래로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서 자신이 스티그마를 손에 넣으랴, 교세를 확장하랴 애쓰는 동안 대체 황제가 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귀족들을 움직여서 속가를 금지해달라고 했던 것마저 실패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황제는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대신관 역시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쓸모 없는 게 대체 누군데.’
황제가 신전을 키워줬다는 것도 어이없었다. 황제와 신전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한쪽이 시혜를 베푸는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결탁한 것 아니었나.
대신관의 상태를 살피던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부디 고정하소서. 일단 지금으로선—”
챙그랑!
긴 로브의 말이 멈췄다.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도기 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긴 로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히 나에게 고정해라 말라,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가?”
“소, 송구합니다, 폐하.”
긴 로브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제는 짜증 난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는 사이 대신관은 분노를 다스리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은근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압니다. 계속해서 일이 뜻대로 안 돌아가니 답답하시고 저희가 미덥지도 않으실 테지요.”
“하! 잘 아는군. 특히 너희를 못 믿겠다는 점을 말이야.”
황제의 으르렁거림에도 대신관은 빙긋 웃었다. 언제나의 여유를 되찾은 모습에 황제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순간은 고작해야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찰나라고?”
그들의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한 건 교세가 예정보다 훨씬 더디게 확장된 때부터다. 그게 삼사 년 전이다. 그런데 이 몇 년간의 시간이 찰나라고?
황제의 생각을 읽은 대신관이 짙게 미소 지으며 옥좌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섰다.
“평범한 우민들에게는 긴 시간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르지 않습니까.”
“…….”
은근한 어조였다. 공모자의 목소리.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에겐 긴 시간이 자신들에게는 찰나인지, 황제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과 손을 잡은 것 아닌가.
여태까지 황제가 대신관에게 유독 유했던 것은 그의 여유로운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신관이, 비스 신전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제국의 통치자인 황제조차도 가질 수 없는 권능을 지녔기에.
“곧 보름달이 뜨는군.”
황제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물건을 던졌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온건한 태도였다.
“예, 샘에 방문하실 준비는 다 갖춰 놨습니다.”
“……그래.”
황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흥분을 가라앉혔다는 뜻이다. 대신관은 깊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서로 이해 관계로 얽혀 있다고 해도 이 중 명백한 갑은 황제였다. 그렇기에 똑같은 잘못을 해도 황제는 대신관을 추궁할 수 있고 대신관은 그러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 샘이 있는 한.’
황제는 결코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내쫓지도 못한다.
결국 감싸 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열쇠는 내가 쥐고 있어.’
* * *
“아가씨!”
“꺄아아악!”
마치 물 속에 있는 것처럼 주변의 비명과 소란이 멀게 들렸다.
후우, 하아—
오로지 자신의 호흡만이 선명했다. 시끄러울 정도로.
하아, 하아, 하아—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는 단 한 순간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너무 맑아 거울 같은 눈동자에 은빛 칼날이 선명하게 비쳤다.
“안돼—!”
유모가 피를 토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칼리오페를 보호하고자 몸을 날렸으나 발돋움하는 순간에조차 이미 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모의 눈에 저 흉측하고 무자비한 칼날에 칼리오페의 작은 몸이 꿰뚫리는 게 선명하게 그려졌다.
우당탕탕!
유모는 대리석 바닥을 구르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칼리오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작은 아가씨가 무사하기를, 소중한 아가씨가 다치지 않기를.
‘제발…….’
그 순간.
채앵—!
“으윽……!”
거대한 무언가가 시야를 한가득 뒤덮었다.
사하르네 부인의 손에서 떨어진 칼날이 공회전을 반복하며 멀리 날아갔다.
검은 그림자가 스윽 움직였다.
그제야 유모의 눈에 어떻게 된 일인지 오롯이 들어왔다.
단련된 몸을 지닌 기사가 한 손으로 칼리오페를 안아 든 채 검을 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 끝은 사하르네 부인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하르네 부인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기사는 보이지도 않는 건지,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칼리오페만 노려보고 있었다. 확장된 동공이 심연의 늪같이 질척였다. 그녀는 현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들고 있던 칼이 멀리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쳐냈다.
보통이라면 손목이 시큰거려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텐데 그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사하르네 부인이 다시 품 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기사가 움직였다.
“안 돼!”
칼리오페가 날카롭게 외쳤다.
기사의 몸이 일순 경직되었다. 그는 사하르네 부인을 제압하는 것보다 품 안에 있는 어린 아가씨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판단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훌쩍 뛰는 것만으로도 사하르네 부인과 그들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다.
그러나 사하르네 부인이 공격한 것은 칼리오페가 아니었다.
푸욱!
살과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붉은 핏방울이 후두둑 튀어 올랐다. 압력에 핏줄기가 분수처럼 허공에 울컥 솟았다가 곧 힘을 잃고는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은 여전히 많았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얼굴에 튄 핏방울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뜨거울 리 없는데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커헉……. 킥, 킥킥…….”
사하르네 부인이 웃는 건지 신음하는 건지 모를 소리를 냈다. 그녀의 입꼬리는 기묘할 정도로 바짝 올라가 있었으나 얼굴이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것으로 일그러져 기괴해 보였다. 그녀가 소리를 낼 때마다 목에 난 상처에서 피가 푸슉푸슉 새어 나왔다.
“칼……리오페, 루스, 티……. 커흡……!”
쿨럭!
사하르네 부인의 입가에서 피거품이 끌어 올랐다.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기사가 몸을 움직였다. 그는 사하르네 부인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리고 양 손으로 칼리오페를 안아 들었다.
칼리오페는 더 이상 사하르네 부인을 볼 수 없었다. 대신 기사의 단단한 가슴팍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머릿속에서 먼 옛날에 들었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기억보다 조금 더 높고, 어리고 덜 딱딱했지만 분명 같은 목소리였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기사를 올려다봤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비죽비죽한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실루엣과 겹쳤다.
대답 없이 멍한 눈을 한 칼리오페를 보며 기사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희고 깨끗한 소녀의 얼굴에 붉은 낙화처럼 튄 핏방울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고 손수건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 실책이다.’
아가씨를 보호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면 피가 튄다는 걸 깨달았을 때 재빨리 물러서야 했다. 아니, 습격자가 자해할 거라고 깨달았을 때 칼리오페의 시야를 차단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를 보호해본 적이 없었다.
피가 튀는 것을 알고도 상대를 경계하기 위해 몸만 긴장시켰고, 그 결과 이 가녀린 소녀에게 정신적인 충격만 안겨주었다.
‘지키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나 훈련을 거듭했는데도 여전히 자신은 부족했다.
그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맑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내리떴던 기사의 눈이 저절로 소녀의 얼굴로 향했다.
“기사님.”
품 안에 안긴 작은 아가씨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얼룩처럼 남은 핏방울조차 자신을 퇴색시키지 못한다는 듯이, 더럽히지 못한다는 듯이.
아주 맑은 웃음이었다.
가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아가씨!”
유모가 칼리오페를 부르며 그들에게로 뛰어왔다.
기사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확 현실감이 일었다.
유모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리오페를 안아 들려고 했다.
기사는 이 상태인 유모에게 아가씨를 넘겨도 되는 건지 고민했다. 유모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져 넘겨주고 싶지만 혹시 아가씨를 떨어트리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모! 피 나잖아!”
그때 칼리오페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 작은 손으로 기사의 어깨를 탁탁 쳤다.
“내려주세요.”
아, 내려놓으면 되는구나.
기사는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 내려놓아도 될까.’
왠지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칼리오페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봐서 기사는 서둘러, 하지만 조심스럽게 칼리오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칼리오페가 그의 품에서 떨어진 순간 어째서인지 가슴에 허전하고 찬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몸이 더 가벼워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염려가 우습게도 칼리오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두 발로 단단히 섰다.
“세상에, 빨리 소독해야겠어.”
칼리오페가 유모의 다리를 살피며 말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침착해 보였던 소녀의 얼굴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유모는 찢어진 치맛자락을 감추며 칼리오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보기에만 심하지 별거 아니에요. 그것보다 아가씨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칼리오페는 유모를 마주 끌어안으며 푹 안겼다. 익숙한 냄새와 온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칼리오페는 그제야 자신이 꽤 놀란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유모의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사하르네 부인의 시신을 보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느껴졌다.
‘유모가 더 놀랐을 텐데.’
회귀 전 칼리오페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도 많이 보고 겪었다.
목에 칼을 박아 자살한 시체는…… 온건한 편이었다.
그래서 칼리오페는 자신이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아.’
자신은 정말로 괜찮다. 조금 놀란 것뿐이다. 설마 사하르네 부인이 자살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할 일을…… 할 일을 생각하자.’
일단 들어가서 유모를 치료하라고 명하고 그동안 자신은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소식을 들은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오실 거다. 최대한 깔끔한 모습으로 맞아드려야 그나마 안심하실 테다.
‘그 후에는…….’
칼리오페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기사는 여전히 가제보 위에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가제보는 참극이 일어난 곳답지 않게 정결하고 우아해 보였다.
그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 역시.
“아가씨.”
유모가 걱정스레 재촉했다.
칼리오페가 사하르네 부인의 시체가 있는 곳을 뒤돌아보는 게 좋은 의미로 느껴지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기사는 작은 소녀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눈을 뗐다.
고개를 돌리니 여자의 시신이 보였다.
목에서 흘러내린 피로 새하얀 바닥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그 위에 누워 있는 여자는 눈도 감지 않은 채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말라붙은 핏방울에서 기사는 무심코 칼리오페의 얼굴을 떠올렸다. 똑같이 핏방울이 튀어 있는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쪽은 이렇게 역하고 한쪽은 그 얼룩으로 인해 깨끗함이 돋보이다니.
‘괜찮으실까.’
여자가 보란 듯이 자살한 것은 뻔했다.
전후 사정은 잘 모르지만 죽어서라도 칼리오페의 발목을 잡고 싶었던 거다.
칼리오페를 공격한 것부터가 자포자기했다는 뜻이었다. 칼리오페가 다치거나 죽으면 이 여자 역시 사회적으로 회생할 수 없다.
아니, 사회적 회생이 문제가 아니다.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그녀는 칼리오페를 공격했다.
‘죽일 생각이었지.’
기사는 그때 느꼈던 선명한 살의를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게 실패로 돌아가자 여자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칼리오페에게 상처를 남겼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끔찍한 경험을 남겨서, 지워지지 않은 상흔처럼 이날을 상기하라고.
평범한 사람도 이런 일을 눈앞에서 겪으면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칼리오페는 귀족 아가씨로 루스티첼 가의 금지옥엽인 만큼 소중히 자라왔다.
‘내가 제대로 지켰더라면…….’
기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후회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해봤자 소용없다. 어차피 미숙한 자신로서는 아가씨를 지킬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우연히 기회가 주어진 지금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그게 아가씨에게도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이 사무치는지.
기사는 생각을 접었다.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어쨌든 루스티첼 저 내부에서 사람, 그것도 귀족이 죽었으니 수사가 들어올 것이다. 목격자가 워낙 많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책 잡힐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기사는 핏자국을 지우려 하는 고용인들에게 현장 보존을 명했다.
‘……설마 오자마자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황실 기사단장을 역임한 무도(武道)의 명문 루스티첼 백작가. 가주를 비롯해 후계들은 황실에 봉사하고 있지만 당연히 가문에도 기사가 있다. 그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루스티첼 가의 영지를 지키던 기사였다. 그러다 능력을 인정받아 이번에 제도로 차출되었다.
‘그런데 이 저택이 이상한 걸까.’
여자가 칼리오페를 공격하던 순간, 그는 기묘한 무언가를 느꼈다. 미약하지만 여자가 내뿜던 살의만큼이나 분명한 것이었다.
갑자기 공기의 밀도가 확 높아지는 느낌.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 기사는 그게 단순한 공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에테르…….’
분명 에테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해.’
이곳이 스티그마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에테르는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다.
칼리오페의 주위에.
‘……제도까지 오느라 피로가 쌓였나.’
갑자기 아가씨를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 긴장해서 뭔가 잘못 감지한 게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오러를 썼다면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오러는 에테르를 기반으로 하니 곁에 에테르가 있으면 당연히 더 증폭된다. 하지만 단련한 적도 없는 부인을 상대하는 데엔 오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아까부터 칼리오페의 투명한 눈동자가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실수했으니 아마 가까이서 뵐 일도 없을 것이다.
‘……상관 없어.’
영지의 기사들은 수련기사든 정기사든 상관없이 모두 칼리오페 아가씨를 직접 모시는 것을 꿈꾼다. 고결한 레이디를 모시는 건 모든 기사의 긍지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칼리오페 아가씨는 모든 이상적인 레이디를 뛰어넘은 존재였다.
직접 본 횟수는 손에 꼽고 그마저도 멀리서 어렴풋이 본 게 다였지만 그들도 귀가 있다. 칼리오페에 관한 이야기는 제국 전역에 퍼져 있을 정도니 루스티첼 가의 영지에선 오죽하겠는가.
아직 어린 나이인 그가 타운 하우스로 차출되었을 때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 역시 기뻐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한 이유는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소드 마스터, 명예로운 백룡 기사단의 기사단장, 열두 검 중 하나인 루스티첼 백작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생각에 기뻤으니까.
물론 다른 기사들도 영주이자 모든 기사들의 선망의 대상 중 하나인 루스티첼 백작의 눈에 들 기회를 싫어할 리 없다.
하지만 그들과 자신은 우선순위가 달랐다.
그러니 아가씨를 모시지 못하게 된다하더라도 자신이 크게 상심할 건 없다.
분명 그럴 것이다.
* * *
칼리오페는 네 마리의 울망울망한 강아지 사람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가족들이 이러는 게 벌써 세 시간째였다. 사실 가족들이 그녀에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용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가족들은 칼리오페에게 따로 사건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끌어안으며 몇 번이고 무사한지 확인하며 안심했다. 또 어떻게든 자신의 온기를 칼리오페에게 나눠주려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으로 모자라 그 직후 바로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목격했다. 이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으면 이상하다. 그런데 심지어 죽은 사람이 칼리오페의 이름을 부르며 자살했다.
혹시라도 칼리오페가 사하르네 부인의 자살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할까 봐 가족들은 모두 전전긍긍했다.
칼리오페는 그런 가족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저는 루스티첼인걸요.”
“그래, 우리 딸은 루스티첼이지.”
칼리오페는 다시 자신을 꼬옥 끌어안는 가족들을 다독였다.
과거와 달리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 중 하나인 사하르네 부인이 죽었다. 어머니 대신 사하르네 부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이기적이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특히 사하르네 부인이 원하는 게 자신이 평생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것이라면 더더욱.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아.’
칼리오페는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뇌리에서 피를 쏟아내던 사하르네 부인의 잔상을 몰아냈다. 사하르네 부인에 관한 것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심력을 쏟고 싶었다.
“저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요.”
“만나고 싶은 사람?”
“아까 절 구해주신 기사님이요.”
* * *
방안에 들어서던 기사는 멈칫했다.
루스티첼 백작의 부름을 받았기에 이렇게 일가 모두가 모여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당황을 감추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오게. 딸아이가 자네를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그 말에 기사는 성큼성큼 칼리오페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기사를 내려다봤다.
“죄송합니다.”
“네?”
“아가씨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이 죄는…….”
“아니, 아니.”
칼리오페는 침통한 어조로 말하는 기사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의 팔을 잡았다.
따스한 감촉에 기사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자신을 일으키는 부드러운 손길에 따라 몸을 세웠다.
“저는 감사 인사를 하려고 부른 거예요.”
“예?”
그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무뚝뚝한 얼굴에 놀람이 가득해졌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보고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몸을 바로 한 채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정말 감사해요, 경.”
“…….”
기사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사 인사는 아까 전에 받은 것만으로도 과분하다. 자신은 이렇게 인사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성격에 불만을 품은 적이 없는데 지금은 조금 답답해졌다. 칼리오페에게 무언가 말을 해줄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부디 제게 은인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도미닉 델탄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말을 생각할 수 없었다.
“반가워요, 도미닉 경.”
다시 만나서.
과거의 연이 현재에 이어지는 순간은 언제나 벅차다.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이 도미닉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그가 빤히 쳐다봐서 칼리오페는 아차, 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 기사님, 기사님 하고 불렀는데 습관 때문에 실수했다.
기분이 나빴을까? 칼리오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미닉 경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영광입니다.”
도미닉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 보였다. 별로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지만 칼리오페는 알 수 있었다.
‘다행이다.’
“사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하명하십시오, 레이디.”
칼리오페는 다시금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는 도미닉을 곤란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래,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고지식하고, 바르고, 결코 부러지지 않는 나의 검.
그땐 당신이 나를 선택했지.
모든 것을 잃은 나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켰어.
이번엔 내가 당신을 선택할게.
“부디 저의 검이 되어주시겠어요?”
* * *
“내 딸을 구해줘서 고맙네, 도미닉 경. 제도로 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겨 놀랐겠군.”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도미닉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를 구한 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물며 제대로 지킨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인사받을 만 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해하듯 말하면서도 도미닉은 자기 자신이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칼리오페 앞에서 해야 했던 말이다.
그런데 칼리오페가 고맙다고 말해주는 것이 기뻐서, 그 두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것이 이상하게 목소리를 앗아가서.
무뚝뚝한 제 성격을 핑계로 입을 다물었다.
“저는 미숙합니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니 다행이군.”
도미닉이 고개를 숙였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런 그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자네가 있기에 리페가 다치지 않은 것도 사실이야. 그 점에 있어서는 좀 더 어깨를 펴도 괜찮네.”
그 말을 듣고도 도미닉의 기가 살진 않았다. 그럴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칼리오페를 완벽하게 지키지 못했다며 자책하지도 않았을 거다.
“도미닉.”
“예.”
“자네가 리페의 호위 기사가 되는 걸 허락한 것은 순전히 리페가 원했기 때문이네.”
루스티첼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까이에 둘 사람은 마음이 맞는 게 중요하니까.” 하고 가볍게 덧붙였다.
도미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실력으로 차출되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네의 실력이 정말로 형편없었다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걸세.”
그 말에 도미닉은 고개를 들어 루스티첼 백작을 바라봤다.
“자네가 미숙한 것은 검술 실력보다는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야. 그건 자네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지.”
루스티첼 백작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서 능숙해지게.”
탁탁.
백작의 두꺼운 손이 도미닉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려주었다.
도미닉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의 어깨를 쥔 루스티첼 백작의 손에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아플 정도로 꽈아악 눌렀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루스티첼 백작은 여전히 자신을 격려하는 것처럼 사람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왜 ‘어서 능숙해지지 못하면 내가 널 죽일 거다.’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을까.
* * *
“난 마음에 안 들어.”
루스티첼 백작과 독대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들은 소리다. 도미닉은 루스티첼 백작이 누른 왼쪽 어깨가 얼얼한 것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작은 도련님이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도련님.”
“우리 리페는 말이야. 예쁘고, 착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똑똑하고…… 하여간 완벽한 애란 말이야.”
동생 바보의 난데없는 동생 자랑에도 도미닉은 묵묵하게 귀를 기울였다.
“인간이 아니야! 천사라고, 천사! 알겠어?”
로베르트는 아예 삿대질까지 하며 외쳤다. 도미닉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 리가 없잖아! 간단히 대답하지 마!”
알겠다고 대답했는데도 뭐가 불만인지 로베르트가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그런 천사의 호위는 말이야. 좀 더…… 응? 천사랑 어울리고, 천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예를 들면 나 같…….”
거기까지 말한 로베르트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더니 또 도미닉을 삿대질하며 버럭 성을 냈다.
“너,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페를 지켜!”
“그럴 생각입니다.”
도미닉의 진중한 대답에 로베르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용건이 끝난 것 같아서 도미닉은 짧게 묵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등 뒤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래도…… 리페를 구해준 건 고마워.”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련된 도미닉의 청각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의외의 말에 도미닉이 뒤를 돌아보자 새빨갛게 달아오른 로베르트가 소리쳤다.
“그렇다고 네가 마음에 든 건 아니니까! 앞으로 내 동생한테 잘 해! 그리고 내 동생 넘보면 내가 너 죽인다!”
문득 도미닉은 로베르트의 산호빛 눈동자가 칼리오페의 맑은 눈과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다.
칼리오페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다. 자신과는 다섯 살이나 차이 난다. 다섯 살 차이 나는 혼인이야 잘 맞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이야기다.
자신은 어른이고 칼리오페는 아직 어린 소녀.
넘볼 리가 있겠는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을 보니 소문으로만 듣던 루스티첼 일가의 팔불출이 이건가 싶었다.
왠지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도미닉은 밖으로 나오자 마자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철회했다.
채앵—!
살기를 감지한 도미닉이 검을 빼드는 순간 검신이 부딪쳤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으면 팔이 잘렸을 것이다. 무게가 실린 묵직한 검에 손아귀가 아릿했다.
이런 공격을 한 사람은 한 점의 동요도 없이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루시우스 도련님…….”
도미닉이 부른 것과 동시에 루시우스가 검날을 미끄러트렸다.
단숨에 힘겨루기식의 대치 상태가 깨지고 날카로운 공격이 쇄도해왔다.
엄청난 속도로 정확하게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었다. 과연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천재의 길을 걸어온 자다웠다. 정말로 도미닉에게 치명상을 입히겠다는 듯 손속에 가감이 없다.
챙, 채챙!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수십 합이 오갔다.
루시우스는 훌쩍 거리를 벌린 후 검 끝을 내렸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군.”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도미닉은 눈썹을 까딱했다.
방금 그 쏟아지는 공격이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뿐이었단 말인가. 엄청 감정이 실려 보였는데.
물론 표정은 한없이 냉정해 보였지만 맞부딪친 검에선 감정이 느껴졌다.
‘루시우스 도련님은 침착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군.’
얼음 속에 불을 가둬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 동생에게 나 같은 오빠가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루시우스가 빙글 뒤를 돌며 말했다.
“그리고 내 동생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
‘……무슨 의미지?’
그게 아가씨를 호위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설마 선택받았다고 우쭐해하지 말라는 건가.’
“미안해요.”
곁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도미닉이 고개를 돌렸다.
“마님.”
예를 갖추는 그를 보며 루스티첼 부인이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우리 아이들이 워낙 막내를 아껴서. 이해해줘요.”
“아닙니다.”
도미닉이 고개를 숙였다.
딱히 안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악의 없이 동생을 아껴서 그랬다는 걸 아니까.
“내 딸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가끔 어디로 튈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면이 있어요.”
딸아이를 떠올리는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은 애정으로 가득했다.
“앞으로 우리 리페를 잘 부탁해요.”
그녀가 도미닉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미닉은 황송한 마음으로 그녀의 손등에 키스하려고 했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그대로 손을 흔들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악수를 마쳤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 말 꼭 믿을게요.”
꽈아악.
도미닉의 손을 쥐어짜듯이 루스티첼 부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지만 웃는 얼굴만은 지상에 강림한 여신처럼 선량하고 아름다웠다.
“…….”
도미닉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분명 여신 같으신 마님인데 왜 뒤에 악귀와 악령이 보이는 걸까.
* * *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구려, 루스티첼 영애.”
“반갑군, 영애.”
칼리오페는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두 사람을 보고 생긋 웃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얼마나 두 분을 뵙고 싶었는지 몰라요.”
칼리오페는 고목 나무처럼, 지긋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인을 바라봤다.
“오렌의 대신관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는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관이라는 직업과 달리 다부진 몸을 한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로한의 대신관님.”
오늘 칼리오페는 오렌과 로한의 대신관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최근 그녀는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이라면 단연 사하르네 백작이 루스티첼 저에 찾아왔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칼리오페를 만나볼 수도 없었다. 부모님 손에서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이 베이비 살롱 용도로 지었던 건물 문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 외 이래저래 잡다한 것들도 받아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지난 삶의 교훈이었다.
‘아직 공사 중이니까 베이비 살롱을 다시 오픈할 날은 좀 더 미뤄지겠네.’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스티그마를 가게로 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사하르네 부인이 그렇게…… 가버릴 줄이야.’
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이 죽은 것에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때 봤던 문장에 대해 캐물을 생각이었는데…….’
전생의 호르세안이 목숨을 걸고 찾아낸, 가문을 몰살시킨 배후의 단서. 그와 똑같은 것을 사하르네 부인의 집무실 서랍에서 목격했었다.
사하르네 부인이 찾아와 애원할 때 대화를 끌고 가던 칼리오페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문장에 관해 다가갈 수 있던 길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하르네 부인이 고용인의 출입까지 통제하며 집무실을 관리했던 걸 보면 백작은 모를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부모님을 통해 돌려서 떠봤지만—부모님은 의아해하면서도 묻지 않고 칼리오페의 말을 백작에게 전달해주셨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하르네 부인의 자살 이후로 스티그마를 팔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 스티그마를 쓰고 싶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이었다.
재능 있는 뛰어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중이떠중이도 있었다. 또 칼리오페와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보려는 귀족들까지.
그야말로 사람에 치이는 삶이었다. 칼리오페의 계획대로이긴 했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드물게도 칼리오페가 먼저 초대장을 보내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백차로 준비했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이 자리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단연 칼리오페였다.
‘하지만 만만찮은 상대야.’
칼리오페보다 몇 배나 오래 살아온 오렌의 대신관, 그리고 겉과 속이 같다고들 하지만 그만큼 까다로운 로한의 대신관.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은가?”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신성한 땅을 놓고 피를 흘리다니……. 요즘 젊은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끌끌 혀를 차는 오렌의 대신관을 보고 칼리오페가 수심 어린 미소 지었다.
“저 역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제가 가진 땅이 스티그마가 되었다고 들었을 때만 해도…….”
속눈썹을 살짝 아래로 내리까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처연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그렇겠지.”
비스 신전의 경우가 특이한 거지, 보통 신관들은 기본적으로 온정적인 사람들이었다. 두 대신관은 열세 살 소녀가 겪은 일에 공감하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다만 거대한 종교단체를 통솔하는 수장인만큼 다른 심성 좋은 귀부인들처럼 칼리오페에게 홀랑 온 마음을 내어주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칼리오페를 경계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칼리오페가 스티그마를 개방하는 조건에 성직자를 모두 제외시켰다는 거다. 이 때문에 이들은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됐다.
칼리오페와 친분을 쌓아 그 조건을 바꾸고 싶어 하면서도, 그런 결정을 한 그녀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냥 기쁜 마음뿐이었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스티그마는 굉장한 거라고 들었거든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잘 알고 계시구려. 성직자가 스티그마에서 수련을 하면 큰 신성력을 얻어 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되지.”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니.”
성직자에게도 스티그마를 개방하라는 밑밥을 까는 것이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상대가 미끼를 물었다. 미끼인 줄 모르고 있겠지만.
“네에, 저도 어렸을 때부터 저를 보살펴 주시는 신께 감사드리며 신전의 가르침을 신실히 따랐답니다.”
거짓말이다.
회귀한 후로 칼리오페는 신전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데.”
칼리오페가 로한 대신관의 말을 막았다. 산호빛 눈동자가 슬픔으로 녹녹해져 있어 차마 무례라 꾸짖을 수도 없었다.
“비스 신전에서 제 땅이 스티그마가 될 걸 미리 알고 저를…….”
칼리오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비스의 대신관님을 만나 뵈어서 정말 기쁘고 영광스러웠는데…….”
비스의 대신관이 속가를 빌미로 칼리오페를 협박한 데다가 스티그마가 제 것마냥 신전을 세우겠다 선언한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저는 신실한 신앙으로 신을 따르는 신자였지만…….”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칼리오페는 울음을 참아냈다. 그리고는 두 대신관을 돌아보며 최대한 밝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있어도 신을 믿고 따라야 하겠죠?”
차라리 우는 게 나을 것처럼 안타까운 미소였다.
두 대신관은 차마 가련한 소녀에게 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신관인 그들이 생각하기에 어떤 고난이 있어도 신을 믿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믿음을 빌미로 스티그마를 신관들에게도 개방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만큼 양심에 찔려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이 없는 두 사람을 보며 칼리오페는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여전히 신을 믿지만, 예전처럼 사람을 아무 의심 없이 믿을 순 없게 됐어요.”
즉, 신관은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물론 영애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비스의 대신관님은 사하르네 부인을 시켜 저를 배신하라고 했죠. 앞으론 대의를 들먹이며 뒤로는 부당하게 제 재산을 빼앗으라고.”
그 말에 뭐라 말을 해보려던 로한의 대신관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실패로 돌아가자 사하르네 부인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제 이름을 부르고 웃으며…….”
칼리오페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고 몸이 잘게 떨렸다.
“영애!”
“애써 떠올리실 것 없소. 다 지난 일이오.”
대신관들이 깜짝 놀라 칼리오페를 다독였다.
칼리오페는 그들이 건네주는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리곤 찻잔을 쥐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것도 우습지만……. 제 땅이 스티그마가 되었다고 들었을 땐 신관, 마법사, 기사 가리지 않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분들께 모두 개방할 생각이었답니다.”
그 말에 두 대산관의 눈매가 움찔했다. 그들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자격을 갖춘 모든 이에게 스티그마를 개방하겠노라 선언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신관만을 제외했다.
그 선언 직전에 비스의 신전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추측을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하물며 비스의 신전은 전부터 유독 칼리오페를 배척했다. 속가에 관한 것도 그렇고, 파문당한 티할렌 신관도 그렇고.
속가에 대해서는 오렌과 로한 역시 달갑지 않게 생각하나 비스와 달리 전면적으로 나서서 비난하진 않았다.
칼리오페가 신관을 제외한 원인이 모두 비스 신전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어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두 대신관을 응시했다. 호소력 짙은 산호빛 눈동자가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분을 직접 뵈니 좋은 분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대신관들의 입가가 움찔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비스와 오렌, 로한 이 세 신전은 결속이 굉장히 강하다고 들었어요.”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듯이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렌과 로한의 대신관은 깨달았다.
지금이 바로 선택의 순간임을.
“각 신전은 어느 정도 긴밀한 관계를 쌓고 있습니다. 모두 같이 신을 따르는 자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지요.”
“각자 모시는 신은 달라도 신성력을 통해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은 같소.”
두 대신관의 말에 칼리오페는 묵묵히 차를 마셨다.
제국의 신전은 모두 다신교였다.
유일신교라면 서로 신앙을 놓고 전쟁도 불사하겠으나 비스의 성서에도 로한이 나오고 로한의 성서에도 오렌이 나온다. 신들은 사이가 좋았던 때도 있고 나빴던 때도 있다. 서로 배척하기도 했으며 서로 돕기도 했다.
딱히 그 밑의 신전들이 다른 신전이라면 치를 떨며 원수 취급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전들은 경쟁하면서도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일종의 담합을 했달까.’
칼리오페의 소서에 찻잔을 놓으며 눈을 내리떴다.
회귀 전, 갑자기 소금 가격이 급등해 사람들의 생활이 힘들어졌던 때가 있다.
‘생산량이 줄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각 상인 및 상회는 서로 경쟁자다. 그런데 왜 모두 함께 가격을 올렸을까? 혼자 소금 가격을 올리지 않는다면 소금으로 고객을 유인해 다른 물건까지 잘 팔았을 텐데.
답은 간단하다. 그게 그들에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상인연합은 사람들의 생활을 인질로 놓고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장신구 판매권.
그 전까지는 전문 보석상에서만 장신구류를 판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일반 상인들도 장신구를 팔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신전에서 하는 짓도 마찬가지야.’
말로는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 하는 행동은 그런 이익 단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주기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사회에 기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전은 신성력을 독과점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많은 이익을 얻어내고 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이 비스의 대신관에게 조심스러웠지.’
비스의 대신관에게 밉보이면 오렌과 로한에서도 그다지 환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칼리오페를 도와 비스의 대신관을 비난했던 것은 그들이 용기 있어서다. 그가 선을 넘은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용기. 그리고 서모나와 같은 힘 있는 귀족들이 먼저 척을 졌기에 거기에 편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귀족 다수와 척을 지는 건 신전 쪽에도 타격이 있을 테니까.’
칼리오페는 시선을 주고 받는 두 대신관을 바라봤다.
‘이들은 비스의 대신관처럼 아주 나쁜 자들이 아니야.’
조금 전에도 험한 일을 당한 칼리오페에게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는가. 그런가 하면 동시에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모습도 보였다. 거룩한 신의 뜻을 좇는다곤 하지만 결국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칼리오페는 이들이 할 결정을 알았다.
어차피 세 신전은 서로 필요에 따라 뭉쳤을 뿐이다.
‘이제 그 필요가 다했으니.’
칼리오페는 빈 찻잔에 손수 차를 따랐다.
‘썩은 가지를 잘라내겠지.’
긴밀한 관계 어쩌고 하는 것은 냉큼 ‘비스와 우린 아무 관계도 없다.’ 라고 하기엔 너무 속보이니 하는 말일 뿐이다.
칼리오페는 티룸 한쪽에 있는 괘종시계를 바라봤다. 요즘 워낙 바쁘다 보니 이 뒤에도 약속이 있다.
‘시간 절약을 위해 우선 잔가지를 먼저 쳐줄까.’
“그렇게 서로 긴밀하시다고 하니 역시 알고 계셨겠군요.”
“어떤 것을 말입니까?”
“제 땅이 스티그마가 될 것을요.”
칼리오페의 말에 오렌과 로한의 대신관은 얼굴을 굳혔다.
당연히 몰랐다.
알았으면 그들도 먼저 칼리오페에게 접선을 시도했을 거다. 비스의 대신관처럼 더러운 수를 써서 빼앗으려 하진 않았겠지만.
안 그래도 이 일로 비스의 대신관과 언쟁을 했다.
어떻게 스티그마에 대한 정보를 숨길 수 있냐는 말에 비스의 대신관은 뻔뻔하게도 되물었다.
[그럼 당신네들이 먼저 스티그마가 될 곳을 찾았다면 다른 신전에 알렸을 건가요? 정말?]
기가 막히는 반응이었다.
지금 비스의 대신관이 저지른 일 때문에 신전 전체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다른 신전으로서는 가만히 있다가 폭격을 맞은 건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다니.
게다가 몇 년간 황제가 묘하게 비스 신전의 편만 드는 바람에 오렌과 로한은 조금씩 불만이 쌓이던 차였다.
비스 대신관의 그 뺀질한 낯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로한의 대신관은 열이 다 뻗쳤다.
“몰랐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칼리오페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대신관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관계를 먼저 깨버린 사람은 비스의 대신관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비스가 경쟁 구도에서 탈락한다면 자신들에겐 더 이득이다.
비록 여론이 안 좋아지긴 했지만 비스에게 가던 기부가 오렌과 로한 쪽으로 돌려져 재정적으로는 오히려 풍족해졌다. 여기서 비스의 손을 놓으면 그들을 향한 여론도 좋아질 것이다.
“사실 이번 일이 있고 나서 나도 여러 생각을 했소.”
오렌의 대신관이 주름진 입가를 달싹였다.
“비스 신전은 우리의 오랜 벗이지. 하나 최근 움직임을 보니 비스 신전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모든 신전의 연원에서 벗어났구려.”
“그간 세 신전이 힘을 합쳐 주어진 소명을 다해왔지만, 비스 신전은 변질되었습니다. 더 이상 비스 신전과 뜻을 함께할 수 없습니다.”
“대신관님…….”
칼리오페는 일렁이는 눈으로 두 대신관을 차례로 응시했다.
‘이걸로 나를 생각해서 비스 신전과 척을 진 사람들에게 해가 미치지 않겠어.’
다행이다.
결과가 빤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조금 긴장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 걸린 일이니.’
이제 자신의 생일 파티 때를 비롯해 비스 대신관에게 밉보인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피해가 없을 것이다. 비스 신전에서는 더 이상 해당 가문에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겠지만 오렌과 로한에서 해줄 테니까.
‘자, 그럼.’
“비스 신전과 달리 오렌과 로한에는 대의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칼리오페는 차분하게 운을 뗐다.
‘사냥을 시작해볼까.’
* * *
비스 신전 내부는 어수선했다.
그들의 수장인 대신관이 어린 소녀를 겁박했다는 것은 윗선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 평신관들에게 꽤 충격이었다.
항상 존경과 공경을 받던 신관들이었지만 최근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했다.
칼리오페는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레이디였다. 그냥 잘 모르는 소녀에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기가 막힐 판이다. 하물며 칼리오페는 어린아이들에겐 같이 성장해온 선망의 대상이었고, 어른들에겐 매년 커가는 걸 지켜본 조카 같은 아이였다.
당연히 눈길은 서릿발 같았고 신전 사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비스의 신관들 중에서도 칼리오페의 사진집을 모으는 사람이 있는 만큼 자신이 따르고 있는 대신관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꼈다.
“하다못해 대신관을 교체해야 하지 않아?”
“이런 사건을 일으켰으면 보통 파면당해야 정상이잖아.”
“높으신 분들은 뭘 해도 안전하시다 이건가.”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신전에 들어오는 기부까지 반절 이하로 확 줄어들었다.
심지어 절감 속도는 계속 가속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달만 지나면 들어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 될 것이다.
이건 실질적으로 신전에 큰 타격을 입혔다.
“뭐야?! 기부가 이렇게나 줄어들었다고?”
“귀족들이 배가 불렀나. 당장 다치거나 병들면 어쩌려고? 이런 식으로 단체로 뻗댄다고 해서 우리가 신성력을 써줄 것 같아?!”
“지금 기부를 멈춘 집안에는 파견 나가지 마.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어.”
“그래, 본보기를 보여줘야지. 아프고 나서 얼마를 준다고 해도 절대 치료해주지 마.”
고위 신관들은 분노해서 떠들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 단체로 기부를 끊으니 신전 운영에 직격타가 왔다.
막대한 기부로 그간 쌓아온 재보는 모두 윗선의 뒷주머니로 들어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놓기 싫어했다.
“시간 문제야. 우린 좀만 버티면 돼. 지금 이 순간은 힘들지만 어차피 사람은 병들고 아프기 마련이야.”
그 말이 옳았다.
하지만.
“저어……. 방금 보고가 올라왔는데……. 오렌에서 로아힌 가에 신관을 보냈다고 합니다.”
“뭐?!”
“우리에게 기부를 멈추고 오렌과 로한 신전으로 간 사람들 모두 그쪽에서 치료해주는 것 같습니다.”
“무, 뭐라고?!”
“무슨…….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우리끼리 맺은 조약이 있는데!”
막강한 권력을 위해 세 신전은 담합해왔다. 기존의 권력자인 귀족들이 자신들에게는 고개를 숙이도록, 그리고 더 많은 기부금을 내도록.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로한과 오렌에 연락을 넣어!”
하지만 오렌과 로한에서는 그들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가만히 돌아가던 일을 지켜본 신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긴 로브를 입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잘못 아닙니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긴 로브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먼저 다른 신전을 배신한 건 우립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황당해하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며 긴 로브는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정확히는 대신관님이죠.”
* * *
칼리오페는 마차 안에서 신문을 보다가 바깥이 소란스러워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보니 황궁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대부분이 신관들이었다.
‘며칠째지.’
칼리오페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대서특필되어 있는 기사에 따르면 오늘로 닷새째였다.
대신관을 정하는 것은 각 신전 내부의 일로 외부에서 참견할 수 없다.
하지만 단 하나 예외인 경우가 존재한다.
대신관이 사회적으로 부정을 저질렀을 때, 황제에게 대신관을 파면할 권리가 생긴다. 보통은 거기까지 안 가고 황제가 파면하기 전에 자진 사퇴하기 마련이다.
‘진짜 자의로 자진 사퇴하는지, 아니면 타의로 자진 사퇴하는지는 몰라도.’
속사정이야 어쨌든 자진 사퇴해야 그림이 좋지 않겠는가?
또 자진 사퇴하면 내부에서 다 해결한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황제가 파면을 명하면 외부에서 개입해 일을 해결한 것이 된다. 콧대 높고 자존심 센 신관들이 외부 알력이 개입하는 걸 좋아할 리가 없다.
즉, 보통이라면 이렇게 신관들이 황궁까지 찾아와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고 파면을 요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무래도 대신관에게 불만이 꽤 쌓인 모양이야.’
칼리오페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사실상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이 정도면 대신관도 알아서 물러날 법도 한데.’
신관들은 상소를 올리기 전에 먼저 대신관에게 자진 사퇴하라는 압박을 넣었을 거다. 그런데도 사퇴 선언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이 지경까지 온 거다.
‘황제는 왜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는 거지?’
상소를 올리고 신관들이 황궁 앞 광장에 모인지 벌써 5일 째다.
‘파면 결정이 내려지고도 남았을 시일인데.’
신전 내부의 일에 황제가 개입할 수 없는 게 원칙인 만큼, 이 예외적인 상황에 대해 얼씨구나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게 보통이다. 심판자의 위치에 서는 모습을 보여 황제의 권위를 살리고, 이후 비스 신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아직까지 파면 결정을 내리지 않고 묵묵부답인 건 한가지 진실을 가리킨다.
‘황제와 대신관이 긴밀한 공조 관계에 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회귀를 했고, 자신이 스티그마를 얻지 않았을 때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다.
‘비스 신전이 스티그마를 홀로 독식하는 데 분명 황제가 도움을 줬었지.’
신문을 넘기는 칼리오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황제의 성격상 대신관을 잘라낼 법도 한데…….’
회귀 전에 있었던 내전의 양상을 생각하면 확실하다.
‘아직도 잘라내지 않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겠지.’
아직 대신관을 대체할 말을 찾지 못했거나.
대신관을 버릴 수 없을 만큼 관계가 깊다거나.
후자의 경우 대신관이 황제의 약점을 쥐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황제의 목표에 대신관이 꼭 필요하거나.
약점을 쥐고 있다면 그 약점이 과연 뭘까?
황제의 목표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 목표란 뭘까?
‘흠…….’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기며 습관적으로 신문 기사를 훑었다.
[작년도 천사의 탄생 구합니다!]
[작년도 천사의 탄생 원가 10배로 삽니다! 가격 협상 가능.]
“…….”
칼리오페는 못 본 척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천사의 탄생 시리즈를 구한다고 광고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작년판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발매일 직후부터 신문에 이런 광고가 실렸는데 매일매일 빠지지 않는다.
‘물량은 예년보다 더 많이 뽑았다고 들었는데…….’
포토북을 산 사람은 많은데 정작 가진 사람은 없다며 괴담 같은 소문이 떠돌았다.
‘대체 뭐지.’
그때 마차가 멈춰섰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벌써 오셨으려나.’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칼리오페는 괜히 머리카락을 한 번 만지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방문을 열려는데 칼리오페보다 더 빨리 문고리를 잡은 손이 있었다.
도미닉이었다.
그가 문고리를 돌리는 것을 보고 칼리오페가 설핏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요.”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단단한 대답에 칼리오페의 미소가 짙어졌다.
‘여전하네.’
“그럼 고마워요.”
칼리오페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던 도미닉이 문을 여는 것을 멈췄다. 칼리오페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칼리오페는 재촉하지 않았다. 몇 번 입안으로 말을 삼키던 도미닉이 물었다.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호위 기사로 임명하고 난 뒤부터 계속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설마 이런 질문일 줄은 몰랐다.
너무 당연한 답이 나와 있는 질문에 칼리오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기사님을, 도미닉 경을 믿으니까요.”
도미닉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음, 정말인데요.”
대강 둘러대는 것으로 보이나 싶어서 칼리오페가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믿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대동하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호위라고 해도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떼놓았겠지. 아니면 이동할 때만 동행하고 건물 밖에서 대기하게 한다거나.
그런 칼리오페를 또 한참 응시하던 도미닉이 작게 중얼거렸다.
“……압니다.”
칼리오페는 턱을 들어 그런 도미닉과 눈을 마주쳤다.
안다고 하지만 그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믿는지, 그가 전생에서 얼마나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었는지.
그녀가 얼마나 그에게 미안한지도.
하지만 안다고 말하는 그가 정말 아는 것 같아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그를 향한 신뢰만큼은 정말 알아주는 것 같아서—
달칵.
그때 갑자기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끼이익, 하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드러난 사람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설원에 쌓인 눈 같은 머리칼이 반짝거리고 가장 맑은 수원 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리페.”
부르는 목소리가 어딘지 달콤하게 느껴졌다.
“공자님.”
칼리오페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평소와 달리 애칭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 지난번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칼리오페의 생일날, 프네우마케투스테라와 만나고 그 후 현실로 돌아왔을 때—
[리페.]
그때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절박하고 애달팠는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몇 번이나 그에게 대답했다.
자신을 꽉 끌어안았던 품은 강인했으나 떨리는 손가락은 애처로웠다.
그때의 감각을 떠올린 칼리오페의 볼이 붉어졌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지척에서 그의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어쩐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으아, 안 돼.’
칼리오페는 더 뜨거워지는 뺨을 인식하고 서둘러 생각을 끊어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요. 제가 빨리 온 것이지요.”
보고 싶어서.
아스타레아스는 그 말을 삼키며 무해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문을 더 활짝 열며 안쪽으로 비켜섰다. 자연히 칼리오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그를 못 보게 된 순간, 아스타레아스의 청색 눈동자가 한없이 예리해졌다.
도미닉은 그 날카로운 시선에 움찔했다. 단순히 눈빛과 태도가 변한 게 문제가 아니라고, 무언가 위험하다고 기사로서 그의 본능이 경고했다.
그러나 그가 멈칫한 순간, 아스타레아스에게 내뿜어져 나왔던 그런 위험한 기색은 단번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도미닉은 자신에게 미소 짓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긴장했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초면이긴 하지만 칼리오페에게 상대가 누군지 미리 언질 받았기에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
문간에 선 채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칼리오페가 의아하게 불렀다.
“처음 보는 분이 계셔서요.”
도미닉에게서 시선을 떼고 아스타레아스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아무 유감도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산뜻함을 넘어 달콤하게까지 보이는 미소였다.
“아, 죄송해요.”
칼리오페가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소개가 먼저였는데…….”
“아니, 말씀 안 하셔도 알 것 같아요.”
아스타레아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보로 말씀하셨던 그 호위 기사죠?”
“네, 맞아요.”
칼리오페의 답에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남성이었군요.”
묘한 어조였다.
아스타레아스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고 목소리는 부드러운데 왜 그렇게 느낀 건지.
“네.”
뭔가 문제라도 있나?
칼리오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의문에도 아스타레아스는 미소만 지을 뿐이다. 그 미소는 어떤 그늘도 없고 그저 상냥하기만 했다.
칼리오페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신경을 껐다.
도미닉만 등골이 오싹해서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았다.
“나가봐도 좋아.”
선명한 푸른빛 눈동자가 도미닉을 꿰뚫듯이 바라봤다.
소년과 청년의 가운데에 있는 공자는 남자인 자신이 봐도 지극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미성숙하고 완성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고귀한 태생으로부터 비롯된 위압감인지, 아니면 태생과 관계 없이 그라는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지배력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래도 물러날 순 없지.’
칼리오페의 가족들과 달리 아스타레아스는 외부인이다. 칼리오페가 자신을 그녀의 검으로 선택한 순간부터 그의 소명은 칼리오페를 지키는 것이다.
칼리오페가 명한 것도 아닌데 외부인의 말을 듣고 그녀를 혼자 두고 나갈 순 없다.
“괜찮습니다. 이곳에 있겠습니다.”
도미닉은 고개를 숙이며 묵묵하게 말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피아노 위에 악보를 놓던 칼리오페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공자님. 도미닉 경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네, 여기에서 일어날 일을 다른 데 가서 말할 분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죠?”
도미닉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칼리오페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두 사람이 아이컨택을 주고받는 것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덧그려졌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가 도미닉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럼 뭐가 문제인지 묻는 표정에 아스타레아스는 눈매를 나른하게 휘었다.
질투가 나거든.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가끔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칼리오페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한다. 산호빛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날 정도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드라운 뺨이 잘 익은 자두처럼 새빨갛게 물들겠지.
할 말을 못 찾아서 작은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장난치지 마세요.
아니면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휙 돌리고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꿀을 들이부은 것처럼 달콤해졌다.
‘보고 싶다.’
실제로 보면 칼리오페를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사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칼리오페를 아무렇지 않게 끌어안을 수 있는 관계라면.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되풀이하며 아스타레아스는 익숙하게 심장의 고통을 감내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가 흔들림 없이 걸려 있었다. 어떤 아쉬움도, 미련도, 안타까움도 드러내지 않은 채.
‘여기서는 한 발 물러나는 게 좋겠지.’
칼리오페와 자신이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위험해진다.
‘하지만.’
유리알 같은 아스타레아스의 시선이 칼리오페 곁에 선 도미닉을 향했다.
그는 칼리오페에게 성큼 다가갔다. 도미닉보다 더 가까이.
동그란 메리 제인 구두코와 뾰족한 옥스퍼드 구두코가 거의 맞닿으려고 했다.
지척에 서서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칼리오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윤이 나는 남보랏빛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우리 둘만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흠칫했다.
내리깔린 아스타레아스의 눈에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허리를 바로 세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까지 칼리오페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아, 표정.’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무심코 생각했다.
‘끌어안고 싶다.’
자신의 품 안에 푹 가둔 채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그만을 바라보게 하고 싶다.
칼리오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그제야 평소와 같이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빨간 것은 아직도 마찬가지였지만.
‘으아, 깜짝 놀랐어.’
만약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면 칼리오페는 그가 속삭였던 왼쪽 귀를 꾹 눌렀을 것이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괜히 간지러워 칼리오페는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둘만의 시간.
어딘지 달콤하게 울리는 말이었다.
칼리오페는 다시금 왼쪽 귀가 뜨거워지려 해 어떻게든 현실의 쓴맛을 떠올렸다.
‘아, 그래 전에 공자님과 그렇게 정했었지.’
다행히 현실의 쓴맛은 객관적인 기억과 정보를 찾아냈다.
처음 함께 노래를 연습하기로 했을 때, 새어나가면 곤란하니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이지 말고 둘만 연습하자고 했다.
[굳이 사람이 필요한가요. 노래하는 데 반주자와 가수만 있으면 되지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처음에는 다소 난감하고 놀랐었다.
하지만 그가 빙벽처럼 견고하고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이서 연습하는 걸로 해요.]
[그 편이 안전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엔 어떤 사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비밀 보장을 위해 제안하고 결정한 얼굴이었다.
괜히 난감해한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부끄러워할 짓을 할 뻔했잖아.’
이성을 되찾은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경솔했어요.”
그때 아스타레아스는 ‘속가를 선보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곤란할 거다.’ 라고 말했다.
칼리오페를 염려해서 한 말이다.
오로지 칼리오페의 입장만 생각한다면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속가를 노래하고 반주한다는 게 알려져도 아무 문제가 없다. 칼리오페가 속가를 노래하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공자님은 달라.’
아스타레아스가 속가를 연주하는 게 알려지면 큰 파문이 생길 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미묘한 입지에 있는 만큼 약점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속가에 대한 귀족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지만, 몇백 년간 박혀 있던 고정관념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칼리오페의 주변 사람들은 전체 귀족에 비하면 극소수였고, 전체 제국민에 비한다면 극소수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들키면 공자님이 곤란해질 텐데, 나는…….’
자신을 염려해주었던 아스타레아스와 달리 그녀는 그의 입장을 깊게 생각해주지 않았다. 호위 기사와 함께 가도 괜찮겠냐는 전보에 별다른 말이 없기에 괜찮다고만 생각했다.
‘왜 그러지?’
아스타레아스는 입술을 깨물며 자책하는 표정을 짓는 칼리오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경솔했다니,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했던 말이 아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유치하지만, 질투를 참을 수 없어서 한 말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자책할 만한 말이지?
“죄송해요, 도미닉 경. 다른 방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아가씨.”
도미닉의 걱정스러운 부름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공자님은 제게 해를 끼칠 만한 분이 아니에요.”
칼리오페의 어조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아스타레아스는 그 자신에게 피해가 올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 그녀를 도와주고 있다.
“……아가씨께서 그러시다면야.”
도미닉은 탐탁잖았지만 아가씨 명령을 받드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가 판단하기에 아스타레아스가 위험 인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미닉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는 위험하다. 발톱을 숨긴 맹수처럼 언제 이빨을 드러내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가 칼리오페의 명을 따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칼리오페 아가씨에게만은 안전한 사람이야.’
칼리오페에게는 애완용으로 기르는 맹수라도 된 것처럼 유순하고 무해하게 굴었다. 문제는 칼리오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그 위협적인 본모습이 투명하게 보인다는 것이지만.
마치 다리에 얼굴을 부비고 애교를 떠는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맹수는 맹수인 만큼 당부는 해야겠다.
“옆방에 있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소리를 질러주세요.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도미닉의 당부에 아스타레아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왠지 치한으로 취급당한 느낌인데.’
하지만 아까 칼리오페에게 딱 붙어서 속삭이는 짓을 한 만큼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도미닉은 두 사람에게 묵례하고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방 안에는 오로지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 두 사람만이 남았다.
* * *
‘으음…….’
막상 둘만 남자 조금 어색한 기분에 칼리오페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쓸었다.
쑥스럽다.
고개를 숙인 채 반질반질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피아노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경이 온통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쏠렸다.
그가 뒤돌아서는 것.
한 발짝,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향기.
그 모든 게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온통 그에게로 뻗어 나가는 것 같다.
‘둘만 있었던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곳에서 항상 같이 노래를 연습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미소를 주고 받았다. 다른 사람 누구 한 명 없이 둘이서만.
하지만 그 익숙한 장소와 익숙한 사람이 오늘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딩—
미끄러진 칼리오페의 손가락이 건반 하나를 눌렀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절박하게 그녀를 끌어안던 손, 단단하고 뜨거웠던 품, 아릿했던 푸른 눈동자.
디리링—
힘 빠진 손가락이 건반 위를 뒹굴었다.
‘읏…….’
생생할 정도로 되살아난다.
* * *
칼리오페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사이, 아스타레아스는 미소를 지은 채 긴장한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번뜩였지만 칼리오페는 보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게 오롯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별로였다는 게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았다.
‘거슬리는 것도 치웠고.’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방문 앞에 당도하기 전부터 기척을 알아챘다.
도착했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차.
[왜 저를 선택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려던 아스타레아스는 문고리를 잡은 채 멈칫했다. 얼굴이 확연하게 굳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야 기사님을, 도미닉 경을 믿으니까요.]
칼리오페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아스타레아스는 가슴 밑바닥에서 늪처럼 진득한 것이 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흉포한 생각이 든다.
칼리오페의 눈길이 향하는 사람들을, 그녀의 신뢰가 닿는 사람들을 전부—
아스타레아스는 검고 질척하게 뻗어 나가는 생각을 억세게 잡아채 저 밑바닥으로 욱여넣었다.
다시는 새어 나오지 않도록.
적어도 칼리오페 앞에서는 새어 나오지 않도록.
달칵.
그는 문을 열었다. 칼리오페가 다른 남자를 신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다른 남자가 그 눈을 봐버리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으니까.
깜짝 놀란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 이미 시꺼멓고 질척한 것을 전부 봉인했으니 그 미소는 산뜻하고 깨끗하기만 했다.
칼리오페는 설마 아스타레아스가 도미닉과 그녀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싫어서 끼어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니 이 지금 상황이 기꺼울 수밖에.’
칼리오페가 그를 의식해 어깨를 긴장한 것이, 수줍음에 혈색을 은은히 붉힌 것이 전부 기꺼웠다.
지금 이 순간, 칼리오페의 머릿속은 다른 어떤 남자도, 어떤 사람도 없이 오직 아스타레아스만으로 가득할 테니까.
“나, 날이 참 좋죠? 이제 봄도 금방이겠어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칼리오페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게 뭐야.’
겉으론 하하 웃고 있지만 칼리오페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하필이면 날씨 이야기라니 누가 봐도 어색해서 화제가 없을 때나 꺼내는 말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미 시간도 꽤 지난 일이다. 이렇게까지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텐데.
“하르첸 경이 새로 편곡한 악보예요.”
칼리오페는 피아노 위에 놓았던 악보를 건드리며 말했다.
“그간 많이 편곡했더라구요. 연습할 곡이 많아요.”
어쩌구저쩌구. 왱알앵알.
칼리오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아스타레아스를 보지 않고 피아노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종알종알 입술을 움직였다.
‘누가 내 입 좀 멈춰 줘.’
“……래서 새끼를 낳았대요. 엄청 귀엽다고 하던데.”
하다 하다 못해 에피니의 집에 있는 암말이 새끼를 낳았다는 말까지 나왔다. 조만간 루스티첼 저의 모든 방 인테리어와 향후 리모델링 계획까지 말해버릴 것 같다.
‘제발 내 입 좀 막아줘!’
그 순간.
“……!”
칼리오페의 입술이 틀어막혔다.
크게 벌어진 입에선 조잘거리는 말소리 대신 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났다.
“걱정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보다 먼저 귓가에 닿은 건 아스타레아스의 숨결이었다.
칼리오페는 온몸을 잔뜩 굳힌 채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자신의 등 뒤에 가득 붙어온 체온이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어색하면서도 그리워서.
칼리오페는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아스타레아스 때문에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호흡조차 멈춘 순간에 오로지 심장만이 선명하게 살아 움직였다.
두근, 두근, 두근—
칼리오페는 눈을 꾹 감았다.
“소리 지를 거야?”
그가 짓궂게 물었다.
칼리오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가 흠칫했다.
‘얼굴이…….’
너무 가깝다.
그녀를 바라보는 나른한 눈매도, 길게 뻗어 음영을 만드는 속눈썹도, 그 아래 선명하게 자리 잡은 여름바다색 눈동자도, 비딱하게 걸쳐진 장난스러운 미소도.
숨김없이 다 보였다.
칼리오페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는 것도, 그것 역시 그에게 온전히 다 드러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리페.”
그가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목 뒤가 당기는 느낌에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더 가까워질 구석이 있었는지 그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아스타레아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심장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때.
쾅콰콰콰쾅—!
피아노가 벼락처럼 울었다.
주춤거리며 지탱할 것을 찾던 칼리오페의 손이 피아노 건반을 마구잡이로 눌러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풋……!”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의 순간은 끝났다.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아까와 같은 긴장감은 흐르지 않았다.
두 소년,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상쾌하고 푸른 웃음을 터트렸다.
아스타레아스는 피아노 의자를 빼 앉았다. 칼리오페 역시 그의 곁에 자리 잡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악보를 살피는 아스타레아스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뭔가 조금…….’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하나, 허전하다고 해야 하나.
칼리오페는 그게 아쉬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이런 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자신뿐인가 하고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힐끔거릴 뿐이다.
그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다정하면서도 서늘했다.
* * *
‘위험했어.’
아스타레아스는 멀끔한 얼굴로 사심이라곤 한 톨도 남아있지 눈을 한 채 생각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매끄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손가락에 남은 감촉은 딱딱하고 차가운 건반의 것이 아니라 따스하고 보드라웠던 칼리오페의 것이었다.
수줍어하는 작은 뒷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 무심코 껴안아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무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척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런 생각은 다 사라졌다.
아스타레아스는 본인이 이렇게까지 자제심이 없을 줄은 몰랐다.
아니, 오로지 칼리오페에 한해서만 자제심이 사라진다.
곡 하나가 끝나자 칼리오페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처음 맞춰봤는데도 괜찮네요. 편곡도 좋고.”
피아노에 비스듬히 기댄 채 그녀의 명랑한 얼굴을 지켜보던 아스타레아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다행이에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눈매가 가늘어졌다.
“괜찮아 보여서.”
낮게 흘러나온 말에 칼리오페가 멈칫했다. 그가 말하는 게 곡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걱정했다는 말, 진짜였거든.”
“아…….”
칼리오페는 탄식을 흘렸다.
“저는 괜찮아요.”
빙긋 웃으며 말하자 그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거짓말.
그 말이 혀끝에서 맴돌며 입천장을 톡톡 쳤다.
다른 사람에겐 숨길 수 있어도 그에게 숨길 순 없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어떤 식으로 고통을 감내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아니, 한 명 더 있겠군.’
아스타레아스는 옆 방에 있는 남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를 테지.’
길고 유려한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칼리오페를 향해 뻗어졌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나뿐이야.’
칼리오페는 자신의 손목에 닿는 따스한 감촉에 깜짝 놀랐다. 아스타레아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칼리오페는 그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 의자 위에 앉게 되었다.
긴 의자 위에 나란히 앉은 소년, 소녀가 서로를 바라봤다. 어깨가 맞닿진 않았지만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은 채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쓸었다.
차분차분 움직이는 손길이 따스해서, 눈꼬리를 내린 채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얼굴이 다정해서.
“괜찮다고 했는데요.”
칼리오페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괜히 그런 마음을 감추고 싶어 퉁명스럽게 말이 나온다.
“응, 알아요.”
아스타레아스가 담담하게 속삭였다.
“그냥 머리카락에 뭐가 묻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 머리를 사분사분 어루만진다. 결 좋은 머리칼이 그의 긴 손가락 사이사이를 매끄럽게 스쳐 지나간다.
칼리오페는 가만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머리카락엔 감각이 없다던데.
‘다 거짓말.’
감각이 없을 리가 없다.
이렇게 따스한데, 이렇게 다사로운데.
‘이렇게나.’
뜨거운데.
어찌나 뜨거운지 마음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 같다. 지워지지 않은 자국이 가슴에 남을 것 같다.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인 칼리오페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내리깐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 밑이 발긋하게 물든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눈물 없는 울음을 흘리는 동안 그녀에게 온기를 나눠주었다.
멈추지 않고.
* * *
황제는 옥좌에 앉아 턱을 괸 채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신관을 내려다 봤다.
역정을 부리고 성을 내는 것은 지난 며칠간 수차례나 했다. 황제가 하도 물건을 많이 던져서 방안을 장식하던 소품 대다수가 바뀌었을 정도였다.
침묵을 지키던 황제의 입술이 벌어지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직도 황궁 앞에 몰려 있나?”
그 말에 대신관도, 그 뒤에 서 있는 긴 로브를 입은 남자도 대답하지 못했다.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태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하.”
황제는 이 기막힌 상황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요즘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심기가 사나워지는 소식밖에 들리지 않는다.
온갖 신문에서 연일 이번 비스 신전의 대신관 파면 요구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그 기사 내용에 일주일 째 침묵을 지키는 황제에 대한 언급이 빠질 리가 없다.
각양각색의 추측이 나오고 있었고, 그중에는 비스의 대신관과 황제의 관계에 대해 어림짐작하는 기사도 있었다. 꽤 사실에 근접한 추측까지 나오고 있어 황제는 당장에라도 대신관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사실 이미 멱살을 몇 번 잡았었지만 그건 한순간 화를 식히는 데만 도움이 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황제는 이제 쓸 데 없이 힘만 빼는 일은 그만두고 싶었다. 아니, 그만두어야만 했다.
어서 이 상황을 해결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
“대신관, 지금 네 놈과 내가 뒤에서 모종의 뒷거래를 한 게 아니냐는 기사가 나돌고 있어.”
황제가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신문을 집어 앞으로 툭 던지며 말했다.
“근거 없는 루머가 아니라면서 과거에 내가 펼친 정책이 비스 신전의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까지 증거라면서 제시했지.”
그간 황제가 시행한 몇 가지 정책과 년도 별 각 신전의 교세 판도를 비교 분석해서 자료로 썼다.
“무슨 거래를 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더군.”
그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신화와 신의 권능과 이적(異蹟)에 대해서.
“아직은.”
하지만 언젠간 밝혀질 것이다.
지금 기자들은 대신관과 황제 사이에 뒷거래가 있는 게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무슨 거래를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대신관과 황제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신관 놈의 뒤까지 밟고 있겠지.’
까드득 이가 갈렸다.
오늘 대신관을 황궁에 부른 것을 보고 또 추측 기사를 써댈까 봐 대외적인 핑계까지 만들었다. 비스 신전 신관들의 상소를 보고 대신관을 직접 대질하겠노라 결정한 것이라고.
“내가 이럴까 봐……!”
팔걸이를 움켜쥔 황제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투드득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나온다.
“비스 신전에서 스티그마를 노린다는 걸 절대 들켜선 안 된다고 했거늘!”
쾅!
결국 분통을 못 이긴 황제가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날카로운 혜안을 가진 노회한 정치인도 아니고 이제 겨우 열세 살 먹은 계집애한테 들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뒤가 구린 냄새를 맡은 언론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조사하고 파고들다 보면 언젠간 비스 신전과 황제가 얽혀 있는 것을 알아낼 게 분명했다.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
비스 신전에서 대신관의 파면을 요구하고, 황제가 반응하지 않으면서 언론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실에 다가섰다.
황제는 기사를 막으려고 했지만 귀족들의 눈치가 보여 강하게 압박할 수 없었다. 워낙 크게 일어난 일이라 국무회의에서도 주요 쟁점이 이 문제일 정도였다.
시건방진 귀족들은 이때다 싶어서 황제를 공격했다.
황궁에 출입하는 귀족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파면 요구 기사가 나가지 않으면 분명 왜 안 나가냐며 따질 것이다.
무엇보다 강하게 압박하면 압박할수록 허를 찔렸다는 뜻이 된다. 그 추측 기사가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라 너무 원색적인 기사만 제한하는 식으로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면 아예 진실과 전혀 다른 기사를 내보내거나.
“언젠가 우리의 협력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겠지.”
비스 신전이 교세를 확장해 유일신교로 거듭나고, 새로운 교리가 제국을 지배해 이단을 전부 숙청할 때.
그렇게 새로 태어난 제국에 황제가 살아있는 신으로서 군림하게 될 때.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무겁고 단호한 목소리가 대신관을 향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관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대신관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문제로 폐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황제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 집안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자가 말은 항상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비스의 신관들을 잘 단속했으면 황제에게 파면해달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라 핑계 대려는 대신관에게 황제가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됐으니 이만 물러가서 수습이나 하라는 뜻이다.
대신관은 굴욕을 삼키며 황제에게 인사하고 어전을 나섰다.
“쯧.”
황제가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생각하니까 또 화가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대신관을 내치고 싶었지만 ‘샘’ 때문에 버릴 순 없었다.
“저놈이 샘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인간만 아니었어도.”
낮게 중얼거린 말에 대신관을 따라 나가던 긴 로브가 멈칫했다.
황제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제깟 게 들으면 뭐 어쩐단 말인가. 대신관에게 달려가 쪼르르 일러바쳐도 상관 없다. 어차피 샘 때문에 대신관의 여러 실수에도 유하게 넘어갔다는 것쯤은 본인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제게 불리할 때면 대신관이 먼저 샘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긴 로브는 감히 황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어전을 나갔다.
“흥.”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마음에 드는 놈이 없다.
“폐하.”
대신관과 긴 로브가 나간 지 5분이나 되었을까. 어전 문이 열리며 신관 하나가 들어왔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내 앞에 신관을 들이는 걸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 신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자 무례를 무릅쓰고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찾아왔습니다.”
근심을 덜어주겠다고?
웃기는 소리다.
로브의 문양을 보니 비스 신전의 신관이었다. 지금 황제 앞에 나타난 비스의 신관이 요구할 것은 딱 하나였다.
대신관 파면.
그건 황제의 근심을 더했으면 더했지 덜어줄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기분이 더러워진 황제가 으르렁대며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근위병을 불러 지하감옥에 신관을 처넣으라 명할 기세였다.
신관은 자세를 더더욱 낮춰 이마를 땅에 붙였다.
“간절한 자에겐 신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보이는 법이지요.”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말을 들으면 황제가 태도를 바꿀 거라는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그게 노성을 지르려던 황제가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어쨌든 손해 볼 건 없으니 들어나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래, 비스 신께서 내 근심을 풀어주고자 그대를 내게 인도했다. 이 뜻인가?”
“감히 신의 뜻을 폐하께 전할 영광을 얻었습니다.”
흠. 황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엎드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관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과연 그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신관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앉아있던 황제의 동공이 수축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방만하게 기댔던 자세를 바로 했다.
과연 신관의 말은 황제의 근심을 덜고도 남았다.
“저도 샘을 다룰 수 있습니다.”
* * *
[비스의 대신관 파면 결정!]
[397년 만의 대신관 파면]
[대신관 파면, 왜 일어났나]
제국의 모든 신문사는 호외를 임시 발행했다.
그 호외가 보도하고 있는 내용은 단 하나였다.
대신관 파면.
각양각색의 기사가 쏟아져 나오며 그간 무슨 일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었는지, 각 사건의 유기성에 대해 일제히 분석했다. 그간 대신관이 자진해서 사퇴하는 일은 몇 번 있었어도 황제의 명으로 파면당하는 일은 근 400년 만이기에 화제가 안 될 수 없었다.
“대신관이 파면되다니 살다 보니 정말 이런 일도 다 있네.”
“죄 없는 어린 레이디를 핍박하고 박해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것도 레이디 칼리오페를요……! 어쩜 그럴 수 있는지!”
길거리에서 따끈한 호외를 읽은 시민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 사건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시민들의 뇌리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역이자 신성하고 절대적인 대신관의 권위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걸 목도했으니 당연하다.
온 제국이 술렁이는 가운데 가장 소란스러운 곳은 단연 화제의 중심지인 비스 신전이었다.
“어이쿠, 대신관님. 아니, 이제 뭐라 불러드려야 하나?”
대놓고 비꼬는 말에 대신관, 아니, 이제는 파면된 전 대신관 마르멜은 숨을 삼켰다.
“왜 아직도 당당히 대신관의 방에 계신지. 새 주인이 오셨으니 냉큼 비켜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파면 발표를 하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마르멜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바닥 뒤집는 듯 태도를 바꾸는 신관들을 보고 분노에 떨었다.
하지만 분노보다 의문이 더 먼저였다.
‘새 주인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흔들리는 마르멜의 눈동자를 본 신관이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신관님.”
대신관이라고 불린 남자가 미소 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정식으로 추대받기 전인데 대신관이라고 불리긴 좀 이르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절대 싫은 얼굴이 아니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마르멜은 새 대신관의 뻔질뻔질한 낯짝을 보고 기함했다. 진짜로 자신이 파면 되고 새로운 대신관마저 결정되었단 말인가?
파면 소식을 들었을 때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다. 대신관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
황제는 자신을 파면시킬 수 없다.
‘그래, 내게 샘이 있는 한……!’
“대신관님께 그 무슨 말버릇인가!”
“아직도 본인이 대신관인 줄 아나 본데.”
신관들이 마르멜을 비웃으며 호통을 쳤다. 그들은 신전 안의 폭군이나 다름없었던 마르멜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마르멜을 무시할수록 새 대신관에 대한 충성심도 어필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끌어내.”
신관들이 하던 양을 지켜보던 대신관이 고개를 까딱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신관들이 마르멜의 양팔을 하나씩 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뭔가 착오가 있을 게 틀림없어!”
마르멜은 소리를 꽥꽥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제게 달라붙은 서너 명의 힘을 이겨낼 순 없었다.
“황제가 날 내칠 순 없어! 내치지 못한다고!!”
문간에서 벽을 잡고 어떻게든 버티는 마르멜을 보고 새 대신관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방 안을 싹 바꿔야겠어. 신의 뜻을 대행하는 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잡한 놈이 쓴 것을 그대로 쓸 순 없으니.”
그 말에 마르멜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그 누구도 그를 이렇게 무시하지 못했다. 황제조차도!
그를 끌어내고 있는 신관들을 비롯해 새로운 대신관이 된 남자 모두 이전에는 마르멜의 시선 한 번에 고개를 숙이고 덜덜 떨었었다.
‘그런데……!’
“이거 놔!”
마르멜은 벽을 붙잡은 채 발길질을 해댔지만 결국에는 문밖으로 끌려나갔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신관들은 그의 발악을 보고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대신전 밖으로 나온 신관들은 성기사에게 마르멜을 넘겼다. 이왕이면 감옥까지 직접 끌고 가 새 대신관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각인시키고 싶었지만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마르멜의 발악은 감옥으로 이동하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성기사가 그의 명치를 후려쳤다.
“커헉!”
마르멜은 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크게 벌린 그의 입가에선 침이 질질 흘렀다. 그 후, 그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한껏 쾌적해진 상태에서 지하감옥에 도착했다.
어둠이 한가득 녹아든 공간에서 고문 기구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마르멜은 목을 움츠렸다. 그는 저 기구들의 사용법과 사후 결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다른 이들에게 써봤기에.
그 기억이 마르멜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그는 새 대신관의 발치에 매달렸다.
“이, 일단 진정해. 좀 기다려보면 분명히 오보라고…….”
“그간의 정이 있으니 단번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애원은 끝까지 나오지도 못한 채 잘렸다.
대신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짜다.
진짜로 이들은 자신을 죽일 셈이다.
이빨이 절로 다닥다닥 떨렸다.
살인 멸구.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새빨갛게 떠올랐다.
보통 파면당했다고 해서 대신관을 죽이진 않는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뻔했다.
황제가 명한 것이다. 마르멜과의 뒷거래를 영원히 어둠 속에 묻기 위해서.
“허…….”
황제가 자신을 버린 게 분명해졌다. 하지만 마르멜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서는 안 됐다. 그건 죽음을 의미하니까.
“화, 황제와 통신을 연결해! 뭔가 일이 잘못—”
“잘못된 건 없습니다.”
새 대신관이 마르멜의 어깨를 차분히 집으며 말했다. 그는 안타깝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마르멜에게 고개를 숙였다.
“샘을 너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나?”
“……!”
작게 속삭이는 말에 마르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네가 어떻게 샘을…….”
샘에 대해서 알 리가 없는데. 알아도 다룰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을 텐데.
왜?
어째서?
왜? 왜? 왜? 왜?
핏발 선 마르멜의 눈동자에는 망연자실한 혼돈이 가득했다.
“처리해.”
대신관이 감옥 안을 나서며 성기사에게 명했다. 신관들은 그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조용해진 감옥 안에는 성기사와 미동도 안 한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마르멜만 남았다.
성기사가 그에게 다가갔다. 절그럭거리는 아머 소리에 마르멜이 고개를 들었다.
지옥의 겁화를 연상하기 위해 신전 감옥 내부는 등을 쓰지 않고 횃불을 쓰고 있었다. 마르멜은 저 횃불이 실제로는 고문에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날름거리며 타오르는 횃불에 기사의 갑옷이 붉게 번들거렸다. 횃불 반대편 쪽에는 짙은 어둠이 기사를 좀먹고 있었다. 그는 성기사가 아니라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사자 같았다.
그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마르멜은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나기 급급했다. 추잡스러운 꼴이었지만 그걸 스스로 자각할 정신은 없었다.
스르릉—
성기사가 검을 빼 들자 검이 낮게 울었다. 마치 피를 보고 싶다는 것 같은 울음이었다. 그 울음에 화답하듯이 성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푸욱!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피가 감옥 바닥에 튀었다. 기사가 검을 비틀어 빼자 피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끄윽, 끅…….”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르멜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데도 저절로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뜨거운 피를 다 뒤집어써서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지, 실금해서 바지춤이 젖어 들었지만 티도 나지 않았다. 마르멜은 본인이 실금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는 들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내던졌다. 가죽 주머니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남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그제야 마르멜은 멀쩡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온통 기분 나쁜 피로 물들었지만 상처가 난 곳은 없었다. 기사가 벤 것은 마르멜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가죽 자루였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자 허어억, 하고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심장이 아플 듯이 뛰면서 안도감인지 불안감인지 모를 것으로 피부가 당겼다.
기사가 밖을 향해 신호하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마르멜을 수레에 실었다. 마르멜은 잔뜩 위축돼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서도 얼떨떨했다.
신전에서 성기사가 수레를 끌고 나간다는데 검사를 할 리가 없다. 새로 추대받은 대신관으로부터 오늘 성기사가 가지고 나가는 물건을 검사하지 말라는 명이 내려온 만큼 더더욱.
마르멜을 실은 수레는 그대로 신전을 나가 한참을 달렸다.
그제야 마르멜은 정신이 들었다.
‘이게 뭐지?’
그는 수레 속에서 생각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온몸이 꿉꿉하니 기분 나빴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으니 당연했다.
‘역시 날 파면한 건 다 위장인가? 신관들과 여론을 달래기 위해서?’
앞으로는 파면시키고 뒤로는 황제의 일을 돕게 하려는 게 틀림없다.
‘그래, 역시 날 그냥 죽일 리가 없지.’
새로운 대신관 놈이 어떻게 샘에 대한 것을 알았는지 몰라도, 자신에 비하면 까막눈 수준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비로소 미소가 나왔다.
‘흥, 황제 놈. 미리 언질이나 해줄 것이지. 날 이렇게 애타게 만들었으니 그놈도 애가 좀 타봐야겠어.’
그제야 코를 찌르는 악취와 불쾌한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이 몫까지 내가 아주 톡톡히 받아낼 거야.’
* * *
드디어 수레가 멈췄다.
성기사가 마르멜을 덮은 가림막을 걷어냈다.
그때까지 마르멜은 어떻게 하면 황제에게 효과적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방법을 선택했다.
“일어나.”
성기사의 말에도 마르멜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모습에 성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집 끝으로 마르멜을 툭툭 쳤다. 감히 어느 안전인데 이렇게 구느냐는 것 같아 마르멜은 웃음이 나오려 했다.
‘누구 앞인지 내 아주 잘 알지, 암.’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요.”
마르멜은 누운 그대로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러니 죽은 자인 저는 더 이상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황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 예상치 못한 내 태도에 쉽사리 반응하지 못하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일 거야.’
마르멜은 통쾌함마저 느꼈다.
그는 천천히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제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하지만 마르멜이 미소 지으며 돌아본 곳에 있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풍채 좋은 황제보다 훨씬 작은 그림자가 반쯤 어둠에 파묻힌 채 의자 위에 앉아있었다.
“안녕.”
소년이 입을 열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르멜은 이미 그가 누구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닐 거야…….’
그는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자신을 데려온 사람은 성기사다. 신전에서 자신을 죽이라 명하고 후처리까지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성기사.
그런데 황제도 아니라 카스틸로 공자의 수족이라고?
카스틸로 공자는 그간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살았다. 정계에서 카스틸로 공작가는 물러난 지 오래고,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귀족들조차 조심스레 가려 받고 있다.
그런데 카스틸로 공자가 신전 내부에 첩자를 심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해 빼돌렸다고?
‘농담하지 마.’
삼류 가십 지에서 이런 기사를 내도 차라리 소설을 쓰라며 비웃을 내용이었다.
“많이 당황했나 보네.”
소년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완연한 성인의 몸이 아닌데도 마르멜은 누워 있던 맹수가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황제에게 들었던, 그리고 멀리서나마 직접 보았던 카스틸로 공자는 이렇지 않았다.
카스틸로 공자는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으나 그걸 살리지 못하는 소심한 겁쟁이였다.
오로지 황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언동을 삼가고 또 삼가는 소인배.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태생을 타고 났는데도 죽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데 급급한 모지리.
‘그런 모지리가 이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낸다고……?’
그래, 말도 안 된다.
카스틸로 공자가 아닐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이 걸음을 옮기는 것에 따라 그를 가렸던 질척한 어둠이 희미한 불빛에 잠식돼 사라졌다.
그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 마르멜은 눈을 꾹 감았다.
그리 놀랍진 않았다. 어쩌면 부정하면서도 예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서 와.”
소년이 입 끝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눈매가 나붓이 휘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카스틸로 공자.”
마르멜은 신음처럼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어떻게—라는 표정이네.”
뚜벅, 뚜벅. 아스타레아스가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빈 창고 안에 울렸다.
“내버려 두면 그대로 죽어버릴 거 같아서.”
마르멜은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선 소년을 바라봤다. 죽을까 봐 꺼내왔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희망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간 마르멜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쪽으로만 생각을 전개했다. 필요하면 현실을 축소하고 부정하면서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아무리 해도 좋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입술이 맞물렸다가 떨어질 때마다 거친 호흡이 흐느낌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마르멜은 황제 앞에서도 당당했던 자신이 이제 고작 열여섯 된 소년에게 이렇게까지 겁을 집어먹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공포가 계속 그의 사지를 잡아챘다.
고작 열여섯이라고 할 수 없는 압도감이 소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저번 사하르네 부인 때는 굉장히 아쉬웠거든.”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르멜은 어느새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귓가 가까이 입술을 댄 아스타레아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쉽게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흐으읍…….”
별 말하지도 않았는데 흐느끼며 몸을 허물어트리는 마르멜을 아스타레아스는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사하르네 부인이 칼리오페의 앞에서 자진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굉장히 후회했다. 칼리오페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릿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죽어선 안 됐어.’
칼리오페의 앞에서 보란 듯이 그녀를 원망하며 죽어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본인의 선택에 의한 죽음이라니, 죄인에겐 너무 관대한 처사가 아닌가.
사하르네 부인의 마지막은 제국에 일파만파 퍼졌다. 그녀의 죽음은 결코 공경받지도, 애도 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헌화하는 대신 그녀의 시체에 침을 뱉었고 분향하는 대신 욕설을 지껄였다. 사하르네 부인은 무덤에 묻히지도 못한 채 들개에게 뜯어먹혔다.
그런데도 아스타레아스는 부족함을 느꼈다.
칼리오페가 겪었던 일들을, 어머니의 죽음에 심장을 찢긴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부족했다.
항상 생각했다.
사하르네 부인이 그때 즉사하지 않고 숨이 붙어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더 비참하고 괴롭게 죽을 수 있도록.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스타레아스는 심어놓은 채 결코 움직이지 않았던 성기사에게 명했다.
그 결과가 자신의 눈앞에 엎드려 있었다.
“겸사겸사 듣고 싶은 말도 몇 가지 있고.”
파지직.
아스타레아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튀어 오르는 불빛이 나타났다.
어둠을 살라 먹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푸른빛. 밤하늘을 태우는 번개와도 닮은 빛이었다.
“끄아아아악!!”
* * *
“칼리오페 영애.”
“영애, 잠시 시간을…….”
칼리오페는 자신을 붙드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거절하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휴, 정말 많네요.”
혼잣말 같은 그녀의 말에 곁에 있던 도미닉이 고개를 숙였다.
스티그마를 개방하는 날이 초읽기로 다가왔다.
자격을 증명하고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도미닉이 봐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도미닉은 방금 빠져나온 회장을 바라봤다. 그 쟁쟁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스티그마의 주인이자, 대정령의 사랑을 받는 칼리오페의 눈에 들고자 안달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
“예.”
도미닉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경도 스티그마에서 수련해도 괜찮아요.”
“예?”
설마 스티그마에 드나드는 게 부러워서 사람들을 쳐다봤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도미닉도 기사인지라 스티그마에서 수련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칼리오페에게 수련하고 싶다는 티를 내서 허락받다니.
“그 누구보다 도미닉 경에게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마치 그의 생각을 읽고 부정하는 것처럼, 칼리오페는 도미닉에게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진작에 말했어야 했던 건데.”
작게 중얼거리는 칼리오페를 보자 저도 모르게 의문이 새어 나왔다.
“왜…….”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 작은 질문을 들어버린 모양이다. 앞서 걷던 그녀가 도미닉을 돌아보고 재차 눈을 마주쳤다.
“말했잖아요. 나는 경을 믿는다고.”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뺨이 폭신폭신하게 부풀어 오른다.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경의 실력에 대해서도 믿는다는 말이에요.”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 속에 올올히 박힌 신뢰에 도미닉은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에게 고귀한 레이디를 모시는 일은 처음이라—
아니, 그의 인생에서 칼리오페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서.
“도미닉 경?”
칼리오페는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는 도미닉을 불렀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도미닉은 묵묵히 감정을 갈무리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건물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칼리오페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마르멜 대신관을 파면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비스 신전에 새로운 대신관이 추대되었다는 기사가 1면에 실려있었다.
‘신전 내부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것부터 시작하겠다라…….’
새로 추대된 대신관의 인터뷰를 보아하니 이미지 쇄신을 위해 힘쓰는 모양이다. 정말 청렴한 사람일지, 아니면 그저 쇼일지.
‘어쨌거나 이 난리가 났으니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칼리오페는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바라봤다.
결국 그 누구도 칼리오페에게서 스티그마를 빼앗아가지 못했다.
* * *
“지금 당장 스티그마를 얻는 건 불가능합니다.”
긴 로브를 입은 남자의 말에 황제가 혀를 찼다.
계획이 전부 틀어진 것에 대해 성을 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역시 현실적으로 당장은 스티그마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게 다 그 계집이 스티그마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한 탓이지.”
어린아이가 별생각 없이 결정한 것이겠지만 파장은 컸다. 마법사와 검사를 비롯해 재능 있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스티그마에서 수련하길 원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더 이상 속가나 불러 사람 신경을 긁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구심점이 되었다.
“일개 귀족 영애에게 무력이 몰리게 되다니…….”
황제는 이 상황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막을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어쩔 수 없습니다.”
새로운 대신관의 말에 황제가 끙, 하고 턱을 괴었다.
칼리오페가 무력을 모으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스티그마를 개방했을 뿐이다.
보통 스티그마의 소유자들은 폐쇄적으로 스티그마를 운용한다. 그렇기에 예전에 마르멜도 스티그마를 혼자 독식하는 것보다 신전이 가지는 게 낫지 않냐면서 칼리오페를 비난했던 것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스티그마를 개방했다. 그것도 무상으로. 이런 칼리오페의 행보는 오히려 사회에 베푸는 선행으로 해석될 만했다. 사회의 귀감이라 칭찬하고 황제가 상을 내려도 부족했다.
“지금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사회적인 주목을 받는 인사입니다. 워낙 촉각이 곤두서 있는데 지금 섣불리 건드리면 겨우 가라앉기 시작하는 여론에 부채질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또 마르멜을 파면하면서 비스 신전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겨우 진정되고 있지 않습니까. 한동안은 잠잠히 있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 말에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잠잠히? 이미 예정보다 일이 틀어져서 더 늦어진 상황이야. 그런데 손 놓고 있자고?”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초조하게 움직이다가 지금보다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마르멜이 그간 일을 엉망으로 해놓았더군요. 일단 신전 내부를 재정비하고 예정과 다르게 바뀐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파악만 하고 언제 움직이려고?”
분노가 넘실거리는 황제의 말에 두 신관이 고개를 숙였다.
“손 놓고 있자는 게 아니라 전열을 가다듬자는 뜻이지요.”
“이전의 계획은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하지 않겠습니까.”
긴 로브와 대신관이 한목소리를 내자 황제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새로운 전략이라……. 확실히, 지금처럼은 안돼.”
그 역시 우두머리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다음 판을 짜는 게 무리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답답했을 뿐이다.
한숨을 내쉰 황제가 고개를 까닥했다.
“좋아, 한동안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내버려 두는 걸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