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생일 선물 고마워요 (1)
제도, 아니 제국 전역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새로운 스티그마, 발현!]
[정령의 축복, 스티그마 모습을 드러내다!]
[스티그마, 제도에 나타나.]
[새로운 에테르의 유적, 이번에는 제도에.]
모든 신문사가 일제히 하나의 주제를 1면에 대서특필했다. 심지어 시시콜콜한 연예사를 다루는 가십지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새로운 스티그마가 발현되었기 때문에.
온 나라의 이목이 순식간에 스티그마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집중 받는 건 땅만이 아니었다.
[땅이 숨 쉬는 그곳, 베이비 살롱.]
[12세 스티그마의 주인은 누구인가.]
[스티그마의 주인, 레이디 칼리오페의 일상.]
[베이비 살롱에 있는 칼리오페 양의 모습.]
[12살에 이미 모든 것을 겸비한 최고의 레이디.]
스티그마에 대한 기사 못지않게 쏟아지는 게 그 땅의 주인인 칼리오페에 관한 것이었다.
칼리오페가 유명 인사였기에 기사로 엮기도 좋았다. 자료로 쓸 수 있는 사진도 넘쳐 났다.
기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나게 타이핑을 했다.
* * *
“젠장!”
쾅! 책상이 진동하며 비명을 질렀다.
비스 신전의 대신관은 책상을 내려친 그대로 몸을 숙인 채 일어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대신관을 따르던 신관들 모두 이 당황스러운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스티그마는 왜 하필 터져도 지금 터지는 거야?!”
“보통 스티그마의 형성 속도를 볼 때 이건 너무 빠릅니다.”
“빨라도 내년 초— 아니, 여름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평균이라면 내년 말쯤 형성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계획은…….”
신관들의 시선이 불안하게 대신관을 향했다.
소리 내서 망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확실했다.
남들 모르게, 남들보다 앞서 스티그마를 얻고 거기서 나오는 에테르를 독점하겠다는 계획은 다 틀어졌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다가가는 길마저 꼬인다. 에테르 공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는 너도나도 스티그마를 얻겠다고 할 것인데.”
“웬만한 조건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겠지.”
“아니, 그 전에 스티그마를 남한테 주겠습니까.”
“그럼 대체 어떡해야……!”
“그만.”
시끌시끌한 가운데 낮은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하지만 그 작은 울림에 회의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신관이 숙였던 몸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자애롭기 그지없는, 신의 대행자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생일이 곧 이었지요?”
* * *
분위기가 안 좋은 곳은 비스 신전뿐만이 아니었다. 사하르네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파사삭— 분노로 떨리는 손을 못 이기고 신문지가 구겨졌다. 사하르네 부인은 신문지를 던지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내던졌다.
챙그랑— 콰직! 와장창!
책상 위에 있던 집기가 떨어지고 벽에 부딪히며 온갖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허억, 허억…….”
있는 힘껏 난리를 치던 사하르네 부인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곧 숨을 가다듬고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허리를 쭉 폈다.
옆으로 물러나 불똥이 제게 튀지 않게 몸을 사리며 기다리던 고용인들이 이때다 하고 서둘러 깨진 집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왜, 모든 일들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사하르네 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예정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안 좋게, 칼리오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기껏 차지한 문서도 가짜였고…….’
루스티첼 가 집사를 회유해 손에 넣은 베이비 살롱 문서는 위조된 문서였다.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그 멍청한 집사 놈은 경찰에게 걸려 감옥에 있다.
원래부터 다 쓰고 난 뒤 놈을 처리할 생각이긴 했지만 지금은 시일을 다투는 급한 문제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감옥 안에 있는 집사를 암살하기 힘들었다. 번번이 실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사하르네 부인에게는 그 정도 감옥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었다. 간수들이 워낙 일을 잘해 암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방해하고 있어.’
그 생각을 하자 더더욱 초조해졌다.
다행히 집사는 경찰의 조사에도 사하르네 부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그녀가 손을 써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말하고 난 이후의 보복이 두려운 건지.
‘어찌 됐든 입을 열기 전에 처리해야 해.’
살아있는 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보다 그 방법이 훨씬 깔끔하다.
이 일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칼리오페는 칼리오페대로 문제였다.
뒷공작으로 베이비 살롱 문서를 손에 넣는 것에 실패했으니 예정대로 새로운 가게를 짓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최고의 건축가를 불러 설계하게 하고 조감도를 만들어 칼리오페에게 보여줬다.
[음, 네. 괜찮네요.]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애매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만족스럽진 않지만 굳이 싫다고 할 것도 없으니 예의상 괜찮다고 해준다는 뉘앙스였다.
사하르네 부인은 도저히 알겠다고 할 수 없었다.
[아, 이거는 느낌만 보라고 준 거고.]
거짓말이다. 최종 설계도의 조감도였다.
[보완해서 완성된 조감도는 나중에 보여줄 거야.]
칼리오페가 완성된 건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투자 건은 무산된다. 그러면 괜히 돈과 시간을 들여 건물을 지어놓고 모든 것을 날리는 셈이다.
무엇보다 칼리오페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제가 좋다고 승인했다고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반드시 저 입에서 좋다는 소리를 하게 만들겠어!’
그런 일념으로 사하르네 부인은 계속해서 돈을 쏟아부었다.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칼리오페의 대답은 나아지질 않았다.
[으음……. 그냥 부인께서 좋으신 대로 하세요.]
오히려 처음엔 표현하지 않던 부정적인 감상이 나오기까지 했다.
[괜찮긴 한데 최신 유행이라는 말은 곧 유행 탄다는 말이죠.]
사하르네 부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 마치 알기라도 한 것처럼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음, 이건 좋네요.]
사하르네 부인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의 짧은 평가에 무려 성취감마저 맛볼 지경이었다.
그렇게 설계를 결정하고, 시공사에 모든 것을 일임하고 대금까지 치렀다. 당장 유통할 수 있는 현금으로는 부족한 액수가 나와 가지고 있던 부동산까지 담보로 잡았다.
어차피 스티그마를 손에 넣게 되면 돌아올 재산이다. 그녀의 주군이 해결해 주실 테니까.
두고 보라고, 본전을 뽑아내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하며 칼리오페에게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건 정말 운명의 장난이자 신의 농간이며 악마의 놀음이다.
이 완벽한 타이밍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스티그마가 지금 터지다니……!’
건물이 들어서는 제도 근교의 땅은 이미 기부한 것으로 칼리오페의 재산이 되었다. 하물며 지금 짓고 있는 건물이 완성되더라도 투자가 결정되는 건 아니다.
먼저 칼리오페가 건물을 보고 난 뒤 만족해서 투자에 응해야 한다. 그다음 사하르네 부인이 말하는 투자 조건에 동의해야지만 성립되는 것이다.
당연히 사하르네 부인은 그 투자 조건으로 안 쓰게 될 베이비 살롱을 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 땅이 스티그마가 된 상황에서 과연 누가 주겠는가.
“……칼리오페 루스티첼.”
나직하게 읊조리는 사하르네 부인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다시금 엄청난 분노가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 * *
“어서 와.”
칼리오페는 예상했던 손님의 방문에 여유롭게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집사.”
그 부름에 집사가 움찔했다.
다시 만날 줄 알고 있었다는 얼굴인 칼리오페의 모습은 그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아, 아가씨…….”
집사는 거의 기다시피 칼리오페에게 다가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애처로운 눈으로 칼리오페를 올려다보는 집사에게선 예전의 깔끔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홀쭉해진 뺨에는 수염이 아무렇게나 나 있고 제대로 빗질하지 않은 머리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듬성듬성 비어있었다.
“아가씨를 배신한 건…… 루스티첼 가를 배신한 건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칼리오페는 대답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집사를 더 초조하고 안달 나게 했다.
“저, 정말입니다. 아가씨,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이 집안에서 집사로 일하면서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거기다 아가씨와는 평생을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정에 호소하는 집사의 행태는 오히려 칼리오페의 가슴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래, 그런 사람이 너무나 쉽게 배신했지. 무려 두 번이나.’
“저는 배신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배신할 마음 따윈 단 한 톨도 없었습니다! 다 시켜서 그런 거예요.”
“시켜서 그랬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협박이라도 당했다는 뜻이야?”
“그, 그렇습니다! 협박 당한 겁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의 표정이 변했다.
“……진짜로 협박 당한 거 맞아?”
칼리오페의 반응에 희망을 느낀 집사가 고개를 마구잡이로 끄덕였다.
“협박 당한 게 아니라면 제가 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주인님과 마님께서는 정말로 훌륭하신 분들이시죠. 그런 분들을 모시는 건 제 기쁨이었습니다.”
“…….”
“저는 루스티첼 일가에 봉사하며 청춘을 바쳐왔습니다. 일에 대한 제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것은 아가씨께서도 아실 겁니다.”
“……집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렇게 말하는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는 그늘이 진 것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읽지 못한 집사는 그녀의 긍정해 반색했다.
“역시! 아가씨라면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대체 누가 집사를 협박한 거야?”
그 말에 집사가 입을 딱 다물었다.
살아날 구멍을 위해 시켜서 그런 거다 운운했지만 막상 배후를 밝히려니 찜찜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를 만나러 올 때부터 이미 각오는 마쳤다.
의도치 않게 협박 당했다고 말했지만, 뭐, 그쪽에 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으로 자신의 죄가 덜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거짓 자백도 할 수 있다.
‘루스티첼에 붙는 게 이득이야. 혹시 그쪽에서 내게 보복하려고 해도 지켜줄 힘은 있을 테지.’
다시 한 번 검산을 마친 집사가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하르네 부인…… 사하르네 부인이 시켰습니다.”
“뭐라고……?”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벌어졌다. 잘게 떨리는 손이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사하르네 부인이 절 협박해 루스티첼 가의 재산을 빼돌리라고 했습니다.”
한 번 사하르네 부인의 이름을 대자 그 다음은 쉬웠다. 집사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말했다.
“그런……!”
칼리오페는 집사에게로 향했던 몸을 홱 돌렸다.
“거짓말…….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사하르네 부인께서는 명망 높은 귀부인이셔. 거기다가 후학 양성을 위해 베이비 살롱을 지원하고 싶다고 하셨어! 그런 분이 어떻게…….”
목소리 끝이 떨렸다. 여린 입술을 질끈 깨무는 칼리오페의 모습은 상처 입은 새처럼 가련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입니다, 아가씨! 믿어주십시오!”
“사하르네 부인을 모함하지 마.”
다시 집사에게로 몸을 돌린 칼리오페가 강하게 말했다.
단호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사하르네 부인의 호의를 믿고 싶어 하는 심경이 절절히 느껴져 더 안타까웠다.
“사하르네 부인이 아가씨를 속인 겁니다. 제 말을 믿어주세요.”
“그만해. 그런 거짓말 듣고 싶지 않아.”
집사는 고개를 가로젓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칼리오페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배신했던 충격은 희미해질 것이다.
그는 적절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을 때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만…….”
“증거가 있습니다.”
“뭐……?”
칼리오페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집사는 속으로 미소 지으며 들고 왔던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든 칼리오페의 입술이 충격으로 벌어졌다.
서류에는 집사와 사하르네 부인의 거래가 적혀져 있었다. 집사가 베이비 살롱 문서를 제공하는 대신 사하르네 부인은 후처리와 집사의 신변 보호를 보장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집사도 바보처럼 사하르네 부인의 말만 믿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연히 명시적인 약속을 원했다.
‘그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집사는 자신의 준비성에 감탄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우리 가문의 서류를 위조했어. 이 서류도 위조했을지 어떻게 알아? 나는 사하르네 부인을 믿어.”
먼저 서류를 위조한 건 칼리오페였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은근슬쩍 그 책임을 집사에게 떠넘겼다. 사하르네 부인이 시켜서 한 짓이라는 걸 증명하기에 급급한 집사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사하르네 부인의 인장이 진짜인지는 확인해보면 아실 겁니다.”
“……만약 아니라면.”
“아니면 그때 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벌 받겠습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는 아무 말 없이 집사를 내려다봤다. 집사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의 진심을 피력하려고 했다.
이윽고 칼리오페의 입술이 열렸다.
“고마워, 집사.”
그녀의 얼굴엔 조각달같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라?’
집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생일 선물.”
칼리오페가 서류를 흔들며 생긋 웃었다.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얼떨떨해하는 집사의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울렸다.
[올해 생일 선물만큼은 꼭 받아낼 생각이니까.]
‘말도 안 돼.’
현실을 부정해봤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새파랗게 질린 집사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음, 하고 생각한 뒤 말했다.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배신할 건 짐작했지만 설마 사하르네 부인과 손을 잡을 줄이야.”
이번에도.
칼리오페는 뒷말을 삼켰다.
아스타레아스에게 집사의 조사를 맡겼던 건 혹시 이전부터 그와 사하르네 부인이 모종의 관계로 엮였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니었지. 사하르네 부인은 베이비 살롱을 원해서 이번에 처음 집사에게 접근했어.’
그러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전생에 스티그마는 칼리오페의 땅이 아니었다. 신전은 아주 쉽게 그 땅을 소유했다.
‘그런데 왜 사하르네 부인은 집사와 공모해 루스티첼 가의 재산을 가로챘을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 그럴 만한 게 있었나?’
스티그마와 비견할 것은 애초에 소유한 적도 없다. 거기다 큰돈이 될만한 건 가세가 기울어질 무렵 어머니께서 처분하셨다. 남아있는 재산 규모는 중앙 귀족의 재산이라고 하기엔 적었다.
집사라면 몰라도 잘나가는 명문가의 안주인인 사하르네 부인이 더러운 수를 써가면서까지 탐낼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칼리오페는 생각을 끊어냈다. 지금은 눈앞의 집사에게 집중할 때였다.
“더 이상 내게 할 말은 없겠지.”
“아, 아니……. 저는 협박을 당해서—”
“아직도 그 소리야? 협박이 아니라 서로 이득이 맞아서 공모했다는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어.”
칼리오페의 단호한 말에 집사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든 것이 다 틀어졌다. 더 이상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
“처음부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린 그가 분노에 차 칼리오페에게 삿대질했다.
“처음부터 알아봤어! 그 기분 나쁜 붉은 눈알로 사람을 쳐다볼 때부터……!”
흥분한 집사가 뭐라 외쳐도 칼리오페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집사와의 첫 만남이 꽤 인상적이었지.”
자신이 던진 이유식을 뒤집어쓴 집사의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그때는 회귀한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서 전생의 감정이 격하게 남아있었다.
지금은 회귀하고 12년이나 된 데다가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도 쌓이니 이전의 감정이 조금은 흐려졌다.
‘그래서 기회를 주고 싶었나 봐.’
칼리오페 자신이 변하고 싶어 했고, 결국엔 변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주어진 상황이 달라지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당신은 변하질 않네.”
칼리오페의 중얼거림은 집사의 귀에 닿지 않았다.
집사는 이상한 눈을 하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첫 만남이라니 그걸……?”
기억하냐는 듯한 물음에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
그녀의 어조에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잔뜩 배어있었다.
“당연히 유모한테서 들었지. 내가 집사 얼굴에 이유식 그릇을 정확하게 맞췄다고.”
집사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칼리오페의 능력을 생각하면 한 살 때 일조차 모두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만큼 눈앞의 소녀에게 압도 당했다는 뜻이다. 더 이상 상할 자존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수치스러웠다.
“내가 스티그마의 주인이 된 걸 보고 어떻게든 빌붙어보려고 찾아온 용기는 가상하지만.”
그걸 용기라고 칭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칼리오페는 집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회유에 넘어가 배신하든 그냥 배신하든, 배신자는 두 번 돌아보지 말자는 주의라서.”
자그마한 아이의 손이 척 문을 가리켰다.
“불합격입니다.”
* * *
매년 마지막 계절, 마지막 달에 자리한 칼리오페의 생일은 항상 큰 화젯거리였다. 사교계에서도 온갖 거물들이 모이는 파티라 큰 주목을 받았고, 일반 시민들도 천사의 탄생 시리즈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곤 했다.
원래도 화제였지만 올해는 더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생일의 주인공이 얼마 전에 생긴 스티그마의 주인이기까지 하니까.
언론이 스티그마와 칼리오페, 베이비 살롱에 대해 연일 보도하는 가운데 칼리오페의 생일이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칼리오페의 생일에 초대받고 싶어 안달이었다.
칼리오페는 이 기회를 살려 과감하게 올해 생일 파티 장소를 바꿨다.
바로 베이비 살롱으로.
급박한 일정에 맞춰 베이비 살롱을 단장하고 초대장을 새로 보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온 사교계가 뒤집힌 것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조차 이 초유의 사태에 열광했다. 신전 소유가 아닌 스티그마를 이런 식으로 개방하는 건 처음이었다.
신문은 물론이고 잡지들조차 경쟁적으로 칼리오페의 생일 특집을 권두로 실었다.
초대 인원은 어느 정도로 예상되는지, 누가 참석할 예정이라든지. 그날 케이터링을 맡은 업체와 실내 장식은 어떤 컬러와 양식을 쓰는지.
제국 전역에 새로운 유행이 될 터였다. 벌써부터 수많은 업체가 칼리오페에게 협업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당연히 스티그마는 칼리오페의 소유라는 이미지가 공고해졌다. 사람들은 베이비 살롱과 스티그마, 칼리오페를 엮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베이비 살롱의 향후 마케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화제가 된 칼리오페의 생일 당일, 아직 주인공이 당도하지 않은 베이비 살롱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어머, 사하르네 부인. 새로운 베이비 살롱을 짓고 있다면서요.”
“저도 들었어요. 제도 근교에 아주 크게 짓고 있다고.”
“거기 지대가 제법 상당할 텐데요. 사하르네 부인은 정말 통도 크시네요.”
귀부인들이 사하르네 부인에게 알은체하며 눈짓을 보냈다. 줄을 잘 섰네, 발이 빠르네 등등. 그들이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그런 뜻이었다.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미소 짓는 얼굴을 볼 때마다 사하르네 부인의 속에선 천불이 솟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 눈에야 원래 좋은 마음으로 기부할 생각이었는데 베이비 살롱이 스티그마가 되었으니 더 잘 된 거로 비칠 것이다. 스티그마의 주인이 된 칼리오페에게 누구보다 빠르게 호의적인 눈도장을 찍을 수 있으니까.
그들 말대로 발 빠르게 줄을 잘 선 것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사하르네 부인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입가가 파들파들 떨리지 않은 것은 그나마 그간 사교계에서 다진 포커페이스 덕분이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 새로 짓는 건물 규모가 굉장하다던데……. 정말 다 기부할 생각이세요?”
“내장도 웬만한 곳 못지않다고 들었어요.”
“그런 건물을 지어서 기부하시다니……. 사하르네 부인, 정말 대단하세요.”
“좋은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온 거겠죠.”
사하르네 부인과 베이비 살롱에 관한 소문은 돌고 돌아 투자에 대한 건 생략되고 기부라는 것만 강조됐다.
좋은 마음으로 기부한 덕에 잘 됐다는 소리를 듣는 판국에 투자라고 바로 정정하기엔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스티그마가 터져서 베이비 살롱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투자하기에도 애매해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안 주겠다고 하면 내 체면이 우스워지잖아.’
무엇보다 이렇게 소문이 난 것은 전적으로 사하르네 부인의 책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베이비 살롱에 기부하고 투자한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나중에 칼리오페가 건물을 보고 자신의 투자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하르네 부인이 저렇게 큰돈과 시간을 들여 건물을 지어줬는데 이제 쓸 일 없는 베이비 살롱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으냐는 흐름.
그 흐름을 만들겠다는 계산이 오히려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하지만 현재로선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던 중 사하르네 부인은 비스 신전의 대신관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 * *
“아, 세상에…….”
“와…….”
파티 시작 시각에 정확히 맞춰 등장한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길고 하늘거리는 하얀 시폰 드레스는 아래로 갈수록 세레니티 블루를 거쳐 밤하늘 같은 짙은 남색으로 그라데이션 되었다. 살랑거리는 천 사이로 드러난 팔에는 상앗빛 암 링(arm ring)이, 손부터 팔목까지는 레이스처럼 하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굵게 땋아 내리고 동백꽃을 엮은 화관을 쓴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제 생일을 축하하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정령의 축복을 받은 땅, 숨 쉬는 대지의 주인다운 모습이었다.
“정령 같아…….”
“숲의 요정인 줄 알았어.”
그 신비하면서도 맑고 깨끗한 미소에 사람들이 너도 나도 감상을 내뱉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칼리오페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지금 당장은 스티그마에 대한 이익은 둘째치고 보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사는 매력적인 소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리페, 생일 축하해!”
“벌써 열두 살 생일이구나. 축하한다, 리페.”
“행복한 하루 되렴.”
“생일 축하해. 이 선물은 딱히 고심해서 고른 건 아니니까!”
“나는 고심해서 골랐어. 생일 축하해, 리페.”
“호세!”
온갖 사람들이 생일을 축하해주는 와중에 잠시 소란이 있었다.
떠들썩한 즐거움이 파티장을 달궜다. 칼리오페의 맑은 웃음과 사람들의 웃음이 한 데 섞여 들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리페.”
칼리오페는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넨 사람을 바라봤다.
“사하르네 부인.”
파티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기대에 차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땅과 건물을 기부할 정도로 베이비 살롱에 관심이 많은 사하르네 부인이 과연 무슨 선물을 준비해왔을까.
“어떻게…….”
그러나 사하르네 부인을 맞이한 칼리오페의 얼굴은 전에 없이 흐렸다.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이듯 읊조린 칼리오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사하르네 부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
“왜, 왜 그러니, 리페?”
그 반응에 다들 당황해서 칼리오페를 불렀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젓는 칼리오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여린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헤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빤히 보여 안쓰러웠다.
“아니긴. 말해 보렴. 괜찮으니까.”
“그래, 리페가 말한다고 해서 분위기 망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귀부인들이 칼리오페를 감싸며 다독였다.
그 모습을 본 사하르네 부인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설마…….’
사하르네 부인의 머릿속에 루스티첼 가의 집사가 스쳤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파티에 오기 직전에도 확인했다. 집사는 감옥에 있고 아직 사하르네 부인의 이름을 내뱉지 않았다고, 어떤 자백도 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 중이라고 들었다.
‘그래, 알고 있을 리 없어.’
그녀는 차게 식어 축축해진 손을 꽉 쥐었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 해.’
그렇게 생각한 사하르네 부인이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말해 보렴. 무슨 일이니, 리페?”
그녀는 칼리오페의 등을 다정하게 쓸면서 자애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고개를 푹 수그린 칼리오페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응?”
되물음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제게 그런 짓을 하시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절 대하실 수 있어요?!”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에는 원망과 슬픔, 분노와 비통함이 가득했다. 울멍울멍하니 흔들리던 눈에서 결국 눈물방울이 또르륵 애처롭게 흘러내렸다.
“……!”
파티장이 술렁였다.
수군수군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너울 쳤다.
“무, 무슨 소리니? 리페,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니? 그러면 말해주렴.”
사하르네 부인이 당황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상냥하게 물었다.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말을 해야 알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칼리오페는 굳은 표정으로, 그러나 희망과 슬픔이 담긴 눈으로 사하르네 부인을 응시했다.
그 호소력 짙은 단호한 얼굴에 귀부인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사하르네 부인,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저는…… 부인의 진심을 원하니까.”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에게는 그저 건방지고 맹랑한 어린애로 보였을 뿐이다.
“베이비 살롱에 왜 투자하고 싶다고 하신 거예요?”
설마, 하고 부정했던 주제가 나오자 사하르네 부인의 입매가 딱딱해졌다.
‘아니야. 침착해.’
그녀는 자신의 정보력과 준비성을 믿었다.
‘통신석도 잠잠하잖아.’
나오기 직전에 확인하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세상사다. 만약 루스티첼 가 집사의 신변에 변화가 있으면 통신석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그래, 떠보는 게 확실해. 기분 나쁠 정도로 똑똑한 애니까 베이비 살롱에 스티그마가 발현되고 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우니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압박하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칼리오페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유감이구나.’
사하르네 부인은 속으로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나는 그런 압박에 넘어갈 정도로 허술하지 않아서 말이야.’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역시 애는 애다.
‘인생 선배로서 가르침을 주지. 이렇게 어설프게 아무런 증거 없이 사람을 압박하면 오히려 더 크게 역공당할 수 있다는걸.’
칼리오페가 차린 밥상을 이쪽에서 야무지게 써먹어 줄 생각이다. 게다가 칼리오페를 압박하는 것에 성공하면 그를 빌미로 무언가 얻어낼 수도 있다.
‘스티그마를 얻어내는 건 무리지만 그와 관련된 것 뭐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사하르네 부인이 입맛을 다셨다.
“왜 투자하고 싶냐니. 그때도 말했을 텐데. 교육 사업을 지원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미래에 투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그리 행한 것뿐이야.”
사하르네 부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이 그리 생각하실걸.”
그 말에 귀족들이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사하르네 부인은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칼리오페 쪽으로 흐르던 분위기를 이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표정으로 굳히고 칼리오페를 내려다 봤다.
“네 말 듣다 보니 기분이 조금 그렇네. 리페,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지금 행동이 무례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사하르네 부인이 엄청난 거금을 들여 베이비 살롱에 지원할 생각이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지원에 대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추궁하는 건 확실히 무례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지적 받은 사항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사하르네 부인, 진심이세요?”
오히려 충격 받은 얼굴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사하르네 부인을 바라봤다.
“정말로 저한테 하나도 미안한 게 없으세요?”
칼리오페의 말은 순수하고 직설적이었다. 화려한 언변도, 귀족적인 화법도 아니기에 오히려 그 충격과 진심이 오롯이 느껴졌다.
“…….”
사냥감을 몰 듯이 더 압박할 계획이었던 사하르네 부인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정말 뭔가를 아는 건가?’
그 잠깐의 주춤거림이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뭐지? 진짜 뭔가 있는 건가?’
‘그래, 리페가 얼마나 예의 바른 아이인데. 경우 없이 사람을 매도할 리 없잖아.’
술렁이는 분위기에 아차, 한 사하르네 부인이 황급히 입을 열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미안해할 일이라는 게 있니? 아까부터 좋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데 제대로 대답도 안 하고.”
“……저는 부인께서 먼저 말씀해주시길 바랐어요. 제가 원한 건 부인의 진심이니까.”
칼리오페의 말에 사하르네 부인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아이는 모르고 있는 거야. 나더러 말하라는 거 보면 확실해. 알면 당연히 자기가 얘기했겠지.’
그녀는 대놓고 칼리오페를 향해 푹 한숨을 쉬었다.
“결국, 말 안 하겠다는 거구나.”
사하르네 부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 다음 말을 보다 효과적으로 들리게 하기 위해서.
“말을 안 하는 거니, 못 하는 거니?”
그 질문에 사람들 틈 사이로 보이지 않은 파문이 퍼져 나갔다. 칼리오페가 이유 없이 이렇게 무례를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눈에 보이는 사실이 너무 명확했다.
경직되는 분위기에 서모나 부인이 부드러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자아, 즐거운 날인데 아이한테 너무—”
“안 좋은 버릇은 확실히 고쳐주어야죠. 이건 리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은 단칼에 중재를 쳐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바보처럼 놓칠 순 없지.’
반드시 스티그마에 대한 것 하나라도 얻어낼 생각이다.
“지금 네 행동이야말로 내게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구나. 리페, 네가 어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렴.”
사하르네 부인이 관대한 척 말했다. 만약 네가 성인이었다면 이 문제를 가문 간의 갈등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사하르네 부인이 받은 모욕감은 대단하고, 그에 비례해 칼리오페의 잘못은 크다는 뜻이었다.
칼리오페는 침잠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부인의 뜻은 알겠어요. 먼저 말씀해주시길 바랐는데. 제가 무리한 걸 원했나 보네요.”
“뭐?”
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의 되물음을 무시하고 유모를 향해 손짓했다.
칼리오페를 향해 다가온 유모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통신석?’
이때 사람들의 뇌리에 같은 장면이 스쳤다.
몇 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에게도, 말로 전해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이었다.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에서 있었던, 통신석을 통한 브리젤 가의 아동 학대 폭로였다.
‘설마……?’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세상에…….’
사람들은 벌써부터 불신 섞인 눈으로 사하르네 부인을 바라봤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사하르네 부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는 품 안에 있는 통신석을 꽉 쥐었다. 여전히 잠잠했다.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칼리오페가 통신석을 조작했다. 맑은 빛이 터져 나오며 허공에 커다란 상이 맺혔다.
[아가씨를 배신한 건…… 루스티첼 가를 배신한 건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
경악과 충격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루스티첼 가 집사가 가문을 배신하고 서류를 조작해 도망간 일은 온 나라 귀족이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루스티첼 가에서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위조 문서를 조심하라며 주요 관공서와 거래처에 공문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제 의지가 아니었다고……?’
이 상황에서 거기에 누구의 의지가 개입되었는지는 누구나 추측할 수 있었다.
방금 전 칼리오페가 추궁했던 사람.
소리 없이 사람들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사하르네 부인은 희게 질린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협박 당한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허공에 맺힌 영상 안에서도 때마침 협박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대체 누가 집사를 협박한 거야?]
칼리오페의 물음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사하르네 부인…… 사하르네 부인이 시켰습니다.]
추측이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그 충격이 약해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사하르네 부인이 절 협박해 루스티첼 가의 재산을 빼돌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감정을 못 이긴 귀부인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했다.
영상 속의 칼리오페는 예상치 못한 이름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사하르네 부인께서는 명망 높은 귀부인이셔. 거기다가 후학 양성을 위해 베이비 살롱을 지원하고 싶다고 하셨어! 그런 분이 어떻게…….]
고개를 돌린 채 떠는 칼리오페의 모습은 애처롭고 가련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사실입니다, 아가씨! 믿어주십시오!]
[사하르네 부인을 모함하지 마.]
사하르네 부인이 협박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녀를 두둔하는 모습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만해. 그런 거짓말 듣고 싶지 않아.]
사하르네 부인을 향한 신뢰와 호의 그리고 밝혀진 진실 속에서 칼리오페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선했다. 칼리오페가 받은 충격에 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을 붉히는 귀부인이 있었다.
“아니야…….”
사하르네 부인이 고개를 잘게 저으며 부정했다.
“이, 이건 사실이 아니야!”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그녀가 고함쳤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마치 그 말에 대답하듯 영상 속의 집사가 말했다.
[증거가 있습니다.]
‘안돼……!’
사하르네 부인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그녀는 계약서를 작성한 장본인으로서 집사가 무엇을 증거로 줄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 속 집사는 칼리오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아도 집사와 사하르네 부인의 공모가 적혀있을 게 뻔했다.
증인과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자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순수한 칼리오페는 집사에게서 명명백백한 증거품을 받아들고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우리 가문의 서류를 위조했어. 이 서류도 위조했을지 어떻게 알아?]
소녀의 눈망울은 잠시 배신감과 슬픔으로 흔들렸지만, 곧 그 전보다 더 단단하게 굳었다.
[나는 사하르네 부인을 믿어.]
집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저런 상황에서 끝까지 사하르네 부인을 믿어주다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영상은 집사가 인장을 확인해보라 하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그에 맞춰 유모가 문제의 계약서를 들고 와 칼리오페에게 건네주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아직 그 계약서를 자세히 보지 못 했지만 결과야 뻔했다. 사하르네 부인을 대하는 칼리오페의 태도를 보아 위조인지 아닌지 이미 답이 나온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쩜 저렇게 믿어주는 아이에게…….”
“저 순수하고 올곧은 신뢰에 제가 다 가슴이 아프네요.”
“아직 이런 일을 겪기엔 너무 어린데요.”
“리페는 원래 저런 아이였죠.”
칼리오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정중히 대했다.
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속삭이긴 했으나 모두 일부러 다 들릴 크기로 말하고 있었다.
꼭 누구 들으라는 듯이.
사하르네 부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잘 다듬은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당한 적이 없다. 그녀는 항상 탄탄대로를 걸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하르네 부인을 존중했다.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그녀는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사하르네 부인.”
칼리오페의 맑은 목소리가 조용히, 하지만 깊은 울림을 가지고 그녀를 불렀다.
“제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단 하나, 부인의 진심이었어요.”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사하르네 부인을 비쳤다.
“부인께서 먼저 이 일에 대해 말씀해주시길 바랐는데…….”
단정한 아이의 얼굴이 아픔으로 물들어갔다.
사하르네 부인이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한 점의 찔림이나 거리낌도 없이 칼리오페를 대했던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리페가 눈물까지 보였는데도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왜 그러냐고 물었죠.”
“진심으로 당황해하면서 달래서 저도 깜빡 속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러다가 아예 적반하장으로 칼리오페를 다그쳤다.
“정말 무례한 게 누구인데 무례라고 지적했던 건지.”
“저는 정말 미안한 게 없냐고 물었을 때 리페의 충격받은 얼굴이 잊히지 않아요…….”
“서모나 부인의 중재에도 안 좋은 버릇을 고쳐야 한다면서 날을 세웠죠? 참나.”
“정말 안 좋은 버릇을 가진 게 누구죠?”
“그러면서 가문 간의 문제로 끌고 갈 수 있는 일인데 어려서 봐주는 걸 다행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하, 이건 뻔뻔하다는 말로도 부족해요.”
“리페가 진실을 몰랐다면 어쩔 뻔했어요. 자기가 잘못해놓고서도 저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인데.”
“조용하고 점잖은 분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저런 음모를 꾸미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순진한 어린애를 상대로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하르네 부인은 분노와 모멸감, 수치심과 굴욕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내가 왜……!’
속으로 아무리 욕하고 발악해봤자 겉으로는 티 낼 수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사하르네 부인을 힐끗거렸다.
“리페가 똑똑해서 다행이지, 다른 아이였으면…….”
“무섭네요.”
“그간 그런 식으로 어린아이들 코 묻은 돈을 빼앗아 온 것 아니에요?”
“설마요. 사하르네 가가 그 정도로 질이 떨어졌을까요.”
킥킥거리는 비웃음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요.”
그때, 칸테나 부인이 칼리오페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 계약서를 요약하자면 집사가 루스티첼 가의 재산을 가로채는 걸 사하르네 부인이 돕는 대신 베이비 살롱을 넘겨달라고 되어있는데—”
말을 끌며 고개를 든 그녀가 사하르네 부인을 보며 물었다.
“왜 베이비 살롱을 원했을까요?”
* * *
칸테나 부인의 질문에 베이비 살롱 내부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속닥임도 멈춘 채 사하르네 부인을 쳐다봤다.
“베이비 살롱을…… 넘겨달라고 되어 있다고요?”
경악이 섞인 작은 물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다들 사하르네 부인의 뻔뻔하고 경우 없는 작태에 놀라 그녀가 대가로 뭘 원했는지 미처 관심 두지 못했다.
“베이비 살롱이 인기 많은 가게라고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이 이런 더러운 수를 써서 탐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백작가 중에서도 가세가 높아 명문 후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하르네 가의 안주인이 빼앗기엔 다소 자잘했다.
또한 베이비 살롱의 인기는 칼리오페라는 상징과 어울려 시너지 효과가 있는 것이다. 경영에 관심 있는 귀족들 중 베이비 살롱이 칼리오페의 손을 떠나는 순간 인기가 급감할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베이비 살롱이 스티그마가 되었죠. 여기 계약 일자를 보면 불과 한 달 정도 전인데.”
계속되는 칸테나 부인의 지적에 칼리오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적룡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칸테나 부인.’
마법사답게 객관적인 요소에 집중해 인과관계를 정확히 꿰뚫었다.
“설마 이곳이 스티그마가 될 걸 알고……?”
“그럼 베이비 살롱에 투자한 것도…….”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사실 사하르네 부인은 베이비 살롱에 그다지 관심 없었잖아요.”
베이비 살롱에 자주 발걸음하던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사하르네 부인은 몇 번 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마저도 최근이었다. 그래서 베이비 살롱에 거액을 기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들 놀랐었다. 칼리오페와 딱히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사하르네 부인, 해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
서모나 부인의 말에 사하르네 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불같은 성정의 칸테나 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하! 해명할 말이 뭐가 있겠어요. 다른 가문의 집사를 협박, 회유해서 재산을 빼돌리게 하고, 그 기회를 틈타 무려 스티그마를 빼앗으려 했다. 하물며 상대는 아직 성년도 안 된 아이. 여기에 덧붙일 게 있나요?”
희게 질린 사하르네 부인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믿든 안 믿든 여기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저는 이곳이 스티그마가 될 줄 몰랐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알았겠어요.”
“그럼 왜 어린아이의 가게를 빼앗으려고 했죠?”
“그, 그건…… 빼앗으려고 한 게 아니라—”
“풋……!”
궁색한 변명은 오히려 비웃음을 샀다. 빼앗으려 한 증거가 뻔히 있는데 무작정 부정하는 모습이 비루해 보였다.
“자존심도 없나 봐요.”
“저런 게 명문가 안주인이라니.”
결국 사하르네 부인은 시뻘게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부인께서는 리페에게 어린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라고 말씀하셨죠. 불행히도 부인께선 성인이시군요.”
서모나 부인이 사하르네 부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이 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서모나 후작가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 의지를 가진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의 귀족들 모두 같은 눈빛으로 사하르네 부인을 쳐다봤다.
“흠, 문제는 사하르네 부인이 어떻게 알았냐는 건데. 스티그마가 생기는 걸 미리 알 수 있는 곳은— 신전뿐이죠.”
칸테나 부인의 지적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어요.”
“이상한 점?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으면 사소한 것이라도 이야기해보렴.”
그 말에 칼리오페의 시선이 파티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던 대신관이 있었다.
“비스 신전의 대신관님이요.”
이 상황에서 대신관이 이상하다고 하면 무슨 뜻인지 뻔했다.
‘저, 저 요망한 계집이 이러려고 날 초대했구나……!’
대신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칼리오페에게서 생일 파티 초대장이 왔기에 옳다구나, 하고 참석했다.
지난번에 안 좋게 헤어지긴 했지만, 칼리오페로서도 신전과 좋은 관계를 쌓는 게 장기적으로 낫다는 판단을 했을 거라 여겼다.
화해의 제스처라고 생각하고 못 이기는 척 받아줄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그 김에 스티그마에 대한 것도 얻어낼 수 있으면 얻어내고.
함정인 줄도 모른 채 희희낙락해서 참석했다는 사실 자체가 굴욕적이었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 함정에 아주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손쓸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이건 월척이라고 하기도 부족한 상황이다.
대신관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만선의 선장이 된 소녀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생긋 미소 지었다. 작은 손이 팔랑팔랑 움직인다.
“그러고 보니 메일린 부인의 티파티에서 대신관님이 따로 리페를 불렀다고 했죠.”
“다들 들으신 적 있으시죠? 그때 속가를 빌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독대 자리에서 대신관이 칼리오페에게 속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신 거액의 기부를 하라고 협박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소문이었다.
“설마 그 기부라는 게 돈이 아니라—”
추측하듯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다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십니까.”
그때, 대신관의 목소리가 파티장에 울려 퍼졌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매를 애써 끌어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온화한 어조였지만 대신관의 말은 분명한 경고를 담고 있었다.
입 조심해.
수군거리며 눈짓을 주고 받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관의 바로 앞에서 신전이나 본인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순 없었다. 제국민, 그중에서도 특히 귀족과 황족은 의료 전반을 신성력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스 외의 다른 신전에서 치료를 받으면 되긴 하지만, 세 신전의 관계를 생각하면 다소 불안했다.
각 신전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지만 종교의 권세를 위해서 얼마든지 협력하기도 했다. 대신관이 치졸하게 나간다면 신성모독이라는 명분으로 다른 신전에까지 협력을 요구해 영향을 줄 수 있다.
대신관은 조용해진 귀족들을 보며 흥, 하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 대신관의 권위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진 않지.’
신실한 믿음이나 신을 향한 경외심같이 모호한 것조차 사람을 광신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종교는 명확하고 확실한 힘을 가졌다.
‘다들 병으로 골골대다가 죽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기라고.’
대신관의 눈이 칼리오페를 향했다.
‘특히 너.’
그가 입꼬리를 위로 싹 올리며 칼리오페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칼리오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쉽게 쓰러지지 않는구나.’
신관들의 고유 능력인 신성력이 있는 한, 대신관과 신전은 쉽게 전락하지 않을 것이다.
‘명분이 필요해.’
비스 신전의 대신관을 끌어내리는 데 다른 신전 역시 동의할 명분. 신전 간의 협력을 끊어낼 명분.
신전 간의 협력을 와해시켜야 대신관을 무너트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명분을 가지고 있지.’
보일 듯 말 듯 소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웃어?’
칼리오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대신관은 그 미묘한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지금 내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데, 웃어?’
그러나 칼리오페는 대신관의 권위에 눌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조차 마음에 들었다.
원래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는 고요한 법이다.
“리페, 말해 봐. 뭔데 이상하다고 그래?”
고요함을 뚫고 천둥이 우르릉 쳤다.
침묵의 무거움도 느껴지지 않는지, 힐데르트가 가벼운 투로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오만한 얼굴은 대신관의 경고에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힐데르트와 에피니는 칼리오페와 대신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지금 모르는 척 묻는 이유야 뻔했다.
힐데르트의 자색 눈동자와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두 소꿉 친구는 입을 열지 않고 눈빛으로 말을 주고 받았다.
에피니가 힐데르트의 말에 동조하듯 입을 열려고 해 그가 황급히 막았다. 명문 중에서도 명문, 현재 정치적으로도 독보적인 입지에 있는 서모나 가의 후계인 자신은 괜찮지만 에피니는 안 된다.
그의 제지에 멈칫한 에피니가 불만스러운 눈을 했다. 재차 입을 열려고 했지만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오페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왠지 분했다. 에피니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자. 나는 나대로 리페를 도울 수 있으니까.’
고된 훈련으로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이 빈주먹에 오롯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느라 자기가 가진 것을 보지 못하면 안 된다고, 칼리오페가 알려줬다.
‘쳇, 서모나 가…….’
소년, 소녀들이 우정을 키워나가는 동안 대신관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서모나 가는 카스틸로 가와의 독특한 관계성 때문에 쉽게 건들기 힘들다. 황제도 거슬린다, 거슬린다 하면서도 그대로 놔두고 있다. 정치적으로 필요해서 놔두는 것도 있긴 하지만.
‘게다가 오렌과 사이가 너무 좋아.’
비스 신전에서 서모나 가를 외면해도 오렌 신전에서 발 벗고 치료해줄 테니 신성력을 빌미로 압박할 수도 없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똑같이 건방지긴.’
“서모나 영식, 신의 뜻을 따르는 신전에 관해 발언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아까 다른 분들이 경솔하게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은 것에 대해선—”
대신관은 일부러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봤다. 귀족들이 나서지 않도록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만. 두 번째도 못 들은 걸로 하긴 힘듭니다. 신께서 제게 두 귀를 주신 이유가 있으니까요.”
부드럽게 말하고 있으나 명백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힐데르트는 오만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까딱일 뿐이다.
“글쎄, 아까 다른 분들이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은 것과는 다른 경우 같은데…….”
혼잣말처럼, 그러나 다 들리게 중얼거린 힐데르트가 느릿하게 말했다.
“저는 리페에게 뭐가 이상했냐고 물었습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는, 신전에 관한 경솔한 소문이 아니라.”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것도 구별 못 해서 내가 알려줘야 하냐는 듯한 깔봄이 느껴졌다.
“아니면.”
힐데르트가 시선을 들어 대신관을 똑바로 쳐다봤다.
“리페가 뭔가 말하면 곤란합니까?”
“그럴 리가요.”
대신관이 빙글거리며 부정했다.
정곡을 찔린 티를 내지 않고 여유로운 웃음을 짓긴 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저 거만한 도련님의 멱살을 틀어잡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게 그의 최선이었다.
바로 부정하긴 했으나 말을 덧붙여야 설득력도 있고 반격도 할 수 있다.
대신관이 효과적인 말을 고르는 찰나였다.
“어머, 그러면 리페 말을 못 들을 이유도 없겠네요. 자, 말해 보렴, 리페. 뭐가 이상했는지 들어야 할 것 같으니까.”
서모나 부인이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덕분에 대신관은 반격할 타이밍을 빼앗겼다.
칼리오페는 주저하면서도 서모나 부인의 격려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대신관님의 요청으로 단둘이 만난 적이 있어요.”
“응, 그랬지.”
“그런데 자리가 마련되자마자 대신관님이 가장 먼저 베이비 살롱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구요.”
‘역시……!’
입을 열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예상했던 그대로잖아.’
‘찔리니까 말 못 하게 막은 거였어.’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경솔 운운하다니 기가 막혀서.’
불온한 분위기를 민감하게 알아챈 대신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여기서 밀릴 순 없다.
“어린 나이에 성공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으니 칭찬했을 뿐입니다. 상대가 이룬 것 대해 칭찬하는 건 기본적인 대화 예절 아닙니까. 인사하는 차원에서 베이비 살롱 이야기를 꺼낸 겁니다.”
그는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칼리오페를 향해 이어 말했다.
“루스티첼 영애, 오해 살만한 발언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는 마치 억울한 오해를 받는 와중에도 그 원인이 된 상대에게조차 가르침을 잊지 않는 위대한 설교자처럼 굴었다.
“저는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듯하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돌아선 대신관이 한숨과 함께 말을 흘렸다.
“방금 했던 오해 살 만한 발언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의도로 루스티첼 영애가 나를 초대한 건지 모르겠군요.”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대신관은 속으로 히죽 웃었다.
‘저 꼬마가 멍청해서 살았네.’
지금껏 똑똑하게 굴어서 사하르네 부인을 패가망신시키고 자신을 궁지에 몬 것이 아깝게 마지막에 커다란 실수를 했다.
‘바로 베이비 살롱을 달라고 했다고 말했으면 내가 이렇게 발 뺄 틈도 없었는데.’
아마 현장감이나 극적인 효과를 위해 나눴던 대화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할 생각이었을 거다.
‘그딴 거에 정신 팔려서 정작 중요한 걸 놓치다니. 멍청하긴.’
슬쩍 보이는 대신관의 입매가 비웃음으로 옅게 뒤틀렸다. 칼리오페는 담담히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왜 그랬을 것 같아요?’
답은 아주 간단하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을 보여줘서 당신 말에 신뢰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야.’
어쨌거나 한 종교의 수장 격인 존재의 말은 무게도 있고 신뢰성이 높기 마련이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지, 칼리오페의 생각대로 대신관은 뻔뻔한 태도로 거짓말을 일삼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내게 훈계하며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 줄은 몰랐는데.’
고작 이런 걸로 당황해서 바로 반응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대신관은 자신이 문밖으로 나가는 몇 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입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가는 대신관을 붙잡지 못할 것도 없다.
‘아니, 예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모멸적이라 바로 반응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칼리오페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메이드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대신관이 직접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때, 그가 승리를 확신한 그 순간이었다.
“도망치는 건가요?”
“……!”
칼리오페의 질문에 파티장에 있는 모두가 눈을 홉떴다. 설마 저런 질문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라고?! 저 망할 계집이!!’
대신관은 이를 빠드득 갈며 뒤를 돌아봤다. 칼리오페가 뭐라고 말하든 무시하고 나가 이 자리를 모면해 전열을 가다듬자는 생각은 싹 날아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대신관의 눈이 무시무시하게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칼리오페는 그 시선을 받고 흠칫 몸을 떨더니 눈을 내리깔며 파르르 떨었다. 도망치는 거냐는 도발을 던져놓고서 자신의 눈짓 한 번에 바로 꼬리를 쑥 내리는 모습이었다.
‘그러게 한 주먹도 안 되는 게 어디서 건방지게 나한테……!’
대신관이 입매를 뒤틀며 속으로 칼리오페를 비웃었다. 하지만 파티장 내에 감도는 분위기는 대신관의 생각과는 달랐다.
사람들은 대신관의 분노에 가련하게 떠는 칼리오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다소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칼리오페의 상태가 워낙 불안정해 보였다. 도망치는 거냐고 목소리는 도발적이긴커녕 꺼질 듯 가냘프고 희미했다.
대신관은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에 멈칫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었다.
희게 질린 낯을 한 채 칼리오페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라고 대신관님의 행동을 오해하는 분이 계실까 봐 걱정이 되어요.”
대신관은 허, 하고 기가 막힌 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무례한 발언을 저렇게 제 뜻이 아닌 척 넘겨버리다니.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날 너무 쉽게 봤어.’
보통이라면 이대로 당했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대신관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이 당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도망친다고 오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 놓으시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좌중을 둘러봤다.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사실상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을 보고 대신관은 만족해서 미소를 지었다.
“루스티첼 영애.”
그가 자애로우면서도 침중한 목소리로 칼리오페를 불렀다. 이제 그녀의 무례를 꾸짖을 차례였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칼리오페가 얼마나 경우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각인시키기 위해.
“정말…….”
하지만 칼리오페가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눈을 내리깐 채 그대로, 감히 시선을 들지 못하면서도 칼리오페는 결심한 듯 작은 주먹을 맞잡아 꽉 움켜쥐었다.
“정말 무례하고 경솔하다고 책하셔도 할 말이 없어요. 저도 제가 얼마나 불경한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요.”
본인이 먼저 무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다지 칼리오페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대신관에게 도망치는 거냐고 묻는 발언만 따로 놓고 보면 무례한 게 맞다.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의 배신부터 시작해 힘든 일을 잔뜩 겪은 아이가 덜덜 떨면서 한 말은 도저히 무례하게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대신관님이 급하게 말을 쏟아내고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 건 맞잖아?’
대신관이 급히 나가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나빠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 도망치는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금 힘든 일을 겪은 아이가 저렇게 떨고 있는데. 이렇게 몰아붙일 일인지.’
‘대신관이라는 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자애롭지 못하잖아.’
‘아, 리페, 가련하게도……. 가서 안아주고 싶다.’
사람들의 눈에 큰 상처를 입은 여린 아이를 핍박하는 대신관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하지만 대신관님.”
칼리오페가 숙였던 고개를 들며 호소력 짙은 커다란 눈망울로 대신관을 바라봤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도망치는 거라는 생각이.
그러니까 당신이 나가면 도망 치는 걸로 알 거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신관은 그렇게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 이런…….’
기가 막히다 못해 뒷골이 띵 당겨왔다.
대신관은 칼리오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베이비 살롱을 달라고 했던 게 사실인 이상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불리해진다.
그냥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 그러는 거냐며 한바탕 쏟아붓고 이대로 문고리를 돌려 밖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도망 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칼리오페의 물음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도망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면 그 글자를 선명하게 만드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대신관은 이를 갈면서도 문으로부터 멀어졌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렇게 쉽게 링 위에서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사하르네 부인과의 공방을 지켜봤으면서도 대신관은 아직 자신을 얕보는 모양이다.
‘그럴수록 좋지요.’
칼리오페의 공격에 강제로 링 위에 서게 된 대신관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잽을 날렸다.
“그래서, 루스티첼 영애. 생일 파티라면서 나를 추궁하려 이곳에 부른 건가요?”
그는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지금은 칼리오페가 상황을 주도할 틈을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베이비 살롱에 대해 말을 꺼낸 걸로 추궁하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이 똑같은 의심을 받아야 하는 건 알고 있겠죠? 설마 루스티첼 영애에게 베이비 살롱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대신관은 스스로의 말에 허점을 잘 알았다. 디테일을 삭제해 버리면 그만큼 일반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일반화라는 지적이 들어와도 상관없어. 아니, 그래 주면 좋아.’
일부러 말에 허점을 만들어 칼리오페가 그 부분을 공격하도록 만든 것이다. 중요한 건 칼리오페의 말에 계속 꼬투리를 잡아 정확한 본론은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거지.’
사람은 자신의 깊은 의도보다 의외로 사소한 말꼬투리를 잡는 것에 쉽게 분노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말을 빙빙 돌리면 지난(持難)한 공방이 될 테고, 진흙 싸움 같은 양상에 사람들은 질려 손을 뗄 것이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흐르는지 모르겠군요. 저희가 나눈 대화는 서로 잘 알고 있지 않나요?”
하지만 칼리오페는 침착한 태도로 이야기가 옆길로 새지 않도록 주지시켰다.
“대신관님이 독대 자리가 마련되자마자 베이비 살롱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고 말씀드린 건…… 제 딴에는 배려였어요.”
배려? 대신관의 표정이 괴상망측해졌다.
물론 배려가 아니라, 대신관의 말이 신뢰성을 잃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진실을 감춘 채 눈을 내리깔았다.
“제 입을 통한 것보다 대신관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대화의 시작이 어땠는지 운을 뗀 것뿐이에요.”
누구나 말을 할 때 의도적이든 아니든 제게 유리하게 말을 하기 마련이다.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말할 사람은 없다. 지금 칼리오페는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고서 대신관에게 유리한 고지를 주려고 했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저 역시 대신관님이 직접 당시 제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진심을 알려주시길 원했고요.”
작게 중얼거리는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대신관을 바라봤다.
“배려…… 아니, 제 희망이라는 말이 정확하겠네요.”
씁쓸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은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애써 미소 짓던 아이는 묻어두었던 감정이 치밀어 올랐는지 읏, 하고 신음했다.
“그런데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니…….”
아이는 계속해서 미소를 지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입꼬리가 엉망으로 흔들리며 내려가고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흐릿하게 허물어졌다.
홀로 울음을 삼키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사람들이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다들 달려가서 안아주지 못해 안타까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리깐 칼리오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기 어린 소녀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대신관을 담았다.
“그날 대신관님이 뭐라고 하셨는지는 대신관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발긋해진 눈가가 촉촉했다.
대신관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칼리오페의 반응에 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반응하든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저는…… 사하르네 부인께 바랐던 것처럼 대신관님도 직접 진실을 말씀해주시길 원했어요.”
다른 이해관계나 처벌, 배상 따위는 관심 없고 한결같이 진심만을 원한다는 소녀의 말. 그 말만큼 사람들의 가슴에 뜨겁고 선명하게 닿는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것이 칼리오페의 진심이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칼리오페는 오로지 하나, 진실만을 바랐다.
가족들의 죽음에 얽힌 진실.
그 사람들을 반드시 색출해 보복하겠다는 것보다 진실을 밝혀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막을 수 있기를. 그래서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의 진심 어린 모습이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몇몇 귀부인들은 그녀를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만큼 대신관에게 압박이 돌아갔다.
신성한 정령 같아 보이는 칼리오페를 울린 대신관은 신의 대행자가 아니라, 신의 뜻을 반하는 악마 같아 보였다.
압박을 이기지 못한 대신관이 입을 열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완패다.
‘이 내가 졌다고?’
자신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소녀에게?
인정할 수 없다.
손톱이 움켜쥔 손바닥을 파고 들었다. 분노로 머릿속이 붉은 피만큼이나 붉게 변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이를 으드득 가는 대신관을 본 서모나 부인이 앞으로 나섰다.
“대신관님.”
부름에 대신관은 흠칫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주변 사람들이 어떤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보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말씀해주시지요.”
그게 그나마 대신관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일 겁니다.
뒷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신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요. 속 시원히 이야기하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추측이 생기기도 하니까요.”
칸테나 부인과 로아힌 부인 역시 동조하며 나섰다. 얼핏 보면 대신관의 편을 들며 조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명문가의 귀부인들이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서 한두 마디씩 작게 보태기 시작했다.
대신관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더 이상 자신의 압박이 귀족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병마는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재앙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맞서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있을 수 없다.
“혹시…… 제가 어려운 것을 원한 건가요?”
칼리오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운 눈썹을 살풋 찌푸리며 말했다.
“부모님께서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배웠는데…….”
졸지에 대신관은 어린애도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됐다.
“너……!”
“대신관님께선 절대 말씀하지 않으실 것 같으니 제가 말씀드릴게요.”
파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순 숨을 멈추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칼리오페와 대신관의 반응으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대신관님이 리페, 네게 베이비 살롱을 달라고 했니?”
성급한 귀족 한 명이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모두가 설마설마하면서도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뭐……?”
“그럼 대체…….”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대신관님은 제게 베이비 살롱을 달라고도, 기부하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칼리오페는 사람들의 얼굴에 퍼져 나가는 파문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혼란이 정점을 찍었을 때, 툭 진실을 내뱉었다.
“그냥 베이비 살롱 자리에 신전을 지을 테니 영광으로 알라고 하셨죠.”
“……!”
경악성이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울렸다.
방금 칼리오페가 한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칼리오페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대신관의 말이 너무나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스티그마가 될 땅을 모르는 척 속이고 기부하라는 식으로 말해도 황당할 것이다. 그래서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설마, 혹시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는가.
그런데.
‘뭐? 영광?!’
‘순진한 어린애한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건 사기라는 말로도 부족한데?!’
‘신전에서 저래도 돼?’
‘기가 막혀서……. 대체 귀족들을 어떻게 보는 거야?’
‘이건 리페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전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보는지 알려 주는데.’
귀족들이 아무리 신전에 많은 돈과 재산을 바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기부다. 신전에선 기부 받는 걸 당연시해서 딱히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건 진작에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귀족들의 사유재산을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도를 지나쳤다.
‘이대로는 안 돼.’
‘치유력을 인질로 얼마든지 선을 넘어도 된다고 생각하나 본데…….’
‘뭔가 개혁이 필요해.’
사람들의 눈초리가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다. 대신관에게 반발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소극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은 대신관이 식은땀을 흘렸다.
상황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니라며 부정하면 오히려 꼴사나울 뿐이다. 꼴사나운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 아예 사하르네 부인 때처럼 저 영악한 계집애가 거짓말이라며 증거를 들이밀 수 있다.
아니, 증거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아까부터 저렇게 여유로운 것 아닌가.
사실 칼리오페에겐 대신관과 대화한 녹화본이 없었지만, 앞선 사건이 있었기에 그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칼리오페의 계획이었다.
대신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부정하지 않고 인정한 뒤 이곳에 신전을 짓는 건 영광이 아니냐고 뻔뻔하게 나오기엔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 귀족들 기를 죽여놔야 해. 안 그러면 이 다음이 힘들어.’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이어도 어쩔 수 없다. 원래 사람이란 가장 원초적인 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니까.
“이곳에 신전을 지으면 신성력이 배가 되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에 한 말입니다. 치유력이 강해지면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이 상황에서 신성력과 치유력을 운운하는 의도가 빤했다. 신전이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아무런 의도 없이 순수한 호의로 베푼 적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사람들을 협박하고 칼리오페를 압박하기 위해 들먹이는 것이다.
“루스티첼 영애, 병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리다고는 하나 어찌 본인만 생각하는지.”
대신관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간교한 혀로 칼리오페를 옭아맸다.
“신에 반하는 속가나 부르는 당신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전생에 비스 신전이 스티그마를 얻고 난 뒤의 행보를 생각하면 더더욱.
‘스티그마를 봉쇄해 독점하고, 그 덕에 축적한 힘을 사용해 종교재판과 이교도심판을 벌이고……. 나중에는 내전까지.’
칼리오페는 대신관의 말에 하나도 분노가 일지 않는 자신이 신기했다.
확고하고 분명한 의지와 이성과 감정이 칼리오페의 작은 몸 속에서 숨을 쉬었다.
그녀가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실 때마다 땅이 동시에 호흡했다. 충만한 에테르가 반짝반짝 빛나며 기쁜 듯이 춤을 췄다.
사람들이 이변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파아아앗!
맑은 빛이 터져 나오며 사위를 물들였다.
“뭐, 뭐지?!”
“꺄아아악—!”
오색찬란한 빛이 패닉에 빠진 사람들을 감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했지만, 빛이 닿자 몸이 따스해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빛이 마음을 진정시킨 건지 모두들 혼란을 곧 가라앉히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눈부셨던 빛이 잦아들어 사람들은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헉……!”
“세상에…….”
그곳에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고래가 긴 꼬리를 부드럽게 움직이며 헤엄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것처럼 기묘하고 환상적인 광경에 사람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멍하니 고래만 바라봤다. 신화 속에 나오는 땅의 정령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파티장 내부를 한 바퀴 휘돈 고래가 칼리오페에게 다가갔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커다란 고래가 자신의 꼬리지느러미만 한 아이 주변을 유영한다. 희고 푸르게 빛나는 고래가 헤엄칠 때마다 칼리오페의 남보랏빛 머리칼이 함께 헤엄쳤다.
칼리오페의 바로 앞에서 고래가 멈춰 섰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고래의 목소리가 울렸다. 촉촉한 흙더미를 스치는 바람 같기도 하고, 깊게 뿌리 내린 나무의 울림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칼리오페는 그에 반응하듯 고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이전보다 더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그 빛을 못 이기고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이미 고래는 사라져 있었다.
칼리오페도 함께.
* * *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방금 그건 분명히 신화 속의, 그그—”
“땅의 정령 프네우마케투스테라님입니다.”
마법사인 칸테나 부인이 명확하게 말했다.
“진짜인가요? 진짜 땅고래가 이곳에…….”
“느껴지는 기운은 확실했어요.”
칸테나 부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법사인 그녀는 사람들보다 에테르를 더 예민하게 느꼈다.
그 두려울 정도로 강대한 힘.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호의적으로 행동했음에도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에테르를 칸테나 부인만큼 민감하게 느끼지 못해도 초월적 존재에게 느낀 경외심은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았다.
“이곳이 스티그마라서 나타난 걸까요?”
땅고래가 숨을 쉬는 땅, 스티그마.
하지만 그 땅에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모습을 드러낸 역사는 없었다.
“그런데 왜 리페를…….”
사람들은 조금 전까지 칼리오페가 서 있었던 빈자리를 바라봤다.
분명 땅의 정령이 칼리오페를 향해 이야기했었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하고.
신성력도, 치유력도 쓸 수 없는, 대신관의 말에 따르자면 속가를 불러 신의 뜻에 반한 보잘 것 없는 아이에게.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