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이 땅, 제 껀데요? (20/41)

Chapter 6. 이 땅, 제 껀데요?

“세상에, 제 살롱에서 하르첸 경이 연주하는 날이 오다니…….”

“루스티첼 영애의 노래를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들으니 너무 좋네요.”

“사실 주변에서 속가에 대한 말을 들어도 아직 편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레이디 덕분에 정말 수준 높은 토의를 할 수 있었어요.”

“아, 사실 저는 루스티첼 영애를 직접 본 것만으로 충분해요.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사진에 사인 좀…….”

칼리오페는 소규모의 온화한 살롱에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윗분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많이 속가를 퍼트려야 하니까.’

명성이 드높거나 선망받는 살롱이 아니라 그런지, 그들은 소위 중앙 살롱의 유명인인 칼리오페를 보고 신기해하고 놀라워했다.

원래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저 유명인을 만났다는 흥분만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칼리오페의 다정하고 차분한 성품을 보고 금세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칼리오페의 이야기는 금방 사교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그런데 루스티첼 영애가 몽에르트 가의 후계 다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면서요.”

“세상에, 너무 다방면으로 우수해서 감탄만 나오네요.”

물론, 칼리오페가 열심히 부르고 다니는 속가도 함께 퍼졌다.

“흠, 흐으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리페가 불렀던 속가였다.

‘노래란 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소년, 소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알던 노래는 엄숙했다.

취미로 노래를 하더라도 고상하고 우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칼리오페가 부른 노래는 어디서든 쉽고 편하게 허밍이 나왔다.

‘뭔가 공감 가고, 나랑 잘 맞는 것 같아.’

신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으니 당연히 공감 갈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였으니까.

거기에 민가에서 유행했던 만큼 쉽고 따라하기 편한 멜로디였다. 더불어 하르첸이 편곡하면서 중독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무엇보다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묘한 마성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의 귀에 착 달라붙었다. 그러니 머릿속에서 노래가 빙빙 도는 건 당연했다.

* * *

“이건 예삿일이 아니야.”

덧창 문까지 걸어 잠근 방안에서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짧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그조차도 성가시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옷자락을 휙 젖혔다.

“귀족들 사이에 속가가 유행하는 게 말이 돼?!”

“아직 어린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 그 나이 대에는 좀 반항적이고 반사회적인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긴 로브를 걸친 남자가 굽신거리며 그를 달랬다. 길이는 달랐으나 그들은 같은 문양이 수놓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어린애들? 지금 서너 살짜리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야, 이게?”

“그건…….”

“3, 4년 후면 정재계에 나설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거잖아! 그냥 보잘 것 없는 애들도 아니고 몽에르트와 서모나가 주도적이라고!”

짧은 로브가 책상을 쾅, 내려쳤다. 그는 드물게 흥분하고 있었다.

요즘 되는 일이 잘 없다.

그들은 리브살어의 교육을 엄격히 제한해 신전 문화와 권력을 한 데 묶으려고 했다. 그건 신전이 잊을 만하면 써먹던, 오래되었지만 잘 먹히는 정책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인가.

다른 문화가, 심지어 신전의 정책과 완전히 대치되는 문화가 유행하면서 그 계획은 다 무너졌다.

핵심 정책 하나가 어이없게 파훼 되었다. 제대로 손쓸 새도 없이.

“그런데……. 막을 명분도 없지 지 않습니까.”

긴 로브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어떤 살롱에서 한 소녀가 속가를 불렀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 원래라면 그들의 귀에도 들어오지 않은 영양가 없는 소문이었다.

그런데도 귀에 들어왔던 건, 그들이 문화를 통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하던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써도 별 수 없긴 했다. 소년, 소녀들 몇이 속가를 듣고 즐겼다고 해서 정부나 신전이 나서는 것만큼 웃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들이 꿈꾸는 건 개개인의 사상 검열—종교 재판—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러기엔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때 놔둔 게 이렇게 커지다니…….”

하아, 짧은 로브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심기를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그는 한결 가라앉은 표정으로 신을 모시는 사자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은 신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신을 찬양해 마땅합니다.”

“예, 그게 인간의 본문이죠.”

“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이상과 진리입니다. 모두 신께서 주관하시는 가치지요.”

그는 엄청난 사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땅과 육신의 제약에 묶여 있는 인간에 대해 노래하다니, 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명분은 섰다.

말을 번드르르하게 했지만 결국 이건 권력 다툼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쥐기 위해선, 그들과 결탁한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선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야 했다.

“황제 폐하께 알려야겠어.”

짧은 로브의 말에 긴 로브가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었다.

“아참, 그런데 처음 속가를 불렀다는 그 여자애의 이름이 뭐였지?”

* * *

“칼리오페 루스티첼?”

채광창을 타고 넘어온 햇살에 방안을 가득 메운 화려한 기물이 번쩍번쩍 빛났다.

새하얀 옥좌 위에 앉아있는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비단 햇살이 눈 부셔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십니까?”

짧은 로브의 질문에 사내는 옥좌에 비딱하게 몸을 기댔다.

속가를 유행시킨 소녀가 있다고 하길래 황당했다. 뭘 어떻게 하면 귀족들 사이에 속가가 유행한단 말인가.

‘그 체면 빼면 시체일 놈들 사이에서.’

아직 나이가 다 차지 않은 영애와 영식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하나 어이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

아무리 루스티첼 가의 가세가 커졌다고 해도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일개 영애의 이름을 사내가 알 리 없다. 정치적으로 긴밀한 동맹 관계도 아니고, 적대 관계도 아니니까. 그러니 원래라면 들어본 적 없어야 했다.

하지만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분명…….’

남보랏빛 머리칼에 유난히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고, 통통한 뺨이 복숭아처럼 탐스러워 뵈는 아이였다. 당연히 아이가 귀여워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조카님과 춤을 추었지.’

황자의 열두 살 생일 축하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황자가 칼리오페에게 춤을 신청하고, 아스타레아스가 저지하며 그 소녀와 함께 춤을 추었다.

‘조카님께선 황자가 탈리아덴 영애와 춤추게 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했지. 내 뜻이 그거니까.’

황자가 춤을 신청한 게 그 소녀가 아니었어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란 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소녀의 이름이 나온단 말이지.’

사내는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조카님이 이 숙부에게 진실을 말한 걸까. 아니면 다른 깜찍한 짓을 벌이는 걸까.’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더 짙고 탁하게 기울었다.

“혹시 카스틸로 가가 이 사건에 관련된 거 있나?”

연관점이 있나 싶어서 물어보자 긴 로브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없습니다.”

“확실한가?”

“그 소녀가 노래 부른 곳은 물론이고, 최근 들어서 살롱에서 속가에 대해 많이 토의하는데 그곳에도 카스틸로 공자는 없었습니다. 공작 부인이야 당연하고요.”

“그래.”

그제야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걸리는 점이 있으십니까, 폐하?”

짧은 로브의 질문에 사내,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나 했을 뿐이다.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군.”

작게 중얼거린 황제의 눈이 날카로운 예기를 띄며 남자들을 바라봤다.

“신경 쓸 다른 게 산적해 있으니 말이야.”

그 말에 긴 로브는 움찔해서 몸을 낮게 숙였다.

짧은 로브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너무 그렇게 조급해하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요.”

“진행?”

황제가 코웃음 쳤다.

“저번에 교세 확장이 더디다고 했지, 실패했다고 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가 팔걸이에 팔을 걸치며 턱을 괴었다.

“속가가 성행하는 건 실패했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황제의 눈동자 안에서 시꺼먼 살기가 음험하게 소용돌이쳤다. 새파랗게 질린 긴 로브는 그대로 엎드렸지만 짧은 로브는 난처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황제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매섭게 질책했다.

“오히려 있던 것까지 다 깎아 먹고 있으면서 말은 똑바로 해야지. 감히 누구를 우롱하려 하는 것인가. 내가 네 세 치 혀에 놀아 날 사람으로 보이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폐하. 답답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 저희가 부족한 탓입니다.”

짧은 로브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제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너희를 밀어줬다고 생각하는 거지. 잘하지 못하면 소용없어.”

“너무 그러지 마시고. 저희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짧은 로브가 빙글거리며 은근한 태도로 황제에게 물었다.

그는 옥좌 가까이 나가와 황제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늘은 보름달이 뜨는 날 아닙니까. ‘샘’에 방문하실 예정이시죠?”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샘이라는 말에 눈동자 속의 검은 분노가 누그러진 게 보였다.

“알았다.”

황제가 손을 내젓자 짧은 로브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옥좌 가까이에서 물러났다.

“성녀는?”

“바로 그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짧은 로브의 대답에 황제는 하, 하고 비소를 지었다.

“아직이란 말이군.”

그래도 별로 찔리지 않는 얼굴을 보니 순조롭게 준비 중인 것 같았다. 황제는 더 질책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거는 대답을 잘 해야 할 거야.”

더 중요한 문제가 있기에.

“스티그마는 찾았나?”

황제의 질문에 처음으로 짧은 로브의 웃음이 사라졌다. 한순간이지만 그의 눈매가 경련하듯 일그러졌다가 돌아왔다. 이 문제에 관해선 그도 속이 터질 정도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황제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다 보고 있었다.

“……일단 범위가 좁혀지고는 있습니다.”

“내가 대답을 잘 해야 한다고 말했을 텐데?”

황제가 턱 끝을 치켜들며 말했다.

“스티그마를 미리 찾겠다는 말을 들은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겨울에 들었는데 이제 가을이지.”

그 지적에 짧은 로브가 짐짓 울상을 지었다.

“제도 중 동쪽이라는 것은 알아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핀포인트만 집어내는 건 시일이 소요되는 일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짧은 로브 본인이 가장 조급해하고 초조해하며 스티그마를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황제보다도 그가 더 스티그마를 원했다.

그러나 총력을 기울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땅이 숨을 쉬는 시일에 가까워질수록 에테르 반응도 격렬해진다. 지금 상태로는 에테르와 테르의 흐름을 읽어도 그 정도 아는 게 최선이었다.

아주 조금만 더 시일이 가까워지면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스티그마가 제도에 생길 거라는 걸 알고 나서 일 년 가까이 지났는데, 고작 제도 동쪽이라는 것만 알아냈다고?”

“다른 신전은 아직 스티그마가 제도에 생길 거라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황제가 분노를 누그러트렸다.

“꼭 사수해야 해. 내가 다른 실수를 다 넘어 가주는 것은 모두 그것 때문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믿고 맡기십시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짧은 로브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든 지금 이 상태를 두고 볼 순 없겠지. 신전의 가르침과 대치되는 속가가 유행하기 시작하면, 신전의 권위나 힘도 떨어질 테니까.”

그건 신전을 통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하는 황제의 계획에 좋지 않았다.

“예, 저희는 예정대로 다른 신전과 협력해서 리브살어 교육을 제한할 예정입니다.”

긴 로브의 말에 황제는 수긍하면서도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소용 없을 텐데.”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요.”

짧은 로브가 첨언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배우지 못하는 것을 뽐내며 신분과 권력 차이를 드러내길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으니까.

“그래서 청이 있습니다만……. 속가를 금지해주셨으면 합니다.”

고대어이자 성서에 쓰인 신성어인 리브살어에 대한 권한은 신전에 있다. 하지만 금서를 지정하는 것을 비롯해, 제국의 문물을 금지하는 권한은 황제에게 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예전처럼 황제가 마음대로 금지하지 못하고 당연히 의회를 거쳐야 했다.

“귀족 놈들이 반대하지 말아야 할 텐데…….”

황제가 미간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귀족들과 기 싸움하는 게 피곤한데 의제에 올릴 게 생기니 성가심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하긴, 무슨 반대를 하겠어.”

무역권을 놓고 밥그릇 다툼하자는 것도 아니고, 채굴을 제한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속가를 금지하는 건데. 아무도 관심 없겠지.”

“예, 그렇겠지요.”

이걸로 갑자기 나타나 그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속가는 치워버릴 수 있다.

황제도, 로브를 입은 남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 * *

“아이들이 크면서 잠깐 즐기는 것 아닙니까. 그걸 왜 굳이 금지씩이나 합니까.”

서모나 후작의 말에 황제가 왈칵 인상을 구겼다.

“지성을 가지라 교육하면서 지적 토론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금지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엘피너스 백작이 냉큼 동조하며 말을 보탰다.

“그렇습니다. 설령 금지한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뭐라고 해야 합니까.”

“굳이 금지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폐하.”

귀족들의 반응에 황제가 옥좌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튀어나왔다.

반대에 부딪힐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상과 진리요. 영혼이 살과 피와 욕망에 얽매여 있는 인간에 대해 탐구하다니. 장차 이 나라의 미래가 될 아이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쏟아서 되겠소?”

황제의 말은 정론이었다. 적어도 이 나라가 세워질 당시에는 그랬다. 하지만 물질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은 해묵은 구시대의 관념일 뿐이다. 그건 명분으로나 이용될 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아니었다.

“육신에서 해방되기 전까진 우린 다 인간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게 그다지 나쁘게 보이지 않는군요.”

로아힌 백작의 말에 몽에르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천박하다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딸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딱히 잘못된 건 없어 보이는군요.”

“진리를 탐구하는 자로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육신과 영혼의 차이에 대해 알 수 있겠지요.”

뛰어난 마법사이자, 적룡 부기사단장인 칸테나 부인 역시 동조했다.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지만 이들은 의연했다. 오히려 속가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대체 왜?!’

이유야 간단했다.

‘속가 부르는 거 리페잖아?’

‘우리 딸 친구인데!’

‘우리 아들 친구야!’

‘난 리페가 좋아!’

그들은 너무나도 확고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매일 저녁, 식사할 때마다 제 아이가 ‘리페 너무 좋아!’ 하며 꼬물꼬물하고 있다.

게다가 칼리오페는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까지 끼치고 있었다.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길래 뿌듯해하다가 보면, 그 원인이 모두 칼리오페와 닿아 있었다.

[리페는 이러더라고.]

[리페가 얘기한 책이야. 재밌대.]

[리페는 이런 사람이 좋댔어.]

그뿐만이 아니다.

더 어렸을 때, 편식을 비롯해 안 좋은 습관들까지 칼리오페가 다 해결해주지 않았던가.

‘내가 봐도 괜찮은 애구먼!’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디 칼리오페가 제 아이들과 평생토록 친구로 지냈으면 했다.

아이가 칼리오페 또래가 아니라서 그런 접점이 없는 사람도 생각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리페 귀여워! 리페 사랑스러워! 리페 멋져!’

‘보통 집에 리페랑 같이 찍은 사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들은 칼리오페가 다섯 살일 적부터 봐왔다. 장장 8년 가까이 아이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 것이다. 그렇게 다정하고 속 깊은 아이에게 정이 가지 않을 리가 없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아이는 항상 그들에게 감사하며 보답하려고 애썼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는 글씨체가 엉망이었는데, 점점 또박또박 바르고 예쁘게 변해가는 걸 지켜보는 재미도 상당했다. 이미 애들은 다 컸고, 아직 손주도 없는지라 적적한데 그 아이가 마음을 많이 달래줬다.

‘리페는 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나 마찬가지라고!’

서모나 후작과 엘피너스 백작, 로아힌 백작과 몽에르트 후작, 그리고 칸테나 적룡 부기사단장. 이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끈끈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뭐지? 몽에르트와 서모나가 손을 잡은 건가?’

황제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중립을 지키는 몽에르트와 친카스틸로인 서모나가 손을 잡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간 각자 이익을 위해 몇 번 손을 잡은 적도 있긴 하지만, 그건 확실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익을 두고 서로 다투며 대립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이유도 없는데 협력하다니……. 역시 결탁한 것인가?’

황제의 오해가 깊어졌다.

그리고 그 오해에 빠진 건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황제의 의견에 반대한 자들 모두 모두 중앙 정계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이었다. 엘피너스 백작가가 그중에서 조금 빠지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중에서 그렇단 소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군.’

‘애들 사이에서 속가가 유행한다길래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게 큰일도 아니고…….’

‘일단 지켜보는 게 좋겠어.’

보수적인 사상을 가지고 속가에 부정적이던 사람들도 한 발 물러서게 되었다.

그 누구도 둘 사이에 있는 것이 정치적 결탁이 아니라, 덕질하는 동지애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칼리오페로 인해 생긴 신조어 덕후—덕분에 후해짐—는 이제 파생어까지 생길 정도로 성행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을 필요는 없겠지요. 일탈도 그 나이 대의 권리 아닙니까.”

서모나 후작이 그렇지 않냐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그의 말에 움찔했다. 짐짓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인 듯 말하고 있지만, 그 속뜻을 못 알아들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자유와 권리.

지금 황제의 제안은 확실히 귀족의 행동을 제한하고, 자유와 권리를 한정시키는 것이었다. 그걸 달가워할 귀족들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제한해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없는데.

‘거기다 이거 왠지 돈 냄새가 나는걸?’

전생에선 카메라의 발명이 늦기도 했지만, 신문 기사나 수사 과정에서 주로 쓰였기 때문에 개인적 사용이나 상업적 사용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전생과 달리 칼리오페가 상업 모델로 인기를 끌면서 관련 산업이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세속적인 가치가 귀족들 사이에서 더더욱 부상했다.

‘이런 문화 산업이 막대한 부가가치를 가졌다는 건 모델 산업을 봐서 알아.’

‘성가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려면 신전과 마찰이 생겨. 하지만 속가라면……?’

‘천박하다는 인식만 희석시키면 꽤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되겠는데?’

‘지금 애들 사이에서 속가 유행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지? 걔를 쓰면 잘 될 것 같은데…….’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뭐가 유행하는지 관심 없던 사람들도 솔깃하기 시작했다. 지금 떠오른 사업 구상을 위해서라도 속가를 금지해서는 안 됐다.

사업가적 기질이 없는 사람들도 별 문제 아닌 일에 들불 같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고위 귀족들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저 반대에 괜히 맞부딪칠 필요 없지.’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긴 시간 동안 모델로서도 활동해왔다. 그리고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모델이었다. 귀족들 중에서 그녀의 팬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팬들은 모두 칼리오페의 행적을 어느 정도 꿰고 있기에, 속가 유행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리페가 하는 일에 금지라니요? 슬쩍 들어봤는데 좋기만 하던데.’

‘훗, 노래하는 모습 사진도 이미 구매 완료했지요.’

이제 황제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라곤 친황제파인 피엔테 후작을 비롯한 무리뿐이었다.

이들도 딱히 열정적으로 반대한 건 아니었다.

황제가 그들에게 귀띔해준 정책이 아니었기에—황제는 당연히 통과될 줄 알아서 물밑작업을 하지 않았다— 구색 맞추기 식으로 의견을 개진한 것뿐이었다.

“자, 그럼 결정된 것 같군요.”

결국 속가를 금지하는 법안은 거센 반대만 듣고 가결되지 않았다.

제국 최고 의결 기관인 은사철나무회. 이곳에 말석이나마 차지하는 것조차 최고의 영예로 꼽혔다. 그런데 이곳에 아직 발도 들이지 못하는 어린 소녀 하나가 이들의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소녀의 그림자에 은사철나무의 가지가 짙게 물들었다.

* * *

“좋아요, 레이디.”

찰칵—.

“고개 조금만 더 옆으로……. 너무 예뻐요. 완벽해요.”

찰칵, 찰칵—.

플래시 빛이 눈부시게 터져나왔다.

“하아아아, 천사가 따로 없네.”

지켜보던 여자가 얼굴을 뺨으로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지금 칼리오페는 천사 날개를 단 채 깃털에 파묻혀 있었다. 요구하는 포즈를 취하며 열심히 일하던 칼리오페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저, 이제 마칠 때 아닌가요? 아직도 부족해요?”

촬영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었다.

원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으면 그럴 수 있지만, 처음부터 계속 ‘좋아요, 좋아요.’ 남발이었기 때문에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왠지 모르겠지만 카메라 감독이 탄식을 흘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기획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럼 그만하도록 하죠. 피곤하죠? 그 생각을 못 했네.”

“아니에요. 다들 고생하셨어요.”

칼리오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든 것보다는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었을 뿐이다.

도움을 받아 날개를 떼어내는데 카메라 감독이 미련 넘치는 손길로 카메라를 쓰다듬는 게 보였다.

“행복한 작업이었어……. 평생 계속하고 싶었어. 배도 고프지 않아. 밥 안 먹어도 돼……. 더 찍고 싶어. 찍게 해줘…….”

“…….”

칼리오페는 왜 촬영이 길어졌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못들은 걸로 하자.’

날개를 떼어주던 사람 역시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 촬영은 매년 연말마다 발매하는 포토북을 위한 것이었다.

다섯 살 겨울, 칼리오페의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니카이논 사에서 포토북을 만들어준 게 계기가 되었다. 당시 생일 파티에서 포토북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카이논을 닦달했다.

카이논은 이게 부탁인지 제안인지 협박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는 칼리오페에게 제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바람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당연히 칼리오페는 기겁하며 반대했다. 그 포토북을 선물로 받았을 때도 부끄러웠는데 그걸 판매까지 하겠다니? 그것도 해마다?

[수익금은 모두 고아들을 위해 쓰일 겁니다.]

그러나 카이논은 칼리오페에 대한 파악을 이미 끝낸 상태였다. 포토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액수와 그것이 고아의 삶을 어떻게 구원할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칼리오페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 다음은 루스티첼 일가의 허락을 받을 차례였다.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이 반대할 게 뻔하지만, 딱 하나 물러서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막내 아가씨의 고집이지.’

그리하여 매년 칼리오페의 생일에 맞춰 포토북을 발매하게 되었다.

계절마다 촬영하긴 하지만 오늘은 가장 중요한 표지 작업이었다.

처음 표지에 맞춰 언제나 천사 컨셉의 사진을 표지로 쓰고 있는 데다가 발매일이 발매일이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천사의 탄생 시리즈’라고 불리고 있다.

유행은 지나간다던데 해가 갈수록 포토북 판매량은 늘어만 가고 있다. 심지어 예전에 발매된 포토북을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매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판매하려는 사람들이 잘 없었기 때문에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다는 소리가 돌았다.

‘조금 곤란한 요청도 있고…….’

[발매하는 포토북을 모두 다 구매하고 싶습니다. 권당 가격을 열 배씩 쳐주지요.]

정말 농담으로도 황당할 소리였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겠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결코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수상한 사람이었어.’

평범한 행색이었지만 협상하는 느낌을 보아 고위 가문의 고용인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가문에서도 그런 사람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필시 눈에 띄었을 사람인데.

처음에는 다 구매한 후 웃돈을 붙여 팔려고 하나 싶었지만, 부르는 대로 쳐주겠다고 한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카이논이 미심쩍어하자 상대는 빙긋 웃으며 가지고 온 서류가방을 열었다.

[이건……!]

카이논은 깜짝 놀랐다.

서류가방 안은 벨벳으로 덧대어져 있고, 그 위에 지폐 열 장이 전시품처럼 놓여 있었다.

아니, 지폐가 아니라 금을 판판하게 담금질해 지폐처럼 만든 것이었다. 그 표면에는 마법 가공으로 인한 반짝임이 어려 있었다.

카이논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어쨌든 사업하는 사람인지라 보자마자 무엇인지 알았다.

이 금 지폐 한 장당 1억.

명시 가격은 그랬다. 그러나 실제 가격은 더 비쌌다.

제조 단가가 너무 높아서 애초에 잘 발행해주지도 않는데—만 운드짜리 지폐 1억 장을 찍는 것의 열 배보다 더 들었다— 사람들의 선호도가 크기 때문이다. 선호도가 큰 것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확실한 이유는 돈세탁이 쉽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보통 금액만 적으면 되는 수표책을 이용했다. 카이논 역시 억 단위 거래를 해봤지만 항상 수표책만 썼다. 수표책은 제조 비용도 들지 않고, 자금 추적도 가능하기에 제국에서도 적극 권장했다.

그러면서 더더욱 금 지폐를 발행하지 않고, 금 지폐의 가치는 계속 상승하고…….

여하간 지금 가치보다 더 올랐으면 올랐지, 결코 떨어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걸 열 장이나 턱 내놓는다고?’

그만한 가문이 대체 몇이나 될까?

‘다른 것보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대체 뭐지?’

[주인님께서는 이 열 배, 아니 백 배가 들어도 상관 없다고 하셨습니다.]

카이논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상대가 짙게 미소 지었다.

[그 돈을 어떻게 쓰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도요.]

그 말은 카이논이 이 돈을 혼자 꿀꺽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장부에는 어차피 포토북 발매 가격과 팔린 수량을 적을 테고, 그 차액의 존재는 오로지 카이논과 눈앞의 상대, 그리고 그녀의 고용주만이 안다.

순간적으로 카이논 자신이 제어할 새도 없이, 대략적인 금액과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때요?]

상대의 입술이 유혹적으로 움직였다.

* * *

“무슨 일 있으세요?”

카이논은 갑자기 들린 말에 회상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숙이니 칼리오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도 계속 안 좋으셨는데 멍하니 서 계시고.”

“……별일 아닙니다. 촬영이 길어져서 지쳤나 봐요. 저는 한 것도 없는데요.”

“한 것이 없다니요? 계속 콘셉트 논의하시고, 확인하시고, 피드백 주시고……. 그 와중에 직원들도 챙겨주셨잖아요.”

칼리오페는 촬영으로 정신없이 바쁜 스태프들에게 카이논이 물을 챙겨주는 모습을 봤다.

카이논은 잠시 말없이 칼리오페를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배고프실 텐데. 식사 함께하실래요?”

“좋아요.”

“앗, 사장님 치사해!”

주변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직원들이 볼멘소리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거 직권남용 아닌가요?”

“이렇게 여러 입이 비어있는데 아가씨한테만 냉큼!”

“아가씨이.”

몇 년간 같이 일하며 친해진 직원들이 칼리오페를 울망울망한 눈으로 바라봤다.

“다 같이 먹으러 가요. 제가 낼게요. 오늘 촬영 길어서 다들 고생하셨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아가씨께서 제일 고생하셨죠. 사장님이 낼 거예요. 같이 얻어먹어요.”

“그래도…….”

“아가씨께서는 함께 식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정 뭔가 더 해주고 싶으시다면…….”

흠흠, 헛기침한 직원들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사진 같이 찍어도 돼요? 날개만 다시 달고…….”

“저는 식사 때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직원들이 사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슬금슬금 칼리오페 곁으로 다가왔다.

“자자, 밥 사달라며. 어서 밥 먹으러 가자.”

카이논이 직원들을 툭툭 밀며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사장님이 아가씨 옆에 앉으려고 수 쓰는 거죠?”

“아까 촬영 전에 아가씨한테 부탁해서 같이 사진 찍는 거 다 봤어요. 우린 바빠 죽겠는 시간에……!”

직원들은 밀려나면서도 끝까지 종알종알 불만을 토해냈다.

칼리오페는 그 사이좋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며 하하 웃었다.

* * *

“그러고 보니 신전이 리브살어를 제한했다더군요.”

카이논의 말에 칼리오페는 우선 고개만 끄덕였다.

후식으로 나온 벌꿀 사과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얌냠 먹느라 입안이 빵빵했다.

“네, 들었어요.”

빠른 속도로 깨끗이 넘기고 나서야 입을 열어 대답했다.

달콤한 디저트로 행복에 물들어있던 뺨이 수심에 잠겼다.

신전이 그런 정책을 펼 거라는 소리를 듣고 막기 위해 속가를 불렀지만, 결국 예정대로 리브살어는 제한되었다.

“저 같은 사람은 평생 못 배우게 됐지요.”

카이논의 말에 칼리오페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맛있었던 케이크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 없어요.”

“네?”

카이논의 말에 애꿎은 케이크만 바라보고 있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저는 그다지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신전에 나간 건 어렸을 때 뭐 맛있는 거 준다고 해서 갔을 때뿐이거든요.”

“초콜릿 맛있었죠.”

카이논의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서 딱히 리브살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는데……. 사업하다 보니 슬슬 필요하더라고요.”

비즈니스 매너인지, 허영인지. 기득권은 모두 리브살어를 할 줄 알다 보니 필요한 때가 있었다. 그 공통점 하나로 유대감을 갖기도 하고, 리브살어를 못 알아들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젠체하기도 했다.

칼리오페도 그런 생리를 잘 알았다. 그랬기에 제한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부와 권력은 점점 밖으로 돌지 않고 기득권에만 집중될 것이다. 그 언어의 근간이 되는 신전은 최대 수혜자가 될 게 분명하고.

“그런데 이제 안 쓰더라고요.”

카이논의 말에 칼리오페의 미간이 좁아졌다.

“리브살어를요?”

“네, 귀족들 사이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카이논의 사과에 칼리오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쁜 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너무 봐주지 마세요, 아가씨.”

비서가 옆에서 끼어들며 카이논에게 핀잔을 주었다. 칼리오페는 재차 고개를 저으며 카이논의 역성을 들어주었다.

“저도 귀족의 폐쇄성은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옛날하곤 비교도 못 하게 개방적인 거죠. 특히 요즘은 정말……. 저는 신사 클럽에서 속가 이야기가 나올 줄 꿈에도 몰랐다니까요.”

“……네?”

“아가씨도 놀랍죠? 저는 아가씨가 노래하실 땐 워낙 특별한 분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괜찮으실까 주제넘은 걱정도 했지만.”

“주제넘지 않아요. 걱정 감사해요.”

그 말에 카이논이 작게 웃었다.

“그런데 설마 신사 클럽에서 속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것도 꽤 긍정적인 반응으로요.”

비서가 말을 받자 카이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저희야 잘됐죠. 속가 이야기가 화제다 보니 그거랑 대척점인 신전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속가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그러다 보니 리브살어도 잘 쓰지 않아요.”

칼리오페는 가만히 눈만 깜빡이며 카이논과 비서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아무리 신전이 리브살어의 사용과 교육을 제한해봤자 손톱만큼의 영향도 없다는 뜻이다.

신전이 고유한 권한을 가진 핵심 정책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녀가 속가를 불렀기에.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에 감응했기 때문에.

위험과 비난을 무릅쓰고 강행한 그녀의 모험이 성공했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칼리오페가 환하게 웃었다. 단정한 눈매가 가늘게 휘며 그 안의 산호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말간 미소에 카이논을 비롯해 밥을 먹던 사람들 모두 포크와 나이프질을 멈췄다.

몇몇 사람들은 눈을 비볐다. 분명 날개 장식을 뗐는데 칼리오페의 뒤로 날개가 보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이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칼리오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덕을 봤으니 감사하다고.

‘하지만 이제 보니 의도하셨던 것 같네. 정말, 아가씨는…….’

지금도 작은 소녀지만 처음 봤던 때는 더 어린 다섯 살 꼬마였다. 그때도 칼리오페에게서 이런 오싹함을 느꼈다.

카이논은 미소로 감정을 억누르며 손도 대지 않은 벌꿀 사과 케이크 접시를 칼리오페에게 내밀었다.

“아가씨, 제 케이크 드실래요?”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지만 결국 작은 고개가 끄덕끄덕한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가씨! 제 것도 있어요!”

“저도! 아직 손도 안 댔어요!”

“이것도 드세요! 이건 셔벗이에요!”

사람들의 농담에 칼리오페는 푸후,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좋다.

* * *

“그래, 실패라고.”

“죄송합니다.”

여자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주인의 심기를 살폈다.

유려한 얼굴이 살짝 기울며 손등 위에 얹어진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소년이라고 믿기지 않는 서늘한 눈매가 그녀를 응시했다.

더 설명하라는 뜻이다.

“당시엔 분명 꽤 흔들린 것 같았습니다. 시간을 달라는 말에 딱 사흘만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만…….”

시간을 제한하는 건 협상의 기본이다.

“오늘로 사흘 째라 연락해보니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꽤 흔들렸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볼 때 카이논은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사흘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게 끝?”

“역시 안 되겠다고…….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도 쓸지 모르는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가격을 받고 파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책하는 시선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힐난 받는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레아스 님.”

아스타레아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수하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실패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실패가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카이논은 그다지 물욕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물욕은 있지만 보통 사업가만큼 강하지 않았다. 카메라 투자처를 찾을 때도 다른 것보다 신문 기사나 경찰 수사 같은 공공이익을 우선적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일을 맡은 건 가장 신뢰도가 높은 수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카이논이 흔들렸다는 보고를 믿었다.

그렇다면 사흘간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리페가 촬영 있다고 연습을 쉬었지.’

촬영 때 카이논을 만났을 확률이 높다.

칼리오페의 모습이 카이논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그게 뭐가 되었든 10억, 아니, 백배라고 했으니 1000억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당연히 있지.’

아스타레아스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했다.

“다른 방법을 쓸까요?”

“아니.”

수하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다른 방법’이란 카이논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수단일 터.

칼리오페 곁에 있는 사람이 돈에 움직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100배는 흘려 넘겨도 보여준 10억은 확실히 솔깃했을 텐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매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여자는 곧바로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모두 구매하려면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한 사람 당 3권씩만 살 수 있다고 했지.’

그녀는 속으로 계산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가 힐끔 주인을 바라봤다. 푸른 눈동자는 창밖을 향해 있었다.

주인의 행동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게 미덕이다.

그녀는 종알종알 시끄럽고 주제넘은 러그윈과 달랐다.

‘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포토북을 전부 구매하려고 하시는 걸까.’

그 포토북 속에 뭔가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의 주인은 어렸을 적부터 기묘한 통찰력을 발휘하곤 했다.

‘전권을 전수조사해서 뭔가를 발견하실 생각인가.’

그중 한 권이 마법으로 변형된 기물이라든가, 어떤 물질이 섞여들어 갔다든가.

그렇게 생각하니 아스타레아스의 명령은 충분히 타당했다.

대의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어깨에 힘을 바짝 들어갔다.

실제는 주인의 덕질과 독점욕일 뿐이라는 것도 모르고.

* * *

콰앙! 챙그랑— 쿠당탕탕!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릴 때마다 긴 로브를 입은 남자는 어깨를 좁혔다. 하지만 감히 흥분한 남자를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방 안에 있는 온갖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분노를 표출하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곤 있지만 제풀에 지쳐서 멈췄다기엔 눈빛이 너무 형형했다.

그 매서운 눈빛이 휙 자신을 향해서 긴 로브는 마른 숨을 삼켰다. 히익, 소리가 절로 났다.

그렇게 겁먹은 것이 무색하게 짧은 로브를 입은 남자는 빙긋 웃었다.

“역시.”

짧은 로브가 선량한 신관의 얼굴을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긴 로브는 아까보다 더 긴장했다. 반달 모양으로 휘는 눈매 속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이대론 안 되겠어요.”

언제 그렇게 패악을 부렸냐는 듯이 짧은 로브가 단정한 자세로 그나마 멀쩡한 의자에 앉았다.

“네, 일단 심기를 가라앉히시고…….”

긴 로브의 말에 짧은 로브가 가볍게 웃었다.

“지금 상황이 아주 여유로우신가 봅니다.”

“예?”

“리브살어 제한은 신전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효과적인 정책 중 하나입니다.”

“예, 하지만…….”

“그런데 그게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고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까?”

짧은 로브는 다시 분통을 터트리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신전의 영향력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이에요! 거기다 속가를 금지하는 것도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었다.

“교세를 확장시켜도 모자랄 시점에—.”

그는 말을 하다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분명 처음에는 잘 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돌아갔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지?’

한 소녀가 속가를 불렀을 때? 그때 그냥 지나가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그땐 이미 늦었던 거다.

사람들은 진즉 새로운 것, 전통과 어긋나는 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던 거다.

‘왜? 어째서?’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속가를 불렀으면 당연히 배척당했을 것이다.

상권이 발달하며 사람들의 의식이 점점 변해갔지만, 최근 십 년도 안 되는 세월에 갑작스럽게 변화한 것이 많다.

‘……관심사.’

사람들이 즐길 건 거의 신전의 문화와 연결되어 있었다.

오페라도, 연극도, 문학도, 심지어 아이들이 보는 만화도 뿌리를 찾으면 성서다.

‘그런데 다른 것들이 나왔던 거야.’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 칼리오페라는 소녀를 조사하니 여러 가지가 나왔다.

베이비 살롱이라는 가게에서 생긴 소소한 문화는 아이들을 가진 귀부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고, 그 귀부인들은 제도 사교계에, 나아가 제국 귀족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그 살롱은 신전에서 책 잡을 게 없었다. 속가를 부른 것도 아니고, 신전에 반대되는 짓을 벌인 것도 아니다. 그저 신전과 관련되지 않은 것만 향유했을 뿐.

‘7년 전에 그 살롱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도 거슬려 하지 않았을 거야.’

속가와 달리 신전과 대치하지 않으니 그냥 그런 것도 있군,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살롱은 암암리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다.

‘마치 몇 수를 앞선 것 같지 않은가.’

문득 든 생각에 그는 흠칫 놀랐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때 그 애는 고작해야 다섯 살이었다고.’

고개를 저어 부정하면서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인기 모델로 활동해 사람들의 우상(idol)이 되며, 당연히 신전의 우상—신—에 대한 관심이 꺾였다. 사람들은 신화적 내용이 담긴 서적보다 칼리오페의 화보집에 더 열광했다.

‘원래 그건 우리의 계획이었는데.’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무해하게 스미듯 접근해 빠지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성녀를 준비했건만.’

까드득, 이를 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성녀가 실패한 건 아니야. 두고 봐야지.’

하지만 칼리오페에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지금, 이전보다 상황이 어려워진 것은 분명했다. 마치 신전이 하려고 계획한 것을 다 읽고서 미리 막는 것 같다.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계획을 차단당하면서도 몰랐다. 상업 모델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새로운 돈벌이나 홍보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다섯 살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는 건 과해. 내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나 보군.’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결국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거야.’

그 소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의 원대한 계획을 방해한 것은 틀림없다.

형형한 눈이 책상 위를 노려봤다.

그곳에는 말간 웃음을 짓고 있는 귀여운 소녀의 사진이 있었다.

파사삭.

남자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사진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긴 로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재가 되어 흩어지는 칼리오페의 사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짧은 로브가 고개를 들어 긴 로브를 바라봤다.

“티할렌을 불러오세요.”

무척 쾌활하고 명랑한 어조였다.

* * *

“어머, 신관님.”

“티할렌 신관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 속에서 들린 이름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귀부인들이 잔뜩 모인 티파티에 참석한 차였다.

‘신관이 티파티에 오다니……?’

안 될 건 없지만, 보통 신관은 가정 예배가 아니면 귀족의 저택에 잘 오지 않는다. 애초에 초대하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해 잘 부르지 않고.

초대하지 않아도 신관이 오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신의 발걸음은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신관에게는 초대받지 않은 곳 어디에도 참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지금 보는 게 처음이다.

“비스의 물길이 제집에 임하시니 영광입니다.”

“그대의 가정에 샘이 마르지 않기를.”

호스트와 신관이 인사를 주고 받는 동안 칼리오페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귀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파우더룸 안에 들어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에 온 것 같지?’

그게 아니면 신관이 갑자기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

‘무슨 생각일까.’

호스트인 메일린 자작 부인은 중앙 사교계에서 그다지 입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정도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할 말을 다 하기보단 내뱉지 않길 택하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인연이 깊지만.’

칼리오페가 다섯 살이 되어 사교계에 처음 나갔던 날, 그때 티파티를 주최한 사람이 메일린 자작 부인이었다.

‘왜 하필 신관이 오늘 왔는지 알겠어.’

최근 칼리오페는 굉장히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속가를 부르기 전, 거의 두문불출하다시피 한 것의 반동처럼.

그만큼 그녀를 찾아올 기회는 많았는데 신관은 오늘을 택했다.

‘메일린 부인이 권력도 없는 데다가 성정도 온순해 티파티의 분위기를 망쳐도 상관 없으니까.’

그다지 제지하지도 못 할 테고, 추후 항의하지도 않을 거다.

‘그럼 절대 내게 우호적이거나 타협점을 찾겠다 뜻은 아니야.’

칼리오페는 빠르게 상황을 계산했다.

‘어떻게 할까.’

걸어오는 싸움을 정면으로 맞설까, 돌아서 칠까, 아니면 피할까.

답은 정해져 있다.

어차피 신전과는 맞붙게 되어 있다. 조금 더 미룬다고 싸움이 사라지는가?

루스티첼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 비친 산호빛 눈동자가 전의를 가지고 투명하게 빛났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오랜만이라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었던 메일린 부인을 생각했다.

‘일단은 피하는 걸로 하자.’

* * *

파우더룸에서 나온 칼리오페는 주변을 둘러봤다.

메일린 부인의 곁에 신관이 없는 것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메일린 부인.”

“리페.”

메일린 부인이 난처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힐끔 신관 있는 쪽을 확인한 그녀가 칼리오페에게 작게 속삭였다.

“갑자기 신관님이 와서……. 괜찮니?”

메일린 부인 역시 신관이 대뜸 자신의 티파티에 온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칼리오페는 미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에게 활짝 웃었다. 메일린 부인이 미안해할 게 아니다. 칼리오페가 참석하지 않았으면 신관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티파티를 망치기 전에 자신이 떠나는 게 맞다.

“네, 그럼요. 그런데 실례지만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돌아가려고요. 괜찮을까요?”

“리페…….”

“걱정 마세요. 문제 일으키진 않을 테니.”

칼리오페는 명랑하게 미소 지으며 메일린 부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다니.’

메일린 부인은 떨리는 입술을 애써 다물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한 번 더 힘주어 그녀의 손을 잡은 후 놓았다. 언제나처럼 반듯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메일린 부인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문제 따위 얼마든지 일으켜도 된다고, 아무 상관 없다고.’

메일린 부인은 칼리오페의 온기가 남은 두 손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솔직히 티파티가 끝난 후 무슨 말을 들을지 두려웠다.

왜 자신은 서모나 부인처럼 강인하지 않은 걸까.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에게 짐을 떠넘기고 쫓아 보내는 느낌이었다. 자괴감이 들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루스티첼 영애?”

그때, 티할렌이 나가는 칼리오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신관님.”

“신전 안에 있어도 영애에 대한 말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말은 문제가 없었지만 티할렌의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칼리오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그러시군요.”

“루스티첼 영애은 노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하던데. 한 번 불러주실 수 있으신가요?”

티할렌은 칼리오페에게 마치 재주나 부려보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당황해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귀부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관을 바라보았다.

“아, 망설이시는 건가요? 듣자 하니 하층민 곡 전문이시라던데. 그럼 망설일 만하죠. 이해합니다.”

키득키득, 티할렌은 대놓고 칼리오페를 비웃었다

“명색이 귀족분이신데 하층민 곡 전문이라니……. 행동이 자신의 수준을 드러낸다곤 하지만요.”

이건 너무 지나친 말이었다.

메일린 자작 부인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 얼굴은 잠잠한 호수 같았다. 결코 열두 살이라고 볼 수 없는 의연한 태도였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을 거야.’

참고, 참고, 또 참고 있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문제 일으키진 않을 테니.]

지금 칼리오페는 자신의 티파티를, 입지를 지켜주기 위해 참고 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저 작은 아이의 등에 이 모든 것을 맡겨놓고 있지 않은가.

“티할렌 신관님.”

메일린 부인은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그녀는 어느새 칼리오페 곁에 서서 티할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마찰을 빚은 적이 없다. 항상 수그려 피해갔다.

‘하지만.’

메일린 부인은 양손을 꽉 맞잡았다. 아직 칼리오페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이 티파티의 주최자는 나야.’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또, 요즘은 속가에 대해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차입니다. 아이의 지적 탐구에 하층민 운운하며 수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티할렌의 시선이 메일린 부인을 향했다.

타인으로부터 이런 시선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 메일린 부인은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애써 폈다.

“지적 탐구는 기본적인 소양은 갖추고 하는 것이죠. 루스티첼 영애가 성가를 불렀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그거 이상하지 않나요? 성서의 내용은 알고나 있는지.”

놀라서 메일린 부인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앞으로 나섰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한과 오렌, 비스 세 명의 신 중 누구도 속가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층민의 것이라고도, 천박하다고도 쓰여있지 않지요.”

뭐가 천박하다, 이건 하층민의 것이다, 고귀하려면 이래야 한다.

이런 건 모두 인간들이 정한 것이다.

‘정확히는 신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칼리오페의 말뜻을 알아챈 티할렌이 붉어진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지금 신의 뜻을 따르고 전파하는 신전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겁니까?!”

“리페…….”

주변의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이 들렸다.

칼리오페는 발바닥에 힘을 꾹 주었다. 메일린 부인이 스스로 나섬으로써 그녀에게 허락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루스티첼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아. 그것도 그 싸움이 분풀이라면.’

뜻대로 안 된 신전이 자신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괴롭힐 생각으로 이러는 거다. 칼리오페는 신전의 치졸함을 질릴 정도로 잘 알았다.

“설마,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티할렌이 언어로 묶은 올가미를 칼리오페의 목에 걸었다.

신성력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신을 믿는다. 하지만 어디에나 반동분자는 있기 마련이다. 신성력은 신이 내린 힘이 아니라 마나나 오러와 같은 힘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이는 제국의 건국신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당연히 속가를 부르는 것보다 더 큰 문제였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신의 존재에 대해 명확한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존재를 만나 시간을 되돌아온 자신보다 더 확신하는 자가 어디 있을까.

칼리오페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상황에 맞춰 되는대로 말을 주워섬기는 게 아니고요?”

“아닙니다.”

“글쎄, 믿을 수 없네요. 신관으로서 교화를 시켜야겠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게 하는 것도 제 도리지요.”

티할렌은 칼리오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키가 큰 그가 자그마한 칼리오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위압적이었다.

“자, 따라 해봐요.”

티할렌이 비웃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잘못했습니다.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날카로운 숨 삼키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렸다. 그럴수록 티할렌은 즐거워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재촉했다.

“어서.”

* * *

똑똑, 노크 소리에 짧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긴 로브를 입은 남자는 날카로운 그의 신경을 건들지 않도록 조심히 나가 문을 살짝 열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라…….”

침을 꿀꺽 삼킨 상대가 재빠르게 보고했다.

“땅이 숨 쉴 곳을 찾았습니다.”

“뭐라고?!”

앉아있던 짧은 로브가 벌떡 일어나 문가로 다가왔다.

“정말 스티그마를 찾았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흔들림 없는 대답이었다.

“오, 비스 여신이시여…….”

긴 로브가 탄식하며 신을 찾았다. 짧은 로브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감정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어디입니까.”

“파트리유 거리입니다. 이곳이요.”

신관이 들고 온 지도를 가리키며 답했다.

“번화가군요.”

긴 로브의 말에 짧은 로브가 단호히 말했다.

“얼마가 들든 상관없어요. 꼭 손에 넣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들은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 앞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만큼 정신을 쏙 빼놓는 화제였다.

세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소유자가 누군지 파악했습니까?”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짧은 로브가 물었다. 공을 치하하거나 숨 돌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조급했다.

최근 진행한 일들이 모두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으로, 스티그마를 손에 넣는 것으로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다!

“예, 비스께서 도우신 건지 어린 소녀가 주인입니다.”

부모가 실소유자이긴 하겠지만 어쨌거나 어린아이를 꾀는 건 어른을 꾀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긴 로브는 대놓고 쉬운 먹잇감을 잡았다는 듯이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그러나 짧은 로브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어린 소녀.

보통이라면 좋아하겠지만, 그는 기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닐 거야.’

짧은 로브는 가슴을 섬뜩하리 만치 차갑게 죄어오는 불안을 떨쳐내며 신관을 향해 물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신관이 질문에 반응해 입을 여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긴장한 줄도 모른 채 신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그러나 나쁜 예감은 항상 현실로 돌아오는 법이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고 합니다.”

신관의 말에 짧은 로브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루스티첼 백작가의 막내딸이라고 하더군요.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됐습니다. 우리에겐 호조입니다.”

뒤이어 무어라 설명하는 말은 귓가에서 뭉개지고 일그러져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까드드득, 짧은 손톱이 나무로 된 소파 팔걸이를 후벼 파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푹 숙인 짧은 로브를 신관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고요.”

“예에……. 뭔가 잘못이라도—.”

큭, 짧은 로브의 입술에서 억눌린 웃음이 튀어나왔다.

신관은 이상한 느낌에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긴 로브를 돌아봤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하하핫, 고개를 젖힌 짧은 로브가 광소를 터트렸다.

“재밌네요.”

결코 그 이름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티할렌은?”

그는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긴 로브에게 물었다. 쾌활한 미소가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오늘 나갔습니다.”

긴 로브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 말에 신관이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통을 터트렸다.

“티할렌, 그자가 또 사고를 친 것입니까?”

규칙에 엄격한 그와 상스러운 행실을 일삼는 티할렌은 앙숙과 같은 사이였다. 그는 무조건 티할렌 때문에 분위기가 이런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티할렌 신관이 사고를 쳤다라…….”

짧은 로브가 신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티할렌은 그의 명을 받아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망신 주기 위해 나갔다. 아무런 소득이 없는 짓임은 알고 있지만, 그 망할 것이 수모를 당하면 적어도 속은 좀 풀리지 않겠는가.

“……아닌가요?”

미묘한 반응에 신관이 머쓱하게 물었다. 짧은 로브는 고개를 젓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역시……! 제가 말리러 가겠습니다.”

“아니요.”

짧은 로브가 단호하게 만류했다. 그는 얼떨떨해하는 신관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관과 긴 로브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탁탁, 로브를 펴 정리한 그가 얇은 미소를 입가에 베어 문 채 말했다.

“내가 직접 가겠습니다. 채비를 하세요.”

* * *

“응? 왜 아무 말이 없죠?”

티할렌이 칼리오페를 깔아보며 물었다.

“따라 하라니까요. 그 간단한 것도 못 하는 겁니까?”

“…….”

“어휴, 제가 이해해야죠. 자,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이번엔 똑바로 기억하세요.”

티할렌은 대놓고 칼리오페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일부러 서너 살짜리 아이에게 말하듯 또박또박 느리게 발음했다.

칼리오페는 아무런 반응 없이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자그마한 얼굴에는 분노도, 수치심도, 열패감도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티할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분명 자기가 칼리오페를 윽박지르고 있는데 뭔가 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까발려지는 기분.

“지적 탐구 운운하더니 이런 머리로 퍽이나 탐구했겠습니다.”

그 탓에 점점 더 말이 거칠게 나왔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그는 이 아이에게 화풀이하러 온 것 아닌가. 후처리는 대신관이 알아서 할 것이다.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하지요. 텅텅 빈 걸 이렇게 자랑할 필요는 없을 텐데.”

정작 비난받는 칼리오페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나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도 권력과 거리가 먼 소규모 친목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티할렌이 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신전에 밉보여서 가족이 아플 때 신관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현실적인 걱정이 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티할렌은 우월감에 빠졌다.

‘그래, 내가 이 년을 윽박지르고 있는 거라고. 까발려지는 건 내가 아니라 얘야. 다른 사람들처럼 나한테 눌려서 입도 벙긋 못하고 있는 거라고.’

“왜, 수준이 까발려지니까 말을 못 하겠나요? 그러니까 사과하라고. 싹싹 빌면 넘어 가줄 테니까.”

그때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들려온 노호에 모두의 시선이 출입구로 쏠렸다.

티할렌은 비웃음을 지은 채 돌아봤다. 말리는 사람 역시 깔아뭉개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확인한 순간, 얼굴이 절로 굳었다.

그곳엔 간소하게 디자인된 짧은 로브를 입은 남자 한 명과 그 뒤를 따르는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대신관 님……?”

“대신관 님이 어째서 이런 곳에?”

“대신관 님을 뵙습니다.”

장내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티할렌 신관. 비스를 섬기는 사제로서 수행해도 부족할 시간에 귀부인들의 담소에 끼어들어 이 무슨 난동을 부리는 것입니까.”

가까이 다가온 대신관이 준엄한 얼굴로 티할렌을 꾸짖었다. 항상 쾌활한 미소를 짓고 있는 대신관이 이렇게 정색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티할렌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당황한 얼굴로 대신관을 바라봤다.

“오해가 있었군요, 루스티첼 영애.”

대신관이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티할렌을 볼 땐 싸늘했던 얼굴이 칼리오페를 향하니 온화해졌다. 그는 다정하게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티할렌 신관이 신앙심이 과해 가끔 그릇된 방향으로 표출하곤 합니다. 나쁜 뜻은 아니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나쁜 뜻이 아니었다고요?”

“예, 신을 따르는 마음 외에 다른 뜻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대신관은 비죽 솟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이렇게 쉬울 수가.’

“하지만 뜻이 좋다고 그 행동이 정당한 건 아니지요. 대신관 님 정도 되시는 분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넌 그것도 모르냐. 칼리오페의 말을 축약하면 그런 뜻이었다.

마치 쉽다고 생각했던 걸 읽은 것처럼, 안심한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에 대신관은 멈칫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녀에겐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물론입니다. 또,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지며 뻗어 나가는 가지를 잘라내듯 윽박지르는 것은 비스의 뜻이 아니지요.”

대신관은 그 위치에 걸맞게 자애로운 태도로 칼리오페의 말에 수긍했다.

‘아, 그렇구나.’

칼리오페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곧 땅이 숨을 쉬는구나. 그리고 신전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어.’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가슴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땅이 내 땅이라는 사실도.’

그게 아니면 자신에게 이를 득득 갈고 있을 대신관이 이렇게 몸소 찾아와 굽신거릴 이유가 없다.

“티할렌 신관.”

“예, 대신관 님.”

티할렌은 순종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상황파악이 안 된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사과하십시오.”

“네에?!”

티할렌이 기함해서 대신관을 바라봤다. 그는 명을 받은 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과했나?’

하지만 대신관은 자신의 비뚤어진 성정을 알고 이 일에 투입한 것 아닌가. 이런 일에 제격이라고 칭찬까지 했었다.

“내 말이 안 들렸습니까? 루스티첼 영애에게 사과하라고 했습니다.”

대신관의 서늘한 시선에 티할렌이 움찔했다. 그는 사과하기 위해 칼리오페를 향해 섰다. 하지만 막상 자기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사과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리오페는 자신의 윽박지름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았던가.

“……미안합니다.”

내뱉듯이 나온 사과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이상하네요.”

소녀의 눈동자가 순진하게 도로록 구른다.

“신관 님께서 저를 교육하신다면서 알려준 사과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칼리오페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탱글탱글한 머리카락이 발랄하게 찰랑거렸다.

“혹시 티할렌 신관 님은 본인이 못 하는 걸 남한테 하라며 훈수를 두는 성격이신가요?”

티할렌의 턱이 파들파들 떨렸다. 굳게 다문 입술이 새하얬다.

“에이, 설마. 아니죠?”

티할렌은 얼굴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진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모습에 이가 갈렸다.

하지만.

“티할렌 신관.”

자신을 부르는 대신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차마 그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내고 싶어서 대신관의 얼굴을 곁눈질했지만, 그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관은 칼리오페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쯤 되니 티할렌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칼리오페에게 학을 떼던 대신관이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의 열쇠를 쥔 사람은 칼리오페였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달렸다. 칼리오페가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대신관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냥 사과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모두가 보는 앞이었다. 오늘 일을 두고 어떤 말이 오갈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아까 전 그가 칼리오페를 깔아뭉개며 했던 말을 그대로 복창해야 한다.

아래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어쨌든 사과를 했으니 된 거다. 칼리오페가 여기서 무언가를 더 요구하면 그걸 빌미로 그녀를 헐뜯으면 된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내가 고작 열두 살짜리 어린애한테 고개를 숙여선—.’

티할렌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관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사과를 내뱉었다.

“……주제를…….”

제가 사과한 것을 깨닫고 티할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다.

“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안 들렸다는 태도에 티할렌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빠드득 이가 갈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시 한번 칼리오페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영애. 용서해주십시오.”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앙증맞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머, 정말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는데…….”

‘……뭐라고?’

순간적으로 칼리오페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티할렌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곧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얼굴을 구겼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워졌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있어……!’

완전히 놀아났다.

정작 칼리오페는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은 듯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루스티첼 영애, 어쨌거나 티할렌 신관이 저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습니까. 받아주시지요.”

그 말에 칼리오페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대신관을 바라봤다.

“음, 대신관님. 아직 배움이 부족하지만, 잘못을 저질러 용서를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때까지 사과하는 것이라 가르침 받았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아, 아니…….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내가 이만큼 사과하고 보상했으니 상대가 마음 풀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한 칼리오페가 순연한 두 눈을 깜빡이며 대신관을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지금 대신관님의 태도는 어떻지요?’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하하, 영애가 제 뜻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예, 영애가 꼭 용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한 것뿐이지요.”

“음, 그러셨군요.”

칼리오페가 말끝을 길게 끌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티할렌 신관님이 저렇게까지 사과하니 받아주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작은 중얼거림이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들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칼리오페는 대신관을 보더니 아차, 하곤 그를 위해 변명을 해주었다.

“물론 말한 그대로의 의도가 아닐 수도 있지요! 다른 뜻이 숨어 있을 수도 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맞아, 대신관님 말씀대로 제가 오해한 거예요.”

칼리오페가 환히 미소 지으며 대신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해한다는 듯이 손을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대신관은 졸지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억지 부리다가 열두 살 소녀에게 양보받은 모양새가 됐다.

지켜보던 귀부인들의 입매가 가볍게 경련했다. 얼굴에 힘을 주지 않으면 이대로 비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감히 누구도 얕잡아 보지 못했던 대신관의 드높은 권위가 처음으로 추락한 순간이었다.

그 부분을 정확히 인지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서 통찰력을 발휘해 이 흐름을 직접 만들어낸 칼리오페뿐이었다.

당사자인 대신관조차 칼리오페의 태도에 당황하느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대신관은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벌컥 성을 내봐야 자신의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다.

칼리오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대신관을 보며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부동산이 중요하다고 하나 봐.’

조금 다른 의미이긴 해지만, 그녀의 부동산 투자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대신관님…….”

티할렌이 조심스레 대신관을 불렀다.

대신관은 날카로운 눈으로 티할렌을 노려본 후, 칼리오페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거나 칼리오페는 스티그마가 될 땅의 소유주다.

‘땅만 얻어내고 보자. 네년을 갈기갈기 찢어줄 테니.’

그는 나중을 기약하며 본론을 꺼냈다.

사실 칼리오페와 둘만 있는 상황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야기가 빙빙 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티할렌 신관의 잘못과 별개로, 우리 비스 신전은 루스티첼 영애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이 말에 놀란 사람은 칼리오페가 아니라 지켜보던 귀부인들이었다. 칼리오페가 속가를 부른 이상 신전에 밉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대신관이 직접 찾아와 칼리오페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으로 모자라, 대놓고 호의를 보이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사람들이 바쁘게 눈빛을 교환했지만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와, 정말 기뻐요.”

칼리오페가 양손을 모으며 밝게 웃었다. 소녀의 뺨이 사랑스러운 홍조로 물들었다.

“속가를 들으시고 그런 것이지요?”

“네?”

“아닌가요? 티할렌 신관님의 용건이 속가여서 당연히 대신관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대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땅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그 땅을 주목할 것이다.

“뭐, 그런 셈이죠.”

“그럼 신전에서도 속가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 인정한 것으로 봐도 괜찮을까요?”

여기까지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다. 대신관은 친절한 웃음을 쥐어짜 내며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해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둘이서 말입니다.”

칼리오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충분해.’

속가에 관한 용건으로 찾아온 대신관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 내일이면 이 이야기가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질 것이다.

‘아직 어린애라고 방심하다간 이렇게 되는 거지요.’

칼리오페는 빙긋 웃으며 대신관을 바라봤다.

“리페.”

메일린 부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칼리오페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그녀는 두 사람을 별실로 안내했다.

* * *

“루스티첼 영애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랍더군요. 듣자 하니 어렸을 적부터 사업을 하셨다고요.”

대신관은 자신이 조급하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하녀가 차를 세팅하고 나간 후,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업이라니요. 그냥 경험 삼아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해보는 것뿐인데요.”

“조그마한 가게라…….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 중 하나 아닌가요?”

“대신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민망하고 부끄럽습니다.”

의외로 꽤 분위기가 괜찮다.

다소곳하게 답하는 칼리오페를 보며 대신관은 입맛을 다셨다.

‘좀 더 파고들어 볼까.’

“다섯 살 때 시작했죠?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다 보니 얻게 된 땅인데 워낙 입지가 좋아서 놀리기 아까웠거든요. 사실 결심이랄 것도 없어요. 제겐 그냥 소꿉놀이 같은 거였으니까요.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죠.”

칼리오페의 대답은 대신관이 보고 받은 정보와 일맥상통했다.

‘브리젤 가가 급히 낙향하면서 주고 갔다고 했지. 그럼 역시 우연인가…….’

묻는 것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데다가 아까와 달리 칼리오페는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대신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대신관의 권위가 우스운 것도 아니고. 얘가 나한테 뻗댈 이유도 없잖아?’

아까 삐딱하게 굴었던 것도 티할렌 때문이다. 그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방어적으로 나온 것일 뿐.

그때 자신을 대하던 칼리오페의 태도가 묘하긴 했지만, 아직 어리니 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조금 살펴볼까.’

의미 없는 말을 이어나가면서 칼리오페의 반응을 살폈으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아직 순진하고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리숙하면서 예의 바른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이런 애가 뭘 꾸밀 수 있을 리가 없지.’

“……해서 그곳에 신전을 지으려고 해요. 잘만하면 영애의 이름도 크게 새겨주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고 대신관이 웃었다.

신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영예 중의 영예였다.

‘대리석에 흠집 좀 내는 게 뭐라고. 이걸로 그 땅을 손에 넣으면 완전히 남는 장사지.’

성공했다. 대신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미소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땅은 제 땅인데요?”

칼리오페가 소서에 찻잔을 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순진하고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리숙하면서 예의 바른 눈동자를 하고.

“왜 제 땅에 신전을 짓는 걸 대신관님이 결정하세요?”

* * *

“리페!”

칼리오페가 별실에서 나오자마자 메일린 부인이 그녀를 불렀다.

메일린 부인을 비롯해 티파티에 참석한 귀부인 모두가 오매불망 칼리오페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차였다.

“대신관님과 이야기 잘 했니?”

메일린 부인은 걱정을 담아 물었다. 아무리 대신관이 칼리오페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하나 그런 높은 사람과 어린애가 독대한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했다.

칼리오페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별실 문이 벌컥 열리며 대신관이 나왔다.

“루스티첼 영애!”

커다란 목소리에 귀부인들은 깜짝 놀라 대신관과 칼리오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들의 얼굴에 우려가 더 깊어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냥 기부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칼리오페가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수심이 가득한 커다란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처연히 내리깔렸다. 그 모습은 칼리오페를 걱정하던 귀부인들의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기부?’

‘속가에 관해 이야기하러 들어간 거 아니었나?’

“애초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기꺼이 따랐을 거예요. 그런데 대신관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렸다. 살짝 깨문 작은 입술이 귀부인들에게 소리 없는 이야기를 전했다.

‘대체 대신관님이 뭐라고 했기에?!’

호의, 속가, 기부.

이 세 가지 단어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조합되며 그럴싸한 가설을 만들어냈다.

‘설마, 속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신 거액의 기부를 하라고 했나?’

‘그건 협박이잖아……?!’

대신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해마다 신전이 받는 막대한 기부금으로 모자라서, 이젠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까지 돈을 뜯는단 말인가.

‘이건 도를 지나쳤잖아. 하를레민에서도 그렇겐 안 하겠다.’

‘처음부터 기부를 원한다고 말했으면 기꺼이 따랐을 거라니……. 대체 뭐라고 했기에 리페가 저렇게 말하지?’

구체적인 것을 모르는 만큼 갖가지 상상이 그들의 머릿속을 채웠다. 당연히 대신관에겐 좋지 않은 상상이었다.

평소였다면 분위기를 읽고 대처를 했겠지만, 지금 대신관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스티그마를 놓쳤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처음부터 달라고 했으면 그냥 줄 생각이었다니……. 젠장!’

괜히 이름을 새겨준다는 것을 강조했다가 일이 꼬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대신관은 심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래도 아주 가능성이 없진 않아.’

마음 같아선 칼리오페가 땅을 바치겠다고 할 때까지 닦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땅은 제 땅인데요?]

그렇게 말한 뒤, 칼리오페는 언제 순순히 굴었냐는 듯 꼬치꼬치 캐물으며 그의 신경을 긁었다.

‘어린 년이 눈 똑바로 치켜뜨고 말이야.’

대신관은 심호흡하며 성질을 눌러 죽이곤 칼리오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버르장머리는 스티그마를 얻고 난 뒤 고쳐줘도 돼.’

그는 설마 칼리오페가 일부러 여지를 남겨놓으며 자신의 고삐를 죄었다, 풀었다 한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영애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속상하시지요.”

대신관은 선량한 척 칼리오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영애.”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땅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관이 티할렌과 함께 나가고 난 후, 응접실은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

메일린 부인은 칼리오페에게 다가가 다정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리페.”

“메일린 부인.”

“괜찮니?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부인께서 제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내가 뭘 했다고…….”

메일린 부인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호스트인 자신의 입지가 약하기 때문에 신관들이 아무 거리낌도 없이 티파티에서 칼리오페에게 멋대로 군 것이다.

“빈말이 아니에요. 아까 티할렌 신관님이 절 모욕했을 때 귀부인께서 나서주셨잖아요. 그때 얼마나 멋져 보였는데요.”

칼리오페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빛날 수가 없었다.

메일린 부인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정말 멋진 건 이런 여유를 잃지 않는 칼리오페였다.

“오늘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모처럼 티파티를 여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니? 네 탓도 아니고……. 리페,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혹시라도 오늘 일에 마음 쓰지 말렴.”

메일린 부인이 고개 숙이는 칼리오페를 저지하며 팔을 토닥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저도 부인이 무척 좋아요.”

“어머나……!”

메일린 부인의 뺨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오랜만에 뵈어서 좋았어요.”

“그래, 피곤하겠구나. 다음에 보자.”

칼리오페가 총총 응접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귀부인들이 한숨을 흘렸다.

“루스티첼 영애는 정말 의젓하네요.”

“우리보다 더 침착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메일린 부인이 부러워요.”

“리페가 부인이 좋다고 할 때 질투할 뻔했잖아요.”

진담 섞인 농담에 귀부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 끝은 조금 씁쓸했다.

“저런 아이에게 돈을 뜯을 줄이야…….”

“아주 약점을 잡은 것처럼 말이에요.”

“오죽하면 리페 입에서 차라리 기부하라고 했으면 기꺼이 기부했을 거라는 말이 나올까요.”

“티할렌 신관부터 시작해서 정말 너무하네요.”

“속가가 리페의 약점이라고 단단히 얕잡아 보는 것 같은데. 제가 다 속상하네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일린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게 약점이 아니게 되면 되지요.”

* * *

“대, 대신관님……!”

창백해진 티할렌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신관을 불렀다.

쾅!

대신관이 던진 의자가 바로 그에게 날아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발이 찍혀서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으윽…….”

“어떻게 할 겁니까.”

어느새 티할렌 바로 앞으로 다가온 대신관이 그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대신관님…….”

“지금 티할렌 신관 때문에 다 찾은 스티그마를 눈앞에서 놓쳤습니다.”

티할렌은 억울했다.

“저는 그 년이 스티그마의 주인인지 몰랐습니다……. 대신관님, 제발…….”

콱! 대신관이 발을 들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티할렌의 어깨를 짓밟았다.

“몰랐다고 해서 스티그마가 우리에게 오는 건 아닙니다. 변명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큭…….”

대신관의 발에 점점 힘이 들어가 티할렌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당신 때문에 이 내가 까마득하게 어린 년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압니까.”

[그런데 대신관님께선 티할렌 신관님이 신앙이 과해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지요.]

[그러면서 나쁜 뜻은 아니라고 대신 변호해주셨는데, 그런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성질대로였으면 뭐가 이상하냐며 칼리오페의 멱살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속으로 분을 삭이는 것으로 모자라 칼리오페에게 허허실실 웃어줘야 했다.

[변명보단 잘못된 행동에 대해 사과하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셨어요.]

그 말투. 마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저보다 더 어린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어조였다.

[……속상하셨을 영애에게 이유를 설명하고픈 마음이 앞서서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분 나쁜 내색도 하지 못하고 잘못을 시인해야 했다.

[실수를 인정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인정한 뒤에는 꼭 고쳐야 한다고도요.]

타이르는 듯한 게 아니라 타이르는 게 확실했다.

‘감히 날 가르치려 들어?!’

“대, 대신관님, 제발…….”

티할렌이 애원했다. 등을 내리밟는 힘이 너무 강해 바닥에 가슴이 짓눌려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의 애원을 들은 대신관이 발에서 힘을 뺐다.

티할렌이 안심하는 순간,

“아악!”

얼굴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대신관이 등 대신 그의 뒤통수를 밟았기 때문이다.

[……루스티첼 영애는 지금 열두 살 아닌가요?]

참다못한 대신관이 칼리오페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열두 살이나 됐으면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니지 않냐는 뜻이었다.

[네, 맞아요.]

조금이라도 움찔할 줄 알았는데 칼리오페는 너무나 상큼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한 걸 알고서 하는 게 맞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 생각 없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다음 칼리오페가 한 말에 비하면.

[대신관님께서는— 나이는 중요하진 않긴 하지만, 성인…… 맞으시죠?]

“아아악!”

티할렌의 비명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머리를 밟은 발이 무게를 실은 채 그대로 움직여 코가 바닥에 뭉개졌다. 비릿한 피가 비강을 가득 채워 눈앞이 벌겋다.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티할렌 신관.”

“대신관님께서 명하신 일 아닙니까!”

견디다 못한 티할렌이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항의했다.

멈칫, 그를 억누르던 대신관의 발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 된 티할렌이 고개를 들었다.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대신관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언제요?”

반질반질 아무 거리낌 없는 미소를 지은 얼굴.

“……!”

티할렌의 동공이 경련하며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어떤 말도 나오지 못하고 밭은 숨만 터져 나왔다.

아무 말 못 하는 티할렌을 보며 대신관이 싱긋 웃었다.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요?”

그는 티할렌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망이 된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툭툭 머리를 치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비스의 이름을 더럽힌 죄로 신관 티할렌을 파면한다.”

대신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티할렌은 엄청난 박탈감에 몸을 잘게 떨었다. 심장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 같은 공포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털썩—

빛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힘이 빠진 티할렌이 바닥에 뻗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여간 쓸모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니까요.”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그래도 당신 소식을 들은 루스티첼 영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그걸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티할렌은 대신관의 모욕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손바닥에 신성력을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도, 몇 번을 노력해도.

“이왕이면 루스티첼 영애에게 찾아가 비참한 당신 모습을 보여주며 싹싹 비는 것도 좋겠지요.”

대신관의 말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티할렌은 이를 악물었다.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던 신성력이 텅텅 비었다. 신성력을 쓰려 하면 할수록 그 사실만 재차 확인받을 뿐이다.

“안 돼…….”

입술에서 흐느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신성력은 고행을 통해 쌓을 수 있다.

티할렌은 신성력을 얻기 위해 1년 중 99일 동안 잠도 자지 않으며 식음을 전폐했다. 그것도 34년간이나.

그런데 이제 다 사라져버렸다. 단 한순간에 모든 것이.

“으아아아악!”

부들부들 떨던 티할렌이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분명 움직일 수조차 없을 텐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그대로 대신관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이……! 너, 내, 내가!”

티할렌은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했다. 시뻘게진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런.”

대신관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티할렌을 봤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이 좋아요.”

그는 손끝으로 부드럽게 티할렌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다른 사람을 짓밟을 땐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하면서 자기가 짓밟힐 땐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불쌍하지.”

대신관은 손끝에 묻은 피를 보면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나랑 참 닮았다니까.”

그의 눈동자는 희열에 가득 차 번들거렸다. 티할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좌절감과 패배감,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에 근육이 경련했다.

“다른 점은 나는 절대 짓밟히지 않는다는 건데.”

중얼거린 대신관이 비밀을 이야기하듯 티할렌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이게 가장 중요한 차이거든요.”

그는 다시 고개를 똑바로 하고 티할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성직자다운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한텐 꼬리 만 모습이 잘 어울려요.”

툭.

대신관의 멱살을 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대신관은 빙긋 웃으며 티할렌의 어깨를 탁탁 쳐주고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대신관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긴 로브가 고개를 숙였다.

“루스티첼 가의 반응은?”

긴 로브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젠장!”

쾅! 대신관이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베이비 살롱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그 땅의 소유자가 칼리오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칼리오페의 행보 역시 주목받고 있으므로 뒤에서 땅에 관해 조작하기도 힘들다.

“왜 하필 그년의 땅인 거야!”

칼리오페 루스티첼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번번이 그녀에게 발목 잡힐 리 없지 않나. 하지만 직접 만났을 때 그런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알더라도 막는 게 가능한가.

결과적으로는 막혔지만,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직접 막았다기보단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녀가 있었을 뿐이다.

만약 그런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칼리오페는 희대의 천재라는 호칭도 부족한 지략가이자 정치가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신관님.”

긴 로브의 목소리가 그를 상념에서 깨웠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대신관의 얼굴이 소태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래, 뭐 일단 스티그마를 찾은 거니까. 그걸 보고하면 괜찮겠지. 루스티첼 가를 설득하는 건 폐하의 도움을 받는 게 더 좋을 거고.”

* * *

“아가씨.”

칼리오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꽃대를 자르다 고개를 들었다.

“아, 집사.”

꽃을 보고 있을 땐 미소 짓고 있었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집사는 속으로 멈칫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칼리오페에게 용건을 전달했다.

“서모나 영식과 엘피너스 영애가 오셨습니다.”

예정에 없는 방문이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일어났다.

“날씨가 좋으니까 일단 동쪽 테라스로 안내를—”

“리페!”

문이 벌컥 열리고 집사 뒤에서 에피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피니 언니.”

“어떻게 된 거야? 응?”

에피니가 타다닷 달려와서 칼리오페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그렇게 다그치지 말라고. 리페가 곤란해 하잖아.”

뒤따라 들어온 힐데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힐데 오라버니.”

“아니, 내가 언제 다그쳤다고 그래! 나는 그냥, 어?”

“네, 에피니 언니도 힐데 오라버니도 모두 절 걱정하신 것뿐이지요. 알아요.”

칼리오페가 생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사다.’

‘천사가 여기에 있어.’

에피니와 힐데르트는 똑같은 생각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칼리오페에게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아 눈이 부셨다.

“음,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동쪽 테라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리하고 갈 테니까.”

“여기도 괜찮아.”

“그래. 꽃꽂이하는 거 구경하지, 뭐.”

급해 보이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에게 손짓하자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야?”

문이 닫히자마자 에피니가 물었다. 힐데르트 역시 말은 하지 않지만, 눈빛으로 답을 종용하고 있었다.

뭘 묻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칼리오페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후 어제 메일린 부인의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뭐야, 미친놈 아냐?”

그게 에피니의 첫 감상이었다.

“왜 갑자기 너한테 와서 시비야? 대신관이 안 왔으면 아주 쳤겠다? 내가 가서 패줄까?”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에피니의 주먹을 바라봤다.

“괜찮아요.”

‘조금 혹했지만.’

“대신관도 어이없네. 잘 말리다가 왜 갑자기 네 땅에 신전을 세운대? 뭐, 법 같은 거 있지 않아? 남의 땅에 자기 멋대로 건물 세우면 안 된다고.”

“토지 무단점유 및 불법 건축.”

힐데르트의 대답에 에피니가 손가락을 튕겼다.

“어, 그거.”

“신전을 불법 건축물로 고발하면 웃기긴 하겠네.”

힐데르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신전에서 인간 중심인 속가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당연하지만,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신관이 찾아와서 모욕하다니…….”

힐데르트의 예리한 말에 칼리오페는 뜨끔했다. 그녀 때문에 신전의 계획이 몇 번이나 좌절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러는 거지.”

어떻게 대꾸할까 고민하는데 에피니가 툭 답을 내놓았다.

“아니, 보통은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모르는 사이에 찾아와서 저러진 않거든?”

“어휴, 넌 이론만 빠삭할 뿐 아직 세상을 몰라. 세상에는 말이야.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 사람이 있단다.”

“내가 모르는 거면 너는 뭔데?”

“네 인생 선배.”

두 사람은 한참 투닥거리다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티할렌을 말리던 대신관이 갑자기 땅을 달라고 한 것도 이상해.”

“난 예전부터 그 대신관 뭔가 안 좋았어. 몇 번 본 적도 없지만.”

에피니의 말에 힐데르트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현재 비스 신전의 대신관은 평이 좋은 편이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에피니 언니는 감이 좋았지.’

칼리오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좀 인상이 별로였긴 한데…….”

평소였다면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핀잔했을 힐데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렇게 이유 없이 기분 나쁜 사람은 사실—”

중얼거리다 아차, 한 힐데르트가말을 멈췄다.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난 너와 다르거든.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아서.”

“아, 그러셔. 그래서 누군데?”

힐데르트는 그 말에 잠시 망설이더니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어? 저요?”

“아니!”

칼리오페의 물음에 힐데르트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힐데르트는 잠시 에피니와 칼리오페를 번갈아 보다 털어놓았다.

“이 집 집사 말이야.”

“아…….”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와서 칼리오페는 침음을 흘렸다.

‘역시 힐데 오라버니는 예리하시네.’

두 사람에게 딱히 집사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

“아니에요.”

힐데르트의 사과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집안의 고용인을 욕하는 것은 그 가문의 안목을 의심하는 것과 같다. 특히 집사는 고용인 중에서도 위치가 상당한 만큼 더더욱.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제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힐데 오라버니가 꺼림칙하다고 말했으면 한 번 다시 살펴봤을 거예요.”

“어?”

칼리오페의 말에 힐데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다정한 미소를 지은 칼리오페가 그를 보고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우리 사이엔 그렇지.”

힐데르트는 시선을 살짝 피하며 중얼거렸다. 양 뺨이 홧홧했다.

“리페, 내가 말했으면?”

볼을 퉁퉁 불린 에피니가 눈을 치켜뜨며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글쎄요…….”

칼리오페가 뜸을 들이자 에피니의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칼리오페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받아들였겠죠.”

그 말에 에피니는 만족해서 뾰족했던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그리곤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렸다.

“흥.”

에피니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그 사이 양 뺨을 가라앉힌 힐데르트가 물었다.

“그런데 리페도 사실 집사 별로 안 좋아하지?”

“네?”

“아, 맞아. 나도 집사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었어. 리페가 싫어하니까.”

에피니의 맞장구에 칼리오페는 더더욱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티 냈나?’

아기 때 이유식 그릇을 집사의 얼굴에 던졌던 것처럼, 얼굴 볼 때마다 뭘 던지고 싶었다. 아까 집사가 들어왔을 때도 저도 모르게 꽃병을 움켜쥐었었다.

그래도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리페, 집사한테는 절대 웃어주지 않잖아.”

“맞아. 항상 누가 말만 걸어도 상냥하게 웃어주는데 말이야.”

“너무 누구에게나 다 그래서 문제지.”

“맞아. 나같이 특별한 관계인 사람한테만 웃으라고.”

에피니의 말에 힐데르트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에피니가 씨익 웃으며 칼리오페의 팔에 팔짱을 끼며 찰싹 붙었다.

“야!”

“왜!”

떽떽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을 보며 칼리오페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힐데르트는 물론이고 에피니도 다른 사람들한텐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조금 더 차가운 느낌이랄까. 힐데 오라버니는 완전히 무시하는 때도 많고.’

전생이나 지금이나 힐데르트는 오만한 도련님이었다.

‘역시 소꿉친구라서 그런가.’

편하고 친한 만큼 별 것 아닌 일에 투닥거리면서 노는 모습에 미소가 나왔다. 몇 년이 지나도 어렸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이제는 말싸움에서 밀린 에피니 언니가 힐데 오라버니를 때리진 않지만…….’

그런 것만 제외하면 옛날과 똑같았다.

칼리오페 자신 역시 이들과 있으면 꽉 조였던 긴장이 풀어지곤 한다.

‘유리 오라버니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녁에 편지 써야겠다.’

“근데 리페는 왜 그렇게 집사를 싫어하는 거야?”

“살펴봤지만 뭔가 책잡힐 행동은 하지 않던데. 오히려 일 잘하는 편 아닌가? 태도도 정중하고.”

“그래도 나는 리페가 싫으면 싫어.”

“나도 좋다고 말한 건 아니거든?”

한마디씩 더 하며 종알거린 두 사람이 대답을 구하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음…….”

전생의 일을 말할 순 없다.

칼리오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달리아 한 송이를 집었다.

“오늘 정원사가 꽃을 따왔을 때 온실에 있던 작약이 다 시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정원사는 자신의 실책을 시인하며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왜 그랬는지 물었는데 그래미타르 때문이래요.”

“그래미타르?”

원예에도, 꽃꽂이에도 취미가 없는 에피니가 물었다.

“이충이라고 해야 하나, 해충이라고 해야 하나……. 벌레예요.”

“이충이랑 해충은 완전 반대 아냐?”

“네. 꽃이 건강할 때 그래미타르는 꽃의 성장을 도와요. 하지만 건강이 나빠지는 순간 꽃의 양분을 모두 다 빨아 먹어버리지요.”

핑그르르— 풍성한 달리아 꽃송이가 칼리오페의 손안에서 돌았다.

“그래서 정원사에게 그래미타르를 모두 제거하라고 했어요.”

뚜둑.

꽃 가위가 꽃대를 싹둑 잘랐다. 잘린 꽃대가 테이블 위로 추락했다.

“꽃에게 도움만 되는 이충이 있는데 굳이 그래미타르를 살려둘 필요 없잖아요?”

칼리오페는 빙긋 웃으며 방금 손질한 달리아를 에피니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머리카락이 붉어서 그런가. 언니한테는 흰 꽃이 잘 어울려요.”

에피니는 무심코 귓가에 걸린 꽃을 만지작거렸다.

검 훈련 때문에 굳은살이 잔뜩 배긴 손에 닿은 꽃잎이 놀라울 정도로 보드라웠다. 그러다가 칼리오페와 눈이 마주쳐 재빨리 손을 내렸다.

“흥.”

고개를 팩 돌리는 에피니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후후 웃었다.

“힐데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다 없애야지. 어떤 의미에선 해충보다 더 나빠.”

‘……에피니 언니에게 어울리는 꽃을 물은 거였는데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따로 정정하진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래미타르를 싫어해요.”

칼리오페의 단호한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칼리오페가 이런 식으로 뭔가에 대해 강한 혐오를 나타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정원에 생긴 그래미타르는 정원사에게 맡기면 되지요.”

“그럼 집안에 생긴 그래미타르는?”

그녀의 말을 받아 힐데르트가 물었다.

칼리오페가 꽃 사이에서 환하게 웃었다.

“제가 없애야지요.”

* * *

집사는 묘한 얼굴로 루스티첼 저를 나서는 손님들을 바라봤다.

엘피너스 영애의 귓가에는 흰 달리아가, 서모나 영식의 귓가에는 보랏빛 아네모네가 꽂혀 있었다.

[자, 힐데 오라버니는 아네모네.]

[이, 이런 거 나는……. 내가 몇 살인데—]

[잘 어울려요.]

[……뭐, 가끔은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겠지.]

세 사람의 차를 가져다줄 때 들었던 소리다.

집사는 대명문 서모나의 후계가 머리에 꽃을 꽂고 돌아다니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집사.”

“예, 아가씨.”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그는 흠 없이 고개를 숙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봐왔던 소녀는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사랑스럽게 성장했다. 하지만 집사는 그녀에게서 여전히 꺼림칙함을 느꼈다.

‘저 눈…….’

그를 볼 때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설원의 빙하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금도—

“아가씨……?”

집사는 저도 모르게 칼리오페를 불렀다.

산호빛 눈동자가 전에 없이 따스했다. 아니, 그다지 따뜻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번 차가운 눈빛만 받던 그에게는 세상 어떤 것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칼리오페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왔다.

집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맹세컨대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 것은 그가 집사가 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손에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 동시에 따뜻한 것도.

집사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스친 따스한 것은 아마도 칼리오페의 손가락인 모양이다.

“집사도 꽃.”

그 말에 고개를 드니 칼리오페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내 선물이야.”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꽃다발을 품에 안아 들고 나서야 자신이 꽃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품에서 싱그럽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소담한 꽃다발 위로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잘 어울리네.”

칼리오페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였다.

집사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칼리오페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시선을 뗐다.

그는 머뭇머뭇거리다 꽃다발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예쁜 꽃이었다. 깊게 향기를 맡으니 기분까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집사는 꽃같이 비실용적인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길어야 열흘이면 시들어버리는 것 아닌가.

고용인들과 사이가 좋은 칼리오페는 몇 번 직접 만든 꽃다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면 하인, 하녀 할 것 없이 모두 감격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집사는 고용인 숙소 벽에 칼리오페에게 받은 꽃다발이 소중히 말려져 있는 걸 몇 번이나 봤다.

‘이왕 줄 거 그 값이면 보석이나 줄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지만 아무도 자신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아가씨의 손이 갔다는 것에 보석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정말 비실용적이야.’

직접 칼리오페에게 꽃을 받게 된 지금, 그때와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말려는 볼까.’

* * *

“리페, 기분이 좋아 보이네.”

루스티첼 부인은 집무실에 들어오는 딸아이를 보고 웃으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제 기분을 그렇게 바로 아세요?”

“엄마 딸이니까 그렇지!”

그녀는 딸아이를 꼭 끌어안고 통통한 장밋빛 뺨에 뺨을 부볐다.

“힐데와 에피니가 왔다는 소리는 들었어.”

“네. 마침 꽃꽂이 중이었어서 꽃을 선물해줬어요.”

“선물했는데 좋아하면 기분이 좋지.”

“네, 그래서 집사한테도 선물했어요.”

“집사한테 꽃을?”

입술로 앙앙 뺨을 깨물던 루스티첼 부인이 멈칫했다.

딸아이가 집사를 꺼리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잘 어울리더라고요.”

무덤에 심는 사이프러스가.

꽃잎이 내려앉듯 칼리오페의 눈매가 보드랍게 휘었다.

“뭔가 이상한데.”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딸아이를 바라봤다.

“네?”

“지금 리페 표정 말이야. 뭔가 이상해.”

길게 말을 끌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루스티첼 부인은 읏샤, 하고 딸아이를 번쩍 들어 무릎에 앉혔다.

“어, 어머니?”

칼리오페가 당황해 불렀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손을 착착 움직여 아이가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순식간에 칼리오페는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폭 안긴 모양새가 됐다.

‘으응……?!’

칼리오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떨떨해했다.

“자, 착하지.”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따뜻했다. 몸에서 무심코 힘이 빠졌다.

한참 그렇게 등을 토닥이던 루스티첼 부인이 넌지시 물었다.

“뭔가 슬픈 일 있니?”

칼리오페는 움찔해서 어머니를 올려다봤다. 자신과 똑같은 빛깔을 지닌 눈동자가 곧장 다정하게 마주쳐 온다.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온화했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이야?”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통을 차분차분 매만진다.

‘웃었는데…….’

엄마한테는 다 들켜버리는 모양이다.

시간을 되돌아온 뒤, 집에서 집사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꺼림칙했다. 하지만 자신이 불편하다고 해서 일 잘하는 사람을 쫓아낼 순 없다. 불편한 이유를 말할 수 없으니 더더욱.

12년 동안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 보는 사람을 미워하는 건 힘든 일이다.

조용히 부모님을 보좌하는 집사를 보고 있을 때면 ‘어쩌면 혹시 이번에는 다를지도 몰라.’ 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칼리오페는 가슴 속에서 전생의 비극을 되뇌었다.

몇 번을 되풀이해도 그 기억은 칼리오페의 가슴에 새로운 상처를 냈다. 하지만 심장이 난도질당해 피가 맺혀도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됐다. 다시 반복할 수 없으니까.

나아가고 싶으니까.

그래서 집사와의 관계를 어서 정리하고 싶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을 내고 싶었다.

아주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왔다.

당연히 기뻤다.

‘……하지만 역시 괴로워.’

누군가를 의심하며 그 사람의 앞길에 덫을 치는 것.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서, 하지만 ‘혹시’라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서 칼리오페는 더더욱 힘들었다.

최대한 슬프다거나, 가슴 아프다거나 그런 생각 안 하려 했는데.

“엄마…….”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부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따스하고 포근한 엄마 품에서는 기분 좋은 익숙한 냄새가 났다.

‘엄마 냄새.’

숨을 잔뜩 들이켜자 가슴이 크게 부풀며 눈이 저절로 감겼다. 전생에서 살았던 시간까지 합치면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났는데 왜 엄마 품에 안기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응, 엄마 여기 있어.”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기분 좋아.’

칼리오페가 아직 성인이 되기도 전에 가족들이 다 죽고 어머니와 단둘이 남겨졌다.

그때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 계셨다. 칼리오페는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자신을 감싸줄 사람의 품에 기대선 안 됐다.

어머니마저 죽고 나선 정말로 홀로서야 했다.

시간을 되돌아온 후, 칼리오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든 그녀를 안아줄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에 제대로 어리광을 부려보지도 못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해가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정한 말 한마디를 속삭였다.

“리페가 뭘 하든 엄마는 리페 편이야.”

“응.”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닥이는 손길과 포근포근한 품을 느끼고 있으려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어리광을 부려볼걸.’

칼리오페는 가족을 지키는 것 외의 꿈을 가져도 된다는 것조차 다른 사람이 알려줘서 깨달았다.

‘……이제라도 차근차근 하나씩 내 삶을 찾는 법을 배워가면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있어야 한다. 아무도 죽지 않은, 모두 살아있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이번 생에서는 꼭 다 지켜서 계속, 오랫동안 함께 있어야지.’

키가 엄마보다 더 자라도 엄마 품에 안겨 이렇게 어리광 피워볼 것이다.

상상만으로 창피한데, 어딘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정신 차리자.’

칼리오페는 엄마에게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어머니.”

루스티첼 부인은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딸아이를 마주 봤다.

‘엄마라고 불렀을 때 귀여웠는데…….’

“저 때문에 약간 집안이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어요.”

언제 어리광을 부렸냐는 듯이 칼리오페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미타르를 잡는 방법은 덫을 놓는 것이다.

“마침 잘 됐구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집안에 활기가 부족한 것 같아 걱정하던 참이란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은 활력을 더 해주지.”

생긋 웃으며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입을 꼬옥 다물었다.

‘언제나 내 편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가슴이 몽글몽글 따뜻한 것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고 보면 속가 때문에 부모님도 여러 소리를 들었을 텐데 제게 내색 한 번 한 적 없다.

“……죄송해요, 어머니.”

“어머? 왜 그러니? 우리 딸은 엄마의 기쁨이자 자랑이야. 절대 그건 변하지 않아. 네가 사과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응. 그럼…… 감사합니다.”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사르르 웃었다. 그리곤 딸아이에게 뺨을 내밀었다.

“고마우면 뽀뽀.”

“…….”

“안 해주는 걸 보니 별로 고맙지 않은가 보구나……. 엄마 조금 슬픈데…….”

“…….”

쪽.

결국 칼리오페는 엄마의 볼에 뽀뽀할 수밖에 없었다.

* * *

“세상에, 그 소식 들으셨어요?”

“비스 신전의 대신관이 열두 살짜리 여자애한테 금전을 요구했다는 거 말이죠?”

“그 애가 속가를 불렀잖아요. 기부하면 그거 봐준다고 그랬다나 봐요.”

“아니, 대체……. 신전에서 속가를 부르는 걸 꺼릴 수야 있지만, 왜 그걸 본인이 돈 받고 봐주느니 마느니 하는 거죠?”

“당황스럽네요, 정말……. 이번 기부는 비스 신전 말고 오렌이나 로한에 할까 봐요.”

사교계에는 대신관에 관한 스캔들이 파다했다.

깜짝 놀라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설마 정말로 그랬겠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신전은 침묵했다.

원래 신전에서 귀족들의 소문에 참견하는 경우가 거의 없긴 했다. 소문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지만.

신전은 소문에 대한 대응은 하지 않고 비밀리에 루스티첼 가와 접선했다. 베이비 살롱의 토지를 넘겨받기 위해서였다.

성물과 성수, 축복 등등.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신전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루스티첼 백작 내외의 답은 한결같았다.

“그 살롱의 주인은 제 딸입니다. 처분하든 뭘 하든 다 딸아이의 결정에 맡겨두고 있어요.”

그즈음 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의 편지를 받았다.

‘왜 사하르네 부인이……?’

어릴 적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서 그녀를 본 이후로, 되도록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 왔다. 사하르네 부인 역시 칼리오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서 사하르네 저에 초대라…….’

스티그마와 관련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신전과 사하르네 부인이 서로 연관 있는 건가?’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사하르네 부인.]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이 칼리오페를 덮쳤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어머니 약값만큼은……! 이대로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루스티첼 영애. 추해요, 지금.]

추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도 다 내다 버렸나요?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어도, 천박하게.]

자존심도 다 버렸다.

어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렇게 구걸할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몸이나 팔라고 했다.

당시 칼리오페가 별로 인연이 없던 사하르네 부인에게 돈을 빌리려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겠다고 답장해드려.”

“알겠습니다.”

칼리오페의 말에 집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산호빛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띠고 물러나는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가씨, 저도 살길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생에서 들었던 집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소용돌이쳤다.

[같이 죽을 순 없죠. 설마 제게 남아달라 하는 건 아니겠죠. 아가씨가 그렇게 염치도 모르는 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남아있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집사를 가족처럼 생각했지만 그 믿음으로 족쇄를 채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상황에서 땅문서와 어음을 비롯해 남아있는 재산 전반을 빼돌릴 줄은 몰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그간 전 마님을 도와 내사 전반을 책임져 오지 않았습니까. 제게 맡기십시오. 아가씨는 마님 간호에 집중하세요.’

그렇게 말해놓고서. 어떻게 어머니의 약값조차 남겨 놓지 않을 수 있는가.

순진하다 못해 멍청한 자신은 그때 집사의 말을 믿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었다.

흔들리는 칼리오페의 시선이 집사 손에 들린 서류 뭉치로 향했다. 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선 단 한 톨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이거요? 제 퇴직금입니다.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제가 스스로 챙겼습니다.]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아버지와 후계인 루스 오라버니가 모두 죽고 어머니가 사경을 헤매는 걸.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줄은 몰랐다.

[뭘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어차피 망할 집안. 다 사라지기 전에 제가 챙긴 건데.]

[……뭐라고?]

[아가씨도 모르는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제 손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제가 잘 관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는 충격 받은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저런, 하고 혀를 찼다.

[설마 가세가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하다못해 마님께서 정신을 차리신다거나.]

어머니. 칼리오페는 차갑게 식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신 분이라 그런가……. 그래도 총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아가씨 머릿속이 그렇게 꽃밭인지는 몰랐는데요.]

[……뭐라 말하든 상관 없어.]

자신에 대한 모욕은 전부 참을 수 있다. 뭐라고 말하든 괜찮다.

[제발 부탁이야. 어머니 약값만은 돌려줘.]

어머니만 살릴 수 있다면.

집사는 간절하게 부탁하는 칼리오페를 보더니 혀를 쯧, 찼다.

[이건 정말 아가씨를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님은 포기하세요. 가망 없는 희망은 고문입니다. 어차피 얼마 안 가 이대로 돌아가실 텐데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러면서 집사는 재산 문서를 흔들었다.

어머니의 목숨과 돈을 가볍게 저울질하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분노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분노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건 모두 줄 수 있어. 어머니 약값만 남겨줘. 어머니께서 당신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비참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다 못해 그 배신자에게 자비를 구걸해야 하는 것. 그건 생각보다 훨씬 참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게 무너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예, 마님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셨죠. 다정하면서도 공명정대하시고……. 이렇게 이상적인 고용주는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집사가 미소 지었다. 가족들이 살아있을 때처럼, 좋았던 시절의 미소.

그 미소를 띤 채 집사는 칼리오페에게 똑바로 물었다.

[하지만 곧 죽을 건데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머릿속에서 파도치던 소리가 뚝 끊겼다. 새파란 분노가 모든 것을 잡아먹었다. 칼리오페는 숨을 몰아쉬었다.

“왜…….”

잇새로 흐느낌 같은 의문이 나왔다.

칼리오페는 그대로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회귀한 후 계속 집사의 행적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었다.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일 잘하는 집사.

어머니와 집사가 함께 미소 지으며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속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피어올랐다. 그가 가끔씩 칼리오페의 집무를 챙겨줄 때면 더더욱.

무엇보다 지금 집사는 아직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아…….”

사람의 마음은 왜 이렇게 복잡할까.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미워하고 혐오하기만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래도 곧 끝이 날 거야.’

그러기 위해선 덫을 진짜 같이 쳐야 했다.

칼리오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산호빛 눈동자가 비석(匪石)처럼 단단했다.

슬픔도, 분노도, 의심도, 증오도…… 끝이 보이는 희망마저도 그녀를 퇴색시키진 못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루스티첼 아가씨.”

사하르네 저의 고용인들이 깍듯하게 칼리오페를 맞았다.

집사 정도만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하우스 키퍼를 비롯해 꽤 지위 높은 고용인들 여러 명이 나와 있었다.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영애에게 하는 마중 인사치고는 과했다.

‘과연, 부탁할 게 있다는 거지.’

칼리오페의 예상이 얼추 맞아떨어져 간다.

사하르네 부인은 어떻게 나올까. 그리고—

‘집사는 어떨까.’

칼리오페는 오늘 동행인으로 집사를 택했다.

아무리 전생에서 집사가 내사를 관리했다고 해도 너무나 손쉽게 전 재산을 빼앗겼다. 분명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해 수소문했었다.

‘그게 사하르네 부인이었지.’

그래서 칼리오페는 그다지 친분이 없던 사하르네 부인에게 찾아갔었던 것이다.

힐끔 집사의 상태를 살폈으나 딱히 동요한 기색은 없었다.

‘그게 가면인지, 진짜인지는 곧 드러나겠지.’

회귀한 후 지금까지 집사의 행적에는 사하르네 부인과의 접점은 없었다.

“마님께서는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하르네 저의 집사가 칼리오페를 안내했다.

‘이렇게 환대하면서 정작 본인은 마중 나오지 않은 건 주도권을 쥐고 있겠다는 건가.’

칼리오페의 기분을 맞춰주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잃지 않겠다는 뜻이다.

‘협상의 기본이긴 하지.’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협상할 생각이 없는데.’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 *

“그러고 보니 곧 리페 생일이지? 뭐 갖고 싶은 것 있니?”

“축하해주시는 마음만으로 감사해요, 부인.”

“그러지 말고 말해보렴. 뭐든 좋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칼리오페는 살짝 미소 짓고는 덧붙였다.

“부모님께서 물욕을 탐하지 말라고 가르치셔서요.”

그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사하르네 부인이 물욕을 탐하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시 사하르네 부인의 미소가 흐려졌지만 곧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러냐며 호호 웃었다.

‘아직 어린애가 무슨 속뜻이 있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리페는 정말 부모님 말씀 잘 듣는구나. 어쩜 이렇게 의젓하고 예의 바르니? 그러고 보니 사교계에 처음 나왔던 때부터 남달랐지.”

칼리오페는 어떻게든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려 애쓰는 사하르네 부인을 보며 웃었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의젓하고 예의 바르게.

“감사합니다, 부인.”

“그때가 몇 살이었더라……?”

“다섯 살이었어요.”

“아, 그랬지.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이었던가……. 그때 리페도 처음 보고 루스티첼 부인도 처음 뵙다시피 했는데. 황궁 연회 같은 데에선 뵈었지만 소소한 사교 모임에서 뵌 건 처음이라 기억나.”

“그때 제가 부인을 뵈었군요. 전 기억나지 않는데…….”

멈칫.

찻잔을 들어 올리던 사하르네 부인의 손이 멈췄다.

만남을 한쪽만 기억한다는 것은 귀족 사회에서 다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만남의 무게가 양자에게 다르단 뜻이고, 한쪽에게 별 볼 일 없었기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니까.

“그때 리페가 넘어져서 내가 일으켜 세워줬었는데…….”

“어머, 그러셨군요.”

칼리오페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리페는 그때 어렸으니까, 그럴 수 있지.”

예의상이라도 기억난다고 하는 게 보통이거늘.

사하르네 부인은 딱딱해지는 안면근육을 애써 끌어올리며 이해한다는 듯이 답했다.

괜히 넘어진 것을 일으켜줬다는 말까지 했다. 상대는 기억조차 못 하는 일을 혼자 자세히 알고 있다는 티만 내고 끝나다니. 본전도 못 찾은 꼴이다.

칼리오페는 차를 들이켜는 사하르네 부인을 보며 생긋 웃었다.

‘걱정 말아요, 부인. 부인이 첫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재회는 내게도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니까.’

그 만남으로 칼리오페는 어서 자신의 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사하르네 부인 덕이었다.

‘게다가 부인이 기억 못 하는 일들까지 저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칼리오페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회귀 후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아주 익숙한 방이기도 했다.

“이 방, 풍광이 정말 좋네요. 전면 창이 있어서 그런가.”

칼리오페가 사하르네 부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사실 우리의 첫 만남은 이 방이었답니다.’

“나도 이 방에서 보는 바깥 풍경을 좋아한단다. 그래서 중요한 손님은 꼭 이 방에 부르곤 하지.”

사하르네 부인의 은근한 말에 칼리오페가 조용히 눈을 내리떴다.

‘그때 어머니 약값을 빌려달라고 했던, 보잘것없는 내가 당신에게는 꽤 중요한 손님이었나 보네요. 왜일까.’

풍경 좋은 곳에서 남을 짓밟는 걸 즐기는 거였나?

‘아니. 뭔가가 있어.’

회귀 후, 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딱히 남을 짓밟거나 깔아뭉개며 희열을 느끼는 부류가 아니었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 나누니 정말 즐거워. 다른 부인들이 왜 그렇게 리페를 좋아하는지 알겠다니까.”

칼리오페는 그 말에 말없이 차를 마셨다.

‘신기한 기분이네요.’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머리칼을 스쳤다.

‘절박한 내게 추하다고 말했던 당신이 지금 내 칭찬을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환심을 사기 위해 안달복달하다니.’

탁,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은 칼리오페가 사하르네 부인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건 부인께서도 제가 좋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머, 당연하지.”

“와, 의외네요. ……정말로.”

두 손을 모으고 웃으며 감탄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사하르네 부인이 미소 지었다.

분위기가 좋다. 슬슬 본론을 꺼낼 때다.

“그나저나 그럼 리페가 다섯 살 때 베이비 살롱을 차린 거구나. 어린 나이에 대단하네.”

‘역시.’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사하르네 부인은 스티그마를 목적으로 자신을 초대한 것이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잘 되고 있지. 아니, 더 잘 되고 있나?”

“소소하게 공부할 수 있는 정도예요.”

“겸손하기도 하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로 붐비는 게 보이던데. 좀 좁지 않니?”

속이 빤히 보이는 말에 칼리오페는 웃었다.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지금은 붐비는 정도지만 나중엔 더할 거야. 리페, 사업은 점점 키워가는 거란다.”

사하르네 부인의 말에 칼리오페는 흠, 하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먹이를 무는 척 해줄까. 아니면 이대로 일어설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먹이를 무는 척하는 걸 미끼로 이쪽에서 낚싯대를 드리우자.’

쉽게 끝내줄 수 없으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어떻게 키울지 고민되네요.”

작게 한숨을 쉬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사하르네 부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선은 면적부터 넓혀야지.”

“음, 그런데 그러려면 좀 부담이 돼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보니까요. 제가 맡고 있는 일이니 부모님 손 빌리기도 탐탁지 않고요.”

사하르네 부인은 찢어지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말만 쏙쏙 하는 건지.

“그럴 때 보통 투자를 받는단다. 리페가 원한다면 내가 투자할 생각도 있는데.”

“정말요?”

“그래. 물론 이쪽도 손해 봐서는 안 되니까 조건을 걸어야겠지만.”

“흠……. 하지만 역시 남의 돈 끌어 쓰는 건 걱정 돼서요. 조건도 있다고 하시니.”

칼리오페가 한 발 뺄 듯이 굴자 사하르네 부인은 초조해졌다. 그녀는 조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칼리오페를 설득했다.

“조건이라고 하지만 내가 이상한 걸 요구하진 않을 거야. 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선에서 합리적인 조건을 걸겠지.”

‘그 조건이라는 게 내가 가진 땅을 달라는 거겠지.’

칼리오페는 느긋한 기분으로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망설이는 척 눈썹을 내려트렸다.

“음…….”

“지금 섣부르게 안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이야기부터 나눠보자. 면적을 넓히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그 돈을 내가 지원해줄게.”

“그럼 일이 너무 많은데…….”

“나한테 전부 맡기렴. 리페는 완성된 건물만 짠, 하고 보면 돼.”

“와아, 그럼 부인께서 베이비 살롱 건물을 더 넓혀주시는 거지요? 주변 건물 매수랑 건물 증축도 다 책임지시고.”

“응?”

사하르네 부인은 당황해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아, 아니……. 이왕 넓히는 거 아예 새롭게 짓는 게 어떠니? 더 좋은 곳에 크고 이쁘게 지어줄게.”

서둘러 정정하자 칼리오페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짝, 쳤다.

“아~ 2호점을 내주신다는 거군요. 기뻐라.”

사하르네 부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분명 제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중요한 부분에서 계속 헛돌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자 사하르네 부인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 가게가 두 개면 관리하기 힘들잖니. 일단 지금 있는 곳은 정리하고, 목 좋은 곳에—”

“파트리유 거리보다 목 좋은 곳이 있나요?”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하는 말에 사하르네 부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

파트리유 거리는 제도 최대의 상업지구다. 그곳보다 목 좋은 곳은 없다.

칼리오페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잘되는 가게를 정리하고 다른 데로 가라고 하시다니…….”

칼리오페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하르네 부인은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언제 식은땀이 났는지 손이 축축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혹시, 그곳에 뭐 있나요?”

칼리오페가 사하르네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랑또랑하게 물었다.

그 투명한 산호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사하르네 부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망했다.’

그 세 글자가 머리 위에 떠올랐다. 그녀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보통 생각이 그쪽으로 튀나?’

보통 의심을 해도 베이비 살롱이라는 브랜드를 노린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아니면 가로채기라던가.

아직 어려 사고가 유연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지나치게 감이 좋은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뛰어난 통찰력으로 대화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거나.

‘……설마.’

그러던 중 칼리오페와 다시 눈이 마주쳐 사하르네 부인은 아차, 했다.

‘아, 이런……. 이렇게 당황을 내보이다니.’

본인의 페이스를 잃을 정도로 칼리오페에게 말려들었다.

뒤늦긴 했지만 사하르네 부인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거긴 리페 사진이 있지? 엄청 인기 많던데. 뭐가 있으면 나보다는 그곳의 주인인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니?”

장난스럽게 말한 사하르네 부인이 갑자기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설마, 리페. 내가 네 살롱이 탐나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그런 것은 눈치채지 못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그 말에 사하르네 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렇—”

“그런데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의아하네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저와 달리 부인께서는 그렇게 생각할 거리가 있었나 봐요?”

한 방 먹었다.

사하르네 부인은 경련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리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 되겠어.’

사하르네 부인의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서리는 것을 본 칼리오페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너무 느리잖아요.’

이제 와서 경계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생각보다 선입견은 무의식중에 강하게 적용되지요.’

칼리오페는 빙긋 웃으며 낚싯대를 잡아당겨 미끼를 흔들었다.

“그럼 부인께서는 어느 정도 생각하셨어요?”

“……무슨 말이니?”

“투자 금액이요. 새로 건물을 지을 거라고 생각하셨으면 그만큼 큰돈이 들잖아요. 위치는 모르겠지만 지대도 그렇고요.”

사하르네 부인이 눈을 깜빡였다.

‘아, 결국 넘어왔구나……!’

그녀는 기쁨을 내리누르며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했다.

‘다 됐다고 생각하다가 실수해서 망치면 안 돼.’

칼리오페는 그런 사하르네 부인을 보며 차를 홀짝였다.

방금 자신을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봤면서 바로 이렇게 돌아서는 게 우스웠다.

‘하긴 스티그마가 보통 먹음직스러운 게 아니죠.’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들만한 미끼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어리니까.’

아무리 경계한다고 해도 열두 살 소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상 무의식중에 ‘그래 봤자.’ 하고 생각하게 된다.

“봐둔 곳이 있어. 리페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제도 근교야. 복잡한 번화가보다는 느긋한 곳에서 즐기는 게 낫지 않겠니?”

어차피 파트리유 거리까지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이 정도 거리 차이는 문제 없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도 충분해. 베이비 살롱의 손님은 어린 아가씨와 도련님들이니까.”

칼리오페는 걱정스럽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파트리유 거리보다는 아니겠지만, 제도 근교도 지대가 제법 높을 텐데요. 넓으면 그만큼 가격이…….”

“걱정하지 말렴.”

사하르네 부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땅은 내 소유니까. 얼마든지 무상으로 써도 돼.”

“네?”

“어차피 놀고 있는 땅이니까. 괜찮아.”

자, 어때? 사하르네 부인은 그런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머리 좀 굴린다고 해도 고작 열두 살짜리가 이렇게 달콤한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사하르네 부인.”

그러나 칼리오페는 표정을 굳혔다.

“베이비 살롱을 가로채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죠?”

말로는 무상으로 임대하겠다고 하고 뒤에서 서류 장난을 치는 건 아니냐는 말이었다.

‘……쓸데없이 영리해선.’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스티그마였으니까. 베이비 살롱 따윈 어찌 되든 좋다.

사하르네 부인은 잠시 고민했다.

“그게 의심된다면 그 땅을 기부할게. 나도 이 나라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으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해 설득하는 것보다 의심할 구석을 막는 게 났다. 무엇보다 서둘러 스티그마를 얻어야 했다. 다른 곳에서 알아채기 전에.

‘땅값을 생각하면 속이 쓰리긴 하지만……. 뭐, 스티그마에 비할 게 아니니까.’

“기부하신다고요?”

“응, 그것도 의심된다면 관련 서류를 리페가 준비해도 좋아.”

“진심이시군요.”

‘돈을 받으러 온 건 아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제도 근교의 알짜 베기 땅을 얻게 되었네.’

칼리오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뜯어 내볼까.’

속내를 감춘 산호빛 눈동자가 순진무구하게 고민하는 척 데구루루 굴렀다.

‘사하르네 부인은 뜯기는 줄도 모르고 있겠지만.’

“그리고 건물에 짓는 비용 말인데. 이 정도 생각하고 있어.”

칼리오페가 망설인다고 생각한 사하르네 부인은 손가락 3개를 폈다.

‘원래 예정보다 한 손가락 더 많이 펴긴 했지만……. 그래도 굳히기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3억이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사하르네 부인이 진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30억.”

사하르네 부인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건물 하나 제대로 세우려면 그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니? 특히 베이비 살롱의 명성에 걸맞아야 하니까.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일 거야.”

100평짜리 토지에 추가로 30억이 딸려온다.

이 좋은 기회를 거절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칼리오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감사한 말씀이네요. 그런데 부인께선 왜 제게 그런 큰 호의를 베풀어주시려고 하는 거죠?”

‘하여간 쉽게 넘어가지 않는 아이야.’

사하르네 부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결코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순 없다.

“아까 말했듯이 아이들 교육에 관심 있어서. 베이비 살롱의 교육적 가치는 이미 검증되었지. 그런 사업에 지원하는 것도 귀족의 책임이야. 그리고— 말했잖니? 난 리페가 좋다고.”

“그렇군요.”

이번에 칼리오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하르네 부인의 얼굴이 불을 켠 듯 밝아졌다.

“그러면 내 투자를—”

“그런데.”

칼링오페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사하르네 부인의 말을 끊었다.

“이렇게 투자하겠다고 하시기 전에 부인의 능력부터 검증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 * *

“뭐?”

“그러니까 부인께서는 돈을 투자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건설부터 시작해 가게 이전 전반을 책임지시겠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근데 제가 부인의 능력을 어떻게 믿고 맡겨요?”

사하르네 부인의 입이 헤 벌어졌다.

“뭐……라고?”

“일단 본인의 능력부터 제게 어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막상 건물을 짓고 나서 보니 이상하면 큰일이잖아요.”

사하르네 부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런 일이 일상일 것이다. 특히 그녀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이것보다 더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사하르네 부인 본인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런 것들과 질적으로 다르니까.

‘그런데 지금 내 능력을 본 후에 결정하겠다고……? 내 능력을 못 믿어서?’

언제나 선택하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했던 사하르네 부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이었다.

“지금 베이비 살롱은 7년간 계속 상승세예요. 오픈하고 난 뒤로 단 한 번도 하락한 적 없어요.”

칼리오페가 노래하듯 가볍게 말했다.

“굳이 투자받을 필요성도, 생각도 없는데 사하르네 부인께서 조건부 투자를 하겠다고 하셨어요.”

칼리오페의 말은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사하르네 부인이 마치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는 양 도와주겠다느니,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느니 하며 권위적으로 굴었지만,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결정권은 칼리오페에게 있었다.

사하르네 부인이 아무리 언변으로 그 사실을 흐리려고 해도 칼리오페는 본질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사하르네 부인의 능력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가 부인이 요구하는 조건을 감수하고 투자받을 만할까요?”

새파랗게 어린애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모멸감에 눈앞이 흐릴 정도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칼리오페를 이 집에서 내쫓고 싶었다. 아니, 내쫓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우선 순종하는 교육을—

‘……안돼.’

사하르네 부인은 심호흡하며 심기를 가라앉혔다. 여기서 버럭 성을 내면 모든 게 실패한다.

칼리오페의 또렷한 눈동자를 보며 사하르네 부인은 입매를 굳혔다.

‘솔직히 반박할 말이 없어.’

자신이 뭐라고 말해도 제대로 된 반박이 아니라 본질을 흐리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저는 부인께서 원하는 조건이 뭔지도 모르죠.”

칼리오페의 말에 사하르네 부인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지금 조건을 말할 순 없다.

‘지나치게 감이 좋은 아이야.’

베이비 살롱을 이전하고 난 후, 비는 건물을 달라고 하면 ‘역시 거기 뭔가 있는 거 아니냐.’ 하고 물고 넘어질 것이다. 조금 전에 그 질문을 농담으로 받아넘기며 지나갔는데 또다시 그런 상황을 만들 순 없다.

그렇다고 능력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도 없다. 사하르네 부인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 저택을 보렴. 관리 잘하지 않았니?’ 같은 것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 두 가지.’

첫 번째는 투자금을 돈으로 줘서 칼리오페가 직접 이전 관리를 하게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그 돈을 다른 데에 쓴다면?

이 경우 투자금을 어떻게 쓸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은 칼리오페다. 만약 지금 건물을 재건축하는 방향으로 확장한다면 일이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투자금을 주는 대신 반드시 위치를 옮기라는 조건을 달 수도 없다.

‘분명 왜 그러냐며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까.’

그러면 결국 이 감 좋은 아이는 아까와 똑같은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그건 안 돼.’

두 번째는 우선 자신이 새 건물을 지어주는 것이다. 그 건물을 보고 가게 이전을 결정하라고 하면 된다. 칼리오페의 마음에 들게만 지으면 분명 이전하겠다고 할 것이다.

‘우선 능력부터 검증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까지 들었는데 어린 여자애 마음에 안 들까 봐 걱정돼서 물러날 수는 없지.’

찜찜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래 생각할 순 없다.

가장 최악은 지금 여기서 칼리오페가 투자 자체를 거절하는 거다. 일단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사하르네 부인은 고민을 마쳤다.

“그럼 우선 건물을 지을 테니 완성된 후에 보고 베이비 살롱을 이전할지 말지 결정하면 어떠니?”

“어머, 그래도 될까요? 그럼 저야 좋죠.”

“이걸로 의견이 좁혀져서 다행이야. 뒤로 미룰 필요는 없으니 오늘 바로 서류를 작성할까?”

혹시 시간을 끌면 칼리오페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 어른들과 상의하는 것도 막고 싶다.

‘이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다니…….’

굴욕적이었다.

땅을 주는 것으로 모자라 거액을 들여 건물을 세워주겠다고 하고, 그걸로도 부족해 완성된 건물을 보고 결정하라고 했다.

여기서 가장 열 받는 건 칼리오페가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속 칼리오페에게 유리한 조건을 덧붙여주며 어떻게든 투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하르네 부인 자신이었다.

‘돈을 써가며 매달리다니…….’

제도 근교의 목 좋은 땅 100평과 30억은 사하르네 부인 입장에서도 적은 재산이 아니었다. 칼리오페의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절대 나오지 않도록 할 생각이라 어쩌면 건물을 지으며 30억보다 더 큰 돈이 들 수도 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이쪽이다.

‘……일만 성공하면 메꿔지고도 남을 돈이야.’

“아까 말했다시피 서류는 리페가 원하는 대로 쓸 거야.”

“좋아요.”

“그래, 그럼 같이 집무실로 가자.”

사하르네 부인이 일어나며 권했다.

‘……사실은 집무실에 들이기 싫지만.’

사하르네 부인은 자신의 집무실에 타인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청소조차 직속 하녀 한 명에게만 맡기고 있다. 그 하녀도 먼지와 바닥 관리 정도만 하고 있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때문에 고용인에게 서류와 인장을 가져오라고 명할 순 없었다.

칼리오페를 두고 그녀가 직접 가지러 갔다 오면 되지만 칼리오페가 혼자서 깊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 * *

집무실에 도착한 사하르네 부인은 종이와 만년필을 칼리오페에게 주었다.

“거기 앉아서 쓰렴.”

방문자가 없는 집무실이라 책상은 사하르네 부인이 쓰는 책상 하나뿐이었다.

“서류 작성이 힘들면 내가 도와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뭐든 경험해봐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그러셨거든요.”

“그러니?”

“그리고 이번 건은 굳이 서식에 맞출 필요는 없잖아요? 저희가 앞서 이야기한 사항만 제대로 들어가 이으면 되니까.”

“그렇지.”

사하르네 부인의 동의에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열심히 서류를 작성해 나갔다.

‘초조한 건 알지만 너무 성급한 건 아닌가요.’

사각사각. 만년필이 막힘 없이 움직인다.

‘아니면 어린애라고 우습게 보는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칼리오페는 정말 정직하게 서류를 작성했다.

사하르네 부인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땅을 기부한다는 것과 베이비 살롱에 새 건물을 지어 투자할 예정이라는 것.

투자 결정은 건물 건축이 완료된 후에 칼리오페가 내린다는 것.

모두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함정을 덧붙일 생각도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작성한 서류를 사하르네 부인에게 건네자 그녀는 한 번 읽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리페는 서류 작성도 잘 하네.”

사하르네 부인은 열쇠로 책상 서랍의 자물쇠를 풀었다.

드르륵— 서랍이 열리는 순간, 칼리오페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사하르네 부인은 칼리오페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하고 서둘러 인장을 꺼낸 후 서랍을 닫았다.

달칵.

다시 서랍이 잠긴 후에도 칼리오페는 한동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다행인 점은 사하르네 부인이 서류에 인장을 찍느라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칼리오페는 떨리는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녀의 위치에서 책상 서랍 안의 내용물이 다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은으로 만든 패가 있었다.

패에는 검은 곡선이 구불구불 이어져 만들어진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칼리오페의 기억 속에 있는 문장이었다.

‘……틀림없어. 착각하거나 잘못 본 게 아니야.’

칼리오페가 다른 어떤 것보다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눈을 감고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서 호세 오라버니가 목숨을 걸고 알아낸 단서인걸.’

절친한 친우인 루시우스가 실종되고 난 후, 호르세안은 그를 찾아내겠다며 떠났다.

호르세안의 소식마저 끊겨 괴로워하고 있을 무렵, 그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는 기별을 보내왔다. 희망과 염려를 동시에 품고 호르세안이 가져올 자세한 소식과 증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렸던 소식은 오지 않았다.

호르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해당했으니까.’

칼리오페는 기다리던 소식 대신 호르세안의 시신과 마주해야 했다.

곡소리와 오열하는 울음소리. 어떻게 염치없이 장례식장에 올 수 있냐는 수군거림.

‘만약 내가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내 죽음으로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와줘서 고맙다며 엘피너스 부인이 두 손을 꼭 잡았을 때 칼리오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숨을 끊고 싶었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지?’

마치 준비한 것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 없어진다.

삶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다. 형벌이었다.

관에 곱게 눕혀진 호르세안의 품에 꽃을 안겨주다가 칼리오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목걸이?’

얇은 가죽끈에 매단 작은 돌.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칼리오페는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렸다. 예쁜 돌을 주웠다면서 로베르트가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타임캡슐에 넣는다고 탄탈리카 숲에 묻었었다.

‘이게 왜 여기에?’

[크흠.]

시신 앞에서 일어서지 않는 칼리오페에게 뒷사람이 눈치를 줬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관에서 멀어지면서도 칼리오페의 정신은 오로지 그 목걸이에 쏠려 있었다.

그대로 탄탈리카 숲으로 가지 않았던 것은 신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의문을 남긴 아버지의 죽음과 루스 오라버니의 실종. 그리고 실종 건을 조사하던 호세 오라버니의 죽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 장례식장에서 나오자마자 탄탈리카 숲으로 향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칼리오페는 희망을 잃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두문불출했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가슴속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분노와 열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후 칼리오페는 행적이 드러나지 않게끔 조용히 탄탈리카 숲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잘 위장해놨지만 타임캡슐을 묻었던 곳에는 얼마 전에 파헤쳤던 흔적이 있었다. 타임캡슐 안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추억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단 하나만이 달랐다.

어릴 적 로베르트가 만들어주었던 목걸이가 없고 대신 다른 게 들어 있었다.

[이 문장은…….]

처음 보는 기묘한 문장이 새겨진 은패가 나뭇잎 사이로 내리쬔 달빛에 반짝였다.

그곳엔 호르세안의 편지가 함께 있었다.

로베르트에게.

네가 이걸 찾아냈다는 건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겠지.

내가 찾아낸 증거는 바로 이거야. 네게 남기긴 하지만 이걸 조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넌 내게도 동생 같은 아이였으니까.

잊는 건 힘들겠지만— 과거를 파헤치다가 이런 꼴이 된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습지만…….

그래도 난 네가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 아직 네가 모르는 행복이 이 세상에는 아주 많아.

칼리오페와 어머니도 생각해야지.

사실 나는 네가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는 걸지도 몰라.

그런가 하면 내가 죽음으로 알아낸 것이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내 죽음이 헛되더라도 네가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난 일은 흘러가게 놔두고 남은 가족들과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라면 옳은 결정을 할 거라고 믿어.

—너의 형이.

호르세안이 어떤 심정으로 그 편지를 썼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소중한 편지에 칼리오페는 눈물 자국 따위를 남길 수 없었다. 자신의 눈물조차 사치로 느껴졌기에.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키며 칼리오페는 부들부들 떨었다.

미처 막지 못한 울음이 간헐적으로 윽윽 새어 나왔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한참을 웅크려 있던 칼리오페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망막에 새길 듯이 은패를 바라봤다. 선의 굵기와 모양새, 각도와 길이까지.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건 로베르트의 몫이었다.

장난기 많고 놀기 좋아하던 한량 같은 둘째 오라버니.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제대로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호르세안은 로베르트가 옳은 결정을 내릴 거라고 믿었다. 칼리오페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둘째 오라버니를 믿었다.

다음 날 칼리오페가 로베르트에게 호르세안의 편지와 은패를 보여줬을 때, 로베르트는 주저 없이 호르세안과 같은 선택을 했다.

“리페?”

사하르네 부인의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니? 어디 안 좋니?”

칼리오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치맛자락에 슬쩍 감췄다. 웃으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싶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두근두근두근. 가슴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정신 차려.’

사하르네 부인이 왜 그 은패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이 상황을 넘겨야 한다.

‘웃어봐야 억지로 웃는 게 티 날 뿐이야. ……그렇다면.’

“네에, 좀.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칼리오페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랬구나.”

사하르네 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불안한 눈빛과 어두운 얼굴을 보니 퍽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큰 결정을 저 혼자 한 건 처음이거든요. 역시 부모님과 상의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어머, 너무 걱정하지 말렴. 분명 루스티첼 부인께서도 잘 했다고 말씀하실 거야.”

“……그럴까요?”

“그러엄. 말했다시피 나도 다른 뜻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기부하고 투자하겠다는 거니까.”

“네…….”

주억주억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오페를 힐끔 본 사하르네 부인이 서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미 리페가 서명했고 나도 인장을 찍었으니 물릴 순 없어.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다행히 내 말을 그대로 믿은 것 같네.’

뿐만 아니라 칼리오페가 무르기 전에 계약을 완료했다는 흡족함까지 더해져 신경이 온통 서류 쪽에 쏠렸다.

‘내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긴 한데.’

칼리오페는 책상 서랍으로 시선을 내렸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런 의심이 들었다.

칼리오페는 조용히 방안을 훑었다.

‘집무실에 놓여있는 가구를 봐도 그렇고, 인장을 다시 집어넣어야 하는데 굳이 서랍을 잠근 것도 그렇고.’

서랍을 잠근 것은 칼리오페를 의식했다기보단 습관 같았다.

‘의자가 딱 하나. 외부인을 잘 들이지 않는 곳이야. 어쩌면 집안 사람들도 못 오게 할 수 있어.’

지금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정보로 치환하겠다는 듯이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서랍을 잠그는 습관은 보통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게 들었거나 다른 사람이 봐선 안 될 게 들었기 때문이지.’

아까 서랍 안을 봤을 때 딱히 값비싼 물건은 없어 보였다. 서류 역시 없었다.

‘이 경우 9할의 확률로 후자인가.’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사하르네 부인이 인장을 집어넣기 위해 서랍을 다시 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서류를 나눠 가지고……. 자, 여기.”

사하르네 부인이 커다란 봉투에 서류를 넣은 후 칼리오페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다시 응접실로 돌아갈까? 아니면 피곤해 보이는 데 이만 집으로 갈래?”

사하르네 부인은 친절하게 제안하고 있었지만, 이만 집으로 돌아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볼일은 다 끝났다는 거지.’

칼리오페 역시 어서 이곳을 나가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책상 서랍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사하르네 부인에게 고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오래 있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 볼게요. 곧 저녁 시간이기도 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하렴.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부모님께서 칭찬하실 테니까.”

“네.”

칼리오페는 사하르네 부인과 함께 방안을 나왔다.

달칵. 집무실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집무실까지 잠그다니…….’

그러고 보니 들어갈 때도 사하르네 부인이 열쇠로 열고 들어갔다.

‘현실 도피하지 말자.’

전생에서 봤던 은패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나 잘못 봤다는 생각 따위는 거대하게 몰려오는 위협과 진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직 조금만 더 이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니까.

혹시라도 전생과 똑같은 비극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천진하게 굴 때가 아니야.’

칼리오페는 각오를 굳게 다졌다.

육중한 사하르네 저택 문이 열리고 시원한 바람이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게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제 가을도 끝물이니 곧 해가 바뀌어 열세 살이 될 것이다.

‘앞으로 2년.’

저물어가는 가을 햇살이 칼리오페의 눈동자처럼 붉게 내리쬐었다.

‘막을 거야.’

* * *

“리페.”

“네?”

칼리오페는 샌드위치를 냠냠 먹다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로베르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반짝반짝한 얼굴로. 문제는 뺨에 랜치 소스를 묻히고 있었다는 거지만.

“로벨 오라버니. 뺨에 소스 묻었어요.”

“아, 정말?”

로베르트가 오른쪽 뺨을 더듬더듬 문질렀다.

“오른쪽이 아니라…….”

“그럼 여기?”

로베르트가 왼쪽 뺨을 더듬으며 물었다.

“아니, 거기보다 조금 더 밑— 아니, 너무 내려갔어요. 살짝 위로. 더 오른쪽이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위치를 알려주던 칼리오페가 결국 냅킨을 집었다.

“자, 여기요.”

뺨을 닦아주는데 눈가에 웃음을 생글생글 매단 로베르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에헤. 로베르트가 배시싯 웃음을 지었다. 칼리오페의 입매까지 덩달아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로베르트의 뺨을 마저 깨끗이 닦아주고는 “좋아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리페!”

로베르트가 멀어지는 칼리오페를 꽉 끌어안으며 뺨에 쪽쪽쪽 입을 맞췄다.

“로, 로벨 오라버니…….”

칼리오페는 곤란한 목소리로 로베르트를 불렀지만, 곧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손길에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아— 오라버니도 참……. 아직 식사 중이잖아요.”

겨우겨우 로베르트의 품에서 탈출한 칼리오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책망하는 어조였긴 하나 칼리오페의 얼굴엔 건강한 미소가 한가득했다.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리페.”

“네?”

자신의 부름에 곧장 이쪽을 향하는 칼리오페의 얼굴. 루시우스는 그 속에 박힌 동그란 눈동자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커다란 손이 머뭇머뭇 접시 위를 맴돈다.

‘……안돼.’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뭘 묻히고 먹는 건 참을 수 없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가 다시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먹었다.

루시우스는 다람쥐처럼 불룩해지는 칼리오페의 뺨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접시 위를 맴도는 손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리페.”

칼리오페는 부름에 루시우스를 쳐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산호빛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나도 묻었다.”

그 루시우스 오라버니가, 서릿발처럼 차갑고 냉정한 얼음 기사라고 불리는 루스 오라버니가—

‘뺨에 머스타드 소스와 케첩을 묻히고 있다니요?!’

깜빡깜빡.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간 동안 칼리오페의 눈이 쉴 새 업이 깜빡거렸다.

“……그냥 그렇다고.”

칼리오페의 반응에 부끄러움을 느낀 루시우스가 고개를 팩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 네. 제, 제가 닦아드릴까요?”

퍼뜩 정신을 차린 칼리오페가 아차, 하곤 황급히 물었다.

“뭐, 리페가 원한다면—”

“형! 내가 닦아줄게!”

로베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루시우스에게 다가갔다.

“필요 없어.”

루시우스가 인상을 확 굳히며 로베르트의 손길을 피했다.

“아니야! 내가 닦아주고 싶어서 그래!”

“됐다니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칼리오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들은 오늘도 참 사이좋군요.’

전생과 달리 로베르트도 훈련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이렇게 투닥거릴 때 루시우스에게 한 번에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두 분 다 식사 자리에선 조금 더 정숙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챙—

‘……라고 생각하자마자.’

칼리오페는 황망한 얼굴로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리페?!”

“리페, 괜찮아?”

유리컵이 쓰러지면서 안에 들었던 사과 주스가 칼리오페의 드레스와 손을 적셨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곧장 칼리오페에게 호다닥 달려왔다. 두 쌍의 눈동자가 울망울망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미안하다.”

“미안해.”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는걸요.”

“그치만 이거 리페가 좋아하는 옷이잖아.”

“과일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던데.”

“오라버니들한테 화낼 정도로 좋아하진 않아요. 그리고 사과하셨잖아요. 진심으로.”

파아앗.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가 눈부셨다.

‘내 동생은 천사야…….’

‘내 동생은 요정이야…….’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는 동시에 생각했다.

두 사람은 칼리오페의 손을 한쪽씩 붙잡고 손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리페 손 진짜 쪼꼬매.”

로베르트의 중얼거림에 칼리오페가 제 손을 내려다봤다.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손이 워낙 커다래서 더 작아 보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에 비하면 많이 컸다.

“많이 컸는데요.”

“그래도 쪼꼬매.”

이번 중얼거림은 루시우스에게서 나왔다.

‘루스 오라버니가 쪼꼬매라고 말하다니…….’

칼리오페와 로베르트 둘 다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봤다.

‘……본인은 모르는 거 같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어쩐지 입꼬리가 비실비실 풀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귀여우셔.’

로베르트가 놀리고 싶은 마음을 주체못하고 입술을 옴찔거리는 게 보였다.

“크흠.”

칼리오페의 헛기침에 로베르트는 화들짝 놀라 얌전히 입술을 다물었다. 아까 루시우스에게 장난 걸다가 칼리오페에게 주스를 쏟아버린 게 생각난 탓에 보이지 않는 강아지 귀와 꼬리가 츄욱 쳐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칼리오페가 잘했다며 손을 도닥이자, 귀가 쫑긋 서며 꼬리를 홰홰 휘저었다.

“루스 오라버니.”

“응?”

칼리오페가 루시우스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움찔.

뺨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루시우스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가만히 얼굴을 댔다.

“다 닦았어요.”

칼리오페는 루시우스의 뺨에 묻어있던 케첩과 머스타드 소스를 다 닦고 나서 손을 뗐다.

“이제 깨끗해요.”

루시우스는 자신과 마주 보며 웃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후, 하고 미소가 나왔다. 그는 멀어져가는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작고 통통한 손바닥에 쪽 뽀뽀했다.

“어머나, 리페. 그게 무슨 꼴이니?”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주스 쏟았어요.”

“신기한 일이네.”

항상 얌전한 딸아이가 뭔가를 쏟는 건 거의 없는 일이다.

“제가 쏟은 거예요.”

“저랑 장난치느라 그런 겁니다. 원인은 제게 있어요.”

“어머?”

서둘러 자진 신고하는 두 아들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후후 웃었다.

“자, 그럼 어서 갈아입자.”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식당에서 나왔다.

“어머니, 죄송해요.”

방으로 향하는 와중에 칼리오페가 불쑥 사과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고개 숙인 딸아이의 정수리를 힐끔 내려다봤다. 옷을 더럽힌 것을 사과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최근 가문 내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일반 고용인들은 아무렇지 않지만, 가문 일에 접근 권한이 있는 상위 고용인들이 그랬다.

칼리오페가 쳐놓은 덫 때문이다.

“말했지. 우리 리페가 미안해할 건 없다고.”

“어머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는걸.”

루스티첼 부인은 걸음을 멈추곤 칼리오페의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노동력은 돈 주고 살 수 있어. 하지만 충성심은 그렇지 않지.”

그녀는 고개 숙인 칼리오페의 얼굴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충성심이 없는 고용인들이 싫다는 건 아니야. 내가 산 것은 노동력뿐이니까 그걸로 만족해.”

똑같은 빛을 띠는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봤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기는 사람에겐 배신하지 않을 정도의 의리가 있어야겠지.”

씨익 웃은 루스티첼 부인은 다시 일어났다.

앞을 향하려는데 꼬오옥, 따뜻한 게 손끝에 닿았다. 내려다보니 딸아이가 수줍게 제 손을 붙잡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흉통에 루스티첼 부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내 딸이지만 너무 귀여운 거 아냐?!’

방에 도착한 칼리오페는 어머니를 자극한 대가로 옷을 여러 번 갈아입어야만 했다.

“역시 우리 리페는 뭘 입어도 귀여워!”

폭신폭신한 털이 가득 달린 망토를 입은 칼리오페를 푹 끌어안은 루스티첼 부인이 쪽쪽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칼리오페가 그녀에게서 풀려난 건 사진까지 찍은 후였다.

* * *

겨우겨우 어머니에게서 탈출한 칼리오페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베이비 살롱에 왔다.

‘신전 측에서 숨을 쉴 거라는 걸 알아냈으니 이제 곧이야.’

혹시 조짐이 있나 보려고 왔지만, 한 번 둘러봐서는 딱히 그런 기색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일단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집중하기 힘들었다. 계속해서 제게 말을 걸려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답하며 홀을 나와 복도에 들어섰다.

손님용이 아니라 고용인들이 다니는 통로라 훨씬 한적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인적이 드문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고용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머, 아가씨.”

“오랜만에 오셨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네는 고용인들을 피해 칼리오페는 코너를 몇 번 돌아 잘 안 쓰는 창고 쪽으로 갔다.

‘여기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팔이 턱 잡혔다.

소리 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몸이 뒤로 잡아 당겨졌다.

‘넘어진다!’

칼리오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등 뒤에 닿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동시에 묘하게 단단했다.

‘응……?’

칼리오페는 무심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고, 공…….”

텁. 그대로 커다란 손이 칼리오페의 입을 막았다.

칼리오페는 그 움직임으로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끌어안다시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을 막지 않은 다른 한쪽 손은 아직도 칼리오페의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화아아악. 칼리오페의 얼굴이 한순간에 붉게 물들었다.

‘으아…….’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게 되어서 어서 품을 벗어나려고 하는 때였다.

“아가씨?”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절로 몸이 굳었다.

사라락, 머리카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귓가가 간질거렸다.

“쉿.”

아스타레아스가 작게 속삭였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에 칼리오는 몸을 움츠렸다.

귀가 뜨겁다.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더더욱 그의 품에 파고든 모양새가 됐다.

천천히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입술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로 가시는 걸 봤는데…….”

살롱 메이드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래, 정말 이상해.’

칼리오페는 시선을 발끝으로 내린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자님의 손이 이렇게 컸던가.

품이 이렇게 넓었던가.

‘내가 쏙 들어가잖아.’

괜히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아직도 귓가가 간지러웠다.

목덜미에 닿은 머리카락이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두근 두근 두근—

괜히 심장이 콩콩거린다.

‘……좋은 향기.’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자신을 푹 감싼 체온에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만 같다.

‘아…….’

칼리오페가 숨을 내쉬는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갔네요.”

“……!”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 아스타레아스에게서 떨어졌다.

“왜, 왜 숨은 거예요.”

털을 부풀린 고양이처럼 잔뜩 경계하는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눈매를 휘며 물었다.

“사람들을 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렇지만.”

칼리오페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가까워.’

창고 안에는 상자들이 가득해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는데도 거리가 가까웠다. 칼리오페는 붉어진 뺨을 꾹 눌렀다.

“왜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거예요?”

“집중할 일이 있어서요.”

칼리오페의 대답에 아스타레아스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끌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지만 조용히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잡힌 손에서 맥박이 뛰는 것처럼 진동이 느껴졌다.

소년과 소녀는 높게 쌓아 올린 상자 사이에 몸을 숨겼다. 아래 있는 상자보다 위에 쌓아 올린 상자의 크기가 더 커서 생긴 틈 속에 나란히 앉으면 딱 숨기 좋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나도 자리를 피해 줄까?’

그 물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속삭였다.

“그럼 집중하세요. 내가 여기서 망봐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칼리오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선 심호흡하며 앞을 바라본 채 눈을 감았다. 방해된다거나 곤란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괜찮은 거야?’

그렇게 물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집중하는 칼리오페의 옆모습이 보기 좋았다. 내리깔린 길고 섬세한 속눈썹, 앙증맞은 코끝, 작고 도톰한 입술. 통통한 뺨은 건강한 혈색으로 발그레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이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 자신조차 모르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막아주고 싶다.’

그는 최근 칼리오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민하게 알고 있었다. 뒤에서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지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나서면 분명 황제가 움직일 거야.’

황제가 칼리오페의 머리카락 한 올에도 관심 갖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번 일로 황제가 이미 칼리오페에게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여버렸지만,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다.

‘나까지 더해질 순 없어.’

칼리오페의 옆에 당당하게 다가서고 싶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싶다. 어디서나 손을 잡고 싶다. 이유 없이 눈을 마주치고 웃고 싶다.

‘하지만 안돼.’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애틋함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칼리오페의 뺨에 손을 얹었다. 매끄럽고 보드라운 결을 매만지다가 커다랗게 뜨인 칼리오페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흠칫.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당황을 능숙하게 감추며 여상한 웃음을 지었다.

“뭐가 묻어서.”

“아, 감사합니다.”

칼리오페는 떨어지는 손가락을 눈으로 좇다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고난 뒤엔 도저히 아스타레아스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앞만 바라본 채 무릎을 세워 꼬옥 끌어안았다.

‘놀랐어…….’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이마까지 발개졌을 것 같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메웠다.

닿을 듯 말 듯 나란한 어깨와 서로의 작은 숨소리가 그 어떤 것보다 크게 다가왔다.

두근두근두근—

칼리오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콩닥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고 그 진동이 온몸을 징징 울린다.

결국 참지 못한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오늘—”

하지만 말을 건 사람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앞만 보고 말을 꺼냈다가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머, 먼저 말하세요.”

“영애가 먼저…….”

두 사람은 또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입을 다물었다.

“풋……!”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마주 본 채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가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 황급히 숨을 죽였다. 멀어지는 인기척에 안심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쳐 키득거렸다.

어색함은 사라지고 묘한 공범자의 미소가 소년과 소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무슨 일 있었어요?”

웃음이 다 잦아든 순간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무슨 일.

그야 많은 일들이 있었다. 티할렌과 대신관, 집사와 사하르네 부인. 최근에 있었던 일부터 전생의 일까지.

하지만 칼리오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에요.”

“응.”

아스타레아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날 걱정해서 왔구나.’

최근 여러 가지 일로 바쁘기도 하고 덫을 치는 것도 있어서 사교 모임에 나가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아스타레아스와의 연습 역시 하지 못했다.

아스타레아스에게도 귀는 있다. 최근 칼리오페를 둘러싼 이야기를 모를 리가 없다. 걱정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따져 묻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뭐랄까.’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별일 아니라고 하면, 아스타레아스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괜히 발끝을 꼼지락거린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에게 다가갔다.

“이거 비밀인데요. 제가 땅 투기에 성공했거든요.”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에게 속닥속닥 속삭이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엄청 진지한 얼굴.’

그 모습 보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웃는 대신 똑같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눈이 딱 마주쳤다.

칼리오페는 슬금슬금 멀어져 원래 있던 위치로 되돌아갔다. 아스타레아스와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자리. 더 멀어지고 싶어도 옆으로 갈 자리가 없었다.

“그, 그래서 이러저러한 일들이 다 별일 아니게 됐어요. 아니, 별일 아니게 될 거예요.”

“응.”

“공자님도 제가 뭘 샀는지 아시면 깜짝 놀랄걸요? 이건 공자님도 없는 거예요.”

“응.”

“워낙 좋은 땅이라 노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만큼 제게 돌아오는 것도 많으니까요.”

“응.”

“그, 그리고…….”

칼리오페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고개가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간다. 양 뺨이 화끈거렸다. 칼리오페는 난처한 얼굴로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응.”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요.”

“응.”

칼리오페는 새빨개진 얼굴을 팔에 묻었다.

* * *

“아가씨!”

“유모.”

홀로 돌아오자마자 유모가 칼리오페를 불렀다.

“어디 계셨어요? 찾아도 안 보이시던데.”

“으응? 그냥 둘러보고 있었는데 길이 엇갈렸나 봐.”

칼리오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강 둘러댔다. 유모가 그런 칼리오페를 빤히 쳐다봤다.

“어, 왜?”

“수상한데요.”

“응?”

유모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칼리오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아가씨 얼굴이 빨개요.”

“그, 그래?”

칼리오페가 제 뺨을 움켜쥐며 얼굴을 돌렸다.

“난방이 너무 셌나 봐.”

“그래요…….”

고개는 끄덕였지만 번뜩이는 유모의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누가 순진한 우리 아가씨에게 수작 건 건 아니겠지?!’

“유모?”

유모가 칼리오페를 푹 끌어안았다.

‘우리 아가씨는 절대 못 넘겨줘!’

“잠깐, 숨 막혀!”

살짝 바둥거리던 칼리오페는 결국 유모를 마주 끌어안았다. 익숙하고 따뜻하고 푹신한 품이 기분 좋았다.

유모의 어깨너머로 창밖 거리가 보였다. 활기찬 파트리유 거리의 분주함 속에 어디에서나 볼 수 없는 특색 없는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직감적으로 그 속에 탄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마차 창을 가린 커튼이 살짝 흔들리며 안에 있는 사람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깨끗하고 투명한 터콰이즈빛 눈동자와 칼리오페의 붉은 산호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스타레아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칼리오페는 유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가씨?”

“응, 아무것도 아니야.”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사이 마차는 멀어졌다.

칼리오페는 유모의 품에 이마를 댄 채 고개를 숙여 붉어진 얼굴 얼굴을 가렸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칼리오페는 조금 전 아스타레아스와 헤어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레이디의 청을 들어드리지 않을 순 없지요.]

가볍게 대답하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칼리오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집사의 뒷조사를 맡기고 싶어요.]

나른했던 아스타레아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루스티첼 가문의 집사?]

칼리오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의 고용인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집안에 문제 소지가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 것과 동시에 직접 조사를 부탁했으니 정보가 새어나갈 위험이 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믿을 수 있으니까.’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한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배신한 사람의 일을 아직까지 끌고 있는 건데. 그 와중에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타인을 또 믿다니.

심지어 아스타레아스에게 집사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는 것은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게 아니었다. 방금 즉흥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믿어.’

아스타레아스는 자신과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가족과도 같다고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그래도.’

푸른 눈동자가 진지했다. 칼리오페는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고 미소 지었다.

‘당신을 믿어.’

아스타레아스의 동공이 살짝 좁아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특히 사하르네 가와 연관이 있는지 알아 봐주세요.]

칼리오페의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일에 대해 조사를 맡기는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디의 뜻대로.]

눈매를 휘며 농담처럼 말하는 그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후, 하고 미소를 지었다.

집사를 데리고 사하르네 부인을 만나러 갔을 때, 두 사람의 반응은 처음 만나는 것 같았다.

사하르네 부인은 집사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사도 하지 않았고 초대 손님의 고용인이 따라왔구나, 하는 정도의 태도였다. 집사 역시 업무에 충실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확실한 게 좋지.’

칼리오페가 믿는 건 아스타레아스가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거란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능력과 실력도 믿었다.

* * *

‘역시 신전의 짓일까?’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마다 양옆으로 높이 묶은 머리칼이 깡총깡총 폴짝였다.

‘지금 베이비 살롱이 스티그마가 될 거라는 걸 아는 곳은 신전밖에 없어.’

신전 중에서도 비스의 신전만 알고 있는 듯했다. 기다려봤지만 다른 신전에서의 접촉은 없었다. 전생에서도 스티그마를 차지한 것은 비스의 신전이었다.

‘그럼 비스의 신전에는 다른 신전보다 먼저 스티그마를 알아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거구나.’

그게 최근 10년 남짓 비스의 신전이 급작스럽게 교세를 확장하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교세 확장은 전생보단 훨씬 못하지만. 그래도 예전엔 오렌과 로한에 비해 한참 뒤처졌는데 지금은 선두에 달리고 있어.’

정책 역시 묘하게 비스의 신전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생에서 비스의 신전이 스티그마를 차지하는 데 황제도 관여했지.’

그렇다면 비스의 신전뿐만이 아니라 황제 역시 스티그마에 대해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황제랑 신전은 어느 정도로 가까운 관계인 거지? 사하르네 부인은 어느 쪽 사람일까? 그리고 그 은패는…….’

칼리오페는 종이에 은패의 문양을 그리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종이 위로 물잔을 살짝 기울였다. 잉크가 물에 번지며 문장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멋지게 태우고 싶지만 불이 없으니까.’

칼리오페는 흐물흐물 울기 시작한 종이를 보고 뺨을 찰싹 때렸다.

‘정신 차리자!’

기합을 넣고 만년필을 멀리 치웠다.

‘그나저나 깜찍한 짓을 하는걸.’

요즘 루스티첼 가를 둘러싸고 도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그 중에서는 칼리오페에 관한 소문도 있었다.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세속적인 것만 좋아해서 다른 아이들을 물들인다느니. 칼리오페와 친하게 지내게 하면 애를 망치는 거라느니.’

돈에 눈이 먼 것은 요즘 루스티첼 가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라고 했다.

‘신전 쪽에서 배알이 꼴려서 낸 소문인 건 아는데.’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며 살랑살랑거리더니 뒤에 가서는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하는 게 우스웠다.

‘음, 그게 날 도와주고 있는 거라는 건 알까?’

칼리오페는 집사를 잡을 덫을 치면서 가문 내에 있는 서류를 조작했다. 투자한 곳의 무역선이 난파되었다거나 없는 회사의 이름을 적어 투자금을 회수 못 했다는 등등.

거기에 집사가 접근 권한을 가진 곳에 있는 서류는 다 위조로 바꿔치기했다. 진짜는 루스티첼 부인의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아무래도 칼리오페 혼자 멋대로 벌일 수 없는 일이기에 루스티첼 부인의 허락을 구했던 것이다.

‘가문 내에서 쉬쉬하긴 하지만 착실히 망하는 길로 빠지고 있는데 바깥 소문이 평온하면 이상하고 신빙성 없잖아.’

그런 의미에서 신전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는 것은 칼리오페의 덫을 보다 진짜처럼 위장해주는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나중에 나한테 도움이 됐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반면, 칼리오페에게 좋은 소문 역시 동시에 퍼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메일린 부인과 그녀의 티파티에 참석했던 귀부인들이 칼리오페의 역성을 들어주며 사교계에서 부채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모나 부인과 같이 사교계의 중심은 아니지만, 구석구석까지 발이 넓었다.

아무래도 고위 귀족들은 폐쇄적이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중앙 중위나 하위 귀족들은 지방의 소소한 귀족들에게까지 연이 뻗어 있는 데다가 수가 많았다.

덕분에 안 좋은 소문과 맞물려 칼리오페를 향한 동정론이 흘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칼리오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반사적으로 책상 위를 확인했는데 이상한 낙서는 없었다.

‘만년필을 치워놓길 잘했어.’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유모가 들어왔다. 칼리오페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론 몽블랑!’

침착한 얼굴이지만 눈만은 반짝반짝 빛나는 칼리오페를 보고 유모는 후후 웃음을 지었다.

바삭한 타르트지에 생크림과 촉촉한 시트, 바닐라 커스터드 크림을 을 넣고 그 위에 고소한 마론 크림을 산처럼 쌓아 올린 뒤, 꿀에 절은 밤을 얹은 마론 몽블랑은 칼리오페가 좋아하는 겨울 디저트였다.

“차 마실 시간은 지켜야지요?”

유모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에 차와 디저트를 세팅했다.

칼리오페는 홀린 듯 다가가 마론 크림을 떠서 냠 먹었다.

‘맛있어…….’

유모가 뿌듯한 눈으로 순식간에 달콤해지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참, 아가씨. 꽃가게에서 편지가 왔어요. 주문하신 꽃에 관한 내용이라고 덧붙이던데…….”

유모가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꽃가게? 주문한 적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꽃이 가득하던 아스타레아스와의 연습실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편지를 뜯어보자 아스타레아스의 필체가 보였다.

편지에는 칼리오페가 부탁했던 집사에 관한 조사가 적혀져 있었다. 칼리오페가 느꼈던 대로 그날 집사와 사하르네 부인은 처음 봤던 것이었다.

‘그런데…….’

칼리오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최근에 사하르네 부인과 접촉을 했다고…….’

편지를 빠르게 내리읽으며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겼다.

집사에게 꽃을 선물한 뒤로 그의 태도가 살짝 변했었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아주 조금이지만.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전생과 다를 수 있다고, 아직 집사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그를 미워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사하르네 부인과 밀회를 가진 걸 보면 헛된 기대였던 모양이다.

‘어?’

침잠하는 칼리오페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건…… 압화?’

편지 마지막 페이지 한가득 압화로 꽃다발이 만들어져 있었다.

“예쁘다…….”

말린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유모, 이거.”

“와, 정말 너무 예쁘네요. 이렇게 다양하고 섬세한 압화는 처음 봐요.”

유모는 감탄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꽃가게라 그래도 비쌀 텐데…….’

꽃은 비싸다. 그런데 이 압화 꽃다발은 갖가지 꽃이 상한 곳 없이 자리 잡고 있는 데다가 꽃잎을 이어붙인 흔적도 없었다.

‘꽃가게 주인이 아가씨 팬인가?’

그냥 손님에게 주는 선물이라기엔 지나치게 과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녀는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액자에 넣어둘까요?”

“응.”

칼리오페는 나머지 편지를 갈무리해서 서랍 안에 넣었다. 그리고선 티타임을 마저 즐겼다.

편지를 읽고 있을 때만 해도 입맛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소한 마론 몽블랑과 향긋한 차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압화로 만든 꽃다발은 정말로 예뻤다. 하지만 좋지 않은 소식에 자신이 우울해할까 봐 그런 깜짝 선물을 해 준 아스타레아스의 마음이 더 기뻤다.

‘그래, 우울해할 때가 아니야. 정신 차리자!’

마지막 한입을 얌, 하고 씩씩하게 먹은 칼리오페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만약 집사가 덫에 걸린다면 곧 일 테니까.’

* * *

그리고 칼리오페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집사…….”

칼리오페는 서류를 한 다발 들고 집사의 방에 찾아갔다. 그의 방은 루스티첼 부인의 배려로 넓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아가씨.”

집사는 칼리오페를 보곤 희미하게 웃었다.

“이게 뭐야?”

칼리오페는 품 안의 서류를 책상 위에 와르르 쏟으며 물었다. 힐끗 그 서류를 바라본 집사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벌써 아셨습니까? 빠르시네요. 마님께서 찾아오실 줄 알았는데 설마 아가씨께서 오실 줄은……. 마님껜 알리지 않았나요?”

마님 성격상 아가씨를 보낼 리 없는데, 하고 집사가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칼리오페는 쾅, 책상을 내리쳤다.

“이게 뭐냐고 물었어.”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실 테고. 상황파악이 안 됩니까?”

집사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건 여태까지의 미소와 달랐다. 한쪽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간 미소. 칼리오페는 그 미소를 본 적이 있다.

[아, 이거요? 제 퇴직금입니다.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제가 스스로 챙겼습니다.]

“퇴직금을 직접 챙긴 거야?”

고개를 푹 숙인 칼리오페가 조용히 물었다.

집사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네요. 어차피 망할 집안. 다 사라지기 전에 제가 챙긴 겁니다.”

[뭘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어차피 망할 집안. 다 사라지기 전에 제가 챙긴 건데.]

그때와 똑같다.

현재와 전생이 겹쳐졌다.

집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그것이 전생의 목소리인지, 현생의 목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주 당당하네…….”

칼리오페가 중얼거렸다.

전생의 집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가씨도 모르는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제 손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제가 잘 관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모르는 사람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당신 손에 들어가는 게 나으니까 당당한 거야?”

칼리오페의 물음에 집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와 제가 이렇게 잘 맞는지 몰랐습니다.”

“하하.”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잘 맞는 게 아니야.’

칼리오페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고개 숙인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을 너무 잘 알 뿐.’

집사는 책상에 놓여있던 잘 말린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칼리오페가 그에게 주었던 사이프러스 꽃다발이었다.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 없이 살면 어떨까, 하고.”

집사가 꽃다발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꽃향기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역시 그딴 소꿉놀이는 저랑 맞지 않습니다.”

파사삭. 집사가 말린 꽃을 움켜쥐자 꽃이 힘없이 뭉개졌다. 꽃잎과 꽃대가 그의 손안에서 바스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쓸모 없고 약한데. 그게 다 무슨 도움이 된다고.”

집사가 손바닥을 펴 꽃의 잔해를 구경했다. 그리곤 가루가 된 꽃을 칼리오페를 향해 후, 불었다.

“남는 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가 깨끗해진 손바닥을 흔들며 칼리오페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쪽은 분명히 남지요.”

집사가 다른 손으로 서류가 놓인 책상 위를 가볍게 노크했다.

“결국 저 자신은 제가 건사해야 하는 법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남을 배신하면서 말이지.”

“그저 상황 판단이 빨랐을 뿐입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당신의 말은 알겠어.”

상황이 어찌 흐르든 자신만 아는 사람. 쉽게 배신하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사람.

‘다 알게 됐으니 이제 기대도 하지 않아.’

“그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칼리오페의 물음에 집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글쎄요. 꽃에는 그다지 관심 없어서. 비싸서 가치 있긴 하지만 너무 빨리 시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비싼 건지도 모르지만. 저는 사치품이라면 변하지 않는 보석을 선호합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취향을 주절주절 늘여놓았다.

‘기분이 좋은가 보네.’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소의 깔끔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 집사는 분명 기분 좋은 흥분에 취해 있었다.

‘내가 태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였어.’

그런데 그런 사람을 배신하고, 배신에 대해 추궁당하면서도 저리 기뻐할 수 있는 게 신기했다. 집사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느낌에 절로 경멸이 들었다.

“이 꽃의 꽃말은 추모야.”

“추모……?”

집사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응. 나는 안녕을 고하고 싶었거든.”

과거의 집사에게, 자신과 가족들을 배신한 집사에게 안녕을 고하고 싶었다. 그리고 현생의 집사와, 그 누구도 배신하지 않은 집사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덫을 짜면서도 칼리오페는 그 누구도 걸려들지 않길 바랐다.

“무슨…….”

집사의 얼굴이 희게 질린 것을 보고 칼리오페가 살짝 웃었다. 그야 멀쩡히 산 사람에게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꽃을 주었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

살짝 겁을 줄까, 고민했지만 이 쓸데 없는 공방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집사에게 들어야 할 말은 정해져 있다.

“걱정하지 마. 당신은 죽더라도 추모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집사의 표정이 언짢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칼리오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신 혼자 꾸미긴 힘들었을 거고. 도와준 사람이 있을 텐데?”

칼리오페가 집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침착하게 물을 수 있다는 건 경험해봐서일까.’

전생에서 집사가 배신했을 땐 모든 게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그 혼자 벌일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가씨께선 너무 제 능력을 과소평가하시는군요.”

집사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당신 혼자 한 짓이라는 거야?”

“제가 그럴 능력도 없어 보입니까?”

“응.”

칼리오페가 즉시 단호하게 긍정하자 집사의 포커페이스에 순간 금이 갔다.

“당신이 집사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해. 정말 아무 도움도 받지 않았어? 고위 귀족이라든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말로 제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건데요. 제게 그런 연줄이 있어 보입니까?”

칼리오페는 답하지 않았다.

“모시는 귀족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선뜻 도와줄 사람이 있다니. 그럼 제가 왜 여기서 집사 노릇을 하고 있겠습니까.”

집사의 말에 칼리오페는 한동안 미동 없이 그를 바라봤다.

‘절대 사하르네 부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군.’

뭐라고 해도 집사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래, 사하르네 부인이 무섭다 이거지?’

입을 열면 사하르네 부인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입을 다무는 게 현명한 행동이다.

‘게다가 이 일에 관해서도 덮어주겠다고 했을 거고.’

그러기 위해선 더더욱 사하르네 부인의 이름을 혀끝에 올려선 안 된다.

“뭐, 좋아.”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팔짱을 꼈다.

‘나중에 내가 묻지 않아도 당신이 먼저 말하게 될 테니까. 제발 들어달라고 빌면서.’

답을 듣지 않아도 아스타레아스의 조사 덕분에 누군지는 확실하다. 근래 집사가 만난 유일한 고위 귀족은 사하르네 부인밖에 없으니까. 고위 귀족이 아니더라도 그 외 외부 접촉은 없었다.

‘사하르네 부인도 생각보다 꼼꼼하네.’

그날 너무 조급하게 굴어서 이렇게 뒤로 손을 쓸 줄은 몰랐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석연치 않았던 거겠지.’

사하르네 부인과 칼리오페의 거래는 사실상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확실한 방법을 쓴 것이다.

‘집사가 조작한 문서에는 베이비 살롱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전과 달리 집안 사정이 어렵다는 소문이 도는 김에 해본 것이다.

멀쩡히 승승장구하던 가문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잘나가던 가게를 팔자마자 그 땅이 스티그마가 되는 것. 가문이 기울어서 가게를 팔았는데 그 땅이 스티그마가 된 것.

둘 중 어떤 게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뭐, 거기다가 실패하더라도 그만이라는 속셈이었겠지.’

이전과 달리 부모님 두 분도 정정하게 살아계시고, 루스티첼 가가 진짜로 스러져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문서를 조작한 게 들통나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실패하면 그 즉시 꼬리를 잘라내 집사의 단독 행동으로 처리할 생각이고.’

욕심에 눈이 먼 집사는 그것까진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루스티첼 가의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걸 너무 철석같이 믿었거나.

‘그것 역시 욕심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은 결과겠지.’

어찌 됐든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재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루스티첼 가는 여러모로 돈과 인맥을 쓰게 될 것이다.

‘사하르네 부인은 그때 호의인 척 도움을 주고 빚을 지울 생각이겠지. 아니면 거액의 투자를 하는 자신에게 내가 먼저 의지할 거라고 생각하거나.’

칼리오페는 흐음, 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열어둔 창에서 바람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살랑였다.

‘멋진 작전이었는데 어쩌지요?’

바스러져 가루가 된 꽃잎에서도 향기는 났다.

‘전부 다 제 덫이었는데.’

덫인지도 모르고 사하르네 부인은 자신이 이중 덫을 쳤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이득이라고.

칼리오페는 책상 위의 문서들을 바라봤다. 위조 문서를 원본인 줄 알고 열심히 고쳤다는 걸 알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신기하군요.”

집사의 말에 칼리오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가씨의 반응 말입니다.”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집사가 묘한 얼굴로 그녀를 유심히 쳐다봤다.

“……굉장히 침착하시네요.”

그야 두 번째 겪는 일이고, 이미 예상하고 준비했던 일이니까 그럴 수밖에.

칼리오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충격받아 제대로 말도 못 하거나 제발 봐 달라고 빌기라도 할 줄 알았어?”

전생처럼.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이 찝찝함은 뭐지.’

집사는 그런 칼리오페를 보며 눈매를 찌푸렸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아이의 태도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분명 우위에 있는 것은 자신일 텐데. 어째서 밀리는 느낌이 드는 거지.

‘아직 애라서 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자기 상황 파악이 안 된 거지.’

추궁하는 칼리오페의 태도는 전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한 달 후가 내 생일인데.”

갑자기 태평하게 생일 이야기를 꺼내는 칼리오페를 보고 그는 제 생각에 더 확신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 생일 파티 준비는 거의 끝내놨으니까. 대금도 다 치렀으니 잘 열리겠죠.”

“그거 고맙네.”

칼리오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생일 선물은?”

“예?”

지금 이 아이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집사의 얼굴에 의문을 넘어 황당함이 가득 떠올랐다. 아무리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해도 이건 도를 넘었다.

‘아니, 정말로 상황 파악을 못 한다고?’

집사는 칼리오페가 자라나는 것을 바로 곁에서 봤다. 도저히 제 나이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다.

‘아무리 온실 속에서 자랐다고 해도 그런 애가 정말로 전 재산이 사라지면 어찌 될지 모를까?’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놓친 게 있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역시 안 줄 생각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매년 주지 않았지. 딱히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도 칼리오페는 여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니 올해 생일 선물만큼은 꼭 받아낼 생각이니까.”

생긋 웃은 칼리오페가 그 말만 남기고 가뿐하게 방안을 나갔다.

홀로 남은 집사는 기묘하게 올라오는 불안감에 계속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야. 이미 다 끝났어.’

이제 루스티첼 가에서 나갈 때다. 이 돈이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류를 챙겼다. 새로운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하, 사기꾼이 제 발로 걸어들어왔군.”

“예?”

집사는 얼떨떨하게 상대를 바라봤다.

“이거 위조 문서잖아. 누굴 속이려 들어?”

“뭐, 무슨…….”

“당신, 일하는 집안 문서를 위조했다고 주의하라고 신고 들어왔어. 어디서 위조 문서로 나한테 사기를 치려 들어?”

“아니, 보십시오. 이거 원본 맞습니다. 최근에 수정되긴 했지만 이 인장을 보면 적법하게 수정되었다는 걸—”

“와, 이 사람 안 되겠네. 사기 치려다 들통났으면서도 뻔뻔하게 우기는 걸 보게.”

상대가 위협적으로 책상을 탕! 내리쳤다.

“뭐 됐고, 붙잡혀갈 준비나 하슈. 당신 얼굴 보고 이미 신고 넣었으니까.”

“뭐?!”

집사가 펄쩍 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켕기는 게 있는 만큼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사하르네 부인은 뭘 한 거야.’

루스티첼 가에서 나와 사하르네 부인과 만나 약속대로 베이비 살롱의 문서를 건넸다. 사하르네 부인은 크게 기뻐하면서 문제가 될 일을 다 처리해놓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일주일 정도 시일이 걸릴 거라고 해서 오늘, 딱 일주일째 되는 날에 루스티첼 가의 재산을 처분하려 나왔다.

‘그런데 이 상황은 뭐지?’

일단 생각은 나중에 해야 했다. 지금은 우선 잡히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제길, 이 내가 왜 도망자처럼…….’

집사는 서둘러 서류를 긁어모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니, 저놈이!!”

등 뒤에서 남자가 삿대질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퍼어어억—!

집사는 명치를 강하게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온몸이 부들부들 경련하며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입가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급소를 얻어맞는 게 이렇게나 아픈 줄 몰랐다.

그대로 등 뒤로 팔이 꺾이고 수갑이 채워졌다. 집사는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명망 있는 가문의 집사로 일하면서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극심한 아픔에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거 이거, 이런 놈들은 항상 뻔하지. 들키면 내빼고 본다니까.”

“타이밍이 좋았네요.”

머리 위에서 경찰들이 느긋하게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잡혀간다.

차가운 수갑의 감촉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집사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항변했다.

“저, 전 억울합니다. 조사하면 알 겁니다! 이건 위조 문서가 아니라 원본—”

“하! 이거 정말 정신 못 차리는구먼.”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인가. 그러면 죄질만 더 나빠질 뿐이라는 거, 알지?”

“이렇게 멍청한 사기꾼은 첨 보는군.”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이었다.

“아니야, 정말로—”

“루스티첼 부인께서 원본 서류는 루스티첼 가에 고이 잘 보관되어 있다고, 원본 도난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

그 말에 집사가 우뚝 반항을 멈췄다.

머릿속에 이때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생일 선물은?]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태평하게 물어보던 소녀의 얼굴이었다.

[올해 생일 선물만큼은 꼭 받아낼 생각이니까.]

봄날 피어나는 꽃처럼 환하게 웃던 미소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설마…… 처음부터?’

꽉 다문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틀어쥔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 부들부들 떨렸다.

‘난 원본이 아니라 위조 문서를 빼돌려 고친 건가?!’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

인생 역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부리던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갔다고, 속은 사람이 멍청한 거라고. 정직한 게 무슨 소용이냐고, 명예가 밥 먹여주냐고 루스티첼 가를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멍청하게 속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찰은 반항을 멈춘 채 고개를 푹 숙인 집사를 툭툭 밀쳐 일어서게 만들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범죄자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생기가 다 빠져나가 그사이 폭삭 늙은 것 같았다.

“그러게 왜 그렇게 좋으신 분들을 배신한 건지.”

“개돼지만도 못한 거지.”

쯧쯧, 경찰이 거칠게 집사를 끌어 수용 마차에 태웠다.

* * *

“그래, 감옥에 수감 됐다고.”

“예.”

주인의 중얼거림에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잘 지켜보도록 해. 죽으면 리페가 곤란하니까 말이야. 아직은 죽으면 안 돼.”

“걱정 마십시오.”

사하르네 부인이 살인 멸구를 하기 위해 감옥 안에 있는 집사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게 새로운 임무였다. 그녀는 자신 있었다.

“죽어도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죽어야 해.”

‘끝나고 나서?’

주인의 말에 여자는 의아했다. 그녀는 집사를 감옥에 넣은 것으로 소녀의 계획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건가?’

여자가 알기로 그 소녀는 자신의 주인과 계획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은 어떻게 그 소녀의 계획에 대해 아는 걸까.

그러고 보면 그 소녀도 주인의 생각을 미리 읽고 대답을 한 적이 많았다. 앞으로 속가를 어떻게 할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어보면 생략된 과정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면 소녀와 주인님은 최고의—’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치 및 공사 관계의 전략적 파트너가 아닌가……! ’

러그윈이 옆에 있었다면 ‘응, 그거 아니야.’ 라고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저번 포토북 사건도 그렇고.’

여자는 아직까지 포토북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에 의문을 품게 된 사건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레아스님의 혜안을 그 소녀는 파악하고 있는 거야.’

전혀 아니었다.

포토북 사건은 칼리오페의 혜안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인 주인의…… 좋게 말하면 덕질, 사실대로 말하면 집착과 독점욕 표시였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음모(?)를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소녀와 레아스님은 아직 어떤 맹약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

여자의 눈동자가 비장해졌다.

‘몇몇 사건의 파트너로서 함께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몰라. 일이 끝나면 멀어질 가변적인 관계지.’

여자는 허벅지 옆에 손을 고이 둔 상태 그대로 슬쩍 두 주먹을 쥐었다.

‘주군을 위해 힘내겠습니다. 그 소녀가 주군과 종신 관계를 맺도록……!’

그녀는 굳게 결심했다. 비록 아스타레아스가 원하는 종신 관계와 궤가 달랐지만.

“믿고 맡겨주십시오, 레아스님.”

아스타레아스는 갑자기 의욕을 고요히 불태우는 여자의 눈을 보고 의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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