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인정해야 할 때 (19/41)

Chapter 5. 인정해야 할 때

“레이디 칼리오페.”

칼리오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맞는 하르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이 살롱의 호스트보다 더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하르첸 경, 안녕하세요.”

“제가 얼마나 이날을 고대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가 빠르게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지 않아야 할 텐데요.”

“레이디의 노래에 실망할 리 없습니다.”

확고한 단언에 칼리오페가 하르첸을 바라봤다. 은회색 눈동자가 굳건한 믿음을 담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빈말이나 칭찬이 아닙니다.”

하르첸이 항의하듯 말해 칼리오페는 웃음을 삼켰다.

“네,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나를 믿어줘서.”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해서.

칼리오페는 뒷말을 삼켰다. 하르첸에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았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이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지.’

이렇게 마주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가 반강제로 노래를 청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서로 시선을 맞추게 될지는 몰랐다.

세상사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는 걸 회귀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실감한다.

몽환적인 은회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 밀려왔다.

* * *

처음은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이었다.

하르첸이 살롱을 나서는 칼리오페를 붙잡았다. 사과를 위해서였다.

칼리오페는 사과를 받아주며 엘피너스 백작 내외의 결혼 기념 파티에서 연주를 부탁했다. 하르첸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작 엘피너스 부인의 명을 받은 호르세안이 반대를 했다.)

그러고서도 미안해하는 그에게 칼리오페가 말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어요.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부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 그렇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럼 또 노래하실 거란 말씀입니까?”

그 말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하르첸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반주를 맡으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단호한 거절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거절 당한 하르첸은 물론이고 호르세안마저 놀란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예?”

한 박자 늦게 하르첸이 되물었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는 하르첸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도 제가 속가를 부를지 모르고 함께 합을 맞추고 싶다고 청하시지 않았나요? 다행히 살롱 분위기는 괜찮지만, 앞으로 저희가 감수해야 할 일들이 있지요.”

오늘 살롱에서 두 사람이 속가를 반주하고 불렀다는 걸 알면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올 것이다.

“제가 앞으로 어떤 노래를 부를 줄 알고 반주를 맡고 싶다고 하세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말에 하르첸이 고개를 저었다.

“레이디께서 말씀하셨죠. 제가 청하긴 했지만 결국 선택을 한 건 본인이시라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르첸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게 빛났다.

“물론 아까 전에는 제가 감수해야 할 게 무엇인지 모르고 청했습니다. 설마 속가를 부르실 줄 몰랐으니까요.”

“하르첸 경.”

“하지만 레이디께서는 제게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연주하기를 택했습니다.”

하르첸이 씨익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낫지요. 적어도 레이디께서 속가를 부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은…….”

“네, 속가를 부르셔도 저는 함께 하고 싶습니다. 아예 이민족이나 타국의 민요를 부르셔도 상관 없어요.”

칼리오페는 가만히 하르첸의 눈을 들여다봤다.

‘진심이구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하르첸은 진정으로 칼리오페와 함께 연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한순간의 충동과 감정에 미래를 걸지 마세요.”

하르첸이 입을 벌렸다. 뭐라고 반박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순간의 충동과 감정.

“……맞아요. 그럴지도 몰라요.”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하려는 순간, 하르첸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까?”

“네?”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순 없잖아요. 예술가들은 원래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에요. 순간의 영감을 손에 쥐어야만 견디는 족속들이죠. 적어도 저는 그래요.”

하르첸은 거의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나 싶어 난처했다. 하지만 짚이는 곳은 없었다.

“경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럼…….”

하르첸의 얼굴이 기대로 확 밝아졌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속가를 연주했으니 색다른 느낌이기도 할 테고, 살롱 반응도 의외로 나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충동에 따르는 것은 쉽다.

‘배척당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몇 번이나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디께서 제가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유가 단지 제가 충동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면 물러설 수 없어요.”

이렇게까지 온 마음을 다하니 칼리오페로서도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가 후회하더라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인의 선택은 본인이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을 믿을 순 없어.’

하르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그의 탓에 난처한 상황을 겪긴 했지만 나쁜 마음에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함께 속가를 부르는 것은 다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노래지만, 거시적으로 가져올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

신전의 세력을 낮추는 것은 문화 격차로 인해 이득을 보고 있는 귀족과 황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군가에겐 혁명이고, 누군가에겐 반역이다.

‘단지 속가를 불렀다고 해서 반역이라고 처벌할 순 없지만.’

이단 심판이 일어나면 달라질 것이나 현재로선 그렇다.

‘하지만 방해는 할 수 있지.’

함께하다 보면 하르첸도 이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만약 속가를 연주해서 비난이 돌아온다면 하르첸은 어떤 선택을 할까.

더 이상 반주를 하지 않겠다고 해도 한 번 붙은 꼬리표는 계속 붙어있을 것이다. 그 꼬리표를 떼겠다고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다. 칼리오페는 전생에서 사람이 절박해질 때 어떻게 변하는지 지나칠 정도로 많이 겪었다.

마음을 정한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제게는 다른 반주자가 있어요.”

비록 공식적인 자리에서 함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연습 반주는 항상 함께하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 그분이 피아노를 잘 치십니까? 저, 저보다 더……?”

“저하고 잘 맞아요.”

하르첸의 눈동자가 충격에 흔들렸다.

“자, 잘 맞으신다고요.”

하르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거절 당해본 적이 없었다. 칼리오페가 단칼에 거절한 것도 충격이긴 했지만, 그녀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칼리오페는 특별하니까.

하지만, 하지만…… 자신보다 더 잘 치는 반주자가 있다니!

이건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얼마나 들숨이 날카로웠는지 갈비뼈가 다 아팠다.

“그럼, 전 이만.”

하르첸이 할 말을 잊은 사이 칼리오페가 서둘러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르첸은 그녀가 떠나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보다 더 피아노를 잘 치는 환상의 인물—어쩐지 남자인 데다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을 생각하며 이글이글 호승심을 불태웠다.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등 뒤에서 하르첸의 외침이 들렸지만, 칼리오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와, 리페가 그런 식으로 칼 거절을 하다니 놀랐어.”

“그래요?”

“하긴, 원래부터 좀 단호한 구석이 있었지.”

상냥하고 예의 발라서 오해하기 쉽지만, 선을 긋는 것은 단호하다.

그건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확고한 주관이 있다.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가끔씩 내비치는 그 단단함에 사람들이 더 끌리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말이지. 그 주관에 따라 오늘 속가를 부른 건 알겠는데. ……괜찮으려나.’

호르세안은 힐끔 작은 소녀를 내려다 봤다.

엄청난 일을 벌여놓고서도 긴 속눈썹을 내리깐 얼굴은 침착하기 그지없다.

호르세안은 무심코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의아하게 올려다 보는 산호빛 눈동자를 보고 빙긋 웃었다.

‘넘어지면 이렇게 잡아줘야지.’

* * *

그로부터 3주 후.

“아가씨, 하르첸 경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안 된다고 답장해드려.”

칼리오페는 보지도 않고 답했다. 벌써 열 통이나 받았던 편지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

그로부터 나흘 후.

“아가씨, 하르첸 경으로부터 편지가…….”

“안 된다고 답장해.”

그로부터 사흘 후.

“아가씨, 하르첸 경…….”

“답장.”

본론이야 똑같지만 각기 다른 말로 편지를 보내는 하르첸과 달리, 칼리오페의 답신은 그대로 잘라 붙여넣은 것처럼 똑같았다.

그러나 하르첸은 굴하지 않았다.

두어 번인가 루스티첼 저를 방문하기도 했다.

칼리오페는 나가보지 않았지만, 그는 루스티첼 부인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줬다. 어머니가 그의 연주를 대단히 좋아해서 칼리오페는 조금 마음이 돌아섰다. 하르첸이 어머니께 속가 운운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연주만 들려주고 돌아갔다.

칼리오페는 망설이던 끝에 아스타레아스에게 말했다.

* * *

“하르첸 경이라고요?”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눈매가 초승달처럼 예쁘게 가늘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칼리오페는 그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 정도는 쉽게 알아보게 되었다.

“어차피 반주자를 구해야 했잖아요.”

칼리오페가 작게 항변했다.

아스타레아스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면 비밀리에 연습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안 그래도 황제가 아스타레아스를 곱게 보지 않는데 속가를 연주하고 다닐 순 없다.

“네, 하지만 굳이 하르첸과 할 필요는 없지요.”

“딱히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누가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여자들 중에서.

아스타레아스는 뒷말을 삼켰다.

“음, 그래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꼭 하르첸과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라 그다지 미련도 없었다. 이미 아스타레아스가 반주자 선별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걸 물리고 싶진 않았다.

‘이런 일에 사람 고르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칼리오페가 손쉽게 수긍하자 아스타레아스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하르첸이 칼리오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또 자신이 그녀에게 더 중요한 것 같아서.

스스로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가벼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칼리오페는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 *

그렇게 계속 하르첸의 청을 거절하던 차.

“아가씨, 하르첸 경이…….”

“거절 답장 부탁해.”

유모는 예상했다는 듯이 레터 나이프로 편지 봉투를 잘랐다. 그러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아가씨.”

“응?”

“이건 평소와 같은 편지가 아닌데요?”

유모의 말에 베이비 살롱 내역서를 보고 있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초대장이에요.”

유모가 칼리오페에게 초대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볼프람 하르첸 피아노 리사이틀」

금박을 입힌 도톰한 카드 위로 유려한 필체로 적혀져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초대장이 온 건 처음이네요.”

유모의 말에 칼리오페가 책상 위에 팔을 얹으며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하르첸 경이 제도에 올라와서 리사이틀을 연 적이 없었지?”

“그러네요? 살롱이나 파티에서 연주는 많이 했어도 개인 독주회는 안 했어요.”

“하르첸 경의 인기를 생각하면 진작 열고도 남았을 텐데. 제의도 많이 들어왔을 테고.”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부러 제의를 거절하다가 왜 인제 와서?’

“아, 봉투 안에 메시지 카드도 들어 있네요.”

유모가 봉투에서 자그마한 메시지 카드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오시지 않을 것 같아서 메시지를 남깁니다. 제 연주를 들으시고 난 후에도 거절하시면 더 이상 청하지 않겠습니다. 바로 요르갈렌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하지만 만약 오지 않으신다면 레이디께 지금보다 더 강력히 제 의견을 피력할 생각입니다.

p.s. 다소 실례되는 조건을 붙여서 죄송합니다. 부디 그만큼 제가 간절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빠르게 메시지를 읽어내린 칼리오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어머, 이거 설마 아가씨를 설득하기 위해 리사이틀을 여는 것 아닌가요?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모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으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내 아가씨 마음에 들기 위해서 이 정도쯤은 당연하지!’

그녀는 녹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에이,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리사이틀을 열겠어? 겸사겸사겠지.”

칼리오페는 바로 부정했지만 어딘지 찜찜했다.

[그, 그분이 피아노를 잘 치십니까? 저, 저보다 더……?]

왜 지금 새파랗게 질려서 말까지 더듬었던 하르첸의 모습이 생각나는 걸까.

‘설마…….’

칼리오페는 고개를 붕붕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어쨌거나 자신의 실력을 내게 증명하기 위해 리사이틀에 초대한 거면 소용 없는 일인데.’

하르첸이 얼마나 피아노를 잘 치는지는 칼리오페도 잘 알고 있다. 회귀한 이후 최대한 피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을 찬미하는 곡들을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집 안, 그것도 자신의 방에만 콕 틀어박혀 살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들을 때마다 불쾌하고 불편했지만, 그 이상의 감각은 없었다.

하지만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에서 하르첸의 연주를 들었을 때는 달랐다.

‘……괴로웠어.’

가슴이 조여들며 숨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악몽처럼 환청과 환영이 찾아왔다.

사람의 감정과 기억을 쥐고 흔드는 위대한 연주.

하르첸의 손가락에서 탄생한 음향은 듣는 이를 고양시키고 보다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칼리오페에게는 오히려 독이었다.

하르첸의 리사이틀에 참석하면 분명 또 같은 고통을 맛볼 것이다. 그때는 단 한 곡이었지만, 리사이틀이니 한 시간 반 정도는 연주하리라. 무엇보다 하르첸은 이 리사이틀에 승부수를 띄웠다. 그만큼 온 힘을 다할 게 자명하다.

‘분명 대단하겠지. 정말…… 사람을 음악 속으로 데려갈 만큼.’

그 음악은 성가일 테고.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신에 대한 찬미에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지 않으시게요?”

칼리오페의 표정을 본 유모가 조심스레 물었다.

가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막상 그 질문을 들으니 망설여졌다. 불참하면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할 거라고 하르첸이 협박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게 마음에 걸렸다.

저쪽에서 모든 것을 걸고 요구한 정면 승부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

칼리오페는 기사가 아니었지만 무가인 루스티첼 가의 적통이었다. 저쪽에서 멋대로 벌인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녀는 부채감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꼈다.

“불편하시면 가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웃기죠. 실례되는 걸 알면 카드를 쓰지 말지.”

자신의 질문이 칼리오페에게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안 유모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간 꼬박꼬박 편지 보낸 정성이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아가씨께서 싫은 일을 할 필요는 없지요.”

유모는 책상 위에 놓은 초대장과 메시지 카드를 집어 들곤 보이지 않도록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가씨의 감정이에요.”

진지하고 또렷한 유모의 얼굴에 칼리오페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응, 알아.”

칼리오페가 유모에게로 손을 뻗었다.

“고마워, 유모.”

자신을 향해 몸을 숙인 유모의 목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 절로 미소가 더 깊어졌다.

‘결정했어.’

칼리오페가 허리를 세우며 유모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져왔다.

안을 열어 초대장을 꺼내 날짜를 살핀다.

“이 날이면 갈 수 있겠네.”

칼리오페의 말에 유모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가기 싫으시잖아요?”

역시 유모는 자신을 잘 안다. 칼리오페는 웃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기 싫어.”

“그럼 왜…….”

작게 중얼거린 유모가 표정을 굳혔다.

“아가씨, 하르첸 경의 마음을 신경 쓰실 거면 제 마음도 신경 써 주세요. 전 아가씨께서 남을 배려하느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정말 싫어요.”

“유모의 마음을 신경 써서도 가야겠네.”

“아가씨!”

“하르첸 경의 마음을 배려하느라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는 게 아니야.”

“그럼 대체…….”

“가기 싫지만, 이 한 번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는 게 더 싫어.”

칼리오페가 빙긋 웃으며 유모를 올려다 봤다.

“그리고—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 게 루스티첼이잖아?”

* * *

‘우와…….’

하르첸의 리사이틀에 참석한 칼리오페는 기가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로비 가득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데다가 밖에는 기자들이 서서 아트홀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찍고 있었다.

“거슬릴 정도로 사람이 많군.”

“홀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요. 독주회 홀이라 그다지 크지도 않은데.”

“리페, 내 손 잡아. 사람 많아서 잃어버리겠다.”

로베르트가 척, 하고 손을 내밀어 칼리오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 정도로 어리진 않은데요.’

하지만 얌전히 로베르트의 손을 잡았다. 지켜보던 루시우스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칼리오페는 따뜻한 무언가가 비었던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루시우스의 손이었다.

칼리오페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봤다.

“둘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루시우스가 칼리오페를 쳐다보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경우라면 루스 오라버니가 우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우리가 루스 오라버니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머릿속에 미아가 된 루시우스가 그려져 칼리오페는 웃음을 흘렸다.

루시우스는 통통해진 칼리오페의 뺨을 힐끔 바라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가가 발갛게 익었다.

“그런데 카메라 플래시 너무 심하지 않아요? 아까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요.”

눈이 아프게 부실 정도다.

칼리오페가 속삭이자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동시에 기자들을 돌아봤다.

“응? 갑자기 확 줄어들었네요. 쉬는 타임인가. 다시 심해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요.”

칼리오페는 밝아진 얼굴로 두 오라버니를 재촉했다.

홀에 들어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주회가 시작되었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검고 매끄러운 피아노. 그리고 그 피아노를 향해 다가가는 하르첸.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긴장해서 손끝이 저릿했다.

‘괜찮아. 견딜 수 있어.’

“리페?”

어두운 객석에서도 희게 질린 칼리오페를 알아본 루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오페는 그를 향해 애써 미소 지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루시우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연 순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무대를 보니 하르첸이 인사하고 있었다.

허리를 편 그가 뒤돌아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 말 없이 건반 위에 손을 얹는다.

칼리오페는 배에 힘을 꽉 주었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

칼리오페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충격을 넘어 경악이 그녀의 얼굴에 파도처럼 넘실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르첸이 연주하는 곡은 속가였으니까.

‘아니, 있는 그대로는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곡처럼 화려하고 섬세한 곡이었다.

트릴과 복잡한 박자로 쪼개져 있는 음의 향연,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정확하고 여유롭게 해내는 연주자. 딱 최신 트렌드인 엘리트 음악이었다.

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보통은 이걸 듣는 순간 속가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속가는커녕 성가라고 생각하겠지.’

장르만 봤다면 칼리오페 역시 성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해. 이건 속가야.’

초절기교 속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멜로디 노트는 분명히 속가였다.

그것도 엄청 유명한 속가였다. 아무리 귀족들이 속가를 싫어한다고 해도 집 밖으로 나가는 이상 한 번쯤 들어 봤을 곡.

‘개구리 집…….’

민가의 아이들이 흙바닥 어디에서건 주저앉아 놀면서 부르는 노래였다. 심지어 그 멜로디를 주제부로 삼아 반복하며 변주하고 있다.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속가의 멜로디의 주제로 삼아 변주하는 곡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했다.

속가를 부르고 연구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깜빡 속았을 테니까.

곡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좋았죠.”

“네, 처음 듣는 곡인데도 익숙한 느낌이라 신기하네요. 아, 다른 곡을 따라 했다는 건 아니고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새로운데 편한 느낌이죠? 저도 그래요.”

“하르첸 경이 새로 작곡한 곡일까요?”

“그럴지도 몰라요. 작곡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으니까.”

박수 소리 사이로 주변 귀부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어쩌면…….’

하르첸이 객석을 향해 인사하자 잦아들던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커졌다. 리사이틀 홀 안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언짢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칼리오페는 빠르게 리플렛을 확인했다.

<해 질 녘 금빛 모래에 손을 넣고>

‘곡명을 적어놓지 않았어.’

적혀져 있는 곡 목록은 은유적이라 오히려 세련된 연출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속가를 가리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다음 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터미션에 로비로 나간 칼리오페는 사람들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리사이틀이 훌륭하다고 답하는 것을 보았다.

휴게실 분위기도 비슷했다.

카우치에 앉은 귀부인들은 음료를 마시며 미소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설마 모든 곡들이 하르첸 경의 작곡일 줄은 몰랐어요. 2부에서도 그렇겠지요?”

“그간 리사이틀을 열지 않은 게 의아했는데 이렇게 크게 한 방 터트릴 생각이었나 봐요.”

“하르첸 경의 작곡이야 원래도 훌륭하다고 정평이 났지만, 이번 리사이틀 곡들은 정말 그 중에서도 수작이네요.”

“이 많은 곡들을 단기간에 작곡해냈다는 게 대단해요. 아, 단기간일지 어떤지는 들어봐야 알지만요.”

“어찌 되었든 야심 차게 준비한 리사이틀이라는 건 알겠어요.”

“리플렛에 곡을 이렇게 적어놓은 것도 정말 좋아요. 시적이고 낭만적이지 않아요?”

“그렇죠? 저도 다음에 후원하는 음악회에 이런 식으로 할까 봐요.”

“새로운 유행이 되겠는걸요?”

호호호, 하는 웃음을 뒤로하고 칼리오페는 휴게실에서 나왔다.

‘그야 듣기 좋을 수밖에 없지.’

민가의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다. 당연히 단조로우면서 중독성이 있고, 따라 부르기도 쉽다.

‘이걸 귀족들 입맛에 맞춰 편곡했으니 평이 안 좋으면 이상하지.’

물론 하르첸이 그만큼 편곡을 잘했기에 가능한 소리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하르첸의 리사이틀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뛰어난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까다로운 안목을 충족시키는 건 하르첸이 그만큼 굉장하기 때문이다.

‘천재라는 소리는 그냥 듣는 게 아닌 거지.’

집안이 받쳐주는 것도 아닌데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탄탄대로를 걸어왔을 정도의 재능이다.

칼리오페는 천장을 올려다 봤다. 빛이 산란하며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눈을 감자 그 반짝임의 잔상이 남아 어른어른거렸다. 귓가에도 마찬가지였다. 반짝반짝 빛났던 하르첸의 속가 연주. 그 잔상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칼리오페는 눈을 떴다.

산호빛 눈동자는 그 빛을 받은 듯 올곧게 반짝였다.

* * *

리사이틀이 끝나자마자 칼리오페는 홀 앞을 서성거리며 꽃을 파는 소녀에게서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 바로 하르첸이 있는 대기실에 방문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하르첸이 반색하며 칼리오페를 맞았다. 은회색 눈동자는 살짝 긴장해 있었다.

무대 위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싶어서 칼리오페는 웃음이 나왔다.

‘그냥 무대도 아니고 그런 대담한 짓을 벌인 무대였는데.’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인상 깊은 리사이틀이었어요.”

칼리오페가 하르첸에게 꽃을 선물하며 말했다.

꽃을 받아든 하르첸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햐, 향기가 좋네요.”

“파는 아이가 신선한 꽃으로 잘 골라주더라고요.”

칼리오페가 생긋 웃는데 로베르트가 끼어들었다.

“대기실을 방문하면서 연주자에게 꽃을 주는 것은 기본 예절이니까 말이야.”

“그래,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이지. 안 주고 싶어도 상식 있는 사람은 줄 수밖에 없지.”

루시우스가 말을 받았다.

하르첸의 눈이 가늘어졌다.

“레이디께서는 제 연주가 인상 깊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롱이나 파티에 그렇게나 많이 불려 다녔으면서 빈말도 구별 못 하는가 보군.”

“눈치 없네.”

로베르트의 말에 칼리오페는 움찔했다.

‘음, 로벨 오라버니도 꽤 눈치 없으신 편 아닌가요. 그런데 그런 말씀을…….’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사실 로베르트는 칼리오페가 눈치 없다고—특히 남녀 관계에—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둘 다 똑같았다.

어쨌거나 칼리오페는 오라버니들과 함께 있으면 이야기를 진행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하르첸 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뭐?! 절대 안 돼!”

로베르트가 기겁하면서 결사반대를 외쳤다.

“루스 오라버니?”

설득해달라는 뜻을 담아서 부르자 루시우스가 얼굴을 굳혔다.

“리페, 혹시 머리가 아프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요즘에는 음에 마력을 싣는 마법도 나온다고 하더구나.”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볼을 잔뜩 부풀렸다.

“난 네가 걱정되어서.”

루시우스가 빵빵한 볼을 톡, 치며 말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칼리오페가 하르첸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이야기가 안 될 테니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따로 시간을 잡아도 될까요? 혹시 바쁘시려나요?”

“바쁠 리가요. 시간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걸요.”

하르첸이 다급히 대답하자 루시우스가 코웃음 쳤다.

“시간이 많다고? 그럼 내게도 내주지 그래?”

“시간 없습니다. 1초도.”

하르첸이 대번에 정색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칼리오페를 향해 덧붙였다.

“레이디께는 많아요.”

“…….”

칼리오페는 어쩐지 두통을 느꼈다.

‘오라버니들 말고 어머니랑 올 걸 그랬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늘 사업과 관련해 다른 일이 있어서 오시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진 않을 것 같아.’

“그럼 제가 전보를 보낼게요. 다음에 둘이서 뵙죠.”

“둘이서?”

“안 돼애애애! 절대 안 돼!”

양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스 오라버니, 로벨 오라버니.”

진지하게 부르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지금 이야기해. 밖에 있을 테니까.”

“형!”

로베르트가 항의하는 걸 루시우스가 막았다. 자못 결사적이기까지 한 눈빛을 보며 칼리오페는 아연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요.’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우스가 로베르트를 끌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칼리오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하르첸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닌데요, 뭘.” 하고 중얼거렸다.

“네?”

“아니요. 오라버니들과 사이가 좋으셔서 부럽습니다.”

“가족이니까요.”

칼리오페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막상 자리가 마련되니 칼리오페도, 하르첸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르첸은 어땠냐고, 괜찮았냐고, 조금쯤은 당신의 마음을 흔들었냐고 묻고 싶은 것을 애써 내리눌렀다.

손끝이 얼음장같이 차갑다.

그는 오늘 모든 것을 걸었다. 칼리오페에게.

아마 그녀가 고개를 저으면 그의 음악 인생은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볼프람 하르첸의 인생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으니까.

누군가는 그렇게까지 갈 일이냐고 묻겠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예술가에게 뮤즈와의 만남은 기적과도 같다. 뮤즈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단은……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칼리오페의 말에 하르첸이 흠칫했다.

은회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린다.

“그게.”

목소리가 깔깔하게 나와 하르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입안이 바싹 말라 잘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신지…….”

“경의 결정이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라고 말한 것. 죄송합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사라락 흘러내렸다.

“아…….”

당황한 하르첸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만났던 순간부터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아서.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부리고 있죠.”

주섬주섬 사과하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한결 편해진 분위기에서 하르첸이 말했다.

“저는 사실 아주 어렸을 적에 속가를 부르며 자랐습니다.”

뜻밖의 말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속가 반주를 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쳐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봉토도 없는, 가난한 남작 가. 제도 귀족분들에 비하면 귀족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요.”

“빈부는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어떤 기준도 되지 못해요. 스스로를 낮추지 마세요. 당신은 그 누구보다 반짝이는 재능을 가졌으니까.”

하르첸은 고개를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올곧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비추고 있었다.

‘돈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라……. 이상적인 말이네.’

온실 속에서 자란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칼리오페의 행동을 보면 그녀가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담긴 감정, 그 거대한 상실감을 봐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배척하는 세속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가장 깨끗한 이상을 바라보는 아가씨.’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

“네, 돈보다 재능이 더 빛나는 것 같네요. 재능 덕에 돈을 손에 넣게 되었으니.”

하르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처럼 말했다.

“제가 돈을 벌게 된 것은 성가를 연주하면서부터입니다.”

“……그렇겠죠.”

“음악은 언제나 저를 구원했죠. 하지만 제 생활을 구원한 건 그 중에서도 성가였습니다.”

하르첸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악보를 쓰다듬었다. 오늘 연주한 속가의 악보였다.

“그래서 저 스스로 더더욱 속가를 배척해왔어요. 속가 따위는 하층민이나 즐기는 수준 낮은 곡이라고, 세속적이고 덧없다고. 그에 비하면 성가는 이상과 불변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탁, 하르첸이 속가 악보를 뒤집었다.

“가난한 생활과 멀어질수록, 이전에는 얼굴도 못 봤던 대단한 귀족들이 제게 감탄할수록. 마치 출신을 지우듯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저를 부정했죠.”

“하르첸 경…….”

“그러다 레이디를 만났습니다. 한눈에 알아봤죠. 저 사람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 나와 같이 음악의 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요. 레이디께선 저보다……. 당신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노래가 들려요. 지금도 흘러가는 노래를 잡아내 악보에 고정하고 싶어서 손가락이 들썩일 정도예요.”

하르첸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웃었다. 신경질적이고 성마른 웃음이었다.

“음악이 저를 구원했고, 제겐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레이디께도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무례라는 생각도 없이 노래를 청했죠.”

“…….”

“아니, 사실 무례인 걸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상관 없었어요. 다들 제가 무례해도 천재의 괴벽이라면서 치켜세웠거든요.”

하르첸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부끄럽고 괴로운 듯 고백했다.

“어쩌면…… 레이디가 처음에는 당황해도 저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나면 노래의 기쁨을 알게 되어서 좋아하게 될 거라고…… 부르길 잘했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하르첸은 이마를 문지르다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하지만 레이디께선 거기서 속가를 부르겠다고 하셨죠.”

속가를 연주하면 다시 그 가난한 생활로 돌아갈지도 몰라. 기껏 마음대로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졌는데 다시—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입으로는 이미 속가를 반주하겠다고 말한 뒤였다. 그리고 거기에 매료된 사람은 칼리오페가 아니었다. 하르첸 자신이었다.

“레이디께선 사과하셨지만, 사실 거의 충동으로 앞으로도 반주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거절당한 뒤 집에 돌아와서는 후회의 나날을 보냈다.

칼리오페가 했던 말들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을 보는 데 태만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깨달음도 얻었다.

“그때 레이디와 합을 맞추며 깨달았는데……. 사실 저는 속가를 좋아하나 봐요.”

어렸을 적에 맛있게 먹은 음식이 커서도 당기는 것과 같다. 속가는 하르첸에게 음악의 근원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접한 음악이었다.

싫어한다고 했지만, 그 속엔 그리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항상 의문이 있었죠. 모든 음악은 절대적이고 위대한데, 왜 사람을 주제로 하면 안 되는가. 왜 엘리트 음악만 가치 있다고 하는가.”

그 의문을 억누르고자 더더욱 속가를 배척하고 성가를 칭송했다.

칼리오페는 정확히 그 부분을 짚어냈다.

그랬기에 그때 하르첸은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처럼 시원한 기분과 긁은 곳에 피가 맺혀 화가 나는 기분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더 이상 신을 위해 연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음악이 가치 없다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하르첸이 칼리오페를 똑바로 직시했다.

“저는 사람을 위해 작곡하고 연주하고 싶습니다.”

정확히는 당신을 위해.

하르첸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하르첸 경…….”

목소리가 흔들려 나와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정확히 칼리오페가 바라던 것이었다.

신이라는 위명 아래 사람들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 종교라는 이름이 사람의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

그래서 무수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는 것.

“오늘 경께선 속가를 연주했죠. 제가 거절하면 앞으로 어쩌실 생각인가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제도 물가는 비싸거든요. 제가 선보인 곡이 모두 속가라는 게 알려지면 후원이 끊길 테니까요.”

하르첸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빳빳해져 있었다.

“그리고 나면 속가를 연주하고 작곡하고 그러고 싶은데…….”

하르첸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삶에서 칼리오페가 사라지면 더 이상 작곡하긴 힘들 것이다. 연주도 퇴색하겠지. 그러나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칼리오페에게 부담이 될 게 뻔하니까.

그녀 덕에 이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구설수야 어쩔 수 없지만, 후원자도 많고 인기도 있으니 다시 성가를 작곡하고 연주하면 한 번의 일탈로 마무리될 텐데요.”

“그렇겠죠. 하지만 이제 그러기 싫어서요.”

하르첸이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경.”

“네?”

“제가 가는 길에 경의 능력이 필요해요. 도와주시겠습니까?”

하르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러 가지 감정이 그의 얼굴에 물결쳤다.

“네, 기꺼이.”

칼리오페의 손을 꽉 붙잡은 그가 손등에 몇 번이고 키스를 퍼부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굳었다가 벅찬 희열로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었다.

“단, 조건이 있어요. 제게 다른 반주자가 있다고 말씀드렸죠?”

“아……. 그, 저보다 잘 치시는 분 말입니까.”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하르첸의 얼굴에서 푸시식 기대가 빠져나갔다.

‘나보다 잘 치고 잘생긴 데다가 돈도 많을 것 같은 그 연주자 말이지.’

“그렇다기보단…… 제 노래와 그분의 연주가 잘 맞는다고 했지요. 어쨌든 그분의 허락이 필요해요.”

이 일은 칼리오페 자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아스타레아스와 그녀. 두 사람이 같이 걸어가는 길이다.

혼자를 각오한 길에 아스타레아스는 가장 먼저 손을 뻗어주었다.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는 나를 잘 모를 텐데.’

“그러니 죄송해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하르첸은 정체도 알지 못하는 그 반주자에게 순간 질투를 느꼈지만, 여기선 물러나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제가 그분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 * *

그날 저녁, 칼리오페는 바로 아스타레아스를 만났다.

“이 이야기는 이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요.”

부드럽게 웃는 아스타레아스를 보며 칼리오페는 기시감을 느꼈다.

‘화났구나.’

“그때는 제가 하르첸 경에 대해 잘 몰랐으니까요.”

“지금은 잘 아신다는 겁니까?”

아스타레아스의 웃음이 더 깊어졌다.

더 화가 났다는 뜻이라 칼리오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어떻게 설득하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스타레아스는 기가 막혔다. 꼼질꼼질 망설이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모습을 보니 화가 스르르 풀리려 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단순했나.’

살짝 자괴감이 든다.

“음, 힘들게 반주자를 구하고 있는데 그 수고를 헛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하르첸 경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생각해요.”

“하르첸이요.”

“네, 일단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되더라도 괜찮은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하르첸이라니. 그놈은 신전과 귀족의 권력에 기생해서 커왔습니다. 성가를 연주하고 작곡하며 부를 얻었죠.”

“이제 그러지 않겠대요.”

“네?”

“내일 신문을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아스타레아스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르첸의 리사이틀이 있었지요. 그가 속가를 연주했나 보군요.”

한순간에 바로 도출된 정확한 추측에 칼리오페는 혀를 내둘렀다.

“네, 맞아요. 그가 어떤 생각인지 아시겠지요.”

“기준선 안에 들어온 것일 뿐, 하르첸이어야 하는 이유는 못 됩니다.”

딱 자른 말에 칼리오페가 한 발짝 그에게 다가섰다.

“성가는 권위에 기대어 있어요. 귀족들이 그 권위에 반응한다면 이름 없는 반주자보다 천재라고 유명한 하르첸 경이 반주자인 게 낫지요.”

맞는 말이다. 아스타레아스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물며 하르첸 경은 작곡도 잘하지요. 이번 리사이틀에서 속가를 편곡해 연주했는데 소문 이상의 실력이었어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지요.”

이것도 맞는 말.

아스타레아스는 그녀의 지성을 사랑했지만, 이번만큼은 발휘 안 해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답 없는 그에게 칼리오페가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질 듯 가까운 거리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끝을 스쳤다.

산호빛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 본다. 순수한 눈빛.

“혹시 꺼리시는 이유가 있나요?”

꺼리는 이유?

이유야 당연히 있다. 아주 확고하고 명확한 이유가.

하르첸이 남자라서. 그래서 질투가 나서.

하지만 그런 말을 칼리오페에게 할 순 없다. 해선 안 된다.

칼리오페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자신들의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그게 이렇게나—.

날카로운 흉통이 아스타레아스의 가슴을 갈랐다.

아스타레아스는 이지러지려는 눈매를 가다듬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 고통을 감추는 것은 익숙했다.

“그럴 리가.”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칼리오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다면…….”

하르첸을 써도 괜찮지 않냐는 뜻을 담은 산호빛 눈동자가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이겨냈다.

그래, 칼리오페가 말한 이유는 모두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도 있지만— 그녀가 하르첸을 반주자로 원하는 듯했다.

그게 다른 무엇보다 거슬리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바람을,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하르첸과 칼리오페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선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질투심에 속이 끓어도.

“그렇게나 원하시니 하르첸 경을 반주자로 쓰지요.”

아스타레아스가 사르르 눈매를 접으며 말했다.

‘그녀가 혼자서 결정하지 않고 나와 상의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해. 만족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족해야 해.’

허락받아서 좋아할 줄 알았던 칼리오페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공자님.”

가만히 아스타레아스를 들여다보던 칼리오페가 한걸음 물러나 피아노를 바라봤다.

“오늘 제가 하르첸 경의 연주에 어떤 감명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그를 반주자로 쓰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 옆에 둔 램프 빛을 받은 긴 머리카락이 고개를 저을 때마다 물고기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제가 원해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그를 반주자로 삼는 게 가장 최선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하는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미소 지었다.

알고 있다.

칼리오페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보다 다른 것을 중요시한다.

‘손쉽게 자신의 마음 따위 꺾어버리니까.’

대의 앞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마모시키는 사람.

그런 사람이니까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고 싶었다. 이루어주고 싶었다.

다른 것보다 널 소중히 하라고. 너는 그럴 가치가 있다고.

‘그러니 내 질투나 욕심 때문에 네 뜻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아스타레아스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하르첸을 반주자로 삼는 것에 동의한 거예요.”

부드럽게 답했지만 칼리오페는 무엇이 걸리는지 여전히 미간에 세로줄을 잡고 있었다.

“오늘 리사이틀에 가 보니 하르첸 경은 연주는 물론이고 편곡 능력도 뛰어나더군요. 그 명성이 헛된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런가요?”

아스타레아스는 치미는 질투심을 숨기며 온화하게 눈매를 접었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눈높이를 맞추고 싶다는 듯이 깡총 발돋움한다.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하지만 저는 이전에도 말했듯이.”

눈앞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한가득했다.

소담하게 자신을 담은 동백꽃 눈동자. 보드랍고 보송한 소녀의 볼.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

“공자님이 좋아요.”

아스타레아스는 순간 호흡을 잊었다.

모든 감각이 일순 사라졌다가 단번에 물밀 듯이 밀려온다. 파도에 휩쓸리는 것처럼 아스타레아스는 그 감각의 홍수에 표류했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명징하다.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말리화 향기. 색색 고른 숨소리. 솜털에 닿는 공기의 밀도. 칼리오페의 얼굴 감싼 빛의 입자.

그 모든 것들이 뚜렷하고 분명해서—.

아마도 자신은 이 순간을, 눈앞에 가득한 사랑스러운 소녀의 얼굴을 평생 기억하리라. 사진보다도 더 정확하고, 추억보다도 더 깨끗하게.

아스타레아스는 망막 안에 칼리오페를 담아내듯 눈을 꾹 감았다.

‘……어디까지나 파트너로, 반주자로 좋다는 것이겠지.’

알고 있다.

애초에 칼리오페는 ‘이전에도 말했듯이.’ 라고 못 박지 않았는가.

‘착각하는 게 어리석은 거야.’

그럼에도 아스타레아스는 어리석어지고 싶었다.

그는 충동을 참아내며 아무렇지 않게 싱긋 미소 지었다.

“제가 서운해하는 것 같았습니까?”

“아니에요?”

“아닙니다.”

칼리오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뭐,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요. 그래도 굳이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칼리오페가 피아노 의자에 착 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가볍게 풀썩인다.

“저는 여기에 공자님이 앉아계실 때가 마음이 편해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전에도 말했지만……. 공자님과 합이 더 잘 맞는 기분이에요.”

자신의 빤히 쳐다보는 아스타레아스의 눈빛에 칼리오페의 시선이 점점 다른 곳을 향했다. 목소리도 갈수록 작아져서 마지막 말은 기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돌린 고개 사이로 살짝 보이는 뺨이 붉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진심으로 기쁘게. 달빛도 무색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이러니 나는 네게 질 수밖에 없지.’

“레이디께서 그렇게까지 내가 좋으시다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주 열렬한 고백이었습니다.”

“고, 고백이라니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홱 돌려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얼굴이 백일홍처럼 새빨갛다.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공자님도 아시잖아요?! 어디까지나 파트너로서……!”

“부부도 파트너라고 하지요. 그건 좀 이르지 않나?”

“공자님!!”

벌떡 일어난 칼리오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백일홍 빛이다.

칼리오페는 주먹을 앙당그레 쥔 채 입술을 깨물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다 얄밉게 웃고 있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한숨이 푹 나온다.

아스타레아스의 페이스에 왜 그렇게 쉽게 말려들었는지. 그와 있으면 항상 그러는 것 같다.

“이제 그만 놀려요.”

“흐음, 놀린 게 아니었는데.”

빙글거리던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향해 달콤하게 웃었다.

“네에, 그러시겠죠.”

칼리오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걸려들지 않네.’

아스타레아스는 살짝 아쉬움을 느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럼 신문 기사를 보류하는 게 좋겠네요.”

“하르첸 경의 리사이틀에 관한 기사요?”

“네, 공자님을 설득하기 위해 내일 기사를 터트리고 사람들 반응을 보여드리려고 했거든요.”

칼리오페가 엣헴, 하고 가슴을 쭉 피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제게 설득되셨으니. 이 카드는 다른 때를 위해 남겨두는 게 좋겠어요.”

설득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올라가는 입가를 꾹 눌렀다.

‘자랑스러워하는 건 어린애 같은데. 깜찍하게도 바로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기자의 입을 막을까요?”

아스타레아스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면 러그윈을 통해 바로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아니요. 그냥 하르첸 경에게 연락하면 돼요.”

“그렇군요.”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서로를 응시했다.

“이제 반주자도 준비되었으니까.”

“슬슬 시작해야죠.”

푸른 눈동자가 붉은 눈동자가 교차했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하여 다시 오늘, 칼리오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살롱에 참석했다. 갑작스럽게 노래를 부르게 된 저번과 달리 각오를 다지고 온 것이었다.

“그럼 오늘 잘 부탁드려요, 하르첸 경.”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오늘 살롱은 전에 없는 대규모 살롱이었다. 그것도 노래를 주제로 한.

주최자는 크레티안느 피엔테.

그녀는 보통 사조를 주제로 잡았었다. 그런데 칼리오페가 속가를 부른 뒤 노래룰 주제로 결정한 게 영 수상쩍었다.

‘그것도 이런 규모로. 마치 여기에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말하는 것 같잖아.’

함정 혹은 기회.

‘함정이겠지.’

하지만 그 함정을 기회로 만들어야 했다.

집중을 위해 하르첸을 사실(私室)로 들여보내고 나서 칼리오페는 주변을 살폈다.

아까부터 계속 묘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크레티안느는 속으로 울상을 지은 채 계속 칼리오페를 힐끔거렸다.

소규모 살롱만 겨우겨우 주최하다가 이런 대규모 연회를 여니 너무 힘들었다. 사람 맞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중간중간 하녀들한테서 내부 상황에 대한 보고도 올라왔다. 눈앞이 핑글핑글 돈다.

‘왜 날 도와주지 않는 거야? 이렇게 곤란해하고 있는데.’

몇 번이나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칼리오페는 냉정하게도 묵묵부답이다.

[아, 그렇지! 내 시녀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한 날 이후로 칼리오페와 확연히 멀어졌다.

시녀를 제안한 게 실례되는 일일 줄은 몰랐다.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옛날 일이었다니.

‘하지만 나는 모르고 그런 거잖아? 악의가 있었던 게 아니야. 다 리페 잘되라는 뜻에서 한 건데.’

서러웠다.

‘리페도 나랑 멀어진 걸 후회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밖으로도 잘 안 나오고 그런 거, 다 자신과 멀어지니 우울해서 그랬던 거 아닌가. 그런데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다니. 어쩜 사람이 저렇게 냉랭할 수 있는가.

‘이런 대규모 살롱을 여는데 당연히 도와줘야 하잖아? 나 혼자서 이런 거 어떻게 하라고.’

다른 영애들이 주제를 정하는 것을 비롯한 준비를 도와줬다. 칼리오페가 답장이 없었던 건 서운했지만 적어도 살롱에 와서는 옆에서 거들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태도는 대체 뭐야?’

크레티안느는 할 일도 내팽개친 채 휴게실로 들어가는 칼리오페를 따라갔다.

“리페.”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돌아봤다. 크레티안느를 발견하고는 차분하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이게 끝?’

크레티안느는 입을 헤 벌렸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한가득 차올랐다.

“왜……?”

“네?”

“나한테 왜 그래?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야?”

“무슨…….”

“리페, 넌 날 도와줘야 하잖아. 그렇잖아.”

칼리오페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크레티안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쳐다볼 수 있는지.

“아니요. 제가 영애를 도와줘야만 하는 이유는 없는데요.”

침착한 목소리에 크레티안느의 채도 낮은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려 나왔다.

“뭐……?”

칼리오페는 충격에 빠진 크레티안느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것을 눌러 참았다.

크레티안느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이 읽혔다. 난 이렇게 착하고, 여리고, 서툰데. 어떻게 도와주지 않을 수 있냐는 눈.

‘아, 피곤하다.’

짙은 피로감이 몰려와서 칼리오페는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속가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크레티안느까지 상대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럼, 전 이만.”

칼리오페가 크레티안느를 스쳐지나 휴게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 도와주기 싫어? 내가 싫구나. 그래…….”

칼리오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칫했지만,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크레티안느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너무해…….”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지만 칼리오페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힐끔 눈치를 살피던 크레티안느는 결국 주섬주섬 일어나 휴게실을 나갔다.

* * *

“루스티첼 영애가 속가를 불렀다는 거 모두 들으셨죠? 오늘 노래를 부를 것 같은데 혹시…….”

“설마 이번에도 속가를 부르겠어요? 그런 천박한 노래를 한 번도 아니고.”

크레티안느 주변에 모인 영애와 영식들이 재잘거렸다.

그들은 피엔테 후작가의 권력과 돈을 보고 크레티안느에게 접근하는 자들 중 하나였다.

그간 칼리오페가 은연중에 그들의 접근을 막으며 크레티안느를 보호해줘서 연을 만드는 데 실패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멀어지면서 칼리오페의 보호가 사라진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손쉽게 크레티안느의 옆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에게 미련이 철철 남은 게 보여서 그들은 어떻게든 칼리오페를 깎아내리려고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면 루스티첼 영애가 다시 우리의 접근을 막을 거야.’

“혼자 고고하게 굴더니 가장 천박한 자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크레틴 영애?”

“응? 아……. 그치만 리페는…….”

“속가를 불렀잖아요?”

“그건 천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천박하다고 하면 리페가 불쌍하잖아. 내 친구인데…….”

크레티안느에게 속살거리던 영애와 영식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와…….’

정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애였다.

‘뭐, 오히려 잘 됐지.’

씨익 웃은 영애 하나가 부채를 살랑 흔들며 말했다.

“친구라고요? 그런데 어째서 루스티첼 영애는 살롱 여는 걸 도와주지 않은 거예요?”

“친구라면 당연히 도와야 하는 거잖아요? 그냥 평범한 살롱도 아니고 이렇게 큰 살롱인데.”

“맞아요. 크레틴 영애를 도와준 건 저 천박한 루스티첼 영애가 아니라 우리라고요.”

“진정한 친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 아닌가요?”

그들은 크레티안느가 어렵고 힘들 때 누구보다 먼저 발 빠르게 멀어질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크레티안느의 배경을 보고 떨어질 콩고물을 얻어먹기 위해 친한 척하는 거니까.

하지만 멍청하고 눈치 없는 크레티안느가 그런 걸 알아볼 리 없다.

“자아, 영애가 살롱 준비로 힘들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죠? 주제 정하는 것부터 해서 도움을 준 사람은요?”

“그때 루스티첼 영애는 뭘 하고 있었죠?”

“…….”

크레티안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영애를 도와줘야만 하는 이유는 없는데요.]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어쩜 그렇게 차갑고 싸늘할 수 있는지. 그렇게 못된 애인지 몰랐다.

크레티안느에게 말이 먹혀 들어가는 것 같자 신난 사람들이 더 속살거렸다.

“천박한 루스티첼 영애는 고귀한 피엔테 후작가의 적장녀인 크레틴 영애랑 안 어울려요.”

“맞아요. 오늘 차림새도 봐요. 값비싼 보석 하나 없고……. 장신구라곤 머리에 단 천 쪼가리뿐이에요.”

“풋, 저것도 장식이라고.”

“그에 비하면 크레틴 영애는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까지……. 이 빛깔 좀 봐요.”

“머리핀은 어떻고요. 정말 섬세한 세공이네요.”

“저도 이런 파뤼르 세트를 가지고 싶어요.”

크레티안느는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핀을 더듬었다. 볼에 홍조가 살짝 올라왔다.

‘그래,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천박한 애랑은 어울리지 않는 게 좋겠어.’

게다가 먼저 차갑게 돌변한 것은 칼리오페였다. 자신은 항상 그녀를 위해주었는데.

크레티안느는 자신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자신은 더 이상 홀로 구석에 서서 칼리오페가 손을 뻗어주길 바라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그런 천박한 애는 내 친구가 아냐.’

* * *

‘좀 신기하긴 하네.’

칼리오페는 음료가 든 글라스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 천박하다고 생각하면서 왜 안 도와주냐고, 내가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굴 수 있는 게.’

뻔뻔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크레티안느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척 봐도 피엔테 가의 황금이 탐나 모여든 까마귀 떼였다. 일부러 칼리오페 들으라고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저러는 게 뻔했다. 크레티안느와 가까워지지 않도록.

‘그러지 않아도 다시 가까워질 생각 따윈 없는데.’

까마귀들이 저들끼리 깍깍대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 시끄럽다.

칼리오페가 자리를 옮기려고 카우치에서 일어난 때였다.

“여기 있었군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함께 팔이 잡혔다.

“리페.”

몽에르트 영애가 칼리오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영애.”

칼리오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우선 인사부터 했다.

그 와중에도 몽에르트 영애는 칼리오페의 팔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붙기까지 했다.

‘너무 친근하지 않나요?’

팔을 터치하는 스킨십도, 애칭도 당황스러웠다.

몽에르트 영애와는 단 한 번 만났을 뿐이다. 서로 호의를 보이긴 했지만 그게 이런 친근함으로 이어질 만했냐면 절대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혼자 서먹해 하는데 크레틴 주변에 있던 까마귀 하나가 다가왔다.

“몽에르트 영애.”

몽에르트 영애는 고개만 돌려 다가온 영애를 바라봤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저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왈렌 가의 티파티에서 뵈었는데…….”

“안녕하세요, 몽에르트 영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랜만이에요, 몽에르트 영애. 이런 데서 다시 뵙네요.”

까마귀 하나의 행동에 다른 까마귀들 역시 떼로 몰려와 너도, 나도 몽에르트 영애에게 깍깍거리기 시작했다.

크레티안느는 어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애초에 칼리오페와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서 있었던 차다. 거기다 까마귀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 같이 이동했기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진 않았다.

하지만 주목받던 상황에서 갑자기 찬밥 신세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피엔테보다는 몽에르트지.’

까마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몽에르트보다 피엔테가 더 막강했다. 몽에르트는 백작가인 로아힌보다 뒤처지지 않았던가.

‘물론 로아힌이 다른 후작가에 견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긴 하지만.’

하나 최근 몽에르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있었다. 제2의 전성기를 맞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무서운 성장세였다.

‘그 성장의 주역은 후계자로서 자리를 확고히 굳힌 몽에르트 영애지.’

크레티안느는 요리하기 쉽지만 멍청해서 미래가 안 보인다.

‘망해도 피엔테는 피엔테라서 뜯어먹을 게 많겠지만.’

반면 몽에르트 영애는 황금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는 까마귀들은 눈앞의 황금을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에르트 영애가 칼리오페와 친해 보이는 게 신경 쓰였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신나게 칼리오페를 험담하고 있었다.

‘만약 루스티첼 영애가 다 일러바친다면?’

식은땀이 났다. 칼리오페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온 것이다.

“헉, 설마 이게 그 루비 목걸이인가요?”

한 영애가 몽에르트 영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비 목걸이? 아, 몽에르트 후작님께서 이번에 선물하셨다는 거요?”

“정말 아름다워요…….”

반짝이는 커다란 루비는 생명을 담은 것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났다.

“네, 맞아요. 아버님께서 제가 후계로서 입지를 공고히 한 것을 칭찬하며 선물해주신 거예요.”

몽에르트 영애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곤 칼리오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오늘 심플하게 하고 왔네요? 아까 보니 왜 장신구 하나 없이 리본만 하고 왔나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 말에 천 쪼가리로 장식했다며 비웃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반면 칼리오페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답했다.

“대연회도 아니고 살롱에 오는 데 그런 장식은 굳이 필요 없으니까요.”

“아하. 나는 안 해도 빛나니까. 라는 건가요?”

몽에르트 영애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키득거렸다.

칼리오페는 황당해서 몽에르트 영애를 바라봤다.

‘이런 이미지였던가?’

좀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는데.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니에요.”

몽에르트 영애의 시선이 칼리오페를 훑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깔끔하게만 입은 칼리오페가 그렇게 반짝반짝 빛날 수가 없었다.

‘눈에 띄니까 더더욱 험담을 듣는 거지.’

보이지 않으면 칭찬할 일도, 욕할 일도 없다.

칼리오페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옳다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의 생리가 그러니까.’

“뭐, 하긴. 보석의 반짝임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요.”

장난기를 지운 몽에르트 영애의 목소리에 칼리오페를 욕했던 사람들이 얼굴을 굳혔다.

“보석 따윈 굳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내 선물은 받아줘요.”

몽에르트 영애가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내며 말했다.

“몽에르트 영애?”

서늘한 감촉이 칼리오페의 목에 닿았다.

“헉…….”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새빨간 루비 목걸이가 칼리오페의 가느다란 목에서 빛났다.

소리 없는 충격이 사람들을 강타했다. 그 누구도 뭐라 입을 열지 않았다. 한순간에 제도 근교의 집 한 채는 될 법한 금액을 선물한 것만 해도 놀랄 법한데.

‘저건 후계 자리를 확고히 한 기념으로 후작한테 받은 거잖아?!’

‘그걸 주다니, 그럼…….’

눈치 빠르고 계산이 밝은 자는 한눈에 이 선물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다.

‘몽에르트 영애의 후계 싸움에 루스티첼 영애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건가?!’

* * *

“몽에르트 영애…….”

칼리오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몽에르트 영애를 불렀다. 갑자기 일어난 일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다만 묵직한 목걸이의 무게가 현실감을 일깨웠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몽에르트 영애가 목걸이 호크를 풀려고 하는 칼리오페의 손을 붙잡았다.

“받아줘요.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있잖아요?”

주변에 있던 까마귀들이 그 광경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몽에르트 영애가 후계로 입지를 다지는데 루스티첼 영애가 도움을 줬나 봐.’

‘그냥 도움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은데…….’

‘그럼…… 어쩌지……?’

망했다.

세 글자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이제 와서 칼리오페에게 살랑살랑거려봤자 꼴만 우스워지고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너무 눈에 보이는 태세전환 아닌가.

자기들이 여태까지 눈에 빤히 보이는 짓을 하고 있었다는 자각은 없었다.

‘이, 일단 지금은 물러나고 나중에 루스티첼 영애의 환심을 사야겠어. 몽에르트 영애한테 따로 접근하거나…….’

‘하지만 루스티첼 영애는 알랑거림이 먹혀들지 않는 사람인데.’

‘크레티안느라도 건졌으니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그런데 복잡했던 몽에르트 가의 후계 싸움을 정리하다니……. 루스티첼 영애의 수완이 대단한걸.’

‘지금이라도 줄을 서야 하나?’

까마귀들이 제각각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각자 생각하는 건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결정은 똑같았다.

바로, 우선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

“어머, 크레틴 영애! 아직 손님들이 들어오고 있어요.”

“규모가 남달라서 그런지 입장하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네요.”

“어서 맞으러 가요!”

그들은 재빠르게 핑계를 대고 순식간에 꽁무니를 뺐다.

둘만 남은 칼리오페와 몽에르트 영애는 아연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몽에르트 영애.”

“네.”

“역시 이 목걸이는 받을 수 없어요. 지나치게 비싸고……. 담긴 의미도 제겐 너무 무거워요.”

몽에르트 영애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의미가 무겁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 바로 당신인데 무겁다니요.”

“네?”

“말 그대로예요. 영애 덕에 저는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니까.”

몽에르트 영애가 손가락으로 칼리오페 목에 걸린 루비를 쓸었다.

“저 외에 이 목걸이의 주인이 될 만한 사람은 오로지 당신, 칼리오페 루스티첼뿐이에요.”

“……제가 도움을 드렸다고요?”

“왈렌 가를 조심하라고, 내게 말했잖아요? 그게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어요. 내부의 적을 정리하고 나니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더군요.”

몽에르트 영애는 아주 가뿐하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그 말을 듣고 실제로 움직인 사람들은 따로 있을 텐데요. 꼬리를 잡아낸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겠지요.”

여전히 납득되지 않아서 말하자 몽에르트 영애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루스티첼 영애는 참 공정한 성격이군요. 아니, 정확히는 스스로에게 엄격하다고 해야 하나?”

“……신중한 거예요. 영애가 무슨 의도로 제게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리페라고 애칭을 부른 것도, 친한 척 스킨십을 한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이런 의미도, 가격도 과한 선물이라니.

“의도라…….”

몽에르트 영애가 중얼거리며 입매를 쓸었다.

“그냥 당신이 좋아서 그런 건데.”

“……네?”

잘못 들었나 싶어서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였다.

“친한 척한 게 실례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받았잖아요? 저런 부류는 권력에 약하니까.”

몽에르트 영애가 까마귀들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라고요?’

도도하게 말했지만 결국 속뜻은 그거였다.

“리페.”

“네.”

“—그렇게 불러도 되죠? 갑자기 또 루스티첼이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니까.”

“네에…….”

이름 부르겠다는 말 한 번 어렵게 한다 싶었다.

“혹시 해서 묻는데 내 이름……. 알고 있죠?”

“……알고 있어요, 베로니카 언니.”

몽에르트 영애는 저절로 움직이려는 안면근육을 바로 잡았다. 내공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속가를 부를 거죠?”

“네.”

“그럼 더더욱 받도록 해요. 이 목걸이가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세상에는 당신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것에 영향받는 사람도 있으니까.”

칼리오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전생에서 가세가 기울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돌변했는지 직접 보고 겪었으니까.

몽에르트 영애가 순수한 호의를 보이는 거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몽에르트 가의 후계 다툼에 누가 가장 많이 기여했는지 판단하는 사람은 칼리오페가 아니라 몽에르트 영애다.

“그럼 소중히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 * *

몽에르트 영애와 헤어진 칼리오페는 노래 준비를 위해 하르첸을 찾아 홀을 나섰다.

규모가 큰 살롱이라 그런지 이례적으로 참가하는 예술가들을 위해 따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의 거실은 독방 여러 개로 연결되어 있어, 집중하고 싶은 사람은 독방 안에 들어가면 됐다.

독방에 들어갈 때 문 앞에 있는 보면대에 이름을 적어놓기 때문에 칼리오페는 손쉽게 하르첸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레이디 루스티첼?”

칼리오페가 거실을 가로지르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뒤돌아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팔리마 디아르엔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디아르엔 양.”

디아르엔은 요즘 떠오르는 오페라 가수였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첫 무대에서부터 주연급 조연을 맡았다.

곧 주인공을 맡을 거라는 소리가 재작년부터 돌았으나 아직 맡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뛰어난 실력파 가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눈에 알아봤어요. 과연, 정말 예쁘장하게 생겼군요.”

칭찬이라기엔 다소 미묘한 어조였다.

“이런 얼굴이면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돼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레이디의 얼굴을 자기 상표 옆에 붙이고 싶어 하는 거겠죠?”

“…….”

“거기다가 평판까지 좋으니……. 완벽하네요, 정말.”

디아르엔이 피식 웃으며 느릿하게 박수를 짝, 짝, 짝 쳤다.

“하지만 이곳에 노래 부르러 온 건 실수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딱하다는 표정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노래는 얼굴로 부르는 게 아니랍니다. 저번에 한 번 노래 부르고 좀 칭찬받았나 본데—.”

소란에 거실에 있던 예술가들이 두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디아르엔은 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당신 유명세 때문에 당신 노래를 좋아하는 거예요. 거기다 속가라는 꼼수까지 쓰다니.”

쯧쯧, 디아르엔이 혀를 차곤 말을 이었다.

“가창력이 부족하니까 다른 논란을 만든 거죠? 주목 좀 더 끌어서 오페라 무대에라도 서 보려고? 모델로는 부족해요?”

칼리오페는 대답 없이 유순한 태도로 디아르엔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신 추종자들이 우쭈쭈해준 것 가지고 우쭐해서 진짜로 여기에 나오다니. 당신 수준 알 만해요.”

칼리오페의 태도에 디아르엔은 더 신나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의 거짓과 진심 좀 구분하세요. 그렇게 어리게 세상을 보면 안 된답니다.”

훈계하듯 말한 디아르엔이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설마, 진심으로 사람들이 순수하게 당신 노래에 감탄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칼리오페의 인정에 디아르엔이 입꼬리를 바싹 끌어올리며 말을 받았다.

“그렇죠? 인정하다니 생각보단 양심이 있군요.”

“네, 인정해야겠어요.”

칼리오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한 눈으로 디아르엔을 바라봤다.

“제가 예쁘다는 것을요.”

디아르엔은 입을 헤, 벌렸다.

‘뭘 인정한다고……?’

뭐라고 하는지 듣긴 들었는데 제대로 들은 것 같지 않았다.

말도, 생각도 잊은 채 수 초간 가만히 칼리오페만 바라보다가 겨우 깨달았다.

눈앞의 소녀가 자신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겠다고 한 것을.

“뭐, 뭐라고요……?”

뒤늦게 그 말만 나왔다.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대체 내 말을 제대로 들은 거야?!’

칼리오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자신의 말이 어려웠나 되짚어 보는 사람처럼.

“제가 예쁘다는 걸 인정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또박또박 차분하게 말하는 모습에 디아르엔은 뒷골이 띵하게 당겨왔다.

칼리오페의 얼굴은 한없이 진지했다. 비꼬거나 놀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이게 진심이 아니라면 칼리오페는 엄청난 연기 천재다. 당장 황립 극단에서 모셔 가야 한다.

“허.”

칼리오페가 진심이라는 걸 깨닫자 기가 찼다. 차라리 비꼬기 위해 저러는 게 낫지, 이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음, 저도 제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디아르엔이 황당해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칼리오페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막혀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 심미안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어느 정도 호감을 살 만한 외모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디아르엔은 겨우 수습 중이던 정신이 다시 출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어이없어하는 이유가 ‘네가 예쁜 걸 이제야 알았냐?!’ 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막혀하지 말라고 하는 말인데 더 기가 막힐 것 같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정말 혈압이 상승하고 있다.

디아르엔의 반응을 본 칼리오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칼리오페가 운을 떼는 순간, 디아르엔은 이어질 말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말할지 하나도 예상할 수 없지만 일단 자신의 혈압 강하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상승시켰으면 시켰지. 그러나 말문이 막힌 상태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대뜸 찾아와서 ‘넌 뭘 하든 쉽게 사랑받을 정도로 얼굴이 예쁘다.’라고 말할 만큼 예쁘다는 걸 인정하겠다는 거예요.”

역시나 칼리오페의 말은 디아르엔의 혈압을 상승시켰다. 디아르엔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저도 제가 그렇게까지 예쁠 줄은 몰랐어요.”

칼리오페 역시 얼굴을 살짝 붉혔다. 하얀 소녀의 뺨에 장밋빛 물이 드니 그야말로 뭘 하든 쉽게 사랑받을 만한 모습이었다.

“부끄럽지만 제가 막내라 그런지 가족들이 유난히 제게 관대하거든요.”

한마디로 팔불출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저 스스로라도 자기 객관화를 하려고 노력해요.”

예쁘다는 말—엄청나게 창피한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한—을 들어도 팔불출이니 그런 것이다, 하고 흘려넘겼다.

“그런데 이런 일까지 일어났으니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저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예쁜 거군요.”

인정하겠다고 선언하고서도 부끄러워진 칼리오페가 손으로 양 뺨을 감쌌다. 뜨끈뜨끈하다.

휘이이익—.

갑자기 들려온 휘파람 소리가 디아르엔과 칼리오페 사이를 갈랐다.

“대단한데?”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리니 거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주목하고 있는 게 보였다.

칼리오페는 더더욱 부끄러워졌다.

“팔리마가 한 방 먹었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다가와 디아르엔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디아르엔이 얼굴을 확 구기며 어깨를 털어냈다.

‘내가 디아르엔을 한 방 먹였다고?’

칼리오페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에 남자는 낄낄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크흡, 흠흠. 굉장히 예쁜 걸 인정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흔치 않죠.”

“……이름도 안 밝히고 레이디의 대화에 끼어드는 신사분은 흔치 않은 것을 넘어 아예 없지요.”

즉, 눈앞의 남자는 예의를 지키지 못했으니 신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칼리오페의 응수에 남자가 눈을 깜빡이더니 재빨리 칼리오페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키스를 했다.

“이런, 실례를. 테르너라고 합니다, 레이디.”

사뭇 정중하게 인사한 테르너가 칼리오페의 손을 놓아준 후 이어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무례하게 굴 의도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굉장히 예쁘신걸요? 자부심을 갖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우세요.”

빙글빙글 웃는 테르너 옆으로 다른 남자가 혼잣말하듯 끼어들었다.

“그 미모만큼 노래 실력도 대단해야 할 텐데 말이야.”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아, 그렇구나.’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나 여기서 환영 받지 못하는구나.’

디아르엔과 자신의 공방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 약간의 적대감과 경멸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나마 호의적으로 굴었던 테르너 역시 난처한 웃음을 지을 뿐, 혼잣말로 중얼거린 남자에게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완벽한 방관자의 자세다.

‘내가 어떤 취급을 당해도 상관 없다는 거지.’

처음 보는 사람이니 굳이 상관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그는 디아르엔과 칼리오페의 대화에 요란하게 끼어들 만큼 참견쟁이가 아닌가.

‘내가 유명세에 편승해서 한 자리 꿰찰 생각으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실력도 없으면서.’

디아르엔과 테르너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꽤 있다고 하니까.

화제성을 위해서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유명인을 오페라 가수로 쓰는 경우. 외모만 출중하고 연기를 못하는 배우를 주연으로 발탁하는 경우.

칼리오페도 알고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내 노래를 들어본 적도 없잖아.’

상대의 능력을 알아볼 생각도 없이, 무작정 추측해서 적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쁜 사람은 노래를 못 부르나요?”

조용하고 차분한 물음에 사람들이 움찔 했다.

“속가를 부르는 사람은 모두 다른 논란을 만들어 실력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꼼수를 쓰는 거고요?”

먼저 적의를 보였으면서 막상 되돌아오자 당황한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 하면 뭐 틀린 게 있냐는 듯, 너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냐는 눈으로 시선을 맞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제 노래는 완벽하지 않아요. 못 부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당당히 빛났다.

“자신이 가는 길만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람의 인정을 받아봤자 기쁠 것 같지 않아요.”

사람들의 얼굴이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물들었다.

“제게 당신들의 인정은 필요 없어요.”

칼리오페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몇몇 사람들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없었다. 뭐라 반박하더라도 칼리오페가 말한 ‘편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 그래 봤자……!”

디아르엔이 쥐어짜듯이 말했다.

“그래 봤자 노래 못 불러서 그러는 거잖아요. 멋지게 말해봤자 결국 그거잖아. 달리 말하면 사람들의 인정을 못 받을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다는 거, 아니에요?”

그녀를 돌아본 칼리오페는 잠시 침묵했다.

아연한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논리인 거지…….’

필요 없다는 것과 못 받는 것은 다르다고 알려줘야 하는 걸까?

“정곡이니까 지금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죠?”

칼리오페의 침묵을 달리 해석한 디아르엔이 반색하며 말했다.

‘아니, 당신의 논리력에 감탄하느라 그런 건데요.’

칼리오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이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을 이유는 없다.

원래 목적대로 하르첸에게 가려던 때였다.

“레이디?”

하르첸이 있던 방문이 열리며 그가 나왔다.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하르첸이 거실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르첸 경?”

“안녕하세요, 경.”

갑자기 사람들이 반색하며 우르르 하르첸에게 몰렸다.

“리사이틀에 직접 가보고 싶었는데 자리를 못 구해서 너무 아쉬웠습니다. 정말 굉장했다죠?”

“오늘 직접 경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영광이에요.”

“이번에도 직접 작곡하신 곡을 연주하실 건가요?”

“리사이틀에서 치신 곡들 중 하나를 쳐주셨으면 좋겠어요.”

하르첸은 인상을 팍 쓰고 귀찮아 죽겠다는 태도로 성큼성큼 걸었다. 신경질적이고 무례한 태도에도 사람들은 안달하며 뭐라도 답을 듣기 위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칼리오페 앞까지 다가온 하르첸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휙 뒤를 돌았다. 그리곤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은 리사이틀에서 쳤던 곡을 연주하지 않습니다. 레이디 칼리오페의 반주를 위해서 왔으니 레이디가 부르실 노래를 칠 겁니다.”

“네?!”

“뭐라고요?”

사람들이 경악하든 말든 하르첸은 다시 뒤돌아 칼리오페를 봤다.

마치 ‘이제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예의를 잘 지킨답니다. 칭찬해주세요.’ 라고 말하듯이.

* * *

“하르첸 경이 반주를 한다고요?”

“그것도 저런…… 레이디의 반주를?”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하르첸과 칼리오페를 번갈아 봤다.

“무, 물론 후원자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사람이긴 하지요.”

그들은 겨우겨우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다.

“하긴, 루스티첼 가는 부유하니까요.”

“후원자로 두면 정말 좋은 집안이죠.”

웅성거리는 말에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던 하르첸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인상을 잔뜩 쓴 그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레이디 칼리오페께선 제 후원자가 아닙니다. 루스티첼 가도 마찬가지고요.”

그 단언에 사람들은 표정이 기묘하게 허물어졌다.

“그럼 왜……?”

흘러나온 의문에 하르첸의 미간이 꿈틀했다.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서며 삐딱하게 말했다.

“내가 레이디께 무리하게 부탁해서 반주자가 된 겁니다.”

은회색 눈동자가 신경질적인 경고를 담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

사람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경악성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대로 자리를 떴다.

“하르첸 경에게 실망이에요.”

“하르첸 경은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애한테 홀려서 뭐 하는 건지.”

“그러니까. 그 빛나는 재능을 썩힐 생각인가?”

“아직 사춘기니 그럴 수 있겠지요. 너무 그러지 맙시다.”

그들이 멀어지는 동안 주고받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안 들어도 될 말을 듣게 해서.”

칼리오페는 하르첸의 사과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반대인데요.”

저들은 처음부터 칼리오페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녀를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추측해 비난부터 했다. 오히려 하르첸이 칼리오페의 반주자라서 욕 들은 것 아닌가.

그런데 하르첸은 전전긍긍하며 칼리오페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을 보니 아까 사람들에게 그렇게 날카롭게 굴었던 사람이 맞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저런 사람들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르첸과 눈을 맞췄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고 꺼리는 게 두려웠다면 애초에 속가를 부르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거기에 맞춰서 살았을 것이다.

당당하고 소신 있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하르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에게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확고한 주관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어린 나이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

그녀가 드리운 빛에 이끌려 사회가 요구한 대로, 신을 찬양하는 곡만 연주했던 자신이 다시 속가를 연주하게 되었다.

‘북극성보다 더 찬란한 내 인생의 지표.’

하르첸은 떠오르는 영감에 눈을 감았다.

바람에 흩어지는 그녀의 머리칼. 햇빛이 떨어지는 그녀의 뺨. 영혼에 닿는 그녀의 목소리. 이제는 그녀의 생각과 신념까지.

칼리오페의 모든 것이 그의 원천이 되고 있다.

* * *

“식순 보셨어요? 레이디께서 제 바로 직전이더라고요.”

살롱이 시작되어 칼리오페는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디아르엔의 말을 붙이며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식순은 봤지만, 칼리오페는 디아르엔이 자신의 다음 순서인진 몰랐다. 오로지 그녀 자신이 몇 번째인지만 기억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였지.’

그럼 디아르엔이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앞뒤로 누가 부르든 아무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 잘하는 것이니까.

“꽃이 참 예쁘죠?”

디아르엔이 협탁에 놓인 화병을 눈짓하며 물었다.

“레이디께선 항상 이 프로테아같이 사셨겠죠.”

디아르엔이 커다란 킹 프로테아를 매만지며 말했다.

용왕꽃이라는 별칭이 있는 만큼 과연 킹 프로테아는 강렬한 존재감과 화려함으로 남다른 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유칼립투스 같았겠죠.”

화병은 킹 프로테아 하나를 메인으로 유칼립투스와 나뭇가지로 꾸며져 있었다.

손장난을 치듯 유칼립투스 잎을 튕긴 디아르엔이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레이디께서 유칼립투스가 될 차례에요.”

그건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디아르엔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 킹 프로테아는 나야.’

구태여 말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칼리오페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바로 앞에 실력도 안 되면서 얼굴과 유명세만 믿고 설치는 칼리오페가 노래를 부른다. 그 직후, 자신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감탄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넌 날 더 돋보이게 할 들러리일 뿐이야.’

어디 한 번 뭐라 할지 보자는 태도로 디아르엔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아까 자신이 예쁘다는 걸 인정하겠네, 뭐네 운운해서 자신을 한 방 먹인 것을 되돌려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 네.”

하지만 칼리오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대 쪽을 바라봤다.

이건 수긍이 아니라 무시였다. 디아르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혹시 제 비유가 레이디께 다소 어려웠나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려 디아르엔을 바라봤다.

곧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속가를 부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디아르엔의 무례한 선전포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굳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고, 그 시간에 마음을 비우는 데 전념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꾸 옆에서 시비 걸 생각이라면 입 다물게 하는 게 좋겠지.’

“일단, 저는 유칼립투스는 좋아해요. 향도 좋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오일로 만들어 입욕제로 쓰면 얼마나 기분 좋은데요. 피부도 매끈해지고.”

“내 말을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유칼립투스가 좋다, 싫다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꽃다발에서 유칼립투스가 들러리로—.”

“그러니까, 저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들러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칼리오페가 디아르엔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유칼립투스를 그저 프로테아를 위한 부산물 정도로 봤지만, 난 달라요. 지금도 유칼립투스 향기가 얼마나 제게 도움이 되고 있는데요.”

마지막 말에 디아르엔이 주먹을 꽉 쥐었다. 모멸감이 그녀의 몸을 휩쓸었다.

유칼립투스의 효능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언급하고 난 뒤, 지금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말을 한 의도가 분명했다.

‘내가 스트레스 덩어리란 뜻이야?!’

앞에 복선을 깔고 뒤에 돌려 말하는 세련된 화법이었다.

디아르엔은 칼리오페가 왜 유칼립투스가 좋다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아니냐며 비웃고 무시했다.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미리 지뢰를 까는 건지도 모르고.

“프로테아는 프로테아대로, 유칼립투스는 유칼립투스대로 아름답지요.”

칼리오페가 노래하듯 말했다.

“누가 누구의 들러리가 아니에요. 같이 조화롭게 있는 모습이 더 아름다울 뿐이지.”

칼리오페가 화병에서 킹 프로테아를 빼냈다.

꽃대를 빙글 돌리더니 디아르엔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곤 생긋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만 생각하고 살았나 봐요?”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뒤늦게 디아르엔이 꽃을 든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화아악, 얼굴이 프로테아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온몸이 화끈거리다 못해 아파 왔다. 자신이 프로테아라고, 너는 들러리인 유칼립투스라고 선전포고했는데 칼리오페는 그 누구도 들러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건 애초에 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거잖아.’

자신만 칼리오페를 의식하고 비교해 가며 내가 더 낫다며 기뻐하고 있던 거였다. 거기까지만 해도 수치스러운데 칼리오페는 프로테아를 그녀에게 주기까지 했다.

‘나는 누가 메인이고 들러리이고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네가 그렇게나 집착하니 메인 역할, 네게 줄게.’

그렇게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더 돋보이더라도 칼리오페가 적선해서 준 것 같은 모양새가 된다.

‘두고 봐.’

디아르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칼리오페는 조연만 맡았던 그녀의 열등감을 제대로 자극했다.

디아르엔은 단 한 번도 자신이 맡은 역할이 매력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주연을 위한 들러리라고 생각했다.

‘진짜로 들러리가 되면 그딴 생각 싹 바뀔 테니까.’

아직 들러리가 되어 본 적 없어서 저렇게 잘난 척할 수 있는 것이다.

‘눈물 콧물 다 뽑게 만들어 줄 테니까. 어디 그 얼굴이 다 불어터졌을 때도 예쁠까?’

픽, 웃음이 나왔다.

끓던 속이 좀 가라앉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었으면 지 유명세나 인기는 그대로였을 텐데.’

예술의 세계는 혹독하고 냉정하다.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면서 노래를 우습게 보고 덤벼드니까 있던 인기까지 떨어져 나가는 거야. 그 때 네 표정이 어떨지 기대되는걸?’

디아르엔은 칼리오페가 노래를, 속가를 부르기까지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각오를 했는지 꿈에도 몰랐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주인공 같은 사람을 제 아래로 깔아뭉개는 것이니까.

마침 칼리오페가 노래할 차례가 되었다.

디아르엔은 무대에 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한껏 비웃음을 지었다.

‘어디 한 번 얼마나 잘하는지 들어나 보자고, 레이디 유칼립투스.’

* * *

칼리오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들. 호의적인 시선들. 그리고 호기심.

이유야 다양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칼리오페만을 바라보고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어.’

얼떨결에 상황에 떠밀려 노래를 부르기로 한 저번과는 다르다.

노래를 주제로 한, 이례적인 대규모 살롱. 살롱이라기보단 이미 음악회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함정이란 것을 알면서도 칼리오페와 아스타레아스는 이곳에서 노래하기로 결정했다.

‘함정을 기회로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런 실력을 갖추기 위해 그간 수없이 노력했다.

‘나를 믿어.’

성공해야 한다. 잘 불러야 한다. 등등.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날 때다.

자기 자신을 믿고 노래에 흠뻑 빠져야 할 때.

피아노의 노래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칼리오페는 살포시 눈을 감고 그 운율을 느꼈다.

점점 현재 상황이 멀어져 간다. 악의에 찬 시선도, 사명감도, 압박도.

오로지 노래 하나만이 남았다.

칼리오페가 눈을 떴다. 기묘하리만큼 투명하고 맑은 눈빛이었다.

칼리오페가 입을 연 순간, 디아르엔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다래졌다.

‘말도 안 돼…….’

첫소리만 들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그 깊이, 그 울림, 그 리듬감.

사람을 잡아끄는 목소리.

“아니야…….”

한껏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대체 뭐지?

“와…….”

칼리오페가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여기저기서 그런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의식하지 않은 채 새어 나온 순수한 감탄이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디아르엔은 현 상황을 부정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잘게 저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칼리오페의 노래는 첫 소절보다는 그 다음이, 그 다음 소절보다는 또 그 이후가 사람의 마음을 깊게 끌어당겼다.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잡생각이 사라져간다.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노래를 즐기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였다.

“이건 꿈이야…….”

디아르엔과 떨어진 곳에는 공연을 끝마친 가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르첸의 전주를 들으며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르첸 경의 반주라니……. 이건 재능 낭비 아닙니까?”

“제 말이요. 저 영애가 하르첸 경의 연주를 망칠 게 뻔해요. 아까워라.”

“그러게요. 우리랑 합을 맞추는 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비교도 안 되죠.”

“하르첸 경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요.”

그들의 조소는 칼리오페의 노래가 시작된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비웃음도, 감탄도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급소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들은 일순 숨도 못 쉰 채 무대를 바라봤다.

그들과 살짝 거리를 두고 있던 테르너가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있는 곳에선 무대가 잘 안 보였기 때문이다.

“미쳤어. 이건 정말…….”

신음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해.”

서늘한 목소리가 테르너의 말을 잘랐다.

테르너는 힐끔 그 말을 한 사람을 봤다.

[그 미모만큼 노래 실력도 대단해야 할 텐데 말이야.]

아까 테르너가 예쁘다고 칼리오페를 칭찬했을 때 굳이 사족을 붙였던 남자였다.

‘그렇게 말해놓고선 지금 노래 안 들린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다니…….’

어이가 없었지만, 칼리오페의 노래는 정말 그럴 만했다. 한 음절이라도 놓치기 아까우니까.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해서 듣고 싶은 노래였다.

“너네 조금 전에 저 레이디가 얼굴만 믿고 노래한다고 하지 않았냐?”

하지만 뭐라 한마디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건…… 팔리마가 그랬던 거지.”

얼굴을 붉힌 가수 한 명이 디아르엔의 이름을 대며 변명했다.

“그래, 팔리마가 주로 몰아세웠지. 하지만 너네 모두 거기에 동조했잖아. 방금 전도 그렇고.”

“……그러는 당신도 우리랑 똑같이 생각했잖습니까.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맞아. 우리 모두 할 말 없어.”

테르너가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에 가득 차 칼리오페를 헐뜯은 이들도 잘못했지만, 그것을 방관한 자신 역시 잘못했다.

“네 말대로 나도 실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레이디의 말대로 편협한 사고방식에 따라 행동한 거지.”

“그건…….”

테르너가 인정하자 다들 할 말이 없어졌다. 여기서 어깃장 부려봤자 억지일 뿐이니까.

“아까 하던 말 들어보니 가관이던데, 레이디의 노래가 하르첸 경의 연주를 망친다고?”

“…….”

“지금 이게 망친 거야?”

이 순간에도 칼리오페의 노래가 부드럽게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결코 무시 당하고 조롱받을 노래가 아니었다. 오히려 찬탄 받을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렇게 심하게 비난받았으면 심적으로 흔들릴 법도 하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노래에는 그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노래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건 경험 많은 가수도 쉬이 하지 못 하는 일이다.

가창력도 가창력이지만, 정신력도 흠잡을 곳이 없다.

“……확실히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실언을 했어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고개 숙은 채 본인들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객석은 고요했다.

처음 저도 모르게 내뱉었던 감탄사 외에는 그 누구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속가인데…….’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첫 음을 듣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활짝 열려 이 노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으니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자신과 단둘이 주고 받는 비밀 이야기 같았다. 힘차게 고조되며 높이 올라가는 목소리에 맞춰 가슴이 조이며 벅차올랐다.

칼리오페의 노래는 분명 신에 대한 노래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노래였다.

그걸 듣는 사람이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노래에 취해 몸을 움직이는 칼리오페가 눈에 박힐 듯이 들어왔다.

성스럽게 빛나는 새하얀 드레스.

가슴에 심장처럼 붉은 루비 목걸이.

천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은 절대 천박하다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름다워…….’

신전의 벽화 속에 그려진, 지상에 강림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여신.

강인하면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칼리오페의 모습이 그 신과 겹쳐졌다.

칼리오페의 노래가 끝나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더 듣고 싶다.

좀 더 들려줘.

그런 생각이 머리로 의식하기 전에 가슴을 꽉 메웠다.

* * *

노래를 끝마친 칼리오페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서서 노래한 것뿐인데도 땀이 흘렀다.

그야말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칼리오페는 두 손을 꽉 쥔 채 사람들을 바라봤다.

‘……박수 소리가 없어.’

예의상이라도 칠 법한데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실패……했나.’

흐려지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여기서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순 없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이보다 더 잘 부를 순 없어. 그런데도 안 된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 같다.

별빛도 들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 칼리오페를 채워 나간다.

그 순간.

“우와아아아—!”

“최고다!!”

“앙코르!”

엄청난 박수 소리가 살롱 안을 뒤흔들었다.

칼리오페는 얼떨떨한 눈으로 관중들을 바라봤다.

노래의 여운에 흠뻑 취한 채, 흥분한 듯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눈에 알알이 박힌 감동과 감탄이 믿기지 않았다.

반응이 좋아도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에서 있었던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크레티안느 주변의 까마귀들과 거실에서 만났던 예술가들의 반응을 보고는 그보다 더 못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쨌든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엔 뛰어난 감각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학술적인 만큼 혁신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에 반해 오늘 살롱은 규모가 큰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거기에 크레티안느의 살롱은 빈말로도 뛰어나다고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렇게…….’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동했다고 말하고 있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깨달았다.

‘다음 순서가 있었지.’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아서 듣다 보니 계속 서 있었다. 그녀가 들어가는 와중에도 박수는 멈추질 않았다.

칼리오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조용해진 자리에 디아르엔이 나와서 섰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나온 줄도 몰랐다.

‘이건 꿈이야.’

디아르엔은 현실을 부정했다. 도저히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차갑게 언 손이 덜덜 떨렸다. 입안이 바짝 마르며 단내가 나는 듯했다. 전주가 시작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무대를 쳐다보지 않았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들러리는 그 아가씨라고. 나는— 내가 오늘 주역인데. 주역이어야 하는데.’

정신이 나간 상황에서도 전주가 끝나자 습관처럼 입이 열렸다.

디아르엔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야기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무대에 집중했다.

디아르엔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에 움찔했다.

“뭐야……. 나름대로 유명한 오페라 가수 아니었어요?”

“이건 좀 심하잖아. 완전 엉망인데.”

“음정도 불안하고, 호흡도 거칠어서 거슬리고…….”

그 시선은 결코 호의적이 아니었다.

항상 사람들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길, 자신에게만 닿길 바라왔다. 다른 가수들과 나누지 않고 오직 자신 혼자만 독차지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렇게나 바랐던 사람들의 시선을 혼자서 누리고 있다.

‘아니야. 난 이런 걸 바랐던 건 아니었어.’

무섭다.

몸이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안 되는데, 이러면 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굽은 자세가 펴지질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나 무서웠던 거였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경멸, 실망, 조소.

계속해서 자신의 자세와 목소리를 의식하게 되고, 그럴수록 노래는 더더욱 나빠졌다.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애는 이런 걸 어떻게 견뎠지?’

사람들의 호기심과 적대감을 마주 보고 서 있던 소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칼리오페에게 얼굴과 유명세로 우쭈쭈 받는다고 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속가를 부른 일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알고 있으니까.

논란이라고 말한 만큼, 칼리오페에게 적의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디아르엔 역시 칼리오페를 향한 관중들의 눈빛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그런…… 노래를 불렀다고?’

심지어 바로 직전에 자신과 다른 예술가들이 면전에서 비웃으며 마음을 뒤흔들지 않았던가.

엄청난 패배감이 디아르엔의 목을 졸랐다.

이건 더 이상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쥐어 짜내는 거였다.

“세상에…….”

“으음, 긴장한 걸까요? 예전에 들었을 땐 이렇게까지 못 부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무대에 한두 번 서본 사람도 아닌데 왜 새삼……. 프로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왜 조연만 맡는지 알겠어요.”

“정말 듣기 싫군요. 듣고 있자니 짜증이 날 정도예요. 차라리 아까 들은 속가가 훨씬…….”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하던 영애가 말끝을 흐렸다.

다들 칼리오페의 노래 실력에 감탄하는 것을 넘어 감동했다. 그건 분명히 마음을 울리는 노래였다. 하지만 ‘속가가 성가보다 듣기 좋다.’ 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기엔 망설여졌다.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그녀가 실수했다며 입술을 깨물었던 순간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영애에게 동조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죠?”

영애가 반색하며 뒤를 돌아봤다. 몽에르트 영애였다.

“네. 흔히 속가가 천박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들어보니 그런 느낌은 못 받았어요.”

지적이며 품위 있기로 유명한 몽에르트 영애가 그렇게 말하니 영애는 더 안심이 되었다.

“저는 제 안목을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판단에 제 판단을 맡기지 않거든요.”

한마디로 속가는 천박하다고 자동반사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따라 하는 자라는 뜻이었다.

“속가가 왜 천박한지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만 주장하는 사람은 줏대도, 주관도, 안목도 없는 거지요.”

몽에르트 영애가 살풋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렇지 않나요?”

* * *

칼리오페는 문을 열자마자 진동하는 꽃향기에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불쑥, 꽃다발이 내밀어졌다. 만개한 꽃들로 이뤄진 꽃다발은 굉장히 커서 시야를 다 가릴 정도였다.

“이게 다 뭐예요?”

얼떨떨하게 꽃다발을 받아들자 빙긋 웃고 있는 아스타레아스가 보였다. 그 뒤로 눈에 들어온 방안은 온통 꽃으로 가득했다.

화려한 여름 장미와 카네이션, 우아한 라넌큘러스와 덴파레, 귀여운 스타티세와 쿠르쿠마.

계절을 잊은 듯 온갖 꽃들이 만발해 가득했다.

“와…….”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렇게 계절이 서로 다른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 있는 것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아니, 흔치 않다 못해 보통은 아예 못 본다.

“어때요?”

“너무 예뻐요.”

들리는 물음에 칼리오페는 반사적으로 멍하니 대답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모습을 보고 옅게 웃었다.

꽃은 비싸다. 특히 개화기가 아닌 꽃은 더더욱 비싸다.

아름답고 싱싱하게 피우기 위해선 격리된 온실에서 온도와 습도를 세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방안을 꽃으로 채우는 데 든 값으로 말 한 필은 거뜬히 사고도 남을 것이다.

오로지 칼리오페가 방문을 열었을 때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스타레아스는 기꺼이 그 값을 지불했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해주고 싶은 것을 부담될까 봐 참았다.

“이게 웬 꽃이에요? 그것도 이렇게 많이.”

겨우 놀람에서 벗어난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물었다.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가 뭘 말하는지 단번에 알았다. 대규모 살롱에서 성황리에 노래를 부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마워요.”

전혀 생각 못 했는데 이렇게 성대히 축하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칼리오페는 수줍게 꽃다발 받아들었다. 그녀가 꽃을 안은 건지, 꽃에게 안긴 건지 헷갈리는 모양새였다.

가슴을 간질거리는 향긋한 향기가 담뿍 올라왔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보드라운 꽃잎만 만지작거리는 칼리오페를 향해 아스타레아스가 물었다.

“혹시 내가 없어서 섭섭했나요?”

“네?”

“그날, 노래 부를 때 옆에 내가 없어서 서운했어요?”

그야, 아스타레아스는 함께 칼리오페는 함께 연습하고 노력한 파트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없으니 허전한 게 당연하다.

‘……당연한데.’

가슴 가득 끌어안은, 그가 준 꽃 때문인가.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해 보이는 그의 눈빛 때문일까.

‘다른 의미 따위 전혀 없을 텐데.’

칼리오페는 구두 속에서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나붓이 휜 눈매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햇빛에 반짝이는 수정 같았다.

문득 깨달았다.

‘나, 섭섭했구나.’

그냥 조금 허전한 정도가 아니라 많이.

그러나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공자님께서 이렇게 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그가 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지 알면서 부담을 줄 순 없었다.

흐음, 하고 묘한 비음을 낸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바싹 다가왔다.

“난 서운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칼리오페 품 안의 꽃잎을 매만졌다. 싱그럽고 매끄러운 꽃잎이 그의 손끝에서 튕겨 오른다. 화아악, 꽃향기가 번진다.

“내가 서운했거든.”

그 말은 속삭임에 가까웠다.

칼리오페는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몇 번 달싹거리다가 다시 다물렸다.

언제 그렇게 다가왔냐는 듯이 아스타레아스는 한 걸음 훅 멀어졌다. 그리곤 빙긋 웃는다.

눈이 마주치고, 그제야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놀리지 마세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더 진하게 웃었다.

‘역시 놀리는 거였어.’

완전히 놀림 받았다는 생각에 심통이 난 칼리오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꽃을 따서 아스타레아스의 머리에 에잇, 하고 걸어줬다.

“잘 어울리네요.”

칼리오페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장난삼아 꽃을 꽂아준 건데 정말로 잘 어울렸다. 매끄럽게 빛나는 은빛 머리칼 사이로 붉은 꽃이 흔들렸다.

‘좀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데……?’

아스타레아스는 당황해서 말가니 그녀가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 누가 그에게 이런 짓을 하겠는가. 그를 키운 조모조차 거리감을 지켰다.

당황한 그의 얼굴을 본 칼리오페가 꽃 속에서 더 환하게 웃었다.

방울 소리 같은 웃음 소리가 아스타레아스의 마음에 울렸다. 이제는 당황이 아니라 칼리오페의 웃음에 눈길을 빼앗겼다.

아스타레아스의 입술이 싹 올라갔다.

“레이디께서 나를 그렇게 생각하실 줄 몰랐는데.”

“네?”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칼리오페를 보고 아스타레아스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귓가에 꽂은 꽃보다 더 달콤하게.

“잘 어울린다면서. 내게 관심 있다는 말 아니에요? 내가 꽃 같단 거잖아.”

“아, 아닌데요!”

당황한 칼리오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칼리오페 얼굴이 품에 안은 꽃보다 더 붉어졌다.

아스타레아스는 눈매를 휠 뿐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안달 난 건 칼리오페였다.

“진짜로 아니에요……!”

“네, 네.”

건성으로 대답한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에게 다가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나는 칼리오페의 품에서 꽃을 꺾었다.

귓가에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조금 딱딱하고, 조금 뜨거웠다. 차가운 꽃대와 부드러운 꽃잎이 볼을 간지럽혔다.

“잘 어울리네요.”

칼리오페의 귓가에 꽃을 꽂은 아스타레아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소년의 미소가 나른한 황금빛 햇살에 물들었다.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꽃다발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꽃이 살짝 뭉그러지며 향기가 농밀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지……?’

함박 벌어진 칼리오페의 눈동자에서 의문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방금 내가 잘 어울린다고 했을 땐—.’

아니, 생각하지 말자.

칼리오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큼, 하고 작게 헛기침한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저만 축하받을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붉어진 안색을 침착하게 되돌린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와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우리 둘이 함께 이뤄낸 거잖아요.”

우리 둘이 함께.

아스타레아스는 그 말이 이렇게나 달콤한 울림이었는지 몰랐다. 칼리오페에게서 듣기 전까진.

“생각보다 훨씬 반응이 좋아서 놀랐어요.”

칼리오페가 노래를 부른 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건 사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속가 때문에 시비 거는 사람이야 물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온건한 반응이 많았어요.”

“시비를 걸었다고요.”

“네, 별건 아니었지만……. 잘 해결되었어요.”

칼리오페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러시다면야.”

아스타레아스는 산뜻하게 물러났다. 더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미 살롱에서 칼리오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크리티안느 피엔테를 둘러싼 까마귀들을 비롯해, 디아르엔과 다른 예술가들까지.

디아르엔은 그날 노래하면서 보인 추태 때문에 후원가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리가 흘렀다. 거기에 아스타레아스가 말을 몇 마디 얹는 건 아주 손 쉬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의 조모인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선망받는 안목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디아르엔은 하루 아침에 후원자가 싹 끊겨 살던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들은 흩어지고 모여들길 반복하길래 두고 보기로 했지만.’

워낙 돈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다.

개중엔 그날 일로 칼리오페에게 잘 보이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일개미처럼 여기저기서 칼리오페에게 좋은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닐 것이다.

“요즘 속가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더니, 그래서 인식이 다소 바뀐 걸까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젊고 진취적인 영애와 영식들 사이에서 속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몽에르트 영애가 본인 살롱에서 속가라는 화두를 던진 일로 꽤 이득을 봤으니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주도적으로 토론을 주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영향이 있었겠죠.”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말에 동의하며 일부러 몽에르트 영애를 언급했다. 그의 말대로 몽에르트 영애가 적극적으로 속가에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아스타레아스가 있었다.

‘몽에르트 영애 본인도 모르겠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사람들의 의견이 한곳으로 모이도록 교묘히 뒤에서 손을 썼다. 덕분에 자연적인 흐름보다 더 빨리, 더 매끄럽게 속가에 대한 여론이 생겼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애를 썼어도 리페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면 소용없었어.’

그리고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노래가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칼리오페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만.”

“슬슬 반응이 오겠지요. 위쪽 분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라는 것이 오롯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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