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파트너 전쟁(4권) (18/41)

Chapter 4. 파트너 전쟁

“리페! 나 시간 다 비워놨어! 그때 한가해!”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고 로베르트가 소리치며 들어왔다.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당황해서 그런 거였는데 로베르트는 아차, 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똑똑똑.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슬쩍 웃으며 “들어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가자!”

이 뜬금없는 말이 아까의 연장선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니까 어디를요?’

칼리오페는 최근 자신이 어디를 가고 싶어 했는지, 혹은 특별한 날짜를 언급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하지 않았나.”

로베르트의 등 뒤에서 루시우스가 나왔다. 달려왔는지 드물게 그의 가슴이 살짝 들썩였다.

“리페, 그날 한가한 것은 이 녀석만이 아니다. 나와 함께 가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거다.”

“뭐?! 왜 더 나은데? 리페는 나랑 더 가고 싶어 할걸?”

“그건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지.”

“아니야! 리페도 나랑 가고 싶어 해! 그렇지?”

칼리오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어디를요?’

하지만 로베르트가 저렇게 시간까지 따로 뺄 정도로 기대하는데 모른다는 무신경한 질문을 할 순 없었다.

“그런 식으로 강요하면 리페는 고개를 끄덕이겠지. 상냥한 아이니까.”

“흥! 형한테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럴지 몰라도 나한텐 아니야. 리페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 말에 루시우스의 얼굴이 한없이 차갑게 굳었다.

그러나 로베르트 역시 더 이상 형아에게 꼼짝 못 하던 열한 살 소년이 아니었다.

“리페는 내가 좋댔어!”

로베르트가 콧김을 내뿜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루시우스는 유치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페는 내게도 좋다고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 손수 피크닉 도시락을 싸주었지.”

“……!”

로베르트의 산호빛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는 배신감이 가득한 눈으로—심지어 눈에 물기가 어렸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로, 로벨 오라버니께는 저번에 손수건에 수를 놓아드렸잖아요.”

칼리오페는 뭔지 모를 압박감에 변명했다.

“수를 놓아줬다고.”

조용히 읊조리는 루시우스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왠지 변명하려다가 스스로를 더 궁지로 몬 느낌인데요.’

그녀는 두 오라버니 모두를 똑같이 사랑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모든 것을 똑같이 해주겠는가.

마침 눈앞에서 로베르트의 손수건이 찢어지는 걸 봐서 새 손수건을 선물했을 뿐이다. 루시우스에게 피크닉 도시락을 싸준 것도 사교 활동을 싫어하는 그가 오래간만에 노는 게 기뻐서 한 일이다.

모두 그녀가 외출을 자제하고 있어 시간이 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태까지 칼리오페가 두 오라버니에게 준 선물이 얼마던가. (물론 받은 게 더 많긴 하지만.) 그걸 하나하나 다 따져가면서 종류와 개수까지 맞춰줄 순 없다.

“루스 오라버니께도 손수건에 수놓아 드린 적 있잖아요.”

“최근엔 없었지.”

“그야……. 루스 오라버니께서는 물건을 잘 안 망가트리시니까.”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한순간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칼리오페의 방에서 나가는 즉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손수건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리페가 수놓아준 것 빼고는 다 태워버려야겠어.’

장인이 한땀 한땀 혼신의 힘을 들여 만든 손수건들의 운명이 정해졌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말이 불러올 파장을 알지 못한 채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직도 맹렬하게 고민 중이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디를 가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 중 하나를 고르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난리가 날 것이다.

“리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기운차게 열렸다.

방안에 들어온 루스티첼 부인은 두 아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다들 여기 있었네.”

곧 그녀는 ‘아하.’ 하는 얼굴로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이런 식으로 선수 치다니.”

루스티첼 부인이 두 아들을 향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칼리오페는 더 아리송해졌다. 전후 상황을 모르는 어머니조차 무슨 일인지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어머니 뒤를 따라온 하녀의 손에 드레스 카탈로그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머니의 용건도 어딘지 모를 곳에 갈 때 입을 옷을 사자는 것이었나 보다.

‘어디길래 저만 빼고 다 아시는 거지요?’

이쯤 되니 자신이 굉장히 무신경한 사람이 된 느낌이다.

칼리오페는 가족 기념일을 하나하나 속으로 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짚이는 데는 없었다.

“사실 꼭 오라버니들의 손을 잡고 들어갈 필요는 없지. 리페는 아직 어리니까 엄마 손 잡고 들어가도 되지 않아?”

루스티첼 부인의 은근한 말에 루시우스가 정색했다.

“리페도 이제 열두 살입니다.”

“아슬아슬하게 괜찮지 않을까?”

“안 괜찮아요! 난 열두 살에 기사단에 들어갔어요!”

로베르트가 낑낑거리며 안돼, 안돼를 외쳤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들 녀석이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이건 이거다.

사랑하는 막둥이를 양보할 순 없지!

“그렇긴 하지만 리페가 엄마랑 입장했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걸. 리페도 엄마 손 잡고 들어가고 싶지?”

칼리오페는 아연한 눈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어머니까지 가세하신 건가요.’

그래, 처음부터 말려 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회귀한 후 팔불출이 된 가족들과 산 지 이제 10년이 넘어간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 범위.

“리페, 원래 장남과 가는 것이 가장 깔끔한 법이다.”

“아니야! 리페는 나를 좋아하니까 나랑 갈 거지?”

“우리 리페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게 엄마인데. 엄마랑 가고 싶지?”

……예상 범위지만!

각자의 미모를 뽐내며 세 모자가 칼리오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칼리오페는 반짝반짝 초롱초롱 빛나는 세 쌍의 눈을 보며 점점 뒤로 물러났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어디를요?!’

* * *

“어디긴 어디겠어. 황자 저하의 생신이지.”

에피니가 얼음을 와드득 깨물며 말했다.

“아.”

칼리오페가 침음을 흘렸다.

사교계를 멀리했더니 그 소식이 늦게 들어왔다. 그녀가 요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속가에 관한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전생에서도 이맘때 황자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고 칼리오페도 참석했지만, 기억에 남는 일은 없었다.

그 당시 칼리오페의 세계에서는 화려하고 웅장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평범한 파티였다. 어디까지나 그때 칼리오페의 삶 속에서 그랬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다를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는 아마 수많은 싸움이 일어났을 테지만.’

내성적이고 책 읽기 좋아하는, 이름 없는 열두 살 소녀에게는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열두 살 생신에는 귀족들이 전부 모이는 게 관례였지요.”

칼리오페가 궁정 예법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로베르트가 시간을 따로 뺐다는 것은 파트너를 원하는 영애들을 거절했다는 뜻이었으리라.

‘그건 루스 오라버니도 마찬가지겠지요.’

동생으로서 다소 걱정이 됐다.

이래서는 두 오라버니가 연애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자 저하는 황태자 책봉을 못 받으셨는데 왜 다 모이라고 하는 건지. 차라리 황태자 책봉을 하든가.”

에피니가 투덜거렸다.

“레아스가 있으니까.”

힐데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칼리오페는 아스타레아스의 이름에 저도 모르게 흠칫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받았다.

“카스틸로 공자님의 계승 서열이 황자 저하보다 더 높으니 미뤄두시는 거겠지요.”

“마음에 안 들어. 뭐든 확실하게 해야지. 이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일단 폐하께서 직접 당신의 아드님보다 선황 폐하의 적장자이신 카스틸로 공자님께 계승 우선권이 있다고 선언하셨으니까요.”

“그럼 아스타레아스를 황태자로 책봉하든가!”

쾅! 에피니가 짜증 난다는 듯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렇게 선언은 해놓고 황자 저하의 생신을 황태자에 버금가게 예우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아니야?”

그 말에는 힐데르트도, 칼리오페도 동의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나는 아스타레아스 별로야. 속도 잘 모르겠고……. 그치만 이건 걔를 이용해 먹는 거잖아.”

에피니의 눈매가 잔뜩 일그러졌다. 호박색 눈동자가 정의감과 신념, 짜증과 분노로 반짝거린다.

힐데르트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에피니에게 아스타레아스는 그저 힐데르트의 친구일 뿐이다.

거의 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 심지어 방금 말했듯이 에피니는 아스타레아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말을 하는데 아스타레아스의 친구인 힐데르트는 오죽하겠는가.

“그나저나 리페도 힘들겠네.”

그러나 그는 말을 돌렸다. 그게 그의 친구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네?”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차를 마시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말이야. 누구 하나를 선택할 수도 없잖아.”

삐질 게 분명하니까. 그 말이 생략된 언사였다. 칼리오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요.”

“그럼 차라리 가족 밖에서 정하는 건 어때?”

힐데르트는 조금 빨리 뛰기 시작하는 심장과 초조함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듯 말했다.

“뭐 하면 내가 같이 가줄 수 있는데?”

슬그머니 이어진 힐데르트의 말에 에피니의 눈매가 대번에 샐쭉해졌다.

“그런 거로 치면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입안의 얼음을 빠르게 삼키고 가슴을 당당하게 쫙 폈다.

“기사는 레이디를 에스코트할 자격이 충분하니까. 아직 종기사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잖아? 리페도 데뷔탕트를 치른 레이디가 아니니까.”

에피니가 슬쩍 힐데르트를 째려봤다.

‘어딜 감히. 넌 빠져.’

‘너나 빠져.’

보이지 않는 으르렁거림이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갔다.

칼리오페는 묘한 기시감에 빠졌다. 왠지 친구들 사이에서 낯익은 가족의 향기가 난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힐데 오라버니께서 제 파트너가 된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거예요.”

칼리오페는 가족들의 성화를 떠올렸다.

“오라버니들이 번갈아 가며 뭐라 할 텐데 그런 폐를 끼칠 순 없지요.”

아버지까지 그럴 수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힐데르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고 딱 그만큼 에피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나랑 가는 거지?!”

“아이참. 언니가 저랑 가겠다고 하면 엘피너스 가 분들이 섭섭하게 여기실 거예요.”

환했던 에피니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호세 오라버니도 그렇고. 다들 사랑하는 동생과 함께 가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니까요.”

‘아니. 그놈은 나보다 너랑 같이 가고 싶어 할걸. 나보다 널 더 귀여워하는 것 같던데.’

어렸을 적엔 친동생인 자신보다 칼리오페를 더 귀여워하는 것 같아 속상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건 그야말로 어렸을 때 이야기다.

만약 오빠들이 자신을 챙기고 귀여워한다면…….

‘징그러워!’

상상만으로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런 걸 생각하면 루스티첼 가의 우애는 어떤 의미로 참 유별난 편이었다.

‘하긴, 동생이 리페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아주 잘 됐다. 에피니는 쉽게 납득했다.

“하여간 루스도, 로벨도 너무해. 자기들은 매일매일 얼굴 보는데 그런 날은 친구들이랑 좀 놀게 해야지.”

힐데르트가 심통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 때문에 칼리오페에게 파트너 자리를 거절당한 게 짜증이 났다.

칼리오페는 아하하,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 저녁 귀택한 루스티첼 백작까지 합세해 서로 칼리오페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난리였다.

누가 파트너가 될지 이견이 좁혀지진 않았지만, 절대 다른 놈팡이를 파트너로 들일 수 없다는 것만큼은 모두 입을 모았다.

‘설마 왈렌 영식과 몽에르트 가에서 있었던 일을 아시는 걸까요.’

타도 놈팡이를 외치는 가족들을 떠올리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아셨으면 난리가 났겠지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호르세안에게 함구를 부탁하지 않았는가.

칼리오페는 가족들의 팔불출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왈렌 영식이 요즘 조용하네.’

단순히 부딪칠 일이 없어서 그런 걸까.

노래 연습을 위해 외출할 때마다 기묘하게 마주치곤 했는데 요즘 조용하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에피니와 힐데르트가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들을 배웅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오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선물이 왔어요.”

유모가 감색 비단 리본을 두른 선물 상자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생각 없이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렇게 예고도, 아무 일도 없이 선물이 온 적은 꽤 있었다.

그녀는 우선 메시지 카드부터 확인했다.

감사를 담아, 친애하는 작은 레이디께.

—베로니카 몽에르트

‘몽에르트 영애……?’

예상치 못한 발신인에 칼리오페는 다소 놀랐다.

‘감사라니……. 살롱이 그렇게 잘 됐나?’

칼리오페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살롱 이후의 반응을 상기했다.

당시 현장의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그래도 속가를 불렀다는 말에 당장 반감을 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에 대한 구설수가 제일 많았지만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의 질이 떨어졌다는 말도 있었지.’

속가를 발표한 살롱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고 생각보다 온건한 반응이었다.

몽에르트 영애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쨌든 영애 입장에선 잘 있다가 갑자기 나 때문에 속가를 발표한 살롱이 된 건데.’

물론 여기에 몽에르트 영애의 과실이 없진 않다. 그 자리에서 부를 생각이 없었던 칼리오페를 재촉한 것은 그녀 자신이니까.

‘대체 뭘까?’

선물 상자를 개봉한 순간, 칼리오페는 몽에르트 영애의 뜻을 알아챘다.

“어머, 이제 여름인데 목도리네요?”

유모의 말대로 이 계절과 맞지 않는 목도리가 담겨 있었다.

차르르 윤이 도는 새하얀 여우 꼬리 목도리. 어찌나 질이 좋은지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네요. 역시 몽에르트 가의 후계 분이라서 안목이 좋으셔요.”

유모가 칼리오페의 목에 목도리를 대보며 말했다.

새하얀 목도리는 칼리오페의 짙은 남보랏빛 머리칼과 대비되어 굉장히 잘 어울렸다. 얼굴이 한층 화사해 보인다.

그러나 칼리오페의 신경은 다른 데에 쏠려 있었다.

‘왈렌 가의 꼬리를 잡았구나.’

여우 꼬리털로 만든 것을 선물로 보내다니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한 뜻이었다.

[왈렌 가를 경계하세요.]

지난번 살롱에서 칼리오페는 몽에르트 영애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몽에르트 영애는 충고를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왈렌 영식이 안 보였구나.’

가문이 난리가 났는데 그 와중에 한가하게 여자애한테 집적거릴 순 없겠지.

몽에르트 영애에게 왈렌 가에 대한 언질을 준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였지만, 결과적으로 칼리오페에게도 잘된 일이 되었다.

‘그런데 꼬리를 굉장히 빨리 잡아냈네.’

몽에르트 영애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난 건가. 그걸 감안하더도 빨랐다.

칼리오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유모에게 말했다.

“지금 걸칠 순 없으니 겨울에 쓰도록 잘 보관해줘.”

선물 자체가 답례품인 셈이니 그녀가 따로 무언가를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 *

“와 있어?”

아스타레아스는 그렇게만 물었지만 러그윈은 누굴 말하는 건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그 아가씨야 칼 같으신데요. 언제나 그렇듯 정시 십 분 전에 와 계시죠.”

쯧. 아스타레아스가 혀를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이 일정 전후로는 여유를 두라고 했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요. 갑자기 터진 일인데. 그리고 그 꼬마 아가씨 때문에 일을 벌이신 건 도련님이에요.”

바른말만 하던 러그윈이 합,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뭐라 하든 신경 안 쓰시는 도련님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강아지 아가씨를 기다리게 해 신경질적인 상태였다.

바로 꼬리를 내리는 러그윈을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커다란 문 앞에서 심호흡해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문을 열었다. 그는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커다란 채광창 바로 앞에 있는 피아노에 햇빛이 쏟아지듯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오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온몸으로 그 햇빛을 받고 있었다.

반짝반짝. 오후의 샛노란 햇살이 칼리오페를 나른하게 물들였다. 빛에 감싸인 그녀는 꼭…….

아스타레아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가 햇살을 받아 황금빛 불꽃처럼 반짝였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불꽃에 자신의 얼굴이 담기는 것을 꼭 기적을 목도하는 사람처럼 바라봤다.

“공자님.”

그 조용한 부름에 아스타레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만들어냈다. 홀린 적 없는 것처럼.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

부드럽게 휜 눈동자가 그제야 칼리오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했다. 악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건…….”

“아, 편지예요.”

칼리오페는 펼쳤던 편지를 서둘러 접으며 말했다. 어쩐지 겸연쩍은 기분이 드는 것은 이 편지가 러브레터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또래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 중 하나다. 소소하게 쪽지를 넣어놓거나 이런 식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백룡 기사단에 있는 에피니의 로커에는 매일 한두 개 이상의 쪽지가 넣어져 있다고 한다.

‘남자보단 소녀들한테서 더 많이 온다고 했지만.’

비밀 친구나 펜팔을 갖고 싶은 소녀적 감성이 아닐까 싶었다. 칼리오페 역시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 없진 않았다.

선망의 쪽지. 우정의 쪽지. 그런 건 칼리오페도 자주 받는 편이긴 했다.

“편지요.”

아스타레아스가 묘하게 되묻듯이 말했다.

“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베이비 살롱에 들렸는데 그때…….”

말하던 칼리오페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이런 걸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는데.

칼리오페는 머쓱한 기분에 재빨리 접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편지에 쓰여 있던 낯간지러운 찬사가 생각나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이없어할 만한 찬사였다.

하지만 속가에 대한 칭찬이 있어서 그 부분은 조금 기뻤다.

“흐음—”

아스타레아스는 살짝 상기된 칼리오페의 뺨을 보고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푸른 눈동자가 얼음처럼 시리게 빛났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햇빛이 얼음을 녹인 것처럼, 아주 따스하고 부드러운 빛깔이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을 적셨다. 가면이라도 쓴 것 같이 한순간에.

누가 봐도 경계심을 허물어트릴 것 같은 온유한 얼굴이었다.

“러브레터?”

“……네에.”

“의외군요.”

“의외라니요.”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이래 봬도 인기 많답니다.”

살짝 앵돌아진 칼리오페의 모습에 아스타레아스는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그렇겠지요.”

누가 봐도 그냥 그렇다니까 고개를 끄덕인다는 어조였다.

칼리오페는 발끈해서 외쳤다.

“진짜예요!”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나 왜 유치하게 굴고 있지?’

아스타레아스가 의외라고 생각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가 자신을 인기 없는 사람으로—그다지 매력 없는 사람으로 봐도 뭐가 문제라고.

인기 있네, 없네. 러브레터를 받았네, 못 받았네. 그러는 것 모두 유치하다.

비록 몸은 열두 살이지만, 칼리오페의 정신은 성인이었다.

“그럼 봐도 돼?”

아스타레아스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방금 뭔가……. 지금까지랑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칼리오페가 부끄러움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아까처럼 별 의미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살짝 짓궂은 장난기가 묻어 있기까지 했다.

그 장난기가 묘하게 칼리오페를 울컥울컥하게 만들었다.

“흠, 역시 아닌가 보네.”

“맞거든요!”

칼리오페는 다시 발끈해서 빽 외쳤다.

원래 인간은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다.

어린 몸과 달리 그녀의 정신은 엄연히 성인이었다. 성인이 맞긴 한데. 이런 것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데.

‘으으……!’

끙끙대던 칼리오페가 봉투에서 다시 편지를 꺼냈다.

아스타레아스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포식자가 포만감에 만족하듯 나른하게.

아스타레아스는 빠르게 편지를 훑었다. 속독쯤이야 당연히 익히고 있다.

편지는 변태적이거나 이상한 문구가 없는, 지극히 신사적인 어조로 쓰여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녹슨 쇠로 긁는 것처럼 거슬렸다.

한 글자, 한 글자 샅샅이 읽어내리며 어떻게든 흠결을 찾아내려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어.’

그의 눈에만 칼리오페가 빛나 보이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리고 가려도 아주 자그마한 틈으로도 빛은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가리면 가릴수록 짙어진 어둠에 그 빛은 더 찬란하기만 하다.

‘알고 있는데도.’

할 수만 있다면 칼리오페를 아무도 못 보는 깊은 어둠 속에 숨겨 놓고 싶었다. 몰래몰래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살짝 열어 그 빛을 혼자서 쬐고 싶었다.

그 누구도, 어떤 위험도 침범하지 못하는 공간에 숨겨 안전하도록, 다치는 일 없도록.

‘하지만 네가 더 중요하니까.’

아스타레아스 본인의 욕망과 희망보다 칼리오페의 생각이, 의지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너는 지금처럼 그렇게 올곧게 나아가고. 너는 더 환하게 빛나고. 사람들은 그 빛에 이끌리고. 나는.’

아스타레아스가 살짝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뱉어내듯이, 다짐하듯이 생각했다.

‘나는 널 꺼트리려는 것들을 막을게.’

칼리오페의 빛에 사람들이 매료되는 게 죽도록 싫으면서도, 그는 누구보다 그녀가 밝고 환히 빛나길 바랐다.

“이, 이제 됐지요?”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의 손에서 편지를 거두며 말했다.

짧은 시간이라 아스타레아스는 편지를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러브레터라는 것만 알아챘을 뿐.

‘아, 왜 그랬지.’

유치하게 굴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거웠다. 아스타레아스와 있으면 종종 그렇게 된다.

그녀는 손등으로 뺨을 식히며 편지를 봉해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간 칼리오페의 뺨과 가방 속으로 사라진 편지를 보고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괴감이 들었다.

러브레터의 주인에게 질투하면서도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칼리오페가 다른 이와 어떤 관계를 맺어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

그녀에 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이.

‘그리고 네게 바쳐지는 무수한 러브레터 중 단 한 장도 내가 보낸 게 없다는 것이.’

온갖 미사여구와 수사를 동원한 러브레터보다 그가 칼리오페에 대해 잘 쓸 자신이 있었다. 기실 그 자신보다 칼리오페에게 맞는 찬사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네가 모르는 너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니까.’

아스타레아스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매끄럽게 빛나는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음계를 누른다.

사실 그는 언제나 칼리오페에게 러브레터를 보내고 있었다. 글로 쓸 수도 없고 종이에 적을 수도 없지만, 편지처럼 마음이 담긴 메시지였다.

칼리오페를 위한 피아노 반주가 그에게는 연서였다.

항상 칼리오페를 생각하면서 건반을 누르고 그녀에게 바친다는 생각으로 페달을 밟는다.

지금처럼 칼리오페의 목소리와 자신의 연서가 서로 얽혀들면 뒷목이 쭈뼛할 만큼 짜릿했다. 이건 단순히 편지를 건네는 사람은 맛보지 못할 기쁨이리라.

그러나 칼리오페가 러브레터를 받은 것을 보니 시샘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그의 연주는 그녀의 서랍 속에 간직될 일도 없고 그녀가 알아보지도 못하는 편지였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웠다.

“참 신기하죠.”

곡 하나를 막 끝내고 나서 칼리오페가 말했다.

“하르첸 경은 천재라고 불리는 피아니스트잖아요.”

하르첸의 이름에 아스타레아스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칼리오페와 합을 맞추는 건 그 자신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는 공자님과 합을 맞출 때가 더 편해요.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고 그냥 느낌일 뿐이지만……. 더 잘 맞는 기분이 들어요.”

아스타레아스는 멍하니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정말로 신기하다.

어떻게 칼리오페는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아쉬워하는 마음을 아는 것처럼.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의 연주가 특별하다고, 편하고 잘 맞는다는 말을 해주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는 칼리오페를 보면서 아스타레아스는 미소 지었다.

‘그건 내가 매일, 그대가 속가를 부르겠다고 카스틸로 저에 찾아오기 전부터. 그대의 노래를 생각하며 피아노를 쳤기 때문이지요.’

마음 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그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도 황자 저하의 생신 축하연에 가시지요?”

“아.”

아스타레아스의 대답도, 표정도 딱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라는 기색이라 칼리오페는 작게 웃었다.

확실히 카스틸로 공작가는 사교계에도, 정계에도 나서지 않고 조용히 웅크린 채 살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 연회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든 귀족이 참석하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으니 아스타레아스도 갈 거라고 생각했다.

‘아, 그렇지만 가기 애매한가.’

황자보다 계승 서열이 높은 아스타레아스.

그 때문에 황태자 책봉이 안 된 황자의 생일 축하 연회.

그러나 황제는 황자의 축하연을 황태자에 준하는 예우로 치르겠다고 공표했다. 결국 아스타레아스의 계승 서열은 명목상일 뿐,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하다.

‘황제의 의중이 그렇다면…….’

칼리오페의 안색이 흐려지는 것을 본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접으며 웃음을 만들어냈다.

“혹시 지금 제게 파트너 요청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칼리오페는 바로 정색했다.

“이런. 조금 실망인데.”

칼리오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그는 웃음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매끄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나도 실망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파트너가 궁하지 않아서요.”

새침한 대답에 아스타레아스가 가방을 눈짓했다.

“하긴, 아까 편지 받은 것도 있고. 그중에서 고르면 되겠네요.”

“전 가족들로도 충분해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진심이었다. 가족들은 이제 칼리오페의 방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을 선택하라면서.

아스타레아스는 다른 남자 누구랑 가는지 떠본 것도 모르고 술술 대답하는 칼리오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미묘한 어조에 칼리오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바라봤다.

“설마 제가 파트너 신청을 받지 못해서 가족과 간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반질반질한 미소와 함께 농담 같은 답이 돌아왔다.

아이참. 칼리오페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곧 그녀는 한숨과 함께 픽 웃으며 피아노를 두드렸다.

잠시 후, 피아노의 노래가 울리기 시작하고 그에 겹치듯 칼리오페의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다.

* * *

“어머나.”

“귀여워라…….”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인데 더 사랑스럽네요.”

“우리도 딸 하나 낳을까요?”

“어멋! 이이도 참!”

황궁의 홀 중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한 화이트펄 홀.

황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귀족들이 막 들어서는 꼬마 아가씨를 보고 감탄을 흘렸다.

양옆에 오빠 손을 꼬옥 잡고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완벽한 레이디의 품위가 느껴져 예법 선생이 대체 누구인지 잠시 소란이 일었다.

“저건 가르친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타고난 거죠.”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저 애가 속가를 불렀다면서요?”

“세상에, 속가를요?”

반사적으로 귀족들의 안색이 변했다.

속가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아까와 달리 뜯어볼 기세로 어린 소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왈가닥처럼 보이지 않은데…….”

왈가닥은커녕 완벽한 자태였다. 배움이 모자라다거나 천박하다고 하기엔 의문이 들었다.

“저도 들었는데 학문적인 화두로 토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요. 우리 애가 그 살롱에 있었거든요.”

“그 살롱이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이었죠?”

“아, 그러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네요.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이야 워낙 정평이 나 있잖아요? 새롭기로.”

“아무리 그래도 속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과 요즘 아이들이 생각하는 건 좀 다르겠죠. 다들 어렸을 때 한 번쯤 특이한 것에 관심을 가졌잖아요?”

속가에 대한 말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칼리오페에게 호감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으나 그만큼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래저래 광고를 많이 하니 신문을 비롯한 매체에서 얼굴을 보긴 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는 아이에게 뭐 대단한 관심을 갖겠는가.

예쁘고 사랑스럽긴 했으나 결국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이였다.

속가를 불렀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열두 살짜리 소녀에게 이를 득득 갈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칼리오페보다 평균 서너 배 이상은 더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 묘하게 분위기가 호의적이란 말이지.’

학문적 호기심 운운하는 사람 대부분이 어느 정도 세가 있는 중앙 귀족들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은 그들을 통해 서모나, 로아힌, 칸테나 등 명문가에 연을 대고 싶어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의견을 충돌할 필요는 없다.

‘뭐, 어린애가 살롱에서 속가 한 번 불렀다는 것쯤은 넘어갈 수 있지.’

‘그러고 보니 루스티첼 가도 요즘 꽤 괜찮지 않나?’

그렇다면 더더욱 혼자 문제 삼겠다고 나설 이유는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황자였다.

그들은 머릿속에서 칼리오페에 대한 감상을 ‘사진으로만 보던 아이의 실물을 봤는데 더 예뻤다.’ 정도로 미뤄뒀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막 입장한 황자가 앞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리오페에게 다가서기 전까진.

* * *

“레이디 칼리오페.”

“안녕하세요, 황자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칼리오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속으로 갈무리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황자는 열에 들뜬 듯 발그레한 뺨과 몽롱한 시선을 한 채 칼리오페가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진짜로 보게 되다니 너무 좋아.”

“네?”

“역시 실물은 좀 다르구나. 아, 아니.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더 예뻐.”

“아, 예…….”

칼리오페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그렇게만 대답했다.

황자는 좋은 의도로 칭찬이라고 말한 것 같지만, 솔직히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보자마자 다짜고짜 실물이 어떠네, 하고 평하는데 좋을 리가 없다.

사진으로 칼리오페를 먼저 접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실 그런 말은 꽤 자주 듣는 편이었다.

미묘한 어감이나 표정 차이로 들었을 때 기분이 괜찮은 경우도 있고, 안 괜찮은 경우도 있는데 황자는 단연 후자였다.

“나 네가 나온 신문 기사나 잡지 칼럼, 포스터 다 모았어. 영광이지?”

칼리오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황자가 자신의 사진을 다 모았다고 말하면 의례적으로 ‘영광입니다.’ 라고 답할 수야 있다. 속이야 어쨌든. 그러나 인사치레일 뿐, 거기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모든 귀족들이 다 알 것이다.

하지만 황자는 진심으로 영광이지 않냐는 얼굴로 뿌듯해하고 있었다. 칼리오페가 감읍해서 눈물이라도 흘릴 거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서 넘기자.’

지금 황자가 자신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목을 끌고 있다. 여기서는 대강 맞장구치고 이유를 대서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칼리오페가 미소를 만들어내곤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영광? 형, 영광이 무슨 뜻이었지?”

로베르트의 명랑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빛나는 영예. 기릴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자랑이란 뜻이다. 그것도 모르다니 참으로 한심하구나.”

마지막 말은 조금 미묘했다. 분명 로베르트에게 한 말인데 황자를 바라보며 말하는 바람에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꼭 황자에게 영광의 뜻도 모르냐고, 한심하다고 말한 느낌.

황자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하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화를 내며 되물으려는 것보다 루시우스가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황자 저하.”

마치 황자를 쳐다봤던 건 순전히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처럼.

다른 의미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 무심한 얼굴에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뭐, 그렇지.”

“저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신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루시우스가 짧게 웃으며 답했다. 평생토록 루시우스와 함께 산 칼리오페가 보기엔 조소였다.

‘아주 가지고 노시는군요.’

칼리오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자는 자기보고 한심하다고 한 것에 동의한 것으로 모자라 ‘영광’이라는 말을 그대로 돌려준 것도 모르고 웃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무려 황제가 황태자 예우로 생일 축하연을 열어준 황자다. 황제가 의중을 확고하게 내비친 날 굳이 황자와 척을 질 필요는 없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숙였다.

“감히 황자 저하께서 먼저 인사해주시니 황망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절대 영광이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말에 황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주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 나도 그래! 너랑 얘기하니까 정말…….”

‘황망이란 뜻을 조금 더 생각해보시지요.’

보통 황송하다고 말하는데 굳이 황망이라고 이야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황자에게 그런 눈치가 없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칼리오페는 자신의 손을 덥석 잡으려는 황자에게서 한걸음 물러나 흔들림 없는 미소를 지었다.

“입장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순 없으니 심기를 진정하기 위해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뭐……?”

“그럼 양해를…….”

칼리오페가 사뿐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황자가 그녀의 팔목을 잡아챘다.

“읏…….”

생각보다 강한 손아귀 힘에 칼리오페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럼 언제 돌아와?”

칼리오페가 아파하는 것은 보이지도 않는지 황자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칼리오페는 아픈 손목과 황자보다 양옆의 두 오라버니가 더 신경 쓰였다. 입매가 단단히 굳고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결국 참지 못하고 황자에게 뭐라 할 것 같았다.

사실 평소 두 오라버니의 행각을 보면 지금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인내하고 있는 거였다. 두 사람의 인내심이 끊어지기 전에 이 공방을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심기만 진정되면 바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언제인데?”

칼리오페는 드물게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생각 같아선 ‘니가 나한테 관심을 끊을 때다.’ 라고 답하고 싶었다.

꽈아악. 답이 없는 칼리오페의 손목을 황자가 더 억세게 쥐었다.

칼리오페는 고통스러운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몸을 긴장시켰다.

“저하.”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손이 황자의 손목을 잡았다.

“제 딸아이가 저하께 혹 무례라도 저질렀습니까?”

강인한 손아귀가 손목을 누르자 황자의 손이 경련하며 힘이 쫙 빠졌다.

“무슨……!”

“아비로서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무슨 무례인지.”

지금 무례한 건 누가 봐도 황자였다. 그리고 손을 떼어내는 손길 역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분명한 행동에 이번에는 황자도 진짜 의도가 뭔지 알아챘다.

그는 씨근덕거리며 고개를 들다가 멈칫했다. 얼굴이 희게 질리고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물소같이 커다란 루스티첼 백작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새파란 눈은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소드 마스터의 눈빛은 별다른 무력도 없는 소년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황자가 주춤주춤 물러서려 할 때, 루스티첼 부인이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제 딸아이는 황궁 연회가 처음이랍니다. 그러다 보니 딸아이와 담소를 나누시기엔 많이 부족합니다.”

‘제 딸 말고 저하가.’

루스티첼 부인은 생긋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상냥한 미소에 황자는 불쾌하고 두려웠던 감정을 몰아냈다. 아니, 몰아낸 게 아니라 외면했다. 황자라는 그의 자존심이 두려움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부족한 면이 있겠지. 하지만 차차 나아지지 않겠는가. 내가 잘 이끌어주면 돼.”

“직접 이끄신다니, 너무 분수에 맞지 않은 광영인 듯합니다.”

‘내 딸 말고 니가. 니가 감히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내 딸을 이끈다고?’

루스티첼 부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마에 슬쩍 핏대가 돋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나.”

물론 눈치 없는 황자는 여전히 알아먹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나는 너와 첫 춤을 출 생각이야.”

황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또 그 표정이었다. 칼리오페가 감격에 몸서리치며 울 거라는 표정.

다른 의미로 몸서리치며 울고 싶긴 했다.

‘아슬아슬해.’

두 오라버니도 그렇고, 두 사람을 말려야 할 부모님마저 위험한 수위를 넘나들었다.

‘그냥 춤추자.’

춤 한 번 추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왠지 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가족들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하기 전에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어차피 이후에는 황궁에 올 일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쪽을 바라보는 황제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게 칼리오페를 직시하고 있었다.

‘안돼.’

칼리오페는 본능적인 경고를 느꼈다.

빠르게 수락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말로 돌렸다.

“황자 저하, 일단 식순이 있는데 연회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황제와 함께 등장한 황자가 바로 칼리오페에게 온 바람에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연회의 주인공이야.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하면 돼.”

“하지만…….”

“지금 설마, 감히 내 춤을 거절하는 건 아니겠지?”

황자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입매가 사납게 솟았다.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쟁에 뛰어들어선 안 돼.’

황제는 서열 순위가 더 높은 아스타레아스를 제치고 자신의 아들에게 황권을 넘겨주려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칼리오페가 황자와 엮인다면?

루스티첼 가는 풍랑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기 위해 그간 세를 키우려고 노력했다. 속가를 부르기 시작해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풍파를 부를 순 없다.

‘하지만 거절하면 황자가 더 강하게 나올 거고 그럼 가족들이 참지 않을 텐데…….’

모든 귀족들이 모인 황자 생일 축하연—그것도 황태자 예우로 열린—에서 황자를 공격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진 세 살 어린아이도 알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무엇을 고르든 평화로운 미래는 없다.

“왜 대답이 없어? 진짜로 거절하는 거야? 제국의 유일한 황자인 나를?”

황자의 음성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가족들이 나서려는 기색을 읽고 칼리오페가 황급히 한 발짝 앞으로 나온 때였다.

“당연히 거절하는 거지.”

부드럽고 나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에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그럴 리가 없어.’

마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따스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진짜라고 말해주듯이.

“레이디께선 나와 춤추기로 선약이 되어 있거든.”

칼리오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불청객이 속삭이듯 말했다.

칼리오페의 고개가 천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새하얀 은빛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나붓이 접힌 눈매가 보였다.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지. 아름다운 레이디를 쟁취하는 건 용기 있고 발 빠른 자라고.”

“공자님…….”

칼리오페가 신음처럼 소년을 불렀다.

그 부름에 답해 소년의 고개가 움직였다. 눈이 마주치고,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그 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깨에 닿은 온기가, 눈앞에서 도톰하게 접히는 눈매가 분명한 현실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아스타레아스!”

황자가 비명처럼 아스타레아스를 불렀다.

“네가 왜 여기에……!”

“형님이라는 말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박대하실 줄이야.”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하며 말했다.

“사촌 동생의 열두 살 생일을 축하하러 온 것이 잘못입니까?”

가벼운 어조는 마치 놀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언제부터 한가롭게 축하를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정도의 지능은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황자가 이를 악물었다.

“굳이 납득하실 만한 이유를 대 드리자면, 폐하께서 직접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라 명하셔서.”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황자와 달리 아스타레아스는 한없이 여유로웠다.

“일단은 저 역시 귀족이랍니다, 황자 저하.”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은 아스타레아스가 빙긋 웃으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이, 이이익—!”

황자가 분을 못 이겨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눈알이 빠져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스타레아스를 노려보던 그는 몸을 휙 돌려 사라졌다.

“음…….”

칼리오페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이 주목받는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연회에서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다사다난했다.

황제가 축사를 시작하며 시선도 점점 흩어졌다. 칼리오페는 그제야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오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슬쩍 속삭이니 아스타레아스가 힐끔 그녀를 바라봤다.

“오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눈에 밟혀서.

아스타레아스는 그 말을 삼키고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를 향한 구애자가 늘어날수록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참아야 한다고, 오늘 연회에 참석해봐야 득 될 건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칼리오페의 파트너로 입장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춤을 춰 눈에 띌 수도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그는 화이트펄 홀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황궁 주최 연회에 걸맞는 성장(盛裝)을 하고서.

언제 내가 이런 준비를 다 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은근히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썼다. 이 정도면 칼리오페에게 괜찮게 보일 것 같았다.

스스로의 행태에 기가 막혔지만,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이었다. 진짜로.

은빛 자수로 수놓은 새하얀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칼리오페가 아무리 예뻐도.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려 목덜미에 잔머리가 살짝 비어져 나온 게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반짝이는 보석 장신구보다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더 아름답게 빛나도.

그냥 가만히, 진짜 정말 조용히 잘 있나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황자가 칼리오페에게 집적대기 전까진.

황자의 생각 없는 행동이 다시금 떠올라 아스타레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별생각 없어야 할 텐데.’

그는 축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있는 황제를 살폈다.

다행히 황제는 앞으로 나선 자신의 아들을 보고 있을 뿐, 일단 이쪽에는 신경을 끊은 것 같았다. 오히려 황자가 계속해서 이쪽을 노려봤다.

황자는 가까이 있는 동년배의 레이디—아무리 봐도 황제가 붙여놓은—의 손을 잡고 댄스홀로 나갔다.

연회의 주인공인 황자가 첫 춤을 열고, 여덟 마디 후 다른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 그럼.”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 그는 조금 짓궂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조금 전 이야기를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아…….”

칼리오페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냥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선약을 했다고 한 줄 알았다.

아니, 모면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도 황자가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는 한 그와 첫 춤을 춰야 했다.

칼리오페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려는 순간이었다.

“자, 잠깐!”

로베르트가 다급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리페는 나랑 춤추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딱히 오라버니와 첫 춤을 추겠다고는…….”

그런 적이 있었나?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니, 첫 춤은 파트너랑 추는 게 당연하잖아?!”

로베르트가 억울하단 듯이 외쳤다. 눈동자가 울망울망했다.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눈빛에 약해진 칼리오페가 멈칫했다.

“그렇게 치자면 나도 있다, 로벨.”

서늘한 목소리가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와 나, 둘 다 리페의 파트너로 입장했으니 당연히 내게도 그 권리가 있지.”

루시우스가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크흠.”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반적으로 첫 춤을 파트너와 함께 추긴 하지만,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

루스티첼 백작이었다. 그 옆에서 루스티첼 부인이 맞는 말이라는 듯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아버지께는 평생을 함께하는 소중한 파트너가 이미 있으시잖아요.]

그 말에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막둥이의 파트너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니 실망이 그렇게 크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첫 춤 상대까지 뺏기기엔 억울했다.

파지직!

가족들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바야흐로 파트너 1차 전쟁에 이어 첫 춤 2차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쿠르릉, 천둥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네 사람의 표정이 비장했다.

‘절대 뺏길 순 없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지 못하게 하는 것에 집중했다. 경계가 지나쳐 누구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였다.

휙!

아스타레아스가 허공을 맴도는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챘다.

“앗!”

가족들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네 쌍의 눈동자에는 멀어지는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의 뒷모습만 비칠 뿐이다.

한 손을 아스타레아스에게 잡힌 채 빠르게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칼리오페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연회장에서 뛰다니, 예법에 정통한 그녀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마 공자님도 처음이 아닐까?’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어쩐지 재밌었다.

댄스홀에 도착한 소년, 소녀는 숨이 차 헐떡이는 서로를 마주 보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레이디.”

아스타레아스가 웃음기를 지우며 짐짓 진지하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고결한 레이디의 첫 춤을 열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칼리오페 역시 표정을 갈무리하며 우아한 레이디처럼 답했다.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이 다시 푸스스 웃었다.

아스타레아스의 흰 뺨이 볼록 솟아 매끄럽게 빛나는 것을 보고, 칼리오페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소년 같이 웃는 건 처음 본다. 그걸 자각하니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스타레아스 역시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년의 손이 소녀의 등허리를 받치고, 소녀의 손이 소년의 어깨에 얹어졌다. 나머지 손은 겹쳐진 채 서로를 단단히 붙잡는다.

탁, 타다닥, 탓타.

리듬에 맞춰 두 사람의 발이 함께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칼리오페의 드레스 자락이 핑그르르 물결치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어머나.”

댄스홀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소년, 소녀가 춤추는 모습은 꼭 케이크 위에 올려진 설탕 과자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예쁘고 달콤한, 어딘지 어릴 적 향수마저 자극하는 모습.

“옛날 생각이 나네요.”

멀어졌다 다가온 칼리오페가 살며시 아스타레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미소 지었다. 그 역시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섯 살 칼리오페의 생일에 선물을 주고 싶어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열리는 그녀의 생일 파티에 어떻게든 얼굴을 내비치고 싶어서.

그때도 지금처럼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루스티첼 저 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대담한 침입이었다.

차마 파티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서성이던 순간. 기적처럼 칼리오페가 나왔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우연에 감히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운명처럼 만나 아무도 없는 겨울 정원에서 둘만의 춤을 추었다. 칼리오페의 작은 발을 제 발등에 얹고 있을 땐 구름이라도 밟는 것처럼 걸음걸음이 가벼웠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걷고 싶었다. 칼리오페가 딱딱하고 차가운 언 땅을 밟지 않도록.

그녀의 온기와 무게를 오롯이 느끼며 그녀의 평생을 대신 디뎌주고 싶었다.

“공자님, 고마워요.”

칼리오페가 미소했다.

그 순간 아스타레아스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월의 햇살보다도 더 환한 웃음이었다. 어둡게 그늘진 그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환히 비쳐드는 미소.

맑게 빛나는 산호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아스타레아스는 직감했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칼리오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녀의 마음 속 작은 덧창 하나가 그를 향해 살며시 열렸으니까.

그 자그마한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조차 아스타레아스에게는 태양 같아서 온 마음이 멀 것 같았다.

이 소녀는 오래전부터 이런 식으로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지금처럼 구석구석 숨김없이.

아스타레아스가 입술을 달싹인 순간이었다.

그의 시야에 황제가 들어왔다.

황제는 기묘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꺼먼 공동 같은 검은 눈동자를 단 한 번 깜빡이지도 않은 채.

아스타레아스의 표정이 굳었다.

“……공자님?”

칼리오페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아스타레아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꾸민 듯한 웃음에 칼리오페의 얼굴 역시 설핏 굳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매끄러운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너무 매끄러워서 부드럽고, 상냥하고,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

“단순히 사촌 형제간의 경쟁일 뿐이니까.”

칼리오페의 눈이 크게 뜨이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산호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가까운 거리 탓인지 그 모습이 하나하나 느릿하게 보였다. 그녀의 긴 속눈썹 가닥이 파르르 떨리는 것조차 세세하게.

아스타레아스는 심장이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고통의 잔재 하나 드러내지 않은 채 여전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칼리오페는 되묻지 않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되묻지 않냐고, 무슨 뜻인지 묻지도 않냐고, 차라리 따지기라도 하지. 그러면……. 혹시 그렇게 말한다면. 어쩌면 자신은 참지 못하고 술술 다 말해버릴지도 모르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납득했든 아스타레아스는 받아들여야 했다.

한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한 것 같다. 지옥으로 그를 처박은 자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손을 맞잡고 있는데도 그 어떤 때보다 그녀가 멀게 느껴졌다.

자신을 향한 칼리오페의 얼굴에서 빛이 꺼져 무감해진 것이 가장 괴로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반짝 빛났는데.’

바뀐 건 칼리오페가 내비치는 빛뿐인데 온 세상에서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곡이 점점 끝나간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의 허리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무감해진 그녀를 마주 보는 게 심장을 에는 고통이더라도 그녀와 춤을 추고 싶었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끝은 찾아왔다.

칼리오페는 한 걸음 물러나 인사했고, 그 후에는 더 멀어졌다.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뒷모습을 차마 붙잡지 못하고, 아스타레아스는 허공만 움켜쥐었다.

* * *

“폐하.”

“……어서 오시오, 서모나 후작.”

황제는 반갑지 않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파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화이트펄 홀과 연결된 뒷방에 들어왔다.

바로 모습을 감춘 이유는 뻔했다. 자신에게 뭐라 할 귀족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대다수의 귀족들은 황제가 청하지 않았으니 사실(私室)에 들어갈 생각을 못 했지만, 서모나 후작은 달랐다.

황제 역시 그에게 감히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며 꾸짖지 못했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맞아줄 뿐.

“갑자기 황실에서 초대장이 와서 놀랐습니다.”

“뭐 놀랄 게 있소. 오늘이 황자의 생일이라는 건 그대도 알고 있었으면서.”

“예, 초대장이 온 것 자체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쓰여 있는 내용이 놀라웠지요.”

“생일이니 축하연을 연다는 게 놀랄 일이오?”

계속해서 모르는 척 능청을 떠는 황제의 모습에 서모나 후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참석하라는 명이 없었으면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크흠.”

찔리는 게 있는 황제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원래대로라면 황자에게 황태자 예우를 해주는 것에 관해 의회에서 논의했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힐 것을 알기 때문에 일단 초대장부터 보냈다. 일부터 저지르면 정정하기 힘드니까.

“황자 저하는 황태자가 아니실뿐더러, 그보다 계승 서열이 높은 카스틸로 공자님이 계십니다.”

황제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는데도 서모나 후작은 굴하지 않고 직언을 올렸다.

더 이상 모르는 척만 하고 있을 수 없어진 황제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황자는 내 아들이나 황제가 되지 못할 녀석이오. 안쓰러운 게 사실이지.”

그는 친히 서모나 후작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을 이었다.

“열두 살 생일 정도야 성대하게 치러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을 모르겠소?”

“폐하께서는 아버지이시기 전에 황제이십니다.”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서모나 후작이 말했다.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꺼먼 눈동자가 매섭게 후작을 응시했다.

“이미 다 끝난 일 아니오. 지금 와서 귀족들을 다 돌려보내라는 거요?”

“끝난 일이라고 해도 그른 일에 대해선 간언을 올리는 게 충신인 줄 압니다.”

“그른 일이라고?”

황제의 목소리가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다. 그러나 서모나 후작은 굴하지 않았다.

“과정부터 잘못된 일이었지요. 단순히 부성애에 움직여 벌이신 일이더라도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셨어야 합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제야!”

쾅!

황제가 책상을 내리치자 술잔 안의 술이 출렁거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예, 그러시기 때문에 더더욱 정도(正道)를 걸으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이 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니까요.”

“하! 후작은 지금 내가 패도(悖道)를 걷고 있다는 말이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황제와 서모나 후작은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고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부정에 이끌려 다른 뜻 없이 연회를 성대히 여신 거라고 해도, 다른 이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조용하게 입을 연 서모나 후작이 “물론 영민하신 폐하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요.” 하고 덧붙였다.

그 비꼼에도 황제는 여유롭게 답했다.

“그런 부가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아니오.”

서모나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 부가적인 문제를 노리고 이런 판을 짠 것 아니냐는 소리가 입 밖에 나오려 했지만 애써 참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카스틸로 공자님의 열두 살 생신연회는 황궁에서 열리지조차 못했지요.”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소. 내가 열어주려 했으나 그 아이가 거절한 것이오.”

아스타레아스가 왜 거절했는지, 카스틸로 공작가가 왜 사교계와 정계에 두문불출하는지. 황제도, 서모나 후작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그런데도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게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 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도 없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실 때 선황의 아드님이신 카스틸로 공자님께 황위를 물려주신다고 하셨지요.”

그 말에 황제가 칼날 조각같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랬지.”

“오늘 폐하께서 직접 황자 저하는 황제가 되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을 믿습니다.”

“걱정 마시오. 황자는 황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오.”

그 말과 행동이 전혀 달랐으나 황제의 말대로 이미 일어난 일이다.

서모나 후작은 황제에게 깊게 읍하고 사실을 나섰다.

“저 건방진 것이.”

문이 닫히자마자 황제의 입술이 비틀리며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술잔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관절이 새하얗게 불거져 나왔다.

“내 사랑스러운 조카님이 자꾸만 내게 고삐를 물리려고 해.”

뭐만 하면 귀족들이 사사건건 아스타레아스를 물고 늘어지면서 양위 이야기를 한다.

그 세력을 낮추고자 오늘 황자 생일을 황태자 예우로 열어준 것이다. 밑에 있는 귀족들이 권력 냄새를 맡고 카스틸로가 아니라 황자의 주위에 모이도록.

이 나라의 황제는 자신인데 왜 이렇게 수를 써야 하는가. 짜증이 났다.

“역시 카스틸로 가를 쓸어버려야…….”

아스타레아스가 죽으면 모든 것이 쉽고 단순해진다.

황제의 새까만 눈이 흉포한 기색을 띠며 일렁였다.

“아직 그럴 순 없습니다, 폐하.”

그때, 방 안에 있던 거울이 움직이며 로브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심기를 가라앉히시지요. 어쨌든 한 방 먹이지 않았습니까. 와서 몇 마디 거슬리게 말했지만 그뿐. 결과적으로 연회는 예정대로 열렸습니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아들놈이 조금만 더 똑똑했어도…….”

그가 술로 입술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황가의 정통성이 아스타레아스에게 있어서 불리한데 능력조차 너무 비교됐다.

“어차피 버릴 말 아닙니까.”

남자가 빈 술잔을 채우며 하는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지.”

조금 특출했다면 자신이 만들어갈 낙원의 일원으로 끼워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아들은 멍청했다.

멍청한 것에 힘을 뺄 필요 없으니 내버려 뒀다. 평소에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들이 이렇게 나오면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아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위대하신 폐하의 영민함이 너무 커 온전히 물려받기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황제가 남자의 말을 비웃으며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때,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카스틸로 공자가 뵙기를 청합니다.”

한순간에 술맛이 떨어지는 소식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들라 해라.”

* * *

“이것 참, 내 사랑하는 조카가 드디어 얼굴을 비춰주는구나.”

황제는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느긋하게 술을 홀짝이며 아스타레아스를 맞았다.

아스타레아스는 담담히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황궁에 오라고 말해도 잘 오지도 않더니. 이렇게 얼굴 좀 자주 비추거라. 그러고 보니 사교계에도 두문불출한다지?”

황제는 걱정을 가장해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너무 집에만 있는 것도 좋지 않아. 가끔은 코에 바람도 쐬어주어야지.”

아스타레아스는 빙긋 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말씀을.’

그가 황궁에 자주 오고 사교계를 휩쓸고 다니면 황제는 당장 목을 잘라야 한다며 주먹을 내리쳤을 것이다.

“이파리 푸른 나무는 바람 이는 곳을 피해 자라는 법이지요.”

황제의 말을 듣고 코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바람에 이파리가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

황제는 재미 난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이를 드러내며 박장대소했다.

아스타레아스는 별 반응 없이 평온한 상태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속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리페.’

그가 부러 황제와 독대하는 이유야 뻔했다. 아까 자신과 춤추는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황제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운을 뗄 순 없어.’

그 무엇에도 관심 없던 아스타레아스가 누군가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면?

영악한 황제는 바로 냄새를 맡고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내 조카님을 위해서라도 이파리를 흩트리는 소란스러운 삭풍을 가라앉혀야 하겠구나.”

중의적인 말이었다.

아스타레아스를 위해 정계를 안정시키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황제가 그럴 리 없다. 무엇보다 삭풍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카스틸로 공작령은 제국 북부 중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이 삭풍의 원인인 아스타레아스를 죽여버려 바람을 잠재우겠다는 뜻이다.

황제의 검은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는 태연하게 그 눈빛을 받아넘겼다. 심지어 눈매를 나붓이 휘며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뜻을 두신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재미없게. 이빨 하나 박히지 않는군.’

황제의 얼굴에서 흥미가 다 빠져나갔다. 그는 턱을 괴며 술을 홀짝였다.

“용건이 있어서 온 것 아니냐?”

황제의 질문에 아스타레아스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놓고 ‘널 죽일 거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초조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은 떨렸다.

“그런 건 아닙니다. 오랜만에 입궁했으니 황궁의 주인이신 폐하를 뵙는 건 당연하지요.”

진짜 용건을 숨기고 정석적인 답을 내놓았다.

사실은 조금 더 말하고 싶었다.

칼리오페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까진 아니더라도 황자와 춤춘 영애에 관해서라든가. 뭐든 좋으니 황제가 먼저 칼리오페를 연상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의중을 내비치길.

‘하지만 참아.’

완벽히 숨길 자신이 없으면 꺼내지 않는 게 낫다. 연상하게끔 말한다는 건 역으로 이쪽의 의도를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시종이 두고 간 차를 한 모금 머금는 아스타레아스는 지극히 귀족적이고 우아하게 보였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걸 숨긴 채 황제를 찾아온 사람 같지 않았다.

황제는 아스타레아스를 면밀히 살핀 후 턱을 쓰다듬었다.

보아하니 정말로 얼굴을 비치려 했을 뿐인 것 같다. 그 이유야 뻔하다. 자신을 보지도 않고 돌아가면 ‘어떻게 황궁까지 왔는데 얼굴도 안 보여줄 수 있냐.’ 하고 들들 볶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눈치만 빨라선. 하긴, 처신을 잘하니 여태 살아남은 거지.’

판단을 마친 황제가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댔다.

서로 달갑지 않은 상대인 데다가 용건도 없다. 더 이야기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지만 얼굴 봤으니 나가라고 할 수도 없다.

어쨌거나 표면적으로 황제는 ‘조카님, 조카님’ 하며 아스타레아스를 아끼는 척하고 있다. 그것이 투명하고 얄팍한 껍질이라 아무도 믿지 않고, 황제 역시 숨길 생각 없을지라도.

황제는 대강 시간을 때울 화제를 찾다가 오늘 연회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침 그에 관해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너랑 춤추었던 그 꼬마 아가씨 말이다.”

황제의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하지만 예선을 통과했을 뿐, 지금부터가 본선이다. 훨씬 신중해야 한다.

“아, 그 하얀 드레스를 입은 영애 말씀이시군요.”

그는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답하고는 “귀여웠죠.” 하고 짧은 감상을 덧붙였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스타레아스가 얼마나 제 것을 싸고도는지 잘 알고 있다.

마음에 담은 것은 모두 죽거나 빼앗긴 경험 때문인지 그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전에 차단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절대 빼앗기지 않기 위해 꽁꽁 숨긴다. 황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런데 저렇게 귀여웠다며 가볍게 평하다니.’

다른 이라면 약한 호감을 내비치는 것이겠지만 아스타레아스의 경우는 다르다. 그에게 그 소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하긴, 나서서 춤춘 것도 이상했지.’

그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자에게 빼앗길까 봐 못 참고 나선 것인가.’ 의심했다. 사춘기의 치기 어린 열망을 참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그런 것에 휩쓸릴 애가 아니지.’

황제는 아스타레아스와 칼리오페의 관계에 대한 의심을 거의 접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해 두는 게 낫겠지.’

자신의 조카는 영악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아가씨에게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라 놀랍더구나. 내 조카님이 원하신다면 그 아가씨와 맺어줄까 하는데.”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폐하, 벌써부터 제 미래를 묶어두시는 겁니까.”

장난스럽게 말한 그가 “듣자 하니 결혼은 저당 잡히는 거나 마찬가지라던데.” 하고 덧붙였다.

꽤 태만한 사내다운 모습에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샌님인 것 같은데 호탕한 면도 제법 있단 말이야.’

가끔씩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의 아들이었다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의미 없는 가정이다.

그리고 정적인 자신에게 그렇게 혹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뛰어난 아이이기에 더 경계해야 한다.

“폐하의 뜻이라면 저는 따릅니다.”

웃음을 지운 아스타레아스가 황제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 새파란 눈동자를 보며 황제는 다시금 제 마음이 아스타레아스에게 기우는 것을 느꼈다.

‘정말 그 소녀는 아무래도 좋은가 보군.’

황제는 일단 의심을 접었다. 지켜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서는 의혹의 가능성도 없었다.

아스타레아스의 약혼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진짜로 진행시킬 생각은 없었다. 사실상 황태자비 간택 아니냐면서 들고 일어날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약혼하는 김에 황태자에 책봉하라고 난리를 치겠지.’

“우리 조카님이 마음에 들면 맺어준다는 거였지. 억지로 시킨다는 뜻은 아니었다.”

황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인생을 즐겨야지? 요즘엔 만혼이 유행이라면서.”

아스타레아스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예, 황자 저하와 탈리아덴 영애를 맺어주고 싶으셨던 게 아닙니까?”

탈리아덴 영애는 칼리오페에게 퇴짜 맞은 황자가 첫 춤을 함께 춘 소녀였다.

소리 없이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 그는 아스타레아스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 소녀와 춤춘 것은 황자가 탈리아덴 영애와 첫 춤을 추게 하기 위해서라고?’

황제의 마음을 읽고 황자의 돌발행동을 제지했다는 뜻이다.

‘틀림없어.’

아스타레아스는 그와 춤을 춘 소녀의 이름도 모를 것이다.

‘하얀 드레스’라고 표현한 점도 그렇고, 지금 말을 들어보니 그 소녀를 특정해서 춤을 신청한 것도 아니다. 황자가 다른 영애에게 춤을 신청했어도 아스타레아스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오로지 황제인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황제는 칼리오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었다.

“황자가 네 반만 닮았어도 좋았을 것을.”

그 반응에 아스타레아스는 제 계획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저렇게 말해도 자신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안다. 황제는 언제든 그의 목을 내리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상관없어.’

황위 따위를 원해서 비위를 맞춰준 게 아니다.

모든 것은 황제의 시선에서 칼리오페를 숨기기 위해.

“폐하의 조카로서 폐하의 마음에 흡족하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아스타레아스가 눈매를 유순히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 순종적인 얼굴에 황제 역시 입매를 위로 올렸다. 이처럼 똑똑한 아이가 제 손바닥 위에서 애교를 떠는 모습이 나쁘진 않았다.

‘제 안전이 가장 중요한 놈이라 다행인 건지.’

살기 위해 납작 엎드린 걸 보면 우습기도 했다.

‘그나저나 소녀가 루스티첼 가의 아이였던가.’

루스티첼 백작가가 최근…… 한 오륙 년 전부터 점점 득세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전에는 권력과 금권에선 멀었는데 말이지.’

청렴하고 명망이 높았지만 실질적인 이권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루스티첼 백작은 오랜 기사문학에서 나오는 것처럼 충심 강한 인물인 데다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루스티첼 가의 딸과 아스타레아스가 춤을 추길래 혹시나 싶었다.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가문이 카스틸로와 손을 잡았는가, 하고. 아니면 카스틸로와 손을 잡은 덕에 빠르게 성장한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좋지 않았다.

그는 루스티첼 가의 딸이 카스틸로 저에 방문했다는 보고를 떠올렸다. 그러나 딱 한 번일 뿐이었고, 그 후로 카스틸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혹시 몰라 루스티첼 가에도 감시를 붙였지만 백작 부부의 활동은 지극히 온건했다.

보름 정도 지켜본 후 황제는 루스티첼 백작 부부에게 붙였던 감시를 풀었다. 의심 많은 그의 성격대로였다면 한 달 정도는 더 붙여두었을 터였다. 그러나 기감이 발달한 소드 마스터를 감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력이 서너 배로 들었다.

감시해야 할 곳은 많다. 그 소녀가 모종의 거래를 위해 카스틸로 저를 방문한 거라면 그렇게 공개적인 방식은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너무 어려.’

그런 일에 쓰이기엔 그 소녀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수지 타산을 계산해보고 그 정도 감시로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해도 찝찝했는데 이제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군.’

황제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봤다.

‘하긴, 이놈에게 야심이 있었다면 진작에 사교계를 뒤집고 다녔겠지. 카스틸로 가 역시 정계에서 물러나지 않았을 테고.’

물론 그 경우, 황제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아스타레아스를 죽였을 것이다. 아니, 핑계 댈 것도 없이 끊임없이 어린 소년의 방에 살수를 밀어넣었겠지.

실제로 황위에 오른 직후 황제는 아스타레아스에게 몇 번이나 살수를 보냈었다. 카스틸로 가가 웅크리게 된 계기였다.

지금은 귀족 놈들이 사사건건 아스타레아스를 걸고 넘어지지 않으면 그렇게 거슬릴 것도 없었다.

‘물론 그래도 기회만 되면 죽일 거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선황의 독자다. 그런 후환을 살려둘 정도로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황제의 눈이 시꺼먼 살기를 담고 아스타레아스를 훑었다.

시선을 느낀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고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싱긋 미소 짓는다. 너무 태연해서 자신이 살심이 아니라 호의를 품고 그를 바라봤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정말 아들놈이랑 바뀌었으면.’

황제는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바꿀 순 없으니 황자를 직접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버리는 말로 쓸 생각에 좋을 대로 내버려 두고 있지만, 장기 말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막 나가면 곤란하다.

‘조카님이 막지 않았으면 탈리아덴 가와의 협약도 완전히 물 건너갔을 거고.’

탈리아덴 후작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벌써 머리가 아팠다.

어쨌든 황자가 첫 춤을 탈리아덴 영애와 추긴 했지만, 루스티첼 영애에게 먼저 춤 신청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협약이 유지되더라도 조건이 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화이트펄 홀에 있는 사람들이 저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찻잔을 다 비운 아스타레아스가 운을 떼었다.

“다들 폐하를 알현하기만을 기대하고 있을 텐데 제가 너무 오래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다는 말에 황제도 반색했다. 그러나 그런 내심을 숨기고 턱을 쓰다듬었다.

“사랑하는 조카님과 마주 이야기하는 게 내겐 무엇보다 큰 기쁨이야. 감히 누가 내 기쁨을 원망할까.”

둘 다 잘 알고 있는 거짓부렁이었다.

문득 아스타레아스는 그럼 이 자리에 계속 있겠다고 말하면 황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은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오나 어찌 저 하나가 나라의 대소사를 논하는 것보다 중하겠습니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는 몇 번이나 만류하는 척하더니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놓아주었다.

‘저렇게 질척거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이야.’

아스타레아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실을 나섰다.

* * *

“리페, 기분이 안 좋니?”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전혀요.”

“어디 불편한 데 있으면 바로 이야기해야 해.”

“네, 아픈 거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생긋 웃으며 답하자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못내 걱정스러운 눈빛이라 칼리오페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큰 연회는 처음이라 긴장했나 봐요.”

“어머나?”

항상 침착한 딸이 긴장했다는 소리에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도 처음엔 그랬단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장난스럽게 속닥속닥하더니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는다. 꽤 악동 같은 얼굴에 칼리오페도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루스티첼 부인이 황홀한 한숨을 내쉬며 볼록해진 하얀 뺨을 매만졌다.

어머니에게 뺨을 내준 채 칼리오페는 가족들을 둘러봤다. 티 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귀신같이 알아채는지. 가족들 모두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아스타레아스와 춤을 추고 난 후, 바로 휴게실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치겠는가.

결국 칼리오페는 네 번 연달아 춤을 췄다. (물론 그 와중에 서로 먼저 추겠다는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리페.”

그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손이 잡혔다.

“호세 오라버니?”

호르세안이 살짝 웃고는 그대로 허리를 숙이며 칼리오페의 손을 들어 올렸다.

비단 장갑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대로 놓지 않고 손등에 제 뺨을 붙인 채 그가 속삭였다.

“오늘은 정말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아.”

살짝 쳐진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꿀처럼 달콤했다.

“원래도 예쁘지만 말이야.”

살짝 덧붙이며 칼리오페와 눈을 마주치는데,

“호르세안.”

“호세 형.”

“호세.”

“어머나, 호세.”

뒤에서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으윽…….’

호르세안은 신음을 삼키며 뒤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루스티첼 일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은땀이 비죽 솟았다.

‘왜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걸까…….’

칼리오페 앞에서는 순하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이지만 다른 사람 앞에선 지옥의 번견이나 다름없다.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호르세안이 당장 칼리오페의 손을 놓고 멀찍이 떨어지며 물었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그리고 슬쩍 한 걸음 물러서는데 시야 끄트머리에 낯익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칼리오페는 손가락으로 벌어지는 입술을 가렸다.

눈이 마주친 사람이 살포시 웃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칼리오페 역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앞에서 마주친 순간, 어쩐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유리 오라버니?”

간신히 확인하는 듯한 질문만 희미하게 나왔다.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봄날, 금빛 풀밭에 핀 꽃잎 같은 연분홍빛 머리카락. 햇살을 잔뜩 받은 이파리 같은 눈동자.

칼리오페를 향한 유순한 눈빛과 다정한 미소.

유리안이었다.

“응.”

유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한 음절에 유리안은 온 마음을 담았다.

지난 7년간, 그는 칼리오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답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에 자신이 한가득 담긴 것을 보니 전율이 일었다.

“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보고 싶었어.”

유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곤 칼리오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오,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유리안을 불렀다.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니 새순 같은 연두색 눈동자가 순진하고 맑은 빛을 띠고 반짝였다.

‘다행이구나. 잘 지냈구나.’

칼리오페는 속으로 안심했다. 유리안의 외조부모가 좋은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그렇게 떠나보내니 항상 마음이 쓰였다.

“잘 지냈어요?”

그래도 한 번 확인해두고 싶어서 묻자 유리안이 고개를 기웃하며 말했다.

“리페가 없는 것만 빼면?”

듣기 좋은 농담에 칼리오페가 픽 웃었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있으니 어릴 적 생각이 났다. 유리안은 자주 칼리오페의 팔짱을 꼈다. 팔에 닿는 몸이 조금 단단해졌을 뿐, 그다지 변한 게 없다.

그리운 감각이었다.

“많이 컸네.”

유리안이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그의 상상보다 더 아름답게 자랐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상냥한 미소. 아니, 어떤 모습이라도 그는 예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놓친 칼리오페의 시간들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다.

계속 칼리오페의 옆에, 다정한 루스티첼 가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가족이 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도요. 몸도 조금 단단해진 것 같고.”

“이제 여자애로 착각하지 못하겠지?”

유리안은 여전히 귀여운 인상이었다. 키도 또래 남자애들보다 작은 편이라 여장하면 아직 여자애로 착각할 만했다. 유리안 본인도 그 부분에 대해선 잘 알았다. 그래도 그냥 칼리오페의 입에서 ‘그렇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칼리오페가 자신을 남자로, 안젤리나가 아닌 ‘유리안’으로 봐주었으면 해서.

그러나 칼리오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 오라버니는 항상 남자였잖아요?”

칼리오페의 말에 유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치마를 입든 바지를 입든 그런 건 상관 없잖아요?”

칼리오페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맑은 눈동자에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리안 자신의 모습이.

“어느 쪽이든 유리 오라버니이신걸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유리안은 말문이 막혀 숨만 겨우 토해냈다. 가슴 속에 오래 묵은 앙금을 뱉어내듯이.

그 후엔 피실피실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 나는 나니까.”

유리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왔다.

여자아이로 취급당하는 것은 단순히 성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선 유리안을 부정하고 안젤리나를 긍정하는 일이었다.

자신은 유리안이 아니라, 안젤리나라고.

안젤리나 대신으로만 가치 있을 뿐, 그 자신은 필요 없는 존재 같았다.

유리안에게 치마를 입는 건 안젤리나의 대용품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치마를 입든 말든 상관없이 그는 그일 뿐이라고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누군가의 흔적을 찾지 않는다. 온전히 그 자신을 봐준다.

‘역시 리페는…….’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더 찰싹 달라붙으며 동그란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새끼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야!”

그때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에피니가 보였다.

거의 뛰다시피 다가온 에피니가 기겁하며 유리안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그를 흘겨보았다.

‘여전하구나.’

그 생각에 유리안은 또 웃음이 나왔다. 오랫동안 보지 않았는데도 어제 봤던 것처럼 자신을 대하는 게 에피니의 재주였다.

유리안 역시 지지 않고 순진한 척, 억울한 척하며 칼리오페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음, 에피니 언니. 일단 오래간만에 만난 건데 인사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칼리오페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권했다.

‘왜 유리안 편을 드는 거야!’

에피니의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픽 돌린다.

다행히도 지원군이 나타났다.

“리페, 대체 쟤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찰싹 붙어있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힐데르트가 다짜고짜 칼리오페에게 투덜거렸다.

칼리오페는 당황해서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이미 떨어졌는데 더 떨어져야 하는가.

“당연히 좋으니까 좋은 거지. 리페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치?”

냉큼 말을 받은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물으며 다시 달라붙었다.

“유리안!”

힐데르트가 당장 떼어내려 했지만 유리안이 힘을 줘 버텼다.

‘……에피니는 단번에 떼어내던데?’

힐데르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해서 그는 승마나 크로케(croquet) 같이 기본 소양으로 갖춰야 할 것만 반쯤 의무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보다 종기사 중에서도 실력파인 에피니가 더 힘이 센 건 당연하다.

‘하지만 유리안은 다르잖아?’

일단 체급이 달랐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유리안은 생긴 것부터가 말랑말랑해 보였다.

힐데르트가 충격에 굳어 있는 사이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더 달라붙으며 잔망을 떨었다.

에피니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힐데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칼리오페가 유리안 편을 들어준 것 때문에 삐져서 참견 안 하려고 했건만.

유리안이 찰싹 붙어서는 ‘내가 좋지? 나 오랜만에 봐서 좋지? 응? 응?’ 하고 있는 걸 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 저 순진한 척하는 요망한 것을 떼어놓고 싶으면서도, 칼리오페가 유리안 편을 들어줬던 게 생각나 망설여졌다.

내버려 두자고 결심해도 유리안이 칼리오페의 베스트 프렌드인 척 구는 건 꼴 보기 싫었다.

‘그건 나인데! 내가 리페 베스트 프렌드란 말이야!’

끙끙거리며 앓던 에피니가 앗, 하고 눈을 반짝 떴다.

‘나쁜 건 리페가 아니야. 나쁜 건 유리안이야. 우리 리페는 상냥해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받아준단 말이야. 상냥한 게 잘못은 아니잖아? 게다가 오랜만에 봤다는 점까지 이용하고 있어!’

자기합리화를 훌륭히 마친 에피니가 얼른 유리안을 칼리오페에게서 떼어냈다.

아주 손쉽게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 힐데르트의 얼굴이 더 우울해졌다.

“뭐야, 진짜. 리페는 가만히 있는데 왜 너희가 더 난리야. 내가 네 팔짱 꼈어?!”

유리안의 말에 에피니가 양손을 교차해 자신의 팔을 보호하듯이 움켜쥐었다.

“내 팔은 못 내줘!”

“누가 잡고 싶대?”

“아, 상상만으로 소름 돋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에피니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질색하고 유리안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나 운동 좀 할까 봐.”

그 야단법석 속에서 힐데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소란스러운 세 사람을 지켜보는 칼리오페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스타레아스와 춤춘 이래, 처음으로 근심을 내려놓고 지은 미소였다.

“두 분 싸우지 마세요.”

7년 전처럼 칼리오페가 아웅다웅하는 것을 말렸다.

“싸우는 거 아니야.”

“그래, 싸움도 수준이 맞아야 하지.”

“그거, 내 수준이 더 높다는 걸 인정하는 거지?”

“넌 좋겠다. 그렇게 행복한 착각 속에서 살 수 있어서.”

다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칼리오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린애들도 아니고 보자마자 싸움질이라니.”

자긴 아닌 척하며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의 옆에 슬쩍 붙어 섰다.

“야!”

에피니와 유리안이 동시에 힐데르트를 불렀다.

“너보단 낫거든?!”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던 두 사람이 합일점을 찾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어린애들 싸움’에 힐데르트까지 참전하게 되었다.

‘다들 기운찬 게 보기 좋네요.’

몇 번 말리던 칼리오페는 해탈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칼리오페가 한 발 물러선 순간, 세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봤다.

“리페?”

어디 가냐며 손을 뻗는 그들의 얼굴엔 즐거움과 웃음기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아웅다웅하면서도 결국 반갑고 좋았던 것이다. 칼리오페는 웃으며 손을 뻗는 그들을 향해 마주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모인 사총사는 그간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 * *

황제와의 독대를 마친 아스타레아스는 화이트펄 홀에 들어서자마자 칼리오페를 찾았다.

그는 단번에 저 멀리 구석에 콕 박혀 있는 남보랏빛 머리카락을 발견해냈다.

다가서는 귀족들을 철벽같이 다정한 미소로 막아내며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직선 거리로 가면 동선이 빤히 보이니 조금 둘러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른 채 돌아 돌아 칼리오페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던 그가 멈칫했다.

칼리오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도, 진주와 다이아몬드 장식이 박힌 홀 장식도 순식간에 빛이 바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꽃이 움튼다.

그 사랑스러운 향기는 자신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칼리오페와 이야기를 주고 받던 아이들이 뭐라고 하자 칼리오페의 웃음이 더 짙어진다.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웃는다.

‘내게는 보여주지 않은 표정.’

아스타레아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참아야 해.’

다가가면 안 된다.

칼리오페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해선 안 된다.

그와 칼리오페의 인연은 꿈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현실이 아니다.

칼리오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칼리오페의 어깨에 친근히 손을 얹고 마주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속이 뒤틀렸다.

저 속에서 칼리오페를 빼내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그가 모르는 표정을 다른 사람 앞에서 짓지 못하도록, 오로지 그만 보도록.

‘……젠장.’

* * *

‘응?’

칼리오페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갑작스러운 행동에 힐데르트가 물었다. 그를 포함한 세 명이 칼리오페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뭐 있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기웃기웃하는 세 사람을 향해 칼리오페는 의문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뭐였을까.’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돌아본 곳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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