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타인의 취향
“그 소식 들었어요? 루스티첼 영애가 백악 계단을 밟았대요.”
“지금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문제는 대체 무슨 일로 갔냐는 거지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지도 궁금해요. 공작 부인께서 쉽게 방문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서모나 부인께서 루스티첼 영애를 귀애하시니 부탁을 들어주신 게 아닐까요?”
“서모나 부인이 쉬운 상대인가요. 상냥하시지만 이런 일엔 칼 같으시죠. 귀애한다고 무조건 소개해주셨겠어요.”
“하지만 루스티첼 영애를 워낙 특별하게 생각하시니까요.”
“모르죠. 서모나 부인이 징검다리가 되는 경우는 애초에 거의 없잖아요.”
7년 전쯤 전에 로아힌 가를 소개시켜준 게 마지막이었다.
귀부인들의 살롱이든 남성들의 사교 클럽이든 어딜 가나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공작 부인과 만났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 소문이 잦아들 만도 한데 양측 모두 관심을 받고 있는 인사들이라서 더 그랬다.
* * *
칼리오페는 난감한 미소를 지은 채 눈앞의 소년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마음은 감사하나 저는 누군가와 교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빠르게 지나치려 했으나 소년은 히죽거리며 칼리오페의 앞을 막아섰다.
“생각이야 바뀔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안 바뀝니다. 전부터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무시하자.’
칼리오페는 빠른 판단을 내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해봤자 이쪽만 피곤하고 귀찮을 뿐이라는 건 저번에 깨달았다.
“좋으면서 튕기긴.”
칼리오페는 표정이 설핏 굳었지만 멈칫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뒤를 졸졸졸 쫓아오면서 알짱거렸다.
“튕기는 것도 적당히 해야 좋은 거야.”
‘반응하지 말자. 무시가 상책이야.’
칼리오페는 속으로 되뇌었다. 상대해 봐야 말도 안 통하고 더 짜증이 날 뿐이다.
“자꾸 이러면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니까?”
칼리오페가 무시한 채 걸음을 빨리하자 소년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면 따로 좋아하는 녀석이라도 있는 거야?!”
“무슨 상관이시죠?”
칼리오페는 어딘지 분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저와 왜 안 만나주냐고 따지는 게 황당했다. 그가 원한다면 칼리오페가 응당 그와 만나줘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점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소년은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딱히 날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지 당황스럽다 못해 신기한 기분이다.
칼리오페는 미지의 생물체를 앞에 둔 기분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뭐야?”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이 대치하는 모습을 본 주변에서 수런거리는 게 들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더 모이기 전에 끝내는 게 좋겠어.’
“몇 번이나 말씀드렸던 것 같지만 다시 정확히 말씀드리죠.”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소년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누군가를 좋아해서 거절하는 게 아니라, 그것과 상관 없이 저는 당신이란 사람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드물게 표정을 잔뜩 굳힌 채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거절은 거절입니다. 왜 그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시죠?”
소년은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 튕기라니까.”
그는 칼리오페를 마치 앙탈 부리는 새끼고양이 보듯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칼리오페는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절로 입이 움직였다.
“당신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요. 여성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 상 이로울 것 같습니다.”
“뭐?”
“당신을 위해 하는 소리예요. 독특한 취향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저는 제 취향이 상당히 대중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년은 입을 헤 벌리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그는 칼리오페의 말뜻을 이해했다.
“뭐, 뭐라고?!”
얼굴이 시뻘게진 소년이 강제로 칼리오페의 팔을 잡아채려 했다.
그 순간,
“이런, 레이디가 싫다는 데 그러는 건 아니지.”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소년의 팔을 낚아챘다.
“악!”
팔이 등 뒤로 꺾인 소년이 꽥 소리를 질렀다.
칼리오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보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호세 오라버니?”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호르세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눈매를 휘며 칼리오페에게 다정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아가씨.”
“이, 이거 놔!”
소년이 온몸을 버둥거렸지만 호르세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칼리오페만 바라보고 있었다.
몸부림치면서 돼지 멱 따는 것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소년 때문에 구경꾼들이 몰렸다.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쉬고 호르세안에게 말했다.
“놔주세요, 호세 오라버니.”
“흐음?”
호르세안은 탐탁지 않은 것처럼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곧 손을 놔줬다.
소년은 하얗게 변색 된 팔목을 어루만지며 “뭐야, 나이도 많으면서 왜…….” 하고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호르세안이 눈매를 가늘게 뜨자마자 곧장 찔끔해서 몸을 움츠렸다.
화살은 만만한 칼리오페에게 돌아갔다.
“야, 너 사귀는 남자가 있었으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괜히 사람 쪽팔리게…….”
칼리오페는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상관 없다는 말을 했던 게 5분도 채 안 지난 것 같은데…….’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뇌 구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 걸까?’
평상시라면 실례되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머릿속에서 지웠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 정도로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지금 소년의 태도는 어떤가.
칼리오페가 거절했을 때는 귓등으로 듣지도 않다가 ‘다른 남성과 관계가 있다’라고 생각하자마자 물러난다.
‘누군가의 것이라는 목줄을 메고 있어야 손대지 않겠다는 건가.’
그 점이 가장 화가 났다.
‘들에 핀 꽃을 마음대로 꺾을 수 있는 것처럼, 주인 없으면 자기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여간 남자 있으면서 여기저기 꼬리 치며 다니긴.”
소년이 빈정거렸다.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호르세안이 버럭 화를 내며 한 발짝 소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 둘이 그런 사이인지 몰랐다니까. 알았으면 안 건드렸을 거야. 화내지 말라고.”
소년이 다가오는 호르세안을 향해 손사래 쳤다.
호르세안이 더 뭐라 하기 전에 칼리오페가 먼저 나섰다.
“사실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굳이 알 필요 없겠죠.”
차갑게 중얼거린 칼리오페가 똑바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아, 그런 생각밖에 못 하는 사람이니 당연할까요? 여하간 호세 오라버니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정정하지 않으면 지켜보는 사람들이 잘못된 오해를 퍼트릴 수 있으니 그 점부터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누군가와 교제하든 말든 상관없이 당신이 싫은 겁니다.”
“뭐?”
“저는 이렇게 예의 없고 막무가내에 상대방 의사는 존중하지 않는 사람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아요.”
“내, 내가 언제?”
칼리오페는 시선을 내리깔아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 봤다.
“방금 당신은 강제로 제게 손을 대려고 했지요.”
레이디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신사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만약 호세 오라버니께서 절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년에게 한 질문이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들 중 몇몇은 소년이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소년이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듣고 뒤늦게 온 사람들은 추측했던 전말을 사실로 확인받았다.
당연히 작고 가녀린 소녀를 괴롭힌 소년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내리꽂혔다.
“세상에, 젠트리도 안 할 행동을 귀족이 하다니요.”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군요. 같은 남성으로서 수치스럽습니다.”
“레이디를 존중하는 것은 기본 소양 아닌가요?”
“루스티첼 영애는 열둘이었죠? 아직 어린데……. 왈렌 영식도 어리지만 사리분별 못할 나이는 아니죠.”
흥분한 소년의 귀에는 주변의 소란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눈 똑바로 뜨고 제게 따지는 칼리오페를 보며 이를 갈았다. 좀 예쁘장하게 생겼고 조용한 데다가 나름 유명하니 괜찮다는 생각에 귀여워 해줬더니 뭐?
‘나한테 이렇게 바락바락 대들어?’
“야!”
소년이 소리 치는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자, 지성을 나누는 살롱에서 왜 이런 큰 소리가 들리는 건가요?”
부채가 소년과 칼리오페 사이를 가로막았다.
“누, 누님…….”
소년이 찔끔해서 부채의 주인을 올려다 봤다.
오늘 살롱의 호스트, 몽에르트 영애가 소년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부채로 입매를 가리고 소년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내 살롱을 망치러 온 건 아니겠지?”
“죄, 죄송합니다.”
소년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의 사촌 누이는 몽에르트 후작의 후계자로 대들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몽에르트 영애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칼리오페에게 다가갔다.
“이것 참. 죄송해요, 영애. 내 사촌 동생이 어려서.”
“아니에요. 영애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지요.”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몽에르트 영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그렇다면 기어코 내 사촌 동생의 사과는 받겠다는 뜻이군?’
그녀는 곁눈으로 사촌 동생을 바라봤다. 의기소침해져서 구석에 처박혀 있는 한심한 모습을 보니 짜증이 올라왔다.
‘지금 나는 저 때문에 사과하고 있거늘!’
저것도 가족이라고 챙겨야 하는 게 열 받았다.
사촌 동생도 짜증 나지만, 자신이 대신 사과했는데 바로 기분을 풀지 않고 뻗대는 칼리오페도 짜증 났다. 그녀는 속마음을 감추고 칼리오페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유명한 루스티첼 영애를 직접 보게 되다니 기분이 새롭네요.”
“저야말로 저명한 몽에르트 후작 영애의 살롱에 참석하게 되어 기쁩니다.”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답했다.
‘흐음…….’
몽에르트 영애는 부채를 펼치며 칼리오페를 훑었다. 미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며 예를 갖추는 게 흠잡을 곳 없었다.
‘제법인데?’
“어머, 저도 모르는 사이 제 살롱이 이름이 났나 봐요. 저명하다니.”
대놓고 칭찬하라는 소리에도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은 구성이 뛰어나서 다양한 사조의 문인과 예술가, 그리고 사상가가 모이는 교류의 장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칼리오페의 시선은 맑았다. 아부가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그런 소문이 있군요.”
“네, 하지만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 교류보다는 몽에르트 영애랍니다.”
“어머나?”
“다양한 사조는 곧 다양한 생각을 의미하지요. 열정 때문에 의견이 부딪칠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주최자인 영애의 조율 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에 몽에르트 영애는 문득 생각했다.
‘아, 어쩌면 나 이 아이가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멍청한 사촌 놈과 얽히지만 않았으면 말이야.’
그녀는 날카로운 생각을 숨긴 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것 참, 의외네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이제서야 참석했는지 의문이에요.”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여러 번 칼리오페에게 살롱 초대장을 보냈다.
‘몽에르트 영애의 자존심 상 한두 번 거절하면 다시 초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이래도 안 와?’ 하는 느낌으로 집요하게 보냈다. 그 집요함에 놀랐지만 칼리오페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이유야 여러가지였지만 거절해도 척을 지진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칼리오페가 대다수의 살롱 초대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초대만 거절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참석하지 않는 거라면 넘어갈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대다수의 살롱 호스트가 그러하듯 몽에르트 영애 역시 칼리오페를 참석시켜 살롱을 빛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친분도 없는 사람의 살롱의 실내 장식이 될 정도로 한가하진 않으니까.’
칼리오페는 그 뜻을 담아 미소 지었다.
‘역시 만만치 않네.’
몽에르트 영애는 씩 웃으며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그럼, 영애. 부디 내 살롱에서 궁금했던 점을 깨우치고 가시길.”
그 말을 끝으로 몽에르트 영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우와……. 찬바람 쌩쌩 이네.”
호르세안의 말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었다.
“별로 그렇게 차갑지는 않은걸요.”
“저게?”
“몽에르트 영애의 성격이야 원래 알고 있었고…….”
오히려 완전했던 적대가 살짝 흐려졌다.
처음에 보였던 적대감이 그대로였다면 방금도 ‘감히 내게 뻗대? 날 만만하게 보는 거야?’ 라며 더 가시 돋친 말을 했을 거다.
돌아서기 전에 보였던 미소는 제법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몽에르트 가의 승계 구도도 복잡하니까요.”
칼리오페의 말에 호르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에르트 영애는 후작의 후계자로 지목 받은 상황이지만 입지가 단단하진 않다. 가문 내부에 찍어 눌러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성격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호르세안은 칼리오페를 힐끔 보더니 입술을 늘리며 웃었다.
“그건 그렇고. 우리 리페, 아까 멋지던데?”
“네?”
“그 멍청한 놈팡이 말이야.”
“아, 그거요.”
칼리오페는 민망한 듯 웃었다.
“리페가 말할 때마다 그놈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보는 맛이 있었는데. 근데 정말로 이름을 몰랐어?”
“네, 몰랐어요.”
칼리오페의 답에 호르세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까 말 들어보니까 여러 번 집적거린 거 같던데. 본인 소개도 안 하고 그랬단 말이야? 하도 거절 당해서 본색을 드러낸 줄 알았더니 처음부터 예의가 없었네.”
“글쎄요. 처음에는 소개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 안 나네요. 음, 예의가 바른 인상은 아니었죠.”
칼리오페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뭐야, 왜 기억 못 하는데? 설마 리페한테 고백하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
칼리오페는 순간적으로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어라? 정말인가 보네?”
칼리오페의 반응에 호르세안이 눈이 함지박만 해졌다.
“이거 방심하다간 우리 리페를 다른 놈한테 뺏기겠는걸.”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콧잔등을 톡, 치며 농담을 던졌다.
“쓸 데 없는 건 머릿속에 넣지 말자는 주의라서요.”
칼리오페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변명했다.
“고백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으면 그걸 쓸 데 없다고 말해? 이것이 바로 인기 많은 자의 여유?”
“호세 오라버니……!”
인상을 찌푸리며 볼을 부풀리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호르세안은 결국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너무 귀엽다니까.’
호르세안은 칼리오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가 아차, 하고 살살 쓰다듬었다.
‘에피니나 다른 동생들한테 하듯이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으면 안 되지.’
칼리오페는 불만스레 호르세안을 올려다 봤다가 상냥한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치고 불평을 거뒀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절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마음은 감사하지요. 그런데 아까 그 영식은 제 인생에 쓸모 없는 사람이잖아요. 오라버니는 방금 버린 쓰레기를 일일이 기억하세요?”
그 말에 호르세안이 피식 웃었다.
침착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조곤조곤 상대를 쓰레기라고 부른 이 아가씨를 대체 어쩌면 좋을지.
‘그 점이 사랑스럽지만.’
“확실히 기억하진 않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칼리오페가 “그렇지요?” 하면서 진지하게 마주 끄덕였다.
“이제는 누군지 알아요. 몽에르트 영애가 사촌이라고 했고, 짜증 내면서도 챙기는 걸 보니 왈렌 가의 아이겠네요.”
“그건 기억하는 거야?”
“이건 쓸 데 있는 거니까요.”
“과연.”
호르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루스 녀석이 알면 난리 나겠네.”
그 말에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확실히 루스 오라버니가 아시면…….’
루스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알면 뒤집어질 거다.
벌써부터 환청처럼 귓가에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리페에게 가아암히 뭐? 뭐라고?!]
[그냥 지 혼자 좋아해도 언감생심이란 소리가 나오는데, 좋아하면서 뭐? 이건 명예를 욕보인 거다. 내 검이 어디 있지?]
[전통을 수호하는 귀족으로서 옛 제도인 영지전을 결행하는 것도 좋은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나, 마침 날씨도 좋고 물량도 풍족하니 옛 제도를 부활시키기 딱이겠어요.]
“…….”
이 환청이 헛된 망상이었으면 좋겠는데 현실에 들어맞았으면 들어맞았지, 결코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불안한 마음에 힐끔 호르세안을 올려다 봤다.
“호세 오라버니, 루스 오라버니께는 말하지 마세요.”
호르세안은 자신을 빤히 올려다 보며 초조하게 부탁하는 칼리오페를 보고 장난기가 돌았다. “어쩔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니 칼리오페의 눈망울이 더 반짝반짝해졌다.
“호세 오라버니.”
“데이트 해주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 말에 칼리오페가 작은 입술을 비죽였다.
“호세 오라버니와 데이트하고 싶은 여성분들은 차고 넘칠 텐데요.”
“우리 리페랑은 다르지.”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뺨을 꼬집었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저절로 입매가 풀어졌다.
“오라버니도 참.”
칼리오페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호르세안의 손가락을 떼어내진 않았다. 동생들이 많아서 그런가, 호르세안은 항상 자신을 애 취급했다. 이제 열두 살인데 말이다.
‘하긴 남 말 할 처지도 아니지.’
가족들이 심심하면 자신의 뺨을 꼬집는 것이 떠올랐다.
“하여간 말하지 마세요.”
“음, 뺨을 내주었으니 그럴까.”
호르세안의 말에 칼리오페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호르세안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칼리오페의 뺨에 다시 손이 가려는 것을 참아내야 했다.
그는 웃음을 삼키며 “좋아.” 하고 말했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어쨌든 그 쓰레기는 몽에르트 가와 연이 깊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게 칼리오페의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잖아.”
“그러네요. 얼마 만이지요?”
“어디 보자……. 저번에 에피니와 함께 본 게 마지막인가. 한동안 리페가 두문불출했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살짝 쳐진 호박색 눈동자에 다정히 스민 걱정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칼리오페는 하를레민의 카바레, 베르 루벤스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두 달 전쯤 백악 저택에 간 이후 외출은 모두 아스타레아스와 노래를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별일은요. 항상 활동적일 순 없잖아요? 그런데 호세 오라버니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그대로 말을 돌렸다.
호르세안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더 캐묻지 않고 씨익 웃었다.
“우리 리페 보러 왔지.”
쳐진 눈매가 도톰하게 접히며 달콤한 말이 새어 나왔다.
칼리오페는 마주 미소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와, 들은 척도 안 하기야?”
칼리오페는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호르세안의 능글맞음이야 익히 잘 알고 있다.
호르세안은 쳇, 하고 혀를 차더니 순순히 답했다.
“어머니 심부름.”
짧은 말이었지만 칼리오페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아, 엘피너스 부인께서 요르갈렌 천재의 피아노 연주에 관심 있으시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그래. 원래라면 다른 녀석이 왔겠지만 요르갈렌의 천재님께선 비싼 몸이시라니까.”
칼리오페가 쿡쿡, 웃으며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엔 드물게 장난기가 있었다.
“시간을 들여 비싼 분을 설득할 수 있게 가장 한가한 호세 오라버니가 왔다는 거군요.”
“한가하다니.”
호르세안이 상처라도 입은 듯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한가하다고 말했지만 그가 백룡 기사단 일로 바쁘다는 건 칼리오페도 잘 알고 있었다.
“엘피너스 부인께서 정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후계자인 호르세안을 직접 보낼 정도면 말 다 했다.
“그래, 꼭 일정을 잡아 오라고 하시지 뭐냐. 그렇게 원하시면 직접 오시지…….”
“부인께서 영애들의 살롱에 참석하는 건 조금 그러니까요.”
호르세안은 “뭐, 그렇긴 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이어 말했다.
“그런데 오늘 마침 내가 심부름으로 잘 참석 안 하는 살롱에 나오고, 두문불출하던 리페까지 참석해서 나와 마주치다니. 이건 운명 아닐까?”
호르세안이 슬쩍 얼굴을 기울였다.
결 좋은 흑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호박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그의 얼굴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화하는 미묘한 경계선에 서 있어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칼리오페가 대답할 말을 찾아 입술을 달싹인 순간,
“레이디 칼리오페?!”
등 뒤에서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니 한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칼리오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낯설지만 칼리오페와 호르세안 둘 다 아는 얼굴이었다.
요르갈렌의 천재, 하르첸이 성큼 다가와 칼리오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런 곳에서 뵙다니, 운명이 인도한 게 틀림없습니다!”
호르세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건 내 대사였는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말에 칼리오페가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절 기억하시나요?”
하르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런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는 잊을 수 없지요.”
“저야말로 레이디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줄곧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그의 열렬한 반응에 칼리오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까지 꽉 잡힌 손이 어색했다.
그 모습에 하르첸은 정신을 차렸다.
“아……. 실례를…….”
그는 화들짝 손을 뗐다. 당황으로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큼큼, 몇 번 헛기침한 그가 예에 맞춰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흥분을 가라앉힌 모습은 열혈 소년이라기보다는 신경질적이고 싸늘한 인상이었다. 천재 예술가라고 할 때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랄까.
칼리오페는 예에 맞춰 마주 인사했다.
“예, 저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르첸은 반쯤 꿈을 꾸는 느낌으로 반듯하게 인사하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의례적인 인사마저도 노래처럼 들렸다.
그가 두 달 넘도록 제도에 남아있었던 것은 순전히 칼리오페 때문이었다.
크레티안느 피엔테의 살롱에서 처음 칼리오페를 만났을 때 그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제도의 레이디들은 노래하듯 말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됐지만 누구도 칼리오페처럼 말하지 않았다. 남부보다 훨씬 부드럽고 세련된 억양이긴 했으나 칼리오페 같진 않았다.
사람들이 입 모아 노래 부르듯 말한다고 칭송하는 어느 귀부인을 만나도, 가장 인기 많은 오페라 가수를 만나도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봐도 나는 알아볼 수 있어.’
칼리오페에게는 특별함이 있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귀찮은 것을 감수하고 수많은 초청에 응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칼리오페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칼리오페와 만난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아니, 이야기보다는 함께 노래하고 싶었다.
수많은 말이 입속에서 맴돌아 정작 입을 뗐을 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던 칼리오페가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엘피너스 가의 호르세안 경이세요. 백룡 기사단의 기사이시기도 하지요.”
“아, 안녕하세요.”
하르첸의 인사에 칼리오페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예의는 차렸어도 성의가 하나도 없는 인사였다.
“그나저나 레이디. 혹시 노래 해볼 생각은 없으십니까? 레이디의 목소리라면 분명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노래가 나올 겁니다.”
호르세안의 인사는 받지도 않은 채 다급하게 입을 여는 모습에 칼리오페의 기분은 더 저조해졌다. 칼리오페에게 호르세안은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박대하는 게 기분 좋을 리 없다.
하르첸은 그런 건 조금도 알지 못하는지 초조함과 기대가 잔뜩 섞인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칭찬은 감사하나 지금으로선 그럴 계획이 없네요.”
사무적인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하자마자 하르첸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럴 계획이 없다니요! 레이디께선 신이 주신 선물을 썩히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노래해 보세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겁니다!”
“음, 조금 당황스럽네요. 오늘 처음 인사를 나눈 분이 이런 제안을 하실 줄 몰랐어요.”
“이런……. 죄송합니다, 레이디. 두 달 넘게 레이디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만 해서……. 제 마음이 급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솔직한 사과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르첸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지 의아했다.
혹시 베르 루벤스에서 만났나 했지만, 하르첸의 표정과 말을 미루어 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하나에 집중하면 나머지는 안 보이는 타입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르세안에게 무례했던 게 괜찮은 건 아니다.
“그렇게 기대해주신 건 기쁘지만, 사과는 제게만 할 게 아닌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며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을 눈짓했다.
“하르첸 경, 저는 모든 예술의 기본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지요.”
칼리오페의 말에 하르첸은 눈을 깜빡였다.
‘예술의 기본이 사람이라고……? 신이 아니라?’
굉장히 미묘한 기분이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처럼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긁은 곳에 피가 맺혀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호르세안과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몸을 트는 칼리오페를 보고 하르첸은 뻗어 나가는 생각을 갈무리했다.
‘별생각…… 없었을 거야. 그래, 그냥 천재라고 무례하게 굴지 말고 사람에 대한 예를 갖추라는 말을 돌려서 한 거겠지.’
천재라 칭송받느라 인간의 기본 도리도 안 지키냐는.
확실히 자신이 잘못한 건 사실이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아무도 하르첸에게 이런 지적은 하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자기 위주로, 음악만 우선시하며 행동했다.
“제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엘피너스 경. 결코 의도적으로 경을 무시한 건 아니었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르첸 경.”
“잘됐네요.”
생긋 웃은 칼리오페가 호르세안을 쿡 찔렀다. 스케쥴이 많을 하르첸을 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호르세안은 다소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명을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엘피너스 백작 부부의 결혼 기념 파티가 열립니다. 혹시 참석해서 피아노 연주로 축하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글쎄요. 제가 바빠서……. 곧 다시 요르갈렌으로 내려갈 생각이기도 하고.”
사실 내려갔어도 진작 내려갈 예정이었다.
하르첸은 칼리오페를 힐끔 보더니 “물론 안 내려갈 수도 있지만요.” 라고 재빨리 덧붙였다. 만약 칼리오페의 노래가 자신의 생각과 같다면 이대로 제도에 남을 셈이었다.
‘그 짧은 만남 덕분에 악상도 꽤 떠올랐고.’
뮤즈는 곁에 둘수록 좋은 것 아니던가.
“엘피너스 백작 내외께선 명망 높고 존경할 만한 분들이세요. 피아노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시고요.”
“피아노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많지요.”
칼리오페가 옆에서 거들었지만 하르첸은 시큰둥했다. 호르세안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초청에 응하겠다고 하기엔 그의 음악적 자존심이 대단했다. 하르첸은 사적인 잘못과 음악은 별개라고 생각했다.
‘가족 모임 같으니 다른 사람을 초대하지도 않을 거고.’
칼리오페가 간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일단 제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확답을 드릴 수 없군요.”
그 말에 칼리오페는 생긋 웃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오늘 연주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만 이야기를 끝내자는 말에 하르첸은 아쉬워하면서도 물러갔다.
“더 잡아둘 걸 그랬나요?”
칼리오페의 물음에 호르세안이 고개를 저었다.
“더 설득해봤자 금방 마음을 바꿀 사람도 아니더만. 지금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지.”
“그렇죠. 괜히 물고 늘어져서 완벽히 거절당하는 것보다는요.”
호르세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이 별로라는 소리는 듣긴 했는데……. 어머니한테 뭐라고 하지.”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속닥거리는 사이 어느새 살롱이 시작됐다.
호스트인 몽에르트 영애가 주관하는 것을 지켜보던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그런데 몽에르트 영애랑은 그다지 친분이 없지 않아? 리페가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의 살롱에 나오다니 의외인데.”
몽에르트 영애와 칼리오페는 나이대가 맞지 않았다. 오늘 살롱 참석자들도 대부분 그녀의 또래로 칼리오페와는 다소 나이 차가 있었다.
“아까 제가 몽에르트 영애에게 한 말 못 들으셨어요?”
“그거 진심이었어?”
“제가 그렇게 아부하는 성격으로 보였어요?”
“아니, 그건 아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페인데.”
전혀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호르세안을 보고 칼리오페가 웃음을 흘렸다.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은 명성이 있는 만큼 잘 짜여 있고, 그만큼 최신 사조를 살피기 적절했다. 마침 음악이 오늘의 주제이니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참석한 것이었다.
“그러는 오라버니야말로 친구분들과 어울리지 않고 저하고만 있어도 괜찮나요? 몽에르트 영애와도 친하잖아요.”
“친하다고? 그런 거 아닌데.”
중얼거린 호르세안이 에잇, 하고 칼리오페의 뺨을 꼬집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나는 간만에 운명처럼 만난 우리 리페랑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칼리오페가 픽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약간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호르세안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칼리오페는 희게 질린 얼굴로 하르첸을 바라봤다.
물에 들어간 것처럼 주변의 웅성거림이 뭉개져서 들렸다.
하르첸은 긴장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었다. 호의와 기대로 가득 찬, 올곧은 시선.
칼리오페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눈매를 찌푸렸다. 난처한 미소가 하르첸의 얼굴에 떠오른다.
“곤란하시면 괜찮습니다.”
그 말에 답한 것은 칼리오페가 아니었다.
“어머, 곤란하다니요. 하르첸 경의 반주로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영광인걸요.”
몽에르트 영애가 웃으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떻게든 이 살롱을 회자시키겠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몽에르트 영애의 반응에 현실감이 밀려왔다.
살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이길, 노래를 부르길 바라고 있다.
‘안 돼. 내가 노래하면…….’
칼리오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결단의 순간이었다.
* * *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몇 분 전, 칼리오페는 호르세안과 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무거운 화음이 살롱 안에 울려 퍼졌다.
정박자로 내리친 화음 뒤에 따르는 건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터치였다. 칼리오페와 호르세안은 속닥거리던 것도 잊은 채 피아노를 바라봤다.
하르첸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연주했던 사람들과 달리 그의 연주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초절 기교가 필요한 곡은 아니지만, 멜로디 노트를 제외한 음이 굉장히 빠른 데다가 강약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했다.
하르첸은 그걸 여유롭게 해냈다.
연주에 푹 빠진 그의 마른 몸이 피아노 음에 맞춰 흔들렸다. 보랏빛 머리칼이 오묘하게 흐트러졌다.
“훌륭한 연주네요.”
“그러게. 하르첸 경이 유명한 이유를 알겠는걸? 그리고 경쟁도 치열하겠어.”
“그렇겠지.”
주변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칼리오페의 귀에 닿지 않았다.
가슴이 조여들며 뜨거운 고통이 숨을 태웠다.
<비스에게 헌정한 소나타.>
이 아름다운 곡의 부제였다.
[모든 것은 우리의 신, 비스를 위해!]
[비스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는 살 가치가 없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어린애라고 봐주지 마! 악마의 씨앗이다!]
종교의 이름 아래 자행된 학살.
칼리오페는 떠오르는 환영과 환청에 눈을 꾹 감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곡이 아름답고 유려할수록 그때의 악몽과 대비되어 더 괴로웠다.
‘그때도 이 곡이…….’
칼리오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체감으로는 길고 긴 곡이었다. 겨우 연주가 끝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트라우마는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칼리오페는 희게 질린 채 겨우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오늘 제 살롱을 빛내는 곡이었습니다, 하르첸 경. 이런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호스트인 몽에르트 영애가 만족해서 칭찬을 건넸다.
그 칭찬에도 별 반응 없던 하르첸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그렇다면 청이 있습니다.”
“어머나? 경께서 이런 적은 없었다고 들었는데요.”
몽에르트 영애의 눈이 반짝였다. 천재와 관련된 특이한 일은 살롱의 명성에 도움이 된다.
“뭐든 말씀해보세요. 이런 훌륭한 곡에 대한 보답이라면 뭐든 아깝지 않네요. 그렇죠?”
몽에르트 영애의 질문에 사람들이 호응했다.
연주에 앞서서도 긴장을 내비치지 않던 하르첸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칼리오페를 향해 똑바로 말했다.
“함께 합을 맞춰봐도 되겠습니까, 레이디 칼리오페.”
* * *
다시 현재, 칼리오페는 결단의 순간에 서 있다.
살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살롱에 잘 참석하지 않았고, 참석한다고 해도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시문 낭독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날마다 커졌다.
자태가 워낙 고와 사교계의 귀감이라고 불리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이 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 행실만큼 칼리오페가 깊은 소양을 갖추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얕은 교양이 들킬 게 염려되어 여태 나서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이번만큼은 양측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어찌 되었든 진실은 오늘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그 외에 칼리오페에게 별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이 특이한 사건에 자그마한 흥미를 느꼈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손에 잡힐 듯 읽을 수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붙었다.
안전한 길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완벽히 준비한 다음, 편견이 없는 사람들과 신전의 득세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속가를 선보인다.’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연습하며 몇 번이나 이야기했던 것이다.
차에 우유를 타는 것에 거부감이 덜한 사람들한테 ‘나쁘진 않은데.’ 라는 말을 들어야 다른 사람들의 찻잔에도 우유를 타볼 기회가 생긴다.
처음부터 ‘차에 우유를 넣는 것은 최악이야. 미개하다고.’ 라고 거부당하면 다시 우유를 타볼 기회가 요원해진다. 특히 평판이 중요한 귀족 사회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찻잔에 홍차가 가득 차면 우유와 설탕을 넣을 자리가 없지 않은가.
우유를 넣어볼 시도조차 못 한 채, 떠나보낸 기회를 뒤늦게 후회할 것인가?
처음부터 위험을 무릅쓴 결정이었다.
‘위험하다고 해서 피해갈 거였으면, 애초에 속가를 부르겠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산호빛 눈동자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빛을 담은 눈동자였다.
“좋아요.”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것, 성공은 직접 손에 넣는 것이다.
“단, 하르첸 경께서 제가 원하는 곡을 치실 수 있다면요.”
칼리오페는 주사위를 던졌다.
마지막 결정은 시간을 되돌린 자신의 운명에게 맡기고.
* * *
칼리오페의 말에 살롱 안이 술렁였다. 어찌 보면 천재라 불리는 하르첸을 ‘네가 칠 수 있겠냐’고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칼리오페는 그 소란에도 동요하지 않고 살롱 내부를 가로질러 하르첸에게 걸어갔다.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평소와 같이 완벽한 걸음걸이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칼리오페는 부채를 펴 입술을 가리고 하르첸에게 속삭였다.
곡명을 들은 하르첸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실 수 있으세요?”
하르첸은 그제야 왜 칼리오페가 조건을 걸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 또한.
아는 곡이라고 해도 귀족들이 모두 보는 살롱에서 속가를 치는 것은 전혀 다른 각오가 필요한 일이니까.
“……예.”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르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 칠 수 있다.
엘리트 음악도 아니고 서민이 일상을 보내며 콧노래처럼 부르는 노래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멜로디.
하지만 그래서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쳐본 적 있습니다.”
“……!”
하르첸의 고백에 이번에는 칼리오페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하, 하르첸이 눈가를 문지르며 바짝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힘드시면 그만두어도 괜찮아요.”
노래를 부르라는 제안을 한 하르첸에게 화가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락으로 떠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천재라고 불리는 소년의 인생이 한순간에 끝날 수 있으니까.
‘내가 선곡한 것이니 나보단 덜하겠지만, 그래도 화살을 완전히 피할 순 없겠지.’
하루하루 전성기를 갱신하고 있는 하르첸의 앞길에 구덩이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힘드네요.”
하르첸이 속삭이듯 실토했다.
“하지만 당신의 노래라면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다.
“부디 제게 들려주세요.”
은하수 같은 은회색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직시했다. 간절하게, 절박하게.
하르첸은 태어날 때부터 음악가였다. 그건 피에 각인된 축복이며, 또한 저주였다. 그래서 지금도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불나방처럼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음악으로 형상화 시키는 족속이니까.
칼리오페는 그의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첸이 피아노 의자에 자리 잡고 칼리오페는 똑바로 서 청중을 둘러봤다.
‘떨지 마.’
칼리오페는 작게 심호흡했다.
지금보다 카스틸로 공작 부인 앞에서 노래한 게 훨씬 더 떨리고 두려웠다.
정작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순간은 지금인데, 카스틸로 부인의 기세가 워낙 대단해서인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때처럼 떨어서 실수하지 말고…….’
—까지 생각한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 없다.
칼리오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기억해. 떠올려.’
봄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작은 방 안에서 아스타레아스와 둘이 몇 번씩이고 호흡을 맞췄다. 서로가 자아낸 멜로디가 겹칠 땐 하늘 끝까지 닿은 듯한 고양감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칼리오페는 부적처럼 들고 다니는 손수건을 꽉 쥐었다.
[울지 마.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그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응.’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노래했던 것처럼 하면 돼.’
기적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칼리오페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기적이었다.
* * *
반주가 시작되었다.
처음 듣는 음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낯선 노래라서 칼리오페가 그런 질문을 했나?
그리고 그 의아함은 곧 칼리오페가 노래를 시작하고 가사가 전개되면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성가가 아니야……?’
‘설마. 새로운 비유겠지.’
애써 부정했지만 그 부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이건 모독이나 다름없어!’
‘천박하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노래를……!’
‘이건…….’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청아한 목소리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살롱을 가득 메웠다.
가사에 따라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하고 쓸쓸하게 가라앉기도 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희망을 기대한다.
어딘지 가슴을 베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가사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입술이 꾹 다물리고 눈가가 침잠해 내려앉는다.
‘이건, 내 이야기잖아…….’
당장 노래를 중지하라고 했던 사람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던 사람들도 어느새 칼리오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왜지. 왜 눈물이 나지.’
마음 여린 영애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냥 하루를 잘 보내다 하늘을 올려봤을 때 먹먹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고인 빗물에 번진 가로등 빛을 볼 때 쓸쓸해지는 것처럼. 이건 그들의 일상과 그들의 감정과 맞닿아 있는 노래였다.
너무 사소하고 개인적이라서 친구와도 가족과도 나눠본 적 없는 그 순간의 감정.
칼리오페의 노래는 꼭 그들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 그 미묘한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랬구나. 눈 덮인 정원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구나.
그래, 왜 그런지 스스로도 모르지만 말이야. 나도 그랬어. 이해해.
꼭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 * *
칼리오페가 노래를 마쳤을 때, 살롱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람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도저히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실패한 걸까? 역시 원래 계획대로 조금 더 준비해서 괜찮은 사람들을 모아서…….’
칼리오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매끄러운 실크의 감촉이 느껴졌다.
[울지 마.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그 덕분에 칼리오페는 의연하게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분명 무언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처음부터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개 숙인 칼리오페의 작은 등 위로 박수가 내려앉았다.
봄비 같은 박수 소리였다.
베르 루벤스에서 들었던 것처럼 환호성이 섞인 우레와 같은 박수는 아니었다. 다만 잔잔히 내려앉는, 그러나 분명히 마음을 울리는 봄비 같은 소리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제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의 노래였어요.”
“그러게요. 정말 여러모로 상상을 초월했죠.”
“……특이하군요. 다들 부르는 곡을 불렀다면 한순간에 이름을 날렸을 텐데 왜…….”
“아무래도 속가는 천박한데…….”
천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말한 사람을 포함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뜨끔했다.
노래에 공감했다는 것. 자신의 이야기로 느꼈던 것.
그건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았다.
속가는 천박하다고 공식처럼 자동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공감한 것을 천박하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꼭 내 감정을 부정당한 것 같아…….’
하지만 나서서 그에 대해 말하기는 꺼려졌다. 어쩌면 자신이 천박한 취향을 가졌다고 낙인 찍힐 수도 있다.
‘나 대신 누군가가 나서주었으면…….’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살롱은 새로운 문화를 교류하는 장이죠.”
그때 몽에르트 영애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텄다.
“저는 예술과 철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다들 아시다시피 제 살롱은 새로운 사조, 새로운 기법, 새로운 사상에 관한 토론이 유독 많았죠.”
그녀는 생긋 웃으며 칼리오페에게 다가갔다.
“저는 항상 새로운 것을 소개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은 그녀가 이어 말했다.
“오늘 들려드린 노래보다 더 새로운 건 없을 것 같네요. 가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몽에르트 영애는 칼리오페의 손을 꽉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
“루스티첼 영애의 노래야말로 현재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최고의 화두가 아닐까요?”
“……!”
그 말은 소년 소녀들에게 아주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왜 속가는 천시당해야 하는가.
이건 그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단순히 평민들이 즐기기 때문에?
물론 그 이유가 있지만, 이들은 모두 자부심 있는 지식인이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인정해버리면 귀족 사회의 편협함만 시인하는 꼴이다.
이 물음이 화두로 던져진 이상 그들은 천시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야 했다. 학술적인 고민이라고 생각하자 취향을 천박하다고 지적당할 염려도 사라졌다.
‘과연…….’
칼리오페는 방긋 웃으며 살롱을 주도해나가는 몽에르트 영애를 바라봤다.
‘괜히 이 살롱이 유명한 게 아니야.’
몽에르트 영애의 주최 능력은 뛰어났다.
‘이 살롱에서 노래하기로 결정한 건 잘한 선택이었어.’
살롱의 참석자들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해 토론을 즐기는 만큼 탄력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 십 대 소년, 소녀들인지라 호기심이 왕성한 데다가 사고가 유연했다.
‘그리고 기존체제에 대한 반항심도 있지.’
칼리오페는 심도 있는 토론을 하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진지하게 속가의 가치를 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들이 속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지적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그와 동시에 낡은 편견은 점점 희미해졌다.
‘어쩌면 내가 꿈꿨던 세상에 한 발짝 다가간 걸지도 모르겠어.’
조금 가슴이 벅찼다.
* * *
“어땠어요?”
호르세안은 조심스럽게 묻는 칼리오페를 보고 입을 벌렸다. 이런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친 채 슬쩍 묻는 게 어이가 없었다.
‘어땠냐고? 그야—.’
“당연히 최고였지! 우리 리페가 부르는 노래인데.”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데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을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리페 목소리 원래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노래 부르니까 또 다르더라.”
호르세안은 아직도 어딘지 긴장한 칼리오페를 보고 슬쩍 농담을 던졌다.
“예전에 리페한테 노래 불러달라고 했는데 그때 대가성 청탁이라고 거절했잖아. 그럴 만한 노래였어.”
“그걸 기억하고 계세요?”
“우리 리페에 관한 일은 뭐든지 다 기억해.”
호르세안이 가볍게 윙크하며 웃었다.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결국엔 못 말린다는 듯이 마주 미소 지었다.
호르세안은 조용한 칼리오페를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나 감동했어.”
칼리오페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냥 이런 거 저런 거 따지는 거 다 빼놓고. 순수하게 감동했어.”
호르세안은 어쩐지 머쓱하고 부끄러워서 칼리오페를 마주 볼 수 없었다.
“나는 그런 노래에는 기꺼이 박수를 보낼 만하다고 생각해.”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며 뺨을 긁적긁적한 그가 ‘아—’ 하고 눈가를 덮었다.
칼리오페는 부끄러워하는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하시는 말씀이 더 부끄러운 편 아닌가?’
호르세안은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려 칼리오페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신음하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걸?”
호르세안이 열심히 토론하는 사람들을 눈짓했다.
“사람들을 둘러봐. 반짝반짝 빛나지?”
익숙한 주제에 비슷한 토론을 반복하던 사람들은 파격적인 화두에 눈을 빛내며 의견을 나눴다.
“그들에게 불을 붙인 건 너야, 리페.”
호르세안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칼리오페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냥 처음부터 ‘우리 오늘은 속가에 관해 토론해 볼까요?’ 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얼굴을 굳히고 경멸을 내비쳤을 거야.”
호르세안은 확신했다.
“하지만 리페. 네가 노래했기에, 네 노래에 공감하고 감동했기에, 속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했기 때문에.”
호박색 눈동자가 차근히 작은 얼굴에 담긴 오밀조밀한 눈코입을 담았다.
이 자그마한 아가씨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지.
“그냥 네 노래가 좋아서 사람들은 저렇게 눈을 빛내는 거야.”
* * *
“내 살롱을 망치려 한 건가요?”
몽에르트 영애가 물었다.
칼리오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설마요.”
그 반응에 몽에르트 영애는 자기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평판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몽에르트 영애의 살롱을 망칠 이유가 있나요?”
칼리오페의 되물음에 몽에르트 영애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아. 나도 그 정도도 생각 못 하는 바보가 아니야.’
그런데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칼리오페의 행보는 파격적이고 아찔한 구석이 있었다.
“제가 살롱을 망쳤나요?”
몽에르트 영애는 부채를 꽉 쥐었다.
당연히 칼리오페가 답을 알고 당당히 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살롱에서 일어난 일은 가히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망쳤냐니.
‘그 획이 어떤 획이 될지, 아니면 아예 지워질지는 나중의 문제지만.’
그런데 칼리오페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섞여 있었다. 몽에르트 영애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살롱에 폐가 되었냐고.
오늘 살롱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몽에르트 영애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정말 졌다.’
그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작은 레이디에게 당해낼 수 없다.
“아니요.”
고개를 저은 그녀가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봤다.
“레이디 루스티첼.”
살롱이 시작할 때도 이 작은 아가씨에게 매력을 느꼈다.
“제 살롱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자존심을 챙기며 외면했지만 결국엔 이 아가씨에게 매료되었다.
“당신의 용기와 당신의 지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몽에르트 영애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후작의 후계인 그녀는 또래에게도 이렇게 허리를 숙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칼리오페는 그녀보다 더 어렸다.
“몽에르트 영애…….”
인사를 마친 몽에르트 영애는 어딘지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살롱은 지성을 나누며 토론하고 예술을 꽃피우는 곳이죠.”
몽에르트 영애는 조용히 살롱의 역할에 대해 되새겼다.
“어느 순간부터…… 아니, 처음부터 저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살롱은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실제로 살롱의 명성은 그녀에게 꽤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 살롱에서 흘러가는 시류를 보면서, 그 물줄기의 물꼬를 트며 그녀는 그간 경험하지 못한 벅참을 느꼈다.
역사의 어느 한순간에 있다는 감각.
항상 명성과 그로 인한 이익을 생각하는 자신과 달리, 칼리오페는 자신의 안전조차 담보로 걸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 화살이 어디까지 날아갈지, 무엇에 명중할지, 그저 빗나갈지, 무언가의 효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화살을 쏘아 올린 것만으로도 분명 굉장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화살을 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으니까.
“아직 어린 당신이 제게 깨달음을 주는군요.”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고고한 자존심을 세웠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겐 그런 게 의미 없어 보였다. 그래서 몽에르트 영애는 생각보다 편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잠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던 칼리오페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몽에르트 영애. 저는 당신의 야망과 포부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몽에르트 영애가 움찔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내 야망과 포부……? 그게 멋지다고?”
“네.”
거의 혼잣말 같은 말에도 칼리오페는 확신을 담아 힘주어 대답했다.
칼리오페 또한 어찌 보면 야망과 포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흘러가는 미래를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세상을 전복할 비극과 전쟁을 막겠다는 야망과 포부.
몽에르트 영애는 한참이나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서 칼리오페는 잠시 그녀를 기다리다가 그래도 말이 없자 입을 열었다.
“영애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는 오늘 이 자리 덕분에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러니 몽에르트 영애에게 보답을 해도 좋을 것이다.
칼리오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왈렌 가를 경계하세요.”
몽에르트 영애의 동공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다시 거리를 벌린 칼리오페는 의심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웃으며 부채를 펼쳐 들었다.
“이건 왈렌 영식에 대한 사감이 섞인 말이 아니랍니다.”
짧게 덧붙인 칼리오페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판단은 오로지 영애의 몫입니다. 그럼.”
홀로 남은 몽에르트 영애는 멀어져가는 작은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모슬린 치맛자락이 살랑살랑 보기 좋게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린다. 폭탄을 던진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뿐하고 세련된 걸음걸이였다.
칼리오페가 오늘 자신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다고 하나 그뿐이다.
반면 왈렌 가는 이전부터 자신의 후작 위 계승을 돕고 있었다. 왈렌 가의 지지가 사라지면 지금 자신 쪽으로 기울어진 추가 다시 균형을 되찾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사촌인 왈렌 영식은 칼리오페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그런 상황에서 왈렌 가와 자신을 이간하려 한다니.
‘보통이라면 귀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
그런데 신경이 쓰였다.
[이건 왈렌 영식에 대한 사감이 섞인 말이 아니랍니다.]
칼리오페가 그렇게 단언하기 전부터 몽에르트 영애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왈렌 가를 경계하라고 말하는 칼리오페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명백히 순수한 호의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연기라면 칼리오페는 가수가 아니라 배우에 더 적합한 재능을 타고 난 것이리라.
‘그럴 아이는 아니지.’
살롱에 폐를 끼쳤는지 걱정하던 상냥한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경계하라는 말만 듣고 움직이기엔…….’
고민하는 그녀의 귓가에 아까 칼리오페가 했던 말이 다시금 울렸다.
[몽에르트 영애. 저는 당신의 야망과 포부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다들 욕심이라고 말했다. 권력욕이 가득 들어있다고. 후계자 싸움 때문에 가문이 백작가인 로아힌보다 뒤처지게 되지 않았냐고. 왜 큰 그림을 보지 못하냐고 그랬다.
‘하물며 날 지지하는 왈렌 자작조차 욕심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했지.’
그녀가 후작을 목표로 하는 것에 대해 야망이나 포부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멋지다고 한 사람 또한.
‘독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아무도 자신이 후작이 되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어떤 꿈을 품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린 레이디는 알아본 것이다.
‘……왈렌의 뒷조사는 해봐야겠어.’
* * *
“이야기는 다 끝났어?”
“네.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 리페를 기다리는 건 오히려 내 기쁨인걸.”
호르세안은 “내 기쁨을 빼앗지 말아줘.” 라고 속삭이며 칼리오페의 콧잔등을 톡, 쳤다.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살롱을 떠나려 하는데,
“저어, 레이디 칼리오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인기 많네, 리페.”
호르세안이 놀리듯 중얼거렸다.
조금 전에도 떠나려던 중에 몽에르트 영애가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따로 봤던 차다.
뒤돌아보니 하르첸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호르세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한 칼리오페와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어머니가 피아노 음악에 관심이 많은 만큼, 그는 하르첸의 잡다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신경질적이고 오만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구체적인 일화까지 들었는데, 호르세안은 그걸 그저 ‘신경질적이고 오만하다’라고 말하는 건 굉장히 온건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드세요, 경.”
하르첸이 허리를 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칼리오페가 말했다.
칼리오페의 올곧은 산호빛 눈와 마주한 하르첸의 은회색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하르첸에게는 음악이 전부였다. 그의 가치는 그것으로 인정받았고, 그 스스로도 자신의 가치를 음악으로 규정했다. 하르첸에게는 음악이 모든 것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은 전부 허용되었다.
사람들도 그를 그렇게 대했다. 천재들은 원래 괴짜 같은 면이 있지, 신경질적일 수도 있지, 하며.
“레이디께 실례라는 생각을 못 했다면 너무 한심한 변명이겠죠.”
하지만 사실이었다.
음악이 그의 삶을 구원했다. 그의 정신뿐만 아니라 생활도 구원했다. 가난한 남작 가의 셋째 아들이었던 그가 한순간에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칼리오페가 노래하는 것은 위대한 음악을 위한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좋아할 것이라고, 난처함을 읽긴 했지만 결국 그녀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칼리오페 역시 노래를 해서 명성을 얻게 되면 좋을 테니까.
오만한 예단이었다.
칼리오페가 속가를 부르겠다고 한 순간, 그는 그것을 깨달았다. 엘리트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기에, 귀족 사회 예술의 선두에 서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제 모자람이 결국 레이디께 폐를 끼쳤습니다.”
가만히 하르첸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제게 미안하다면 부탁 하나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세요.”
“엘피너스 부인의 결혼 기념 파티에서 연주해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가장 빨리 반응한 사람은 하르첸이 아니라 호르세안이었다.
“리페!”
드물게 진지한 얼굴을 한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받아야 할 정당한 사과를 나 때문에 이런 식으로 쓰지 마.’
호박색 눈동자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부드럽게 호르세안의 팔을 토닥였다.
“오라버니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제 기쁨이에요.”
생긋 웃으며 말한 그녀가 이어서 “부디 제 기쁨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하고 작게 속삭였다.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앙큼한 모습에 호르세안은 말을 잃었다.
“거기에 저도 엘피너스 백작 내외의 결혼 기념을 축하해드리고 싶은걸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호르세안은 말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하르첸이 억지로 칼리오페에게 노래시킨 걸 이런 식으로 무마하게 되는 건…….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항시 부드러웠던 호르세안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띠고 하르첸에게 향했다.
“마지막에 노래하겠다고 결정한 건 저예요.”
칼리오페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고개를 저었다.
“다소 난처하고 불쾌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마무리되었으니 괜찮아요.”
“레이디를 난처하고 불쾌하게 만든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날카로운 시선은 거뒀지만, 호르세안은 정중한 신사처럼 사과하는 하르첸이 탐탁지 않았다.
‘저게 사과하는 건 누구도 보지 못했다던데 리페 앞에서 내숭은…….’
“그렇게 미안하시면 엘피너스 저에서 최고의 연주로 축하해주세요.”
생긋 웃으며 가볍게 말한 칼리오페가 진지한 눈으로 하르첸을 바라봤다.
속가를 연주하는 것은 하르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앞길에 가시밭이 펼쳐질 수 있는데 그는 연주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마음의 준비를 계속 해왔던 칼리오페보다 그가 훨씬 더 각오를 다졌어야 했으리라. 무슨 심경에서 가시밭을 선택한 건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어요.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부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 그렇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칼리오페의 말에 하르첸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그럼 또 노래하실 거란 말씀입니까?”
“네.”
그 간결한 대답에 하르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입술이 떨리며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 * *
“뭐, 뭐야, 이건……. 너네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눈을 가린 채 손이 등 뒤로 묶인 소년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날 건드리면 모, 몽에르트 후작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허세를 부리지만 그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 도, 돌려 보내주면 모르는 척해줄 테니까 어, 어서 풀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소년이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할 무렵.
“왈렌 영식.”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
왈렌 영식은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에게 말을 건 상대는 바로 앞에 서 있었으나 눈이 가려져서 볼 수 없었다. 흥분과 두려움에 자신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이 오감을 더 궁지로 몰았다.
“누구냐고!”
겁에 질린 그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글쎄, 누굴까.”
여전히 여유롭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놀리는 것 같아서 왈렌 영식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왈렌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도 이러다니……!”
손을 움직이려 했으나 의자에 뒤로 꽉 묶여 있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굵은 밧줄이 손목을 파고들어 고통스러웠다. 처음으로 겪는 아픔에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내 뒤엔 몽에르트 후작가가 있어!”
겁먹은 것을 숨기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두려운 와중에도 왈렌 영식은 희망을 가졌다. 상대가 자신이 귀족인 걸 알면서도 납치한 건 의외였지만, 그래도 몽에르트 가의 위명을 들었으니 당장 소스라치게 놀라 혼비백산할 것이다.
‘묶었던 것을 풀어주며 몰라 봬서 죄송하다고 넙죽 엎드리겠지.’
그러면 감히 자신에게 고통을 준 대가를 치르게 하면 된다.
“그래서?”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아무 동요도 없는 매끄러운 질문이었다.
“뭐, 뭐?!”
“뒤에 누가 있든 무슨 상관이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 되지 않는데도 몸이 의지를 벗어난 것처럼 덜덜 떨렸다.
“네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하면 다 끝인데.”
남자의 목소리는 그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작고 온유했다.
깃털이 내려앉는 것 같은 다정한 속삭임. 그러나 사뿐사뿐 내려앉던 깃털은 지면에 닿은 순간, 폭탄으로 변했다.
왈렌 영식은 부들부들 떨었다.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식은땀이 미칠 듯이 솟으며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멍청하고 눈치 없는 그라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알아들었다.
저 남자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죽으면 끝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날 죽이면 몽에르트 가가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든가, 사건이 커지면 수습하기 힘들 것이라든가. 그런 것들은 저 남자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말해봐야 아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래서?’ 라는 답만 돌아오겠지.
그 말대로다.
남자가 후에 어떻게 되든, 처벌을 받든, 비참하게 복수 당하든.
‘죽으면 끝.’
덜커덩—!
왈렌 영식이 앉은 의자가 요란스레 소리를 냈다.
손목을 파고드는 밧줄의 고통조차 생경한 그에게 생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현실적인 공포가 드리웠다.
그가 강하게 몸부림칠 때마다 의자가 덜컹덜컹 바닥을 긁었다. 밧줄이 쓸려 손목이 벌겋게 부어오르고 종래에는 피가 났지만, 왈렌 영식은 깨닫지 못했다. 팔이 빠질 것 같은 것도, 손목이 부어올라서 밧줄이 더 파고들고, 그 때문에 밧줄이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는 것도.
죽음의 공포 탓에 날카로운 아픔만 선명하게 느끼고 왜 그런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은 더 공포를 부추겼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눈을 가린 천이 축축하게 물들었다.
“제발……! 뭐, 뭐든지 할게요.”
떨리는 입술 사이로도 추하게 침이 새어 나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앞에 서 있던 남자, 아스타레아스는 버러지처럼 빌빌거리는 왈렌 영식을 내려다 보았다.
유리 공예처럼 새파란 눈동자는 무기질적이었고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은빛 머리칼이 사르륵 그의 이마를 간질였다.
아스타레아스는 정말로 궁금했다.
이런 주제에 어떻게 그녀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버러지는 버러지답게 태양 앞에 못 나가고 썩어들어가는 그림자 속을 기어야 하지 않는가?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저 홀로 공황 상태에 빠진 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푸른 눈동자 속 동공이 확 좁아 들었다.
이딴 새끼가 칼리오페에게 추근대며 괴롭혔다는 게 떠오르자 살의를 주체할 수 없었다.
뻐억! 쿠당탕!
“아아아악—!”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비명을 지르는 왈렌 영식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봐도 하나도 통쾌하지 않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다.
아스타레아스가 의자를 차서 쓰러트린 바람에 의자 등받이 뒤로 손이 묶여 있던 왈렌 영식은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단단한 돌바닥에 얼굴을 찍힌 왈렌 영식은 그대로 콧대가 나갔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얼굴이 갈린 것은 덤이다.
아스타레아스는 부들부들 떨며 실성한 사람처럼 뭐라 웅얼거리는 머리통을 지그시 밟았다.
“시끄러워.”
“흐으, 끅, 크으윽…….”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왈렌 영식은 입을 다물려고 노력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칼리오페가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절대 칼리오페가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다는 점.
늦봄이라 칼리오페는 무릎까지 오는 미니 드레스를 즐겨 입고 있었다. 카메라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담는가 하면 드러난 종아리를 집요하리만큼 많이 찍었다.
파사삭, 아스타레아스의 손에서 사진이 구겨졌다.
푸른 눈동자가 눈물과 콧물, 그리고 피가 뒤범벅된 흉측한 얼굴을 형형하게 바라봤다.
최근 칼리오페는 외출을 자제했지만 아스타레아스와 노래 연습을 하기 위해 나오는 것은 예외였다.
그때 아스타레아스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서 조사해서 나온 게 바로 왈렌 영식과 이 사진이었다.
‘게다가 오늘 몽에르트 가의 살롱에서 일이 있었다고 했지.’
카스틸로 가는 정쟁에 능한 가문이었고 당연히 정계를 이끄는 다른 가문들에 눈과 귀를 심어놨다.
아스타레아스는 수트 재킷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드러난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물체가 들려 있었다.
흠칫.
왈렌 영식은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에 숨을 멈췄다.
‘카, 칼……!’
뼛속까지 시린 감촉에 몸이 절로 경직됐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입안이 바싹 말라붙었다.
“푸하하하하!”
갑자기 들린 웃음 소리에 왈렌 영식이 숨을 삼켰다. 목덜미의 나이프 때문에 감히 움직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와, 이거 정말 걸작인데요? 푸흡! 바지에 오줌 싼 귀족 영식이라니……! 신문에 제보하면 1면에 나겠어요.”
유쾌하고 쾌활한 목소리였다. 이전에 들었던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과는 또 다른 사람이다.
왈렌 영식은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바지에 오줌 싼 귀족 영식이라고……?’
한 번 머릿속에서 들은 말을 되뇌자 그제야 바지가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는 계속되었다.
“아이고 배야. 너, 너무, 푸흡! 흐하하학, 아, 너무 웃었더니, 크흡. 흠흠.”
애써 웃음을 갈무리한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몽에르트 가를 등에 업은 우리 대~단하신 왈렌 영식께오선 펜을 무서워하는 건가요?”
펜?
왈렌 영식의 입이 벌어졌다.
‘펜이라고?’
목덜미에 닿고 있는 이 감촉이 나이프가 아니라 펜이라고?!
“어이쿠, 오줌 밟을 뻔했네.”
중얼거린 남자가 아직도 빙글빙글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그러고 보니 무식한 사람은 펜을 무서워한다던데. 딱 그런 건가 보네요.”
분노와 수치가 아픔과 두려움을 이겼다.
“나, 나를 감히……!”
왈렌 영식이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땅에 처박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의자 등받이 뒤로 손이 묶여 있어 바르작거릴 뿐이다.
아스타레아스는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펜을 뗐다.
더 날뛰기 시작하는 왈렌 영식의 턱 밑에 쿡, 만년필 펜촉을 찔렀다.
우뚝.
그대로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왈렌 영식의 몸이 굳었다.
“푸하하하하하! 방금 겪고도 또……! 펜이 그렇게 무서워쪄요? 그래쪄요?”
“나,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펜이라는 걸 알게 된 왈렌 영식이 사납게 소리치며 날뛰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다시 펜을 떼고 펜촉으로 목덜미를 눌렀다. 그렇게 날뛰던 게 거짓말처럼 왈렌 영식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스타레아스의 푸른 눈동자에 경멸이 스쳤다.
펜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받고, 발끈해서 외쳐도 이렇게 다시 농락당한다. 혹시라도 이번에는 나이프일까 봐.
쉽게 겁에 질리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그걸 이겨낼 한 줌의 용기조차 없는, 이토록 비루하고 너절한 자가.
‘감히 그녀를…….’
펜을 잡은 손에 콱 힘이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만년필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몇 번 그런 사건이 있었다. 목덜미 경동맥 펜이 박혀 죽은 사람들.
아스타레아스에겐 그럴 힘이 충분했다.
그때, 러그윈이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잡았다.
“…….”
천천히 손에 힘을 빼는 아스타레아스를 보고 러그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예 족치면 안 되지.’
아스타레아스의 싸늘한 눈이 왈렌 영식을 훑었다.
* * *
잠시 후, 왈렌 영식은 눈을 떴다.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은 사라지고 손도 풀려 있었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다가 격통에 그는 몸을 말았다.
“이, 씨발……. 이 새끼들 가만히 안 둬.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신음하며 바르작거리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담겼다.
손바닥만 한 통신석과 고급스러운 메시지 카드 한 장.
[잘 찍히지 않았어? 다들 좋아할 거 같아.]
메시지 카드를 읽는 순간 왈렌 영식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통증도 잊고 서둘러 통신석을 조작했다.
이윽고 하얗고 맑은 빛이 어두운 방 안에 퍼져 나왔다.
떠오른 영상에는 상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미친 듯이 발작하고 울며 빌기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았지만 그게 애원이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왈렌 영식은 충격을 받았다.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무섭고, 아프고, 두렵고, 고통스럽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는데.
상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혼자 빌빌거리며 비는 모습이 추하기 그지없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대가 의자를 발로 차서 쓰러트린 뒤는 가관이었다.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만년필을 목에 대었다 뗄 때마다 화를 내다가 쫄아서 바짝 어는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만년필에 실금했다는 것이다.
영상은 친절하게도 푹 젖은 바지와 바닥에 흥건한 액체를 자세히 찍었다. 만약 이 모습이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면 왈렌 영식은 아주 시원하게 웃어 젖혔을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관심을 가졌을 게 분명하다. 뉘 집 자식이길래 이러냐고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으며 비웃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상의 주인공은 왈렌 영식 자신이었기에.
광대같이 우스꽝스럽고 버러지같이 추한 게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었기에.
“젠장, 젠장, 젠장!”
왈렌 영식은 바닥을 쾅쾅 치며 절규했다.
감히 배후를 찾을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절대로 이 영상을 남에게 보일 수 없다는 생각과 두려움뿐.
* * *
“그런데 통신석을 두고 오면 단서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시종, 러그윈이 아스타레아스에게 모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통신석을 이렇게 협박용으로 쓸 수 있다면 재력도 지위도 상당하다는 뜻이다. 그것만으로 배후를 찾는 건 불가능하지만, 어찌 됐든 물망을 좁힐 순 있다.
“괜찮아. 그 통신석을 숨기기에 급급할 테니까. 아니면 아예 파괴할 수도 있고.”
아스타레아스는 왈렌 영식 같은 부류를 잘 알았다.
“몽에르트의 후계에게 정보를 흘려.”
“왈렌 가에 대한 정보 말이죠.”
아스타레아스는 희미하게 미소 짓곤 마차에 올라탔다.
마음 같아선 칼리오페를 스토킹하고 도촬까지 한 왈렌 영식을 그냥 죽여버리고 싶었다. 특히 칼리오페가 찍힌 사진을 보고 있으면 살심이 한없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자신의 흔적을 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아서 처리되겠지.’
몽에르트의 후계인 여자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몽에르트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오늘 살롱에서 있었다는 일이 떠올랐다.
‘리페가 훌륭한 결단을 내렸어.’
설마 그곳에서 예정에도 없던 노래를 부를 줄은 아스타레아스도 짐작하지 못했다.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그 흐름을 자신의 쪽으로 휘어잡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쓴 용기와 철저한 계산이 필요하다.
둘 중 어느 한쪽도 빠지면 안 된다. 철저한 계산이 빠진 용기는 만용일 뿐이고, 아무리 계산을 해도 용기가 없으면 때를 놓치기 마련이다.
‘한순간에 그런 결정을 하는 사람은 정말 흔치 않지.’
그 과단성 있는 결정에 아스타레아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풍랑에 배가 뒤집힐 것을 예상하면서도 돛을 폈다.
그리고 기적과도 같이 배는 폭풍을 뚫고 순항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롯이 칼리오페의 능력이었다.
상황에 밀려 무턱대고 부르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살롱의 분위기를 읽고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 배팅한 것이다.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칼리오페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순간을, 편견을 감탄으로 바꾸는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베르 루벤스에서 불렀던 건 좀 다르니까.’
반주자로 함께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와 그녀가 가깝다는 것을 세간에 알릴 순 없으니까.
그래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무위로 돌아갔다. 조금도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잘한 결정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저조했다.
‘……사실은.’
그 역시 칼리오페와 함께하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녀 옆에 서서 서로를 지탱하고 싶었다. 그가 자아내는 피아노 음률과 그녀가 자아내는 노랫가락이 섞여드는 것을 사람들에게 당당히 내보이고 싶었다.
봄 잔디밭에 돋아난 연한 새순같이 보드랍고 간지러운 소망.
이런 식의 소망은 그로서는 정말 드문 것이라 아스타레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온갖 것을 다 보았는데도 여전히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건 칼리오페가 있기 때문이다.
‘하르첸이라…….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기억 속에서 곱상하게 생긴 보랏빛 머리의 소년을 끄집어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이 나서지 못하는 만큼, 공식적인 반주자 자리에 제대로 된 반주자를 붙여줄 생각이었다.
‘여성 반주자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스스로가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춰서 러그윈이 마차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레아스 님.”
마중 나온 집사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전보가 와 있습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레이디 루스티첼로부터입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 당장 확인하지.”
아스타레아스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전보부터 확인했다.
편지가 아니라 칼리오페의 단정한 필체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그녀가 얼마나 빨리 그에게 사건을 전하려고 했는지가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전보 길이와 수신 시간을 봤을 때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저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전보를 보낸 것이리라.
전보 내용은 대부분이 상세한 상황 설명이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아무 것도 모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작에게 말을 듣는 것과 이렇게 그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아스타레아스는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집중해서 전보를 읽었고, 어느새 그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때 칼리오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침착한 그녀답게 다 적어 내리지 않았지만, 행간에서 그 흔적이 느껴졌다.
칼리오페가 직접적인 언어로 남기지 않은 마음을 마침표와 마침표 사이에서 발견해내는 것은 마치 보물을 찾는 것처럼 즐겁고 놀라운 일이었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남긴 한 글자, 한 글자를 깊게 음미했다.
보고의 끝에는 망설임이 남은 질문이 있었다.
[공자님 성격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서운하세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은 것에 아스타레아스는 흠칫했다.
그녀 역시 그를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도 조금쯤은 섭섭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그에게 물은 것일까.
[제가 괜한 말을 한 건 잊어주세요.]
수줍음이 느껴지는 마지막 문장에 아스타레아스는 미소 지었다.
전보가 온 것만으로도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좋아졌다. 그녀 역시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것에.
예의 바른 그녀에겐 함께 연습한 사람을 챙기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서운했냐는 말에 섭섭했던 게 바로 사라지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솔직하게 서운하다고 말한다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달래줄까. 달래준다면 어떻게 달래줄까. 그런 면에서조차 너는 성실하겠지.
하지만 현실에선 솔직하게 서운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할 수 없으리라.
네 편지 하나에 그 서운했던 게 다 풀렸다는 말도.
네게는 숨겨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
그러나 상상만큼은 자유였다. 그리고 그 상상은 안타까운 만큼 달콤했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