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백악의 귀부인
칼리오페는 심호흡하며 거대한 저택을 바라봤다.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만큼, 루스티첼 저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제국의 흰 날개’라 불리는 루스티첼의 명성에 걸맞아 몇 번이나 취재요청이 왔을 정도다.
그러나 그조차 눈앞의 이 고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칼리오페 아가씨.”
칼리오페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집사를 바라봤다.
‘환대받을 줄은 몰랐는데…….’
풋맨이 열어줄 줄 알았다.
‘진짜 환대인지는 좀 지나봐야 알겠지만.’
이윽고 결심을 마친 그녀는 발걸음을 떼 돌계단을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저택의 백악 계단을 밟고 싶어 한다.
이 백악 계단은 제국에서 발굴한 화석 중 가장 오래된 화석으로 만든 것이다. 한때 황궁의 일부였지만, 유스키리안 황제가 카스틸로 공작가를 치하하며 하사했다.
이 저택의 주인, 카스틸로 공작가는 가장 오래된 화석에 걸맞은 가문이었다. 전통과 계보는 황가만큼이나 길었고 귀족 중 가장 황실의 피가 짙기도 했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칼리오페는 집사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카스틸로 저는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가와 거리를 두려고 했으니 더더욱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생각이 변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칼리오페 본인이 먼저 카스틸로 공작 부인과의 만남을 청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연통을 넣겠지만……. 카스틸로 부인께서 거절하실 수도 있어.]
칼리오페의 부탁에 서모나 부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말이 거절하실 수 있다는 거지, 거의 99% 거절할 거라는 뉘앙스였다.
실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다정한 눈동자에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전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정말이었다. 칼리오페 또한 카스틸로 부인이 허락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바늘에 구멍이 있으니 한 번 실을 찔러보겠다는 심산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실이 바늘 구멍에 들어갔다.
“마님께선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가 아름다운 문양이 음각된 문을 열어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칼리오페는 생긋 웃어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묵례한 후 문을 닫는 집사의 눈동자에 이채가 띄었다.
‘내로라하는 귀부인들조차 마님과 독대할 때 긴장을 감추지 못하거늘…….’
아직 어린 소녀가 그에게 감사를 전할 여유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 * *
“안녕하세요, 카스틸로 공작부인.”
칼리오페가 시선을 내리깔며 곱게 치맛자락을 펴곤 인사했다. 예법의 교과서라고 불릴 만큼 고아한 자태에는 누구나 감탄했다. 칼리오페에게 적개심을 갖는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감탄이 부정적인 감정을 더 키웠을 뿐.
하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아무런 반응 없이 메마른 목소리로 칼리오페를 불렀다. 낯선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듯.
“칼리오페 루스티첼.”
“네. 편히 칼리오페라고 불러주세요, 공작부인.”
카스틸로 부인은 예의 바르게 답하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노회한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 시선을 받았다.
‘할 수 있어.’
칼리오페는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스스로를 독려했다.
두 손을 꽉 맞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노래를 사교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이 분께 인정받아야만 해.’
* * *
한 달 전,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 덕분에 무탈하게 하를레민에서 돌아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자숙하는 의미로 한동안 외출을 자제했다.
당연히 바이엘에게는 날이 밝자마자 전보를 보냈다. 자신은 잘 돌아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바이엘의 안부를 물었다.
바이엘 역시 무사하다는 말에 칼리오페는 안도했다. 그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무사한 걸 확인하고 싶었지만, 칼리오페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었던 직후, 하를레민과 연이 닿아있는 그녀와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쓸데없는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다.
바이엘 역시 그렇게 말해 와서 두 사람은 전보로만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귀족들 앞에서 노래하기 전에 우선 최고위 귀족의 반응을 보는 건 어떨까요.]
한마디로 위험 부담을 낮추기 위해 테스트를 해보라는 거였다.
칼리오페는 동의했고 적당한 최고위 귀족을 찾았다.
후작가 이상인 귀족은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제도 내에 머물고 있는 경우는 더 그랬다.
로아힌 부인은 고위 사교층의 일원이지만, 계급으로 따지면 백작 부인이다. 그런가 하면 몽에르트는 후작가이면서 백작가인 로아힌보다 권세가 약했다.
칼리오페는 까다로운 기준으로 선별한 귀족들 가운데 자신에게 호의적인 자들과 적대적인 자들을 제외했다. 선입견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왕이면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좋겠다고 생각하니 남은 건 몇 안 되었다.
그중 하나가 카스틸로 공작부인이었다.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공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전통적이고, 오래된 가문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비할 수 없이 고절한 식견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카스틸로 공작부인의 안목을 무시하지 못한다.
‘원래라면 카스틸로 공작가를 피했겠지. 테스트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카스틸로 공자와 처음 마주쳤을 때, 엮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처럼 피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노래하기로 했으니까.’
칼리오페는 자신의 노래가 몰고 올 파란을 예감했다.
몸을 사리기 위해 카스틸로 공자를 피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더는 피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그녀는 기묘한 해방감을 맛보았었다.
칼리오페는 말없이 공손한 태도로 카스틸로 부인을 응시했다.
카스틸로 부인 역시 가늠하듯 그녀를 마주 봤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칼리오페의 일거수일투족을 뜯어보고 있었다.
‘초조함에 이야기를 꺼내지도, 불편함에 과하게 반응하지도, 긴장감에 얼어붙지도 않는군.’
앉으라는 소리조차 없이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쓸데없이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호의가 가득하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도 아니다. 깊은 우물처럼 고요하고 맑게 미소 지을 뿐.
‘그러고 보니 편하게 칼리오페라고 부르라고 했지.’
보통 카스틸로 부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덮어놓고 애칭을 말한다. 친근함과 호의를 표하는 사교 언사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부인의 태도에서 기민하게 그런 기색을 읽어내고 거리감을 지켰다.
‘이야기는 들어볼 만하군.’
“일단 앉지.”
“감사합니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쫓기진 않은 건가.’
백악의 귀부인은 알현 요청을 받아들여도 상대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자리도 안 내주고 내쫓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 나를 만나고 싶어 했다고?”
카스틸로 부인은 차 한 잔 내주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시하는 처사였으나 칼리오페의 미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듣지.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정확히는 내게 시간을 할애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거겠지.’
칼리오페는 속으로 심호흡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로 “제 노래를 들어주세요.” 라고 말할 순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공작 부인께서는 사리에 밝으시고 미학과 신학에—.”
“본론만.”
카스틸로 부인이 칼리오페의 말을 싹둑 잘랐다.
칼리오페는 철렁한 가슴을 담담한 얼굴로 숨겼다. 딱히 찬사를 늘여놓아 금칠을 해주려던 건 아니었다. 예술에 관한 운을 뗀 것뿐이지.
‘하지만 제게 할애할 시간이 그렇게나 없으시다면.’
칼리오페는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 본론도 못 꺼내고 쫓겨나는 건 피해야 하니까?
곧 그녀는 생각을 접었다.
승부를 내야 할 때는—.
“저는 신전이 제국을 지배하는 현 상황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감하게.
* * *
처음으로, 카스틸로 부인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겉으로 드러난 동요는 짧았지만 동요는 동요였다.
“신전이, 제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예, 공작 부인.”
“어려서 어리석은가, 아니면 두려움이 없는 건가. 아주 맹랑한 소리를 하는구나.”
카스틸로 부인의 목소리엔 노기마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예의에 맞춰 고개를 살짝 숙였을 뿐이다.
이런 반응 정도야 폭탄을 던질 때부터 예상했다.
“이 제국을 아우르는 군주는 황제 폐하이시네. 그런데 폐하를 두고 신전 따위가 제국을 지배한다고?”
“군림이 지배와 같은 의미는 아니지요.”
차분한 대답에 카스틸로 부인은 멈칫했다.
‘저 나이에.’
황록색 눈동자가 예기를 띄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노회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칼리오페가 ‘신전이 제국을 지배하고 있다.’ 라고 말했을 때부터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화를 낸 것은 칼리오페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었다.
‘군림은 지배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라…….’
명달한 노부인은 그 한 번의 시험으로 많은 것을 읽어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톡톡, 노부인이 검지로 가볍게 팔걸이를 두들겼다. 어떻게 안 것인지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왔다.
“차를 내오게.”
담백하지만 묵직한 말이었다. 칼리오페를 자신의 손님으로 대하겠다는 말.
칼리오페는 번지는 미소를 애써 속으로 갈무리했다.
잠시 후, 훈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칼리오페 앞에 놓였다. 딸기 타르트도 함께.
‘딸기 타르트?’
칼리오페는 의아함에 디저트를 쳐다보았다.
다섯 살, 딸기 타르트를 좋아한다고 한 번 말했다가 오만 데에서 선물 받은 전적이 있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칼리오페가 딸기 타르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좋아하기도 하지만.’
손님의 입맛에 맞춘 디저트는 호의의 표시. 그러나 카스틸로 부인이 그렇게 신경 썼을 것 같진 않다.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했으면 자리에도 앉히지 않고 내쫓을 기세였는걸.’
의문은 곧 풀렸다.
“레아스 님.”
카스틸로 부인의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 공자인 그가 서 있었다.
“제가 아는 손님이 와 계신다고 해서 들렀습니다만, 실례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아는.
카스틸로 부인은 그 말에 다소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아스타레아스가 저렇게 말한 이상 그의 얼굴을 봐서라도 칼리오페에게 박하게 굴 순 없었다.
‘레아스 님이 직접 냉대하지 말라고 청하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다과를 내온 시점에서 칼리오페를 카스틸로 가의 손님으로 대할 생각이긴 했다.
“공자님.”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오페가 아스타레아스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아스타레아스는 살짝 묵례하고 칼리오페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두 분께선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 중이었습니까?”
“아주 재미 난 이야기였지요.”
“할머님께서 재미 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정도라니, 저도 참 궁금하군요.”
카스틸로 부인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황록색 눈동자는 홍채 안쪽의 황색이 짙어 이렇게 반짝일 때면 노란 눈동자로 보이기도 했다.
“신전이 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였답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결국.’
칼리오페가 하를레민에 있는 카바레까지 가서 노래를 듣고 부를 일이 뭐가 있나 싶었다. 그날 그는 빠르게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해냈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타레아스는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저에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이 입안에서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이 굴렀다.
루스티첼 가는 안 좋은 쪽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네게 다가가지 않은 것인데.’
속가는 분란을 만들기 가장 좋은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입안에 굴러다니는 말을 삼켰다.
그는 칼리오페의 뜻을 존중했다. 그녀의 고결한 정신을.
‘네가 가시밭길을 가겠다면.’
터콰이즈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응시했다.
‘내가 그 가시를 치워주면 돼.’
자신의 손이 가시에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로 물드는 것은 상관없다. 걸음을 내딛는 칼리오페의 하얀 발이 깨끗하다면.
아스타레아스는 싱긋 웃었다. 여름철 시냇물처럼 맑고 시원하고 차가운 미소였다.
“정말 재밌는 이야기군요.”
그의 미소에 칼리오페는 왜인지 모르면서도 흠칫 놀랐다. 그녀가 이유를 찾기 전에 아스타레아스가 말을 이었다.
“영애가 굳이 카스틸로에게 그 말을 꺼낸 이유가 있겠지요.”
이제 정말 본론을 꺼낼 차례다. 칼리오페는 긴장했지만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귀족 문화가 어떤지부터 시작해서 신전의 리브살어 제한 계획과 그에 따른 예상 결과까지.
카스틸로 부인은 ‘고작 글 몇 줄과 그림 몇 장, 노래 몇 소절로 귀족들이 움직인다고.’ 라고 코웃음 치지 않았다.
문화는 때론 성문화된 법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정서란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사람을 움직인다.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겪는 것이 그 사람을 형성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적으로 문화를 사용하기도 하고 말이지.’
우민화 정책에는 문화 전략이 반드시 들어간다. 반대로 시민이 성숙할 때도 발전된 지식과 동시에 그에 걸맞는 문화가 필요하다. 대중 지식과 시민 문화의 균형이 맞지 않을수록 사회는 삐거덕거린다.
그만큼 문화는 사람에게 중요하고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걸 ‘고작’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한 채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무서운 점이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그것이 문화의 가장 대단하고 무서운 점이었다.
카스틸로 부인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놀랍구나.’
무표정한 얼굴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감탄 중이었다.
은사철나무 기둥(제국의 최고 의결 기관을 뜻하는 말. 회장 기둥에 ‘지혜’를 뜻하는 은사철나무가 음각되어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에서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문화 정책으로 시민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능력도 없는 것들이 배경 덕을 봤기 때문인지.’
그에 비하면 눈앞의 소녀는 어떤가.
칼리오페에게는 자신의 손자와 비슷한 면이 있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사고의 깊이.’
카스틸로 부인이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를 헤집을 듯 바라봤다.
‘그리고 부정적 시각.’
어두침침하고 회의적인 성격이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칼리오페의 두 눈에는 희망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창창한 미래를 꿈꿀 나이에 사회 흐름을 부정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스타레아스처럼.
‘꼭 무언가에 대비하는 사람처럼 말이지.’
카스틸로 부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대척 요소로 다른 문화를 성행시키겠다는 건 알겠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칼리오페를 똑바로 직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네 노래라고?”
“정확히는 성가가 아닌 노래입니다.”
“그래, 그런데 그걸 부를 사람이 필요하지. 유행하면야 자연히 따라 부르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그 말은 곧 누군가가 유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야.”
속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뒷말은 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네가 그럴 능력이 될까?”
황록색 눈동자가 가늠하듯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불쾌하거나 떨리는 기색 없이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카스틸로 부인이 충분히 관찰했다고 생각될 때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해서 공작 부인께서 먼저 들어주십사 청하고자 온 것입니다.”
“그게 진짜 본론이었군.”
“공작 부인의 안목을 믿으니까요.”
카스틸로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목이 좋다는 소리야 늘 듣는 소리이고 실제로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대담한 소녀의 노래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폭풍을 몰고 올 거야.’
그 폭풍우를 함께 맞아도 되는 것인가.
카스틸로 공작가가 정치계에도, 사교계에도 안 나서는 이유는 조용히 살고자 함이거늘.
“노래라……. 저도 궁금하군요.”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스타레아스가 싱긋 미소 짓은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가만히 아스타레아스를 바라보던 카스틸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보도록 하지.”
‘지금 당장?’
칼리오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연히 다음에 따로 약속을 잡을 줄 알았다. 반주자도 없는 상황에서 노래를 요청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오늘 만남으로 카스틸로 부인의 취향을 알아내서 맞는 곡을 선정해서 부를 계획이었다.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는 해왔지만.’
혹시 부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노래를 준비해오긴 했다.
‘정말 당장 부르게 될 줄이야.’
칼리오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도 해내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기회가 오지 않을 거야.’
‘다음에’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카스틸로 부인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카스틸로 저에 발을 들이지 못하리라.
“반주가 없으면 심심하지요.”
아스타레아스가 칼리오페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를 슬쩍 본 카스틸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 * *
“공자님께서 피아노를 쳐주시려고요?”
“네.”
“하지만 악보도 없는데…….”
“코드를 알려주시면 됩니다.”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그는 여상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특유의 상냥하면서 벽을 치는 미소.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교양으로 배운 피아노까지 그럴까.’
코드를 알려주는 것만으로 즉석 반주가 되는지 약간 의심됐지만 믿기로 했다. 교양을 쌓는 것은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었고, 카스틸로 공작가의 교양 수준은 믿을 만했다.
무엇보다 아스타레아스 덕분에 카스틸로 부인이 노래를 듣는 방향으로 생각을 굳혔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호의를 거절하는 건 아니다.
“첫 네 마디까지는 코드가 같아요.”
칼리오페가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이렇게요?”
아스타레아스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손가락에 얽히듯 교차했다.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지만, 아스타레아스는 별생각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나…….’
“네, 그 다음에는 이렇게.”
칼리오페가 손을 움직이자 아스타레아스가 함께 손을 움직였다. 손이 겹쳤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손, 크구나…….’
칼리오페는 건반 위에서 움직이는 아스타레아스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칼리오페의 손이 건반 위를 뛰노는 새끼 고양이라면, 아스타레아스의 손은 다 큰 고양이랄까.
달을 등지고 날았던 그 날, 그가 자신의 망토를 둘러줬을 때도 체격 차를 깨달았지만—.
[귀한 손입니다. 부디 아무에게나 내주지 마시길.]
—떠올리는 순간 그날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손등에 닿았던 그의 입술.
칼리오페가 몰래 나왔다고 하자, 아스타레아스는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대담하신 레이디, 밤의 어둠이 그대를 붙잡아가지 않도록 길을 밝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는 손을 다시 내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 지금은 내주는 게 아닌가.’
칼리오페는 닿았다가 떨어지는 카스틸로 공자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가 귀하다고 말한 손은 흙투성이가 된 적도 있고, 핏물이 배인 적도 있다. 레이디의 손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거칠거칠하고 상처 가득했던 손.
‘심지어 시체를 만진 적도 있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귀하다고 말할까.
지금 이렇게 손을 겹치며 피아노 치는 것도, 손등에 입을 맞췄던 것도 후회하지 않을까.
피아노 의자는 두 사람이 앉기에 넉넉하지 않아서 바로 옆에서 아스타레아스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맡았던 향…….’
칼리오페는 눈을 꾹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은 이렇게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정 그날이 떠오른다면 아스타레아스와 단둘이 되었을 때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노래했을 때를 생각해야 했다.
“좋아요. 빠르게 외우시네요.”
칼리오페가 건반 위에서 손을 뗐다.
아스타레아스는 물끄러미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부인.”
칼리오페가 다과를 들며 기다리고 있던 카스틸로 부인을 불렀다.
“다 되었나 보군.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그 말에 칼리오페는 커다랗게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한다.
카스틸로 공작가는 대명문가인 만큼 보수적이다. 편견을 배제한다고 해도 속가에 호의적이진 않을 것이다. 거기에 카스틸로 부인은 높은 안목의 소유자인 만큼 까다로운 귀를 가지고 있다.
또, 반주하는 아스타레아스는 이 곡을 알지도 못한다.
‘잘 해야 해.’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타레아스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코드만 짚는 게 아니라 코드 화음에 맞춰 더 화려하게 변주가 들어갔다.
듣기 좋은 피아노의 노래였다.
칼리오페는 그에 맞춰 노래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피아노가 부드럽게 받쳐주는 느낌에 칼리오페는 혀를 내둘렀다.
사실은 곡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주가 정확하게 치고 들어왔다. 방금 코드만 겨우 외웠다고 믿기지 않는 실력이었다.
들어 와주었으면 싶을 때 들어오고, 빠져주었으면 할 때 빠진다.
구름처럼 푹신푹신하면서도 확실하게 노래를 받쳐준다.
점점 긴장했던 몸이 펴지고 맥박이 차분해졌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사라지고 칼리오페는 순수하게 노래를 즐기기 시작했다.
시야에 카스틸로 부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다지 노래에 감흥을 못 받는 얼굴.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지금 카스틸로 부인을 신경 쓰느라 집중을 잃긴 싫었다.
‘좀 더, 이 따뜻하고 푹신한 구름 위에서 노래하고 싶어.’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곡이 끝나 있었다.
칼리오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여운이 몸을 충만하게 감싸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잊었다.
시야에 카스틸로 부인이 들어오고 나서야 현실감이 피부를 스쳤다.
카스틸로 부인은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칼리오페는 어땠는지 묻고 싶은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부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달칵,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카스틸로 부인이 입을 열었다.
“칼리오페, 목소리가 예쁘구나.”
그 말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크게 웃거나 기뻐하진 않았지만 차분한 표정 위로도 안도감이 선연하게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예쁘다고 해서 듣기 좋은 노래가 나오는 건 아니지.”
카스틸로 부인이 칼리오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양손을 꽉 맞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역시 안 되는 걸까?’
하를레민에 있는 카바레에서 반응이 좋았다고 좀 우쭐했던 걸까.
가슴 속에 차가운 서리가 내리는 순간, 카스틸로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 노래는 듣기 좋았다.”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제 노래가 듣기 좋으셨다고요?”
“그래.”
스르륵, 가슴 속에 맺혔던 서리가 녹는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봄기운이 완연했다.
처음으로 카스틸로 부인이 미소 지었다. 입 끝만 살짝 올라간 직후 사라진 짧은 미소였으나 미소는 미소였다.
“칼리오페, 앉으렴.”
“네.”
칼리오페는 공손히 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스타레아스도 그녀 옆에 앉았다.
“차가 식었구나.”
그 말에 곁에 대기하고 있었던 집사가 차를 다시 우리기 시작했다.
차에서 나는 훈연향이 공기를 부드럽게 달궜다.
따뜻한 차가 뱃속에 들어가자 몸이 이완했다.
칼리오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딸기 타르트를 맛보았다. 긴장이 풀리니 먹을 생각이 든 것이다.
‘맛있어!’
딸기 타르트를 적게 먹어본 것도 아닌데—아직도 선물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여태까지 먹었던 것들 중 단연 최고였다.
칼리오페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을 아스타레아스는 놓치지 않았다. 카스틸로 부인 역시 칼리오페의 포크가 점점 빨리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속도로 반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부스러기 하나 없이 냠냠 먹는 건 묘기에 가까운 재주였다.
카스틸로 부인은 저도 모르게 이야기를 뒤로 미뤘다.
왠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칼리오페가 타르트 조각 하나를 다 먹고 차로 입가심을 한 후에야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넌 아직 미숙해.”
* * *
칼리오페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무룩한 얼굴이라 옆에서 걷던 아스타레아스는 주저하다가 그녀를 불렀다.
“영애.”
멋진 노래였다고 달래도 되나, 고민하는데 그를 본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정말로.”
그림자 한 점 없는 환한 미소였다.
“즐거웠다고요?”
방금까지만 해도 수심에 잠겨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저는 이렇게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한 게 처음이거든요.”
반주가 있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저번에…….”
칼리오페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살짝 발돋움해서 아스타레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베르 루벤스에서 만났을 때 있잖아요.”
재빨리 말을 마친 칼리오페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스타레아스는 한 박자 늦게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 귀가 뜨겁다.
“그때도 반주가 있긴 했지만, 오늘 같진 않았거든요.”
칼리오페는 복도에 깔린 카펫 문양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브라스 밴드의 반주는 흥겹고 신났다.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연주였다. 하지만 교감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노래에 신경 쓰지 않고 악보대로 연주하는 인상이었다. 그렇다고 악보대로 완벽히 연주한 것도 아니었다. 중간중간 색소폰 하나가 혼자 길게 음을 빼기도 했으니까.
각자 자신만의 흥에 맞춰 연주하는 느낌.
칼리오페는 그 또한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을 즐기는 거니까.
‘하지만 함께 만들어 가는 편이 훨씬 즐거워.’
피아노 연주와 자신의 노래가 교감하고, 서로의 감정이 고양될 때의 충만함.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기실, 오늘 아스타레아스와 함께 합을 맞추기 전까지는 반주에 대해서 어떤 생각도 없었다. 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정도로 경험이 없었으니까.
“또 하고 싶다…….”
무심코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깜짝 놀라 입을 다무는데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네?”
“어차피 노래 부를 때 반주를 맞출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영애의 계획에 대해 알고 있는 내가 맡는 게 여러모로 안전하겠지요.”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바쁘시지 않나요? 제가 시간을 뺏는 것 아닌가요? 저와 그렇게 가깝게 지내도 괜찮은가요?
칼리오페는 여러 가지 질문을 삼키고 그렇게만 물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대답 없이 생긋 웃었다. 눈매가 나붓이 접히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칼리오페는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아스타레아스가 마주 고개를 숙인 후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연습은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편이 좋겠군요. 이 저택은 주목받고 있으니까요.”
“네. 속가를 내보이기 전까진 숨기는 게 좋을 테고요.”
칼리오페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몰래 하죠?”
“일단 아는 사람이 적어야겠지요.”
아스타레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확실히.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새어나갈 확률이 높죠.”
“칭찬의 의미로 말한 것도 유출인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가 덧붙인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원을 최소화하는 게 좋겠네요.”
“그렇지요.”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겼다.
아스타레아스와 그녀 자신. 그리고 한 명 정도 더 있으면 될 것 같았다.
“누구를 부를까요? 제 유모나 공자님의 시종은 어때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사르르 미소 지었다.
“굳이 사람이 필요한가요. 노래하는 데 반주자와 가수만 있으면 되지요.”
“음…….”
예상 외의 말이라서 칼리오페는 난감함에 입을 다물었다.
힐끔 아스타레아스를 보니 그는 여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냥하면서도 날카로운, 겨울 숲 같은 미소였다.
빙하 같은 단단한 벽.
‘나도 참…….’
그 미소를 보니 난감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칼리오페는 힐데르트, 그리고 유리안과 친구가 되면서 성별에 대한 편견을 극복했다.
전생에는 단정한 레이디에 걸맞게 남성을 멀리했지만, 지금은 성별이 다르다고 무조건 벽을 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전생에는 좀 구시대적이고 고지식했지.’
또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녀가 모두 섞여 놀았는데 말이다.
칼리오페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한 만큼, 이번 역시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나를 도와주는 건데 그에게 맞춰줘야겠지.’
속가 연습을 도와주는 것은 구설수가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카스틸로 공자가 조심하는 것도 이해됐다.
“그럼 둘이서 연습하는 걸로 해요.”
“그 편이 안전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아스타레아스의 모습엔 어떤 사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비밀 보장을 위해 제안하고 결정한 얼굴이었다.
칼리오페는 괜히 곤란해 하던 자신이 웃겨서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말하며 걷는 사이 어느새 현관 앞에 도착했다.
아스타레아스는 마차에 오르는 칼리오페를 에스코트해주며 말했다.
“장소는 제가 정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아스타레아스는 마차가 넓은 정원을 지나 정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 * *
홀로 남은 카스틸로 공작 부인은 차를 마시며 칼리오페의 노래를 떠올렸다.
그녀는 평생 최고라 일컬어지는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살아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든다는 내색을 하면 가수들이 먼저 스케쥴을 바꿔 그녀에게 찾아왔다.
그건 가수뿐이 아니라 어떤 음악가, 아니, 어떤 예술가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일이지.’
잘 부르겠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칼리오페의 첫 소절은 엉망이었다.
긴장해서 목소리는 떨리지,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지, 시선은 불안정하지. 그녀가 봐왔던 어떤 가수들과 비해도 형편없었다.
‘그런데도 거기서 바로 노래를 끊을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칼리오페가 노래에 온전히 집중하고 나선 훨씬 좋아졌다.
노래를 교양으로만 익힌—칼리오페는 노래를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노래였다.
칼리오페가 노래를 취미로 삼았다면 카스틸로 부인은 기꺼이 칭찬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원하는 건 혁명이나 다름없어. 취미로 잘 부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야.’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가수’로서의 자세가 잡히지 않았다.
노래 도중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부인의 굳은 얼굴을 보고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관객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은 가수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가수가 감정과 노래에 취해 눈을 감았는지, 관객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감았는지 심미안을 가진 이들은 예민하게 눈치챈다.
‘아무래도 관객 없이 홀로 노래 부르는 게 습관 되어서 그렇겠지.’
카스틸로 부인은 자신 앞에 놓인 딸기 타르트를 바라봤다.
‘네 목표는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야. 가혹한 길이 기다리고 있겠지. 여기에서 만족하면 안 돼.’
타르트를 열심히 먹는 칼리오페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네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니까.’
노래는 사람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마법과도 같다. 그런데 가수가 그 감정을 단절해버리면, 청자를 배제해버리면.
‘마법은 일어나지 않지.’
카스틸로 부인은 칼리오페에게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녀는 결코 감상에 대해 길게 늘여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다거나 싫다거나 그저 그렇다는 것 외에는 입을 다물었다.
카스틸로 부인은 결국 미숙하다는 말 한 마디로 감상을 끝냈다.
‘스스로 깨닫는 게 중요하니까.’
이 정도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칼리오페에게는 세상을 움직일 힘이 없는 것이다.
‘그래, 못 깨달으면 그것밖에 안 될 뿐이지.’
카스티틸로 부인은 가슴에 남은 기묘한 감정을 떨쳐내며 딸기 타르트 조각을 맛보았다. 칼리오페가 하도 맛나게 먹기에 혹시나 했지만, 역시 이 달콤한 맛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왜 딸기 타르트가 있는 걸까.’
남편도, 손자도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파티시에는 딸기 타르트를 만들지 않는다.
카스틸로 부인은 칼리오페를 배웅 나간 손자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 아이를 남다르게 대하셨지.’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레아스 님.”
아스타레아스가 짧게 묵례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 아이는 잘 떠났나요?”
“네.”
집사가 식은 차 대신 새로운 차를 아스타레아스에게 내주었다.
“레아스 님은 오늘 노래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아스타레아스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사르르 웃었다.
“영애는 제가 아니라 할머님께 평가받으려고 온 것 아닙니까.”
‘역시 순순하지 않으시군.’
괜히 아스타레아스의 마음을 떠보려다가 실패했다. 카스틸로 부인은 내색하지 않고 여상하게 말을 받았다.
“호흡이나 음 처리가 세련되었다는 느낌은 없더군요. 아직 어려서 그런지.”
말을 하니 다시 귓가에 칼리오페의 노래가 맴도는 것 같았다.
카스틸로 부인은 오늘 칼리오페가 부른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런데 고작 한 번 들은 걸로 이렇게 귀에 남다니 다소 놀랍긴 했다.
“……세련되지 못한 창법으로도 듣기 좋다는 건 흥미롭긴 했습니다.”
아직 미숙하다는 것은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비록 단절되었으나 칼리오페의 노래에는 순수한 진심이 가득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카스틸로 부인은 그림 같이 단정한 손자를 바라봤다.
“레아스 님.”
“예, 할머님.”
“그 아이를 곁에 두고 싶은 것입니까, 멀리 두고 싶은 것입니까.”
나직하지만 묵직한 물음이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고개를 들어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백작 가문의 아이더군요.”
“할머님.”
“그렇다면 괜찮겠지요.”
가문의 격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칼리오페란 아이 자체에 대해서도 흡족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루스티첼 가가 꽤 득세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서모나 부인이 루스티첼 백작 부부를 칭찬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요.”
아무리 엎드려 지내고 있다고 하나 카스틸로 가의 후계이자 황가의 핏줄이 너무 한미한 가문과 어울릴 순 없는 법이다.
“할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스타레아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카스틸로 부인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다.
그 무엇에도 관심 없던 자신의 손자가 처음으로 삶에 애착을 가질 기회.
“레아스 님. 선황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현 황제가 즉위한 이래로 우리는 숨죽이듯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카스틸로 부인은 그간 속에서만 묵혀왔던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건 아니에요. 다 포기하면 살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할머님.”
“이제 레아스 님의 나이도 열다섯. 소소한 행복을 찾으셔야죠.”
여느 또래들처럼은 아니어도 그 나이대의 기쁨을 놓치지 말길 바랐다.
아스타레아스는 카스틸로 부인을 바라봤다. 딱딱한 노부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거기에 깃든 것은 숨길 수 없는 애정이었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는 깊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님께서 잘못 짚으셨습니다.”
그 말에 카스틸로 부인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레아스 님께서는 이 할미를 너무 무르게 보시는군요.”
“무르게 보다니요.”
아스타레아스가 그럴 리 있겠냐는 듯이 눈꼬리를 유순히 접었다.
“레아스 님. 아무리 당신이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하셔도 이 할미를 속이진 못하십니다.”
겨우 숟가락질을 흘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안아 키웠다. 노심초사하며 언제나 손자의 주변을 살피고 돌아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 아스타레아스의 마음을 못 알아볼 리 없다.
“하물며 애정은 속이기 힘든 것이지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작게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 애는 아직 어립니다.”
“레아스 님도 어리시지요.”
카스틸로 부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민가의 아이들은 열두 살 때 이미 밥벌이를 하고 있답니다.” 하고 덧붙였다.
아스타레아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을 다잡기 힘든데 이렇게 부추기니 애써 가라앉혔던 마음이 복잡했다.
“레아스 님도 이럴 때 보면 참 고지식하시군요.”
카스틸로 부인이 드물게 눈을 빛냈다.
그만큼 그녀는 손자의 감정적 변화가 기꺼웠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이끌어낸 칼리오페도 마음에 들었다.
“그 나이 때는 그 나이 때의 풋사랑이 있는 거랍니다. 나중에 커서 꺼내어 보면 아주 사랑스러운 기억이 되지요.”
“그런 추억은 필요 없습니다.”
그에게 칼리오페는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때 그런 아이가 있었지.’ 라고 추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물며 그런 추억을 만들기 위해 걸어야 하는 것은 칼리오페의 안전이었다.
“풋사랑이 진정한 사랑으로 발전하는 과정 역시 즐거운 것 아니겠습니까.”
카스틸로 부인은 꼭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목소리가 악마의 유혹보다 더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할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스타레아스는 그 유혹을 끊어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자신의 행복보다 칼리오페의 안전이었다.
‘이번 생에서 그 애는 반드시 행복해야 하니까. 어떤 아픔도 몰라야 하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면 심장을 가르는 아픔도, 온몸을 난도질하는 아픔도 아무렇지 않았다.
“레아스 님, 이 할미는 그대의 안전과 행복만을 바랍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카스틸로 부인이 말했다.
“에리시네가 그랬듯이.”
짧게 덧붙인 말에 아스타레아스가 움찔했다.
여태껏 단 한 번의 동요도 내보이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에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