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꿈꾸는 레이디(Part II. Caména) (15/41)

Part II. Caména

Chapter 1. 꿈꾸는 레이디

햇살이 채광창을 타고 방안을 곱게 수놓았다.

그러나 방안은 햇빛의 찬란한 자수가 무색하게 온갖 빛무리를 뽐내는 장식으로 가득했다.

그 휘황찬란한 방안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내가 새하얀 옥좌 위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느릿한 사내의 말에 긴 로브를 걸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상보다 교세 확장이 느립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나?”

날 선 사내의 말에 남자가 더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향유하는 문화 자체가 신전에 관련된 것으로 편향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중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데 지금은 다른 것에도…….”

“변명을 늘어놓으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아까보다 훨씬 느릿한 어조였지만 전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자자, 너무 그러지 마시고. 그 전까지는 잘해왔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옆에 빠져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사람이 쾌활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그는 고개를 조아린 남자와 같은 문양이 수놓아진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더 간소하다는 것이 달랐다. 특히 로브의 길이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옥좌 위에 앉은 사내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으나 끼어든 자에게 뭐라 말하지 않고 손에 턱을 괴었다.

그다지 티가 나진 않았지만, 아까 남자를 대할 때 날 서 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태도였다.

끼어든 자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깊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곧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사내는 그 말에 흥미가 당기는지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남자가 하는 말은 가벼운 어투와 달리 무거웠다. 사내는 그 무게에 꽤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곧 스티그마가 탄생할 것입니다. 그것도 제도 안에.”

그때까지 팔걸이에 기대 있던 사내가 몸을 바로 했다.

“제도 안에 스티그마가 생긴다고?”

“예.”

사내가 생각에 잠겨 눈을 감았다. 툭툭,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말을 꺼낸 남자는 그 반응에 흡족하여 미소지은 채 가만히 기다렸다.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사내가 생각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자세한 정보를 주기 위해서였다.

“제도에 신성력이 모이고 있습니다. 땅이 숨 쉴 조짐이지요.”

“위치는?”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제도 안인 건 확실합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는 말에 사내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스티그마가 생긴다는 걸 미리 알게 된 점은 커다란 이득이었다.

그는 짧은 로브를 입은 남자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자신의 신뢰에 걸맞게 묵직한 정보를 가져온 남자가 언제나처럼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도 안에 새로운 스티그마라…….”

사내가 음미하듯 말했다.

에테르의 힘은 그 누구보다 사내가 잘 알고 있다. 이때까지 이걸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선대들이 우스웠다.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한다.”

사내의 말에 가득 들어간 열망과 야욕에 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스티그마의 조짐을 보는 것은 신께서 신관에게 내린 축복 아니겠습니까.”

짧은 로브의 말에 긴 로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현자의 탑도, 열두 개의 검도 땅이 숨을 쉬기 전까진 모릅니다.”

“그 전에 선수를 치면 된다는 거군.”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은 사내가 턱을 쓸었다.

“다른 신전은?”

“다른 신전도 곧 알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저희는 아시다시피 ‘샘’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빨리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다른 곳에서 스티그마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전에 선수 쳐야 한다.

계획에 대해 생각하던 사내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예정대로 교세를 확장했다면 쫓기듯 서두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날카로운 시선이 남자들을 향했다. 긴 로브를 입은 남자는 그 채찍 같은 책망에 몸을 떨었지만, 짧은 로브 쪽은 태연자약했다.

사내는 그의 묘한 당당함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 뒷받침되기에 나오는 것이라 생각해서 높게 샀다.

“성녀는?”

사내의 물음에 짧은 로브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는 그로서도 애먹는 문제 중 하나였다.

“준비 중입니다. 아직 내보이기엔 일러요.”

사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것보다 완벽한 게 좋겠지. 성녀 문제는 재촉하지 않겠다.”

그 말에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안도로 어깨에서 긴장을 풀었다.

성녀 문제는 서두른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서두르면 일이 틀어질 수도 있다.

교세 확장 건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다른 건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이만해서 다행이다.

“지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사내의 느릿한 질문에 긴 로브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예? 아, 아닙…….”

“그래, 아무렴 다행이겠지. 성녀 문제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해, 교세 확장을 실패한 것도 왈가왈부하지 않으니.”

사내의 입매가 비틀렸다. 한쪽으로 비죽 솟은 입꼬리가 사납게 꿈틀거렸다.

“내가 자비로워서, 물러서 그렇다고 생각하나?”

긴 로브를 입은 남자는 감히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까지 자비를 배풀어줬는데 하나는 확실히 해야지.”

그러나 그 복종의 자세에도 사내의 눈동자는 더 음험하게 가라앉아 번뜩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티그마를 손에 넣도록 해라.”

* * *

에피니는 아늑하게 꾸며진 방 구석에 홀로 앉아 손톱을 튕기고 있었다.

새초롬한 눈이 폭신한 백곰 모피가 깔린 바닥과 곳곳에 놓인 서로 다른 디자인의, 그러나 치밀한 계산 아래 조화롭게 놓인 소파, 그리고 피아노를 훑었다.

‘따분해.’

틱틱, 손톱을 튕기며 무료함을 쫓아내려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살롱이 시작하기 전이라서 사람들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서로 인사를 나누며 삼삼오오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구석에 콕 박혀 앉아있는 사람은 에피니 뿐이었다.

살롱에 모인 또래들이 에피니를 따돌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에피니는 또래들—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은근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곧게 뻗은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에피니의 모습은 소녀들의 꿈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홀로 있는 것은 오로지 에피니의 의지였다.

에피니는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왔구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구를 주목하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행동력이 빠른 사람들이 서둘러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오페 영애.”

“어서 와요, 레이디 칼리오페.”

“다시 뵙다니 반가워요.”

목소리에는 호감과 기대가 가득했다.

칼리오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에 답하고는 주변을 쭉 둘러봤다. 구석에 앉아있는 에피니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말을 거는 사람들을 정중히 받아주면서도 칼리오페는 단 한 번도 멈춰 서지 않고 에피니를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자 에피니는 무료하고 따분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칼리오페는 도톰한 모직 원피스를 깔끔하게 입고 검은 비단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단조로워 보이는 의상이었지만, 몸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떨어지는 라인 덕에 굉장히 세련되어 보였다.

거기에 양쪽으로 반 묶음 하여 고정한 핀은 눈송이 같은 새하얀 폼폼이었다. 달랑거리는 눈송이들은 칼리오페의 흰 피부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발목을 따뜻하게 감싼 부츠에도 장식으로 폼폼이 달려있었다.

‘한동안 폼폼이 유행하겠네.’

에피니는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다른 소녀들의 머리장식을 바라봤다. 철사를 넣은 리본을 각자의 방법대로 달고 있는 소녀들이 많았는데, 그건 저번에 칼리오페가 유행시킨 머리 장식이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영향력을 알게 된 이후 웬만하면 보석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았다.

에피니는 그 속에 담긴 칼리오페의 생각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에피니 언니, 먼저 와 계셨군요.”

생긋 웃는 칼리오페의 몸짓을 따라 눈송이가 달랑거렸다.

‘귀엽네.’

굳이 유명 모델이 아니더라도 유행할 만했다.

하지만 에피니는 내색하지 않고 도도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칼리오페에게 인사했다. 그리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칼리오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훑어봤다.

에피니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앉아있던 소파에 칼리오페를 앉혔다. 그 다음 그 옆에 자신이 앉았다.

칼리오페 왼쪽 옆은 벽, 오른쪽 옆은 에피니 자신.

소파가 길기 때문에 한두 사람 정도 더 앉을 수 있긴 하지만 에피니의 모습을 보고 억지로 앉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저 자리에 앉아있으면…….’

“뭐야, 둘 다 벌써 와 있었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깔끔한 금발과 고급스러운 자안, 귀족적인 고상한 얼굴과 몸에 배인 오만함.

대명문가 서모나 가의 독자, 힐데르트 서모나였다.

“벌써가 아니야. 곧 시작할 시간이라고.”

에피니의 지적에 힐데르트는 고개만 살짝 비틀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들이 앉은 소파의 빈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역시나, 하는 기분으로 깔끔히 포기했다. 저 자리가 탐나긴 했지만 괜히 끼어들어 밉보이면 그걸로 끝이다.

일전에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 없는 척하는 건지 모를 영식 하나가 힐데르트 자리에 냉큼 앉은 적이 있었다. 그가 뒤늦게 온 힐데르트에게 모임이 끝날 때까지 서릿발 같은 시선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다 말이라도 꺼내면 에피니가 끊으며 원천차단했다. 에피니의 태도에 놀란 칼리오페가 몇 번 그 영식에게 말 걸었으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에피니와 힐데르트의 눈빛은 더더욱 날카로워졌고 주변에 있던 다른 영식과 영애들의 눈길도 그 영식에게 꽂힌 채 떨어지질 않았었다.

결국, 그 영식은 본전도 못 건진 채 터덜터덜 사라졌다.

그때를 상기한 사람들은 미련을 버리고 자리를 떴다. 칼리오페의 주변에 있는 소파에 앉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물론, 칼리오페는 벽 바로 옆에 앉아 있기 때문에 주변이라고 해도 가깝진 않았다.

에피니와 힐데르트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오늘도 리페를 잘 지켰다.’

그들은 뿌듯함을 공유했다.

칼리오페는 날이 갈수록 유명해지고 아름다워져서 날벌레들이 꼬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자신들이 지켜줘야 했다.

힐데르트는 힐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산호빛 눈동자 위를 길게 드리운 속눈썹과 오똑한 코, 작은 입술. 어딘지 우수에 잠겨 있는 것 같은 얼굴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시선을 느낀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렸다. 힐데르트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가볍게 미소 짓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한겨울에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언 땅을 일깨우고 꽃망울이 움트는 사랑스러운 봄이.

사심 없이 순수하게 웃는 얼굴에 처음 만났던 다섯 살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또 달랐다.

세월은 칼리오페에게 축복인 것 같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이렇게 세월이 지날 때마다 계절은 그녀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덧칠해주었다.

통통했던 팔다리는 길쭉하고 늘씬하게 뻗고, 어깨는 가늘고 가냘파졌다. 자라나며 많은 것을 겪고, 보고, 느낀 눈동자는 더 많은 것을 담아 다양한 색채로 빛났다.

거기에 아직 젖살이 남아있는 뺨은 그 나이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한껏 더해주었다.

열둘.

제국에서 열둘은 꿈꾸는 나이라고 한다.

칼리오페는 과연 무슨 꿈을 꿀까?

힐데르트는 그 꿈을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은 힐데르트에게 풋사랑에서 벗어나 첫사랑을 시작하는 나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어릴 적 풋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 * *

“아,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어.”

에피니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오늘 살롱은 칼리오페가 속해 있는 독서 클럽 일원 중 한 명이 주관하는 것으로, 좀 사변적인 이야기를 다루긴 했다.

“에피니 언니는 시문엔 관심이 없으시죠?”

칼리오페가 웃으며 말하자 에피니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

관심 없는 것뿐만 아니라 좀 많이 못 했다. 칼리오페의 배려가 더 눈물 나는 건 왜일까?

에피니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리페, 오늘 무슨 일 있어?”

“네?”

“아니, 좀 평소보다 처져있는 것 같아서.”

원래도 차분했지만 오늘은 그것과 좀 달랐다. 에피니가 ‘그치?’라고 하며 힐데르트를 돌아봤다.

“응, 좀 생각에 잠겨 있는 느낌이던데. 토론에도 집중하는 것 같지 않고.”

“그랬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은 칼리오페가 어머, 하며 입가를 가렸다. 그조차 그림 같은 움직임이라 이쪽을 곁눈질하던 사람들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주최하신 분께 실례되는 일을 저질렀네요.”

“와준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힐데르트가 신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야?”

“아, 별일은 없는데…….”

칼리오페는 괜히 신경 쓰이게 했나 싶어서 잠시 주저하며 운을 뗐다.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진로?”

힐데르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피니 언니는 이미 종기사 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힐데 오라버니는 아카데미에 들어가진 않으셨지만…… 역시 중앙 관료가 될 생각이시죠?”

“뭐, 집안 대대로 그렇게 해왔으니까.”

힐데르트가 긍정했다. 서모나 가는 대대로 국가전략기획에 중요한 인재를 배출해 왔다. 일종의 가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힐데르트 또한 같은 길을 밟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칼리오페는 그가 회귀 전에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국의 핵심 중추 기관인 아프락스 궁에 들어갔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제 저도 열두 살이니 진로에 대해서 슬슬 윤곽을 잡아야 하니까요.”

제국에서는 보통 12살에 인생의 전환기를 한 번 맞는다.

학문에 뜻이 있는 자들은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무도에 뜻이 있는 자들은 종기사로 기사단에 들어간다. 예외가 있다면 마법학으로, 재능을 발견하는 즉시 마탑에서 테스트를 치르기 때문에 나이대를 특정하기 어렵다.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의 경우는 더 빠르게 진로가 결정된다. 열 살 무렵에 일을 시작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세월 참 빠르다니까.”

칼리오페는 다 늙은 사람 같은 소리를 하는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열네 살, 열다섯 살짜리가 그렇게 말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십 대에 이르게 죽긴 했지만, 회귀를 겪은 칼리오페는 어쨌든 그들보다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힐데르트가 당황해서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칼리오페가 지긋이 응시하니 새삼스레 부끄러웠다.

‘오늘 컨디션 괜찮지? 내 얼굴 이상한 거 아니겠지?!’

들어오기 전에 슬쩍 거울을 볼 땐 괜찮았다. 안심하면서도 힐데르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칼리오페가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바람에 소년의 마음은 더더욱 복잡해졌다.

“그래서 그랬던 거야?”

타격이 없는 에피니가 칼리오페를 채근했다.

“네, 진로를 어떻게 정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게 밖으로 드러났나 봐요.”

멋쩍어하는 칼리오페를 본 힐데르트와 에피니는 ‘흐음—’하고 생각에 잠겼다.

에피니는 일곱 살 때 루스티첼 가에서 우연히 검을 잡아본 이후로 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힐데르트는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관념이 잡히기 전부터 자연스럽게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 길에 의심도 없었고 거부감도 없었다. 응당 자신의 자리일 거라 여겼다. 어찌 보면 오만하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에게는 그럴 능력도, 배경도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이런 진로 문제에 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둘 다 자기 일처럼 끙끙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힐데르트였다.

“일단…… 리페,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하지. 네 꿈이 뭐야?”

“꿈이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칼리오페에겐 굉장히 뜻밖으로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그녀가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제 꿈은…… 그냥 가족들과 행복한 거인데.”

아무도 살해 당하지 않고, 병들어 죽지도 않고, 오래도록 함께 사는 것.

아침마다 한 명도 빠짐 없이 식탁에 빙 둘러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 그러면서 오늘 하루를 알차고 기분 좋게 보내길 빌어주는 것.

밤에 잠들 때 굿나잇 키스를 나누는 것. 가끔 햇빛이 좋은 날이면 창가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 비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듣는 것.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를 담으며 미소 짓는 것.

그게 칼리오페의 꿈이었다.

“그건 당연한 거잖아.”

에피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리를 꼬았다.

칼리오페는 말없이 작게 웃었다.

“맞아요. 당연하지요.”

하지만 그 당연한 게 칼리오페에겐 당연하지 않았다. 꿈이 될 정도로.

“그거 말고 다른 거. 네가 뭘 하고 싶은지를 물은 거야.”

“응, 리페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걸 알아야 하니까.”

그 말에 칼리오페는 멍하니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꿈은 원래 그런 뜻이었지.’

정말 새삼스러울 정도로 당연한 소리였다.

‘꿈에 대해서 말할 땐 그런 걸 생각하는 게 보통이야.’

그 마땅한 사실에 칼리오페는 충격을 받았다.

“아…….”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도, 나도 꿈이란 걸 가질 수 있구나.’

칼리오페는 자신에게 꿈을 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과 오래 사는 게 ‘당연한’ 미래를 그리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꿈을 꿀 수 있다.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원하는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잘 모르겠어요.”

몇 번의 달싹임 끝에 나온 말은 모르겠다는 소리였다.

칼리오페는 단 한 번도 그런 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가족을 살리고 미래를 바꾸는 것에만 집중해서,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고려해 본 적도 없었다.

‘전생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 했더라……?’

비극을 모르던 12살의 칼리오페 자신은 대체 무슨 꿈을 꿨을까?

이상하게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가족의 죽음과 전쟁의 비극을 겪으며 억지로 꿈을 잊어버리길 바란 것처럼.

‘기억해봐야 크게 의미 없을 테지만.’

회귀 전과 회귀 후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비극을 겪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칼리오페는 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생에는 싫어했던 춤도 이제는 꽤 즐기게 되었다.

그러니 전생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른 꿈을 꿀 것이다.

“리페는 광고 모델로 이미 잘 나가고 있잖아. 그냥 그대로 가도 될 텐데.”

감을 못 잡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생각의 물꼬라도 틔우자 싶어서 에피니가 제안했다.

“음, 그건 좀…….”

모델로서 평생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연히 카메라 회사 모델로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제는 모델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민망하고 어색하진 않았다. 또, 모델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전보다 진지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리페는 똑똑하니까 관료가 되어도 좋을 텐데.”

힐데르트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에피니가 피식 웃었다.

“너랑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뭐……. 진짜로 공부 잘하잖아.”

힐데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새하얀 뺨이 살짝 발그스름해졌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꼭 관료가 되는 건 아니잖아. 한때 칸테나 부인이 리페를 붙잡고 마법사가 되라면서 얼마나 따라다녔는데.”

“리페가 마법사는 싫댔잖아. 그러니까 관직은 어떠냐고 제안해본 거야. 누구나 꿈꾸는 좋은 직업이잖아.”

에피니가 퍽이나, 하는 얼굴로 “흥.”하고 성대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태도에 힐데르트는 발끈했지만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할수록 제 무덤을 파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 설마 공부가 좋다고 아카데미에 가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든 생각에 에피니가 핫, 하고 놀라서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아카데미 가면 싫어.”

조용히 덧붙이는 말에는 어릴 적처럼 투정이 묻어 있었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카데미에 갈 생각은 없어요.”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한다. 아카데미 안이 하나의 도시 규모로 크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는 것은 곧 가족의 곁을 떠난다는 뜻이니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그때, 주최자인 크레티안느가 좌중을 둘러보며 휴식 시간의 종료를 알렸다.

“그럼 슬슬 낭독회를 시작할까 해요.”

“으아, 또 시작이야.”

에피니가 작게 투덜거렸다.

낭독회는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니 토론이 오가던 전 시간보단 나을 것이란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토론회 때는 너무 사변적으로 이야기가 흐르는데 중재해야 할 주최자가 잘 하지 못했다.

에피니는 원래 시문에 흥미가 없는지라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걸 견디지 못했다. 평소라면 에피니한테 교양 없다며 뭐라 할 힐데르트 역시 조용한 걸 보니 그도 토론회의 수준이 매우 마음에 안 차는 듯했다.

‘하긴, 에피니 언니보다 힐데 오라버니가 더 까다롭지.’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힐데르트는 현학적이기만 하고 알맹이가 없는 토론을 혐오했다.

“오늘은 특별히 멀리 남부 지방에서 오신 손님을 초대했어요. 모두 환영해주세요. 하르첸 경입니다.”

소개와 함께 한 인물이 살롱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열다섯 정도 됐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요르갈렌의 천재라고 불리는 애야.”

“아, 저분이 소문의 그분이군요.”

힐데르트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음악에 흥미가 있는 귀족들이 수다를 떨 때엔 하르첸의 이름이 빠지질 않았다.

하르첸은 어렸을 때부터 음악가인 아버지를 따라 다니다가 9살 때부터 살롱에서 연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고향인 요르갈렌이 남부라 주로 남부 도시를 오가며 연주했는데 최근엔 제도에까지 명성이 자자했다.

“아, 설마…….”

피아노 앞에 앉는 하르첸의 모습을 본 에피니가 얼굴을 왈칵 구겼다.

“오늘은 시문을 그냥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음에 맞춰 낭독해볼까 싶어요.”

“역시…….”

크레티안느의 말에 에피니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원래 시문을 읽을 때는 노래하듯이 운율을 살려 있는 게 고상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아예 피아노를 비롯한 음악 반주에 맞춰 읽는 게 유행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부터 목이 아플 예정이야.”

그러니 절대 낭독할 일 없다는 뜻이었다. 설령 크레티안느가 지목해도.

“에피니 언니…….”

칼리오페가 책망하듯 불렀지만 에피니는 소파에 등을 휙 기댔다.

“몰라. 난 이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한 거라고. 내가 크레틴을 싫어하는 거 알잖아.”

소리를 잔뜩 낮춘 말이었으나 칼리오페는 놀라 주변을 살폈다.

“크레틴 언니한텐 악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보는 내가 답답해서 싫다는데.”

“어차피 네 낭독을 듣고 싶다는 사람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힐데르트가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발끈한 에피니가 무심코 큰 소리를 냈다. 힐데르트와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에피니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선이 잠시 모였긴 하지만 에피니가 소란을 피운 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곧 흩어졌다.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와 자신은 참 얌전하고 의젓한데 어쩌다 한 데 묶여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는 건지 모르겠다며 우울해했다.

“어차피 저희 쪽까진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칼리오페가 에피니를 달랬다.

크레티안느는 피엔테 후작가의 후계자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많았다. 살롱의 성공적인 분위기를 위해 너도, 나도 낭독하겠다며 일어설 것이다.

무엇보다 칼리오페는 그 어떤 살롱에서도 시문을 낭독하지 않았다. 모두 그걸 알고 있으니 지목하지도 않았고, 그건 칼리오페와 함께 다니는 에피니와 힐데르트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힐데 오라버니는 자진해서 자주 낭독하시지만.’

그 우아하고 완벽한 발성과 발음에 얼굴을 붉히는 아가씨들이 많았다.

첫 번째 낭독자가 낭독을 끝내고 두 번째 지원자가 앞에 나섰다.

“아, 이건 토론회와는 다른 의미에서 고역이다.”

에피니가 지치지도 않고 소곤거렸다. 칼리오페는 그만큼 지루하구나, 싶어서 쓴웃음을 삼켰다.

“토론회는 그렇다 치고 낭독회가 이렇게 귀 아플 줄이야.”

힐데르트 또한 차가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고 빠지자고 했는데. 피아노 치는 애가 불쌍할 지경이야.”

“그래도 크레틴 언니가 주최하는 거니까요.”

[리페는 당연히 올 거지? 내가 주최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데 매정하게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크레틴 때문이 아니라 네가 와서 온 거야. 힐데도 마찬가지일걸?”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며 자랐는데도 에피니는 크레티안느를 싫어했다. 힐데르트 역시 탐탁지 않아 하긴 마찬가지였다.

칼리오페로서도 억지로 안 맞는 사람들을 붙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기실 그녀 또한 크레티안느와 그다지 잘 맞는 편은 아니었다.

[그럼 나 어떻게 돈 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던 어렸을 적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베이비 살롱에서 처음 마주친 날, 칼리오페는 돈을 잘 세지 못하는 크레티안느를 보고 도와줬었다. 베이비 살롱에 자주 오지 않는다는 칼리오페의 말에 크레티안느는 자주 오라고 하며 저렇게 말했었다.

칼리오페는 자주 올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고 크레티안느에게 다시 한 번 돈 세는 법을 알려줬다.

하지만.

[저, 왜 베이비 살롱에 안 왔어?]

다시 만났을 때, 크레티안느는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물었다. 그러면서 본인이 얼마나 칼리오페를 보고 싶어 했는지 아냐며 불만을 토해냈다.

칼리오페는 배려 없이 자신의 마음만 강요하는 모습이 꺼려졌었다. 그러나 아직 어리다는 것과 피엔테 부인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며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크레티안느를 챙겨줬다.

‘이제는 내가 챙기지 않아도 어울리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 점은 잘됐다고 생각한다. 다만 크레티안느의 생각은 그다지 성장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아무 거리낌 없이 좋아할 순 없었다. 크레티안느가 워낙 칼리오페를 따라서 외면하기도 가여웠다.

“리페, 네가 한 번 낭독해서 내 귀 좀 씻어줘.”

“저는 좀…….”

칼리오페는 슬쩍 웃으며 말을 흐렸다. 이런 살롱에서 절대로 시문을 낭독하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리페, 네가 훨씬 잘 부르잖아.”

“우리가 이렇게 귀 아픈 거에는 네 탓도 있어.”

“제 탓이라뇨?”

“우리는 네가 부르는 노래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청아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음을 타고 속삭일 때면 그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잊혔다.

온전히 칼리오페의 노래가 만든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 그 세계엔 어느 것도 침범하지 못했다. 수백 번 검을 휘두를 때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그런 칼리오페의 노래에 익숙해지다 보니 에피니와 힐데르트는 듣는 수준이 높아졌다. 두 사람에게 멜로디를 섞은 낭독회는 소음공해와 마찬가지였다.

에피니가 반짝이는 눈으로 칼리오페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왜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지 전부터 궁금했어. 부르기만 하면 다들 난리 날 텐데.”

“본격적인 노래가 부담스러우면 시문 낭독 정도는 괜찮잖아.”

힐데르트 역시 말을 보탰다. 에피니와 달리 그는 칼리오페가 왜 살롱을 비롯한 모임에서 노래 부르길 꺼리는지 눈치 채고 있었다.

‘리페는 속가밖에 안 부르니까.’

단순한 에피니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힐데르트는 귀족 사회에 대해 잘 알았다.

‘리페는 작은 소란이라도 만들기 싫은 거겠지.’

사실 힐데르트로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좋았다.

‘나만 알고 싶으니까.’

본인만 알고 싶다고 하기엔 이미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 몇 있었지만, 더 퍼지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리페가 노래하는 모습은 정말…….’

유망한 예비 문관으로,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힐데르트조차 감히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힐데르트는 그 모습을 자신이 독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드러날 것이라면 빨리 드러나는 게 낫다.

“죄송해요.”

칼리오페의 거절에 에피니가 볼을 부풀렸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시문을 낭독할 순 없었다.

귀족들이 향유하는 예술은 거의 신전의 성서를 기반으로 한다. 당연히 시문 역시 성서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절대로, 신전을 찬양하는 내용 같은 것에 동조하고 싶지 않아.’

사회 활동을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살롱을 비롯한 예술 모임 쪽에 얼굴을 비추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참석 이상의 것을 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엔 참석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많이 타협한 거였다.

“나중에 꼭 불러드릴게요.”

칼리오페가 살살 달래자 에피니가 “꼭이야.”라고 하며 심통 난 얼굴을 풀었다.

“나는 리페가 노래 불렀으면 좋겠어.”

“네?”

칼리오페는 당황한 얼굴로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에피니를 달래놓으니 이번엔 힐데르트 차례인가 싶었다.

‘아니, 힐데 오라버니는 평소엔 안 이러시잖아요?’

“아, 아니. 지금 불러달라는 게 아니라. 리페, 아까 전부터 고민했잖아. 꿈에 대해서.”

꿈. 노래.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선상에서 합해지는 순간, 칼리오페는 이상하게 가슴에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전율이라고 하기엔 미약하고, 무시하기엔 분명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노래는…….”

칼리오페는 말을 멈췄다.

부르고 싶다.

그러나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한다. 칼리오페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노래, 부르고 싶어.’

자신도 모르던……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음에도 외면해왔던 열망이, 꿈이 가슴 속에 번졌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힐데르트는 그런 그녀의 눈을 조용히 마주 보았다. 수많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은 시선이었다. 담담하게 칼리오페가 가는 길을 언제까지나 지켜볼 것처럼.

“리페.”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렸다.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를 보며 수줍게 웃고 있었다.

어느 새 낭독회가 끝나 사람들은 낭독한 시문에 관한 감상을 나누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아, 크레틴 언니. 좋은 살롱이었어요. 저도 많은 것을 느끼고 가네요.”

칼리오페의 칭찬에 크레티안느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고, 고마워.”

어린 영애와 영식 사이에 살롱을 유행시킨 것은 다름 아닌 칼리오페였다.

‘베이비 살롱’은 가게 이름일 뿐이라 실질적인 살롱과는 상관없지만, 매달마다 열리는 파티 데이는 또 달랐다. 처음에는 소소한 교류의 장으로 시작했던 것이 점차 교육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다.

과거엔 ‘아이의 사회화’란 돈을 주고 가정교사를 붙여 만들어 내거나, 어른들이 주최하는 모임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이비 살롱은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스스로 깨우치게 만들었다.

파티 데이는 점점 발전해 살롱의 형태를 띠었고, 어른의 전유물이었던 살롱은 어린 영애, 영식 사이에서 유행했다.

부모들은 당연히 환영했다.

크레티안느가 손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오늘 그다지 말이 없어서,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칼리오페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크레티안느는 안심한 듯 웃었다.

힐데르트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반쯤 돌렸다. 그는 크레티안느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에도 무얼 하든지 칼리오페에게 꼭 확인을 받으려고 굴었다. 자기 스스로는 판단도 못 하는 건지.

“저어,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그냥 별 얘기 아니야.”

크레티안느의 물음에 에피니는 냉정하게 답했다.

‘알 거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에피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힐테르트도 크레티안느가 얼른 가버렸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칼리오페는 중재하기 위해 크레티안느에게 답변해주었다.

“제 진로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 중이었어요.”

“아, 진로……. 고민이겠다.”

크레티안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덧붙였다.

“리페는 뭐든 잘하니까 어떤 걸 하든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칼리오페를 빤히 바라보던 크레티안느가 활짝 웃었다.

“아, 그렇지! 내 시녀하면 되잖아?”

크레티안느의 말에 세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크레티안느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 시녀어……?”

에피니가 크레티안느가 했던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시녀’라는 단어가 다시 귀에 들어오고 나서야 서서히 무슨 말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응! 그럼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따로 만나지 않아도 하루 종일…….”

크레티안느는 멋진 미래라도 꿈꾸는 것처럼 환한 얼굴로 밝게 조잘거렸다. 두 손을 꽉 맞잡고 꿈질거리더니 칼리오페를 힐끔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저어…… 리페가 원한다면 제도 저택에도, 영지 성에도 가장 좋은 방을 마련해줄게. 리페는 특별하니까.”

수줍은 듯 말했지만, 그 저변에는 대단한 총애라도 내리는 것이라는 거만함이 깔려있었다.

“야, 너 뭐야?!”

에피니는 기가 차서 저도 모르게 크레티안느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꽉 움켜쥔 주먹을 내지르지 않은 게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이었다.

힐데르트 역시 한 발 나섰다. 그는 오만한 얼굴로 크레티안느를 깔아보며 물었다.

“시녀? 리페가 네 시녀라고? 니가 뭔데?”

“리페가 왜 너랑 하루 종일 붙어있냐? 뭐가 좋다고!”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온갖 친한 척하면서 리페한테 들러붙더니 이렇게 깎아내릴 생각이었겠지. 제 주제도 모르고.”

힐데르트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 고상하고 귀족적인 얼굴이 경멸적인 비웃음을 짓자, 표정만으로 울컥할 정도로 모멸적이었다.

“왜, 왜 그래…….”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크레티안느는 주춤주춤 물러서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구원을 바라는 듯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크레틴 언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칼리오페는 어떤 상황에서건 태양처럼 자신을 구해준다.

그러나 정작 칼리오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크레티안느의 예상과 달랐다.

“지금 저와 제 가문을 모욕한 것인가요?”

“어? 어어?”

크레티안느가 당황해서는 눈을 깜빡거렸다.

칼리오페가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었다. 산호빛 눈동자는 착 가라앉아 침잠해 있었다. 크레티안느가 예상했던 따스함과 안쓰러움은 물론이고, 분노나 모멸감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아무 것도 내비치지 않는 붉은 눈동자에 크레티안느는 흠칫했다. 자신을 향한 격노가 가득한 힐데르트나 에피니의 눈동자보다 칼리오페의 눈이 더 무서웠다.

크레티안느는 바들바들 떨면서 가련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리를 조금 두고 서서 수군거리는 영애와 영식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크레티안느의 얼굴은 더더욱 울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 너무해…….’

크레티안느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어째서? 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거야? 보통 그래야 하잖아. 그런데 오히려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상식적으로 봤을 때 먼저 시녀 운운하며 상대방에게 모욕을 준 사람은 크레티안느였다. 그런 그녀를 돕기 위해서 나서는 건 그 모욕에 일조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몰상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서는 경우는 보통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이득을 생각해도 나서서 좋을 게 없었다.

크레티안느는 친황파인 피엔테 후작가의 후계자로, 꽤 솔깃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대립하고 있는 힐데르트 역시 중도파의 중심인 서모나 후작가의 후계자였다.

나서는 순간 둘 중 한 명의 미움을 받는다면 나서지 않는 게 좋다.

또, 요즘 승승장구하는 루스티첼 가에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루스티첼 가는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은 귀족으로 정치 활동보다는 무도가로서 굳건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화제의 중심이었던 데다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교계의 구심점이 되었다. 구심점이라는 것은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고, 그건 정치적으로도 힘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서지 않는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리페한테 자기 시녀하라니…….’

‘집안 믿고 저러나? 왜 저래?’

‘아니, 지가 황족이야? 황족 중에서도 직계가 아니면 황당할 텐데.’

정치적 상황이나 귀족 간의 알력 말고도 사춘기 소년, 소녀들에게는 다른 기준이 있었다. 그들은 칼리오페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소녀들의 머리에 달린 리본만 봐도 알 수 있다.

칼리오페가 착용한 장신구는 곧 유행이 되었다.

소녀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따라 하지 않는다. 닮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 한다. 몇몇 소녀들은 칼리오페와 같은 남보랏빛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하기도 했다.

그런 칼리오페에게 자기 시녀가 되라고 했으니 크레티안느를 곱게 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잔뜩 위축된 크레티안느는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초록빛 눈동자에 억울함이 잔뜩 차올랐다.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왜 다들 이렇게 못된 걸까?

“정말 너무해. 세 명이서 단체로 이렇게 나를 매도하고……. 여러 명이 한 명한테 이러는 거 잘못된 거 아니야?”

속상하고 슬프고 무섭다는 감정이 목소리와 어조에서 뚝뚝 묻어나왔다.

이런 안쓰러운 모습에도 칼리오페는 매정하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재차 물을 뿐이었다.

“제 말에 대답하세요. 루스티첼 가와 저를 모욕할 의도로 말한 거예요?”

흠칫한 크레티안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중얼거렸다.

“모, 모욕이라니……. 나는, 그냥, 그냥…….”

“울려고?”

에피니가 하, 하고 비웃으며 사납게 물었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과 그 차가운 어투에 깜짝 놀란 크레티안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피니를 바라봤다.

“야, 냅둬. 울라고 해. 한두 번도 아니고 지겹다, 진짜.”

힐데르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쩜 사람이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는데도 스스로 행동을 돌아보지 못할망정……!’

크레티안느는 에피니와 힐데르트의 몰지각한 행태에 화가 났다. 그녀는 씩씩하게 눈물을 털어내고 당차게 말했다.

“왜 모욕이라고 하는 거야? 존경할 만한 고귀한 혈통에게 봉사하는 것은 모든 귀족의 기쁨이잖아. 보통 사람은 누릴 수 없는, 선택된 자들만의 특권이라구. 나는 리페에게 좋은 일을 주려고 하는 건데……!”

“존경할 만한 고귀한 혈토옹? 선택된 자들의 특궈언?”

에피니가 눈을 부라리며 크레티안느를 노려봤다.

크레티안느는 그 사나운 모습에 움찔하긴 했지만, 전처럼 물러서진 않았다.

“좋은 일을 줘? 이게 좋은 일인지는 둘째고, 니가 뭐라고 리페한테 하사하듯이 말해?”

“좋은 일 맞잖아! 고위 귀족의 시녀로 들어가는 거 선망하는 일이잖아!”

힐데르트의 신랄한 물음에 크레티안느가 발끈해서 외쳤다. 자신의 말이 맞는데 둘 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에피니의 어이없어하는 물음과 힐데르트의 비아냥이었다.

“그게 언제적 이야기야?”

“또 지한테 좋은 것만 기억하는 거겠지. 얜 꼭 그러더라. 있는 사실도 자기한테 좋은 쪽으로만 기억하고 불리한 건 쏙 잊지.”

“내가 언제!”

“크레틴 언니.”

칼리오페의 차분한 부름에 빽 소리 지르던 크레티안느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오페에게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이런 무도한 애들보다는 이야기가 잘 통할 것이다.

“제국에서 직접 사업을 운영하고 계신 레이디는 몇 분일까요?”

갑작스럽고 아리송한 질문이었다. 크레티안느는 침묵했다.

“직접 운영하지 않더라도 투자하시는 분은요? 사업 말고 다른 직업을 가진 분은? 작위를 이으신 분, 정·재계나 학계에서 활동하시는 분들까지 하면 얼마나 될까요?”

“그, 그런 거…….”

크레티안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자신이 어떻게 아는가.

“나 망신 주려고 그러는 거야?”

칼리오페는 믿었는데 정말 너무하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몇 명인진 몰라요.”

“너도 모르는 걸—.”

“하지만, 제국의 레이디 대부분이라는 건 알고 있죠. 소수를 제외한 모든 레이디는 제가 말한 조건에 해당돼요.”

크레티안느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칼리오페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주 먼 과거, 귀족은 노동하지 않는 게 미덕이었을 땐 황족 같은 고귀한 혈통에 봉사하는 것이 최고의 영예이고 미덕이었죠.”

“그래, 그러니까 내가 좋은 일을 시켜주겠다는 거잖아.”

왜 자신의 호의를 몰라주는지 서운하고 섭섭했다.

크레티안느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본 힐데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또 잘라먹고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지.”

‘먼 과거’, ‘귀족이 노동하지 않는 게 미덕이었을 땐’이라는 전제를 한순간에 잊는 게 어이없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칼리오페가 현대 레이디의 사회 활동에 관해 미리 힌트를 주지 않았던가.

‘멍청하려고 노력해도 저러긴 힘들겠다.’

요즘에는 황후의 시녀가 되는 것도 ‘봉사’의 개념이 아니라 황후의 이너 서클(Inner circle)에 든다는 측면이 강했다.

‘황후도 저런 식으로 생각 안 하는데 지가 뭐라고…….’

도저히 못 참겠어서 힐데르트가 나서려는 순간, 칼리오페가 단호하게 말했다.

“크레틴 언니, 언니의 시녀가 되라고 한 것은 제게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어? 나, 나는…….”

“지금은 과거와 달라요.”

“아니, 시녀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뽑으니까…….”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시녀로 두는 거니까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요?”

칼리오페가 얼굴을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따지는 어투도 아니고 화난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럽고 가벼운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크레티안느는 왠지 자신이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의식 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좋은 뜻으로, 칼리오페를 위해 말한 거였어. 그러니까 잘못하지 않았어.’

크레티안느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옳다.

“내, 내가 리페를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잖아……!”

“그럼 언니가 제 시녀가 되는 건 어때요?”

“뭐……?”

“그렇잖아요.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시녀로 두는 게 좋은 일이라면, 언니가 제 시녀 해도 나쁠 거 없잖아요?”

크레티안느가 입을 헤, 벌린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저는 언니를 믿으니까요.”

칼리오페는 생긋 친절하게 웃으며 덧붙여주었다.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멸감이 드는데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피엔테 후작이 될 거니까 시녀는 할 수 없어.”

“모욕적이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요?”

칼리오페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건 아냐!”

아니라곤 하지만 칼리오페의 제안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모욕감이 들었다.

‘아니야. 모욕적이지 않아. 나는 좋은 제안을 한 거고, 그 좋은 제안을 그대로 돌려받았는데 왜 모욕적이겠어. 내가, 내가……. 내가 화나는 건—.’

그래, 자신이 화난 건 후작가의 후계자인 자신에게 백작 영애의 시녀가 되라고 했기 때문이다.

‘맞아. 이건 경우에 맞지 않아. 리페는 백작 영애니까 내 시녀로 와도 괜찮지만 나는 아니야.’

“신분이 차이 나니까, 내가 시녀가 되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아.”

“저도 그럴 신분은 아닌데요.”

칼리오페가 딱 잘라 말했다.

“역사서에나 나올 시대였다면 그게 영광이었을 수 있죠.”

크레티안느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지금은 피엔테의 가신이나 가호를 받아야 하는 하급 귀족이어야 크레티안느 피엔테의 시녀가 되는 게 영광이겠죠.”

먼 과거, 계급이 황금보다, 목숨보다 중요하던 시절과는 다르다. 지금은 부르주아 계급의 시민이 남작에게 떵떵거리기도 하고, 금맥을 움켜쥔 자작이 계약서를 들먹이며 백작을 협박하기도 한다.

고귀한 혈통에 대한 경애, 전통적인 명예와 충성. 그런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현대적 관점에 맞춰 미화된 가치로 소비된다.

그런 관점에서 루스티첼 가는 다른 핏줄보다 고귀하다고 일컬어지는 가문 중 하나였다. 유서 깊은 흰 날개, 한 권으로 부족한 계보, 거기에 청렴함과 강직함의 상징이라는 수식까지.

심지어 루스티첼 가의 계보는 피엔테 가보다 더 길었다.

입지가 더욱 굳건해진 지금과 달랐던 전생에서도 루스티첼 가의 명예는 드높았다.

그런데 시녀라니.

“루스티첼이 피엔테의 그늘 아래에서만 살 수 있나요?”

깊은 물 속에 잠긴 바위처럼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시선에 크레티안느가 움찔했다.

“나, 난 몰랐어…….”

크레티안느가 작게 중얼거렸다. 초록빛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충격도 잠시, 주먹을 꾹 움켜쥔 크레티안느가 항의했다.

“너무하잖아. 난 몰라서 그런 건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몰라서 실수한 건 잘못 아니잖아.”

크레티안느는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 태도에 칼리오페를 비롯한 세 사람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아연실색했다. 시녀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것도 충격인데 그 충격이 잊힐 정도로 뻔뻔했다.

“그렇잖아? 몰라서 하는 실수는 잘못 아니지?”

크레티안느가 매달리듯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칼리오페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그럼 잘한 거냐?!’

‘어서 잘못이라고 말해줘!’

‘저 나이 먹고서 저걸 모르는 건 잘못이지!’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칼리오페의 말을 기다렸다. 은근한 기대감이 사람들의 눈에 서렸다.

칼리오페가 예의 바르고 얌전한 데다가 참을성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건드리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방금 칼리오페가 크레티안느에게 한 말을 생각하면 더 이상 인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모두의 기대감이 극에 달했을 때,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네, 몰라서 하는 실수는 잘못 아니죠.”

그러나 그건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치?”

그렇게나 울상을 지은 게 거짓이었던 것 마냥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밝아졌다.

“거봐.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런데 나를 이렇게 매도하다니…….”

크레티안느는 힐데르트와 에피니를 노려봤다.

아무 잘못 없는 자신을 그렇게나 몰아세우고 비난하다니, 두 사람 다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

순식간에 선량한 피해자의 모습이 된 크레티안느가 당당하게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비난하려고 숨을 들이킨 순간이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저는 언니가 아무 잘못 없다고 하진 않았는데요?”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산호빛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지더니 천천히 깜빡였다.

“어?”

“몰라서 저지른 실수는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 언니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하진 않았어요.”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었다.

“제 미래고, 제 꿈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좋은 미래를—.”

“좋은 미래?”

칼리오페가 차갑게 말했다.

안 좋은 건지 몰랐다고 시인했으면서도, 그게 얼마나 됐다고 다시 자기한테 유리하게 ‘좋은 것’이 되는지.

정말 질렸다.

그 차가운 목소리와 시선에 크레티안느는 파르르 떨었다. 여태까지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칼리오페가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칼리오페는 금방 생긋 웃었다.

“그 좋은 미래에 제 생각이 들어갔나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은 아까보다 더 차가운 칼날이었다.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원하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의 미래’를 좋은 미래라며 강요한 게 아니라요?”

덜컥. 정곡이 찔린 크레티안느가 비틀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혀가 버석 굳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제 미래를 고민하는 척할 때, 진실로 제 생각은 하셨나요?”

“나, 나는…….”

“아, 고위 귀족에게 봉사하는 건 기쁨이고 명예이니까 저한테 좋을 거라고?”

칼리오페는 아주 매끄럽게 크레티안느가 할 변명을 잡아챘다.

“정말 그 생각으로 말씀하신 건가요?”

크레티안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상하다.

나는 착하고, 조금 어수룩한 면이 있지만 그런 점이 조금 귀엽고, 안쓰럽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고, 사랑스러운……. 그런 사람인데.

그렇게 계산적이지 못하고 착한 내가 이기적일 리가 없잖아.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내 꿈, 내 인생.”

칼리오페는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가볍게 나열했다.

“이런 건 하나도 생각 안 하고,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원하는 칼리오페의 삶을 나한테 강요한 거잖아.”

“나는 그런 뜻이……. 몰라서, 그런 의도가 아니라—.”

“남 생각 안 하고 자기 생각 강요하는 게 나쁘다는 것. 그 정도는 아시잖아요?”

횡설수설하며 변명하던 크레티안느의 입술이 딱 닫혔다.

이제 진짜로 몰랐다며 억울해할 수 없었다.

“당신에게 내 인생을 결정하거나 좌우할 권리 따위 없어요.”

단언한 칼리오페가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웃으며 살짝 덧붙였다.

“아, 이것도 모를까 봐 말씀드리는데 그거 무례한 거예요.”

사람들이 피식 웃었다.

자신에게 꽂히는 비웃음에 크레티안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무서워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렇게나 무서워하는데 나를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나, 난 착한데…….’

“모르진 않겠지. 그 일이 있었는데.”

에피니가 중얼거렸다.

예전에도 크레티안느는 자기 의견을 강요하며 인생을 좌우하려다가 친구를 잃은 적이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피엔테라는 배경 때문에 비위 맞춰주려고 노력하던 불쌍한 가신 가문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린 크레티안느가 움찔했다. 평생 곁에서 자기 편을 들어줄 것 같았던 사람이 떠났다. 그런 경험을 또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나는 리페가 좋아서…….”

“좋아서 한다고 잘못이 아닌 건 아니지요.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는 일은 전부 무죄인가요? 살인도? 감금도?”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인 건 아니잖아!”

크레티안느가 벌컥 성을 냈다.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 꼬투리 잡고 늘어지는 것도 피곤하다.

‘하긴, 지금 크레틴에게 잘못을 알려주고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도 아니지.’

크레티안느에게 연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돌아설 때가 됐다. 칼리오페는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래요.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요.”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에피니 언니와 힐데 오라버니에게 잘못한 건 사과하세요.”

“뭐?!”

크레티안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다른 어떤 것도 없이 오로지 순수한 의문만을 가득 담은 초록색 눈동자.

힐데르트와 에피니는 기가 찼다. 저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됐어.”

“쟤한테 사과받아 봤자 기분만 더러워.”

“리페한테나 사과해. 이만큼 설명해줬으니 이제 니가 얼마나 무례했는지, 이기적이었는지는 알겠지.”

말로 채찍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흠칫한 크레티안느가 울먹거렸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듯 주변을 돌아보더니 어깨를 늘어트리고 두 손을 끌어모았다.

“자,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응?”

에피니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대체 뭘 모르냐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걸 참았다. 오로지 지난 세월 동안 그녀와 함께 지냈던 칼리오페의 영향 덕분이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아…….”

반응 없는 세 사람을 향해 크레티안느가 재차 말했다.

‘독촉당해서 사과하는 불쌍한 나’라고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또, ‘가련한 내가 이렇게 사과하는데 안 받아줄 거야?’라는 것도.

“레이디 크레티안느 피엔테.”

칼리오페의 정중한 부름에 크레티안느의 눈동자에 희열이 들어찼다. 그녀는 칼리오페를 잘 알고 있었다. 그 관대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성품을.

‘나의 구원자……!’

“사람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칼리오페는,

“중요한 건 그 이후의 문제지요.”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칼리오페가 크레티안느를 똑바로 응시했다.

“행동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산호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크레티안느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

붉고, 거대하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선. 날카로운 눈동자가 칼리오페와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를 버렸다.

“저는 이만.”

칼리오페가 치맛자락을 잡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그녀가 오늘 입은 것은 깔끔한 모직 원피스지만, 성장(盛裝)을 한 채 대연회에 나간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 정중하고 우아한 예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상황을 잊고 탄성을 흘렸다.

칼리오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피엔테 가를 나섰다.

* * *

“피엔테 후작가의 미래를 알만하다. 저딴 게 후계자라니.”

마차를 타자마자 힐데르트가 낮게 짓씹었다.

‘미래가 그다지 밝진 않았지요.’

칼리오페는 전생의 피엔테 후작가를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셋이나 됐으면서 저 정도로 모르는 건 머리에 문제 있는 거지.”

제국에서 열셋은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귀족가의 아이들은 이미 진로를 결정한 경우가 대다수고, 일반 시민 아이들은 이미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에피니는 종기사로서 일하고 있으니 더더욱 크레티안느가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 애랑은 상종을 말아야 해.”

“맞아.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좋아한다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해도 그걸 들어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인간관계는 서로 좋아해야지 유지되는 거니까.”

힐데르트와 에피니가 웬일로 죽이 맞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힐끔힐끔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았다.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네, 그 말이 맞아요.”

힐데르트와 에피니가 화악,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오페는 싱긋 웃은 후,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리고…….” 하고 운을 뗐다.

“크레티안느 언니가 진짜로 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에요.”

거리를 바라보는 칼리오페의 얼굴은 여상했다. 단순히 사실을 말할 뿐, 그게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크레티안느가 십 년 가까이 칼리오페를 좋다고 쫓아다닌 걸 생각하면 참으로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힐데르트와 에피니는 만족해서 미소 지었다. 그들은 칼리오페의 온정 가득한 시선을 사랑했지만, 이렇게 냉정하고 확실한 점을 더 사랑했다.

칼리오페는 두 사람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모르는 채, 눈 내린 하얀 거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사교계의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기 시작하겠네.’

* * *

오늘 크레티안느가 살롱을 열었던 피엔테 가의 한 응접실.

칼리오페의 예상대로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까마귀들이 탐욕스러운 눈을 번뜩 빛내고 있었다.

‘이거, 기회 아닌가?’

서모나 가의 후계자와 ‘그 칼리오페 루스티첼’ 앞에선 감히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지고 나니 반짝이는 황금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나이대 소년·소녀들은 또래에게 민감하다. 크레티안느 피엔테가 의존적이고 멍청하다는 것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이전엔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만을 찾았고,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를 이용하려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막아줬다.

‘하지만 이제 리페가 떠났잖아?’

의지할 구석이 없어진 크레티안느에게 접근하면 곧장 매달려 올 것이다. 남에게 기생해서 자신의 자존감을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으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크레티안느에게 다가가는 까마귀는 없었다.

그들은 주변의 눈치를 봤다.

이 자리에서 까마귀는 매우 극소수였다.

피엔테 가의 살롱에 초대된 영애나 영식 대부분은 중앙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이른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다. 피엔테 가와 돈독해지면 좋긴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리페가 착해서 이 정도로 넘어간 거지. 시녀라니…….”

이곳엔 칼리오페의 열성적인 추종자들이 넘쳐났다.

“난 아직도 충격이야. 진짜, 무식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아, 근데 이거 소문 새어나가면 좀 그렇긴 하겠다. 크레티안느가 사과했는데 리페가 받아주지도 않고 자리 뜬 게 되잖아.”

“저걸 사과한다고 받아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 근데 소문이라는 게 축약되고 덧붙여지기 마련이니까…….”

머리카락에 산호빛 리본을 매단 영애가 어깨를 으쓱했다. 칼리오페에게 유리한 소문도 있겠지만, 반대로 크레티안느에게 유리한 소문도 날 것이다.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 당연히 칼리오페를 탐탁지 않게 보는 무리도 있었다.

또, 이 기회를 이용해 크레티안느와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시 우리가 리페를 지켜줘야 해!”

남보라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말했다. 머리 뿌리 부분이 밝은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염색을 한 것 같았다.

다들 그녀에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리페가 워낙 처신을 잘해서 안 좋은 소문이 성행하긴 쉽지 않을 거야.”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를 등지면서도 결코 ‘네가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지 않았다.’ 라거나, ‘그러니 사과를 받을 수 없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확언하지 않았다. 그저 절제된 몸짓과 표정으로 압도했을 뿐.

“진짜 노련해…….”

“너무 멋져…….”

“눈빛만으로 제압한 거 봤어?”

세련된 사교술은 모든 귀족 소년·소녀들의 로망이었다. 그렇게 모욕적이고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 자신을 가다듬고 냉정하게 ‘소문 나도 괜찮을’ 언행만 하는 사람은 몇 없다.

“어쨌든 트집 잡아서 어떻게든 리페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애들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자고.”

소년·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에 불을 밝힌 채 살롱을 살폈다.

까마귀들은 일단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소리 없는 까마귀 사냥이 한창인 곳에서 홀로 다른 것에 빠져 있는 소년이 있었다.

피아노 앞에 선 요르갈렌의 천재, 하르첸은 칼리오페가 나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하르첸 역시 칼리오페를 알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는 남부 지방에도 칼리오페는 아주 유명인사였다.

칼리오페가 광고하는 물건들은 남부에서도 제법 잘 팔렸고, 거리를 걷다 보면 꼭 한 번은 칼리오페의 얼굴과 마주치곤 했다.

제도로 올라오니 그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제국에서 가장 큰 오페라 하우스와 온갖 명품샵이 몰려 있는 유리 돔 플라자. 그 사이를 잇는, 이름난 장인들의 아틀리에가 몰려 있는 제국 최고의 가도 파트리유 거리. 그 곳곳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칼리오페는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르첸은 그녀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파트리유 오페라 하우스로 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파트리유 거리를 거쳐야 했다. 그러다가 칼리오페를 보고—도저히 못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고향의 거리를 떠올렸을 뿐.

오늘 실제로 칼리오페를 보았을 때, 그 생기 넘치면서도 고요한 아름다움에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흥미를 두는 것은 외적인 미가 아니었다.

다만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을 때.

‘말하는 게…….’

그것도 그냥 말한 게 아니라 화를 낸 것인데도.

‘피아노 연주 같아.’

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별 거지 같은 낭독에 곤두서 있던 신경이 확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목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에서 봤던 블랙홀.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수많은 아름다운 소리를 손끝에서 탄생시킨 그로서도 그런 음률은 처음이었다.

그 리듬감, 그 음색, 그 음정. 아주 살짝 섞이는 숨결마저 노래의 일부 같다.

“제도에는 노래 부르듯이 말하는 레이디들이 많다더니.”

하르첸이 중얼거렸다.

“진짜였잖아…….”

* * *

볕 잘 드는 오후 카페 안.

바이엘은 신문을 읽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뾰로롱, 차임벨이 울리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든 그녀는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오늘 그녀의 데이트 상대였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칼리오페에게 쏠렸다. 바이엘은 그 소리 없는 소란에 눈을 가늘게 떴다.

카페 웨이터가 칼리오페에게 다가가 코트를 받았다.

‘저 웨이터 표정 관리가 안 되는걸.’

귀엽고 흐뭇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에 바이엘은 피식 웃었다.

칼리오페는 팁을 두둑이 주고는 바이엘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가씨.”

일어나서 맞으니 칼리오페가 다정하게 손을 맞잡았다.

“바이엘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친밀한 스킨쉽에 바이엘에게까지 시선이 몰렸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바이엘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자리에 앉았다.

“루스티첼 저로 부르셨으면 그쪽으로 갔을 텐데요.”

“에이, 선생님이랑 오래간만에 데이트하고 싶었는걸요.”

칼리오페가 생긋 웃더니 “그리고 저보다 선생님이 더 바쁜데 제가 와야죠.” 라며 가볍게 덧붙였다.

그 배려에 바이엘은 따스한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똑똑한’ 제자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성장하면서 어울리는 무리의 영향을 받으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칼리오페의 영향으로 주변인들이 바뀌었다.

“사실은 오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뵙자 그랬는데요.”

조심스러운 시작에 바이엘은 몸을 바로 했다. 그녀는 칼리오페의 호기심이나 고민에 전력으로 상담할 준비가 만만인 사람이었다.

“제 진로에 대해서요.”

“진로요?”

“네, 저어…….”

답지 않게 망설이던 칼리오페가 소리를 한껏 낮춘 채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저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요.”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커다란 눈으로 마주 보며 속닥이는 게 너무 귀여웠다.

바이엘은 순간 웨이터처럼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며 가르쳤던 경험이 있다.

바이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렸다.

“노래라…….”

귀족들은 교양으로 성악을 배우는 경우도 많고, 신전에서 노래하는 것을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은 타국과 달리 오페라 내용조차 성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오페라 가수가 천박하다는 인식도 없었다.

즉, 어떤 방면으로 노래하더라도 그다지 해가 될 일은 없다.

‘그런데도 아가씨가 고민하는 이유는…….’

바이엘은 칼리오페가 왜 자신에게 고민을 털어놓는지 알 것 같았다.

‘속가 때문이겠지.’

바이엘은 일반 시민 계급이면서 귀족과 함께 생활한 날이 길었다. 그녀야말로 편견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이었다.

“아가씨, 저는 정말로 힘들었어요.”

잠시 고민에 잠겼던 바이엘은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녀가 아카데미 시절 겪었던 일은 아직도 치부였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그걸 쉽게 훌훌 이야기할 순 없었다. 바이엘처럼 자존심 센 사람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모두 털어놓는다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페 아가씨라면 괜찮아.’

커피잔을 꽉 붙잡은 바이엘이 결심한 듯 입술에 힘을 줬다.

“저는 특별전형으로 입학했거든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입학 전형이었어요.”

귀족도, 부르주아도, 심지어는 그녀와 같은 일반 시민 계급조차 그녀를 배척했다. 바이엘의 집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고, 그녀의 고향 같은 시골 마을에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은 저, 입학하고 일 년 정도까지만 해도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았어요.”

완전히 하위권이 아니었던 것은 기부 입학한 부르주아나 귀족들이 출석조차 하지 않아 아래를 깔아줬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 접한 방대한 사상, 신식 문물과 과학은 그녀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따라가기 벅찰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아마도 그쯤에서 바이엘의 의지는 꺾였을 것이다.

사그라지는 그녀의 의지에 불을 붙인 것은 다름 아닌, 그녀를 배척하고 괴롭힌 자들이었다.

가문 계보도, 재산 문서도 없지만, 바이엘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다. 그녀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자신의 인생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학업에 매달렸다.

십 대 소녀가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참 비참하고 슬픈 일이었다. 바이엘은 분노를 연료 삼아 모든 것을 떨쳐냈다.

“고생 끝에 수석 자리를 꿰찼는데 글쎄, 비겁한 수를 써서 졸업 시험 하나를 못 치게 하지 뭐예요?”

정말 열 받았다.

그 과정에서 다치기도 했지만, 아프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부상을 본 교수가 추가 시험을 허락했으나, 추가 시험은 성적의 70%만 반영된다. 결국, 그녀는 수석 자리를 놓쳤다.

“선생님…….”

“세상은 바뀌었죠.”

바이엘은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제가 이렇게 아가씨와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도, 중앙 행정 관료로 일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예요.”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바이엘은 “200년 전쯤이면 민원관리과에서 일했을 수는 있겠네요.” 라고 농담을 던졌다.

“왕국 시절엔 저희 둘 다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구요.”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칼리오페 역시 농담을 던졌다.

천 년 전, 제국이 왕국이었던 때가 있다. 그때 태어났다면 칼리오페는 규방에서, 바이엘은 농노라 영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조금 씁쓸함이 담긴 웃음이었다.

“네, 정말 많이 변했죠. 지금도 변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바이엘이 웃음을 멈추며 진지하게 칼리오페를 바라보곤 이어 말했다.

“선은 옅어지고 흐려질지언정 없어지진 않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 선을 다시 짙게 칠하려고 하겠죠.”

칼리오페의 말에 바이엘은 작게 웃었다.

가정교사를 하며 이 총명한 아가씨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었다. 그 기간이 일 년뿐이었다는 게 오늘따라 무척 아쉬웠다.

“이건 귀족과 시민의…… 신분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무리 짓기 시작하면 어딜 가나 누군가를 배척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입지나 우월함을 확인받으려고 합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전쟁으로 무법지대가 된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겪었다.

“그거 아세요? 시골에서는 오히려 도시 아이가 배척받는답니다. 같은 계급이긴 하지만, 집안을 생각하면 그 도시 아이가 더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요.”

바이엘은 냉소를 지은 후 한마디 덧붙였다.

“인간의 본능 같은 거죠.”

바이엘의 눈동자는 인간에 대한 회의에 물들어 있었다.

칼리오페는 그런 그녀가 안타깝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밑바닥을 본 칼리오페가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해서, 그걸 바이엘에게 강요할 순 없다.

칼리오페는 그녀의 회의감을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말씀은 잘 알겠어요. 선이 흐려지고 있으니 더더욱 귀족들은 그 선을 최대한 지키려고 할거라는 말이죠.”

“맞아요. 신전 문화는 귀족들의 고유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요.”

즉, 어떻게든 성가를 드높이고 속가를 배척할 것이라는 뜻이다.

칼리오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전생에 비해 신전 측의 사상 지배가 약해서 좀 다르려나 싶었는데, 귀족의 권위 다툼으로 생각하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칼리오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이엘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가씨, 곧 신전이 리브살어를 가르치는 걸 제한할 거라고 합니다.”

‘제한? 전생에서 그런 일은 없었는데?’

미래가 바뀌었다.

칼리오페는 이 시점에서 리브살어 사용자를 제한해서 신전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설마 배우는 사람의 혈통을 따져서 제한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안타깝지만, 그 말이 맞아요. 혈통주의와 세습주의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거지요.”

모든 성서는 어려운 고대어인 리브살어로 쓰여 있다. 물론 대중들이 접하는 성서는 제국어로 번역되어 나와 신도들이 신앙 활동을 하는 것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사실 신전 문화가 귀족의 고급 문화와 연관을 가진 데에는 이 리브살어의 공이 컸다.

‘시민 계급은 리브살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니까.’

귀족을 선망하는 몇몇 부르주아들이 배울 뿐, 바이엘조차 리브살어를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 사용자 자체를 제한한다면…….’

귀족 사회에서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 위해 리브살어를 많이 사용한다. 성서에 뿌리를 둔 언어이기 때문에 귀족 문화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전이 리브살어를 더 배타적이게 관리하면 귀족들은 더더욱 리브살어에 매달리게 될 거야.’

한정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 그건 굉장한 힘을 갖는다.

정보를 독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권력조차 갖게 만든다.

킴시스브가 말하길, 특정 계급이 글자를 독점해 권력을 움켜쥐었던 실질적인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왕이 쉬운 글자를 만들려는 것을 반대했다고…….’

그 나라는 어떨지 모르나 현 제국의 상황에서 신전이 리브살어 사용을 혈통에 따라 제한한다면.

리브살어를 사용하는 것이 곧 자신의 지식, 혈통, 우수성을 증명하는 게 된다.

귀족들의 자리를 침범하는 부르주아 계급.

부르주아 계급이 득세하고 있다고 하나, 제국의 주요 금권과 정치권은 전통적인 권력자들이 꽉 잡고 있다.

감히 그들이 우리와 같아질 수 없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다.

‘그렇게 둘 순 없어.’

귀족과 부르주아가 모두 소속된 신사 클럽.

칼리오페는 그곳에서 귀족들이 리브살어로 말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리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브살어를 배우는 게 금지된 부르주아들은 클럽 내에서 소외되겠지.’

계층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 신전 또한 더 득세할 것이다.

‘신전이 발톱을 드러냈어.’

이대로 가다간 신전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성녀의 등장으로 아예 정점을 찍을 것이다. 전생처럼 이단 심판이란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피를 흘리리라.

“아가씨…….”

무언가 결심한 듯한 칼리오페의 표정을 보고 바이엘이 그녀를 불렀다.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걱정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결심이 섰어요. 감사해요.”

바이엘은 무슨 결심인지 듣지 않았는데도 반대부터 하고 싶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 소중한 작은 아가씨가 행복한 것뿐이었다. 사회가 분열되는 것에 대한 염려는 뒷순위였다.

‘……그런데.’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맑게 빛나고, 선홍빛 입술은 각오로 앙다물려 있었다.

‘눈부셔…….’

칼리오페에게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새벽 별처럼.

바이엘은 순식간에 첫새벽의 여명에 매료되었다. 빛이 떠올라 세상을 밝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녀는 걱정으로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말씀하세요.”

단지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감사해요, 선생님.”

칼리오페는 자신이 뭘 할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바이엘이 고마웠다.

“자,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바이엘이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신전 문화가 성행할수록 귀족 사회는 더더욱 배타적이 되고, 계층 간의 격차는 뚜렷해지겠지요. 신전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요.”

때마침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져 차가 다 우려졌다는 것을 알렸다.

칼리오페는 티포트 안의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찻잔이 꽉 차면 새로운 것을 넣을 수 없죠. 흘러넘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며 찻잔의 반만 채우고 티포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밀크 저그(milk jug)를 들었다.

“다 차기 전에 우유를 부으면.”

진한 고동색이었던 차가 점점 뿌옇게 변하며 캐러멜 크림과 닮은 색이 되었다.

지켜보던 바이엘이 설탕 단지에서 갈색 각설탕을 퐁당퐁당 넣으며 말했다.

“거기에 이렇게 설탕도 넣으면.”

“멋진 밀크티가 되지요.”

티스푼으로 차를 저은 칼리오페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어요.”

차는 부드럽고 고소한 우유와 섞이고 달달한 맛까지 더해져 스트레이트 티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혀에 감겼다.

칼리오페와 바이엘은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찻잔이 귀족문화라면 차는 신전문화다.

여기에 우유와 설탕이라는 또 다른 문화를 넣어서 귀족 사회에 신전문화를 희석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설탕과 우유는 속가인가요?”

“정확히는 성가가 아닌 노래지요.”

바이엘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옆머리를 조금 땋아서 눈송이 같은 폼폼으로 고정한 것이 보였다.

시선을 돌리니 카페 안에 폼폼 귀걸이를 하거나 폼폼 머리끈을 한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그보다는 철사를 넣은 리본을 한 사람이 더 많았다.

‘곧 리본보다 폼폼을 한 사람이 더 많아지겠네.’

리본도, 폼폼도 모두 칼리오페가 유행시킨 것들이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이 하고 다니는 액세서리가 유행한다는 걸 알자마자 값비싼 보석은 하고 다니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성장(盛裝)이 필요한 곳에는 제대로 갖추어 입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아직 12살.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리본과 폼폼은 품질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반 시민 계급도 충분히 살 수 있다.

원래 귀족과 일반 시민은 차림새부터 뚜렷하게 나뉘었다. 그런데 칼리오페로 인해 어리거나 젊은 나이대에선 비슷한 패션이 유행했다.

묻지 않아도 그것이 칼리오페의 의도임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지.’

자신의 영향력을 알자마자 이용하는 영리함도 굉장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보는 것은 굉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아가씨 나이에 이렇게 시야가 넓은 사람은 보지 못했어.’

거기에 따지고 보면 칼리오페는 기득권자가 아닌가.

바이엘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귀족 사회는 편견에 물들어 있죠. 속가를 부르는 건 차에 우유를 타는 것처럼 쉽진 않을 거예요.”

“네, 어렵겠죠.”

전생의 칼리오페는 사회에 어떤 영향도 없는, 독서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소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회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입지가 넓어졌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다.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루스티첼 가를 노릴지 알 수 없기에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로 적을 늘리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녀 주변의 사람들을, 자신을 향한 마음을 믿었다.

그리고 세계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순진하고 나약한 믿음인지도 모르지.’

칼리오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산 채로 심장을 가르는 것 같은 비극을 겪었다. 그런데도 폭풍 속에 핀 꽃처럼, 연약하고도 기적 같은 믿음을 가진 건 오롯이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덕분이다.

“모험인 건 맞아요.”

“아가씨.”

“하지만, 해야 해요.”

바이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칼리오페의 손을 잡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앞으로의 파란을 예지한 사람의 체온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어린아이의 치기가 아니다.

“아가씨는 제게 귀족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신 분이세요. 그러니 이번엔 하층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시지 않을까요?”

바이엘이 살짝 웃으며 “되게 감정적이죠.”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어요.”

“선생님…….”

“저처럼 이성과 논리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 이런 감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분은 아가씨뿐이에요.”

“고마워요, 선생님.”

칼리오페는 자신의 손을 움켜쥔 바이엘의 손을 맞잡았다. 차가웠던 손에 점점 온기가 전해졌다.

“자, 그럼 먼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칼리오페는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신기하게 주변 환경과 동조해서 자신도 모르는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가 아는 노래는 기억에 의존한 속가 몇 개였다.

“귀족들에게 그 천박하다는 속가를 불러주려면 우선 속가부터 제대로 알아야겠죠.”

“마침 잘 찾아오셨네요.”

바이엘이 칼리오페를 향해 살짝 윙크했다.

그녀는 다루안 아카데미를 나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출신을 따지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무시당했던 것은 출신 탓이 컸다.

바이엘의 고향은 하를레민. ‘시골’이라고 불리지만 물 맑고 공기 좋은 산골짜기는 아니었다.

불법체류자와 빈민, 범죄자가 스며든 도시 속 소외지역이었다.

* * *

“자, 다 됐어요.”

칼리오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거울을 봤다.

“이, 이게…….”

정말 나란 말인가?

말할 때 같이 입술을 움직이고, 눈을 깜빡일 때 같이 깜빡이는 것을 보니 자신이 맞았다.

“믿기지 않아요.”

칼리오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원래 눈매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가를 검게 물들이고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렸다.

가죽 초커와 가느다란 목걸이를 어지러울 정도로 레이어드하고 검은 레이스로 포인트를 준, 끈으로 된 얇은 슈미즈를 입었다.

“이, 이건 좀……. 그렇지 않나요?”

이건 속옷 아닌가?!

칼리오페는 훤히 드러난 어깨를 감쌌다.

“아가씨, 말하면 안 되겠어요. 금방 귀족 티가 나요.”

바이엘이 커다란 재킷을 입혀주며 말했다. 재킷을 입으니 좀 나았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음, 드레스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덜 파여 있긴 하지만.’

칼리오페는 입은 적 없으나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는 드레스가 귀족 사회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허름하게 입는 게 눈에 띄지 않겠지만, 아가씨는 너무 귀티 흘러서 안 돼요.”

그래서 일부러 과하게 꾸며 본래의 색을 감춰버린다는 거였다.

확실히 지금 칼리오페의 얼굴에선 본래 정갈한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을 옆에 놓고 봐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워낙 차분하셔서 안 어울리면 어쩌지, 싶었는데 괜히 걱정했네요.”

바이엘은 “워낙 캔버스가 좋아서 그런 걸까요.” 하고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처럼 칼리오페에게 잘 어울렸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과한 화장을 한 것에 어떤 사람은 얼굴을 찌푸릴지 모르나 적어도 하를레민에선 아니었다. 칼리오페보다 어린 소년·소녀도 짙은 화장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예 삭발을 해도 특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시골’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리는 없다는 걸까…….’

통칭 ‘시골’이라고 불리는 하를레민은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조차 쉽게 발걸음하지 않는, 제도 속 우범지역이었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는 것은 차림새가 워낙 파격적이기 때문이리라.

칼리오페는 자꾸만 드는 불안한 예감을 무시했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칼리오페는 흠칫 놀랐다.

“괜찮아요, 아가씨.”

바이엘이 칼리오페의 어깨를 토닥였다.

“말씀드렸던 제 친구예요. 이 집 주인이요.”

바이엘은 칼리오페가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서야 현관으로 나갔다.

열흘 전, 칼리오페는 오랜만에 바이엘과 카페에서 만나 진로에 대해 상담했었다.

그 결과, 오늘 칼리오페는 하를레민 지구의 어느 낡은 집—바이엘의 친구의 집—에서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도카니 서 있게 되었다.

[저도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낮에 함께 하를레민으로 들어오면서 바이엘은 그렇게 속삭였다.

칼리오페는 바이엘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 역시 이곳에 오는 게 잘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속가, 그중에서도 하층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야 제도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하를레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소외 계층 문화의 산실이었다.

한 문화의 뿌리라고 불리는 곳이 어떤지, 그곳의 노래는 어떤지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조금 후면 알 수 있겠지.’

칼리오페는 재킷을 한 번 더 여민 다음 커튼을 살짝 들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에 들어올 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거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밤의 어둠이 내린 하를레민은 온갖 색색의 램프들이 휘황찬란하게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불빛 바로 옆 그림자 속은 새까매서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산호빛 눈동자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의 걸음걸이와 고갯짓, 그리고 표정까지.

전생에서도 평민 행세를 해본 적이 있었다. 다 티가 나서 문제였지만.

그때 칼리오페와 어울렸던 사람들은 알고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줬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렇게 변장을 한 것은 칼리오페의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범죄를 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전생에서 칼리오페가 평민들을 만났던 곳은 마르뎅 지구로, 일반적인 소시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하를레민 지구는 마르뎅 지구와 범죄율부터 차원이 다르다.

때마침 거실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에 있는데도 이곳까지 나무판자가 울렸다.

칼리오페는 허리에 힘을 뺀 후 골반으로 비딱하게 섰다.

‘눈은 내리깔고, 어딘지 지쳐 보이게.’

어두운 방 안에서 칼리오페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어지럽게 빛났다.

* * *

바이엘은 급한 손놀림으로 칼리오페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러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네가 갑자기 들어가면 놀랄 수 있다고. 아직 어린애라니까? 네 덩치를 생각해야지.”

“내가 내 집에서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냐?”

러셀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바이엘을 쳐다봤다. 이곳이 러셀의 집인 건 사실이기에 바이엘은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그럼 같이 들어가자. 대신 내가 소개할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있어.”

“야, 걔 열두 살이라며? 내가 열두 살 땐 구역 다툼에 꼈었어.”

“……그건 그렇지만.”

바이엘의 눈이 러셀의 눈썹에 난 상처로 향했다.

“난 열 살 때부터 벽돌을 날랐어. 열두 살이면 다 큰 거야. 자기 몫은 자기가 챙기는 나이라고. 너는 그때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잘 모르겠지만.”

“러셀…….”

“널 탓하는 게 아니야. 넌 우리의 자랑이라고. 우리 같은 놈들도 노력하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몸소 알려줬잖아.”

“……어쨌든 내 일행은 이곳 아이가 아니야. 우리랑은 다르다고.”

“흥. 여기가 아니더라도 밖에 나가보면 열 살, 열한 살짜리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빵을 파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

러셀은 코웃음을 치며 바이엘을 지나쳤다.

그로서도 바이엘이 소중하게 끼고 도는 애한테 나쁘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일행을 보호해달라는 바이엘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한 거였다.

‘물론, 돈도 잘 챙겼고 말이지.’

그냥 부탁했어도 들어줄 생각이었는데 바이엘은 돈까지 두둑이 얹어주었다. 러셀은 성심을 다해 바이엘의 일행을 보호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기를 죽여줄 필요가 있지.’

관광 온 것처럼 철딱서니 없게 굴다가 맛있는 먹잇감이 되는 건 피해야 한다.

바이엘은 일행의 정체에 대해서 함구했으나 러셀도 머리가 있었다.

‘뭐, 바이엘 상사의 아이겠지. 귀족은 아니라고 했지만, 부르주아나 돈 좀 있는 집일 게 뻔하고. 하를레민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어떤 성격일지 뻔하다.’

온실 속에서 자란 공주님은 곧 현실을 깨닫고 겁먹어서 울게 되리라.

러셀은 닫혀 있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창가에 서 있던 소녀가 느릿하게 그를 돌아봤다.

“…….”

소녀의 두 눈과 마주친 순간, 러셀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 막힌 것은 말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멈춰 섰다.

비딱하게 기대선 마른 몸, 성의 없이 걸친 재킷.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는 우울함에 물들어 있었다. 철딱서니 없는 공주님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 내 생각과는 이미지가 좀 다르네.”

러셀은 허허, 어색하게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뒤따라온 바이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아가씨?!’

물론 저렇게 꾸며놓은 것은 자신이지만.

‘조금 전이랑 너무 달라.’

몸가짐이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짙은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었던 칼리오페 특유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특히 저 눈빛.’

한없이 맑고 청명했던 칼리오페의 눈이 아니었다.

짙고, 어둡고, 빽빽한 무언가로 뒤덮여 있는 눈동자. 시꺼먼 동공은 마치 심연같이 섬뜩하면서도 시선을 붙드는 구석이 있었다.

화초처럼 자란 귀족 아가씨의 눈빛이 아니었다. 삶의 잔혹함과 처절함을 겪은 자의 눈이었다.

‘아가씨는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을 텐데…….’

가끔씩 칼리오페가 내비쳤던 절박함.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지금은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야.’

바이엘은 생각을 털어냈다.

“음, 안녕?”

저도 모르게 기선 제압당한 러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칼리오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했다. 말투에서 귀족티가 난다던 바이엘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러셀은 칼리오페의 태도에 멈칫했다.

이런 인사를 받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이보다 더 싹퉁바가지 없는 꼬맹이들은 이 거리에 널렸다. 하지만 그들도 러셀에겐 나름의 예의를 차렸다.

'뭐, 이 꼬맹이는 나에 대해서 모르고, 이 거리 애도 아니니까.'

그리고 저 가녀린 몸에서 나온 패기 넘치는 태도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배짱 두둑한 녀석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러셀은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을 소개했다.

“난 러셀. 바이엘에게서 들었겠지만 오늘 한정 네 보호자다.”

“……리리.”

“좋아, 리리. 네가 지켜야 할 것은 한가지다. 내게서 떨어지지 말 것.”

러셀은 물끄러미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이 거리에서 보호하겠다고 말하면서 단 한 가지의 제약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한 의미였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열댓 가지의 제약사항을 늘어놓는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실력에 자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이 그의 길드 구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상과 달리 칼리오페가 상황 파악이 빠른 아이 같아서 였다.

바이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진짜로 중요한 건 이 집을 나선 다음이지만.

* * *

러셀은 이 거리에서 알아주는 젊은 실력자 중 하나였다. 덕분에 칼리오페 일행은 아무 잡음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칼리오페는 힐끔 간판을 올려다봤다. 붉고 푸른 등이 깜빡이는 간판에는 ‘베르 루벤스(ver rŭbens)’라고 쓰여있었다.

‘붉게 물든 봄…….’

하를레민, 아니,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카바레(cabaret) 중 한 곳이었다.

술을 파는 곳인데 칼리오페가 들어가는 것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칼리오페보다 동갑이거나 더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들락날락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동전을 받아 다시 나갔다. 아무래도 거리의 심부름꾼인 듯싶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이런 가게에서 일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자마자 동갑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러셀의 코트를 받았다.

‘음…….’

칼리오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코트를 받은 소년이 칼리오페를 보곤 살짝 윙크했다.

칼리오페는 당황해서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었다. 소년에게는 ‘흥, 난 너 따위에게 관심 없어.’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실망하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미모에 이 정도 철벽은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다.

“얌마.”

러셀이 소년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소년은 러셀을 향해 애교 있게 웃더니 카운터로 달려갔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카바레 안을 살펴봤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귀족의 실내장식과는 다른 화려함이었다.

무대는 현란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금빛 술을 매단 붉은 커튼이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상단은 오페라 하우스를 흉내 내긴 했지만, 지나치게 과하게 꾸민 데다가 어쩔 수 없이 싸구려 느낌이 났다.

어지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한 장식과 조명. 빵빵거리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소리. 쿵쿵 땅을 울리는 드럼.

무대 위의 여자들이 치마를 뒤집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지만, 칼리오페가 보고 듣고자 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괜히 무리해서 왔나, 싶은 후회가 생기려고 했다.

그때였다.

깊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커다란 홀에 울렸다.

강제로 머리를 잡아 끌고 가는 것처럼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무대 위, 흰 조명을 받은 채 눈을 감고 노래하는 여자가 보였다.

이리저리 뻗은 부스스한 백금발, 새하얀 피부, 짙은 화장과 검붉은 입술.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스탠딩 마이크의 대를 잡고 스르륵 부드럽게 위로 올라갔다.

브라스 밴드도, 드럼도 연주를 멈췄다.

이 드넓은 공간에 오로지 여자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다.

첫 소절을 마친 여자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러자 밴드와 드럼이 빈자리를 채우듯 연주를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어느새 여자 혼자 남은 무대를 바라봤다.

첫 소절을 부르는 동안 댄서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퇴장했다는데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몰랐다.

여자는 밴드 음악에 맞춰 여유롭게 리듬을 타기도 하고,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오만한 얼굴로 코웃음 치듯 얼굴을 돌리기도 했다.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그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녀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받아주거나 무시하거나 비웃었다.

밴드 음이 잦아들고 여자가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였다. 풍염한 몸매와 달리 약간 중성적인 목소리가 독특한 매력을 자아냈다. 그렇게 소란스럽고 화려한 공연 직후의 독무대인데도 스테이지가 꽉 차는 것 같은 존재감이 있었다.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던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어떤 이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채 농락하듯 관중을 희롱하는 모습에 사로잡혔겠지만, 칼리오페의 마음을 흔든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식의, 이런 풍의 노래는 처음이었다.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적나라한 가사와 몸짓, 표정, 높은음에서 꺾이고 낮은음에서 파고드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슬픔.’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여자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연일까? 여자의 시선은 더 이상 칼리오페를 향하지 않았다.

스탠드에서 마이크를 분리한 여자가 노래하며 무대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이런 일이 꽤 있는 건지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 커졌다.

여자는 그에 화답하듯 가까이 있는 남자의 옷깃을 매만지기도 하고, 서 있는 남자의 엉덩이를 찰싹 내려치기도 했다.

‘……응?’

노래에 흠뻑 빠져 있던 칼리오페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여자는 칼리오페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중간중간 이 남자, 저 남자의 넥타이를 끌어당기고, 무릎에 앉았다가 뺨을 가볍게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래서 눈치채는 게 늦었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여자는 분명히 칼리오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의 노래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이곳에서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없다. 칼리오페는 여자와 자신의 거리를 확인했다.

“선생님.”

아무도 안 들릴 정도로 작게 바이엘을 부르며 옷 소매를 끌어당겼다. 그냥 부르기만 해서는 음악 소리에 묻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이엘 역시 여자가 이쪽으로 향하는 걸 눈치챘는지 조금 긴장한 어조로 낮게 답했다.

“괜찮을 거예요. 워낙 변덕스러워서 저러다가 곧 뒤돌아 무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바이엘의 말과 달리 여자는 계속해서 칼리오페를 향해 다가왔다.

“……선생님?”

“음, 마담 카나리아와 러셀이 막역한 사이이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러셀과 친한 사이라서 그에게 다가오는 거라면 일행인 칼리오페도 눈에 띌 가능성이 있다.

칼리오페는 슬쩍 러셀에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턱, 두툼한 손이 칼리오페의 팔목을 붙들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러셀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

“사람 많다고 안심하지 마. 혼잡한 곳이야말로 먹잇감이 되기 딱 좋으니까.”

여긴 러셀의 길드 구역인 데다가 그의 일행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위험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모르는 법이지.’

한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러셀은 칼리오페를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작고 연약한 몸은 그것만으로도 쉽게 딸려왔다.

칼리오페는 말투에서 귀족인 게 드러나는 것을 각오하고 입을 열려고 했다. 빠르게 사과하고 러셀과 함께 이 자리를 어서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어머, 그렇게 사납게 굴면 여자가 좋아하지 않아.”

그보다 먼저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주를 틈타 마이크를 뗀 마담 카나리아가 눈매를 접으며 칼리오페에게 윙크했다.

“뭐야, 왜 왔어.”

러셀이 툴툴거렸지만, 마담 카나리아는 코웃음만 치더니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농축된 것처럼 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뿌연 안개 같기도 하고 따뜻한 물 같기도 한 노래였다.

칼리오페는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담 카나리아는 오로지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노래했다. 알아달라는 듯, 자신을 봐달라는 듯.

휘익— 그 구애와 유혹에 남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완숙한 그들의 카나리아가 어린 소녀를 농락하는 모습은 귀중한 볼거리였다.

몇몇은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좀 더 커서 베르 루벤스의 무대에 설 수 있기를 기대했다.

들뜬 관중들의 소란도 칼리오페의 귀에 닿지 못했다.

쿵쿵, 칼리오페는 가슴이 아릴 정도로 뛰었다.

‘뭐가 그렇게 슬퍼요? 왜 그렇게 우는 거예요?’

사람들의 눈에는 마담 카나리아가 언제나와 같이 여유롭게 요염한 유혹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칼리오페에겐 아니었다.

한없이 슬퍼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슬픔이 ‘들렸다’.

빙긋 웃은 마담 카나리아가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야.”

러셀이 미간을 찌푸리며 위협적으로 마담 카나리아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카나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왜일까.

칼리오페는 검은 레이스로 감싸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 * *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마담 카나리아와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을 보고 나서야 칼리오페는 현실을 깨달았다.

멀리서 바이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게 보였다.

‘지금 뛰어 내려갈 순 없어.’

카나리아가 얼마나 이런 이벤트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난하게 끝내는 게 뛰쳐나가는 것보다 인상이 희미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주목받은 걸 물릴 순 없겠지만.’

칼리오페는 자신의 차림새를 보고 옅게 심호흡했다. 그 누구도, 그녀 자신조차도 ‘칼리오페 루스티첼’이 이런 차림을 한 채 하릴레민의 카바레에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다.

‘괜찮아. 사진을 옆에 놓고 봐도 나인지 모를 정도로 분장했잖아.’

최대한 이곳에 어울리게, 녹아들도록.

손짓 하나에서도 ‘칼리오페 루스티첼’을 떠올릴 수 없게.

좋은 선생님이 바로 옆에 있었다.

칼리오페의 표정이 변했다. 나른하고 권태에 찌든 눈을 한 채 좌중을 둘러봤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조차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마담 카나리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녀가 칼리오페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름이 뭐야?”

“…….”

칼리오페는 눈동자만 굴려 그녀를 쳐다봤다.

“뭐, 좋아.”

카나리아는 더 캐묻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미련 하나 없듯이 굴었던 것과 다르게 카나리아는 칼리오페에게 바짝 다가섰다. 허리를 숙이고 한 손으로 칼리오페의 턱을 치켜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카나리아의 낮은 숨결이 칼리오페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노래하고 싶지?”

검붉은 입술이 유혹적으로 움직였다.

칼리오페는 순간 숨이 막혔다.

“노래하고 싶잖아.”

카나리아가 칼리오페의 눈을 헤집을 것처럼 들여다봤다.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를 읽은 건지 카나리아는 만족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섰다.

“난 너 같은 사람을 잘 알아.”

씨익 웃은 카나리아가 칼리오페에게 마이크를 떠넘기다시피 넘겼다.

칼리오페는 티 내진 않았지만 내심 굉장히 당황했다.

‘지금 나한테 노래 부르라는 거지?’

이래도 되나, 싶은 건 나중의 문제다.

마담 카나리아는 흥미 가득한 눈을 한 채 아예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곤 객석 테이블에 앉은 남자의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무대에는 칼리오페 혼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정말로 노래를 부르라고……?’

아무 준비도 안 되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갑자기?

여기서 노래를 해도 되는 걸까?

혹시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한 번 듣고서 기억하는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아니, 그보다.

수많은 시선이 칼리오페를 향해 꽂혔다.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가 새하얘지길 반복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본 적 자체가 처음이었다.

칼리오페는 주목받는 귀족 영애였지만, 살롱이나 파티의 분위기와 이곳은 확연히 달랐다. 무대 위에 오른 적조차 없었다.

‘이 상태에서 노래를 한다고……?’

칼리오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덜컥 겁이 났다.

계속해서 온갖 상념이 칼리오페의 머릿속에 스쳤다.

방황하는 산호빛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뜨였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발을 쓴 것인지 머리칼은 새까만 밤의 색이고, 같은 색의 케이프 망토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지만.

‘카스틸로 공자?!’

칼리오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역시 그녀를 알아봤다. 칼리오페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인데도.

푸른 눈과 붉은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갑자기 조명이 팍 켜진 것처럼 카스틸로 공자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무대 아래 가득하던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모습이 어둠에 가린다.

이 넓은 공간에 오직 카스틸로 공자와 칼리오페 자신만 있는 것 같았다.

놀라고 당황했던 가슴이 가라앉고, 겁먹고 두려웠던 마음이 사라져간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런 게 잘 보일 리가 없는데, 칼리오페에게는 그 입술의 움직임이 분명하게 보였다.

[괜찮아.]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또렷하게.

[네 노래를 해.]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인 가운데 마이크를 잡은 손끝이 저릿저릿해지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의 노래.’

칼리오페는 눈을 감고 마이크를 꽉 쥐었다.

‘내 노래를.’

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스타레아스에게.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어.’

브라스 밴드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음악이 모든 소음을 단절시켰다. 칼리오페는 그 음표의 폭포에 흠뻑 젖었다.

귀족이 즐기는 음악과는 전혀 다른 리듬과 음색. 들척지근하게 귓바퀴에 달라붙더니 또 바로 튕기고 나간다.

‘알 것 같아.’

이 음악이 자신에게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지, 자신과 어떤 춤을 추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칼리오페의 입술이 열렸다.

조금 전 마담 카나리아가 불렀던 노래 중 하나였다.

칼리오페는 그녀의 노래에 담긴 슬픔을 이해했다. 이제 자신이 그 슬픔을 위로할 차례였다. 익숙하지 않은 노래지만, 처음 듣는 자연의 노래도 그대로 담아내는 칼리오페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칼리오페의 목소리가 처음 터져 나오는 순간.

“……!”

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흥미진진한 눈을 한 채 옆 사람과 수군거리거나 럼(rum)을 마시던 사람들이 일제히 칼리오페를 주목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한순간에 잊혔다.

지금 이 순간에는 칼리오페의 노래를 들어야 했다.

그런 자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어느새 칼리오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 *

아스타레아스는 처음 칼리오페를 발견했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정보 교환을 위해 음지 최고의 카바레인 베르 루벤스에 왔던 차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마담 카나리아가 무대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녀가 어디로 갈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할지. 사람들의 시선이 더더욱 그녀에게 몰렸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틈을 타 접선자와 만났다.

이야기 도중 마담 카나리아의 위치를 힐끗 확인하는데—.

‘칼리오페?’

그는 한눈에 칼리오페를 알아봤다.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려 놓고 짙은 화장으로 눈매를 다 가렸다.

삐딱한 자세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표정. 반짝반짝 빛났던 눈동자는 불이 꺼진 것처럼 어둑하게 침잠했다.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소녀네요.”

옆에서 접선자가 속삭였다.

“예쁘게 생긴 것도 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 뭔가, 눈빛이.”

공포심을 느끼면서도 깊은 공동(空洞)을 계속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림자와 얼룩이 가득한 소녀의 모습은 신경을 잡아채는 무언가가 있었다.

순간 아스터레아스는 자신 안에 날뛰는 포악한 감정을 억눌렀다. 접선자를 비롯해 흥미 가득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다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실행에 옮기는 대신, 그는 싱긋 미소 지은 채 접선자를 바라봤다.

“여자애나 감상하자고 우리가 만난 건 아닐 텐데요.”

부드러운 목소리였는데도 접선자는 옷 속에 얼음을 끼얹은 것처럼 흠칫 놀랐다.

그는 칼리오페를 훑어보던 것을 즉시 멈췄다. 아예 칼리오페가 있는 방향에서 돌아서기까지 했다.

아스타레아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접선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에 드리워진 날이 치워진 느낌이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아스타레아스의 시종, 러그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 소녀에게 먼저 한눈판 것은 도련님인데 신경질 부리는 게—러그윈의 기준에서는 신경질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한눈 팔만 하긴 해.’

러그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하를레민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의 소녀였다.

아니, 소녀는 하를레민의 퇴폐적인 분위기와 맞닿아 있으나, 하를레민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과는 또 달랐다. 아까부터 계속 긴장 상태이던 접선자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고 소녀에게 붙들릴 만했다.

‘근데 도련님은 왜 그러셨지?’

도련님이 소녀에게—사람에게— 주의를 빼앗길 리 없다. 그가 평소의 페이스를 잃는 것은 오로지 강아지 아가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딴 게 있었나? 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러셀?’

러그윈은 유심히 칼리오페의 주변을 살폈다.

“윈.”

나긋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러그윈은 흠칫 놀라 주인을 바라봤다.

그의 도련님이 봄바람처럼 웃고 있었다.

흠칫한 러그윈은 접선자처럼 칼리오페 쪽을 등지고 섰다. 왠지 모르지만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칼리오페에게로 향하는 접선자와 러그윈의 시선을 차단한 아스타레아스는 그나마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러그윈은 모르는군.’

반응을 보아하니 모르는 게 틀림없다. 알아채는 순간 촐싹 맞게 입을 놀려댈 게 뻔했다.

‘모르는 게 당연한가.’

그 누구도 저 소녀를 보고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아스타레아스에게는 저 나른하고 퇴폐적인 겉껍데기 안에 들어있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어둡다 못해 섬칫할 정도로 심연 같은 동공 속에서, 아스타레아스는 기어코 불씨를 찾아냈다.

잿더미 안을 헤집으면 불씨가 숨어있는 것처럼, 칼리오페에게는 결코 꺼지지 않는 불씨가 있다.

‘절대 사그라들지 않아.’

떠오르는 아침 해조차 희망을 잃었던 그 순간에도—.

아스타레아스는 머릿속에 고이는 광경을 털어냈다.

시야 한켠에 마담 카나리아가 다시 무대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칼리오페에게 향했던 시선도 흩어질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카나리아의 손에는 작은 소녀가 붙들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가…….’

아스타레아스가 숨을 들이켜더니 깊게 내쉬며 미소 지었다.

한기를 느낀 카나리아가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어느새 칼리오페는 넓은 무대 위에서 홀로 관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타레아스는 베르 루벤스의 마력차단기를 다 내려버릴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네가 무서워하잖아.’

다른 사람들 눈에는 무대 위에서도 쫄지 않고 여유로워하는 것으로 비췄겠지만, 아스타레아스에게는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당황하고 겁먹은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괜찮아.’

그렇기에 아스타레아스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너는 무서워할 것 하나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거니까.’

칼리오페에게서 단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안심하고 네 노래를 들려줘.’

칼리오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거짓말처럼 그를 찾아냈다.

서로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칼리오페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 * *

칼리오페는 마지막 음을 소중히 내뱉고 여운에 잠겼다.

그녀를 휘감았던 음표의 물보라가 음을 튕겼다. 마치 ‘즐거웠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었다.

‘나도 즐거웠어.’

마음속으로 답하자 음표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밴드 연주마저 마무리된 것이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넓은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바라볼 뿐, 어떤 반응도 없었다. 표정도 이상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거의 본능적으로 카스틸로 공자를 담아냈다.

그 청명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움츠러들려는 몸이 이완하며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를 바라본 채 손을 가슴팍으로 들어 올렸다.

짝, 짝, 짝 그가 천천히 박수를 쳤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 같았다.

휘이이익—

높은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고, 박수갈채가 천둥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브라바(brava)!”

“멋있다!”

“최고였어!”

그 사이사이에 감정에 못 이긴 사람들의 외침이 섞여들었다. 흥분으로 얼굴을 붉힌 채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

칼리오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 * *

카바레, 베르 루벤스의 2층 컨트롤룸.

아래쪽에서 박수 갈채가 요란한 가운데 이곳 분위기는 부산스러웠다.

“대체 누구야, 쟨?”

“모르겠어. 본 적 없는 애인데?!”

“저런 애를 왜 몰랐지?”

“일단 잡아야 해.”

“절대 놓칠 순 없어!”

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들 역시 칼리오페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빛나는 노래, 빛나는 재능!’

‘지금도 저렇게 빛나는데 조금만 닦으면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이 될 거야!’

‘황금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다니……!’

……조금 다른 의미로 매료된 것이 문제였지만.

그들은 서둘러 컨트롤룸에서 나왔다.

“카나리아와 아는 사이인가?”

“아는 사이라고 저러진 않잖아. 뭔가 꽂혔겠지.”

“하긴, 워낙 변덕스러운 애니까……. 그래도 아는 사이라서 그런 거면 좋겠는데.”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홀 앞쪽에 서 있는 카나리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일단 물어보면 알겠지.”

* * *

카나리아는 미동도 안 하고 서 있었다.

그녀는 지금 칼리오페의 노래가 가져다 준 여운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녀의 회녹빛 눈동자에 칼리오페의 무대가 스쳐 지나갔다. 속삭이듯 시작된 노래에 어떻게 점점 색을 덧입혀갔는지, 모든 구절이, 모든 마디가, 모든 음절이 생생했다.

관능적인 곡 그대로의 느낌에서 슬프게, 애절하게, 유약하면서도 강인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그 노래를 들은 순간, 카나리아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무릎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항상 나른하게 내리깔려 있던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 무대에 고정되었다.

두 손이 저절로 가슴 앞에 모였다. 전율이 그녀의 몸을 강타했다.

뜨겁게 치미는 감정이 카나리아의 가슴에서 폭발했다.

칼리오페는 자신을 이해했다. 그리고 분명하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노래가 끝난 지금도, 그녀는 도저히 그 감동을 안으로 갈무리할 수 없었다.

카나리아의 회녹빛 눈동자와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마주쳤다.

칼리오페는 반사적으로 미소 지으려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자신은 지금 세상의 잔혹함에 지친 거리의 아이였다.

미소 짓는 대신 칼리오페는 시선을 돌리며 홀을 살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이들이 태반이다. 몇몇은 아예 홀린 듯 일어나 있었다. 아직은 여운에 잠겨 있지만, 움직이는 순간 돌풍이 휘몰아칠 분위기다.

‘내려가자마자 사람들한테 둘러싸일 것 같아.’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다.

‘백스테이지로 가도 괜찮을까?’

칼리오페는 무대 양옆의 출입구를 바라봤다. 관계자가 아닌 그녀가 그쪽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예의 때문에 꺼리는 건 아니지만.’

칼리오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파트리유 오페라 하우스의 경우, 백스테이지 쪽으로 나가면 분장실, 대기실, 소품실이 먼저 나온다. 그렇게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스튜디오나 로비로 통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통로가 밝고, 환하고, 넓다는 것이다.

보지 않아도 베르 루벤스의 백스테이지가 얼마나 어두울지 알 수 있었다.

이 카바레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곳의 주인 역시 범죄자일 확률이 높았다.

여태까지 안전했지만, 그건 순전히 러셀의 보호 덕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여기서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아.’

그렇다고 무대 아래로 내려갈 순 없다.

칼리오페는 바이엘의 얼굴을 찾았다.

멍하니 서 있던 바이엘은 칼리오페의 시선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재빠르게 달려가는 바이엘의 모습을 본 러셀 역시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달렸다. 달리는 와중에 러셀은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그의 눈에 1층으로 내려오는 컨트롤룸 일행이 포착됐다.

‘젠장, 테르알이 따라붙으면 귀찮아지는데.’

어느새 무대 앞까지 도착한 그는 카나리아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야, 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러셀이 테르알 쪽을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카나리아는 테르알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골치 아프게 됐다는 기색이긴 했지만, 상당히 느긋한 음성이었다.

“이렇게 소란 피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한가한 태도에 답답해진 것은 러셀이었다.

“그냥 소란 피워버렸네, 라고 하면 끝날 일이냐? 테르알이 쟤 무대에 세우겠다고 난리 칠 텐데.”

“그게 뭐?”

“뭐라고?”

“그게 뭐가 어때서. 왜? 뭐가 문제야? 쟨 무대 위에 있어야 하는 애야.”

카나리아는 진심이었다.

테르알이 다소 난폭하게 굴 수도 있겠지만, 이곳 하를레민에선 삶 자체가 난폭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저 아이는 이제 마음껏 날개를 펼치며 노래를 지저귈 수 있을 것이다.

‘번쩍이는 보석으로 가득한 새장 안에서 말이지.’

카나리아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하지만 이 새장은 거친 세상으로부터 새를 보호해주기도 했다. 하를레민에서 살아가는 한, 이 새장 안에 있는 게 오히려 축복이었다.

‘러셀이 내 삶을 못마땅해하는 건 알고 있어.’

그래서 저 소녀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이렇게 기겁하는 거겠지.

‘하지만 이게 내 삶이야. 내 삶을 부정하지 마!’

“뭐가 어떠냐고? 쟨 이곳과 전혀 상관 없는 애야!”

목소리를 낮춘 러셀의 외침에 카나리아는 코웃음 쳤다.

“뭐가 상관 없어? 쟤는 무대와, 노래와 상관 있어.”

카나리아의 회녹빛 눈동자에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다. 러셀은 그녀의 분노를 읽고 고개를 돌렸다.

“너랑 입씨름할 시간 없어.”

러셀의 말에 카나리아는 멈칫 했다.

“설마……. 쟤, 이 거리 애가 아니야?”

러셀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대답이 되었다.

카나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소녀가 누군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왜 왔는지, 어쩜 자신조차 깜빡 속아 넘어갔는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그런 거나 생각할 때가 아니다.

“쟨 다시 무대 위에 오르게 될 거야.”

카나리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러셀은 인상을 찌푸리며 카나리아를 봤으나 곧 미간을 풀었다. 카나리아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러셀은 그녀의 뜻을 읽었다.

“그래,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그의 말에 카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이곳은 더더욱 아니고.”

카나리아는 베르 루벤스를 굉장히 사랑하지만, 또 그만큼 증오하기도 했다.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내가 수습해야지.”

그 말과 함께 카나리아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요염한 몸짓으로 칼리오페의 손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정말 아름답게 지저귀는 소리였어.”

카나리아의 손끝이 칼리오페의 뺨에서 입술로 느릿하게 미끄러져 내렸다.

입술에 닿자마자 미련 없이 손을 뗀 그녀가 도도하게 몸을 돌리며 관중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지저귀는 것으론 나도 지지 않지.”

카나리아의 손짓에 들어갔던 댄서들이 깔깔 웃으며 무대 위로 몰려나왔다.

시끄러운 음악이 쾅쾅 내리붓듯 쏟아지며 풍성한 스커트 자락이 와르르 소란스레 펼쳐졌다. 광대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요란스레 능청을 떨었다.

환락의 왕국, 베르 루벤스가 제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다.

무대가 비좁을 정도로 나온 댄서들과 여자들이 펼치는 스커드 자락에 칼리오페의 모습이 가렸다.

“카나리아, 쟤 뭐 하는 거야?!”

테르알이 분통을 터트리며 외쳤다.

“무대에 잡아두려는 거겠지.”

“내려오면 우리가 알아서 할 텐데, 뭘!”

“우리보다 먼저 관중들이 다가갔을걸.”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놓치는 것도 아니잖아.”

“무대 위에 있다고 해서 놓치는 것도 아니지.”

그 말에 테르알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백스테이지로 나간다면 더욱 좋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 * *

“이쪽으로.”

칼리오페는 갑자기 팔목을 낚아채는 손에 화들짝 놀랐다.

“아, 러셀.”

칼리오페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러셀은 자세를 낮춘 채 칼리오페를 무대 옆 통로로 이끌었다. 그곳엔 바이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뒷문으로 나갈 거야.”

나직한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의 예상처럼 베르 루벤스의 백스테이지는 굉장히 어둡고 복잡했다.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통로는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러셀은 혹시 모를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잘 사용하지 않는 길로 돌고 돌았다.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고 꺾었을까. 러셀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쉿.”

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쪽에도 없어.”

“여기까지 찾았는데 안 나오다니……. 여기는 길을 잘못 들어야 겨우 올까 말까 한데.”

“어차피 이 건물 안에 있어. 샅샅이 뒤져.”

“황금 덩어리야. 절대 놓치면 안 돼.”

발소리가 여럿이었다.

추격자가 멀어지는 기척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뱉기 힘들었다.

러셀은 몇 번이나 발소리를 감지하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아슬아슬하게 모퉁이를 돌기를 몇 번.

“젠장.”

러셀이 낮게 욕설을 흘렸다. 막다른 길이었다. 양쪽에서 추격자가 접근해서 이쪽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못 보고 지나가라고 비는 수밖에 없겠군.’

그리고 러셀은 추격자들과 같은 길드의 일원인 만큼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바람인지 알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는 계속 가까워졌다.

칼리오페는 각오를 다졌다.

[괜찮아.]

이상하게도 지금 이때, 아까 무대 위에서 들었던 카스틸로 공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래서 조금 위안이 되긴 하네.’

설핏 웃은 칼리오페가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레이디.”

눈앞에 흰 손이 내밀어졌다.

‘말도 안 돼.’

칼리오페는 멍하니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은빛 머리카락, 깨끗하다 못해 시린 푸른 눈동자.

‘어떻게…….’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

그가 이 순간에, 이곳에 있는 걸까.

칼리오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채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그를 떠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나타났다.

‘기적.’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시키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의 손에 손을 얹었다.

둥실, 몸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는 바이엘도, 러셀도, 추격자들도…… 그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에서 완전히 잊혔다.

정신을 차리니 칼리오페는 어느새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발밑에는 밤에 더 화려한 하를레민의 불빛이 주단처럼 깔리고 머리 위에는 무수한 별빛이 휘장처럼 늘어져 있었다.

빛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와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고마워요.”

어쩐지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칼리오페의 나직한 인사에 카스틸로 공자는 평소처럼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의례적인 인사처럼, 진심 한 톨 묻지 않길 바라며.

“곤경에 빠지는 레이디께 도움을 드리는 것은 신사의 기쁨이지요.”

“그런가요.”

픽, 웃으며 고개를 들던 칼리오페는 멈칫했다.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모두 눈동자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시간이 멈췄다.

순식간에 다섯 살의 생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마주 봤던 그때로. 딱딱한 언 땅이 아니라, 구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그때로.

허공을 딛고 서 있는 지금. 그야말로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시간이 멈춘 가운데 바람이 불었다. 겨울 바람인데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머리카락이 밤하늘에 녹아들 듯 휘몰아쳤다.

카스틸로 공자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가락이 볼을 살짝 스쳤다.

따뜻하고 아련한 감촉.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 없었다.

“잘 들었어요.”

밤바람을 닮은 목소리였다.

“노래.”

작게 덧붙이는 말에 칼리오페는 빙긋 웃었다.

“잘 들었어요?”

들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노래를, 그에게.

카스틸로 공자 덕분에 겁먹지 않고 노래할 수 있었다.

“응, 좋았어.”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

‘울지 않아서 다행이야.’

카스틸로 공자는 그 말을 속으로 숨겼다.

두둥실 떠오르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천천히 깃털이 바람에 살랑이는 것처럼 내려앉기 시작했다.

곧 발에 허공이 아니라 단단한 지면이 닿았다.

“여긴…….”

두 사람이 내려 앉으며 달빛마저 함께 내려 앉은 것인지, 테라스에는 월광이 하얗게 부서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본 순간,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

‘가, 가까워…….’

확 가까워진 거리에 움찔 뒤로 물러서려는 찰나, 무언가가 어깨를 따스하게 감쌌다.

“아, 고맙습니다.”

카스틸로 공자가 입고 있던 케이프 망토를 벗어준 것이다.

하늘에 떠 있을 땐 춥지 않았는데 땅으로 내려오고 마법이 해제되니 추위가 느껴졌다. 카스틸로 공자의 체열로 데워진 케이프 망토를 입고 있으니 뱃속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아직 다 성장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확실히 다르구나.’

카스틸로 공자의 망토는 굉장히 커서 칼리오페의 손은 소매 밖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미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외양인 만큼 이렇게나 체격 차이가 클 줄 몰랐다. 물론 카스틸로 공자는 가늘가늘 여리여리하진 않고, 오히려 단단한 체형이지만.

‘섬세한 얼굴과 길쭉한 손가락 때문일까.’

칼리오페는 무심코 카스틸로 공자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휙 돌렸다. 아까 볼에 닿았던 순간이 생각나서였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칼리오페는 케이프에 얼굴을 묻어 보이지 않도록 감췄다.

그러자 은은한 향기가 맡아졌다.

아까 그와 가까이 있을 때부터 다던 향기다. 깊고 청량한, 겨울 숲 같은 향.

‘우디 베이스인가? 아직 소년한테는 안 어울리는 향인데…….’

카스틸로 공자에게는 잘 어울렸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노곤하게 풀어지도록 만드는 눈 내린 겨울 숲. 하지만 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날카로운 한기가 침입자를 얼려버릴 것이다.

‘괜찮은 걸까?’

칼리오페는 눈만 빼꼼 들어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겉옷을 벗은지라 그는 셔츠에 베스트 차림이었다.

“공자님.”

하지만 신사가 겉옷을 양보했는데 다시 돌려주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다.

칼리오페가 고민하는 사이, 카스틸로 공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케이프 망토에서 맡아지던 향이 더욱 진하게 풍겼다. 그의 입술이 바로 옆에서 움직였다.

“실례.”

속삭임과 동시에 부드러운 손길이 칼리오페의 얼굴에 닿았다.

“……!”

기다란 손가락이 매끄러운 흰 뺨을 간질거릴 정도로 약하게 쓸어내렸다. 따스한 손바닥이 턱을 부드럽게 받치고, 서로의 눈동자와 호흡이 마주쳤다.

칼리오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카스틸로 공자는 포커페이스 같은 미소를 드리운 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진한 화장이 벗겨져 나가 원래의 청초한 눈매가 완연히 드러났다.

놀라서 크게 뜨인 눈. 그 사랑스러운 눈가에 키스하면 너는 더 놀랄까. 도망갈까.

‘하지만 안 돼.’

자신이 다가가면 그녀는 또다시 불행해질 것이다.

카스틸로 공자는 충동을 억눌렀다. 인내는 익숙했지만, 칼리오페를 앞에 두면 항상 참기 힘들었다.

그는 미련 없이, 미련이 없는 척 손을 뗐다.

칼리오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카스틸로 공자가 만졌던 제 볼을 쓸었다.

대체 뭐지, 하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깨달았다. 얼굴을 답답하게 덮고 있는 느낌이 사라졌다. 얼굴이 개운했다.

‘설마?’ 하는 눈으로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보자 그의 미소가 깊어졌다.

맞다는 뜻이다.

‘화장 지워주려는 거였구나.’

깨달았는데도 놀란 가슴은 아직까지 쿵쾅거렸다. 어째서인지 살짝 어깨가 내려갔다.

‘키, 키스하려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나는 왜 밀어내지 않은 걸까?’

칼리오페는 홀로 화들짝 놀라 케이프에 얼굴을 묻었다.

‘분명 당황스럽고 놀랐기 때문이야.’

망토 속에서 손끝을 꼼지락거리던 칼리오페가 힐끔 카스틸로 공자를 봤다. 왜인지 자꾸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화제를 전환해 분위기를 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공자님께선 이런 곳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 질문에 아스타레아스는 잠시 침묵했다.

오늘 그가 연락책을 안 쓰고 직접 하를레민까지 발걸음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칼리오페에게 밝힐 순 없었다.

‘……이제라도 좀 거리를 두는 게 좋겠지.’

마음을 숨기기란 참 힘든 일이다. 그것이 애달픈 마음이면 더더욱.

깔끔하게 탈출만 시켜줄 생각이었는데 자꾸만 눈길이, 손길이 갔다.

“글쎄, 그런 것까지 말하는 사이였던가요?”

싱긋, 상냥하면서도 쌀쌀맞은 웃음에 칼리오페는 커다란 벽을 느꼈다.

“확실히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요.”

칼리오페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키스할 거라 착각했다니, 새삼 부끄럽고 창피했다.

“영애께서야 말로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나요?”

“글쎄요.”

“……설마, 이런 적이 꽤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왜 물으세요? 공자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요.”

심통 가득하게 대답한 후, 칼리오페는 내심 깜짝 놀랐다.

‘으아, 유치하게…….’

스스로가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었다.

‘정말, 진짜 열두 살 같잖아…….’

상대는 이쪽을 열두 살로 알고 있으니 아무 문제도 없지만, 왠지 엄청 창피했다.

‘으으…….’

어째 카스틸로 공자 앞에서는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휘말리는 것 같다.

가족의 죽음과 전쟁을 겪고 칼리오페는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 했다. 원래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것과 어른이 되는 것은 별개였다.

칼리오페가 어떤 얼룩도 없었던 전생의 어느 날처럼, 혹은 현생의 제 나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오로지 카스틸로 공자의 앞에서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깊게 인지하지 못한 채 은근히 고개를 내미는 미안한 마음에 집중하고 있었다.

‘구해준 사람에게 상관 없다고 한 건 좀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칼리오페는 결국 조그맣게 답했다.

“……오늘이 처음이에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면 좋겠군요.”

‘윽…….’

옳은 말이었지만 칼리오페는 또다시 불쑥 심통이 솟았다.

그녀는 팔짱을 척 끼고 고개를 돌린 채 도도하게 말했다.

“저도 이런 일을 다시 만들 생각은 없어요. 노래하게 된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구요.”

칼리오페가 자신을 안 보는 틈을 타 카스틸로 공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평소의, 상냥하면서도 벽을 치는 웃음과는 다른 웃음이었다. 한없이 따스한 미소.

푸른 눈동자가 투덜투덜 움직이는 작은 입술과 곧은 콧대, 내리깔린 속눈썹 그리고 자신의 옷을 입은 작은 몸을 아로새길 듯 담았다.

사실 원래 예정대로였다면 카스틸로 공자가 직접 하를레민에 발걸음할 일은 당연히 없었다.

아마 평생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진 바람에 예기치 못하게 오게 되었다.

하필이면 오늘, 그 시간, 그때에.

칼리오페는 우연히 노래하게 되었고 카스틸로 공자는 뜻밖에 베르 루벤스에 방문했다.

그리고 한순간에 서로를 알아봤다. 그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오늘, 네 노래를 들을 수 있던 건.

‘기적이야.’

카스틸로 공자는 감히 그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중얼거리듯 작게 퍼져 나간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은 우연이 겹쳤다.

“그러고 보니 정말 기적 같네요.”

움찔.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오늘 공자님을 만난 게 기적 같아요.”

칼리오페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밤하늘의 별빛보다 그 미소가 더 빛났다.

“아까 거기에서 공자님이 나타났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칼리오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마주 잡았던 온기가 아직도 선연했다.

사람들에게 잡힐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무대 위에서 두려움에 떨던 순간에도.

‘나는 당신에게 구원받았어요.’

칼리오페는 온기를 잡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곤 카스틸로 공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아까 고맙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그건 약식이었다.

칼리오페는 망토 자락을 살짝 잡아 펴며 무릎을 굽혔다. 커다란 케이프 망토가 일순 우아한 드레스로 보일 정도로 기품있는 자세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스틸로 공자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했다.

모든 것을 반사할 듯 윤이 나는, 맑고 청아한 눈동자. 그 무수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청청하다.

그는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기적은—.’

분명히.

“……너야.”

작은 속삭임은 밤바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스틸로 공자를 쳐다봤다.

그 무결한 얼굴에 카스틸로 공자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신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만.”

한 발짝, 그가 칼리오페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를 좁히는 건 이렇게나 쉽다. 그는 망토 자락 속에 숨은 칼리오페의 작은 손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레이디께서 그렇게 고마우시다면야—.”

뒷말을 끈 그가 정중한 태도로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스르륵, 긴 망토 자락이 흘러내리며 백조의 긴 목과 닮은 팔목이 드러났다.

‘……거리를 둬야 하지만.’

오늘 밤은, 오늘 밤만큼은 기적에, 이 달빛의 마력에 조금 빠져도 되지 않을까.

달빛에 희게 두드러진 긴 속눈썹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내려 앉았다.

그와 동시에 칼리오페는 손등 위에 따스한 감각을 느꼈다.

부드럽고, 말랑하고, 조금 단단하기도 한 감촉.

“……!”

두 눈에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었으면서도 칼리오페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카스틸로 공자의 정중하고 우미한 몸짓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손등에 입 맞추는 소년의 모습.

칼리오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근두근, 진동이 몸속을 울렸다.

부디 이 맥동이 손끝을 통해 그에게 닿지 않기를, 칼리오페는 간절히 빌었다.

카스틸로 공자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겨울 호수보다 시린 새파란 눈동자가 온전히 드러나 칼리오페를 응시했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칼리오페는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랄 수 없었다.

호흡도, 생각도 멈췄다.

찰나가 영원 같았다.

밤바람이 소년의 머리칼을 한차례 쓸었다.

카스틸로 공자는 최대한 머뭇거리지 않게끔 주의하며 칼리오페의 손을 놓아주었다. 거리를 좁히는 건 그렇게 쉬웠는데 다시 벌리려니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래도 물러나야 했다.

그가 다시 거리를 두고 나서야 칼리오페는 정신을 차렸다. 무심코 손등에 남은 온기를 다른 손으로 쓸었다.

서서히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정지되었던 사고가 용수철이 튀는 것처럼 어지러이 펼쳐진다.

‘그와 너무 가까워져선 안 돼.’

그렇게 생각했었다.

다시 재회한 5살의 피크닉에서, 연관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두 손을 가슴에 끌어당겼다.

카스틸로 공자가 지금 한 키스는 사교 파티에서 의례적으로 하는 손등 키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그는 지금 구해준 답례를 받기 위해 손등에 입을 맞춘 거였다.

해묵은 전설이 진실이던 시절, 제국이 제국이기도 전에.

용맹한 기사는 오로지 지체 높은 레이디의 손등에 키스하기 위해 일곱 바다를 넘고 다섯 산맥을 넘어 악룡을 무찔렀다.

그런 전설의 시대가 아니어도 제국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명예가 황금보다 중요하고 공명이 목숨보다 귀하던 때였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귀부인이 휘장 너머로 손을 내밀고 그 손등에 키스하는 게 최고의 영예였다.

이제는 역사서나 그 시대를 다룬 신전 문학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손등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에게 최고의 영예를 내릴 수 있는 레이디는 당연히 가장 고결하고 고귀한 귀부인이었다.

황후나 황녀, 혹은 성녀.

신분이 낮은 사람일수록 그보다 덜한 지체의 레이디에게도 영광을 받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카스틸로 공자는 황가의 핏줄. 그것도 원래라면 적통 계승자였다. 심지어 현재 황제에겐 자식이 있는데도 카스틸로 공자가 황위 계승서열이 가장 높았다.

황제를 제하고 가장 고결한 피. 일각에서는 현 황제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말하는 카스틸로 공자.

그가 일개 백작 영애인 칼리오페의 손등에 키스한 것이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보상보다, 그 어떤 답례보다 그 자그마한 흰 손등에 존경을 표하는 게 더 영광이라고.

카스틸로 공자 자신보다 칼리오페가 고결하고 고귀하다고.

“이걸로……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칼리오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귀한 손입니다.”

카스틸로 공자는 산뜻하게 웃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다정하고 차가운 미소였다.

“부디 아무에게나 내주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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