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생일 축하해!
소란스러운 느낌에 칼리오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살며시 귀를 기울여 봤지만, 특별한 기척은 없었다.
‘정원에서 난 소리인가?’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며 부스스 일어났다.
쭉쭉이를 하고 푹신한 러그에 발바닥을 비볐다. 간지러운 기분에 웃음이 나왔다.
커튼을 열자 창에 흰 성에꽃이 피어있는 게 보였다.
어느새 일 년의 마지막 계절, 겨울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일 년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네.’
올 봄, 처음으로 어머니 손을 잡고 티파티에 간 이후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설마 소개받은 가정 교사가 가문을 무시하고 자신을 사교계에서 매장시키려 할지는 생각도 못 했다.
‘잘 해결됐고, 그 일로 인해 오히려 가문의 입지가 더 좋아져서 다행이긴 하지만…….’
처음 가문 밖으로 나가서 생긴 일이 그런 일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제이드와 달리 지금 가정교사인 바이엘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니 이제는 그런 문제가 없겠지.’
좋은 의미로 주목 받기 시작했지만, 빛에는 그림자가 따라오는 법이다.
브리젤 부인이 느닷없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며 어머니와 가문을 공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익명의 권력가가 브리젤 부인이 아이를 학대해왔다는 증거를 잡아 최고위 사교계에 뿌렸다.
그 일의 마무리는 행운이 따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해결이야 할 수 있었겠지만, 훨씬 더 귀찮게 돌아갔어야 했을 것이다.
‘대체 누굴까…….’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설원 같이 희게 반짝이며 부서지는 머리칼, 맑은 수원 같은 새파란 눈동자.
카스틸로 공자는 브리젤 부인이 칼리오페를 해코지하려고 했던 것을 목격했다. 그 직후에 브리젤 부인의 아동학대가 폭로되었다.
‘하지만 그가 왜?’
카스틸로 공자에겐 칼리오페를 위해 움직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는 나와 달리 전생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회귀한 것은 칼리오페 자신뿐이다.
그가 회귀했다면 좀 더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전생에서 카스틸로 공자는 칼리오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에 관해서도, 권력 다툼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다가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칼리오페와는 달랐다.
‘카스틸로 공자님은…… 황자님은, 황실의 핏줄이니까.’
그 피는 그의 족쇄가 되기도 했지만, 가끔 그의 날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니 그는 나처럼 시간을 거슬러온 게 아니야. 날 도울 이유도 없고.’
브리젤 부인의 폭력성을 목격한 권력가의 공자, 그리고 이어진 가정 폭력 고발.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쳤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단언할 순 없다.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누구인지 알 수 있겠지.’
칼리오페는 그렇게 정리했다.
그 행운이 따랐기에 칼리오페는 손쉽게 원하던 브리젤 부인의 살롱—미래의 스티그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칼리오페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브리젤 가 쪽에서 먼저 보상 제안을 했으니까.
스티그마가 될 땅에서 땅고래 프네우마케투스테라를 만나고 칼리오페는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다소간 알게 되었다.
‘테라님이 말한 각성은 아직 먼 것 같지만…….’
얼마 전, 사르니오 저에서 유리안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 뭔가 갈피가 잡힌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얻은 땅을 놀리기 아까워서 베이비 살롱이라는 상호로 카페를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칼리오페에 대한 관심과 호의가 많아지면서 루스티첼 가에 향한 사람들의 인식도 더 좋아졌다.
베이비 살롱으로 버는 부가수입도 짭짤했지만, 사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획기적이었던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카메라 회사 니카이논에 루스티첼 부부가 투자하고, 그 후 칼리오페가 광고 모델이 된 일이다.
‘이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 많긴 해도 어쨌든 결과적으론 잘 된…… 잘 된 일이겠지?’
통장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난 것이 칼리오페의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힐데르트와 유리안, 에피니 이 세 명의 친구야 말할 것도 없다. 또, 아기 때 보고 못 봤던 호르세안과 더 가까워진 것도 기뻤다.
만날 때마다 웃으며 챙겨주는 서모나 부인과 레이드한 부인, 그리고 로아힌 부인. 백룡 기사식에서 만난 기사단원들까지.
‘변하려고 노력했지만, 나 자신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변했다.
‘그건 역시, 나도 어느 정도 변한 것일까? ……발전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유모가 들어왔다.
“어머나, 벌써 일어나셨어요? 창가에 서 계시면 몸이 식어요.”
서둘러 담요를 꺼낸 유모가 칼리오페에게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푹 끌어안았다. 그 따스하고 푸근한 품에 몸이 노곤노곤 녹았다.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나와서 칼리오페는 유모를 올려다보며 몸을 비볐다.
아기 새가 짹짹 바라보며 품에 파고 드는 듯한 모습에 유모는 웃음을 터트렸다. 칼리오페의 콧등을 톡, 건드리더니 아쉬운 듯 팔을 풀었다.
“어서 준비하셔야죠.”
준비?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자 유모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잊으셨어요? 오늘 아가씨의 생일이잖아요.”
* * *
유리 온실에 모인 사람들은 숨 죽인 채 문을 바라봤다. 이제 곧 칼리오페가 올 거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많이 놀랄까?’
‘그야 놀라겠죠.’
키득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옅게 퍼지고 가라앉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아이가 온갖 꽃이 가득 핀 정원에 들어섰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아까까지의 침묵이 폭발하기 직전의, 기대감 어린 침묵이었다면 지금 침묵은 탄식에 가까웠다.
“와…….”
“어쩜…….”
예쁘다거나 귀엽다거나 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웨이브를 넣은 머리칼은 몇 가닥은 비즈를 넣어 땋았고, 윗부분은 양 갈래로 동그랗게 올렸다. 요정의 날개 같은 천을 겹겹이 쌓은, 앙증맞은 미니 드레스가 통통한 팔다리와 어울렸다.
그런 점이 제 나이다운 깜찍함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성화에 나오는 천사처럼 말을 잃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본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에 넋을 잃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칼리오페를 놀라게 해주려 했는데 되레 이쪽이 놀랐다.
“칼리오페, 생일 축하해!”
그 말과 함께 팡팡, 벌크 폭죽이 터졌다.
웃는 얼굴로 다가온 사람들이 뺨에 키스를 하며 화관을 씌어주었다. 칼리오페가 태어난 계절, 겨울의 꽃인 동백꽃을 메인으로 만든 탐스러운 화관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구요?’
이럴 거라곤 아무 언질도 못 받았다. 그래서 작년까지 그랬던 것처럼 가족끼리 생일을 보낼 줄 알았다. 어린아이의 경우, 그런 식으로 가문 내부에서만 파티를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칼리오페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인연이 닿은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점차 황망함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웃음이 대신했다.
‘가족끼리만 보냈던 생일도 물론 정말 행복했지만…….’
오늘은 정말 특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전생에서 십 대 때조차 이런 떠들썩한 생일을 보내진 않았다. 이곳에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전생에서는 인연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같은 사교 모임에 나가도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 그들이 지금은 단단한 인연이 되어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있다.
‘쟁쟁한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다섯 살 난 어린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오는 경우도 무척 드문데.’
가문 간의 결속이 전통적으로 깊은 사이에는 그러기도 하지만, 루스티첼 가는 최고위 귀족가가 아니었다. 루스티첼 가의 입지나 정치적인 상황을 바라보지 않는, 꾸밈 없는 호의가 가슴 가득 느껴졌다.
오늘 아침에 혼자 창밖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이 났다.
주변이 변한 건 내가 변해서 일까, 변한 만큼 발전한 걸까, 잘하고 있는 걸까.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면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난 것을, 자신과 만난 것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칼리오페는 코끝이 찡한 것을 참으며 활짝 웃었다.
순식간에 봄이 찾아온 것처럼, 꽃봉오리가 만개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내 생일을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 * *
소란이 가라앉자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찾아와 생일을 축하해주기 시작했다.
“레이디 칼리오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부드럽게 손을 붙잡고 손등에 키스하는 것은 덤이었다.
칼리오페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고마워요, 엘피너스 경.”
호르세안이 준 것은 온갖 달콤한 것들로 가득 찬 상자였다.
[이건 대가성 청탁이 아닙니다, 레이디. 하지만 감히 청컨대 부디 오늘도, 내일도 항상 행복하시길.]
그런 쪽지가 들어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장난기를 잃지 않는 점이 참 호르세안다웠다.
칼리오페가 처음 보는 종류의 과자도 많았다.
‘설마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처럼 나를 위해 새로운 디저트를 만든 걸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호르세안이 칼리오페를 위해 만들었다며 자랑했다.
‘기사보다는 파티시에가 적성에 맞으시는 걸지도.’
칼리오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밖에 꺼내진 않았다.
‘뭐, 요리 잘하는 남자는 나쁘지 않으니까.’
가세가 많이 기운 가문이 아닌 이상에야 귀족 가는 모두 하인과 하녀를 두어 평상시에는 직접 요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국 풍조 상, 귀족이 부인이나 남편, 아이들을 위해 직접 하는 요리가 고귀한 희생이자 사랑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루스티첼 부인 역시 칼리오페가 아프거나 할 때면 꼭 직접 수프를 만들어서 먹여준다.
“나중에 부인한테 사랑 받겠어요.”
칼리오페의 말에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을 지은 호르세안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맹랑하다니까.”
칼리오페의 볼을 살짝 꼬집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뭐, 리페한테 검증 받은 일등신랑감이라니……. 나중에 장가 못 가면 꼭 리페가 책임져야해?”
“논리적 비약이 심한 것 같습니다만.”
칼리오페의 조용한 대꾸에 호르세안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호세, 다 끝났으면 좀 비켜 봐.”
언제 끝나나 지켜보고 있던 에피니가 호르세안은 밀어냈다. 호르세안은 아직 안 끝났다며 꿍얼거리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비켜줬다.
에피니는 정작 자신의 차례가 되자 머뭇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피니 온니?”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자 움찔하더니, 고개를 팩 돌리며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
“고마워요.”
“별로.”
새침하게 대답하면서도 에피니는 칼리오페가 포장을 뜯는 것을 곁눈질했다. 리본이 다 풀릴 땐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기까지 했다.
“와아, 예뻐요!”
칼리오페가 환히 웃자 에피니는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이 되어서는 턱, 팔짱을 꼈다.
“일단은 생일이니까. 축하해.”
“축하해주셔서 기뻐요.”
생긋 웃은 칼리오페는 선물 상자에서 팔찌를 들어 올렸다. 가느다란 줄에 하트 컷 루비가 있는, 귀여우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에피니 언니랑 세트네요.”
“어? 으응…….”
에피니가 깜짝 놀라 자신의 팔을 뒤로 숨겼다. 표정이 복잡했다. 칼리오페가 알아차려줘서 기쁜 듯도 하고 창피한 듯도 했다.
“끼워주실래요?”
에피니가 못 이기는 척 칼리오페의 팔에 팔찌를 끼워줬다. 두 꼬마 아가씨의 손목에서 같은 모양의 루비가 빛났다.
다들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서 덩달아 에피니의 어깨도 으쓱으쓱 올라갔다.
다음은 힐데르트 차례였다.
“리페,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힐데 오라버니.”
“그다지 특별한 건 아니지만.”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내민 연핑크빛 상자는 까만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누가 봐도 특별한 상자였다. 상자와 리본의 배색만으로도 다들 어떤 브랜드인지 알기 때문이다.
티르판. 귀족 가들의 결혼 예물로 많이 쓰이는 쥬얼리 브랜드 중 하나였다.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를 하사 받기도 했고, 황족들이 평소에 착용하는 쥬얼리 뿐만 아니라 결혼 예물을 주문 받아 제작한 적도 꽤 있다.
상자를 연 칼리오페는 숨을 멈췄다.
반짝이는 화려한 보석들의 향연에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말을 잊었다.
‘음, 이거 내가 받기엔 너무 비싼 거 같은데…….’
왠지 맨손으로 만지는 것도 안 되고 장갑을 끼고 만져야만 할 것 같은 자태였다. 고작 다섯 살짜리의 장신구라고 하기엔 과했다.
‘그것도 파뤼르(parure)라니.’
칼리오페가 어찌해야 하나 주저하는데 힐데르트가 덥석 목걸이—파뤼르 콜리에르(parure collier)—를 들어 올렸다.
그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깜짝 놀란 것은 칼리오페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정작 힐데르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다이아몬드 광맥을 뒷산으로 가지고 있는 아이다웠다.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오직 칼리오페가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느냐였다.
“잘 어울려.”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의 목 언저리에 대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좀 비싸다고 생각했는데요.”
“너한테 비싼 게 어디 있어?”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묻는 말에 칼리오페는 머쓱해졌다.
“그런 문제 외에도 파뤼르를 하기엔 아직 어리잖아요.”
“지금 해도 예……. 어, 나중에 커서 하고 싶을 때 해도 돼.”
힐데르트는 차마 예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하얀 얼굴이 발긋해졌다.
“쓰는 일은 나중이라고 해도……. 우울할 때 보석 보면 기분 좋아지잖아.”
힐데르트의 말에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끼면 더 좋아져.”
칼리오페는 황당한 눈으로 아줌마, 아저씨들을 둘러봤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너무 옳은 말에 무심코 긍정해버렸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칼리오페의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마음에 안 들어?”
오만한 힐데르트답지 않게 은근히 눈치 보는 말이었다. 칼리오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정말 예뻐요.”
진심이었다.
칼리오페도 로망이라는 게 있었다. 전생의 일이고, 어느새 잊어버렸지만.
아직 어떤 비극도 찾아오지 않았던 때, 꿈꾸는 소녀였던 칼리오페는 언젠가 티르판이나 까르티엘르, 부르칼리 같은 곳에서 쥬얼리를 맞추고 싶었다.
‘이렇게 비싼 건 성년식이나 결혼식같이 큰 행사가 있을 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시 루스티첼 가의 재정 상 평소에도 그런 브랜드의 쥬얼리를 살 순 있었다. 욕심이 없어 소박하게 살았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제도 중앙 귀족으로서 처지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검박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칼리오페는 언젠가 특별한 날의 버킷 리스트로 혼자 마음 속에 적어놨었다.
그 후, 가세가 기울면서는 아예 마음 속의 버킷 리스트가 사라졌다.
칼리오페는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이런 대단한 선물을 마련해놓고서도 그는 칼리오페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주고 싶었다.
잃어버렸던 꿈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라서 정말로 기쁘기도 했다. 행복만 가득하던 시절의 꿈이,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잘 쓸게요. 너무 기뻐요.”
다섯 살 생일에 잊혔던 꿈이 이루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환히 웃는 칼리오페를 보고 힐데르트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뭐, 딱히 특별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 젠체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빙긋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니카이논의 사람들도 몇몇 파티에 참석했다.
“서로 오겠다고 난리여서 제비 뽑기를 했지요!”
카이논이 당당하게 말했다.
“사장님은 뽑기에서 탈락했는데 어거지로 온 거잖아요. 리페 아가씨, 이 분이 이렇게 권력을 남용합니다.”
“그럼 안 되지요.”
모델 촬영을 하며 친해진 직원의 농담에 칼리오페가 짐짓 엄한 척 카이논을 혼냈다.
그들이 내민 것은 포토북이었다. 표지에는 천사 날개를 단 칼리오페의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
잠시 굳었던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리며 포토북을 품에 껴안아 표지를 가렸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이 다 본 상태였다.
거기다 앞표지를 가리느라 완전히 드러나게 된 뒤표지에는 칼리오페가 떨어지는 깃털 사이에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실려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눈을 번쩍 빛내며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포토북을 노렸다.
“리페, 안 열어보니?”
“그래, 선물인데 성의껏 구경해야지.”
“어서 열어보자. 다 같이 봐야지 선물한 사람도 기쁠 거야.”
가지진 못 해도 안에 실린 사진을 전부 섭렵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곤란함에 눈만 도록도록 굴리다가—그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더 요구했다— 결국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나중에 따로 소중히…… 보도록 할게요.”
생일을 축하해서 주는 선물이니 기쁘게 받아야 하는데, 왜 기쁘지 않은 걸까.
칼리오페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포토북은 하이에나의 시선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루스티첼 부인의 손에 들어갔다. 부인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카이논은 포토북에 관해 은밀한 뒷거래를 제안 받았다. 솔깃한 조건이기도 하고 좋은 것은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흠칫했다.
루스티첼 일가가 죽일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눈물을 머금고 제의를 거절했다. 어쨌거나 목숨은 소중했기에.
레이드한 부인은 생일 선물로 책을 주었다.
“리페, 널 위해 내가 직접 집필한 거란다. 재밌게 읽으렴.”
“감사합니다, 레이드한 부인.”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척 봐도 마법에 관한 책이라 재밌게 읽긴 힘들 것 같았다. 레이드한 부인은 칼리오페의 재능을 꽃 피워야 한다면서 계속해서 마법사가 되지 않겠냐며 꼬시는 중이었다.
로아힌 부인은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부적을 선물로 줬다.
“건강한 게 최고란다. 일 년 사이 여러 일이 많았지만 이제 걱정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렴.”
화려한 금박을 물리고 반짝이는 보석이 달려 있어서 장식용으로 쓰기에도 좋았다.
“정말 감사해요.”
부적과 관련해 신전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칼리오페는 뒤로 미뤘다.
‘오늘은 즐겁게 보내자!’
자신이 태어난 것을, 자신과 만난 것을 축하해주는 사람들 틈에서 웃고 싶었다.
칼리오페의 키보다 훨씬 큰 생일 케이크. 단단하게 친 크림을 잔뜩 올린 슈케트. 별과 달 모양의 머랭 쿠키. 황금빛으로 구운 후 버터를 발라 반짝반짝거리는 파이까지.
꼭 요정 나라의 파티에 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가운데 칼리오페는 왠지 모를 부족함을 느꼈다.
조용히 떨어져 나와 정원으로 향하는 온실 문을 열었다. 곧장 쌀쌀한 겨울바람이 작은 몸을 휘감았다.
몸을 움츠리면서도 칼리오페는 다시 온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을 걸었다.
‘……오지 않았네.’
아니, 오지 않는 게 맞다. 오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엮이지 않는 게 좋으니까.
오히려 왔으면 곤란했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리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화들짝 놀라서 손수건을 집어넣었다.
온실 문을 연 로베르트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려는 순간이었다.
“어?”
팔이 턱, 잡혔다.
“쉿.”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곧게 뻗은 검지를 붙인 채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보였다.
그 위로 시선을 올리니 곧장 호수 한가운데의 수정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바람이 한차례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눈부신 은빛 머리칼과 별 박힌 밤하늘같이 짙은 머리칼이 한 데 나부꼈다.
“리이페……!”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부르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
그러나 칼리오페도, 눈앞의 상대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내 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도로 들어간 모양이다.
“……카스틸로 공자님.”
칼리오페가 겨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카스틸로 공자는 칼리오페의 모습을 눈에 한가득 담았다.
오늘 칼리오페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보지 못했다면 오랫동안 후회로 가슴에 남았을 것이다.
그는 망토를 벗어 칼리오페의 어깨에 둘러줬다. 아무래도 파티 장소가 유리 온실이다 보니 겨울인데도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놀라서 굳었다가 이내 망토 자락을 꼬옥 붙잡고 여몄다. 카스틸로 공자의 체온으로 데워진 망토가 따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카스틸로 공자는 무심코 옅게 미소 지었다. 언제나와 같이 습관적인 미소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안 오려고 했지만, 결국 와버렸다.
눈앞에 들어온 루스티첼 저를 보며 그는 허탈했다. 그래도 파티장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자신이 칼리오페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을 때 생길 파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바로 발걸음을 돌리진 못했다.
이렇게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있으면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그런 미련이 발목을 잡아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어차피 그녀는…… 칼리오페는.’
모든 것이 꿈일 뿐이다.
카스틸로 공자는 겨울 정원에서 온갖 꽃이 활짝 핀 유리 온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온실은 가냘프지만 따뜻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가 들어가는 순간, 칼리오페를 안전하고 따뜻하고 행복하게 감싸주던 유리 온실은 파사삭 깨질 것이다.
그러니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원 밖으로 나온 칼리오페를 본 순간 무심코 붙잡아 버렸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공자의 망토를 꼬옥 붙잡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무리해서라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 축하해, …….”
마지막에 속삭이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되물으려는 순간, 불쑥 선물이 내밀어졌다.
풀어보라는 눈빛에 칼리오페는 물음을 삼키고 상자를 열었다.
“세상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카스틸로 공자가 준 선물은 두 손에 쏙 들어오는 자그마한 그랜드 피아노 미니어처였다.
건반 하나하나가 섬세해서 혹시나, 하고 눌러보니 정말로 눌렸다.
“진짜 눌리네요……!”
본인이 눌러놓고서도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정밀하게 세공된 미니어처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흑단과 상아가 매끄럽게 빛나서 굉장히 아름다웠다.
뚜껑을 열자 맑은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오르골 특유의 향수 어린 음색이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산호빛 눈동자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피아노 오르골을 바라봤다.
카스틸로 공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항상 침착한 칼리오페답지 않게 잔뜩 흥분한 모습이 귀여웠다.
전해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들고 왔는데, 그러길 잘했다.
“이 노래…….”
칼리오페가 작게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음이라고 느꼈는데 예전 서모나 가의 피크닉에서 자신이 불렀던 노래였다.
사하르네 부인과 마주치고 난 뒤, 흔들리는 감정에 못 이겨 나오는 대로 뱉어낸 숨이 노래가 되었고…….
‘그걸 들은 사람이 있었지.’
낮은 나뭇가지에 묶인, 주인 없는 새하얀 손수건이 누군가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누가 왜, 무슨 의미로 손수건을 놓고 갔을까 고민했었다.
[눈물이 나면 닦으세요.]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손수건의 주인은 그렇게 말했다. 돌려주려는 그녀에게 다시 손수건을 들려주면서.
눈물을 흘리지조차 않았는데 손가락으로 눈가를 다정히 닦아주기도 했다.
그 날, 그 숲에서 그녀 자신조차 못 본 눈물을 보았던 걸까.
띠링, 팅, 티리링-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로 맑고 가냘픈 오르골 소리가 흘렀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피아노가 있으면 좋을 텐데요.]
[피아노?]
[네, 있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연주할 순 없을 테지만.]
무슨 사치스러운 생각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바람은 희망의 또 다른 형태였다.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면……이라는 의미의 희망.
칼리오페의 속마음을 아는 것인지, 카스틸로 소공작은 핀잔 대신 진지하게 되물었다.
[어떤 피아노가 가지고 싶어?]
[글쎄요. 음-.]
불탄 잿더미 위에 앉아 그들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스러졌기에 그런 상상을 하며, 어떻게든 멀어져가는 삶을 서로 붙잡아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장식이나 부조 없이 기본적인 게 좋아요. 그랜드 피아노 특유의 기하학적인 곡선을 좋아하거든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
[색은?]
[고민되지만…… 역시 검은색이 좋겠어요. 새까맣게 윤이 나는 모습이 턱시도를 잘 차려입은 신사분 같으니까,]
[음, 그건 좀 곤란한데…….]
카스틸로 소공작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중에 꼭.]
[네, 나중에 꼭.]
불길이 모든 삶과 삶의 자취를 먹어치운 곳에도 그들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매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붉고 푸른 눈동자 속에는 결의가 가득했다.
칼리오페는 두 손 안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바라봤다.
섬세하게 만든 미니어처지만, 특별한 장식은 없었다. 거기에 색은 검은색.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불안감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전에도……. 전생의 일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어.’
백룡 기사식에서 분명히 그랬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전생에서는 그녀가 그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이번 생에선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물었다.
[고백은 이르다고.]
이 말을 그에게서 들은 것은 두 번.
첫 번째는 회귀 전, 두 번째는 회귀 후.
‘우연일까, 아니면-.’
칼리오페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고, 공자님.”
그녀가 다급하게 입을 연 순간, 음악 소리가 들렸다.
카스틸로 공자의 시선이 유리 온실로 향했다.
리듬감 있는 춤곡이었다.
“아…….”
칼리오페는 아차, 했다.
설마 다섯 살짜리의 생일 파티에 춤곡을 연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첫 춤을 여는 것은 당연히 파티의 주인공인 자신이어야 했다.
‘그간 엄청 찾았겠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할까? 망설이는데 카스틸로 공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부디 제게 함께 춤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칼리오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모르지만.
그녀는 피아노 오르골을 조심스럽게 상자에 넣어 땅에 내려놨다.
“기꺼이.”
그 말과 함께 그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포개진 손이 따뜻했다.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한 후,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음, 조금 어색한가.’
전생에 춤을 춰본 적이 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지만, 어린아이 몸으로 추려니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회귀한 후 칼리오페는 아직 댄스 교습을 받지 못했다.
‘그걸 알고 계실 텐데 무슨 생각으로 왈츠를 연주하는 거지.’
자신이 첫 춤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니 찾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빙글빙글 돌 때마다 망토 자락과 드레스 자락이 둥글게 퍼졌다. 꼭 두 사람의 춤사위가 만든 물결처럼.
몇 번 발을 옮기던 칼리오페는 움찔했다.
언 땅에서 춤을 추다 보니 발이 시렸다. 파티장이 유리 온실이기 때문에 방한과는 거리가 먼 구두를 신고 있었다.
“실례.”
그 순간,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의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
“네?”
의문도 잠시, 몸이 붕 뜨는 감각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카스틸로 공자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는 개의치도 않고 칼리오페를 가뿐하게 휙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자신의 발 위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최고급 가죽 구두 위에 칼리오페의 구두 밑창이 닿았다. 더러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무게 때문에 구두 모양이 다 망가질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당황한 건 칼리오페 혼자였다.
구두를 못 쓰게 되는 것도 그렇고, 무겁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보다-.
‘너, 너무 가깝잖아요……!’
카스틸로 공자의 발에 자신의 발을 얹고 있으니 당연히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칼리오페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아래만 바라봤다.
‘그야, 나는 지금 어린아이니까, 둘 다 어린애니까 별 상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애써 어린애라는 걸 상기하며 진정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오히려 카스틸로 공자와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차라리 여덟 살짜리 애를 껴안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자. 나, 난 원래 어른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나은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옅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즉시 그녀의 얼굴이 동백꽃처럼 확 붉어졌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스틸로 공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머리꼭지밖에 보이지 않았을 텐데.
칼리오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조차도.
청명하게 시린 눈동자가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닥이 보일 듯 투명한 호수에 시선을 뺏기고, 종래에는 홀려 몸을 던지는 사람처럼.
‘여덟 살…… 애니까…….’
멍한 머리로 애써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녀 자신에게조차 닿지 않았다.
카스틸로 공자가 스텝을 떼면 칼리오페의 몸이 두둥실 떴다.
빙글, 아무도 없는 겨울 정원에서 두 사람의 몸이 함께 돌면 칼리오페의 드레스 자락이 꽃 대신 피어났다. 꼭 봄을 깨우는 요정의 왈츠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생각조차 멈춘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시간도, 음악도, 춤도, 아무 것도 붙잡지 않은 채.
‘왜, 카스틸로 공자는.’
다른 아이들의 경우, ‘어린애로 대하지 않아야지.’하고 다짐해도 무의식 중에 어린아이라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아예 그런 다짐조차 하지 않았지만, 에피니와 힐데르트, 유리안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루스티첼 저택 내에서 지내던 때와 달리, 또래들과 부대껴 지내면서 칼리오페도 은연중에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그 중 가장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준 깨달음은 바로, ‘현재는 전생의 연장선 상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전생에서 몰랐던 사람을 현재 알게 되고, 전생에 연이 있었던 사람과 현재 다른 인연으로 맞닿아 만나게 되었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똑같은 가족 관계와는 달랐다.
이전에는 자신이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진 못 했었다. 그래서 행동이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현재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하던 습관도 있고, 전생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제 또래처럼 굴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도 이전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일고여덟 살짜리 어린애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처음 그들과 만나서 어울릴 때만 해도 칼리오페는 아이들을 돌본다는 느낌으로 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함께 ‘노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한다.
무의식 중에 어른이 어린아이 대하듯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깨달을 때마다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아야 하는데. 왜, 카스틸로 공자는…….’
바이올린 선율이 높게 울었다. 느린 왈츠곡은 빨라지지 않으면서도 고조되며 절정부로 치달았다.
카스틸로 공자는 부드럽게 스텝을 밟았다. 칼리오페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곡이 이끄는 대로 카스틸로 공자가 움직이고, 그가 이끄는 대로 칼리오페가 움직였다.
음악과 춤을 통해 칼리오페와 카스틸로 공자는 하나가 되는 기묘한 일체감을 맛보았다. 그 일체감은 고양감이 되어 두 사람을 감쌌다.
딱딱하게 언 겨울 땅이 아니라, 구름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해…….’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생에서 몇 번 춤을 추긴 했지만 교습을 받을 때가 아니면 대부분 오라버니들이 상대였다. 열다섯을 기점으로 가세가 기울었으니 그다지 춤출 기회가 많지 않았다.
몇 안 되는 경험 중에서도 이번은 특별했다.
카스틸로 공자의 발 위에 발을 얹고 있으니 거리가 더 가까운 것은 둘째 치고…….
‘편안해.’
전생의 칼리오페는 내성적인 성격답게 그다지 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과 가까이 붙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거리감와 카스틸로 공자가 주는 온기에 당황했지만, 적응되자 뻣뻣하게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춤이란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거였나?’
노래는, 선율은 항상 그녀의 힘이 되어주었다. 현과 금관과 목관의 노래. 서로를 붙잡은 손이, 그 온기가 이정표가 되어 노래 사이를 헤엄치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타인에게 맡기고 있는데 이렇게나 안심이 될 수 있는 걸까?
등을 받치는 손도, 언 땅 대신 디딘 발도 든든했다.
이렇게, 든든하게 보였던 때가 이전에도 있었다.
앳된 아이의 얼굴 위로 단단히 여문 턱선이 떠오른다.
카스틸로 소공작의 얼굴이 보이는 것은 그저 동일인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역시 전생을 겪었기에 비슷한 표정을 짓는 걸까.
칼리오페의 진지한 얼굴에 카스틸로 공자가 다정하게 눈매를 휘었다.
나붓한 웃음은 언제나와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다. 이건 포커페이스가 아니라 진심에서 나온 미소였다.
그는 춤을 추는 내내 시종일관 따스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냥해 보이지만 어딘지 차가운, 평소 같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도 나처럼 이 춤이 즐거운 걸까?’
아니, 물을 필요도 없이 그가 즐겁다는 건 알고 있었다.
노래 속에 녹아 하나가 되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닿았다.
칼리오페는 용기를 냈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은 불안이 아니라 기대로 요동쳤다. ‘어쩌면.’이던 가정이 이제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전생을 기억한다고 해서 곧장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칼리오페가 그와 엮이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생각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칼리오페는 조심스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낙하한 동백꽃 다시 가지 끝에서 피어날 때—.”
만약 그 역시 회귀한 것이라면 분명 이 뒤의 구절을 말할 것이다.
산호빛 눈동자와 수정 같은 눈동자가 서로를 비췄다.
음악이 끝났다.
두 사람은 멈춰 선 그대로 마주 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카스틸로 공자의 입술이 열렸다.
* * *
“리페! 어디 갔다 왔어?! 한참 찾았잖아.”
로베르트가 입술을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미안해요, 잠깐……. 많이 찾았어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사과했다.
로베르트는 그 모습을 보고 움찔하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리페,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요?”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로베르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렇게 한참을 봐도 의아함이 서린 칼리오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일이 있었어야 하나요……?”
뭔가 깜짝 놀라게 할 것을 준비했냐는 듯한 물음이었다.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뭐가 있었지, 하고 고민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로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로베르트는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웃는 얼굴도, 말하는 모습도 평상시와 같은데 뭔가 이상하게 걸렸다. 동물적인 직감에 가까운 거라 스스로도 뭐가 걸리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 으앗, 차거!”
칼리오페의 손을 잡으려던 로베르트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왜, 왜 이렇게 차가워?”
“아, 잠시 바람 쐬고 싶어서 밖에 있었더니 그런가 봐요.”
“그 차림으로? 그 시간 동안 밖에 있었으면 꽁꽁 얼었을 텐데.”
손이 차갑긴 하지만 혈색을 보나 말하는 것을 보나 언 것 같지는 않았다. 입도 얼어서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아……. 외투를 빌렸거든요.”
외투를 빌린 데다가 타인과 가까이서 온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춥지 않았다.
‘손이 차가운 건…….’
칼리오페는 뻗어 나가는 생각을 지우며 로베르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런데 왜 찾으셨어요?”
로베르트는 칼리오페의 양손을 자신의 손 사이에 끼우고는 호호, 불면서 답했다.
“아니, 춤 같이 추려고 했는데…….”
역시 그랬구나, 싶어서 칼리오페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무래도 첫 춤은 부모님이 여셨겠지만 로베르트는 개인적으로 자신과 춤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저는 춤 배운 적이 없는걸요?”
미안함에 그렇게 답하자 로베르트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치마안! 우리 리페의 첫 춤 상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야!”
“배우지 않아서 로벨 오라버니 발을 마구마구 밟았을 거예요. 막상 함께 췄다면 후회했을지도 몰라요.”
방금 남의 발을 밟다 못해 땅 대신 쓴 사람답지 않은 말이었다.
“후회라니!”
로베르트가 양손을 꽉 쥐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마구마구 밟아도 상관없어!”
진짜 말도 안 된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한 눈빛에 칼리오페는 주춤했다. 로베르트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은 그저 걱정한 것뿐인데 왜 이런 시선이 돌아오는 걸까.
“그래도 발을 밟히는 건…….”
“밟히는 게 뭐 어때서! 리페랑 춤추다가 발을 밟히는 건 영광이지!”
로베르트의 맹렬한 항변에 칼리오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영광이라니,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될 일인가 싶었다.
로베르트의 얼굴엔 진심이 가득했다. 춤을 신청할 때 의례 말하는 관용어를 차용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아프잖아요.”
로베르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칼리오페의 발로 향했다.
매끄러운 새틴과 진주, 오팔로 장식된 구두에 감싸인 발은 손바닥에 들어올 것처럼 작고 앙증맞았다.
“리페 발 진짜 쪼꼬매. 완전 귀엽다!”
“…….”
로베르트는 상황도 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눈을 떼지도 못한 채 바라보다가 얼굴이 따끔거려서 고개를 들었다. 당황과 황당이 가득한 칼리오페의 눈동자를 보고서 그는 제정신을 차렸다.
칼리오페의 발은 순간적으로 현실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위험한 면이 있었다.
크흠, 하고 어색함을 떨쳐낸 로베르트가 당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귀엽고 예쁜 발에 밟히는 건 안 아파!”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처럼 로베르트의 산호빛 눈동자는 티 없이 맑고 위풍당당했다.
칼리오페는 할 말을 잃었다. 정확히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칼리오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틀렸어. 내가 뭐라고 말해도 소용없는 수준이야.’
결국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로베르트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투덜거렸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데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 표정이 대체 어땠길래 로벨 오라버니가 그러는 걸까.’
별로 알고 싶진 않았다.
로베르트는 불만을 양 볼에 가득 집어넣은 채 팔을 붕붕 휘둘렀다.
“당연히 안 아파! 만약의 만약의 만약의 만약에! 혹시라도, 그럴 리는 없지만! 아프다고 해도 영광이라구!”
로베르트가 자신과 똑같은 빛깔을 지닌, 칼리오페의 눈동자를 진지하게 마주 봤다.
“리페가 춤추는 것도, 춤추다가 발을 밟는 것도 다 처음이잖아!”
칼리오페는 로베르트의 말에 움찔했다.
이렇게까지 첫 춤을 함께 추고 싶어 하는 것을 보니 가슴에 잔물결 같은 감동이 스며들었다. 칼리오페 역시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을 나누길 기대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무거운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으으, 죄송해요. 처음이 아니에요.’
칼리오페의 속마음을 모르는 로베르트는 수그러든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발 밟는다는 걱정 때문에 춤을 거절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춤곡은 이미 끝나서 어쩔 수 없지만, 꼭 나랑 처음으로 춤춰야 해!”
로베르트가 뿌듯한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까닥거리는 새끼손가락과 환한 로베르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으음, 어쩌지…….’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랑 춤춰본 적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말한다고 해도 언제 누구랑 춰봤냐는 말에 대답하기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 약속을 하기도 싫은걸.’
별 거 아닌 일이지만, 칼리오페는 이런 사소한 일이 토대가 되어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을 대충 메우는 것이지만, 그 사소한 것들이 쌓여 커다란 바위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짓누른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거짓이 습관이 될 수가 있다.
처음 몇 번은 마음에 걸리는 걸 느끼겠지만, 갈수록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종래에는 쉬운 길로 갈 수 있다면 서슴없이 거짓말을 택하는 관계가 되기 마련이다.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전생에 칼리오페는 돌아갈 줄 몰랐다. 단 한 번 굽힘 없이 꼿꼿이 자라나다가 툭 부러졌다. 이제는 배운 대로 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로벨 오라버니의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싶진 않아.’
환하게 웃는 로베르트에게 마주 웃으면서 약속한다고, 기대된다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만약 나중에 혹시라도 카스틸로 공자와 먼저 춤췄다는 걸 알게 되면 로베르트가 얼마나 충격받고 상심에 잠기겠는가.
들키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괜찮은 것 또한 아니다.
“뭐야, 리페. 나랑 춤추기 싫어? 다른 사람이 더 좋은 거야?”
로베르트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당연히 다른 사람이 더 좋은 거지.”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로베르트와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루시우스가 서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 눈에만 서늘한 것이고, 칼리오페는 그가 농담 중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뭐야, 형. 칼리오페는 나를 제일 좋아한다구!”
움찔한 로베르트가 바로 댕댕거렸다.
“그럼 왜 춤추자는 말에 망설였겠어? 로벨, 넌 아직 모르겠지만 레이디의 침묵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런 법칙이 있는지는 사실 루시우스도 모른다. 다만 호르세안이 그렇게 말한 적은 있었다. 루시우스는 그때 한심하다는 눈으로 호르세안을 바라봤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한심한 말도 때에 따라선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괜찮은 거 같진 않지만.’
루시우스는 지금 옆에 호르세안이 없는 것에 감사했다. 만약 그가 이 말을 들었다면 바로 박장대소한 후 일 년 동안 놀려먹었을 것이다. 어쨌든 로베르트에게 통하는 말인 점에선 유효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로베르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순진하게 물었다.
“리페가 너보다 나와 춤을 추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뭐어? 그럴 리 없어!”
“그럼 왜 너한테 바로 약속하지 않았겠어?”
“약속하려고 했는데 형아가 끼어들었잖아!”
“내가 끼어들 틈이 있었다는 건 리페가 망설였다는 뜻이다.”
“내가 싫냐고, 다른 사람이 더 좋냐고 물었을 때 리페는 아니랬어!”
“로벨, 너는 예의란 말을 모르는 건가?”
루시우스는 칼리오페가 황당하단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유치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었다.
‘이건 리페의 첫 춤 상대가 걸린 일이야.’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칼리오페가 이미 춤을 췄고, 첫 춤 상대는 물 건너갔다는 걸 모르는 형제는 팽팽하게 맞섰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로베르트.”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먼저 물었으니까 내가 먼저 리페랑 춰야지!”
“여기서 선착순은 의미 없어. 처음 춤을 추는 리페에겐 능숙하게 이끌어줄 수 있는 상대가 먼저야.”
어느새 형제의 싸움에서 한걸음 물러선 채 지켜보고 있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스 오라버니도 그다지 춤을 잘 추시는 건 아니지 않나?’
루시우스는 오로지 검술에만 관심이 많아서 사교 모임이나 파티엔 필요 이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자연히 춤과도 거리가 멀었다.
몸을 움직이는 데 센스가 있다 보니 못 추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 춘다고 하기엔 부족했다. 댄서가 검술에 능숙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칼리오페는 몰랐다.
전생과 달리 여동생과 춤추고 싶은 첫째 오빠가 남몰래 얼마나 춤 연습을 했는지. 전부터 모두들 은연중 칼리오페의 첫 춤 상대를 노리고 있었다.
“자자, 싸우지 마시고……. 저는 두 분과 춤추는 것 모두 기뻐요. 늦게 추나 좀 더 빨리 추나 결국 춤추는 건 똑같잖아요?”
보다 못한 칼리오페가 중재에 들어갔다.
“그게 어떻게 똑같아!”
“전혀 다르다, 리페.”
싸우는 것도 멈춘 채 완전히 정색하는 두 오빠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이게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자신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나?
‘첫 춤 상대’가 특별한 울림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건 성인식이나……. 뭐든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한 후의 첫 춤 상대를 일컫는 말이잖아요?’
그녀로선 덕후—칼리오페 ‘덕’분에 마음이 ‘후’해지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형제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파티는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 * *
“우리가 조금 늦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아간 시간, 루스티첼 저를 방문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먼 길을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려요.”
칼리오페는 놀람을 감추지 못한 채 유리안의 외조부모, 제프라덴 자작 내외에게 인사했다.
“생일 축하한다, 리페.”
제프라덴 자작이 웃으며 축하하자 자작 부인이 선물을 내밀었다. 칼리오페보다 더 키가 큰 곰돌이 인형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곰돌이에게 파묻히다시피 안긴 모양새가 된 칼리오페가 힘겹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도 얼떨떨했다.
‘내 생일 때문에 이 먼 길을 오신 건가? 다녀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간 내기 힘드셨을 텐데……?’
물론 손자인 유리안이 이곳에 있으니 핑계가 있으면 자주 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영지 일은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되었다.
제프라덴 자작 내외가 관리하는 타르알덴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곳이라 그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것이다.
타르알덴의 주 수입원은 농산물.
겨울은 다소 한가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건 어디까지나 영지민의 입장에서였다. 영지를 관리하는 입장에선 그 어느 계절보다 겨울이 가장 손이 많이 가고 힘들다. 시골에서 겨울은 가장 혹독한 계절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큰일을 겪은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니까.’
두 달 정도 만에 보는 지금도 무척 오랜만으로 느껴질 것이다.
칼리오페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루스티첼 부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납득했다. 부모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을 테니 온다는 답변을 미리 받았을 것이다.
루스티첼 부부와 제프라덴 부부가 대화하는 동안 칼리오페는 곰 인형을 유모에게 맡겼다.
“리페, 나도 선물 준비했어. 생일 축하해.”
유리안이 내민 상자에 칼리오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유리안은 지난 두 달간 평화롭게 루스티첼 저에 있었지만, 정말로 그의 속마음까지 평온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르니오 백작 내외는 이혼했다. 그 와중에 사르니오 백작이 루스티첼 저에 찾아오기도 했고, 사르니오 저의 고용인들이 찾아와 유리안 도련님을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
유리안이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스티첼 부인은 철저히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만나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홀가분한 것은 아니리라.
이혼 후, 사르니오 부인은 병원에 입원했다. 심신에 안정을 줄 수 있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병원이라고 들었다.
유리안은 사르니오 부인이 제도를 떠나기 전 찾아갈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 결과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지만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사르니오 부인이 떠나는 날, 유리안은 멀리서 그녀가 탄 마차를 지켜보았다.
루스티첼 저에서 전보다 나은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해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 생일 선물까지 준비하다니…….’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풀어봐.”
유리안의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선물 상자를 열었다.
여는 순간 포근포근하고 섬세한 꽃향기가 났다. 포근한 둥지처럼 꾸며져 있는 상자 내부에는 말린 꽃으로 꾸민 향초가 있었다.
“와……. 향초네요? 향이 너무 좋아요.”
지금도 은은하게 맡아지는 향이 좋은데 불을 켜보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켜봐.”
유리안이 말을 고르듯 살짝 망설이다가 이야기했다.
“응, 그럴게요. 정말 고마워요.”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를 보는 유리안의 시선이 복잡했다.
“그럼 갖다 놓고 올게요.”
그는 조금 더 칼리오페에게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손이 자석처럼 뒤돌아서는 칼리오페를 따라간다. 유리안은 칼리오페 대신 허공을 움켜쥐며 손을 내렸다.
* * *
칼리오페는 유리안이 준 선물을 놓다가 로아힌 부인이 준 부적 발견했다.
‘금박을 물린데다가 반짝이는 보석까지 달려 있어서 장식품 같긴 하지만…….’
[건강한 게 최고란다. 일 년 사이 여러 일이 많았지만 이제 걱정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렴.]
로아힌 부인의 말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확실하게 부적이 맞았다.
부적을 든 채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겼다.
‘이건 신전의 물건이 아니야.’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런 부적이 통용되는 걸 보면 역시 내가 어렸을 땐 종교의 강제력이 없었다는 거야.’
전생에서 칼리오페가 사회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무렵엔 이미 종교의 강제력이 강했다. 점점 더 강해져서 종래에는 이런 부적을 갖고 있으면 이단으로 몰려 심문을 받았다.
사실을 정리하자 당연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10년 남짓한 단기간에 사회 분위기가 확 바뀌고 특정 종교의 힘이 강력해졌다는 건데 그럴 수 있을까?
성녀의 등장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성녀로 인해 비스의 신전이 다른 신전보다 교세를 확장할 수 있던 건 타당한 일이다. 그다지 신실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성녀를 보고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비스는 유일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제국 내에선 유일신교 자체가 없었다. 아예 말소하듯 다른 모든 종교를 배척하는 건 분명 무리수가 따른다.
이단 심판관은 순식간에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제국의 법규를 넘나들었다. 그게 과연 신전만의 힘으로 가능했을까?
‘사람들의 욕심은…… 지겹게 봐왔어.’
비스의 신관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다른 종교를 배척했을 것이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하지만, 아무리 성녀란 조커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통할 일이 아니야.’
조커가 최강의 카드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카드 게임 룰 안에서의 일이다.
‘타 종교를 탄압하는 것은 룰 자체를 무시하는 거야.’
황실은 종교와 손을 잡기도 하지만, 종교에 힘이 실리는 것을 누구보다 경계하기도 한다.
오렌, 로한, 비스. 세 개의 신전이 서로 땅따먹기하듯 견제하는 덕에 어느 한쪽에 권력이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쪽이 룰을 위반하면서 권력을 쥐어 삼키기 시작했다. 아무리 조커가 있다고 해도 룰을 위반한 시점에서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하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혹시, 정책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면?
황제가 일부러 비스의 신전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면?
아니, 비스의 신전이 득세하던 게 아예 처음부터 황제의 계획이었다면?
‘그렇지만 왜?’
황제가 그럴 이유는 없었다.
세 개의 신전이 서로 견제하기 때문에 황제에게 종교는 그다지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즉, 자신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특정 종교를 따로 키워내 힘을 실어줄 필요가 없다.
‘황제에겐 아무 이유도…….’
생각을 이어나가던 칼리오페가 핫,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황제에겐 정통성 문제가 있어.’
황가엔 신혈이 흐르기 때문에 정통성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중요했다. 정통성 문제는 현 황제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의 새로운 질서가 된 비스의 신전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는 시나리오?’
그렇게 하면 정통성 문제를 불식시킬 수 있다. 더불어 이단 재판이라는 간단한 구실로 사사건건 자신의 약점을 들먹이던 귀족들을 손쉽게 탄압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전생에서 이단 재판 때문에 많은 가문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사회의 근간을 파괴하면서까지 할 일인가?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 여파로 내전이 일어났다.
“…….”
칼리오페는 지친 얼굴로 부적을 다시 내려놨다.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역시 안 돼.’
전생의 일을 반추하며 퍼즐을 짜 맞추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자리 잡은 얼굴이 떠나가질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정통성 문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 얼굴이 더 뚜렷해졌다.
카스틸로 공자.
칼리오페는 아까 정원에서 그와 주고 받았던 말을 떠올렸다.
[낙하한 동백꽃 다시 가지 끝에서 피어날 때—.]
분명 그는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자신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어날 때?]
카스틸로 공자가 그렇게 되물었을 때, 칼리오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칼리오페의 뒷말을 기다리며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니, 정신이 들진 않았다.
겨우겨우 그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그 후로 어떻게 다시 온실에 들어왔는지는 불분명했다.
기억이 없는 걸까?
전생과 똑같은 말은 한 것은…… 그저 같은 사람이라서, 사고방식이 똑같기 때문에?
그렇다면 피아노 오르골을 선물한 건?
내 노래를 들었기 때문에?
노래 멜로디를 담은 오르골을 선물하고 싶었고…… 모양이 피아노인 건, 가장 유명한 악기니까?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는 가장 보편적인 디자인이 아닌가.
가슴이 싸늘했다.
그가 전생을 기억하는 증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에는 모두 아닐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선 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놓지 못한다.
그는 여태까지 내가 전생을 기억하는 걸 몰랐을 테니까, 내가 그 시를 읊어서 당황한 바람에 모른 척한 걸 아닐까.
혹시 나한테 전생을 기억하는 것을 숨기려 한 것은 아닐까.
‘그럴 이유가 있나?’
칼리오페가 생각하기엔 없었다. 전쟁을 겪은 자로서 서로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건 나중 문제지 사실을 숨길 이유는 되지 않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성이나 논리를 걷어내고 오롯이 남은 것은 투정 같은 마음이었다. 평소 그녀였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리오페는 시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쓸쓸해.’
혼자만의 기억이 있다는 것.
‘그거 엄청, 쓸쓸한 거였어.’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뭘 멋대로 기대한 거지. 자기 자신의 기대에 스스로 상처 받고. 자해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가슴이…… 아파.’
이 통증은 그냥 그런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너무 춥고 아파서 절로 등이 굽었다.
가족들이 전생의 비극을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칼리오페가 회귀에 대해 말한다면 가족들은 모두 믿을 것이다.
그런 걸 걱정해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내가 말하면 분명 우시겠지.’
아픈 일은, 힘든 일은, 슬픈 일은 모두 자신이 감당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은 나눠 지면 편할 것을 홀로 지는 건 미련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혼자, 혼자서만 짊어지고 싶었어.’
그런데 이렇게나 쓸쓸한 건—.
진흙 속의 진주처럼, 눈 속에 피어나는 붉은 꽃처럼 비탄 속에서도 소중하고 기적 같은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붉은 꽃가지를 아는 사람은 이제 칼리오페밖에 없다.
모두가 사라진 설원에서 칼리오페 홀로 서서, 피어나는 붉은 꽃이 잊히지 않기를, 퇴색되어 시들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몰아쳤다.
희고 검은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붉은 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칼리오페는 혼자 아는 소중한 기억이 시들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눈보라가 그치고,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새하얀 눈밭에는 못 보던 발자국이 있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에 누군가가 꽃 나무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느리게 비쳤다.
그 가지를—
산호빛 눈이 커다랗게 벌어지며 잘게 떨렸다.
—꺾지 마.
우둑, 거친 소리가 나며 가느다란 가지가 단번에 꺾였다.
나뭇가지 틈으로 보인 사람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된 눈처럼 희게 빛났다.
* * *
“리페!”
“어?”
칼리오페는 어깨에 닿는 손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맺힌 상이 흐릿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채색이었던 세상에 점차 색이 돌아온다.
어느새 자신은 춥고 쓸쓸한 설원이 아니라 따뜻한 온실에 앉아 있었다.
힐데르트와 에피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칼리오페는 재빨리 입매를 올리며 답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에피니가 중얼거리는 걸 듣고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칼리오페를 보고 에피니와 힐데르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오페는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그보다 더 짙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자신이 조금 멍해 있었던 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리페, 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네?”
칼리오페의 되물음에 힐데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칼리오페의 태도에 당혹스러웠다. 그건 에피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멍하니 앉아 우수에 잠긴 칼리오페를 보고 당연히 유리안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녀의 곁에는 유리안이 준 선물도 놓여 있었다.
“알고 있어서 방금까지 우울해했던 거 아냐?”
“그럼 왜 그러고 있었어?”
“무슨 일 있어?”
“잠깐, 잠깐만요.”
번갈아 쏟아지는 질문에 칼리오페는 두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요?”
그 물음에 힐데르트와 에피니는 말문이 막힌 듯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본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무언의 재촉에 에피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유리안. 떠난대.”
* * *
제프라덴 자작 내외가 직접 왔을 때부터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손자가 걱정되고 보고 싶다고 해도, 칼리오페의 생일을 핑계 삼아 책임져야 할 영지를 두고 오는 것은 타르알덴의 영지 사정에 맞지 않았다.
‘그것도 한 분만 오신 것도 아니고 두 분 모두 오셨으니까.’
그 이유가 유리안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면 말이 된다.
“힘들게 직접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우리 유리를 마중 나오는 건데 힘들게 뭐가 있니?”
“그래, 오히려 이 할아비는 손주와 함께 여행한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한데.”
유리안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살짝 숙인 뺨에는 기쁜 기색이 옅게 배어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의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칼리오페는 유리안이 외조부모와 함께 지내며 그 일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길 바랐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유리안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기를.
유리안의 걱정대로 제프라덴 자작 내외는 정말 바쁜 와중에 억지로 시간을 만들어 온 것이었다. 원래라면 대리자를 보냈겠지만, 다른 일도 아니고 힘든 일을 겪은 손자를 마중하는 일이었다.
무리해서라도 직접 데려오고 싶었다.
“그래도 며칠 묵고 가시지…….”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제프라덴 자작이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신세를 지는 것도 실례지요. 여태까지 유리를 봐주신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걸요.”
“여기가 불편하시다면 호텔에서라도 여독을 풀고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루스티첼 백작이 염려 섞인 얼굴로 제안했다.
겨울에 타르알덴에서 제도까지 왕복하는 것은 노인에게 꽤 부담이 되는 여정이었다. 마나 포털도, 철도도 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요. 포털은 체력에 부담도 되잖아요. 로아힌 광장 쪽에 온천수를 써서 여독 풀기에 딱 좋은 호텔이 있어요.”
“백작 부부께서 이렇게 배려심 넘치시는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제프라덴 자작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사실 그도 여기까지 와서 유리안만 데리고 바로 가기 면구스러웠다. 하지만 정말로 무리해서 제도에 올라온 거라 지체하기 힘들었다.
“염려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내려갈 때에는 포털은 이용하지 않고 기차로만 갈 생각이에요.”
제프라덴 부인이 여정에 대해 설명했다.
“포털을 이용하는 것보다 시일은 더 걸리겠지만 아직 유리가 어리니 포털이 부담될까 봐요.”
이동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제도에 머무를 시간이 사라졌지만, 그게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기차 안에서 어느 정도 쉴 수도 있으니 마차를 탈 체력 정도는 회복하겠죠. 요즘 마나 공학이 발전해서 기차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보통 귀족들은 열차 한 칸을 통째로 쓰기 때문에 침실과 소거실, 욕실까지 갖춰져 있다.
“아쉽지만 더 붙잡을 순 없겠네요.”
“저도 더 길게 뵙지 못해 아쉽습니다.”
어른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칼리오페는 한숨을 흘렸다.
‘상황을 보니 일, 이주 전에 정해진 일이 아니구나.’
제프라덴 내외의 방문에 부모님이 놀라지 않았던 것은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는 답장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예전부터 결정되었던 일이었어.’
조금…… 아니, 꽤 서운했다.
칼리오페가 이럴진대 아직 어린 힐데르트와 에피니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넌 좀 비실비실하니까 가는 게 좋을지도.”
에피니가 흥, 하며 고개를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틱틱거리는데 반해 토끼처럼 눈시울이 은근히 붉어져 있었다.
“나 힘은 세.”
“악바리인 거겠지.”
유리안의 항변에 에피니가 바로 부정했다. 형제들이 많은 만큼, 에피니는 의외로 사람을 보는 눈썰미가 매서웠다.
요 몇 달간 유리안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원래 루스티첼 저에서 검술 훈련이 끝날 때마다 칼리오페와 놀았는데, 유리안이 합세하면서 자주 어울리다보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리안은 자기보다 힘도 약한 주제에 한 번 붙잡은 걸 절대 놓지 않았다. 다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기질이었지만 에피니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왈가닥 에피니와 악바리 유리안.
썩 어울리는 조합 아닌가. 적어도 에피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칼리오페와 힐데르트처럼, 유리안 역시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친구라고 생각했다.
“……호세가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댔어. 가봤자 뭐 다를 게 있다고 가냐?”
“리페네 집에서 지내는 거 그렇게나 좋다고 하더니.”
에피니의 말에 힐데르트가 말을 보탰다.
“이제 너 대신 내가 리페네서 지낼까 봐.”
잘됐다는 말투와 달리 힐데르트의 얼굴엔 아쉬움과 서운함이 가득했다. 할라피뇨 사건 이후로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으니—본인들이 인정하든 말든— 당연했다.
“니가 원한다고 해서 될 거 같아?”
유리안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루스티첼 저에 들어오기도 전에 루시우스의 손에 운명을 달리할지도 모른다.
농담을 던져도 웃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실 누구보다 유리안 본인이 가장 아쉬웠다.
“유리이이! 가는 거야? 가지마아아!”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로베르트가 유리안을 붙잡고 펑펑 울었다.
“가면 안돼, 안된다구우!”
눈물 범벅이 된 채 로베르트는 유리안을 설득하기 위해 가면 안 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꽤 근사한 이유를 찾아냈다.
“아직 못 보여준 신기술이 이렇게나 마는데에에! 내 자이언트 슈퍼 그뤠잇 하이퍼 스피릿이 얼마나 대단한데에!”
“…….”
유리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끌어안은 로베르트를 밀어냈다. 당연히 로베르트는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놓지 않겠다는 듯이 더 꽉 끌어안았다.
‘가끔은 정말 신기하니까.’
칼리오페도, 루시우스도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데 어떻게 정반대인 로베르트가 중간에 껴 있는지.
‘아니, 그래서 로베르트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유리안은 로베르트의 눈물에 어깨가 축축이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결국 한숨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이렇게 우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일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였으니까.’
유리안은 없고, 안젤리나가 있을 때 집은 평화로웠다.
“유리.”
부름에 고개를 드니 루시우스가 서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서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유리안도 루시우스의 얼굴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루시우스는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연둣빛 눈동자를 바라봤다. 새순같이 여린 빛을 띠는 눈과 달리 유리안에게 억센 구석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루시우스는 저도 모르게 유리안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유리안이 깜짝 놀라 루시우스를 바라봤다. 그 커다래진 연둣빛 눈동자를 보니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루시우스는 유리안의 머리통을 꾸욱 눌렀다.
“건강해라.”
‘그래야지 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으니까.’
한 번 더 유리안의 정수리를 꾹 누른 루시우스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 로베르트를 데리고 자리를 비켰다.
고개를 든 유리안은 바로 보이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리페.”
그냥 부르는 것뿐인데 어쩐지 말이 잘 안 나왔다.
칼리오페와 가족처럼, 남매처럼 지내는 건 무척 좋았다. 분명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도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언제부터……. 언제 떠나겠다고 결심하셨어요?”
칼리오페의 목소리엔 답지 않게 책망의 기운이 어려있었다.
그만큼 헤어짐이 섭섭한가 싶어서 유리안은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미안.”
그 말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한차례 물결쳤다.
저 커다란 눈에 자신이 담긴 것을 보고 결정했다. 칼리오페는 안젤리나와 똑같은 눈빛을 한 채 유리안 자신을 바라봤으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여기 있고 싶어요.]
그렇게 말했을 때, 제프라덴 자작 내외는 명백한 실망의 빛을 숨기지 못했다.
[함께 가지 않겠다는 말이니?]
[유리, 우린…….]
설득하고 싶으면서도 죄책감 때문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유리안은 입을 열었다.
[곧 리페 생일이에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건 꼭 맞는 새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차 빠른 속도로 편해졌다. 루스티첼 저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다른 종류였다.
그러면서 복잡했던 머리가 점차 정리되고 어떤 걸 선택할지 명확해졌다.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여기 있을래요.]
칼리오페의 곁에.
그렇게 말했을 때 제프라덴 자작 내외는 정말로 기뻐했다. 활짝 웃는 주름진 얼굴을 보니 유리안도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곧 칼리오페와, 루스티첼 일가를 비롯해 정든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미리 말해주셨으면 좋잖아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칼리오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말하려고 했어.”
변명이 아니라 진짜였다. 계속 말하려고 했었다. 몇 번이나. 하지만 칼리오페의 얼굴을 마주 보면 떠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유리안은 주먹을 꽉 말아쥔 채 생긋 웃었다.
“나, 리페랑 지낸 몇 달 동안 정말 행복했어.”
그래서 미리 떠나기로 결정한 게, 외조부모가 오자마자 가야 하는 상황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너무 좋아서 계속, 계속 있고 싶었어.”
일주일만, 사흘만…… 아니, 하루라도 더 있었다면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칼리오페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정말 떠나기 싫었다.
“그치만 떠나려고.”
고개를 든 칼리오페는 붉어진 눈으로 꿋꿋이 말하는 유리안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였다.
정원 구석에서 혼자 앉아있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유리안.”
제프라덴 부인이 다가와 유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간을 더 지체하면 기차 시간에 못 맞출 수도 있었다.
* * *
루스티첼 저를 나서면서 유리안은 뒤를 돌아봤다.
그간 정들었던 고용인들이 모두 나와 그를 배웅했다. 그 앞에 선 루스티첼 내외와 루시우스, 로베르트. 힐데르트, 에피니. 그리고…….
‘칼리오페.’
눈이 마주치자 칼리오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유리안은 가지 않겠다면서 떼쓰듯 엎어져 울지 않을 수 있었다.
“꼭 돌아올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유리안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지체 없이 바로 출발했다.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돌아와야 해, 유리안!”
“그때까지 건강해!”
커다란 목소리가 덜그럭거리는 소음과 마차를 뚫고 유리안의 귀에 닿았다.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유리안은 마차 창을 열고 몸을 밖으로 쭉 뺐다. 제프라덴 내외가 깜짝 놀라 유리안을 붙잡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히 붙잡은 덕에 더 힘차게 창밖으로 몸을 뺄 수 있었다.
“응, 꼭…… 반드시 돌아올게!”
상체를 전부 밖으로 뺀 유리안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울컥, 무언가가 가슴을 뜨겁게 치고 올라왔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유리안은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다. 마차는 야속하게 달려 순식간에 루스티첼 저를 벗어났다.
제프라덴 부부는 온몸을 들썩이며 우는 손자를 끌어안고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이 또한 성장의 밑거름이 되길 바라며.
* * *
온실은 조용했다. 낮게 깔린 음악이 빈자리를 대신하듯 채워주었다.
유리안이 떠나고 나서 다른 사람들도 돌아갔다.
칼리오페는 선물 더미에서 유리안의 향초를 꺼냈다.
[오늘…… 켜봐.]
그때 그가 왜 망설이며 말했는지 알겠다. 정확히는 ‘오늘 내가 가고 나면 켜봐.’였을 것이다.
칼리오페의 마음을 어떻게 안 건지, 유모가 초에 불을 켜주었다.
주홍빛 불빛이 일렁이며 따스한 온기가 가슴 속까지 스몄다.
요즘은 샹들리에는 물론, 일반 시민의 가택에도 모두 마나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초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천천히 왁스가 녹아들며 은은한 향이 퍼졌다. 포근포근한 향 뒤에 섬세한 꽃향기가 묻어 들었다.
‘아……. 캐시미어페탈.’
칼리오페가 좋아하는 향이었다.
꼭 깨끗이 빨아 햇볕에 말린 포근한 캐시미어에 얼굴을 가득 묻은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에 무심코 미소를 지으며 숨을 들이켜자 어렴풋이 꽃내음이 밀려들었다.
플로럴 계열의 향은 잘못 쓰면 머리 아프기 마련인데 워낙 섬세한 꽃 향이라 그런 것도 없었다. 오히려 우아하게 느껴졌다.
같은 캐시미어페탈 향을 표방해도 어떻게 배합을 하는지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칼리오페는 이렇게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감싸주는 향은 처음 맡아봤다. 일렁이는 향초의 불빛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어……?’
초를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점점 투명해지는 왁스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글씨?’
불이 어둠을 밝히고 향이 사위를 감싸자 나타난 것은 편지였다.
[리페, 생일 축하해.]
살짝 엉성한 필체는 분명 유리안의 것이었다.
[네가 외로워할 때마다 곁에 있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칼리오페는 조금 놀랐다.
‘유리안 앞에서 내색한 적은 없는데……. 언제 내가 외로워한다고 느낀 걸까.’
그만큼 유리안이 칼리오페를 열심히 봐왔기 때문이지만,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유리안은 오로지 칼리오페만 바라봤으나 칼리오페는 주변에 있는 사람 모두를 두 눈에 담았다.
그 중 유독 오래 시선이 머무른 사람이 있다면—.
칼리오페는 불현듯 떠오른 소년의 모습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갑자기 왜 그가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이제 정말로 상관 없는 사람이야.’
칼리오페는 상념을 털어내며 향초에 떠오른 글씨를 마저 읽었다.
[나 대신 이 온기가 네게 전해지길.]
향초의 불빛보다, 포근한 향보다 더 따뜻한 말이었다.
[또 만나자.]
유리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응, 또 만나요.”
칼리오페는 조용히 답했다.
그러자 유리안이 미소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칼리오페 역시 그를 향해 마주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이 조용히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그건 안온하기도 하고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흔들리는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가 돌아보자 오라버니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서로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꼭…….
‘춤?’
로베르트와 루시우스는 춤추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스티첼 부인은 호호, 하고 웃더니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지만 곧 부인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대체 어쩌다가 루스 오라버니와 로벨 오라버니가 춤추고 있는 거지?’
춤추는 건지, 옥신각신하는 모양새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한순간 로베르트가 크게 휘청거렸다. 루시우스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쓰러지는 로베르트의 허리를 멋지게 받쳐 들었다.
“역시 내가 리페랑 먼저 추는 게 좋겠군. 그 실력으론 어림도 없다.”
“내가 여자 파트 춰서 그런 거잖아!”
루시우스의 품에 안긴 그대로 로베르트가 소리를 질렀다.
얼추 상황파악을 한 칼리오페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가족 모두가 칼리오페를 돌아봤다.
“리페, 뭐해? 이리 와!”
밝은 햇살처럼 환히 웃으며 손을 뻗는 가족들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숨을 들이켰다.
어둑해서 조용하고 안온한 이곳도 좋지만.
칼리오페는 기꺼이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언젠가 이 빛 속에서 유리안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울해할 것도 없다.
“자자, 오늘이 얼마 안 남았어. 알차게 즐겨야지!”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시 만날 수 있어.”
“맞아, 유리는 돌아오지만, 우리 리페의 생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로베르트가 손을 번쩍 치켜들며 말했다. 아까 전만 해도 세상이 떠나갈 듯이 울었으면서 어느새 회복했는지 아주 쌩쌩했다.
“내년은?”
“내년 생일은 또 다르지! 지금의 리페와 내년의 리페는 아주아주 다르다고! 다섯 살 리페의 생일은 지금뿐이야!”
“맞는 말이네!”
떠들썩한 가족들 사이에 있으니 칼리오페 또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축하해준 것도 물론 굉장히 기뻤지만, 가족들과 있을 때의 편안함은 또 달랐다.
읏쌰, 하고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생일 축하한다, 리페.”
정수리에 쪽, 하고 입술이 내려 앉았다. 까끌까끌한 수염이 비벼지는 감각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옴팡 찡그려졌다.
루스티첼 부인은 딸아이의 표정에 쿡쿡 웃다가 자그마한 두 손을 붙잡았다. 쪽쪽, 오른손 왼손 번갈아 가며 뽀뽀한 그녀가 칼리오페와 눈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생일 축하해, 내 천사. 엄마한테 와줘서 너무 고마워.”
칼리오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면 자신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에서 느껴지는 든든함과, 맞잡은 양손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보드라운 온기가 뱃속에 한가득 고였다.
“어머니, 아버지 저를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진심 가득한 딸아이의 말에 루스티첼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풋……!”
곧 두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칼리오페는 당황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폈다.
‘내가 뭔가 이상한 말을 했나?’
당황해서 눈이 댕그래진 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이 웃음을 삼키며 통통한 뺨을 콕 찔렀다.
“아니, 우리 리페가 첫돌에 했던 말이 생각나서.”
[아버지, 어머니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깨끗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그 걱정이 무색하게 누구보다 잘 자라주었다.
‘사랑스러운 우리 딸.’
코끝이 찡해져 와서 루스티첼 부인은 얼굴을 감추듯 칼리오페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볐다.
너무 고맙고 대견하고 뿌듯해서 코가 빨개지다니. 아이의 성장은 언제나 벅찼다.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음악이 기분 좋게 꼬리 짓을 치며 그들 사이에 음률을 튕겼다.
“한 곡 추실까요, 레이디?”
고개를 든 루스티첼 부인이 장난스러움을 숨기고 진지하게 손을 내밀었다.
“기꺼이.”
칼리오페 역시 짐짓 우아한 레이디를 가장해 곱게 손을 올렸다. 아빠에게 안겨 있는 덕에 키도 딱 적당했다.
안긴 상태이다 보니 칼리오페 대신 스텝을 밟는 사람은 루스티첼 백작이었다.
저와 똑 닮은 어린 딸과 손을 맞잡고 아기자기하게 몸을 움직이는 루스티첼 부인. 그리고 그런 아내의 몸짓에 맞춰 딸아이를 안은 손을 둥기둥기 흔들며 물소같이 커다란 몸을 슬금슬금 움직이는 루스티첼 백작.
그 사이에서 세상 진지한 얼굴로 열심열심 몸을 움직이는 칼리오페.
온실에 있던 하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얼굴 한가득 웃음을 베어 물었다.
사실 칼리오페는 가만히만 있으면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이 알아서 몸을 움직여주는 건데도 엄청 열심인 얼굴이었다.
“뭐야, 뭐야! 치사해! 나도!”
로베르트가 그 사이에 끼어들며 루스티첼 부인과 칼리오페의 손에 제 오른손을 얹고 흔들었다.
“어머나.”
루스티첼 부인이 웃더니 칼리오페의 손을 양보해주었다. 그 대신 빈손에 로베르트의 왼손을 슬그머니 쥐었다.
칼리오페와 손잡은 오른손을 붕붕 휘저으며 좋아하던 로베르트가 움찔해서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생긋 웃는 엄마의 모습에 로베르트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곧 그는 엄마와 손을 맞잡은 왼손까지 붕붕방방 흔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칼리오페와 루스티첼 부인 사이에 끼어들려는 찰나—.
“……?”
칼리오페는 손에 닿는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루시우스가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괜히 멀리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다.
루스티첼 백작은 자신의 자리를 가로챈 아들놈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아내의 손짓에 한숨과 함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곧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서도 엷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칼리오페, 로베르트, 루스티첼 부인, 루스티첼 백작 그리고 루시우스.
다섯 사람은 손에 손을 맞잡고 원을 만든 채 다 함께 춤을 추었다.
전생에는 없던 가족의 첫 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