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2. 유리안과 안젤리나(3권) (13/41)

Chapter 12. 유리안과 안젤리나

사르니오 저의 집사는 놀란 얼굴로 갑작스러운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안젤리나 온니,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상대의 모습에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카, 칼리오페 아가씨? 여긴 어떻게…….”

대답 대신 생긋 웃는 아이는 쌀쌀한 날씨도 잊게 할 만큼 빛이 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 아니,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칼리오페를 밖에 세워둘 순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 집사는 황급히 안으로 비켜 섰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인처럼 앙증맞은 핸드백을 착 내밀었다. 집사는 얼결에 몸에 밴 정중한 태도로 핸드백을 받아들었다. 뒤에 따라 들어온 유모는 아예 꽃까지 들고 있었다.

놀란 채 굳어있던 하녀가 집사의 눈짓에 재빨리 꽃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유리 온실에 안젤로니아가 활짝 폈더라구. 안젤리나 온니랑 딱 어울리지 않아? 온니 생각이 나서 가져왔어.”

“네. ……안젤리나 아가씨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집사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꼭, 안젤리나 아가씨…… 유리안 도련님이 기뻐하시기를.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칼리오페의 태도 덕분에 정체되어 있던 사르니오 저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추위를 가시게 하는 칼리오페라는 빛이, 그녀가 몰고 온 평소 같은 일상의 공기가 사르니오 일가를 밝혀줬으면 했다.

“칼리오페 아가씨,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1층에 있는 소응접실로 칼리오페를 안내한 집사가 정중히 문을 닫고 나갔다. 하녀들이 바로 따뜻한 우유와 초콜릿 칩이 잔뜩 박힌 쿠키를 가져왔다.

‘……딱 하나만 먹을까.’

몸이 겨울을 대비하는 건지 요즘 자꾸만 단 게 당겨서 배가 빵빵해졌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칼리오페는 결국 얼굴만 한 초코칩 쿠키를 손에 쥐었다.

“아가씨.”

“어? 하, 하나만 먹으려구…….”

유모의 부름에 지레 찔린 칼리오페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던 유모가 웃으면서 트레이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오늘 간식을 아직 안 드셨으니 많이 드셔도 돼요.”

“살쪘는데.”

“그 말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어요. 아가씨 나이엔 통통한 게 보기 좋은 법이지요.”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칼리오페는 죄책감 없이 초코칩 쿠키를 해치우기로 했다.

“하지만 이따 저녁을 못 드실 테니 하나만 드시는 게 좋겠네요. 하나도 그렇게 커다랗잖아요?”

유모가 다시 트레이를 멀리 치웠다.

받았다가 뺏기는 기분에 칼리오페는 우울하게 초코칩 쿠키를 바라봤다.

“그런데 왜 불렀어?”

유모의 반응으로 쿠키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다과를 갖다 준 하녀가 나간 지도 오래인데 유모는 칼리오페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음…….”

칼리오페는 긍정의 뜻으로 작은 신음을 흘렸다.

얼굴을 본 사람은 고작해야 집사와 하녀 몇 명뿐이지만, 웃으며 접대하는 얼굴에서도 지울 수 없는 침울함이 보였다.

뭔가 이상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유리안.’

칼리오페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최대한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같은 척하려고 했지만 역시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칼리오페가 연락도 없이 사르니오 가를 찾아온 것은 유리안 때문이었다.

최근 유리안은 어느 사교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 사르니오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번에 에피니의 집인 엘피너스 저에서 있었던 모임에 불참한 것은 별생각 없었지만, 계속되니 걱정되었다. 칼리오페와 힐데르트, 에피니가 계속해서 초대장을 보냈지만, 몇 달 동안 완곡한 거절만 되돌아왔다.

‘그동안은 기다렸지만 이제는 더 기다릴 순 없어.’

다른 사람들은 걱정되어도 사르니오 일가를 존중해 깊게 파고들기 저어할 수 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유리안이 미래에 저지를 일을 알고 있다.

그는 살인, 그것도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심지어 첫 대상이 유리안의 부모님이었지.’

그 신문 기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혔다.

‘전생과는 조금쯤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달라지다 보면 전생과 전혀 다른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낙관적이었을 수도…….’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였던 초코칩 쿠키도 더 이상 당기지 않았다.

그때, 사르니오 부인이 소응접실에 들어왔다.

“리페,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사르니오 부인.”

칼리오페가 일어나 치맛자락을 살포시 잡고 인사했다. 여전히 예법 교과서 같이 바른 태도에 사르니오 부인은 미소 지었다.

“신문으로만 소식을 접하다가 이렇게 보니 또 새롭네. 그간 많이 컸구나.”

사르니오 부인은 새삼스레 아이들은 두세 달 사이에도 훌쩍 큰다는 사실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부인께서는 변함없이 아름다우세요.”

“어머나.”

사르니오 부인이 기분 좋은 듯 작게 웃으며 앉았다.

“연락도 없이 우리 집에 다 오고……. 무슨 일이니?”

그렇게 묻는 얼굴은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날 선 기운이 느껴졌다. 그 방어적인 태도에 칼리오페는 직감했다.

‘역시 유리안에게 문제가 생겼어.’

칼리오페는 생각을 숨긴 채 순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안젤리나 온니가 보이지 않아서요. 저도, 힐데 오라버니도, 에피니 온니도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그것 참 고맙구나. 다들 친절하네. 우리 안젤리나는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행복하겠구나.”

사르니오 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목이 타는지 바로 찻잔을 입에 대는 등 초조한 기색이 완전히 가려지진 않았다.

“안젤리나 온니를 만나봐도 될까요?”

“아, 우리 안젤리나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많이 안 좋은가요?”

칼리오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바로 울망울망해지는 눈이 당장 찾아갈 기세였다.

사르니오 부인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란다. 걱정하지 말렴. 나으면 먼저 리페 네게 연락하라고 하마. 곧 건강히 돌아올 테니까.”

‘그래, 곧 돌아올 거야. 사랑스러운 내 딸로.’

사르니오 부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많이 안 좋은 게 아니라면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칼리오페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순연한 걱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사르니오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많이 안 좋은 거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은 바람에 안젤리나의 안정을 위해 만날 수 없다는 말을 꺼내기 힘들어졌다.

“그거야 괜찮지만…… 옮으면 큰일이잖니.”

대신 생각해 낸 다른 변명을 읊자마자 칼리오페가 활짝 웃었다.

“전 건강해서 괜찮아요!”

씩씩하게 대답한 칼리오페는 사르니오 부인이 더 만류하기 전에 재빨리 일어났다.

크고 나서 이러면 실례겠지만 이럴 때는 어린아이다운 무모함이 최고다.

“리페!”

당황한 사르니오 부인이 칼리오페를 불렀다.

“빨리 나으라고 이야기만 하고 나올게요!”

그 말만 남긴 칼리오페는 응접실 문을 쾅 닫고 고용인들이 만류하기 전에 호다닥 위로 올라갔다.

* * *

똑똑, 유리안의 방문을 노크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칼리오페는 잠시 기다리다가 문고리를 돌렸다. 아무런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지,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물건이 마구마구 날아 왔다.

사랑스러운 토끼 인형, 꽃잎 같은 장난감 다구, 책과 필기구. 그러다 화병이 날아올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문을 다 열지 않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날아온 물건들은 대부분 문에 맞고 떨어지거나 그조차 닿지 않은 채 발치에서 굴렀다.

칼리오페는 초조했다.

‘이럴 땐 보통 당장 나가라거나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치지 않나?’

하지만 유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칼리오페는 조심스레 문틈 사이로 더 바짝 다가가 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손에 오르골을 든 유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자세를 보아 딱 던질 기세였다.

“리, 리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건만 닥치는 대로 던지던 유리안이 깜짝 놀라서 칼리오페를 불렀다. 잔뜩 치켜들었던 팔이 힘 빠진 듯 스르르 내려온다.

그런 유리안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망설임 없이 문을 더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어느새 따라온 고용인들이 만류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뒤돌아 웃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 미소가 무엇보다 단호한 거절로 비쳐서 고용인들은 일순 멈칫했다.

그 사이에 칼리오페가 문을 꽉 닫은 후 몸을 돌려 유리안과 마주했다.

“오랜만이에요.”

“리페…….”

유리안은 평소처럼 상냥하게 미소 짓는 칼리오페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봤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비비며 사라지지 않는지 확인하다가 정말로 사라지지 않자 깜짝 놀라 다가왔다.

“다, 다치진 않았어? 어디 봐봐.”

유리안이 허둥지둥 칼리오페의 몸을 살폈다.

“전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칼리오페가 괜찮다고 말해도 유리안은 계속해서 어디 다친 곳이 없나 살피려 했다.

도저히 진정하지 못해서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두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췄다.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새순같이 연하고 보드라운, 유리안의 연둣빛 눈동자를 보자 칼리오페 쪽이 말문이 막혔다. 너무 많은 말이 한꺼번에 차올라서, 그중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수많은 말을 담아 그저 미소만 짓자 유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가가 이지러지고 입술이 덜덜 떨리더니 소리 없이 입술이 달싹인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핏기 없는 입술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속삭임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들리지 않는 속삭임이 그 무엇보다 강하게 칼리오페에게 닿았다.

‘이렇게, 이렇게나 여린 아이가 어떻게…….’

이런 애가 살인을, 그것도 제 손으로 부모를 죽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눈에 보일 정도로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유리안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맞잡은 손에 아무리 힘을 줘도 유리안의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붙잡은 칼리오페의 손까지 덜덜 떨렸다.

계속해서 자신을 응시하는 칼리오페의 시선에 유리안은 흠칫했다. 불에 덴 듯이, 거의 뿌리치다시피 칼리오페와 맞잡은 손을 떨쳐냈다.

“이, 이건……. 그냥, 그냥 머리를 자르고 싶어서, 잘랐는데…….”

유리안이 자신의 머리칼을 양손으로 가리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잔뜩 겁먹은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

칼리오페는 침음을 삼켰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기 손으로 자른 듯 엉망진창인 머리칼, 유리안의 표정, 몸짓, 잡아 뜯어서 넝마가 된 옷, 생채기가 난 손바닥.

알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칼리오페는 움츠러든 유리안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었지요.”

품에 꼬옥 안고 다정하게 등을 쓸어주었다.

오들오들 떠는 마른 몸이 점차 느리게 안정되어 갔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칼리오페의 어깨 한쪽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유리안은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뚝뚝 눈물만 흘렸다.

품 안의 아이가 어떤 마음일지 칼리오페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깊은 슬픔과 절망, 그리고 겨우 비춰든 안도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적시고 가슴에까지 스몄는지, 눈물이 나왔다.

유리안의 눈물처럼 똑같이 따뜻한 눈물이.

* * *

사르니오 백작은 그다지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그다지’라는 수식조차 아까운 인사였다.

그는 정략 결혼으로 맞은 어린 아내를 방치했다.

결혼 상대를 찾을 때 그가 요구한 조건은 간단했다.

1. 후계자 생산을 위해 건강하고 젊을 것.

2. 한 번도 일을 해보지 않았을 것.

3. 그래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을 것.

4.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

구태여 말하진 않았지만, 가문의 격이 낮은 것 역시 포함되었다.

그는 그 조건에 딱 부합하는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 아니, 아내를 맞은 것이 아니라 가난한 남작가에서 아내를 사 왔다.

사르니오 부인은 애당초 남편의 사랑을 기대하지 않았다. 제도에서는 연애 결혼이 잦고 정략혼은 비인도적이라는 소리가 돌았지만, 그녀가 살았던 변방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연애 결혼을 하는 친구들은 드물고 대다수가 정략 결혼을 했다. 그녀는 이만하면 잘한 결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제도로 올라오면서 여러 가지 꿈도 키웠다. 그녀가 맡게 될 사업, 영지 관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람들과의 친분. 가슴 깊은 곳에서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열정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남편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경험 없는 순종적인 여자를 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가문의 일에서 거의 소외되었다. 인장을 찍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었으나 모두 가신들과 남편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제도도, 사르니오 가도 결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가 없으니 허공에 붕 뜬 것처럼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정을 붙일 수 있는 존재가 탄생했다.

[응애, 응애!]

자신을 찾으면서 자지러지게 우는 작은 생명체들.

보기만 해도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그 사랑스러운 존재들.

쌍둥이를 낳고 나서, 그 아이들로 인해 사르니오 부인은 드디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말라비틀어져 서서히 죽어가고 있던 그녀는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싱싱하게 살아났다.

쌍둥이들 모두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똑같이 사랑스러웠으나 사르니오 부인의 손길을 더 받는 아이는 유리안이었다. 초산인 데다가 쌍둥이라 엄청난 난산이었던 탓이다.

안젤리나는 그나마 빨리 나왔지만 유리안은 태내에서 숨이 끊어질 뻔했다. 유리안은 약했고, 약한 만큼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안젤리나는 이해심 많고 그늘 없는 아이였다. 언제나 괜찮다며 웃고 유리안의 손을 잡고 챙겨주었다.

그래서 몰랐다.

자신이 딸아이를 그렇게 ‘이해심 많고 그늘 없는 아이’로 만들었다는 것을.

딸아이가 발을 붙일 땅을 빼앗아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사르니오 부인은 딸의 시체를 마주 봐야 했다.

안젤리나는 어머니와 자신의 반쪽인 동생 유리안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가끔씩 불쑥 토라지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젤리나는 상냥한 아이였기에 그런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서,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듯 모든 것을 차단한 채 좁은 다락방에 앉아 지붕 창에서 들어오는 햇볕을 쬐는 게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어린 그녀에게 다락방을 오르내리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서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사고가 일어났다.

안젤리나는 다락방에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

추락하고 나서도 아이는 한동안 살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미약한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고, 아무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

사르니오 부인도, 유모도, 하녀도 고열에 시달려 눈도 못 뜨는 유리안에게 매달려 있느라 안젤리나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안젤리나가 워낙 사고도 안 치는 얌전한 아이였기에 모두 그녀에게서 눈을 떼는 것이 익숙했다.

그 대가는 너무나 잔혹했다.

사르니오 백작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부인에게 분노했다.

맹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사르니오 부인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나흘을 버티다가 쓰러졌다.

왜 딸아이를 그렇게 혼자 내버려 뒀는지, 자신이 증오스럽고 저주스럽고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녀 한 명만…… 아니, 자신이 눈을 떼지 말았어야 하는데. 곁에 있어야 했는데.

그 아이가 그 차가운 바닥에 누워 죽어가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엄마를 찾았을까.

겉으로 내색 안 하고 매일 속으로만 엄마를 불렀을 텐데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마저…….

사르니오 부인은 쓰러졌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러던 중 퀭한 그녀의 눈동자에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가 비쳤다.

봄날 피어난 꽃잎 같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에 그 이파리 같은 눈동자.

통통했던 얼굴이 반쪽이 되도록 수척해진 데다가 눈물로 눈가가 짓물러 엉망이었지만,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식인데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

[아…… 안젤리나, 왔구나.]

비쩍 마른 우뭇가사리 같은 손이 유리안에게 뻗어졌다.

[그래, 살아있을 줄 알았어. 엄마는 믿고 있었어.]

모래 바람처럼 메마른 목소리엔 기묘할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 * *

유리안과 칼리오페는 가만히 서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마저 멈춘 것처럼 침묵은 안온하고 온유했다.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야.”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유리안은 말해놓고도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예전부터 어머니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걸 이렇게 구체적으로 입 밖에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말하면 인정하는 것 같아서, 사실로 굳어질 것 같아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혼자 속으로 생각할 때조차 조심스럽고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어머니는 나를 안젤리나라고 생각해.”

옷을 벗은 모습을 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남자인데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안젤리나라고 부른다.

유리안이 반항하는 의미로 준비해둔 여성복을 하나도 입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손수 입혀준 적도 있다. 그냥 투정 부리는 딸을 보는 눈으로.

“아니라고, 나는 유리안이라고 말하면…….”

유리안은 말을 멈췄다.

‘나는 유리안’이라고 말할 때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라서 도저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꽉 다문 입술에서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끔찍하고 무섭고……. 그래도 어머니인지라 불쌍해서.

“……더 이상해져.”

유리안은 겨우겨우 힘겹게 말을 마무리했다.

이상해진다는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르니오 백작은 그런 부인에게 화를 냈다. 몇 번 화를 내도 해결되지 않자 혀를 차기 시작했고, 나중엔 혀조차 차지 않았다.

[뭐, 나아지겠지.]

유리안은 그 말을 기억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모든 것이 뇌에 판화를 찍어낸 것처럼 기억에 남았다. 사르니오 백작의 입술 모양과 눈동자의 움직임, 목소리의 고저까지.

잊을 수가 없었다.

사르니오 부인이 자신을 안젤리나라고 부르면서 치마를 입힐 때보다, 그 말을 들었을 때가 더 충격적이었다.

개미만 한 자신에 비해 아버지는 너무나 거대했다. 아버지의 두툼하고 커다란 손. 그 믿음직스러운 손이 자신을 건져 올릴 줄 알았다. 하지만 사르니오 백작은 등을 돌렸고 그가 만들어낸 광대한 그림자에 유리안은 잠식당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절망 속에 유리안은 혼자 남겨졌다.

[네가 장단 좀 맞춰줘라.]

사르니오 백작은 유리안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미쳐버린 아내 때문에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이 붕괴됐다. 하루하루 지치기만 한다. 하지만 유리안이 안젤리나로 있어주면 괜찮았다. 여전히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아내 그대로였다.

애가 크면 괜찮아지겠지.

심기에 걸리는 모든 것을 그렇게 외면하듯 정리하고 사르니오 백작은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기는 거인의 발에 유리안은 비명도 못 지르고 밟혔다.

백작은 밑에서 질식하는 유리안을 보지도 못했다. 신경 쓰지 않았기에.

그때 유리안은 깨달았다.

나만 참으면 이 집안은 평화롭다.

“안젤리나가 그렇게 참았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였던 거야.”

그 생각대로였다.

유리안이 참자 사르니오 가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사르니오 부인은 웃었고, 사르니오 백작은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만족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생각에 그때만큼은 유리안도 행복했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 집안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는 사라진 것 같았다. 여전히 그는 그림자 속에 묻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안젤리나가 살아난 대신 유리안이 죽었던 거야.”

그래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안젤리나는 둘이서 하나였다. 반쪽이 죽었으니 당연히 정상으로 살아갈 수 없다. 몸은 유리안이되, 정신은 안젤리나로 살아가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건 인정이 아니라 체념이지만 유리안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죽이던 차에 칼리오페와 만났다.

[안녕하세요. 사르니오 영애, 맞지요?]

안젤리나의 죽음 후 처음으로 외출했던 날이었다.

도저히 전처럼 어울릴 수가 없어서 구석진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시들어가는 자신에게 햇살처럼 환히 웃으며 손을 내밀던 아이.

[안젤리나라고 불러.]

사실은 그렇게 부르라고 하기 싫었다.

칼리오페를 보고, 칼리오페와 지내면서 ‘유리안’은 조금씩 되살아났다.

부모가 만든 그늘에 스러져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조차 유리안은 손톱보다 더 작아졌었다. 눈을 감은 채 웅크리고 있어 죽은 줄 알았던, 죽은 것 같았던 아이가 눈을 뜨고 일어섰다.

유리안의 속에서 안젤리나는 점점 작아져 가고 유리안이 커지기 시작했다.

“죽기 싫어…….”

불완전한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위로 머리를 자르고 여자 옷을 입지 않겠다고, 나는 유리안이라고 말했다.

만들어졌던 평화는 케이크를 뭉개는 것처럼 아주 쉽게 짓이겨졌다.

과거 유리안이 입었던 남성복은 다 버려지고 태워졌다. 그 모습이 꼭 자기 자신 같았다.

유리안을 버리고 태워서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안젤리나가 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칼리오페에게 머리 자른 모습을 보이고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다.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내보일 때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칼리오페가 부정적으로 반응할까 봐 무서웠다. 이제 다른 사람은 상관없다. 다만 칼리오페에게만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녀는 이미 가족의 죽음을 경험해봤다. 그게 얼마나 심장을 쥐어뜯는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리안의 아픔도, 사르니오 부인의 아픔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오만이었어.’

반쪽 같은 쌍둥이 누이를 잃은 슬픔에 그녀를 그리워해 동일 시 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사르니오 부인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지만 차마 다그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내 위주로만 쉽게 생각한 거지.’

칼리오페는 자기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모든 죽음이, 모든 비극이, 모든 상실이 똑같지 않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세계 속에서 죽은 가족 때문에 곁에 살아있는 가족을 외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도, 루시우스도, 로베르트도, 그녀 자신도. 어떻게서든 남은 가족이 살아남고 행복하길 바랐다. 절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래서 설마, 사르니오 부인이 유리안을 여장시켜 안젤리나 대신으로 삼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한 번 생을 살았으면서도 이렇게나 바보 같아.’

십 대에 죽었다고 해도 삶을 다시 사는 건데 이렇게 시야가 좁을 수 있는지.

칼리오페는 유리안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미래의 살인마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책임감 때문에 다가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그랬다면 유리안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하루라도 빨리 꺼내줄 수 있었을 텐데.

[안젤리나가 살아난 대신 유리안이 죽었던 거야.]

유리안의 말이 생각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생에서 몇 년 뒤, 유리안이 부모를 죽인 것은 본인이 살기 위해서였던 걸까. 그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견디고 견디다가 도저히 안 돼서…….

유리안에게 멋진 위로의 말이나 가슴을 포근히 감싸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회귀하고 꽤 달라졌지만 칼리오페는 원래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전생의 경험과 몇 년간의 노력으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전생의 경험이 사무칠 때, 슬픔과 절망이 자신을 압도할 때 하는 것.

‘나를 위로해주는 것.’

“…….”

유리안이 고개를 들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조용한 가운데 낮은 허밍 소리가 울렸다.

언 땅 사이로 조용히 스며든 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어째서인지 유리안은 그 나약하고 미약한 소리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칼리오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었던 땅이 녹고, 땅 깊숙이 숨어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씨앗이 움찔거렸다.

유리안의 눈동자 같은 연한 새순이 거친 땅을 뚫고 움트기 시작했다. 황무지 같았던 곳이 푸른빛 벨벳으로 뒤덮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조금 전 이야기할 때만 해도 담담했는데 왜 지금에서야 흐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칼리오페가 그런 유리안을 보고 미소 지었다. 유리안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주 웃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자꾸 나왔다.

노랫소리가 보이지 않는 손길이 되어 젖은 뺨을 감쌌다.

유리안을 생각하는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일까.

아직 각성 전인데도 칼리오페의 염원에 응해 에테르가 움직였다.

그녀가 가슴 깊이 바라는 대로, 그녀의 노래에 담긴 대로.

생의 근원이 노래를 타고 흐르며 빛났다.

유리안이 호흡할 때마다 그 따뜻한 빛이 그의 속에 스며들었다.

미풍이 불었다.

젖은 흙과 싱싱한 풀냄새를 품고 있는 춘풍이었다.

반짝반짝 따뜻한 봄바람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 * *

틱, 티딕, 틱—

사르니오 부인은 가만히 있질 못하고 계속해서 손톱과 손톱을 맞부딪쳤다. 지체 높은 귀부인으로서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자각이 없었다.

‘칼리오페는 안젤리나의 친구잖아. 아픈 안젤리나를 보러 간 것뿐이야.’

그래,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불안했다.

‘왜?’

왜 불안한 거지?

사르니오 부인은 자신이 대체 왜 불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초점을 잃은 채 더듬더듬 허공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아스라한 잔상같이 무언가가 떠오르려 했다.

아픈 안젤리나…… 아픈 유리안. 안젤리나는, 혼자. 새빨간—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사고를 차단했다. 그리고 뇌는 아주 달콤한 허상을 만들어냈다.

‘그래, 안젤리나가 아픈 게…… 몸이 아니잖아. 우리 엔젤이 요즘 많이 힘들지.’

아무리 쌍둥이는 정체성을 헷갈릴 수 있다고 하지만, 자기가 완전히 유리안인 줄 알아서 큰일이다.

‘어라?’

사르니오 부인은 멈칫했다.

‘그런데 왜 안젤리나가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지? 혼자 두면 안 되는데, 우리 엔젤은.’

자신이 가뒀다는 건 까맣게 잊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요즘 이상하게 기억이 잘 안 나는 일들이 많았다. 생각해내려고 해도 머리만 깨질 듯 아파져 올 뿐, 도저히 기억나지 않아서 계속 포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층, 유리안의 방에서 새어 나온 봄바람이 사르니오 부인의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기억해내야 한다.

‘그래야 또 잃지 않을 수 있어.’

갑자기 든 생각에 흠칫했다.

‘잃지 않다니, 뭘?’

게다가 ‘또’ 잃지 않는다는 건 뭔가. 자신은 아무 것도 잃어버린 적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잃어버릴 것 같은 기분은 점점 강해졌다.

소중하게 쥐고 있는 것이 모래알처럼 손 틈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

사르니오 부인은 초조하게 희미한 기억을 되짚었다.

‘안젤리나가…… 자길 유리안이라고 해서, 그래서 내가……. 내가?!’

그녀 자신이 안젤리나를 방안에 가뒀던 게 생각났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사르니오 부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화를 냈어……?’

유리안의 옷을 입은 안젤리나에게 소리 지르고 우악스럽게 옷을 벗겼다. 보관하고 있던 유리안의 옷을 다 태우고…….

‘왜, 왜 그랬지?’

안젤리나가 자신을 유리안이라고 말했을 때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아이를 보듬어주질 못할망정 왜 그렇게 윽박질렀는지.

‘완전히 폭력적인 최악의 엄마였잖아…….’

사르니오 부인은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차단된 시야 속에서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 예전에도 자길 유리안이라고 한 적이 있었어…….’

기억 속 안젤리나는 굉장히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꼭 유리안처럼.

‘일 년 반 정도 전인 거 같은데 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지?’

안젤리나는 항상 가슴까지 오는 머리 길이를 유지했었다.

‘언제 잘랐지? 그런 적이…….’

사르니오 부인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끈거리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흐으…….”

다문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사르니오 부인은 더 생각해내는 걸 포기했다.

어쨌든 그때 안젤리나는 금방 제정신을 찾고 자신이 유리안이라고 말하는 걸 그만뒀다.

그럼 된 거였다.

“아, 칼리오페.”

지금 안젤리나는 혼란스러운 것뿐인데, 칼리오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멀리하면 어쩌지. 안젤리나는 정말 칼리오페를 좋아하는데.

‘내가 잘 말해줘야 해.’

사르니오 부인은 벌떡 일어났다.

2층으로 올라가 안젤리나의 방 문고리를 돌리다가 멈칫 했다.

방 안쪽에서 희미한 노랫소리가 울렸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어째서인지 손이 떨렸다. 배꼽 언저리가 울렁울렁거린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도 모르게 슬며시 문을 여니 노랫소리가 더 짙고 농후해졌다.

묘한 음성이었다. 비 온 뒤 구름 낀 하늘을 보는 것 같은 목소리. 구름 뒤에 가려진 태양에서 뻗어 나온 빛이 구름 끝을 은빛으로 찬란하게 물들였다.

사르니오 부인은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섰다.

공기가 촉촉하고 청량했다.

기묘할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비 온 뒤 안개가 걷히고 세상이 환한 것처럼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 달라진 풍경에 사르니오 부인은 자신이 그간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끗해진 시야에 노래를 부르는 칼리오페가 들어왔다.

칼리오페와 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유리안?”

사르니오 부인이 멍하니 아들을 불렀다.

깜짝 놀란 유리안과 칼리오페가 사르니오 부인을 돌아봤다.

유리안의 연록 빛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얼마 만에 엄마가 자신을 불러주는 건지. 엄마의 두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 게, 자신을 온전히 담은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어, 엄마?”

벌떡 일어난 유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르니오 부인을 불렀다.

2년 전, 아직 어떤 비극도 찾아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리고 앳된 목소리였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사르니오 부인은 깜짝 놀라서 아들에게 다가갔다.

우는 아이를 다정히 품에 안고 어르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유리안? 유리안이 왜 여기에……?’

유리안은 분명 가문의 영지에 있어야 했다.

제도에는 안젤리나만…….

안젤리나만.

‘안젤리나는 어딨지?’

그 순간 눈앞에 여러 장면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갔다.

아픈 유리안, 혼자 누워있던 안젤리나. 다락방 사다리. 새빨간—

피.

“아으윽……!”

누군가 머리를 거대한 망치로 쾅쾅 내려치는 것 같았다.

사르니오 부인은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머리칼이 뜯기는 아픔보다 안쪽에서 뇌를 찌르고 으깨 곤죽으로 만드는 통증이 더 심했다.

허억, 허억, 허억. 새하얗게 질린 사르니오 부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주저앉은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견디듯 미동도 안 했다.

그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생기가 빠진 것처럼 버석하게 마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눈만은 형형했다.

고통 때문에 안압이 높아져서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벌게진 눈이 유리안을 담았다.

“……안젤리나?”

확인하듯 부르더니 엉금엉금 기어와 유리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엔젤! 아아, 정말…….”

책망과 안도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어디 갔었던 거야. 엄마가 놀랐잖아.”

환하게 웃으며 말썽꾸러기를 보듯 바라보더니 이마를 맞부딪쳤다.

유리안은 품에 안긴 그대로 뻣뻣이 굳었다.

아까 잃어버렸던 엄마를 되찾은 아이처럼 사르니오 부인을 꽉 붙들고 엉엉 울던 게 거짓말 같았다. 눈물 자국이 아직도 얼굴에 한가득한데 지금은…….

‘잘 만든 밀랍인형처럼 보여.’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르니오 부인.”

칼리오페가 사르니오 부인을 부르며 유리안을 감쌌다.

“안젤리나 언니가 아니라 유리안 오라버니예요.”

잘 보라는 듯이 유리안을 품에서 빼냈다. 유리안의 몸은 종잇장같이 힘이 없어서, 칼리오페는 아린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아까 부인께서 유리안이라고 부르셨잖아요.”

사르니오 부인은 미소 지은 그대로 눈만 깜빡였다. 온화한 표정과 달리 벌게진 눈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안젤리나잖아. 유리안은 지금 영지에 있어.”

그렇게 말하는 사르니오 부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짓궂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 같이 부정하는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실제로 그녀에게 칼리오페의 말은 농담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이는 안젤리나고, 유리안은 요양 차 영지에 있다.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불안할까?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데 조금씩, 조금씩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발밑이 풍화되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모래성처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면 이 모든 게 먼지가 되어 무너질 것 같다.

사르니오 부인은 고개를 잘게 저으면서 중얼중얼거렸다.

“안젤리나. 안젤리나 맞지? 안젤리나야. 내 천사 안젤리나.”

유리안은 불안해졌다.

지금 이 반응은 차라리 괜찮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심해지면 칼리오페가 다칠 수도 있다.

‘그건 안 돼.’

“응, 나 안젤리나예요.”

유리안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르니오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치? 역시 안젤리나지?”

사르니오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작은 손을 마주 붙잡았다.

“유리안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리안을 불렀다.

유리안은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이럴 때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다. 생각이 사라지고 빈껍데기가 된 기분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까 칼리오페가 따스한 손으로 자신을 붙잡아줬을 때.

족쇄 같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신을 빼내 준 순간.

‘그것만으로도 나는…….’

껍데기처럼 아무 것도 못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칼리오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을 수 있어.’

“유리안 오라버니…….”

유리안의 미소가 사라질 것 같이 너무나 아스라해서 칼리오페는 재차 그를 불렀다.

‘그래, 나는 유리안이야.’

칼리오페가 그렇게 불러주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칼리오페라면 자신은 유리안으로 살아 있을 수 있다.

말 없는 유리안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단호한 눈으로 사르니오 부인을 쳐다봤다.

“부인,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유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유리안 오라버니랑 같이.”

단단한 어조에 사르니오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이니? 아까부터 계속.”

현실을 전혀 보지 않는, 그 이해할 수 없다는 눈동자에 칼리오페는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왜 자꾸 안젤리나를 유리안이라고 부르는 거니. 쌍둥이라서 헷갈려서 그러는 거야?”

사르니오 부인이 유리안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잃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리페, 안젤리나는 네 친구잖니?”

그렇게 말하는 사르니오 부인은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확장된 동공과 일그러진 미간, 그와 달리 비죽 올라간 입꼬리.

칼리오페는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꼈다.

‘내가 부정한다면, 현실을 말한다면.’

그건 기폭제가 되어 사르니오 부인을 폭발시킬 것이다.

칼리오페는 바짝 마른 입안을 애써 축였다.

“저는 단 한 번도, 안젤리나 언니와 만난 적이 없어요.”

칼리오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 역시 가족의 죽음을 겪어봤기에, 더더욱 그것을 직시시키는 말이 힘겨웠다.

‘하지만 해야 해.’

칼리오페의 입술이 조용하게 달싹이며 기폭제를 점화시켰다.

“안젤리나 언니는 죽었으니까.”

칼리오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앞에서 사람이 홱 도는 것을 목격했다.

어떤 비유가 아니라 사르니오 부인은 말 그대로 홱 돌았다. 그것 외에는 그녀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번들거리는 흰자와 새까만 시선, 쫙 찢어진 입.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응접실에서 함께 다과를 들던 귀부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누가, 누가, 누가! 누가 죽었다는 거야!”

갈퀴 같은 손이 칼리오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리안이 다급히 손을 잡아챘지만 역부족이었다. 억센 힘에 유리안의 손은 그대로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사르니오 부인의 팔뚝이 손톱에 긁혀 주욱 붉은 상처가 났다.

그래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 멈칫거리지도 않고 속도가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아무 영향도 없었다.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초조해진 유리안이 곧장 사르니오 부인의 손을 콱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지 사르니오 부인은 오로지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아가씨!”

유모가 뛰어들어 칼리오페를 확 감싸고 하인들이 사르니오 부인의 팔을 잡아챘다.

사르니오 부인은 놓으라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시뻘게진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다가 발작적으로 손을 뻗었다. 자신을 붙든 하인들의 힘 때문에 가로막히니 그대로 멈추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또 발작하듯이 칼리오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꼭 그녀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구속하는 힘 역시 마찬가지로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뿌리칠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다.

사르니오 부인의 두 눈은 계속해서 칼리오페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오로지 칼리오페만, 안젤리나가 죽었다는 말만 보이는 상태.

칼리오페는 묵묵히 그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정신이 나간 모습에 연민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났다.

시야 한 편에는 자신과 사르니오 부인 사이를 가로막듯 서 있는 유리안이 보인다.

자그마한 아이의 뒷모습.

저 슬픈 모습이 사르니오 부인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걸까?

칼리오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 이상 사르니오 부인을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정말?’

정말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까?

자극하지 않은 결과가 바로 앞에 있지 않나?

그 때문에 엉망이 된 유리안을 눈앞에 두고서, 그냥 물러나겠다고?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칼리오페는 상황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했다.

충격 요법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칼리오페는 의사가 아니었다. 괜히 말을 더 보탰다가 사르니오 부인의 상태가 훨씬 악화될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칼리오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당혹에 물들어 있던 산호빛 눈동자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유리안을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감히 구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엄마를 잃고,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가 사르니오 부인의 광증일지라도,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손을 잡기로 했다.

“딸을 잃은 슬픔은 극복하기 힘들죠.”

칼리오페가 조용히 말했다.

사르니오 부인을 붙잡고 있던 하인들이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잔뜩 흥분한 사람을 더 자극하면 어떻게 하냐는 책망의 눈빛이었다.

칼리오페에겐 그들도 가해자로 느껴졌다.

결국 그들 역시 만들어진 평화가 소중했던 것이다. 사르니오 부인이 난동을 부리는 게 힘들어서 유리안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외면했다.

그러면 겉으로야 조용하니까.

약간의 죄책감이 동반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더 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부인께서는 살아있는 아들을 죽이고 있어요.”

칼리오페가 유리안을 꽉 붙잡고 끌어당겼다.

“유리안의 모습을 보세요!”

내내 칼리오페만 바라보던 눈이 처음으로 유리안을 담았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쇠를 긁는 듯한 비명 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찔렀다.

사르니오 부인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발광하며 소리 지르는 그녀의 입가에 허연 거품이 묻어나왔다.

칼리오페는 유리안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서로의 온기에 맞잡은 손이 따뜻해질 때까지.

* * *

아비규환과도 같았던 사르니오 저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와 함께 온 유리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엉망으로 잘린 머리칼과 다 찢어진 드레스 때문에 놀랐다. 그것만으로도 어린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런데 밝혀진 사실은 그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함할 일이었다.

유리안은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깨끗이 씻고 난 후, 제대로 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꿀이 듬뿍 들어간 따뜻한 우유를 마시며 안락하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았다.

‘……따뜻해.’

손에 쥔 머그잔도, 옆에 앉아 있는 칼리오페도. 루스티첼 부인과 백작, 로베르트와 루시우스까지.

따뜻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나 따뜻할 수 있는지.

유리안은 두 손으로 머그잔을 꽉 붙잡았다.

소년의 눈동자가 일렁거리는 것을 긴 속눈썹이 감췄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얼마나 괴로웠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유리안은 그 평온함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손에서 머그잔을 빼내고 제대로 눕혀줬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담요가 몸을 덮었다.

“잘 자요, 유리안 오라버니.”

꿈결같이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유리안의 입매가 어렴풋이 올라갔다.

여긴 안전하니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자도 된다는 것 같아서.

모처럼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루스티첼 일가는 잠든 유리안을 두고 소거실에서 나왔다.

유리안이 지쳐 보여서 침실로 옮기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대신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사르니오 부인의 상태가 심각한 듯하네.”

혼잣말 같은 루스티첼 부인의 속삭임에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보내는 게 좋겠지.”

“그런데 사르니오 백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루스티첼 부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이와 부인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걸 보니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었다. 요양원이나 병원에 보내는 것에 어떻게 반응할지 뻔하다.

“사르니오 부인의 친정은 멀어서 당장 연락해도 조치하기 힘들 거예요.”

마나 포털은 물론, 철도조차 연결되어 있지 않은 시골이다.

“사르니오 부인보다 유리안이 더 문제인데…….”

“그 집에 다시 돌려보낼 순 없어요.”

루스티첼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백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부인과 같은 생각이오.”

두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칼리오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문제는 이미 자신의 손에서 벗어났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제 어른들과 전문가를 믿고 맡길 차례였다.

‘어머니, 아버지께선 현명하시니 분명 최선의 방도를 찾아주실 거야.’

로베르트는 시무룩한 칼리오페를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슬쩍 다가가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안이 씻는 동안 칼리오페가 부모님한테만 자초지종을 설명해서 로베르트는 자세한 상황을 몰랐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우울해하는 게 너무 속상했다.

“우리 리페, 슬픈 거 싹 날아가라아!”

토닥토닥하는 로베르트를 바라본 칼리오페가 결국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슬픔이 날아가진 않았지만, 로베르트라는 행복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그 사이에 끼어들었을 루시우스는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부모님만큼이나 심각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은 잘 모르겠고 대강 추측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첫 만남부터 칼리오페 옆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던 그 꼬마.

‘……그 자식이 남자였다니!’

유리안이 칼리오페의 손을 덥썩덥썩 잡았던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팔짱을 꼬옥 끼고 달라붙기까지 했다.

눈앞에 그 장면들이 떠오르자 반사적으로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으드득, 이를 갈던 루시우스가 곧 몸을 이완시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여자애라고 그냥 보아 넘겼는지. 후회가 되긴 했으나 이미 지난 일이다.

‘그래, 지난 일…… 즈는 을으근 흐즈(지난 일이긴 하지)…….’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도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만!

알고 보니 남자였던 아이가 엉망이 된 상태로 집에 찾아왔다.

이 상황에서 뭐라 하지 않을 눈치는 있었다.

루시우스는 유리안이 잠든 소거실 쪽을 바라봤다.

서늘한 눈에는 염려가 어렴풋이 스며 있었다.

* * *

루스티첼 저에 온 다음 날, 유리안은 그래도 꽤 진정된 상태에서 질문을 기다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수많은 질문이 날아올 거라고 예상했다. 굳이 각오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할 때도, 루스티첼 부인의 꽃꽂이를 구경할 때도, 부인과 칼리오페와 함께 티타임을 가질 때도…….

그렇게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가 들은 질문이라곤 ‘음식이 입에 맞니?’ 라든가, ‘어떤 꽃을 좋아하니?’ 정도였다.

[난 괜찮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에 칼리오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네요.]

이상하게 따뜻한 말이었다.

진짜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유리안은 그 말에 울컥했다. 코끝이 찡하게 아프고 명치 위가 꽈악 눌린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그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칼리오페의 생각이 맞았다.

유리안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는 하루를 보내면서 ‘나는 괜찮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도 칼리오페는 괜찮지 않다는 말 대신 다행이라고만 했다. 괜찮아지려는 유리안의 노력을 존중한 것이다.

그 노력을 알아줘서, 믿어줘서,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준 사람이 처음이었기에, 그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진짜 괜찮았는데…….]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거칠게 닦는 유리안에게 칼리오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줬다.

[응, 괜찮아질 거예요.]

그 따뜻한 산호빛 눈동자를 보면서 유리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유리안’의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그건 꽤 괜찮은 미래였다.

* * *

그 후로 일주일간, 유리안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보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르니오 저에서처럼 자신을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금이 간 유리처럼 살피며 조심히 대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유리안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서조차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과거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문 같은 희망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홀쭉해졌던 볼살이 다시 탱탱하게 돌아오고 팔다리도 단단하게 여물었다. 삐죽빼죽 엉망이었던 머리도 잘 다듬고 손의 생채기도 나았다.

그렇게나 지옥 같았던 현실이 오랜 꿈처럼 멀었다.

늦가을 햇살이 눈꺼풀을 두드려 일어나면 커튼을 열던 하녀가 돌아보고 웃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상쾌한 가운데 유리안이 좋아하는 꽃으로 장식한 화병에서 향기로운 꽃냄새가 났다.

유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따로 있지만, 두 번째로 좋아하는 시간은 식사 시간이었다.

루스티첼 일가와 함께 식탁에 앉아 복작복작하게 먹고 마시는 그 순간이 좋았다. 아버지가 시끄러운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다지 대화가 없었던 사르니오 가의 식사 시간과는 달라서 신기했다. 주로 로베르트가 이것저것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치는 느낌이었다.

별 것 아닌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 유리안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소외감은 없었다.

가끔 검술 훈련을 하는 로베르트와 루시우스를 지켜보기도 했다.

루시우스는 간혹 자신을 어마무시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야채를 다 먹으면 말없이 사탕을 쥐여주기도 했다. 로베르트는 뺙뺙 소리 지르면서 칼리오페 자랑을 하곤 했다. 유리안도 엄청나게 관심 있는 주제였기에 열심히 들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로베르트는 자신의 검술 공연—주로 자이언트 스피릿 흉내였다—의 감상을 강요했다. 조금 귀찮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웃음이 나왔다.

루스티첼 부부야 말할 것도 없고, 마주치면 유리안 도련님이라고 인사하는 고용인들도 다정했다.

검술 훈련하러 온 에피니가 유리안을 보고 ‘어라? 남자였어?!’라고 삿대질할 땐 긴장했다.

하지만 그게 반응의 전부였다.

에피니는 바로 검술 훈련을 하러 연무장에 나갔다.

칼리오페의 제안에 에피니가 훈련하는 걸 함께 구경했는데 딱히 유리안이 남자라는 걸 의식하진 않았다. 그것보단 유리안에게 자신의 검술을 뽐내려는 마음만 가득해서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뭐하냐고 혼났다.

훈련이 끝나고 셋이서 티타임을 가질 때 드디어 말이 나왔다.

[나보다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완전 남자애잖아!]

그게 끝이었다.

[에피니 온니도 예뻐요.]

칼리오페의 칭찬에 흥,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툴툴거리던 게 그대로 풀어졌다.

에피니는 별 생각 없었겠지만 유리안은 달랐다. 제대로 남자애라고 봐주는 게, 안젤리나가 아닌 유리안으로 봐주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에피니에겐 이름도, 성별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 옷을 입었을 때도, 남자 옷을 입은 지금도 에피니에게 유리안은 똑같은 사람이었다.

부모님과 달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유리안은 보다 단단해졌다.

그런 소소한 일상들이 반짝반짝했다.

작디 작은 모래 알갱이가 모여 반짝반짝한 것처럼, 눈부신 일상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칼리오페와 함께 하는 때였다.

칼리오페와 손을 붙잡은 채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고, 나란히 정원을 산책하는 일상이 좋았다.

유리안이 부탁해서 몇 번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는데, 그때가 유리안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지난날, 사르니오 저에서 노래를 불러줬을 때 받았던 기묘한 감각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칼리오페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유리안은 그 노래 속에 흔들려 눈물이 나기도 하고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다. 노래가 사람에게 이토록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 빛나는 나날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일에도 변화는 찾아온다.

“유리안, 네 외조부께서 찾아오신다고 하더구나.”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유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담담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서는 곧 끝날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말 없는 유리안을 바라보던 루스티첼 백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지내도 된단다.”

유리안의 외가와 연락한 이후, 부부는 아이들과 진지하게 유리안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 모두 유리안이 루스티첼 저에서 지내는 것에 찬성했다. 구김 없이 잘 자란 자식들을 보고 부부는 미소 지었다.

어쩌면 유리안 역시 이 틈에서 점점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야.”

여전히 말이 없는 유리안을 향해 루스티첼 부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여기서 지내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도 되고, 반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도 괜찮아. 우리는 언제나 환영할 테니.”

부인의 말에 루스티첼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안의 어깨를 잡았다.

“유리안, 너의 행복이 중요하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유리안은 고개를 들어 루스티첼 부부를 바라봤다.

‘이런 분들과 함께 지내면.’

진지하게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루시우스, 로베르트, 그리고…… 칼리오페와 함께 산다면.’

분명 행복할 것이다. 지난 일주일도 더없이 빛났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당장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다.

“네, 생각해볼게요.”

자그마한 대답에 루스티첼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보렴. 네가 지금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 * *

“제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지요.”

칼리오페의 답에 유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인데 왜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칼리오페의 성격상, 다른 데 가지 말라고, 같이 살자고 조르지 않을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시무룩한 유리안을 바라본 칼리오페가 빙긋 웃었다.

살며시 유리안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마주친다.

유리안은 제 뺨에 닿은 칼리오페의 보드라운 손에, 그 온기에 화들짝 놀랐다. 두 눈 가득 들어온 칼리오페의 얼굴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쿵쿵쿵쿵, 여름 축제의 북소리처럼 심장이 귓가에서 거세게 뛰었다. 순식간에 열이 오르고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섭섭하다는 생각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유리 오라버니가 함께 살면 정말 좋겠지요.”

조곤조곤 칼리오페가 말할 때마다 유리안은 몸이 떨렸다.

칼리오페가 하는 말이 제대로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심장 소리와 내 얼굴이 너무 빨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떨림아 제발 멈춰라,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루스 오라버니, 로벨 오라버니처럼…… 가족같이 살 수 있으니까요.”

다정하게 이어지는 칼리오페의 말에 유리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결 속에 있다가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진 것 같았다.

쿵쿵쿵 시끄러웠던 심장 소리도, 수줍고 부끄러우면서 설레던 마음도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고요해진 세상에서 직시한 칼리오페의 눈동자는 여전히 따스했다. 하지만 그 따스함은…….

유리안은 차마 그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와 전혀 다른 색의, 기억 속에 묻어둔 연둣빛 눈동자가 겹치듯이 떠올랐다. 자신과 똑같은 빛깔, 하지만 저와 달리 눈부시게 반짝거렸던 따스한 눈동자.

이제는 없는 누이.

칼리오페의 시선은 누이의 시선과 비슷했다.

‘가족…….’

유리안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좋겠지.’

그래, 정말 좋을 것이다. 좋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칼리오페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또, 루스티첼 일가는 어떤가.

지금 사르니오 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목하다. 안젤리나가 살아있었던 시절의 사르니오 가조차 이렇게 화목하진 않았다.

‘분명 행복할 거야.’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사그라들려고 하는 걸까.

유리안은 칼리오페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낯빛을 본 칼리오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서, 유리안은 활달한 표정으로 기운차게 물었다.

“이제 곧 리페 생일이지?”

칼리오페는 빤히 유리안을 바라봤지만, 곧 걱정스러운 시선을 거두고 방긋 미소 지었다.

“곧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꽤 남았지만요.”

더 캐묻거나 하지 않고 말 돌리는 것에 순순히 따라주는 칼리오페에게 고마웠다.

이렇게 생각해주니까, 항상 배려해주니까.

아니, 무엇을 하든지 그냥 다 예쁘니까.

“그날 뭐 하고 놀까? 가문 밖으로 나온 후 처음 맞는 생일이잖아. 특별하게 보내야지.”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도 유리안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웃지 않으면 눈물이 툭 나올 것 같았다.

‘그런 네가 좋을 수밖에 없잖아.’

* * *

일주일 후, 늦은 오후.

유리안의 외조부모, 제프라덴 자작 내외가 루스티첼 저에 찾아왔다.

늙은 몸을 이끌고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그들은 눈물을 숨기며 애써 손자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들은 루스티첼 일가 모두에게—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정중히 감사 인사를 했다.

그 급한 와중에도 선물을 가득 챙겨와서 유리안에게 한 아름이나 안겨주었다. 물론 루스티첼 가의 아이들과 부부에게도 각각 선물이 돌아왔다.

시간이 애매해 식사 대신 티타임을 가지던 와중 루스티첼 부인이 말을 꺼냈다.

“유리안이 한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답답할 거예요. 두 분께서 데리고 나들이라도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유리안의 외조부모를 배려한 말이었다. 그 멀리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큰일이 많았던 손자와 단란하게 있고 싶을 것이다.

또, 다른 가문이 보지 않는 곳에서 손자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도 많으리라.

‘그렇지만 아무래도 차 한 잔만 후다닥 마시고 냉큼 유리안을 데리고 나가기엔 눈치가 보이기 마련이지.’

루스티첼 부인은 레몬을 넣은 실론티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배려해서 먼저 말을 꺼내주었는데도 민망한지, 제프라덴 자작 내외는 잠시 주저했다. 하나 이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유리안과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유리안은 몇 번 보지 못한 외조부모에게 특별히 낯을 가리진 않았다. 그 드문 만남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자상했는지, 헤어지는 순간마다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기억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눈빛에는 그가 원했던 것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자신을 바라볼 때 이렇게,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길 원했었다.

그렇게 제프라덴 자작 내외와 유리안은 약간의 어색함을 안은 채 외출했다.

함께 맛있는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유리안은 점점 편안함을 느꼈다.

루스티첼 가에서 있었을 때와는 또 다른 편안함이었다.

조금씩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되어 갔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싱숭생숭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다.

유리안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제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쳐오는 모습에 그는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 * *

늦은 밤, 아이들은 모두 꿈나라로 떠난 시각.

루스티첼 부부와 제프라덴 부부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제도는 정말 그새 또 많이 바뀌었더군요. 마지막으로 왔던 때가 재작년 안젤리나의 장례식이었을 때인데…….”

제프라덴 부인이 말했다.

그때 손자 유리안은 정상적으로 남자애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딸에 관해선 다소 불안하긴 했다. 깨어났다가 도로 혼절하기를 반복해서 어미, 아비가 왔다는 것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도에 더 있고 싶었지만, 영지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추수를 앞둔 밀밭이 다 타버린 대참사였다.

제프라덴 자작 내외가 관리하는 영지인 타르알덴은 광물도, 특산물도 없는 곳이었다. 비옥한 땅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농산물이 영지민의 한 해 삶을 결정했다. 그런데 밀밭 일대가 대부분 소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딸아이를 두고 떠나기 꺼려졌지만, 사위는 제가 알아서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듬직하게 보였다.

정말로 그렇게 보였다.

지금은 그놈을 믿은 자신의 멱살을 쥐고 욕하고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부부 중 한 사람만이라도 제도에 남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는 제도의 유행을 따라가기 힘들답니다.”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타르알덴도, 그 주변 영지도 모두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패션이나 취미 활동, 예술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사고방식도요.”

목이 탔다. 제프라덴 부인은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가 어느새 술잔이 비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녀를 만류하는 대신 술을 더 따라주었다.

진한 호박색 액체가 꼴꼴꼴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제프라덴 부인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제도에서는 정략혼이 없어진 지 오래라지요.”

그렇다고 신분 차가 많이 나는 결혼이 성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끼리 친해지듯, 결혼 역시 그렇게 이뤄졌다. 서모나 후작 내외의 결혼이 특별한 경우였다.

“저는 왜, 딸에게 그런 결혼을 시켰을까요.”

제프라덴 부인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도에 기반을 둔, 정략혼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가 정략혼을 원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번듯한 백작가로 시집을 보내면서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노부인의 회한 어린 음성에 루스티첼 부부는 숙연해졌다.

어떤 이는 이 부부를 탓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동정할 수도 있다.

인생이란 선택지에서 언제나 정답을 고를 수는 없다.

루스티첼 부부는 이들의 오답에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표하기로 했다.

“딸은……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습니다.”

제프라덴 자작이 부인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사르니오 백작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이혼시킬 겁니다.”

자작의 단호한 어조에 루스티첼 부부는 다소 놀랐다.

제프라덴 부인이 말했듯이 그들은 폐쇄적이고 낡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혼시켜서라도 병원에 입원시키겠다는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혼도, 병원에 입원하는 것도 둘 다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이나 주관보다 무엇이 딸에게, 손자에게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한 결과이리라.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루스티첼 백작의 말에 제프라덴 자작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결과 역시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꼭 그럴 겁니다.”

진솔하게 눈을 마주쳐오는 루스티첼 백작 내외의 모습에 자작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유리안의 상태가 생각보다 양호했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칼리오페라고 했던가……?’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손자 녀석은 우울하고 힘들었던 일보다 그 아이에 관해 이야기하며 웃었다.

웃어줘서, 그것도 그렇게 행복하게 웃어줘서 유리안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아이 덕분이겠지.’

짧은 시간 동안 봤지만 제프라덴 자작이 봐도 칼리오페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커다란 눈동자 속에 다섯 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아직 세상을 모를 아이가 어떻게 그럴까.’

그 이해한다는 시선과 마주쳤을 때, 자작은 순간적으로 위로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프라덴 자작이 양손을 깍지 끼며 진지하게 말했다.

“편히 말씀하세요. 저희 능력이 되는 선에서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루스티첼 부인의 상냥한 진심 덕분에 제프라덴 자작은 안심하고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유리안이 저희와 함께 떠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 * *

칼리오페, 에피니, 힐데르트 그리고 유리안.

사총사는 칼리오페네 집에서 간만에 모두 모였다. 그간 유리안이 어느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아서 이렇게 네 명 다 모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칼리오페의 생각과 달리 힐데르트는 남복차림인 유리안을 보고 나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첫사랑이 유리안이 아니었던가?’

놀라지 않는 거야 미리 들어서 그렇다고 쳐도 다른 반응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남자라는 걸 확인사살로 깨닫고 울고불고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는데.’

울고불고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화를 낸다거나 심술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충격적이겠는가.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힐데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어? 뭐가?”

되묻는 힐데르트의 얼굴은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웠다.

‘모르는 척해주는 게 좋으려나?’

칼리오페는 복잡하고 섬세한 여덟 살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혹시…… 힘드시거나 누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칼리오페는 힐데르트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정히 두드리곤 이어 말했다.

“비록 도와줄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이야기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으니까요.”

자상한 얼굴로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 힐데르트는 없던 고민도 만들어 내야 하나, 고뇌했다.

‘뭔가 내가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힘들 거라고 확신하는 어투 아니야?’

아무 일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의아했다.

눈이 마주치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의지해도 괜찮아요. 무엇이든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써 붙여 놓은 얼굴이었다.

‘너한테 무슨 고민을 말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하는 건…… 안 되겠지?’

대체 뭐 때문에 갑자기 이러는가 싶어서 주변을 살피던 힐데르트의 눈에 유리안이 들어왔다.

‘유리안 녀석 때문인가?’

유리안에게 그런 가정 문제가 있을 줄은 힐데르트도 몰랐다.

의도치 않게 유리안의 할라피뇨—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힐데르트의 얼굴이 파프리카 소녀와 당근 소년을 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를 봐버렸지만, 왜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지는 듣지 못했으니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난 지금이야 ‘그때 물어볼 것을 그랬나.’하고 후회하긴 했지만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콩알만 한 주제에 자존심은 거인만큼 센 유리안이 제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리페니까 그나마 솔직해졌던 거지.’

여장한 채로 다닐 때, 칼리오페 옆에 찰싹 붙어서 착한 척은 다 하고 뒤로 혀를 쏙 내밀던 것을 절대 잊지 못한다. 지난 일인데도 다시 생각하니 혈압이 상승했다.

여하튼 그 때문에 칼리오페가 자신에게도 무슨 일이 없는지, 괜찮은지 확인하는 게 분명하다.

힐데르트는 새삼스레 칼리오페의 다정함에 감격했다.

보통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주변을 살피고 신경 쓰진 않는다.

‘역시 내가 특별해서?’

머리 한구석에 든 생각에 힐데르트의 가슴이 술렁였다. 괜히 볼이 붉어지고 크흠, 크흠 헛기침이 나왔다.

어쨌든 자신에겐 별일 없으니 이 다정한 소녀를 안심시켜주어야 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괜찮으셔. 나는 걱정하지 마.”

뜬구름 잡는 힐데르트의 말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곧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닫고선 팔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힐끗 유리안이 있는 쪽을 살핀 칼리오페가 힐데르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팔을 잡고 끌어내리는 모습에 힐데르트는 몸을 칼리오페 쪽으로 기울였다.

살짝 머리칼이 스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칼리오페가 까치발을 들고 힐데르트의 귓가에 소라껍데기처럼 두 손을 만들어 가져다 댔다. 바짝 다가온 따뜻한 기척에 힐데르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보드랍고 고소한 향이 났다.

칼리오페가 붙든 한쪽 귀에 온 신경이 쏠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것도 힐데르트 자신에게만.

‘역시, 역시 내가 특별—.’

“힐데 오라버니, 유리 오라버니를 여자아이로 착각하고 좋아하시지 않았나요?”

칼리오페가 유리안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속닥거렸다.

힐데르트는 순간적으로 아무 반응도 하지 못 했다. 뇌가 언어의 해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유리안을 여자아이로 착각하고 좋……?’

“뭐어?!”

힐데르트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저 자식을 왜 좋아해!!”

힐데르트가 유리안을 삿대질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질색하는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심으로 극히 혐오하는 표정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유리안 역시 마찬가지인 얼굴이 되었다.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감정이 일치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던 힐데르트가 우뚝, 말을 멈췄다. 그 좋아하는 상대가 바로 코앞에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힐데르트의 귀족적이고 우아한 얼굴이 밑에서부터 점점 시뻘게졌다.

“오라버니께서 좋아하는 건요?”

칼리오페가 뒷말을 재촉했다.

“—으, 그게, 그러니까…….”

귀에서 연기가 날 것 같았다.

유리안과 에피니는 재밌어 죽겠다는 눈으로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누가 지금 그의 모습을 보고 그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힐데르트 도련님이라고 생각하겠는가.

“흥, 그걸 내가 왜 너한테 말해줘야 해?!”

궁지에 몰린 힐데르트가 고개를 팩 돌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하지만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서 칼리오페 눈에는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힐데르트는 자신의 발언에 아차, 하고 칼리오페를 살폈다. 혹시라도 기분 나쁘거나 서운해하면 어쩌지, 싶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묘하게 납득하는 얼굴이라서 힐데르트는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부끄럽겠지.’

칼리오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애를 여자애로 착각해서 좋아했다는 것. 한참 지나서야 어릴 적 재미난 추억이라 말하며 술잔을 부딪치겠지만, 지금은 창피한 일일 수도 있다.

힐데르트는 칼리오페에게 뭔지 모르지만 다 오해라고 말하려 하다가 그만뒀다.

대체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푹, 한숨을 내쉬는데 에피니와 유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완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세에 쌤통이라는 눈빛이라서 저절로 미간이 폭삭 구겨졌다.

‘저 모자란 것들도 아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더 억울했다.

‘아니, 칼리오페는 다른 데에서는 재치 있고 눈치도 빠르면서 왜 이 부분에 한해선 이렇게나 둔감한 거야?’

느는 것은 한숨과 답답함 뿐이다. 여덟 살 도련님은 사랑의 고뇌에 번민했다.

기실, 칼리오페는 애초에 또래를 그런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칼리오페가 주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과 닮아 있었다.

첫사랑의 날카로운 화살에 이성을 잃어서 별 생각을 다하긴 했지만, 이성을 갖고 돌이켜보면 힐데르트 자신을 보는 시선도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점점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돌봐줘야 하는 어린아이’에서 ‘같이 성장하는 친구’로 바뀐 느낌이었다.

‘괜찮아, 발전하고 있는 거잖아. 친구에서 연인이 된 경우도 많고…….’

힐데르트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럼에도 불안한 건 역시,

‘내 마음만 이런 식으로 오해하지 않으면 돼…….’

칼리오페가 오해를 풀지 않아서 일까.

힐데르트는 괜히 유리안에게 다가가 툴툴거렸다.

“리페네 집에서 사니까 좋냐?”

“응, 좋아.”

유리안이 행복이 넘쳐 반들반들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즉시 힐데르트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괜히 시비 걸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난 부럽지 않아!’

왠지 눈물이 찍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하늘…… 아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사총사들이 꽁냥꽁냥—힐데르트는 가슴으로 울고 있지만 어쨌든 겉보기엔 그랬다— 노는 것을 지켜보는 살기 어린 시선이 있었으니…….

‘저것들이 눈만 높아서는……!’

문간에 선 루시우스가 살기 어린 시선으로 힐데르트와 유리안을 노려봤다.

때마침 유리안이 칼리오페에게 꼬옥 달라붙었다.

칼리오페는 밀쳐내진 못할망정 상냥한 얼굴로 유리안의 머리칼에 묻은 뭔가를 떼어내 주었다.

‘그걸 떼지 말고 유리안을 떼어냈어야지!’

하여간 자신의 동생은 너무 착해서 탈이다.

문설주를 붙든 루시우스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주 기둥을 뽑을 기세였다. 유리안을 여자아이로 알았을 때도 칼리오페랑 찰싹 붙어있으면 묘하게 불쾌했는데, 그때 자신의 직감을 믿었어야 했다.

‘그때부터 떼어냈으면 괜찮았을 것을.’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애매했다.

어쨌거나 유리안은 가정 폭력을 겪은 아이니까.

‘좀 괜찮아지면 두고 보자.’

나중을 기약하면서 지금은 벽만 득득 긁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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