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쁘띠 레이디와 아이들
열어둔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휘저었다.
칼리오페는 노래를 멈추고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 여름도 거의 끝이네.’
만발했던 여름 장미와 수국은 어느새 정원에서 자취를 감췄다. 곧 이른 코스모스가 수줍은 얼굴을 내밀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칼리오페가 장서실 안에 있을 때, 가족을 제외하고 이렇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유모뿐이다.
“아가씨.”
아니나 다를까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오페는 벌써 준비할 시간이 되었나 싶어서 얼른 서가에서 나왔다.
오늘은 새로운 가정교사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제이드와의 경험이 있는 데다가 회귀까지 한 칼리오페로서는 가정교사에 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로베르트가 배우는데 그녀만 빠지는 것도 애매했다.
‘만약 괜찮은 선생님이라면 나도 배움을 청하고 싶기도 하고.’
전생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들이 차례차례 죽으며 칼리오페의 배움도 끊겼었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혼자 책을 읽으며 독학하긴 했지만, 공부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였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며 어떤 식으로 대응할까 고민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시각을 알고 싶어.’
문간에 서 있던 유모가 칼리오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선생님께서 오셨어요.”
“벌써?”
칼리오페의 눈이 시계를 향했다. 생각보다 장서실에 오래 있긴 했지만, 아직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다.
“선생님께서 초행길이라 서두르신 바람에 일찍 도착했나 봐요. 어서 가요.”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이고 유모와 함께 장서실을 나섰다.
선생님이 헤매지 않은 건 다행이긴 하지만—
“—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바람이 헝클어놓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말하자 유모가 멈춰 서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머리칼을 손으로 살짝 빗은 뒤 머리띠를 다시 씌워주곤 칼리오페를 살핀다.
“웃어보세요.”
“응?”
되물으면서도 칼리오페는 요구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유모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완벽하세요.”
칼리오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 * *
“안녕하세요, 선생님. 칼리오페라고 합니다.”
가정 교사, 바이엘은 참하게 인사하는 칼리오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의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흠칫 정신을 차렸다.
‘……귀족이 이렇게 예의를 갖춰서 인사하는 건 처음 봤어.’
부르주아나 젠트리 계급도 아닌, 일반 시민인 바이엘은 자주 무시 당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춘 사람도 많았다. 특히 최근 들어 가정 교사 일을 해달라며 만난 사람들의 경우가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정중함마저 느껴지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감상은 뒤로 미뤄둘 때다. 바이엘은 서둘러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칼리오페 아가씨. 저는 바이엘이라고 해요. 오늘부터 아가씨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바이엘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혹시 신경 쓰이신다면 제게 말씀을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마주 보기 껄끄러워서 바이엘은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서도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큼큼, 몇 번 헛기침한 바이엘은 결국 실토하듯이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나온 목소리는 모기만 했고, 말투도 도망가는 것처럼 빨랐다.
“저어,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일반 시민 계급입니다.”
한마디로 평민이라는 뜻이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그 간결한 대답에 바이엘은 멈칫했다. 아이의 투명한 눈동자에 그녀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한껏 위축되어서는 조심스럽게 눈치 보는 못난 얼굴.
그에 반해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아무 티도 없이 그저 투명하고 맑았다. 거기에는 평민인 바이엘을 향한 경멸도, 동정도, 혹은…… 감탄도 없었다.
‘감탄마저 없어.’
아무런 감상이 없는 눈동자.
뭔가 맥이 탁 풀렸다.
‘평민이 감히’라던가 ‘평민 주제에’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냥 멍청한 사람이구나, 하고 속으로 무시하면 된다.
하지만.
[평민인데 정말 대단해.]
[평민이 그렇게 하기 힘든데 멋져.]
[넌 다른 평민들과 달라.]
이런 악의 없는 말이 가장 힘들었다.
모두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칭찬하고 호의로 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마주 볼 때마다 바이엘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을 느꼈다.
귀족과 평민—그것도 부르주아나 젠트리 계급이 아닌 평민 사이의 선. 그 선은 마치 벼랑 같아서 건너갈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다.
기분이 상하면서도 호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괴로웠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에 어떤 감상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평민이라는 게 어떤 의미도 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과민 반응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바이엘은 칼리오페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말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칼리오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루안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수석이 바로 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가르침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업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어요.”
예의를 차린 또랑또랑한 말에 바이엘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한결같은 산호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과민 반응이 아니었다.
칼리오페에게 중요한 것은 바이엘 자신의 능력이었다.
‘내가 이룬 것들로만 나를 평가하고 있어.’
그 사실에 왜 이렇게 힘이 풀리는지 모르겠다.
여태까지 얇은 실 위에 홀로 서 있다가 이제야 땅에 내려온 느낌이었다. 두 발이 지면에 단단히 자리 잡고 나서야 ‘아, 내가 서 있었던 곳이 위태로운 실 위였구나.’하고 깨달은 느낌.
바이엘은 자신의 출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의 자랑이었고, 마을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 중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위축되었던 것이다.
칼리오페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못 마주치고, 묻지도 않았는데 모르는 게 아니냐면서 출신 이야기를 하고.
주먹을 한 번 꾸욱 움켜쥐었다 편 바이엘이 칼리오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네, 저도 아가씨를 가르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습니다.”
바이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서 칼리오페는 의아했다.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봤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처음 만났으니 평범한 인사를 주고 받은 것뿐이었다.
바이엘이 ‘그럼 착석할까요?’하고 물어서 칼리오페는 의문을 뒤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 혹시 제가 수업에 참고해야 하는 사항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바이엘의 말에 칼리오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실 시간 낭비를 줄이기 위해 바라는 것이 있었다. 다만 먼저 말을 꺼내기 힘들어서 망설이던 차였다.
“제가 조금…… 아니, 많이.”
하지만 자리를 깔아주더라도 역시 말하기 어려웠다. 칼리오페는 힐끔 바이엘을 쳐다봤다.
바이엘이 무엇이든지 말하라는 듯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제가…… 많이 똑똑해서요.”
“네?”
얼굴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치맛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리는 손마저 새빨갰다.
“그, 음……. 제가 똑똑하다는 걸……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칼리오페는 겨우겨우 말을 마쳤다. 마지막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는 속삭이는 것처럼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가 똑똑…….”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멍하니 칼리오페의 말을 따라 하던 바이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멈추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칼리오페는 차마 바이엘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꼭 쥐었다.
‘우으…….’
안구가 뜨거워진 것은 부끄러워서가 아니야. 눈물이 나려 해서가 아니야. 계속해서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바이엘은 웃느라 흘린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음기를 지웠다. 하지만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머리통을 보면 저절로 입매가 풀어졌다.
정말 의외의 면모가 가득한 매력둥이 아가씨였다. 앞으로가 기대됐다.
“네, 꼭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겨우겨우 고개를 들고 인사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바이엘은 또 다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꾸욱 내렸다.
귀족을 가르치는 일이라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이 귀여움을 참는 일이 가장 어려울 것 같았다.
* * *
“나 칼리오페랑 놀래!”
“나도, 나도!”
“리페, 우리 인형 놀이하자.”
“나는 리페랑 자이언트 스피릿 놀이하고 싶어!”
칼리오페는 영혼 없는 눈으로 괘종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 정말 안 간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팔을 이리저리 잡아끄는 아이들 때문에 몸이 왔다 갔다 했다.
칼리오페는 원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신문에 사진이 실리고부터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모두가 칼리오페의 옆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같이 놀고 싶어 했다.
‘아이들은 정말로 귀엽지만…….’
솔직히 힘에 부친다. 이 작은 몸으로 어떻게 이렇게나 힘이 센지 모르겠다.
‘이대로라면 몸이 찢어질지도 몰라……!’
과장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칼리오페는 눈을 꾸욱 감았다.
“리페.”
익숙한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돌아봤다.
“에피니 온니?”
에피니가 마치 왕자님처럼 나타나 아이들 틈바구니 속에서 칼리오페를 구출해냈다. 에피니의 손짓 한 번에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엉덩방아를 콩콩 찧는 아이들을 보며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발딱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뭐야, 에피니!”
“나도 칼리오페랑 놀 거야!”
아이들이 불만스럽게 에피니를 바라보며 칼리오페에게 손을 뻗었다. 에피니는 신경도 쓰지 않고 칼리오페와 아이들 사이에 자신의 몸을 집어넣었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달라붙는 게 차단됐다.
“온니…….”
에피니가 든든한 보호막처럼 느껴져서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인지 심장이 콩닥거렸다.
“엄마 있는 쪽으로 가자.”
부모님이 계신 쪽에는 아무래도 아이들이 없다.
에피니가 칼리오페의 손을 턱 잡더니 이끌기 시작했다. 힘차게 뛰다가 칼리오페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속도를 낮춘다.
아이들이 불만스레 뭐라 했지만 쫓아오진 않았다. 모두 왈가닥 에피니의 위명은 잘 알고 있는지라 에피니와 맞서기 싫어했다.
‘……에피니는 세니까.’
‘맞으면 아파.’
에피니는 아이들의 관심이 흩어진 걸 보고 뛰는 걸 멈췄다.
겨우 숨돌릴 여유가 생긴 칼리오페는 에피니를 보고 생긋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에피니 온니, 고맙습니다.”
“별로.”
에피니가 새침하게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아직도 숨이 찬 칼리오페를 보더니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계단을 내려가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응접실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서로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 *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던 귀부인들은 손을 꼬옥 잡고 방에 들어오는 두 아이를 보고 미소 지었다.
“어머나, 마침 리페가 왔네요.”
“그러게요. 한창 이야기 중이었는데.”
“리페랑 에피니랑 둘이 같이 있으니 너무너무 예쁘네요.”
“역시 딸이 귀엽다니까요.”
귀부인들이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필 내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
타이밍을 잘못 맞췄다.
요즘 칼리오페는 어딜 가나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듣기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리페?”
에피니가 멈칫하는 칼리오페를 이상하단 눈으로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눈물을 머금고 탈출을 포기했다.
위층에 있는 아이들은 금방 새로운 놀이에 열중할 것이다. 그때 올라가면 아이들의 관심이 제게 쏠리지 않는다.
‘좋아, 그때까지만 버티자.’
스스로를 다독인 칼리오페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귀부인들을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귀부인.”
에피니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각자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인사에 귀부인들은 웃음을 깨물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신문 잘 보고 있단다, 리페.”
한 부인의 말에 칼리오페의 얼굴이 붉어졌다. 최근 자주 듣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꾸 부끄러워하는 칼리오페의 모습 때문에 귀부인들은 짓궂은 웃음을 숨기고 더 이야기하곤 했다. 평소에는 당당하고 또랑또랑한 아이가 수줍어하는 모습은 각별했다.
“말이 나와서 생각났는데, 모두 카메라 받으셨어요?”
에피니의 어머니이자 호스트인 엘피너스 부인이 귀부인들에게 물었다.
“받다마다요. 매일매일 아주 잘 찍고 있답니다. 오늘도 가져왔어요.”
“저도 가져왔어요. 우리 애 사진까지 챙겨 왔지요.”
“어머, 꼭 보여주세요.”
귀부인들의 눈짓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카메라와 사진을 가져왔다.
카메라를 가져온 귀부인들 모두 제 아이를 찍은 사진 역시 들고 왔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쳐다보던 한 부인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들 사셨군요. 저는 늦어서 예약도 못 했어요.”
“저런……. 하기야 그렇게 빨리 나갈 줄 누가 알았나요.”
“저야 보자마자 예약하긴 했지만……. 바로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예약이니까 며칠 늦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요.”
다른 귀부인들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위로했다. 카메라가 얼마나 좋은데……. 나중에 살 수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없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워낙 예약이 몰렸기 때문에 니카이논은 어쩔 수 없이 예약 판매를 중지했다. 니카이논의 설비상 생산 물량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매장에서도 못 구하셨어요?”
“매장이요? 예약 분만 구매할 수 있지 않나요? 아직 정식 판매가 들어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머, 모르셨구나.”
“1차 예약 판매 출시일에 맞춰서 한정 수량으로 매장에서 판매했어요.”
귀부인의 설명에 카메라를 못 산 부인의 얼굴이 더 침울해졌다. 다른 부인들이 재빨리 그녀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알았더라도 구매하기 힘드셨을 거예요.”
“그때 정말 줄이 대단했다고 하더라고요.”
“전날 밤부터 기다렸다는 소문도 있었지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저도 예약을 못 해서 풋맨을 보냈거든요.”
“저도 새벽같이 풋맨을 보냈는데 아슬아슬하게 샀다고 하더라구요.”
그날 니카이논 매장 앞의 줄은 고용인들의 만남의 장이었다. 귀족뿐만 아니라 젠트리나 부르주아의 고용인들까지 잔뜩 모여 있었다.
“아이참, 그 난리가 났는데 저는 몰랐다니…….”
“부인께서는 그때 영지에 다녀오셨으니 어쩔 수 없지요.”
“곧 2차 예약 판매를 한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그땐 잊지 말아야겠어요.”
그녀는 다른 부인들이 들고 온 사진을 부러운 듯 넘겨보며 다짐했다.
“이 인기를 보니 카메라 회사가 칼리오페 덕을 톡톡히 봤네요.”
가만히 최대한 없는 듯이 있던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다 좋다가 또 왜 자신에게로 화제가 튄단 말인가.
“그러게요. 예전에 투자 설명을 듣긴 했는데 그땐 투자할 생각도, 카메라를 살 생각도 없었거든요.”
“저도요. 하지만 신문에서 리페 사진을 보고 바로 예약했지요.”
칼리오페는 제게 몰린 시선에 움찔움찔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수줍은 모습에 미소 지은 귀부인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락이 왔다면서?”
“네에…….”
칼리오페가 기어들어 가듯이 대답했다.
“어머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정말 대단하네! 오페라 하우스에서까지 연락 오다니…….”
최근 여기저기서 칼리오페를 모델로 기용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칼리오페로서는 굉장히 의외였다.
광고를 잘 봤다고 전보가 많이 오긴 했지만, 그게 자신의 파급 효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종의 친목을 겸한 예의라고 생각했었다.
일 년 사이 있었던 여러 변화로 루스티첼 가의 위상이 전과 달라졌다. 고위 귀족들은 루스티첼 가를 자신의 원 안에 들여놓았다. 당연히 주변의 대접과 관심 역시 달라졌다.
‘그래서 전보가 많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카메라의 인기와 파급력에 칼리오페가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머, 이 피망 먹는 사진은 처음 신문에 실렸던 당근 먹는 사진보다 더 귀엽네요.”
루스티첼 부인이 가져온 칼리오페 사진을 구경하던 부인이 감탄했다.
칼리오페는 그 사진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들고 온 어머니께 약간 배신감마저 느꼈다. 가장 수치스러운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피망 향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뭐가 더 귀엽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당근에 피망까지. 리페는 어쩜 그렇게 골고루 먹어요? 우리 아이는 편식이 너무 심해서…….”
“그래, 리페 어쩜 그렇게 골고루 먹니?”
“우리 애한테도 좀 가르쳐주렴.”
귀부인들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왜인지 칼리오페가 아이들의 편식을 고쳐줄 거라는 믿음이 가득했다.
“응? 같이 올라가서 좀 알려주렴.”
‘으…….’
반짝반짝.
귀부인들의 눈빛이 마치 별빛 같았다.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 * *
그리하여, 칼리오페는 위층에 올라와 ‘편식 탈출! 골고루 맛나게 냠냠 먹기’ 강의를 시작했다.
‘그래,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
혹시 이를 계기로 한 명의 아이라도 골고루 먹게 된다면 기쁜 일이다. 칼리오페는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옛날 옛적에 피망 소녀가 살았습니다.”
그렇게 피망 소녀의 파란만장한 성장기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올망졸망하게 모여 칼리오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가운 햇볕이 온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도 피망 소녀는 힘을 냈습니다. 해님을 자주 보면 더 달고 맛있어진다는 농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요. 조금이라도 더 단맛을 내기 위해서 피망 소녀는 참고 또 참았습니다.”
“피망에 단맛이 있나?”
“모르겠어. 잘 안 먹어서…….”
“아주아주아아~주 살짝! 나기도 해. 그게 피망 소녀가 저렇게 노력해서였구나…….”
“그랬구나, 피망 소녀…….”
“날씨는 변덕쟁이였습니다. 물이 없어 온몸이 바짝 타들어 가도, 물이 너무 많아 자랑하는 이파리가 흐물흐물해져도 피망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울망울망해졌다.
“언젠가 천사 같은 아가씨, 도련님들이 맛있게 먹어줄 거야. 하루하루 그렇게 꿈을 꾸며 버텨냈지요.”
힘든 성장기를 이겨낸 피망 소녀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피망 소녀와 당근 소년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피망과 당근. 마차 칸 안에서만 함께할 수 있었어요. 곧 가게에 가면 따로따로 놓일 운명이라 헤어지는 게 당연했습니다. 절대 함께할 수 없었지요.”
한 박자 쉰 칼리오페가 슬픈 눈동자로 아이들을 둘러봤다.
“포기를 모르고 언제나 씩씩하던 피망 소녀는 슬픈 사랑에 온종일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렇게 힘들게 버텨 만들어낸 탱탱하던 표면이 눅눅해질 정도였어요. 단맛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당근 소년 역시 슬픔에 앓아 온몸이 물렁물렁해졌지요.”
“피망 소녀 불쌍해애애애!”
“당근 소년 죽으면 안돼애애애애!”
“그 사랑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브로콜리 선생님이 한 가지 희망을 이야기 해주었어요.”
아이들이 일시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건 바로 피망 소녀의 오랜 꿈을 이루는 방법이기도 했지요.”
힌트를 주듯 흘린 말에 몇몇 아이가 ‘아!’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설마?”
“우리가 맛있게 먹어주면 돼?”
“네, 정말 똑똑하시네요!”
칼리오페가 빙긋 웃으며 칭찬하자 아이의 얼굴이 뿌듯뿌듯 윤이 났다.
“그렇습니다. 착한 아가씨, 도련님이 피망과 당근을 맛있게 먹어주면 둘은 언제나 함께할 수 있지요. 헤어지지 않아도 된답니다.”
“우음……. 그치만 피망은 맛없는데…….”
“당근도 맛없어…….”
피망 소녀와 당근 소년의 사랑을 응원하면서도, 둘의 맛을 떠올린 아이들이 주저했다.
그 와중에도 이야기는 착실히 진행됐다.
“셰프가 둘을 단장시키듯 정성스레 요리해주었어요. 피망 소녀와 당근 소년은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식탁 위에 올랐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엔 아직까지도 망설임이 가득했다.
“나를 맛있게 먹어주겠지? 이제 당근 소년과 함께할 수 있겠지?”
칼리오페는 피망 소녀처럼 두 손을 꼬옥 모으고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창피해서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꿋꿋이 이겨냈다.
“그러나…….”
엄숙하게 나레이션을 넣은 칼리오페가 양손을 허리에 깡총 올렸다.
“피망 싫어싫어! 맛없어! 안 먹을 거야!”
그리고는 편식하는 아이에 120% 싱크로율로 빙의해서 빽빽 외쳤다.
사진 찍으며 지켜보던 귀부인들의 얼굴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특히 루스티첼 부인은 딸의 색다른 모습에 심부전이 올 뻔했다. 그녀는 심장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가슴을 부여잡지 않았다. 손은 칼리오페의 사진을 찍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뜻하고 기분 좋게 두근거렸던 피망 소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어요. 피망 소녀 가까이엔 포크 한 번 오지 않았지요. 그렇게 접시에 남겨진 피망 소녀는…….”
아이들의 동심을 파괴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 피망 소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이들의 얼굴이 핼쑥해지는 것을 지나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사랑도, 꿈도 이루지 못하고 버려진 피망 소녀는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서서히 썩어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싱싱하다고 자랑하던 꼭지부터였지요.”
아련한 눈동자로 먼 곳을 응시한 칼리오페가 피망 소녀 메소드 연기를 시작했다.
“다음 생에는, 달고 맛있는…… 그래, 초콜릿으로 태어나고 싶어.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피, 피망 소녀어…….”
숨죽인 아이들이 안타까운 탄식이 흘렸다.
“점점 썩어가는 자신의 꼭지를 보면서 피망 소녀는 그렇게 바랐지요. 하지만 피망 소녀에겐 그 바람조차 사치였습니다.”
“왜! 어째서!”
“피망 소녀는 초콜릿으로 태어나야 해!”
“행복해져야 한다구!”
“아무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피망 소녀는 다시 태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움찔했다. 커다란 눈동자들에 물기가 울망울망 어룽어룽한다.
“피망 소녀는 끝까지 행복하지 못 했습니다. 영원히 불행하게 살다 갔지요…….”
“피망 소녀어어어어어어!”
“피망 소녀 미안해애애애애애!”
“당근 소년이랑 행복해야 하는데에에!”
아이들의 통곡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음, 좀 심했나.’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자, 여러분이 직접 피망 소녀와 당근 소년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칼리오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생긋 웃으며 수습했다.
그러나 수습은 전혀 되지 않았고 피망 소녀를 추모하는 울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음……. 그래도 이야기가 통한 거 같네.’
솔직히 무슨 수작 부리냐고 할 줄 알았다.
“에피니 온니.”
이제 할 일도 끝냈으니 에피니에게 다가가는데 에피니가 고개를 홱 돌렸다. 주먹과 팔로 얼굴 반을 가렸는데 눈가에 물기가 살짝 맺혀있었다.
“……온니 울었어요?”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물론 다른 아이들이 대성통곡 중이긴 하다.
하지만 상대는 에피니였다. 평소 에피니의 반응을 미루어볼 때 유치한 소리 한다며 흥, 하고 코웃음 칠 줄 알았다.
“울긴 누가 울어!”
에피니가 버럭 성을 내며 칼리오페를 노려봤다. 그 부릅 뜬 눈동자에서 눈물이 한 방울 톡 흘러내렸다.
“……!”
깜짝 놀란 에피니가 서둘러 몸을 팩 돌리며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런 에피니가 귀엽기도 하고 우는 게 곤란하기도 했다. 칼리오페는 미안한 웃음을 지은 채 에피니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피망 소녀는 행복해질 거예요. 에피니 온니가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꿈도 사랑도 이뤄줄 테니까!”
“으, 으으…….”
피망과 당근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에 갈등하던 에피니가 굳은 결심을 마치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언트 스피릿은 평화를 지키고 사랑을 이뤄주니까…….”
“그래요. 온니는 자이언트 스피릿처럼 검도 휘두르시니까요! 이것도 할 수 있어요!”
“오오!”
에피니가 주먹을 꼭 쥐고 아자아자 하면서 위로 치켜들었다.
칼리오페는 웃으며 에피니의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닦아줬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에피니가 새침하게 흥, 하면서 피하듯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칼리오페의 손에 그대로 맡기고 있다.
“뭐야, 너 울었어?”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에피니가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힐데르트가 곁에 와 있었다.
“정말 그런 걸 믿는 거야? 믿는다고 해도 전제 자체가 잔인하지 않아? 먹히는 게 피망 소녀의 꿈이—.”
“힐데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다급하게 힐데르트를 불렀다.
“아니, 어…… 안 먹어주는 게 잔인하다는 거야. 그리고 사실이니까 당연히 믿어야지!”
힐데르트가 당황해서 말을 바꿨다. 오만한 그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의견을 바꾸는 경우는 오로지 칼리오페 한정이었다.
칼리오페의 손길을 받고 있는 에피니가 부럽고 짜증 나서 놀리려던 건데 이러다가 칼리오페에게 미움을 받게 생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페 말인데. 당연히 다 옳은 말이지.’
그 말까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부끄러워서 나오지 않았다. 소년의 하얀 뺨에 붉은 해당화가 피어났다.
보라색 눈동자가 힐끔, 칼리오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내리깔린다.
‘더 예뻐졌어.’
원래도 예뻤지만 볼 때마다 예뻐진다. 칼리오페의 드레스 프릴과 앙증맞은 구두만 바라보는데도 슬쩍 웃음이 배어 나오려 한다.
“힐데 오라버니, 언제 오셨어요? 좀 늦으셨네요.”
“일이 좀 있어서. 아까 피망 소녀 이야기하는 와중에 왔어.”
“안 와도 됐는데.”
에피니가 혼잣말하듯 툭 던졌다.
“너 보려고 온 거 아니거든?”
힐데르트가 코웃음 쳤다.
칼리오페, 에피니, 힐데르트 그리고 유리안. 칼리오페를 중심으로 모인 이 사총사는 어느새 죽이 잘 맞는 소꿉친구가 되었다.
힐데르트는 에피니가 으르렁거리는 걸 가볍게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원래라면 칼리오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을 유리안이 보이지 않았다.
“안젤리나는?”
“몰라. 안 왔어.”
에피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안부터 찾는 힐데르트를 보며 칼리오페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예전 유리안네 집에 함께 놀러 간 이후로 둘이 부쩍 친해졌다.
힐데르트가 유리안에게 관심 있는 거야 전부터 알았지만, 유리안의 태도 역시 변했다. 유독 힐데르트를 대할 때 편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힐데르트 역시 마찬가지고.
‘서로 벽이 허물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힐데르트에게 슬픈 상처를 남긴 ‘할라피뇨 노출 사건’을 모르는 칼리오페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착각했다.
‘다른 사람은 반대해도 저만은 두 분의 사랑을 응원할게요……!’
힘든 사랑을 하는 친구들이 대견하고 안타까웠다.
‘리페가 저런 눈으로 나를…….’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고 애틋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오페 때문에 힐데르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짝이는 산호빛 눈동자는 무언가 호소하듯 수많은 말을 담고 있다. 힐데르트는 그 무언의 속삭임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지금 이곳에 그와 칼리오페 단둘만 있는 것 같은 느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힐데르트가 목을 가다듬고 떨리는 목소리로 칼리오페를 부르려는 순간,
“놀자, 리페!”
“이리 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아이들이 씩씩하게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피니와 힐데르트의 눈이 단번에 세모나게 변했다.
“그래요. 뭐하고 놀까요?”
그러나 두 사람의 기분과 달리 칼리오페는 웃으며 아이들을 받아주었다. 당장 아이들을 떼어낼 준비 만반이었던 에피니와 힐데르트가 멈칫 했다.
“리페.”
에피니가 불만스레 칼리오페를 불렀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생긋 웃을 뿐이다.
“다 같이 놀면 더 재밌잖아요.”
의도치 않게 아이들 눈에서 눈물을 쏙 뺀 게 내심 미안했다. 도저히 같이 놀자는 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우느라고 힘이 빠졌는지 아까처럼 힘을 주체 못 하지도 않고.’
아까는 정말 아이가 아니라 황소가 달려드는 줄 알았다. 칼리오페는 강제로 투우사가 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소꿉놀이 하자!”
“자이언트 스피릿 놀이!”
“아니야! 인형 놀이가 제일 재밌어!”
손을 번쩍번쩍 들고 각자 원하는 놀이를 외치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에피니 온니네 집에 온 거니까 온니가 원하는 놀이해요.”
칼리오페가 빙긋 웃으며 에피니를 돌아봤다.
아이들이 칼리오페를 끌고 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던 에피니가 움찔했다.
속상하고 서운한 걸 어떻게 알고 자신을 챙기는지. 이런 점 때문에 도저히 칼리오페를 미워할 수 없었다.
“……자이언트 스피릿 놀이.”
에피니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칼리오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뼉을 짝, 쳤다.
“그럼 자이언트 스피릿 놀이해요.”
“나 기사님 할래!”
“난 마법사님!”
아이들은 금세 놀이에 빠져 들뜨기 시작했다.
에피니 역시 언제 심통 나 있었냐는 듯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장난감 칼을 치켜들었다.
힐데르트는 아이들이랑 한 데 뒤섞여 노는 건 유치해서 질색이라는 듯이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손을 잡아끌자 못 이기는 척 함께 어울렸다.
꺄르르 하는 웃음 소리를 흐뭇하게 듣던 칼리오페는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봤다. 그리곤 흠칫 놀랐다.
크레티안느가 구석에 서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크레티안느가 왔는지도 몰랐다. 아이들 틈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에 딱 붙어서 가만히 서 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오직 눈만 자신에게 고정하고 있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꽤 오래였을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다 같이 놀고 있는 게 부러워서 그러는 걸까?’
먼저 같이 놀자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모인 아이들과 접점이 없다 보니 낯을 가리는 크레티안느로서는 다소 어색할지도 모른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은 참 신기하게도 5분 만에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곤 한다.
뒤돌아봤을 때 느꼈던 꺼림칙함을 뒤로 하고,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에게 다가갔다. 저렇게 미동도 않고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도 힘들었다.
칼리오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크레티안느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크레티안느 영애.”
“어, 응. 안녕. 오, 오랜만이야.”
크레티안느가 인사하며 얼굴을 붉혔다.
“저, 왜 베이비 살롱에 안 왔어?”
조그마한 질문에 칼리오페는 혹시 자신이 크레티안느와 베이비 살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나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봐도 그런 적은 없었다. 파티 데이마다 온다고 했던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칼리오페는 당연히 파티 데이에 베이비 살롱에 갔다. 그땐 크레티안느가 오지 않았다.
“음, 다른 일로 많이 바쁘다 보니 베이비 살롱엔 자주 가는 편이 아니에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파티 데이에만 가구 있어요. 그때 말고 마주치려면 우연이 필요하지요.”
“……와줬으면 했는데.”
크레티안느의 중얼거림에 칼리오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난 계속 오고 싶은데……. 내가 올 때마다 오면 안 돼?]
완곡히 거절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나 어떻게 돈 세?]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쎄한 감정이 이번에는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칼리오페가 입을 다문 사이, 크레티안느는 중얼중얼 불만을 토해냈다.
“나는 여기 너 보러 왔는데. 여기 오면 너를 만날 수 있다고 해서…….”
“크레티안느 영애.”
칼리오페는 말을 끊어내듯이 다소 강경한 어조로 크레티안느를 불렀다.
‘아무 배려 없이 같은 마음을 강요하는 것은 상대에게 부담이 된다’라고 똑똑히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깜짝 놀라 왕방울만 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크레티안느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 사실을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칼리오페와 크레티안느는 오늘까지 쳐서 겨우 두 번 만난 사이였다. 즉, 크레티안느는 칼리오페와 처음 만난 날부터 묘한 집착을 보인 것이다.
‘아무래도 친구가 없기 때문이겠지.’
모친인 피엔테 후작 부인의 사후, 크레티안느는 저택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종이모인 바셀로 부인이 피엔테 후작저에 들어가고 나서야 외출하기 시작했을 테다.
‘당연히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었을 테고…….’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엘피너스 백작가와 피엔테 후작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아마 초대장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로지 칼리오페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이상한 집착을 보인다는 건 알지만, 칼리오페는 이 여섯 살 꼬마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겉모습은 동갑이지만 정신은 성인인 자신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또, 다른 친구들이 생기면 자연히 없어질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요? 같이 가서 놀아요.”
크레티안느는 잠시 넋을 놓고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딱딱하게 자신을 부르길래 화낼 줄 알았다. 대체 무엇에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이렇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다니.
크레티안느는 시선을 내려 제 앞에 놓인 손을 봤다. 그리고 다시 미소 짓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역시 칼리오페는 태양이야.’
크레티안느는 내밀어진 손을 꽉 마주 잡았다.
* * *
여름도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자마자 순식간에 바람이 차가워졌다.
곧 필 거라고 생각했던 코스모스도 어느새 피었다 졌고, 단풍이 꽃 대신 정원과 거리를 알록달록하게 꾸몄다.
운신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일이 많아서 그런지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
“리페, 이건 어떠니?”
루스티첼 부인이 폭신폭신한 핸드 워머를 가리키며 물었다. 윤이 차르르 도는 풍성한 하얀털이 따뜻하고 포근해 보였다.
“지금 사기엔 너무 덥지 않을까요?”
이제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드는데 모피 핸드 워머는 과한 듯했다.
“무슨 소리니? 겨울은 금방 온단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 해.”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손에 핸드 워머를 입히며 말했다. 옆에서 쇼핑을 도와주던 종업원들이 나설 것도 없었다.
“어머! 너무 귀여워!”
“역시 내 동생이야!”
“……사도록 하죠.”
루스티첼 부인과 로베르트, 루시우스가 차례로 막내의 귀여움에 이성을 놓았다. 그건 지켜보던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예쁘세요!”
“아가씨를 위해서 만든 것처럼 딱이에요!”
원래 맞장구를 치는 것은 그들의 노동이었다. 하지만 일이 아니더라도 이 사랑스러운 꼬마 아가씨는 정말 귀여웠다.
‘이렇게 잘 어울리니 이대로 우리 가게 모델이 되셔도 좋을 텐데…….’
‘칼리오페 아가씨를 직접 뵙게 될 줄이야……!’
‘광고보다 더 귀여워. 사랑스러워. 예뻐. 최고야.’
‘으항앙아, 진짜 딱 한 번만 언니라는 소리 듣고 싶다!’
카메라 광고로 얼굴이 알려지면서, 칼리오페는 전국민의 딸이자 여동생이자 아가씨가 되었다.
칼리오페처럼 사진으로 광고한 경우 자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들 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유명 오페라 가수의 초상화를 사용한 광고는 여럿 있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아무리 예뻐도 같은 그림을 계속 보다 보면 처음에 느꼈던 감상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니카이논은 계속해서 다른 사진을 광고에 활용했다.
매일 아침마다 신문을 읽으며 색다른 칼리오페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사람들의 일과가 되었다.
일상을 담은 사진이다 보니 눈앞에 그때 칼리오페의 상황이 그려지는 느낌이라 절로 친밀감이 생겼다. 그렇게 칼리오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정적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언니, 오빠들을 갖게 되었다.
루스티첼 부인, 루시우스 그리고 로베르트는 신나게 쇼핑을 했다. 도저히 풋맨이 다 들 수 없는 양이라 잡화점에서 루스티첼 저까지 배송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많이 샀는데 모두 칼리오페를 위한 것뿐이었다.
‘왜 제 물건을 사는데 제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 거지요…….’
칼리오페는 아련한 눈으로 산더미 같이 쌓인 물건들을 바라봤다. 그다지 필요 없다고 해도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은 듣지 않았다.
칼리오페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만족한 얼굴로 잡화점을 나섰다.
단시간에 기록할 만한 매출을 달성했음에도 종업원들은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사진 한 장이라도 같이 찍어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카메라도 없는 데다가 귀족을 상대하는 고급 잡화점의 특성 상 그런 부탁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직접 본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그들은 아쉬운 팬심을 달랬다.
* * *
밖으로 나온 칼리오페는 거리를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순간을 간직하세요.]
니카이논의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칼리오페의 사진이 잔뜩 붙어있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제 모습이 보였다.
한두 번도 아니고 외출할 때마다 보는 광경이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니카이논에서는 광고 콘셉트를 잡은 후, 준비를 마치고 칼리오페를 불렀다.
기껏해야 사진 몇 컷 찍을 줄 알았던 칼리오페는 광고 기획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진 광고 촬영 일정은 단언컨대, 회귀한 이래로 가장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는 가족들 덕분에 어느 정도 찍힌다는 일에 익숙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찰칵찰칵찰칵찰칵 소리가 홍수처럼 쏟아져도 칼리오페는 굳지도, 어색해하지도 않아서 촬영이 수월한 편이었다. 촬영 콘셉트가 ‘칼리오페의 사소한 일상’이라 연기할 필요가 없었기도 했다.
칼리오페는 커다란 곰돌이를 푹 끌어안기도 하고—곰돌이가 너무 커서 반대로 칼리오페가 껴안긴 것 같았다— 책을 읽기도 하고, 제 키보다 큰 골든 리트리버와 잔디밭을 뛰기도 했다.
‘그래도 카메라를 향해 하트를 그리는 것은 조금…… 많이 민망했지.’
‘사랑하는 순간’이라는 문구와 매치 되게끔 편집된 포스터를 보며 칼리오페가 한숨을 흘렸다. 나중에 바캉스 시즌에 맞춰서 바캉스 간 느낌의 사진도 찍을 거라고 했던 게 생각 나 가슴이 답답했다.
니카이논 쪽에서 성실히 계약을 이행하고 있으니 칼리오페도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카메라가 불티나게 팔린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했다.
그건 귀족이나 부르주아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메라 가격이 부담되는 사람들을 위해 니카이논은 라인을 나누기로 결정했다. 보급형과 고급형, 그리고 신문사나 수사기관에 특화된 형으로 세분화해 각자 자신에게 맞는 카메라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아직 계획일 뿐이지만 확실히 사업은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스티첼 가에서 투자한 만큼 운영에 신경이 쓰였는데 안심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배분되는 수입이 짭짤했다.
루스티첼 백작 부부는 막내딸을 향한 팔불출 덕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손에 넣게 됐다.
거기에 더해, 칼리오페에게 따로 배분되는 몫도 있었다. 전속 모델 계약서에는 니카이논의 수익을 나누는 조항도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제 기반은 꽤 다져졌네.’
전생에도 비극이 찾아오기 전까진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뜻이고, 청렴하고 욕심 없던 부모님의 성품 때문에 중앙 귀족 중에서는 가산이 소박한 편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확실하게 중앙 귀족 중에서도 부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생처럼 ‘적’이 루스티첼 가가 투자한 사업체를 망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일한 카메라 생산처인 니카이논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또, 대외적으로 루스티첼 가와 니카이논의 투자 관계는 이제 끊어졌다고 알려졌기에 표적이 될 확률이 낮았다.
‘거기에 금권을 쥔 대귀족들이 니카이논에 투자를 많이 했지.’
라인에 따라 다른 카메라를 출시하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다. 카이논은 투자를 받겠다고 했고, 이전에 그를 외면했던 대귀족들이 너도나도 앞다퉈 명함을 받았다. 파워 있는 대귀족이 대거 연루된 회사를 가지고 놀긴 힘들 것이다.
‘거기에 몇 년 후 스티그마 될 땅도 수중에 있고.’
이만하면 경제적으로 루스티첼 가를 궁지에 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칼리오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그뿐만 아니라 사교계의 입지도 달라져 중앙 고위귀족의 사교 모임의 일원이 됐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카메라 광고 덕에 전제국민의 관심을 받는다. 기반은 튼튼히 다진 땅에 굵직한 뿌리를 깊게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태풍이 불어도 쉬이 흔들리지 않을 테니 이제 가지를 높게 뻗을 일만 남았다.
“리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니?”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를 보고 물었다.
“이 오라버니가 멋져서 그러지?”
칼리오페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로베르트가 냉큼 끼어들었다. 결국 칼리오페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오라버니가 멋져서 그렇지요. 오늘 힘내세요!”
“응! 우리 리페를 위해서 잘 하고 올게!”
“……서류만 작성하는 건데 뭐 잘할 게 있나.”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우스가 중얼거렸다.
칼리오페의 응원을 받는 로베르트가 아니꼬웠다.
내년에 로베르트가 백룡 기사단의 종기사로 입단하기 위해 기사단에 서류를 쓰러 가는 길이었다. 로베르트는 잔뜩 들떠서 서류 접수 받는 첫날인 오늘 가야 한다고 졸랐다.
사고뭉치에 깜빡하는 게 많은 둘째 아들이 걱정된 루스티첼 부인은 이미 경험이 있는 루시우스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모처럼 가족 나들이—막내 물건 사주기—를 겸해 나오게 된 것이다.
“리페, 나는 혼자서 작성했다.”
칼리오페는 은근슬쩍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루시우스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어쨌든 네 개의 용기사단은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었다. 서류라도 접수할 자격을 갖춘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두 분 다 멋있으세요.”
결국 그렇게 둘 다 칭찬하고 나서야 두 오라버니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아, 도착했다!”
로베르트의 외침과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어머니, 리페와 함께 저 카페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핫초코가 맛있으니 리페가 좋아할 겁니다.”
“어머, 우리 리페 챙겨주는 사람은 루스밖에 없네.”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를 데리고 카페로 향하는 어머니를 보며 루시우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리페를 보일 순 없지.’
저번에 칼리오페를 직접 본 이후로 백룡 기사단원들의 칼리오페 사랑은 더더욱 깊어졌다. 칼리오페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몰려들어 귀찮게 굴 것이 뻔했다.
‘내 동생을 뺏길 순 없지.’
칼리오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여동생이었다.
“형?”
“가자.”
루시우스는 자신의 ‘날파리 원천 차단 계획’에 만족하며 로베르트와 백룡 기사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가 말한 카페는 백룡 기사단 바로 앞에 있었고, 그곳에는 그의 친구가 단골 고객이었다.
* * *
“아름다운 레이디, 감히 제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허락하신다면, 함께 앉는 영광을 얻고 싶습니다.”
칼리오페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호세 오라버니.”
아니나 다를까 호르세안이 살짝 처진 눈을 접으며 빙긋 미소 짓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에 칼리오페는 마주 미소 지었다.
“이런 곳에서 다 보는구나, 호세. 하긴, 백룡 기사단 바로 앞이지.”
“네, 이상하게 목이 마르다고 했는데 아름다운 귀부인과 우리 작은 아가씨를 보려고 그랬나 봅니다.”
“여전하구나.”
능청스럽게 씨익 웃은 호르세안이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엘피너스 가에 왔으면서 날 안 보고 갈 수 있는 건지. 리페, 이 오빠는 너무 섭섭했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호르세안의 너스레에 칼리오페가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냉정하게 전보로 말한 거? 거기에 다시 한 번 들리겠다고 해놓고 안 왔지.”
호르세안이 답지 않게 투덜투덜거렸다. 하지만 호박색 눈동자엔 진한 장난기가 묻어있어 듣는 입장에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광고 문제 때문에 바빠서 도저히 시간이 안 났어요. 그래도 이렇게 만났잖아요?”
칼리오페의 변명에 호르세안은 아무 말 없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표정 없이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 칼리오페는 혹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서 신경 쓰였다.
“리페.”
어색해진 칼리오페가 제 얼굴을 더듬기 위해 손을 올리려던 찰라, 호르세안이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선 씩 웃으며 속삭였다.
“보니까 좋다.”
호르세안이 칼리오페의 말랑말랑한 뺨을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더 예뻐졌네.”
가만히 차를 마시던 루스티첼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친구의 아들이자, 아들의 친구인 호르세안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딸은 못 줘!’
황제가 와도 못 주는 귀한 막둥이다.
루스티첼 부인이 호르세안에게 단호한 경고를 하려는 순간,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와 계셔도 괜찮은 건가요?”
“응?”
호르세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칼리오페가 힐끗 창가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호르세안 또래의 소녀들이 한가득 앉아있었다. 그것도 소곤소곤 이야기하며 이쪽을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칼리오페가 카페에 들어서면서 보기론 분명 호르세안의 일행이었다.
“어, 이건 말이지…….”
호르세안이 당황해서 떠듬거렸다.
칼리오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벽을 친 꼴이 됐다.
‘역시 내 딸은 야무져.’
루스티첼 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해하는 것 같은데. 저 영애들은 내 일행이 아니야.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호르세안은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체 왜 변명하고 있는 것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칼리오페가 일행을 내버려 뒀다고 질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니까 저절로 입이 열렸다.
‘얘는 루스 녀석도 혼내더니 이젠 나까지……. 아니, 예전부터 많이 혼났었지.’
대가성 청탁 운운할 때가 생각나 헛웃음이 나왔다.
질책도 질책이지만 칼리오페에게 오해받기 싫었다. 안 그래도 온갖 사람들에게 바람둥이로 오인당하는 차다.
‘연애 많이 해봐서 좋겠다고 하지만 연애는 무슨. 아직 한 번도 사귀지 않았는데.’
누군가와 사귈 마음도 없었다.
연애 편지라면 많이 받았다. 모두 다 아름답고 각자의 매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호르세안은 그중 누구한테도 끌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옅은 호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귈 순 없다.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의외로 그는 교제 관계에 진지했다.
‘내가 8명이랑 사귄다는 허황된 소문이 제발 리페 귀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텐데…….’
루스 녀석이 있으니 불안했다. 그 녀석은 칼리오페에게 제 평판을 깎기 위해 그런 소문을 흘릴 놈이었다. 사실은 아닌데 그런 소문은 있다고.
‘하여간 여동생을 독점하고 싶어서 우정을 내팽개치는 놈이라니까.’
그가 어떻게 루시우스의 입을 막을까 고민하는 사이, 칼리오페는 창가의 있는 소녀들을 향해 겸연쩍은 눈빛을 보냈다.
‘아무래도 호세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분들 같은데…….’
자신이 우연히 마주친 기회를 뺏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러나 소녀들은 아쉬운 눈으로 호르세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칼리오페였다. 그것도 무척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어라?’
칼리오페는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다.
눈이 마주쳐서 반사적으로 미소 짓자 꺄아, 하는 작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방금 봤어? 귀여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녀들의 작은 소란을 들은 호르세안이 창가 쪽을 쳐다봤다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가장 먼저 줄 섰는데 말이야.”
“네?”
뜬금없는 호르세안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동생 삼는 거.”
호르세안은 칼리오페의 둥근 이마와 커다란 눈동자, 보드라운 뺨과 작은 입술을 차곡차곡 눈에 담았다.
손에 턱을 괸 채 한참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역시 오빠한테 오지 않을래?”
“아직도 그 소리세요?”
“아직도라니.”
호르세안이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눈꼬리를 내렸다.
그 강아지 같은 모습에 칼리오페가 무심코 미소 지었다. 통통한 뺨이 볼록 올라가며 입술이 사랑스러운 곡선을 그린다.
호르세안은 불쌍한 척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아이를 볼 때 까꿍 까꿍 하면서 재롱을 피우는구나 싶었다. 이렇게 칼리오페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재롱 피울 수 있었다.
“이렇게 마주치는 걸 보니 우리 뭔가 인연인 거 아냐?”
호르세안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접으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아무 말도 없이 창가의 소녀들을 바라봤다가 다시 호르세안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열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했다.
“으음…….”
할 말이 없어진 호르세안이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때, 루스티첼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호르세안을 불렀다.
“호르세안 엘피너스.”
“이크.”
움찔한 호르세안이 사람 좋게 웃으며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루스티첼 부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루스티첼 부인은 평소처럼 웃고 있지만 그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느끼다 못해 부인의 등 뒤에서 검은 아우라가 피어나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호르세안은 겉으로 웃는 채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루스티첼 단장님이 뺑이 시킬 때보다 더 무서워…….’
과연 루스티첼 가 권력 서열 1위다웠다.
루스티첼 부인의 장밋빛 입술이 천천히, 온화하게 움직였다. 딸아이가 듣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적당히 하거나 사라지렴.’
“넵…….”
호르세안은 바짝 긴장해서 바로 대답했다.
거친 말도 없고 여전히 상냥하게 웃고 있다는 점이 가장 두려웠다. 만약 목소리를 냈다면 분명 평소처럼 자애로운 어조였을 것이다.
호르세안은 신병처럼 자세까지 꼿꼿이 한 채 한동안 차만 벌컥벌컥 마셨다.
그냥 이대로 사라질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순간 루스티첼 부인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휴…….’
그렇게 압박이 누그러지고 나서야 호르세안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야? 단장님과 약속?”
“아니요. 로벨 오라버니 입단 서류를 제출하러 왔어요.”
“아, 오늘부터 접수 시작이었지. 로벨이라면 서류 통과는 물론이고 당연히 합격할 거야.”
“네, 내년에는 루스 오라버니, 호세 오리버니, 로벨 오라버니까지 함께 백룡 기사단에 있겠네요.”
“단장님께서 골치 아프시겠는걸.”
칼리오페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호르세안이 멈칫했다.
“접수소에 로벨만 들여보낸 거야?”
로베르트는 지금 11살. 3개월 정도만 지나면 12살이 된다.
제국 기준에 따르면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다.
12살이면 기사 지망생은 종기사 생활을 시작하고, 15살에 기사가 될 자격을 갖춘다. 진짜 15살에 맞춰 기사가 되는 경우는 손에 꼽지만 말이다.
로베르트 나이에 서류 제출쯤이야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호르세안 본인도 혼자 제출했고, 루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같이 와서 로벨만 들여보냈다고?’
그건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눈앞에 절친한 친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루스 비번이었지……?’
칼리오페의 대답이 두려웠다.
호르세안의 속을 모르는 칼리오페가 생긋 웃으며 설명했다.
“아, 루스 오라버니랑 같이 갔어요. 여기 핫초코가 맛있다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루스하고 같이…….”
호르세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 걸까…….’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리페가 카페에 온 지 얼마나 지났지?’
호르세안은 초조하게 카페 문을 바라봤다. 불안했다. 그가 보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마침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호르세안은 안 좋은 예감을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이 타이밍에 들어오진 않을 거야. 그건 신께서 나를 버린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신은 호르세안을 버렸다.
* * *
루시우스는 자신의 완벽한 ‘날파리 원천 차단 계획’에 대단히 만족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단 안에는 혹시 칼리오페가 왔을까 기웃기웃거리면서 살펴보는 날파리들이 있었다. 대놓고 실망하는 날피리들을 비웃으며 기분 좋게 일을 마무리하고, 막둥이가 기다리는 카페 안으로 들어왔는데—.
대왕 날파리가 칼리오페 옆에 앉아있었다.
잠시 얼굴을 굳혔던 루시우스가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에 다가갔다.
“다녀왔니? 잘 접수했어?”
“응! 여기 접수증도 있어요. A그룹이에요.”
로베르트가 접수증을 짠, 하고 내밀며 자랑하더니 칼리오페를 빤히 쳐다봤다. 보상을 기다리는 멍뭉이 같은 모습에 칼리오페는 환히 웃었다.
“고생하셨어요, 오라버니. A그룹이라니 접수자 중에서도 선두네요.”
“헤헤.”
로베르트가 수줍게 웃었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붕붕붕 세차게 흔들렸다.
칼리오페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로베르트가 내년에 백룡 기사단에 종기사로 들어가면 직장(?)이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조그맣던 둘째 오라버니가 언제 이렇게 큰 건지 대견하고 장했다.
그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도 루시우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찌르는 듯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있던 호르세안이 결국 아는 척을 했다.
“여어.”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친구의 모습에 루시우스는 눈매를 비틀었다.
차갑고도 뜨거운 시선에 호르세안은 움찔했지만, 그것에 굴했다면 루시우스의 친구가 아니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저쪽일 텐데?”
루시우스가 창가에 앉은 소녀들을 눈짓하며 차갑게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똑같이 우연히 마주친 건데. 함께 있으려면 단연 리페 쪽이지.”
호르세안이 슬쩍 칼리오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루시우스가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
“저 영애들은 너랑 우연히 마주치려고 여기 오는 거 아닌가?”
“에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한다.”
호르세안이 웃으며 얼버무렸다.
루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르세안이 평소보다 과하게 부정하는 것이 묘하게 거슬렸다.
그 따끔따끔 뾰족한 시선에도 호르세안은 평소처럼 슬쩍 뒤로 빠지지 않았다. 루시우스가 칼리오페 앞에서는 대놓고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대련을 빙자해 폭력을 행사하겠지만……. 크흑!’
벌써부터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 미래의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예전에 칼리오페가 나서서 두 사람을 화해시킨 이후로, 루시우스는 칼리오페 앞에서 어느 정도 자제했다.
호르세안으로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다시는 루시우스와 그런 식으로 포옹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억지로 포옹할 때 루시우스의 표정은 볼만했다.
‘엄청 웃겼지.’
호르세안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잠시 고민했다.
친구를 엿 먹이기 위해 스스로 엿을 먹을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호르세안은 참된 친구라 언제나 진정한 우정을 나눴기 때문이다.
함께 엿을 먹는 진정한 우정!
만약 루시우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강제 포옹형에 처해지더라도 주둥이는 놀려야겠다.
고민을 마친 호르세안은 씨익 웃으며 말문을 뗐다.
“설령 영애들이 누군가와 마주치기 위해 온 거라고 해도, 나만 보려고 그런 건 아니야.”
“뭐?”
어느새 난처한 웃음을 지운 호르세안이 야릇한 눈빛으로 루시우스를 훑었다.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루스 오라버니, 인기 많으신가 봐요?”
칼리오페가 그 떡밥을 물자 호르세안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엄! 잘생겼지, 검술 실력도 좋지. 이 녀석이 항상 차가워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먼발치에서…….”
“호르세안.”
이를 악물고 자신을 부르는 루시우스의 모습에 호르세안은 말을 멈췄다. 하지만 입만 다물었을 뿐, 두 눈은 재밌어 죽겠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다행히도 루시우스에게는 그를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호르세안의 발언으로 그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어떤 오해를 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호세 놈 같은 바람둥이로 생각한다면…….’
칼리오페의 커다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실망으로 물드는 모습이 선했다.
목에 칼끝이 겨눠졌을 때보다 더 아찔한 느낌에 루시우스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리페, 난 인기 없다.”
루시우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호르세안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고, 루스티첼 부인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대체 루시우스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인기가 없다니. 그것도 저렇게 진지하게.
“루스 형아, 인기 없구나…….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로베르트가 루시우스의 등을 토닥였다. 루시우스의 표정이 더더욱 볼 만해졌다. 호르세안은 웃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민인 걸까.’
사춘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친한 친구가 인기 많은 호르세안이 아니던가.
“히, 힘내세요……?”
칼리오페는 주먹을 쥐고 루시우스를 응원했다.
“…….”
루시우스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호르세안은 아무 소리도 못 낸 채 엎어져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숨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루시우스는 칼리오페의 응원에 조각 난 마음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고민했다.
호르세안 같은 바람둥이가 아니라고, 네 오빠는 성실하다고, 나한텐 우리 리페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었는데.
둘째 녀석의 동정과 막둥이의 응원이 웬 말인가.
이 어그러진 상황에 대한 분노는 모두 원인 제공자인 호르세안을 향했다.
‘히이이익!’
호르세안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웃음이 절로 쏙 들어갔다. 지옥에서 악마 머리채를 잡고 666바퀴 휘두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칼리오페 앞이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순간, 의외의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뻗어졌다.
“어머, 이제 가봐야겠다. 미스 바이엘이 올 시간이네.”
시계를 본 루스티첼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출발해야 가정 교사가 오기 전에 집에 도착한다.
“호세, 간만에 얼굴 봐서 좋았단다.”
“저 역시 아름다우신 귀부인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호르세안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호르세안의 어깨를 살포시 잡고 속삭였다.
“아가씨들이랑 잘 놀렴.”
이 부드러운 속삭임에서 왜 한기가 느껴지는 걸까?
호르세안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말 뒤에 ‘내 딸한테 집적거리지 말고.’가 생략된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루스티첼 부인이 호르세안의 어깨를 놓자, 이번엔 루시우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힘이 꽉 들어가서 꾸욱 누르는 느낌에 호르세안이 움찔했다.
“내일 보자, 호세.”
이 말은 꼭 ‘내일 네가 보는 것은 지옥의 사신이다.’처럼 들렸다.
오들오들 떠는 그에게 로베르트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호세 형아, 다음에 봐!”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로베르트의 반응에 호르세안은 눈물마저 찔끔 비어져 나왔다.
“로벨, 너밖에 없다.”
호르세안의 격한 반응에 로베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좀 자제하는 게 좋겠어. 형아가 바람둥이라는 말은 듣긴 했지만…….”
로베르트가 창가를 힐끔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8명이랑 동시에 사귀는 건 심했잖아.”
마침 창가에 앉은 영애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로베르트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던 것이다.
호르세안은 저도 모르게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로베르트가 안다면 칼리오페도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호세 오라버니…….”
칼리오페가 착 가라앉은 눈을 하고 호르세안을 불렀다.
“리, 리페, 이건…….”
“휴우— 제가 오라버니의 사생활에 참견할 순 없겠지요. 그럼.”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편 칼리오페가 빠르게 호르세안을 스쳐 지나갔다.
호르세안은 망연자실했다.
그를 등진 칼리오페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호르세안이 여덟 명의 영애와 사귄다는 소문은 에피니에게서 들었다. 말하는 에피니도 그렇지만, 칼리오페 역시 그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다.
호르세안이 연애를 많이 할 순 있다. 하지만 한 번에 여러 명과 사귈 사람은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장난삼아 놀린 거라는 걸 모르는 호르세안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루스티첼 일가가 다 나갈 때까지도.
“호세.”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보다 못한 한 영애가 그에게 다가왔다.
호르세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녀의 손에 끌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여덟 명의 소녀들은 모두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고 맑은 눈망울을 한 채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사슴처럼 고개를 까딱하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칼리오페 뺨 어땠어?”
“부드러웠지?”
“엄청 잘 늘어나더라.”
“아, 나도 만지고 싶어!”
한 소녀의 말에 다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까운 탄식이 퍼져나갔다.
“호세, 말 좀 해봐. 응?”
“나 칼리오페 소개시켜주면 안돼?”
“나도, 나도!”
“…….”
호르세안은 칼리오페 이야기로 화기애애한 소녀들을 바라봤다.
왠지 루시우스의 마음이 이해됐다. 소개시켜달라는 말에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지.
‘말 그대로 내가 제일 먼저 줄 섰는데 말이야.’
하지만 소녀들의 재촉은 몹시 집요했고, 결국 그는 입을 열어 말캉한 볼살의 감촉을 상세히 설명해야만 했다.
* * *
칼리오페는 수업을 끝마치고 기지개를 쭈욱 폈다.
제이드 때와 달리, 그녀는 현재 자신을 가르치는 바이엘에게 무척 만족하는 중이었다.
바이엘은 식견이 풍부하고 다양했다. 또, 칼리오페가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는 법도 없었다.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로 수업에 임했고 칼리오페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렇다고 귀족인 칼리오페의 비위를 살살 맞춘 것도 아니다. 바이엘은 가끔 칼리오페의 생각이 너무 과격하다며 지적했다.
칼리오페는 수긍했다. 무의식 중에 10년쯤 뒤 전쟁이 날 것을 전제하고 의견을 전개해나가다 보니 그런 면이 있었다. 본인이 그렇다는 걸 바이엘의 지적을 통해서 깨달았다.
‘바이엘 선생님이 관료가 되고 나면 서운하겠는걸.’
칼리오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17살에 다루안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은 대체로 18살에 시험을 쳐 행정 관료직을 맡는다. 그중 중앙 관료 직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명문가에 가정 교사로 일하며 인맥과 명성을 쌓는다. 그러니 바이엘 역시 내년에는 시험에 응시해 관료가 될 것이다.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응원해야지!’
수석 자리에서 부당하게 밀려나면서 바이엘이 한 번 접었던 꿈이다. 그러니 칼리오페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지원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됐다.
바이엘과 수업, 베이비 살롱 관리, 니카이논의 전속 모델로서 잡힌 일정,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가족들과 두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는 시간.
루스티첼 가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전생과 달리 가족들은 자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누가 봐도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집안이었다.
칼리오페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웃으며 잠자리에 들어도 전생의 서늘함이 가슴을 스치는 밤이면 칼리오페는 서랍을 열었다.
‘……아스타레아스.’
서랍 안엔 카스틸로 공자가 준 손수건이 잠들어 있었다.
칼리오페는 망설이듯 손수건의 모서리만 매만지다가 결국 손에 쥐었다.
누군가의 유품.
그걸 간직하고 있는 무거움이 칼리오페의 손 안에 고였다. 그 무게를 절절히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따뜻해.’
온기가 없을 게 분명한 손수건이 따뜻했다.
무거움은 자신의 마음에서, 따뜻함은 손수건을 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리라.
가슴을 스치던 서늘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칼리오페는 가족들이 죽고, 온 나라가 타들어 가는 악몽을 꾸고 깨어나도 울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카스틸로 공자가 준 손수건을 바라봤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운 적도 없는데 울지 말라고 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귓가에 울리던 낮은 속삭임, 눈가를 스치던 부드러운 손가락.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그는 눈물을 흘려도 더 이상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이 손수건은 어머니의 손길일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이 위안이 가슴에 사무쳤다.
가끔씩 사교계에서 카스틸로 공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참석하는 모임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와 그녀가 함께 참석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정작 그의 선 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칼리오페는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카스틸로 공자 역시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럼에도 칼리오페는 예감했다.
어느 날, 불현듯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걸.
‘그때에는 내가 눈물을 닦아주자.’
이 위안을 그대로 돌려줄 순 없겠지만.
시린 가슴에 손수건을 덮은 채 잠드는 밤이면 칼리오페는 그렇게 다짐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