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내 마음 속에 저장!
“흐음…….”
칼리오페는 신문을 읽으며 오렌지 주스를 호로록 마셨다.
별 감흥 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카메라 발명? 벌써?’
지면에는 카메라에 대한 설명과 마나 회로 작동 원리에 관해 자세한 기사가 쓰여 있었다. 이 정도로 상세한 기사라는 것은 더 이전에 발명된 상태이고 상용화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경쟁자에게 개발 원리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으니까.
이미 발명해서 앞서나간 시점이니 힌트를 주는 것을 각오하고 상용화 전에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기사를 크게 낸 것이다.
‘사실 이런 기술은 훨씬 전부터 있었지.’
일례로 귀족들이 쓰는 통신석에는 화상은 물론, 영상까지 저장해서 서로 전송 가능하다. 다만 굉장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고위 귀족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딱히 고비용을 들여 사진이나 영상을 주고 받을 일이 없었다. 필요성 자체를 못 느낀 것이다.
‘저번에 브리젤 가의 아동학대를 고발했다던 영상이 예외 중의 예외였고.’
대체 그 영상을 찍고 배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칼리오페는 다시 신문 기사에 집중했다.
카메라의 발명과 상용화는 사람들의 생활상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카메라는 사진을 찍을 때 소비하는 마나가 통신석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었다. 그 덕에 카메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보급되었다.
‘꽤 성공한 사업이었지.’
칼리오페는 전생에서 카메라 사업이 얼마나 커다란 성공을 거둬들였는지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자신이 투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상용화되었던 시기는 분명 훨씬 더 뒤일 텐데?’
카메라는 칼리오페가 십 대 중반이었을 무렵에서야 판매되기 시작했다.
당시 카메라의 주 고객층은 기자들과 공공기관이었다. 신문은 삽화가 아닌 사진을 싣기 시작했고 극사실적인 보도를 강조하는 트렌드가 떠올랐다.
그 후로 전쟁이 일어났다.
칼리오페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참상을 알리려는 종군 기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칼리오페는 고개를 숙인 채 신문 기사를 살살 매만졌다.
‘예전보다 훨씬 시기가 앞당겨진 걸 보니 투자를 잘 받았나 보네. 내가 못한 건 아쉽지만.’
전생에서 어느 기자에게 ‘사실 훨씬 더 전에 카메라를 발명할 수 있었는데 투자자를 찾기 힘들어서 개발이 늦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돈을 쥐고 있는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은 딱히 카메라를 발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특히 사실적인 보도나 범죄 증거에 대한 메리트를 역설하며 투자자를 찾았다면, 더더욱 그랬겠지.’
그런데 전생과 다르게 투자자를 일찍 찾았나 보다.
칼리오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회귀하고 전생과 다르게 행동하면서 미래 또한 바뀌었다. 바뀐 것은 모두 칼리오페에게 원인이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 개발과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데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낯익은 소음에 칼리오페가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에 또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스티첼 부인이 카메라를 든 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어, 어머니?”
“와, 우리 리페가 놀라는 표정은 결코 그림으로 남길 수 없었는데……. 과연 사진은 좋구나.”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하는 말에 칼리오페는 더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부인이 들고 있는 카메라와 기사를 번갈아 보았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작은 고개가 요리조리 움직이며 높게 묶은 머리칼이 깡총깡총 흔들리는 것을 사진에 담았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어머니…….”
“응?”
대답하는 순간에도 찰칵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만 좀 찍으세요.”
“음, 조금만 더 찍으면 안 될까?”
“안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루스티첼 부인은 시무룩해서는 카메라를 내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카메라 발명이라는 기사는 봤지만, 아직 팔지도 않을 텐데…….”
“응, 아직 안 팔아. 투자자니까 받은 거야.”
“네?”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생과 다르게 카메라가 빨리 발명된 계기가 궁금했는데 그게 어머니 때문이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호기심 가득한 칼리오페의 표정을 보고 루스티첼 부인은 셔터를 누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으으, 진짜 내 딸의 모든 모습을 사진으로 박제하고 싶다!’
방금 투자처에서 찾아와 주고 간 것인데, 그간 카메라 없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충동을 힘겹게 누르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운을 뗐다.
“음……. 그건 말이지.”
칼리오페가 ‘사람 됨됨이가 된 권력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루스티첼 백작은 전과 달리 신사 클럽에도 자주 참여했다. 그러던 와중에 투자자를 찾는 카메라 회사 대표, 카이논과 만나게 됐다.
카이논은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비전을 어필했다.
카메라가 보급되면 더 많은 정보를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일이다. 기억은 소실되고 왜곡되지만 사진은 언제나 믿을 수 있다. 아예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통신석에도 쓰이다시피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기술은 이미 나와 있다. 이를 개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새로운 기술 개발과 달리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영업은 신사 클럽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투자자를 찾는 회사는 넘쳐났고 모두 다 자신의 상품이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량이라고 해도 실패는 할 수 있을 텐데.’
루스티첼 백작은 카이논의 말에 그렇게 냉소적으로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기억은 소실된다. 하지만 사진은 순간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
‘우리 막내딸의 순간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어!’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카이논은 카메라의 대국적 영향을 강조하려고 했기에 범죄 수사나 신문 기사와 같은 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솔깃할 말은 일상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 즉시 카이논의 명함을 받았다.
그 후, 집에 돌아온 그는 바로 부인에게 카메라에 관해 이야기했다. 루스티첼 가의 재산은 전부 루스티첼 부인이 관리하고 있고, 사업에 투자하는 일 역시 그녀의 소관이었다.
그리고 루스티첼 부인은 남편의 말을 듣자마자 외쳤다.
[이건 투자해야 해!]
“음…….”
짧은 회상을 마친 루스티첼 부인이 신음을 흘렸다. 이 진실을 딸에게 그대로 말하기는 다소 껄끄러웠다. 팔불출 짓이 부끄럽거나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칼리오페를 사랑하는 일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
루스티첼 부인은 당당했다.
다만…….
‘말하면 우리 리페가 도망갈지도 몰라!’
루스티첼 부인은 속마음을 감추고 허리를 쭉 폈다. 그리고 업무를 볼 때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채 또박또박 이유를 설명했다.
“카메라가 발명되면 사회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투자한 거란다. 증거를 확실한 기록으로 남길 수 있고, 현장을 사진으로 보존할 수 있으니 범죄 수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니? 이는 범죄 검거율을 높여서 치안이 강화된, 안전한 사회를 구축할 거야. 또, 신문 기사에 사진을 넣으면 대중이 더 많은 정보를 더 정확하게 얻게 되잖니? 사람들은 알 권리가 있어. 즉, 카메라를 발명함으로써 인권을 향상시킬 수 있단다.”
“네에…….”
칼리오페는 미심쩍은 눈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무슨 브리핑 하듯이 말하니까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전생에서는 왜 카메라 회사에 투자하지 않으셨지요?’
딸의 시선에도 루스티첼 부인의 확신에 찬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럴 때 표정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시선을 거둔 사람은 칼리오페였다.
방어적인 투자를 했던 전과 달리, 부모님께서는 요즘 꽤 적극적인 투자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인 거겠지?’
적극적으로 투자처를 찾다 보니 우연히 카메라 회사를 발견한 걸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특히 중독 증상에라도 걸린 듯, 카메라 셔터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어머니를 보니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 * *
칼리오페는 벽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자신의 사진을 보고 당황했다.
그야 저택에 초상화를 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곳이 집이었다면 칼리오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가게잖아? 기본적으로 손님을 위한 공간이라고.’
자신이 이 베이비 살롱의 주인이긴 하지만, 아무도 주인의 모습 따위 궁금해하지 않을 테다. 그런데 왜 제 사진이 정중앙, 가장 잘 보이는 벽면에 떡하니 걸려 있는 것인가.
‘어쩐지 평소보다 시선이 더 쏠린다고 생각했어.’
베이비 살롱에 들어올 때, 사람들이 일순간 칼리오페를 주목했었다.
‘여기 주인인 걸 알고 있으니 보는 거겠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저 사진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칼리오페는 한숨을 삼키며 루스티첼 부인을 불렀다.
“어머니.”
“응? 왜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는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칼리오페는 또다시 한숨을 억눌렀다.
“저 사진이요.”
“아, 잘 나왔지? 우리 리페는 어떻게 찍어도 귀엽지만, 저건 너무너무너무 귀여워서 정말 참을 수 없다니까!”
‘대체 뭘 참을 수 없다는 거지요…….’
칼리오페는 흐린 시선으로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보다가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롱헤롱한 얼굴로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를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건 귀여운 사진이 아니라 부끄러운 사진 아닌가.’
확실히 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칼리오페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막 루스티첼 부인에게 이야기하려는 순간, 어느 귀부인이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루스티첼 부인.”
“어머, 파멜라 부인. 잘 지내셨나요?”
루스티첼 부인은 오랜만에 보는 파멜라 부인에게 반갑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비슷한 계층의 귀족이라 막 결혼했을 시절에 얼굴을 꽤 자주 봤던 사이였다. 하지만 서로 삶이 바빠 어느 순간 소원해졌다.
요즘 안면 있는 귀부인들이 이런 식으로 살갑게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런지는 잘 알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사교계에 흐르는 권력에 민감하게 굴지 않았다.
그건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둔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 기민하고 예리했다. 그런 그녀가 최근 들어 갑자기 다가오는 사람들의 저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바로 곁에 얌전히 서 있는 딸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사랑스러운 막둥이로 인해 루스티첼 가의 내부와 외부 환경이 변했다. 모두 좋은 방향이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당연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답게,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환멸을 느끼진 않았다. 물론 은근히 루스티첼 가를 무시하다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사람들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루스티첼 가에 악의를 품지 않았던 자들이 호의를 품게 되는 것은 그 배경이 어떻든 환영할 만한 일이다.
루스티첼 가가 사교계의 중심 중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저야 언제나와 같지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한 파멜라 부인이 칼리오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칼리오페겠구나.”
“안녕하세요, 파멜라 부인.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칼리오페가 치맛단을 곱게 펴며 가뿐하게 무릎을 굽혔다. 살짝 숙인 고개를 따라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목선이 드러났다. 아직 짤따란 귀여운 목선인데도 우아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어쩜.”
예법 교본에 나올 것처럼 각도까지 완벽한 인사에 파멜라 부인이 부채 끝으로 입가를 톡 치며 감탄했다.
오늘 칼리오페는 차분하면서 시원한 인디고 블루빛 드레스를 입고,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채 손바닥만 한 미니햇을 쓰고 있었다.
“사진과는 또 분위기가 다르네요.”
그 말에 칼리오페의 뺨이 달콤한 과즙을 잔뜩 머금은 자두처럼 붉게 익었다.
‘……역시 어서 떼어 내야겠어.’
칼리오페가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멜라 부인의 말을 받았다.
“후후, 리페가 평소에는 의젓한데 달콤한 걸 좋아해서요.”
“저런 생생한 표정은 결코 초상화로 담아낼 수 없지요.”
귀족들의 초상화는 정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게 기본이었다.
파멜라 부인은 몇 번이나 감탄하며 사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사진을 찍어서 걸 생각을 다 했는지 신통방통하기도 하고, 파멜라 저택에 이렇게 사진을 걸어 놓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사진이 비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사진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비싸다거나 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박하고 실례되는 일이었다.
“파멜라 부인께서도 이렇게 사진을 찍어 걸어놓으시면 좋을 텐데요. 곧 파멜라 영애의 결혼식이 있지요?”
“네, 마침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결혼식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사진은 너무 비싸다. 결혼식이니 한두 장 정도는 찍어도 좋겠지만, 태풍 때문에 무역선이 반파되어서 당장 자금 운용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루스티첼 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결혼 선물로 카메라를 드리면 되겠네요. 아이의 결혼식인데 매 순간을 간직하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지요.”
“카메라요? 아, 신문에서 봤어요. 그런데…….”
자신이 받는 입장이긴 하지만 너무 비싼 선물이 아닌가 싶었다. 아직 카메라가 출시되기 전이기 때문에 파멜라 부인은 정확한 가격을 몰랐다. 기존의 사진 촬영이 워낙 많은 마나가 들었기에 선입견이 있기도 했다.
신문에서는 사진을 찍는 데 소모되는 마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다.
“아마 이 상태라면 결혼식 전에 카메라가 나올 거예요. 걱정 마세요.”
루스티첼 부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파멜라 부인은 혹시나 자신이 결혼 선물에 관해 부담을 준 게 아닌가 싶어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시기가 안 맞을 수도 있지요. 축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칼리오페가 단 걸 굉장히 좋아하나 봐요? 눈이 정말 반짝반짝하고…… 행복해 보여요. 사진을 보는 저까지 흐뭇한 웃음이 나오네요.”
가만히 있다가 불시에 공격 당한 칼리오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부모님께서 투자했다 보니 카메라에 대해 주고 받는 말이 흥미로웠지만, 더 있다가는 대화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했다.
칼리오페는 서둘러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오늘이 파티 데이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지.’
칼리오페는 기본적으로 파티 데이로 지정한 매달 말일마다 베이비 살롱에 왔다.
그날은 에피니, 힐데르트, 유리안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높은 확률로 호르세안까지 참석했다. 에피니의 보호자 명목이었다.
‘파티 데이 전에는 저 사진을 떼야겠어. 반드시!’
칼리오페는 작은 주먹을 앙당그레 쥐고 굳게 다짐했다. 친구들과 호르세안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려웠다.
다른 사진은 없나, 가게 내부를 둘러보는 와중에 살롱 메이드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한참 전부터 계속 같은 아이가 카운터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계산에 미숙할 아이들을 생각해 카운터를 여러 개 마련한 덕에 다른 손님들에게 지장은 없었지만, 문제가 생긴 건 분명했다.
“어, 얼마라고 했지?”
가까이 다가가자 잔뜩 긴장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12,700운드입니다.”
살롱 메이드는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답했지만, 아이는 그 말에 더 초조해졌는지 돈을 세는 손끝이 떨렸다.
칼리오페는 아이의 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크레티안느 피엔테?’
오렌지빛 곱슬 머리와 올리브 같은 눈동자. 피엔테 후작가의 금지옥엽이자, 유일한 후계였다.
순간적으로 칼리오페의 머릿속에 백룡 기사식에서 만난 바셀로 부인이 스쳐 지나갔다.
‘크레티안느가 바셀로 부인의 오촌 조카였지.’
바셀로 부인은 피엔테 후작가의 후계자인 크레티안느의 당이모라는 점을 이용해 세를 불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셀로 부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칼리오페는 바셀로 부인이 뒷공작으로 경쟁업체에 타격을 입혔다는 정보를 흘렸다. 그 직후 카스틸로 공자가 나타난 게 워낙 뜻밖이라 모두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려 흐지부지됐었다.
‘아니, 흐지부지되진 않았지.’
카스틸로 공자의 언변에 말려든 바셀로 부인은 크게 한 방 먹었었다. 낭패감을 숨기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망신을 톡톡히 당하긴 했지만, 그 후 뒷공작 건은 정확히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칼리오페는 몰랐다. 어머니는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칼리오페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해주진 않았다.
무심코 고개를 든 칼리오페는 살롱 메이드와 눈이 딱 마주쳤다.
‘도와주세요.’
둥그런 메이드의 눈동자에는 그 다섯 글자가 절박하게 적혀져 있었다.
“저기…….”
그때, 크레티안느가 살롱 메이드를 불렀다.
“네, 아가씨.”
메이드는 반사적으로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답했다.
“저, 어, 얼마라고 했었지?”
크레티안느가 돈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칼리오페는 상황을 깨달았다.
‘아까 내가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이게 무한 반복이었다는 거구나.’
살롱 메이드는 이번에도 친절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12,700운드입니다, 아가씨.”
크레티안느의 손이 굼뜨게 처음부터 돈을 세기 시작했다.
살롱 메이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칼리오페는 한눈에 알아봤다.
크레티안느는 아직 어린 데다가 직접 계산할 기회가 잘 없었을 테니 돈을 세는 게 서툴 수밖에 없다. 다른 카운터가 많으니 기다리는 손님에 대한 압박도 없다.
그런데도 불편한 이유는 하나였다.
‘도와주고 싶겠지.’
답답하거나 짜증 나서가 아니었다. 베이비 살롱 특성상 계산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못 드린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귀족을 가르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안녕하세요, 영애.”
“어?”
돈 세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크레티안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크레티안느는 어색하게나마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도 잠시, 크레티안느는 오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는 칼리오페 루스티첼이라고 합니다.”
“나, 나는 크레티안느 피엔테야. 저기…….”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을 봤다.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며 우물쭈물하던 크레티안느가 결심한 듯 물었다.
“저거, 너야……?”
“……네, 저 맞습니다.”
칼리오페는 무너질 뻔한 미소를 애써 수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부끄러움에 붉어진 뺨은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많이 사신 거 같은데 어떤 거 사셨어요?”
크레티안느가 소심한 성격임을 간파한 칼리오페가 부드럽게 물었다. 무턱대고 가르쳐준다고 하면 오히려 위축될 수도 있다.
“어, 뭐, 뭐였지? 그냥 사고 싶은 거 다 사서……. 그게, 여기 온 게 처음이라서. 그래서, 그냥…….”
크레티안느는 횡설수설하며 칼리오페의 눈치를 봤다.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어서 끝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사고 싶은 게 많으셨다는 거네요. 이 가게의 주인으로서 정말 기뻐요.”
크레티안느는 멍한 얼굴로 미소 짓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태양 같아…….’
눈이 부실 정도라 크레티안느는 칼리오페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러면 함께 어떤 걸 샀는지 봐요. 괜찮을까요?”
“으응…….”
크레티안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에게 돈을 세는 법을 알려주면서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나하나 처음부터 알려줘야 하고, 액수를 다르게 하면 허둥지둥하면서 까먹어 다시 처음부터 알려줘야 했다.
칼리오페는 내색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가르쳐줬다.
“네, 12,700운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드디어 계산이 끝났다.
크레티안느는 뿌듯한 표정으로 잔뜩 산 과자를 받아들었다. 사실 크레티안느보다 지켜보던 살롱 메이드들의 얼굴이 더 뿌듯해 보였다. 그녀들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우리 아가씨가 최고야!’
‘우리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해!’
칼리오페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어, 정말 고마워.”
크레티안느가 칼리오페의 옷자락을 살짝 잡고 인사했다. 칼리오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리페는 정말 친절하고 상냥하네.”
두 사람은 비어 있는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잠시 칼리오페가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를 먹는 사진을 바라본 크레티안느가 자신이 시킨 음료를 보고 중얼거렸다.
“나도 저거 시킬걸…….”
그 후로 크레티안느는 풀이 죽어 입을 다물었다.
칼리오페는 다른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인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한 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살롱 분위기를 살폈다. 원체 조용한 성향인 데다 이유가 없으면 먼저 말을 붙이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칼리오페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크레티안느는 달랐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폈다 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사람들은 자신이 곁에 있으면 알아서 이것저것 챙겨주며 말을 붙였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러지 않았다.
‘내 또래는 원래 이런가?’
모르겠다. 아까는 자신을 잘 챙겨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지금은 안 챙겨주는 거지?’
크레티안느는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설마 날 싫어하나?’
“저, 저기!”
크레티안느는 다급하게 칼리오페를 불렀다.
“네?”
카운터를 보며 무엇을 개선하면 좋을지 살피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미소 짓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에 크레티안느는 안심했다.
“저, 내가 낯가림이 심해서…….”
크레티안느는 시선을 내리며 재빨리 빨대를 만지작만지작거렸다. 어쨌든 칼리오페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역시 또래라서 다른 거였다. 자신이 가만히 있어도 항상 말을 붙이고 챙겨줬던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었다. 또래랑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가 거의 처음이니 잘 몰랐다.
‘이모가 모르는 건 나쁘지 않댔어.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크레티안느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계속 말을 걸지 않으면 칼리오페는 또다시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릴 것 같았다.
“나, 나는 그런…… 돈 세는 거 잘 모르거든. 리페는 똑똑하구나.”
“아니예요. 아직 어색해서 그래요. 익숙해지면 잘 하게 될 거예요.”
칼리오페는 상냥하게 웃으며 크레티안느를 다독였다.
“이모가 항상 챙겨줬는데. 왠지 아버님께서 이모한테 잔뜩 화가 나셔서…….”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가 말하는 이모가 그녀의 종이모인 바셀로 부인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결국 터졌구나.’
시무룩한 크레티안느를 보니 마음이 쓰였다.
‘그때 가만히 있는 게 크레티안느에게는 좋았을까?’
하지만 우리 가족이 모욕을 당했는데?
칼리오페는 성인(聖人)이 아니었다. 남보단 제 가족의 상처가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때, 크레티안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치만 괜찮아! 용서해주실 거야.”
묘하게 단호하고 확신 어린 말이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칼리오페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피엔테 후작은 엄마를 잃은 딸에 대한 연민이 강했다. 크레티안느가 바셀로 부인을 따르는 이상, 그녀를 아예 내치진 못할 것이다.
‘이번 일은 수습하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꼬리를 잘라버리는 게 가장 편하긴 하지만 권력과 돈을 잔뜩 쓰면 얼마든지 수습 가능한 일이었다.
‘음모에 당했던 사업체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위로금을 안겨주었겠지.’
칼리오페는 크레티안느를 바라봤다.
‘차라리 다행인 걸까.’
바셀로 부인을 극히 싫어하던 귀부인들의 태도를 생각하면 피엔테 후작이 직접 움직였을 확률이 높았다.
‘서모나 가를 비롯한 고위 가문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겠지.’
그 결과, 귀부인들은 후작의 얼굴을 봐서 이 사건을 들쑤시지 않기로 했을 것이다.
피엔테 후작이 직접 수습할 만한 일을 만들었으니 바셀로 부인은 전처럼 활개를 치진 못할 것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자숙하겠지.’
어머니를 잃고, 바셀로 부인을 어머니 대신 따르는 크레티안느를 생각하면 그 정도가 딱 좋을지도 모른다.
“저, 리페는 여기 자주 와?”
“저는 달에 한 번씩 와요.”
칼리오페는 파티 데이에 관해 설명했다.
“왜? 난 계속 오고 싶은데……. 내가 올 때마다 오면 안 돼?”
“감사한 말씀이지만……. 다른 일이 많아서요.”
여지를 주지 않는 거절에 크레티안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 어떻게 돈 세?”
곧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크레티안느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이곳은 본디 직접 경험하기 위한 공간이다. 남이 대신 해주는 곳이 아니라.
칼리오페는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너무 혼자 짊어지는 바람에 가족들이 걱정해서 조금 바뀌려고 하지만, 기본적인 성향은 여전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 평생 혼자서 할 수 없다. 능숙해질 수도 없다.
칼리오페는 무엇이든지 잘 해야 했다. 그게 불가능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려면 잘 해야 했다.
그게 어떤 일이든.
‘나는 그렇다고 쳐도……. 다른 아이들도 혼자 하려는 건 다르지 않던데.’
가족 품에서 벗어나 또래들과 부대껴 지내면서 자립심이나 사회성이 생긴 덕일까.
‘내가 할 거야!’, ‘내가 했어!’라며 손을 번쩍번쩍 드는 아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엄마, 아빠, 이게 왜 그런지 알아? 내가 알려줄게!’라고 말하며 어른들은 다 아는 사실을 열심히 설명하곤 했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몰랐던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깜짝 놀란 반응을 하곤 했다.
확실히 평범한 또래를 생각해도 크레티안느는 달랐다.
‘하지만 나는 이 가게의 주인이니까. 책임자이기도 하지.’
경험할 기회는 이곳의 손님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제가 다시 가르쳐 드릴게요. 다음엔 혼자서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칼리오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보통 혼자 성공하면 엄청 뿌듯해하니까, 크레티안느도 경험해보면 달라지겠지.’
아까 전 카운터 앞에서 했던 강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크레티안느는 알 수 없는 오싹거림을 느꼈다.
그녀는 몰랐다.
칼리오페가 무려 2살 때 오라버니에게 산수를 가르쳤던, 몹시 엄격하고 유능한 선생님이란 것을.
* * *
긴 은발 머리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깨끗하게 틀어 올린 노부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에 끼인 커다란 인장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북쪽의 커다란 별을 비롯한 여덟 개의 별, 완벽한 수평과 대칭을 이루는 천칭.
카스틸로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 상태로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 눈을 떴다.
“바셀로 부인 따위는 알 바 아닙니다.”
그녀는 ‘바셀로’라는 가문 자체를 이전엔 몰랐었다.
제국을 몸에 비하자면 귀족들은 혈관이다. 제국이 썩어들어가는 부분 없이, 원활히 기능하도록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바셀로 남작가는 혈관으로 치자면 모세혈관. 수많은 모세혈관 중 하나가 손상되었다고 해도 아무 문제 없이 수복할 수 있다. 그러니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 그 작은 모세혈관 하나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것은 피엔테 후작가입니다.”
어느 순간, 그 보이지도 않던 모세혈관은 대동맥과 같은 피엔테 후작가에 연결되었다.
카스틸로 공작 공작의 황록빛 눈동자에 차가운 경멸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바셀로 남작가는 더 이상 혈관이 아니었다. 피엔테 후작가라는 혈관에 끼인 지방 덩어리였다. 수도관에 녹이 슬고 이물질이 끼이면 못 쓰는 것처럼 혈관도 마찬가지다.
제국이 동맥경화에 걸리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스틸로 공작 부인은 거기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녀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손자를 바라봤다.
아스타레아스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우아한 손길로 차를 마셨다. 답답함을 느낀 것은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었다.
“피엔테 후작은 최근 황제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자입니다.”
조급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아스타레아스가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할머님.”
카스틸로 공작 부인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녀의 완고한 얼굴에 손자에 대한 사랑과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레아스 님, 나는 그대의 뜻에 따릅니다.”
그녀는 자신의 손자를 전처럼 황자라고 부르지도, 그렇다고 지금 신분에 맞게 공자라고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단 하나, 변하지 않고 한결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아스타레아스가 자신을 ‘할머님’이라고 부르는 것.
그렇기에 카스틸로 공작 부인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아스타레아스에게 약하기에, 그가 소중하기에, 그를 사랑하기에 이번 건은 반대해야 했다.
“그대의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것.”
그 말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아스타레아스의 손이 멈칫했다.
[레아스,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너는 오래…… 오래 살아주렴.]
울 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가 손수 수놓아주었던 손수건도.
‘……칼리오페.’
필요하지 않냐며 손수건을 내밀던 칼리오페가 생각났다. 당황해하던 얼굴도, 조금 심통 난 얼굴도,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려주며 은근히 짓궂은 미소를 지었던 얼굴도 연달아 떠오른다.
“피엔테 후작이 이번 일에 관해서 직접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미 피해 입은 사업체와는 합의 보고 배상을 끝마쳤어요.”
법적으로 깨끗이 처리했다는 뜻이다.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 이어 말했다.
“거기에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지 않도록 입김이 센 고위 귀족들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손짓하자 보좌관이 새하얀 봉투를 아스타레아스에게 건넸다.
“현재 카스틸로 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있으니 직접 찾아오진 않았지만, 우리 쪽에도 편지는 왔습니다.”
아스타레아스는 고풍스럽게 작성된 편지를 빠르게 훑었다. 전보가 아니라 편지로 예를 갖춘 것부터 시작해서 감정에 호소하면서도 똑바로 사과하는 점까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바셀로 부인이 잘못한 일을 대후작인 피엔테 가주가 직접 사과하니 체면과 예를 중시하는 고위 귀족이 더 따지지 못하는 것도 이해됐다.
“이런 편지가 없어도 카스틸로는 움직이지 않을 확률이 높은데 보내다니……. 잡음 나올 구석 없게 확실히 처리하는 점이 피엔테 후작답네요. 필시 신문사에도 압박을 넣었겠지요.”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카스틸로 공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손자를 살핀 귀부인은 찻물을 들이키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이유가 있습니까?”
편지를 보던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어 카스틸로 공작 부인을 마주 봤다.
“레아스 님, 그대의 말대로 카스틸로는 이 일에 관해 움직이지 않는 게 맞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아스타레아스는 ‘확률이 높다’라고 했지만, 그건 본인이 ‘움직이자’고 이야기했기에 나온 말이다. 가문 밖에서 보나 안에서 보나 움직이지 않는 게 맞다.
카스틸로 공작 부인은 처음 아스타레아스가 바셀로 부인의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다.
‘치기 어린 정의감인가?’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성적이고 셈이 빠른 손자답지 않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인도하는 별과 천칭의 가문에 적을 둔 자답게 우선순위를 잘 알았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한 말로 확실히 깨달았다.
아스타레아스는 움직이지 않는 게 옳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움직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왜 움직이자고 했지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는 싱긋 웃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산호빛 눈동자를 한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건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그는 아무런 흔들림도, 내색도, 동요도 없이 답했다.
“없습니다.”
“없다고요?”
“가끔 할머님께서는 제 나이를 잊으시는군요. 저도 제가 나이에 비해 무척 어른스럽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잠시 아스타레아스를 살펴보던 카스틸로 공작 부인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온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 * *
‘으으으음……!’
칼리오페는 심각한 얼굴로 눈앞의 초록색 괴생물체를 바라봤다. 왠지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잠시 주춤했다가 그런 자신에게 화들짝 놀랐다.
‘아냐! 안 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워야 해!’
굳게 다짐하고 눈을 부릅떴는데 또다시 초록색 괴생물체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무, 물러설 순 없어. 이런 데에서 물러서면 언제 자라서 언제 가족을 지키겠어!’
그녀가 재차 결심을 다지는 순간이었다.
“리페, 왜 안 먹고 그릇만 노려보고 있어?”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칼리오페에게 물었다.
잠시 그릇과 칼리오페를 번갈아 보던 그가 알겠다는 듯이 환히 웃었다.
“아, 설마 피망 먹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럴 리가요!”
칼리오페는 전에 없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흐흥—.”
로베르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나도 피망은 싫지만……!’
사랑스러운 동생을 위해서라면 대신 먹어줄 수 있다.
‘그럼 리페가 좋아하겠지? 막막 멋지다면서 안아 주겠지? 뽀뽀도 해달라고 할까?’
로베르트가 속으로 레드 스파이시 수프를 한 그릇 마시고 있을 때, 칼리오페는 다시 심각한 얼굴로 피망과 아이 콘택트를 시도했다.
‘도망칠 수 없어!’
편식하는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전에는 피망이든 브로콜리든 뭐든 아무렇지 않게, 아니, 오히려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아기 입이라 그런지 혀가 예민해서인지 맛과 향이 강하게 느껴져서 전처럼 먹기 힘들었다.
원래 처음 맛보는 것보다 기대하고 먹었다가 알던 맛보다 훨씬 맛없을 때 충격이 더 큰 법이다.
‘하, 하지만 로벨 오라버니가 지켜보고 있고.’
자존심이 상했다. 로베르트는 다른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였지만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칼리오페는 포크를 꾸욱 움켜쥐고 비장한 표정으로 피망을 푹 찍었다.
긴장된 얼굴로 그녀가 막 입을 벌린 순간,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현란한 셔터 소리에 칼리오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셔터 찬스!’
루스티첼 백작과 루스티첼 부인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구마구 셔터를 눌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칼리오페가 흐린 눈동자로 부모님을 바라봤다. 열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시선에 부부는 움찔했다.
하지만.
‘이 표정도 너무 귀여운걸……!’
또다시 그들의 검지가 바쁘게 움직였다. 찰칵찰칵찰칵!
“어머니, 아버지…….”
“으응……? 마저 식사하렴?”
정신이 딴 데 팔린 채 대답하는 어머니를 보고 칼리오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메라의 발명. 다 좋다.
거시적으로는 인류의 발전인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곧 가문에 돈도 벌어다 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그만 좀 찍으세요.”
볼을 한가득 부풀리고 불만스레 말하는 딸아이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저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뒤늦게 아차, 한 그녀가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였니?”
“무지무지요.”
칼리오페가 드물게 눈을 가늘게 뜨고 확실하게 말했다. 아직도 볼에 바람이 빵빵했다.
“미안하다. 우리 리페가 하루하루 자라나니까 어렸을 때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욕심에…….”
커다란 물소 같은 루스티첼 백작이 순식간에 작아져서 딸에게 사과했다.
“그래, 지금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볼 수 없어지니까……. 그 마음만 앞서서 우리 딸이 싫어하는 걸 생각 못 했구나.”
시무룩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음…….’
사진을 찍는다고 어디 닳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우울해하는 부모님을 보니 가슴이 콕콕 아팠다.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생에서 가족들이 모두 죽고 난 후, 그녀 역시 ‘사진으로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남겨놓을걸.’하고 후회했으니까.
칼리오페가 가지고 있었던 가족사진은 초상화처럼 반듯한 자세뿐이었다. 생생하게 일상을 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어느 순간 환하게 웃던 표정들이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가족들이 웃는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없었다. 고작해야 사진과 초상화에 나온 어렴풋한 미소가 한계였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들고 가족들을 둘러봤다.
땀을 뻘뻘 흘리는 부모님의 미안한 미소. 무표정하지만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루스 오라버니. 왠지 눈을 반짝이며 피망이 가득한 접시를 바라보는 로벨 오라버니.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살아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래, 나도 이런 걸 간직하고 싶었어.’
칼리오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싫을 정도는 아니에요.”
“정말?”
“그럼 찍어도 괜찮니?”
칼리오페의 말에 부모님의 얼굴이 봄날을 맞은 꽃처럼 파아앗 피어났다.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싫다고 하겠어요.’
우리 엄마·아빠 원하시는 건 다 하세요. 그런 심정이었다.
“물론 괜찮—.”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칼리오페의 허락이 채 떨어지기 무섭게 셔터 소리가 울렸다.
칼리오페는 살짝 후회되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다시 피망 공략에 집중했다.
혀가 아린 것과 피망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을 참는데—그 와중에도 셔터 소리는 계속되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로베르트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벨 오라버니……?”
“피망, 왜…….”
“네?”
“왜, 왜……. 왜 먹은 거야? 피망, 내가…….”
울망울망한 로베르트를 보고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로벨 오라버니가 피망을 이렇게나 좋아했나? 분명 싫어했던 것 같은데…….’
힐끗 로베르트의 접시를 바라보니 피망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며 로베르트의 접시를 가리켰다.
“피망 맛있게 드세요.”
제 것 말고, 오라버니 꺼 있어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데 로베르트는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자기 접시와 칼리오페를 번갈아 보더니 더 울멍울멍해졌다.
‘이왕 피망을 먹어야 한다면 리페 거 먹어줘서 리페의 기사님이 되고 싶었는데……!’
로베르트는 힘없이 고개를 푹 떨궜다.
“리페가 맛있게 먹으랬으니까……. 맛있게 먹을게…….”
그리고 자신의 접시에 있는 피망을 집어 들곤 비장한 표정으로 먹기 시작했다.
루스티첼 부부와 유모는 깜짝 놀라서 로베르트를 바라봤다.
‘로벨이 자발적으로 피망을 먹다니……!’
‘로벨 도련님이 달라지셨어요……!’
엄청난 일이었다. 로베르트는 피망을 먹느니 차라리 상·하단 베기 100번을 하는 아이였다.
깜짝 놀라면서도 루스티첼 부부는 손가락으론 반사적으로 두 아이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나란히 먹는 모습이 너무 닮았는걸!’
안 찍을 수가 없었다.
* * *
피망을 모조리 해치운 상으로 사탕을 받은 두 남매는 만족한 얼굴로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로베르트는 검술 훈련을 하러 갔고 칼리오페는 기사단에 가는 루시우스를 배웅한 뒤, 장서실에 틀어박혔다.
칼리오페는 작게 노래를 부르며 테르를 에테르로 변환했다. 땅고래와 만난 이후로 노래는 하루 일과가 되었다.
‘응, 확실히 에테르를 전보다 훨씬 더 잘 느끼게 되었어.’
칼리오페는 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손에 바람이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간지러워서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키득거린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에 푹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꽤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런, 책도 읽으려고 했는데.’
칼리오페는 골라놓은 책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피니 언니가 기다릴 테니까.’
얼마 전부터 에피니는 루스티첼 백작저에서 검술 훈련을 받고 있었다. 지난번에 자이언트 스피릿을 따라 하는 에피니를 보고 루스티첼 백작이 재능을 알아본 덕이다.
엘피너스 백작가는 무가가 아니다. 전통적인 대지주 가문에 가까웠다. 저택에 기본적인 연무장이 있긴 하지만, 무가인 루스티첼 가의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검술에 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두 가문의 친분이 두텁기 때문에 루시우스와 동갑인 호르세안은 루스티첼 저에서 함께 검술을 배웠었다. 비슷한 이유로 에피니 역시 루스티첼 가에서 검술 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에피니는 칼리오페의 친구였기 때문에 칼리오페는 그녀가 방문할 때마다 나가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에피니가 흥, 하며 고개를 돌린다든지 귀찮아하는 기색이 얼핏 보여 괜히 방해인가 싶어서 얼굴을 안 비췄던 때가 있었다.
‘엄청 서운해했지.’
그때 에피니의 표정이 생각나 칼리오페는 웃음을 삼켰다.
그날 칼리오페는 자신의 방에서 베이비 살롱 회계장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쾅, 하고 열리기에 깜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에피니가 서 있었다. 뛰어온 건지 숨까지 헉헉 몰아쉬면서.
바로 뭐라고 쏘아붙일 듯한 기색이었는데 칼리오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표정이 변했다. 뭔가 엄청 곤란하고, 반갑고, 서운하고, 뭐라 하고 싶은데 뭐라 할 수 없고,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얼굴.
칼리오페는 생긋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에피니 온니.]
살갑게 인사하자 그 복잡한 얼굴은 안도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곧 평소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칼리오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에피니와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배웅하면서 다음부턴 꼭 나오겠다고 하니 에피니가 시선을 피했다.
[별로.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닌데.]
작게 중얼거리는 에피니의 뺨이 그녀의 머리칼처럼 발긋했다.
[그,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뭐, 조금 이야기 나누는 것 정도는 괜찮아.]
칼리오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잘 가라는 인사 대신 노크하는 예절을 가르쳤다.
에피니는 그 잔소리에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마차에 올라타서 아무도 못 보자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에피니 온니.”
연무장에 나간 칼리오페가 목검을 휘두르는 에피니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에피니는 땀을 손등으로 스윽 닦으며 본척만척 건성으로 답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목검을 늘어트리고 칼리오페 곁으로 다가왔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빙그레 웃으며 에피니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로벨 오라버니는요?”
“지도 끝나자마자 들어갔어.”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 기사식을 보고 기합이 바짝 들어간 로베르트는 요즘 고강도 훈련 중이었다. 지금쯤이면 벌써 씻고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에피니 온니는 검술이 정말 좋으신가 봐요.”
“응?”
“거의 매일 지도 받으러 오시고, 지금도 남아서 연습하고 계셨잖아요.”
에피니는 칼리오페를 향했던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괜히 발끝으로 지면을 툭 찼다.
‘검술도 재밌긴 하지만……. 너랑 놀 수 있으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대답이 명치를 쿡쿡 찔렀다. 가족이 아닌 또래랑 이렇게 가깝게 지낸 게 처음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네가 나올 때까지 검을 휘두른 것도…….’
자랑하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칼리오페가 멋지다고 말하는 게 좋았다.
에피니가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직접 만나기 전에는 칼리오페가 싫었다. 호세는 내 오빠인데 칼리오페에게 빼앗긴 느낌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여러 번 얼굴을 마주치며 서서히 깨달았다. 호르세안이 왜 ‘너랑 리페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칼리오페는 너와 달리 얌전하고 착한 아이니까 보고 배워라.’라는 뜻이 아니었다.
칼리오페를 친동생인 자신보다 더 좋아해서 친구가 되라고 했던 게 아니었다.
‘나를 생각해서, 나를 위해서였어.’
처음에도 생각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리고 점점 가면 갈수록, 칼리오페를 만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응, 좋아해.”
에피니가 작게 웅얼거렸다. 그 말은 수건에 막혀 잘 들리지 않았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에피니는 여전히 수건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피니 온니?”
재차 묻자 에피니가 수건을 내리며 팩 고개 돌렸다.
“……배고파.”
작게 새어 나온 말에 칼리오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싶었다.
‘실컷 운동한 후에는 배가 고픈 법이지.’
“마침 오늘 스콘이 맛있게 구워졌어요. 마들렌도.”
칼리오페가 손뼉을 착 치고 에피니의 손을 잡아끌었다. 에피니는 당황하다가 결국 작게 미소를 지은 채 칼리오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꼬마 아가씨가 손잡고 중정을 가로지르는 모습에 고용인들이 미소 지었다.
에피니가 씻는 사이 빠르게 티테이블이 차려졌다.
버터와 바닐라 빈을 잔뜩 넣어 풍미가 좋은 황금색 마들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스콘, 스콘에 발라먹을 무화과 잼과 클로티드 크림. 거기에 루스티첼 부인의 특제 오렌지 아이스티까지.
뽀송뽀송하게 씻고 나온 에피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모두 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사실 스콘과 마들렌은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에피니를 위해 칼리오페가 일부러 구워달라고 한 것이었다.
에피니는 군침을 꼴깍 삼켰다. 배고프다고 한 건 그냥 말 돌리기였는데 빈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안 그래도 운동으로 왕성해졌던 식욕이 확 입맛을 자극했다.
칼리오페는 맛있게 냠냠챱챱 먹는 에피니를 뿌듯하게 바라봤다.
“오늘은 뭐 특별한 일 없어?”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에피니가 두 번째 아이스티를 시키며 물었다. 이렇게 함께 티타임을 가질 때면, 칼리오페가 신문에서 읽은 것 중에 재밌거나 신기한 사건을 말해줬다.
에피니는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칼리오페의 말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듣곤 했지만, 사실은 다 귀담아들었었다.
“글쎄요. 저도 아직 오늘 신문을 읽지 않아서…….”
칼리오페가 손바닥에 뺨을 대며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고 있던 유모가 눈짓하자 하녀가 신문을 가져왔다.
“한 번 같이 봐볼까요?”
그리고 두 사람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칼리오페의 사진을 발견했다.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칼리오페는 답지 않게 성급한 손길로 신문을 팍 닫았다. 빠르기가 흡사 빛의 속도와 같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에피니에게 물었다.
“오늘 훈련은 어떠셨나요?”
하지만 에피니는 넘어가지 않았다.
“아까 너였지? 한 번 봐봐.”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칼리오페가 신문을 꼬옥 붙든 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에피니는 몹시 흥미진진했다.
“너 맞잖아?”
“아니라니까요.”
“확인해보면 알겠지.”
두 꼬마 아가씨가 투닥투닥 아웅다웅했다. 지켜보던 유모와 하녀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깔렸다.
‘우리 리페 아가씨가 이렇게 또래답게 보이다니……!’
칼리오페는 매우 심각하고 초조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 눈에는 새끼 고양이가 서로를 깨물며 장난치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승자는 에피니였다.
칼리오페로서는 기본적인 체력 단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검을 마구마구 휘두르던 꼬마 장사님을 이길 수 없었다.
“역시 너 맞잖아.”
신문을 펼친 에피니가 칼리오페의 사진을 빤히 바라봤다. 칼리오페가 다시 신문을 접으려고 해도 놓아주질 않았다.
새 아이스티가 왔길래 크림과 잼을 잔뜩 바른 스콘으로 유혹해도 소용없었다.
결국 칼리오페는 포기한 채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엄마!”
“어이쿠, 우리 말괄량이 아가씨. 검술 훈련은 잘 하고 오셨나요?”
엘피너스 부인이 우당탕탕 큰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에피니를 향해 웃었다.
“신문!”
“신문?”
“신문! 빨리!”
발을 동동 구르는 딸의 기세에 밀려 엘피너스 부인은 집사에게 손짓했다.
집사가 들고 온 신문을 건네주니 망설이지 않고 파라락 펼친다.
‘어머나? 리페랑 놀더니 신문에 관심을 다 갖네? 아……!’
칼리오페가 오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었다.
‘귀여웠지.’
엘피너스 부인도 보자마자 카메라를 충동 예약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에피니가 칼리오페의 사진을 확인하더니 힐끔 엘피너스 부인을 바라봤다.
“리페 예쁘게 나왔지?”
“별로.”
댕댕거리던 게 무색하게 갑자기 침착해진 에피니가 새침하게 답했다.
“나 간식 먹고 왔으니까 필요 없어.”
그 말만 남기고 쌩하니 방을 나갔다. 신문은 들고.
“쟤가 대체…….”
엘피너스 부인은 황당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날 저녁.
“어머니!”
“잘 다녀왔니?”
엘피너스 부인이 집에 돌아온 호르세안을 향해 빙긋 웃었다.
“신문 어딨어요?!”
‘오늘 낮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엘피너스 부인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집사가 한발 빠르게 하인을 시켜 신문을 가져오게 했다.
그간 리페 화첩을 보면서 얼마나 갖고 싶었던가!
호르세안은 주먹을 꾹 쥐었다.
루스 녀석에게 말이라도 꺼내면 대련 때 엄청나게 공격해왔다. 검을 받아쳐 내는 손이 아릴 정도였다.
단장님께는 무서워서 차마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손에 넣을 수 있다!
10개월 같은 10분이 지나고 하인이 신문을 가져왔다.
두근두근하며 신문을 펼친 호르세안이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왜 구멍이 뚫려 있어?!”
리페 사진이 있던 곳에는 삐죽빼죽 오려낸 자국만 남아 있었다.
* * *
같은 날 아침, 사르니오 가.
“안젤리나.”
유리안은 사르니오 부인이 부르는 목소리에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이거 리페 아니니?”
지겨움이 가득하던 유리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리페는 정말 예쁘네. 딱 아가씨란 느낌이야.”
사르니오 부인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유리안은 칼리오페의 사진만 바라봤다. 밀랍 인형 같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 안젤리나도 이렇게 예쁘고 단정하고 착한 아가씨가 되어야지?”
“이거, 나 가져도 돼요?”
의외의 질문에 사르니오 부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상냥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렴.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좋지.”
* * *
비슷한 시각, 서모나 가.
“신문사에 연락하는 게 좋겠어요.”
뜬금 없는 아들의 말 한마디에 서모나 부인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힐데르트는 신문에서 오려낸 칼리오페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서모나 부인이 그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아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사진을 감상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서모나 부인은 웃으며 카메라를 들었다. 오늘 신문에 나온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자마자 예약한 것이었다.
대명문 서모나 후작가의 예약에 카메라 회사에서 바로 사람이 나왔다. 그들은 아직 발매되지 않은 카메라를 건네며 친절하게 작동법을 알려주고 갔다.
찰칵찰칵, 서모나 부인은 아들의 모습을 찍고 나서야 이유를 물었다.
“신문사에 연락은 왜 하려고 하니?”
“종이를 좀 더 좋은 걸로 쓰라고 하려고요.”
작게 흘러나온 대답에 서모나 부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했다.
칼리오페 사진에 정신 팔렸던 힐데르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루스티첼 부인께 사진을 달라고 하면 되지.”
웃느라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서모나 부인이 명안을 내놓았다.
불만스러웠던 힐데르트의 눈빛이 한순간에 존경으로 가득하게 바뀌었다.
* * *
비슷한 시각, 카스틸로 가.
“도련님, 도련님!”
호들갑 떨며 들어오는 시종, 러그윈의 모습에 아스타레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찡그리진 않았지만 서늘함이 느껴져서 러그윈은 멈칫했다. 그러다가 곧 손에 들린 것을 상기하곤 히죽 웃으며 다가갔다.
“그 강아지 아가씨요. 신문에 났던데요?”
그 말에 아스타레아스의 얼굴이 확 달라졌다. 다급하고 초조하다 못해 불안과 걱정으로 새파란 눈동자가 잔뜩 흔들렸다.
러그윈은 당황했다. 도련님이 조금 동요하길 바라긴 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동요하길 바라면서도, 진짜로 동요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러그윈의 손에서 신문을 빼앗아가다시피 채간 아스타레아스가 급히 신문을 살폈다.
그리고 당근을 노려보는 칼리오페의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
푸른색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깜빡였다.
잠시 충격에 흔들리던 시선이 더듬더듬 사진 밑에 적혀져 있는 문구를 살폈다.
[당신이 사랑하는 순간을 간직하세요.]
그리고 그 문구 밑에는 또 하나의 사진이 있었다.
칼리오페가 입을 짹짹 벌려 당근을 먹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예쁘죠?”
말을 잊은 듯한 모습에 러그윈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아스타레아스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신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그의 얼굴에서 당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곧 평소와 같은 담담한 표정이 되었다. 다만 후, 하고 내뱉는 숨결에선 명백한 안도의 기색이 뚜렷이 배어 나왔다.
러그윈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련님이 이렇게 읽히다니……?’
그가 아는 도련님은 감정이 분명히 보이는 표정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거 일일이 보고하지 마.”
차가운 아스타레아스의 말에 러그윈은 속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아까 강아지 아가씨가 신문에 났다고 했을 때엔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셨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러그윈이 인사하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신문.”
아스타레아스의 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돌아보자 우아하게 브렉퍼스트 티를 한 모금 마신 아스타레아스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말을 마저 이었다.
“두고 가.”
“…….”
러그윈은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는 물러나며 무의식 중에 집은 신문이 들려 있었다.
“왜?”
러그윈의 얼굴을 본 아스타레아스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주인의 명에서 어떤 의도를 읽었더라도 말없이 따르는 게 바람직한 시종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러그윈은 바람직한 시종과 거리가 멀었다.
“강아지 아가씨 보려고 그러시는 거지요?”
느물느물한 웃음을 걸친 채 묻는 러그윈을 보고 아스타레아스가 미소 지었다. 여유로이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 그가 양쪽 팔꿈치를 팔걸이에 올리며 깍지꼈다.
세련된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과 부드럽게 휜 눈매를 보며 러그윈은 불안을 느꼈다.
“자꾸 네 본분을 잊는 것 같아, 러그윈.”
상냥한 목소리에 러그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인에게 참견하는 것은 물론 시종의 본분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참견에 관대했다. 성격이 좋다기보단 단순히 아무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은 결과였지만.
그래서 이런 지적을 받을 줄 몰랐다.
‘아니, 어쩌면 한마디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역시 그 강아지 아가씨가 관련되어서?’
요즘 자꾸 이런 식으로 선을 확실히 긋는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설마, 하고 부정했지만 모든 일이 그 꼬마 아가씨와 작거나 크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 아가—.”
“그 신문, 처음부터 내게 주려고 갖고 온 게 아니었어?”
아스타레아스의 물음에 러그윈은 입을 벌린 상태 그대로 멈췄다.
‘그 아가씨와 관련된 일에는 신중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아…….”
3초 후에 아스타레아스의 말을 이해한 러그윈이 애매한 탄식을 흘렸다.
매일 아침 도련님에게 신문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의 일과였다. 지금 역시 그 일과를 수행 중이었다. 그런데 신문을 도로 가져가려 했으니 본분을 잊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시종으로서 다소 껄렁한 면이 있다고 해도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은 처음이었다.
러그윈은 할 때는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고,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까다로우신 주인이 시건방진 자신을 곁에 두는 것도 모두 그를 웃도는 쓸모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긍지를 가졌다.
‘대체 왜 신문을 도로 가져가려 한 거지?’
그때 무슨 생각으로 움직였는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네,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러그윈이 허둥지둥 신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김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신문을 두고 가라고 했을 때 그 아가씨 사진 때문인 줄 알고 얼마나 설렜는데.
축 처져서 방을 나간 러그윈이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아스타레아스는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으로 당근을 꼭꼭 씹어먹는 칼리오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어서 어쩌자는 거야.’
아스타레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일그러진 눈동자가 고통으로 침잠했다.
그것도 잠시, 곧 그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위험을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차라리 이 편이 나은가.’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면 건들기 힘들어진다.
루스티첼 가는 사교계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카메라가 출시되고 나면 상류사회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재력까지 갖추게 될 것이다.
‘아마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사진 속의 칼리오페는 행복해 보였다.
흰 손가락이 보드라운 뺨을 덧그리며 쓰다듬었다.
행복이 옮듯 희미한 웃음이 아스타레아스의 입매를 물들였다.
* * *
“어머니!”
“응? 왜 그러니, 리페?”
자신의 딸답지 않은 큰 목소리에 루스티첼 부인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딸의 손에 꽉 들린 신문을 보고 무슨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
당차게 집무실에 들어오던 칼리오페는 어머니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종이 더미를 보고 멈칫했다.
저 양을 보니 어머니는 무척 바빠 보였다. 평소라면 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할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주춤거리는 마음을 다잡은 칼리오페가 척, 신문 속 사진을 가리켰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요?!”
루스티첼 부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칼리오페에게 다가왔다.
“잘 나왔지? 역시 우리 딸은 너무너무 귀여워.”
그 말과 함께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를 꼬옥 껴안고 부비부비 뺨을 비볐다.
‘으윽…….’
칼리오페의 전투력이 한풀 꺾였다. 쪽쪽 뺨에 입을 맞추는 걸 그대로 당하고 있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냐, 약해질 때가 아니야!’
꼬물꼬물 엄마 품에서 빠져나온 칼리오페가 다시 신문을 가리켰다.
“이렇게 신문에 제 사진을 실으시면 어떻게 해요. 제게 말씀도 하지 않으시구.”
루스티첼 부인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으음, 하지만 좋은 건 함께 나눠야 하니까…….”
자랑하고 싶었다.
“네에?”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는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더 난처해졌다.
“아니, 엄마도 이렇게 신문에 사진이 실릴 줄은 몰랐어.”
“모르셨다구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께서 진행하신 일인가?’
루스티첼 부인이 아니라면 이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루스티첼 백작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런 일을 어머니께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칼리오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카메라 회사 쪽에서 우리 리페 사진을 홍보용으로 쓰고 싶다고 했거든.”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칼리오페는 신문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홍보용으로 쓴다고 하고 정확한 사용처는 말하지도 않았다는 거지?’
그걸 꼼꼼하고 세심한 어머니가 허락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눈앞의 신문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걸 허락하셨어요?”
“으응…….”
루스티첼 부인이 답지 않게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떻게 쓰는지 묻지도 않으시구요?”
“음…….”
“이 사진만 허락하신 거지요?”
“너무 귀여운 사진이 많다 보니…….”
칼리오페는 뒷목이 띵해져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사용 기간은요?”
루스티첼 부인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사용료는—.”
루스티첼 부인의 표정을 본 칼리오페가 질문을 확정으로 바꿨다.
“……안 받으셨군요.”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편두통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는 쓰셨겠지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물었다.
하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침묵했고, 칼리오페 입에 걸렸던 미소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전혀 어머니답지 않아.’
전생에서 워낙 욕심이 없고 안전하게 가산을 운용했던지라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루스티첼 부인은 일 처리가 빠르고 섬세하고 정확했다.
한 번도 문제 된 적이 없었기에 가문이 몰락할 때에 충격이 더 컸다. 물론 그것 역시 거대한 음모 때문이었지, 루스티첼 부인과 관계없는 몰락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일을 처리하다니,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대체 어쩌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걱정이 가득한 칼리오페의 얼굴에 루스티첼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그 바람에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
차마 진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같이 있던 남편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카메라에 엄청난 만족을 한 루스티첼 부부는 카이논의 초대에 기쁘게 응했다. 카메라 예약 출시를 앞두고 축하하는 자리였다.
루스티첼 부부는 당연히 그간 찍은 사진을 들고 갔다.
칼리오페의 사진을 본 카이논을 비롯한 직원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며 동그래졌다. 그리고 모두 입을 모아 칼리오페를 칭찬했다.
어깨가 으쓱으쓱하고 과연 내 딸이다, 싶었다.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그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다 옳은 말이다 보니…….”
[이 귀여움은, 이 사랑스러움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알려야 해요! 전파해야 해요!]
[칼리오페 아가씨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맞아요! 그간 칼리오페 아가씨의 귀여움을 모르고 살았다니……. 저 너무 억울해요!]
정말 옳은 소리밖에 안 했다.
루스티첼 부부는 전혀 기분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청렴하고 절조 있는 삶을 살았었다. 술에 취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어쩌다 취해도 절대 그 순간의 흥에 도취해 어떤 일을 결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알코올보다 강했다. 너무나 쉽게 강직한 루스티첼 부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제대로 된 계약도 안 하는 사람들이 옳은 말을 했다구요?”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가 빤히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루스티첼 부인은 자신과 꼭 닮은 눈동자를 보며 진땀을 흘렸다.
‘마치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 사업에 빠진 사람을 보는 듯한 눈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착각일 것이다. 착각이어야만 했다.
‘우리 리페한테는 항상 멋진 엄마가 되고 싶은걸!’
루스티첼 부인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칼리오페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영지 예산을 책정하고, 영지를 관리하고, 투자처를 결정하고, 무역선의 선로를 선정하는 것이 낫겠어.’
칼리오페에게 멋진 엄마로 보일만 한 말을 고르는 게 평소 하는 업무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루스티첼 부인이 끙끙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들어왔다.
보좌관이 들고 있는 쟁반에 수북이 쌓인 종이를 보고 칼리오페는 아차, 했다.
“일이 많으신가요?”
걱정스러운 칼리오페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던 루스티첼 부인이 아, 하고 웃었다.
“한 번 읽어볼래?”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부인이 건넨 종이를 순순히 받아들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내게 보여주시는 거지?’
그리고 그 답은 종이에 적혀져 있었다.
[그렇게 어른스럽던 리페도 편식을 하나 보네요. 당근 들고 갈등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혹시 리페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딸기 타르트 말고도 궁금해요.]
[따님이 어쩜 그렇게 귀여운가요? 정말 좋으시겠어요. 저도 칼리오페 양 같은 딸이 갖고 싶네요. 저는 아들뿐이라서……. 아, 제 아들이 딱 따님 또래인데……. 기억하시죠? 다음 달에 생일인데 괜찮으시다면 따님과 함께 참석해주세요. 그간 서로 바쁘다 보니 왕래가 없었는데, 이 기회에 다시 교류가 활발해졌으면 좋겠어요.]
[카메라 투자에 대한 설명을 듣긴 했는데, 진작 투자할 걸 그랬어요. 그땐 별생각 없었거든요. 그런데 리페의 사진을 보니 이게 바로 그동안 제가 원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루스티첼 부인께선 어쩜 그렇게 안목이 좋으세요?]
[리페 사진을 보고 바로 예약했어요. 카메라가 오면 함께 피크닉을 가서 사진 찍는 건 어떤가요? 리페랑 저희 애랑 비슷한 드레스를 입히고 찍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정말 기대되네요.]
“…….”
대충 눈에 띄는 문구들이 다 그런 식이었다.
칼리오페는 현기증을 느꼈다.
“사람들이 정말 난리야.”
보좌관이 들고 온 종이는 모두 귀족들이 보낸 전보였고, 내용이 다 비슷비슷했다. 칼리오페는 더 읽기를 포기했다.
‘설마 책상 위에 쌓인 종이도 모두 다 이런 전보인가?’
차마 두려워서 묻지 못했다. 대답을 듣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했다.
탁탁탁, 전보를 정리해 책상 위에 올려둔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가요.”
“어디를?”
칼리오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카메라 회사에요.”
* * *
카메라 회사 니카이논의 사장, 카이논은 지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전보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리고, 직원들의 타이핑 소리가 다다다닥 오케스트라처럼 화려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비바체, 비바치시모, 포르테, 포르티시모, 볼란테! (vivace, vivacissimo, forte, fortissimo, volante!)
그야말로 곡은 절정부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정부에 걸맞게 이변이 생겼다.
“어머나……!”
갑자기 타이핑 소리가 일제히 잦아들더니 속닥속닥 크기를 낮춘 목소리가 대신 자리를 메웠다.
“세상에, 사진보다 더 예쁘잖아.”
“귀여우셔라…….”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칼리오페를 보며 저마다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쭉 핀 허리. 여기저기 둘러보지 않는, 세련된 시선 처리.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사뿐사뿐한 걸음걸이.
“너무 완벽해…….”
“정말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아…….”
“진짜 레이디는 저렇구나…….”
제게 부담스러우리만치 쏟아지는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칼리오페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실은 엄청 신경 쓰이고 부끄럽지만……! 오늘은 전투를 하려고 온 거니까!’
칼리오페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안내인이 채 사장실로 안내하기 전에, 사장실 문이 벌컥 급하게 열렸다.
“루스티첼 부인?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카이논이 허둥지둥 나오며 반갑게 루스티첼 부인을 맞았다. 그리고 루스티첼 부인의 옆에 있는 칼리오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카, 칼리오페 아가씨?!”
“안녕하세요, 미스터 카이논.”
칼리오페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카이논은 얼떨결에 그 손을 정중히 받치며 비단 장갑에 감싸인 손등에 키스했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나서야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손등 키스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칼리오페의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귀여운 꼬마 귀족 아가씨께 손등 키스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장난 반인 키스와 방금 것은 확연히 달랐다.
카이논은 뭔지 모르게 압도된 기분으로 루스티첼 부인과 칼리오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비서가 커피와 커피 쿠키, 그리고 칼리오페를 위한 꿀을 넣은 우유를 내왔다.
달칵이는 소리를 들으며 카이논은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자 차분히 칼리오페를 볼 여유가 생겼다.
‘사진이 잘 나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과 자신의 회사가 천재라서 그렇게 귀엽고 예쁜 사진이 나온 줄 알았다.
‘내 자만이었구먼.’
카이논은 습관적으로 이리저리 뻗은 곱슬머리를 헤집으려다가 아차, 하고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올려놨다. 손님이 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데, 의식하지 않으면 쉽지 않았다. 투자 설명을 할 때 말쑥한 척하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최대한 자세를 가다듬은 카이논이 칼리오페를 향해 인사했다.
“칼리오페 아가씨, 저는 카이논이라고 합니다. 직접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오늘 이 성공의 주역이자 최대 기여자가 바로 칼리오페 아가씨 아니겠습니까.”
카이논이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과분합니다. 카메라를 개발하신 분들이 오늘의 주역이자 최대 기여자라구 생각해요.”
칼리오페의 침정한 대답에 카이논이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러 신사 클럽에 투자를 받으러 다니면서 루스티첼 가의 꼬마 레이디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긴 했다. 소문엔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다.
카이논은 칼리오페의 일화에 놀리기보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더 신기해했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호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정말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루스티첼 부부와 만나 칼리오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어느 정도 감안해서 들었다. 본래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은 다 천재이고 최고인 법이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보니……. 내가 들은 일화들이 다 사실일지도 모르겠는걸?’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요. 하지만 이 성공에 날개를 달아주신 분은 분명 아가씨이십니다.”
그 말에 칼리오페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하하, 당연히 반갑지요. 물론 회사의 사장으로서도 반갑지만,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뵙고 싶었습니다. 칼리오페 아가씨의 사진을 보고 반했거든요.”
카이논이 너스레를 떨었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카이논은 카메라의 최대 효용을 ‘증거의 기록과 보존’으로 생각했다. 초점을 그렇게 맞췄기 때문에 투자를 받기 위해 돌아다닐 때도 보도 자료와 범죄 현장 보존을 예시로 들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사진을 보고 이런 가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카이논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예약 판매를 앞두고 투자자인 루스티첼 부부를 초대했던 날이었다.
다 같이 빙 둘러앉아 칼리오페의 사진을 보고, 이 사진을 찍었을 당시 있었던 일화를 들으며 무척 즐거웠다.
모두를 즐겁게, 행복하게 하는 카메라와 사진.
그런 걸 만들고 싶어졌다.
‘카메라가 아니라 다른 것들도.’
칼리오페의 사진은 마치 마법처럼, 루스티첼 부부를 언제든지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행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게 했다.
‘행복의 기록과 보존 그리고 확산.’
카메라를 개발하는 내내 생각하지 못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카이논이 많은 의미를 담아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칼리오페가 ‘흐음—’하고 비음을 흘렸다.
“의외네요. 저는 저를 피할 줄 알았거든요.”
“예?”
예상치 못한 말에 카이논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멋대로 제 사진을 사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셨잖아요.”
카이논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들은 말이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라고요……?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니카이논 사에서 제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해서 부당 이득을 취했다구 말했습니다.”
칼리오페의 어조는 산뜻해서 마치 봄바람이 귓가에 감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겨울 바람보다도 더 날카롭고 매서운 내용이 홀로 훈훈해하던 카이논의 마음을 꽁꽁 얼렸다.
그는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무슨……. 아니,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카이논의 허리춤에도 안 오는 어린애였다.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다르다고 느꼈지만서도……!’
이래도 되는가. 아니, 그 전에 가능한 것인가.
카이논은 눈앞의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달콤한 꿀 냄새 나는 우유를 호로록 마시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머리가 아득해진다. 인지 부조화가 일어날 것만 같다. 갑자기 담배가 간절해져서 손끝이 떨렸다. 그러나 칼리오페는 카이논이 정신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너무나 명백한데, 반갑게 맞아주셔서 놀랐습니다. 이렇게 맞아주시는 걸 보니 필시 이 일에 대한 해결방안을 마련해놓으신 거겠지요?”
방긋 새순같이 보드라운 웃음을 짓는 칼리오페를 보고 카이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해결방안이라는 소리에 이 상황을 겨우겨우 인지했다.
‘이러다간 한마디 항변도 못 하게 생겼어.’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인 카이논이 서둘러 변명했다.
“그 건은 칼리오페 아가씨의 부모님께 허락을…….”
“어머?”
칼리오페가 깜짝 놀란 듯,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신문에 실린 게 제 사진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 사진이었나요?”
답이 빤히 나와 있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의 의도가 너무나 명백해서 카이논은 끄응, 하고 침음을 삼켰다.
“물론 아가씨의 사진이니 아가씨께 허락을 구하는 게 옳지요.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아직 연유(年幼)하시다 보니 보호자인 부모님께서 대신…….”
“네, 제 부모님께서는 제 결정에 ‘동의’하실 수 있으시죠. 부모님께서 저를 대신해 ‘결정’하시는 게 아니라.”
칼리오페가 차이점을 강조하듯 동의와 결정에 또박또박 힘 주어 말했다. 카이논은 법제까지 꿰뚫고 있는 꼬마 아가씨의 모습에 이젠 웃음이 나왔다.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었다.
제국법에 따르면 부모나 후견인이 피보호자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없다. 특히 귀족의 경우는 보호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대부분이 본인이 직접 결정하고 난 뒤, 부모나 후견인이 동의하는 구조였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의 가문과 재산을 가로채는 일이 더러 일어나다 보니 생긴 법제였다.
즉, 칼리오페의 보호자인 루스티첼 부부가 허락했다고 해서 그녀의 사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순 없다.
‘그거야, 법으로 따지면 그렇긴 한데…….’
솔직히 부모에게 자식 사진 예쁘다고 하다가 쓰게 된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카이논은 제 곱슬 머리칼을 벅벅벅 헤집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제할 이성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거기까지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안일했다는 걸 인정했다.
지금 막 카메라가 예약 출시되는 상황이다 보니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었다. 애초에 사진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최초였다. 그래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초상화를 홍보용으로 신문에 실었다고 생각하면 아주 명확한 일인데…….’
자신의 불찰이었다.
“설령 저를 대리하실 수 있다고 해도, 부모님께 제 사진의 사용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셨나요?”
“그건…….”
말 안 했다.
출시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칼리오페의 사진을 보고 사용하고 싶어서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너무 예쁘길래 한 즉흥적인 결정이었던 만큼 어떻게 사용할지조차 결정 안 한 상태였다.
나중에 결정했을 때라도 알렸어야 하나 예약 출시를 앞두고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깜빡했다.
카이논은 루스티첼 부인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우아하게 커피 향을 즐기며 아주 재밌다는 눈으로 자신의 딸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설 생각이 없으시군. ……알고는 있었지만 이로써 확실해졌어. 부인께서 부추긴 일도 아니야.’
투자 건으로 몇 번 루스티첼 백작 내외와 만남을 가지며 카이논은 그들의 뛰어난 인품에 여러 번 감탄했다.
카메라 사업이 잘 되니까 딸을 앞세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받아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루스티첼 가에서 단독으로 투자한 사업이니만큼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니카이논의 성공은 곧 루스티첼 가의 이익과 맞닿아 있으니까.
좀 도와달라는 의미로 바라본 것이었는데 루스티첼 부인에겐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니, 저렇게 또박또박 말하는 칼리오페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눈에서 하트가 뿅뿅 튀어나왔다.
‘……팔불출인 것도 전부터 알고 있었지.’
카이논은 도움을 청하길 포기했다.
귀족들은 사업 감각을 키우기 위해 자식이 어릴 때 일부러 실수해도 괜찮은 작은 거래를 맡긴다더니, 그거인가 싶었다. 뭐, 이 경우는 거래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칼리오페 아가씨는 지나치게 어린 감이 있고.’
“사진의 사용처, 사용기한에 대해서 명시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진 역시 특정하지 않았지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카이논을 향해 칼리오페가 말했다. 그 명명백백한 사실 적시에 카이논은 얻어맞은 것처럼 뺨이 얼얼했다.
조목조목 늘어놓고 나니 자신이 정말 사기꾼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 말 못 하고 당하기만 할 순 없다.
“물론 그 점을 간과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저희도 기준이 있습니다. 루스티첼 백작 내외와 함께 봤던 사진으로—.”
“모호한 기준은 기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칼리오페가 단언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카이논은 자세를 바로 했다.
칼리오페를 향했을 때 저절로 풀어지던 입매가 진지하게 다물어지고, 눈빛이 선명해졌다.
여태까지 칼리오페가 하는 말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면서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이 일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오감 중 시각에 가장 많이 좌우되니까.
카이논은 칼리오페를 살폈다.
댕그란 산호빛 눈과 건강한 혈색이 도는 빵빵한 볼살. 이야기할 때마다 오물오물거리는, 버찌 같은 입술. 살짝살짝 움직이는 조가비 같은 작은 손.
정말 귀여운 아이지만 지금은 귀여워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회사 사장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상대해야 했다.
카이논은 카메라 개발 같은 일에선 뛰어났지만, 다소 어수룩한 면이 있었다. 그 때문에 카메라처럼 획기적인 물건을 개발하면서도 투자자를 찾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한 회사를 운영하는 자였고, 그것도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카이논은 사업가의 본능으로 알아봤다.
이 작은 꼬마 아가씨는 그냥 똑똑하고 남다르기만 한 ‘어린애’가 아니다. 날카로운 두뇌와 보드라운 혀를 가진, 타고난 협상가이자 사업가였다.
우습게 봤다간 이쪽이 잡아먹힐 것이다.
순식간에 사업가의 얼굴을 한 카이논이 변을 시작했다.
“칼리오페 아가씨, 구두라고는 하나 이미 아가씨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사안입니다. 아가씨의 허락이 아닌 것은 물론 문제지만, 이에 대해 지적하려면 허락해주신 루스티첼 백작 내외께도 책임이 있지요.”
부모님을 걸고 넘어지는 말에도 칼리오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는 허락 여부가 아니라 그 기준이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여유롭게 찌르는 말에 카이논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기준 이야기를 하면 이쪽이 변명할 말이 없다. 일부러 루스티첼 내외를 언급해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 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뭐가 가장 문제인지, 변명조차 할 수 없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니카이논은 루스티첼 가의 단독 투자를 받았습니다. 단독 투자인 만큼 아가씨의 사진을 사용해 저희가 얻은 이득은 곧 루스티첼 가에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한배를 탔다.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 카이논이 회사와 루스티첼 가의 관계에 호소했다.
칼리오페가 빙긋 웃었다.
“그럼 니카이논은 루스티첼 가의 회사인가요?”
카이논은 말문이 턱, 막혔다.
듣기에 따라서 굉장히 모욕적일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카이논은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벌컥 역성을 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어떤 맥락 속에서 나왔느냐에 따라서 속에 담고 있는 뜻은 천차만별이다.
칼리오페의 말은 니카이논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는 언사가 아니었다. ‘나의 이득은 곧 너의 이득’이라는 카이논의 주장이 가진 맹점을 정확히 찌르는 말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카이논은 칼리오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오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티첼 가가 니카이논에 단독 투자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밀접한 관계에 있지요. 미스터 카이논이 말씀하신 대로 니카이논의 이윤이 곧 루스티첼 가의 이윤이 되는 것은 맞습니다.”
카이논은 칼리오페가 다음에 할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말은 논리정연하게 하나의 포인트를 향해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니카이논이 루스티첼 가의 회사가 아니듯, 우리 가문의 것이 니카이논의 것이 될 순 없어요.”
칼리오페는 잠시 말을 끊고 카이논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간과했던 것, 그가 했던 말의 맹점을 정확하게 읊었다.
“니카이논의 수익이 우리 가문에 배당된다고 해서, 제게 지불해야 할 사진 사용료가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할 말이 없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카이논은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말이 모두 다 맞다고 인정하면 이후 대화의 고삐는 칼리오페가 잡게 된다.
‘지금도 솔직히 말해서 고삐를 나눠 잡고 있다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자신이 고삐를 잡아당기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칼리오페에게 가로막혔다. 칼리오페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다시피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고삐에 손만 얹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지라도 아예 손을 놓는 것과는 천차만별이다.
“아가씨 말이 모두 맞습니다.”
하지만 카이논은 고삐에서 깨끗이 손을 뗐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한 회사의 책임자로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끈덕지게 달라붙어 한 톨의 밀알만큼이라도 덜 손해 보는 방향으로 신경전을 벌여야 옳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건 칼리오페에게 그가 보내는 경의였다.
이 앙증맞고 깜찍한 꼬마 아가씨는 겉모습과 달리 노련한 사업가 같은 통찰력이 있었다.
이 경험이 나중에 칼리오페가 커서 하는 일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했다. 분명 엄청난 사업가가 될 것이다. 비단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칼리오페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거대한 성공을 거둔 사람으로서 감사이기도 했다.
“원래 지불해야 했던 사용료를 내지 않았으니 늦게라도 지불하는 게 옳겠지요.”
카이논이 진중하게 말했다.
칼리오페는 의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살풋 미소 지었다. 여태까지 카이논을 상대하면서 지었던 비즈니스 스마일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미소였다.
꽃망울이 움트는 것 같은 사랑스러운 아이의 미소에 카이논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들어줄 수 있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곧바로 무슨 미친 생각이냐고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순수하고 티 없는 미소였다.
“이렇게 인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칼리오페는 카이논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인정하더라도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 놓을 줄 알았다. 가격 협상을 위해서.
‘음, 깨끗이 물러났으니 내 정신적 충격과 가문에 미친 영향을 배상하라는 말은 그냥 하지 말고 넘어 가주자.’
사실 그 외에도 어떤 경로로 사진이 실리게 되었는지 알려지면 니카이논에도 그다지 좋지 않을 거라는 소소한 조언—절대 협박이 아니다—도 해줄 생각이었다.
카이논이 물고 늘어지지 않으니 칼리오페 역시 더 말을 보탤 이유가 없었다. 담백하게 인정하고 물러난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칼리오페는 전투를 하러 온 것이지 상대를 학살(?)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백기를 든 상대에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명백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몹시 추하지요. 아름답고 고귀한 레이디께 추한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군요.”
카이논의 농담에 칼리오페가 살짝 웃었다. 그가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칼리오페가 미소 지은 순간부터 분위기는 빠르게 누그러졌다.
카이논은 드디어 커피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결정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칼리오페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조건은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한,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의외의 말에 칼리오페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느긋하게 앉아 둘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던 루스티첼 부인 역시 놀라서 카이논을 바라봤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무게를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이 똑 닮은 모녀를 바라보며 카이논은 씨익 웃었다.
“대신…….”
항복과 패배는 같은 선상에 있지만 엄연히 차이가 있다.
카이논은 다른 조건을 모두 양보하고서라도 꼭 확답을 받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도 딱 한 가지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만 받아들여 주시면 다른 건 모두 아가씨 뜻대로 정하겠습니다.”
‘이대로 아가씨를 놓칠 순 없으니까. 꽉 잡아둬야 해!’
카이논의 눈이 반짝였다.
뭔지 모를 집념마저 느껴져서 칼리오페는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간 카이논의 어떤 대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굉장히 불안했다.
* * *
“막 예약 판매를 시작했는데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한 것 아닙니까.”
루스티첼 부인과 칼리오페가 돌아간 뒤, 비서가 카이논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래도 많이 벌었잖아. 생각 이상으로.”
“칼리오페 아가씨 사진을 쓰면서 원래 예상 판매량보다 두 배가량 많게 잡기까지 했는데……. 그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었지요.”
비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막 쓰면 안 됩니다.”
사무실이 모두 축제 분위기처럼 들떠 있는데 찬물을 끼얹긴 싫었다. 하지만 이런 상정 외의 큰 지출을 혼자 결정한 사장 놈에게는 찬물을 콸콸 들이부어야 했다.
“이 폭발적인 반응이 과연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신문 광고 효과로 한 순간 타오르고 푸시식 식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때 타고 남은 잿더미 위에서 망연자실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니카이논의 직원들이었다.
“아— 정말 냉정하네.”
갑자기 쏟아진 찬물에 카이논이 고개를 들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조금은 이 축제 분위기에 물들지 그래?”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 비서는 그를 무시한 채 테이블 위에 통신석 카탈로그를 올려놨다. 그리곤 엉망이 되어가는 카이논의 머리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또 손님 분들 앞에서 머리 긁적였습니까?”
“음…….”
카이논은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내쉰 비서가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더 있다간 답답함에 잔소리만 잔뜩 할 것 같았다.
“통신석 카탈로그에 괜찮은 제품 몇 개를 체크해놓았습니다. 보시고 결정하세요.”
“응, 고마워.”
카이논은 카탈로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고위 귀족을 응대할 때는 아무래도 통신석이 좋다 보니 비싸더라도 하나 정도 구비해놓을 생각이었다.
카메라를 처음 개발할 때 주고객층을 신문사나 수사기관으로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귀족을 대상으로 한 사업이 되었다. 귀족의 씀씀이를 생각했을 때 회사의 수익 측면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었다.
또한 귀족이라는 고객층이 새로 추가된 것이지, 기존에 생각했던 신문사나 수사기관의 수요가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정말 여러모로 잘 됐지. 다시 생각해도 칼리오페 아가씨를 놓치지 않길 잘했어.’
흐뭇함에 씨익 웃는데 지켜보던 비서가 제안했다.
“통신석을 사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요?”
“왜?”
“고위 귀족을 응대할 때 좋은 건 사실이지만, 지금도 딱히 불만은 없잖아요. 전보가 오면 바로 인편을 보내고 있고……. 언젠가는 구비해놓아야 할 테지만 지금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아, 이것 때문에? 더 이상 지출을 늘리지 말자고?”
카이논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종이 뭉치를 흔들었다. 칼리오페와 함께 작성한 계약서였다.
“네, 그렇게 큰 지출을 했으니 돈이 나가는 일을 줄이는 게 좋으니까요.”
“흠…….”
카이논은 고민에 빠졌다. 이왕 살 거니 빨리 사는 게 좋긴 하지만, 비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비서는 계약서에 적힌 칼리오페에게 줄 대금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은 물론, 사장인 카이논조차 만져보지 못한 액수였다.
아니, 카이논은 루스티첼 가에게 투자를 받을 때 ‘만져는’ 봤을 금액이다. 받은 대로 몽땅 개발비에 써서 손에 남은 게 하나도 없지만.
“사업이 잘 되고 있으니 지출이 느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규모의 지출은 수익이 안정되었을 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속적으로 매출 추이를 살펴보고, 평균 수익을 계산한 뒤, 예상 수익을 상정해서 계획적으로 지출해야 합니다.”
결국 잔소리가 튀어나갔다. 구구절절 옳은 말에 카이논은 입을 뻐끔뻐끔하다가 결국 한 마디 했다.
“너 그 꼬마 아가씨랑 잘 맞을 것 같아.”
“저도 사장님보단 그 아가씨와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지지 않고 답하는 모습에 카이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급자에게도 당당한 면이 좋아서 쓰고 있는 거지만, 함께 일한 시간이 얼마인데 이렇게 매정하면 상처 받는다.
“나도 그걸 몰라서 이런 위험한 결정을 한 게 아니야.”
결국 카이논은 통신석 카탈로그를 덮었다.
“비용이라는 건 돈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야. 루스티첼 가와 척지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돈을 아끼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야.”
카이논의 말에 비서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말씀하신 대로 비용이 돈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건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돈을 내지 않아도 루스티첼 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요?”
루스티첼 부인의 성품은 비서 또한 잘 알고 있다. 많은 돈을 낼 필요 없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솔직히 사진 사용료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돈이었다.
“자그마치 3억이에요, 3억! 그것도 계약금만! 3억으로 끝이 아니라 더 내야 한다구요!”
오늘 막 예약 판매를 시작한 차다. 당연히 3억이나 되는 현금이 있을 리가 없다. 카이논은 수표책에 금액을 써서 지불했다.
“이제 판매를 시작했는데 빚이 생기다니요!”
흥분한 비서와 달리 카이논은 느긋했다.
“괜찮아. 그 정도로 루스티첼 가…… 아니, 칼리오페 아가씨를 잡아둘 수 있으면 싸게 먹힌 거야.”
“무슨…….”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서는 미쳤냐는 뜻을 담아 카이논을 바라봤다.
카이논은 좀 어리숙한 면이 있지만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고집을 피우는 건지 모르겠다.
카이논이 어깨를 으쓱였다.
“있었던 일을 들으면 이해가 될걸? 너, 뭐든 들어준다는 내 말에 칼리오페 아가씨가 내건 조건에 대해서 못 들었지?”
3억이라는 금액은 칼리오페가 말한 액수가 아니었다.
“아가씨가 말한 조건은 돈이 아니야.”
3억은 칼리오페의 조건을 듣고 그가 스스로 책정한 금액이었다.
칼리오페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 * *
칼리오페는 우울한 눈으로 가족들을 둘러봤다.
가족들은 각자 저마다 신문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루시우스야 원래 신문을 읽었지만, 신문엔 통 관심이 없던 로베르트마저 신문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사각사각 가위로 신문을 오려내는 소리가 선명했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수심을 가득 묻힌 채 도로록 굴렀다. 그녀의 눈길이 멈춘 곳엔 스크랩 북이 놓여 있었다.
주먹만 한 모란에 코끝을 파묻고 있는 모습, 햇살이 눈 부셔 살짝 눈을 감은 모습, 책을 읽다가 루시우스에게 기대 잠든 모습. 활짝 펼쳐진 스크랩 북에는 신문에서 오린 자신의 사진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카메라 신문 광고는 계속되고 있는데 매일매일 새로운 칼리오페의 사진으로 홍보하는 중이었다. 카메라가 잘 팔리는 것은 물론, 신문 판매량마저 올라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서 칼리오페는 머리가 띵했다.
‘우리 가족은 다 좋은데 나에 관해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도 믿어버리는 게 조금…….’
다른 것도 아니고 광고 때문에 신문 판매량이 올라갔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유모가 칼리오페 앞으로 온 전보를 가져다 줬다.
읽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만 했다. 각오 없이 읽기엔 너무 지쳤다.
‘역시 그때 그냥 거절했어야 했나.’
카이논이 제시한 단 하나의 조건.
그건 바로 칼리오페가 니카이논의 전속 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을 촬영해주셨으면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하니 그건 나중에 하고……. 오늘 신문에 실린 사진처럼 원래 찍었던 사진이라도 쓰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늘 하루 신문에 실린 것으로도 그 난리가 났는데 계속 사진을 쓰겠다니.
[어머, 그럼 사진 고르는 건 엄마가 할래.]
어머니가 짝, 손뼉을 치며 말했고, 칼리오페는 신이 난 어머니를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도 애써 거절하려고 했다.
[이것만 허락하신다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거절의 기색을 읽은 카이논이 재빨리 미끼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솔직히, 굉장히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얼굴은 이미 전국에 팔렸고, 칼리오페가 카이논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다.
잠시 망설이던 칼리오페는 결국 자신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그럼 대외적으로 니카이논과 루스티첼 가의 투자 관계를 숨겨주세요.]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카이논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분명 돈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루스티첼 가에서 니카이논에 투자했다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으니……. 음, 그 투자는 일회성으로 니카이논에서 고이율의 채권을 발행한 것이라고 해요. 카메라 판매를 시작한 니카이논이 채권을 갚음으로써 관계가 끝났다고 알리면 좋겠군요.]
[예?]
카이논은 여전히 칼리오페의 말을 따라가지 못했다. 너무 걸리는 게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짜로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저 대외적으로 니카이논과 루스티첼 가의 재정적 연결고리를 없애달라는 것뿐이에요. 이후 관계는 단순히 니카이논 측에서 절 모델로 기용했다고 정리하는 게 좋겠어요.]
차분히 말을 마친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나요, 어머니?]
[후후, 우리 딸이 커가는 걸 보는 건데 괜찮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니? 항상 기쁠 뿐이지.]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의 포동한 뺨을 살짝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무엇을 위한 조건인지는 모르지만, 설령 실수를 하거나 루스티첼 가에 안 좋게 끝나더라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실수하는 것도 성장의 일환이니까.
그 끝을 알 수 없는 믿음과 사랑에 칼리오페는 가슴이 뭉클했다.
두 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그들만의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안 카이논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대체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니카이논의 성공이 명확한 시점에서 투자 관계를 숨기려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알리면 더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칼리오페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또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니카이논은 신문사와 기자를 고객으로 두게 되겠지요.]
카이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생각했던 주 고객층이 그쪽이었으니까. 신문에 카메라 광고를 실으면서 서로 좋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참이다.
[그분들과 관련해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도움이요?]
[기사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궁금해서요.]
잠깐 말을 끊은 칼리오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확히는…… 기사에 실을 수 없는 이야기 쪽일까요?]
카이논이 멈칫하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든요.]
[……재밌는 이야기 말입니까.]
[네.]
눈앞의 꼬마 아가씨의 속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건 벌써 깨달았지만, 이젠 가늠할 수조차 할 수 없었다.
칼리오페의 말로 인해 카이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지평이 훨씬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카메라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 카메라로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화시키자면 그렇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바라보는 ‘니카이논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달랐다.
‘신문사와 기자와의 관계를 통해 정보를 쥘 수 있다니……!’
불가능하지 않다.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았다.
신문사와 기자는 모두 카메라를 쓰게 될 것이고, 카메라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니카이논뿐이다. 자신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칼리오페가 바라보는 시야는 얼마나 드넓고 광활할까.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런 사람을 진짜 천재라고 하는 것이겠지.’
카이논도 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사람이었다. 느껴지는 격차에 웃음만 나왔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면 씁쓸할 것도 없이 기분 좋게 승복하게 된다.
[수사 기관의 이야기도 아가씨가 재밌어할 것 같습니다.]
카이논의 말에 칼리오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듣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네, 재밌을 것 같네요.]
카이논은 칼리오페가 왜 대외적으로 루스티첼 가와 니카이논과의 관계를 정리해달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의 유통경로를 추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카이논의 생각도 옳았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적’이 루스티첼 가의 투자처—니카이논—를 공격해 자금줄을 틀어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기를 생각할 때 아직 이르긴 하지만, 애먼 니카이논이 피해당할 가능성이 있는데 두고 볼 순 없었다.
카이논과 주고받은 말을 떠올리던 칼리오페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얻은 것을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야.’
그러니 후회는 없다.
그 생각과 달리 칼리오페는 후회 가득한 눈으로 루시우스를 바라봤다. 그는 굉장히 심각하고 진중한 얼굴로 오려낸 사진을 스크랩 북에 붙이고 있었다.
“……사진 갖고 계시면서 왜 신문을 오려서 붙이세요?”
결국 칼리오페는 묻고 말았다.
가족들이 하나같이 그러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루시우스는 말문이 막힌 듯이 칼리오페를 보더니 앨범에서 원본 사진을 꺼냈다.
“리페, 이거랑 이게 뭐가 같아?”
신문에서 오려낸 사진과 원본 사진을 흔들며 묻는다.
오른쪽에도 비눗방울을 부는 모습, 왼쪽에도 비눗방울을 부는 모습. 머리카락 한 올까지 같았다.
“……똑같은 것 같은데요…….”
자신 없이 대답한 것은 루시우스의 표정 때문이다.
‘자, 이렇게 같이 놓고 보니까 확실히 다르지?’ 하는 표정이었다.
“리페, 하아— 아니다…….”
루시우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첫째 오라버니가 자신을 이렇게 대한 것은 처음이라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뭐지? 저만 같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요?’
가족들을 둘러보는데 모두 다 루시우스에게 동감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칼리오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로베르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로벨 오라버니……!’
이해받는구나, 싶어서 칼리오페의 얼굴에 반가움이 퍼져나갔다. 로베르트는 위로하듯이 토닥토닥 칼리오페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괜찮아, 리페. 사람이 다 완벽할 순 없어. 모를 수도 있지. 우리 리페는 이런 점까지 귀여워.”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둘째 오라버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세상에서 가장 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칼리오페는 그 후 한참이나 원본 사진과 신문 사진을 바라봤지만, 차이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