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우리 사이는 아직 (10/41)

Chapter 9. 우리 사이는 아직

“이번 백룡 기사식에는 유독 사람이 많네요.”

“그러게요. 사교계에서도 보기 힘든 인사들도 많고.”

소곤소곤 들리는 말에 칼리오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룡 기사식은 사실 귀족들을 위한 이벤트라기보단 평민들을 위한 이벤트였다.

백룡 기사단은 무엇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고 권력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귀족이 아닌, 평민들을 위한 이벤트를 크게 여는 것이다.

[그 덕에 백성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지만 귀족들에겐 글쎄……. 다른 기사단에서는 의전용이라고 낮잡아 부르기도 하니까.]

저번에 호르세안에게 백룡 기사단에 관해 물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네 개의 용기사단 중 가장 명예직에 가깝다고나 할까. 백룡 기사단장이 가진 권한은 백룡 기사단에만 국한되거든. 다른 군사 권한은 하나도 없어.]

[그럼 당연히 권력자와는 거리가 머네요.]

다른 기사단장들이 모두 막대한 군사 권한을 쥐고 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한 것과 정반대다. 물론 단장을 포함해 단원의 신원까지 숨기는 흑룡 기사단은 경우가 다르다.

‘흑룡 기사단은 황제의 직속 친위기사단이니까. 흑룡 기사단이라는 이름보다 ‘황제의 그림자’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고.’

다들 ‘그림자’가 다른 용기사단보다 더한 권력을 손에 넣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다만 누구인지 모를 뿐.

[루스티첼 백작님께서는 더 많은 권한을 지닐 자격이 충분하신데…….]

[아버지께 야심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백룡 기사단장이 되지 않으셨겠지요.]

되었더라도 기사단장직을 발판처럼 위로 올라가는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황실 용기사단의 장은 최고위 계층에 문을 두드릴 자격이 충분하니까.

[명예가 높다 보니 종기사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많은 기사단이지만……. 모시는 기사들도 인격자고, 백룡 기사단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꽤 먹히거든.]

[그렇게 있어 보이는 명함을 달고 난 후, 다른 기사단에 들어간다는 거군요.]

[그렇지, 뭐.]

호르세안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칼리오페는 내심 이해되는 면이 있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돈과 권력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아니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짓밟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지만.’

자신 역시 짓밟힌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호르세안과의 대담으로 칼리오페는 자신의 위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명예는 충분하지만 권력은 없다. 그래서 가문의 명예를 추락시키는 데 그렇게 혈안이 되었던 거야.’

명예로운 기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 사람들이 루스티첼 백작의 죽음을 안타깝게 느껴서 루스티첼 가에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도 있다. 그걸 막기 위해 루스티첼 가가 보상금을 노리고 루스티첼 백작의 죽음을 조작한다는 말을 퍼트린 것이다.

‘청렴결백하고 명예로운 기사 가문의 본모습은 추악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는 건 꽤 잘 먹히는 스캔들이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무도 루스티첼 가를 도와주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호세 오라버니 빼고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로베르트의 말에 칼리오페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나저나 내년엔 로벨 오라버니께서도 백룡 기사식 준비를 돕겠네요.”

“응! 내년이면 드디어 입단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꼭 입단하실 수 있을 거예요.”

“당연하지!”

로베르트의 활기찬 답에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원래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백룡 기사식에 참석할 예정은 없었다.

‘루스 오라버니께서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 것도 백룡 기사식 이야기가 아니라 열심히 용돈 벌어서 저금통 사 주시겠다는 뜻이었고.’

아직 종기사인 그가 이런 행사에 전면으로 나설 수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나선다면 기사단장의 아들이 특혜를 받는 거라고 말이 돌았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공명정대한 아버지께서 절대 그럴 리 없지.’

그런데도 칼리오페가 예정을 바꿔 백룡 기사식에 참석한 이유는 간단했다.

[백룡 기사식에 리페도 오나요?]

그런 질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스티첼 부인은 ‘어떻게 할래? 리페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했다. 전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외출을 즐기지 않았던 성격 때문이니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좋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다가 요즘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 꽤 즐겁다고 생각한다.

“어머, 저길 봐요. 서모나 부인께서 참석하셨어요.”

“칸테나 부인과 로아힌 부인도 계시네요.”

백룡 기사식에 참석한 귀족들이 호화로운 인사에 감탄을 흘렸다.

“적룡 부기사단장이신 칸테나 부인께서 이런 자리에 참석하시다니 의외네요.”

“그러게요. 적룡 기사단은 다른 용기사단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적룡 기사단은 검기사단인 다른 기사단과 달리 마법기사단이다. 서로 은연중에 자신의 분야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 보니 적룡 기사단은 다른 기사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석에서야 어떨지 몰라도 이렇게 다른 용기사단의 기사식에 참석한 것은 화제가 될만했다.

“가서 인사라도 드려볼까요?”

대부분의 귀족들은 최고위 귀족들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때 안면을 튼다면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기실 오늘 고위 귀족들이 참석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는 귀부인들은 곧장 루스티첼 부인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루스티첼 부인. 안녕, 로벨, 리페.”

지켜보던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중 한 남자가 어렴풋이 건너건너 지인을 통해 최고위 귀족들이 루스티첼 가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속삭였다.

최고위 사교계의 일은 워낙 소문만 무성할 뿐, 아래까지 내려올 일이 없어서 진실인지 아닌지 헷갈렸었다.

“아무래도 진실에 가까운 듯하네요.”

“그건 두고 봐야 합죠.”

“그래, 그 ‘관심’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루스티첼 부인과 로베르트, 칼리오페가 일어나 귀부인들에게 마주 인사했다.

“리페는 오늘도 귀엽네.”

커다란 보닛을 쓰고 그 아래로 총총 땋은 머리를 동그랗게 말고 커다란 리본으로 묶은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감사합니다, 부인. 아, 힐데 오라버니도 안녕하세요.”

“안녕, 리페.”

힐데르트가 인사하며 로베르트가 맞잡은 칼리오페의 손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여기 자리 있나요?”

“어머, 부인을 위한 자리는 언제든 마련되어 있지요. 앉으세요.”

귀부인들이 모두 루스티첼 부인이 있던 테이블에 앉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속으로 후회했다.

‘루스티첼 부인 옆에 앉아있을걸!’

이름만 높을 뿐 실속은 없는 가문이라고 생각하고 다가가지 않았는데 오산이었다.

* * *

“어머, 서모나 부인.”

자리를 함께 한 귀부인들과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중에 한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누구지……?’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에 별로 남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 바셀로 부인, 안녕하세요?”

서모나 부인이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바셀로 부인?’

들어본 것도 같지만 기억에서 희미했다.

‘지방 영세 가문인 것 같은데……. 서모나 부인이 사가에 있을 적 친구인가?’

그러기엔 서모나 부인의 태도가 미묘했다. 서모나 부인은 여느 때처럼 친절한 웃음을 짓고 응대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 옅은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나를 대할 때와는 너무 달라.’

“어머나, 반지를 벗어놓고 깜빡했네. 힐데, 엄마를 위해 마차에서 반지 좀 가져와 줄래? 사람이 많아서 메이드에게 부탁하기 미안하네.”

“네, 어머니.”

힐데르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들어줄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들어주자 서모나 부인은 새삼 감동했다.

‘역시 리페가 최고야.’

하지만 지금은 기쁨을 만끽할 때가 아니다. 서모나 부인은 임전 태세를 갖추고 바셀로 부인을 바라봤다. 아들을 보낸 건 눈앞의 사람이 어디까지 질이 낮아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서모나 부인과 바셀로 부인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칼리오페는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슷한 수준이던 친구가 대명문가의 안주인이 될 때, 모든 사람이 축하해 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열등감을 내비치며 시기할 수 있다.

과거 칼리오페는 누구든 당연히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서모나 부인이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성격도 아니고, 단순하게 운이 좋아서 한순간에 신분 상승했다기엔 아프락스 궁에서 일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인데…….’

칼리오페가 서모나 부인을 처음 만났던 곳은 메일린 자작 부인의 티파티였다.

서모나 부인은 친구인 메일린 부인을 위해 기꺼이 모습을 드러냈고, 초대 받은 부인들과도 벽을 세우는 일 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런 서모나 부인을 시기하다니 어지간히 꼬인 사람인가 보네.’

결론을 내린 칼리오페는 더 이상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런 성향의 사람과 엮여봐야 좋을 일 하나 없다.

그 결심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바셀로 부인이 칼리오페에게 관심을 보였다.

“어머, 이 아이가 바로 그 칼리오페인가요?”

“아, 안녕하세요, 바셀로 부인.”

칼리오페는 난감함을 감추며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긴 아이는 처음 봐요. 우리 크레틴이랑도 비슷한 나잇대인데,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크레틴?’

익숙한 이름에 칼리오페가 움찔 했다.

‘설마 크레티안느 피엔테? 아니겠지, 바셀로 부인의 딸이라면 성이 다르니까.’

워낙 드문 이름이라서 순간적으로 생각났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연관되어있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케케묵은 기억의 저층에서 수북이 쌓인 먼지 사이로 무언가가 언뜻언뜻 보일락말락 한 감각.

그 의문을 해결하듯이 칸테나 부인이 끼어들었다.

“누가 보면 크레틴이 남작 부인의 따님인 줄 알겠습니다.”

뾰족한 말에 바셀로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일부러 가문 이름을 말하지 않고, ‘남작’이라는 작위를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확실했다.

‘원래 칸테나 부인은 이런 성격이셨지.’

저번에 자신을 만났을 때가 묘하게 친절했을 뿐, 기본적으로 까칠하고 다혈질이다.

‘그만큼 정이 많기도 하시지만.’

“칸테나 부인, 크레틴은 제 하나뿐인 조카이니 당연히 저는 딸처럼 여기고 있답니다.”

“오촌 조카겠지요. 사촌의 딸이니.”

“칸테나 부인께서는 연구에만 매진하느라 그런 가족 간의 정은 잘 모르시나 보네요.”

바셀로 부인의 공격에 칼리오페는 속으로 감탄했다.

칸테나 부인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용감한 걸까, 무식한 걸까. 그도 아니면…….

‘피엔테 후작가를 믿는 걸까.’

그러나 명문 대귀족가는 혈족에게 한없이 관대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엄격하기도 하다. 무엇을 해도 신경 쓰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정한 선을 넘으면 그대로 잘라낸다.

그리고 이 경우는 ‘엄격할’ 경우다.

사별한 아내의 사촌이 저지른 잘못으로 칸테나 가와 사이가 틀어진다면 피엔테 후작이 그냥 보아 넘길 리 없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다면 다르겠지만.’

“그만하시지요, 바셀로 부인. 오늘은 좋은 날 아닌가요?”

가만히 상황을 보던 로아힌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 저는 간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워서 인사하러 온 것뿐이랍니다.”

그렇게 답한 바셀로 부인이 서모나 부인을 힐끔 쳐다보곤 이어 말했다.

“서모나 부인께서도 정말 과거와 많이 달라지셨지요. 지금은 이렇게 어엿한 대명문가의 안주인이 되셨으니.”

“칭찬 감사합니다, 바셀로 부인. 과거의 저는 어엿한 아프락스 궁의 재원이었고 지금은 어엿한 후작가의 안주인이지요.”

서모나 부인이 싱긋 웃으며 답하자 바셀로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모습이 통쾌하다는 듯이 칸테나 부인이 덧붙여 말했다.

“바셀로 부인도 과거와 달라지셨지요. 저희가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사이는 결코 아니었으니까요.”

“네, 달라졌지요. 앞으로도 달라질 겁니다.”

입술을 꽉 깨문 바셀로 부인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줘 말했다. ‘서모나 부인도 달라졌는데, 왜 나는 안돼?’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칼리오페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서모나 부인을 시기하는 적의가 서모나 부인과 친한 귀부인들에게까지 확대된 건 알겠다.

‘하지만 이래서는 본인만 손해인데.’

“바셀로 부인, 피엔테 대부인께 크레틴의 교육을 일임받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서모나 부인의 말에 바셀로 부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크레틴이 워낙 저를 잘 따라서요. 교육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잃은 그 불쌍한 아이에게 대신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인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닙니다.”

“질서를…… 어지럽힌다고요?”

바셀로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서모나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로아힌 부인이 입을 열었다.

“바셀로 남작 부인, 제가 부인께 예의를 지키는 건 어디까지나 피엔테 가와의 인연 때문입니다.”

“하, 그러시겠죠.”

“그리고 부인이 무례할수록 그 인연은 옅어지고 있어요. 아니, 피엔테 가에서 언제까지 부인의 방만함을 묵인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부인들의 생각은 잘 알고 있어요.”

바셀로 부인이 로아힌 부인의 말을 끊어내듯 강하게 말했다. 그녀는 무례에 희게 질린 귀부인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며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밑에 있던 사람이 올라오는 게 싫은 것이 아니죠.”

“뭐라고요?”

“서모나 부인이 저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흘렸을지 알아요. 그래서 그렇게 싫어하고 경계하는 것이겠지요.”

“서모나 부인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 능력이 무서운 거죠. 저처럼 뛰어난 사람이 올라오는 게 싫은 거예요. 자기자리를 뺏길까 봐.”

바셀로 부인이 팔짱을 턱, 끼더니 루스티첼 부인을 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루스티첼 부인은 그냥 잘 받아 주잖아요.”

‘……뭐라고?’

갑자기 어머니를 걸고넘어지자 칼리오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좋게 말해 루스티첼 가는 내실이 탄탄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그냥 안전하게만 가는 거죠. 그걸 누가 못해요?”

“바셀로 부인, 생각하고 말하세요.”

그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서모나 부인이 굳은 얼굴로 경고했다. 하지만 바셀로 부인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루스티첼 가를 헐뜯기 시작했다.

“이번에 뭐 베이비 살롱인지 뭔지를 만들어서 호평받았다던데……. 솔직히 애들 장난 수준밖에 안 되죠. 루스티첼 백작께서는 백룡 기사단장이라고 하지만 권력과는 가장 거리가 멀고. 이름뿐인 자리 아닌가요?”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까부터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칼리오페는 떨리는 주먹을 보고 치맛자락에 숨겼다.

‘이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야.’

전생에 당했던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가 냉정해졌다. 떨림도 가라앉고 분노도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우습게 보고 받아 준 거죠? 같은 그룹에 들여서 자신들을 떠받들어 줄 시녀가 필요하니까.”

그때까지도 바셀로 부인의 폭언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됐다.

“하지만 나는 다르죠. 차기 피엔테 후작이 될 크레틴이 엄마처럼 따르고, 과단성 있는 투자를 해서 성공했지요. 예전엔 저도 아프락스 궁에 들어갈 뻔했어요. 서모나 부인이 뒤에서 술수만 부리지 않았다면 분명 들어갔을 거라고요.”

‘아, 생각났다.’

칼리오페는 바셀로 부인을 빤히 쳐다봤다.

‘바셀로 부인이 아니라 하이네헴 백작으로 불렸어.’

아마 몇 년 후면 하이네헴 백작이 될 것이다. 지금 남편을 죽이고 늙은 백작과 재혼해 그 백작과 후계마저 죽여서.

그리고 백작이 된 그녀는 피엔테 후작가를 등에 업고 정·재계를 휩쓴다.

바셀로 부인의 과거사는 나중에야 밝혀지고, 그녀는 처형당한다.

‘그래, 본인 말대로 정말 과단성 있는 사람이네.’

칼리오페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 소리에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서모나 부인께서 술수를 부리셨다구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아이의 모습에 바셀로 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에 대한 책임, 질 수 있으신가요?”

“얘야, 어른들이 말하는 데 끼어드는 것 아니란다.”

바셀로 부인이 위압적으로 말했지만 칼리오페의 미소는 더 깊어질 뿐이었다.

“제 말에 대답 못 하시네요.”

칼리오페가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에 바셀로 부인은 더 기가 막혔다.

“과단성 있는 사업 투자라……. 저는 아직 공부가 부족한가 봐요. ‘과단성’이라는 뜻을 잘못 알고 있었어요.”

‘이건 말해도 괜찮아.’

칼리오페는 속으로 시기를 계산했다.

바셀로 부인의 살인죄가 밝혀지면서 과거에 그녀가 저질렀던 경제범죄 역시 재조명됐다. 사실은 범죄 발생 당시에 고소를 접수했고 혐의도 있었지만 조사가 안 이뤄졌다는 게 밝혀졌다. 어느 순간 접수된 고소가 취하되었다는 것도.

‘이미 고소했을 시기야. 누군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칼리오페가 의자에 깊게 기대며 양손 끝을 맞대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그 여유 넘치는 태도가 묘한 위화감을 발휘했고, 그 위화감은 위압감이 되었다.

칼리오페가 생긋 웃었다.

“과단성의 뜻은 경쟁업체의 자금줄을 막고, 위장 취업을 시켜 사업기밀을 빼 오고, 생산 설비에 오작동을 일으켜 납품 기일을 못 맞추게 하는 건가 봐요.”

“무, 뭐라고?!”

바셀로 부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는 그런 뜻인지도 모르구 좋은 뜻인지 알았지 뭐예요? 앞으로 주의해야겠습니다.”

산뜻한 얼굴로 말을 끝마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바셀로 부인은 패닉에 빠졌다.

‘어떻게?! 어디서 새어나간 거지? 분명 덮어주겠다고 했는데…….’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귀부인들이 모여있는 자리다. 여기서 이 일이 일파만파 퍼지면 피엔테 가에서 자신을 잘라낼지도 모른다.

바셀로 부인의 눈동자가 폭풍 속 조각배처럼 떨렸다.

“너,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주제도 모르는 어린 게 어디서 감히 나를 모욕해! 너, 그 말 누구한테 들었어?!”

흥분한 바셀로 부인이 칼리오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즉시 루스티첼 부인이 보호하듯 딸아이를 감싸며 앞을 막아섰다.

“제 아이에게 손대지 마세요.”

“아줌마, 지금 설마 내 동생한테 소리치는 거 아니지?”

눈앞에서 귀부인들이 언쟁할 때조차 말랑하게 풀린 얼굴로 주변을 구경하던 로베르트가 한순간에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어린 소년의 눈빛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다.

루스티첼 가의 둘째는 첫째와 달리 백작을 닮지 않아 몰랑몰랑하다더니, 전혀 아니었다.

바셀로 부인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그 다음엔 오히려 진정했다. 이렇게 칼리오페를 감싸고 보호하는 두 사람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래, 제 새끼는 귀한 법이야. 크레틴이 있는 한 피엔테 후작이 나를 그렇게 쉽게 버리진 않을 거야.’

바셀로 부인은 패닉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사교계에서 조금 무례하고 주제 모르는 부인으로 여겨지는 것쯤은 상관없다. 눈앞의 귀부인들 정도가 아니면 그 누구도 피엔테 후작가를 등에 업은 자신을 무례하다 지적하지 못했다.

무례한 행동에도 제 비위를 맞추는 귀족들을 볼 때의 쾌감이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을 테다.

그 귀족들 대다수가 본래 자신과 이야기도 나누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지방 영세 가문의 남작 부인인 자신은 절대 진입할 수 없었던 중앙 사교계.

그런데 보라. 지금은 그 중앙 사교계에서도 가까이 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최고위 가문의 귀부인들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 역시 자신의 무례에 까칠하게 굴지만 어쨌든 바로 축객령을 내리지 못하지 않는가?

무례해도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자신은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왜 굳이 예의를 차리겠는가.

바셀로 부인은 무례하게 행동하며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며 희열을 느꼈다.

또, 그녀에게 무례한 행동은 하나의 전략이기도 했다. 누구나 한 수 접어준다는 최고위 가문의 귀부인들에게 대놓고 대항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례한 사람으로 끝나야지, 아이를 때리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돼.’

특히 바로 얼마 전에 브리젤 가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아동학대 관해선 예민했다.

결코, 아이에게 해코지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무엇보다 피엔테 후작이 그런 소문을 접하면 나를 잘라낼지 모르니까.’

생각을 정리한 바셀로 부인은 허리를 쭉 펴고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칼리오페가 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을 겪은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루스티첼 부인께서 예민해지신 것 같네요.”

얼굴에서 감정을 갈무리한 그녀가 침착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아이를 때리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제대로 물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 했을 뿐이에요.”

실제로 한 발짝 떼었을 뿐이다. 또한, 그녀는 정말로 칼리오페를 때리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패닉에 빠졌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이를 때릴 정도로 정신을 놓진 않았다.

바셀로 부인은 귀를 곤두세워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얼핏 수긍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그녀는 기세등등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건 칼리오페인데, 애를 혼내야죠. 왜 제게 화를 내시나요?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 반응하시다니 정말 불쾌하네요. 저를 어떻게 보시고…….”

“아줌마가 내 동생한테 소리친 거 맞잖아?”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바셀로 부인을 보고 그가 재차 말했다.

“아줌마가 내 동생 위협한 거잖아.”

“아니, 위협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손이라도 올린 줄—.”

“리페가 얼마 전에 겪은 일도 안다며. 그런데도 소리 지른 거잖아. 그거 위협 아니야?”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 바셀로 부인을 쳐다본 로베르트가 “몰라도 리페한테 소리 지르면 안 되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로벨 오라버니, 저는 괜찮아요.”

칼리오페가 작게 미소 지으며 로베르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마안 저 아줌마가—.”

“정말 괜찮아요.”

빙긋 웃은 칼리오페가 덧붙여 말했다.

“원래 사람들은 정곡을 찔리면 공격적이게 된다고 하더라구요. 책에서 읽구 알고 있었는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정곡을 찌른 제 탓도 있어요.”

“뭐……?!”

바셀로 부인은 완전히 어린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이걸로 자신이 화를 내거나 칼리오페를 비롯한 루스티첼 가를 비난하면 ‘정곡을 찔려서’ 그런 게 된다.

‘루스티첼 부인에게 불쾌하다고 물고 늘어져서 논점을 흐릴 생각이었는데……. 저런 말을 하면 못하게 되잖아!’

정말 칼리오페를 때리려고 했던 게 찔려서 화를 내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칼리오페에게 더 이상 캐물을 수 없게 됐어.’

어디서 누구에게 어디까지 들었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다 토해내게 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어.’

어린애 주제에 저 한마디로 자신의 계획을 차단하고 행동의 폭을 제한했다.

‘우연인가? 아니면…….’

바셀로 부인은 눈빛을 가라앉힌 채 칼리오페를 내려다봤다.

‘설마,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렇게 어린애인데. 좀 맹랑할 뿐, 계산한 건 아니겠지.’

정보를 캐물을 순 없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칼리오페, 너에 대한 소문은 들었단다.”

차라리 울려서 어린애의 말은 감정적이고 신뢰할 수 없다는 인상을 주는 게 나을 듯했다.

“조금 똑똑하다고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 아주 세상이 자기 것 같은가 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은 함부로 지어내는 게 아니란다. 어린애가 못된 습관이 들어서 거짓말만 하고. 원래 그렇게 못돼 먹은 거니, 아님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어?”

“바셀로 부인!”

귀부인들이 힐난조로 바셀로 부인을 불렀다.

“왜요? 애가 잘못했으면 혼내야 한다고요. 그게 올바른 훈육이에요.”

바셀로 부인의 뻔뻔한 말에 귀부인들은 기가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럼 어른이 잘못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역시 감옥행?”

질척이는 침묵 사이로 칼리오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고개를 갸웃한 칼리오페가 바셀로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 어른이 법망을 피해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땐—.”

칼리오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혼나는 건가요?”

“윽…….”

순간적으로 주춤한 자신이 믿기지 않아서 바셀로 부인은 주먹을 꽉 쥐고 버텨 섰다.

‘뭐지?’

순간적으로 칼리오페의 주변이 일렁이듯 어그러져 보였다.

목덜미에 닿는 바람이 스산했다. 바셀로 부인은 뒤늦게 자신이 식은땀을 흘렸다는 걸 깨달았다.

칼리오페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나부꼈다.

바셀로 부인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분위기가 왜 이러지?”

뻑뻑한 침묵 사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힐데르트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칼리오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힐데르트 옆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이곳에 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

햇빛에 반사된 눈처럼 빛나는 머리칼, 가장 맑은 수원처럼 청명한 눈동자.

‘카스틸로 공자?’

칼리오페의 산호빛 눈동자와 카스틸로 공자의 새파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칼리오페는 일순 호흡을 멈췄다.

한순간에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피비린내가 나던 전장.

죽은 자는 말이 없었기에 고요했다.

칼리오페는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주저 없이 그 참상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핏물이 흰 발목을 더럽히고 악취가 연약한 몸에 스며도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발걸음과 피 웅덩이가 만들어내는 찰박이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그토록 가볍게 울릴 수 없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기사 둘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칼리오페는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온통 시뻘건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호수처럼 청명한 색이었다.

그리고 칼리오페는 최초로 죽음을 예감했다.

* * *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카스틸로 공자였다. 칼리오페는 그제야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던 세계에 다시 소음이 섞여든다.

쿵쿵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귓가를 스치는 바람, 아까보다 더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세상에, 황자님께서…….”

“아, 듣던 것보다 훨씬 선황 폐하를…….”

“쉿, 경을 치려고 그러세요?”

“모두 입을 조심하시게.”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카스틸로 공자님, 안녕하세요.”

바셀로 부인이 카스틸로 공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의를 차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카스틸로 공자와 연을 이으려고 안달 난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흐음, 이게 바로 ‘그 공자’라는 거지.’

바셀로 부인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카스틸로 공자는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모나 부인을 향해 사르르 미소 지었다.

“서모나 부인.”

“오랜만입니다, 레아스 공자님.”

서모나 부인이 인사하자 다른 귀부인들도 얼른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공자님.”

“기사식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적룡 기사식에도 와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칸테나 부인의 말에 카스틸로 공자가 눈을 나붓하게 휘었다.

그게 대답의 전부였다.

여전히 상냥하고 친절한 공자님이지만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이 느껴진다.

칸테나 부인의 다혈질마저 카스틸로 공자 앞에선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마주 미소 짓는 것으로 이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셨습니까. 분위기가 ……묘하던데.”

마지막 말을 할 때 카스틸로 공자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아, 별일 아니었습니다.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에 지루해진 아이가 끼어드는 바람에 분위기를 망쳤을 뿐이에요.”

바셀로 부인이 냉큼 끼어들어 답했다.

그제야 카스틸로 공자는 바셀로 부인을 바라봤다. 그의 입가엔 진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부인.”

“네, 공자님.”

바셀로 부인이 마주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카스틸로 공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바셀로 부인의 입매가 점점 어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눈만 마주친 채 있기 불편했다.

“어떤가요?”

카스틸로 공자가 더 깊게 웃으며 물었다.

반사적으로 바셀로 부인의 입꼬리 역시 더 올라갔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서 바셀로 부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굴렸다.

“어떤 걸 물으시는지…….”

“이상하단 표정이네요.”

“…….”

“대화에 원치 않는 사람이 끼어들었을 때 분위기가 이렇게 되지요. 이런 분위기를 말씀하시는 건가 해서요.”

카스틸로 공자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말했다.

그 달콤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에 바셀로 부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그러니까 내가 끼어들어서 분위기 망쳤다는 거야?!’

손끝이 떨려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감히 끼어들다니 불쾌하다고 대놓고 말하거나, 아예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 모멸감이 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카스틸로 공자의 미소에 마주 미소 지으며, 어색함에 내려가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바보가 된 기분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나저나…… 대화에 끼어들다니 정말 참을성이 없는 아이였겠군요, 부인.”

카스틸로 공자의 말에 바셀로 부인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진 내게 모멸감을 줬으면서 지금은 왜 내 편을 드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바셀로 부인의 반응에 칼리오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지금 끼어드는 사람이 참을성 없다는 걸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건데, 그걸 못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다니…….’

물론 끼어든 사람은 바로 바셀로 부인을 뜻하는 거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칼리오페는 힐끗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우아하고 섬세한 외양처럼 그는 우아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곤란하셨겠어요.”

카스틸로 공자가 웃으며 바셀로 부인을 바라봤다.

바셀로 부인은 눈을 깜빡였다.

소년은 어린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긴 눈매 위로 드리운 속눈썹이 미려한 음영을 만들고, 그늘진 깊은 눈에서 파라이바 결정 같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아, 맞아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바셀로 부인이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무슨 꿍꿍이인지 파헤칠 생각을 해야 하는데 홀려서 고개부터 끄덕이다니.

‘아니, 가만. 내 말에 동의하는 것뿐인데 무슨 꿍꿍이랄 게 있을까?’

그것과 이건 별개일 수도 있다.

바셀로 부인은 다시 한 번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햇살이 매끄러운 머리칼을 타고 내려오며 소년의 뺨을 정결하게 물들였다.

‘그래, 카스틸로 공자는 다른 어린애들과는 달라. 그러니 경우 없이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드는 또래를 더 싫어할 수 있어. 또래라는 이유로 한 데 묶여서 같은 취급 받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여기 있는 귀부인들 모두 카스틸로 공자에겐 한 수 접어준다. 카스틸로 공자가 제 편을 들어주면 저 재수 없는 꼬맹이를 납작 눌러줄 수 있겠다 싶었다.

“정말, 모든 아이가 공자님처럼 어른스러우면 참 좋겠는데요. 그렇지 못하니……. 하긴,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지요. 소문이 무성할 때부터 알아봤답니다.”

바셀로 부인이 칼리오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레아스 공자님, 그게 아니라……. 바셀로 부인이 먼저 루스티첼 부인을 모욕하고 무례하게 굴었어요.”

서모나 부인이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지적에도 카스틸로 공자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네, 서모나 부인의 말씀이 옳아요. 그래서 리페가 대화에 끼어든 것입니다.”

“그런 일로 아이가 끼어들게 만들다니, 저희가 오히려 부끄럽네요.”

귀부인들이 너도 나도 칼리오페의 상황을 대변해주었다.

“바셀로 부인은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나요?”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데다가 제 허물을 어린아이에게 덮어씌우다니…….”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요.”

“정말……. 일부러 카스틸로 공자님이 오해하도록 말하다니, 어떻게 보면 참 바셀로 부인답지만요.”

칸테나 부인이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

다른 귀부인들은 칸테나 부인에게 말로 드러내어 동의하진 않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봤다. 여러 말보다 확실한 동조의 표시였다.

칸테나 부인의 말은 구경꾼들 사이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생각해보니 좀 그러네. 공자님한테 잘 보이려고 자기가 한 말 덮어씌운 거잖소.”

“아무리 공자님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 해도 그렇지. 뻔히 다 보고 있는데 어린애 잘못으로 돌리다니.”

“그 어떤 가문의 귀부인이 와도 굽히지 않는 척하더니 공자님한테는 잘 보이고 싶나 보죠.”

“결국 똑같으면서 그렇게 잘난 척한 거군.”

주변에서 이쪽을 살피던 사람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들렸다.

모두 한 목소리로 자신을 비난하는 상황에 바셀로 부인은 당황했다. 심지어 그녀가 온갖 사람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쌓아온 이득까지도 없어지려 했다.

무례하게 굴고 싶어서 무례하게 행동한 거지만, 거기에 수반되는 메리트 역시 중요했다.

오만방자하다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 어떤 권력자에게도 똑같이 행동하는 모습에 하위 가문 사람들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권력에 굽히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권력에 맞서 싸운다고 멋대로 착각한다.

바셀로 부인으로선 정말 고마운 착각이었다. 물론 속으론 멍청한 사람들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런데 지금, 그녀 역시 권력자 앞에서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되었다. 여태까지 무례하게 행동한 것은 피엔테 후작의 권력을 등에 업어서일 뿐.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엔 그녀도 똑같다고,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라?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카스틸로 공자의 조력으로 저 시건방진 꼬마 계집을 혼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 어린 시선과 힐난.

거기다 여태까지 쌓아왔던 메리트조차 사라지고 있다.

‘나는 카스틸로 공자에게 잘 보일 생각도 없었는데?! 서모나 부인이 괜히 칼리오페 편을 들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서모나 부인을 노려보려는 순간, 시선 끝에 무언가 걸렸다.

붉은 입술을 길게 늘인 채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카스틸로 공자.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매를 휘며 웃었다.

‘설마…….’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카스틸로 공자가 눈을 깜빡였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긴 속눈썹이 사붓하게 움직였다.

그 연약한 움직임과 달리 그의 얼굴은 포식한 맹수처럼 흡족해 보였다.

* * *

“올해 백룡 기사식에는 보기 드문 명사들께서 오신다고 해서 와봤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요. 더 볼 것도 없겠어요. 저는 이만.”

바셀로 부인은 그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발걸음과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치욕감이 가득했다.

“정말, 피엔테 후작가를 믿고 바셀로 부인의 방자함이 나날이 도를 넘는군요.”

부채를 거칠게 핀 로아힌 부인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지금 피엔테 후작가는 명실공히 황제 폐하의 최측근이니까.”

“정말, 이래서 저희가 그렇게…… 아.”

이쪽으로 시선을 준 칸테나 부인이 말을 멈췄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들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 난감한 정도가 아닌데…….’

그보다는 낭패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칸테나 부인의 시선을 쫓았다. 칸테나 부인은 정확하게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칼리오페가 자세히 표정을 읽으려는 순간, 카스틸로 공자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귀부인들께서 편히 이야기 나누실 수 있도록 저희는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아……. 공자님.”

칸테나 부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카스틸로 공자를 불렀다. 하지만 서모나 부인이 그녀를 만류하며 카스틸로 공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레아스 공자님. 마침 저쪽에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괜찮을 것 같아요.”

서모나 부인이 가리킨 방향엔 아이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꾸며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좌석에 올망졸망하게 모여있는 아이들을 바라본 카스틸로 공자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가끔은 또래들과도 어울리셔야지요.”

그 말에 카스틸로 공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귀부인의 조언대로.”

서모나 부인을 일별한 카스틸로 공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으음, 편히 이야기 나누도록 배려해서 자리를 옮긴다는 느낌이 아닌걸? 오히려 본인이 귀부인들과 어울리기 싫다는 느낌인데.’

칸테나 부인이 마치 실수라도 했다는 듯이 카스틸로 공자를 부른 것도 그렇다.

칼리오페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힐데르트가 그녀를 불렀다.

“리페도 같이 가자.”

“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른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을지 궁금한데…….’

힐끗 귀부인들을 바라봤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카스틸로 공자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좋아요.”

칼리오페의 대답에 힐데르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크흠, 하고 헛기침한 그가 은근슬쩍 손을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 손을 맞잡았다.

처음으로 모임에 외출했을 땐 여장한 유리안이 손 잡는 것도 신경 썼는데, 어린아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꽤 타인과의 접촉에 익숙해졌다.

환해졌던 힐데르트의 얼굴이 이번엔 잘 익은 여름딸기처럼 붉어졌다.

그는 삐걱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칼리오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왜 이렇게 다들 나를 쳐다보는 거지?’

콕콕 찌르는 눈길에 조금 불안해졌다. 칼리오페는 답지 않게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에피니 언니!’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칼을 양갈래로 높게 묶은 에피니가 어딘지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칼리오페가 에피니를 부르려는 순간, 아이 한 명이 불쑥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 맛있었어.”

“……네?”

‘잘못 들은 거겠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하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칼리오페는 자신의 청각 능력을 의심했다.

“맞아.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 진짜 맛있어.”

“그치?”

바로 확인 사살이 날아왔다.

‘어, 어째서?!’

콕콕 찌르던 시선의 이유를 깨달았지만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

“응, 베이비 살롱에서 먹을 수 있어.”

그 와중에도 착실히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 영업은 진행되고 있었다.

“이름이 좀 특이하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묘했다. 칼리오페의 뺨이 부끄러움에 살짝 붉어졌다.

‘입소문은 고맙지만. 왜 그런 이름으로…….’

“일단은……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는데요.”

“그치만 호세가 그게 원래 이름이라고 했는걸?”

그때까지 턱을 괴고 가만히 지켜보던 에피니가 툭 던지듯 말했다.

‘호세 오라버니이……!’

칼리오페가 자그마한 두 손을 앙당그레 쥐었다. 넉살 좋게 아이들 틈에 파고 들어 이것저것 말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후로도 베이비 살롱에 몇 번 들렸다고 했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리페의 달콤 어쩌고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레아스는 먹어본 적 없지? 리페의 달콤달콤.”

힐데르트의 질문에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꼭 무르익은 과실처럼 발갛게 익은 통통한 뺨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가득 적실 것 같다.

“그렇게 달콤해 보이진 않는데.”

“?!”

카스틸로 공자의 말에 칼리오페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저를 보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본 적 있어?”

힐데르트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아는 카스틸로 공자는 베이비 살롱 같은 곳에 발걸음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힐데르트가 힐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단지 예외가 생겼을 뿐이다.

카스틸로 공자는 대답 없이 묘한 웃음만 지었다.

칼리오페는 탐탁잖은 눈으로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손수건에 관해 물어봐야 하는데 여기는 너무 정신없어.’

따로 불러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심한 순간,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백룡 기사식이 시작되었다.

“백룡 기사단이다!”

“루스티첼 기사단장이야!”

“오, 레드불이라는 별칭답지 않게 잘 생겼잖아?!”

“빨간 머리일 줄 알았는데……. 왜 레드불이야?”

“그건 말이지—.”

“삼 기사도 있어!”

소리의 크기가 백룡 기사단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칼리오페가 앉아 있는 곳은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라 쾌적했지만, 평민들이 있는 관중석은 계단까지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차 있었다.

기사들이 대열에 맞춰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며 서로 부딪칠 듯 복잡하게 교차하면서도 결코 부딪치지 않는다.

사열식이 끝나자 검술시연이 시작됐다.

백룡 기사단뿐만 아니라, 모든 용기사단의 기사들은 전부 오러 유저로 이뤄져 있다.

기사들의 검 끝에서 아름답고 강인한 오러가 피어올랐다.

“와아아아아!!”

“세상에—!!”

관중들 사이로 감탄과 휘파람 소리가 퍼져나갔다. 평민들이 이렇게 직접 오러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칼리오페 또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훈련할 때 오러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오러를 일제히 내뿜는 것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검술을 보고 있는지 기예를 보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백룡 기사식이 끝나면 사람들의 애국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네.’

소위 ‘뽕이 찬다’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 후, 평민인 척 거리를 돌아다녔던 시절에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칼리오페를 보며 어디 귀한 집 아가씨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뜨끔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반쯤 알고서 모르는 척한 것 같지만.’

그때는 잘 꾸며냈다고 생각했지만 몸에 밴 행동은 티가 나는 법이다.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나서는 완벽한 평민 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하간 보는 것만으로 제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배가 빵빵해질 정도니, 백룡 기사단의 인기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백룡 기사단을 연호하는 사람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내 기억하고 조금 다른데.’

전생에도 백룡 기사식에 참석했던 때가 있었다. 바로 루시우스가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해의 백룡 기사식이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확실하게 차이가 느껴졌다.

기사가 아니라 확실하게 집어낼 순 없지만, 뭔가 훨씬 기합이 들어가 있다.

‘으응? 묘한 패턴이 있는데?’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게 반복되는 구간이 있었다.

칼리오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집중하자 오러가 더 명확하게 보였다. 훈련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에테르와 테르를 감지하고 나서부터 혼자 있을 때마다 노래를 부르며 감각을 일깨운 결과였다. 사실 아직 ‘보인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오러까지 ‘느껴진다’는 게 더 정확했다.

덕분에 칼리오페는 비교적 쉽게 패턴을 머릿속에서 그려낼 수 있었다.

‘리……페, 구……? 귀, 여, 워…….’

리페 귀여워, 리페 최고야, 리페 사랑해.

“…….”

어쩐지 칼리오페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 * *

“어머나.”

칸테나 부인은 감탄을 내뱉으며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녀가 묘한 눈길로 루스티첼 백작을 바라봤다.

‘그렇게는 안 보였는데…….’

칸테나 부인은 11인의 대마법사 중 한 명이자 용기사단 중 유일한 마법기사단인 적룡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었다. 그녀가 오러의 패턴을 바로 파악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러와 마나는 그 특질이 다르지만 원래 같은 줄기—에테르—에서 흘러나온 힘이다. 에테르를 어떻게 체내에 흡수하느냐에 따라 오러, 마나 그리고 신성력으로 나뉜다.

그러니 그녀가 다른 사람보다 오러를 기민하게 느끼는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저 무뚝뚝한 인사가 이렇게 딸바보가 되다니.’

용기사단 일로 루스티첼 백작과 여러 번 마주쳤지만, 만날 때마다 딱딱한 사람이었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나 칸테나 부인은 호의적인 쪽이었다.

딱딱하고 올곧은 루스티첼 백작과 다혈질에 솔직한 그녀는 상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꽤 된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기사단도 아니고 오히려 라이벌에 가까우나 안심하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뭐, 지금은 평화의 시대니까 그럴 일은 없지만. 갑자기 전쟁이 일어날 리도 없고.’

칸테나 부인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백룡 기사단장이 꽤 부드러워졌다는 말을 들었다.

‘막내딸 덕분이라고들 떠들었지. 그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기사단이 아니라 무슨 팬클럽 같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안 될 이유도 없었다.

황실에 의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백룡 기사식이다. 백룡 기사식은 오로지 백룡 기사단의 소관인 데다가 평민들을 위한 축제나 다름 없어서 그 기준이 용기사단 중 가장 낮았다.

일반 백성들이 따라오기 힘든 고상한 의례—칸테나 부인은 허례허식이라고 부르는—는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그 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페니까 이해되긴 해. 사람을 단번에 사르르 녹인다니까.’

예시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자신이 그러지 않았는가.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 역시 칼리오페에 대해선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며느리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로아힌 부인은 몰라도 서모나 부인은 확실했다.

그다지 내색하지 않지만 칼리오페를 챙기는 것을 보면 제 집 사람 챙기는 것과 같았다. 힐데르트와 칼리오페의 사이도 좋으니 더더욱 마음이 동할 것이다.

특히 서모나 부인은 본인이 루스티첼 가보다 더 낮은 집안 출신이라 신분에 관한 편견도 없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미 자신들은 루스티첼 가를 무리에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이상 편견으로 대하지 않는다.

‘나도 아들 녀석이 조금만 더 어렸으면 생각해봤을 텐데.’

칸테나 부인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카스틸로 공자가 난입한 대사건이 일어나 그쪽으로 신경이 쏠렸지만, 그 전에 칼리오페의 발언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바셀로 부인을 향해 또박또박 말하던 칼리오페를 떠올리니 흡족한 미소가 나왔다.

‘항상 예의 바르고 차분해서 너무 유순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나 걱정될 정도였다. 루스티첼 부인의 성향이 온화한지라 더더욱 그랬다.

‘물론 루스티첼 부인은 결단력이 있긴 하지만…….’

욕심이 너무 없다 보니 그 결단력이 발휘될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최상위 가문쯤 되면 카리스마를 발휘해야 할 일이 많다.

‘많은 패를 쥐고 있는데 우습게 보이면 그 패를 넘보기 마련.’

칸테나 부인은 기사답게 호전적인 성향이라 더더욱 칼리오페가 드러낸 이빨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혼나는 건가요?’라니. 천진한 아이 같으면서도 뼈 있는 한 마디였다.

자신조차 이렇게 마음에 드는데 칼리오페가 친딸인 루스티첼 백작은 오죽할까 싶었다.

[리페 귀여워, 리페 대단해, 리페 최고야.]

백룡 기사단이 보내는 신호를 미소 지은 채 보던 칸테나 부인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마나를 움직여 오러 패턴을 따라 하고 있었다.

‘편견 없이 대하는 게 아니라 콩깍지가 쓰인 건가.’

무심코 든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리페가 말한 대로 바셀로 부인이 죄를 저질렀을까?’

바셀로 부인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그럴 만한 구석은 많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관심 없었다. 피엔테 후작이 뒷배로 있는 게 분명한 일을 굳이 파헤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수면 위로 드러났으니…….’

듣는 귀가 있다 보니 다른 귀부인들도 우아하게 앉아 기사식을 감상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선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어쩌진 않더라도 만일을 위해 피엔테 후작가를 공격할 패를 준비하겠지. 은밀하게.’

꼬리 잘라내기로 끝날지 모르나 작은 타격이라도 적절한 시기를 만나면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정치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이 패는 분명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만약 패를 쥐게 된다면 다 리페 덕분이네.’

* * *

본격적인 비무를 앞두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칼리오페는 힐끗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보다가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 나 목말라.”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교 모임과 달리 이런 곳에서 자리를 옮기면 유모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다른 가문 사람들과 장내 질서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굳이 날 따라오진 않겠지.’

유모의 뒷모습을 확인한 칼리오페가 조용히 카스틸로 공자를 불렀다.

“카스틸로 공자님,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푸른 눈동자가 칼리오페를 향했다.

“이야기 좀 해요. 둘이서.”

그 말에 카스틸로 공자가 싱긋 웃었다. 묘한 웃음이었다. 달콤하면서도 완벽한 벽이 느껴졌다.

“우리가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네?”

카스틸로 공자의 말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사이가 아니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가슴이 술렁였다.

“고백은 이르다고요.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인걸.”

“…….”

칼리오페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사람은 너무 할 말이 많으면 오히려 말이 안 나온다.

“……네?”

겨우겨우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레아스!”

칼리오페랑 똑같이 얼음이 됐던 힐데르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칼리오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리, 리페!”

힐데르트가 당황해서 칼리오페를 불렀다.

“바보야! 따라가면 더 창피하다고!”

에피니가 따라 나가려는 힐데르트를 휙 잡아당겼다.

“이거 놔! 리페가……! 이거—.”

‘뭐, 뭐야?! 뿌리칠 수가 없잖아?’

힐데르트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에피니를 바라봤다. 그냥 한 손으로 잡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았다.

카스틸로 공자는 눈동자를 움직여 칼리오페가 유모 없이 혼자 관람석을 벗어나는 걸 확인했다.

“레아스? 어디 가?”

슬그머니 일어나는 그를 보고 힐데르트가 물었다.

“시끄러워서.”

그 시끄럽게 떠든 장본인인 힐데르트는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흥, 품위 없이 시끄럽게 굴기는.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자긴 아닌 척 한 마디 보태는 에피니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 * *

칼리오페를 쫓아 관람석 밖으로 나온 카스틸로 공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뛰쳐나가기 전 칼리오페의 얼굴이 눈앞을 물들였다.

꼭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

‘……어째서?’

둘만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섞어 거절한 건 맞다.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게 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강아지 아가씨께 대체 왜 그러세요?”

어느새 따라붙은 시종, 러그윈이 불쑥 물었다. 카스틸로 공자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러그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그 아가씨께 특별한 관심이 있으신 거예요?”

자신의 주인은 그 누구에게도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쳐내지조차 않는 사람이다. 그런 노력이나 감정 소모마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저번에 파트리유 거리에서 칼리오페와 만났을 때도 설마 했다.

그런데 이번이 두 번째다.

자신의 주인은 그 강아지 아가씨를 확실히 쳐냈다.

부드러운 웃음과 교묘한 말에 가려서 농담처럼 들릴 뿐이었지만, 그건 확실한 경고였다. 다가오지 말라는.

‘하지만 도련님이 누군가를 특별히 대한다고? 누군가에게 의미를 둔다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카스틸로 공자는 확실히 칼리오페를 도와줬다.

눈앞의 폭력을 막는 것이야 당연히 신사의 미덕이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브리젤 가가 그렇게 몰락한 것은 카스틸로 공자의 손바닥 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배후에 있다는 걸 확실히 숨겼지.’

도련님의 입장 상 눈에 띄는 걸 꺼리는 게 당연하기 때문에 당시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그게 다른 이유가 있는 거였다면?

‘지금 저 강아지 아가씨를 쳐내는 것과 관련이 있…….’

“러그윈.”

“네!”

앞만 보고 있던 카스틸로 공자가 갑작스럽게 부르자 러그윈은 긴장했다. 그리고 공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니 그 긴장감은 배가 되었다.

“다행이구나.”

“네?”

“이 일이 천직에 맞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일이 편하니 잡생각이 많은 것이겠지?”

러그윈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목숨줄은 소중했다.

‘아니, 도련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막 죽이는 성정은 아니시지만……. 아니시겠지……?’

어쩐지 불안했다.

대체 왜 농담을 가장해 칼리오페를 쳐낸 건지 여전히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기 꺼려졌다.

러그윈은 말없이 카스틸로 공자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강아지 아가씨?’

카스틸로 공자는 칼리오페를 따라가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뒤쫓는 게 느껴지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천천히.

‘왜? 둘만 되는 거 싫다고 하셨잖아?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러그윈은 카스틸로 공자의 눈치를 살살 봤다.

‘아까는 도련님의 생각을 물은 거니까 말이야. 이건 괜찮겠지?’

자신의 도련님은 선을 넘지만 않으면 관대한 주인이었다. 관대하다기 보단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더 정확하지만.

“그런데 그 강아지 아가씨는 왜 도련님을 따로 뵙자고 했을까요? 그것도 둘이서만.”

‘손수건 때문이겠지.’

카스틸로 공자는 속으로 그때를 떠올렸다.

그 처절하고 아름다웠던 노랫소리를.

아마도 자신은 그 노래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러그윈은 카스틸로 공자의 반응으로 그가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하지만 대체 그 이유가 뭔데?’

칼리오페와 카스틸로 공자가 만난 것은 저번 파트리유 거리에서가 처음이다. 거리에서의 짧은 만남 후, 브리젤 부인의 살롱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러그윈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다음으로 만난 것은 바로 오늘. 분명 카스틸로 공자 역시 두 번째 만남이라고 말했다. 그 두 번의 만남 속에서 칼리오페가 카스틸로 공자를 따로 불러낼 만한 사건은 없었다.

‘도련님이 브리젤 가의 일을 뒤에서 손 썼다는 걸 알 리도 없고.’

생각해보면 첫 번째 만남부터 도련님이 이상했다. 혹시, 하는 생각에 러그윈이 물었다.

“도련님, 저번에 파트리유 거리에서 그 아가씨를 처음 본 게 아니었나요?”

“…….”

카스틸로 공자는 대답 없이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린’ 그녀를 처음 본 건 서모나 가의 피크닉에서였다. 하지만 손수건을 건네 준 건 없는 일이어야 하고, 눈이 마주친 것은 기억 못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건물 뒤편으로 돈 카스틸로 공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키 작은 나무 아래에 칼리오페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건물이 소리와 시야를 차단해 앞 쪽의 소란스럽고 흥분된 분위기는 이곳까지 넘어오지 못했다.

카스틸로 공자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 숙인 칼리오페가 아까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아니, 그보다 더 발목을 붙잡는 건 두려움이었다.

기묘하고 생소한 감각에 카스틸로 공자는 눈을 깜빡였다.

칼리오페가 정말로 울고 있을까 봐, 그걸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카스틸로 공자는 그 질척이는 감정을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그녀가 울고 있다면, 그게 자신 때문이라면.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 * *

칼리오페는 고개를 숙인 채 물끄러미 발끝을 응시했다.

‘리본 풀린 거, 묶어야 하는데.’

나중에는 사람들을 피해 발걸음 닿는 대로 걸었지만, 처음 뛰어나온 게 원인이었는지 구두 리본이 풀렸다. 계속 묶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데, 그저 리본을 묶어야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데.

자각하지 못하는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는 태풍이 몰아치는 것인지 과부하에 걸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랜 시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검고 서늘한 그늘이 칼리오페의 발을 적셨다.

칼리오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스틸로 공자의 앳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우리가 아직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아까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둥둥 울렸다.

그와 동시에 아주 오래 전,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이 겹쳤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때 그 말을 들은 카스틸로 공자…… 아니, 소공작의 표정이 어땠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단단하게 여문 턱선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는 웃었던가, 화냈던가. 아니면—.

[고백은 이르다고요.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인걸.]

어지러운 머릿속에 아까 들었던 말이 재차 반복되었다.

그것 역시 기억에 있는 말이다.

[고백은 이르다고.]

카스틸로 소공작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던 때가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고 눈은 햇빛을 받아 평소보다 더 새파랗게 빛났다.

‘나는 화를 냈었어.’

만약 전생에서 들었던 말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화를 냈을 것이다.

‘교만은 좋지 않다고 하거나,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언행은 옳지 않다고 했겠지.’

하지만 전생에서 화를 낼 때도, 현재에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과거 혹은 사라진 미래 그리고 현재가 얽혀 가슴 속을 어지럽게 채웠다.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던 카스틸로 공자가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고, 공자님?”

무심코 따라 시선을 내린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아까까지의 상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햇빛에 하얗게 부서지는 머리칼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카스틸로 공자가 그녀 앞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가 풀린 구두 리본을 잡고 묶기 시작했다.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카스틸로 공자가 스스로 리본을 묶어본 적이 있을까? 아마 지금이 최초이리라.

이래도 되는 건가 싶지만 말리는 것도 이상했다.

칼리오페는 안절부절 못하며 주먹을 꼬옥 쥐었다 폈다만 반복했다. 그러다 카스틸로 공자의 차분한 손놀림에 마음이 점차 진정됐다.

전생에 자신이 했던 말, 그가 했던 말과 비슷한 소리를 들어서 동요했지만 결국 그뿐이다.

‘그래, 카스틸로 공자가 나처럼 전생을 기억할 리가 없어.’

기억한다면 그는 황궁에 있어야 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도 벅찬 자신과 달리 카스틸로 공자는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다. 그의 위치, 그의 혈통, 그의 능력. 모든 것이 미래를 바꾸는 데 큰 전력이 된다.

또한, 카스틸로 공자는 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을 테니 손쉽게 전쟁을 막을 수 있다.

‘그래, 기억하지 못해. 다만…… 같은 사람이다 보니 비슷한 말을 했을 뿐이야.’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동시에 진한 아쉬움이 가슴을 노랗게 물들였다.

카스틸로 공자가 자신처럼 전생을 기억한다면 분명 큰 전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칼리오페는 감정에 이유를 붙였다.

가만히 카스틸로 공자의 머리꼭지를 내려다 보니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칼리오페의 흰 발목에 스쳤다.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뾰족한 어투로 묻자 손이 멈췄다.

그 동요하는 기색에 칼리오페는 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아까 뜬금 없이 ‘그럴 사이’ 운운하면서 고백은 이르다고 할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그 직후 기시감과 함께 전생의 대화가 떠오르는 바람에 그 황당함이 잊혔지만, 솔직히 기가 막혔다.

카스틸로 공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긴 눈매가 가늘어지고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찰나가 영원처럼 고통스러웠다.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칼리오페였다.

리본을 다 묶은 카스틸로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손수건 공자님 것이지요?”

칼리오페는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저번에 파트리유 거리에서 만났던 것처럼 우연히 마주칠지 모르니 갖고 다니고 있었다.

“글쎄요.”

카스틸로 공자가 시선을 내려 손수건을 잠시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주우셨다면 주운 사람의 것이겠지요.”

그러니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칼리오페의 손수건이란 뜻이었다.

‘받을 수 없어.’

칼리오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받을 수 없다.

그녀는 이 손수건이 카스틸로 공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힐데르트가 보자마자 ‘레아스 거야.’라고 단언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 필요 없어요?”

이 손수건, 당신 어머니 유품이잖아요.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네.”

짧은 대답이지만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칼리오페는 그 중 어느 것에 답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 뒤 카스틸로 공자가 작게 덧붙였다.

“더 이상 울지 않으니까.”

그런 이유로 납득할 수 없었다. 울지 않는다고 해서, 손수건을 쓸 일이 없다고 해서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죽은 가족이 남긴 물건은 절대 그렇게 가벼울 수 없다. 칼리오페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경험해봤다.

[이게 왜 리페한테 있어? 레아스가 흘릴 리 없는데…….]

그리고 칼리오페와 달리 카스틸로 공자는 경험하는 중이다.

[엄청 소중히 여기거든. 걔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 이 손수건이 유일할걸?]

손수건을 쥔 칼리오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 보드랍고 하늘하늘한 손수건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는, 저도…….”

카스틸로 공자가 칼리오페가 내민 팔을 부드럽게 물렸다. 그러곤 힘 빠진 그녀의 손을 감싸 손수건을 꽉 쥐여 주었다. 두 사람의 손이 얽혔다.

“눈물이 나면 닦으세요.”

그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어 카스틸로 공자를 마주 봤다.

“저, 울지 않았는데요.”

카스틸로 공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칼리오페의 손을 감싸 쥐었던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문질렀다.

꼭 눈물이라도 닦듯이.

“울었잖아.”

칼리오페는 눈을 깜빡였다.

‘……울었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뛰쳐나오기 전에 순간적으로 울컥하긴 했지만, 그건 달리면서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눈물을 흘린 적이 없으니 눈물 자국조차 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는 이렇게 부드러운 손길로 자신의 눈가를 어루만지는 걸까.

“저는…… 운 적이 없는데요?”

매일 밤 눈물로 밤을 지새운 적이 있긴 했으나 적어도 그의 앞에서 운 적은 없다. 오늘도 그렇고, 파트리유 거리와 브리젤 부인의 살롱에서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장 처음 만났던 날, 그가 자신의 노래를 들었던 때도 울진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울었다고 말하는 걸까.’

너무나 확신에 찬 어조라서 실제로 우는 모습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카스틸로 공자는 대답 없이 그저 미소 지었다.

칼리오페는 바로 눈앞에서 휘어지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햇살이 투명한 하늘 같기도 했고, 가장 깨끗한 수원을 그대로 얼린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자 고요했던 수원에 파랑이 일었다.

칼리오페가 그 파문을 읽으려는 순간, 눈가를 더듬던 그의 손이 움직였다. 마치 감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따스한 손바닥이 칼리오페의 눈을 덮었다.

“……공자님?”

카스틸로 공자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속눈썹이 파닥파닥거리며 그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내 포기했는지 가만히 내려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카스틸로 공자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바람에 칼리오페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가만히 자신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뱃속을 칼로 후비는 것처럼 아팠다.

카스틸로 공자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칼리오페의 동그란 이마를 덮은 자신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에 하는 키스는 축복의 키스. 언제나 미소 짓기를, 더 이상 울지 않기를, 항상 행복하기를.

손등을 입술로 꾹 누른 그의 눈가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제 것이 아니니 돌려줄 필요 없습니다.”

그 말과 함께 눈가를 덮었던 손이 사라졌다.

칼리오페는 천천히 눈을 떠 카스틸로 공자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한 발 물러선 채 언제나와 같이 벽이 느껴지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칼리오페는 여러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손수건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를 붙잡고 설득할 만큼 그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신경 써서는 안 됐다.

“혹시, 혹시라도 필요해지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국 한 마디를 더 보태고 말았다.

“이런, 저는 쓰던 손수건은 받지 않는데.”

카스틸로 공자가 눈매를 접으며 가볍게 농을 쳤다.

“레이디께서 정성스레 수놓은 손수건이라면 거절하는 것도 무례겠지요.”

지금 들고 있는 손수건 말고 새 손수건을 건네달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칼리오페가 직접 수를 놓아서.

“저는 언제 손수건이 필요할지 모르는 공자님을 위해 수를 놓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딱 잘라 정색하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카스틸로 공자의 가면 같은 웃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눈을 마주치면서 당당히 말한 칼리오페가 씨익 웃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스틸로 공자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와 같은 의뭉스러운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꺼운 웃음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가 말했다.

“그것 참 아쉽네요.”

전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즐거워 보였다. 칼리오페가 눈썹을 까닥였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라고 하셨는데, 그럼 레이디께선 제게 뭘 해주실 거죠?”

그 말에 칼리오페가 잠시 손수건을 내려다 봤다. 카스틸로 공자에게 중요한 물건이니 당연히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저렇게 받기 싫어하니…….’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새 손수건에 수놓아 달라는 가벼운 농담으로 가장해 숨겼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손수건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본심이다. 아까 칼리오페가 둘이서 보자고 말했을 때 했던 답도 마찬가지다.

그럴 사이는 아니라느니, 고백은 이르다느니, 황당한 농담을 던져 의도를 흐렸지만 그건 칼리오페와 둘이 되기 싫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따라 나온 걸까.’

칼리오페는 손수건을 한 번 꾹 움켜쥔 다음에 고개를 들었다.

“그땐 눈물을 닦아 드릴게요.”

“응?”

“더 이상 울지 않으니 필요 없다면서요.”

다시 필요하다는 것은 곧 운다는 뜻이다.

당황한 듯 몇 차례 눈을 깜빡깜빡한 카스틸로 공자가 후, 하고 웃었다.

“그럼 그때는 꼭 말씀드리지요. 상냥하게 닦아주세요.”

그 말을 남긴 뒤, 그는 뒤를 돌았다.

그대로 떠나려는 기색이라 칼리오페는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공자님.”

멈춰 선 카스틸로 공자가 그녀를 돌아봤다.

“저, 그때…… 손수건을 잃어버리셨을 때 들으셨던 노래 말인데요…….”

긴장으로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칼리오페가 전생을 회상할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사회 분위기는 십 대 중반 즈음의 모습이다. 기억하는 십 대 시절과 달리, 한참 어린 지금은 종교의 강제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깨달았다.

겨우 다섯 살인 자신이 속가를 불렀다고 해서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원인이 되어 가족들이 죽었는지 모르는 만큼, 평판에 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아주 작은 것이더라도 배제하고 싶었다.

어쨌든 속가가 천시받는 것은 사실이니까.

지금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만약 그가 속가를 경멸한다면?

카스틸로 공자는 그야말로 가장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다. 라이난테 실크로 만든 손수건처럼, 보드랍고 반질반질하고 우아한, 흠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런 사람이 울퉁불퉁하고 직설적인 속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너무 뻔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카스틸로 공자의 청명한 눈동자를 쳐다봤다.

카스틸로 공자는 절박해 보이는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저는 손수건을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그러니 노래를 들은 적도 없다는 뜻이다. 모르는 척 해주는 말에 가슴 속에서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카스틸로 공자는 자신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칼리오페의 손을 붙잡고 빙긋 웃었다.

“저는 분명 고백 때문에 부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칼리오페는 하려 했던 수많은 말을 다시 삼켰다. 애써 변명하거나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렇게 말을 돌리는 것으로 표현하는 면도 그다웠다.

칼리오페는 따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공자님 말씀대로 그럴 사이는 아니니까요.”

* * *

칼리오페를 먼저 관람석으로 돌려보낸 카스틸로 공자는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카스틸로 공자는 부름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러그윈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역시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대체 손수건은 언제……. 노래는 또 뭐고요.”

그제서야 카스틸로 공자의 시선이 러그윈을 향했다. 날카로운 새파란 눈동자에 러그윈이 찔끔했다.

“내가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라고 하지 않았었나?”

칼리오페에게 다가갈 때 그렇게 명했다. 러그윈은 분명 그 명을 받들어 망을 보기 위해 거리를 벌렸었다.

“명하신 대로 제대로 살펴보고 있었어요.”

러그윈이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카스틸로 공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언제부터 주인의 대화를 엿듣는 쥐새끼가 되었지?”

“쥐새끼라뇨!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아니, 저, 음, 휴식 시간이 끝나서 사람들이 다 안으로 들어가길래……. 멀리서부터 경계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모퉁이에 붙어 망을 봤을 뿐입니다.”

무슨 말을 주고 받는지 호기심이 없진 않았기에 러그윈은 쩔쩔 맸다.

카스틸로 공자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

그제서야 시선이 거둬졌다. 러그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더니, 자신이 고양이가 될 뻔했다.

‘하지만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실 줄은 몰랐어.’

원래 명을 지키기만 하면 그 과정이 어떻든 신경 쓰시지 않았다. 대화를 듣는 것을 포함해서.

대화를 주워들은 러그윈이 그에 대해 질문해도 이런 식으로 반응한 적은 처음이다.

‘정말……. 이상하게 행동하시는 건 모두 그 강아지 아가씨랑 연관되어 있단 말이지.’

러그윈은 시선을 돌려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대체 내가 모르는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련님은 저 꼬마 아가씨에게서 뭘 본 거지?’

러그윈이 조용해지자 카스틸로 공자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노래라…….’

칼리오페가 왜 그렇게 신경 쓰는지는 알고 있다.

‘속가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속가라는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속가라든가, 성가라든가 그런 분류 자체가 상관없는 노래였다.

서모나 가의 피크닉 날, 카스틸로 공자는 귀찮게 따라붙는 시선이 거슬려 숲 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그는 나무 사이에서 홀로 노래하는 칼리오페를 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채 눈에 담기기 전에 카스틸로 공자는 예감했다. 예지에 가까운 강력한 예감이었다.

그는 오늘 그녀의 노래를 오랜 시간 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비에 젖은 동백꽃 같은 노래였다. 슬프고 처량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동백꽃은 절대 꽃잎만 떨어지지 않는다. 목이 잘리는 것처럼 꽃봉오리 전체가 잘려 추락한다.

꼭 칼리오페의 노래가 그랬다.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동백나무에서 모가지가 떨어졌다.

칼리오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카스틸로 공자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봤다.

직접 닦아주고 싶었다.

울지 말라고 속삭이고 작은 등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두 눈을 마주치고 울음 가득한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햇살에 물들 듯 웃음 짓는 것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그녀의 노래와 닮은 동백나무 가지에 손수건을 걸었다.

* * *

“아가씨!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걱정했잖아요.”

관람석으로 돌아가자 유모가 칼리오페를 향해 달려왔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에 칼리오페는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밖에서 보낼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다.

“미안, 조금 바람 쐬러…….”

“목마르다고 하시곤 사라지셔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에피니 아가씨랑 힐데 도련님께서 휴게실에 간다고 전해달랬다고 말씀해주시긴 했지만…….”

‘에피니 언니랑 힐데르트 오라버니가?’

칼리오페는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유모를 꼬옥 껴안았다.

“응, 그래도 너무 늦어서 놀랐지? 미안해.”

“휴게실에 따라 가보겠다고 해도 에피니 아가씨가 말리시고……. 혹시, 싸워서 그런 건 아니지요?”

유모가 칼리오페를 마주 끌어안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응, 아니야. 그냥 지쳐서 쉬다 왔어.”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조금 누워있었더니 다 괜찮아졌어.”

칼리오페는 건강한 걸 표현하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으쓱으쓱했다.

유모가 웃으며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다행이에요. 혹시라도 어디 불편해지시면 꼭 말씀하세요.”

“응.”

자리에 앉은 칼리오페가 에피니와 힐데르트를 향해 말했다.

“유모한테 말해줘서 고마워요.”

“흥.”

에피니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굴려 힐끔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괜찮은 거지?”

“네?”

“아니, 뭐어.”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던 에피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뛰쳐나갔으니까…….”

걱정했구나 싶어서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당황해서 그런 것일 뿐이에요. 괜찮아요.”

“레아스가 돌아오면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할게. 걔가 원래 그렇지 않은데……. 이상하네.”

힐데르트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카스틸로 공자가 했던 말이 창피하거나 부끄러워서 뛰쳐나간 게 아니었다.

‘전생과 겹쳐 보이는 게 견딜 수 없어서였지.’

“전 괜찮아요. 그리고 공자님과는 따로 이야기 나눴구요.”

“그래?”

힐데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아스타레아스는 대화 도중 상대가 뛰쳐나갔다고 해서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아스타레아스가 사라진 걸 깨달았지만, 설마 칼리오페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니.

‘솔직히 상상도 못 했어. 듣고도 안 믿길 정도인걸.’

“두 분께 걱정을 끼쳤네요. 정말 괜찮으니 마음 놓으세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칼리오페의 감사 인사에 힐데르트는 물론이고 에피니의 볼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피니는 그 볼을 숨기듯 휙 고개를 돌렸다.

칼리오페는 작게 웃은 후 귀부인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어머니와 비무에 푹 빠져든 로베르트를 보니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카스틸로 공자가 입을 다물어준다니 이것으로 안심이야.’

백룡 기사식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오늘 밤은 고생한 아버지와 루시우스 오라버니랑 맛있는 케이크를 먹어야겠어.’

며칠간 두 사람이 백룡 기사식 준비로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보지 못하고 먼저 잠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늦게 들어오더라도 졸린 것을 참자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집에 돌아가서 낮잠을 자야지!’

* * *

‘……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쩌다 보니 백룡 기사단의 본부에 들어왔다.

[나, 형이랑 아부지 보고 갈래!]

백룡 기사식이 다 끝났을 때, 비무를 관람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로베르트가 그렇게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짜 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기사식을 끝마쳤으니 기사단도 자기들끼리 작은 축제를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엄격한 기사단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루스티첼 백작이지만 이런 날은 풀어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종기사 한 명이 찾아와 어머니께 ‘혹시 동행해주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로베르트는 신이 나서 만세를 불렀고, 루스티첼 부인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칼리오페는 그냥 ‘아버지가 부르시는 걸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리페 아가씨!”

“와, 정말 어쩜 이렇게 귀여우시지?”

“리페 아가씨, 여기 좀 봐주세요!”

“딸기 타르트 드실래요?”

어째서 이런 상황이 된 걸까?

시커멓고 커다란 기사들이 자그마한 칼리오페를 둘러싸고 어화둥둥 하고 있었다. 칼리오페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딸기 타르트가 별로면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는 어때?”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호르세안이 씨익 웃고 있었다. 여전한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 타령에 칼리오페의 볼이 빵빵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기사들 모두 그게 뭔지 알고 있는지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칼리오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호세 오라버니.”

“응?”

호르세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신나 보이는 얼굴에 칼리오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가 결국 미소를 지었다. 호르세안에게는 따라 웃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페?”

의아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루시우스가 장갑을 벗으며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어머니랑 로벨까지?”

놀랐던 루시우스는 곧 상황 파악을 하고 주변 기사들을 쫙 노려봤다. 그렇게 칼리오페를 직접 보고 싶어 하더니 결국엔 이 사달을 낸 것이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기사들이 찔끔해서 뒤로 물러났다.

평소에는 위계서열도 확실해서 단장의 아들이라는 내색도 없이 깍듯하게 구는 녀석이지만, 여동생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루스 오라버니! 고생 많으셨어요.”

타다닷, 작은 발걸음 소리와 함께 칼리오페가 루시우스에게 다가갔다. 루시우스의 냉담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를 본 기사들과 종기사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진짜로 녹이는구나.”

“말로만 들었는데…….”

“가능한 거였어.”

“하긴 나라도……. 왜 나는 여동생이 없는 거지?”

“오늘 집에 가서 저런 딸을 낳아달라고 해야겠어.”

“널 닮은 딸이라면 저렇진 않을걸. 현실을 인정해.”

루시우스가 찌릿, 하고 쳐다보자 바로 웅성거림이 합, 멎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루스티첼 백작이 부기사단장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다.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살짝 놀랐던 그는 곧 루스티첼 부인에게 다가가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부지! 오늘 진짜! 완전 최고였어요!”

로베르트가 두 손을 붕붕 흔들며 감탄했다. 루스티첼 백작은 작게 웃으며 로베르트의 머리를 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그리곤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리페.”

“아버지, 오늘 멋있으셨어요.”

칼리오페가 다소곳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은 채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루스티첼 백작이 성큼성큼 칼리오페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로도 루스티첼 백작의 키는 칼리오페보다 더 컸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평소처럼 고개를 바짝 치켜들 필요 없이 살포시 들면 딱 눈이 마주쳤다. 딸아이의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를 마주 보며 루스티첼 백작이 미소 지었다.

“이 영광을 나의 작은 레이디께 돌립니다.”

그가 칼리오페의 앙증맞은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눈을 휘둥그레 떴던 칼리오페가 이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나의 기사님.”

그리고 와락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루스티첼 백작은 그대로 칼리오페를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뒤를 돌아보자 큰아들 녀석이 치사해 죽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우스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아버지인 루스티첼 백작은 알 수 있었다.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루스티첼 백작은 보란 듯이 칼리오페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어떻게 다들 절 알고 계신 거예요?”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백작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종기사를 보내 자신을 부른 게 아니라는 건 이어지는 상황으로 깨달았다.

‘기사분들이 종기사 분에게 시킨 거고, 그 과정에서 호세 오라버니가 바람을 넣었겠지.’

그렇다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나 자신을 보고 싶어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게, 단장님과 루스 녀석이 가지고 다니는 화첩 때문이야.”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호르세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첩이요?”

“응, 다들 그걸 보고 궁금해했거든. 리페가 워낙 귀여우니까.”

호르세안이 칼리오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단장님과 루스 둘 다 처음엔 질문에 제대로 답도 안 해주고 꽁꽁 감췄는데…….”

물론 그때엔 호르세안이 대신해서 여러 가지 대답을 해줬다. 칼리오페가 얼마나 귀여운지, 사랑스러운지. 통통하고 말간 뺨이 얼마나 꼭 깨물어주고 싶은지에 대해서.

“결국 둘 다 못 참고 리페 자랑을 시작했거든. 그런데 막상 입을 여니까 엄청……. 음, 엄청, 정말 대단하게…….”

호르세안은 두 사람이 얼마나 팔불출이었는지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거기에 감화된 기사들이 자진해서 칼리오페를 찬양하는 오러 패턴을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물론 그 와중에 제일 신난 사람은 호르세안이었다.

루시우스는 그걸 아니꼽게 바라봤는데, 뒤에서 혼자 몰래 그 오러 패턴을 따라 하다가 호르세안에게 들켰다.

‘하지만 루스 녀석은 그렇다 치고 단장님 앞이니까 좀 그렇지?’

호르세안은 백룡 기사단의 종기사였다. 바로 앞에서 직장 상사의 팔불출 짓을 폭로할 만큼 간이 크진 않았다.

“화첩이라니, 그런 걸 가지고 다니셨어요?”

칼리오페는 당황해서 루스티첼 백작에게 물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차마 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멀리 돌렸다.

칼리오페가 얌전하고 인내심이 강한 아이였기에 루스티첼 부부는 딸의 다양한 모습을 초상화에 남길 수 있었다. 칼리오페가 태어난 뒤, 화가가 루스티첼 가에 찾아오는 것은 월례 행사가 되었을 정도다.

그렇게 탄생한 <이 달의 칼리오페 화첩 시리즈>—한 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칼리오페를 제외한 가족 전원에게 배포되어 각자의 보물이 되었다.

물론 칼리오페는 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전생보다 훨씬 초상화를 많이 그린다고는 생각했지만…….’

화첩까지 만들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걸 남들이 보게 될 줄은 더더욱.

직장 부하에게 화첩을 보여 주며 팔불출 짓을 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도저히 기사단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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