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쁘띠 레이디의 창조 경제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가 실수라도 한 걸까?”
루스티첼 부인이 화병에 장미를 꽂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소리가 나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기에 그녀는 장갑을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사람이 없나 걱정되기도 했고 깨트린 물건이 뭔지도 확인해야 했다.
“제 방 쪽에서 난 소리 같은데요?”
칼리오페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방 공기가 술렁이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공기가 아니라 테르와 에테르겠지만.’
그 술렁거림을 느낀 건 아주 잠깐이었고, 다시 느끼려고 집중해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있는 곳이 칼리오페의 방과 가까웠기에 루스티첼 부인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기는 깨지는 물건이 없을 텐데…….”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린아이의 방답게 칼리오페의 방에는 깨질 위험이 있는 물건이 없다.
‘아, 하나 있긴 하지. 닦다가 깨트린 건가?’
복도를 나가자마자 바로 칼리오페의 방문이 보였다.
소리를 들은 하녀들이 다가오다가 루스티첼 부인을 보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리페 방에서 난 소리가 맞나 보네.”
루스티첼 부인이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방에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 두 명 있었다.
바로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였다.
“어머?”
루시우스가 다소 난감한 얼굴로 루스티첼 부인을 쳐다봤다.
“로벨 오라버니!”
방을 살피던 칼리오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로베르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쳐진 뒷모습을 보니 덜컥 걱정이 들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다친 건가 싶어서 다급히 다가가는데, 칼리오페를 본 로베르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 오지 마!”
“네?”
당황한 칼리오페가 멈칫했다가 이내 얼굴을 굳히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오지 말라니까!”
로베르트의 얼굴은 숫제 울 것 같이 엉망이었다.
“무슨 일이니?”
“어, 어머니…….”
엄마의 목소리와 얼굴을 확인하곤 로베르트의 눈동자가 단번에 그렁그렁해졌다.
그것도 잠시, 칼리오페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그가 몸으로 바닥을 가리려고 허둥거렸다.
“대체 왜 그러시는—.”
말하던 칼리오페의 얼굴이 전에 없이 굳었다. 순식간이었다.
로베르트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눈을 꾹 감았다.
‘리페한테 미움받을지도 몰라……!’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바로 소중한 여동생에게 미움받는 것이었다. 살짝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칼리오페가 자신에게 손을 휙 뻗고 있었다.
‘그, 그래! 리페한테라면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어! 아니, 우리 리페한테 맞는 건 영광이야!’
왠지 머릿속에 고양이 솜방망이를 맞는 듯한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칼리오페에게 맞는 사람은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 왜인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걸로 화가 풀렸으면 좋겠는데…….’
힐끔 눈치를 보는데 칼리오페가 로베르트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리, 리페?!”
“다쳤잖아요!”
바닥에 깨진 유리 조각을 가리려고 하다가 결국 상처가 난 것이다.
“몰랐어…….”
멍하니 중얼거리는 로베르트를 속상하다는 듯이 바라본 칼리오페가 품 안에서 레이스 손수건을 꺼냈다.
“다행히 깊진 않네요.”
살짝 긁힌 정도다. 상처 부위를 살피며 조각이 들어갔나 확인한 후 손수건으로 꾹 눌렀다.
“어, 어어— 저기, 리페, 저금통……이 깨졌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어? 그, 그치만— 리페가 아끼는 거였구…….”
하아,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 로베르트가 움찔했다. 산호빛 눈이 다시 울망울망해졌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비난이 아니었다.
“오라버니보다 아끼진 않아요.”
“리, 리페……!”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와락 껴안았다.
“오, 오라버니! 상처……!”
칼리오페가 당황해서 말했지만 로베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마구마구 껴안았다.
결국 칼리오페는 차분한 얼굴로 로베르트를 토닥여주었다.
‘많이 놀랐구나.’
그때까지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루시우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놀란 로베르트를 진정시켜주는 건 좋은데…….
‘너무 길게 안고 있지 않나?’
심기가 불편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자코 있었다.
“자자, 로베르트. 상처를 보여주렴.”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로베르트가 마지못해 칼리오페를 놔주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니?”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로베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칼리오페가 아끼던 저금통을 깨트렸다는 것에 당황해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비칠지 깨달은 것이다.
“나, 나 훔치려던 거 아니야!”
로베르트가 칼리오페를 향해 초조하게 고개를 저었다. 팔까지 내저으려 해 하녀들이 “도련님, 팔은 가만히요.”하고 붙들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로벨 오라버니께서 그럴 리가 없지요.”
“으앙, 리페!”
로베르트가 또다시 칼리오페를 껴안으려 했다.
“잠깐! 치료 중이잖아요.”
칼리오페의 제지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멈춘 로베르트가 시무룩하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멍멍이 귀와 꼬리가 축 늘어진 것 같은 모습에 하녀들이 쿡쿡 웃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로베르트가 동생의 돈을 탐내 몰래 가져가려 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 해주세요.”
“으응, 그게…….”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 * *
귀족들은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며 금전 감각에 대한 교육을 하곤 했다. 금권이 중요해지며 생겨난 교육법이었다.
요즘 귀족들은 일하지 않고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며 시류를 만드는 자들이었다.
보통 아이들이 할 일을 잘하거나 하면 칭찬의 의미로 용돈을 쥐여줬다. 사실 귀족 아이들에게는 돈 쓸 일 자체가 없고, 예산도 따로 집행되기 때문에 이 용돈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밖에서 하는 소소한 군것질이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장난감은 일부러 사주지 않고 용돈으로 사게 하곤 했다.
물론 귀족 아이들의 장난감은 비싸서 아이들이 얼마 정도를 내면 나중에 어른들이 전체 대금을 치르곤 했다. 아이들에게 직접 주는 용돈은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서 단위가 적었기 때문이다.
칼리오페 역시 다섯 살이 되며 용돈을 받기 시작했다.
아침에 깨우면 바로 일어나기, 피망과 브로콜리를 남기지 않고 먹기, 아침 저녁으로 엄마, 아빠에게 뽀뽀해주기 등등. 칼리오페는 부모님이 내건 조건을 잘 지켰다.
워낙 어른스러운 아이라 잘 지킬 줄은 알았지만 뽀뽀해주기까지 한 번도 빼먹지 않는 걸 보며 루스티첼 내외는 다소 놀랐다.
‘계획대로……이긴 한데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칼리오페는 그렇게 받은 용돈을 모았다. 그냥 모은 게 아니라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전부 그대로 모았다.
저금통도 없이 보관하는 것을 보고 루스티첼 백작이 저금통을 선물했다. 얼마나 모았는지 잘 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 저금통이었다.
‘내가 모은 돈보다 저금통이 더 비쌀 것 같은데…….’
아름답게 조각된 유리 저금통을 보며 칼리오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렇게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그러니, 리페?]
그간 모은 돈을 저금통에 넣는 것을 도와주며 루스티첼 백작이 물었다.
[나중에 다 쓸 데가 있는 겁니다.]
뭐 갖고 싶은 게 있는 건가 싶어서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나중에? 어디에?]
[돈은 어디든 쓸 일이 있지요. 최고예요. 그리구 많을수록 좋습니다.]
루스티첼 백작은 당황했다.
‘뭔가 물질만능주의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그는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그 후 칼리오페는 돈 모으기에 더더욱 열중했다.
말은 안 했지만, 온 가족이 칼리오페가 저렇게 악착…… 아니, 소중하게 모은 돈으로 뭘 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로베르트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리페를 도와줄 거야!’
오늘 하루 피망, 양파, 브로콜리, 당근을 꼭꼭 씹어먹고, 지루한 책도 읽고, 힘든 추가 검술 훈련까지 했다. 몹시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받은 용돈을 들고 그는 몰래 칼리오페 방을 찾았다.
‘새 장난감…… 자이노코어, 떠봇…… 갖고 싶지만…….’
눈앞에서 자이노코어—자이언트 스피릿 노말 코어—와 떠봇—떠드는 로봇 장난감—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든 물욕에 산호빛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으아! 안돼! 사라져라, 사라져!’
로베르트는 고개를 붕붕 흔들며 자이노코어와 떠봇의 환영을 밀어냈다. 그걸 위해 오늘 하루 이렇게 착한 어린이가 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물러날 듯 흩어지던 환영은 다시 두둥실 뭉쳤다. 로베르트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포실포실한 뺨과 댕그란 눈, 꼬물대는 작은 손발, ‘로벨 오라버니’ 하고 부르는 입술.
“흐아아아아~.”
자기도 모르게 기분 좋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이노코어와 떠봇 따위 한순간에 저 너머로 사라졌다.
‘리페가 좋아할 테니까……! 들키기 전에 어서 넣어줘야지!’
칼리오페가 빵긋빵긋 웃는 얼굴을 그리며 저금통에 돈을 넣어주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챙그랑!
그 날카로운 소리에 로베르트와 방으로 들어오던 루시우스 둘 다 깜짝 놀라 저금통을 바라봤다. 로베르트가 뒤돌아보며 팔로 친 바람에 저금통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산산조각이 난 저금통과 새어 나온 돈을 보고 로베르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 어어쩌지?! 리페가 아끼는 건데! 어쩌지?!”
“일단 진정하고, 위험하니까 물러나.”
루시우스가 로베르트를 뒤로 잡아당겼다. 신발을 신고 있긴 하지만 그러다 깨진 유리 조각에 다칠까 걱정이 되었다.
“리페 울까? 화낼까? 나 미워하면 어쩌지? 형아, 나 어떻게 해야 해?!”
루시우스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동생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리페가 울 애는 아니잖아. 상황을 말하면—.”
“울지 않으면 어떡해! 차라리 울면 낫지!”
아까는 울면 어떻게 하냐고 묻더니. 황당했지만 동생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칼리오페는 괜찮다며 혼자 끙끙 앓을 아이니까.’
도저히 진정하지 못 하는 동생을 바라보던 루시우스가 로베르트의 머리에 턱, 손을 얹었다. 낑낑거리던 로베르트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넌 잘못 없다, 로벨. 갑자기 들어온 내 잘못이지.”
“뭐? 아니야! 내가 깨뜨렸잖아!”
그게 왜 형아 잘못이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생을 보고 루시우스의 건조한 입매가 살짝 풀렸다.
“내가 안 들어왔으면 네가 깨지도 않았을 테니까.”
복도에서부터 눈치 살살 살피며 칼리오페 방에 들어오길래 뭘 하나 싶어서 따라 들어왔던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치마안—.”
로베르트가 입을 쀼루퉁하게 내밀었다.
루시우스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동생을 쳐다봤다. 발을 동동 굴리며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는 모습에 대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그럼 우리 둘 다 잘못했네.”
루시우스는 천천히 차분한 손길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베르트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머리에 닿는 형의 딱딱한 손이 기분 좋아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같이 있어 줄 테니까. 같이 리페한테 말하자.”
“……으응.”
순식간에 조용해진 로베르트가 작게 대답하며 힐끔 형을 바라봤다.
루시우스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로베르트의 눈 밑이 발그레 물들었다.
“헤헤.”
금방 마음을 놓은 그가 웃음을 흘린 순간, 방문이 열렸다.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패닉에 빠진 로베르트가 주저앉아 어떻게든 깨진 저금통 조각을 가리려고 했다.
* * *
“……그렇게 된 거군요.”
칼리오페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가 매달리는 듯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눈치 보는 멍뭉이 같았다.
“저기, 리페, 화났어? 나 미워? 그치만 나는 진짜루 리페 도와주고 싶어서…….”
로베르트가 웅얼웅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우, 웃으면 안 돼.’
칼리오페는 아까부터 표정을 관리하느라 힘들었다. 로베르트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일인데 웃어버리면 안 된다.
‘하지만 이렇게나 귀여운 오라버니신걸.’
방심하면 하뭇한 웃음이 비식비식 새어 나오려고 했다.
“크흠, 화 안 났어요.”
“정말?”
“정말입니다.”
“슬픈데 참는 것도 아니야?”
“아니에요. 오라버니께서 저를 위해 주려고 하셔서 기뻐요.”
그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운을 뗀 로베르트가 말을 끌며 힐끗 눈치를 보더니 작게 물었다.
“나 안 미워?”
이번에야말로 칼리오페는 웃음을 꾹 참느라 진땀을 흘렸다.
“안 미워요.”
“정말?”
“네,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안 미워요.”
“진짜지?”
계속되는 질문에 칼리오페가 로베르트를 빤히 쳐다봤다.
로베르트는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작게 혀를 찬 칼리오페가 가까이 다가가 로베르트를 살짝 붙잡았다.
“어, 어어?”
당황한 로베르트가 기웃하면서 칼리오페의 손길에 따라 허리를 숙였다.
칼리오페가 살짝 발뒤꿈치를 들었다.
쪽.
“……?!”
볼에 살그머니 닿는 보드라운 촉감에 로베르트가 펄쩍 뛰었다. 너무 놀란 바람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로베르트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자기 볼을 삿대질했다가 칼리오페를 가리켰다가 두 팔을 파닥파닥거리면서 엄마와 형을 바라보았다.
루스티첼 부인과 루시우스도 놀랐긴 매한가지였다.
“진짜예요.”
가족들 사이에 폭탄을 떨어트려 놓은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주먹을 불끈 쥐고 딸을 불렀다.
“엄마가 용돈 줄까?”
그러면서 슬며시 뺨을 내밀었다. ‘얼마면 돼?!’ 눈동자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칼리오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리페.”
루시우스가 진지한 얼굴로 칼리오페를 불렀다.
“나도 이 사건에 잘못이 있다.”
“……네?”
대체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나 싶어서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중한 저금통을 깨트렸으니 네가 내게 화나고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흠흠, 헛기침한 루시우스가 은근슬쩍 고개를 모로 돌렸다. 루스티첼 부인처럼 대놓고 뺨을 들이민 건 아니지만 뺨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살짝 돌린 모습이었다.
‘설마, 지금 나한테 뽀뽀해달라고 그러는 거야?’
칼리오페는 할 말을 잊은 채 루시우스를 쳐다봤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오른쪽을 보면 두근두근하는 얼굴로 뺨을 내밀고 있는 어머니가, 왼쪽을 보면 애써 담담한 얼굴로 뺨이 잘 보이게 고개를 튼 오라버니가 보였다.
‘우으…….’
무언의 압박이 엄청났다.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던 칼리오페가 발끝에 힘을 줘 버텨 섰다. 빠르게 평소의 침착함을 찾은 그녀가 우선 루스티첼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처음 용돈 조건을 아침저녁에 뽀뽀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잖아요. 중간에 조건을 바꾸면 교육 효과가 미미해집니다.”
“응? 그, 그렇지…….”
루스티첼 부인이 내밀었던 뺨을 도로 물렸다.
“루스 오라버니, 이번 일은 오라버니 잘못이 아니지요. 그리고 설령 오라버니 잘못이라구 해도 이런 일로 화내거나 미워하지 않아요.”
“……그래.”
루시우스가 느릿하게 대답하며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애초에 순순히 뽀뽀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칼리오페가 보통 아이들과 달리 스킨십에 낯가림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실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모자는 완전히 낙담해서는 시무룩했다. 보이지 않는 귀꼬리가 추욱 늘어진 것 같다.
‘음…….’
칼리오페는 그런 두 사람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당겨 쪽, 쪽 가볍게 뺨에 뽀뽀했다.
“……?!”
루스티첼 부인과 루시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쳐져 있던 귀꼬리가 순식간에 쫑긋 섰다.
“이런 친애의 표시는 그냥 할 수 있어요. 아무런 대가나 이유 없이도.”
다시 한 발짝 물러선 칼리오페가 조용히 말했다. 통통한 흰 뺨이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 물론 조금 부끄럽지만요. 그렇게 바라시는데 싫다 할 정도는 아니에요.”
시선을 못 마주치며 작게 말하는 수줍은 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참지 못했다.
“리페……!”
와락 칼리오페를 끌어안은 그녀가 보드라운 아이의 뺨에 제 뺨을 부볐다.
“누구 딸이길래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자랐어?”
둥기둥기하는 루스티첼 부인을 보던 루시우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리페.”
부르는 소리에 칼리오페가 돌아본 순간,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쪽, 하고 뺨에 닿았다.
“오, 오라버니?!”
새빨개진 칼리오페가 깜짝 놀라 루시우스를 불렀다.
“……우리 사이에서는 아무 대가나 이유 없이 할 수 있는 친애의 표시잖아.”
루시우스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럼, 그럼. 할 수 있지.”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면서 거들곤 쪽쪽, 칼리오페의 뺨에 뽀뽀했다.
로베르트는 아직도 거침없이 칼리오페에게 뽀뽀 세례를 하지만, 루시우스는 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막상 실제로 하진 않았다.
‘부끄러운가 보지. 리페가 아주 아기일 때는 안고서 내려놓질 않았으면서.’
“나도, 나도! 나도 리페한테 뽀뽀할 거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에게 달려들어 마구마구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 그만……. 이제 그만……!’
칼리오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겨우겨우 로베르트가 떨어져 나간 후에는 이마, 뺨, 코, 턱 할 것 없이 입술 도장이 쾅쾅 찍힌 후였다.
‘뭔가 엄청 지쳐버렸어.’
어머니와 함께 꽃꽂이를 하던 평화로운 오후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싶었다.
“그나저나 저금통이 깨졌으니 이 돈은 어디다 보관할까요?”
유모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생각에 잠겼다.
“그냥 적당한 곳에 보관하면 되지 않을까. 아버지께서 저금통 선물해주시기 전에 보관하던 곳이나?”
“알겠습니다.”
유모의 손짓에 하녀들이 오르골 상자에 돈을 넣기 시작했다.
“저렇게 보관하면서 하나도 안 꺼내쓰는 게 대단하단 말이지.”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자제심이 강한 아이라는 건 알지만 가끔씩 놀란다.
“자, 이제 두 아드님께서는 오후 훈련할 시간이에요. 어머, 벌써 시간 지났네.”
루스티첼 부인이 손바닥을 짝짝 치며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를 내보냈다.
“오라버니들, 훈련 힘내세요.”
칼리오페의 응원에 축 처져서 나가던 로베르트가 금방 밝아져서는 방방 뛰었다.
“응응! 힘낼게! 슈퍼 자이언트 스피릿 소환하는 거 보여줄 테니까!”
“아, 네……. 기대되네요…….”
슈퍼 자이언트 스피릿과 자이언트 스피릿이 뭐가 다른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말인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리페, 널 위해서 힘내도록 하마.”
“루스 오라버니?”
루시우스가 조용히 속삭인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 방을 나갔다.
‘무슨 뜻이지?’
고개를 갸웃하던 칼리오페는 곧 아, 하고 깨달았다.
‘곧 백룡 기사식이구나.’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종기사라서 이벤트에 참여하진 않을 텐데…….’
기억을 더듬어 봐도 루시우스가 열두 살 때 백룡 기사식에서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물론 그때는 내가 백룡 기사식을 보러 가지 않았지만.’
칼리오페는 내성적인 아이였고, 외출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불참했다고 해도 루시우스가 참여했다면 모를 리가 없다.
‘가족 일이니까.’
지금 같진 않아도 충분히 화목한 가정이었다. 루시우스가 백룡 기사식에서 주목 받았던 적은 열다섯 살에 정식 기사 서임을 받았을 때였다. 그때는 당연히 칼리오페 역시 기사식에 참관했다.
‘정식 기사는 나이 제한이 있으니 당겨졌을 리는 없고…….’
대체 뭘까요, 하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봤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 * *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칼리오페가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항상 보는 모습이지만 언제 봐도 앙증맞고 귀엽다.
루스티첼 백작은 당장 딸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무겁게 내렸다.
“리페.”
“네, 아버지.”
심각한 루스티첼 백작의 목소리에 칼리오페는 저절로 뜨끔했다. 선물 받은 저금통을 제대로 관리 못 한 만큼, 가슴 한 구석이 불편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들었다.”
루스티첼 백작은 은근하게 운을 떼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로베르트 녀석이 호다다닥 달려 나오며 깡총깡총 뛰길래 칼리오페가 뭔갈 해줬구나 싶었다.
‘그 녀석이 저렇게 폴짝거릴 일은 리페와 관련된 일밖에 없으니까.’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훈련하다 다친 걸 칼리오페가 치료해주었나, 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리페가 뽀뽀를……?!]
[응! 해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해주더니 먼저! 직접! 이렇게 이렇게! 쪽 하구! 내 뺨에! 뽀뽀해줬어요! 어머니랑 형아한테도 해주고……. 그치만 나한테 제일 먼저 해줬어요!]
루스티첼 백작은 로베르트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용돈을 대가로 아침저녁으로 뽀뽀 받긴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칼리오페에게 받는 뽀뽀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다.
그리하여 칼리오페가 작은 발걸음으로 채 마중 나오기 전에 복도에서 맞닥트린 것이다.
“……들으셨군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숙였다. 부러 신경 써서 선물해주신 건데, 싶어서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고개 들렴.”
그 말에 칼리오페는 움츠러든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녀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했다. 책임을 져야지 회피하면 안 된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하다고?”
“네, 제 부주의도 원인이었던 만큼…….”
“응? 부주의라니?”
“네?”
루스티첼 백작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흠흠, 뭐 부주의이긴 하지.”
확실히 부주의하게 아무한테나 뽀뽀하면 안 된다. 이런 교육은 평소에 뇌리에 박아줘야 한다.
“네, 반성하구 있습니다.”
“아니, 뭘 또 그렇게……. 가족끼리는 괜찮다.”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버지…….”
따뜻한 말에 칼리오페가 감동해서는 루스티첼 백작을 올려다 보았다.
“정확히는 부모와 자식 간에는 괜찮단다.”
루스티첼 백작이 은근히 강조했다.
아무렴, 부모 자식 간은 아무리 뽀뽀해도 괜찮은 사이였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설령 상대가 용서해줄 걸 알고 있어도, 알고 있는 만큼 분명하게 사과해야 한다구 말씀하신 분은 아버지신걸요.”
“용서라니?”
부녀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저금통을 부주의하게 관리했다는 걸 들으신 게 아닌가요?”
“아니, 나는…….”
온 가족에 뽀뽀해줬다는 말을 듣고 나한테도 해달라고 달려온 건데.
직접 말하자니 여태까지 쌓아온 아버지로서의 위엄이 한 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가족 간의 차별을 두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최대한의 이성을 발휘한 루스티첼 백작이 돌려 말했다.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별을 두는 건 당연히 좋지 않다.
‘하지만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특별한 애정 표현을 다른 가족 모두에게 했다는 말을 들었다.”
‘특별한 애정 표현? 아……!’
칼리오페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네에…….”
“차별은 좋지 않은 거다, 리페.”
루스티첼 백작이 몸을 낮춰 칼리오페와 눈을 맞추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저 위에 있던 얼굴이 눈앞에 다가왔다. 말하는 바가 명백했다.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전생에서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해드릴 수야 있지만 여러 사람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그런 과감한 애정 표현을 하기엔 부끄러웠다.
칼리오페는 힐끗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지나가던 하녀, 하인들이 어느새 멈춰 서서는 거리를 두고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저절로 식은땀이 났다.
고용인들은 좋은 주인이지만 딱딱하고 엄격했던 백작님이 저렇게 달라진 모습에 흐뭇했다. 저도 모르게 응원을 시작한 것이었지만, 칼리오페에게는 압박으로밖에 안 느껴졌다.
“리페.”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하우으…….’
“리페?”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쭈쭈해!’
‘으으으으……!’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얼굴에 열이 오르다 못해 눈가가 촉촉해졌다.
칼리오페는 눈을 꼬옥 감았다.
쪽.
그 작은 소리와 함께 일순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정적이 지나자 폭발적인 반응이 튀어나왔다. 하인들은 서로를 퍽퍽 때렸고 하녀들은 눈물을 지으며 루스티첼 백작을 바라봤다.
‘잘됐네요, 백작님.’
‘축하드려요, 백작님.’
‘정말로 잘 됐어요.’
‘그런데 조금 많이 부럽다.’
소리 없는 축하를 받은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를 와락 껴안고 들어 올렸다.
“아, 아버지!”
“리페, 내 사랑스러운 천사, 뭐 갖고 싶니?”
다 사줄게, 말만 해! 그런 눈을 하는 아빠를 보고 칼리오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제 용돈 교육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요?’
* * *
저금통을 깬 김에 칼리오페는 그간 모은 돈을 확인했다.
‘음, 역시 용돈을 아무리 모아봤자 이 정도인가.’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칼리오페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 투자하기는커녕, 하다못해 은행에 맡기기도 애매한 돈이었다.
‘역시 내가 직접 버는 수밖에 없어.’
칼리오페는 눈빛을 예리하게 빛내면서 틈틈이 구상한 사업계획서를 바라봤다.
‘분명 이거라면 돈을 쓸어모을 수 있어!’
그리하여 칼리오페의 ‘어린아이 코 묻은 돈 쓸어 담기’라는, 전무후무한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몇 년만 지나면 브리젤 자작에게 넘겨받은 부동산—살롱—이 스티그마가 될 것이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재산을 얻게 되는 것이니 굳이 돈 벌 궁리를 안 해도 괜찮다.
‘하지만 돈은 많을수록 좋고, 있는 땅을 놀리기도 아까우니까.’
효율의 문제다. 또, 나이가 어려 운신의 폭이 제한된 만큼 할 수 있는 건 하고 싶었다.
[리페가 살롱을 주최할 날이 기대되네.]
일전 사르니오 가에 놀러 갔을 때 서모나 부인이 했던 말이다.
그때는 살롱을 주최하려면 멀었다고 답했지만, 사실 이미 그 살롱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살롱을 주최하는 게 아니라 돈 벌 궁리를 한 거였지만.’
기회는 잡아야 한다.
처음 사업을 구상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혔다.
미래를 알고 있는 만큼 괜찮은 아이템을 몇 개 알고 있긴 하지만, 어린아이의 행동반경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발상을 바꿨다.
‘어린아이기에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 * *
“꼬든 헤이즈너 쪼꼬 주세여!”
주먹을 꼭 쥐고 당당히 외치는 모습에 살롱 메이드는 웃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골든 헤이즐넛 초콜릿이요. 3000운드입니다.”
하나, 두울, 세엣. 꼬마 아가씨가 천천히 돈을 세기 시작했다.
이내 볼이 발갛게 상기 되어서는 꼬옥 쥔 주먹을 내밀었다.
“와, 정확하네요. 3000운드 받았습니다. 벌써 이렇게 계산도 잘 하시고 대단하세요. 여기 초콜릿이요.”
“웅!”
초콜릿을 받은 꼬마 아가씨가 꺅꺅 하며 엄마에게로 뛰어갔다. 내가 사쬬! 개산 잘 해때! 그런 재잘거림이 들려왔다. 손에 들린 초콜릿보다 방금 이뤄낸 성취에 더 기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귀부인들이 루스티첼 부인에게 말 걸었다.
“고마워요, 루스티첼 부인. 덕분에 이런 경험을 하게 하네요.”
“아이들 교육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또래와의 교류에도 참 좋고.”
“역시 자녀분들을 잘 교육하신 분다우세요.”
경제관념을 심어주기 위해 용돈 교육을 하고 있지만, 정작 직접 물건을 사는 경험을 만들어 주는 건 힘들었다.
아이들 모두 부족함 없이 살고 있어서 원하는 건 간식이나 장난감 정도다. 밖에서 하는 군것질을 직접 사게 해봤지만 여러모로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보통 한두 번 해보는 이벤트 정도로만 끝냈다. 또, 귀족 아이들의 장난감은 비싸서 아이들 용돈으로 사긴 턱없이 부족했다.
‘장난감 같은 경우는 뒤에서 대금을 따로 치렀지.’
그런데 이렇게 아이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물건을 고르고 살 수 있는 사교의 장이 열린 것이다.
모든 과정이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데다가 또래들과 교류도 할 수 있다.
“어머, 여러분. 이 베이비 살롱을 구상하고 생각해낸 사람은 따로 있다고 들었어요.”
흐뭇한 얼굴로 귀부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서모나 부인이 슬쩍 끼어들었다.
“어머나?”
“대체 어느 분이실까요?”
귀부인들이 당황해서 부채 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상대를 착각해 칭찬하다니, 사교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모나 부인의 환한 얼굴에 실례되는 말을 하진 않았구나 싶어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이 베이비 살롱의 주인이지 누구겠어요.”
그 말에 귀부인들은 더더욱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주인이요? 이 살롱의 주인은 루스티첼 부인이 아니셨던……. 아, 설마?”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귀부인이 입을 벌렸다. 그 반응에 다른 부인들 역시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이가 받았지만 보통 관리는 엄마가 하기에 모두 루스티첼 부인을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베이비 살롱의 주인은—.
“칼리오페?”
통통한 뺨과 댕그란 눈으로 용케도 침착한 표정을 짓는 꼬마 아가씨 아니던가.
“루스티첼 부인, 정말 칼리오페가 기획한 일인가요?”
놀라서 묻는 귀부인의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작게 미소 지었다.
“저도 놀랐답니다. 이왕 살롱을 얻게 된 김에 또래 친구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요.”
“어쩜, 생각도 깊네요.”
“확실히 아이들을 위한 곳은 따로 없죠.”
귀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15세까지,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사교모임에 참석할 수 없다. 물론 친한 친구들과의 독서클럽 같은 경우는 예외이긴 하다.
아이들의 교류를 위해 귀부인들은 유아 동반이 가능한 피크닉이나 티파티를 따로 열고 한정적으로 교류한다.
“어린아이의 아이디어라서 그런가. 굉장히 참신하고 새롭네요. 이런 식의 공간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저도요. 대체 리페는 어떻게 이런 묘안을 냈을까요?”
* * *
“왜 안 줘? 나 딸기 프라페 먹고 싶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계산하지 않으면 못 드려요.”
“여기! 나 돈 있어!”
“죄송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돈이 부족하셔서…….”
벌써 몇 번째 오가는 말인지 모르겠다.
“안 끼어들어도 돼?”
호르세안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돌렸다.
“호세 오라버니, 오셨군요.”
“그럼, 와야지.”
단단한 손이 칼리오페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고 멀어졌다.
“아,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골든 헤이즐넛 초콜릿 관련 상품은 인기가 좋아요.”
“아니,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닌데. 물론 그것도 있지만…….”
“네?”
칼리오페의 되물음에 호르세안은 볼우물이 파일 정도로 깊게 미소 지었다. 가늘어진 호박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칼리오페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는 별말 하지 않고 카운터를 향해 턱짓했다.
“저거 정말 그대로 놔둬도 돼?”
“네.”
“저런 거 관리하는 것도 네 몫 아냐? 책임감이 없다고는 생각 안 했는데?”
놀리듯 묻는 말에 칼리오페는 작게 미소 지었다.
“호세 오라버니, 여긴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에요.”
아이용 다과를 파는 가게는 다른 곳도 있다. 단순히 사교계에서 받는 주목도를 이용해 유리한 고지를 점해서 장사하려는 게 아니다.
“제가 파는 것은 경험이에요.”
어린아이 코 묻은 돈을 쓸어 담겠다고 했지만, 아이와 아이를 위하는 부모 마음을 이용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왕이면 서로 도움이 되는 것을 판매하고 싶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세상에 던져지지 않기를 바라니까.’
울타리가 있을 땐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부서진다면?
칼리오페는 집에서 책 읽기 좋아하는 내성적인 소녀였다. 하지만 가족들이 차례로 죽고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칼리오페는 깨달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걸.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라는 것 역시.
“경험을 판다라……. 내게 찾아왔을 때도 그런 말을 했지.”
호르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들은 엄마 도움 없이 무언가를 사고, 이용하고, 먹고 있다.
“확실히 이런 곳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이지.”
아이를 대상으로 한 가게도 물품만 유아용일 뿐, 모든 것을 부모님이 알아서 해준다.
“그러니까 저렇게 진상 부리면 안 된다는 제지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호르세안이 팔짱을 턱, 끼며 이어 말했다.
“오히려 그런 제지는 지금이 아니면 경험 못 할지도 몰라. 상대가 진상이어도 권력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당하는 게 보통 현실이……. 앗차, 마지막 말은 잊어줘.”
칼리오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좀 봐줘. 리페랑 얘기하다 보면 그냥 또래랑 얘기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꽤 아이 취급을 하시지 않나요?”
“아이 취급이라니? 네 말에는 항상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밑으로 굴렀다. 정확히는 자신의 뺨을 꼬집고 있는 호르세안의 손을 향해서.
“하하, 이건 네가 귀여우니까 어쩔 수 없어.”
칼리오페는 뭐라 하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말씀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끼어들지 않는 거예요.”
그 말에 호르세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칼리오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권력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는 건 당연히 지탄 받을 일이지요.”
“그럼 왜?”
칼리오페가 재밌다는 눈으로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언젠가는 이런 문답을 반대로 했던 것 같은데.
‘역시 나이가 차면 어렸을 때의 생각이 잊히는 건가?’
“오라버니는 동생분들이 많잖아요. 그럼 아실 텐데요?”
“애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
호르세안이 옆구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 아침 에피니에게 따끈따끈하게 걷어차인 곳이었다.
“그건…… 몰랐네요.”
그 말에 호르세안은 무심코 칼리오페를 향해 부러워 죽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흠흠, 그게 아니라 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 것 말이에요.”
“확실히. 알지만 안 한다는 느낌이지?”
에피니도 오빠를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때리는 거니까.
“저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돈이 부족해서 사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칼리오페가 검지 손가락을 서로 교차시키며 ‘X’표를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무언가를 살 때, ‘돈이 부족해서 안 된다’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겠지요. 들어봤어도 갖고 싶다구 우기면 결국 손에 들어왔을 테구요.”
사실상 용돈 교육의 의미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뭐, 가게 주인 보기 민망해서라도 사줬겠지.”
아이 교육을 위해서라고 해도 그 상황을 견딜 수 있는 귀족은 거의 없다.
“네, 하지만 이곳은 돈이 부족해서 못 사도 흠이 되지 않지요.”
“과연. 돈이 부족해서 못 사는 경험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거야?”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아이가 저러는 건 당연한 거예요. 진짜로 안 된다는 걸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안 된다’라는 말을 들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 하는 거니까요.”
아이를 보던 호르세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리페…….”
감탄하듯 칼리오페를 부른 호르세안이 결국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마구 쓰다듬었다.
“호, 호세 오라버니?!”
당황스러운 칼리오페의 목소리에도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모처럼 루스 녀석이 없는 기회인데 쓰다듬게 해줘.”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칼리오페가 슬쩍 피하려는데 호르세안이 그녀의 양 뺨을 붙잡았다. 커다란 손이 볼을 감싸는 것과 동시에 두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 호르세안은 순간 당황했다.
“……호세 오라버니?”
“어? 아, 미안.”
저도 모르게 사과한 호르세안이 얼른 손을 뗐다.
루시우스가 없을 때 몰캉몰캉한 뺨을 양껏 만지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바로 앞에서 칼리오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뭐였지?’
호르세안이 인상을 쓰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 사이 칼리오페는 거울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마구마구 쓰다듬었는데 머리가 하나도 안 망가졌다.
‘역시 여자 친구들이 많아서?’
칼리오페는 갸웃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자 친구들도 많긴 하지만 동생이 다섯이나 되니 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동생분들은…….’
주변을 살피는 칼리오페의 눈에 높게 묶은 에피니의 붉은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남자애 위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호르세안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갑자기 한순간에 열 살은 더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 우리 아가씨께서 웬일로 조용하다 했지.”
“저건 말려야겠네요.”
그 말에 호르세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칼리오페는 따라 걸으며 아까 떼를 쓰던 아이를 확인했다. 결국 포기했는지 엄마 치마에 얼굴을 푹 묻고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엄마는 곤란한 듯 그런 아이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입에는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잘됐네.’
칼리오페는 슬며시 카운터로 가 아이를 상대했던 살롱 메이드에게 말을 붙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귀족 아이에게 거절하는 게 큰일이었을 것이다.
고용인들을 살피고 배려하는 것 역시 살롱의 주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 고생한다며 격려하자 살롱 메이드가 전혀 아니라고, 즐겁다며 고개를 저었다. 안색을 보니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다.
‘좋아.’
왠지 뿌듯하기도 했다. 칼리오페로서도 이렇게 무언가를 주최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뒤돌아서려는 순간, 메이드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 초콜릿 나한테 주는 거야?”
“앗, 아니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 메이드가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물리려 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칼리오페가 메이드의 손을 턱 붙잡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호의는 거절할 필요 없다.
“고마워. 잘 먹을게.”
빼간 초콜릿을 살짝 흔들며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칼리오페가 그렇게 사라지자마자 메이드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카운터에 있던 다른 메이드가 그녀의 어깨를 퍽퍽 쳤다. 두 사람은 몸짓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말랑말랑한 얼굴로 귀부인처럼 치하하는 꼬마 아가씨의 모습이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그 후에 살짝 뿌듯해하는 모습이 더더욱.
* * *
“쟤가 잘못했어! 난 잘못 없어!”
호르세안은 컁컁거리는 에피니를 한 손으로 달랑 들어 올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발버둥 치는 에피니에게 또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윽…….”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맞은 바로 그 자리였다.
이 ‘취급 주의’가 붙은 새끼 맹수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호르세안은 미간에 줄을 잡았다.
“오랜만이네요, 에피니 온니.”
때마침 끼어든 침착한 목소리에 에피니가 발버둥을 멈췄다.
“흥.”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렸지만, 오빠 손에 달랑달랑 들린 상태에서 그래 봐야 귀엽기만 하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쟤가 나 때렸어!”
“쟤가 맞을 짓을 했어!”
“내가 에피니를 안 본 잘못이지.”
칼리오페의 물음에 세 사람이 차례로 답했다.
“호세 오라버니 잘못은 확실하네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피니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에요?”
“아, 아니……. 아닌 건 아닌데.”
에피니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호르세안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하자니 뭔가 편 들어주는 것 같아서 싫었다.
칼리오페가 시선을 돌려 호르세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호르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빤히 응시하는 산호빛 눈동자에 호르세안은 주춤했다.
‘뭐지, 내가 엄청 잘못한 듯한 기분인데.’
생각하던 호르세안이 멈칫 했다.
‘아니, 잘못했나?’
칼리오페가 자신처럼 장난삼아서 잘못했다고 말했을 리가 없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쩌다 싸우게 된 거예요?”
“쟤가 맞을 짓 했다니까?”
에피니가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내가 뭘 했다구! 나는 그냥 내 장난감 가지고 놀았을 뿐이야! 근데 저 왈가닥이 날 때리잖아!”
“뭘 그냥 가지고 놀아! 엄청 놀려댔으면서! 건들지도 못하게 하고!”
“내 건데 내 마음이지!”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칼리오페는 남자애 손에 들린 장난감을 바라봤다. 눈에 익은 모양이 분명 자이언트 스피릿과 관련된 장난감인 듯했다.
“맞아요. 자기 물건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지요.”
칼리오페가 수긍하자 에피니가 휙 그녀를 쳐다봤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배신감이 가득했다.
“에피니 온니도 자기 오라버니 있잖아요. 출격하라구 하세요. 자이언트 스피릿 소환도 할 수 있을걸요?”
“뭐?!”
손가락질 당한 호르세안이 당황해서는 되물었다.
칼리오페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 다정한 미소가 ‘뭘 잘못했는지 몸으로 구르면서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호르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착각이겠지.’
“마, 맞아. 나한텐 내 장난감이 있다구!”
에피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난감이라니?!’
호르세안은 얼떨떨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왠지 두 꼬마 아가씨들한테 양쪽으로 치이는 느낌이다.
“자, 가라! 자이언트 호세 스피릿! 저 악당을 쓰러트려!”
에피니가 남자애를 삿대질하며 당당하게 외쳤다.
“흥, 그래 봐야 내 자이언트 떠봇한테는 못 당해!”
호르세안이 대체 어떻게 하냐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칼리오페는 아까와 같이 미소로 답해주었다.
결국 호르세안은 에피니를 내려놓고 출격할 수밖에 없었다.
“자, 에피니 온니는 저랑 가서 차 마셔요. 오렌지 아이스티 좋아하셨지요?”
칼리오페가 에피니의 손을 잡았다. 에피니는 깜짝 놀라서 잡힌 손을 바라봤다가 다시 칼리오페를 봤다.
“왜 그러세요?”
“으응, 아냐.”
고개를 저은 에피니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형제들도 그렇고 또래 아이들과는 항상 싸우기만 했지 이렇게 다가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힐데르트가 테이블로 왔다.
“리페.”
“아, 힐데르트 오라버니. 앉으세요.”
힐데르트가 앉으며 슬쩍 에피니를 바라보았다.
“아, 이쪽은 에피니 온니예요. 온니, 이쪽은 힐데르트 오라버니구요.”
“……안녕.”
힐데르트는 내키진 않았지만 칼리오페를 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흥.”
하지만 돌아오는 건 쌀쌀맞은 외면이었다.
‘왜 칼리오페 주변에는 성질 더러운 애들만 모이는 걸까.’
본인도 그중 하나라는 걸 알지 못한 채 힐데르트가 혀를 찼다.
“소개 안 해줘도 알아. 왈가닥 에피니. 유명하잖아.”
“뭐라고?!”
“저는 처음 듣네요. 다른 걸로 유명할 줄 알았는데.”
“다른 거?”
“네, 굉장히 강하고 힘이 세다는 걸루요.”
“그것도 유명하긴 하지?”
힐데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왈가닥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 중 하나니까.
“네, 왈가닥이라구 떠드는 사람들은 모두 에피니 온니한테 지는 바람에 분해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며 칼리오페는 에피니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날 왈가닥이라고 부르는 애들이 다 나를 질투해서라고……?”
“그렇지 않아요?”
“마, 맞아!”
에피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니는 그런 애들하고는 달라요. 더 세고 더 강하니까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 없어요.”
“그렇지. 맞아.”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오페가 눈을 크게 떴다. 손에 익숙한 레이스 손수건이 아니라 다른 게 들려 있었다.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나무에 묶여 있었던 라이난테 실크 손수건이었다. 혹시 손수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들고 온 바람에 잘못 꺼낸 것이다.
“힐데르트 오라버니, 혹시 이 손수건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
“응? 손수건?”
“네, 저번 피크닉에서 주웠는데 주인에게 돌려 주고 싶어서요.”
“이니셜이나 문장 없어? 아무 표식도 없으면 어떻게 알아?”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받아든 힐데르트가 막상 펴보더니 단번에 말했다.
“이거 레아스 거야.”
아무 힌트가 없으면 대체 어떻게 아냐고 했던 것치고 단호한 확답이었다.
“네?”
레아스? 그게 누구지?
칼리오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핫, 하고 숨을 삼켰다. 모를 리 없는 사람인데 애칭으로 부르는 걸 처음 들어서 순간적으로 누군지 생각이 안 났다.
레아스. 사람 가리는 힐데르트가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사람.
아스타레아스 카스틸로.
“카스틸로 공자님 말씀이세요?”
* * *
베이비 살롱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귀부인들은 너도나도 아쉬움을 표했고 그들의 수요를 받아 베이비 살롱은 상시 오픈하기로 했다.
‘살롱이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본질은 가게이니 매일 오픈하는 쪽이 좋지.’
칼리오페는 흡족했다. 물론 체험할 기회가 더 많이 생기는 것이니 꼬마 손님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래도 베이비 살롱에 리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귀부인들은 제 자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칼리오페의 존재를 매우 아쉬워했다. 그래서 매달 말일을 ‘파티 데이’로 지정해서 칼리오페가 참석하기로 했다.
‘이걸로 인맥까지 만들 수 있게 됐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선 돈과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을 만들기 위해선 인맥이 필요하다.
‘돈을 벌려고 시작한 사업인데 인맥까지 따라오니 일석이조야.’
게다가 생각보다 훨씬 수익률이 좋았다.
특히 호르세안이 칼리오페를 위해 개발했던 그 ‘악마의 음료’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악마의 음료라는 이름은 거부감이 있을 거라서 평범하게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라고 지었지만.’
칼리오페 속의 인상은 여전히 악마의 음료였다.
호르세안은 그 이름에 반대했었다.
[리페를 위해 만든 음료니까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라고 불러야지.]
정말 농담을 진담처럼 던지는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칼리오페는 호르세안에게 진심으로 싸늘한 시선을 보낼 뻔했다.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는 명실공히 베이비 살롱의 시그니쳐 메뉴로 자리 잡아 매상에 톡톡히 일조했다.
다들 베이비 살롱에서 처음 먹어봤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베이비 살롱에서만 판매하기로 호르세안과 협의했다.
[좋아. 그건 리페를 위해 만든 음료니까 리페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호르세안은 칼리오페의 제의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음료를 특별한 조건 없이 이쪽에 독점으로 제공하는 것이었기에 칼리오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이득이어도 그런 불공정한 거래를 할 순 없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호르세안과.
[리페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나는 ‘리페의 달콤달콤한 금빛 회오리’를 만들지 않았을 거야. 리페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선물로 만든 음료인걸.]
[…….]
뭔가 감동적인 말을 한 것 같지만 그것보다 리페의 달…… 어쩌고 하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몇 번이나 정정했는데 여전히 그렇게 부르는 호르세안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칼리오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호르세안의 단호한 말에 칼리오페는 그가 골든 헤이즐넛 블렌딩 프라페의 경제적 가치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있는데도 추가 조건은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음료는 칼리오페에 대한 선물이기 때문에.
[그럼 비율을 조정하는 걸로 하지요.]
계약서 작성이나 최종적인 인가는 루스티첼 부인과 엘피너스 백작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계약 조건은 호르세안과 칼리오페가 정했다.
워낙 서로 우호적인 집안인 데다가 사업 규모가 점포 하나 정도로 작아서, 두 가문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거래 자체에 만족했다. 결과보다는 이 경험이 그들에게 중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까지 서로에게 좋았으니 두 가문은 더더욱 돈독해졌다.
“리페.”
부르는 소리에 매출표를 보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루시우스와 로베르트가 책상 앞에 서 있었다. 루시우스는 어쩐지 쑥스러워하고 있었고, 로베르트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응? 대체 무슨 일이지?’
“크흠, 리페.”
루시우스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볼이 살짝 붉었다.
“네, 루스 오라버니.”
“저번에 우리가 네 물건을 망가트렸었지.”
“제 물건을 망가트렸다구요?”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던 칼리오페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금통 말씀이세요? 그건 괜찮습니다.”
“괜찮아도 네가 소중히 여기던 걸 망가트린 건 사실이다.”
“네, 사실이지만 전 정말루 아무렇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자꾸 죄송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정말! 답답해 죽겠네!”
로베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저금통을 샀어!”
그가 등 뒤에 숨기고 있었던 저금통을 불쑥 내밀었다.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저금통을 쳐다보았다가 루시우스와 로베르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어쩐지 로베르트가 루시우스보다 살짝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더라니, 저걸 숨기려고 했나 보다.
“이걸 두 분이서 사신 거예요?”
“그래.”
루시우스의 대답에 칼리오페가 저금통을 바라봤다. 네모 반듯한 상자 모양의 저금통에는 알록달록한 칠이 되어 있었다.
두 오빠가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샀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건 깨지지 않는 거야! 돈을 뺄 때는 이렇게 밑에 있는 구멍을 열어서 하면 돼! 그리고 이렇게, 여기 동전을 올려놓으면…….”
로베르트가 동전을 올려놓자 저금통 윗부분이 살짝 열리며 멍뭉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빼꼼 고개를 내민 멍뭉이가 손을 뻗어 동전을 가지고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칼리오페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랑스럽게 보여줬으면서 다 보여주자 자신이 없어졌는지 로베르트가 저금통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예, 예전 것보다 마음에 안 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어요.”
칼리오페의 말에 로베르트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환히 웃는 칼리오페의 얼굴에 로베르트와 루시우스 둘 다 숨을 삼켰다.
“잘 쓸게요.”
칼리오페는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저금통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저금통 대용으로 썼던 오르골을 열어 동전을 꺼내 저금통에 직접 넣었다.
다시 멍뭉이가 동전을 가져갔다.
‘……이 멍뭉이 아무리 봐도 닮았는데.’
칼리오페는 힐끔 두 오라버니들을 바라봤다.
대놓고 헥헥거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붕붕 흔드는 로베르트. 무표정한 얼굴이면서 귀를 바짝 세우고 꼬리를 살금살금 흔드는 루시우스.
‘역시 닮았어.’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귀여워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두 오라버니를 돌아봤다. 저금통 멍뭉이와 두 오라버니 모두 귀엽다.
“그치!”
다시 자신감이 빵빵해진 로베르트가 외쳤다. 루시우스는 아닌 척하면서도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런데 이거 비쌌을 텐데…….’
마법이 쓰인 만큼 비쌌을 게 틀림없다.
칼리오페는 최근 유난히 성실했던 두 오라버니의 일과를 떠올렸다. 용돈, 용돈 중얼거리는 로베르트를 보고 갖고 싶은 게 있나, 했는데 이런 선물을 준비했을 줄이야.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비극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사건을 겪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현실이니까.
‘내가 겪었던 미래가 절대 찾아오지 않게 할 거야.’
소중한 가족들을 지킬 것이다.
“그렇지, 참.”
두 오빠들을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손뼉을 짝, 쳤다.
“같이 부모님께 가요.”
“응? 왜?”
어리둥절하면서도 두 오빠들은 칼리오페를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저금통을 챙겨 방을 나서면서 칼리오페는 유모에게 눈짓했다. 유모는 칼리오페의 뜻을 곧장 알아듣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녁에 밥 먹으면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오라버니들이 선물해줬으니 딱 알맞은 타이밍인 것 같았다.
* * *
“어머, 어서 오렴.”
“모두 함께 오다니, 무슨 일이 있었나?”
칼리오페는 부모님이 앉아있는 소파 앞의 테이블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까 그녀가 보고 있었던 베이비 살롱 매출표가 놓여 있었다. 두 분이서 그 얘길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엣헴!’
칼리오페는 뿌듯한 기분이 되어 어깨를 폈다.
“아참, 리페. 아버지께 우리 리페 살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단다. 정말 대단했다고.”
칼리오페를 본 루스티첼 부인이 바로 그녀를 칭찬했다.
부끄러운 속마음을 다 들켰다는 생각에 칼리오페가 살짝 뺨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칭찬은 기분 좋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니?”
“아, 오라버니들께서 제게 저금통을 선물해주셨어요.”
칼리오페가 저금통을 내밀었다.
“어머나.”
“리페는 자상한 두 오라버니가 있어서 좋겠구나.”
두 부부는 이미 아들들이 무엇을 위해 용돈을 그렇게 모았고, 어떤 걸 샀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본 것처럼 감탄했다.
“네, 좋아요.”
그 기쁨이 가득한 말에 루시우스의 입매가 살짝 실룩였다. 누가 봐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는 거였다.
내친 김에 칼리오페는 동전을 들고 저금통 사용법을 시연했다.
“정말 귀여운 저금통이네.”
“루스와 로벨이 얼마나 리페를 생각했는지 느껴지는구나.”
“응! 리페한테는 가장 좋은 거 해줘야 하니까!”
로베르트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모습에 칼리오페 역시 미소 지었다.
선물해준 것을 상대가 좋아하고 잘 쓰는 데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까지 하면 당연히 뿌듯하다. 그래서 부러 저금통을 들고 와 부모님께 자랑한 것이다.
‘무, 물론 기뻐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도 있긴 하지만…….’
칼리오페는 몰래 얼굴을 붉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유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유모의 손에 들린 걸 확인한 칼리오페는 가족들을 돌아봤다.
왠지 살짝 긴장됐다.
‘루스 오라버니도 이래서 그렇게 뜸을 들였던 걸까.’
정성을 다해 상대를 생각한 만큼, 상대가 받았을 때의 반응이 기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두려웠다.
‘혹시 실망하시면 어쩌지?’
유모가 건네준 꾸러미를 살짝 매만진 칼리오페는 결심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저어, 저도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선물?”
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칼리오페는 꾸러미 안에서 포장된 상자를 꺼내 부모님께 내밀었다.
짙은 쪽빛 포장지에 은박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은 아버지 것, 말린 장미 빛깔 포장지에 금박 무늬가 새겨진 것은 어머니 것이었다. 상자엔 풍성한 리본을 두르고 활짝 핀 꽃으로 마무리했다.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포장에 루스티첼 부부는 내심 놀랐다.
“어머니, 아버지께 제 힘으로 번 돈으로 선물을 사드리고 싶었어요.”
전생에선 성인이 되어서도 드리지 못했던 선물이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작된 악몽 같은 현실에 이런 소소하고 보드라운 행복은 모두 잡아먹혔다. 지금이라도 이룰 수 있어서 다행이다.
칼리오페는 말이 없는 부모님을 보고 다급히 덧붙였다.
“물론 온전히 제 힘은 아니지만요. 두 분께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구, 두 분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머, 엄마가 오히려 우리 딸 덕을 봤는데 그게 무슨 말이니?”
“리페, 네 힘으로 일궈낸 일이란다.”
다정한 대답에 칼리오페의 뺨이 붉어졌다.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선물을 사 부모님께 드렸다. 선물을 받은 부모님이 ‘수고했다’, ‘잘했다’하고 인정해주시는 것만큼 가슴이 뿌듯한 일이 어딨을까?
“포장이 너무 예뻐서 풀기 아까울 정도지만 우리 리페가 뭘 선물했을지 궁금하니까.”
포장을 푸는 부모님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로베르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보였다. 꼭 ‘기다려’라는 말을 듣고 얌전히 앉아 간식을 들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는 멍뭉이 같았다.
내꺼는? 내꺼는? 나도 선물! 리페의 선물!
분명 얌전히 서 있는데 어째서인지 저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로벨 오라버니와 루스 오라버니께도 드릴 선물이 있어요.”
칼리오페는 서둘러 간식…… 아니, 선물을 내밀었다.
“와아— 고마워, 리페!”
“고맙다, 리페.”
차례로 인사한 두 오빠가 선물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로베르트는 포장을 푸는 게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잡고 뜯어내 해체하는 거였다. 반면에 루시우스는 꽃부터 떼고 리본을 푸는 등 차분한 느낌이었다. 다만 두 사람의 손길 모두 급하다는 것만은 똑같았다.
칼리오페는 조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포장이 모두 풀렸다.
“와아, 너무 예뻐!”
로베르트가 탄성을 질렀다. 그 진심 어린 감탄에 칼리오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 우리 리페는 센스도 참 좋지. 가족들끼리 세트네.”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칼리오페가 가족들에게 선물한 것은 작은 참장식이었다. 투명한 빛을 발하는 산호빛 보석을 중심으로 오너먼트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의 오너먼트는 검, 어머니의 오너먼트는 만년필. 세 개의 검은 모두 조금씩 모양이 달랐다.
“이거 내가 쓰는 검인데…….”
루스티첼 백작이 경탄하며 중얼거렸다.
“네, 아버지 검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구 했어요. 어머니 것은 서명하실 때 쓰시는 만년필을 본땄어요.”
선물 받는 사람 단 한 명을 위한, 세상에 다시 없는 것을 주고 싶었다.
가문을 경영하고 온갖 사업을 후원하는 어머니는 기사인 아버지가 검을 쓰는 것만큼이나 만년필을 많이 쓰신다.
“오라버니들께도 쓰시는 검 모양으로 오너먼트를 만들어드리고 싶었지만……. 앞으로 검이 자주 바뀔 테니까요.”
쑥쑥 자라는 두 오빠들은 성장에 따라 검을 계속 바꿔 썼다.
“이것도 충분히 좋아!”
로베르트의 말에 루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나중에 이 오너먼트 디자인에 맞춰 검을 제작하면 된다.”
‘……검 디자인은 중요한데 이렇게 정해도 되는 건가요?’
설마 그러겠냐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정도로 선물이 마음에 든 거라고 생각하니 기뻤다.
“맞아. 진짜 그러면 되겠다. 내가 즐겨 쓰는 종류의 검인걸?”
로베르트가 오너먼트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상대적으로 폭이 좁고 길이가 그렇게 길지 않은 아밍 소드(Arming sword)였다. 반면 루시우스의 오너먼트는 길이가 길고 폭이 넓은 데다가 베기에 최적화된 워 소드(War sword)였다.
“로벨 오라버니께서 한 손 검을 더 좋아하신다는 걸 아니까요.”
“리페……!”
로베르트는 칼리오페의 말에 감격해서 그녀를 와락 끌어 안았다.
“오너먼트 장식도 정말 예쁘지만 이 보석도 마음에 쏙 들어. 꼭 리페의 눈동자 같은걸?”
어머니의 말에 칼리오페가 뜨끔했다.
“마침 색이 잘 맞는 보석을 발견해서요.”
“정말 잘 골랐네.”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에 보석을 한참 들여다보던 루시우스가 중얼거렸다.
“하고 다니면 리페랑 항상 같이 있는 기분이겠군.”
“그러게!”
“이건 정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선물이구나. 고맙다, 리페.”
루스티첼 백작이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했다.
이런 작은 부분에서 칼리오페가 얼마나 가족을 생각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지 느낄 수 있었다. 조숙한 막둥이는 또래보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 인색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속마음은 깊다.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칼리오페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돈 주고도 구할 수 없지요.’
그리고 조용히 속으로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다.
요즘엔 참(charm)을 단순히 장식이란 의미로 많이 쓰지만, 원래는 부적을 겸하는 장식을 뜻한다.
그리고 칼리오페가 가족에게 선물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참장식이었다.
* * *
베이비 살롱을 오픈한 날 당일, 손님들을 상대하던 칼리오페는 피로감을 느끼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한숨 돌리고 바로 나갈 생각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는데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빡이자 눈앞은 숲으로 변해 있었다. 어딘지 익숙한 숲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땅고래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테……라님?”
[오랜만이구나, 소중한 아이야.]
칼리오페는 이 숲이 왜 눈에 익은지 깨달았다. 테라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 생겨나던 환상의 숲이었다.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 말에 고래가 고개를 갸웃했다.
[싫으니?]
“아니요. 단지 예상 외라서요.”
칼리오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내게 불러준 노래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고래가 지느러미를 살짝 저었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에 따라 새끼손톱만 한 일곱 개의 투명한 보석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건……?”
[에테르를 담을 수 있는 크리스털이란다.]
크리스털이 두둥실 움직이며 칼리오페 앞에 주욱 늘어섰다.
[노래해보렴.]
* * *
투명했던 크리스털은 칼리오페의 눈과 똑같은 빛으로 변했다. 그리고 지금은 참장식이 되어 가족들에게 선물로 전해졌다.
참장식을 어디에 달까 고민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려 유모를 불렀다.
“유모.”
“네, 아가씨.”
본인이 준 선물이 환영받은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유모가 얼른 칼리오페에게 다가왔다.
“이거, 유모 선물이야.”
“……!”
꾸러미에서 하나 남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자 유모의 녹색 눈동자가 울렁울렁 물결쳤다.
유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선물 상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굳어 있던 그녀가 천천히 팔을 뻗어 작은 손이 내민 상자를 받아 갔다.
“아가씨…….”
가슴에 선물 상자를 꼬옥 품은 유모가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눈가가 촉촉했다.
“유모도 내 가족이잖아. 당연히 선물해야지.”
그 말에 유모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렀다.
문득 칼리오페가 처음 말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 자그마한 아가씨는 자신을 빼놓지 않았다.
‘고마워하는 내게 지금처럼 내 가족이라고 말했지.’
그 말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는지 모른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아니, 더 가슴에 사무쳤다.
“맞아! 유모도 우리 가족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유모.”
번갈아 말하는 로베르트와 루시우스의 모습에 유모가 울면서 함박 웃음을 지었다.
“네, 이 유모도 우리 아가씨, 도련님들을 제 가족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루스티첼 백작과 부인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어준 유모에게도, 유모의 가족이 되어준 아이들에게도 고마웠다.
“유모는 뭘 받았을지 궁금하니까 어서 풀어봐.”
풀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는 유모에게 로베르트가 재촉했다.
포장을 풀자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가 나왔다. 목걸이 참은 산호빛 크리스털이 메인으로 주변에 작은 녹빛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건 투어말린이네.”
루스티첼 부인이 말했다.
“신경 써서 골랐나 봐. 유모의 눈동자 색과 잘 맞아.”
투어말린은 살짝 채도가 낮은 녹빛을 띄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가치가 떨어졌을 테지만, 선물 받는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채를 고른 것이니 오히려 더 좋은 선물이었다.
“다른 가족들처럼 오너먼트를 달아 참장식으로 만들어 선물할까 했지만, 유모가 가지고 다니기엔 목걸이가 나을 것 같아서……. 목걸이면 일하는 데도 방해 안 될 거고.”
유모는 양손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서 개인 물건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물건에 다는 참장식보다 아예 목걸이를 선물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네, 이거면 항상 지니고 다닐 수 있겠어요.”
유모가 빙긋 웃으며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받는 사람을 위해 고심한 흔적이 남아 있는 선물이라 그 어떤 것보다 기뻤다.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착용해 봐. 잘 어울릴 거야.”
루스티첼 부인이 웃는 얼굴로 재촉했다.
“하지만 아까워서……. 그럼 아가씨께서 해주시겠어요?”
“응, 좋아.”
목걸이를 받아든 칼리오페가 고개 숙인 유모의 목에 목걸이를 둘렀다.
‘으음……. 생각보다 훨씬 어렵네.’
자꾸만 잠금쇠가 고리에서 미끄러졌다.
끙끙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완전히 집중한 칼리오페의 모습을 가족들이 웃음을 참은 채 지켜봤다.
“됐다!”
어찌나 고생했는지 목걸이를 연결하는 데 성공하자 함성까지 나왔다.
“고마워요, 아가씨. 절대 풀지 않을게요.”
“나야말로 항상 고마워.”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가족들을 한 번 찬찬히 둘러본 다음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 모두 정말 고마워요.”
전생을 통틀어서 현생까지, 가족들에게는 항상 받기만 했다.
칼리오페가 커서 무언가 해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아무도 곁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가족들 모두 자신이 준 선물을 들고 웃고 있다.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뿌듯하고 행복하다.
‘제발, 이 행복이 영원하도록 해주세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단지 가족들의 웃는 얼굴을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