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7. 이 삼각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8/41)

Chapter 7. 이 삼각관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칼리오페!”

유리안이 커다란 목소리로 칼리오페를 부르며 뛰쳐나왔다. 양갈래로 낮게 묶은 벚꽃잎색 머리카락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칼리오페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젤리나 온니.”

“아, 응……. 안녕.”

유리안도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붙들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르니오 부인.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오렴, 리페. 어서오세요, 루스티첼 부인.”

“오랜만이네요, 사르니오 부인. 마침 영지에서 질 좋은 복숭아가 영글어서 복숭아 프로마쥬를 만들어 가져왔어요.”

“어머나, 사려 깊으시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사르니오 부인이 두 사람을 정원으로 안내했다.

“장미가 활짝 펴서 정원에 자리를 마련했어요.”

“딱 향기로울 시기지요. 오늘 마침 날이 좋네요.”

“리페가 좋아한다는 딸기 타르트도 준비했답니다.”

그 말에 옆에서 얌전히 걷던 칼리오페가 멈칫했다.

‘이제 딸기 타르트는 그만 먹고 싶은데요…….’

선물 받은 그 수많은 딸기 타르트를 겨우겨우 다 먹어치운 참이었다. 앞으로 10년간 딸기 타르트를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으음, 그래도…….’

자신을 위해 일부러 준비해준 사르니오 부인의 마음은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사르니오 부인.”

어린아이의 다소곳함이 깜찍해 보였다. 사르니오 부인이 뺨을 부풀리며 미소 지었다.

햇살이 다사로운 오후 정원에 티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분홍빛 장미 덤불에서 달콤한 향이 기분 좋게 흩어졌다.

“갑작스럽게 방문을 미뤄서 죄송했어요.”

찻잔에 홍차가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루스티첼 부인이 사과했다.

“아니요, 그럴 만하지요. 리페는 괜찮은 건가요?”

사르니오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레 칼리오페를 바라봤다.

원래 오늘 티타임은 훨씬 더 전에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칼리오페의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에 미뤄졌다. 아이가 아프기만 해도 마음 졸이는 게 부모인데, 브리젤 자작 일가가 행패까지 부렸다고 들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다행이구나. 혹시 쉬고 싶으면 말하렴.”

“네.”

밝게 미소 짓는 아이의 얼굴에 사르니오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케이크 스탠드 위에 있는 다과를 칼리오페 앞으로 날랐다.

‘따, 딸기 타르트는 정말 이제 괜찮은데…….’

칼리오페는 다소 두려운 눈으로 접시를 바라봤다.

빠져나갈 핑곗거리가 없나 주변을 살피는데 꼼지락거리는 유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말을 걸고 싶은데 부끄러운 모양이다. 여전히 수줍은 아이였다.

“안젤리나 온니, 보고 싶었어요.”

칼리오페가 유리안의 손을 탁 잡았다.

유리안은 흠칫 놀라 칼리오페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사르니오 부인에게 향한 후였다.

“온니랑 놀다 와두 될까요? 정원 구경하구 싶어요.”

“어머, 물론이지. 어른들이랑 있으면 재미없을 텐데……. 재밌게 놀다 오렴.”

“사르니오 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을 리가요. 다녀오면 꼭 함께 차를 마셔주세요.”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짝 고개를 숙인 칼리오페가 유리안을 이끌었다.

타박타박 멀어지는 칼리오페의 뒷모습을 몽롱하게 쳐다보던 사르니오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사르니오 부인은 칼리오페의 치맛자락이 덤불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저희 안젤리나도 저렇…….”

무심코 말하던 사르니오 부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창백해진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본 루스티첼 부인이 말을 받았다.

“안젤리나도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걸요.”

“그, 그렇죠.”

사르니오 부인이 동의하며 생긋 미소 지었다.

* * *

“와아, 수국도 활짝 피었네요!”

칼리오페가 방긋 웃으며 유리안을 바라봤다. 소담한 수국 사이로 서 있는 유리안은 꼭 한 송이의 꽃 같았다.

칼리오페가 웃으니 유리안도 좋았다.

두 아이는 꽃에 파묻혀 향긋한 향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켰다.

‘나비다.’

그러던 차에 유리안은 나비를 발견했다. 나비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얇은 날개를 접고 꽃 위에 앉아 있었다. 유리안은 맨손으로 단번에 나비를 잡았다.

“어? 나비네요.”

칼리오페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유리안의 작은 손안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유리안은 대답도 하지 않고 집중해서 나비의 가냘픈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다.

‘신기한 건 알겠지만…….’

칼리오페가 불쌍하니 놓아주자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

유리안의 작고 가는 손이 나비의 날개를 찢었다.

찌지직, 들릴 리 없는 찢기는 소리와 나비의 비명이 울리는 듯했다.

“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칼리오페는 숨을 들이켜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안젤리나 온니.”

유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칼리오페의 눈가가 떨렸다.

새순같이 연한 유리안의 눈동자는 여전히 유순했다.

말을 잃은 칼리오페가 입을 다물자 순연한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든다.

‘왜 그래?’

그 소리 없는 말을 듣자 말문이 턱 막혔다.

날개를 찢기고서도 살아남은 나비가 손바닥 안에서 파닥거렸다. 유리안은 시선을 내렸다.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나비의 더듬이와 다리가 아이의 관심을 끌었다.

자그마한 손이 재차 나비를 해체했다. 날개가 떨어지고 더듬이와 몸통이 분리된다.

해체된 나비를 들고 서 있는 아이는 새싹 같은 연녹색 눈동자에 아기자기한 프릴과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람이 한차례 드레스 자락을 흩트리고 꽃잎 같은 아이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칼리오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아가씨!”

사르니오 가의 하녀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서모나 부인과 힐데르트 도련님께서 오셨어요.”

하녀의 시선이 잠시 유리안의 손에 머물렀지만 그뿐이었다.

돌아서서 안내하는 하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겼다.

‘반응을 보니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유리안의 손안에는 여전히 나비가 있었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딱히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나비가 괴로워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유리안에게는 그저 예쁘고 재밌는 놀이일 뿐.

‘그런데 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

나비에게서 관심이 떠난 유리안이 손바닥을 털었다. 찢어진 나비 날개가 꽃길 위에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칼리오페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 * *

“리페!”

힐데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뛰어오던 그가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와서는 멈칫했다.

흠흠, 하고 표정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걸어와서 작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안젤리나도.”

칼리오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았다. 부끄럼 타느라 아닌 척하는 요 꼬맹이가 너무나 귀여웠다.

‘오히려 티 나잖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안젤리나도’ 하고 덧붙인 게 더 어색했다.

“네, 오랜만이에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유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슬쩍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더니 작게 말했다.

“어서 와.”

칼리오페가 보기엔 수줍은 모습이라 다시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힐데르트는 유리안의 인사를 못 들은 척 몸을 돌려 티테이블로 다가갔다.

칼리오페는 다시 웃음을 참았다.

‘어쩌지. 안젤리나 언니는 사실 남자인데.’

첫사랑의 추억이 꽤 날카로울 걸 생각하면 안쓰럽지만, 그래도 귀여운 건 어쩔 수 없다.

“안녕하세요, 서모나 부인.”

“오랜만이구나, 리페. 몸은 좀 괜찮니?”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서모나 부인의 눈이 다정하게 칼리오페를 살폈다. 혈색이 완연한 장밋빛 뺨을 보고서 대견하다는 듯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안젤리나.”

“안녕하세요.”

서모나 부인의 인사에 유리안이 작게 답했다. 유리안은 부끄러움 타듯이 칼리오페의 손을 꼬옥 잡았다.

서모나 부인을 보고 있던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하며 유리안을 돌아봤다. 시선 끝에 힐데르트가 엄청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들어왔다.

‘음, 이건 내가 잡은 게 아니라 유리안이 잡은 거랍니다.’

칼리오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유리안이 힐데르트에게 혀를 쏙 내밀고 있는 건 보지 못했다.

“리페!”

힐데르트가 소리치듯 칼리오페를 불렀다.

“네, 네?”

엄청난 기세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편지, 잘 받았어.”

편지?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 했다. 곧 아, 하고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딸기 타르트에 대한 감사 편지를 말하는 거였다.

“저두 타르트 잘 받았습니다. 맛있었어요.”

고맙다며 생긋 웃는 칼리오페의 모습에 힐데르트의 얼굴이 풀어졌다.

이번에는 유리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편지?”

유리안이 중얼거렸다. 힐데르트는 화색이 만연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리페가 나한테 편지 보냈어. 자기가 직접 써서.”

“직접…… 써서?”

“글씨 예쁘더라.”

그 말에 칼리오페의 얼굴까지 어두워졌다.

‘아니……. 이건 돌려서 욕하는 건가…….’

갑자기 날아온 강력한 공격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 못생긴 손글씨가 대체 어디까지 퍼졌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창피함이 몰려왔다.

“리페, 글씨 잘 써?”

유리안이 칼리오페를 잡은 손을 흔들며 물었다.

“…….”

칼리오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건 자신을 수치사 시키려는 신종 괴롭힘인가 싶었다.

“와, 와아— 딸기 타르트 맛있겠네요.”

이러다가 글씨 한 번 써보라고 할까 봐 무서워 재빨리 말을 돌렸다.

티테이블에 다가가며 칼리오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기껏 피한 딸기 타르트를 내 손으로 먹게 될 줄이야.’

“어머, 리페는 정말 딸기 타르트를 좋아하는구나.”

“잘 먹으니 보기 좋네.”

호호 웃는 서모나 부인과 사르니오 부인을 보며 칼리오페는 열심히 기도했다.

‘더 이상 딸기 타르트를 먹지 않게 해주세요.’

“그러고 보니 리페, 살롱의 주인이 되었다면서.”

사르니오 부인의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어쩌다 보니…….”

브리젤 부인의 살롱은 결국 칼리오페의 손에 넘어왔다.

브리젤 자작은 루스티첼 저에서 돌아간 즉시 여론을 조작하려 했다.

[루스티첼 가에 진심으로 사죄하러 갔건만 이를 빌미로 말도 안 되는 배상금을 요구했소. 처음부터 돈을 노린 거였소!]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사과하러 갔으면서 사과는커녕 오히려 모욕만 주었다던데?]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고 다 남 탓만 했다고 하지.]

[자기 부인이 때릴 뻔한 아이 앞에서 큰소리치고 윽박지르고…….]

[아니, 근데 학대당한 자기애들은 어쩌고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요?]

[누가 돈 욕심밖에 없는지 참 극명하네.]

브리젤 자작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급히 여론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번져나간 불길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루스티첼 가에 살롱을 주겠다고 찾아왔다.

루스티첼 가에서는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서류까지 다 작성해와 떠넘기다시피 살롱을 이관했다.

그 후 그는 제도에 있는 저택을 처분하고 영지로 돌아갔다.

브리젤 자작령은 작은 변방의 시골이라 그리 풍족한 곳이 아니다. 그 때문에 브리젤 가가 상단 사업에 힘을 썼던 것이다. 상단의 거래처 반을 잃은 상황이라 그는 전과 같은 유세를 부리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두 아이가 자라나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또 한적한 시골 환경은 학대받은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브리젤 대부인은 엄격하지만 정감이 많은 분이란다.]

브리젤 영식과 영애를 걱정하는 칼리오페에게 루스티첼 부인이 안심하라며 말했다.

대부인은 브리젤 자작이 작위를 이은 후, 뒤로 물러나 자작령에서 조용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브리젤 대부인께서 제도에 계셨다면 처음부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 말에 칼리오페는 안심했다. 제대로 된 어른이 사랑으로 키운다면, 아이는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다.

“리페가 살롱을 주최할 날이 기대되네.”

서모나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살롱을 주최하려면 멀었지만요.”

그냥 먼 게 아니라 몇 년이 지나야 한다. 데뷔탕트를 치러야 살롱의 주인이 될 자격이 생기니까.

‘아니, 그때쯤이면 이미 스티그마가 되어 있으려나.’

살롱을 여는 일은 영영 없을 것 같았다.

“리페는 지금 열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사교계에 귀감이 된다는 여느 레이디 못지않은걸.”

“우아하기로 이름 높으신 귀부인들께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습니다.”

그 말에 서모나 부인과 사르니오 부인이 서로를 마주 봤다. 그리곤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부끄러워할 사람은 우리 같은데.”

“어휴, 리페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진짜로 지금 살롱 열지 않을래?”

칼리오페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낮술 한 것처럼 해롱해롱한 귀부인들을 보고 루스티첼 부인이 차를 마시는 척 웃음을 흘렸다.

‘우리 리페가 좀 사람을 잘 홀리지.’

“살롱은 무리지만……. 아무 것두 하지 않긴 아까워서 뭐라두 할까 고민 중이에요.”

“어머, 꼭 초대해주세요, 레이디 칼리오페.”

“귀부인께서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칼리오페의 말에 부인들이 또 까르르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심통이 난 두 남자가 있었다.

바로 힐데르트와 유리안이었다.

엄마에게 칼리오페를 뺏긴 상황에 둘 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볼을 부풀렸다. 상대가 엄마라서가 아니었다.

‘리페가 싫어하면 어떡해!’

두 사람 다 칼리오페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아들의 마음을 알아챈 서모나 부인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나도 참. 리페랑 대화하는 게 즐거워서 너무 붙잡고 있었네. 모처럼 셋이 만났는데. 가서 재밌게 노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냉큼 대답한 힐데르트가 이때다, 하고 칼리오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유리안을 떼놓고 둘이 놀 생각이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진 알고?”

재빠르게 따라온 유리안이 칼리오페의 남은 손을 제 쪽으로 끌었다.

“알거든?”

“어떻게 알아! 여긴 내 집인데!”

“집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가 거기서 거기야! 내 방이 어딨는진 알아?”

“왜 니 방에 가냐! 바보! 난 리페랑 둘이서 놀 거야!”

“리페는 나랑 놀 거야!”

“아니야! 나야!”

“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 내가 더 많이 했으니까 나랑 놀 거야!”

“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 내가 더 많이 했어!”

졸지에 두 아이 사이에 낀 칼리오페는 해탈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유리안이 안젤리나랑 이러고 놀았다는 건 알겠는데…….’

쌍둥이 누이의 죽음 이후로 어두워졌던 유리안이 또래랑 어울리면서 다시 밝아졌다고 생각하니 안심이다.

‘힐데르트는 왜 갑자기 유치해진 거지.’

힐데르트도 애답게 유치한 면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나. 오만하게 굴며 뭔가 혼자 한 마리 외로운 늑대를 자처하지 않았던가 싶었다.

‘역시 사랑 앞에서 남자는 유치해지는 건가.’

완전히 엇나가진 않은 생각을 하며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싸우면 저는 아무하고두 놀지 않을 거예요.”

칼리오페의 선언에 아니야아니야 메아리치던 게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나 안 싸웠어.”

“내가 이런 애랑 싸울 리가 없잖아. 싸움도 격이 맞아야 한다고.”

네에, 칼리오페는 영혼 없이 수긍했다. 지적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럼 다 같이 소꿉놀이하면서 놀아요.”

칼리오페는 힐데르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자,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소꿉놀이를 첫사랑과 하게 되었어요.’

그 미소에 힐데르트가 칫, 고개를 돌리며 뺨을 붉혔다.

‘소꿉놀이 그런 유치한 거……. 뭐, 리페랑 하는 건 괜찮지만. 왜 쟤까지 껴서…….’

힐데르트가 힐끔 유리안을 쳐다봤다. 그걸 본 칼리오페가 또다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놀이방으로 가자.”

유리안이 칼리오페를 이끌었다. 이번에는 힐데르트도 묵묵히 따랐다. 여전히 칼리오페를 잡은 손은 놓지 않았지만.

“내가 아빠 할게. 리페가 엄마 해.”

놀이방에 도착한 힐데르트가 불쑥 말하곤 유리안을 쳐다봤다.

“너는…… 키우는 개?”

“뭐라구?!”

유리안의 유순한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아이고……. 부끄러운 건 알겠지만 왜 좋아하는 애한테 못되게 구는 건지.’

칼리오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는 니가 해! 내가 리페랑 부부 할 거야!”

“싫어! 리페는 나랑 부부야!”

그 와중에 힐데르트와 유리안은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이래서 애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여기서 제일 어린 다섯 살 꼬맹이가 혀를 쯧쯧 찼다.

“지금 두 분 싸우는 거예요?”

“아니.”

물어보기 무섭게 둘 다 동시에 바로 부정했다. 이럴 때는 마음이 참 잘 맞는다.

“두 분 다 부부 하구 싶으니까, 그럼 이렇게 해요.”

칼리오페가 힐끔 힐데르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힐데르트는 가슴이 뛰었다.

‘역시 리페는 나랑 부부 하고 싶은 거야!’

“두 분이 엄마 아빠 하구 제가 아기 할게요.”

“…….”

“…….”

방안에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이 셋이 모여 있는데 이렇게 조용한 것은 기적과도 같다.

방금 기적을 행사한 칼리오페가 하뭇하게 웃었다. 멍한 표정의 힐데르트를 보니 그렇게 좋은가 싶었던 것이다.

‘힐데르트 오라버니, 저한테 고마워하세요.’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아이들이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내, 내가 왜 쟤랑? 싫어!”

“내가 더 싫거든?!”

‘에이, 좋으면서.’

아이들의 진심 어린 항변은 칼리오페에게 닿지 않았다.

“자자, 그러지 말구. 부인~ 해보세요.”

“싫어!”

“안젤리나 온니두 여보~ 하세요.”

그때까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힐데르트와 유리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 젠장! 귀여워!’

‘여보~’ 하고 말하는 칼리오페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콩닥콩닥 심장이 뛴다.

“응? 여보~.”

칼리오페가 재촉했다.

“……네, 여보.”

유리안이 홀린 듯이 답했다.

칼리오페가 활짝 웃었다.

“자, 힐데르트 오라버니두 부인~ 하세요. 부인이 싫으면 여보~ 이것두 괜찮아요.”

졸지에 힐데르트에게 ‘여보’라고 부른 게 된 유리안이 기겁했다.

저 재수 없는 샌님을 여보라고 부르다니 말도 안 된다. 자신은 칼리오페가 자길 여보라고 부른 것에 마주 부른 거였다. 바로 잡아야 했다.

“응? 어서요.”

그러나 두 사람은 칼리오페의 웃는 얼굴을 거역하지 못했다.

“……부인.”

그렇게 힐데르트의 소꿉놀이 로망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 * *

“더 이상 이렇게 못 살아!”

쾅! 소리가 나며 밥상이 와르르 떨렸다.

“나야말로! 이혼해!”

그에 질세라 또다시 쾅! 소리가 나며 밥상이 떨렸다. 색색이 마카롱과 자허 토르테, 요정의 꽃잎 같은 찻잔이 비명을 질렀다.

‘장난감이니 깨지지 않는 재질로 만들었겠지만…….’

칼리오페는 불안한 눈길로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래, 갈라서자구! 매일 아침마다 네 얼굴 보는 거 지긋지긋했어!”

‘언제 봤다고 그러시지요.’

쾅쾅 싸우는 와중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솔직히 힐데르트가 아침에 유리안의 얼굴을 본 적이나 있겠는가.

“이혼은 내가 할 말이야! 너 같은 남자랑 10년 동안이나 산 내가 대단해!”

‘언제 10분이 10년이 됐지요?’

이 역시 싸우는 와중에 생각은 아니지만, 솔직히 두 사람 나이 모두 열 살도 안 되지 않은가.

‘10년을 논하는 일곱 살, 여덟 살짜리라니.’

—라고 다섯 살짜리가 혀를 쯧쯧 찼다.

“뭐라고?! 나는 뭐 너랑 사는 게 좋았는지 알아?”

“그러니까 이혼하자고!”

“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려도 할 거거든?!”

힐데르트와 유리안은 말없이 서로를 이글이글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동시에 팩 뒤돌아섰다.

“흥!”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묘한 납득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오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쩌다 꿈과 희망의 소꿉놀이가 동심 파괴 놀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은 이렇지 않았던 거 같은데…….’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분명 잘 시작했다.

아빠 힐데르트와 엄마 유리안이 서로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너무 딸 칼리오페에게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지만, 칼리오페는 그러려니 했다. 그녀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막둥이 바보 집안에서 성장해왔기 때문에 그 정도로는 이상하단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힐데르트가 수줍음 타서 유리안에게 말을 못 시키고 있구나.’

그렇게 상황을 이해하고 짹짹 입을 벌려 엄마 유리안과 아빠 힐데르트가 주는 마카롱을 받아먹었다.

그때 힐데르트와 유리안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아아, 리페 너무너무 귀여워! 리페랑 결혼해서 리페랑 똑 닮은 딸 낳고 싶다!’

그리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서로를 인식한 순간이 바로 이혼 전쟁의 시작이었다.

“음……. 어머니, 아버지. 싸우지 마세요.”

본인이 가정파탄의 원인인 줄도 모른 채 칼리오페가 싸움을 말렸다.

등 돌린 채 씨근덕거리고 있던 두 사람이 휙 고개를 돌려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뭔가 맹수 앞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 칼리오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아이는 내가 데려가겠어!”

타앗, 하고 칼리오페의 팔을 재빠르게 낚아챈 유리안이 외쳤다.

“무슨 말이야! 내 딸이야!”

그냥 두고 본다면 힐데르트가 아니었다. 그가 칼리오페의 다른 쪽 팔을 잡았다.

‘……이건 뭔가 익숙한데.’

데자뷔가 일었다. 내 딸 운운하는 것도, 두 사람에게 양손을 잡힌 것도 각기 다른 상황에서 익숙했다.

“내 딸이라니? 당신이 애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뭐, 뭣?! 그럼 당신은 얼마나 해줬다고 그래!”

힐데르트의 말에 유리안이 당당히 밥상을 가리켰다. 유리안의 집이라 당연히 유리안의 물건이었다.

“리페가 먹고 마시는 것, 다 내가 해준 거야!”

“읏…….”

힐데르트는 말문이 막혀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사르니오 저에 힐데르트의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여덟 살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천재라 불리는 아이였다. 곧 정론을 찾아냈다.

“아이한테 이거저거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한 건 아이의 생각이야!”

‘음, 그건 그렇지.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의 의사니까.’

칼리오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불구경하듯 남의 싸움을 관전하는 자세였다.

그녀는 어느새 자신이 이 태풍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잊었다.

“흥, 리페는 당연히 나랑 가고 싶어 할걸?”

“무슨 소리야. 리페는 날 더 좋아하거든?”

흥흥거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그래서 어느 쪽이야, 리페?”

“리페, 우리 둘 중에 누군지 선택해.”

“……네?”

현실로 닥쳐오고 나서야 칼리오페는 이게 자기 일이라는 걸 상기했다.

나지? 날 고를 거지?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그렇게 종용했다.

“저, 저는…….”

칼리오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누구 한 명을 고르면 큰일 난다는 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응? 누구야?”

“얘 눈치 보지 말고 계속 말해, 리페.”

젖살이 통통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회귀 후, 그 어느 것보다 지금 눈앞의 질문이 가장 어렵게 느껴졌다.

“저는, 역시 어머니, 아버지 둘 다 좋아요.”

방긋 웃으며 위기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엄마, 아빠는 이혼하잖아. 한 명하고만 살아야 해.”

“맞아. 둘 다 같은 건 없어. 한 명만 골라.”

“애초에 둘 다 좋다는 말은 옳지 않아. 리페, 넌 사랑을 나눌 수 있어?”

“사랑은 한 사람하고만 하는 거랬어. 그 사람을 평생토록 아껴줘야 한다구.”

두 아이는 ‘그것도 몰라?’ 하는 눈으로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물론 그건 맞는 말이지만…….’

얼결에 훈계까지 들었다.

칼리오페는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회귀 후 가장 힘든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지금 상황에선 아니지 않나요. 저는 딸이고 두 분이 부부인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으르릉 싸우다가 지금은 왜 이렇게 쿵짝이 잘 맞는지 모를 일이다.

‘이래서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는 건가.’

깨달음이 살짝 엇나갔다.

이럴 때 자식의 역할이 중요한 법이다. 칼리오페는 위기의 부부들을 위해 입을 열었다.

“엄마, 리페 머리 묶어주세요.”

“어? 으응…….”

“아빠, 리페 머리 묶을 끈 골라주세요.”

“응? 그, 그래.”

혼신의 힘을 다한 아기인 척이 통했다.

무표정하고 묘하게 당당한 태도로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한 것뿐이었지만, 칼리오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 아기 같지도 않은 아기인 척에 홀라당 넘어간 힐데르트와 유리안이 시키는 대로 척척 움직였다.

‘리페가 나한테 애교 부렸어! 엄청 귀여워!’

……그 아기인 척에 약간 오해가 있었지만 말이다.

“어떻게 묶어줄까?”

“음, 땋아주세요.”

“어떤 머리끈이 좋아?”

“아버지께서 골라주시는 게 좋아요.”

칼리오페의 머리를 푸르고, 양쪽으로 가르마를 타고, 한쪽 머리를 거의 다 땋을 때가 돼서야 유리안은 정신을 차렸다.

‘핫!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분명히 저 얄미운 힐데르트와는 이혼하고 칼리오페와 둘이서 눈누난나오순도순 즐거운 스윗홈을 꾸릴 생각이었다.

‘그치만…….’

자기 손에 머리를 맡긴 채 가만히 있는 칼리오페가 보였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 긴 속눈썹이 눈 아래 오동통한 뺨에 꽃잎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예쁘다…….’

멍하니 생각한 유리안의 뺨이 붉어졌다.

‘머리카락도 엄청 부드러워.’

멈췄던 손이 다시금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와 달리 힐데르트는 아주 심각한 고민 중이었다.

‘어쩌지.’

커다란 붉은 새틴 리본도, 레이스로 만든 탐스러운 꽃 머리끈도, 나비 모양 은장식의 루비 머리핀도.

‘다 리페랑 잘 어울려.’

여태까지 머리 장식을 고르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칼리오페한테 물어볼까 싶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리페는 내가 골라준 게 좋다고 했는걸.’

그 고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이혼하네 마네 했던 사실은 이미 잊혔다.

사랑 앞에서 오만한 천재 도련님은 바보가 되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한쪽 머리를 다 땋은 유리안이 끙끙거리는 힐데르트에게 물었다. 뾰족해진 연두빛 눈에는 어서 끈 안 주고 뭐 하냐는 핀잔이 섞여 있었다.

“리페한테 다 잘 어울려서.”

그 말에 유리안의 눈빛이 달라졌다. 칼리오페와 머리끈을 번갈아 보던 그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치? 이것도 귀엽고 이것도 예뻐.”

“응, 그것들도 괜찮지만……. 이것 봐. 이것도 어울려.”

“그러네.”

두 아이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오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런 아이들을 쳐다봤다. 남자애들 둘이서 리본과 꽃을 조몰락조몰락거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고 있자니…….

‘그래도 화해해서 다행이네요. 어머니, 아버지.’

결국 미소가 나왔다.

그 사이 두 사람은 힘든 결론을 내렸다.

일단 장식 없는 가느다란 남색 끈으로 땋은 머리를 묶고, 땋은 머리를 돌돌 말아 위로 올린 후, 장식을 고르는 방향으로 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게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할 일인가.’

칼리오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 나이에는 으레 그렇겠다는 생각에 넘어갔다. 아이들이 인형에 심취하는 것도 다 이런 게 재밌어서 그런 거 아니겠는가.

“응, 좋아. 이 상태로도 이뻐. 올리면 더 이쁠 거야.”

양 갈래를 다 땋은 유리안이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양옆으로 깡총깡총 흔들리는 머리를 보며 감탄했다.

“정말 예쁘게 땋았네요. 고맙습니다.”

처음 유리안을 만났을 때 드레스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길래 엉성하게 묶을 줄 알았다. 위기의 부부들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자는 마음에서 머리를 맡긴 거였는데, 이렇게 야무지게 땋을 줄이야.

“그럼 이제 머리 장식을 정하면 되나?”

“응, 옷도 같이 고르자.”

유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놀이방 안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 안은 꼭 귀부인의 투왈렛룸처럼 꾸며져 있었다.

물론 구조가 그렇다는 것이지, 자그마한 가구와 파스텔톤 색채가 꼭 요정의 드레스룸 같았다.

방안을 가득 채운 옷 역시 겹겹이 꽃잎처럼 퍼진 시폰 드레스나 호박처럼 봉긋한 비단 드레스같이 귀엽고 깜찍한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여자아이의 로망 그 자체였다.

‘과연……. 안젤리나와 이러고 놀았다는 거구나.’

칼리오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 누이동생의 머리를 땋아주고 옷을 같이 골라줬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노는 데 정확한 명칭을 알 필요는 없으니까.’

숙련된 머리 땋기에 반해 드레스 장식 이름을 잘 모르던 게 이해됐다. 사르니오 부인이 꼭 집어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싶었다.

‘좀 더 자주 유리안과 놀아줘야지.’

처음에는 안쓰러움과 미래의 살인마를 두고 볼 수 없다는 책임감 때문에 다가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유리안이 행복해졌으면 한다.

‘힐데르트와 옥신각신해도 오늘 유리안은 정말 즐거워 보였으니까.’

“자, 그럼.”

그때까지 칼리오페는 자신 앞에 닥쳐올 운명을 모른 채 아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페가 입을 옷을 골라볼까?”

유리안과 힐데르트는 어느새 양손 가득 드레스를 안고 있었다.

히이익, 칼리오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설마 그거 전부 저한테 입어보라는 건가요?!’

* * *

이건 더 이상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인형 놀이였다.

‘살려줘…….’

인형이 된 칼리오페가 속으로 신음했다.

아이들은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지금이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살짝 몸을 비틀었다.

“안 돼, 리페. 움직이면 머리 망가지잖아.”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대번에 유리안이 제지했다.

칼리오페는 한숨을 삼키고 포기했다.

인형처럼 앉아 있는 그녀의 발치엔 힐데르트가 무릎 꿇고 앉아 비단 신을 신겨주고 있었다.

물론 한 켤레로 끝이 아니었다. 드레스와 어울리는 신을 찾아 그는 벗겼다 신겼다를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는 유리안이 심혈을 기울여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미 세 벌째라고요.’

칼리오페가 울상을 지었다. 그것도 매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치장했다.

‘집에 가고 싶어…….’

왠지 오늘따라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조차 한 번 꽂히면 몇 시간 동안 칼리오페의 옷을 갈아입히며 노는 게 함정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이 넓은 세상엔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다섯 살에 어쩐지 중이—중분(中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이칠(14) 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녀가 중이였을 땐 오히려 하지 않았던 반항적인 생각이었다.

“응, 됐다!”

드디어 유리안이 머리에서 손을 뗐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자신을 꾸며준 거니 칼리오페는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정말 사양이다. 또 새로운 옷을 입으라며 가져오기 전에 재빨리 일어났다.

“안젤리나 온니, 머리 흐트러졌네요. 만져 드릴게요.”

열심히 옷을 고르다 보니 정전기가 일어나 유리안의 머리칼은 살짝 헝클어진 상태였다. 기민하게 핑계를 찾은 칼리오페가 유리안을 의자에 앉혔다.

“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유리안이 얼떨떨하게 눈을 굴렸다.

“머리, 풀러도 괜찮지요?”

얼굴 가까이에서 자신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말하는 칼리오페를 본 순간 그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칼리오페의 작은 손이 꼬물꼬물 열심히 움직였다. 어른의 멋진 머리 땋기 실력을 보여줄 차례였다.

‘어라……?’

하지만 손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싶어서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 땋아본 칼리오페는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음……. 심각한데.’

꼭 자신의 글씨를 유리안의 머리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처참했다.

슬쩍 유리안의 눈치를 보자 의외로 얌전히 머리를 맡기는 중이었다.

‘리페 손길 기분 좋다……. 뭔가 졸려.’

유리안이 작게 미소 지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나른해서 눈이 감겼다. 자신의 머리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기에 그는 머리칼 사이사이를 헤집는 따스한 손이 주는 평화로운 기분에 흠뻑 젖었다.

‘눈 감고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일단 풀자.’

칼리오페는 서둘러 증거를 인멸했다. 엉망인 머리칼을 솔빗으로 빗으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손으로 땋는 건 무리야. 고작해야 묶는 정도.’

솔직히 묶는 것도 야무지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칼리오페의 눈에 머리띠 함이 들어왔다.

‘머리띠는 잘 꽂을지도……!’

그냥 꽂으면 되는 일에 ‘잘’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칼리오페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머리띠에 도전했다.

고민이 길었던 만큼 많이 빗어서 머리카락도 반짝반짝하고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다. 유리안의 머리칼은 벚꽃잎처럼 아름다운 색이니 머리띠만 해도 예쁠 것이다.

칼리오페는 새하얀 깃털과 레이스로 장식된 머리띠와 커다란 토끼 리본 머리띠 중 고민하다가 토끼 리본 머리띠를 골랐다.

“자, 다 됐어여.”

그 말에 유리안은 아쉬움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칼리오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전면 거울 가까이 가는 유리안을 따랐다.

“마음에 드세요?”

“응!”

유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오페가 만져준 머리인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없다.

기분 좋아 보이는 유리안의 얼굴을 보고 칼리오페는 따라 미소 지었다.

솔직히 머리 위에 새하얗고 커다란 토끼 귀 리본을 단 유리안은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거울에 비친 유리안의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던 칼리오페는 뒤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힐데르트를 발견했다.

‘나를 꾸밀 땐 그렇게 적극적이더니…….’

유리안을 꾸밀 땐 저렇게 지켜보기만 한 건가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칼리오페는 빙글 뒤를 돌며 힐데르트에게 물었다.

“예쁘지요?”

움직임에 맞춰 하얀 드레스 자락이 핑그르르 돌았다.

힐데르트의 눈이 커졌다.

칼리오페는 커다랗고 새하얀 모란이 중심인 머리핀을 왼쪽에 꽂고 머리칼을 오른쪽으로 땋아 내린 상태였다. 일반적인 세 갈래 땋기가 아니라 아주 풍성하고 화려했다.

모란을 중심으로 잔잔한 꽃들이 주변을 받치고 아주 살짝 연보랏빛이 도는 등나무 꽃이 찰랑찰랑 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보석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마법으로 보존 처리된 생화로만 이뤄져 있어 더 청초해 보였다.

땋은 머리를 따라가면 보이는 소매는 어깨만 감쌀 정도로 짧은 데다가 둥글게 부풀어 있어 깜찍함을 더했다. 드레스는 마찬가지로 흰빛인데, 끝자락에 살짝살짝 연보랏빛이 섞였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앙증맞은 발에는 힐데르트가 신겨 준 레이스를 덧댄 비단신이 보였다.

무엇보다 어떠냐며 환하게 웃는 칼리오페의 얼굴.

힐데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꽃처럼 붉어졌다.

“뭐, 뭐가……! 하나도 안 예뻐!”

칼리오페는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자기가 유리안을 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그를 좋아하는 힐데르트는 오죽할까 싶었다. 쑥스럼 타는 모습을 보니 풋풋하고 귀여웠다.

‘유리안이 남자애인 거 알고 나면 어떠려나.’

걱정이 들면서도 재밌는 건 어쩔 수 없다.

전생에서 힐데르트를 직접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고, 이야기한 적은 칼리오페의 기억에도 안 남을 정도로 적었다.

‘아마 없었겠지.’

그럼에도 힐데르트가 얼마나 오만하고 도도했는지 잘 안다. 제가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대꾸도 안 하고 눈빛만으로 사람을 경멸했다.

‘그런 사람의 첫사랑에 빠진 모습이 이렇게 귀엽다니.’

칼리오페는 고양이의 비밀을 본 것 같은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잘 어울리지요?”

“하, 하나도 안 어울려!”

“하나두 안 어울려요?”

조금 시무룩한 질문에 힐데르트는 주춤했다. 솔직히 잘 어울렸다. 잘 어울리다 못해 천사 같았다.

아니, 이대로 신부 삼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아까 머리 장식을 고를 때는 고민에 정신이 팔려 이것도 저것도 잘 어울린다는 말을 무심코 했으나 지금은 제정신이었다.

‘하, 하지만…….’

시무룩한 칼리오페의 모습을 보니 진땀이 났다.

힐데르트는 가진 용기를 끌어모았다.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려고 그가 입을 연 순간이었다.

“아니, 리페 진짜 잘 어울려. 너무 예뻐.”

선수 친 유리안이 칼리오페를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의 머리에 달린 토끼 귀가 앙증맞게 까닥였다.

칼리오페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이 아니라 유리안이 예쁘냐고 물었던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저보다 안젤리나 온니가 훨씬 더 예뻐요.”

“정말? 리페 눈에는 내가 예뻐?”

“네, 정말이에요.”

칼리오페의 말에 유리안이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슬쩍 힐데르트를 쳐다봤다.

‘훗, 내가 이겼다.’

딱 그런 눈빛이었다.

“윽…….”

힐데르트는 대꾸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웃고 있는 칼리오페를 힐끔 보니 여전히 예뻤다. 하지만 다시 솔직해질 용기는 나지 않았다.

“힐데르트 오라버니두 그렇게 생각하지요?”

칼리오페가 힐데르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절대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 못된 기지배보다는 네가 훨씬, 훨씬 더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으으, 거리던 힐데르트는 결국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응? 힐데르트 오라버니?”

깜짝 놀란 칼리오페가 서둘러 뒤쫓아 나가려고 하는데, 유리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왜?”

유리안의 물음에 칼리오페는 당황했다. 손목을 붙든 손은 생각보다 힘이 강했다.

“왜, 냐니…….”

“왜 따라 나가려고 해?”

유리안의 연록빛 눈동자는 순수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칼리오페는 가까스로 그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왜……?’

따라 나가는 것이 왜 궁금한지는 알 수 없었다. 보통 그런 걸 궁금해 하나? 유리안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칼리오페가 유리안의 의중을 읽기 위해 그를 들여다보는 순간, 돌연 그가 생긋 미소 지었다.

“급히 나간 걸 보면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었나 보지.”

“…….”

칼리오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유리안을 쳐다봤다.

그 상황에서 힐데르트가 화장실을 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유리안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설마 유리안이 힐데르트를 싫어하나?’

쿵짝이 맞아 놀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 보이진 않았지만, 최악이었던 둘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혹시 힐데르트가 집에 놀러 오는 것도 싫은데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건가 싶어서 가슴이 내려앉았다.

칼리오페가 진지하게 입을 여는 순간 유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삐졌나 본데 저럴 때는 내버려 두는 게 좋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칼리오페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오히려 쫓아갔다간 화만 돋울 수 있으니까. 혼자 풀고 올 때까지 기다려주자.”

어른스럽고 세심한 말이었다.

“안젤리나 온니…….”

칼리오페는 조금 감동한 눈으로 유리안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눈을 돌렸다. 힐데르트를 쫓아가는 게 싫어서 댄 핑계일 뿐이었다.

‘안젤리나가 했던 말을 비슷하게 한 거지만……. 역시 리페는 안젤리나와 비슷해.’

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사과를 받아주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했다. 안젤리나처럼.

“온니 말이 맞아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르트에게 뭔가를 잘못한 거라면 응당 가서 사과하는 게 옳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힐데르트가 나간 건…… 아무래도 부끄럽기 때문일까?’

그 이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부끄러운데 쫓아가면 오히려 더 부끄러울 것이다. 확실히 유리안 말대로 부끄러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좋을 듯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졌네.’

유리안이 대견했다. 칼리오페는 그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리페. 우리 둘이 소꿉놀이할까? 내가 아빠, 리페가 엄마.”

유리안이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는 드레스룸 밖으로 이끌었다.

칼리오페가 순순히 뒤를 따르자 유리안이 씨익 미소 짓곤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승자의 미소였다.

* * *

힐데르트는 정원에 나와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이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예쁘다고 한마디 해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왠지 훌쩍 코가 시큰했다.

이 오만한 꼬마 도련님은 난생처음 맛보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사랑 앞에서 자신은 그저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리페더러 예쁘다며 방긋 웃었던 얄미운 안젤리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안젤리나를 향해 환하게 웃던 칼리오페의 모습도.

안젤리나가 그런 칼리오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힐데르트의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은 점차 가까워졌다.

종래에는—.

[미안해요, 힐데르트 오라버니. 저는 안젤리나 온니랑 부부할래요. 힐데르트 오라버니는…….]

칼리오페가 고민하자 안젤리나가 피식 웃었다.

[너는 개야, 힐데르트. 멍멍 짖도록 해.]

콰과광!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힐데르트는 행복한 부부 사이의 멍멍이가 되어 아오오오 서러운 울음을 토했다.

진짜 서럽다.

‘지금도 리페랑 안젤리나는 재밌게 놀고 있겠지.’

쫓아 나오지도 않는 게 더 서러웠다.

‘나는 상관도 없는 거야?’

칼리오페와의 좋았던 추억—힐데르트의 뇌내 보정 버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리페 바보!’

힐데르트는 실연의 슬픔을 못 이기고 주변에 있는 식물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잔디를 쥐어뜯던 그의 눈에 진홍색 해당화가 들어왔다.

‘……리페 눈이랑 닮았네.’

보랏빛 피튜니아는 리페의 머리카락, 하얀 등수국은 리페의 단정한 이마, 연분홍빛 장미는 리페의 통통한 뺨. 리페의 웃음을 닮은 해바라기, 긴 속눈썹을 닮은 금낭화, 작은 발걸음을 닮은 해란초꽃.

그렇게 칼리오페와 닮은 꽃들을 엮다 보니 어느새 화려한 화관이 되었다.

‘리페한테 잘 어울릴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어졌다. 힐데르트는 뛰듯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놀이방 앞에 도착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데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칼리오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두드리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안 것일까. 혹시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바깥 소리에 신경을 썼고, 그래서, 그래서…….

눈이 마주치자 칼리오페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는다.

“산책 잘 다녀오셨어요?”

그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힐데르트는 속에서 무언가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손 안의 꽃다발처럼 아주 보드랍고 연한 무언가가.

“리페……!”

그 부름에 힐데르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서던 칼리오페가 뒤를 돌아봤다.

힐데르트의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시야 가장자리에 유리안이 보였다. 그 위로 칼리오페와 부부가 되어서 ‘넌 개나 해.’하고 말하던 상상 속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선수를 뺏기지 않으리라.

불쑥, 힐데르트가 칼리오페에게 화관을 내밀었다.

“이거, 난 필요 없으니까.”

칼리오페를 보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는 소년의 뺨이 꼭 해당화 같았다.

얼떨결에 떠밀어진 화관을 받아든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였다. 힐데르트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유려한 화관이었다.

순수하게 감탄하다가 힐데르트가 은근슬쩍 유리안을 쳐다보는 것을 눈치챘다.

‘유리안한테 주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 준 거구나.’

칼리오페는 속으로 웃음을 깨물었다. 여기서 웃으면 저 부끄러움 많은 새침쟁이가 또다시 도망갈 것이다.

‘으음, 어떻게 대신 전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데 힐데르트가 초조하게 물었다.

“왜 안 써? 마음에 안 들어?”

당당한 척 묻지만 어쩐지 풀 죽은 기색이었다.

“아, 아니요.”

당황한 칼리오페가 서둘러 화관을 썼다. 원래 하고 있던 핀 자체가 꽃으로 이뤄져 있어서 그런지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온갖 꽃으로 만든 왕관을 한 칼리오페의 모습에 힐데르트와 유리안이 숨을 들이켰다.

‘요정 나라의 공주님 같아…….’

두 꼬마의 시선이 몽롱해졌다.

“흐흥, 아까보다 이게 훨씬 잘 어울려.”

힐데르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칼리오페는 또다시 웃음을 참았다.

‘아까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말했던 게 마음에 걸렸구나.’

역시 나쁜 아이는 아니다. 은근히 귀여운 면도 있다. 유리안에게 안 어울린다고 한 거였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한 말이 되어서 신경 쓰인 건가 싶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잘 만들었네요. 예뻐요.”

칼리오페가 웃으며 인사하자 힐데르트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치, 그런 거 원리만 파악하면 쉬워. 어느 방향으로 엮으면 꽃이 어느 각도로 고정되는지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심미안이 깊다고.”

“아, 네…….”

물론 그러시겠지요. 칼리오페가 영혼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먹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안 어울린다고 했던 게 미안해서 열심히 화관을 만들어 주곤 콧대 세우는 도련님이 귀여웠다.

“잘 쓸게요.”

방긋 웃는 칼리오페를 지켜보던 유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리안이 힐데르트를 노려봤지만, 힐데르트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힐데르트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리페.”

부르고서도 한참을 주저주저하던 힐데르트가 무언가를 스윽 내밀었다.

작은 손 위에는 그보다 더 작은 꽃반지가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 이것 역시 잘 만들었다. 붉고 하얀 꽃이 소담했다.

“가져.”

“네?”

칼리오페가 반문하며 힐데르트를 쳐다봤다.

힐데르트는 그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뜨며 한마디 했다.

“오다 주웠어.”

* * *

“으음…….”

칼리오페는 다시 탐스러운 꽃반지를 내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정원에 핀 꽃 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을 고르고 골라 따서 정성스레 만든 거로밖에 안 보였다.

“오다 주우셨군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이자 힐데르트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여전히 칼리오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가지든가.”

칼리오페는 반지를 받아들고 고민했다. 꼬마 남자애가 만들어 준 꽃반지라니.

‘너무 귀엽고 고맙지만요…….’

‘와, 너무 예쁘다. 고마워. 직접 만든 거야?’ 하면서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다른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렇다.

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쟁취하는 법이다.

으음, 하면서 주변 눈치를 보던 칼리오페가 눈을 깜빡였다.

왜인지 이글이글한 유리안과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힐데르트가 눈에 들어왔다.

‘아! 질투 작전이구나!’

아직 꼬꼬마면서 꽤 머리를 쓴다. 확실히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로 아프락스 궁에 출입한 천재다웠다.

‘으응? 그런데 유리안도 힐데르트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저렇게 불타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칼리오페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사랑에는 원래 여러 종류가 있다. 어린아이의 풋사랑은 성별과 관계 없이 가족이나 자신을 잘 돌봐주는 어른, 혹은 친한 친구에게 향하기도 한다.

‘으음……. 그래도 만약 유리안이 나중에 커서 남자를 좋아하더라도 존중해야지.’

칼리오페는 굳게 다짐했다.

유리안이 알았다면 억울해서 사흘 밤낮 동안 엄한 나비를 사냥했을지도 모른다.

“안 낄 거야?”

칼리오페가 꽃반지를 바라보고만 있자 힐데르트가 어서 껴보라고 종용했다. 질투 작전인 걸 깨달았지만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안도 마음 있는 거 같고…….’

괜히 꼬마 커플 사이에 끼는 건 아닌가 싶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유리안이 반지를 홱 낚아챘다.

“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리안의 자그마한 손에 들린 꽃반지를 보고서야 칼리오페는 상황을 깨달았다.

‘우와…….’

어쩐지 가슴이 설렌다. 이런 치정 싸움(?)은 전생에서도 본 적 없었다.

‘이대로 자기 손에 끼는 거겠지?’

칼리오페가 두근두근 기대 어린 눈으로 꽃반지를 쳐다봤다.

“……?!”

하지만 유리안은 땅바닥에 반지를 패대기쳤다.

“너……!”

당황한 힐데르트가 소리를 질렀지만 유리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꽃반지를 그 작은 발로 콱콱 짓밟기 시작했다. 고운 꽃잎이 고운 꽃신 아래에서 잔인하게 뭉그러졌다.

칼리오페는 그 모습을 아연하게 쳐다봤다. 자신을 향해 유순하게 웃던 얼굴과 지금 꽃반지 파괴자의 포악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무슨 짓이야!”

화가 난 힐데르트가 유리안의 멱살을 잡았다. 두 아이가 한데 뒤엉켜 쓰러져 굴렀다.

칼리오페는 급작스러운 상황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린애들의 주먹다짐을 목격한 것은 처음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길거리에서 치고받는 남자들을 보긴 했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이런 야만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던가.

부우욱, 유리안의 드레스에 붙어 있던 프릴이 찢겨 나갔다.

‘지, 지금 드레스가 찢어진 건가?! 맙소사…….’

칼리오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과 명료해지는 것을 동시에 겪었다. 자신이 말리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거라는 사명감이 그녀의 정신 줄을 붙들었다.

“그, 그만들 하세요.”

발을 동동 구르며 말렸지만 그 가냘픈 목소리가 흥분한 아이들에게 들릴 리가 없다.

일어섰다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보다 못한 칼리오페는 눈을 꾸욱 감은 채 그 사이로 몸을 던졌다.

“……!”

그때까지 으르릉컹컹왈왈냐옹냐옹 난리를 치던 힐데르트와 유리안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뚝 멈췄다.

“다칠 뻔했잖아!”

“눈 감고 달려들면 어떡해!”

가까스로 그녀를 받아낸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칼리오페는 얼떨결에 사과한 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싸운 건 두 사람이고 자신은 말리려고 했을 뿐인데 어째서,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싸움은 멈췄으니 다행인 걸까.’

힐데르트와 유리안은 칼리오페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곤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오페는 황당한 눈으로 그런 두 사람은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주먹질하며 싸우던 사람들이 누굴 걱정하나 싶었다.

다친 사람은 오히려 두 사람이 아닐까 싶어서 쳐다봤다가 깜짝 놀랐다.

“히, 힐데르트 오라버니?!”

비명 같은 부름에 힐데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 몸에 일어난 이상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코피 나요!”

칼리오페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자신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눈치 챈 힐데르트가 깜짝 놀라 코 밑을 더듬었다. 손가락을 보니 새빨갛게 피가 묻어나왔다.

“피, 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힐데르트의 안색이 핼쑥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도련님은 자기 몸에서 피가 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걸로 코를 누르세요. 아, 고개 젖히면 안 돼요. 고개는 숙이시구……. 그래요, 그렇게.”

손수건으로 힐데르트의 코를 압박한 칼리오페가 자세를 잡아주었다.

힐데르트가 콧등을 막는 걸 확인한 그녀는 서둘러 복도로 나갔다.

하녀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어쩔 줄 몰라하던 하녀가 칼리오페의 재촉에 사람을 부르러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칼리오페는 풀썩 한숨을 내쉬었다.

하녀가 울먹이던 건 아마 무섭기 때문이리라.

놀이 시중을 들기 위해 하녀가 따라 왔었으나 방해된다고 물렸다. 명 받은 대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지만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혼날 게 뻔하다.

‘하필이면 초대한 손님이 다쳐서……. 상황을 봐서 변호해주자.’

칼리오페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수건은 이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피가 안 멈출 줄은 몰랐다.

걱정하는 사이 고용인들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응급처치가 이뤄지는 동안 차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귀부인들 역시 들어왔다.

칼리오페는 조금 긴장했다. 소중한 외아들의 몰골을 보고 서모나 부인이 화를 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샘솟았다.

‘서모나 부인께선 워낙 성격이 좋으시지만…….’

그래도 이 경우는 그냥 넘어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서모나 부인의 감정이 상한다면 사르니오 가는 실질적인 피해를 볼 수 있다. 서모나 부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녀의 감정을 기민하게 읽은 주변 사람들이 사르니오 부인을 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 서모나 부인…….”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사르니오 부인이 희게 질려서 서모나 부인을 불렀다.

서모나 부인은 아무 반응도 없이 엉망이 된 제 아들을 쳐다봤다.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는 헝클어져 비죽비죽 서 있고 재킷의 단추는 다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목에 했던 리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바지는 저렇게까지 구겨질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손수건을 온통 새빨갛게 물들인 코피, 그리고 찢어진 입술. 살짝 부어 보이는 눈가는 시간이 지나면 시퍼런 멍이 들 것이다.

“하…….”

서모나 부인의 입술 새에서 숨이 흘러나왔다. 그 작은 소리가 천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르니오 부인이 움찔 떨었다.

그때였다.

“하하하, 맙소사……! 힐데, 이게 무슨…….”

서모나 부인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힐데르트에게 다가갔다.

“아프니?”

“아니요.”

힐데르트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서모나 부인은 다시 웃었다. 제 아들이 이렇게 친구랑 싸우다니 너무 기가 막히고 신기했다.

서모나 부인은 지방 자작 가 출신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아프락스 궁에 발탁되기 전까지, 아니, 그 후 서모나 가의 안주인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제도 중앙 귀족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작의 가신으로, 공작령의 조그마한 일부를 맡고 있었다. 영지민들에게는 퉁쳐서 영주님이라고 불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주도 아니었다. 공작의 혈족이 직할하지 않을 정도로 변방 시골이었으니 진짜 영주였어도 그리 대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시골 자작 영애였던 서모나 부인에게는 이런 주먹다짐이 익숙했다. 심지어 그녀는 형제들을 여러 번 울렸다.

서모나 부인이 처음 제도에 올라왔을 무렵에는 다들 그녀에게 시골의 순박하고 수줍음 많은 아가씨를 기대했다. 그때 그녀는 혼자 속으로 이 도시 아가씨와 도련님들은 얼마나 순진한가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었다.

그녀는 결코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 오만하고 콧대 높은 서모나 후작을 단번에 휘어잡아 자신에게 절절거리게 만든 것만 봐도 그렇다.

왠지 어렸을 적 향수가 일고 고향에 있어 잘 보지 못하는 형제들 생각도 났다.

시끌벅적하게 자랐던 서모나 부인으로선 힐데르트가 외동이라 외로울까 봐 항상 가슴 한구석에 미안함이 있었다.

‘가문 배경도 있고 힐데 성격도 그러니 또래와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신경 쓰였는데…….’

이런 친구가 생길 줄이야.

‘칼리오페와 안젤리나에게는 서모나 가라는 게 중요하지 않은 거겠지.’

오늘 사르니오 저에 오게 된 것은 모두 칼리오페의 제안 때문이었다. 칼리오페가 아니었다면 이런 제안을 받았어도 서모나 부인은 거절했을 것이다.

‘리페 덕에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어.’

뿌듯한 눈으로 칼리오페를 바라보던 서모나 부인이 아차, 했다.

“안젤리나는 괜찮은 거니?”

남자애인 힐데르트가 이 정도인데 여자애인 안젤리나는 얼마나 다쳤을까 걱정됐다.

“저는 괜찮아요.”

온순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는 유리안은 정말 가련해 보였다. 드레스 프릴은 찢어져 있고 머리칼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어?”

그게 끝이었다.

작은 동물처럼 연약해 보이는 유리안에겐 작은 긁힘 하나 나지 않았다.

“그,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서모나 부인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 힐데가 봐준 거겠지? 그래, 그럴 거야.’

지고 못 사는 힐데르트의 성격상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애써 외면했다.

“서모나 부인, 죄송해요.”

너무 멀쩡한 유리안의 모습에 사르니오 부인이 민망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니에요,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죠.”

서모나 부인이 소탈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과 사르니오 부인은 안도했다. 이러저러한 역학 관계가 얽혀 있는지라 좋은 의도로 시작된 만남이 안 좋게 흘러갈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어쩌다 싸운 거니?”

서모나 부인과 달리 다른 두 부인은 아이들의 싸움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이 보아온 아이들의 싸움이란, 제가 맞다며 왁왁 외치다가 분을 못 이겨 우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치고 피가 날 정도로 싸우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칼리오페는 제게 모이는 시선에 식은땀을 흘렸다.

‘일단은 제 나이가 여기서 가장 어린데요…….’

세 귀부인들은 물론 고용인들까지 자연스레 자신을 쳐다보니 마냥 침묵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서모나 부인의 반응을 보니 있었던 일을 말한다고 해서 태도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가문 사이의 복잡한 사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칼리오페의 시선이 슬쩍 힐데르트와 유리안을 향했다가 다시 귀부인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차라리 정말 다섯 살 어린아이였다면 아무 생각도 없이 본 대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심오하고 섬세하단 말이지.’

부대껴 지내다 보니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크고 나서는 기억도 희미한 어릴 적의 추억이 되겠지만 지금 아이들에게는 다르다. 무엇보다 애정이 얽힌 감정 문제니까 더 예민할 터다.

어떻게 말하면 두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까, 말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힐데르트가 불쑥 말했다.

모두 깜짝 놀라서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그중에서도 서모나 부인이 가장 놀랐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리페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좋댔으니까…….’

힐데르트는 부끄러움에 다소 심통 난 얼굴이 된 채,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무, 물론 나보다 저 독한 기지배가 더 잘못했지만!’

아직도 코가 얼얼하고 팔다리가 욱신거렸다.

힐데르트가 슬쩍 유리안을 쳐다봤다. 지나치게 멀쩡한 얼굴을 보니 부아가 치미는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안이 반지를 짓밟은 게 원인이지만, 어쨌든 여자애에게 먼저 달려든 것은 힐데르트 자신이었다.

‘……나도 잘못한 거니까.’

“세상에, 우리 힐데. 이제 다 컸구나.”

서모나 부인은 심히 감격해서 눈마저 촉촉해진 채 제 아들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사과를 해서 놀란 게 엊그제 같은데, 먼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친구를 감싸주기까지 하다니.

그녀의 아들은 똑똑한 만큼 자신이 가진 힘을 잘 알았다. 아기 때부터 가문을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알 수밖에 없었으리라.

만약 그가 안젤리나를 탓했다면 사르니오 부인은 일부러 그녀를 크게 혼냈을 것이다. 가문의 입지 때문에 제 자식을 혼내는 게 마음 편할 리 없다. 그럼에도 사르니오 부인은 안젤리나를 챙기지 않고 힐데르트를 챙길 것이다. 그가 마음을 풀도록.

‘예전이라면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 썼겠지.’

그렇게 눈치 보는 사람들을 상대조차 하지 않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을 것이다.

‘역시 오늘 오길 잘 했어. ……리페는 정말 태양 같은 아이야.’

반짝반짝 환하게 빛나며 그 빛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따스하게 물들인다.

칼리오페는 갑자기 신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모나 부인의 모습에 움찔했다.

신분이 더 높은 데다가 더 많이 다친 아이가 자기 잘못이라고 하니 이 일은 일단락됐다.

창백하게 질렸던 사르니오 부인의 뺨에 서서히 온기가 돌아왔다.

얼마 전, 루스티첼 부인이 힐데르트도 같이 노는 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는 정말 예상치 못하게 하늘에서 금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동아줄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다 못해 채찍으로 변하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멀쩡해진 걸 본 느낌이었다.

“아,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겠구나.”

서모나 부인의 말에 사르니오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하녀에게 안내를 명했다.

* * *

“이걸로 갈아입으실게요, 도련님.”

“갈아입을 테니 나가 있어. 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것 싫어.”

과연 대 명문가의 자제답게 까탈스러운 말이었다. 하녀는 고개를 숙인 후 나갔다.

혼자 남은 힐데르트는 느릿느릿하게 셔츠를 벗었다.

“아고고고.”

여덟 살 평생 단 한 번도 몸을 써본 적 없는 도련님인지라 절로 신음이 나왔다. 일생 동안 이렇게 맞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이 입었던 옷을 입다니.’

자기 옷도 두 번은 안 입는 도련님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래도 밖으로 투덜거리진 않았다. 이 옷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었다.

‘안젤리나의 죽은 쌍둥이 오빠…… 유리안, 이었던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괜히 시비 걸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셔츠를 팔에 꿰던 힐데르트가 멈칫했다.

‘작아.’

아직 고이 개어있는 바지를 펼쳐보니 이것도 작을 것 같았다.

인상을 찌푸린 힐데르트가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하녀는 그새 어디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힐데르트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 드레스룸인가.’

방 안에 나 있는 문을 보고 다가가 벌컥 열었다.

“어?”

예상과 달리 아기자기하게 핑크빛으로 꾸며진 방이 나왔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에는—.

“너, 너어……!”

호박 바지 차림의 유리안이 힐데르트를 발견하고 소리 질렀다.

“미, 미안!”

힐데르트가 문을 쾅! 닫았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내, 내가 뭘 본 거지?’

문 앞에 주저앉은 힐데르트의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온통 새빨개졌다.

드로어즈 하나만 달랑 입은 여자아이의 알몸을 봐버렸다.

대체 왜 방이 이렇게 연결돼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쌍둥이를 배려한 사르니오 부부의 조치였지만 그가 알 리가 없었다.

힐데르트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어쩐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문가에 앉아있으니 바스락바스락 드레스를 입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하던 힐데르트는 곧 평정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이미 봐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똑똑, 문을 두드린 힐데르트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저, 다 갈아입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 문 열게.”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힐데르트는 심호흡한 뒤 문을 열었다.

“왜 열어?!”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유리안이 힐데르트를 노려봤다.

저렇게 유순한 눈매로 이렇게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참 재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앞으로 힘들 거 같지만 어쩔 수 없지.’

눈앞에 칼리오페와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가 아른아른거리다 멀어졌다.

힐데르트는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을 부릅뜨고, 도망가고 싶은 다리에 힘을 줘 버텼다.

“의도치 않게 네 몸을 봐버린 것은 미안해. 하지만 나는 명예와 책임을 아는 서모나 가의 후계. 걱정하지 않아도 돼.”

“뭐?”

유리안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눈으로 힐데르트를 쳐다봤다.

말이 바로 안 나왔다. 마른 입술을 축인 힐데르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 책임지겠…….”

“누가 누구랑 결혼해!”

유리안이 대번에 빽 소리를 질렀다.

힐데르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싸울 때처럼 바로 받아치는 대신 한 번 참았다.

“내 잘못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났으니 당황스…….”

“싫어! 싫어! 싫어! 이 바보! 바보!”

유리안은 거의 울 것처럼 소리 질렀다. 결국 힐데르트의 얄팍한 인내심도 뚝 끊겼다.

“누군 너랑 결혼하고 싶은 줄 알아?! 어쩔 수 없잖아! 여, 여자애 알몸을 봐버렸으니까!”

마지막 말을 할 때 힐데르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어! 없던 일로 하자고!”

“나를 책임도 명예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 작정이야?!”

“아무 책임도 안 져도 된다고!”

“여자애 몸을 봤는데 어떻게 그래!”

“나 여자 아냐!”

발끈한 유리안이 결국 소리쳤다.

방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헉헉거리는 아이들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뭐, 뭐라고……?”

겨우 정신 차린 힐데르트가 되물었다.

“나 여자애 아니야.”

유리안은 아까와 달리 침착하게 말했다. 홧김에 말해버렸지만, 엎어진 물을 어쩌겠는가.

별 거짓말을 다 한다는 시선에 유리안은 치마를 위로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힐데르트가 히익, 하고 뒤로 물러섰다.

유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박 바지를 내렸다.

“미, 미, 미, 미쳤어?”

힐데르트가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눈 떠.”

“싫어!”

“눈 뜨고 봐.”

“싫어! 저리 가!”

그림이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여자애가 남자애를 성추행하는 장면이었다.

“눈 안 뜨면 만지게 한다!”

유리안이 힐데르트를 협박했다. 그래도 힐데르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힐데르트가 울상을 지었다. 정말 만지게 할 작정인지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별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살짝 실눈을 떴다.

곧 그의 눈이 저절로 왕방울만 해졌다.

“하, 할라피뇨?!”

* * *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아 줄래?”

유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손가락으로 유리안의 할라피뇨를 삿대질하며 어버버 거리던 힐데르트가 즉시 손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겠지?”

유리안이 드로어즈를 올리고 탁탁 치마를 정리하며 말했다.

“어어, 그러니까 넌 남자고…….”

힐데르트가 유리안을 쳐다봤다.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여자애였다.

“……여자 옷을 즐겨 입는 변, 음, 취미—.”

“변태 아니거든?! 그런 취미 없어!”

유리안이 톡 쏘아붙이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 품새가 틀림없는 사내아이였다.

힐데르트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당황함이 가시자 상황이 얼추 이해됐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리페한테는…….”

유리안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경멸하고 있을 상대에게 뭘 부탁하는가 싶었다.

“너 바보냐?”

힐데르트가 퉁명스럽게 묻고는 유리안의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은 드레스를 입은 유리안보다 조신했다.

“말 안 해.”

먼 곳을 보며 툭 던지는 말에 유리안이 깜짝 놀라 힐데르트를 바라봤다.

힐데르트가 고개를 돌려 유리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아무한테도.”

* * *

유리안과 힐데르트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놀이방을 나간 후, 칼리오페는 다시 귀부인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게 되었다.

휴우, 결국 칼리오페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말하지 않아도 뭐가 궁금한지 알 수 있었다.

“알겠어요.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칼리오페는 두 아이의 애정 싸움에 대한 것은 빼고 간략하게 사실 관계만 설명했다.

힐데르트가 만든 꽃반지를 유리안이 망가트려서 싸우게 됐다는 말에 귀부인들은 허탈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웃음을 터트렸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으니,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를 빤히 쳐다봤다. 정확히는 칼리오페 머리 위의 화관을.

“리페, 그 화관도 힐데가 만들어 준 거니?”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지만 그 속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네, 잘 만들었지요?”

“응, 그러네.”

“힐데는 손재주가 좋네요.”

“저도 화관을 잘 만들 줄은 몰랐어요.”

서모나 부인과 사르니오 부인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동안 루스티첼 부인은 여전히 칼리오페만 바라봤다.

‘설마 힐데르트가 우리 리페를……?’

자기 딸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칼리오페는 반할 만했다.

‘아니, 안 반하면 이상할 정도긴 해!’

“그런데 힐데는 왜 꽃반지를 만들었다니?”

조심스러운 물음에 칼리오페가 빙긋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미소에 루스티첼 부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야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선물하구 싶어서겠지요.”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조숙한 거지?!’

자기 어렸을 적 일은 다 잊어버린 루스티첼 부인이 충격에 비틀거렸다.

꽃으로 직접 만든 왕관과 반지를 선물하다니.

힐데르트는 은근 로맨틱한 기질이 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내 딸을 뺏길 순 없어!’

루스티첼 부인이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루스티첼 백작이 미간에 줄을 만들며 되물었다.

“네, 어찌나 심장이 내려앉던지.”

루스티첼 부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참, 정말 큰 일이군.”

“어쩌면 좋을까요.”

두 부부의 얼굴이 침중했다.

집사는 황당한 눈으로 주인 내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서모나 가의 도련님이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왜 저렇게 심각한 거지?’

모시는 집안을 이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두 가문 중 쳐지는 쪽은 단연 루스티첼 가다. 서모나 가와 혼약을 맺게 되면 확실히 이쪽이 이득을 본다. 정치적으로나 가문의 명예로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물론 어렸을 때 잠깐 사이좋았다는 것으로 혼약을 맺진 않지만…….’

요즘은 귀족 간에서도 연애결혼이 자리 잡았다. 오히려 정략혼의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해 말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선선대 황제가 세기의 연애결혼을 했을 때는 반발이 거셌다.

‘보통 그 연애결혼이란 것도 조건과 상황이 맞는 가문끼리 하는 법이고.’

결혼은 무리더라도 두 아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으로 루스티첼 가에 좋은 일이다.

도통 이해되지 않는 반응에 집사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암어(暗語)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고민했다.

‘설마 나만 못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슬쩍 옆에 있는 유모를 쳐다보니 주인 내외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 매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예상보다 빠르군요. 벌써 행동에 들어가는 놈팽…… 아니, 분이 계실 줄이야.”

집사는 경악한 얼굴로 유모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무슨 암호가 아니라 정말로 칼리오페 아가씨를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겨서 이런 분위기가 됐다는 건가.’

여기서 정상인 사람은 나뿐인가.

숙련된 집사답게 얼굴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소외감을 넘어 이 집안 사람들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요?”

로베르트가 선룸에 들어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뒤로 루시우스 역시 함께 들어왔다.

루스티첼 백작은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새 두 아들의 검술 훈련이 끝난 시간이었다.

“로벨, 머리 단정히 해야지.”

루스티첼 부인이 아이참, 하는 얼굴로 로베르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히히히.”

로베르트가 웃으며 엄마 손에 머리를 맡겼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어리광을 피우기 위해 일부러 하녀들이 만져주는 걸 거부하고 왔을 게 뻔했다. 루스티첼 부인의 입꼬리가 살풋 올라갔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였어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루시우스의 물음에 두 부부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으음, 그게 말이지—”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에 루시우스와 로베르트의 얼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해졌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리페는 안 돼! 나랑 살 거야.”

“누구 마음대로?”

로베르트의 말에 루시우스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절대 넘겨줄 수 없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녀석, 보는 눈은 있네.”

“그 말은 동감이다.”

집사는 아연해졌다. 진중하게 주고받는 두 도련님이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어른들이나.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 문이 열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리페 왔니?”

“네에, 다 여기 모여 계신다는 소리 듣구 왔어요.”

홀로 장서실에서 책을 읽던 칼리오페가 온 것이다.

“저기저기, 리페.”

로베르트가 칼리오페에게 쪼르르 가서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팔을 척 내밀어 자연스레 칼리오페가 손을 얹을 수 있도록 한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뿐사뿐 걸어 테이블로 다가가자 루시우스가 일어나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두 오빠 덕에 리페가 웬만한 남자애한테 반하긴 힘들 것 같은 게 다행일까…….’

착착 에스코트를 물 흐르듯이 하는 두 아들을 보며 루스티첼 부인은 안도인지 뭔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힐데르트가 준 꽃반지 받았다면서!”

“남자가 주는 반지를 덥석 받는 거 아니다.”

로베르트와 루시우스의 말에 칼리오페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받진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받을 생각 없는 거지? 앞으로도 안 받는 거지?”

칼리오페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음, 그래두 매몰차게 거절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방금은 안 받았다면서!”

“그건 안젤리나 온니가 끼어드는 바람에 못 받은 거구요.”

정말 자신에게 주는 건지도 미묘했지만 말이다.

“그 말은 누가 안 끼어들었으면 받았을 거란 뜻이야?!”

“리페, 꽃반지가 갖고 싶다면 내가 만들어주마.”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오빠를 바라봤다. 로베르트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이었고, 루시우스는 기사와 대련할 때도 안 짓던 초조한 표정이었다.

“별루 꽃반지가 갖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 말에 가족들은 모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주시면 받아야지요.”

“안 돼!”

가족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칼리오페는 다소 불손한 눈으로 가족들을 빙 둘러봤다.

“정성스레 만든 건데 안 받으면 상처 받잖아요.”

‘상처 받아도 돼!’

‘그런 상처쯤은 얼마든지 받아도 괜찮아!’

‘원래 애들은 상처를 극복하면서 크는 거야!’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서 이 거친 세상 어떻게 살아간다고!’

막둥이를 누구보다 온실 속 화초로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아우성쳤다.

가족들의 얼굴에 가득한 불만에 칼리오페는 하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소중히 여겨줘야 하는 법입니다.”

그 말에 깊고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어쩐지 힐데르트가 짠 해져서 가족들은 모두 시선을 돌렸다. 여태까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던 집사마저도.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남자도 못 되는 처지라니…….’

이쯤 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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