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땅고래의 울음(2권) (7/41)

Chapter 6. 땅고래의 울음

루스티첼 부인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외출을 즐기지 않는 딸이 먼저 외출을 청한 것이다. 우리 리페 엄마랑 어디 갈까? 하고 물으면 언제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좋아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먼저 청하다니! 우리 딸과 데이트!’

루스티첼 부인은 눈누난나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문 앞에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양쪽으로 땋아 뿔처럼 높게 틀어 올린 머리가 귀여웠다.

“리페.”

웃으며 불렀지만 칼리오페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리페?”

“아, 어머니.”

어깨를 붙잡자 놀라서 고개를 든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을 보고 살풋 미소 지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니에요.”

‘요즘 좀 계속 그러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며칠간 계속 골몰에 잠겨 있더니 그 후에는 어쩐지 멍하다.

‘방금도 생각 중이었다기보단 멍한 거였지.’

꼭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칼리오페는 똑 부러지는 아이였기에 이상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딸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네, 그냥 봄볕이 좋아서요. 나른한가 봐요.”

“이제 조금 있으면 더워질 거야. 올여름엔 다푸르에 가볼까?”

다푸르는 새파란 바닷물이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로 인기 많은 곳이다. 바다뿐만 아니라 바닷가를 따라 주욱 늘어져 있는 귀족들의 별장 역시 장관이다.

‘아직 큰물을 본 적 없는 리페가 바다를 보고 얼마나 놀랄까.’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벌써부터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좋아요.”

어딘지도 모를 텐데 고개를 마냥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딸의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책을 읽는 걸 보면 호기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칼리오페는 아기 때부터 질문이 없었다.

‘보통은 이게 뭐예요? 이건 왜 그래요? 하면서 종알거리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좋다는 거야?”

마차에 오르다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을 본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어머니의 얼굴에 장난기가 느껴졌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좋아요.”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물론 그녀는 다푸르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다. 어디라도 어머니와 함께라면, 가족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

“어머나.”

루스티첼 부인은 벅차올라서 딸을 꼬옥 끌어안았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내 딸이지만 정말 사람이 아닌 거 같아. 요정이 틀림없어!’

뭐든 척척 다 아는 딸이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정답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답을 들었다.

“리페.”

“네.”

“무슨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말해주기야.”

칼리오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작은 손이 꼬물꼬물 엄마의 등을 마주 끌어안는다.

“걱정 마세요.”

“자! 그럼 출발할까?”

그 말이 신호가 되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칼리오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해야겠어.’

자꾸 공기가 신경이 쓰여서 멍하게 있는 건데, 어머니를 걱정하게 할 줄은 몰랐다.

‘공기가 신경 쓰인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하지만 그 외에는 이 감각을 뭐라 표현할지 모르겠다.

칼리오페는 이상하게 노래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유일한 취미라고도 할 수 있고 혼자 있을 때 가끔씩 불렀기에 여태까진 별 느낌 없었다.

하지만 최근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 하다가 깨달은 것이다.

‘노래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대체 왜 그러지?’

서모나 가의 피크닉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걸 누군가에게 들키고 난 뒤, 칼리오페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으려고 했다.

‘안 좋은 구설수에 오르내릴 수 있는 건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가족들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고 좋아해 줘서 그렇지, 분명 다른 귀족들은 싫어할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르게 종교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지만.’

칼리오페의 생각보다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집념이 약했다. 자신이 어렸을 땐 미래보다 자유로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신전이 사람들의 삶을 강제하는 건 나중 일이다.

‘정확히는 성녀의 등장부터.’

갑자기 나타난 성녀는 기적을 일으켰다. 다른 성직자들의 기적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 이상 기적을 기적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성녀는 기적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종교에 깊이 빠져들었고, 신전은 강한 힘을 휘둘렀다.

‘그에 반해 지금은 너무 신전과 상관 없는 삶을 사는데.’

유난히 종교적인 사람이 있긴 하다. 하지만 본인이 좋아서 그런다는 느낌이었다. 칼리오페가 알고 있던 사회 분위기와 다른 점이 많다.

‘하긴, 내가 어렸을 때 사회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니까.’

지금처럼 속에 어른이 들어있었던 것도 아니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회 분위기는 거의 10대 때 보고 듣고 느낀 것이다.

‘사회가 빠르게 변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의 영향으로 역사가 바뀐 건지. 이 부분은 나중에 알아봐야지.’

어쨌든 칼리오페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서모나 가의 피크닉에서 사하르네 부인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그 순간엔 노래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서 죽을 것 같았다.

그땐 전생에서 큰 비극을 겪은 후 항상 노래로 풀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통에서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칼리오페는 홀로 노래했다.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렀던 그녀가 유일하게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야. 그런 것과 상관 없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못 견뎌.’

사하르네 부인과 만났을 때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다.

다만 노래를 안 부르자 공기가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무거운 공기가 코와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오려고 한다. 어떻게든 칼리오페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숨결을 타고 압박한다.

지금도 공기가 어서 들여보내 달라면서 아우성치고 있다. 숨 쉬면서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는데도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공기 자체가 밀도 높게 느껴지니 당연히 그 파동도 느껴졌다.

‘이러니 계속 정신이 팔려서 멍하니 있을 수밖에.’

둥둥둥, 맥박처럼 울리는 공기의 파동을 들으며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톡톡 그 박자를 맞췄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런 칼리오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일단 괜찮다고 하니 믿어보자.’

정말 봄을 타나 싶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저 쪼꼬만 아이가 봄을 다 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귀여웠다.

그때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왔어, 리페.”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칼리오페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지금은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야.’

마부가 문을 열어줘서 칼리오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떨리는 가슴을 깊은 숨으로 달래며 거대한 거리를 두 눈에 담았다.

‘돈을 벌 때지.’

* * *

“여기가 바로 파트리유 거리야. 저기 저 건물은 리페도 지나가며 마차 안에서 몇 번 봤을 텐데.”

루스티첼 부인이 짜잔 하고 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기억나요. 엄청 큰 건물. 너무 커서 마차 안에서는 부분부분만 보였는데…….”

“제국에서 가장 큰 오페라 하우스야. 리페가 봤다는 소설 속에서도 나왔을 거야.”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부인에게는 소설 속에 나오는 파트리유 거리를 직접 보고 싶다고 둘러댔다.

실제로 파트리유 거리는 소설에 많이 등장하곤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예술의 거리라는 별칭이 붙어있으니까.

“생각보다 더 크구 예뻐요.”

십 대 때 본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거인의 나라에 있는 궁전 같달까. 무엇보다 기억 속 파트리유 거리의 마지막은 폭격으로 인해 반파된 모습이었다.

칼리오페의 두 눈에 사륜마차 네 대가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널찍한 가도가 들어왔다.

그 거대한 가도를 따라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갤러리, 아틀리에가 늘어져 있고, 가도 끝의 로터리에는 제국에서 가장 큰 파트리유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그리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면, 저 멀리 길 끝에 거대한 유리돔 플라자가 작게 보였다. 길이 너무 길어서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정말 제대로 살아있구나.’

시체 썩는 냄새와 타는 냄새가 섞여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조차 사라진 죽음의 거리. 그 모든 게 꿈인 양 거짓말처럼 활기가 넘쳤다.

덜 마른 물감과 시너 냄새가 쨍한 소음과 함께 밀려들어 이것이 현실이라고 외치는 듯했다.

“우리 리페 노래하는 거 좋아하니까 다음에 오페라도 보러 오자.”

“오페라는…….”

성전에 적혀져 있는 내용의 재현이라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종교적 강제가 약하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아예 종교의 영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의 문화는 신전의 신화와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관심 없니?”

“나중에요. 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걸요.”

예를 들자면 돈 버는 일.

칼리오페는 속마음을 감추고 헤헤 웃었다.

“그래, 그럼 우리 리페가 읽은 소설 속 명소 곳곳을 탐험하러 가볼까.”

“네!”

칼리오페는 엄마 손을 꼬옥 잡으며 위치를 가늠했다.

‘많이 바뀌었네. 아니, 바뀔 거라고 해야 하나.’

7년 후, 젊음의 신 비스의 신전이 파트리유 거리에 들어서게 된다. 칼리오페가 알고 있는 익숙한 파트리유 거리는 신전이 생긴 후부터다.

‘우선 신전이 어디에 들어서는지부터 찾아야 해.’

바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애매했다.

쭉 뻗은 큰 가도는 그대로지만 신전이 지어지며 신전 부지의 골목과 건물이 사라졌다. 또, 신전을 중심으로 주변 건물 역시 변했고, 그와 별개로 시간이 지나며 증축되거나 사라진 건물들이 많아 골목골목이 달라졌다.

그 때문에 한눈에 어디라고 딱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오페라 하우스를 오른쪽에, 플라자를 왼쪽에 두는 건 확실하니까 이쪽 길이 맞는데. 변하지 않을 만한 게…….’

“리페, 초콜릿 좋아하지. 먹을래?”

루스티첼 부인의 물음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고급 초콜릿 가게가 눈앞에 있었다.

“아, 저는…….”

“어머나, 사랑스러운 꼬마 레이디시네요.”

“초콜릿 좋아하세요? 여기 이 캐러멜 초콜릿은 우리 가게의 자랑이랍니다.”

“또 좋아하시는 건 없으세요?”

대답하기 전에 이미 초콜릿이 칼리오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입구에서 기웃거리는 칼리오페를 보고 가게 사람들이 다 달려 나온 것이다.

“……고마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맛있으니까 먹어보세요!’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실례다.

칼리오페는 기대 가득한 사람들의 눈을 쳐다본 후 초콜릿을 입에 쏙 넣었다.

‘마, 맛있어!’

칼리오페의 얼굴이 파앗 밝아졌다.

태우듯이 바삭하게 만든 캐러멜이 초콜릿에 얇게 입혀져 있는데, 캐러멜의 씁쓸한 여운과 달콤한 초콜릿이 만나 절묘한 균형을 이뤘다.

“30구짜리로 줘. 그게 가장 큰 사이즈지?”

칼리오페의 얼굴을 보고 잠시 심장에 무리가 왔던 루스티첼 부인은 어느새 홀린 듯이 주문하고 있었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마찬가지로 심장에 무리가 왔던 종업원들이 홀린 듯이 이거저거 바리바리 넣어줬다.

두 사람을 따르던 풋맨은 양손 가득 묵직한 과자의 무게를 느끼며 싱글싱글 미소 지었다.

“어머나, 리페. 저 목걸이 좀 봐. 특이한 아틀리에네. 들어가 볼래? 우리 리페한테 딱이야.”

“……네에.”

아틀리에를 나온 칼리오페의 목에는 목걸이가, 팔에는 팔찌가 매달려 있었다. 물론 뒤에 선 풋맨의 짐이 늘어난 건 말할 것도 없다.

“여기는 가죽 공방이래. 쑥쑥 크는 시기니까 새 장갑이 필요한데……. 리본 달린 장갑을 끼면 무척 귀여울 거야.”

‘이제 곧 여름이니까 가죽 장갑은 다음에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그 말은 하지 못했다.

풋맨의 짐이 늘어났다.

“그러고 보니 리페 요즘 손수건에 관심 있다면서? 한 번 보러 가볼까.”

“…….”

칼리오페는 해탈한 얼굴로 루스티첼 부인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쇼핑할 거면 이 거리가 아니라 플라자 쪽이 낫지 않나요, 어머니…….’

파트리유 거리의 아틀리에에서 만든 물품은 바로 옆 유리돔 플라자의 고급 상점에서 판매한다. 아틀리에에서 바로 사는 것도 물론 장점이 있지만, 편안한 쇼핑을 즐기려면 단연 플라자 쪽이 낫다.

‘뭐, 그래도 어머니께서 신나 하시는 것 같으니까.’

길거리를 천천히 둘러보며 신전 위치도 찾을 수 있고, 어머니까지 즐거워하시니 일석이조다.

‘피곤한 것만 빼면 말이지요.’

칼리오페는 자신의 머리에 이 리본 저 리본 대어보는 어머니와 공방 주인의 모습을 보며 폭 한숨을 쉬었다.

“안 되겠어. 다 어울려.”

“저도 무엇 하나 추천하지 못하겠네요. 아가씨를 모델로 만든 것처럼 정말 다 잘 어울려서.”

“어쩌겠어. 내 딸이 사랑스러운 탓이지.”

“정말로요. 물건 사실 때마다 고민이 크시겠습니다.”

‘아니, 거기서 진지하게 맞장구치지 말아 줄래요…….’

칼리오페는 견습생이 준 아이스티를 홀짝이며 눈매를 좁혔다.

“그래, 고민은 결제를 늦출 뿐이지. 다 포장해줘.”

“정말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공방주가 짝, 손뼉을 치자 견습생들이 포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아가씨께 드리는 제 선물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직접 머리를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흠흠, 공방주가 헛기침하며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수줍어하는데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아니,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번뜩이고 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이렇게 예쁜 리본을 만드는 사람이니 믿고 맡겨도 되겠지.”

루스티첼 부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공방주가 달려들었다.

‘제, 제 의견은요?!’

칼리오페는 당황해서 쳐다봤지만 후후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단념했다.

* * *

리본 아틀리에를 나오는 칼리오페의 머리에는 커다란 리본이 양쪽으로 앙증맞게 달려 있었다. 리본 밑으로도 천이 길게 늘어져 칼리오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강아지 귀 같아.’

루스티첼 부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헤어 스타일은 집에서 나올 때와 달라지지 않았는데 리본 두 개 추가한 것으로 사랑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우리 리페 너무 귀여워. 과연 리본만 만드는 장인답네.”

보통 머리 리본만 만드는 아틀리에는 잘 없다. 효율의 측면에서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다. 리본 공방주는 한 가지에만 몰두해서 성공한 만큼 실력이 대단했다.

‘어머니께서 좋으시다면 그걸로 됐어.’

칼리오페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생각보다 리본 아틀리에에서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어서 신전 위치를 찾아야…… 어?’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바람이 분 수면처럼 흔들렸다.

‘카스틸로 소공작?’

새파랗다는 말로도 부족한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카스틸로 소공작의 시선이 칼리오페에게 머물다 빗겨 갔다.

의미 있다고 하기엔 짧은,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엔 긴 눈맞춤.

“어머, 안녕하세요, 카스틸로 공자님.”

루스티첼 부인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아직 소공작 위를 받지 않았구나.’

전쟁터에서 봤을 때는 당당한 소공작이었다. 아니, 당당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 기억이 강렬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어린아이의 모습인데도 소공작으로 느껴졌다.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려나.’

공작가의 자제라 해도 작위도, 지위도 없는 어린아이다. 그럼에도 루스티첼 부인이 공대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셨더라.”

카스틸로 공자가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웃고는 있지만 그게 예의 상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루스티첼 부인이십니다.”

카스틸로 공자 옆의 시종이 작게 언질했다.

“아, 루스티첼 부인. 안녕하세요.”

카스틸로 공자가 느릿하게 인사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제가 괜히 공자님 앞을 막아섰군요.”

그는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흔히들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지만, 그 침묵은 이상하게도 긍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뭔가…….’

칼리오페는 눈매를 좁혔다.

그녀가 침묵의 의미를 읽으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부인, 부디 좋은 시간 되시길.”

그 말만 남기고 카스틸로 공자는 그들을 지나쳤다.

무례할 수도 있는 언행에도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엔 불쾌감이 없었다. 그보다는 안타까움이 어려있었다.

작은 숨 한 번으로 그마저도 날려버린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보고 싱긋 미소 지었다.

“자, 리페. 우리도 갈까?”

“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카스틸로 공자 옆에 있던 시종, 러그윈이었다.

“왜 그러셨어요, 도련님.”

러그윈의 물음에 카스틸로 공자는 시선을 돌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러그윈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앞을 향한다.

‘대답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거지.’

그럴수록 더 궁금한 게 사람 마음이다. 러그윈은 히죽 웃었다. ‘누구셨더라’라니. 보통 도련님은 그런 말을 하지 않으신다.

‘쳐내진 않고 받아주되 벽은 느껴지게.’

그게 바로 카스틸로 공자가 귀족을 상대하는 법이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접근해도 일단 부드럽게 대답해준다.

‘어디까지나 ‘일단’은 말이지.’

러그윈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스틸로 공자는 사교성이 좋다느니, 성격이 부드럽다느니 그런 말이 들려올 때면 제 속만 타들어 갔다.

“보통 누군지 몰라도 그런 거 묻지 않으시잖아요.”

몰라도 묻지 않는다. 눈치 있는 상대는 자신을 소개했고, 눈치 없는 상대는 착각한 채 소개하지 않았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누군지 몰라도 카스틸로 공자는 내색하지 않는다. 애초에 다른 사람이 옆에서 뭐라 하든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사려가 깊다느니 배려심이 넘친다느니-.

‘곁에서 모시는 나만 억울하지.’

러그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매끈한 얼굴을 한 카스틸로 공자를 힐끔 바라봤다.

“특별히 관심이 가서 누군지 물어보신 건 절대 아닐 테고…….”

아까 물음은 절대 관심이나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태도에서 더 이상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견고한 벽이 느껴졌다.

웃고는 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감히 말을 거냐는 느낌.

“그렇게 보였어?”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스틸로 공자의 대꾸에 러그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엥?”

껌뻑껌뻑. 그는 아예 걸음을 멈춘 채 카스틸로 공자를 쳐다봤다.

물론 카스틸로 공자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새 떨어진 몇 걸음을 급하게 따라잡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러그윈이 미간을 좁혔다.

“네가 제대로 잘 봤어.”

이건 신경 끄고 더는 파고들지 말라는 뜻이다. 러그윈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어차피 별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도련님을 모시면서 그가 무언가에 의미를 두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하지만 궁금한데. 입 다물라고 한 건 어디까지나 도련님 태도에 관한 거니까-.’

러그윈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참 귀여웠죠?”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워서 도련님의 기척을 느꼈다. 아주 조그마한 조짐이라도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도련님의 걸음걸이나 호흡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쳇, 재미없게.’

하지만 여기서 포기한다면 러그윈 윈나이트가 아니다.

“루스티첼 아가씨 말이에요. 그렇게 귀엽게 생긴 꼬마 아가씨는 처음 봤어요.”

이건 진심이었다.

산호를 박아놓은 것 같은 분홍색 눈, 고양이 귀처럼 양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칼, 엄마 손을 잡고 종종종 걷는 모양새.

무엇 하나 귀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묘하게 침착한 얼굴인데 그렇게 커다란 리본을 달고 있는 건 반칙 아닙니까? 리본 때문인지 뭔가 강아지 같았죠.”

말하다 보니 그 모습이 다시 떠올라 저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랑스러운 강아지 아가씨가 도련님의 차가운 말에 상처받지는 않았으면-.”

“러그윈.”

섬뜩한 목소리에 러그윈은 합, 입을 닫았다. 저도 모르게 등에 땀이 났다.

“적당히 해라.”

그렇게 말하는 카스틸로 공자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러그윈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카스틸로 공자는 관대한 주인이 아니었다. 까불까불거리는 러그윈을 보면 관대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차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러그윈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했다. 외출한 용무는 끝났으니 이제 귀택하면 된다. 솔직히 경고까지 들은 마당에 도련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시지 않을 겁니까?”

그 말에 카스틸로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인파 사이로 엄마를 올려다보는 칼리오페의 옆얼굴이 보였다. 이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오늘은 ……지 않네.’

* * *

“리페, 아이스크림은 어때?”

루스티첼 부인이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명한 가게인지 꽤 넓은 데도 안에 사람이 가득했다.

“배가 불러서요…….”

정말로 더는 못 먹는다. 엄마의 미소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다가 군것질로 배를 빵빵 채웠다.

거절하던 칼리오페가 문득 떠오른 기억에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신전 옆에 인기 많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던 것 같아.’

강제 예배로 바뀌면서 엄마아빠 손에 끌려 억지로 신전에 온 아이들이 많았다. 짜증 부리던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하나에 활짝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칼리오페는 기억 속 아이스크림 가게와 눈앞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비교해봤다. 기억보다 조금 더 반짝거리고 내부 인테리어와 간판이 다르긴 했지만 같은 곳이다.

‘그럼 여기에…….’

칼리오페는 아이스크림 가게 옆 부지를 쳐다봤다. 파트리유 거리의 여느 곳과 다름없이 크고 작은 건물이 가득했다.

나중에 이 건물들은 모조리 다 사라진다.

‘그리고 청춘의 신 비스의 신전이 들어서지.’

칼리오페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 신전이 생기고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어쨌든 지금은 신전이 생길 계획도 없으니까 내가 사는 데엔 문제없어.’

칼리오페가 노리는 것은 그 신전의 땅이었다.

파트리유 거리 자체가 땅값이 비싸고, 앞으로도 더 비싸질 테지만 땅값을 노린 투자는 아니었다. 정책이나 상권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게 땅값이다.

‘전생에서 투자처를 망하게 했던 것처럼 땅값도 폭락하게 할 수 있겠지.’

칼리오페가 이곳의 땅을 노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신전부지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어떤 특별한 땅. 그 땅을 원했다.

‘지금은 아주 평범한 땅이지만…….’

몇 년 후엔 달라진다.

‘이 땅이 숨을 쉴 때. 신전이 들어서기 전이니까 아마도 5, 6년 후.’

땅은 살아있다. 살아서 숨을 쉰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있다.

‘그런데 얼마 정도 하려나…….’

칼리오페는 땅의 숨결이 닿은 곳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가치가 돈으로 얼마인지는 몰랐다.

‘어머니는 알고 계시지 않을까?’

“어머니.”

“왜 그러니, 우리 딸.”

“책에서 읽었는데 땅이 숨을 쉰다면서요.”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하다는 얼굴로 <자이언트 스피릿>엔 손도 대지 않더니 몰래 읽은 거구나.’

<자이언트 스피릿>은 칼리오페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 중인 만화책이다.

완벽한 오해였지만 오해당한 사람조차 알지 못해 해명할 수도 없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딸아이의 볼을 톡 치며 말했다.

“그래, 땅의 정령님이 한 번씩 올라와 숨을 내쉬고 간단다. 그렇게 땅의 정령이 숨 쉬고 간 곳을 ‘스티그마’라고 불러. 스티그마에는 에테르가 충만해진다고 해.”

“……에테르?”

“그래, 에테르. 에테르는 마법사의 마나, 소드 마스터의 오러, 성직자의 신성력의 기본이 되는 힘이란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에너지라고 해. 만물이 자라나는 데 근원이 되는 힘이니까.”

에테르가 뭔지는 안다. 그래서 되물은 게 아니다.

‘신성력이 아니라 에테르가 가득해진다고……?’

칼리오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분명 황제는 정령의 숨결로 신성력이 가득해졌기에 신전을 세운다고 공표했다.

“숨 쉴 때마다 달라요? 신성력이 가득해지는 줄 알았는데…….”

“음, 글쎄…… 정령의 힘이니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지만, 여태까지 숨을 쉰 곳은 모두 에테르가 충만해졌어.”

“그렇군요…….”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만 특별하게 에테르가 아닌 신성력이 가득해지는 건가? 아니면…….’

황제가 모종의 이유로 숨긴 건가.

“어렵니? 후후, 괜찮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끙끙거리는 칼리오페를 본 루스티첼 부인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 손길에 칼리오페는 정신을 차렸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할 때다.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고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사뭇 전투적이기까지 한 기세였다.

“그 땅은 비싸겠지요?”

“……으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루스티첼 부인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비싸냐니, 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본래 무한한 가치를 지닌 스티그마를 두고 비싸다 싸다 운운하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황당한 질문을 한 사람이 자기 딸이었다.

‘내 딸은 발상도 참 남다르지!’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느꼈을 텐데 상대가 칼리오페니 다 좋고 특별해 보였다.

“물론 비싸겠지? 아니, 값을 매길 수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부르는 게 값인데 아무리 높게 불러도 팔려 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야?’

칼리오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야 해!’

풍부한 에테르는 스티그마 고유의 가치이기 때문에 절대 떨어트릴 수 없다. 즉, 주변 상권이 어떻게 변하든,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든 상관없다는 뜻이다.

‘사려고 해도 팔지 않으려 해서 사지 못하는 땅이야.’

적대 세력이 우리 가문에 돈이 들어가는 게 싫다는 이유로 사지 않아도 괜찮다.

‘다른 쪽에서는 얼마를 주고서라도 사려 하겠지.’

그러면 다른 사람 손에 스티그마가 들어가게 되니 적대 세력이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스티그마는 그만큼 효용이 엄청 나니까.’

모든 힘의 근원이 에테르. 그런 에테르가 풍부하다는 것은 힘을 단기간에 빠르고 강하게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적대 세력으로서도 다른 이의 손에 스티그마가 들어가는 것은 막고 싶을 테니 결국 사려고 할 것이다.

‘그 쪽에겐 안 팔 테지만.’

황제 정도 되는 권력자가 분쟁을 막겠다는 명분을 들어 스티그마 판매를 일시적으로 제한하겠다고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루스티첼 가의 사유지잖아. 입장료를 받으면 돼.’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를 내고서라도 들어오려 할 것이다.

제한 인원을 둬도 좋을 것 같다. 희소성에 희소성을 더하면 더 비싸지니까.

‘나 좀 돈벌이에 소질 있는 것 아닌가?’

칼리오페는 자기자신의 생각에 당황했다.

전생에선 이런 돈벌이와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재물을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잘 됐어.’

재물을 그냥도 아니고 엄청나게 탐해야 하는 지금은 정말 좋은 소질이다. 만약 누군가 루스티첼 가에 누명을 씌워 압류하려고 해도 전과 달리 귀족들이 다 반발할 것이다. 다른 이의 손에 스티그마가 부당하게 넘어가는 꼴을 보지 못할 테니까.

‘스티그마는 그야말로 최고의 인질.’

이쪽에서 스티그마를 붙잡고 있는 한 아무도 함부로 굴지 못한다.

‘루스티첼이 경계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경계할 테지.’

칼리오페가 씨익 웃었다.

“리페, 밖에 나와서 기분이 좋구나?”

어린 딸이 머릿속에서 인질 운운하며 음험한 계산기를 돌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루스티첼 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네, 정말…… 기분 좋아요.”

‘어머니는 이대로 계세요. 제가 돈을 착착 벌어다 드릴 테니.’

칼리오페가 상냥하고 욕심 없는 어머니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칼리오페의 결혼 상대가 되기 위해 권력자가 될 생각이 만만이었다.

모녀는 서로를 너무 몰랐다.

“이 아이스크림 가게 소설에서두 나왔어요. 주변을 살펴보면 그런 곳을 더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탐험을 재개해볼까?”

칼리오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면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쓸데없이 신전 부지를 다 살 필요는 없다. 광활했던 부지 전부가 스티그마였던 것은 아니다.

‘이젠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찾는 일만 남았어.’

문제는 칼리오페가 스티그마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티그마는 신전에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가까이 가볼 수도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좀 확인해 봐야겠어.’

본디 스티그마에는 에테르가 충만해지는데 신성력이 충만하다고 했던 것이 걸렸다.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만약 거짓이라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출입을 차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원래부터 스티그마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면 소용없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뭐든 확인하는 것이 좋다.

“어머니,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는 신전들도 있어요?”

“오렌의 신전과 로한의 신전에서 하나씩 가지고 있을 텐데……. 로한의 신전 쪽 스티그마는 이제 정령의 숨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구나.”

“거기에 사람들이 못 들어가요?”

“우리 리페는 신화에 관심이 많구나.”

루스티첼 부인은 의외네,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딸에게 익숙할 성가를 부르지 않고 낯선 속가를 부르길래 전혀 관심 없는 줄 알았다.

‘어린아이에게 속가는 평민들이 즐기는 노래라 천박하니까 부르지 마세요, 라고 할 수도 없어서 넘어갔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딸아이를 편견 없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칼리오페에게 관심을 가지며 다소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른 곳은 몰라도 신전에서는 스티그마를 개방한단다. 신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인도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니까.”

“그렇군요.”

그 말은 즉, 이곳에 들어서는 비스의 신전만 스티그마를 통제했다는 뜻이다.

‘역시 뭔가가 있어.’

비스의 신전이 이곳에 들어선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것과 루스티첼 가를 둘러싼 음모가 영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정확한 스티그마의 위치는 몰라도 단서는 있다. 출입을 통제하던 구역을 생각하면 된다.

‘신전 중앙을 통제했으니까 어딘지 가늠해서 그 주변을 사자.’

이쪽은 신전이 된 부지라 기억과 길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기억과 대조하는 게 무척 어려웠지만, 점점 중앙으로 다가가고는 있었다.

‘이쯤일 텐데 확신할 수는 없어. 그냥 포기하고 사는 범위를 넓히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하지?

칼리오페는 스티그마에 있는 가게를 사달라고 할 예정이었다.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장난감이 좋으니 장난감 가게를 사달라고 하는 듯이.

‘부모님이 황당해하시며 혼을 내겠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귀족 아이가 가게 하나를 선물 받는 건 흔한 일이었다. 어쨌든 여긴 중앙 사교계다. 다른 가문에선 딱히 혼날 일도 아니었다. 루스티첼 가가 엄격해서 혼 낼뿐, 결국 사줄 것이다.

‘하지만 가게를 무더기로 사달라고 하는 건 역시 좀…….’

칼리오페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다.

“……!”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거대한 공기의 압박에 칼리오페의 몸이 경직했다.

“리페?”

깜짝 놀란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불렀으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미칠 것처럼 뛰었다.

공기가 엄청난 밀도를 가지고 칼리오페를 짓눌렀다. 공기의 압박 때문에 꼭 깊은 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괴로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칼리오페는 숨을 못 쉰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녀는 과호흡 중이었다.

“리페?! 리페!”

칼리오페만큼 새파랗게 질린 루스티첼 부인이 주저앉아 딸아이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서둘러 풋맨에게 눈짓했다. 당황한 채 굳어있던 풋맨이 들고 있던 봉투의 내용물을 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리오페에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누가, 좀, 나를— 아직 죽을 순 없……. 가, 가족들을…….’

꺽꺽, 숨이 막힌다.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아직 자각하기 전인가 보구나.]

그 순간, 미칠 듯이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를 뚫고 목소리가 들렸다.

거짓말처럼 괴로웠던 게 사라졌다.

공기가 조금 끈적이는 느낌이긴 했지만 전과 같은 압박은 없었다.

차갑고 어두운, 깊은 심해 같았던 곳이 갑자기 한낮의 파트리유 거리가 되었다.

“리페, 여기에 숨을…….”

눈물범벅이 된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입과 코에 빈 봉투를 대어주었다. 덜덜 떨리는 어머니의 손을 본 칼리오페가 그 손을 맞잡았다.

“저—”

목소리가 갈라진 채 나와서 칼리오페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작게 미소 지으며 어머니를 안심시키는데 이상하게 어머니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어머니?”

꽈악,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들썩이는 어깨와 흐느낌이 묻어나오는 호흡을 들으며 칼리오페는 어머니의 몸을 마주 안았다. 토닥토닥,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면서 칼리오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울려버렸다.’

작게 한숨 쉰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서 다가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건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건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나 기묘한 소리였다.

촉촉한 흙더미를 스치는 바람 같기도 했고, 깊게 뿌리 내린 나무의 울림 같기도 했다.

‘과연 내가 목소리를 들은 건 맞았을까?’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그런가 하면 꿈결 같이 아스라하기도 했다.

한 번 더 주변을 살피던 칼리오페는 이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는 걸 포기했다.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어머니.”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는데 루스티첼 부인이 껴안았던 팔을 확 풀고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잔뜩 화난 얼굴이었다.

“괜찮지 않아!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애가 어디가 괜찮다는 거야!”

칼리오페는 멍하니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이렇게 소리 지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처음 본다.

“얼굴이 아직도 이렇게 창백한데…….”

떨리는 손이 칼리오페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렇게 말하는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이 더 창백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 말하기로 했잖아.”

바들바들 떠는 얼굴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애정이 가득했다.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루스 오라버니와 비슷한 말…….’

[걱정할까 봐 숨기지 마. 자꾸 숨기면 더 걱정하게 된다. 무슨 일 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가, 정말로 괜찮은 게 맞는가 하고.]

심장을 저미듯 가슴이 아렸다. 칼리오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이제는 숨도 제대로 돌아왔구, 정말로 괜찮아요.”

루스티첼 부인은 한동안 말없이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미소 짓는 칼리오페의 입꼬리가 떨릴 무렵, 루스티첼 부인은 다시 딸을 꼬옥 끌어안았다. 아까 끌어안을 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리페한테 화난 게 아니야.”

“알아요.”

“리페가 아픈 건 리페 탓이 아닌데.”

“어머니 탓두 아니에요.”

루스티첼 부인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녀는 한 번 더 힘을 줘 칼리오페를 꽉 껴안고는 일어났다.

“정말로 이제 아픈 곳은 없지?”

“네, 괜찮아요.”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자.”

칼리오페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 손을 잡았다.

‘이 상황에서 더 둘러보자고 하는 건 무리겠지.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하고 다음에 와야겠어.’

오늘 일 때문에 한동안 외출하기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때였다.

“어머, 루스티첼 부인?”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브리젤 부인.”

바로 앞 건물에서 나온 브리젤 부인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칼리오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회귀하고 처음으로 갔던 티파티에서 겪은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좋은 건 나누는 게 좋잖아요. 그렇게는 안 봤는데, 루스티첼 부인께선 욕심이 많으시네요.]

예법 선생을 따로 두지 않고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욕심이 많아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하던 브리젤 부인. 그 모습이 지금 브리젤 부인의 위로 선명하게 겹쳐졌다.

“안녕하세요, 브리젤 부인.”

칼리오페는 내심을 감추고 드레스 자락을 잡고 다소곳이 인사했다.

“안녕, 리페.”

브리젤 부인은 여전히 예법이 바른 칼리오페를 묘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바깥이 소란스럽길래 나와봤는데…….”

그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확인했다.

“아, 여기 브리젤 부인의 살롱이었죠.”

브리젤 부인의 살롱에는 몇 번 참석했던 적이 있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리페가 몸이 안 좋은가 봐요. 갑자기 과호흡해서…….”

“저런.”

브리젤 부인은 습관적인 염려를 내비쳤다. 그녀의 머리는 맹렬히 회전 중이었다. 녹색 눈동자가 힐끗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소란 때문에 다가온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 마차를 타도 몸에 안 좋을테니 제 살롱에서 쉬다 가실래요?”

“그럼 감사하지요.”

배려 깊은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 * *

‘으음, 예상치 못하게 가장 의심되는 곳에 들어오게 됐네.’

칼리오페는 간이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살롱의 메이드가 다가와 미지근한 물을 건네길래 받았다. 목마르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몸은 아니었는지 물이 달게 넘어갔다.

칼리오페는 현재 브리젤 부인의 살롱 뒤쪽 휴게실에서 쉬는 중이었다.

메이드 휴게실이라 자리가 마땅찮아 어머니와 브리젤 부인은 주로 손님을 모시는 홀에 있다.

루스티첼 부인은 딸의 곁에 있고 싶어 했지만 브리젤 부인이 손님을 누추한 곳에 모실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칼리오페 역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쉬고 싶다고 했다.

결국 루스티첼 부인은 주저하면서도 브리젤 부인을 따라 홀로 나갔다.

‘나보단 어머니께서 진정하셔야 할 것 같으니까…….’

따뜻한 차를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좀 상황을 정리해보고 싶고.’

대체 그 공기의 압박은 뭐였을까.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 할 때 느꼈던 압박과 비슷했다.

‘하지만 훨씬 강렬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에 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괴로울 정도로 강렬했다.

‘아직도 공기가 끈적끈적해.’

이곳 공기만 유독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장 의심되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메이드 역시 물만 건네주고 휴게실을 나갔다.

칼리오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피가 통할 때처럼 뒷덜미가 찌르르 경련했다. 그제야 칼리오페는 자신이 긴장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무섭다거나, 괴롭다거나, 불안하다거나.

그런 감정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가족을 지킬 수 있는지.

그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알고 있는데…….’

사고가 이어지지 않았다. 집중하려고 해도 생각이 흩어졌다.

칼리오페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혼자가 되자 비로소 심연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 * *

“정말 놀라셨겠어요.”

브리젤 부인이 차를 권하며 말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찻잔의 손잡이를 잡으며 살풋 미소 지었다. 감사의 뜻이었다.

“네, 쉬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마차도 몸에 부담이 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루스티첼 부인의 온 신경은 휴게실에 있는 딸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에겐 마냥 작고 어린 딸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땐 또래 아이들보다 굉장히 어른스러웠다. 학습 능력을 비롯한 지적 능력은 물론이였고, 배려심이나 인내심도 너무나 뛰어났다.

그랬기에 더욱 걱정되었다.

사실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내 몸이 안 좋았던 것은 아닐까?

엄마가 걱정할까 봐 내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루스티첼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쉴 찰나에 브리젤 부인이 입을 열었다.

“마침 우연이 잘 맞았네요. 아이들은 갑자기 크게 앓기도 하니까 걱정이죠.”

“몸이 강한 편은 아니어도 이렇게 약하진 않았는데…….”

물론 갓난아이였을 적엔 가벼운 열병을 앓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난데없이 과호흡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루스티첼 저에 돌아가는 즉시 진찰할 수 있도록 주치의에게 연락해놓았지만 불안했다.

“별일 아닐 거예요. 과호흡 증상은 딱히 병을 앓지 않아도 나타나잖아요.”

브리젤 부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얘기했다. 그녀는 이제 슬슬 장단을 맞춰주는 데 질리고 있었다.

브리젤 부인은 예전 티파티에서 루스티첼 부인과 칼리오페에게 당한 모욕을 잊지 않았다. 본인이 먼저 루스티첼 부인을 욕심 많은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몰아간 게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을 한 것뿐이잖아.’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가 끼어들어서 예법 운운하며 제게 맞섰다. 그 후 다른 부인들이 저를 쳐다보던 시선이라니……!

아직도 밤에 한 번씩 떠올라 그때마다 몸서리쳤다.

‘하필 그날 서모나 부인의 마음에 들어서는…….’

안 그래도 부인들의 눈초리가 좋지 않았는데 서모나 부인이 칼리오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자 더더욱 눈치 보였다.

그날 브리젤 부인은 그 후 한 마디도 못 하고 쥐죽은 듯이 차만 마셨다.

티파티에서 돌아와 딸아이에게 억지로 책을 읽히고 다소곳이 인사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칼리오페의 말이 떠올랐다.

[브리젤 부인, 둘째 따님이 저보다 두 살 어린 걸루 알고 있습니다. 세 살이 아직 예법에 익숙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차분한 낯으로 조곤조곤 말하던 그 반반한 얼굴.

[벌써부터 아이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며 억지루 가르치려 하면, 아이의 정서 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누가 누굴 가르치는 거야, 건방지게!’

애초에 루스티첼 일가 역시 칼리오페를 이용해서 사교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아닌 척하기는.’

보는 시선만 없었다면 루스티첼 부인과 칼리오페를 살롱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 일로 나에 대한 여론도 좋아지겠지. 모욕줬던 상대에게 호의를 베푼 거니까.’

브리젤 부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힐끗 루스티첼 부인을 쳐다봤다. 아픈 딸 때문인지 얼굴이 수척했다.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내가 지금 은혜를 베풀어주고 있는 건데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잖아.’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소식 들었어요, 루스티첼 부인.”

“네?”

걱정에 잠겨 있던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 다녀오셨다고요.”

“아, 네. 초대를 받아서요.”

“저번 티파티 때 받은 초대였죠? 그때도 서모나 부인께서 어찌나 루스티첼 부인 얘기를 하시던지…….”

칭찬 같지만, 티파티 분위기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냐는 빈축이었다.

그날 티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은 서모나 부인이었다. 최고위 사교계와 가까우면서도 견고한 벽을 넘지 못한 사람들이었기에 더더욱 안달 난 상태였다. 그런데 정작 서모나 부인은 칼리오페에게만 관심을 쏟았으니 싫어하는 사람이 나올 법도 했다.

‘특히 그날 브리젤 부인과는 작은 다툼이 있었으니까.’

루스티첼 부인은 브리젤 부인의 빈축을 웃음으로 넘겼다.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 무엇보다 딸아이가 아픈 상황에서 기 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리페와 힐데가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서모나 부인께서 딸아이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칼리오페만 초대한 것도 아니고, 루스티첼 가 아이들 전부를 초대하셨죠?”

“또래 친구가 생기는 건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니까요.”

아이들 전부를 초대한 것은 가문간 가까이 지내자는 뜻이다. 브리젤 부인이 일부러 놀랍다는 듯이 강조해서 말한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루스티첼 부인은 의연히 넘겼다.

‘이런 것, 아픈 리페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 대가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어.’

브리젤 부인이 찻잔으로 입술을 가렸다. 저절로 입꼬리가 삐뚜름히 올라갔다.

‘제일 신난 건 본인일 거면서 애 핑계 대기는.’

가장 눈꼴 시린 건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가문 간의 친분에서 나오는 이득 같은 것엔 관심 없다는 듯 고고하게 굴더니 뒤로는 호박씨를 깠다.

그간 체면상 짓고 있던 미소도 벗어던지고 날카롭게 물었다.

“아이를 앞세워서 권력가에 아첨하니 좋아요?”

그때까지 뭐라고 하든 유연하게 넘겼던 루스티첼 부인이 굳었다.

달칵, 소서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두 눈에 흥분의 기색은 없었지만 브리젤 부인을 직시하는 시선은 분명하고 단호했다.

“내 말이 틀렸어요? 아이를 이용한 거잖아요.”

항상 고고하게 굴었던 루스티첼 부인이 정색하자 브리젤 부인은 신이 났다.

‘역시 정곡을 찔린 거지. 더 화내라고.’

그녀는 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그렇지. 좀 심하셨어요.”

“브리젤 부인.”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 루스티첼 부인이 말했다.

“질투할수록 못나 보여요.”

“네?”

“원래 못난 사람이라 질투 나는 게 어쩔 수 없다면 아닌 척이라도 해보세요.”

“뭐라고요?!”

“너무 티 내고 다니는 거 같아서요. 다 보여요.”

새하얗게 질린 브리젤 부인이 루스티첼 부인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날 선 침묵이 지속되는 가운데 칼리오페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리페. 몸도 안 좋은데 나오지 말고 부르지 그랬어. 이제 돌아갈까?”

루스티첼 부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칼리오페는 잠시 루스티첼 부인과 브리젤 부인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이상해.’

어머니께서 웃고 있긴 했지만 분위기가 냉랭했다. 브리젤 부인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입매가 딱딱했다.

테이블 곁으로 다가간 칼리오페가 브리젤 부인을 향해 인사했다.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리젤 부인.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 말에 브리젤 부인은 루스티첼 부인을 힐끗 쳐다봤다. 내가 당신 딸을 쉬게 해줬는데 어떻게 감히 그딴 망언을 내게 했느냐는 뜻이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딸이 이상하게 보더라도 지금 당장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결심을 마치고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선수를 치듯 브리젤 부인이 말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나도 근래 사교계에서 화제의 중심인 아가씨를 도울 수 있어서 기쁘단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가 유명한가요?”

“그럼, 유명하지.”

생긋 웃은 브리젤 부인이 칼리오페를 똑바로 쳐다봤다. 웃는 입매가 묘하게 잔혹해 보였다.

“이상하기로.”

그 말을 기점으로 브리젤 부인의 표정이 변했다.

불악귀처럼 변한 그녀가 칼리오페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고 다그쳤다.

“말도 안 되는 짓만 하고 다니는 거, 다 계산한 거지? 너희 엄마가 시켰지? 응? 대답해!”

“브리젤 부인!”

루스티첼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자신을 공격하는 건 웃으며 받아칠 수 있어도 딸아이에게 상처 입히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고함소리에 브리젤 부인은 더 고조되었다.

‘정곡이 찔려서 저렇게 소리치는 거잖아.’

이대로 칼리오페를 다그쳐 자백을 받아내기만 하면 된다.

“서모나 가에 레이드한 가, 그리고 로아힌 가에서도 네게 선물을 보냈다지? 그뿐만 아니라 그 피크닉에 참석한 가문 대부분이—.”

“네, 타르트 주셨는데 맛있었어요.”

칼리오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심지어 맛있었다고 말할 때는 회상이라도 하듯 작게 웃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브리젤 부인의 손이 느슨해졌다.

칼리오페는 살짝 뒤로 물러나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그게 칼리오페의 의도라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칼리오페가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브리젤 부인의 말로 칼리오페는 이미 대강의 전후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어?”

“제가 귀부인들께 선물 받은 것이 브리젤 부인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화를 내시지요?”

“무, 뭐…….”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 하는 브리젤 부인을 빤히 쳐다보던 칼리오페가 ‘아~’ 하고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풋.

그 뒤에 따라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브리젤 부인은 완전히 굳었다. 몸뿐만 아니고 사고까지.

‘웃어?’

명백한 비웃음을 흘린 얼굴이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아직 남아있는 웃음기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원하다고 하더라구요.”

매끄러운 말이 칼리오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전히 웃는 얼굴은 천사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리고 그걸 가진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한다구. 그래 봤자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칼리오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브리젤 부인을 쳐다봤다. 약간의 동정, 그보다 명확한 경멸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런 부류를 천박하다고 하죠.”

* * *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카스틸로 공자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댔다. 그의 눈에 자그마한 칼리오페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잡은 브리젤 부인이 비쳤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살롱 메이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결국 메이드 역시 상황을 지켜 보기로 결심한 듯했다. 저 날 선 분위기를 뚫고 브리젤 부인에게 손님의 방문을 고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도련님.”

러그윈이 작게 카스틸로 공자를 불렀지만, 그는 이 역시 무시했다.

러그윈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주인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순간부터 관여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러그윈 역시 사교계의 갈등에 끼어드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물론 구경하는 건 좋아했다.

평소라면 도련님 옆 명당에 자리 잡고 노가리 까듯 이러쿵저러쿵 품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상대인데.’

그것도 보통 어린아이가 아니라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아가씨가 상대였다. 러그윈은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순진한 아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모르는 듯했다.

‘아니, 정말 모르는 게 맞는 건가?’

모른다고 하기엔 너무나 교묘했다.

자연스레 브리젤 부인의 손에서 빠져나가 한 방 먹이는 칼리오페를 보고 러그윈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꽤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는데 말이야.’

어린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편견 때문인지 뒤늦게 눈치챘다.

‘가장 어린아이답지 않은 주인을 모시고 있으면서.’

변명을 하자면 그의 눈에 카스틸로 공자는 도저히 어린아이로 안 보였다. 그에 반해 칼리오페는 무척 작고 사랑스러워서 지켜줘야 할 것처럼 보였다.

‘정작 그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아가씨는 전투력이 아주 상당하신 것 같고.’

이제 보니 딱히 본심을 숨기려고 순진한 척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열 받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렇게 몰래 지켜보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휘파람이라도 불었을 거다. 하지만 칼리오페가 풋, 하고 브리젤 부인을 비웃는 순간엔 러그윈도 움찔했다.

전투력이 상당하다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어지는 말들은 저절로 러그윈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정말로 다섯 살짜리 맞아?’

자기만 놀라나 싶어서 도련님을 보는데—.

“……!”

러그윈은 깜짝 놀랐다.

‘도련님이 웃고 계셔?!’

입매가 살짝 올라간 상태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카스틸로 공자를 항상 지척에서 모시는 러그윈은 그게 진심을 담은 미소라는 걸 알았다.

‘맙소사…….’

저쪽 꼬마 아가씨의 전투력보다 도련님이 진심으로 미소 지은 게 더 놀라웠다. 아마 앞으로 이보다 놀랄 일은 없지 싶었다.

‘아니지. 내가 잘못 본 거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상황을 봐도…….’

“도련님, 무슨 꿍꿍이세요?”

“뭐?”

“뭔가 꾸미고 계시는 거죠? 안 좋은 계획일 거 같은데. 다 좋은데 제가 굴려지는 계획은 아니죠?”

속닥속닥.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러그윈이 물었다. 그로서는 매우 심각한 질문이었다.

카스틸로 공자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쳐다봤다. 러그윈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회는 항상 늦다.

싱긋.

아예 고개까지 돌린 카스틸로 공자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눈매가 나붓이 휘고 보기 좋은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간다. 녹음이 우거진 계곡의 맑고 푸른 시냇물처럼 청량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만큼 차가웠다.

그와 상반되게 봄볕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러그윈.”

사색이 된 러그윈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카스틸로 공자가 흠칫하며 정면을 바라봤다.

‘응?’

도련님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본 러그윈 역시 움찔했다.

그가 상황을 깨닫는 순간, 카스틸로 공자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브리젤 부인!”

루스티첼 부인의 비명과 동시에 카스틸로 공자가 브리젤 부인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심지어 러그윈조차 예상치 못한 일에 아무도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숨소리가 홀 안을 메웠다.

‘카스틸로 공자?!’

‘말도 안 돼…….’

‘그가 왜 이곳에……?’

하지만 의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부인.”

속삭이듯 작은 부름에 브리젤 부인은 정신을 차렸다.

사실 제대로 차렸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서둘러 예를 표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카스틸로 공자에게 잡힌 팔이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 화, 황…….”

브리젤 부인은 숨넘어갈 듯했다. 그녀는 제대로 말하려 애썼으나 헐떡이는 소리가 목소리보다 더 컸다.

칼리오페가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눈앞의 소년을 불렀다.

“카스틸로 공자님.”

“…….”

카스틸로 공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가 브리젤 부인의 팔을 놓아주고 싱긋 미소 지었다.

“카, 카스틸로 공자님.”

브리젤 부인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그녀는 패닉 상태에 빠진 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뭐지? 뭘 해야 하지? 눈앞에 카스틸로 공자가 있어! 그렇지, 소개를 해야 해! 연을 만들어야……. 이렇게 만나게 됐는데—.’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에서 두서없는 생각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몇 번이나 최고위 가문의 사람을 만날 때를 상상해서 연습해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저, 저는 브리젤 자작가의…….”

“다친 덴?”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인사는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카스틸로 공자는 브리젤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칼리오페를 향해 물었다.

멍하니 카스틸로 공자를 쳐다보던 브리젤 부인의 시선이 칼리오페에게로 옮겨갔다. 순간적으로 저 계집이 있는 걸 잊었다.

‘저 계집이 또 날 방해하고 있어!’

“다친 데는 없습니까?”

카스틸로 공자가 대답 없는 칼리오페를 향해 돌아서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의 뒤통수를 보고 퍼뜩 놀란 브리젤 부인이 황급히 말했다.

“다, 다친 데라니요, 다칠 일도 없었는데요.”

자신을 돌아보는 카스틸로 공자를 보고 그녀는 살짝 안심했다. 바로 앞에서 외면당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지금 이 강아지 아가씨께 손찌검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요?”

러그윈이 칼리오페의 어깨를 살짝 감싸며 말했다.

‘카스틸로 공자의 시종?’

러그윈 윈나이트는 꽤 유명한 남자였다. 그녀가 수집했던 고위 사교계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시종. 거기다 카스틸로의 가신 가문도 아니고 평민 출신.’

브리젤 부인이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펴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난 이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쉬게 해줬을 뿐이네!”

“와…….”

뻔뻔한 태도에 러그윈이 입을 벌렸다.

‘나도 한 뻔뻔하는데 이 아줌마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겠네.’

그 사이 칼리오페에게 다가온 루스티첼 부인이 딸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품에서 얼렀다.

“브리젤 부인.”

브리젤 부인과 언쟁할 때조차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딸아이의 앞을 보호하듯이 막아섰다.

“이 건에 대해선 루스티첼 가에서 정식 서한이 갈 것입니다.”

정식 서한.

그 말에 브리젤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짝 떨리는 손이 부채를 콱 움켜주었다.

조금 전에는 흥분 때문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칼리오페에게 손찌검하려 했다.

하지만 약자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 정말로 욱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머릿속엔 계산이 깔려있었다.

루스티첼 가에서 공식 서한을 보내고 정식으로 항의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공론화는 바라는 바다.

어차피 목격자는 자신에게 고용된 메이드들뿐이다. 살롱 메이드들은 모두 브리젤 부인의 패악을 견딘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일자리가 절실하고 생활이 절박했다.

‘그런 버러지들을 입맛대로 조종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눈엣가시 같은 루스티첼 가가 따지고 든다면 얼마든지 역공할 생각이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자신은 도와주려고 살롱에 들인 건데 왜 모함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저 딸 같은 어린아이가 편히 쉬었으면 했던 것인데.

할 수 있는 말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보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공론화되어 주목을 받으면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다. 시종 정도면 어떻게든 구슬려 보겠는데 절대 그러지 못할 사람이 있다.

‘하필이면 카스틸로 공자라니……!’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 브리젤 부인의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자의 입장에선 브리젤 가나 루스티첼 가나 마찬가지야. 평소 들었던 공자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런 싸움에 끼어들기 싫어해.’

싸움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 편으로 회유하는 건 어려워도 조금의 핑곗거리를 만들어주면 상관하지 않을 확률이 커.’

일단 입장 상 눈앞에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대명문 귀족으로서 모른 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른 척할 이유를 만들어주면 된다.

브리젤 부인이 두 손을 다소곳이 가슴 앞에 모았다.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칼리오페가 아프다고 하기에 제 살롱에서 쉬도록 해줬을 뿐입니다.”

“요즘 쉬게 해주는 방법 중엔 손을 올리는 것도 있나 보네요. 확실히, 어떤 의미로는 쉬게 해주는 게 맞죠.”

러그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나중엔 아예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긍했다.

브리젤 부인은 감히 어딜 끼어드냐는 생각에 발끈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중요한 것은 카스틸로 공자다.

“루스티첼 부인께서 이제 돌아가겠다고 하셔서 아이가 괜찮은지 살펴본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좌중을 둘러본 브리젤 부인이 정리하듯 말을 이었다.

“제가 칼리오페를 살펴보기 위해 손을 뻗은 걸 다른 일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런가요.”

카스틸로 공자가 싱긋 봄볕처럼 웃었다.

그 다정한 미소에 브리젤 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러그윈은 화색이 깃들기 시작한 브리젤 부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저 미소를 보고 안심할 수 있는 거지.’

그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저 역시 처음엔 도련님의 얼굴에 완전히 속았다.

‘원래 독화는 아름다운 법이지.’

그가 혀를 차는 와중에도 브리젤 부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럼요. 칼리오페가 갑자기 과호흡을 일으키는 걸 본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제 살롱에서 쉬다 가라고 했다는 것도요. 그런데 제가 갑자기 돌변해서 아이에게 해코지하려 했겠어요?”

이건 모욕적이기까지 하다며 브리젤 부인은 얼굴을 붉혔다.

“과연, 그럼 부인께서는 아픈 루스티첼 영애를 편히 쉬게 해주시고 괜찮은지 살펴보셨다는 거로군요.”

“그렇지요.”

아까와 달리 브리젤 부인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수긍해주는 것을 보니 역시 카스틸로 공자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거다.

‘아니, 이 정도로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걸 보면 내가 좋게 보인 것 아닌가?’

처음엔 다 망했다 싶었는데 이렇게 눈도장을 찍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다.

긴 눈꼬리를 사르르 접은 채 웃고 있는 카스틸로 공자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풍족했다. 카스틸로 공작가라는 배경을 떼고 보아도 참 귀태가 자르르 흘렀다. 브리젤 부인의 이상(理想) 그 자체였다.

“아픈 어린아이를 지나치지 못하는 부인의 심성에 탄복했습니다. 본 사람 모두 미담을 나누려 할 테니 곧 다른 분들도 알게 되겠지요.”

브리젤 부인의 얼굴이 화색을 넘어 광채가 날 정도로 환해졌다.

카스틸로 공자의 교제 범위는 굉장히 좁았다. 그가 말하는 ‘다른 분들’은 다수의 불분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수의 불분명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카스틸로 공자의 귀에 들어가지도 않으니까.

‘즉, 최고위 사교계의 사람들!’

바르르 몸이 떨렸다. 아까처럼 분을 못 참아서가 아니라 전율 때문이었다. 고양감이 브리젤 부인의 몸을 감쌌다.

최고위 사교계. 그 문을 두드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한때 좌절하기도 했다. 아이를 앞세운 루스티첼 부인의 영악함에 치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선택받은 건 자신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드디어 보상받은 거다.

“어머니.”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의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피곤해요.”

브리젤 부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스티첼 부인이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어머, 빨리 집에 가자꾸나. 엄마가 미처 신경을 못 써줬네.”

“아니에요.”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정신이 팔릴 만한 광대 쇼였다.

루스티첼 부인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브리젤 부인을 쳐다봤지만, 일단 지금은 칼리오페가 우선이었다.

가벼운 묵례로 카스틸로 공자에게 예를 표하고 딸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브리젤 부인에게는 인사도 아깝다. 칼리오페를 안심시켜주듯 한 번 웃어준 후 루스티첼 부인은 걸음을 옮겼다.

엄마를 따라 종종 걸으면서 칼리오페는 슬쩍 카스틸로 공자를 쳐다봤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새파란 푸른 눈동자와 곧장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 무기질적인 눈동자를 보자 저절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칼리오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브리젤 부인은 저 눈빛을 보고 안심할 수 있다니 참 대단해.’

저도 모르게 엄마 손을 잡은 손에 힘이 꼬옥 들어갔다.

루스티첼 부인은 그걸 느끼고 칼리오페를 내려봤다. 창백한 얼굴의 딸아이를 보니 가슴이 저렸다.

마차는 이미 살롱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창문 열까? 어디 불편하진 않니?”

이것저것 칼리오페의 편의를 살핀 루스티첼 부인이 결국에는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칼리오페가 작은 손을 꼬물꼬물 움직여 어머니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미안할 일 없으니까.”

루스티첼 부인은 말없이 딸을 안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칼리오페는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이 알게 될 거라……. 무슨 뜻일까?’

언뜻 듣기엔 브리젤 부인을 칭찬하는 듯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칼리오페가 보기에 명백한 함정이었다.

‘하지만 카스틸로 공자가 나설 리가……. 소문의 중심이나 근원이 되는 걸 극히 꺼리는 사람인데.’

단순히 싫어서 꺼리는 것도 아니다. 그럴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

“리페.”

꽉 끌어안았던 팔을 푼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지?”

“아니에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요.”

지키고 보듬어야 할 약자에게 오히려 폭력적이 되는 사람들.

전생의 칼리오페는 그런 사람들은 풍문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가족의 죽음을 통해서다.

그리고 그런 자를 상대할 때는 저 역시 품위나 체면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배웠다.

“……실망하셨나요?”

“응?”

예상치 못한 말에 루스티첼 부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칼리오페는 루스티첼 부인의 품에서 빠져나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차마 어머니를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제가, 예의를……. 브리젤 부인께 예의를 지키지 못했잖아요. 상대방이 어떻더라도 저 자신의 기준을 지켜야 하는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는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루스티첼 부인은 한참 동안 딸아이를 바라봤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자그마한 아이가 왜 이렇게 짐을 지고 있을까.

왜 이렇게 자신을 속박하고 있을까.

‘한창 자유롭게 뛰놀 나이인데.’

기준을 잃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으로 있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 기준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면 괴로운 족쇄에 지나지 않는다.

“리페, 네가 무엇을 하더라도 엄마가 네게 실망하는 일은 없단다.”

루스티첼 부인이 깃털 같은 손길로 칼리오페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부드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 눈을 마주친 채 진중하게 속삭였다.

“칼리오페 루스티첼. 너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아이야. 그런데 엄마가 어떻게 실망하겠니?”

“저는…….”

쉿. 루스티첼 부인이 장난스레 칼리오페의 입술을 막았다.

“엄마가 보기엔 오늘 리페는 충분히 자기 자신의 기준을 지켰단다.”

칼리오페의 눈동자가 떨렸다.

사실 마음속에선 가족들이 바뀐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염려했다.

전생의 성격 그대로였다면 가정교사였던 제이드에게도, 브리젤 부인에게도 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못난 사람들을 못나게 상대할 필요는 없다. 피상적인 예의를 유지한 채 피하고 다시는 얽히지 않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시간을 되돌아 왔을 때 달라지기로 결심했고, 달라졌다.

달라진 것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자신이 부모님께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걱정은 늘 가시처럼 심장에 박혀 있었다.

“천박한 사람에게 천박하다고 말한 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그러니?”

루스티첼 부인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칼리오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배려와 존중, 예의도 사람을 가려가면서 하는 거지. 그리고 그 정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해.”

루스티첼 부인이 아주 장하다면서 칼리오페의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었다. 평소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랐다. 모처럼 리본 장인이 묶어줬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결국 칼리오페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엄마는 리페처럼 브리젤 부인에게 예의 차리지 못했을 거야.”

“네?”

“거기서 카스틸로 공자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브리젤 부인을 한 대 쳤을걸?”

“네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누군가를 한 대 치는 어머니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칼리오페의 표정을 본 루스티첼 부인이 후후, 웃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다정한 아이라서 엄마는 항상 고맙고 행복해.”

얍, 하고 칼리오페를 껴안은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뺨에 뽀뽀했다.

“저, 저두 어머니께서 자상하시고 현명하셔서 감사하고 행복해요.”

얼굴이 새빨개진 칼리오페가 어물어물 속삭였다.

“아, 이 귀염둥이를 내 배로 낳았단 말이지! 정말 제일 기특한 건 나 자신이야.”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를 꽉 끌어안았다.

평소와 달리 장난기가 많은 루스티첼 부인을 보며 칼리오페는 미소 지었다.

어머니의 배려가 가슴 한가득 느껴졌다.

* * *

브리젤 부인은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였다.

‘들킬 리는 없겠지?’

어린애에게 손찌검하려 했다는 게 알려지면 파장이 클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브리젤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뻗어가는 생각을 멈췄다. 카스틸로 공자가 제 편을 들어줬고, 다른 목격자들은 모두 살롱 메이드다. 그 시건방졌던 시종은 제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그래, 괜찮아. 카스틸로 가가 내 편인걸?’

하나하나 되짚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자 진정이 됐다.

워낙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멀쩡하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초조함이 찾아왔다.

‘살롱도 열지 못하고.’

그녀가 그날 살롱에 있었던 것은 다음날 개최할 살롱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루스티첼 모녀와 카스틸로 공자가 떠난 뒤 바로 살롱 취소를 알렸다. 그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롱을 주최할 순 없었다.

그럴 정신이 없는 건 둘째 치고, 혹시라도 소문이 안 좋을 경우를 대비해야 하니까.

‘카스틸로 공자가 내 편이니 안 좋은 소문도 결국엔 내게 유리하게 바뀌었겠지만.’

굳이 논란이 있을 때 살롱을 개최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워낙 날짜가 촉박하다 보니 전보로 통보했고, 하루 앞둔 취소도 황당한데 정성조차 없다며 불만이 많았다는 거다.

그래도 이제는 얼추 수습했다. 고풍스러운 편지와 선물을 돌렸으니 슬슬 기분을 풀 것이다.

‘안 풀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살롱은 최고위 사교계에 들어가기 위한 발판이었으니까.’

살롱의 유명세를 키워 최고위 귀족까지 오게끔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귀족 중에서도 귀족인 카스틸로 가와 연을 맺었으니 이제 필요 없다.

물론, 이제부터 친해질 최고위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게끔 살롱은 더 화려하고 더 크게 개최할 것이다. 그걸 위해 처음부터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살롱 실내 장식부터 가구, 갤러리의 그림까지 뭐 하나 최고급이 아닌 게 없다. 부유한 상단을 보유하고 있는 브리젤 가로서도 뼈아픈 지출이었다.

‘지금 알고 있는 고만고만한 귀족들은 이제 부를 필요 없어.’

브리젤 부인은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다 식었잖아!’

불쾌함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초조함 때문에 자신이 주변을 물렸던 것은 생각도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문간을 쳐다봤다.

당장 하녀를 불러 혼쭐을 내주려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마님!”

집사였다.

브리젤 부인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집안 고용인들은 급한 일이 있어도 문을 함부로 열지 않았다. 하물며 집사가 이렇게 다급히 찾아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겨우 진정시켰던 가슴에 다시 초조함이 차올랐다. 브리젤 부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브리젤 부인의 시선이 빠르게 집사를 훑었다. 그리고 왼손에 들린 흰 봉투를 발견했다.

‘루스티첼 가의 공식 서한인가?’

그 건에 관해선 집사에게 미리 귀띔해뒀다. 그런데도 이런 경거망동이라니. 브리젤 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차피 목격자는 모두 제 편을 들 테니 공식 서한이 왔다고 해서 걱정할 건 없다. 오히려 처음 계획대로 루스티첼 가를 역공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마님. 어서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빨리 전해주고 싶었다고?”

“예, 보시지요.”

브리젤 부인이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에 찍힌 인장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로아힌 가!’

로아힌 가의 문양이었다. 인장을 매만지는 브리젤 부인의 손이 떨렸다. 집사와 같이 들어온 하녀가 서둘러 레터 나이프를 건넸다.

개봉하자 보이는 것은 금박과 은박을 입힌 화려한 초대장이었다.

날짜는 바로 오늘 저녁.

초대장 외에 간단한 쪽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급박한 초대라 실례지만 가능하다면 꼭 참석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브리젤 부인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 이미 한 달 전에 초대장이 돌았던 파티다. 그만큼 로아힌 가에서 준비를 많이 했단 뜻이다. 규모와 참석하는 사람들까지 대단하지 않은 게 없으리라.

그 파티 속에 섞여든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브리젤 부인이 벌떡 일어났다. 오늘 저녁이면 시간이 촉박하다. 한 달 전에 초대받은 귀족들은 이미 새 드레스며 장신구를 맞췄을 텐데 자신은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브리젤 가의 상단이 꽤 크다는 것이다. 드레스는 몰라도 당장 착용할 액세서리 세트는 수배할 수 있을 거다.

“지금부터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에 갈 준비를 시작한다.”

로아힌 가, 하고 말할 때의 울림조차 달콤했다. 브리젤 부인은 꿈에 부풀었다.

* * *

브리젤 부인은 초대장을 자랑스럽게 착 건네고 파티 홀로 들어섰다.

별빛처럼 쏟아지는 마법 샹들리에의 불빛, 화려하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로 꾸며진 홀, 조용하고 감미롭게 몸을 감싸는 음악.

퀸텟 중에는 살롱에 초빙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던 연주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공기부터 달라.’

브리젤 부인은 벅차오르는 감동에 호흡을 골랐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졌다.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흥미를 느낀 걸까? 최고위 사교계는 워낙 사람을 잘 안 받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면 벌써 자신의 ‘미담’이 퍼진 걸까?

브리젤 부인의 입가에 웃음이 만연했다.

‘아니면, 내 다이아몬드 귀걸이에 관심을 가지는 걸 수도 있지.’

황금빛으로 보일 정도로 선명한, 가장 높은 등급의 옐로 다이아몬드 귀걸이였다.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트린 귀걸이가 걸을 때마다 묵직하게 흔들렸다. 브리젤 가의 상단이 보유하고 있는 물건 중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장부 작성에 꽤 애를 먹겠지만 자신이 작성하는 게 아니니 알 바 아니다.

재정 타격에 대한 생각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다 날아갔다.

브리젤 부인은 몇 걸음 더 걷다 멈춰섰다. 사람들은 자신을 쳐다보며 서로 속닥였지만 다가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소개가 있어야 하니까. 로아힌 부인께선 어디 계시지?’

주변을 둘러본 브리젤 부인의 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잡혔다. 이 최고위 사교계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로아힌 부인의 얼굴 역시 보여서 브리젤 부인은 화색을 띤 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누가 있는지 자세히 보였다. 말 그대로 황금 동아줄 같은 인사들의 모습에 브리젤 부인은 자꾸 빨라지려는 걸음을 애써 늦췄다.

그 순간,

‘어?’

행복하게 무리를 살피던 브리젤 부인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말도 안 돼……!’

다시 봤지만 사람들 틈으로 보이는 얼굴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루스티첼 부인?!’

루스티첼 부인이었다.

브리젤 부인이 굳어있는 사이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얼굴에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곧 관심을 끊었다. 야심 차게 끼고 온 옐로 다이아몬드 귀걸이는 그들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대로 브리젤 부인은 잊혀질 판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여길……! 저 사람이 바로 브리젤 부인이에요.”

브리젤 부인의 얼굴을 아는 서모나 부인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진.

“어머나.”

“저 사람이……?”

조곤조곤 이야기하던 부인들이 일시에 브리젤 부인을 쳐다봤다. 언제나 꿈꿨던 주목의 순간이었지만, 브리젤 부인은 공포를 느꼈다.

시선은 곧 떨어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노골적으로 훑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어떻게 여기를 다 왔죠?”

“뻔뻔스럽기도 하네요. 저 같으면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요.”

팔랑거리는 부채 사이로 기가 찬 부인들의 말이 오갔다.

“루스티첼 부인, 괜찮으세요?”

“휴게실에 가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저도 같이 갈게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조금 더 안정될 거예요.”

그리고 너도나도 루스티첼 부인을 챙기기 시작했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브리젤 부인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녹색 눈이 흔들렸다.

우아하고 고상한 귀부인들이 다정한 걱정을 내비치곤 친근하게 루스티첼 부인의 팔을 잡는다.

‘왜……?’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하는 루스티첼 부인을 보자 의문이 분노로 바뀌었다.

‘저 자리는 내 자리인데……?’

오늘 파티에서 꿈꿨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니, 자신의 꿈속에서조차 귀부인들이 저렇게 친밀하진 않았다.

이상했다.

루스티첼 부인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도 못했어야 하는데.

당당하게 최고위 사교계에 입성한 자신은 귀부인들의 걱정과 염려,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했는데.

‘미담’의 주인공은 자신인데.

‘빼앗았어.’

브리젤 부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녹색 눈이 표독스럽게 루스티첼 부인을 노려봤다.

‘저년이 내 걸 다 빼앗았어!’

브리젤 부인은 루스티첼 부인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세상에, 저 눈빛과 걸음걸이를 보세요.”

“과연 ‘그 소문’의 주인공다운 자태군요.”

속닥대는 말소리에 브리젤 부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파티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수없이 생각했는데 다 망쳤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세를 바꾸는 건 더 우스울 뿐이다.

‘다 저년 때문이야!’

고아한 척 얌전히 서 있는 루스티첼 부인을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에 온 거죠?”

그 와중에도 귀부인들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원래 상류층일수록 말을 아낀다. 뒤에서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들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쉼 없이 떠드는 이유는 하나였다.

들으라는 거다.

하지만 브리젤 부인은 주춤거리긴커녕 오히려 걸음을 더 빨리했다. 귀부인들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수치심을 느끼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에 완전히 질렸다.

“초대장을 훔친 거 아니에요?”

“그럴 만한 사람이죠.”

“브리젤 부인에 대한 평은 저도 동의하지만, 초대장은 오늘 제가 보냈답니다.”

로아힌 부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귀부인들은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대체 왜? 소리 내어 묻지 않았지만 모두의 눈에 똑같은 의문이 가득했다.

솔직히 로아힌 부인도 같은 심정이었다.

‘정말 왜 저런 사람을 내 파티에 초대해야 하는지…….’

오늘 이브닝 파티는 로아힌 가에서도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벤트였다.

이곳 1층에는 까다로운 귀부인들을 사로잡도록 마법을 사용한 실내 장식으로 가득 채웠다. 남편들이 모이는 2층에는 특별히 그랑티에 40년산과 뮬비르산 시가를 비치해놨다.

엄청난 자본을 들인 파티였다. 당연히 분위기를 망칠 사람은 초대하고 싶지 않았다.

로아힌 부인은 곁눈으로 서모나 부인을 바라봤다. 서모나 부인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도 이걸로 서모나 부인이 카스틸로 가에 방문할 때 동행하게 되었어.’

카스틸로 가에서도 허락했다고 했다.

‘서모나 부인의 속셈은 잘 모르겠지만…….’

어제 저녁 늦게 통신석이 울렸다. 연결하니 서모나 부인이었다. 서모나 부인과는 친분이 꽤 두터웠으나 저녁 늦게 연락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서모나 부인의 말이었다.

‘내일 파티에 브리젤 부인을 초대해달라’는 말에 로아힌 부인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도는 브리젤 부인에 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는데, 그런 사람을 초대하라니.

서모나 부인은 무리한 부탁인 것을 알고 있다는 사과와 함께 제안을 했다. 브리젤 부인을 초대만 해준다면 카스틸로 가에 함께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미 카스틸로 공작 부인의 허락을 받았다는 말에 로아힌 부인은 고민했다.

사실 마음은 거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최고위 사교계에서도 서모나 부인에게 한 수 접어주는 이유가 바로 카스틸로 가 때문이 아닌가.

꿀처럼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로아힌 부인에게도 기준은 있다.

혹시 브리젤 부인을 초대하는 이유가 그녀를 사교계에 재기시켜주거나 옹호해주기 위해서인지 물었다. 만약 서모나 부인이 긍정한다면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서모나 부인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서모나 부인은 부정했고, 로아힌 부인은 오늘 아침 브리젤 가에 초대장을 보냈다.

오늘 서모나 부인의 태도를 보니 브리젤 부인을 옹호하기보단 비난하기 위해서 제안한 것 같았다.

‘서모나 부인이 루스티첼 부인을 아끼는 건 알지만……. 이렇게 초대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것은 서모나 부인의 성정과 맞지 않는데……?’

로아힌 부인은 작은 의문을 가슴 속에 묻었다.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말할 생각이 있으면 진작 했을 것이다.

다른 귀부인들에게 이런 내막을 드러낼 순 없다. 로아힌 부인은 빙긋 웃으며 준비한 핑계를 말했다.

“확실히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다른 부인들이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꾸미고 온 모양새를 보니…….”

“꼭 눈으로 확인해야지만 되는 사람이 있죠.”

헛된 망상 속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눈으로 직접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주제를 파악하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다.

브리젤 부인은 이미 귀부인들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어쩜 자기 잘못을 생각하지 못할까요.”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러지도 않았겠지요.”

바로 코앞에서 제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브리젤 부인은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주목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아야 했는데.

‘아니야. 다 오해 때문인 거니까.’

저 루스티첼 요망한 것이 먼저 와서 귀부인들을 감언이설로 꼬드겼기 때문이다. 오해를 바로잡으면 태도를 바꿀 것이다. 다 좋아질 것이다.

‘지금 저지른 실례가 미안해서 더 잘해주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미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차가워진 손끝을 맞잡고 입을 열었다.

“저, 여러분. 오해가 있어요.”

거짓말처럼 이야기가 뚝 끊겼다.

귀부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브리젤 부인을 쳐다봤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우아한 무표정에 브리젤 부인은 움찔했다. 그 와중에 루스티첼 부인의 앞을 슬며시 막아서는 움직임까지 보여서 분통이 터졌다. 그들은 무슨 오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응시할 뿐이다.

“무슨 말을 들으신 건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루스티첼 부인께서 제가 칼리오페를 야단쳤다고 하셨을 것 같은데…….”

귀부인들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브리젤 부인이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날 칼리오페가 아픈 바람에 제 살롱에서 쉬어가라고 호의를 베풀었답니다. 그런데 쉴 만한 침대가 메이드 휴게실에 있어서……. 그곳에서 쉬게 했더니 루스티첼 부인께서 불쾌하셨던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없는 말을 지어내시다니. 저는 리페를 야단친 적 없어요.”

“물론 그것도 정말 충격적인 일이지요.”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자는 심정으로 있던 귀부인 한 명이 듣다못해 입을 열었다. 다른 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먼저 나와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더 심각하고 더 끔찍한 일이요.”

더 심각하고 더 끔찍한 일?

브리젤 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 순간, 가슴을 훅 치고 올라오는 게 있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아무도 모를 거라고…….’

희게 질린 브리젤 부인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계속 그녀가 상상하던 최악의 경우. 칼리오페의 일이 시발점이 되어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그녀가 초조함을 떨치지 못했던 이유.

“브리젤 영식과 영애의 몸에 피멍 자국이 나 있던데요.”

“마, 말도…….”

브리젤 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주춤주춤 물러서는 자세가 영락없이 궁지에 몰린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누가 알 리가 없다. 브리젤 저의 고용인들조차 그 사실을 모른다. 아이들의 독립성을 키운다는 핑계로 옷 갈아입는 것부터 목욕까지 혼자서 하게끔 했다.

고용인들이 아이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옷에 달린 보석을 훔치려 했다고 쫓아냈다.

그 결과, 브리젤 저의 고용인들 그 누구도 아이들에게 손대지 않았다.

“정말 놀랐습니다, 브리젤 부인.”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루스티첼 부인이 앞으로 나섰다.

브리젤 부인은 왈칵 인상을 구겼다. 그녀가 뭐라 하기 전에 루스티첼 부인은 말을 이었다.

“칼리오페에게 쉽게 손을 올리는 것을 보고 설마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들으니 아이를 상습적으로 폭행하셨다고요.”

상습적 폭행이라는 말에 브리젤 부인의 가슴이 철렁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창백하게 굳은 얼굴과 경멸 어린 시선에 브리젤 부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니야. 아니에요. 루스티첼 부인이 앙심을 품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 거예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입안이 버석버석 말랐다. 진심으로 억울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폈다. 정곡에 찔려 구석에 몰린 사람이 아니라 심한 오욕을 당한 가련한 피해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여러분께서는 루스티첼 부인에게 속고 계신 거예요. 저렇게 고상한 척하는 것도 다 연기예요. 일부러 아이한테 어른스럽게 굴게 시키고—.”

“글쎄요. 적어도 브리젤 부인께 무시당할 안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브리젤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사람 볼 줄 몰라서 속은 거라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게 아니라, 저는 그날 칼리오페를 가까이에서 봤으니까…….”

“저도 지난번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서 직접 칼리오페를 봤어요.”

레이드한 부인의 말에 로아힌 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 그때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웃음이 나오는 아이였다.

“야무졌죠.”

“똑똑하고.”

“정말 귀엽더라구요.”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딸 있는 집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그 아이가 그 정도예요? 이렇게 한결같이 칭찬하시는 건 처음 봐요.”

서모나 부인의 피크닉에 가지 않았던 귀부인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이미 몇 번이나 칼리오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인가 싶어 신기했다.

“생긴 것도 정말 비스크 인형같이 사랑스럽지만, 타르트를 자르는 걸 보면서 나눗셈을 생각한 것이 대단해요.”

“하는 짓은 또 얼마나 의젓한데요.”

“레이드한 부인께서 감탄하시는 경우는 드문데. 저도 만나보고 싶네요.”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급변한 상황에 벙쪘던 브리젤 부인이 곧 아득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지금 속고 있다는 거잖아. 왜 내 말을 듣질 않는 거야.’

하지만 또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안목을 폄하한 게 돼버린다.

“루스티첼 부인.”

브리젤 부인은 화살 방향을 바꿨다.

“사과하세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친 채 요구했다.

“내가 내 아이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니요. 정말이지, 여태껏 살면서 이런 모욕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루스티첼 부인은 물론이고 다른 부인들까지 말을 잃었다.

자기 아이를 때리던 버릇 때문에 다른 집 애까지 손찌검하려 했으면서, 그 아이 엄마에게 지금 뭐라고……?

너무 할 말이 많다 보니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루스티첼 부인도 아이가 있으니 알지 않나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이인데, 그런 아이들을 피멍이 들 때까지 때렸다니. 전 맹세코 그런 적 없어요.”

브리젤 부인은 반박하지 못하는 루스티첼 부인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본 사람도 없고 증거도 없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고용인이 제보한 것이라도 매수됐다고 하면 된다.

아이들 몸에 남은 멍 자국이 유일하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하지만 이 밤에 어떻게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한단 말인가.

일단 이 상황만 모면하면 어떻게든 된다.

후우, 루스티첼 부인은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브리젤 부인에 대한 분노와 그 집 아이들에 대한 걱정, 폭력적인 상황의 참담함에 저절로 숨결이 떨렸다.

“정말……. 저야말로 묻고 싶네요. 부모로서 어떻게 그런…….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를, 바라보기만 해도 아까운 아이를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때릴 수 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벌벌 떨렸다.

루시우스, 로베르트 그리고 칼리오페. 어쩌다 아프기만 해도 온 심장이 내려앉는데, 어떻게 제 손으로 아프게 만들 수 있는지.

그 작은 아이는 상습적인 폭행을 당하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좌절했을까.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시는데, 증거 있어요?”

그 말에 어째서인지 귀부인들 사이로 소리 없는 웃음이 퍼져나갔다.

‘……뭐지?’

자신만만하게 증거를 외쳤던 브리젤 부인이 움찔해서 반응을 살폈다.

“증거 있냐는 말은 꼭 증거를 파기한 범죄자가 한다던데요.”

“일어난 적 없는 일이니 증거가 있을 리 없어서 물은 거예요.”

그래, 증거가 있을 리 없다. 일부러 떠보는 거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 한다.

“파렴치한 사람.”

그 뻔뻔한 작태에 귀부인이 입술을 깨물며 비난했다.

“애초에 기대는 안 했습니다.”

서모나 부인이 한숨과 함께 품 안에서 자그마한 물건을 꺼냈다.

‘통신석?’

브리젤 부인은 물건을 확인하고 긴장했던 마음을 풀었다.

‘통신석으로 우리 애들이랑 연락하려고?’

훗, 눈앞에 보이는 승리에 브리젤 부인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통신석으로 할 수 있는 건 상대방과의 연락뿐이다.

‘그런 주제에 한 번 연락하는 데 엄청 비싸지.’

때문에 브리젤 부인은 통신석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효율 좋은 전보가 있으니 급한 연락은 그쪽을 이용하면 된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방 말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유용하지만, 잘못 짚었어.’

브리젤 부인은 완전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통신석을 쳐다봤다.

‘우리 애들은 절대 맞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밀고한 고용인이 있어서 그쪽과 연락이 닿아도 상관없다. 아이들을 바꾸라고 해서 아니라는 말을 하게 하면 되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잠든 늦은 시간에 깨운 것도 미안한데, 충격적인 질문까지 하다니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하고 돌아가면 된다.

행여나 내일 사람들이 아이들을 살피기 위해 브리젤 저로 찾아와도 괜찮다. 오늘 밤 자신이 당한 모욕에 충격을 받아 앓아누웠다는 말로 저택 문을 닫으면 된다.

‘완벽해.’

브리젤 부인은 고개를 도도하게 들고 서모나 부인에게 말했다.

“매수된 누군가가 거짓 증언을 한 모양이군요. 저는 결백하니 그 사람과 연결해 보세요.”

그녀는 루스티첼 부인을 보며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이겼어. 공식 서한은 이쪽에서 보내도록 하지.’

저 고고한 루스티첼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니요. 누군가의 증언은 없습니다.”

서모나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증언이 없다니? 브리젤 부인이 의문을 느낀 것과 동시에 그녀가 통신석을 조작했다.

“말 그대로 증거가 있을 뿐.”

통신석이 빛무리를 뿜어냈다. 빛은 모이고 엉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

떠오른 작은 형상에 브리젤 부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여태까지 그녀가 내보였던 동요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경기를 일으킬 기세였다.

‘어, 어떻게?! 저게 왜……?’

“통신석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이렇게 모습까지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머리에 서모나 부인의 차분한 설명이 울렸다.

“물론 마나 소모가 심해서 잘 사용하지 않지만요. 저도 영상을 받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꽤 커다란 상단을 보유한 브리젤 부인도 비싸서 쓰지 않는 통신석을 최고위 사교계의 귀부인들은 전보처럼 이용했다. 하지만 그런 귀부인들조차 영상을 송출하는 것은 잘 쓰지 않을 만큼 비쌌다. 영상을 주고받을 일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귀부인들의 통신석에 동시다발적으로 영상이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정말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성인 여성이 세 살이나 됐을 법한 작은 어린아이를 후려친 뒤 쓰러진 아이에게 발길질하는 영상이었다.

[왜! 왜 이런 것도 못하는 거야! 고작 인사잖아! 니가 모자라니까 내가 무시당하는 거잖아!]

[자, 자모태쪄여……. 자모태쪄여…….]

아이의 가냘픈 목소리가 울려 퍼져도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분이 풀릴 때까지 폭력을 행사하던 여인은 제풀에 지쳐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훌쩍이는 소리도 못 내고 바들바들 떠는 아이를 일으켜 세워 몸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작은 몸에 난 끔찍한 멍 자국에 영상을 보던 귀부인들은 모두 숨을 들이 삼켰다.

멍은 바로 생기지 않는다. 색깔과 상태를 보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있다. 아이의 상태로 볼 때 지속적으로 이렇게 맞은 듯했다.

영상이 끝난 후에도 귀부인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심약한 부인 몇은 결국 그 뒤 가벼운 몸살까지 앓았다.

마음을 진정시킨 후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모르는 통신코드였다.

각자 친한 이들에게 통신석으로 연락했지만 발신자의 코드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모두 같은 영상을 받았다는 것과 영상 속에선 뒷모습만 나왔던 여인이 브리젤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영상을 많이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최고위 귀족 정도다.

귀부인들은 이야기 끝에 결론을 내렸다.

주인의 폭력을 보다 못한 고용인이 고발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지체 높은 가문과 연이 닿아 이런 방식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새 통신석을 사용해 발신인을 숨긴 것은 아마 공개적으로 엮이기 싫다는 뜻일 터다.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없다.

일개 고용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들인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귀부인들은 그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 결과.

브리젤 부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을 뿐이다.

그녀의 귓가에서 옐로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묵직하게 흔들렸다.

* * *

열흘 전.

칼리오페는 브리젤 부인의 살롱 메이드 휴게실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고요한 공기를 타고 희미한 음색이 스며들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의 소리, 땅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고동, 조금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의 들썩임.

언제부터 칼리오페는 세상을 노래로 느꼈다.

처음은 노래를 부를 때였다.

노래할 때 주변의 공기가 자신 속으로 섞여든다고 생각했다. 그 공기를 잔뜩 들이마시고 내쉴 때면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곧 그것이 세상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해지고 난 뒤, 귀를 잘 기울이면 공기가 독특한 음색을 담고 있는 것이 들렸다.

노래를 하면 할수록 더 익숙해졌고, 더 익숙해지자 더 이상 귀를 기울일 때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자그맣게 시작한 세상의 노래는 곧 방 안을 꽉 메울 정도로 커졌다.

익숙하면서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다.

그리우면서도 새로운 노래.

그 노래가 칼리오페 속에 가득 들어찼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러나 그걸 내쉬는 대신 칼리오페는 눈을 떴다.

여긴 집이 아니었다.

‘휴게실엔 아무도 없지만 문밖에 들리는 일은 피하고 싶으니…… 어?’

칼리오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누워있는 간이침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손을 더듬어 침대의 윤곽을 확인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침대가 있다고 생각하고 만지는 부분은 푹신한 뭔가가 느껴졌지만,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 손이 푹 꺼졌다.

‘이게 대체……. 꿈인가.’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놀라게 했구나, 사랑스러운 아이야.]

칼리오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자각 전일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단다.]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촉촉한 흙더미를 스치는 바람 같기도 하고, 깊게 뿌리 내린 나무의 울림 같기도 한 목소리.

호흡곤란을 일으켰을 때 들었던 목소리다.

“누구세요?”

칼리오페가 허공에 물었다.

[나는 프네우마케투스테라.]

“프……네우마케투스테라?”

되묻자 땅에서 고래가 튀어 올랐다.

[땅의 정령이지.]

한없는 어둠 속에서 고래는 희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꼬리가 유선형 궤적을 그리며 느릿하게 헤엄쳤다.

너무나 아름답고 기묘한 광경에 칼리오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땅이 낮게 진동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만지게 해주고 싶지만 이곳에 실재(實在)하는 건 아니란다.]

그 말대로 손은 고래의 몸통을 통과했다.

무심코 만지려는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칼리오페는 서둘러 손을 거뒀다.

[이 모습은 너와 이야기하기 위해 만든 사념체란다. 아니, 이 공간 자체가 내 사념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야겠구나. 어여쁜 아이야, 너 역시 정신만 이곳에 온 거란다. 몸은 그대로 잠자고 있지.]

칼리오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쉽게 따라가기 힘들었다.

‘꿈이든 뭐든 정신 차리자.’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고래가 한 말을 정리했다.

“진짜…… 정말 땅의 정령이라고요?”

말하고 난 뒤 칼리오페는 자신의 발음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사람들을 많이 만나며 점점 더 발음이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짜로 정신만 왔나 보네. 어른 모습이 아니라 어린아이 모습인 건 의외지만.’

칼리오페는 여전히 자그마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단다. 몇 년 후에는 사념체가 아니라 정말로 만날 수 있겠구나.]

고래가 다정하게 말했다. 넓은 지느러미가 부드럽게 손짓한다.

칼리오페는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몸짓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는 날 만질 수 있단다.]

고래는 그렇게 말하더니 수줍게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면.]

너무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그렇게 말한 건가 싶어서 칼리오페는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쁘구나. 숨길을 뚫고 있는데 네가 느껴져서 급히 사념체를 보냈단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를 만나기 위해서요?”

[그래, 소중한 아이야.]

“왜…….”

땅이 낮게 웃었다.

[궁금한 게 많겠지. 당연하단다.]

고래가 부드럽게 칼리오페 주변을 유영했다.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난 뒤 정면에서 눈을 맞추곤 말을 이었다.

[네가 어서 자각했으면 좋겠지만……. 아직 알기 전이라면 모르는 것도 좋은 일이지. 지금 순간을 소중히 하렴. 너의 혼란도, 고뇌도, 근심도……. 너의 모든 것이 소중하단다.]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만으로도 칼리오페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오페는 그 진심 어린 조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저는 알아야 해요.”

단호하게 말하자 고래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거대한 몸체가 갸웃갸웃 기울었다. 고래는 머뭇거리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칼리오페를 살폈다.

칼리오페가 반사적으로 미소 짓자 안도한 듯 말했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허락이 떨어졌다. 칼리오페는 무엇을 물을지 생각에 잠겼다.

‘아까 몇 년 뒤에는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몇 년 뒤 이곳이 스티그마가 되는 건가요?”

[그렇단다. 몇 년 뒤에 이곳에서 숨을 쉴 생각이야. 안정화가 필요한 곳이거든.]

칼리오페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스티그마를 찾는 문제가 해결됐다.

‘좋아. 이제 확실한 위치를 알았으니 사들이기만 하면 돼.’

그럼 몇 년 후엔 자동적으로 돈방석에 앉게 된다. 그 누구도, 심지어 황제조차 루스티첼 가에 경제적인 타격을 줄 수 없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역시 갑작스럽게 숨을 쉬지 못했던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숨이 막혔던 게 아니라 오히려 과호흡을 했던 것 같지만.’

원인은 뭔지, 또 그럴 일이 생기는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 놓아야 대비를 할 수 있다.

“아까 제가 과호흡했던 이유가 뭔지 아세요? 공기가 굉장히 무겁게 느껴져서 고통스러웠어요.”

고래가 당황한 듯 꼬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건…… 나 때문이란다. 미안하구나.]

“네?”

[네가 올 줄도, 네가 각성 전일 줄도 몰랐단다. 많이 괴로웠니?]

쩔쩔매는 고래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요. 잠깐이었고……. 이제 괜찮다는 걸 알았으니까.”

고통보다 더 칼리오페를 괴롭혔던 건 불안이었다.

이대로 내 숨이 끊어지면 우리 가족은?

또다시 비극이 반복되는 걸까?

이번에도 지키지 못하는 건가?

그 불안이 밭은 숨보다 더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다.

“그런데…….”

칼리오페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했다.

‘프……네우마. 프네우마케투스, 테라.’

아까 이름을 듣고 나서 잘못 부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몇 번 속으로 되뇌었던 게 효과가 있었다.

칼리오페는 당당하게 이름을 발음했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님 때문이라니, 무슨 뜻이죠?”

[테라라고 불러준다면 기쁘겠구나.]

칼리오페는 조금 안도했다.

“테라님.”

그렇게 부르자 또다시 땅이 낮게 진동했다.

기분 좋은 것을 숨기지 못하고 잠시 빙글빙글 헤엄치던 고래가 다시 칼리오페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은 안정화가 필요한 곳이란다. 그걸 위해 내가 숨길을 뚫고 있어서 그렇게 괴로울 정도로 공기를 무겁게 느낀 거야. 정확히는 공기가 아니라 테르를 무겁게 느낀 거지.]

“안정화?”

칼리오페의 질문에 고래가 당황했다. 설마 안정화도 모를 줄은 몰랐다.

[으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거대한 꼬리가 탁탁 바닥을 쳤다.

[세상에는 에테르를 품고 있는 여러 가지 핵이 있단다. 인간들이 스티그마라고 부르는, 내가 숨을 내쉰 곳도 그중 하나지.]

‘스티그마 외에도 에테르가 풍부한 곳이 있구나.’

칼리오페는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핵에 따라서 범위는 다르지만, 핵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의 에테르 농도가 조정된단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의 설명에 칼리오페는 모닥불을 떠올렸다. 모닥불 근처가 따뜻한 것처럼 핵 근처에 에테르가 풍부하다는 말인 것 같았다.

[핵은 시간이 지나면 품고 있던 에테르를 다 잃어.]

‘모닥불의 불이 꺼진다는 거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칼리오페가 물었다.

“그럼 그 자리를 새로운 핵으로 교체해요?”

모닥불이 꺼졌으면 다시 불을 붙이는 게 보통이다.

‘땅의 정령의 경우, 다시 불을 붙이는 방법이 숨결을 내쉬는 것이고.’

[그렇지는 않단다.]

예상 외의 대답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테르의 농도를 조정해주는 중요한 핵이 그냥 사라져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에테르는 유동성. 핵이 다 고갈됐다고 해서 그곳이 새로운 핵을 만들 곳이라는 보장은 없단다. 멀지 않은 곳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아, 멀지 않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정령의 기준이란다.]

‘정령의 기준이라는 건 대체 어느 정도일까…….’

칼리오페는 무심코 든 의문을 접었다. 중요한 이야기 중에 논점을 흩트릴 필요는 없다.

‘으음, 날씨에 따라 가장 추운 곳이 변해서 모닥불 위치를 바꾼다고 이해하면 되려나.’

칼리오페는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구조라면 스티그마가 항상 같은 위치가 아니라는 게 이해된다.

‘어머니께서 로한의 신전이 가진 스티그마에 정령의 숨결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했지. 그럼 그쪽 핵이 고갈되고 새로 생기는 자리가 여긴가? ……로한의 신전은 제도에 없을 텐데?’

칼리오페는 정령의 거리감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또다시 궁금해졌지만 참았다.

[단순하게 말해 안정화는 이 핵을 만들어서 에테르 농도를 안정시켜주는 것이란다. 고갈된 에테르를 다시 수급해주는 거지. 에테르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힘. 없으면 그 어떤 생명도 자랄 수 없으니까.]

안정화가 무엇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안정화 때문에 숨길을 뚫고 있으셨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왜 절 괴롭게 한 거죠?”

[내가 숨길을 뚫는 자리에는 에테르가 일시적으로 없어지기 때문이란다. 내 힘이 미치기 때문에 그 상태여도 생명이 사는 덴 지장이 없단다. 하지만 네게는 영향이 있지.]

‘내게는 영향이 있다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이라면 단연 회귀했다는 것이다.

칼리오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네가 느낀 그 공기의 압박. 그건 공기가 아니라 테르의 압박이란다.]

“테르?”

처음 듣는 말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각성하면 이런 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텐데……. 말로 설명하려니 어렵구나.]

고민하듯 몇 번 허공을 헤엄친 고래가 다시 칼리오페 곁에 다가왔다.

[테르는 에테르로 환원되려고 한단다. 소모된 에테르는 테르가 되고. 편의상 에테르가 고갈된다고 말하지만 사실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할 뿐, 에테르는 소실되지 않는 힘이란다. 안정화도 자세히 말하자면 테르를 다시 에테르로 전환해주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에테르를 수급해주는 방법이 그거거든.]

“테르가 뭔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왜 저와 상관이 있는 거죠?”

[에테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그 공간이 테르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뜻이야. 무지막지한 양의 테르가 네게 안정화를 해달라고 매달려서 압박을 느낀 거란다. 과호흡까지 한 건…… 네가 안 해주니까 억지로 몸에 들어가 순환하려고 한 거겠지. 나중에 각성하면 그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거란다.]

예상외의 말에 칼리오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회귀했기에 다른 사람과 달리 제약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네우마케투스테라의 말은—.

“그 말은 제가 안졍화를…… 테르를 에테르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인가요?”

깜짝 놀란 칼리오페의 얼굴에 고래가 낮게 웃었다. 고래의 눈빛은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닮았다.

‘아니, 막 헤엄을 치기 시작한 아기 고래인가.’

땅의 정령이니 진짜 고래는 아닐 테지만 고래 모습이다 보니 그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자상하게 그녀를 쳐다보던 고래가 입을 열었다.

[오늘처럼 공기가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니?]

“으음,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고 할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오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긴 하지만요. 이것 역시 공기가 아니라 테르의 압박을 느꼈던 건가요?”

[그렇단다. 노래를 불러서 바람의 냄새가 났구나. 노래는 바람을 타고 퍼지니까.]

사람이 턱을 괴는 것처럼 고래가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조금 아쉬운걸.]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고래가 애교를 부리듯 칼리오페의 뺨에 커다란 얼굴을 부볐다.

서로 실체가 아니다 보니 닿지 않고 통과할 뿐이지만, 칼리오페는 왠지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느꼈다. 싱싱하고 촉촉한 흙더미에 맨발을 묻었을 때의 기분.

[노래를 부를 때 바람이 화답하지 않았니? 마주 분다거나, 휘돈다거나.]

그랬던가? 칼리오페는 노래 부를 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바람이 불긴 했지만……. 보통 바람이 부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그게 꼭 노래 때문이라고는…….’

노래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을 잊을 때가 많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프네우마케투스테라가 질문한 의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제가 노래를 부를 때 테르가 에테르로 바뀐다는 말이세요?”

[그렇단다, 귀한 아이야. 물론 지금은 각성 전이라서 아주 미미하겠지만.]

칼리오페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놀람도, 의심도 일단 접어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프네우마케투스테라의 말이 모두 사실일 때의 일이다.

‘이 만남이 끝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라.’

답을 줄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최대한 생각해서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가만, 내가 평소에도 테르의 압박을 받았다는 건……. 그때도 에테르가 부족했다는 뜻 아닌가?’

칼리오페가 가장 많이 압박을 느낀 장소은 가족들과 사는 집이다. 아무래도 가장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에테르가 부족하면…… 가족들 신변에 이상이 올 수도 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가 테르의 압박을 느끼는 곳은 모두 에테르가 부족한 곳인가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도 단 한 번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칼리오페가 초조해하자 땅의 정령은 놀랐다.

[새 핵을 만들 때가 되었으니 이 근방의 에테르가 다른 곳보다 부족한 건 사실이란다.]

“그럼, 테라님이 숨을 내쉬고 나면 이 주변은 괜찮아지는 거죠? 여기 사는 사람들은…….”

칼리오페가 왜 그렇게 초조해했는지 깨달은 고래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숨을 내쉬기 전에도 이곳 사람들은 괜찮단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숨을 내쉴 테니까.]

불안에 물들었던 얼굴에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팠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에게 있어서 칼리오페는 다른 인간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였다.

[고운 아이야, 좀 더 자기 자신을 챙기렴. 에테르가 부족하다는 뜻은 네가 테르의 압박을 받게 된다는 뜻이잖니. 먼저 ‘내 몸은 괜찮은 건가요?’부터 물었어야지. 네 주변을 걱정할 게 아니라.]

“저는 괜찮은 건가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 모습에 땅의 정령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갓 생성된 핵이 아닌 이상 순수한 에테르는 없단다. 많든 적든 테르는 존재하고, 이 테르는 에테르로 바뀌려고 할 거야.]

‘그러니까 갓 생성된 핵의 에테르가 100이라고 치면, 시간이 지날수록 에테르가 90 테르가 10, 에테르가 70 테르가 30 이렇게 변한다는 건가. 핵보다 에테르 농도가 옅은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칼리오페는 속으로 프네우마케투스테라의 말을 정리했다.

[테르는 에테르로 바뀌기 위해 네게 환원해달라고 하겠지.]

“그 말은 제가 계속해서 압박을 느낄 거라는 거군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칼리오페의 말에 고래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적당히 안정화 작업만 해주면 몸이 받는 압박은 없을 거란다. 네가 가끔 안정화를…… 그러니까 노래를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어. 아직 각성 전이기 때문에 제어할 수 없어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말렴.]

확실히 사하르네 부인과 마주쳤던 때, 갑자기 노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항상 노래로 감정을 풀었기 때문일 거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제어’라는 말을 들으니 감이 왔다. 확실히 감정이 불안정할 때엔 뭐든 제어하기 힘든 법이다.

‘제어를 하기 위해선 각성을 해야 하는 거고. 그런데 각성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지?’

“각성은 어떻게 하는 건가요?”

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하고 싶었다.

[그건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거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아니, 인간에겐 다소 오랜 시간일지도 모르겠구나.]

칼리오페의 얼굴이 실망으로 그늘졌다.

땅의 정령이 숨을 내쉬어 안정화 된 땅, 스티그마.

에테르가 풍부하다는 이유만으로 책정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일을 내가 노래하는 걸로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 가치가 칼리오페 자신에게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안정화는 효과가 미미하다고 했지만…….’

오러 사용자인 루스티첼 백작과 루시우스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니 효과가 있다고 하기도 미안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테라님은 각성 전이라 미미하다고 했어.’

그 말은 각성 후에는 얼마든지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능력이란다.]

칼리오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땅의 정령이 뻗어 나가는 생각에 찬물을 끼얹었다.

“위험하다고요?”

[그러니 부디 잘 헤쳐나가렴.]

고래는 그렇게 말하고 흰 배를 보이며 몸체를 뒤집었다. 아름다운 유영이었다.

‘가르쳐 줄 생각은 없다는 거구나.’

칼리오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헤엄치는 고래를 바라보다가 포기했다.

[이런,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겠구나.]

고래의 말에 칼리오페가 드레스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단정한 상태로 다소곳하게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테라님.”

땅이 낮게 웃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너를 내 품에 안고 싶지만.]

가까이 다가온 고래가 칼리오페에게 지느러미를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고 통과할 뿐이다.

[대신 내게 네 노래를 불러줄 수 있겠니?]

칼리오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여전히 누군가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 땅의 생명을 위해 숨길을 뚫고 숨을 내쉬는 지고의 정령에 대한 예우를 해주고 싶었다.

또, 자신을 무한한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령에게 화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조건 없이 정성껏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해준 정령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도 이 아름다운 땅고래가 좋아. 원한다면 들어주고 싶어.’

쑥스러움에 잠시 머뭇거린 칼리오페가 입을 열었다.

어린 몸에서 나온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녀가 누워있을 때 땅고래가 들려준 노래와 닮은 음색이었다.

숲속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노래하자 컴컴하던 허공에 숲이 생겼다.

여문 줄기와 단단한 뿌리, 그 뿌리를 품은 땅은 푸른 비단 같은 잔디로 뒤덮여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노래, 그 옆을 흐르는 시냇물의 노래, 잎사귀에 번지는 햇빛의 노래.

칼리오페의 노래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풍경이 더해졌다.

그 속에서 땅고래가 유유히 헤엄쳤다.

칼리오페는 그 환상 같은 장면에 매료되었다.

그 안에서 호흡할수록 노래 역시 더 깊고 풍부해졌다.

가슴이 벅찼다. 노래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홀함에 전율이 일었다.

밤이 된 숲에는 반짝이는 별이 눈이 멀 정도로 많이 떠 있었다. 은하수를 헤엄쳐 칼리오페에게 가까이 다가온 고래가 이마에 키스했다.

닿지 않았지만,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좋은 노래야. 고맙구나.]

그 말만 남기고 땅의 정령은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자 아무런 장식도 없는 메이드 휴게실의 유백색 천장에 눈에 들어왔다.

* * *

‘그게 벌써 열흘 전이라니.’

칼리오페는 종이에 땅의 정령이 했던 말을 정리해 적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프네우마케투스테라와의 만남은 의문을 풀어주기도 했지만, 새로운 의문을 더하기도 했다.

빠트린 것은 없나 쪽지를 살피던 칼리오페가 움찔했다.

‘……암호문?’

—이 아니라 글씨를 너무 못 쓴 거였다.

딸기 타르트에 대한 감사 편지를 쓸 때는 나름 신경 써서 그런지 못 읽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 읽을 생각으로 쓰다 보니 해독해야 할 글씨가 나왔다.

‘으음, 나중에 읽을 수 있겠지? 어찌 됐든 내가 쓴 거니까.’

칼리오페는 쪽지를 품에 갈무리하고 장서실을 나섰다.

“유모?”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유모의 얼굴에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 했다.

“나 기다리고 있었어?”

“호세 도련님이 아가씨가 좋아하는 골든 헤이즐넛 초콜릿을 잔뜩 보내주셨거든요. 어서 방으로 가서 먹어요.”

‘자아, 갑시다’ 하면서 손을 잡아 이끄는 유모를 보고 칼리오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순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주변을 살폈다.

‘묘하게 어수선하네.’

눈이 마주친 하녀들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지만 어딘지 분주한 기색이었다.

“유모, 어머니는?”

“마님께선 지금 서류 보시느라 바쁘세요.”

“그래?”

루스티첼 부인이 다망하게 일하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 가산 관리, 내저 살림, 투자한 외부 사업, 그리고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자선 사업까지. 안 바쁘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그런 와중에도 루스티첼 부인은 항상 칼리오페를 위해 시간을 냈다.

[이렇게 우리 리페랑 시간을 보내는 게 효율이 좋거든. 사람에겐 휴식도 중요하고, 엄마에게 최고의 휴식은 우리 딸을 보는 거니까.]

유모는 여태까지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을 찾을 때 일하는 중이라 바쁘시다고 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그럼 보러 갈까요’라고 웃으며 칼리오페를 데려갔다.

가끔 타이밍이 안 좋아 보고를 받고 있는 중에 만나러 간 적도 있지만 루스티첼 부인도, 유모도, 심지어 보고 하는 사람도 반갑게 칼리오페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쁘다는 거지.’

어머니도 함께 선물 받은 초콜릿을 먹자는 말을 막는 것처럼.

‘오늘 방문하는 손님은 없는데…….’

하녀들의 동선을 살핀 칼리오페가 유모에게 잡힌 손을 흔들었다.

“유모, 나 정원에서 먹을래.”

“정원이요? 그래요.”

유모가 방향을 돌렸다. 정문 쪽이 아니라 중문 쪽이다.

‘역시.’

칼리오페가 고개를 저었다.

“중앙 정원 말구 장미 화단 쪽에서 먹을래. 슬슬 장미가 피기 시작할 거야.”

칼리오페는 순간적으로 유모가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장미는 아직 일러요. 봉오리만 볼 걸요. 활짝 피면 그때 보러 가요.”

유모는 여느 때처럼 다정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동요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모.”

작은 한숨과 동시에 부르자 유모가 걸음을 멈추고 칼리오페와 눈을 마주쳤다.

“네, 아가씨.”

“무슨 일이야?”

이럴 땐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게 최고다.

유모는 갑자기 무슨 소리시냐고 되묻지 않았다. 이미 눈치챈 사람한테 모른 척 해봐야 소용없다.

“……저택에 손님이 오셨을 뿐이에요.”

“내가 인사드리지 않아도 돼?”

“괜찮아요.”

‘우리 아가씨는 예의도 참 바르시지.’

유모가 미소 지은 채 칼리오페를 안아 들려고 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

작지만 날카로운 물음에 유모의 손이 멈칫했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누가 왔길래?”

* * *

“루스티첼 부인, 사과를 받아주시지요.”

브리젤 자작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냘픈 귀부인의 모습에 안심했던 자신이 멍청이 같았다.

몸집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루스티첼 백작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그가 없는 시간을 노려 루스티첼 저에 방문했다.

그런데…….

‘차라리 루스티첼 백작이 낫겠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귀부인이 물소 같은 루스티첼 백작보다 더 철벽처럼 느껴졌다.

“어떤 것에 대한 사과 말인가요?”

루스티첼 부인이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으며 질문했다.

“아, 자작께서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방문한 바람에 우리 고용인들이 갑작스럽게 예정에도 없는 추가적인 노동을 하게 된 것에 대한 사과인가요?”

“무, 무슨…….”

브리젤 자작은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귀족인 자신 때문에 고용인들이 안 해도 될 수고를 하게 됐다는 말을 하다니. 그런 말을 들은 것도 충분히 모욕적인데 졸지에 그 일을 사과한 꼴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바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약자는 브리젤 자작이었다. 어떻게든 루스티첼 부인의 입에서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 나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모욕적이라며 따질 순 없는 법이다.

‘우리 마님 멋있어…….’

‘우리 마님 모시는 건 항상 새로워.’

‘최고야.’

‘짜릿해.’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던 하녀들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린 채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크흠,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못난 처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브리젤 자작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하지만 따님께서는 다치지도 않았고…….”

“다치지 않았다고요?”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브리젤 자작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아니, 무슨 여자가 저렇게…….’

순간적으로 움츠러든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은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구먼!’

“그렇지 않습니까. 때리지도 않았는데 자꾸 이러시는 건—.”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브리젤 자작은 말을 멈추고 긴장한 눈으로 문을 쳐다봤다. 루스티첼 부인만으로도 벅찬데 루스티첼 백작까지 오면 큰일이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커다란 물소 같은 루스티첼 백작이 아니었다.

작고 앙증맞고 귀엽고 뽀송한 작은 아가씨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리페?”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루스티첼 부인이 깜짝 놀라 딸아이를 불렀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유모를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그런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유모를 보고 루스티첼 부인은 한숨을 삼켰다.

딸아이의 성정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얌전하고 순종적인 듯 보이지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종종종 걸어 응접실 안으로 걸어들어온 칼리오페가 치맛자락을 곱게 폈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리젤 자작님.”

“아, 네가 칼리오페구나.”

그때까지 굳어있던 브리젤 자작의 얼굴이 펴졌다.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어쩐 일이니, 리페.”

“손님이 오셨다고 들어서요.”

칼리오페는 그렇게 말하고는 루스티첼 부인의 옆에 앉았다. 눈치를 보는 하녀들에게 루스티첼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리오페 앞에도 찻잔이 놓였다. 있어도, 대화에 참여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따님이 부인을 닮아 아주 아름답군요. 이거, 장래가 기대됩니다.”

“그런가요? 아빠를 더 닮았다고 하던데. 그렇지만 저를 닮기도 했죠.”

칼리오페의 등장으로 확실히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브리젤 자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루스티첼 부인도 설마 딸아이 앞에서 아까처럼 어깃장은 놓진 못하겠지.’

이때까지 그는 알지 못했다.

루스티첼 부인보다 더한 상대가 왔다는 것을.

사랑스러운 작은 새처럼 연약하게 보이는 어린 소녀가 바로 그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다.

* * *

“그래, 칼리오페. 몸은 괜찮니?”

브리젤 남작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칼리오페가 괜찮다고 하면 그것 봐라, 아이도 괜찮다고 하지 않느냐고 말할 생각이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칼리오페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러더니 아차, 하고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곤 고개를 숙였다.

“오늘 손님이 오신다는 말은 듣지 못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아, 아니…….”

인사가 늦었다는 걸 책망하려고 몸이 아프냐며 돌려 말한 게 아니다.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인 브리젤 자작이 얼굴을 붉혔다.

칼리오페의 인사가 늦은 건 브리젤 자작이 무턱대고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 브리젤 가에서 칼리오페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으니 부모가 아이를 내보이지 않으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순진한 어린아이니까 그럴 의도는 없었겠지만…….’

칼리오페의 사과는 오히려 이쪽의 실례를 꼬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브리젤 자작은 모르는 척 자상하게 말했다.

“그런 걸 책망하려고 물은 게 아니란다. 정말 네 몸이 괜찮은지 걱정되어서 물은 게야.”

하지만 그 모른 척이 통할 리가 없었다.

“어머?”

루스티첼 부인이 사르르 웃으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책망이라니요?”

“부인…….”

“흘려들을 수 없네요. 브리젤 자작께서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제 딸은 꾸짖음을 당했다고 느꼈어요. 이상한 일이죠. 정작 연락도 없이 무례하게 방문한 사람은 자작이신데. 사과는 제 딸아이가 하고 있고 자작께서는 관대하게 책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다니.”

브리젤 자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칼리오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니 손바닥 위에서 마음대로 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 옆에 있는 루스티첼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깜빡했다. 솔직히 딸아이 앞에서 얼마나 날카롭게 굴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루스티첼 부인만 아니었으면 그냥 잘 넘어갔을 일을…….’

하지만 그는 몰랐다.

덫을 드리워 루스티첼 부인이 브리젤 자작에게 항의할 빌미를 만들어준 건 바로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칼리오페였다.

“네에?”

칼리오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브리젤 자작을 쳐다봤다.

“연락도 없이 방문하셨던 거였나요?”

파렴치한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에 브리젤 자작은 움찔했다.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것만이 아니라, 멋대로 들어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금품을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커다란 산호빛 눈동자가 곧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래두 되는 건가요? 저번에 어머니께서 연락도 없이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것은 정말 실례라구, 절대 하면 안 된다구 말씀하셨는데…….”

어느 게 맞는 건가요? 그런 눈으로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을 쳐다봤다.

이제 루스티첼 부인은 아이의 교육을 위해 브리젤 자작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손에 넣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단다, 리페.”

“그러면 자작께선 왜…….”

칼리오페가 힐끔 자작을 쳐다봤다. 자작은 그 무구한 눈빛이 채찍인 것처럼 흠칫 떨었다.

“세상에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단다.”

“왜지요? 무례니까 상대방이 싫어할 걸 알고 있으니 하지 않게 되잖아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상대방보다 자신의 상황이나 기분을 우선시하는 사람도 있단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무례를 저지르며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기 마련이지.”

칼리오페가 자작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오.”

어린아이 특유의 끌리는 발음이 천진했다.

졸지에 눈앞에서 ‘무례를 저지르며 자신의 입장을 강요한 사람’의 훌륭한 표본이 된 브리젤 자작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루스티첼 부인!”

히익, 칼리오페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가여워 보는 사람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리페?”

루스티첼 부인이 깜짝 놀라 딸아이를 살폈다.

“죄, 죄송해요…….”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떠는 칼리오페를 보고 루스티첼 부인이 얼굴을 굳혔다.

“자작. 레이디 앞에서 위협적으로 큰소리를 내는 것도 실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어린아이 앞에서 그러다니요.”

브리젤 자작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짓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분이 나는데 엄마 품에서 떨고 있는 어린애를 앞에 두고 또 화를 낼 순 없었다.

‘이 일까지 사교계에 퍼져나가면 나까지 회생 불가야.’

어차피 사고를 친 아내와는 이혼할 생각이다. 칼리오페에게 저지른 잘못만이라면 힘들었겠지만 다행히 아이들에게까지 손찌검해서 쉽게 이혼할 수 있다.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버지로서 실격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그제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부터 지금까지, 그야말로 일분일초가 지옥 같았다.

부인 덕에 드디어 상류 사회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파티에서 돌아온 후에 축배를 들자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천국에 있었다. 이브닝 파티에서 최대한 많은 거래를 트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 온갖 준비를 다 했다.

파티홀 입구에서 브리젤 부인과 헤어지고 위풍당당하게 2층에 올라갔다.

그런데.

[자작은 그것도 몰랐단 말이오?]

[대체 제 가정조차 돌보지 못하는 자를 어떻게 사업 파트너로 삼겠소.]

[아이들을 방치하고 여기 와서 돈 벌 궁리만 하다니…….]

아이들이 가정폭력을 당한 것을 온 사교계에 소문이 퍼질 때까지 몰랐던 얼간이 취급을 당했다.

[루스티첼 백작, 칼리오페는 괜찮소?]

[우리 아들 녀석이 칼리오페를 걱정하던데……. 이것 참, 그 녀석이 남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처음 봤지 뭐요.]

[아이가 놀랐을 텐데 잘 다독여주시게나.]

[아내가 칼리오페 칭찬을 그렇게 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으니 집에 초대하기도 그렇군.]

[나 원, 여기 원인 제공자가 있으니 술맛만 떨어지는군. 모처럼 로아힌 백작께서 그랑티에를 준비해주셨는데.]

[모르면 뻔뻔하다고, 딱 그 짝이로군.]

[아직 안 갔나? 아, 루스티첼 백작께 사과는 하고 가려고?]

뿐만 아니라 루스티첼 백작을 끼고돌며 사과를 종용했다.

[대체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잘못은 다 아내가 했는데! 전 루스티첼 백작께 사과할 게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내도 칼리오페에게 도움을 주려 했던 것 아닙니까? 대체 어떤 일이 있었으면 순수한 선의를 베풀려던 사람이 태도를 바꿨겠습니까. 요즘 애들은 영악해서—.]

흥분해서 다다다 쏘아 붙이던 브리젤 자작이 흠칫 했다.

얼굴을 굳힌 채 자신을 쳐다보는 대귀족들도 두려웠지만…….

‘마, 맙소사…….’

다리가 달달 떨렸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타오르는 루스티첼 백작을 본 순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소드 마스터의 위압감이 브리젤 자작을 짓눌렀다. 그대로 압사당할 거라는 원초적 공포가 자작을 옥죄었다.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생존본능이 자작을 움직였다. 그대로 파티장에서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다.

결국 위풍당당했던 포부는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조롱만 당한 채 파티장을 나왔다.

그리고 어제, 굵직한 거래처들로부터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들었다. 각기 다른 이유를 댔지만 진짜 이유가 뭔지는 명백했다.

순식간에 천국이 지옥으로 변했다.

‘일단 이혼하고 어떻게든 루스티첼 가의 용서를 받아야 해.’

도마뱀 꼬리 자르듯 아내를 버리고 루스티첼 가의 용서를 받으면 대귀족들도 압박을 거둘 것이다.

‘우리 애들이 불쌍해서라도 우리 가문 자금줄을 완전히 마르게 하진 않을 거야. 이건 루스티첼 가에게 사과하라는 시위니까.’

브리젤 자작은 제 자식의 불행까지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것에 거리낌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그는 루스티첼 저에 찾아온 것이다.

말로 사과해서 끝나면 가장 좋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배상할 각오도 했다.

‘막대한 돈이 걸려 있어. 일단은 참자.’

마음 같아선 버럭 성낸 후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감정을 다스렸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이렇게 무서워하는 제가 한심한 거지요……. 그치만, 저번에 브리젤 부인께서 큰소리 치며 절 때리려구 한 후로…… 읏—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서…….”

긴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입술을 꾸욱 깨무는 모습이 막 피어난 물망초처럼 가련했다.

브리젤 자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칼리오페는 지금 브리젤 부인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는 거다.

브리젤 자작의 눈이 빠르게 방안의 고용인들을 훑었다. 그들은 흉흉한 눈으로 브리젤 자작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감히 우리 아가씨를……!’

그런 생각이 읽혔지만 신경 쓰이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일곱 명이나 되다니…….’

보통 손님을 맞는 때보다 더 숫자가 많은 이유는 뻔했다.

귀부인에게 무례를 범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주는 것도 있지만, 그건 건장한 하인 두엇으로도 가능하다.

‘젠장, 오늘 하루면 다 퍼져나가겠군.’

듣는 귀가 많을수록 퍼져나가는 것 역시 빠르기 때문이다. 고용인들의 네트워크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큰소리쳐서 미안하구나, 칼리오페.”

브리젤 자작이 다정하게 사과했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브리젤 자작의 눈이 번들거리며 파고들 틈을 찾듯 칼리오페와 루스티첼 부인을 훑었다.

루스티첼 부인이 사과를 바로 받아주지 않을 것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를 놓고 따져 용서를 받을 생각이었다.

때리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결국엔 때리지 못했고, 칼리오페는 전혀 피해를 받지 않았다. 상처 하나 안 나지 않았느냐.

어차피 조용하고 여린 성정의 귀부인이니 잘 타이르면 받아줄 거라고 여겼다.

‘직접 겪어보니 절대 조용하고 여린 성정이 아니었지만…….’

칼리오페가 저렇게 트라우마를 호소한 이상 더는 ‘실질적으로 아무 피해도 받지 않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할 수 없었다.

‘하여간 부인 하나 잘못 얻어서 고생은 내가 다 하는군.’

솔직히 아내가 저지른 잘못을 왜 자신이 수습하고 다녀야 하나 싶지만, 사업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내 아내가 칼리오페, 네게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들었다.”

브리젤 자작은 눈썹을 늘어트리며 칼리오페와 눈을 마주쳤다.

“함께 산 지가 몇 년인데……. 그런 여자인 줄은 몰랐어.”

치를 떠는 브리젤 자작을 보며 칼리오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엄마의 품에 얼굴을 숨긴 채 칼리오페가 비소를 지었다.

“속은 내가 가장 미련하지…….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몇 년이나 감쪽같이 속였는지 모르겠다. 무섭고 악독한 여자야.”

브리젤 자작이 자책하는 척하며 모든 잘못을 브리젤 부인에게 떠넘겼다.

‘그래, 억울할 수도 있지.’

자기가 없는 곳에서 아내가 저지른 일이다. 말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억울해선 안 돼. 그럴 자격 없어.’

칼리오페가 생각하기에 브리젤 자작은 결코 피해자일 수 없었다. 부부는 운명공동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브리젤 부인이 브리젤 영식과 영애에게 손찌검했다구 들었어요.”

“그렇단다! 그 여자가 그런 여자야! 정말, 끔찍하구나…….”

칼리오페의 말에 브리젤 자작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젓는 모습이 완벽한 피해자 행세였다.

“신기하네요.”

엄마 품에서 빠져나온 칼리오페가 또렷이 말했다.

브리젤 자작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칼리오페를 쳐다봤다.

“자작님과 브리젤 부인은 부부가 아닌가요?”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브리젤 자작은 불안을 느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렇지……. 그런 끔찍한 여자와는 곧 이혼을—”

“그럼 브리젤 영식과 영애는 두 분 사이의 자제분들이구요.”

어린아이의 말간 눈동자가 순수한 의문을 품고 브리젤 자작을 쳐다봤다.

“그런데 왜 브리젤 부인만 탓하세요?”

브리젤 자작이 헛숨을 삼켰다. 당황한 그가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 나는 속은 거야. 그런 여자인 줄은 전혀 몰랐어.”

“자작님께선 그 아이들의 아버지 아닌가요? 아이가 그렇게 다칠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잘못이에요. 한두 번도 아니구 지속적인 폭력이었는데요.”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잘못 했다고? 아이들을 때린 것은 아내잖아. 난 애들한테 항상 좋은 아버지였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장난감이든 맛있는 것이든 턱턱 사줬다. 아이들이 내성적이라 뭔가를 요구하는 법이 없어서 안 그랬지만, 원하는 건 다 사줬을 것이다.

아이들도, 자신도 피해자다.

“자작님은 지금 부끄러워하셔야 해요.”

칼리오페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책망이 어려 있었다. 말보다 그 시선에 더 반발심이 생겼다.

‘뭐, 뭐야. 어린애 주제에…….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부끄러워해야 해? 지금 애들을 때린 걸로 모자라 사교계에서 가문에 먹칠 한 사람은 아내잖아.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오히려 그걸 수습하고 있다고.’

브리젤 자작의 생각이 얼굴에 빤하게 보였다.

칼리오페의 말로 깨달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다.

루스티첼 부인은 옅은 한숨을 쉬며 브리젤 자작에게 물었다.

“브리젤 자작, 한 번이라도 아이들과 놀아준 적 있으세요?”

브리젤 자작의 입이 열렸다가 도로 다물렸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인 그가 방어적으로 성을 냈다.

“아니, 그건……! 애 엄마도 있고, 돌봐줄 고용인들도 많은데…….”

“한 번 안아주기만 했어도 아이가 아파하는지 안 아파하는지 알았을 거예요. 아이가 숨기려고 해도 온몸이 멍투성이인데 몰랐을 리 없죠. 제대로 보기만 했으면요.”

“그런 아버지였다면 아이들이 먼저 의지해서 말했겠지만요.”

루스티첼 부인의 말에 칼리오페가 조용히 덧붙였다.

브리젤 자작은 할 말을 찾았으나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억울함이 차올랐다.

자신은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좋은 아버지였는데, 모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아내 때문에—.

“브리젤 부인을 탓할 게 아니지 않나요?”

루스티첼 부인의 말이 어어지는 사고를 정지시켰다.

“자작님의 무관심 역시 아이들에게 학대입니다.”

“또, 자작이 무관심했기에 브리젤 부인은 그렇게 심한 폭행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절대로 자작님께 들키지 않을 거라구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절대로 들킬 일 없었다.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평생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녀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이 브리젤 자작을 짓눌렀다. 절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전부 다 내 잘못이라는 거요?!”

“적어도 그렇게 난 떳떳하고 당당하다, 이 모든 일이 억울하다, 어서 사과나 받아라— 같은 태도를 보일 상황은 아니죠.”

루스티첼 부인이 차분하게 답했다.

칼리오페는 구석에 몰려 날을 잔뜩 세운 브리젤 자작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진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그녀의 마음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브리젤 자작의 아이들은 지금 어떨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데. 어떻게 부모인 브리젤 자작은 저렇게나 멀쩡할 수 있을까.

“지금은 여기 찾아올 때가 아니지 않나요?”

자작은 이틀 전,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에서 아이들이 폭행당한 사실을 알았다고 들었다.

“제게 사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지금이라두 아이들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말로 아이들을 아끼고 생각한다면 집에 함께 있어야 했다. 여태 못 줬던 관심을 지금이라도 줬어야 한다.

애초에 브리젤 자작의 사과에는 진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피해 없지 않느냐라는 식으로 몰아가려 하더니, 그 후에는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

‘아무리 떠밀려 온 거라 해도 그렇지.’

대강 어떤 상황일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거래처들만 아니었어도……!”

구석에 몰리고 몰리다가 결국 폭발한 브리젤 자작이 벌떡 일어났다.

“왜 자꾸 내 탓만 하는데! 나는 아이들을 위해 밤낮으로 돈을 벌었어! 나더러 밖에 나가지도 않고 애 엄마 감시나 해야 했다는 거야?! 원래부터가 할 줄 아는 거라곤 파티 나가는 것밖에 없는 여자였어! 나 보고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거야!”

귀부인의 사교 활동은 여러 의미로 굉장히 중요하다. 새로운 거래처를 뚫지 못해 상단이 정체에 접어들었던 때, 브리젤 부인이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한 덕에 활로를 뚫은 적이 있었다.

자작은 자신의 노동은 과대평가하고 브리젤 부인의 공은 잊었다.

“막말로, 어? 우리 애들도 그렇게 맞았는데도 건강하다고! 당신 딸은 맞은 것도 아니고, 멀쩡하잖아!”

브리젤 자작이 칼리오페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과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 거래처가 가하는 압박에 이미 이성을 잃었다.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사과하러 왔더니 우습게 보고…….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인가요? 소리치지 마세요.”

루스티첼 부인이 칼리오페의 상태를 살피며 차갑게 말했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켰다. 마님이 신호만 하시면 감히 우리 아가씨 앞에서 행패를 부린 무뢰한을 당장 제압할 것이다.

“아하~!”

브리젤 자작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야비하게 웃었다.

“사과하는 태도 운운하는 걸 보니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무슨…….”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루스티첼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사과 안 받아주는 거 배상금을 원해서 그러는 거 아냐? 일부러 빙빙 돌리지 말고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올 때부터 어느 정도 챙겨줄 각오는 했다고. 그래, 얼마를 원해?”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저런 말이 나오는 거지. 루스티첼 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해졌다.

“왜, 정곡을 찔렸어? 역시 배상금을 노린 게 맞았네.”

아득했던 루스티첼 부인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브리젤 자작의 비아냥 때문이 아니었다.

칼리오페가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리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부름에도 반응이 없었다.

‘배상금을 노렸다고?’

칼리오페는 그것 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브리젤 자작의 한마디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오래된 상처를 더 찢으며 후벼팠다.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칼리오페는 작게 헐떡였다.

[루스티첼 일가가 보상금을 노리고 백작의 죽음을 조작하려 한다더군.]

[깨끗한 척은 다 하더니 본색을 드러내네요.]

[보상금 때문에 백작의 죽음도 꾸며낸 거 아닌가요? 천박해라.]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들었던 그 모욕적인 말들이 다시금 메아리쳤다.

그게 아니라고, 보상금 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으니 진상만 규명해달라고, 필요한 자금은 가문에서 대겠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되려 속내를 들키니 아닌 척한다는 조롱만 받았다.

칼리오페가 차갑게 식은 손을 꽉 쥐었다.

“……수 있는데요.”

“뭐?”

버석거리는 작은 목소리에 브리젤 자작이 되물었다.

“얼마나 줄 수 있냐구요.”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였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에 붉은 눈동자가 브리젤 자작을 똑바로 직시했다.

자작은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의 얼굴에서 조소가 사라졌다.

맑았던 산호빛 눈동자가 빛을 잃은 채 어둡게 침전했다. 말라붙은 피안화 같은 눈이었다.

“어, 얼마라니…….”

브리젤 자작은 역시 돈을 원했던 거냐고 비꼴 수 없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해 오싹한 눈이었다. 어린아이의 눈이라는 게 특히 더 섬뜩했다.

흉흉한 시선과 달리 칼리오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밤하늘 같은 남보랏빛 머리칼에 잔물결이 일었다. 아주 작은 일렁임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무엇보다 확실하게 보였다.

‘바람?’

브리젤 자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으로 향했다. 하지만 창문은 모두 닫혀있었다.

“리페.”

루스티첼 부인의 부름에 칼리오페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생기가 돌았다. 칼리오페가 고개를 돌려 루스티첼 부인을 바라봤다.

“괜찮니?”

“괜찮아요.”

살포시 미소 지은 칼리오페가 루스티첼 부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살아 계셔. 모두 살아 있어.’

잡은 손에 꼬옥 힘을 주며 온기를 느끼겠다는 듯 기댔다. 루스티첼 부인은 남은 손으로 칼리오페의 어깨를 토닥였다.

브리젤 자작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다시 본 칼리오페의 머리칼은 차분했다.

‘잘못 봤나? 뭐, 고개를 움직였던 거겠지.’

엄마에게 기대있는 칼리오페는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다. 작은 새처럼 뼈조차 부드러워 힘주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로 숨을 거둘 것 같다.

그런 존재에게 겁먹었다는 걸 부정하기 위해 브리젤 자작은 배를 쑥 내밀었다.

“얼마를 원하는데 그러시오? 내 다 들어주지.”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브리젤 가는 루스티첼 가에게 용서를 받았고, 배상금도 지불했다’ 정도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모욕받은 이상 절대 그렇게 끝낼 수 없다.

‘루스티첼 가가 배상금을 뜯어내기 위해 진심 어린 사과를 무시했다. 얼마나 줄 수 있냐고 먼저 묻기까지 했다……정도면 충분하지.’

브리젤 자작이 야비하게 입매를 씰룩거렸다.

“다 들어준다구요?”

“그래.”

요구하는 대로 다 주고, 아내와도 이혼하고, 아이들을 살뜰히 살피는 것을 보여주면 자신을 향한 날 선 시선은 사라질 것이다.

‘아니, 오히려 호의적으로 바뀌겠지.’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지금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이 루스티첼 부인이 아니라 칼리오페라는 게 가장 만족스러웠다.

‘어린애가 뭘 알겠어.’

저 작은 머리통에서 나오는 가장 큰 액수라고 해봤자 어느 정도인지 뻔하다.

‘내가 루스티첼 저에 오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으면 적겠지. 이거, 너무 손쉬운 장사인데?’

적은 돈으로 루스티첼 가에서 요구하는 것을 전부 들어줬다는 생색은 다 낼 수 있다.

“그렇다면 파트리유 거리에 있는 살롱을 주세요.”

“그래, 파트리유…… 뭐, 뭣?!”

승리감에 도취되어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던 브리젤 자작이 눈을 크게 떴다.

흔들리는 자작의 눈을 보며 칼리오페는 또박또박 확인 사살했다.

“브리젤 부인이 저를 때리려 했던 곳이요.”

브리젤 부인의 살롱은 땅의 정령이 숨을 내쉴 장소다. 즉, 몇 년 후면 스티그마가 될 곳이다. 그리고 에테르가 충만한 스티그마는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즉, 부르는 게 값이란 뜻이지. 어떻게 손에 넣나 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아무것도 모르는 브리젤 자작 내외가 몇 년 뒤에 땅을 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시원했다.

“거긴…….”

브리젤 자작은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미래에 스티그마가 된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었다.

그 살롱은 그야말로 가문 재산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브리젤 가가 최상류 사회에 들어갈 다리가 되어줄 곳이었다. 비록 아직 최고위 귀족은 한 번도 초대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잡을 수 있도록 처음부터 가장 귀한 것들로 꾸렸다. 때문에 살롱에는 브리젤 본저보다 더 귀하고 호사스러운 것들로 가득했다.

카스틸로 공자가 살롱에 다녀간 후로 고무된 브리젤 부부는 남는 유동자산을 전부 털어 넣다시피 해 새로운 물건을 들여놨다. 위험한 투자였지만 그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로아힌 가의 이브닝 파티에 초대받을 때만 해도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다며 쾌재를 불렀다.

모두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거길 뺏기면 거의 파산이야.’

브리젤 자작이 식은땀을 흘렸다.

“거긴 왜? 칼리오페, 너는 아직 살롱을 주최할 나이도 아니라 쓸모없을 거야. 그것보다는 네가 좋아할 게 낫지 않겠니? 너와 똑 닮은 비스크 인형이나 예쁜 옷은 어떠니? 맛있는 초콜릿은?”

그는 애써 친절한 웃음을 덧그린 채 칼리오페를 설득했다.

칼리오페는 그가 제시하는 것들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대신 진지하게 고개를 저으며 차분히 말했다.

“안 좋은 기억은 극복하라구 배웠어요. 생각만 해도 두렵지만…… 제 것이 된다면 언젠가 극복할 수 있겠지요.”

브리젤 부인과의 일을 이유로 들자 자작은 뭐라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절대.

“다 들어준다구 하지 않으셨어요?”

칼리오페가 브리젤 자작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말뿐인 놈. 그럴 줄 알았다. 천진한 시선이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브리젤 자작은 조금 전처럼 욱해서 나오는 대로 내뱉지 못했다. 발끈하긴 했지만 홧김에 주겠다고 말하기에 살롱은 너무 크다.

“아니, 그렇긴 한데…….”

브리젤 자작은 말을 끌며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그건 아내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살롱이니 나 혼자 결정할 순 없단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결국 자작님께서 결정할 수 있는 건 내탕금 정도 아닌가요?”

허를 찌르는 말에 브리젤 자작은 당황했다. 있을 법한 지적이지만 다섯 살짜리 꼬맹이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역시 뭐든 다 들어주시겠다는 건…….”

칼리오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브리젤 자작을 훑었다.

여기서 안된다고 하면 제 꼴만 우스워진다. 더 이상 비웃음 당하는 건 사양이다.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상의 후에 결정해서 알려주겠다는 거야.”

“그러시군요. 그런데 자작님께선 부인의 잘못을 사과하러 오신 게 아니었던가요?”

“……그렇지.”

브리젤 자작은 칼리오페가 질문한 의도를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되는 날카로운 지적에 속에서 식은땀이 났다. 용서를 받지 못하더라도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안 그러면 정말 살롱을 내주게 될지도 몰라.’

그것만은 절대 피해야 한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이쪽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루스티첼 부인. 연락드리도록 하죠.”

브리젤 자작이 허둥지둥 일어나며 지팡이를 챙겼다.

“배웅은 하지 않겠어요.”

브리젤 자작이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끝까지 무례한 불청객 취급이다. 하지만 그는 따지는 대신 급히 방을 나섰다.

‘나중에 두고 보자.’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간 것 같았다.

루스티첼 부인은 칼리오페를 들어 무릎에 앉혔다. 그리곤 눈을 맞췄다.

“리페.”

“네, 어머니.”

칼리오페는 조금 불안했다.

브리젤 부인에게 대들었던 때를 생각하면 브리젤 자작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다고 실망하실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얼마나 배상해줄 수 있냐고 물었던 건 조금 후회됐다. 솔직히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도 없었다.

루스티첼 부인이 다정하게 딸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안 좋은 기억은 꼭 극복할 필요 없어. 만약 이기려고 애쓰는 게 고통스럽고 그냥 잊는 게 더 편하다면 잊어버리렴.”

칼리오페가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어머니는 딸아이의 마음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한다.

내가 어떻더라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내 편이 있다는 것은 가슴이 울릴 정도로 행복하고, 동시에 조금 슬프다.

칼리오페는 눈을 감았다.

망막 안으로 끔찍한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그걸 잊는다면 정말 편하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따스한 부모님 품에 안겨 뺨을 부비고, 오라버니들 손을 잡고 햇살 아래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안온한, 울타리 같은 행복. 울타리 너머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잊지 않기 위해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되새길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잊는다면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잊는 게…… 더 힘들면요?”

“그럼 그때는 이겨야지.”

루스티첼 부인이 생긋 웃으며 칼리오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페, 너는 이겨낼 수 있단다. 그게 뭐든 네게는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어.”

햇살처럼 환히 웃는 어머니의 모습에 칼리오페의 입매가 울렁였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신에 가득 차 빛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두려울 게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칼리오페는 물기가 차오르는 눈을 감추며 루스티첼 부인의 품에 풀썩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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